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은 무엇에 대하여 심판하십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다가오는 일이 있습니다

     

     (1) 자기가 세상에서 행하였던  모든 일이 하나님 앞에 들어나게 됩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또 내가 들으리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니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 마16:27,  고후 10:5, 계14:13) 

    (2) 말에 대하여 심판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높혀드리고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의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자기 자랑하며  다른 사람들을 용서치 못하고 비판한 것에 대하여 정죄함을 받게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마 12:36) 

    (3) 믿지 않는 죄에 대해서 심판하겠다 하십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16:9) 

    (4) 생각에 대해서 심판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창 6:5, 마 15:18-20)    

 

   우리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고 심판하겠다 하십니다   히 9:27 에 "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했습니다

 

2) 인류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근거

    하나님의 책에 기록하신대로 심판하십니다  인류가 살아간 것을 기록한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계 20:12)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마 10:26)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십니다 (롬 2:16)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자기 일을 인정하고 자백할 것입니다 (롬 14:11-12)

 

3) 성도들에게는 이러한 심판이 어떻게 해결되는가

  (1)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공로로 해결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죄악을 다 용서하셨습니다 (요 3:16,  요1서 3:5,  벧전 3:18,  갈 1:4)

  (2) 죄인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받습니다   죄에 대한 대가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치루셨으며  깨끗하게 하신  사실을 내가 믿으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 사 53:4-6,  히 8:12,  요1서 1:7, 엡2:8-9, 엡1:7)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공로로 다 치루어 주신 것입니다  과거의 모든 죄악을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의 거룩한 피로 정결케 하시고  기억도 아니하심으로  우리를 의로우신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어  영원토록 의롭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사탄이 새로운 피조물된 우리를 공격합니다    우리의 과거를 참소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영혼에 의심을 불어넣어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지게 하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의 문제가 해결됬다  두려워말라 새롭게 되었다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하십니다   예수님이 대신 지신 십자가로 심판을 받으시고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속죄함과 구원받은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믿는 성도들은 죄에서 심판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알기 전에 지은 모든 죄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흘리신  죄없으신 의로우신 피로  속죄하여 주심을  말씀을 통해 믿고 확신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나의 죄악을 대신하여 주심으로  나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며  심판에서 영생을 얻게 하신  예수님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찬송하는 기쁨이  심령에 가득하게 하옵소서

                                

( 새벽기도회 목사님 요약설교 말씀)

이런 여자와의 대화가 가능할까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66권으로 진리만 증거하시는 우리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먹지 못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는 없을까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매스 커뮤니케이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대량의사전달체계에 길들여 진 현대인들입니다. 쌍방향이 아닌 일방적인 의사전달이 가져다주는 문제점을 인터넷이 어느 정도는 해소해주는 것같습니다. 소위 말하는 댓글달기가 그에 속합니다.

예수님과 여인 사이에 대화는 있으되 소통은 없습니다. 알아먹지 못 하는 자에게 더 이상 말을 해봤자 입만 아픕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래와 같이 말씀하십니다.

16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9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당장)돌아가라,불러라 네 남편을,그리고 여기 오라"(직역-구둣점은 필자가 임의로 찍음)

우리글 성경은 원문의 글맛을 잘 살리지 못 하고 있습니다. 아주 젊잖케 이르시는 주님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 뿐입니다. 젊잖을 잃지 않으면서도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명령어가 세 번이나 나옵니다. "돌아가라 불러라 오라"

여자는 돌아갈 곳도 부를 남편도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다시 이 곳에 오라고 해도 올 수 없는 아니,올 이유가 없는 그런 여자였습니다. 그만 기가 죽어 꼬리를 내립니다. 겉은 멀정해도 속은 썩을대로 썩은 자신의 내면을 들킨 기분입니다.

'나는 남편이 없어요(나는 남편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번 대화는 성과가 있습니다. 여자가 비로소 알아먹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주여 제가 인제사(지금) 보니까 선지자시네요"(의역)(여기서 '주'란 여자가 남자를 부를 때 쓰는 일반적인 호칭입니다) '아까는 제가 몰라봤습니다. 여느 유대인과 바를 바 없는 분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다소곳해진 여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회개란 입에 발린 말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심으로부터 돌이켜야 참 회개입니다. 여자의 진심은,앞서 자기가 한 말-아니꼽게 여기고 말꼬리 잡고 대들고 비아양댄 것-에 대한 잘못을 (비록 표현은 안 했을지라도)알고 돌이켜 상대를 선지자로 인정함으로 나타납니다.

주님은 몰라서 저지런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입니다. 그러나 무지가 면책사유는 될 수 없습니다. 무지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죄악입니다. 그런데 많이 알고,잘 안다고 하면서 가르치는 선생이 잘못하면 그 때는 형편이 달라집니다. 주님은 죄많고 한많은 인생을 살아온 이 여자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이혼을 다섯 번이나 한 여자입니다. 여섯 번째 남자와 동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보다 나이가 많을 수도 있습니다. 비록 이 여자가 그런 남성편력을 가지고 있고 무지하여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랬을지라도 주님은 이 사마리아 여인을 인격적으로 대하십니다. 오래 참으시면서 말입니다.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없다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 할 것입니다.

그리고,우리는 섣불리 단정짓기를 예수님이 이 여자에게 반말로 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글 성경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나 생판 처음 보는 여자에게 반말을 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람어로 말씀하시고 헬라어로 기록된 위 본문이 가리키는 그 현장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을 듯 싶습니다.

이제 여자는 자신이 평소 가졌던 관심사에 대해 물어봅니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만)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25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위 본문에는 "예배"란 단어가 무려 열 번이나 나옵니다. 그런데 "구원"이라는 단어는 딱 한 번 나옵니다. '유대인에게서 나오는 구원'이란 말씀이 열 번의 "예배"란 말씀을 견인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앞서 여인과의 대화에서 "생수(살아 있는 물),"하나님의 선물","내가 누구인지","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등등을 언급하신 이유는,"예배"와 "구원"과 연관지어 미리 말씀하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가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구원)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게 해 주고자 하심인 줄로 믿습니다. 예배(제사)로 얻게 되는 그 선물은 "내가 누구인지"를 계시하심으로써,다시 말해 예수님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심으로써 앞서 말한 "내 말을 믿으라"고 하신 대로 나를 믿으면(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를 믿으면) 하나님의 선물(구원-영생))을 받게 된다는 의미로 말씀하고 있는 셈이지요.

다시 세겜으로 여행을 떠나야 할 싯점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가나안 땅 세겜에 도착하여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 단을 쌓습니다. 아브람이 세겜에서 비로소(처음으로) 단을 쌓은 것이 아닙니다. 아벨의 제사,노아의 번제 그리고 조상들이 전해준 대로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 단을 쌓은 아브람입니다.

그 뒤 야곱이 이 세겜에서 동일하게 단을 쌓습니다. 모세는,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차지하면) 이 세겜에서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라고 신명기에서 두 번에 걸쳐 강조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그 기록된 분부를 하나님 말씀으로 받들어 아브라함이 처음 단을 쌓은 곳인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 아래로 가서 그렇게 합니다. 이 때 눈여겨 볼 말씀은 에발산에 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다는 점입니다. 절반의 지파는 저주를 위하여 에발산에 서고 나머지 절반의 지파는 축복을 위하여 그리심산에 섰었지요. 저주를 위해 선 에발산에 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말한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다"는 말은 중간기 시대 혼혈잡족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심산에 성전을 건축하고 제사한 것을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기록자 요한은 족장시대와 가나안 정복시대 때 선조들이 지낸 그 제사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 예배의 가장 큰 특징인 제사제도를 살펴봄이 본문 이해에 도움을 줍니다. 제사는 제사장과 제물로 구성됩니다. 아벨의 제사나 아브라함의 제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는 그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합니다. 그리고 구약의 제사는 그림자요 모형일 뿐입니다. 오실 구원자(여인의 후손으로서 메시야)는 '여호와의 고난받는 종(The suffering servant of Jehovah)'으로 오실 것임을 이사야는 잘 예언하고 있습니다. 출에굽기 12장에 '여호와(주)의 유월절 어린양'으로 이미 예표되어 있음이 그 이유이지요.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에 나오는 세 번의 유월을 다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주(여호와)의 유월절'이라 하지 않고 "유대인의 유월절"이라고 부르고 있습에 유의해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지들만의 유월절임을 드러내고자 함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님은 실로, 자신의 몸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써,"유대인의 유월절"을 '하나님의 유월절'로 되돌려 놓으셨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실 메시야(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몸을 친히 제물(어린양)로 드릴 것임을 구약 전반에 걸쳐 계시하고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또한 유대지파인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임이 야곱의 유언(예언)과 다윗언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옛 언약의 성취자로서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은 다윗의 아들(자손)로 오셨기에 "...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자신이 죄인으로서 죄사함을 받기 위하여 자신과 가족 내지는 백성의 공동체를 위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죄사함을 받아야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섬길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바른 제사는 필연적으로 섬김을 수반하게 되지요. 신약시대에,예배란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제사에 근거해서 죄인들이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얻는 회개로부터 출발하여 그 분의 백성으로서 섬김의 자리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섬김이란 단어는 일과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가나안 땅을 차지한 이스라엘 백성이 해야 할 일은 오직,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에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올라오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만 섬겨야 하는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여호수아의 고별설교 중 여호수아서 24장 14절로 26절까지를 차분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섬김(아바드-serve)이란 단어가 계속 등장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에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로 시작되는 본문입니다.

요한복음 6장 29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아 믿는 것이 곧 제사(예배)란 말입니다. 그런 자를 하나님이 찾으시되 제사에 담긴 영적 의미와 진리에 따라 바르게 믿는 자를 찾으신다는 말이지요. 그래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선물로 받게 될 테니까요.

결국 예배(제사)란,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그 의미를 완전히 드러냅니다.요한복음 4장 본문은 이를 밝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과연 여인의 말 대로 그리스도가 오셔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되 삶과 죽음,부활로써 친히 가르쳐주셨습니다. 모세와 선지자와 시편에 나오는 모든 예언을 따라 그리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내가 기다...(에고 에이미)"라고 자신을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영생)을 선물로 받아 그 분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외연이 확대됩니다. 아브라함은 약속만 받고 그 땅(세겜) 한 평 차지하지 못했었지만 아브라함의 후손(씨)이신 우리 주님은 땅(천국-하나님 나라)를 차지하셨습니다. 이제,그 세겜 땅에서 예배(제사)의 의미를 밝히 드러내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차지하신 땅(천국)에 거하는 자마다 하나님만을 섬겨야 합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심길 수 없습니다. 우상을 섬겨서는 안 됩니다.

모임 예배는 물론이요 삶으로 드리는 제사,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사는 삶이 곧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오늘도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32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35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39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이상히 여겼다는 말은 놀랐다는 말입니다. 어안이 벙벙해서 말이 안 나옵니다. '아니? 우리의 호프 랍비께서 사마리아인 그것도 하찮은 여자와 담화를 나누시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 목전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유대 랍비들은 여자와 담화하는 것을 금했다고 합니다. 그래서,묻고는 싶었지만 아무도(한결같이) 묻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둔 채 동네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비록 남편은 불러 올 수 없는 처지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불러 올 수 있습니다. 메시야를 만난 여인의 행동과 말은 '과거를 묻지 마세요!'를 떠올리게 합니다.(반면에 제자들은 여전히(아직까지는) 예수님을 랍비라 부릅니다. 나중에는 "주"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부활후에는 "나의 주시요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편, 제자들은 그 사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라고 합니다. 지들은 이미 다 먹고 왔습니다. "잡수소서"가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모시고 함께 먹어야지그래 음식 싸들고 와 내밀면서 "랍비여 잡수소서!"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믿고(영접하고)서는 자기들과 유하시기를 청합니다. 유한다는 말은 함께 먹고 마시고 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주님은 유대인들이 개 취급했던 사마리아인들과 숙식을 함께 하며 교제하십니다. 참으로 죄인들의 친구이십니다. 유대주의에 물든 제자들과는 얼마나 다르신지요!

사마리아 여인은 메시야를 만나자마자 물동이도 내팽개친 채 동네에 들어가서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증거하는데 제자들이 한 일이라고는 고작,'12명이 밥 1인 분 싸가지고 온 일'이 전부였습니다. 전도(예수님을 전하기)는 커녕 사마리아인들과 말도 섞지 않았을 넘(?)들입니다. 입 꾹다물고. 그러나 씹어먹기 위해서 상.하악골은 부지런히 움직였겠지요.

이런 제자들을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성경은 신앙위인들의 전기가 아닙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임을 철저히 드러낼 뿐입니다.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참되시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사실 오합지졸에 불과한 자들이었습니다. 그 면면을 살펴보십시오. 좀 괜찮은 자가 있는 지를. 그런 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고 나니까 믿음의 용사로 변합니다.

위 본문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제발 전도해라. 너희들의 전도(예수님의 제사-십자가의 복음의 선포))를 통해 하나님은 죄인찾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 벌써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복음전도로 영혼을 살리는 일이다. 그런데도 너희들은 한 사람도 안 데려 왔구나!'

이 지점에서, 이들이 정말 주님의 제자가 맞습니까? 그러면 우리의 모습은 제자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죄많은 그 여인은 먹고마시는 문제 팽개치고(물동이 버려두고) 주님을 증거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죄많은 여인을 통해 하나님은 죄인 찾으시지 않았습니까? 정말 메시야를 만난 자들은 입만 살아서 설치지 않습니다. 온 맘과 몸으로 주님을 증거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의 제사입니다. 다시 말해 회개하는 자들을 받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죄인 찾아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4장 후반부는 하나님이 어떻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지"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기를 원하십니까. 삶을 통해, 복음 전도를 통해 하나님이 찾으시는 자를 찾아나서십시오. 여러분들이 아무리 주일날 예배를 잘 드리고 교회에 열심히 봉사한다 할지라도 여러분을 통해서 구원받는 자가 없다면 참된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요4장의 요지를 따른다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진정 메시야를 만났다면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전도입니다. 그것이 삶으로 하든, 입술로 하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구원받는 자들이 많아지기를 축복합니다.

출처: USA아멘넷/지혜자 목사님


아래 글을 올린 지 어언 1년이 지났군요.
아멘넷 독자님들께서 다시 한 번 더 읽어보시라고 올립니다.

*아래 글은 이 곳 게시판에 몇 번에 걸쳐 나눠올렸던 글을 합쳐서 매끄럽지 못한 부분을 손질(오타 수정등등)해서 다시 올립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영(프뉴마)과 진리(참-알레데이아)로 예배해야 한다'는 본문이 속한 문맥이나 역사적 맥락 그리고 신학적 이해를 무시한 채, '예배의 구호'로 써먹는 사례가 빈번하다 못해 도가 넘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드리는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까?'라고 물으면 대개는 우물쭈물하다가 변죽만 울리고 맙니다. 그렇게 간단하게 정의내릴 수 있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열린 예배'가 유행합니다. 심지어 '예배의 성공'이란 신조어까지 등장한 상황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그 예배, 곧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란 현재 우리가 드리는 모임예배 나아가 생활예배를 뛰어넘는 광활한 성경적 개념을 지닌 예배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맥과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 '한구절적용'식의 성경이해는 여러가지 페단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는 뜻은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 그러니까 (구약)제사에 담긴 영과 진리, 그리고 제사가 가리키는 바 영적 의미와 진리이신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찾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 찾아 구원하신다는 뜻이지요.

예수님이 수가성을 그냥 찾으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영과 진리로 에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그 찾으심을 이루시기(일하기) 위해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를 거쳐 갈릴리로 가고자 하신 것입니다.

수가란 이름이 가진 역사성을 외면한 채 성경을 읽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도착하여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 처음 단을 쌓았던 곳이 바로 세겜이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이 쉐켐은 신약에서 헬라어로 음역되어 쉬칼(수가)로 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에 보면 "마리아와 요세"란 표현이 나옵니다. (갈릴리역)아람어는 종종 끝글자 받침이 탈락되어 불리워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리암-마리아, 요셉-요세'로 말입니다.

쉬카르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쉐켐-쉐케, 쉐케(아람어식 발언)를 헬라어 쉬칼로 번역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유서깊은 역사적 고장으로 각자가 여행을 떠나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시대로부터 시작되는 지명이지만 그 이전 아벨의 제사로 시작해서 아브라함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단을 쌓음-제사'임을 알게 해 줍니다. 야곱의 세겜,모세가 명한 세겜 땅인 그리삼산과 에발산 사이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로 가서 율법을 선포하고 에발산에 단을 쌓음등등, 구속사의 흐름 가운데 나오는 쉐켐과 제사(단을 쌓는다는 것은 제사함를 말함)에 대한 이해의 선행없이 곧장 '따옴표'로서의 예배는 무의미를 넘어 본문의 참된 의미를 손상시키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분들이 있다면 기꺼이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만 적어도 세겜(수가)에 대해서만은 미리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같아서 권면하는 것입니다. 동참하실 분들은 예습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4장(개역개정)

1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사실 위 본문으로 바로 강해를 한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에 나오는 기록인 1-3장을 바르게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요한복음 전체를 다 강해할 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요한복음은 '창조육일과 안식일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일곱 개의 큰 문단으로 되어 있지요. 성삼위 하나님의 '원 창조(첫 장조)의 구조'를 '새 창조'와 이미지로 유비시켜 글을 구성해나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1-2:3절 까지를 염두에 두고 읽으면 좋습니다.

요한복음의 첫 문단격인 서론문단은 1:1에서 2:11절 까지입니다. 창조육일과 안식일 구조의 이미지를 채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섯 개의 작은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일곱 개의 단락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특징 중 하나는 마지막 일곱 째 단락을 생략한 채, "그를 믿으니라"란 말로 묻어둔다는 사실이지요. 이 "그를 믿으니라"란 말로서 마지막 문단인 "안식 후 첫 날"로 독자들을 이끌고 있다는 점입니다.

진정한 안식은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믿을 때-영접할 때) 주어진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함인 줄로 믿습니다.

두번 째 큰 문단인 2:12 이하 "그 후에...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에 어어지는 글이 오늘 본문입니다.

본 두 번째 문단에 속한 글이 '성전정화 사건', 니고데모에게 이르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입니다.- 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이란 새 창조를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말씀인데요, 창세기 서두에 나오는 "하나님의 신(루아흐-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만물이 물에서 나올 때, 그것은 하나님 자신과 말씀과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신 창조행위의 과정이요 결과였습니다. 성삼위 하나님의 창조를 말하고 있지요.

물과 성령으로 거듭(아노덴-위로부터) 난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말씀(로고스)이신 아들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결코 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례전적인 물세례(사실상 침례)가 이어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례는 하나의 상징이요,표(sign)일 뿐입니다. 본질적으로 거듭나지 않는 자에게 아무리 세례를 준다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오해하여 세례주어 제자삼기 경쟁을 벌릴 때, 세례요한은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제자들을 바르게 교훈하고 가르치고자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실 새 사마리아로 거쳐가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수와 부와 힘에 있지 않습니다. 수와 힘의 논리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일언반구의 설명도 없이 유대를 떠나 사마리아로 해서 갈릴리로 가고자 하십니다. 위 본문 1-4절을 원문으로 찬찬히 살펴보면 제자들은 여전히 세례를 주고있는데(미완료) 예수님은 유대를 떠나셨다(과거 시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메시야 왕국 건설에 이 적은 무리로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숫자를 불려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물도 없는(세례주지 못 하는) 사마리아로 가시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메시야 왕국 건설을 포기하겠다는 말인가!' 그것은 제자들의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입이 튀어나온 제자들을 데리고 사마리아로 해서 가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한 번 헤아려보셨습니까. 천국((하나님 나라)를 바르게 알지 못 하는 우리를 보시는 주님의 심정이 어떠실까요? 큰 게 좋은 것이고 교인 수가 많아야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철저히 수와 힘의 논리로 무장하고 그에 함몰되어 주를 따르는 작금의 한국교회 현실을 보시고 주님은 무엇이라 하실까요?

정신차려야 할 때입니다. 자다가 깰 때가 벌써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자고 있습니다. 세상 잠에 세상 영광에 취해 있습니다. 술에 잠긴 자 보다 나을게 조금도 없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 주님은 사마리아 여자 하나를 찾으심으로써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이 무엇인지, 왜 물세례주어 숫자 불리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지를 몸소 가르치고 친히 교훈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드디어 사마리아 수가라 하는 동네에 도착했습니다. 수가(쉐켐),야곱,요셉의 이름만 들어도 창세기 족장시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의 처음 독자는 1세기 말경에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가까이는 예루살렘의 멸망이 있었고 사도들과 부활의 증인들도 대부분 순교하거나 죽었던 시기였을 것으로 봅니다. 더하여 신약성경의 대부분이 기록되어 쪽복음과 서신의 형태로 여러 교회들에서 읽혀지고 있던 시대입니다.

그리고 유대주의와 영지주의의 거짓된 가르침이 횡행하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 시대에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도 요한을 영감하셔서 이 책(요한복음)을 기록케 하신 것은 분명한 의도가 있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한복음 끝자락(20장)에 나오는 기록목적을 한 번 찾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쉐켐에 대해 예습을 하신 줄로 알고 자세한 설명은 줄이겠습니다. 물론 사마리아에 대한 역사적 이해(배경)도 생략합니다.

야곱의 우물 곁에 풀썩 주저앉으신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에브라임 산지에는 물이 귀합니다. 우물은 생명줄입니다. 식구와 가축이 다 마시고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런데 야곱의 우물이라고 합니다. 이 참에 야곱에 대해서도 공부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무릎에 앉아(형 에서와 함께),할아버지가 들려주시던 하나님 이야기! 생명주시는 구원자가 오신다는 이야기! 창조기사는 물론이요,타락과 회복의 약속에 나오는 여인의 후손 이야기,제사 제도와 노아 홍수등등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은 야곱입니다.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린 형 에서와는 전혀 다른 야곱입니다. 그랬기에 형과 아버지 이삭을 속이면서까지 장자권을 빼앗았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어코 내 것으로 삼고야 말겠다는 야곱의 거룩한 욕심(열망)이 족장시대 야곱이야기를 그토록 재미있게 서술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 야곱의 우물에 아브라함의 후손 곧, 야곱의 허리 아래 씨로 계셨던 생명주시는 그 분이 인자됨을 인하여 피곤하여 그대로 풀썩 주저앉아 계십니다. 요한복은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사람의 아들이심을 동시에 강조하되 어느 한 쪽도 그러니까, 신성과 인성 어느 한 부분도 손상시키지 않습니다.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마실 것 좀 다오(주시오)"
옆에 아무도 없습니다. 입이 한 발이나 나온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다 동네에 들어가고 한 넘(?)도 예수님 곁에 없습니다.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 길러 왔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달라 하나이까"
여자의 말이 젊잖아 보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실로 젊잖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자의 말은 언중유골도 아닌 가시가 돋친 발언입니다. '평소에는 상종조차 않고 개 취급하더니만 목마르니까 유대인이라고 별수없구나'라는 응어리가 묻어나는 말입니다.(이에 대한 역사적 배경도 공부하셨으리라 믿고 약(略)합니다)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위 말씀을 꼽씹어보십시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아니 그냥 곱게 물 좀 달라면 됐지 하나님의 선물 운운하면서 이 우물이 마치 유대인 자기들 것인양 말한단 말인가! 우리 조상 야곱이 분명 우리에게 준 것이 아니더란 말인가! 그리고 이 우물은 깊고 물 길을 그릇도 없는 주제에 누가 누구에게 생수를 준다는 말인가!'

그래서 여인은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하고 대든 것입니다. 나중에 보면 알겠지지만 이 여자는 그렇게 하고도남을 인생역정을 가진 여자입니다.

여담입니다만, 저는 예전에(이십년 가까이 전) 요한복음을 좋은 읽을거리로 여겨 참 재미있게 읽고 은혜를 받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요한복음 전체를 가지고 설교도 두어 번 했습니다. 우리는 너무 젊잖게 성경을 대합니다. 물론 경외심을 가지고 읽어야겠지만 글맛까지 놓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몸을 가져셨기에 마실 것 좀 다오하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들도 참말만 하십니다. 다시 말해 진리만 증거하고 있음이지요.

말귀 알아먹지 못 하는 이 여자는, 아니꼽게 여기고 말꼬리 잡고 대들고 이제는 아예 비아냥댑니다. '아니 세상에! 그런 물이 어딨담! 내가 바본 줄 아나?' 그래서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한 것입니다. 긍정을 통한 강한 반감과 비아냥댐을 표시하고 있음이지요. (상대가 말도 안 되는 말로 고집을 부릴 적에,'그래 니 말 맞다!' 하면서 상대의 말을 인정 안 하려는 우리의 어투도 있습니다)

모든 게 무지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해가 넘칩니다. 무지에서,오해에서 바른 이해(앎)의 자리로 이끄시는 우리 주님을 만나보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여자와 대화를 이어간다는 것! 가능할까요?

출처: USA 아멘넷/ 지혜자 목사님





A.W TOZER (1897~1963) 목사님은 그의 저서  중의 하나인
 "나는 진짜인가,가짜인가?" 라는 책에서
독자들에게 '진짜 크리스챤의 자가 진단법' 으로 다음 7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1.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2.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3.나는 내 돈을 어떻게 쓰는가?
4.나는 여가를 어떻게 보내는가?
5.나는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는가?
6.나는 누구를 존경하고,어떤 것에 열광하는 가?
7.나는 무엇을 보고 웃는가?
 
우리들의 대답은...무엇입니까?
 
 "저는 아이들을 보고 웃어요" ....딸 넷을 둔 여집사님의 답변입니다
 "가장 원하는 것은 주님의 얼굴을 보는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에 있는 여집사님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온 가족이 남은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3년여의 선교에서 막 돌아 온 집사님의 그칠줄 모르는 주님사랑입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 왔습니까?
심혈을 기울여 얻고자 했던 만족,기쁨은 무엇이었습니까?
삶의목적,목표에 인생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으며 보람을 느끼십니까?
2008년도 열흘이 채 남지 않은 이 때에 우리의 지난 한해를 돌아 보기 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글/김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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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르의 기도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위험에 처해도 두려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을 멎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고통을 이겨 낼 가슴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생의 싸움터에서 함께 싸울 동료를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스스로의 힘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두려움속에서 구원을 갈망하기보다는
스스로 자유를 찾을 인내심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내 자신의 성공에서만 신의 자비를 느끼는 겁쟁이가 되지 않도록 하시고
나의 실패속에서도 신의 손길을 느끼게 하소서..

-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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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미지 않아 아름다운 마음

 

찬란하게 빛나는 영롱한 빛깔로 수 놓아져
아주 특별한 손님이 와야
한 번 꺼내놓는 장식장의 그릇 보다는

모양새가 그리 곱지 않아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언제든지 맘 편하게 쓸 수 있고
허전한 집안 구석에 들꽃을
한아름 꺽어 풍성히 꽃아두면 어울릴 만한
질박한 항아리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오해와 이해 사이에서 적당한 중재를 할 수
있더라도 목소리를 드 높이지 않고
잠깐동안의 억울함과 쓰라림을 묵묵히
견뎌내는 인내심을 가지고 진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꾸며진 미소와 외모보다는 진실된 마음과
생각으로 자신을 정갈하게 다듬을
줄 아는 지혜를 쌓으며 가진 것이 적어도
나눠주는 기쁨을 맛보며 행복해할 줄
아는 소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좋은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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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파트 이름이 복잡하고 긴 이유 옛날 아파트 이름은 단순했다. 삼성아파트, 롯데아파트, 현대아파트... 그런데 요즘 아파트 이름이 왜 이리도 길고 복잡할까? 거기다 복잡한 영어까지 넣어서........ 예를 들면 타워팰리스, 미켈란쉐르빌, 아카데미스위트, 현대하이케리온, 롯데캐슬모닝 등 ... 알고 봤더니 그 이유라네 . . . . . . . . . . 그것은 시어머니가 찾아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 마우스로 긁어 보셔요^^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하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서 좋은 하루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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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해지지 마!

"있잖아,
불행하다고 한숨짓지 마
햇살과 산들바람은
한 쪽 편만 들지 않아
꿈은
평등하게 꿀 수 있는 거야
나도 괴로운 일
많았지만
살아 있어 좋았어
너도 약해지지 마”
- 100세 할머니시인 시바타 도요의《약해지지 마!》중에서 -

* 누군들 험난한 세파에
힘겨운 때가 어이 없었겠습니까만
백세의 나이에 꿈도 많아 구름도 타보고 싶다는
도요 할머니의 잔잔한 삶의 이야기가 감동을 안겨줍니다.
"새는 하늘이 있어 날개를 퍼덕이고,
꽃은 바람이 있어 향기를 피운다."고 하지요.
우리 모두 힘내세요!
인생은 늘 지금부터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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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기도 최송연
하느적 거리는 고운 미풍 여린 가슴 토닥거리고
따사로운 햇살 은빛 사랑으로 하얗게 쏟아져 내리는 아침
화려함도 수수함도 모두 긴긴 生의 미로((迷路)
가시와 엉겅퀴로 오염된 상념들일랑 거두어 내시고
새벽이슬처럼 순백한 영혼으로 새롭게 피어나게 하시사
오늘 하루도 이웃을 대하는 순간마다 주님 모습 그윽한 향기로 뿜어내는 진실한 사랑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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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은 보배요 무언(無言)은 평화다♧




친구를 교제함에 있어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
상호간에 예의를 잊어버리는 일도 없고,
남의 중상을 받는 일도 없을 것이다

세상에 나가서는
말을 조심하고 남의 결점을
비평하기 전에 자기 결점을 반성해야한다

겸손은 보배요
무언(無言)은 평화다
말 하지 않고 후회할 때가 한번이라면
말하고 후회할 때는 다섯번, 여섯번이다

아무에게도
모질게 해서는 안 된다.
이 뜬구름 같은 세상의 덧없는 운명은
오늘은 너에게 좋을지 모르나
내일은 나빠질 수도 있는 일이고,

현세의 재물은
모두 얼마 후에는
갚아야 할 부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세상에 무엇을 얻겠다고
남에게 모질게
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고 네가 누구를 모질게 하지 않는다면
너도 운명의 모진 대접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좋은 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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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의 시작 기도
      최송연 고운 햇살 담은 미소 캄캄한 밤을 몰아내고 소망으로 빛나는 아침을 엽니다 무지개빛 닮은 주님 사랑, 아침마다 은총의 이슬 되어 메마른 영혼을 보드랍게 적셔주소서 행여, 어제는 인색함으로 모두었던 손이 있었다면 오늘은 나눌 수 있도록 마음도 손도 풍성함으로 드넓혀주소서 마음 아파 우는 이를 보면 말보다 가슴으로 다독이게 하시고 가난한 이를 만나면 외면하여 돌아서지 말게 하시되
      이 모든 것 위에 진솔한 사랑을 더하는 오늘이게 하소서
      아침엔 소망으로 한낮이면 사랑으로 저녁에는 감사로 후회 없는 하루가 모여 아름다운 일생을 지날 수 있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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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30가지 명언 


1. 기도 없는 경건은 양의 옷을 입은 이리와 같다.
2. 교만 중에 가장 무서운 교만은 기도하지 않는 교만이다.
3.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리는 영적인 낮은 포복이다.

4. 기도자가 피해야 할 교만은 기도 많이 한다는 교만이다.
5.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인격, 사상,
   그리고 사역에 감화되어 하나님께 설득되는 것이다.
6. 기도를 통해 변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기도자 자신이
   하나님이 원하는 아들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다.

7. 기도자는 바른 기도를 통하여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 점점 더
   하나님 중심의 사람으로 바뀐다.
8. 기도는 자기의 욕심이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과 인생 청사진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9.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의 집을 짓는 벽돌이다.

10. 기도는 제 소리를 내기 위해 악기를 조율하는 것과 같다.
11. 기도는 세상적인 욕심의 발전소가 아니라, 소방서이다.
12. 기도가 없을 때에 마음은 세상 것으로 무거워지고, 기도가 있을 때
    마음은 성령과 하늘의 것으로 충만하다.

13. 기도는 언뜻 보면 좁은 길처럼 보이나 자세히 보면 넓은 길이다.
14. 기도는 우회도로처럼 보이나 실상은 지름길이다.
    (요령, 약삭빠름, 잘남보다 더 빠르다).
15. 세상에서 가장 줄을 잘 서는 방법은 기도이다.

16. 세상의 성공에는 후유증이 있으나 기도에는 후유증도 뒤탈도 전혀 없다.
17. 세상의 모든 후원에는 용수철처럼 조건이 달려있지만
    (string-attached), 기도에는 기도자를 하나님 아버지께 매어
    다는 용수철이 달려있다 (God-attached).
18. 기도 자체는 무능이나 하나님은 기도의 무능을 통해 전능전지의 역사를 하신다.

19.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을 하시고,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
20. 기도 없는 곳에 사람만 일하고, 기도 있는 곳에 하나님이 일한다.
21. 기도는 노력 더하기 노력이 아니라, 나의 노력 곱하기 노력이다.

22. 기도가 없는 곳은 사탄의 잔칫집이고, 기도가 있는 곳은 사탄의 초상집이다.
23. 기도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선물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리는 것이다.
24. 기도는 예수님을 닮는 최상의 방편이다.

25. 기도 여행의 목적지는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다.
26. 기도는 성공적인 삶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삶의 본질이다.
27. 기도는 노동절약 장치가 아니라, 삶의 본질이다.

28.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할 삶과 기도의 내용은 같다.
29. 하나님께 감동되려하지 않고 하나님을 감동시키려고 할 때 기도는 중언부언이 된다.
30.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고, 기도자는 삶으로 하나님께 응답한다.
 
 
- 옮겨온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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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에게는 하늘의 아버지땅의 어머니가 계셨다. 그분은 완전한 인간이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으로 사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성장하고 음식을 먹고 잠을 자고 죽으셨다.
또한 그분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신의 본질을 가지셨으며, 영원히 성부 하나님 및
성령 하나님과 동등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는 두 본질, 즉 인간의 본질과 하나님의 본질이 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位格)이 한 하나님이시다.
위대한 교부(敎父)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5?∼373)는 “예수님이 인간이 되셨을 때 그분의 신성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그분이 인성을 더 취하신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렇다. 인간이 되셨을 때 예수님은 ‘무엇인가 부족한 하나님’이 되신 것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님이면서도 완전한 인간이 되셨다.
그분은 본래 영원 전부터 그분에게 없었던 본질, 즉 인간의 본질을 취하신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 분이 하나의 본질을 가진 존재’를 의미한다면, 그리스도는
‘두 개의 본질을 가진 하나의 존재’를 의미한다.

예수님이 인간의 본질을 취하실 때 그분은 본래의 신적 본질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두 개의 본질을 갖게
되신 것이다.

삼각형의 비유를 통해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양성(兩性)을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삼각형의 꼭대기 각(角)은 성부를, 아래의 두 각들 중 왼쪽의 각은 성자를, 오른쪽의 각은 성령을 나타낸다고 하자.
그리고 왼쪽 아래의 각에 원이 하나 붙어 있는데, 이 원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한다고 하자.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삼각형의 본질을 갖고 계시며, 또한 인간이시기 때문에 원의 본질을 갖고 계시다.


인간이 되신 예수님
예수님이 인간이셨다는 증거들이 성경 곳곳에서 발견된다.
먼저 그분의 탄생에 관한 모든 성경 구절들은 그분이 인간이심을 증명한다.
성경은 그분이 여자에게서 나셨고(갈 4:4) 성장하셨으며(눅 2:52) 눈물 흘리셨다(요 11:35)고 기록한다.
그분은 배고픔을 느끼셨고 시험 받으셨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또한 네 복음서들은 모두 그분이 감정을 느끼셨다고 증거한다.

한편 성경은 예수님이 참하나님 되심을 증거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 1:1,2). 


예수님은 구약의 주인이시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사 40:3)
구약의 예언은, 예수님을 위한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광야로 나갔던 세례 요한에 의해 성취되었다
(마 3:1-17 ; 막 1:1-8 ; 눅 3:1-17 ; 요 1:19-28). 

다윗은 하나님에 대하여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다”(시 23:1)라고 말했는데,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이다”(요 10:14)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슥 12:10)라는 말씀은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요 19:37)
말씀에서 예수님에게 적용되었다.

또한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
는 말씀은 예수님이 요한에게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다”(계 1:17)
라고 말씀하신 내용과 연관된다.

예수님이 우주의 창조주이심을 증거하는 구절들이 많이 나온다(요 1:3 ; 골 1:16).
예수님은 자신에게 죄를 사하는 신적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셨다(막 2:1-12).
예수님은 자신이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줄 수 있다고 말씀하셨고(요 5:21), 여러 번 사람들의 경배를
받아들이셨다(요 20:24-29). 그리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도마의 고백을 받아들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자신에게 하나님의 속성들이 있으며 자신이 하나님으로서 행동한다고
주장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분은 오직 하나님만이 받으실 수 있는 경배를 받으셨다.
그분은 말씀과 행동들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주장하고 밝히셨다. 
예수님이 인간이 되신 이유 예수님이 두 가지 본질을 가지신다는 교리, 즉 그리스도의 양성의 교리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분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분은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며,
만일 그분이 인간이 아니시라면 우리에게 오실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2:5)
고 증거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화목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인간이셔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두 가지 본질을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
즉, 우리는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과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을 모두 믿고 인정해야 한다.
그분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인간의 육체로 오신 하나님이시다.

종종 사람들은 “그 아이는 아버지를 꼭 닮았다”는 말을 하는데, 이는 그 아이의 말과 행동이 그의 아버지와
똑같을 때 하는 말이다. 이것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을 꼭 닮으신 분, 즉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성경은 “이는(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 1:3)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골 1:15)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시다.
그분은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먹고 자고 죽으셨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속성들을 보여주셨다.
그분이 높으신 하나님의 보좌를 버리고 이 낮은 땅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과 일체감을 가질 수 있다.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와 동떨어진 천상적(天上的) 존재가 아니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 마 1:23)이라고 불리시는 것이 당연하다.


노만 가이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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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입니다


어떤 중년 부인이 고해성사를 했다.

“신부님, 저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거울을 보면서

제가 너무 아름답다고 뽐냈습니다.

제 교만한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 고백을 들은 신부가 칸막이 커튼을 조금 들어 올려

그녀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고는 이렇게 답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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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매님 안심하세요. 그것은 죄가 아니고 착각입니다.”,,,



    가장 멋진 인생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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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현명한 사람은 늘 배우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고
    가장 훌륭한 정치가는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이 되면 하던일 후배에게 맡기고 미련없이 떠나는 사람이며
    가장 겸손한 사람은 개구리 되어서도 올챙이적 시절을 잊지 않는 사람이다.
    가장 넉넉한 사람은 자기 한테 주어진 몫에 대하여 불평불만이 없는 사람이고
    가장 강한 사람은 타오르는 욕망을 스스로 자제할 수 있는 사람이며
    가장 겸손한 사람은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하여 감사하는 사람이다.
    가장 존경 받는 부자는 적시적소에 돈을 쓸줄 아는 사람이고 가장 건강한 사람은 늘 웃는 사람이며
    가장 인간성이 좋은 사람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가장 좋은 스승은 제자에게 자신이 가진 지식을 아낌 없이 주는 사람이고
    가장 훌륭한 자식은 부모님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는 사람이며
    가장 현명한 사람은 놀 때는 세상 모든 것을 잊고 놀며 일할 때는 오로지 일에만 전념하는 사람이다.
    가장 좋은 인격은 자기 자신을 알고 겸손하게 처신하는 사람이고
    가장 부지런한 사람은 늘 일하는 사람이며
    가장 훌륭한 삶을 산 사람은 살아 있을 때보다 죽었을 때 이름이 빛나는 사람이다.

     



    = 좋은 생각 중에서 =

     

     

     

    



뉴욕의 아멘넷 기사에 올라온 우리나라 어느 대학의 신학부 교수님은 방언은사는 우리나라가 유럽보다 많다고 하며, 그 이유를 들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고, 아래는 필자가 그 글아래 남긴 댓글인데, 행여 방언에 대한 오해가 있으신 분들에게 도움이 될까 하여, 이곳에 올려둡니다.


방언 그것이 알고 싶다!!, 왜 한국교회에 많이 나타나나

 사람들은 현재 교회에서 체험하는 방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문을 가지고 있다. 그 중의 하나는 다른 나라 교회에 비해 왜 유독 우리나라 교회에서 방언의 은사가 많이 나타나는가 하는 것이다. 유럽 교회에서는 방언 은사 체험한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다.

또 한국 교회에서도 어떤 교회에는 대다수의 성도가 방언을 체험하는데 반해 다른 교회에서는 극소수가 방언을 체험하는가 하는 것이다. 혹시 한국 교회에서 방언이 많이 나타나는 것은 신앙적인 측면보다 한국의 샤머니즘적 신앙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필자도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성서적 해답을 얻었다. 우선, 바울에 따르면 방언의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고전 12:11)과 신자의 사모함(고전 12:31)으로 체험한다는 것을 상기해야 하겠다. 은사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시기 때문에 사람이 은사체험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은사를 체험하는 것이 그 은사에 대한 신자의 태도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신자가 방언의 은사를 체험하려면 열심히 사모하라고 바울은 권한다(고전 14:1). 이렇게 은사 체험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다. 전도를 하는 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다음으로, 이것은 말씀이 실제화되는 주요 원리 중의 하나와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것은 말씀의 뜻을 올바로 깨닫고 순종할 때다. 종교개혁 때 마틴 루터가 바울이 말하는 이신득의(以信得義)를 깨닫고 외쳤을 때 그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요한 웨슬레가 성경이 말하는 성화의 원리를 깨닫고 선포했을 때 역시 그 역사가 이루어졌다.

마찬가지로 초대 교회를 제외하고는 많이 연구되지도 않았고, 활성화되지도 않았던 방언에 대해서 말씀을 연구하고 깨닫고 선포할 때 역시 방언을 체험하는 역사가 많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럽 교회에 방언 현상이 적게 나타난 것은 유럽 교회는 전통적으로 방언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을 긍정적으로 연구하지도 가르치지도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수 십 번 인도한 방언 세미나 혹은 집회를 통해서도 이 진리를 누누이 경험했다. 이 집회에서 필자는 대략 1시간 정도 방언에 대해서 성경 구절을 들어 그 의미와 필요성을 설명한다. 그러면 이전에 방언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잘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고, 잘 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을 교정 받는다.

그러고 나서 방언을 체험하고 싶은 사람은 강단 앞으로 나오라고 한다. 그리고 같이 기도하면 많은 경우에 그 자리에서 방언을 체험한다. 조사를 해 보면 자리에서 그냥 앉아 있는 사람보다는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방언을 체험한다.

어떤 이는 앞으로 나오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인위적인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방언의 은사를 주시면 어떻게 자리가 그 은사 체험과 관련이 있느냐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 공부도 잘 하고 은혜도 더 많이 체험한다.

은사도 마찬가지다. 앞자리에 앉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는 가운데 말씀에 동의하고 사모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 앞에서 공식적으로 표현한다는 의미로 앞으로 나와 같이 기도하면 대부분 방언을 체험하는 것을 본다.

그래서 나는 이 문제를 이렇게 본다. 한국 크리스천들은 방언에 관련해서 말하면 앞자리에 앉았다가,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이다. 반면, 방언에 대해서 오랫동안 부정적으로 생각해 왔거나 소극적으로만 인정할 뿐 실제로 잘 인정하지 않는 유럽의 주요 교회들은 뒷자리에 앉아서 구경하는 사람들인 경우가 더 많은 셈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나, 우리 한국의 어떤 샤머니즘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방언에 대한 태도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방언체험에만 국한된 원리는 아니다. 성경 어떤 말씀이라도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순종하고 결단할 때 그것이 그 사람에게 적용되고 역사하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계속)

김동수 논설위원 / 평택대 신학과 교수
ⓒ뉴스미션

(반면, 방언에 대해서 오랫동안 부정적으로 생각해 왔거나 소극적으로만 인정할 뿐 실제로 잘 인정하지 않는 유럽의 주요 교회들은 뒷자리에 앉아서 구경하는 사람들인 경우가 더 많은 셈이다.)

 

1. 방언 은사를 사모하는 사람, 2. 방언 은사에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으로 인정하는 사람으로 분류하신 것 같네요. 교수님께서 분류하신 대로 하자면, 저는 후자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철야기도 시간에, 다른 이의 영혼을 위해 기도할 때, 성령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방언 은사를 체험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방언도,

주께서 원하시는 시간, 주께서 원하시는 사람,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판단이 되시면, 주님께서 주권적으로 허락하시는 은사 중 하나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열정적인 사회나 더 열정적인 개인에게 주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는 것은 바른 성경관이라고 보기는 어렵겠다고 하는 것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지방방언도 여러 가지 방언이 있듯, 영언도 여러 가지임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긴 하지만, 그 은사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더 열심있는 자에게"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1. 개인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2. 공동체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 원하시는 때에 주신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고전 14장 참조)

 

인간 지성의 잣대로 성경 말씀이나 하나님의 은사를 재단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나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고, 나의 경험은 너무 주관적이기 때문입니다. 내 지식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복종해야지, 내 지식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끌어와, " 꼭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아래 '질문'님이 우리 독자님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것도 그가 설파하고자 하는 말이 모두 다 틀렸다기 보다는 질문님의 논리 역시, 자신의 경험의 반경, 그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 주장하는 개론에 "성경적 뒷받침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주권적 은사를 인정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성령의 선물인 은사를 논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토대로 살펴보는 것만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요, 우리가 취해야할 바른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전지전능하심을 전제로, 모든 주권이 우리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은사의 주체와 은사를 선물로 받는 객체를 먼저 인정하는 겸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만약 강사의 초청에 의해서 강대상 앞으로 나간 사람이 더 많은 은사를 체험한다고 주장하시면, 글쎄요,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간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기를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보면 무리는 없겠습니다만...그것이 전부인양 말씀해서는 안 되겠지요.

 

요즘 부흥회나, 인터넷에 떠도는 'so called' 신령한 부흥강사님들, 신유집회 동영상을 보게 되면, 강사님들이 이상한 괴성을 지르며, ", ! !, 불로, 불로!, !!" 등등...강한 명령어를 사용함을 봅니다....주체와 객체가 뒤바껴 버린, 기형적 모습이 바로 그런 사상, 강대상 앞이 더 신령하고, 어떤 개인,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는 강사들이 더 신령하다고 보게 되도록 유도하는, 영적 특권의식층을 구성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런 사상이 만연할 때, 과거 박태선 장로나 전주 율리아 같은 이단을 양산해 낼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김교수님이 그렇다는 것은 결코 아니니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곳에서 과연 지.. 의를 온전히 갖추신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심히 의심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오래 전, 철야기도 중에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여집사님이 방언을 한다고 알 수 없는 소리로 소리소리 지르며 기도를 합니다. 저는 아무런 생각없이 한 쪽에 앉아서 조용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주님께서 저의 영의 귀를 열어주심일까요? 그 여집사님의 방언이 통역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녀가 하는 뜻없는 말이란 것이, 놀랍게도 하나님을 저주하고 원망하고 욕하고....너무도 놀라서 저는 제가 잘못 듣고 있는가? 못들은척 하려고 하였으나, 듣기가 너무 거북스러워 견딜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일어나 그 여집사님께로 가서 어깨를 건드려, 물었습니다. 지금 무슨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 아십니까? 모른다고, 방언이 터져서 방언기도를 하고 있다고...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집사님께서 하시는 방언은 사단이 장난을 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지금 주님을 욕하고 원망하고 ...듣기가 거북할 정도이니 본 마음이 그게 아니시라면 절제하시지요." 그 여자 집사님은 그 말을 듣더니 너무도 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행이 나이가 훨씬 더 어린 저의 말을 듣고 절제를 하시더군요.

그때, 저는 바울 사도가 통역이 없으면 방언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신,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제가 모든 방언을 다 통역되어진다고는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놀랍게도, 제가 다른 분의 방언을 듣는 대로 모두 통역되어지는 것은 또 아니더군요. 꼭 필요한 때, 주님께서 귀를 열어주셔야 되는 것임을 깨닫고 저는 그때부터 더욱 조심합니다. 그리고 영언이란 인간이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겸손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사단이 그 사람의 혼을 사로잡아 장난질 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구더기 무숴워 장못담그랴? 사단의 장난이 무서워 성령님이 주시는 방언을 부정하느냐? 라고 몰아가는 사람이 있기에 말을 아끼려합니다만...제가 경험한 바로는 무조건 마음이 열려져 있는 무방비 상태는 더욱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령한 은사자라 부르는 자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알 수 없는 괴성을 내는 것이 모두 성령의 선물로서 방언은사가 아니란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하고, 교제님이 올려주신 동영상을 보아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들이여, 가장 신령한 것은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내 마음속에 모시고 있는데, 무엇이 더 필요해서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는지 자신의 영적 상태를 재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방언은사를 이유없이 뜻없이 받아누려야 할 필요가 어디있습니까? 내가 다른 이들보다 좀 더 신령하게 보이고 느껴지기 위해서? 그렇다면 그 순간이 바로 사단이 틈타기 가장 좋은 교만의 순간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받는다면서, 이리저리 그대보다 더 신령(?)하다고 나팔을 부는 자들을 따라다닐 수 있는, 여유와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그 시간에, 골방에 들어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조용히 이웃을 위해, 국가를 위해, 하다못해 우리 아멘넷을 위해서 한마디 말이라도 진정한 기도를 드려주십시오. 그리고 더욱 신령한 은사를 사모하십시오. 그 신령한 은사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은사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자신은 숨고, 이웃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런 사람을 주님은 오늘도 찾고 계신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다윗이 양치는 목자로 있을 때, 주님은 그를 아시고 기억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위치가 어느 곳에 있던지, 개의치 마시고 주님 앞에 겸손해지도록 마음을 낮추는 자가 주님 마음에 합한 자입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더욱 낮아지고 겸손해져서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여도, 주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기만 하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을 남길 수 있겠습니까?

 

교제님께서 올려주신 동영상을 보면서, 영적 사깃꾼들의 작태가 갈수록 더욱 심각해진다는 것을 느끼고 우리가 좀 더 분별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오래 전에 있었던 실제적 체험담도 생각이 나고...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간증을 올려드렸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별똥별/최송연

 

 

 
http://www.youtube.com/watch?v=3oMlZmJIZ6c
저 목사 누군지 아시는 분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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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방사능 공포 1년, 아직 안 끝났다?… 원전 구름 증발 영상 ‘경악’
  • 2012.02.23 17:02

 


[쿠키 지구촌] 사고 1주기(3월11일)를 앞둔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에서 구름이 순식간에 증발하는 기현상이 발견됐다. 한국과 일본 등 지구촌 네티즌들은 “방사능 공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경악했다.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www.youtube.com)에서 후쿠시마 원전 주변 상황을 전하고 있는 일본 네티즌(아이디 fuku1live)은 지난 12일 오후 3시부터 한 시간 동안 후쿠시마 제1·2원전 상공에서 포착한 기현상을 공개했다. 영상은 1시간 분량의 도쿄전력 CCTV 화면을 20배속으로 재생한 것으로 3분 분량이다.

영상에는 바람을 타고 원전 상공을 지나는 구름이 특정 지점에서 빠르게 사라지는 장면이 포착됐다. 구름 한 점이 완전하게 사라질 때까지 걸린 시간은 1~2분에 불과했다. 덩어리가 크거나 수증기 밀도가 높아 보이는 구름도 대부분 5분 안에 사라졌다. 이 같은 현상은 한 시간 내내 계속됐다.

구름은 상공의 열기와 접촉하며 증발했거나 기류 이상으로 흩어져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국내 기상청 관계자는 “구름이 사라지는 방법은 비와 증발, 소산(消散) 뿐”이라며 “원전과의 연관성은 알 수 없으나 구름이 열기에 의해 증발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국과 일본 등 세계 네티즌들은 지난해 3월11일 일본 대지진과 쓰나미에서 비롯된 원전 사고를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이들은 “원전의 방사성 물질에서 발생한 열로 구름이 증발했다”거나 “방사성 물질이 직접 작용해 구름을 사라지게 했다”는 등의 추론을 내놨다.

영상은 23일까지 13만6000건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인터넷 포털 및 커뮤니티 사이트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타고 빠르게 확산되며 네티즌들의 공포심을 자극했다. 대부분의 네티즌은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을 향한 원망을 쏟아냈다.

국내 전문가들은 우려할 상황이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고리원전 민간항시감시기구의 최선수 센터장은 “구름이 사라지는 모습은 분명 특이하다”면서도 “구름은 사고로 폐쇄된 제1원전으로부터 수 킬로미터 떨어진 제2원전 상공에서 사라진 것으로 보여 방사성 물질과의 연관성을 찾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이은철 교수는 “영상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원전 방사성 물질의 열 발생에 따른 현상과 다른 모습이다. 구름의 증발은 외부 요인으로 추정된다”며 “우려할 수준이거나 특이한 현상이 원전에서 발견되면 곧바로 학계에 알려진다. 아직까지 영상에 대한 보고가 없다”고 말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 / 트위터@kcopd

☞도쿄전력 CCTV에 포착된 후쿠시마 원전 상공 구름 증발 동영상 보기(유튜브)




질문: 여성도 목사나 설교자란? 성경은 사역하는 여성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대답: 아마 여성 사역자 주제 만큼 오늘날 교회에서 더 많은 논쟁거리를 불러일으키는 주제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성 대 여성 이렇게 대립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여성들은 여자는 목사로 섬겨서는 안 된다고 믿고, 성경도 또한 여성의 사역에 대해 제한하고 있습니다. 반면 여성 설교자의 섬김과 여성들의 사역에 제한을 두지 않는 남성들도 있습니다. 이 문제는 성차별대우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 해석의 문제로 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하셨습니다(디모데전서 2:11-12).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각각 달리하셨습니다. 이는 남녀가 창조된 원리에 부합되는 것이고 죄가 세상에 들어 오게 된 연유때문이기도 합니다 (디모데후서 2:13-14).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 여성들이 영적인 가르침으로 섬기는 데 있어서 남성 보다 높은 권위를 갖는 것에 제재를 가하십니다. 이는 여성이 목사로서의 섬김 즉 설교하고, 가르치고, 영적인 권위로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여성 사역 제한을 반대하는 많은 의견들이 있습니다. 첫째, 바울이 여성의 가르침을 막는 이유는 1세기의 여성들은 교육받은 자가 특별히 적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2:11-14어디에서도 교육적 지위에 대해 언급한 바가 없습니다. 만약 교육이 사역을 위한 자격조건이었다면 대다수 예수의 제자들은 자격미달입니다. 둘째, 바울이 단지 에베소의 여성들만 가르치는 사역에서 제외시켰다라고 합니다 (디모데전서는 에베소 교회의 목사였던 디모데에게 쓰여진 글입니다). 에베소 도시는 그리스 로마가 섬겼던 신, 아르테미스의 성전으로 유명했습니다. 아르테미스에 대한 예배는 여성이 주도권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어디에서도 아르테미스를 언급한 적이 없으며, 바울도 아르테미스 숭배문제를 가지고 디모데전서 2:11-12을 통해 제한시키지 않았습니다.

셋째, 바울이 단지 남편과 아내를 상대로 여성의 활동을 제한시키는 것이지 일반적으로 남성 대 여성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스어는 남편과 아내만을 뜻 하지만 근본적으로 남자와 여자를 뜻합니다. 더군다나 같은 그리스어가 8절에서 10절에서도 쓰입니다.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는 것은 결혼한 남편들에게만 얘기하는 것입니까 (8절)? 단정한 옷을 입으며 오직 선행으로 예배드리는 것은 오직 결혼한 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겠습니까? (9절-10절). 물론 아닙니다. 8절부터 10절은 분명히 남성과 여성을 상대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11절에서 14절에서도 대상이 갑자기 남편과 아내들로 전환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이의는 여성 목사나 설교자를 해석할 때 성경에서 리더쉽의 자리에 있었던 미리암, 드보라, 훌다, 프리실라, 뵈뵈를 예로 듭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중요한 사실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데보라의 경우, 그녀는 13명의 사사중에 유일한 여성 사사였습니다. 훌다의 경우, 그녀는 성경에서 말 하는 13명의 선지자 중에 유일한 여성 선지자 였습니다. 미리암의 리더쉽은 그녀가 모세와 아론의 혈연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왕조 시대에 가장 눈에 띄는 여성은 아달리아와 이세벨이나 그들은 거룩한 여성 리더쉽을 거의 보이지 못했습니다. 중요한건 구약에서 여자의 권위는 논 할 문제로 적절치 않았습니다. 디모데전서는 교회의 새로운 예를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 것은 이스라엘이나 구약체제가 아닌 교회의 권위를 포함합니다.

비슷한 논쟁으로는 신약에 나오는 프리실라와 아퀼라가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행전 18장에 그리스도의 충성된 사역자로 묘사됩니다. 프리실라의 이름이 먼저 언급되어서 그녀가 남편보다 사역을 훨씬 뛰어나게 감당한 한 것 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프리실라가 디모데전서 2:11-14절에 대립되는 사역활동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프리실라와 아퀼라는 아볼로를 그들의 집으로 데리고 와 하나님의 말씀을 더 효과있게 전달함으로 그를 제자로 양육 했습니다 (사도행전 18:26).

로마서 16:1에서 뵈뵈를 “종”보다는 “여집사”로 여겼지만 그녀가 교회의 교사였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르침은 집사들이 아닌 장로들에게 주어진 자격이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3:1-13; 디도서 1:6-9). 장로/주교/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 “믿음이 좋은 자녀를 둔 남자” 그리고 “존경할 만한 남자”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3:1-13와 디도서 1:6-9에서는 남성 대명사가 특별히 장로/주교/집사들을 언급하는 데 쓰였습니다.

디모데전서 2:11-14의 구조는 아주 확실한 “이유”를 제공합니다. 13절은 “왜냐하면”의 접속사로 시작하여 바울이 11절과 12절에 언급한 것에 대한 이유를 말해줍니다. 왜 여성의 가르침은 금지되었고 남성에게 권위를 행사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아담이 먼저 창조되었고 그 후에 여성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속임을 당한 것은 여자였지 아담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먼저 창조하셨고, 이브를 아담의 “조력자”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창조 질서는 지구상의 모든 가정과 교회에 적용됩니다 (에베소서 5:22-33). 이브가 속임을 받았다는 사실은 여성의 목회자 사역과 남성에게 영적 권위 사용의 부적합한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또 여성은 쉽게 속기 때문에 가르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개념은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여자가 더 쉽게 속임을 당한다면 어떻게 아이들을 (잘 속아 넘어가는) 가르치고 또 다른 여성(더 잘 속는다고 가정된) 들을 지도할 수 있습니까? 이는 본문이 뜻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브는 속임을 받았기 때문에 가르칠 수 없고, 남성에게 영적 권위를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남자에게 교회에서 가르치는 권위를 주신 것입니다.

여성은 대접, 동정, 긍휼, 가르침, 그리고 돕는 은사에 강합니다. 교회 내의 많은 사역이 여성들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남성에게 영적 권위를 사용하는 것을 빼놓고는 여성이 기도나 예언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1:5). 성경 어디에서도 여성들이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에 제한 두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여성들도 남성들과 같이 다른 지체들을 섬기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하고 (갈라디아서 5:22-23), 잃어버린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8:18-20; 사도행전 1:8; 베드로전서 3:15).

하나님은 교회에서 오직 남자만 영적 지도자의 위치에서 섬기도록 정하셨습니다. 이는 남자가 더 수준 높은 교사이거나 여성이 남자보다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이 교회를 이렇게 디자인하신 것입니다. 남성이 그들의 삶과 언어사용을 통해서 영적 리더쉽의 모범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여성은 조금 덜 권위적인 역할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여성은 다른 여성을 가르치라고 되어있습니다 (디도서 2:3-5). 성경은 또한 여성의 아이들 교육에 제재를 가하지 않습니다. 여성의 활동이 제한된 경우는 남자를 가르치거나 남자에게 영적 권위를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이는 자연히 목사나 설교자로 활동하는 여성들을 포함합니다. 이는 여성이 덜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성에게 더 유리하게 만드신 은사들에 전력하는 사역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What does the Bible say about women in ministry?
http://www.gotquestions.org/women-pastors.html

교회에서의 여성 사역의 문제에 대한 한 고찰 -이승구 교수

이상에서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여성의 교회 안에서의 사역 문제를 다루는 유일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는 디모데 전서 2:12-14에 근거해서 판단할 때 여자가 교회 안에서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일을 하는 것(목사직)과 다스리고 주관하는 일을 하는 장로직은 허락되지 않았고, 이 구절의 내포에 따라 그것은 창조의 질서가 존재하는 한 지속되는 교훈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런 성경의 가르침이 있는 한 우리는 이 말씀에 근거해서 교회 안에서 목사직과 장로직을 여성에게 허락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외에 폭 넓은 의미의 여성 사역은 교회 안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고 격려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신약의 가르침에 우리가 복종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이 능력이 부족하다거나 열등하다는 생각에서 그리해야 한다는 것이 아님에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순전히 성경이 지시하는 가르침에 충실하려고 하는 마음에서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사역에 대해서, 그것도 목사직과 장로직에 대해서만 이런 금령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사회의 다른 영역에서 여성이 가르치는 것을 이 성경은 금하지 않는다. 또 다른 사회적 맥락에서 여성이 주관하는 자와 치리하는 자와 재판하는 자가 되는 것을 이 성경은 금하지 않는 것이다. 여성이 잘 다스릴 수 있는 은사가 있다면 다른 사회의 영역에서 그와 부합한 하는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일의 한 부분이 될 것이다. 또한 여성이 잘 가르치는 은사가 있다면 이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잘 가르치는 일을 효과적으로 해야 할 것이고, 그리스도인 여성이 그리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될 것이다

http://blog.daum.net/vorgott/17190679


출처: USA 아멘넷 게사판/ JuNick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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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절대로...
많은 것을 바라지 마세요
아니 아무것도 바라지 마세요
그렇지 않으면 너무 지쳐버리거든요

절대로...
그 마음을 감추려 하지 마세요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답니다
서로의 감정을 느끼면서도
불안해하고 힘들어하는건
필요없는 여백일수 있거든요
그 시간만큼 서로 기뻐할수 있도록
필요없는 여백을 두지마세요

절대로...
너무 많이 표현하지 마세요
아껴두는 것도 때로는 꼬옥 필요하답니다
너무 흔한건 가치가 없는 법이니까요

 

 절대로...
서두르지 마세요
서두름은 이별의 화근이 될수도 있으니까요
조금씩 천천히 그렇게 알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행복이 두배가 되거든요
쉽게 지치고,
쉽게 싫증이 나지 않도록
절대로 서두르지 마세요

절대로...
단계를 뛰어넘지 마세요
1단계 다음엔 2단계가 있어야하고
2단계 다음엔 3단계가
단계를 뛰어넘게 되면
그만큼의 설레임과 기쁨이 감소한답니다

절대로...
좋아하는 사람의 일상에
많이는 간섭하지 마세요
거부감이 생길수도 있으니까요
자유를 절망하게 되면
그때부터 이별이 될지 모르니거든요

절대로...
좋아하는 사람의 과거를 들추지 마세요
어떤 사랑을 했건,
어떤 이별을 했건,
잊었건,
잊지못했건,
인정해 주고 이해해 주고 함께 나눈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사랑은 없을테니까요

절대로...
비밀은 너무 많이는 갖지 마세요
비밀이 하나도 없다면
그건 실망스런 일일수 있어요
그치만 비밀이 너무 많다면
그건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되어 버린답니다
많은 부분을 그 사람과 함께
그때 서로가 행복감을 느낄수 있으니까요

절대로...
하루에 단 한 번의 연락이 없으면 안되요
그 사람이 잘지내고 있는지,
어려운 일은 없는지
좋아하는 사람의 안부를 알고 싶은건
당연하고 중요한 일이니까요
그것 뿐이겠어요
불안해 할 수도 있는 그 사람에게
아직도 좋아하고 있다는 확신을 줘야 하니까요
하루에도 몇 번씩,
적어도 한 번은 확신을 시키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하니까요
 

절대로...
거짓말은 하지마세요
신뢰, 이거 또한 무척이나 중요하지요
서로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없는 만남은
어떤 포장을 하고 있을지라도
가치가 없답니다
그 사람을 속이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그 사람의 곁에 없을땐
그 사람을 속였다는 것보다도
자신을 속였다는 것에
훨씬 더 맘 아플수 있으니까요

절대로...
모든걸 그 사람만을 위해서
하지는 마세요..
정말 그래요..
가끔은 자신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답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곁에 없을 때
그 빈자리가 많이 크지 않을테니까요
가끔은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그 사람에게 요구하세요
그러면 오히려 고마워하게 된답니다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줄 때의 기쁨이란
도무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절대로...
그 사람을 불안하게 하지 마세요
확신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음 서로가 힘들어지거든요
이별을 생각해 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절대로...
그사람을 잡아두지 마세요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편한 맘으로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세요
좋아하는 사람이 행복해지는거,
그것만큼 기쁜일이 또 있을까요

절대로...
한 사람 외에 사랑하지 마세요
한 사람을 완전히 사랑한다는거,
무척 힘든일이지요
그런데 동시에 한사람 이외의 사람까지
좋아한다는건
도무지 이해할수 없는 일이거든요
한 사람이 무지무지 좋다면
그 사람에게만 충실하세요

절대로...
그 사람의 기쁨이나 슬픔을
그냥 넘겨버리지 마세요
슬플 때는 같이 울어주고,
기쁠 때는 같이 웃어주세요
그러면 행복해져요
 

절대로...
취중에 고백하지마세요
취중진담이라는거...
그래요.. 그런 것도 있지요
그렇지만 고백이라는건
좀더 진지하고 진실되고 용기있게
정말로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걸
떳떳하게 말하는 거에요

절대로...
좋아하는 감정의 변화를 감추지 마세요
그 사람이 걱정되서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될까봐
..등등의 이유로
좋아하는 감정이 사라진 맘을 말하지 않는건
그 사람을 더 비참하게 한답니다

절대로...
멀어지는 거리를 길게 두지 마세요
언제든 떠나야할 때는
당당하게 말하는 겁니다
멀어지는 거리를 느끼게 하는거
그것만큼
그 사람을 힘들고 외롭게 하는 일도 없을꺼에요
곁에 있어도 외로움을 느끼게 하는건
나쁜 일입니다
정말로 죽기보다 싫은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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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끝부분 수정보충)

핵폭탄(원자력발전도 마찬가지이지만)은 우라늄이나 풀로토늄 같은 물질이 핵분열을 일으켜 다른 물질로 바뀌면서 질량이 바뀔 때, 그 질량이 감소하는 만큼 에너지로 바뀌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우라늄 (92U235)이 분열되어 38Sr94와 54Xe140으로 바뀐다. (스트론튬, 제논)
36Kr92와 56Ba141로도 바뀐다. (크립톤, 바륨)
이런 물질들이 핵분열생성물질들이다.

우라늄이나 풀로토늄이 핵분열을 일으켜 다른 핵분열생성물질로 바뀔 때 약 0.1%의 질량결손이 생기는데 이 결손된 질량이 E = mc²공식에 따라 전부 에너지로 바뀌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10 킬로그램의 우라늄을 분열시켜 그 0.1%, 즉 10 그램의 질량결손을 만들어내면 얼마나 큰 에너지가 나올까?
10 곱하기 광속의 제곱 에르그(erg).......
큰 도시 하나가 파괴될 만 한 에너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맨해튼 프로젝트로 알려진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조차 E = mc² 에 대하여는 현실감을 느끼지 못 하였고 실제로 뉴멕시코 사막에서 이루어진 핵폭탄 실험을 보고서야 그 엄청난 결과에 놀랐다고 한다.

이러한 위대한 발견이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참혹한 파괴가 아닌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먼저 쓰여 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



41.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

앞에서 말한 상대성이론은 1905년에 발표된 특수상대성이론이다.
특수상대성이론은 서로 등속으로 운동하는 관성계에서의 물리학법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인슈타인은 등속운동이 아닌 가속운동의 경우, 즉 중력과 인력으로 가속도가 붙는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가를 1907년부터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실제로 실험을 하여 증명하기보다는 주로 논리와 사고를 통하여 논리적인 모순을 알아낸다든지 새로운 법칙을 발견해 내었는데 이를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이라고 한다. 이것이 실로 그의 천재성을 입증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1) 등가원리

등가원리는 가속도와 중력이 결국 같다는 것을 말한다.
만일 우주선이 지구에 앉아있다면 그 안에 탄 우주인은 우주선 바닥방향으로 지구의 중력가속도 'g'의 중력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그 우주선이 우주공간에서 가속을 하여 지구중력가속도 'g'만큼의 가속운동을 하면서 점점 빨라진다면 그 안에 탄 우주인은 지구에 있을 때와 똑같은 중력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만일 밖을 내다보지 못 한다면 그 우주인은 거기가 우주공간인지 지구인지를 분간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우주선이 어떤 별의 인력에 의하여 자유낙하를 한다고 치자.
우주선이 그 별의 중력장에 의하여 점점 가속되면서 빨라지고 있지만 그러나 그 안의 우주인은 똑같은 무중력상태를 느끼기 때문에 우주선이 점점 빠른 속도로 낙하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게 될 것이다.
즉 가속도와 중력은 같다. 이것이 등가원리이다.

2) 빛은 중력으로 인하여 휜다.

중력과 가속도가 같다면 빛과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우주선이 로켓을 분사하면서 위로 점점 빨라지는 가속운동을 하고 있다고 해보자.
그 때 좌편에서 우편으로 똑바로 흐르는 빛이 있다고 해보자.
만일 우주선이 정지상태이거나 등속운동을 하고 있다면 그 빛은 직선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우주선이 가속도로 점점 빨라지는 가속운동을 하고 있다면 그 빛은 우주선이 가속되고 있는 방향의 반대방향으로 휘어지는 것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즉 가속도는 빛을 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속도와 중력이 같으므로 그 가속도와 같은 중력장을 가진 별에서 그 빛을 본다고 해도 똑같이 휘어져야 할 것이다.
결국 가속도와 마찬가지로 중력도 빛을 휘게 만든다는 결론이다.
아인슈타인은 이 사고실험을 통하여 밝혀낸 이 일반상대성이론을 1916년에 발표한다. 그리고 태양을 스쳐 지구에 도달하는 다른 별의 빛이 태양의 중력만으로 휜다면 0.875초가 휘겠지만 상대성이론에 의한다면, 즉 휘어진 공간이론에 의한다면 1. 75초 휠 것이라는 계산을 내놓았다.

마침 1916년에 서부 아프리카의 프린시페 섬에서 개기일식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되었다. 영국의 천문학자 아서 에딩턴은 과연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옳은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탐험대를 이끌고 아프리카로 가서 개기일식 동안에 별을 관측하는 실험을 하였다.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때라야 태양의 뒤편에 있는 별을 관측할 수 있다.)

실제 측정결과로 별빛은 1.6초 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그 오차범위는 0.3초라고 계산되었다. 이 결과는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완벽하게 옳음을 증명한 것이었다.
만일 에딩턴의 관측실험결과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틀렸다고 증명되었더라면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한 공간-빛의 휨은 물론 E = mc² 공식에 의한 질량-에너지 변환도 신뢰 받지 못 하였을 것이다.

그 후 많은 별들이 실제위치와 다른 위치에 있는 것으로 관측되었고 그 빛의 휨 현상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한 공간의 휨과 일치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같은 별이 블랙홀 같은 중력장에 의하여 두 개 이상 여러 개로, 혹은 띠 모양으로 흩어진 원호(圓弧) 모양으로 관측되는 현상도 나타난다.

이 때문에 한 개의 성운이 네 개로 보이는 것도 있다.
그것은 그 성운과 지구 사이에 강력한 중력을 가진 천체, 혹은 블랙홀이 여러 개가 있어서 빛을 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일으키는 것을 ‘중력렌즈’라고 부른다.

사고실험을 통한 아인슈타인의 이론들이 이렇게 실제로 맞아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3) 일반상대성이론, 휘어진 공간

대장쟁이는 “19. 보이지 않는 힘”에서 인력(중력)의 기이함과 신비함을 언급한 바 있다.
도대체 아무 연결 된 것도 없는데 어째서 천체들은 인력으로 서로를 끌어당기며, 또 끌려들어가지 않기 위해 달리고 있는 것일까?
보이지 않는 힘, 그 정체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과학이 대답할 수 있는 영역이 분명 아니다.
과학은 존재나 현상의 근원을 밝혀내는 문제는 외면하고 이미 존재하는 현상만을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과학은 마치 빵을 누가 만들어서 가져왔고 어디서 생겼는지 하는 기원 따위는 관심 없고, 그 빵의 모양이나 성분, 맛이 있느냐 없느냐의 현상만을 문제로 삼는 아이와 같다.  

중력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과학자들이 알 바가 아니다.
다만 그 중력이 만들어내는 현상만이 과학탐구의 대상일 뿐이다.

아인슈타인은 중력장과 천체의 운동을 그물망으로 설명하였다.
여기 한 퐁퐁 그물망(뜀뛰기 하는 그물망)이 있다.
그 가운데에 커다란 볼링공이 들어있고 그물망은 그 볼링공의 무게로 인하여 아래로 쳐져있다. 그 주위를 작은 당구공이 돈다.
그러면 당구공은 볼링공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천천히 구르다가 볼링공이 있는 곳에 가까이 오면 속도가 빨라지고 다시 그 빨라진 속도로 인하여 다시 멀리 튀어나가게 된다.
혹은 볼링공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게 된다.
마찰에 의하여 속도가 줄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 그물망으로 태양을 도는 혹성들의 운동을 설명할 수 있다.

상대성이론은 이 그물망으로 공간의 휘어짐으로 설명한다.
즉, 마치 열차 안에서 튕긴 농구공처럼 당구공이 중력장에 이끌려 빨라지면서 쏘옥 끌려 들어가면 상하방향으로 움직인 거리는 길어지지만 원래 그물망의 평면을 기준으로 한다면 그 속도는 같다는 것이다.

즉, 같은 그물망, 같은 평면인데 그 평면이 휘어져있기 때문에 움직인 거리가 길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중력장이란 공간의 휘어짐에 따른 현상이라는 것이다.

4) 그렇다면 중력이란 무엇인가?

중력은 무엇인가?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으로, 또 “공간의 휨” 현상으로 설명하였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중력이라는 현상이 어떻게 생겨났고 작용하는 것인지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물망이 중력장과 공간을 훌륭하게 해석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중력의 정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매어놓은 줄도 없고 끈도 없는데 잡아당기는 그 중력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러한 일반상대성이론을 만들어낸 아인슈타인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여러분도 함께 곰곰이 생각해보자.
중력이 무엇이며 왜 중력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아무 매개체도 없는 허공을 운행하는 천체들이 왜 어떻게 서로를 끌어당기는가 말이다.

5) 빅뱅이란 무엇이었을까?

대장쟁이는 가끔 그런 엉터리 같은 상상을 잘 한다.
아인슈타인처럼 사고실험을 하기에는 어림도 없는 낮은 지능의 머리를 가졌지만 엉뚱한 상상이야 아무나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대장쟁이 상상으로는.......,
빅뱅(Big Bang)이란.......
우리는 태초에(in the beginning) 시간과 공간이 원래 있었다고 전제하고 빅뱅을 생각한다.
그래서 어떻게 한 점에 우주(혹은 우주가 될 모든 물질들)가 압축되어 있다가 폭발할 수 있는가 생각한다. 그 어마어마한 압축과 우주공간을 가득 채우는 어마어마한 폭발의 근원, 그 힘이 상상이 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아니다.
태초에 공간이란 것은 없었다.
시간도 없었다.
시간과 공간은 아직 창조되지 않았다.
빅뱅이란 창조주가 무한한 우주만유의 질량을 한 점(아니 점도 아니다. 공간이 아직 없었으니까.)에 만들어놓고 거기에 시간과 공간을 부여한 사건이다.
공간이라는 피조물이 만들어져 그 점에 부여되자 비로소 그 질량들이 일시에 폭발하여 그 공간을 따라 사방으로 균일하게 흩어지게 된 것이 빅뱅이다.
시간과 공간이 부여되자 모든 존재가 나타난 것이 빅뱅의 사건이다.
그리고 시간이라는 피조물 때문에, 그 시간을 따라 흐르는 빛 때문에, 사방으로 흩어지는 빅뱅의 속도는 그 폭발의 그 힘이 아무리 커도 질량이 무한히 커져서 넘을 수 없는 한계의 벽, 즉 빛의 속도 이내였을 것이다.

중력이란 공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공간이 마치 스프링에다가 쐐기를 끼워 넣은 것처럼, 혹은 뻥튀기처럼 공간이 들어차면서 그 틈을 벌려버린 것이다.
그래서 모든 물체가 공간을 이기고 도로 제자리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 중력인 셈이다.
지금이라도 공간이 사라져준다면 그 물체는 도로 같은 위치에 원위치 될 것이다.
그런데 한 번 창조된 공간은 사라지지 않고 우주만유를 붙잡고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두 물체 사이의 공간이 크면 한데 붙으려는 회복력이 떨어지고, 가까우면 증가하는, 그래서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만유인력의 법칙이 생겨난 것이다.
그렇다. 중력이란 공간이 만들어낸 현상인 것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일반상대성이론이, 아인슈타인 역시 그 중력의 정체, 보이지도 않고 줄도 매여 있지 않는데도 작용하는 그 중력의 정체를 이해할 수 없었겠지만, 그 중력장을 그물망, 즉 공간의 휘어짐으로 설명하였더니 맞아들어간 것이다.
중력이 공간에 의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블랙홀......, 그물망이 푹 꺼진 그 곳은 공간이 사라져버린 곳이다.
공간이 사라지니 당연히 질량만 남고 부피가 없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 점 보다 더 작은, 아니 부피가 아예 없으면서 어마어마한 질량들만 남은 것이다.  

그렇게 빅뱅은 된 것이 아닐까?
그렇게 공간과 시간이 시작된 것이 아닐까?
그렇게 시간과 공간이, 그리고 모든 존재가 시작된 것이 아닐까?
그것이 우주만유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성경이 말하는 시작(Beginning) 말이다.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heavens and earth."

뭐, 이건 어디까지나 대장쟁이의 상상이다.
대장쟁이가 아인슈타인처럼 사고실험을 할 재주는 없고.......

그렇지만........
다른 설명이 가능한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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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놓고 말하고 가슴으로 듣기 내가 경청에 대해 절실하게 배운 것은 사고가 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그저 내가 더 잘 들어주기만 해도 사람들은 내게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마음을 열수록 나는 그들에게 깊이 공감했다. 나는 가슴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들도 마음을 터놓고 내게 이야기했다. 그 시간들 속에서 나는 진정 사람을 아끼고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발견했다. - 대니얼 고틀립의《마음에게 말걸기》중에서 - 우리가 살아가면서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냥 귀로 듣지 않고 마음으로, 가슴으로 들어주는 사람에게만 모든 걸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터놓고 말하고 가슴으로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풀리고 녹아내리고 사랑하게 됩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Sop 김치경,Ten 김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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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의 사후 개념에는 심판의 개념이 약하다. 누구나 다 죽어 저승에 간다. 그 저승이 어디에 있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곳에서는 지상에서 선하게 산 사람이 특별히 복을 받는다는 구체적 사상이 약하다. 악하게 산 사람도 그것 때문에 사후에 벌을 받는다는 생각도 별로 나타나 있지 않다. 그것이 아마도 우리 나라 사람들이 사회적 윤리관이 약한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친분이 있는 관계이거나 가족 사이에는 그래도 아직 유교적 윤리관이 지배하고 있어 건전하지마는 일단 모르는 사이에 들어가면 샤마니즘의 윤리관이 작동한다. 그것이 우리 사회를 살벌하게 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20장에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자기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최후의 대심판이다. 거기서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 각 사람들은 정확히 자기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
마침내 모든 죄와 불의 그리고 사망의 근원인 사단의 최후가 온다. 신음하던 죄악 세상의 피조물들과 구원받은 성도들도 그리고 온 우주의 거민들도 이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반역이 일어난 다음 우주는 죄의 결과들을 목도해야 했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탄생하여 잔인한 죽음을 당하시는 것을 보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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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도 끝났다. 하늘 천사가 내려와“용을 잡으니 곧 옛 뱀 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20:1~3) 천년이 차기까지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
사단은 자기가 저지른 죄의 참담한 결과들을 보면서 천년 동안이나 고통을 당하여야 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20장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사단이 황폐한 지구에 천년 동안 결박당하고 구원받은 의인들은 천년 동안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심판에 참예하는 장면이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계 20:1~5).

천년 후에 사단은 잠시 놓임을 받아 부활한 악인들을 선동하여 새 예루살렘 성을 향한 최후의 공격을 시도하지만 하늘에서 유황 불이 내려와 모두 멸망당하고 말 것이다(계 20:6~10).
마지막 멸망 전에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대심판이 있을 것인데 그때 모든 악인들은 둘째 부활 혹은 심판의 부활이라고 부르는 부활을 통하여 다시 살 게 된다. 이것은 심판을 위한 부활이다.
그리고 각 사람의 행한 대로 형벌을 받게 되며, 결국에는 둘째 사망이라고 부르는 영원한 죽음을 당하게 된다(계 20:11~15).

 

이웃 게시판에서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다] - 오컬트의 구상화(Visualization) 기법

 

 [펜타그램: 오컬트 심볼의 예]

[오컬트] (Occult)

 

비학(秘學)

과학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신비적, 초자연적 현상. 또는 그런 현상을 일으키는 [감추어진] 기술

초자연적 또는 마술적 힘에 대한 지식과 연구

 

"감추어진" 지식이라는 어원에서 유래된 오컬트(오컬티즘)는 마술, 점성술, 연금술 등으로 대표되는 신비술을 말한다.

일종의 형이상학적 과학이라고도 불리는 오컬트는 의식과 주문 그리고 아래 소개되는 기법 등을 통해서 초자연적 현상을 가져온다.

["생각대로" T 선전에서] "비비디바비디부" - "당신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어요"

[브라운아이드걸스의 노래에서] "아브라카다브라" - 마법사의 주문 "수리수리마하수리"

[소녀시대의 노래에서] "소원을 말해 봐 - 너의 Genie 내가 들어줄게"

 

요즈음 TV를 켜면 쉽게 들을 수 있는 위의 대중문화의 내용에서도 잘 드러난 것처럼, 이 시대의 (뉴에이지적) 메시지 중의 하나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그냥 스쳐 넘길 일만은 아닐 것 같다.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이 오컬트의 사상은 신사상(New Thought)운동이라고도 불리는데, 생각과 말과 그림(이미지/상상), 영상을 통해 바라는 것을 "실체"로 만들어 낸다는 사상이다.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그림 그린 것이 초자연적인 (끌어들임의) 작용을 통해서 구체화된다는 것이다.

 

끌어당김의 법칙과 구상화(마음먹은 그림을 상상 속에서 그리는 것)의 법칙에 대한 뉴에이저들의 말이다:

[구상화(具像化 Visualization)는 영상화/시각화로도 번역되며, 심상화(心像 Imagery)도 비슷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당신의 인생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은 당신이 끌어당긴 것이다. 당신이 마음에 그린 그리과 생각이 그것들을 끌어당겼다는 뜻이다...익것으로 하지 못할 일은 하나도 없다...그림을 그릴 때 당신은 그 강한 파장을 우주에 내뿜는 것이다. 그러면 끌어당김의 법칙이 그 신호를 받아서 당신이 마음 속에 그린 그림을 현실로 만들어 되돌려 준다." - 론다 번 ['시크릿'의 저자]

 

구상화란 마음의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고, 그림은 당신의 미래가 드러남에 있어 하나의 원형으로 작용하게 될 틀이다...그리하여 마지막으로 세 번째 과정인 물질화가 뒤따르게 된다. 우리 모두는 우주가 먼저 생각으로 존재한 뒤에 물질로 나타났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구상화는 필요한 것이 오게 하는 메커니즘이다." - 찰스 해낼

 

시각적 상상은 당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환경의 그림을 그리고, 긍정적 확인과 에너지 채널링을 통해 생각을 실체로 결정화시킨다. 구상화는 목적을 이루는 뉴에이지 기법이지만 그 뿌리는 마술의 오컬트 과학에서 찾을 수 있다...창조적 구상화는 또 다른 마술적 루틴이다: 마술적으로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 속에 이것을 확실하게 그려야 한다. 이것을 가진 상태를 그리고 마음에 간직한 채 수 분간 잡고 있는다. 이 강하게 잡고 있는 이미지는 마술적 의식이다. 창조적 구상화는 강한 상상과 조절된 호흡의 마술적 의식이다. 당신의 내면의 욕망의 에너지가 넘쳐오르는 것을 느끼십시오. 이것이 강해지면 당신의 마음에서 그림 또는 욕망이 풀린 것을  순간 느끼십시오. 그림을 통해 지나간 에너지를 느낄 것이며 점점 강해질 것입니다. 에너지가 당신의 소우주에서 모든 방향으로 터져나감을 상상하십시오. 그리고 우주가 이 힘에 반응함으로써 흔들리는 것을 느끼십시오. - 안잘리 가르퓨어 / 뉴에이지 사이트에서

이 사상은 아그네스 샌포드노먼 빈센트 필에 의해 기독교 속으로 들어와서 "긍정적 사고"(Positive Thinking)와 "믿음(의) 말씀"(Word of Faith)라는 이름 아래 기독교 내부에서도 세력의 확장을 거듭하고 있다. "긍정적 사고"의 대표 주장자들의 말을 들어 보자:

"이 개념은 심리행동의 한 형태로서 구상화(이미징)라고 불린다. 이는 의식 속에서 원하는 목표와 목적을 생생하게 그려서, 이 그림이 무의식 속으로 가라앉을 때까지 그림을 잡고 있는 과정인데, 이 그림은 무의식 속에서 미개발의 거대한 에너지를 방출한다." - 노먼 빈센트 필

 

"말에는 엄청난 창조의 힘이 있다. 우리가 뭔가를 입으로 말하는 순간에 말의 내용이 생명을 얻는다. 이것이 영적 원리다." - 조엘 오스틴

이 모든 주장 속에는 사람에게 창조의 능력이 있으며, 그러므로 신성에 참여하고 있다는 가정이 전제된다. 참으로 터무니 없는 일이다.

전에 인용했던 데이브 헌트의 "과학과 하나님<<"에서 다시 인용한다.

신비술사(오컬티스트)들은 세계에서 가장 처음이자 수천년 동안 유일한 과학자들이었다. '형태화(manifestation)의 법칙'을 통해서 마법을 이루기 위해, 신비술사들은 항상 과학적 기술을 사용했다: 긍정적 사고, 긍정적 발언 그리고 구상화(visualization). 이 세가지 방법 모두는 지금 복음적 교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사용되고 있다. 이런 오컬트 기술을 가장 성공적으로 증진시킨 사람이 서울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의 Paul Yonggi Cho 목사이다.

 

긍정적으로 말하기(고백)에 대해 Cho는 주장한다. "당신의 입으로 예수님의 임재를 만들어라...그(예수)는 당신의 입술과 당신의 말에 묶여 있다..." 가장 파워풀한 오컬트 기술인 '구상화'에 관해서 Cho는 적는다. "시각화와 꿈을 통해서 당신의 미래를 품고 그 결과를 부화시킨다." 그(Cho)의 유명한 저서, '4차원의 세계'의 서문에서 (로버트) 슐러는 구상화에 관해 적는다.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 그저 즐기기를 시작하라. 이것은 사실이다. 그렇게 된다. 나도 해봤다. 성령께서 이 메시지를 우리와 전세계에 주시도록 허락한 Cho에게 감사한다."

 

Cho는 "영은 4차원이다"라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계시하셨다고 말한다. 그 안에 창조적인 힘이 담겨 있다. Cho는 하나님이 우주를 구상화를 통해 창조하셨으며, 누구든지, 신비술사이든 크리스천이든, 사탄이든 하나님이든, 마찬가지 방법으로 "4차원의 법칙"을 적용함으로써 창조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맞다. 원자의 에너지를 활용하기 위해서 크리스천일 필요가 없다 - 그리고, 종교 과학의 "영적 에너지"도 마찬가지다. 

현실을 창조하고 변화시키는 오컬트의 기법은 세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구상화의 기법은 가장 파워풀할 뿐 아니라, 종종 심령적 체험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특히 유의해야 할 것으로 본다.

1. 사고(Thought) - 생각하는 대로

노먼 빈센트 필에 의해 기독교 속으로 전파된 긍정적 사고(Positive Thinking)로 알려져 있는 오컬트적 사고

2. 언어(Word) - 말하는 대로

주문과 주술을 비롯한 언어를 통해 마음먹은 바를 이루어내는 기법으로, 늦은비/신사도 운동권에서는 "말씀-믿음"(Word-Faith) 교리(운동)로도 나타난다.

3. 구상화(영상, Viasualization) - 그리는 대로 (상상하는 대로)

머리 속에서의 동영상 이미지를 사용하는 이 기법은 융과 샌포드에 의해 "내적 치유" 과정 속으로 도입된다.

 구상화의 위험 - 스피릿의 현현

 

구상화의 신비적인 영향력 중의 하나가 구상화를 지속하면 구상화의 대상이 실제적으로 나타나난다는 것이다. 고대 샤먼(무속인)으로부터 현대 뉴에이지에 이르기까지 많은 오컬티스트들이 구상화를 통해 그들의 "스피릿 가이드"(영계 안내자)를 초청해 왔으며, 그들의 가이드를 통해서 계시와 치유를 받았다고 한다. [성경은 죽은 자와의 교통을 금하고 있기 때문에, 이 스피릿 가이드는 악령(친숙령)임에 틀림없다.] 대표적으로, "빌레몬"이라는 "스피릿 가이드"로부터 구상화를 통한 내적 치유를 전수받은 오컬티스트 칼 융과 "드왈 쿨"(Djwhal Khul, '대백색형제단'의 일원이며 D.K. 대사<<라고도 불림)이란 티베트 출신 "스피릿 가이드"로부터 주어진 계시를 받아적음으로써 뉴에이지 운동의 교과서를 만든 앨리스 베일리가 있다.

 

구상화를 통해 이런 스피릿을 만난 뉴에이저들의 예를 들어 보겠다:

전에 느껴보지 모했던 강한 물리적 힘(포스)이 내게 나타났다. 밝은 빛이 나의 전체를 둘러 쌌다..내 몸의 모든 세포를 투과하며. 특히 내 머리는 천 와트의 전구가 켜진 것 같이 빛으로 가득 찼다...깊은 평안을 느꼈다...갑자기 강한 골든화이트 빛을 발하는 사람이 내 앞에 섰다. 처음에는 신비롭게 빛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보인다고 지각했으나, 곧 이 사람이 드왈 쿨이라는 강한 직관이 떠올랐다. - 윌 바론 [윌 바론의 뉴에이지 체험기가 참고자료<<에 실려 있습니다]

 

나는 밤에 깨어 있었다. 놀랍게도 호텔 방 중앙에 남자가 서 있었다. 충격적이었다...그는 183 센티 정도의 키와 큰 위엄을 지녔다. 그는 말했다. "무릎을 꿇어라!...나는 예수 그리스도이니라. 내가 너를 고쳐 주겠다..." - 윌 바론(바로 위 인용자)의 영매(靈媒)

기독교화된 (뉴에이지) 구상화에서 구상화의 대상은 예수로 바뀐다. 예수의 모습을 상상으로 그림으로써, 그들은 예수와 "실제로" 만나고 대화하고 교제를 한다. 카톨릭을 포함한 많은 신비주의 관상가들에 의해서도 "구상화"는 증진되어 왔다:

"그리스도가 당신 앞에서 십자가 위에 계신 것을 상상하고, 그와 대화를 시작하라"

"누구든지 먹을 때에는,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서 먹고 마시고 보고 말하는 것을 상상하고 그것을 따르도록 노력해야 한다" - "영적 훈련"/예수회 이그나시우스 로욜라

 

"나는 환상 속에서 뿐 아니라 실제 현실 속에서도 그분(예수)께 말할 수 있다는 얘기다. 주님과의 이 영적 접촉이 명상의 참 목적이다." - 토마스 머튼

 

"그리스도의 빛이 당신의 손을 통해 흘러서, 당신의 아이가 그 날 겪은 모든 마음의 상처를 치유했다고 상상하십시오" - 리차드 포스터 

그 외에도 복음주의 저술가인 캘빈 밀러는 "우리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창조해야 한다"고 말한다:

상상(구상)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앞에 옵니다...그리스도와 대화하는 중에...나는 그분의 연갈색 눈...적갈색 머리(의)영광을 마십니다.

아니라고요? 그분의 머리가 검다고요? 눈은 갈색이라고요? 그렇게 하세요...우리가 서로 다른 이미지를 갖게 되더라도, 그분의 모습은 내게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에게도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생명력은 이미지에 있습니다.

각자가 그린 모습대로 예수가 나타난다면, 참으로 예수는 한 모습을 가진 실체일 수 없다.

 

기독교 속으로 칼 융의 오컬틱한 "기억의 치유"(내적 치유)를 소개한 아그네스 샌포드는 그녀의 오컬트 수행에 관해 말한다:

나는 스스로를 여덟 살짜리 소년으로 구상하기 시작했다.

"예수께서 나타나는 상상을 할 수 있는지 보십시오" 세미나 강사는 지시했습니다. "그분이 당신께로 걸어 오시도록 하십시오."

놀랍게도 예수께서는 캄캄한 놀이터에서 천천히 내게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는 사랑과 포용의 자세로 내게 손을 펼치셨습니다...

더 이상 나는 장면을 창조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이 내게 다가와 내 등에서 짐을 들어올렸습니다. 그가 너무 힘차게 하는 바람에 나는 의자에서 튕겨 올랐습니다.

이들은 구상화 속에서 만난 예수와 함께 과거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서 당시의 죄를 용서받고 치유를 경험한다고 주장한다. 아그네스 샌포드의 내적 치유의 제자인 루스 카터는 마약과 범죄에 빠져 스스로를 "사생아"로 여기는 젊은 여성에 대해 말한다. 루스의 해결책은 이 여성을 "유도 명상"(誘導 Guided Meditation)으로 이끄는 것이었는데, 거기서 그녀의 간음행위 중에 예수가 "계신" 것으로 구상화함으로써 이 행위를 "거룩하고 순수한 하나님의 행위"로 만들었다고 한다.

 

플로리다 거짓 부흥의 타드 벤틀리의 과거 홈페이지에는 "유도 구상화"(Guided Visualization)에 관한 코스가 소개되고 있었으며, 이 구상화를 통해 삼층천을 볼 수 있으며, 특별히 그는 이를 통해 죽은 선다 싱을 만났다고 주장했다. 타드 벤틀리와 패트리샤 킹의 컨퍼런스에 참석했던 한 성도의 증언을 들어 보자:

나는 그들의 "삼층천" 유도 구상화에 대해서 모르는 채 패트리샤 킹(5일간)과 타드 벤틀리(2일간)의 컨퍼런스에 참가해서 삼층천 방문을 상상하기 - 유도 구상화하기 - 시작했는데, 나는 아직 그것들이 실제로는 어둠의 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뉴에이지는 그것들을 스피릿 가이드라고 부르는데, 그것들은 악령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삼층천 방문에 관한 타드 벤틀리의 테이프를 집에서 들으려고 사가지고 왔다. 나는 거실 바닥에 누워서 삼층천을 구상하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있었고 그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자 몸이 갑자기 걷잡을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으며 움찔움찔하고 신음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마자 내 몸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나는 몸의 어느 부분도 움직일 수 없었으며, 나는 이것이 악령이 나를 장악하려고 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온 힘을 다해서 "하나님 나를 구해 주세요. 예수님 도와 주세요"라고 외쳤다. 내가 주께 외치자 내 몸이 부드럽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날 밤에 나를 구해주셨고, 나는 그로 인해 영원히 감사할 것이다. 나는 밤새 울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으며, 내게 안수했던 손들과 나 스스로 불러들인 미혹을 끊어버리느라고 밤을 보냈다...

 

["유도 구상화"는 최면술과 비슷한 방법으로서, 동양명상과 뉴에이지뿐 아니라 대체의학에서도 치유의 방법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궁금하신 분은 "유도심상"으로 검색해 보기 바랍니다.)

자료: "당신의 스피릿 가이드를 만나라"는 유도 명상/구상화 비디오로, 스피릿 가이드를 불러들이는 구체적인 유도의 내용이 담겨 있다]

 

아그네스 샌포드 이후 존 윔버 등의 은사갱신주의자들은 오컬트로부터 유래된 내적 치유를 신봉해 왔지만, F. V. 스콧은 이렇게 적는다:

은사갱신의 오랜 지도자였던 돈 마짜트는 데이브 헌트의 기독교 속의 미혹(Seduction of Christianity)을 읽은 결과로서 내적 치유에 관한 책을 썼다. 헌트의 주장에 충격받은 그는 진실을 찾기 시작했다. 헌트가 부도덕한 선정주의자였는가 아니면 내적 치유를 증진하던 인기 은사주의자들에게 은폐의 책임이 있었는가? 놀랍게도 그는 내적 치유의 오컬트적, 심리학적인 기원에 대한 헌트의 분석이 옳았음을 발견했다...주제에 대한 철저한 리서치를 통해서 마짜트는 내적 치유에 관한 네 개의 기본 진실을 지적했다:

  • 내적 치유는 성경을 토대로 한 것이 아니라, 무신론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오컬티스트 칼 융의 심리학 이론을 토대로 한 것이다.
  • 내적 치유는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에 위배된다.
  • 내적 치유는 과학적 진리에 바탕한 것이 아니라 잠재의식 이론에 바탕한 것이다.
  • 내적 치유의 요소인 구상화는 기독교와 어떤 관련도 없으며, 스피릿 가이드(영계 안내자)를 찾는 오컬트 기법이다. 

또한, 오랫동안 뉴에이지의 미혹을 연구한 콘스탄스 컴베이는 그녀의 유명한 책 "무지개의 숨겨진 위험들"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뉴에이지에서) 사람들은 또한 심리기술을 연구하도록 권장을 받는데, 이는 사탄 같은 영적 존재와 관계를 맺는 데에서 나타나는 기술로서, 마음에 심상을 떠오르게 하는 것과 자기암시, 최면, 이미지에 의해 인도되는 것 등이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바라는 것을 그림으로써 실체를 창조한다는 오컬트의 구상화는 동기와 방법에서 매우 비성경적인 사술일 뿐 아니라, 이를 통해 마귀와 친숙령들의 거짓 계시와 치유 등의 현상이 나타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고 하겠다. 아울러, 이런 비성경적 현상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받아 들이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할 것이다.

 

데이브 헌트의 "기독교 속의 미혹"의 일부 내용을 소개하면서 끝을 맺는다.

샤머니즘적 구상화는 "정신 연금술"의 실천으로 물질 세계를 창조하거나 조직하려는 시도이다. 이것은 전 우주가 정신에 의해 창조된 환영(幻影 흰두교의 마야maya)이라는 고대 마법사의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샤마니즘적 구상화의 주도적인 지지자중에 한 사람인 아델라이드 브라이는 이것을 "당신의 실재를 창조하기 위해 당신의 정신력을 신중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구상화를 사용하여 가질수있다...."고 서술한다. 이것은 부두교 사제들과 마법사들이 아직도 저주와 치료를 위해 사용하는 고대의식 마법이지만, 지금은 만일 우리가 이것을 일으키게 하는 방법만 안다면 우리 모두가 소유한 소위 말하는 무한한 인간의 잠재능력에 포함된 중립적인 정신력으로 간주할 수 있다.

 

아그네스 샌포드는 심상(心像 이미징 imagery)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병자를 치유하려면 "창조적인 능력 곧 하나님과 거의 같은 창조적인 상상의 부분을 발전시키는 정신적인 훈련이 요구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크리스천 싸이언스와 다른 정신 분파들의 교훈이다.  원시 미신을 수년동안 그와 같은 믿음으로 포장한 후, 현대인은 "창조적 구상화"에는 믿을 수없는 힘이 있다는 것을 결국 발견하고 있으며, 그것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적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실바 마인드 콘트롤, EST, 그리고 다이아네틱스와 같은 대중적이고 힘있는 신비술 방법들은 모두 상당히 구상화에 의존한다. 

 

구상화는 놀랍도록 쉽게 마법사들과 샤먼들이 "스피릿 가이드"라고 부르는 것과 접촉하게 해준다. 하르너는 "샤먼은 최소한 하나 이상의 스피릿 가이드를 개인적으로 부릴 수 있다. 영이 없다면 사실상 샤먼이 될수 없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이나 "예수님" 또는 기도의 대상을 구상화할 때 일반 그리스도인들은, 샤먼들이 주장하는 똑같은 절차를 따라서 마법사의 세계로 인도하는 "마법의 문"을 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샤먼들이 오랫동안 영적 존재들과 접촉하고 거래하기 위하여 영적 세계로 들어 가는데 사용해온 이 단순하지만 힘있는 기법들은 오늘날의 의학, 심리학, 공동동기부여, 그리고 교육 분야에서 인정을 받아왔다. 놀랍도록 증가하는 많은 수의 기독교 지도자들 또한 이를 조장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그들은 우리에게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구상화하라고 권하면서 우리가 마음으로 창조한 형상이 실제로 예수님이 되어 우리와 진짜로 접촉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하는 추가 참고자료입니다]

다음은 요가 수행 중 구상화를 실행하는 것에 대한 한국요가협회 자료입니다. 관상을 통한 구상화의 예를 볼 수 있습니다.

"금강살타 수행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먼저 수행처에서 금강 결가부좌의 상태로 선정인을 유지한다. 그리고 나서 금강살타에 대한 본격적인 관상법을 시작한다. 먼저 유가행자는 자신의 정수리 위에 연화좌와 달의 좌복 위에 붓다와 스승의 본질을 구족하신 금강살타의 희고 빛나는 얼굴을 관상한다. 그리고 금강살타의 가슴 쪽으로 향한 오른손에는 금강저를, 허리 쪽으로 향한 왼손에는 요령을 들고 계신 것을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관상한다. 대락의 불모가 금강살타를 안고 계신다. 금강살타의 가슴에 있는 연화대 위 월륜의 중앙에 만트라 종자 훔이 있고, 그 주위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금강살타 만트라가 돌면서 빛나고 있다. 거기에서 하얀 감로수가 끊임없이 흘러내린다. 쌍신의 연결 부위에서 흘러 나와서 자신의 정수리로 녹아 들어와서 몸과 마음의 모든 카르마를 정화시킨다...이러한 예비적인 금강살타 수행이 탄트라의 본 수행에 들어가서는 금강살타와 내가 하나가 되는 합일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티벳 수행은 탄트라 입문 이전부터 직접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구상화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추가 2009/9/24] 다음은 불교적 배경에서 채널링(영접)하는 수행자의 사이트<<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형상에너지란 우주의 조화로운 기운을 형상으로 시각화 한 것, 이미지의 형태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몸에 지니고 있거나 바라보게 되면 그것으로부터 발산되는 조화로운 에너지가 우리의 시각을 통해서 그리고 육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게 되어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승화시키며 경락이 열리고 기(氣)의 순환이 일어나게 됩니다.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소주천, 대주천이 열리게 되고 요가에서 표현하는 쿤달리니가 각성되며 프라나가 충만됩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건강 및 정신적인 안정, 수행의 향상 효과를 가져다 주게 됩니다.

[추가 2009/10/5] 뉴에이지 오컬트에서는 "아스트랄 투사(여행)"라는 행법이 수행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육체로부터 분리된 아스트랄체(계)로 의식을 옮겨서 아스트랄체를 구상화함으로써 구상화 대상의 에너지를 빨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체의 형상을 우리가 원하는 대로 변형시킬 수 있다...이것은 자신의 에너지를 작용, 통제하거나 특정한 에너지를 일깨우는 데 이용되는 행법이다...에너지의 특성은 우리가 선택하는 신의 속성에 상응하게 된다. 예를 들어, 비너스 여신의 형상을 취하면 사랑의 에너지를, 토트의 형상을 취하면 지혜를 끌어당겨 올 수 있다.

 

아스트랄 여행의 개념은 우리의 육체가 보다 고급한 의식, 즉 자아에 의해 통제되는 존재라는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 자아는 '불멸의 영', '성령' 등으로 불릴 수도 있다. 그것은 육체의 죽음으로도 멸하지 않고 다른 화신으로 이어지게 된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안내자의 목소리의 근원이다.

 

이마에 위치한 차크라에는 아스트랄체의 시력인 제 3의 눈이 들어 있다. 아스트랄 시력을 총해 당신은 형상들을 만들 수도 있다. 실제로 당신은 자시의 마음 또는 자아로 특별한 형상을 창조할 수 있다. 자아는 당신이 인식하는 이미지들의 수용체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해, 당신의 자아로 하여금 어떤 대상을 보도록 의지를 가지면 그 결과 그것이 가시화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어떤 의미로는 마치 조각가가 진흙 덩어리로 조각을 하듯이 당신의 마음으로 오라 에너지를 조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마법사의 작업서" 에서

[추가] 아스트랄체는 카발라의 4계 중 예치라계에 해당합니다. 다음은 창조에 관한 카발라의 가르침입니다.

물질계(아시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스트랄계에 대응물이 존재한다. 이 대응물은 아스트랄체로 불린다. 육체 때문에 아스트랄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스트랄체가 존재하기 때문에 육체가 있다. 물질계에 존재하기 위하여 모든 것은 먼저 아스트랄계에 존재해야 한다. 그러므로 삶에 무엇인가를 창조하고 가져오기 위해서는 먼저 아스트랄계에 그것을 창조해야 한다. 이것이 회색마법의 근간이 되는 원칙이다. - <Modern Magic> 카발라 마법서

[추가 2009/10/6] 당연하게도, 뉴에이지 사상의 토대를 제공해 주는 영지주의 문서들에서도 구상화는 나타납니다. 영지주의 나그함마디 문서의 연구가인 일레인 페이절스는 영지주의 "빌립 복음서"의 내용을 인용하며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신성한 실재를 인정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보고 있는 것으로 변할 수 있다".

...네가 영을 보았으니 너는 영이 되었다. 네가 그리스도를 보았으니 너는 그리스도가 되었다. 네가 [아버지]를 보았으니 [너는] 아버지가 될 것이다...네가 네 자신을 보면, 너는 네가 본 것이 [될 것이다].

영지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기독교에서 그리스도"가 된다.

[추가 2009/10/8] 다음은 뉴에이지 명상 수행 사이트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인간의 '신성'과 '창조능력'에 관한 문구입니다.

삶의 본질은 <창조>와 <체험>이다. 인간은 우주전체의식이 개체몸에 들어와 그 몸을 통하여 우주전체의식인 자신을 <자각>하고 <체험>함으로서 물질계와 의식계를 넘어서 존재하는 자신을 이해하고 장차 근원적 존재로서의 무한한 <창조>능력을 갖추어 나가는 신비로운 존재이다.

[추가 2009/10/15] 히브리 신비주의 오컬트인 카발라 마법에서도 구상화(심상心像)를 이용합니다.

[카발라 멘탈 마법 체계]

1. 구체적인 목적을 결정하면 주어진 마법 문구에 따라 문장을 작성한다.

2. 마음에 이미지를 만드는데(심상心像) 이미지에 당신이 개입되어야 한다.

3. 일어나서 5분, 잠자기 전에 5분, 목적을 말하고 심상한다.

4. 낮 동안 목적에 반하는 생각이 떠오르면 반대 생각이 사라질 떄까지 즉시 (만트라를 하는 것처럼) 마법 문구를 되풀이하여 읽는다.

 

[대천사 초환(invocation) 절차]

1단계: 중심으로 돌아와서 양팔을 옆으로 펴 십자가 모양을 만든다...에너지가 당신을 통하여 흐르는 것을 느끼고 자신을 우주의 중심에서 빛나는 빛의 십자가로 심상한다.
2단계: 당신 앞에 작은 언덕과 그 위에 있는 대천사를 심상한다. 대천사는 약간 자줏빛을 띤 노란색 로브를 입고 있다. 카두세우스 지팡이를 들고 있으며 로브는 바람에 물결친다. 그 천사 뒤로부터 불어오는 미풍을 느껴라.
3단계: 뒤에 있는 대천사 모습을 심상하는데 약간 오렌지 빛을 띤 포른 로브를 입은 모습을 심상한다. 그 천사는 컵을 들고 폭포에 둘러싸여 있다. 습기를 느끼도록 하라.
..
6단계: 왼발을 왼편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또 다른 아름다운 푸른 펜타그람이 당신을 밝히면서 주변에 있음을 심상하고..
7단계: 황금빛 헥사그램을 당신 심장이 있는 바로 그 곳에 심상하라...

[추가 2009/11/8]

1. 긍정적 정신태도(Positive Mind Attitude)를 통한 성공과학의 원조 격인 나폴레온 힐의 상상 속의 "상담자"들에 관해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들은 에디슨, 다윈, 링컨, 나폴레온, 포드, 카네기...이었다. 매일 밤 나는 "나의 보이지 않는 상담자들"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들과 상상의 상담회를 열었다. 이 상상의 상담회에서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을 걸어 그들에게서 지식을 얻기 위하여 그들을 방문했다...
몇 달 동안 매일 밤 이런 과정을 거친 후에 나는 이들 상상의 인물들이 분명하게 실제 인물이 되는 것을 발견하고 몹시 놀랐다. 이들 아홉 사람은 각각 개인의 특성을 발전시켰으며 그것은 나를 놀라게 했다...

2. 데이비 헌트의 또 다른 저작인 "기독교 속의 미혹"에는 위의 조 목사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글이 들어 있다.

조 목사는 기적들이 모두 "4차원의 법칙"에 따라야 할 뿐 아니라 신비주의자를 포함하여 어느 누구든지 "4차원의 법칙을 적용하여... 기적을 행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마치 "힘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 목사는 기도함에 있어서 왜 신비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인들처럼 기적을 행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서 그는 "성령"으로부터 이러한 사실을 배웠다고 우리에게 확신하다. 조 목사는 일본 신비주의자들인 소카 각카이를 추천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번영의 모습을 구상화하고 되풀이하여 구절들을 말해서... 인간의 영적 4차원을 발전시키므로 기적들을 행하기 떄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꾸짖는다. (참고문헌: "4차원"의 50 페이지, 64 페이지 등)

위의 책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함께 나와 있다.

소카 각카이(Soka Gakkai: 일본 밖에서는 일반적으로 Nichiren Shoshu로 더 알려져 있다)는 "남묘호랑겟교"라는 주문(mantra)을 외워 "내부의 생명의 근본적인 영원성을 외부의 영속적인 법칙의 정수로 융화시킨다. (참고문헌: 聖敎신문<<)

참고로, 소카 각카이(Soka Gakkai)는 創價學會의 일본발음이다.

네이버백과 창가학회(SGI)<<

 

3. "늦은 비의 대부흥"이 곧 온다고 주장하는 신사도 운동권의 한 선교사는 환상을 보는 법을 가르치며 구상화를 사용한다.

그는 "누구나 볼 수 있는 [환상훈련법]"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런 식으로 1시간 정도만 따라 하면 다들 [칼라 동영상 환상]들을 보게된다고 한다. 이것을 아래에 캡처한 어느 명상센터에서 말하는 심상화 연습방법과 비교해 보라. 모두 유도명상, 최면과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이 오컬트가 아니면 무엇인가? 

 [명상센터 사이트<<에서]

 [같은 사이트<<에서]

 

[추가 2011/2/8]

릭 워렌, 밥 버포드, 존 맥스웰, 빌 하이벨스 등과 함께 Lead Like Jesus<<를 이끄는 "청바지를 입은 예수"의 저자 로리 베스 존스는 "CEO 예수"라는 책에서 예수조차 구상화를 통해서 그의 존재에 이르렀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예수는 정기적으로 자신의 노력들에 대한 성공을 구상화했다...예수는 자아지식과 자아사랑이 충만한 분이었다. "내가 그로라" 라는 그분의 말씀은 그렇게 되어진 자신에 대한 말씀이다.

[추가 2011/9/1]

1. 구상화의 또 다른 이름인 심상화(心想化)는 요새 유행하는 소위 "코칭"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문서와 시각화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 심상화(心想化)하는 것도 아주 좋은 방법이다. 목표를 달성했을 때 감정을 미리 느껴보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실현 과정을 보다 구체적으로 마음속으로 그려보라.    출처<<

2. "심상화 명상"으로 검색한 결과<<에서 찾은 어느 문서 제목이 "마법의 기본, 심상화(영안)<< "이다. 그 내용을 캡처한 것이다.

 

 

 

3. 마법에서도 구상화/심상화를 사용하는 것을 이미 말했지만 또 다른 증거로 "소환마법실천" 책의 내용<<을 캡처/인용한다.

 

 

[추가 2011/12/22]

블로그의 다른 글<<에 있던 내용을 여기에 다시 옮긴다.

레노바레의 신비/관상영성의 리차드 포스터도 구상화/시각화하는 훈련을 증진시키는데, 각 개인은 그의 몸을 떠나서 "외계 깊숙히 들어가" "영원한 창조주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의깊게 듣고 지시를 받는다고 합니다. ["영적 훈련과 성장" / 리차드 포스터] 

이것은 아스트랄 여행과 매우 유사하다. ([2009/10/5]에 추가한 내용 참고) 위의 책에는 이런 내용이 더 나와 있다.

당신의 상상 속에서, 빛으로 빛나는 당신의 영적 몸이 육체로부터 일어나 나가는 것을 허락하십시오. 풀밭에 누워 있는 당신 자신을 뒤돌아 보고 곧 되돌아 올 당신의 몸을 확인하십시오. 살아있고 활기찬 당신의 영적 자아가 구름을 뚫고 올라가 성층권으로 오르는 것을 상상하십시오... 외계로 점점 더 깊숙히 들어가서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영원한 창조주의 따뜻한 임재만이 존재하는 곳까지 가십시오. 그분의 임재 안에 머무르십시오. 예기치 못한 것을 기대하며 조용히 들으십시오. 주어진 모든 지시에 주목하십시오.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생기면, 의식 속으로 떠오르는 단순한 사람의 생각과 내적으로 마음을 운행하는 참영(True Spirit)과를 손쉽게 구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영적 훈련과 성장" / 리차드 포스터]

 

[추가 2011/12/30]

 "부의 대유행"(The great Wealth Pandemic)이라는 뉴에이지 책 번역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당신은 지금 바로 바라는 것을 마음에 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상상하기만 한다면, 지금 즉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생각할 수 있으며, 어떠한 느낌이든지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시각화[구상화]는 기본적으로 당신이 소망하는 것을 얻게 되었을 때, 어떤 기분이 들지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분을 유지하는 겁니다. 샘솟는 열정과 무한한 상상력으로 이것을 연습하면서, 스스로 원하는 경험을 자석처럼 끌어당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우주의 법칙<<입니다...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명상을 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당신은 명상을 통해 내면을 정화하고 본연의 자아를 회복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당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게 됩니다.  (출처<<)

[추가 2012/1/25]

"꿈꾸는 다락방"이라는 책도 시각화(visualization 구상화)를 증진한다. (아래 본문에 나오는 에스테 로더는 "채널링"을 한다고 한다. 구상화를 통해 스피릿 가이드와 접속하면 당연히 따라 오는 것이 채널링이 아닌가 한다. 출처<< )

성공의 마법을 걸어주는 VD라는 건 대체 무엇인가? ... 그것이 바로 '생생하게(Vivid) 꿈을 꾸면(Dream) 이루어진다(Realization)'는 R=VD 법칙이다. (책소개<<에서)

치료 VD를 하는 데는 돈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저 마음 속으로 가만히 상상만 하면 된다.

에스테 로더가 '시각화의 힘'이라고 부른 그 힘을 이 책에서는 공식 R=VD라고 부른다.

에스테 로더는 자서전에서 성공을 끌어들이는 에너지를 갖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당신의 꿈을 시각화해라... 이미 성공한 모습을 마음속으로 생생하게 그리는 습관은 목표를 달성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내용 중에서)

 


# 사탄의 성육신

유명한 투자회사의 CEO요, 한국어를 포함해서 수십 개 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며, 지적이고, 신사적이고, 잘 생기고, 춤 솜씨도 좋고, 매너도 좋은 중년 남성, 존 밀턴. 놀라울 정도로 매력적인 이 남자의 정체는? 사탄이다. 만일 사탄이 오늘날 현대사회에 성육신(incarnation)한다면 그는 분명히 '데블스 에드버킷'의 존 밀턴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왜 하필 이름이 '존 밀턴'일까? 그건 아마도 '실낙원'을 연상케 하기 위한 장치일 게다. 그리고 이건 이 영화가 창세기 3장의 뱀의 유혹과 실낙원 사건을 재해석하겠다는 의도를 노출한 것이다. 실제로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존 밀턴이 캐빈 로맥스에게 크리스타벨라와 섹스를 하라고 설득하는 신으로 설정되어 있다. 상징과 은유로 가득 찬 매력적인 이 신에서 에덴동산은 존의 집무실로, 뱀은 존 밀턴으로, 아담은 캐빈 로맥스로, 이브는 크리스타벨라로, 그리고 선악과는 섹스로 재현되어 있다. 그 옛날 에덴동산에서 뱀이 아담에게 다가가 유혹했듯이, 이곳에서 존은 캐빈을 유혹한다.

이 영화에서 나의 시선을 유독 끄는 대상은 바로 사탄, 존 밀턴이었다. '데블스 에드버킷'은 사탄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놀라운 독창성을 보여 준다. 사실 사탄은 할리우드 장르 영화가 심심치 않게 사용해 오던 소재다. 전통적인 호러 영화에서 사탄을 묘사하는 방식은 대체로 이런 식이다. '오멘' 유의 영화에서는 사탄을 감히 저항할 수 없는 초월적이고 거대한 힘으로, '엑소시스트' 유의 영화에서는 타인의 신체를 강탈하거나 빙의하여 그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악령으로, '드라큘라' 유의 뱀파이어 영화에서는 사람의 피를 좋아하는 흡혈귀로 묘사한다. 대체로 사탄은 섬뜩하고,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며, 무섭고, 폭력적인 살인자로 그려진다. 선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순수 악이다.

하지만 '데블스 에드버킷'에서 사탄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그가 하는 한 마디 한 마디는 도무지 이치에 어긋남이 없다. 존 밀턴이 캐빈에게 "믿는 대로 행동해, 이젠 질 때야"라고 했을 때나 재판에서 손을 떼고 이제 그만 아내를 돌보라고 조언할 때, 사탄은 캐빈보다 훨씬 정직하고 인간적이다. 그는 누구도 귀 기울여 주지 않는 외로운 16세 소녀의 말에 처음으로 귀 기울여 주는 친절한 사람이었으며, 그녀에게 성경 말씀을 알려 줄 정도로 성경에 해박하다. 스스로 말하듯 그는 사람을 강압적으로 굴복시키거나 조종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무대만 만든다. 나머지는 자신에게 맡긴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인격적이다. 그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못하게 막거나, 원치 않는 것을 억지로 시키는 법이 없다. 그는 인간의 욕구를 존중하고 비판하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나는 네 편이야."

'데블스 에드버킷'이 사탄을 묘사하는 방식은 유혹자다. 사탄이 애용하는 두 가지 무기가 있는데, 하나는 폭력이고 또 하나는 유혹이라 할 것이다.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폭력이 강제적이라면, 유혹은 비강제적이다. 무엇이 더 치명적일까? 폭력은 사람의 몸을 얻을 수 있지만, 유혹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 하여 유혹은 폭력보다 더 치명적이다. 통치 수단의 측면에서 봤을 때 폭력에 비해 유혹이 훨씬 효율적이다. 로마가 1000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군사력 때문이 아니라 유혹의 기술 때문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들이 간파했듯이 서구 자본주의사회가 극심한 모순에도 붕괴하지 않는 이유는 문화 산업이라는 유혹의 기술 때문이다. 하여 20세기에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기 원하는 사탄은 '데블스 에드버킷'에서 존 밀턴이라는 유혹자로 성육신했다.

# 선악과와 선악과 금령

사탄이 본성상 유혹자일 수밖에 없는 건 인간에게 있는 '자유의지' 때문이다. 존은 캐빈에게 이복동생과 관계를 해서 아이를 가지라고 유혹한다. 그러자 캐빈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존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내가 자원해야 하죠?"

존이 답한다.

"그 망할 놈의 자유의지!"

그렇다. 결국, 최종 결정은 인간의 몫이다. 자유의 상징이자, 인간 조건의 표상인 선악과 앞에서 뱀이 유혹자일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하다. 선악과 앞에서 인간의 마음을 얻기를 바라는 사탄, 그리고 또 다른 편에서 자신을 선택해 주기를 바라며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 인간의 결정을 기다리는 뱀과 하나님, 그 사이에 인간 실존의 자리가 놓여 있다. 이 얼마나 위험하고도 놀라운 자리인가? 이 얼마나 감당하기 벅찬 권한인가?

하지만 이 놀라운 은총은 너무나 자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뱀은 하나님이 질투심 때문에 선악과를 만들어 놓고 먹지 말라고 했다며 하나님을 참소했다. 존 밀턴은 선악과를 만들어 놓고 먹지 말라고 명한 것은 말도 안 되는 모순된 규칙이라며 그를 못돼먹은 사디스트라고 비난했다.

"보되 만지지 마라.
만지되 먹지 마라.
먹되 삼키지 마라. 푸하하하…."

하지만 옛 뱀이 그랬듯이 존 밀턴도 하나님의 심오한 계획을 오해했다. 선악과는 자유를, 선악과 금령은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감당하기 벅찬 자유의 권한을 주신 이유는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하기 위해서다. 오직 자유로부터 참사랑이 나온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자유롭게 사랑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기를 원하셨다. 성서의 가르침은 명확하다. 사랑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과 연합하는 길이고 이것이 바로 구원의 길이라고.

# 모든 것이 테스트다

하지만 인간의 사랑을 원하는 건 사탄도 마찬가지다. 자발적 의지로 자신을 선택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캐빈에 대한 존의 요구였다. 만일 우리가 자발적으로 사탄의 유혹을 따를 때 우리의 의지는 사탄의 의지와 뒤섞인다. 캐빈이 개티스 법정에서 성추행 교사를 두둔할 때, 모예즈 사건 때 교황과 사이비를 똑같이 싸잡아 몰 때, 컬른의 유죄를 알고도 무죄라 주장할 때 그는 그 모든 악을 '스스로' 한 것이다. 예수의 말대로 그 모든 악을 "제 것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캐빈은 존에게 '당신이 시킨 것'이라고 변명할 수 없고 사탄을 비난할 수 없다. 스스로 한 것이기 때문에… 이미 캐빈은 존과 하나다.

그 무시무시한 권능을 소유한 존 밀턴이 캐빈에게 원했던 것은 고작 크리스타벨라의 난자에 수정될 수 있는 정자 한 마리였다. 하지만 그것은 캐빈의 자발적인 순종으로 하는 것이라야 했다. 즉 존이 원했던 것은 사랑으로 이루어진 가족이었다. 존은 그 가족의 가장이 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정체가 뭐냐고 묻는 캐빈에게 존은 "아빠라고 불러"라고 했던 것이다.

진리는 언제나 단순하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지만, 사탄의 유혹을 따르면 사탄의 자녀가 된다. 그래서 말로는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하나 행위로는 마귀의 일을 하는 유대인을 향해 예수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고 하셨던 것이다.

사랑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느냐, 아니면 자발적으로 사탄의 유혹을 따르느냐? 인간의 삶은 늘 이러한 실존적 결단의 순간에 놓이게 된다. 테스트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에게 본질적이다. 팸 게리티가 말했던 것처럼, 그리고 메리 앤이 직감했던 것처럼 "모든 것은 테스트다!" 캐빈이 게티스 법정에서 궁지에 몰렸을 때, 밀턴 채드윅 워터스로부터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을 때, 직장에서 크리스타벨라를 보았을 때, 아내의 푸념을 듣던 중에 전화벨이 울려 올 때, 컬른의 유죄를 확신하게 되었을 때, 이 모든 것이 캐빈을 테스트하는 순간이다. 그뿐만 아니라, 메리 앤이 존 밀턴으로부터 머리를 좀 올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나 뉴욕에 처음 온 캐빈의 엄마에게 존이 다가와 그녀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 줄 때 테스트는 그들도 비껴가지 않았다.

# 사탄이라는 작업가설

하지만 삶을 실존적 결단으로 충만한 테스트의 연속으로 묘사하기 원한다면 굳이 사탄이라는 작업가설이 필요할까? 사르트르 같은 실존주의자들은 신이니, 사탄 없이도 사물과 인간을 설명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우주는 그저 우연히 존재하는 잉여적 존재라고 하면 그만이다. 신이나 사탄이 꼭 필요할까? 꼭 악에 대해서 설명해야 한다면 그건 뭐, 인간의 탐욕이니, 혹은 사회적 일탈이니, 자본주의의 폐해니, 타락한 다국적 기업의 담합과 카르텔… 뭐 이런 심리학적, 사회학적 설명으로도 충분치 않은가?

   
 
  ▲ 서구 자본주의사회가 극심한 모순에도 붕괴하지 않는 이유는 문화 산업이라는 유혹의 기술 때문이다. 하여 20세기에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기 원하는 사탄은 '데블스 에드버킷'에서 존 밀턴(사진, 알 파치노 분)이라는 유혹자로 성육신했다. (영화 '데블스 에드버킷' 갈무리)  
 
'데블스 에드버킷'의 존 밀턴도 따지고 보면 실존하는 특정 인물이 아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존 밀턴은 사실 캐빈 자신임이 밝혀진다. 어찌 보면 존은 캐빈의 투사였다. 존은 캐빈뿐만 아니라 얼마든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친구 기자 래리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에디 바준을 때려죽이는 노숙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존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누구나 될 수 있다. 하지만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말은 결국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닌가? 또 누구나 될 수 있다는 말은 아무도 아니라는 말이 아닌가? 사탄은 과연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을 통과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아담 이야기에서의 '뱀의 정체'에 관한 물음이기도 하다. 대체 뱀은 뭔가? 걸어 다니고 말도 하는 뱀이라니 혹시 그건 고도로 지능적인 공룡인가? 그건 왜 순진무구의 낙원에 존재했을까? 만일 아담이 그 자신의 의지로 선악과를 따먹었다면 왜 뱀이 필요할까? 판도라의 이야기에서처럼 뱀 대신 마음속에서 일어난 욕망의 불꽃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리꾀르(P. Ricoeur)의 말대로 뱀은 아담 신화의 가장 심오한 미스터리 중 하나다.

현대주의자들은 사탄 없이도 얼마든지 세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최근 학자들은 다시 사탄이라는 낡고 오래된 신화적 용어를 끄집어내고 있다. 상담심리학자 스캇 펙(Scott Peck)은 '악의 심리학'이라는 부제가 붙은 그의 <거짓의 사람들>에서 악은 실존할 뿐만 아니라 과학적 관찰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했다. '스탠퍼드 감옥 실험'을 했던 필립 짐바르도(Philip George Zimbardo)는 인간으로 하여금 매우 비합리적이고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게 만드는 외부의 어떤 힘이 실존하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흥미롭게도 짐바로도는 이를 가리켜 '루시퍼 효과(rucifer effect)'라고 명명했다.

신학자 중에서도 사탄을 근본주의자들과는 다르게 보는 이들이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사탄을 귀신이나 악령으로 보기보다는 이 세상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구체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정사와 권세'라는 관점으로 보려는 이들이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헨드리쿠스 벌코프(Hendrikus Berkhof), 존 요더(John H. Yoder), 월터 윙크(Walter Wink), 마르바 던(Marva Dawn), 그리고 자끄 엘륄(Jacques Ellul) 등이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전부는 아니지만 대체로 신약성서를 퇴마록처럼 읽는 피터 와그너(Peter Wagner)식 독법을 반대한다. 이들은 사탄의 존재를 찾기 위해서 빙의 현상이나 주술적 접촉 혹은 흑마술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탄에 대한 그들의 관점은 무엇일까? 여기서 잠깐 자끄 엘륄의 마귀론을 살펴보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마귀의 마지막 유혹은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케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런 확신을 하게 되는 순간 즉시 환상과 망상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마귀는 실존한다. 하지만 그는 전통적인 마귀론을 거부한다. "무대 뒤의 다른 세계란 없다.…신비나 악한 저편의 세계에 대한 열림도 찾을 수 없다." 즉 루시엘이니, 루시퍼니, 아마겟돈이니, 이런 건 마귀에 대해서 허상일 뿐이다. 이런 고대의 언어로 사탄을 이해하려는 것은 은유와 실제를 혼동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귀는 무엇인가? 엘륄에게 있어서 마귀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다. 한마디로 그것은 반창조(anti-creation), 곧 창조 세계의 파괴다. 그가 하는 일은 "지상에서의 상황을 비극적으로 만들고, 인생을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만들며, 신앙을 파괴하고, 신뢰를 없애며, 인간들을 고통 받게 하고, 사랑을 말살시키며, 소망이 태어나는 것을 방해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데블스 에드버킷'이 묘사하는 사탄의 모습이기도 하다. 사탄은 캐빈 부부가 아이를 낳지 못할 정도로 캐빈을 바쁘게 만들고, 불륜을 일으키고, 아내를 신경쇠약에 걸리게 하여 끝내는 자살하게 하는 힘이다. 그뿐만 아니라, 사탄은 미성년자 성폭행범, 살인범, 그리고 사이비 종교 지도자에게 면죄부를 주어 사회로 내보내게 하는 비합리적 사법 시스템 속에 존재하며, 세계 곳곳에서 무기 거래를 하고, 화학무기와 산업폐기물을 다루고, 이를 위한 돈세탁도 거침없이 하는 부도덕한 다국적 기업 속에 거하기도 하다. 존 밀턴, 곧 사탄은 그것들 가운데 실존하며, 그 모든 것들의 우두머리다.

사탄이 아니고서는 인간 영혼이나 이 사회를 설명할 수 없는 여분의 영역이 존재한다. 주체철학자들은 인간 영혼을 순수하게 자유로운 상태에서 사유하고 결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주체로 상정했지만, 현실에서의 개인이나 집단은 꼭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하지만은 않는다. 그들로 하여금 원치 않는 방향으로 행동하게 하는 외부의 강력한 힘(power)이 존재한다. 혹은 월터 윙크식으로 말하자면 그 속에 편입된 순간 그 일부가 되어 버리는 거대한 사탄의 체제가 존재한다. 그걸 영화에서는 '존 밀턴의 무대'라고 표현했다. 존은 조종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하도록 무대만 만들어 준다. 그런데 그 무대에 올라서기만 하면 누구라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바로 이 여분의 영역, 이곳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며, 이곳이 바로 사탄의 거처다.

영화는 바로 이 여분의 영역, 곧 우리의 삶에는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실존하고 있는 삶의 초월적인 차원들을 장르 문법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데블스 에드버킷'은 법정 드라마로 시작해서, 법정 드라마로 끝나는 일종의 액자식 구성이다. 법정 드라마 장르는 현실 공간, 곧 세속적 일상의 차원을 상징한다. 이 법정 드라마 장르 사이에 여러 장르 복합체가 끼어 하나의 삽화를 이룬다. 이 삽화는 호러를 대표로 누아르, 오컬트, 멜로, 재난 영화 같은 여러 장르가 혼합되어 만들어진 장르 복합체다. 물론 중간에 끼어 있는 이 삽화는 나중에 현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다. 그렇다면 그건 무엇인가? 순수한 가상인가? 아니다. 그것은 세속의 일상 한가운데를 교차하며 지나는 삶의 영적이고 초월적인 차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말하려는 바는 이것이다. 즉 우리의 삶에는 보이는 일상의 차원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초월적 차원도 존재한다는 것인데, 특별히 그것은 우리의 삶에서 숱하게 만나게 되는 테스트의 순간에 그 배후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메시지를 통해 관객에게 각성 효과를 주기를 원하고 있다. 그래서 관객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유혹의 본질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가 우리의 삶에서 숱하게 만나게 되는 그 모든 테스트가 사실은 창세기 3장의 뱀의 유혹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영화는 곤경에 처한 캐빈이 게티스 법정의 화장실에서 고민하고 있는 바로 그 테스트의 순간에서 출발하여 관객을 에덴에서 뱀이 아담을 유혹하는 그곳으로 이끌어 간다. 게티스 법정에서의 테스트는 본질상 에덴에서의 뱀의 유혹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게티스 법정의 화장실에서 캐빈에게 찾아온 유혹이 다른 유혹보다 더 특별하지는 않다. 모르긴 해도 캐빈이 게티스 선생의 변론을 포기한 다음 날 래리와 인터뷰를 하게 될 것인데, 그곳에서 캐빈은 또 다른 테스트를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유혹의 본질 역시 창세기 3장에서의 뱀의 유혹과 본질상 다르지 않다. 이것은 유혹의 본질에 대한 근사한 영화적 통찰인데, 모든 유혹은 창세기 3장의 유혹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1500년 전 오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원죄 논쟁을 언뜻 떠오르게 한다. 당시 오거스틴은 창세기 3장의 뱀의 유혹을 단회적인 사건으로, 펠라기우스는 계속적 사건으로 보았다. 이렇게 봤을 때 영화는 펠라기우스의 성서 이해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이런 신학적 프레임으로 이 영화를 펠라기우스 주의 영화라고 단죄하는 것은 영화와 조직신학 책을 혼동하는 태도일 것이다. 아마도 이 영화는 우리가 삶에서 부딪히는 크고 작은 유혹이 멀리는 선악과를 따먹으면 신처럼 되리라고 했던 뱀의 유혹과 조금 가까이는 예수를 산꼭대기로 이끌고 가서 만국과 영광을 주겠노라 딜을 했던 마귀의 유혹과 본질상 다르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리라. 그렇다면 모든 유혹을 관통하는 유혹의 동질성,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Vanity!'

우리말로 허영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vanity가 유혹의 본질이다. 이글이글 불타는 화염과 태양의 이미지는 원자를 분해할 정도로 뜨거운 인간의 욕망을 상징한다. 그 욕망 중에서도 더 높아지려는 자기애적 상승 욕구가 가장 뜨겁고 강렬하다. 이 뜨거운 욕망의 불꽃은 사탄이 창조한 것이 아니다. 그건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존의 말대로 인간에게 부여한 신의 놀라운 선물이다. 프로이트(G. Freud)가 리비도라고 불렀던 이 생본능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하지만 이 불꽃은 제어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나의 욕구의 불꽃만큼 타인의 욕구 불꽃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제어되지 않는 자기중심적 욕망은 결국 파괴와 죽음만을 남긴다.

사탄이 하는 일은 바로 이것이다. 욕망의 불꽃을 제어하지 말고 발산하도록 자극하는 것. 그래서 모두가 이기고 싶어 하고, 황제가 되고 싶어 하고, 종국에는 신이 되고 싶어 하도록 욕망을 발산하라는 것, 이렇게 그저 속삭여 주기만 하면 된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걸려들게 되어 있다. 그 옛날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후손들도 조상을 본받아 오늘도 거대한 바벨탑의 꼭대기를 향하여, 존 밀턴의 집무실이 있는 꼭대기 층을 향하여 부단히 오르고 있다. 그래서 존은 "허영심이 나의 최고의 기호품"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 영적 전쟁

'데블스 에드버킷'은 후반부로 가면서 존 밀턴의 정체가 밝혀지며 점차 호러물이 되어 간다. 하지만 영화는 관객이 기대하는 장르적 관습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무엇보다도 관객을 당혹게 하는 건 악마와 맞서 싸울 영발이 출중한 퇴마사가 없다는 것이다. 장르 관습상 관객은 신앙심 깊은 캐빈의 엄마가 퇴마사 노릇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캐빈의 엄마는 사탄의 애인으로 밝혀졌다. 유일하게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메리 앤도 일찍 자결했다. 밀턴 채드윅 워터스의 비리를 알고 있다는 위버위원회나, 그에게 맞선 에디 바준은 존 앞에 깜냥도 안 된다. 그렇다고 존의 손에 놀아난 캐빈의 힘으로 존과 맞서 싸워서 도무지 이길 것 같지 않다. 그럼 누가 악마를 처단한단 말인가? 이 심각한 힘의 불균형은 관객을 불편하게 한다.

이런 식의 관습 폐기는 악마를 무찌를 수 있는 무기가 없다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전통적인 호러 영화에서는 악마와 맞서 싸우는 영웅과 그가 애호하는 무기가 반드시 나온다. 하지만 성당 앞 성수 통에 손가락을 넣고 조롱하는 존을 보는 순간 관객의 기대는 무너져 내린다. 무엇으로 악마를 없앨 수 있단 말인가? 십자가? 마늘? 성경 구절? 어림없다. 캐빈의 엄마에게 마태복음 10장 16절을 가르쳐 준 이가 바로 존 밀턴이다. 그러다 보니 플로리다 한적한 시골 예배당에서 "Roman Sixteen Nineteen says!!~"라는 찬송가를 있는 힘껏 불러 대며 영적 전쟁을 펼치고 있는 교인들의 모습이 한심해 보일 수밖에…. 결국 캐빈이 기껏 가지고 간 무기는 손바닥만 한 권총이다. 존을 향해 권총을 갈겨 대며 분노를 터뜨리는 캐빈의 모습은 누구 말마따나 애잔하기까지 하다.

영화는 전통적인 축사나 축귀 방식으로 사탄과 대결하는 것이 무익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물론 오늘날에도 축사나 축귀 현상은 보고되고 있다. 하지만 영화에 따르면, 사탄이 보기에 피터 와그너식 영적 전쟁이란 유치한 어린애 장난스러워 보일 뿐이다. 자, 보라.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에게 들러붙은 귀신을 내쫓으며 그들을 고치셨다. 하지만 예수는 마귀의 자녀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축사를 행하신 적이 한 번도 없다. 결국, 예수는 성전을 중심으로 결탁된 거대한 권력 카르텔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다. 이런 마귀는 축사해도 나가지 않는다. 영화는 바로 이 대마귀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재벌의 무한 탐욕, 국가권력의 폭력, 사법기관의 기만과 거짓, 교회와 목회자, 신자의 위선, 다국적 기업의 횡포, 제삼세계 국가에 대한 막대한 국가 부채를 통한 항구적 지배, 자원의 고발, 갖가지 오염과 파괴, 그리고 황금만능주의와 소외…. 자, 이 모든 것들과 싸우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땅 밟기? Roman Sixteen Nineteen Says!를 목청껏 부르기? 축사 기도? 그렇게 해서 그 악이 줄어들 것 같은가? 사탄이 순순히 자신의 왕국을 내어놓겠는가? 어림없다. 이미 사탄에 점령당한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텅 빈 뉴욕 시가지를 혼자 걸어가는 캐빈의 부감숏은 바로 그러한 무력감의 시각화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하지만 여기서 영화는 다시 한 번 반전된다. 이 거대한 사탄의 체제 앞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인간이지만, 그러나 사탄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의 자유의지다. 놀랍게도 영화는 모든 초점을 한 점에 집중시키고 있는데, 그건 바로 캐빈의 자유의지다. 이것은 학문적 통찰과도 상통한다.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은 인간이 비합리적이고, 비도덕적인 권위에 65%나 되는 사람이 무조건 복종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하지만 그 비합리적 권위에 35%는 복종하지 않았다.

실존주의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e)은 자신의 아우슈비츠 수감 시절을 기록한 수기에서 인간에게는 여전히 '마지막 하나의 자유'가 있음을 웅변하고 있다.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99%(정확한 수치 아님)의 수감자들은 금세 인간의 존엄을 잃어버리고, 조금이라도 덜 힘들고,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고, 조금이라도 덜 배고프기 위해서 짐승처럼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말았다. 그러나 정작 그를 놀라게 한 것은 끝까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1%의 예외자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타인에게 자신의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눠 주고, 고통스러워하는 이웃에게 다가가 따뜻한 위로의 말을 전해 주며, 그 가혹한 환경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애써 찾으며, 심지어는 타인을 위해서 대신 가스실에 들어가기도 했다.

캐빈의 자살은 바로 이 자유의지의 발현이다. 캐빈은 자신의 마지막 남은 권리를 행사하는 방식으로 자살을 택했다. 그 권리란 온 세상이 사탄의 지배하에 들어가서 단 한 사람의 조력자도 남지 않는 상황에서, 아무리 극심한 외부의 위협과 구조적 압박에도 주변 환경의 강력한 영향력에도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만은 결코 빼앗기지 않는다는 위대한 독립 선언이다. 캐빈의 영웅적 결단이 인간이기를 선택하는 길이며, 사탄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는 진정한 무기이다.

이런 점에서 캐빈의 자살은 메리 앤의 자살과는 조금 다르다. 메리는 자살이라기보다는 사실상 타살당한 것이다. 존에게 유린당할 대로 유린당한 뒤, 팸 게리티가 일부러 건네준 거울 속의 악령을 보고 공포에 질려 목숨을 끊었으니 사실상 타살이다. 하지만 캐빈의 자살은 이와는 다르다. 자신의 오류에 대한 성찰에서 오는 회개와 뉘우침이며, 자기 굴복이었다. 비록 무패의 행진을 이어 오던 자신의 이력이 손상당할지라도 피 묻은 돈을 받지 않겠다는 양심선언이며, 자기 부인이고, 아내에 대한 사랑을 능가하던 자기애를 죽이는 길이었다. 다소 정체가 모호하긴 하지만, 캐빈 나름의 십자가의 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음날 캐빈은 또 한 번 십자가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테스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이 기사는 한국 <뉴스앤조이>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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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차 끊이는 법

     

     

    1.(불평)과(화)는 뿌리를 잘라내고 잘게 다진다.

     

    2.(교만)과 (자존심)은 속을 빼낸후 깨끗히 씻어 말리고

      (짜증)은 껍질을 벗기고 송송 썰어 ( 넓은 마음)에 절여둔다.

     

    3. (실망)과  (미움)은 씨를 잘 빼낸후 (용서)를 푼 물에 데친다.

     

    4. 모든 재료를 주전자에 담고 (인내)와 (기도)를 첨가하여 쓴 맛이

        사라질 때까지 충분히 달인다.

     

    5. (기쁨)과 (감사)로 잘 젓고  (미소)몇개를 예쁘게 띄운 후

         깨끗한 믿음의 잔에 부어서 (따뜻할 때 ) 마신다.

     

    향긋한 사랑차 날마다 끓여드시고 늘 행복하세요.^^

     

     

     

     



              
              

               

               

              



               

               

              ※★ 말속에 향기와 사랑이★※   

              우리는 날마다 많은 말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아름다운 말이 있는가 하면
              남의 가슴에 상처를 남기는 말도 많을 겁니다.

              말속에도 향기와 사랑이 있다는 거 아세요?    
              짧은 세상 살다 가는데 좋은 말만하며
              살아간다면 듣는 이나 말을 하는 이에게나


              모두 가슴에 넘쳐나는 기쁨과 행복이 올 것입니다.   
               
              행복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랍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타인의 험담을 늘어놓는 것보다는 칭찬하는 말이
              상처 주는 말보다는 위로를 구하는 말이 비난보다는
              격려의 말이 나와 타인의 삶을 행복하게 한답니다.

              마크 트웨인은 "멋진 칭찬을 들으면 그것만 먹어도
              두 달은 살 수 있다" 고 했습니다
              복잡한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서로의 격려와
              칭찬과 긍정적인 말은 이 세상을 훨씬 밝게 만드는
              초석이 될 것입니다.    

              사랑은 기적을 낳는다고 하지요.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는 이웃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은 새로운 힘과 용기를 줄 것입니다.

              아름다운 말에는 향기가 분명 있습니다.
              아름다운 말에는 사랑이 분명 있습니다.
              늘 향기를 안고 다니는 님들이길 소망해 봅니다.

               

              늘 사랑을 안고 사랑을 나누는 그런
              우리였으면 참 좋겠습니다.
              늘 좋은 생각 좋은 말만하며 살아가는 행복한
              우리였음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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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글은 제가 어느 집사님을 만나알게된 천국간증을 듣고
              그것의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어서 그 집사님에게 메일을 보낸 내용입니다


              조0식 집사님께
              어제 집사님께서 신성종목사님의 저서“내가 본 지옥과 천국”
              을 보시고 감명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려스러운 마음에
              신성종목사님의 간증집회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간증을 들으면서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보수적인 합동측의 신학자이며 총신대학교 총장까지 역임하신 분이
              천국과 지옥을 다녀온 간증을 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간증내용은 다른 간증자들의 내용과 대동소이 하였습니다 만은
              한가지 특이한것은 지옥여행을 하게된 동기가 단테의 “신곡”
              이라는 책을 읽다가 잠이 들어 지옥여행을 하기
              시작했다는데 있습니다
              더욱이 이단적인 사상인 스웨덴 보그의 신비적인 내용을 담은
              “천상여행기” 를 적극 추천하는것을 보고 너무도 놀라웠습니다

              제가 지금 집사님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저의 주관적인 부분은 최대한 줄이고 객관적인 사실을 통해서
              신성종 목사님의 영적인 배후를 분별하셨으면 해서
              지극히 간략하게 설명하여 올립니다

              신성종목사님은 인천 주안장로교회 나겸일목사님의 초청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간증을 하였습니다
              나겸일목사님의 특정 부분을 소개하자면 이단으로 정죄된
              베뢰아1기생입니다
              그리고 이단으로 정죄된 변승우목사의 주장을 옹호하였습니다
              또한 변승우목사는 여러 주장중에 자신이 계시록에 나오는
              두감람나무의 두 증인중 한 사람이라고 주장했으며
              직통계시를 주장하기도해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특히 큰믿음교회에서는 인도의 성자 “선다싱” 의 영계출입설과
              유사한 “하늘나라에서 온 이메일”이라는 책을 발간하여서
              많은 신앙인들을 미혹되게 하는것을 봅니다

              사실 저와 집사님이 빠졌던 이단의 김0드로의 주장과 큰믿음교회
              변승우씨의 주장이 많이 흡사한것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또한 큰믿음교회 집회에서 나타나는 진동 입신 등의 신비적인
              성향이 동일하게 나타났으며 천국여행의 부분도 흡사하게
              닮았음을 알고 저도 놀랐던적이 있습니다

              신성종목사님이 지옥과 천국을 꿈을 통해서 보았다는것이
              결코 거짓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그 꿈을 꾸게된 경위가 단테의 “신곡”을 읽다가
              잠들어서 지옥과 천국의 여행을 8일동안 했으며
              단테와 직접 만나 대화를 하고 또한 단테와 논쟁을 하고
              싸웠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참으로 석연치 않은 부분입니다
              신성종목사님이 개인적으로 꿈을 꾸고 그것으로 끝났으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개혁교회의 보수인 합동측의 , 더군다나 총신대총장까지
              역임 하신분이 그를 통해서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배출되었겠습니까
              교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칠수 있는 신분인
              신성종목사님께서 검증 못할 개인적인 꿈을 책으로
              출간하여서 사람들을 미혹 시키는것은 큰 실수라 생각합니다

              집사님!
              신성종목사님의 간증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만
              보는것이 타당할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건을 통해서 영적인 분별이
              필요할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집사님께서는
              이미 잘 아시리라 생각하고 이만 글을 맺겠습니다

              집사님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구합니다

              도봉옥 님

              ===========================================================

              플로리다 거짓 부흥의 타드 벤틀리의 과거 홈페이지에는 "유도 구상화"(Guided Visualization)에 관한 코스가 소개되고 있었으며, 이 구상화를 통해 삼층천을 볼 수 있으며, 특별히 그는 이를 통해 죽은 선다 싱을 만났다고 주장했다. 타드 벤틀리와 패트리샤 킹의 컨퍼런스에 참석했던 한 성도의 증언을 들어 보자:

              [나는 그들의 "삼층천" 유도 구상화에 대해서 모르는 채 패트리샤 킹(5일간)과 타드 벤틀리(2일간)의 컨퍼런스에 참가해서 삼층천 방문을 상상하기 - 유도 구상화하기 - 시작했는데, 나는 아직 그것들이 실제로는 어둠의 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뉴에이지는 그것들을 스피릿 가이드라고 부르는데, 그것들은 악령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삼층천 방문에 관한 타드 벤틀리의 테이프를 집에서 들으려고 사가지고 왔다. 나는 거실 바닥에 누워서 삼층천을 구상하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있었고 그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자 몸이 갑자기 걷잡을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으며 움찔움찔하고 신음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마자 내 몸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나는 몸의 어느 부분도 움직일 수 없었으며, 나는 이것이 악령이 나를 장악하려고 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온 힘을 다해서 "하나님 나를 구해 주세요. 예수님 도와 주세요"라고 외쳤다. 내가 주께 외치자 내 몸이 부드럽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날 밤에 나를 구해주셨고, 나는 그로 인해 영원히 감사할 것이다. 나는 밤새 울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으며, 내게 안수했던 손들과 나 스스로 불러들인 미혹을 끊어버리느라고 밤을 보냈다...]
              http://blog.daum.net/discern/48

              마이크 비클의 교회(KCF)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증언입니다. 아이들이 맘대로 "삼층천에 들어가서 천사들을 보고 생명나무를 맛본다"고 했답니다.

              [내 아들(11살)은 사촌과 밤을 보냈는데, 그 (사촌)아이는 아직 KCF에 다니고 있었다. 어느 (KCF) 목사의 아들과 KCF에서 온 다른 아이들이 함께 밤을 보냈다. (7살 먹은) 목사의 아들은, 아들 사촌의 스케이트보드를 들고는 하나님이 그에게 스케이트보드는 악하다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모든 아이들이 그것을 테라스로 가지고 나가 부숴버렸다. 후에, 그들은 모두 이층에 올라가서 원을 지어 앉았다. 그러자 목사의 아들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그들 모두가 손을 잡으면 그들이 삼층천에 들어가서 천사들을 보고 생명나무를 맛볼 것이라고 했다. 내 아들은 거절했다. 그런 것을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머지 아이들이 아들에게 화를 내서 내 누이가 말려야 했다. 그녀는 내 아들이 그들 그룹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아이들에게 말했다. 아들이 잠옷파티에서 돌아와서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스케이트 셔츠가 조각난 것을 발견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화가 난 그는, 자신이 기억하는 전부는 목사의 아들이 그의 셔츠 또한 악하다고 말한 것뿐이라고 했다.]

              글세요 님
              출처: USA아멘넷 독자공간 게시판에서 게시글과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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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성령님 안에서

              계속 전진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볼 수 없다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 만진다면,

              귀에 들리는 것만 듣는다면,
              인간적인 사고(思考)를 뛰어넘는

              그 이상을 알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체험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A. W. Tozer / 성령님 365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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