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게 살다 간  성도들(The Saints Who Live Short) 

     



    많은 사람들이 전쟁, 굶주림, 에이즈, 거리의 폭력, 신체적인 또는 정신적인 태만으로 젊은 나이에 죽는 것을 볼 때, 우리는 흔히 그들의 짧은 생애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이 여러 목표들 중에서 어느 하나에도 미치지 못한 채, 많은 꿈 중에서 어느 하나도 실현하지 못한 채, 또는 많은 과업 중에서 어느 하나도 성취하지 못한 채, 그들의 인생 여정이 중단된 것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애가 짧았는지는 몰라도, 그들은 십자가에서 처형되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하면서 흰 옷을 입고 어린 양의 보좌 주위에 서 있는, 시공을 초월하는 성자들의 저 크나큰 신앙의 교류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요한계시록 7:9 참조)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헤롯 왕이 살해한 죄 없는 어린아이들에 관한 얘기는(마태복음 2:13~18 참조) 성도의 삶이란 반드시 오래 살고, 그리고 열심히 일하면서 산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일깨워 줍니다
    이 아이들, 그리고 젊은 나이에 죽은 그 밖에 많은 다른 사람들은 영웅적인 업적을 성취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들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박성규 목사 "선생목회에서 엄마목회로 바뀐 사연"


뉴욕목사회(회장 최예식 목사)는 미국과 조국을 위한 신년금식기도성회를 1월 1일부터 3일 정오까지 펜실베니아에 소재한 Pinebrook 수양관에서 열었다. 주강사 박성규 목사(남가주 주님이세운교회)은 둘째날 누가복음 7장 1-10절을 본문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박성규 목사는 본문을 통해 하인의 병을 고치기위해 예수님께 간구한 백부장의 믿음을 전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본인의 언급처럼 성령의 인도하심이라며 설교 중간에 다른쪽으로 흘렀다. 이미 소개한대로 그 부분은 이단에 대한 부분이다. (설교 앞부분 보기 ① 박성규 목사 "여러분은 의인인가 죄인인가")

이번 기사에서는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백부장의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를 전했다. 박 목사는 백부장의 믿음은 가슴에 사랑의 불이 있는 믿음, 말씀중심의 믿음, 순종하는 믿음이라고 소개했다. 박성규 목사는 설교도중 몇가지 예화를 전했는데 대구에서 목회를 하던 당시 교회를 찾아온 거지와의 일화를 통해서 진정한 십자가 사랑이 무엇인가를 역설했다. 그리고 명마 이야기로 설교를 맺고 있다. 왜 생김새가 다른말과 다를바 없는 그 말이 20배가 더 비쌀까. 20배 신앙생활을 더 잘하는 비결이 그 안에 있다.


▲주강사 박성규 목사(남가주 주님이세운교회)

1. 가슴에 사랑의 불이 있는 믿음이다.

백부장이 어떤 믿음인가. 가슴에 사랑의 불이 있는 믿음이다. 대구에서 일어난 일인데 어떤 목사가 심방마치고 저녁 9시에 집에 들어가는데 집앞 전봇대에 남녀가 붙들고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목사가 들어가 자고 새벽기도를 가려고 나오는데 그때까지 둘이 전봇대 아래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목사가 깜짝 놀라서 밤새도록 있었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목사는 가면서 회개가 되어 새벽강단에 설교하고 엎드려 울었다고 한다.

목사는 나는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 사랑의 예수님과 1-2시간 기도하면 힘드는데, 저들은 무엇이 좋다고 그렇게 밤이 새도록 사랑을 나눌수 있느냐고 회개했다고 한다. 신부된 우리들에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주님과의 친밀함이다. 그냥 교회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 앉으나 서나 주님만 생각하는 것이다. 세상은 도박이나 마약에 중독이 되지만, 우리는 예수에 미쳐야 한다. 성령님이 우리를 예수사랑으로 미치게 할 줄 믿기 바란다.

우리 교회 권사가 얼마전에 간증을 했는데 교인들이 눈물바다가 되었다. 교회를 성실히 섬기는 권사님의 아들이 대학에 들어가 룸메이트를 잘못만나 마약중독이 되었다. 마약에 중독되니 자살충동을 느껴 위험하니, 권사님은 자살의 위험이 적은 감옥에 차라리 아들이 들어가기를 기도했다. 어머니가 오죽했으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감옥가게 해달라고 기도했겠는가. 몇번 감옥에 왔다갔다 하니 영주권자이니 한국으로 추방을 당했다. 한국에는 아는 사람도 없고, 한국말도 잘못해 권사님은 눈물로 기도를 했다. 권사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사정이 기가 막혔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중보기도팀을 꾸며 비밀로 기도했다. 그 연합의 기도의 역사가, 어머니 눈물의 기도의 역사가 일어났다.

한국에 갔는데 전도를 받아 EM이 있는 한국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영어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고 변화되어 마약을 끓고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다. 신실한 자매와 결혼하고 동남아를 다니면서 청년들을 모아놓고 집회를 했다. 동남아에는 마약환자들이 많다. 그 청년은 자신이 마약중독으로 자살충동을 느끼고 감옥에 간 과거를 말하면서 예수님의 치유하심과 구원하심을 증거했다. 그러자 집회에 참가한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 파워풀한 역사가 일어났다. 권사님의 간증을 듣고 성도들이 은혜를 받았다. 이런 놀라운 기적이 우리의 삶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어머니의 기도, 합심의 기도로 마약중독 환자가 능력의 강사로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난다. 한국에 있는 아들을 새롭게 된 역사는 현대판 백부장의 역사이다.

백부장의 가슴속에 사랑의 뜨거운 불이 있다. 어머니의 기도가 아들을 살리듯이 우리가 조국땅을 위해, 중풍환자로 소생불능된 미국을 위해 백부장의 가슴을 안고 기도하라. 하나님이 고쳐주실 것이다. 죽인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체험될줄 믿는다.

백부장의 하인은 헬라어로 '둘로스'로 직역하면 노예이다. 옛날 노예는 영혼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소나 말이 그 취급을 받는데, 노예는 영혼이 없는 말할줄 아는 나귀로 취급을 받았다. 그릇이 깨져 물이 새면 가져다 버린다. 주인이 아픈 늙은 하인을 버려도 되는데, 예수님이 오셨다니 장로와 벗들을 보내고 나중에 자기가 직접가서 간구한다. 자기 부모도 아들도 아니고, 영혼이 없는 당나귀 같은 존재인데도 그를 위해 간절히 구했다. 예수님이 그 속을 보시고 깜짝 놀라셨다. 주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다. 예수님이 어디서 저런 사랑을 보이는가 라고 깜짝 놀라신다.

이 세상은 요즘 사랑의 홍수이다. 드라마도 온통 사랑의 홍수이다. 온갖 사랑이야기로 소설과 책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진짜 홍수때 먹을 물이 없다. 온통 물인데 먹을 물이 없다. 세상의 사랑은 홍수인데 참사랑이 보기 힘들다. 교회안에서도 싸운다. 교회안에서 자기끼리만 사랑한다. 예수믿는 사람의 사랑은 세상과 달라야 한다. 세상에서 사랑받지 못하는 자가 교회에 오면 교회에서 품어주어야 한다. 하지만 세상보다 더 못한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한인 이민자가 미국와서 미국교회를 빌려 예배를 드리다가 교회건물을 구입하고 페이오프하면 싸우기 시작한다. 그런것이 이민교회 역사이다. 싸우지말자. 십자가는 사랑할수 없는 자를 사랑하고, 용서할수 없는 자를 용서하는 것이다.

거지가 준 교훈

부끄러운 간증 하나 하겠다. 1985년 신학을 마치고 대구에 있는 교회에 부임했다. 어느날 거지가 와 돈을 달라고 했다. 그 후 10년간 매주 왔다. 그런데 교회는 구제를 하는 곳이 아니라 구제를 통해서 예수님을 드러내고 복음을 전하는 곳이다. 돈만 주면 안될것같아 수요일 저녁예배에 참석하여 설교듣고 예배끝난후 기도받고 돈을 받아가라고 했다. 그렇게 하기를 9년반이 지났다. 그런데 어느날 술을 먹고 교회에 왔다. 지난 9년반동안 잘지키더니 마음이 무너졌다. 구제하고 기도해주어 변화되어 간증거리가 되면 감사하다 싶어서 했는데 공든탑이 무너진것 같아 화가 나고 슬펐다. 저같은 인간은 20년이 지나도 안되겠다고 생각하면서 분노가 일어났다. 오늘은 돈을 못준다며 무섭게 대했다. 그러니 가면서 운다. 따끔하게 맛을 보여주어야 다음에는 술을 안먹고 오지 하는 마음으로 그랬는데 그 다음부터 오지않았다. 신문에 노숙인이 길거리에서 죽었다고 나서 혹시 그 사람인가 해서 알아보았더니 아니었다. 갑자기 위기감이 들어 제발 오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1시간쯤 기도하니 갑자기 메세지가 왔다.

"박 목사 넌 참 잘났다. 그 사람이 안고친다고 네가 고칠려고 쫓아냈지. 그래. 한번 이야기 해보자. 너는 지금까지 예수믿고 도대체 몇년인가. 예수믿고 40-50년동안 변화되고 고쳐졌느냐. 내가 볼때 얼마 안고쳐졌어. 너는 고쳐서 구원받을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나의 피로 덮어서 구원하기로 작정하고 내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다. 내가 나의 피로 너를 덮었듯이 너도 그 사람을 덮어야 하지 않겠느냐. 너는 고치는 자가 아니다. 고치는 자가 나라는 것을 왜 잊어버리느냐. 내가 너를 덮어서 고치듯이, 네가 그 사람을 덮어서 고쳐야지, 어째서 고치려고 하느냐."

그 순간에 왈칵 눈물을 쏫아졌다. 내가 주님의 십자가를 져버렸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것을 잊버버리고, 백 데나리온을 빚진 그 사람을 고치려고 달려드는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 이야기가 얼마나 간단한 이야기 인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이야기이다. 내가 너를 덮어준 것 처럼 너도 덮으라는 이야기이다. 그날 새벽 그 십자가 사랑을 생각하면서 펑펑 울며 회개했다.

그리고 다음 주일 그때 받은 은혜를 주제로 설교했다. "여러분, 우리는 고치는 자가 아니라 덮는 자이다. 내가 나의 포지션에서 아내와 자녀를 고치려 할때 잠깐 고쳐진 것 같으나 그것은 내 삶의 파워와 포지션에서 내려오는 순간 수십배의 파워로 도전해올것이다. 그것은 고쳐진 것이 아니라 스피링처럼 눌렸을 따름이다. 진정 고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내가 주님의 사랑으로 덮음을 당하고 구원받았으니, 주님이 나를 덮은 그 사랑으로 덮으면서 사랑을 베풀면 주님이 고쳐주실줄 믿는다. 내가 9년반 동안 그 사람을 사랑했다고 하다가 나의 의 때문에 그사람을 쫓아냈다. 네가 스스로 못고치면 내가 고치겠다고 쫓아냈다. 주님이 나에게 오셔서 너는 고치는 자가 아니라 덮는 자라고 하신다. 우리 모두 덮으면서 살아가자."  

눈물로 설교후 장로들이 은혜가 되었는지 그 사람이 10년가까이 우리 교회에 왔으니 이제 방을 얻어주고 데리고 살자고 했다. 그리고 어느 여자 집사는 그 사람을 위해 백만원을 준비했다. 새벽에 온성도들이 그 사람을 위해 기도했다. 미침내 그 사람이 교회에 나타났다. 그런데 어디서 얻어터져가지고 왔다. 술을 먹고와 나에게 야단을 맞고 자신이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어 이제 다른곳에서 구걸을 하려고 하다가 깡패들에게 끌려가 혼나게 되었다고 했다.

그 사람은 각혈을 하는등 상태가 좋지 않아 병원에 가니 온몸이 다 망가져 한달을 넘기기 어렵다고 했다. 그 사람을 위해 교회에서 10일 작정 새벽기도를 했다. 병원에 가니 그 사람은 나같은 사람도 예수를 믿고 구원받을수 있느냐고 물었다. 9년반동안 설교를 들었지만 마음을 닫아 버리니 폭포수같이 쏫어져도 한방울도 못마신것이었다. 성경을 펴고 예수님을 소개하고 영접기도를 시켰다. 그 사람에게서 회개의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다음에 방문하니 얼굴색이 달라져 있고 기쁨이 어디서 오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성경책을 사다달라고 해서 사다주었다. 한달뒤에 죽을 사람이라고 진단했는데 병이 호전되어 2달만에 퇴원했다. 교회에서 직장을 주어 설교테입을 녹음하는 일을 하게 했다. 설교를 들으면서 믿음이 자라고 세례를 받았다.

가짜 사랑 말고 생색내는 사랑이 아니라 참사랑을 하자. 내가 고치려고 했던 사람인데 주님이 깨달음을 주셨다. 그 십자가 사랑이 나를 깨닫게 안했다면 끝까지 그 사람을 고치려고 했을 것이다. 저는 선생처럼 목회했지만 그 사람때문에 주님의 음성을 듣고 엄마의 목회로 바뀌었다. 어머니처럼 기다리는 목회가 되었다. 백부장이 사랑할수 없는 하인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보시고 놀라워하셨다. 하늘보좌 버리고 이땅에 오셔서 버려진 우리를 품에 안고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의 가슴에 붙은 사랑의 불길이 백부장 가슴에 있는 것을 주님이 보신것이다. 오늘 조국과 미국을 가슴에 품고 백부장 처럼 기도하기를 축원한다. 이 자리에 계신 주님이 고쳐주신다는 것을 믿기 바란다.

2. 말씀중심의 믿음이다.

백부장은 예수님께 오지말고 말씀만 하시라고 했다. 백부장은 말씀중심의 신앙이다. 주님을 크게 보는 신앙이다. 강단에서 담임목사가 말씀을 전할때 말씀을 부여잡고 은혜받고 말씀받는 자리에서 병고침 받고 문제해결받기를 축원한다. 일곱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주님이 일곱 별을 붙들고 통치하신다. 주님의 사랑받기 원하면 담임목사를 통해 사랑받고, 담임목사의 말씀을 받는 것이 주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다. 말씀이 선포될때 종의 입술을 통해 주님이 말씀을 하고 있는 줄 믿어라.

백부장의 집은 크고 좋은데, 예수님이 오실 필요가 없다고 했다. 백부장은 자신이 영적으로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알았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인줄 알았다. 그래서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라고 했다. 예수님은 깜짝 놀라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랍비여' '선생'이라고 할때 이름없는 백부장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알았다.

예수님은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바로 그 분이시다. 그래서 백부장은 말씀만 하셔도 십리밖에 있는 하인이 고침받을 줄을 믿었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말씀의 능력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그렇게 크게보는 신앙을 가지기 바란다. 예수님은 조국도 미국도 고칠 능력이 있으시다.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은 가능하시다. 경제나 정치가 다 하나님을 떠나있는 탈출구가 없는 미국을 고칠수 있는 분은 주님밖에 없다.

3. 순종하는 믿음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백부장은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했다. 이제는 황제의 부하가 아니라 예수님의부하가 되어 순종하겠다는 것이다. 순종하는 믿음을 명마 신자로 보신다.

제주도에 200마리 말을 키우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아라비안 명마를 구입했는데 보통말보다 20배가 비쌌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와서 구경하겠다고 하니 내일 이맘때 오라고 했다. 8월 뜨거운 여름에 사람들이 다시올때까지 말들을 울타리안에 가두고 하루종일 물을 안주었다. 저밑에는 시냇물이 흐르고 있는데 말들이 목이말라 미친다. 다음날 사람들이 모여들어 명마를 구경시켜 달라고 하니 말을 가둔 울타리 문을 열자 말들이 미친듯이 물로 달려갔다. 말들이 시냇물로 뛰어들려고 하는데 주인이 나팔을 두번 불었다. 나팔을 한번 불면 뛰게하고 두번을 불면 서도록 훈련을 시켜 모든 말들이 나팔을 두번만 불면 선다.

그런데 하루종일 물을 못먹은 말들이 개울가에 도착했는데 나팔을 두번 불어도 말들은 시냇물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말 한마리는 나팔을 부는 주인을 찾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감동했다. 육신의 본능을 이긴것이다. 온몸이 물을 찾고 있었고, 본능으로 시냇물에 뛰어들고 싶었으나 주인이 말씀하시면 내가 순종하겠다는 바로 그 모습이었다. 그 말이 다른말에 비해 크지도 않고 잘생기지 않고 섞여있으면 구별이 잘안된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본능을 이긴 말이 다른 말보다 20배 비쌌다.

오늘 주님은 명마 신자를 찾고 계시다. 말씀대로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주님을 크게보는 믿음 그리고 순종하는 믿음으로 주님을 깜짝 놀라게 만들고  나는 이런 믿음을 만나본적이 없다고 인정받는 순간 하인이 낫는 기적이 일어났다. 우리가 이 시간에 백부장처럼 주님께 인정받는 믿음으로 이 땅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를 바란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10주년

'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악플은 간접 살인 행위  (1) 2013.02.09
아리랑의 숨겨진 이야기고개  (0) 2013.02.02
최초로 한국 땅을 밟은 귀출라프  (0) 2013.01.29
좋은 지도자가 되려면  (0) 2013.01.25
카톨릭  (0) 2013.01.21
열왕기와 역대기는 유대인들의 바벨론포로생활이 끝날 무렵에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열왕기 끝에는 포로로 잡혀가 37년 동안 옥에 갇혀있던 여호야긴 왕이 풀려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고, 역대기 끝에는 바사왕 고레스가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허락하는 장면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열왕기를 기록하던 저자(들)의 심정이 어떠하였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종살이생활로부터 건져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고 솔로몬에 이르러 찬란한 번성과 부귀영화를 허락하시기까지 하였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고 패역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였다는 뼈아픈 역사 속에 교차하는 온갖 후회와 감회가 열왕기와 역대기를 기록하던 그들의 가슴 속에 가득하였을 것입니다.

열왕기 저자는 3장 1절부터 솔로몬이 저지른 불순종과 패역의 출발도 빠뜨리지 않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솔로몬이 애굽왕 바로의 딸을 데려와 아내로 삼은 것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왕이면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왕이지만 이스라엘에 수많은 이방여인들과 우상들을 도입한 장본인입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신 지혜와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우상숭배로 이스라엘을 타락케 하고 남북왕조로 갈라지게 만든 단초를 제공한 왕입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읽어보면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솔로몬의 이방여인과의 혼인이 이스라엘의 패망의 원인이었다 하여 이방여인 아내와 자식들까지 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솔로몬의 손에 나라가 든든하게 서게 하시고 산당에서 드린 삼천번제를 받으시고 솔로몬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솔로몬이 왕으로서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고 재판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자 그 기도를 기뻐하시고 지혜 뿐 아니라 부귀영화까지 더 하여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도 세상 사람들은 인류역사상 솔로몬보다 더 지혜로운 왕, 솔로몬보다 더 부귀영화를 누린 왕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열왕기 3장을 보면 솔로몬이 삼천번제를 드린 때는 솔로몬이 벌써 바로의 딸을 데리고 온 다음입니다. 벌써 싹수가 노랗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지혜에다 그 엄청난 부귀영화까지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이방여인과 우상을 끌어들여 이스라엘을 우상숭배의 길로 이끌게 될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렇게 하셨을까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이미 다 보시고 다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바로의 딸을 아내로 데려온 솔로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부귀영화까지 더 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잘 다스리고 재판할 수 있도록 지혜를 구한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다고 부귀영화까지 주셨습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그런 솔로몬에게 그렇게나 은혜를 베푸신 것일까요?

1.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완전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부족하고 불순종하여도 복을 주시고 영광을 허락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완전하신 그 분의 위치에서 우리를 대하셨다면, 우리에게 완벽을 요구하셨다면 우리는 아무도 하나님을 대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도 마치 불완전하신 것처럼 눈높이를 낮추고 내려오셔서 우리를 대하십니다. 부족한 우리의 잘못 된 삶, 잘못된 기도를 탓하지 않으시고 들어주시며 함께 하시며 동행해 주십니다. 이것이 임마누엘 하나님입니다.

2. 그러므로 기도는 완전한 자만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이 타락의 원흉이 될 것을 아시고도 기도를 들어주셨다면 우리도 실수하고 넘어지고 잘못 구할지라도 하나님은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낮은 자, 천한 자, 심지어 자신을 대적하고 십자가에 못 박을 자들까지도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시고 위하여 피 흘리시며 기도하셨습니다.

3. 하나님은 후회가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찬란한 부귀영화를 허락하신 것이 실수였을까요? 솔로몬이 그렇게 될 줄 모르시고 부어주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시며 후회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멸망의 길을 갔다 할지라도 솔로몬에게 베푸신 은혜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베푸신 사랑이었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그 섭리와 구원계획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4. 무엇보다도 그것은 솔로몬을 통하여 보여주신 하늘나라의 예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부어주신 것은 그 날이 오면 우리에게 허락하실 천국,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우리에게 씌워질 면류관, 영원한 생명과 영광의 예표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보다 더욱 큰 영광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천국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우리가 완전하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우리는 부족하지만 주님의 공로로 값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을 통하여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망쳐먹은 솔로몬을 너무 욕하지 마세요. 그게 바로 천국에서의 우리 모습 아닐까요?
자격도 공로도 없는...
.

'이응한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솔로몬 재판 횡설수설  (0) 2013.02.17
나 철든 다음에야 알았네...  (0) 2013.02.05
만추(晩秋)  (4) 2012.10.18
인구조사가 무슨 큰 죄라고...  (0) 2012.10.08
다윗의 통곡을 들으며  (0) 2012.09.20

성공회대 이어 감신대와 한신대 교수들도 동참

김근상 교회협의회 회장의 담화문 발표에도 불구하고 1.13 WCC 총회 공동선언문을 폐기하라는 요구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24일 성공회대에 이어 29일에도 감신대, 한신대 교수들이 잇달아 입장을 발표하고, WCC 공동 선언문 폐기와 관련자 사퇴를 요구했다.

한신대 채수일 총장 등 신학과 교수 10명은 호소문을 통해 "이번 1.13 선언문은 WCC의 역사와 전통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다"면서 "선언문에 서명한 교회협의회 총무는 책임을 인정하고 사임하라"고 촉구했다.

또 교회협의회 의장과 WCC 한국준비위 상임위원장은 1.13 공동 선언문이 무효임을 선포하라고 요구했다.

이정배 교수 등 14명의 감신대 교수들도 "이번 선언문은 그동안 면면히 이어져 온 에큐메니칼 신학과 전통을 심각하게 훼손했다"면서 "선언문은 즉시 폐기돼야 한다고" 밝혔다.

또 "WCC 총회는 교계의 정치적 야합이나 돈의 힘으로 치르는 세상의 행사가 아니"라고 지적하고 "교회협의회는 에큐메니칼 정신에 입각해 총회 준비를 이끌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밖에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와 문화신학회, 기독교장로회 생명선교연대도 공동선언문 폐기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선언문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종교 다원주의와 동성애 등 이번 선언문 내용을 신학적으로 평가하는 에큐메니칼 신학 심포지엄이 다음달 4일 서울 연지동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릴 예정이다.

CBS TV보도부 고석표 기자
ⓒ CBS 크리스천노컷뉴스/USA아멘넷

 

14. 타인을 위한 기도 커리큘럼 (2) 만일 기도한다면 / 챔버스의 글들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도를 어떻게 응답하실 것인지를 절대로 예측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귀한 약속을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시도록 돕기 위해 최선의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 혈과 육의 상식에 따라 가장 현명한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는 것을 포기할 때까지 13년 동안 아브라함과 대화를 하지 않으셨다. 그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 엘 샤다이 -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 17:1).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어떻게 서서 견딜 수 있는지를 가르치시며 적극적으로 깨어서 미래를 소망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실 때마다 언제나 놀라움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실 때 놀라서는 안됩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언제나 놀랍다. 너무나 놀라와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지를 못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 14:13). 이 말씀이 놀랍지 않은가? 이 말씀은 너무나 놀라운 말씀이라서 우리 중 반 이상은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 7:8). 이 말씀도 놀랍지 않은가? 이 말씀도 너무나 놀라운 말씀이라 우리들 대부분은 하나님께 성령을 달라고 간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너무나 놀라와서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 18:19). 이 말씀도 놀랍지 않은가? 너무나 놀라운 말씀이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 5:16). 이 말씀도 놀랍지 않은가?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얼마나 놀랍게 응답하시는가를 본다면 오늘도 당신은 주께서 주의 방법으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실 것을 지켜 기다리지 않을까? 당신은 성루에 서서 하나님의 모든 역사하심을 꾸준하게 지켜 기다리고 있는가? 혹은 메로스 거민처럼 독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대항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주님의 영이 여선지자 드보라에게 임하였을 때에 그녀는 이렇게 외쳤다.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주민들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 ( 5:23).

 

          하박국 1장은 이스라엘에 임할 무서운 황폐함에 대하여 언급한다 (참조, 1:1-11). 오늘날 이 시대에 이 말씀을 영적으로 적용해 보라. 지금 이 시대의 성도들 대부분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황폐함에 대해 잠들어 있다. 만일 우리가 지금 이 시대에 깨어있지 못하고 하나님과 함께 서서 어둠의 세력들을 대항하지 않으면 우리도 메로스의 그 지독한 저주 아래 있게 될 것이다. 심령술, 미신, 크리스천 싸이언스, 시한부 종말론이 너무나 무서울 정도로 번져 전 지역을 잡아 삼키며 휩쓸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신은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고 있는가? 아니면 젖먹이 같이 아직도 보채고만 있는가? 어두운 세력이 활개를 치는 이러한 때에도 여전히 많은 신자들은 우리 귀에 즐거운 말만 해 주세요. 우리의 수준에 맞게 기분 좋고 신나는 말들을 해 주세요. 선지자적인 난처하고 어려운 이야기들을 삼가해 주세요라고 말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모든 자녀들이 성루에 올라서서 깨어 기도하며 기다리길 바라신다.

 

          어려움이 닥치고 구름이 덮일 때에 더 강건히 깨어 기도하는 모습은 어디로 갔는가? 어려움이 닥치면 우리는 마음이 상해서 다른 길로 빠진다. 하나님께 등을 돌리며 주님께서 보내신 자들을 푸대접하며 불평한다.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도 아니하고 밭도 포도원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니... ( 16:14).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 시대에 혼란을 허락하신 이유는 우리를 성루에 다시 서게 하기 위함이다. 다시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 기다리면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를 크게 눈을 뜨고 보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현재의 혼란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함께 성루에 서서 깨어 기도하게 한다면 우리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인하여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출처: 생명수 쉼터/한아름 



'오스왈드 챔버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룩을 위한 바울의 기도  (0) 2013.03.02
주님은 나의 최고봉  (0) 2013.03.01
도움의 장소-13  (0) 2013.01.07
나의 순종과 타인의 불편  (0) 2013.01.07
예수 없는 진리는 오류  (0) 2012.12.27

머 리 말

빈야드 운동에서 나타 난다는 소위 ‘영적 체험 현상’ 에 대한 문의가 상담창구에 적지않다. 목회자들에 의한 문의가 아니라 목회자들을 통해서 일어나고 있는 자기교회와 타교회 집회와 혹은 친척으로 부터 인도받아 찾아간 교회에서 보고 묻는 전화들이다. 이로 본다면 적지않은 목회자들이 빈야드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빈야드 운동에 대해서는 예장 통합측 제 81회 총회(1995년). 예장 합동측 제 82회 총회(1997년). 예장 개혁측 제 77회 총회에서 「도입금지 내지 참여 삼가」등으로 정죄한바 있다. 이에 본지는 5월호에서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의 분별력을 높이기 위해 「쓰러짐의 현상」을 집중 조명해 보기로 하겠다.

 

1. 빈야드 운동이란 어떤 것인가 ?

지난 수년간 기독교 내에서는 참으로 많은 운동들과 사상들이 출현했다.  ‘단일세계종교’ 구현을 위한 에큐메니칼 일치운동, 긍정적 사고, 뜨레스 디아스, 떼제 공동체, 몬테소리교육, 로욜라의 영성훈련, 약속이행자 운동등 여러가지 운동, 수단 및 기법들이 개발되어 소개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오랄 로버츠, 짐 베이커, 지미 스웨가트, 존 웸버, 베니 힌 등 각종 표적과 이적을 보여주며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무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좀더 구체적으로 우리 피부에 와 닿는 기법들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유혹한다는 점에서 더 위험하다 할수 있다. 이들은 대중 최면등의 기법을 사용하여 보통 사람들의 관심사. 즉 병에서, 가난에서, 마귀에서 해방되는 것등을 약속하기 때문에 수많은 성도들과 심지어 목회자들도 이들의 유혹에 빠져 있다.

 이런 무리들 중 최근에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그룹이 바로 빈야드 운동을 하며 소위 “토론토 축복” 이라는 이상한 축복을 약속하는 무리들이다. 이같은 축복의 골자는 웃는것, 소리지르는것, 몸을 떠는것, 넘어 지는것, 비명을 지르는것, 날카로운 소리로 외치는것, 씨씩 거리는것, 나귀소리내는 것, 사자처럼 부르 짖는것, 꼬꼬 꼬꼬 암탉 소리를 내는것, 개처럼 짖는것, 꿀꿀 꿀꿀 돼지 소리를 내는것 등과 같은 경험이다.

이운동의 창시자는 존 웸버(John Wimber)다. 그는 풀러신학 의 와그너 박사가 지도하는 목회학 박사과정에서 ‘표적과 기사와 교회성장’ 이라는 강의를 통해서 빈야드 운동을 전개했으나 1982년 1월부터 시작해서 1985년 이 과목이 중단된바 있다.

빈야드 운동이 한국에 소개된것은 1988년에 존 웸버의 책 ‘능력전도’가 이재범 목사에 의해서 번역되어 나단 출판사에서 발행 하면서 부터라고 볼수 있는데 1994년 《목회와 신학》3월호 특집에서 소개되고, 동시에 각종 은사주의 단체에서 L.A와 토론토 참가를 광고 하므로 더욱 수용의 가속도가 붙게 되었다.

 

2. 빈야드 운동의 영적 현상.

창시자 존. 웸버가 『능력치유』에서 말하는 빈야드 운동의 ‘영적 체험 현상’ 은

① 몸의 진동과 떨림.

② 꼬꾸라지는 현상.

③ 술 취한 듯한 행동.

④ 몸부림 치거나 경련을 일으키는 현상.

⑤ 웃거나 흐느껴 우는 현상.

⑥ 장시간 열열하게 찬송을 부르는 행위. 등이다.1)

 

웸버는 “성령의 능력이 임할때 사람들이 항상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만 반응을 나타 내는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진리에 대한 반응으로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는 현시(顯示)들 또는 현상들은 그 형태가 매우 다양하다. 즉 딩굴기, 몸의 진동, 흐느끼기, 큰소리로 웃기, 소리지르기등 기이한 감정적. 육체적인 현상들이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법이다. 이러한 현상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자신이 행한, 또한 자신에게 가해진 어떠한 죄악에 대한 혐오감이나 두려움을 드러내 보여준다.” 고 말한다.2)

특히 이 빈야드 운동에 ‘양탄자 시간’이 있는데 그것은 푹신 푹신한 양탄자 위로 넘어지는 시간을 말한다. 사람들이 뒤로 넘어져, 때로는 수시간씩 웅크리고 누워있는 것이다. 그들은 양탄자 마루바닥을 하나님의 작업대로 간주하고, 이것을 성령안에서 휴식하는 것이라 한다. 하나님의 영광 이라는 히브리어 ‘카보드’가 무게를 의미하기 때문에 하나님 영광앞에 모두 엎드렸다는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 이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뉴저지 엠마오교회 예태해목사는 1992년 12월호 본지(p32-47)와의 인터뷰에서 이 운동에 대해서  “최근 10년간 일부 신학자들은 이와같이 넘어지는 현상이 정말로 하나님으로 부터 온것인지 진지하게 의문을 제기 하면서 단지 중립적인 용어로 ‘넘어지는 현상’(Falling Phenomenon) 이라고 불렀다. 실상 초 자연적인 현상이 모두 하나님으로 부터만 온것은 아니며 어떤 경우는 기도해 주는 사람이 밀어 넘어 뜨리는 수도 있고 암시의 힘(Power of Suggestion) 에 의해 넘어 지기도 한다.” 고 밝힌바 있다.

 

3. 정당화 하려는 역사적 고찰들.

『토론토 축복 조사 보고서』의 저자 스탠리 젭은 “빈야드 운동가들이 빈야드 운동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정당화 하기위해, 과거 부흥 운동에서 일어났던 현상들에 대한 기록을 제시 하면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같다고 주장하나 이러한 인용은 기껏해야 사람들을 현혹 시키는 것이며 나쁘게 말하자면 정직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다. 3)

그러면 그들이 열거하는 기록에 대한 반론들을 종합해보기로 하자.

1) 요한 웨슬레.

빈야드 운동가와 지지자들에 의하면, 1739년 1월 1일밤 3시 페터 레인에서 7명의 목사와 60명의 교인들이 철야기도중에 “ 많은 사람들은 너무나 기뻐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마루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라는 웨슬레의 일기와, 1739년 4월 26일(목) 런던의 뉴케이트(Newgate) 감옥교회에서 웨슬레가 설교를 하던중 갑자기 큰소리로 기도하기를 “ 하나님 제가 전하는 말씀이 진실이면 지체 마시고 표적을 보여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 하였더니 그즉시로 “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에게 임하셔서  한사람 한사람씩 바닥으로 가라 앉았고 여기 저기서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쓰러졌습니다.”라고 웨슬레는 증언하고 있다는 것이다.4)

그러나  『토론토 축복 조사보고서』의 저자 스탠리 젭 에 의하면, 웨슬레는 1740년 5월 21일자 일기에 웃음의 영이 있어 웃어대는 L양에 대해서 “ 마귀가 한 사람을 그렇게 갈기 갈기 찢어놓는 모습은 일찍이 본적이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기진맥진해서 그리스도께 도와 달라고 외쳤다. 그러자 그녀를 괴롭히던 심한 고통이 사라졌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5) 웨슬레는 여기에서 소위 “빈야운동의 영적 현상” 특히 쓰러짐의 현상을 사탄의 역사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웨슬레의 1743년 3월 21일(토)자 일기 에서는 두가지 문제에 대한 조사와 분석이 나오고 있는데, 첫째매일 밤마다 설교하는 동안 큰소리로 부르짖는 사람들의 경우에 대한 조사분석 결과이다. 한번도 발작해 본적이 없으나 마침내 이러한(넘어지는) 현상을 체험하게 되는데, 사람들은 쓰러지는 순간에 몸에 힘은 완전히 빠지고, 격렬한 고통에 사로 잡히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쓰러지는 현상이 일어날때 어떤 사람은 마치 칼로 그들의 내부를 찌르는 것처럼 느꼈다고 말하고, 또다른 사람은 마치 무거운 짐이 그들 위로 내려 누르고 짜서 땅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처럼 느꼈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가슴이 터질듯이 부풀어 올랐으며, 또 다른 사람은 마치 심장이, 모든 내부가, 몸전체가 조각 조각으로 찢어져 버리는 것처럼 느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요한 웨슬레는 어떻게 보았던가 ?  “ 이런 징후를 나는 어떤 자연적인 원인으로 돌릴수도 없고, 또한 하나님의 영(성령)의 영향으로 돌릴수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리스도 에게로 올때에, 사단이 그들을 찢어 버린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1759년 11월 25일자 일기에서는 “처음에 이러한 역사(쓰러짐의 현상 등.)는 의심할 여지없이 전적으로 하나님께로 부터 온것임을 확실히 믿었다. 오늘날에는 부분적으로 믿는다.”고 자신의 입장을 밝혀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수있다. 1739년과 1759년 11월 25일 의 견해가 분명히 다르다.

 웨슬레는 이 일기에서 특별히 무엇이 위험 한가를 지적하고 있다. 즉 “ 위험한 것은, 진동, 환상, 입신 등과 같은 현상이 우리의 내적인 역사(변화)에 필수적인 것이라 하여, 이러한 현상 없이는 안되는 것처럼 생각하여, 특수한 현상을 너무 강조하는 것이고. 또 다른 위험은 아마도 이러한 특별한 현상을 너무 과소 평가 하든지, 전적으로 정죄 하든지, 또한 하나님의 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하나님의 역사에 방해가 된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하여 주의를 요하고 있는 것을 볼수있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이러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가장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가정해 볼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실제로 그렇지도 않은 일을 보고 느낀것 처럼 가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한 하나님의 영(성령)의 권능에 진정으로 압도된 사람의 부르 짖음이나 진동하는 동작을 흉내내는 사람도 있음을 가정해 볼수 있다는 것이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사탄이 우리가 보게된 환상을 역 이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자만의 죄를 짖게하는 호재로 삼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6) 이렇듯 챨스 웨슬레, 호웰 해리스, 조지 휫필드와 같은 위대한 부흥사들은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을 제지 했다.

『빈야드 운동의 평가』의 저자 박영호 목사는 이 부분에 대해 그의 저서에서, 특별히 1739년 1월 1일 집회에 참석해 쓰러지는 광경을 목격 했던자요 웨슬레와는 친형제 관계인 찰스 웨슬레도 ‘빈야드 운동의 영적 현상들’을 사탄의 탓으로 돌린 사실을 밝히고 있다. 즉 “요한 웨슬레의 말에는 주님의 능력이 존재했다. 그래서 원수는 회중 가운데에서 울부짖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음성을 안들리게 하고 복음을 죄인들로 부터 막는 그 끔직한 고함들을 질서의 하나님께로 돌리지 않고 분명히 사단의 짓으로 돌린다.” 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토론토 축복과 관련된 설교자들과 웨슬레의 같은 형제인 찰스 웨슬레를 주의해서 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 7)

2) 조나단 에드워즈.

에드워즈는 미국의 제1차 영적 대각성 운동을 주도하던 조지 휫필드를 4번이나 초청해 부흥회를 하면서 그때마다 소위 빈야드 운동의 ‘영적 체험 현상' 이 일어나고 동시에 이에대한 찬반 양론이 일어나자 “ 나는 일부 사람들이 가진 이같은 편견은 이런 성령의 현상들에 대해 제대로 소개 받지 못했거나 잘못된 외부의 일방적인 견해를 받아 들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고 말 했다는 빈야드 운동 지지자들의 주장이다.8)

 에드워즈는 그의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에서 많은 사람들의 영적 황홀경을 묘사하고 거기에 이어지는 진정한 회심의 표적들 즉 겸손한 마음, 온유함, 자제 그리고 기도를 강조한다. 특히 1937년부터 에드워즈의 아내 사라는 천국의 영광에 대한 놀라운 느낌을 소유하게 되었다.

에드워즈는『오늘날 뉴잉글랜드에서 일어나고 있는 신앙부흥에 대한 고찰』이라는 저서의 한 부분에서 부인 사라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그녀의 생애에 있어 놀라운 17일 간을 자세히 설명했다.  “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너무도 생생하고 눈에 선하여 아무것도 의식할수 없었다. 내가 맛본 평화와 행복을 말로는 전혀 표현 할수 없었다. 마치 땅 아래의 모든 것으로 부터 벗어나 지구와 지옥을 벗어나 들려 올라가는 것 같았다....... 하나님이 임재 하였을때 내 영혼은 큰 기뿜으로 충만 하였다. 그순간 내몸에서 힘이 빠져 버렸다. 그리하여 나는 마루에 쓰러지게 되었다. 내 가까이에 있었던 사람들 중의 몇이 나를 붙들어 주었다. ”

빈야드 운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위와 같은 사라 에드워즈의 이 압도적인 경험에서 자신들이 경험하는 선레를 찾는다. 『불을 잡아라.』의 저자 기 슈브로(편집자 註: 빈야드 운동가)도 그의 책에서 사라의 경험을 자세히 묘사 하는데 장시간 소비한다. 그는 사라 에드워즈를 상술한 에드워즈의 책의 내용을 인용해, “내몸의 힘을 빼았았다.”  “몸을 압도했다.”  “실신” 과 같은 표현들은 에어포드 빈야드 교회에서 경험되는 넘어지고, 누워 있고, ‘죽임을 당하는’일들에 대한 18세기의 동의(同意)들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그리고 엘리노 멤포드 라는 여인도 토론토에서 자신이 경험한 일들을 묘사하며, 사라가 17일 동안 양탄자 위에 누워 있었던 것으로 말한다. 멤포드는 이 기간동안 “인사 불성” 이었고,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여기서 그녀의 경험이 오늘날 빈야드의 경험과 유사한지  에드워즈 사라의 경험들을 보다 더 자세하게 살펴볼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예배가 끝난다음 약 3시간 동안 예배당에 남아 있었다. .... 그 시간 대분분 동안, 나의 육체의 힘은 압도를 당했고, 나는 하나님의 큰 자비를 묵상하며, 나는 마음을 흥분 시키는 기뿜과 감사를 가지고 매우 진지하게 옆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나중에 강렬한 감정이 다시 나의 몸의 힘을 빼았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뿜으로 뛰지 않을 수가 없었다.

 1월 29일 목요일에 몸의 힘이 매우 약해져서 일상적으로 할일을 하기가 어려웠다. 다음날 11시경에 나는 옆방에서 부엘 목사(주(註):에드 워즈가 출타했을때 대신 맡은 설교자)가 사람들과 대화를 하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냉랭하고 생명없는 신앙생활을 하다니! ’ 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 갑자기 그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내는 냉정함과 무감각에서 깊은 배신감을 느끼며, 갑자기 몸의 힘이 빠져 그자리에 쓰러졌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일으켜 의자에 앉혔을때, 나는 충만한 심령으로 그들에게 진지한 태도로 나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헤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깊은 감정을 표현했다..... 결국 나는 쇠진하여 쓰러졌다. 사람들이 나를 눕혀준 침대에 나는 상당히 오래동안 누워 있었다.  그동안 나는 천국의 영광들을 묵상했다. ...... 12시 부터 약 4시간까지 침대에 누워있는 동안 이 부활의 기대는 새록 새록 새로워졌고, 나는 너무 힘이 빠져서 일어서지도 앉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옆에 있는 경건한 부인들과 내가 깊은 감동을 받은 영적인 일들과 천국의 일들을 진지하게 대화했다. 내가 일어나기 얼마전에 부엘 목사와 사람들은 예배를 드리러 갔다. ”

 이와같은 사라 에드워즈의 경험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분명한것은 그녀는 17일 동안 인사불성이 아니었고, 그녀는 ‘성령안에서 죽임을 당한것’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양탄자 시간”을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내내 의식이 있었다. 심지어 가장 앞도를 당할 때에 조차도 그녀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했다. 때때로 그녀는 기뿜으로 뛰고 싶어 했다. 이처럼 “이 모든 경험은 긴 시간 동안 의식이 없이 쓰러져 있는 토론토 에어포트 교회의 경험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고 박영호 목사는 『빈야드 운동의 평가』에서 반박하고 있다.9)

예장(합동) 제 82회 총회 보고서도 “ 문제는 그 부인의 현상이 회개하는 동안에 쓰러질 정도 은혜를 받은 것과 빈야드에서 서서있는 동안 넘어가는 것과 현상의 동기와 질에 있어서도 다르지만 형식에 있어서도 다르다.” 고 보고 하고 있다.10)

1749년대 초에 뉴욕 롱 아일랜드의 제임스 데이븐 포트(James Davenport-註:빈야드 운동가) 와 코넥 티컷의 앤드류 크로스웰(Andrew Croswell-註:빈야드 운동가)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동안 바닥에 넘어 지거나 몸의 경련을 경험하거나 환상을 보는 사람들에게 그런 경험들이 성령의 회심시키는 역사의 확실한 표적이라.”고 확신을 주기 시작했다.

 크로스 웰 은 “그런 신령한 현상들을 나타내는 사람들 만이 진정한 거룩의 의미를 안다.”고 했고, “ 사람들이 무질서 하게 고함을 지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강력하게 역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질서는 인간들의 하나님에 대한 근엄하고 부드러운 견해들과 는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라고 선언했다.

이와같이 데이븐 포트의 두드러진 특징은 “시끄럽고 떠들석한 찬송에 전염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데이븐 포트는 군중을 모아 청교도의 책들을 불사르고, 요한 복음 16장에 예언된대로 ‘성령이 모든 것을 가르칠 것’ 이기 때문에 자신들에게는 어떤 책이나 심지어 성경 까지도 필요 없다고 가르쳤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적인 빛’으로 행하라는 그의 권고를 따랐다. 데이븐 포트의 광란은 극에 달해, 그는 책을 태우는 불에 옷을 벗어 던지기 까지 했다. 그때 옆에 있던 사람이 “데이븐 포트에게 마귀가 들었다.”고 책망했고, 그는 깊이 뉘우치며, 그 비난을 인정하고 자신이 악령에게 사로 잡혔었다 고 설명했다.

이때 에드워즈는『성령의 사역의 표적들을 분별』이라는 책을 �㎢쨉� 그는 “데이븐 포트가 사단과 신앙부흥의 반대자들에게 어느 누구보다도 더 유익을 주고있다.” 고 확신하고, 그는 “ 육체에 나타나는 결과들이 반드시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시는 증거인 것은 절대로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결과들은 신앙과는 전혀 무관한 세상에 대한 애정 에서도 종종 생겨 나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11)

3)  찰스 피니.

빈야드에 속한 사람들 중에는 찰스 피니를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부흥 설교가들 중에 하나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잭슨(註:빈야드운동가)은, 피니가 뉴욕 州의 소돔성 이라고 칭해지는 곳에서 설교를 하던중 얼마 않되어 “모든 방향의 회중이 의자에서 넘어져 용서를 부르짖는 것을 목격했다....... 거의 무릎을 꿇거나 엎드려 있었다. ..... 많은 다른 장소 에서도 유사한 장면들이  목격되었다.” 는 기록을 인용하고 있다.

피니는 교회 부흥을 위해 정한 시간에 기도 하자고 젊은 이들에게 제안을 하고 일출시와 정오와 일몰시에 골방에 모여 기도를 시작했다. 일주일 계속했을때 그곳에 모인 젊은 이들에게 그 골방 바닥에 넘어지는 현상이 일어났다. 피니는 그때 현상을 “ 그들은 온몸에 힘이 다빠지고 그리고 골방에서 발로 일어 설수가 없었다. 그들은 마룻바닥에 엎드러 져서 말할수없는 신음 소리로 기도 함으로써 성령 체험을 했다.” 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조엘 피크 박사는 머레이12) 의 저서『신앙부흥과 부흥주의』라는 책에 대한 서평에서 “ 찰스 피니는 미국의 큰 교단들을 하나님 중심의 신앙 운동에서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에 기초한 ‘부흥주의’가 되게 한 촉매로 간주한다.” 고 평했다. 피니는 부흥을 꾸밀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피니는 자신의 저서『신앙부흥』(Revials of Religion)여러 장에서 부흥을 조장하는 방법을 설명 하는데 할애 하고 있다는 것이다.13)

4) 캐더린 쿨만 여사.

미국에서 신유 은사자로 알려 졌으나 1976년 사망한 캐더린 쿨만 여사에 대한 기록을 통하여 조심 스럽게 살펴보자 .

캐더린 쿨만은 캔자스 시(市)로 부터 60마일 떨어져 있는 컨콜디아 출생으로 모친은 감리교인이었고 부친은 침례교인 이었다. 소녀시절 그녀는 한 침례교 신학교에 다녔고 침레교 전도사로 임명 되었다. 어느날 교인중 몇 사람이 설교 도중에 병고침을 받았다고 말한 사람이 생기고 부터 믿음을 통한 신유에 대하여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1946년부터 연 평균 125회 신유 집회를 인도했고 신유집회에는 150만명이나 참석을 하기도 했다.

쿠르트 코흐 박사가 쿨만 여사의 저서들을 읽고 신유집회에 참석한 기록을 보면,  “ 우선 나는 이 신유집회의 형태를 간략하게 적어 보겠다. 환상적인 올갠 전주곡이 있은후 캐드린은 청색이나 혹은 백색의 긴 예복을 입고 단위에 나타나게 된다. 모든 사람이 기립하면 그녀는 말한다.  ‘여기 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대하여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크게 역사 하실것 입니다.’ 기대감에 찬 수천의 사람들이 부른 첫 개회 찬송가로 분위기가 고조된다. 그다음 기도와 간단한 설교가 있다. 그때 캐드린은 갑자기 말한다.

‘ 저 위 발코니의 두번째줄에 있는 사람이 지금 <암에서> 고침 받았습니다. 자 단으로 내려 오세요. ’  또는 ‘열일곱째 줄에 있는 소녀가 페병으로 부터 지금 고침 받았습니다.’

고침받은 사람들은 단으로 올라오고 캐드린은 각사람의 머리위에 약 6인치 상공에 두손을 올리고 기도한다.(註: 이와 꼭같은 방법을 사용한 한국의 유명한 부흥사들도 있었다.)그러면 그들은 <벌렁 나자빠져> 바닥에 쓰러진다. 내가 눈여겨 볼때에 심지어 목회자들도 의식을 잃고 넘어지는 것을 보았는데 그중에는 천주교 신부도 있었다........ 여기 물의를 빗고 있는 부분은 고침받은 사람의 몸이 뒤로 넘어졌다는 것이다.” 라며 쿠르트 코흐 박사는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캐더린 쿨만 여사는 왜 사람들이 쓰러지느냐 란 질문을 받고 대답하기를 “ 저도 만족한 설명을 할수없습니다. 제가 믿는 것은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의 권능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약합니다. 그크신 권능에 접하게 될때에 우리 육신은 견디어 내지 못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고압전류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라고 했다. 14)

 캐더린에 대한 과학적인 평가로 알려지고 있는 것은 「기적의 추적」이라는 제목으로 모 기독교 잡지에 실렸던 미네아 폴리스 출신 외과 의사인 노울런 박사의 글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총평을 했다. “ 나는 그녀가 사기꾼이나 돌팔이 라고는 믿지 않는다. 문제는 <무지한 탓이다.> 캐더린 쿨만은 심인성 질병과 기질성 질병간의 차이점을 알지못한다. 그녀는 최면술적 기법을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최면술과 암시력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녀는 자율 신경계에 대해서도 백지상태다. 그렇지 않고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좀 알고 있다면 그녀는 자기 자신을 감출줄 아는 법을 틀림없이 터득했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코흐 박사는 노울런의 이러한 평가. 특히 환자들이 뒤로 넘어지는 문제에 대하여 최면술 이라고 가볍게 해석하는데 대하여 부족을 느끼며 여기에는 다른 능력이 개입되고 있고 또한 때때로 환자가 앉아있는  장소와 그 환자의 질병을 정확히 지적하는 것은 분명히 심령성 접촉이 개재된 듯한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15)

5)  중국 - 조나단 고포드.

고포드(Jonathan  Goforth)는 중국 만주에서 부흥을 경험 했으며 다양한 현상들을 보았다.

다음의 인용문은 그가 이런 사건들(빈야드 영적 체험현상)중 하나를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보여준다.

 “집회가 막 시작되고 사람들이 기도하는 중이였다. 특히 신음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고 그 남자를 보았다. 그는 전날밤에 아주 놀랍게 쓰임을 받았던 사람이었다. 바로 그 사람이 지금은 이상한 신음 소리를 내면서 갖가지 동작을 하고 있었다. 내가 쳐다보자 그는 갑자기 바닥에 벌렁 넘어졌다. 마귀가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 너무나 분명했다.

 전날밤 그의 기도는 나무나 놀라운 능력을 나타냈다. 이것을 깨달은 그는 오늘 밤에는 정말 특별한 일을 해 보려고 결심 했던것 같다. 나는 지나치게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그냥 두었다가는 다른 사람들이 곧 그를 따라 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아래로 내려가 그의 옆구리를 세게 치면서 ‘일어나 젊잖게 기도하게’ 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가 즉시 멈추더니 부끄러운 듯이 제자리에 앉았다.”

이런예를 놓고 스탠리 젭은 『토론토 축복 조사보고서』에서 위와같은 예를 두고 “현재 토론토 현상을 이끌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조나단 고포드가 보여 준 상식의 절반 수준조차 보여주는 리더가 없다.” 평하고 있다.16)

『빈야드운동 평가』에서 박영호 목사는 다음과 같이 총평하고 있다.

“ 빈야드 운동은 요한 웨슬레의 ‘복음적 완전주의’와 찰스 피니의 ‘윤리적 완전주의’ 의 발자취를 좇았고 이제는 그들을 훨씬 앞섰다. 그러나 빈야드 운동은 칼빈, 루터, 청교도, 에드워즈, 조지 휫필드, 호웰 헤리스와 닮은 점이 전혀 없다.”

6)  죠지 휫필드.

그는 영국 웨일즈 지방에 신앙부흥을 일으켰으며 스코틀랜드와 미국에서 일어난 부흥에 기여한바 있다. 그의 집회들에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은 마치 번개, 뇌성, 지진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러나 휫필드는 “ 표적을 구하는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표적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귀가 표적들을 구하는 자들에게 역사할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고 단호히 말했다.

 그는 신앙부흥의 기준으로 외적 현상들을 이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1746년 출판된 한 설교집에서 그런 광신은 “기록된 말씀을 소유함이 없이 성령께 인도를 받고 있는 시늉을 하도록 만들 것이라.” 경고했다.

 휫 필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늘날 기적들의 반복을 주장하는 자들의 영을 의심하지 않을수 없다....... 지금은 외적인 기적들은 필요가 없고,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야 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말씀을 통한 성령의 내적 역사만이 필요할 뿐이다.”17)

 

4. 쓰러짐의 현상에 대한 비판.

 

1) 쓰러짐의 현상에 대한 성경적 반증.

“성령안에서 죽임을 당한다.”는 표현은 성령은사 집회시 사람들이 뒤로 쓰러지는 현상을 묘사한 것이다. 종교사회학의 원리에서 보면 “성령안에서 죽임을 당하는것”은 “어떤 영에 사로잡혀 황홀경에 빠지는것”이다.

소위 “성령안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주장하는 카리스마 운동의 전체 과정은 주님께서 승인한것이 아니라 마귀가 승인한 것이다.

성경은 “인간들이 넘어지는 것을 사탄이 매우 즐거워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한번은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가 주님께 말하기를 “ 주님, 제 아들이 간질병으로 몹씨 시달리고 있으니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아이는 가끔 불속에 뛰어 들기도 하고 물속에 빠지기도 합니다.”(마17:14, 15.) 라고 했다. 마귀에 걸린 바로 그 사람은 예수님께 오자 또 넘어졌다. “그들이 아이를 예수께 데려 오자 악령이 예수를 보고는 곧 아이에게 심한 발작을 일으키게 했다. 그래서 아이는 땅에 넘어져 입에서 거품을 흘리며 딩굴었다.” (공동번역성경:막9:20)고 했다.

그런데 마귀에 의해 넘어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병자들의 병을 고칠 경우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5:8)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막5:42)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눅8:55) 고 말씀 하시고, 결코 빈야드 운동자들처럼 병자를 고치기 위해 쓰러뜨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이로 보건대 분명히 ‘빈야드적 체험’ 이나 ‘오순절적 체험’은 결코 하나님께로 부터 온 것이 아니다.

귀신학(鬼神學) 분야에서 유명한 사람들도 위의 빈야드 체험이 사탄의 도구 중 하나라고 기록했다. 특히 쿠르트 코흐는 “나는 성령안에서 죽는 이 현상(즉 입신)을 성령의 선물로 받아들일수 없다.”고 말한다. 메릴 엉거는 “ 유명한 병고치는 자들과 카리스마 지도자들은 이런 능력들을 성령의 참된 선물로 오인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사실 그들은 그런것들을 부인해야 한다. .... 오늘날 교회내에서 계속 팽창하고 있는 카리스마적 혼돈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분열시키고 있다. 그런 현상들은 사람들을 매우 미묘하게 실제적인 형태의 신비주의로 데려 가려는 사탄의 가장 큰 계략이다.”18) 라고 말했다.

 

2) 쓰러지는 경우는 집단 암시의 최면요법

스위스 취리히 의 지(紙) 의 편집 기자요『사이비종교』(송순섭역. 홍성사 간(刊))의 저자 위고 슈탐(1949년생)은 그의 저서에서 “ 암시는 구원론의 허구 세계를 가상 현실로 변화 시킨다. 사이비종교  추종자들이 암시로 얻은 경험이나 인식은 현실이자 진리가 된다....... 집단 암시 방법은 주로 사이비종교, 복음주의적이고 카리스마적인 모임 , 구루운동, 신비주의 모임등에서 사용된다. 집단 암시의 표현으로 ‘방언’이나 ‘자동기술’ 등을 예로 들수 있다.

 치유 예배를 드릴때 신도들이 차례로 쓰러지는 경우도 마찬가지로 집단암시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당사자들은 성령이 임했다고 굳게 믿는다. 신비주의 모임에서 사용하는 방법들도 집단 암시에 해당된다.”고 밝히고 있다.19)

『마지막 시대의 저자』김종일은 “서울에서 귀신쫏기로 유명한 교회의 모 목사도 ‘귀신 쫏기’를 할때 뒤로 넘어지는 현상이 일어나는데 그 유형이 최면술과 유사하고 소위 은사 집회에서 방언은사를 받기 위해서는 귀신을 쫏아야 하며 귀신이 나갈때는 뒤로 자연 스럽게 넘어져야 한다고 암시를 주는등 최면술과 관련된 기법들이 교회안에 많이 침투해 들어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20)

 특히 인도의 마하리쉬에 의해서 창안된 ‘초월 명상’ (T.M -Transcendental Meditation)이 ‘영적 부흥 운동’(S.R.M)이라는 이름하에 보급된것임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알라바드 대학에서 물리학과 화학을 공부하던 마하리쉬는, 구르텝이라고 부르는 인도의 유명한 성인 브라마 난다 사라스와티 가 잠시 알라바드에 머물고 있을때, 그를 만난것이 인연이 되어 그의 지식을 전수 받고, 가장 아끼는 제자가 되어 히말라야의 깊은 동굴에서 침묵의 생활로 3년을 보낸바 있다.

 1956년 세상에 나온뒤 전 인도를 여행하며 TM을 보급 하면서 TM의 우수성을 인정받고, 1959년에는 캘리포니아에 도착하여 TM을 보급하고 영적 부흥운동(S.R.M)을 위한 영속적인 국가센타를 세운 다음 뉴욕을 거쳐 유럽으로 가서 TM을 보급 하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영적 부흥운동(S.R.M) 이라는 이름하에 TM을 보급 하였던 것이 1960년에는 국제 명상 협회(I.M.S) 로 발전 하였고 1965년에는 학생국제 명상협회(SIMS)를 설립하여 젊은 이들의 관심을 크게 불러 일으켰다.21)

 라즈니쉬의 전속 카메라맨과 경호대장을 지내다가 이탈한   휴밀톤은 그의 저서 『타락한신』(최승규 역(譯) 도서출판 여러분 刊)에서 “ 라즈니쉬는 청년기 부터 이미 호흡법. 마술. 최면술 등의 실험에 매료 되어 있었다. 그는 늘 친구들을 실험대에 올리고 극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서 무엇이 일어나는 지를 관찰했다. 헤엄도 칠줄 모르는 사람을 물속에 떨어뜨려 보기도 하고 머리를 강제로 물속에 쳐박기도 했던 것이다.” 라고 폭로하고 있다.

특히 크리쉬나 무르티를 만나 라즈니쉬에 대해서 한말을 들은 디크샤 라는 여인의 말을 전하고 있다. 즉 “ 이 사나이는 ‘범죄자’ 입니다. 당신은 이것을 확실히 이해 해야만 합니다. 그가 영성이란 미명하에 사람들에게 행하고 있는 것은 명백한 범죄 행위입니다.” 라고 비판 했다는 이야기다.22)

 

3) 능력 전도가 갖는 위험성.

능력전도는 하나님과 사단의 대결에 대해 많은 집중을 하고 있다. 능력대결에 강조점을 두다보면 죄와 회개와 하나님의 은혜와 하님의 섭리와 겸손을 등한시 한다. 그리고 능력대결은 가시적으로 악의 세력을 이기는 것에 한정되는 위험성이 있다.

박영호 목사는 “ 에수님의 치유사역은 사람을 모이게 하기위한 종소리에 불과했고 말씀 사역이 첫째였다. 우리는 은사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능력사용의 은사도 중요하나 반면에 겸손히 섬기는 종의 역활도 동등한 가치가 있다. 사람마다 은사가 다른데 귀신을 쫏아내는 것만 귀중한 것으로 착각해서는 않되는 것이다. ” 고 지적하고 있다. 23)

특히 데이브 브리이즈는 『이것이 이단이다』에서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즉 “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다가 그 산 봉우리를 넘어서서 전진해 나아가다가 보면, 산등성이의 바위와 절벽의 미로를 헤매다가 참된 기독교에서 부터 이탈해 나가기 십상인 것이다. 이단의 절벽을 넘어서면(beyond) 뱀과 전갈이 기다리는 이단 종교의 광신적 열광의 늪지가 나타난다. 합리적 행동을 넘어서면  미친짖이되고, 약을 넘어서면 독이 되며, 성(sex)을 넘어서면 성적 도착증이 되며, 사랑을 넘어서면 욕정이 되고, 실재를 넘어서면 환상이된다. 이와같이 기독교를 넘어서게 되면 죽음, 절망, 암흑, 이단이 기다리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결국은 내리막 길이 될 샛길을 선택하라는 유혹앞에 무방비 상태로 내버려져 있다. 오늘날의 갈수록 복잡해져 가는 종교적 상황은 전무 후무하고 기괴한 종교적 혼합물의 분출현상을 연출해 내고 있다.” 24)

 

4)   빈야드 영적 체험 비판.

우리는 웸버가 주장하는 현상들이 성경적인 배경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웸버는 그의 주장을 정당화 하기 위해서 많은 성경구절을 인용하지만 그의 성경 인용은 대부분 적절하지 않다. 웸버는 넘어지는 현상이 은헤 체험의 현상 이라고 말하면서 에스겔 1:28을 인용한다.

 그러나 에스겔이 엎드린 것은 성령이 임해서 넘어진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엄을 느끼고 스스로 엎드린 것이다. 또  꼬꾸라지는 현상이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예수를 잡으러온 군사들(요18:6), 무덤을 지키던 파수군(마28:4), 귀신이 꼬꾸라진것(막9:20)을 제시 하였지만(능력치유 359) 이들은 사실상 하나님의 은혜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자들이었 으므로 성령의 증거와 무관한 것이다.

조난단 에드워즈는 은사주의 운동을 교회 몰락의 징조로 간주하였고, 이러한 은사 주의로 인한 신앙적인 혼란을 극복하기 위하여 1744년 『신앙과 정서』(Religious Affection)이라는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 그는 이책에서 참된 신앙의 정서는 격정이나 흥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감동과 감화를 통해 오기 때문에 육신에 나타나는 반응이 참된 정서의 기준이 될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꼬꾸라지는 현상, 술취한 듯한 현상, 몸부림을 치는 행위, 웃거나 슬퍼하는 행위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말하기 힘들다고 하였다. 비록 이것들이 하나님과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믿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유의 은혜로운 정서에는 가짜가 끼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5)

 전주 한일 신학교 에서 있었던 빈야드 집회에서 어떤 목사님이 마구 잡이로 웃는 사람에게  다가가 “사기 치지마!” 라고 말하며 뺨을 야무지게 때렸더니 그 사람이 벌떡 일어나 화를 내며 달려 들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목사가 “성령받은 사람이 왜 화를 내느냐”고 따지자 그 장면을 목격한 주최자가 슬며시 사라지고 말았다는 이야기도 있다.26)

 스탠립 젭은  하워드 브라운의 비디오 테잎프를 본적이 있다고 한다. 그 테잎에서 하워드 브라운은 30분간이나 자신의 “축복”(富)을 정당화하고 예수님은 부자셨다고 주장한후 반 강제적으로 헌금을 거두었으며 헌금을 거둔 후에도 계속해서 사람들을 “넘어 뜨렸다.” 고 보고하고 있다.27)

 놀라운것은 토론토 공항 빈야드 교회의 부목사인 롱(Steve Long)은  “귀신에 의한 일들이 자신의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다.” 고 1995년 5월 9일자 『크리스챤 위크』지(紙)에 보고했다는 사실이다.28)

 

5)  빈야드 운동의 문제점들.

빈야드 운동의 문제점에 대해서 예장(통합) 제82회 총회 보고서는 「토론토 축복의 잘못된 관행」7 가지로

① 상처와 악습과 무능으로 부터 해방 시킨다는 사역시간의 안수.

② 은사 집회에서 환자를 지명해 불러내어 기도해 치료한다는 치유집회. 

③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병을 유발시키고 죄를 짖게하는 책임을 귀신에게 돌리는 점.

④ 농촌, 도시, 국가 가 지역에 있는 특별한 지역 영(靈)에게 지배를 받는 다는 지역 영들에 대한 교리.

⑤ 지상 교회가 실패와 수치로 퇴보 할수밖에 없다는 세대주의적 사고방식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만인구제설. 

⑥ “ 이것(註: 성경)을 이해 하려고 마시오 여러분은 육체 속한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몰라요 ? ” 라고 말한 한 목사의 선언의 결과 말씀의 기근이 있을수 밖에 없는 점.

⑦ 바닥에 �떪� 것은 예사이고 마귀에게 붙잡힐 때에 일어나는 현상과 은사추구가 있다.

 그리고 비기독교적 현상 5가지로는 흔들고 뛰는 발작, 쓰러짐의 현상, 거룩한 웃음, 술취한 행동, 짐승 소리들 을 열거하고 있다.

 

 『빈야드 운동의 실체』의 저자 정동수 교수는 「터론터 웃음예배의 10가지 잘못」으로

1. 모든 예배와 영적 훈련에 참가하는 사람이 의식과 함께 知的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는점. 

2.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는 영적 훈련이나 경험. 

3. 사람의 기분을 만족시키려는 욕망.

4. 대규모의 최면. 

5. 더욱더 놀라운 일들을 믿도록 하는 부추김. 

6. 거룩함에 이르는 지름길에 대한 약속. 

7. 복음을 흐리게 만들며 에큐메니칼 일치를 촉진시키는 점. 

8. 생명과 회개 대신 즐거움과 쾌락을 조장하는 점. 

9. 자신들의 능력과 은사를 자랑하며 가장 무레한 방법으로 성령님을 주관 하려는 점. 

10. 비정상적인 행동과 우수꽝스러운 광기로 인해 세상 사람들로 부터 조롱받게 되는점을 열거하고 있다.

 

5. 빈야드 운동과 이교적 요소.

빈야드 운동은 과연 성서적인가 ? 많은 목회자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가운데 ‘영적 체험의 현상’ 들이 이교(異敎)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사실을 모른채 깊이 빠져들고 있다. 그 실예를 아래에 열거해 보려고 한다.

 

1) 라즈니쉬니즘의 역동적 명상법.

라즈니쉬는 인도에서 자이나교를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학을 마친후 사우갈(Saugar) 대학의 대학원에서 철학 분야의 석사 학위를 받고 10여년간 교수 생활을 한바 있으나. 그후 1966년 대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인류에게 깨달음을 일깨워 주고 명상을 통한 해방을 가르치는데 여생을 보낼 결심을 했다. 라즈니쉬의 공식적인 전기에 의하면 그가 처음 종교적인 삼매경을 경험한것은 일곱살 때 였다고 하나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것은 대학원생 시절인 스물 한살때라고 한다.

라즈니쉬가 영적 스승을 넘어서 살아있는 신(Bhagwan-바그완) 그 자체로 떠 받들여 져서 라즈니쉬즘(Rajneeshism) 이라는 종교의 숭배의 대상이 된것은, 그가 인도 푸나(Poona)에 세웠던 교당을 떠나서 1981년 미국 오레곤주 안티로푸에 64,000 에어커에 달하는 거대한 땅을 사들여 추종자들을 위한 독자적 도시를 건설 하면서 부터 였다고 본다.

 이 라즈니쉬의  가르침에서 핵심이라고 할수있는 것은 ‘깨달음과 명상을 통한 해방’ 이였다. 그는 다양한 명상법을 전수하고 또 스스로 개발해 냈다. 특히 거제프의 춤이나 방법이나 선(禪)이 목표로 해왔던것 등을 골고루 포함하여 나름대로 새롭게 소화시켜 왔다.

그중에서도 1970년 독자적으로 창안해낸 “역동적 명상법”(Daynamic Meditation) 이라는 것이 가장 독특하고 중요하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대개의 명상법들이 조용한 가운대 정적인 깊은 사고를 뜻하는 것과는 달리 매우 시끄러운 동적(動的) 인 행위를 의미한다.  즉 역동적 명상법에서 ‘역동적’이란 노력(effort)을 뜻하고  "명상법“은 고요함 즉 노력없음(no effort) 을 의미 하므로 결국에 이 둘사이의 일종의 변증법적인 명상을 뜻한다고 라즈니쉬는 설명한다.

이 역동적 명상법은 새벽 5시에 시행되는 것으로,  사회적 심리적으로 억압 되어온 지식인들을 위해 고안된 기술이다. 따라서 이것은 비명지르기, 거칠게 추는 춤, 옷벗기등 아주 괴상해 보이는 강도 높은 행위들을 포함한다.  역동적 명상법의 실제는 4 단게로 구성된다.

첫째는 혼돈적 호흡의 단계로 약 10분 정도 숨을 내쉬기에 집중하면서 코를 통해 점점더 세게 그리고 더빨리 숨을 쉬는 것이다. 이때 강한 숨을 통해 더 많은 산소가 들어와 더많은 에너지를 가져온다고 한다. 둘째 카타르시스(catharsis) 의 단계로 10 분정도를 하는 것인데, 앞서 언급된 역동적 명상법의 특징이  나타나는 바로 그순간이다. 자신의 모든것을 그대로 흐름에 맡기는 것이고 결코 저항하지 않는 것이다. 완전히 미친듯이 외치고 뛰고, 울고, 흔들고, 노래하고 , 춤추고, 웃고 닥치는 대로 자신을 던지는 폭발이 일어난다. 모든것이 텅 빌때까지 던져지는 것이어서, 이때 변화가 일어나고 병이 고쳐 진다고한다. 섯째는 주문의 단계로서 역시 10분 정도 계속된다. 팔을 들어 올린채 펄쩍 펄쩍 뛰면서 “후”(hoo)라는 주문을 가능한 깊이 외친다. 이 “후”라는 주문은 본래 수피들 에게서 사용 되었던 것인데 깊이 외치면 성(性)의 중심(sex center)을 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평상시 뇌의 부분에서 단전 방향으로 아래로만 흐르던 기(氣)(에너지)가 꺼꾸로 흐르게 되는것(이런 일깨워진 잠재적 에너지를 흔히 쿤달리니-kundalini 라고 함)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해진다.

마지막 정지(stop)의 단계로서 약 15분간 계속된다. 이것은 이름 그대로 하고 있는 행위의 상태에서 그대로 얼어붙은 듯이 정지하고 있는 것을 뜻한다. 어떤 자세로 있었던 간에 절대로 몸을 추수려 자세를 바로 잡지 말아야 한다. 이때 몸을 바로 잡으려 움직인다면 모든 것은 본래대로 되돌아 가서 무의미해 진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모든 단계가 끝나면 다시 춤추고 노래하며 있었던 축복과 황홀함을 표현하는 축하의 시간이 있다. 이것을 실천하는 진정한 사람을 라즈니쉬는 “새로운 구도자”라고도 부른다.

새로운 구도자는 네가지 사항을 실천해야한다. 첫째, 오랜지 색옷을 입는다. 이것은 떠오르는 태양을 상징한다고 한다.29) 둘째, 긴 목걸이(mala)를 하고 다닌다. 108개의 염주 그 하나속에 라즈니쉬의 모습이 담겨 있는 목걸이다. 셋째, 입문식때 주어진 새로운 이름을 사용한다. 남자는 스승(또는 주인)을 뜻하는 “스와미”(Swami)로 시작하고 여자는 어머니를 뜻하는 “마”(Ma)로 시작되는 이름이다. 넷째 규칙적으로 명상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역동적 명상법에서 보았듯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매일 집단적으로 하는 주문 암송도 있다.30)

미국 오레곤 주의 구루였던 라즈니쉬는『하나님께로 춤추며 가라』는 책에서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항상 하나님께 춤추며 나아가며 웃으며 나아가라.”  “오직 즐거워하라 ..... 신은 따분한 자가 아니다.” 라즈니쉬는 종종 신(神)에 의해 술취한 것으로 여겨 졌으며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자신에게 와서 영적 술을 마시라.”고 권면했다. 라즈니쉬의 영적 포도주는 종종 머리에 손을 댐으로서 이사람 저사람에게 옮겨갔다. 이렇게 라즈니쉬의 손이 머리에 닿으면 그의 추종자들중 많은 이들이 황홀경에 빠져 마루에 쓰러졌다.31)

그는 “ 누구든지 자기가 진실로 원하는 것을 행함은 좋은 것이다.” 라면서 심지어 사회의 기존 도덕윤리 체제에 위배 되더라도 진실로 원하면 행하라는 것이다. 모든 제도와 질서등의 제약으로 부터의 해방을 부르짖는다. 따라서 “모든것을 반역하라.” 고 하며 “삶이란 풀어야할 수수꺼끼가 아니라 누려야할 신비라.”고 외친다. 그가 강조했던 가장 중요한 자유는 섹스(sex)의 자유였다. 이런 라즈니쉬의 성적 타락상은 그의 전속 카메라멘 과 경호대장으로 그를 추종하던 휴 밀톤이라는 사람이 저술한 『타락한 신』(최승규 역. 도서출판 여러분 간(刊) 에 자세히 나타나 있지만 매스콤들은 그를 “섹스 교주”(the sex guru)라고 비판했다.32)

 

2) 크리쉬나의 쓰러짐의 현상.

인도의 성인으로 알려진 라마 크리쉬나는 매일같이 “샤마디”(Samadhi)라 불리는 황홀경에 빠졌는데 그때마다 그는 넘어져서 의식이 없는 무아지경과 같은 상태(사마드히. samadhi)로 빠지곤 하는데 이때 그는 몇시간씩 또는 몇일간씩 쓰러져 있는다. 이 사마히드는 ‘아름다운 환상들과 별나라의 영상이 수반되는 의식을 초월하는 완전한 행복의 상태(아난다.-ananda)라고 하는데, “종종 억제할수 없는 웃음이나 울음이 동반 되기도 한다.” 그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머리나 가슴에 손을 얹음으로서 간단하게 이런 상태에 들어가게 할수있다.33)

 

3)  흰두교 요가 수행의 현상.

위와 유사하게 흰두교의 종교가이자 요가 수행자인 스와미 바바 므크난다(Swami Baba Muktananda )도 샤키파트(Shakipat) 즉 신체적 접촉을 통해 자신의 추종자들을 소위 ‘도사의 자비’(guru's grace)라고 칭하는 상태로 옮길수 있다고 한다. 이 ‘도사의 자비’라는 상태는 “쿤달리니를 점차적으로 깨어나게 하고,  이렇게 깨어난 쿤달리니는  억제할수 없이 웃거나, 야수같이 으르렁 대거나, 개같이 짖거나, 뱀처럼 쉿쉿 소리를 내거나, 울부 짖거나, 몸을 흔들거나 하게 한다. 어떤 광신적 신봉자들은 벙어리가 되거나 의식을 잃기도 한다.”34)

 

4)  아프리카 부쉬맨 추종자들.

매우 기묘하게도 유사한 결과들이 아프리카 칼라하리 쿵(kung) 이라는 부쉬맨 부족중에서와 키공 얀 신(Qigong Yan Xin)이라는 자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샌프란 시스코 크로니클》(San Francisco Chronicle) 이라는 신문은 얀 신이 말을 시작한후 몇분안에 일어난 일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얼마되지 않아서 장면은 오순절 기도 집회와 비슷해지기 시작하여 많은 사람들이 팔을 흔들고  이해 할수 없는 소리를 냈다.”

 박영호 목사는 그의 저서『빈야드 운동의 평가』에서  “토론토 축복을 경험한 대다수 사람들은 이 현상들이 하나님께로서 온것이라고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다. 우리의 연구들은 그들이 매우 엷은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있을뿐 아니라 전혀 얼음이 얼지 않은 곳에서 까지 스케이트를 타는 묘기를 부리고 있다는것을 입증 하고 있다. 빈야드 축복운동의 변명자들은 성경적으로는 거의 나아 가려고 하지않고 자신들이 경험하는 것들의 선례들을 입증하기 위해 교회사만 파헤치고 있다.”고 지적했다.35)

 

 5) 쓰러짐의 현상은 영적 허탈 상태 ?

대한 예수교 장로회(?) 빌립교회(송파구 소재 ? ) 한인환 이라는 목사가 지은『임상 목회학』이라는 책에(p17 -이하) 보면 그도 “쓰러짐의 현상” 론을 전개하고 있는데 그는 “ 영혼도 무형의 생명체이기 때문에 질병으로 병약 해지며 허탈 해져서 무기력해 질수가 있다.” 고 주장하면서  “영혼 이 허탈상태나 병약해 있을때는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 하시는 집회나 예배에 참석하게 될때 기도 중에나 말씀을 받을때 앉은 자리에서 뒤로 쓸어지게 됩니다. 이때 뒤로 쓰러진 사람들은 영혼의 허탈 상태에서 충격을 받고 쓰러지게 된다.” 하며 “ 영맹인 강사들은 영혼의 형편은 분별해 보지도 못하고 쓰러져 있는 것만 보고 ‘내집회에’  ‘내가 안수했더니’ 입신한 사람이 얼마나 있었다고 자랑합니다. 엉터리 부흥사들 샐러리맨 부흥사들의 외침에 우리는 신경 써서는 않됩니다. 영혼의 허탈 상태에서 쓰러진 성도들을 입신한것처럼 공언하게 되면 그 사람은 마귀의 침입을 당하게 된다.” 고 주장 하기도 한다.(p70)

그는 영혼의 허탈상태에 대해서 “인간의 영혼을 위한 양식은 인간의 마음의 양식이나 육체를 위한 양식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성별된 양식인데 이음식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인간의 영혼은 허약해 지고 허탈 상태에 빠지게 되어 마침내 그영혼이 병약해 진다는 것이고, 이렇게 영혼이 허탈 상태에 이르거나 병약해지면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악령들이 육체속으로 침입하여 잠복한 상태가 되고 인격성에 악령이 잠복하게 되면 점차적으로 착상하게 되는데 이착상은 악령이 집을 지은상태” 라고 말하기도 한다.36)

 이에 대해서는 따로 분석 평가할 필요가 있으나 쓰러짐의 현상에 대한 또다른 해석으로 참고할 필요가 있다.

 

꼬 리 말.

“빈야드”(Vineyard)란 우리말로 옮기면 “포도원”이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빈야드 운동을 포도원을 세우자는 운동으로 파악 할수는 없다.

 예장(합동)제 82회 총회 보고서는 ‘빈야드 운동’을 우리 한국 교회가 선교 110년이 지난 21세기의 문턱에서, 전통적 신학 방향에 대한 긍지와 열심이 식어 회의를 겪고 퇴조하는 현상까지 보이고 있는데, 그런 현상 가운데 하나가 소위 ‘빈야드 운동’ 이라고 규정하고, 우리가 이운동을 좌시할 때에는 교회의 세속화와 거짖 부흥 운동에 속아 넘어가는 사탄의 전략에 굴복하고 말것이라고 우려하면서, “목회자들은 교회성장 이라면 모든 것을 불사하는 자세이기 때문에 자연히 비성경적이라 해도 일단 실험해 보자는 자세를 가지고 임하니 문제를 발생 시킨다.”고 지적 하면서 “참된 부흥도 오래가기 힘드나 그 열매가 남는 반면 거짖 부흥은 쓴 뿌리들만 남기고 교회를 할퀴고 지나간다.”고 보고하고 있다..37)

 사실 일선 목회자의 ‘교회성장의 유혹과 부담’은 엄청나게 크다. 대형교회나 성장한 교회 목회자의 풍요로운 생활을 보면서 이 중압감은 더 더욱 높아지고 반면 욕망 또한 커진다. 그러나 무분별한 성장 위주의 목회방향은 위험하지 않을까 ?  분명히 “거짖 부흥은 쓴 뿌리만 남기고 교회를 할퀴고 지나간다. ! ”  끝.

http://blog.daum.net/alphacourse/1201696
출처: 개혁주의 마을/이지명


참된 회심의 성격과 복음이 계시하는 것들(창32: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창32:24) 

   


마틴 로이드존스 




이 사건은 물론 야곱의 전 생애에서 하나의 전환점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떤 의문도 제기될 수 없습니다. 

야곱이 정말로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은 바로 이 시점입니다.  

그때까지 야곱은 종교를 이용하는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고 

곤란에 빠지거나 어려움이 생기면 항상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 시점까지 그는 단지 종교를 가지고 놀았을 뿐입니다.  

그것은 아주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는 외적인 것으로 

자기에게 편리할 때나 찾는 꽤 괜찮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그가 맨 처음 자기 집을 떠날 때 하나님과 흥정했던 사실 

- *"당신이 저를 축복하시면 제가 이것을 하겠습니다"(*창 28:20-22)-

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10분의 1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창 28:20-22)


그러나 이 시점부터는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이 사건이 야곱의 이상야릇하고 변화무쌍한 인생사에서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시점부터 그는 

종교를 참으로 믿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이처럼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사람이라 할 수 있는 

야곱의 인생사에 나타난 전환점을 보여 주기 때문에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제가 이 이야기에 여러분의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데는  

이것 말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이야기가 기독교와 하나님을 진정으로 체험하는 것,  

회심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 본질을 완전히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진짜 체험, 

이 중요한 체험을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가 믿고 있는 신념과 우리의 입장을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이런 중요한 체험을 했습니까?  

이 같은 결정적인 중대한 변화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즉 하나님을 만난 후로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 

그런 변화를 체험한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는 이 주제를 다음과 같이 둘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전반적인 성격을 알아본 다음,  

그 체험을 통과하게 되는 상세한 방법과  

그것이 어떻게 효과를 발하는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그 사건을 전반적으로 살펴볼 때,  

거기에는 우리가 반드시 물어 보아야할 

아주 단순하고 기본적인 질문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이야기 속에 깔려 있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체험한 것과 똑같은 체험을 했는가? ”


그럼 이제부터 이 지극히 중요한 체험의 특징들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첫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특징은  

회심은 항상 강렬한 개인적 체험이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이 체험에 관한 첫 번째 사항은 

그것이 항상 우리를 격리시킨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그런 다음 "한 사람" 즉 하나님과 단둘이 남게 된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오시는 데는 
참으로 여러 가지 방법들이 동원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격리시키셔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자기 자신도 잃고 자기 영혼도 잃은 채 빠져 있는 것들로부터 

그들을 단절시켜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격리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은 개인이라는 것, 자기 혼자 문제들에 직면해야 한다는 것,  

이런 사실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이것이 설교가 하는 일의 전부입니다.  

설교가 하는 첫 번째 일은  

우리 모두에게 우리 각자에게 우리는 개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선 지나칠 정도로 언제나 개인적입니다.  

복음은 여러분이 한 개인이요 혼자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우리는 개개인이 따로 서 있다는 것,  

이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 바로 복음의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복음의 두 번째 메시지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한 개체라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개인적으로 책임을 물으실 거라는 것,  

이런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격리된 상태에서 자신을 바라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제 두 번째 특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회심은 항상 

우리를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도록 인도해 주는 체험입니다.  

이 지극히 중요한 체험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한 개인이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한 인간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따금씩 우리를 축복해 주는 어떤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시오, 하나님은 참이시며,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고 들을 수 있는 분이요,  

우리와 용무가 있는 분이요, 우리가 관계해야 할 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서로 대화를 나눌 수 가 있습니다.  

브니엘 체험을 하기 전에는 

야곱도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비인격적인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브니엘에서 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제가 말씀드리지만 

이 체험의 두 번째 특징은  

그것이 항상 

우리를 즉각적으로 하나님과 직접 만나게 해주는 인격적인 관계

라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에 비추어 볼 때, 

그 체험의 세 번째 특징은 이것입니다.  

이 체험을 한 사람은 
항상 그것을 그의 인생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식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 하며,  

에서에 대해 그리고 자기 소유물에 닥칠 위험을 생각하며 

불길한 예감에 가득 차서,  

걱정 근심에 싸여 왔다 갔다 하고 있는 야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체험을 하기 시작하고 그 체험이 진행되는 동안  

야곱은 에서에 대해 새까맣게 잊어버립니다.  

자신의 가축들, 소떼와 양떼들, 그 많은 재산, 

심지어 처자식들에 대해서도 

다 잊어버립니다.  


이 사건은 

보는 즉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해주는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여러분도 모두 그 사실에 동의하시리라 믿습니다.  

첫째는 그것이 항상 놀라운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특성 중 가장 특이한 것은 

복음이 자연인을 찾아오는 방식입니다.  

자연인은 복음에 접할 때 항상 놀라게 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이 문제에 심한 편견을 가지고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사람이 정말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가 정말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에게 제일 먼저 일어나는 일은 
그가
 대경실색할 만큼 깜짝 놀란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체험했는지의 여부를  

테스트 해 볼 수 있는 기본 조건 중 하나라고 

주저 없이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여기서 회심의 두 번째 특징인 이것 때문에 

복음이 우리를 그렇게 놀라게 합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행동하신 결과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날 밤 야곱에게 일어난 일은 야곱이 행동한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야곱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반드시 말해야 할 첫 번째 사항은  

복음이 본질적으로 그리고 주로 하나님의 행위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그것이 복음의 정수요 복음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복음이 우리에게 계시해 주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① 복음이 우리에게 계시해 주는 첫 번째 것은  

우리가 그렇게 많은 시간과 정열을 쏟고 있는 문제들이,  

우리가 그렇게 염려하고 괴로워하는 문제들이  

실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 
또는 궁극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우리가 그토록 번민하고 괴로워하는 가운데 

머리를 짜내고 계획하는 모든 것들이  

실은 진짜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 시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골치 아픈 세상을 향해  

복음이 주는 첫 번째 메시지가 뭔지 아십니까?  

그것은 이 세상이 진짜 문제점에 직면하여 

그것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이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그 방법 속에  

무언가 아주 서글픈 것이 들어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모두 이 세상이 진짜 근본적인 문제는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번째 요점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② 복음이 하는 두 번째 일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우리의 진짜 문제점이 무엇인지 계시해 주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진짜 문제일까요? 

인간의 진짜 문제는 그 사람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 하는 것

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인간이 이 세상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이 세운 법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해 줍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인간을 만드셨을 뿐 아니라  

자연과 인간 안에 일정한 법을 두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인간이 이 첫 번째 점에 대해 거짓된 생각을 갖고 있으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거짓된 생각을 갖게 될 거라는 

사실을 계시해 줍니다.  

복음은 인간에게 찾아와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지금 살고 있는 그 인생이 

하나님이 본래 의도하셨던 네 모습에 합당한 삶이냐?"  


③복음이 그 다음으로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는 것은  

우리의 진짜 위험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은 

에서가 문제가 아니라 실은 이런 것들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나 자신과 나와의 관계, 

그리고 나의 진짜 위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아 너는 너의 가장 큰 위험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너의 가장 큰 위험은 네 영혼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네가 지금 걱정하고 있는 것들은 

조만간에 모두 다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네가 죽는 날에는 그 가축들을 다 두고 죽어야 한다.  

그 때는 처자식이고 재산이고 모두 두고 죽어야 한다.  

죽음을 기다리며 침상에 누워 있게 될 날이 올 거다.  

그때 너는 그것들 중 하나도 가져 갈 수 없을 거다.  

그렇지만 그 순간에도 네 영혼만은 여전히 갖고 있을 것이다.  

그 영혼을 가지고 네가 무엇을 했는지 나한테 결산 보고를 해야 한다.  

야곱아, 그 영혼은 내가 네게 준 것이다. 

이 순간 너의 가장 큰 위험이 무엇인지 아느냐?  

바로 그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다음, 

복음은 인간이 생각하거나 꿈꾸거나 상상했던 어떤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초월적인 가능성, 인생의 축복들을 계시해 줍니다.  

그는 자기에게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  

자기에게 그 손을 얹어 주겠다고 확신시켜 주신 하나님,  

그에게 열방의 아비요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의 구주가 되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리라는 
비전을 주신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저는 야곱이 이때 자기 후손에게서 메시아가 나올 거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다시 말해 복음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이 세상이 궁극적으로 죄에서 해방 될 거라고 말해 줍니다.  


마틴 로이드존스의 창32:24에 대한 설교 중에서


중국의 새 퍼스트 레이디 : 펭 리유안

 




중국의 새 퍼스트 레이디 : 펭 리유안

새 퍼스트 레이디 : 펭 리유안



중국의 공산당들은 새 퍼스트 레이디에 대해 상당히 우려를 하고 있다.



이런 그녀가 문화 외교 사절로서
시진핑을 내조하는 데 힘쓴 것은 당연한 일이다.

2009년 당시 시진핑 국가부주석과 함께 방문한 일본에서
그는 아키히토(明仁) 일왕의 즉위 2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일본인 애창곡 ‘사계절의 노래’를 열창했다.
나루히토(德仁) 왕세자는 뜨거운 기립 박수를 보냈다.

2주 후 시진핑 측은 일왕 부부 접견을 타진했다.
그리고 2주 만에 일왕을 만날 수 있었다.

최소 한 달 전에는 신청해야 접견할 수 있는 관례에 비추어
시진핑 부부를 파격적으로 환대한 것이었다.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중·일 갈등이 나날이 격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펭 여사에 대한 외교적 기대치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녀는 노래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들의 시선을 한몸에 모을만큼 아름답다.







펑리위안은 중국에서 유명 가수 이상이다.
모든 노래 중 90%는 공산당 업적을 찬양하는 가요다.

이미 18세 때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산하 가무단에 스카우트돼
군 소속 가수로 활동해 왔다.

중국이 키운 첫 번째 민족음악 석사이며
현재 그는 군 산하 가무단을 이끄는 인민해방군 소장(우리의 준장)이다.



















중국의 새 지도자 시진핑 공산당 총서기의 두 번째 부인 펭 리유안.
1987년 9월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은

인기 가수 펭 리유안을 보고 의아해 하다가
시진핑이 새 아내라고 소개하자 깜짝 놀랐다고 한다.

펭 리유안 (彭丽媛, Peng Liyuan,1962년 11월 20일 ~) 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군대 가수이다.

인민해방군 계급은 소장이다.
남편은 시진핑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이다.

산둥 성 출신. 14살 때 산둥예술학교 입학.
18살 때 중국 인민해방군 문예병으로 입대.
1986년 시진핑과 만나 다음해 결혼했다.



흐르는 곡 : 月亮代表我的心 / 鄧麗君



그림같은 아름다운 대자연..!


























출처 :Blue Gull 원문보기   글쓴이 : Blue Gull

해 아래서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전1:14) 어느 이슬람교도가 기독교인에게 "당신들은 성경을 진리라고 하면서 왜 암송하지 않느냐?" 고 비웃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4살부터 하루 3시간씩

토라(모세오경)를 외우고, 13살이 되면 토라를 모두 암송해야

성인식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모두 암송한다고 하네요 우리는 단 한 구절의 말씀을 암송하지도 않고 해 아래서 주님 주신 날들을

헛되이 보내고 있지나 않은지... 올 한 해는 조금 더 도전적으로

힘을 다해서 성경구절을 암송도 해보고요


글고, 앞으로는 우리 모두 자기 나이만큼

성경을 읽는 goal을 한 번 세워보면 어떨까 싶네요.^^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최초로 한국 땅을 밟은 귀출라프

그의 아내 뉴엘은 1831년 2월 16일, 쌍둥이 딸을 출산하다가 하나가 잘못되어 죽게 되었다. 그리고 둘째 역시 잃고, 게다가 아내도 세상을 떠나자 귀출라프는 태국을 떠나 중국을 향해 선교지를 옮겨 새롭게 사역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그는 중국에서 세 차례의 선교여행을 하였는데, 특별히 그의 두 번째 여행은 한국선교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의 여행은 1832년 7월 출발하였다. 그는 중국 남부 해안 마카오를 떠나 타이완, 상하이, 산둥반도를 경유, 그 해 7월 17일 한국의 서해안에 도착, 이것이 개신교 선교사로서는 최초로 한국 땅을 밟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하나님의 역사는 겉으로는 단순하게 보이는 것 같지만, 댓가지불이라는 관문을 통과할 때 이루어짐을 귀출라프 선교사를 통해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한국 방문을 통해 기록한 항해기가 출간되므로 은둔의 나라, 한국이 서방에 잘 알려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를 통해 많은 이들이 한국에 관심을 갖기 시작, 입국했으며, 로버트 토마스 역시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생애
귀출라프(Gutzlaff, Karl Friedrick, 1803-1851)는 1803년 7월 8일, 독일 프로이젠의 포메라니아(오늘날의 폴란드) 프릿츠에서 재봉사의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엘리자베스는 그가 4세에 별세하였고, 아버지는 8명의 자녀를 둔 여인과 재혼하였다. 어린 귀출라프는 계모 밑에서 학대와 상처, 고통 가운데 성장하였다. 참으로 그는 외로움과 상처가운데 자라났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친구 삼아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8세까지 독일 할레에서 경건주의자 프랑케가 설립한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학비 때문에 더 이상 학업을 지속하지 못하고 고향의 프릿츠 공립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러나 그가 신앙적 영향을 받은 것은 할레에서 경건주의자들에 의해서다. 이때 그의 중심에 부흥이 일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설교자가 되는 꿈이 있었지만, 선교사가 되길 꿈꾼 것은 바젤선교회에서 발행되는 선교잡지를 접하면서 부터이다. 그러나 직접적인 동기는 런던에서 당시 중국선교의 개척자인 로버트 모리슨 선교사를 만나면서부터이다.

로버트 모리슨은 중국 최초의 선교사로서 1807년 9월에 중국 마카오에 도착, 광주로 이동하여 자신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영국 동인도회사 통역요원으로 일하면서 중국선교를 위해 헌신했었다. 그는 주로 문서선교를 하였고, 실제적인 회심자를 많이 얻지는 못했지만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였으며, 병원을 세우기도 하였고, 중국인 최초의 목사 ‘양발’을 세우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의 영향으로 영국에 있었던 칼 귀출라프에게 선교적 도전을 주었다는 것은 매우 소중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런던에서 한국선교와 관련된 인물이었던 귀출라프에게 선교동기를 심어주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의미가 있다. 우리 주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역사하신다.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신기하고 놀랍다. 귀출라프가 17세 되던 해, 1820년 스테틴에 당시 황제인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가 프로이젠 군대 열병식에 참석했는데, 이때 귀출라프와 그의 친구가 함께 지은 “충성의 시(詩)”가 황제에게 헌정되었다. 귀출라프는 이 시를 통해 황제로부터 계속 공부를 위한 재정지원을 약속 받았으며, 1821년 오한네스 야니케가 설립한 베를린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영적인 중생을 체험하였고, 경건주의의 최소한의 교리를 배우면서 학업에 정진하였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회심을 기록하였다.

“침상에 무릎을 끊고 기도하며 더 이상 낙심하지 아니하고 학업을 시작하기 위해 내 자신의 책상에 앉아서 진실하며 조용히 명상하듯 기도하는 자세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학업을 성실하게 하므로 6개 국어를 공부하였다. 그 후 베를린대학교에서 잠깐 공부를 하다가 도중 그만두고 로테르담에 있는 네덜란드 선교회에 입회하여 선교사로서의 지식과 자질을 준비하였다. 그곳에서 복음주의 루터파 소속 목사가 되어 3년간 사역하기도 하였다.

선교사로서 파송받음
네덜란드 선교회는 귀출라프를 1826년, 그의 나이 23세에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그가 처음 도착한 곳은 자카르타였다. 귀출라프는 그해 7월 20일, 정식선교사로 임명되어 9월 15일, 자바섬으로 들어가 다음해인 1927년 1월 6일, 바타비아(오늘날 자카르타)에 도착하여 사역을 시작하였지만, 특별한 성과는 없었다. 다만 런던선교회 소속의 매드허스트와 협력하여 복음전도와 언어를 열심히 공부하였다.

이러한 때에 매드허스트가 태국선교에 대한 제안을 하자 그는1828년 태국 방콕으로 선교지를 옮겨 8월 23일부터 시암(태국 방콕의 옛 지명)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특별히 그는 1931년 방콕에서 런던선교회 소속 톰린(Tomlin, Jacob)의 도전을 받아 동아시아 사역의 비전을 구체화하였다. 하지만, 1931년 2월 16일, 그의 아내 뉴엘(Newell, Maria)의 출산사고로 소천하면서 선교지를 바꾸게 되었는데, 그가 본래 가고 싶었던 나라, 수억의 이교도들이 거주하고 있던 중국을 향해 출발하였다. 이때가 1931년 6월 3일 이었다.

선교역사가 스티븐 네일(Stephen Neil)은 귀출라프를 가리켜 “그는 성인이자 괴짜이며 비전이 가득한 진정한 개척자임과 동시에 광신자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중국선교를 시작한 1931년부터 정기선, 마약선, 함선들을 가리지 않고 승선하여 중국 연해안과 한국 연해안을 왕래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중국인들에게 전도하기 위해 중국인 복장을 하고 능숙한 중국어를 구사하면서 연해안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하면서, 내륙까지 들어가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1840년 아편전쟁이 일어나 위험할 때에는 모리슨처럼 통역관이 되어 남경조약 체결에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 아편전쟁 이후에는 중국에 본거지를 정하고 중국복음화를 계획하였다. 그가 중국 북부를 여행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중국 사람으로 오인하기도 하였다. 워낙 중국말을 유창하게 잘했고, 중국식 옷을 입고 습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배를 이용하여 해안 선교를 하는 동안 여러 번의 해상 폭풍을 만나기도 하고, 한 번은 어려운 위기를 경험하기도 하였는데, 기독교 서적을 넣은 상자에 금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여 선원들의 살해음모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귀출라프와 한국
한국선교와 귀출라프의 인연은 그의 두 번째 선교여행이다. 1832년 2월 26일, 영국 동인도 회사 소속 암허스트호를 이용하여 중국 북방으로 행해 마카오에서 타이완, 상하이, 산동반도를 경유하여 한국의 서해안에 도착하였다. 이 배는 무역선으로서 무역개항을 타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배 안에는 린제이 함장을 비롯해서 통역관으로 귀출라프, 리스로 선장 등 67명이 승선하였다. 그리고 로버트 모리슨은 이 여행 기간에 배포할 수 있는 다량의 중국어 성경을 귀출라프에게 후원하였다. 이 배는 예정대로 산동반도를 경유하여 한국 서해안에 도착했는데, 처음으로 닿은 곳이 황해남도 몽금포이다. 이때가 7월 17일, 오전 10시. 이때 귀출라프의 기도문을 옮기면,

“거센 바람이 우리를 조선 땅에 오게 하였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중국 해안으로부터 그 수많은 위험한 고비마다 우리들을 보호해 주셨으니 진실로 감사합니다.”

이때는 한국은 문호를 개방치 않았던 쇄국정책을 펼칠 때였으니 그는 긴장과 기대가 교차되었을 것이다. 그의 감사기도는 입술에 발린 형식적 말이 아니라 심령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감사였기에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이리라.

귀출라프 일행은 7월 17일, 오후 5시 암허스트호 모선에서 작은 보트를 이용하여 몽금포 부근 작은 마을로 진입하려 하였으나 쉽지 않았다. 그의 말을 직접 옮기면,

“우리가 상륙하자 많은 주민들이 언덕으로부터 달려 왔다. 그들은 말총으로 만든 둥근 모자를 쓰고 중국인 것과 비슷하지만 보다 넓은 단추가 없는 바지저고리 차림이었다. 이들의 표정이나 행동은 매우 신중하였다. 그중 지팡이를 들은 지도자로 보이는 윗사람이 “좌”라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 하면서 우리에게 앉으라고 하였다. 그의 요구에 응하자 그는 연설을 길게 하였다. ... 다행이 한문을 아는 젊은이의 덕택으로 우리는 뒤 늦게 이 나라의 외국인에 대한 국법과 외국인이 도착했을 때 주어진 그들의 의무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설득을 하면 우리를 해변에 머물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언덕을 향해 마구 진입을 시도하자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우리가 마을 쪽으로 걸어가자 그들은 버티고 서서 한 발자국도 옮기지 못하게 하였다. ... 우리가 언덕에서 내려가자 그들의 요구를 수용해준 것에 만족하여 담뱃대와 잎담배를 우리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해서 우리의 나이와 성과 어떤 나라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결국 몽금포 주민들은 귀출라프 일행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귀출라프는 그들에게 성경을 나눠주고 그곳을 떠나 7월 25일, 홍주 고대도 안항에 도착하였다. 이때 홍주 목사(牧使)에게 서양포, 시진표, 천리경 등 진귀한 서양물품과 성경 2권, 교리서 수집종이 포함된 헌상품을 순조에게 헌상하면서 영국과의 통상을 주문하였다. 이것은 외국인이 한국에 통상을 요구한 최초의 사건으로서 외교사적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부로부터 파견해 온 역관 오계순은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으로 상국의 명령이나 허락 없이는 외국과의 교역을 할 수 없다고 거절하므로 헌상품과 주문을 반환하고자 하였다. 이때 귀출라프의 일기를 옮기면,

“우리는 드디어 조정에서 보낸 특사와 선상에서 만나게 되어 기뻤다. 자신은 재무대신이 보낸 사람이라고 말한 다음 서론을 말하였다. “당신의 서한과 선물을 받는 것은 불법이요. 이 일을 맡은 두 관리가 너무 늙어서 이런 잘못을 저지르게 된 것이오. 그러나 이는 불법이므로 국왕께 헌상을 할 수 없으므로 되돌려 주는 것이오. 우리 국가는 중국의 속국으로 중국 황제의 명령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소. 이것이 우리의 법이오.”

이때 귀출라프는 고대도에 잠시 머무는 동안 도민들에게 감자종자를 주고 심는 법과 저장법을 써주어 감자가 충청도 일원에 퍼진 것은 서양 식물도래의 좋은 예이며, 홍주 목사 이민회의 서생 양씨의 도움을 얻어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한 것은 성경 한글역의 효시가 되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 후 일행은 여행을 하다가 8월 17일 제주도를 경유하여 8월 22일 일본의 오키나와 섬을 거쳐 9월 5일 마카오로 귀항하였다.

오늘날 고대도는 거룩한 성지가 되었다. 이곳에 귀출라프를 기념하는 교회가 1982년 4월 30일에 건립되었으며, 고대도에 귀출라프가 최초로 입항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곳에 기독교인들이 방문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뿐만 아니라 충남 보령시 관광지로 활성화 하기 위한 전략을 가지고 고대도를 정비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그 본래의 기독교 가치가 훼손될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현재 이 섬의 총가구수는 54가구이며, 주민은 120여 명이며 대부분 기독교인들이다. 이곳은 기독교 신앙을 접한 지역이라는 점에서 매우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선교사로서의 업적
귀출라프는 한국 땅을 처음으로 밟은 개신교 선교사로 역사에 기록되었으며, 그 후의 그의 기록은 발견할 수 없다. 중국에서 그는 1844년 복음을 전 중국에 증거하기 위해 중국인 전도인과 권서인을 조직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중국인 연맹(The Chinese Union)이다. 중국인 연맹 회원수는 나날이 늘어나 1848년에는 중국의 19개주 가운데 12개 주에서 천 여 명의 권서인과 100명의 설교자가 사역하고 있었다.

그리고 외국인들은 조약상 광주를 비롯한 마카오, 홍콩 등 5개 항구에 제한되어 있으므로 그는 홍콩에 중국인 지도자를 양육하기 위하여 신학원을 설립하였고, 중국복음화선교회(The Chinese Evangelical Society)를 설립하여 이 선교회에서 처음으로 허드슨 테일러를 파송하였다. <중국내지 선교회>를 설립한 테일러는 귀출라프를 통해 선교를 배워 중국선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그래서 테일러는 귀출라프를 가리켜, ‘중국내지선교회의 조부’라 하였다. 그러므로 귀출라프는 저 유명한 <중국내지 선교회>를 창립한 허드슨 테일러의 스승인 셈이다. 테일러는 이미 그의 스승 귀출라프를 통해 토착화된 방식의 선교를 배워 적용하였던 것이다.  

귀출라프의 사역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였다. 중국에서 선교목적을 위해 모든 기회를 이용하면서 성경과 전도지를 나누어주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중국에서 아편전쟁이 종결된 후 영국총독이 홍콩에 주재할 때 민정관으로도 일했다. 그가 중국어에 능통하였고, 선교에 유익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1844년에는 홍콩에 신학원을 설립하기도 하고, <중국복음화선교회>를 창설하여 중국선교에 진력하였다. 그의 선교 열정은 끊이지 않았으며, 그 일환으로 그는 1849년 영국, 독일 등 유럽 여러 나라를 순회하면서 중국선교 보고회를 가졌으며, 듣는 자들이 많은 도전을 받고 동양선교에 함께 협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1851년 8월 9일, 육체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홍콩 빅토리아섬에서 약관 48세의 젊은 나이에 별세하여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되었다. 그의 그칠 줄 모르는 사역은 그가 죽었어도 하이트 모어가 피력했듯이 “그가 용기를 가지고 시작한 선교사역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계속 수행되었다.” 그는 실로 원두우와 아펜젤러가 내한하기 53년 전, 한국 선교에 포문을 연 하나님이 한국에 보내신 최초의 천국대사였음이 틀림없다.

우리의 귀출라프 선교사는 어릴 때부터 꿈의 사람이었다. 그는 경건한 모라비안들을 통해 어릴 때, 설교자가 되길 원했으며, 하지만 중국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을 영국 런던에서 만나면서부터 그의 꿈은 선교사가 되는 것으로 굳혀 갔다. 중국 현지에 가서도 그는 날마다 새로운 꿈을 꾸면서 주의 나라 위해 헌신하였으니 실로 그를 지탱해 주었던 것은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있었던 하나님의 꿈이었다. 우리는 칼 귀출라프를 통하여 어릴 때 회심의 중요성과 더불어 그리스도 안에서 꿈은 한 사람의 생애 가운데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배우게 된다. 또한 그 꿈은 삶의 고난과 위험가운데서도 그 자신을 지탱시켜 주는지도 알게 되는 것이다.

둘째는 그는 모험의 사람이었다. 수많은 선교항해 여행을 하면서 폭풍과 파선, 강도의 위험이 있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바울같이 모험을 하였다. 귀출라프는 여러 번의 삶의 위기를 만났다. 자녀의 죽음, 아내와의 사별, 항해 가운데 강도, 위험, 죽음의 위기 등. 그러나 그에게는 꿈이 있었으며, 그 꿈은 주의 복음을 이교도들에게 전하는 열정이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으나 그는 믿음으로 그 거룩한 일을 포기치 않고 감당하였으니 그리스도 안에서의 꿈은 거룩한 모험을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마지막 세 번째, 그는 조직자였다 <중국복음화선교회>를 조직하여 보다 효과적으로 선교를 하길 원했다. 그는 중국인 지도자를 양성하는 신학교도 세우고, <중국복음화선교회>에서 허드슨 테일러를 파송하였는데, 테일러는 <중국내지선교회, CIM>를 통해 경이로운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의 중국사역은 지금까지 중국선교에 있어 전무후무한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으며, 그에 대해선 별도로 다룰 필요가 있겠다. 허드슨 테일러의 흔적은 지금도 중국 곳곳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으니 이는 귀출라프에게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

조경현(세움동공체 대표)

출처: USA 아멘넷 독자공간 게시판

'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리랑의 숨겨진 이야기고개  (0) 2013.02.02
"선생목회에서 엄마목회로 바뀐 사연"-박성규 목사  (0) 2013.01.31
좋은 지도자가 되려면  (0) 2013.01.25
카톨릭  (0) 2013.01.21
로마 카톨릭 배교의 역사  (0) 2013.01.21

 

어느 사모의 기도

                  최송연

 

내 소망의 주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나는

안개낀 들판을 헤매이며

주님을 향하여 울부짖기를

어미 잃은 송아지 새끼와 같고

구슬피 우는

산비둘기 새끼 같으니이다

 

나는

이웃에게 선을 베풀었으나

그들은 함께 뭉쳐

나를 비방하니

쓴물이 내 잔이되었고.

고난의 떡과 눈물의 빵이

내 양식이 되었나이다

 

나를 위하여

신원해 주실 주님은

잠잠하시오니

내 영혼이 곤고하며

혼미하나이다

 

주께서

때로는 질풍같이

때로는 성난 파도같이

사람의 채찍과

고난의 몽둥이로

나를 훈련시키심은...

내게 더 큰 사랑과

더 깊은 인내를

가르키려 하심이니이다

 

아, 나의 주여...

나는 어느 때에 가서나

내 주님의 얼굴을 뵈올런지요

님을 그리워하는 내 마음은

하늘만 조금 붉어도

가슴이 설레인다오

 

주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주님이 맡기신 

양떼들을 섬기느라

당해야만 하는

나의 모진 고난과

눈물들을 ...

구슬로 엮어

화관을 만드소서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나의 눈물로

곱게 꾸민 화관을

내 머리에 씌워주시면

내가 당신 앞에서 춤추며

즐거이 노래 부르리이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혼  (2) 2013.02.09
새털 구름  (0) 2013.02.01
당신 사랑 흰 눈처럼...  (0) 2013.01.21
눈 내리는 아침  (0) 2013.01.12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0) 2013.01.03

(Q 3) 교만
왜 교만은 신자의 생활과 교회에 대해 그토록 파괴적인가? 언제 적절한 자기존중이 오만함과 죄악의 선을 넘는가?

세 번째 질문
교만은 심지어 창조 이전에 하늘로부터 사탄을 타락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첫 번째 죄라고 일컬어집니다
(두로 왕의 교만을 책망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에스겔 28:14-17에 사탄의 교만을 기록한 에스겔 28장을 보십시오).
성경에서 교만이나 무례함으로 번역된 모든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단어는 마음의 잘못된 태도, 거만한 영을 묘사합니다. 잠언 16:18 은 이 말의 부정적인 사용에 대해서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그러나 영어 사전은 교만(pride)이라는 단어의 부정적인 면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면의 사용에 대해서도 설명합니다. 우리들은 오늘날 자신의 일에 대한 만족함, 보화나 정말로 값어치 있는 어떤 것에 대한 깊은 애정, 혹은 영웅에 대한 사회의 존경함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 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의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 사이의 구별
을 인식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칭찬하는 말을 하면 그러한 표현이 그들을 오만하고 거만한 마음을 가지도록 만들 것이라고 두려워하여서 어떤 부모들이 그러한 말을 자녀들에게 사용하지 않도록 만드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어린이들은 자신들이 어떤 가치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적절한 가르침은
오만하고 거만한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창조물에게 두신 가치에 대하여 이해하는 것을 도울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의 가치와 은사에 대해 감사할 필요성을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러한 생각이 이기주의적이며 경쟁적인 것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주의했습니다. 로마에 있는 교회에 쓴 편지에서 그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로마서 12:3)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한 구분을 분명하게 하면서, 우리들은 오만하고 교만한 마음이 하나님의 눈에는 천하게 보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미묘하게, 주의하지 않는 사람을 사로잡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타락한 인간의 육체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도움을 통해서만 우리들은 성경이 인정하는 겸허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만하고 교만한 마음 속에는 창조물에게 사랑과 복종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정당한 요구에 대항하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기주의적인 교만으로 가득 찬 사람은 그로 하여금 생존과 행복한 삶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교만은 스스로에게
도취되게 만들어서 자신을 신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후에, 스스로가 다른 사람들을 능가하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들어내는 이러한 이기주의적인 경향은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거나 심지어는 그들에게 상처나 굴욕을 주면서, 그들을 무시하거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 그들을 사용하도록 만듭니다 (시편 10:2-4; 디모데전서 1:12, 13). 사회에서 혹은 소수의 문화권 안에서, 총체적 교만은 인종 차별, 계급 차별, 그리고 편견을 낳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의식 속에서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교만을 항상 인식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교만을 점검하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 다른 사람의 등 뒤에서 그 사람을 헐뜯음 (시편 101:5), 교만한 눈 (잠언 6:17), 술 취한 자들의 교만함(이사야 28:1), 백성들을 임으로 주관함 (마태복음 20:25, 26), 가치 없는 칭찬을 받아들임(사도행전 12:21-23), 다른 사람들보다 낫게 여기는 자만함 (고린도전서 4:6, 7), 이기적인 명예심이나 허영심 (빌립보서 2:3, 4), 장래 일에 대한 자만함 (야고보서 4:13-16), 장로들이나 영적 지도자들의 권면을 무시함 (베드로전서 5:5,6), 그리고 피차 복종하기를 거부함(에베소서 5:21) --- 랄프 해리스의 자만의 증상에서 인용함.

우리들 스스로가 항상 감시를 철저히 하지 않으면, 잘못된 교만은 우리들의 삶 속으로 기어들어 올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들이 고의적으로 그것의 존재를 은폐하기 때문에 교만이 겉으로 요란스럽게 나타나지 않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완전히 의지함이 주는 우리들의 영적인 삶을 망가뜨립니다. 때때로 우리들은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
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시편 139:23,24) 라고 한 다윗의 기도를 드려야만 하는 때가 있습니다.

관심사:

“자신에 대해 죽는 것”은 오만하고 교만함을 다루기 위한 것으로 묘사되어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들의 할 수 있는 능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완전히 깨닫지 못하기를 바라시지는 않으십니다. 우리들은 신약성경에서 여덟 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들이 우리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부어주신 그 가치를 보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을 이토록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더 나아가서, 실제적으로 내면의 교만을 감출 수 있는 가장된 표면적 겸손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겸손함에 대한 교만이나 성령님께서 우리들에게 부어주신 덕이나 성품에 대해서 교만함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일반적인 교리와 성령세례 및 성령의 은사와 열매에 대한

하나님의 성회 교리 Q/A 에서 발췌


요즈음 보편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사실은 기독교계 안에 영성이 쇠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가 급격하게 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주님의 백성들은 복음이 여전히 널리 전해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위안을 갖습니다. 슬프게도 이들의 낙관적인 추측은 근거가 약하며 모래에 기초를 둔 것입니다.


만약 지금 선교 홀에서 전해지고 있는 메시지를 조사해 보거나, 일반대중 가운데 뿌려진 소책자를 면밀히 검토해 보거나, 옥외에서 전해지는 말씀을 주의해서 들어 보거나, 구령 캠페인에서 전해지는 설교나 강연을 분석해 보거나, 현대의 복음주의를 성경의 저울에 무게를달아보면, 요컨대, 참된 회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없으며, 죄인이 구원자(救主 : Saviour)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본질적인 것이 없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변화된 삶의 열매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흠을 잡으려고 이 글을 쓰거나 남의 감정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완전함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며, 완전함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평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다른 이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비평하는 것도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
 

이것은 훨씬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시대의 "복음주의"는 철저하게 표면적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복음주의는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나오도록 호소하는 기초가 전혀 없습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안에는 하나님의 긍휼이 하나님의 거룩보다 훨씬 더 크며,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진노보다 훨씬 더 크다는 균형을 잃은 슬픈 양상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를 알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들이 치명적으로 빠져 있습니다.
비난받아 마땅할 자기를 드러내는 멋진 찬양, 유머 있는 익살, 재미있는 일화 등은 도입되었지만, 오직 복음만이 효과적으로 비출 수 있는 어두운 배경은 의도적으로 삭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심각한 것은 이러한 것이 부정적인 면의 한쪽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

더욱 심한 것은 복음이 현대의 싸구려 복음전도자들에 의해 값싸게 팔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전하는 메시지의 내용은 단지 죄인의 눈에 먼지를 날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의 혼은 전혀 의심받지 않고 사용되는 마귀의 마취제로 잠에 빠져 있습니다
.
오늘날 대부분의 "정통" 설교에서 전해지는 "메시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치명적으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길이 사람에게는 옳은 길로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은혜의 기적으로 간섭하지 않을 경우, 그 길을 따르는 자는 결국 그 끝이 사망의 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늘(천국)을 향해 가는 중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후에 지옥에서 깨어날 때 참혹한 환멸을 갖게 될 것입니다
!
 

복음이란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역자를 사악함 가운데서 편하게 만드는 하늘로부터 전해진 좋은 소식인가요? 미친 듯이 쾌락을 추구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믿기만" 하면 장차 두려워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확신을 주고자 주어진 것인가요? 혹자는 대부분의 "복음전도자들"이 복음을 제시하는 방식에 - 오히려 왜곡시킨 방식에 - 비추어 그렇게 생각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회심한 자들"의 삶을 바라 볼 때,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 영적 분별이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들을 위해 죽으셨으며, 단지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주로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죄(과거, 현재, 미래)를 완전히 용서받았다고 확신하는 것은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

복음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복음에 앞서 계시된 하나님의 율법과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공의를 완화시켰다거나 그분의 거룩의 표준을 낮추셨다고 공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복음을 성경적으로 설명할 때 복음은 하나님의 공의와 단호함과 그분께서 죄를 절대적으로 혐오하신다는 것에 관한 가장 확실한 실증과 가장명확한 증거를 보여줍니다
.
슬프게도 육체의 자랑은 수많은 자격 없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보다 훨씬 지혜로운 자들이 지나가기를 두려워하는 곳을 뛰어들도록 방임합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비참한 상황을 초래한 원인은 이러한 자격 없는 자들이 늘고 있기 때문입니다
.

교회들과 모임들이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이유는 이러한 "회심자"들로 가득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독자들이여, 복음은 결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결코 죄들을 비추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자기 백성들의 범법으로 인한, 구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치신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공의의 검을 보여줍니다
.
복음은 율법을 무효로 하기는커녕 오히려 율법의 저주를 견디어내시는 구원자(구주)를 보여줍니다. 갈보리는 엄숙하고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를 시간 안에서와 영원 안에서 계속 줄 것입니다.


당신은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가서, 그들이 우상에 집착하고 그 마음이 여전히 죄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리스도를 단지 개인적인 구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함으로 복음이 존귀하게 되거나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합니까?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며, 복음을 왜곡시키고,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음란한 것으로 변개시키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몇몇 독자들은 앞에 기술된 우리의 "거칠고" "비평적인" 말에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물을 것입니다. "영감을 받은 베드로 사도가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분명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그렇다면 오늘날 동일하게 죄인들에게 말하는 것이 틀렸단 말인가요? 우리가 그렇게 하는 데에는 신성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요?"


그러한 말씀이 성경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한 말씀이 성경에 있기 때문에 훈련받지 않은 많은 표면적인 사람들이 모두 그 말씀을 그대로 말하는 것을 옳다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행전 16:31이 결코 어중이 떠중이 군중들에게 전해진 것이 아니라 특정개인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그 말씀은 아무에게나 전해진 메시지가 아니라 복음이 최초 전해졌던 자들과 같은 성품을 가진 자에게 전해진 특별한 말씀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구절들은 절대로 왜곡되어서 안 되며, 본문에 따라 고찰하고, 해석하고, 적용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듯이 숙고하고, 주의 깊게 명상하며, 시간을 드려서 연구해야 합니다. 오늘날과 같은 급변하는 시대가 만든 이러한 겉만 번지르르한 가치 없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 잘못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16:31을 보십시오.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사도와 그의 동료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라고 말한 때가 언제이며 누구에게 말했는가요? 복음의 말씀이 진실로 전해진 자들의 특성을 뚜렷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묘사하는 일곱 가지 대답이 있습니다. 이들 일곱 가지 항목들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독자들은 이 항목들을 주의 깊게 숙고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그 말씀을 들은 사람은 바로 전에 기적을 일으킨 하나님의 권능을 목격했습니다
.
"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감옥의 기초가 흔들리고 즉시 모든 문이 열리며 각 사람의 결박이 풀린지라"(16:26).


둘째, 그 결과로 그 사람은 매우 동요되어 스스로 자기 생명을 포기하려 했습니다.
"
간수가 잠에서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친 줄 생각하고, 검을 뽑아 자결하려 하거늘..."(27
).
셋째, 그는 경위를 알고 싶었습니다
.
"
간수가 등불을 달라 한 후..."(29
).
넷째, 자기 만족을 누리며 살던 그의 삶이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
"...
뛰어 들어가 떨면서..."(29
).
다섯째,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
"...
바울과 실라 앞에 와 엎드리고..."(29
).
여섯째, 그는 하나님의 종에게 존경과 경의를 보였습니다
.
"
그들을 데리고 나와..."(30
).
일곱째, 자신의 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물었습니다
.
"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
 

우리가 기꺼이 배우고자 한다면 우리를 가르치는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그 간수는 "단순히" 믿기만 하라는 권면을 받은 경솔하고 부주의하고 무사태평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역사가 자기 안에 이미 역사했다는 명백한 증거를 보여주는 자입니다.
 

그의 혼은 깨어 있었습니다(27). 그 간수의 경우, 그의 잃어버린 상태를 깊이 느끼도록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잃어버린 상태를 분명하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사도들이 반드시 회개하도록 설득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의 완전한 태도는 그가 진정으로 회개한 자임을 보여줍니다. 자신들의 타락한 상태에 완전히 눈이 멀어 있고 하나님께 대하여 완전히 죽어있는 자에게 간수에게 전해진 말씀을 적용하는 것은 방금 물에서 나와 후각이 없는 자의 코에 후자극제(嗅刺戟劑 : 냄새로서 각성, 자극시키는 약)를 갖다대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입니다
.
독자들은 이 글의 비평을 읽고 사도행전을 주의 깊게 통독하며, 과연 사도가 어중이떠중이 청중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에게 연설을 할 때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라고 말한 경우가 단 한 번이라도 있는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구약 성경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신약 성경에 대하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처럼, 그리고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에 앞서서 회개로 부르기 전에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처럼,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마음에 율법이 적용되기 전까지는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되기" 때문입니다( 3:20). 미리 경작하지 않았거나 일구지 않은 땅에 씨를 뿌리는 것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
 

온통 죄를 짓는 일에 몰두하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대속을 소개하는 것은 개에게 거룩한 것을 주는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자는 반드시 그가 인격적인 관계를 가져야 할 분의 성품과 자신에 대한 그분의 권리와 의로운 요구와, 그가 극악무도하게 그분을 무시하고 자기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슬프게도 그리스도의 구원의 본질이 오늘날의 "복음전도자"들에 의해 잘못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구원자 대신에 지옥에서 구원해 주시는 구원자를 전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치명적으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육욕과 세속적인 마음으로부터 구원받고자 하는 갈망이 조금도 없이 불호수만 피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맨 처음 언급하는 곳은 "그가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다가오는 진노로부터가 아니라) 그 죄들에서 구원할 것임이라"입니다(
1:21).
죄의 엄청난 가증함에 관하여 깨닫는 자, 양심에 죄의무거운 짐을 느끼는 자, 그리하여 죄를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는 자, 죄의 무서운 지배로부터벗어나고 싶어 하는 자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구원자가 되시지만, 다른 이에게는 구원자가 되시지 않습니다
.
만약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죄를 사랑하는 자들을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신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사악함을 묵과하며, 하나님을 대적하여 그들을 편드는 죄의 사역자가 될 것입니다. 이 거룩한 분을 그같이 고소하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신성모독인가요
?
 

만약 독자가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실 때, 나는 죄의 가증함을 알지 못했고, 죄의식으로 복종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즉시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은 결코 구원받은적이 없거나, 당신이 이전에 구원받았다고 생각했을 때 실제로는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은혜 안에서 자라감에 따라 죄가 무엇인지를 -<하나님께 대한 반역> - 더욱 분명하게 깨닫고, 더욱 더 죄를 미워하고 죄에 대하여 슬퍼하게 됩니다. 그러나 양심이 결코 성령에 의해 찔린바 된 적이 없는 자와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 적이 없는자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떠한 사실의 영역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것과 같습니다.
 

"
온전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하니라"( 9:12). 진정으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위대한 의사에게서 치료받기를 구하는 자만이 죄로 병든 자입니다. 그러한 자만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죄의 행위와 혼을 더럽히는 죄의 오염으로부터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이 죄로부터의 구원이요, 죄를 사랑하는 것으로부터의 구원이요, 죄의 지배로부터의 구원이요, 죄의 교활함과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에, 복음전도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와 주된 사역은 죄에 관하여 선포하고, 죄의 열매가 아닌 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정의하고, 죄 안에 있는 무한한 극악성을 보여주며, 마음속에서 죄의 다양한 역사를 찾아내고, 영원한 형벌이 바로 죄의 공로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아, 복음전도자가 죄에 관하여 선포하는 것, 단지 죄에 관하여 상투적으로 몇가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죄가 무엇인가를 선포하는 것은 그를 유명하게 만들지 않고 청중들의 관심을 끌지도 않을 것입니다. 분명 그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칭찬을 얻는 것보다 사람의 칭찬을 사랑하는 자와, 구령(救靈)보다 자기 봉급에 더 가치를 두는 자는 그에 알맞은 임기웅변의 조치를 취하며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씀의 선포는 사람들을 쫓아내는 것이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신실한 말씀을 선포함으로 사람들을 쫓아내는 것이 부정하게 육체와 영합하여 성령을 쫓아내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는 것입니다
.
 

오늘날 복음전도자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이란 용어를 잘못 전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복음전도자들이 전하는 내용은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며 값없이 선물로 받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에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고, 단지 그리스도의 피의 무한한 공로를 믿고 신뢰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
이러한 개념이 지금 "정통" 기독교계에 널리 유행하고 있고, 그들의 귀가 멍하도록 자주 듣고 있으며, 그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내리고 있어서, 이제 누군가가 이의를 제기하고, 그것이 부적절하고 한쪽으로 치우쳐서 사람을 미혹하며 잘못된 것 이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면, 그는 즉시 이단이라는 낙인을 찍히고 행위 구원을 가르침으로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손상시킨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타락한 피조물이 하나님께 공로를 인정받거나 은혜를 얻을 만한 일을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거룩을 희생하면서 까지 역사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결코 죄와 타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구원은 값없는 선물로서, 오직 빈손으로 받아야 하며, 여전히 세상을 굳게 쥔 손으로는 결코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셨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배를 채우지 못하는 돼지 먹이인 곡식 껍질로 죄인의 배를 채우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먼 나라에서 돌아서게 하셔서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자기 죄들을 인정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죄인 스스로가 반드시 해야 할 행동입니다. 참으로 이러한 것들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탕자가 계속해서 아버지에게서 떨어져 죄악 가운데 있는 동안은 아버지의 입맞춤과 반지를 받을 수 없는 것 같이, 탕자가 이러한 것들을 행하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믿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 필요합니다
.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단단해진 마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먼저 반드시 그 마음이 부서져야 합니다. 성경은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그와 같이 멸망하리라"고 말합니다( 13:3). 회개도 믿음과 똑같이 구원에 필수적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그 후에 회개하지도, 믿으려 하지도 아니하였음이니라."( 21:32). 모든 순서는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정하셨습니다.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1:15)

회개는 죄를 슬퍼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마음으로 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죄를 버리고자 마음으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가 있는 곳에 은혜가 자유로이 역사합니다. 왜냐하면 거룩의 요구는 죄를 버릴 때 만족되기 때문입니다
.
그러므로 복음전도자는 반드시 다음과 같이 외쳐야 합니다. "사악한 자는 자기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아담 안에서 떠났던)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55:7).
 

복음전도자의 책무는 그의 청중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병기를 버리도록 요구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긍휼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구원의 길에 대한 정의가 잘못 내려져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현대의 "복음전도자"들은 죄인이 지옥을 면하며 확실히 하늘(천국)을 가기 위해서는 단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회중을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르침은 죄인을 완전히 잘못 인도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배척하면서 동시에 구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복음 선포자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는 또한 주님으로서 그분께 완전히 복종해야 한다'고 부언하기는 하지만, 회심자가 그와 같이 하지 않더라도 하늘이 확실하게 보장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즉시 그러한 말을 쓸모 없게 만듭니다. 그와 같은 주장은 마귀의 거짓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적으로 눈먼 자들만이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권위를 무시하거나 그분의 멍에를 거절하는 자도 구원하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독자들이여, 그것이 은혜가 아니라 수치인 이유는 그리스도를 불법을 장려하시는 분으로 뒤집어씌우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주님(Lord)의 직분으로 하나님의 영예를 유지하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도우시며, 하나님의 법을 집행하고 계십니다.
만약 독자들이 두 개의호칭이 등장하는 누가복음 1:46,47, 사도행전 5:31, 베드로후서 1:11, 2:20, 3:2, 3:18을 본다면, 항상 "구주와 주님"이 아니라 "주님과 구주"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왕권에 복종한 적이 없고, 그분을 자신의 마음과 삶 가운데서 왕위에 앉힌 적이 없으면서도 여전히 그분을 자신의 구주로 믿는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속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들을 환상에서 깨어나게 해 주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오른 손에 거짓을 쥐고 영존하는 타오르는 불 속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44:20). 그리스도는 "자신을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창시자"가 되십니다( 5:9).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주님 되심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그분께 대해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라는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19:14).
 

독자들이여, 잠깐 멈추고 정직하게 다음의 질문을 직시하기 바랍니다.
"
당신은 그분의 뜻에 복종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진정으로 그분의 명령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
슬프게도 오늘날 하나님의 "구원의 길"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본질은 거의 보편적으로 오해되고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이란 용어는 모든 방면에서 잘못 전해지고 있습니다
.
 

지금 선포되고 있는 "복음"은 십중팔구 진리를 벗어났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하늘(천국)을 향하고 있다고 확신하지만, 사실은 가능한 빨리 지옥으로 서둘러 가고 있습니다.
기독교계 안에 이러한 사태는 심지어 "비관론자" "기우가 심한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나쁩니다. 우리는 대언자가 아니며, 결코 대언서의 예언을 고찰하는데 깊이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필자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들이 자주 그렇게 행함으로 스스로 어리석은 자가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하건대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영국에서조차 종교적인 상황은 150년 전보다 훨씬 더 나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심히 두려워합니다.


하나님께서 진정한 부흥을 주시지 않는다면, 머지 않아 곧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짙은 어둠이 백성들을 덮을 것입니다"( 60:2). 왜냐하면 참된 복음의 빛이 급속히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판단컨대 현대의 "복음주의"는 모든 "시대의 표적들" 가운데서 가장 심각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더 핑크

 

'아더 핑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십계명 서론  (0) 2013.05.08
중생의 필요성  (0) 2013.04.28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우리의 태도  (0) 2013.04.13
믿음의 눈(The Eye of Faith)  (0) 2012.12.22
시냇가(엘리야의 생애 중에서)-아더 핑크  (0) 2012.12.11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멸망한다

 

교회가 서서히 그 위엄을 잃어가는 것을 보며 우리는 분명한 징후를 감지한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를 시중드는 종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우리는 “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라고 말하지 않고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라고 말한다.
똑같은 말 같아도, 사실 그 의미는 동이 서에서 먼 것만큼이나 다르다.

교회가 하나님에 대한 숭고한 신념을 버리고, 그 대신에 생각할 가치도 없는
저급하고 천박한 인간 숭배 사상으로 무장하고 말았다.

하나님에 관한 천박한 개념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만연한 탓에 도처에 온갖 악이
횡행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새로운 철학이 생겨난 것도 바로 이런
잘못된 종교적인 사고방식 때문이다.

세상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멸망하고, 교회는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여 영적 기갈에 허덕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실재하는 분이 아니라 한갓 추론의 결과물로 생각한다.
자신들이 적당하다고 판단한 증거에 근거하여 도출한 하나님일 뿐,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알 수 있는 분은 아니라는 것이다. 불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저들에게도 하나님은
더 이상 살아계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방법

하나님에 관한 이런 모호하고 막연한 인간적인 생각들과는 달리, 성경은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잘라 말한다. 성경에는 사랑이 충만한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증언이 가득하다.

하지만 정작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나누는 인격적인 교제에 관해 그토록 무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고질적인 불신앙 때문이다. 하나님과 영적인 세계는 명백한 현실이다. 그러나 죄가 마음의 창을 더럽혀 더 이상 그것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은 위대한 실재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순간 비로소 우리의 심령은 서서히 신령한 일들을 보기 시작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의 마음에 나타난다(요 14:21-23). 하나님을 알게 하는 신령한 지혜에 사로잡혀 우리의 생명이자 전부인 하나님을 내밀하게 느끼고 맛보고 듣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이 되고, 그분의 임재는 우리의 삶을 영광과 경이로움으로 가득 채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완전히 나타내셨다. 물론 하나님은 이성으로서가 아니라 믿음과 사랑으로서 알 수 있는 분이다. 믿음은 하나님을 알게 하고, 사랑은 그분의 인격을 경험하게 한다. 하나님은 성육신으로 우리에게 오셨고, 대속으로 우리와 화목하셨다. 그리하여 우리는 믿음과 사랑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그분과 교제할 수 있다. 사랑과 믿음은 하나님과 신비에 속한 것이다. 이성은 겸손히 물러나 무릎을 꿇어야 한다.

 

잘못된 지식은 영혼을 구속한다.

인간에 대한 사탄의 첫 공격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하와의 믿음을 교묘하게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인간은 하나님에 관하여 그릇된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에 대해 비열한 혹은 부당한 개념을 가진 것만큼 인간의 영혼을 심하게 비틀고 흔드는 것은 없다.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은 결코 인간을 관대하게 품어주는 분이 아니었다.

오늘날 선한 그리스도인들조차 비참한 일들을 겪는 이유는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기대하는 것만 많고 용서라곤 찾아볼 수 없는 엄격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의 감시 아래서 십자가를 짊어진 채로 침울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존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운 분이시고, 그분의 돌보심은 우리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을 안겨준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의 사랑을 우주 전체보다 더, 아니 우주가 수억 개 더 생긴다고 할지라도 그보다 더욱 귀히 여기신다.

불행하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왜곡된 개념으로 알고 있다. 그런 개념들은 심령에 해악을 끼치고 내면의 자유를 구속한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가인’처럼 열정도 기쁨도 없이 마땅히 해야 할 것만 행하며 의무감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를 용납하시고 우리와 교제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안해 떨며 서둘러 예배하길 원하지 않으시고, 시대를 좇아 기계적인 방법으로 자신께 나아가는 것도 인정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을 알고자 한다면 그분께 시간을 드려야 한다.

 

바로 알고 바로 믿어라

하나님의 활동은 그분의 속성과 일치한다. 즉, 하나님이 하신 일은 모두 그분의 신성에서 비롯한다. 그분에게 존재와 행함은 하나다. 하나님은 자신의 속성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으신다.

역사적으로 교회를 괴롭혀 온 이단은 모두 하나님에 관한 거짓된 교리를 믿거나 아니면 그분의 다른 속성을 무시한 채 단지 한두 가지 속성만을 극단적으로 강조함으로 생겨났다. 하나의 속성을 배제하고 다른 속성만을 강조하는 경우에는 그릇된 신학체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끊임없이 그런 유혹에 시달린다.

예를 들어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이시라고 가르친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근거로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성경의 또 다른 진리를 외면하다. 또한 하나님이 선하심만을 강조하고 그분의 거룩하심을 도외시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긍휼만을 강조하고 그분의 진리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배제하고 그분의 주권만을 지나치게 높이기도 한다.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 계시하신 모든 것을 믿어야만 진리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유지할 수 있다. 계시된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못마땅해 보이는 것들은 추려내고 자신이 원하는 것들만 강조하면 엄중한 문책을 감당해야 한다.

삼위 하나님은 따로 떨어져 사역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활동은 삼위 하나님이 함께 이루셨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에게서 시작하라

하나님은 늘 변함이 없으시다는 진리를 깨달으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그분이 우리의 요청을 들어주실 기분인지 아닌지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과 믿음은 물론 불행과 필요에도 항상 관심을 기울이신다. 하나님은 근무시간을 따로 정해 두시거나, 아무도 만나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을 따로 떼어놓지도 않으신다. 또한 어떤 일에도 변덕을 부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기분에 따라 행동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식거나 열정이 사라지는 법도 없으시다. 하나님의 타협을 불허하실 뿐만 아니라 속아 넘어가는 일도 없으시다. 하나님은 설득당하여 말씀을 바꾸는 분이 아니시며, 이기적인 기도에 응답하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을 찾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며, 그분과 사귐을 가지려고 노력할 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변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나는 네 주 하나님이다. 나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분명히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나타내신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이 진리의 성경에 나타난 복음의 원리에 따라 우리의 삶에 항상 역사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나는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다. 선원이 별을 보고 배의 위치를 파악하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우리를 도덕적 상태를 진단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찾아오는 많은 어려움들은 하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하여 그분께 자신의 삶을 내어드리지 못하는 불신앙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마음대로 변형시키려고 하며 그분을 우리 자신의 형상에 맞추려고 애쓴다.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의 준엄한 판결을 짐짓 못마땅하게 여기며 육체적인 방법으로 스스로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마치 아각처럼 조금만 봐주십사하는 심정으로 애처로운 태도를 취하곤 한다. 하지만 그건 다 소용없는 일이다.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그분이 자신에 대해 계시하신 모습 그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울 때 우리는 올바른 출발선에 서는 것이다.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갈수록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우리에게 무한한 기쁨의 근원이 됨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인간의 틀에 맞추지 마라

유한한 우리는 그 한계를 무한하신 하나님께 돌리려 든다. 하나님은, 영원을 품고 계신다. 하나님께 시간의 경과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는 영원한 현재만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은 무한한 시간과 영원한 삶을 주님과 공유한다. 하나님은 결코 서두르시지 않으신다. 그분에게 마감일자 따위는 없다. 이런 사실을 알 때 우리의 영혼은 평화를 얻고 안정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이들에게 시간은 먹이를 삼키려고 달려드는 맹수와 다름없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며 그분의 무한하심을 함께 나눈다 하나님 안에는 무한히 누릴 수 있는 생명이 존재한다. 그분의 사랑은 다함이 없다.

믿음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내면의 눈을 들어 만물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믿음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쉬운 일의 하나일 것이다. 하나님은 가장 중요한 일을 쉽게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하셨다. 우리 가운데 가장 연약하고 비천한 이들도 얼마든지 믿음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쉽고도 어려운 일이다. 가장 쉬운 이유는 그것이 힘든 정신활동을 통해 얻는 지식이 아니라 값없이 주어지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햇빛이 들판을 비추듯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거저 주어진다. 반면에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이유는 타락한 인간의 완고한 본성에는 쉽게 충족되지 않는다는 조건 때문이다.

20세기 중반을 살아가는 요즘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너무 저급하기 짝이 없다. 그들의 생각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전혀 걸맞지 않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도덕적으로 무너져 내리는 이유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신앙적인 두려움도, 하나님의 임재의식도 모두 잃어버렸다. 또한 예배의 영을 잃어버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침묵으로 경배하며 내면으로 침잠하는 능력도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포도나무선교회
개혁주의 마을/Grace

'A.W 토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충만의 표지 (에이든 토저)  (0) 2013.06.24
참 믿음은 하나님만 의지한다  (0) 2013.05.20
세상과 타협하며 미지근하게 살지 않는다  (0) 2013.02.11
살아계시는 하나님  (0) 2012.12.15
말씀과 성령  (0) 2012.11.10

 

 



 

개혁파 교회의 고민과 진로 /서창원목사|개혁파 신학

 

개혁파 교회의 고민과 진로 / 서창원목사

교회가 할 가장 중요한 사명은 무엇인가? 요즘처럼 시대적 소명에 충실하자는 외침이 많았던 때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과연 교회의 시대적 사명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원수인 불신자들, 하나님의 뜻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육체적이요 세상적이요 마귀적인 일에 몰두하고 있는 교회 밖의 사람들의 동정심(?)을 얻고자 미혹의 손짓을 과감하게 벌이는 것이 시대적 사명인가? 아니면 외딴 섬처럼 세상이라는 바다하고는 상종할 이유가 없이 독자적 행보를 가야하는가?

개혁파 교회 성도들도 분명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세상의 여파에 무관심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세상 사람들의 외면을 받지 않으려면 그들의 요구와 기대하는 바를 충실하게 실천하는 교회여야 하는가? 아니면 하늘에 속한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다스림의 본질에 충실할 것인가? 과연 성경은 이에 대해 뭐라 교훈하는가? 또 과거 기독교 역사는 우리의 고민을 어떻게 해결하라고 권면하는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자. 그들이 이집트 땅에서 430년을 그것도 상당한 세월을 노예로 굴종의 시간들을 보냈다. 그러다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애로운 손길을 통해서 출애굽의 대 역사를 창출하였다. 40년이라는 광야 생활을 통해서 이집트에 깊이 물든 사람들 거의 전부가 광야에서 숨지고 광야에서 태어난 새 사람들만이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입성하였다. 물론 여호수아와 갈렙은 예외였었다. 그들의 올곧은 신앙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 자들에게 간곡하게 당부하셨다.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살 때 과거 조상들이 살았던 이집트 땅의 풍속과 유행을 따르지 말라. 그리고 가나안 땅의 풍습도 따라서는 안된다. 오직 하나님이 너희에게 일러준 규례와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해야 한다. 그리하면 그로 인하여 살 것이다(레 18:1-5). 하나님은 철저하게 이집트에서 온 몸에 익숙하게 박혀있는 풍습을 제거하길 원하셨다. 그리고 새 땅에 들어가서 살게 될 그 현지의 유행과 풍습도 본받을 것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지적하셨다.

이스라엘은 주변의 바알 신을 비롯한 각양 잡신들을 섬기는 이교도들로 둘러쌓여 있다. 작은 나라 사람들이 주변 나라들을 살펴보는 것은 국가를 견고히 세워가는 일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그런 차원에서 이스라엘은 충분히 이웃나라들과 교류를 했어야만 했고 그 필요성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삶은 주변 나라들의 삶과는 달라야 함을 강조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에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아야 할 것을 촉구하신 것이다. 이 일에 잘 순응하였던 시절은 강대국이 되었고 풍요로움을 누렸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심을 분명하게 경험하였다. 그런데도 때로는 주변 나라들과 손을 잡고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들을 받아들이는 죄를 범하였다. 어쩌면 이스라엘의 대부분의 역사가 혼합 종교를 지지한 시대였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구약에서 주님이 보여주신 역사의 교훈이다.

신약시대라고 다르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도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사모하고 갈망하는 것들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을 것을 요구하셨다. 사도들도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가르쳤다(롬 12:2).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약 4:4). 땅에 것을 구하지 말고 하늘의 것을 구하라고 하였다. 아니 땅에 속한 지체를 죽이라고까지 말한다(골 3:5). 왜냐하면 그런 것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구약의 이스라엘이 망한 것처럼 이 세상에서 성도가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해 주고 있는 답은 하나이다. 즉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를 거스리는 길이 아니라 오직 진리를 위한 길이다(고후 13:8). 그것이 종종 핍박을 받게 되고 심한 환난에 떨어지는 것이라 할지라도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이 더 좋아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택한 길이었다.

이것은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가 보여주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과 동일시하거나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했을지라도 결국 그러한 교회들은 망하였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에 왕성한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유토피아 건설과 유지에 치중한 것이 아니라 세상과 구별된 모습을 간직하였을 때였다. 교권이나 왕권과의 결탁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로서의 마땅히 내야할 진리의 소리를 외치는 시기가 교회가 왕성했던 때였다. 로마 제국이 무너진 것과 교회로서의 힘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회가 세속에 매몰된 것은 세상의 부와 영화가 교회를 지배할 때였다. 종교개혁은 그런 교회를 벗어나 교회의 본질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복음진리의 재발견이었다. 그것은 교권이나 왕권과의 결탁을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광야에 홀로 서는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 결과 전 유럽을 놀랍게 변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되었다.

지금의 유럽의 교회가 쇠퇴하고 그야말로 세속국가로 전락된 것은 자유주의 신학과 세속주의의 영향이라 할지라도 세상과 호흡을 맞춘 결과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WCC운동이 추진했던 길이다. 지금은 그렇게 활동할 돈을 낼 만한 유럽의 교회들이 없기 때문에 아직은 여전히 부를 누리고 있는 한국 교회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한국 교회는 우리의 위세를 자랑하고 싶어 그들이 내민 손을 덥석 잡아 그들의 세계대회를 한국에서 개최하기까지 이른 것이다. 한국 교회는 그 역사가 보여주는 길을 답습하고 있으니 그 수명이 얼마나 될지 참으로 난감하다. 지금 한국 교회는 돈 자랑할 때가 아니다. 숫자나 크기를 내세울 때가 아니다. 서구 교회의 몰락의 원인을 찾고 다시 원초적인 복음으로 되돌어가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렇다면 진보주의 자들의 주장과 실천을 반대하는 보수주의 교회들에게는 소망이 있는가?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기 힘들다. 개혁파 교회도 위기에 처한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보편적으로 교회가 누려온 세속적 가치를 조금이라도 붙들고 있는 한 교회로서의 힘을 발휘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숫자적 가치, 크기와 부피의 위용을 내세워서 교권을 행사하려는 자들의 횡포는 개혁파 교회를 추구하는 곳에서도 그 미세한 진동은 여전히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개혁파 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일단 돈이 없다. 그리고 숫자도 미미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아주는 단계에 있지 않다. 그 보다 더 아픈 것은 개혁파 교회들의 모래알 특성이다. 이상하리만큼 하나되게 해 달라고 간구하신 주님의 기도를 외면한다. 개혁파 교회들이 하나되지 못하는 신학적 차이는 극히 일부분들이다. 그런데도 서로 협력하려고 않는다. 자기 주도적인 일이 아닌 이상 비개혁파 교회들이 가는 길을 그대로 한다. 공동전선을 펼쳐야 할 것도 그냥 방치한다. 격려하고 협력하는 일은 도움이 절실할 때 뿐이다. 스스로 일어설 때가 되면 혼자 몸부림치는 일이 대부분이다.

오직 하나인 진리를 추구하는 개혁파 교회는 이 상황에서 어떤 길을 가야하는가? 성경과 역사가 말해주는 답을 붙들어야 한다. 황량한 광야의 시련을 자원해서 겪어야 한다.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신 하나님을 깊이 경험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세상에 있으나 죽어가는 세상을 위한 살아있는 진리로 존재할 것이다. 그 때 하나님은 진리에 목말라하는 자들을 붙여줄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에 속한 사람들은 진리를 듣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개혁파 교회 목사들은 사람들의 소리, 심지어 교회의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말라. 오직 진리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현실적 외침이 강력하다. 세상살이에 개혁파 교회라고 해서 물만 마시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즘은 물조차도 사 먹어야 하는 시대이기는 하지만 참된 생수는 진리이신 하나님만이 주신다. 그 하나님을 목말라하는 자가 되라. 그 하나님만이 우리의 복이라고 여기라. 그 하나님을 우리 앞에 모시고 흔들림이 없이 나아가야 한다.

목회현장에서 함께 하고 있는 성도들도 그들이 사는 세상 주변을 다 보고 있다. 성도들이라고 목사들도 아는 길이와 크기와 부피가 가져다주는 달콤함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그 속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그들이나 목사들이나 다 턱밑까지 차있다. 누군가 조금만 물꼬를 터주는 일이 되면 왕창 쏠리는 현상이 드러날 것이다. 이미 준비는 다 되어 있다. 그러나 목사들이여 정신 차리자. 그렇게 쏠려서 당장 목마름이 해결되고 당장 배고픔이 사라진다고 한들 교회가 세상에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교회가 되겠는가?

이교도들도 배고팠을 때 더 도를 잘 닦았다. 교회가 배고파야 한다. 그런데 나도 그 배고픔을 자청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개혁파 목사라고는 하지만 실로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청빈한 삶은 과거 17세기 청교도들에게나 어울리는 일이었지 지금 경제대국의 반열에 들어선 대한민국에서는 자랑할 일이 아니다. 지금의 사람들은 노숙자들이나 하층민의 사람들에게서 복음을 발견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도리어 세상 부와 영화를 누리는 곳에서 찾아진다고 믿고 있다. 아니 복음의 출발은 가난에서부터였을지라도 복음의 결과는 소유의 많음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런 세상에서 낮은 곳으로, 가난하고 헐벗고 힘없고 고통 중에 있는 곳으로 간다고 해서 누가 따르겠는가? 혹독한 겨울철에 은혜의 꽃이 활짝 핀다고 주장한들 누가 그 매서운 겨울을 환영하겠는가?

개혁파 교회가 안되는 이유가 이것이다. 진리가 없어서가 아니다. 목사인 내 자신이 구별된 길을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광야보다 안락한 도시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진리이신 주님과 씨름하는 복된 시간보다 세상에서 안주하는 일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과 귀를 더럽히는 일들에 더 깊숙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시내 산에서의 모세, 광야에서의 석청을 먹으며 고독하게 지냈던 선지자들이 걸어간 것은 더 이상 흠모의 대상이 아니다.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며 좋은 집에서 살며 종종 여가 선용에 가담하는 고즈넉한 삶을 추구하는 한 구별된 성직자 상은 허울 좋은 개살구이다.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이 없는 목사 내 자신이 부끄럽게 여기면서도 그곳에서의 탈출이 쉽지 않다. 내려놓기엔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찬송을 쉽게 부르지 못하는 데 진리의 일군이라고 말하는 것이 염치없는 일이다. 주님보다 귀한 것이 실제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입으로의 고백과 손과 발의 고백이 다른 삶을 사는 한 진리의 영향력은 꿈도 못 꾸는 것이다.

개혁파 교회를 사랑하는 동역자들에게 할 말이 없다. 그래도 까마귀를 동원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다면 지금의 우리의 목회사역을 신중하게 재고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한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은 지금 대한민국 땅에서도 동일하게 역사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물론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그 곳에 아담과 하와를 두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시작도 우리가 일할 수 있고 살 수 있는 환경을 다 만드시고 그 속에서 일하게 하시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보내실 때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도 아무에게도 문안하지도 말고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평안을 빌며 그 집 주인이 주는 것을 먹고 마시되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지 말라고 당부하셨다(눅 10:1-9참고). 주님께서 일군이 삯을 받아야 함을 잘 아신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위해 일하는 자들을 위해서 주님께서 직접 마련하시겠다는 약속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환영하지 않는 곳에서 자리 펴려고 기웃거리지 말고 환대하는 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자들이어야 할 것이다. 개혁파 교회의 시작은 언제나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이루어졌다. 그들의 헌신으로 귀한 열매를 맺었다. 안락한 교회당과 넉넉한 먹거리가 제공되는 것을 버리고 들판에서 비바람 맞으며 눈보라 휘날리는 곳에서 외로이 진리를 순종하는 성도들의 헌신 때문에 사람들 영혼 깊이 파고드는 진리의 역사를 남길 수 있었다. 그들의 수고에 후손들은 주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는 혜택을 입었다. 그러나 후손들은 그 혜택을 잡고만 있었지 나누는데 인색하였다. 더 많은 것을 탐하였다. 그것은 곧 진리를 버리는 자리로 나아갔다. 또 다시 교회는 황폐해진 것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답을 찾기란 쉽지 않다. 아니 찾아도 그대로 행하는 것은 더 어렵다. 바알에게 절하거나 임 맞추지 않은 남은 자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하나님이 찾으시는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한 사람은(렘 5:1) 어떤 유형의 사람일까?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사람은(미 6:8) 어떤 사람들일까? 그런 무리를 만나고 싶고 또 내가 그런 사람이고 싶다. 사람을 살리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내 자신도 죽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그릇보다 못한 내게 복음을 맡기신 것은 살리는 영이신 주님께서 하신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의 사람이 되는 것이 필수인 것 같다. 거룩한 복음의 광채는 주님과 깊은 교제를 통해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주님께 도움을 구한다. 오 주여!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으로 하여금 주를 인하여 기뻐하게 하소서(시 85:6).

개혁교회의 미래는 사람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주님의 사람을 통해서 주님의 교회를 온전히 세워 가실 것이다. 누가 더 주님을 잘 아는가가 우리 교회의 미래의 열쇠이지 않겠는가? 오라 우리가 힘써 여호와를 알자!
출처: 생명수 쉼터/한아름 

'개혁주의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에서의 개혁 교육  (0) 2013.04.26
개혁주의에 대한 바른 이해  (0) 2013.04.14
청교도의 신학  (0) 2013.01.18
율법의 세 가지 용도(권호덕 박사)  (0) 2013.01.04
개혁주의 교의학  (0) 2013.01.02

유일하신 하나님
The Only God

 

하나님은
유일하시다
그가
세상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시며(히 1:3)
하나님의 피로 임하신 이다(요 1:14)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믿었고(고후 4:4)
하나님의 피를 생명으로 마셨다(요 6:53~55)
그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기까지 아직
하나님의 피를 본 자가 없었으나
그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심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피를 보았고 그 피를 의지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갈 담력을 얻은 것이다(히 10:19~22)

 

우리가 그를 믿는 믿음은 은혜로 주신 것이니(엡 2:8)
그가 주신 믿음을 인하여 의롭다 하셨다(롬 1:16~17)
우리가 그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이다
성령은 이를 증거하신다(행 2:38~40)

 

○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복은
   성도의 신령한 그릇이다
   복을 많이 받아 그릇을 키워야 한다

 

○ 하나님은 이 그릇에
   성령을 주셨으니
   성령 충만해야 한다

 

○ 성령을 받은 자는 신령한 자요
   그러므로
   성령의 나타남을 주셨다

 

※ 종교인이 되지 말고
   신령한 사람이 되어
   예수의 증인이 되자

 

 

... 2013년 1월 20일 말씀에서
이웃 게시판에서


      등불 같은 사람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지요. 운명이라는 것은 그림자와 같아서 언제 우리들 삶에 끼어들어 서로를 갈라 놓을지 모르기에 서로 함께 있을 때 그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화는 언제나 거칠은 입에서 나와 마음을 병들게 하여 악업의 원인이 되기에 항상 입을 조심하여 겸손해야 하며 작은말 한 마디라도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는지 항상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타인에게 있어 소중한 사람이 되려면 먼저 타인을 소중히 해야합니다. 고뇌를 많이 느끼게 하는 세상입니다. 참고 인내하지 않으면 서로 이별이 많을 수 밖에 없는 세상인 듯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한세상 생각하면 한숨만 절로 나오는 세상 하지만 아직은 마음 따뜻한 이들이 있기에 살아볼 만한 세상이지 않은가 싶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 어떤 탁함에도 물들지 않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며 맑은 생명의 사람으로 먼저 나 자신부터 작은 것 부터 실천한다면 진정 그대는 어두운 세상에 등불 같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 좋은 글 중에서 -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가 되기
(Becoming the Church of the Poor)


우리가 우리의 가난을 주장하고 우리의 가난을
우리 형제 자매의 가난과 연결시킬 때,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 즉 예수님의 교회가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에서는 결속이 필수적입니다
고통과 기쁨은 나누어 가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한 몸으로서 서로의 고통과 기쁨을 깊이 경험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당하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기뻐합니다" (고린도전서 12:26)

흔히 우리들은 몸의 한 부분이 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한 몸이 되는 것에 참여하면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고통스럽게 느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면,
그들의 아픔 또한 깊이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기쁨은 아픔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아픔을 함께 나눌 때,
우리는 또한 기쁨을 함께 나눕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1. 져주는 지도자
분명 이길 수 있고 따져야 할 일인데도

    져주는 지도자가 있다.
그릇이 크기 때문이다.
같이 있고만 싶어진다.

2. 힘든 일에 먼저 뛰어드는 지도자
 모두가 피하는 힘든 일을
 가장 먼저 팔 걷어 부치고
 주저하지 않고 실행하는 지도자.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3.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지도자
 자신은 가진 것이 없어도
 언제나 꾸어서라도 주기를 좋아하는

      지도자.
 주위에 따뜻함의 정기가 흐른다.

4. 문제를 줄이는 지도자
 작은 문제를 키우는 자가 있고,
 큰 문제를 줄이는 자가 있다.
 기침하고 몇 사람을 거치면
죽었다
 소문을 퍼뜨리는 이가 있지만,
 그는 엄청난 죽일 죄도

     침묵으로 평생을 묻어 주는 지도자.
      한없이 든든하기만 하다.

5. 희망을 전하는 지도자
 좋은 소리 많이도 하지만
 끝에 가서 사람을 불안케 하는 이  가  있고

 아무리 심각한 일에도
 언제나 결론은 희망을 듬뿍 주는
지도자.
 그의 말에는 언제나 새 일을 하고 싶어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6. 공과 사 구분을 잘하는 지도자
 개인적인 정에 이끌려가는 지도자는
 성공의 길을 스스로 묶는다.
 할 일과 개인의 감정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그의 행동에는 언제나 신뢰가 간다.


7. 주위 사람 칭찬하는 지도자
  보는 사람마다 좋은 점 한 가지를 꼭
  칭찬해주는 지도자.
  그를 생각하면,
  조건 없이 기분이 좋아진다.
  항상 주위에 사람이 끓는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