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28장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을 위하여’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칼빈 장로교의 웨스트민스터 신조도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이어야 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과연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부족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에 무슨 보탬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있든 없든 이미 완전하시며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시니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우리를 그 분의 영광을 위하여 지으셨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우리가 들어간다는 뜻일 겝니다.
아무것도 아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 영광의 존재가 된다는 뜻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기 위하여는 오직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순종이라고 말씀한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순종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 ‘사무엘상하’는 ‘사무엘상하’가 ‘다윗상하’라 하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사무엘상하에는 책이름 ‘사무엘’ 이야기보다 다윗의 이야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영화에서도 주인공은 끝까지 죽지 않는데 사무엘상하를 보면 주인공 사무엘은 사무엘하가 시작되기도 전인 사무엘상 28장에 벌써 죽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완전히 다윗의 이야기뿐입니다.

‘사무엘상하’든 ‘다윗상하’든 이 책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순종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다윗과 그 다윗을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사무엘상하입니다.

사무엘상하를 다시 읽어보십시오.
사울은 악하고 다윗은 착헤서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사랑하신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악함과 선함으로 사울과 다윗을 비교한다면 다윗이 사울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울왕도 처음에는 행구 속에 숨을 정도로 수줍고 착한 청년이었습니다.
사울왕은 다윗을 질투하고 다윗을 죽이려고 날뛰기는 했지만, 다윗은 밧세바와 간통하고 그 남편, 자신의 충성된 부하 우리야를 모살하였습니다. 죄질로 보자면 다윗이 사울보다 오히려 악하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다윗의 편이 되어 주셨고 마침내 다윗을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순종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울왕은 적이 쳐들어오는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 하고 자기 생각대로 제사장이 드려야 할 제사를 드렸습니다.
살찐 소와 양이 아까워서 아말렉 왕과 가축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였습니다.
다윗은 위급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사울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어도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왕을 자기의 손으로 죽일 수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였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밧세바와 간통하고 우리야를 죽인 죄를 지적하자 그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꼬꾸라져 회개하였고, 시므이가 저주를 퍼붓고 욕을 하며 흙을 던지는 것을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생각하고 감내하였습니다.
다윗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걸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임재의식과 순종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씀하시게 하였다고 믿습니다.
사무엘상하가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불순종하는 자는 버림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셨습니다.
우주만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피조 되었고 주관 되고 있습니다.
피조세계는 곧 창조주에 대한 순종의 세계입니다.
순종은 존재를 가능케 합니다.
창조주에게 순종하지 않는 피조세계는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피조세계에서 오직 인간만이 불순종합니다. (또 있군요, 사단 마귀...)
창조주에 대한 불순종은 자기파괴와 타락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피조세계란 창조주에게 순종하는 세계라는 사실입니다.
순종이 존재의 조건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조차도 피조세계 안으로 피조물의 위치로 낮아져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 분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빌 2:6)
하나님은 순종한 예수님을 살리시고 그 이름을 만물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모든 무릎으로 그 앞에 끓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조차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영광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은 피조세계에서는 오직 순종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또한 마지막 날에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 곧 순종하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그 보내신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순종해야만 죄인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불순종의 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순종하기는커녕 조롱하고 대적하고 밟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불순종의 결국은 버림받음 밖에 없습니다.
사무엘상하는 불순종하는 사울왕과 순종하는 다윗의 대비인 셈입니다.

사무엘상 28장에는 불순종으로 인하여 끝내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울왕의 비참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블레셋 대군이 쳐들어오자 사울왕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울왕을 이미 버리셨기 때문에 아무 응답을 하지 않으십니다.
군급한 사울왕은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죽은 사무엘의 혼을 땅속으로부터 불러올려 도움을 청합니다.
마치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는 것 같은 처절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신접한 여인이 불러올린 사무엘의 신으로부터 사울왕이 들은 것은 엄중한 정죄와 파멸의 선고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사울왕은 길보아산에서 아들들과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오직 순종입니다.
순종만이 생명의 길이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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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우리는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조차 주저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더 말해 달라고 요청할 때,
더 이상 말할 게 없을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 때문에, 우리는 걱정하고 숨으려 하고
소유하려 들며, 그리고 다른 사람 앞에 나가기를
꺼리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요청할 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모두 자연스럽게
그들과 나누어 가질 용기가 있으면,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우물을 관대하게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때에 비로서
우리는 얼마나 그 지식의 우물이 깊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꾸미지 않아 아름다운 마음
찬란하게 빛나는
영롱한 빛깔로 수 놓아져
아주 특별한 손님이 와야
한 번 꺼내놓는 장식장의 그릇보다

모양새가 그리 곱지 않아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언제든지 맘 편하게 쓸 수 있고

허전한 집안 구석에 들꽃을
한아름 꺽어 풍성히 꽃아두면
어울릴 만한 질박한 항아리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오해와 이해 사이에서
적당한 중재를 할 수 있더라도
목소리를 드높이지 않고

잠깐동안의 억울함과 쓰라림을
묵묵히 견뎌내는 인내심을 가지고
진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꾸며진 미소와 외모보다는
진실된 마음과 생각으로
자신을 정갈하게 다듬을 줄 아는
지혜를 쌓으며 가진 것이 적어도
나눠주는 기쁨을 맛보며
행복해할 줄 아는 소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 좋은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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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사랑' 운행 중
    

지금은 사랑 운행중입니다.
사랑 밸트 꼬옥 메어 주십시요.
만남을 출발로 행복으로 가는 여행길에
당신만이 함께 갑니다.

간혹 슬픔의 마을과 미움의 터널을
지나게 되더라도
결코 한눈 주지 마십시요.
가급적 브레이크는 밟지 않을 것이니 정 휴식이 
필요하시면 귓속말로 살짝 얘기 해 주십시요.
하지만 휴식은 길지 않습니다.
당신과 함께 해야 할 길이
아주 멀기 때문에 쉼 없이 가겠습니다.
간혹 비포장 도로나 꼬부랑길을  지날 수 있으나 
저를 믿고 가십시요.
당신의 사랑 여행이 목적지에 무사히
이를 수 있도록 당신만의 기사가 될 것입니다.
간혹 멀미가 난다거나 여정길이 지겨울 때면
내가 우스갯소리로 당신을 즐겁게 해 주겠습니다.
내가 가진 여유를 드리겠습니다.

사랑의 연료가 충만해 있습니다.
믿음의 윤활유가 가득 차 있습니다.
오늘도 당신을 모시고 마저 길을 가겠습니다.

출처 : 좋은 글 중에서

 


사랑이여/연주곡

 

 
 
 
작은자님 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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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 스님에서 카자흐스탄 선교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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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얼마 전, 촬스 스윈돌 목사님이 ‘Sincere’라는 단어를 아주 재밌게 해석한 것을 '사모님사모님' 카페에서 읽어본 적이 있다. 기억 나는 대로 이곳에 잠시 옮겨보면, 라틴어 ‘Sine Ceras’가 영어 ‘Sincere의 어원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Without Wax’ 즉 ‘왁스가 없다’란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Sincere’란 ‘정직하다’ ‘진실하다’라는 뜻인데 무엇 때문에 ‘왁스가 없다’라고 하는 뜻을 담고 있을까?

그 유래는 이렇다. 우리나라도 그랬겠지만, 아주 오래 전, 유럽에서는 도자기가 무척 귀한 물품이었다고 한다. 질이 좋은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늬, 색감, 모양, 모든 것이 좋아야 했지만, 무엇보다 금 간데가 전혀 없어야 했고, 조금이라도 금이 간 곳이 있으면 그 도자기의 가치는 땅에 떨어져 폭락해버린다.

그럼에도, 그때나 지금이나 일부 정직하지 못한 상인들은 금이 간 도자기를 깜쪽 같이 속여서 파는 방법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진주 같이 투명한 왁스를 살짝 바르면 도자기의 금을 감출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교묘한 위장술로서 당시 상인들 사이에 이 방법이 아주 성행했다고 하니, 어디든지 사람 사는 곳은 모두 매일반, 가짜와 진짜가 섞여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일반인의 눈에는 전혀 알 수 없는 이런 교묘한 방법도 전문인의 눈은 속일 수가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깜쪽 같이 속여 칠한 왁스를 전문인이 알아 내는 방법은 무엇일가? 그것은 도자기를 밝은 햇빛에 비추어 보는 것이라고 한다. 밝은 햇빛에 도자기를 들고 비추면, 제 아무리 깜쪽 같이 발라둔 왁스라고 하더라고 햇빛에는 그 실체가 모두 들어나기 때문에, 이 ‘Sincere’의 헬라어 어근은 또 다른 말로, ‘Suntest’, 즉 ‘햇빛에 실험하다’ 라는 뜻도 포함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무엇이건 귀한 것은 반드시 모조품이 있고, 모조품 즉, 가짜와 진짜를 가려러내는 햇빛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고, 특히, 우리 성도는 ‘Sontest’ 즉, 하나님 아들의 실험대 앞에서 살아야 한다라고 찰스 스윈돌 목사님이 말했다고 하니, 이 얼마나 기발한 생각인가?

금도 그렇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순금보다 도금한 금이 더욱 번쩍거리지만, 가짜 금, 도금을 드러내는 불이 있다. 금은 불 속에 들어가보면 그 진가를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요즘처럼 가짜와 진짜가 혼란스럽게 뒤섞인 시대가 다시 없을 것이란 생각마저 든다. 가짜 예수, 가짜 구원자, 가짜 메시야가 우리나라만도 부지기수이고, 게다가 요즘은 가짜 성령의 은사, 가짜 성령의 역사마저 흥왕하는 시대이니 다시 더 말해서 무엇하랴.

최근, 우리 게시판에 "여보 제발 믿으려면 제대로 믿어요"라는 예쁜 제목과 함께 대대로 믿음의 가정이요, 장로교의 뿌리로 신앙생활(본인의 고백대로라면 '종교인 생활')을 착실히 해 나오던 한 성도님 가정이 순복음?(조 아무개 목사님)의 스타일 교인으로 바뀌는 과정을 극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서, 이 성도님의 신앙이 가짜 신앙이란 것은 아니니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주요 흐름의 맥을 짚어보자면, 당신 가족이 믿음의 뿌리를 가진 신자로서 지금껏 성장해 나오던 장로교에서 가르침 받지 못했던 '예수님 이름의 능력과 기적을 체험하는 것을 순복음 교회의 조아무개 목사님의 '4차원의 영성'이란 책에서 배움을 받았고 그 책에 서술된 대로 따라 했더니 생활 속에서 수많은 기적을 체험했다는 것, 그리고 이런 기적을 체험하는 믿음이야말로 "제대로 믿는 믿음"이란 지론이다.

안타깝게도 필자는 그 책을 읽어본 적이 없기에, 딱히 그 책의 내용을 비판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또 비판할 자격도 없다. 다만, 우리 게시판에 올라온 글, 그 내용을 토대로 함께 생각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란 생각이다. (마침 고비야 목사님께서 별이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셨으니, 그분의 뜻을 존중하는 뜻에서 답변을 댓글로 남길까 생각도 했으나, 기도하는 중, 이곳에 올려 더 많은 분들과 나누는 것도 괜찮을 것이란 생각에 따로 정리해 본 것이다.)

하늘에서 10전짜리 동전이 차 안에 떨어졌고 그 동전에 의하면 내가 지금 섬기고 있는 교회는 US 달라로 10전의 가치도 없는 교회다, 그러니 나와 내 가족은 그런 교회, 미련 없이 훌훌 떠난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다 좋다.하나님의 자녀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누리는 것이 잘못된 것이 무엇이겠는가? 문제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계속 그렇게 점치는 듯한 작은 기적을 체험하고 거기에 내 진로를 맡기고, 이런 태도가 과연 “제대로 믿는 믿음, 바른 믿음의 표상일까?” 왠지 가슴이 답답하고 의구심마저 드는 것이 사실이다.

기적을 따라가는 자는 결국 그 기적 속에 자신의 신앙을 걸기 때문에 매우 위험해 진다. (이렇게 말한다고 하여서 필자는 기적을 체험해 보지 못해서 그런 소리 하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마시기 간곡히 바란다. 하늘에서 10전 짜리 동전 하나가 떨어진 것이 기적이라면 기적이다. 그러나 필자 역시 글자 그대로 amazing, wondrous 한 기적을 수없이 많이 체험했음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고백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라. 그들은 선민이었다. 그들 앞에 가로막혔던 홍해, 넘실거리던 요단 강이 쫘~악 갈라지는 기적을 맛보았을 뿐 아니라 철통 같은 여리고 성이 그들 눈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기적도 체험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만큼 놀라운(wonderous) 기적을 많이 체험한 백성이 다시 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들을 “하나님 섬기기에 실패한 백성”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기적이란, 이방 종교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가 있고, 사이비 교주들이 가장 많이 팔아먹는 것 또한 유사한 기적이다. 모세의 지팡이로만 뱀이 나온 것이 아니라, 둘러선 거짓 영성가들이 들고 있던 지팡이 역시, 뱀으로 변하게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소소히 작은 기적이건, 엄청나게 큰 기적이건, 기적을 너무 사모하거나 너무 추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말씀보다 기적을 우선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수많은 기적을 베푼다는 소문이 자자하였고, 하늘 기적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던 우리나라의 그 유명한 조 아무개 목사님, 그리고 그 가족의 가는 길이 어떠한가? 
 
또한, 성령님의 능력이나 기적이 성도의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일은 단지, 초대교회로서 중단되었다는 말도 따르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요, 살아계신 하나님,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 (마태복음 22: 23~30)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하시고자 하시면 못하실 것이 없다고 믿는 것이 믿음이다!

작금의 많은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고 그 말씀이 주는 참뜻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주견을 먼저 뼈대로 세워놓고, 그 주견에 맞은 말씀 성구만을 부분적으로 골라서 인용하는,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아전인수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여 가르치는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때 자신의 주견을 앞세우기 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하며 내 생각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그 의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 뜻을 우선순위에 둘 때 내 신앙에 무리가 오지 않고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잘 유지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유기적이며 총체적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1. 우리(성도)에게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생명이다. 그렇다면 생명을 구하는 것이 무엇으로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믿음이다. 믿음은 어디로부터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생긴다.(로마서10:16-21) 그러니까, 일생에 기적은 단 한 건도 체험하지 못하였을지라도 내가 내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임이 확실히 믿어진다면, 그는 최상의 것, 가장 귀한 보배를 소유한 사람인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제 죽을 생명에서 건짐을 받은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이름,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말씀에 순복하며 복종하는 것이 남았을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말씀에 복종하는 것, 여기에는 내가 십자가를 져야 할 때도 있고, 내가 병들고 헐벗고 굶주릴 때도 있고, 내 눈앞에 죽음의 강이 놓여져 있을지라도 묵묵히 순종하고 따르는 마음가짐, 이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열 두 영이나 더 되는 천사를 불러 내려, 십자가를 벗어던지는 것은 큰 기적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고통을 묵묵히 견뎌내셔야만 하셨던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약속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지금 현대는 귀신의 영과 성령의 역사를 분별조차 하지 않고 무조건 받아드리는 말세적 현상이 극에 달한 때이기에, 이상한 일들이 곳곳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기적, 기적을 더 강조한다. 말하자면, 본질보다 비본질을 더 크게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눈에 보이는 기적과 이사를 추구한 나머지 성경을 넘어서는 것도 아무런 꺼림도, 두려움도 없고, 직통 계시, 거짓 영성을 마구 남발하고 심하게 말하면, 속여 팔아 먹는 자도 있다.(지송~^^)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런 거짓 영성을 팔아먹는 한심한 자들의 인기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고, 간음을 한 목사도, 성폭행을 상습적으로 하다 들통이 난 목사마저도, 용서라는 이름으로 덮어주자며(누가 하나님인지...), 말만 잘하면 그곳으로 우르르 몰려든다는 것이다!

2)우리(성도)의 주인은 누구시며 그분의 원하시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교회(성도)의 주인은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실질적으로 모두 예수님이 주인이시다. 주인 = "주"(Lord)는 히브리어로는 "아도나이 ", 헬라어로는 "큐리오스" 즉 "주인, 상전"이라는 의미다. 영어로는 Lord 이 역시 주 종과의 관계성에서 상전을 의미할 때 사용되어지는 뜻이다. 민주국가의 주인은 물론 국민이다. 그러나 교회는 민주주의로서 기능과 신권정치를 동시에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주권이 주님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개인 교회건, 가시적 교회건 비가시적이요 우주적인 교회이건) 그 누구도, 예수님 외에는 주인이 될 수 없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주인’이란 단어보다는 '청지기'란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 용어가 가장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우리 예수님께서 그 피를 값으로 지불하시고 산 성도들이 모인 단체인, 교회에서 마저 그분의 설 자리가 없고 통치권이 박탈당한다고 해서야 어디 말이되겠는가?

주인이 원하시는 것은, 첫째도 말씀 증거요, 둘째도, 세째도 모두 그분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바로 전하는 것, 이것 뿐이다! 주인의 것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충성된 종, 이것이 우리, 목회자건, 직분자건, 평신도이건...성도가 주님의 몸을 섬기는 자의 태도가 되어야 하고, 이런 자세가 바로 발란스 잡힌 신앙인의 태도다. "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 기적과 이사는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그분께서 그분의 시간에, 그분의 원하시는 사람에게, 그분의 방법으로 나타내시고, 이루어 주실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기적을 추구하며 따르다가 사단의 거짓 기적, 거짓 영성에 미혹받을 수 있음을 명심, 또 명심해야 할 것이다!

3)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마귀의 장난을 분별하는 방법(부록)

아래는 오래 전, 작자 미상으로 필자가 운영하는 이웃 게시판에 올라온 글에서 도움을 받고 참조한 것이다.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퍼왔다.

"신비주의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새롭게된 성도들의 삶 속에서 성령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바르게 깨달아야만 한다. 이것은 참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신비주의에 연루되지 않았던 크리스천들도 마귀들의 장난이 어떻게 성령님의 인도처럼 작용하는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마귀의 장난을 성령님의 인도처럼 착각하여 잘못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자기들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성령님의 역사에 대해 성경이 무어라 말하는지 제대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이런 실수의 대부분을 쉽게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님의 인도는 마귀의 장난과 매우 다르다." 다음은 성령님의 인도와 마귀의 장난 사이의 차이점을 비교해서 보여준다. 성령님은 무한한 능력과 지식을 가지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따라서 하나님의 속성을 모두 갖고 계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제한된 피조물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속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 지식과 지능이 인간에 비하면 훨씬 우수하다 할지라도 역시 제한된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의 개성을 존중하셔서 어떤 식으로든 개개인의 인격을 침해하려 하시지 않는다. 반면에 마귀들은 우리 인간을 미워한다! 그들은 개인의 인격을 강탈하여 자기의 인격으로 바꿔치려 한다. 

성령님은 우리가 스스로의 행동을 관리하고 그것에 대해 책임지길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항상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일하신다.(빌2:13) 반면에 마귀들은 완전한 통제를 원한다. 그들은 인간의 무의식 세계에 들어와서 자기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이용한다.

성령님은 온화한 분이시다. 그분께서 어떤 사람에게 들어오시면, 너무나 온화하시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의 내부를 들여다 볼 때 어떤 것이 성령님이고 어떤 것이 자신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이다. 반면에 마귀들은 매우 거칠다. 자신들이 점거한 사람들의 모든 것을 탈취하려는 마귀들의 욕망 때문에 누구나 마귀와 자기 자신과의 차이를 늘 인식할 수 있다. 비록 마귀들이 자신들의 잠재의식 일부의 어떤 "상담자" 같은 존재라고 그들이 생각할지라도 위의 진술은 사실이다. 마귀는 항상 피해자의 의식과 분리된, 또 다른 "하나의 실체"인 것이다.

성령님은 거룩하고 정결하시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 정결함을 가져오시며 또한 우리에게 죄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완전히 부정하며 사람들을 항상 죄 속으로 깊이 이끌어간다. 새 시대 운동(뉴에이지 운동)의 마귀들이 스스로를 선한 존재로 제시하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사람들을 죄 가운데로 빠르게 이끌어 가는 존재들이다. 새 시대 운동에 속한 죄의 영역으로는 구체적으로 성적 부도덕, 신비주의에 깊이 빠져들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영계와의 접촉 증가 등을 들 수 있다.

성령님은 항상 예수님을 높이고 찬미하여 자신이 내주하고 있는 사람의 삶 속에 겸손을 가져온다. 반면에 마귀들은 예수님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그들은 항상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에게 관심을 돌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행하는 사람에게로 돌리게 하며, 또 자기들이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찬미하도록 한다. 교만은 마귀들과 그들이 거주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성령님은 결코 우리로 하여금 의식을 잃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생각을 우리의 마음속에 넣어주시지만 결코 우리의 마음을 흐릿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항상 "모든 생각을 사로잡고"(고후10:5)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빌2:13)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또한 우리가 적극적으로 자신과 협력하기를 원하시며 따라서 우리는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텅 비울 필요가 없다. 즉 정신을 잃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매우 능력이 크시므로 우리의 의식이 활발할 때도 우리의 의식을 누르시고 자신의 원하는 바를 주실 수 있지만 이 때에도 깨끗하고 질서 있게 행하신다. 성령님께서 자기들에게 말씀하시거나 혹은 운행하시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신을 잃어야만 한다는 잘못된 속임수에 빠지는 크리스천들이 매우 많은데, 이것은 결코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요, 증산도, 요가, 명상, 만트라 등의 뉴에이지 운동에 속한 기법에서 나온 것이다.

한편 마귀들은 자주 사람의 의식을 잃게 한다. 그들은 사람이 제 정신을 잃고 피동적으로 되어 그를 쉽게 점령할 수 있을 때 최고의 능력을 발휘한다. 이것이야말로 동양적이며 신비주의적인 명상에서 사람의 마음을 비우기 위해 긴장 이완의 기법을 도입하는 이유인 것이다. 사실 마귀들이 사람들의 능동적이며 강력한 의식을 무효화시키기는 어렵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에게 심적으로 수동적 상태에 있으라고 격려하는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신다. 그러나 그분께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자각케 하시는 일은 결코 파괴적이 아니며, 그분께서는 항상 사람들을 회개, 용서, 구속 그리고 평화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다음의 두 가지 중 하나를 행한다. 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악을 정당화시키도록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용서나 구속에 대한 소망이 없는 파괴적이고 무서운 죄의식을 가져다준다. 마귀는 항상 "너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정죄와 심판의 메시지를 가져다준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모순이 되는 메시지를 주시지 않는다. 반면에 마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뒤틀고 변경하여 우리의 죄를 정당화시켜준다.

우리는 결코 성령님을 통제할 수 없다! 그분께서는 자신이 원하실 때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일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종이며 그분께서는 우리의 주인이시다. 예를 들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임재를 알게 하실 때, 우리를 고치시거나 통찰력을 주실 때, 우리는 결코 성령님을 제어할 수 없다. 또한 성령님께서는 같은 일을 두 번 하시지 않는다. 또한 그분께서는 우리가 어떤 틀에 박힌 일이나 혹은 의식에 의존하는 것을 인정하시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학습 방언과 같이 똑 같은 것을 반복하는 일은 결코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다.

반면에 마귀들은 자기들이 내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속이고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마귀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그 뒤 이 마귀들은 그 사람이 부를 때마다 와서 그 사람이 원할 때 치료하는 일 을 행하곤 한다. 또한 마귀들은 의식과 예식 등을 사랑하며, 사람들에게 영계를 많이 보여준다. 성령님의 은사를 마귀가 모방 할 때 그는 대개 이 일을 자기에게 사로잡힌 사람의 통제하에서 수행한다. 다시 말해 마귀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자기가 원할 때마다 병 고치고, 예언하고, "지식의 말씀" 을 갖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마귀를 통제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궁극적으로 마귀의 통제를 받아 영원히 멸망 받게 되는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보는 것이나 감정에 의지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고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환상이나 감정의 치솟음 등과 같은 일을 일상적으로 혹은 자주 주시지 않는다. 분명히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고 우리의 육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려 하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는 것'(sight)이 아니라 '보지 않고'(insight) 믿음으로 모든 일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영계를 보여주시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가 원할 때마다 그 원하는 것들이 우리에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즉 병을 고치고 싶다고 해서 아무 때나 병을 고칠 수 없으며, 방언을 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 때나 방언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성령님께서 하시고자 할 때 기적이 일어나며 단지 우리는 주님의 뜻 안에서 온전히 아뢸 뿐이다. 그 결과는 주님께서 처리하시는 것이다.

반면에 마귀들은 인간의 감정을 교묘히 다루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정의 극치 즉 황홀경을 줌으로써 그들을 통제한다. 마귀들은 빈번히 사람들로 하여금 영계를 보게 하며 그 결과 믿음을 소유하지 못하게 한다. 자꾸 보게 되면 자연히 믿음이 필요 없게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은 자주 환상을 보거나 초자연적인 경험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우리에게 주신 한 권의 책, 즉 성경으로만 만족해야 한다. 그 안에 있는 대로 주님께서 이루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 바로 그것을 주님께서 요구하신다.

구원받은 우리도 의도적으로 성령님께 불순종함으로써 그분을 탄식하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그분에게 복종하지 않을 때에, 그분께서는 단지 조용히 뒤로 물러나셔서 우리의 삶 속에서 일하시지 않는다. 성령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자유의지를 반대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인형극에서 손가락으로 놀리는 인형이나 로보트를 원하시지 않는 것이다. 성령님으로 밥티스마(침례)를 받아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다. 즉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relationship)는 영원 불변하며, 단지 그가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교제(fellowship)가 즐겁지 못할 것이다. 또한 그가 너무나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경우에는 그를 쳐서 죽게 하는 경우도 있다.

반면에 마귀들은 자기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를 재빨리 징계한다. 그들은 항상 개인의 자유의지를 빼앗으려고 힘쓰며 그것을 점령하고 통제하기에 민첩하다. 마귀들은 인형이나 로보트들을 좋아한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늘 우리를 하나님 앞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우리를 싫어하고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되는 "영원한 파멸"로 인도한다.

예수님께서는 죄로부터 우리를 정화시키시기 위한 죄값을 친히 지불하사 우리를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셨고 우리를 대신해 죽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 반면에 마귀들은 우리를 위해 자기들의 피를 단 한 방울도 흘린 적이 없다. 오히려 그들은 사람들이 자기들을 위해 피를 흘릴 것을 요구해 왔으며, 자기들을 위해서그들이 정화되어야만 하고 이를 위해 피흘리는 일을 해야만 한다고 가르쳐 왔다.

또한 성도들을 향해 마귀들은 하나님께 축복을 받으려면 신자들 스스로 부과한 모든 종류의 얽어매는 규례와 엄격한 형식에 따른 율법 조항들을 지켜야만 한다고 가르쳐 왔으며, 이 경우에도 마치 이런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처럼 꾸며 크리스천들이 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게 만들어 왔다. 다시 말해 마귀들은 "주일 성수, 십일조 준수 등을 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거나 혹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등의 거짓 가르침을 신자들에게 불어넣어 그들로 하여금 항상 위기의식이나 죄의식 등을 느끼게 만든다.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종교의 특징이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자유와 기쁨을 가져다준다. 또한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단 한번에 우리의 죄를 위한 대가를 지불하셨다.(벧전 3:18) 반면에 마귀들은 항상 점점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그들은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다.성령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성경을 읽고자 하는 갈망을 주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요 14:26) 반면에 마귀들은 혼란을 가져와서 사람들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성도들의 모든 참된 기도를 방해한다. 성령님께서는 절대로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다. 반면에 마귀들은 항상 자랑하길 좋아한다.

성령님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며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으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다 거짓말쟁이며 그들이 거주하는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배우는데 능동적으로 활용하길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결코 우리 마음의 의지와 상관없이 단지 우리의 정보 은행으로서 봉사하길 원치 않으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자기들이 내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정보 은행이 되어 주며, 그 결과 마귀에 들린 사람들은 자기 의지대로 정보나 지식을 배울 필요가 없게 된다. 이것을 쉽게 풀이하자면, 예수님을 영접했어도 공부하지 않으면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귀들은 기도만 하면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기들이 노력하지 않는데도 성령님께서 도와주시기만 하면 무슨 일이든지 다 잘 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물론 마귀에게 사로잡히면 점 같은 것은 잘 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언기도, 축복성회 등에 참석해서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려 하는 것이다. 예전부터 우리 사회에는 두 세 살 먹은 아이들이 영어도 유창하게 하고 대학생이나 풀 수 있는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서 신문에 보도가 되곤 했다. 성경적으로 보면, 바로 이런 경우의 대부분이 마귀에게 사로잡힌 경우이다. 하나남께서는 결코 정상적인 과정을 무시하신 적이 없다. 심지어 예수님도 아이로 태어나 지식이 자라고 영이 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신동으로 불리던 아이들이 커서 잘 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가? 일단 마귀가 떠나면, 그 아이의 삶은 완전히 망가지고 말며, 더 이상 정보나 지식 창고로 존재하던 마귀가 없으므로 그 아이는 사회의 폐인이 되는 것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성령님께서 일하심을 기억해야만 한다.

성령님께서 들어오시면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들을 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크리스천들이 너무나 많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능동적인 의식과 자신의 뜻이 연합되어 우리 가운데 선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길 원하신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기를 포기하면, 마귀가 우리 속으로 쉽게 우리를 다스리게 된다. 마귀들은 자기들이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점령하고 통제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결코 점쟁이가 아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예견력을 주시지 않는다.(마6:34) 반면에 마귀들의 가장 일반적인 속임수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간단한 예견에 불과한 "거짓 지식의 말들"을 주는 것이다. 마귀들은 또한 운수를 점치는 것에 불과한 많은 개인적인 "예언들"을 말해 준다. 성경의 예언은 대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며, 개인의 신상에 대한 것은 매우 드물다. 따라서 대학 진학, 배우자 선택, 직업 선택 등을 위해 소위 용하다는 예언기도를 받으러 가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큰 죄를 범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런 예언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들처럼 보이나, 사실 이들은 대부분 마귀에게 사로잡혀 그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 믿어서도 안되지만, 부분적으로 이해하거나 부분적으로 인용 해석을 하려해서는 더더욱 안 될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 역시 부분적으로 치우치게되면 극단주의가 될 수도 있고, 더 심하면 이단사설로 빠져들 수도 있다. 그런고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그 말씀 속에서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친히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로 간구하고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대로 어디든지 따라가는 겸손함이 필요하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된 삶이란 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보이고 내 귀에 아무 소리 아니들려도 하나님의 약속(말씀)위 굳게 서서 나가는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복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크나큰 능력이다. 죄악 중에 죽었던 내 영혼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나는 것, 이 것이 기적 중에서도 가장 큰 기적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하나님께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힘써 연구하라"(딤후 2:15)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 17)


USA 아멘넷, 별똥별/최송연 선교사의 신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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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마리째 원숭이 현상


1950년 일본의 미야자키(宮崎) 현 동해안의 고지마(幸島)라는 무인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곳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일본 원숭이가 서식하고 있었는데, 먹이를 주어 길들이는데 성공했다. 먹이는 밭에서 막 뽑은 진흙투성이의 고구마였다.

원숭이들은 처음에는 고구마에 묻은 흙을 손으로 털어내고 먹었는데, 어느 날 한 마리의 젊은 암컷 원숭이가 강물에 고구마를 씻어먹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젊은 원숭이와 어미 원숭이가 그것을 차례로 흉내내기 시작했으며, 무리의 반 수 이상이 물로 씻어 먹기에 이르렀다.

어느 날 강물이 말랐다. 그러자 그들은 해안까지 진출하여, 바닷물로 고구마를 씻어 먹었다. 이 행위는 원숭이들에게 생각치 않은 부대 이익을 가져다 주었는데, 바닷물의 소금기가 고구마를 맛있게 한 것이다. 먹는 방법도 통째로 씻어 먹을 뿐만 아니라, 바닷물에 담가서는 한 입 베어먹고 또 담가서는 베어먹는 식으로 간을 맞춰 먹는 행동이 나타났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고구마 씻기를 하는 원숭이 수가 어느 정도까지 늘어나자 이번에는 고지마 섬 이외 지역의 원숭이들 사이에서도 똑같은 행위가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났다. 불가사의하게도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다카자키(高崎) 산을 비롯한 다른지역에 서식하는 원숭이들도 역시 고구마를 씻어먹기 시작했다.

물론 바다로 둘러싸인 고지마 섬의 원숭이와는 전혀 접촉이 없고 의사소통도 할 수 없는 , 따라서 모방할 수 없는 다른 무리의 원숭이들 사이에서 말이다.

이것이 '백 마리째 원숭이 현상'이라는 것이다.
어떤 행위를 하는 개체의 수가 일정량에 달하면 그 행동은 그 집단에만 국한되지 않고, 거리나 공간을 넘어 확산되어가는 것이다. 생물에게 나타나는 불가사의한 이 현상을 미국의 과학자 라이언 왓슨은 백마리째 원숭이 현상이라 이름 붙였다. 백 마리라는 숫자는 그 경계가 되는 일정량을 편의적으로 수치화 한 것이다.

왓슨은 <생명조류>라는 책에서 백 마리째 원숭이 현상을 소개하고, 인간의 문화와 유행의 원리를 그 현상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즉 어떤 사고방식이나 사상이 사회에 널리 전파되는 현상이 일어나는데, 그 원리는 '어떤 것이 진리라고 생각되는 사람의 수가 일정 수에 달하면 그것은 만인에게 진리가 된다'는 것이다.


- 개인이 바뀌면 사회가 변한다

세상의 가치관이나 구조란 깨달은 10%의 사람에 의해 바뀐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깨달으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먼저 10%가 깨달으면, 즉 개인이 눈뜨기 시작하면 종의 의식이 변한다. 백 명의 사람이 의식을 바꾸고 지혜롭게 행동해가면 사회와 세계를 바꿀 수 있다. 세상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혁하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은 좋다고 생각하는 일을 지체없이 시작하는 것이다. 남보다 빨리 깨달은 자가 먼저 행하는 백 마리째 원숭이가 되도록 노력하면 된다.


- 진리만이 세상을 좋게 한다

진리는 잘 전달되고 시대를 초월하여 전진한다. 좋고 양질의 것-말이나 사고방식, 기술, 사상, 생활방식, 이념, 원리 등-은 사람들이 수용하고 인식하기 쉽다. 따라서 광범하게 전달되어 많은 사람들 사이에 진리로 정착되어 간다.

진리는 좋은 면만 있고 나쁜 면이 없다. 진리와 어울리면 좋은 일만 일어나고,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1)세상이라는 존재는 시간과 더불어 잘 되어가도록 이루어져 있다. 그 과정은 결코 직선이 아닌 나사모양이며, 따라서 완만하지만 확실히 양질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고지마 섬에서 2)제일 먼저 고구마 씻기를 시작한 것은 한살 반의 암컷이었다고 한다. 무리 중에 좋은 일, 새로운 행위를 솔선해서 실행한 것이 젊은 암컷이었던 점은 실로 상징적이다. 이 암컷은 매우 활발하고 영리한 원숭이로, 노는 방법도 다양했다고 한다. 이 행동을 전파한 것 역시 젊은 원숭이와 어미 원숭이였다.

한편, 무리의 80%가 고구마씻기를 하게 되어 행동이 무리 속에 정착한 지 3)10년이 지나도 완강히 이것을 수용하지 않았던 원숭이들 중에는 12세 이상의 어른 원숭이, 특히 수컷 원숭이가 많았다. 보수적인 아저씨 층이다. 인간도 45세를 넘은 남성은 높은 파동에 대한 동조 능력이 부족한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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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in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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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관대하심(God's Generosity) 하나님은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결코 부족함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너무도 많은 빵을 주시기 때문에 남은 빵 조각만도 큰 바구니로 열두 바구니나 되고 (요한복음 6:5~15),
    또한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너무도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게 하시기 때문에 배가 거의 가라앉을 뻔한 일(누가복음 5:1~7 참조)은 모두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이상의 것, 즉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빵과 생선, 그리고 우리가 감히 바랄 수 있는 그 이상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은 관대하게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슴과 마음을 다하여 그리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때만, 우리는 하나님의 관대하심을 볼 수 있고 향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먼저 당신의 관대하심을 나에게 보여 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동안은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며, 하나님이 진정으로 우리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 즉 생명, 그 풍성한 생명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책에서 옮긴 글 출처: 별똥별 최송연의 목양연가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Sop 김치경,Ten 김정현♬



     

     

      


    우리는 모두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심성을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먹을 수 있을 만큼
    식량이 충분치 않아 그러니 나는 비상시에 대비하여
    내 자신을 위한 양식을 저장해 두어야겠어"

    또는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가질 수 있는 지식이란
    이 세상에 없어 그러나 나의 지식은 내가 간직해서
    다른 사람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해야겠어"

    또는 "모든 사람에게 다 줄 수 있는 충분한 사랑이란
    이 세상에 없어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나의 친구를 빼앗아 갈 수 없도록 그 친구를
    내 곁에 붙어 있게 해야겠어"
    이러한 말들은 결핍 의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충분히 가질 수 없으리라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무엇이든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비축해 두려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비극은 당신이 손에 움켜쥐고 있는 그것들은
    당신의 손 안에서 녹슬어 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가장 빛나는 별  
    
    돋움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이고,
    당신 인생 최고의 날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이다.
    스스로에게 길을 묻고 스스로 길을 찾아라.
    꿈을 찾는 것도 당신,
    그 꿈으로 향한 길을 걸어가는 것도
    당신의 두 다리,
    새로운 날들의 주인은, 바로 당신 자신이다.
    
    
    - 토마스 바샵의《파블로 이야기》중에서 - 
    
    
    * 당신이 바로 가장 빛나는 별입니다.
    다만 그 빛나는 순간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아니면 빛나는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을 뿐입니다. 오늘에 머물러 있는 사람,

    그 자리에 안주하는 사람에게 빛나는 순간은 결코 오지 않습니다.

    저 먼 우주 공간의 별을 찾아, 꿈을 향해

    두 다리를 내딛는 사람만이 새로운 날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2008년 6월16일자 앙코르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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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총이 이단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다는 의혹들이 한국교회에 파다하게 번져있다. 과거 통일교 인사로 지목을 받은 장재형을 이단성 없다고 판단하여 면죄부를 주었는가 하면 다락방을 영입한 예장개혁에 미온적인 조치를 할 뿐 아니라 다락방 교회들을 한기총 행사에 동원함으로 사실상 다락방을 이단해제 시켜준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한기총은 과거 한기총에서 이대위원장으로 일했던 최삼경 목사에 대해 최목사가 이단과의 논쟁에서 나온 말을 꼬투리 잡아 이단이 만들어낸 삼신론과 월경잉태론으로 이단 정죄하고, 또 그런 최삼경 목사를 비호했다는 이유로 한장총의 이대위원 5명을 이단옹호자로 규정하기 이르렀다.


    그러자 이번에는 한교연이 들고 일어났다. 컵뉴스(http://www.cupnews.co.kr/)에 의하면 지난 25일 한교연이 “한기총 홍재철 목사를 이단 및 사이비집단과의 연루 또는 관계에 대해서 조사 연구키로 했다”고 보도했다.


    기사에 의하면 한국교회연합(대표회장 김요셉 목사) 바른신앙수호위원회(위원장 정근두 목사)는 지난 25일 기존에 이단 또는 사이비로 지목받은 7명과 함께 홍재철 목사에 대해 “한국 정통 교단에서 이단 및 교류 금지를 발표한 것을 참고하여 이단과 사이비단체로 결정하기로 하고, 이단 및 사이비집단과의 연루 또는 관계에 대해서도 조사 연구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고 한다.


    또한 한교연은 지난 24일 오전 7시30분 사무실에서 위원회 첫 모임을 갖고, 각 회원교단의 이단사이비대책위원장을 당연직 전문위원으로 추대하기로 했으며, “베뢰아 김기동 목사, 류광수 목사(다락방전도), 박윤식 목사(평강제일교회), 변승우 목사(큰믿음교회), 이만희 목사(신천지), 이재록 목사(만민중앙교회), 장재형 목사(합동복음총회), 홍재철 목사(경서교회) 등 8명에 대한 이단사이비 조사 연구에 착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고 한다.     

     

       
     
    ▲ 한교연이 한기총 홍재철 목사에 대해 이단사이비 연루를 조사키로 함에 따라 이단사이비 논쟁을 중심으로 양 기구 싸움이 본격화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교연의 임원회 장면(사진 컵뉴스)
     
    위원회는 거론된 8명에 대해 한국 정통교단에서 이단 및 교류금지를 발표한 것을 참고하여 이단과 사이비단체를 결정하기로 하고, 이단 및 사이비집단과의 연루 또는 관계에 대해서도 조사 연구하기로 했다.


    위원회는 이를 위해 오는 8월 7일 오전에 한교연 회의실에서 전문위원을 위촉한 후 연석회의를 가져 심도 있게 연구하여 발표하키로 했다.


    한편 뉴스미션 보도에 따르면 최근 한 대형교회 원로목사가 교회 세습을 회개하는 발언을 하며 교회에 대한 목회자의 잘못된 소유의식 비판이 거세지고 있는 가운데, 한기총이 교회 세습을 두둔하는 입장표명을 적극적으로 하고 나서 논란이 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한기총의 입장에 대해 관계자들은 두 가지 해석을 내놓고 있는데, 먼저, 세습 관련 성명을 비롯한 최근 한기총의 행보가 한기총을 비판하는 세력에 대한 압력 행사라는 것이다. 특히 한기총의 갑작스런 세습 관련 성명은 금권 선거 논란을 시작으로 한기총 해체 운동에 앞장섰던 기윤실 전 대표 손봉호 교수를 지목, 기윤실을 상대로 쐐기를 박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홍재철 대표회장은 지난 실행위원회에서 “2000년 당시 손봉호 교수가 대표였던 기윤실에서 처음 ‘교회 세습’ 용어를 사용하며 비판해왔다. 또 손 교수는 한기총 해체를 주장하며 혼란을 부추겼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뿐 아니라, 한기총을 비판하는 적대적인 세력에 대해서는 무조건 고소하겠다는 홍재철 대표회장의 발언대로, 고신 정근두 총회장과 기성 우순태 총무가 한기총으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해 현재 조사를 받고 있다.


    한국장로교총연합회도 한기총의 횡포에 대해 그냥 두고 있지만은 않겠다는 입장을 피력함으로 교회들의 전쟁의 결말이 어디로 치달을지 점입가경이다.


    한국교회의 연합을 위해 조직된 한기총이 어느새 교회 위에 군림하고 막강한 권력의 칼을 휘둘러 상처를 내어 결국 한교연이라는 또 하나의 단체를 만드는 원인제공을 하더니 이제는 이단논쟁으로, 세습옹호 발언으로, 고소고발로 서로를 더 먼 적군으로 만들고 있으니 한국교회의 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말을 흘려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갈 5: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출처: 코람데오닷컴

    한국 뉴스앤조이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1616
    "한기총 대표도 이단 조사 받는다"

    코람데오 닷컴
    http://www.kscoramdeo.com/news/read.php?idxno=5472&rsec=MAIN§ion=MAIN
    "한교연, 홍재철 목사 이단 사이비 연루 조사한다"


     

    By MIKE MICHALOWIZ

    우리 모두는 따라하기 쉬운 사업 성공 전략을 찾는다. 하지만 그건 없고 망하는 노하우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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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tty Images/Vetta

    대체 실패하는 노하우를 알아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당신이 이미 (부분적이나마) 그런 노하우를 따라하고 있는데도 본인은 그걸 전혀 모르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피해야 할 점들을 알게 되면 너무 늦기 전에 사업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수년간 알고 지내고 함께 일하고 멘토링을 제공해 주었던 기업가들을 전부 떠올려보고 내가 공부한 경영의 모든 것을 생각해본 후 실패하는 6가지 노하우를 도출했다. 다음을 피하면 당신의 성공 가능성은 크게 증가할 것이다.

     

    1. 벼락부자가 되라.

     

    일례로 10년전 웹디자인처럼 사업에는 일종의 트렌드가 있다. 빨리 돈을 벌 수 있는 확실한 방법처럼 보이기 때문에 누구나 그 트렌드에 편승한다. 아니면 몇개월 안에 백만장자가 되게 해 주겠다는 프로그램에 투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생기지 않는다. 벼락부자 컨셉은 진실인 경우가 드물고 결코 지속가능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 트렌드는 어쩔 것인가? 소셜미디어라는 뜨거운 주제는? 돈 되는 거 아닌가? 물론이다. 소셜미디어에 대해 ‘열정적인’ 사람들은 부자가 될 것이고 나머지는 손해를 볼 것이다.

     

    만약 하나에만 집중하면서 자신의 열정을 따른다면 돈(그것도 엄청나게 많은 돈)은 시간이 저절로 벌어다 줄 것이다. 또한 돈이 벌리기 시작하면 트렌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앞서 갈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바로 부자가 되는 옳은 길이다.

     

    2. 사업이 잘 안 될때는 더 열심히 일하라.

     

    적자의 늪에 허덕인다면 시간을 어떻게든 더 내서 더 많은 일을 하려고 할 것이다. 그것이 제대로 안되면 일을 두 배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거기서 멈춰라. 대부분의 기업가들은 현명하게 일해야 할 때 무조건 더 열심히만 하기 때문에 실패한다.

    자신에게 ‘어떻게 하면 일할 시간을 더 낼 수 있을까’를 묻는 대신 ‘어떻게 하면 향후 몇일 동안 10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해 이 일을 10초만에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할까’를 자문하라. 실패하는 기업가는 거의가 일을 너무 해 지친 경우다. 성공하는 기업가는 지속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해 두고 있어 더 적은 시간에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사업을 확장할 수 있는 인프라로 활용하기도 한다.

     

    3. 문제 고객을 양성하라.

     

    당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엄청나게 소진시키면서 내야할 돈은 늦게 내는 몇명의 “문제” 고객이 있을 때 당신은 협력해서 그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리라고 결심한다. 안될 말이다. 문제 고객이나 안좋은 관계를 개선하는 데 에너지를 쓰는 것은 우수 고객에 대한 당신의 관심을 줄어들게 만드는 행위다. 결국 불만에 가득찬 고객만 남게 될 뿐이다. 자, 사실을 인정하자. 문제 고객은 당신에게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내 첫 사업은 최악의 고객들을 버리고 우수 고객에게 집중하면서 본격 성장 궤도에 올랐다.

     

    4. 총매출로 수익을 측정하라.

     

    대차대조표를 들여다보다가 총매출이 괜찮다 싶으면 사업이 꽤 잘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틀렸다. 사업운영에 쓸 현금이 없다면 총매출은 아무 의미도 없다. 이것저것 제하고 남을 돈을 생각해야 한다. 백만불짜리 프로젝트가 있다면서 결국 손실을 입는 기업가들도 많이 있는 반면 15,000달러짜리 프로젝트로 1만 달러의 이익을 올리는 기업가들도 있었다.

     

    실패하는 기업가는 얼마나 많은 물고기를 ‘잡았나’로 낚시의 성패를 판단하지만 성공하는 기업가는 얼마나 많은 물고기를 ‘요리했나’로 성패를 판단한다.

     

    5. 지갑에 집중하라.

     

    당신은 고객에게서 얼마를 벌어들일 수 있을까 혹은 얼마나 많은 부유층 고객을 소개받을 수 있을까 등 항상 돈 생각을 한다. 안좋은 선택이다. 얼마나 돈을 벌 수 있을까라는 한 가지만 생각하는 기업가를 볼 때마다 나는 그들이 회사를 실패로 이끄는 노하우를 보게 되리란 걸 직감한다. 스티브 잡스가 요즘 우리가 없이는 못 사는, 그의 마지막 제품들을 개발할 때 돈을 생각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어떻게하면 내가 죽기 전에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제품을 만들까?”를 생각했을 것이다.

     

    6. 취미를 사업화하라.

     

    직접 만든 스파게티 소스가 환상적이라고 치자. 친구들도 그걸 병에 담아 팔아보라고 권한다. 틀렸다! 사업을 시작하고 키워가려면 아침에도 빨리 일어나 그 일을 하고 싶어 잠도 덜 자고 벌떡 일어날 만큼의 열정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하루종일 해도 질리지 않고 여전히 그 일이 즐거워야 한다. 너무 피곤해서 신발끈조차 맬 수 없을 때에도 말이다. 그건 취미가 아니다. 취미는 있는 에너지를 방출하는 것이고 열정은 없던 에너지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물론 사업 실패 노하우는 이것만이 아니다. 하지만 위의 6가지는 결코 실패할 리 없는 실패 노하우다. 그대로만 하면 올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사업이 초토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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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사실일까요? (메일로 온글입니다)

    속보 : 신종 범죄 술법 조심

    이게 사실일까요?

    요즘 납치가 상당히 빈번합니다. 보통 조선족이 한국 젊은 남녀를 노립니다.
    인신매매인데요. 어디 가게에 파는게 아니라. 장기매매를 합니다.
    얼마전 수원에서 토막살인사건 났죠? 그것도 장기매매의 일종입니다.
    잡아서 기절시킨후 바로 작업해서 몸안에 필요한 모든것을 아이스박스에 넣고 공급됩니다.
    외국인노동자들 특히 조선족들이 국내로 들어오기 시작한 이후부터 갑자기 늘었습니다.
    보통 중국이나 동남아로 장기가 팔려가는데 사람 한명당 1억이 넘게 장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돈이 궁한 그쪽나라 사람들이 알선을 하고 작업을 합니다.


    납치의 주된 수법은
    1. 도움을 요청한 납치 ===할머니들이 어디로 데려다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고맙다며 음료등을 주는데 절대로

    먹으면 안됩니다. )
    2. 화를 돋우는 납치 === 보통 길가나 지하철, 버스안이 많은데 화났다고 따라가면 큰일납니다.
    3. 스토킹 납치 === 평소 다니던 길에 혼자 귀가하는것이 판단되면 2,3인이서 작업을 합니다. 조심하세요.
    4. 상품 싸게 판다며 가게로 유도하는 납치 === 여성들 특히 주부들이 잘 따라갑니다. 조심해야합니다.
    5. 자신이 경찰임을 가장한 납치 === 휴대폰으로 위치를 묻고 조사에 도움을 달라고 합니다. 위치를 알려주면

    인신매매단들이 바로 옵니다. 큰일납니다.
    6. 취업알선 납치 === 가출청소년들이 타켓이고 무직자들, 노숙자들 상당히 여기에 많이 끌려갑니다.
    7. 택시합승 납치 === 요즘 시대에 택시합승 안하죠? 합승요구하면 바로 내리셔서 번호판 일단 적으시고 다른

    택시를 타십시요. 합승자가 동일범입니다


    조심조심하장 이거 소문 내야됨다 세상이넘무섭지않나요이웃에도얘기해서 미연에 방지할수있게 해주세요 무조건 친절이 요즘세상은 넘무서워요 제발 참조하세요

    무서운세상

     

     

     

      하나님께로 가는 길목의 표지판
      (Signposts On the Way to God)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관대함을, 하나님의 친절함을,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알 수 있을까요? 우리의 부모님, 우리의 선생님, 우리의 목사님, 우리의 배우자,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을 잘 알게 되면, 우리는 이들이 오직 하나님의 작은 부분만을 우리들에게 보여 줄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들의 사랑보다는 큰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이들의 선함보다 큰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이들의 아름다움보다 큰 것입니다 처음에는 우리는 이 사람들에게서 실망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랑과 선함, 그리고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로 가는 길에서 만나는 도로 표지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옮긴 글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나는 세습목사다.
        <교회세습논쟁➀>

        입력 : 2012년 07월 25일 (수) 11:41:43 / 최종편집 : 2012년 07월 25일 (수) 19:02:56 [조회수 : 973] 김명섭onthewaychurch@hotmail.com

        기독교 대한 감리회 홈페이지에 때아닌 “세습 논쟁”이 한창이다. 이에 강릉예향교회 김명섭 목사가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자신의 글을 당당뉴스에 보내왔다. - 세상과 교회의 다리, 당당뉴스는 독자 여러분들의 기고를 언제나 환영합니다.(당당뉴스 홈피 ‘나도기자’ 메뉴 참조)

        지난 7월 18일 김명섭 목사가 감리교선거와 관련해서 “H목사를 감독회장 단일후보로 추대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린 후, 감리교 게시판에는 목회자 세습에 대한 논쟁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논쟁의 한 가운데 서있는 김명섭 목사는 이 글이 단순히 ‘세습논쟁’을 넘어 ‘감리교회의 근본적인 개혁’에 관해 진지하게 성찰해 보는 단초가 되기를 소망한다는 뜻과 함께 자신의 글 전문을 보내왔다.

        이에 당당뉴스는 총 5회에 걸쳐 김명섭 목사의 글을 연재 할 예정이다. - 당당뉴스는 댓글이나 혹은 논쟁적인 글쓰기를 통해 독자님들의 많은 의견을 기다립니다.  본 글은 감독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감리교회 내부의 논쟁이며, 개신교 전체에 대해 일반화할 수 없는 내용이 담겨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편집자 주.




        <교회세습논쟁➀>
        나는 세습목사다.

        1. 나는 목회세습을 했다.

           
        ▲ 김명섭 목사
        (강릉예향교회)

        세습의 사전적 정의는 ‘한 집안의 재산이나 신분, 직업 따위를 대대로 물려주고 물려받음’이다. 편의상, 재산(교회)이나 신분(담임자)을 물려주는 것을 ‘교회세습’이라고 하면, 직업(직분)을 물려주는 것은 ‘목회세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목회세습을 했다’ 나의 아버지는 목사님이셨고, 나도 목사인 까닭이다. 좋게 말하면, 2대째 목회자 집안이다.

        나의 아버지는 감리교회의 평신도 출신으로 40대 중반에 감리교총회신학교(협성)에서 공부하시고 감신대 선교대학원을 졸업하셨다. 뒤늦은 목회로 험난한 인생역정과 우여곡절 끝에 60대가 되셔서 ‘연령제한으로 인해’ 장로교(대신측)에서 목사안수를 받으셨다. 몇 해 전 불의에 사고로 작고하셨지만, 내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시지 전까지 시골에서 이름 없고 빛도 없는 무명의 목회자로 생을 마감하셨다.

        내가 ‘목회세습’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과장이 아니다. 내가 목회자가 된 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영향인 탓이다. 사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지만, 아버지가 뒤늦은 목회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입신양명을 꿈꾸던 나는 다른 일에 헌신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나의 아버지로부터 신학과 신앙에 엄청난 무형의 유산들을 아낌없이 대물림해서 물려받았다. 그 가운데 으뜸은 ‘목사의 자존감’이다. 다른 이들은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나에겐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어마어마한 유산이다.

        2. 나는 교회세습도 했다.

        나는 엄밀히 말하면 ‘교회세습’도 했다. 그 이유는 지나칠 정도로 정의롭고 강직하신 나의 아버지 때문에 지금 나의 목회지에 부임했기 때문이다. 내가 10년째 담임하고 있는 교회는 2년간 세 명의 담임자가 바뀌고, 세 번이나 이름을 바꾼 실로 ‘사연 많은(?)교회’였다. 내가 그 3번째 담임자였고 ‘강릉예향교회’는 벧엘, 온누리에 이은 3번째 이름이다. 이런 이유로, 부임할 당시 우리교회는 강릉지방의 유력한 목사님의 괘씸죄에 걸려 ‘절대인준불가판정’을 받았다. ‘누구든지 부임해오면 죽는다(?)’고 공포하신 까닭이다. 누가 봐도 밟으면 죽는 부비트렙이였다. 실제로 나는 6개월간 파송을 받지 못했다.

        수련목 1기로 33세에 때늦은 목사안수를 받고 고민하는 나를 대신해서 내 아버지께서는 선뜻 교우들에게 부임결정을 약속하셨다. “감리교목사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아골 골짝 빈들이라도 복음전할 수 있으면 그만이지요, 이렇게 어려운 교회라서 우리 김목사를 보내셨다고 믿습니다.” 아버지 덕분에 나는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우리교회에 담임목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상가 월세교회를 졸업하고 200평대지 위에 150평의 교회건축을 준비하고 있는 남부럽지 않은 교회가 되었지만, 말로 다 할 수 없는 목회적 어려움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때마다 내 아버지는 나의 멘토가 되셨고, ‘지혜’와 ‘용기’, ‘인내’와 ‘헌신’ 아버지의 유산은 빛을 발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내 아버지가 물려주신 믿음의 유산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3. 나는 교회세습을 함부로 정죄하지 않는다.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는 ‘목회세습’과 물질적인 유산을 물려주는 ‘교회세습’의 정확한 차이점을 나는 잘 모르겠다. 예를 들면, 아무도 가지 않는 오지에 있는 소위 영구미자립교회를 세습했다면, 그건 도리어 칭찬 받을 일 아닐까? 혹은 갚을 수 없는 빚더미에 앉아 희망 없는 교회를 물려받았다면, 그건 도리어 십자가를 지는게 아닐까? 그래서, 나는 교회세습을 비판 할 때, 나름의 특수한 사정과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으로 타인의 중심을 함부로 제단하는 ‘일반화의 오류’을 경계하고 정면으로 거부한다.

        물질적인 유산을 물려주는 ‘교회세습’과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는 ‘목회세습’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기득권 곧 물질(돈과 부동산)의 차이다. 우리는 여기서, 무형의 유산을 대물림하는 ‘목회세습’은 문제 삼지 않고, ‘유형의 자산을 대물림하는 교회세습, 그것도 대형교회의 세습만을 유난히 비판하는 숨겨진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그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가치는 하찮게 여기고,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가치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물질주의적인 가치판단을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비판하는 대상의 오류를 스스로 범하고 있는 격이다. 욕하면서 사실은 부러워한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오늘날 대형교회의 목회자들과 교회세습을 한 목회자들만 성공주의, 성장주의, 물질주의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작은 교회의 목회자들과 세습과 무관한 대다수의 목회자들 역시 동일하게 성공과 물질, 성장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둘의 차이는 한쪽은 이미 이루었고, 한쪽은 아직 이루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나는 ‘교회세습’ 말할 때, 교회세습을 한 이들의 부와 권력에 대한 탐욕과 더불어, ‘교회세습’을 비판하는 이들의 마음 한편에 있는 부와 권력에 대한 박탈감과 갈망, 시기와 질투를 동시에 본다. 물론, 그들 모두는 아니고 그들 가운데 일부에 해당한다.


        4. 나는 비교하지 않는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려운 목회실존 속에서 세 자녀를 키우기 위해 일을 하셔야 했다. 신학교시절엔 동네슈퍼를 하셨고, 목회하시면서 회사구내식당도 하셔야 했다. 생활을 위해서... 그래서 아버지의 목회는 늦어졌고 그 희생으로 나는 남부럽지 않게 공부하며 구김살 없이 성장했다. 나 역시 작은 교회를 10년간 담임하면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 속에 하루하루 전전긍긍 하는 목회현실이 때때로 무척 피로하고 몹시 곤고하다. 말할 수 없는 깊은 절망과 낙심을 경험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코 대형교회목회자들의 호의호식을 부러워하지도 않고, 비교하지 않는다. 목사로 산다는 것은 본래 물질적인 가치가 아니라, 영원한 가치를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 이것은 무명의 목회자로 인생을 마감하신 내 아버지가 나에게 물려주신 유산 가운데 하나다.

        늘 가난했지만 언제나 숭고함을 잃지 않으셨던 나의 아버지는 늘 내게 말씀하셨다. 고난과 역경은 더 풍성한 삶과 깊이 있는 목회를 경험하게 한다. 무엇보다, 진짜 목사다움을 경험할 수 있다. 목사답게 살면 그것이 목회의 가장 큰 성공이다. 지금 너의 목회현장이 너에게 가장 좋은 곳이다.


        5. 나는 그들도 친구(동역자)라고 여긴다.

        몇해전, 참석했던 목회자세미나에서 사랑의 교회 오정현목사는 대형교회 목회자를 3D( Difficult, Dirty, Dangerous) 업종 가운데 하나라고 하면서 볼멘소리를 했다. 허튼소리가 아니라, 옥한흠 목사님의 뒤를 이은 부담감이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과연, 대형교회 목회자는 천하태평과 무사안일의 편안하고 안락하기만 할까? 꼭 그렇지 만은 않으리라. 목회자로 산다는 것 자체가 부담인 까닭이다.

        소위 아버지의 목회를 이어서 자신이 자란 교회에서 담임목회를 하는 분들은 정말, 무사태평하기만 할까? 선지자가 고향에서 대접받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냥, 목사로 사는 것도 힘든데, 탁월한 목회를 감당하고도 아버지의 후광덕분이라고 평가절하 되고, 30년을 넘게 목회하고 환갑이 넘어도 세습목회자라는 지탄을 감수해야 한다. 한 평생을 마음 한구석에 불편한 마음의 짐을 지고 살아야 하는 목회자들을 나는 동역자로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냥 하는 빈말이 아니다. 내가 이렇게 바라볼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교회세습이 나에겐 둘도 없는 친구(동역자)의 실존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카드빚과 학자금대출로 신학공부를 마치고, 목사가 되어서도 보험회사, 택시운전을 감당하며, 자녀들을 키우고, 가난한 목회적 실존을 해결하기 위해 일하는 이 시대의 수많은 미자립교회 동역자들의 아픔을 안다. 나는 이와 동일한 시선으로 교회세습을 한 목회자들의 남모르는 아픔도 본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들도 나와 같은 친구(동역자)라는 시선으로 서로의 아픔을 바라볼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시대에서 우리 모두가 해원상생으로 함께 공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이유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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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장은 믿음의 의의 열매와 결과들을 다룬다. 그러나 그가 앞서 말했던 바를 대체적으로 확대 해석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게 해서 그의 요점을 더욱 분명하게 해준다. 구속함을 받아 하나님께 화목된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주실 만큼 풍성하게 그의 사랑을 길 잃은 죄인들에게 쏟아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바울은 a mairi 논증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죄와 자유로운 의, 그리스도와 아담, 사망과 생명, 그리고 율법과 은혜를 비교시킨다. 이로써 우리의 허물이 아무리 클지라도, 그것들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선에 의하여 삼킨 바 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6장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성화에 대해 그는 논한다. 육체가 이 은혜의 맛을 조금밖에 보지 못할 것 같으면, 그것은 마치 이제는 은혜가 끝나버린 것처럼, 그것의 악덕과 욕망을 아무런 가책도 없이 탐닉하기가 십중팔구이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여기서 성화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그리스도 안에 의를 우리가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세례를 들어 그의 논증을 펴고 있다. 이 세례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교제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p.30)통하여 일으킴을 받아 새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거듭남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을 수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바울은 이 사실을 근거로 정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 것을 권한다. 이러한 성결과 거룩은 그리스도 안에서 더 큰 자유를 얻어 죄를 범하려고 하는 육체의 불경건한 방종을 제쳐 버리고, 죄의 왕국에서 의의 왕국으로 이적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져야 한다. 바울은 또한 간략하게 율법의 폐기를 언급한다. 이 율법 안에서 신약이 그 빛을 비추이고 있다. 왜냐하면 성령이 죄사함과 더불어 신약에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7장에서 그는 율법의 효용에 관하여 공명정대하게 논하기 시작한다. 그는 앞서 다른 주제를 논하면서 이것을 언급했던 바가 있었다. 그는 말하기를, 율법 그 자체만으로는 우리를 정죄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논증으로 인하여 율법이 비난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율법에는 아무런 흠이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그는 주장한다.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주어졌던 율법이 사망의 수단으로 둔갑한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라고 바울은 설명한다. 동시에 어떻게 율법이 죄를 더하는가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그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죽을 육신의 감옥에 감금되어 있는 한 경험하게 되는 영과 육의 갈등을 기술한다. 율법을 순종하는 데서 신자들을 계속적으로 빗나가게 하려고 하는 탐욕의 찌거기들을 신자들은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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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언(無言)의 향기 최송연 어둡던 내 영혼 주님의 빛 비취셨네 내 영혼에 비친 주의 빛 세상의 어둠을 밝혀주는 소망이게 하소서 삭막하던 내 영혼 주님의 사랑 임하셨네 내 맘속에 임한 주의 사랑 세상의 삭막함을 감싸는 향기이게 하소서 주의 은총으로 산 생명 된 영혼 그 생명의 향기 바람결 따라 저 멀리 퍼치고 꽁꽁 언 땅 헤치고 돋아나는 새순처럼 깨끗한 기상은 무언(無言)의 향기 되어 시나브로 전해질 수 있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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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화의 3분의 2를 듣는데 쓴다.
          
         
        나는 회사 구내 식당, 강당 어디에서든
        직원들과 얘기한다.
        
        이 때 나는 늘 3분의 2 원칙을 지킨다.
        주어진 대화시간의 3분의 2를 듣고,
        그 질문에 대답하는데 썼다.
        
        이를 통해 
        반대자들의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많은 사람을 내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 AG 래프리, P&G CE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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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단적 사이비 종말론 자들

         하나님을 배반하고 사망의 죄를 범한 인간을 구원하시고 죄와 원수마귀의 세력아래 황폐화된 만물을 회복하시기 위하여 만유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 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 제물로 내어주시고 이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고 마침내 하나님나라를 회복하시고 완성하실 하나님의 구속사가 끝나는 날은 언제일까?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몸이요 신부로써 부름 받은 이 땅의 하나님의 교회가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신랑이신 주님의 재림의 때는 과연 언제일까?

        (마 24:5-14)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오늘날 성도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전인 하나님의 자녀들을 넘어뜨리려는 미혹의 영들이 얼마나 세상에서 활개치고 있으며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얼마나 역사하는지 모른다. 교회를 통째로 먹고 넘어뜨리며 파괴하는 현상을 볼 때 과연 점입가경이라 할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되고 예언된 대로 오늘날 얼마나 많은 자칭 그리스도라 하는 자들이 많은지 모른다. 자신이 재림예수요 구세주라 하는 자는 물론 스스로 하나님이라 칭하는 자도 부지기수며 심지어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하는 정신 나간 자들도 있다. 스스로 보혜사 성령이라고 하는 자는 이에 비하면 아예 애교로 친다. 현재 한국에 생존해 계시는(?) 재림 예수와 하나님 만해도 수십 명(이런 외람되고 참람한 표현을 써도 될지 모르겠다)이며 이미 승하하신 분들까지 치면 수도 없이 많으니 전 세계에 등장해 계신 주님들까지 합치면 얼마나 많으시겠는가?

         과연 그러고 보면 낮은 데로 임하시는 하나님,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맞긴 맞는 것 같다. 아마 천국에 가 보면 모두 한국 사람들로만 가득 차 있을 런지 모르겠다. 그리고 천국에는 하나님이 안계실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 이미 여러 곳에 와계시지 않은가 말이다.

         어떤 사이비 이단 집단이던지 자기들 교주가 하나님이요 재림주이신데 왜 위의 천국엘 가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하나님 나라(천국)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 아닌가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 현세상이 천국이요 이미 종말의 일들은 이루어지고 끝난 것이 아닌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엉터리도 분별하지 못하도록 모든 지각이 화인 맞았으니 실로 복장이 터질 지경이니 더 이상의 이야기는 여기서 줄이기로 한다.

         수많은 이단 사이비가 곳곳에서 일어나 무차별 공격해서 깨어있지 않은 신자와 목회자와 교회를 넘어뜨리고 잡아가두고 파괴하는 이때에 과연 교회의 파수꾼으로써 목자들은 이런 현실 앞에서 어떤 자세로 임하고 있으며 성도들을 어떻게 지켜내야 하는가?

         오늘날 온라인상에서 제공되는 수많은 정보들과 기독교 관련 자료들을 보면 절반이상이 마지막 시대적 현상들과 주님의 재림에 관한 자료들 일색이다.  오프라인에서는 아직은 드러내고 깊이 다루지 않고 있는듯하지만 이런 정보들은 결국 오프라인으로 나올 것이 틀림없다.

         이런 과열되고 있는 온라인상에서의 종말과 재림에 관한 수많은 정보들을 접하는 목회자들은 어떤 준비를 하며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 것일까?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써 이러한 현상들을 단순히 교회 안에서만 또는 개인적으로만 예의 주시하고 있어야 하는가? 아니면 구체적으로 다루어야 하는가?

         1990년대 등장했던 이장림 목사가 이끄는 ‘다미선교회’의 경우처럼 과거 수차례 극단적 사이비 종말론 자들의 등장으로 사회전반을 어지럽게 하고 성도들을 미혹하고 가정을 파괴하는가 하면 사회불안을 가져오고 하나님의 교회들을 무너트린 예로 보아 이제 웬만한(?) 교회와 성도들은 그런 일엔 관심조차 갖지 않거나 무시하는 것 같다. 마치 이솝우화에 나오는 늑대와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처럼 이제는 다시는 안 속는다는 모양새다. 하기야 미국의 어느 유명한 목사는 지옥은 없으며 종말이나 재림 또한 없다고 하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한 편으로는 수많은 세기말의 현상과 데이터와 증거들로 인해 두려워하며 반신반의 하거나 당장 내일이라도 주님이 공중 재림 하실 것처럼 난리법석을 떨고 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대로 전쟁의 소문과 기근과 지진 민족 간의 전쟁과 지구 곳곳에서 자행되는 불법, 입으론 사랑을 노래하지만 사랑은 식어지고 난무하는 폭력과 싸움, 그리고 세기말 적인 하늘과 땅의 멸망의 징조들은 과연 무시할 수 없는 시대적 현상들이 아닌가?

         모든 이단 사이비집단들이 주요 무기로 다루는 것과 그들 집단의 핵심교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부활의 구원복음이 아닌 다른 구원관과 이 극단적 종말과 재림사상이다. 이 땅에서의 영원한 삶, 이 땅에서 신적 존재로 영생한다는 엉터리 이론이나 자기들의 집단에 속해야만 구원받고 천국 간다는 거짓말과 이런 극단적 사이비 종말론이 지금도 여전히 먹혀들고 있고 오히려 더욱 득세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안에서도 교파에 따라 교리나 신학이론을 가지고 수 백 년을 지난 지금도 극과 극을 달리며 서로 옳거니 그르니 싸우고 있다. 결국 극과 극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과연 중립은 없는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이 동일하시고 변함없는 생명의 말씀으로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해 오셨음에도 진리의 구원의 문제가 아닌 것들로 극과 극을 달리며 등을 돌려 대야 하는 것일까?  이런 극단적인 대결과 분쟁은 과연 하나님의 교회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오늘날 수많은 교파와 교단으로 분열되고 흩어져서 그리스도의 신부요 몸으로써 세워지지 못하며 연합되지 못하게 한 원인은 아닐까? 수없이 많은 이단과 사이비 집단을 양성하고 만들어 낸 원인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 교회는 이런 상황들에 대하여 책임이 없는 것일까? 오늘도 한국교회 안에서는 나와 생각이 조금 다르다거나  
        튄다는 이유만으로도 이단 만들기가 계속되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극단적인 생각의 저변에는 이기주의와 욕심이 깔려있다. 고집과 교만이 자리 잡고 있다. 전혀 이해와 자기부인과 겸손 따윈 없다. 실수를 인정하거나 다른 쪽의 견해를 용납할 수 없다. 결국 오류나 실수가 드러나도 감추거나 합리화하려들지 돌이키려하지 않게 된다. 그 끝은 결국 이단 사이비로 정죄되고 만다.

         우린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이런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을 목도한다. 그 뒤에 과연 무엇이 도사리고 있어서 그들의 마음과 생각과 양심을 노략질하고 미혹하는 것일까? 극단이 가져다주는 폐해 그 이면에 역사하는 다른 힘과 세력들은 없는 것일까? 있다고 한다면 그 세력은 무엇이며 그 목적은 무엇일까? 그 결과로 나타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과연 무엇일까?

         극단적 사이비 종말론자들은 두 종류로 정의 할 수 있다.

         그 첫째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극단적 사이비 종말론 자들로써 지금이 주님의 때라고 믿으며 각자에게 주어진 일상을 탈피하거나 함께 집단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려고 하거나 애써 현실을 외면하는 현상이 있다.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더욱 열심히 최선을 다하며 감사와 찬양으로 삶을 지키며 맡겨준 소임을 다하며 말씀과 기도로 깨어있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영원한 천국으로 이사 갈 것이기에 주변을 정리하기도 하고(이 땅을 떠날 준비를 하고) 그들이 믿고 따르는 교회와 목자를 위하여(명목상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 전파를 위하여) 헌신하게 되고 집중하게 되며 결국 그들의 삶은 버려지고 파괴되고 압제당하며 빼앗기게 된다.

         마지막 복음을 전한다며 두려움과 공포심을 유발하는 내용들로 이루어진 정보들만을 유포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들을 전할 뿐이다. 그리고 주된 포교의 대상은 다른 이단 사이비 집단과 마찬가지로 기존교회 성도, 즉 하나님의 교회들이다. 그리고는 자기들의 생각과 주장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나머지 그 외에 다른 사람들과 교회를 비난하거나 무시하고 ‘기성교회’ ‘음녀’ ‘바벨론’ 등과 같이 구별을 두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들은 함께 모든 정보를 돌려가며 수집하고 집중하여 교육되고 세뇌 되어 그 생각은 절대적이 되고 다른 정보를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은 그 정보에 기준하여 합리화하게 된다. 생각과 사상은 강화되고 현실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게 되며 두려움은 한층 강화된다. 그 두려움은 때론 극단적 열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집단에 소속되게 되면 매우 위험한 것이 지나치게 극단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교회나 성도들과 하나가 될 수 없다. 생각과 믿음이 분명하기는 하지만 만일에 대한 여지를 가질 수 없다는 위험성이 따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예를 보더라도 결국 그들이 믿고 따르던 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틀렸을 경우 극단적 집단 히스테리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매우 높고 자기 파괴적이 되거나 집단 우울증에 빠지게 될 수 있다. 때론 현실 부정과 자기합리화로 왜곡하려고 하며 그들의 주장을 바꾸고 변경하며 스스로 위로하려고 하게 된다. 너무 극단적으로 믿고 따랐기에 현실을, 그리고 사실들을 받아들이고 인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고 만다. 결국 또 다른 사이비 집단으로 전락하는 불행이 뒤따르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 첫 번째 극단적 사이비 종말론 자들은 현재 왕성하게 활동 중이며 급속히 온 땅으로 들불처럼 퍼져나가고 있다. 가히 그 세력이 대단하다. 이런 성도들과 교회를 미혹하고 두렵게 하는 각종정보들과 동영상은 온라인은 물론 오프라인으로 급속히 무차별 전파되고 있다. 각종 통신시설과 개인 휴대폰의 카카오 톡을 통하여 하루에도 수차례 이 곳 저곳으로 보내지고 있다. 그 중에는 목사들도 부지기수다. 여기에는 진짜와 가짜의 구별이 없다. 이런 집단에는 이단과 사이비의 경계가 없다.  이런 정보들과 메시지를 통하여 어떤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 결말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그 배후에는 과연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

         두 번째 극단적 사이비 종말론 자들이 있다.

        (마 25:1-13)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 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첫 번째 극단적 사이비 종말론이 지금이 마지막 때이고 주님 재림하실 때라며 현실의 삶에서 벗어나 지나치게 종말 사상에 집착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 극단적 사이비 종말론 자들은 구원의 확신도 있고 주님의 피 묻은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하기도 하였으며 성령의 역사도 경험하였고 주님의 재림신앙도 있고 나름대로  교회생활도 열심히 하지만 아직은 주님이 오실 때가 아니라고 믿고 있으며 이 땅에서 열심히 업적을 이루고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힘쓰고 애쓰는 부류들이다.

          이 두 번째 극단적 종말론 자들은 또 한편으로는 아예 말세니 종말이니 재림이니 휴거니 하는 이야기가 성경에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무관심한 사람들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이런 목자들과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들에게 이런 말씀을 나누어 보려하면 금세 하품을 하고 졸려한다. 완전히 귀가 가리우고 닫혀서 들으려도 않고 전혀 관심도 없다. 무슨 자다 봉창 두드리는 얘기냐는 표정이고 아예 웬 미친 놈 취급이다. 그들에게는 이런 마지막 때의 말씀은 성경에 있어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이들의 특징은 위의 마 25:1-13절 말씀에서도 경고하고 보여주듯이 신랑을 기다리기는 하지만 늦다는 이유로(무슨 근거로 늦다고 믿는지는 모르지만) 다 졸며 잠들어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한국교회를 보면 분명하게 드러나고 나타나는 현상이 여기에 있다. 슬며시 교회 안에 들어온 번영신학과 물질 만능주의의 맘모니즘이 교회 공동체를 전부 영적인 잠에 빠트려 버린 것 같다. 외형상으로는 부흥한 것 같고 성장한 것 같고 깨어서 그리스도의 신부로 준비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내면을 살펴보면 이들 역시 극단적 사이비 종말론에 사로잡혀있다.

         시대적 상황들과 급박히 변해가는 사회적 현상들을 애써 외면하려하고 성도들에게는 계속 부귀와 영화와 축복의 메시지만을 외치고 있고 이 불타버릴 세상에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천문학적인 생명 같은 돈을 쏟아 부어 바벨탑을 쌓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마치 이 땅에서 영원토록 존재할 것처럼. 바로가 이스라엘을 노예삼아 국고성과 자기의 영광을 위한 라암셋을 건설케 했던 것처럼 자신들의 이름과 영광을 위하여 대리석 아방궁을 짓고 있으며 그 곳을 성전이라 하나님의 집이라 하지는 않는가 말이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 7:4)

         이런 사람들의 기도는 깨어서 기름을 준비하는 기도가 아니라 지신들을 뜻을 성취하기위한 기도와 자신들의 배를 불리고 이 땅에서 복을 받기위한 욕심에 찬 기도일 뿐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마지막 때의 말씀은 애써 피한다. 강단에서는 종말의 때에 관한 경계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다. 아니 전할 수 없다. 이러한 정보나 자료들도 철저히 금하며 사이비 종말론 자들로 무조건 몰아간다. 계시록을 비롯한 다른 말세의 예언을 메시지도 상징적으로만 풀이한다. 성도들을 모두 장님으로 만들고 귀머거리로 만든다. 또한 시대를 깨우는 종들의 외침을 비판하고 정죄한다. 마치 세상 영화에 취하여 동료를 때리는 악한 종처럼. 이러한 교회는 주님의 신부가 될 수 없고 당연히 주님과의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없다.

        (마 24:35-51)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예수님께서는 친히 당신의 육성으로 마지막 때에 대한 말씀을 우리에게 경계로 주셨다. 눈이 있으면 읽어보라. 굳이 영적으로 해석하려고 하지 말라. 그냥 읽으면 거기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말이다. 과연 누가 어디에 주님 오실 때가 아지 멀었다고 하였을까? 그 소리는 어디에서 나온 것이며 누가 속삭이는 소리인가? 잘 못하면 자신은 물론이요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교회를 미혹하고 실족시킬 수 있게 된다. 이 말씀은 분명 목사들(종)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닌가? 이런 양 극단의 사이비 종말론의 모든 원인들은 결국 깨어있지 못한 목자들의 책임이다.

         이런 교회들은 왜 시대를 분별하며 깨어서 그리스도의 신부로써 주님의 때를 준비하려는 일에 열심을 갖지 않으며(이 말에 분명 인정하러들지는 않겠지만) 시대적 현상과 성경의 마지막 때를 위해 주신 말씀들을 연구하고 묵상하는 일을 애써 피하고 사이비 종말론 자들의 역사로만 치부하려는 것일까?

         주님의 때(심판의 주로 공중재림하실 때)를 기다리며 준비한다고 하는 것과 교회가 신부로써 단장하고 기름을 준비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올바른 종말 신앙과 재림 신앙은 어떤 것일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현상들 중에 이러한 극단적 사이비 종말론 자들이 급속이 번져나가고 있는 것 같아 매우 안타깝다. 이들은 말씀을 깨닫고 성령께서 주시는 예지로 시대를 분별한다고는 하지만 정작 주님께서 성령으로 말씀하시고 위탁하신 마지막 때 부르시고 택하신 목적과 주님의 뜻을 간과하고 있다. 또한 교회의 본질과 그리스도의 몸의 신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주님이 재림하시려면 반드시 선행되어져야 할 매우 중대하고 분명한 조건이 있다. 이 조건이 먼저 충족 되어져야 주님이 오신다는 곳이다. 그 조건은 바로 하나님의 교회가 완전하게 세워지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정하신 그리스도의 몸인 성도의 충만한 수가 차야한다는 것이다. 신랑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이고 그 교회가 바로 우리 성도들이다. 그 충만한 수가 차야 한다는 것이다.

         그 충만한 수가 찬다고 하는 것은 단지 교인 숫자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써 흠도 티도 없이 완전한 교회로 준비되어져야 하며 여러 가지 단장품과 향유로 단장되어져야 한다. 아가서나 에스더서를 통하여 왕의 신부가 얼마나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되는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의 혼인 준비를 위하여 교회들에게 친히 말씀하여주시지 않았던가 말이다.

         오늘날의 우리 자신과 우리들의 교회를 들여다보자. 과연 그리스도의 신부로 자격을 갖추었는가? 흠이나 점이나 티가 없이 거룩하고 깨끗한 옷으로 준비되고 있는가? 신부의 정절이 더럽혀지고 단장품도 준비되지 않고 잠들고 졸아 눈에는 총기도 없는 형편없는 저질 신부를 데리러 주님이 오시겠는가 말이다. 기다리다 지쳐 침을 흘리고 자고 있는 신부, 주님은 지금 그나마 우리들을 깨우고 경각시키시고 계신 것은 아닌가?

         아버지 하나님과 신랑 예수님은 빨리 신부를 맞이하고 싶어 안달이시다. 그런데 신부인 하나님의 교회가 오늘날 양 극단의 사이비 종말론에 사로잡혀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주님의 재림을 목마를게 사모하는가? 그렇다고 한다면 먼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극단적 사이비 종말론 말고 순전한 그리스도의 복음 말이다. 모여서 떨지 말고 웅성거리고 속아 미혹되지 말고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내라. 눈물로 깨어 힘써 세계 열방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고 교회가 세워지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수가 차도록 헌신하고 투자하라. 엉뚱한 놈(?)들에게 재능과 자원과 달란트와 생명 같은 물질을 바치지 말고...

         속지 말아야 한다. 복음은 단 하나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하시고 보혜사 성령으로 오셔서 역사하시는 이 복음 외에 다른 그 어떤 복음도 없다. 666이니 베리칩이니 종교통합이니 이런 것에 목매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사실일찌라도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의 관심은 복음 이외에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

         단언 하건데 지금 당장은 주님이 오실 때가 아니다. 곧 속히 오시지만 아직은 아니다. 이 말은 내가 하는 말이 아니다. 위의 마태복음 24장을 읽어보라.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는가? 그럼 지금은 어느 때인가?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완성하고 온전히 세우는 일을 해야 할 때인 것이다. 온 땅에 복음이 전파되고 나서야 끝이 온다고 말씀하시며 충만한 수가 찰 때까지 신랑께서는 기다리고 계신 것이다.

         이미 하늘에서는 신부인 우리 교회들의 신혼집이 준비되어 있다. 정신 차리고 목숨 걸고 복음 전하는 일에 헌신해야 할 때이다. 교회 증축하느라 혈안이 되어 있지 말고 자꾸 퍼져 나가야한다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해야 한다. 열방을 향해 퍼져 나가야한다 지역교회가 연대하고 온 나라의 하나님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으로 연합하여 몸을 세우고 충만해지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

         도시의 대형 교회들은 참회해야 한다. 욕심을 버리고 소외지역의 목회자들을 섬겨야 한다. 모든 면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 그 오지와 낙도와 소외된 곳에 하나님의 교회가 든든히 설 수 있도록 사명감을 가지고 끊임없이 지원해야 한다. 기도 뿐 아니라 물심양면 모든 재원을 투자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서로 으르렁 대며 싸우고 있고 갈갈이 찢기고 있는 신부의 세마포 옷을 눈물로 바라볼 수가 있어야 한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가 얼마나 더렵혀져 있고 수치와 모멸을 당하고 땅바닥에 던져져 짓밟히고 있는지도 모른 체 잠들어 있고 술에 취해 진리를 외치는 깨어있는 동료를 치고 있는 현실을 보지 못한다고 한다면 이미 술에 취한 채 깊이 잠들어 있는 것이다.

         찢기고 더럽혀져있고 능욕당한 채 수치스런 몰골을 한 오늘날의 교회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외아들, 만왕의 왕이신, 모든 능력과 지혜와 영광의 왕이신 그분을 신랑으로 맞을 자격이 있는가? 무슨 자격으로 재림을 기다린단 말인가? 신부의 거룩한 옷도 없이, 등과 기름도 준비되지 않고서 말이다.

         기름은 무엇인가? 거룩한 감람유, 순전한 감람유를 상징한다. 감람 열매를 찧어서 짜낸 기름을 정제하여 얻은 순전한 감람유, 오늘날 교회는 찧어지고 짜내지고 그리고 거르고 정제해야만 얻을 수 있는 기름을 과연 얼마나 준비하였는가?

         진액을 짜내는 기도의 무릎으로만 가능한, 죄인의 자리에서 회개와 탄식 세상과 내 안의 죄악을 돌아보며 중보와 참회의 눈물로만 만들어지는 그리고 모든 욕심도 명예도 대단한 업적도 다 걸러내야만 얻을 수 있는 순결한 감람유를 얼마나 준비했는가 말이다.

         순진한 성도들에게 십일조와 거액의 감사헌금과 과잉충성과 건축헌금 등의 감언이설로 기름을 준비하고 신부단장 한다고 사기 치면 안 된다. 그런 더럽고 저급한 기름은 미련한 처녀들이나 사러 다니는 것이다. 그런 돈 주고 사는 기름 따위로는 신랑을 맞이할 수 없다. 내 안에서 감동하시고 역사하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 무릎 꿇음과 눈물의 통회와 간절한 간구의 애통함의 과정을 통해서만 만들어 지는 것이기에 지금 우리의 모습을 올바로 직시해야만 한다.

         양 극단의 사이비 종말론에서 정신을 차리고 빠져 나와야 한다. 전자도 문제가 있지만 정작 더 심각한 문제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마취상태에 있는 후자의 극단적 종말신앙이 더 큰 문제임을 깨달아야 한다. 마치 주님의 재림은 요원한 것인 양 이 땅의 것에 마음 빼앗기고 눈에 보이는 것을 쫓아 살면서 세상 풍조에 편승하여 번영을 꿈꾸는 교회는 그 날이 오히려 덫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눅 21:34-36)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수많은 당신의 종들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영광의 그날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계신다. 다시 오시겠다 하신 주님께서 영광의 재림을 하시는 그날은 반드시 올 수 밖에 없는 실제 중의 실제이다. 그날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와 복음을 순종하지 않은 자에게는 멸망과 심판의 가장 두려운 날이지만 예수 생명으로 거듭나 복음을 순조하는 자에게는 복음의 영광 안으로 들어가는 가장 사모하고 기다리는 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는 그 때는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이 오시는 때가 가까이 오면 임할 징조들에 대해서 성경 곳곳에서 말씀하시고 계신다. 그러므로 깨어 기도하는 자에게는 그 날이 얼마나 가까이 왔는지 주님께서 보여주시며 그 날을 준비하게 하신다. 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가 속히 오신다는 것이 실제가 된 사람의 삶은 어떠하겠는가?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로써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싸우는 영적 군사로써 오직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는 삶을 살 것이다. 그리고 열방을 위하여 선교적 중보자로써 굳게 일어서게 될 것이다. 사단은 마지막 때에 교회가 깨어있지 못하도록 세상의 온갖 유혹으로 미혹할 것이다.

         이기는 교회,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이 마지막 때 비로소 그 정체가 나타날 것이다. 잠들어 있는지 취해 있는지 아니면 깨어서 기름을 준비하고 있는지...

        주님은 마지막 때는 노아시대와 소돔과 고모라 시대와 같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때가 될 것에 대해 말씀 하셨다. 사람들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을 믿지 아니하며 심지어 많은 교인들도 주님이 더디 오실 것처럼 자신을 깨어 준비하지 않고 살고 있다. 이때에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준비된 신부로써 그날을 더욱 간절히 사모하며 깨어 자신을 지키며 열방을 중보 하는 자로 일어서야 할 것이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할렐루야!

        USA아멘넷 게시판/교회는 하나 목사님
        
        
          하나님의 얼굴을 나타내는 모자이크  
         The Mosaic That Shows us the Face of God)
        
        모자이크는 수천 개의 작은 돌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어떤 돌은 파란색이고, 어떤 돌은 초록색이며, 
        또 어떤 돌은 노란색, 또 다른 돌은 금색입니다
        
        우리가 얼굴을 모자이크에 가까이 대고 보면, 
        우리는 돌 하나 하나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자이크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면, 
        이 작은 돌들이 하나의 아름다운 그림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은 돌 하나 하나로서는 
        말할 수 없는 얘기를 우리들에게 들려줍니다
        
        우리의 공동체 생활이란 
        바로 이 모자이크와도 같습니다
        우리 각자 각자는 
        하나의 작은 돌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모여서 하나님의 얼굴을 
        이 세상에 보여 줄 수 있습니다
        "나에게서 하나님을 보여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하나 하나로 보지 않고
         함께 뭉쳐서 보는 사람은 
        "그들에게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 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는 겸손과 영광이 서로 만나는 곳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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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심 때문에 잃어버리는 행복 인간은 행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행복은 별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욕심을 줄이고 만족할 줄 아는 것,

        그게 행복입니다.

        세상이 망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상이 불행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재수가 없어서도 아닙니다. 안 따라주는 운 탓도 아닙니다. 욕심 이 욕심 때문에 망하고 불행해지는 겁니다 욕심 때문에 행복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가져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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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와 그들의 독특한 재능
          (Friends and Their Unique Gifts) 두사람의 친구가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친구 한 사람 한 사람은 우리들을 위한 각각 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한 친구가 소유하고 있기를 우리가 기대하면, 우리는 언제나 그 친구를 심하게 비판할 것이고, 또 결코 그 친구가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완전히 만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 친구는 우리에게 애정을 줄 수 있을 것이며, 다른 친구는 우리의 마음을 고무시킬 수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친구는 우리의 영혼을 강하게 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친구들이 줄 수 있는 여러 가지 다른 재능들을 우리가 더 잘 받아들일 수 있으면, 우리도 자신의 독특한 그러나 제한적인 재능을 친구들에게 더 잘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정은 아름다운 사랑의 태피스티리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출처: 최송연믜 목양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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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1596

        얼마 전 칼뱅주의 논리적 구조에 관한 글을 기고했는데 기고문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제3자는 될 수 없습니다." 제3자가 될 수 없다고? 왜? 대체 그이는 무슨 이유로 필자가 제3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가? 이러한 양자택일의 압박은 필자가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부터 늘 받아왔던 것이다.

        아무래도 필자가 속한 교단이 침례교단이다 보니 신학교에도 칼뱅주의자와 아르미니우스주의자가 함께 모여 공부를 했다. 그래서 허구한 날 칼뱅주의 vs. 아르미니우스주의 논쟁이 벌어졌다. 그런데 필자가 썩 유쾌하지 않았던 건 논쟁을 벌이던 학우들 중 몇몇은 늘 필자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했던 것이다. "너는 어느 입장이냐?" 흑이냐 백이냐를 묻는 그들이 나에게 보인 태도는 그 댓글과 같은 태도였다. 이름 하여 '3자 불허!'

        나는 이렇게 3자 불허를 외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대체 무슨 근거로 제(諸)기독 신자가 칼뱅주의 아니면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인지…. 그렇다면 베드로와 요한, 바울 그리고 심지어 예수조차도 칼뱅주의자와 아르미니우스주의 중 하나를 택했어야 했다는 말인가?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논쟁이 지금까지 그토록 치열하게 지속되어 온 이유는 두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 모두가 둘 중 하나 아니면 안 된다는 3자 배제 원칙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는 칼뱅주의 아니면 아르미니우스주의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장에 동의할 수 없다.

        필자가 3자 배제 원칙을 거부하는 이유는 먼저 이들이 감히 광대한 기독교 신앙을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단 둘로 압축하려는 무모한 시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분법적 태도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으로 양분하려는 자기중심주의와 별로 다르지 않다. 사실 3자 배제 원칙을 주장하는 이들은 둘이 모순 관계이기 때문에 필경 하나는 진리고, 하나는 오류일 수밖에 없으니 진리의 편에, 즉 자기 편에 속하라고 늘 압력을 가하려는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필자의 답변은 이것이다. '싫다~!'

        앞글에서도 잠깐 밝힌 대로 3자 배제 원칙을 주장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매우 성서적이며, 그들의 논쟁이 성서의 내용에 충실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의 원칙을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그들은 모르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3자 배제 원칙은 결코 성서적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논리학의 3법칙 중 배중율(排中律)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논리적으로 봤을 때에도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는 모순 관계가 아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과 같은 스펙트럼을 짜 보자. 만일 신의 주권을 전적으로 강조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철저히 약화시키는 태도의 극단을 1이라 하고, 반대로 신의 주권을 철저히 약화시키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적으로 강조하는 태도의 극단을 10이라고 해 보자. 이런 스펙트럼에서 1은 이슬람 숙명론쯤 될 것이고, 10은 무신론적 인본주의쯤 될 것이다. 내가 볼 때 칼뱅주의나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이 스펙트럼에서 2~9 사이 어디쯤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다.

        1<--------------------------------------------------------------------------> 10
        이슬람 숙명론 (칼뱅주의 vs. 아르미니우스주의 논쟁) 무신론적 인본주의

        다시 기독교 신앙의 범주 내에서 위의 스펙트럼을 다시 짜 보자. 그렇다면 1은 하이퍼칼뱅주의쯤 될 것이고, 10은 펠라기우스주의쯤 될 것이다. 이 스펙트럼 상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아마도 2부터 9 사이 어딘가에 위치할 것인데, 필자 생각에 요한 웨슬리 같은 복음적 아르미니우스주의는 대충 3~4 사이를 왔다 갔다 하지 않을까 싶다.

        1<---------------- 3-----4---------------------------------------------------> 10
        하이퍼 칼뱅주의/ 복음적 아르미니우스주의/ 펠라기우스주의

        어거스틴의 예정론

        이 스펙트럼이 보여 주는 바는 무엇인가? 만일 기독교 신앙의 범주 내에서 칼뱅주의의 카운터파트를 찾는다면 펠라기우스주의이지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서로 카운터파트가 아니니 둘은 모순 관계도 아니다. 단지 두 입장의 주장 중 상호 모순되는 것들이 존재할 뿐이다. 결론은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에 대한 다양한 여러 견해의 스펙트럼 가운데 서로 다른 지점에 위치해 있는 몇몇 입장일 뿐이다.

        위에서 보다시피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칼뱅주의와 펠라기우스 중간 어디에서 절충적 입장을 택하고 있다. 굳이 라벨링을 하자면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수정-펠라기우스/수정-칼뱅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복음적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성향상 칼뱅주의에 더 가깝기 때문에 수정-칼뱅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물론 칼뱅주의자들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수정-칼뱅주의로 부르는 것을 무척 싫어하겠지만…. 그들은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칼뱅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교리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어쨌거나 이런 이유로 제(諸)기독 신자가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둘 중 하나를 양자택일해야 한다는 주장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지 않다.

        그렇다면 펠라기우스는 누군가? 그는 신학적으로 위대한 교부 어거스틴과 동시대 사람으로서 어거스틴의 신학적 숙적이었다. 어거스틴의 예정론은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생겨난 결과물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고전적 논쟁은 칼뱅주의 vs.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아니라 어거스틴 vs. 펠라기우스 사이에서 벌어졌던 논쟁에서 찾아야 한다. 칼뱅주의 vs. 아르미니우스주의 논쟁은 사실 6세기에 있었던 고전적 논쟁이 1000년 뒤 각색되어 다시 리메이크한 것이다. 그 때문에 칼뱅주의 vs. 아르미니우스주의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펠라기우스주의를 간단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편의상 튤립 교리의 구조를 따라 간단히 설명해 보자.

        1) 타락에 대해 -> 펠라기우스는 타락을 아담 개인에게만 국한시키고 죄의 유전이나 원죄 등을 거부한다. 그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아담처럼 타락 없이 무죄 상태에서 출생한다. 인간이 죄인이 되는 이유는 부모의 죄를 모방하기 때문이다.

        2) 선택에 대해 -> 하나님의 선택 같은 건 없다. 만일 선택이 있다면 그건 인간이 스스로의 운명에 대해서 스스로 선택할 뿐이다.

        3) 속죄에 대해 -> 인간의 본성이 무죄 상태이니 그리스도의 속죄도 사실상 무의미하다. 모든 인간은 자기에게 있는 의를 행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유의지를 활용하여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

        4) 은총에 대해 -> 흥미롭게도 펠라기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사건을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표현한다. 인간의 자력 구원을 강조하면서도 그가 은총을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모방할 수 있는 올바른 모범, 즉 100% 완전한 교과서를 내려 주셨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올바른 모범으로서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선물이고 은총이다. 우리는 예수를 모방함으로써, 혹은 그를 따름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다.

        5) 견인에 대해 -> 인간이 스스로 구원하기에 자신의 구원을 지키는 자도 자기 자신이다. 견인은 인간 자신의 의지에게 달려 있다.

        이러한 펠라기우스의 사상은 로마서, 갈라디아서 등에서 바울이 신랄하게 비판했던 행위 구원론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어거스틴은 이를 탄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어거스틴의 예정론의 대략이 생겨난다. 어거스틴의 예정론을 종교개혁 신학에 맞춰서 논리적으로 더욱 일관성 있게 정교화한 것이 칼뱅주의 예정론이라 할 수 있다.

        칼뱅주의자들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펠라기우스주의라고 부르기 좋아하지만 사실 아르미니우스주이자들은 펠라기우스를 매우 강력하게 거부한다. 그런데 그들은 동시에 칼뱅주의의 경직성과 완고함에도 거부감을 표한다. 즉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적으로 무시하는 어거스틴-칼뱅주의도 거부하고, 동시에 자력 구원을 주장하는 펠라기우스도 거부함으로써 제3자의 길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사실 아르미니우스는 칼뱅의 후대 사람이다. 그는 처음에는 칼뱅주의자로 신앙하고 신학했던 사람이다. 그러다가 점차 칼뱅주의를 떠나면서 칼뱅주의자들과 적지 않은 갈등을 겪게 된다. 칼뱅주의 vs. 아르미니우스주의 논쟁이 본격화된 것은 그가 죽은 뒤였다. 1609년 그가 죽은 지 1년 후 그의 추종자들이 전통적인 칼뱅주의에 반대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담은 아르미니우스주의 5대 교리를 네덜란드 교회회의에 제출했는데 이때 이들의 5대 교리는 칼뱅주의에 대한 명백한 저항 선언이었다. 저항했다 해서 이들 아르미니우스의 후예들을 '항론파(Remonstrance)'라 부르게 된다. 칼뱅주의자들은 아르미니우스 5대 교리를 반대하기 위해서 칼뱅주의 5대 교리를 확정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앞글에서 소개한 튤립 교리라 불리는 도르트신조다.

        그렇다면 아르미니우스주의가 말하는 5대 교리는 무엇인가? 그들의 입장을 역시 편의상 튤립교리의 구조를 따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미리 밝혀 두는 바이지만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상당히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기에 필자의 용어와 개념이 모든 아르미니우스주의를 포괄한다고 자신할 수 없다).

        Natural Inability(자연적 무능력) :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으나 하나님의 은총에 반응할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이 남아 있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은총으로 회복되었다.

        Conditional Election(조건적 선택) : 하나님께서 복음을 믿을 자를 미리 아시고 그들만 자기 백성으로 선택/예정하신다. 여기서 복음을 믿는 것이 선택의 조건이 된다.

        Unlimited Atonement(보편 속죄)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차별 없이 속죄의 피를 흘리셨다.

        Resistible Grace(거부할 수 있는 은총) : 하나님께서 베푸신 십자가의 은총은 이를 믿기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믿지 않기로 거부할 수도 있다.

        Perseverance of the Saints(성도의 인내) : 신자는 인내로써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하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신자를 붙드신다.

        이를 좀 더 부연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자연적 무능력 :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칼뱅주의를 가르는 분기점은 전적 타락 교리에 있다. 칼뱅주의는 '구원에 관한 한' 인간에게는 아무런 능력도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그래도 뭔가가 남아 있다고 말한다. 남아 있다고 말하면 '전적' 타락이 부정되어 펠라기우스주의로 신속하게 빠져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회복'되었다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즉,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 복음을 깨달을 수 있는 지각, 하나님의 은총에 반응할 수 있는 능력, 복음을 믿을 수 있는 능력, 결단과 그에 대한 책임 등을 회복시켜 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선행은총'이다. 하나님께서는 은총으로 타락 직후 모든 인간 안에 이러한 최소한의 능력과 자질을 회복시켜 주셨다.

        2) 조건적 선택 : 선행은총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복음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반응을 기대하시고, 요구하신다. 인간이 해야 할 반응은 자발적인 믿음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의 반응을 보시고 자기 백성을 선택/예정하신다. 그 때문에 아르미니우스주의는 하나님께서 택자는 물론이고 유기하실 자도 아울러 예정하셨다는 이중 예정을 부정한다. 또한 무슨 이유로 어떤 자는 택자로 정하시고, 어떤 자는 비택자로 정하시는지 알 수 없다는 무조건적 선택도 거부한다. 그 때문에 그들에게 예정의 신비는 불필요한 가설이 된다.

        3) 보편 속죄 : 모든 인간에게 복음을 믿을 능력이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 속죄의 피를 흘리셨다. 이것이 보편 속죄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보편 속죄를 종종 보편 구원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있다. 보편 속죄와 보편 구원은 다르다. 보편 구원이란 믿든 안 믿든 모든 인간을 하나님께서 전부 다 구원하신다는 뜻이고, 보편 속죄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을 위해서 차별 없이 속죄의 피를 흘리셨다는 뜻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예수께서 택자만을 위해 피를 흘리셨다는 제한 속죄를 하나님의 차별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한다. 그리고 그들은 '차별 없음'을 강조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믿을 사람뿐만 아니라 믿지 않을 사람들을 위해서도 똑같이 피를 흘리셨다.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선택은 인간의 몫이다.

        4) 거부할 수 있는 은총 : 모든 인간을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속죄의 피를 흘리셨다. 이제 인간이 반응할 차례다. 복음을 믿고 주님을 영접하면 구원을 얻을 것이지만, 믿기를 거부하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 자, 어떻게 할 텐가? 요한계시록 3장에 나와 있는 것처럼 예수는 문밖에 서서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지만 억지로 문을 부수고 들어오시지는 않는다. 주님은 우리가 문을 열기를 기다리신다. 만일 문을 열면 주님이 들어오시지만 열지 않으면 주님은 들어오실 수 없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이러한 자발주의는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될 수 있는 은총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거부할 수 있는 은총론이 믿을 사람은 손들어 보라는 식의 제단초청(altar calling)을 할 수 있게 만들고, 영접기도라는 것이 가능하게 만든다.

        5) 성도의 인내 : 영어로 perseverance of the saints를 칼뱅주의자들은 신자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견인'으로 읽고,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신자의 '인내'로 읽는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신자가 믿기로 결정했으니 신앙을 지키는 것도 그가 할 일이라고 말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옆에서 그를 붙들어 주신다. 하지만 결국 그 자신이 자신의 신앙을 붙들어야 한다. 그 때문에 신자가 스스로 믿음을 포기하면 그의 구원은 취소된다. 이러한 이유로 칼뱅주의 교리에서 배교는 불가능하지만 아르미니우스주의에서 배교는 가능하다.

        눈치챘을 테지만 아르미니우스주의 역시 칼뱅주의와 비슷하게 첫 번째 교리로부터 마지막 교리까지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 논리적 체계다. 이렇게 양 체계 모두 미학적으로 산뜻하고 아름다울 정도로 하나의 완성된 논리 체계를 이룰 수 있는 이유는 칼뱅주의자들이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나 모두 중세 스콜라철학을 자신들의 신학 방법론으로 차용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바로 이 스콜라철학 때문에 두 신학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칼뱅주의에 비해 논리적 엄격함이나 완고함이 상대적으로 덜하다. 왜일까? 필자가 보기에 그 이유는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칼뱅주의의 수정을 시도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소위 정통이라고 일컬어지는 칼뱅주의를 일부(칼뱅주의자들은 전부라고 주장) 수정하려 한다. 하지만 앞에서 봤듯이 칼뱅주의는 일부를 수정할 수 있는 체계가 아니다. 그건 아예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이단으로 낙인찍히거나, 논리적 모순을 범한다고 비웃음을 사게 될 뿐이다. 그 때문에 칼뱅주의 입장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어쩌면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시도를 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창작한 여러 논리적 장치들은 이런 시도들 때문에 생겨난 것들로서 좀 궁색해 보인다. 이것이 칼뱅주의를 더욱 공세적으로,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더욱 수세적으로 만드는 이유다.

        칼뱅주의는 1000년 전 어거스틴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이런 점에서 칼뱅주의는 역사적 특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르미니우스주의는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어거스틴-칼뱅의 전통을 수정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칼뱅주의 vs.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논쟁을 정통주의와 개량주의의 싸움으로, 혹은 순혈주의와 수정주의의 싸움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역사가 아르미니우스주의 편으로 점점 기울어 왔다는 것이다. 그건 바로 아르미니우스주의가 근대의 시대정신을 더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자신이 결핍한 역사적 정통성을 당대의 시대정신으로 메웠다. 특히 계몽주의의 개인 인권에 대한 무한한 존중과 개인이 자신의 운명과 신앙을 결정할 수 있다고 하는 자율적 인간관, 평등주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출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정신이 논리적으로는 다소 수세에 몰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점차 아르미니우스주의가 근대인들에게 설득력을 얻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칼뱅주의자들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세속주의에 물든 기독교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칼뱅주의자들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신학이 시대정신과 대화하며 생겨나고 발전해 왔다는 사실을 종종 간과한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논리적으로 보면 아르미니우스주의는 기본적으로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고 한다. 즉 그들은 펠라기우스의 자력 구원을 엄중하게 반대한다는 점에서 칼뱅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칼뱅주의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과도하게 제거한 점을 비판한다. 다른 말로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토끼와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토끼를 다 잡고 싶어 한다. 그들의 논리적 약점은 여기서 생겨난다. 그리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그들은 장치들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전적 타락이라는 전통적인 교리를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는 전적 타락과 하나님의 주권, 은총, 원죄 등을 그대로 인정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복음을 들으면 깨닫고,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으며,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한마디로 그들은 '전적으로 타락했으면서도 완전히 타락하지는 않은' 인간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기서 '선행 은총'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선행 은총이란 아담의 범죄로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칼뱅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혼 속에 하나님을 사모하고, 복음을 깨달으며, 반응할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과 자율성, 책임을 회복시켜 주셨다고 말한다. 타락 직후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부어 주신 '선행 은총'이라는 것인데, 문제는 이것이 성서의 증거를 심각하게 결여하고 있다. 선행 은총론은 성서보다는 경험과 이성의 산물처럼 보인다. 이것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논리적 장치다. 그런데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이 선행 은총론의 기초 위에 자신들의 모든 논리를 세워 놓았다. 그러니 위태로울 수밖에….

        이런 식의 필요에 의한 창작은 예정에 관한 교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칼뱅주의의 이중 예정과 무조건적 선택을 거부한다. 하나님은 사실 하나님이 영원 전에 예정한 것은 택자, 비택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를 믿는 자들을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기로 예정하셨다.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복음을 믿기로 결단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비택자를 예정하신 것이 아니다. 또 선택이 무조건적이지도 않다. 믿음이 선택의 조건이 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논리적으로 인간의 믿음의 결단이 하나님의 선택보다 앞서게 된다. 왜냐하면 믿음이 하나님의 선택/예정의 조건, 즉 원인이 되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이 믿을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시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가? 하나님은 과연 전지전능하신가?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아르미니우스주의는 논리적 순서와 시간적 순서를 뒤바꾼다. 논리적으로는 언제나 늘 인간의 믿음이 먼저고 하나님의 예정이 나중이 된다. 하지만 시간적으로는 그가 믿을지 안 믿을지를 하나님께서는 더 먼저 아신다. 미리 아시는 하나님의 예지력 때문에 시간적으로 하나님의 예지가 먼저다. 그리고 이 예지에 기초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자기 백성으로 선택/예정하신다. 이것이 바로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예지예정설이다. 이처럼 칼뱅주의에 대한 수정 -> 문제 발생 -> 문제 해결을 위한 창작… 이 사이클이 아르미니우스주의에서는 반복된다.

        다시 하나님의 예지 예정으로 돌아가 보자. 만일 믿을지 안 믿을지를 전적으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다 아시는가? 결국 다 아신다는 얘기는 다 프로그램하셨다는 뜻이 아닌가? 아르미니우스주의는 하나님의 예지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개발해야 한다. 이를 위해 아르미니우스주의는 하나님의 '중간 지식'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다. 칼뱅주의는 하나님에게는 두 가지 지식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가능태에 관한 필연적 지식(scientia mecessaria)과 현 실태에 관한 자발적 지식(scientia voluntaria)이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자신이 하실 일을 알고, 또 하지 않으실 일이지만 그것도 다 아신다, 뭐 이런 뜻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지식의 기초는 하나님 자신의 의지와 행동이 된다. 하지만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제3의 지식, 중간 지식(scientia media)을 가지고 계시다고 주장한다.


        중간 지식은 뭔가? 어려우신 분들은 건너뛰셔도 좋다. 중간 지식이란 비유로 쉽게 말하면 바둑의 고수가 초심자와 바둑 둘 때 초심자의 바둑 수를 미리 내다볼 수 있는 능력과 유사하다. 초심자가 딴에는 무지 고심해서 바둑을 두지만 고수는 자신이 어디다 돌을 놓으면 초심자가 그다음 어떤 식으로 돌을 놓을지를 훤히 꿰뚫고 있다. 고수가 초심자의 수를 내다본다고 해서 고수의 예지력이 초심자의 의지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이것은 제갈공명이 적벽대전에서 보인 지략과도 비슷하다. 공명은 뛰어난 지략으로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면 조조군이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를 훤히 내다본다. 공명은 조조군의 의지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행동을 내다보았고 이 예지력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도 인간의 행동을 훤히 내다보실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의 예지력은 바둑의 고수나 제갈공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하다. 이때 하나님의 예지 능력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인간은 나름 고심해서 자신의 자유의지로 뭔가를 결정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뭘 결정할지를 다 꿰뚫어 보신다. 중간 지식은 이렇게 이해하면 쉽다. 하나님께서는 이 중간 지식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들려줄 때 어떤 사람이 복음을 믿기로 결단할지 안 할지를 훤히 아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작정하신 뜻에 따라 믿기로 결단할 자를 자기 백성으로 택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이 논리적으로는 인간의 결단에 뒤따르지만 시간적으로 앞서기 때문에 예지에 기초한 예정이 된다. 통상 이러한 예정론을 '예지 예정'이라 부른다. 그리고 칼뱅의 예정론은 '예정 예지'가 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예지 예정'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는다.


        대체 이런 복잡한 이론이 왜 필요한가? 이유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주권과 전지전능성을 동시에 붙잡기 원하기 때문이다. 선행 은총도 마찬가지지만 중간 지식이라는 게 성서 계시에 기초했다기보다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필요 때문에, 그리고 논리적 체계를 완성하기 위한 필요 때문에 창작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논리적 창작에도 불구하고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새로운 문제와 부딪히게 된다. 시간적으로 하나님의 예정이 인간의 믿음의 결단보다 앞서기는 하지만 논리적으로는 언제나 늘 인간의 믿음의 결단이 앞서고 하나님의 선택이 뒤따른다. 인간이 결단하면 하나님은 그 결단을 늘 언제나 받아들이셔야만 한다. 마음에 안 드는 결정을 해도 하나님께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따라서 엄격하게 말하자면 예지만 있지 예정은 없다.

        더 나아가 논리적으로 보면 결국 주권은 인간에게 있지 하나님에게 있다고 할 수 없다. 선택은 하나님의 몫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여러 배경을 만들어 주신다. 하지만 결정적인 선택은 인간이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의 믿음을 늘 언제나 승인하는 배경으로 전락하게 된다.

        주권이 인간에게 넘어감으로써 하나님은 죄의 창조자 혐의를 벗게 된다. 칼뱅의 예정설은 자칫 하나님을 죄의 창조자로 만들 수 있는데 반해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죄의 책임을 하나님이 지실 필요가 없다. 책임은 이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 넘어간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복음을 들어 보지도 못하고 죽어 간 이들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도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설명해야 할 또 다른 책임을 지게 된다. 처음부터 믿음을 결단할 기회조차 없었는데 그건 누구의 책임인가? 이처럼 설명해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복음을 들어 보지도 못하고 죽어 간 이들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신학적 변증보다는 행동주의라는 전략을 취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거야." 하나님의 책임을 따지고 앉아 있기 전에 어서 일어나 복음을 전하러 가자! 이처럼 인간의 책임에 대한 강조는 그것이 인위적인 전략과 기술 과잉으로 오염되기도 하지만, 소극적인 신자의 태도를 적극적인 태도로 교정하는 데 효과적이다. 이것이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강점이고, 근대인에게 매력적인 측면이다.

        구원의 확신을 확실히 알 수 있다는 것도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또 다른 매력이다. 구원의 확신, 혹은 신앙의 확신은 칼뱅주의에서도 강조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궁극적인 선택의 신비는 구원의 확신의 확실성을 늘 반감시킨다. 하지만 아르미니우스주의 체계에서 그런 류의 신비는 없다. 따라서 칼뱅주의보다 훨씬 더 명료하고 분명하게 '구원의 확신'을 선포할 수 있다.

        어떻게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알 수 있는가? 믿기로 결단하면 된다. 물론 여기서 과연 '진실로' 결단했느냐는 문제가 생기기는 하겠지만… 편의상 복음주의자들은 어떤 사람이 복음을 듣고 믿겠다고 하면, 그리고 예수님을 마음속에 구주와 주로 영접하면 그를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 간주해 왔다. 이때 내가 믿는 것을 내가 알 수 있고 남도 알 수 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은 분명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구원의 확신이다. 이러한 확실성은 자신이 택자인지 비택자인지 알 수 없어서 전전긍긍해 하던 사람들에게 큰 매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구원의 확신도 칼뱅주의처럼 불확실하기는 마찬가지다. 왜냐? 마지막 교리인 배교 가능성 때문이다. 사실 배교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성도의 인내' 교리는 꽤 성서적이다. 왜냐하면, 성서의 여러 본문에서 믿음의 파선과 배교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이를 엄히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히브리서에서는 배교를 경계하는 고전적 본문들이 수두룩하다(물론 칼뱅주의자들은 이를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는 데 능수능란하지만…).

        그런데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체계 내에서 배교 가능성에 대한 교리는 구원의 확신을 결국 불확실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구원의 확신은 '지금 여기'에만 국한된다. 미래까지 확신할 수 없다. 자신이 배교할지 모르니 말이다. 하나님을 믿을 수는 있어도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실존이 아닌가? 그러니까 자신을 믿을 수 있는 사람만이 구원의 확신을 100% 자신할 수 있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주장할 수 없다. 칼뱅주의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불확실성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구원의 확신이 살인 면허로 전락하는 것을 막는다. 내가 믿고, 내가 믿는다는 것을 내가 알고, 그래서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아르미니우스주의다. 하지만 그 구원은 결코 보장된 것이 아니다.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구원의 확신을 비교해 보면 '조삼모사'다. 왜냐하면 칼뱅주의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지만 그대가 택자인지 비택자인지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하고, 아르미니우스주의는 "그대가 구원받은 건 확실하지만 그 구원이 영원히 유지된다는 보장은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둘 다 안심할 수 있는 체계는 아닌 것이다.

        이런 이유로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배교 가능성에 대한 가르침은 칼뱅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기독 신앙에 긴장을 부여한다. 칼뱅주의는 하나님의 선택을 신비로 돌림으로써 택자와 비택자를 100% 확실히 확신할 수 없다며 기독 신자들에게 긴장을 부여했다. 이 긴장이 신자들로 하여금 윤리적 실천을 결과하게 만들었다. 반대로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100% 확실히 알 수 있지만 그 구원이 언제 상실될지 모른다는 것 때문에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지키고, 이루어 가야 한다며 긴장을 부여한다. 구원은 감격하고 감사해야 할 선물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끝까지 마저 이루어 가야 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요한 웨슬리의 완전성화론을 이해할 수 있다. 구원은 지금 받아 누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루어 가야 하는 과제다. 그리고 우리가 이루어야 할 과제의 궁극은 예수 그리스도다.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모든 신도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도록 힘써야 하며, 또 그렇게 될 수 있다. 이것이 요한 웨슬리를 비롯한 감리교인들이 전통적으로 개인적 삶뿐만 아니라 사회적 실천에 모범을 발휘할 수 있는 신학적 이유다.

        신광은 / 대전 열음터교회 담임목사·<메가처치 논박> 저자

        출처:USA 아멘넷/기다림 님

        질문: 구원 받을 때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 의지와의 관계는?

        대답: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 의지와 책임의 관계를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둘이 어떻게 함께할 수 있는지 아십니다. 아마 다른 여느 교리들보다도, 이문제에 있어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과 그분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느 한쪽으로 너무 멀리 치우치는 것은 구원에 대한 이해를 왜곡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누가 구원 받을지 아신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로마서 8:29; 베드로전서 1:2). 에베소서 1:4은 말하길 하나님은 이 땅의 기초를 세우시기 전부터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합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신자들을 “선택 받은” 자와 (로마서 8:33; 11:5; 에베소서 1:11; 골로새서 3:12; 데살로니가전서 1:4; 베드로전서 1:2; 2:9) “뽑힌”자들로 묘사합니다(마태복음 24:22, 31; 마가복음 13:20, 27; 로마서 11:7; 디모데전서 5:21; 디모데후서 2:10; 디도서 1:1; 베드로전서 1:1). 신자들은 미리 예정되었고 (로마서 8:29-30; 에베소서 1:5,11) 구원을 위해 선택되었다고 분명히 합니다(로마서 9:11; 11:28; 베드로후서 1:10).

        성경은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 할 책임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요한복음 3:16; 로마서 10:9-10). 그러니까 하나님은 구원 받을 자를 아시며, 구원 받을 자를 선택하시며, 그리고 우리는 구원 받기 위해 반드시 그리스도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이 세가지가 어떻게 함께 조화되는지는 유한한 인간의 생각으로 이해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로마서 11:33-36). 우리의 책임은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18-20; 사도행전 1:8). 즉 예정론, 선택론 부분은 하나님께 맡기고, 복음을 전하는 데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 J. I. Packer

        Question: "How does God's sovereignty work together with free will?"

        Answer: It is impossible for us to fully understand the dynamics of a holy God molding and shaping the will of man. Scripture is clear that God knows the future (Matthew 6:8; Psalm 139:1-4) and has total sovereign control over all things (Colossians 1:16-17; Daniel 4:35). The Bible also says that we must choose God or be eternally separated from Him. We are held responsible for our actions (Romans 3:19; 6:23; 9:19-21). How these facts work together is impossible for a finite mind to comprehend (Romans 11:33-36).

        People can take one of two extremes in regard to this question. Some emphasize the sovereignty of God to the point that human beings are little more than robots simply doing what they have been sovereignly programmed to do. Others emphasize free will to the point of God not having complete control and/or knowledge of all things. Neither of these positions is biblical. The truth is that God does not violate our wills by choosing us and redeeming us. Rather, He changes our hearts so that our wills choose Him. “We love Him because He first loved us” (1 John 4:19), and “You did not choose me, but I chose you” (John 15:16).

        What are we to do then? First, we are to trust in the Lord, knowing that He is in control (Proverbs 3:5-6). God’s sovereignty is supposed to be a comfort to us, not an issue to be concerned about or debate over. Second, we are to live our lives making wise decisions in accordance with God’s Word (2 Timothy 3:16-17; James 1:5). There will be no excuses before God for why we chose to disobey Him. We will have no one to blame but ourselves for our sin. Last but not least, we are to worship the Lord, praising Him that He is so wonderful, infinite, powerful, full of grace and mercy—and sovereign.

        http://www.gotquestions.org/free-will-sovereign.html


        출처: USA 아멘넷 게시판/JuNick 님

         

         

        친구와 그들의 한계

        (Friends and Their Limitations) 우리는 친구를 필요로 합니다
        친구는 우리를 인도하고, 우리를 돌보며,
        우리를 사랑으로 대하며, 그리고 괴로울 때
        우리를 위로합니다

        우리는 "친구를 만든다(make)"고 말하지만,
        친구는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친구는 하나님이 주시는 공짜 선물(free gift)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면, 
        우리에게 친구가 필요할 때 하나님이 그 필요한 친구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친구들은 하나님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한계와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사랑에는 결코 흠이 없을 수 없으며,
        결코 완전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바로 그들의 한계 속에서
        하나님의 무한하시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향한
        우리의 여행 길에서 만나는 도로 표지판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여행 길에
        보내신 친구들과 함께 즐기십시오

          보경님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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