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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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일민  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있다(롬 1:19). 그래서 저마다의 하나님을 그려낸다. 그 결과 시대나 지역이나 인종에 따라 온갖 모습의 하나님이 등장한다. 하나님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효과적인 싸움은 적을 알고 나를 알 때라야 가능한 것처럼, 효과적이고 올바른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바로 알 때라야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그 모습을 설명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기독교적인 신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몇 가지만을 제한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1. 여호와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여호와"라고 답하시면서,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록할 나의 표호니라"(출 3:15)고 하셨다. 여호와는 성경에서만 발견되는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이다. 여호와는 히브리어의 발음에 따라 '야훼'라고 하기도 한다. 그 뜻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출 3:14)이다.

우리 주변에는 오랜 세월을 지내고 하늘에 올라간 짐승이나 공덕을 쌓은 어떤 사람이 변해서 신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름 그대로, 누가 있게 해서 존재하게 된 분이나 누군가가 올라가서 되어지신 분은 아니다. 그는 스스로 존재하고 계시는 자존자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일정한 원인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구별이 되신다. 그러므로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으로도 묘사되어질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출 20:4). 심지어는 십자가 형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믿음의 표현이 될 수 있을는지 모르나 믿음의 대상이 되어질 수는 없다.

하나님은 그 존재에서뿐만 아니라 계획이나 활동에 있어서도 아무런 원인을 갖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혼자서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만사를 자유롭게 계획하신다. 또 아무의 구애도 받지 않고 그 계획을 이루어가신다. 하나님은 천지의 변화나 인간의 죄악된 행위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천지가 없어진다고 해도 하나님은 없어지지 않으시고 그의 말씀 역시 변하지 않는다.

성경에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후회를 하시거나(삼상 15:11, 35) 뜻을 돌이키신 것(삿 2:18)처럼 보여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는 사람 편에서 그렇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머물러 있는 태양을 지구가 돌고 있음에도, 해가 동쪽에서 떠올랐다가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표현하는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여상하시고"(시 102:27), "변역하지 아니하시고"(말 3:6), "식언치 않으시고, 후회가 없으시며"(민 23:19),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약 1:17) 분이시다. 여기에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과 함께 쓰여지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혼자 동떨어져 계시지 않고, 사람들을 찾아오시고, 사람들에게 언약을 맺어주시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주시는 분이심을 의미한다. 아브라함과 같은 조상을 언급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셨던 약속을 지금도 기억하여 반드시 성취하실 것을 암시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찾아오셔서 언약을 맺어주실 정도로 은혜로운 분이시다. 그리고 천지는 없어져도 그의 약속을 기필코 완성하시는 신실한 분이시다.

2. 인격적인 하나님

하나님은 영이시다(요 4:24).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말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분이심과, 늘 살아서 일하고 계시는 분이심과, 시간이나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의미한다. 영이란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자거나 죽는 법이 없이 항상 그리고 어디에서나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저기 멀리 하늘이나 예배당에만 계시는 분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바알처럼 졸거나 주무시면서 게으름을 피우는 분으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이스라엘의 부족신 또는 모세나 다윗이나 바울의 하나님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의 내 하나님으로 나와 더불어 일하시기를 원하시는 임마누엘이시다. 우리는 엘리사처럼 "엘리야의 하나님은 어디 계시니이까"(왕하 2:14)라고 외치면서, 그 하나님 앞에서 지금 우리 앞에 가로 놓인 강물을 가를 수 있어야 한다.

또 영은 인격적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격적이란 나무나 돌 같지 아니하고 지성적, 감정적, 의지적 활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지성을 가지신 하나님은 천지와 사람들에 관한 모든 것들을 겉모양만 아니라 그 생각까지 알고 계신다. 그리고 그 근원부터 장래에 대한 것까지를 다 헤아리고 계신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호리라는 숨겨진 것이 없이 다 밝히 드러난다. 감정을 가지신 하나님은 그 자녀를 사랑으로 감싸고 인자와 긍휼을 베푸신다.

불의와 죄악에 대해서는 맹렬한 노를 발하신다. 그리고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비뚤어진 사랑에 대해서는 질투를 하기까지 하신다(출 34:14). 의지를 가지신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뜻을 정하고 세상 끝날까지 그 뜻을 이루어 가신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르시기를,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게 하시고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것을 분명하게 이루어 가신다(빌 1:6)고 했다.

인격적 존재는 다른 인격적 존재와 더불어서 교통을 하며 지낸다. 인격적인 존재이신 하나님께서는 성부, 성자, 성령 사이에 서로 인격적인 교통을 나누신다. 피차 의논을 하시기도 하고(창 1:26), 보고 들으시기도 하고(요 3:32), 보내고 보냄을 받으시기도 한다(요 12:14, 16:17)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시고 사람들과 더불어서도 교통을 나누신다. 사람이 날이 서늘할 때 아담을 찾으시던 하나님과 나누는 인격적인 교통,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영적인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와 찬송을 할 수 있는 것은 이 교통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그 대상이 인격적인 하나님을 고려할 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방적인 묵상이나, 일방적인 요구나, 광란적인 몸짓이나, 번지르한 단어의 나열보다도 중심을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대화형이 더 바람직할 수 있을 것이다.

3. 선하신 하나님

사람은 누구나 선을 칭찬하고 악을 비난한다. 그러나 때로는 그 판단기준이 애매하거나 서로 달라서 혼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주님께서는 친히 한 청년에게 이르시기를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고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선하시고, 따라서 하나님이 바로 선 그 자체이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아닌 것은 선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최근 종교다원주의의 바람을 타고 하나님 이외의 다른 선을 인정하려 하거나, 추구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은 크게 경계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다음 몇 가지로 그 의미를 적용시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의 섭리에서 잘 나타난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을 창조하시는 때에서만 그치지 않고, 그것들이 그 존재를 유지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보살피시기 때문이다. 때를 따라 햇빛과 비와 바람을 주심으로 생명을 유지하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신다. 공중나는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신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 특별한 사랑을 더 쏟으신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교통이 가능하게 하고 피조물들을 다스리게 하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셔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가진 후사로 삼아 주신다(롬 8:15).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의 공의에서도 잘 나타난다. 하나님은 무엇이 선한 것인지 율법으로 보여 주신다. 그리고 피조믈들을 그 율법에 따라서 의와 공평으로 다스리시어 조금도 변벽됨이 없게 하신다. 또 상과 벌을 그 정도에 따라서 정확하게 베푸신다. 우리에게는 얼핏 보아 당장에 보기에 공평치 못한 것처럼 여겨져서 원망과 불평과 시비를 벌이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리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그 공평함은 드러나진다. 그러므로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조급하게 속단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요셉은 부당하게 팔려갔지만 그것은 그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 미리 보내신 조치이었다(창 45:5). 바울은 억울하게 옥에 갇히고 죄수의 몸으로 로마를 향했지만, 그것은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게 하기 위한 효과적인 인도이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범죄한 자들을 향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하나님은 그의 선하심을 인하여 당장에 지옥불에 떨어져야 할 죄인들임에도 오래 참고 기다리시면서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때문이다. 회개의 기회는 오직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이다. 천사들에게도 회개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눈이 범죄할 때 눈을 빼고, 손이 범죄할 때 손을 찍어버린다면 지금 우리의 눈과 손은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고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하여 우리는 탕자처럼 아버지께로 향하는 결단을 가져야 한다.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4. 삼위일체 하나님

1) 삼위일체의 중요성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삼위일체란 하나님이 한 분이면서도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인격으로 계심을 말한다.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심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회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사도신경의 대부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삼위일체가 이해하기 어려움에도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고, 또 성경전체의 중심 주제인 구속진리의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부정하는 것이요, 따라서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부정하는 것이며, 동시에 성령이 하나님 되심도 부정하여, 우리 속에서 실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성령의 구속적용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2) 삼위일체의 증거

성경에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종합해 보면 삼위일체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성경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성자를 낳으신 성부를 하나님이라고 하였다(고전 8:6) 태초부터 성부와 함께 계시던 성자도 하나님이라고 하였다(요 1:1).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속였던 성령도 하나님이라고 하였다(행 5:3, 4). 삼위께서 각각 하신 사역을 보아도 하나님으로서의 전지전능하심과 편재하심 등의 속성이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복수명사를 사용하여 "우리"(창 1:26, 3:22)라고 하셨다. 세례를 베풀 때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 28:19)고 하였다. 왜냐하면 삼위가 각각 하나님이시고, 그 영광과 권능에서 서로 동등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딤전 6:15)라고 하였고,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느니라"(신 4:35)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한 마디로 설명하는 말이 삼위일체이다.

3) 삼위일체 교리의 완성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초대교회의 교부들에 의해서 생겨났다. 한 분이신 하나님을 맨 처음 삼위로 표현한 분은 주후 2세기 때 교회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데오빌루스이었다. 그 후 220~240년 사이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진 터틀리아누스가 삼위일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였다. 그러나 삼위일체에 대한 일부 사람들의 오해로 인하여 교회에 혼란이 일어나자 이를 바로 잡기 위한 전체교회의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는 주후 325년에 니케아라는 도시에서 있었다. 이 회의는 삼위일체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자세한 내용은 우리나라에서는 자주 사용하지 않고 있는 니케아 신경으로 발표가 되었다. 이 회의에서 크게 공헌을 했던 사람은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감독이었던 아다나시우스(293~373)이었다.

4) 삼위의 구분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심에도 삼위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서는 동시에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시기도 한다. 성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던 요단강이 그 좋은 예이다. 성부께서는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로 임하시고, 성자께서는 물에서 나오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시고, 성령께서는 비둘기 같은 모습으로 내려 임하셨다(마 4:16, 17).

삼위 사이에는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교통이 있고, 그 사역에서 서로 구분이 있다. 성부는 계획을 하시고, 성자는 성취를 하시고, 성령은 적용을 하신다. 예를 들어 성부께서는 죄인의 구원과 그 구체적인 방법을 계획하시고, 성자께서는 그 계획에 따른 율법의 요구를 성육신과 죽음을 통해서 성취하시고, 성령께서는 그 계획의 효력이 구체적으로 적용되도록 택하신 자들을 중생시키시고 거룩하게 하신다. 이는 마치 한 건물의 경우에 설계자와 건축업자와 입주자의 역할이 서로 구분되는 것에 비교할 수 있다.

그러기에 삼위에는 일정한 질서가 있어서 성부, 성자, 성령의 순서로 불려진다.

5) 삼위일체에 대한 오해

사람의 머리로서는 삼위일체를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교회역사에는 초대교회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로 말미암아 많은 오해들이 생겨났다. 우리는 이러한 오해를 이단이라고 부르는데, 그 유형은 대체로 성자에 관한 설명여하에 따라서 다음 두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성자 하나님은 하나님으로만 계시지 않고 성육신이 되어 사람이 되시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시다. 그러나 사람의 머리로는 이 사실이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그래서 한 쪽으로 치우쳐서 사람이라고만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예수님은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를 주님으로 부르고 찬송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보다 경건성이 뛰어났기 때문에 마치 하나님처럼 존경을 받을 수 있을런지는 모르나,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성부 하나님 오직 한 분뿐이라고 하면서 삼위일체를 부인한다. 초대교회에서는 사모사타 출신의 바울이라는 사람이 그 대표이었다. 지금은 유니테리안파와 같은 곳에서 이러한 주장이 이어지고 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기에"(고전 12:3) 생겨난 이단이다.

정반대의 다른 오해도 있다. 성자의 참 하나님 되심을 지나치게 강조하기 위해서 그의 사람 됨을 부인하는 오해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과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악된 육체를 가지실 수가 없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육체가 실제로 우리와 똑같은 육체가 아니었고, 다만 신기루처럼 우리의 육체와 같이 보여졌을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한 분 되심을 강조하기 위해서 성부, 성자, 성령은 한 하나님이 필요에 따라서 그 모습을 바꾸어 나터나신 것이라고 주장한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는 성부의 모습으로 나타나시고, 율법을 완성하실 때는 성부로 나타나셨던 바로 그 하나님이 성자로 그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시고, 구속을 적용하실 때는 성부나 성자로 나타나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성령으로 그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그들은 삼위일체를 한 사람의 연극 배우가 각기 다른 세 배역을 맡아 연기를 하는 경우와 같이 생각을 한다.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내가 교회에 가면 집사이고 집에 가면 가장이고 직장에 가면 과장이지만, 사실 나는 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바로 이러한 오해에 해당된다. 초대교회에서는 시벨리우스라는 사람이 그 대표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오해는 우리들 주변에도 폭넓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세심한 주의를 기우릴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라"(요일 4:2, 3)고 하였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오해는 성자를 성부보다, 성령을 성부나 성자보다 못한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다. 성자는 성부에게서 나셨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셨기 때문에, 삼위는 동등한 하나님이 아니라 우열이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을 우열이 있는 하나님으로 보는 것은 하나님을 세 분으로 보는 삼신론(三神論)에 이르고 만다. 삼위 하나님은 똑같이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시간적 제약을 받지 않으신다. 그리고 그 영원한 시간을 초월한 것이므로 먼저와 나중이 따로 있지 않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으며, 순간이 영원 같고, 영원이 순간 같다(벧후 3:8). 따라서 삼위에는 우열이 있을 수 없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삼위일체 앞에 선 우리는 바닷가의 모래알갱이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위일체를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얼음속에 박힌 나무가지를 억지로 잡아 빼면 부러지고 만다. 그러나 봄이 오면 그 가지는 저절로 빠진다. 이해가 부족하면, 후히 주시는 주님께서 주의 기이한 것을 밝히 주시기를 기도하며 기다려야 한다.

 출처: 안개꽃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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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정 휜 허리 위로
골깊은 삶이 있다
어느 때부터인지 당신의 휜 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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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마의 주름 때문인가
시련을 참고 모질게 살아온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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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거워 무거운 삶의 지게를
잠시 벗어두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겠지
한없이 달아나고 싶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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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마의 주름속에
골깊은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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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휜 허리 등골속에
쌓인 파노라마
이승은 저승보다
더 힘이 드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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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게가
내가 지고 갈수만 있는 무게가
점점 무거워지는 나의 등짐은
언제 벗을 수 있는가?




드로잉...고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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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비판이란

 



비판하지 말라는 명령은, 분별력을 갖지 말라는 요구가 아
니라 관대하게 되라는 간청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람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우리를 동물
과 구별되게 하는 우리의 비판력을 정지시킴으로) 하나님
이 되려는 외람된 야망을(우리 자신을 재판관으로 내세움
으로) 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존 스토트

 


“비난하기 좋아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헐뜯음으로 말미
암아 자신을 높이는 바리새인의 악행이며 도덕적 우월성을
 얻는 매우 값싼 방법이다.”- A.B.Bruce

예수님의 산상설교

 

 

츨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존 스토트 목사" 중에서

 

 

 

칼빈의 핵심 교리(요약)

 

정준모

 

 

1.경건이란 무엇인가? 

 

경건은 칼빈의 신학과 삶의 핵심 주제며 교리이다. 그의 여러 문헌과 작품 속에서, 칼빈은 다각적인 측면에서 경건과 그 결과에 대하여 여러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경건은 칼빈 신학의 하나의 공통된 주제라기보다는 그의 신학 전반의 방향이자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칼빈에게 『기독교강요』는 경건의 총체와 구원 지식에 필요한 핵심 교리를 모두 포함한다. 그러므로 그는 이것을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열정을 가지고 읽어야 할 가장 가치 있는 책으로 간주하였다.

 

경건에 대해 언급한 후 칼빈은 참 종교와 거짓 종교에 관하여 설명한다. 참 종교를 결정짓는 것은 경건이다. 칼빈은 경건을 외형적인 모습에 나타난 어떤 형식으로 여기지 않는다. 진실한 경건, 참된 신실함으로 표현되는 참된 경건은 하나님을 우리의 주로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것만큼 그분을 아버지로 사랑하고 그의 의로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에 대한 거역이 죽음보다 더 악하다고 여기고 두려워하는 신실한 감정이다.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종교나 경건을 떠나서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위엄과 긍휼을 찬양하는 자리에서도, 칼빈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능력들을 통해 종교가 발생되고 이런 능력들이 경건에 대한 우리의 좋은 스승이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경건을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생기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포함된 경외라고 부른다.

 

칼빈은 경건을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에 스며있는 것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경건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길 수도 있는데, 그 첫 번째 발걸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감찰하시고 다스리시고 양육하시는 우리 아버지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회개의 열매들 가운데 하나인 경건은 거룩함 속에서 평생 성장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칼빈은 회개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맺게 되는 열매들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서 경건의 의무를 다하는 것과 모든 인간을 향하여 사랑을 베푸는 것, 그리고 전 삶을 통하여 거룩함과 순결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십계명에 대한 논의에서도 칼빈은 십계명을 통하여 우리 모두는 사랑과 경건을 실행할 의무를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참된 경건은 바로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경건은 교회에 관한 정황 속에서 순수한 교리로부터 얻게 되는 믿음 있는 삶을 내포할 수 있다고 칼빈은 생각한다. 결국 칼빈은 이 개념을 성경의 전반적인 계시로 이해하면서도, 단지 경건의 교리만으로 취급하는 경우도 보여주었다.

 

경건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수적인 그 어떤 것을 가리키는 포괄적인 용어임은 분명하다. 이것은 너무나 필수적인 것이어서 칼빈은 경건을 그리스도인의 삶이 가지는 시작과 중간, 그리고 마지막이며, 경건이 완성된 곳에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경건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칼빈은 경건의 개념을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근본적인 어떤 것을 일컫는 포괄적 개념으로 보았고 경건에 대한 풍부하고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경건은 사랑, 경외,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 그리고 경배의 원천이라고 인식하였다.
 
2. 하나님에 관한 지식
 
칼빈의 신학의 초기 집합체인『제 1차 신앙교육서』 2절에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지녀야 할 참된 경건”을 다룬 칼빈은 같은 책 3절에서 “그런 경건의 삶을 위하여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논한다.
 
먼저 칼빈은『기독교강요』1권의 주제인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를 대단히 눈부신 극장으로 본 칼빈은 이 세상을 주께서 그의 영광의 놀랄만한 광경을 보여 주시는 극장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타락과 범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무지한 인간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속성을 이해할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고 보았다.

 

따라서 칼빈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우상이나 귀신을 스스로 만들고 있음을 보고 안타까워하였다. 이런 이유로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으로부터 그 분의 영원함, 능력, 지혜, 선하심, 공의, 그리고 긍휼과 같은 것들을 충분히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입장인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20)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칼빈의 인간 이해는 그들의 무지와 아집으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나타난 일반 계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 근거한다. 『기독교강요』에서 그는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가 선포하는 영광들과 죄로 인하여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인간의 상태를 상세하게 다루는 데 다섯 장을 할애한다. 그 다음에, 그는 성경을 창조주 하나님께로 나오려는 자에게 선생과 안내자로서 필수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칼빈의 명저인『신앙교육서』와 『기독교강요』에 기록된 성경의 목적은 창조 사역 가운데 거하시는 참되신 하나님을 명확히 보도록 돕는 것이고 그러한 창조 사역에 어울리는 감사가 우리 가운데 울려 퍼지도록 하는 것이다. 『신앙교육서』에서 칼빈은 창조 사역을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위대함은 단지 그분에 대한 참된 지식에 이르게 되는 첫 번째 단계일 뿐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우리는 겸손하게 우리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선과 긍휼을 깊이 생각할 때에 우리는 그것들이 가진 진정한 목적, 가치, 그리고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를 인식하게 된다.

 

『신앙교육서』 3절의 마지막 문장은 『기독교강요』의 첫 장을 여는 중요한 문장이며, 모든 신학 문헌들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장 가운데 하나이다. 칼빈은 계속해서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 왜 그리고 어떻게 얻어지는가를 묻는다. 칼빈은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신앙, 그리고 사랑을 모두 포함하는 진정한 경건에 기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앙을 지식으로 표현한 칼빈은 마음과 심정으로 이해하는 지식을 생각하였다. 이처럼 칼빈은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은 비록 말씀으로 알게 되지만 실제적인 지식에 의존한다고 강조한다.

 

지금까지 경건에 관한 관찰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을 경건이라는 용어에 맞추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사실인지의 여부를 판별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에 관해 아는가에 있지 않고, 우리가 그 분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있다.

 

따라서 경건하고 거룩한 삶은 하나님에 관한 거짓되고 죽은 지식에서 참된 신앙을 구별하는 것이다. 덧붙여서 그리스도 없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은 즉시 우리의 모든 사고들을 삼켜 버릴 거대한 심연과 같다고 꼬집은 칼빈은,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되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한, 혹은 그리스도 중심의 하나님의 지식을 강조하였다.

 

3. 하나님의 형상 회복과 자유의지
 
인간 본성과 그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이며 염세적인 견해를 가진 칼빈은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매우 처절하게 묘사한다. 그는 인문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과 이성에 관하여 그 어느 개혁자들보다 너그러운 자세를 취하였지만, 『신앙교육서』에서는 이러한 인문주의적인 영향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인간은 죄와 반역의 결과로 하나님께서 주셨던 모든 타고난 능력들을 박탈당하였으며, 단지 영혼이 결여된 육체만을 음미하게 되었다. 인간의 타락은 지성과 의지뿐만 아니라, 손상되어 부패해 버린 신체적인 능력에도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어떤 방향으로 우리가 눈을 돌리든지 결과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더럽고, 저속하고, 혐오스러운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에 관하여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으며 여전히 인간의 부패로 잔존하는 모든 것은 무서울 정도로 추할뿐이라고 말한다. 칼빈은 죄의 결과로 영혼의 모든 능력은 죄로 점유되었고 저급한 욕망이 인간을 사로잡았을 뿐 아니라, 가증한 불경건이 인간 이성의 아성을 점령해 버렸으며, 교만이 그 마음의 은밀한 장소까지 침투해 들어갔다고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전통적으로 사도 바울, 어거스틴, 칼빈 등이 전 인류가 아담으로부터 범죄를 저질렀으며 모든 인류는 이 사실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다는 것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칼빈은 최종적으로 인간의 마음이 죄의 독성에 빠져서 오직 죄의 열매만을 맺게 된다고 언급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맨 처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아담은 거울에서처럼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반영했을 것이지만, 죄로 지워져 버린 이 형상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었음이 틀림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회복된 성도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그들 안에서 강화된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창조보다 이 두 번째 창조 즉,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회복된 성도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훨씬 더 풍성하고 강력하다. 결국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자격을 얻게 될 여지를 갖게 된다고 칼빈은 보았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칼빈의 사상은 성경적이며 매우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많은 개혁주의자들은 죄인의 의지가 노예 의지이며, 이 의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도움을 받기 전에는 악을 자유롭게 선택할 뿐이라고 강조한다. 가장 어두운 색채로 죄악의 실체를 묘사하는 칼빈은 죄의 노예가 된 인간의 모습을 첨가시켜서 자유 의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칼빈은 자유 의지에 관해서 적극적인 입장을 갖게 된다. 타락된 상태의 관점에서 자유 의지를 바라본 칼빈은 “육체에 속한 인간은 전 영혼이 한결같이 죄 속에 거한다”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칼빈은 인간이 자유 의지와 노예 의지를 모두 갖는다고 말한다. 칼빈 자신은 이 문제를 쉽게 이해하거나 간단하게 대답하지 못했지만 그의 근본 입장은 명확하다. 원래 선택의 자유를 부여받았던 인간은 바람직한 구별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자기가 원하기만 했다면 자유 의지로 영생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따라서 아담은 그가 원하기만 했다면 오직 자신의 의지로 자기가 넘어지는 것을 알고 바로 설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왜곡되어 버렸던 것은 처음 인간이 지녔던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이와 같이 칼빈은 인간이 자유 의지를 부인함으로 도덕적 책임을 무시하는 결정론에 빠질 수 있으며 또한 인간이 노예 의지를 부인함으로 운명론에 빠질 수 있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칼빈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노예의지를 모두 부인하지 않고 인정하였던 것이다. 즉 칼빈은 인간에 관한 결정론이나 운명론을 모두 거부한 반면, 그는 분명코 한 측면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다른 한 측면에서는 노예의지를 인정하였다.

 
4. 십계명과 삶
 
칼빈은 전통적인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율법관을 따르지 않고, 사도 바울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 율법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그의 『신앙교육서』에서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칼빈은 율법의 세 가지 용도와 율법에 합당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형태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의 삶을 정확히 측정할 목적으로 당신이 친히 부여하신 규정 혹은 표준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에게 참된 의로움과 인생의 길을 제시해준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지은 죄 때문에 율법의 요구들을 성취할 수 없고, 따라서 율법은 죄인된 우리에게 일차적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비춰진다. 어거스틴의 말을 따라서 칼빈은 우리 자신의 의로움이 하나님에게는 무익하다고 본다.

 

율법은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관하여 우리를 지속적으로 훈육하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악을 버리도록 우리를 격려하고 권고하는 도구로서 유용하다는 점에서 그 유익성을 찾는다. 율법은 우리가 어떤 열매를 거둘 수 있으며 또한 그것으로부터 어떤 종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를 보게 하며, 우리의 행동을 제어한다. 이런 통제는 건전한 사회에 필요한 것이다. 율법은 이미 성령이 성도들의 마음에 사역하고 있음을 교훈하고 있다.

 

십계명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데 필수적으로 지켜야 하는 하나님의 표준이다. 칼빈은 십계명을 아는 사람이 온전하게 성경을 안다고 하였다. 칼빈은 율법에 대하여 다음의 세 가지 이해를 가진다. 우선 하나님은 영적인 율법 수여자이시기 때문에 율법은 영적인 것이다.
 
그리고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는 목적으로 이해되고 긍정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관점에서 십계명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칼빈은 그리스도를 율법의 심장, 영혼, 생명, 목적, 마침, 그리고 성취라고 하면서 율법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노골적으로 진술한다. 따라서 율법은 오직 그리스도와의 관련 속에서만 해석되어야 한다. 부가적으로 율법이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것은 사랑이다. 이것은 모세의 마지막 네 권의 책들에 대한 칼빈의 주석에서 강력하고 분명한 의미를 가진다.

 

칼빈은 십계명을 우리의 전 삶이 하나님을 즐거워하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행하여야 할 것에 관해 하나님께서 주신 가르침의 요약이라고 정의하였다. 또한 그는 하나님은 계명을 주시면서 그 계명의 근거로 이스라엘의 해방을 상기시키셨는데,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 백성의 자유의 주인이심을 밝히면서 그 자유를 누리는 길이 계명에 대한 순종임을 언급하며 율법과 자유의 관계를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의견이 일치되는 바이다. 그 점에 있어서 칼빈도 역시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살도록 훈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어진 삶 속에서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가 파악하려고 노력할 때 문제는 더욱 복잡해지고 우리의 판단은 점점 흐려지기 쉽다.
 
특히 어렵고 명확하지 않은 윤리적 결정들에 직면하게 될 때 우리는 매우 혼란스럽고 당혹스럽게 된다. 그러나 칼빈은 이 문제에 관해서 상대적으로 간단하게 대답한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율법의 개념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은 율법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들을 거기에 기록해 놓으셨다. 우리가 알아야 될 모든 사항들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이다.

 

칼빈은 율법과 그리스도를 동시에 취하여 작업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분의 형상이 율법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회복되기 위하여 우리가 아들로서 입양되었다고 칼빈은 주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율법의 정신, 생명, 목표, 그리고 완성이신 그리스도를 율법은 모든 부분에서 언급하기 때문에, 참으로 율법의 모든 교리, 명령, 약속은 항상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율법의 최고 해석자일 뿐만 아니라, 율법의 본질이시며 완성이시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토론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의 삶을 원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율법보다 오히려 그리스도가 우리의 본받을 모델과 형상이라고 주장한다.
 
5.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와 자유
 
칼빈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칭의는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자유을 선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로 인하여 그들의 삶 속에서 자유를 얻었다고 밝힌다. 이것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의롭다고 칭하시는 자유이며, 그리스도께 종노릇하는 자유이다. 또한 칼빈은 하나님의 사역으로 이루어지는, 곧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은 우리 하나님과의 관계와 경건한 삶의 기초이며 그분이 부여하신 은혜의 결과로 우리는 회개와 중생의 삶을 갖는다고 말한다.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순종을 통하여 얻으신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나타나게 함을 뜻하는 것이다. 칼빈은 칭의가 두 측면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칭의는 전적으로 완전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과 죄인이 그리스도의 의로 자신을 장식하는 것이다. 칼빈은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은 의인으로 선언됨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하는데, 이 의미는 자신 안에 있는 어떤 무엇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외부의 어떤 세력에 의하는 것을 말한다.

 

그의 명저인『기독교강요』 최종판에서 칭의 교리를 정립하려고 시도하는 칼빈은 기독론적 차원에서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분명하게 연결시킨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관점에서 칭의로부터 진정한 자유가 파생된다고 보았던 칼빈의 사상은 그의 율법에 대한 입장을 잘 보여준다. 칭의와 자유의 관계를 오랫동안 생각하였던 칼빈은 양심이 칭의에 의하여 죄책에서 자유롭게 될 때에, 칭의의 중심적 의미는 분명하게 된다고 이해한다. 그는 진정한 경건에 관하여 지속적인 관심을 가짐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더욱 분명히 이해하게 된다. 이런 자세는 반드시 믿음의 중요한 행동인 기도로 이어진다.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율법에서 자유롭다. 칼빈은 그 근거를 바울의 율법 폐지에 대한 언급에서 찾는다. 따라서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고 바울이 말하였을 때, 그것은 칼빈에 따르면 우리가 그 힘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율법의 엄격한 요구들과 그 요구들로 말미암은 저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따라서 폐지된 것은 율법의 규칙이 아니라 절대적인 완성을 위한 요구를 통하여 얻게 된 자유에 반대하는 요소이다. 이제 믿는 자는 죽음이 주는 두려움으로 괴로워하는 양심의 끝없는 속박이 주는 부담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마침내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에 의해서 ‘양심의 자유’라는 선물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친히 우리를 오랫동안 속박시켰던 율법에 복종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법적인 요구들을 가지고 우리에게 대항하고 있었던 그 속박은 벗어졌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모든 율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자유가 하나님의 자유에 근거하며 그 자유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순종은 율법 아래뿐만 아니라 복음 아래서도 요구된다. 그러나 양쪽에 대한 순종에는 차이가 있다. 복음에 대한 순종은 더 이상 율법의 명령들에 대해서 요구되는 엄격하고 혹독한 복종이 아니라 오히려 자발적인 순종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완전한 순종에 의하여 율법의 요구들을 충족시키셨다. 그래서 순종에 대한 의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충족되는 것이다.

 

자유는 자율이나 무질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진정한 주인을 찾는 것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예속된 자유임과 동시에 섬기는 자유다”라고 한 루터의 말을 반복한다. 즉,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섬김’ 그 자체이며 섬기는 자유이다. 진정한 자유는 순종 안에 거하는 자유이다.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나 경외가 자발적이어야 하듯이 복종 또한 기쁨의 마음으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만약 그것이 사랑과 감사로부터 생긴 것이 아니라면 믿음의 순종이 아니다. 그들의 의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열망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분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기쁨의 순종은 단지 그들이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제 진정으로 자유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유롭게 사랑하고, 자유롭게 순종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유롭게 따를 수 있다. 결국 오직 자유로운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지적이며 자발적인 순종을 할 수 있다고 칼빈은 강조한다.
 
6. 선택 교리 
 
선택과 예정은 칼빈의 교리들 가운데 가장 강조되지만 또한 오해되는 것들 중 하나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예정에는 선택과 유기가 있다. 선택과 유기는 하나님의 은혜와 공의를 증거하는 수단이다. 선택은 자주 귀중한 하나님의 긍휼과 선하심을 보여준다. 칼빈은 예정을 하나님의 주권의 틀에서 이해하였다. 선택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서 예정되었다는 근거를 가진다. 칼빈은 선택은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해되고 인정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칼빈의 선택 교리는 성경적으로 바울의 신학적 입장을 철저히 따른다. 또한 그는 바울의 주장처럼 선택 교리를 인간의 구원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다. 이는 칼빈에게 있어서 인간의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순전한 관대하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은 오직 주께서 그의 영원하신 선택에 의하여 당신의 자녀와 하늘나라의 상속자들로 예정하셨던 사람들 속에서만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다고 보았다. 모든 사람이 동등한 조건으로 창조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인 예정은 각 개인에게 적용된다.

 

예정 혹은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교리는 칼빈 신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교리로서 『신앙고백서』, 『제네바 신앙교육서』, 그리고 『기독교강요』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칼빈은 이 교리를 중요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 틀림없다.

 

‘이중예정교리’는 인간 이성에 의하여 이해될 수가 없는 오묘한 진리이며 인간 이성에 장애물과 같은 개념이다. 칼빈은 이러한 어려움을 인식하고 예정된 자들과 유기된 자들에 대해서 주님 자신의 가장 합리적인 이유로 그들에 대한 각기 다른 행동을 우리에게 감추신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숨겨진 뜻을 간파하려는 자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였다. 사실상 인간은 자신의 지혜의 지극히 경미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심판들에 대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선택과 유기 사이의 평행 관계를 생각하는 일부 신학자들과는 달리, 칼빈은 누가 선택되었고 유기되었는지에 관해서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가 이런 입장을 가지는 이유는 우리의 구원의 확신이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약속들을 신뢰하는 것에서 나오며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곳에서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논의에 대해서 칼빈이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는 은혜에 집중된다. 그가 우선 강조하는 사항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와 그분의 거저 주시는 자비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교리는 믿는 자들에게 불확실성과 혼돈이 아닌 위로의 원천이 된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자신들의 구원과 선택에 대해서 확실한 입장을 가지지 못하였다. 칼빈은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그들에게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영원부터 정하셨던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은 단지 비참한 근심과 걱정으로 우리를 초조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주제에 관한 토론이 벌어지는 모든 곳에서 그는 ‘그리스도’라는 주제가 우리의 선택을 반영하고 명확하게 해준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구원의 확신에 관한 질문을 다루면서 다시 우리에게 그리스도만을 돌아보도록 촉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감추어져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선택이며 가장 진지한 것이며, 서약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러한 거울 안에서 보여주는 생명을 숙고하며 믿음으로 우리는 이러한 가장 진지한 것과 서약을 붙들고 있다. 예정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있으며, 그리스도 때문에 있다.

 

7. 믿음과 이신칭의
 
칼빈의 <신앙교육서>에 따르면, 그는 선택교리를 살펴 본 후에 바로 믿음의 주제로 돌아간다. 그는 믿음을 역사적 사건들과 근본적인 교리들에 관한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들에 대한 가슴의 확신으로 보았다. 하지만 무지가 아닌 지식에 근거하는 믿음은 약속들에 대한 지식을 전제로 한다.
 
또한, 믿음에 관한 지식은 뇌보다도 가슴의 문제이며, 이해의 문제라기보다는 기질의 문제기 때문에 이 지식은 특별하다. 지식으로서의 믿음은 인간의 감각적 인식을 통한 이해를 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믿음은 지금까지 인간의 마음이 그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넘어가며 일어나야 하는 감각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믿음에 있어서 지성과 의지를 모두 강조하였지만 지성보다는 의지를 더 강조하였다. 그는 신앙에서 의지의 역할을 중심에 두고 지성의 역할을 주변에 둔다. 또한 칼빈에게 있어 믿음은 성령의 행위인 동시에 인간의 행위이며, 수동적인 동시에 능동적이다.

 

복음에 있는 약속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극에 달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믿음의 영구한 대상’이시다. 또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하나님의 약속들은 확인되며, 제시되고, 완성된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모든 신적인 자비의 부요함을 제공해 주시는 믿음의 지속적인 대상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특별히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때 비로소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러나 믿음만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믿음에 필수적인 것은 하나님이 자비롭게 나를 향하시고, 사랑하시고, 나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하실 것이라는 지식이다. 바꾸어 말하면, 오직 은총 위에서만 사람의 심장이 쉼을 얻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은총의 약속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는 외적인 유일한 서약이 되신다. 그러므로 칼빈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주어진 진리의 약속에 기초된 지식으로 본다. 그래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포함하는 이 지식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계시되고 우리의 심장에 새겨져서 견고하고 확실하게 된다.

 

우리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다. 또한 믿음의 창시자요 저자이신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의 접착제 역할을 하는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비롭고 언약적으로 이루어진다. 믿음은 실제로 그리스도가 효과적으로 우리를 자신에게 묶어주도록 하는 끈으로, 이것은 성령의 주요한 사역이다. 따라서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믿음이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확신이 우리의 믿음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는 것이다. 결국, 믿음의 확실성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일체에 있다. 칼빈은 종종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신비적인 결합’이라고 한다.

 

칼빈은 칭의를 간단히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호의 안으로 그리고 의로운 사람으로 받으시는 수납’으로 정의한다. 선한 행위에 대한 토의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들어오는 죄인은 하나님과 화해되었고,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깨끗함을 받아 죄 용서를 얻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고 하늘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감 있게 서게 된다”고 그는 더욱 완성된 정의를 내린다.

 

칼빈에게 칭의는 단지 법정적인 문제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의인으로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칭의는 죄의 사면과 전가로 구성된다. 따라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수납되는 것이며, 용서받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게 되는 것으로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놀라운 선물들 중의 하나는 양심의 평화와 조용한 기쁨이다. 결론적으로 칼빈은 칭의를 복음의 가장 위대한 선물로 보았다.
 
8. 기 독 론
 
니젤(Niesel)의 명저인 『칼빈의 신학』에서, 그는 칼빈 신학의 특징을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으로 보았다. 그는 “칼빈은 그리스도가 성경의 중심이고, 목표이며, 목적으로 보았다고 말한다.
 
칼빈은 “우리는 그리스도가 성경 가운데 거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두 직분(제사장과 왕의 직분)을 가르쳤던 초대 교회처럼, 칼빈도 『신앙교육서』에서 두 직분만 가르쳤다. 그러나 1539년의 『기독교강요』 두 번째 판에서는 『1541년 신앙교육서』에서처럼 그리스도의 선지자적 사역을 덧붙였다.

 

그리스도의 왕의 직분은 그가 교회의 영원한 지배자이며 옹호자시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는 다윗에게 약속하신 구약의 약속을 성취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마귀와 세상과 육에 대한 모든 투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승리하도록 역사하시며 모든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왕권을 인식하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의 직분은 그의 자기 희생과 죽음으로 이루신 죄에 대한 유일한 만족과 중보의 간구하심을 의미하는데, 그는 지금도 제사장의 직무를 계속하고 계신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의 최종판에서 “대속적인 죽음의 희생으로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사해 주셨기 때문에, 제사장의 직분은 오직 그분께만 속해 있다”라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칼빈은 그리스도의 죄 사함, 하나님의 진노의 소멸,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언급하고,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이 하나님의 긍휼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선지자로서의 세 번째 직분을 강조하면서, 칼빈은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실 때에 선지자로 오시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세상을 창조하셨던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예언하시고 모든 것을 계시하실 것이기에,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주권적인 대사가 되었다고 말한다.

 

칼빈은 이 직분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세 직분에 모두 적용된다고 보고 있다. 이 직분들은 모두 우리의 선을 위한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서로 교제하며, 우리 모두가 그의 충만함을 받도록 하기 위해 이러한 은사를 받으셨다. 또한 그리스도의 선지자적 직분에서 얻어지는 개인적인 유익은 우리의 주인과 교사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선지자적인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학자가 되도록 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에 관한 참된 지식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칼빈은 그의 모든 저서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인 동시에 그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구원의 원천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십자가에 완전한 구원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래도 구원의 성취를 재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라고 보고, 따라서 우리는 생명의 희망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말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서 본질을 분리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죄가 씻겨졌고 죽음은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부활을 통하여 의가 소생되었고 생명이 살아났다 말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죽음으로 죽음의 권능이 소멸되어서 우리 안에 효험이 있게 된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로 하여금 사망의 권세를 넘어서 승리를 얻도록 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경험하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때, 올바르게 그리스도를 알게 된다

 

9. 기도론 (1) 기도와 믿음
 
칼빈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기도에 큰 비중을 둔다. 역사적으로 유명하였던 기도에 관한 다양한 논의들 중에서도 칼빈이 기도에 대해서 논의한 글은 그 중심에 위치한다.

 

기도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요소는 믿음이다. 즉, 기도와 믿음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이 칼빈의 생각이다. 기도가 전적으로 믿음과 관련되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이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자신의 부족을 확실히 깨닫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부족의 상태에서 사람은 자신의 가련함을 도울 수 있는 어떤 구원의 손길을 찾게 된다. 즉, 그는 창조주이신 주님을 찾음으로써 그분께서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주셨고 또한 하늘의 모든 보화를 열어주실 것을 인식하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의 총체적인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묵상하며, 그의 전 기대는 그 분께 의존하며, 그의 모든 소망은 그 분께 집착하고 그분 안에서 쉼을 갖게 된다. 따라서 칼빈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주요 훈련은 기도하는 것이며, 이것은 신앙의 참된 증거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믿음은 진정한 기도의 기초가 되는 동시에 필수 조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칼빈은 성경의 약속은 기도하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연료와 같다고 하면서 성경을 좋아하였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소망을 나타내는 신앙이며, 살아있는 신앙의 표현이자 호흡과 같아서 거룩한 교리에 대한 지식이 내 몸에 살아 움직이는 표가 된

다. 기도의 중요성 때문에 칼빈은 기도에 원칙과 형식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논한다.

 

또한 기도는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데 필수 과정이다. 이런 이유로 기도가 칼빈의 경건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서 경건은 예배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기도로 입증되기 때문이다. 기도와 믿음은 모두 그 초점과 목표를 그리스도 안에서 찾는다. 따라서 믿음과 기도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일차적인 반응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이러한 풍부한 요소들을 이용하지 않는 것은 마치 엄청난 보화가 땅에 묻혀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무시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주님의 복음을 믿음의 눈을 통하여 보게 되며, 그 보화들을 기도를 통하여 파내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로마 백부장 고넬료의 경우에서 기도와 예배의 의미를 찾는다. 여기서 그는 고넬료가 연단 받을 때마다 영적으로 하나님께 예배와 기도를 드렸다고 설명하였다. 왜냐하면 칼빈은 진심으로 열렬히 예배에 몰두하였던 고넬료가 거기에서 신앙의 힘을 얻었다고 추측하였기 때문이다.

 

자비로운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소원과 필요를 아시고 채우시기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해 간청해야 한다. 또한 기도로 우리는 우리의 양심에 놀라운 평화와 안정을 갖게 된다. 기도는 살아있는 신앙 표현이며 고백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또한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려는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필요한 것들을 받으려는 데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9. 기도론 (2) 기도의 필요성과 규칙
 
칼빈의 기도의 필요성과 기도의 규칙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관대하심이 기도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능력과 지식에 있어서 무한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필요들을 충분히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신자가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문이 생긴다. 하지만 기도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신자들은 반드시 그 명령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 우선 믿음의 강건을 위하여 기도의 훈련이 필요하다.

 

기도해야 할 여섯 가지 이유들은 첫째로, 하나님을 항상 찾으며 섬기겠다는 소원과 열의가 우리 마음속에 불일도록하기 위해서이다. 둘째로, 하나님께 알려 드리지 못할 부끄러운 욕망이나 소원이 우리 마음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은혜를 주실 때에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넷째로,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서 기도로 응답해 주셨다는 확신으로 그의 인자하심을 더욱 열심히 명상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다섯째로, 기도로 얻었다고 인정하는 것들을 더욱 큰 기쁨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여섯째로, 우리가 연약한 때일수록 습관과 경험으로 그의 섭리를 확인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우리를 도우시고 지켜 주신다.

 

칼빈은 기도에 대하여 분명한 정의를 하고 있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행해지는 일종의 약속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그분 앞에서 우리의 소원, 기쁨, 하소연을 포함한 우리 마음의 모든 생각들을 내어놓을 수 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대화이며, 우리 마음의 순수한 감정의 작용인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기도는 우리의 ‘선택적인 행동’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리고 그 명령은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을 받으리라는 확신을 주는 약속과 함께 온다.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은 모두 기도의 동기와 우리의 확신의 근거가 된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의 명령을 의도적으로 거절하여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될 것은 ‘기도하지 않는 죄가 가장 나쁜 죄’라는 것이다.

 

기도의 규칙에 대한 칼빈의 입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은 신자들을 위하여 적절한 기도의 규칙들을 열거하고 논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과 합당하게 대화하기 위하여 마음과 정신을 가다듬어야 한다. 이런 자세를 위하여 우리는 성령께 의존해야 한다. 그 다음에 우리는 진지하게 우리의 탄원을 불타는 열성으로 아뢰어야 한다. 전심으로, 진지하게 하지 않는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그리고 합당한 기도의 전제 조건은 통회하는 심령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이다. 또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자는 자신의 영광과 가치에 대한 생각은 일체 포기하고 겸비하여 하나님께 전적으로 영광을 돌려야 한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고백적인 응답이다. 신자가 먼저 하나님을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반드시 응답하신다. 또한 모든 기도는 죄의 고백과 용서의 간청이 반드시 동반되는 것이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최악의 상태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기도가 응답될 것이라는 확실한 소망을 가져야 한다. 이런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경외가 수반되어야 한다. 복음의 진리를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회와 믿음으로 기도하는 모든 이에게 인자하시고 신실하시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도하는 자는 철저하게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의 능력과 기도에 온 정신을 바쳐야 하고 산만한 생각으로 주의가 흩어지지 않아야 한다. 정신을 모으기 어려울 때는 찬양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소리내어 읽으면서 마음과 생각이 주를 향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기도는 믿음의 가장 중요한 훈련이며,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통로이다. 그리스도인은 열심히 성화의 훈련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칼빈은 하나님 앞에서 일정한 시간에 기도할 것과 기도가 응답되지 않더라도 인내로 간구할 것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준다.

 

[출처] 칼빈의 핵심 교리(요약) (비공개 카페)   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1146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팔짱 낀 김정은과 리설주, 故김정일이 봤다면…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북한의 ‘퍼스트 레이디’로 알려진 리설주와 동행하는 모습이 공개되자 “고(故)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원하지 않았던 행동”이라는 주장이 탈북자 사이에서 나왔다.지난 1일 북한전문매체 자유아시아방송은 탈북자들과의 인터뷰를 인용해 “사망한 김정일 위원장이 남녀가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행동은 ‘우리식’이 아니라며 금지시켰고 북한 대학들에게 이 방침이 전달됐다”고 전했다.

자유아시아방송에 따르면 인터뷰에 응한 한 탈북 여성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리설주와 팔짱을 낀 것은 사실상 아버지인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를 거부하고 북한 여성들에게 이 같은 행동을 허락한 것과 다름없다”고 언급했다.

고 김정일 위원장은 2003년 노동당 중앙위 간부들에게 “외국풍을 없애고 우리식을 살라”고 지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팔짱을 끼고 다니는 젊은이들을 단속하고 치마저고리를 입지 않고 현대풍 정장을 한 여성을 통제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김정은 제1위원장과 그의 부인으로 알려진 리설주가 팔짱을 끼고 등장했고, 리설주가 현대풍 정장을 선보임에 따라 고 김정일 위원장의 규제가 완화될 것이라는 분석이 등장하고 있다.

한편 조선중앙TV 등 북한 언론은 지난달 25일 김정은 제1위원장과 리설주가 평양 능라인민유원지 준공식에 참석한 소식을 전하며 리설주의 이름을 처음으로 언급한 바 있다.

출처: 내 사랑 중국/익명회원

 김정일은 악마 그 자체;영하 35도에 발가벗겨 고문
( 이순옥씨 프랑스 라디오 증언에서 발췌) "

저는 북한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 근 50여년을
북한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은총으로 96년 아들을 데리고
남한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태어나 북한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제가 영문도 모른 채 지하 감옥소에서 모진
고문과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집행을 극적으로 취소한다는 통지와 함께
정치범 수용에 보내졌을 때
수용소안에서 겪은 북한 신자들의 모습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김일성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기 때문에
정치범 수용소에서 죄수의 신분으로 유일하게
6,000여명의 수용된 그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을 시킬 수 있는
생산 지휘와 모든 재정업무를 맡아서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땨문에 저는 많은 사람들이 일하는 작업장들을
이곳저곳 마음대로 갈 수 있었습니다.

어느날 저를 담당하는 재정부장 교도관이 저를
불러놓고 단단히 교육시켰습니다.
"너는 오늘부터 매일 어떤 공장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 공장에는 미친 정신병자놈들만 모여 있다.
그 미친 정신병자놈들은 당과 수령님을 믿지 않고
하늘을 믿는 미친 자들이니 너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곳에 가야한다.
그리고 그 미친자들하고는 절대 눈길
한번 마주치지 말아라.
그렇지 않고 네가 그 자들이 믿는 하늘을 믿게 되면
네 목숨은 여기서 끝나게 되는 줄 알아라."

그런데 거기 가서 그 사람들을 보는 순간 나는
너무 놀랐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무리같지 않았습니다.
1.500도 이상 시뻘겋게 타오르는 용광로의
고열 노동 작업장이었는데
그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을때,
무슨 짐승의 무리 같기도 하고 외계인 같기도 하고
도무지 사람의 모습은 찾아볼래야 찾아볼수가
없었습니다.
머리에 머리카락이 붙어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얼굴은 해골같고 이빨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키가 다 줄어들어서 120센티,130센티 요렇게
땅에 딱 붙은 난쟁이들만 움직였습니다.

나는 가까이에 가서 그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전 너무나 놀랐습니다.
잡혀 올 때는 정상인이었는데
거기와서 하루 열 여섯시간, 열 여덟시간씩
먹지도 못하고
그 고열 속에서 노동하며 고문받다보니
그 사람들은 척추가 녹아 내려서 뒷잔등에
혹이 되어 버렸고
몸이 다 휘어져서 앞가슴하고 배가 마주
붙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한결같이 모두 그렇게 육체가
망가져 기형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프레스 기계로 찍어도 한 판에 그렇게
똑같은 모습으로 찍기는 힘들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이 일하는 작업장에는 교도관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교도관들은 말로 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소가죽 채찍을 윙윙 휘두르고 다니면서 묵묵히
일을하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예수를 믿는 그 사람들의 몸에는 옷이 입혀져
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처음에 그 사람들을 멀리서 보았을 때
모두가 꺼먼 옷을 입고 있는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찬찬히 보니
그 사람들은 맨 살가죽에다 앞에 시커먼
고무 앞치마 하나만 걸치고 있었습니다.
용광로의 뜨거운 불꽃이 앙상하게 말라붙은 살가죽에
튀고 또 튀고 딱지가 앉고
그 자리에 쇳물이 떨어지고 또 떨어져서
타버리고 해서
그 사람들의 피부는 한 곳도 성한곳이 없었고
마치 들짐승의 가죽과 같았습니다.

어느날 저는 그 곳에서 정말 말로 전하기 힘든,
너무나 끔찍하고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오후, 제가 공장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공장안이 쥐 죽은 듯 고요했습니다.
작업장 한 가운데 수백명의 죄수아닌
죄수를 모아놓고
담당 교도관들 두 명이 눈에 핏발을 세우고
미친듯이 고함을 치며 날뛰고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무서워서 문 옆 한쪽에 비켜
서 있었습니다.

교도관들은 수령님을 믿지않고 하늘을 믿는
미친 정신병자놈들이라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그 사람들을 차고, 때리고 하면서
인간이하의 취급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도관들은
"너희들 가운데서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대열 앞에 나서라.
하늘을 믿지않고 수령님을 믿겠다고 하면
자유세상으로 보내서 잘 살수있게 해 주겠다"
고 하면서
그 사람들을 윽박지르며 하늘을 거부하라고
채찍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이상했습니다.
수 백명의 그 사람들은 왜 그런지 아무 대답도 없이
그렇게 매를 맞으면서도 침묵으로 맞섰습니다.

저는 너무나 무서워서 빨리 한 사람이라도
나서야 되는데,
그래야 오늘 누가 맞아죽지 않을텐데
왜 계속 저렇게 입을 다물고 있나..
저러고 있으면 또 누구를 끌어내다가 밟아
죽일지 모르는데,
빨리 한 사람이라도 나서야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급하게 생각하며 문 옆에 서서
무서움과 공포 속에서 떨고 있는데
예수를 믿는 그 사람들은 계속해서 침묵으로
대응했습니다.

그 때 독이 오른 교도관이 그사람들에게 달려가서
닥치는 대로 아무나 여덟명을 끌어 내다가 땅바닥에
엎어놓았습니다.
그리고는 구둣발로 내리밟고 짓이겼습니다.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고 허리며 팔 다리뼈가
부러졌습니다.
그 사람들은 고통 중에서도 몸을 뒤틀면서,
짓밟힐 때마다 신음소리를 냈는데
그 신음소리가 너무나도 이상하게 들렸습니다.

저는 그 때, 주님이 누군지,하나님이 누군지
전혀 몰랐습니다.
뒤에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이 고통 중에서도
몸을 뒤틀면서,
짓밟힐 때마다, 뼈가 부러지고 머리통이 부서지면서
신음소리처럼 애타게 불렀던 것은 바로
"주님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사람들이 당했던 고통의 천 만분의 일도
제대로 여러분에게 전해주지 못합니다.

미쳐 날뛰던 교도관들은 "
수령님과 당을 믿는 우리가 사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 너희가 사는가 보자"하면서
달려가더니 펄펄끓는 쇳물통을 끌어왔습니다.
그리고는 피투성이가 된 그 신자들 위에 부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순식간에 살이 녹고 뼈가 타면서
숯덩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난생 처음으로
내 눈앞에서 사람이 숯덩이로 변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그 충격이 컸던지,
그 곳을 어떻게 튀어나왔는지 기억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얼마동안 도무지 눈을 감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정신적 충격으로 눈만 감으면
눈 앞에 숯덩이가 된 사람들이 어른거려서
도무지 눈을 감을 수도 없고,
잠을 잘 수도 없었고,
일을 제대로 할 수도 없었으며,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고 정신이 들어갔다
나갔다 했습니다.
저는 그 일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그래도
마음속 한구석에
실오라기 만큼이라도 수령님과 당에 대해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때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를 말입니다.
인간은 주님을 꽉 붙잡어야 된다는 것을
저는 그때 뼈져리게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다시,
우리 어머니가 평생을 하늘에 기도했다는
그 하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너무나도 간절하게 하늘을 찾았습니다.
"저 사람들이 저렇게 불에 타 죽으면서도
거부하지 않고, 목숨걸고 믿는 하늘이,
진짜로 그 하늘이 어디에 계시다면 나를
좀 살려달라고.....
그리고 저렇게 무서운 짓을 하는 저 자들에게
하늘에서 정말 벌을 내려 줘야되지 않겠냐고"
그렇게 마음속으로 부르짖으며
자나깨나 꿈속에서도 하늘을 찾고 또 찾고
기원했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주님께서 그 간절한 저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한달이 멀다하고 공개처형이 있었는데
어느날 누구를 또 공개처형 시키려는지
6천명이나 되는 수용소 사람들을 한자리에
다 모이게 했습니다.
공개처형 때는 반드시 하늘을 믿는 사람들을
맨 앞줄에 앉힙니다.
그런데 하늘을 믿는 자들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하늘을 보지 못하게 하라는
김일성의 특별지시와 규정
있어서
하늘을 믿는 그 사람들을 앉힐 때에는
무릎사이에 목을 끼우고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리게 했습니다.
심지어 죽어서도 하늘을 보지 못하게 해야 한다면서
죽은 시체도 목을 꺽어 거적에 말아서
어두컴컴한 산골짜기 나무 밑에 파묻게 규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날도 신자들은 하늘을 조금도 보지 못하도록
목을 무릎사이에 끼우고 맨 앞줄에 앉아 있었고,
그 뒤쪽으로 다른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습니다.
누구를 또 공개처형하려는가?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 쇠몽둥이로 머리를 한 대 맞은것처럼
정신이 아찔하여 대답을 할 수 없었고,
일어설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간수들이 나를 끌어내다가 앞에 세웠습니다.
내가 군중들 앞에 섰을 때, 수용소 소장이 나에게
"고마운 수령님과 당의 은덕으로 너는 이 시각에
석방이다"라고 통보를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목을 무릎에다 끼우고 맨 앞줄에 엎드려 있던 신자들이
내가 석방된다는 소리에 약속이나 한듯이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었습니다.

그 때 저는 그 분들의 눈빛을 보았습니다.
그 분들은 눈빛으로 간절히 간절히 말했습니다.
"밖에 나가거든 자기들의 실상을 세상에 알려 달라"고...

지금도 제 가슴에는 그 분들의 간절한 눈빛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가 평생 빌고 또 빌은 그 하늘이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나올 수 없는 그 악명높은
정치범 수용소에서
저를 살려 주셨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희 모자를 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북한의 수용소에 갇혀 있는 그 신자들의 눈빛을
절대로 잊을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 분들이 이 시대의 순.교.자.라고 봅니다.

저의 증언으로 인해 북한 신자들의 인권문제가
150여개 나라에 나갔고 세계가 떠들었습니다.
유럽의 지식인 100여명이 프랑스에 모여
북한 신자들의 인권을 위한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것에 대해
철.
저.
하.
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북한을 위해
"꼭"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순옥(52)씨가
29일 오전 11시 파리의 메종드 라디오 프랑스에서
북한 인권 실태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여자로서 차마 견디기 힘든 고문을 겪었고,
영하 35도 이하 겨울에 발가벗긴 채로 추위에
떠는 [동태 고문]으로
동상에 걸려 열개의 발톱이 다 빠졌다"고
폭로했습니다.
이씨는 "사형장에 끌려가는 한 여성이
집에 두고 온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던 모습이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다"고
북한 수용소의 참상을 전했습니다

[자료 출처] : 빛과 흑암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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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지대책전국연합은 27일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이 가장 경계하는 것이 복음방·센터·위장교회의 위치 노출”이라며 “해당 건물 사진과 지도가 담긴 팸플릿을 배포하고 교육장 입구에서 1인 시위만 해도 성도들을 거짓말 포교로부터 지켜내는 데 탁월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밝혔다.

신천지대책전국연합의 조언대로 전국 3개 지역은 이미 신천지 건물 사진과 지도가 게재된 팸플릿을 배포하고 있다. 가장 적극적인 곳은 광주다. 한국기독교이단상담소협회 광주상담소와 광주 양림교회는 최근 공동으로 ‘신천지를 위해 가정을 파괴하는 신천지’라는 인쇄물을 만들어 광주지역 신천지 복음방 5개와 센터(신학원) 13개, 교회 2개, 위장교회 4개 위치를 알리고 있다. 특히 신천지 접근 방법, 복음방·센터 교육 내용을 명시해 성도들이 거짓 포교에 빠지지 않도록 홍보하고 있다.

창원·마산지역도 기독교연합회 이단대책위원회가 나서 팸플릿을 배포하고 있다. 이 지역도 9개 센터와 교회 위치를 알리기 위해 건물 사진과 주소를 명시해 놨다. 부산지역도 부산성시화운동본부 차원에서 부산·김해·양산지역에서 운영 중인 복음방과 센터, 위장교회 등 33곳의 사진과 주소를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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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종 한국기독교이단상담소협회 영남상담소장은 “신천지가 사무실을 임차할 때 보증금으로 수천만원을 납부하고 인테리어를 해놓기 때문에 단시간에 교육장소를 옮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면서 “지역교회가 연합해 위치정보를 취합하고 건물 사진과 지도만 공개해도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1인 시위도 신천지 예방에 탁월한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 최모(55)씨는 최근 부산 신천지 센터 5곳에서 ‘이곳은 신천지 미혹 교육장소입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패널을 목에 걸고 1인 시위를 벌여 4주 만에 신천지에 빠졌던 딸을 구출해냈다.

최씨는 “교육장소에 오는 사람 대부분은 그곳이 신천지인 줄도 모르고 들어가기 때문에 신천지는 1인 시위를 가장 경계한다”면서 “1인 시위는 집회 신고를 하지 않아도 돼 폭행 등 위협에 대비해 동영상 촬영을 도와주는 사람만 있다면 전혀 문제될 게 없다”고 밝혔다. 그는 “신천지는 거짓말 포교가 들통 나고 주변 평판이 아주 나빠지기 때문에 교육장 앞 1인 시위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한다”면서 “교육 시작·종료 전후 30분씩만 시위해도 신천지 예방에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2013 호산나전도대회 강사로 참가한 유관재 목사(일산 성광침례교회)가 대회기간중 6월 18일(화) 오전 목회자 세미나를 인도했다. 예배와 설교에 대한 세미나 내용에 이어 두번째 세미나 내용을 소개한다.


▲유관재 목사(일산 성광침례교회)

방법보다 본질을 잡아라

방법에 대한 내용보다는 본질에 대한 세미나를 하고 싶다. 목회자를 대상으로 한 세미나가 지금처럼 많았던 시대는 없다. 하지만 지금처럼 부흥이 없는 시대는 없다. 많은 세미나를 통해 본질이 아니라 방법론을 가르친다. 오늘은 방법론이 아니라 본질을 잡았으면 좋겠다.

박사과정을 공부할때 소그룹을 연구하고 논문을 작성했다. 20여년전 당시 '셀'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시작했다. 침례교회중 버클랜드라는 교회가 있었는데 기가 막힌 셀교회를 했다. 이남하 담임목사를 초청해 구역장 세미나를 했다. 교회의 내부행사로 했는데 세미나 첫날 목사가 15명 정도 왔으며 다음날은 더 많이 왔다. 참가한 목회자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데 셀로 교회를 전환하니 교인들이 30%가 나갔지만 자기는 행복하다고 했다. 어떤 목사는 교인의 50%가 나갔는데 셀교회를 하니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마음이 있었다.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성도들이 상처를 받고 나갔을텐데 그렇게 나갔는데도 행복하다고 해서 너무 화가 난 것이다. 물론 버클랜드 교회는 귀한 교회이다. 교회가 2백키로를 이전을 했는데도 교인들의 100%가 교회를 따라갔다. 어떤 교인은 직장을 놔두고 교회쪽으로 이사를 했다. 교인들이 그렇게 헌신적이다. 이런 교회가 진짜 교회이다.

그런데 목사들이 이러한 버클랜드 교회 이야기를 듣고 자신들이 목회하는 교회에 적용하려고 한다. 버클랜드 교회의 교인들은 버클리를 졸업한 30대가 주류이다. 교회라기 보다는 파라처치 하나의 선교단체이다. 똑 같은 문화와 생각과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어떻게 모든 교회에 그대로 적용시킬수 있는가. 그런 시스템을 그대로 받아들일수 있는 교회가 얼마나 될까.

목사들은 어디에서 세미나를 듣고 교회에 가지고 들어온다. G12나 D12등 많은 방법들이 있다. 교회에 그런것들을 가져오면 두종류의 사람이 생긴다. 좋다고 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적응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교회를 떠나게 되어 있다. 그러면 영원한 떠돌이가 된다. 우리교회는 옛날에는 그랬는데 이 교회는 왜 저러지 하며 더욱 떠돌이가 된다.

외국 한인교회에서 목회를 잘하던 어느 목사가 한국에 와서 한탄하는 소리를 들었다. S교회 교인들이 절대 우리교회에 안왔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S교회 교인들이 오면 담임목사가 왜 이렇게 목회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며 목사를 가르치려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교회는 6-7년전에서 부터 제자훈련이라는 말을 사용안한다. 한국사람의 뇌리속에는 성경공부의 단계를 밟은 사람이 제자라고 생각한다.

진짜 제자란 무엇인가. 벽돌을 찍어내는 것 처럼 찍어내는 것이 제자인가. 진짜 제자는 예수같이 먹고 마시고 자고 호흡하는 사람, 예수를 닮아가는 사람이 제자이다. 제자가 되면 더 겸손해야 한다. 그런데 요즘은 훈련받은 만큼 교만해 지지 않는가를 돌아보아야 한다. S교회가 한국교회에 있어 모델적인 교회이지만 그만큼 한국교계에 좋은 영향을 주면서 동시에 잘못된 양향을 주고 있는 것 같다.

제자훈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왜 교회가 제자훈련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본질로 가야 한다. 제자화가 잘된 교회의 장로는 주일에 섬기느라고 외부사람이 보면 누가 장로인지를 알수가 없다. 그런데 훈련을 받을수록 머리가 커져서 사람들을 정죄하고 자기 방법이 아니면 틀리다고 생각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저는 교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자주한다. 진리에는 목숨을 걸어야 하지만 방법론은 양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문제는 진리를 가지고 싸우는 교회가 없고 다 방법론의 문제이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과 세미나를 통해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보다 본질에 대해 말했으면 좋겠다. 저의 목회 스토리를 이야기하면서 서로 도전받고 격려받았으면 좋겠다.

교회의 갈등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 교회는 카페가 지역에서 유명하다. 한국교회에 카페를 만드는 붐이 일어났는데 20년전부터 기획을 했다. 정말 맛있는 커피를 통해 감동을 주자고 했는데 이제 동네에서 유명한 곳이 되었다. 한국교회에서 카페를 만들면 두종류의 극단적인 모습이 있다. 커피 맛이 없어서 지역주민들에게 외면을 받거나 두번째는 너무 화려하게 만들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경우이다. 이런것들은 경계해야 한다. 극단적으로 가지말자. 우리 교회 카페는 간판도 없어 모르면 못찾아온다. 그렇지만 낮에 주민들이 많이 온다. 무엇보다 커피가 맛있다.

우리교회 카페가 잘되는 것을 보고 옆의 교회에서도 카페를 만들려고 했다. 그 교회는 1층에 좋은 자리가 있었다. 문제는 옆의 교회 장로님들이 빠르게 결정을 안해준다. 시간이 걸린 끝에 나온 결론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는 자판기 커피라는 것이다. 장로들이 그런 결정을 내리자 젊은 사람들이 난리가 났다. 그래서 그 교회에서 갈등이 일어났다.

그런데 과연 누구의 이야기가 맞을까요. 자판기 커피가 좋다는 장로들의 이야기가 맞을까 아니면 젊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커피가 맞을까. 그 사람들에게 자기의 선택이 맞는 것이다. 연세가 많이 드신 장로님들의 문화로 보면 자판기가 최고의 커피이다. 그 세대의 사람들 치고 누가 2백원이 아니라 2천원내고 커피를 먹겠는가. 갈등이 생겼다. 교회는 바로 그것이다. 나는 맞는데 다른 사람은 틀리다.

교회의 갈등은 여기서 온다. 어떤 사람들이 교회에서 문제를 막 일으키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사람 입장에서 보면 맞는 이야기이다. 저는 신학교 다닐때 목사가 누군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고 연구를 많이 했다. 나는 학교공부에 충실은 못했지만 다른 고민들을 많이 했다. 가만히 보니 모든 사람들을 다 품을수 있는 사람이 목사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목사는 내 방법으로 교인들을 상대하려고 한다.

일산에서 요즘 뜨고 있는 광성교회가 아름답게 건강하게 세워진것은 정성진 목사의 스타일이 자기와도 다른 것을 넉넉하게 품어주었기 때문이다. 결국은 목사가 어떤 마음의 그릇을 가졌는가가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내 방법하고 다르니 상대를 인정하지 못할때가 많다. 심지어 내 방법이 맞다고 다그칠때가 많다. 기다리는 것이 바른 것이다. 목사는 더 앞을 내다보아야 한다. 그래서 성도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아야 한다.

목사가 빠지기 쉬운 함정들

목사는 혼자 앞서서 가기에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수많은 것이 안에 있다. 누가 목사의 고독한 마음을 이해할수가 있는가. 우리 목회자가 빠지는 함정가운데 하나는 교인들에게 따라 오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니다. 교인들이 이해될때 까지 기다려야 한다.

처음 목회를 할때 힘들었는데 교회가 멀리 이전을 해야 했다. 그런데 내 말이 맞다고 한번도 우기지 않았다. 꾸준히 기다렸다. 제직회에서 교회이전에 가장 반대하는 사람이 찬성하니 모든 교인들이 공감하고 이전할수 있었다. 교회를 이전했는데도 교회가 오히려 부흥했다. 내 말이 맞다고 주장하며 내가 앞장서 깃발을 들고 따르라고 하면 이해를 못하는 교인들은 떨어진다. 한번 더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 어느날 부목사가 이렇게 하면 빨리 되는데 안한다고 나를 보고 답답하다고 했다. 그때 나는 기다리는 것이 바른 것이고 강조했다. 나중에 그 부목사는 내 말이 맞다고 많은 것을 배웠다고 했다.

다른 사람이 이해되지 않은데 목사가 맞다고 무엇을 하자고 하면 안된다. 옛날에는 목사가 깃발들고 따르라 하면 교인들이 다 따랐지만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바르지 않으면 절대 교인들이 안따라온다. 옛날에는 부흥사들이 목회하는 교회들이 부흥을 많이 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제는 아무리 영향력이 있는 부흥사라고 해도 무조건 나를 따르라고 하면 교인들이 안따르고 상처받고 나간다. 이제는 목사가 나를 따르라 해서 따라오는 시대는 지나갔다. 바르지 않으면 안된다. 목사 마음대로 하면 안된다.

교회가 부흥할수록 더욱 책임감때문에 빨리 은퇴하고 싶은 사람이다. 어떤때는 하루에도 수십번 그 생각이 왔다갔다 한다. 교회가 부흥할수록 책임감에 중압감이 달라진다. 목사 하나가 잘못되면 교회가 깨지는 것 뿐만 아니라 주위에서 조롱거리가 된다. 목사는 소명이 있고 은사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이 목사가 되면 나도 힘들고 남들도 힘들다.

교회 사역자들에게 당신이 맡은 것에 있어 당신이 담임목사라고 격려를 많이 한다. 열정을 다하고 사랑을 쏫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개척을 한다고 할때 당신들이 맡은 교인들이 다 당신들을 따라오게 만들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교인들이 따라 가겠다면 다 따라가게 해주겠다고 말한다.

행정적으로 일하는 것이 힘들어 수석 부목사에게 많은 것을 위임하고 행정적 담임목사라고 부른다. 우리교회 재정에 대한 최종사인을 내가 안한다. 먼저 숫자계산이 힘들고 내가 최종사인을 하면 교인들이 나를 따라온다. 담임목사가 사인하면 된다고 생각하기에 교인들이 목사의 의도를 자꾸 생각하는 것이 힘들어서 자유롭게 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행정 수석 부목사가 최종사인을 한다.

우리 교회 옆에 있는 예장합동측 교회가 상가교회였다가 교회를 건축했다. 지난주 설교도 우리 교회 혼자 잘되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크게 보자고 강조한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도 옆에 있는 교회도 잘되기를 원하신다. 그럴때 전도도 할 수 있다. 이웃의 한 교회가 무너지면 우리 교회도 타격이 있다. 그래서 옆의 교회가 건축을 한다고 할때 우리도 건축을 끝난지 얼마 안되어 재정이 어려웠지만 2천만원을 헌금했다. 같이 잘되어야 한다.

가만히 보면 목사가 빠지는 함정가운데 하나는 내가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교인들이 얼마가 되는가에 많은 관심을 두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숫자를 가지고 따지지 않으신다. 그것은 절대 아니다.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같이 잘되는 것을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 하나 잘되는 것을 원하시겠는가. 옆에 교회가 잘못되면 그 교회의 교인들이 우리 교회로 올 것이라고 하면 되겠는가. 결국 전도의 문을 닫는 것이다. 같이 잘되어야 한다.

목사가 힘든 이유중 하나가 내가 끝까지 쥐려고 하기에 그렇다. 그러니 못 믿는 것이다. 부사역자를 못믿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믿어주는 만큼 된다. 목사가 혼자 어떻게 하는 것 보다 믿어주는 것이 행복하고 교회가 건강해 진다. 우리는 목회하면서 외적으로 우리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한다며 너무 목표의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돈도 그렇다. 돈은 필요하지만 욕심이 들어가면 인생이 망가진다.

목회도 마찬가지이다. 외형적인 것에 너무 빠지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한사람을 가지고 목회를 해도 귀하게 보시는 분도 있다. 아론이 출애굽해서 금송아지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많이 모았지만 숫자가 아니라 그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많이 모은것에 대해서만 너무 생각한다. 숫자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방법론에 연연하지 말고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크리스찬 리더십 - 공평성

크리스찬 교회 리더십의 핵심 하나를 말하려고 한다. 리더십 책에서 나오지 않는 한가지를 말하려고 한다. 공평성이다. 교인들이 왜 상처를 받는가. 목사는 상처를 안주었는데 교인들은 상처를 받는다. 공평하지 않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공평성이다. 부모님이 목회하는 것을 보면서 그런 장면들을 많이 보았다. 어머니가 음식을 잘한다. 음식을 할때면 잘 도와줄수 있는 교인과 같이 일한다. 다른 교인들이 그것을 보고 그 교인하고만 친하다고 상처를 받는다. 나는 고생한다고 생각하지만 교인들은 나도 목사의 사랑을 받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못하니 공격이 들어간다.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본능이다.

사람들은 목사가 공평하지 못하다고 느낄때 상처를 받는다. 그래서 교인들중 아무리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고 재력이 있어도 먼저 전화를 안한다. 하지만 그들이 나를 필요로 할때는 얼마든지 돕는다. 그래서 교인들은 내가 공평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갈등이나 싸움 자체가 없다. 싸움은 불골평해서 일어난다. 목회를 하면서 주의하는 것은 공평성이 깨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공평성이 깨질때 내가 상처를 준 적이 없는데도 상대는 상처를 받는다. 공평하지 않다고 느끼기에 그렇다. 교인들은 목사님의 사랑을 받기 원한다. 목사와 사모를 공격하는 사람은 결국은 관심이 필요한 사람인 경우가 많다.

나는 피부가 약해 무좀이 굉장히 심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얼굴 치장에는 관심이 많지만 발에는 관심이 없다. 발은 하루종일 음침한 곳에 있기에 더 관심을 가지고 대우를 해주어야 하는데 관심이 없다. 내가 발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난 다음에 무좀이 없어졌다. 내가 관심을 가져주니 문제가 해결됐다. 사람들이 공격을 하는 이유는 관심때문이다. 한번 더 관심을 가져주면 된다.

목회하면서 별 희안한 일들이 많이 생긴다. 어쩌면 저럴수 있을까 하는 경우도 있다. 목사가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품으면 그 사건이 우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사건이 된다. 그렇지 않고 서로 내 말이 맞다고 싸우면 교회가 분열이 되는 것이다. 교회는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공평성을 가지고 품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10주년



 

알아두면 좋은 신학용어(Theological Terms)


 

1.   신학사조

liberalism(자유주의), neoorthodoxy(신정통주의), fundamentalism(근본주의),

neoevangelism(신복음중의), evangelism(복음주의), conservatism(보수주의),

progressivism(진보주의), puritanism(청교도주의), radicalism(급진주의),

calvinism(칼빈주의), new theology(신 신학)


2.  신학체계

biblical  theology(성서신학),  historical   theology(역사신학),

systematic theology(조직신학),  pratical  theology(실천신학)

homiletics(설교학),  liturgics(예배학), pastoral  theology(목회학),

pastoral counceling(목회상담),  missiology(선교학),  church growth(교회성장학),

church administration(교회행정학), Christian education(기독교교육),

theology of ministry(교역학)


3. 조직신학의 구성

prolegomena(서론), the doctrine of God(신론), christology(기독론), soteriology(구원론)

pneumatology(성령론),  anthropology(인간론),  ecclesiology(교회론),  eschatology(종말론),


4. 조직신학 각 분야의 논쟁점

kerygmatic theology(선포적 신학), apologetic theology(변증적  신학), dogmatics(교의학),

systematic  theology(조직신학),  transcendence(초월), immanence(내재),

deus  absconditus deus revelatus(숨겨진 하나님  계시된 하나님),

vere deus vere  homo(참 하나님 참  인간), divinity(신성),  humanity(인간성),

filioque(그리고 아들),  simul  justus et  peccator(의인인  동시에  죄인),

visible church(보이는  교회), invisible  church(보이지  않는  교회), 

futuristic  eschatology(미래적  종말론),   realized eschatology(실현된 종말론),

inaugurated eschatology(시작된 종말론)


5.  계시론

natural  theology(자연신학), revealed  theology(계시신학),

the  knowledge of God(신인식), natural  revelation(자연계시),

supernatural  revelation(초자연계시), common revelation(일반계시), 

special  revelation(특수계시),   analogia  entis(존재유비),  analogia fidei(신앙유비),

analogia relationis(관계유비)


6. 신앙과 이성의 관계

credo quia absurdum(Tretullian, 비합리적이기때문에 내가 믿는다.), 

credo ut  intelligam(Augustinus,  알기 위해서  믿는다.), 

si  non credideritis,  non permanebitis

(사  7:9,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  굳게 서지  못하리라.),

fides quaerens intellectum(Anselm, 신앙은 이해를 추구한다.),  

intellectus   quaerens fidem(Thomas, 이해는  신앙을 추구한다.), 

finitum non capax  infinitum(유한은 무한을 포함할 수 없다.)


7. 교파

the Roman  Catholic(천주교), the  Greek Orthodox  Church(그리이스 정교회),

Jesuit(예수회), the Lutheran Church(루터교), the Episcopal Church(성공회),

the Reformed Church(개혁교회), the  Methodist Church(감리교),

the  Congregational Church(회중교회), the Holiness Church(성결교),

Quaker(퀘이커),  Salvatioa Army(구세군), Church of Christ(그리스도교), 

Pentacostal  Church(오순절교회),   Mormonism(모르몬교), 

Seventh  Day Adventists(제 7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


8. 현대신학

libaration  theology(해방신학), black theology(흑인신학), feminine  theology(여성신학), 

political   theology(정치신학),  minjung  theology(민중신학),  

secularization theology(세속화신학), theology  of hope(희망의  신학),

process  theology(과정신학), the death of God theology(사신신학),

narrative theology(이야기신학), postmodern theology(탈근대주의 신학), pluralism(다원주의),

fundamenmtalism(근본주의) 


9. 성경관련

apocalypse(계시), apocalyptic literature(apocalyptic, 계시), apocrypha(외경),

pseudoepigrapha(위경), canon(정경)


10. 성서의 영감

mechanical inspiration(기계적 영감), dynamic inspiration(역동적  영감),

organic inspiration(유기적 영감),  partial inspiration(부분영감),

plenary inspiration(완전영감),   thought  inspiration(사상영감),  

verval   inspiration(축자영감),  inerrancy(무오성), infallacy(신빙성),

testimonium spiriti santi internum(Calvin, 성령의 내적 증거)


11. 성경해석 

exgesis(석의),   eisgesis,  exposition(주해),   commentary(주석), 

interpretation(해석), hermeneutics(해석학)


12.  성서비평

biblical  interpretation(성서비평),  higher  criticism(고등비평),  historical criticism(역사비평),

literary  criticism(document criticism, 문서비평), form  Criticism(양식비평),

tradition history(전승사),  redaction criticism(편집비평),

reader's response  criticism(독자반응비평), narrative criticism(서사비평, 이야기비평), 

structural criticism(구조비평), lower criticism(저등비평), textual criticism(본문비평),

demythologization(비신화화) 

 

13. 하나님  명칭

Elohim(하나님), Adonai(주),  El Shadai(전능하신 주),  Yahweh(야웨),

Theos(하나님), Kyrios(주),


14. 신존재증명

the rational proof of  the existence of God, ontological argument(존재론적 증명),

cosmological  argument(우주론적 증명), teleological argument(목적론적  증명),

anthropological argument(인간론적 증명), moral argument(도덕적 증명)


15. 하나님의 본성과  속성

nature(본성), attribute(속성), communicable attributes(공유적 속성), 

incommunicable attributes(비공유적  속성),  omniscience(전지),

omnipotence(전능), omnipresence(전재),  aseity(자존성), actus  purus(순수행동),

tremendum et  fascinum(두려움과 매혹됨)


16. 신정론

theodicy(신정론), theocracy(신정론), the deficiency of good(선의 결핍)


17. 이외용어

imago dei(하나님의 형상), semen religionis(종교의 씨), the point of contact(접촉점)


18. 하나님의  섭리

providence(섭리), preservation(보존),  concurrence(협력),

government(통치, sovereignity: 주권)


19. 세계의 기원

dualism(이원론), the emation theory(유출설),  creationism(창조설),

the theory of form(조성설)


20. 사단관련 

devil(마귀), demon(귀신), Satan(사탄), the Evil(악한 자)


21. 삼위일체 이단

dynamic monarchianism(역동적 군주신론),

modalistic monarchianism(양태론적 군주신론, Sabelianism,  subordinate monarchianism), tritheism(삼신론), socinianism(소찌니아니즘), uniterianism(유니테리아니즘), 

antitrinitarianism(반삼위일체론), binitarianism(이위일체론), patripassianism(성부수난설)


22.  삼위일체론  용어

substance(본질),  person(위격),  una  substantia(한  본질), 

tres personae(세 위격),  ousia(본질), hypostasis(위격),  prosopon(위격), physis(본질).

essential trinity(본질적   삼위일체론,  internal   trinity),

economic   trinity(경륜적  삼위일체론), generation(생성), filiation(아들됨), 

procession(발출), vestigia  trinitatis(삼위일체의 흔적), homoousios(동일본질), 

modus  entis(존재  양태,  the  mode  of  being), 

communicatio essentiae(본질교류), communicatio idiomatum(속성교류),

communicatio operationum(이행교류)


23. 2세기  이단

gnosticism(영지주의), Judaism(유대주의),  Marcionism(akfmtldhswndml)

Montanism(몬타니즘) 


24. 신론

monotheism(유일신론), henotheism(단일신론), polytheism(다신론)

deism(이신론), pantheism(범신론), paentheism(범재신론), theism(유신론), atheism(무신론),

scepticism(회의주의), agnostics(불가지론)


25.  기독론이단

adoptionism(양자론),  ebionism(에비오니즘), 

subordinationism(종속론, Arianism), monothelitism(단의지론), 

monophysitism(단성론, eutychianism), docetism(가현설), Appolinarianism(삼이설),

Nestorianism(네스토리우스주의, moral  conjuction 도덕적 접속)


26. 역사적 예수의 문제

historical jesus(역사적 예수), kerygmatic Christ(선포적 그리스도),

proclaimer(선포자), proclaimee(선포된 자), kerygma (선포)


27. 성육신

incarnation(성육신), ho  logos sarx egeneto(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kenosis(비하) 


28. 그리스도의 삼중직

munus triplex(threefold offices, 삼중직), prophet(선지자),  priest(제사장), king(왕)


29. 속죄론

atonement(속죄), ransom theory(속전설, Irenaeus),  satisfaction theory(만족설, Anselm),

moral influence theory(도덕감화설, Abelard),  penal satisfaction theory(형벌만족설, Calvin),

government theory(통치설, Grotius)


30. 인간론  논쟁

recapitulation  theory(복원교리), Augustinianism(아우구스티누스주의),

Pelagianism(펠라기우스주의), semi-Pelagianism(반펠라기우스주의),  Calvinism(칼빈주의),

Arminianism(아르미니우스주의),    synergism(신인협동설),   monoenergism(단독사역설),

libertas(자유), libero  arbitrium(자유 선택),  meirtum(merit, 공적),

summum bonum(최고선)


31. 칼빈주의 5대 강령

total depravity(전적 타락), unconditional predestination(무조건적 예정),

limited  salvation(제한적 구원), irresistable  grace(불가항력적 은총),

perseverance of saints(성도의 견인)


32. 영혼의  기원

preexistentianism(선재설),   traducianism(유전설,   루터/서방교회)

creationism(창조설, 칼빈/동방교회)


33. 예정론

decree(작정), double  predestination(이중예정설), election(선택), 

reprobation(유기), preterition(간과), inflalapsarianism(타락 후 예정설),

supralapsarianism(타락  전 예정설), foreknowledge(예지), foreordination(예정)


34. 원죄론

original sin(원죄),  original righteousness(원의), indircet transmission(간접 전가),

direct transmission(직접 전가), realistic view(실재설), covenant theory(계약설)


35.  인간의  구성

trichotomy(삼분설),  dichotomy(이분설),  body(몸,  soma),   soul(혼, nephesh, psyche), 

spirit(영, ruach, pneuma),  flesh(육, sarx), mind(정신,  nous, dianonia),

heart(마음,   leb,   kardia),  passion(열정),   emotion(정서),   intellect(지성),   will(의지),

intention(의도), disposition(성향), reason(이성), understanding(오성)


36. 구원의 순서

ordo salutis(구원의 순서), prevenient grace(선행적  은총), communion(하나됨),

calling(소명,  부르심, vocation),  regeneration(중생, 거듭남),  conversion(회심),

repentence(회개), faith(신앙),  justification(칭의), sanctification(성화),

the perseverance of saints,   glorification(영화), 

justitia infusa(의화, infusion of righyeousness),  

justitia imputatio(의인, imputation of righteousness)


37.  개혁5대모토

sola fide(오직  믿음), sola  scriptura(오직 성서),  sola  gratia(오직 은총), 

soli deo gloria(오직 주께 영광)


38. 의인화 

anthropomorphism(신인동형론), anthropopaticism(안트로포파티시즘)


39. 계약설

covent theology(계약신학), covenant of  work(행위계약),

covenant of grace(은혜언약), covenant of redemption(속죄언약), dispensationalism(세대론)


40. 교회의 특징

one(ecumenical), holy, catholic, apostolic/ 교회의 임무: koinonia(교제),

didake(교육), kerygma(선포), diakonia(봉사)


41. 성례전

sacrament(성례), transubstantiationism(화체설),  consubstantiationism(공재설),

theory of symbol(상징설), baptism(세례), eucharist(성찬, Lord's  supper),

the anointing ofthe sick(병자성사),  matrimony(혼인성사), confirm!!ation(견진성사), 

confession(고백성사), ordination(신품성사)


42. 천년왕국론

premillenialism(전천년설), postmillenialism(후천년설), amillenialism(무천년설),

advent(재림, the second coming)


43. 사후세계

the intermediate state(중간상태), sheol(스올),  hades(하데스), geenna(게헨나),

purgatory(연옥), limbo(고성소), psychopannychy(영혼혼수설)


44. 시간

Heilsgeschichte(구속사, sacred  history), Geschichte/Historie,  kairos(카이로스),

chronos(크로노스) 


45. 설화신학 등 

sags(사화), myth(신화), parable(비유),  allegory(우화), narrative(이야기), talk(이야기),

story(설화)

[출처] 알아두면 좋은 신학용어(Theological Terms) (비공개 카페)  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2468

생명나무 쉼처/한아름 님

네 목숨으로 대신하고 네 소유로 대신하리라.


“하나님이 당신의 주(主)이십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소유입니까?” 어쩌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구원 받은 자와 구원 받지 못 한 자를 구분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롬14:8)” 또한 바울은 ‘믿고 세례를 받은 자는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부활한 자’라고 말씀합니다. (롬6장) 이것은 내가 주인으로 살았던 과거의 내가 죽고 주의 소유로 다시 났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주(主)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거듭났다고 말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스스로의 주인행세를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주(主, Lord)이신 하나님 앞에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한 사람은 엘리사입니다. 엘리사는 소 열 두 겨리로 밭을 갈 정도로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그에게 겉옷을 던져 도제(徒弟)로 부르자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따랐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즉각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주로 인정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소유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친을 장사하고 나서 주를 따르겠다거나 가족과 작별하고 나서 따르겠다거나, 재물이 아까워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지 못 함으로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려는 낙타’가 되어버린 부자청년과 대비되는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이와 대비되는 다른 한 사람은 아합 왕입니다. 그는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가지고 시집와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왕비 이세벨에 쥐여서 이스라엘을 우상숭배의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나 국가는 사단의 먹잇감입니다. 아람왕 벤하닷이 군대를 몰고 와서 아합왕에게 “네가 가진 것은 너의 은금과 처들과 자녀들도 다 내것이다.” 하면서 내어놓으라고, 종이 되라고 강요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아합왕에게 보내어 아람군대를 너의 손에 붙여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천지만물의 주(主)요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대주재이심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아합왕이 패역하고 이세벨이 악행을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빠져있다 할지라도 이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소유로 삼은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합의 보잘것없는 병력과 군대로 아람 대군을 쳐부수게 하십니다. 벤하닷이 이듬해 다시 대군을 몰아 쳐들어왔을 때도 다시 한 번 아람군대를 물리치게 하시고 벤하닷을 비참한 궁지로 몰아넣습니다. 전쟁은 내게 있다 하신 말씀대로였습니다. 만유의 주(主)요 주재(主宰)라 하신 말씀 그대로였습니다. 비참한 패배를 당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벤하닷은 신하들과 함께 베로 허리를 동이고 아합왕에게 나아와 엎드려 항복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합왕은 주(主)이신 하나님께 여쭈어보지도 아니하고 제 맘대로 일을 처리합니다. 항복하여 목숨을 구걸하는 아람왕 벤하닷을 형제라 부르면서 극진히 예우하고 화친협약을 맺고 놓아줍니다. 멋대로 주인행세를 한 것입니다.

이 일이 있었을 때 하나님의 선지자 하나가 다른 선지자에게 자신을 치라 하고 다른 선지자는 친구를 칠 수 없다 하고... 친구를 치지 않은 그 선지자는 돌아가다가 사자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선지자는 다시 다른 선지자에게 가서 자신을 치라 하고... 그렇게 해서 그에게 얻어맞아 부상을 당한 다음 부상병을 가장하고 아합왕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저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저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멋대로 주인행세를 한 아합왕에게 내려진 무서운 심판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주(主)이신 것을 알지 못 하고 자신이 주인인 것으로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 많습니다.
자신이 주인이고 하나님을 자신을 도와주시는 분쯤으로 여기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주인행세를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실 말씀은 "네 목숨으로 대신하고 네 소유로 대신하리라."일 것입니다.  
내가 나도 모르게 주인행세 할까봐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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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교회에서 발견되는 예들입니다.

남이 손바닥만한 성경책을 가지고 다니면 경건치 못하기 때문이고, 
내가 작은 성경을 가지고 다니는 이유는 활동적인 신앙인이기 때문이다.

남이 새벽기도에 못 나오는 것은 게으르기 때문이고, 
내가 새벽기도에 못 나오는 이유는 워낙 사회적인 활동이 많기 때문이다. 

남이 눈물로 기도하면 유별난 신앙이고, 
내가 눈물로 기도하는 것은 간절한 마음 때문이다. 

남이 기도를 길게 하면 주책이 없는 까닭이고, 
내가 기도를 길게 하는 까닭은 정성을 다하기 때문이다.

남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은 기복신앙이고, 
내가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은 성경의 약속을 믿기 때문이다. 

남이 헌금을 적게 하는 것은 인색하기 때문이고, 
내가 헌금을 적게 하는 것은 하나님은 과부의 엽전 두 푼을 칭찬하셨기(눅 21:2-4) 때문이다. 

남이 타협하면 야합이고 
내가 타협하면 양보이다.

남이 친척의 결혼식 참석을 위해 주일을 지키지 못하면 신앙이 자라지 못한 때문이고, 
내가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가문의 평화를 위해서이다. 

남이 예배에 참석치 않는 것은 신앙이 없기 때문이고, 
내가 예배에 빠지는 것은 '하나님은 어디나 계신다'는 성숙한 신앙 때문이다. 

남이 예배 시간에 늦으면 '5분만 일찍 출발하지.' 
내가 늦으면 '설교가 중요하지...” 

남이 교회에서 직분을 받으면 “벌써?” 
내가 직분을 받으면 “이제야…”

남이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하면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으셨는데...’(마 8:20). 
내가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하면 “네 지경(地境)을 넓히리니”(출 34:24). 

남이 교회에 올 때 화장을 하는 것은 사치하기 때문이고, 
내가 교회에 갈 때 정성 들여 화장을 하는 것은 최소한의 에티켓이 아니겠어? 

남이 예배시간에 졸면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눅 22:46)는 말씀이 생각나고, 
내가 졸면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라는 말씀이 떠오른다. 
 
펌글

  B.B.Warfield의 삼위일체론 연구 

                                                                                                                                                                     작자 미상


I.서론: B.B.Warfield의 생애와 그의 신학적 작업

워필드(Benjamin.B.Warfield)는 구 프린스톤의 위대한 3대 정통신학자들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Archibald Alexander, Charles Hodge와 함께 그는 구 프린스톤의 신학적 기초를 놓은 조직신학자들 중의 한 분이기 때문이다.1) 그는 1851년 켄터키(Kentucky) 주의 렉싱턴(Lexington)근교인 “Grasmere"라는 곳에서 출생하였으며, 1871년에는 뉴저지 대학(현 프린스톤 대학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는데, 대학시절에는 학문적 탐구열이 뛰어난, 열렬한 다윈주의자(Darwinian)였다.2)

워필드는 대학을 졸업한 후, 유럽의 에딘버러 (Edinburgh), 하이델베르그(Heidelberg)에서 유학생활을 하기도 했다. 유럽에서 1년을 보낸 후, 미국으로 돌아와 1873년에는 프린스톤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876년에는 졸업했다. 같은 해 여름에는 Annie Pearce Kinkead와 결혼한 후, 곧바로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공부했다. 1877년에 귀국한 후, 볼티모어 제일 장로교회에서 협동목사로 사역하기도 했으나, 다음 해인 1878년에는 웨스턴 신학교의 신약학 강의를 담당해달라는 요청을 수락하여 그 곳에서 프린스톤 신학교로 옮기기까지 9년동안 교수사역을 수행했다.3)

워필드의 스승은 Charles Hodge로서, 그의 스승의 아들인 Archibald A. Hodge도 프린스톤에서 조직신학자로 사역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A.A.Hodge가 프린스톤 신학형성에 있어서, 그리 중요한 위치를 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교수 재임기간이 1877년부터 1887년까지 십년 뿐이었기 때문이었다.4)

오히려, C.Hodge의 진정한 후계자는 바로 B.B.Warfield인 것이다. 워필드는 조직신학을 함에 있어서, 자신의 스승인 C.Hodge의 신학에 크게 의존적인 태도를 취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또 다른 어떤 새로운 조직신학의 체계를 세우려하기 보다는 스승의 조직신학의 체계 위에서 신학을 전개하면서, 자유주의를 비롯한 당시의 수많은 도전들에 대해서 정통 기독교를 변호하는 변증학자로서의 사명을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잡지나 정기 간행물, 혹은 사전류, 그리고 특히 Presbyterian & Reformed Review (후에 Princeton Theological Review)에 기고한 논문들을 통해서 신학적 변증작업들을 수행하였다. 프린스톤의 신학적 입장에 반대하는 여러 가지 관점들과 주장들에 대해서 정통신학자의 입장에서 논쟁을 벌이고 변증을 시도하는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물론, 그도 많은 저술들을 남긴 것이 사실이나,5) 그 저술들은 어떤 하나의 종합적인 조직신학서라기 보다는, 그의 스승들이 확립한 정통신학의 전제들 위에서 전개된, 여러 가지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연구서인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서, 우리는 완전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서를 들 수 있다. 19세기의 지평 위에서 신학을 전개했던 워필드는, 프린스톤의 신학에 도전하는 여러 경향들에 대해서 주목했는데, 특히 오벌린 학파가 채택했던 New Divinity 신학과 연관되었던 완전주의사상을 정통신학의 입장에서 반박하는 글을 광범위하게 써내려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들은 그의 저서인 완전주의(Perfectionism)6)에 포함되어있다. 그 밖에도 그가 주목했던 프린스톤의 대적들 중에는 슐라이에르마허, 리츌의 신학을 비롯하여, 테일러와 부쉬넬의 신학, 그리고 성서비평, 진화론 등이 포함되었다.7)

삼위일체론에 대한 워필드의 논의들도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전체적인 조직신학의 체계적 논의들을 전개해가는 가운데, 그 일부로서 삼위일체론을 제시했던 것이 아니다. 단지, 당시의 자유주의 신학을 비롯한 다양한 현대의 도전들을 주목하면서, 정통신학의 삼위일체론을 대변하려는 입장에서 하나의 개별적인 논문을 집필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가 쓴 “The Biblical Doctrine of the Trinity"라는 글은 자신의 조직신학서의 전체틀 속에서의 한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한 성경사전 속에서 발견된다.8) 따라서, 본고에서 논의의 초점은, 그 논문의 내용을 중심으로 워필드가 자신의 삼위일체론 논의를 어떻게 전개했느냐 하는 부분이다. 그 논문을 통해서 그가 강조하려했던 특징적 요점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려 한다. 먼저, 워필드의 삼위일체론 논문의 구성과 그 내용들을 요약, 정리한 후, 그 논문을 통해서 워필드가 강조하려했던 주요 관심점들이 정리해보려 한다.


II. Warfield의 삼위일체론 논의의 구조와 내용

워필드의 논의는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진다.9) 첫째 부분은 성경이 제시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는 성경의 계시적 진리임을 주장하는 내용이고,10) 둘째 부분은 그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계시적 진리를 말하고 있는 성경의 가르침들을 신,구약의 본문들을 통하여 설명해준다.11) 그리고 끝 부분에서, 워필드는 삼위일체 교리의 역사를 초대교부들로부터 종교개혁자 칼빈에 이르기까지 간략히 개관해주었다.12)

(1) 논문의 첫째 부분: 삼위일체는 성경의 계시적 진리(교리)이다.

먼저, 워필드는 성경에서 계시된 기독교 유신론이 말하는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는 “성경적” 교리이고, 또 “계시적” 교리임을 주장했다. 삼위일체 교리는 철학적 논의나 다른 종교적 가르침에서 찾아질 수 있는 진리가 아니라, 성경의 계시를 통해서만 발견되는 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논문의 첫 번째 부분이 마무리되는 곳에 이르러,13) 워필드는 기독교의 유신론만이 오직 안정되고 견고한 유신론이 된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첫째 부분의 내용들 속에서 워필드가 먼저 주장하고있는 것은, 삼위일체 교리란 “성경적 교리”라는 지적이다. 그것은 성경에서 주어진 교리이지, 어떤 철학자들의 논의들로부터 주어질 수 있는 성격의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 말은 “삼위일체”라는 용어 자체가 성경에서 발견되는 용어임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본체는 하나이나 삼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진술할 때, 우리는 성경의 어휘를 그대로 사용하여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 교리가 성경적 교리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성경의 내용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성경에서 직접 나타나는 어휘들을 사용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것이 성경의 진리를 보존하게될 때, 그것은 성경적인 교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방식으로 접근될 수 밖에 없는 이유로서, 워필드는 삼위일체 교리가 성경에서 하나의 “공식화된 정의”로서 제시되지 않았고, 오히려 “단편적인 언급들”을 통해서 주어졌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The doctrine of the Trinity is given to us in Scripture, not in formulated definition, but in fragmentary allusions; when we assembled the disjecta membra into their organic unity, we are not passing from Scripture, but entering more thoroughly into the meaning of Scripture.14)

우리들이 그러한 성경의 단편적인 언급들을 유기적으로 연합시켜나갈 때, 워필드는 우리가 성경으로부터 벗어나게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의 의미 속으로 더 철저하게 들어가게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물론, 그러한 작업의 과정 속에서 철학적인 반성을 통하여 제공된 기술적인 용어들이 사용될 수도 있으나, 그 진술된 교리내용은 진정한 성경의 교리가 된다고 보았다.

계속해서, 워필드는 삼위일체 교리가 성경의 계시적 진리라는 명제가 함축하고 있는 내용들을 더 설멸해준다: 즉, 그 교리는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얻어지는 진리이므로, 인간의 자연이성이나, 어떤 다른 종교적 가르침을 통해서 주어질 수 있는 성격의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지혜의 어떠한 추구나 노력들을 가지고서도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발견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인간의 이성적 논구를 통해서는 성경의 삼위일체 개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워필드의 논지는 당시의 자유주의 신학이 견지하고 있는 “자연주의적 기독교”에 대한 정통신학자의 분명한 비판적 시각이 반영되고있는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통개혁신학의 중요한 성격들 중의 하나를 “신본주의적 신학(theocentric theology)"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통찰력이나 종교적 경험이나 재능을 통하여서는 진리가 찾아질 수 없음을 인식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성경의 계시말씀만을 통하여 진리가 찾아질 수 있다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15) 반면에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를 단지 하나의 종교로만 간주하고, 따라서 기독교의 진리들도 단지 과학적, 경험적 연구방식을 따라 분석될 수 있고, 추구될 수 있다고 보는 자연주의적 혹은 내재주의적(immanent) 신학방법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신학연구란 단지 현상적 세계에 속한 인간의 종교적 활동에 대한 분석과 연구일 뿐이다.16) 정통개혁신학이 신본주의적 성격을 띄는 것은, 그들의 신학적 교리들을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에서부터 기초하여 세워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삼위일체 논의를 시작하면서, 워필드는 우선적으로 이러한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내재주의적 경향성에 대해 주목하면서, 정통개혁신학의 입장에 서서 암묵적으로 일침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워필드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란 인간의 이성적 논의나 다른 종교적 가르침들 속에서 발견될 수 없는 진리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워필드는 이집트인들의 Osiris, Iris, Horus와 같은 존재들의 경우들과 같이 제시되는 “3개의 신격들”의 개념은 거의 모든 다신교적 종교들에서도 발견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혹은 서로 다른 지역에서 숭배되는 신들이 모여진 형태의 혼합주의적 개념이나, 힌두교의 Brahma, Vishnu, Shiva, 혹은 Homer의 신화에 나타나는 삼위일체적 개념, 불교의 Triratna, 플라톤 철학의 관념론이나 파르시교의 교리 등과 같은 여러 이방종교들 속에서 제시되는 삼위일체와 유사한 개념들이 발견되고 있으나, 그러한 것들은 성경의 계시적 가르침 속에서 제시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성격과는 어떤 유사성도 확인될 수 없음을 강조했다.

It should be needless to say that none of these triads has the slightest resemblance to the Christian doctrine of the Trinity. The Christian doctrine of the Trinity embodies much more than the notion of "threeness," and beyond their "threeness" these triads have nothing in common with it.17)

일반 다른 종교에서 제시되는 방식처럼, 단순히 3개의 신격들이 혼합적으로 설명되는 형태의 개념만으로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개념이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오직 성경의 계시적 가르침에서만 찾아진다는 점에서 유일성 내지는 독특성을 지니게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방향에서, 워필드는 삼위일체 교리가 인간 이성의 통찰력에 의해서도 찾아질 수 없고 또 이성으로부터의 어떠한 증거나 자연 속에서의 어떠한 유추에 의해서도 설명될 수 없는 초월적인 진리임을 강조한다. 초월자 하나님의 존재방식은 전 우주 속에서 유일한 존재방식이므로, 그 분의 존재방식을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과거에 삼위일체에 대한 이성적 증거들을 세우려했던 시도들을 몇 가지 사례로 들면서, 그 시도들의 한계점들을 지적함으로서, 워필드는 삼위일체 교리의 유일성과 초월성의 성격을 확인해준다.18)

워필드는 삼위일체 개념에 대한 이성적 증거들을 제시하려 했던 과거의 시도들을 크게 2종류들로 분류한다. 즉, “자기 의식”(self-consciousness)의 개념과 "사랑(love)"의 개념 속에 함축된 의미들을 분석함으로서 입증하려했던 시도들을 말한다. 왜냐하면, 그 두 개의 개념들은 그 개념 자체만으로는 부족하며, 그러한 개념을 위한 어떤 “대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논리를 따르자면, 우리가 “자기의식”이나 “사랑”의 개념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게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통일성과 아울러 복수의 형태로서의 존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자기의식”의 개념을 통한 삼위일체 입증의 시도는 17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Bartholomew Keckermann에 의해서 발전된 것으로 보았는데, 그는 하나님을 자기의식적 사고라고 전제하고,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고는 전부터 존재해온 완전한 대상을 소유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 완전한 대상은 하나님이므로, 바로 복수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게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워필드는 그와같은 시도가 범신론으로 빠질 위험성을 지니게 된다는 점, 그리고 또한 세 번째 위격인 성령님의 존재에 대한 자연스러운 설명을 제시하기 어려운 점을 지적했다.19)

다음으로 “사랑”의 개념을 통해 삼위일체 개념을 입증하려했던 시도를 소개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랑이신데, 그러나 그 사랑이 사랑의 대상을 갖지 않는 한 사랑일 수 없다”라고 주장했던 Valentinus의 논증, 그리고 “the lover", "the loved", 그리고 ”the love"라는 3개의 개념들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유추하려했던 어거스틴의 논증들을 워필드는 차례로 소개한다. 그러나, 워필드는 그러한 시도들은 단지 추상적인 관념 정도로서가 아니라, 좀 더 명백하고 구체적인 요소들로서 설명되고 있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결국 그러한 시도들은 단지 비유적인 언어의 남용일 뿐이라고 비판했다.20)

이성적 논증들의 마지막 사례로서, 워필드는 에드워드(Jonathan Edwards)의 본체론적 증명을 소개한다. 에드워드가 사고, 사랑, 공포와 같은 개념들 혹은 영적 개념들의 성격에 초점을 맞추고 논의를 전개했음을 지적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자신에 대해 가지시는 관념은 다시 그 자신이 된다”는 논지를 제시했음을 지적했다.

God's idea of Himself is absolutely perfect, and therefore is an express and perfect image of Him, exactly like Him in every respect... But that which is the express, perfect image of God and in every respect like Him is God, to all intents and purposes, because there is nothing wanting...."21)

그러나, 워필드는 이러한 시도들도 결정적인 논증이 될 수 없다고 평가한다. 개념이란 그 형태로 구성되어있는 것이 아니므로, 단지 그 형태들의 반복을 통하여 그것을 이중적이거나 삼중적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 할찌라도, 우리는 본체의 복수성을 말하게될 뿐이며, 한 본체 안에 계시는 복수적인 위격을 말하게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이와같이, 워필드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완벽한 관념이나, 완전한 사랑의 개념들로부터 하나님 자신을 또 만들어낼 수 있다는 방식의 시도들을 비판했는데, 결국 그것은 그 분이 그의 개념이나 자신에 대한 그의 사랑과는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22)

그런데, 워필드는 삼위일체 존재에 대한 위와같은 이성적 추론들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비판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성의 긍정적인 기능까지도 간과했던 것은 아니다. 워필드는 이성의 긍정적인 역할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삼위일체 교리가 단순한 추상적 단자(monad)적 개념보다 훨씬 우월한 가르침이 되고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되고, 그 교리에 대한 중요하고도 합리적인 지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고 보았다.23) 이성의 올바른 사용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있어서, 다양한 난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조명하며 또 풍요롭게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논문의 첫째 부분의 마지막에 이르러, 워필드는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을 그냥 단순한 추상적 단자로서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으므로,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를 향해 부르짖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그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만 인생의 진정한 풍요로움이 발견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바로 그 부분에서 인간의 이성과 마음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인생의 참 풍요로움을 확인하고 받아들이도록 역할을 하게된다는 보았다.

(2) 논문의 둘째 부분: 그러면, 성경의 계시내용은 무엇인가?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나?)
위에서 정리한 바와같이, 워필드는 논문의 앞부분에서 다른 종교의 가르침들이나 인간의 이성적 증거들을 통하여 삼위일체 개념을 제시하려는 이들의 모든 입을 틀어막은 후, -바른 접근방식으로서- 논문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계시적 증거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어떻게 제시하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성경계시의 증거들에 대한 워필드의 설명들은 크게 두 부분들로 나누어볼 수 있다. 앞의 부분에서 워필드는 삼위일체 진리가 신약과 구약의 성구들 속에서 제시된 방식들을 살피는 가운데, 그것이 구속사의 계시사건들과 어떻게 밀접한 연관이 있는지를 드러내 보이고 있으며, 둘째 부분에서는 삼위의 하나님들 사이의 관계성(성부,성자,성령 3위격들의 연합성과 구별성의 문제, 혹은 삼위 하나님 사이의 동등성과 종속적 성격에 관한 문제 등)에 대한 성경의 설명들을 제시하고 있다.

1)삼위일체 교리의 기초: 구속사 속에서 주어진 행위계시

이제 워필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구약성경의 증거들과 신약성경의 증거들에로 향한다. 그런데, 구약과 신약의 구체적인 구절들을 살펴보기 전에, 그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증거들의 성격들을 먼저 정리하고 있다. 그 두 부분의 증거들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 그럼에도 또 어떻게 유기적 연관성 지니게 되는지를 설명하는 가운데, 워필드는 궁극적으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증거란 사실상 삼위 하나님의 계시내용 즉,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 계시와 성령 하나님의 부으심(outpouring)이라는 행위 계시에 의해서 근본적으로 뒷받침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24)


ㄱ.구약의 증거들

먼저 워필드는 구약의 증거들의 성격을 정리해준다. 구약성경 안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증거가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워필드는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구약 안에서 주어진 계시에 근거하여 삼위일체 교리에 도달할 자는 아무도 없음을 지적한다. 구약의 증거들은 단지 모호한 암시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복수적인 형태인 “엘로힘”과 같은 단어처럼 사용된 복수명사(창 1:26; 3:22; 사6:8)나 복수동사의 용례, 잠언 8장에서의 지혜의 개념, 여호와의 사자에 대한 언급들(출 3:2), 그리고 민 6:24-26과 같은 구약의 암시들은, 단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이미 숙지한 이들이 그와같은 모호한 암시들을 분명하게 드러내줌으로서, 구약의 증거라고 말할 수 있게되는 것일 뿐이라고 보았다.25)

단순히 구약의 특정한 본문들을 인용하는 방식 외에도, 워필드는 ‘모든 사물들의 존재와 보존에 대한 3중적 원인들’이라는 개념으로 제시되는 구약계시의 유기적 성격에 호소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즉, 시편33:6; 학개2:5,6과 같은 내용들 속에서 언급되는 “하나님”, “말씀”, “그의 영”의 역할에 대해 설명함으로서 삼위일체를 증거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워필드는 결국 구약 안에서 제시되는 하나님에 관한 개념의 발전 속에서, 우리는 단지 아직 오지 않은 삼위에 대한 계시를 바라보는 준비를 확인케될 뿐이라고 정리해준다. 그는 구약을 “호화스럽게 가구가 비치된, 그러나 불이 희미한 방”으로서 비유하면서, 구약증거의 성격을 정리하였다:

The Old Testament may be likened to a chamber richly furnished but dimly lighted; the introduction of light brings into it nothing which was not in it before; but it brings out into clearer view much of what is in it but was only dimly or even not at all perceived before.26)

구약의 증거들에 대한 워필드의 결론은 이것이다: 삼위일체의 신비가 구약에서 명백하게 계시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구약의 계시의 기초로 존재해 있었고 그러한 차원에서 여기 저기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구약의 계시는 계속되는 더 충분한 계시에서 수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완성되고 확장되며 풍성해진다는 것이다.27)

ㄴ.구약과 신약 계시 사이의 연속성

워필드의 계속되는 논지는 구약의 계시와 신약의 계시 사이의 유기적 연관성에 관한 내용이다.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구약의 계시와 신약의 계시 사이에 있는 연속성이 무시되거나 간과되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신약의 저자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념과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개념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념 사이에 어떠한 부조화도 느끼고있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가 신약성경의 많은 증거들 속에서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신약의 저자들도 분명코 이스라엘의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경배를 잃지 않았지만, 그들은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을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하나님으로서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으로 묘사할 때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새로운 창안적 시도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갖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물론, 이 말은 삼위일체의 교리가 구약의 모든 부분들 속에서 명백히 가르쳐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 속에서 그들이 예배하고 있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확인하였으므로, 구약계시의 문맥 속에서도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약의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었고, 그들의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었다. 또 그 두 하나님의 동일성에 대한 그들의 확신은 너무나 명백하므로, 그들의 마음 속에 어떠한 의구심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ㄷ.신약의 증거들

바로 그러한 신구약 계시의 연속성의 관점 속에서, 워필드는 신약의 증거들의 성격을 설명한다. 그러한 신구약 계시의 유기적 통일성은 우리가 신약성경 속에서 어떠한 새로운 개념으로 하나님을 제시하려는 시도를 찾을 수 없는 사실에 대한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신약에서 나타날 때, 그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조는 이미 전체 내용들 뒤에 놓여있는 기초로서 간주되고 있으며, 이미 세워져있는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전제로서 이해되고 있다는 것이다.

신약성경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는 여기 저기에 산발적으로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다. 신약 전체의 핵심이 삼위일체이므로, 오히려 그것은 모든 다른 가르침들의 기본적인 전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신약 속에서 그 교리는 “이미 충분히 완성된 상태로서”, 그것이 발전되어진 어떠한 자취들도 남겨놓지 않았다는 Gunkel의 말을 인용하면서,28) 워필드는 그 교리가 신약성경에서 새로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으로서 제시되지 않고, 이미 만들어진 것으로 전제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또한 “우리에게 이 어려운 교리가 싸움없이- 그리고 논쟁없이- 기독교의 진리들로서 수용된 다른 항목들 사이에서, 조용하고도 알아채기 어려울 만한 방식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인간사상의 역사들 속에서 매우 놀라운 일이다”라고 말한 Sanday의 말을 인용한 후에, 그러나 그것은 신약성경이 어떤 교리의 발전이나 융합에 대한 기록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워필드는 말한다. 그 교리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이미 수납된 사안이었기 때문에, 그 수납되는 과정에 대한 것은 신약성경의 배후에 놓여있다고 보았다.

ㄹ.구속사 속에서 주어진 “행위 계시”에 기초한 교리로서의 삼위일체

워필드는 이어서, 신약성경의 배후에 놓여있다고 보았던 바로 그 ‘삼위일체가 수납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을 해준다. 그런데,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왜 구약성경 안에 좀 더 충분하고 명백한 증거들이 부족했는가에 대한 이유에 대한 답도 발견할 수 있고, 또 신약성경이 왜 그 교리를 이미 수납된 교리로서 간주했으며, 가르치는 방식이 아닌, 단지 암시적인 방식으로만 제시하고 있는가에 대한 답도 찾을 수 있게된다.

삼위일체 교리란 “성경적 교리”이지만, 정확히 말하면 신약과 구약의 내용들 속에서는 그 교리가 반영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그 교리가 수납되는 과정에서 그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행위계시에 기초하여 수납된 것으로 봐야한다고 워필드는 주장한다:

The Old Testament was written before its revelation; the New Testament after it. The revelation itself was made not in word but in deed. It was made in the incarnation of God the Son, and the outpouring of God the Holy Spirit. The relation of the two Testaments to this revelation is in the one case that of preparation for it, and in the other that of product of it. The revelation itself is embodied just in Christ and the Holy Spirit.29)

이러한 의미에서 삼위일체 교리는 “계시적”교리인 것이다. 그 진리는 인간의 고안이나 다른 종교적 가르침을 통해서 수납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성령님의 오심의 “행위계시”로 말미암아 드러나고 수납된 진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성령이 바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근본적인 증거가 된다고 워필드는 설명한다.30)

여기에서 워필드는 또한 삼위일체 교리가 “구원론적” 진리가 됨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교리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성령의 강림에 기초한 교리이라면, 그것은 곧 삼위일체 계시는 우발적인 것이 아니고, 구원의 성취를 위해 주어졌던 행위계시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교리는 인류의 죄의 문제를 감당하시기 위해서 이 땅 위에 오신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 속에서, 그리고 세상에 죄와 의와 심판을 깨우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성령님의 강림 사건 속에서 이해되는 교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하나님을 바로 만나고 이해하고 믿는 자들은 그 분을 삼위일체 존재방식 이외의 모습으로 생각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Those who knew God the Father, who loved them and gave His own Son to die for them; and the Lord Jesus Christ, who loved them and delivered Himself up an offering and sacrifice for them; and the Spirit of Grace, who loved them and dwelt within them a power not themselves, making for righteousness, knew the Triune God and could not think or speak of God otherwise than as triune.31)

결국, 삼위일체 교리란 구속역사의 과정 속에서 자신을 충분히 계시하신 하나님의 “행위계시”를 통하여,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좀 더 확장되고, 완성된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적인 기초를 바로 이해하게될 때, 우리는 삼위일체에 대한 구약의 계시와 신약의 계시의 성격들에 대한 몇 가지의 의문점들을 해결하게 된다.

첫째 의문점은 왜 구약성경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좀 더 명백하게 제시되지 않고 있는가? 에 대한 문제이다. 워필드는 먼저 Nazianzus의 그레고리 시대로부터 구약계시의 임무란 하나님의 유일성(unity)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진리를 하나님의 사람들의 마음 속에 확고히 세우는 일이었다고 설명해왔음을 지적한다. 그 임무가 충실하게 성취되기까지는 하나님의 신격의 유일성 안에 존재하는 복수성을 말하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워필드는 그의 논지를 따라, 구약에서 삼위일체의 계시가 지연되었던, 좀 더 실제적인 이유가 있다고 말해준다:


the times were not ripe for the revelation of the Trinity in the unity of the Godhead until the fulness of the time had come for God to send forth His Son unto redemption, and His Spirit unto sanctification.32)

하나님 안의 복수성에 대한 구약의 계시가 지연되었던 것은,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경륜 속에서 예수님의 성육신과 성령님의 강림의 때가 아직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약의 말씀의 계시가 그 충분한 설명을 더하기 위해서는 그와같은 행위의 계시를 기다렸어야 했던 것이다. 구속역사 속에서의 구체적인 행위계시에 대한 이해없이, 하나님 안에 계시는 삼위에 대한 단순한 추상적인 진리진술은 적합하지 않었기 때문이다.

신약의 계시와 관련된 또 다른 의문점도 그러한 “행위계시”의 사실과 연결되어 설명될 수 있다. 그 의문점이란, 왜 신약성경에서는 삼위일체 교리가 가르치는 표현으로가 아인, 단지 암시적인 형식으로 제시되는가? 공식적으로 가르쳐주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여기저기에서 우연히 제시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가?와 같은 물음이다. 그것은 구속역사 속에서 주어진 행위계시의 사실들이 이미 모든 기독교인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았기 때문이라고 워필드는 설명한다.33) 기독교인들에게 그것은 이미 확인된 사실들이었으므로, 서로에게 어떤 새로운 진리를 가르치는 방식이 아니라, 이미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진리를 다시 상기시키며 확인시키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워필드가 자신의 논문의 둘째부분의 전반부에서 주장한 내용의 요점은, 삼위일체 교리의 근원적인 증거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이시라는 사실을 밝혀주려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삼위일체 교리란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성육신과 성령님의 강림의 행위계시에 의해서 뒷받침되는 교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신약성경의 전 내용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증거해주는 하나의 덩어리가 된다. 그 안에는 성령의 신적인 인격과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증거들로 가득 채워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삼위일체 교리를 위한 어떤 새로운 진리 체계를 세우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그저 그것은 이미 확인된 계시적 진리임을 전제하고 있을 뿐이다.34)

2) 삼위일체 교리의 내용: 3위간의 상호관계성

논문의 둘째부분의 후반부에서, 워필드는 논의의 초점을 성경에서 제시되는 삼위 하나님 사이의 상호관계성에 관한 주제로 맞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성과 구별성, 그리고 동등성과 종속의 성격에 관한 주제와 같은 것들에 대해서 논의한다.

신약성경도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유일성을 주장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모든 곳에서 또한 하나님으로서의 성령, 하나님으로서의 성자, 그리고 하나님으로서의 성부를 인식하고 있으며, 또한 삼위는 구별된 인격들로서 셋임을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워필드는 삼위 간의 상호관계성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요구되는 3가지의 기본적인 원리들을 소개해준다:


...... the principle which has ever determined the result has always been determination to do justice in conceiving the relations of God the Father, God the Son, and God the Spirit, on the one hand to the unity of God, and, on the other, to the true Deity of the Son and Spirit and their distinct personalities.35)

즉, 워필드는 삼위일체 교리가 지니는 세 가지의 기본적인 원리들이란, 오직 하나인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 아들과 성령의 참된 신성, 그리고 그 삼위간의 구별된 위격성의 원리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본적인 원리들을 신약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통해서 확인해준다. 특히 워필드는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 속에서의 증거들을 제시해주는데, 예를들면, 주님의 수태고지 사건이나(눅1:35; 마1:18), 예수님의 세례장면(마 3:16-17; 막1:10-11 등)에 대한 설명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의 가르침들 속에서의 증거들로 나아간다.36)

예수님은 그의 가르침들 속에서, 자신이 하나님과 진정으로 구별되었다는 의식 속에서 아들로서, 그러면서도 또한 자신이 하나님과 진정으로 하나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셨음을 지적한다. 그런데, 그와같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하나됨과 구별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워필드가 핵심적으로 논의하는 것은 요한복음의 본문들이다.

워필드는 요한복음 10:30, 38 등과같은 본문들 속에서 발견되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사이의 하나됨의 증거들을 언급한다. 또한 요 8:58과 같이 성자의 영원성을 제시하는 구절들을 통하여, 성부와 성자의 연합성에 대한 요한복음의 증거들을 요약해준다. 그러나, 워필드는 이러한 성부와 성자 사이의 관계성은 거기에서 멈추지않고, 성령님과의 관계성에까지도 확장되고 있다고 지적한다.37) 특히 요한복음 14:16-26의 본문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은 삼위 하나님 사이의 구별성과 하나됨에 대한 요한서신의 가르침을 요약해준다:

...... But the Advocate, the Holy Spirit, whom the Father will send in my name, He shall teach you all things, and bring to your remembrance all that I said unto you.'(본문 속의 강조는 워필드의 강조임) It would be impossible to speak more distinctly of three who were yet one. The Father, Son, and Spirit are constantly distinguished from one another- the Son makes request of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response to this request gives an Advocate, "another" than the Son, who is sent in the Son's name. And yet the oneness of these three is so kept in sight that the coming of this "another Advocate" is spoken of without embarrassment as the coming of the Son Himself (vs.18,19,20,21), and indeed as the coming of the Father and the Son (ver.23).38)

워필드가 설명하는 삼위 간의 구별성과 하나됨의 원리는 이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떠나시고, 그 대신 성령님이 오신다고 말할 수 있는 차원이(구별성) 있으나, 동시에 성령님이 오실 때 ‘그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라고 말할 수도 있으며, 또 그리스도의 오심 속에서 성부께서 오신다고 말할 수 있는 차원이(하나됨) 또한 존재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위격들 사이의 구별성이 인정되면서도, 동시에 그들 사이의 연합성이 존재하는, 다시 말하면 그 양자의 양립을 위한 여지가 삼위일체 교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성경의 계시적 증거는 하나님의 유일성(Unity)과 3위간의 위격적 구별성을 함께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한복음을 읽을 때에, 우리는 구별된 인격들로 활동하고 있으면서도, 또한 더 깊은 근원적인 의미에서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세 위격들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만나게된다는 것이다. 유일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문도 제기되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성부로부터 보냄을 받은 성자도 하나님이시며, 성자로부터 보냄을 받은 성령도 하나님이신 것이다.39)

다음으로 삼위 간의 상호관계성에 대한 워필드의 또 다른 관심있는 주제는, 그들의 동등성과 종속적 성격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이다. 앞 부분에서의 워필드의 강조는 성부 만이 아니라, 성자와 성령도 참되신 하나님으로서 인정하되, 그 삼위간의 하나됨과 위격적 구별성을 함께 제시하려함에 놓여있었다. 그런데, 이 두 번째의 논의의 초점은 “종속론”에 관한 것이다. 성경에서 성자 예수님을 “아들”로 명명함에 있어서, 우리가 “존재의 파생이나 종속”에 대한 암시를 받게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워필드는 성경의 어법을 주의해야한다고 하면서, “독생하신 하나님”(요1:18)과 같은 구절이 결코 파생을 함축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없고, 오히려 요5:18절과 같은 구절을 통하여 동등성이 확보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40)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성령”이나 “여호와의 영”이라는 이름들도 파생이나 종속의 개념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정체성을 나타내줄 뿐이라고 설명한다. 고전2:10-11에서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 자신에 관한 지식의 원리임을 말하고 있으며, 곧 그는 하나님의 존재의 가장 깊숙한 본질인 하나님 자신임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워필드는 신약성경에서 성자나 성령의 종속 혹은 파생의 의미를 제시하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결론내린다.41) 단지,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의 방식(modes of operation)”에 있어서, 즉 구속역사의 과정 속에서 삼위의 하나님 각각에게 부여된 기능들을 수행함에 있어서, 종속의 원리가 표현되고 있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라고 보았다:

The Father is first, the Son is second, and the Spirit is third, in the operations of God as revealed to us in general, and very especially in those operations by which redemption is accomplished.42)


워필드는 여기에서 삼위의 하나님 사이의 의논이였던, “(구속)언약”의 개념을 도입한다. 구속역사의 진행과정 속에서 삼위 하나님의 역사의 방식에 있어서의 종속의 성격으로서, 즉 성부에 대한 성자의 종속, 성자에 대한 성령의 종속이란, 삼위 사이의 언약적 논의를 기초로 하여 주어진 것이고, 따라서 삼위의 하나님 각자가 자발적으로 취해진 성격의 종속으로 이해해야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워필드는 성경에서 제시되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용어의 사용례들이 구속역사 속에서의 “경륜적(economical)" 관계 속에서 이해되는 것만 가능할 뿐 아니라, 그러한 용어들은 또한 영원하고 필연적 관계성에도 적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것이 결코 성부와 성자가 그 존재방식에 있어서 첫째와 둘째라든지, 혹은 우월과 종속과 같은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이라고 설명한다.43) 워필드의 결론은 신약의 어떠한 성구를 가지고서도, 우리는 성자나 성령의 종속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3) 논문의 마지막 부분: 구원교리와 맞물려있는 삼위일체론

워필드는 삼위일체론에 대한 자신의 논문을 마무리하면서, 그 교리가 성경의 구원교리와 밀접히 연관되어있음을 지적해준다. 먼저, 삼위일체교리는 성경의 구원역사를 경험한 신자들이 자신의 구원경험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해준다는 점을 지적한다. 구원역사의 과정 속에서 삼위의 하나님은 3중적인 신적 원인들로서 계시되었기 때문에, 그 구원을 경험한 모든 신자들의 의식 속에서 그 3위 하나님에 대한 반향이 자연스럽게 울려나게 된다는 것이다:


Every redeemed soul, knowing himself reconciled with God through His Son, and quickened into newness of life by His Spirit, turns alike to Father, Son, and Spirit with the exclamation of reverent gratitude upon his lips, "My Lord and my God!"44)

역으로 말한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가 없다면, 신자는 자신의 영적 구원의 삶에 대하여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고, 무질서한 모습으로 남게되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의 마음은 창조주 하나님, 구속사역을 이루신 예수님, 그리고 그 구원을 적용시키시는 성령님의 삼위일체 안에서 안식을 얻을 때까지 안정을 찾을 수 없게 된다. 그와같은 차원에서, 워필드는 F.E.Koenig의 글을 인용하면서, 삼위일체교리와 구원의 교리는 역사적으로 함께 서고 넘어진다고 주장한다.45) 그 점이 바로, 왜 기독교회가 역사적으로 분명하고 완숙한 삼위일체 교리에 도달하기까지 안식할 수 없었는가에 대한 답변이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차원에서 그는 자신의 논문의 나머지 부분에서 삼위일체 교리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개관해주었다.

우선 대표적인 사례로서, 유니테리안 신학을 들면서, 그들의 신학적 (일신교적) 오류는 그것이 펠라기안주의 인간론과 소시니안 구원론과 연관되어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밖에도 역사상에 나타난 여러 이단들을 지적해준다. 예를들면, 사벨리안주의나 아리안주의의 오류도 그것들이 신자의 구원경험의 내용들에 대해서나, 그리고 성경계시의 내용에 대해서도 만족할 만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와같은 타협되거나 왜곡된 설명들이 나타날 때마다, 신자의 의식은 필연적으로 성경의 계시내용들을 다시 검토하게 되었고, 완숙한 삼위일체교리가 제시될 때까지 만족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워필드는 초대교회로부터 시작된 삼위일체론 논의들, 즉 로고스 기독론이나 양태론적 군주론(Monarchianism)과 같은 오류들에 대한 정통신학자들의 반응들, 즉 터툴리안, 아다나시우스, 어거스틴, 그리고 종교개혁자 칼빈의 신학적 시도들에 대해서 간략히 개관해준다. 그러나, 워필드의 관심은 단지 삼위일체 교리의 역사를 연구하려함에 있다기 보다는, 그러한 신학적 시도들 속에서 기독교회와 신자들은 그 교리가 성경의 계시내용의 자료들과 자신들의 구원경험에 충실한 내용으로 세워지도록 노력함으로서, 완숙한 삼위일체교리에 이르려 하였었다는 사실을 말하려한 것이다.


III. 결론: Warfield의 삼위일체론의 특징(주된 강조점)들

서론에서도 지적했었듯이, 워필드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논의는 자신의 포괄적인 조직신학서의 체계적 논의들 속에서 그 일부로서 제시되는 교리적 진술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스승 C.Hodge의 조직신학서를 전체적인 조직신학의 틀로서 전제하고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논문에서 워필드는 기존의 삼위일체론 논의들을 모두 반복하려하지 않았다.(물론, 그 교리의 중심적인 내용들이 중복되지 않을 수는 없겠으나).46) 그렇다면, 자신의 논문에서 그가 주로 주장하려 하였던 특징적인 강조점들은 무엇인가? 다음과 같이 몇 가지의 내용들로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 강조점은 그의 논문의 첫 번째 부분에서 주장되었던 내용으로서, 삼위일체 교리가 성경의 계시적 진리임을 강조한 사실에서 찾아진다. 그러한 강조를 통해서, 변증학자였던 워필드는 당시의 자유주의의 내재적 신학에 대한 정통개혁신학의 비판과 변증을 시도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삼위일체 교리의 내용은 어떤 철학자들의 논의나 다른 종교적 가르침과 같이, 인간의 자연이성에 의해서 도달될 수 있는 진리가 아니며, 그것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초월적인 계시말씀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것임을 강조했기 때문이다.47)

그와같은 강조점은 곧 그의 논문의 두 번째 주된 강조점으로 연결된다. 그것은 워필드가 삼위일체론을 구원론과 직결된 교리임을 강조한 사실을 가리킨다.48) 그 점은 그의 논문의 두 번째 부분 중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구속역사 속에서 주어진 ‘행위계시’에 기초한 교리”임을 말하는 대목에서 그 점을 제시하였다. 삼위일체 교리가 인간의 고안이나 다른 종교적 가르침을 통해서 주어지지 않고,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성령의 강림이라는 “행위계시”에 기초하여 주어진 진리이라면, 그 계시는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구원의 성취를 위해 주어졌던 행위계시의 필연적인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49)

삼위일체 교리란 구속역사의 과정 속에서 인류의 구원사역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자신을 더욱 온전히 계시하신 하나님의 “행위계시”를 통하여 제시된 교리이므로, 그것은 신자로 하여금 구원의 하나님을 바로 만나며 자신의 구원 경험을 바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교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지적은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다시 반복된다. 신자의 구원경험 속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3중적인 원인들로서 역사하시고 계시므로, 삼위일체 교리는 신자가 자신의 구원경험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하는 틀을 제공해준다고 지적했다.50)

이와같은 워필드의 강조점들은 결국 삼위일체 교리를 더욱 실천적인 교리로서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해준다. 즉, 삼위일체 교리란 신학자들이 단지 책상 위에서의 이론적인 토의 만으로 제시되는 어떤 사변적인 가르침인 것이 아니라, 그것은 신자의 삶과 구원경험과 밀접히 연결되는 “구원적” 진리임을 드러내주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워필드가 자신의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삼위일체 교리와 구원의 교리는 함께 서고 넘어진다”라고 말했던 것은, 교회사적으로도 삼위일체 교리가 완숙한 표현에 이르기까지 기독교회가 안정할 수 없었다는 의미에서도 이해될 수 있으나, 좀 더 근본적으로 그것은 신자 개인의 영적 경험의 차원에서 적용될 수 있는 지적인 것이다. 구원의 경험을 소유한 신자의 마음은 창조주 하나님, 구속사역을 이루신 예수님, 그리고 그러한 구원을 적용시키시는 성령님을 말해주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바른 이해 안에서 안식을 얻게되기 까지는 혼돈에 빠지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워필드는 삼위일체 교리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바로 이해하며, 신자의 구원경험을 바로 해석함에 있어서 필수적인 교리임을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소위 “본체론적 삼위일체(ontological trinity)"와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al trinity)"에 관한 워필드의 관점을 지적해볼 수 있겠다. 물론, 워필드가 그러한 용어들을 직접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나, 그의 설명들 속에서 우리는 그러한 개념들이 어느 정도는 표출되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 예를들어, 경륜적 삼위일체의 개념은 삼위일체 교리가 계시적 진리임을 말하는 대목에서, 그 교리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성령님의 강림하심이라는 “행위계시”로 말미암아 드러나고 수납된 교리임을 말할 때, 이미 표출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51) 그리고, 본체론적 삼위일체의 개념은, 삼위 하나님 사이의 상호관계성에 대해 설명하는 문맥 속에서,52)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용어사용이 구속역사의 경륜적 관계 속에서만 이해가 가능한 것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영원하고 필연적인 관계성 속에서도 적용되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가 바로 “본체론적 삼위일체”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을 견지하고있음을 보게된다.

물론 워필드는 이 주제에 대한 현대적인 논의의 상황이 전개되기 전에 논문을 정리하였으므로, 그 개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진술을 하고있지는 않다. 그러나, 논문의 전체적인 구조 속에서 분석해볼 때, 논문의 앞부분에서는 구속의 과정 속에서 주어진 예수님의 성육신, 성령님의 강림과 같은 행위계시를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주어졌음을 지적하였고(경륜적 삼위일체), 다음으로 3위간의 상호관계성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들 속에서 성경본문들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삼위간의 영원한 하나됨이나 동등성을 설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본체론적 삼위일체) 이 주제에 대한 논의가 워필드의 논문 속에서는 그렇게 충분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필드의 관점은 -그리고 그의 논문들 속의 어떠한 내용들도- 적어도 현대의 논의들 중에서 본체론적 삼위일체 자체를 거부하거나, 혹은 그것이 경륜적 삼위일체를 통해서만 형성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입장들을 거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출처] B.B.Warfield의 삼위일체론 연구 (비공개 카페)  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2301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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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주님’을 구하십시오! - 로이드 존스

사도 바울에 따르면 무엇보다 좋은 방식은 그
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개괄적으로 말한 방식입니다.
12장의 마지막
절을 살펴보십시요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성경의 어떤 구절
도 바로 이것만큼 더 자주 오용되고 잘못 해석된 것은 없습
니다. 일반적으로 성령을 소멸하는 자들은 이것을 사용하
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
게 보이리라 너희는 은사에 대해 말하거나 관심을 갖지 말
라. 은사는 괜찮은 것이다. 그러나 별로 필요가 없다. 은혜
... 에 충만하라.” 그들은 이 구절의 흠정역 성경에 그들의 가
르침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해석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올바르지 못합니다. 흠정역 성경은 “그러나
내가 제일 좋은 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말하나, 그렇게
번역해야 할 아무런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원문에
는 비교급은 전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번역되어
야 할 방식은 “또한 내가 한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이것이 전부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습니
다. “게다가 내가 좋은 것을 따라 한 길을 보이리라.”

이것을 통해 바울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요? 저는 찰스
핫지(Charles Hodge)가 이것을 이렇게 해석한 것에 동의
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은사
들을 얻기 위하여 지극히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것은 은사들을 멸시하고 약화시키
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정확히 반대됩니다. 이것은
그것을 의미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도가 14장 서두
에서 주제를 다시 채택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랑을 따라
구하라 그리고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라고 말합니다. 그는
영적인 은사와 은혜를 대조하지 않습니다. 아니오. 절대로!
그는 “만일 여러분이 진정으로 은사를 원한다면, 은혜를 구
하라”고 말합니다. 은사를 얻는 최상의 방식은 주님의 사랑
을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사랑을 주님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사랑
으로 충만하면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
이 있습니다. 이것은 은사를 얻는 지극히 좋은 길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신약성경의 가르침이며 수세기를
통하여 온 성도들의 방식이었습니다. 은사를 직접적으로
구하지 말며 간접적으로 구하십시오. 그를 구하십시오! 그
의 사랑을 구하십시오! 그의 영광을 구하십시오! 그에 대한
지식을 구하십시오! 그를 입증하고 증거하기위한 권능을
구하십시오! 그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십시오. 그러면 여
러분은 은사를 얻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것은 이렇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 수도 있으나, 여러
분이 사람이 없으므로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방언을 말할 수 있으나, 아
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여러분은 이것을 직접적으로 구해왔습니다.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
도 아니요.” 이것은 결코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처방은 - 그를 구하십시오! 그의 사랑을, 그
의 생명을, 여러분의 존재의 근원인 그를 알기를, 그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기를 구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은사를
받을 것입니다. 은사들에 관하여 항상 말하지 마십시오. 은
사들에 관한 집회를 갖지 마십시오. 절대로! 주님에 관한
집회를 가지십시오. 그에 관해서 선포하십시오! 그의 신격
의 영광과 신적인 구원과 그가 행하신 모든 것을 선포하십
시오. 그를 선포하십시오! 그를 구하십시오! 그를 사랑하십
시오! 그러면 그는 여러분에게 은사를 주어 그의 증인이 되
게 하며 그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성령의 주권적 사역 - 로이드 존스

 

“엄밀한 개혁신학과 장로교 신학에 관한 한국 교회 목회자의 교리 선언서”

(The Doctrinal Statements of Korean Ministers on the Reformed and Presbyterian Theology in a Strict Sense)

 

 

목적: 한국교회와 그 신학의 위기 앞에 680년 콘스탄티노플 세계 공의회 신조까지의 세계 공의회 신조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도르트 신조 및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포함한 개혁교회 신조들에 대한 바른 해석에 있어서 성경적 기초를 세우는 교리적 선언과 그 모든 고백서들에서 고백되지 않은 선언내용들을 위한 성경해석 작업

 

Subjects:

1. Divine Inspiration and Inerrancy of the Original Holy Scripture,

2. God as Highest Good and Sole Reward,

3. the Substantial Unity of O.T. and N.T. in the Holy Trinity and its Structure,

4. 'Totus Christus extra carnem',

5. 'Duae voluntates Christi' in Relation to O.T. and N.T.,

6. Supralapsarianism or Infralapsarianism,

7. Practical Senses of the Eternal Decree,

8. Limited Atonement Christi and his Mediatorship,

9. Relationship of the Divine Predestination to 'ordo salutis' as 'causa remota et propinqua',

10. 'Unus' or 'Unitas' in the 'Presbyterium',

11. Refomed Worship,

12. Modern Scientific Facts and their Theological Meanings etc.

 

한국교회의 교회 선언서

 

1. Divine Inspiration and Inerrancy of the Original Holy Scripture

1) 날카로운 운동력과 은폐되지 않는 말씀 앞에 숨겨지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속성(히 4:12,13)이 구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신약에도 적용이 된다. 더욱더 큰 권위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의 역사 및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

 2) 성경이 없어지지 않고 폐하여질 수 없다(마 5:18; 요 10:35)는 것은 계시를 주신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신자로서 결국 세상도 변하고 계시를 받는 자도 없어져도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에 그의 말씀도 여전히 폐하여지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로 해석해야 한다.

 3) 성경에는 무오성에 대응하는 표현은 없을지라도 구약의 증거에 의해서 그에 해당한 성경의 완전성, 진실성, 진리성, 순수성이 증거되고 있고(시 18:30; 19:7ff) (무폐성, 없어지지 않고 폐하여지지 않는다는) 영원성뿐만 아니라 무오성도 추론할 수 있다.

 4) 하나님이 스스로 인간의 방식으로 계시하셨으나 영원히 살아계시고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으로서 그 말씀과 함께 존재하시므로 유오성을 적용할 수 없다.

 5) 성경의 일점일획이라는 표현은 구약에 적용이 될 때 모음기호와 신약에서의 액센트, 읽기기호의 무오성을 표현하기보다는 그 문자와 그 문맥의 의미에서 신적영감의 완전성을 표현한 것이다.

 6) 성경에서의


전환(Conversion)       
                  최송연
 
당신 사랑이
봄비처럼 보슬보슬
꽁꽁 얼어붙었던
내 영혼을 적셔 흐를 때

그제야
내 마음속에도
사랑의 눈(眼)이
싹 터기 시작했나 봐요
 
당신 사랑을
내가 느끼던 그때부터
모든 만상(萬狀)이
어찌 이리도 곱고
어찌 이토록 사랑스러운지요

그동안
내가 문제였었나 봐요
이쁘게 보이는 것 별로 없고
날 괴롭게 하는 사람은 많아
세상이 정말 싫다며 원망한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한 1서 16)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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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균형감각 - 존 스토트

우리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문제들을 놓고 갈라서 있다. 물
론 그 중에는 신학적으로 중대한 문제들도 있으나 기질적
인 대립 문제들도 있다. 가령 신학적인 면에서, 우리는 하
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과의 관계라든가, 교회의 ‘질서’
와 목회 문제(감독교회건 장로교회건 간에) 신앙의 타협 없
이 어디까지 교단교류를 할 수 있는가의 문제, 교회와 국가
의 관계, 세례의 자격문제, 세례 시 물은 얼마나 사용할 것
이냐의 문제, 가장 중요한 은사는 무
... 엇이냐는 문제 등에 대하여 의견이 다를 수 있다. 꼭 같이
독실하고 꼭 같이 성경적인 기독교인들도 이런 문제들을
놓고 의견이 갈린다. 이런 문제들은 종교개혁자들이 지적
한 ‘아디아포라’ 문제(‘별스럽지 않은’ 문제)이다. 이런 문
제에 있어서 우리들은 각자가 받은 조명에 따라 성경에서
얻은 확신을 계속 관철하고 싶어 할지라도, 다른 기독교인
들의 양심에 자기의 입장을 독단적으로 강요할 것이 아니
라, 여기서 루퍼트 멜데니우스(Rupert Meldenius)란 사람
이 썼다고 하며 리차드 백스터가 인용한 바 있는 다음과 같
은 금언을 제인용하는 것이 적절한 것 같다.
"근본문제에는 일치를
지엽문제에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일에는 사랑을“
우리는 신학적으로 갈라설 뿐 아니라, 기질적으로도 갈라
선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다양성을 좋아하셔서 수
십억 가지의 인간 타입들과 기질들과 개성들을 창조하셨다
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더욱이, 우리가 인정하기 싫어하
는 것이지만, 사실상 우리의 신학도 우리의 기질에 영향을
많이 입고 있다. 물론 성경진리에 대한 이해가 성령의 조명
에 좌우되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우리가 어떤 색채의 개
성을 가지고 있느냐에 불가피한 영향을 받는다. 그것은 또
한 우리의 연령과 우리가 속한 문화권에 영향도 받는다. 우
리들 중에는 성향이나 교육면에서 감정적 이기보다 이지적
인 자들도 있고 이기적 이기보다 감정적인 자들도 있다. 또
한 타고난 의식구조가 보수적인 자들도 있고, 전통에 대한
반항의식을 가진 자들도 있다. 이런 문제들은 각기 그 사람
의 기본적인 기질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이다. 그러
나 우리는 기질에 통제 받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성경으로 우리의 타고난 기질의 성향을 판단해야 한다. 그
렇지 않으면 우리는 기독교인의 균형감각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현대기독교 선교(죤 스토트)
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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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교단 상대 큰믿음 변승우 씨 손배소 “기각”
서울중앙지법 “총회 이단결의, 표현행위 불과…위법성 없어”
2013년 06월 21일 (금) 01:57:29 전정희 gasuri48@amennews.com


   

서울중앙지법 민사14부(재판장 배호근)는 최근 큰믿음교회와 변승우 씨가 자신들을 이단으로 규정한 예장 통합측 교단(총회장 손달익 목사)을 상대로 “허위사실을 적시해 명예를 훼손했으므로 인터넷 홈페이지(http://pck.or.kr)에 게시한 게시물을 삭제하고 2천만 원을 배상하라”며 낸 소송에 대해 “이유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지난 6월 18일 발부한 판결문에서 “원고들은(변승우 씨와 큰믿음교회) 이 사건보고서(큰믿음교회에 대한 연구보고서 및 지역별 이단대책 세미나 자료집) 등 각 게시물에 포함된 구체적인 내용이 아니라 피고(통합교단)가 단지 원고들을 ‘이단’으로 표현한 부분만을 문제 삼고 있(다)”며 “피고가…원고들을 이단으로 표현한 부분은 그 자체로 의견을 표명하는 표현행위에 불과하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허위사실 즉, 범죄집단 등으로 묘사함으로써 자신들의 명예가 훼손됐다’는 변승우 씨 측 주장에 대해 ① 통합측이 ‘이단이란 자신이 믿는 종교의 교리에 어긋나는 이론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점 ② 정통교리와 배치되는 교리 여부는 같은 종교를 믿는 대다수의 목회자나 신도들이 평가하는 관념에 따라 달라지는 점 ③ 통합측은 자료집에서 이단으로 지목한 종교단체 중 영리집단, 밀교집단, 음란집단, 종교집단 등의 특징을 보이는 경우를 예를 들고 있지만, 변승우 씨 측을 그 예로 들고 있지는 않는 점 등에 비추어, “피고가 간접적으로나 우회적인 표현으로라도 원고들을 사교집단, 조폭집단 등임을 암시하여 구체적인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고 보기에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원고들의 이 부분 주장은 이유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통합 측의 이단규정이 한계를 일탈한 표현행위’라는 변승우 씨 측의 주장에 대해 “사실 및 사정들을 종합하여 보면, 비록…원고들의 교리와 주장을 비판하여 그 명예 등 인격권을 침해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고, 이러한 게시내용이 기독교 관련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 인용되거나 유포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신앙의 본질적인 내용으로서 최대한 보장받아야 할 종교적 비판의 표현행위로서 피고의 교단에 속하는 교인들의 신앙을 보호하고 교리상의 혼란을 방지하여 주로 그들을 상대로 객관적 정보를 제공하여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취지에서 게시한 것”이라며 “위법성이 없다”고 판시했다.

   

구체적으로 재판부는 ① 통합측 총회가 이대위의 연구보고서 등을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시한 목적은 변승우 씨 측을 이단으로 몰아서 명예를 훼손하는 데에 있다기보다는, 교리상의 혼란을 피하고 소속 교단의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보호하기 위한 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 ② 이대위가 작성한 연구보고서를 제94회 총회에서 채택하는 과정을 밟음으로써 변승우에 대한 종교적 비판을 하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 신중을 기하였다는 점, ③ 이대위 연구보고서의 내용은 변승우의 저작물과 설교내용을 제시하고, 이를 토대로 그의 교회론, 계시론, 성경론, 구원론 등을 분석하면서 교리상의 오류를 지적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 이를 접하는 자로 하여금 자신의 신학적 배경지식에 비추어 연구결과의 당부를 판단하여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는 점, ④ 통합측 인터넷 홈페이지는 이단·사이비에 관심이 있는 교인들이 적극적으로 위 게시판을 찾아와야지만 열람할 수 있어서 그 공표의 범위에도 어느 정도의 제한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점 등을 그 근거로 꼽았다.

특히 재판부는 ⑤ 변승우 씨 측은 통합 총회가 이대위의 보고 및 결의 과정에서 절차위반이 있어 그 효력이 없다고 주장하나, 변승우 씨는 통합측 교단 소속이 아니고, 실제 “보고서를 채택하고 나아가 이 사건 각 게시물을 게시하는 과정에 절차에 위반한 잘못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뿐만 아니라 재판부는 “설령 위와 같은 이대위의 보고 및 결의 과정에 절차위반으로 인한 하자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피고의 내부적인 문제에 불과하고 원고들은 피고에 소속되어 있지 않아 피고의 제94회 총회의 결의의 효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자들도 아니(다)”며 절차위반으로 인해 통합측의 “종교적 비판행위가 위법하여 지는 것은 아니다”고 판결했다.

마지막으로 재판부는 “변승우 씨 측이 통합 총회에 소명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나, …당사자 명의의 재심 요청 공문서에 피고 교단의 결정 사항에 적시된 모든 논지에 대한 해명이나 변화된 입장을 구체적으로 요청한 재심요청사유서와 이를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공식적 문서 자료를 첨부하여 재심을 요청할 수 있(다)”며 변승우 씨 측은 “이단 결정에 대하여 재심을 요청함으로써 입장을 소명하고, 이단 결정을 다툴 수도 있다”고 밝혔다.

한편, 변승우 씨는 지난 2009년 예장 통합·합동·고신·합신·백석 등 5개 교단에서 일제히 ‘이단성’ 규정을 받은바 있다. 또한 변승우 씨는 이번 판결에 불복하여 지난 6월 14일 고등법원에 항소했다.

출처: 교회와신앙


 

“박사(doctor)”입니까? “형제”(brother)입니까?

 

 

 

“박사(doctor)”입니까? “형제”(brother)입니까?

: 아더 핑크/ 번역: 이승훈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필요한 교훈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때로 사용하시는 방법이 얼마나 기이한지요. 최근 필자의 경험이 그런 경우였습니다. 모 ‘대학’에서 와서 제게 D.D(Doctor of Divinity의 약자로 신학박사 학위수여자를 말함) 학위, 즉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고자 하니 이를 수락해달라는 청을 하였습니다. 그 제안을 받고 필자는 그들로부터 약간의 말미를 얻어 기록된 말씀을 살펴보고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결과, 기대했던 것 이상의 충분한 빛을 얻게 되었습니다. 필자는 단지 하나님의 종에 불과한데 나같은 자가 그런 (육에 속한) 명예(honour) 타이틀을 수락하는 것이 과연 가당키나 한 것인지 몹시 의구심이 들게 된 것입니다. 이제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필자가 분명히 깨닫게 된 사실은 그것이 인사치레라 할지라도 박사 칭호를 받는 것이 제게 온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친구분들이 그동안 저를 “핑크 박사(Dr. PINK)”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물론 그것이 존경의 표시란 걸 잘 압니다만, 이제 그분들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

더 이상 저를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제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이를 허용하시는 분들을 정죄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결단코 아닙니다. 그분들이 서고 넘어지는 것은 오직 그들의 주인되신 주님께 달려 있습니다.

이제 저는 이런 결심을 하는데, 제게 결정적 도움을 주었던 성경 말씀을 여러분들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부디 이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여러분에게도 복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 구절은 엘리후(하나님의 대변자)가 욥의 거짓 위로자들에게 한 말입니다.

“청하건대, 내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게 하며 사람에게 아첨하는 칭호(flattering titles)를 붙이지 말게 할지니”(욥기 32 21 22절 상반절)

두 번째 구절은 마태복음 23 8절입니다.


“너희는 랍비(Rabbi)라 불리지 말라”(마태복음 23:8 상반절)

여기서 랍비는 정확히 ‘박사'(Doctor)를 뜻하는 말입니다.

세 번째 구절은 요한복음 5 44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서로 존귀(honour)를 받는” 자들을 책망하시며 우리에게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나오는 존귀(honour)”를 구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는 신약성경 전체를 통틀어 주님의 종들 중 누구도 가령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Paul, an apostle) (고후 1:1; 1:1; 1:1; 1:1; 딤전 1:1; 딤후 1:1)이란 표현을 썼지, “바울 사도” 혹은 “사도 바울”(the apostle paul)이란 식의 호칭(title)을 사용한 적이 결코 단 한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하나님의 아들께서도 “친히 무명한 자가 되셨다”(made Himself of no reputation)고 빌립보서 2 7절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그분의 종들이 이에 역행한다면 이것이 온당한 일이겠습니까?

여섯 번째는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11 29절에서 친히 우리에게 “온유하고 비천한”(meek and lowly) 자신을 본받으라 명하셨습니다.

일곱 번째는 유다서 16절이 배교(변절)의 특징 중 하나를 “이득을 위해 사람의 외모(겉모습)에 감탄하는”(having men's persons in admiration because of advantage) 것이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여덟 번째는 우리가 받은 명령은 “그분의 치욕을 짊어지고”(히브리서 13:13 bearing His reproach) 진영밖에 계신 그리스도께 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인해 “멸시받고 거절당하신”*(despised and rejected) 그리스도를 대변하고 증거하기 위해 여기 이 자리에 모인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존귀(honour-영예)와 아첨(flatter)을 받는다는 것은 온당치 않은 일이라 여겨집니다.

앞으로는 저를 "핑크 박사(Doctor pink)"가 아닌 "핑크 형제(brother pink)"로 불러주십시오
!!


출처 : 알이랑코리아 http://cafe.daum.net/ALILANG/ETND/102

원문출처 : http://www.pbcofdecaturalabama.org/AWPink/doc-bro.htm


아더 핑크

출생 : 1886 04 11

별세 : 1952 07 15

출생지 : 영국 노팅햄

성별 : 남자

1886년 영국 노팅햄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가 무디 성경학원에서 공부했다. 그는 성경연구에 일생을 바치도록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았던 말씀의 사람, 성경의 사람이었다. 순회 성경연구교사로 일했는데 특히 미국의 전역과 호주에서 많은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는 사후에 그의 문서 - 성경연구서 - 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로이드 존스, 캠벨 몰간과 함께 영국에 주신 하나님의 복된 말씀의 대사역자로 꼽히게 되었다. 그는 영국, 미국, 호주 등에서 그의 소명을 감당했고, 말년에 가까울 때쯤 해서는 영국으로 돌아와 <성경연구>(Studies in the Seriptures)란 월간지를 창간, 성경연구 열매를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1952년 스톤웨이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들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게 하는 사람들
거짓말하는 사람들
날 실망시키는 사람들
날 모함하거나 음해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만났을 때
나는 늘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야 했다
알고 싶은 걸 다 알아야 했다
그래서 내가 더 아프고 더 힘들었다
 
내가 아프지 않은 법을 알았다
말을 줄이는 것
시선을 옮기는 것
그들이 스스로 깨닫게 두는 것
그리고
내 맘을 아름다운 사람들 곁에 두는 거였다
진정한 마음과 커다란 사랑의 마음들 안에서
나는 평온할 수 있었다...
-담아온 글-
       
                                                                                                  
출처: 사모님사모님/이화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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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바디스(헨리크 센케비치) 1

한정자 ㆍ 2013/06/24 ㆍ추천: 0  ㆍ조회: 48      

쿼바디스(헨리크 센케비치) 1
-암울한 네로황제 시대에 등불을 켠 기독교인들 이야기-


사치와 향락이 극에 달해있던 로마의 네로황제 시절, 네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던 페트로니우스의 집에 어느 날, 그의 조카인 비니키우스가 찾아온다. 그는 지금 막 전쟁에서 돌아오는 길이다. 이 전쟁에서 그는 약간의 몸의 부상을 입었지만 그보다 마음의 병을 얻은 것을 삼촌에게 고백한다.

그것은 팔의 부상을 치료하려고 가있던 로마 장군 아울루스 집에서 본 소녀, 리기아에 대한 연정이었다. 그녀는 당시 로마국경에 인접해 있던 리기아국의 왕녀로서 인질로 그 집에 와 있었다. 비니키우스는 마치 새벽빛같이 아름답고 신비한 리기아를 처음 본 순간, 무슨 일을 해서라도 그녀를 갖고야 말겠다는 욕정에 사로잡힌다.

페트로니우스는 조카의 이 고민을 듣고 네로황제에게 말하여 리기아를 비니키우스에게 주도록 주선한다. 그리하여 리기아는 아울루스 집에서 강제로 불려나와 네로의 궁전에 잠깐 머문 뒤 비니키우스의 집으로 보내진다.

그러나 이때 리기아는 그녀의 충실한 하인 우르수스에게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자기를 납치해 가도록 부탁했다. 리기아는 그녀가 인질로 잡혀가 있던 아울루스의 아내, 폼포니아가 믿던 기독교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된지 이미 오래인 소녀다. 사실 리기아에게서부터 우러나오는 신비한 아름다움은 단순히 육체적인 매력 때문에만이 아니라 그녀가 믿고 있던 기독교, 그곳으로부터 흘러나온 거룩함에서부터 빚어진 것이었다.

비니키우스는 그것을 뚜렷이 알지 못했지만 쾌락위주로 살아가는 로마풍습에 젖은 여인들만 보던 그에게 리기아의 청순한 모습은 새벽빛이요, 아침이슬처럼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러나 리기아의 입장에서 보면 비니키우스는 그가 아무리 로마의 귀족 청년이라 해도 역시 죄악에 깊이 물든 이교세계의 사람일 뿐이다.

결국 기독교도들은 리기아를 탈취해 갔다. 이 소식을 들은 비니키우스는 분노에 못 이겨 청동 촛대로 자기의 충직한 노예의 두개골을 부수어 버리고 밤새도록 노예들을 매질한다. 그 후 그는 사이비 철학자 킬로를 만나 물고기 그림으로 기독교인들의 모임 장소를 알아내어 킬로와 함께 그곳으로 간다.

그날은 사도 베드로의 설교가 있는 날이다. 비니키우스는 베드로를 처음 보았을 때 참으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신전의 사제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나 진리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현실의 일처럼 그것을 믿고, 또 그것을 믿음으로써 사랑하고 있는 사람같이 보였다. 그 얼굴에도 진리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듯 한 확신의 힘이 있었다. 그는 “사치와 쾌락을 단념하고 빈곤과 결백과 진리를 사랑하라. 학대와 박해를 꾹 참아라. 모든 지배권을 가지고 강림하시는 분에게 복종하라. 불신, 사기. 모략을 삼가라.”고 설교하고 있었다.

<선>이란 리기아를 자기 집에 데려오는 것이고 <악>이란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비니키우스는 그의 이러한 설교에 화가 나기도 했으나 한편 이들이 믿는 완전하고 유일한 신에 비하면 자기들이 믿는 주피터나 아폴로, 비너스 같은 신은 아무 소용없는, 시끄러운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직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최고의 덕이라고 믿고 있던 그는 리기아가 숨어있는 집을 습격하여 무력으로 그녀를 빼앗으려 한다. 그러나 그는 이때 우루수스의 저항에 부딪쳐 부상을 입고 기독교인들의 간호를 받게 되었다. 그는 이들과 리기아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면서 비로소 리기아에 대한 단순한 육적사랑에서 영적인 사랑에 눈을 뜨게 되고 리기아도 그를 사랑하게 된다. 그들은 베드로의 축복과 격려에 힘입어 서로 약혼할 것을 다짐하고 잠시 헤어져 있게 된다.

한편 점점 더 정신이 이상해지던 네로 황제는 간신 티겔리누스의 암시를 받아 단순히 자기가 쓰는 시에 감동을 불어넣기 위해서 로마를 불태울 음모를 꾸민다. 그는 트로이의 대 화제를 묘사했던 호머의 일리아드와 같은 작품을 쓰기 위해선 로마와 같은 대도시가 불타는 장면을 보아야 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었다. 유치한 망상과 야수처럼 잔인한 성품을 타고난 네로의 이 어리석고 무모한 계획에 의해 결국 로마는 불타오르게 된다. 이 불은 6일간 전 로마의 3분의 2를 태운다. 시민들은 아비규환의 지옥 속에서 갈팡질팡한다. 그러나 이때도 네로는 금으로 만든 월계관을 쓰고 자줏빛 옷을 걸치고는 화염에 싸인 하늘을 우러르며 비파를 타고 자작한 시를 읊는다. 그리고 조상의 도시가 멸망해가는 것을 슬퍼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지은 시의 애조에 감동되어 눈물까지 흘리며 시민들이 자기의 시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화를 낸다.

그러나 이렇듯 어리석은 네로도 분노에 못 이겨 무서운 폭동을 일으킬 듯 아우성치는 군중들을 마냥 묵과해 버릴 수만은 없다는 것을 차츰 깨닫는다. 네로는 그들을 달래기 위해 무슨 방도를 강구해야만 했다. 이때 네로 앞에 저 사이비 철학자 킬로가 나타난다. 그는 태연히 기독교도들이 이 불을 질렀으며 그들은 인류와 율법의 적이요, 로마와 네로의 적일 뿐 아니라 네로의 딸도 기독교인 리기아의 저주로 죽은 것이라고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네로는 이 거짓말을 빌미로 복수심에 불타는 백성들에게 기독교도들을 희생 제물로 내줄 것을 결심한다. 그는 백성들에게 이 불을 일으킨 것은 기독교도들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기독교에 대한 대 박해를 시작한다. 커다란 경기장이 세워지고 신자들은 피에 굶주린 사자와 짐승의 발톱에 갈가리 찢겨져 죽는다.

이러한 박해가 계속되고 있을 때 베드로 사도는 신자들의 간곡한 권유로 로마를 탈출해 나가려 한다. 그러나 로마 성문 밖에서 그는 로마로 향해 들어가는 그리스도를 만난다. 그는 그리스도께 묻는다.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이때 주님은 “그대가 나의 어린 양들을 저버렸으니 내가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로마로 가리라.”고 말씀하신다. 한동안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엎드려 있던 베드로는 한참 후에 그를 따르던 시동에게 조용히 말한다. “로마로-.”이리하여 그는 다시 로마로 돌아와 순교의 반열에 들어간다.

리기아도 이때 잡혀 마지막 날, 거대한 황소의 뿔에 매달려 투기장으로 내몰리었으나 그녀의 충복, 우르수스가 놀라운 힘으로 황소의 완강한 목을 부러뜨리고 그녀를 구출한다. 그녀는 관중들의 동정을 사서 생명을 구하게 되고 비니키우스와 함께 시실리 섬으로 가서 행복한 여생을 보내게 된다. 다른 한편 네로는 군사들의 반란으로 비참하게 생을 마친다.

이 작품은 <네로시대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암시하듯 1세기의 로마를 배경으로 고대의 이교적 세계관인 헬레니즘과 기독교적 신앙인 헤브라이즘의 항쟁을 묘사한 대작이다. 우리에게는 영화로 더 많이 알려 진 작품이기도 하다.

인간의 육체와 힘만이 지상 최대의 선이라고 믿던 로마의 한 귀족청년이 아침 이슬처럼 순결한 리기아를 사랑하면서부터 체험하게 되는 기독교 세계의 경이로움과 그 어떤 권력과 무력으로도 정복할 수 없는 기독교의 신비한 힘이 생생한 필치로 묘사되어져 있다.

이 작품을 쓴 센케비치(Sienkiewicz, Henryk)는 러시아 점령 하에 있었던 폴란드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전통적이고 애국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라나 바르샤바 대학에서 역사학과 문학을 공부했다. 그는 일찍부터 시사평론을 쓰기 시작하면서 애국적이고 실증주의적인 여러 편의 작품을 발표하여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혔고 1876년부터 3년간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시야를 넓힐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는 이때 미국에 대한 비판적 인상기 “미국으로부터의 편지”를 썼다. 그리고 이때 받았던 특별한 인상들을 단편으로 발표하였는데 그중에는 폴란드 망명자나 이민자들의 참상을 다룬 “빵을 찾아서”가 있다.

그는 가난하고 고난 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고통을 세상에 알리는 사명감을 갖고 농촌의 참상을 테마로 한 작품을 여러편 발표하기도 하였다. 또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그의 작품에 연결하는 능력이 있었다. 세기가 바뀌면서 그의 명성은 폴란드 뿐만 아니라 독일, 불란서, 러시아 영국 등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의 작품 “불과 검을 갖고서”는 그 당시 이미 26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팔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명성을 일거에 드높인 작품은 이 <쿼바디스>이다. 이 작품은 유럽과 미국을 포함한 40여 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오페라, 뮤지컬로 극장에서 상영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05년에는 “산문적 서사시에의 위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51년에는 미국에서 영화화 되었다.

폴란드에는 그의 이름을 딴 공원, 거리, 박물관들이 있고 중고등학교에서는 그의 작품과 삶이 가르쳐지고 있다. 그는 역사의식이 뚜렷한 작가요, 애국자로 1차 대전 중에서는 전쟁 희생자의 구호 활동에 종사하다가 스위스로 망명하여 끝내 그곳에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객사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후 그의 시신은 그가 그리던 고향땅으로 운구 되어 성 요한 성당에 안치되었다.

쿼바디스는 역사학도로서의 센케비치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다. 제정 로마시대 사람들의 사치한 생활과 풍속도, 그들의 생각들이 작품 곳곳에 화려하게 펼쳐진다.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곧 도덕이요, 윤리가 되던 이 시대에는 귀족 여성들이 남편을 서너 번씩 바꾸는 것이 정상이요, 오직 한 남편만을 섬기며 사는 폼포니아같은 여성은 비정상적인 존재이다.

이 전혀 다른 두 세계 속에서 방황하며 고민하다가 마침내 기독교인이 되는 비니키우스를 보며 우리는 도의와 순결의 승리에 박수갈채를 보내게 된다. 기독교의 이 신비한 힘은 비니키우스만 감동케 한 것이 아니다. 철저히 향락적이요, 로마적인 그의 삼촌, 페트로니우스까지도 폼포니아의 집에 처음 들어온 순간 이상스러운 체험을 하게 된다.

“그곳에는 일종의 광명이 있었고 안식이 있었고 일종의 명랑함이 있었으며 그것은 이 사람들 전체가 풍기고 있는 생명에서 직접 넘쳐 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바로 여기서 그는 폼포니아로부터 다음과 같은 대담한 신앙고백을 듣는다.

“제가 신앙하고 있는 것은 한분이시며 정의이며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생명, 진리, 사랑, 하나님에 대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던 비니키우스가 오랜 방황 끝에 마침내 “전 세계는 변혁과 개조가 필요하고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고 마침내 자기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기독교인이 된 것도 바로 이 기독교로부터 솟아나는 생명의 신비한 힘인 것이다.

이 작품에서 무엇보다도 우리를 감동케 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무한한 희생과 용서의 정신이다. 비니키우스에게 리기아를 찾게 해주었던 사이비 철학자 킬로- 그는 단순한 거짓말쟁이일 뿐 아니라 기독교신자인 글라우쿠스의 삶을 철저히 파괴해 놓은 장본인이었다. 그는 글라우쿠스를 속여 강도에게 그를 팔았고 그 가족들을 흩어지게 했고 그 재산을 빼앗았으며 그를 살인업자에게 넘겨주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후에 그가 살아난 것을 보고는 또 다시 야비한 방법으로 그를 죽이려고 자객을 보냈다.

그러나 글라우쿠스는 그를 만나자 깊은 괴로움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를 용서해 준다. 킬로는 지금까지 자기가 배신하기만 했던 기독교인들이 자기를 용서해 주었다는 사실에 머리를 갸웃거린다. 그러나 이처럼 큰 용서를 받은 그였건만 그는 여전히 뼛속까지 야비하고 사악함으로 가득찬 인간이었다.

그는 로마의 대화재가 일어나자 네로에게 찾아가 온갖 거짓말로 기독교인들을 매도한다. 그런데 자기를 용서해주고 사랑으로 대접했던 기독교도들이 짐승들에게 처참하게 찢기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자, 그때에야 이 사특한 인간의 마음에도 무언가 두려운 느낌이 찾아온다. 그러다가 활활 불타는 십자가 형틀에 매달린 글라우쿠스와 정면으로 마주치게 된다. 세상에 킬로가 자행한 참혹한 박해보다 더 무서운 박해가 있을까?

그는 글라우쿠스에게 행했던 모든 악행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형 집행자의 손에 넘긴 것이다. 불길이 점점 깊이 글라우쿠스를 삼키는 것을 보고 킬로는 그 불길이 자기 몸은 태우는 것 같은 공포에 못 이겨 찢어지는 듯 한 소리로 외친다.

“글라우쿠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를 용서해 주오!”

이 전율의 순간에 저 순교자는 깊은 침묵을 한 후에 “당신을 용서합니다.”라고 신음하듯이 말하고 죽는다.

이때에야 이 강퍅하고 뼛속까지 악에 절을 대로 절었던 악한은 땅을 치며 짐승처럼 통곡한다. 십자가에서 죽으면서도 자신을 못 박는 무리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던 저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이 승리하는 순간이다. 이때로부터 킬로는 전혀 딴 사람으로 변한다.

생생하게 펼쳐지는 기독교 박해 장면은 우리를 다시 한 번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받았던 형언할 수 없는 고통 속으로 휘몰고 간다. 네로의 미친 행태, 잔인하고 살기에 가득찬 관중들, 어린이나 여인을 막론하고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 맹수들의 노호소리…….그것은 이 세상의 광경이 아니라 피의 광연(狂演), 무서움 꿈, 허무맹랑한 거대한 파노라마이다.

이런 광경을 바라보는 베드로의 고뇌는 우리들의 마음까지도 산산이 찢어지게 한다. 다만 박해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슬픔과 다른 이들의 강권에 못 이겨 로마를 탈출하려 했던 그의 마음을 누구라서 이해하지 못할까?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다시 로마로 되돌아오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비장한 공감을 또한 느끼게 된다.

센케비치는 이 작품 속에서 로마제국의 세계와 기독교 세계를 명암처럼 확연히 구분해 놓고 싶어 했다. 로마가 어두움이라면 기독교는 빛의 세계다. 잔인과 복수가 로마의 것이라면 사랑과 용서는 기독교의 것이다. 로마가 타락, 부도덕, 부패의 모래위에 세워진 왕국이라면 기독교는 순결과 도의, 정의라는 벽돌로 세워진 왕국이다. 로마가 배반과 중상이라는 칼로 스스로를 멸망해 갈 때 기독교는 충성과 변호의 십자가로 세워져 간다. 어떻게 해서 저 거대한 로마제국이 힘없고 약한 기독교의 소수 무리로 인해 무너질 수 있었던가?

우리는 여기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기독교의 생명의 맑은 물이 결국 죄와 악으로 더러워진 로마 정신의 막강한 탁류를 거슬러 이길 수 있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 기독교는 실로 로마의 깊고 깊은 어두움 속에 비추인 한줄기 광명한 빛이었다.

센케비치는 이 작품에서 러시아의 학정에 시달리는 자기 민족의 어둡고 고단한 운명을 그리려 했으나 그의 이 소박한 꿈은 오히려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과 비신자들에게 기독교의 위대한 승리를 선포하는 영광의 찬가가 되었다.

출처:USA 아멘넷

성령충만의 표지 (에이든 토저)

외적인 특정한 사실만으로는 신앙의 깊이를 알 수 없다.
성령충만의 참된 표시는 그 사람이 간절히 바라는 소원이 무엇인가를 보아 알 수 있다.
그는 행복하기보다 거룩하기를 열망한다.
은혜 생활을 한다고 공언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룩한 생활보다도 인생의 행복을 더 추구하고 있는 것을 본다.
그러나 참된 성령충만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신령한 생활과 거룩함을 먼저 구한다.
그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열망한다.
비록 자신은 욕과 손해를 당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영광되기를 바란다.
그의 신령한 생활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빛내기에 힘쓴다.
모든 일에 자신과 의논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를 생각한다.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기를 사슴이 시냇물을 사모하듯 한다.
그는 십자가를 지기를 열망한다.
인생의 불행과 역경을 십자가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나 이는 모든 이들이 지는 인생고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는 신앙의 결과로 짊어지는 특별한 고난과 고통이다. 이는 자원하여 지는 고통이다.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고자 하면 십자가를 질 수 밖에 없다.
이는 그의 계명을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필연적인 것이다.
이러한 십자가를 지고자 열망하는 사람이야말로 성령 충만한 사람이다.
그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하기를 열망한다.
세속적 신자는 겉을 보지만 성령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물의 깊이를 이해하려고 한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한다.
그는 자기 개인의 입장과 처지가 곤란하게 될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열망한다. 그는 죄악 속에 살기보다 의로운 죽음을 열망한다.
그의 모든 사상과 생활은 다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작정된다.
그는 육신의 생사를 문제 삼지 않는다.
사나 죽으나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대로 따르기를 열망한다.
그는 남을 자신보다 높이기를 열망한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믿음의 형제들이 영광을 누리는 것을 볼 때 그것으로 만족한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그도 기뻐한다.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영화롭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는 모든 일에 자기보다 남을 높이기를 갈망한다.
그의 생활은 벌써 영원 속에 살고 있다. 신앙에 의해 그의 생활은 현세를 초월하여 산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지상에서부터 천국은 시작된다. 아무도 자력으로 은혜의 생활을 할 수는 없다. 다만 성령께서 그에게 충만히 역사하실 때에 은혜의 생활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영적인 사람의 7가지 습관  

 

첫째,영적인 사람은「행복」해지는 것보다는「거룩」해지는 것을 원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좀더 편안하고 행복해지기를 바라지만 이러한 바람은 그 사람의 관심이 세상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둘째,영적인 사람은 주기도문을 고백할 때「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 오며」라는 구절 바로 뒤에「제게 어떤 희생이 뒤따르더라도」라는 조건을 덧붙이는 사람이다.즉 자신이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결국 주님의 이름이 높여지기를 원하는 그런 사람이 바로 영적인 사람이다.

 

셋째,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습관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대개 사물의 겉모양만을 보기 때문에 쉽게 상처받고 흥분하게 된다.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사물의 겉과 속을 한꺼번에 통찰하시는 하나님을 닮으려고 애쓰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흥분하거나 상처받지 않는다.

 

넷째,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지 않은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이 낮아지고 다른 사람이 높아지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일줄 안다.

 

다섯째,영적인 사람은 죽음에 대해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릇된 모습으로 살기보다는 아름답게 죽기를 원한다. 죽음이 두려워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사람들과 달리 영적인 사람은 불의와 타협해 가며 하루하루를 연명하기보다는 단 하루라도 의미있는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마련이다.  

 

여섯째,영적인 사람은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이다.
영적인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해지거나 섬김을 받으려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유용한 존재가 되기 위해 애쓴다.

 

일곱째,영적인 사람은 기꺼이 고통을 감수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일단 무겁고 힘든 것이라는 생각에 짓눌려 자신의 십자가를 지기도 전에 한숨과 탄식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그 십자가가 불편하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탄식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고난 당하신 주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이미 세상적인 것들을 포기 한다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토저는『인간의 힘만으로는 이러한 일곱가지 습관을 가질 수 없다』면서 『먼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만 영적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출처: 포도나무선교원/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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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 여러분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 로이드 존스

사도는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31)라
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에 대적자는 더욱 기습을
가하여 쳐들어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에 관해 분명히
해봅시다. 우리는 매우 열정적으로 은사를 구하고 사모하
라는 권면을 받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
는 것입니다. 은사를 구하는데 잘못된 의도도 있습니다. 저
는 이제 이것들 중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
로 가장 중요한 것은 은사를 구하는 마음입니다. 만일 우리
... 가 이것을 교회의 덕을 세우기보다는 이기적인 동기나 단
순히 우리 자신을 놓이려는 욕망으로 구한다면 우리는 이
미 잘못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 첫 번째 질문을 함으로써 시작해
야만 합니다. “나는 왜 이 은사를 사모하는가? 나의 동기와
목적은 무엇인가?” 그러면 여러분은 이것이 여러분에게 도
움을 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흥분되는 체험이나 스릴을 맛보기 위하여 구합니까? 여러
분은 이미 잘못되었습니다. 성령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
화롭게 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동기는 주를 더욱 알아가는 것
과 그에게 영광과 찬양을 돌리도록 사역하기 위한 것이어
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동기를 담사했으므로 저는, 최근에 제가 읽은 어
떤 가르침을 들고자 합니다. 성령세례를 받는 가장 빠른 방
식은 방언을 받는 것이라는 가르침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들은 “만일 여러분이 성령세례를 원한다면 방언부터 시
작하십시오. 그러면 분명히 여러분을 성령세례로 인도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결코 믿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방언의 은사도 성령의 나타남의 하나이
라는 신약성경의 전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방언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을 여러분이 소유했다면
방언의 은사는 그것에 대한 하나의 증거가 됩니다. 이것은
물론, 지나친 열심이며 사람들이 자신의 방식으로 끌어드
리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습니까? 사도와 120여
성도는 다락방에 함께 모여 기도했으며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자 그들이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먼
저 성령세례를 받았고 그 후에 방언을 시작했습니다. 그리
고 이것은 성경의 다른 예들도 모두 동일합니다. 그러나 새
로운 가르침은 방언부터 시작한다고 말하며 방언은 가장
쉽고 간단한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방언을 통하여 여러분
이 성령의 세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더 이
상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대한 이해의 부족
이요, 육신이 개입하여 우리가 성령 자신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제시하고 싶습니다. 저에게 있
어서는, 우리 스스로 성령의 은사를 산출하거나 유발시키
는 것보다 더 위험하고 잘못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
시 한번,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들을 벗어난다는 사실을 믿
고 싶지도 않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항상 그렇게
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것은 현재에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성령이 자신의 사역을 할 수 있
도록 도와주려는 시도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성령이 우리
에게 주어졌으며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
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이도 아닌 주님 홀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어떤 협력을 필요로 하지 않고 성령 또한 우리의 어
떠한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성령을 도우
려는 순간, 여러분은 이미 어려움을 자처하고 있는 것입니
다.

예를 들어, 사람이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는 방식에 관하여,
현재에 잘 알려진 가르침을 취해보십시오. 여기 우리네 그
리스도인들은,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증거 하기 위하여 하
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야만 하는 최상의 것과 성령세례
를 받기를 열망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받지 못했다
고 느낄 때 우리는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우리는 “아주 간
단합니다. 성령세례를 받기를 원합니까? 여러분에게 필요
한 모든 것은 집회 후에 남아 있으면 됩니다”라는 말을 듣
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의자에 앉아 할 수 있는 한 긴장
을 풀고 여러분의 몸을 편안하게 합니다. 그 후에 우리는
우리 주님이 다락방에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제자들에게
불어 넣으셨다는 것과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는 것
들 듣습니다. 이제 이 가르침의 다음 단계는 다음과 같습니
다. “이제 주님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불어 넣으신 것을 기
억하십시오. 성령세례를 받기를 원하십니까? 자 이것이 여
러분이 해야하는 모든 것입니다. - 이렇게 이완된 상태에
서, 깊게 호흡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그렇게 하는 동안
여러분은 성령의 세례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쉬고, 깊게 들이 마시고 ... 계속해서 그렇게 하십시오. 여러
분이 그렇게 하는 동안 여러분은 성령을 여러분 속에 호흡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것이 가르쳐졌습니다! 신약성경의 어디에서 이것
과 일치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나의 사랑하는 형
제들이여, 이것은 단순한 심리학적 가르침이며 암시작용일
뿐입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심리학적인 방식이며, 여러분
도 심리학자들이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텔레비전에서
인도하고 있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세상이 조롱하는 가
운데, 비난자들이 기독교에 대한 그들의 공격을 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이러한 종류의 그리스도인들의 가르침에 있습
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서 이 가르침이 단순히 비성경적
일 뿐 아니라, 이보다 더 나쁜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순전
히 육신적인 것임을 밝히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긴장을 풀
고 깊게 호흡하라거나 어떤 것을 행하라는 것을 들었던 사
람을 신약성경 어디에서 발견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발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하나
님께 기도할 때, 갑자기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다는 것입
니다. 고넬료의 집안 사람들이 앉아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
을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에베소에서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에게 은사가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심리학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가르침을 따르는 순진한 사
람들이 있으며 그들은 자신들이 성령세례를 받고 있는 것
이라는 분별없이 추측합니다. 그들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
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최면에 걸리거나 자신들을 최면
을 시키고 있고 혹은, 정신착란의 상태에 빠져있는 것입니
다. 제가 이미 일렀듯이 강신술이 할 수 있는 것처럼, 심리
학적 조건은 이런 현상들을 산출해 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성령을 돕기 위하여 어떤 것을 행하기 시작하는 순간,
여러분은 이미 기독교인의 삶에서 열 수 있는 어떤 것보다
가장 위험한 문을 열어버린 것입니다.

저는 또다른 동일한 예증을 들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저
에게 찾아와 그가 기도하는 동안 성령이 갑자기 임해서 그
가 자신 밖으로 들어 올려져서 자신이 이상한 방언을 말하
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그의 삶에서 특별한 경험에 관하
여 말했을 때, 만일 그가 이것은 그에게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거나, 이것은 매우 희귀하게만 일어났다고 말한다면
, 저는 기꺼이 그를 믿고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진실한 체험으로써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그와 같은 어떤 것에 대해 읽을 때(저는 가끔
여러 저널들에서 그러한 것을 읽습니다) 저는 전적으로 다
른 입장에 서게 됩니다. 이것이 그들의 가르침입니다. 방언
을 말하고자 합니까? “좋아요. 여러분이 해야 할 것은 이것
입니다. 여러분의 턱과 혀를 맡기고 움직여 보십시오.” 형
제들이여, 이것은 웃기는 문제가 아니라 매우 진지한 것입
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그러면 소리를 내기 시작하십시오.
어떤 종류의 소리든지 지각이나 의미가 그 안에 있듣지 없
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에게서 그 자체로 주어진 어
떠한 소리든지 내십시오. 그리고 이것을 계속 하십시오. 만
일 여러분이 이것을 계속해서 하신다면 여러분은 스스로가
방언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에 대한 단순한 답변은 여러분은 아마 그러할 수 있을 것입
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과 결코 관계가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
야만 한다는 어떤 암시라도 신약성경에 있습니까? 신약성
경에서 일어난 것은 사람이 성령세례를 받고서, 자신이 방
언을 말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방언은 분명
히 성령의 은사이며, 성령은 능력이 충만한 분입니다. 그는
여러분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심리학에
서는 필요로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최면에 걸리기를 원한
다면, 여러분은 자신을 포기하고 내던지며, 자율적인 방식
으로 움직이도록 하고, 여러분이 하라고 들은 것처럼 해야
만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정확히 이 사람들이 가르치고 있
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의 동기에 관해서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
들은 정직하고 그들의 동기는 선하다는 것을 압니다.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들은 단순히 비성경적일 뿐 아니라, 아
마도 그들 자신을 심리학자들의 손 외에도 심지어 악령들
의 손에 맡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결코 어떤 것도
행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은 이 은사들을 “그 뜻대로 각 사
람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사도는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
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
전 12“11)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일 제가 누군가에게 선
물을 주려 한다면, 저는 그에게 어떤 도움도 원하지 않습니
다. 그런데 이것을 - 마치 성령은 결정할 수도 본질적으로
그리고, 그 스스로 행할 수도 없다는 듯이-사람들이 행하도
록 가르침을 받고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없습니다!

성령의 주권적 사역 - 로이드 존스
개혁주의마을/Grace 님

 



마음에서 마음으로 가는 길
 
    행복은 근사한 말이 아닙니다. 행복은 마음속 깊은 데 숨어 있는 진실이며 행동하는 양심 입니다. 행복은 남에게 나눠 줌으로써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나눔으로써 채워지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베푸는 만큼 행복의 양도 그만큼 많아 집니다. 행복은 또 스스로 만족하는 데에 있습니다. 남보다 나은 점에서 행복을 구한다면 영원히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한두 가지 나은 점은 있지만 열 가지 전부가 남보다 뛰어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행복이란 남과 비교해서 찾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게 중요합니다.
    행복은 아주 자그마한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1. 태어나 줘서 고마워요.

    2. 무사히 귀가해 줘서 고마워요.

    3. 건강하게 자라 줘서 고마워요.

    4. 당신을 만나고부터 행복은 내 습관이 되어 버렸어요.

    5. 당신은 바보, 그런 당신을 사랑하는 난 더 바보예요.

    6. 이 세상 전부를 준대도 당신과 바꿀 순 없어요.

    7. 당신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어요.

    8. 난 전생에 착한 일을 많이 했나 봐요.

    당신을 만난 거 보면...

    9. 당신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 이보다 더 큰 행운은 없어요.

    10. 당신은 나의 비타민 당신을 보고 있으면 힘이 솟아요.

    11. 지켜봐 주고 참아주고 기다려 줘서 고마워요.

    12. 내가 세상에 태어나 가장 잘한 일은 당신을 선택한 일.

    13. 당신 없이 평생을 사느니 당신과 함께 단 하루를 살겠어요.

    14. 난 세상 최고의 보석 감정사인가봐요.

    당신이라는 보석을 알아봤으니까요.

    15. 사랑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옮기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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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훈

 

 

130611 높은뜻정의교회 깊은뜻 묵상 (왕하 23:26-30)

[잘못된 개혁의 결과]



하나님께서 요시아의 통회와 마음을 다한 개혁조치에도 불구하고
격노를 멈추지 않는 이유는 므낫세가 저지른 죄의 크기가
요시아의 개혁조치보다 더 크고 무겁기 때문이었습니다.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

므낫세의 우상숭배의 여파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요시아왕의 통회와 마음을 다한 개혁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격노가 계속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말씀을 통하여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택한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한 이 성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신 이유는 리더를 비롯하여
모든 백성들이 잘못된 리더십을 따라 맹목적인 신앙의 형태를
보임으로서 우상을 숭배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다도 같은 이유로 인하여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요시아왕이 생존하고 있을 동안 유예되었을 뿐입니다.
요시아가 죽은 후에 멸망시키겠다는 것은 그 이유와 책임이
백성들에게 있음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요시아왕의 마음으로부터의 통회와 개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다백성들은 진정으로 통회하지 못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옛 생각에 젖어 있었고 옛 시절을 잊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형식적으로 통회와 개혁의 모습만을 표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백성들의 형식적인 개혁은 왕의 죽음을 앞당기고 있었습니다.
요시아왕의 죽음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망하는 것을
보지못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은혜로서의 죽음이었습니다.
왕의 재임시에 발생한 국가의 멸망은 치욕 그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요시아왕의 종교개혁에 관한 말씀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개혁자체의 성패는 리더의 진정성과 리더십에 의하여 결정되지만
진정성이 결여된 상태에서 하나님께 결단하는 언약과 개혁은
하나님을 폄하하는 것이되므로 공동체가 위험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신앙적 개혁은 마음을 다한 것이라고 자부합니까?


 

 

이미지 전체보기가난해도 마음이 풍요로운 사람이미지 전체보기 가난해도 마음이 풍요로운 사람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모든 것을 소유하는 사람입니다. 남이 보기 부러워 할 정도의 여유있는 사람은 모든 것이 행복해 보일 듯 하나 실제로는 마음이 추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려움을 아는 사람은 행복에 조건을 알지만 모든 것이 갖추어진 사람은 만족을 모를 터이니 마음은 추운 겨울일지도 모르겠네요. 몸이 추운 것은 옷으로 감쌀 수 있지만 마음이 추운 것은 어떻게 해결 할 수 있을까요. 사는 기준이 다 같을 수는 없지요 행복에 조건이 하나 일 수는 없답니다. 생긴 모양새가 다르면 성격도 다른 법 가진 것이 적지만 행복을 아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 비록 부유하지는 않지만 남과 비교하지 않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행복에 조건이기 때문이지요. 남과 비교할 때 행복은 멀어집니다. 그저 감사한 마음 하나만으로도 당신은 행복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 좋은 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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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 사고의 승리자  (0) 2013.06.06

      나는 하나님께 나의 나쁜 습관을 없애달라고 기도했다. God said NO! 나쁜 습관은 내가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네가 포기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 장애아를 완벽하게 고쳐달라고 기도했다. God said NO! 그의 영혼은 완벽하단다. 그의 몸은 잠깐이란다. 나는 하나님께 인내를 달라고 기도했다. God said NO! 인내는 긴 고통의 산물이다. 그것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 행복을 달라고 기도했다. God said NO! 나는 너에게 축복을 주었다. 행복은 너에게 달려 있다. 나는 하나님께 고통을 없애달라고 기도했다. God said NO! 고통은 네가 세상적인 관심에서 벗어나서 나에게로 더 가까이 오게 한단다. (작자미상)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은혜의 단비" 중에서
 

너는 혼자가 아니란다.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를 멸할 때 여호와의 선지자 100명을 굴속에 감추어두고 보호하였던 오바댜는 막상 때가 닥치자 죽음이 두려워 아합에게 엘리야가 있다고 전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까지 머뭇머뭇 하려느냐?’는 질책을 들으면서도 비겁하게 말 한 마디 않고 잠잠하였습니다. 그래서 엘리야 혼자서 용감하게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850명을 상대하여 놀라운 승리를 거두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랬는데 이번에는 엘리야가 비겁해질 차례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갈멜산 대결에서 승리하고 바알선지자들을 죽인 엘리야, 기도로 비가 내리게 하고 폭우 속에 허리를 동이고 마차를 탄 아합왕 앞에서 달렸던 그 엘리야가 이세벨의 ‘죽여 버리겠다.’는 말 한 마디에 혼비백산 목숨을 구하여 도망합니다. 그 용감하던 모습이 온데간데없습니다.

엘리야는 유다땅 남쪽 끝 브엘세바까지 도망하여 내려간 다음 거기에 사환을 남겨두고 자신은 하룻길이나 광야를 들어가 로뎀나무 아래 드러누워 ‘하나님, 차라리 저를 죽여주십시오.’ 하고 애걸합니다. 어떻게 우리의 영웅 엘리야가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특별한 인간은 없는 모양입니다. 생명의 위협 앞에서는 누구나 비겁해지는 모양입니다. 야고보서는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약 5:17)’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엘리야의 연약한 모습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연약하지만, 우리도 믿음으로 순종하면 엘리야처럼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격려의 말씀일 것입니다. 그 엘리야를 천사가 어루만지며 두 번이나 떡과 물을 가져다 먹이고 기운을 차려 호렙산으로 가게 합니다.

엘리야가 호렙산에 가 그 곳 굴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물으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영어성경(NIV)을 보니 “What are you doing here, Elijah?” ‘너 여기서 뭣 하고 있니? 엘리야야.’ 입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어떤 물으심이었을까요? 야단이나 꾸지람이었을까요? 비난이나 빈정거림이나 재촉이었을까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정한 음성의 위로였을 것입니다. 그랬길래 엘리야가 신세한탄, 넋두리를 하였지요. “그들이 우상숭배하고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다 죽였습니다. 열심이 특심한 저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저마저도 죽이려고 합니다. 무서워 죽겠습니다.” 그 하소연을 들으시고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여호와의 앞에 산에 섰으라.” 하시고 강한 바람, 지진, 불로 지나가십니다. 그리고 세미한 소리로 엘리야에게 임하십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능력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 물으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러나 이번에도 엘리야는 똑같은 신세한탄과 넋두리입니다. “저만 홀로 남았습니다. 무서워 죽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꾸짖지 않으시고 ‘다메섹에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왕이 되게 하고,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가운데 7,000인을 남기리니 다 그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7,000명이라니요! 엘리야는 홀로 남았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엘리야뿐 아니라 이처럼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지키고 계셨고 또한 돕는 자들과 사역자들을 예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비겁, 연약한 존재임을 이미 아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엘리야는 얼마나 기뻤을까요? 얼마나 힘이 났을까요?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안다면, 많은 동지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결코 두려워하거나 낙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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