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k Garlock 의 Christian Music 에 대한 강좌입니다. 모두 10편의 긴 강의이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음악에 대하여 좋은 강의라고 생각하여 소개합니다. 영어 강의라서 죄송하지만, 영어로 들으시기에 어려움이 없는 젊은 분들과 EM Ministry 목사님들은 꼭 들어보실만합니다.

Frank Garlock gives a good presentation of what exactly music is according to the Bible.
What to look for and what to avoid. Satan is the god of this world and his music is crafted to draw you away from God. Today many Christians are getting sucked into this evil influence. This series is being presented to help and edify the saints on this most important matter.

Christian Music? or Satan's Music?
http://youtu.be/E6j3yThfxxk

The World's music in the Church
http://youtu.be/POSwiLirxqM

 

출처: 아멘넷/ JuNick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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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있는 긍정적인 증거들 혹은 5가지 바른 분별기준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있는 바른 기준은 무엇인가? 에드워즈는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 2장에서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바른 기준 5가지를 소개한다.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기준은 무엇보다 먼저 성경이 제시하는 기준이어야 한다. 에드워즈는 요한일서 4장에서 발견한 성령을 분별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 5가지를 제시한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에 반드시 동반되는 일이다. 사탄은 부정적인 혹은 중립적인 9가지 증거들은 일으킬 수 있지만, 긍정적인 5가지 증거들은 만들어 낼 수 없다. 이러한 5가지 긍정적인 증거들은 오직 성령님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어떤 현상이나 어떤 체험 혹은 어떤 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입증할 수 있는 5가지 분별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성령은 무엇보다 예수님을 높인다. 성령은 예수님을 알려주러 오신 분이시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을 고백하고 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께 순종하게 만들어준다. 따라서 성령 충만은 곧 예수님 충만이다. 예수님 충만하지 않은 성령 충만은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어떤 성령운동이 일어날 때, 어떤 외적인 현상이나 체험에만 몰두하고 예수님의 성품과 예수님의 사역이 강조되지 않을 때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예수님을 높이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둘째, 성령은 성경을 높여준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사랑하게 해 준다.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게 만든다. 만일 성경을 무시하고, 성경을 부인하는 영이 있다면 그는 분명 성령과는 다른 영이다. 성경이외의 다른 어떤 수단이나 방법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려고 만드는 각종 운동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신비주의가 바로 이런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은 반드시 성경 충만임을 명심하자. 성령과 성경은 언제나 함께 간다.


셋째,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의 진리 즉 교리와 신학에 관심을 가지게 만든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성령은 성경 속에 나오는 진리를 통하여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간다. 만일 어떠한 운동이 우리로 하여금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무시하게 만든다면, 또한 기본적으로 교리와 신학에 대한 거부감을 조장시킨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로 보기 힘들다. 교회사에서 성령의 역사가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던 종교개혁시기와 부흥시기에는 성경의 주요 진리, 기독교의 중요 진리에 대한 강렬한 관심과 신앙고백도 함께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따라서 성령 충만은 곧 진리 충만이요, 교리 충만이요, 신학 충만이라 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넷째,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로 이끈다. 그리고 거룩을 추구하도록 한다. 성령은 우리가 깨달은 진리, 성경, 예수님을 통하여 결국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도록 한다. 하나님을 닮도록 한다. 성령은 성결의 영이기도 하다. 만일 어떤 운동이나 현상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를 불러일으키고, 더욱 성결하도록 한다면 그것은 분명 성령의 역사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 충만은 곧 회개충만, 거룩 충만이라 할 수 있다.


다섯째,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게 만든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있다. 성경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깊은 이해는 사랑의 열매로 나타나야한다. 거룩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사랑의 역사로 이어진다. 성령 충만은 곧 사랑 충만이다.

 

참된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이러한 요소들이 모두 함께 결합되어 있다. 만일 이러한 것들 가운데 특정한 어떤 것만을 주장하고 다른 요소들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예를 들어 성령의 역사인 사랑 충만 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 모두를 가지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만 사랑한다고 하고, 인간에 대한 사랑은 관심 없는 종교중독자는 잘못된 것이다. 또한 인간만 사랑한다고 하고, 하나님 사랑 없는 인본주의도 성령의 역사는 아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있어야 할 필수요소만이 아니라 필수 요소들이 모두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신다.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기본적으로 예수님 충만, 성경 충만, 진리 충만, 거룩 충만, 사랑 충만하도록 만들어주는 어떤 운동이나 현상도 우리는 그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분별할 수 있다.


조나단 에드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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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 겉과 속이 따로 놀기 일쑤다.

모순투성이다.

우리는 사건과 실망의 위력 아래

방향감각을 잃고 어지러이 휘청거린다.

모순만 의식하고 산다면,

우리는 미쳐서 정신병원에 누울 것이다.

 

그러나 의식주, 신뢰, 사랑, 용서, 일, 여가 등

삶을 존속시켜 주는 것들에 부응하여 살면

제정신을 잃지 않는다.

삶의 내부와 외부가 서로 맞아든다.

내면의 시끄러운 요구와 외면의 부득이한 필요가

섭리의 위계안에 제자리를 찾는다.

 

기도하면 모든 필요가 하나로 통합된다.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 주관하시기 때문이다.

기도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의 초점이 잡힌다.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마소서(시 55:1)

 


The River In The Pines /  JOAN BA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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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혜와평강이 넘치는 커피브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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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다 살아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봤다는 '이것'은...
 
[유코피아] 2012년 03월 28일(수) 오전 11:43 이미지 전체보기
[유코피아닷컴=ukopia.com] 죽음 직전 살아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미국엔 거의 800만명이나 된다.

인터넷 매체 허핑턴 포스트에 따르면 이들 중 상당수가 긴 터널의 끝자락에 흰 불빛이 밝게 빛나고 있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다. 또한 죽음 직전 육체가 분리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매체는 죽음 직전 증상으로 편안해지고 두려움이 없어지며 특히 거대한 우주와 일체를 이루는 것 같은 느낌을 꼽았다.

이 같은 증상들은 과학적으로 입증되기 어려운 것이지만 죽음 직전에 내몰렸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어 학계에 새로운 도전이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최근 한 여론조사결과 미국인 중 71%는 죽음 후에도 영혼은 존재한다고 믿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1907년에는 매사추세츠주의 한 의사가 영혼의 무게를 21그램이라고 발표해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최근에는 죽음 증상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UCLA) 뇌질환센터의 데이비드 호브다 교수는 죽음 직전의 사람들이 터널 끝에서 불빛을 봤다는 증언은 사실일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의학적으로 뇌사 직전에 이르면 뇌는 생존을 위해 후뇌(hindbrain)만 빼고는 모든 기능이 차단된다. 후뇌는 신경의 주요통로가 되는 곳으로 특히 운동신경과 감각신경이 척수와 연결돼 있다. 후뇌만 작동할 경우 터널 끝 불빛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이 호브다 교수의 주장이다.

그러나 나머지 증상들은 신의 영역에 속해 규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의학계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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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반물질을 잡아라.

이 글을 써나가는 중 어제, 그러니까 2011년 8월 8일에 지구 주위에서 반물질의 띠가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떴다.
지난 2006년 발사된 이탈리아-러시아 합작 파멜라 위성 자료를 분석해 온 과학자들은 지구 1만 킬로미터 상공의 밴앨런대들 사이에 소량의 반양성자가 존재한다고 밝혔다는 내용이다.
반물질은 안 그래도 소립자에 이어서 대장쟁이가 다루려고 했던 소재였는데 마침 기사가 뜬 셈이다.

반물질(反物質, Antimatter).......
반물질은 무엇이고 밴앨런대는 또 무엇인가?  

1) 반물질

반물질이란 말 그대로 물질의 반대되는 물질이라는 뜻이다.
양(+)이 있으면 음(-)이 있듯이 물질이 있으면 반물질이 있다는 것이다.
아니 과학 하다 말고 웬 뚱딴지같이 음양설(陰陽說)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태초에 빅뱅이 일어났을 때 제로(無, 零) 상태에서 물질과 반물질이 생겼다고 말한다. 제로(無, 零)에서 물질이 생겨나려면 수학에서 보는 것과 같이 서로 반대방향으로 물질과 반물질이 나누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질(Matter)만 남고 반물질(Antimatter)은 소멸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반물질은 추상적인 존재인 셈이다.
(Material이라고 하지 않고 Matter라고 하는 것도 재미있다.)

그런데 우습지 않은 것이 반물질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빅뱅 때는 반물질이 모두 사라져버렸는지 모르지만 우주공간에는 아직도 반물질들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태양 같은 극렬한 핵반응이 일어나는 천체에서 반물질이 생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1928년인가 1930년에 반물질을 처음으로 언급한 사람은 폴 디랙(Paul Dirac)이다.
그는 전자기장 내에서의 전자이동을 설명하는 이론을 내어놓으면서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을 도입했는데 이게 종전의 이론들보다 정확하게 맞아 들어가는 바람에 유명하게 되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전자는 마이너스 전하를 띠고 양자는 플러스 전하를 띤다.
그런데 디랙은 자신의 이론에서 플러스 전하를 띠는 전자도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그러나 디랙은 이런 주장을 하면서도 실제로 플러스 전하를 띠는 전자가 발견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은 1931년 칼 앤더슨이라는 사람이 실험을 하다가 질량은 같은데 움직임은 반대방향인 전자, 즉 마이너스가 아닌 플러스 전하를 띤 반전자를, 순간적으로 소멸되긴 했지만, 발견한 사건이 터진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디랙의 이론은 전자뿐 아니라 양자, 중성자에까지 해당되는 것이었고 실제로 반대의 전하를 가지는 양자, 중성자 등 반입자들이 발견되었다.
전자는 플러스 전하, 양자는 마이너스 전하를 띤 “거꾸로 물질”.......
이것이 오늘날 반물질로 부르는 것이다.

사실은 반물질(反物質)은 추상적인 반물질이 아니라 기존의 물질들과 반대의 성질을 가지는 물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반물질들은 물질들과 만나면 물질들과 합치면서 소멸되어버린다.
마치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끌어당겨 합쳐지면서 제로가 되어버리는 것처럼 반물질은 그만큼의 물질과 만나서 함께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상태에서는 반물질이 발견되지 않는다.
인위적으로 만들었다 해도 주변의 물질과 합쳐지면서 순간적으로, 수백만 분의 1초 만에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런데 이것들이 그냥 사라지지 않는 것이 또 문제이다.
전기가 플러스, 마이너스가 합쳐지면서 번개를 일으키고 열을 내듯이, 알칼리와 산이 합쳐지면서 화학열을 내듯이 반물질과 물질이 만나면서 쌍소멸을 일으켜 에너지를 내는 것이다.
쌍소멸이란 물질도 그 만큼 소멸되고 반물질도 그만큼 소멸되어 양쪽에서 두 배의 물질로 소멸되기 때문에 일컫는 이름이다.

이 쌍소멸은 따라서 물질과 반물질, 두 배의 물질이 소멸되는 만큼의 에너지를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의 E = mc² 공식에 따라 내게 되는 것이다.

1그램의 물질이 소멸되면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나오는지 우리는 앞서 대충 살펴보았다.
원자탄도 수소탄도 다 핵분열, 또는 핵융합을 통하여 소멸되는 물질이 에너지로 변환되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그런데 만일 반물질을 이용한 폭탄을 만든다면 그 위력은 원자탄의 1,000배, 수소탄의 300배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반물질과 물질이 만나 쌍소멸되면 소멸의 양도 많아지지만 전혀 손실이 없는 완전한 에너지변환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일 반물질을 백만분의 1 그램 정도를 만들어서 물질에다 쏜다면 어떻게 될까?
그 반물질이 물질과 닿는 순간 쌍소멸을 일으키면서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낼 것이다.
백만분의 1 그램이나 천만분의 1그램의 반물질만 사용해도 엄청난 위력을 가지는 폭탄이 될 것이다.

만일 반물질로 엔진을 만들거나 발전소를 만든다면 엄청난 일이 될 것이다.
반물질 수 백 분의 1 그램만으로도 자동차와 기관차가 움직이고 비행기나 날며,
반물질 1 그램만으로도 2,500만 kwh (칼로와트아워)의 에너지가 발생한다.
반물질 10 그램만 있으면 1개월 만에 화성까지 날아갈 수 있는 강력한 추진력을 가지는 우주선을 만들 수 있다.
사용하는 것도 쉽다. 그냥 반물질을 물질과 만나게만 해주면 된다.
소문이지만 미군은 반물질을 이용한 폭탄개발연구를 하고 있단다.

그런데 지난 (2011년) 6월 6일자 보도에 의하면 CERN의 제네바 80억불짜리 거대강입자가속기에서 반수소 입자들을 만들어 무려 16분 동안 사라지지 않고 붙잡아두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반수소란 수소와 같은데 양자는 마이너스 전하, 전자는 플러스 전하를 띠는 반물질 수소라는 뜻이다.
즉 광속의 99.999991%의 속도로 양자들을 충돌시켜 빅뱅과 비슷한 조건을 만들었을 때 거기에서 입자들과 반입자들이 생성되고 반입자들로 이루어진 반수소들이 만들어졌고 이것을 자기장으로 붙잡아두고 관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만일 이렇게 반물질이 만들어지고 나아가서 모아질 수 있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사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물질을 만들어 모으는 것은 쉽지 않다.
강입자가속기를 이용하든지 다른 방법을 사용하든지간에 엄청난 속도로 입자들을 가속하여 충돌시켜 빅뱅과 비슷한 조건을 만들어 물질이 붕괴되면서 새로운 입자들과 반물질이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반물질을 만든다 해도 겨우 수 십, 수 백 개 정도의 양성자, 양으로 치면 수 조, 수경 분의 1 그램도 안 될 만큼 적기 때문이다.

반물질을 만드는 것도 어렵지만 반물질이 물질과 접촉하지 않도록 붙잡아서 모으는 것은 더욱 어렵다. 생성되자마자 반물질은 주변의 물질과 만나서 순식간에 소멸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물질을 잡아두는 방법은 물질이 전혀 없는 진공의 허공에다 전기자기력으로 띄워두는 방법밖에 없다.
만일 반물질을 이용한다면 완전진공 가운데 전자기력으로 공중에 띄우는 장치를 만들어 모아두었다가 필요하면 내보내서 물질을 만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폭탄을 만들든, 열기관을 만들든, 로켓을 만들든 반물질을 이용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만일 반물질 폭탄을 만든다면 전기자기장을 이용하여 완전한 진공 허공에 반물질을 붙잡아 둔 캡슐이 될 것이다.
그 캡슐이 적에게 날아가서 그곳에서 반물질이 물질을 만나게만 해주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보도된 기사에 의하면 이탈리아-러시아 합작 파멜라 위성 자료를 분석해 온 과학자들은 밴앨런대들 사이에 소량의 반양성자가 존재한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2) 밴앨런대

밴앨런대(Van Allen Belt 帶)는 무엇인가?
알다시피 태양은 수소핵융합반응을 일으키므로 엄청난 고온, 수 천만도, 1억 도의 플라즈마 상태를 이룬다.
플라즈마 상태란 모든 입자들이 흐물흐물 풀어진 고온상태라는 뜻이다.
그 플라즈마 상태의 태양에서 쉴 새 없이 수많은 입자들이 밖으로 뿜어져 나온다.
이 입자의 바람을 태양풍이라고 부른다.
태양풍은 그 세력이 태양으로부터 명왕성을 지나 세 배의 거리가 넘는 거의 200억 킬로미터 주변에까지 미친다.
태양풍은 태양계 전체를 부드럽게 풍선처럼 감싸고 있다.

지금 보이저 1호 우주선이 175억 킬로미터를 날아가 태양풍 영향권의 가장자리, 헬리오스히스 구간을 곧 벗어날 것이라는 이야기를 “17. 태양계를 벗어나 우주 속으로”에서 이미 한 바 있다.

따라서 지구를 비롯한 모든 혹성들은 태양에서 불어오는 입자들의 부드러운 바람을 맞으면서 태양을 공전하고 있다.
태양에서 불어오는 태양풍이 만일 그대로 지구 대기권으로 쏟아져 들어온다면 그 입자들이 대기권 공기분자들과 충돌하면서 많은 방사선을 만들어내고 지구상의 생명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구는 자기장을 가지고 있어 태양풍의 입자들이 그 자기장에 붙잡히게 된다. 다만 극지방에서는 일부 하전입자들이 오로라 현상을 일으킨다.

태양풍 입자들이 지구 자기장에 붙잡힌 모양은 마치 지구가 조개껍질을 둘러쓴 모양, 지구를 삥 둘러 싼 도넛 모양과 비슷하다.
고도 3,000 미터의 낮은 층과 1,5000 미터가 넘는 높은 층 두 개가 있다. 태양풍의 입자들 때문에 방사능을 띠고 있다. 이것이 바로 밴앨런대라고 부르는 것이다.

지구가 태양풍을 헤치고 밴앨런대를 만들면서 공전하는 모습은 마치 물결을 헤치고 나아가는 선박이나, 마치 자기장 우산을 펼쳐들고 태양풍을 헤치면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구를 비롯한 혹성들이 태양풍 때문에 공전속도가 떨어지는 거 아니냐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거대한 혹성들에 비하면 입자들의 태양풍은 너무나도 미미하기 때문이다.
수억년, 수십억년이 지난다면 혹 모를까.

그런데 이번에 파멜라 위성이 소량의 반양성자 반물질을 발견한 것은 윗층, 아래층 밴앨런대의 사이 공간이라고 한다. 태양의 활동 중에도 생성된 입자들 중에 반입자들이 있고 이 반입자들이 물질을 만나지 못 한 상태로 지구까지 날아와 밴앨런대의 자기장에 잡혔다는 이야기다.

과연 밴앨런대에서 발견된 반물질이 얼마나 되고 우리가 이용하기에 충분한 양이 되는지는 알 수 없으므로 미리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우주공간을 드문드문 날라가는 그 반물질들을 우주선으로 낚아채어 모아서 이용할 수 있느냐는 더욱 어려운 문제이다.

그렇지만, 만일 그 반물질을 모아다가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만일 우주선이 그 반물질을 모아다가 전기자기 진공캡슐에 담아서 지구를 향하여 발사하면 무시무시한 폭탄이 될 것이고,
그 캡슐을 지구로 가져와서 평화적으로 이용하면 엄청난 에너지원이 될 수 있을 것이고,
혹은 캡슐에 담아서 우주선의 우주여행 연료공급소로 이용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
.

얼마 전 동호회의 회원 한 분이
모친상을 당했습니다.
오프라인 모임엔 자주 안 나가지만
조문이라면 상황이 다릅니다.
면식 있는 회원에게 연락하고
장례식장 앞에서 만나서 영안실을 찾다가
난처한 일을 겪었습니다.
 
"근데 산꼭대기님 원래 이름이 뭐야?"
.....?"
 
달랑 닉네임만 알고 있는데
막상 영안실은 실명으로 표시되어 있어
초상집을 찾지 못하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전화를 해서야 이름을 알게 되었고
빈소를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조금은 따로 걷어서 봉투에 담았는데
안내를 맡은 청년이 방명록에
이름을 적어달라고 부탁하는 거였습니다.
네댓 명이 와서 머뭇거리다 그냥 가면
더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펜을 들어 이름을 적으려다 보니
본명으로 쓰면 상주인 회원이
나중에 못 알아볼까봐 늘 부르던
호칭으로 적어야 누가 다녀갔는지
알 것 같아서 자신 있게 닉네임으로 썼습니다.

'감자양'

다른 회원도 내 의도를 파악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곤 자신의 닉네임을 썼습니다.

'아무개'

데스크에서 안내를 하던 젊은 청년이
난감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회원도 닉네임을 썼습니다.
 
안내를 하던 청년은 이제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민망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방명록에 이름을 적는
우리도 민망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아직 적지 못한 회원 분을 다그쳐
빨리 쓰라했더니 계속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이 회원의 닉네임은 '에헤라디야'였습니다.
빨리 쓰라고 다그쳤지만 망설이고만 있습니다.

"아. 빨리 쓰고 갑시다. 챙피해 죽겠어요."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에헤라디야'라고 쓰겠습니까?"
"그래도 얼른 가자니까"

결국 '에헤라디야' 회원님은 다른 회원들보다
작은 글씨로 조그맣게 '에헤라디야' 라고 썼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마지막 남은 회원이 자리를 박차고
영안실을 뛰쳐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얼른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모두 큰 소리로 그를 불렀습니다.
"저승사자님 어디 가세요?"

주변이 썰렁해졌습니다.
결국 우리는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장례식장을 빠져나와야 했습니다.    

(웃다가 퍼온 글)

출처: 아멘넷/ 대장쟁이 님


 

남편이 죽었다 .
결혼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교통 사고로 사랑하는 남편이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새벽에 경부고속도로에서 대형 트럭이
남편의 차를 들이받아 버렸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정신이 없는 가운데 장례를 치렀다.

많은 사람들이 위로의 말을 건네며
남편의 죽음을 기정 사실화 했으나 인정할 수가 없었다.
여름 휴가 때 첫 아들을 안고
고향의 바닷가를 찾자고 하던 말만 떠올랐다.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도대체 하나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 원망스러웠다.
가난했지만 착한 마음으로
열심히 세상을 살려고 노력하던 남편이었다.

다니던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
그리고 고통 가운데 해산을 했다.
남편이 바라던 대로 아들이었다.
그녀는 아들을 안고 남편의 고향을 찾았다.
동해가 보이는 산자락에 남편은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포대기를 열어
남편이 잠든 무덤을 아기에게 보여주었다.
파도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남편을 일찍 데려간 하나님이 다시 원망스러웠다.
아들을 얻은 기쁨보다 남편을 잃은 슬픔이 더욱 컸다.

"오늘이 일요일인데 왜 교회에 가지 않느냐?"

산을 내려오자 시아버지가 그녀를 불렀다.
정이 넘치는, 햇살같이 따스한 음성이었다.
"나가기 싫어서요, 아버님."
"왜?"
"그이를 일찍 데려간 하나님이 원망스러워요."
"이렇게 어여쁜 아들을 주셨는데도?"
"네, 그래도 원망스러워요."

그녀가 말도 채 끝내지 못하고 눈물이 글썽해지자
시아버지가 그녀를 마당 앞 꽃밭으로 데리고 갔다.
꽃밭에는 장미와 다알리아,
채송화와 도라지꽃 등이 활짝 피어있었다.

"여기에서 꺾고 싶은 꽃을 하나 꺾어보거라."
시아버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가장 아름답게 핀 장미꽃 한 송이를 꺾었다.
그러자 시아버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 봐라, 내 그럴 줄 알았다.
우리가 정원의 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꺾어 꽃병에 꽂듯이,
하나님도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먼저 꺾어
천국을 장식한단다.
얘야, 이제 너무 슬퍼하지 마라."

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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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위한 용기

'정의를 위한 용기'라는 책을 낸 게리 하우겐은 이렇게 썼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구제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라고 했다.

그는 '불의'에 대해서,
권력을 남용하여 하나님이 다른이들에게 주시는 것을 빼앗는 행위'라고 정의했다.
대부분의 가난은 불의와 폭력의 문제라고 밝힌다.

캄보디아 섹스관광객들의 노리개로 착취 당하는 캄보디아의 어린 소녀들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악행은 지속적이고 계획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개발도상국에서 평생 노예로 착취당하다 그생이 끝나는 사람이 2500만명이나 된다고 한다.
아프리카에 마구 버리는 전자쓰레기로 건강을 잃어가는 아이들이 있다
아프칸 여성들의 그 비참함은 감히 상상할 수 조차 없다

북한 정권에게 억압당하고 죽임 당하는 성도들과 주민들의 신음..
성매매 업소에 짐승처럼 갇혀서 죽어가는 어린 소녀들의 문제는
긍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다.

얼마 전에도 어린 중학생이 학교 폭력에 희생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동네에 음란하고 마구 널려져 있는 광고물에 대한 단속도
공공기관에다가 지속적으로 요청하지 않는다면
우리 아이들은 계속적으로 그런 거리를 지나다녀야만 한다.

게리는 폭력의 고리를 끊을수 있는 세가지 비밀을 알려주었다.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에게 든든한 후원자가 있다면,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두려움을 내쫓을수 있는 온전한 사랑이 있다면,

악독한 폭력의 희생자가 되고 있는 이들을 구할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역사를 보면 악이 승리하기 위한 조건은 단 한가지,
선한 사람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의 불의와 불법을 그대로 두고
나만 좋고 우리끼리만 좋으면 그만인 것은 아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줄 안다.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이 있고,
예수님께 중요한 질문이 있다.

위험한 세상에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토록 가슴아프게 자신의 약함을 느끼는 것이어서,
더욱 더 하나님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그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군대를 응원하며
나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길 기도한다..

- 마중물 -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인간의 뇌가 죽으면 영혼도 함께 죽는다’고 믿는다. 그는 영국 일간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천국은 없다. 사후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동화일 뿐이다”고 했다. 더 나아가 그는 “마지막 순간 뇌가 깜빡거림을 멈추면 그 이후엔 아무것도 없다. 뇌는 부속품이 고장나면 작동을 멈추는 컴퓨터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호킹의 신념은 전형적인 물리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심리철학에서 물리주의자들은 인간의 영혼은 뇌의 기능에 불과하며, 육체가 죽은 후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들은 정신적 속성과 육체적 속성이 동일하다고 본다. 이런 주장은 과연 타당한가? 만일 물질적 속성과 정신적 속성이 같다면 그들의 주장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속성들은 동일하지 않다. 물질적 속성에는 감각이 없고 내적 성찰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정신적 속성은 개인적이고 감각을 가지며 내적 성찰이 가능하다. 따라서 물질적 속성과 정신적 속성은 분명히 다르다.

예를 들어 나무 책상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책상의 상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윗부분만 강철로 바꿨다. 또 다음 날 책상 다리를 플라스틱 재질로 바꿨다. 그렇다면 원래 나무 책상과 다른 재질로 바뀐 책상은 같은 책상인가? 다른 책상인가? 물론 다른 책상이다. 이처럼 물질은 부분을 바꾸면 그 정체성도 달라진다.

그런데 인간의 정체성은 어떠한가? 물리주의자의 시각에서 볼 때 인간은 물질일 뿐이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거의 모든 세포들이 새로운 세포 조직으로 바뀐다. 7년 전 나의 몸과 현재 나의 몸은 물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그렇다면 7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른 사람인가? 분명히 같은 사람이다. 물질은 그 부분이 바뀌면 전체 정체성도 바뀐다. 그러나 오늘의 나는 어릴 때 나와 동일하다. 그 이유는 인간의 정체성은 물질(육체)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 안에 변화되지 않는 나의 영혼이 있기 때문에 몸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나일 수 있는 것이다. 영혼은 육체적 변화와 죽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나의 정체성을 나타낸다.

인간의 영혼이란 무엇인가? 영혼은 육체를 제외한 모든 것으로서 나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나라는 자아를 포함하고 나의 마음과 의지, 감정, 생각 그리고 욕구도 포함한다. 이러한 정신적 요소는 육체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구분될 수 있다.

스티븐 호킹의 주장과는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고 선언한다. 육체가 죽은 후에도 나의 영혼은 계속 살 수 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칭찬받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참 잘하였다! 내 아들아! 내 딸아!” 

- 박명룡 
 
- 출처 : 국민일보
 
k.s.a

 



끌리는 사람은 1%가 다르다..

 

1.모든 선택에는 반드시 끌림이 있다
- 첫 만남(Starting Relationship)

좋은 인상을 유지하려면

첫인상이 아무리 좋았더라도 부정적인 정보를 접하면
쉽게 나쁜 쪽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열 번 잘하다가도 한번 잘못하면
나쁜 이미지로 낙인찍히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좋아하면 판단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한다.
따라서 성공적인 설득을 하고 싶다면 우선 상대방으로부터
호감을 사고(에토스), 감정에 호소한 다음(파토스), 필요성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고(로고스), 마지막으로 상대방이
마음을 바꾸지 않도록 다시 에토스를 이용하는
순환과정을 거치는 것이 필요하다.


신은 마음을, 사람은 겉모습을 먼저 본다

옷차림은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에 대한 평가뿐 아니라
우리자신의 태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끄는 사람은 때와 장소에 어울리는
옷차림을 할 줄 안다.
겉모습 때문에 내면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면
그건 너무나 아쉬운 일이다.
문밖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우리의 옷차림은 다른 사람에게
엄청난 양의 정보를 제공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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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은 동색, 가재는 게 편

사람들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좋아하는 반면
자기와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반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자주 보면 정이 들고 만나다 보면 좋아진다

가까이서 자주 만날수록 호감도가 커지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다.
따라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간간이 안부를 묻고,
만나기가 힘들다면 책이나 신문 등 상대가 흥미를 느낄 만한
내용을 메일로 보내는 등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칭찬 방법을 바꾸면 관계가 달라진다

좋은 말도 자주 듣다 보면 식상하듯이 칭찬도 반복되면
그 효과가 급격히 줄어든다.
즉 신빙성이 떨어져 그 사람의 말을 신뢰하지 않게 된다.
부정적인 말을 했다면 반드시 칭찬이나 격려의 말로 마무리를 짓자.
언제나 시작보다는 끝이 중요하다.
칭찬은 구체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
또한 면전에서 칭찬하는 것보다
제3자에게 칭찬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을 통해 듣는 칭찬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자랑하고
싶은 욕구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칭찬을 전해 듣게 되면 두 명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셈이 되기 때문에 면전의 칭찬보다 몇 배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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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끌림을 유지하는 1%의 차이
- 관계의 발전(Developing Relationship)


나는 왜 나를 사랑해야 하는가

자기애가 깊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과장해서 과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교만하지 않으면서도 자신감이 넘치는 당당함으로
주변사람들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게 만든다.


다름을 인정하면 공감이 쉬워진다

인간관계의 갈등을 줄이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머릿속에서 ‘다른 것=나쁜 것’이라는 공식을 삭제해야 한다.
사람들은 옳은 말을 하는 사람보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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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말을 잘하는 사람보다 잘 들어주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

관계의 문제는 말을 못해서가 아니라
제대로 듣지 못해서 생기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사람들은 말을 잘하는 사람보다 잘 들어주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면
슬픔이나 분노가 해소되고 마음이 후련해진다.
또한 존중받고 이해 받는다는 느낌이 들게 된다.


작은 빈틈이 마음을 열게 한다

너무 완벽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만든다.
또 사람들은 결점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에 대해
위선적이고 인간미가 없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상대가 틈을 보일 때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스펀지가 공간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물을 빨아들이듯이 누군가가 다가오게
하려면 그가 들어올 수 있는 빈틈을 마련해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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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담화, 만족은 짧고 후회는 길다

검지 하나로 손가락질을 하면
나머지 세 개의 손가락이 나를 향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뒷담화의 유혹에 빠질 땐 스스로에게 ‘또 시작이야!’라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꿔보자.


“나는 당신이 좋아요”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친구로 선택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도와주려고 하며,
좋아하는 사람으로부터 물건을 사고 싶어한다.
또한 상대가 자기와 관련된 사람이나 일 또는 사물에 대한 호감을 보이면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호감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함께 밥 먹고 싶은 사람이 되라

우리는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을 때,
가장 흔한 표현으로 식사를 제안한다.
먹거나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면 대화가 더 쉽게 풀리고
음식을 접대한 사람에게 더 쉽게 설득된다.
왜 그럴까? 뭔가를 받으면 그만큼 베풀어야 한다는
‘상호성의 원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또한 맛있는 음식으로 인한 유쾌한 감정이 파급되기 때문이다.
정말 기분 나쁜 사람을 ‘밥맛 없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가.
함께 밥 먹고 싶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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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끌리는 사람은 이렇게 관계를 유지한다
- 지속되는 만남(Staying Relationship)


관계를 알리고 싶은 사람이 되라

사람들은 자신을 승자와 연결시켜 자존심을 고양시키려는 반면,
실패자들로부터는 최대한 거리를 두어 자신의 이미지를 보호하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당신과의 관계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콤플렉스를 건드리면 돌부처도 돌아선다

차마 해서는 안 될 말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과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은 그 질이 다르다.
“뭐 틀린 말했어?”라고 되물으면서
다른 사람의 아픈 곳을 건드리는 습관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프랑스 속담을 명심해야 한다.
“진실만큼 마음에 거슬리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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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사람에겐 그를 믿어준 사람이 있다

프로이트는 자신이 위대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던 것은
“너는 장차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다”라는
어머니의 믿음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가능성을 믿어주면 기대에 부응하는 결과가 일어난다


너무 멀지도 않게 너무 가깝지도 않게

사람들은 개인 공간이 침해당하면 반사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낸다.
물리적 공간뿐 아니라 프라이버시도 침해당하고 싶지 않은 개인 공간이다.
상대방이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시시콜콜 다 알고 싶어하는 것은 관심이 아니라
간섭이며 경계를 넘는 침입행위다.


사과 먼저, 변명은 나중에

잘못된 상황을 개선하려면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미안하다고 말해야 한다. 해명은 그 다음에 할 일이다. ‘
미안하다’는 말은 마법과 같은 힘을 발휘한다.
그 말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동시에 전달한다. ‘제 탓입니다’,
‘당신을 존중합니다’, ‘우리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기를 원한다면
절대로 ‘미안하다’는 말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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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일에서도 감사할 일을 찾아 보라

누군가를 당연하게 생각하면 우리 역시 당연한 존재로 취급당한다.
감사란 그냥 저절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며
선택해야 하는 것이고, 배우면서 훈련해야 하는 것이다.
감사란 고마워하기를 선택한 사람만 느낄 수 있는 의도적인 감정이다.


퍼주고 망한 장사 없다

먼저 베풀어도 당장 돌아오지 않을 때가 많다.
씨앗을 뿌리고 수확을 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또한 씨앗을 열 개 뿌렸다고 열 그루 모두에서 수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거두려면 먼저 뿌려야 한다.
인간관계의 기본은 상대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다.
무엇이든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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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은 언제나 또 다른 시작이다

첫인상은 이미 지나간 일이기 때문에 더 이상 바꿀 수 없다.
하지만 끝인상은 언제든 바꿀 수 있다.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공한 기업과 개인은
모두 주어진 일의 경계를 넘어 추가서비스를 할 줄 안다.
당신이 다수 대중과 차별화하고 싶다면
남들이 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는 뭔가를 추가로 해야 하다.
이제 더 이상 만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순간이 곧 또 다른 시작임을 잊지 말자.


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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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 만나고픈 한 사람에게 인생이란 어차피 홀로 걸어가는 쓸쓸한 길이라지만.. 내가 걷는 삶의 길목에서 그래도 평생을 함께 걷고 싶은 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 보다는 연인도 아닌 친구도 아닌 그저 편안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고단하고 힘든 날에 마음으로 다가가면 살포시 내 등을 도닥여주는 다정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부족한 내가 위로해 주기보다는.. 그의 위로를 더 많이받아 가끔은 나보다 더 나를 아껴주는 마음이 넓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기도로서도 채워지지 않는 허약한 부분을 어느 한 사람의 애틋한 마음을 만나서.. 기쁜 날보다는 슬픈 날에 불현듯 마음이 찾아가면 보듬어주는 따뜻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평생을 마음으로 만나다가 어느날 홀연히 바람으로 사라지는 날.. 아님 구름속으로 사라지는 날 죽음에 이르러서도 마음이 이별을 못하니.. 그가 죽음에 이르는 날이 먼저라면.. 미련없이 나도 그와 함께 하늘로 훨훨 날을 수 있는 마음이 아름다운 이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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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20:8-11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낫게 하시고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게 하실 무슨 징표가 있나이까 하니 이사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실 일에 대하여 여호와께로부터 왕에게 한 징표가 임하리이다 해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갈 것이니이까 혹 십도를 물러갈 것이니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가기는 쉬우니 그리할 것이 아니라 십도가 뒤로 물러갈 것이니이다 하니라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아하스의 해시계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십도 뒤로 물러가게 하셨더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지 않고 버티다 늦게 시작한 신학생 때인데 당시 저는 강원도 춘천에서 1시간 정도 더 들어간 산골에서 서울로 학교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춘천에서 여자 집사님 두 분을 제 자동차에 태우고 같이 학교를 다녔습니다. 두 집사님이 아이들이 어리기에 야간반에 다녔습니다. 학교까지 두 시간 반 가까이 걸리지만 힘든 줄 모르고 다녔습니다. 수업을 마치면 항상 산 기도를 하였습니다. 청계산이나 아니면 신내동 뒷산인 봉화산에 올라가 공동묘지에서 함께 몇 시간씩 부르짖곤 했습니다. 가난한 신학생이 뒤늦게 소명을 받고 신학을 하다 보니 그저 두렵고 배움도 부족하니 용기도 없고 가진 돈이 없으니 기름 값이며 밥값이며 등록금이며 책값이며 그 때 그 때마다 감당할 방법이 없다보니 하나님께 매달려 울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녁 식사는 어차피 굶어야 되니 아예 한 끼씩 금식을 하였습니다. 돈이 필요할 때면 하나님께 기도했고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공급해 주셨습니다. 안면식도 없는 사람이 찾아와 필요를 채워 주는가 하면 오히려 내가 도와야 할 만큼 어려운 분들이 봉투를 넣어주곤 하였습니다.

어떤 때는 자동차에 연료가 떨어져 경고들이 들어와 있는 상태로 출발할 때도 있습니다. 부모님이 “기름 값 있느냐”고 물으시면 부모님께서도 돈이 없음을 아니까 “네! 있어요. 걱정 마세요“ 라고 씩씩하게 대답하곤 출발을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휴지로 계기판을 덮어놓고 핸들을 붙잡은 채 펑펑 울며 내가 언제 신학교 다니겠다고 했습니까? 왜 나를 이렇게 불러놓곤 힘들게 하시는 겁니까? 책임을 지셔야 하지 않느냐며 떼를 쓰곤 했습니다. 계기판을 보면 도저히 나 자신을 감당할 수 없기에 아예 눈을 가리는 거지요. 그렇게 울며 기도하며 떼를 쓰다보면 어느새 학교에 도착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수 없을 마치고 여느 때처럼 기도하고 집에 도착하면 집 바로 앞에서 시동이 꺼지는 것입니다. 그럼 그제야 기름이 없는 차를 타고 수백 킬로를 달려갔다 온 것을 알게 되고 놀라곤 하였습니다.

96년도경인 것으로 기억됩니다. 당시 4학년이었는데 그 때도 후배 집사님 두 분을 태우고 수업을 마치고 신내동 봉화산에 올라 산 기도를 마치고 짐으로 가는 길인데 교문리를 막 지나는데 갑자기 주님의 우레 같은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은태야! 교통편을 놓고 기도해라.” 똑 같은 음성이 두 번을 들리는 것입니다. 저는 황급히 뒤에 계신 집사님들에게 “지금 성령께서 교통편을 놓고 기도하라고 하시니 빨리 기도 하십시다. 아무래도 제 신상에 2-3일 내로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으니 교통편에 어려움이 없도록 기도해야합니다.”라고 말씀드리고 그 자리에 자동차를 세우고 함께 통성으로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왜?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교통편을 놓고 기도하라고 명하시니 주님 우리 모두에게 교통편 때문에 어려움 당하지 않게 인도해주세요 라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두어 시간 그렇게 길에서 기도한 후에 집으로 돌아갔고 곧 그 일은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때 내가 왜 내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길 것 같다고 그랬는지는 알지 못하였고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 월요일에 저를 늘 도와주시는 교수님 한분께서 나에 일찍 올라와서 교수님과 같이 인천에 좀 가자고 하셔서 일찍 올라와 교수님을 태우고 일을 마치고 오후가 되어 학교로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점심 식사 후부터 명치끝이 살살 아프더니 남부 순환로에 올라서자마자 점점 아프기 시작하는데 너무나 통증이 심해 그만 도로 한 복판에서 기절을 하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국립경찰병원이었습니다. 급성 췌장염이었습니다. 당시 신학만 마치고 목사가 안 되려고 마음먹고 전도사 고시를 안 보려고 버티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이상한 방법으로 저를 쓰러트리시고 저를 설득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개역]호 2:14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 하고(**개유:달래다, 꼬드기다) [개역(개정)]호 2:14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내 의도와 상관없이 통증이 가라않을 때까지 여기저기 호스를 꽂아놓고는  보름간을 강제 금식을 시키시더군요.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개입하심을 알고 항복(?)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입원한 날부터 당장 춘천에서 다니시는 두 분의 집사님의 교통편이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늘 모시고 다녔기에 차비 걱정도 덜고 시간도 충분했는데 당시 동서울터미널에서 춘천행 막차가 8시30분에 있었고 학교 수업은 9시에 끝났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학생회를 하고 나면 9시 30분 한 시간 수업 빼먹지 않는 한 춘천으로 내려 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걱정을 할 수 밖에요. 그런데 그 다음날 진통제 때문에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데 침대 발치에 누군가 와 있는 인기척에 눈을 떠 보니 두 분 집사님이 계신 겁니다. 반갑고 놀라 어쩐 일이냐 물으며 학교는 어떻게 다니는지 그것부터 물었습니다. 그러지 두 분이 눈물이 글썽글썽 한 채로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아느냐고 하시는 겁니다.

제가 입원하던 월요일 수업을 한 시간 빼먹고 짐으로 가면서 두 분이 제 걱정을 하면서 교통편 때문에 걱정을 하였는데 다음날 학교를 오려고 버스를 타러 터미널에 와보니 터미널에 현수막이 걸렸고 거기에 “경축, 서울-춘천 간 버스 증편 운행” 이렇게 씌어 있더랍니다. 막차가 9시 50분, 한 대가 더 늘어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업을 마치고 터미널까지 와서 막차를 탈 수 있는 시간이 가능해 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준비하시고 우리들로 교통편을 위해 미리 기도하게 하신 후 그 기도를 응답해주신 것이지요. 할렐루야.

그 일이 있은 후 2주 후에 퇴원을 하고난 후 저는 서울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고 당시 2년 동안 춘천에서 신학교 가는 것 외에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 집사님들 네 분을 제 차에 태우고 분당까지 성경공부를 하러 다녔습니다. 말씀을 배우고 깨닫고 세워지는 재미와 은혜가 얼마나 좋은지 한 번도 빠지지를 않았었죠. 그런데 제가 병원에 입원한 후에 아예 서울로 올라왔으니 그 네 분들의 교통편이 또 걱정인 것입니다. 당시 분당까지 춘천에서 가려면 시외버스로 서울에 와서 2호선 전철을 타고 교대역에서 3호선 분당선을 타고 또 내려서 마을버스를 타고 수내동까지 가야하기에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간도 차비도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제가 모시고 다니다가 막상 이렇게 되니 미안하기도 하고 또 그분들 중에는 정말 어려운 분들이 많은데 성경공부를 포기해야 하는 일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근심걱정으로 착잡한 마음으로 성경공부를 하거 갔는데 그 네 분이 벌써 일찍 와 게신 겁니다. 너무나 반갑고 미안해서 어떻게 일찍 오셨느냐고 물으니 그분들이 또 제 손을 잡고 울면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김전도사님이 서울로 가시게 되고 저희들이 교통편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는데 글쎄 이번주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세요? 우연히 신문을 보다보니 크게 축하광고가 실렸는데 ”경축, 춘천-성남 간 버스노선 신설“ 이렇게 실렸지 뭐예요. 그래서 얼른 터미널에 전화를 해보니 하루 네 번 버스가 성남까지 다닌다는 거예요.” 라고 하시는 겁니다. 당시 춘천에서 성남까지 버스노선 신설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 후 거의 1년간을 빈차로 다니다 시피 했으니까요. 네 분의 집사님들은 항상 오시면 싱글벙글하시면서 우리는 아주 비싼 자가용을 타고 다닌다고 말씀하곤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때 그 기도로 서울 춘천 간 버스 편을 증편 하신 것만 아니고 춘천-성 간 버스노선을 신설하시기도 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그리고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할렐루야!

왕하 20장에는 히스기야 왕이 병에 들어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자신의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과 신앙을 아뢰며 간절히 기도하자 하나님이 병을 고쳐주시고 수한을 15년이나 연장시켜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에 히스기야가 이사야 선지자에게 병이 낫고 삼일 만에 성전에 올라간다는 말씀을 응하게 할 증표를 구하게 되고 그 증표로 일영표 즉 해시계의 그림자를 앞으로가 아닌 뒤로 십도 물러가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은 그 증표로 해시계의 그림자가 뒤로 십도나 물러가게 됩니다.

해시계의 그림자가 뒤로 십도 물러갔다는 얘기는 시간상으로 약 40분 정도의 시간입니다. 그 말은 태양을 중심으로 자전과 공전하는 지구가 거꾸로(뒤로) 10도나 되돌려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컴퓨터로 이 시간을 거꾸로 돌려 계산하면 그 시간에 약40분의 공백이 생긴다는군요.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사는 당신의 사랑하시는 구원받은 후사인 우리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절대 질서를 손대시면서 까지 당신의 자녀들을 위하여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외아들 독생자를 아낌없이 대속 제물로 내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그깟 지구를 거꾸로 돌리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십니다. 당신께서 스스로 창조주, 전능자의 영광을 포기하실 만큼 이 보잘 것 없는 죄인을 사랑하시는 말도 안 되는 바보 같으신 분이십니다.

그깟 버스노선 증편쯤, 버스노선 실설 정도는 식은 죽 먹기 아니겠습니까?
주님을 믿고 주님만 바라고 주님만 사랑하는 당신이 눈물로 기도하신다면...


출처: USA 아멘넷/ 김은태 목사님




기러기는 다른 짐승들처럼 한 마리의 보스가 지배하고
그것에 의존하는 그런 사회가 아니랍니다.
당신은... 먹이와 따뜻한 곳을 찾아 40,000km를 날아가는 기러기를 아십니까?
기러기는 리더를 중심으로 V자 대형을 그리며 머나먼 여행을 합니다.

가장 앞에 날아가는 리더의 날갯짓은 기류에 양력을 만들어 주어
뒤에 따라오는 동료 기러기가 혼자 날때 보다
71%정도 쉽게 날 수 있도록 도와 줍니다.

이들은 먼길을 날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울음소리를 내며,
그 울음소리는 앞에서 거센 바람을 가르며
힘들게 날아가는 리더에게 보내는 '응원의 소리'입니다.

기러기는 40,000km의 머나먼 길을 옆에서 함께
날개짓을 하는 동료를 의지하며 날아가며
만약 어느 기러기가 총에 맞았거나 아프거나 지쳐서
대열에서 이탈하게 되면 다른 동료기러기 두마리도 함께
대열에서 이탈해 지친 동료가 원기를 회복해 다시 날 수 있을 때까지
또는 죽음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동료의 마지막까지 함께 지키다 무리로 다시 돌아옵니다.

톰 워삼 (Tom worsham)의 기러기 이야기 中 



만약 제일 앞에서 나는 기러기가 지치고 힘들어지면
그 뒤의 기러기가 제일 앞으로 나와 리더와 역할을 바꾼다고 합니다.
이렇게 기러기 무리는 서로 순서를 바꾸어
리더의 역할을 하며 길을 찾아 날아간답니다.

이렇게 서로 돕는 슬기와 그 독특한 비행 기술이 없다면
기러기떼는 매일 수백킬로를 날면서
해마다 수천킬로를 이동하는 그 비행에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기러기가 가지고 있는 세 가지 덕목'을 사람이 본받자는 뜻에서
결혼식 폐백시 기러기 모형을 놓고 예를 올리는 것이라 합니다.

첫째, 기러기는 사랑의 약속을 영원히 지킨답니다.
보통 수명이 150-200년 인데,
짝을 잃으면 결코 다른 짝을 찾지 않고 홀로 지낸다고 합니다.

둘째, 상하의 질서를 지키고 날아갈 때도 행렬을 맞추며
앞서가는 놈이 울면 뒤따라가는 놈도 '화답'을 하여 예를 지킨다고 합니다.

셋째, 기러기는 왔다는 흔적을 분명히 남기는 속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기러기를 본받아 훌륭한 삶의 업적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옮긴 글]


 
         
      

43. 쪼개고 또 쪼개고

물리학이란 게 그렇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몇 백 년을 연구하고 계산하고 이루어놓은 것이 현대물리학이다.
그 현대물리학을 이 짧은 글들로 수박 겉핥기식으로 논한다는 것은 사실 그냥 주마간산인 셈이다.
그런데도, 이 대장쟁이가 컴컴한 대장간에서 대충 얼렁뚱땅 두들기고 빼먹고 넘어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더러는 복잡하고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니 이건, 대장쟁이도 그렇지만, 인간의 빨리 결론을 알고 싶어 하는 조급함과 복잡하고 골치 아픈 생각을 하기 싫어하는 이성적 게으름 때문은 아닐까? 이런 복잡하고 잡다한 것을 물리학자들은 어떻게 해내었을까? 정말 존경스럽다.
어쨌든 앞장에서 우리는 수많은 원자번호, 원소들과 소립자들의 종류들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사람들은 잠시 모든 물질은 양자, 중성자, 그리고 주변을 돌고 있는 전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세 가지 소립자가 모든 물질의 기본입자라고 생각하고 행복해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앞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후 수 백 가지의 소립자들이 발견된 것이다.
그 소립자들이 어찌나 많았던지 미국의 원자탄 개발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페르미는 발견된 수 백 가지의 소립자의 이름을 다 기억할 수 있다면 식물학자도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하였다.

수 백 가지의 소립자들의 발견.......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양자, 중성자, 전자가 다시 여러 가지의 하부 구성입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또한 뜨거운 기체에서 나오는 빛을 프리즘으로 분광시켜 얻은 스펙트럼이나 제만효과도 양자, 중성자 같은 페르미온(바리온)소립자들이 여러 가지 구성입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소립자들을 고유특성, 스핀과 전하, 질량 등으로 분류하고 우주선실험이나 가속기실험을 통하여 소립자들의 충돌실험을 통하여 나타나는 궤적과 전하, 질량의 변화 등을 분석하였으며 다른 입자들로 나누어지고 생성되고 소멸되는 현상들을 연구하게 된다.  
복잡하니까 대충 생략하고......

어쨌든 과학자들은 소립자들이 더 작은 미시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앞에 언급한 대로 1969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미국의 물리학자 머리 겔만은 이들 기본입자의 이름을 ‘쿼크’라고 이름 지었다.  
‘쿼크’에 특별한 의미는 없다. 그저 겔만이 애송하던 시의 한 구절에서 따 왔다고 한다.

겔만과 또 한 사람 츠바이크는 처음에 up, down, straight, 세 가지의 쿼크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top, bottom, charm 쿼크가 더 해져 모두 여섯 가지의 쿼크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또 6개의 렙톤이 있다.
6개의 쿼크와 6개의 렙톤이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입자라는 것이다.

6개의 쿼크와 6개의 렙톤이 양자, 중성자를 만든다면 무슨 모양이라고 할까?
마치 정육면체 상자 같은 모양이라고 할 수 있다.
6개의 쿼크가 6개의 면을 이루고 6개의 렙톤이 각 면 사이에 선을 이루는 식이라고 이해하면 될까?
뭐 그런 모양은 꼭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12개의 입자가 물질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같은 수의 반입자(反粒子), 즉 12개의 반입자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반입자들은 사라지고 없지만 아무튼 모두 24개의 입자들이 소립자를 이루는 셈이다.

미립자들은 또 있다.
쿼크와 쿼크 사이의 강력(强力)을 매개하는 ‘글루온’이라는 입자가 있다.
두 전하를 갖는 입자 사이에서 전기력을 매개하는 광자라는 입자도 있다.
또 약력을 매개하는 세 가지의 입자도 있다.
쿼크, 렙톤, 광자, 글루온, 중성미자, 뉴트리노........

오늘날 과학자들은 지금까지 발견되고 확인된 입자들을 가지고 기본입자의 표준모형을 만들었다.
6개의 쿼크, 6개의 렙톤, 4개의 매개입자.
그러나 이 기본입자 표준모형이 최종적인 결론은 아니다.
아직도 이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가 끝일까?
쿼크이든 렙톤이든 메존이든 보존이든 이런 것들이 물질의 가장 기본요소들일까?
그것들은 또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
그러한 미립자들의 질량을 이루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최종적인 물질의 근원은 무엇이란 말인가?
과학자들의 고민과 탐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쪼개고 또 쪼개고.......
과학자들은 오늘도 쪼개고 있다.
더 강한 힘으로 더 큰 에너지로 입자를 충돌시키면 더 많은 물질의 기본입자를 발견해낼 수 있으리라.
광속의 속도로 무한의 에너지로 입자를 가속하여 충돌시켜보자.
그리하여 빅뱅의 조건을 만들어보자.

그래서 이미 “물질의 근원을 찾아라.”에서 말한 바와 같이 스위스 제네바 인근에 무려 80억불을 투자, 둘레 27 킬로미터에 달하는, 양성자를 1,000분의 1초 만에 광속의 99.999991%까지 가속시킬 수 있는 거대강입자가속기를 설치한 것이다.

그 거대강입자가속기를 설치한 목적은 가장 강한 힘으로 가장 빠른 속도로 소립자들을 충돌시켜 빅뱅의 비밀, 태초의 우주탄생, 물질탄생의 비밀을 엿보자는 것이다.
또한 모든 물질의 질량의 근원이 된, 빅뱅 때 물질에 질량을 부여하고 사라져버린 것으로 믿어지는 ‘힉스입자’를 찾아내는 데 있다는 것도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쪼개고 또 쪼개고.......
부수고 또 부수고.......
그렇게 끝없이 쪼개고 부수어 나가면 물질의 비밀 속에 숨어 계시던 창조주 하나님이 마침내 두 손을 번쩍 들고 항복하고 나오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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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곡이 있는 우리의 생활은 언제나 변덕 그 자체,

주님께 비기알을  충전받으면 감사가 넘치다가  

 예기치 못한 또 다른 상황이 생기면

불평 충만이 될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이거 아세요? 

우리가 한 번 불평할 때  25번의 감사 에너지가

필요하다는것.... 즉 불평 한 번 하면

우리의 뇌에 입력되어 그불평으로

25 번의 감사를 소멸시키기 때문에

불평은 계속 불평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답니다. 

그래서 사단도 우리에게 불평이라는 심령의 도구를

사용하여 절대 감사하지 못하게 한답니다.

 

어때요, 우리 1: 25 의 손해보는 장사 하지맙시다.

 

                                        출처: 사모님사모님 중에서 퍼온 글입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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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고 깊게 / 이정하 
     
             

                   묵묵히 사랑하라
                   깊고 참된 사랑은 조용하고
                   말이 없는 가운데 나오나니
                   진실로 그 사람을 사랑하거든
                   아무도 모르게
                   먼저 입을 닫는 법부터 배우라 


                   말없이 한 발자국씩  
                   그가 혹시 오해를 품고 있더라도
                   굳이 변명하지 마라
                   그가 당신을 멀리할수록
                   차라리 묵묵히 받아들이라


                   마음 밑바닥에 스며드는 괴로움은
                   진실로 그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니
                   그가 당신을 멀리할 때는
                   차라리 조금 비켜 서 있으라


                   그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를 위해 
                   외려 두 손 모아 조용히 기도하다보면
                   사랑은,
                   어디 먼 곳이 아니라 바로 당신의
                   마음 속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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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H. 스펄젼의 회심 간증

- C. H. 스펄젼 -

 

내 나이 겨우 20세 안팎이었지만 내가 겪었던 그 무서운 심적 고민과 고통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이 고민 가운데서 오년을 헤맸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공포를 직접 뼈저리게 느낀 사람이 있다면 나야말로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죤 번연이 쓴‘넘치는 은혜’속에 묘사된 그 실상이야말로 바로 나의 모습이었습니다. 번연이 빠져들어간 그 구렁속으로 내가 들어가보지 못한 것이 사실이더라도 내가 허우적거렸던 그 깊이 속에 번연 역시 들어가보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나의 세계는 태양 없는 하늘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 죄가 너무 중하여 다시는 소망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기도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기도했는지 하나님만은 아십니다. 그러나 응답은 희미한 별빛만큼도 새어나지 않았습니다. 성경 말씀을 부지런히 읽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약속은 성경의 모든 무서운 경고보다 더욱 더 내 마음을 불안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누릴 수 있는 복락이었고, 뺐都� 전혀 관계없는 사실임을 나는 확신했던 것입니다.‘나는 아무리 재어 보아도 죄인이다. 그런 약속은 죄인 아닌 사람들, 즉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것이 아닌가!’이래서 나는 밑도 끝도 없는 사연 속으로만 곤두박질해 들어갔었습니다.

나의 이 고통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복음을 얘기해준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게 하나님을 가르쳐주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들려주었고, 영생과 영멸을 깨닫게 했고, 내가 죄인인 것을 알려 주었으나, 내게 복음을 말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소위 기독교 국가에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비록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고 누구든지 값없이 받을 수 있는 복음의 단순성을 충분히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는 내가 살던 도시의 곳곳에 있는 교회를 다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말이지만 복음 그대로를 설교한 설교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설교자들을 원망하진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설파했습니다. 나는 그 설교에 공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구원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는 죄인에게 그런 것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입니까? 또 한분 훌륭한 목사님은 늘상 율법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마음 밭을 갈아놓고 씨뿌리기만 기다리고 있는 내 심령에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나는 죄인인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죄인임을 확신하고 구원 받을 길만 일심으로 애쓰고 있는 터였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분은 아주 실제적인 내용의 설교가였습니다. 마치 임전태세인 군인들 앞에 이것 저것 마지막으로 명령하는 사령관과 같았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어가는 나같은 자에겐 그런 좋은 권고와 격려도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하는 말씀이 있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대관절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 사건만 없었더라면 나는 아직도 여전히 그와 같은 미궁 속을 헤매고 다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날 일요일 아침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셔서 큰 눈바람을 보내주셨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날도 그 어둠과 실망속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날 아침도 나는 또다시 나의 영적 해결을 위하여 어떤 교회로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날씨가 너무 나빠 가던 중도에서 계획을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걸어갈 수 없었던 나는 좁은 골목길을 꺽어 부근의 작은 예배실로 들어갔습니다. 초기 감리회의 보잘것 없는 예배실로써 모인 사람들이라야 고작 열서너명 되었습니다. 설교자는 그날 아침 일기 관계로 오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눈보라때문에 길이 차단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가난한 직공 차림의 한 남자가 대신 설교하러 강단으로 나가는 참이었습니다. 재봉공인지 또 구두장이인지 하여튼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설교자라면 어느 정도 교육을 받아야 좋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이런 표준에서 볼 때는 아주 얼뜨기란 평을 들을만 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택한 본문 외엔 무슨 말을 엮을지 통 모르는 이였습니다. 그것 빼놓고는 지식이라곤 전혀 들어있지 않은 모양이었습니다. 그가 선택한 본문은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Look unto me, and be ye saved, all the ends of the earth: for I am God, and there is none else. (Isaiah [KJV] 이사야 45:22)’ 이었습니다. 그는 발음도 제대로 못 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말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한 줄기의 서광을 던져주는 듯 싶었기 때문입니다. 내게도 희망이 비쳐진 듯 한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을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모로 보나 이 말씀 참으로 간단하지 않습니까,‘보라!’(이사야 45:22의 국역‘앙망하라’는 영역으로는 눈을 들어 단순히‘보라’는 뜻으로 되어 있음. 원어인 히브리어‘파나’도‘얼굴을 돌린다’, ‘얼굴을 대한다’등이 주요 뜻으로 되어 있음)‘보라!’‘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보는’데 단돈 십원도 들지 않습니다. 세상 고금 없는 바보라도 다‘볼’수는 있습니다. ‘보기’위하여 대학교 공부하는 사람 없습니다. 여러분들이나 또는 누구든지 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말씀하시기를‘나를 보라’하십니다.”

 

그가 너무 열중한 나머지 영국 남동부 지방 사투리가 튀어 나왔습니다.

 

“거참, 당신네들은 대개 모두 당신네들 자신을 본다말이여. 거기 볼 필요 없당께. 아, 아무리 당신네들 자신을 봐두 신기한 꼴 못본다말이여! 어떤 사람은 또 하나님 아부지를 보네그랴. 아부지 하나님은 차츰 보란 말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나를 보라’그 말이여. 당신네들 중 어떤 사람은 또 이런 말을 하네그랴,‘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보지.’이런 재변이 있나, 지금 당장은 그 일허구 상관이 없단 말이여. 그리스도를 봐요. 여기 있지 않나배,‘나르르 보라’구.”

 

그리고 이 고마운 사람은 본문 귀절을 양 팔을 벌려 제스쳐를 써가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나를 보라. 십자가에 달여 있는 나를 보라. 보라! 죽어 묻힌 나를 보라, 나를 보라, 부활하는 나를 보라. 나를 보라, 승천하는 나를 보라, 아버지의 오른 쪽에 앉은 나를 보라, 나를 보라! 나를 보라! 나를 보라!”

 

이 정도로 이어나간 후, 그리고 또 여남은번 되풀이한 후, 그 사람은 이제 밑천이 딸렸습니다. 그럴 때 그는 복도 쪽에 웅크리고 앉은 나를 발견했습니다. 사람이 워낙 적게 모였던지라 그는 단번에 낯선 사람을 가려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다시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내게 대한 직접적인 것이었습니다.“젊은이, 자네 대단히 풀이 죽어 보이는군.” 딴은 사실이었지요. 그러나 강단으로 부터 내 몰골을 지적당하기란 과거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내겐 실로 결정타가 되었습니다. 그는 말을 이었습니다.“자넨 언제나 그 모양인걸세, 살아도 그렇고 죽어도 그렇지, 여기 이 본문을 순종하지 않으면 말일세. 그러나 자네가 이 말씀을 순종하면, 이 순간 구원받을 수 있네.”

 

그리고 그는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젊은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보소!”나는‘보았’습니다. 그 자리, 그 시간에 나의 구름은 걷혔습니다. 흑암은 사라졌어요. 그 순간 나는 태양을 보았단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흘리신 보혈,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단순한 믿음을 그 자리의 그 어느 구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감격과 희열로 찬송 또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아아, 이전부터 그 이야기를 진작 내게 전할 수 있었던 사람이 있었다면 나는 그 지긋 지긋한 오 년을 허송세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구원 얻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밖엔 없다는 이야기를!

 

챨스·스펄젼이 이생에서의 마지막 설교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오늘날까지 주님을 섬긴지 사십 년 하고 조금 더 됩니다. 단지 주님의 이름만 찬송할 뿐입니다. 그동안 나는 주님의 사랑만 받아왔습니다. 주님이 기쁘게 허락하신다면, 이곳 세상에서 다시 사십 년간을 기쁘게 계속하여 봉사할 마음이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나의 생활은 시종일관 생명의 약동과 평안과 기쁨의 충만이었습니다. 여러분, 지금이라도 곧장 이 생활로 들어오시기를 나는 진심으로 간구합니다. 하나님이 도우셔서 오늘이라도 여러분이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모여들기를 기도하여 마지 않습니다.”

 

‘And this is the will of him that sent me, that every one which seeth the Son, and believeth on him, may have everlasting life: and I will raise him up at the last day.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John [KJV] 요한복음 6:40)


출처: 양무리 마을
행여, 내가 / 최송연

주님, 
진리의 빛으로 내 길을 늘 
밝혀주시옵소서 
불어치는 모진 세속의 바람 
나의 연약한 영혼이 감당하기엔
너무 어둡고 캄캄하여
행여, 내가 
주의 길을 벗어나 어둠과 짝하고
거기 안주할까 그것이 두렵습니다  

주님,
온유하신 당신 사랑을 내게 늘 
더하시옵소서
날이면 날마다 듣게 되는
어이없는 비방과 억울한 말들
나의 연약한 영성이 감당하기엔
너무 거칠고 험악하여
행여, 내가 
성도의 본분을 망각하고 
형제와 다투고 쟁론하여 이긴 후,
내가 승리했다 자고할까 그것이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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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망 최송연 캄캄한 밤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 한개를 줍습니다.

     

    푹풍이 휘몰아치는 바다위에서

    따뜻한 등대의 불빛을 찾습니다.

     

    바싹 메마른 사막에서

    빠알간 선인장 꽃 한송이를 피워냅니다.

     

    십자가 위에서 흐르는 그리스도의 피가

    세상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줍니다.

     

    소망은

    손으로 만져지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귀로 들리는 소리도 없습니다.

     

    그는

    고난의 밤과 흑암의 저 넘어엔

    언제나 새날과 새 아침이 있음을

    굳게 믿는 이들에게

    미소로 찾아와 주는 천사입니다.

    

     

      
    
    글 한 줄로 마음을 전한다
    
    뉴욕의 한적한 공원,
    한 노숙자가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가슴에 
    “I am blind(나는 앞을 보지 못합니다).”라고 
    쓰인 팻말을 걸고 있었지요.
    
    하지만 거리를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은 
    누구 하나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한 남자가 노숙자 앞으로 다가섰습니다. 
    남자는 노숙자의 목에 걸린 팻말에 
    뭔가를 쓰고는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팻말을 본 사람들이 
    노숙자에게 돈을 건네기 시작했습니다. 
    
    팻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Spring is coming soon,
     But I can't see it "
    (봄이 곧 올 텐데요,
     나는 그 봄을 볼 수조차 없답니다).
    
    노숙자의 팻말에 쓰인 글을 고친 남자는 
    프랑스의 초현실주의를 주창한 
    시인 앙드레 브르통이었습니다.
    그는 한 줄 글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또는 강하게 움직일 줄 알았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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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비로 내리는 성령
            
            비온 뒤의 상쾌함과 신선함, 
            싱그러움이 가득한 아름답고 쾌적한 날입니다
            지난 주말에 비교적 많은 비가 내려서 
            오늘 아침에도 도로 곳곳에 흙탕물이 흘러 내리고...
            비포장도로는 말 할것도 없이 진흙탕천지입니다
            이렇게 진흙탕으로 변한 길은
            1주일정도가 지나야 마르고 굳어 집니다
            
            지난 주일 오후에는 선배 목사님의 은퇴식에 
            참석했더랬습니다
            미국에 오셔서 늦깍이로 신학공부를 하셨더군요
            은퇴소감을 말씀하시는 중에 
            "...수학,기타 다른 공부는 그런대로 하겠는 데...
            영어로 헬라어, 히브리어를 공부하는 것은 
            정말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목회를 한참 하실 나이인데...65세에 은퇴를 하시더군요
            일면식도 없는 분을 후임으로 세우시고 물러나십니다
            
            벌써 5년여 전입니다
            만 65세(되기 전)에 물러나신 
            목사님 한 분이 생각이 납니다
            교회설립부터 25년의 성상을 쌓아 오시다 
            본인과의 약속 대로 65세에 은퇴하신 그 목사님...
            ...제 집에는 찾아 오지도 마시라, 
            전화 심방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인생의 마지막, 끝 마무리가 깨끗치 못하여 
            평생의 업적이 빛을 바래고,
            비난을 받는 성직자, 교회가 적지 않습니다
            약속, 법, 질서, 규칙을 지키는 것...
            지극히 당연한 일이 화제가 되고, 존경, 
            추앙을 받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춘분(한국에서는 입춘부터 봄으로 치지만)
            봄이 시작하는 날입니다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려 만물이 생동함같이 우리 마음에...
            봄비로 내리는 성령이 가득하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기쁘고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승리!!
            
            글/김만니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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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상 2:3 "교만한 자들아, 너무 잘난 체하지 말아라. 교만한 자들아, 너무 우쭐대지 말아라. 여호와는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시다. 그가 너희 행위를 판단하시리라.

        작년 여름부터 목덜미와 오른 쪽 어깨가 뻐근하고 저려서 병원 치료를 몇 차례 받았읍니다. 집에서 부황을 뜨기도 하고 사혈요법을 시도하면서 그저 오십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적절히 치료받을 환경이 안되고 경제적인 여력도 안되니 그저 쉬면 좋아지려니 했던 것이 점점 더 악화가 되고 겨울부터 오른 쪽 팔이 저리고 당기는 것입니다. 여러 이유로 안산으로 사역지를 옮기고 교회에 적응하느라 차일 피일 미루어오던 중 통증이 점점 더 심해져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상황까지 왔습니다. 

        전에 사역하던 기도원에서 작년 봄 곡물 창고를 지었습니다. 봉사자가 적고 인원이 모자라서 혼자서 골조를 세우고 용접하는 일을 하면서 누군가가 잡아주어야 하는 일 임에도 어쩔 수 없이 혼자 사다리에서 파이프를 붙들고 처다보며 작업을 하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목이 상당히 아프고 견딜 수없도록 아파서 사실 불안했습니다. 그 때 바로 안정을 취하고 치료를 받았어야 함에도 계속 진행하고 그 일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그후 또 한번 정자를 짓게 되고 그 일도 도중에 인원이 없어서 혼자서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사실 그때는 이미 상태가 많이 안좋을 때였습니다. 집사람은 제발 이번 일만 끝내고 다시는 일을 하지 않토록 해 달라고 기도를 하였으니까요.(그 기도의 응답으로 지금의 사역지로 옮기게 되었는 것 같습니다^^)

        .집사람과 이 문제로 의견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다툼이 있었습니다. 저는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야겠다 라고 하고 집사람은 지금은 상황이 어려우니 기도하며 기다려보자는 얘기였죠. 때론 이런 종류의 일들은 서로의 마음을 다치게하는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당사자인 저는 나름 기도하며 참아왔던 일이고 너무 고통스러우니 의사의 정확한 진단을 받고자 하는 것이었고 아내는 기도 하면 하나님이 고쳐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집사람은 지금의 재정 상태로는 병원에 가는 것 조차 감당이 안되니까 염려하는 것이고 저는 지금까지 지키시고 도우신 주님께 믿음으로 맡기고 검사를 받아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당사자가 아니면 사실 얼마나 아픈지 상태가 어느정도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목사가 아닙니까? 기도하며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느냐 라는 투의 말은 곧 당사자에게는 자칫 믿음 없는 자로 책망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저로써는 이 일로 인해 얼마나 간절히 낫기를 기도했겠습니까? 이런 저를 이해하지 못하고 병원비 때문에 적극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것에 화가 났습니다. 이런 애기로 인해 서로 마음이 상해 있었습니다.

        가끔씩 찾아오셔서 대화와 기도를 통해 늘 저를 세워주시는 멘토 목사님 한분이 다녀가셨습니다. 꼭 필요할 때 찾아와 주셔서 영적으로 성장하고 주님의 교회로 성장할 수 있도록 섬겨주시는 주님(?) 같은 분이십니다. 목사님과 대화중에 목 아픈 것 에 대해 집사람과의 의견 차이가 있었으므로 그 부분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저희 얘기를 들으시고나서 이런 조언을 해 주셨습니다. 우선 이런 고통이 오게된 상황을 하나님께 먼저 낱낱이 말씀드리고 나서 왜 이 고통이 내게 임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하나님께 물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건 뒤에는 그 사건이 있게 된 원인이 있으며 그 결과로 지금의 이런 일이 있게 된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 '인과 관계'를 먼저 찾으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어디서 잘못 되었는지 영적인 문제를 반드시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 지 주님께 묻는 기도를 하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주님께서 고쳐주시든지 아니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지를 말입니다.

        사실 문제에는 반드시 답이 있습니다.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가운데 우연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필연'이지요. 저절로 된 일은 없다는 이야깁니다. 원인만 찾으면 의외로 답은 쉽게 찾아지는 것이지요.

        그날 저녁부터 더욱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왜 이일이 내게 닥쳤는지를 생각했습니다. 성령님께 도움을 요청하며 말씀으로 조명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반드시 원인을 찾아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저의 영혼 깊은 곳, 양심은 그 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목사님과의 대화 가운데 제 마음에 찔림으로 다가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아니기를 바라는 미묘한 불안함과 불쾌한, 나의 속사람, 나의 자아가 거부하는 양심 깊은 곳으로부터의 찔림이 말입니다.

        그날 밤 주님은 저의 잘못이 무엇인지, 왜 목 디스크가 걸렸는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저의 영적인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저의 교만함은 사실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저는 교만함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남다른 은혜도 주셨습니다. 분별의 은사도 주셨습니다. 이 것은 주님의 절대적인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며 이런 은혜는 성도들과 주의 종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더 겸손히 섬기라고 주신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저는 사역자들과 수많은 목사님들과 설교와 사역들을 속으로 평가하고 판단하였습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은연중에 판단하고 무시하고.... 성도들을 보면서 저사람은 왜 저럴까 무엇이 잘못되었고 저사람은 무엇이 문제고 라며 수 없이 판단하였습니다. 한국교회가 무엇이 문제고 어떤 교회는 무엇이 잘못되고 어느 목사님의 설교는 무엇이 문제고 등등등...

        정말 말 할 수 없이 그리고 끊임없이 판단하여 왔습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 충고하거나 성령님의 감동으로 나에게 바른 말을 할 때면 겉으로는 안그래도 속으로는 그를 미워하고 오히려 판단하고 무시하기도 했습니다. 오히려 교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를 위해 기도하신 분들, 끝까지 나를 섬겨주신 주의 종들, 가족들과 성도들과 동역자 목사님들... 나로 인해 상처 받았을 수 많은 분들...(정말 죄송합니다. 부디 저를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강단에서 설교 말씀을 통해 날린 수 많은 칼날들... 수술하고 고치라고 주신 말씀이 오히려 흉기가 되어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죽이고 아프게 했는지...말씀의 성령의 검이 아닌 독검으로 마냥 휘둘러 댔던 나자신이 얼마나 끔찍한지...

        너무나도 부끄럽고 죄송하고 땅바닥을 파고 들어가고 싶을 많큼 수치스러움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밤 주님께 회개하며 눈물로 용서를 빌고 또 빌었습니다.

        저는 신학교 다닐 때부터 매일 기도할 때마다 빼먹지 않고 간구한 기도 제목이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말씀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교만하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 저의 유일한 기도제목이었습니다. 그리고 현재도 그 기도제목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주님 저의 교만한 목을 꺾어 주시고 거만한 눈을 감겨 주옵소서."

        습관처럼 꼭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만의 죄 때문에 타락하게되는 것을 보아왔고 성경속에서도 그 것이 가장 큰 죄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저 또한 얼마던지 교만할 수 있는 소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기도를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제가 바로 그 흉악한 죄인 교만한 자였습니다. 내가 바로 사단이었고 죄인 중의 괴수 였습니다.

        모두가 주님의 생명을 소유한, 주님이 함께 계시는 주님의 사자들이었습니다. 그런 분들을, 주님을, 내가 판단하고 주님을 내가 정죄하고, 주님의 말씀을 내가 경멸히 여기고 주님을 무시했으며 주님을 미워한 것입니다. 모두들 나를 온전히 세우고자 희생하고 섬겨 주신 주님들이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교만으로 눈이 어두워져서 그 주님을 보지 못하였고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주님의 섬겨주심을 깨닫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나를 깨닫고 돌아서게 하시기 위하여 내 목을 치셨습니다. 인과 응보,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 불변의 통치 질서입니다.

        제가 그동안 기도했던 대로 교만함의 댓가는 목이 꺽이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지나친 생각이 아니냐고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저는 정말 알고 있습니다. 저의 겉사람은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어하지만, 아니 아니길 바라지만 제 양심은 맞다고 소리칩니다. 자신 스스로를 저는 잘 알지 않습니까? 어찌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부인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며칠 전 척추 디스크 전문병원에 가서 MRI촬영과 정밀 검사를 했습니다. 경추 4-5번 목디스크 판정이 났습니다. 위 아래 디스크도 밀려있는 상태였고 목뼈가 디스크를 밀어내어 우측신경이 까맣게 눌려있고 상태가 심해서 약물이나 주사 그리고 물리치료 로는 안되고 반드시 수술적 치료와 인공디스크를 넣어주는 시술을 해야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수술자체가 어렵거나 한 것이 문제가 아니고 비용이 매우 비싸다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기구는 의료보험이 안되기에 수술 비용만 해도 800만원 정도 한다는 것이지요. 인공디스크 보다 저렴한 수술도 있지만 약간의 장애는 있다고 하면서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의사선생님을 만나 설명을 듣고 참담한 심정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오른 쪽 팔을 쓰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돌아와서 가족과 담임 목사님과 상의를 했습니다. 보험 들어놓은 것도 없고 보험 들 형편도 안되고 들었어도 깼을 테니까요. 대출을 받을 수도 없고(부끄럽지만 신용불량이라) 아내 앞으로 카드 대출을 받아야 할까 별 생각을 다 하지만 가난한 목사가 무슨 방법으로 많은 병원비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 맡기고 기도하는 수 밖에요. 사실 주님이 유일한 도움이시며 보호자시니까요.

        무슨 일을 만나던지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아내에게 하나님을 믿는다면 감사해야한다고 계속 독려하였습니다. 담임목사님이 여기저기 알아보시고 나서 친구 목사님이 인천 부평의 세림병원 원목 목사님과 잘아시는데 그 병원에서 어렵고 힘든 분들의 치료를 돕는 프로그램이 있다며 그 병원 원목 목사님과 통화를 하시고 나서 진단서와 MRI자료를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류심사를 마치고 병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수술 비용의 아주 일 부분만 감당하고 치료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이렇게 돕는 손길이 있음에 감사하고, 무엇보다 저의 영적 교만을 이 일로 깨닫게 되고 회개할 수 있게된 것이 무엇보다도 감사하며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하시니 정말 감사하지요.

        이제는 차료를 잘 받을 수 있게 되길 기도합니다. 훌륭한 의사선생님을 만나도록, 수술이 잘 되도록, 모든 손길에 주님께서 역사해 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합니다. 무엇보다도 목 디스크의 치료뿐 아니라  교만으로 더럽혀지고 죄악으로 물들어져 있는 나의 마음, 비뚤어져 있는 심령이 치료 받아 정결케 되고 바로 세워지기를 기도합니다.  부족한 저를 위해 중보기도 부탁드립니다. 염치가 없지만 기도외에는 붙잡을 것이 없음을 잘 알기에 부탁을 드립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러분의 기도가 제겐 가장 큰 힘이 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시 94:2) 세계를 심판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들에게 마땅한 벌을 주소서)

        출처: USA 아멘넷 독자공간게시판/ 김은태 목사님

        내 맘의 방을 채워가는 일
         

        내가 인생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은
        사람과 접촉한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책과 접촉한 결과였습니다.
        나에겐 맛난 음식보다도
        욕심이 나는 책이 있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마음은
        곧 글을 아끼는 마음입니다.
        시간과 돈을 아껴서
        사정이 허락할 때마다 책을 사고,
        또 그책을 자기만의 책장에 꽂아
         두고 틈틈이 읽는 사람.
        그 사람은 분명 누구보다도
        마음이 풍요로운 사람일 겁니다.
         
         

          
        물론 지식의 양과 가지고 있는
         책의 양이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사모은 책이
        자신의 구석방에 한 권 한 권 쌓여간다면
        또 얼마나 가슴 뿌듯한 일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 영혼의 방을
        채워가는 일이기에 말입니다.
         
         

         
        어쩌면 책은
        더 이상 매력적인 것이
         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책은 무엇이 올바른 삶인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제시해 주는
        삶의 이정표 같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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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을  만난 후
                                                        

                                                               최송연

                                       주님,
                                       당신을 만난 후,

                                       내 마음속에 흐르는

                                       감격의 노래 하나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던 나는

                                       보잘것없는 실수투성이


                                       그러나

                                       당신의 눈에 비친 나는

                                       최고의 걸작품이죠,

                                       주께서 정성 다해 빚으셨으니까요.


                                      주님,

                                      당신을 만난 후,

                                      내 마음속에 흐르는

                                      사랑의 노래 하나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던 나는

                                      슬픈 자아상을 가진 외로운 영혼


                                     그러나

                                     당신이 보시는 나는 사랑받는 자녀죠,

                                     주님의 보혈로 자녀 삼아 주셨으니까요.


                                     주님,

                                     당신을 만난 후,

                                     내 마음속에 흐르는

                                     소망의 노래 하나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던 나는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아집 덩어리


                                     그러나

                                     당신이 보시는 나는 들에 핀 백합화죠,

                                     주님의 그 크신 은혜가 향기 되어  

                                     내 온몸과 영혼을 적셔주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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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나비의 연무(戀舞) / 최송연
        아침 햇살이 온 누리를 감싸기 전 어둠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태고의 울음 없이는 잉태된 생명을 안을 수도 없지
        슬픈 안개 없이 새싹은 돋아날 수 없고
        꽁꽁 언 땅을 뚫고서야 보리는 파랗게 피어나지
        겨울의 푹풍이 그토록 거센 것도 봄나비의 戀舞를 준비하는 것임을 그 누가 알랴
        잠시 춤추다 사라지는 나비마저 캄캄한 고치 속에서 한 세월을 기다려야 하는 것을...
        십자가 없는 영광만 바란다면 그대, 어찌 성도라 부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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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는 마른 솔잎처럼 조용히 태우고
        기뻐하는 일은 꽃처럼 향기롭게 하라

        역성은 여름 선들바람이게 하고
        칭찬은 징처럼 울리게 하라

        미움은 물처럼 흘러 보내고
        은혜는 황금처럼 귀히 간직하라

        사람은 축복으로 태어났으며
        하여야 할 일들이 있다

        그러므로 생명을 함부로 하지 말며
        몸은 타인의 물건을 맡은 듯 소중히 하라

        시기는 칼과 같아 몸을 해하고
        욕심은 불과 같아 욕망을 태우니
        욕망이 지나치면 몸과 마음 모두 상하리라

        모든 일에 넘침은 모자람 만 못하고
        억지로 잘난 척 하는 것은 아니함만 못하다

        내 삶이 비록 허물투성이라 해도
        자책으로 현실을 흐리게 하지 않으며
        교만으로 나아감을 막지 않으리니

        생각을 늘 게으르지 않게 하고
        후회하기를 변명 삼아 하지 않으며
        사람을 대할 때 늘 진실이라 믿어하며

        절대 간사한 웃음을 흘리지 않으리니
        후회하고 다시 후회하여도
        마음 다짐은 늘 바르게 하리라 "

        복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씨앗을 뿌리는 농부
        비록 오늘은 고달프나 인내하면서 씨를 뿌릴지니
        내일, 소망이란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어 드릴 수 있으리라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서 남을 가르치려는 것은
        듣는 자에게나 가르치는 자 모두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는 입술만의 지식이라

        물 없이 흐르는 아침 안개처럼 부질없고
        시궁창에서 장미를 구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라

         -목양지기 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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