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3. 29. 고난 주간 금요 설교] 왜 십자가인가 | ▶설교 본문
2013.03.30 10:22
 

십자가인가

 

베드로전서 3: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비록 한절이지만 너무 영광스럽고 귀한 말씀입니다. “우리 예수 의로운 자께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다.”

 

오늘 간단한 한절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임하여 성령의 구원의 역사, 성화의 역사가 나타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말씀이 여러분의 믿음으로 인하여 여러분 속에 있는 모든 불의와 미움과 죄악을 제거하는 복음의 능력이 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인가? 답은 예수님께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시기위함입니다.

무엇을 대신하셨습니까?’ 십자가에서 의로운 예수께서 불의한 우리를 대신하셨다는 뜻은 대신 죄값을 지불하셨다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까?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대신 화목 제물로 받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이를 신학적인 용어로 구속(Redemption) 또는 속죄(Atonement)라고 합니다.

 

한번 세상에서 생각해 봅시다.

만일 재판관이 간음죄, 살인죄, 도둑, 사기, 유괴 등의 무서운 죄악들을 무조건 용서한다면 어떨 같습니까?

 

유괴 살인범이 잡혀왔습니다. 재판관이 유괴 살인범을 보니 젊은 사람인데 앞길이 창창합니다. 이에 징역 30년을 선고하자니 너무나 불쌍해서 갑자기 법정에서 유괴 살인범을 용서합니다.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 나는 사랑이 많다. 죄를 졌구나.  그래 그럴 있지. 내가 용서하마. 이제 그만 집에 가라.’

이후 재판관은 사랑한다는 이유로,  간음범, 방화범, 도둑놈, 강도 , 어떠한 죄수에 대해서도 너희들이 감옥에 들어가면 불쌍해서 안되겠다라고 하면서 전부 풀어 주며 용서한다면 어떨 같습니까?  

 

만일 이러한 재판관이 있다면 그는 오히려 불의한 재판관이요, 사람들은 의로운 분노로 재판관을 제거하려 것입니다. 그러한 재판관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사회의 공의가 살아날 것입니다.

 

사람 세계도 그러한데 만일 하나님께서 의로운 심판관이시라면 절대로 죄를 그냥 묵인하고 지나가실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그냥 넘어가신다면, 그러면서 근거없이 죄를 용서하신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이상 하나님일 없으며 또한 의롭고 거룩한 재판관의 자리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도 근거 없이 무조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없습니다. 만일 근거없이 죄를 용서하신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상 거룩한 분이 되실 없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많은 설명을 합니다.

진리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온유의 하나님, 오래참으시는 하나님, 겸손한 하나님 그러나 성경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가장 중요한 성품으로 거룩을 말합니다.

 

따라서 거룩 거룩 거룩이라고 천사들이 찬양합니다. 이는 하나님은 죄의 가장 반대편에 서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어떤 죄라도 그냥 지나갈 없습니다. 이유는 아무리 작은 죄라도 그냥 지나가는 순간 하나님의 완전하신 공의와 거룩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완전하고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재판관으로서 죄에 대하여 언제나 형벌하셔야 공의와 거룩이 유지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은 공의롭고 의로우실 아니라 사랑이시며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죄입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려면 동시에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셔야 합니다. 방법은 죄는 벌하셔야 하고 우리는 살리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본성상 죄인이요 날때 부터 죄성을 타고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행하는 모든 행위들, 생각하는 모든 것들, 뱉어내는 모든 말들에는 언제나 죄로 가득찰 밖에 없습니다.

 

신문을 보면 하루라도 죄가 없는 날이 없습니다. 살인, 음란, 술취함, 방탕, 마약 중독, 폭행, 변태 , 인간이 있는 곳에는 죄악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지독한 죄인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무한히 사랑하시지만, 그러나 죄에 대하여는 지독히 싫어하시고 미워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마음속에 주의 백성들의 죄를 문제를 해결하시려는 계획을 갖게 되셨습니다. 죄에 대하여는 공의한 벌을 내리고 그러나 동시에 사람은 용서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방법은 대속(Substitution) 입니다. , 누군가가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십자가의 대속 계획은 사실 창세 전에 이루어진 일이고, 그리고 구약 때에도 많은 부분을 드러내셨습니다.

 

예를 보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첫번째 히브리인입니다. 유대인들의 아버지로서 신실한 사람이요, 모든 인류의 찬란한 영웅입니다. 그는 모든 믿는 이들의 믿음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대속의 계획을 보여주셨습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자녀가 전혀 없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내가  너에게 아들을 주겠다. 아들은 너의 후손이 것이다.

아들을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것이다. 아들이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그는 너의 마음 속에 한없는 기쁨과 웃음을 것이다.”

 

이때 아브라함은 99세였고 그의 아내 사라는 경수가 마른 벌써 수십년째 상태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라가 아이를 낳는 것은 불가능한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길, 사라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아들을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다음해 사라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말로 표현 못할 기쁨 가운데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였는데, 아들은 사실 언젠가 땅에 오실 메시야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구약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자라나던 어느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아!”

, 부르십니까? 주님!”

네가 사랑하는 너의 독생자 이삭을 데리고 내가 너에게 보여줄 곳으로 가라. 거기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부탁을 하시는 지는 없지만,  그러나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기적의 하나님이니 분명히 어떠한 기적을 통해 이삭을 살릴 것이라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11:17-19).

 

히브리서 기자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다고 증거합니다.

 

아무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지 이유를 없었으나 오직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장소로 갑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장소는 바위로 가득차고 아주 거친 곳이었습니다. 모리아 산입니다.  후에 산은 하나님의 성전이 곳입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대하 3:1).

 

산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갈보리 산이기도 합니다.

 

모리아 산은 거칠고 흉악한 산이었습니다. 젊은 이삭이 나무 장자를 자신의 어깨에 메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갑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를 등에 지고 갈보리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아브라함이 번제를 위하여 타오르는불을 들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타오르는 진노를 그려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습니다.  죄의 결과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죄에 대한 결과는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모리아 산으로 올라갑니다. 산으로 올라 갔을 이삭이 질문합니다.

아버지! 장작도 있고 칼도 있고 불도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있나요?”

 

아브라함은 눈물로 가슴이 막힙니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발언을 합니다.

나의 아들아! 하나님께서 번제할 어린 양을 친히 준비하셨단다.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다.”

 

마침내 둘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은 산의 꼭대기였습니다.

이삭! 손을 내밀어라.”

이삭이 손을 내밉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의 손을 밧줄로 묶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늙은 노인이었습니다. 반면 이삭은 힘이 철절 넘치는 소년이었습니다. 아무 때라도 아버지를 밀어내고 거부할 있는 힘을 가진 상태입니다. 분명히 그럴 있었습니다.

 

사실 아무리 순종하는 아들이라도 자신을 죽이려는 상황은 얼마든지 발버둥치고 거부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손을 내밉니다. 그리고 손을 묶입니다.

 

마치 예수께서 나는 생명을 스스로 주노니 누가 나의 생명을 취함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목숨을 버리노라 말씀하시는 모습을 그려줍니다.

 

아들 이삭은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합니다. 모습 역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원합니다라고 하던 예수님의 고백을 듣는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칼을 들고 이삭을 향하여 걸음 나섭니다. 순간에 이삭은 아버지께 버림을 받는 정신적 고통을 당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고통만큼이나 고통을 당합니다.

 

아브라함은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눈물을 머금은 ,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아들의 가슴을 향하여 칼을 내리치려는 순간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사자가 급하게 외칩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내가 마음을 알았다. 네가 참으로 나를 경외하는구나

 

아브라함이 내리치던 손을 멈추고 눈을 드니 수양 한마리가 묶여 있었습니다.

도망가지 못하고 수풀에 뿔이 묶여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양을 취하고 이삭 대신 양으로 내게 번제로 드리라.”

 

사실, 그날 아브라함도 모리아 산으로 올라오고 있었고, 동시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양도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양은 하나님의 정하신 장소에서 아브라함과 정하신 때에 만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양을 보며 기쁨을 감출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대속입니다.

다시 살아난 이삭을 안으며 눈물을 흘립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면 그렇지! 우리 하나님은 나를 정말 사랑하시는 구나

아브라함은 당장 양을 잡고, 대신 이삭을 붙들고 얼싸 안으며 기쁨에 겨워 감당하지 못합니다. 아들 이삭 역시 자신 대신 나타난 때문에 안도의 숨을 쉬며 한없이 기뻐합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양을 잡으면서, 양의 피를 흘리면서 깨달았습니다. 친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자신과 그의 아들 이삭을 위하여 어린양을 준비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삭 대신 번제를 드릴 대속의 양을 준비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과정을 통하여 양은 상징일 뿐이며 실제로는 이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게 하나님의 아들, 어린양 메시야의 날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을 바치면서 하나님의 대속의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모리아 산의 특별한 장소를 여호와 이레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셨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양이 나의 아들 이삭을 대속하였다.”라는 뜻입니다.

 

모세 때에는 출애굽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에게 유월절 양을 알려 주셨습니다. 수천수만의 양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유월절 희생양으로 드려졌습니다.

 

유월절 날은 하나님의 공의롭고 거룩하신 심판이 임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로 바른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지나가서 생명을 구원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피를 때에 내가 넘어 가리라.”

또한 대속의 진리입니다.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속의 양을 따로 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양을 유월절 양이라고 부르며 구분하여 길렀습니다.

어디서 유월절 양들을 따로 길렀습니까? 바로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유월절 양을 길렀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밤에 예루살렘 지경에서 목자들이 양을 칩니다.

이들은 어떤 양들을 치고 있는 것입니까? 그들은 바로 유월절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목자들이 천사로부터 성탄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때 작은 양이 예루살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진짜 유월절 양이었습니다.

냄새나는 마구간에서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유월절 양들이 많지만, 지금 예루살렘 베들레헴에서 어린 아기는  유월절 양입니다. ‘ 유월절 희생양입니다.

 

세례 요한이 양을 보았습니다. 그가 사람들 앞에서 증거하며 외칩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1:29).

 

예수께서 십자가를 향하여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던 때도 유월절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감람산에 오르시고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동문을 지나십니다. 예루살렘의 동문으로 들어가실 때에 무리들이 예수를 맞이하였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할렐루야! 다윗의 자손이여! 이스라엘의 왕이여,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께 영광!!!”

 

동시에 같은 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준비한 유월절 양들도 정확히 예루살렘의 동문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없이 많은 유월절 양들이 베데스다 연못 곁의 양의 지나고 있었습니다( 3:32, 12:39). 

 

갈보리 산을 향하여 하나님의 어린양인 예수님도 오르시고, 실제 예루살렘에서 길려진 유월절 양들도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오르고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양을 검사합니다. 유월절 양은 흠도 없고 점도 없어야 합니다.

동시에 제사장들과 심지어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비난하고, 묻고, 따지고, 조사하면서 어디 흠이 있나 찾으려고 온갖 심문을 하지만 아무 죄나 흠을 찾을 없었습니다.

 

결국 세상의 법을 대표하는 로마 법정의 총독 빌라도에게까지 끌려가 흠이 있나 조사를 당합니다. 그리고 빌라도가 고백합니다.

나는 사람에게서 아무 흠도 발견할 없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식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완전하고 흠이 없는 유월절 양으로서 모든 사람 앞에서 인정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유월절 3, 지금 시간으로 오전 9시입니다. 제사장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온 사람을 위하여 유월절 양을 잡아 죽이는 시간입니다. 시간에 로마 병정들은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있었습니다. 장소도 예루살렘이요, 시간도 같습니다.

 

그리고 산은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모리아 산입니다.

내가  산에서 내가 준비하리라.”

여호와 이레!

바로 산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제물이 되십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의 어린양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십자가 상에서 머리를 숙이시고 고통과 범벅 속에서 제물이 되십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기 전에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예수께서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19:30).

 

이루었다.” 테텔레스타이! “내가 지불하였다.”

 

제사장들은 이제 이상 성전에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상 동물 유월절 양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모든 그림자들이 이루어졌습니다.  지금까지 그림자로 상징되던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 어린양으로 인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하나님의 대속의 계획은 끝난 것입니다.

 

의로운 자가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자를 용서할 있게 되었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어린양을 의지하는 자마다 아무리 불의한 죄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대속 제물 유월절 어린양으로 인하여 그들을 의롭다 하실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린양을 믿는 자들마다 의로우신 재판관이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께 기쁨과 감사로 나아올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로마 총독 빌라도는 관례에 따라 무리의 요구에 따라 죄인 하나를 풀어줄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의로운 예수를 석방하길 원하였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십자가 형벌에 넘기기로 결정되지는 않은 상태입니다.

 

빌라도는 의도적으로 무서운 죄수 하나를 무리들 앞에 거론합니다. 빌라도는 바라바를 거론하였습니다.

 

바라바는 도둑이며 반역자, 살인자, 악한 자였습니다. 누가 보아도 바라바는 너무 무섭고 잔인한 악독한 죄수이기에 십자가에 죽어 마땅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무리들에게 예수와 바라바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자신있게 질문하였습니다. 그의 생각은 이들 군중이 악명 높고 무서운 바라바보다는 분명히 예수를 사면하여 것을 택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너희 무리들아! 너희는 누구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예수냐? 누구를 석방하랴!”

그러나 빌라도의 기대와는 달리 군중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사주를 받아서  예수를 십자가에 박으라! 바라바를 놓아주라!” 외칩니다.

 

바라바를 놓아줘? 그러면 예수를 어떻게 하랴?

, 예수의 형벌이 결정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박으라. 십자가에 박으라.”

 

따라서 예수는 도둑놈이요, 반역자요, 살인자요, 온갖 악을 행한 무서운 죄수 바라바 대신에 십자가에 박히게 됩니다.

 

군병들이 예수님를 잡아 십자가에 달아 멥니다. 그런데 곳에는 세개의 십자가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세개의 십자가는 사실, 정확시 세명의 강도를 십자가에 박으려고 의도하였던 것입니다. 예수 옆에는 무서운 강도들이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께서 달리신 십자가는 정확히 바라바의 십자가였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메어 달리자, 훼불을 군병 하나가 깊은 로마의 감옥으로 내려갑니다. 좁은 복도를 따라 어두운 통로를 지납니다. 쇠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냄새가 아주 퀴퀴합니다. 한참 어두운 복도를 지난 군병 간수가 드디어 어떤 독방으로 찾아 갑니다. 그리고 매우 조심스럽게 창을 들고 키를 들고 방간을 하나 엽니다.

 

안을 들여다 보니, 인생 동안 내내 무서운 악을 행함으로 얼굴이 흉악하기가 말로 없는 어떤 남자가 벽을 향하여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수는 군병을 보자 기겁을 하며 귀퉁이로 기어서 숨어들어갑니다.

 

훼불을 군병이 가까이 남자에게 가서 훼불을 얼굴에 비치며 말합니다.

바라바야! 일어나라. 이제 시간이 됐다.”

싫다! 나는 이곳이 좋다. 나를 내버려 두라!”

군병을 피하여 기겁하여 도망치는 바라바!!!

이때 군병이 외칩니다. “이놈 조용히 해라. 이놈아. 내가 간수로 있는 동안 같은 행운아는 처음이다. , 죽지 않게 되었다. 너는 십자가 상에서 죽지 않게 되었단 말이다. 생전에 너처럼 행운아는 처음 본다.”

아니, 군졸 나으리? 무슨 말씀입니까? 이해할 없는데요.”

이리 나와 ! 나쁜 . 너는 십자가에 죽어 마땅한 놈인데, 세상에 이럴 수가!”

군병은 바라바를 끌고 복도로 나와 멀리 갈보리 언덕이 보이는 곳으로 이끌고 갔습니다.

저기 보이지. 언덕. 보여 안보여?  저기 갈보리 언덕의 세개의 십자가가 보이냐! 그리고 가운데 십자가에 달린 사람 보여 안보여? 원래 이놈아 십자가는 너의 자리 아니냐? 십자가는 너를 위하여 만든 것이다.

너를 곳에 못으로 박으려고 만들어 십자가이지. 그러나, 너는 이제 자유자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가 대신 자리에 달리게 되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사건 이후에 바라바가 구원을 받았는지 받았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건을 정확히 전개해 나가고 계시는데 모든 전개의 내용이 바로 대속을 알려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누군가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베드로가 말합니다.

의로우신 예수께서 죄많고 불의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

바로 십자가의 목적은 우리 죄를 위한 대속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바라바를 등장시키셔서 우리가 바라바인 것을 알리고 싶어하십니다.

 

바라바는 도둑놈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도둑놈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합니까?

 

바라바는 반역자였습니다. 우리도 반역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의도적으로 반역하며 살아갑니까?

바라바는 살인자였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로 살인자입니다. 얼마나 사람들을 미워하며 살아갑니까? 사실, 우리야 말로 우리의 죄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무서운 죽음에 넣은 주인공들이 아닙니까? 그리고 지금도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있습니까?

 

바라바는 죄수였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완전하신 율법 앞에서 영원한 죄값을 치러야 죄수들입니다. , 영적으로 하면 바라바는 바로 우리 모두를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침례 교회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요 설교자로 여겨지는 챨스 스펼전 목사님께서 임종하시기 직전에 그의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지금까지 우리에게 가르치신 목사님의 신학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이때, 챨스 스펄젼 목사님께서 마지막 힘을 다하여 미소지으며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 분께서 나를 대신하여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인간 역사 속에서 최고의 신학자 사도 바울도 같은 고백을 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박히신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사랑하는 여러분!

시간에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신 예수님을 묵상합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결코 십자가 상에서의 예수님의 고통을 만분지 일이라도 이해할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육체적, 정신적, 영적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먼저 주님의 육체적인 고통을 묵상해 봅시다.

로마 군병들이 채찍하며 고문을 가합니다. 그들의 고문은 상상할 없는 고통을 가져옵니다. 채찍은 끝이 갈쿠리로 되어 있어서 사람의 살점을어냅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에게 당시의 게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을 왕으로 만들어 놓고자신이 제일 미워하는 사람으로 간주한 후에 모든 악독한 말들과 무서운 폭행을 가하는 게임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모독합니다. 굴밤을 때립니다. 곤봉으로 예수님을 후려 갈리고, 그리고 얼굴에 침을 뱉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네가 선지자라면 누가 너를 때렸는지 알아맞추어 보아라.”

           

실컷 장난을 하며 게임을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갈보리 , , 모리아 산으로 끌고 올라갑니다. 예수님의 손을 옆으로 후에 대못을 박습니다. 예수님 머리에는 조롱의 표시로 가시 면류관을 씌우더니, 발에 못을 박았습니다.

, 이제 십자가를 들어올립니다.

이때 모든 몸의 무게가 발로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발로 견디지 않으면 십자가의 고통이 몸에 이르기 때문에 힘을 다하여 발로 견뎌야 합니다. 그러나 못에 박힌 발이 몇분 견디지 못하고 힘을 잃게 됩니다. 그러면 몸의 무게는 박힌 발에서 손으로 오게 됩니다.  그러면 손이 고통을 덜어보려고 힘을 다하지만 역시 몇분 견디고 힘을 잃게 됩니다. 그후 십자가의 고통은 온몸에 임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이 육체적으로 가장 많이 고통을 받는 곳이 바로 십자가의 고통입니다.

로마 군병들이 이러한 육체적 고통을 의도적으로 개발한 것입니다. 로마 법을 어긴 가장 악한 죄수들에게 가장 고통을 주어 공의를 세우겠다고 개발한 형벌이 십자가의 형벌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의 형을, execution , ex: out of: cross: 십자가:   ex-cruciating! 인간의 모든 것이 튀어 나온다는 뜻입니다.

 

놀랍게도 성경에서 십자가의 형벌은 율법의 저주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영원한 법정 앞에서 인간의 죄를 향하신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이 십자가의 형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외치십니다. “내가 목마르다.” 숨을 없습니다. 심한 현기증과 함께 피가 터져 나옵니다. 구역질과 견딜 없는 구토와 함께 몸의 모든 근육에 경련이 일어납니다. 몸에 있는 모든 땀이 흘러나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상태에서는   안에 있는 모든 액체가 밖으로 터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몸에 고통이 임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 하셨습니다.  

 

시간에 또한 예수님의 정신적 고통을 묵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22:42).

이는 예수님이 당하시는 정신적 고통을 말합니다.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그가 기도하는 중에 땀이 핏방울이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땀이 핏방울 같이떨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땀이 핏방울이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몇년 미국의 권위 있는 의사가 의학적으로 증명한 것은 정신적 고통이 극에 달할 사람의 피가 구멍을 통하여 흐를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 예수님의 땀이 피가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와 함께 당하시는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극에 달하였는지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받으시는 잔에는 모든 죄가 담겨 있었습니다. 아담과 이브로 부터의 인류가 지은 모든 죄가 예수님께서 받으시는 잔에 담겨 있던 것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모든 값이 예수님의 잔에 담겨 있었습니다.

 

살인죄, 변태, 도적질, 거짓말, 폭행, 사탄 숭배, 우상 숭배, 욕설, 남의 등을 , 언약을 깨뜨림, 유괴, 음란, 마약 등등, 인간의 모든 죄가 예수님께서 지실 잔에 담겨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치루시는 대속은 세상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 사건으로써 그분의 마시는 잔에 우리의 모든 죄를 넣고 죄값을 십자가에서 치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겟세메네 기도에서 정신적 고통이 너무 무거운지라 예수님께서

아버지! 아버지 잔을 내게서 지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잔이 무엇입니까? 잔은  인류 역사 가운데 세상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지은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친히 담당하는 형량인 것입니다. 죄의 무게가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그러니 주님의 땀이 핏방울이 되어 흘러내릴 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영적인 고통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하나님의 안에 영원히 계셨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영원토록 한번도 아버지와 아들은 분리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 , 그가 대속하여 담당할 잔으로 인하여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재판관 앞에서 잔의 형벌을 담당하셔야 하는 죄수가 되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대신 치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대상이,  잔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외치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께서 죄로 인하여 분리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에 대하여 예수님께 공의의 형벌을 내리십니다.

 

영적인 고통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합니다.

아버지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는 지옥 자체의 고통입니다. 사람의 지옥의 고통이 아니라, 수천 수백만의 지옥의 고통을 홀로 받으시는 순간입니다.

 

아버지는 차마 장면을 수가 없어서, 슬픔을 감추지 못하셔서 하늘이 어두워 지고 바람과 태풍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던 장막이 찢어졌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요구가 만족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치루신 단번의 제사로 하나님의 공의가 영원히 만족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 Once-for-All. 이번 한번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영원히 만족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끝났습니다. 구속이 완성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Once-For-All)이라는 용어는 법정 용어입니다. 죄에 대하여 내가 치루었다 뜻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가 법적으로 만족되었습니다.  이제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분의 계획대로 맘껏 역사하실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영적인 고통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답은 때문입니다. 대신에 ….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가장 완벽하고 공의로우신 법을 만족시키셔야 했는데, 바로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십자가의 형벌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으로 인하여 나는 완전한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나는 예수님 덕분에 영원토록 나의 죄로 인한 죄값을 갚을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갚으셨습니다. 아니 내가 지은 죄의 수백배, 수천배를 갚아 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완전한 자유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구원의 능력입니다.

이에 성경은 선포합니다. 하늘의 영원한 최고 법정에서의 선포입니다. 누구도 법정의 선포를 바꿀 자가 없습니다. 이는 한번 선포되면서 영원히 바뀔 없는 선포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1).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없으리라”( 8:38-39).

 

바울이 외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16-17).

 

예수님께서 이러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갈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이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생의 기쁨을 소유하라고 친히 십자가의 고통을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법적 축복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께서 이루신 일을 헛되게 하는 것이며 나아가 그분의 희생에 대해 감사치도 않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 예수님의 보혈만을 믿고 언제나 하나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시는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 되시길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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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초월명상

동양과 서양철학 사이의 간격을 연결시키고자 하는 시도들 중에 하레 크리쉬나
(Hare Krishna)와 초월명상의 시도가 있다. TM이라고 불리는 초월명상
(Transcendental Meditation)은 특별히 최근에 미국 전역에 퍼져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주목을 받고 있다. 전에는 동양의
신비적인 의식에 대해서 전혀 모르던 사람들이 이제 TM에 대한 자료를 찾고 있
다.

초월명상의 특성
 

초월명상의 표면적인 정의는 매일 두차례씩 20분 동안 긴장완화를 위한 자연
적인 운동이라고 묘사되었다. 이 과정 중에 만트라(Mantra)라는 한 단어가 반복
하는데 이러한 리드미컬한 반복이 긴장완화의 노력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초월
명상을 선전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생물학적, 심리학적 법칙에 근거한 과학적인
운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종교인들이 참여해서 많은 유익을 얻
을 수 있는 비종교적인 활동이라고 반복해서 선전한다.
소정의 요금을 지불하고 초월명상에 가입한 후에 초월명상에 대한 세심한 지도
를 받고나서 그 기법을 성실하게 사용하면 생활의 모든 영역 즉 신체적, 심리학
적, 사회적 그리고 영적인 영역에서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결과를 얻는다는 보고가
있다. 초월명상을 선전하는 사람들은 연구 결과라고 하는 것을 제시하며 정치가,
교육가, 운동가, 연극배우, 심지어는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수많은 증언을 제시하
며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초월명상을 깊이 연구해 보면 그에 관한
모든 것이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초월명상을 진지하게 조사
한 결과 그것은 긴장완화의 도구 이상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종교적인 활동이
다.
초월명상은 그 뿌리를 힌두교에 두고 있다. 실존, 신, 사람, 구원에 관한 이의
모든 가르침은 힌두교의 경전인 베다(Vedas)에서 따온 것이다. 초월명상에 있
어서 의식적 초입례의 포함과 은밀하게 만트라를 사용하여 동양의 사교에서 행
하는 신비적인 의식과 맥을 같이 한다. 초월명상의 세계적인 지도자인 마하리쉬
(Maharish)는 그 기법의 유익을 설명할 때 과학적 언어보다는 종교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초월명상은 심리학적, 신학적, 사회학적인 면에서 의문이 생
기게 한다. 이러한 의문들은 교회가 무시할 수 없는 도전으로서 교회에 제시되고
있다.

초월명상의 뿌리
 

초월명상은 기원상 종교적인 활동임에 틀림없다. 그것의 개념은 힌두교에까지
추적된다. 힌두교 예배에는 수백만의 신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중에
셋만이 특출하게 부각된다. 첫째 브라마(Brahma)인데 모든 것의 창조자이다.
둘째가 쉬바(Shiva)인데 파괴, 질병 그리고 죽음의 신이며 또한 채소와 동물과 인
간번식의 신이다. 인도사람의 생각에 죽음은 다시 태어나는 것의 전조일 뿐이다.
따라서 죽음의 신은 또한 생식의 신이기도 하다. 셋째가 비쉬누(Vishnu)인데
사랑과 자비의 신이다. 그러나 이외에도 모든 곳에 퍼져있고 비인격적인 신적 능
력을 가진 존재로서 브라만(Brahaman)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있다. 초월명상의
문헌은 창조적지성(Creative Intelligence)으로서 브라만을 언급한다.
힌두교에서는 신들을 예배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제공한다. 이것들은 금욕주
의 의식, 의례적인 헌신 그리고 명상 등을 포함한다. 명상은 수세기 동안 예배의
수단으로 주목 받아왔다. 모든 요가의 주된 특성은 명상이다. 힌두교의 전통에
있어서 명상은 신들이 신과 연합하여 탄생과 죽음 그리고 재탄생의 순환에서 도
피하고자 할 때 그들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정의하자면 명상은 초월 혹은 신과의 연합을 경험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으
로 초월명상에서 강조된다. 지금까지 초월명상의 마지막 부흥은 중세기에 있었
다. 중세 힌두교의 가장 뛰어난 학자로서 상카라(Sankara)가 있는데 그는 힌두
교의 뛰어난 옹호자였다. 동양의 명상술을 회복하기 위한 현대의 노력은 스와미
브라마난다 스라스와티(Swami Brahmananda Saraswati)라는 사람과 더불어 가
장 큰 추진력을 일으키고 있는데, 이 사람은 보통 구루 대브(Guru Dev)라고 하며
인도에 있는 4명의 주요 종교지도자 중 하나이다. 그러나 초월명상의 대중적인
지도자는 마하리쉬 마헤쉬 요기(Maharish Mahesh Yogi)인데 구루 데브의 제자
이다. 보고에 의하면 마하리쉬가 구루 데브의 명령을 받아 간단의 명상의 형식을
개발하였다고 한다. 히말라야에서 은둔한 후에 1955년 초월명상을 소개하였다.
인도에서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못하자 그는 그의 가르침을 영국에 수출하였다.
가장 괄목할만한 개종자 중에는 비틀즈(The Beatles)가 있다. 마하리쉬는
1959에 미국에서 그의 일을 시작하였다. 그는 1973년에 아이오와주의 페어필
드에 초월명상의 교육적인 기관으로서 마하리쉬 국제 대학교(Maharish
International University)를 설립하였다.

초월명상의 가르침
 

초월명상은 그 기법이 세워진 개념 때문에, 성격상 종교적인 것은 명약관화한
것이다. 그것의 신학적 전제는 힌두교의 그것이다.

신에 대한 가르침
 

마하리쉬는 힌두교 신학의 전통에 따라서 신 혹은 창조적 지성(Creative
Intelligence)은 영원하며, 무한하며, 알 수 없으며, 성이 없으며, 비인격적인 것
이라고 주장한다. 그 신은 속성, 질, 특성, 형태 등이 없다. 힌두교의 사상에서는
신과 그의 피조물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없다.

실재에 관한 가르침

마하리쉬는 모든 창조물이 신과 하나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범신론적인 관
념을 버터가 우유에 스며들고 수액이 나무에 스며들 듯이 신이 모든 존재에 스며
드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설명한다. 기본적 실재(Basic reality)는 상대적인 것
과 절대적인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들은 단지 한 본질 안에 있는 두 개념이다.
상대적인 것은 신이 창조물 중에 그 자신을 나타내는 모습인 것이지만, 절대적인
것은 그 속성상 신의 개념이 나타나지 않은 채로 있는 것이다. 마하리쉬의 견해
에 의하면 신은 그것이 실재를 구성하는 방법으로 모든 창조물 안에 내재한다.
나무의 줄기, 가지, 잎, 꽃 그리고 열매는 항상 변하지만 신과 같은 수액은 항상
동일하다. 이와같이 이 세상은 단지 환상일 뿐이다. 그것은 실제와 같이 보일 뿐
이다.

사람에 관한 가르침
 

이와 같이 마하리쉬의 견해에 따르면 신은 창조물 중에서 여러 형태로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거한다. 사실 사람의 영혼은 브라만
을 구성하는 거대한 바다 중 하나이다. 각 사람은 자신이 우주 전체의 생명의 일
부인 것을 알아야 한다. 우주적인 생명과 그의 관계는 전체 몸에 대한 각각의 조
직의 관계와 같다. 각 사람은 그가 자신에게 하는 것같이 창조물 안에 있는 모든
신들을 경험하기 위하여 나와야 한다.

구원에 관한 가르침
 

마하리쉬에 의하면 이상과 같은 사실을 인간이 무시함으로써 인간의 모든 문제
가 생긴다고 한다. 그는 환상과 무지의 세계에 묶이게 된다고 한다. 창조물이 실
제라고 잘못 생각함으로써 그는 신과 동일함을 깨닫지 못한다. 그가 이러한 무지
함 속에 있는 한, “업”(Karma)의 생명에 묶이게 되는데 여기서 업은 탄생, 죽음
그리고 재탄생의 순환을 끝없이 반복하게 하는 활동이다. 사람의 구원은 생명의
환상을 아는 것과 사람이 신과 하나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사람이 지금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지 그것은 그의 업(Karma) 혹은 그의
전 생에 있어서의 활동의 결과이다. 혼이 지식에 있어서 창조적 지성(Creative
Intelligence)과 합하지 않는 한, 각 사람은 개인으로서 지속될 것이며 전 생애 업
(Karma)의 열매를 계속 받게 될 것이다. 모든 고난은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 안으로 뛰어드는 방법에 대
한 지식의 결핍은 인간의 생명 안에 있는 모든 질병의 뿌리이다. 그러한 경험이
없이는 사람에게 힘과 지성이 부족하게 된다. 그는 피곤하고, 염려하고 긴장하게
된다. 물론 우리 안에 있는 신적 의식을 접촉하기 위한 마하리쉬의 기술은 초월
명상이다.

초월명상의 방법
 

초월명상이 긴장완화의 기술 이상의 것임은 보다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것의
전제가 종교적일뿐 아니라 그것의 방법도 종교적이기 때문이다. 마하리쉬는 그
의 명상술 자체를 사람 안에 있는 신을 드러나게 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명상의 기술
 

마하리쉬는 명상이라는 용어에 대한 그 자신의 정의를 조심스럽게 보여 준다.
명상은 집중하는 것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정신집중은 그의 기법이 요구하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명상에 있어서 마음은 전적으로 소극적(Passive)이어야 한
다. 어떤 의식적인 노력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 마음은 창조적지성의 거대한 바
다에 자연스럽게 뛰어 들도록 단지 허용되어야 한다. 인간지식의 내용물인 인간
사고의 모든 활동은 절대가 아닌 실제의 상대적 영역 안에 있다. 따라서 명상 안
에 그 마음은 무의식적으로 신의 능력이 주입되어진다. 성공적인 삶을 살리려 계
속적으로 그러한 능력을 받아야 한다.
신과의 일체감을 얻기 위해서는 사고의 중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마하리쉬는 그
의 윤리학에 관한 토론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세계의 각 종교마다 윤리의 규
약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들은 그 시대의 문화를 변화시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와같이 거기에는 옳은 것과 그른 것에 대한 성문화된 절대적
기준이 없다. 초월명상을 통하여 창조적 지성에 의해 영향을 받은 마음만이 불변
하는 윤리와 더불어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

초입례(Initiation Ceremony)
 

초월명상에서 초입례는 성격상 분명히 종교적이다. 그것은 전통적인 힌두교의
예배의식 혹은 푸자(Puja)로 되어있다. 그 의식에서 초월명상의 초보자는 6개의
꽃과 3개의 싱싱한 과일과 하나의 하얀 손수건으로 된 제물을 가져온다. 교사는
이것을 구루 데브의 사진 앞 제단에 놓는다. 촛불과 향의 분위기 아래서 교사는
산스크리트(Sanskrit)로 떠나간 힌두 교사들에 대한 감사의 노래를 부른다. 그는
형상이 없는 브라만의 현현으로서 브라마, 비쉬누 그리고 쉬바의 힌두 트리무르
티(Trimurti)를 예배한다. 그러나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구루 데브에 대해서인
데 그는 작고한 마하리쉬의 교사이다. 그의 사진의 출현은 실제로 예배의 대상으
로서 우상의 개념을 암시한다.

만트라
 

초입례의 마지막 행동으로서 초월명상 교사는 개종자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서 그를 위하여 선택한 비밀 만트라를 반복하기 시작한다. 초월명상을 선전하는
사람들은 만트라는 최면적인 유익을 얻기 위하여 선택한 무해하며 의미없는 단
어라고 선언하지만 그것은 여러 힌두 신들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하여 전통적으
로 사용되어 온 베다(Vedas)에서 따온 단어이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의
미없는 말이 될른지 모르지만 만트라는 힌두교 개념에서 분명한 종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초월명상의 문제점
 

이러한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한 결과 초월명상은 심리학, 신학, 사회학적인 면
에서 문제를 야기시킨다.

심리학적인 문제
 

심리학적 문제의 가능성은 초월명상에 있어서 정신적인 소극적 자세를 강조하
는 데 있다. 이 기법은 명상하는 동안 사람의 마음이 완전 방임상태에 놓이게 되
는 것을 요구한다. 일상적인 생각도 함께 초월하게 된다. 초월명상에서 배출되
는 것은 지성적인 이해의 도를 넘게 된다. 크리스찬에게 초월명상의 방법은 역사
를 통해 주기적으로 나타났던 침묵 의식의 회복이 아니다. 그 기법은 지식이나
이성과 동떨어진 신비적인 경험을 유발한다. 이와같이 초월명상은 우상숭배 이
상으로 해로운 것이다. 성경시대에 귀신은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었다.(신32:17,
고전10:19,20)
초월명상의 또 다른 심리학적인 문제점은 근본적인 문제해결보다는 염려에 대
한 빠르고 쉬운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가능한 심리학적 스트레스
의 원인을 무시하고 오직 임시변통만을 제공할 뿐이다. 초월명상에 대한 외부 학
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초월명상으로부터 얻어지는 유익은 단기간에 그칠 뿐이었
다.

신학적 문제
 

초월명상이 가져다주는 신학적 문제는 다양하다. 마하리쉬는 그의 신학적 가르
침을 창조적 지성의 과학(Science of Creative Intelligence) 혹은 SCI라고 불렀
다. SCI가 가르치는 신, 실재, 사람,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거
스리고 있다. 그것은 인격적 신을 부인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격적인 분임을
보여 준다. 그는 아시고(마6:8,32) , 사랑하시고(요3:16), 뜻하시고(마6:10) 그
리고 활동하신다.(창1:1) 더구나 SCI는 성경 계시에서 근본적인 창조자-창조물
의 구분을 부인한다. 신은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이 신이라고 하는 SCI의 범신론
적인 전제와는 반대로 하나님은 그의 창조물과 구분된다. 창조물은 하나님의 작
품에 지나지 않는다.(시19:1) 하나님은 창조물과 혼동함으로써 SCI 는 옛날 사람
들의 죄를 반복하고 있다.(롬1:23,25)
SCI는 자신을 계시하지 않은 신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자연에서, 양심,
역사, 기적, 예언, 성경,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하신다는
것을 성경은 확실하게 말한다. 마하리쉬는 인간을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신을 구
원할 능력이 없는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신성을 경험할 수 있는 존재로 보
고 있다. SCI의 교리는 인간이 중보자가 필요로 한다는 개념을 제시하지 않는다.
사람은 단지 초월명상을 행함으로써 자신의 구세주가 될 수 있다.
SCI에서는 회개라는 말이 없다. 업(Karma)에 의하면 죄에는 반드시 형벌이
따른다. 거기에는 자비나 은혜를 위한 공간이 없다. 사람의 현재 상태는 그의 업
혹은 과거의 행동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다. 따라서 그는 현재 상태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인다.
그 가르침들이 기독교의 가르침과 이렇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마하리쉬는 기독
교인들이나 어느 종교 추종자도 아무런 갈등 없이 초월명상을 행할 수 있다고 주
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그의 신학에 있어서 수만의 선하고 악한 신들을 수
용하는 힌두의 배경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신을 더 받아들이는 것이
그에게는 문제될 것이 없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의 종교에 무슨 이름을 붙이든
지, 교회나, 절이나 , 모스크나 사원에서 어떤 예식을 따르던지 별로 관계없다고
한다.
힌두교는 그의 거대한 우상으로 세계의 종교를 덮고 있다는 것이 마하리쉬의
관점이다. 따라서 힌두교는 지상에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종교적으로 가장 관
대하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는 베다는 가장 오래된 경전이다. 세계의 신성한
책들이 포함하고 있는 진리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베다에 이미 처음으로 나
타났다. 이와 같이 한 종교의 기본적 진리는 모든 다른 종교의 기본적 진리라고
한다.

사회적인 문제
 

창조적 지성의 과한(SCI)을 퍼뜨리기 위한 마하리쉬의 대담한 계획으로 인하여
초월명상과 관련된 사회적인 문제가 있다. 그는 그의 교리를 세계의 모든 질병들
즉 신체적, 심리학적, 영적,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환경적인 질병에 대
한 치유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1972년에 마하리쉬는 SCI와 초월명상 프로그램을 지상의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세계적 계획을 시작하였다. 그는 매 천명당 SCI의 교사가 한 명
이 있으면 이 계획을 이루는데 충분하다고 계산하였다. 이 사업을 위한 3600개
의 세계적 계획 센터(World Plan Center)를 짓는 프로그램이 진행 중에 있다.
마하리쉬 국제대학, 비디오 테입 프로그램 그리고 초월명상이 소유하고 있는 텔
레비전 방송국들이 이 계획을 위해서 쓰여질 것이다.
대학 외에도 4개의 다른 기관이 세계적 계획의 가지들로서 형성되었다. 학생
들의 국제 사회(Student's International Society)는 젊은이들과 함께 일한다.
국제 명상학회(The International Meditution Society)는 폭넓게 장년층에게 환
심을 사고 있다. 영적 갱생 운동(The Spiritual Regeneration Movement)은 생
활에 대한 영적 접근에 관심을 가진 사람 중 특히 은퇴한 사람들을 위한 모임이다.
창조적 지성의 과학은 위한 재단(The Foundation for thew Science for
Creative Intelligence)은 사업가와 전문인을 위하여 기획되었다.
초월명상을 선전하는 사람들은 개인의 건강과 행복 이상의 것에 관심이 있다고
선언한다. 그들의 야망은 사회제도를 변화시키는 것 이상의 고지에 도달하는 것
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마하리쉬는 주어진 시간에 사회에서 인기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사용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것은 종교 혹은 교육 혹
은 정치일 수도 있다.
이 세대에 초월명상을 진전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무엇이 가장 적합하겟는가?
마하리쉬에 의하면 그것은 정치이다. 이와같이 그는 정부기관을 통하여 초월명
상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그의 정력을 쏟고 있다. 이미 실험적인 조건으
로 초월명상에 대한 가르침이 정부의 경비로 미국의 어떤 학교들 안에서 행해지
고 있다. SCI와 초월명상(TM)학과가 일리노이, 뉴욕 매사추세스, 플로리다 그
리고 캘리포니아 주의 공립학교에서 합법적으로 개설 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지역에서는 염려하는 시민들이 그러한 계획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적절한 것인
지에 관하여 법적 질문을 하고 있다.

초월명상의 도전
 

초월명상은 3가지 면에서 교회에 도전하고 있다.

첫째는 교리의 정확성에 대한 새로운 강조에 관한 것이다. 교리와 실천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것의 신학적 잘못을 보고 초월명상 기법을 사용하고자
하는 유혹을 피할 수 있다.
둘째로 교회는 신자의 생활에서 성령의 역사를 새롭게 하는 일을 강조해야 한다
초월명상은 순수하고 성경에 근거한 성령의 경험에 대하여 믿을 수 없는 대치물에
지나지 않는다.
셋째로 교회는 성경의 시작부터 가르쳐 온 안식일, 안식의 위대한 원리를 다시
선포해야 한다. 일과 놀이에 미친 현대인들은 점점 안식일의 원리를 범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칠일 중에 하루는 쉬고 예배함으로써 신체적, 정신적, 그리
고 영적인 쇄신을 가져다주는 적합한 도구를 인간에게 주셨다. 초월명상을 주장
하는 사람들 밖에서 행해진 어떤 사람들의 연구는 그들의 기술은 아무런 신체적
유익을 주지 못한다고 했다. 사람의 원기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원래 계획을 따른
다면 크리스찬은 초월명상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시1:2는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라고 권한다. 이것이야말로 순수
한 명상의 참된 내용이다. 이러한 묵상의 유익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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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특징

·르네상스 전성기가 끝나가는 16세기 중엽부터 17세기초(1520년경부터 1600년경까지)

·‘정신적인 위기의 시대에 두각을 나타낸 죽어 가는 양식의 마지막 표현’

·르네상스 고전주의의 쇠퇴나 고전주의에 대한 반동(완전한 미를 추구한 르네상스 미술에 대한 돌파구)
( 이전의 고전주의 잣대로는 평가할 수 없는 일탈과 변형의 미술이 이루어짐)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이어주는 교량 역할

·매너리즘의 소산
루터의 종교개혁
지리상의 발견.
지동설의 학설로 그들이 믿던 중심은 해체되고 새로운 언어 갈구.

·베네치아와 스페인 미술에서도 두드러진다
·불안감, 의도적부조화, 몽상적인 분위기, 기괴한 배경, 과정된 인체비례는 시대정신의 표출

파르미지아노(1503-1540)

인체를 늘이는 과장된 표현

목이 긴 성모(1534-40년. 피렌체미술관)
얼굴도 작아서 아마 10등신 정도는 되어 보인다. 아름다움과 우아함의 전형이 형성되자 이를 더 아름답게 하기 위한 과장의 방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장은 어느덧 변형의 미를 낳게 되었다. 이 그림은 성모자와 성인 또는 천사들이 같이 있는 것 같지 않고 마치 채색된 성모자 조각상에 천사들이 모여들고 있는 것 같다. 성모자의 묘사가 너무 인위적이며, 좌대 위에 올려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 인간보다 훨씬 거대하게 느껴지는데 이는 바로 마리아의 뒤에 놓인 큰 기둥 때문이다. 그 앞에 있는 수도자는 오히려 너무 작다. 이제 미술가들은 더 이상 실제같이 보이게 하려는 재현에는 관심이 없는 듯 하다.


로쏘 피오렌티노(Rosso Fiorentino: 1494-1540)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림(1521년. 볼테라성당)
예수의 모습을 찾으려면 우리는 땅에 쓰러질 듯 슬퍼하는 막달라 마리아부터 마리아를 부축이고 있는 여자와 예수의 발을 붙잡고 있는 왼쪽의 남자, 잘 붙들고 있으라고 소리치는 왼쪽 위의 남자들까지 한 바퀴를 돌아야 한다.주인공인 예수와 성모, 요한은 중앙에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늘에 가려있다. 이제 중심은 해체된 것이다.

폰토르모(Jacopo Pontormo: 1494-1557)
예수의 시신을 눕임(1528년. 피렌체 산타펠리치타)
푸른 보라빛을 배경으로 한 붉은 색의 난무와 같은 이미지. 고유색을 부정한 이러한 인위적인 색채와 빛의 효과가 특색이다. 그가 그린 예수의 시신을 눕히는 장면은 보라빛이 감도는 연한 푸른색과 연한 주황, 연분홍, 연한 살색의 배치 같다. 이러한 탈색된 듯한 색들은 그림에서의 색채가 이제는 사물의 묘사를 위한 색채이기보다 색들 자체의 유희임을 잘 보여준다

마리아의 엘리자벳 방문(1528-9년. 피렌체 카르미냐노)
산 미켈레 매너리즘의 여러 특성을 함께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화면 가득히 차지하고 있는 네 사람의 머리와 발은 작고 몸체 중앙만 부풀린 채 커서 마치 공중에 약간 떠 있는 듯이 보인다. 마리아와 엘리자벳은 서로 마주 보고 있으나 뒤의 두 사람은 관람자를 쳐다 보아 네 사람의 관계는 서로 불일치하며, 그들에게 비추는 광선 또한 마리아는 화면 왼쪽에서, 엘리자벳은 화면 정면에서 오는 빛을 받아 분산된 효과를 주고 있다. 이 광선들은 한쪽에서 오는 자연광이 아니며 화가가 임의로 정한 인위적인 국부 조명인 것이다. 이 그림이 더욱 괴이하게 느껴지는 것은 배경과 인물들 간의 비례 때문일 것이다. 인물들은 건물의 3층까지 차지할 정도로 거대하여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이들은 왼쪽 건물 아래에 있는 아주 작은 인물들과 대비되어 있다.
브론치노(Angelo Bornzino 1503-1572)

피렌체 코지모 1세의 궁중화가. 정확한 묘사와 차가운느낌. 생명감의 약동으로 새로운 감각의 발현을 엿볼 수 있음.

시간과사랑의알레고리
작품의 주제는 명확하다. 음탕한 쾌락 추구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도덕적으로 훈계하는 그림인 것이다. 쾌락은 고통을 가져도고, 그것은 쉽게 망각될 것 같지만, 시간은 언제나 진실의 편이어서 진실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글미을 보다 보면 작의가 훈계하겠다는 건지 문제가 된 음탕함을 시각적으로나마 함께보고 즐기자는 건지 도저히 구분이 안된다. 여체에 대한 탁월한 이해와 우미한 표헌 형식으로 그림 속의 관능미를 한껏 고조시켜 놓았다.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색채와 분위기 아래 자신의 타고난 감각을 마음껏 과시하는 작가의 붓길에서 회화라는 예술에 있어 주제가 갖는 의미가 때로 얼마나 왜소한 것인가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톨레도의 엘레오노라와 그의 아들(1550년.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엘레오노라는 메디치가의 피렌체 공작 코지모 1세의 부인이다. 16세기 중엽 피렌체 정치는 여러 면에서 이전 르네상스시대와 많은 차이가 있었다. 공작은 곧 이 지방의 주인이었으며 정치면에서만이 아니라 경제, 문화, 모든 것을 지배하여서자신을 신격화 할 수도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국제 정세에서의 피렌체는 오히려 약세였으니 이러한 신격화는 과시에 불과했다. 인물의 얼굴은 마네킹 같이 차갑고, 부인이 입은 옷은 마치 의상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듯이 옷의 특징 만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인물들은 마치 박제된 듯 고정되어서 주인공의 성격이나 감정을 읽어내기 어려우며 인물이 그림으로부터 소외된 듯이 느껴진다.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년 그리스출신.에스파냐의 화가.)

엘그레코란 스페인말로 그리스사람이라는 뜻. 과장된 인체 비례. 틴토렛토의 영향을 받음

스페인 최초의 위대한 종교화가

왜곡된 형태와 강렬한 색채 감각으로 정열을 표현 : 현실적으로 존재할 리 만무한 형태와 색채를 그리다. 특이한 발상과 묘사력을 추구. 현실감이 상실된 왜곡 추구. 이상한 장소에 광원이 있고, 그 빛이 대상이 되는 인물을 기괴하게 비춤. 규범으로부터의 탈출.

오르가스백작의매장
인망이 두터웠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순간, 성 스테파누스와 성 아우구스타누스가 날아 내려와 백작의 유체를 묘에 안장했다는 전설에 근거하여 그려졌다. 매장에 참석한 톨레도 시민들의 줄을 경계로 천상계와 지상계가 나뉘어져 있다. 비례에 왜곡이 있는 천상계는 필치나 색채 모두 신비스럽다. 백작의 혼은 갓난아기 같은 형태로 천사들에 의해 운반되고 있다.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그리스도에 의한 심판을 받는 장면이다.

게쎄마니에서의 기도(1588년. 톨레도미술관)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는 예수가 공포와 번민에 싸여있는 순간의 기도이다. 데리고 간 세 제자는 잠에 빠져 예수와 함께 깨어있지 못하였으며 이때 이미 유다는 로마인들에게 예수가 있는 곳을 알려준 순간이다. 엘 그레코는 기도하는 예수에게 붉은 옷을 입혀 크게 중앙에 놓고, 왼쪽엔 잠에 빠진 제자들, 오른쪽엔 로마 군인들을 희미하게 암시하였다. 길게 늘어트린 인물의 비례와 명암의 강한 대비, 마치 초점이 없는 듯 흐릿하고 어긋난 윤곽선들, 빠른 필체 등은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매너리스트들의 전형적인 방법이다. . 그는 사물을 배치하는데 있어서 현실의 고정관념을 거의 무시하고 있다. 예수와 천사의 관계는 공간적으로 매우 애매하며, 잠든 세 제자가 있는 곳은 마치 동굴 속 같기도 하고 공기의 막에 싸여있는 듯 비현실적이다. 그리고 푸른 달무리와 밤하늘의 구름은 환상적인 느낌을 배가시키고 있다.
툴레도풍경(1600-10년.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인물 형상이 없어서 표현력이 더욱 큰 것 같다. 짙은 먹구름 아래에서 번개 빛에 실루엣을 드러내는 음산한 언덕과 건물들, 빛의 흐름만이 번쩍이는 검은 하늘은 거의 추상화 같다. 중세 종교화가 지닌 영적인 힘과 현대의 추상회화가 만난 듯한 표현력이다.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마리아의 승천 기증가가있는 크리스트의십자가상

성안드레아와성프란체스코

틴토레토(Tintoretto 1518-1594)

강한명암대비, 격정된 동세감, 불안정한 사선구도

최후의 만찬 (1592-94년. 베네치아, 산 조르지오 마죠레 )
베네치아의 산 조르지오 마조레(San Giogio Maggiore) 교회에 걸려있는 거대한 캔버스화 .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에 익숙해 있는 우리에게 틴토레토의 작품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식탁은 대각선으로 놓여있고, 예수와 사도들 보다 이들의 식사를 시중들고 있는 주변 사람들의 번잡스러움이 화면을 지배한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임을 알아보게 하는 요소는 번쩍이는 두광의 빛이다. 예수의 두광은 마치 자체가 빛을 발하는 힘이 있는 듯 하며, 제자들의 두광은 화면 왼쪽 위의 등불에서 발하는 빛의 역광인 듯 처리하였다. 빛의 원천이 뒤에 있기 때문에 인물들은 모두 어둡고, 따라서 표정을 알기 어렵다. 인물의 역할보다는 빛이 화면의 효과를 좌우한다. 어두운 부분은 거의 색채가 없는 듯 검은 색이며 밝은 부분은 섬광이 빛나듯 즉흥성이 번뜩이고, 등불의 빛이 번져 나가면서 형성하는 천사들의 환영은 초자연적인 신비감마저 조성한다.

최후의 심판 터어키인과 크리스트교도들의싸움

( http://namgane.cafe24.com/detail164_8.html )




아침 이슬과 같은 말



좋은 말은 아침 이슬과 같습니다.

이슬은 양은 많지 않지만
식물에게 큰 영향을 줍니다
특히 사막 같은 지역에서는
이슬이 식물의 생존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좋은 말은
많은 말을 하는것이 아닙니다.

한 마디의 좋은 말은
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줄 수 있으며
때로는 사람을 살리기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내가 한 좋은 말 한 마디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그것보다 귀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슬이 아침에 식물을 적셔주는 것과 같이
좋은말을 해서 사람의 마음을 촉촉히 적셔준다면
좋은말을 듣는 사람은
생명수를 공급 받는 것과 같을 것 입니다.




좋은 말은 소망이 있는 말입니다.

내 생각이 아무리 옳을 지라도
상대를 설득하려는 말과 책망하는 말은
때로는 소망을 끊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모두 다르게
자기만의 은사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내가 잘하는 것이 있다고 해서
상대가 못하는 것을 책망하고
권면하면서 따라 하라고 할 때
상대는 죽어도 못 할 수도 있다는 사실 입니다.




그것을 너무 강하게 요구하면
상대의 소망을 끊어 버리는 것과 같이 됩니다.

실제적으로 부모의 지나친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아이들이
생명을 끊는 경우도 종종 일어 납니다.


소망을 주는 말을 하세요
이슬과 같이 그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말을 하세요
소망을 주는 말은 진실되어야 합니다.




좋은 미사여구를 써서
우유보다 매끄럽게 말을 할 지라도
진실되지 못한 말은 결국
상대를 찌르는 비수와 같은 것이 됩니다.


때에 맞는 옳은 말은 기쁨을 줍니다.

한 마디의 말이라도 아름다운 말을 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식물을 적셔 주는
아침 이슬과도 같이 영롱하게 빛을 낼 것입니다.



- 좋은 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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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죄성 | ▶칼럼
2013.03.28 07:21

 

각자의 죄성 

 

야고보서 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모든 사람은 각각의 죄성이 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은 세상 사람들은 양심으로 자신의 죄성과 싸우지만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능력으로 죄성을 다스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죄성의 근원은 인간 속에 있다. 그 죄성을 죄악으로 만드는 것은 외부의 사탄의 유혹이 있다. 그러나 죄성은 가만히 있지 않고 유혹 거리를 찾아 헤맨다. 즉 사탄을 스스로 찾아 헤맨다. 이러한 죄성은 끊임없이 인간의 본성에서 쉬지 않고 나오는 것이니 성경의 선포대로 모든 사람이 죄인임에 틀림없다.  

 

사도바울은 죄성으로 인한 삶의 열매를 뚜렷하게 선포한다. 현저하다고 한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 5:19-21).

세상 사람들도 이러한 죄악을 볼 때 옳지 않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문제는 이러한 죄악의 열매들이 성도들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면 그 열매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땅바닥에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뿌리 깊은 죄성으로 인하여 각 사람들에게 되풀이 되는 죄악들이 나타난다. 습관적인 죄악이 나타난다. 각 사람마다 어렸을 적에 자라나면서 만들어지는 깊은 죄성이 각각 있다. 이 죄성은 인간의 힘으로 제거할 수 없다. 마치 DNA처럼 그 사람의 기질처럼 되어 버렸다. 개성처럼 되어 버렸다. 그런데 각 사람의 개성이 죄성과 맞물려 있다. 그리스도를 알고 새사람이 되기 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끊임없이 지은 죄악으로 인하여 뿌리 깊은 죄성의 기질(성격, 성품)이 각 사람의 영혼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죄성의 기질이 두개 이상만 되어도 사회 속에서 아주 큰 문제아가 된다. 혈기의 죄성, 음란의 죄성, 거짓말의 죄성, 미움의 죄성, 시기의 죄성, 쾌락을 추구하는 죄성 등을 생각해 보라. 그리고 그러한 죄성이 가정과 사회에 있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다루기 힘들고 악한 사람들인가! 흔히 기질이 되어버린 죄성은 삶의 중독과 연결되기도 한다. 습관적인 구타, 습관적인 음행, 습관적인 도벽 등이 있겠다. 문제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이러한 죄성의 기질이 ‘평생’ 좇아다닌다는 점이다.  

 

성경은 성도들에게 자신 속의 죄성의 기질과 싸우라고 말한다. 어떻게 싸우는가? 그렇다. 인간으로서는 자신의 기질과 싸워 이길 수 없다. 사실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죄성의 기질과 같은 편이 되어 버린다. 우리가 자신의 죄성과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나의 지정의를 포함한 전인격적인 순복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으실 때만이, 즉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대신 사실 때만이 나의 죄성의 기질로 살지 않을 수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들이 ‘늘어나면’ 나의 기질이 점차 성령의 ‘성품’으로 만들어지면 죄성의 그림자가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된다.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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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대학교(총장 김성수 교수) 지명수 전 교수를 자진사퇴 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고려신학대학원 3인교수(한정건, 유해무, 박영돈)의 논문 평가서는 무엇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공개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번에 3인 교수는 고려학원 이사회(이사장 신상현 목사)에 ‘지명수 교수 이단성 시비에 대한 재심요청’을 한 것으로 알려져 공개가 필수적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 한정건 교수                       ▲유해무 교수                       ▲ 박영돈 교수
 
이 문제는 수면 아래 묻혀 그냥 넘어갈 뻔 했는데 지명수 교수가 고신대학교 신학과 교수 5인을 걸어 명예훼손으로 영도경찰서에 고소함에 따라 다시 수면위로 부상하였고 고신대학교가 이사회에 지교수는 이단이 아니라는 보고를 하는 과정에서 논문평가를 한 대다수의 교수들이 지교수를 훌륭한 학자라고 했다는 것은 고려신학대학원의 신학 정체성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기에 신대원 3인 교수는 신학교 5인 교수와 같이 고소를 당할지라도 이 문제를 밝혀야 한다는 신념으로 재심요청을 하고 논문평가서를 공개하는 것 까지 감수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신대학교 지명수논문조사위원회는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3인 외에 2명의 다른 대학의 교수에게도 평가를 의뢰했었다.

고려신학대학원 3인 교수는 애초 고신대학교 경유로 재심요청서를 보냈지만 대학당국이 받아주지 않아 부전지를 붙여 이사회에 낸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이러한 일로 인하여 분개한 유해무 교수는 기독교보에서 조금은 과격하리만치 대학 당국과 이사회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돌아오는 대답은 아직까지 묵묵부답이어서 이대로 가다가는 3인 교수까지 지교수에 대한 평가가 호의적이었다는 누명을 쓸 것이 분명하므로 사실을 밝히고자 재심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렇다면 3인 교수의 평가는 어떠했는지 그 중 한정건 교수가 신학비교를 한 것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에 따라 3인교수는 논문평가를 통해 우리와는 확연이 다른 신학적 주장으로 이단, 혹은 이단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제목

고신의 신앙과 신학

지명수 교수의 주장

성경관

말씀에 대한 신적인 초월성을 믿는다.

초월성을 믿지 않으며, 인간의 이성 한계 내에서만 사고할 수 있다. 성경해석은 과학적 접근법과 칸트 인식론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연구방법이다.

창조론

하나님의 무에서 유에로의 창조를 믿는다. 사도신경: 천지의 창조주를 믿는다.

“성경은 무에서 유에로의 창조를 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6일간의

창조기사

하나님이 행하신 창조행위에 대한 기록으로 믿는다.

‘새 거주자’(행성에서 온)가 지구가 얼마나 아름다우며 살기 좋은지를 교육용으로 관찰한 기록이다.

인간의 창조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다.

외계에서 온 ‘새 거주자’이다.

원죄론

원죄로 인한 전적 부패와 타락을 믿는다.

전적 부패와 타락을 믿지 않는다.

미래의

하나님의나라

이미 이루어진 나라와 또한 재림 후에 완성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믿는다.

이미 이루어진 나라만 믿고, 재림과 심판 이후에 이루어질 미래의 하나님 나라(천국)를 믿지 않는다.

영혼의 불멸

영혼의 불멸의 믿는다.

영혼의 불멸을 믿지 않는다.

사후의 세계

사후의 세계를 믿는다.

사후의 세계를 믿지 않는다.

재림

재림을 믿는다.

재림을 믿지 않는 것같이 보인다.

재림 때에 있을

우주적최후심판

사도신경의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를 믿는다.

최종 심판을 믿지 않으며, 성경에 언급된 심판은 국지적(지역적)이요, 일시적이다.

 

 

출처: 코람데오닷컴

 

<앵커>

문자 메시지를 통한 소액결제 사기, 이거 조심해야 한다고 자주 경고해 드렸습니다만 이런 사기가 진화하는 속도를 따라가기가 버겁습니다. 또다시 강력한 변종이 나타났습니다.

정영태 기자가 단독 보도합니다.

<기자>

미환급 보험금을 돌려준다거나 미납된 전화 요금을 조회하라는 문자 메시지.

전형적인 소액결제 사기와 달리 문자에 나온 인터넷 주소를 눌러도 즉각 돈이 빠져나가지 않았습니다.

[변종 스미싱 피해자 : 눌렀는데 아무것도 안 나오고 뭔가 자꾸 다운로드만 되더라고요.]

숨겨진 해킹 목적을 알아보기 위해 보안 전문가들과 함께 역추적해봤더니, 해커들의 서버로 연결됐습니다.

문자에 나온 인터넷 주소를 무심코 눌렀던 피해자들의 전화번호와 단말기 번호 수십 개가 나옵니다.

전화번호별 정보로 들어가자 휴대전화에 저장해뒀던 개인 정보가 쏟아져 나옵니다.

주민등록번호 등이 나와 있는 신분증을 찍어둔 사진, 비밀번호를 적어둔 메모, 심지어 공인인증서 파일까지 해커들 서버에 고스란히 전송돼 있습니다.

모두 인터넷뱅킹에 필요한 정보들입니다.

이런 정보를 휴대전화에 저장해두는 사람이 많다는 걸 해커들이 노린 겁니다.

[봉용균/보안전문 레드얼럿 팀장 : 이러한 공인인증서를 압축형태로 변형을 해서 공격자의 서버에 전송을 하게 되는 거고요. 마찬가지로 SD카드에 메모라는 파일을 탈취를 하게 되고.]

피해자들은 알 리가 없습니다.

[(휴대전화에 혹시 공인인증서가 저장돼 있습니까?) 어머! 네. 이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 변종 스미싱 조직은 서버를 자주 바꾸면서 해킹시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피해 사례는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뾰족한 대책이 없습니다.

일단은 각자 신분증 사진이나 보안카드 내역, 공인인증서 파일과 비밀번호 같은 중요한 정보는 전화기에 저장해두지 않는 것이 안전합니다.
 
고난에서 復興으로 부활 할 때

고난주간이라 나는 이번 한 주간은 특히 말씀과 기도 중심의 삶을 살기로 하였다. 그런 실천 사항가운데 하나는 서울의 그 교회, 특새 말씀을 경청하는 일이다. 오늘 아침도 나의 스케줄대로 한 설교자의 설교를 경청하게 되었다. 헌데 그는 설교자는 아니고 한 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인 분이셨다. 그의 설교는 일종의 간증(주의 은혜로 소아마비 장애자가 대학교수로 서다)이었고, 또한 목발을 짚은 것을 보아 장애우가 분명하였다. 그를 통해 어떤 특별한 메시지를 찾는 중에 어느새 나는 그의 간증에 점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교회의 본래적 모습, 영적 경건의 실체를 보는 듯하여 이 글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다. 필자는 지금도 공부하면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부흥운동사”이다. 물론 부흥을 운동과 연관 짓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지만, 부흥이 한 시대에 지속적으로 나타났던 것을 염두에 두고 보통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부흥을 일으키셨다. 사도시대에는 베드로, 요한 등을 통해 성령의 부흥이 임하였으며, 초대교회 시대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순교자 이그나티우스를 비롯하여 암브로즈, 어거스틴 등을 통해 교회가 부흥되었다. 또한 중세시대의 부흥은 그레고리1세, 베네딕트 등이 그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레고리1세는 교황권의 기초를 확립한 인물이었지만, 교회의 부흥을 주도하며 교회를 개혁하고, 빈민들을 구제하며, 영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도 하였다. 종교개혁시대에는 말할 것도 없이 마틴 루터를 비롯한 울리히 쯔빙글리, 존 칼빈이 그 주역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근세시대에는 18세기 영국의 존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가 산업혁명으로 침체된 교회에 영적 활력을 주었고, 미국에서는 조나단 에드워즈, 길버트 텐넨트 등을 통하여 잠자고 있었던 미국교회를 흔들어 깨었다. 그 이후에 미국은 찰스 피니를 비롯하여 드와이트 무디에 이르기까지 부흥을 통해 교회는 다시 침체에서 회복으로, 그리고 세계선교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 짧은 지면에 세계부흥의 역사를 다 포함 시킬 수는 없다. 다만 부흥의 발로에 대해서 잠시 나누고자 한다.

필자가 그동안 부흥에 관해 공부하며 얻은 결론 가운데 하나가 있다. 부흥이 일어나는 때는 여러 원인이 있는데, 즉 1)교회가 영적 침체되었을 때 2)교회가 핍박가운데 처하기 전에 3)교회가 복음을 전해야 할 때 등. 하나님은 교회를 너무도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교회가 침체되었을 때, 성령님은 슬퍼하시고 어찌 하든지 그 침체가운데서 다시 소생(Revival)케 되기 위한 기회를 만드신다. 그러나 인간은 그 때가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 없어 단지 주님 앞에 기도로 나갈 뿐이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한 사람의 부흥으로 교회가 전혀 새롭게 부흥되는 것을 역사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그 몇 가지 예를 들면, 18세기 초 미국은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교회는 이전의 경건이 사라졌고, 교회에서는 이성주의적인 설교가 득세하였으며, 젊은이들은 술과 도박 등으로 방탕한 삶을 살아가며, 교인들은 더 이상 기도하지 않았다. 그러한 때에 매사추세츠, 노샘톤의 한 교회에 조나단 에드워즈가 외조부님의 뒤를 이어 목회자로 부임 하게 되었고, 그가 목회하는 동안, 1734년에 그 교회와 관련된 몇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두 젊은이가 아무 이유 없이 죽었고, 다른 하나는 그 지역의 점술가였던 한 여인이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교회는 영적으로 긴장감 가운데 있었으며, 그리고 에드워즈는 주일 메시지를 복음(칭의론)에 관해 설교하였을 때, 그 말씀을 들은 청중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면서 부흥이 일어났다. 이 부흥은 인근지역으로 확대되었고, 여러 교회들에 영향을 미쳐 교회가 새로워지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한창 일 때 교회는 영적 감각이 사라졌고, 교회 안에는 이신론자들로 가득 찼었다. 더 이상 교회를 통해서는 복음 메시지를 들을 수 없었고, 이때 혜성같이 나타난 인물이 존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였다. 이 둘은 옥스퍼드대학에 절친한 친구였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가 아니라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옥외집회를 통해 말씀을 증거 하였다. 특히 휫필드는 설교의 거장으로서 그의 설교를 5분만 들으면 듣는 이들은 누구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경험을 하기도 하였다. 영국이 산업혁명으로 인해 사회가 가장 어두울 때, 노숙자들이 생기고, 가정이 허물어져 가고, 돈이 없이 병원에 가지 못하는 이들로 인해 사회가 혼란 할 때, 그들은 병원사역, 감옥사역, 학교사역 등을 통해 사회를 개혁해 나가기도 하였다.

한국의 경우, 1885년에 정식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였다. 그러나 선교의 큰 실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원산에 거주하였던 미남감리회 로버트 하디 선교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본래 의사였지만, 후에 복음 선교사가 되어 원산 지역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였지만, 자신의 교만, 자만 등으로 인해 한국인을 무시하고 외면했을 때, 그는 가장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처했다. 이때 1900년 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 사건으로 한국에 피난 온 두 여선교사를 초청하여 말씀을 공부하고, 간증을 들었을 때,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죄를 통회 자복하는 회개를 하였고, 그때 부흥을 경험하였다. 이때가 1903년 8월이었다. 그리고 이 부흥은 지속적으로 이어져 1907년 1월 평양 대부흥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소돔성 같은 평양이 거룩한 聖市로 변화되었다.

우리는 이 몇 가지 사례를 통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교회가 모이기 시작했다는 것. 조나단 에드워즈가 목회하던 노샘톤 교회에서 교회 안에 영적인 조짐이 일어났을 때, 교인들은 모여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에서 웨슬리와 휫필드가 말씀을 증거 할 때 사람들은 빈 공터에 모여 그 말씀을 사모하여 경청하였다. 또한, 1903년부터 비롯된 한국의 부흥도 교회는 모이기 시작하였고, 말씀을 사모하며 기도에 진력하기 시작하였던 것. 평양의 경우, 초기 선교사들은 무디를 통한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이기에 그 모임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으며, 그러나 진정한 성령의 부으심은 하나님의 주권가운데 일어났던 것이다. 이때 길선주 장로를 사용하신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영적으로 깊은 나락에 떨어졌다. 강단의 말씀 권위가 사라졌고, 세상은 교회를 외면하고, 그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으며, 교인들은 더 이상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서로를 향해 정죄하며 비판적이다. 그리고 도덕적, 윤리적인 책임을 물어 특정한 사람을 정죄하며, 그가 퇴임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 외친다. 물론 그는 자신의 잘못에 반드시 책임져야 한다. 그렇다고 우린 그만 탓할 필요가 없다. 우리 모두가 공범들인데 말이다. 이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하리라.

하나님은 당신의 때에 교회의 부흥을 위해 한 사람을 세우신다. 마치 베드로를 세우듯 주님의 종을 세울 것이다. 때로는 루터와 같은 개혁적 성향을 가진 이를 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말씀중심의 설교자를 세워 부흥을 도모하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실패자였던 하디 같은 종을 세워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자존심, 자만, 교만한 마음을 깨트려 교회가 말씀으로, 복음으로 회복하는데 쓰임을 받게 하실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아무도 모른다. 오직 아버지 한 분 밖에는 알 수 없도다.

필자는 오늘 한 무명의 간증자를 통해서 그 희망을 보게 되었다. 그가 간증 후에 울먹이면서 마지막 기도했던 내용은 지금도 내 귀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오, 주님 이 교회가 회개하고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 힘없는 자들이 가득 차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라고. 이는 부흥의 결과이다. 진정한 교회의 부흥이 일어나면 누굴 향해 정죄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대신에 서로 용서하며 용납하며 사랑하며, 그리고 자신을 개혁하며, 더 나아가 이 사회를 개혁하는데 까지 나가게 된다. 지금은 고난에서 부흥으로 부활 할 때이다. 바로 그 교회가, 아니 우리교회가 그런 교회되길 이 고난주간에 간절히 기도해 본다.

“주님, 당신의 주권으로 한 명의 지도자가, 한 교회가 회개하고 주님 앞에 서게 하소서!”

13 3 28(목) 도현/조경현

출처: USA아멘넷 독자공간 게시판


전도 - “타이타닉 침몰 때까지 전도했다.”

코람데오 ㆍ 2013-03-27 (수) 23:55 IP: 70.xxx.174 ㆍ조회: 13      

“타이타닉 침몰때까지 전도했다”
무디교회 부임차 배에 탔던 하퍼 목사의 감동 스토리...생존자들 증언

- 전도에 도움이 될 것 같아 퍼온 글입니다. -


4월 15일은 타이태닉호 침몰 100주년 된 날이다.
처녀항해에 나선 타이태닉은 1500여명의 목숨을 앗으며 침몰해갔다. 존 제이콥 애스터 4세나 몰리 브라운을 비롯한 수많은 명사들의 이야기가 영화화됐지만, 비록 몸은 죽어가도 숱한 영혼을 구조한 한 영웅적인 목회자 이야기가 더 심금을 울린다.

존 하퍼 목사(사진)가 6살난 딸과 함께 타이태닉에 올랐을 때, 부흥강사 D.L. 무디의 이름을 딴 무디교회에서 설교를 할 계획이었다. 당대 유명교회의 하나였던 이 교회는 차기 목회자로서 그를 초빙하여 그의 도착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글라스고와 런던에서 두 교회를 목회했던 하퍼는 이름있는 설교자였다. 그의 설교 스타일은 부흥강사 형이었다. 한 동네 목사는 이렇게 전했다. “그는 언제나 수많은 청중을 대하던 위대한 옥외 전도자였다...그는 다양한 방해자들을 다룰 줄 알았고 성경진리를 슬기롭게 그러쥐고 공격자들을 성공리에 설득할 수 있었다.”

당시 아내를 잃은 홀아비였던 하퍼는 배가 빙산에 부딪친 때, 어린 딸을 구명정에 태우고는 같이 탈 수도 있었지만 자신을 구조하는 대신 마지막으로 수많은 영혼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기회로 삼았다. 그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달려가 열정적으로 전도했다.

배에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는 여성들, 어린이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복음의 생명선에
태우기 시작했다. 한 남성이 도움을 호소하자 자신의 구명재킷을 벗어 입혀주면서 “나보다 당신이 더 필요하오”라고 말했다.

배가 빠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예수님께 드릴 것을 호소했다. 배는 얼음 투성이 바다 깊이 잠겨갔고 수 백명은 구조의 여망이 없는 가운데 해표에 둥둥 떠 있었다. 하퍼는 몸이 식어가는 그때까지도 최선껏 이리저리 헤엄치며 사람들에게 다가가 복음을 전했다. 그는 체온저하로 곧 목숨을 잃을 위기였지만 영광스러운 복음의 증인으로서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

그로부터 4년 후, 캐나다 온태리오에에서 생존자 모임이 열렸을 때, 한 남성은 당시 대서양의 얼음 바다 한 가운데서 자신이 대면했던 하퍼에 대한 추억을 회고했다. 그는 뱃조각에 매달려 있었는데 하퍼가 다가와“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세요. 그럼 구원받습니다”라는 말을 두 번 들었다. 그는 한 번은 거절했지만 발 아래의 시퍼런 바닷물을 내려다보며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하퍼가 물 속으로 잠겨갈 무렵 이 사람은 되돌아온 구명정에 의해 구조됐다. 그는 온태리오 모임에서의 연설을“저는 존 하퍼의 마지막 피전도자입니다(I am the last convert of John Harper)”라고 맺었다.

타이태닉이 출항할 당시 배 안은 승선권의 금액에 따라 3개 등급으로 나뉘었었다. 그러나 비극 직후 영국 리버풀의 화이트스타 라인사는 승객들을‘구조된 사람들’과‘실종된 사람들’의 두 부류로 나누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서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 세월을 보낼‘구원받은 영혼들’과 ‘잃어진 영혼들’의 두 부류로 나누고 있었다. 확실히 하퍼는 때를 얻든지 못 얻었든지 복음 전파에 힘쓴 본보기였다.


출처: USA아멘넷 독자공간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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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을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합니다.


제 1언의 말씀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23:34)
예수님은 처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분입니다. 구약에는 아버지란 말이 없으나 예수님은 아버지라 부르시면서 우리에게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주기도문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도는 아버지가 두 분이십니다. 육신의 아버지와 영혼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은 사랑의 인격적 참여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모시게 될 때 내 모든 문제는 해결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1.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① 죄 많은 여인의 죄를 속죄하여 주실 때 그는 구원을 받고 평안히 돌아갔습니다. (눅7:36-50) ② 중풍병자의 죄를 사죄하여 주실 때 곧 건강하여 졌습니다. (마9:1-8, 요5:14) ③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만 속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26:28)
2. 예수님은 원수들의 죄까지도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모든 인간들을 위한 죽음 이셨습니다.
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이들의 죄를 용서 하셨습니다. (눅23:34) ② 빌라도와 종교 지도자들의 죄를 용서 하셨습니다 (요19:6-23) ③ 베드로와 가룟유다의 죄를 용서 하셨습니다. (마26:15-69)
3. 우리에게도 용서하라고 친히 말씀 하셨습니다.
①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골3:13) ② 주기도문에서 명령 하셨습니다. (마6:12) ③ 일흔 번씩 일곱 번 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마18:21-22)


제 2언의 말씀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우리는 양쪽에 달린 두 강도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양쪽에 십자가에 달리고서도 그 죄를 깨닫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림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강도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39절)고 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진심이면 얼마나 다행이었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에 보면 비방하였다고 했습니다. 객관적이요, 비판적이요, 야욕적인 말이었으니 얼마나 불행합니까? 현재도 십자가를 신앙적으로, 주관적으로, 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강도처럼 비방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했습니다. 지금도 강도처럼 죽어가면서도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비방하는 자가 많습니다. 고난과 십자가에서는 선한 말이 나오기 힘든 모양입니다만 중앙에 계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고 구세주임을 알았다면 구원을 호소하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강도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1. 예수님은 낙원의 주인이심을 의미합니다.
① 낙원을 예비하러 가셨습니다. (요14:1-6) ② 영원한 천국의 주인이십니다. (계22:1-6)
③ 하나님이 지으신 집은 세상의 집과는 다릅니다. (고후5:1-3)
2. 낙원에 제일 먼저 간 사람은 강도입니다.
① 회개와 기도함으로 낙원에 갔습니다 (눅23:41-42) ②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눅23:40)
③ 예수가 의인이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함으로 낙원에 갔습니다. (눅23:42)
3. 주님이 가시고 우리가 갈 낙원입니다.
① 거기서 세세토록 왕노릇 합니다. (계22:5) ② 세상 끝까지 함께 계십니다. (마28:20)
③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삽니다 (요14:3)


제 3언의 말씀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27)

세 번째 주님의 눈동자가 집중된 것은 여기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계신 곳입니다. 25절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클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등 네 여인이 울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울고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면서 부탁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격은 여인입니다.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하게 되어 남편에게 송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제 예수님을 먼저 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은 한없는 슬픔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친히 효도의 계명을 지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① 어려서는 부모님과 함께 성전에 예배하러 갔습니다. (눅2:41-51) ② 예수님이 효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엡6:1) ③ 십자가상에서도 어머니를 생각하셨습니다. (요19:26-27)
2. 기독교는 효도의 종교입니다.
① 십계명 중에 인간에게 주신 첫 계명이 효도입니다. (출20:12) ② 고르반의 진리를 설명하셨습니다. (막7:11) ③ 효도하는 자에게 장수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신5:16)
3. 가상칠언중에 3언의 말씀은 우리에게 주시는 산 교훈입니다.
① 부모님에게 순종을 해야 합니다. (마21:28-31) ② 부모는 타락과 실패의 자식이라도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눅15:11-24) ③ 스승의 어머니는 내 어머니요, 성도는 주 안에서
한 형제요, 부모입니다. (막3:31)


제 4언의 말씀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27:46)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말할 수 없는 고뇌에서 비롯된 절규였습니다. 죄 없는 자가 정죄를 당하고 허물없는 자가 박해를 받으며 은혜 베푸는 자가 잔인하게 죽어가는 일이 역사상 처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죄를 홀로 지시고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시는 순간 주님으로서는 매우 심각한 세 시간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주님은 세상에 대하여는 더 할 말씀이 없고 성경에 응하기 위한 말씀을 하실 뿐이었습니다. 이런 절규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도 우리와 같은 육신의 몸을 입고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
1. 예수님의 이 순간은
① 흑암의 권세가 잠깐 이기는 모습입니다 (마27:46) ② 하나님이 얼굴을 돌이키신 순간입니다 (시22:1) ③ 하나님과 인간의 담을 허시는 순간입니다. (엡2:14-18)
2. 4언의 산 교훈
① 버림받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십자가의 최고봉의 순간입니다. (딤전2:4) ② 죄인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다는 산 교훈입니다. (계21:8) ③ 예수님이 인간 대신 버림을 받으시는 순간입니다. --------------- (사53:4-6)
3. 엘리, 엘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요8:29) ② 예수님의 전폭을 하나님께 맡기시는 고백입니다. (대하20:20) ③ 충성과 봉사의 순종으로 끝까지 맡기시는 모습입니다. (사53:7)


제 5언의 말씀 : "내가 목마르다!"(요19:28)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입증하고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내가 목마르다" 하심은 곧 목마른 인생을 부르시는 뜻도 있습니다. 인생은 어디서 무슨 물을 마셔도 그 심한 갈증을 해소할 길 없으나 주님이 주시는 물은 영원한 갈증을 해소합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 : 1).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거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 13-14)고 말씀하셨습니다.
1. 목마른 우리 인생을 위하여 주님이 목말라 주셨습니다.
① 우리의 심령이 목마릅니다 (사55:1) ② 우리의 애정이 목마르고 있습니다. (요일3:16)
③ 경제적으로 목마르고 있습니다. ----------------------- (신28:15-19)
2. 목마름을 해갈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① 하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사55:1-3) ② 예수님을 철저히 믿어야 합니다. (요4:14)
③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 (행2:1-4)
3. 세상엔 목마른 사람이 많습니다.
① 생명수를 주어야 합니다. (마10:40-42) ② 사모하게 해야 합니다 (마5:6)
③ 예수님께 인도해야 합니다. --------------------------- (요7:37-38)


제 6언의 말씀 : "다 이루었다!"(요19:30)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가죽 채찍으로 서른 아홉 대의 매를 맞으셨습니다. 가죽 채찍 끝에는 다섯 갈래의 가지가 있고 그 가지마다 낚시와 같은 쇠고리가 달려 있어서 가죽 채찍이 살에 닿을 때마다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터져 엉켜 붙었습니다. 또한, 가시관을 쓰신 머리와 대못에 박힌 양손과 양발에서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무지한 군병의 창에 옆구리를 찔리셔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주님의 옷은 군병들이 제비 뽑아서 나누어 가졌고, 벗기운 채로 주님은 십자가에 높이 매달려 계셨습니다.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분이 바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죄도 없으시면서 가장 죄 많은 자처럼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것입니다. 그가 하실 일을 이제 다 이루신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완성자 이십니다.
① 순종을 완성하셨습니다. (빌2:6) ②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마5:44)
③ 구속을 완성하셨습니다. ----------------------------- (요19:30)
2. 인간은 다 이루고 갈 수가 없습니다.
① 자기의 계획을 다 이루고 가는 이가 없습니다.
② 자녀나 부부가 가진 꿈을 다 이루고 가는 이가 없습니다.
③ 교회나 국가의 꿈을 다 이루고 가는 이가 없습니다.
3. 못다 이루는 우리 인생은 다 이루신 주님을 믿고 가야 합니다.(벧전2:24)
① 마귀는 우리의 완성을 방해합니다. (마4:1-10) ② 예수님은 마귀의 권세를 이기고 다 이루셨습니다. (요16:33) ③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와 확신의 말씀이 됩니다. - (계20:1-3)


제 7언의 말씀 :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예수님은 아버지란 말씀을 즐겨 사용하셨으니 산상설교 가운데서 17번, 유월절 다락방에서 45번(요 14, 16장), 요한복음 17장에서 6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에서 마지막 말씀을 아버지로 끝맺으셨습니다. 아버지란 명칭은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자신을 갖게 하는 이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들은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해도 아버지 손에 맡기고 부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체로부터 분리되려는 찰나에 있는 그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셨습니다.
1. 사람은 세 가지 형태로 창조되었습니다(육, 혼, 영). ① 육으로 지어진 몸은 물질과 교제하고 (갈5:19-21) ② 혼은 사람의 정신으로 자기를 담고 있습니다. (살전5:23) ③ 영은 하나님이 임하시매 신령한 세계에서만이 통합니다. --- (롬8:10-11)
2.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이십니다.
① 예수님의 아버지이십니다 (눅23:46) ②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엡1:3)
③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의 아바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 (롬8:15-17)
3.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내 영혼이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① 천하보다 귀한 것은 생명(영혼)입니다 (마16:26) ②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성도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요1:12)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께 인도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 (요14:6)

/자료ⓒ창골산 봉서방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4-6) "

하나님은 제1계명에서 하나님은 한분 이시며 자신외에는 어떤 신도 경배 하거나 상상해서는 안된다고 선포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본성이 무엇이며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어떤 육신적인 생각도 품지 않으려면 어떠한 예배로 하나님을 높여야 하는지도 더 분명하게 선포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합당한 예배를 미신적인 의식으로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어리석은 지성이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조잡한 개념을 만들어 낸 뒤에 고안해 내기 쉬운 육신적이고 경박한 의식을 철저히 멀리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합당한 예배 즉, 하나님 자신이 정하신 신령한 예배를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여기서 금지된 가장 심한 악은 외적인 우상 숭배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자신의 권위가 손상되거나 멸시를 당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겠다고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에 필적할 대상을 용납하실 수 없으므로 자신을 질투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위엄과 영광을 -누군가 그것을 피조물이나 새긴 우상으로 바꾸면- 지키실 것이며 그것도 짧은 기간의 단순한 형벌을 통해서가 아니라 조상들의 불경함을 본받는 삼, 사대의 후손들에게까지 미치는 형벌을 통해 지키실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이들은 먼 후손까지에게 끊임없는 자비와 인자를 베푸시겠다고 선포하십니다

 

포도나무선교회/개혁주의마을/Grace

"예수가 어머니 연배의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

 

성경 통독의 대가 노우호 목사, <다빈치 코드>는 "무식의 소치" 비판

 

▲ 노우호 에스라하우스 원장 ⓒ시사포커스 진민용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혼인을 맺었다는 내용의 영화 <다빈치 코드>가 처음부터 ‘어불성설’이라고 밝힌 한 목사의 주장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에스라하우스의 원장으로 30년 이상 성경 통독 운동을 전개해온 노우호 목사(예장통합, 마산 샤론교회 시무)는 최근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더 많았고 따라서 청년 예수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다"며 <다빈치 코드>의 내용을 반박했다. 또한 노 목사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를 풀어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던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로 알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노 목사의 비판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것으로 원문을 그대로 옮겼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를 풀어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던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로 알고 있는데, 이는 성경을 정밀하게 보지 못한 사람들의 경솔함에서 비롯되었다

 

첫째,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지도 않았다. 이 어처구니없는 오해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으로 착각한 데서 비롯되었다.

 

둘째,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가 아니었다. 창녀로 볼 수 있는 죄 많은 여인은 베다니에 살고 있던 나사로의 누이동생 마리아였다.

 

셋째, 막달라 마리아는 나이가 상당히 많은 여인이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을 뒷바라지를 하면서 섬겼던  여러 여인들이 이름이 나올 때 언제나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이 제일 먼저 나온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연배 비슷

 

서양과는 달리 동양 사람들의 관습은 나이가 많은 사람의 이름을 앞에 기록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 모친 마리아와 거의 같은 나이였거나 그 이상이었다.

 

예수님이 자기 어머니 뻘이나 되는 고령의 여인과 결혼을 했다는 댄 브라운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삼류 코미디도 못되는 이야기다.

 

막달라 마리아는 재력이 있는 중년이었고 아마도 과부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녀는 한때 일곱 귀신이 들어가서 폐인이 될 뻔했는데, 그녀를 억압하던 일곱 귀신을 예수님께서 쫓아내어 주심으로 정상적인 회복되시어 그날부터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다.

 

그녀는 자기의 소유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섬겼다. 예수님의 삼년 사역에 들어간 경비 중 상당 부분을 막달라 마리아가 담당했고 세베대의 부인 즉 야고보와 요한의 모친이 일부분을 담당했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눅 8:2~3)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라는 여인은 젊은 여인이라고 볼 수가 없다. 헤롯이 자기의 내탕고를 맡을 청지기를 풋내기 젊은 아이를 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나이 50이 덜된 사람이 헤롯왕의 청지기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요안나 역시 나이가 대체로 50대였을 것이고 당시 상당한 신분에 있었던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의 이름보다 앞에 거명되는 막달라 마리아의 나이도 최소한 50대 여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가 아니었다

 

성경 어디에도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는 기록이 없다. 그럼에도 그녀가 창녀로 언급되는 이유는 591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부활절 설교를 하면서 누가복음 7장에 등장하는 마리아를 베다니 마리아인 줄 모르고 그녀를 창녀이며 막달라 마리아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을 더 자세하게 살펴본 사람이라면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마리아는 베다니의 마리아 즉 나사로의 누이동생이었고, 그 장소는 베다니의 나사로 집 가까이에 살고 있었던 바리새인 시몬이라는 문둥병 환자의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베다니라는 동네는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한 가난하고 소외된 마을이었다. 그곳에는 불가촉 질병을 앓는 사람들이나 죄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동네였다. 그래서 그 동네의 이름도 '벧-아니' 즉 베다니 , '슬픔의 집'이라는 뜻이다.

 

병든 나사로 역시 나병환자였다는 것이 정설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에게는 여동생이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마르다'이고 다른 한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였다.

 

예수님은 나사로와 오래 전부터 사귀어왔고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는 당연히 나사로의 집을 찾았으며 당연히 그의 여동생들도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으며 고마운 분으로 존경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집에 자주 출입하는 것을 그 이웃에 사는 바리새인 시몬이라는 문둥병을 앓는 사람이 자연히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때 앓던 병으로 죽어 장사까지 지냈던 나사로를 능력으로 살려내신 사건이 있은 후로부터 예수님은 베다니 마을에서 매우 유명해졌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평소에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기는 했지만 그래도 시몬은 혹시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게 되면 무슨 은혜를 받을 수 있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게 되었고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꺼림이 없이 그 초대에 응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때 시몬의 이웃에 살고 있었던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그 자리에 나타나서 예수님께 다가가 예수님의 머리에 한 방울을 떨어뜨린 후 나머지 향유는 한꺼번에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를 풀어서 예수님의 발을 닦고 있었다.

 

 

향유를 깨뜨린 마리아는 막달라가 아닌 '베다니'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더라."(요 11:1~2)

 

복음서마다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댄 브라운은 복음서를 읽지 않고 무슨 책을 읽었는지가 매우 궁금하다.

 

복음서의 어떤 부분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 하고 다른 곳에서는 발에 부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런 경우는 간단하다. 처음에 한 방울은 머리에 붓고 나머지는 발에 부었던 것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마 26:7)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막 14:3)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눅 7:38)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눅 7:45)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눅 7:46)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요 12:1~3)

 

성경을 제대로 보지 못한 댄 브라운이 엉뚱한 이론을 만들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엉뚱한 근거로 소설 쓴 댄 브라운만 탓할 일은 아닌 듯

 

하기야 우리 한국의 찬송가에까지 그런 실수를 할 정도로 성경을 잘 모르니 댄 브라운만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리 찬송가 346장에 보면 꼭 오해하기 좋게 되어 있다. "값비싼 향유를 주께 바친 막달라 마리아 본받아서"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라 베다니 마리아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가 향유를 가지고 간 것은 예수님께서 무덤 속에 계실 때 그 시신 즉 미이라에 바르기 위하여 준비했었던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인지 베다니 마리아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쓴 책이 그렇게 팔리고 또 그런 것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고 하는 것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우리 목사들이 그 동안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서 이런 끔찍한 일이 발생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다빈치 코드>라는 책은 오늘날 서방 기독교가 얼마나 무식한지를 시험하고 증명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자료: http://ezrahous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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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위하여 최송연



            나의 머리에 넘치도록 겹겹이 쌓여만 가는 추악한 생각들은
            기어이,
            정결한 당신 머리에 
            가시관을 덮씌우고 말았습니다
            당신의 두 손에
            대못을 박은 것도
            나의 두 손으로 움켜쥔 
            탐욕이 부른 
            잔혹하고도 모진 대가였습니다
            갈 곳
            가지 말아야 할 곳
            돌아다닌 나의 허영심은
            당신의 두 발에 대못을 박았고
            가슴에
            품어서는 안 될 정욕들이 
            당신의 그 순결한 가슴에
            깊은 창 자국을 내고야 말았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나를 위하여...
            갈기갈기 찢기시며 
            마지막 피 한 방울 마저 
            모두 쏟으셔야만 했습니다
            고난의 주님 그리스도여, 나 이제 당신을 찬양합니다. 나를 위한 당신의 그 죽음 때문에... 내가 살아났음을....
            사랑의 아버지여, 나 이제 엎드려 고백합니다 영원토록, 나 또한, 당신만을 사랑하겠노라고....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으로 입었도다."
            (이사야53: 5절 말씀)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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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월 3일, 미국 연방의회 의원 취임 선서에서 미국 의회 역사상 최초로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기타>에 손을 얹고 선서하는 의원이 나타났다. 첫 번째 불교 신자 상원의원도 등장했다. 미국 연방 하원에서는 이미 두 명의 불교 신자가 있고, 6년 전 이슬람교 신자가 코란에 손을 얹고 취임 선서를 했었다. 이날 의원 선서에 사용된 책은 총 9가지였다. 3종류의 기독교 <성경>(캐톨릭·개신교·동방정교), 유대교 경전인 <토라>, 이슬람교 경전 <코란>, <몰몬경>, 힌두교 <베다>, 불교 경전 <수트라>, 미국 헌법.

        이 기사를 보고 사람들은 이제 미국은 "더 이상" 기독교 국가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아니, 틀렸다. 미국은 "더 이상" 기독교 국가가 아닌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기독교 국가가 아니었다.

        청교도가 세운 나라?

        미국 교회사 첫 수업 시간에 교수님의 첫 질문은 "미국은 크리스찬 국가인가?"였다. 언뜻 당연해 보이는 이 질문에 대해, 흥미롭게도 미국인 신학생들의 답이 거의 반반으로 나눠지는 광경이 연출됐다. 당사자인 미국인들마저도 이런 상황이니,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늘 '기독교 국가 미국'에 관한 예화를 들어온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당황스러운 질문일 것이다. '미국은 청교도들이 기독교 정신으로 세운 국가이고, 건국을 주도한 대통령들은 신실한 크리스천들이었고, 링컨은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들었고, 국가 지도자들이 성경에(만) 손을 얹고 취임 선서하는 유일한 나라다. 그래서 하나님은 미국을 축복하신 것이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이 내용들이 대부분 잘못된 신화라고 한다면, 고개를 끄덕일 사람이 많을까? 아니면 불편해 할 사람이 많을까?

        어디부터 실타래를 풀어야 할까? 우선은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매사추세츠 플리머스에 도착한 순례자들이 과연 우리가 아는 그 청교도들과 같은 사람들이었는지에 관한 질문부터 시작해 보자. 본래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에 아직 남아 있던 카톨릭의 요소들을 완전히 제거하고,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형태로 국교를 '개혁'하려는 자들이었다. 즉, 그들은 결코 영국 국교를 떠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좀 더 철저한 형태로 국교에 대한 종교개혁을 이루려는 것뿐이었다. 반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왔던 그 순례자들은 그 노력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국교로부터 벗어나 그들만의 독립된 사회를 꿈꾸던 사람들이었다. 물론 이들도 넓은 의미에서는 청교도주의에 속한 사람들이었지만,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나중에 보스턴으로 이주해 온 청교도들과는 다른 입장을 취하던 '분리주의자'들이었다.

        그럼 국교는 물론이고 영국을 떠날 생각이 없던 청교도들이 신대륙으로 이주를 시작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첫째는 청교도들에 대한 국가의 핍박이 심해졌기 때문이고, 둘째는 당시 영국이 경제적 위기를 경험하면서 식민지 이주를 권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이 신앙적인 이유로 신대륙을 찾은 것은 맞지만, 그들은 많은 다른 이유로 식민지행을 결심한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한 그룹이었을 뿐이다. 실제로 식민지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무관심한 사람들이 많았다.

        종교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그룹 역시 청교도나 성공회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당시 유럽의 종교 상황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다양했고, 그들이 모여든 신대륙은 그야말로 종교 시장이 되었다. 당시 식민지에는 개신교의 다양한 종파인 루터교, 장로교, 침례교, 회중 교회, 퀘이커는 물론이고, 카톨릭과 유대교, 원주민들의 종교, 게다가 아프리카 노예들이 믿고 있었던 이슬람까지, 수없이 많은 종교 형태가 공존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유행하던 민간 신앙이나 마법은 기독교와 이미 너무 친숙하게 혼합되어 있을 정도였다. 아무 것도 없는 깨끗한 신대륙에 오직 청교도들만 신앙의 자유를 찾아 들어와서 기독교 신앙으로 설립한 국가로서의 미국? 그런 나라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정교분리 원칙 주장한 '건국의 아버지들'

        물론 그와 비슷한 세상을 꿈꾸었던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버지니아가 영국 성공회를 공식 교회로 삼은 반면, 청교도들이 주도하던 뉴잉글랜드는 회중 교회(Congregational Church)를 공식 교회로 삼았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버지니아의 성공회는 물론이고 뉴잉글랜드의 회중 교회 역시, 공식 교회를 통한 종교와 정치와의 합일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종교적 이유로 핍박받았던 자신들의 과거는 잊어버리고, 청교도적 신앙에 합하지 않는 모든 종교적 견해와 전통을 강한 법적 힘으로 제거하려 했다. 교회가 세운 규범을 어기는 이들은 교회는 물론이고 정부로부터 처벌을 받았다.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지도자들은 소위 '언덕 위의 도시'를 세우고 신적 계약 공동체로서의 새 이스라엘을 꿈꾸었다.

        하지만, 이들의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새로운 이주민들이 몰려오고, 각종 종교 형태가 유입되고, 종교에 관심 없는 젊은 세대들이 늘어감에 따라 청교도 공동체는 서서히 붕괴되어가기 시작했다. 미국의 독립 직전, 뉴잉글랜드를 제외한 당시 신대륙은 전혀 종교적이지 않거나 청교도 신앙과 전혀 다른 종교를 지닌 사람들로 이미 가득 차 있었다.

        그렇다면, 미국의 독립과 건국을 주도했던 소위 '건국의 아버지'들은 어땠을까?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미국은 성경에 기초해서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 독립선언서와 헌법에 기초하여 세워진 나라이다. 그리고 그 독립선언서와 헌법의 초안을 만든 이들은 기독교적 가치보다는 세속적(secular) 혹은 계몽주의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미국의 초기 대통령들은 결코 일반적인 개념에서의 기독교인들이 아니었다. 초대 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턴을 비롯해서, 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은 다 계몽주의적 이신론자들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 독립선언서에 나타나는 – 신(Nature’s God) 혹은 창조자(Creator)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적 하나님이 아니라 그저 우주 혹은 자연의 법칙(Laws of Nature)일 뿐이었다. 미국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토머스 제퍼슨은 신약성경에서 모든 교리나 기적 같은 요소를 가위로 잘라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제퍼슨 바이블>은 그가 전통적인 기독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보여 주는 실례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국가와 종교가 철저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영적 유익'을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로 정교 분리를 주장했던 기독교 지도자들과는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그들은 미국이 기독교를 비롯한 어떤 종교 위에 세워지는 것을 철저히 경계했다. 헌법과 제1조 수정안을 입안한 제임스 매디슨은 특정 종교와 국가 간의 연합이 '정치적 유익'을 위해서도 해가 된다고 보았고, 수정안을 통해 "국가와 교회를 나누는 장벽"을 만들려고 했던 토머스 제퍼슨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렇게 해서 1791년 공포된 미국 헌법 수정안 제1조는 다음과 같은 조항을 명시했다 : "의회는 종교의 설립에 관여하거나 그것의 자유로운 실행을 금지하는 어떠한 법도 만들 수 없다." 이 수정안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요소들 중의 하나는, "유대인과 이방인, 기독교인과 이슬람교인, 힌두교인이나 모든 이교 종교인들"에게 공평하고자 했던 버지니아법(1785)이었다. 또한, 1796년 트리폴리타니아와 수교를 맺고 체결한 '트리폴리 조약'에서는 "미국 정부가 어떤 의미에서도 기독교 위에 세워지지 않았음"을 명시하고 있다(제11조).

        신화화의 과정들

        자, 이렇게 헌법과 국제조약이 이처럼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는데도, 미국이 기독교 국가라고 흔히 믿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혹은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미국의 건국신화 때문이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메이플라워호의 순례자들, 대부흥, 건국의 아버지들, 독립선언서와 헌법, 이 모든 것들이 미국이 신적 선택을 받은 특별한 나라임을 증명하는 요소들로써 신화화 과정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톤에게는 모세의 이미지가 덧붙여졌고, 그 외 다른 대통령들도 성인처럼 기념되어졌다. 가장 세속적인 인문주의 문서였던 독립선언서와 헌법의 원본은 일종의 경전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선택받은 나라로서의 미국'에 대한 이상을 가장 잘 보여 주었던 청교도들의 아이디어는, 정교 분리의 원칙이 고수되는 미국의 국가 정체성에 특별한 종교성을 부여해 주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가진 생각 중에 – 기독교인이 아닐지라도 – 미국을 특별한 나라로 생각하는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에는 이런 배경이 존재한다. 좀 빗나가는 이야기일 수 있으나, 맥스 루케이도의 <넌 특별하단다>라는 동화책을 볼 때마다, 필자는 이런 동화가 굳이 미국인에게 필요할까 의문을 갖는다. 안 그래도 미국의 아이들은 늘 그런 말을 듣고 자라며, 대부분은 스스로도 그런 줄 안다. 이미 그렇게 아는 아이들에게 "넌 특별해"라고 말하는 것은, "넌 예외적이야"라는 말로 들려질 수 있지 않을까?

        대부흥에 관한 이야기도 짚고 넘어가자. 흔히 '1차 대각성 운동' 혹은 '대부흥'이라 불리우는 식민지 시대 부흥 운동은 미국에 일어난 매우 중요하고 특별한 종교 현상으로서, 미국의 독립과 건국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실제로,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일어난 부흥 운동은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위대한 신학자와 조지 휫필드라는 탁월한 설교자를 배출하면서, 미국의 종교와 정치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과연 이 부흥 운동을 종교 현상이 전국가적인 파장을 일으킬 때를 묘사하는 "대부흥 (Great Awakening)"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에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린다. 미국 전역에 종교 정치 문화 등 모든 분야에 실제적인 영향을 끼친 19세기 부흥 운동 (소위 "2차 대각성 운동")에 비해, 식민지 시대 부흥 운동은 지역적으로 영향 범위가 넓지 않았고, 그 영향력이 오래 가지 못했다는 연구 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대부흥 이후 독립전쟁까지 식민지 미국의 기독교는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조나단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한 식민지 시대 부흥 운동이 지금처럼 '대부흥'으로 주목을 받은 것은 19세기에 일어난 대규모 부흥 운동 때부터였다. 특히 동북부에서 부흥 운동을 주도한 찰스 피니와 그 동료들은 조나단 에드워즈와 휫필드가 주도한 '대각성 운동'에서 자신들의 부흥 운동의 신학적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물론, 오늘날에 주로 개혁 전통에 있는 이들은 찰스 피니와 그의 부흥 운동을 비판하기 위해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을 사용하고 있지만 말이다). 식민지 시대 대부흥이 후대 사람들의 '발명품' 혹은 '허구(invention)'라고 말하는 역사가들의 의견에 다 동의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미국의 건국 신화와 더불어 과대 포장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가 초등학교 시절 그랬던 것처럼,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도 '국기에 대한 맹세(Pledge of Allegiance)'를 배운다. 여기에는 한 가지 흥미로운 문구가 있다. 미합중국에 대해서 "하나님 (보호) 아래서 한 국가(One nation under God)"라고 표현하는 부분이다. 이 문구를 보며 미국을 기독교 국가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본래 이 문구는 1892년 처음 만들어질 때 없었고, 1954년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 삽입된 것이다. 당시 매카시 열풍이 불면서, 무신론적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싸우는 미국을 신적 보호 하에 있는 민주주의 국가로 묘사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다. 1954년 이후로 지금까지 이 문구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포함하는 수정헌법 제 1조를 어긴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논란이 되어오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 국가로서의 미국'이 종교적 혹은 정치적 이유로 후대에 만들어진 아이디어 혹은 하나의 신화 일뿐임을 보여주는 수많은 예들 중 하나이다.

        거짓 신화를 깨자

        혹자는 미국이 기독교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물을 지도 모르겠다. 가장 큰 문제는, 미국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 수많은 비기독교적이고 비윤리적인 행위들마저 '기독교 국가 미국'의 신화 뒤로 밀려나거나 미화된다는 점이다. 자유와 평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겼던 미국인들은 흑인 노예들에게 대한 억압과 차별을 자행했으며, 특히 식민지 시대에서는 노예들이 자유와 평등을 외칠까 두려워 기독교 신앙을 전달하는 것조차 꺼려했다. 원주민들에게 저지른 악행은 또 어떠한가. 자신들의 땅과 전통을 다 빼앗기고, 지금까지도 술과 도박에 찌들어 희망 없이 살아가고 있는 북미 원주민들에게 '기독교 국가' 미국이 한 일은 무엇인가?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서라면 약소국가에 대한 억압과 전쟁도 서슴지 않은 미국은 과연 기독교 국가인가?

        미국이 기독교 국가라고 믿는 것은, 교회와 기독교 선교를 위해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도 수많은 나라에서 기독교인이 되기를 거절하는 이유는 기독교가 미국의 종교라는 인식 때문이다. 그뿐 아니다. 미국이 기독교 신앙으로 세워졌기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지금의 강대국이 되었다는 메시지가 각 교회에서 전해질 때마다, 기독교 복음은 그 본질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했다. 예외적인 한 사람에게 은총이 주어진다는 베데스다연못의 거짓 신화가 수많은 병자들의 마음을 동요시킨 것처럼, 미국이 기독교 국가라는 거짓 신화는 그와 같은 예외적 국가를 꿈꾸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동요시켰다. 기독 정당을 만들고, 시장의 이름으로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하고, 기독교인 대통령을 세워서 교회와 정치와의 합일을 꿈꿨다. 그러나 2000년 기독교 역사가 보여 주듯이, 종교와 정치가 합해지면 정치적 타락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타락도 나타난다. 정치에 기생하는 교회의 영적 타락은 자명한 일이다. 그것이, 미국을 신앙적 국가적 표본으로 삼았던 한국교회가 처한 오늘의 현실이다.

        손태환 / 미국 뉴저지 세빛교회, 드류대학교대학원에서 미국 종교사 전공
        본보 제휴 <뉴스앤조이>, 무단 전제 및 배포 금지


         

        

         

         

            제목;주님 당신만이 복의 근원 이십니다. 내 입술의 찬송이 뼛속 깊숙이 스며들고 두 손을 꼭 잡은 기도가 하늘 향한 것은 부질없는 욕망들을 끌어내려 가난해진 심령이 되고부터였고 당신은 선물로 천국을 주셨습니다. 진정 있어야 될 신령한 것은 없고 없어야 될 세상 것 때문에 아직도 남아있는 그것 때문에 손수건을 적시도록 애타하는 그 자리에 당신은 찾아와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누군가 뭐라고 하던 나의 자존심 마저 뭐라고 속삭이던 입가에 환한 미소지으며 그들 위해 못난 자아를 위해 기도하던 그곳에 당신은 평안의 안식처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형제의 아픔 내 아픔처럼 자매의 기도 내 기도가 되어주며 당신이 주신 것으로 나누어주고 또 주었더니 당신은 어느새 나의 아픔을 가져가 버렸습니다. 오늘도 조용히 당신을 찾아와 마음껏 사랑을 고백하는 그 자리에 자신과 민족과 교회를 위해 부르짖는 심령에 밀려오는 유혹들을 싹 쓸어 내며 당신을 맞이하는 아름다운 자녀들에게 신령한 복으로 가득 채워 주소서 주님! 당신만이 진정 복의 근원이 되시니까요. ....달빛...


        

        대부분 환란전 휴거 까페들에서,
        주님의 재림이 가까왔고 세상의 종말이 가까왔다고
        많은 시간과 정력을 소모해가며 세상의 징조들에 몰두하고 세상뉴스들을 연구분석하고 있는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징조들을 잘 보고 징조들에 박사학위를 갖고 있다고 한들,
        그것이 내가 예수님을 맞이하고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는 일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물론, 징조를 잘 보아서 때가 임박한 것을 알았으니,
        이제는 깨어서 주님 맞을 준비를 잘해야 한다는 그런 뜻이겠지요.

        그런데, 어찌하는 것이 과연 깨어 있는 신앙이고 주님 맞을 준비를 잘하는 것일까요..
        환란전 휴거론자들은, 구원은 받았어도 기름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은 휴거되지 못하고 땅에 남아서 대환란기를 거쳐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거룩하게 되어야 휴거될 수 있다고,(주님의 신부가 될 수 있다고)
        사람들에게 거룩하고 정결하자고 외치고 있는 것이지요.

        다 맞는 말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의 재림이 심히 가까왔다고 말하며 징조들을 이야기하며 휴거의 자격을 논하게 되면, 뭔가 모를 공포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휴거되지 못하고 땅에 남아 대환란기를 거치면 어쩌나, 하는 그런 염려와 공포같은데요. 이런 심리때문에 사람들마다 환란후 휴거보다는 환란전 휴거를 더 믿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과연 성경이 말하는 이 시대의 종말, 곧 예수님의 재림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내가 아무리 환란전 휴거를 믿고 있다고 한들,, 환란전에 일어날지, 환란후에 일어날지,,그것은 우리가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와 시기에 대해서는 너희가 알바가 아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고 그 때를 정확히 알 수 없도록 주님께서 성경에 감추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말,,
        임박했다는 그 기준이 과연 무엇일까요?

        내년?
        후년?
        아니면 몇년 후?
        십년이나 이십년 후?

        예수님의 초림이후, 곧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과 성령강림 이후부터가 말세입니다. 그 말세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과연 앞으로 몇년후가 될지, 아니면 아무리 징조가 충만해도 몇십년후가 될지, 그것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과연 개인적 종말이든 주님의 재림하심이든 종말을 맞이할 신앙적인 준비가 되어있느냐,,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은, 구원받았다고 해서 우리의 신앙여정과 생활이 끝이 난 것이 아닙니다. 계속적으로 이루어 나가야 할 우리의 영적인 성장이 있고, 그것을 우리는 성화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아버지께 영광을 올려드려야 할 본분이 있고, 또 이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드려야 할 역사적 사명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주님의 재림이 가까왔고, 우리 개인의 삶의 종말이 가까울수록,,우리는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핵심과 촛점은 주님에게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징조나 종말의 징조에 우리 눈의 촛점이 모아져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신앙생활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오직 세상의 징조를 보고 종말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공포심을 갖는 것을 깨어 있는 신앙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 같습니다.

        신앙의 본질과 핵심은 말씀입니다. 주님입니다. 주님만 온전히 바라보고, 주님에게만 우리 시선의 촛점이 모아진다면, 내일 당장 세상의 종말이 오고, 내 개인의 종말이 오고,  주님이 재림하신다고 하여도 우리는 전혀 염려하거나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늘 마음이 평안하고 담대하며 오히려 주님 어서 와 주시기를 기대하며 기도하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는 주님의 재림보다도 개인적인 종말이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이든 종말은 종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없는 세상사람들에게 있어서 "종말" 이란 죽음을 연상케 하는 공포 그 자체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종말은,, 단지 이 세상에서의 삶의 종말일 뿐, 더 나은 세상, 곧 하나님 나라에서의 새롭고 영원한 삶의 '시작'일 뿐입니다.

        영생의 삶, 주님과 함께 하는 천국의 삶이 바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죽음은 단지,, 주님에게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일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이상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 땅의 삶을 살더라도, 이와 같은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과 동경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더 이상 이 땅에서의 삶만으로 그치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영생의 삶을 이 땅에서부터 이미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이든, 내 개인적인 땅에서의 삶의 종말이든, 우리는 주님을 직접 우리 눈으로 뵈오며 얼굴을 마주 대하고 뵈올 그 날을, 고대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가까울수록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욱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에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는 그런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이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 하지 못하도록 우리는 날마다 영생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썩어질 양식을 위하여 살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이 땅에는 고요함과 평화가 자리잡을 수도 있고, 대환란과 같은 큰 환란이 먼저 있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세상의 변화와 흉흉한 소식들에 마음을 빼앗길 것이 아니라, 세상 종말의 주인공이신 예수님, 우리의 영원한 구주이신 예수님만을 온전히 바라보고 그 예수님과 함께 깊이 동행하는 우리들의 삶이 되어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신앙의 본질로 돌아갑시다. 세상의 징조들에 부화뇌동하지 맙시다. 징조들을 보고 분석하는 일보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더 깊이 착념하여 날마다 영생의 참 떡과 생수를 받아 먹는 우리들의 건강한 삶이 되어져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하루 하루의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주님 다시 오심을 고대하고 사모합니다.


        아멘 마라나타~!



        출처: 물과피와성령/작성자: 새언약



        ▲미국 1달러 지폐

        미국 달러화에 찍혀 있는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In God We Trust)는 문구가 삭제될 수도 있는 위기에 처했다.

        미국 무신론 활동단체 ‘종교로부터의 자유재단’은 미국 달러화에 적힌 이 문구가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너무 공격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미 재무부를 상대로 이를 삭제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종교로부터의 자유재단’ 활동가 등 19명의 고소인은 뉴욕 남부 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면서 “달러의 이 표어가 믿지 않는 사람들을 개종시키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미국수정헌법과 1993년의 '종교자유회복법'을 위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다른 표어로 바뀌는 것도 원치 않으며, 단지 이 내용의 삭제만을 요구했다.

        이들은 “물건을 살 때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보도록 강요당하는 것이 싫다”면서 “정부는 중립적이어야 하며 어느 한 쪽을 공격하거나 선전하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 동안 달러화에 적힌 이 문구를 삭제하려는 시도는 여러 차례 있어왔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소송은 이러한 종류의 소송 경험이 많은 ‘종교로부터의 자유재단’ 명예이사 마이크 네도우가 직접 맡아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네도우는 지난 2002년 미국 ‘국가에 대한 서약’(Pledge of Alligiance)에 적인 ‘하나님 아래’(Under God)라는 문구 삭제 소송에 도전해, 미 연방순회법원이 이를 위헌이라고 판결해 승리한 바 있다.

        한편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In God We Trust) 문구는 1864년 이후 미국 동전에 새겨졌으며, 1957년에 달러 지폐에도 인쇄되기 시작했다.

        이동희 ⓒ 뉴스미션

        출처:USA아멘넷

           

            
            
              십자가 아래로
              김은태

              나도 맘껏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던 하얀 도화지 그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언젠가부터인지 기억은 없지만 지워도 잘 지워지지 않는 칙칙하고 어두운 잔뜩 흐린날 같은 그런 마음이 되었습니다.
              세상 어떤 지우개로도 지워지지 않던 검은 내 마음을 주님이 갈보리에서 흘리신 보혈이 흰 눈같이 희게 씻어 주셨습니다.
              이제 나는 아름다운 수채화를 다시 그릴 수 있습니다.
              습관처럼 더러워지는 감당 못할 이 마음을 가지고 오늘도 저 갈보리 십자가 아래로 나아갑니다.
              고난의 주간에 그렇게 보혈에 적시우고자 오늘도 갈보리 십자가 아래로....

              별똥별/최송연의 "수채화처럼 고운 生"을 패러디 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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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화해를 선포하기(Claiming Our Reconciliation)

        어떻게 우리는 화해를 위해 노력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하셨다는 진리를
        우리 자신이 선포함으로써 화해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진리를 우리의 머리로 믿는 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화해의 진리가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에 스며들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했다는 것을, 우리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새 심장과 새 영혼, 볼 수 있는 새 눈과
        들을 수 있는 새 귀를 받았다는 것을
        우리가 완전히 그리고 철저하게 믿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해서 사람들 사이에 분열을 일으킬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치유의 권능을
        그들(사람들)에게서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들이라는것을 믿고 또 우리의 마음,
        심장 그리고 영혼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완전히 믿을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참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또한 화해의 사역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금방 자기 의심과 자기 거부로 빠져 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우리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우리가 진실로 화해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기억해야 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면접과 자격

                                                                                           박종목

        합당한 직장을 찾기 위하여 구로동 1,2,3공단을
        여기 저기 해매고 다니는 한 청년이 있습니다.

        벽보에 붙어 있는 모집 공고를 보고 어렵게 찾아간
        모 주식회사 이력서와 개인 면담으로 종업원을 채용한다

        학교는 어느곳 무슨 학교인지? 경력은 얼마인지? 보수는 얼마인지?
        청년은 학력도 능력도 외모도 무엇하나 빼어난것 하나 없는
        아주 무능한 청년이었답니다

        그리하여 그에게 맞는 직장을 찾기란 바닷가의 바늘 찾기보다
        어려웠던가 봅니다 봇짐을 둘러메고 다른도시 (반월 공단)
        시화 공단을 또 배회 합니다. 드디어 찾은 직장은 섬유 공장  조직과
        체계 선후배의 분명한 서열 속에서 힘겹게 하루하루를 이어나갑니다

        앞날은 캄캄하고 뚜렷한 비젼도 없이 바랄 것이라곤 한달 후 받을 급료가
        그에게 있어 전부였다 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신분은
        그 회사에 있을 동안 종업원이라는 자격 하나입니다
         
        모든 것이 영원하지 못하고 언제 어느 때 사라질지 모른는
        유한한 존제 앞에 청년은 인생의 허무함이 엄습하여 옵니다.

        그 회사 사장님의 아들의 신분과 비하면 청년은 하잘 것 없는
        일회용 도구인 것 같습니다 언제 이 방황을 잠재울까?
        언제 편안히 쉬는 곳이 없을까? 청년은 고난 중에 꿈을 꿉니다.

        나에게도 누군가가 있어 아무 보잘 것 없고 들여다보면 모두가 피투성이인
        나를 안아주고 치료해주고 영원히 같이해 줄 그 누가 없을까
        여러 가지 까다로운 조건도 없이 그냥 오셔서 나의 신분을
        바꾸어 주실분은 없는가 가히 자신을 내려다 보니 참 웃기는 상상입니다

        보도 블럭 바닥을 내려다보며 어디론가 향하고 있을 무렵 어떤 낮선 사람이
        가던 길을 가로 막고  청년 어디를 그렇게 힘없이 걸어가고 있소

        청년 : 아저씨가 무슨 상관있소 괜히 길가는 사람 잡고 시간 낭비 마시오
        나그네: 내가 보니 당신은 누군가를 간절히 찾고 있는것 같소 그렇지 않소?
        청년: 맞기는 맞소 하지만 나같은 사람을 누가 만나 주겠소  
        뭐 남들 보다 지식이 많나 과거가 깨끗한가 그렇다고
        용모가 준수한가  내 모습 이대로 누가 받아 주겠소 !
        나그네: 아니네 당신이 만날 그분은  어떤 조건도 바라지 않는다네
        청년 :그러면 이 추한 모습으로 그 분 앞에 가도 됩니까?
        혹시 목욕이라도 깨끗이 하고 가야 하는 것 아니오 ?
        나그네: 아니네 그냥 그대로 가면 그분이 깨끗이 씻겨 주실 것이네
        청년은 나그네의 손에 이끌리어 드디어 그분께로 향합니다.
        두려움과 설래임이 교차되면서...., ...

        이내 나그네는 사라지고 웅장한 궁궐 보좌에
        한 임금님이 보좌에서 내려와 청년 앞에 다다른다 .
        청년은 감히 얼굴을 들지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습니다
        임금님 저는 죄인입니다
        임금님은 아무 말씀도 안하신다.
        청년이 스스로 회계하도록 내버려 두신다

        청년이 지금껏 생각 했던 조건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지금 죄인 청년이 임금님 앞에 선 자체가 모든 조건을 대신한다
        그와 함께 신분도 서서히 변화되는 광경을 바라보고
        주위에 관람객도 조용히 박수를 보냅니다.

        잠시후 임금님 부더러운 목소리로 청년에게 조건을 제시 합니다
        청년의 이름을 부르면서 "네가 나를 믿느냐?"
        임금님 친히 친필로 청년의 손바닥에 한자 한자 써내려갑니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장 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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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가 분리되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내 제자인줄 알 것"이라고 하셨지만, 교회는 너무 자주, 상습적인 다툼과 당파싸움으로 잘 알려져 있죠.
        교회 분열이 일어날 때, 서로가 서로를 헐뜯고 비난하기가 매우 쉽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만약 교회가 분열된다면, 한 개인이 모든 문제와 이슈를 야기하진 않는다 해도, 각 개개인이 분열의 원인이 될 수는 있습니다.

        교회 분열을 일부러 계획하고 덤벼드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열은 매우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큰 문제로 커져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스스로가 기도하는 중에 우리 자신들이 분열의 원인인지 아닌지를 시험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기도하며 우리 자신들을 돌아볼 때, 유의해서 보아야 할 5가지 위험요소들을 소개합니다.
        아래의 5가지 위험요소들을 기도하면서 읽으시면서, 혹시 해당되는 것이 있다면, 회개하고 기도하며 회복되길 바랍니다.

        1. 교만
        교만은 매우 추악한 죄이며, 교만한 사람들은 추악합니다. 교회생활에서의 교만은 교회 분열의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만약 당신이 의견내기를 즐기며, 당신의 의견이 신중하게 협의되길 기대하면서, 당신의 의견이 거절될 때, 화가 난다면, 아마도 당신은 교만으로 인해 몸부림치고 있는 것입니다.

        2. 이단
        이단이라는 단어는 교회 안에서 매우 유행되고 있는 말입니다. 많은 경우,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의견이나 비본질적 요소에서 자신의 것과 다르다는 이유로, 이단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건 이단이 아니라 의견충돌일 뿐입니다.
        이단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정통기독교 교리에 반하는 내용을 믿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부인하거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가지신 신성과 죄가 없으신 분으로서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지 않는 것등이죠. 이러한 진리들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반드시 믿고 그것을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단이 허용되면, 교회는 분열정도가 아니라 파괴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3. 형식주의
        형식과 외식에 치중한 사람들은 법을 만들어서 하나님처럼 행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들은 법을 만들 뿐 아니라, 그 법을 휘둘러서 교회의 당파를 짓는 무기처럼 사용합니다.
        그들 개인적 신앙의 확신에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기보다는, 그들은 도리어 그들과 같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심지어 경멸하기까지 합니다(로마서 14:1-12).

        4. 불신
        교회 안 성도들 가운데서, 특히 리더들 가운데서 불신이 존재한다면, 교회분열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한면에서, 리더들은 신뢰할 수 있고, 나무랄 것이 없어야 하는 하나님의 명하신 책임을 준수해야 합니다(딤전3:2, 딛1:6). 다른 한면에서, 성도들은 그들의 리더들을 신뢰하여서 존중해 주고 순종해야 하는 하나님의 명하신 의무를 이행해야 합니다(살전5:12-13, 딤전5:17, 히13:7,17).
        리더들과 성도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신뢰할 수 있는 상태인지 아닌지를 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최악의 경우, 성도들은 리더들을 신뢰하지 못하고, 해결책을 강구하기보다는 리더들에 대한 험담과 뒷담화를 늘어놓을 수 있습니다. 결국 더 심각한 불신과 분열을 낳게 되는 것이죠.

        5. 전통주의
        전통은 전통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닙니다(고전11:2, 살전2:15, 3:6). 하지만, 전통적 방법들이 본래 의도된 기능보다 훨씬 더 추켜 세워지고, 전통적 방법 자체가 기본적인 예배가 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교회를 분열시키는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이유없이, 비성경적 전통방식의 변화를 거부한다면, 당신의 전통적 방식 고수가 교회의 분열을 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하나됨을 추구하십시오.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교회의 연합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추구하지만, 연합을 만들어내진 못합니다.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에베소서 4:4-6) 예수 안에서, 우리는 연합된채로 창조되었습니다.

        연합을 추구함에서, 우리는 반드시 지속적인 변화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유기체적 공동체로 구성된 유기체적 교회안의 한 부분입니다. 마치 우리 각 개개인이 살아있어서 성장하고 변화하여 성숙을 향해 나아가듯이, 그러한 개인이 속한 교회공동체도 변화해야 합니다. 연합을 추구함에 있어서, 우리 교회는 사도바울이 전한 말씀을 유의해서 들어야 합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 4:2-3) 이 본문에서 가장 핵심은 겸손(Humility)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싸움, 개인적 유익, 혹은 의견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의 관심은 하나님과 주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마22:37-40). 그리고 이 가장 큰 계명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교회 분열을 막을 뿐 아니라, 그의 교회를 하나되게 하실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는 비결입니다.


         

        5 Things That Can Divide a Church

        There are few things more tragic than a church divided. Jesus said, “By this all people will know that you are my disciples, if you have love for one another” (John 13:35). Yet, too often, the church is known by their bickering and division among itself, rather than churches’ love for one another.

        When a church is divided, it’s easy to fall into the temptation of placing blame on others, but the reality is that if your church is divided, you, not the person who has “all sorts of problems and issues,” may be the cause of division.

        Many don’t set out to be divisive in the church. The seeds of division are small, but they can grow into a large problem. As Christians, it’s important that we prayerfully examine ourselves to see if we are or are not the cause of division.

        Here are five signs to consider. Read them. Pray about them. And if you find yourself as the cause of division, then repent and make restitution with those you have offended.

        1. Pride

        Pride is an ugly sin, and proud people are ugly. Pride in the life of the church ultimately leads to division. If you think highly of yourself, delight in providing your opinions, expect to be consulted about your opinions, and get angry when they’re not obeyed, then you probably struggle with pride.

        2. Heresy

        “Heresy” is quite the buzzword in the church. Many times Christians label other Christians as heretics because they disagree with them on some minute, nonessential detail. That’s not heresy. That’s disagreement.

        A heretic is someone who believes the opposite of Christian orthodoxy. A heretic is someone who doesn’t believe that there is one God in three persons, that Jesus is God’s Son, and that Jesus lived without sin, died on the cross in our place, and rose as our Savior. These, among a few others, are essential beliefs that must be adhered to if you call yourself a Christian.

        The allowance of heresy will divide and even destroy the church.

        3. Legalism

        Legalists love to act like God by making rules. Not only do they make rules, but they also wield rules as weapons to divide the church body into separate parts. Instead of honoring Jesus in their personal convictions, legalists despise and even pass judgment on those who are not like them (Rom. 14:1–12).

        4. Distrust

        When there is distrust among people in the church, especially among leaders, division is certain.

        On one hand, leaders have the God-ordained responsibility to be trustworthy and above reproach (1 Tim. 3:2, 10; Titus 1:6). On the other hand, church members have a God-ordained duty to honor and submit to their leaders, which requires a level of trust (1 Thess. 5:12–13; 1 Tim. 5:17; Heb. 13:7, 17).

        Leaders and members must work to ensure that they are relating with each other in a trustworthy manner. The worst thing that can happen is when you distrust leaders in the church and don’t pursue resolution but instead, go behind their back and gossip about them. This creates greater distrust and division.

        5. Traditionalism

        Tradition in and of itself is not a bad thing (1 Cor. 11:2; 2 Thess. 2:15; 3:6), but when a method is elevated above its intended function and basically worshiped, it becomes an idol that can divide churches.

        If you oppose change to non-biblical tradition for no good or godly reason, then your adherence to tradition will cause division.

        Pursue the Unity of the Church

        As Christians we are to pursue the unity of the church, but in our pursuit, we don’t create unity. God does. There is “one body and one Spirit . . . one Lord, one faith, one baptism, one God and Father of all, who is over all and through all and in all” (Eph. 4:4–6). In Christ, we are created as a unified people.

        To pursue unity, we must continually pursue change. We are part of a living church made up of living people. We must change in the same way that a living person grows and changes, hopefully toward maturity.

        To pursue the unity, we must listen carefully to the words of the Apostle, who said we must walk together “with all humility and gentleness, with patience, bearing with one another in love, eager to maintain the unity of the Spirit in the bond of peace” (Eph. 4:2–3). The key word in this passage is “humility.”

        A humble person is not concerned with seeking his or her own welfare, personal gain, or opinion. A humble person’s concern is with loving God and others. These are the two greatest commandments that you can pursue (Matt. 22:37–40). And pursuing them will keep you from being divisive and used by God to bring unity to his church.

        This post is adapted from Vintage Church by Mark Driscoll and Gerry Breshears copyright © 2008. Used by permission of Crossway Books , a publishing ministry of Good News Publishers, Wheaton, IL 60187.


        물리학자 마이클 스트라우스 교수, ‘신 존재의 과학적 증거’ 강연

         

        ▲마이클 스트라우스 교수가 강연을 전하고 있다. ⓒ신태진 기자

         

        美 오클라호마대학교 물리학과 마이클 스트라우스(Mike Strauss) 교수가 ‘신 존재의 과학적 증거’(Scientific evidence for the existence of god)라는 주제로, 21일 저녁 7시 고려대학교 4.18기념관 대강당에서 공개강연을 전했다. 지적설계연구회(회장 이승엽 서강대 교수)가 주최한 이 강연회는 22일 저녁 6시 30분 서울대 26동 대형강의실에서도 진행된다.

        마이클 스트라우스 교수는 “전 시대의 뉴턴, 파스칼은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크리스천이었는데, 과학자로서 기독교의 신을 믿는 것이 현 시대에도 해당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진리를 추구하는 과학과 기독교 사이의 연관성을 생각하게 됐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과학적 증거들을 발견하게 됐다”고 전했다.

         

        마이클 스트라우스 교수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로

        ▲‘우주의 기원’

        ▲‘우주의 설계’

        ▲‘특이한 지구’

        세 가지를 제시했으며, 스티븐 호킹이 저서 「위대한 설계」에서 “우주에서의 또 다른 지구와 같은 별의 존재 가능성”을 주장한 것을 비판했다. 스티븐 호킹은 “빅뱅 이후 물 속의 거품과 같이 팽창하는 수많은 우주(다중우주)가 존재하며, 이 다중우주에서는 창조자의 개입이 없이도 우리와 같은 생명이 존재할 가능성이 수없이 많다”고 주장했었다.

         

        그는 ‘우주의 기원’과 관련, “1929년 에드윈 허블은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우주의 팽창은 우주의 시작점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며, 이는 우주를 시작하게 한 신적 존재가 있다는 철학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고 했다.

         

        오늘날 ‘빅뱅’이 우주의 시작이라는 것은 명확해졌는데, 그 증거로는

        ▲‘우주의 팽창’

        ▲‘우주의 온도’ ▲‘

        우주 내의 원소들’

        이 있다.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 우주의 한 지점을 허블망원경으로 비추면 은하계가 나타나는데, 이는 엄청나게 먼 곳으로부터 우주가 팽창되어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우주가 빅뱅에 의해 시작됐다면, 빅뱅 상태는 굉장히 온도가 높았을 것이고, 그 열이 사라졌다 하더라도 우주 어딘가에는 잔열이 남아있을 것이라는 가설이 1964년 아노 팬지아스와 로버트 윌슨의 이방향성 전자파 탐지에 의해 증명됐다. 빅뱅이론이 예측했던 원소들의 백분율 역시 그대로 관측됐다. 과학자들도 빅뱅의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1970년대 스티븐 호킹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근거하여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도 팽창되고 있음을 증명했다. 빅뱅은 공간만의 기원이 아니라, 시간의 기원이라는 것도 입증한 것이다. 결국 빅뱅은 폭발이라기보다는 우주 안에 우리가 알고 있는 공간, 시간, 물질, 에너지 등 모든 것의 기원이 된다. 이는 새로운 철학적 문제를 야기했는데, “과연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느냐”는 것이다.

         

        이와 관련, 마이클 스트라우스 교수는 “우주의 시작 이전에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은 존재하지 않았다. 우주의 원인은 우주를 초월해서 존재하며, 창조주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우주는 분명 기원이 있으며, 그 기원이 있게 한 하나님이 계시다. 과학자 로버트 제스트로우도 ‘과학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려고 했는데 이미 신학자들이 그 사실들을 알고 있었다. 과학자들이 지금까지 한 것은 이미 성경에서 오래 전에 선언했던 것을 발견한 것’이라고 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우주의 설계’와 관련, “우주의 수많은 매개변수들은 모두 인간의 생존을 위한 최적의 조건으로 정확하게 조율되어 있다. 우주에 존재하는 물질의 양은 인간의 존재에 최적이다. 우주 팽창속도에 비해 물질이 적거나 많으면 은하계는 쉽게 붕괴된다”고 했다.

         

        마이클 스트라우스 교수는 “물질은 원자로, 원자는 핵으로, 핵은 중성자와 양성자로, 이는 쿼크로 구성되어 있는데, 원소가 결합될 수 있는 것은 강한 핵력의 힘 때문이다. 하지만 이 힘이 5%만 약해져도 원소주기율표에서는 결국 수소(H)만 남게 된다. 물도 형성을 못하는 것”이라며 “우주를 구성하는 조건은 인간의 생존에 최적화되어 있다”고 했다. 이와 관련, 학자 폴 데이비스는 “우주는 짧은 시간 안에 급팽창했기 때문에 팽창하는 힘은 우주 안에 꼭 필요한 물질에 해당하는 만큼만 주어졌다”고 주장했었다.

         

        지구가 속한 태양계는 나선형 은하에 속해 있는데, 은하계 중심의 블랙홀에는 방사선이 강하기 때문에, 인간과 같은 고등생명체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선형 은하에 속해야 한다. 그런데 나선형 은하는 은하계의 10%에 불과하다. 또 고등생명체의 생존에는 태양과 같은 별이 있어야 하는데, 만약 태양 주위에 다른 행성들이 돌며 불규칙하게 타게 되면 고등생명체는 존재할 수 없다. 대부분의 별은 주위에 또 다른 행성이 돌고 있는데, 다행히 태양은 3세대 별로서 행성이 없다. 태양과 같은 3세대 별의 형성 기간은 140억 광년이다.

        ▲‘지구 같은 별’의 형성에는 수많은 매개변수가 존재하며 그 확률은 극히 적다. 사진은 매개변수의 목록들. ⓒ신태진 기자

         

        그 외에도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는 수많은 매개변수가 존재한다. 지구의 자전속도, 크기, 밀도, 자전축의 기울기도 생각해야 한다. 지표의 판이 계속 활동하는 것도 역시 필요하다. 지구의 기울기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데는 달이 굉장히 중요하다. 목성은 중력이 강해서 우주의 수많은 행성들이 지구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막아준다. 수많은 매개변수들이 맞지 않으면 인간은 생존할 수 없다.

         

        마이클 스트라우스 교수의 이 강연은 스티븐 호킹이 저서 ‘위대한 설계’에서 질문했던 ‘왜 무가 아니고 유인가’, ‘우리는 왜 존재 하는가’, ‘왜 특정한 법칙들만 있고 다른 것은 없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준다. ‘우주의 기원’, ‘특이한 지구’, ‘인간 중심의 지구’ 등이 그것이다. 그는 “322개 이상의 모든 변수를 고려하여 지구 같은 별을 발견할 확률은 거의 없다”며 “스티븐 호킹은 ‘지구 같은 별’의 존재 가능성을 말했지만, 이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비판했다.

         

        또 그는 스티븐 호킹이 ‘M-이론’으로 무한대에 가까운 개수의 우주 창조를 허용한 것에 대해서도 ‘형편없는 과학’이라며 비판했다. 이론에 대한 과학적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무경계상태에서 물리의 법칙이 작동한다면, 그 법칙들 또한 원인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진정한 과학적 관찰은 우주가 기원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고 전했다.

        ▲이날 강의실은 학생들로 가득 찼다. ⓒ신태진 기자

         

        학자 폴 데이비스는 “물리학이 설계의 산물이라면 우주도 반드시 목적이 있어야 하며, 현대 물리학의 증거는 그 목적 가운데 인간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한다.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의 창조를 완벽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전했었다. 학자 조지 그린스타인 역시 “모든 증거를 조사해 볼 때 초자연적 존재 또는 절대적 존재가 반드시 포함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든다”고 전했었다.

        마이클 스트라우스 교수는 “현대 과학이 발견한 것들은 우주를 창조한 창조주의 실존에 대한 풍성한 증거를 말해 주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질의응답에서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날(Day)의 의미는 어떻게 보는가”라는 질문에, “의미상 ‘날’의 개념이 다양하게 쓰이듯이, 히브리 원어에도 ‘날’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아마 세상을 창조할 때 걸린 ‘오랜 기간’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싶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는 새 시대, 새 시작의 선포로 여겨진다”고 했다.

         

        “세상을 창조한 신이 기독교의 하나님이라고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모든 종교 중 성경만이 유일하게 우주 창조의 사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에 대해 전하고 있다. 여러 과학적 사실들을 검토할 때 성경의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것을 확신한다”고 밝혔다.

         

        신태진 기자 tjshin@chtoday.co.kr /입력 : 2013.03.22 16:30 /크리스천투데이




        하나님의 상상(God's Imagination)

        우리들은 서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하여
        에너지와 시간 그리고 돈을 투입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의 대부분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많은 자원이 서로에게서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또 우리 힘을 유지하거나 확장하기 위하여,
        그들이 갖고 있는 특권들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노력이 평화와 화해를 위하여 쓰인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빈곤이 존재할까요?
        범죄와 전쟁이 존재할까요?
        이제 사람들 사이에 서로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며, 경쟁심이나
        적대감이 없으며, 비통함이나 복수도 없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지구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손을 마주잡고
        하나의 커다란 사랑의 원을 만들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 일은 상상할 수 없어" 라고 우리는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이 바로 내가 상상하고 있는 바야
        태초에 그렇게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지금 나의 상상 속에 살고 있는
        바로 이 커다란 하나의 세계!!" 라고 말씀하십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묵은 상처 내버리기(Letting Go Old Hurts)

        인생에 있어서 가장 힘든 일 중 하나는
        묵은 상처를 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당신이 나에게 한 것, 즉 나의 가족에게 한 것,
        나의 조상에게 한 것, 또는 나의 친구에게 한 것을
        잊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용서할 수도 없습니다...

        어느 날 당신은 그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는 말을하지 않더라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의 기억은 수십 년, 심지어 수세기를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며 우리는 계속해서 복수를 다짐합니다
        사람들의 실수에 대하여 그들에게 책임을 물으면
        뚫을 수 없는 장벽이 생깁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것을 들어 보십시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존재입니다 
        옛 사람은 없어지고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고린도후서 5:17~18)

        참으로 우리는 옛 감정을 내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바울은 "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해시키시고
        사람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으셨다" (고린도후서 5:19) 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자기와 화해시키신 하나님이 "화해의 말씀"
        (고린도후서 5:19)을 우리에게 맡기셨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을 맡은 사람입니다
        이 화해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묵은 상처를 내버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가장 경청해야 할 말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여비서에게 돈세탁 하랬더니...

         

        어느 재벌이 거액의 불법자금이 있었답니다.

         

         

        재벌은 여비서에게 돈세탁을 맡겼습니다.

        *

        *

        *

        *

         

        그랬더니 이렇게 돈세탁을 했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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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공~ 아까버라, 나나주지!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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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연자 맷돌에 관한 신약의 두 구절이다.
        (마18: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눅17:2)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연자 맷돌이란 무엇인가
        당나귀나 소 등이 끄는 큰 규모의 연자 맷돌은 신약시대부터 개발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구약성경 민수기 11:8에는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맛 같았더라"로 나와 있다.

        대부분의 연자 맷돌은 기름의 재료가 되는 올리브 나무가 무성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올리브 기름을 짜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겟세마네"의 의미는 "기름틀"이란 뜻이며 이곳의 비잔틴시대 교회 터에서는 올리브나무 사이로 여러개의 맷돌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특히 로마 제국의 영향아래 나무 기둥을 깍아서 만는 나사(screw)의 발명으로 기름을 좀 더 효율적으로 짜기에 이르렀다.

        당시에 로마에는 유대인들에게는 없는 두 가지 사형법이 있었다. 하나는 십자가에 매달아 공개적으로 죽이는 것이었고(반역자, 반란을 획책한 노예), 다른 하나는 맷돌을 목에 달아 수장시키는 것(부모를 죽이거나 도덕을 문란하게 하는 자)이었다.

        소자(작은 자)중 하나를 실족케 하여도 연자 맷돌을 목에 달리우고(매이우고) (깊은 )바다에 던지는 것이 낫다고 하였는데 소자뿐만이 아니고 더욱이 하나가 아닌 수많은 대중들을 연일 보도되는 언론과 SNS매체를 통해 실족케하는 자들에게는 어떤 방법이 좋을는지 예수님께 진정으로 묻고 싶은 요지음의 심정이다.

        현대 교회의 목회자들은 목사가 되어서도 자기 하고 싶은 것을 다하고 살려는데 고질적인 문제가 있다.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고 서원하였음에도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갖고 싶은 것 다 갖고 즐기고 싶은 것 다 즐기는 방자한 종들이 너무 많다.

        웬만한 교회의 중직자들도 가기를 꺼려하는 노래방에서 측근들과 즐기는 총회장님과 실형을 선고받은 감옥 안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모 목사와 성추행을 거침없이 자행하고도 스스로 하나님께 용서받았노라고 목을 꼿꼿히 세우는 전모 목사와 세습이 아니라 계승이라고 오리발 닭발 내미는 김모 목사와 그 외의 수다한 주의 종들로 인해 실족하는 자들의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교회가 허물어져간다.

        소자를 실족케하는 자들이 버젓이 하나님의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하나님을 능멸하여도 누구하나 연자 맷돌을 그들에게 매우지 못하는 요상한 세상이다.

        도저히 일반 상식으로는 목회자로 인정할 수가 없는데도 버젓히 목회자로 군림하며 주의 종을 자처하고 조작과 거짓말로 일관하는 이런 자들을 치리하지 못하고 오히려 면죄부를 발급해주어 저들로 하여금 방자한 종들로 만드는 원인은 무엇인가 ?

        목사를 하나님의 대언자요 제사장의 위치로 끌어올려 무소불위의 권력을 남용하면서 저들의 범법을 치리하지 못하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유야무야로 지나가며 설혹 노회나 총회로 상소한들 초록은 동색이요 가재는 게 편이라고 눈감아주고 암묵적으로 넘어갈 수 있는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대다수 개신교 교단 헌법떄문이다.
        교단 헌법들은 최소한의 법률적 요건도 갖추지 못한 이름만의 헌법이다. 세속의 법질서보다 더 낙후되고 시대에 뛰떨어진 법질서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교회와 사회에 강요하는 요상한 논리이다.

        다음은 이에 관한 정확한 지적의 글을 일부 옮겨와서 이곳에 올림을 알린다.

        첫째, 의사정족수 없는 교단 헌법

        대한민국 국회는 통상 재적 의원의 1/5 이상 참석하면 개회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안을 의결할 때는 재적 의원 과반수의 출석을 법률로 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단 헌법은 국회와 같은 의사정족수(議事定足數)가 없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담임목사 맘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이건 의사정족수를 몰라서가 아니라 멋대로 하고 싶어 빼 버린 겁니다(ex, 예장통합 헌법 제2편 정치 90조 2항 : 공동의회는 당회의 결의로 당회장이 소집하되 일시, 장소, 안건을 한 주일 전에 교회에 광고한다).

        둘째, 제척 사유가 없는 교단 헌법

        교단 헌법의 또 하나의 중대한 허점은 제척 사유를 규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제척이란 법관이나 사무관 등이 특정 사건의 피해자이거나 또는 피해 가족과 친척 관계일 때, 재판의 공정성을 높이기 위해 그 사건의 집행에서 제외시키는 제도를 말합니다. 이는 민사는 물론 형사소송에도 해당됩니다(민법 제88조·제89조, 민사소송법 제37조, 형사소송법 제17조).

        법관만이 아니라 음악이나 미술, 체육 등의 입시나 각종 콩쿠르에서도 심사위원의 제자나 직접적 관련자일 경우는 심사에서 제외됩니다. 그런데 교회법에는 제척 사유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권한을 쥔 담임목사가 자기 관련 사건에서 버젓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 총회 헌법입니다. 이 헌법 조항 때문에 온갖 못된 짓을 다한 목사들이 성도들을 탄압하면서 그 자리를 지키는 추태를 한국교회 교인들은 지겹도록 보고 있습니다. 황교안 법무장관 후보자는 이런 교회법의 문제에 어떤 입장이신지 궁금합니다.

        세쨰, 교인 주권을 부정하는 교단 헌법

        한국교회 대다수 총회와 개교회에서 교회의 주권은 철저하게 부정됩니다. 물론 이렇게 된 일차적 이유는 교단 헌법이 위임목사의 권한을 과도하게 설정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 헌법들은 당회장에게 제직회, 당회, 공동의회의 의장직을 위임합니다. 이를 백종국 교수는 당회장의 독재권이라 표현했습니다. 독재권이란 "당회장의 의사와 다른 결정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적 권한"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각 교단 헌법은 각종 회의에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안건에 가부를 묻지 않을 수 있는 권한을 당회장에게 주거나 헌법학자들이 헌법을 그렇게 해석하고 있고, 그것이 관행처럼 굳어진 상태입니다.

        "(목사가 판단하기에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제안들의) 동의와 재청은 묵살해야 하고, 묵살할 권리가 당회장에게 있다.…악한 장로들의 협박 공갈에 굴하지 아니해야 한다(<교회정치통람>(전정판), 박병진, p.81)."

        교단 헌법은 담임목사의 신임이나 해임의 경우 공동의회 과반수 혹은 2/3의 의결로 통과됩니다. 그러나 공동회가 그런 결정을 내렸더라도 노회가 거부권을 행사하면 공동의회 결의는 원인 무효가 됩니다.

        넷째, 직분의 평등을 부정하는 교단 헌법

        대한민국에서는 목사를 '기름 부음 받은 자'라거나 '성직자'라고 부르는 것에 별 거부감이 없지만 칼뱅은 이런 사람들을 향해 "신성모독의 죄를 범했다"며 노발대발했습니다. 위임목사인 당회장은 공동의회에서 2/3의 찬성으로 결정되어 70세까지 임기를 보장받는데 부목사는 당회 의결로 결정되고 임기도 1년입니다. 만약 한국교회의 헌법이 개혁 교회의 정신에 충실했다면 모든 목사는 당연히 공동의회에서 초빙이 결정되어야 옳습니다.

        목사와 장로의 서열화도 분명합니다. 성경과 장로교 전통에서 목사와 장로는 본래 같은 말입니다. 그러나 대다수 장로교 헌법들은 치리권을 목사가 독점하는 대신 장로에게는 ’기본교권'을 부여합니다. 이처럼 목사와 목사 사이, 목사와 장로 사이에 서열이 생겼기 때문에 집사나 권사나 교사 직분이 목사와 장로의 하위 구조에 재편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만 존재하는 권사나 서리집사는 서열화된 한국교회의 상징입니다. 권사는 여성을 장로로 세울 수 없는 교리와 한국의 유교적 전통이 결합되어 생겨난 직분입니다. 직분이 계급화되다 보니 성인 교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서리집사란 제도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서열화 내지 계급화는 성경과 교회 전통에 대한 배신입니다.

        다섯째, 교회, 노회, 총회의 평등을 부정하는 교단 헌법

        종교개혁 이후, 1년에 한 번 모이고 흩어지는 형태로 총회가 출발한 것은 개교회를 구속하고 통제하는 교단(敎團)으로 군림하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총회나 노회는 상회가 아니라 교회 간의 협의를 위한 광대 회의(assembly)였고, 총회 헌법은 상위법이 아니라 협약(協約, convention)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교회는 총회가 헌법상의 '최고 치리회'로 등극한지 이미 오래입니다. 교회 헌법을 해석할 전권(專權)을 거머쥔 총회 말입니다. 신학생들이나 교역자들 사이에서는 "예수님이 오셔도 교단 헌법은 바꿀 수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회자될 정도이니 두말 하면 뭐하겠습니까. (지강유철 “ 황교안 법무장관을 보고 쓴 교회법 단상”)

        이 이름만의 교단 헌법의 갱신에 참된 신앙양심을 지닌 목회자들의 거룩한 동참을 바란다. 거룩함을 회복하지 못하고 문드러지는 종기를 수술로 제거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더욱 사회적으로 비난받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것이다.

        이 시간에도 꽃뱀이라고 매도되는 성추행의 피해자 자매와 신천지라고 모함되어 실족되어지는 영혼들의 아픔이 가슴에 메아리치지는 않는가 ? 평신도들이 이 일을 추진하려면 예수님의 재림 시까지도 모자랄 것이 명확하기에 양심있는 목회자들의 동참을 촉구하는 바이다.

        이미 몇몇 언론에 올려진 전병욱 목사에 대한 뉴스타파M 의 보도에 관한 링크이다.




        출처: USA아멘넷/누지문서/허경조 장로의 신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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