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6장 인간의 타락과 죄의 형벌

 

고든 H.클라크

 

[1항] 우리의 시조들은 사탄의 간계와 시험에 유혹을 받아 금지된 실과를 먹음으로 범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범한 이 죄를 그의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을 따라 기쁘게 허용하셨는데 이는 그것을 명령하시어 그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로 이미 계획하셨기 때문이다. 3;13 고후11:3 롬11:32

 

[2항] 이 죄로 말미암아 그들은 본래의 의를 잃게 되고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죄로 죽게 되었고 영과 육의 모든 기능들과 기관들이 전적으로 더럽혀지고 말았다. 3:6~8 전12:29 롬3:23 창2:17 롬5:12 엡2:1 창6:5 렘17:9 롬3:10~18 딛1:15

 

6장[1]~[2]의 요점

 

1. 인류의 시조는 금단의 실과를 먹음으로 범죄(불순종)하였다. 이 최초는 죄는 예정되어 있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2. 그 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시조들은 ①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게 되고 ②그의 진노와 저주를 받게 되었으며 ③전적 부패하게 되었다. 

3. 창세기 3장의 기록은 그 성격에 있어서 상징적이거나 신화적이 아니며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요즘 종교적인 간행물들을 보면 정치적인 기사들은 가득 차 있으나 성경 해석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이로 인하여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서 너무나도 엄청나게 무식하기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모든 교리들을 힘차게 선포할 필요가 있다.

 

6장에서 죄의 교리를 읽어 볼 때 다른 교리들에 비해서 더욱 힘차게 이 교리를 소개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다. 이러한 생각은 좀 가장된 것일지 모르겠으나 본 장이 오늘의 무감각한 세대에 대한 적절한 내용을 많이 포함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1항]에 보면 우리의 시조는 금지된 과실을 먹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범한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이브를 살해하지 말라고 금하시는 대신 어떤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금하심으로써 그를 시험하셨는가? 어떤 경건한 사람들은 그러한 질문은 천박하고 경건치 못한 것이라고 혹평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아주 중대한 질문이다. 또한 실제적으로 교육적인 것이라 믿는다. 아담은 본능적인 애정으로 말미암아 이브를 살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의 순종은 하나님의 권위를 존중하여 된 것이라고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아담이 금지된 실과를 먹기를 거절했다고 하면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 그 유일한 동기 이었을 수 있다. 하나님은 쓸데없는 문제들로 복잡하게 하지 않고서 단순한 순종을 시험하셨다. 그러므로 아담의 죄는 정상을 참작해 줄 만한 것도 없는 불순종인 것이다.

 

‘죄’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중요하다. 개별적인 죄들을 알기 위해서는 이 지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죄들을 피하려는 노력을 전혀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또한 제시된 치유책(治癒策)의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죄의 본질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가 죄의 결과들을 소멸시킬 수가 있는가? 아니면 불교가 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그러한 종교들은 그들이 싸우려고 하는 그 대상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면, 그들은 성공할 것 같지가 않다. 거듭 말하거니와, 죄에 대한 지식은 그것이 얼마나 위해(危害)한 것인가를 정확하게 평가하는 데 있어서 필수불가결 하다. 여러 종교들과 심지어 기독교인들이라고 자처하는 여러 단체들은 죄의 위해성에 대해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다. 어떤 종교나 단체의 경우는 죄를 대수롭지 않는 것으로 보고 다른 종교나 단체는 죄를 약간 나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죄를 치명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칼비주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유는 성경이 죄를 하나님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다. 『소교리(요리)문답』에 보면 죄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나 혹 어기는 것으로 되어 있다. 율법이 없이는 아무 죄도 있을 수 없다.

요한1서에 보면 죄란 불법이라고 말씀되어 있다. 이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죄를 모세의 율법에만 관련시켜 가지고는 이해될 수가 없다. 성경에는 율법 시대 이전에는 양심 시대가 있고 율법시대 이후에는 은혜시대가 있다는 말이 전혀 없다. 롬5:13~14에 보면 죄에 대한 형벌인 사망이 아담으로부터 모세 때까지 왕 노릇 하였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이 모세의 율법에 앞서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물론 그것은 그렇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몇 가지 계명을 주셨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는 오늘의 세대는 1500년간의 율법 시대에 뒤이은 은혜의 시대가 아니다. 이 시대는 은혜 시대이면서 또한 율법 시대이다. 만일 율법시대가 아니라고 하면 죄가 결코 있지 않을 것이다. 몇몇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모든 죄수들까지도 무죄 상태의 완전에 이르렀을 것이다.

 

1세기 말엽과 종교 개혁시대에 십계명이 폐기되었으므로 이제는 “율법에서 자유 하기” 때문에 자기네들이 원하는 모든 악을 자유롭게 탐닉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이 유독한 형태의 반 율법주의는 오늘날 유형 교회에 크게 득세하고 있지는 않으나, 그것에 탈선된 일부 교리가 남아 있어서 복음을 가리우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롬7:6) 라는 문구는 “율법에서 의롭다 함을 받았으니”로 번역했어야 좋았을 것이다. 그 문구의 의미는, 구속 받은 죄인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율법의 형벌을 면하게 된다는 것이지, 하나님의 명령들을 무시하고서 죄악 된 생활을 살아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요점은 반 율법주의 자들이 암암리에 죄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무죄 상태의 안전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론에 의하면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죄란 전혀 있지 않기 때문에 죄가 전혀 있을 수가 없다. 존재하지 않는 율법을 아무도 범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이 같은 극단적인 형태로 반 율법주의로 인하여 지금 교회가 혼란을 당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죄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은 역시 필요하다. 이 같은 필요성은 복음 전도 활동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기꺼이 영접하기 전에 그는 자기가 구원을 필요로 하는 죄인임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금세기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대소 전쟁들은 말할 것도 없고, 부도덕, 십대청소년의 비행, 대학생들의 성범죄, 강력범과 유혈범 그리고 폭도들에도 불구하고 구세주를 필요로 한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극소수 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자기가 비록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하늘나라에 가기에는 충분히 선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충성스런 전도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선포해야 한다. 좌가 무엇인가를 그들에게 말해줘야 한다.

 

하나님의 율법이 더 이상 이 세대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복음 전도의 골자를 빼버리는 것이 된다. 죄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함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다. 본 장(本 章)의 첫 조항에 대해 앞에서 자세하게 설명된 대로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시조 아담과 이브가 그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을 기쁘게 허용하신 것으로 말씀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용이라는 단어가 작정이라는 단어보다 훨씬 더 부드러운 표현이라고 말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허용은 하나님께서 죄를 반(半)만 주관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제6장이 제3장, 4장과 모순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은 무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점에서는 약간의 모순을 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어디에서나 신적 작정교리를 부인했다고는 거의 볼 수가 없다. 허용이라는 단어를 단순히 편리한 언어상의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참으로 인간의 일들에서 사용되고 있는 대로의 허용 개념은 하나님이 전능과 주권에는 부적합하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죄를 범하도록 허용 하셨다고 말한 것은 참으로 사실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의 죄를 미리 작정 하셨다는 것을 부인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하나님께서 장차 되어질 일은 무엇이 나를 미리 다 작정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들로 인하여 요한 칼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여기서 그들(신적 작정들을 반대하는 자들)은 의지와 허용을 다시 구분하여 주장하기를 하나님께서는 불 경건한 자들의 멸망을 허용하시나 그것을 바라지는 않으신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신 것에 대해 그것이 그의 뜻이라고 하는 이유 외에 무슨 다른 이유가 또 있을 수 있겠는가?” (기독교 강요, 3권 23장8 - “하나님의 뜻과 허용의 구별이 없음 참조 2권 4장3 – “사람의 일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 이것으로 충분한 대답이 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제4장에는 인간이 의롭게 창도되었다고 말씀되어 있었으나 본 장에는 우리의 첫 조상들이 범죄 했다고 덧붙여져 있다. 또한 이 죄로 말미암아 그들은 그들의 본래의 의(義)를 잃게 되고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죄로 죽게 되었고 영과 육의 모든 기능과 기관들이 전적으로 이제 더럽혀지고 말았다고 말씀되어 있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주장하기를 인간은 적극적 의의 상태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립상태로 창조되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에게 의(義)의 특별한 은사를 주셨는데 아담이 범죄 했을 때 그는 그 특별한 은사를 잃고서 그가 창조된 때의 중립상태로 되돌아 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로마교회에 따르면 인간의 현재 상태는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과 신앙 고백서에는 인간은 그가 창조된 때의 상태 이하로 전락 되었고 지금은 그의 모든 기능과 기관들이 전적으로 더럽혀져 있다고 말씀되어 있다.

 

현재 주의자들은 로마교회들 보다는 더욱 나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인류가 타락했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상향(上向)의 진화론적 타락(upward’ evolutionary fall)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후 줄곧 급격한 진보를 해 왔었다는 것이다.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는 지성에 남아 있는 적은 악은 얼마 안 가서 없어질 것이라고 예언하여 현재주의 적인 설교의 표준을 정해 놓았다. 많은 책들이 저술되었으나 그것들은 유토피아가 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라는 약을 필요로 하는 부도덕한 사회에 사는 도덕적인 인간을 주제로 한 것들이었다. 목회자들은 인간의 완전성에 관하여 상세히 부연했다. 그리고 1914년 여름에는 어떤 대학 총장이 장로교회 장로인 사람이 이제는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이라는 증명하는 책을 거의 마무리 지어 출판하려고 한 일이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을 잊고 있었다.

 

이제 40여 년이 지난 오늘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전체주의 국가들의 잔학상을 인하여 이런 형태의 어리석은 신념은 뿌리째 뒤 흔들리고 말았다. 이제 신정통주의 신학이 인간에게 그릇된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어떤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그들의 견해는 성경과 일치하는가? 그들이 애매모호하게 뒤섞어 사용하고 있는 몇 개 안 되는 성경 구절들과 많은 난해한 술어는 인간이 죄로 죽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즉 “인간이 전혀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수도 없고, 행할 능력도 없고, 선한 것이 그 속에 없으며 전적으로 악을 행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신정통주의 신학은 아담의 죄의 죄책이 그의 후손에게 전가 되었다는 것을 부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담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재판 받을 때 우리의 대표자가 아니었고 다만 아담은 비역사적인 신화적 인물(unhistorical myth) 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신정통주의 자들은 뻔뻔스럽게도 주장하기를 우리보다는 자기네들이 종교 개혁자들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읽어 보아야 할 줄로 안다.

 

우리 또한『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읽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힘차게 전해야 한다. 로마 교회와 현대주의자들과 신정통주의자들이 성경의 교훈들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성경을 신봉한다고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진리에서 크게 탈선한 사람들도 있다.

어떤 기독교 대학에서 인간은 죄인이요 악한 길에 있으며 죄로 병들어 있다고 가르친 성경 교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 교수는 구원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구원은 약국에 있는 약과 같다고 했다. 그래서 병든 자는 친히 병든 몸을 이끌고 약국으로 가서 약을 복용하면 낫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 기독교 대학의 교수단 중에는 확실한 장로교인도 있었다. 그는『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준하여 가르쳤다. 결국 학생들은 이 두 신학이 뚜렷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학교 총장은 그 장로교인 교수를 해직시켰다.

성경과『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인간이 죄로 다만 병들어 있다고 하지 않고 죄로 죽어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또한 구원은 약으로 비교되기 보다는 부활과 비교된다는 것도 가르치고 있다.

 

[3항] 그들은 온 인류의 시조이기 때문에 그들이 범한 이 같은 죄책이 그들의 모든 후손들에게 전가되었고, 또한 그 죄로 인하여 같은 죽음과 부패한 성품이 전달되었는데 보통의 출생법에 의하여 태어나는 그들의 모든 후손들에게 유전되었다.

1:27,28 창2:16,17 창3:16,17 행17:26 롬5:12 롬5:15~19 고전15:21,22,45,49 시5:15 창5:3 욥14:4 욥15:14

 

[4항] 이 원부패로 말미암아 우리는 전혀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수도 없고 행할 능력도 없고 선한 것이 그 속에 없으며 전적으로 악을 행하는 성향이 있으므로 이 원부패로부터 모든 실제적인 범죄들이 나온다.

5:6, 7장 롬8:7 골1:21 창6:5 창8:21 롬3:10~12 약1:14,15 엡2:2,3 마15:19

 

6장 [3]~[4]의 요점

 

1. 인간은 죄와 부패성의 원인은 인류의 대표성을 가진 그 시조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 죄와 부패성이 전가 되었기 때문이다.  

2. 그 죄와 부패 상태의 결과로 모든 실제적인 범죄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3항]에는 두 가지의 중심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아담의 처음 지은 죄의 책임을 그의 모든 후손에게 전가시키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만은 예외이다. 둘째는 아담의 부패한 성품이 바로 그 개인들에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먼저 아담은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 했을 때 한 개인의 신분으로 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의 후손들의 대표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롬12:12~21을 주의 깊게 연구해야 할 것이다. 유의할 것은 한 사람의 한 가지 행동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점이다. 당신과 나는 우리가 죄들을 범한 것 때문에 죄인들인 것이 아니다. 적어도 처음 죄를 범한 경우에는 더욱 죄인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대표가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범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죄책이 있는 것이다. 특별히 유의할 것은 로마서 5장에 한 사람의 한 가지 행동이 얼마나 강조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죄책을 우리에게 전가시키신다. 이 전가(傳家)는 롬5:13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고 그 부분(롬5:12~21) 전체를 통해 함축되어 있으며 특별히 19절에는 “한 사람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라고 말씀되어 있다.

 

그러나 신약에서 로마서 5장에만 일일 하게 죄의 전가 사상이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니다. 로마서 4장에도 전가사상이 가득차 있다. 6,8,11,23,24절 등은 영어로 ‘전가(imputation)’라는 단어를 포함하고 있고, 3,4,5,10절 등은 헬라어로 같은 단어를 포함하고 있다. 성구사전을 보면 그와 같은 단어와 그와 같은 사상이 딤후4:16, 고후5:19, 몬18과 그 밖의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이 성구들 중에는 어떤 것은 죄의 전가를 어떤 것은 의의 전가를 말하고 있고 어떤 것은 인간적인 의무와 관련하여 그 사상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전가의 사상을 예시하고 있다. 비평가들은 불평하기를『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작성자들이 17세기의 지적(知的) 분위기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한 과장된 개념들을 미리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모든 것이 정확한 법률 용어로 표현되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 작성자들은 그 같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의 입장을 명확하게 깨닫지 못했으며 그래서 이같이 난삽한 어휘를 사용하여 왜곡시켰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17세기가 많은 혹은 모든 다른 세기들보다 더욱 법 정신이 강했던 것으로 볼 수도 없을뿐더러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신앙 고백서의 작성자들이 율법과 전가 사상 전체를 통해서 발견해냈다는 점이다. 정직한 주석가라면 그것을 아마 놓칠 리가 없었을 것이다.

 

어떤 신학자들의 경우 그들은 전가를 참 종교에는 아무 필요가 없는 일종의 부기(簿記 = book- keeping)로 본다. 또 다른 어떤 신학자들의 경우 죄책이 전가 된다고 하는 대표 원리의 개념은 전적으로 부도덕한 것처럼 생각되고 있다. 핸드리 박사는 주장하기를 “’을’이라는 사람이 먼 곳에서 오래 전에 지은 범죄 행위를 인하여 ‘갑’이라는 개인이 그 ‘을’의 죄책을 뒤집어 쓴다고 하는 것은 명백히 불합리하다.” (George S. Hendry, The Westminster Confession for Today, p.81)고 하였다. 그러나 정직한 부기가 종교에 아무 필요 없다고 불평하던 사람들이 어찌하여 정직하지 못한 부기를 옹호하는가?

전가가 지나치게 법적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어찌하여 불법적인 어떤 것을 더 좋아하는가? 그리고 만일 저가 교리가 부도덕한 것이라고 비난할 것 같으면, 대표원리에 관해서 무엇이 부도덕한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무엇을 두고 부도덕하다는 것인지 물어보자. 금단의 과실을 따먹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금했다고 하는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부도덕하고 죄악 된 것이었다. 살인이나 간음이 그릇된 것이라는 것에 대한 다른 이유가 있는가? 그 이유란 옳고 그른 것을 구분 지어 놓은 하나님의 계명들 때문이 아닌가? 인간의 마음속에는 순종과 불순종의 경우 양자 모두 상반되거나 이질적인 동기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해 주는 데는 하나님의 명령 외에 다른 무엇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만일 하나님께서 주권적이시고 그가 대표의 원리를 인정하셨다고 하면 대표 원리와 전가 개념에는 아무 부도덕한 것이 없는 것이다.

 

전가 개념에 대하여 [3항]에 보면 자신의 죄의 결과로 아담에게 임한 부패(腐敗)와 악화(惡化)가 유전에 의하여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으로 말씀되어 있다. 여기서 아담과 우리 자신 사이의 차이점에 유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담은 먼저 자의(恣意)로 죄를 범하였고 그것의 결과와 형벌로 그의 성품이 부패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는 부패가 자의적인 범죄보다 앞선다. 우리는 의롭게 창조되지 않았다. 우리는 태어날 때 부패한 성품을 타고났으며 그 성품으로부터 우리의 자의적인 범죄들이 자연히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은 앞서의 전가의 개념에 대한 더한층 빛을 던져준다. 부패한 성품은 일종의 형벌이다.

 

아담이 범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벌하여 그이 성품을 부패케 하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태어날 때 이미 부패해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부패한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이 형벌은 무엇에 대한 형벌인가? 그것은 우리의 자의적인 범죄에 대한 형벌일 리가 없다. 태어날 때에는 우리 자신의 악한 행위를 우리가 범한 일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껏 선악 간에 아무것도 전혀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벌을 받게 되는 그 죄는 아담의 죄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아담의 죄의 책임이 우리에게 전가된 것이다. 핸들 박사와 같은 신학자들은 “전가 개념 없이는 우리가 태어날 때 왜 이미 부패해 있는가를 설명할 수가 없다. 왜 우리가 죄악 된 상태로 출생하는가를 설명해 주는 것은 전가 개념이다”라고 했다.

 

어떤 신학자들과 어떤 철학자들은 주장하기를 우리가 중립 상태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르치기를 우리는 태어날 때 아무 도덕적 성품을 가진 것이 없다고 했다. 우리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또한 영국의 철학자 로크(Locke)도 주장하기를 우리의 도덕률을 포함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이 경험에서 나온다고 했다. 철학과 쟁론하는 것은 복잡하고 여기에서는 적합하지도 않다. 그러나 사람이 태어날 때 이미 형성된 성품을 가지고 나온다는 것이 결코 터무니 없는 주장이 아님은 개와 고양이는 만나기만 하면 원래부터 갖고 있는 반감을 인하여 서로 싸운다는 사실로 곧 알 수가 있다. 그것들은 그러한 반감을 경험을 통해서 배우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다. 아무튼 생리학과 철학에서 그 문제가 어떠하든지 간에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우리는 나면서부터 죄인들이라고 한다.

 

[4항]에는 이 부패가 우리의 전 성품에 퍼져 있다고 진술되어 있다. 죄로 말미암아 영향을 받지 않는 기능이나 기관은 아무것도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인간의 지성은 죄악 되나 그의 감정은 순전하다고 하면 그것은 틀린 말이다. 그 말을 바꾸어서 말해도 역시 틀린 말이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해져 있는 것이다. 한두 가지 실례를 보면 이 점이 분명해질 것이다. 주제가 죄와 부패에 관한 것이니만큼 거기에 부합되는 실례가 좋을 것이다. 몇 명의 소년들이 주사위 던지기 노름을 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한 녀석이 주사위를 굴리니 7이 나왔다. 운이 좋은 것이다. 그는 다시 주워 가지고 두 번째로 굴렸다. 7이 나왔다. 놀랄만한 것이다. 그는 다시 주워 가지고 세 번째로 구렸다. 또 7이 나왔다. 그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철학자들의 형안(炯眼)을 가진 소년들이 어떤 원인으로 해서 그 같은 일치된 결과가 나올 수 있게 되었을까를 설명코자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천재적인 솜씨를 발휘하여 그들은 결론짓기를 그 원인이 주사위 내부에 있다고 보았다.

 

인간의 성품도 그와 마찬가지다. 만일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죄가 빈민굴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면, 어찌하여 부잣집 자식들이 야만적인 행동을 탐닉하는가? 그리고 어찌하여 부유층 사람들이 공금을 횡령하는가? 또는 만일 죄가 열대 지방의 질병이라고 하면 어찌하여 캐나다 사람들과 시베리아 사람들은 완전하지 않는가? 죄에는 지리적, 사회적, 또는 지식적인 경계가 전혀 없다.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릇 행한다면 우리에게 주사위 놀이를 하는 꼬마 녀석들의 철학적 통찰력이 있다고 가정할 경우 그 원인이 사람들 내부에 있다고 우리는 결론지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본래적으로 죄악 된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대답하기를 모든 사람이 죄를 번했다고 할지라도 몇 차례 범한 것을 가지고 인간을 본래부터 죄악 되고 전적으로 부패해 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할지 모른다. 

 

심지어 흉악범들일지라도 매일 살인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토요일 밤에만 그랬다. 그리고 존경할 만한 사람들의 경우는 악한 행실보다는 선한 행실을 더 많이 한 것뿐이다. 그러므로 몇 안 되는 악한 행실이 악한 성품의 증거가 된다고 하면, 많은 선한 행실은 훨씬 더 선한 성품에 대한 더 좋은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대답은 핵심을 놓친 것이다. 인간의 선행과 악행의 비율이 문제가 되는 것 아니다. 잠깐 그 비율에 대해서 말해 보기는 하겠지만, 그것이 문제되는 것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간단히 말해서 이렇다. 즉 인간의 본성은 그 자체가 저절로 무죄성의 경향이 있으며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만한가, 아니면 그렇지 않는가? 문제는 더욱 분명하게 해서 말하자면 사람은 저절로 무죄성의 경향이 있으며,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만한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무죄성은 단 몇 가지의 선행을 필요로 하거나, 심지어 많은 선행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무죄성에는 악한 행실들이 단 하나라도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율은 문제의 핵심을 놓친 것이다. 무죄성은 완전을 요구한다. 그래도 인간의 성품이 악한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죄악의 원인은 내부에 있다. 인간은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실례를 들어보자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유럽 여행을 간다고 생각하자. 제트 여객기로 여섯 시간 만에 갈 수도 있었으나 물 구경을 하고 싶은 나머지 느린 화물선을 탔다고 하자. 매일 매일 태양이 빛난 까닭에 갑판 의자에 앉아 시원한 바닷바람을 즐겼다. 그런데 열 하루 째 날에 폭풍이 일어났다. 광풍이었다. 배가 깨어져 가라앉아 내렸다. 우리는 구명선을 타고 파도를 따라 요동하면서 우리가 탔던 그 배가 마지막으로 침몰되는 순간을 보았다고 하자. 그때 바닷물을 한입 마신 채 슬프게 말하길 얼마나 좋은 배였던가 할 것이다. 그 배는 유쾌하게 열흘 동안은 잘 항해했었는데 어쩌다가 단 한 번 가라앉고 말았다. 그것의 좋은 점은 그것의 나쁜 점에 비해 열 배나 더했다.

 

이렇듯 비율에 관한 실례를 볼 때 인간의 본성을 비율로 평가하려는 것은 핵심에서 벗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인즉 사람들이 누리는 좋은 날들은 악한 날들에 비해 수적으로 열 배가 되지 않는다. 그 비율은 훨씬 낮다. 불신자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을 하나님의 계명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할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불신자는 우상 섬기는 죄도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불신자일지라도 그가 완고하지만 않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을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할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할 것으로 본다. 그런데 자문자답해 보자 우리가 그 계명을 얼마나 많이 순종하였는가? 열흘 가운데 하루라도 순종하는가? 솔직히 말해서 한 날도 제대로 순종하지 못하고 있다고 우리는 고백해야만 될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도 잡념에 사로잡힌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비율은 우리에게 불리하다. 죄는 항상 전적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태어났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이처럼 큰 구원이 필요한 것이다.

 

[5항] 이러한 본성의 부패는 이 세상 사는 동안에 중생한 사람들 안에도 남아 있다. 그리고 그 부패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용서되며 억제되고 있다 할지라도 그 자체와 그것에서 비롯되는 모든 행동들을 참으로 그리고 완전히 죄이다.

요일1:8,10 롬7:14,17,18,23 약3:2 잠20:9 전7:20 롬7:5,7,8,25 갈5:17

 

[6항] 원죄와 본죄 등 모든 죄는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에 대한 위반이요, 그것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그것 자체의 성질 때문에 죄인에게 죄책을 가져다 준다. 그 죄책으로 말미암은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를 받게 되며 그리하여 사망을 당하되 동시에 영적 육체적 그리고 영원한 모든 불행들을 아울러 당하게 되었다.

요일3:4 롬2:15 롬3:9,19 엡2:3 갈3:10 롬6:23 엡4:18 롬8:22 애3:39 마25:41 살후1:9

 

6장 [5]~[6]의 요점

 

1. 죄와 부패성의 중생한 신자들 안에도 남아 있다. 그러므로 그 죄와 부패성의 산물은 신자의 경우일지라도 죄이다.  

2. 원죄와 본죄(자범죄) 등 모든 죄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위반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다음 장인 제7장에서 구원의 대계획을 서술하기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죄의 교리를 막음하기 전에 [5항]에는 중생한 사람의 죄악성에 관한 진술이 있다. [5항]의 요점은 중생하더라도 곧 죄가 근절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아무리 경건하다고 할지라도, 그는 결코 이 세상에서 죄 없는 완전을 이룰 수 없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죄 없는 완전히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어떤 이들은 심지어 거기에 이르렀다고까지 주장한다. 당신은 지금까지 성결교회 단체들과 접촉해 본 일이 있는가? 승리 생활 운동(victorious life movement)에 대해서 들어 본 일이 있는가? “완성되고 즉각적인 완전” 이라는 어구가 생각나는가? 4판(版)에 걸쳐서 널리 읽혀진 한 권의 책(Chester Wilkivs , A Handbook for Personal Soul-Winning : Light and Hope Publication, 1950)이 있는데 거기 보면 다음과 같이 가르쳐져 있다.

 

은혜 가운데서 성장하는 것은 씻는 것도 아니요 깨끗하게 하는 과정도 아니다. 은혜 가운데서 성장하는 것은 자연적인 과정도 아니다. 성화는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사역이다. 완전한 성화는 체험하여 얻어지는 어떤 것이다. 죄에서 떠나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일은 결코 없다. 정도의 차이라든지 점진적인 단계란 전혀 없다. 오직 성령의 사역은 시작할 때 완성되어 있고, 시간적으로는 즉각적인 것이다. (p212~214)

 

그런데 완전 무죄하다고 주장한 사람이면 누구이든 극단적인 위선적인 버림받은 자임에 틀림없을 것으로 처음에는 생각할 수도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기독교 대학 교수는 그가 26년 동안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 사람은 흉악한 위선자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경건한 노신사이었고, 다른 교회 회원들과 비교해 보면 그는 참으로 아주 선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 사람이나 그 밖의 다른 사람을 성경의 표준과 비교해 보게 되면, 이와는 다르게 말할 것임에 틀림없다.

 

성결교회 단체들(holiness groups)을 크게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그들의 불충분한 견해 때문이다. 그들은 죄의 본질과 정의에 대해서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들은 죄를 정의할 때 하나님의 율법에 비추어 하지 않고 대신 일반적으로 지방 풍속에 의하여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거나 아니면 경건한 육감(肉感)(pious hunches)을 따르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내 딸이 프랑스에 있는 어떤 성경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여학생들이 머리를 어떻게 손질해야 하는가에 대한 엄격한 규칙이 있었다.

 

성결교회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사회 또는 교회의 관례들과 대치할 뿐만 아니라, 자범죄와 전혀 죄가 아닌 어떤 것을 비 성경적으로 구분하기까지 한다. 윌킨스(Wilkins)씨는 “하나님과 그의 율법에 대한 고의성 있는 죄와 죄과(罪過)와 사람이 어쩌다가 범할 수 있는 실수 간에는 차이가 있다. 후자의 실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마음의 동기를 보시기 때문에 우리가 실수를 범할 때 우리를 결코 죄 있다고 하지 않으신다.”(p.214)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선 성경에는 어느 곳에도 마음과 머리가 대조되어 있지 않다. 또한 성경에는 죄와 실수가 대조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끝으로 윌킨스씨의 말에는 완전히 순결한 동기들을 사람이 가질 수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반대로 마음의 내면적 순결보다는 율법을 형식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울 듯싶다.

 

즉각적인 완전을 주장하는 것에 반대하여 자범죄가 죄의 유일한 형태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주장해야 한다. 죄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데 있어서 부족한 것이다. 이 말은 곧 우리의 타고난 부패 그 자체가 죄라는 뜻이다. 죄란 행위일 뿐만 아니라 상태 또는 성품인 것이다. 성결교회 교인들은 자범죄의 이 근원을 간과해 버린 듯하다. 성결교회 단체들의 오류는 죄의 극악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로마 교회와 현재주의자들의 오류와 비슷하다. 그들에게는 죄가 오히려 표면적인 것 같다. 그래서 죄가 이 세상에서 근절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때때로 죄를 “알려진 죄(known sin)에 국한시킨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목표가 단지 알려진 죄를 피하는 데에만 있다면 우리가 율법을 모르면 모를수록 우리는 더욱더 의로워질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죄 없는 완전을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기의 구원을 상실하며 그 다음에는 중생치 못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처럼 불완전한 완전이 도대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로 보건대 신앙 고백서에 정확하게 요약되어 있는 성경의 죄관이 얼마나 깊은 뜻을 지니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죄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가 하는 점은 구원의 본질, 성도의 견인, 각종 자유 의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그리고 실은 교리전체를 통해서 알 수가 있다. 우리는 일부분만을 아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완전한 신앙 고백서가 필요하다. 즉 신앙 고백서를 전체적으로 온전하게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그런데 성결교회 단체들이 사용하는 많은 구절들은 성경에서 인용된 것들이다. 예를 들면 요일3:6,9 (하나님께로 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 6절도 표현은 다르나 같은 뜻 – 역자 주) 은 이 세상에서 죄 없는 완전이 가능한 것으로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그가 방금 앞서 요일1:8과 2:1에서 언급한 것을 이 구절들에 와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라면 무슨 뜻이 거기에 내포되어 있을 것인가? 그 구절들에는 하나님께로 서 난 자마다 아무 죄도 범치 않는다고 언급되어 있다. 이 경우에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만이 완전 상태에 이르는 것이 아니고 그 대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죄 없게 되지 않겠는가? 바꾸어 말하자면 죄의 흔적이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성결교회 단체들마저도 이러한 의미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이 세상에서 죄 없는 완전(sinless perfection)에 이를 수가 있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지 않다. 이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알고자 하면 워필드(B.B Warfield)의『완전주의(perfectionism)』를 읽기를 바란다. 본 자의 마지막 조항에는 죄에 대한 형벌은 육체적, 영원적 사망이다. 요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후계자들은 오늘날 거의 없다. “성난 하나님의 장중에 있는 죄인들(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은 흔히 있는 설교 제목이 아니다. 보편 구원론이 환영 받고 있기 때문이다. 지옥은 욕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신약에서 지옥에 대하여 가장 많이 말한 사람은 누구였는가? 베드로였는가? 바울이었는가? 요한이었는가? 아니다 이들 중에 아무도 아니다. 성구사전을 조사해 보라. 지옥을 가장 많이 말씀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었다. 죄의 유독성을 가장 강력하게 강조하고 거기에 상응하는 구원을 제공하신 이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었다.

  

 고든 H. 클라크 / 나용화 역

 

출처: ReturnBible/개혁신앙/returnbibl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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