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견인

 

                                                                                       -루이스 벌코프

 

A. 성도의 견인론의 역사


성도의 견인은, 하나님께서 중생시키며 은혜의 신분으로 효과적으로 부르신 사람들이 그 신분에서 완전히 혹은 궁극적으로 타락하지 않고 은혜의 신분에서 끝까지 견디어 내어 영원히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교리이다. 이 교리는 어거스틴에 의해 최초로 설파되었다. 하지만 어거스틴은 엄격한 예정론자에게 기대된 만큼은 이 점에 대한 철저한 신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거스틴에게서는 이 교리가 위에서 서술된 것과 같은 형태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는 선택된 자가 결국 궁극적으로 타락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동시에 새 생명과 진정한 신앙을 부여받은 자들 중 일부가 은혜로부터 완전히 타락하여 궁극적으로 영원한 저주를 받는 것을 가능한 일이라고 보았다. 로마 교회는 자유 의지론을 포함하는 반 펠라기우스주의적 견해로 인해 성도의 견인론을 부인하며, 자신들의 견인을 인간의 불확실한 순종에 의존하게 했다. 종교 개혁자들은 이 교리의 정당한 위치를 회복시켰다. 하지만 루터 교회는 성도의 견인을 인간의 신앙의 지속적 활동에 의존하게 하고, 진정한 신자들도 완전히 은혜로부터 타락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를 불확실하게 만들고 있다.

칼빈주의적 교회만이 이 교리를 절대적인 확신을 부여할 수 있는 형태로 주장한다. 도르트 신조는 하나님의 자녀의 약점과 실패를 다수 열거한 후 “하지만 풍성한 자비를 지닌 하나님은 선택이라는 불변의 목적에 따라 중죄에 있어서도 자신의 백성에게서 성령을 거두시지 않으며, 양자 됨의 은혜를 상실하고 칭의의 신분을 상실하며 죽음에 이르는 죄 혹은 성령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도록 방임하시지 않는다. 또 하나님은 이들이 완전히 유기되거나 영원한 파멸에 빠지도록 허용하시지 않는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거부하고, 신자의 견인을 신앙하고자 하는 의지와 선행에 의존하도록 했다. 알미니우스 자신은 이러한 극단을 회피했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신인 협동설을 그 모든 결과들과 함께 주장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웨슬리적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많은 소종파들이 그렇듯이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추종한다. (이 부분은 원본과 약간 다르게 번역된 것 같아서 삭제했음- )

B.견인의 교리의 진술


견인의 교리는 ‘성도의 견인’이라는 용어가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소지가 있으므로 조심스럽게 진술되어야 한다. 이 교리는 어거스틴의 견해처럼 우선 선택된 자가 궁극적으로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교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교리는 하나님에 의해 중생하고 은혜의 신분으로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비록 때때로 악에 정복당하기도 하고 죄에 빠지기도 하지만 결코 그 신분에서 완전히 타락하여 영원한 구원을 획득하지 못하게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중생의 생명과, 성화 과정에 있어서 중생에서 발현된 성향들은 결코 전적으로 폐기될 수 없다.

더욱이 우리는 이러한 견인이 신자의 본래적인 자산 혹은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의 길에서 견인할 수 있게 하는 인간의 지속적인 활동이라는 오해를 불식시켜야 한다. 스트롱은 견인을 “그리스도인 편에서의 신앙과 선행의 자발적인 지속”, “신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우리가 성화라고 부르는 영적인 진보의 인간적 측면”으로 언급하는데, 이는 견인이 인간에게 의존한다는 인상을 주기 쉽다. 하지만, 개혁파는 성화에서와 같이 성도의 견인에 있어서도 인간이 협력한다고 믿고 있지만, 성도의 견인을 우선적으로 신자의 활동이나 성향이라고 규정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신자가 홀로 남아 있다면 타락해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엄격히 말해 견인하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견인은
“심령 안에 시작된 신적 은혜의 사역이 지속되고 완성에 이르게 하는 신자 안에서의 성령의 지속적 사역” 이라고 정의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포기하시지 않기 때문에 신자들은 끝까지 견딜 수 있게 된다.


C.견인의 교리에 대한 증명

견인의 교리는 성경적 진술과 다른 교리로부터 추론에 의해 증명될 수 있다.


1.성경적 직접적 진술


여기서 고려되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성경 구절이 있다. 요10:27-29에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메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으니라”는 말씀이 있다. 그리고 롬11:29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는 마치 하나님께서 이에 대해 후회하는 것처럼 결코 폐기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부르심과 관련되지만 일반적인 진술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신자들에게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위로한다(빌1:6) 살후3:3에서는 기쁨으로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고 말한다. 딤후4:18에서 그는 주께서 자신을 모든 악한 일에서 건지시고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기뻐한다.


2.추론적 증명.

견인의 교리는 다음의 교리로부터 추론적 방식으로 증명될 수 있다.


(1)선택의 교리로부터

선택은 어떤 사람들이 일정한 외적인 특권으로 호의를 입고 자신들의 의무를 다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선택된 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구원될 것이며 필히 완전한 구원에 이를 것이라는 의미이다. 선택은 궁극으로의 즉 구원으로의 선택이다. 이를 전개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성령의 감화력을 주셔서 이들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할 뿐만 아니라 끝까지 견인하고 궁극적으로 구원되도록 인도한다.


(2)구속 언약의 교리로부터

구속 언약에 있어서 하나님은 아들의 순종과 고난의 보상으로 자기 백성을 아들에게 주셨다. 이 보상은 영원 전부터 결정된 것으로, 인간의 여하한 불확실한 충성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약속을 외면하시지 않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간주되고 하나님의 보상의 일부가 된 자들이 하나님에게서 분리되거나, 생명의 연함으로써 언약에 들어간 자들이 타락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롬8:38,39)


(3)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 기도의 효력으로부터

그리스도는 자신의 속죄 사역에서 죄인의 용서와 열납을 획득하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셨다. 그의 의는 죄인의 칭의를 위한 완전한 근거를 구성하며, 그렇게 완전하고 효과적인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정의받은 자들이 다시 정죄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욱이 그리스도는 아버지로부터 그에게 주어진 자들을 위해 계속 중보기도를 드리며, 백성을 위한 그의 중보 기도는 항상 효과적이다(요11:42;히7:25)


(4)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으로부터

신앙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은 그의 영의 참여자가 되고 그의 한 몸이 되며 성령의 생명으로 약동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며, 그리스도가 살아있듯이 그들도 살아 있다. 그들은 그 몸으로부터 다시 절단되어 신적 이상(ideal)을 무효케 할 수는 없다. 연합은 항구적이며 불변하는 원인, 즉 하나님의 영원하고 값없는 사랑에서 발원하므로 항구적이다.


(5)마음 안에서의 성령의 사역으로부터

댑니(Dabney)는 “성령이 지금 역사하기 시작하지만 곧 그를 포기할 것이며, 천상적 출생의 생동적 불꽃이 일시적으로 불붙다가 완전한 흑암 속으로 스러지게 되며, 새로운 출생에서 증개된 영적인 생명은 돌발적이며 발작적이어서 죽은 영혼에 외면적으로 생명이 발현하는 듯하다가 결국 소멸하게 된다고 가정하는 것은, 성령의 지혜와 마음 안에서의 성령의 사역을 과소 평가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성경에 의하면 신자는 이미 이생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다(요3:36;5:24;6:54) 우리가 영생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에 의해 행동할 이유는 무엇인가?


(6)구원의 확신으로부터

성경을 보면 신자들이 이생에서 구원의 확신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히3:14;6:11;10:22;벧후1:10) 신자들이 어느 순간 은혜로부터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면 이런 확신은 전적으로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이미 시작하신 사역을 완성하실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에 서 있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다.


D.견인의 교리에 대한 반론들


1. 인간의 자유와 모순된다

견인의 교리가 인간의 자유와 모순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반론은, 진정한 자유는 무관심의 자유나 혹은 도덕적이며 영적인 일들에서 잘못된 선택을 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 구성된다는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이는 오류이다. 진정한 자유는 거룩함의 방향으로의 자기 결정이다.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방향으로 의식적으로 움직일 때보다 저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그러한 자유를 누린다.


2.태만과 부도덕으로 인도한다

견인의 교리가 태만, 방종, 심지어 부도덕까지도 초래할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되고 있다. 그릇된 안정감이 이 견인의 교리로부터 유래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그릇된 주장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보호받는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이 교리는 우리가 우리 편에서의 지속적인 경계와 열심, 기도없이 지내도록 방임한다는 사상을 전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신자에세 거룩함으로의 견인을 확신시키는 교리가 어떻게 죄의 동기가 될 수 있겠는가? 성화를 위한 능동적인 노력이 성공하리라는 확신은, 보다 더 성화를 위한 노력을 경주하는 데 있어서 최고의 자극이 될 것이다.


3.성경에 위배된다

이 교리는 성경에 위배된다고 종종 주장된다. 이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인용된 성경 구절을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1)배교에 대한 경고들이 있는데 이는 신자가 타락하지 않는다면 전혀 불필요했을 것이다(마24:12;골1:23;히2:1;3:14;6:11요일2:6)하지만 이러한 경고들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모든 문제를 고려한 것이요, 진지한 의도로 진술된 것이다. 이들은 자기 점검을 촉진시키며 신자들이 견인의 길을 유지하는 도구가 된다. 이 구절들은 말한 대상 중 어느 누가 배교할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이러한 죄를 범하지 않도록 수단이 강구되어야 한다고 진술한다. 이러한 원리의 예시로서 행27:22-25을 31정과 비교 해 보라.


(2)성경에는 신자들이 성화의 길에서 지속적으로 정진할 것을 권면하는 구절들이 있는데, 이는 신자들이 끝까지 이를 수행한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불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보통(1)에서 언급된 경고들과 연관되어 발견되며 동일한 목적을 수행하고 있다. 이들은 신자들의 어느 누구도 견인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입증한다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도덕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도덕적 수단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3)또 성경은 실제적인 배교의 사례들을 기록하고 있다고 말한다(딤전1:19,20;딤후2:17,18;4:10;벧후2:1,2;또 히6:4-6참조) 하지만 이러한 사례들은 진정한 구원적 신앙을 소유하고 있는 진정한 신자들이 은혜로부터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이 구절들에서 언급된 사람들이 중생에 근거하지 않은 일시적인 신앙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신앙을 소유했다는 것을 먼저 증명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진정한 신앙을 고백하지만 이 신앙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롬9:6;요일2:19;계3:1) 요한은 일부 신자들에 대해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다”고 말하며 그 이유로서 “저희가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를 언급한다(요일2:19)


E.이 교리를 부정한다면 구원은 인간 의지에 의존하게 된다


견인의 교리를 부정한다면 실제로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인간의 의지에 의존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펠라기우스적 자력 구원관을 지닌 자들에게는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없다. 하지만 이 생각은, 은혜로 인한 구원을 기뻐하는 자들에게 이 문제를 숙고하게 한다. 이러한 견해의 요점은, 인간이 성령만의 사역에 의해서는 혹은 성령과 인간의 의지와의 협력 사역에 의해서든 은혜의 상태로 옮겨진 이후에는, 신앙을 지속하느니 신앙을 포기하느냐의 여부가 자기가 원하는 대로 결정되어 인간에게만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동기를 매우 불확실하게 하며, 인간이 신앙의 복된 확신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견인의 교리를 고수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호비(Hovey)는 “이 교리는 큰 위로와 능력의 근원, 즉 감사에 대한 자극, 자기 헌신의 동기, 위험시에는 불기둥이 될 수 있다” 고 말했다.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신이내린 록키 밴프국립공원의 멋진절경!


 

 

"
깨끗한 양심처럼 더없이 폭신한 베개는 이 세상에 없다"

      





 

 

 

한성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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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전문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1563)
  (The Heidelberg Catechism)
                            대한예수교 장로회   평화교회
                            http://peacech.org  ☎ 627-3474                                



◎ 들어가는 말 ◎

☞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은 16세기 독일 팔츠의 영주 프리드리히 3세가 중세기독교의 잘못을 바로잡고 종교개혁과정에서 드러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미사 중심의 교회구조로 성도들의 교육이 거의 찾을 수 없었던 시절, 그야말로 종교심은 넘쳐났지만 하나님께 대해서는 무지했던 때에, 사람들은 이 교리문답을 통해 신앙의 체계를 성경의 기초위에 세워나갔고 그것은 종교개혁의 든든한 힘이 되었습니다.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가 중심이 되어 만든 이 교리문답은 1563년 팔츠의 수도인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린 총회에서 정식으로 채택되면서 곧 많은 교회들의 호응을 크게 얻었으며, 그 후 약간의 수정을 거치면서 기독교역사에서 권위 있는 신앙고백으로 자리 잡습니다.

“이 교리문답은 (냉엄함이 없는) 칼뱅의 힘과 깊이와 (우유부단함이 사라진) 멜란히톤의 신중함과 따뜻함과 (과도한 절제와 신비에 혐오감이 드러나지 않은) 츠빙글리의 단순성과 명료함이 훌륭하게 결합하여 드러나 있다”(필립 샤프)

☞ 이 교리문답은 다음과 같이 짜여 있습니다.
                  (로마서의 구성을 따른 듯)
  서문 (질문 1-2항)
  제1부 / 우리의 죄와 비참에 대하여 (질문 3-11항)
  제2부 /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질문 12-85항)
  제3부 / 우리의 감사에 대하여 (질문 86-129항)

☞  이 책은 몇 가지 번역본을 참조하여 만들었습니다.  

                                                    2007.3.1 펴냄  평화교회  


서문 (1-2문)

제 1문 :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 : 살아서나 죽어서나1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2 몸과 영혼 모두 미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3 그리스도께서는 보배로운 피로 내 모든 죗값을 치러주셨고4 마귀의 권세에서 나를 해방하셨습니다.5 또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는 머리털 하나라도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지켜주시며,6 참으로 이 모든 것이 합하여 나의 구원이 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7 그리하여 성령으로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고8 이제부터 온 마음으로 기꺼이 즐겁게 그분을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9

1)로마14:7-9 2)고전6:19-20 3)디도2:14; 빌립1:20-21 4)벧전1:18-19 5)요한8:31-36; 히브2:14-15 6)마태10:29-31; 누가21:16-18; 요한10:27-30 7)로마8:28 8)로마8:15-16; 고후1:21-22 9)겔36:26-27; 빌립1:6



제 2문 : 이러한 위로 가운데 복된 인생으로 살고 죽기 위하여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답 : 세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 나의 죄와 비참이 얼마나 큰지를,1 둘째, 그 모든 죄와 비참에서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 지를,2 셋째, 그러한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3

1)로마3:23; 요일1:9-10 2)로마3:23-24; 요한17:3; 행16:31 3)마태5:13-16; 시편50:23; 골3:15-17



제 1 부  우리의 죄와 비참

제 3문 : 당신은 죄와 비참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답 : 하나님의 율법에서 압니다.1

1)로마3:19-20



제 4문 :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22장에서 이렇게 요약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1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2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3”(22:37-40)

1)신명6:5 2)레위19:18 3)로마13:10; 고전13:13



제 5문 : 당신은 이 모든 것을 완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
답 : 할 수 없습니다.1 나는 본래 하나님과 내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2

1)로마3:10-12; 요일1:8,10 2)창세6:5; 예레17:9; 디도3:3; 로마8:7



제 6문 :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악하고 일그러지게 창조하셨습니까?
답 :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선하게 창조하셨으니,1 자신의 형상,2 곧 의롭고 거룩하게 창조하셨습니다.3 그리하여 사람이 자신의 창조주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마음 다해 사랑하며, 영원한 축복 가운데 그분과 함께 살면서, 찬양과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4  

1)창세1:31 2)창세1:26-28; 5:1-2 3)에베4:24; 골로3:10 4)시편8:4-8



제 7문 : 그렇다면, 이렇게 타락한 사람의 본성은 어디서 왔습니까?
답 : 우리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타락하고 불순종한데서 왔습니다.1 그로 인해 우리의 본성은 크게 부패하여2 모든 사람은 죄 가운데 잉태되고  태어납니다.3  

1)창세3장 2)로마5:12,18-19 3)시편51:1-5



제 8문 : 그렇다면, 우리는 그토록 부패하여 선이란 전혀 행할 수 없고 언제나 악을 향해 기울어질 뿐입니까?
답 : 그렇습니다.1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나지 않는 한 그렇습니다.2

1)창세8:21; 이사53:6; 로마3:10-12 2)요한3:3-5; 시편51:10-11



제 9문 : 그렇다면, 사람이 행할 수도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요구하신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닙니까?
답 :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의 율법을 행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습니다.1 하지만 사람이 마귀의 유혹에 빠져 제멋대로 불순종하였고,2 그로인해 자신은 물론 모든 후손들마저 그 능력(선물)을 잃어버렸습니다.3

1)창세2:16-17 2)창세3:4-6,13; 요한8:44 3)로마5:12; 3:23



제 10문 :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불순종과 반역에 벌을 내리지 않고 지나치십니까?
답 :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된 행동(actual sins)과 죄된 본성(original sin) 모두에 크게 진노하십니다.1 그러므로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갈라3:10)하신 선언에 따라2, 이 세상과 영원한 세상에서 의로운 판단으로 벌을 내리십니다.3

1)출애34:7; 나훔1:2; 로마5:12,14 2)신명27:26 3)시편7:11-13; 히브9:27



제 11문 :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자비로운 분이 아닙니까?
답 : 하나님은 분명히 자비로운 분이지만 또한 공의로운 분입니다.1 하나님의 공의는 그 높으신 위엄을 거역하는 죄에 대해, 참으로 무서운 형벌인, 육신과 영혼에 영원한 형벌을 내리실 것을 요구합니다.2

1)출애34:6-7; 신명7:9-11; 시편5:4-6  3)마태25:45-46; 살후1:8-9



제 2부  우리의 구원

제 12문 :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에 따라, 우리는 이 세상과 영원한 세상에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까?
답 : 하나님은 자신의 정의가 충족되기를 원하십니다.1 따라서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그 죗값을 완전히 치러야 합니다.2

1)출애23:7; 에스겔18:4 2)마태5:26; 이사53:11



제 13문 : 우리가 스스로 이 죗값을 치를 수 있습니까?
답 : 절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날마다 죄를 더해 갈 뿐입니다.1

1)시편130:3; 로마2:4-5



제 14문 : (단지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어떤 다른 피조물이 우리를 위해 죗값을 치를 수 있습니까?
답 :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죄 때문에 다른 피조물에게 벌을 내리시지 않습니다.1 더구나, (단지 피조물로서는) 어떤 피조물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짐을 감당할 수 없고, 다른 피조물을 그것에서 구원 할 수 없습니다.2

1)에스겔18:4,20 2)나훔1:6; 시편130:3; 49:7-9



제 15문 :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중보자와 구원자를 찾아야 합니까?
답 : 그는 참 사람(true man)으로1 의로우신 분이며2, 동시에 참 하나님(true God)으로3  모든 피조물보다 큰 능력을 가진 분입니다.  

1)고전15:21; 히브2:17 2)고후5:21; 히브7:26-27 3)이사야7:14; 예레23:6; 로마8:3-4



제 16문 : 왜 그분은 참 사람으로 의로우신 분이어야 합니까?
답 : 그가 참 사람이어야 하는 것은, 사람이 죄를 지었으니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이 죗값을 치러야 하는 하나님의 공의 때문입니다1. 그가 의로운 분이어야 하는 것은, 그 자신이 죄인으로서는 다른 사람들의 죗값을 치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2

1)로마5:12; 고전15:21; 히브2:14-16 2)히브4:15; 벧전3:18;



제 17문 : 왜 그분은 동시에 참 하나님이셔야 합니까?
답 : 그래야 그의 신성(神性)의 능력으로1 하나님의 진노의 짐을 그의 인성(人性)에 짊어지시고,2 의와 생명을 획득하여 우리에게 회복시켜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1.

1)로마1:4; 히브1:3 2)이사야53:4,11 3)이사야53:5,11; 요한3:16; 고후5:21



제 18문 : 그러면 누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으로 의로우신 그 중보자입니까?
답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1, 곧 우리의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을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분입니다.2

1)마태1:21-23; 누가2:11; 딤전2:5; 요한14:6 2)고전1:30; 골로2:2-3



제 19문 : 당신은 이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답 : 거룩한 복음에서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 복음을 처음에 낙원에서 계시하셨고1, 그 후에 거룩한 족장들과2 예언자들을 통하여 선포하셨으며3, 율법의 제사와 의식(儀式)을 통하여 예시(豫示)하셨으며4, 마침내 그의 독생자를 통하여 성취하셨습니다.5

1)창세3:15 2)창세12:3; 26:4 3)이사42:4; 49:6; 예레23:5-6; 31:32-33; 로마1:2 4)골로2:17; 히브10:1,7 5)로마10:4; 히브1:1-2; 에베1:10; 마태5:17



제 20문 : 그러면 모든 사람이 아담을 통하여 타락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습니까?
답 : 아닙니다.1 참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연합하여, 그의 모든 은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만 구원을 받습니다.2

1)마태7:14; 22:14 2)요한1:12-13; 3:16,18,36; 로마11:20; 히브4:2-3



제 21문 : 참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답 : 참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확실한 깨달음(a sure knowledge)입니다.1 또한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와2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3 죄 용서와 영원한 의와 구원이 다른 사람 뿐 아니라 내게도 일어났음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4 성령께서는 복음을 통해 이 믿음을 내 마음 속에 불러일으키십니다.5

1)요한17:3; 히브11:1-3; 야고2:19; 에베1:17-19  2)에베2:8-9  3)행13:39; 로마3:24 4)갈라2:20; 로마1:16-17; 딤후4:8 5)마태16:17; 고전1:21; 로마10:10; 히브4:14-16



제 22문 :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답 :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입니다.1 이 복음은 <사도신경>이 요약하고 있는데, 기독교 신앙에 관한 보편적이고 확실한 조항들입니다.

1)마태28:18-20; 요한20:31



제 23문 : 사도신경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답 :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어 음부에 내려가셨다가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어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제 24문 : 사도신경은 어떻게 나눌 수 있습니까?
답 : 셋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성부 하나님과 우리의 창조. 둘째는 성자 하나님과 우리의 구속(救贖), 셋째는 성령 하나님과 우리의 성화(聖化)에 관한 것입니다



제 25문 :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신데1, 당신은 왜 삼위(三位), 곧 성부 성자 성령을 말합니까?
답 :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안에서 자신을 그렇게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2 이 구별된 삼위(三位)는 한 분이시고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1)신명6:4; 이사야44:6; 고전8:4,6; 에베4:5-6  2)마태3:16-17; 28:18-19; 누가1:35; 요한14:26; 15:26; 고후13:13; 디도3:4-6



하나님 아버지에 관하여

제 26문 :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고백할 때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답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아버지께서 무(無)에서(out of nothing)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1, 영원한 뜻과 섭리로2 그것들을 보존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이 하나님이 그의 아들 그리스도 때문에 나의 하나님이시며 나의 아버지이심을 믿습니다.3 내가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기에, 그분은 나의 몸과 영혼에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시며4, 이 눈물골짜기 같은 세상에서 (그분이 내게 주셔서) 겪게 될 모든 역경을 내게 선으로 바꿔주실 것을 굳게 믿습니다.5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능히 그리하실 수 있으며6 미쁘신 아버지이시기에 기꺼이 그리하실 것입니다.7

1)창세1:1; 2:3; 출애20:11; 시편33:6; 이사야40:26; 행14:15 2)시편104:2-5,27-30; 로마11:36; 에베1:11 3)요한1:12-13; 20:17; 로마8:15-16; 갈라4:6-7; 에베1:5 4)시편55:22; 마태6:25-26; 누가12:22-24 5)시편84:5-6; 로마8:28  6)로마4:17-22; 로마8:37-39 7)마태7:9-11; 벧전4:19



제 27문 : 당신은 하나님의 섭리를 어떻게 이해합니까?
답 : 섭리란 언제 어디에나 미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1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손을 뻗어 일하듯이  하늘과 땅과 모든 만물을 붙드시고 다스리는 것입니다.2 그러기에 나뭇잎과 풀, 비와 가뭄, 풍년과 흉년, 먹고 마시는 것, 건강과 질병, 부와 가난,3 실로 이 모든 것은 우연히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손길에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4

1)예레23:23-24; 행17:24-28 2)히브1:3 3)예레5:24; 행14:15-17; 잠언22:2 4)잠언16:33; 마태10:29-30; 요한9:3



제 28문 :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섭리 가운데 보존하심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 : 역경 속에서 인내하고1 복을 받을 때는 감사하며,2 장래 일에 서도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미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으리라는 굳센 확신을 갖게 합니다.3 만물이 온전히 그분의 손 안에 있기에 그분의 뜻이 아니고는 그 어느 것도 움직일 수(바뀔 수) 없습니다.4

1)시편119:71; 야고1:2-4; 로마5:3-5 2)신명8:10; 살후5:18 3)시편37:5-6; 55:22 4)욥기2:6; 잠언19:21; 21:1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제 29문 : 왜 하나님의 아들을 예수, 곧 구주(救主)라 부릅니까?
답 : 그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구원하셨기 때문이며,1 또 그분 외에 는 그 어디에서도 구원을 찾아서도 안 되며, 찾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2

1)마태1:21; 히브7:25 2)이사야43:11; 요한15:5; 행4:11-12; 딤전2:5



제 30문 : 구원과 축복을 성인이나 자기 자신, 또 다른 데서 찾는 사람들도 유일한 구주 예수를 믿고 있는 것입니까?

답 : 아닙니다. 그들은 말로서는 주님을 자랑하지만, 그 행위로는 유일한 구주 예수를  부인합니다.1 예수가 완전한 구주가 아니든지,2 아니면 참 믿음으로 이 구주를 영접한 사람들이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분 안에서 찾든지, 둘 중에 하나만 진실입니다.3

1)고전1:13,30-31; 갈라5:4  2)고전3:11 3)요한1:16; 골로1:19-20; 에베3:20



제 31문 : 왜 그분을 그리스도 곧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고 부릅니까?
답 : 그분은 성부 하나님에게서 임명을 받고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1 그리하여 우리의 큰 예언자와 스승이 되셔서 구속에 관한 하나님의 오묘한 계획과 뜻을 완전하게 계시하시며2, 우리의 유일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자기 몸을 제물로 드려 우리를 구속하시고3 하나님 앞에서 쉬지 않고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4 우리의 영원한 왕이 되셔서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다스리시고 구원 안에서 살아가도록 보호하시고 지켜주십니다.5

1)이사야61:1; 시편45:7; 누가3:21-22; 4:18; 행10:38 2)요한15:15; 행3:22; 골1:26-27 3)히브9:12; 10:12-14  4)로마8:34; 히브7:25; 요일2:1 5)마태28:18-20; 요한10:28; 계시12:10-11  



제 32문 : 그러면 당신은 왜 그리스도인이라 불립니까?
답 :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지체(肢體)가 되어 그분의 기름부음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1 그리하여 나는 예언자로서 그분의 이름을 증언하고2, 제사장으로 살아있는 감사 제물로 자신을 그분께 드리며,3 왕으로서 자유롭고 선한 양심을 따라 이 세상의 죄와 마귀에 대항하여 싸우고4 장차 그분과 함께 모든 피조물을 영원히 다스릴 것입니다5.

1)고전12:13; 행2:17(요엘2:28); 요일2:27 2)마태10:32-33; 히브13:15 3)계1:6; 로마12:1; 벧전2:5 4)갈라5:16-17; 에베6:11; 딤전1:18-19; 14)계22:5



제 33문 :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그분은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부릅니까?
답 : 오직 그리스도만 하나님의 영원하신 참 아들이시기고1,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2.

1)요한1:1-3,18; 히브1:1-2; 요일4:9 2)요한1:12; 로마8:14-17; 에베1:5-6



제 34문 : 왜 당신은 그분을 '우리 주님'이라고 부릅니까?
답 : 그분은 금이나 은이 아니라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서 우리의 몸과 영혼을 모든 죄로부터 구속하셨고,1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하여 그분의 소유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2

1)벧전1:18-19; 고전6:19-20; 딤전2:5-6; 에베1:7  2)골로1:13-14; 히브2:14-15



제 35문 :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말로 당신은 무엇을 고백합니까?
답 : 하나님의 아들은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의 본질을 그대로 지니신 채1 성령의 역사로2 동정녀 마리아의 살과 피로부터3 참 사람의 본질을 취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다윗의 진정한 후손으로,4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은 형제가 되셨으나 죄는 없으십니다.5

1)요한1:1; 골로1:15-17; 요일5:20 2)누가1:35; 마태1:20; 3)누가1:3; 요한1:14; 갈라4:4 4)시편132:11; 로마1:3; 마태1;1 5)빌립2:7; 히브2:17; 히브4:15



제 36문 : 그리스도의 거룩한 잉태와 탄생은 당신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 : 그분은 우리의 중보자가 되십니다.1 그분의 깨끗함과 거룩함은 잉태하고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내 죄를 하나님 앞에서 가려줍니다.

1)딤전2:5-6; 히브9:13-15 2)시편32:1; 이사야53:11; 로마8:3-4; 3:25-26



제 37문 : '고난을 받으사'라는 말로서 당신은 무엇을 고백합니까?
답 :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사셨던 전 생애를 통해, 특히 생의 마지막 순간에, 온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자신의 몸과 영혼에 짊어지셨습니다.1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은 유일한 화목제물로서,2 우리의 몸과 영혼을 영원한 형벌에서 구속하였고3 하나님의 은혜와 의와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4

1)이사53:12; 벧전2:24; 3:18 2)히브10:14; 요일2:2; 4:10 3)로마8:1-4; 벧전1:18-19 4)로마3:24-26; 고후4:21; 요한6:51



제 38문 : 왜 그분은 재판장 '본디오 빌라도'에게서 고난을 받으셨습니까?
답 : 그리스도는 죄가 없었지만 세상의 재판에서 정죄 받으신 것은, 우리 위에 내릴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마태27:24  2)이사야53:4-5; 고후5:2



제 39문 : 그리스도께서 다른 방법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뜻이 있습니까?
답 :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이므로, 그분의 십자가 죽음은 내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짊어지셨음을 확신하게 합니다.

1)신명21:23; 갈라3:13



제 40문 : 왜 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낮아져야 했습니까?
답 :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 때문입니다1. 우리의 죗값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 이외는 달리 치를 방법이 없습니다.

1)창세2:17  2)로마8:3-4; 빌립2:8; 히브2:9



제 41문 : 왜 그분은 “장사”지내졌습니까?
답 : 그분의 장사는 그분이 실제로 죽으셨음을 증언합니다.1

1)이사야53:9; 요한19:40-42; 고전15:3-4



제 42문 :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죽어야 합니까?
답 : 우리의 죽음은 죗값을 치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 짓는 일을 끝내고 영생에 들어가는 문입니다.1

1)요한5:24; 빌립1:21-23; 살전5:9-10



제 43문 :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에서 우리가 받는 또 다른 유익은 무엇입니까?
답 :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의 옛 자아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장사되며, 그로 인해 육신의 악한 욕망이 더 이상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며, 오히려 우리 자신을 감사 제물로 그분께 드리게 됩니다.1

1) 로마6:3-14; 골로2:12; 갈라2:20



제 44문 : 왜 "음부에 내려가셨다"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습니까?
답 : 내가 크나큰 슬픔과 유혹을 당할 때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옥의 두려움과 고통에서 건지셨음을 확신하고 위로를 얻기 위함입니다.1 그분은 온갖 고난을 통하여, 특히 십자가에서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아픔과 공포와 고뇌를 친히 겪으시어2 이 구원을 보여주셨습니다.3  

1)이사야53:5 2)마가14:32-34; 15:34  3)시편18:5-6; 히브5:7



제 45문 :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 :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부활로서 죽음을 이기셨으니, 그를 통해 이루신 그 의에 우리로 참여하게 하십니다.1  둘째, 그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이제 새 생명으로 다시 일어났습니다.2 셋째,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영광스러운 부활에 대한 확실한 보증입니다.3

1)로마4:25; 고전15:16-20; 요한11:22-25 2)로마6:4-11; 에베2:4-6; 골로3:1-4; 벧전1:3-5  3)로마8:11; 고전15:20-26; 빌립3:20-21; 2+3)요한5:24-29; 11:23-26



제 46문 : "하늘에 오르사"라는 말로 당신은 무엇을 고백합니까?
답 :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셨으며,1 장차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들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때까지2 우리의 유익을 위해 그곳에 계십니다3.

1)마가16:19; 행1:9-11 2)로마8:34; 에베4:10; 히브4:14  3)마태24:30; 행1:11
  


제 47문 :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한 약속은 어떻게 됩니까?
답: 그리스도는 참 사람이요 참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적 본성(인성)으로는 지금 그분은 이 땅에 계시지 않으나,1 신성의 위엄과 은혜와 성령으로는 잠시도 우리를 떠나 계시지 않습니다.2  

1)요한16:28; 17:11 2)마태28:20; 요한14:16-18; 16:13



제 48문: 하나님으로 계신 곳마다 사람이신 그분이 함께 계시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까?
답: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의 신성은 제한 받지 않고 어디에나 계십니다.1 따라서 신성은 그분이 취하신 인성을 분명 초월하여 존재하지만, 이 인성 안에서 인격적으로 결합하여 존재합니다.2

1) 예레23:23-24; 행7:49 2) 요한1:14; 골로2:9



제 49문: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심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십니다.1 둘째, 우리의 육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으며,2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지체인 우리를 장차 하늘로 이끌어 올리시리라는 확실한 보증입니다.3 셋째, 그리스도께서는 그 보증으로 성령을 보내셔서,4 이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로 이 땅의 것을 구하며 살지 않고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신 그리스도께서 계신 ‘위엣 것’을 구하며 살게 됩니다.5  

1)로마8:34; 요일2:1  2)에베2:4-6 3)요한14:2-3; 17:24 4)요한14:16; 행2:23; 고후1:21-22  5)빌립3:20; 골로3:1-4



제 50문 :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란 말이 왜 덧붙여졌습니까?
답 :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로서 그곳에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 하늘에 오르셨습니다.1 아버지께서는 (그곳에 계신) 그분을 통해 만물을 다스리십니다.2

1)에베1:20-23; 골로1:18 2)마태28:18; 요한5:22-23



제 51문 :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답 : 첫째,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그분의 지체인 우리에게 하늘의 은사들을 부어주십니다.1 둘째, 그리스도는 그의 능력으로 모든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2

1)행2:33; 에베4:7-12 2)시편110:1-2; 요한10:27-30



제 52문 : 그리스도께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은 당신에게 어떤 위로를 줍니까?
답 : 나는 어떤 슬픔과 박해 가운데서도, 나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시어 내게 미칠 모든 저주를 없애주신 바로 그분이 심판자로서 하늘에서 다시 오시기를 머리 들고 간절히 기다립니다.1 그분이 그분과 나의 원수들을 영원한 저주로 벌하실 것이고, 그분의 선택받은 사람들과 함께 나를 하늘의 기쁨과 영광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2

1)누가21:28; 로마8:22-25; 빌립3:20-21; 디도2:13-14 2)마태25:31-46; 살후1:6-10



성령 하나님에 대하여

제 53문 : 당신은 "성령"에 관해서 무엇을 믿습니까?
답 : 첫째, 성령은 성부 성자와 함께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1 둘째, 성령은 내게도 임하시어2 참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모든 축복에 참여하게 하시며,3 나를 위로하시고4 나와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5

1)창세1:1-2; 마태28:19; 행5:3-4; 로마8:9 2)고전6:19; 고후1:21-22; 갈라4:6; 에베1:13 3)갈라3:14; 벧전1:2; 요한15:26; 로마8:14-17 4)행9:31 5)요한14:16-17; 벧전4:14



제 54문 : 당신은 "거룩한 공회(보편적 교회)“에 관하여 무엇을 믿습니까?
답 :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 처음부터 마지막 날까지 온 인류 가운데서 영생을 위해 선택하신 교회를1, 참된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2, 성령과 말씀으로 자신을 위해 불러 모으고 보호하며 보존하실 것을 믿습니다.3 나도 지금 이 공동체의 살아있는 지체이며, 영원히 그 지체로 남으리라는 것을 믿습니다.4

1)창세26:4; 이사야49:6; 로마10:12-13; 딤전3:15 2)에베1:10; 2:14-22; 4:1-6; 요한17:21; 고후5:18-21 3)로마8:29-30; 벧전2:9; 마태16:18; 요한10:28; 행20:38; 에베4:11-12; 이사야59:21; 요한10:28 4)고전12:27; 1:8-9; 시편23:1-6



제 55문 : 당신은 "성도가 서로 교통(교제)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답 : 첫째, 신자는 모두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함께(또한 각각) 주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그분의 모든 부요와 은사에 참여합니다.1 둘째, 각 신자는 자신의 은사를 다른 지체들의 유익과 복을 위하여 기꺼이 즐겁게 사용할 의무가 있습니다.2

1)고전12:12-13; 로마8:32; 요일1:3 2)고전12:20-27; 빌립2:2-5



제 56문 : 당신은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에 관하여 무엇을 믿습니까?
답 :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나의 죄와 내가 평생 싸워야 할 죄된 본성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아니하십니다.1 오히려 은혜로 그리스도의 의를 내게 허락하셔서 결코 정죄에 이르지 않게 하십니다.2
1)시편103:10-14; 예레31:34; 미가7:19; 고후5:19  2)로마3:23-24; 고후5:21; 요일2:1-2; 요한5:24; 로마8:1-2



제 57문 : "몸이 다시 사는 것"은 당신에게 어떠한 위로를 줍니까?
답 : 이 생명이 끝난 후 즉시 내 영혼은 머리되신 그리스도께로 갈 뿐 아니라,1 여기 내 육신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일으킴을 받아서 내 영혼과 다시 결합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될 것입니다.2
1)누가23:43; 빌립1:21-23; 계14:13  2)고전15:20,53-54; 빌립3:21; 요일3:2



제 58문 : "영원히 사는 것"에서 당신은 어떠한 위로를 받습니까?
답 : 이미 지금 내 마음속에 영원한 기쁨이 시작되고 있음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1 이 생명이 끝나면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지 못하는 완전한 축복, 곧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2

1)로마14:17; 요한17:3 2)요한17:24; 고전2:9; 계21:4



제 59문 : 이 모든 것을 믿는 것이 당신에게 지금 어떠한 유익이 있습니까?
답 :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며 영원한 생명의 상속자가 됩니다.1
1)요한3:36; 로마1:17(하박국2:4)



제 60문 :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있습니까?
답 :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믿음으로만 됩니다.1 비록 내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크게 어겼고, 그 가운데 어느 하나 지키지 못했으며, 아직도 악을 향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내 양심이 나를 고소할지라도,2 하나님께서는 나의 공로가 전혀 없이 순전히 은혜로서,3 그리스도의 만족케 하심(satisfaction)과 의와 거룩하심을 내게 선물로 주십니다.3 하나님께서는 마치 내가 전혀 죄가 없고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여기시며,4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루신 모든 순종을 나 자신이 이룬 것처럼 여겨주십니다.5 오직 믿는 마음으로 나는 이 선물을 받습니다.

1)로마3:23-24; 5:1-2; 갈라2:16; 에베2:8-9; 빌립3:8-11  2)로마3:9-10; 7:23; 3)디도3:4-5; 에베2:8  4)로마4:24-25; 고후5:21 5)로마4-8; 고전1:30; 요일2:1-2  



제 61문 : 당신은 왜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말합니까?
답 : 하나님께서 나를 기쁘게 받으시는 것은 내 믿음이 어떤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만족케 하심과 의와 거룩함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의가 되기 때문입니다.1 오직 믿음으로 이 의를 받아들여 나의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2

1)로마4:4-5; 고전1:30-31 2)요한3:18; 로마10:10



제 62문 : 우리의 선행은 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가 될 수 없으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없습니까?
답 :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 수 있는 의는 절대적으로 완전해야 하며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히 일치해야 합니다.1 하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한 최고의 행위라도 모두 불완전하며 죄로 더럽혀져 있습니다.2

1)갈라3:10  2)이사야64:6



제 63문 :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행에 대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보상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데, 우리의 선행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답 : 이 보상은 일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시는 선물입니다.1

1)마태5:12; 히브11:6  3)누가17:10; 딤후4:7-8



제 64문 : 이러한 가르침이 사람들을 무관심과 사악으로 이끌지 않겠습니까?1
답 : 아닙니다. 참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습니다.1

1)로마3:8  2)누가6:43-45; 요한15:5; 야고2:17,22,26



거룩한 성례에 관하여

제 65문 :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혜에 참여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 믿음은 어디서 옵니까?
답 : 성령에게서 옵니다.1 성령은 거룩한 복음 선포를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 믿음을 불러일으키며,2 성례를 통해 그 믿음을 굳세게 하십니다.3

1)요한3:5; 고전2:12; 고전12:3 2)행16:14; 로마10:17; 벧전1:23; 야고1:18  3)마태28:19-20; 고전10:16



제 66문 : 성례는 무엇입니까?
답 : 성례란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룩한 표시(signs)이며 날인(seals)으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입니다.1 하나님은 이 성례시행을 통해 복음에 약속한 것을 더욱 충만하게 선언하고 확증하십니다.2 그 복음약속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제사를 드려 이루신 것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입니다.3

1)창세17:11; 로마4:11  2)마태26:26-28  3)히브10:10



제 67문 : 그러면 말씀과 성례 이 둘은 우리의 믿음을 구원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제사로 온전히 향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까?
답 : 참으로 그렇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께 달려있다는 사실을, 복음(말씀)으로 가르치시고, 성례로 확신시켜 줍니다.1

1)로마6:3; 고전11:26; 갈라3:27



제 68문 : 신약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제정하신 성례는 몇 가지입니까?
답 : 거룩한 세례와 성만찬, 두 가지입니다1

1)마태28:19-20; 고전11:23-26



거룩한 세례에 관하여

제 69문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드리신 단번의 제사가 당신에게 유익함을 거룩한 세례에서 어떻게 깨닫고 확신합니까?
답 : 그리스도께서는 물로 씻는 일(외적 의식)을 제정하시고, 그 일을 통해 물이 몸에서 더러운 것을 씻어내듯이 그분의 피와 성령이 내 영혼의 더러운 것, 곧 내 모든 죄를 씻으신다는 것을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1

1)행2:38; 마태3:11; 로마6:3-4; 벧전3:21



제 70문 :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으로 씻김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답 : 그리스도의 피로 씻김 받는다는 것은, 십자가의 제사에서 우리를 위해 흘린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은혜로 하나님이 주시는 죄 사함을 받았음을 뜻합니다.1 성령으로 씻김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고 그리스도의 지체로 거룩하게 되어 더욱더 죄에 대해서는 죽고 거룩하고 흠 없는 삶을 살도록 이끄심을 뜻합니다.2

1)스가랴13:1; 에베1:7-8; 계17:14 2)에스겔36:25-27; 요한3:5-8; 고전6:11; 골로2:11-12



제 71문 : 세례의 물로 씻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와 성령으로 우리를 씻으신다는 확실한 약속이 어디에 있습니까?
답 : 세례를 제정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태28:19).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마가16:16). 이 약속은 성경이 세례를 “중생의 씻음” 혹은 “죄를 씻음”이라고 부른 데서도 거듭 나타납니다(디도3:5; 행22:16)



제 72문 : 물에 의한 외적 씻음 그  자체가 죄를 씻어 줍니까?
답 :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만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합니다.1

1)마태3:11; 벧전3:21; 요일1:7



제 73문 : 그러면 왜 성령께서는 세례를 ‘중생의 씻음’과 ‘죄의 씻음’이라고 부르십니까?
답 :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데는 타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이 우리의 더러움을 씻어주듯이 그리스도의 피와 영이 우리의 죄를 씻어준다는 점을 가르치려 하십니다.1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신적 보증과 표시를 통하여 우리의 죄에 대한 영적인 씻음이 물로 몸을 씻음처럼 실제적임을 확신시키려 하셨습니다.2

1)고전6:11; 계1:5; 7:14  2)행2:38; 갈라3:27



제 74문 : 유아들도 세례를 받아야 합니까?
답 : 그렇습니다. 어른들뿐만 아니라 유아들도 하나님의 언약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1 유아들도 어른들 못지않게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속죄와 믿음을 일으키는 성령을 약속 받았습니다.2 그러므로 유아들은 언약의 표인 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교회에 연합하게 되고 불신자들의 자녀들과 구별되어야 합니다.3 이것이 구약에서는 할례를 통해 이루어졌으나, 신약에서는 세례로 바뀌어 제정되었습니다.4

1)창세17:7; 마태19:14; 2)이사야44:1-3; 시22:10; 행2:38-39  3)행10:47; 고전7:14 4)골로2:11-13



거룩한 성만찬에 대하여

제 75문 : 십자가에서 단번에 드리신 그리스도의 속죄제사와 그의 모든 축복에 당신이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성만찬은 어떻게 깨닫게 하며 확신시켜 줍니까?
답 :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와 모든 성도들에게 그를 기념하여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시라고 명령하시며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1 첫째, 주님의 떡이 나를 위해 떼어 나눠주고, 주님의 잔이 내게 건네지는 것을 내 눈으로 분명히 보듯이, 주님의 몸도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바쳐지고 찢겨졌으며 주님의 피도 나를 위해 흘린 것이 확실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확실한 표지로서 주님의 떡과 잔을 목사의 손에서 받아 입으로 맛보는 것처럼,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몸과 흘리신 피로 내 영혼이 영생에 이르도록 손수 먹이시고 마시게 하실 것이 확실합니다.2

1)마태26:26-28; 마가14:22-24; 누가22:19-20



제 76문 :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흘리신 피를 마신다는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답 : 그것은 믿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믿음으로 죄 용서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1 나아가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또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에 더욱더 연합함을 뜻합니다.2 비록 주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을지라도3 우리는 그분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가 되어 살아갑니다.4 그리하여 우리 몸의 지체들이 한 영혼에 의해 살고 다스림을 받듯이 우리도 한 성령에 의해 영원히 살고 다스림을 받습니다.5

1)요한6:35,40,47-54 2)요한6:55-56; 고전12:13 3)행1:9-11; 3:21; 골3:1 4)고전6:15-19; 에베5:29-30; 요일4:13 5)요한6:56-58; 15:1-6; 요일3:24



제 77문 : 믿는 자들이 이 뗀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시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그의 몸과 피로 먹이고 마시게 하겠다는 분명한 약속을 어디서 하셨습니까?
답 : 성찬을 제정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11:23-26)
사도 바울도 거듭 이 약속의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전10:16-17)



제 78문 :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실제 몸과 피로 변합니까?
답 : 아닙니다. 세례의 물이 그리스도의 피로 변하지 않고 그 자체가 죄를 씻지 못하고 단순히 하나님께서 주신 표지와 확증인 것처럼,1 주님의 만찬의 떡도 비록 성례의 본질과 용어에 따라2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릴지라도3 그리스도의 실제 몸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4

1)에베5:26; 디도3:5  2)마태26:26-29 3)고전10:16; 10:26 4)창세17:10-11; 출애12:11; 고전10:1-4



제 79문 :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께서는 떡을 자신의 몸이요, 잔을 자신의 피, 또는  자신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라고 부르셨습니까? 그리고 사도 바울은 왜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까?
답 :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분은 성찬을 통해 떡과 포도주가 우리 육신의 생명을 살지게 하듯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몸과 흘리신 피가 우리 영혼을 영생에 이르게 하는 참된 양식과 음료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려 하십니다.1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분은 눈에 보이는 이러한 표지와 보증으로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신시키려 하십니다. 첫째, 그리스도를 기념하면서 이 거룩한 표지들을 입으로 받아먹듯이 우리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분의 몸과 피에 확실히 그리고 실제로 참여합니다.2 둘째,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모든 고난과 순종이 - 마치 우리 자신이 직접 죗값을 치르기 위해 고난당한 것처럼 여겨져 - 확실히 우리의 공로가 됩니다.3

1)요한6:51,53-55  2)고린10:16-17 3)로마6:5-11; 고후5:14



제 80문 : 주의 만찬은 로마가톨릭의 미사와 어떻게 다릅니까?
답 : 주의 만찬은 첫째, 십자가에서 단번에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제사를 통해 우리 모든 죄가 완전히 용서받았음을 증거합니다.1 둘째, 성령에 의해 우리는 그리스도께 연합되었으며,2 그분의 참된 몸은 지금 하늘에 계시면서 하나님 오른편에서3 우리의 경배를 받으신다는 것을 증거합니다.4 그러나 미사는 첫째, 사제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해 날마다 그리스도(의 희생)를 드리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의해서 용서를 받을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둘째, 그리스도는 떡과 포도주란 형체 속에서 몸으로 존재하기에, 그 속에서 경배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미사는 단번에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와 고난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며 저주받을 우상숭배입니다

1)요한19:30; 히브17:26-27; 9:25-28; 10:10-14 2)고전10:16-17 3)히브1:3; 8:1 4)요한4:21-24  



제 81문 : 주님의 식탁에는 누가 참여할 수 있습니까?
답 : 자신의 죄와 그 같은 자신의 모습에 참으로 애타하는 사람,1 하지만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의해 자신의 죄가 용서받고 자신 안에 남아 있는 연약함이 가려졌음을 믿는 사람,2 더 굳센 믿음으로  더 바른 삶을 살기를 갈망하는 사람입니다.3 하지만 위선자들과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은 자기가 받을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 됩니다.4

1)시편51:3-4,17 2)시편32:1-5 3)시편51:10 4)고전10:19-22; 11:28-29  



제 82문 : 자신의 고백과 생활로서 “믿지 않음과 불의함”을 드러내는 자도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답 :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더럽히는 일이며 하나님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내릴 것입니다.1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도들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의 교회는 천국의 열쇠를 사용하여 그들이 생활을 바르게 할 때까지 성찬에 참여시키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1)고전11:27-34; 시편50:14-16; 이사야1:11-17; 66:3; 예레미야7:21-23



제 83문 : 천국의 열쇠란 무엇입니까?
답 : 거룩한 복음 선포와 교회의 권징(勸懲)을 말하는데, 이 두 가지를 통하여 믿는 자에게는 천국의 문이 열리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닫힙니다.1

1)마태16:18-19; 마태18:15-18  



제 84문 : 복음 선포에 의해 천국은 어떻게 열리고 닫힙니까?
답 :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사람들의 모든 죄를 실제로 용서하신다는 사실이 신자들 전체나 개인에게 공적으로 선포되고 증언될 때, 참된 믿음으로 이 복음의 약속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천국이 열립니다.1 하지만 회개하지 않는  불신자들과 위선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와 영원한 형벌이 임한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선포하고 증언할 때 천국은 닫힙니다.2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복음 증언에 따라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에서 심판하실 것입니다.2

1)마태16:19; 요한20:21-23  2)딤전5:20; 요이1:10-11; 고전5:11



제 85문 : 교회의 권징을 통해 어떻게 천국은 닫히고 열립니까?
답 :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르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 교리나 생활에서 그리스도인답지 않을 때는 먼저 형제로서 거듭 권면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잘못과 사악함에서 돌이키기를 거부한다면, 그 사실을 교회, 곧 치리회(治理會)에 보고해야 합니다. 만약 그들이 교회의 권면마저 듣지 않는다면, 치리회는 성례참여를 금하여 성도의 교제에 참여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그들을 쫓아내실 것입니다.1 그러나 만약 그들이 참된 회개를 약속하고 실천해 보이면, 그리스도와 교회의 지체로 다시 받아들입니다.2

3)마태18:15-20; 고전5:3-5,11-13; 살후3:14,15 2)누가15:20-24; 고후2:6-11




제 3부 우리의 감사

제 86문 : 우리자신의 공로란 조금도 없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직 은혜로 우리의 죄와 비참에서 구원을 받았는데, 우리는 왜 선을 행해야 합니까?
답 :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시고, 성령으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온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며1 찬양 드려야 합니다.2 뿐만 아니라 그 열매로서 우리 자신은 믿음에 확신을 얻고,3 경건한 생활로서 우리 이웃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4

1)로마6:13; 12:1-2; 벧전2:5-10; 엡2;10 2)마태5:16; 고전6:19-20; 벧전2;12 3)마태7:17-18; 갈라5:22-23; 벧후:10-11 4)마태5:14-16; 로마14:18-19; 벧전3:1-2



제 87문 :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회개하지도 않는 생활을 하면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답 :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부정한 자, 우상숭배자, 간음하는 자, 도둑질하는 자, 탐욕스런 자, 술 취하는 자, 비방하는 자, 강도질하는 자와 같은 자들은 하나님나라를 기업으로 물려받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1

1)이사야35:8; 고전6:9-10; 갈라5:19-21; 에베5:5-6; 요한3:14-15; 계22:15



제 88문 : 참 회개 또는 회심은 무엇입니까?
답 :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사는 일입니다.1

1)로마6:4-11; 고후5:16-17; 에베4:22-24; 골로3:5-10



제 89문 : 옛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하나님을 거역한 우리의 죄에 대해 마음깊이 슬퍼하며, 나아가 그것을 미워하고 피하는 일입니다.1

1)시편 51:3-4,17; 요엘2:12-13; 로마8:12-13



제 90문 : 새 사람으로 다시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안에서 마음으로 즐거워하며,1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온갖 선을 행하며 사는 일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2

1)시편51:8,12; 이사57:15; 로마5:1-2; 14:17 2)로마6:10-11; 갈라2:19-20



제 91문 : 그렇다면 선한 일을 행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우리 자신의 생각이나 사람의 관습에 따라서가 아니라,1 참 믿음으로2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서3, 그분의 영광을 위해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4

1)신명12:32; 이사야29:13-14; 에스겔20:18-19; 마태15:7-9 2)로마14:23; 히브11:6 3)레위18:4; 삼상15:22; 에베2:10 4)고전10:31; 미가6:8  



제 92문 : 하나님의 율법은 무엇입니까?
답 :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출애20:1-17; 신명5:6-21).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제1계명 :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제2계명 :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제3계명 :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제4계명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제5계명 :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제6계명 : 살인하지 말라
제7계명 : 간음하지 말라
제8계명 :도둑질하지 말라
제9계명 :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제10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제 93문 : 이 계명들은 어떻게 나눌 수 있습니까?
답 :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부분은 우리가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면서 살아야 할 것인가를, 둘째 부분에서는 우리가 이웃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1

1)마태22:37-39



제 94문 : 제 1계명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답 : 바로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모든 우상숭배와2 마술과 미신3, 성인(聖人)이나 어떤 피조물을 향한 기도도 피하고 멀리하는 것입니다.4 나아가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만을 바르게 알고,5 그분만을 믿으며6 모든 겸손과 인내로 그분에게만 순종하며,7 오직 그분에게서만 모든 선한 것을 기대하며,8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고9 경외하며10 경배하는 것입니다.11 그러기에 지극히 작은 일 하나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살기보다는 오히려 피조물을 포기하는 것입니다.12

1)고전6:9-10; 10:7-14; 요일5:21 2)레위19:31; 신명18:9-12; 4)마태4:10; 계19:10; 22:8-9  5)요한17:3 6)예레17:5-7; 7)벧전5:5-6; 골로1:11; 히브10:36 8)시편104:27-30; 야고1:17 9)마태22:37(신명6:5) 10)잠언1:7; 9:10; 시편111:10; 벧전1:17 11)마태4:10(신명6:13) 12)마태5:29-30; 10:37-39



제 95문 : 우상숭배란 무엇입니까?
답 : 우상숭배란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 ‘대신에’ 또는 하나님과 ‘나란히’(동등하게), 그 무엇을 신뢰하거나 만들어 소유하는 일입니다.1

1)대상16:26; 갈라4:8-9; 에베5:5; 빌립3:19; 마태6:24



제 96문 : 제 2계명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어떠한 형태로든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고1 말씀을 통하여 명하신 것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예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2

1)신명4:15-19; 이사야40:18-25; 행17:29; 로마1:23-25 2)레위10:1-7; 삼상15:22-23;



제 97문 : 그러면 어떤 형상도 만들면 안 됩니까?
답 : 하나님은 어떤 형태로든 눈에 보이는 것으로 표현할 수 없으며, 표현해서도 안 됩니다. 피조물은 형상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그것에 경배하거나 또는 하나님을 섬기는 수단으로 쓰기 위해 만들거나 소유하는 일은 금하셨습니다.1

1)출애34:13,14,17; 신명16:22; 왕하18:4-5; 이사야40:25



제 98문 : 그렇다면 교회에서 (성도들을 교육하기 위한)<평신도를 위한 책>으로 형상들을 사용하는 것도 안 됩니까?
답 :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지혜로운 척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 못하는 우상을 통해서가 아니라1 살아있는 말씀의 선포를 통해서 자기 백성들을 가르치시기를 원하십니다.2

1)예레10:8; 하박2:18-20 2)로마10:14-17; 딤후3:16-17; 벧전1:19



제 99문 : 제 3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저주나 거짓 맹세, 또는 불필요한 서약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거나 그릇 사용하지 말아야 하며,1 나아가 침묵하는 방관자가 되어서 그러한 무서운 죄악에 동참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2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경외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사용해야하며,3 우리의 모든 말과 행실로서 하나님을 바르게 고백하고 그 이름을 부르며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4

1)레위24:10-17; 19:12; 마태5:37; 야고5:12; 로마2:24 2)레위5:1; 잠언29:24 3)시편99:1-5; 예레4:2; 4)시편 50:14-15; 골로3:17; 마태10:32-33; 로마10:9-10



제 100문 : 맹세와 저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 그것을 힘써 가로막거나 금지하지 못한 자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진노가 내릴 만큼 그렇게 중대한 죄입니까?
답 : 진실로 그렇습니다.1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보다 더 큰 죄가 없으며 그것보다 더 그분의 진노를 자아내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죄에 대하여 죽음의 형벌을 내리십니다.1

1)레위5:1; 24:15-16



제 101문 :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경건하게 맹세할 수는 있지 않습니까?
답 : 그렇습니다. 정부가 국민에게 요구하거나,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진리를 보존하고 신뢰를 증진하려는 목적으로 선서가 꼭 필요한 상황에서는 맹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맹세는 하나님의 말씀에서도 인정하고 있으며1 신구약의 성도들도 올바르게 사용했습니다.2

1)신명6:13; 10:20; 히브6:16 2)창세21:24; 왕상1:29-30; 로마1:9; 고후1:23



제 102문 : 성인들이나 다른 피조물로서도 맹세할 수 있습니까?
답 : 안 됩니다. 올바른 맹세는, 홀로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을 불러, 그분을 진리의 증인으로 삼는 것이며, 이것은 또한 내가 거짓으로 맹세할 때 벌을 내리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1 어떤 피조물도 그러한 영예를 받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2

1)로마9:1; 고후1:23  2)마태5:34-37; 야고5:12



제 103문 : 제 4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첫째, 말씀선포의 직무와 교육이 계속 이루어지기를 바라며,1 특히 안식의 날인 주일에 하나님의 교회에 부지런히 참석하여,2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3 성례에 참여하고4 주님을 공적으로 부르며5 가난한 이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헌금을 드리는 일입니다.6 둘째,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내 속에서 일하시게 하여, 평생 살아가면서 악한 일을 그만두며,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부터 이미 영원한 안식을 시작하는 것입니다.7

1)신명6:4-9; 고전9:13-14; 딤후2:2; 3:13-15; 디도1:5 2)시편40:9-10; 행2:42-47; 히브10:23-25 3)로마10:14-17; 딤전4:13; 계1:3  4)행20:7; 고전11:23-24 5)골로3:16; 딤전2:1-2 6)신명15:11; 고전16:1-2; 딤전5:16 7)히브4:9-11



제 104문 : 제 5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내 위에 있는 모든 권위를 존경하고 사랑하며 신실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선한 가르침과 징계에 대해서는 합당한 순종을 하며,2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우리를 다스리시기 때문에,2 그들의 약점과 부족함에 대해서는 인내하라는 말씀입니다.3

1)출애21:17; 잠언1:8; 4:1; 로마13:1-2; 에베6:1-2,5 골로3:18-22 2)로마13:2-4; 3)잠언23:22 벧전2:18



제 105문 : 제 6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내 이웃을 생각이나 말과 몸짓으로, 무엇보다도 행동으로 깔보거나 미워하거나 해치거나 죽이지 말아야 합니다.1 자신이 이런 일을 행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시켜서도 안 되며, 어떤 복수심도 버려야 합니다.2 더 나아가 스스로를 해하거나 부주의하여 위험에 빠뜨려서도 안 됩니다.3 이 같은 살인을 막기 위해서 정부는 칼을 가지고 있습니다.4

1)창세9:6; 마태5:21-22 2)마태18:35; 로마12:19; 에베4:26 3)골로2:23 4)출애21:14; 로마13:4



제 106문 : 이 계명은 살인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까?
답 : 아닙니다. 살인을 금지시킴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살인의 뿌리가 되는 시기, 증오, 분노, 복수심 등을 미워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1 하나님의 눈에는 이 모든 것들이 살인에 해당합니다.2

1)잠언14:30; 시편37:8; 로마1:29; 갈라5:19-21; 요일2:9-11 2)요일3:15



제 107문 : 그렇다면, 이런 방법으로 이웃을 죽이지 않았다면, 그것으로 이 계명을 다 지킨 것입니까?
답 :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기와 증오와 분노를 정죄하심으로써, 우리로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고1 인내와 평화와 온유와 자비와 친절을 보이며2 할 수 있는 한 그들을 위험에서 보호하고 심지어 원수에게까지 선을 베풀라고 말씀하십니다.3

1)마태7:12; 22:39; 로마12:10 2)마태5:3-12; 누가6:36; 로마12:18; 갈라6:1-2; 에베4:2-3; 골로3:12; 벧전3:8  3)출애23:4-5; 마태5:44-45; 로마12:20-21



제 108문 : 제 7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모든 부정(不貞)한 짓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습니다.1 따라서 거룩한 혼인관계에 있든지 독신으로 살든지, 우리는 어떤 부정이라도 온 마음으로 미워하고 순결하면서 단정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2  

1)레위18:30; 에베5:3-5 2)히브13:4; 유다1:22-23; 살전4:3-8



제 109문 : 하나님은 이 계명에서 간음이나 그 같은 부끄러운 죄만을 금하십니까?
답 : 우리의 몸과 영혼은 모두 성령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전(殿)이므로, 하나님께서는 몸과 영혼이 순결하고 거룩하게 지켜지기를 원하십니다.1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부정한 행동이나 몸짓, 말이나 생각이나 욕정 등 그곳으로 유혹하는 모든 것을 금하셨습니다.2

1)고전6:18-20; 에베5:3-4 2)고전15:33; 에베5:18; 마태5:27-29



제 110문 : 제 8계명에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답 : 하나님께서는 단지 국가의 법률에 어긋나는 도둑질과 강도질만을 금하신 것이 아니라,1 온갖 속임수와 간계를 사용하여 이웃의 재화를 자기의 것으로 삼으려는 시도들을 도둑질이라고 말씀하십니다.2 거짓 저울과 자와 되, 위조상품, 폭리, 고리대금업 등 그 밖에 하나님께서 금하신 일들입니다. 이런 일들은 폭력으로 또는 합법성을 가장하고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탐욕과,4 그분의 선물(재화)을 조금이라도 잘못 쓰거나 낭비하는 것을 금하십니다.5

1)출애22:1; 고전5:9-10; 6:9-10; 레위19:13 2)누가3:14; 야고5:1-6 3)신명25:13-16; 시편 15:5; 잠언11:1; 12:22; 에스겔45:9-12; 미가6:9-11; 누가6:35 4)누가12:15; 에베5:5 5)잠언 21:20; 23:20-21; 누가16:10-13



제 111문 : 이 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할 수 있는 한 내 이웃의 유익을 위해 애쓰고, 다른 사람들이 내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남들을 대하며,1 또한 가난한 이들을 도울 수 있도록 성실히 일해야 합니다.2

1)이사야58:5-10;  마태7:12  2)갈라6:9-10; 에베4:28



제 112문 : 제 9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어느 누구에게도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야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왜곡하거나 뒤에서 헐뜯거나 비방하지 말아야 하며, 사연을 들어보지도 않고 성급하게 정죄하거나 그런 일에 동참하지 말아야 합니다.1 하나님의 무서운 진로를 가져올, 본질적으로 마귀의 일인 모든 거짓과 속이는 일을 피해야 합니다.2 법정이나 그 밖의 어느 곳에서든 진실을 사랑하고 그 진실을 정직하게 말하며 공적으로 증언해야 합니다.3 또한 이웃의 명예와 이름을 보호하고 높이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4

1)잠언19:5,9; 21:28; 시편15:3; 로마1:28-32; 마태7:1-2; 누가6:37 2)요한8:44; 계시21:8 3)레위19:11-12; 잠언 12:22; 13:5  4)고전13:6; 에베4:25



제 113문 : 제 10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하나님의 계명에서 어긋나는 것은 아무리 작은 욕망이나 생각이라도 마음속에 품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언제나 마음을 다해 모든 죄를 미워하고 의를 좋아해야 합니다.1

1)시편19:7-14; 139:23-24; 로마7:7-8



제 114문 : 하나님께로 회개한(돌아온) 사람들은 이 계명들을 완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
답 :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사람일지라도 그 순종이란 겨우 시작에 지나지 않습니다.1 그럴지라도 계명의 일부분만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겠다는 목표를 갖고 열정을 다해야 합니다.2

1)전도7:20; 로마7:14-15,21-24; 고전13:9; 요일1:8-10 2)시편1:1-2; 119:5-6,106; 요일2:3



제 115문 : 아무도 이 세상에서 십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없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엄격하게 십계명을 강조하십니까?
답 : 첫째, 평생 살아가면서 우리의 죄된 본성을 더욱더 알게 되고,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죄 용서와 의로움을 더욱더 간절히 추구하기 위해서입니다.1 둘째, 이 생을 마치고 우리의 목표인 완전함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더욱더 변화되기를 하나님께 성령의 은혜를 간구하기 위해서입니다.2

1)시편32:1-5; 로마7:24-25; 요일1:9; 마태5:6 2)고전9:24; 빌립3:12-16; 요일3:1-3



기도

제 116문 : 그리스도인에게 왜 기도가 필요합니까?
답 : 기도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감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1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전심전력으로 끊임없이 구하며 감사하는 사람에게만 은혜와 성령을 주시기 때문입니다.2

1)시편 50:14-15; 116:12-19; 살전5:16-18; 빌립4:6  2)마태7:7-8; 누가11:9-13



제 117문 : 하나님께서 기뻐 들으시는 기도는 어떤 기도입니까?
답 : 첫째, 말씀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 그분이 기도하라고 명하신 모든 것들에 대해 온 마음으로 간구해야 합니다.1 둘째, 우리 자신의 부족과 비참을 철저히 깨닫고,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겸손히 드리는 기도입니다.2 셋째, 비록 우리는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약속하신대로, 우리 주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의 기도를 분명히 들어주신다는 굳센 확신을 가진 기도입니다.3

1)시편145:18-20; 로마8:26-27; 야고1:5; 요일5:14-15  2)대하20:12; 시편2:11; 34;18; 이사야66:2  3)대하7:14; 다니엘9:17-19; 야고1:6-8; 요한14:13-14; 16:23; 로마10:13



제 118문 :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까?
답 : 영혼과 몸에 필요한 모든 것인데, 그것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담겨 있습니다.1

1)야고1:17; 마태6:33



제 119문 :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무엇입니까?
답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태6:9-13; 누가11:2-4)



제 120문 : 그리스도께서는 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명하셨습니까?
답 : 그리스도께서는 기도의 첫머리에, 우리로 하나님을 향한 어린아이와 같은 경외심과 신뢰를 불러일으키고자 하셨는데, 이것이야말로 우리 기도의 기초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하나님은,1 육신의 부모가 이 세상의 것에 대한 자녀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는 것보다 더, 우리가 믿음으로 간구하는 것을 결코 거절하지 않으십니다.2  

1)이사야63:16; 요한20:17; 갈라4:6  2)마태7:9-11; 누가11:11-13



제 121문 : '하늘에 계신'이란 말이 왜 덧붙여졌습니까?
답 : 그 말의 뜻은 하나님이 가지신 하늘의 위엄을 땅의 권세와 혼동하지 말라는 것과,1 그분의 전능하신 능력에서 우리의 몸과 영혼에 필요한 모든 것을 기대하라는 것입니다.2

1)예레23:23-24; 대하6:18-19; 행17:24-25 2)마태6:25-34; 로마8:31-32



제 122문 : 첫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답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인데, 이런 뜻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로 주님을 바르게 알게 해 주셔서,1 주님의 전능과 지혜와 선하심과 의와 자비와 진리를 드러내는 주님의 모든 역사(役事)를 우리로 보게 하시고,2 이로 말미암아 주님을 거룩하게 여기고 경배하며 찬양하게 하소서.3 또한 우리의 모든 생활, 곧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인도하시어, 주님의 이름이 우리 때문에 더럽혀지지 않고 언제나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옵소서”4

1)예레9:23-24; 31:33-34; 마태16:17; 에베1:17 3)출애34:6-7; 시편145:8-9; 예레32:16-20 3)누가1:46-55, 68-75; 로마11:33-36  4)시편 115:1; 마태5:13-16



제 123문 : 둘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답 : ‘나라가 임하옵소서’인데 이런 뜻입니다.
“우리가 더욱더 주님께 순종하도록 주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다스려주옵소서.1 주님의 교회를 보존하시고 부흥케 하옵시며,2  마귀의 역사와 주님께 대항하여 스스로를 높이는 모든 세력과 주님의 거룩한 말씀에 반대하는 모든 악한 음모를 멸하여 주옵소서.3 주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져, 주께서 만유의 주가 되실 때까지 그리 하옵소서.4”

1)시편119:5,105; 143:10; 이사야59:21 2)시편51:18; 122:6-9; 마태16:18; 행2:42-47; 6:7; 9:31 3)시편2:6-9; 로마16:20; 요일3:8 4)고전15:28; 계시22:17,20



제 124문 : 셋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답 :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인데, 이런 뜻입니다.
“우리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버리고,1 참으로 선하신 주님의 뜻에 불평 없이 순종하게 하옵소서.2 그리하여 하늘의 천사들처럼,3 우리 각 사람이 자신의 직분과 부르심을 즐겁고 신실하게 수행하게 하옵소서”.4

1)누가9:23; 14:26-27  2)누가22:42; 로마12:2  3)시편103:20-21  4)고전7:17-24; 갈라5:13; 에베4:1-3; 살후2:11-12; 히브3;1



제 125문 : 넷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답 :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인데, 이런 뜻입니다
“우리의 몸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내려주소서.1 그래서 오직 주님만이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심을 깨닫게 하시고,2 주님께서 복 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염려와 노동, 아니 주님의 선물조차도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게 하옵소서.3 그리하여 우리로 그 어떤 피조물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신뢰하게 하소서”.4

1)출애16:4; 시편104:27-30; 145:15-16; 마태6:25-34 2)행14:17; 17:25; 야고1:17 3)신명8:3; 시편127:1-2; 고전15:58 4)시편55:22; 62:10; 146:3-4; 예레17:5-8; 히브13:5-6



제 126문 : 다섯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답 :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인데, 이런 뜻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거하는 증거로서,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마음 다해 용서하기를 굳게 다짐하오니,1 그리스도의 피로서 우리의 범죄와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악행을 용서하시어 불쌍한 죄인인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1)마태6:14-15; 18:35  2)시편51:1-7; 143:2; 로마8:1-2; 요일2:1



제 127문 : 여섯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답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인데, 이런 뜻입니다.
“우리 자신은 너무나 연약하여 한순간도 스스로 설 수 없으며,1 더욱 우리의 불구대천의 원수인 마귀와2 세상과3 우리의 육체가4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하나이다. 그러하오니 주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붙드시고 강하게 하셔서, 이 영적싸움에서 거꾸러져 패하지 않으며,5 마침내 완전한 승리를 거둘 때까지, 언제나 원수와 당당하게 맞서게 하옵소서”.6

1)시편 103:14-16; 요한15:5 2)고후11:14; 에베6:10-13; 벧전5:8 3)고후15:18-21; 요일2:151-16 4)로마7:23; 갈라5:17-21 5)마태10:19-20; 26:41; 고전10:12-13 6)살전3:13; 5:23; 야고4:7



제 128문 : 당신은 이 기도를 어떻게 마칩니까?
답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인데, 이런 뜻입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주님께 간구하는 것은, 주님은 온 세상의 권세를 가진 우리의 왕이시며, 또한 우리에게 온갖 좋은 것을 주시길 원하시며 또한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1 하여, 우리가 아니라 주님의 거룩한 이름이 영원히 영광받으시옵소서”2

1)로마10:11-13; 벧후2:9; 대상29:10-12  2)시편115:1; 요한14:13; 계5:12



제 129문 : '아멘'이란 말은 무슨 뜻입니까?
답 : '아멘'이란 ‘참되고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한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내 마음의 소원보다 더 확실하게 내 기도를 들어주심을 믿는 것입니다.1

1)이사야65:24; 고후1:20; 딤후2:13; 계3:14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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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言의 出典과 故事

 

                   정시유

      

 *내가 깍은 손톱은 ? *

                亡一

                                         

 

한 <韓.의 조후 <昭侯>가 손톱을 깎고 있을 때의 일 입니다

깎은 손톱을 손 안에 숨겼습니다

그리고는

 [깎은 손톱이 없어졌으니

   빨리 찾아 오라] 고

측근들에게 독촉을  했습니다

그때 측근 중 한 사람이

몰래 자기의 손톱을 깎아

[ 손톱을 찾았습니다]하고 갖다 바쳤습니다

 

소후<昭侯.는

측근들이 다 충실 하지만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出典 ~ < 韓非子 >에서

 

 

韓昭侯握爪而佯, 亡一爪.求之甚急.

左右因割其爪而效之.昭侯以察左右

之臣不誠.

 

사람들이 간사< 奸邪>하여

충실한 신하를 얻기가 어렵다는

말 입니다

 

사람의 일을  알아보는 방법 가운데

알면서도 모르는척 하여 .....

물어보면 알고 있는 것 보다

 더 숨겨진 일까지도 ,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出典 ~ < 韓非子  >에서

 

 挾智而問, 則不智者至, 深智一物, 衆隱皆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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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아마존은 세계 7 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인정되었다.
아마존江은 나일江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6,400km) 江이다.
아마존은 1500 킬로미터 이상 되는 17개의 지류와 1,100개의 작은 지류가 있다.
 

브라질, 페루,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볼리비아, 가이아나, 수리남과 프랑스 령 기아나 등,  

9 개국에 속하는 영토를 커버하는 열대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우기(雨期)때마다 광대한 숲은 지역마다 침수된다.
 

 

세계 열대 숲의 큰 영역인 아마존 숲은 5,500,000k㎡로서 모든 열대 우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지구의 "폐"라고 한다. 

아마존은 지구의 식물과 동물의 가장 큰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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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부활 中 - 부활의 '본질'에 관해.. (‘개혁주의 종말론‘에서 발췌) / 안토니 후크마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자들도 영화로운 육체들로 부활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던 자들이 중간기 상태 동안 잠정적 행복을 누리고 있긴 하지만 그들의 이러한 행복은 그들의 육체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게 될 때에 비로소 완전해질 것이다.

 ......

이제 우리는 부활의 본질에 관한 문제를 취급하려 한다.

우리가 예측하는 바이지만, 육체 부활에 대해 신약은 구약보다 더 구체적이며 상세하다. 이 책의 9장에서 우리는 이미 구약으로부터 사후에 경건한 자들의 운명과 악인들의 운명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배웠다. 앞에서 인용되었던 성경구절에서도 우리는 육체의 부활에 대한 암시를 던져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보게 하지 아니할 것임이라”(참조. ASV). 오순절 설교에서(행2:27, 31) 베드로가 이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는 이 구절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선지서들 중 두 곳에서 육체의 부활에 대해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곳이 있다. 첫 번째 구절은 이사야 26장:19이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여기서 이사야 선지자는 두 개의 무리의 운명을 대조시키고 있는데 하나는 믿고 죽은 자들의 미래의 운명(주의 죽은 자들)이고 또 다른 하나는 14절에서,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고 사망이 되었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던 대상인 유다의 원수들의 운명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26:19은 신자들의 미래의 육체 부활, 특별히 이스라엘 중 신자들의 미래적 육체 부활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니엘 12:2은 불신자와 신자 모두의 부활에 대해 말하고 있는 구절이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라.” 영생(olam)이란 표현이 구약성경 중에 유일하게 나타나는 곳이 여기뿐이다. 다니엘은 분명히 미래에 육체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으며 영원한 생명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영원한 수치에 대해서도 함께 말하고 있다. 히브리어 영원(olam)이란 단어가 경건한 자들의 축복상태나 불경건한 자들의 불행한 상태를 동일하게 수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부활에 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보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신약 부활교리의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은 매우 분명히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자들의 미래적 부활에 대한 증표와 보증이라고 한다. 성경에 언급되고 있는 그리스도 전의 모든 부활들은 다시 죽음이 찾아왔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만은 죽음이 뒤따르지 않았다. 이 부활의 모형을 신자들은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일어나셨으므로 신자들 역시 일어날 것이다.

 

이런 진리는 신약의 여러 곳에서 가르쳐지고 있다. 고린도전서 15:20에서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선포하고 있다. 첫 열매(aparche)란 단어는 추수의 첫 부분을 의미하는데 이 첫 부분은 추수의 미래적 완성을 보증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의 증거요 보증인 것이다. 골로새서 1:18에서도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prototocos, the first-born)”라고 부르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를 먼저 나신 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들도 장차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럼으로써 로마서 8:29에서처럼, 그리스도가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 사실상 요한복음 14:19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그의 제자들에게, “내가 살았기 때문에 너희도 살겠음이니라”고 하셨던 것이다.

 

로마서 8:11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들의 부활 사이에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배울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부활이 성령의 사역이라는 사실도 배우게 된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빌립보서 3:20~21에서 바울은 신자들의 부활한 육체가 그리스도의 부활육체와 비슷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참조 ASV). 현재 우리 육체를 “우리의 낮은 몸” 혹은 “우리의 비천한 육체”라고 부르고 있다. 낮고 비천한 것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인 것이다. 아마도 고통, 고난, 병마, 질병 그리고 죽음 등을 연상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부활을 통해 신자들의 육체는 모든 죄의 결과들, 즉 사망까지도 제거된 그리스도의 영광의 육체와 같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 시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은 완전히 그와 같이 될 것인데, 우리의 영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체까지도 그렇게 될 것이다.

 

육체의 부활에 관해 수많은 질문이 제기되어 왔고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부활의 육체는 물질적인 육체일까? 현재의 육체와 미래의 부활육체와는 어떠한 동질성이 있는 것일까? 부활육체가 현재의 육체와는 근본적으로 달라서 동질성이란 전혀 없는 것인가? 만일 다르다면 무슨 방식으로 부활육체가 현재의 육체와 다르단 말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답변하려 할 때, 우리는 먼저 성경 중에서 육체의 부활에 관해 가장 충분하게 다루고 있는 고린도전서 15장을 살펴야 할 것이다. 그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이 대항하여 논쟁하려던 고린도 교회의 잘못들이 무엇인지 정확히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12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라고 바울이 반문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구절을 살펴 볼 때 그리스도의 육체 부활이 고린도에서 부인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린도인 중 얼마가 신자들의 육체 부활을 부인하고 있었다는 것이 자명해진다. 아마 그들이 그랬던 것은 영혼의 불멸성을 인정하면서도 육체의 부활을 부인했던 헬라 사상의 영향이었다고 짐작할 뿐이다. 바울은 이와 같은 오류에 대해, 만일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면 그는 신자들의 부활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답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바울은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가진 자들에 대항하면서, 먼저 부활이라는 사실(fact)에 대해 말하고(12~34절), 그 다음에는 부활의 양태(manner)에 관해 말한다(35~49절). 그리고 끝으로 부활과 살아 있는 신자들의 변화 등의 필연성에 관해 말하고 있다(12~14절). 신자들의 부활이라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들어 증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라”(12~14절). 다른 말로 하자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지 않고서는 신자들의 부활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사실은 함께 가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한다면 그의 신앙은 헛될 것이며 그는 아직도 그의 죄 가운데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바울은 이미 말하고 있던 요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는데, 즉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자들의 부활에 대한 보증이라는 것이다. 20절에서 이미 그리스도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하고 있다. 21절에서는 말하기를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고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예수 그리스도)으로 말미암는다고 한다. 22절에서 분명히 말하기를,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던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는다고 했다. 이 구절 중에서 첫 번째 모든 사람은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자들, 즉 모든 인류를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두 번째 모든 사람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를 가리키고 있으니 곧 신자들을 말한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불신자들의 부활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의 관심은 여기서는 신자들의 부활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요점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은 그와 함께 부활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신자들의 부활은 사실상 그리스도의 중보적 사역의 필수적인 국면인 것이다. 왜냐하면 “맨 나중 멸망받을 원수는 죽음”이기 때문인 것이다(26절).

 

안토니 후크마의 개혁주의 종말론- ‘몸의 부활’에서 발췌 (338~350p)

 

 

참조:

바울이 고전 15장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신체적 육체부활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예를 통해서도 이것은 입증되는데 그리스도는 분명히 육체적인 부활을 하셨기 때문이다(그의 육체는 만져질 수도 먹을 수도 있는 육체였다. 눅24:38~43). 또한 비육체적 의미의 “부활” 사상은 헬라인들의 “영혼불멸” 사상과 일맥 상통하기 때문에 “죽은 자들의 부활”을 육체부활로 생각해야 한다. 더욱이 고린도의 오류자들은 육체부활을 대치하기 위한 개념으로 비육체적 부활 사상 내지 헬라의 영혼불멸 사상을 받아들였던 것 같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나누며 살아요, 우리 

                                 최송연

너무 욕심내지 마세요
한 세상 사는 것
정말이지 별것 아니랍니다

인색한 맘 버리고
나누며 살아요, 우리
물질도, 마음도, 미소도
나눈 만큼 향기 되어 돌아온답니다

지친다 말하지 말고
조금만 더 인내하세요
인내한 그만큼
내 마음의 폭도 넓어진 것이니까요

잠시 쉬었다 가는 길목에서
내 것이라 주장하는 것 많지만
진정한 내 것이란 아무것도 없답니다
내가 나누어준 것 외에는...

            (학개 2:8 참조)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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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마음 당신께 바칩니다 최송연 내가 주님을 사랑하기 전 주께서 날 먼저 사랑하셨으니 뒤늦게나마 내 마음 당신을 향해 나아갑니다 내가 주님을 거부할 때도 당신은 내 곁에서 묵묵히 날 지켜봐 주셨으니 내 영혼 한가득 감사의 눈물로 채웁니다 현란한 달빛 날 유혹하고 안개 짙어 길 잃었을 때에도 주께서 늘 내 손잡아주시니 이젠, 내 마음 당신께 바칩니다, 온전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1서: 4: 19)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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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g_20120706052425.gif

    중년의 가정주부가 집 앞의 공원에 앉아 있는
    하얗고 긴 수염을 가진 3명의 노인을 보았다.

    그녀가 말하길,나는 당신들을 잘 몰라요.
    그러나 당신들은 많이 배고파 보이는군요
    저희 집에 들어 오셔서 뭔가를 좀 드시지요?.

    집에 남자가 있습니까?
    아니요.외출 중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들어 갈 수 없습니다
    그들이 대답하였다.

    산행 후 남편이 집에 돌아 왔을 때
    그녀는 남편에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였고

    남편은 그들에게 가서
    내가 집에 돌아 왔다고 말하고
    그들을 안으로 모시라고 하였다.

    img_20120706052529.gif

    부인은 밖으로 나가 그 노인들을
    안으로 초대 하였다 그들이 대답하길,
    우리는 함께 집으로 들어 가지 않는다
    왜죠?라고 그녀가 물었다.노인 중 한 사람이
    설명하였다.

    내 이름은 부(富)입니다. 다른 친구들을 가리키며
    저 친구의 이름은 성공(成功)이고,
    다른 친구의 이름은 사랑(Love)입니다
    그리고 부연 설명하기를, 자, 이제
    집에 들어 가셔서 남편과 상의하세요.

    부인은 집에 와서 남편에게 상의를 했다 남편은
    이런 경우, 우리 부를 초대합시다
    그를 안으로 들게 해 우리 집을 부로 가득 채웁시다
    부인은 동의하지 않았다.

    여보, 왜 성공을 초대하지 않으세요?
    며느리가 집안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img_20120706052654.gif
    그 며느리가 이번에 부모님께 이런 제안을 내 놓았다
    사랑을 초대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그러면 우리 집이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되잖아요.

    부부는 ‘며느리의 조언을 받아 들입시다 ‘
    남편이 부인에게 말했다 밖에 나가 사랑을
    우리의 손님으로 맞아 들입시다.

    부인이 밖으로 나가 세 노인에게 물었다
    어느 분이 사랑이세요?
    저희 집으로 오시지요 사랑이 일어나
    집안으로 걸어 가기 시작했다.

    다른 두 사람(부와 성공)도 일어나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놀라서, 그 부인이 부와
    성공에게 물었다 저는 단지 사랑만을 초대했는데요!
    두 분은 왜 따라 들어 오시죠?

    두 노인이 같이 대답했다
    만일, 당신이 부 또는 성공을 초대했다면,
    우리 중 다른 두 사람은 밖에 그냥 있었을 거예요.

    그러나 당신은 사랑을 초대했고,
    사랑이 어느 곳에 가도 우리 부와 성공은
    그 사랑을 따라 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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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번역한 사도신경 / 서철원 교수  |개혁파 신학
쉐퍼 | 조회 106 | 2009.02.25. 12:24 http://cafe.daum.net/CPI2002/C2ck/393 
 
 
 

새롭게 번역한 사도신경
 
서철원
다음은 서 교수가 새롭게 번역한 사도신경이다. 굵은 부분이 수정 부분.

1. 전능하신 천지의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 서 교수는 기존의 사도신경의 '만드신'이란 부분이 기존의 물질로 현상의 세계를 만드셨다는 사상을 전달한다고 보았다. 하나님은 세상을 무(無)에서 창조하셨는데 이 단어는 그 뜻이 정확히 반영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창조주'란 고백이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2 . 그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사오며
- 원래 사도신경의 본문을 순서대로 번역하면 '예수 그리스도, 그의 외아들, 우리 주를 내가 믿사오며'이지만 현행 본문을 존중해 이 같이 바꿨다.

3. 이는 성령으로 수태되시고
- '잉태하사'는 능동태이기 때문에 성령이 잉태하거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잉태하는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 비록 앞에 '성령으로'가 있지만 '성령으로 잉태하사'는 잉태의 주체를 혼동하게 하므로 정당한 번역이 아니다. '수태되시고'보다 더 잘 이해될 수 있는 단어는 '임신되시고'인데, 임신은 부부간의 관계에 의한 수태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수태되시고'가 합당하다.

4. 동정녀 마리아게서 나시고
- 동정녀가 젊은 세대에게 약간 생소하지만 '동정녀'가 사도신경의 본래의 뜻을 전달해 바꾸지 않았다.

5. 본디오 빌라도 아래 고난 받아
- 현행 본문은 '본디오 빌라도에게'이지만 라틴어와 희랍어 본문에 '아래'로 되어 있기 때문에 고쳤다. 본디오 빌라도가 직접 예수를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아니고 그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래'가 합당하다.

6.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시었다가,
-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 손으로 묻혔기 때문에 '장사되시었다가'란 수동태로 써야 한다 .

7. 삼일에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셨고
- '삼일에'는 서수를 썼다. 즉 '셋째날에 부활하셨고' 그러므로 '삼일에 부활하셨고'이다. 또 '고난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장사되시고'는 다 수동태인데, 이번에는 '부활하셨다'고 능동태를 사용하므로 주님 자신이 부활하셨음을 말한다.

8. 하늘에 오르사
- 원문 그대로는 '하늘들에 오르사' 이지만 하늘을 복수개념으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하늘에 오르사'가 합당하다.

9.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데
- 라틴어 본문대로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로 하는 것이 바르다. 왜냐하면 신인 중보자가 아들로서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시기 때문이다. 신인 중보자가 아들로서 아버지의 우편에 앉는 것은 아버지의 통치권에 동참하고 하나님이 통치권을 행사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10. 거기로부터 산자와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 현재의 '저리로서'는 장소적 의미 전달이 쉽지 않다. 또 '오시리라'보다는 '오실것입니다'가 합당하다.

11. 성령을 내가 믿사오며
- 라틴어 본문에 있는대로 '내가'를 첨가하는 것이 더 바르다.

12.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들의 교통과
- '공회'가 무엇을 뜻하는지 의미 전달이 쉽지 않다. '공교회'는 주의 초림시 세워진 교회로부터 재림시까지 존재하는 모든 교회를 다 포함한다. 그러므로 '공회'라 하지 말고 '공교회'라고 해야 한다.

13. 죄들을 사해주심과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습니다.
- 그냥 '죄를 사해주시는 것'으로 하면 처음 믿을 때 죄를 용서받는 것만을 전달하기 쉽다.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시는 것이므로 '죄들을 사해주심'으로 해야 정당하다. '몸이 다시 사는 것'으로 하면 부활의 본 뜻을 바로 전달하기가 쉽지 않다.
기사입력: 2009/02/01 [13:01]  최종편집: ⓒ 리폼드뉴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칼빈의 자필 예정론>

"첫 인간의 창조 전에 하나님께서 영원한 의논에 의해서 전 인류에 대해서 무엇을 행하시고자 하 시는지를 정하셨다(Ante creatum primum hominem statuerat Deus aetemo consilio quid de toto genere humano fieri vellet).

이런 감추어진 하나님의 의논으로 말미암아 아담이 자신의 순수한 상태로부터 타락하였고 그의 결함 때문에 그의 모든 후손들이 영원한 죽음의 진노 가운데 몰았다(Hoc arcano Dei consilio factum est ut Adam ad integro naterae suae statu degiceret ac sua deficeret ac sua defectione traheret omnes suos posteros in reatum aetemae mortis)

택자들과 유기자들 사이의 구별은 같은 성정에 의존하고 있다. 이는 어떤 이들을 구원에 이르도 록 택하셨고 다른 이들을 영원한 멸망으로 정하셨기 때문이다(Ab hoc eodem decreto pendet discrimen inter electos et reprobos: quia alios sibi adoptavit in salutem, alids aeterno exitio destinavit)

 
비록 하나님의 공의의 징벌의 그릇은 유기자들이고, 반면 택자들은 긍휼의 그릇일지라도, 구별 의 원인은 의의 최고 규범인 자신-하나님-의 유일한 의지 이외에 하나님 안에서 찾을 수 있는 다 른 것이 아니다.(Tametsi iustae Dei vindictae vasa sunt reprobi, rurusum electi vasa misericordiae, causa tamen discriminis non alia in Deo quaerenda est quam mera eius voluntas, quae summa est justitiae regula).

비록 택자들이 믿음으로 채택의 은혜를 받지만, 선택은 믿음에 의존하지 않고 시기와 순서에 있 어서 그것에 선행한 것이다(Tametsi electi fide percipiunt adoptionis gratiam, non tamen pendet electio a fide sed tempore et ordine prior est)

믿음의 시초와 보존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선택으로부터 흐르는 대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 이외에 다른 자들이 참으로 믿음 안에서 조명받거나 중생의 영을 받지 못한다. 유기자들은 오히 려 필연적으로 자신의 눈이멀음 가운데 머무르거나, 그들 안에 없었던 것처럼 믿음의 부분으로 부터 떨어져 나간다(Sicut initum et perseverantia fidei a gratuita Dei electione fluit, ita non alii vere illuminantur in fidem, nec alii spiritu regenerationis donantur, nisi quos Deus elegit: reprobos vero vel in sua caecitate manere necesse est, vel excidere a parte fidei, si qua in illis fuerit).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을지라도, 순서에 있어서 주께서 우리를 자신의 것들 로 결정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지체로 삼는 일보다 앞선다.(Tametsi in Christo eligimur, ordine illud prius est ut nos Dominus in suis censeat, quam ut faciat Christi membra).

비록 하나님의 의지가 모든 것들의 첫 그리고 최고의 원이이고 하나님께서 마귀와 모든 불신자 들을 그의 자유의지대로 복종케하실지라도 하나님이 결코 죄의 원인이라고 부를 수 없고 악의 저자이거나 잘못에 대한 죄책이 있는 것이 아니다(Tametsi Dei voluntas summa et primum est rerum omnium causa, et Deus diabolum et impios omnes suo arbitrio subiectos habet, Deus tamen neque peccati causa vocari potest, neque mali autor, neque nlli culpae obnoxius est)

비록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참으로 미워하시고, 인간들 안에 있는 불의에 속한 것은 무엇이나 불 쾌해 하시기 때문에 진노하실지라도, 그의 순수한 허락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역시 뜻과 신비한 성정에 의해서 인간의 모든 일들을 다스리신다(Tametsi Deus peccato vere infensus est et damnat quidquid est iniustitiae in hominibus, quia illi displicet, non tamen nuda eius permissione tantum, sed nutu quoque et arcano decreto gubemantur omnia hominum facta).

비록 마귀와 유기자들은 하나님의 배역자들이고 도구들이며 그의 신비한 심판으로 종결될 것이 지만, 하나님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렇게 그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역사하셔서 어떠한 것도 그들의 타락의 부패성으로부터 축소되도록 하지 않았다. 이는 비록 그 방식은 종종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을지라도, 그들의 악이 선한 목적에 바르고 정당하게 유익되게 하시기 때 문이다(Tametsi diabolus et reprobi Dei ministri sunt et organa, et arcana eius iudicia exsequuntur, Deus tamen incomprehensibili modo sic in illis et per illos operatur ut nihil ex eorum vitio labis contrahat, quia illorum malitia iuste reteque utitur in bonum finem, licet modus saepe nobis sit absconditus)

모든 것들이 그의 원함과 질서에서 일어난다고 하여 하나님이 죄의 저자라고 말하는 자는 미련 하고 중상하는 일이다. 이는 그들이 인간의 명백한 부패와 하나님의 신비한 심판 사이를 구별하 지 못하였기 때문이다.(Incite vel calumniose faciunt qui Deum fieri dicunt autorem peccati, si omnia eo volente et ordinante fiant: quia inter manifestam hominum pravitatem et arcana Dei iudicia non distinguunt)."

- 본 내용은 칼빈오페라 제9권 713-714 면에 있는 라틴어 원문을 김영규교수님이 번역하신 것입니다.

 

김종욱 목사 페이스북


대형급 금 광산지역으로, 한때 10만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모인
곳이다.
Serra Pelada는 브라질 아마존강 하구에서
남쪽으로 430km 떨어진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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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어느 한 농부가 이 지역에서 금덩어리를 발견하고, 그 소식을 접한 많은 광부들이 금광을 캐러 모여들어 거대한 촌을 형성하기시작했다.

 7년이 지난 1986년에는 10만명의 인구가 몰려들어 하나의 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그후 금광의 고갈로 주민들의 이주를 부추기면서 결국 예전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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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Serra Pelada는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10년살이 도시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2000년을 전후로 또 다시 금광이 발견되었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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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금광이 세상에 알려지게된 것은 브라질 출신의 세바스티앙 살가도(Sebastiao Salgado)씨가 이곳 현장을 사진(1979년~1986년)에 담은 후였다.

세바스티앙 살가도씨는 1973년부터 광범위한 사회적인 이슈를 사진을 통해 세상에 알려온 인물이다.

아프리카 Sahel지역의 기근부터 남아메리카의 노동 현장까지...
하지만 그가 촬영한 널리 알려진 사진 시리즈는 Serra Pelada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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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성교회 “교회 흔드는 세력, 단호히 대처” 의지 밝혀


대형교회 세습이라는 비판 속에 부자 간 담임목사직 대물림에 성공한 왕성교회(담임 길요나 목사, 원로 길자연 목사)가 최근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분란에 대해 강력 조치하겠다고 밝혔다.

 
▲왕성교회 당회가 교회를 흔드는 세력에 대해 단호히 대처하겠다는 입장을 21일 밝혔다.ⓒ뉴스미션

“소수의 불만세력, 괴문서로 허위사실 퍼뜨려”

왕성교회가 21일 교회 홈페이지에 ‘성도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란 제목의 공고문을 띄웠다. 공고문에서 왕성교회 당회는 “교회의 거룩한 일치와 연합을 깨뜨리려는 반(反)성경적 위해행위에 대해 단호히 대처하기로 결의했다”고 밝혔다.

당회는 길요나 담임목사 부임 이후 교회가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데, 소수의 불만세력이 허위 사실을 퍼뜨려 교회를 흔들고 있다며 14일 회의를 통해 이 같이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당회는 “교회 안에서 익명의 괴문서를 유포한다든지, 한국교회를 흔들려는 외부세력과 연대하여 인터넷 상으로 교회에 대한 허위 사실을 퍼뜨리는 일들을 자행하고 있다”며 “실로 복음 전파와 교회의 사명 감당을 가로막는 결과를 초래하는 심각한 위해(危害)행위”라고 일갈했다.

이어 “성도들은 불손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괴문서를 유포하거나 허위 및 왜곡된 비방을 일삼는 자들에게 현혹되지 말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익명의 ‘괴문서’는 교회 재정 공개 요구한 ‘호소문’

왕성교회가 이 같은 강력 조치를 시행하게 된 데는 길요나 목사의 청빙과 부임 과정에서 불거진 교회 내 분란과 관련된 것이다.

교회 당회가 말하는 ‘괴문서’는 교회 내 일부 성도들이 교회 재정과 헌금 내역, 사무 처리 과정을 공개할 것을 교회 측에 촉구하는 익명의 호소문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 문서에서 이들은 신림동 왕성교회와 과천 왕성교회를 포함해 교회 부채가 수백억 원에 달하고 있지만, 당회장과 재정 담당자들이 이 같은 사실을 성도들에게 정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문서에서 교회가 지고 있는 은행권 채무와 이자 등 구체적인 액수도 공개했다.

이들은 “교회 부채는 성도들의 부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이 알아야 하고 당회나 공동의회를 통해 우리 교회의 부채 현황을 짚어 해결 방안 및 앞으로 진행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며 “이는 교회와 어느 특정한 사람을 폄하하거나 해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왕성교회의 진정한 부흥을 위해 교회를 돌아보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왕성교회를 다니다 얼마 전 교회를 옮겼다는 한 교인은 “호소문은 교회 부채에 심각성을 느낀 교회 성도들이 교회 재산을 확인하고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짚어가는 물음이었다”며 “교역자와 당회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진지한 답변을 성도들과 함께 갖고, 비판적인 물음도 수용하는 태도와 입장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당회, 정관 제정으로 교인 엄격 통제

하지만 왕성교회는 성도들의 이 같은 주장에 역행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모 언론 보도에 따르면 왕성교회는 최근 교회 정관을 만들어, 개인이 교회 재정 장부를 보려면 ‘공동의회 출석 인원 2/3 이상, 당회원 절반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는 엄격한 조건을 달았다. 자신의 헌금 내역을 볼 때도 당회장 허락이 있어야 한다.

또 당회 치리권을 대폭 강화해 노회와 총회의 재판 결과와 상관없이 당회의 결의가 있으면 교인의 지위를 박탈하고 출입을 금할 수 있는 조항을 만들었다. 당회가 말하는 소위 ‘불만세력’을 제재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교회는 해당 정관이 공동의회를 거쳐 교인들의 절대 다수 찬성으로 통과된 것이니 문제없다는 입장이다. 공동의회에 참석했다는 한 성도는 "한 사람만 거부하고 나머지 모든 성도가 찬성해 정관을 통과시켰다. 괴문서 내용의 오류도 인정했다"고 설명했다.

왕성교회가 일부 교인들에 대한 엄격한 제재 조치를 시행한 가운데, 교회 내 일각의 의혹과 분란이 해소될 수 있을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윤화미 ⓒ 뉴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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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교리(2)| 신론[神論]
Great Light 조회 45 |추천 0 | 2009.01.30. 17:29

 

 

 

코넬리우스 반틸의 [개혁주의 신학 서론] 중에서


제17장   하나님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들에 대한 고찰로 나아가기로 하자.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자충족적인 존재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은 삼위일체 교리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여기서 다른 모든 형태의 존재와 비교해서 구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숫자적으로 하나이신 분이 그 자신 안에 구체적이고 숫자적인 존재의 구별(a distinction of specific and numerical existence)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 신성의 본질에 대해 신성의 삼위(the three person of the Godhead)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각 속성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동일시 될 수 있다고 말할 때, 동시에 그것들을 구별할 수 있듯이, 삼위일체의 각 위(各位)가 신성 자체를 다 드러내면서도(exhaustive of divinity itself), 삼위 간의 참된 구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통일성(Unity)과 복수성(plurality)이 꼭 같이 궁극적이다. 신성의 각 위는 서로를 다 드러내면서(exhaustive of one another), 따라서 신성의 본질을 다 드러낸다(exhaustive of the essence). 하나님은 하나의 의식을 가지신 존재이시면서, 동시에 세 개의 의식을 가진 존재(a tri-conscious being)이시기도 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삼위일체 교리를 가르친다. 먼저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증거를 요약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구약에 대해서는 우리가 피하여야 할  두 가지 극단적인 경향이 있어 왔다. 구약에서 완전한 신학의 체계를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삼위일체 교리가 구약에서 분명히 가르쳐졌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성경이 하나의 통일된 교리의 체계를 가리치고 있음을 부인하는 사람이 있어 왔다. 그들은 구약에는 삼위일체에 대한 그 어떤 증거도 없다고 주장해 왔다. 이 두 가지 극단적인 입장에 대조해서, 우리는 성경이 사람에게 유기적으로 전달된 하나님의 계시의 기록이라고 여긴다. 따라서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가 구약에서도 가르쳐졌으리라고, 그러나 신약에서 훨씬 더 분명하게 가르쳐졌으리라고 생각한다.

  창조 기사에서 '엘로힘'(이것은 히브리어 단어로서 복수형임)의 사용에 대해서 우리는 최대한 말한다면 그것이 후에 계시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적합하다고 말할 수 있다(즉, 그 자체가 삼위일체를 계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후대의 계시의 빛에서 볼 때 적절한 것이라고 할 수는 있다는 뜻-보역). 그러나 우리가 의존하는 증거는 후대의 계시의 단계에서 나타난 삼위일체 각위 간의 구별에 대한 증거이다.


1. 구약에 나타난 삼위일체에 대한 가르침


(1) 신성 안의 구별(the differentiation in the Godhead)에 대한 시사로서는 창세기 19:24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하늘 여호와께로서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여기서는 지상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the angel of Jehovah)가 하늘에 계신 여호와로부터 불과 유황을 비 같이 내리셨다고 한다.


(2) 창세기 16:13에서 하갈이 여호와의 사자(the angel of Jehovah)를 "당신 하나님이 나를 감찰하신다"(Thou God seest me)라고 부른다.

  여호와의 사자가 한편에서는 하나님과 동일시되고, 또 한편에서는 하나님과 구별되는 것이다. 출애굽기 23:20, 21 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을 수 있다.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너희는 삼가 그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라." 여기서는 사자(the angel)가 여호와의 이름과 동일시 되었다. 한편에 출애굽기 33장에서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가 사자를 이스라엘과 함께 보낼 것이나, 그 자신은 가시지 않으실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사자는 분명히 하나님과 구별되었다.


(3) 다음과 같은 구절들에서도 삼위일체의 구별이 시사된 듯하다.

  1) 시편 33: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the breath of his mouth)으로 이루었도다"

  2) 잠언 3:12-31에서는 '지혜'가 의인화되어 창조주와 구별되어 나타나고 있다.

  3) 이사야 48:16: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 말을 들으라 내가 처음부터 그것을 비밀히 말하지 아니하였나니 그 말이 있을 때부터 내가 거기 있었노라 하셨느리라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 이사야 63:10: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이런 구절들에서는 성령이 구별되는 인격(a distinct person)으로 언급되고 있다.

  4) 시편 45:6, 7 :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히 1:8,9에서도 인용됨)

  5) 시편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6) 이사야 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 본문들이 결코 전부는 아니다. 이 본문들은, 벌코프 교수가 말하듯이 구약에 나타난 심위일체의 각 위에 대한 시사들일 뿐이다.


2. 신약에 나타난 삼위일체에 대한 가르침

 

  신약에 대해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인용된 삼위일체를 가르치는 성구들만을 간단히 열거해 보려고 한다.


  (1) 마태복음 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2)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3)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엡 2:18)

  (4) 요한복음 1:14,18: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라가 충만하더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히 1:2-6; 골 1:15-17)

  (5) 요한복음 15:26:"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6) 갈라디아서 4:6 : "너희가 아들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3. 교리적 진술


  이런 구절들과 다른 성경 구절들에 근거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제2장, 제3장):  "단일한 신성에 삼위가 계시니, 곧 본질과 권능과 영원성이 동일하신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는 그 누구에게 속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나시지 아니했으며 나오시지 않으시며, 성자는 아버지에게서 영원히 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

  이를 설명하면서 핫지(A.A. Hodge)는 이렇게 말한다: "살아계신 한 분의 참된 하나님이 계심을, 그리고 그의 본질적 속성들이 모든 온전성을 포괄함을 밝힌 후에, 이 부분은 덧붙여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 성부, 성자, 성령이 똑같이 한 하나님이시고, 나뉘어질 수 없는 신적인 본질과 모든 신적 온전성과 대권들이 그 각각에게 같은 의미와 정도로 속한다.

    2.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이 명칭들은 각기 다른 관계를 가진 한 분의 다른 이름들이 아니고, 다른 위들의 이름들이다.

    3. 이 삼위는 어떤 인격적 특성들(certain personal properties)에 의해서 구별되며, 그 존재와 작용이 일종의 질서를 가진 것으로 계시된다.


  여기 언급된 세 가지 요점에 대하여 핫지가 논의하고 있는 부분 전체가 아주 중요하다.



4. 이 교리의 역사


  삼위일체 교리에 관한 성경적 진리의 온전한 진술은 오래고 힘든 성경 해석의 열매이다. 이 역사에 대한 지식은 그에 반하여 이 교리가 진술된 여러 형태의 이단을 살펴 보는 일에 있어서 아주 유용하다. 이 교리의 역사의 몇 가지 중요한 요점을 여기서 언급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우리에게 아주 실천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여러 가지 다양한 속성들을 논의한 후에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좀더 친근한 지식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지칭하는 다른 특별한 마크가 있다. 즉, 그분은 당신 자신의 일체성을 선포하시면서도, 우리 앞에 삼위로(in three persons) 존재하심을 분명히 제시하신다. 신성의 이름이 아니면, 이것들은 아무런 참된 지식도 없이 우리의 두뇌 안에서 펄럭거리고 다니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해야만 한다."(Institute, 1. Xiii, 2) 이 때 칼빈은 그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삼위일체로 계시하셨다고 단순히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사실이며, 또한 하나님은 삼위일체적 방식외에 달리 존재하실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워필드(Warfield)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러면, 칼빈에 의하면, 단일론적 하나님(a monadistic God)과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는 듯하다. 다양성(multiformity)의 개념이 하나님의 개념 안에 들어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이 단순하다고 하고, 삼위가 그 신성에서는 서로 동등하다고 말함으로써 교회는 모든 형태의 비기독교적 사상과 대립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변적 교리가 아니다. 최종적으로 분석해 보면 모든 형태의 이단은 삼위일체에 대한 공격인 것이다. 바빙크는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의 본질,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자기 계시, 성령 안에서의 그 근거와 원리를 가질 때에야 주장될 수 있는 것들이다" 여기서 바빙크는 본체론적 삼위일체를 말한다. 이것은 중요하다. 모든 비기독교적 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전체로서의 우주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도록 한다. 모든 이단들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시 공간적 실존을 전체로서의 우주의 다른 측면으로 도입시키려고 한다. 이것은 분명히 현대 이단의 특성이다. 그리고 사실상 여기에 고대의 이단과 현대의 이단의 연관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본체론적 삼위일체(the ontological Trinity), 즉 피조된 우주와의 관계를 떠나서 그 자체 안에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the Trinity as it exists in itself)가 그 스스로 온전하며, 그 안에 단일성과 복수성의 동등한 궁극성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삼위일체의 이 높고 고귀한 교리에 이르게 된 것은 오래고도 힘든 노정을 통해서였다.

  삼위일체 교리사의 첫 시기, A.D. 1-325은 역사의 그리스도가 신성의 제2위이심을 밝히려는 노력의 시기였다고 특징지울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경배하였을 때, 그들은 다신론자들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영지주의자들의 로고스와 동일시하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 일종의 중간적 존재로 여기려고 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영원과 시간의 통일성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희랍 사상은 하나님을 말없는 심연으로, 이 세상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것으로 여기어 그렇게 말했고, 로고스에 대해서는 우주 안에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말하였었다. 자연스럽게 이런 형태의 사변은 하나님이 자충족적 존재되심에 반하는 것이었다.

  제1세기와 2세기의 교부들은 이미 에비온주의와 가현론과의 투쟁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삼위일체에 대한 유일하게 변호할 수 있는 철학적 진리의 체계를 가졌음을 밝히기에는 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철저히 무장되었었다고 하기 어렵다.

  제2세기에 변증가들, 특히 저스틴 마터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좀더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 사이의 내재적 관계는 저스틴 마터의 경우에서는 아직 분명히 나타나지 않았다"고 바빙크는 말한다. "마치 성자가 이 세상의 창조를 위해서 낳아진 듯이 여겨진 듯하다. 여전히 하나님 그 자신(God in himself)은 감취어진 하나님(숨어계신 하나님)이고, 성자는 계시된 하나님인 듯이 제시되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저스틴 마터에게는 성령의 신성과 성부나 성자와의 본체론적 관계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것이다.


(1) 아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오리겐

  아리레니우스는 영지주의적 신 개념과 로고스 개념에 대립하여 상당한 진보를 나타내었다. 바빙크는 이렇게 말한다: "로고스가 이중적 성격(his twofold nature-의미상 중간적 성격)을 벗어버리고 신성을 가진 것으로 진술되었다". 비록 언제나 일관성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아이레니우스는 성자와 대립되는 '숨어계신 하나님' 개념에 대립하였다. 이것은 아주 큰 진전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표현의 수단으로서 우주를 어떤 방식으로든 필요로 하지 않으심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이미) 삼위일체 안에서 자기 표현적이셨음을 보여주었다는 말이다. 터툴리안은, 비록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하나(a unit)이기는 하지만, 신성에는 통일성(unity)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삼위일체성(trinity)도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아리레니우스를 보충하고 있다. 터툴리안에 대해서 바빙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종속설을 언제나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였고, 삼위일체 교리 안에서 본체론적인 삼위일체와 우주론적인 삼위일체, 그리고 구원론적 삼위일체를 충분히 구별하지는 못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는 삼위일체론의 진술을 위한 개념과 단어들을 제공하였다. 그는 '로고스' 사변을 아들됨의 관계(filiation)로 대치하였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 본체론적 삼위일체를 우주론적 사변에서 분리시켰다. 그리고 그는 각 위의 삼위일체성을 성부의 인격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에서 이끌어낸 최초의 인물이었다.

  오리겐 역시도 종속설의 오류에 빠졌다. 그는 성자의 성부와의 하나됨(the unity)을 강조하였으나, 그가 필요하다고 느낀 그 안에서의 다양성을 강조하기 시위해서 성부의 본질과 성자의 본질을 구별하였다. 그리하여 성부는 다시 한번 희랍적인 방식으로 가장 궁극적인 존재이며, 성자보다 훨씬 더 높은 존재로 생각되었고, 성자는 세상보다는 더 높은 존재로 여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2) 아리우스주의

  핫지는 오리겐의 여러 추종자들이, 예를 들어서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와 특히 아리우스가 오리겐보다 훨씬 더 낮은 교리를 가르쳤음을 지적한다. 아리우스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로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라, '무로부터'(ek ouk ontoon) 창조되었고, 따라서 성부와 동일 본질이 아니라고 한다.



  (3) 사벨리우스주의

  삼위일체에 대한 또 하나의 불만족스러운 형태의 진술은 흔히 사벨리우스주의라고 언급되는 것이다. 아리우스주의가 삼위의 본질적 통일성을 충분히 강조하지 않고서 삼위의 다양성을 가르쳤는데 비해서, 사벨리우스주의는 삼위의 다양성을 충분히 가르치지 않고서 본질의 통일성(단일성)을 가르쳤다고 일반적으로 대조되어 설명된다. 이것은 옳다. 그러나 문제의 뿌리를 분명히 파헤치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범신론은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하고, 이신론(理神論)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데, 유신론은 그 모두를 강조한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구별이다. 요점음 교회가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 단순히 아리우스주의와 사벨리우스주의를 연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아리우스주의와 사벨리우스주의는 둘 다가 그 근저에서는 시간적인 것을 영원한 것과 동리한 수준에서 연합시키는 같은 이단에로 환원될 수 있으므로, 그 둘을 다 거부해야만 한다. 이것이 ‘아리우스주의’의 이름으로 요약된 모든 종속론적 사변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벨리우스주의 역시도 전체로서의 실재의 통일성을 제공해 주는 영원 세계에 대한 보충으로 시간 세계가 복수성을 제공하도록 해 보려고 한 것이다.


  (4) 나이신 신조(혹 니케아 신조)

  니케아 공의회가 삼위일체에 대한 바르 교리를 진술하고 변증하려 모였을 때, 니케아 공의회는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 본질'(homoousion to patri)이라고 진술함으로써 아리우스주의를 거부하였고, 삼위들이 단순히 세상과 관련한 경륜적 표현일 뿐 아니라, 본체론적 삼위일체의 삼위들이라고 진술함으로써 사벨리우스주의를 거부하였다. 그것들은 전혀 그 종류가 다른 것(allo kai allo)이라고 한 것이다. 이 두 이단을 거부함에서 니케아 공의회는 한 이단의 두 가지 형태를 거부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삼위일체에 대한 한 가지 기본적인 이단은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궁극적 연합으로 혼합시키는 것이다. 이 한 이단의 두 가지 형태에 대립하기 위해서는 아리우스주의와 사벨리우스주의에 대해 언급한 두 요점을 주장하는 것이 필요할  뿐 아니라, 신성 안의 각 위의 내적인 관계가 피조된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에 대해 선행하며, 독자적임을 강조해야 한다. 찰스 핫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성의 본질이 각위에게 공통적이므로, 그들은 공통적 지성과 의지와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 안에는 세 지성과, 세 의지와 세 작용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삼위가 한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한 정신과 한 의지를 가지신다. 이 밀접한 엽합을 희랍교회는 ‘페리코레시스’라는 말로 표현하였는데, 이를 라틴어 'inexistentia', 'inhabitatio' 또는 'intercommunio'(상호 연합, 침투) 등의 말로 설명하였다.


  (5) 콘스탄티노플 회의(381)

나이신(니케아) 신조에는 참된 성경적 교리의 모든 요소들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일어난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참된 교리가 주장되려면, 그것은 계속적으로 재진술되고, 세련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아들만이 아니라 성령도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 본질이심이 더 분명하게 진술되어야만 했다. 아다나시우스와 어거스틴은 삼위 모두가 동등함을 더 분명히 하려고 상당한 노력을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성령이 성부로부터만이 아니라, 아들로부터도(filioque) 나오심을 밝히는 일이다. 성령이 성부와 성자 모두로부터 나오셔야만 삼위일체 삼위의 내적 교통이 영원히 온전한 것이다. 서방교회는 동방교회보다 삼위의 동등성을 더 분명히 보았고, 그들의 배타적인 내적 교통은 '아들로부터'(filioque)라는 어귀 없이는 표현될 수 없음을 더 분명히 보았다. 성부에 의한 성자의 출생(낳아지심)이 영원한 출생이므로, 성령의 나오심도 성부와 성자로부터의 영원한 나오심이어야만 한다. 핫지는 이렇게 말한다: "나이신 신조의 가장 분명한 결함은 성령에 대한 어떤 분명한 진술이 없는 것이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나이신 신조의 '우리는 성령을 믿사오며;라는 말에 "주님이시요, 생명의 수여자이시고, 아버자와 아들과 함꼐 경배를 받으시며, 영광을 받으시고, 선지자들로 말씀하셨던" (성령을) 이란 말을 덧붙였다" ('아들로 부터도, filioque'라는 말은 최종적으로 589년 톨레도 공의회에서 수납되었다.


  (6) 칼케돈(451)

  삼위일체에 관한 모든 이단들은 영원과 시간을 혼합하는 하나의 커다란 이단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칼케톤 공의회에서 거부되어진 네스토리우스주의와 유티케스주의도 교회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반대의 변형된 형태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칼케돈 신조에 대해 필립 샤프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니케아의 첫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영원하며, 선재하시는 신성을 수립하였으나, 제4차 공의회의 신조(칼케돈 신조)는 땅 위에서 걸으시고,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신 성육신하신 로고스와 관련하였다. 칼케돈 신조는, 아리우스주의에 반해서 나이신 신조에 동의하기는 하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잘못 생각한 네스토리우스와 유티케스의 오류에 반하는 것이었다.

  칼케돈 신조의 진술 형태에 대해서도 샤프의 말을 인용해 볼 수 있다. "정통 교리는, 유티케스주의에 반해서 성육신 이후에도 혼동이나, 변화없이(asygchytoos, inconfuse 그리고 atreptoos, immutabiliter), 또 한편으로는 (네스토리우스주의에 반해서)구분이나 나뉘어짐없이(adiariretoos, indivise 그리고 achoristoos, inseparabiliter) 있는 각 성질의 구별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신성은 영원히 신성이고, 인성은 영원히 인성인데, 그들이 계속적으로 하나의 공통된 삶을 가지고, 삼위일체의 각 위와 같이 서로 침투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여기서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말을 덧붙여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삼위일체의 제2위이시요, 참으로 영원하신 하나님이시요,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요. 동등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때가 찾을 때에 인간성(man's nature)을 취하셨는바, 그 본질적 속성들과 그 일반적 약점을 모두 같이 취하였지만 죄는 없으시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마리아의 태에 잉태되사, 그녀의 본질로부터 나셨다. 따라서 두 가지 온전하고 구별되는 본성인 신성과 인성의 변화됨이나 혼합이나 혼동없이 함께 한 인격 안에 나눌 수 없게 연합되어졌다. 그 인격은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의 인격이며, 한 그리스도이시고, 그는 사람과 사람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제8장, 2항)

  이 진술로부터 우리는 교회의 주된 관심 중 하나는 하나님과 사람을 혼동이나 혼합없이 바른 관계에 있도록 하는 것이었음을 깨닫을 수 있다. 하나님은 삼위 일체적으로 존재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스스로 온전하신다. 그런데도 그는 세상을 창조하셨다. 이 세상은 본체론적 삼위일체의 자기 온전성에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 온전성 때문에 의미를 가진다. 이 하나님은 피조된 우주의 토대이시고, 이 우주를 초월하시는 것이다. 그가 이 우주의 토대라고 먼저 생각되지 않고, 이 우주와는 다른 분이라고만 정의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 타자성'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 '절대적 타자성'이 결국, 시간적 우주와 연관되게 되면, 전체로서의 실재의 한 측면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이신론[理神論]처럼) 하나님의 섭리를 부인하든지, (희랍 사상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의 창조와 섭리를 모두 부인하는 교리는 결국 영원과 시간을 혼합시키고야 만다. 이신론과 범신론은 이렇게 영원과 시간을 혼합하고 혼동하는 근본적 오류의 두 가지 형태일 뿐이다.

  (그러나 기독교적으로 바르게 이해하면) 죄가 세상에 들어 왔을 때나, 삼위일체의 제2위가 인간성(human nature)을 취하셨을 때에도 영원한 것과 시간적인 것은 혼합되거나 혼동되지 않았다. 네스토리우스주의는 역시 참된 교리에 대한 이신론적 형태의 대립이며, 유티케스주의는 명백히 범신론적 형태의 대립인 것이다.


  (8) 현대의 반삼위일체주의

  한 마디로 말해서 현대의 신학적 이단들은 그 기원을 거짓된 삼위일체론에 두고 있다고 하든지, 그런 왜곡된 개념에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시사할 수밖에 없다. 고대에서와 같이 현대에도 사람들은 영원한 것과 시간적인 것을 한데 섞었던 것이다.

  그런 한 가지 대표적인 예는 칼빈이 정리한 삼위일체 교리에 개한 반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칼빈은 신성의 삼위(the three persons of the Godhead)의 동일 본질성(the consubstantiality)을 주장하는데 아주 관심이 있었다. 워필드의 말을 인용해 본다: "성자의 '스스로 신적이심'(the autotheotes)에 대한 그의 주장에 있어서, 칼빈은 결코 자신이 새로운 것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니케아 공의회의 교부들 자신들이 '아주 많은 말로' 이를 주장하고 있다고 인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이 주장에서 삼위일체 교리사에서 획기적인 일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는 사람들이 성자의 하나님으로의 자기 존재와 주장을 믿지 않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삼위일체론을 진술하는 현대의 양식이 성자의 신성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결함있는 양식의 도입을 넓게 열었으므로, 성자의 '스스로 하나님되심'(autotheotes)에 대한 날카로운 주장이 필요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워필드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삼위일체 교리의 진술을 위해 교회가 가장 큰 빚을 지고 있는 세 사람을 든다면 터툴리안, 어거스틴, 그리고 칼빈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진술이 굉장한 반대를 받은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 내에서 칼빈의 교리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는 천주교 사상이나 자세한 몇 부분에서 반대하는 루터파는 말할 것도 없고, 알미니안적 반론을 간단히 주목해 보기로 한다. 루터파에 반대해서 알미나안주의자들은 오리겐주의자들의 종속설적 성향을 매우 분명히 가지고 있다" 알미니우스 자신은 성자의 '스스로 하나님이심'을 부인하지만 "그의 정통성을 어느 정도는 견지했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의 무게의 중심은 하향적이 되었다. 그래서 에피스코피우스의 가르침에서는 벌써 '영원한 출생'과 '나오심'에 대한 니케아 신조의 가르침에서 말하는 삼위 간의 질서상(in order) 종속이 아니라, 삼위 간의 본성상(in nature)의 종속을 위한 출생과 나오심이 언급됨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켈셀레우스는 삼위 간의 '특정한 통일성'(asoecific unity) 이상을 가르치지 않았다". 조오지 벌 은 컬셀레우스보다는 덜 극단적이었다. 그러나 벌 이후에는 사무엘 클락이 오는바, 그는 "성자가 무로부터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성도 동등하게 있음을 허용하기를 하였으나," 성자가 성부의 본질에서 낳아졌음을 인정하려고 한다.

  바른 삼위일체론에 대한 알미니안주의의 대립은 좀더 급진적인 일탈의 길을 준비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관념론 철학자들은 삼위일체를 전체로서의 실재 안의 정.반.합 원리와 동일시하였다. 이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아서 많은 신학자들이 신앙에서 벗어나 나아갔다. 결국 유니테리안주의도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섞는 옛 오류의 새로운 형태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현대주의(modernism)는 이 모든 이단들의 행복한 상속자들인바, 그 모든 이단들에게 있어서 기본적인 것은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동일 본질이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또는 그 오류가 좀더 깊이 나타나서 현대주의에 있어서는 성부 자신이 실재의 한 국면에 불과한 것이다. 참된 삼위일체론을 재확인하고 가르칠 필요가 있는 때가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때이다.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그의 개념에 대해서 만큼이나 많은 오해가 있다. '하나님의 자유'에 대한 바르트의 칸트주의적인 원리는 자충족적인 본체론적 삼위일체에 대한 전통적 교리와 같은 것이 있을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 경우에도, 다른 경우에 있어서와 같이, 정통주의의 용어들은 사용하나 그 의미는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비공유적 속성들은 바르트에 의해서 (상호) 상대적인 것이 되었다. 그의 역동주의는 그로 하여금 그리하도록 한다. 마찬가지로 본체론적 삼위일체도 (상호) 상대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바른 삼위일체론을 세우기 위해서 교회는 세상과 생사의 투쟁을 하기 위해 준비한 듯하다. 그 삼위일체론을 진술함에서 교회는 자충족적이고, 신비하신 하나님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확언하였다. 이 자충족적이시고 신비하신 존재께서 당신 자신을 사람에게 계시하시려 낮추신 것이다. 그분은 그분 자신이 그러하시듯 반드시 존재하시는 분으로 계시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반드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이 어떤 사역을 특히 성부께 돌리고, 어떤 사역을 성자께 돌리며, 어떤 사역을 특별히 성령께 돌릴 때, 우리는 그렇게 돌리는 것(ascription) 배후에 신성 안에 참된 구별이 있음을 전제하게끔 된다. 반면, 각 위에게 돌려진 사역은 절대적인 한 분의 사역이다. 바빙크는 삼위일체 교리에서 우리가 기독교의 핵심을 찾을 수 있다고도 지적한다. 우리는 언제나 신성 안에 있는 참된 위격적 구별(personal distinctions)을 무시하여 하나님의 존재의 절대적 통일성을 허용함으로써 사벨리우스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가거나, 하나님의 존재의 절대적 통일성을 무시하도록 신성 안의 삼위의 구별을 허용하므로써 아리우스주의로 나아갈 위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 위험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우리가 다음과 같이 하면 이 위험을 가장 잘 피할 수 있을 듯이 보인다: (a) 이 교리를 분명히 제시하고, 그 안에서 현대철학과 현대신학의 교리와는 정면으로 대립하는 신론을 발견하여 보는 것이고, (b)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언급 가능한 전제라고 아무런 변명없이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과제를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의 주된 난제는 우리가 우리의 사고를 잘못된 데서 시작하기가 너무나도 쉽다는 사실에 있는 듯하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해서 추론할 수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시작할 수도 있고, 유비적(analogically)으로 추론하기보다는 일의적(univocally)으로 추론을 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오류 중의 하나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즉, 삼위일체가 자연인의 전제에서 합리적인 교리로 비그리스도인에게 밝혀질 수 있다고 주장하거나, 삼위일체는 비합리적이라는 의미에서 신비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오류를 잠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때때로 우리가 하나님이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요, 그 위(person)에 있어서는 셋이라고 말하는 한,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어떤 것을 주장하는 것이 전혀 아님을 사람들에게 증명할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우리는 통일성(unity)과 삼위성(trinity)이 정확히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부 다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즉 전체로서의 하나님(the whole Godhead)이 한 분(one person)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각 속성이 하나님의 존재와 동연적(同延的, co-extensive)이라는 것을 살펴 본 바 있다. 어떤 종류의 해석되지 않은 존재 개념을 피하기 위해서 이를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는 소위 '순수 사실'의 망령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속성들과 그 존재의 일치성을 주장하게끔 된다. 또 비슷하게 우리는 신학자들이 신성의 각위가 신성의 존재와 동연적이라는 주장을 관찰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위격적 특성의 구별이 단지 이름만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각 속성과 각 위의 하나님의 전체 존재와의 절대적 동연성을 필요로 하며, 또한 그 속성들과 위격의 참된 구별(distinctions)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바빙크는 이렇게 말한다.: "각 위는 하나님의 전체 본질(the whole essence of God)과 동등하며, 다른 두 위와도 동연적이고, 삼위 모두와도 동연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다른 존재들, 즉 피조된 존재들에 반해서, 하나님의 존재의 절대적인 숫자적 단일성을 제시하고 주장해야만 한다. 그리고 본체론적 삼위일체 안에서도 하나님이 숫자적으로 하나이심을 주장해야만 한다. 그는 한 분(one person)이시다. 우리가 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우리는 단순히 '인격성'(personality)란 수식어구가 그에게 대해 붙여질 수 있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격성을 가지신 본질이신 것(an essence that has personality)이 아니라, 그는 절대 인격체(absolute personality)이신 것이다. 그러나 이 한 분의 존재 안에서 존재의 구체적인 형태나 유형(a specific or generic type of being), 그리고 삼위의 위격적 존재 방식(three personal subsistences) 사이의 구별을 알 수 있다는 허용과 강요를 성경에 의해 받게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이런 삼위일체가 우리의 철저한 파악을 넘어선 신비라고 말한다. 그것은 분명히 신비이다. 하나님 자신은, 그의 존재의 전체성 가운데서, 우리의 파악을 넘어 서신다. 동시에 이 신비하신 하나님은 그가 그 자신 안에서 전적으로 합리적이시므로 신비하신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성경을 떠나서, 합리성이 있기 위해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셔야만 한다는 사실을 먼저 규정할 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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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철부지 22살이던 12월30일 유난히 눈이 많이와서 교통수단이 모두 정지됬던날!
그래도 어찌어찌하여 간신히 결혼식예배만 드리고
신혼여행은 다음에 가자고 약속하고 대전시내에서 하룻밤을 묶고...
전남의 땅끝마을 바닷가 외딴교회에서 신혼과함께 목회을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신혼여행은 못가고 말았네요)
 
교인이 할머니만 3분인교인중에서 생활보호대상자가 2분이셨어요!
사례비는 1만5천원인데 남편이 신학2년생이라 한주간 교통비밖에 안됬지요~~
(해남땅끝에서-대전)
 
남편목사님은 한쪽다리에 장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양 한마리를 시아버님품에 안겨주시는
꿈울꾸고 남편을 낳았답니다,,그런데 중간에 온가족이 주님을 믿지않고..
남편은 동네건달처럼 남을 패기도하고 나쁜친구들과 어울리며 지내던 어느날
갑자기 한쪽다리가 아파서 8개월을 엎드린 상태에서 꼼짝도 못했답니다!
굿도하고 큰병원도 가봤지만 고칠수가 없다고해서
죽을사람으로 포기했는데 예수믿고 일어서기 시작하여
지팡이짚고 교회나가다가 지팡이 버리고 치료받고
신학교에 들어갔답니다!
 
목회자사모가 되기 싫어서 다른 전도사님들은 선도 안봤습니다만!
남편도 전도사라서 거절하면 장애인이라 거절당했다라고 생각되어 상처받을까봐
1주일 작정기도중에 주님께서 하라는뜻인것 같아 결국 남편과 결혼을 했어요~
 
 바닷가 외딴 교회에서 23살의 어린신부는 사모라는 이유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사택에서 혼자 교회지키고!
새벽엔 새벽종치고! 새벽예배.삼일밤예배.구역예배등을
인도하면서 무서움과 외로움속에서 홀로 지내야했답니다ㅠㅠ
 
그러던중 주님께서는 멋진가지에게 아들둘을 년연생으로 주셨는데

두아들모~두 집에서 낳았습니다!
두아이 모두 산부인과 또는 일반병원을 한번도 안가봤습니다~~
(안가는게 아니고..못갔습니다!)
임신확인도 배가부르고..아기가 뱃속에서 놀아야 임신이 확실하여
그때야 날짜를 계산해서 출산일을 정하곤 했지요^^
 
첫아들은 신학생남편이 중간고사기간이라고 학교에 가버리고 없는기간에
20시간을 아파 울면서 방안을 헤맸지만 병원갈 형편이 못되어
주님께 매달리고 울기만 했습니다 ㅠㅠㅠㅠㅠ
 
 너무나 아프고 서럽기도해서  계~속 울면서 기도하는데 주님께서 비몽사몽간에
(사66:9.) 말씀을 주시더라구요! 임산케하신분이 해산케도 하신다고...
20시간만에 무사히 순산했습니다!
 
큰아들낳고 다시는 아기도 안가지려했는데
100일지나면서 주님께선 덤으로 저도모르게 둘째를 바로주셨습니다!
뱃속에 아기가 생기니까 젖이 말라서 젖만먹던 큰아기가 빈젖꼭지만 빨고있으니
5개월된 아기배가 얼마나 들어갔는지 옷을 벗겨놓으니 등이굽었어요!
우유란 구경도 못하고 나오지않는 빈젖꼭지만 빨면서도!
아기허리가 굽을정도로 배가 들어갔는데도  보채지도 않고
잘도 버텨준 착하고 착했던 내 아기가 지금은 전도사가 되었네요ㅠㅠ주님~~
 
둘째는 추운겨울 12월23일에 아기를 낳는데 방이 너무나 추워서 아기가 나왔는데
온~몸이 새파래서 피부가 검은애가 나온줄 알았는데..
목욕시켜 이불속에 묻어두니 하얗게 변하더라구요!
(방이추워서 아기가 새파랬던거예요)
덤으로 선물받은 둘째도 신학을 졸업했구요~
 
신학생남편이 월욜날 새벽기도마치고 학교에가면 토욜날이나 돌아왔어요!
한주간동안 혼자서 새벽종도 쳐야했습니다!
교회종이 높은데 결려있고 땡그렁!땡그렁하게 치는종이였는데

아기를 방에두고가서 치면 아기가 혼자있다가 놀라서 방에서 울고있고!

등에 업고가서 종을치면 아기가 등에서 깜짝 놀라 울곤 했습니다!ㅠㅠㅠ

 

아기데리고 예배인도도 해야했고!

심방도하고!삼일예배!구역예배,새벽예배도 인도하고~~

 
바닷가 외딴교회에서 사명감으로 지내긴 하면서도

남편도 없이 한주간을 혼자 살아가는

 23살에 어린사모는 밤이면 무서워서 울었었고!

외로워서 울었었고! 얼마나 울기도 많이 울었던지요~~

낙옆굴러가는 소리에도 숨죽여야했던~

울기도 많이 울었던 철없던 어린사모였답니다!

지금 다시하라시면 저는 정말로!절대로 못할것 같아요!ㅠㅠ

 
아기둘을 낳기전에는 얼마나 무섭고 마음조이며 살았는데
그래도 아들둘이 생기면서 덜 외롭고 아기여도 든든해서 좋드라구요!
 
아이를 둘이나 낳았지만 한번도 시장에라곤 가본적 없었고
먹고싶은것 한번도 먹어본적없고...
임신복도 얻은거 한벌로 아이둘 낳기까지 버텼습니다!
 
과일이 너무나 먹고싶어 주님께 기도했더니 세명중에 한명할머니가
새벽마다 교회오시면서 오시는길에 남의집 살구가
밤사이에 떨어져서 주워왔다고 치마에다가 한움큼씩을
새벽마다 주워오더라구요!
살구라도 먹게하신 주님께 너무나 감사를 드렸답니다~~
 
이 다음에 잘 살면 1년에 한 번이라도 시골교회사모님들에게
옷 하나라도 선물해야지.. 맘먹고 형편이 괸찮을 때는 몇 번하다가
지금은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ㅠㅠㅠ
 (실은 저두 옷 사입은 지가 언제인지 잘 모르거든요~~
 주님이 아시기에 용서하시리라 믿습니다......)
 
남편이 졸업하던해에 어느 큰~~교회 목사님이(연세가 많은)
후임으로 오라고 이삿짐 차를 보냈어요!
 저희는 기도해보지도 않고! 준비도 안했는데도
그 교회에서 하도 강요하고 부탁하는 바람에 주님께 물어보지못하고 가게 됬어요!
 
그러나 그밤에 주님께서 주님 뜻이 아니라고 보여주시더군요~~~
그러나 기왕 부임했으니 열심히 목회했는데 교만이 찾아왔어요!
 
너무 일찍 큰교회에 있다보니 잘난줄 착각하고 다른목회자를 판단하게 되드라구요!
주님께서 치료해주셨던 남편의 다리가 다시 아프기시작했구요!
담임 목사님이 돌아가시고 장례치뤄 드리고 그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다리를 수술해서 3개월 동안 기브스를 하고 누워서 지내야 했기에
어린아이들 둘 돌보며 남편의 소, 대변을 받아내며 간호해야 했고
기브스 풀고 3개월은 물리치료로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 후에 약을 1년8 개월 먹어야 한다는 걸 기도원에 가서

금식하고 믿음으로 약봉지 버린 후
지금까지 병원은 안 가고 건강합니다! 할렐루야~~~
그때  대수술이였기에 남편의 다리 한 쪽이 짧아서...
지금은 지체장애로 살아가고 있답니다!
 
그 후엔  지금의 교회(목회자가 40일금식하다 돌아가시고..

어떤목회자는 성도에게 맞아서 고막이 터지고..

사례비도 없고..문닫기 직전)로 부임하였는데 
와서보니 동네에서 덕이 안되서 전도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와 사택 합25평 교회인데 비가오면 자고있는 방으로 비가 새어들어와서
요를 다~ 적시곤했는데 주님께서 은혜로
교회를 2층 건물로 건축하게 하셨습니다!
 
결혼반지와 아이들 통장까지.가진거라곤 모두 주님께 드렸는데도
건축빚으로 고생도 많~이 했고!사례비없이 지냈지만
1년 여만에 빚을 다~ 갚아주셨습니다!
 
교회는 크기와 숫자와 상관없이 두세사람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곳엔
주님의 교회이며 교인도 주님의 양들이기에 주님도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두 아들들이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방학만하면 밤마다 교회가서 기도회를 시작하여
한 겨울에도 난로는 피우지 않고 1시간씩 기도했고...
여름엔 선풍기도 안켜고 한시간씩 기도하였던 저에 기도의 동지였지요!
 
두 아들 모두 주님의 은혜로 건 강하게 잘 자라 주었고
어려서 목회자가 되겠다고 맘먹더니 큰 아들은 신학교 들어가서 전도사로 있고...
둘 째는 전문기술자가 되었습니다!만 다시 신학공부하여 전도사랍니다~
한평생을 가난하게 살아온걸 보고 자랐으면서도 목회자의 길을
걷겠다는 아들들을 보면 주님께서 택하시고
사명주시고 주장하시고 계신 증거입니다 아멘~~
큰 교회도 있어 보고...개척교회도  있어 보고..시골교회도 있어 보고..


시내교회도 있어 보고 지금은 면소재지의 작은 교회에서 물질로 사는 게 아니고..


주님 은혜로  살아가고  있어 때로는 사례비 많~은 사모님들이!

돈  잘~버는 자녀를 둔  사모님들이 부럽기도하지만

영육간 건강하게  믿음으로  잘~자라준 아들들이 감사하고!

주님안에서 사명 감당하며 살아가는 가족들 모습에 감사로!

주님을 기쁨으로 섬기며 살아갑니다~

 

감사 중  한 가지라면 작은 교회 사모기에 조금 더 겸손할 수  있고....

가난하기에  좀 더 기도로  주님을 의지할 수 있음인가 봅니다!

 

두서없 는 간증을 읽어 주셔셔 감사드리며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샬롬^^

 

글/멋진가지(제일교회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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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성경의 영감'에 대한 개념 - 존 머레이

칼빈의 영감과 그 효과에 대한 개념에 관해서는 디모데후
서 3:16과 베드로후서 1:20 이상으로 그의 사상을 정확하
게 나타내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디모데후서 3:16에
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바울은 첫째로 성경의 권위 때문에, 그리고 둘째로 성경이
가지는 효용성 때문에 성경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성
경의 권위를 지지하기 위해서 성경이 신적으로 영감된 것
임을 선언한다.

... 왜냐하면 성경이 영감된 것이라고 하게 되면 누구나 논쟁
의 여지없이 경외심을 가지고 성경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
다. 우리의 종교와 다른 종교들을 구별해 주는 원리는 바로
이것이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다는 사실
을 아는 것과 선지자들은 그들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고
다만 성령의 도구로써 하늘로부터 명령되어진 것들을 말했
을 뿐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성
경에서 유익을 얻고자 하는 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다음과
같은 것을 기정된 사실로 인정해야 한다.
율법과 선지서들
은 인간의 뜻을 따라 전달된 교리가 아니라
성령에 의하여
구술된 교리이다. 모세와 선지자들은
그들에게서 우리가
받아 가지고 있는 성경 말씀을
임의로 말하지 않았다.

그들
은 신적 감동을 받아 말했기 때문에 말씀해 주시는 이는 사
실이 그렇듯이 하나님의 입 자체라고 확신 있고도 대담하
게 증거했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께 대한 것과 동일한 경
외심을 가지고 경외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
한 분에게서만 유래되고 인간적인 어떤 것도 혼잡되어 있
지 않기 때문이다.”

칼빈의 성경관과 주권사상 ( 존 머레이)
출처: 개혁주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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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머레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0) 2014.09.17

질병을 이길 힘 인간의 질병들을 위한 치료책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내가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그에게만 있다. 내가 만족을 얻을 것도 언제나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 - 로이드 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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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ybook.org/newsletter/read.asp?ccode=503&No=555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강해』(전4권 중 제1권)
유해무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교의학)

 

드디어 김헌수 목사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강해서가 나왔다. 400년이라는 요리문답 설교 역사를 지닌 외국의 개혁파 교회의 목사들은 이미 많은 강해서를 출판하였다. 개혁교회의 역사가 길지 않은 이 땅에서 우리 목사의 설교와 작업의 결실로 나온 포괄적인 첫 강해서이기에 그 의미가 크며, 축하를 받을 만한 일이다.

  

장로교회도 개혁교회이다. 그렇지만 차이가 없는 것도 아니다. 요리문답 설교에서는 현격한 차이를 지닌다.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참가한 청교도 목사들은 대소요리문답을 작성하였다. 이들은 영국 국교회의 교리, 예배와 교회 정치에는 인간의 전통이 지배하고 성경의 가르침에서는 벗어났다고 투쟁하였다. 이 투쟁 과정에서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과 아타나시우스 신경도 사람의 작품이라고 보고, 결코 설교단에서 가르칠 수 없다는 입장을 가졌다. 이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은 설교의 본문이 될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요리문답이 잊혀지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그러나 유럽 대륙의 개혁교회는 요리문답이 비록 인간의 작품이지만 말씀의 복창이요 성경 교훈의 요약이라는 입장에서 매 주일 설교하는 전통을 교회법적으로 확립하였다. 그 결과로 개혁교회 교인들은 자신의 비참과 그리스도의 구원과 감사의 삶을 잘 안다. 이 삼중 지식은 요리문답의 제1문이 말하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우리의 몸도 영혼도 우리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위로를 알고 고백하게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자기 보혈로 우리를 비참에서 해방하심으로 아버님의 사랑과 성신님의 확신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 하심이 위로의 내용이다. 그래서 저자는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일한 위로이심을 부제로 삼았다.

  

저자는 2006년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역사와 신학』을 내면서 요리문답 교육, 특히 요리문답 설교를 반대하는 의견을 염두에 두고서 그 필요성을 세 가지로 차분하게 반박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설득력 있게 피력하였었다. 저자는 본서에서 이 세 가지를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

  

첫째로, 목사 개인의 한계와 성향에 좌우되는 강해 설교와는 달리 성경의 교훈을 요약한 요리문답을 설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오직 성경’은 ‘성경 전부’라는 확신이다. 마찬가지로 삼위일체 하나님은 위로 전부이시다(33). 이 때문에 비참함도 전체적이며, 타락도 전체적이라고 해설한다(40; 380). 이 확신을 따라 저자는 성도가 성경을 전체로 받아들여 참된 믿음을 갖도록 돕고 있다(178).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구속·성화의 사역을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전부 받든지 아니면 전부 잃게 된다고 단언한다(201).

  

나아가 성경의 일부가 아니라 성경 전체를 받고 믿고 따르는 교회가 개혁교회라고 정의한다(381). 개혁교회 목사인 저자는 성경 전부를 균형 있게 정리하여 개혁교회 교인들에게 잘 가르친다. 성경과 예수님의 사역에 인간의 생각이나 제도를 더하거나 부분적으로 가르치면 항상 이단에 빠질 위험이 있다. 성경의 교훈을 떠나 예수님의 사역에다 인간적인 공로를 더하는 것이 로마 교회의 역사에서 잘 나타난다(265 이하). 현재에도 복음에다 무엇을 더하여 복음을 부인하는 일이 우리 주위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것을 지적하고 경고한다(271 이하). 부분적으로 가르치는 위험으로는 유아세례를 부인하는 재세례파를 든다. 이들은 육신 자체를 죄의 본질로 보기 때문에 예수님의 육신은 하늘에 속한 육신이 마리아의 몸을 빌어서 탄생하였다고 주장한다. 선한 창조를 부인하고 기독론도 부분적으로 가르치고 유아세례도 부인한다(380-1).

  

둘째, 요리문답 설교는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한다. 본서는 위로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는 성도가 살아가야 하는 삶을 잘 보여 준다. 즉 믿음의 내용을 잘 설명하면서 그 믿음대로 살도록 인도하는 실천적인 배려도 잊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포괄적인 은혜를 베푸시려고 비참함과 죄의 깊은 것을 알게 하신다. 그러면 성도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 이것은 사람인데도 짐승처럼 싸우는 사회와는 다른 언약 백성의 모습이다(51 이하). 참된 믿음을 가진 신자는 가정을 아름답게 가꾸며, 사회에서도 모범적일 수밖에 없다.

  

요리문답 설교가 신자들을 신실하게 살도록 이끈다는 구체적인 예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설명에서 잘 나타난다(91 이하). 하나님의 형상을 영혼의 기능이나 종교적이거나 지적 능력으로 해석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역동적으로 가르친다. 즉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이 먼저이고, 그 사명을 이루도록 주시는 자질은 뒤따라온다. 또한 남자와 여자를 지으심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사회적 특성도 이끌어낸다. 또 그리스도의 삼직(三職)에 이어서 그리스도인의 삼직을 다루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빌어 직분을 설명하는 것이 아주 돋보인다(308 이하). 모든 그리스도인이 직분자라는 것을 가정생활에서 잘 보여 주고, 나아가 교회의 직분도 설명하면서 한국 교회의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로운 사회’를 이루면서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은 삼위 하나님을 닮은 성도로 이루어진 사회이다(206-210).

  

셋째로, 요리문답에 요약된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교회의 통일성에 기여한다. 징계를 받고도 승복하지 않고 다른 교회로 옮겨 가는 것은 ‘교회적 믿음’을 버리는 일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연합되어 있지 않으니까 나타나는 현상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이고, 말씀이 바르게 전파되는 보편적 교회도 하나이다(186).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연합한 사람은 말씀의 직분자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다(187; 289).

  

저자는 이전에 밝힌 대로 요리문답 교육이 지닌 세 가지 유익한 점을 신실하게 설교하였고 잘 정리하여 책으로 선물하였다. 그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신실하고 의롭다.


이와 연관하여 저자가 사용하는 ‘파악의 태도와 경배의 태도’라는 용어가 눈길을 끈다(162; 198). 삼위일체론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저자는 이단의 중요한 특징으로 합리적이고 사변적인 설명을 든다. 교회사에서 교인들이 이런 ‘파악의 태도’를 물리쳤다고 말한다. 교회사를 사상사(思想史)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로 보는 역사 이해가 그 배경에 있다. 물론 위대한 신학자들이 이단의 잘못을 잘 지적했지만, 교인들이 ‘구원을 생각할 때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셔야 한다’는 사실을 믿었고 그들을 후원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교회는 중보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경배의 태도’를 취한다. 이단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비도 다 분석하여서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파악의 태도를 지녔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 주는 것을 믿고 ‘세 하나님의 한 이름’ 안으로 세례를 받고 삼위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면서 살아가는 ‘경배의 태도’를 취한다. 이런 성도는 결코 오만하지 않을 것이다.

  

곧 저자는 요리문답을 사용하여 오직 성경을 전체적으로 가르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성도들이 갖게 하고, 이 믿음을 따라 삶이 변화되며, 말씀 앞에 겸손하도록 인도한다. 혹 어떤 독자들은 본서를 너무 무게가 나가는 딱딱한 책이라고 평가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런 독자들은 성경 전체를 가르치기에는 역부족인 이름뿐인 강해 설교에 익숙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참된 믿음은 확실한 지식과 굳은 신뢰이다. 신뢰하면 확실한 지식에도 이른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그분을 확실하게 알려고 애쓴다. 이것은 동시에 객관적 지식만으로는 믿음이 빈곤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잘 보여 준다. 확실한 지식과 굳은 신뢰는 하나님의 향한 전인적인 관계를 말한다.

  

그래서 예배가 중요하다. 저자는 예배에서 하나님께 찬송과 기도를 드리고 말씀을 받을 때에 확실한 지식과 굳은 신뢰도 생긴다고 강조한다(181). 이 공적 예배가 약화되면 신앙이 개인주의적이 되고 삶도 힘이 없어진다고 한다. 아주 중요한 지적이다.

  

이 점에서 저자가 독립개신교회의 찬송을 인용하는 것은 중요하다. 요리문답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론으로 가르치지 않고 성자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통하여 삼위 하나님을 알게 한다. 이것은 성경 말씀의 가르침이요 예배 끝에 선언하는 복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먼저 나온다(24). 성자를 통하여 성부 하나님을 알고 또한 성자를 통하여 성신 하나님도 안다. 그러면서 저자는 독립개신교회의 『찬송』에 나오는 경배송 XXXI을 인용한다. 1절은 ‘우리 주님 예수님 나를 이뻐하시니’로 시작하고, 2절의 ‘내 아버지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니’를 거쳐, ‘보혜사인 성신님 나를 인도하시니’로 3절이 시작한다. 이처럼 계시와 선포된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서 찬송을 통해 삼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것은 시편의 말씀을 따르는 순종이다. 동시에 이런 찬송을 부르는 이들에게 본서가 결코 어렵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따라서 저자가 아주 평이한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아주 신실하게 요리문답을 가르쳤다. 특정 청중이 아니라 성인과 어린이를 모두 포함한 회중에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저자의 언어 사용은 간결하다. 그러면서도 전달하는 내용은 아주 알차다. 원래의 청중을 잘 배려하였다는 증거이다. 교사로서 청중을 배려하고 소통과 전달에서도 성공했다. 아이들에게 참된 지식과 거짓 지식, 기독론적 삼위일체가 조금 어렵겠지만, 숙제에 대한 답을 보면 이들도 위로를 삼위 하나님 안에서 찾는다는 사실을 확인한다(25).

  

본서를 보면 저자가 말씀을 깊이 깨닫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요리문답 설교를 준비하면서 성경 본문을 아주 깊이 궁구하여 그 깨달음이 깊고 넓다. 간혹 필요하여 성경 원어를 직접 언급하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로 성경 말씀을 원어로 읽고 준비한 흔적을 볼 수 있다. 성도의 선지자 직분은 주님을 고백함이라고 설명하면서 부인함과 시인함을 주님께서 말씀하신 마태복음 10:32-33절을 인용한다(306). 저자는 언급하지 않지만, 시인함이 고백이다. 이는 원어를 알지 못하고는 인용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또 삼위 하나님의 이름 ‘안으로’ 세례 받는다는 번역은 원문을 살린 정확한 번역이다(194-211). 세례가 삼위 하나님과의 접붙임, 곧 연합이기 때문이다. 세례의 성격을 잘 설명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변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삼위일체를 깨닫도록 인도한다. 저자는 삼위일체론이라는 말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역사와 신학』에서 언급한 바가 하나 더 있다. 즉 매년 같은 주제로 설교하면 자칫 판에 박힌 ‘지루한 설교’가 될 수 있다는 현실적인 비판이다. 이미 그때 저자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바르게 깨달은 자에게는 자주 시행하는 성찬도 지루하지 않지만, 깨닫지 못한 자에게는 한 번의 성찬도 지루할 것이요, 요리문답의 내용을 바르게 배우지 않은 사람은 요리문답 설교가 지루할 것이라고 ‘미리’ 판단한다고 반박한다.

  

저자는 이 점에서도 성공했다. 깊은 말씀 이해와 성경 전체라는 포괄성, 그리고 간결한 문장력과 실천적인 배려 등으로 본서는 딱딱하지도 않고 지루하지도 않다. 저자는 이미 요리문답 전부를 5회나 강해했다(8). 이 땅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설교의 선구자이며, 경건 서적의 새로운 장르를 계발하였다. 한국 교회 안에는 ‘절기 설교’에 부담을 갖는 설교자들이 많다. 절기의 독특성은 말씀 선포에서 편파성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것은 이른바 ‘헌신 예배 설교’에도 해당된다. 이런 상황에서 요리문답 설교가 지루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것은 공정하지도 않을뿐더러, 본서는 그런 기우에 불과한 반대를 말끔하고 멋지게 씻어 낸다.

  

앞으로 독립개신교회의 신학교에서 교의학을 강의할 저자는 본서에서 교의학적 주제들을 아주 잘 다루고 있다. 이미 말한 삼위일체론과 기독론과 하나님의 형상론 외에도 율법과 복음의 관계,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직분론 등의 주제를 이른바 ‘교의학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말씀의 해명으로 녹여 낸다. 좋은 교의학자의 자질이 있고 충분히 훈련하였음을 잘 보여준다.

  

이것이 신학의 길이다. 설교로 하나님을 말하고, 그 하나님을 교인들이 본받아 삼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유일한 위로를 받아 살아가는 신학의 길이다. 이런 설교에서 진정한 신학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모범적으로 보여 준다.

  

어디 흠잡을 곳이 없는 작품이기 때문에 저자에게 당부하는 식으로 서평을 마치려고 한다. 저자는 한국에서 기독교 세계관 운동과 기독교 학문 운동을 초기부터 주도하다가 목사가 되었다. 본서는 이 운동을 바르게 할 수 있는 기초도 잘 놓았다. 바로 직분으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이다. 저자는 이 형상을 가정과 교회 안에서 설명한다. 아쉽게도 첫 권에서는 가정과 교회 밖에서 실천해야 하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계속될 요리문답 설교와 다른 저작에서 이 빚도 꼭 갚아서 교회에 기초한 개혁 신학이 포괄적인 문화 운동의 주체라는 것을 보여 주기 바란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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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생미쉘’은 프랑스 여행의 백미로 불리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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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외감을 느낄 정도의 멋진 절경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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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강암 위에 우뚝 세워진 수도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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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조가"되면"바다로"둘러싸여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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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천공의 성 처럼  멀리서는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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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위에 떠 있는 '몽생미쉘'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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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물때는 바다물이 모두 빠져 나가 갯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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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에는 풀을 뜯는 양떼들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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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꽃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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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모를 잡초들이 무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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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물이 빠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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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맨발로 갯벌을 거닐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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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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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해변가를 천천히 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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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타고 달리는 짜릿한 기분을 만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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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사 미카엘의 메시지를 받은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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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밖으로 주민들이 거주하며 마을을 이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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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도원은 영국군 진공에도 침공을 당한 적이 한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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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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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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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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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으로 들어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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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중세풍의 작은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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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순례자들을 맞던 주민들이 살았던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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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호텔과 상점, 01132649_37.jpg
이곳에 있는 식당중 가장 유명한 곳은 ‘라 메르 뿔라르’(La Mere Poul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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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지 한가운데  위치해 있는호텔을 겸한 식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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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의 수많은 국가 원수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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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등 유명인사들이 다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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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 유명한 음식은 ‘브루타뉴’ 전통의 오믈렛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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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오믈렛 요리는 공기와 함게 계란거품을 먹는 느낌이라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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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당 50유로는 있어야 한끼 식사를 해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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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 유로(1,500 달러) 짜리 포도주도 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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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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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꽃이 함께 어우러진 벽돌 건물도 보이고

30141634_45.jpg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이 묻어 있는 이끼낀 건물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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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대한  수도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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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 전쟁 때에는 프랑스의 군사적 요새로 사용되기도 했던 몽생미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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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황제 때에는 형무소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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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옥상으로 올라 가 안으로 들어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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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꾸어진 아름다운 수도원 정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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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정원은 바라 보기만 해도 평온한 마음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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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밖으로 나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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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로 지어진오래된 담과 도로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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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생미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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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은 가도 가도 끝없는 평야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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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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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생미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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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속한 기독교?
(grunge christianity?) 존 맥아더목사

반(反)문화가 지닌 죽음의 소용돌이와 복음의 저속화

최근 복음주의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최고의 주제는 어떻게 교회가 "문화를 따라잡는가"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급속도로 쇠퇴해 가고 있는 문명의 야만적인 면모를 닮아갈 필요가 있는가? 단지 사회와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누군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복음주의 전략가들과 약삭빠른 교회 지도층들이 조언하기를 교회는 현시대의 문화와 보조를 맞출 필요가 있다는 말을 듣는다.

... 당신도 분명히 이러한 토론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병 속에 담긴 메세지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말하기를 현세대의 반문화의 언어로 말하지 않으면 우리는 더이상 목회를 효과적으로 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만일 우리가 복음을 현시대의 말로 표현하지 못하며, 기독교를 새로운 세대에 맞게 재구성하지 않으면 어떻게 젊은 청년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가라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시대와 발을 맞추어 가야한다고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쟁은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소위 무(無)스타일이야 말로 복음의 전파에 가장 큰 위협이고 교회가 그 효력을 잃게되는 실제적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실로 자신이 세속화된다는 문제를 크게 문제삼고 있지 않다. 그들은 단지 쿨~하게 보이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주류에 속한 복음주의 운동은 이미 반세기 전에 세속주의에 두손을 들고 말았다. 그리고 수십년 전에 이미 실용주의에 완전히 굴복하고 말았다. 결국 1985년 이후 눈에 띄게 성장한 모든 유명 초대형교회들은 이 실용주의 철학위에 세워졌으며 교회에 다니지 않는 청중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제공해 주어 그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제 남은 중요한 문제는 정말 효과적인게 무엇이냐 이다.

대다수의 교회들은 고의적으로 문화적이고 싶어한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이 현재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트렌드를 쫒는 신세대 교회 설교자들을 보고 있다. 그들은 모든 대중적 스타들과 내용들을 언급하고, 모든 잡다한 얘기를 늘어놓으며 모든 무미건조한 풍류를 쫒고 있다. 다시 말하면 모든 포스트모던 시대의 세속적 풍속의 변덕스러운 환상과 허망한 트렌드를 쫒는 것이다.

세속적인 설교자들은 길을 벗어나 육욕적인 의견을 표면적으로 들어내고 있다. - 심지어는 설교 가운데서 말이다. "문화"를 빙자하여 그들은 자신들도 사람들이 최근에 MTV(음악프로그램)에서 본 프로그램들을 보았노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최근 텔레비젼 드라마의 주요 주제들을 익히 알고 있으며 최신 가요와 헤비메탈을 들었으며 소위 말하는 성인영화들을 수도없이 보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유행의 최신과 과거, 앞과 뒤, 처음과 나중을 모두 알고 있는 듯이 말한다. 그들은 세상의 언어들과 스타일을 도입한다. 심지어는 정숙한 사회모임에서 쓰기 어려운 저질의 언어도 서슴지 않고 쓰고 있으며 이를 강단에서 유감없이 사용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단지 세상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으며 사람들이 이를 통해 편안함을 느끼게 해 주고 싶어한다.

마크 드리스콜(Mark Driscoll)은 이와 같은 사상의 대표적인 주자이다. 그는 매우 효과적인 대화창구이다. 밝고 재치가 넘치며, 영리하고, 웃기고, 통찰력이 가득하고, 세속적이며, 저속하며, 일부러 사람들을 놀래키고, 얼굴을 맞대고 얘기하기에 적합한 사람이다. 그의 구원관은 정확히 옳다, 하지만 이는 그의 세속적 취향과 더불어 더욱 혼돈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시애틀에 있는 드리스콜의 교회는 "저속한" 교회 음악의 탄생지이자 이러한 류의 문화들이 숨가쁘게 배출되는 근원지이다. 드리스콜의 독특한 스타일과 개성적인 언어들은 "저속함을 지난"듯 하다. 그의 언어들과 설교들은 일부러 정제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는 최신 재즈음악의 가사에 나오는 저속한 언어들을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도날드 밀러(대중적인 작가이자 "떠오르는 교회"운동의 아이콘격인 사람으로 드리스콜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낸 바 있다)는 드리스콜에게 " 입이 걸한(cussing pastor) 목사"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드리스콜이 개인적인 담화에서 어떤 말을 하는 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의 설교 몇 편을 들었으며 공정하게 평가한 결과 그는 소위 말하는 외설적인 말들-방송에서 금지된 말들을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즐겨쓰는 단어와 주제들은 그리스도의 목회자들이 쓰기에는 부적절한 품위가 없고 예의바르지 못하며, 원색적인 것이었다. 내가 들은 모든 메세지들 속에는 적어도 설교 단상에서 쓰기에 벗어난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드리스콜이 자유롭게 말하는 것들 중에는 내가 대중적으로 언급하기에 꺼려지는 것들이 있다. 그렇기에 그것들에 대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내 몇 블로그에서 논하여 진 바있다. 올해 초 팀 챌리는 드리스콜의 저속한 경박성에 대해 언급한 바 있으며 이는 그의 빈티지 지저스 시리즈에서도 나타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본질적으로 드리스콜의 언어적 문제가 아니다.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사상에 관한 것이며 이는 사회를 쫒아 로마서 1장의 길을 따라 "문화를 따라잡자"를 목표로 삼는 것이다. 우린 우리 문화의 어두운 면에 과잉적으로 노출될 수 있다. 나는 어느 누구도 오늘날 오락적 문화에 깊이 빠진 채로 영적으로 건강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것을 한번 다루어 보자. 세상의 가장 호감있는 유행들 중 많은 부분은 독성이 있으며 우리 사회가 죽음의 소용돌이에 더욱 휘말릴 수록 더욱 그러하다. 그 속에 잠겨 있을 때에는 그 효력을 즉시 알아챌 수 없으며, 그 영혼을 죽이고 파괴하는 피할 수 없는 오염에서 결코 빠져 나올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죄악적 세속의 풍류에 익숙하고 편안함을 느끼는 자들에게 화가 미칠 것이다. 로마서 1장 끝부분에는 이러한 자들을 정죄하고 있다.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비록 누군가 이러한 세속주의와 함께 훌륭한 조직 신학과 대속적 구원을 결합시키고자 할지라도, 건전한 신학적 교리는 결코 이러한 실용적인 라이프스타일의 사악함을 용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말씀을 따라 가르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건전한 성경적 교리는 무시되고 모욕을 당할 것이다.

우리는 바울의 예에서 배울 수 있다. 그는 아레오바고(아레오바고의 뜻은 마스의 언덕, Mars Hill- 드리스콜이 목회하는 교회이름, 역자주)의 철학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하지만 결코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불쾌하게 생각했다. 사도행전 17:16을 보면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바울이 그들의 문화에 대해 얘기할 때, 그는 희랍의 학문을 통해 자신의 말할 바를 나타내지 않았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진리를 단순한 언어를 통해 선포하였다. 또한 그의 말을 들은 청중들 중 몇은 이것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했다.(18절) 이것이 바로 얘견되는 바이다. 예수님을 말씀하셨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 (요한복음15:18-19)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기도는 우리의 세상에 대한 자세와 정당한 관계성을 잘 가르쳐 주고 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요한복음 17:14-16)

주님께서는 언제나 신자들이 세상에 있을 때를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일 너희들이 신실하게 살려 한다면, 세상은 핍박과 증오의 장소가 될 것이다. 결코 편안한 곳이 될 수 없다.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가르침을 우리의 성화를 위해 간구하셨다. (요한복음 17:17-19)

경건에 대한 "저속한 " 접근방식의 문제는 그것이 성화에 반대된다는 것이다. 사실 내가 들은 몇 편의 설교중에서 드리스콜은 실제적으로 자신의 성화가 자신의 어깨 높이 밖에 진전되고 있지 않다고 자랑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대속적인 구속은 그의 제자들이 이신칭의의 교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하지만 그가 표방하는 라이프스타일은 - 특히 그의 더러운 세상 문화에 대한 친근감 - 실제적으로 온전한 성화에 결코 이룰 수 없음을 보장해 준다.

나는 솔직히 어떻게 성경을 마주 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감히 "문화적으로 뒤쳐지지 않기 위해" 사회의 저속함에 참여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저속함과 문화는 우리의 삶과 정 반대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출처: 개혁주의마을



하늘 꽃... 최송연
나에게 행복을 안겨다 줄 천사가 그 어디멘가 있을 거야
외로운 인생들 날마다 행복을 안겨줄 그 한 사람을 찾아 헤매느라 더욱 고달프네
그러나 참 행복이란 다른 사람이 내게 선물로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지 그가 비록 천사일지라도...
참된 행복은 영혼 깊은 곳에 숨겨진 오색 무지개 타인을 위해 눈물을 빗물처럼 많이 아주 많이 흘려본 사람의 마음속에서만 조용히 피어오르는 하늘 꽃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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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가항력적인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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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알듯이 성령님께서는 사람들이 비록 여러 다른 곳에 거처한다할지라도 마음에 역사하시기에 그들은 같은 믿음과 같은 진리를 믿고 받을 것이다. 크리스토퍼 러브-
      내적인 부름은 성령님께서 외적인 말씀의 부르심과 동반하여 그 사람을 무지에서 지식으로 자연인의 상태에서 은혜의 상태로 부르실 때 일어난다. -크리스토퍼 러브
      부르심은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함께 연합할 자들을 모으시는 것이다. -윌리암 아메스
      그리스도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의지가운데서 성령의 은혜원리가 작용되는 과정이다. 내적인 부름은 영적인 계몽이며, 여기서 약속들은 내적인 말씀에 의해 그 사람들의 마음에 증거된다. -윌리암 아메스-
      하나님에 의해 영적이며 신적인 빛이 곧 인간의 영혼에 주어지는데 이는 자연적인 도구에 의해 얻어진 무엇과는 전혀다른 속성이다. -조나단 에드워드-
      육신에 있는 편견은 거룩한 진리와 반대되는 것으로 제거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성은 진리에 대한 논쟁에 대해서 적절히 민감해 지기 위해서이다. 인간의 마음은 본성적으로 거룩한 것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복음적 교리에 대한 완전한 반감이다. 이것은 진리를 입증하는 논쟁에 대해 무익하며 마음에 힘을 잃게 만들고 만다. 하지만 누군가 사람의 마음에 기독교적 교리들의 영적인 탁월함을 밝혔을 때에는 이것이 모든 반감을 부수고 모든 편견을 제거하며 이성을 거룩하게 만들고 진리에 대한 논쟁의 힘에 마음을 열게 만든다. -조나단 에드워드
      이러한 부름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이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은 죄로 죽어 아담 안에서 잃어버린 사람들을 복음의 선포와 성령님의 은혜로 불러낸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며 그 안에서 구원을 얻게 한다 -프란시스 튜레틴
      양자됨은 우리에게 아들의 특권, 즉 아들들의 새로운 본성의 거듭남이다. -스테판 차르녹
      첫 창조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그렇듯이 두번째 창조, 거듭남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셔서, 지식과 의와 진실한 거룩성, 사랑에서 새롭게 만드신다. -바바서 파웰
      회개는 마음의 변화이며, 거듭남은 사람의 변화이다. -토마스 아담스
      사람의 관점에서는 인생이 아름답게 보일만한 것들이 여럿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그 어떤 것도 아름답지 못한데, 다만 그 마음이 변화되어 새롭게 될 때까지 그러하다. 이 세상의 어떤 약도 성령님의 거룩케 하는 역사가 없이는, 상처와 병이난 부위를 덮을 수는 있어도 영혼을 치료하고 고칠 수는 없다. -오지 스윈녹-



      출처: 포도나무선교회/생명나무 쉼터 꾸밈: 최송연의 목양연가"묵상의 글" 중에서

            
동성애 문제: 사탄의 또 다른 전략을 보라!

최용수 ㆍ  

                              동성애 문제: 사탄의 또 다른 전략을 보라!

                                                                                             최용수 목사                                                                  

불과 몇 십년 전까지만 해도 동성애 문제는 대중들에게 그리 직접적인 이슈가 되는 주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동성애는 어느 한 국가나 특정 지역을 벗어나 전 지구적인 이슈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전 지구적인 보편성으로 서서히 부상할 뿐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그럴 수도 있지”라는 공감대와 더불어 법적 안정장치까지 얻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동성애에 대해서 사회적인 그리고 관습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는 어떠한 브레이크를 걸 수도 없을 만큼 동성애 문제는 가속도가 붙여진 상황이다.
이미 동성 결혼을 합법적인 결혼으로 법적으로 인정하는 나라만해도 네덜란드, 벨기에, 스페인, 남아공화국을 넘어 미국의 메사추세츠 주, 코네티컷 주와 최근에는 미국 대법원에서도 동성 결혼이 위헌이 아니라는 공식적인 법적 판결을 내려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주민 발안을 낸 캘리포니아주를 비롯한 다수의 미국 주들이 주 법을 변경 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제야 말로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는 나라들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고, 반대하는 나라들의 입지가 “인권”이라는 미명하에 점점 좁아지는 형국이 되고 있다.
이러한 동성 결혼과 동성애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는 미국, 캐나다 등을 비롯한 북미 멕시코, 브라질 등 남미 대륙 국가들, 유럽의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영국 등의 유럽지역 그리고 필리핀, 싱카폴, 말레이시아, 태국 등의 아시아 국가들을 망라한 전 지구적인 도미노 현상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동성결혼 그리고 동성애 문제에 대한 교회와 우리 목회자의 상황인식은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불과 우리는 수십 년 전만해도 “이혼, 낙태”등의 이슈가 교회 공동체를 논란 가운데 빠트렸던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이혼, 낙태 등의 주제는 논란기를 이미 거쳐 안정기에 접어들어 사회 안에서는 언급할 필요도 없고, 교회 안에서 조차도 별다른 논란 거리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즉 이미 이혼과 낙태 등은 해당 개인의 문제이지 법적으로 논란을 만들어 낼 수준이 지나갔다는 인식이 대세이다. 물론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이혼과 낙태 등의 문제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이 다수이겠지만 실제로 해당 문제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본인들의 삶이 그 생각처럼 그렇게 사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 볼 수 있다. 일례로 이제는 교회 안에서 이혼, 낙태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쉽사리 설교 또는 가르침의 주제로 선택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설교하는 목회자 입장에서는 성도들 가운데 편모, 편부 성도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고, 괜히 이런 문제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조용한(?) 교회에 평지풍파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주류가 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주제들은 암묵적인 동의 하에 제대로 다루어 지지 않고 설교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대세이다. 그런데 이제 이런 주제에 슬그머니 또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동성애 문제이다. 사탄이 늘 그러하듯 이것도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라이프 스타일”로 인식하게 만들고, “억압받는 소수자의 인권”이라는 잘 포장된 이름으로 사람들을 혼돈 속에 몰아 넣고 있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알든 알지 못하든 서로 다른 차이를 가진 사람들이 누리는 “법적 권리”로 포장하여, 점점 공감대를 넓혀가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동성결혼과 동성애는 하나의 법적 권리와 합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생각해서는 안될 위험 요소들이 너무나 많음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우선 동성결혼은 동성으로 결혼하는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실로 심각한 문제는 동성 결혼을 한 사람들이 키우는 자녀들에게 미치는 영향이다. 동성 결혼자들은 동성 결혼으로 걸음을 멈추지 않고 자녀를 갖고(?), 자녀를 키운다. 그렇다면 동성 부모를 둔 아이들은 부모님-앞으로 부모님이라는 단어도 동성애자들의 인권에 저촉되어 사용할 수 없을 때가 올 수도 있을 것이다-동성 부모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인식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자신을 키워준 동성 부모 아래서 자라난 아이들은 동성애에 대해 아무런 거부감이나 바람직한 사고를 하기 어려운 태생적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아울러 이것은 동성 결혼자들의 자녀들이 학교를 다니며 성장함에 따라 더욱 더 그들과 다른 환경에 처한 학생들, 학교, 사회 전체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회적 악영향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악화되어 앞으로 20-30년 이후에는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고 사랑하는 것에 의문을 품을 수 있고, 남성이 husband이 되고 여성이 wife가 되며, 결혼가운데 정상적인 자녀가 생기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운 특수한 상황으로 받아질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동성애에 대한 인정과 동성결혼의 합법화는 지금보다 앞으로 20-30년 이후, 우리들의 자녀세대가 겪어야 하는 더욱 큰 재앙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진리를 가르치는 우리 목회자들과 교회 공동체는 어떻게 이 문제에 대응해야 할까?
무엇보다 우리는 이혼, 낙태 등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그 사람들이 다치지 않도록, 상처받지 않도록 공개적으로, 공식적으로 제대로 말할 수 없이 쉬쉬하는 수준으로 이 동성애 문제를 대응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렇게 안이한 대응은 머지않아 이혼, 낙태 옆에 슬그머니 동성애라는 자리가 끼어들 수 밖에 없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성경 안에서 진리 안에서 동성애와 동성결혼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견지하고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다. 동성애 문제는 단순한 인권이나 다양성을 인정하는 그런 논리와 접근이 될 수 없는 사안임을 가르쳐야 한다. 모든 인간은 인권이 있고, 하나님이 그리 부여하셨다. 하지만 죄를 머리에 이고 가며, 전파하는 이들에게도 인권, 다양성이라는 이름을 들먹인 사탄의 전략에 침묵하거나 입을 닫아서는 그 일에 방조내지 동참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어제자 소식에서는 복음주의권 안에 있는 미국의 한 신학교에서도 학교 내에 동성애 그룹 동아리를 인정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동성애는 이제 우리들 멀리 있지 않고, 우리 주변에 가까이 와 있다. 이제 곧 교회 안에서도 다양성의 무지개색 정신-동성애자들이 다양성을 주장하자는 취지로 무지개 색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전파할 것이다. 사탄의 전략에 공감할 것인가? 아니면 그 계략을 직시하고 대응할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바른 선택에 달려있다.

이제 동성애와 동성 결혼은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미 우리 곁에 성큼 와 버렸다. 동성애에 대한 현재의 문제보다 이후에 파생될 문제를 생각할 때 그 심각성을 가름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거짓을 전하는 사탄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의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같이 날카로우며 그의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의 걸음은 스올로 나아가나니 (잠5:3-5)

이러한 때 한국 교회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진리를 구부러트리고 사람들을 혼돈케 만드는 거짓의 영, 미혹의 영, 사탄의 전략에 바른 대응과 올바른 판단을 해야 할 것이며, 바른 목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 다시 한번 이 땅의 교회와 목회자들이 동성애, 동성결혼에 대한 이슈를 제대로 파악해 진리의 목소리를 내어 줄 것을 기원한다.


USA 아멘넷 독자공간 게시판

 

하나님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는 방법(시 5:3)

 

매튜 헨리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이른 아침에 이곳에 오는가? 이곳에 와서 하는 일은 무엇인가? 거룩한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아니, 어디에 있든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에게 하셨던,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19:9)라는 질문에 분명하게 답변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배를 마치고 돌아갈 때는 그리스도께서 세례요한의 사역에 참석했던 사람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마11:7)라는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밭은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 여러분이 여기까지 나온 것이 단지 상쾌한 아침 산책을 위한 것이거나, 전에는 이러한 아침 설교가 없었으니 한번 가볼까 하는 호기심 때문이 아니었기를 바란다. 이곳에서 친구들을 만나기 위한 단순한 목적에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로부터 은혜를 받고 그 가운데서 영적인 교제를 잘 유지하기 위한 경건한 목적에서 이곳에 나온 것이기를 바란다.

만일 여러분이 우리 목사들의 직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능케 하심으로) 여러분들을 이곳까지 오도록 도와주고 밀어주는 것이라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다. 베들레헴의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평강을 위하여오시나이까"(삼상16:4)라고 물었듯이, 아마 여러분들도 우리에게 그렇게 물어 볼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해 우리는 예언자가 대답했던 것처럼 "평강을 위함이니라 내가 여호와께 제사하러 왔으니. ... 와서 나와 함께 제사하자"(삼상16:5)라고 답할 것이다.

여러분이 이 설교를 계속 듣는다면 여러분의 아침 경건 시간은 두 배의 효력을 얻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설교를 듣는다고 여러분 혼자서 혹은 가족들과 함께 예배드리던 시간을 없애 버리거나 미루어서는 안 된다. 여하간 지금 여러분은 여기 엄숙한 모임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은 설교를 듣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이 아침 예배는 온 영국 사람들이 시민전쟁(영국의 찰스 1세와 의회와의 싸움으로 일어난 청교도 혁명을 말함 - 역자주)이라는 무시무시한 심판을 받아 신음하고 있을 때, 기도하기 위해 모였던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여러분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과 사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고, 매 구절 구절에서 훈계 위에 훈계를 받게 되었다. 매일 아침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여러분은 (예언자의 말처럼)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될 것이다(사50:4)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여러분이 이런 기회들을 통해 감화받음으로써 항상 그러한 효과를 얻게 되기를 바란다. 또한 이 아침 설교로 인해 앞으로 아침 예배에 대해 더욱더 호의를 갖게 되고, 이같이 반복되는 경건 시간이 습관이 되어 여러분이 드리는 매일 매일의 예비가 더욱 쉽고 자연스러워지기를 바란다.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도록 경건한 다윗을 예로 들어 소개하려 한다. 그는 시편 5:2에서 기도의 의무를 충만하여 그것을 지킬 것을 결심하고 있다.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여기서 그는 아침을 기도하기에 적당한 시간으로 정하고 있다.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그러나 아침에만 한 것이 아니라, 다니엘이 그랬듯이 하루 3번 기도하는 일을 진지하게 실행했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시55:17) 아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지 않고 그는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시119:164)라고 했다. 그러나 특히 그는 아침 기도를 중시했다.

 

Point

매일 매일을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는 것이 우리의 지혜요 의무이다.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우리가 해야 하는 선한 일 :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실 것이니 우리는 주께 기도하고 그를 바라야 한다.

2. 이 선한 일을 위해 정해 놓고 지켜야 할 특별한 시간 : 그것은 바로 아침이다. 어김없이 아침이 찾아오는 것처럼 매일 아침에 기도해야 한다.

 

1. 우리가 해야 하는 선한 일 : 기도

 

첫 번째로 다윗의 예를 통해 여기에서 배울 것은 한마디로 기도하는 일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그들의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명료하게 큰소리로 외치고 있는 빛과 자연의 법칙에 의해 지시되는 의무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가르침과 격려를 주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며 누구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누구의 도움을 받아서 기도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또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들을 초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일은 아침뿐만 아니라 다른 어느 때에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시대에 뒤떨어진 설교라는 말은 들었어도 기도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기도는 결코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은혜의 보좌는 언제나 열려 있으며 겸손하게 간구하는 자를 언제라도 환영하고 있어서, 어느 때 나아가더라도 적당하지 않은 때가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윗이 이 의무를 지키기 위한 경건한 결단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보기로 하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여기에서 우리는 이 말을 두 가지 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받아 주시리라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고 있다.

즉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할 때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실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 위에 기초를 둔 그의 믿음을 나타낸다. 주님의 귀는 언제나 백성의 울부짖음에 대하여 열려 있을 것이라는 그의 믿음의 표현이다. 그는 시편 5:1에서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라고 기도했고, 2절에서는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라고 했다. 그는 여기에서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는다.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그는 주님께서 들으실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비록 내가 기도한 것들이 즉시 응답받지는 못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 될 것을 확신한다(고넬료의 기도가 그러했듯이), 그 기도는 기록에 남게 되어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심중을 들여다보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준비하셨다고 경험을 통해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바라고 기대하는 확신을 가지고 주께서 귀기울여 들으실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도하는 영혼을 발견하시면 어디에서든지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그런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하며 또 그러한 확신 가운데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비록 기도하는 음성이 연약하고 낮은 목소리일지라도 솔직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들어주시되 기꺼이 들어주실 것이다. 그것이 그의 기쁨이므로 은혜로운 응답을 해주실 것이다.

그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고 우리의 눈물을 보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아무 것도 의심하지 말고 무엇에도 흔들리지 말며 다음과 같은 근거와 다음과 같은 원칙 아래에서 기도해야 한다.

즉,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고 우리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기꺼이 우리에게 허락해 주실 것이다. 요한복음 16:23의 약속의 말씀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리고 인류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이래로 모든 세대의 성도들의 일치되는 경험이 그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야곱의 하나님은 "야곱 자손에게 너희가 나를 헛되이 찾으라 이르지 아니하셨다."(사45:19)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 하늘과 땅 사이의 거리감이나 사랑과 은총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우리의 기도를 멀리하지 아니하신다.

 

둘째로, 다윗은 그가 서원한 대로 끊임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것을 약속하고 있다.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즉 다윗은 "나는 그에게 말씀드릴 것이다. 주님께서 수없이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기로 결심했다.(시116:2) 하루도 어김없이 나는 주께 기도할 것이다."라고 약속하고 있다.

사람들은 기도하는 것을 그들의 "목소리로 상달케"(사58:4)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하나님께서 중시하신 것은 목소리가 아니다.

한나의 기도는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효험이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마음의 목소리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출14:15)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그가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음을 안다.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들어올리며, 그 앞에 우리의 마음을 쏟아 놓는 것이다. 그렇지만 마음에서 일어나는 경건한 감동을 말로써 표현하는 것은 생각을 고착시키고 욕망을 북돋우며 고무시키는데 필요할 수 있다. 정결한 마음과 겸손한 목소리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은 좋다. 그리하여 우리의 입술로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언어를 이해하신다. 그리고 바로 그 언어로 우리는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한다. 다윗은 시편 5:1에서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으며, 시편19:14에서도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며 편지를 써야 한다. 우리는 친구에게서 편지를 받으면 그 친구로부터 소식을 듣는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우리로부터 소식듣기를 원하시는다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기대하시며 요구하신다.

그는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봉사가 필요하신 것이 아니며 또한 그러한 것에 의해 이익을 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의 제사를 드리며 끊임없이 찬양하기를 원하신다.

 

▶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높이며 끊임없이 그분께 순종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 진실한 마음으로 그를 경외하며 그의 이름에 영광 돌리기를 바라시며, 이러한 행위가 자주 반복됨으로써 그의 율례를 관찰하고 지켜야 하는 우리의 의무를 강화하고 그 중요성을 점점 깊이 깨닫게 되기를 바라신다.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니 그를 경배하라.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늘 겸손히 경배드림으로써, 계속해서 그의 뜻에 더욱 자연스럽고 겸손하게 순종할 수 있게 된다. 경배를 통해서 우리는 순종을 배우는 것이다.

 

▶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그의 사랑과 연민을 우리에게 나타내신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시50:15)고 말씀하신 것만 보아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심이 충분히 증명된다. 그것으로도 충분하지만 한 아버지가 아이를 멀리 보낼 때 그 아이에게 애정을 표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귀하게 여기심을 나타내기 위해 특별한 일이 없을 때에도 매일같이 기도하라고 하신다.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의 기쁨이며 그의 귀에 음악과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아가서 2:14에서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노래 중의 노래인 아가서 끝 부분에서 "너 동산에 거한 자야 동무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나로 듣게 하려무나"(아8:13)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의 배우자인 교회에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려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의 기도를 들으려 하시며,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들어주실 준비를 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우리는 매일 하나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은 그들의 죄악이며 불행이다. 그들은 하나님 없이 세상을 살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우리에게 그에 대한 의무가 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께 드릴 말씀이 아무 것도 없다. 탕자가 한 주일 또 한 주일을 소요하며 방황할 때 그 아버지가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들로부터 아무 것도 듣지 못하신다.

그들은 전능자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경멸하듯이 묻는다. 따라서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무슨 유익을 얻을 수 있느냐고 그들이 묻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결과 그들은 전능자에게 우리를 떠나라고 말하게 되며 그들의 운명은 그들이 원하는대로 된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 겁도 없이 하나님 앞에 기도 드리는 것을 금하는 자들과 같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전능자께서 여러분에게 베풀어주려 하시는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그에게 기도하는 것이 유익한 줄 알아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로 결단함으로써 그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하시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

 

▶ 사랑하는 친구에게 말하듯이 자연스럽게 말씀드리라.

친구에게는 특별한 용무가 없더라도 찾아가서 이야깃거리가 궁색한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눈다. 또한 허심탄회하게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며 사랑과 존경을 나타낸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렀다. 모든 성도들도 그 같은 영광을 갖게 된다.

"내가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고 친구라 하였노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그는 의로운 사람들과 함께 비밀을 나누셨다. 우리는 그와 친밀해지며, 친구들이 서로 나란히 걸어가듯이 그와 함께 걸을 수 있도록 초대받았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요일1:3)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에게 드릴 말씀이 아무 것도 없는가?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심사숙고해도 만족할 만한 답을 얻을 수 없는 주님의 무한하신 완전무결함을 찬양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겠는가? 주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가운데 즐거움을 얻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주님 자신을 세상이 아니라 우리에게 나타내시면서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은혜와 은총에 대하여 감사드리면서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요21:17)라고 주님께 향한 사랑과 순종을 고백하는 것 등, 그에게 드릴 말씀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날마다 우리에게 말씀하실 원하신다. 우리는 그 말씀 속에서 그의 섭리와 우리 자신의 양심을 통해서 그 음성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음성을 들으시려고 귀기울이시는데 우리가 할 말이 없다며 너무 박정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하실 때에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시27:8)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고 말씀하실 때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렘3:22)라고 즉시 대답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께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책망하시면 자백과 복종으로 응답하며, 주께서 위로하시면 찬양으로 답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 드릴 말씀을 애써 짜내거나 우리의 마음을 억지로 쏟아 놓으려 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주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 함께 동역하며 섬기는 주인에게 하듯 말씀드리라.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놓여 있는 관심사가 얼마나 방대하며 중요한가를 생각해 보라. 그러면 주님께 드릴 말씀이 무척 많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를 의지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기대는 그로부터 나오고 항상 그와 관련을 갖고 있다. 그는 우리와 관계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다.(히4:13)

우리의 행복은 그의 은혜와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것은 생명 곧 우리 영혼의 생명으로서 우리 육체의 생명보다 더 귀하다. 또한 하나님께 은총을 구하되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하여 간구하며,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시기를 기도하며,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입을 수 있으니 그의 의를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해 왔고,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진노와 저주에 합당한 자가 되었으며 날마다 죄에 물들고 있음을 알고 있는가? 그렇다면 주님께 우리의 잘못과 어리석음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용서를 구하며 우리의 평화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맺으며 주님의 능력 안에서 이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그와 세운 언약을 새롭게 하는 등 하나님과 더불어 할 일이 있지 않겠는가?

날마다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자신의 영혼을 위하여 해야 할 일이 있으며 그날 그날 해야 할 일이 있음을 알지 못하는가? 그런데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보여 주시고 인도해 주시며 그것을 위해 우리를 능력으로 입혀 주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할 일이 없겠는가? 우리를 도우시고 용납하시어 우리가 선한 일에 뜻을 두고 행하도록 역사하시고 후원하시며, 우리의 일을 나타내 주실 것을 간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일들이 종된 우리가 주인 되시는 주님께 해야 할 일들이다.

우리는 끊임없는 위험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우리의 육체가 그렇고 그 생명과 안위 또한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끊임없이 질병과 죽음에 둘러싸여 있으며, 그 화살은 밤이나 낮이나 가릴 것 없이 날아든다. 그런데도 들어오고 나오면서, 자리에 눕고 일어나면서 그의 섭리 가운데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과 천사들의 보호 속에 거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할 것이 없는가? 하물며 우리의 영혼에는 그보다 더한 위험이 있지 않겠는가?

우리를 대항해서 싸우며 삼키려는 자는 힘세고 교활한 마귀다. 그런데도 우리가 주님의 은혜 안에 보호하심을 입고 그의 전신 갑주를 입어 사탄의 계략과 폭력에 대항하여 일어서며 갑자기 닥쳐오는 유혹으로 말미암아 죄에 빠져 놀라거나 강한 유혹에 압제되지 않도록 하나님께 간구할 일이 없겠는가?

우리는 날마다 죽고 있다. 그 죽음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면서 우리를 재촉하고 있다. 또한 죽음이 심판을 동반해 오는 것과 그 심판이 우리에게 영원한 운명을 지어 줄 것임을 알지 못하는가? 그런데도 우리 앞에 닥쳐올 것을 예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드릴 말씀이 없다 할 수 있겠는가?

"주여, 우리로 종말을 알게 하소서! 주여,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치소서!"라고 기도하지 않겠는가? 심판을 면하기 위하여 자신들을 살펴보고 우리의 행위가 선한가를 주의해 보기 위해 하나님과 더불어 해야 할 일이 없겠는가?

그리스도는 머리되시고 우리는 그의 지체인데도 우리가 살아 있는 지체임을 증명하는 데 관심이 없는가? 교회를 위해 중보하거나 시온과 예루살렘의 무너진 벽을 대신해서 해야 할 일이 아무 것도 없겠는가? 조국의 평화와 복지를 위해 할 것이 아무 것도 없겠는가? 가족의 일원으로서 집안 일에는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 어린아이들과는 다르지 않은가?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사랑하는 친척이나 친구가 없는가?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말할 것도, 불평할 일도, 간구할 것도 없는가? 아픈 사람이나 곤궁에 처해 있거나 유혹을 당하거나 수심에 잠겨 있는 사람은 없는가? 그들을 구제하고 도와주실 것을 간구하기 위해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일이 없단 말인가?

자,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생각해 보자.

이래도 매일 하나님께 아뢸 것이 없는가? 더구나 "내가 징계를 받았사오니"(욥34:31)라고 말하며,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욥10:2)라고 아뢰게 될 환난의 날에도 그러한가?

이와 같이 하나님께 아뢸 것들이 많이 있는데도 매일같이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렇게 많은 기도 제목이 있는데 무엇이 여러분의 기도를 방해하는가?

 

기도가 방해받지 않게 하라

▶ 거리감 때문에 기도가 방해받아서는 안된다.

우리가 친구와 이야기해야 할 경우가 있다고 하자. 그러나 그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연락할 수가 없고 어디서 그를 찾아야 할지도 모르며 그에게 편지도 쓸 수 없다면 자연히 친구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데는 이런 일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는 자신을 찾는 백성 곧 기도하는 백성에게 가까이 계시며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목소리를 들으시기 때문이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시130:1)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시61:2)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2:2)라고 요나는 말했다. 어느 곳에서나 하늘로 향한 길이 열려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이것은 주님께서 친히 보혈을 흘려 우리를 위해 지성소로 들어가는 새롭고 산 길을 열어 주시고 하늘과 땅 사이의 교통을 이룩해 놓으신 덕분이다.

 

▶ 두려움 때문에 기도가 방해받아서는 안된다.

아주 위대한 사람에게는 용무가 있어도 너무 신분이 높고 완고하고 엄격하여 이야기하기가 두려울 때가 있다. 우리를 소개해 주거나 좋게 말해 줄 사람이 없어서 목적했던 바를 취소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대화하려 할 때는 그런 일로 실망하는 경우가 없다.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으며, 거기서 "언론의 자유"를 가지고 우리의 온 영혼을 쏟아 놓을 수가 있다.

겸손하게 간구하는 자들에게 연민을 베푸시므로 주님의 엄위하심조차도 그들을 두렵게 하지 못한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을 거스르는 것이다. 우리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롬8:15)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용기를 주실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갖는 다른 복된 자유함도 누리게 하실 것이다. 이것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우리를 소개해 주시고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하나님께 중보해 주시는 분이 계신다.

아이들이 아버지께 갈 때 중보자가 필요한가? 그러나 의지할 하나님이 계실 뿐 아니라 하늘나라의 대제사장이시며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의 관심과 중보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커다란 위안이 된다. 그의 이름을 의지해서 언제 어디서나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으니 말이다.

 

▶ 우리의 해야 할 일과 우리가 그분께 아뢰야 할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이미 다 알고 계시다는 사실 때문에 기도가 방해받아서는 안된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므로 기도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바를 이미 알고 계시므로 기도드리지 않아도 우리의 모든 소망이 하나님 앞에 놓여 있음은 사실이다. 주님은 우리의 필요와 부담을 알고 계신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그것을 알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의 약속은 우리가 간청해야만 이루어진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겔36:37)고 하셨다. 비록 우리의 기도가 그에게 아무런 정보를 드릴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기도로써 영광을 돌려야 한다.

우리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고 또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도록 움직일 수도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 영향을 줄 수가 있으며 은혜받기에 합당한 형상으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영향을 줄 수는 있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을 것이다"라는 것은 주님의 은총을 받기 위한 매우 쉽고도 타당성 있는 조건이다.

그리스도께서 소경된 자에게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마20:33)라고 다소 이상한 질문을 하신 것은 우리가 은총을 입기 위해서 기도해야 함을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었다. 주님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셨지만, 금홀의 끝을 만지는 사람은 자신의 청원이 무엇이며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던 것이다.

 

▶ 다른 어떤 일로도 기도가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

친구와 해야 할 일이 있지만 시간이 없어서 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관계되는 일에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일은 어떤 일이라도 제쳐놓고 해야 할 가장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위대하게 되는 것이나 재산을 늘리는 일 따위는 우리의 행복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며 그의 은총을 입으며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떠한 일도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구실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세상일이 더욱 중요할수록 하나님께서 그 위에 축복해 주실 것을 기도함으로써 더욱더 하나님께 의탁하며 우리와 늘 함께하시도록 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기도에 더욱 전념하며 기도로써 하나님과 더 가까이 할수록 우리의 모든 행사는 더욱 형통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음성을 자주 들으실 수 있게 하라

비록 그것이 살아 있는 표시인 탄식 소리에 불과하며(애3:25) 신음소리에 불과할지라도, 너무 연약하여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지라도(롬8:26) 주님께서 여러분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게 하라. 히스기야 왕이 "나는 제비같이 학같이 지저귀며"(사38:14)라고 했던 것처럼, 비록 그것이 온전한 언어가 못 될지라도 그에게 기도하라. 자주 주님께 말씀드리라. 그는 언제나 들으신다.

그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경청하라. 그리고 여러분이 주님께 기도하는 모든 것을 주목해 보라. 사업상의 편지에 답장을 쓸 때 그 편지를 앞에 놓고 쓰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소원에 대한 인도자가 되어야 하며, 여러분의 기도에 대한 기대에 바탕이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귀를 막고 있다면, 그에게 구한 것에 대한 자비로운 응답을 주실 것을 기대 할 수 없다.

하나님과 대화할 기회를 자주 가져서 그와의 교제 안에서 더욱 성장하며, 그를 불쾌하게 하는 어떠한 일도 삼가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키도록 힘쓰라. 오직 그를 통해서만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기도하기에 알맞도록 목소리를 조정하고 언어를 깨끗하게 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기에 합당하게 하라(습3:9).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음을 기억하고 여러분 영혼 깊숙이 경외심을 가지고 있음도 나타내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하지 말자.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다(전5:2). 만일 그가 우리를 초청하고 격려치 않으셨다면 티끌과 같은 우리가 감히 주께 고하는 것은(창18:27)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주님께 아뢰는 것은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영혼을 위한 것이므로 우리의 가슴속에서부터 간절히 말하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께 집중된 기도를 드리라.

우리의 목소리를 들려 드릴 뿐 아니라 신중하게 계획을 가지고 말씀드려야 한다. 원래는 "내가 주께 기도하고"(시5:3)라고 되어 있지만 이것은 시편 25:1에서처럼 "나의 영혼이 주께 기도한다"고 보충 설명해 볼 수 있겠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다시 말해 "나의 사랑을 주께 드리나이다. 나의 사랑을 주께 정하고 내가 주를 사랑하리이다."라는 말이다. 우리의 번역은 이 말씀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내가 주께 기도하고" 이 말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 집중해서 기도해 한다.

이것은 기도의 의무에 대한 생각을 확정하여 마음에 적용시키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는 기도할 때, 진정으로 중요한 그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자답게 신중하게 구해야 하며 소흘히 여겨서는 안된다. 우리가 기도할 때,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며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 생각지도 않고 구하는, 그런 어리석은 제사를 드려서는 안된다. 선한 목적에 목표를 두고 그 목적에 표적을 맞추어 현명하게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자신의 진정한 행복을 구해야 한다.

은혜의 약속은 너무나 좋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 하셨다. 따라서 우리가 그의 영광을 구할 때, 하나님은 그것이 실제로 우리 자신의 진정한 유익을 효과적으로 구하는 것이 되도록 하셨다. 화살을 쏘아 표적을 맞히려는 사람이 그것을 겨냥하여 눈을 고정시키고 손을 똑바로 하여 목표물을 정확히 맞추는 것처럼, 이것이 바로 집중하여 기도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다가가도록 몰두하는 것이며 그것을 위하여 그 밖의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한 눈으로 목표를 겨냥하는 사람은 다른 것을 보지 말아야 하며, 여러 가지 생각들을 모아서 총동원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 모두가 필요하며, 그것들 모두가 모여야 할만큼 가치가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시57:7)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 주님께 기도해야 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 신실한 목적을 갖고 기도한다. 바리새인들이 구제할 때 남들에게 보임으로 자신들이 영광을 얻었던 것처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를 함으로써 칭송과 갈채를 받게 되어서는 안 된다. 진실로 그들은 자기의 상을 이미 받았다. 사람들은 그들을 존경할지 모르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자만과 위선을 싫어하신다. "누가 우리에게 선을 베풀리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처럼 뚜렷한 목적도 없이 무조건 기도해서도 안 된다.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를 인하여 모이는"(호7:14) 자들처럼, 세상의 환심을 사고 부귀를 추구하면서 기도를 드려서도 안 된다. 우리 기도의 중심과 동기가 우리 자신, 즉 육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 간구할 때는 하나님이 최상의 목적이 되시도록 영혼의 눈을 주님께 돌려야 한다. 이러한 태도가 우리 영혼의 습관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드려야 한다. 또한 바라는 모든 것 중에 이것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해야한다. 곤핍함이 닥쳐올 때도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것들이 조정되고 결정되며 성화되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주기도문의 첫머리에서 분명히 이것을 생각하게 하셨다. 즉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 : 우리는 그 가운데서 목적을 정하고 그것을 위하여 다른 모든 것들을 구하게 된다. 그 속에서 기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루어지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과 그 거룩하심의 영광을 알게 된다.

그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때 그의 나라가 임하며 그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되며 양육을 받고 도우심을 입으며 용서하심을 입게 된다. 우리의 신실하고 온전한 복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 눈이 성하면 온몸과 온 영혼이 밝을 것이다. 따라서 기도는 하나님만을 향하여 드려야 한다.

 

→ 한결같이 하나님만 생각하며 기도한다. 우리는 하나님께만 기도를 드려야 한다. 마치 그분과 할 일이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그를 생각해야 하며, 용무가 있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기도를 드려야만 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편지이며, 기도는 우리가 그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편지에는 겉봉을 써야 하고 내용물이 올바르게 들어 있어야 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잘못 배달될 수 있으며 나쁜 결과를 낳게 된다. 여러분은 매일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 편지를 보내고 있다. 여러분의 편지가 잘못 배달된다면 여러분의 손실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는 다음의 지침을 따라해야 한다.

 

?  존경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쓸 때처럼, 하나님께 합당한 호칭을 사용하라. 위대하신 여호와,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 영원토록 영광받으실 하나님께 기도하라. 왕 중의 왕이시며, 주중의 주이시며,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주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과 입에 그를 향한 경건한 경배와 찬양으로 가득차게 하며, 경외하는 마음과 신성한 두려움을 가지고 주님께 경배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에 거룩한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기에 합당한 주님의 호칭에 주의를 기울여 어마어마한 위엄과 측량할 수 없는 위대하심이 있는 영광의 하나님께 기도드림으로써, 기도할 때 그를 감히 하찮게 여기거나 조롱하지 말아야 한다.

 

?  하나님의 자녀된 관계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지나친 경배심으로 인해 그의 자녀라는 사실을 간과하거나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한 선한 사람에 대한 말을 들었는데, 그가 죽은 후에 발견된 그의 기록물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발견되었다. "은밀한 기도 시간에 기도를 시작하면서 '위대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진노하시는 하나님'과 같은 두렵고 무서운 호칭들을 부르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지는 않는가?"

그리스도께서 교훈과 본보기로 우리에게 가르치시기를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 부르라 하지 않으셨는가? 또한 양자의 영이 아바 아버지라 부르도록 가르쳐 주지 않는가? 아들이라면 비록 그가 탕자일지라도, 돌아와 회개할 때는 그의 아버지에게 가서 '아버지여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더 이상 아들이라 불릴 가치가 없지만 그래도 겸손하게 그러나 담대히 그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

에브라임이 멍에에 익숙지 못한 송아지같이 스스로 탄식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으로 측은히 여기셨다.(렘31:18,20) 그러니 하나님께서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실진대, 그와의 관계를 두려움 없이 유지하도록 하자.

 

?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드리라. 이것은 주님께서 주기도문의 첫머리에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제한되어 계시거나 하늘 혹은 하늘 중의 하늘이 그를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는 왕국을 통치하는 통치의 보좌뿐만 아니라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가까이 나아가야 하는 은혜의 보좌도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손으로 만든 사원 안에 거하는 이방인의 신과는 대조적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신 주님께 눈을 돌려야 한다. 하늘은 높은 곳이니 우리는 지극히 높이 계신 하나님이신 그분께 기도드려야 한다.

그곳은 빛의 원천이므로 우리는 주님을 빛의 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 그곳은 감찰하는 곳이므로 그의 눈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신 것을 알아야 한다. 그곳은 정결한 곳이므로 우리는 기도드릴 때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의 거룩하심을 기억하여 감사드려야 한다. 그곳은 그의 능력의 창공이므로 우리는 그가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신 줄을 알고 그를 의지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축복을 하늘로부터 받을 것을 기대하도록 가르치시기 위해, 눈을 하늘로 드시고 기도하셨다.  

 

?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주 예수님의 손에 이 편지를 드리라. 그의 손에 드리지 않는다면 물론 잘못 전달될 것이다. 바로 그가 모든 성도들의 기도에 많은 향을 넣어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그 천사(계8:3)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그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 아버지로부터 받기를 기대하는 것도 그의 손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을 위하여 예물을 드리도록 되어 있는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이다(히5:1).

편지를 주님께 드리라. 그러면 주께서 신속하고도 사려 깊게 우리의 기도가 열납되게 해주실 것이다. 조지 허버트는 "가방"이라는 시에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실 때의 옆구리의 상처를 감동적으로 묘사하면서, 주님께서 하늘로 가시며 모든 믿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표현했다.

 

너희가 전해야 할 것이나 편지가 있다면,

내게 가방은 없으나 여기 공간이 있다.

내 아버지의 손과 그의 목전에

안전하게 전해질 것을 믿으라.

네가 알리고자 하는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리니

자, 나의 심장 가까이로 가져 오라.

또한 이후로 나의 친구들 중 누구라도

이처럼 나를 필요로 한다면,

그 문은 그때에도 여전히 열려져 있을 것이다.

그가 보내는 것을 내가 전할 것이며,

그에게 해가 되지 않게 더 보완할 것이다.

탄식만으로도 내게 모든 것을 전할 수 있다.

절망이여, 사라져라.

 

우리는 위를 바라보아야 한다.

▶ 기도할 때 위를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보다 높은 곳에, 무한히 높은 곳에 계시며 영원히 사시는 높고 거룩하신 분께 말씀드리는 자처럼, 위에 계신 빛의 아버지로부터 오는 모든 선한 것과 온전한 선물들을 기대하는 자답게, 지성소에 들어가 진정한 마음으로 가까이 나아가기를 바라는 자처럼, 위를 바라보며 기도드려야 한다. 믿음의 눈으로 세상과 그 안에 있는 것 그 이상을 쳐다보아야 하며, 시간에 국한된 문제 그 이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영적인 축복을 올바로 평가할 줄 아는 사람에게 이 세상과 이곳에 있는 모든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간의 영혼은 이를 주셨던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때문에 죽은 후에 위로 올라간다(전3:21). 따라서 그 근원을 잊지 않고 기도할 때마다 위에 보물을 쌓아 놓는 것이니 위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며, 위를 향하고, 하나님을 향하며, 그 고향을 향하여야 한다.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들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드리자(애3:41). 예전에 어떤 교회 목사님들은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기도를 시작하도록 하였다. "주여, 우리의 마음을 높여 우리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 기도가 끝난 뒤에도 위를 바라보아야 한다.

→ 만족과 기쁨의 눈으로 위를 바라보아야 한다. 내려다보는 것이 슬픔의 표현인 데 비해 우러러보는 것은 기쁨의 표현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에 대하여 기도드림으로써 마음이 편하고 기쁨에 가득 차며, 그의 지혜와 선하심을 전적으로 믿음으로써 그 응답을 참을성 있게 기대하며 기다려야 한다. 한나는 기도할 때 위를 바라보았고 얼굴에는 기쁨이 감돌았다. 그녀는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었다(삼상1:18). 기도는 올바른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음의 평안이다. 기도할 때는, 은혜를 통하여 기도한 그것을 받은 것처럼 여기며 바라보아야 한다.

 

→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어떤 응답을 주시는지를 관찰하는 눈으로 위를 바라보아야 한다. 화살을 쏜 사람이 그 화살이 표적에 얼마나 가까이 갔는가를 살펴보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며 기다려야 한다.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아 기도를 마친 후 우리 영혼이 어떠한 상태이며, 하나님의 뜻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으며, 그 뜻에 얼마나 적응할 뜻을 갖고 있는지를 관찰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기도가 응답될 때, 감사를 드릴 수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기도 응답을 방해하는 것들을 제거하고 계속 기다려야 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지를 보기 위해 더욱 간절히 살펴야 한다(히2:1)

또한 화평을 말씀하실 것을 기대하며, 다시는 망령된 데로 돌아가지 않을 것을 결심하며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시85:8).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할 때마다 그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춰 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지속해야 한다. 때로는 그 응답이 빨라서 기도하는 도중에 듣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보낸 편지에 대한 회답을 받는 것보다도 더 빠른 회답을 받게 될 것이나 기도했는데도 그렇지 않다면 기다려야 한다.

기도를 드리고 위를 바라보며 모든 일을 하나님과 더불어 하며 기쁨으로 그 일을 행하는 것을 배우자.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유익도 얻지 못할 것이다. 휘장 안에 들어가서 기도하도록 명령을 받고 격려를 받고서도 바깥 뜰에서 기도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2. 정해 놓고 지켜야 할 특별한 시간 : 아침

 

두 번째로 본문에서 이 선한 일을 하기 위해 특별히 정해 놓은 시간은 아침이다. 시편기자는 아침이라는 것을 특히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아침에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아침에 기도로 시작하라는 것이다.

아침 시간을 기도하는 시간의 하나로 삼으라. 율법 아래서는 아침마다 양을 잡아 제사드렸고(출29:39). 또한 아침마다 제사장이 향을 피웠던 것(출30:7)을 알 수 있으며, 매일 아침 주께 감사드리며 찬송하는 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대상9:33). 에스겔의 성전에서도 아침마다 정해 놓고 제사드리는 일이 있었다(겔46:13-15).

이것들은 아침이 어김없이 오는 것처럼 영적인 제사는 제사장에 의하여 매일 아침 어김없이 드려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모든 그리스도인과 또한 모든 가정의 가장들은 가족과 함께 매일 아침 은밀한 가운데 기도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들이 충분히 있다.

 

아침에 기도해야 할 이유들

▶ 아침은 하루의 첫 부분이다.

따라서 가장 위에 계신 주님께서 첫 번째 자리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받으시는 것은 합당하다. 이방인들도 "무엇을 하든지 신과 더불어 시작하라"고 하였다.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우리도 그렇다. 따라서 무슨 일을 시작하든지 그와 함께 해야 한다. 태양이 우리의 영혼에 솟아오르자마자 우리 인생의 나날을 하나님께 드리며 그에게 예배드려야 한다.

아침에 동일 틀 때부터 새벽 이슬 같은 청년들이 그리스도 앞에 나가기를 바란다(시110:3). 첫 열매와 짐승들의 첫 수확은 언제나 주님의 것이었다. 아침과 저녁 기도로써 우리는 알파와 오메가 되시며 처음과 나중 되시는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와 더불어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지어야 한다. 그는 시작이며 끝이 되시고 처음이시고 또한 나중이시기 때문이다.

지혜자는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고 말했다. 즉 젊어서부터, 아침 일찍부터 하나님을 찾는 자가 그를 만나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로써 하나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것, 즉 무엇보다도 좋은 것을 드리며, 우리가 그를 기쁘시게 하는 일과 그에게 인정받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우리가 주님을 진실하게 구하고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지하게 해야 하는 것은 아침 일찍 하라고 성경에서도 말하고 있다(시101:8). 부지러한 사람은 아침 일찍 일어난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시63:1)라고 말하면서 다윗은 온 마음과 정성으로 주께 헌신함을 표현했다.

 

▶ 아침은 신선하고 생동감이 있는 최상의 시간이다.

밤에 수면과 휴식으로 우리 영혼이 활기를 되찾은 후, 아침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전날의 피곤함이 잊혀져 있을 때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지만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평소보다 큰 일을 하실 때에는 자다가 깨어나신 것으로 표현이 된다.(시78:65)

우리가 어떤 일이든 훌륭히 하게 되는 것은 아침이다. 아침이 시적 영감을 얻는 데 최상의 시간이라면 은혜를 얻는 데도 최상의 시간이 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처음 되시는 주님께서 처음 것을 받으셔야 하며, 으뜸 되시는 주님께서 으뜸되는 것을 받으셔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일을 하기에 가장 적합할 때, 가장 필요한 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영혼이 가장 좋은 상태에 있을 때, 가장 좋은 힘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그만한 가치가 있다. 어떻게 그들이 이보다 더 잘 사용이 되며, 더 좋은 이익을 낳을 수 있겠는가?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으로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한다고 다윗은 말했으며 그 모든 것으로도 충분치 않다고 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만한 은사가 우리에게 있다면, 그것을 불일 듯하게(딤후1:6) 하기에 가장 적당한 때는, 우리의 영혼이 신선해지고 새로운 힘을 얻었을 때인 아침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57:8). 이처럼 하나님을 붙잡도록 자신을 일깨우자.

 

▶ 아침은 조용하고 한적한 시간을 갖기에 가장 적합하다.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잠을 자겠느냐고 그들의 할 일이 부를 때까지도 잠이 덜 깨어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며 이불 속에 누워 있는 게으름뱅이가 아니라면, 북적거리기 전에 자신들의 믿음을 위해 아침에 시간을 갖는 것이 이 세상에 할 일이 많고 하루 중 1분이라도 아쉬운 사람들의 지혜이다. 그래야만 그 일을 완전히 할 수 있으며, 더욱 몰두할 수가 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는 내적으로 무감각하고 우둔하지 않을 때, 즉 외적으로 주의가 산만하고 분요하지 않을 때 드려져야 한다. 사도 바울은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는 것에 우리가 얼마나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를(고전7:35) 암시해 주고 있다. 따라서 7일 중에 하루는 (이것 또한 한 주일의 첫 번째 날로서, 한 주일의 아침이다) 거룩한 일을 위하여 예정되어 있으며, 다른 모든 일을 하지 않고 쉬는 날로 되어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섬기러 산 위에 올라갈 때 산 아래 모든 것을 남겨 두고 갔다. 그러니 우리는 이생의 문제 속으로 휘말려 들기 전에, 아침 일찍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며 다른 차원의 생에 관심을 가져보자. 주 예수께서 친히 그 본보기를 보여 주셨다. 그의 생애는 전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영혼을 위한 일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날이 밝기 훨씬 전, 무리들이 모여들기 훨씬 전에 일어나서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셨다(막1:35)

 

▶ 아침은 새로운 자비를 받는 시간이므로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적합하다.

주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선을 행하시며 그의 축복으로 채워 주신다. 주님께서 날마다, 특히 아침에 우리를 축복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이름을 찬양할 이유가 있다. 아침마다 새로운(애3:23) 그의 은총의 열매들, 즉 우리가 어제와 똑같은 아침을 맞을지라도 또 다시 필요하여 늘 새롭다고 할 수 있는 그의 은총의 열매들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것처럼, 우리는 언제나 감사와 경건하고 진정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에게 나아가야 하며, 단 위의 불처럼 아침마다 새롭게 해야 한다(레6:12).

편안하게 하룻밤을 지냈다면 그에 대해 감사하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지난 밤이 편안하게 되기 위해서 동시에 얼마나 많은 자비가 베풀어졌는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어 있지 않은 은혜가 우리에게는 허락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머리 둘 곳이 없다. 우리 주님 자신이 그러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고 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거할 집이 있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거처가 있다. 아마도 대궐같이 좋은 집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울 침상이 있고, 그것도 따뜻하고 안락하며, 은빛 나는 좋은 것으로서 들어가 누우면 마치 시온에 있는 것처럼 편안할 것이다. 세상에서는 귀중히 여기지 않았으나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던 어떤 성도들은, 사막이나 산에서 혹은 동굴 속에서 방황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지만 우리들은 그렇지 않다.

 누울 침상은 있으되 친구들의 병이나 원수의 두려움 때문에 밤을 지새우며 누울 수도 없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우리는 자리에 누울 수 있으며 우리를 두렵게 하는 자도 없으며 창, 칼의 위협이나 전쟁과 핍박의 두려움도 없다. 자리에 누울 수는 있으나 마음의 고민과 몸의 고통으로 인하여 새벽까지도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며 잠을 이룰 수 없는 사람도 많다. 그들은 근심 어린 마음에 뜬눈으로 밤을 지샌다.

그러나 우리는 자리에 누워서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잠을 잔다. 우리의 잠은 달고 피로를 풀어주며, 고민과 수고 사이에서 쾌적한 안식이 된다. 우리에게 잠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듯 우리에게 잠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한번 자리에 누워 잠이 들어서는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고 죽음의 잠을 자 침상이 무덤이 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누워서 잠을 자고 다시 깨어났으며 쉼을 얻고 새롭게 되었다. 우리가 여느 때처럼 누워 자고 깨어나는 것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붙드셨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우리를 붙들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잠들어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시3:5)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는가? 아침 햇살이 기쁘게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며, 아침을 맞게 해주신 주님께 의무를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에겐 아침에 입을 따뜻한 의복이 있다(욥37:17). 꼭 필요해서라기보다는 치장을 위해서 옷을 갈아입지 않는가?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 이는 우리의 벌거벗은 것을 가리기 위해 주신 털과 천으로서 모두 그의 것이다. 그러니 옷을 입고 난 그 아침은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드리기에 적당한 시간이다. 이처럼 많은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감사를 드리는지 의심스럽다.

우리는 건강하고 평안한가? 오랫동안 그렇지 않았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병들어 있고 고통받고 있는지를 생각하고, 우리가 과연 얼마나 그러한 것들을 받을 가치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 특별한 은혜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평상시 끊임없이 베풀어주시는 은혜에도 감사를 드려야 한다.

화재나 도난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며 우리가 알고 있는 위험이나 보이지 않는 많은 위험들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우리 자신이나 가족들에 대한 주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경험한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밤에는 울음이 계속되다가 아침에는 기쁨이 찾아와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라고 큰소리로 외칠지도 모른다. 파괴하는 천사가 밤중에 날아다니며 흑암 속에서 다른 집 창문에 화살을 쏘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집은 그냥 지나쳐 넘어갔으니 문설주에 뿌려진 언약의 피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어둠을 조성하여 캄캄하게 하고는 먹이를 찾는 짐승처럼 살금살금 다가오는 이 세상의 어둠의 통치자들과 우리를 대적하는 악한 천사들의 원한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며, 은혜를 베푸는 우리 주위의 착한 천사들의 사역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모든 영광을 천사들의 하나님께 돌리라.

 

▶ 아침에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경배하게 하는 신선한 그 무엇이 있다.

안락과 유익을 주는 하나님의 선물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이는 소견이 좁은 소행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주님께는 영광이 되고 전 인류에게는 유익을 주는 그의 섭리 가운데서 더욱더 일반적인 주님의 지혜와 권능들을 관찰해야 한다.

시편 19편은 "아침의 묵상"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거기서 우리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빛과 권세로부터 우리가 받는 유익뿐만 아니라, 하늘에 장막을 베푸시고 기둥을 세우시며 운행하는 법을 세우신 여호와께 그들이 드리는 영광을 보게 된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종들이기 때문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길을 따라 계속 운행하고 있다.

날이면 날마다 이 사실을 선포하고 밤이면 밤마다 이 지식을 나타낸다. 심지어 천지를 지으신 위대한 창조자이시며 또한 그것을 다스리시는 분으로서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도 드러내신다. 원래의 약정에 따라 빛과 어둠이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계속되고 회전하면서 교대로 다스리고 있음은 창조의 역사를 말해 주는 신성한 묵시나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주신 약속(창8:22) 낮과 밤에 대한 그의 약정(렘33:20)에 대한 것들을 믿는 우리의 믿음을 확고하게 해줄 수 있다.

새벽이 얼마나 정확하게 그 처소와 시간을 알아 그것을 지키며, 아침 햇살이 땅 끝과 하늘을 비추며, 그 빛을 받자마자 땅이 변화하여 진흙에 인친 것 같이 되는지를 바라보라(욥38:12-14). 최근에 어느 훌륭하신 목사님의 이런 표현을 듣고서 매우 기뻤다. "우리와 같은 비천하고 죄 많은 자들에게 아침 햇살을 비춰 주기 위해 태양은 수천 마일을 여행했다."

하늘을 바라보라. 그리고 성장한 신랑처럼 무한한 기쁨을 안고 그의 방에서 나와 경주하기를 기뻐하는 장사와 같은 태양을 바라보라. 그 빛이 얼마나 밝으며 그 미소는 얼마나 감미로우며 그의 세력은 얼마나 강한지를 살펴 보라.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이러한 불멸의 자연에 대한 설교자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적이 없는데, 그러한 설교자들의 소리에 메아리치며 즐기는, 아침과 저녁을 만드신 주께 영광을 돌리는 주를 섬기는 자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남들이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이런 목적으로 아침마다 주님께 기도를 드리자. 그리고 아침마다 찬송을 드리자.

 

▶ 아침은 하나님에 대하여 새롭게 생각하게 되므로 그의 이름을 묵상하며, 기도하기에 적합하다.

다윗은 본보기처럼 우리는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시63:6) 했는가?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깨어나 여전히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입술의 말을 가지고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 마음의 묵상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것은 주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냄새나는 제사가 도리 것이다. 마음에서부터 좋은 말이 우러나오면 여러분의 혀로 하여금 왕 앞에 그것을 쏟아 놓는 필객의 붓과 같이 되게 하라(시45:1).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 아침 성경 말씀을 읽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므로 밤낮으로 그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우리들을 은혜의 보좌로 인도할 것이며, 그곳에서 많은 좋은 것들로 우리를 채워줄 것이다.

 

▶ 아침은 지난 밤에 품었던 헛되고 죄된 생각들을 반성하기에 적합한 시간이다.

헛되고 죄된 생각들을 반성하고 용서받기 위하여 아침에 하나님께 기도드릴 필요가 있다. 주기도문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라는 문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우선적으로 아침에 기도드리도록 고안된 것 같다. 그 다음에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되어 있다. 분주하게 하루를 지내면서 일관성이 없는 말과 행실로써 죄를 짓게 되는 것처럼, 부패된 생각과 절제되지 못한 환상 속을 방황하며 밤의 적막 속에서도 죄를 짓게 된다. 미련한 자의 생각이 죄가 된다는 것(잠24:9)은 분명하다. 미련한 생각은 곧 죄된 생각이며 모든 죄의 시작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너무나 많은 헛된 생각들이 숨어 있다. 그 수가 많기 때문에 그들의 이름을 군대라 한다. 누가 이러한 잘못들을 이해할 수 있는가? 그것들은 우리 머리의 머리카락 수보다도 더 많다. 우리는 "침상에서 악을 꾀하며 간사를 경영하고 날이 밝으면 .... 그것을 행하는 자"(미2:1)를 보게 된다. 밤이 되면 수없이 의심하고 염려하는 생각들로 마음이 불안해지고 미혹케 되고, 부정하고 음란한 생각들로 오염되고, 솟구치는 교만한 생각들로 인해 도취되며, 경건한 생각들은 수없이 많은 무례한 것들에 의해 침해당한다.

우리와 함께 눕고 함께 일어나는 악한 생각들이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나오며,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함께 따라 다니는 이 부패된 샘에서부터 이런 샘물이 자연적으로 흘러나온다(전5:2). 많은 말뿐만 아니라 많은 꿈속에도 허다한 허영이 담겨 있다.

매일 밤낮으로 회개할 일을 저지르는 우리가 그것을 새롭게 하기 전에 집밖으로 나갈 수가 있는가? 우리의 마음이 방황하며, 반항과 고집으로 불평하며 타락하기 쉽다는 것을 아시는 주님께 자백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평화를 누리며, 우리 마음의 생각들이 용서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는 일에 힘쓰지 않겠는가? 자백하여 용서받지 않은 죄를 안고는 하루의 일과를 안전하게 시작할 수가 없다.

 

▶ 아침은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는 시간이므로 하나님께 한 날의 모든 일에 함께하시며 축복해 주실 것을 간구하기에 적합하다.

우리는 잘못을 용서해 주시도록 자비를 구할 뿐만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도움을 주시도록 은혜를 구하기 위해서도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주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때가 있는가? 그러니 기도하지 않고 지나칠 수 있는 아침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매일같이 번제를 드려야 하는 것에 대해 읽어 볼 수 있다(스3:4).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님께서 자비롭게 섭리해 주실 것과 성령께서 은혜롭게 역사해 주실 것을 기도하기 위하여 매일 아침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우리에게는 돌보고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으며 그들이 잘되는 데에 관심이 있다. 그렇다면 매일 아침 기도로써 그들을 하나님께 부탁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 아래 있게 하자. 그것이 효과적으로 그들을 주님의 보호하심과 돌보심 가운데 두는 것이다.

경건한 욥은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리려고 아침 일찍 일어났다. 우리도 아침 일찍 일어나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기도와 간구를 드려야 한다(욥1:5). 그리하여 주님의 축복이 우리 가정 위에 머물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생업을 위하여 나가려 할 때,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일들을 잘 관리해 나갈 수 있도록 지혜와 은혜를 구하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하나님 안에 거하며 그 일들을 행하자. 믿음으로 우리가 그 일에 번영하고 성공할 것과 주님께서 그 일에 필요한 힘을 공급하시며 피곤할 때 붙들어 주시고 그 일들을 계획할 때에 인도해 주시며 좋은 결과를 얻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여행을 하려 할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을 바라고,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가 주실 것을 기도드릴 수 없는 곳이라면 가지 말자.

일이 잘되어 갈 좋은 기회가 보이면 그것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우리 손에 달려 있는 모든 것들, 즉 기술과 의지와 용기에 열심을 품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어리석은 자처럼 되지 않도록 하자. 유혹은 매일같이 뒤따른다. 어떤 것들은 미리 예견했던 것이기도 하겠지만 생각지도 못한 것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유혹에도 끌려가지 않고 모든 것으로부터 보호받고 어떤 일터에 들어가더라도 선을 행하고 해를 끼치지 않으며, 좋은 일을 당하고 해를 받지 않도록 지혜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과 함께 하는 데 열심을 품어야 한다.

우리는 어떠한 하루가 될지, 무슨 소식을 듣게 될지, 밤이 되기 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미리 알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알 수 없는 일들과 어려움도 은혜 가운데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모든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서기 위하여 날이면 날마다 주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

그날의 걱정은 그날로 충분하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처럼 오늘은 오늘 일을 생각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란 모든 선한 말과 선한 일을 위하여 온전히 우리에게 채워 주시며, 모든 악한 말과 악한 일에 대항하여 우리를 온전히 강하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공급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하여 밤에 또다시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하루 종일 생각지도 말하지도 행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적용

 

첫째, 태만은 죄이며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마음속에 새겨 두라.

아침에 성경 보고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 하고 소흘히 행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전혀 하지 않거나 거짓되게 행한다. 전혀 제사를 드리지 않거나 혹 드린다 해도 상처난 것, 절름발이거나 병든 것으로 드린다. 기도를 전혀 하지 않거나 해도 올바르게 하나님께 우러러 드리는 기도가 아니었다.

주님께서는 아침에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우리들의 아버지로서 사랑과 관심을 표하시기에 인색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아침에 제사도 드리지 않았고, 부끄럽게도 그의 자녀로서의 해야 할 바를 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며, 우리 자신들이 아침 경건회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유익을 잃어버린 어리석음과 죄를 인하여, 오늘 아침 진정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자. 하나님께서 이러한 열매를 찾으시며 우리의 골방에 오셨으나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셨고, 혹 발견하셨더라도 전혀 주님께 기도하고 있지 않거나 올바르게 기도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찮은 것을 핑계삼아 아침 경건회를 제쳐놓게 되면, 좋은 구실이 없을 때는 양심에 상처를 입게 되고, 뼈가 쇠잔하여지며, 점점 더 냉담해져 경건회 갖는 것을 완전히 그만두게 될지 모른다.

 

둘째, 아침 경건의 시간에 대한 권고의 말을 간직하라.

은밀한 가운데 계속해서 신실하게 예배드리는 것이 우리의 영혼이 잘되는 데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정말 진지하게 이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매일 아침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목소리를 들으실 수 있도록 기도하고 그를 바라라.

 

▶ 지속적으로 아침 경건의 시간을 지키라.

이것은 믿음의 조상들이 행한 전통적인 관습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분이 주께 받은 계명과 관련된 의무이기에 지속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정해 놓은 시간을 지키고 그 시간에 충실하라. 이제까지 은밀하게 기도드리는 일에 대해 전혀 무관심한 상태에서 살았거나 이 일을 종종 소흘히 한 사람들도 지금부터는 이것이 여러분들의 어떠한 일과보다도 가장 필요한 부분이며 그날의 위로 중 가장 즐거운 부분으로 여기고, 끊임없는 주의와 기쁨을 가지고 이를 행해야 한다.

이성을 가진 사람이면 아무도 이 의무를 면하려고 핑계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야기되었다면 그것은 곧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기도하고 기도하라. 계속해서 기도하고 주님을 바라라.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처럼 그들의 손이 일에 얽매여 있지 않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처럼 자선금을 많이 내지는 않지만,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간에 기도는 다같이 해야 한다. 부자라고 해서 당연히 해야 할 이 일을 지나칠 수 없으며,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연소한 사람이라도 기도를 시작하기에 이르지 않으며, 아무리 고령의 사람일지라도 기도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들이 더 이상 기도할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말년에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이다.

아무도 기도할 수 없다고 변론하지 말라. 굶주려서 멸망케 되었거든 먹을 것을 위하여 기도하고 구하며, 죄로 말미암아 파멸케 되었거든 자비와 은총을 베풀어주실 것을 위해 기도할 수 있지 않은가?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인가? 그렇다면 기도할 수 없다는 부끄러운 말을 하지 말라. 이는 군인이 무기를 혹은 목수가 도끼를 다룰 줄 모른다고 함과 같이 어리석은 것이다. 그리스도와 교제 가운데 부르심을 입은 것은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교제를 갖기 위함이다. 여러분이 남들과 같이 기도를 잘할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실 것이다.

아침에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변명하지 말라. 분명히 그보다 더 중요하지 않은 일을 위해서는 시간을 낼 수 있다고 나는 장담할 수 있다. 기도하는 시간을 원하기보다는 잠자는 시간을 갖기를 더 바라는데, 어떻게 여러분 자신의 만족과 유익을 위하여 시간을 더 잘 사용할 수 있겠는가? 하루의 모든 일과는 하나님과 더불어 시작할 때 더욱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이다.

기도하기에 적합한 은밀한 장소가 없다고 변명하지 말라. 이삭은 기도하기 위해 들판으로 나갔으며, 시편 기자는 지붕 꼭대기 한쪽 구석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할 수가 있었다. 여러분이 원하는 만큼 은밀한 중에 기도할 수 없다 해도 있는 그 상태에서 기도하라. 과시하기 위해서 남들이 보는 데서 기도하는 것이 나쁘지, 어찌할 수 없는 경우에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젊은 시절, 런던으로 여행을 하는 길에 우연히 한 신사와 동행하게 된 일이 기억난다. 그는 로마 카톨릭 신자임을 털어놓기를 꺼리지 않았다. 나는 그와 함께 가는 동안 많은 논쟁을 했는데 그 중 이런 것이 있었다.

그는 카톨릭에서는 어느 때나 사람들이 와서 기도할 수 있도록 성당 문을 늘 열어 놓고 있다고 자랑했다. 그 말에 내가,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에서 기도하는 것 같이,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은밀한 중에 기도하라고 하신 주님의 가르치심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격분하여 "당신에 신교도들은 아무 곳에서도 기도하지 않는 걸로 나는 알고 있소"라고 했다.

그 이유는 그가 신교도들과 함께 여행한 적이 많고, 때로는 그들과 함께 여관 방에 지내기도 하면서 주의 깊게 관찰했지만, 밤이든 아침이든 기도하는 사람은 장로교인이었던 단 한 사람 외에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가 이야기한 것이 사실이기보다 악의로 그런 말을 했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것을 일례로, 우리가 아침에 주님의 말씀을 보며 기도드릴 때, 우리가 원하는 만큼 은밀한 곳에 있지 못하더라도 빠뜨리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빠뜨리고 지나침으로써 죄를 드러낼 뿐 아니라, 불명예스러운 일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 부지런히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마음으로 아침 경건의 시간을 가지라.

이 일이 형식에 치우치지 않도록 하며 예배드릴 때 관습적으로 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이 일에 진지하게 임하라. 단순히 기도한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므로 하나님과 마음을 함께 하며, 엘리야가 기도했던 것처럼 기도드려야 한다(약5:17). 에바브라가 기도했던 것 같이(골4:12) 항상 애써 기도하는 것을 배우자. 그리하면 우리를 부요케 해주는 것은 바로 부지런히 이 일을 행하는 손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얼마나 기도를 길게 하는가에 관심을 갖지 않으신다. 또한 여러분이 유창하게 많은 말을 한다고 해서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실이며, 주님께 기쁨이 되는 것은 정직한 자들의 기도이다.

하나님을 섬기고 의지하면서 기도드린다면, 아침 경건의 시간을 통해 오는 위로와 축복은 지나쳐 가는 아침 구름 같지 않고,점점 더 밝게 비치는 아침 햇살과 같을 것이다.

 

 

 

2008.01.04  메튜 헨리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성도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도 그리스도를 신뢰할 수 있음에 대하여 -존 뉴턴 상황에 따라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양상이
    조금씩 다르지만 주님께서 활동하신다는 사실
    그 자체는 변함이 없습니다.
    은총의 외적 표현은 무난한 성품, 건전한 상식,
    세상지식 따위와 같은, 다만 자연스러운 많은 요소들을 통해
    고양(高揚)되기도 하고 많은 유익을 보기도 합니다. 또한 그것은 천박한 정신, 무능, 내리누르는 유혹의 손길 따 위와 같이 죄악 된,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요소들 때문에 그 늘에 가리워질 수도 있습니다. 은총이 크면 클수록 훼방도 ... 크다는 사실을 성숙한 성도는 깨닫게 됩니다. 만일 아무런 훼방이 없다면 아주 작은 은총이 큰 은총인 것처럼 느껴질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경솔하게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어떤 일의 얽히고설킨 사건전모를 전부 파악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대하고 자비로우신 우리의 대제사장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에 지나지 않는 존재임을 기억하고 계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동정을 베푸시며 참으시며 받아들이시며 인정하시며 무엇보다 실 수 없는 판단을 내리십니다. 영적 도움을 위하여 (존 뉴턴 )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는 거인의 흔적들!



전설 속 거인족 실제로 존재했을까?

지난 1976년 터키 남동부 쿠르드지역에서는 신장 2.7m~3m의 거인 유골이 발견됐다.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고고학자들이 고대유적 발굴 중 우연히 발견했는데 발견지가 성경에서 요르단 서쪽 가나안의 유적이 있는 곳으로 묘사된 지역이어서 많은 화제를 모았다. 사람들은 이를 근거로 이 유골이 네피림일 수도 있다고 믿기도 했다.

지난 1950년 터키 유프라테스강 인근에서도 여러 거인 화석이 발견됐다. 그 중 한 화석의 대퇴골은 길이가 자그마치 1.2m에 달했다. 때문에 당시 학자들은 뼈 주인의 신장을 약 5m로 추정했다. 또한 이곳 역시 길가메시가 통치한 수메르 문명 발원지와 유관해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 1970년에는 아마존강 유역에서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허리 굽은 거인들이 달리고 있는 모습이 목격됐다. 마치 파이우테족 인디언들의 전설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특히 지난 1911년 미국 네바다주의 한 동굴에서는 이들의 유해로 추정되는 붉은 머리카락을 한 신장 2~3m의 기이한 거인 미라가 발견되기도 했다. 발견자는 버려진 금광을 탐사하던 광부들이었다. 이들은 누군가 일부러 만든 듯한 인위적 형태의 동굴 깊숙한 곳에서 동쪽을 보고 서있는 3구의 거인족의 유골을 맞닥뜨렸다.

덧붙여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등 세계 각지에서 거인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목격담은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지난 1850년 미국 중서부에서는 신장이 2m가 넘고 두 줄의 치열이 있는 거인의 유해가 대량 발견됐으며 이중에는 손가락 혹은 발가락이 6개인 것도 있었다.

비교적 최근인 지난 2004년에도 쓰나미가 휩쓸고 간 태국 피피섬에서 3.1m의 거대 유골이 발견됐고 2005년에는 시리아에서 10m에 달하는 고대 거인의 묘지 두 곳이 발견됐다.

이 같은 이야기들은 성경 외 각종 문헌의 거인족에 대한 기록들이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을 둔 것이라는 주장에 힘을 보탠다. 이를 믿는 이들은 지구상에 거인 집단이 확실히 존재했으며 이들의 활동 범위가 상당히 광범위했다고 추정한다. 하지만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유해들의 출처와 진위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무엇보다 이들 유해들에 대해서는 아직 학술적으로 명확히 검증된 바가 없다. 목격담에 등장하는 대다수 유해는 종교적 분쟁, 유골의 행방불명 등 석연치 않은 이유로 발굴이 중단됐거나 연구가 흐지부지됐기 때문이다.


1. [창 6:4]
당시에 땅에 네피림(킹제임스역 : 거인)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5. [민 13: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6. [삼하 21:16]
거인의 아들 중에 무게가 삼백 세겔 되는 놋 창을 들고
새 칼을 찬 이스비브놉이 다윗을 죽이려 하므로

 7. [삼하 21:18]
그 후에 다시 블레셋 사람과 곱에서 전쟁할 때에
후사 사람 십브개는 거인의 아들 중의 삽을 쳐죽였고

 8. [삼하 21:20]
또 가드에서 전쟁할 때에 그 곳에 키가 큰 자 하나는 손가락과 발가락이
각기 여섯 개씩 모두 스물 네 개가 있는데 그도 거인족의 소생이라

 9. [삼하 21:22]
이 네 사람 가드의 거인족의 소생이
다윗의 손과 그의 부하들의 손에 다 넘어졌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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