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귀영화로 채울 수 없습니다.



어릴 적 읽은 세계명작문고 “솔로몬의 동굴”이 생각납니다. 탐험가 세 사람이 맹수와 토인들의 땅 아프리카에서 보화가 가득한 솔로몬의 동굴을 찾아내는 모험 이야기인데 얼마나 재미나게 읽었던지요. 아프리카 밀림과 무서운 동물들, 토인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모험 끝에 휘황찬란한 보물들이 숨겨져 있는 동굴을 찾아내기는 하였는데 그들을 덮치는 위험들, 그 동굴 속에 그 세 사람을 가두려고 음모를 꾸민 주술사 마술할멈이 거꾸로 자기 꾀에 빠져 큰 바위 문 밑에 깔려 죽는 장면, 세 사람이 횃불을 들고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따라가서 마침내 출구를 찾아내는 장면, 부족들간의 전쟁에 그들도 끼어들어 전투를 하는 장면들이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열왕기 10절 말씀을 보니 스바 여왕이 나오고 수많은 금은과 재물이 오고 천하가 솔로몬의 지혜와 부를 동경하고 사모하며 모여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0장 14절을 보니까 솔로몬의 세입금의 중수가 금 666 달란트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1년간 세입금이겠지요. 그런데 하필이면 왜 ‘666’일까요?

금 666달란트가 오늘날 화폐기준으로 얼마나 될까 계산해 보았습니다. 1 달란트는 약 30 킬로그램입니다. 요즈음 금값이 1온스 (약 30 그램)에 1,600 달러 가량 된다니까 금 1달란트 30 킬로그램이면 그 값이 160만 달러 정도 되겠군요. 그런데 666달란트니까 666 곱하기 160만 달러 하면 약 10억 달러, 한국 돈으로는 1조 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세입금이로군요. 1년에 1조원의 황금이 굴러다니던 당시의 예루살렘.... 생각만 해도 어마어마하군요.

솔로몬왕은 그걸로 상아와 금으로 된 보좌를 만들었습니다. 눈부신 황금보좌였을 것입니다. 또 금으로 방패를 만들었습니다. 금 600세겔로 만든 큰 방패 200개를 만들었는데 금 600세겔이면 6.8 킬로그램, 방패 한 개가 36만 달러짜리나 되는군요. 작은 방패는 금 3 마네로 만들었는데, 그러면 금 1.7 킬로그램이 사용된 9만 달러짜리 방패네요. 적군이 보기만 해도 질리고 기가 죽을 휘황찬란한 황금방패들인 셈입니다. 솔로몬의 하는 일들이 황금과 돈이 넘쳐나 어디에 써야 할지 주체를 못 하는 로또에 당첨된 졸부의 모양새입니다. 병거 1,200, 마병 12,000에다, 은이 굴러다니는 돌멩이 같고 백향목이 뽕나무 같이 많은 예루살렘, 과연 스바 여왕이 보고 정신이 현황(아찔)할 수밖에 없었겠다 싶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라가 솔로몬이 죽자 남북으로 찢어졌고 황금방패는 애굽에 빼앗기고 나라는 분열된 채 결국은 멸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은 불타고 파괴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고 말았는가?” 열왕기 저자는 애통으로 가슴을 치고 비탄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이것을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솔로몬부터 시작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다.”라고.

열왕기상 11장에서 열왕기 저자는 솔로몬의 타락을 소상하게 적고 있습니다. “바로의 딸 외에도 많은 이방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왕의 후비가 700인 빈장이 300인이요.......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암몬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고,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산에 산당을 짓고, 암몬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고, 이족 후비들을 위하여......” 9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두 번이나 저에게 나타나 경고하셨는데도 솔로몬은 우상숭배에서 돌이키지 못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그토록 지혜로운 솔로몬, 그토록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솔로몬, 잠언 3천을 말하고 전도서 아가서를 남긴 솔로몬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단 말입니까? 열왕기를 읽는 우리는 절대로 안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도 마찬가지라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무릇 지나가는 자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애 1:12)라고.

솔로몬은 오직 하나님만을 붙잡았던 다윗 같지 않았습니다. 마치 아버지에게는 관심이 없고 아버지가 주시는 선물에만 관심이 있는 아이 같이 솔로몬은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만족하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떠한 부귀영화, 지혜, 명예로도 채울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마음, 밑 빠진 독과 같고 바닥이 없는 무저갱 같은 인간의 욕망입니다. 부귀영화는 인간의 욕망을 채울 수 없는 허망한 거품 같은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는 듯 하지만 오히려 인간의 주인이 되어 인간을 노예로 삼고 결국은 멸망으로 끌고 가고 맙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으로 만족을 얻으려는 자의 끝은 멸망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자가 복 된 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 있는 자입니다. 솔로몬을 부러워할 것 없습니다. 천하의 명성과 부귀영화와 지혜를 가졌던, 수많은 처첩들과 울긋불긋 우상들의 전들을 가졌던 솔로몬이 복 된 자가 아니라, 가진 것 없어도 오직 주님을 마음속에 모신, 가난한 심령에 천국을 소유한 저와 여러분이 진정 부요한 자들이요 복 된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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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벚꽃 소곡 
벚꽃이 봄바람에 휘날리던 어느 날 난 괴로워하며 떨었지 그 때 주께서 주신 말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울지 말그라 힘을 내그라 봄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말그라" - 기자석의 즉흥 자작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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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이 되는 삶. 우리는 남에게 나를 드러내기를 좋아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위대해진다 해도 저 높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아주 작은 좁쌀 개미보다도 작은 존재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가 누가 위대한가를 판단하고 싶어합니다. 자기의 업적, 자기가 한 일 등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실수, 실패는 도저히 시인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나의 마지막 날에 나와 함께 있게 된다면 장례식을 길게 하지 마십시오. 노벨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킹 목사는 남에게 봉사하는 일을 힘써 했다고 말해 주십시오. 생명을 주기 위해 애쓰고, 먹을 것을 주기 위해 애쓰고, 입을 것을 주기 위해 애쓰고, 돌보아 주기 위해 애쓰고, 봉사하기 위해 노력했다고만 말해 주십시오. 나는 단지 그것으로 족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마지막 설교의 한 대목입니다. 무언가 댓가를 원하지 않고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 일이야 말로 참으로 아름답고,보람있으며 기쁜 일입니다. 나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남에게 도움이 된다면 내 마음은 이미 뿌듯해지고 행복해지기 시작합니다. 나를 채우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나를 조금씩만 깎아서 남에게 베풀며 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마음으로는 쉬운데 실행하기는 왜 그리 어려운지요. 나로 인해 웃을 수 있는 얼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 아침을 여는 참 좋은 느낌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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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4군(진보성향)이 5군화(극진보)쪽으로 가는데 그보다 WCC 중심측은 이미 5군화(급진적 진보)가 되었는데 그 일부는 5군에서 더 나가 기독교 진리를 포기하고 다른 종교를 포용하고 있다고 본다.
그 증거로 동성애를 인정하는 교단과 연합, 종교화가 된 천주교와의 연합 그 다음에는 타종교와 평화라는 명목으로 대화하고 있는 것을 들고 있다.
그렇게 WCC가 배도하고 다원주의로 나가고 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던 차에 부산총회를 개최하고 있으니 당연히 반대할 수밖에 없다고 필자는 진단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필자와 다르게 보는 시각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고 봄)


▶ 우리 교단 통합 측에게 주어진 발등
우리 교단은 앞서 말한대로 WEA와 WCC에 가입되어 신앙군으로 보면 3군(보수+진보)을 견지하면서 한국교회에서 균형 잡힌 교단으로 평가받아왔는데 이번 WCC부산 총회를 유치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함으로 WEA측의 반대와 곱지 않는 시선을 받으며 부산총회를 진행하는데 애로 점이 있다고 보고 있다.
WEA와 WCC간의 차이가 점점 벌어져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집단으로 보고 있는데 이런 사이에서 우리 교단은 어떤 입장을 취하여야 하는가? 필자는 고민이 된다.  


▶필자의 주장
지금까지 보수주의신앙과 진보적인 신앙이 비교적 조화를 이루며 성장한 한국교회가 이번 WCC부산총회를 개최함으로 앞으로 간극은 더욱 심화될 것이 자명할진데 필자는 우리교단이 힘 있게 부산총회를 통하여 한국교회와 WCC 산하의 모든 교회를 향해 3군(보수와 진보)으로 나가야 필요성은 적극적으로 개진하고 그렇게 되도록 힘을 결집하여야 한다고 본다.


이상과 같이 필자는 한국교회를 진단하고 있고 우리 교단의 위치와 현 상황을 이해하고 있다.  이 글은 이곳에 들어오신 분들은 자신의 위치가 몇 군에 속해 있는 가를 진단해 보기를 바라고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 분들을 이해하면서도 교단 본연의 위치(2군과 4군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데 하나가 되었으면 해서 올려봤다.

필자와 견해를 달리하는 분이 있다면 그분들의 고견을 듣고 싶다.



출처:USA아멘넷 게시판/김정한 목사




나기브와 무사라는 두 친구가 페르시아의 좁고 어두운 산길을 함께 걷고 있었다. 그런데 무사가 발을 헛디뎌 강물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자 나기브는 망설임 없이 거센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 무사를 구해 냈다. 무사는 그의 하인을 불러, 근처에 있던 바위에 이렇게 새기라고 명령했다.

"방랑자여, 바로 이곳에서 나기브는 무사의 생명을 구했다."

몇 달 후, 그들은 지난번 나기브가 무사의 목숨을 구했던 그 장소를 다시 지나게 되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잠시 쉬다가 사소한 문제로 말다툼을 했다. 그러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나기브가 주먹으로 무사의 얼굴을 때리고 말았다. 무사는 잠시 주춤거리더니 곧 일어났다. 그러고는 말없이 들고 있던 지팡이로 바위 옆에 펼쳐진 모래밭에 이렇게 썼다.

"방랑자여, 바로 이곳에서 나기브는 사소한 말다툼으로 친구 무사의 마음에 큰 상처를 입혔다."

곁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무사의 하인이 물었다.
"왜 친구의 영웅적인 행동은 단단한 바위에 새기면서 그 친구의 나쁜 행동은 겨우 모래 위에 써 놓습니까?"

그러자 무사가 대답했다.

"친구의 용감한 행동은 내 가슴속 깊이 영원히 간직할 것이네. 하지만 그가 입힌 상처는 모래 위에 쓴 글자가 지워지듯이 곧 내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네.”

글ㆍ정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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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동성애자 헨리 나우웬[보편구원론] 사제는 행복한가?

김석년목사[서초교회]와 관련하여 생각하며

김석년목사[서초성결교회:서초구 반포동 소재]의 말과

이단이며 동성애자인 헨리 나우웬의 특별한 행복

동성애 사제 헨리 나우웬을 경계하며


이단 동성애자 헨리 나우웬[보편구원론] 사제는 행복한가?


김석년목사(서초성결교회:서초구 반포동 소재)의 말과

이단이며 동성애자인 헨리 나우웬의 특별한 행복




이단 동성애자 헨리 나우웬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혼돈에 빠지는 크리스찬이 있는 듯하다.


김석년목사(서초성결교회)같은 종교인은, 동성애자이며 이단인 헨리 나우웬 카톨릭 사제를 통해서 참다운 인생의 성공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국민일보에서 자랑스럽게 인터뷰를 했다. 그런 경우를 볼 때 헨리 나우웬은 특별히 행복한(?) 사람처럼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진리이신 예수를 따르는 목회자 및 성도들과 참된 예수님의 몸된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 외에도 구원이 있다는 보편구원론자이며 동성애자(Gay)인 헨리 나우웬】
① 행복하지 않을 뿐더러,


② 지금 지옥에서 엄청나게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③ 광명의 천사 가면을 쓰고 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지옥 인도자’들의 롤모델이고,


④ 이단 헨리 나우웬을 통하여 참다운 인생의 성공을 발견했다는 김석년목사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조심해야 할 것이라고 많은 크리스찬들이 언급하고 있다.


⑤ 참고로 이단이며 동성애자인 헨리 나우웬을 통해 인생의 성공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하는 믿음의 고백은 김석년목사의 신앙의 고백일 뿐이다.


⑥ 예수님의 참된 목회자들은 이단을 경계하면서, ‘동성애자 헨리 나우웬은 성공한 인생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Gay(동성애자) 사제’라고 경계한다.



⑦ 이것이 김석년목사와 예수님의 참된 목회자들의 차이점이다.


⑧ “국민일보는 기독교신문을 표방하나, 많은 사람들은 국민일보를 단순한 세상 일간지로 여기고, 이태형 기자는 월급 받는 기자일 뿐”이라고 언급하는 크리스찬들이 많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기독교 신문을 표방한 국민일보는 동성애자이며 이단인 헨리 나우웬 사제에 대해 정확하게 글을 써서 국민일보에 대한 독자들의 우려를 없애고, 기독신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미션’면 담당 종교국의 편집방침이 정비되어야 한다고 많은 분들이 지적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보편구원론자인 이단 헨리 나우웬을 미화하는 글을 쓰는 종교부 기자들에 대해 올바른 기사 작성의 방향을 제시해 주어야 할 것이다.



예수 외에도 구원이 있다고 믿는 이단 헨리 나우웬에게서 ‘참다운 인생의 성공을 발견했다’는 김석년목사의 글도 실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는 바이다. 국민일보는 미션면(종교면)을 면밀히 지켜보는 기독인 독자들이 예기치 않는 행동(국민일보 불매운동)을 촉발하지 않도록 자체 정화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국민일보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진실한 크리스찬 기자도 있음을 알고 있다.


국민일보 이태형 종교 기자는 국민일보 ‘한마당’이라는 기고란에 ‘나우웬의 벤치’(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3684304&code=11171211 )라는 기사를 쓰며 이단 카톨릭 동성애 사제 헨리 나우웬을 은근히 좋은 각도로 홍보하고 있다고 많은 목사님들이 염려하며 지적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또한 국민일보 이태형 종교 기자와 김석년목사는 얼마나 친밀한 관계인지, 이단 동성애(Gay) 카톨릭 사제 헨리 나우웬의 영성을 추구하는 바에 있어서 아름다운 동행을 하는 관계인지는 몰라도, 이태형기자는 기사를 쓸 때 “서초교회 김석년 목사는 “목회는 하나님이 ‘봐 주셔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봐 주시는 만큼’ 목회하다가 어느 순간 ‘하나님이 봐 주시지 않는다’고 느껴지면 항복해야 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다시 ‘하나님이 봐 주신다’고 느껴지면 ‘다시 목회를 하면 되는 것’이라는 설명” 을 인용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동행인 듯 하다고 많은 성경적 목사들이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보면 김석년목사는 동성애자 이단 카톨릭 사제 헨리 나우웬을 통해서 참다운 인생의 성공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한 것이 시간이 지나가면 하나님이 봐주신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닌지 많은 목사님들이 실소를 금치 못한다고 많은 성도들이 언급한다고 전해진다.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 공공의 유익을 위해 이 글을 공표합니다.



†한국교회이단연구소

출처:크리스찬트리뷴

http://www.kctn.net/contents/news/newsView.asp?board_type=0105&board_title=&board_nm=&search_field=&search_word=&page_no=1&action_flag=&page_str_menu=0105&bbs_seq=685

 
 

 

조나단 에드워즈의 중생론

노병기 박사


페리 밀러는 ‘청교도주의는 곧 에드워즈 자신이다.’라고 말했다. 밀러의 말은 옳다. 청교도주의의 정신을 가장 심오하게 구체화시킨 사람이 조나단 에드워즈였다. 청교도 신학은 거듭남이라는 주제에 대한 집중적인 지향성으로 인해 ‘거듭남의 신학’이라고 칭해져 왔다.1) 특히 에드워즈는 철저한 중생 체험의 필요성에 대하여 가장 강력한 입장을 가진 사람 중 하나였다. 에드워즈의 중생론은 많은 점에서 존 오웬의 중생론을 닮았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중생론의 특징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성령(새로운 원리)의 주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오웬의 중생론과 같다. 에드워즈는 죄에 대한 각성의 상태가 먼저 와야 한다는 것과 은혜의 주입(즉, 새로운 원리의 주입)에 ...
의하여 지각과 의지와 성향, 행동이 바뀌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오웬과 똑같다.

1. 거듭남의 정의 : 하나님의 성령의 부으심

에드워즈에 있어서 거듭남이란 성령의 부으심이요, 놀라운 변화를 초래하는 신적인 역사다. 에드워즈의 정의에 의하면, “거듭남은 사람이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회심할 때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에 의하여 사람 속에 일어나는 위대한(great) 변화”를 의미하며, “사악한 자로부터 거룩한 사람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2)

사람이 거듭날 때 먼저 성령이 주입되는데, 이때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며 새로운 본성을 주신다.3) 이때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아름다움에 대한 ‘마음의 감각’(sense of heart)을 주신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4) 이러한 신적인 믿음으로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칭의를 얻게 된다.

에드워즈는 성령의 주입으로 일어나는 위대한 마음의 변화를 거듭남이라고 하였으며, 그것은 회개, 회심과 같은 말이라고 했다.

“나는 회개와 회심을 같은 말로 봅니다. 왜냐하면 성경(행 3:19)이 그것들을 함께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명백히 많은 같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metanonia(회개)는 마음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회심(conversion)이란 단어도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변화 혹은 전향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거듭남(regeneration)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변화입니다(거듭남이란 용어는 특별히 마음의 수동적인 측면에서 본 변화입니다).”5)

에드워즈는 거듭남과 회심과 부르심과 성화를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 그는 부르심과 회심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성경구절에서 부르심은 다른 뜻이 아닙니다. 부르심은 죄인이 구원에 이르는 회심을 할 때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역사입니다.”6) 또 그는 초기 성령이 주입되면서 ‘거듭남’과 ‘성화’가 일어난다고 했다. “하나님의 성령 혹은 하나님의 사랑은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내주하시면서 생명의 원리로 활동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 살아 있는 성전이 됩니다. 사람이 거듭나고 성화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령을 그들에게 부으십니다.”7) 그러나 에드워즈는 성화를 거듭남 이후에 오는 일평생 계속되는 성화의 과정을 말하기도 하였다.8)

2.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주어지는 거듭남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생각이 에드워즈 신학의 전반에 흐르는 중심축이었다. 그가 하나님의 주권을 높인 것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의지하는 인간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God Glorified in Man’s Dependance, 1731)이라는 설교에서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구속의 단계마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회심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새로운 성품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합니다. 그것은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했고,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라고 하신 것입니다.”9)

에드워즈는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적 자비에 달려 있음을 강조했다. 그가 이것을 강조한 이유는 “우리의 거듭남을 위해서도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했다.

3. 성령의 내주 : 생명의 원리

에드워즈는 성령님께서 주입되자마자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내주하신다고 했다. 성령께서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신적인 것들을 아는 지식과, 거룩한 성향과 모든 은혜가 주어지고 지속된다.”10)

성령님께서는 내주하시는 분이 되셔서 영혼 안에 ‘생명의 원리’가 되신다. 이와 같이 성도들의 마음은 거듭날 때에 “초자연적인 원리가 주입된다(infused).”11) 삼위 하나님 가운데 세 번째 위격이신 성령님이 성도들의 마음속에 있는 신적인 원리가 되신다.12) 사람이 죄인에서 성도로 변화될 때 “지각과 행동에 새로운 원리”를 갖게 된다.13) 거듭날 때에 은혜의 주입으로 이러한 새로운 원리를 갖게 된다는 것은 오웬의 가르침과 똑같다. 성령님이 성도의 마음속에서 “내주하는 생명의 원리로 행동”하신다는 것은 에드워즈 중생론의 핵심이 되는 부분이다.14)



4. 주입된 경향성

에드워즈의 경향성의 문제가 그동안 에드워즈 학자들 사이에 논의의 주제가 되어 왔다. 에드워즈는 주입된 경향성과 획득되는 경향성의 구별을 어떻게 했는가? 에드워즈는 ‘주입된’ 경향성의 필요성을 말하고, ‘획득되는’ 경향성을 부인한다. “주입된 경향성(Infused Habits): 차츰 선해지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악한 마지막 순간이 있을 것이며, 그 사람이 선해진 첫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정죄의 상태에 있는 마지막 순간이 있을 것이며, 구원의 상태에 있는 첫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 사람이 경계선에 있는 그 한순간 전에 죽으면 지옥에 가고, 한순간 후에 죽으면 천국에 가는 그런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 사람이 그전보다 엄청나게 나은 사람이 되는 한순간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획득되는 경향성의 개념은 잘못되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15)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때 새로운 경향성을 주시는 것은 성령의 주입으로 인해 즉시에 새로운 경향성을 주시는 것이지, 어떤 인간적인 설득에 의해 점차적으로 새로운 경향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5. 주입의 첫 역사인 성령의 조명

에드워즈가 성령의 주입과 성령의 조명의 관계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의 말을 보자.

“회심에서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변화는―이것은 모든 것의 시작이요 기초이다―마음의 기질과 성향(disposition)과 영의 변화입니다. 왜냐하면 회심에서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수여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영혼 속에 내주하시면서 생명과 행동의 원리가 되십니다. 이것은 새로운 본성이요 신적인 본성입니다. 영혼의 본질이 변화됨으로 신적인 빛을 받아들입니다. 신적인 것들이 이제는 탁월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보입니다. 영혼의 본질이 변화되지 못한 상태였을 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첫 번째 활동, 혹은 신적인 기질이 발휘하는 첫 번째 활동은 영적인 이해 혹은 마음의 감각, 즉 영적인 것들에 대한 영광과 탁월함을 지각함에 있습니다. 이것은 의지의 어떠한 타당한 행동보다 앞섭니다.”16)

이로 보건대 에드워즈에게 있어서는 성령의 주입이 먼저이고 조명은 주입의 결과이다.17) 에드워즈의 주입은 성령의 내주를 말하는 것으로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새로운 본성을 주고 이해와 행동의 새로운 원리로 작용하시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조명은 주입의 결과 주어지는 것으로서 성령께서 새로운 이해의 원리로 역사하신 결과이다. 물론 주입과 조명은 시간적으로는 동시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을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그림 3〉 에드워즈의 구원의 순서: 주입과 조명의 관계

성령의 주입



( 성령의 내주) ┌─ 이해의 원리 → 조명(sense of heart=믿음) → 칭의

새로운 원리─┤ ↓

(새로운 본성) └─ 의지와 성향, 행동의 원리 → 새로운 의지, 성향 , 행동



6. 거듭남과 믿음과 칭의의 관계 ― 거듭남의 선행성(先行性)

에드워즈는 거듭나야 믿음을 가지게 된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믿음이란 성령의 주입으로 오는 믿음을 말한다. 에드워즈가 거듭남을 얻기 위해서도 믿음을 가지라고 했지만 그가 말하는 믿음은 주로 거듭남 후에 오는 신적인 믿음을 말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이것이 청교도 신학의 특징이다.

⑴ 믿음의 정의 : 그리스도를 보는 것

성령이 마음에 부어지면 “신적인 일들의 거룩함 혹은 도덕적 완전함의 지고한 아름다움과 달콤함에 대한 마음의 감각(sense of heart)”이 생긴다. 에드워즈는 이 ‘마음의 감각’이 곧 믿음이라고 하였다.18)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새로운 감각이라는 사상을 『신앙 감정론』을 대표하는 독특한 것이라고 말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에드워즈의 전체 작품 가운데서 어떤 사상도 이보다 더 창조적인 것은 없으며, 청교도적 신앙에 미치는 영향에서 이 교리보다 더 광범위한 것은 없다.”19)

에드워즈는 '믿음'을 새로운 감각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보는 것에 근거하지 않는, 그리스도에 대한 어떠한 믿음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영생의 특권을 수반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아들을 보고 믿는’(요 6:40)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가지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이 아닙니다(고후 3:18 ; 4:6).”20)

⑵ 철저한 전가로서의 칭의

에드워즈는 거듭남이 믿음보다 먼저 와야 된다고 했으나 철저한 전가로서의 칭의를 동시에 가르쳤다.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가 값없이 전가되어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했다.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순종 모두가 전가된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개인적 순종과 고난이 우리의 순종과 고난으로 판단됩니다.”21)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는 죄책에서 놓임 받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서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는 그리스도의 속죄와 순종을 모두 우리의 것으로 넘겨주시는 것을 의미한다.”22)

⑶ 칭의 얻는 믿음

에드워즈는 칭의 이전의 인간의 선행의 공로를 분명히 거절한다. 가령 “그 사람 안에 있는 경건함이나 작은 선함도 일절 고려하지 않으신다.”23) 이와 같이 에드워즈는 자기 자신의 미덕이나 순종이 칭의에 근거가 되지 못하고 전가에 의한 칭의를 분명히 말했다. 그러나 그는 칭의를 얻는 믿음의 본질에 사랑과 회개가 포함된다고 했다.

에드워즈는 “사랑은 참된 살아 있는 믿음의 요소이며, 참된 믿음의 본질”이라고 하였다. “사랑은 실제적인 믿음에 있어서 생명이요 영혼”이다.24) 그는 사랑뿐 아니라 ‘회개’도 칭의 얻는 믿음의 본질이라고 했다.25) “어떤 사람이 마음속으로 모든 죄의 길에서 돌아설 것을 진지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원치 아니하면 그리스도를 죄에서 구원하는 구주로, 죄의 길에서 구하시는 구주로 영접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와 분리되는 것을 정말로 원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죄와 자기를 분리시키는 구주로 영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26)

(4)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행동으로서의 믿음

믿음이 칭의의 조건인가? 에드워즈에 의하면, 믿는 신자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이유는 결코 믿음 안에 존재하는 어떤 탁월함이나 가치 때문(도덕적 적합성, moral fitness)이 아니라, 이 은혜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이 맺고 있는 관계(자연적 적합성, natural fitness)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는데, “믿음은 바로 그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다.”27) 에드워즈는 믿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믿음은 “참된 그리스도인 쪽에서 자신을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어떤 행동 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나 관계를 이루기 위하여 행하는 어떤 행동”이다.28)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적극적으로 연합한다. 믿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실제 행동” 자체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연합을 함으로써 법적인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 사이에 있는 실제적 연합이 법적인 것의 기초입니다.”29) 에드워즈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말했다. “믿음은 지고하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가운데 그리스도와 믿는 사람을 하나로 만들어 주기 때문에, 믿음은 우리를 의롭다 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속죄와 모든 공로를 소유하게 하며 그리스도께서 그처럼 값 주고 사신 모든 은혜에 대한 권리를 소유하게 하는 것입니다.”30)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속죄와 모든 공로’를 얻게 되는 것이다.

⑸ 믿음에 앞서는 성화(중생)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남아 있는데 믿음과 칭의가 성화보다 앞서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하는 점이다.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성화가 믿음에 앞서야 한다고 분명히 말한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행동이 있기 전에 원리가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에 뒤이은 행동이 있기 이전에 먼저 죄인의 마음속에서 그러한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즉, 성결이 발휘되어지기 전에 먼저 성결의 원리가 있어야 합니다. (원인이 결과에 선행하듯이) 믿음의 행동이 있기 전에 본질적으로도(in nature) 어떤 변화가 먼저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만약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이 성공적인 행동이 되려면, 시간적으로도(in time) 먼저 있어야 합니다. 먼저 정신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개념, 즉 그에 대한 적합하고도 진실로 사랑하는 개념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영혼이 성화되어지기 전에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31) 에드워즈의 이러한 설명은 성화를 칭의보다 앞세우는 약점이 있다.



7. 중생 체험의 성질 : 초자연적으로, 총체적으로, 즉시에 주어지는 중생

에드워즈는 중생을 ‘새 창조’로 말하였는데, 새 창조의 내용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전부 그리고 즉시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32)

⑴ 에드워즈는 첫째로 ‘영적이고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중생’을 말했다. 그가 새 창조가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즉 그 기원이 초자연적이라는 것이다.33) 즉 인간의 본성에 속하지 않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명백해지는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곧 성도들이 받는 그 은혜로운 감화와 그들이 체험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효력들은 전적으로 본성 그 위에서 나는 것이며, 사람들이 자신의 본성 속에서 발견하는 어떤 것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또는 본성적 원리들을 행사하여 얻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34)

에드워즈는 죄인에서 성도로 바뀌는 이 변화는 “도덕적인 변화”가 아니고 “물리적인(physical) 변화”35)라고 말했다. “만일 하나님의 성령의 어떤 직접적인 영향이나 활동이 세상 어느 곳에 있는 어떤 창조된 존재에게 조금이라도 임한다면, 사도 시대 이후로 그것은 물리적인 임함입니다. 만일 그것이 어떤 동기들을 일으키는 생각 중에 역사하든지, 어떤 점에서건 어떠한 효과를 낳거나 촉진하는 것이든지 간에, 그것은 여전히 물리적입니다. 어느 점으로나 그와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마음의 기질이나 본질이 즉시 변한다고 가정한다면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36)

⑵ 에드워즈는 둘째로 ‘총체적 중생’을 말했다. 그는 중생을 완전히 새로운 것을 “전부” 즉시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회심 때에 일어나는 변화는 인격 전반에 걸친 변화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으로 회심한 사람은 새 사람이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속만 새 것이 아니라, 바깥도 새롭게 된 자입니다. 그들은 영과 혼과 몸 전체가 통틀어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옛 것은 지나가 버리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눈과 새로운 귀와 새로운 혀와 새로운 손과 새로운 발을 가졌습니다. ― 즉 새로운 대화 내용과 새로운 생활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를 그의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계속합니다.”37)

⑶ 에드워즈는 셋째로 ‘즉시적 중생’을 말했다. 그에 의하면, 회심은 “즉시에” 이루어지는 역사이지 점차적으로 이루어지는 역사가 아니다.38) “회심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회심의 준비 단계인 지식, 개혁, 그리고 죄의 깨달음은 점진적일 수 있습니다. 회심 이후에 따르는 은혜의 역사도 점진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전적인 부패와 타락의 상태로부터 건짐을 받아 은혜의 상태로 들어가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소유하게 되며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수단인 ‘회심’이라는 이 은혜의 역사는 한순간에 이루어집니다.”39)

8. 중생의 표지 : 에드워즈의 『신앙 감정론』에 나오는 진정한 거듭남의 표지

에드워즈는 누가 참된 중생을 하였는지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연구를 많이 했다. 그 결실로 나온 책이 『신앙 감정론』이다. 새뮤얼 홉킨스(Samuel Hopkins)는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를 구별하는 일에 있어서 에드워즈만큼 힘을 쏟은 사람이 없고 그만큼 성공한 사람도 없다고 했다. 『신앙 감정론』은 본래 베드로전서 1장 8절을 본문으로 해서 1743년에서 1746년 초까지 노샘프턴에서 전했던 연속 설교인데, 후에 수정 보완하여 한 권의 책으로 1746년에 발행되었다. 에드워즈는 처음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할 때부터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운 작용들’의 본질과 표지들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고 고백했다.40)

에드워즈는 『신앙 감정론』을 3부로 나누어서 기록하고 있는데, 1부는 정서가 종교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다루었고, 2부는 진정한 은혜에 속한 정서라고 볼 수 없는 것 12가지를 다루었고, 3부에서는 진정한 은혜에 속한 정서 12가지를 다루었다. 그는 정서(affections)란 “의지와 성향이 모두 왕성하고 생생하게 활동하는 것”이라고 하였다.41)

제1부에서 에드워즈는 종교는 머리보다 마음에 그 좌소가 있다고 말했다. “종교의 가장 중요하고 근원적인 좌소가 바로 마음입니다.”42) 이는 메마른 이성주의와 형식주의를 겨냥한 말이다. 오늘날에도 성령을 느껴야 하고 체험해야 한다고 하면, 마치 못 들을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음 에드워즈의 글을 읽어 보라.

“다른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높은 정서들을 정죄하는 사람은 높은 정서를 갖지 못한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신앙적인 정서가 없는 사람이 바로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십시오. 자신은 신앙적 정서가 없으면서도 신앙적인 정서를 보이는 사람들을 정죄하려는 사람들이야말로 전혀 신앙을 갖지 못한 사람들입니다.”43)

에드워즈는 이와 같이 ‘마음의 종교’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나 한편 제2부에서는 크게 고조된 감정이나 이상한 신비 체험을 은혜의 징조로 보는 열광주의의 오류를 크게 경계했다. “이와 같은 종류의 신앙을 통해서 사탄은 광명한 천사로 가장합니다. 기독교회의 시작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사탄은 이런 거짓 신앙을 성공적으로 활용하여 신앙의 소망스럽고도 행복한 부흥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44) 제1차 대각성 운동 당시 열광주의는 진정한 부흥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에드워즈는 분명 종교적인 정서이지만 꼭 구원에 이르는 은혜로운 정서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것들로 다음과 같이 12가지를 말하였다.

⑴ 참된 중생을 입증하지 못하는 12가지 표지

첫째, 에드워즈는 종교적 정서가 매우 크다고 해서 은혜로운 정서인 것을 입증해 주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영적이지 못하고 구원과는 아무 상관 없는 종교적인 정서이면서 매우 높게 나타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 내시는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큰 감명을 받은 큰 무리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극도로 그리스도를 높이며 큰 소란을 떨었습니다. …… 사도 요한에 의하면 사람들이 이러한 소동을 벌인 까닭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기적에 큰 감동을 받은 까닭이었습니다(요 12:18). 이 때에 큰 무리가 ‘호산나’라고 외치자, 바리새인들은 ‘보라 온 세상이 저를 따르는구나.’라고 서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는 몇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한다. “신앙적 정서가 매우 높게 고양된다 할지라도, 참된 신앙과 완전히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정통 신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입니다.”45)

둘째, 에드워즈는 몸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해서 그 정서가 참된 신앙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전혀 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몸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해서 그 정서가 영적인 것이라는 확실한 표지가 되는 것은 아님은 명백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세상적인 일들에 대한 커다란 정서로 인해서도 몸이 큰 영향을 받는 것을 종종 보기 때문입니다.”46)

셋째, 신앙에 대해서 뜨겁게, 자신 있게 말한다고 해서 꼭 참된 은혜로운 정서를 가졌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체험을 지나치게 많이 말합니다. 우리는 도처에서 그리고 모든 부류의 사람 가운데서 이런 사람을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좋은 징조이기보다는 나쁜 징조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잎이 지나치게 무성한 나무는 좀처럼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 사도 유다는 초대 교회에 가만히 들어와 대단한 신앙이 있는 척 가장함으로 잠시 동안 의심을 받지 않았던 사람들을 ‘저희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유 1:12)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이들을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벧후 2:17)라고 말씀합니다.”47)

넷째, 에드워즈는 신앙적 정서와 흥분이 자신에게서 온 것이 아니며, 자신들이 고안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자신들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해서 꼭 은혜로운 정서인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들이 체험한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어떤 영적 존재에게서 온 것”일 수 있다. 혹은 “하나님의 성령이 하신 일이지만 성령의 구원하시는 역사가 아닌 일반적인 역사에서 비롯된 생각”일 수도 있다. 혹은 “뇌가 병약하거나 여러 가지 생각과 인상에 쉽게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가지는 이상한 생각과 상상”일 수 있다.48)

다섯째, 놀랍도록 성경 말씀으로 마음에 다가왔다고 해서 참으로 거룩하고 영적인 정서라고 할 수 없다. 에드워즈는 그런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마음 속에 아주 달콤한 약속들이 떠올랐습니다. 그 약속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직접 내게 말씀하시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저에게는 그런 성경 본문을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저는 그 본문과 연관된 어떤 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너무 갑작스럽게 떠올라서 저 자신도 놀랐습니다.’” 그는 왜 사람들이 이런 착각에 빠지는지 설명했다. “이 문제에서 무지하고 또 이해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잘 속아 넘어가는 이유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경 안에는 잘못된 것이 전혀 없고, 순전하며 완전하기 때문에 성경 말씀에서 비롯된 체험들은 반드시 옳다.’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귀도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 성경 이것저것을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유혹하고 기만하려고 시도했다.”라고 그는 경고했다.49)

여섯째, 에드워즈는 겉으로 사랑의 표시가 난다고 해서 꼭 구원하는 정서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사람에게 일종의 종교적인 사랑이 있더라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를 갖지 못한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앙을 고백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사랑을 가지고 있지만, 그런 사랑은 지속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므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2~13). 하반절이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그들의 사랑이 끝까지 지속되지 못하고 식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50)

일곱째, 여러 종류의 다양한 종교적 감정을 갖고 있다고 해서 꼭 은혜로운 정서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말했다. 그는 “모든 유의 은혜로운 정서에 가짜가 끼어드는 것은 분명”하다고 하였다. “하나님이나 형제들에 대한 사랑”도 모조품이 있다. 바로나 사울이나 아합이나 광야의 이스라엘 자손들에게서처럼 죄에 대한 “경건한 슬픔”에도 가짜가 있다(출 9:27 ; 삼상 24:16~17 ; 26:21 ; 왕상 21:27 ; 민 14:39~40). 여호와를 경외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우상을 섬겼던 사마리아인들에게서처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도 모조품이 있다(왕하 17:32~33). 기타 “하나님께 대한 감사”, “순간적인 영적 기쁨”, “종교적인 일에 대한 열심”에도 가짜가 있다. 예후(왕하 10:16)와 회심하기 전의 바울(갈 1:14 ; 빌 3:6)과 믿지 않은 유대인들에게서처럼(행 22:3 ; 롬 10:2) “열심”에도 가짜가 있다. “간절한 종교적 갈망”에도 가짜가 있다. 바리새인들과 같이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삶을 강하게 소망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은혜로운 정서는 아닌 것이다.51) 가짜를 보고 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

여덟째, 일정한 순서에 따라서 기쁨이 왔다고 해서 (즉, 죄에 대한 각성이 있고 난 후에 평화와 기쁨이 왔다고 해서) 은혜로운 정서를 입증해 주지는 않는다고 에드워즈는 말했다. 사람들은 마귀를 통해서도 무서워하는 마음을 주입받을 수 있다.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 두려움의 정서를 가질 수도 있지만, 마귀에게 그 일이 허락된다면 “마귀도 그 일을 잘 할 수 있다.”52)

아홉째, 에드워즈는 종교적인 일에 많은 시간을 들이고 외적인 예배의 의무에 많은 열심을 보인다고 해서 그 정서가 참된 신앙의 성질을 가진 것인지 입증해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성향은 전혀 은혜를 갖지 못한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들은 길게 기도하며 일주일에 두 번 금식했습니다.”53)

열 번째, 하나님께 찬양을 열심히 많이 한다고 해서 참으로 은혜로운 정서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말했다. 은혜 없는 사람들도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향해서 고조된 감정을 가질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에 큰 목소리로 외치면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찬양했습니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높은 곳에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쳤습니다.”54) 그러나 나중에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찬양을 열렬히 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은혜로운 정서가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열한 번째, 에드워즈는 자기가 경험한 것이 신적인 역사이고, 또 자신들은 좋은 상태에 있다고 강하게 확신한다고 해서 꼭 은혜로운 정서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잘못된 확신일 수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일단 어떤 위선자가 거짓된 소망으로 확고하게 서게 되면, 자기는 구원받았다고 하는 소망을 의심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참된 성도들은 때때로 자신의 부족함을 생각하고 겸비해지지만 위선자들은 그런 모습이 없습니다. …… 거짓된 소망을 가진 사람은 참된 성도들이 자신의 부패함을 보는 시각이 없습니다. …… 위선자들에게 있는 확신은 죄가 그 확신을 흔들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들은(적어도 그들 가운데 일부는) 가장 부패한 삶으로 가장 사악하게 살면서도, 자신들의 소망을 담대하게 주장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기만당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55)

열두 번째, 외면적 모습이 아주 감동적이고 참된 신앙인들이 보기에 기쁨을 주는 그런 모습을 지녔다 해서 꼭 은혜로운 정서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말했다. “성경은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불확실하며 속기 쉬운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한다. “화려하게 신앙 고백을 하여 탁월한 성도라고 인정받던 사람들이 신앙에서 떨어져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나는 일이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흔한 일입니다.”56) 그는 말한다. “모든 외적인 표현들과 모습에서, 위선자와 참된 성도가 얼마나 비슷합니까!” 외면적인 훌륭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는 그 신앙의 진위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꽃의 아름다운 색깔이나 향기가 아니라, 나중에 나오는 익은 열매로 판단해야 합니다.”57)

⑵ 참된 중생을 입증하는 12가지 표지

제3부에서 에드워즈는 참된 거듭남의 역사가 주어질 때 나타나는 진정한 은혜에 속한 정서로 다음 12가지를 말했다.

첫째, 에드워즈는 참된 은혜로운 정서는 ‘영적이고,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감화와 작용’에서 온다고 말했다. 참된 정서는 성령님의 내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당신이 영구적으로 거하시기 위해 참된 성도들 안에 내주하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본성의 원리로서 또는 생활과 행동의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원천으로서 성도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칩니다.”58)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면 전혀 새로운 감각이 생긴다. “하나님의 성령의 구원하시는 사역을 통해서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진 은혜로운 역사와 정서 가운데는, 그들의 마음에 새로운 내적인 지각과 감각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그 성질과 종류에 있어서 그들이 거룩함을 입기 전에 그들의 마음에 가졌던 어떤 것과도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59) ‘영적이고 신적인 일들’에 대하여 참된 성도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느끼는 것과 전적으로 다르게, 마음속에서 ‘새로운 감각’을 행사하여 그것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마치 꿀을 쳐다보고, 마음으로 그 맛을 상상하는 것과 그 꿀의 단 맛을 직접 맛보는 것은 전혀 다른 것과 같다. 영적인 세계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감각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다.

둘째로, 에드워즈는 참된 은혜로운 정서는 하나님께 속한 것들의 ‘초월적이며, 탁월하고, 사랑스러운 본성에 대한 감동’에서 온다고 말했다. 이기심이나 탐욕스런 자기 사랑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탁월성과 영광,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하시는 일, 하나님의 방식 등은 참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차적인 이유가 된다.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의 기초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사랑스러우신 분이시요, 사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요, 최고로 사랑스러운 본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이치에 합당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갖게 하는 제일의 요건임에 틀림없습니다.”60)

하나님을 가장 사랑스럽게 만드는 것도 하나님의 탁월성이다. 하나님의 본성이나 신성은 무한히 탁월하다. 그 하나님의 본성이나 신성은 무한히 아름답고, 빛나며, 영광 그 자체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탁월하심에 대한 감동에서가 아니라 자기 정욕으로, 즉 하나님을 믿음으로 얻게 되는 혜택이 자기 사랑을 만족시켜 주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수가 있음을 에드워드는 경고했다.

셋째, 에드워즈는 참된 거룩한 정서는 하나님께 속한 것들의 탁월함 중에 특히 “도덕적 탁월함”의 사랑스러움에 그 토대를 둔다고 강조했다. 그는 하나님의 본성적인 완전과 도덕적인 완전 사이를 구분했다. “하나님의 도덕적인 완전성이라 할 때는 하나님께서 도덕적인 행위자로서 발휘하시는 속성들을 뜻합니다. …… 한마디로 그의 거룩하심을 뜻합니다. 이에 비해 하나님의 본성적인 속성이나 완전성들이라고 말할 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나 도덕적 선하심이 아니라, 그의 위대하심을 이루고 있는 속성들을 뜻합니다.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중생의 필요성(아더 핑크)



중생의 필요성(아더 핑크)


 인간은 본래 타락한 자들이기 때문에 중생이 필요하다. 


타락함으로써 인간은 선한 것에는 부적당하게 되었다. 

죄악 중에 출생하고 죄 중에 잉태되었기 때문에(시 51:5), 

인간은 “모태에서부터 패역한 자”(사 48:8)이다. 

“그들은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한다.”(시 58:3) 

그리고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창 8:21) 

인간은 교양이 있고 교육받고 세련되었고 종교적이기조차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심히 부패”하였다.(렘 17:9)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지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 보시기에 사악하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마 7:18) 

인간이 거듭나기 전에는 

그들은 모두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자들이다.(딛 1:16) 


타락함으로써 인간은 선한 것에는 부적당하게 되었다. 

죄악 중에 출생하고 죄 중에 잉태되었기 때문에(시 51:5), 

인간은 “모태에서부터 패역한 자”이다.(사 48:8) 

“그들은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한다”(시 58:3) 

그리고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창 8:21) 

인간은 교양이 있고 교육을 받았고 세련되었고 종교적이기 조차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심히 부패”하였다.(렘 17:9)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지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 보시기에 사악하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가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마 7:18) 

인간이 거듭나기 전에는 

그들은 모두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들이다.(딛 1:16) 


타락함으로써 인간은 선한 일을 자발적으로 할 수 없게 되었다. 

타락한 상태에서의 모든 의지의 동기는 

올바른 원리를 따르지 못하고 올바른 목적을 향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모두 죄악일 뿐이다. 

인간을 제멋대로 놔두고 율법과 질서가 부여한 모든 제한을 풀어놓는다면, 

거의 모든 설교자들이 증거하는 바와 같이, 

인간은 급속히 짐승보다 못한 수준으로 타락하게 된다. 

그는 선한 일에는 부적당하고, 기꺼이 하려고 들지도 않을뿐더러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자신의 이상에 들어맞는다고 진실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겠는가? 

모든 사람들은 

자신을 아래로 잡아끌고 악으로 향하게 하는, 

즉 그것을 이기려고 애써 대항한다 해도 

여러 형태를 취해, 다소간에 자신을 정복하고 마는 이상한 힘이 자신 안에 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친구들의 친절한 경고와 하나님의 종들의 충성스러운 경고, 

고통과 슬픔에 대한 엄숙한 실례들, 여기저기 놓여 있는 질병과 죽음 

그리고 자신의 양심의 호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굴복해 버리고 만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롬 8:8)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은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과 친교를 나눌 수 있기 전에 

그 사람 안에는 근본적이고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할 절실한 필요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금 이 땅에는 저주가 내려져 있기 때문에 

땅이 인간의 타락 이전의 상태와 같이 열매를 맺을 수 있으려면 

완전히 변화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일반적인 죄악에 붙잡혀 있는 인간도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기 위해서”는 새롭게 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롬 7:4) 

그는 다른 줄기에 접붙여지고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그의 부활의 능력에 참여해야 한다. 

이것이 없이도 그가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열매는 아니다. 

영적인 행동의 원리를 갖지 않은 이가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설 수 있겠는가? 

영적인 생명을 갖지 않은 이가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겠는가? 

잔인하고 악마같은 본성을 가진 이가 어떻게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할 수가 있겠는가? 

 

 

 인간의 전적 부패 때문에 중생이 필요하다.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다 타락한 자들이고 

인간의 존재의 모든 부분은 죄로 인해 오염되어 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다.(렘 17:9) 

그의 마음은 사탄에 의해 혼미케 되었고(고후 4:4) 

죄로 어두워졌으므로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다.(창 6:5) 

그의 성향은 변절되어 버려서 

그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사랑하시는 것을 미워한다. 

인간은 타락한 피조물이다. 

그것은 몇 개의 잎사귀가 시들어 버린 것이 아니라 

나무 전체와 뿌리와 가지까지 썩어 버린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 안에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 있다. 

근본적이라는 단어는 ‘뿌리’를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왔으므로, 

우리가 인간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말할 때, 

인간 안에는 그의 존재의 근원과 기질 안에

본래부터 부패되고 원래 악마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는 그 열매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 죄가 흘러나오는 뿌리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 안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당연히 더 높은 곳으로부터의 능력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으므로 하나님만이 인간을 재창조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요 3:7)고 말씀하신 것이다.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고 무가치한 존재이지만 

전능하신 능력이 그를 살릴 수 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롬 5:12) 

아담이 금단의 열매를 먹었던 날에 그는 영적으로 죽었다. 

그리고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영적인 생명을 소유한 아이를 낳을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후손들은 

자연히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상태로 태어나게 되며(엡 4:18) 

“허물과 죄로 죽었다”(엡 2:1) 

이것은 단순한 말의 비유가 아니라 엄숙한 사실이다. 

모든 아이는 영적인 생명의 불꽃을 단 한 줄도 받지 못하고 태어난다. 

그러므로 영적인 생명의 나라인 하나님의 왕국(롬 14:17)에 들어가기 위해서라면 

그곳에 맞는 상태로 태어나야 한다. 

만일 주님의 백성과 이 세상사람 사이에 아주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지니신 영광을 어떻게 상상이나 하며 

어떤 영광을 그리스도에게 드릴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 두 집단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 되는 마음의 변화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즉 양과 염소가 본성이 서로 다른 것처럼 

모든 차이가 생기게 하는 원천인 본성이나 기질의 변화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으로 

그들을 구분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모든 중보적인 사역은 이 한 가지 목적을 지니고 있다. 

주님의 제사장으로서의 임무는 

그의 백성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고 또한 하나님께로 데려오는 것이다. 

그의 예언자로서의 임무는 

그들에게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고 

그의 왕으로서의 임무는 

그들로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과 거룩한 대화와 교제를 나누기에 합당하게 되는 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격들을 주고 

아름다움을 그들에게 나눠주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셨다.”(딛 2:14)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고전 6:9) 

그러나 많은 이들이 미혹받았고 

특히 바로 이점에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 문제에 있어서 미혹을 받았다. 

하나님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고 경고하셨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에게 해당된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신에 신앙을 고백하는 수천만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게 모든 것이 잘되고 있다는 헛되고 거만한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제멋대로의 그리고 자신만을 즐겁게 하는 삶을 계속하면서, 

자비를 기대하며 미혹당하고 있다. 

그들은 매일매일 지옥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천국에 합당한 자라는 환상에 빠진다. 

그가 자기 백성을 죄 가운데서(in)가 아니라 

그들의 죄로부터(from) 구원하실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마 1:21), 

이것은 그들을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죄의 세력과 오염에서도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저가 스스로 자긍하기를 자기 죄악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시 36:2)라는 이 엄숙한 말씀이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고 있는가? 

사단이 주로 사용하는 책략은, 

사람들이 세상과 하나님을 성공적으로 조화시킬 수 있고 

성령에 따르면서도 육적인 일을 허용하여 ‘두 세계를 잘 조화시킬’ 수 있다는 상상에 

사람들을 빠뜨려 미혹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다”(마 6:24)라고 

분명히 선언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찌르는 이 말씀의 참된 뜻을 오해한다. 

즉 정말로 강조된 점은 ‘둘’이 아니라 

‘섬긴다’는 데에, 즉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섬김을 받기를”, 즉 두려워하고 복종하고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뜻은 생활의 모든 세세한 부분까지도 감찰하신다.(삼상 12:24-25을 보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 4:10) 

 

 

 인간이 하나님께 부적합하기 때문에 중생이 필요하다. 


인간이 영적인 본성을 소유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영적 세계에 참여할 수 없다. 

이 영적 본성만이 영적 세계에 속한 일들을 즐길 수 있는 적성과 자격을 부여해 준다. 

그런데 자연인은 이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깨닫지”도 못한다.(고전 2:14) 

그는 그것들을 사랑하지도 바라지도 않는다.(요 3:19) 

또한 의지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노예가 되었으므로(엡 2:2,3) 

그것들을 바랄수도 없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이 영적 세계에 들어갈 수 있기 위해서는 

그의 지식이 초자연적으로 계몽되고 

그의 마음이 새로워지고 

그의 의지는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 

죄인이 중생하기 전까지는 

그 죄인과 함께 한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에는 접촉점이 있을 수 없다. 

어떤 중요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 않은 두 개의 집단은 법적으로 서로 연합할 수 없다. 

본성에 있어서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은 함께 연합되어질 수도 있지만 

서로 다른 본성은 연합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첫 번째 아담’과는 같은 본성을 가지고 서로 연합되어 있다. 

그런데 ‘마지막 아담’과는 새로운 본성이나 원리가 없이 

어찌 그와 연합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살아있는 혼으로 첫 번째 아담과 연합되어 있으므로 

살려주시는 성령에 의하여 마지막 아담과 연합되어야 한다. 

하늘의 형상이 없이는 하늘의 아담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전 15:48,49) 

우리 주님의 지체일 것 같으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머리에게 전하여진 것과 꼭 같은 

거룩의 본성을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눅 1:35) 

이 둘 속에는 한 ‘영’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 쓰여 있다.(고전 6:17) 

그리고 다시 하나님은 우리에게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롬 8:9) 

생명이 없이는 그 어느 것도 다른 것과 생명의 연합을 이룰 수 없다. 

머리는 살아있는데 몸은 죽었다고 하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새로워진 영이 없이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 

자신의 율법과 거룩함을 소유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과 같은 피조물과 교제를 나눌 수 없으며, 

인간도 자신의 타락한 본성에 뿌리박힌 반감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없다. 

그러면 인간이 본성의 철저한 변화를 겪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겠는가? 

빛과 어두움이, 그리고 살아있는 하나님과 죽은 심령이 어떻게 교제할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이 의합치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는가?”(암 3:3)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나 인간은 죄를 사랑한다. 

하나님은 거룩함을 사랑하시나 인간은 그것을 미워한다. 

죄로 인하여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게 되었다.(엡 4:18) 

그러므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생명이 회복되어져야 한다. 

이전 것은 지나가야 하고 이제 모두 새로워져야 한다.(고후 5:17) 

복음적 의무는 중생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첫째 내용은 자아를 부인하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기”(딤후 3:2) 때문에 

타락한 인간본성으로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영이 새로워지기 전까지는 자기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언약은 

“내가 그들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다”(겔 11:19)

모든 복음적 의무는 마음의 유연성과 부드러움을 요구한다. 

교만은 마귀를 정죄하는 정죄(딤전 3:6)이며 

우리의 첫 조상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창 3:5) 부푼 욕망 때문에 타락하였다. 

그 때 이후로 인간은 

더욱 높아지고 싶어 하고 너무나 고집이 세고 

복음이 요구하고 있는 요소들이 그에게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복음적 의무를 수행할 수 없다. 


복음이 주요 목표로 삼는 것은 

우리 자신을 영광되이 하는 것을 다 물리치고 

오직 주 안에서만 자랑하게 하는 것이다.(고전 1:29-31) 

그러나 이것은 은총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새롭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녹아지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다시 만들어질 때에야 가능한 것이다. 


새로운 본성이 없이는 우리는 복음이 요구하는 의무를 계속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한다”(롬 8:5) 

그런 마음은 영적인 일에 오랫동안 종사할 수 없다. 

양심의 가책, 지옥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일시적으로는 영향을 끼칠 수 있으나 

그것들이 지속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돌밭도 싹을 낼 수는 있으나 뿌리가 없으므로 곧 말라 버린다.(마 13장) 

돌을 하늘 높이 던질 수도 있으나 결국 그것은 땅에 떨어진다. 
자연인은 한동안 종교적인 열정에서 높게까지 올라갈지도 모르지만 

이스라엘에 대해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저희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이 성실치 아니하였음이로다.”(시 78:37)라고 말한 바와 같이, 

그에 대해서도 조만간 그런 평가가 있게 될 것이다. 

많은 이들이 성령으로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나 결국은 육으로 끝나고 만다. 

오직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곳에만 그 일은 지속될 것이다.(전 3:14, 빌1:6) 

중생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에 필수불가결한 것과 같이 

하늘의 영광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도 반드시 중생해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에, 

그들의 힘과 신선함은 바로 그 중생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노쇠하였거나 연약한 사람은 그 약속된 땅에 한 사람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즉 애굽의 본성을 가지고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과 

애굽에서 종살이 하면서 고통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의 양파와 마늘을 그리워하는 자들은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모두 죽어버리고 말았다. 

오직 어려운 난관에 부딪쳤을 때 그들을 격려하던 두 첩자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옛사람을 보유하고 있고 종의 집에서 태어난 사람은 어느 누구도 들어갈 수 없지만 

오직 새로 태어난 피조물만은 하늘의 가나안에 들어갈 것이다. 

하늘은 불결한 자가 아니라 거룩하게 된 자가 받을 기업이다. 

“그들이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되리라”(행 26:18) 

율법 아래 있었던 제사장은 자신을 성결케 하지 않고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고 

사람들 또한 성결케 되어지지 않고는 예배하는 무리 속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또한 예수님의 피로 뿌려지지 않고는 

그 어느 누구도 지성소에 접근할 수가 없다.(히 10:22) 

천국은 준비된 자에게 예비된 장소이다. 

그리스도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씀하셨다.(요 14:2) 

누구를 위해서인가? 

주를 좇기 위해 마음으로부터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을 위해서이다.(마 19:27)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고전 2:9)를 위해서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일들을 사랑한다. 

그들은 영적인 일들의 무한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깨닫는다. 

그리고 영적인 일들을 진실로 사랑하는 그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 어떠한 희생도 크게 여기지 않는다.(빌 3:8) 

하나님은 그의 가장 큰 행복이 되었고 

하나님의 뜻이 그 자신의 유일한 규칙이 되며 

하나님께 영광 돌려 드리는 일이 그의 주요 목적이 된다.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는 영혼의 기질 그 자체가 변한 것이다. 

인간이 하늘나라를 준비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변화되어야 한다. 

중생한 자들에 대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2)고 쓰여 있다. 

어느 누구도 거룩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합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룩한 자들의 기업이기 때문이다. 

하늘은 빛 안에 있는 기업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어둠의 권세 아래에 있는 한 그 기업에 적합하지 않다. 

그리스도 자신도 그가 죽음에서 부활한 후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영광을 얻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셨고 

또한 우리도 죄에서 부활되지 않고서는 하늘에 들어갈 수가 없다.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생해야 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그와 아주 친밀한 교제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과 같이 우리의 허물을 없애는 것이다.(사 44:22) 

왜냐하면 우리는 죄 때문에 하나님과 떨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사 58:2)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요한복음 3:36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기뻐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기쁨을 누릴 수 있으려면 “청결한 마음”이 없어서는 안된다. 

이 ‘청결한 마음’은 죄로부터 깨끗하여지고 그 앞에 거룩한 목표를 가지게 된 마음이다. 

‘청결한’ 마음은 ‘거룩함의 아름다움’에 이끌리고 위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의 불완전한 거룩함을 참지 못하시며

그 불완전한 거룩함을 불필요한 “엄격함” 또는 청교도적 광신이라고 꾸짖으시는데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얼굴은 의로운 중에만 볼 수 있다.(시 17:15)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어떤 사람도 그 자신 안에 근본적인 변화, 

즉 죄로부터 거룩함에로의 변화를 겪지 않고는 

하나님과 함께 살 수도 없고 

영원히 하나님의 존전에서 행복할 수도 없다. 

이 변화는 타락하게 되었을 때처럼, 
바로 우리 존재의 근원에까지 이르러 

우리 존재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어야만 한다. 

즉 우리 마음의 어두움을 벗겨내고, 

양심을 일깨우고 

평화롭게 하며, 

우리의 감정을 영적이게 하고, 

의지를 변화시키며, 

우리의 전 삶을 개혁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이 큰 변화는 바로 이 땅에서 일어나야 한다. 

영혼이 하늘로 옮겨진다고 해서 중생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장소가 하나님의 형상을 전해주는 것은 아니다. 

천사들이 타락하였을 때, 그들은 하늘에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의 영광이 그들을 회복시키지는 않았다. 

사단은 하늘에 들어갔었지만(욥 2:1) 아무 변화도 겪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 

한 영혼이 하늘나라에 합당해지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그 영혼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셔야 한다. 

육체가 하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변화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혼도 변화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무엇이든지 속된 것은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기”(계 21:27) 때문이다. 

그런데 사악한 자들은 주제넘게도 천국에 가기를 원하면서도 

이 땅에서는 그 거룩함을 멸시하고 증오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주민들은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함을 분명히 보게 되며 

그와 지극히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들의 내적인 존재(외적인 생활 뿐만 아니라)가 

근본적이고 혁명적이며 초자연적인 변화를 겪지 않고는 

이것을 받기에 합당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 

그리스도를 마음 속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그에게 여기 이 지상에서 

자신의 삶의 최고의 자리를 내어주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거처를 준비하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럴 리가 없다.(잠 1:26) 

우리의 마음은 하늘에서 찬미의 가락을 울리기에 합당하도록 

이 지상에서도 찬미로 가득차야 한다. 

하나님은 거룩과 행복을 (마치 죄와 비참을 그렇게 하셨듯이) 

아주 밀접하게 연결하셨기 때문에 그것들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중생하지 않은 영혼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곳이 양심의 채찍질과 하나님의 거룩함의 고통스러운 불로부터 피할 수 있는 

은신처는 되지 못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하늘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먼저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은 사람은 (행 26:18)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죄의 용서함을 받을 수 없다.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는 (미 7:19) 

하나님이 그들의 허물을 없이 하신다. 

죄를 용서하고 마음을 청결히 하는 것은 

구세주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처럼(요 19:34)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하늘에 합당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는 것이 그 곳을 위한 한 자격이 되듯이, 

심령으로 새롭게 되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엡 4:23-24)

새사람을 입어야 한다. 

죄인은 용서함을 받음으로 

왕의 존전에 서서 그의 식탁에서 시중들 수 있는 자격은 얻을 수 있으나 

그의 악취나고 해충이 득실거리는 옷을 벗어버릴 때까지 

그에 합당한 존재는 되지 못한다. 

자신만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살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죄는 하나님이 용서하셨다고 상상하는 것은 

치명적인 위험이며 위험한 가정인 것이다. 

우리가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하심을 얻은 것을 증거해 주는 것은 

바로 “중생의 씻음”(딛 3:5-7)이다.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실 때, 

그리스도께서는 그 구원받은 자 안에 내주(內住)하신다.(갈 2:20) 

그러나 그가 영적으로는 

냉담하고 완고하고 생명이 없는 채로 남아 있는 마음 속에 

거하시는 일은 불가능하다. 

거룩함의 최고의 모범이신 이가 방종한 자의 후원자가 되실 수는 없는 것이다. 

칭의와 성화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어떤 사람이 죄책으로부터 용서함을 받을 때 

그는 또한 죄의 지배로부터도 구원된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영혼이 중생하기 전까지는 이루어질 수 없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전가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반드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되어야 했던 것처럼(롬 8:3)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있기 전에(고전 5:21)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후 5:17)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벧전 1:4)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할 수 있기 전에 범사에 인간들과 같이 되심처럼 

실제적이고 크게 필요한 일이다.(히 2:14-17) 

하나님이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고는, 그는 죄의 나라로 들어올 수가 없다. 

인간이 거듭나지 않고는 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 

즉 모든 의지의 신성한 전권대사이며 집행자인 성령의 능력이 

하나님의 성육신과 인간의 중생을 이루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죄가 될 수도 있으며 

사람들의 아들들이 의롭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시간을 죄 속에서, 즉 자신만을 즐겁게 하며 소비해 버린 사람이 

어떻게 그 지극히 거룩한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오랫동안 깜깜한 어둠만을 보아왔던 눈이 

갑자기 한낮의 밝은 빛을 참아내기 어려운 고통이 되듯이, 

중생하지 못한 자가 빛이신 자를 바라볼 때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한 광경을 환영하는 대신에, 

“땅에 있는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할 것이다”(계 1:17) 

실로 그들의 고통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그들은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고 할 것이다.(계 6:17) 

하나님이 당신을 중생시키지 않으신다면, 

바로 당신이 이 일을 당하게 될 것이다. 



아더 핑크의 ‘구원의 교리’ 중에서


 

첨부파일 중생의 필요성.hw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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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비가오는 날이면 그때의 일이 생각 이 난다,
 주차의 번거로움을 피하려 모처럼 지하철을 이용해 거래처로 향했다.
‘문현역’에서 내려 출구를 겨우 찾아 계단으로 오르니 웬 계단이 그리 높은지
 헥헥 거리며 올라오면서
 ‘정말 운동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구를 막 나오려는데 갑자기, 아주 급작스럽게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데 조금 과장하면 
 퍼붓는 것이었다. 나보다 조금 먼저 도착했을까 한 할머니 한 분이 큰 보따리를 움켜쥐고
난처하게 서 계셨다.

평소 준비성 많은 마누라가 억지로 챙겨 준 작은 우산을 펴면서 
“할머니, 어느 쪽으로 가시죠?” 했더니 “에고 난 괜찮은디”하면서 우산 속으로
쏙  들어오셨다.

비가 주춤하면 나갈까 하려는데 급히 나가시는 할머니 덕에 작은 우산을 할머니만
씌워준  채 홀딱 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굵은 비였는지 잠깐 동안에 나는 물에 빠진 생쥐보다도 더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안되겠다 싶어 앞에 보이는 전화박스로 모신 후에 가시는곳을 물었더니 대꾸는 안하시고 
자꾸 주변만 둘러보신다.  

“할머니 전화번호 없으세요?”
그제야 할머니는 허리춤에 꼭꼭숨겨둔, 글씨가 닳아 지워지기 시작한 낡아서 꼬깃한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우리 아들 전화번호여 회사 댕기는데 회사 사장이 지 매형이여, 월급도 많이 준다 캐서 내려왔는데... ”
묻지도 않은 말까지 해가며 주시는 번호가 핸드폰이어서 내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한참 만에 받은  전화 목소리는 힘이 없는 목소리였다.

 “할머니께서 지금 그곳을 못 찾으시는 것 같아 전화 드렸습니다.” “거기가 어딘데요?” 아주 간결하게 묻는 소리에 위치를 상세히 알려주었더니 “예”하고 바로 끊어버린다. ‘참 성격한번 그러네’ 생각을 하고 곧 오리라 믿으며

 “할머니 지방에서 오실 때는 미리 자제분께 전화를 하시고 오셔요. 그래야 마중도 나오고 걱정도 안하시지요. 이렇게 짐도 무거운데 어떻게 이걸 들고 오셨어요?”

 아마 아들과 딸네에 줄 거라고 있는것 없는것 바리바리 챙겼으리라 “뭐 가져올게 있어야지 내어 팔다 남은 나물 쬐께 쌌는데 좋아할랑가 모르겠네.” 할머니 혼자두기 뭣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한참이 지났는데 아들은 오지 않는다. 혹시 못 찾고 헤맬까 싶어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한참 가도 받지 않는다.

할머니가 불안해 하실까봐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시 전화를 걸려는데 벨이 울렸다.  거래처였다. 
잠시 통화를 한 후, 뒤를 돌아보니 트럭 한 대가 서있고 할머니가 낑낑대며 보따리를 싣고  올라타는 중이었다.

트럭에 몸을 실은 할머니가 내 쪽으로 손을 저으며 무어라 하기도 전에 차는 휑하니 가버렸다.  이제 비도 멈추고 내동댕이쳐진 우산을 챙기며 얼굴을 닦는데 속에서 욱하며 올라왔다.

 ‘호랑말코 같은 놈일세. 고맙단 말 한마디 하고 가면 어디 덧나나. 에라, 나쁜 XX야.’
전화를 해서 몇 마디 할까하다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마음을 달랬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핸드폰에 모르는 번호가 부재중으로 찍혀있어 전화를 했었다.

문현동에서의 그 괘씸한 아들이었다.
“그날은 정말 죄송했었습니다. 제가 너무 경황이 없어서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하며 시작된 사연은 이러했다.
“몇 일전 어머니가 내려오신다는 연락을 받고 요즘  제가  굉장히 바쁘고 누님 내외가 멀리 출장 중이라  나중에 연락하면 내려오시라고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다싶어 그렇게 급하게 내려오셨답니다.

사실은  제가 누나 집에서 나온 지 한 참되었고 매형의 사업체가 부도나면서 매형이 구금되어있는 상태에 누나와  저는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이거든요.  노인네 걱정하실까 싶어 친구한테 급히 차도 빌리고 친구 집을 내 것인 양, 말도 맞추고 해서 어머님을  하루 이곳에 모시고 누나네 집에 못 가게 할려 했지요....
그날 밤 어머니가 보따리에서 돈 뭉치를 꺼내더군요.

이백만원이 채 안 되는 금액이었지만 고향산에서 나물캐다 팔아 몇 년간 꿍쳐놓았던 전 재산이지요. 
 “누나네 갖다 주거래이... 줄게 이기밖에 없어서...” 어머니께선 이미 모든 사실을 다 알고 계셨지요.
“니네 매형 우째 크게 잘못되는 거 아니제..”
코를 팽 풀면서 흘리시는 눈물에 나도 울고 내 친구도 울고 그렇게 밤을 보낸 후 누나네 집에 갔답니다.

더 이상은 말해봐야 그렇고... 아무튼 어머님께서도 내려가시며 도와주셨던 그 선상께 꼭 인사드리거라  부탁하셨고 저 또한 찾아뵈려하다가 이렇게 전화로 인사드립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제서야 나물 보따리를 놓칠세라 꼭 안고 계셨던 할머니의 모습과 허둥지둥 경황 없었던
아들의 모습이 이해가 되었다.

자기의 모든 것을 주고도 더 주지 못해 당신의 가슴을 치시는 어머니는
자식들의 어려운 상황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 그 먼 길을 물어물어 왔던 것이었다.
그 어머니의 그  아들이라 어머니 걱정하실까봐 연극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그 아들의 효심…….

 ‘빌어먹을 놈 그놈의 공치사하려고 하마터면 큰 실수할 뻔했잖아.’ 
자책하면서 그 귀한 사랑에 목이 메였다.

그래서 흔히들 어머님의 사랑을  하나님 사랑에 비유하곤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어려운 가운데 자식을 훌륭히 키우시는 많은 어머니들.....,

 이 땅의 어머니들 파이팅!
우리에게 어머니 주신 하나님 파이팅!

글/ 조남호 목사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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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복음연합교회, 서임중 목사 초청 부흥성회

2013/04/26 (금) 22:46 ㆍ추천: 0  ㆍ조회: 72      

뉴욕순복음연합교회(양승호 목사)는 4월 25일(목)부터 4일간 "인생은 지우개가 없습니다(계 22:1-12)"라는 주제로 춘계부흥성회를 열었다. 강사는 서임중 목사(포항중앙교회)로 2011년 할렐루야복음화대회 강사로 선 바 있다.

서임중 목사는 금요일 저녁집회에서 마태복음 16장 21-24절을 본문으로 "믿음의 법칙대로 행하십니까?"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했다. 서임중 목사는 할렐루야대회 강사로 선 명성이 걸맞는 탁월한 진행을 했으며, 순복음연합교회 성도들도 강사의 작은 움직임에도 아멘으로 반응하는 은혜의 집회를 열었다.  

서임중 목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만사가 질서안에서 운행되는 법칙이 있는데 주님의 교회에 법칙이 없겠냐면서 본문을 중심으로 죽어야 사는 법칙, 올바른 가치관의 법칙, 거룩한 희생의 법칙을 전했다. 다음은 말씀내용이다.


▲강사 서임중 목사

어느날 인적이 드문 곳에서 빨간불을 보고 차를 멈추었다. 그런데 뒤에 있는 차가 경적을 울렸다. 사람이 없으니 그냥 가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가만히 있으니 나를 추월해 가다가 경찰에 잡혔다. 빨간 불은 가지말라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고 우리 삶의 질서를 위해 교통법규를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도 법규를 어기고 사고가 일어난다. 만류인력의 법칙등 학교다닐때 배운 여러가지 세상의 법칙이 있다. 우주를 창조하실때 하나님은 그냥 만들지 않으시고 완벽한 하나님의 법칙대로 만드셨고 세상은 법칙대로 운행한다.

인간생활에도 다양한 법칙이 있으며 그 법칙은 통제수단이 아니라 우리를 보다 행복하고 아름답게 하고, 삶의 질을 높여주기 위해 만든 것이다. 질서는 편하고 빠르고 아릅답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교회도 똑 같다. 세상만사 하나님의 창조섭리가 질서안에서 운행되는 법칙이 있는데 하물며 믿음생활에 하나님께서 영적인 법칙 하나 안세우시고 주님의 교회를 이끌고 가시겠는가.

믿음의 법칙대로 행해야 한다. 믿음의 법칙을 뭔지도 모르고 대학 4년 나와 신학교 3년 마치고, 인턴 2년과정 마친후 노회에서 목사고시 합격하고 목사로 임직을 받고 목사가 된다. 믿음의 법칙이 무엇인지 모르고 목사안수 받고 교회를 끌어가는 목사가 되면 교인들이 어렵다.

장로교단은 세례받고 범죄사건 없이 7년이 지나고, 교인들에게 인정받으면 투표에 통과되고 교육과정을 마치면 임직을 받고 장로가 된다. 그런데 믿음의 법칙이 무엇인지 모르고 장로가 되면 그 장로때문에 목사와 성도들이 힘들수 있다. 믿음의 법칙을 제대로 공부안하고 하나님의 교회에서 온갖 일들을 저지르다 주의 몸된 교회가 상처투성이 되고 깨어지고 아파하는 경우가 많다. 믿음의 법칙을 모르는 사람이 목사 장로 집사 권사가 되니 그들때문에 하나님의 교회가 시끄럽고 교인들이 무질서한 가운데 마귀에 지배하는 세계에 들어가서 아름다움이 없다.

믿음의 법칙이 무엇인가. 본문에 답이 다 나와있다. 개인적으로 중히 여기는 본문이다. 본문은 66권 가운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구속사의 비밀이 있는데 그 구속사의 비밀을 제일 처음으로 오픈한 본문이 바로 이 본문이다. 보통 사건이 아니다. 이 본문 말씀을 가만히 보다가 이것이 믿음의 법칙이라는 깨달음이 왔다.

믿음의 법칙 1단계. 죽어야 사는 법칙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마태복음 16:21)

예수님은 내가 죽고 산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그런데 베드로가 죽고 산다는 주님의 말씀가운데 사는 쪽에 관점을 안두고 하필 죽는 쪽에 관점을 두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죽다니 무슨 그런 말을 하십니까"라고 말한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베드로가 두가지 죄를 범한다. 하나는 제자가 예수님을 나무란다. 둘째는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자리까지 올라가 예수님이 안죽다고 단언한다. 큰 범죄이다. 그 순간에 예수님이 타임을 안놓치시고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셨다.

죽고 사는 원리가 믿음의 법칙 1단계인데 죽어야 사는 법칙이다. 예수님이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살길이 없었다. 예수님은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뒤에 부활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내용은 전부 다 역설이었다. 높아지고 싶으면 낮아져라, 섬김받고 싶으면 섬겨라, 살고싶으면 죽어라. 여기서 나오는 믿음의 법칙 1단계가 죽어야 사는 법칙이다.

내가 죽어야 모두가 사는데 나는 안죽고 다른 사람보고 죽으라 한다. 교회생활하면서 내가 안죽는다. 당회하면서도 내 말이 먹혀야 한다. 교회생활하면서 자신이 하는 말이 먹혀들어야 행복한 사람들이 있다. 아니다. 교회에서 내가 죽어야 한다. 내가 죽으면 주님이 나를 살리신다. 교회사를 공부해보라. 하나님의 교회에서 살겠다고 하여 산 사람은 없다. 다 죽었다. 그러나 내가 죽으니 주님이 역사에 이름을 높여 살리셨다. 이것이 믿음의 법칙 1단계이다.

이것을 누가 가장 해박하게 깨닫고 실천했는가. 사도 바울이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고 바울이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정체성을 말한다. 육체와 함께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죽었다는 말이다. 예수님과 함게 육체도 감정도 욕심도 십자가에 완벽하게 못을 박은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그런데 죽었는데 왜 살고 있는가. 그래서 성경은 성경안에서 답을 꺼집어내야 한다. 갈리디아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도 같은 말이다. 바울이 확실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말한다.

그런데 죽었다는 바울이 왜 사는가. 말씀이 이어진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다시 말하면 바울은 예수를 믿음으로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아직도 바울로 살고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어져 간다는 신학적 인간론이 성립이 된다. 신학적 인간론에서 인간을 'Being'아니라 'Becoming'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존재'가 아니라 '존재화'라는 말이다. '되었다'가 아니라 '되어져 간다'는 말이다. 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기에 목사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날부터 주님앞에 설때까지 좋은 목사가 되어져 간다는 말이다.

내가 오늘 여기서 말씀을 증거하지만 내일이 타락하여 몹쓸 인간이 안된다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그래서 주님앞에 설때까지 좋은 목사가 되어간다는 것이 신학적인 인간론이다. 교회에서 장로와 집사로 임직을 받아서 장로와 집사가 된 것이 아니라, 임직받은 그날부터 주님앞에 설때까지 좋은 장로와 집사가 되어져 간다는 말이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니 교회에서 온갖 행패가 벌어지고 시끄러워 진다.

한국교회가 왜 홍역을 앓는가. 기초가 안되어 있다. 믿음의 법칙을 모르고 얼렁뚱당 목사와 장로가 되니 문제이다. 솔직히 말하자. 교회가 시끄러운 것이 평신도 때문이 아니라 목사와 장로때문이다. 깨닫아야 한다. 죽어야 산다는 법칙, 믿음의 법칙 1단계는 잘죽어야 한다.

프라이드 관리법을 심리학을 공부한 분을 알것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존심이 있다. 보편적 인간의 프라이드 관리법은 너가 나보다 낫다는 느낌이 올때 내안의 자존심이 질투로 변질된다. 그래서 네가 고등학교 다닐때는 공부도 못하던 것이 신랑 잘만나 자가용 타고 다닌다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이 왜 나오는가. 현재는 나보다 낫는데 과거를 꺼집어내서 질투로 말이 뒤집어 진다. 보편적인 프라이드 관리법이다.

동시에 너가 나보다 낮다고 느낌이 올때는 짖밟고 무시한다. 가장 인격적인 비열은 강한자 앞에서는 비굴하고 약한자에게는 강한 사람이다. 프라이드 관리를 잘못하는 대표적인 예가 바리새파 사람들이다. 그들은 가난한자(세리, 창녀)를 사정없이 짖밟았다.

에수님의 프라이드 관리법은 상대가 나보다 낫다고 느낌이 올때 존중하고 인정한다. 나보다 안수집사가 늦게 되었지만 장로가 먼저 될수있다. 질투를 한다면 프라이드 관리를 잘못하는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인정하고 존중할줄 알아야 한다. 동시에 예수님의 프라이드 관리법은 나보다 못하다고 느낄때는 돌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인격을 갖추어야 제대로 사는 것이다. 이런 인격을 갖추어야 인간관계가 원만하게 된다. 이런 인격이 안되면 문제가 생긴다.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야 한다. 교회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교회가 무엇인지 모르니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맹사성은 야사를 보면 20세, 정사에는 27세에 고시합격해서 파주군수가 된다. 부임을 받기전에 깊은 산속에 고승을 찾아가 좋은 지혜를 얻고자 했다. 고승은 겸손하게 정도를 잘지켜 선한일을 많이하라고 했다. 맹사성은 고승의 고차원적인 말을 기대하고 왔는데 너무 일반적인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불만을 가지고 가려고 했다. 그때 고승은 잠깐 앉으라고 하면서 주전자에서 녹차를 잔에 부으면서 넘치는데도 계속 붓고있다.

맹사성은 "스님, 잔에 물이 넘치는 것이 안보입니까"라고 짜증을 내며 물었다. 노승은 계속 녹차를 넘치는 잔에 부으면서 혼자 말로 중얼거린다. "잔에 물이 흘러 넘쳐 방바닥을 버리는 것은 보고 알면서 지식이 넘쳐 인품을 버리는 것은 왜 보지를 못하는가." 맹사성은 고승이 자기에게 한 말을 듣고 부끄럽고 창피해서 황급하게 밖으로 나가다가 절간의 낮은 문지방에 이마를 부딪쳤다. 그러자 맹사성의 뒤통수에다 대고 고승은 중얼거린다. "엎드리면 부딪치는 법이 없다."

오늘날 총회, 노회, 교회가 왜 시끄러운가. 엎드리는 사람이 없다. 뻣뻣하게 서니 부딪친다. 잔에 물이 흘러 넘쳐 방바닥을 버리는 것은 보고 알면서, 즉 남의 허물과 약점은 그리도 알고 말하면서 자기자신의 인격을 상하는 것을 왜 보지 못하는가. 그리고 엎드리면 부딪치는 법이 없다. 이 두마디가 이조 5백년사의 최고 겸손한 명재상 맹사성이 되게한 시작이었다.

오늘 성도님들이 믿음의 법칙에 이유를 설명하는 저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여러분의 남은 삶이 윤택하기를 축원한다. 죽어야 산다.

믿음의 법칙 2단계. 올바른 가치관의 법칙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태복음 16:22-23)

이 내용의 핵심은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이다. 이 말씀을 통틀어 함축하니 가치관 개념이다. 여기에서도 사도바울이 가장 모범인이다. 예수님을 만나기전 사도 바울의 생애는 당대의 족보 학벌 명예 권력 부귀 영화 재물 누구도 따라올수 없는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었다.

하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순교할때 까지는 어떤 삶이었는가. 바울은 맞아 만신창이 되었고, 자연으로 부터 위험을 당하고, 동족과 이방인들에게서 위험을 당하고, 헐벗고 굶고 온갖 억울함을 당한다. 순교할때까지의 바울의 생애는 완전한 실패자의 모습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내가 환란을 당해도 낙심을 안하고 내게 주신 주의 은혜는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수 없다고 말한다. 주님의 은혜를 받고 나는 죄인중의 괴수이라고 고백한다. 지구촌의 가장 고상한 지식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시는 것이다. 여기까지 들어가야 올바른 가치관이 성립된다.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땅에 있는 것을 누릴줄도 알아야 한다고 교인들에게 말한다. 아브라함이 은금이 풍부했던 것 처럼 여러분들도 물질의 복과 건강의 복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주님보다 앞세우지는 말아야 한다. 이 세상의 것을 누릴줄을 알아야 한다. 이왕이면 큰 차가 낫다. 돈없이 예배당을 세울수 있는가. 돈없이 선교할수 있는가. 물질의 축복을 누려라. 그러나 예수님 보다는 앞세우지는 말아라.

주일을 까먹으면서, 십일조를 도적질하면서, 주의 종의 가슴을 아프게 하면서 살지는 말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주신 모든 복을 누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가치개념은 바로 서 있으라는 것이다. 내 일생동안 내 범사의 중심에는 오직 주님이라는 가치관이 세워졌을때 믿음의 법칙이 바로 이루어 진다.

요한복음 6장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오병이어 사건을 일으키셨다. 예수님은 무리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때나 지금이나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진다. 제자가 요즘말대로 하면 "예수님, 아무리 세상물정을 몰라도 그렇게 모르시는가. 여기는 빈들이고 날도 저물었습니다. 이백 데니리온의 떡이 있어도 모자랍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현대어로 바꾸면 여기는 빈들이다는 것은 장소핑계이고, 날이 저물었다는 것은 시간핑계이고, 이백 데나리온의 떡은 돈핑계이다. 지금도 하나님의 교회가 거룩한 사역을 위하여 일을 하려고 하면 장소 핑계, 시간 핑계, 돈 핑계이다. 예수님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주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을때는 주님은 다 준비가 되신 것이다. 반드시 이루시는 줄 믿는다.

가치관이다. 무엇이 더 중요하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믿는 사람에게는 주님이 중요한 것이다. 주님은 돌아가신 분이 아니라 지금도 눈이 시퍼렇게 뜨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살피시는 주님이시다. 이 주님을 기쁘게 하면 우리의 모든 범사가 복될것이다.

두번째 믿음의 법칙은 올바른 가치관의 법칙이다. 예수님을 앞세우라. 그런데 예수님이 안보이신다. 그래서 교회를 주님의 교회라고 한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시고 대신 탄생시키신 것이 교회이다. 교회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고 감사하라.

믿음의 법칙 3단계. 거룩한 희생의 법칙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복음 16:24)

다른 말로 바꾸면 자기 십자가를 지는 법칙이다. 십자가는 고난이다. 주님은 정말로 나를 따라 오려고 한다면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다. 쉬운 이야기가 아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회의 성도라면 우리교회에서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교회를 위해 짊어질 고난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예수님을 따를수가 없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10주년


 좋은 글 좋은 생각

 

 

***만남을 사랑으로 이어가려면 ***

만남을 사랑으로 이어가려면 숨김이 없어야 합니다.
마음이 그림자로 가리워져 있으면 진실을 찾을 수 없으니까요
너울을 하나씩 벗겨 나갈 때 만남은 사랑으로 시작될 것입니다

만남을 사랑으로 이어가려면 꾸밈이 없어야 합니다.
환심을 사기 위한 치장은 마음의 짐만 안겨줄 뿐이니까요
구김살 없는 미소와 살아갈 때 만남은 사랑으로 머무를 것입니다

만남을 사랑으로 이어가려면 치우침이 없어야 합니다.
무게의 중심이 맞지 않으면 가는 길이 그만큼 힘들어지니까요
마음의 짐을 나누어 질 때 만남은 사랑으로 빠져들 것입니다

만남을 사랑으로 이어가려면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아무리 흡족한 만남이라 해도 세상은 생각대로 쉽지 않으니까요
강함과 온유함이 어우러질 때 만남은 사랑으로 성숙될 것입니다

만남을 사랑으로 이어가려면 완벽함이 없어야 합니다.
상대방에게 남겨진 부족한 곳은 내가 채워야 하는 사랑의 자리니까요
비우고 또 채워 나갈 때 만남은 사랑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만남을 사랑으로 이어가려면 의혹이 없어야 합니다.
때로는 아픈 만남이라 해도 하늘이 준 선물일 수 있으니까
믿음으로 하나 됨을 기뻐할 때 만남은 영원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 글 / 최현복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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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과 함께라면 / 최송연★
      주님과 함께라면,
      저는 새하얀 달빛이 되겠어요. 달은 혼자 두면 죽은 위성일 뿐이지만… 찬란한 태양 빛을 받아 반사할 때는… 캄캄한 이 세상을 환하게
      밝혀줄 수가 있으니까요.
      주님과 함께라면, 저는 반짝이는 별빛이 되겠어요. 별은 혼자 두면 죽은 위성일 뿐이지만… 찬란한 태양 빛을 받아 반사할 때는… 낙심하여 우는 자들에게
      소망을 줄 수가 있으니까요.
      주님과 함께라면, 저는 산속에 옹달샘이 되겠어요. 옹달샘은 혼자 두면 외로운 곳이지만… 목마른 사슴들이 찾아올 때는
      항상 시원한 생수를 줄 수가 있으니까요.
      주님과 함께라면, 저는 구석에 세워둔 빗자루가 되겠어요. 빗자루는 혼자두면 죽은 나무토막일 뿐이지만… 주인의 손에 들려지면… 구석구석 쌓여 있는 먼지를
      깨끗이 털어낼 수가 있으니까요.





      내게 능력 주시는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 14절 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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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과 격려가 없어도 칭찬과 격려가 없어도 은밀히 뛸 수 있는 영성을 기르라 가장 큰 핵심은 하나님 보시라고, 묵묵히 기쁨을 가지고 충성스럽게 성숙한 믿음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나 자신을 부인할 때만이 하나님을 가장 크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은밀하게 우리의 내적인 인격을 강화시킬 수 있어야만 인생의 결국의 승리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은혜의 단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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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개혁 교육 | 가정 & 교육

전체공개 2012.01.05 09:33

 

 

                                                              한국에서의 개혁 교육 

                                                                                                                                                          김헌수 목사

 

한국에서의 개혁 교육이라는 주제를 여러 나라에서 모인 형제자매들과 함께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에서의 교육’에 대한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살펴보아야 개혁 신앙을 고백하는 부모들이 한국에서 씨름하는 특별한 과업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한국에서의 교육

 1) 전통적인 유교 교육

 한국의 전통적인 교육은 대체로 유교에 의해서 형성되었습니다. 유교는 일반적으로 공자(주전 551-479)에서부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래는 중국 샤머니즘의 원시적인 형태에서부터 시작하여 오랜 역사 가운데서 발전한 신념 체계입니다. 공자와 더불어 맹자(주전 372-289)와 주자(1130-1200)가 유교의 새로운 틀을 제시한 대표적인 학자로 꼽힙니다.


 기원전 3천 년경부터 고대 중국인들은 영과 귀신의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왕가나 귀족은 상제나 하늘을 섬겼고, 평민들은 대체로 풍요의 신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명절에 죽은 조상의 영들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자식의 출생이나 혼인이나 승진과 같은 중요한 일을 조상신에게 알렸습니다. 이처럼 죽은 자의 영혼이 동양 사람들의 생활에서 필수적인 부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공자는 새로운 것을 짓지 않고 고대 성현들의 사상을 전달하는 자로 자처했지만, 그는 무속적인 조상 숭배를 문민화 시킨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전달자였습니다. 그는 효의 개념을 시민 생활과 정치 생활에까지 확대시켰습니다. 효는 부모에 대한 존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연장자나 윗사람에 대한 존경으로 확대되었으며, 국가도 가정의 확대로서 이해되었습니다. 따라서 유교 체제에서의 가족은 ‘사회학적’ 단위일 뿐 아니라 ‘형이상학적’ 중심이었습니다.


 유교의 발전된 형태는 샤머니즘과 매우 다르지만 한 뿌리에서 나왔기 때문에 똑같이 현세 지향적입니다. 샤머니즘의 기본적인 특징은 죽은 자의 영혼이 이 세상에 함께 있고, 무당을 매개로 하여 산 자의 생활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인데, 유교는 죽은 조상의 영혼의 도움으로 현세적인 수복강녕을 보장받으려는 것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유교의 조상 제사는 언제나 샤머니즘적인 신념 체계 안에서 수행되었습니다.


 유교 사회에서 교육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것은 현세 지향적인 효와 밀접히 연결됩니다. 유교의 경전 가운데 하나인 {효경}에서는 조상이 물려준 신체를 잘 보존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고 출세하여 ‘부모의 이름을 내는 것’이 효의 마침이라고 가르칩니다. 유교 사회에서 도를 행하려 부모의 이름을 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과거 공부를 하여 고위 관직에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유교 문화권에 속하는 한국, 일본, 중국, 싱가포르 등의 높은 교육열은 효에 대한 교훈을 떠나서는 제대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교육이 효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유교적 교육은 종교적인 의미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조: 샤머니즘은 “신비적 요소”“현세적인 태도”의 혼합으로 특징되어지는데, 두 요소의 혼합은 한국 교회에 매우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효와 교육에 대한 강조가 유교 문화권에 속하는 나라의 경제적 발전에 기여했고, 어떤 학자들은 ‘유교적 자본주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 용어는 이론적으로나 통계적으로 검증되어야 할 필요가 있지만, 높은 수준의 교육이 자본주의적 발전에 강한 추진력을 제공함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요약하면 유교적인 사회 가치관은 정치적 사회적 출세를 위한 정당한 방편으로 고등 교육을 장려했습니다. 동아시아 사람들의 심성과 유교의 체계에 박혀 있는 샤머니즘적인 신념이 성공과 물질적인 복지를 추구하는 데에 큰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2) 근대 교육의 세 단계

 근대 교육의 세 단계에서 첫 단계는 ‘한국에 근대 교육 제도를 도입한 사람은 서양 선교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인도에서 활동한 스코틀랜드 파송 선교사 알렉산더 더프(1806-1878)의 방법론을 선교 전략으로 택하여 ‘미션 스쿨’이라고 불리는 교육 기관을 많이 세웠습니다. 이것은 교육이 존중되는 한국에서는 특히 효과적인 전략이었습니다. 1910년에는 2,250개의 학교 가운에서 882개가 기독교 계통의 학교였습니다. 미션 스쿨은 하층민이나 여자에게도 입학을 허락하여 양반과 상민의 신분 철폐나 여성의 권직 신장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미션 스쿨은 한국 근대화의 중요한 추진력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긍정적인 영향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에 많은 신자들이 ‘기독교화’‘서구화’ 혹은 ‘근대화’를 동일시했음도 지적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문을 세속화를 향해 열어 둔 셈이었습니다.


 미션 스쿨은 학교를 전도(미션)의 수단으로만 생각하였기 때문에 교과목을 성경의 교훈이나 신앙고백과 통합하는 일은 소홀히 하였습니다. 달리 말하면 언약의 자녀에 대한 교육은 차츰 뒷전으로 밀려났고, 가르치는 내용에서 기독교적 독특성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미션 스쿨이 좋은 학교로 소문이 나면 불교도도 아무 거리낌 없이 입학할 수 있었고, 기독교인도 다른 세속 학교에 진학했습니다. 한국에서는 기독교인이나 불교도나 모두 교육과 그들의 종교적 신념을 별개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교육을 통해 사회의 상층에 진출한다는 데서는 같은 생각을 가졌습니다.


 근대 교육의 세 단계에서 두 번째 단계는 ‘일본은 식민지 시대에 공립학교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일본의 ‘식민지 교육’은 일본 백성의 우월성을 인정하게 하고 일본의 신념 체계를 한국 사람들의 마음에 각인 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무속의 일본판의 신도가 교육의 중심에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일본 당국은 한국 학생도 신도 사당에 절을 하게 했고, 일본 왕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절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이 정책에 순응하지 않는 것은 폐교를 의미했습니다. 비록 몇몇 기독교 학교들이 폐교되고 몇몇 선교사들이 추방되거나 투옥되었지만 대부분의 미션 스쿨들은 그 압력에 순응했고 심지어 교회들도 그리 했습니다.


 근대 교육의 세 단계에서 세 번째 단계는 ‘1945년 해방 후에는 미국의 교육 체계’가 도입되었습니다. 그러나 교육부는 일제의 공립학교 제도의 유산, 즉 정부가 교육을 통제하는 것을 그대로 이어받아 시행했습니다. 교과 과정을 학교 이사회가 아니라 교육부자 결정했습니다.


 해방 이후에 서양적인 교육이 도입되었지만 기저에서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여전히 유교적인 교육관이었습니다. 교육을 통한 효의 실현과 현세적인 성공의 확보가 교육열의 근본 동인이었습니다. 한국의 중고생들은 유명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 아침 7시부터 저녁 11시까지 학교나 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입시 과열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교육부는 몇 차례 교과 과정을 개편하여 지금은 7차 교육 과정을 시행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거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3) 개혁의 관점에서의 평가

유교적인 교육이 없었다면 한국의 경제적 발전이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무속적인 요소와 가족주의와 연결된 유교적 가치관은 한국이 좀 더 근본적인 개혁을 하는 데에 지속적인 장애물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적절한 공적 직분의 개념이 없이 유교적인 인간관계 중심의 가치 체계를 정치 제도에 적용할 경우 쉽게 친인척 비리와 부패로 이어집니다. 정치 비리의 문제를 많은 경우 개인적인 도덕성의 문제로 파악하지만, 사실은 인간관계 중심의 사고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유교적인 가치관이 문화에 깊숙이 침투해 있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를 잘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기독교인은 이러한 문제를 다른 시각에서 보아야 하고, 그와 같은 강력한 문화적 장애물을 타파하기 위해서 힘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지적은 기독교인들이 유교에서 배울 것들을 있음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권위와 연장자에 대한 정당한 존경은 힘써 보존해야 할 전통입니다. 십계명 제5계명에 대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해설에서 ‘나의 부모님, 그리고 내 위에 있는 모든 권위에 모든 공경과 사랑과 신실함을 나타내고, 그들의 모든 좋은 가르침과 징계에 대한 합당한 순종을 하며, 또한 그들의 약점과 부족에 대해서는 인내해야 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처럼 가족 관계에서 유추할 수 있는 사회적인 원리가 있습니다. 또한 교육과 근면함에 대한 정당한 강조는 일상생활에서 유지하고 실천해야 할 덕목입니다.


 그러나 효와 교육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피조계의 다른 영역을 희생하면서 한 영역을 절대화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우상 숭배입니다. 또한 국가는 가족 관계를 확대한 것으로 다 설명될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가족 관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공적 영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사회적인 덕목은 인화를 넘어서는 요소가 있습니다. 공적인 관계와 규범을 따라서 일하는 것은 사적인 관계의 확대로만 설명될 수 없습니다.


2. 한국에서의 개혁 교육

 1) 한국에서의 개혁 교회

 1884년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첫발을 디뎠는데, 그때는 한국이 세계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던 시기였습니다. 밀려오는 열강의 힘에 저항할 힘이 없던 상황에서 기독교는 일종의 탈출구를 제공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기독교의 급속한 성장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요소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1907년에 한국 장로교회가 독노회를 조직했습니다. 그때 교세를 보면 선교사를 포함하여 목사 49명, 조사 160명, 장로 47명, 교인 72,968명(성찬 교인 18,061명)이었습니다. 교세로 볼 때 결코 미미하지 않았지만 총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요약이 12개조를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택했습니다. 그러나 한두 쪽에 지나지 않는 이 고백서는 교회를 그릇된 교훈과 이단으로부터 보호할 정도로 튼튼하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목사 장로 집사에게만 12신조를 승인할 것을 요구했지 교인들에게는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교인들은 신앙고백과 무관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약 60여 년이 지나서 몇몇 교회들에서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를 채택했지만 이 고백서에 대한 서명도 직분 자에게만 요구하고 교인은 제외되었습니다. 또한 직분자의 서명도 엄격히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안에는 좋은 신자들이 많이 있지만, 신앙고백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한국 장로교회가 참으로 신앙고백적인 교회인가’를 묻게 됩니다. 현재 한국 인구는 20퍼센트가 기독교인으로서 자처하고 기독교가 중요한 사회 세력이 되었지만, 발표자는 이 질문이 여전히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2) 한국에서의 개혁 교육을 위한 부모의 과제들

 개혁 교육에서도 우리의 역사는 너무나 짧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과 과제는 좀 저 기본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한국의 개혁 부모들이 한국적인 상황에서 힘쓰고 있는 것들을 몇 가지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교회의 생활 영역에서

 첫째, 부모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이해에서 지속적으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하는 것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중요한 함축을 지닙니다. 유교 사회에서는 사회적 출세와 성공이 효를 이루는 수단이었지만, 그리스도의 몸에서는 지체들 사이에 분열과 경쟁이 없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게 하시기 때문입니다(고전12:22-23). 유교적인 가치관은 오직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만 극복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무엇인가를 알 때에야 우리는 개혁학교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둘째, 부모들은 언약의 말씀에 의해서 가르침을 받고 개혁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진정한 그리스도의 교회로 만드는 것은 언약의 말씀에 대한 신실하고 정순한 강설입니다. 비성경적인 사변이 신학 논쟁에서나 삶에 강한 영향을 끼친 한국에서 언약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가 더 절실합니다. 믿음에 대한 수동적인 태도는 부분적으로는 예정에 대한 결정론적인 이해에서 비롯한 것인데,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에 의해서만 적극적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언약의 말씀에 신실하게 전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고 살아 있는 믿음으로 반응하게 이끄실 것입니다.


 셋째, 부모는 자신들의 자녀에 대한 이해에서도 변화되어야 합니다. 유교적인 세계관에서는 영원성을 후손을 통해 표현했습니다. 자녀는 개인으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부모나 조상과 관련해서 의미를 지녔습니다. 줄여 말하면 그들은 부모의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자녀들이 삼위 하나님에게 속했다고 가르치고(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문, 74문)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 안에서 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창17:7).


 넷째, 부모는 학교나 교회에서의 ‘생활’‘관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교에서는 나이와 개인적인 친분 관계나 사회생활이나 서로의 관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에서도 그러한 현상이 매우 빈번히 나타납니다. 이것은 교회의 직분 개념을 왜곡시키는 것이고 직분을 통한 그리스도의 통치를 가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직분’에 대한 성경적인 교훈을 배우고 학교와 교회의 모임에서 실천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2) 교육의 영역에서

 다섯째, 부모는 교육에 대한 관점에서도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교육은 아이들을 훈련시켜 자녀들이 사회 상층부에 효과적으로 올라가도록 만드는 수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발견하고 계발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더 효과적으로 섬기도록 갖추어 주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이들에게 다양한 은사들을 주셨기 때문에 교육자는 이러한 차이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개혁 교육에는 두 가지 목표가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과 교회의 역사적인 고백을 잘 알아서 ‘교회의 살아 있는 지체로서의 자기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들의 직업과 일상생활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개혁 교육의 정체성과 질’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는 어린이날 성도들에게 창세기 6:4를 읽고(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다음과 같이 부모들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여러분들은 무엇을 위해서 자녀들을 교육시킵니까? 그들이 유명하고 힘이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처럼 수고하십니까? 그들이 유명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서 아름다운 사람의 딸들을 자기들의 마음대로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교육에 투자하십니까? 사랑하는 부모들이여, 창세기에 기록된 유명한 자들과 사람의 딸들의 혼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왔습니다. 정체성의 위기는 매우 심각한 것입니다. 생명과 사망, 하나님의 복과 저주의 문제입니다.”


 (3) 문화의 영역에서

 여섯째, 부모는 문화의 문제와 도전에 대한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한국의 전통적인 가치관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서양의 가치관을 대안으로 여기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서양 문화의 상당 부분이 성경에서 연원한 것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 근원에 닿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더구나 필자와 같은 동양의 기독교인에게는 서양의 기독교적 문화도 서양의 토양에서 토착화된 요소가 다소 있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이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서양 문화 자체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전통적인 유교의 토양에 서양 문화가 수입되는 나라에 살고 있는 신자로서 성경의 교훈을 토대로 동서 문화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검토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토착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비판적 반성은 자신의 믿음을 순결하게 보존하고 자신이 속한 사회를 성경의 교훈을 따라서 변혁하는 데에 필痔岵都求? ‘개혁 관점에서의 토착화’는 성경과 문화에 대한 깊은 연구를 요구하는 거대한 작업입니다. 그러한 작업을 거쳐서 비로소 개혁 교육의 교과 과정에도 그 결과를 담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도 문화에 대한 성경적인 비판은 필수적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적인 비판이 없이는 개혁 교육을 시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한국의 개혁 부모들이 위에서 열거한 내용으로 신령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여기에 있는 다른 문화에서 온 개혁의 형제들에게도 격려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다른 지역에서 다른 단계에서 다양한 양태로 씨름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신령한 전투에 함께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여러분의 좋은 전통은 제한된 자료를 가진 우리에게도 큰 격려가 됩니다. 독자적인 건물과 개혁 교과 과정이 갖추어진 학교를 갖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두신 그 단계와 위치에서 주님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소망을 갖고 이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생명나무 쉼터/한아름님

말세에 귀한 종이 되려면

김정한 ㆍ 2013-04-25 (목) 02:39 IP: 180.xxx.48 ㆍ조회: 71      

말세에 귀한 종이 되려면 때를 알고 사단에게 속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해서 올려봅니다.


사단과 성경
필자는 성령의 존재와 사역을 믿듯이 사단의 존재와 현시대의 사역을 믿고 이 글을 쓴다.

그러면 사단은 분명히 현재도 일하고 있을 터인데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생각해 봤다. 사단을 인정한다면 조직을 가지고 일하고 있는 것을 부정할 목사들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적으로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서도 역사할 것이지만, 전 세계 교회 공동체를 대적하고 방해하는 일도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 본다. 그렇지 않겠는가?

필자의 생각으로는 사단이란 놈은 기독교회를 허물고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근간을 허무는 일을 하리라고 짐작해본다. 그래서 첫인류였던 아담과 하와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과 기독교 초기 역사 때부터 예수님에 대한 공격을 위시해서 수많은 공격을 해 왔지 않는가?  

그래서 필자는 성경에 대해서 사단은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봤다.
알다시피 성경에 대한 사단의 공격은 이미 중세 캐토릭교회 시대에 있었지 않는가? 사단은 캐토릭 교권을 가진 교황에게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하는 참으로 기이한 일을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사단에게 잡히면 가롯유다처럼 된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중세는 성경을 금서로 읽지 못하게 하다가 종교개혁 이후로 성경번역이 번역되고 인쇄 기술이 발전되어 복음진리가 확립되기 시작할 무렵 사단은 근세 18-19세기 때는 계몽주의를 이은 이성주의를 통해서 성경의 내용에 대한 공격을 가하여 외적으론 성경의 허구성을 내적으로 성경 비평학을 통하여 창조에 대한 것은 신화로 예수님의 신성은 부인하고 인성만의 예수를 만들어 냄으로 변질된 복음진리를 만들려는 시도를 했던 것이다.

그에 맞서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그리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복음진리라는 것을 알게된 무리들은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 말씀을 쫓아 땅 끝을 향한 선교가 시작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복음의 확산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우리 한국은 이성주의의 공격 앞에 타협한 자유주의 신학에 접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 이런 선교사들에게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어 세계 선교에 바톤을 이어받게 된 것을 필자는 감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대와 최근세인 오늘은 사단이 어떻게 역사하고 있겠는가? 그것은 이미 알려진 대로 포스트모던이즘을 내세워 새로운 시대(New Age)가 왔다 고 말하며 기독교를 낡은 것으로 외적으로는 공격하고, 내적으로는 자유롭게 성경을 읽되, 성경해석을 잘못하게 하여 수많은 이단 사이비를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더 조심하고 분별하여야 할 것은 복음적 진리를 믿고 있는 정통 교회 안에서 성경해석을 달리하게 하여 분열을 획책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정통 교회를 성도들을 혼란케 하고 있다.

필자는 어떤 성도분이 인터넷에 올린 글을 읽어보았다. 그 분이 하는 말, 교단과 교단간에 혹은 같은 교단 목사님들끼리도 요한계시록 해석을 달리하는 것을 보고 어떤 것이 옳은 해석인지를 고민한다면서 아래와 같은 주제에 대해 그렇다고 해서 올려본다.
   
1. 요한계시록은 상징으로 해석해야 한다. vs 요한계시록은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2. 신사도운동 vs 비신사도운동.
3.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단일세계정부의 존재에 대한 인정 vs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단일세계정부는 공상과학소설이라고 치부.
4. 베리칩은 짐승의 표이다. vs 베리칩은 짐승의 표가 아니다.
5. 지금은 말세이므로 대부흥 대추수의 기간이다. vs 대 부흥 대 추수는 비 진리이다.  

필자는 이런 문제에 대해 일반성도들도 고민하는데 우리 목사들은 뭐라고 대답해주어야 할까를 생각해 봤다.  대부분 목사님들은 이런 문제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겠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아마 이런 문제에 어떻게 알려주어야 할 지 고민하고 있는 목사들도 상당수 있으리라고 본다.

왜 위에 주제에 대해 목사들 간에, 신학자간에 주장이 갈리고 있는가? 필자는 그것을 사단의 전략이라고 본다. 이런 사단의 전략을 진리의 영이신 성령 안에서 분별치 않고 지적으로 접근하는 대형교회 목사들이나 각자의 교단 신학자에 영향 때문이라고 본다.  

성경은 본래가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고, 성령님이 모은 것이기에 성령의 조명 속에서 성경해석이 나와야 하는데 성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세속적이고 인본위적인 분들의 성경해석을 따르기에 필자가 예견하기론 성령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목회자 포함) vs 분별이 흐려진 자의 해석이 극명하게 갈리게 될 것이라고 본다.

필자가 그렇게 보는 것은 마지막 때가 되면 교회 안에서부터 나뉘기가 시작된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알곡과 쭉정이가, 좋은 고기와 그렇지 못한 것을 나누는 심판이 있다고 하셨지 않는가?    

필자는 올바른 종말 신앙이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으로 말한다면 사단에게 속지 않는 것이라 본다.  지금 성령님과 사단은 어떤 면에서 역사하고 계실까? 그렇게 보는 관점이 분별하는데 관건이랄 수 있다고 본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위에 문제나 WCC 같은 문제에 대한 분별이 될 것이라 본다. 성령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지도록 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세상을 망할 세상으로 보듯 우리도 세상을 그렇게 봐야 할 것이요,  더 나가 그분의 종으로, 그분의 군사요, 신부로 부름 받았다면 그분의 명령과 사랑의 약속을 굳게 붙잡아야 할 것이다.

주님이 곧 오시겠다고 하고 짐승 표를 받지 말라고 했는데, 주님 오심을 먼 것으로 알게 하고 짐승 표는 상징으로 해석해서 자신에게 붙여준 성도들을 잠든 게 하고 열매를 맺되 모래위에 세우도록 한다면 어찌 될 것인지 필자는 그 점을 생각해 보자고 이 글을 써 보았다.

필자의 바람은 모든 목사님들의 바른 종말신앙(신학)을 가지고 사단에게 속아 급박하다고 하는 시한부 종말론 자들과 반대로 종말이 더딜 것이다. 라고 미혹된 진리에서 벗어나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지혜로운 종들이 되기를 바란다.

출처: USA아멘넷 게시판

【서울=뉴시스】강진형 기자 = 25일 오후 서울 광진구 워커힐호텔 시어터홀에서 열린 '2013 미스코리아 서울 선발대회'에서 진을 수상한 곽가현(24, 가운데)이 수상자들과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marrymero@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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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3:4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의 세 번째 요소는 시기하지 않는 것이다. 시기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젤로우”이다. 영어의 젤러시(jealousy)가 이 헬라어 단어에서 유래하였다. “젤로우”라는 단어의 뜻은 “질투하다”, “시기하다”, “다른 사람의 것을 탐내다”라는 뜻이다. 남의 자녀, 집, 학벌, 인기, 용모 등을 탐내는 것이다. 십계명의 제 10계명은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고 명하고 있다.

 

성경은 “젤로우”를 탐심과 연결시키고 나아가 탐심은 우상 숭배임을 알려 준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다시 말하면 “젤로우”는 하나님을 섬김이 아니라 사탄을 섬기게 되는 요소라는 뜻이다. “젤로우”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우상 숭배다. 사탄이 “젤로우”하는 마음의 뒤에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시기심이 있는 사람은 비교 의식이 강하다. 지면 견딜 수 없어 한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낫거나 내가 가진 것보다 나은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 시기심이 작동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으면 마음이 삐뚤어진다. 마음이 삐뚤어지고 나면 시기의 대상에게 아주 작은 일에도 시비를 걸기 시작한다. 상대를 비방하며 거짓말을 꾸며대면서 명예를 깎아 내리기에 바빠진다. 시기심에 빠지면 남이 울 때 자신은 기뻐한다. 남이 기뻐할 때는 속이 뒤틀린다. 심지어 시기는 욕심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만 다 갖고 남은 하나도 못 가져야 직성이 풀린다. 

 

성경에서 시기의 대표적인 인물을 말한다면 구약에서는 사울 왕이 있고 신약에는 가룟 유다가 있다. 사울 왕은 모든 부귀영화를 다 소유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자기의 사위 다윗을 향해 심한 시기를 느끼면서 평생을 비참하게 살아간다. 한편, 신약에 등장하는 가룟 유다는 시기심 때문에 스승 예수님을 미워하기 시작한다. 그는 결국 은전 30냥에 예수님을 팔아넘긴다.  

 

시기에 빠지면 배은망덕을 합리화하게 된다. 시기는 멸망의 시작이며 인간성을 상실하는 시작점이다. 시기는 사람을 포악하게 만든다. 상상을 초월하는 무서운 범죄들은 언제나 그 뿌리에 시기가 있다. 시기는 또한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주범이기도 하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님은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약 3:16)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장본인도 시기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시기로’ 예수님을 법정에 넘긴 것을 알고 있었다(마 27:18). 종교 지도자들은 시기심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성경은 복음을 가로 막는 주인공도 시기임을 증거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부하고 자신의 육체의 정욕에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의 특징도 시기다(고전 3:3, 갈 5:20, 롬 1:29). 시기심은 사탄이 우리의 죄성에 뿌려 놓은 가장 깊은 죄악의 뿌리요 출발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시기심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사랑은 “젤로우”하지 않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시기심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방법 밖에 없다고 가르친다. 성령 충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신앙이 경건한 성도들과 함께 하면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때 우리는 사탄의 유혹인 시기심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다.

 

 

생명나무 쉼터/한아름님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뜻과 유래가 뭐예요? <불교적인 용어>

서재생 ㆍ 2013-04-24 (수) 12:40 IP: 115.xxx.235 ㆍ조회: 14      

목사님! 우리 교회 젊은 부부 집사는 서로 말을 하지 않고도  마음이 통한다면서 우리 부부는 이심전심(以心傳心) 부부라고 합니다. 목사님 그 젊은 부부는 누가 보아도 일순간에 잉꼬부부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책에서 이심전심(以心傳心)은 불교에 유래된 용어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목사님! 이심전심의 뜻과 유래를 알고 싶습니다.

1.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뜻

 이심전심은 송(宋)나라 때의 승려(僧)인 보제(菩濟)의 저서인 오등회원(五燈會員)에 이심전심이라는 기록에 나오는 고사성어로서 마음 심(心)은 심장의 모양을 본뜬 글자로서, 마음은 심장에서 우러나온다 하여 “생각”을 뜻하게 되었고, 전(傳)은 사람 인(人)과 오로지 전(專-실패를 손에 든 모양)을 합친 글자로서 <실>이 풀려나가듯이 달려가는 역마를 뜻합니다. 즉 사람이 역마를 타고 소식을 “전 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심전심(以心傳心)은 언어와 문자가 아닌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을 전 한다는 불교적인 용어로서 석가모니와 제자인 가섭존자와 관련된 대목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심전심의 첫 번째로 <겉> 뜻은 불교의 진리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는 뜻이고, 두 번째로 <속> 뜻은 문자나 언어로써 설명할 수 없는 심오한 불교의 깨달음의 진리를 경전이나 언어 등에 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는 뜻입니다.

2.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유래

송나라의 중 도언(道彦)이가 석가모니 이후 고승들의 법어를 기록한 전등록(傳燈錄)에 보면 석가모니께서 제자인 가섭(迦葉)에게 말이나 글이 아니라 이심전심의 방법으로 불교의 진수를 전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책은 석가모니 이래로 내려온 조사(祖師)들의 법맥을 분류하고 법어들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이 책에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에 법을 가섭에게 맡겼는데,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했다고 해서 불멸후(佛滅後) 부법어가섭(付法於迦葉) 이심전심했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불교의 이심전심의 대표적인 예로 석가모니가 영축산에 있을 때입니다. 대범천이 꽃 한 송이를 바치며 설법(說法)을 청하자 석가모니는 아무말씀도 없이 그 꽃을 집어서 대중들에게 보였습니다.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했는데 가섭제자만이 그 뜻을 읽고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이를 염화미소(拈華微笑) 의 얘기라고 합니다. 염화미소 외에도 석가모니(釋迦牟尼)는 이심전심으로 가섭제자에게 마음을 전한 일이 두 번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가섭제자가 남루한 옷차림으로 기원정사를 찾아왔을 때 대중들이 그의 모양새를 보고 경멸하였습니다. 그 때 석가모니는 어서 오너라. 여기 내 자리에 앉아라. 하시며 자리를 내어 모든 위없는 정법을 가섭제자에게 내렸으며 내가 열반에 든 후 그대가 모든 수행자(修行者)의 의지처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한 번은 석가모니(釋迦牟尼)가 열반 후 뒤늦게 찾아온 가섭제자에게 관 밖으로 두 발을 내어 보인 일 있었다고 전해진 얘기입니다. 이렇게 ‘영축산’, ‘다자 탑 앞’, ‘사리쌍수 아래’, 이 세 곳에서 이심전심이 이루어졌다고 하여 삼처전심(三處轉心)이라고 합니다.

석가모니가 제자인 가섭제자에게 말이나 글로서가 아니라, 이심전심(以心傳心;마음과 마음)의 방법으로 불교의 깨달음을 전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심전심이란 경전이나 언어가 아닌 마음과 마음으로 전하였다는 데서 유래합니다.

3. 이심전심(以心傳心)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이심전심(以心傳心)은 언어와 문자가 아닌 마음으로 심오한 불교(佛敎)의 사상을 마음과 마음으로 뜻을 전달하여 깨닫게 한다는 말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는 “나에게는 정법안장(正法眼藏;-사람이 오래 지니고 있는 미덕), 열반묘심(涅槃妙心;-번뇌와 미망을 벗어나 진리에 도달하는 마음), 미묘법문(微妙法門;-진리를 깨닫는 마음), 불립문자와 교외별전(敎外別傳;-둘 다 경전이나 언어 등에 의지 않고 이심전심으로 전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나는 이런 것들을 가섭에게ㅡ 전한다고 했습니다. 이때부터 이심전심(以心傳心)은 마음과 마음이 통한다는 의미로 쓰이기 시작 했습니다. 서로의 행동이나 표정을 보고서도 이해할 수 있는 마음, 부모와 자식 간에 굳이 글이나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상통하는 마음, 이런 때 우리들은 이심전심이라 합니다.

 한국교회는 이심전심이 불교(佛敎)용어 인줄 모르고 교회 안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자주 사용하는 생활용어 중 하나입니다. 이심전심은 불교적인 사상이 내재된 용어이니까 기독교인(基督敎人)들이 사용에 주의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 교회를 이끌어가고 지도하는 목회자들이 타 종교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외형적(外形的)인 부흥을 자랑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교회 안에 있는 전통 종교적(宗敎的)인 사상과 언어의 수술을 필요로 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언어생활은 그 삶 자체가 하나님을 찬미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심전심은 언어와 문자가 아닌 마음으로 심오한 불교(佛敎)의 사상을 마음과 마음으로 뜻을 전달하여 깨닫게 한다는 말입니다.

서재생목사(서울대현교회)

출처: USA 아멘넷

벚꽃 필 제면 
                              최송연
모진 겨울 다 지나고
벚꽃 필 제면 
내 영혼 속엔 당신을 향한 
사랑도 함께 피어납니다
저 벚꽃처럼 화사하게...

온 누리에
벚꽃 향기 진동할 제면
내 가슴 속엔 당신을 향한 
그리움도 함께 흐릅니다
저 벚꽃 향처럼 진하게...

벚꽃은 
저리도 곱게 피었고
그 향기 흐드러졌건만
내 사랑 당신은 
언제쯤이면 오시려는지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계 22 :12)



마라나 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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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에서 성령을 거스르는 것들

설교는 창작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전달하는 것이기에 설교자는 우선적으로 성경본문연구에 충실해야 한다. 본문연구에 소홀할 때 성경의 원저자이신 성령이 본문에서 의도하신 의미를 제대로 깨달을 수 없고, 본문의 뜻에 멀어질수록 설교에 함께 하는 성령의 능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설교자가 사람들의 욕구와 기호에 맞추어 말씀을 조작할 때, 청중의 마음을 끌기 위해 쓸데없는 것을 말씀에 더 하거나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꼭 해야 할 말을 뺄 때 성령은 근심하신다.

기발한 예화나 유머를 가미하여 설교의 효과를 돋우려는 시도는 오히려 성령의 감동을 삭감시키고 대체할 수 있다. 설교를 준비함에 있어서도 성취지향적인 성향이 강하게 발동하여 성령에 대한 전적인 의존을 힘들게 할 수 있다. 성경강해가 탁월하고 신학적인 치밀함과 영적인 깊이가 있는데다 대중적인 적용성까지 두루 갖춘 불후의 명 설교를 창작하고픈 유혹이 열심 있는 설교자들을 늘 따라 다닌다. 설교준비를 게을리 하는 것 뿐 아니라 열심히 하는 데에도 성령을 거스르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설교행위에 과도하게 집착하여 그 자체를 거의 우상화하므로 성령께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다.

 

박영돈교수의 페이스북 


벨직 신앙 고백서 강해(2)

출처:  이승구 교수님 블로그  http://blog.daum.net/wminb/13718831

  벨직 신앙 고백서 강해(2) :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우리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과 관련해서도 무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공간에 대해서 초월하시며 동시에 그 안에 내재하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시공간의 어느 한 점이나 한 영역에 가두려고 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시공간을 전혀 초월하시는 분으로만 생각하여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에 전혀 내재하실 수 없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초월만을 인정하여 내재성을 전혀 부인해 버리려는 20세기 초의 사상을 우리나라에서는 과거에 "초절주의"(超絶主義)라고 번역하여 그 특징을 분명히 표현해낸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초절주의는 하나님의 내재성만을 말하려는 내재주의(內在主義, immanentism)에 대한 좋은 반발과 반박이 되지만, 이 역시 한 극단으로만 치우쳐서 하나님의 온전한 초월과 내재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것입니다.

 시간과 관련한 하나님의 무한성을 영원성이라고 할 수 있고, 공간과 관련한 무한성은 편재성(遍在性, 어디에나 계시는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시간과 관련해서도 시간을 초월하시며, 동시에 시간 안에 내재하시며, 시간 안으로 들어오실 수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으로서의 특성을 조금도 잃지 않으시고(따라서, 시간을 초월하시면서도) 시간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육신 사역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손상시키지 않고 일어 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대한 초월과 내재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시간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거나, 시간 안에 들어오시면 하나님조차도 상대화된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는, 오늘날 많은 잘못된 신학자들과 함께, 문자적 성육신은 모순이요 부조리라고 선언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바로 이해하는 이는, 비록 자신의 머리 속에서 잘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시간을 초월하시면서도 동시에 시간 안에로 들어오실 수 있다고 하고, 이것이 진실이요 진리라고 선언할 것입니다.

 또한, 벨직 신앙 고백서에서는 강하게 표현되지 않았고 그저 그의 "무한성"이란 말에서만 시사되고 있으나, 공간과 관련해서도 하나님은 무한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공간을 충만히 채우시며, 오히려 모든 공간을 창조적으로 붙드시면서 계시는 것입니다. 이를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계실 수 있으시다고 가능성에 대한(per potentiam) 진술로만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본질로(per essentiam) 어디에나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를 피하여 어디로 갈 수 없고, 항상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있음을 잘 깨달은 자답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하나님을 향해 살도록 합니다. 그저 소극적으로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 139:7)라고만 말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리이다"(시 139:10)라고 말하며, 더 나아가 성육신하여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을 향하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요 6:68)라고 고백하는 우리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영원하시다는 것과 논리적으로 연관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신학적 상황 가운데서는 이 "하나님의 불변성"을 강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변하실 수 있으신 분(God is in becoming을 강조하는 융엘 등), 아니면 적어도 변하실 수 있음을 한 측면으로 가지신 분으로 생각하려는 것(과정신학 등)이 오늘날의 정황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질상 전혀 변하실 수 없는 분이심을 아주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움직이실 수 없으시다 거나, 아주 답답한 분이시라는 뜻이 아닙니다.

 벨직 신앙고백서의 작성자들은 프랑스 신앙고백서의 작성자들을 따라서, 말라기 3:6의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여기에 야고보서 1:17의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는 말씀을 같이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변하지 않으시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당신님 자신에 대해서 계시하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분이신 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의 계시를 믿을 만하게 하는 것이 그의 불변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 하나님께서 불변하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확실히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불변하시므로 하나님은 미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본질이 불변하시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행하시는 일에서도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믿을 만한 분이신 것입니다. 그의 언약 관계에서 변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되심의 근거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말라기 3:6의 진정한 의미도 이것을 강조하는 데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변역지 아니하시므로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하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범죄한 이스라엘이 온전히 소멸하지 않고 언약의 상속자가 되고, 그들을 통해서 언약의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 관계에 있어서 변하시지 않으신다는 특성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그의 언약 관계에서의 불변성은 후의 언약의 역사 가운데서 비로소 형성된 것이 아니라, 그의 본질이 영원히 불변하시기 때문에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영원히 불변하실 수 있으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는 것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므로 변하지 않고 당신님의 존재를 유지하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 전능하지 않은 존재는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만이 변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이 전능성은 우리가 후에 생각할 창조와 역사를 그 목적에로 까지 인도하여 가시는 통치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전능성을 생각하면서 그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마땅히 있어야 할 바른 위치에 잇지 않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전능성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만을 생각하면서 기도에 열심인 것도 바르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성은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당신님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 되시어, 그 전능성을 우리를 위해 사용하실 때에도 당신님 자신을 위해서 그리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성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엄위에 대한 의식으로 가득 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 영혼의 무릎을 끊고서 경배와 찬양을 올려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전능성 앞에서의 우리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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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The Lord Working With Them

 

하나님은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이시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을 알게 하셨다(마 4:17)
우리가 들은 복음은 하늘을 아는 믿음이다(롬 10:17)
세상에는 하늘이 없다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그곳이 하늘이다(막 16:20)

 

예수께서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삼 일 후 부활하사 하늘로 올리셨으니(행 2:32)
이는 하늘이 존재함을 알게 하신 믿음이다
하늘에는 영생이 있고 불행이 없는(요 14:1~3)
하나님의 행복이 충만한 신령한 곳이다
예수를 믿는 성도는 그의 능력을 함께 가지며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하늘에서 증거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증거를 받은 자가 그의 성도이다(요 14:10~12)
이를 위하여 거룩한 약속과 능력이
성령으로 임하였고
성령은 확실히 역사하신다

 

○ 믿음을 자기 혼자 가지는 것은 신념이요
   하나님과 함께 가지는 것은
   참 신앙이다

 

○ 믿음이 고아 같으면 안 된다
   주께서 함께하시고
   함께 역사하셔야 참 믿음이다

 

○ 이를 위하여
   성령을 주셨으니
   성령은 주께서 함께하심을 보증하신다

 

※ 우리는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를 믿으며
   성령을 받는다

 

 

.. 2013년 4월 21일 말씀에서/송아지 님 방에서


지금은 성령을 가장한 악령들의 활동이 매우 강하고도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래 기사와 같이 성령을 가장한 악령의 활동은 매우 무섭기도 합니다.
 
‘쫓겨난 목사’ 김베드로-김다윗 부자의 막장 행각 (그것이 알고싶다)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6063923


저의 가족 중에서도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의 씀씀이를 보면 과연 성령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겠는가? 라고 강한 의구심을 갖고 있었는데,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성령을 가장한 악령한테 이용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은 하늘을 우러러 구름 한점 없는 깨끗한 사람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또한 거듭나서 성령의 은사를 받아 많은 기사이적을 보인 사람일찌라도 그가 타락하게 되면 성령은 떠나고 악령이 들어간다는 사실도 역시 명심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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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겨난 목사’ 김베드로-김다윗 부자의 막장 행각 (그것이 알고싶다)

[뉴스엔] 입력 2011.08.27 10:56

[뉴스엔 이민지 기자]

십자가의 이름으로 신도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있는 막장 목사 부자(父子)가 있다.

8월27일 방송되는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스스로 메시아가 돼 여성 신도들에게 성적 고통을 준 현직 목사와 그 아들의 막장 행각을 폭로한다.

한 여성은 '그것이 알고싶다'에 현직 목사가 최면을 걸어 자신을 성폭행 했다고 제보했다. 이 여성은 목사 옆에만 있어도 다리에 힘이 풀리고 쓰러지는 이상한 현상을 직접 겪었다고 털어놨다. 이런 현상은 그 교회를 다니는 신도들 대다수가 겪었고 상당수 여성 신도들이 목사에게 성적 착취를 당했다.

목사에게 성적 착취를 당했다는 여성 신도들은 한결같이 "사모를 시켜주겠다", "주님이 당신을 나의 베필로 삼았다" 등 유혹을 받았다고 한다. 피해자들은 김베드로 목사가 치유의 능력과 예언의 능력을 지녔으며, 신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영서'를 쓰게 하고 직접 해석까지 했기 때문에 그의 유혹이 실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렸다는 것이다.

게다가 김베드로 목사의 아들, 김다윗은 '주님임재'가 시작되면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순교훈련을 실시했다. 순교훈련은 야산에 생매장 시키기, 물파스를 눈과 항문에 바르기, 다리에 기름발라 불지르기, 주먹밥 변기에 담궜다 먹이기 등 상식 밖의 막장 고문이었다.

이 교회의 신도들은 김다윗의 일탈적인 행동들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주님의 믿음을 인정받기 위한 테스트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순종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김베드로 목사와 그의 아들이 행한 신도들에 대한 일탈적인 행동들은 교묘히 법망을 피해오고 있었다. 여성신도들의 성적 피해들은 성관계시 폭력이나 강압적 행위를 통하지 않고 종교와 신을 빌미 삼았기 때문에 세상 법으로는 처벌되지 않았다.

알고보니 김베드로 목사는 90년대 말 목사직을 잃었던 면직 목사였고 최근까지 기성 교단의 간판만 내걸었을 뿐 어떤 교단에도 소속돼 있지 않은 인물이었다. 특히 면직 당시 재직했던 지방 교회에서도 10대 여신도들과의 성적인 문제로 쫓겨났던 것으로 밝혀졌다.

일탈된 종교인을 규제하고, 그 피해를 막을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27일 오후11시10분 방송. (사진=SBS)


이민지 기자 oing@




뉴스해외
베니힌, 집회 참석자들에게 1백달러 ‘종자’ 헌금 요구베니힌, 수천명의 참석자들에게 “종자헌금을 내는 사람은 큰 축복 받을 것”
장길남 기자  |  giljang79@newsnne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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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4.17  20: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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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힌 ©www.bennyhinn.org

부흥강사 베니힌의 ‘기적치유 집회’가 남미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지난 주말(13-14일) 개최되었다.그는 현지 오순절 교회가 초청한 이틀간의 집회경비에 충당키 위해 집회에 참석한 수천명의 참석자들에게 각자 100달러씩 헌금하라고 요구했다.

베니힌은 토요일 집회에 모인 12,000명의 참석자들에게 “나는 트리니다드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집회를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고 한다”면서 이번 집회의 헌금은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현지 언론은 보도했다.

뉴스데이 트리니다드 토바고(Newsday Trinidad Tobago)는 번영복음을 전하는 부흥사 베니힌이 토요일-일요일 양일간 기적치유를 경험하기위해 참석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집회경비를 지불하기위해 미화 100달러씩을 헌금하도록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베니힌이 설교에서 이번 집회의 헌금은 종자를 심는 것으로써 종자를 심는 사람들에게 큰 축복을 있을 것이라면서 “여러분들은 나머지 삶에서 큰 수확을 거둘 것이다. 여러분들의 재정과 가족에게 큰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이신문은 집회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헌금했다고 보도했다.

이번 집회는 우드부룩 오순절교회가 주최했는데 베니힌의 여느 집회처럼 대중에게 무료로 개방되었다.

이번 집회기간동안 베니힌은 언론들에게 무뚝뚝하게 대했으며 그가 말하는 동안 사진을 촬영하려는 사진기자들에게도 소리 지르며 질책했다.

그의 소문난 기적치유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베니힌은 ‘종자헌금’으로 묘사되는 믿음의 깊이에 따라 돈을 내면 하나님으로부터 물질적인 축복을 받는다는 그의 번영 복음과 가르침이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베니힌은 그가 서명한 뉴스레터에서 “하나님은 그를 위해 특별한 일을 할 사람을 찾고 있다”면서 “나는 여러분들이 특별한 수확을 약속하는 하나님을 믿고 특별한 종자를 심을 것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여러분들이 이것을 행할 때 여러분들은 앞으로 엄청난 기적을 경험할 것으로 믿는다” 면서 “앞으로의 세월은 세상에는 어두움이 있을 것이나 여러분들에게는 밝은 빛이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뉴스레터는 누가복음 6장 38절의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번 집회의 기름진 땅에 종자를 심으라”고 요구하고 “특별한 믿음은 하나님의 손을 움직일 것”이라고 말했다.

베니힌은 뉴스레터에서 그의 2013성회에서는 막대한 재정이 필요하다면서 동참해 줄 것을 요구했다.

http://www.newsnnet.com/news/articleView.html?idxno=495




어떻게 소명을 발견할 것인가

오스 기니스는 이렇게 말했다. "소명을 발견하는 주된 방법은 각자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도록 창조 되었고 어떤 재능을 받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세상은 '네가 하는 일이 곧 너' 라고 말하지만, 소명은 '네가 누구인지를 알아 그 일을 하라' 고 말한다."

소명이란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단 두사람도 세상을 정확히 똑같이 보지 않는다. 가령 교통사고 현장에 10여명이 함께 도착했다고 하자. 똑같은 현장을 목격하지만 저마다 보는 것도 다르고, 반응하는 방식도 다르다.

한 남자는 운전자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고 교통정리를 시작한다. 한 여자는 사고를 자세히 관찰한 후 휴대전화로 119에 전화를 걸어 정확하게 사고 현장을 설명한다. 한 은퇴한 여교사는 길가에 죽어 누워있는 엄마를 보고 경악하고 있는 두 아이를 품에 꼭 끌어안고 달래준다.

한 간호사는 부상이 심한 사람들에게 즉시 응급조치를 취한다. 한 목사는 걷잡을 수 없이 흐느끼는 한 목격자를 보고 곁에 가서 진정 시킨다. 어떤 사람은 혼란 스러운 상황을 보고 요긴하게 쓸수 있도록 자기 차에서 담요며, 조명기구며, 비상용품을 가져다 놓는다.

같은 사고를 보면서도 저마다 반응하는 것이 다른 것은 저마다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을 보는가 하는 것은 각자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그 무언가에 의해 결정된다.

내가 주변 세상을 보는 방식에 내 소명의 방향이 들어있다. 어디를 가나 운영상의 문제가 있는 단체만 보이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그 기관을 더욱 효율적인 체제로 바꿔놓는다. 몸이든 마음이든 영혼이든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만 보이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신체적, 정신적, 영적 치유를 베푸는 직업을 택한다. 주택문제만 보이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헤비타트 운동 같은 기관에 몸담아 주택문제를 줄여간다.

나는 세상에 잘못된 문제들이 많다는 것을 알지만, 모든 문제가 내 마음의 눈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청소년 흡연, 에이즈 확산, 무능한 정부, 지구 온난화, 환경 오염, 높은 문맹률, 난민문제.. 이런 문제들을 알고 해결을 돕고자 가끔 돈도 보내지만, 이런 일로 밤잠을 설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내게도 마음의 눈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으니, 내 눈에는 영적 고아처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보인다. 기독교 신앙을 실 생활의 경험과 연결시킬 줄 모르는 미숙한 그리스도인들로 가득 찬 교회가 보인다.

우리는 어떻게 소명을 발견할 것인가? 많은 경우 어렸을 때는 소명을 모른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소명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소명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언 땅 속에 잠자고 있는 씨앗처럼 말이다. 봄이 오면 씨앗은 땅을 헤집고 올라온다.

우리는 깊은 소명의식에 이끌려 내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는 여정에 올라야 한다. 그 길을 따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이르러야 한다. 꼭 따라가야 하지만 결코 쉬운 길은 아니다..

- 제랄드 싯처, 하나님의 뜻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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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담배, 그리고 마약

왜 성결교회와 오순절 교회는 술, 담배, 그리고 마약 사용의 절제를 옹호하는 가?
왜 그것의 절도 있는 사용을 허락하지 않는가?

여덟 번째 질문 

성결교회와 오순절교회 신자들은 역사적으로 고린도전서 6:19-20을 매우 존중했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殿)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술 취함에 대해 경고하는 이 말씀과 다른 말씀은 술, 담배, 또는 마약을 사용하는 것으로부터의 완전한 절제를 옹호하기 위한 충분한 이유로 여겨졌습니다. 인간의 몸은 성령의 전이기 때문에, 그 전을 더럽혀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완전한 절제를 옹호하는 또 다른 이유들이 있습니다.

(1) 현대 사회는 이 세 가지 중독성 물질의 파괴적인 결과로 인하여 괴로움을 당하고 있으며, 또한
(2) 이러한 물질, 특별히 술과 마약은 심지어 소량을 사용한다 할지라도 흔히 파괴적 중독성 습관으로 이어집니다.



성경은 술의 파괴적인 힘에 대해서 자주 말합니다. 노아의 술 취함은 그의 가정에 수치를 가져왔습니다 (창세기 9:20-27). 롯의 술 취함은 그의 두 딸과 근친상간의 관계를 야기시켰습니다 (창세기 19:30-38). 술 취한 아하수에로는 공중 석에서 왕후 와스디에게 모욕을 주려고 했습니다 (에스더 1:9-22). 술의 소비는 판단을 흐리게 하고, 감정에 불을 붙이며, 폭력을 초래합니다 (레위기 10:8-11; 잠언 20:1; 23:19-35; 31:4,5).

술중독과 그것과 연관된 우울증은 흔히 도덕적 저해(沮害)의 와해, 무분별한 혹은 포악한 행동, 또는 양심의 상실(술 취함)에 이르게 합니다. 장기간의 음주는 간, 췌장, 뇌, 혹은 심장을 완전히 훼손시킬 수 있습니다. 대학교 교정에서 마시는 폭음은 순식간의 죽음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천 4백만 명이 술 취함으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치명적 자동차 사고의 절반은 음주 운전자들에 기인합니다. 매년 술과 관련된 사고, 병, 강력 범죄, 그리고 노동시간의 손실은 천억 불을 초과할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불법 약물 (마약)

비록 마약의 사용에 대하여 성경에 특별히 언급이 없지만, 마약 사용자와 사회에 미치는 그것의 영향은 음주의 해로운 결과를 훨씬 초과합니다. 어떤 마약의 중독성은 매우 강력하여서 단 한 번 사용할지라도 그 사람을 평생 동안 마약 중독자로 만들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용하는 사람의 장기와 정신적 수용능력에 미치는 돌이킬 수 없는 육체적 손상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마약은 지극히 위험한 것입니다. 가장 커다란 위험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일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도록 방해하며, 개인의 대인 관계와 영적 행복을 파괴시킴으로서, 그 사람의 삶을 극단적으로 소모시키며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마약 중독으로 인한 개인의 손상 이외에 마약은 그들의 가족과 사회에 비참한 짐을 지웁니다.
술과 불법 약물의 사용은 가정 폭력, 거리와 직장에서의 격노, 아동 학대, 자살, 그리고 여러 가지의 사회의 다른 파괴적인 행동들에 대한 요인이라고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술중독과 마약중독은 우리 사회 기간(基幹)의 파괴를 위협하는 국가적 위기를 제공합니다.

담배

담배를 피우고 씹는 것이 그 사람의 판단을 손상시키거나 여러 가지 술과 마약에 연관된 부작용을 일으키지는 않지만, 담배는 지금 가장 중요한 건강의 관심사인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마다 젊은이들이 담배가 성숙함과 인기에 연관시키는 효과적인 속임수 광고 캠페인 때문에 그 습관에 사로잡히고 있습니다. 수 년 동안 미국 연방의무감(surgeon general)은 흡연의 위험에 대해서 사회에 경고해 왔으며, 심지어 담배 제조회사들에게 제품에 위험 경고문을 부착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구강암과 폐암 및 담배중독의 희생자들이 증가할 때까지 사람들은 그러한 경고를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금연가가 간접흡연으로 인하여 담배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 분명하게 되었을 때에야 사회는 담배의 사용에 대하여 심각하게 반대하기 시작 했습니다. 최근의 의학 연구들이 담배가 폐암의 주요 원인이 된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보여 주었지만, 교회는 성령의 전(殿)인 기독교인의 몸에는 물론 기독교인의 증언에 해로운 습관이기 때문에 담배의 사용을 반대해 왔습니다.

술, 담배, 그리고 마약의 사용에 관한 이러한 사실에 입각하여 보면 이러한 것을 절제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육체와 영적인 행복에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는 그러한 것에 대하여 높은 표준의 자제심을 가지고, 그것들을 취하지 말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습니다. 술, 마약, 혹은 담배를 어떤 정도 “적당히 사용”하는 것은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 말씀의 중요함과 우리 사회가 부딪치고 있는 현재의 위험에 대해 무감각한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우리들의 세상 앞에 순수한 증언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로마서12:1,2) 해야 합니다.

관심사:

위에서 언급한 술, 마약, 담배의 사용은 중독된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무거운 짐을 지웁니다. 약물의 남용은 더 큰 사회에서 생산성 있는 개인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는 중독자로 만들 수 있으며, 따라서 그가 속해 있는 사회에 재정적인 짐을 지워줍니다. 중독자로 인하여 생기는 상해(傷害)와 병에 대한 의학적 치료의 비용은 훨씬 더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을 더욱 소모합니다. 그리고 약물 남용이 흔히 범죄 행위로 이어지기 때문에 사회는 보험 비용의 추가와 법의 집행을 위해 비용을 두 배로 지불합니다. 우리들은 사탄이 중독자들의 생활에서 그들을 노예로 구속하기 위하여 사탄이 사용하는 이러한 중독성 물질과 싸울 것을 모든 사회에 요구합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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