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교리와 여호와의 증인 교리 비교

 

여호와의 증인

성서의 가르침 (기독교의 해석)

하 나 님

여호와 하나님 단 한분이 영원으로부터 존재하며 그 분은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보호자이시다. 삼위일체설은 부인.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신의 삼위일체이신 세 인격체이고 영원하고 개인적이며 영적인 존재이다(마태 3:13~17, 28:19, 고후 13:14).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지 않는다.

영혼은 인간의 몸으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죽음과 함계 멸절된다.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다. 몸은 죽어도 영혼은 남는다(창 5:1, 창 1:26, 욥기 32:8, 행 7:59, 고전 11:7).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이 최초로 창조한 인간이므로 예수는 신성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일체 중 하나이신 성자 하나님 자신이다(요 1:1, 골 1:15~19, 2:9, 요일 5:7~8, 딤전 2:5).

예 수 의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후 육체는 썩고 영만 부활했을 뿐이다.

예수는 영과 육체가 아울러 부활했다(요 2:21, 요 20:24~29, 눅 24:43).

예 수 의

1914년에 이미 눈에 보이지 않게 재림했다. 지금은 천국에서 지구를 통치 하신다.

예수는 세상 끝날에 육체적으로 재림한다(살전 4:16~17, 마 24:30, 슥 12:10, 계 1:7).

지옥이나 영원한 심판도 없다. 지옥 부재설 주장.

죄에 대한 형벌로써 지옥이 있다(마 5:22, 8:11~12, 13:42, 50, 22:13, 눅 13:14~28, 벧후 2:17, 유다 13, 계 14:9~11).

신구약성서를 믿되 해석법에 있어서 여호와의 증인에게 필요한 성서구절만 뽑아 연결지어 해석한다. 신세계 번역판 성서가 있다.

신구약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딤후 3:16).

구 원 관

1975년 ~2975년 천년왕국 이루고 여호와의 증인만이 구원을 받음.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수를 제한하지 않고 구원을 얻고 천국에 가게된다(엡 2:8, 행 2:38, 행 3:19, 4:12).

말세심판

1975년 10월 1일께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했으나 불발됨.

인간을 심판하는 날은 하나님 외에 아무도 모른다(마 24:36).

교 회 관

유형 교회는 부정하고 여호와의 증인 왕국회관만이 진정한 교회라고 함.

교회에는 유형교회와 무형교회가 있음


커츄니티 게시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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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기록은 다면적이다.
예로서 십자가는 생명이면서 사망을 동시에 상징한다.
그리고, 세례를 보더라도 한 편에서는 옛사람과 죄는 죽는 것을 상징하며, 새사람으로 거듭 태어남을 상징하는 증표이다.

율법에 대하여 성경은 상반되게 기록되어 있다.
골 2:14-16, 롬6:14, 롬 10:4, 엡7:18-19, 히7:18-19 같은 곳에서는 율법은 폐지되었다고 하였고, 마5:17-19, 눈16:17 같은 곳에서는 율법은 폐지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구약시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을 율법시대라고 부르고, 예수님 오신 이후를 은혜시대 또는 성령시대라고 부른다.

마11:13절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라고 한 것’을 보면, 예수님 오신 후에는 율법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로마서 13:10에서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선언함으로서 예수님의 십자가상 ‘다 이루었다’는 선언과 연결하여 예수님 수난 이후에는 율법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율법에 관하여 폐지와 존치의 상반된 내용이 존재하므로, 위에서 제시한대로 지금도 이에 대하여 의견들이 나누어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성경에는 구원을 받는데 두 가지의 방법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구약시대 때는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과 또 하나는 로마서 3장에서 소개한 믿음의 법이 있음을 볼 때에 예수님을 믿음에도 일정한 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야고보서 2장 12절에는 ‘자유의 법’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고 죄에서 자유를 받는 것은 맞지만, 그 자유 속에도 지켜야 할 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성경말씀은 넓게 보면 모두 법이다.
구약시대 때는 행위의 법으로, 신약시대 때는 믿음의 법으로 대별하였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법이 없었던 때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이 세상에 법이 있는 것처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믿는데도 일정한 율례나 법이 있다는  너무도 당연하다고 본다.



출처: USA 아멘넷/ 박종욱 님

 




“안녕하세요, 사모님, 목사님 건강은 좀 어떠세요?” 오랜만에 한국 반찬 가게를 갔다가 그곳에서 우연히 이웃교회 사모님을 만나게 된 필자는 그분의 남편 목사님께서 간암 말기란 소문을 얼마 전에 들었던 터라 안타까운 마음으로 물어 보았던 것이 화근이다. “우리 목사님 다 나았어요. 그럼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데 염려 할 것 있나요?”무슨 그런 믿음 없는 소리를 하느냐? 라는 듯, 질책하는 눈빛으로 짧게 바라보시더니 휭하니 돌아서서 어느새 저만치 가버리신다.

‘아차, 내가 괜한 질문을 한 것인가? 남편 목사님께서 병든 것, 그리고 그 병이 낫지 않는 것과 하나님 살아계신 것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만약, 저러시다가 남편 목사님의 병이 영영히 낫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죽은 하나님이 되는 걸까?’ 마음이 무척 심란했다. 그후로 그분을 같은 가게에서 두어 번 더 마주칠 기회가 있었지만 나는 차마 그분께 남편 목사님의 건강을 물어볼 수가 없어서 진열장 뒤로 슬그머니 몸을 숨기듯 피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몇 달 후, 안타깝게도 그 목사님은 오 십대 중반의 한참 일할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소천하셨다.

어디 그 사모님 뿐이랴. “믿습니다! 믿습니다!” 휘황찬란한 조명등이 현란하게 쏟아져 내리고 꽃장식으로 화려한 (저런 돈 아껴서 선교사들이나 밀어주면 좀 좋을까, 믿음이 없는(?) 나는 궁시렁거리며 둘러보느라 은혜도 안 된다.) 무대처럼 꾸민 강대상 위에서 쇳소리가 섞인 듯한 음성으로 강사 목사님이 땀을 뻘뻘 흘리며 질러대는 괴성, 거기에 맞추어 “믿습니다! 믿습니다”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성도들, 은사 집회란 곳이나 혹은 무슨무슨 부흥집회란 곳을 한 번 참석해 보면 믿음(faith, belief)이란 단어가 주는 뉘앙스가 자못 희한하기 그지없다. 저렇게 소리를 지르며 주문(?)외우듯 해야 믿음이 생기는 것일까? 믿음이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믿음과 자기 암시 내지 자기 신념을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먼저 믿음(faith)의 정의부터 한 번 생각해 보자.

위키백과 사전에서는 믿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믿음은 어떠한 가치관, 종교, 사람, 사실 등에 대해 다른 사람의 동의와 관계 없이 확고한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개인적인 심리 상태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어떠한 사실이나 사람을 믿는 마음’으로 설명되어 있다. 철학, 사회, 정치 등의 분야에서는 일반적으로 신념이라 하며, 종교에서는 신앙, 신심, 신앙심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믿음과 신념의 차이를 명확히 분류해 두지 않았다.

성경은 믿음(faith)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1절 말씀)” 즉 다시 말해서 믿음이란 자기가 소원(바라는) 하는 것들이 어느 시간에 실제적인 형태(실상)로 나타나는 것이며, 그리고 믿음이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evidence)라고 말씀하고 있다. 얼핏 들으면 자기 신념과 별반 다를 것 없어보인다. 그러나 믿음과 자기 신념과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다는 것을 여러 부분의 성경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믿음(faith, belief)은 자기신념이 결코 아니다.

믿음(faith)의 대상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믿음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믿음의 대상이 잘못되어 실패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 명철과 지식을 믿고, 어떤 사람은 자기의 권세와 부를 믿는다. 또 어떤 사람은 인생을 믿고 의지하다가 배신을 당해 가슴 아파한다. 우리 아멘넷 토론방에서 한참 치열하게 논의 되는 것도 바로 이런 것이다. 담임 목사의 말을 믿었는데, 어느 한 순간에 그들의 말과 행동이 다르게 나타나더란 것이고,이런 것을 바라보는 성도들은 너무 상처가 되어서 자칫 교회를 등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대상을 잘못 선정한데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말(언어)이란 자기 정당화를 위한 수단으로 거짓 사용될 때가 가끔 있다는 것을 아시기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은 듣되 그들이 행하는 행동은 따르지 말라고” 말씀 하신 것일까? 누군가 말했던 것 같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고…, 인생을 살아갈 수록 그말이 더욱 절감되는 현실이다.

우리가 뉴스를 보아도 금새 알 수 있다. 권력과 명예를 믿고, 돈을 믿고, 자기의 인기를 믿었지만 그 믿음이 자기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으로 이끌어 넣는 것을 보면서 저것이 인생인 것을…, 안타깝다못해 가슴이 저민다.

우리가 진정 믿어야할 대상은 누구일까? 성경은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 한 분이어야 한다고 말씀한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이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사 2:22).”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잠 3:5) 우리가 믿음의 대상을 잘못 선정했을 때, 좌절과 실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결국 멸망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 믿음의 대상은 오직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어야 한다. ( 히 13:8절 참조) 그분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신다!

믿음 (faith)의 근간(根幹)

믿음의 근간(根幹)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믿음이란 감정의 변화나 오래 교회에 다닌 역사나 또 막연한 추측이 아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리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로마로 압송되어가는 도중 유라굴로라고 하는 태풍을 만나 그 배에 탄 모든 사람이 죽게 되었고 모두 크게 두려워서 떨고있을 때, 바울 사도가 그들에게 들려준 말이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행 27: 25절) 이것이 바로 우리가 깨달아야 할 바른 믿음의 근간(根幹)이다.

그러니까, 믿음이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믿음이 좋은 사람은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도 아니요, 성경지식이 많은 신학자도 아니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율법주의자도 아니란 것이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란 하나님께서 내게 해주신 약속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확실히 믿는다, 하는 것이고, 따라서 행동에 옮기기 전, 내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로고스(Logos) 혹은 레마(Rhema))을 먼저 받아야 한다.
 
예를 들자면,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가기 이전,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창 12:1절 말씀)."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듣고 길을 떠났던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인간으로서는 최초, 최말로 물 위를 걸은 위대한 사람, 베드로 역시 물 속에 혼자서 마음대로 뛰어든 것이 아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주께 먼저 간구했고,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 예수께로 가되." ( 마 14: 28-29절 말씀)  모든 믿음의 근간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라기보다는 자신의 의지와 결단과 선택이라고 말하는 신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의 은혜란 것을 인지하고 그 말씀에 동의해야 한다. 믿음의 주체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
“너희는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 2:8-9)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10:17)

결론적으로 믿음이란 단어는 추상명사임이 틀림없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은혜로 그분이 허락하시는 때에, 내 앞에 실상(현상)이 되어 나타나게 된다. 우리가 자기 신념과 믿음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 하여 내 몸에 병이 들지 말라는 법 없다. 그리고 내가 병들었을 때 그 병에서 놓임을 받게 해주시는 은혜를 입게 해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그 병에서 놓임 받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불러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한다.
 
그런고로 믿음이 좋은 사람은 치유 은사 사역자도 아니고 “믿습니다! 믿습니다!” 소리질러라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들뜨게 하는 유명 부흥강사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Logos, Rhema) 약속한 바 없음에도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내 병을 낫게해 주실 것이다 라고 하는 막연한 기대도, 강렬한 입술의 선포도 아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자기 암시적이며 자기 신념을 확고히 하려는 시도일 뿐 참 믿음이 아니다.

믿음(faith, belief)이란 세상 모든 것이 그분의 뜻 안에서, 그분의 주권과 섭리하심 아래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신하며, 내가 살던지 죽던지 그분께 영광 돌리고 그분의 선하심을 믿고 의지하며 따르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증거(evidence)인 것이다! 고로, 신념은 인간 스스로의 정의이며, 믿음은 전적 하나님의 주권이고 소유이며 은혜라 정의할 수 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 6절 말씀).”


아멘넷 별똥별/ 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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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로는 유화처럼, 때로는 수채화처럼
          누구나 다 마찬가지겠지만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나의 삶이 맑고 투명한 수채화였으면 좋겠다는 내가 그려온 삶의 작은 조각보들이 수채화처럼 맑아 보이지 않을 때 심한 상실감, 무력감에 빠져들게 되고 가던 길에서 방황하게 된다 삶이란 그림을 그릴 때 투명하고 맑은 수채화가 아닌 탁하고 아름답지 않은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만은 수채화를 그리다가 그 그림이 조금은 둔탁한 유화가 된다면 또 어떠하랴 그것이 우리의 삶인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우리 삶의 모습인 것을... 때로는 수채화처럼 그것이 여의치 않아 때로는 유화처럼 군데 군데 덧칠해가며 살아간들 또 어떠하랴 누구나 다 그렇게 한세상 살다 가는 것을 맑은 영혼 하나만 가져가게 되는 것을...
          ♪~ 지혜의 숲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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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가장 잘하시는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은혜를 베푸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기뻐하시고 가장 잘하십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대상은 시간과 공간,
        조건과 상황에 관계없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장면이 자주 묘사됩니다.
         
        하나님은 마땅히 죽어야 하는 자에게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리시고 자비와 은총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선물은
        은혜의 택배와도 같습니다.
        은혜의 택배란 무슨 말입니까?
         
        예전에 잘못 배달된 상품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상품을 보내 준 곳으로 전화해서 물건이 잘못 왔으니
        돌려보내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곳 담당자가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받으신 물건은 그냥 쓰셔도 됩니다.
        우리에게는 그 물건이 많이 있습니다'
         
        사지도 않은 물건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택배입니다.
         
        하나님은 자격이 없더라도 우리에게 은혜를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가 선물을 감사함으로 받는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그렇기에 신앙생활은 과분한 은혜를 받아 과분한 직분을
        감당하다가 후에 과분한 소명까지 이루게 되는 은혜의 여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아서
        그 은혜의 영광을 노래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옮긴 글)

 

말의 힘 글의 힘

 

 

내 입에서 나와
상대의 귀로 흘러들어 가는 말 한마디가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역할을 해내고 있는지를
우리는 항상 새겨야 합니다. 말을 내뱉는 것은 쉽고
순식간이지만, 그 말에 대한 책임은 평생토록
가져가야 합니다. 말이란게 이토록 어렵고
중요합니다. 말이 주는 놀라운 힘을 믿고,
말을 잘합시다.



말한 대로 거두고
말한 대로 이루어집니다.
말이 곧 그 사람이고 에너지입니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가 주는 힘은 놀랍습니다.
글은 더 많은 사람에게 더 큰 힘을 행사합니다.
그러므로 말을 책임있게 잘 해야 하고
글은 더 잘 써야 합니다.

 

 

 

"三思 一言"

 

너무 쉬운 문화공간에서

                                                                                  경산 유영훈

콤퓨터 앞에 앉으면
모든게 너무 빨리 돌아 갑니다

마우스로 못 볼 것이 없고
키워드를 두두려
마음 내키는 대로 글을 씁니다

대다수 국민의 지지로
당선된 대통령을
최고의 지성이라는 판사가
가카 새끼라고 쓰고
경찰 간부가 심판한다고 외쳐 대는 것은

소셜 네트워킹 써비스라는
폰이나  콤퓨터도 책임이 있읍니다
엄지정치
트위터등 수많은 사이버 공간이
너무 쉽게 의사를 표출하여
때론 투표선동을
때론 인신 공격을 무차별 공격 합니다

세 번 생각하고 한마디 말을 하고
남의 말을 들으면 세밀하게 분석하여
동의 여부를 판단 해야 되는데
자극성이 심한 선동적 구호에는
벌떼처럼 나서서 쏘아대고
냄비처럼 부글 부글 끓어대지요

이런 알맹이 없는 매체들이
국가나 사회에 얼마나  큰 재앙을 가저올지

마우스
키폰지 엄지손가락도
세 번을 생각하고 움직여야 합니다

세 번을 생각하고
열거나
두드리거나
휘둘러야 합니다

***이것은 詩가 아니라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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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질과 코스프레(cosplay)

         

        어떤 분이 정초에 아내를 즐겁게 해 줄 마음으로

        팔을 걷어 부치고 부엌 싱크대에 섰단다.

        “여보 내가 설거지 해줄께…”

        그러나 아내가 남편의 그 말을 받아 말한다.

        “설거지는 해주는 게 아니라 당연히 하는 거예요!

        앞으로는 나를 즐겁게 하려거든 해주지 말고 그냥 해버려요!

        설거지는 생색내며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하는 것이다.

        의미있는 말이라 생각되었다.

         

        주일말씀중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태도를 말씀하시면서

        “사랑과 믿음”에 대해서 “명사”로서만 이해하는데 그치지 말고

        “동사”적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권면하신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에서 이해되어지고, 분석되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끝나지 말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의 실천되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어져야 한다.

         

        “믿음”에 있어서도

        예수님께서 지붕을 뜯고 달아내린 중풍병자를 치유하실 때에

        “친구들의 믿음”을 보셨다는 말씀이 나온다

        여기에서도 예수님께서 보신“친구들의 믿음”은

        예수님께 나아가면 고쳐 주리라고 하는 명사적“믿음”뿐만 아니라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를 달아 내리는 동사적“믿음”도 포함됨을 말한다.

         

        “기도”에 있어서도 그렇다.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합니다”로 이어져야 한다.

         

        명사로 이해하고 분석하는데서 그치면

        모방하고 흉내내려는 객체의 “코스프레”에 머무르기 쉽다.

        그러나 본질의 주체가 되고… 능력의 역사의 가운데는

        열망하는 마음으로 지붕을 뚫고, 환경을 타개해 나가며

        동사로 이어지는 실천적 행동이 뒤따른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빛과 소금이 “되어라”고 하지 않으셨다.
        너희는 “빛과 소금이다” 라고 하셨다.

        즉 “존재의 본질”은 “동사”일 때 나타난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누가복음 10:33~34)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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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을 치는 자의 사명
    스위스의 알프스 산 깊은 계곡에
    한 오두막집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집은 종을 치는 집이라고 불렸는데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이 산에서 잃은
    어느 어머니의 정성으로 만들어진
    사랑의 집이라고 합니다.
    이 깊은 골짜기에는 겨울이 찾아오면
    눈이 바람에 흩날려 앞을 볼 수가 없고, 사방이 흰 눈으로 덮여버리므로
    등산하는 사람들이 길을 잃기 쉬웠습니다.
    그래서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치는 날이면 누구든지 이 집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이
    곧 종을 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길을 잃은 사람들이 종소리를 듣고
    구조를 받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종을 치는 집이어야 합니다.
    성도는 종을 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길을 잃고 죄 가운데 헤매는 사람들이
    모두 듣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복음의 종을 힘차게 쳐주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모두 종을 치는 사람으로 각자가 주께 받은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는 과연 종을 치는 자의 사명을 제대로 잘 감당하고 있는 것인지...
    캄캄해지는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세상 안일함에 취하여 종을 쳐야할 사명을 망각하고 있지나 않은지...
    늘상 그날이 그날 같은 나태한 일상,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오늘 따라 다급한 마음에 조바심만 생깁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겔 3: 17-21)

 

 

별똥별/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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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0일이 되면 쌍십절(雙十節)이라고 거창하게 행사하는 나라도 있는데..
제게도 그 때의 기억이 있습니다.
28년 전..., 1983년... 10월 10일 아침 10시 10분쯤...
아직 30대 초반의 젊던 저는 그 때 전라남도 영광군 홍농읍 계마리 517번지, 서해 바닷가 영광원자력 1,2호기 건설현장에 있었더랬습니다.
한 끔찍한 사고가 일어난 건설현장에....

저는 그 때 한국전력 영광원자력건설사무소에서 신출내기 계장이었죠.
1981년에 약 1년간 벡텔(Bechtel)사로 보내져서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벡텔사에서 두 달 정도, 그리고 애리조나 팔로버디 원자력건설현장에서 원자력건설요원 교육을 받고는 1982년에 귀국하였고
1년 동안 서울 본사 원자력건설부에서 근무한 다음 1983년 가을, 영광원자력 건설현장으로 투입되어서
1988년 올림픽 하던 해까지 건설현장의 기계분야 건설업무의 핵심에서 엔지니어 10 여명 데리고
도면, 기술지침, 시방서, 보고서 끌어안고 죽어라 일하는 기계기술계장을 했지요.

1983년 9월 1일, 저는 서울 쌍문동에 있는 한전연수원에서 신임계장요원 교육을 받고 있었는데,
그 날 아침 전해진 엄청난 뉴스는 그야말로 끔찍하고도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KAL 007기 피격.. 269명의 목숨이 한꺼번에 국화꽃잎처럼 산산이 부서져 사할린 검은 바다에 떨어진 사건.

아무리 공산당 유물사관으로 인간의 목숨을 우습게 아는 저들이지만 어떻게 저럴 수가...!
밤하늘을 날던 비행기가 미사일로 피격되던 그 순간, 그 미사일은 비행기의 어느 부분에 맞았을까?
미사일이 폭발한 순간 그 자리와 그 근방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비행기는 동강이 났을까, 아니면 큰 구멍이 난 채 추락하였을까, 산산이 부서졌을까?
순식간에 모든 것이 폭음과 함께 부서지고 또 고공에서 비행기 안팎 기압차이로 인하여 순식간에 모든 것이 산산조각으로 휩쓸려나가 흩어지지 않았을까?
그들이 잠을 자다가, 혹은 몸을 뒤척이다가? 혹은 생각에 잠기거나 책을 읽다가?
1만 피트 고공에서, 영하 40도의 차가운 공중에 피투성이로, 조각난 채 내뿌려져 꽃잎처럼 바다 위로 떨어졌을 영혼들...

그 뒤로도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제 자신이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바다를 향하여 떨어지는 끔찍한 상상을 하면서 몸을 떨곤 했지요.
일본의 해안에는 사지와 머리가 잘려져 나간 여인의 몸뚱이가 파도에 밀려나오고, 비행기가 떨어졌음직한 해역에는 소련과 미국의 군함들이 출동하여 수색을 벌리고,
그러나 비행기의 잔해는 흩어지고 희생자들의 시신들은 하나도 찾을 수 없었던 그 사건.
사할린 바다를 찾아간 유족들은 바다를 향하여 오열하고 떠나간 이들을 목 놓아 부르며 꽃다발을 던져 보지만
매정스럽게 뱃전을 때리는 찬바람은 그 통곡소리조차 쓸어가 버리고 던진 꽃다발은 바람에 밀려 되돌아와 뱃머리 물결에 부딪던 그 모습...
그 허무하고도 안타까운 장면들을 보던 그 기억.....


그런데, 269라는 희생자의 숫자 말입니다.
대한민국은 그 때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 게임을 유치해놓고 86년 아시안 게임과 과 88 올림픽 게임이 성공하면 세계 속의 한국이 된다고 떠들고 있었지요.
그런데...., 왜 86년 아시안 게임 때 금메달 숫자가 하필이면 269 개였을까요?
왜 그 희생자수와 같은 숫자였냐 말입니다.
그 269 개의 금메달 중 150 개 이상을 죽의 장막을 헤치고 서울로 기어 나온 중공(그 때는 아직 중국이 아니라 중공이었죠...)이 쓸어가고,
우리는 일본을 제치고 90 개가 넘는 금메달을 땄었지요.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에서 한국이 일본을 누르고 이기기 시작한 것이 이 때부터였지요.
그리고 어느 날 저는 은행에서 번호표 269번을 받아 쥐고 멀거니 그 숫자를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269라...”


다시 되돌아가서... 우리는 연수원에서 2주간인가 교육을 마치고 9월 중순, 영광원자력 건설현장으로 내려갔습니다.
건설현장인 계마리와 사택이 있는 상하리는 약 3 킬로미터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는데, 발전소와 사택을 짓기 위한 정지작업과 굴토작업을 하면서
6.25 전쟁 때 서로 죽이고 죽임 당한 참혹한 살육의 희생자 유골들을 1천 구 넘게 수습했다고 하더군요.
우리 가족이 배정 받은 사택은 17평짜리 아파트 2층이었는데, 아파트들은 바로 수많은 유골들이 나온 그 골짜기에 서 있었습니다.
6.25 때 영광은 유난히 서로 죽이고 죽는 피비린내 나는 보복과 상잔의 땅이었다더군요.
그리고 기계기술과장으로 임명받아 아직은 모든 것이 서먹하고 업무도 익숙지 않을 때였는데...

10월 9일, 한글날이자 일요일... (저는 주님도 모를 때였으니까 주일이 아니라 일요일이었죠.)
저는 그 날 회사에 가지 않고 사택 방안에서 하루 종일 뒹굴었습니다.
당시 건설현장에는 휴일이 없었는데.... "하루 공기 백만 불, 공기단축 달성하여 경제발전 앞당기자!"
이런 슬로건 밑에 누가 감히 일요일이라고 회사에 안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날은 아침부터 종일 비가 추적거리고 내렸거든요. 그래서 집에서 놀게 된 거지요.
건설현장에 비가 오면 철골용접이고, 페인팅이고, 목공작업이고, 콘크리트 타설이고 뭐고 작업이 거의 안 되거든요.

그런데 바로 그 날, 미얀마에 전두환 대통령과 함께 갔던 17명의 각료가 아웅산 묘소에서 한꺼번에 폭사하는 참혹한 테러사건이 터졌고 그 뉴스는 우리를 또다시 놀라게 했지요.
피 묻은 흑백필름에 그들이 남긴 마지막 모습, TV는 폭음과 함께 흩날리는 나뭇조각과 먼지, 아우성, 그리고 무너져 내리는 묘소건물을 보여주고 있었지요.
왜 하필이면 그들은 교회들이 예배드릴 시각인 11시에 그들은 아웅산을 참배하였나 하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리고 3명의 북한군 공작원들... 두 명은 사살되고 한 명이 생포되었다던가, 한 명이 사살되고 두 명이 생포되었다던가...


그리고 이튿날, 10월 10일 월요일 아침...
구름은 걷히고 푸른 하늘에는 다시 빛나는 태양이 솟아올랐지요.
영광원자력 건설현장을 내려다보고 선 금정산 봉우리 위에도 한 줄기 옅은 안개가 휘감겼다 사라지고,
건설현장은 드디어 2호기 원자로 격납건물의 꼭대기부분의 철판, 즉 Upper Dome Liner Plate를 설치하는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최대 600톤짜리를 들어올릴 수 있다는 초대형 링거크레인은 대지를 딛고 높이 100미터가 넘는 Boom을 쳐들었고,
로프를 내려 지름 36M, 무게 178톤이나 되는 거대한 삿갓모양의 철판, 2호기 격납건물 상부돔 철판을 고리로 감아 걸었고, 그리고 고사가 치러졌지요.
웃는 모양의 삶은 돼지 대가리를 놓고 현대건설소장, 작업반장들, 그리고 몇몇 간부들이 배춧잎 만원짜리 지폐를 돼지의 입에 물려놓고 나서 두 번 씩 절하고...,
그렇게 고사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작업반 노무자들이 달려들어 만 원짜리 지폐를 머금은 돼지대가리를 나꿔채어 도망가고,
또 한 무더기의 노무자들이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뒤쫓아 가고...

그런 가운데 600톤 링거크레인은 우렁찬 엔진음 소리를 내며 상부돔 철판을 서서히 격납건물 위로 까마득히 들어 올렸지요.
몇 개월 동안 애써 조립한 돔 철판이 격납건물 꼭대기 위를 덮으면 격납건물도 제 모양을 갖추고,
그 위에다 콘크리트를 치면 격납건물은 공사가 끝나게 되고,
고리원자력에서부터 시작하여 숱한 중량물을 들어주었던 믿음직한 600톤 링거크레인도 조용히 은퇴를 할 참이었지요.

그런데 어찌된 일입니까?
이제 다 올라갔다 싶던 돔 철판이 기우뚱거리더니 크레인의 Boom이 조금씩 슬로비디오처럼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니 저럴 수가, 저럴 수가....!
저는 그 때 크레인 바로 곁에 서 있었는데 크레인의 Boom이 천천히 기울어지는 걸 보면서도
잠시동안은 거대한 격납건물 콘크리트 구조물과 크레인을 위로 쳐다보기 때문에 생기는 착시현상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까마득히 올라갔던 크레인 붐이 진짜로 기울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하기까지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차마 믿어지지 않는 끔찍한 광경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순간, Boom은 뚝! 뚜두둑 소리를 내면서 중간쯤에서 허리가 꺾였고,
돔 철판은 격납건물 위에 떨어져서 천둥소리를 내면서 미끄러져 내리기 시작하였으며,
이어서 거대한 Boom은 터빈건물을 덮치며 굉음과 함께 무수한 쇠막대기 철봉들을 수수깡처럼 산산이 흩뿌리면서 무너졌고,
아름드리 철골구조물들이 그 충격에 힘없이 휘어져 나갔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소리도 제대로 못 지르고 넋이 빠졌고,
여태 지어놓은 발전소가 모두 무너지는 게 아닌가, 여태까지 애써 해놓은 모든 일들이 한꺼번에 끝나는 게 아닌가,
무섭고 참담한 심정에 몸조차 가누지 못 할 지경이었습니다.

얼마 뒤일까, 정신을 차려보니 상부 돔 철판은 격납건물 위에 비스듬히 걸려 멈춰 있었고,
크레인은 와이어로프를 매단 채 터빈건물철골 위로 처참하게 잔해를 눕히고 있었습니다.
아우성과 고함 속에 부상자들을 앰뷸런스에 실어 보내고 이리저리 뛰던 그 순간. 온 세상이 끝난 것처럼 생각되던
아, 잊을 수 없는 그 시간! 이 사고는 한전, 아니 세계의 원자력건설사상 아마도 최대의 사고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래도 상부돔 안쪽에 붙어있던 배관행거 두 개가 하부돔 철판에 걸려서 178톤의 중량물을 멈추게 한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철판이 계속 미끄러져서 떨어졌다면 아마도 그야말로 건설현장 절반은 부서지고 엄청난 인명피해가 났을지도 모릅니다.
178톤짜리 그 거대한 두꺼운 돔 철판이 격납건물 위에서 마치 솥뚜껑처럼 미끄러져 내릴 때 철판은 종잇장처럼 찢겨지고,
돔철판 안쪽에 설치해 놓은 살수(Emergency Spray)용 배관은 마찰열로 뻘겋게 달아올라서 휘어지고,
떨어져 나온 쇳조각이 튕겨 나가던 그 속에서 사람이 그 속에 깔린다면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날 터였는데, 그 철판이 얼마간을 미끄러져 내리다가 걸려서 멈춘 것입니다.
그리고 건너편 터빈건물에서 일하던 인부 두 사람이 날아온 쇠토막에 맞아 사망하고 십 여 명이 다치는데 그쳤고....

긴급사고대책반이 구성되고, 공정복구계획이 검토되고, 과기처, 원자력안전센터, 원자력 자문위원 조사단이 현장을 조사하고, 철판, 배관 자재가 긴급발주되고,
밤을 새운 대책회의가 이어지던 몇 날 몇 주일이 우리 건설요원들에게는 악몽과도 같았답니다.

사고의 원인은 바로 전 날, 아웅산 사건의 날 그렇게 추적거리고 내린 비였습니다.
책임문제로 토목기술자들은 아니라고 우겼지만 그 빗물이 크레인이 선 자리, 팠다가 되메운 그 자리의 지반을 적셨기 때문에 크레인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 하고 꺼졌던 것입니다.

그 사고를 수습하는데 우리는 8개월이나 걸렸습니다.
수백 장의 도면과 작업절차서, 텔렉스, 전화, 공급독려, 엄동설한 속에서도 계속된 철판재작업...., 저는 기계기술계장이라 그 복구작업 기술업무의 중심에 있었고...

그리하여, 8개월 뒤인 1984년 6월 8일, 다시 만들어진 상부돔 철판이, 부품을 들여와 재조립한 600톤 크레인에 들려져 8호기 격납건물 위 제자리에 올려지던 날은
사람들이 차마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먼발치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떨리는 가슴을 쓸어내렸고, 혹은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지요.

5년 동안 원자력 건설현장에서 겪은 사건, 사고, 에피소드도 많지만 그 크레인 사고처럼 엄청난 사고는 없었습니다.


10월 10일, 아침 10시 10분 무렵...
(십 자가 네 개....., 글 제목 보시고 무슨 소린가 하셨죠? 띄어쓰기를 유심히 보셨다면 왜 십 자와 자 자 사이가 띄어져 있나 하셨겠고...)

저는 그 날짜와 시각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10월 10일이 되면 거의 30년 전 사건이지만 어제 일처럼 기억이 납니다.
KAL기 피격, 아웅산 폭파, 그리고 크레인 사고...

저는 그 때 아직 주님도 모른 채, 피할 산성이요 요새가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아직 멀리 있었었지요.
그 위험한 곳에 말입니다


내 남편에가 걸려온 옆집 여대생의 전화

  • 아는 친구의 남편이 바람피워 이혼하자 주변 사람들은 잘 생긴 남편을 둔 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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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걱정의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잘생긴 내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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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 여자 싫다는 남자 없다.

    니 남편도 저쪽에서 죽자고 덤비는데 싫다 하겠냐. 한번쯤 의심해 봐야 돼."

    그래서 의심해 보기로 했다.

    참 이상하게 그동안 믿어왔는데 의심하기로 작정하고 지켜보니

    모든 점이 의심스럽기 그지 없는 것이다.

    그러던 차, 모두가 잠이 든 새벽 1시,

    그 깊은 어둠속에 남편의 핸드폰이 울렸다.

    "따다따 따다따~~따다따따 따다따~~~~"

    자다 벌떡 일어나 전화를 받는 남편, 가만히 상대의 목소리를 듣고만 있더니

    알았다고 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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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핏 들리기로는 어린 여자 목소리 같았다.

    남편은 잠시 고뇌와 번민에 찬 모습으로 갈등하더니,

    부스럭거리며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는다.그리고 자는 나를 한번 더 확인하더니,

    살금살금 부시럭부시럭 바같으로 나갔다.


    헉!! 설마설마 했더니, 내가 그렇게 믿어왔던 내 남편이...

    이 밤중에 다른 사람 전화를 받고 나갔다...

    이런 떠그랄~!!~!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것인가, 순간적으로 머리 뽀개지게 고민했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데

    성인군자인척 할 필요가 어디 있나.무조건 따라나가 한 대 갈기구 잡구 싸우는 거다.

    그러나 만약 남편이 내가 아니라 그뇬 편을 들면 우짜지?

    오만 생각을 하며 떨리는 가슴으로 앉아 있는데 남편이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급하게 나가느라 지갑을 안 들고 간 게다.

    배신을 때린 바람난 저 인간을 어떻게 해야 하나...초당 100바퀴로 머리 굴리다

    벌떡 일어나 문 앞에 가서 있었다.

    야구방망이 하나만 있었음 딱 좋겠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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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을 여는 순간,

    "으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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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고 비명지르며 뒤로 나자빠지는 남편 아니 그 인간.바람피우는 걸 상대방에게 들켰을 때보다

    더 무서울 때가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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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현행범이야.
    이제 무슨 변명을 해도 소용없어,
    난 모든 걸 지켜봤어!"

    뒤로 자빠진 그 인간앞에 서서 분노로 씩씩대는 나,

    이건 그야말로 완벽한 미스테리물의 한 장면이었다.

    "전화한 뇬이 누구얏!"

    슬금슬금 다시 일어나던 남편이 분위기 장난 아님을 깨닫고 사실대로 분다.

    "...옆...옆집...여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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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옆집 여학생????
    아니, 적이 그렇게 가까이 있었더란 말인가??

    "그 나쁜뇬이 왜 전화한거얏!
    이 밤중에 남의 남자한테! 왜!왜!..???"

    남편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듯, 아니면 나를 포기하고 그 뇬을 택한 듯 잠잠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남편은 놀라고 당황하던 조금 전의 모습과 달리

    되려 당당해진 모습으로 침대로 갔다.그러면서 한 마디 던지는 말.

    .
    .
    .
    .
    .
    .
    .
    .

    차 빼달래...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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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ㅋㅋㅋ 남편 의심 하지 맙시다~ 열심히 일해서 식구들 멕여 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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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시 구원구 영생읍 믿으면 얻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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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결점을 인정하는 용기           


      오페라 가수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는 오디션마다 낙방을 하자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에게 연줄이 없어서 그래. 
      예술계의 든든한 연줄만 있었다면 내 실력으로 떨어지진 않았을 텐데…
      그 말을 들은 그녀의 스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에겐 자신의 결점을 인정하는 용기가 없구나.
      위로를 원했던 그녀는 충격적이었지만

      스승의 말을 밤새도록 되새겨 보았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능력이 다른 참가자들에 비해서
      부족했던 것들이 분명하게 보이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결점을 인정하게 된 그녀는 자신의 약점인 음역과 발성

      그리고 무대 매너까지 파악한 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머지않아 그녀는 미국의 메트로폴리탄에서

      유명한 오페라 스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리즈 스티븐스입니다.

      사람들은 남의 결점은 잘 집어내지만 자신의 결점엔 관대합니다.
      자신의 결점을 지적당하면 항상 그럴싸한 이유를 달아 방어를 합니다.
      남의 눈의 티를 보지 말고 자신의 눈의 들보를 빼내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상대방의 결점을 보기 보다는 
      먼저 스스로의 결점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상대방의 장점만을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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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seven)가지 예쁜 행복



 

첫째, Happy look / 부드러운 미소
웃는 얼굴을 간직하십시오.
미소는 모두들 고무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둘째, Happy talk / 칭찬하는 대화
매일 두 번 이상 칭찬해 보십시오.
덕담은 좋은 관계를 만드는 밧줄이 됩니다.

셋째, Happy call / 명랑한 언어
명랑한 언어를 습관화하십시오.
명랑한 언어는 상대를 기쁘게 해줍니다.

넷째, Happy work / 성실한 직무
열심과 최선을 다하십시오.
성실한 직무는 당신을 믿게 해줍니다.

다섯째, Happy song / 즐거운 노래
조용히 흥겹게 마음으로 노래하십시오.
마음의 노래는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여섯째, Happy note / 아이디어 기록
떠오르는 생각들을 기뻐하십시오.
당신을 풍요로운 사람으로 만들 것입니다.

일곱째, Happy mind / 감사하는 마음
불평대신 감사를 말하십시오.
비로소 당신은 행복한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좋은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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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의 주장: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히 2:11, 14절 가운데)

 2. 칼빈 :

“그 무리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부끄러움도 던져버린 채 너무나도 방자하게 우리들이 의미하는 바가 그리스도께서 처녀의 월경의 씨에서 잉태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이에 반문하여 나는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그의 모친의 피와 결합을 하지 않으셨는지를 묻겠다. 그들은 이것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inst., 2.13.3)

3.벨직 신앙고백서 18항:

 “... 그리스도께서 그의 어머니에게서 사람의 몸을 취하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재침례파 이단들에 맞서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녀들의 살과 피에 참여자가 되셨음을 고백한다. 그리스도는 육체를 좇아 다윗의 허리의 열매이며, 육체를 따라 다윗의 씨에서 나셨으며, 처녀 마리아의 태의 열매이며, 여인에게서 나셨고, 다윗의 가지이며, 이새의 줄기에서 난 싹이며, 유다지파에서 나셨으며, 육신을 따라 유대인들에게서 나셨으며,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셨으니 아브라함의 씨에서 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모든 점에 있어서 형제들과 같이 되셨으나 죄는 없으시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는 진실로 우리의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4.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563년):

"질문 35: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고백이 뜻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답: 그 고백은 현재나 장래에나 언제나 동일하신 참되며 영원한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 곧 성자 하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혈과 육으로부터, 참된 사람의 본질을 취하셨으며, 이러한 일은 성령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임을 뜻합니다. 그 결과 그는 다윗의 참된 후손이 되셨으며, 죄를 짓지 않으셨다는 면을 제외한 다른 모든 면에서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음을 뜻합니다."

5. 우르시누스:

 "그리스도의 잉태와 관련한 성령의 역할은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를 제공하는 질료적 원인(material cause)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잉태를 가능케 하는 실행적 원인(efficient cause)이었다"(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해설중)

 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7년):

 “하나님의 아들은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제2 위격이시며, 영원하신 참 하나님이시며, 성부 하나님과 한 본질이시며 동등하시다. 때가 차매 그가 오셔서 인성을 취하셨고 인성의 모든 본질적 속성들과 공통된 연약성들을 가지셨으나, 죄는 없으셨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의 태에 서 마리아의 실체를 취하여 잉태되셨다”(8장 2항). 

7. 로이드 존스:

 “우리가 아는 바는 성령의 능력이 마리아에게 임했고, 마리아에게서, 그의 몸의 세포 하나에서, 우리 주님의 인성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마틴로이드존스, 성부하나님 성자 하나님, 기독교문서선교회, p.355).

 8. 이승구:

 이러한 사실 가운데서 성령님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것은 인간의 능력에 의해 의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성육신이 이루어졌음을 단적으로 선언해 주는 것이다..... 이 일은 성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성령의 능력 가운데 성자께서 우리의 인간성을 그 분께로 취하여 들이신 삼위일체적인 사건이다. 따라서 이 일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 가운데 있던 일이 그 정해진 때에 일어난 것이다. 그런 뜻에서 바울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라고 말했던 것이다(4:4). 이 일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일러난 일이라는 의미이다.이렇게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잉태를 통해 성령님께서는 모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타락한 인간성이, 또는 그 자체 안에 있는 죄의 죄책과 오염이 그리스도께 취하신 인간성에서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는분이시다(7:26).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이 타락한 이후 가지된 연약햐진 인간성, 따라서 죽을 수 있는 이간성을 취하셨지만, 죄의 부패와오염은 자지지 않은 인간성을 취하신 것이다(사도신경, SFC:151-152)

 9. 로버트 레이몬드:

 "그렇다면 예수의 동정녀 잉ㅌㅐ의 최고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직접적 답변을 하기 전에 비록 그 본질상 동정녀의 잉태이지만 바로 그 육신의 어머니의 태 안에서 그의 정상적으로 발육된 것과, 예수의 육신의 어머니의 자궁 안에 잉태되신 사실과 또 마태와 누가가 모두 기록한 대로 그 인간 자궁 안에서부터 세상에 출생하기까지 지극히 정상적인 과정을 거쳤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예수는 참으로 그리고 완전히 사람이셨고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해주고 또 보증해 주는 그의 인성의 기원의 특질들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좋겠다"(최신조직신학, 700).

출처: 양무리마을/holyjoy님

아래는 아멘넷 한창덕 목사님의 기사아래 남긴 댓글

복된소리
2012-01-18 03:42
98.xxx.205
한창덕 목사님,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그동안 많은 분들의 염려와 기도 끝에 이토록 분명한 해명의 말씀이 열매로 맺어졌다고 믿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성자 하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기에, 완전한 神이십니다. 또한 정상적인 아가씨, 완전한 여인, 인간 '마리아'의 몸을 빌리셨고 그 몸속에서 열달 동안 성장하셨기에, 그분은 완전한 人이십니다.

인간으로서, 마리아가 온전한 여인이었음을 인정한다면, 그녀가 월경을 한 것이나 임신 중에 월경이 중단되는 것,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 부분이 불경하다고 하여, 예수님을 신으로만 생각을 하게 되면, 3세기 초, 프락세아스(Praxeas)가 주창하고, 나중에 사벨리우스가 완성시킨 '성부수난설(patripassionanism)'로 이어지게 되고, 이는 분명히 금지된 이단사설일 뿐입니다.

정통교단에서는 모두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은 완전한 神이시요, 완전한 人이심을 믿으며 고백합니다. 그렇기에 그분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주실 수가 있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부활하셨음으로 우리의 '첫열매'가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토록 명약관화한 일을 가지고 문장을 뒤튼다음, 최삼경 목사님을 이단으로 계속 몰아가는 것이야말로, 중세의 마녀 사냥처럼 사악한 행위라고 봅니다. 무엇이문제인가님께서는 아멘넷을 비방하기 전, 무엇이 바른 것인지, 무엇이 틀린 것인지, 냉정을 되찾으시고 사태를 직시하시면 길이 보일 것입니다.


저와 가족은  1년6개월을 천안에 있는 주0양교회의 사이비목사 김0광에게
미혹되어 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벗어났고 또한 다수의 인원을
그곳으로 부터 구하여 이끌었습니다.
김0광의 단체는 이제 이단의 조직으로 커가는 과정에 있고
빈야드운동에서 나타나는 현상중 대부분이 그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김0광의 아들 김다윗은 현재 24세로 15세 때부터 주님의 영 이 임하여
예수님의 행세를 하며 자신의 아버지인 김0광을 큰아들이 라고
호칭하며 아버지는 그의 아들 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웃지 못할 행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 그곳으로 가게된 동기는 신비적인것을 좋아하는
집사를 통하여 김0광을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처음 만난 김0광은 저의 지난 과거를  무당처럼 잘 맞추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들먹이면서 성령으로 기도하여 모든것을 알수있다
라고 주장하는 그의 말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1. 주님의 임재
처음에는 그곳에 장길자 처럼 주님의 임재가 있는줄은 몰랐습니다
그들은 처음 온 신자들에게는 이 사실을 비밀로 부치고 나중에
김0광이 조심스럽게 “우리교회에는 아주 특별한 사건이 일어난다” 라고
먼저 설명하고 자신의 아들의 몸을 빌어
예수님께서 영으로 오신다고 하며 “어떻게 이런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자신도 너무나 신기한일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그런 그의말에 흥미를 느꼈고  김0광에게 그 주님을
만날수 있느냐고 하자 사모함을 키워야만 만날수 있다라고 하며
약 1 개월 간을 “오늘 부르실지 모르겠다 기다려봐라” 하고
또 그 다음 기회로 미루면서 사람의 마음을 애타게 만들었습니다
그곳에 들어간지 6개월만에 그 주님? 에게 들어가게 되었는데
전혀 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양을 모른다는게 이해가 되지 않아서 김0광에게
왜 하나님인데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냐고 하자 주님이 사람의
뇌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렇다 라고 하며 둘러 댔습니다
그 후 저는 그 임재실에 90여 차례 들어가서 그 김0광의
아들의 행동과  말을 관찰 하였는데 도저히 주님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김0광에게 약 6개월 동안, 주님의 임재를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라고 하자 김0광은 빙그레 웃기만 하였습니다

2.찬양
김0광은 예배 전에 항상 일렉 키타를 연주하며  찬송가보다
복음성가를 주로하며 특히 감정을 자극하는 곡을 위주로 하여
예배 분위기를 이끕니다(드럼,신디,베이스)
그럴 때에  진동현상과 록커의 헤드뱅잉 처럼 머리를 흔드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부분 여고생과 여자 청년들중에 이런 현상이 많이 나타납니다

3.설교
설교 내용은  주님의 사랑, 희생, 눈물, 십자가의 피흘리심 그리고 충성
믿음등의 주제로 이루어지며 말씀은 한구절을 인용 하는 경우가 많고
대부분을 영적인 알레고리칼한 해석과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설명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릴 정도로
애절한 목소리로 하여 듣는 사람들이 은혜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신 구원과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는것 임에도
감정적인 설교를 듣고 감정에 치우친것이 마치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달리심을 슬퍼만 할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우리가 거룩하게 살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음을
바로 알아 이제 생각을 변화 시키고
삶을 변화 시켜야함에도 감정적인 위안과 자극만을 쫒는
비정상적인 믿음의 형태는 그곳 사람들의 대부분의 모습입니다.


4.기도
기도를 할 때는  김0광은 주님의 십자가의 흘린피를 상상하라고 독려하고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자신이 느낀 것처럼 상상해보라고 합니다
이럴 때 일부 여자들은 자신이 마치 십자가에서 못박힌것 처럼
심음 소리와 함께 몸을 비틀어 댑니다
어떤 청년은 김0광이가 안수기도를 할 때 성령의 불로 태워 주시옵소서
하면 마치 연탄불 위에 올려놓은 마른오징어처럼 오그라들면서
뜨겁다는 듯이 신음소리를 내었습니다
나는 이런 모습을 처음 볼 때 너무나 신기해서 김0광에게 어떻게 해서
저런 현상이 나타나느냐고 질문하자
어깨를 으쓱하면서 성령의 능력이 높은 단계에 들어가면 그 정도의
능력이 나타난다고 하였습니다

5치유
또한 김0광의 치유기도는 특히 머리가 아픈 것에 효과가 있습니다
암이나 그밖의 질병은 잠시 좋아지듯 하나 나중에 더욱 악화 되었습니다
그럴 때면 심령관리를 잘해야 한다면서 병자의 탓을 하였습니다.

6.예언
김0광의 특징은 무당처럼 예언을 하는데 교회 안에서 돈이 분실되면
쪽집게 처럼 잡아내어서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지난 과거는 잘 맞추지만 미래의 예언은 틀릴 때가 많았습니다

7.은사
김0광은 은사는 기도 많이 하고 순종을 잘하면  받을 수 있다 라고 하며
성령의 수술에 들어간 사람들이 큰 능력을 받을 것이다
라고 하지만 그러나 매일 쓰러지고 자빠지는 사람 중에 몇 년이 된 사람도
쓰러지기만 반복 할뿐 은사를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8. 성령과 교통
성령의 작업자들에게 환청과 환시가 나타나며
주님의 음성을 듣고 글로 표현합니다(이0희)

9. 천국과 지옥
김0광은 1년에 2번 정도 천국을 여행을 한다고 하여 특별한 날을 잡아
예배당 안에서 자신의 아들과 눈이 열렸다고 하는 몇 명이 천국여행을
가는데 모든 신자들 앞에서 실황중계를 합니다.
천국의 형태와 모습을 세밀히 설명하면 눈이 열린 사람들이
동일한 광경을 보았다고 진술 합니다
그리고 평상시에도 천국의 광경을 설명 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10. 그곳에 빠진 사람들의 성향과 특징
먼저 자신은 특별한 신앙을 가졌다라고 교만에 빠진 자들이며
감정적으로 치우치고 신비한 것을 찾는 특징이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평신도 보다 목회자가 많았으며
목회자들이 오히려 그곳을 떠나지 못합니다
그곳에 있는 목회자들을 구하려 하였지만 대부분 자신의 신념이 옳다라고
주장함으로 더 이상 말이 먹히지 않았습니다
총신대, 장신대등 국내 유수의 신학을 전공한 목회자들이며
그중에는 성경을 100독을 하고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능통한
사람도 다수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청년 때까지는 고신교단에 속한 교회를 다녔고 이단에 빠지기
전에는 순복음교회에서 약 5년간 중고등부 부장집사로 섬기고 있다가
이단에 빠졌습니다
그때 저의 신앙의 상태도 옳바르지 못했고 교만과 함께 영적혼란에
빠져 있었으며  담임 목회자의 타락으로 인한 회의감으로 인하여
힘들어 할 때에 이단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결론.
나는 1년6개월 동안 김0광과 그의 아들 김0윗의 측근에서
모든 것을 관찰한 결과, 김0광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들이 빈야드운동과 아주 흡사 하였으며
빈야드운동이 이단적이고 반 성경적이 라는 사실을
성령의 능력이라고 주장하는 김0광에게 나타난  현상들을 통하여
알게되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습니다
기도원이나 집회에서 일어나는 쓰러짐, 입신. 등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현상들이 진리를 호도하며
변질시키는 원인 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말씀의 절대성을 훼손 시키는 것은 분명 사단의 책략이며
훼손시키는 이유는 사단의 역사를 분별하는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을
약화 시킴으로 분별의 잣대를 없애려는 계략입니다.
다시 한번 옳바른 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실히
깨닫는 계기가 되었으며
마틴루터의 말처럼 바르지 않은 말씀으로 하나님을 섬기는것은
마치 바알을 섬기는것과  다를게 없다는 것에 철저히 동의 합니다
옳바른 교리 위에 지어진 신앙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 신앙입니다.
그리고 이단의 교주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최면에 의한 것임이 확실하며
그들이 최면술을 배웠는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로 최면의 방식을
따라가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김0광은 자신과 신도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최면현상 이라고 깨닫지 못하는것 같음)  이들과 그를 따르는
신도들은 하나님의 참된 것을 체험하거나 보는 것이 아닌  
인위적이고 자의적인 상상을 최면의 방식을 통하여
거짓 환상과 거짓음성을 듣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들려 주셨다 라고 착각 하는 것입니다.
이런것은 지극히 마술적이고 사단적인 것입니다.
사단은 거짓의 아비 이기에 이런 거짓된 것으로 미혹시키는 것입니다.
피해의 첫번째 희생자는 사이비 교주 자신입니다
자신이 먼저 속고 또한 그 거짓된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면서
이단의 조직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김0광을 측근에서 관찰한 결과 신앙적인면 에서 이중적이고 편중적이며 이기적인 모습과 또 한편으로 뜨거운 열정을 보았습니다
이중적 이라함은 사랑을 외치면서  그러나 그 속에 하나님의 참사랑이
없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편중적 이라함은 균형을 잃어버리고 극단적인 성향의
신앙을 추구 하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것은 자신의 병적인 성도착증은 자신의 허물이고 약점 일뿐이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을 더욱 불쌍하게 여기시고 그럴수록 더 큰 능력을
지금까지 부어주셨다 라고 주장 합니다
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악한 신앙 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죄에 대하여 눈이 범죄 하면 눈을 빼어내고
손이 범죄 하면 손을 자르라고 하시며 죄의 위험을
극단적인 비유를 통하여 알려 주셨음에도
그는 괴변을 일삼으며 더러운 범죄를 반복적으로
저지르는것을 보았습니다.
뜨거운 신앙의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상황에 알맞게 설정 되어진 말씀과
거짓하나님, 즉 바알에 대하여 뜨거운 열정이 있습니다
그의 기도를 듣게되면 얼마나 처절하고 애처롭게 부르짓는지 모릅니다.
그 모습을 본 사람은 많은 감동을 받을 것입니다.
왜곡된 하나님과 변질된 진리에 대한 사이비교주의 열정을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섬기는 주님이 참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그들이 섬기는 주님은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 시키기
위하여 말씀을  변질 ,  왜곡 시켰기 때문에 그들은 참 하나님이 아닌
바알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20여 년간 더러운 성범죄를 반복적으로 짓는 자에게서 어떻게
거룩하신 성령께서 함께 하실수 있겠습니까?
반 도덕적이고 반인륜적인 범죄자가 하나님의종 일수는 결코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더욱이 성력의 역사가 일어날수도 없습니다
김0광은 정명석 못지않게 변태 성욕자이며 수많은 여성들과
그 가족들을 고통에 빠뜨린 자 입니다
김0광의 특징은  빈야드운동 처럼 최면을  활용하고(우연하게 최면술의 방식을 따라감)
더불어 성령을 가장하나  그러나 신접한자 처럼 점을 본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 김0광은 본인이 지켜본 결과 문선명이나 정명석 못지않게
거대한 이단의 집단으로 자라날 잠재적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판단 되었습니다
이 김0광을 이단으로 정죄하여 만천하에 알리므로
이단의 싹을 초기에 없애서 더 이상의 피해자와
기독교계의 희생자가 생기지 않도록
교계차원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2011, 11,    도봉옥


윗 글은 2011년 한기총 이대위에 보낸 서신으로써
조속한 이단결정으로 앞으로 미혹될 사람들을
미연에 막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기총 지도부의 파행적인 행보로
이 안건은 아직 상정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정치에 치중한 병들은 목회자들과
기성 교단 지도부까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들어온
이단의 종자들이 교계를 더욱 혼미케 하고 있습니다
한기총이 하루빨리 정상화되어서
이대위의 충실한 역활을 기대합니다


출처: 아멘넷 게시판/ 도봉옥님의 사랑의 수고를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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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동시에 청지기 직분을 부여받은 하나님의 일군들입니다. 격에 있어서 모두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누가 더 높고 더 낮은 사람이 없습니다."나는 하나님의 집을 섬기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청지기요, 일군일 것뿐이다."하는 것을 인지(knowledge)하고 충성(loyalty)을 다짐하는 것, 이것이 청지기 의식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이런 올바른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직분에 임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 아무런 유익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청지기에 대해서 같이 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청지기(steward)의 뜻:
청지기 직분이란 주인의 재산이나 가옥을 일시적으로 위임받아 주인의 뜻을 따라 보관하고 관리하다가 주인이 돌아올 때 주인의 것을(이익, 불이익) 돌려 드리는 것이다.

2.구약에 나타난 청지기 직분
많이 있지만, 시간 관계로 아브라함의 아들이삭의 아내 될 신부를 구하고자 먼 나라로 보낸 늙은 종이 아브라함의 신뢰받는 청지기이다. (창24:2-3)

3.청지기의 의식주
그 소유주가 전적 책임이며 주인의 집에서 나는 것을 먹는다.

4. 청지기의 사역
때를 따라 양식(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눅12:42절)"

먼저, 청지기들은 삶의 주인이 되신 성령님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 해야 합니다. (요14:26절, 요15:26, 고전12:3절 등) 성령님의 사역에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를 알게 하는 것이며 이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요,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예수님의 길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며,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증거해 주시며, 예수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 됨을 확신시켜 주시고 자녀 됨을 인쳐 주시는 사역, 한 마디로 성도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는 사역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적어도 이것이, 다른 모든 이적과 기사보다 우선순위라고 보아야 합니다.

다음, 청지기들이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여기실 것마저 포기하셨고 인간의 모습을 입으시고 모진 십자가를 참아 내셨습니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사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그 후에 보혜사 성령님을 스승으로 보내어 주셨습니다. 성령님을 우리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신 목적도 인간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혹은 자기의 사욕을 위해서 신앙 양심을 팔아먹어서도 안 될 것이며 우리가 서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우리가 서로 힘을 합치되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힘을 합치고,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진 자들을 바로 세워주는 일에 힘을 합쳐야 하며 이 땅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며, 그분만이 우리들의 주인 되심을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하고 주님만이 자기 종들을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음도 믿어야 합니다. 다만, 청지기 된 우리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생명의 양식인 복음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서로 아끼며, 서로 세워주며, 서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주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교회의 필요에 따라 어떤 이는 교사로, 어떤 이는 목사로, 어떤 이는 가르치는 자로, 어떤 이들은 사랑으로 섬기는 자로, 또 어떤이는 봉사자로, 세우신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이 모든 은사는 하나님의 교회가 분리되고 파괴되고 우위를 가리기 위해서 세우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과 서로 섬기고 서로 사랑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더욱 든든하게 서 갈 수 있도록 세우신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신령하다고 착각을 한다던지, 내가 좋아하는 목사님만이 하나님의 특별한 자요, 신령한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이미 그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요, 사탄이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영혼들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들을 나누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면, 하나님의 뜻대로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인위적인 방법이나 어떤 특정인에게 국한되어 그 사람을 통하여서 성령이 전이(impartation)되고, 어떤 특정 집회장소에서 성령의 사역이 국한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들을 특정인의 전유물인양 생각하면 안 됩니다.요한 사도처럼 조용한 사람은 그 성품대로 비둘기 같은 성령의 임하심, 베드로 사도처럼 성격이 불같은 사람은 불같은 성령의 체험을, 이렇게 저렇게, 이모저모로 사람을 변화시켜 사용하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심을 굳게 믿고 서로서로 질시하는 일이나 정죄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깨닫는 것도, 인간의 독창적인 해석으로 받아 지느냐? 아니면 성령님의 은혜로 깨달아 지느냐? 두 갈래로 나누이게 됩니다. 사실, 영적인 일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 3:7) 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깨닫을 수 있도록 깨달음을 주시는 영역은 인간의 몫이 아니라 성령님의 몫(하나님의 고유 권한)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의 주님은 살아계십니다. 우리중 누군가가 잘못 살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판단하실 것입니다! 주인께서 심판하실 날이 멀지않았으니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주님께 기도로서 아룀이 좋으며 내 영혼에 거울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책망이 아니라 생명의 양식,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아카페 사랑을 가슴에 품고 똑바로 전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될 때, 비본질 적인 것을 본질인양 가르치기도 하고, 자신의 뜻을 섞어서 가르치기도 하고 약한 자들을 질책하기도 하므로, 오히려 본질을 흐리게 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영혼을 실족시키고 잃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종들을 과연 착하고 충성스런 종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계시록22:11-12절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하십니다.

여기에서 각 사람(everyone)에 주의를 기우려 주십시오. (Individuality)입니다.!! 상급도 개인적이요, 벌도 개인적입니다! 다른이들의 비행 때문에 내 영혼에 상처가 되거나 내 영혼이 병들거나 해서는 안 될 것 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1-2절 말씀)"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10)


별똥별/ 최송연

올들어 처음으로 태양폭발(Solar flare)이 관측돼 태양폭풍이 지구를 향하고 있다. 이에 따라 통신 장애 등이 우려되고 있다.
 
24일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 따르면 지난 23일 태양폭발이 발생해 코로나물질방출(Coronal Mass Ejection CME)현상, 즉 태양의 대기에 있던 전하를 지닌 물질이 태양폭발에 따라 지구를 향하고 있다. 초당 2253km의 속도로 지구로 접근하고 있다.
 
나사는 "24일 오전(미동부표준시 기준, 한국시간 24일 밤 늦은시간)부터 북극의 고 위도 지역 국가들에게서 이런 통신두절 현상 등이 뚜렷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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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태양폭발에 인한 태양 자기 폭풍으로 지구의 전세계위치측정시스템(GPS)와 일부 통신시스템을 부분적으로 마비시키는 등 통신시스템을 교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더그 비세커 미우주기상예측센터 물리학자는 "태양풍이 방사되면서 인공위성작동자는 문제를 겪을 수 있으며 아마도 북극지방의 높은 주파수 통신역시 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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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북극지역 운항 항공기들도 다른 우회항로를 이용하며 우주선도 태양폭풍이 오고 있는 동안에는 발사되지 않는다.
 
 
헤럴드생생뉴스 onlinenews@heraldm.com

 


꾸미지 않아 아름다운 마음


찬란하게 빛나는 영롱한 빛깔로 수 놓아져 아주 특별한 손님이 와야 한 번 꺼내놓는 장식장의 그릇보다 모양새가 그리 곱지 않아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언제든지 맘 편하게 쓸 수 있고 허전한 집안 구석에 들꽃을 한아름 꺽어 풍성히 꽃아두면 어울릴 만한 질박한 항아리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오해와 이해 사이에서 적당한 중재를 할 수 있더라도 목소리를 드높이지 않고 잠깐동안의 억울함과 쓰라림을 묵묵히 견뎌내는 인내심을 가지고 진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꾸며진 미소와 외모보다는 진실된 마음과 생각으로 자신을 정갈하게 다듬을 줄 아는 지혜를 쌓으며 가진 것이 적어도 나눠주는 기쁨을 맛보며 행복해할 줄 아는 소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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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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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꼭꼭, 꼭꼭. 어느 老夫婦의 사랑 이야기

 

어떤 노부부는 어디 가든 손을 붙잡고 다녔습니다.

보기만 해도 참 좋았죠.

연세가 지긋한 분들이시건만 서로 지긋지긋하게 여기지 않고

진정으로 다정다감하시니 놀라울 뿐이었거든요.

하지만 그런 모습을 계속 접하면서

좀 지나치신 게 아닐까, 라는 느낌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날 물어봤습니다.

"서로 참 사랑하시나 봐요.

두 분이 손을 항상 꼭 쥐고 다니시네요."

노부부가 똑 같이 ", " 하시며 "허허" 웃으셨습니다.

그러시다가 남편이 입을 여셨고 다음과 같은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손만 붙잡고 다니는 것이 아닌데요."

"그럼, 뭘 더 하시죠?"

"우리는 서로 '꼭꼭꼭', '꼭꼭'을 한답니다.”

"하하하, 사랑을 표시하는 거랍니다."

의아한 표정을 짓자 말씀을 계속 하셨습니다.

"서로 손을 잡고 다니다가

제가 엄지손가락을 이용하여

아내의 손에다 '꼭 꼭 꼭' 하고 세 번 누르곤 합니다.

그러면 아내도 엄지손가락을 이용하여

'꼭 꼭' 하고 제 손에다 두 번 눌러 주곤 한답니다.

 

아내가 먼저 제게 '꼭꼭꼭' 할 때도 있어요.

저도 즉시 '꼭꼭' 하고 반응하죠.

우리 둘 사이에서 '꼭꼭꼭''사랑해'라는 표시이고

'꼭꼭''나두'라는 표시입니다.

우리는 서로 손만 잡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자주 '꼭꼭꼭', '꼭꼭'을 한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남편은 이와 같이 또 부언하셨습니다.

"사실 우리 부부가 '꼭꼭꼭', '꼭꼭'을 시작한 게 아니예요.

따라 하는 거랍니다.

 

이웃에 우리보다 더 나이 많으신 노부부가 살고 계셨습니다.

마치 젊은 연인처럼 손을 꼭 붙잡고 다니셨답니다.

한데 부인이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지더니 의식을 잃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아연실색했습니다.

 

이제 부인은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산송장일 뿐이었습니다.

호흡만 붙어 있을 뿐이지 말을 하나 움직이기를 하나

죽을 날만 손꼽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경황이 없어서 그동안 아내에게 하지 못한 일이있는것을 알았습니다.

즉시 아내 손을 붙잡아 주었습니다.

또한 전에 하던 대로 엄지손가락을 펴서

'꼭 꼭 꼭' - '사 랑 해' 하고 따박따박 세 번 눌러 주었습니다.

 

,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아내의 엄지손가락이 서서히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힘겹게나마 '꼭꼭' - '나두' 하고 내 손등을 누르며 반응했습니다.

, 아내가 살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남편은 아내 곁에서 손을 붙잡고 계속해서 '꼭꼭꼭' 했고

아내 역시 '꼭꼭' 하고 화답했습니다.

게다가 아내의 손에 힘이 점점 더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참 기뻤습니다.

얼마 후에는 놀랍게 아내의 의식도 돌아왔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꼭꼭꼭', '꼭꼭'이 아내를 살려낸 것이었습니다.

다 죽어 가던, 다 꺼져 가던 아내의 생명의 심지에

'꼭꼭꼭', '꼭꼭' - '사랑해', '나두'가 스파크를 계속 일으켜서

생명의 불꽃이 다시 타오르게 한 것이었습니다.

사랑이 죽어 가던 생명을 구해 낸 것이었습니다.

이 감동적인 사실을 알고 나서

우리 부부도 작정을 하고 손을 서로 붙잡고 다니면서

'꼭꼭꼭', '꼭꼭' - '사랑해', '나두'를 실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정말 너무너무 행복합니다."

그 남편은 여기까지 얘기하고 나서

엄지손가락을 펴보이며 다음과 같이 권유했습니다.

"당신도 아내와 함께 해 보시겠습니까?"

"'꼭 꼭 꼭', '꼭 꼭'"

 

펌글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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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과학은 인간을 영생케 할 수 있을까?

죽기를 무서워하는 인간들은 영생불멸을 염원한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과 동행하며 죽음을 향하여 출발한다.
인체를 이루는 60조 개의 세포는 끊임없이 죽어간다. 그리고 새로 생겨나서 바뀐다.
혈액세포는 120일이 지나면 모조리 죽고 새 것으로 바뀐다. 피부도, 내장표피도 바뀌고, 인체를 이루는 모든 세포가 다 죽고 새로 생겨나 바뀌기를 계속한다.
그러면서 인간은 성장하고 또 늙어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바꾸어지지 않는 세포가 있다. 그것이 바로 뇌(腦)다.
하루에 10만 개의 뇌세포가 죽기는 하지만, 그래서 80세 정도가 되면 뇌가 약 15%가 줄어들지만, 대부분의 뇌세포는 일생동안 살아남는다. 즉 뇌세포는 죽어도 바뀌지 않는 것이다. 뇌세포가 교체되지 않는 것은 그렇게 되면 뇌세포 안에 담긴 기억과 정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세상에 별 희한한 일, 별 희한한 종교도 다 있다.
사이비종교 ‘라엘리언’은 처음 지구에 생명체가 생겨난 것이 외계인들에 의해서였다고 믿는다. 라엘리언은 1973년과 1975년 두 차례에 걸쳐 외계인 ‘엘로힘’과 접촉했다는 클로르 보리롱 라엘이 1975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창시하였고 오늘날 전 세계 182개국 6만 여명의 회원들이 있다고 한다.

그들의 라엘리언 무브먼트는 외계인을 절대자로 신봉하며 지적설계론을 주창한다. 그들은 인간은 외계인의 유전자 복제로 탄생했으며 그래서 인간의 영생은 복제인간과 외계인의 재림에 그 해답이 있다고 한다.
모계혈통의 여자로부터 채취한 난자세포에 자신의 체세포를 집어넣어 수정시키면 인간복제가 가능하다. (대장쟁이의 다른 글 “배아줄기세포의 황당한 바람”(2011. 2. 2 자유게시판 게재)을 읽어보시면 배아복제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라엘리언의 영생방법은 그렇다. 그렇게 만들어진 복제인간의 두뇌를 빼내고 자기의 두뇌로 교체하면 한 세대를 다시 더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외계인들이 지상에 재림(?)할 때 마침내 전능하신(?) 외계인 ‘엘로힘’이 오시면 영원한 삶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래전 보도된 기사이지만 참으로 악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라엘의 오른팔이었던 장드니 쌩씨르가 ‘최후의 예언자’ 라엘은 실제 외계인과 만난 적도 없고 사실은 프랑스 작가 장 샌디의 책을 표절한 것이라고 폭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미련한 인간들은 그들의 '엘로힘' 외계인이 있다고 믿는단다.

또 다른 사람들이 꿈꾸는 영생의 방법은 냉동인간이다.
만화영화 “빙하시대”를 보면 다람쥐가 도토리와 함께 얼음 속에 냉동보존 되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말이다.
개구리나 어류 중 일부는 냉동되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종이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시베리아 같은 북쪽에 사는 개구리는 겨울철이 되면 체내 혈액의 수분을 따로 모아 혈액의 동파를 방지하고 동면에 들어가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완전히 꽁꽁 얼었다가도 봄이 되면 녹아서 다시 살아난다.
어쨌든 시신을 냉동시켜 보관했다가 몇 백 년 후 모든 질병이 정복되고 인간이 죽지 않는 시대가 오면 그 때 다시 살린다는 아이디어가 ‘냉동인간 아이디어’이다.

1946년 프랑스 생물학자 장 로스탕이 개구리 정충(정자)를 냉동시켰다가 살려내는데 성공했다. 지금은 인간의 정자를 냉동보관 하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제2차 서계대전에서 부상을 입은 로버트 에틴거는 이 소식을 듣고 냉동인간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고 “냉동인간”이라는 책을 내었다.
그리고 1967년 폐암으로 죽은 캘리포니아 심리학과교수 제임스 베드포드가 최초로 냉동인간이 되어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

이후 인간냉동보존은 비즈니스가 되었다. 1972년에는 생명연장재단, 1976년에는 냉동보존재단이 설립되어 지금까지 207 구의 인간의 시신과 78마리의 동물시신을 영하 197도로 냉동보존하고 있다.  

인간도 개구리처럼 냉동시켰다가 녹이면 괜찮을까?
그렇지 않다. 인체세포에 들어있는 수분이 얼음결정을 만들면 그 얼음이 세포를 날카로운 칼날로 안에서부터 갈라버리듯이 파괴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의 시신을 냉동시킬 때는 시신의 모든 혈액을 뽑아내고 대체액체를 집어넣고 수분을 제거한 다음 급속냉동을 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완전히 해결되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튼 지금 수백만 달러가 드는 사후냉동보존을 원해 막대한 신청비를 내고 대기자명단에 이름을 올린 사람의 수가 전 세계 2,000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전신냉동을 하는 대신 머리(두뇌)만 냉동보존하면 가격이 훨씬 싸다고 한다.

부활을 꿈꾸며 영하 197도로 냉동되어 잠들어 있는 200구가 넘는 그들, 줄줄이 늘어선 냉동대기자들은 과연 먼 훗날 그들의 소원대로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과학자들은 냉동된 인간들이 소생되려면 뇌세포를 복구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원자를 조작하여 분자를 복구하는 수준의 나노기술 (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 미터)이 확보되어야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즉 나노기술로 만든 초미세 로봇이나 조작장치로 뇌세포를 하나하나 복구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과연 가능할까? 나노기술이 개발된다 해도 뇌세포가 몇 개나 몇 백 개, 혹은 몇 천 개 몇 만 개까지라면 몰라도 과연 1,000억 개나 되는 뇌세포를 나노기술로 만든 나노로봇으로 과연 복구할 수 있을까?
설사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렇게 뇌세포를 복구한다고 해서 과연 생명이 돌아오고 영혼이 돌아올까?

과연 인간은 무엇이며 인격은 무엇일까?
인간의 생명은 무엇인가?
인간의 정신은 뇌가 학습, 축적한 정보들이 만들어내는 것이고, 인간의 감정은 화학물질이 만들어내는 작용일까?
인간의 영혼은 신경세포들이 그렇게 만들어낸 현상이요 뇌가 죽으면 컴퓨터가 망가지듯 꺼져버리는 것일까?
인간의 정신은 뇌신경세포들의 네트워크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것은 아메바세포들의 진화의 결과물일까?
인간은 다만 60조 개의 세포가 만들어낸 오케스트라 같은 연합생명작용일까?
그래서 결국 인간이 죽으면 정신도 영혼도 없이 끝일까?
냉동보존 하였다가 다시 살리면 정신도 영혼도 복구될 수 있을까?
과연 그럴까?
진화론자들이라면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죽는다는 것 말이다. 생명이라는 것, 영혼이라는 것 말이다.
산낙지, 문어를 먹어본 적 있는가?
칼로 잘라놓아도 여전히 살아서 꿈틀거린다.
세포가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사람도 그런 식으로 죽는가?
아니다. 사람은 뇌진탕이나 심장마비로 순간적으로 절명한다.
아직 인체의 세포들이 살아있는데도 인간의 생명은 떠나버린다.
만일 인간의 생명과 정신(영혼)이 60조 개의 세포들이 만들어낸 연합생명체의 작용이라면 결코 그런 식으로 죽을 수가 없다.
인간의 생명이 그런 거라면 60조 개의 세포들이 불이 꺼지듯 하나하나 다 죽어야 끝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생명은 60조 개의 세포들이 만들어내는 생명체연합현상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인간은 그 영혼이 육신에 담겨져 있는 것이 분명하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인간의 육신은 장막(帳幕)이다.
진정한 ‘나’는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다.

“천사가 노래를 불러주었어요.”
“아니, 뭐라고?”
“내가 병원에 누워 있을 때 아빠는 옆방에서 기도하고 계셨고 엄마는 다른 방에서 전화통을 붙잡고 울며 기도하고 계셨어요, 의사선생님은 내 몸 위에 구푸리고 나를 살리려고 애를 쓰고 계셨고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아니?”
“난 위에서 다 보았어요,”
“보았다고?”
Todd Burpo라는 어린아이의 천국체험을 쓴 책 “천국은 진짜로 있다(Heaven is for Real)"의 앞부분은 이런 대화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전략, 바로 이것이야.  [2005-12-15]  전략
 
  

지난 1995년 10월. 동네 슈퍼마켓에 낯선 음료가 하나 등장했다. 이름도 생소한 ‘가을대추’. 지금이야 대추음료가 흔하지만 당시만 해도 대추는 ‘드링크’지 ‘음료’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제품은 불과 몇달 만에 히트상품이 됐다. 콜라·주스 등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맛에 슈퍼에 들른 소비자들은 너도나도 대추음료를 집어들었다.


인삼 제품을 주로 판매해 오던 웅진인삼(현 웅진식품)이 음료시장에 관심을 가진 것은 시장이 작은 건강음료보다 훨씬 ‘큰 물’인 음료시장에 군침이 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음료시장은 롯데칠성·해태음료·코카콜라 등 대형 업체들이 시장을 과점하고 있어서 새로 들어서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품목이 다양하지 않은 데다 음료제품이 저관여상품(제품 구매 판단에서 중요도가 낮고 잘못 구매해도 위험이 크지 않은 제품)이기 때문에 음료사업의 성패는 마케팅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주스나 청량음료를 맛 차이 때문에 선택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는 말이다. 오히려 광고 이미지에 좌우되다 보니 큰 업체가 더 효율적으로 경영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큰 회사는 더욱 커지고, 작은 회사는 더욱 설 자리가 없게 된다. 음료시장에 후발주자가 진입하기 힘들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런 음료시장에 웅진식품이라는 중소기업이 등장했다. 다들 ‘실패’를 예상했지만 웅진식품은 음료사업을 시작한 지 10년 만에 국내 음료시장 4위로 올라섰다. 연간 매출액 2,500억원에 로열티도 전혀 없다. 아침햇살은 외국으로 수출까지 되고 있다. 어떻게 빅3의 견제를 따돌리며 기존의 벽을 넘었을까?


웅진식품은 철저한 차별화로 새로운 수요를 찾았다. 어차피 탄산음료나 주스 등은 기존 제품 부류로 도전할 경우 대형 업체와 게임이 안 되기 때문이다. 모든 콜라는 코카콜라의 하위 제품일 뿐이다. 모든 주스는 델몬트와 썬키스트의 아류작으로 취급받는다. 여기에 같은 제품을 내놓을 경우 마케팅 싸움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우선 제품의 차별화를 시도했다. 조운호 사장은 ‘음료수가 탄산음료와 주스 외에는 없을까?’ 하는 의문에서 시작했다. 조사장은 ‘대추음료 개발’을 지시했고 연구진은 “그런 음료는 나온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불도저식 업무 추진에 대추음료가 탄생했다.


문제는 유통이었다. 음료사업의 핵심은 영업망이었다. 건강식품 업체인 웅진인삼이 그런 유통망을 가지고 있을 리 없었다. 궁리 끝에 음료시장의 비수기인 10월에 런칭하기로 결정했다. “그때 남들은 ‘음료의 음자도 모르는 짓’이라고 평가했죠. 하지만 성수기에는 영업사원을 구하기 어렵고 공장 가동 여력도 부족합니다. 또 비수기에는 대형 음료 회사들이 광고집행을 하지 않아 경쟁도 덜한 편이죠. 어차피 성수기에 붙어봐야 안 될 일이고, 결국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비수기를 택했습니다.”


조사장의 이런 전략은 성공했다. 마땅한 일감이 없던 영업직과 공장은 가을대추의 출시를 반겼고, 비수기에 손 놓고 있던 거대 업체들은 허를 찔렸다. 출시 다음 해인 1996년 가을대추의 매출은 400억원으로 뛰어올랐다.


뒤이어 99년 시장에 내놓은 아침햇살은 가을대추보다 더 인기를 끌었다. 음료 사상 최단기간 1억병 판매라는 기록을 세우면서 웅진식품이 음료시장에서 완전히 자리잡도록 한 제품이다. 여기에 초록매실·하늘보리·쑥의향기 등 한국적인 음료들이 계속 출시됐다. 초록매실도 2001년 매출액이 1,000억원을 넘어설 정도로 많이 팔렸다.


웅진식품의 초기 전략은 철처한 차별화와 니치마켓 공략으로 정리할 수 있다. 기존 시장에 진입하기보다 신규 시장을 창출한 셈. 자금력·조직력 등이 열세인 후발업체로선 기존 업체와의 충돌을 피하면서 최대한 매출을 올리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성숙시장인 음료시장의 경우 후발업체가 신규 시장에 진입할 경우 기존 업체가 마케팅·자금·유통망 등을 이용해 고사시킬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웅진식품은 최근 ‘주류 음료시장’ 진입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말 ‘제주감귤’을 시작으로 올해 ‘자연은…’ 시리즈로 주스시장에 뛰어들었다. ‘자연은…’ 시리즈는 올 들어 급성장하고 있다. 5월에 출시된 뒤 현재까지 7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주스시장은 전체 음료시장(3조4,000억원) 중 30%(1조1,000억원)를 차지하는 거대 시장이다. 어차피 이 시장을 공략하지 않고 큰 음료업체로 성장하기는 힘들다.


조사장은 “내년에는 탄산음료 시장에도 도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렇다고 “콜라나 사이다는 아니다”고 밝혔다. 새로운 개념의 탄산음료로 시장을 개척하겠다는 계획이다. 


이코노미스트  2004.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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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의사결정에서 벗어나는 4가지 방법

집단사고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다음 네 가지를 기억하자.



첫째, 만장일치에 대한 환상부터 깨라.


회의에서 만장일치의 의견이 나왔다고 해서 그 의견이 최선의 선택은 아닐 수 있다. 만장일치라는 환상을 깨고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게 하는 안전장치를 갖추는 것이 방법이다. 알프레드 슬론 2세(Alfred Sloan)가 GM 회장으로 있을 때,  만장일치로 한 의견을 선택할 경우 최종 결정은 다음 회의로 미루었다. 대신 참석자들에게 만장일치 의견에 대해 반대할 이유를 찾아보게 했다. 모든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는 안건이라면 애초에 회의에 가지고 올 필요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자유로운 회의 분위기를 만들어주자


권위적이거나 위계 질서가 강한 조직일수록 회의에서 침묵현상이 잦다. 직원들은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괜히 튀는 발언을 했다가 눈 밖에 나거나, 상사와 자신의 견해가 다르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에 입을 다문다. 따라서 리더가 앞장 서서 어떠한 이야기라도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고 반대 입장도 귀담아 들을 줄 아는 회의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리더는 자신의 주장을 결단력 있게 관철시키기 보다, 먼저 직원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태도를 기억하라. 경청형 리더로 잘 알려진 P&G의 CEO였던 A. G. 래플리(A. G. Lafley)는 직원들과 대화할 때 시간의 2/3를 듣는 데 할애했다고 한다.

셋째, 싸움닭을 의도적으로 키우고 활용하라


데블스 애드버킷(devil's advocate)이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직역하면 악마의 대변인, 즉 모든 사항에 대해 반대 의견만 내는 사람을 뜻한다. 집단사고를 피하려면 이러한 데블스 애드버킷을 키우고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시켜 건전한 갈등을 조장하는 것도 필요하다.

인텔의 CEO였던 앤디 그로브(Andy Grove)는 데블스 애드버킷을 의사결정 회의 중간에 일부러 투입했다. 한 쪽 의견에 사람들이 쏠려 있으면 반대 의견을 내고 싶어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럴 때 일부러 ‘싸움닭’이라고 불리는, 데블스 애드버킷을 회의 중간에 불렀다. 싸움닭이 반대 의견을 내면 너도 나도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게 된다. 앤디 그로브는 인텔이 성공한 비결은 혁신적인 기술 개발에 쏟는 시간만큼 많은 시간을 논쟁과 갈등에 할애했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조선시대 최고의 임금이라 불리는 세종대왕 역시 어전회의 때마다 데블스 에드버킷을 활용했다. 매사를 비판적으로 보고 깐깐하게 지적하는 예조판서 허조를 모든 회의에 반드시 참석시켰다. 세종은 그가 내는 반대의견을 통해 집단사고로 인한 판단오류를 경계할 수 있었다.

넷째, 소수의견을 받아볼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라.

창의적 조직의 대표로 손꼽히는 3M에는 마이너리티 리포트 제도가 있다. 각종 미팅에서 작성하는 보고서에 소수의 의견이라도 반드시 표기하도록 의무화한 것이다. 이는 아무리 작은 의견이라도 중간단계에서 차단되어 임원진의 검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이러한 제도 덕분에 3M은 매년 수많은 신제품과 특허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리더는 조직이 강력한 응집력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때 오히려 긴장해야 한다.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동화를 기억하는가? 이 동화에서 신하들은 보이지도 않는 임금의 옷이 잘 보인다며 모두가 거짓말을 한다. 이러한 신하들의 말만 믿고 거리에 나선 임금님은 한 어린아이가 큰소리로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라고 소리치는걸 듣고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게 된다. 임금이나 신하나 바보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 자신의 판단을 무시하고 다수의 의견을 좇는 집단사고에 빠진 것이다.
과연 나는 지금 벌거벗은 채 거리를 활보하고 있지는 않은가? 동화 속 신화들처럼 직원들이 소신 있는 의사표현에 주저하지는 않는가? 그리고 과연 우리 조직은 집단사고를 막는 다양한 노력들을 하고 있는가? 다시 한번 점검해 볼 때다.



IGM
윤희정 수석연구원"

출처: 아멘넷 게시판/ 김성훈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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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증인이 되자
Let Us Become Spiritual Witnesses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로 세상에 자기 뜻을 나타내시고
또 자기 일을 하신다

 

기독교회는 신령해야 하고 능력이 있어야 한다(막 16:17~20)

이는
하나님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기독교회는 철학을 하는 종교가 아니고
명상하는 수양 종교가 아니다
성령으로
하나님을 알고 그를 섬기는 믿음이다(롬 8:9)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뜻하신 대로
영적인 생활을 하고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일하고 말한다
기독교회는 사람의 뜻을 가르치지 아니하고(갈 1:10)

오직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며 그의 능력으로
큰 감동을 받는다
우리는 살아 계신 이를 인정하며
그에게 감동을 받는다

 

○ 성령만이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신다
   성령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신 성도는
  주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들이다

 

○ 성령만이
   하나님의 사정을 아신다
   성도는 주님의 영으로 구원함을
   베풀자를 만나게해 주십사
   잃어진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자들이다

 

○ 성령으로 감동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을 기만하는 자니
   매일 성령으로 큰 감동을 받으라

 

※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겠는가
  진리는 영감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을 증거하는 이가 증인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 2012년 1월 22일 어느 주보를 각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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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 부터 지금까지 전쟁이 있습니다   우리는 6.25 전쟁으로  수많은 사상자와

고아와 과부가 있었던 경험을  또 전 세계가 잊을 수 없는 세계 2차 전쟁의 무서움을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영적인 전쟁으로  영적 싸움이 있다 했습니다  

계12:7-  에 보면 ,   하나님의 천사장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싸우는 전쟁이 나옵니다     공중 권세를 잡고  천하를 꾀는 용,옛 뱀, 사탄, 마귀와 싸우는 전쟁이라 했습니다    사단의 도전이 있고 도전을 받지만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싸움은 어디에서 부터

    누가 먼저 문제를 일으키고 싸움을 걸어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악한 쪽에서 먼저 합니다    6.25 전쟁도 주일 아침 북한에서 불법 남침한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팔레스타인이 먼저 전쟁을 걸어 옵니다   미국도 아프카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이 9.11사태를 일으켰습니다      영적인 삶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를 두시어  평안이 살고 있었는데 사단이 찾아와 평화를 깨트립니다   꾀임과 미혹에 넘어가 사망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다윗도 선한 일을 하지만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하고 창을 던집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자로 평화를 위해 살려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며 믿음으로 살고  은혜안에 거하는데  마귀가 도전을 합니다  그것을 잘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2) 이럴 때 우리의 자세는

    (1) 악한 영들을 이겨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지게 하는 일을 마귀가 합니다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악한 영이 도구로 잡아 사용하기에  마귀가 나쁜 것입니다   그러기에 엡 6:12 에서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했습니다  육신적으로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이기기 위해서 성령의 힘으로  악한 영들을 대하여 영적으로 싸워야 합니다

  (2) 이기기 위해 대적이 어떤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대적은 악한 영인  옛뱀, 사단 ,마귀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며 ,성도를 꾀는 일을 하며,  이간을 붙이며, 쉬지 않고 고발하며, 참소한다 했습니다   마귀는 살인자요  거짓의 아비입니다   그래서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닌다 했습니다 (벧전 5:8)    하나님을 섬기는 광명한 천사처럼 가장하여 일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후11:14)

사단은 가장 좋은 것을 약속하고  가장 나쁜 것으로 갚아주기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사단의 일군들이 있음에  약한 자를 미혹하며  어리석은 자는 그들의 가장에 속아 넘어가기에  우리는 분별을 잘 해야 합니다

 

3) 이길 수 있는 방법

  (1) 말씀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40 일을 금식하신 예수님을 찾아와   하나님의 아들이니 돌들로 떡이 되게 하여 먹으라고 조롱을 합니다    사람의 약함이나  약점을 들추어 내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입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셨습니다   성도는 말씀으로 물리치고   말씀안에서 살아가야 이길 수 있습니다  영적인 능력과 축복의 비결이 있는  말씀이 무기인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가는 무기는  영생의 말씀, 성령의 검인 말씀입니다

  (2) 예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았느냐 하는 물음대로  받은 줄 믿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믿음안에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에서는 이겨야 합니다  영적 싸움속에서  옳고 그른 자를 분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귀는  자기가 본인이 존경과 숭배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며  신비주의로 신처럼 섬기게 하려 합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비슷하게 합니다  전략을  좋게 짜서  나쁜 것으로 무서운 것으로 파괴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만이 전부입니다   "안전한 곳은 문제가 없는 곳이 아니고  예수님 안에 있을 때만 안전하다" 라는 글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교회안에 불러 주셨으니   말씀의 사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성령의 능력으로 함께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영생의 길에   마귀의 도전이 있는  영적 전쟁에서  지켜주시고 보호하심으로 승리하게 하옵소서 

                   ( 새벽기도회  목사님 요약설교 말씀 )



*** 1)

    즐거운 설날을 맞이하여 가정에 기쁨과 행복이 가득하시고 행운과 건강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바라며~~ 고향 다녀오시는 길에는 마음에 사랑 가득 담아 오세요 사랑하는 님들 하늘만큼 땅만큼 복 많이 받으시고 즐거운 설 연휴되세요. . . .
      목양연가지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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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21

    누가복음 23장 56절의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십자가 후에 안식일을 지켰다는 뜻이 아닙니까?

     

    안식교인들은 본문을 인용해서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후 제자들이 안식일을 지켰으니 신약의 그리스도인들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제자들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다음날 안식일에 쉰 것은 안식일을 지켰다는 뜻이니 안식일이 폐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식교인들의 주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반증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쉰 것은 유대인의 관습에 따른 것으로서 우리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본문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전의 유대인들로서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서 계명을 좇은

    것입니다. 이는 유대인이었던 제자들이 십자가 후에도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서 유월절을 지키고(고전5:8), 할례를 받는(행 16:3) 등의 율법의 전례 등을 행하고 있었던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 후에 제자들이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켰다 해도 할례나 유월절이 십자가에서 폐한 것임을 확실히 알 수 있듯이 안식일도 십자가에서 폐한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골 2:14). 다만 십자가 사건 후에 제자들이 안식일을 지키거나 할례를 행하는 등의 구약의 율법을 지켰던 것은 그들이 유대인이었기에 그들의 관습에 따라서 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지켰으나 신약성경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할례나 유월절, 안식일을 강조한 곳은 한 군데도 없는 것입니다.

    안식교인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제자들이 계명을 좇아 안식일을 지켰으니 그리스도인들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비성경적입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을 지킨 것은 유대인으로서 지킨 것입니다. 유대인이 아닌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킬 의무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면 제자들이 십자가 사건 후에 행한 할례도 행해야 할 것이며, 사도들이 지킨 유월절을 지켜야 하고, 사도들이 행한 모세 율법의 전례를 다 행해야 할 것입니다.

    왜 사도들은 십자가에서 폐한 구약의 규례들을 행했을까요? 그들이 유대인이었기에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서 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안식일을 '지켰다'는 말도 없고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도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도 안식일을 '지켰다'고 되어 있지 않고 안식일에 '쉬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이 아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유월절이나 할례와 같이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Q 22

    사도행전 16장 13절에 사도들이 안식일에 강가의 기도처를 찾아간 것은 사도들도 안식일을 지킨 증거가 아닙니까?

     

    안식교인들은 이 본문을 인용하여 사도들이 안식일에 유대인의 회당이나 성전에 복음 전하러 간 것이 아니고 스스로 강가의 기도처를 찾아갔음을 볼 때 안식일을 지키려고 강가에 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사도들이 철저히 안식일을 지킨 증거라고까지 주장합니다. 그들의 비성경적인 요소를 살펴봅시다.

    이 본문의 내용은 안식일 지킨 것을 말하려는 뜻이 아니고, 사도들이 전도하기 위하여 기도처를 찾은 것을 의미합니다.

    안식교인들이 안식일에 대한 많은 성경 구절들을 인용하여 말하고 있지만 모두가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구절들은 없습니다. 이 본문 역시 의도하는 바는 안식일 지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즉 '안식일을 어떻게 지켰느냐' 또는 '안식일을 지키기 위하여 어떻게 핍박을 받았느냐'는 등의 안식일에 대한 내용이 아니고 어떻게 전도했는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본문을 알기 쉽게 표현하자면 '어느 안식일에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모여

    기도하고 있는 기도처가 어디 있는가 하여 강가에 모여 있는 여자들에게 찾아가 복음을

    전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도 안식일을 '지켰다'라는 말이 없는 것입니다. 안식교인들은 사도들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강가의 기도처를 찾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은 다른 사람이 없는 한적한 장소의 기도처를 찾아 안식일을 지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여인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사도들이 찾아갔던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들을 찾아갔습니까? 역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 자주 장사 루디아가 구원을 받게 되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하여 한적한 기도처를 찾은 것이 아니고 안식일을 지키려고 모여 있는 유대인들의 기도처를 찾아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공동번역 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되어 우리는 성문 밖으로 나가 유다인의 기도처가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강가에 이르렀다 그리고 거기에 앉아서 모여 든 여자들에게 말씀을 전하였다."

    이것을 볼 때 위의 본문은 사도들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고 안식일에 복음을 전하였다는 내용임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Q 23

    마태복음 12장 8절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은 안식일이 주일이라는 뜻이 아닙니까?

     

    안식교인들은 이 본문을 인용해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했으니 안식일이 주일이 아니냐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예수께서 안식일을 강조하신 말씀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안식교인들이 이 본문의 전후문맥을 한 번이라도 객관적으로 살펴본다면 이러한 엉뚱한 해석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은 복음서에서 이 본문과 마가복음 2장 28절의 두 곳에 나와 있습니다. 이 두 본문들의 전후문맥을 잘 살펴보면 안식교인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이 본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을 강조하시기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보고 "왜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고 공격하였을 때,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다윗이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었던 일과 제사장이 성전 안에서 안식일을 범하여도 죄가 되지 않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예수님은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시기 때문에 다윗이나 제사장처럼 안식일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은 안식일을 강조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제자들의 안식일 범한 것을 변호하시기 위한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도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명백한 구절을 안식교인들은 거두절미하고 자신들의 교리를 주장하기 위하여 원저자의 의도를 벗어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원저자의 의도는 "예수님은 안식일도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주인이 되시므로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었어도 괜찮다. 제사장들도 성전에서 안식일을 범하여도 죄가 되지 않았지 않느냐?"라는 뜻인데, 안식교인들은 엉뚱하게도 이 본문이 "안식일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 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본문을 인용해서 주일은 안식일이며 요한계시록 1장 10절의 주의 날도

    안식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안식일이 십자가에서 폐한 후에도 안식일은 언제든지 신약에

    안식일라고 되어 있습니다(행 1:12, 골 2:14 등). 안식일을 주일 또는 주의 날이라고 한 곳은 없습니다. 만일 요한계시록 1장 10절에서 사도 요한이 계시를 받는 날이 안식교인들의 주장대로 안식일이었다면 '안식일에'라고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안식일은 계속 안식일이라고 표기해 왔기 때문입니다. 만일 안식일을 주의 날이라고 했다면 신약의 다른 곳에 한 번이라도 안식일이 주의 날이라고 언급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곳은 없습니다.

     

    Q 24

    골로새서 2장 16절의 안식일이 절기 안식일이라고 하는데 맞습니까?

     

    이 본문은 안식일이 월삭과 함께 십자가에서 폐한 것임을 분명하게 증거하는 구절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안식교인들에게 이 구절을 제시하면 본문에 나오는 안식일은 제칠일 안식일이 아니고 절기에 속한 안식일이라고 억지주장을 합니다. 구약 레위기 23장의 유월절, 무교절, 초막절 등 절기 기간 중에 안식일로 지켜야 할 날들이 있는데, 이러한 절기에 속한 안식일들을 안식교인들은 절기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폐했다고 기록한 안식일은 바로 절기 안식일이라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에서 폐한 것은 절기이지 제칠일 안식일이 아니라는 주장인데, 성경을 잘 상고해 보면 안식교의 이같은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의 안식일은 결코 절기 안식일이 아니며, 십자가에서 월삭이나 절기와 함께 폐한 안식일은 제칠일 안식일입니다. 그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본문이 절기, 월삭, 안식일을 구분해서 말씀했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안식일이 절기가 아니고 제칠일 안식일이라는 분명한 증거는 안식일만이 아니라

    이미 절기도 함께 언급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절기 안식일이라는 것은 절기와 구분되는 것이 아니고 절기 자체가 절기 안식일입니다. 절기 따로 있고 절기 안식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절기가 폐하면 절기 안식일은 자동으로 폐하는 것입니다. 절기만 폐하고 절기 안식일은 폐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절기나 월삭이나' 라고 한 것은 해마다 돌아오는 절기 및 그 절기에 속한 안식일, 그리고 매 월마다 돌아오는 월삭이 폐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이라고 했을 때 절기 안식일은 '절기'에 포함되어 있으며 '안식일'은 제칠일 안식일을 말하는 것이 너무 분명합니다. 본문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은 절기(해마다 돌아오는 절기 안식일), 매 월마다 돌아오는 월삭이나, 안식일(매 주마다 돌아오는 제칠일), 이 세 가지가 모두 폐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절기 안식일이 '안식일'이라고 쓰여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소위 절기 안식일은 유월절이나 무교절, 초막절, 대속죄일 등에 속한 것으로서 레위기 23장에 "그 달 일일로 안식일을 삼을지니",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니" 등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절기를 제정한 이후로 성경에는 절기에 속한 안식일은 '절기'라고 기록되었고, 따로

    '절기 안식일' 또는 '안식일'로 사용된 곳은 없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라고 기록된 곳은 모두 제칠일 안식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안식교인의 말처럼 안식일이라고 기록된 곳이 절기 안식일을 가리키는 것인지, 제칠일

    안식일인지를 구분하려고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예를 들어 마태복음 12장 8절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라는 구절에서 안식일이 절기 안식일이냐,

    제칠일 안식일이냐를 따지고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성경 어느 곳에도 절기를 소개하는 구절인 레위기 23장 외에 절기에 속한 안식일을

    '안식일'이라고 기록된 데는 없습니다. 성경에 단순히 '안식일'이라고 기록된 것은 모두

    제칠일 안식일인 것입니다. 특히 본문 골로새서 2장 16절에 절기와 함께 언급된 '안식일'은 제칠일 안식일이 분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제칠일 안식일은 다른 절기들과 함게 십자가에서 폐한 것이 분명합니다.

    셋째, 골로새서의 안식일이 복수형(sabbaton)으로 되어 있지만 제칠일 안식일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안식교인들은 본문의 안식일이 복수형(sabbaton)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절기 안식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안식교인들의 주장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성경을 살펴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안식교인들의 말대로 안식일이 복수형으로 되어 있어서 절기 안식일이라면 같은 복수형으로 되어 있는 마 28장 1절의 안식일도 절기 안식일이 되어야 하고, 막 16장 2절의 안식일도 역시 절기 안식일이라는 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안식교인들이 즐겨 인용하는 누가복음 4장 16절의 예수께서 자기의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신 그 안식일도 복수형으로 사용되었으므로 절기 안식일이며, 누가복음 23장 56절에 제자들이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었던 그 안식일도 복수형으로 쓰여졌으므로 절기 안식일입니다. 그 외에도 행 13:14, 16:13 등 제칠일 안식일을 가리키는 데도 복수형으로 쓰여졌습니다. 이로 보아 복수형으로 쓰여진 본문의 안식일이 절기 안식일 이라고 할 수 없으며, 오히려 다른 제칠일 안식일이 복수형으로 쓰여진 것으로 보아서 본문 골로새서 2장 16절의 안식일은 제칠일 안식일이 분명한 것입니다.

    넷째, 절기가 모형과 그림자이듯이 토요일 역시 모형과 그림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17절에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즉 장래 일의 그림자였던 것은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제하여 버리고 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칠일 안식일은 그림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안식교인들은 이에 대하여 안식일은 모형과 그림자가 아니고 영원한 안식일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 살펴보면 안식교의 이러한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성경 히브리서 4장 1절부터 11절까지를 잘 상고해 보면 제칠일 안식일은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은 사람이 들어가는 심령의 안식에 대한 그림자였던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안식일이 참 안식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모형과 그림자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하셨고,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 이니라"(마 12:8)고 하심으로 친히 안식일의 실체가 되심을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형과 그림자였던 안식일은 실체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구속을 이루심으로 완전히 폐하시고 끝내신 것입니다. 이로 보아 골로새서 2장 16절의 안식일 역시 제칠일 안식일 즉 토요일을 가리킴이 분명한 것입니다.

     

    Q 25

    에스겔 20장 20절의 말씀은 안식일이 요한계시록 7장의 '하나님의 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요?

     

    안식교인들은 본문에 안식일을 하나님의 '표징'이라고 했으니 안식일은 계시록의 하나님의 '인'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안식일을 구원의 조건으로 주장하기 위한 말입니다. 안식교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출애굽기 31장 17절이나 에스겔 20장 20절의 '표징'이라는 말이 하나님의 '인'이 될 수 있을까요? 성경을 잘 상고해 보면 이는 안식교인들의 비성경적인 억지 주장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표징'에 히브리어의 '오트'(oth)가 쓰여졌는데, '오트'(oth)는 징조(창 1:4, 삼상 10:7, 9,왕하 19:29, 20:8, 9), 이적(출4:17, 28, 30, 3:4, 8, 신 13:1-2, 26:8), 표적(출 12:13, 시 74:4),증거(출 3:12, 창 9:13)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징'(oth)을 어떻게 하나님의 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안식교인들의 주장처럼 'oth'를 하나님의 '인'이라고 한다면, 가인이 받았던 표

    '오트'(창 4:15)가 하나님의 인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재앙의 표 '오트'(신 28:46)도

    하나님의 인이 되어야 하며, 요단의 열두 돌들도(수 4:6) 하나님의 인이 되어야 할 것이며, 창세기의 언약의 증거 '오트'(창 9:12-13)는 영세까지 이르는 하나님의 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 영원한 언약의 표징 '오트'인 할례(창 17:11)는 하나님의 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트'는 표징이지 결코 하나님의 인이 아닙니다.

    히브리어의 '인치다'라는 단어는 '코탐'(chotham, 출 28:11, 왕상21:8)이 사용되었고,

    신약 성경에서도 하나님의 인은 성령으로 인침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엡 1:13, 고후 1:22). 그런데 안식교인들이 안식일을 하나님의 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에 전혀 근거가 없는 비성경적인 억지스러운 주장입니다. 안식교인들이 어떤 궤변으로 주장한다 해도 성경에는 안식일을 하나님의 인이라고 기록한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이란 성경의 말씀대로 복음을 듣고 믿을 때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주시는 새

    생명이며(엡 1:13), 계시록의 하나님의 인(계 7:1-4)도 복음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고후 1:22).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인을 맞는다는 안식교인들의 해석은 성경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안식일은 하나님의 인이다'라는 말씀이 없는 한 안식교인들이 어떤 성경 구절들을 어떻게 편집하여 어떤 말을 한다해도 미혹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Q 26

    예배일이 토요 안식일에서 A.D.321년 콘스탄틴 칙령에 의하여 주일(일요일)로 바뀐 것입니까?

     

    안식교인들은 초대 교회에서도 안식일을 지켰으나 A.D.321년 로마의 콘스탄틴에 의해서 예배일이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변경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일요일 예배는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로마의 콘스탄틴의 강제 법령에 의하여 변경되었다고 주장하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실제 역사적인 사실들을 고찰해 본다면 또 하나의 역사적 오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콘스탄틴 이전에도 주일(일요일)예배가 드려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안식교에서 주장하기를 "A.D.321년에 반포된 콘스탄틴 황제의 안식일 칙령 이전에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켰다는 역사적 증거는 없다."는 것입니다. 안식교인들의 주장대로 A.D.321년 콘스탄틴에 의하여 주일(일요일) 예배가 강제적으로 시작되었다면 콘스탄틴 이전에는 주일 예배가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자료들에 의하면 콘스탄틴 훨씬 이전에도 주일(일요일) 예배가 초대교회에서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A.D.107년에 쓰여진 베드로의 후계자로 알려진 안디옥교회의 감독 이그나티우스의 서한 9절에 벌써 구약의 관습인 안식일은 끝나고 주일에 예배해야 하는 의미에 대하여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식교 목사들도 인용하는 문헌이기도 한, A.D.70-80년에 쓰여진 바나바 서신 15절에도 분명하게 주일(일요일)에 왜 예배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여러 초기 문헌들에 콘스탄틴이나 교황권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 초기 교회들이 주일(일요일) 예배를 드렸다는 증거들이 있습니다. 이로 보아 안식교의 A.D.321년의 콘스탄틴 안식일 변경 주장은 역사적인 오류입니다.

    둘째, A.D.321년의 콘스탄틴의 칙령은 안식일 변경의 칙령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안식교의 주장은 안식일을 지키는 교회에 콘스탄틴이 강제적으로 안식일을 변경하여 일요일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 곡해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역사적인 오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A.D.321년에 콘스탄틴이 주일에 쉬라는 명령을 내린 바가 있으나 이는 안식교의 주장처럼 안식일 변경의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콘스탄틴이 이 명령을 내리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더 잘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당시 교회는 로마에 의하여 극심한 박해를 받고 있던 중 콘스탄틴이 교회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 진심이든 형식적이든 기독교로 개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토록 극심했던 핍박은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즉 콘스탄틴은 교회를 박해한 왕이 아니고 오히려 교회에 박해를 중지시켰던 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콘스탄틴은 당시 교회의 예배일이었던 주일에 모든 공무원 근무와 군사 훈련, 상업 행위를 삼가하여 주일 예배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고 교회를 돕기 위한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안식교인들의 주장처럼 안식일을 지키고 있는 교회에 안식일을 일요일로 변경하라는 교회 박해의 칙령이 아닌 것입니다.

     

    Q 27

    천주교 교리문답에 의하면 천주교회가 안식일을 주일로 바꾸었다고 하는데 맞습니까?

     

    안식교인들은 가톨릭이 예배일을 토요 안식일에서 주일인 일요일로 바꾸었다고 주장합니다. 그 근거로 천주교 교리문답이나 교리 해설 등 천주교 측의 교리서들을 들고 있습니다. 안식교는 천주교의 교리문답에 나오는 안식일 문제에 대한 주장들을 성경적인 증거나 되는 것처럼 안식일 문제의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이는 안식교인들의 상투적인 수법으로서 많은 성경 지식이 없는 기성 교인들이 여기에 미혹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알아야 할 점은 천주교의 교리나 교리문답 등의 천주교측 주장들이 교리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북한은 6.25 전쟁을 남침이 아닌 북침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남한 측의 국민들 누구도 6.25가 북침이었다고 믿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북한의 주장대로 북침이었다고 믿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상을 의심받게 될 일입니다. 천주교가 개신교에 대해 그들의 교리문답에 어떤 주장을 하든지 그대로 믿고 받아드리는 개신교인들은 없을 것입니다. 천주교 교리문답이나 그들이 뭐라고 주장하든 성경만을 믿는 사람들이 개신교인들입니다. 그럼에도 안식교인들이 천주교 교리문답이나 천주교인들의 글들을 주장하고 인용하여 그 교리의 근거로 삼는 것은 종교개혁 정신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는 천주교가 뭐라고 하든지 그 교리가 어떻든지 상관없이 오직 성경이 그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분명히 안식일이 폐한 것이 증거 되었고(골 2:16), 신약 성경에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나 지켰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이며, 초대 교회의 사도들의 전통에 의하여 주님께서 부활하신 주일을 예배일로 하는 것입니다. 안식교인들이 천주교 교리문답 등의 천주교인들의 주장을 인용하여 천주교 교리를 진리인양 주장하여도 결코 미혹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전국목회자 세미나]Verichip과 짐승의 표 666 / 장조셉 목사님

    ⊙ 세미나 1부



    ⊙ 세미나 2부
    - 1부가 끝나면 플레이버튼(▶)을 누르세요.
     

     
    사람의 만남에는 우연이란 없다고 합니다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는 꼭 만난다는 말이 있듯이.
    그렇게..만나게 되어지는 것인가 봅니다.
    사랑에 아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지만 볼 수 없고.얼굴보며 웃어 줄 수가 없는
    그 말할 수 없는 험한 아픔을.느끼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현실.운명.인연.같은 것은 모두 잊고
    마음에서 원하는 대로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다 할 때까지 마음 놓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정말로 행복한 일인 줄 알면서...
    그렇게 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웃으면서 사랑을 대하세요.. 원치않는 이별로 인하여
    그 이별전의 추억이 후에 다시 만나

    이루어질 것을 바라면서도 눈물로 얼룩질
    이별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이있습니다. 
    마음속에서 그리움을 키워간다는 것...
    함께 할 수 없어
    슬퍼하는 것보단 함께 지내며 다투기도 하고

    서로 눈을 바라보며 웃어주고 힘이 되어주고 하면서
    겪는 고통이라면 아마도 사랑에 아파하는 사람은
    차라리 이 아름다운 고통을 택할 것입니다.

    자꾸만 바라지도 않던 장애로 인해 만날 수 없어
    그리움이라 생각하며 끙끙대고.
    정말 밤잠을 설치며
    슬퍼하는사람.. 야위어 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고통은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아픔이 생각나지는 않듯이 그렇게
    아주 허탈하게 잊혀져 갈테니까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성실한 모습으로 사랑하세요 

    비록 훗날 각자의 길을 따로 걷고 있더라도
     후회없도록 말이죠.
    그 많은 사람 중에 오직 그 사람만을
    사랑하며 아껴준다는 것 아름다운 일 입니다...

    지금도 그리운 그 사람을 위하여
    작은 기도를 해봅니다.
    조그만 가을 소리를 내며 발 아래 밟히는 낙엽들...
    전 오늘에서야 새삼 느꼈습니다. 
    낙엽도...아낌없이 자기를 다 희생한다는 것을.. 

    -좋은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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