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난함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기쁨이라는 것은 언제나 잠시뿐 

돌아서고 나면 험난한 구비가

다시 펼쳐져 있는 이 인생의 길 

 

삶이 막막함으로 다가와 주체없어

울적할 떄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구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자신의 존재가 한낱 가랑잎처럼 

힘없이 팔랑 거릴 때

 

그러나 그런 때일수록 나는 더욱 소망한다.

그것들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화사한 꽃밭을 일구어 낼 수 있기를

 

나중에 알찬 열매만 맺을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꽃이 아니라고 

슬퍼할 이유가 없지 아니한가 

 

이정하 님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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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똥별의 노래
                    최송연 

반짝이는 별이라 
착각하던 한 영혼이 
새벽별  되신 그분을 만났다네 

그분을 만난 후 
난 내 실체를 알게 되었지 

나는 별이 아니라 
황량한 들판에 떨어져 뒹구는 
한 조각 운석(隕石)일 뿐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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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는 지금 전쟁중입니다!!

우리의 옛 자아는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그리고 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할 때
그분과 함께 연합하여 부활한 우리는
교회로 재창조되었다.
예수님을 머리로, 우리는 그분의 지체로 부활한것이다.
우리는 이제 사단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것은 대적의 문을 취하는 교회의 사명이 우리에게 실재가 됐기 때문이다.
우리의 존재자체가 사단에게는 도전이요 공격이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이 하신 일을 할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사단의 일이란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 십자가의 능력이 실재가 되는 현장마다 사단의 권세는 무위로 돌아간다.
복음은 죽었던 자를 살리기 때문이다.
생명을 살리는 우리의 부르심은 바로 적의 심장을 겨누는 일이다.
타격지점이 명확한 이상 적이 반격하는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닐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교회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무지하다.
지금이 전시체제인것과,
자신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군사인것도 모르니 어찌 말씀으로 무장해야 할 필요와

동지들과 연합해야한다는 절박함을 깨달을수 있겠는가!

문제는 교회가 이와 같은 정체성의 혼란으로 자신이 이 전쟁의 공격수인것을 모른다는것이다.
공격은 늘 사단의 몫이고 우리는 다만 수비수일뿐이라는 인식은 사단의 거짓말이다.
이미 하나님이 승리로 완성하신 이 전쟁이 역사속에 실재가 되지않는 것은

공격수가 공격을 지연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적의 문을 취하여 얻어야 할 공격수들이 하나님의 전쟁에 관심조차 두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이란 나라와 나라와의 싸움이다.
이 전쟁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과 상관없이 우리는 이 전쟁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
다만 이 질문만이 유효하다.

당신은 어느나라에 속한 자인가?

그러나 기억하라!
십자가의 능력이 이미 이 전쟁을 숭리로 장식했음을!
보이는가?
십자가에서 휘날리는 승리의 깃발을!
진리를 희석시키고 왜곡시키려는 이 시대의 음모와

다양한 핍박과 박해앞에 완전하고 총체적인 복음은

어떠한 틈도 허락하지않는다.
말씀으로 무장한 복음과 기도의 증인들이 하나님의 군대로 연합하여

전쟁하는 하나님나라는 보이지않는 실재이며 그 영광은 영원하다.

교회여!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여!
사랑하는 신랑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철장 든 신부로 일어나라!!

느헤미야52기도정보 <복음과 영적전쟁> 서문중에서. /열방의미소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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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    

지난 20년동안 36판이나 거듭한 장기 베스트셀러 ‘이단들의 왕국’을 집필한 마틴(Walter Martin)박사는 이단에 대한 정의를 내렸고, 맥도웰(Josh McDowell)도 이단들의 특성 11가지를 언급하였으나, 이 저자들은 자신들이 내린 이단들의 범주에 완전하게 해당될 뿐 아니라, 11가지의 모든 특성을 다 가지고 있는, ‘대 바벨론의 비밀’, 천주교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어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저들의 눈이 가려져 있음을 보게 된다. 이 바벨론의 비밀은 전 성경의 구석구석에 밝혀져 있다. 계시록에 언급된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계17.18)에 대하여 로마카톨릭교회의 주석가들도 별 수 없이 저들의 교부(敎父)들을 통해 전해 내려온 해석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은 ‘두 번째 바벨론 로마, 서방의 바벨론 로마’로 언급하였고, 제롬(Jerome, c. 342~420)은 ‘로마는 계시록에서 바벨론으로 지칭되어 있다’고 기록하였다. 사가(史家)이자 변증학자였던 이태리의 바로니우스(C. Baronius, 1538~1607)추기경은 ‘계시록 안에서 로마가 바벨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라고 말하였다. 프랑스의 예수회 학자 벨라르민(R. Bellarmine, 1542~1621)추기경은 ‘사도요한은 계시록에서 로마를 바벨론이라고 부르고 있다’라고 썼으며, 루이14세로 하여금 낭뜨칙령을 번복(飜覆)케함으로써, 프랑스 기독교들의 신앙의 자유를 박탈한 장본인이었던 보쉬에(J. - B. Bossuet, 1629~1704)주교는 ‘그 특징이 너무 분명하여 바벨론에서 로마를 발견해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모든 교부들은 계시록의 바벨론이 로마임을 가르쳤다’고 시인(是認)하였다. 뉴먼(John H. Newman, 1801~90)추기경은 1840년 로마교회(敎會)에 가담하기 전에 로마를 ‘심판으로 멸망하는 도시’로 묘사하였는데, 이는 ‘공포로 가득한 계시록의 궁벽한 땅’을 분명히 지적하는 것이었다. 또 예수회학자 헌터(S.J. Hunter)는 그의 저서 『교의신학개요』에서, ‘계시록에서 바벨론이 로마를 의미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하였다. 루터의 개혁 이후 개혁자들은 ‘로마의 특성은 바벨론으로, 교황의 권위는 적(反)그리스도’로 평가하였다. 1970년, 로마교황 바오로6세의 추천문까지 실어 출판한 영문(英文)판 천주교성경의 계시록 14 - 18장의 바벨론에 대한 관주설명은 모두가 로마임을 저들 스스로가 시인하고 있다.

27년이 넘는 재임기간동안 로마교황이 만난 정치인-왕(여왕), 대통령, 수상, 총리, 주지사, 국회의원 등등-들의 숫자는 1600명이 넘는다. 『요한 바오르』2세의 장례식에 참석한 미국의 현직, 전직 대통령 3명(왼쪽으로부터 부시 대통령 내외, 부시 전대통령, 클린턴 전대통령, 곤돌레사 국무장관, CIA국장-이들 중 당신이 속한 교단의 총회장의 장례식에 올 수 있는 사람이 있을것이가?)

이단은 이단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교황권 조직이 거짓된 믿음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9~12)

로마교황권제도가 무엇인가 하는데 대하여는 과거 14년 동안 예수회 사제였던 휀스브뢰흐(G.P. Von Hoensbroech)가 『사회문명에 미친 교황권제도』라는 책의 서문에 가장 잘 묘사되어 있다: ‘교황권제도는...인류역사상 가장 탁월한, 가장 치명적이며, 동시에 가장 성공적인 기만의 조직이다. 교황권제도 - 저 거대한 기만의 조직...교황권지상주의는 모든 점에서 가장 완벽하게 조직된 제도로서, 오만하고 냉담한, 넓지만 은밀히 짜여지고, 고도로 마무리 된 조직이다.’ 또 그의 다른 저술, 『교황권지상주의, 그 독과 해독제』에서는 ‘교황권지상주의는 종교의 탈을 쓴 세속정치조직으로서, 그 자체는 범(汎)세계적인 세속권력을 추구해 오고 있다...교황권은 그리스도로부터 그 존속근거를 찾고 있는 신성한 기관이라고 자칭하고 있지만..그 제도를 옹호하는 자들이 뱉아내고 있는 무수한 허위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아담 스미스』,『크레이톤』,『토마스 홉스』

영국의 사회철학자이며 정치경제학자인 아담 스미스(Adam Smith, 1723~90)는 그의 명저(名著) ‘국부론’(國富論, Wealth of Nations)에서, 역사상 전무후무한 이 교황청 세력을 두고 다음과 같은 소신을 피력하였다: ‘로마교회는 국가정부의 권위와 안전에 대적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이성 및 복지에 대적하는, 인류가 산출한 가장 가공할 만한 조직체이다.’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의 역사학자로 5권의 방대한 『교황사』를 펴낸 후, 영국교회감독을 지낸 크레이톤(Mandell Creighton, 1843~1901)은 더 단호하다: ‘로마교회는 전혀 교회가 아니다. 조직에 있어서 하나의 국가다. 그것도 가장 사악한 형태의 국가 전제독재국이다.’ 로마교회의 성직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들은 거의가 통치와 지배에 관한 것이고, 전 신약성경을 일관하여 흐르고 있는 겸허와 봉사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다. 빌라도 앞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18:36)고 선언하신 그리스도의 기독교가 아니라, 늘 로마제국주의의 영광인 세상권력을 추구해 온 로마교회를 향하여, 영국의 정치(政治)철학자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는 ‘패망한 로마제국의 유령이며, 그 무덤 위에 왕관을 쓴 채로 앉아있다’라고 기록하였다.

로마교황청 주관으로 이태리의 아씨씨에서 3번째로 모인 12개 종교대표들. 『요한 바오르』 2세의 왼쪽 첫 번째는 한국의 성균관 대표이다. (New York Times, 25 Jan 2002).

『클리포드』,『스펄전』

이 바벨론의 세력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인가? 저명한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클리포드(W.K.Clifford, 1845~79)교수는 자녀를 가진 부모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충언하였다: ‘우리를 압도하는 한 역사적인 교훈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니, 당신의 자녀들을 천주교사제로부터 피신시켜라. 그렇지 않는다면 그들은 당신의 자녀들을 인류의 적으로 만들 것이다.’ 설교자의 왕자로 알려졌던 스펄전(C.H. Spurgeon, 1834~92)목사는 “...이 여리고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수 6:26)는 말씀을 인용, 로마카톨릭교의 사악(邪惡)한 제도를 건설하고 돋우려고 시도(試圖)하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여리고 성을 건축한 자가 저주를 받았으니, 우리 가운데 로마카톨릭교를 재건하려고 애쓴 자에게는 큰 저주가 있으리라. 우리 선조시대에 로마카롤릭교의 거대한 벽이 믿음의 힘으로, 노력의 인내로, 복음의 나팔로 무너졌다. 그런데 지금 그 옛 터전 위에 그 저주받은 제도를 재건하려는 자들이 있다.’

『스펄전』목사가 제시한 구체적인 방안들

‘우리는 로마교회의 죄악에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들에게 사려깊게 그러나 담대하게 경고를 해야 한다. 젊은이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고, 선조 때에 로마교회가 저지른 암흑상을 이야기해주어야 한다. 사제들이 올빼미처럼 햇빛을 싫어하므로, 보다 철저하게 온 땅에 빛을 전파해야한다.’
‘로마교회에게 독과 해가 되는 성경을 반포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건전한 복음책자들을 해외에 보내고 있는가? 한때 루터는 “악마는 거위깃털 펜을 싫어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성령의 축복으로 쓰여진 저술이 마귀왕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에 대해 그는 확실하고도 충분한 체험적인 이유를 갖고 있었다’. 그는 또 장래의 사역자들에게 행한 강의에서 ‘로마카톨릭교회의 이리들이 교훈을 받지 못한 양무리들을 약탈하고 있으니, 올바른 가르침만이 우리들 속에 들어와 종횡무진하고 있는 이단들로부터 양떼들을 보호하는 최선의 길’임을 분명히 하였다.

<북미에서 자란 영어권 세대들이 읽어야 할 책 두 권을 추천한다.
1) 천주교인이면서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인 John Cornwell이 쓴 ‘Hitler’s Pope’ (10년 이상 뉴욕타임즈의 장기 베스트셀러임)
2) 미국 동부 Drew 대학 교수인 Paul L. Williams의 ‘The Vatican Exposed’ - Money, Murder and the Mafia, 2003.
나폴레옹은 로마교황을 감옥에 구금하기도 했으며 20세기에 들어서자 죽었던 로마교황권은 로마카톨릭교회의 아들들인 무쏠리니, 히틀러, 프랑코(스페인)등의 지원을 얻고 다시 살아났다. 특히 로마교황청과 파시스트 무쏠리니, 나치의 히틀러 사이에 조인된 정교조약내용도 부록으로 담고 있다. 평생을 천주교 예수회 사제들과 대화하며 교우관계를 맺어온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의 신학 분석을 위해서도 필요한 책들이며 Indigo / Chapters 등 일반서점에서 주문가능하다.>


주예수 해변서 떡을 떼사
무리를 먹이어 주심같이
영생의 양식을 나에게도
풍족히 나누어 주옵소서
(찬송가 284 / 주예수 해변서①)

 구영재 선교사 [KOO,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출처: USA아멘넷 게시판/진설병 님


좌익 배격하고 대한민국 수립 이끌어
“민족끼리 단결하자” 65개 정당운동협의체인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발족시켜
美 군정과 협력ㆍ견제 속에 전국 순회 강연… 압도적인 지지로 초대 대통령에

 

고려는 왕건(王建)의 나라’ ‘조선은 이성계(李成桂)의 나라’라는 표현이 가능하다면 대한민국은 분명 ‘이승만(李承晩)의 나라’다. 물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김일성(金日成)의 나라’다. 한동안 기승을 부린 ‘이승만 때리기’가 대한민국에 대한 원초적 부정이었고 최근 ‘대한민국의 재발견’이 이승만에 대한 활발한 재조명으로 이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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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7월 24일 취임 선서를 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왼쪽) 1948년 8월15일 중앙청에서 열린 정부 수립식.(오른쪽)


이승만의 건국운동은 아놀드 토인비의 말 그대로 ‘도전과 응전’의 변증법 그 자체다. 1945년 8월 15일 70세의 노(老) 독립운동가 이승만은 미국 워싱턴의 마운트 플리전트 2층 벽돌집에서 일제강점의 종언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이승만은 즉각 귀국을 위한 수속에 들어갔다.

그러나 좌우합작에 우호적이던 미 국무부의 반대에 부딪혀 한동안 난항을 겪어야 했다. “이승만은 우리의 구상을 쉽게 따라줄 인물이 아니다”는 판단에서 국무부는 한동안 이승만의 조속한 귀국에 제동을 걸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승만은 해방 2개월이 지난 10월16일에야 김포에 내릴 수 있었다. 순전한 ‘개인’ 자격의 환국이었다.

이승만이 부재(不在)하던 해방 직후 2개월은 말 그대로 ‘좌익(左翼)의 득세기’였다. 8월 16일부터 여운형(呂運亨)이 주도하는 건국준비위원회가 전국적으로 조직을 확대하면서 주도권을 장악했고 9월 6일 박헌영(朴憲永)은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다음 조선인민공화국, 즉 ‘인공(人共)’을 선포했다. 9월 14일에는 임의대로 내각 명단을 발표했는데 여기에 이승만이 ‘주석’으로 추대돼 있었다. 대통령에 해당하는 자리다. 물론 이승만의 동의는 전혀 없었다.

‘주석 이승만’과 관련해서는 다양한 논란이 있었다. 심지어 북한이나 친북 성향의 학자들은 박헌영이 이승만을 주석으로 추대한 사실을 들어 “박헌영은 미제의 간첩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허무맹랑한 주장이다. 그저 당시의 지명도를 바탕으로 백지 상태에서 내각을 구성할 때 이승만은 좌익에서조차 첫손 꼽지 않을 수 없는 비중을 갖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자연히 이승만이 귀국했을 때 첫 번째 도전은 좌익 쪽에서 왔다. 귀국 다음날 여운형ㆍ허헌(許憲)ㆍ이강국(李康國) 등 좌익 인사들이 이승만의 숙소인 조선호텔로 찾아와 정식으로 주석에 취임해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언론에서 ‘민족의 영웅’ ‘최고의 지도자’로 칭송받고 있던 이승만은 정중하게 주석 취임을 거절했다. 이승만은 태생적으로 좌익과는 함께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워낙 좌익 세력의 힘이 컸기 때문에 날을 세우는 것은 위험천만이었다.

그렇다고 우익이 일치단결해서 이승만을 민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승만에게는 자기 세력이 없었다. 한민당이 자신들의 지도자가 되어줄 것을 부탁했지만 이승만은 굳이 분류하자면 토착세력인 한민당보다는 김구(金九)가 이끄는 임시정부 쪽이었다. 김구를 비롯한 임정 인사들은 아직 귀국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주일 가량 정국을 관망하던 이승만은 10월 23일 조선호텔로 전국 65개 정당·단체 대표 200여명을 모이도록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이승만 이름 석 자만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덮어놓고 뭉치자”고 호소했다. 이렇게 해서 건국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정당통일운동협의체인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이하 독촉)’를 발족했다.

일단 이승만은 ‘대통합’의 명분을 장악했다. 공산당 계열이나 임시정부 쪽에서는 불만이 없을 수 없었지만 거부할 명분도 마땅치 않았다. 좌익과 임정의 도전에 대한 노회한 정치가 이승만의 첫 번째 응전이 바로 ‘독촉’이었고 그것은 대성공이었다. 명분 장악으로 그의 입지가 훨씬 넓어졌기 때문이다.

응전에 대한 재도전은 박헌영 쪽에서 먼저 제기되었다. 10월 30일 박헌영은 ‘친일파 청산’을 통합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했다. 무조건 통합론과 조건부 통합론이 대립하고 있었다. 결국 조선공산당은 2주가 지난 11월 16일 독촉 탈퇴를 선언했다. 이승만의 구상에 약간 금이 가 버렸다.

이런 가운데 11월 23일 김구의 임정파가 역시 ‘개인’ 자격으로 김포에 내렸다. 이 날 저녁 이승만이 김구의 거처로 찾아갔고 다음날 이승만은 김구를 미 군정청장 하지 장군에게 소개했다. 그러나 이미 이승만과 김구의 묘한 신경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12월 3일 오전 김구는 자신의 정통성을 과시하듯 숙소인 경교장에서 임정 전 국무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첫 국무회의를 열었다. 이승만도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거나 이승만의 공식직함은 임정주미외교위원장, 즉 주미대사 격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미 군정청은 임정은 말할 것도 없고 인공을 비롯한 어떤 단체도 정부로 인정치 않겠다는 입장을 밝혀 놓고 있었다. 경교장 국무회의는 이런 미 군정청의 방침에 정면으로 맞서는 행위였다. 이날 오후 임정 관계자들은 하지와 아놀드 군정장관을 방문해 임정의 지위 보장을 요구했다. 그러나 “국제적 승인 없이는 합법적 정부로 인정할 수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상황은 이승만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임정이 인정을 못 받는다면 족쇄가 될 수도 있는 ‘주미외교위원장’이라는 자리도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박헌영의 인공이나 김구의 임정이나 이승만의 독촉이나 ‘임의단체’이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다소 소강 상태를 보이던 정국은 12월 28일 미·영·소 3국 외상의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가 전해지면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한국을 5년간 신탁통치한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에 가장 강하게 반발한 쪽은 김구의 임정 세력이었다. 이 날 이승만은 신탁반대를 골자로 하는 성명서 한 장을 발표한 것이 전부였지만 김구는 즉각 긴급국무위원회를 열어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설치했다. 해방정국에서 김구의 임정이 처음으로 주도권을 장악하는 순간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다음날 우익진영의 신탁 배격 대표자대회가 열리는데 첫 번째 요구항목이 ‘신탁통치 배격’이 아니라 ‘연합국에 임시정부 즉시 승인 요구’였다는 사실이다. 즉 임정세력은 다른 우파 진영을 끌어들여 반탁운동을 중경 임시정부 추대운동으로 끌어가려 하고 있었다.

12월 31일 임정 내무부장(내무장관) 신익희(申翼熙)는 “현재 전국 행정청 소속의 경찰기구 및 한인 직원은 전부 임시정부 지휘하에 예속케 함”이라는 포고문까지 발표했다. 당시로서는 유일한 무장력이던 경찰기구의 접수를 선언한 것이다. 미 군정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결국 다음해 1월 1일 하지는 김구에게 강력경고를 했고 김구도 한걸음 물러섰다. 1차 신탁반대운동은 이렇게 끝났다. 이 과정에서 12월 30일 한민당의 지도자 송진우(宋鎭禹)가 반탁노선을 함께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암살당했다.

1차 신탁반대운동에 대해 이승만은 소극적이었다. ‘반탁을 하되 반미나 미 군정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1946년 1월 2일 소련의 사주를 받은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익 세력이 느닷없이 신탁지지를 선언하고 나섰다.

2차 신탁반대운동이었다. 이번에는 미 군정과 대립하는 게 아니라 좌우대립의 양상이었다. 한 달여 동안 계속된 반탁·친탁 투쟁은 국민의 여망을 등에 업은 반탁세력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

이후 미 군정은 2월 14일 정부수립의 전 단계로 ‘남조선민주의원’이라는 기구를 창설한다. 우파인사들이 중심이 된 민주의원에서 이승만은 의장, 김규식(金奎植)은 부의장, 김구는 총리에 선임된다. 두 차례의 신탁반대운동을 통해 주도권을 장악한 김구는 다시 실권을 이승만에게 넘기게 된다.

그러나 이승만에 대한 새로운 도전은 미 군정의 하지로부터 왔다. 3월 20일 열리는 한국의 신탁문제를 다룰 미ㆍ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하지는 이승만을 의장직에서 하차시켰다. 불과 한 달 만이었다. 이유는 소련과의 협상에 확고한 반공주의자 이승만이 걸림돌이 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미ㆍ소공위가 난항을 거듭하고 있는 동안 이승만은 지방유세에 나선다. 정치가 이승만의 탁월함은 여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미 ‘위대한 독립운동가’라는 명망에 ‘독촉’이라는 조직을 갖춘 이승만은 미 군정과의 관계가 좋지 않자 대중의 지지 획득을 위한 전국 순회강연에 나선 것이다. 유명한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정읍 발언이 나온 것도 바로 이 때였다.

‘공산당 배격’을 골자로 하는 정읍 발언이 나오자 좌익 세력의 연합체인 남조선 민주민족전선은 말할 것도 없고 김구의 한독당까지 반발하고 나섰다. 한민당만이 이승만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좌우가 극한으로 대립하는 상황에서 김구의 설 자리는 오히려 좁아지고 있었다. 결국 이 무렵 이승만의 독촉과 김구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하나로 통합해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발족하는데 이승만이 의장, 김구가 부의장으로 선출된다. 적어도 이승만과 김구의 정치 투쟁에서 이승만은 유리한 고지를 확고히 했다.

이에 하지는 여운형과 김규식을 하나로 묶는 좌우합작을 추진하면서 이승만을 압박하려 했다. 당시 하지는 “이승만은 한국에서 탄생할 어떤 형태의 정부에도 참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기까지 했다. 당시 하지의 말은 곧 법이었다.

 

이승만은 고립무원에 빠졌다. 사실 하지가 좌우합작 정부를 세우겠다고 했다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권력과 원칙의 갈림길에 섰고 권력을 버리고 원칙을 택했다. 공산당과의 협력은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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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 3월 콜로라도주 덴버시의 한 농장에서 농기구를 들고 있는 이승만(가운데). 미국의 동포들은 독립운동 자금을 만들기 위해 농장을 조성했다.1946년 11월 23일 이승만은 새로운 지지세력을 얻기 위해 도미(渡美) 의사를 밝힌다.

 

그러나 실제로 이승만이 미국행에 나서는 것은 열흘이 지난 12월 4일이었다. 하지와 미 국무부의 방해공작이 심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도쿄에 있던 맥아더의 도움으로 이승만은 우여곡절 끝에 12월 7일 미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승만은 1947년 4월 21일까지 무려 4개월14일 동안이나 미국에 머물며 자신에 대한 지지세력 확보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사실 이승만이 미국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미국 행정부나 의회가 그에게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3월 12일 트루먼 대통령이 의회에서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소련과의 협력에서 반공노선으로 돌아서겠다는 선언이었다. 트루먼이 이승만을 지지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양상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승만의 천운(天運)이었다. 4월 21일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이승만은 더 이상 ‘떠날 때의 이승만’이 아니었다.

귀국 후 이승만은 남한만의 정부 수립을 위한 작업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그가 밝힌 구상은 ‘미 군정과 합작으로 보통선거법을 만들고 총선거를 통해 과도정부를 수립한 다음 이 정부를 유엔에 참가시켜 남북통일을 추진해간다’는 것이었다.

한편 여전히 좌우합작, 미ㆍ소공위에 집착하고 있던 하지는 심지어 5월에 재개되는 미ㆍ소공위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해 이승만을 2개월여 동안 가택연금해 버렸다. 그러나 하지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미ㆍ소공위가 궁극적으로 결렬될 경우 그 책임을 자신이 고스란히 덮어써야 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소(對蘇) 시각이 바뀐 것도 그로서는 큰 부담이었다.

오죽했으면 하지는 설사 좌우합작 노력이 실패하더라도 정권이 이승만에게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7월 1일 84세의 서재필(徐載弼)을 한국으로 데려왔겠는가. 당시 이승만은 자신의 스승이기도 한 서재필이 하지의 초청으로 한국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서재필이 아니라 서재필 할애비를 불러 봐라 되나” 하고 흥분했다고 한다. 물론 서재필은 대안이 될 수 없었고 쓸쓸히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국내의 이런 정세와 달리 국제사회에서는 트루먼 독트린이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미국의 마셜 국무장관은 9월 17일 한국문제를 UN에 상정했다. 미ㆍ소 점령지구에서 조속히 총선거를 실시하되 이를 감시할 UN위원회를 두는 방안이었다. 이승만의 구상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1948년 1월 8일 UN위원단이 한국에 도착했다. 군정을 해체하고 한국인에 의한 독립정부를 세우기 위함이었다. 이승만은 절대 환영했고 김구는 “남한만의 단독선거는 절대 반대한다”고 선언했다. 이미 두 사람은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소련이 위원단의 입북을 반대하면서 남북한 동시 총선거는 불가능해졌다. 논란 끝에 위원단의 크리슈나 메논은 북한 측에 대해서는 인구비례에 따라 의석을 공석으로 남겨두고 국회의원 수는 남북 통틀어 200명으로 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UN에 제출했다.

‘이승만 구상’은 순조로운 듯했다. 그런데 이 때 김구와 김규식이 단정(單政) 노선 반대를 명분으로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3월 12일 남한만의 총선거에 불참한다는 입장을 표시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승만에게는 도전거리도 되지 않았다. 대세가 이미 이승만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열흘이 지나서야 두 사람을 비판하는 짤막한 성명을 발표한 데서도 당시 이승만의 자신감을 알 수 있다. “좌익 파괴분자 외에는 기권할 사람이 몇 안 될 줄 믿는다.”

실제로 4월 3일 제주도에서는 남노당 계열이 총선반대를 명분으로 폭동을 일으켰다. 4월 19일 김구가 북한으로 갔고 얼마 후 김규식도 38선을 넘었다. 그러나 5월 5일 북한에서 돌아온 두 사람은 국민들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5월 10일 95.5%의 투표율을 보이며 제헌국회 선거는 성공적으로 치러졌고 이승만은 초대 국회의장으로 선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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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9월 29일 서울 수복 후 중앙청 기념식에서.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맥아더 사령관(오른쪽)의 모습이 보인다.

7월 17일 자신의 구상대로 대통령제를 관철시킨 헌법 제정이 이뤄졌고 3일 후 국회에서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180표라는 압도적 다수의 지지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구 13표, 안재홍 2표, 무효 1표였다. 그 한 표는 미국 시민권자 서재필을 찍은 것이었다고 한다.

이 후 초대내각 조각(組閣)을 마친 이승만 대통령은 8월 15일 일제에 의한 조선지배의 상징이던 중앙청 건물 앞 광장에서 자신의 지원자 맥아더와 견제자 하지가 귀빈으로 참석한 가운데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을 가졌다. 국권을 상실한 지 38년 만에, 해방 3년 만에 지구상에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나라가 탄생했다.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기자

 

이승만 그는 누구인가

독립운동가이자 ‘건국의 아버지’
임정·하와이에서 독립운동… 재미동포 청년들을 미군 특수부대에 파견하기도 2006101077061_00.jpg

▲ 1910년 6월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

이승만은 ‘준비된 국부(國父)’, 대한민국을 세우기 위해 태어난 ‘건국의 아버지’다. 의외로 간단하다. 북한이 주도적으로 통일하면 통일조국의 아버지는 김일성이 되는 것이고 남한이 주도적으로 통일하면 이승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좌우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문제요, 현실의 문제다.

지금이야 마구 이승만이라고 부르지만 50대 이상에게는 ‘이승만 박사’라고 해야 자연스러운 그는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 능내에서 몰락한 선비 이경선과 김해 김씨 사이에서 6대 독자로 태어났다. 고종 12년 때였다. 3살 때 한양(서울)으로 이사와 지금의 서울역 근처 우수현(雩守峴)에서 스무 살까지 살았다. 그의 아호 우남(雩南)도 이 시절을 그리워하며 지은 것이다.

여러 차례 과거시험에 낙방한 청년 이승만은 1894년 신학문을 배우기로 결심하고 배재학당에 입학한다. 당시 배재학당에는 “주시경은 한글 연구하러, 이승만은 정치하러 배재를 다닌다”는 말이 떠돌 정도로 일찍부터 현실 정치에 관심을 보였다.

2년 후 배재를 졸업한 이승만은 오늘날의 시민운동이라 할 수 있는 독립협회에 들어가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1898년 3월 10일 제1차 만민공동회에서 뛰어난 웅변술로 열변을 토해 장안의 유명인사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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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3년 복역중인 이승만.그러나 수구세력의 견제로 24살 때인 1899년 1월 9일 이승만은 ‘역적모의를 했다’는 죄목으로 투옥된다. 장장 5년7개월간의 옥살이가 시작된 것이다. 종신 징역형을 선고 받은 이승만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도서관을 만들고 영어사전을 집필했다.

 

외국인 선교사의 도움을 받으면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심지어 함께 수감 중인 죄수 40여명을 기독교에 입문시키기도 했다. 또 1910년에야 출판되지만 옥중에 있으면서 자신의 근대화 구상을 담은 ‘독립정신’이라는 첫 번째 저서도 집필했다.

1904년 8월 출옥한 이승만은 민영환(閔泳煥)의 밀서를 휴대한 채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11월 도미길에 오른다. 어렵사리 시어도오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기는 했지만 힘없는 나라의 무명청년의 호소에 귀를 기울일 루스벨트가 아니었다. 밀사역 실패에 실망한 이승만은 미국에 남아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다.

1905년 2월 윌버 학장과의 개인면담을 거쳐 조지 워싱턴대 2학년 2학기에 입학한 이승만은 2년 후인 1907년 6월 졸업한다. 귀국이냐, 공부냐를 고민하던 이승만은 9월 하버드대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1년 만에 석사과정을 끝낸 이승만은 귀국을 원했으나 부친의 만류로 미국에 더 남게 되는 바람에 프린스턴대 박사과정에 들어간다. 1910년 봄, 조국의 운명이 일본의 손아귀로 들어가고 있을 때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이라는 제목의 국제법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한다.

이승만 박사는 이후 여러 가지 고민 끝에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한다. 거점은 하와이. 그곳에서 이승만 박사는 크게 세 가지 사업을 벌였다. 하나는 교육사업, 둘째는 교회활동, 셋째는 교민단체를 통한 독립운동이었다.

1918년 이승만 박사는 한인기독학원, 한인기독교회를 창설했고 하와이 동지회를 설립했다. 당시는 1차대전이 막바지를 달리고 있었고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기대가 높을 때여서 이승만 박사는 상당히 고무돼 있었다. 독립의 기회가 올 수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때마침 1919년 조국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났다. 이후 국내외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선포됐다. 가상의 정부였지만 각료명단까지 발표됐다. 그것을 보면 당시 독립운동의 지형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이승만은 5개 임시정부에서 각각 국무총리, 부도령(副都領·부통령), 국무총리, 집정관총재(대통령) 등으로 추대됐다.

 

이 중 법통은 이승만 박사를 집정관총재로 추대한 ‘한성정부’가 잇기로 하고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설치하는 것으로 합의가 이뤄졌다. 이렇게 해서 이승만 박사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에 올랐다.

그러나 좌파는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우파에서도 이승만 박사의 노선을 지지하지 않는 세력이 많았다. 사실 이승만 박사도 대통령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 명칭을 활용해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데 더 큰 노력을 쏟았다. 이런 와중에 이승만 대통령은 1925년 3월 임시정부 의정원에 의해 탄핵을 당했다. 5년6개월의 임정 초대 대통령직을 불명예스럽게 마감한 것이다.

한동안 이승만 박사의 외교활동에도 암흑기가 찾아왔다. 1940년 일체의 대외활동을 자제한 그는 미국인을 대상으로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폭로하는 저서를 집필했다. 그로서는 마지막 독립운동인 셈이었다. 그것이 바로 영어로 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이다. 이 책은 1941년 초 출간됐으나 처음에는 미국인들로부터 야유에 가까운 비평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은 알래스카나 하와이를 공격할 수 있다”는 대목이 들어있는 이 책은 그 해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하루 아침에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승만 박사는 다시 독립운동을 재개했다. ‘미국의 소리’ 방송을 통해 소수나마 고국에 있는 동포에게 독립의 희망을 설파했고 미군과의 협동작전을 구상하기도 했다. OSS계획에 참여해 재미동포 청년들을 미군 특수부대에 파견하기도 했다. 중국에 있는 김구의 임시정부와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수립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뤄진 것이다. 당시 이승만 박사는 미국에 군사적 기여를 해야 전후에 독립을 보장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1945년 8월 15일 조국은 해방됐고 치열한 정치투쟁 끝에 3년 후인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이라는 위업을 달성한다. 기쁨도 잠시, 김일성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터졌고 3년 동안 전 국토는 초토화됐다. 이런 가운데도 이승만 박사는 특유의 외교력을 발휘해 미국으로부터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얻어냈다. 독도를 넘보는 일본을 겨냥해 ‘이승만 라인(평화선)’도 선포했다.

사실 이승만 박사의 공(功)이 태산이라면 과(過)는 언덕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로서는 과도 커보였다. 결국 이승만 박사는 1960년 4·19 혁명으로 인해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리고 다시 망명지 하와이로 떠나 말년을 보냈다. 1965년 90세의 이승만은 마침내 주검이 되어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언덕으로 태산을 덮어버린 것이다.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기자



 

스트레스 해소하는 박장대소

날벼락 - 최악의 써비스

 

어디서 성폭행이야

 

안 죽은 게 다행 - 프로펠러에 걸렸다면?

 

방송사고 - 또라이는 못말려

 

높이뛰기 선수의 차타기

 

나쁜 남자...덜된여자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데..

 

..

맹구 일병의 수류탄 투척

 

명중 - 씨저스 킥

 

이것도 사내라고....

 

어딜 만져?

 

앗! 바위가 아니네..미안

 

아이고 내 새끼

 

사람아 ! 약올려...이거나 먹어라

 

쨉도 안 되는 게 어디서...

 

맹구 일병은 어디 가나...

 

여자라고 함부로 시비하지 마라

 

나무의 복수

 

성공?이냐 실패?이냐

 

한 방! 아니 한 발!

 

나하고 놀자구!

 

치사한 반칙 ㅋ

 

명중률 100%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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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육공동체  http://onesfamily.org/technote/board.php?board=book&command=body&no=1833

 

 

정리: 돌이켜 회개하라 (조셉 얼라인, 규장) 

 

 
돌이켜 회개하라(조셉 얼라인, 규장)

<제목 차례>


1. 가짜 회개에 속지 말라 2
  1) 기독교를 믿는다는 고백이 회개는 아니다. 2
  2)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회개한 것은 아니다. 2
  3) 도덕적 의가 회개는 아니다. 2
  4) 형식적으로 경건의 규율을 지키는 것이 회개는 아니다. 2
  5) 교육, 법, 가혹한 억제를 통해 타락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 회개는 아니다. 2
  6) 한 번 비췸을 얻는 것, 죄책감을 느끼는 것, 피상적 변화, 부분적 개혁이 회개는 아니다. 2


2. 이것이 회개이다. 3
  1) 회개케 하시는 분은 누구인가?  3
  2) 회개는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갈 사람을 만들어내며 사람의 마음과 몸과 삶 전체의 행동들을 변화  4


3. 당신은 생명 얻는 회개를 한 적이 있는가? 8
  1) 당신이 왜 회개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자. 8


4. 회개하지 않은 자는 어떤 죄를 짓는가? 10
  1) 회개하계 않은 열 가지 부류의 죄인 10
  2) 회개하지 않은 자들의 열두 가지 죄 11


5.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가 임한다. 12
  1) 하나님께서 회개하지 않은 자에 대항하여 싸우신다.  12
  2) 하나님의 피조세계 전체가 당신을 대적한다.  13
  3) 사탄은 회개하지 않은 당신을 완전히 지배한다.  13
  4) 당신의 모든 죄목이 산처럼 당신을 짓누른다.  13
  5) 억제하기 힘든 욕망이 당신을 비참한 노예로 만든다.  14


6. 회개하지 않는 자를 위한 생명의 지침 15
지침1. 회개하지 않는 상태로는 천국에 이를 수 없음을 명심하라. 15
지침2. 당신의 죄를 철저히 살피고 뼛속 깊이 느끼도록 노력하라. 15
지침3. 당신의 비참한 현재 상태를 가슴 깊이 절감하라. 16
지침4. 행위의 도움을 받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자신을 잘 살펴라! 17
지침5. 당신의 모든 죄들을 남김없이 버려라! 17
지침6. 하나님을 당신의 기업과 복음으로 엄숙히 선택하라! 17
지침7. 주 예수님의 모든 직무를 당신의 것으로 받아들여라! 18
지침8. 당신의 모든 능력과 재능과 관심을 주께 바쳐라! 18
지침9. 그리스도의 법을 따라 당신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다스려라! 19
지침10. 하나님과 당신 사이의 엄숙한 언약 안에서 온전해지게 하라! 19
지침11. 회개를 미루지 말고 속히 하나님께 마음을 바쳐라!  20
지침12. 하나님께서 회개의 방편으로 세우신 말씀을 성실하게 경청하라! 20
지침13. 성령님이 당신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실 때 순종하라! 20
지침14. 진지하고 뜨거운 기도를 쉬지 말고 열심히 드려라! 20
지침15. 악한 친구들과 작별하고 죄의 유혹을 이겨라! 20
지침16. 하루 동안 금식하고 기도함으로써 당신의 영혼을 겸손히 낮추라! 21


7. 바로 지금 돌이켜 회개하라 21
  마지막 그물을 던지며‥‥ 21
  1) 탕자처럼 돌아오라. 21
  2) 당신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친절하게 초대하신다. 21
  3) 천국 문이 당신을 향해 열려 있다 22
  4)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도 당신에게 놀라운 특권을 주신다. 23
  5) 하나님께서는 자비의 조건들을 최대한 낮추어 당신에게 제시하신다. 23


8.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다! 24

 
1. 가짜 회개에 속지 말라
먼저 회개가 아닌 것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1) 기독교를 믿는다는 고백이 회개는 아니다.
기독교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전 4:20). 이교도(異敎徒)이기를 거부하고 기독교 신앙을 공언하기만 하면 회개한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불의(佛儀)에서 떠나지 않고(딤후 2:19), 말로는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면서도 행위로는 그분을 부인한다(딘 1:16).
2)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회개한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외형적 세례의식(洗禮儀式)이 구원에 필요한 은혜를 주기 때문에 세례를 받으면 누구나 실제로도 거듭났다고 착각한다. 회개와 세례가 동일한 것이라면, 이 세상을 떠날 때 세례 증서만 챙기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세례 받는 것이 곧 회개이고 중생이라는 주장은, 마태복음 7장 13-14절을 비롯한 수많은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난다.
사람이 세례를 받을 때 무엇을 받았거나 받은 척 할지라도 그 후 진리에 대해 무지(無知)하거나 불경스러운 언행을 일삼거나 형식적인 종교생활을 한다면 그는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요 3:7).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세례 때 무엇을 받았든 간에 이후의 삶이 거룩하지 못하다면 그는 철저한 변화를 통해 확실히 새로워져야 한다(갈 6:7).
3) 도덕적 의가 회개는 아니다.
도덕적 의(義)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할 수 없다(마 5:20). 회심(回心)하기 전에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다(빌 3:6). 바리새인들은 "나는 다른 사람들 곧 도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눅 18:11)라고 말할 정도로 도덕적 의가 뛰어났다. 물론 도덕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거기에 안주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기독교와 박애를, 은혜와 이성을 분리하면 안 되듯이 경건과 도덕성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
4) 형식적으로 경건의 규율을 지키는 것이 회개는 아니다.
경건의 능력이 없으면서도 경건의 모양만을 나타내는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딤후 3:5). 오랜 시간 기도하고(눅 20:47) 자주 금식하고(눅 18:12) 기꺼이 듣고(막 5:20) 비싼 대가를 치르며 하나님을 섬기지만(사 1 11) 사실은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경건의 능력 없이 겉모습만으로 봉사할 수도 있다.
5) 교육, 법, 가혹한 억제를 통해 타락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 회개는 아니다.
6) 한 번 비췸을 얻는 것, 죄책감을 느끼는 것, 피상적 변화, 부분적 개혁이 회개는 아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가책을 느껴본 사람들 중 대다수는 죄의 깨달음이 회개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위로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방탕한 삶을 청산하고 악한 친구들을 멀리하고 욕망을 극복하고 근신하면서 예의 바른 생활을 한다고 해서 자신이 회개했다고 착각한다. 무지한 사람에서 지식 있는 사람으로, 불경스러운 말을 내뱉는 사람에서 점잖고 경건의 모양이 있는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여전히 중생하지 못한 본성이 변하지 않았다면 계속 육욕적일 수밖에 없다.
한 번 비췸을 얻고 종교적 의무를 형식적으로 준행한 사람도 회개하지 않았다고 판명되어 지옥에 간다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떠하겠는가?
 
2. 이것이 회개이다.
회개는 마음과 생활의 철저한 변화이다.
회개의 본질과 동인(同人)들을 간단히 살펴보자.
1) 회개케 하시는 분은 누구인가?
(1) 우리는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살후 2:13) 또는'성령의 새롭게 하심'(딛 3:5)으로 회개하게 된다.
① 회개는 인간이 가진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이다.
당신 스스로 자신을 회개시킬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
회개는 죽은 자의 상태에서 다시 사는 것이며(엡 2:1), 새로운 창조이며(갈 6:15, 엡2:10), 전능하신 분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엡 1:19).
이런 것들은 인간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이다.
② 회개는 초자연적인 일이다.
(2)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한 자는 예수님이 해산(解産)의 고통을 치르시며 얻어낸 열매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모든 고통은 우리를 낳기 위한 해산의 고통이었다. 주님은 우리에게 거룩함이 되셨고(고전 1:30),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자신을 거룩하게 하셨다(요 17:19).
(3) 말씀이 우리의 눈을 밝게 하고, 영혼을 소성케 하고(시 19:7-8),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준다(딤후 3:15).
말씀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썩지 아니할 씨'이다(벧전1:23).
우리가 씻음을 받았다면 그것은 바로 말씀 덕분이다(엡 5:26).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진리를 통해 그렇게 된 것이다(요 17:17).
(4) 부름 받은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사 60:21).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德)을 선전하고(벧전 2:9)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기 위해서다(골 1:10).
회개는 자기의 모든 몸과 능력과 마음에서 일어나야 한다. 먼저 당신의 회개를 증명하라. 그런 다음, 당신이 선택받았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라.
(행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롬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행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① 회개가 전인(全人)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육욕적(肉慾的)인 사람도 어떤 면에서 선할 수 있지만, 그의 인격 전체가 선한 것은 아니다.
회개는 낡은 건물을 뜯어고치는 것이 아니라 전부 허물고 새로운 건물을 세우는 것이다.
② 회개는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2) 회개는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갈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내며 사람의 마음과 몸과 삶 전체의 행동들을 변화시킨다.
(1) 마음의 변화
첫째, 회개는 사람의 판단 기준을 완전히 뒤집어놓는다.
둘째, 회개는 비뚤어진 의지를 바로잡아준다.
회개한 사람에게는 새로운 목적과 계획이 생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가장 원하기 때문에 다른 것을 원하거나 계획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를 섬겨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여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준다 해도 이 행복과 바꾸지 않는다. 회개한 사람은 선택의 기준이 바뀐다.
셋째, 회개는 뒤틀린 감정을 바로잡아준다.
회개한 사람의 눈과 마음은 그리스도를 향한다.
회개하면 기쁨의 대상이 바뀐다.
회개하면 관심사가 꼭 바뀐다.
회개한 사람은 고난을 받을까봐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죄를 지을까봐 두려워한다. 회개한 사람은 사랑의 대상도 바뀐다. 사람이 회개하면 그를 슬프게 만드는 것도 달라진다(고후7:9-10).
(2) 몸의 변화
① 회개하기 전에는 죄의 도구로 사용되던 인간의 몸이 회개한 후에는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성전의 거룩한 도구가 된다.
자신의 몸을 욕되게 했던 사람이 회개하면 거룩함과 영예와 절제와 순결과 근신 가운데 지키면서 주께 온전히 바친다.
② 회개하기 전에는 세상적인 계획들로 가득했던 머릿속이 하나님을 위한 계획들로 채워지고, 그분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 고심한다.
회개한 사람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데 머리를 쓰지 않고 자기의 책무를 다하는 데 머리를 쓴다.
회개한 사람의 입은 생명의 우물이며 그의 혀는 최상급 은(銀)이다. 그 입술은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먹인다.
(3) 생활과 실천의 변화
새로워진 사람은 새로운 길을 간다(엡 2:2-3).
그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3:20).
하나님께서 새 마음을 주시고 그 마음에 율례를 새겨주시면 그때부터 그는 하나님의 율례 안에서 행하며 하나님의 판단을 따른다.
① 회개의 종류
㉠ 죄로부터 돌이키는 회개
회개한 사람은 죄와 영원히 적대 관계에 놓인다. 모든 죄가 그렇다. 무엇보다도 자기의 죄, 특히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죄에 대해서 그렇다.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자기의 죄 때문에 자신을 혐오한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죄에 맞서 전심전력으로 싸운다.
㉡ 사탄으로부터 돌이키는 회개
회개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움직인다.
때때로 사탄이 덫을 놓아 발목을 잡을 때도 있지만 그럴 때도 그는 '원하지 않으면서 잡혀 있는 포로'일 뿐이다. 믿음의 길을 갈 때 그는 사탄의 올무와 미끼를 경계하면서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철저히 연구한다. 사탄의 유익을 얻지 못하게 하기 위해 적(敵)을 경계하고 의무를 다한다.
㉢ 세상으로부터 돌이키는 회개
누구나 참된 신앙을 갖기 전에는 세상에 압도당한다.
돈에 절하거나 자기의 명예를 우상시하거나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한다. 그는 사람에게 치우쳐 있어서 오직 하나님께만 바쳐야 할 영광과 신뢰와 애정을 사람에게 바친다. 본래 우리를 섬기도록 만들어진 세상이 이제는 우리 위에 군림한다. 그러나 회개하게 만드는 은혜는 모든 것을 정상으로 되돌려놓는다.
하나님을 보좌에 앉게 해드리고, 세상을 그분의 발등상에 두고,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세상을 발 아래 둔다.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한 사람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서 만족을 얻지 못한다. 그는 그가 즐겼던 세상 것에 '헛되고 괴로운 것!'이라는 딱지를 써 붙이고, 모든 인간적 위대함에 '쓰레기와 배설물!'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이제 그는 생명과 불멸(不滅)을 추구하며, 은혜와 영광에 목말라 하고, 썩지 않을 면류관을 목표로 삼는다.
그의 마음은 주님을 찾겠다고 굳게 결심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義)를 구한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최고로 여긴다. 주님의 이름이 가장 소중하고, 주님의 은총이 너무나 귀해서 주님의 이름을 마음에 새긴다.
㉣ 자기 의로부터 돌이키는 회개
회개하기 전에 인간은 무화과 잎으로 자신을 가리려 하고, 자기 의무를 다함으로써 자신을 온전케 하려고 애쓴다.
자신을 신뢰하고 자기의(自己義)를 세우고 자기가 조종할 수 있다는 생각을 의지하면서도 하나님의 의(義)에는 순종하지 않는다.
하지만 회개하여 변화된 사람은 자기의 의를 누더기 옷처럼 여긴다. 그는 마치 더러운 거지의 옷을 벗어던지듯 자기의 의를 벗어던진다.
심령이 가난해진 그는 자신에 대해 불평하고 정죄하기 시작한다.
당신이 회개했는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당신의 영혼과 당신의 온 힘을 쏟아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에 귀 기울여라.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네 아버지가 내 아버지가 되시고, 네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당신도 그리스도께 똑같이 말씀드릴 수 있는가? 이것이 시금석(試金石)이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
회개한 사람은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 6:68)라고 고백할 수 있으며, 영생의 말씀이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정착한다. 그렇다면
② 회개한 사람은 어느 족으로 향하게 될까?
㉠ 회개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향한다.
회개는 그리스도를 유일한 생명의 길, 구원의 길, 하늘 아래에서 유일한 이름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오직 그분만을 의지할 뿐이다.
이렇게 회개하는 영혼은 그리스도에게 모험을 걸고 그분을 결코 놓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분이 주시는 유익과 짐을 지는 것 또한 좋아한다.
㉮ 온전히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절반만 붙든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환영하지만 거룩하게 살라는 명령은 반기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특권은 환영하지만 인격을 본받지는 못한다.
㉯ 온전히 회개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전부 받아들인다. 그리스도의 모든 뜻과 목적을 예외 없이, 한계 없이, 주저함 없이 받아들인다. 주님이 어떤 조건을 제시하시더라도 그 조건에 따르면서 받아들인다. 구원뿐만 아니라 주님의 지배도 받아들이는 것이다.
㉡ 회개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율법과 규례와 방법으로 돌이킨다.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의 율법과 방법과 관련하여 네 가지 일을 이루신다.
첫째: 판단력
회개한 사람의 판단은 그리스도의 율법과 규례와 방법을 인정하고, 그것들이 가장 의롭고 합리적이라고 동의한다.
이성의 판단에는 객관적인 판단과 주관적인 판단이 있다.
객관적 판단은 개인의 입장이나 상황에 관계없이 일반적으로 그 판단이 최선이라고 믿는 것이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의 길이 옳다고 판단하는데, 이것은 자신과 무관하게 판단하는 객관적 판단에 그치지 않고 자신을 결부시키는 주관적 판단이기도 하다.
경건한 사람이 어떻게 판단하는지 들어보자(시119:75)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 (시119:127-128) (시119:137-138)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 (138) 주께서 명령하신 증거들은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니이다 (시119:160).
둘째: 마음의 소원
회개한 사람의 소원은 그리스도의 온 마음을 아는 데 있다.
전에 알지 못했거나 신경 쓰지 않았던 의무를 깨닫게 해주고 숨은 죄를 드러내는 말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셋째: 자유롭고 단호한 의지
회개한 사람은 자유롭고 단호한 의지로 그리스도의 길을 선택한다.
의지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자유롭게 선택한다. 육신이 저항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의지는 그리스도의 율법과 통치를 좋아한다. 그래서 율법과 통치를 부담으로 여기지 않고 복으로 여긴다.
거룩함이 주는 유익을 기뻐하고, 거룩한 사람에게서 반드시 나타나는 표를 드러낸다. 세상에서 엄청난 성공과 번영을 누릴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그것을 마다하고 엄격하고 거룩한 삶을 선택한다.
넷째: 삶의 방향
회개한 사람의 삶은 하나님의 율례를 준수하는 쪽으로 달려간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에 날마다 신경 쓰면서 살아간다. 오직 완전함을 목표로 계속해서 달린다.
죄를 전부 없애고 완전한 성결에 이를 때까지는 결코 쉬지 않는다(빌3:11-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은 협착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을 찾는 사람이 아주 적고, 죄인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여 회개와 구원에 이르게 하려면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다
 
3. 당신은 생명 얻는 회개를 한 적이 있는가?
당신이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당신을 천국에서 만날 가능성은 없다.
당신이 완전히 돌이켜 하나님께 복종하고 거룩함과 새 생명 가운데 살지 않으면, 당신이 구원받을 가망성은 전혀 없는 것이다. (요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회개의 문'을 통과하지 않고 천국에 들어간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회개는 높은 수준의 신앙에 오른 일부 그리스도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구원받은 사람 누구나 겪어야 할 과정이다.
1) 당신이 왜 회개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자.
(1) 회개하지 않으면 당신의 존재가 소용없다.
회개하지 않은 자는 의(義)의 문제에서 무력하듯이 행함의 문제에서도 무력하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하늘나라의 비밀을 모른다. 또한 회개하지 않은 자의 마음은 너무나 약하고 쉽게 지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는 힘이 없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목적 없이 살 뿐만 아니라 악한 목적을 위해 봉사하며 살기도 한다.
당신이 창조된 이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 당신을 만드셨다.
(2) 회개하지 않으면 종교도 헛되다.
종교의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영혼을 구원하는 것인데 회개가 없으면 그 단계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롬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고전13:2-3).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자기의 생활을 고치고 기도와 구제를 하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라!
마음이 거룩해지지 않으면 겉으로 드러난 행위들은 무용지물이다.
하나님의 일은 그분의 뜻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리가 없다. 거룩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야 기뻐하신다.
(3) 회개하지 않으면 당신의 소망도 헛되다.
(욥8:13)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저속한 자의 희망은 무너지리니
(렘2:37) 네가 두 손으로 네 머리를 싸고 거기서도 나가리니 이는 네가 의지하는 자들을 나 여호와가 버렸으므로 네가 그들로 말미암아 형통하지 못할 것임이라
① 회개는 영혼의 안전을 위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영혼의 위로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회개 없는 구원의 소망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당신에게 치명적인 것이다.
이런 소망에는 죽음과 절망과 신성모독이 있다.
당신이 회개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거하는 장막에서 당신을 송두리째 뽑으실 것이요, 당신은 무서움의 왕에게 잡혀갈 것이다(욥 18:14, 27:8).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시지만 당신이 계속 무지(無知)와 불의(不義)속에 살면 결코 당신을 구원하지 않으실 것이다.
당신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기 때문에 구원받을 것이다"라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신의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이 아니라 그분을 거스르는 소망이기 때문이다.
(4) 회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간다.
주님은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죄짓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라.
죄 가운데 머무는 사람들을 구원해준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첫째, 하나님의 공의를 무너뜨림.
둘째,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무너뜨림.
셋째, 하나님의 진실성을 훼손함.
넷째, 하나님의 지혜에 어긋남.
다섯째,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불변성에 위배됨
여섯째, 그리스도의 말씀에 어긋남
일곱째, 그리스도의 맹세에 어긋남(히 3:18)
그리스도에게서 생명 얻기를 소망하는 자들은 그분과 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이 죄를 옹호하는 분으로 오해받을 것이다(딤후 2:19, 딛2,12, 요일 3:3).
이성과 이해력이 있다면 두 눈을 뜨고 지옥의 불길 속으로 뛰어들지 말고, 멈추고 생각하고 회개하라.
 
4. 회개하지 않은 자는 어떤 죄를 짓는가?
1) 회개하계 않은 열 가지 부류의 죄인
(1) 깨끗하지 못한 자
(2) 탐욕스러운 자
(3) 술 취하는 자(사 5:11-12, 22, 갈 5:21)
(사5:11, 22)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22)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4) 거짓말하는 자(계 21:8,27, 요 8:44, 잠 5:17)
(계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5) 맹세하는 자(약 5:12, 슥 5.1-3)
(약5:12)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
(6) 욕하고 험담하는 자(시 15:1, 3, 고전 5:11)
(시15:1, 3)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3)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7)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을 소홀히 하는 자(욥 15:4, 시 14:4, 79:6, 엡 2:12, 4:18)
(요8: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8) 도적질하는 자, 강탈하는 자, 압제하는 자(살전 4:6, 약 5:2-3)
(살전4:6)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
(9) 무익한 친구들과 어울리는 자(잠 9:6, 13:20)
(잠13:20)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10) 신앙을 조롱하는 자(대하 36:16, 잠 19:29)
(대하36:16)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사신들을 비웃고 그의 말씀을 멸시하며 그의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를 그의 백성에게 미치게 하여 회복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
당신이 어느 한 부류에라도 속하는지 잘 생각해보라.
만일 이에 해당한다면 당신은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된 것이다(행8:23)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나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죄악 때문에 멸망할 것이다(겔18:30)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
당신에게 깨달음을 주려는 나의 말을 깊이, 깊이 새겨라.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은밀한 죄 때문에 멸망할 것이다. 이런 죄들은 다른 사람들이 모를 뿐만 아니라 자기성찰의 결여로 자신도 모르게 지은 죄들이다.
공개적으로 드러날 죄가 아니더라도 발견하지 않은 죄 때문에 결국 멸망하게 된다. 이런 죄 때문에 사람들은 무수히 멸망의 구덩이로 떨어질 것이다.
2) 회개하지 않은 자들의 열두 가지 죄
(1) 고집스러운 무지(호 4:6, 사 27:11, 살후 1:8, 고후 4.3)
(호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2)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지 않는 은밀한 죄(눅 14:26, 28-33)
(3) 형식적인 신앙생활
(4) 잘못된 동기에 이끌려 거룩한 일을 하는 것
(5) 자기 의를 믿는 것(빌 3:9, 사 64:6)
(사64:6)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6) 철저한 신앙생활에 대한 은밀한 증오
(7) 일정 수준의 신앙생활에 안주하는 것(빌 3:13, 잠 4.18)
(8)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요일2:15)
(요일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9) 자기를 무시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에게 악의와 시기심을 품는 것(행 8:23, 마 18:32-35, 요일 3:14-15)
(10) 억제되지 않는 교만(요 12:43, 갈 1·10, 요 9:40)
(11) 쾌락을 아주 좋아하는 것(갈 5:24, 고전 9:25-27)
(고전9:25-27)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12) 육신의 안전을 의지하는 것
주님의 제자들처럼 (마19:25)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묻고 싶은 심정이라는 것을 잘 안다.
부지런히 자신을 살펴라.
양초를 켜들고 깊이 조사하라. 저울에 당신을 달아보아라. 성소(聖所)의 표준에 따르라. 시금석으로 금화의 순도를 확인하라. 사탄은 속이는 데 능하다.
 
5.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가 임한다.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종종 태평하게 앉아 있을 정도로 지독한 게으름과 잠에 빠져 있다. 육체적 쾌락에 대한 사랑,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일 그리고 세상의 정욕과 애착과 근심은 양심의 목소리를 잠재운다. 그래서 회개하고 고치면 좋겠다는 막연한 희망을 마음 한구석에 간직한 채 살아갈 뿐이다.
회개하지 않은 자들의 비참함이란 어느 누구도 다 이해할 수 없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회개하지 않았다면 명심하라!
1) 하나님께서 회개하지 않은 자에 대항하여 싸우신다.
(1) 하나님의 공의는 엄격해서 완전히 충족되어야 한다.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을 내시며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환난과 곤고가 있다(롬 2:8-9).
자신이 하나님께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분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무섭고 비참하다는 것을 안다.
당신이 죄를 버리지 않고 진정한 회개를 통해 철저히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당신 위에 계속 머무르고 당신을 대적하신다고 선언하신다(겔5:8)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너를 치며 이방인의 목전에서 너에게 벌을 내리되).
(2)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당신을 대적한다.
하나님의 본성은 죄를 무한히 대적하셔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죄인을 결코 기뻐하시지 않는다.
(3)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실 뿐만 아니라 경고하신 것도 그대로 행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지 않으면 우리를 멸망시킴으로써 자신의 성실하심을 드러내실 것이다.
예수님은 (요13: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분명히 말씀하셨다. 또한 육신을 따라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고, 회개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명확하게 말씀하셨다(롬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마 18:3).
(4) 속히 돌이켜 회개하라.
전능하신 하나님은 당신에게 형벌을 내리실 능력이 있으시다. 당신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영혼과 육체는 영원히 비참할 수밖에 없다
2) 하나님의 피조세계 전체가 당신을 대적한다.
바울은 (롬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탄식하는가?
거룩하게 되지 못한 사람들이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피조물을 남용하기 때문이다.
회개하지 않은 영혼은 자기가 피조물에게 짐을 지운다는 사실을 깨닫고 두려워해야 한다(눅13:7)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3) 사탄은 회개하지 않은 당신을 완전히 지배한다.
당신은 울부짖는 사자의 손아귀 안에 있다(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마귀의 올무에 사로잡혀 그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딤후 2:26).
(1) 마귀는 어둠의 세상, 어둠가운데 사는 무지한 죄인들을 지배한다.
당신은 마귀를 신(神)으로 섬기는 미개인들을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여기지만 당신도 마귀를 신으로 섬기고 있는 것이다.
거룩하게 되지 못한 모든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비참한 사실은 그들이 마귀를 신으로 섬긴다는 것이다(롬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4) 당신의 모든 죄목이 산처럼 당신을 짓누른다.
(1) 당신이 회개하지 않았다면 어떤 죄도 씻김을 받지 못하며, 모든 죄가 고스란히 기록되어 당신을 대적한다.
중생과 죄사함은 분리되지 않는다. 거룩하게 되지 못한 사람들은 의롭게 되지도, 죄 사함을 받지도 못한다.
(2) 자기 죄의 무게를 느끼는 죄인의 얼굴을 보라.
그의 표정과 하소연에서는 두려움이 묻어나온다. 그의 평안은 고민으로 바뀌고, 살은 윤기가 사라져 까칠하게 되고, 그의 눈에서는 잠이 떠났다. 그는 자신과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근원이 된다. 차라리 감각이 없어 비참함을 느끼지 못하는 길거리의 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5) 억제하기 힘든 욕망이 당신을 비참한 노예로 만든다.
(1) 회개하지 않은 한 당신은 죄의 종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죄는 당신을 다스리고 지배한다. 죄와 같은 폭군은 없다. 죄는 그의 종에게 아주 비열하고 무서운 일을 서슴지 않고 시킨다.
잠들어 있는 당신의 양심이 죽음을 거쳐 심판대 앞에 서면 감각이 살아나 모든 상처의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죄를 깨달은 죄인은 죄의 비참한 속박을 받게 된다. 양심이 그를 꾸짖고,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말해준다. 하지만 정욕의 노예가 되어 계속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중단하지 못한다.
(2) 욕망은 유혹이 찾아올 때 그의 모든 약속과 맹세를 깨뜨리고 그를 멸망으로 끌고 간다.
(3) 지옥과 멸망이 당신을 향해 입을 크게 벌린다.
그것들은 그 욕망을 크게 내어 당신을 집어삼키려고 한다(사 5:14).
하나님의 뛰어난 종들도 하나님께서 얼굴을 감추실 때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며 탄식했다.
죄인이여, 이제 멈추고 깊이 생각하라, 당신이 감각 없는 나무토막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한번 생각해보라.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살펴보라. 당신은 지금 멸망의 낭떠러지 끝에 서 있다.
(4) 진실을 가리지 말라. 자신을 속이지 말라.
당신의 비참함을 똑똑히 보고 늦기 전에 대책을 세워라. 하나님께 버림받은 저주스러운 진노의 그릇이 어떤 것인지 깊이 생각해보라.
율법의 말은 뽑아든 칼이요, 용사의 날카로운 화살이다.
율법은 완전한 복종에만 만족하고, "공의! 공의!"라고 외친다. 그것은 당신에게 피와 전쟁과 상처와 죽음을 선포한다.
(5) 당신의 죄에서 떠나 당신의 요새요 성소요 도피성이신 그리스도께 가라!
만일 당신이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지 않으면, 복음이 당신을 정죄하게 된다.
복음의 정죄는 단지 첫 언약을 어긴 것에 대한 정죄보다 훨씬 더 무섭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부르짖으시는 것을 들을 때 우리는 마땅히 떨어야 한다(욜3:16).
주님의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들어보자(막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6) 깨어 일어나 가장 시급한 문제에 신경 써라.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현재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겠다고 말하는가?
이 세상에서 가장 미친 사람은 회개하지 않았으면서도 아무 가책이나 감각 없이 그대로 살아가는 완고한 죄인이다. 깨어라!
죄인이여, 일어나 피하라!
당신이 피할 길은 딱 한 길이다. 그것은 회개와 거듭남의 좁은 길이다.
당신의 모든 죄로부터 돌이키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분을 당신의 주(主)와 의(義)로 영접하고 그분 안에서 생명의 거룩함과 새로움 가운데 행하라.
 
6. 회개하지 않는 자를 위한 생명의 지침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경외심과 경건과 순종의 마음으로 나의 권고를 기쁘게 받아들여라(신32:46-47)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을 너희의 마음에 두고 너희의 자녀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47) 이는 너희에게 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 차지할 그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불경건한 사람들이 멸망하는 것은 고집을 꺾지 않기 때문이다.
지침1. 회개하지 않는 상태로는 천국에 이를 수 없음을 명심하라.
지침2. 당신의 죄를 철저히 살피고 뼛속 깊이 느끼도록 노력하라.
(1) 당신의 마음과 삶을 깊이 살펴라.
당신과 당신의 모든 행위를 철저히 조사하여 죄를 날밭이 밝혀라.
당신 혼자서는 이 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영의 도움을 구하라.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 그분이 본래 하시는 일이다.
(2) 당신의 마음과 눈에서 눈물이 날 때까지 당신이 지은 모든 죄들을 당신의 양심 앞에 펼쳐놓아라.
하나님과 당신의 영혼이 벌이는 씨름을 포기하지 말라.
죄책감에 못 이겨(광명의 비췸을 입은 간수처럼)(행16:30)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부르짖게 될 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다음과 같이 해보라.
① 당신의 죄가 얼마나 되는지 깊이 생각해보라.
다윗은 자신이 지은 죄가 머리카락의 수보다 많다는 것을 알고 낙심했다.
② 당신의 속을 들여다보라.
당신의 육체와 영혼의 모든 부분과 재능이 전부 죄에 오염되어 있다.
당신이 어떤 의무를 준행했다고 해도 그곳에는 죄의 독이 침투해 있다.
③ 당신 본성의 죄를 보라.
그리고 그 본성이 낳은 저주스러운 죄들을 보라.
해야 할 것들을 하지 않은 죄,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행한 죄,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지은 죄, 젊어서 지은 죄, 성장해서 지은 죄를 모두 기억해내라.
(3) 당신의 죄가 얼마나 악한지 깊이 생각해보라.
죄는 하나님의 큰 원수요, 당신 영혼의 큰 원수이다.
죄에 대한 정당한 보응은 사망과 멸망이다.
죄는 하나님의 저주를 사람들의 몸과 영혼에 임하게 한다.
죄는 영혼 위에 그려진 악마의 형상이다.
다른 죄보다도 우선 다음 두 가지 죄를 살펴보자
첫째, 마음속의 죄
부패의 뿌리를 그냥 내버려둔 채 가지만을 잘라내는 것은 소용이 없다
바울처럼 사망의 몸 때문에 몸부림칠 때까지 인간의 선천적 부패가 얼마나 깊고 영속적이고 보편적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라.
마음이 본래 뿌리까지 썩어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때 비로소 무너진다.
죄는 당신의 양심에 무감각과 불성실의 씨앗을 뿌린다.
거룩한 처소가 되어야 할 영혼을 온갖 악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
죄 때문에 인간은 거짓말과 아첨과 음담패설에 귀를 기울이고, 생명의 교훈에는 귀를 막게 되었다.
둘째, 자주 탐닉하는 죄
당신이 자주 탐닉하는 특정한 악을 깊이 생각하고 그 특정한 악이 심화되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에 주목하라.
지침3. 당신의 비참한 현재 상태를 가슴 깊이 절감하라.
(1) 양심의 눈을 크게 떠라.
(2) 당신의 비참함을 뼛속 깊이 느껴라.
두려움을 피하려고 당신의 비참함을 외면하지 말라. 당신이 비참함을 느끼는 것은 상처가 주는 통증을 느끼는 것에 비유된다.
상처의 통증을 느껴야 치료를 위해 노력하지 않겠는가? 고통을 느끼더라도 지금 치료하는 것이 치료를 외면하다가 영원히 고통을 느끼는 것보다 낫다.
지침4. 행위의 도움을 받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자신을 잘 살펴라!
(1) 당신은 당신의 지식과 지혜와 의(義)와 능력을 부인하고 대신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해야 한다.
자신을 신뢰하고 자기의 의를 세우고 육신을 의지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나와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지침5. 당신의 모든 죄들을 남김없이 버려라!
(1) 죄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당신은 멸망할 것이다.
죄와 결별하든지 영혼을 잃어버리든지 양자택일을 하라.
한 가지 죄라도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버리실 것이다.
(2) 당신의 죄는 죽어야 한다.
지침6. 하나님을 당신의 기업과 복음으로 엄숙히 선택하라!
(1) 최대한의 헌신과 공경의 마음을 담아 주님을 당신의 하나님으로 인정하라.
자랑거리와 허식(虛飾)과 화려함과 쾌락과 출세를 제공하는 세상이 당신의 한쪽에 있다. 그리고 무한히 위대하고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다른 쪽에 계신다.
이제 분명히 의지적으로 선택하라, 하나님의 그늘 아래 앉아라.
(2) 하나님의 약속과 완전하심이 온 세상을 누르고 승리하도록 하라.
주님이 조금도 부족함 없는 기업(基業)이심을 명심하라.
온 세상 보다 더 크신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라.
그리스도를 의지해 하나님께로 나와 쾌락과 물질과 명예라는 우상을 버려라.
첫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영접하여 인격적 관계를 맺으라.
① 우선, 성부 하나님을 당신의 아버지로 모셔라.
탕자처럼 그분께 나와 이렇게 말씀드려라. "주님, 저는 주님의 것입니다. 제 모든 것, 즉 제 몸과 영혼과 계산이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주께 제 마음을 드립니다. 저를 온전히, 영원히 주께 드립니다. 저는 제 의(義)를 포기합니다. "
② 이제 성령 하나님을 이렇게 모셔라.
당신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으로, 당신의 옹호자로, 당신의 고민을 의논할 수 있는 상대로, 당신의 위로자로, 당신의 무지를 깨우쳐주시는 분으로, 당신의 기업을 보증하고 증거하시는 분으로 영접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완전한 속성들을 인정하고 복종하라.
그분의 자비를 얻겠다고 하면서도 죄를 사랑하고 거룩함과 순결함을 미워한다면, 그분을 시혜(施惠)자와 후원자로는 모시지만 주권자와 기업(企業)으로는 모시지 않는다면, 철저하고 진정한 회개를 한 것이 아니다.
지침7. 주 예수님의 모든 직무를 당신의 것으로 받아들여라!
아무 생각 없이 그분을 영접하지 말고, 먼저 앉아서 그 비용을 계산해보라.
그분의 발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고 구원의 길에 오르겠는가?
어떤 길로 인도하시든 간에 그 길을 가겠는가?
당신을 부인하고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겠는가?
지침8. 당신의 모든 능력과 재능과 관심을 주께 바쳐라!
(1)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당신의 재물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몸과 당신의 영혼과 그 능력들을 주께 드려라.
그러면 주님의 소유가 된 당신의 몸과 영혼을 통해 주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은 그의 모든 재능을 주께 바치게 된다.
이런 사람은 참된 깨달음을 얻은 결과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길에 대한 편견과 썩어빠진 추론(推論)과 트집을 버린다.
쓸데없는 의심을 버리고 세상에 맞서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좋다고 결론 내린다.
그의 '의지'도 항복하게 된다. '기억력'도 그리스도께 복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감정'도 그리스도께 굴복한다. '슬픔'도 "주님, 주님을 불쾌하게 만들고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 주님 백성의 불행, 그들의 죄가 저를 울게 만듭니다. " '증오'도 주님 앞에 무릎 끊고 "주님의 원수들이 곧 저의 원수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당신은 당신의 모든 것을 주께 바쳐야 한다.
(2) 그분께 드리지 않고 당신의 것으로 남겨놓은 것이 있다면, 그것 때문에 멸망할 것이다(눅14: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 당신의 마음을 준비하고 결심할 때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주님을 모시는 데 당신의 부모나 당신의 생명이 걸림돌이 된다면 부모나 당신의 생명까지 미워해야 한다.
당신은 당신 자신과 당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께 드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의 소유가 되지 못한다.
지침9. 그리스도의 법을 따라 당신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다스려라!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선택을 한다. 이 선택에도 세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모든 법을 받아들여야 한다.
둘째, 평탄의 때나 역경의 때 언제라도 그리스도의 법을 따라야 한다 (시119:31, 112, 111, 117).
셋째,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려면 자기가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의도적으로 실천해야 한다(마 21:28-29, 신 5:27).
그리스도의 법과 길은 당신의 선천적 성향과 완전히 반대되기 때문에 당신에게 엄격한 자기부정을 요구한다.
당신은 좁은 길로 가야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육신은 자유를 원하지만 육신을 억제해야 한다(시119:96)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들은 심히 넓으니이다).
지침10. 하나님과 당신 사이의 엄숙한 언약 안에서 온전해지게 하라!
주님 앞으로 조용히 나아갈 시간을 내라.
(1) 주님의 특별한 도우심을 구하고 당신을 은혜 가운데 받아달라고 간절히 구하라.
(2) 당신의 모든 죄들을 버리고 당신의 몸과 마음을 그분께 바치고 평생 거룩함과 의(義)가운데 그분을 섬기겠다는 마음이 진정 당신에게 있는지 확인해보라.
그리고 다음과 같이 기도하라
"전에 저는 세상을 우상으로 섬겨 지나칠 정도로 세상에 집착했지만, 이제는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께 제 마음을 바칩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한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순종을 요구하실 때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제 결심을 실천에 옮겨 세상의 소중한 것들을 모두 버리고 죄를 멀리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주 나의 하나님으로 엄숙히 인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다스리려고 한다면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저는 생명이나 죽음도 주님과 저를 갈라놓을 수 없다는 믿음으로 살면서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주님과 운명을 같이하며 주님의 은혜에 힘입어 주님과 함께 온갖 신앙의 모험을 감행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지침11. 회개를 미루지 말고 속히 하나님께 마음을 바쳐라!
(시119:60) 주의 계명들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1) 오늘이라는 이 때에 돌이켜라.
그래야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으며 은혜의 날이 끝나기 견에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지금 그리스도의 일꾼들이 당신을 부르고 있고, 양심이 당신을 찌르고 있다.
(2) 은혜의 기회가 찾아왔을 때 붙들라.
지금이 아니면 더 이상 기회는 없다. 이 기회를 가볍게 여기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며 그분의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맹세하실 것이다(눅14: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지침12. 하나님께서 회개의 방편으로 세우신 말씀을 성실하게 경청하라!
(1) 습관적으로 말씀을 듣지 말고 성실하게 들어라.
(2) 말씀을 통해 당신이 회개할 수 있을 거라는 소망과 기대와 바람과 의도를 가지고 들어라.
설교를 들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 설교를 통해 나를 찾아오시기 바란다. 오늘이 나의 회개의 날이 되고, 하나님께서 오늘의 설교자를 통해 나를 주께 인도하시기를 정말 소원한다."
(3) 말씀을 회개의 방편으로 여기지도 않고, 말씀을 통해 회개하겠다는 마음도 없고, 말씀의 복된 효과를 위해 기도하지도 않고, 그것을 기대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말씀이 당신에게서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이다.
지침13. 성령님이 당신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실 때 순종하라!
지침14. 진지하고 뜨거운 기도를 쉬지 말고 열심히 드려라!
(1) 기도를 소홀히 하는 사람은 거룩하지 못하고 세속적인 죄인이다.
일시적 유혹에 못 이겨 잠시 기도를 하지 않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꾸준히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위선자이다.
사람들이 회개할 때 보여주는 특징은 그들의 기도로 나타난다.
(2) 기도에 힘써라. 단 하루도 빼놓지 말고 아침저녁으로 시간을 내어 진지하게 기도하라.
또한 날마다 가족과 함께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려라. 뜨겁고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해야 한다. 끈질기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지침15. 악한 친구들과 작별하고 죄의 유혹을 이겨라!
(1) 죄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면 죄로부터 돌이킬 수 없다.
자기부정(自己否定)을 통해 죄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면 죄로부터 벗어나는 회개를 기대할 수 없다.
모든 유혹 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이고 나쁜 것은 악한 친구들을 사귀는 것이다.
희망의 싹이 보일 때 악한 친구들이 그것을 짓밟은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가,
(2) 당신이 악한 동무들을 끊지 않는 한 희망이 없다.
그들을 버리든지 생명을 버리든지 선택해야 한다.
전염병 환자를 피하듯 악한 친구들을 피하라. 그들은 마귀의 하수인(下手人)이 되어 당신을 꾀는 자들이다.
지침16. 하루 동안 금식하고 기도함으로써 당신의 영혼을 겸손히 낮추라!
십계명에 대한 주석을 숙독하고, 이행하지 못한 의무와 계명을 어긴 죄들을 낱낱이 기록하고 목록을 만들라,
부끄러워하고 슬퍼하면서 그것들을 주님 앞에 펼쳐 놓아라.
만일 당신이 주님의 조건에 기꺼이 동의한다면, 앞에서 말한 언약을 주님과 엄숙히 맺으라. 그러면 그분이 보시고 당신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이다.
 
7. 바로 지금 돌이켜 회개하라
당신과 하나님이 화목하게 하기 위해 회개를 위한 몇 가지 동기부여를 하겠다.
마지막 그물을 던지며‥‥
주께서 저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셨는데 제가 이제까지 헛수고를 한 것입니까? 그렇다면 저는 제 힘을 낭비한 것입니까?
당신이 회개한다면 천국에서는 영광스러운 영들이 기뻐하고 잔치할 것이다. 그들에게 새 형제가 생기고, 함께 기업을 얻을 자를 주께서 얻고, 잃어버렸던 아들이 무사히 돌아왔기 때문이다.
진실로 회개하는 자의 눈물은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이다.
1) 탕자처럼 돌아오라.
아들이 돌아온 것을 본 아버지가 자신의 신분과 나이를 잊은 채 달려가는 모습이 눈에 선하지 않은가?
자비의 발걸음은 너무나 빠르다. 죄인의 발걸음보다 2배 이상 빠르다.
긍휼로 불타는 아버지의 가슴이 뛰는 소리가 내 귓가에 울리는 것 같다!
그렇다! 그 아버지는 넘치는 기쁨을 자신의 마음속에만 묻어둘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불러 함께 기뻐하자고 했다.
2) 당신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친절하게 초대하신다.
지극히 온유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초대하신다.
그분의 친절은 놀랍고, 자비는 끝이 없고, 긍휼은 무한하다!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처럼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고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크다.
그분은 당신이 돌이키기만 하면 다시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는 분이시다(미7:19)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로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말3: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
당신이 돌이키기만 하면 이 모든 것이 당신 것이 된다.
3) 천국 문이 당신을 향해 열려 있다
영원한 문이 당신을 위해 활짝 열려 있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당신에게 열려 있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신다. 일어나 이 나라를 차지하라고 부탁하신다.
(1) 복음의 지도(地圖)가 안내하는 저 세상의 영광을 보라.
미련하고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눅 24:25) 세상을 추구하고 섬기느라 영원한 영광을 포기하겠는가?
전에는 당신이 낙원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던 화염검(火焰劍)이 이제는 당신을 그 안으로 몰아가는데도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하려는가?
① 당신 앞에 제시된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더 깊이 생각해보라.
그것은 복된 나라, 영광의 나라, 의(義)의 나라, 평화의 나라, 영원한 나라이다. 당신이 돌이키기만 하면 바로 이런 나라에 거하며 영원히 다스릴 수 있다. 그곳에서 주님은 당신을 영광의 보좌에 앉히시고, 손수 당신의 머리에 귀한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이다
② 지금 당신의 보잘것없는 육체를 보라.
먼지와 재 같은 이 육체가 그곳에서는 별보다 더 빛날 것이다.
만일 당신이 믿는다면, 내게 당신의 결심을 보여 달라.
당신의 행복을 위해 내 말에 따르겠는가?
당신의 죄악 된 소득과 금지된 쾌락을 포기하겠는가?
세상의 명예를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세상의 아첨에 귀를 막고, 세상의 마수(魔手)에서 필사적으로 탈출하겠는가?
천국에 이르기 위해 가난과 불명예를 감수해야 한다면 그것들을 받아들이겠는가?
겸손히 자기를 부인하고 육신을 따라 살지 않으면서 주님을 따르겠는가?
이렇게 한다면 모든 것은 영원히 당신의 것이 된다.
손을 뻗어 잡기만 하면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데도 그것을 거부하여 멸망한다면 그 보응은 아주 공정한 것이다.
4)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도 당신에게 놀라운 특권을 주신다.
(1) 번영이 당신을 멸하지 못할 것이며, 역경이 당신을 그분에게서 떼어놓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죽음의 세력에서 건지실 것이고, 공포의 왕도 당신에게는 평화의 사자(使者)가 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고난에서 저주스러운 것들을 제거하실 것이다.
시련이 당신을 깨끗하게 하는 연단의 용광로로, 겨를 날려버리는 선풍기로, 마음을 고치는 명약(名藥)으로 변하게 하실 것이다.
(2) 주께서는 당신을 비참함에서 구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특권을 주실 것이다
주님 자신을 당신에게 주시고, 당신에게 친구이자 아버지가 되어주실 것이다.
당신에게 해와 방패가 되시며, 당신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3) 당신을 자녀로 삼으시고, 기업을 얻을 자로 만드시고, 당신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실 것이다.
주님은 당신 안에 늘 거하시며 당신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실 것이다.
주님의 귀, 주님의 문 그리고 주님의 창고가 당신에게 활짝 열려 있을 것이다.
5) 하나님께서는 자비의 조건들을 최대한 낮추어 당신에게 제시하신다.
(1) 하나님께서는 불합리하거나 불가능한 것을 생명의 조건으로 당신에게 요구하지 않으신다.
첫 번째 언약에 따르면, 두 가지가 요구된다.
첫째는 과거의 죄에 대해 공의가 요구하는 것을 완전히 만족시켜야 하는 것이고,
둘째는 남은 생애 동안 율법 전체를 개인적으로, 완전히, 끊임없이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중 어떤 것을 통해서라도 구원을 얻는 것이 우리의 죄 때문에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두 가지를 충족시키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충분히 요구할 수 있으셨으나 자신이 세운 보증인(그리스도)에게서 받는 것으로 만족하셨다(고후5:18-19)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 하나님께서는 "나는 속전(贖錢)을 받았다. 나는 너희가 내 아들을 영접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내 아들이 너희에게 의(義)와 구속(救贖)이 될 것이다"라고 선언하셨다.
 
8.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다!
흐트러진 삶을 사는 자여, 들어라!
당신은 허영심이 강하고 제 고집대로 사는 자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지금까지 세속적인 잡담으로 웃고 떠들며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
이제 지혜의 부르심을 듣고 돌이켜라.
지혜를 택하고 지혜의 길을 배워라. 그러면 살리라(잠9:5-6)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 (6)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하느니라).
형식적으로 믿음을 고백하는 자여,
당신은 미지근하여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안주하고 있구나. 덥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상태를 끝내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돼라.
덥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상태를 끝내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돼라.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
이제까지는 그리스도께 불쾌한 존재였던 당신이 앞으로는 그분의 기쁨이 될 것이다(계3:16-20)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제, 긍휼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당신에게 찾아왔다는 것을 인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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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그들을 경계하고 있는가

낮은바다 ㆍ 2013-04-23 (화) 01:43 IP: 175.xxx.183 ㆍ조회: 3      

벚꽃이 만발하는 4월 어느 날, 가까운 곳을 산책하면서 평소 이상한 교회(?)라 생각했던 그 교회를 잠시 방문하였다. 마침, 교회 어느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작은 서점이 있어 어떤 책을 구비 하였는가 궁금하였던 차에 대충 훑어보니 기독교 일반출판사 책들도 눈에 뛰었지만, 이00 목사의 책이 주류를 이루었다. 바로 구원파 계열 이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구원파에도 여러 계열이 있는데, 이곳은 그 가운데 한 곳으로서 권00파, 박00파에 비해 덜 알려진 파이다.

요즘, 이단이 교회를 대상으로 극성을 부리고 있고, 안산 다문화사역에서 이단관련 강의를 하던 차에 좀 더 알아보고자 누군가와 대화를 시도 하고자 했으나 마땅치 않아 이00 목사의 가르침과 이 교회의 정체에 대한 글을 읽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이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인데, 이들이 가장 먼저 질문하는 것은 바로 “당신은 구원을 받았는가?” “언제 받았는가?”였다. 만일 이에 대한 답을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는 것.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한 번 회개하면 다시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미래의 죄까지 모두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에, 심지어 살인하여도 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교리가 아닐 수 없다. 약 30년 전 오대양 사건이 갑자기 떠올랐다.    

이 단체도 교회라는 이름, 즉 침례교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 일반 기독교인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하고 있으며, 현재 약 3,0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이곳을 출입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아, 사단의 미혹을 받으면 분별력이 없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도 이런 류의 이단들에게 미혹을 당하는 이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온다.

더군다나 요즘 정통교회는 다양한 사건들로 인해 그 이미지가 실추되었고, 지금도 세속화된 교회의 모습으로 인해 전도는커녕, 세인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으니 목회자로서 더욱 가슴이 저미어왔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각성하여 한반도의 통일을 준비하고, 세계 열방에 복음을 증거 해야 할 사명이 있는데도 교회는 사단의 미혹, 조롱, 멸시, 천대를 받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위기가운데 처해 있다고 말하지만, 절망할 필요는 없다. 다시 무너진 기초를 바로 세우고, 자신들의 위치에서 제 역할을 해야 할 때이다. 지도자들은 지도자답게 그 사명을 감당하며, 교인들은 교인들답게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하리라. 그곳에서 철저한 자기각성, 부흥을 경험하는 전제가 필요하다. 이것 없이는 교회가 다시 소생할 수 없다.

교회가 혼란 할 때, 세상은 귀를 막고, 교회를 손가락질 하지만, 이단은 교회 내부로 침투하여 들어와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장난을 친다. 특히, 그들은 불신자가 아닌 기신자를 공격 대상 1호로 삼는다. 그리고 신앙을 혼란케 하고, 교회를 비난하고, 더 나아가 분열을 조장하는 특징이 있다. 그러기에 저들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 정신을 바짝 차리는 정도가 아니라 영적으로 예민하지 않으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사단의 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첫째는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는 건강한지 다시 한 번 점검해야 한다. 우리 각자가 말이다. 둘째는 약한 부분이 있다면 서로 보완해 주어야 한다. 교회는 더불어 세워주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이단들이 침투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만반의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이단교육을 철저히 해야 한다. 그렇다고 지나친 경계로 인해 초신자들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넷째는 교회로서의 사랑과 믿음, 소망이 있도록 더욱 믿음의 공동체로서 성숙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필자가 그 건물에서 나오면서 중학생 쯤 되어 보이는 두 명의 남학생들을 만났다. 혹시나 해서 그 가운데 한 아이에게 “너는 언제 구원받았나? 라고 묻자, 그는 작년에 0월 0일 0시에 받았다고 정확히 말했다. 그가 이렇게 대답을 하는 것은 구원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적으로 깨닫는데 기초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들은 쇄뇌 당한 것이다. 이단들(Heresy)은 복음에서 이탈된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는 거짓말도, 폭력도, 서슴치 않고 자행한다. 그들에겐 윤리, 도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조건 구원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즉 행함이 없는 지식적인 믿음을 추구하기에 비정상적인 삶으로 변하는 것이다.

결국, 이단에 깊이 빠지면, 가정이 파탄되고, 부부가 이혼하고, 그래서 이단단체가 반사회적인 공동체로 전락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사회문제화 된다. 특히 기독교 사이비 이단은 교주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기에 바른 말씀에 기초해서 신앙생활 하지 않으면 위험하며, 또한, 그들과 대화를 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들기에 그들과 교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필자 역시 며칠 전에 세 명의 신천지 요원으로 의심되는 이들을 만나 대화한 적이 있는데, 상대방을 혼란시켜 넘어뜨리려는 전략을 사용하는 것을 경험한 바 있다.

따라서 교회는 그들을 더욱 더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사단은 사회가 어수선 할수록 교인과 교회를 더욱 미혹하기 때문이다.


 

♥ 들어가며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지칭을 두고, <삼위>를 <세 분 하나님>으로 지칭하느냐?, <일체>를 <한 분 하나님>으로 지칭하느냐? 에 대하여 각종 선행 연구물과 자료가 분석되어 갑론을박을 하고 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도출될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토론과정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욱 풍성하여 지리라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접근 자료를 드러내어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1. 성경에 기록된 삼위 하나님

1) 삼위가 존재하심을 같은 자리에 나타낸 곳(창1:26;마3:16,17,28:19;요14:16,17;고후13:13;벧전1:2)

2) 삼위가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곳 - 성부(시89:26;요8:41;고전8:6;엡1:17), 예수(롬9:5;딛2;3), 성령(행5;4)

3) 삼위가 영원하심을 나타내는 곳 - 성부(사9:6), 예수(히6;20), 성령(히9;14)

4) 삼위가 상호 내재하심을 나타내는 곳(롬8:9-12;요14:10,17,17:21)

<의견> 구약시대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구분이 없이 나타나시고 일하셨다. 그러다가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 구분되어 기록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상호 내재하심을 알 수가 있다.

 

 

2. 성경에 표현된 하나님의 지칭(指稱)

1)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① (신6:4) : 하나인 여호와(개역한글), 유일한 여호와(개역개정) 한 분 여호와(표준새번역, 공동번역)

② (말2:10) : 한 하나님(개역, 개정, 표준), 하나님 한 분(공동)

2) 성부 하나님에 대해서

① (막2;7) : 한 분 하나님(개역, 개정, 표준)

② (막10:18;눅18:19;요8;41) : 한 분 하나님(모든 번역본 동일)

③ (롬3:30;고전8:4;딤전2:5;약2:19) : 한 분 하나님(모든 번역본 동일)

④ (고전8:6) : 한 하나님(개역, 개정), 하나님 한 분(표준, 공동)

⑤ (갈3:20) : 한 하나님(개역) 한 분 하나님(개정, 표준, 공동)

3) 성자 하나님에 대해서

① (딤전1:17;유1;4,25) : 하나이신 하나님(개역, 개정), 한 분이신 하나님(표준, 공동)

② (딤전2:5) : 중보도 한 분(모든 번역본 동일)

4)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① (고전12:9,11) : 한 성령(개역, 개정), 한 분이신 같은 성령(표준, 공동)

② (고전12:11) : 한 성령(개역, 개정), 한 분이신 같은 성령(표준, 공동)

③ (엡4;4) : 성령이 하나(개역, 표준, 공동), 성령도 한 분(개정)

<의견> 1) 구약성경에, 삼위 하나님을 구별하지 않던 유일신 개념의 여호와 하나님의 칭호 표현에 번역본에 따라 <한 하나님>과 <한 분 하나님>을 동의어로 번역하고 있었다. 영어번역본(KJV,NIV,NRSV,RSV)에서는 모두 <one god>로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2) 신약성경에,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칭호할 때, 구약성경과 마찬가지로 번역본에 따라 <한 하나님>과 <한 분 하나님>을 동의어로 번역하고 있었다.

3) 결론적으로 <한 하나님>과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구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2. 삼위일체란 어의(語義)

1) 삼위(三位)의 어의

① 희랍어 - 트레이스 휘포스타시스(tres hypostasis)

② 라틴어 - 트레스 페르소나에(tres personae) - 배우가 사용하는 가면, 조건, 신분 기능의 의미 - <외적>

③ 영어 - 트리 퍼슨스(three persons) - 사람, 개인, 인간 -> 의식하는 주체

< 어의(語義)> : 여기에서 삼위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가리키며, 셋이 따로 따로 독립된 존재로 있다는 뜻이다.

2) 일체(一體)의 어의

① 희랍어 - 우시아(ousia)

② 라틴어 - 숩스탄티아(substantia) - 형이상학적 존재, 만물의 근원의 의미 - <내적>

③ 영어 - 원 서브스탄스(one substance) - 본성, 본질 -> 본체

< 어의(語義)> : 본체가 동일하다든가, 동질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이다.

<의견> 362년의 알렉산드리아 회의에서 결정된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의 기본 도식(圖式)은 <세 실체(實體)>와 <하나의 본체(本體)>였다. 이 도식은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하나의 본질(本質)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즉 성부, 성자, 성령께서 상호침투(相互浸透)와 공재(共在)를 통해 하나의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한 하나님>이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3. 삼위 하나님의 관계(關係)

영원부터 성부가 성자를 낳으심은 성부에게 고유(固有)하며, 성자가 성부 하나님에게서 낳으신바 되심은 성자에게 고유하고,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 나아오심은 성령에게 고유한 것이다(히1;5-8;요1:14,18,15:26;갈4;6).

1) 존재론적 순서(順序)

성부는 다른 위에서 발생하지 않으셨으며, 성자는 성부로부터 영원히 발생하셨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방출한다.

2) 경륜적 순서(順序)

삼위 하나님을 외적인 사역의 순서로 말하면, 만물이 성부에게서 나오고, 성자로 말미암고 , 성령 안에 있다(요1:3,14).

3) 사역적 순서(順序)

3위 하나님을 인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순서로 말하면, 성부는 구속을 계획하시고(요17:6), 성자는 죽으심으로 구속을 성취하시며(롬5:8), 성령은 구원의 효과를 각 개인에게 적용하신다(고후3:18).

 

 

4. 삼위일체 교리(敎理)의 문제점

<삼위일체>라는 기독교 핵심 교리를 성경에서 찾아내었지만, 현재까지 그 삼위일체를 세상 언어로 완전히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삼위(三位)를 주장하다 보면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이 <세 분>인 것으로 오해될 염려가 있다.

교회사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삼위일체(三位一體)를 단정지어 설명하려다가 이단적인 길로 나아가게 되었거나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일들이 있었다. 또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을 강조하느라고 성부 하나님 외에 성자 하나님이나 성령 하나님의 독립적 신성이나 인격성을 부정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

 

또한 <삼위일체>에서 <위격>과 <본질> 어디에 중심을 둘 것인지가 혼란이 온다. 구약에서는 <본질>이 중심이었는데, 신약에서는 <위격>에 그 무게 중심이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하나님>이라는 기독교 유일신이,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등장으로 이해는 되는데 막상 정의를 내리려면 헷갈리게 된 것이다.

 

 

5. 신학(神學)에 표현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지칭(指稱)

1) 터툴리안(삼위일체론의 기초형성) : 하나님은 한 분 - 한 본질(本質) 세 위격(位格)

2) 요한(동방교회) : 한 실체(實體)인 동시에 상호침투(相互浸透)의 관계인 세 객체(客體)

3) 어거스틴(서방교회) : 한 분 하나님 안에는 상호의존(相互依存)의 세 존재 양식(樣式)

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2장1,3) : 한 분 하나님으로 본체(本體)는 삼위(三位)가 계신다

5)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문8,9) : 한 분 하나님으로 삼위(三位)가 계신다.

6)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문5,6) : 한 분 하나님이시며, 삼위(三位)는 한 하나님이시다.

7)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문25) : 한 분 하나님으로 삼위(三位)가 계신다.

8) 토마스빈센트 소요리문답(문5,6) : 하나님 한 분이시며, 삼위(三位)는 한 하나님이시다

9)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신앙요리문답(문11) : 한 하나님의 세 위(位)

10) 벨직 신앙고백(8조) : 삼위(三位)는 단 한 분의 하나님이시다.

11) 니케아신경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

12) 아타나시우스 신경 : 삼위(三位)로 계시는 한 분 하나님

 

 

6. 삼위일체 하나님의 지칭(指稱)에 대한 문제점

1) 삼위(三位)의 위(位)가 인격체를 의미하니 우리말 <분>으로 대입하여 <세 분 한 하나님>으로 표현하자는 제안이 있다. 참으로 간결한 표현이다. 이 표현이 삼신론이란 저항에 대응할 수 있어 신학적인 문제가 종결되었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소망이다. 그런데도 <분>이란 용어가 <상호침투(相互浸透)와 공재(共在)>라는 의미를 완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세 분>을 설명하기 위하여 다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히려 신학적인 논의 과정 하나가 추가된다는 결과가 된다.

2) 삼위(三位)의 <세 분>은 삼신론적 표현이니 삼위(三位)를 그대로 표현하여 <삼위이신 한 분 하나님>으로 표현하자는 제안이 있다. 삼신론에서 벗어나려는 의도는 있으나 양태론이란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또한 <삼위>를 그대로 사용함으로서 쉬운 우리말 표현이란 의미가 없어진다. 그렇게 할 바에야 그대로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본질을 살린 표현이 된다.

 

 

♥ 나가며

삼위 하나님은 한 분인가 세 분인가? '한 분'이란 말도 가능하고 '세 분'이란 말도 가능합니다. 삼위 하나님에 대하여 어느 측면에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 가능한 말입니다. 칼빈도 '한 분'이란 말도 하고 '세 분'이란 말도 하였습니다(기독교강요, 13장 2. 16. 17.). 즉 인격(위격)으로 하면 '세 분'이라고 할 수 있고, 본질을 나타내는 말로는 '한 분'이란 말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뭉치로 표현하려면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드러내지 않는 것에 대하여 지나치게 알려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하여 바벨탑을 쌓을 때,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 일을 못하게 하셨습니다(창11:4-8). 마찬가지로 <삼위일체>란 참으로 심오하고도 절묘한 표현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셨으면서도 1700 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그 이상의 접근은 차단하셨습니다. 인간의 지혜가 부족했다는 것 보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의 접근을 차단하셨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가르침 안에서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이 바른 믿음의 생활이며,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방법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메가처치 구원론은 기존의 개신교 구원론을 대량 생산 시스템에 어울리도록 산뜻한 매뉴얼로 패키지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메가처치 구원론의 문제점을 살펴보려면 기존의 개신교 구원隙�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첫째는 구원론 자체가 워낙 민감한 문제라서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다는 것이요, 둘째는 좀 복잡한 문제인데 기존의 개신교 구원론 자체가 일종의 덫에 걸려들어 있다는 것이다.

 

논리적 덫이라니 무슨 뜻인가? 이것은 구원론이라는 조직신학적 주제가 일종의 논리적 함정에 빠져 있다는 뜻이다. 사실 이러한 덫은 성서 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 덫은 성서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서 지난 2000년 간 신학이 발전해오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덫은 신학적 덫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필자는 이 덫을 ‘우물’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우물은 이중성이 있다. 한 편으로 우물은 생수를 제공하는 생명의 원천이지만, 자칫 잘못해서 우물에 빠지면 무덤이 되고 만다. 개신교 구원론이 빠져 있는 논리적 함정도 꼭 이 우물과 이와 같다. 잘 쓰면 약이지만 잘못 쓰면 독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개신교 구원론은 그만 이 우물에 빠지고 말았다.

 

개신교 구원론이 빠져버린 우물은 세 개가 있는데, 이 세 개의 우물은 각각 주인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어거스틴, 루터가 우물의 주인이다. 개신교 구원론 논의를 위해서 이 세 개의 우물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1. 아리스토텔레스의 우물

개신교 구원론이 빠져 있는 첫 번째 우물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물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우물이라기보다는 그리스 철학의 우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신학의 역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오랫동안 잘 알려지지도 않았으며, 알려졌다고 해도 오해되어왔다. 그런데도 필자가 아리스토텔레서의 우물이라고 부른 이유는 워낙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 철학자를 충분히 대표할 만큼 유명해서이기도 하고, 또 한 가지는 그의 논리학과 철학 방법론이 기독교 신학에 미친 영향력이 지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독교가 아리스토텔레스, 그러니까 그리스 철학이라는 우물에 빠진 시기는 대단히 이르다. 어쩌면 사도 바울도 그리스 철학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의식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철학을 받아들인 시기는 대략 2세기경으로 보인다. 이 무렵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를 논리적으로 방어하고 해명하기 위해서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기독교 변증가들은 한결같이 그리스 철학에 깊은 조예가 깊었는데, 이들은 성서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계시의 내용을 의식적이고도 적극적으로 그리스 철학의 틀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순교자 저스틴은 하나님의 계시가 그리스도 이 전에 이미 소크라테스와 같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도 계시되었다고 주장했다. 또 알렉산더의 클레멘트는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인에게는 율법을 주셨고, 헬라인에게는 철학을 주셨다고 주장했다. 오리겐의 신학을 살펴보면 이것이 신학인지 플라톤 철학인지 도무지 헷갈릴 지경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학은 '참 철학'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장 탁월한 철학이라고 논증하는 것을 자신들의 사명으로 여겼다. 분명 많은 유익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덕분에 <뒤틀려진 기독교>에서 엘룰이 ‘계시의 철학화’라고 불렀던 현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이후 2000년 동안이나 기독교는 그리스 철학의 우물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기독교 계시가 첫째 우물에 빠지면서 나타난 현상들 세 가지만 간단히 살펴보자.

 

첫째로 추상화 현상이 나타난다.

그리스 사유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사고의 특징이 고도로 추상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학자들은 이들의 이러한 추상적 사유가 그들의 언어 구조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영어도 마찬가지지만 그리스어에서 ‘정관사 +형용사’ 하면 ‘명사’가 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형용사가 명사로 바뀐 다음 이 명사가 계속 추상화 과정을 겪게 된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철학 방법론이 기독교 신학에 미친 영향력이 지대하다.  
 
예를 들어, ‘희다’라는 형용사에 ‘정관사’(to)를 붙이면 ‘흼’이 된다. 그리고 이 ‘흼’이라는 명사는 고도로 추상적으로 활용될 때 ‘흼 자체’가 된다. 이런 식으로 ‘아름답다’는 ‘아름다움’ 혹은 ‘미’로, 더 나아가 ‘미 자체’ 혹은 ‘미의 본질’로 추상화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모든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언어들은 고도로 추상적이고 철학적 개념으로 대상화된다.

 

물론 이러한 개념은 명료하며, 철학하기 좋은 개념이 될 수는 있지만 기독교 계시의 역동성은 심각한 제약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역사 속에서 구체적인 사건과 인물 속에서 스스로를 계시하신 야훼 하나님은 점차 철학적 일자(the One)로 고정되거나,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로 얼어붙게 된다.

 

이와 함께 모든 구체적인 사건들은 추상적 개념으로 고정되고, 모든 형용사는 명사로 객관화, 대상화되고 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실재하지 않는 것들이 마치 실재하는 양 가상적 존재가 되어 나타난다. 점차 기독교 신학은 이 가상적인 개념적 존재들을 엄격하게 조작하고 다루는 작업이 되어 간다.

 

가령 니케아 공의회 이후 기독론이 예수라는 인물 속에 ‘신성’(divinity)과 ‘인성’(huminity)이 어떤 식으로 결합하고 배치되는지를 놓고 다툴 때, 또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이 전적 타락한 인간이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있다면 그것이 인간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를 놓고 다툴 때 결국 이러한 신학적 논쟁은 그리스 철학의 우물에 빠져 있다는 증거가 된다.

 

둘째, 소위 신학 방법론으로 논리학의 기본 법칙을 수용한 것이다.

논리학의 중요한 기본 법칙으로는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 등이 있다. 이런 법칙들은 옛날부터 있어왔던 것들인데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집대성된다. 그렇다면 이 법칙은 무슨 뜻인가? 쉽게 설명하면 ‘그런 건 그런 것이고, 아닌 건 아니다’라는 법칙이다. 무슨 말이냐? 정류장에 서 있는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자. 만일 그가 오바마라면 그는 부시가 아니다. 여기서 ‘그는 오바마다’가 동일률이고, ‘부시는 아니다’가 모순율이다. 그러니까 동일률과 모순율을 합치면 그는 오바마이면서 동시에 부시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럼 배중률은 무엇인가? 가운데가 없다는 뜻인데, 예를 들어, 신은 50%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신은 존재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거나 한다, 뭐 그런 법칙이다.

 

이러한 논리학의 법칙은 모든 것들을 ‘도 아니면 모’(all or nothing)로 만든다. 이렇게 되면 말하는 내용이 대단히 명료해진다. 데카르트가 ‘명석함'과 '판명함'의 사고를 추구하고자 했을 때 그는 스스로 그리스인의 후예이고자 했던 것이다. 어쨌든 이런 법칙들은 머릿속의 뿌옇고 희미하던 관념들을 마치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깔끔하게 이해되게 한다. 이러한 방법론으로 성서를 읽으면 엄청나게 많은 유익을 얻지만, 동시에 또 엄청나게 많은 것을 잃게 된다.

 

셋째는 ‘삼단논법’이다.
 삼단논법은 타당한 방식을 통해서 결론에 이르는 일종의 추론 방식을 말한다. 삼단논법을 쉽게 이야기하면 일종의 자동화(automation) 기계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완벽하게 자동화된 공장 기계에 원재료를 넣기만 하면 재료가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닌 후 완제품이 되어 ‘짠~’하고 나오는 것과 똑같다. 정교한 삼단논법의 과정들을 엄격하게 지키기만 하면 결론은 자동적으로 완벽하게 추론될 수 있다고 약속하는 것이 삼단논법이다.

 

이상의 방법들이 이리저리 결합되어서 신학적 작업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다. 이러한 영향으로 초기 300~400년간의 신학이 어떻게 발전되었는지 한 번 추적해보자. 맨 처음에는 신학이 아니라 ‘예배’가 존재했다. 이 예배는 나사렛 출신의 한 젊은 남성을 기리는 예배였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배’가 문제를 촉발시켰다. 과연 예수를 예배하는 것은 정당한가? 구약성서에 의하면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천사든, 인간이든, 어떤 피조물이든 예배 받을 수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예배한다. 이것은 정당한가?

 

최초의 신학은 이렇게 생겨났다. 신학자들은 예수를 예배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보여야 했다. 논리적으로 볼 때 예수는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거나, 합당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이나 초대 교회의 실천은 예수가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만일 예수가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면 ‘예수는 하나님이어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니 말이다.

 

때문에 이 문제에 있어서 아리우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예수는 하나님 비스무래(homoiousios)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니다.’ 이에 반해 아타나시우스는 ‘예수는 하나님과 완전한 동일본질(homoousios)이기에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그리고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 정통(orthodox)으로 인정된다. 이렇게 된 데 무슨 음모론이 있었기보다는 논리적으로 아타나시우스가 더 타당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개연성이 있다.

 

그러나 만일 예수가 하나님이라면 이제 새로운 문제가 터진다. 하나님이 하나냐, 둘이냐가 문제가 된다. 하나님이 둘이라고 하면 다신론(多神論)이 되고, 하나님이 하나라고 한다면 예수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예수라는 말이 된다. 후자가 맞다면 십자가에 달린 분은 예수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말이 된다. 이렇게 되면 성부수난설(Patripassionism)이 된다. 그러나 이 둘 다 성서와 일치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와 하나님은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다. 그럼 대체 뭐냐?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다!’ 여기에 성령이 더해져서 삼위일체론(Trinity)이 만들어지게 된다.

 

하지만 논리라고 하는 것은 어느 한 지점에 그치지 않는다. 자, 만일 예수가 하나님과 완전히 동일본질이라면, 마리아가 낳은 아기는 인간이냐, 하나님이냐.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므로 마리아가 낳은 자는 하나님이라야 한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옳다면 마리아는 하나님을 낳은 자(theotokos)다. 그리고 마리아가 하나님을 낳은 자라면 그는 ‘하나님의 어머니’시다. 그래서 마리아도 경배받으시기에 합당하다? 어느덧 논리는 엉뚱한 곳으로까지 이르게 된다. 뭐, 대충 이런 식이다.

 

이와 유사한 과정을 칼빈주의 구원론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다. 전적으로 타락했다면 인간이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나 능력은 있는가? 있다고 한다면 전적 타락이 부정된다. 따라서 전혀 없어야 한다. 그렇다면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인간에게 전혀 가능성이 없다면 자연히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리게 된다. 만일 구원이 하나님의 손에 전적으로 달리게 된다면 믿음은 누구의 것인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인가? 그렇다면 다시 전적 타락이 부인된다.

 

따라서 신앙은 하나님이 주셔서 가지게 된 하나님의 선물이라야 한다. 또 만일 신앙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선물주실 지를 미리 아셨는가? 모른다고 하면 하나님의 전지성이 부정된다. 따라서 아셔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신앙의 선물을 주지 않으실 자도 아시는가? 모른다고 하면 역시 하나님의 전지성이 부정된다. 따라서 아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주실 자와 주지 않으실 자를 미리 정하셨는가? 정하지 않으셨다고 하면, 하나님이 아시고도 정하지 않으셨다는 말이 된다. 이는 하나님을 이중인격자로 만든다. 따라서 정하셔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택자와 비택자를 정하셨다면 이 선택은 아담의 타락 전인가, 후인가? 이 문제를 두고 칼빈주의 진영에서는 타락 전 선택설(supralapsarianism)과 타락 후 선택설(infralapsarianism)이 논쟁하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이 타락하기도 전에 미리 택자와 비택자를 정하셨다면 이것은 타락과 구원받지 못하는 모든 책임이 하나님께 넘어가는 혐의가 발생하게 된다. 그렇다고 타락 후에 선택하셨다면 역시 또 많은 논리적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다. 뭐 대충 이런 식이다.

 

이상의 일련의 논리적 추론 과정은 성서의 계시 자체로부터 왔다기보다는 그리스 철학의 방법론으로부터 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신학자들은 신학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를 썼다. 실제로 정통신학이라고 하는 것들은 대체로 고도의 균형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또 이러한 작업들이 준 유익이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로부터 수입한 논리적 자동 기계는 성서의 계시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들을 만들어내는 일들이 너무도 많았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개신교 구원론은, 아니 기독교 신학 전체는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우물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2. 어거스틴의 우물

어거스틴의 우물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와 논쟁하면서 판 우물이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그리스도와 동일한 행위를 함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아담처럼 죄 없이 무죄 상태로 태어난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각자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무죄의 상태를 유지하고, 죄 없이 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죄 없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도덕적 교사라고 했다.

 

이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인간은 은총의 빛을 받기 전에는 선행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며, 또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의지 자체가 심각하게 마비되어 있기 때문에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없다 주장했다. 그래서 의지는 의지로되 기능이 상실된 ‘노예 의지’만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 점에서 어거스틴은 후에 종교개혁자들이 발견한 ‘전적 타락설’의 시조였다. 때문에 어거스틴의 도식에 따르면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구원 받을 수 있다.

   
 
  ▲ 어거스틴 이후로 '둘 다!'라는 관점은 배제되었다. 그리고 은총 vs. 행위는 ‘도 아니며 모’라는 식의 양자택일의 성격이 되고 말았다.  
 

이 두 사람의 논쟁은 한참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 논쟁이 지속되는 동안 양측은 점점 더 상대방의 논리를 공격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처음보다 훨씬 더 극단적으로 상대방과 대립각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주관적인 평가가 되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펠라기우스보다는 어거스틴의 주장이 보다 현실적이고, 또한 성서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논쟁을 통해서 엉뚱한 결과가 초래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 vs 인간의 행위,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 vs 인간의 자유가 서로 대립하게 되고 만 것이다.

 

김기현의 <가룟 유다의 딜레마>에서도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이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이 문제는 결코 만만치 않은 신학적 딜레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토록이나 심각한 딜레마가 성서에서는 전혀 딜레마처럼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성서의 독자들을 의아스럽게 한다.

 

가령 가룟 유다는 스스로 예수를 팔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예수를 팔게 하셨는가? 또 바로는 스스로 마음을 강퍅케 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는가? 이러한 논쟁은 신학생들의 시간 죽이기 말싸움 게임의 소재로도 훌륭하고, 소그룹 성경 공부 리더를 골치 아프게 만들게 하기에도 훌륭한 소재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성서는 이런 종류의 딜레마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냥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둘 다야!’

 

그러나 어거스틴 이후로 "둘 다!"라는 관점은 배제되었다. 그리고 은총 vs. 행위는 ‘도 아니며 모’라는 식의 양자택일의 성격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논쟁으로 말미암아 세 가지 선택안이 남게 된다. 첫째는 100% 은총과 0% 행위라는 어거스틴주의, 둘째는 은총 0%와 행위 100%라는 펠라기우스주의, 셋째는 은총 50%와 행위 50%라는 세미(semi)-펠라기우스주의 혹은 신인협력설(synergism).

 

중세 가톨릭교회는 처음에는 어거스틴주의를 붙드는 것 같다가 점차 세미 펠라기우스주의로, 그리고 나중에는 펠라기우스로 기울어갔다. 이러한 경향에 종교개혁자들은 “어게인 어거스틴!”을 외치며 다시금 “오직 은총”(Sola Gratia)의 교리를 다시 붙들게 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행위를 완전히 배제한(0% 행위) 순어거스틴주의(100% 은총)를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만일 조금이라도 인간의 행위가 들어간다면 신인협력설(synergism), 내지는 세미 펠라기우스라는 주홍색 낙인이 찍히고 만다. 따라서 은총론은 철저하게 인간의 행위를 배제해야만 했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가 철저하게 배제된 결과 두 가지 문제가 생겨나게 된다. 하나는 율법 폐기론의 위험이다. 실제로 이러한 위험은 독일 루터교회에서 금세 확인되었다. 막스 베버가 지적하듯 개혁주의 궁정에서 보였던 금욕과 절제에 비해 루터주의 궁정에서는 폭음과 난잡함이 현저했던 것이다. 신속하게 죄악으로 빠져 들어가는 성도들에게 도덕적 행위를 요구할 논리적 근거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이러한 문제를 ‘불가지론’이라는 상당히 흥미로운 방식으로 빠져 나간다. 그것은 택자와 비택자가 영원 전부터 예정되어 있으나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고 인간은 ‘완전히 알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예정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므로 인간은 이를 알 수 없고 다만 내면의 변화와 외적인 도덕적 행위를 통해서 이 사실을 어림짐작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이것이 신도들을 끊임없는 경건과 도덕적 삶으로 이끄는 동인이 되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신앙의 성격 및 주체에 관한 문제다. 에베소서 2장에 따르면 “그 은혜을 인하여(by grace) 믿음으로 말미암아(through faith)”(엡2:8) 구원을 받는다고 했다. 은혜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겠지만, 믿음은 우리가 가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만일 믿음을 죄인이 가질 수 있다고 하는 순간 전적 타락설은 부정되고 만다. 타락한 죄인이라도 최소한 구원 얻을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은 있는 셈이니 말이다. 따라서 믿음은 인간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야 한다.

 

하지만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신다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아무 것도 없다. 순전히 하나님 맘이다. 그러나 구약에서 얼마나 많은 본문이 “여호와를 신뢰하라”고 했으며, 또 예수는 얼마나 자주 “믿으라”고 하셨는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뭐하려 인간에게 "믿으라"고 하셨느냐 그 말이다. 또 만일 믿음마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인격적 존재라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은 구원에 관한 한 식물인간이 아닌가? 이러한 식의 물음이 생겨난다.

 

이 문제를 두고 격돌한 것이 바로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 간의 논쟁이다. 칼빈주의는 신앙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말하고, 알미니우스주의는 신앙을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과 사랑에 인간이 인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이러한 알미니우스의 주장을 신인협동설(synergism), 혹은 세미 펠라기우스라고 정죄했다. 이에 반해 알미니우스주의는 칼빈주의가 하나님을 아담의 타락과 인간의 죄, 죄인들의 불신앙을 조장한 악신으로 만든다며 비판했다. 어느 것이 맞는가?

 

참으로 골치 아픈 논쟁이다. 필자는 이 논쟁에 끼어들 생각은 없다. 사실 이 논쟁은 일종의 논리적 함정이다. 그래서 하나를 선택하면 이 문제가 걸리고, 다른 것을 선택하면 저 문제가 걸린다. 대세는 칼빈주의였다. 그리하여 개신교회는 조금이라도 행위나 윤리를 강조하면 ‘행위구원론’이니, ‘율법주의’니, ‘펠라기우스주의’라고 정죄하기를 서슴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의 열매를 강조하지 않는 것이 마치 복음적인 양 그렇게 가르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바로 개신교 구원론이 어거스틴의 우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성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구원은 100%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동시에 100% 선한 열매라고. 교부 키프리안은 도나투스라는 친구에게 이렇게 구원 간증을 이렇게 하고 있다. “내가 천상 성령의 물을 흠뻑 받고 난 다음 제2의 탄생이 나를 바꾸어 놓았으니, 모든 의심들이 묘하게도 밝혀지고, 닫혔던 것들이 열리고, 어둡던 것들이 빛나고, 전에는 어렵게 보이던 것들이 쉬워지고,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되던 것들이 행할 수 있게 된 거야. 이것은 자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은총일세. 이것은 인간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에서 오는 것으로 생각해야 하네.”(Ad Donatum 4.)

 

3. 루터의 우물

개신교 구원론이 빠져 있는 세 번째 우물은 루터가 판 것이다. 루터가 판 우물은 무엇인가? 소위 “오직 믿음”(Sola Fide)이라는 우물이다. 그는 신학적으로 볼 때 행위 은총론이 판을 치고 있던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를 향해서 우렁차게 위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선포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례전의 신학에 따르면 반복되는 성사를 통해 죄라는 영혼의 질병을 조금씩 고쳐나갈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을 위해서 영세, 성체, 견진, 고해, 병자, 신품, 혼배 등 일곱 가지 성사를 정성스럽게 받아야 했으며, 또 때에 맞게 다양한 기도문을 암송해야 했다. 이 뿐 아니라 마리아와 성인 숭배, 성화상 공경, 자학적 참회, 갖가지 금식과 기도일, 십자군 전쟁 참가 등 갖가지 교회가 만들어 낸 기이한 신앙의 관습들과 유전들을 지키도록 독려했다. 거기에 선행까지. 그 중 가장 루터를 분노케 한 것이 면죄부였다.

 

이제는 돈으로 구원을 사다니! 이 모든 관습들을 향해서 그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선언했다.

   
 
  ▲ 루터의 우물에 빠진 개신교회는 진실한 체험의 순간을 끊임없이 찾아 헤맸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하나님 나라의 모델>에서 개신교회의 하나님나라 모델이 신비주의자들의 하나나라의 모델과 닮았다고 했는데 이는 참으로 정확한 지적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유대파 그리스도인을 향해 누차 반복적으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고 선언한 것과 대단히 흡사하다. 그러나 문제는 도대체 '믿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믿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오직 믿음'이라는 주장은 전혀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

 

믿음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신약성서에서조차 미묘한 의견의 차이가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즉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은 ‘듣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에게 있어서는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야고보와 바울의 주장은 따지고 보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서 2장 24절의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는 말씀은 분명 야고보의 믿음관이 바울의 믿음관과 상당한 강조점의 차이가 있음을 무시하기 어렵다.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을 때 우리는 동일한 물음을 던질 수 있다. 도대체 루터가 말하는 그 믿음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루터에게 있어서 이 믿음은 ‘모종의 체험’과 관계되어 있었다. 루터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의(義)’에 대해서 고민해왔다.

 

하나님의 완전한 의 앞에서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심판받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인식 때문에 그는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했다. 따라서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는 말씀이 도대체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가 이 문제와 함께 끙끙거리며 씨름하고 있던 중에 갑자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하나님의 의가 인간의 죄를 심판하는 준엄한 의가 아니라 여전히 죄인일 뿐인 인간을 향해 주권적으로 ‘무죄!’라고 선언해 주시는 의라고 ‘깨달아진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높고, 크고,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 전가되는 복된 의라는 사실을 그는 갑자기 깨닫게 되었다. 루터는 이 깨달음의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 사실로 즉시 나는 다시 태어난 듯 열린 문을 통해 천국에 들어간 듯 느끼게 되었다.”

 

루터에게 일어난 이 깨달음의 체험은 그의 불안한 영혼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의 영혼은 평안해졌으며, 확신에 차고, 담대해졌다. 수도원을 유령처럼 서성이던 루터는 보름스 회의장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위대한 신앙의 투사로 바뀌었다. 이 체험은 마치 밤이 낮으로 바뀌고, 검은 것이 흰 것으로, 흑백이 칼라로 바뀐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이 결정적인 변화의 순간에 루터에게는 믿음이 생기게 된 것이다. 참으로 값진 백 만 불짜리 체험이다. 그리고 500년간 개신교 구원론은 바로 이 루터의 백만 불짜리 체험에 대한 각주(脚註)가 되었다.

 

그의 체험은 개신교회 내에서 여러 사람들을 통해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놀라운 회심 이야기>에 나오는 아비가일 허친슨이나 피비 바틀릿,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요한 웨슬리, 찰스 피니, 찰스 스펄전 등. 그리고 오늘날 강단에서 자신의 구원 체험을 간증하는 수많은 개신교 신자들은 모두 루터의 백 만 불짜리 체험을 함께 공유한 자들이다. 루터의 실제적인 신앙 체험에 대한 강조는 형식적이고 관습적 신앙에 젖어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와 함께 개신교 구원론은 거의 1500년 간 구원을 침례·세례와 연결시켜 왔던 교회의 전통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유아 세례로 변질되어 버리기 훨씬 전, 그러니까 초대교회 300년 동안 침례․세례는 구원의 가장 강력한 표지였다. 따라서 초대교회는 침례․세례를 아무에게나 베풀지 않았으며, 결코 쉽게 행하지도 않았다. 3세기 경 초대교회가 침례를 베풀던 관습에 대해서 상당히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에 따르면 예비 입교자는 침례 받기 전 자그마치 3년간이나 예비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신앙 고백이 진실한지 뿐만 아니라 삶의 변화의 뚜렷한 징후가 있는지, 그리고 순교의 잔까지 마실 진지한 결심이 있는지가 확인되었을 때만 침례를 베풀었다. 이 때문에 초대교회는 어떤 사람의 순간적인 신앙 체험을 구원과 연결시킬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런데 루터 이후 특별한 은총의 순간이 있다고 가정되게 되었다. 바로 이때가 회개의 순간이요, 믿음의 순간이며, 그리하여 구원의 순간이라는 관점이 생겨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 믿음의 순간에 대한 이해는 통일되지 않았다. 가령 정통주의자들의 경우 믿음을 정확하고 순수한 정통 교리의 지식과 연결시켜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교리 문답서를 잘 배우고, 익히고, 외울 필요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경건주의자들과 같이 신적인 임재의 체험과 연결시키는 이들도 있었다.

 

전통적으로 청교도 신학에서는 이 은총 체험의 순간을 죄에 대한 격렬한 깨달음과 성령께서 갑작스럽게 부어주시는 죄 사함의 확신과 연결시킨다. 앞서 들었던 조나단 에드워즈의 <놀라운 회심 이야기>의 아비가일 허친슨이나 피비 바틀릿 등은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죄에 대한 강렬한 자각과 통회, 그리고 밀려드는 죄 사함의 확신을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 때문에 청교도 신학에 기초한 복음 전도자들은 우렁찬 목소리로 신랄하게 죄인들을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하며, 지옥불의 가공할 만한 두려움을 선포하며, 십자가의 길을 소개한다. 하지만 죄인들에게 믿겠느냐며 초청하는 일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왜냐? 그것은 성령께서 하실 일이기 때문이다.

 

한편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 은총 체험의 순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초청에 인격적으로 '결단'하는 것과 연결시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이제 누구라도 그분이 자신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실을 마음으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때문에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의 복음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기 원하시는 분들은 자리에서 일어서십시오”와 같은 구원 초청(altar calling)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이들 모두는 방식은 다르지만 구원을 모종의 신앙 체험과 연결시키는 점에서 대동소이하다. 이것은 개신교 구원론이 루터의 우물에서 빠져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종교개혁 시절부터 루터의 우물에 빠지기를 거부하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는데 이들을 가리켜 급진 종교개혁가들이나 혹은 재침례파들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믿음을 교회가 베푸는 의식과 연결시키거나 혹은 모종의 내면적인 신앙 체험과 연결시키는 것 모두를 거부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삶의 변화’다. 그리고 이것은 최초의 300년 동안 초대 교회가 유지했던 관점과도 유사하다.

 

어쨌든 루터의 우물에 빠진 개신교회는 진실한 체험의 순간을 끊임없이 찾아 헤맸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하나님 나라의 모델>에서 개신교회의 하나님 나라 모델이 신비주의자들의 하나님 나라의 모델과 닮았다고 했는데 이는 참으로 정확한 지적이다. 루터 이후 개신교회는 외적인 형식보다는 항상 마음에 집중하는 경향이 생겼다. 하지만 모태교인과 같이 강렬한 체험이 부족한 사람은 어쩌랴. 교회는 이들을 위해서 ‘말씀에 기초한 신앙’을 가르치면서 위로하기는 하지만 하여간 이들은 자신의 미지근함 때문에 늘 열등감을 가지게 되었다.

 

개신교 구원론이 체험과 긴밀하게 연결되면서 기이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개신교인들이 한 번의 체험만으로 뭔가 2%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분명히 회심 체험은 있었지만 이것만으로 ‘삶의 변화’가 충분히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한 번의 체험으로 안 되고 또 한 번의 ‘진짜’ 강렬한 체험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소위 ‘제2의 축복’(second blessing)이라고 부르는 체험이다. 혹자는 이를 성령 세례라고도 부르는데 결국 이것이 20세기 오순절 운동을 일으키는 씨앗이 된다.

 

오로지 '예수의 몸, 삶, 말'

이상에서 보듯이 개신교 구원론은 세 가지 큼직큼직한 우물에 빠져 있다. 다시 말하거니와 우물은 양면성이 있다. 한편으로 우물은 생수의 원천이지만 자칫 잘못해서 우물에 빠지면 우물은 무덤이 된다. 따라서 우물은 무조건 거부할 수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거기에 빠지면 더 위험한 일이 생긴다. 우리는 믿음의 선진들이 우물을 팔 수 밖에 없었던 이유와 그들의 선한 의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 시대의 신학적 언어와 개념에 붙잡힐 필요는 없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오로지 예수뿐이다. 예수의 몸, 삶, 말이야 말로 끊임없이 교회와 신학을 갱신시키는 원천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몸, 삶, 말로 다시 한 번 우리의 구원에 대한 가르침을 반성하고 개혁시켜야 할 필요가 있지 않는가 하고 제안하는 바다.

신광은 / 열음터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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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명문 스텐포드 대학은 어떻게 건립 되었을까요 돈 많은 재벌부부가 살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자식이 없어 긴 여생을 조금은 쓸쓸하게 보냈다 그래서 노부부는 그 많은 재산을 유익한 일에 쓰고 싶었다 우리 전 재산을 교육사업에 쓰기로 해요 다음날 부부는 미국의 명문 하버드 대학을 방문하였다 정문을 막 들어서려는데 허름한 옷차림을 본 수위가 그들을 불러 세웟다 그리고는 불친절하게 따지듯이 물었다 노인 양반들 지금 어디로 가려고 하는거요 총장님을 좀 뵈러 왔는데요 수위는 경멸하는 태도로 괄시하며 답했다 총장님께서는 댁들을 만날 시간이 없소 노부부는 수위에 태도에 불쾌했지만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물었다 대학교 설립 하려면 돈이 얼마나 듭니까 내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댁들 같은 사람들이 그건 왜 묻습니까 마음에 상처를 받은 노부부는 기부하는 것을 없던 일로 하고 직접 학교를 짓기로 결심했다 그들이 가진 전 재산을 투자하여 설립한 대학이 바로 지금 미국에서 제일가는 대학 중에 하나인 스텐포드이다 한편 이 사실을 뒤늦게 안 하버드에서는 그날의 잘못을 반성하며 아쉬워했다 그 후부터 하버드 대학 정문에는 이런 문구가 붙어있게 되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 담아온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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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 된 기도와 바른기도    

      미신적인 기도중독에 빠지면 ....
    신비적인 미신적인 요행적인 사람으로 변하고 성경(말씀)을 멀리하고 보이는것만 따르는 극히 위험한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태복음6장)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잠언 28장)

    그럼, 기도할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01. 중언 부언 하지 말아야 합니다.
    02. 횡설 수설 하지 말아야 합니다.
    03.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04.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하지 말고 ⇒ ‘복 내려 주옵소서’ <빌축-복복:하나님은 빌 때가 없음>
    05.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높이지 말아야 합니다.
    06. 자정이나 심야기도를 믿지 말아야 합니다.
    07. 기도할 때 고함을 지르지 말아야 합니다.
    08. 가능하면 온 회중이 함께 통성(괴성)으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09. 기도할 때 사람을 참소하지 말아야 합니다.
    10. 교회 안에서는 방언으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11. 식사기도는 길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12. "간절히 기도합니다" 라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13. “기도했습니다” 하지 말고⇒기도 드립니다.
    14. 수식어를 너무 많이 쓰지 말아야 합니다.
    15. 묵상시간이 아니면 성구를 앞에 달지 말아야 합니다.
    16. 기도할 때 손(팔)으로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17. 공적 예배 기도에 개인적인 문제를 거론하지 말아야 합니다.
    18. ‘여호와’ 하나님으로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여호와여 안됨)
    19. ‘내 아버지’라고 하지 말고 ⇒ ‘우리 아버지라고 불러야 합니다.’
    20. ‘주여!’ ‘주여!’,하지 말고 ⇒ ‘주님'"하나님"으로 부릅시다. (부모님 이름도 "여" 붙이면...)
    21. 지식(주님의 심정분별)이 없는 소원은 선하지 못합니다.
    22. 자기 소원을 앞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23.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24. 너무 조급하게 졸라 대지 말아야 합니다.
    25. 분수에 맞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26.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27. 남을 무시하는 기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28. 진실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29.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30. 열심히 일(행동)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31. 솔직하고 정직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32. 성경에 약속하신 것을 알고 기도해야 합니다.
    33. 자신의 골방에서 조용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34.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35. 원고를 써서 기도하는 것이 잘 하는 것입니다.
    36.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다.
    37. 사람들의 과실을 용서하고 기도 해야 합니다.
    38. 사랑으로 기도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39. 감사함으로 아뢰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40.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41.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42.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43. 마귀와 세상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해야 합니다.
    44. 많이 생각하고 간단하고 명료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45. 지혜와 분별력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46. 각성되어 맑은 정신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47.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맡기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48.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확인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49. 욕심을 내려 놓고 순전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50.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각오와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자료ⓒ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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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생과 중생자의 세계
    이 승 구 교수

    우리는 서론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특징 지우면서 이는 무엇보다도 중생자의 영적인 세계관이라는 것을 말한 바 있다. 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중생이 무엇이며, 중생의 결과로 우리의 의식과 영혼의 기능의 어떤 변화가 일어나서 우리로 기독교 세계관을 갖게 하는지를 살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번 장에서는 중생이 무엇이며, 중생의 세계관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1. 중생이란 무엇인가?

    중생(重生, regeneration)이란 인간 존재의 타락을 전제로 하고, 이렇게 타락한 존재가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며 살기 위해서 그에게 요구되는 영혼의 변화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런 용어는 신약 성경에서 조금은 폭 넓게 사용되었고, 이런 용례에 따라서 신학에서도 상당히 폭넓게 사용되다가, 17세기에 이르러서 좀 좁고 제한된 의미의 중생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제한된 의미로 사용된 중생은 시간 안에서의 사람들의 구원에로의 변화의 첫 단계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런 개념의 중생의 의미에 의하면, 사람들은 중생에 의해서야 하나님과 제대로 된 관계를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바르지 아니하므로, 이 세상에 대해서도 궁극적으로는 바르지 못한 개념을 가진 것이 된다.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참된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며, 따라서 이 세상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자들인 것이다.

    중생에 대한 신약 성경의 가르침 가운데서 요한 복음 3장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과 바리새인 니고데모와의 대화는 중생의 필요성과 방법, 그 성격들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인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와 그의 가르침을 받고자 했다. 그가 밤에 찾아온 것으로부터 그의 연약한 마음, 교만함, 다른 이들의 눈치를 살핌 등을 추론하고 그를 비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 그가 밤에 찾아 온 것이 그가 어두움과 육에 속해 있으며, 이 어두움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을 보여주려는 상징적인 일이었다고 보는 해석은 요한이 신비한 분위기를 묘사하기 위해 창작한 것이라는 불트만의 해석과 비슷하게 이 일의 역사성보다는 요한의 구성을 더 중시하려는 이상한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그가 예수님과 함께 방해받지 않는 조용한 시간에 많은 시간을 내어 깊이 대화를 나누기에 좋은 시간이 밤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렇게 찾아와 가르침을 받으려고 한 것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서 그를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선생님으로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어떤 태도와 자세로 예수님을 찾아 와서 배우고자 하는지를 잘 알고 계셨다. 후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에 바리새인인 니고데모는 이제까지의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사유와 바리새인으로서의 활동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조금만 더 받아 더하기만 하면 종교적으로도 완성되고, 자신들이 이제까지 기다려 오던 하나님 나라도 잘 준비하는 것이 된다고 생각한 듯싶다. 그러므로 자신에 대한 평가는 이제 하나님에게서 오신 선생님이신 예수님에게서 그의 가르치심을 받으면 되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 나라에도 들어 갈 수 있고, 그 나라 백성으로 활동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니고데모와 같은 예수님께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나타내 보인 바리새인들의 공통적인 태도였을 것이다. 그들은 상당히 종교적인 자신들의 생각과 삶과 사고 방식, 그리고 지금 자신들이 생각하는 세계관이 그런 대로 괜찮은 것이라고들 생각했던 것이다. 카슨이 말하는 바와 같이, "니고데모가 다른 바리새인들과 같다면, 그는 자신의 전 생애가 씻혀지고 그의 마음이 변혁되며, 다시 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는 켜녕, 자신이 많이 회개해야 하리라고 생각하지도 못할 정도로 자기 자신의 순종의 질에 대해 너무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니고데모의 이런 마음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그에 적절한 도전을 니고데모에게 던지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는 것과 5절에 언급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같은 것이다(pace Westcott). 그런데, 칼빈이 잘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 나라란 말로부터 [지금 하나님이 계신] 하늘(Heaven)을 생각하는 이들은 잘못된 것이다." 니고데모와 같은 배경과 확신을 가진 유대인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것은 이 세대 끝에 나타날 그 나라에 참여한다, 영원한 부활 생명을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많이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영생이란 말로 대치되어 나타난 예가 더 많다. 특히 이 구절에서는 하나님 나라와 영생의 동일성이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그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 즉 그들이 고대하는 영생에 들어갈 수 없다고 아주 단정적으로, 그리고 엄숙하게 선언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배우러 찾아 온 이 사람에게 엉뚱한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기본적인 마음의 자세를 아시고서 그에 적절하게 반응하시는 것이었다. 그는 이전에 나다나엘에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요 2:48) 말씀하신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시고,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는" 분이었던 것이다(요 2:24-25). 이 예수님을 잘 보고 그에게서 배웠던 베드로가 먼 훗날에 말하는 대로 "모든 것을 아시는" 분으로서(요 21:17) 그는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니고데모와 같은 바리새인들이 강조하는 "율법에 대한 헌신적 준수나 유대교의 개정된 제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급진적인 중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모리스가 말하듯이, "그는 한 문장으로 니고데모가 대변하는 모든 것을 쓸어 내시면서 그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만들어져야만 한다는 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왜냐 하면, "자신이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인의 항존적 이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듭나야만 한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거듭난다"라고 번역된 말( ' )은 문자적으로는 "다시 난다"(to be born again)고도 이해할 수 있고, "위에서 난다"(to be born from above)고도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아노뗀"(' )을 공간적으로 해석한 "위에서 난다"는 말은 3:31과 19:11에서와 같이 "하늘로부터 난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고, "다시 난다"는 번역은 이를 시간적으로 해석한 "처음부터"(from the beginning)라는 말로부터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예수님과 이를 희랍어로 옮겨 적고 있는 사도 요한은 이런 애매성을 의도적으로 사용한 듯하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다시 남이면서 동시에 위로부터 나는 남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말이다. 여기서 오늘의 주제인 중생(重生)의 성격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이 '다시 남'은 니고데모가 처음에 이해한 바와 같이 육체적인 다시 남이 아니다. 이를 육체적으로 이해한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 날 수 있삽나이까?"하고 반문했었다(4절). 그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영적 출생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중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믿지 못했던 것이다. 또는, 린다스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기원의 문제는 도외시한 채 출생의 문제에만 집중한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말씀하시는 다시 남이 육체적인 남이 아니라, 영적인 남이라는 것을 밝혀 주기 위해서 다시 매우 강조하면서 말씀해 주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5절). 이는 니고데모가 말하는 바 "어떻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인 셈이다.

    이런 대답을 주시고는 답답하시다는 듯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6절-7절)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어머니 태에서 난 것은 육적인 남이고,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남은 성령으로 낳는 것이라고 하셔서 니고데모가 생각하는 바와 같이 어머니 배에 다시 들어가서 두 번째로 육체적으로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두 번째의 남, 즉 중생은 참으로 성령으로 낳는 것이다. (이 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어머니에게서 낳아진 사람은 그저 육일뿐이라고 생각한다든지, 성령으로 나야만 영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5절에서 "물과 성령으로" 라고 하셨던 말씀은 6절에 있는 "성령으로 난 것"이라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에 결국 중언법(重言法, hendiadys)적 표현으로 성령으로 남을 좀더 부연해서 설명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물은 칼빈이 잘 말하고 있듯이 "성령의 내면적으로 깨끗하게 하심과 일깨움을 의미할 뿐이다."

    이런 주해가 옳다고 생각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물과 성령"이라는 말씀이 혹시 그 말씀을 인유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구약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빌론 포수기에서 회복시키실 때에 대해서 예언적으로 말씀하시는 에스겔 36:25-28의 말씀이다: "[그 때에]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말씀에 비추어 볼 때에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이 예언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으로 회복됨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신이 그들 가운데 주어져서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지키게 되는 것과 그들의 마음과 영의 변화, 그리고 그들 안에 있는 죄와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을 연관시키면서 설명하고 있다. 특히 그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물 표상(water-imagery)을 사용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물리적인 물이 이스라엘의 윤리적 더러움과 죄 문제를 제거하거나 씻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므로 이는 물 표상을 사용해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과정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물은 성령께서 하시는 죄를 정결케 하시는 사역의 표상으로 사용된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의미의 연관이 "물과 성령"으로 라는 헨디아디스(hendiadys) 용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이 말은 성령께서 죄를 정결케 하시는 사역을 통해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은 성령으로 우리의 존재가 위에서, 즉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으로 출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 전에는 영적으로 죽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칼빈도 이 본문의 가르침 중의 하나가 인류의 부패한 본성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한다. 타락한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외인들이고, 따라서 하나님께서 중생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기 전까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계속적인 대립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가 이제 성령의 사역으로 영적으로 산 존재가 되는 일 -- 그것이 중생인 것이다. 칼빈이 잘 드러내고 있듯이, 이 중생이라는 말로 그는 "어느 한 부분의 변화가 아니라, 본성 전체의 갱신(the renewal of the whole nature)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여기서는 존재 전체의 변화, 인간성 전체의 변화가 의도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영혼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요구하신 것은 그와 같은 지식과 은사와 이해와 지위와 능력을 가진 이라도 이런 중생을 거쳐서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고, 그 나라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일이 없이는 그 누구라도 하나님 나라와 관련이 없다는 준엄한 선언이 여기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준비하던 사람들이라도 그 영혼이 새롭게 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이제까지 지녀 왔던 그 성향과 그 인식과 그 태도를 그대로 유지하고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일은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영혼에 사역하여 일어나는 것이기에 우리의 의식과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일이고, 우리의 노력과 상관없이 이루어 지는 일이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표현하셨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8절).

    이 말씀은 성령으로 나는 일 그 자체는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마치 바람 그 자체는 알 수 없고, 또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 수 없는 것과 같이 말이다. 물론 뒤에서 말할 바와 같이 바람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들, 즉 바람 부는 소리나 바람이 일으키는 결과들을 주의해 보면 바람이 부는 것에 대해서 말할 수는 있다. 바람의 힘은 느낄 수 있지만 그 기원과 원인은 감추어져 있다는 말이다. 칼빈은 이런 해석이 크리소스톰과 시릴의 해석이라고 하면서 자신은 이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좀더 분명한 의미로는 예수님께서 성령의 중생 시키시는 일을 자연 현상인 바람과 비교하시는 말씀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칼빈은 이렇게 묻는다: "이 세상의 잠정적인 삶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그 능력에 대해 놀랄 정도로 놀랍게 역사하시는데, 천상적이고 초자연적인 삶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은밀하신 사역을 우리 자신의 정신의 이해력으로 측정해서 보지 못하는 것은 믿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보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불합리한 것인가?" 칼빈의 이런 해석도 흥미로운 해석이다. 그러나 이 비교를 통해서 그 기원과 원인의 신비와 그 힘과 결과의 가시성을 드러내려고 했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모리스는 여기까지는 우리와 같은 주해를 한 후에 이로부터 "자연인은 성령과 접촉할 수는 있지만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의 기원도 모르고 자신의 종국적 목적도 모른다"고 보는 것이 더 선호할 만한 해석이라고 한다.

    그러나 중생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이 문맥에 성격상 예수님께서 중생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나은 것이 아닐까? 이런 이해에 가장 근접하는 입장을 잘 표현한 이는 도날드 거뜨리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 그 겉으로는 예견할 수 없음과 불가시성이란 두 성질 모두에서 바람은 성령의 활동에 대한 유용한 예증 구실을 하는 것이다. 중생의 기적은 인간의 제아무리 기묘한 능력으로도 일으킬 수 없는 것이다. 그 작용은 인간의 통제밖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에 근거해서 우리가 언제 중생했는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언제 어떤 식으로 중생했는지를 알 수 없으면 중생한 것이 아니라고는 전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 중생했는지 알 수 없다는 이 말은 성령으로 새롭게 나는 일의 결과가 의식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중생한 사람은 반드시 중생한 사람다운 모습과 태도를 드러내 보에게 된다. 중생 그 자체는 우리의 의식과 상관없이 이루어지나, 중생의 결과는 반드시 우리의 의식 가운데서 의식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중생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의 변화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2. 중생에 따르는 영혼의 기능과 정향의 변화

    중생은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영혼의 기능과 영혼의 근본적 정향(disposition)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벌코프는 "중생이란 새로운 생명의 원리가 사람 안에 심겨지는 것, 영혼의 주도적 정향이 급진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데, 이로써 성령의 영향력 아래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방향으로의 생명이 낳아지게 되는 것이다"고 말한다.

    따라서 중생한 자의 영혼은 그 영혼의 주도적 성향이 변하여 이제 중생한 자로서의 기능을 나타내 보이게 된다. 그 중에 가장 기본적인 것이 인지적 기능의 변화이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존재나 그의 뜻을 인정하지 아니하거나 그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지 않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神知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을 자신이 가지는 지식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지식으로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기" 때문이다(고후 4:6). 그러므로 중생한 사람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알아가려고 한다. "갓난아이와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벧전 2:2)는 말씀을 구현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잘 알려주는 계시의 책인 성경을 읽고 그 내용을 깊이 있게 생각하며, 성경으로부터 하나님과 이 세상에 대한 이해를 더욱 발전시켜 나간다. 그리고 그는 이 세상 전체를 하나님과의 관련 가운데서 바라본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관련 없는 것은 없고,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련성을 제대로 드러낸 것이 참된 지식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모든 참된 지식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시며 알고 계시는 바에 따라서 생각하고 아는 것이 된다. 이처럼 중생한 사람은 그의 지식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의 지식을 기준으로 하여 사고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지식과 중생한 사람의 바른 지식 사이에는 유비적인 관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지적 내용에서만 변화가 일어 나는 것이 아니고, 그의 감정과 정서도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그리하여 이전에는 하나님을 미워하거나 무관심하던 이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이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분의 뜻을 알려하고 그 사랑을 표현하려고 애쓰게 된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던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쓴 일이 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 무한한 즐거움과 기쁨을 짐작하게 해주는 말씀이다.

    또 이렇게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거룩한 사랑의 감정을 가지게 된다. 이는 인간성에 내재된 능력이나 부패한 인간성 안에 있는 사랑하는 능력을 극대화하여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 부패한 인간성 안에서의 모든 능력을 부인하는 위치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공급하시는 사랑을 가지고서 이웃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웃 사람과 동료 인간들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계 일반에 대해서도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서 돌보는 작업을 하게 된다. 요한은 그의 서신서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고 권면하면서,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나서 하나님을 안다"고 말했다(요일 4:7). 사랑이 하나님에게서 난 일과 따라서 하나님을 참으로 안다는 것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하는 지배와 다스림은 결코 이 세상을 파괴하거나 이 세상에 대해 적대적인 심정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한 사람의 정서를 가득 채우는 것은 성령이 주시는 거룩한 사랑의 심정이다. 언제나 무엇에 대해서나 그런 따뜻한 심정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따뜻한 사랑의 심정은 마음과 정서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을, 이웃을, 피조계 일반을 사랑하기에 그 사랑에 근거해서 활동하고 움직이려는 고귀한 의지와 그렇게 움직여 나갈 수 있는 힘도 공급받는 것이다. 이렇게 중생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수동적이거나 정적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적극적인 활동을 하여 나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하나님께 순종해 나가는 것이다.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고 표현하기도 했다(요일 2:29). 중생한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일이 무엇인가를 추구해 나간다. 그리고 중생한 사람은 모든 일을 성령께서 주시는 힘으로 행해 나간다. 자신의 부패한 능력과 의지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일을 하여 나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힘으로 모든 사랑의 역사를 행하게 된다.

    이렇게 성령에 의지해서 하나님께 순종하여 선한 일을 행해 나가는 사람은 그 행해 나가는 일이나, 그로 말마암아 이루어진 업적에 대해서 전혀 자신이 이루었다는 공로 의식을 갖지 않는 것으로 특징지어 진다. 성령에 의지해서 노력해 가는 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열심히 일을 해나가는 역동적인 사람이나, 일 자체를 위해 살아 나가는 이도 아니며, 자신이 이룬 일에 대해서 참으로 젠체하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행하는 일과 관련해서도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에게는 도무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이라고는 없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는 하나님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자이며, 그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에 의존해서 일을 해 나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생한 사람이 성령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중생의 결과로서 나타내 보이게 되는 영혼의 기능과 정향의 변화는 전포괄적이고 전인격적인 변화이다. 그의 영혼 가운데서 중생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없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의 삶과 활동 전체가 중생의 영향 아래 있고, 있어야만 한다. 삶의 어떤 부분만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이 중생의 영향하에 노출되어야 한다.

    3. 인지적 변화의 표현으로서의 외현화 된 기독교 세계관과 그 성장

    따라서 중생자의 의식은 중생하기 전의 타락한 의식과는 아주 다른 특성을 지니게 된다. 타락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전 2:14).

    이는, 예를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나 삼위일체에 대한 내용 등과 같은 어떤 특정한 내용만을 받아들이지 않고 미련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런 특정한 종교적 내용만이 아니라 세상 전체를 하나님과 관련시켜서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고 미련한 것으로 판단한다는 말이다. 오히려 그는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 대해서 파악을 해야 하고, 파악할 수 있으며, 자신이 그 파악한 내용을 구성해야 할 것처럼 생각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자율적인 존재로 여기며 사고한다. 그는 반틸이 말한 바와 같이 그 의식이 "창조적으로 구성적인(creatively constructive)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진리를 찾아보려고 하거나, 스스로 진리를 구성해 보려고 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중생하지 않은 사람은 이 시공간 세계의 의미가 그 자체 안에 내재하고 있으며, 사람이 이 세상에 대한 궁극적인 해석자라고 하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를 흔히 죄의 인지적 영향(the noetic effects of sin)이라고 지칭된다.

    이에 비해서 중생한 사람은 처음 창조 받은 아담이 그렇게 했어야만 했듯이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서 생각하는 수납적으로 재구성적인(receptively reconstructive) 의식을 가지는 것이다. 중생의 인지적 영향(the noetic effects of regeneration)이라는 것이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변화된 의식, 특히 그 인지적 측면이 변화한 그 내용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외현화 된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이 세상을 바라 볼 때에 이 세상은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정리해 나가는 것이다. 어떤 이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중생은 인간의 믿음에도 앞서고 인간의 그 어떤 반응에도 앞서지만, 중생은 반드시 성경에 제시한 바를 믿고 그에 반응하도록 하는 결과를 내는 것이다.

    따라서 중생한 사람의 의식이 성장할수록 그는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세계관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더욱 풍성해지면 풍성해 질수록 그의 기독교 세계관의 내용도 더 풍성해 지고, 더 바른 것이 되어 가는 것이다. 또 그가 이런 관점에서 이 세상을 더욱 바르게 관찰해 가며, 바르게 이해해 갈 때에 그는 더욱 더 온전한 기독교 세계관을 가져 나가는 것이 된다. 이런 측면은 사실 중생, 즉 영적 출생의 결과로 그에게서 시작되는 영적 성장인 성화의 한 측면이다.

    특히 성화의 인지적 측면은 이렇게 더욱 더 온전해 지는 기독교 세계관의 정립과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영혼의 성화가 완성되는 그의 죽음에서 그는 기본적으로 온전한 기독교적 이해(그 일부가 온전한 기독교적 세계관이다!)를 가지고서 기다리다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있게 되는 그의 부활과 영화 등과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루어지는 것과 함께 매우 온전한 셰계관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때까지는 우리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날마다 성숙해져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누구도 온전한 곳에 이르렀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관의 성장과 발달에 대한 이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기독교 세계관을 위한 기본적인 지침이 없는 듯이 생각하게끔 해서는 안된다. 객관적으로는 성경에 성문화된 하나님의 특별 게시와 이 특별 계시의 빛에서 해석된 일반 계시가 그 기준이고, 주관적으로는 우리의 신앙과 중생된 의식, 특히 그 인지적 측면이 그 구성 요인으로 작업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으로부터 기독교 세계관을 구성하려고 해야 하며, 이를 이룰 수 있는 이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하여 성화되어 가고 있는 이들이다. 그들이 하나님과의 관련성 가운데서 그의 힘에 근거하여 성경과 성경의 빛에서 해석된 이 세상을 이해한 대로 제시해 갈 것이기 때문이다.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12 >  
    글쓴이 : 관리자    

    『마이어』대위의 죽음      
    프랑스 혁명으로 유대인들에 대한 법적 제재가 제거되자 프랑스는 유대인들이 거주하기에는 가장 안전한 나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로마카톨릭교회의 영향하에 있는 자들은 프랑스의 모든 불운을 유대인들에게 돌렸다. 『보불전쟁』(the Franco-Prussian War)에서 독일인에게 패한 프랑스는 경제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으며, 1880년대에는 상황이 유대인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1885년, 언론인으로서는 『예수회』(Jesuit)회원인 『드루몽』(Edouard Drumont)은 『프랑스 유대인들』(La France Juive)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프랑스의 모든 불운을 유대인들에게 전가하기 시작한 그의 책이 호응을 얻어 몇 년 사이에 백만 부 이상이 판매되자 그는 신문(La Livre Parole)까지 창간, 프랑스 군부 내의 유대계 장교들의 진출을 시기한 군수뇌부 내의 반(反)유대 카톨릭 세력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이를 항의한 젊고 유능한 유대계 장교 『마이어』(Armand Mayer)대위가 죽임당한다. 그의 장례식과 행렬에는 5만여명이 군중이 운집하였고 『헝가리』계 유대인 법률가로서 프랑스에 특파원으로 파견된 언론인 『헤르츨』(Theodor Herzl, 1860-1904)도 그 행렬에 있었다.

    0057. 『드레퓌스』사건 (L’Affaire Dreyfus, 1894-1906)
    1894년 가을, 프랑스 군부 내의 드레퓌스(Alfred Dreyfus, 1859-1935) 대위가 군사기밀을 독일에 넘겼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무기형을 언도받고 무계급으로 강등되었다. 지휘관을 상징하는 그의 칼은 부러지고 계급장, 모든 장식과 단추까지 제거당한 후 더 이상 군복이 아닌 군복 차림으로 거대한 군연병장에 운집한 인파 앞을 돌게 하였다. “매국노!”, “유대인들을 죽여라!” 라는 군중들의 함성에 드레퓌스는 “나는 무죄하다!”라고 맞섰고, 신문기자단석 앞에 이르자 그는 걸음을 멈추고 “나는 무죄하다는 사실을 온 프랑스에 고하라!”라고 절규하였다. 그리고 그는 서아프리카의 프랑스령(領)인 『악마의 섬』(Devil’s Island)에 유배되었다. 이 사건을 보는 프랑스 지성들의 시각은 달랐다. 작가 『에밀 졸라』(Emile Zola, 1840-1902)가 “나는 고발한다”(J’accuse)는 글을 신문에 투고함으로써 양심의 포문을 열었다. 프랑스의 여론은 양분되기 시작하였으며, 군재판부가 『졸라』구속령까지 내리자 그는 영국으로 피신하였고, 군수뇌부 내의 음모자의 자결 등으로 드레퓌스는 유배 5년만에 『악마의 섬』에서 다시 『빠리』로 송치되어 재판은 재심에 들어갔으며, 결국은 대통령의 특명에 의해 사면된 후 『드레퓌스』대위는 다시 소령으로 복귀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무려 12년 동안 프랑스의 이성(理性)을 쪼개어 놓았으며, 온 유럽의 양심을 저울질하신 사건이었다. 

    변하지 않으려고 변하고 있다
    오늘날 『로마』교회의 사제들은 루터의 칭의론을 강의한다. 우리는 “파괴하기 위해 침투하라”(join to destroy)는 『로마』교회의 정신을 경계해야한다. 오늘 날 『로마』교회의 사제들은 “거듭난다”, “구원경험”, 구원의 역사, “『그리스도』와의 만남”, 성령세례, “『그리스도』를 영접”, 은사경험, 『케리그마』등의 표현을 상투적으로 늘어놓는다. 사제나 수녀들은 복음적인 집회에 참석도 하며, 기독교의 찬송가도 배운다. 지역 기독교회의 모임, Y.M.C.A. 등의 모임에도 나타나며, 기독교회의 메시지와 신학용어도 자유자재로 인용한다. “구원중심”이니 하는 단어를 사용하는 저들의 간교한 표현에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속는다. 그들은 기독교회의 목사들과의 만남에서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라고 능란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천주교도들에게는 이와 상반된 거짓된 교리를 가르친다. “반대하기 위해 인정하라”(agree to disagree, we agree to differ)는 『로마』교회의 생리를 모르면 저들은 변하고 있다고 속단하게 된다.
    기독교의 어느 신학자의 표현 - “과거 카톨릭과 현대의 카톨릭은 구별해서 생각해야 하며, 『제2바티칸』공회의 교황『요한 23세』, 『바오로 6세』의 선언이 밝힌 것과 같이 저들의 교리와 기본 가르침에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뭐가 바뀌었던 말인가? 교황, 사제가 없어졌는가? 연옥의 불이 꺼졌는가? 『마리아』, 성자, 전통숭배가 해제되었단 말인가? 저들이 변하고 있는 것은 변치아니한 것을 숨기기 위해 부지런히 옷을 갈아입는 것일 뿐이다. 성경은 사단의 세력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고후11:13-15),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24:4-28)고 우리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로마카톨릭교의 기원

    사도 『바울』에 의해 복음의 씨가 『로마』에도 뿌리를 내리고 예수의 이름은 초대교회의 박해 속에서 『네로』의 사자굴에 던져져도 더욱 뻗어져 갔다. 그러한 박해 중에서도 교회지도자들 사이에서는 크고 작은 교권암투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로마』는 첫 교회지도자 『리누스』(Linus, A.D. 67-76)로부터 『실베스터』(A.D. 314-335)에 이르는 동안 31명의 지도자를 가졌었는데, 그 중 첫 18명은 아무도 침대에서 죽은 자가 없었으며 모두가 암살, 독살, 길에서 자객에 의해 쓰러졌다. 사단은 세상명예, 탐욕에 찬 이러한 교권지도자들을 다루는데 조금도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콘스탄틴』대제는 종교통합을 추구해왔고, 이때의 교회감독 『실베스터』는 ‘로마의 대로(大路)’, ‘로마의 군력’, ‘로마법(法)’, ‘로마의 권력을 이용’, ‘로마의 평화’(Pax Romana, 무력하의 평화)를 꿈꾸며 기독교 포교를 계획하였다: “로마와 손을 잡고 세력을 펼치리라. 로마의 지배를 따라 뻗어나가면 ‘예수의 세례’는 저절로 ‘로마의 길’을 타고 온 땅의 동서남북 끝에까지 흘러갈 것이며, 로마의 감독은 온 인류의 영적 아버지로서 인류에게 얼마나 큰 축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인가!”

    “그리스도냐? 가이사냐?”  
    인간은 명예심과 탐욕심이 많은 동물이며, 기독교는 박해 속에서는 더욱 강한 폭발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한 사단은 전략전술을 바꾸어 『로마』황제 『콘스탄틴』을 자신의 수(首)제자로 택하고, 박해 대신 포용정책을 가지고 『로마』교회지도자 『실베스터』와 만나 협상하게 한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의 권력과 교권의 두 지도자는 흥정에 들어갔다. 거룩한(?) 허영심에 불탄 『실베스터』는 “그리스도냐? 가이사냐?”의 갈림길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눈앞의 땅의 군주의 권력을 택하였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요 19:15)라고 『유대』인들이 소리지르던 길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사도 『요한』이 기록한 대로 처음부터 거짓에 속한 무리였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않음을 인함이니라”(요일 2:19-21).

    “슬프다! 그대 『콘스탄틴』이여!”  
    『바벨론』종교는 『로마』의 천하통일과 더불어 쉽게 고대 『로마』전역으로 퍼져갔고, 순교와 박해속에서 강해지고 부유해진 『로마』교회는, 당시 『로마』의 정치수반이요 『바벨론』종교의 대 제사장(최고승원장)의 직책을 겸하여 가졌던 『콘스탄틴』대제와 결합함으로써, 사단이 예수를 유혹할 때 던졌던 약속 -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눅4:6) - 을 사단으로부터 받고 천하영광을 꿈꾸는 기독교 모조품 종교가 태어난다. 종교통합을 통해 『로마제국』을 하나로 통치하려고 시도해온 『콘스탄틴』대제가 받아들인 기독교라는 것은 『시몬』화(化)된 기독교였으며(행8:20), 이 배도의 신앙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어, 온 『유럽』을 넘어다 보기 시작하였다.

    사단은 기독교의 모조품 교회를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 ‘정치권력과 종교와의 결합’은 그날 이후로 로마카톨릭교회를 특정지어 온 단어이다. 사단과의 영적전투에서 대패를 당하고 권력의 시녀로 타락한 이 결정의 순간을, ‘회칠당한’기독교회사는‘기독교의 승리’라고 기록해왔다. 복음의 진수를 알지도 못했던 『단테』조차도 그의 『신곡』(神曲)에서 “슬프다! 그대 『콘스탄틴』이여! 너를 통해 얼마나 많은 악(惡)이 세상에 들어왔던고!”라고 썼다.

    A.D. 313년, 『밀라노』칙령이 공고된 후, 『바벨론』종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로마』의 이교도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옴으로써 교회는 이교화 되기 시작하였고, 그 후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되었을 때 『로마』 종교는 ‘바벨론의 비밀’의 알을 품기 시작하였다(계17:5).

    가이사와 그리스도  
    콘스탄틴 대제의 개종(改宗)에 대하여는 사가(史家)들 간에도 이견이 있어왔다. 스위스의 사가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 1818-1897)는 그의 유명한 저서 ‘콘스탄틴의 생애’(Leben Konstantins)에서 콘스탄틴의 거짓된 개종에 대하여 엄격히 다루었으며, 이 책은 120여년 동안이나 계속 출판되었다. 그는 과장된 유세비우스(Eusebius, c.260-c.340)의 ‘콘스탄틴의 생애’(Vita Constantini)를 반박하였다. 콘스탄틴에 대한 유세비우스의 아첨은 지나쳐 ‘신(神)에 대한 불경’으로 간주될 정도였다. 부르크하르트는 유세비우스를 두고 ‘황제찬미가 중에 가장 역겨운 자, 철저하게 불성실한 최초의 고대사가(古代史家)’로 언급하였다.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틴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특히 장래의 황제들을 위한 이상적인 군주의 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오리겐을 따랐던 유세비우스는 시편, 이사야(시72:7-8, 사2:4)등에 기록된 메시야에 적용된 구절을 대담하게 콘스탄틴에게 적용시켰다. 심지어 콘스탄틴을 두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로 간주하였다. 콘스탄틴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의 거룩한 대변자’(Holy Speaker of God’s Word)였다. 시편 96:12을 인용, ‘새 노래로...’ 콘스탄틴을 찬양하였다. 아구스도의 평화의 때에 그리스도가 탄생(눅2:1), 구약선지자의 예언성취는 콘스탄틴에 의해 완성된 것으로 보고, ‘한 통치자, 한 제국, 한 하나님’(One Ruler, One Empire, One God)의 선전표어를 등장시켰다. 로마제국은 하나님의 선택된 제국, 그리스도는 로마시민으로 이 세상에 임하셨다고 믿었다.

    0063. 2045년: 인간불멸의 해?  
    2045년이 되면 인간은 영원히 죽지 않게 될 것이라는 시사주간지 타임(Time, Feb. 21, 2011)의 기사. 영국, 미국, 불어권 시사주간지들이 다투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신의 존재?’, ‘죽음 후의 천국’, ‘인간은 정녕 어디서 왔는가?’등의 기사들을 커버스토리로 다루기 시작하였다. 정치, 경제 등의 ‘시사성’기사들을 제쳐놓고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 기이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주님께서 무엇이 가장 ‘시사성’이 있는 기사인가를 다시 생각케 하신다(“아버지, 그렇군요!”). 이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인간들이 매일매일 죽음을 지나 ‘영생과 영벌’로 갈라지는 사실보다 더 시사성이 강한 사건이 없다고 하신다.

    USA 아멘넷 게시판/진설병님





     ■ 이 저작물은 제3시 사이트(http://3-rd.net)에서 퍼왔으며, 작자는 infiltrator 님입니다. ■

     

     

    워싱턴을 출발하기 전 사전 피츠버그 자료를 수집하면서
    피츠버그 다운타운에서 북쪽으로 약 5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한 로즈몬트 연합묘지(Rosemont United Cemeteries)에는 여호와의 증인 창시자인 [찰스 테이즈 러셀]의 무덤과 초기 여호와의 증인들의 집단 무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잠행을 하게 되면 그곳에 가 보아야겠다 계획하고 떠나왔었습니다.

    피츠버그 도착 다음날 성산교회 담임목사님의 안내로 피츠버그 다운타운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워싱턴 마운틴에 올라 잠시 머물면서 피츠버그에 대한 가벼운 오리엔테이션을 목사님께 전해 들었습니다. Jean Rhee전도사님 Pick Up을 위해 목사님과 ㅈ 목사님은 떠나시고... 저와 나머지 일행들은 로즈몬트 연합묘지로 떠났습니다.

    피츠버그 다운타운을 살짝 지나며 579와 279 고속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조금이동하여 Exit 12으로 빠져나와 목적지로 향했습니다. 그곳은 공동묘지들이 연이어 있는 장소였는데, 첫번째 들어간 곳은 우리가 목적하는 로즈몬트 연합묘지가 아닌 유대인들의 공동묘지였습니다.

    유대인 공동묘지 인부들에게 물어 로즈몬트의 위치를 확인하고 방향을 돌렸습니다. 잠시 후 로즈몬트가 눈 앞에 들어왔는데... 역시 제 눈에 제일 먼저 띄었던 것은 [피라밋] 형태의 러셀의 무덤이었습니다.

    그런데 무덤 근처에 갔을 때, 우리 일행은 예상치 못한 장소를 하나 더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다름아닌 Greater Masonary Pittsburgh Center 곧 프리메이슨의 회집 장소였습니다.
    "아니! 왜 이곳에 프리메이슨의 회집장소가 있지?"

    저와 일행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이번에 저와 함께 피츠버그에 동행했던 일행은 한 주 전 워싱턴 DC에 있는
    미국 프리메이슨 양대 계파 중의 하나인 'Scottish Rite'의 남부 본부인 템플
    곧 프리메이슨 성전을 함께 잠행했었던 일행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주 전의 경험만으로도 일행들은 피츠버그에서 뜻밖에 발견하게 된 이 장소가
    프리메이슨의 장소임을 금방 알아챘던 것입니다.

    이 센터에 차를 주차하고
    우리는 우선 러셀의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 피라밋 형태의 무덤에 가까이 가서 알게 된 사실은
    그 피라밋 형태가 러셀의 무덤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러셀의 무덤은 그 피라밋 구조물 바로 뒤에...
    너무나도 선명한 러셀의 초상화가 사진으로 새겨진 비석 아래 묻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각자 약속이라도 한 듯... 중보기도와 사진촬영에 각자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그 피라밋 구조물과 러셀의 무덤을 중심으로 나머지 무덤들을 돌아보았습니다.

    무덤들을 돌아보며 발견하게 된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은
    그 무덤의 비석들 가운데 프리메이슨을 상징하는 상징 기호(직각자와 컴퍼스)가 새겨진
    무덤 비석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가 정확하게 단정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프리메이슨과 여호와의 증인도 어떤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왜 여호와의 증인의 창시자의 무덤이 피츠버그에 있는 것일까?
    왜 초기 여호와의 증인들의 집단 무덤들이 여기 피츠버그에 있는 것일까?
    왜 이들의 집단 무덤 바로 곁에 프리메이슨 센터가 존재하는 것일까?
    여러 질문을 동시에 물으며...
    우리는 워싱턴의 경험을 되살려 담대하게 피츠버그 프리메이슨 센터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재밌는 것은... 우리가 그 건물 안에 진입했을 때...
    아무도 우리를 반겨 맞아준 사람이 없었다는 것인데... 워싱턴은 가이드가 나와서 설명을 해 주지 않으면 잠행을 할 수 없었던 반면... 피츠버그에서는 우리가 마음껏 그 공간을 잠행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많은 것들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상간에 이곳 피츠버그에 수 많은 프리메이슨들이 활동했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진에 보니... 이들의 회집(Conference)에 약 2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단체로 기념사진을 찍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얼른 그곳을 빠져 나와 계획하지는 못했지만 인도하심을 구하며
    다음 잠행장소로 이동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과 프리메이슨이라...

    첫번째 사진은 러셀의 무덤인줄 알고 찾았던 피라밋 구조물 사진입니다.
    두번째 사진은 실제 러셀의 무덤 비석입니다


    러셀의 무덤을 뒤로하고 저희는 다시 279와 579를 타고 피츠버그 다운타운 쪽으로 이동을 했습니다. 러셀의 무덤을 떠날 때 저의 마음속에는 다운타운에 있는 Port Pitt이라는 요새를 그리며 출발했었는데, 다운타운에 가까이 접근할 때 저의 눈에는 History Center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정확한 명칭은 확인을 못한 채, o ㄱ 형제에게 그쪽으로 차를 몰아줄 것을 부탁하고, 우리는 Port Pitt에 가기 전에 이곳을 먼저 둘러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주차공간이 마땅하지 않아 들어간 Public Parking Lot, 그곳은 감사하게도 우리들이 다리를 건너며 유심히 보았던 다리의 조각물을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제가 워싱턴 DC를 잠행하며 확인했던 Zodiac(황도대)을 새겨 놓은 지구본과 그것을 등에 올려 떠 받들고 있는 네 마리의 날개달린 말(천마^^)의 조각물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포세이돈과 관련된 조각상과 물고기 조각들... 이런 것들 또한 피츠버그와 그 다리를 나름 상징하는 것이기에... 사진에 고스란히 잘 담아 두었습니다.



     

    드디어 History Center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해 보니 그곳은 상원의원(The Senator)이었던 John Heinz를 기념하여 History Center를 만든 곳이었습니다[미국에 사시는 분들은 세계적 케첩의 상표인 Heinz가 바로 피츠버그와 이 Family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쯤은 아시죠!^^]. 약 275,000 square-foot의 공간에 피츠버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담아내려 노력한 흔적이 담뿍 담겨있는 그런 공간이었습니다. 이곳은 스미소니언 박물관이 관리하고 있었는데요, 스미소니언이다보니 제 머리 속에는 또 곧바로 워싱턴과 뉴욕의 스미소니언 박물관과의 연결고리를 찾는 작업이 빠르게 진행되었었습니다.

    워싱턴 DC를 제외하고 다른 도시가 그렇듯... 여기도 역시 입장료를 받더구만요.^^ 본의 아니게 잠행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다 보니... 제가 입장료를 쏘았죠!^^ 하지만 감사하게도 3명은 학생으로 처리되어 싸게... 이 공간을 이 잡듯이 뒤져보게 되었습니다.

    이 John Heinz History Center는 내부에 몇 가지 공간들을 따로 구분해서 전시하고 있었는데요, The Western Pennsylvania Sports Museum이라는 스포츠 관련 역사 전시관과 6층 꼭대기에 있는 the Library and Archives 그리고 서부 펜실베니아의 역사와 그 발전과 관련된 여러 가지 전시물을 전시하며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175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약 250년간의 지역 역사를 고스란히 경험해 볼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또한 피츠버그 지역의 미국 유리 역사, 또한 H. J. Heinz사의 연대기 등도 잠시 둘러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피츠버그의 역사를 한 곳에서 아주 집중적으로 둘러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되었었습니다. 특별히 The Historical Society of Western Pennsylvania (HSWP)를 돌아볼 수 있었던 것은 피츠버그의 뿌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기회 그 자체였습니다. 6층의 Library & Archives at the History Center에는 보고가 많을 것 같았지만... 시간이 없어 그냥 사진만 몇 컷 찍었을 따름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지역의 고지도는 거기 다 있었습니다. 침만 꿀꺽 삼키고... 다만 자료가 어디 있음만 확인하고 온 잠행이었죠!^^ 250년간의 서부 펜실베니아의 모든 자료 즉 books, manuscripts, photographs, maps, atlases, newspapers, films, recordings and other memorabilia가 거기 다 있었습니다. 워메 아까워...^^ 시간만 있었으면...^^

    또한 Meadowcroft Rockshelter and Museum of Rural Life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는데, 시간이 없어 여기도 잠시만 살피고 몸을 움직여야 했습니다.

    특별히 이 History Center를 잠행하면서 저에게 가장 큰 유익이 있었다면, 그것은 미시시피 인프라와 관련하여 제가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을 깨닫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것이었습니다: 저는 미시시피 인프라를 왼쪽편 미주리 강과 오른쪽편 오하이오강이 [카이로]에서 만나 뉴 올리언즈로 [흘러내려가는 것]만을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History Center를 방문하고나서 저의 생각에는 한가지 수정이 필요함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왼쪽편 미주리 강에 대한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로키산맥쪽에서 시작되는 미주리강이 오하이오강과 만나 미시시피를 형성하여 내려가는 것 만을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앗뿔사! 이 History Center에는 저의 그런 생각을 뒤집는 역사적 사건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미국 제 3대 대통령이었던 토마스 제퍼슨 당시 루이스 & 클락 탐험대(Lewis & Clark Expedition)에 의해 진행된 [서부 개척로 확보 프로젝트:이 명칭은 제가 그냥 개인적으로 지어 보았습니다.^^]였습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당시 루이스와 클락이 당시 제퍼슨이 계획했던 루이지애나 구입 계획을 염두에 둔 중서부 확장 계획의 일환으로 탐험대가 피츠버그에서 출발하여 오늘날 카이로(미주리강과 오하이오강이 만나는 곳)라는 곳에서 미주리강을 거슬러 올라가 로키산맥을 넘어 미국 서부 워싱턴 주와 오레곤 주를 관통하는 콜럼비아 강을 따라 태평양까지 건너갔던 역사적 사건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탐험팀이 추가로 이 개척 루트를 따라 조금은 다른 루트로 서부 개척의 루트를 뚫어 냈다는 기록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 앞에서 무릎을 쳤습니다. 그랬구나! 그래서 바로 이 피츠버그가 The Gateway of the West였구나! 피츠버그가 서부의 관문이 될 수 밖에 없었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었구나!라고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피츠버그는 오하이오 강을 따라 뉴 올리언즈까지 남부로 관통할 수 있는 관문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오하이오 강에서 미주리 강을 따라 로키산맥을 넘어 태평양까지 다다를 수 있는 서부 관통을 위한 관문도시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피츠버그! 미국 서부개척의 역사는 바로 이 피츠버그에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된 저는 팀들과 이 사실을 함께 나누었고 저는 이 사실을 붙들고 주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피츠버그로부터 아버지께서 참으로 기뻐받으실만한 부흥이 오하이오 강을 따라 서부와 중남부로 전파되게 하옵소서! 성령의 바람이 이 두 거대한 물줄기와 함께 그 물줄기의 영향을 받는 모든 미 대륙의 대지 위에 뜨겁게 불어가게 하옵소서!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또 다른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누리며...
    저와 3명의 infiltrator들은 History Center를 빠져 나와 Port Pitt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첫번째 사진은 The John Heinz History Center전경 사진입니다.
    두번째 사진은 Lewis & Clark 탐험대가 개척한 피츠버그-오하이오-미주리-로키-서부 루트를 표시한 지도 사진입니다.

    Heinz History Center를 벗어나 우리는 두 번째로 계획했던 Fort Pitt[피트 요새: 이곳의 사진은 제가 담지 498번 글에 올렸던 피츠버그(01)을 보시면 두 번째 사진에 나와 있습니다]을 향했습니다. 처음 가보는 길이었지만 뛰어난 드라이버의 도움으로^^ 순조롭게 Fort Pitt 가까이로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곳은 새로운 단장을 위함인지 알 수 없었지만 공사 중으로 우리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더군요. 하는 수 없이 Port Pitt은 곁눈으로만 지나친 채, 다운타운을 빠져 나와야만 했었습니다. Boulevard of The Allies를 통해 빠져 나오면서 가능하면 다운타운을 짧고 굵게 살펴보려 노력했었습니다.

    과거의 Fort Pitt이 위치했던 현 Point State Park은 알레그헤니강(The Allegheny River)과 모논게헬라강(The Monongahela River)이 만나는 삼각주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삼각주는 서부 펜실베니아와 피츠버그의 개척과 생사고락을 함께 해 온 아주 중요한 장소입니다. 1700년대 중반 프랑스와 영국은 세 강 모두를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이곳 Fort Pitt을 빼앗기 위해 피나는 전투를 치러야만 했었습니다.  

    프랑스가 1754년에 Fort Pitt의 전신인 듀케인 요새(Fort Duquesne)를 건설합니다. 이 듀케인 요새는 프랑스와 인디언 간의 전쟁(The French and Indian War)에서도 전략적 요충지로 프랑스에게 우위권을 가져다 준 핵심지 중의 핵심지(Core Focal Point)였습니다. 영국은 이 듀케인 요새를 빼앗기 위해 계속해서 원정 부대를 보냅니다. 원정 부대 중 하나를 지휘했던 영국군 에드워드 브래덕(Edward Braddock) 장군은 이 요새탈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그만 전사하고 맙니다. 1758년 11월 25일 영국은 존 포비(John Forbes) 장군이 이끄는 또 다른 원정 부대를 보내 결국은 프랑스로부터 이 중요한 요새를 빼앗아버립니다. 이후 이곳은 핏 요새(Fort Pitt)로 개명됩니다.

    피츠버그를 방문해 보면... 피츠버그의 영적 전략적 요충지가 되는 오크랜드(Oakland)지역을 중앙으로 관통하는 도로가 바로 Forbes Ave임을 알게 됩니다. 곧 그 승전 장군의 이름을 따 그 이름을 Forbes Ave라고 명명한 것입니다. 그곳에 피츠버그 대학과 카네기 멜른 대학이 위치합니다. 제가 지도를 통해 확인해 본 결과 이 Forbe Ave는 피츠버그의 다운타운까지 연결됨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워싱턴으로 돌아와서 깨닫게 된 것인데... 이 Forbes Ave와 4th St 그리고 Blvd of the Allies와 Wood St 그리고 Smithfield St로 구획되는 지역은 아주 중요한 영적 포인트가 되는 장소였었습니다.

     

     

     

     

    또한 이번에 저와 세 명의 잠행동지들은 Forbes Ave를 끼고 형성되어 있는 일명 [핏대]로 통하는 피츠버그 대학이 피츠버그의 Stronghold를 형성하는 영적 전략적 교두보로 그곳에 위치하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첫날 성산교회 담임목사님의 인도로 올랐던 Mt. Washington에서 저는 담지 496번 글 [콜로라도 스프링스(04)]에서 제가 다루었던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창시자 Spencer Penrose의 무덤이 있는 Will Rogers Shrine of the Sun와 비슷한 모양을 가진 일종의 탑 같은 건물에 제 눈이 주목되었습니다. 목사님께 그곳이 어떤 곳인지 그리고 그곳 주변은 어떤 곳인지에 대한 설명을 약간 듣게 되었습니다. 대학가... 그리고 그 주변에도 프리메이슨의 템플이 있다는... 그리고 특별히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한다는... 짧지만 중요한 정보였습니다.

    첫날의 잠행을 마무리 하면서 저는 이 Port Pitt과 함께 그 탑 건물이 어떤 중요한 실마리가 될 것 같은 예감을 가지고 다시 성산기도원으로 향했습니다. 우리 팀들도 피츠버그공항에 도착해서 성산기도원으로 들어오고 계실 진 리(Jean Rhee) 전도사님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그 탑이 있을 것 같은 쪽을 지나칠 때 그 탑을 볼 수 있을까 생각하며 지켜보았지만... 그 탑은 볼 수 없었습니다.

    첫날 잠행 끝^^

    첫번째 사진은 피츠버그의 다운타운 상세지도입니다.
    두번째 사진은 오크랜드의 상세지도입니다. 특별히 피츠버그대와 카네기멜론대...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에 대한 이해의 양극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닮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 대는 보수진영이나 진보진영에서 거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필자는 본다.

    그러나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에 구체적인 이해에는 다르게 생각하며 그것으로 인하여 한국교계 안에서 이번 ‘WCC 부산총회’ 같은 일에는 서로 나뉘어 다투는 갈등구조가 되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왜 그런가에 대해 필자의 생각을 개진하여 본다. 늘 하는 말이지만 필자의 견해는 사견임을 밝히며 얼마든지 다른 입장이 있음을 인정한다.

    보수진영에서의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거듭난 회심의 사건을 중시하여 예수님으로 구원받게 하는 은혜 를 중시하는 복음 신앙체제를 구축하게 하게 함으로 거기서 모든 잘못을 언제나 쉽게 용서받을 수 있다는 ‘값싼 은혜’주의로 흐르게 하고 삶을 통하여 주님이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遇를 범하게 하는 것 같고.

    진보진영에서의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성경에서 보여주듯 당시 유대인의 사회에서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주목하며 ‘현재의 삶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삶을 구현해 나갈 지’에 대한 것을 중시하는 것 같다. 그럼으로 해서 보수진영에게서 소위 ‘거듭나지 않고 외형만의 삶’을 사는 자들이란 공격을 당하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보수와 진보는 상대방 측의 모습을 서로 지적하고 있지만 이것은 양쪽 모두 다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과 사람 되심에 핵심을 간과하기에 그렇지 않나 생각해본다.

    무슨 이야기고 하면,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아들로 성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고(여기까진 하나님 됨을 말함), 또한 거듭나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사람의 행할 바를 손수 본을 보이신 것(이것은 예수님의 인자되심을 보이심)이다.

    더 쉽게 말하자면, 예수님이 전하는 생명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서 하나님의 말씀(법)을 어긴 아담처럼 살지 않고 예수님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 말씀을 따르겠다고 하는 자에게만 영생의 길이 있다는 것을 믿는대서 예수님만의 유일무이한 구원자란 것을 고백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의 의의 절차를 따라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구체적인 모습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그렇게 살도록 한 것이다.

    그런고로 오직 예수로만 구원받는다는 사실과 구원받은 자들은 예수님의 보여주신 삶의 정신을 현재의 상황 속에서 제자로 살아야 되어야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며 그것이 ‘예수님을 닮는다.’ 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런데 보수진영(예수로만 구원)에 머물며 인자이신 예수님의 삶과는 동 떨어지는 대서 문제인 것이고, 진보진영에서는 그런 보수진영인사들의 삶에서 참된 예수님의 모습과는 현격하게 모순됨을 발견하고, 그에 역작용으로 예수님의 인성됨에만 강조하다보니 예수님을 통한 구원자란 것을 강조하지 않은 채,  ‘선한 것’을 추구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 같다. 그래서 모든 종교와도 관계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서 ‘선을 극대화’ 하는 노력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온 것이 WCC이고 WCC의 방향성이라고 본다.

    필자는 통합교단의 신앙이 오직 예수님이란 신앙과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따르는 “예수님을 닮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한다.  그러면서 보수진영에서는 진보의 예수님 삶을 따르려는 것을 본받고, 진보진영에서는 보수에서 지적하는 예수님을 통하여만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선임’을 알았으면 한다.  



    출처: USA아멘넷 게시판 김정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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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iovanni Marradi - Shad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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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1년, 샌드라데이 오코너는 미국 사법사상 최초의 여성 연방대법관이 되었다. 24년 동안 보수와 진보로 팽팽하게 갈린 대법원에서 '중도의 여왕'이라고 칭송받을 정도로 균형추 역할을 하고, 유방암 투병 중에도 법정을 지키는 등 강인한 면모를 지녔던 오코너.

    그러나 오코너는 2005년 갑자기 은퇴를 선언했다. 종신직인 대법관의 임무와 영예를 내려놓은 이유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남편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로스쿨에서 만난 남편은 유능한 변호사로 활동하다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기억을 점점 잃으면서 부인조차 알아보지 못하게 된 남편은 요양원에서 만난 환자와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산책하거나 키스를 하는 장면을 오코너는 자주 목격했지만 남편을 미워하거나 새 애인을 질투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코너는 행복해하는 남편을 기쁘게 바라봤다.

    “아버지는 마치 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년 같아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정서적 안정을 찾게 됐다며 좋아하세요.” 오코너 부부의 아들은 방송 인터뷰에서 줄곧 자살 이야기만 했던 아버지가 사랑에 빠진 뒤 행복해한다고 말했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다른 여성을 사랑해도 당신만 행복하다면 나는 기쁩니다.” 남편의 변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오코너의 사랑에 대해 심리학자 매리 파이퍼는 이렇게 말했다. “젊어서의 사랑은 자신의 행복을 원하는 것이고, 황혼의 사랑은 상대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것이다.”

    글ㆍ월간 「좋은생각」편집팀 / 2008년 10월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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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사람, 참 괜찮다!"


          사무실 쓰레기통이 차면
          조용히 직접 비우는 사람이 있다.

          아무도 안볼 거라 생각하는 곳에서도
          누군가는 반드시 보고 있다. 그래서
          "저 사람, 참 괜찮다"라는 소문이 돌게 된다.

           "나는 원래 큰일만 하는 사람이야." "그런 작은 일은
          아랫사람이 하는 거야"라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작은 일을 소홀히 하는 사람치고
          크게 성공한 사람은 드물다.

          - 나이토 요시히토의《저 사람 왠지 좋다》중에서 -


          '괜찮다'는 평판은 다른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자기 자신이 걸어온 발자국일 뿐입니다.
          걸어온대로 보이고, 남긴 발자국대로 읽혀집니다.

          남이 보든말든, 자기가 걷는 발걸음 그대로 가장 궂은 일,

          가장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저 사람 괜찮다'는 최고의 평판을 듣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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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 / 벌코프의 조직신학에서 발췌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


     

    A. 중생에 대한 성경적 용어와 그 의미

     

    1. 고려되야 할 용어.

    2. 이 용어들의 의미.

    이 용어들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1) 중생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며, 따라서 이 사역에서 인간은 완전히 수동적이며 인간의 협력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2)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새로운 생명을 생성하고, 이로 인해 인간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 부활의 삶에 참여하게 되며,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불릴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3) 중생에는 두가지 요소, 즉 새 생명의 발생(generation)과 새로운 생명이 감추어진 심연에서 표출되는 출생(bearing)을 구분해야 한다. 전자는 영혼안에 새로운 생명의 원소가 주입되는 것(principie)이며, 후자는 이 원소가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중생을 적적하게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

     

     

    B. 신학에서의 중생이라는 용어의 용법

     

    1. 초대교회와 로마 카톨릭 신학에서. 

    2. 종교개혁자들과 개신교회.

    루터는 중생과 칭의의 혼동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중생 혹은 새로운 출생을 상당히 광범위한 의미로 언급했다. 칼빈도 역시 이를 새로운 생명을 생성시키는 하나님의 행동 이외에 회심(회개와 신앙)과 성화를 포함하는, 인간이 갱신되는 전 과정을 나타내는 용어로 매우 포괄적으로 사용했다. 일부 17세기 저자들은 중생과 회심을 구분하지 못하고 두 용어를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하며, 중생을 부르심 즉 효과적 부르심 아래 두었다. 도르트 신조도 두 단어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벨기에 신앙고백서 중생을 보다 광범한 의미로 언급하고 있는 듯하다중생이란 용어의 이러한 포괄적 사용은 종종 혼동을 초래하고 매우 필요한 구분들을 무시하게 한다. 예를 들면 중생과 회심이 동일시 되는 반면, 회심에서 인간은 어느 정도 하나님에게 협력하지만 중생은 하나님의 단독사역으로 선언된다. 중생과 칭의의 구분은 명백해졌지만, 중생을 보다 제한적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점차 필수적이고 통상적인 관례가 되었다. 투레틴은 두 종류의 회심을 구분한다. 첫번째는 '습관적인' 또는 수동적인 회심으로서, 영혼의 성향 혹은 습성을 창출하는 것으로 이는 '중생'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두번째는 '실제적' 또는 '능동적' 회심으로서, 여기서 나온 습관이나 성향이 신앙과 회개에서 능동적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개혁파 신학은 중생이라는 단어를 보다 제한적인 의미로, 즉 죄인이 새로운 영적인 생명을 부여받고 새 생명의 원소가 처음으로 행동화되는 하나님의 행위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한다. 이렇게 생각할 때 중생은 "재발생(begetting again)"과, 생명이 발현되는 "새 출생(new birth)" 양자를 포함하게 된다. 하지만 중생이라는 용어의 문자적인 의미와 엄격히 조화될 수 있도록, 중생이라는 용어를 이러한 새 생명의 첫번째 발현과는 구분시켜서, 단지 영혼 안에서의 새 생명의 주입(implanting)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좋다.....

     

     

    C. 중생의 본질

     

    1. 그릇된 견해들.

     

    (1) 중생은, 원죄를 실체로 이해하여 중생시 다른 실체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종교 개혁 시대의 플라키우스 일리리쿠스나 고대의 마니교도들이 주장하듯 인간 본성의 실체의 변화가 아니다. 어떠한 새로운 물질적인 씨앗이나 싹이 인간에게 이식되는 것은 아니다. 영혼의 기능에 있어서는 어떠한 첨가나 감소도 없다.

     

    (2) 중생은 한 가지 혹은 그 이상의 영혼의 기능의 변화가 아니다. 중생은, 예를 들면 일부 복음주의자들이 생각하듯 하나님의 일에 대한 혐오의 제거를 통한 정서적 생활(감정이나 마음)의 변화, 혹은 합리주의자가 생각하듯이 죄로 어두워진 마음에의 조명을 통한 지성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생은, 성경적인 의미로 이해한다면, 영혼의 중심적이며 모든 것을 통제하는 기관으로 생명의 원천인 인간의 마음(heart)에 영향을 준다. 이것은 중생이 인간 본성 전체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3) 또 중생은 재세례파나 다른 열광적인 종파들이 주장하듯, 인간의 본성 전체나 부분에 있어서 완전한 변화가 아니다. 이들은 중생한 자들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중생은 인간의 본성 전체에 영향을 주지만, 성령의 역사에 의해 인간 안에 야기되는 모든 변화를 나타내는 용어가 아니다. 중생은 회심과 성화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2. 중생의 긍정적 특성.

     

    (1) 중생이란 인간 안에 새로운 영적 생명의 원소(principle)를 주입하고 성령의 영향아래 하나님의 방향으로 움직이는 생명을 탄생시키는 변화로, 영혼의 지배적 성향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원리적으로 이 변화는 전인적으로 일어난다.

     

    (2) 중생은 전인적으로 즉 지성적으로 정서적으로 도덕적으로 즉시 영향을 미치는, 인간 본성의 즉각적인 변화이다. 중생을 즉각적인 변화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음 두가지를 내포하고 있다.

     

    ① 중생은 로마 가톨릭 교인들이나 모든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가르치듯 인간이 영혼 안에서 점진적으로 예비되는 사역이 아니다. 생명과 사망 사이에는 중간 단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살든지 죽든지 양자 택일이다.

    중생은 성화처럼 점진적인 과정이 아니다. 일부 개혁파 신학자들이 중생을 성화까지도 포함하는 용어로 사용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구원의 순서가 오늘날처럼 완전히 전개되지 못한 시대에 있었던 일이다.

     

    (3) 중생은 가장 제한된 의미로 이해한다면, 잠재의식에서 나타나는 변화이다. 이는 인간에 의해 직접적으로는 인식될 수 없는, 하나님의 은밀하고 불가사의한 사역이다. 변화는, 중생과 회심이 동시에 발생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인간이 이를 즉시 인식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일어난다. 이후에 있어서도 인간은 '단지 그 결과로서만' 이를 인식할 수 있다. 이는 기독교인이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회의와 불확실성과 투쟁해야 하며, 한편으로는 점진적으로 이것들을 극복할 수 있고 확신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해 준다.

     

    3. 중생의 정의

    현재 사용되는 중생에 관한 상기 진술로부터 중생을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우리는 중생을 "새 생명의 원소가 인간에게 심겨지고 영혼의 지배적 성향이 거룩하게 되는 하나님의 행위"(Regeneration is that act of God by which the principle of the new life is implanted in man, and the governing disposition of soul is made holy.) 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재발생"의 개념뿐 아니라 새 출생의 개념을 포함하기 위해서, 본 정의에서 "이러한 새로운 성향의 최초의 거룩한 활동이 확보되어 있다"라는 문장을 보충해야 할 것이다.


     

    D. 외적 부르심에 관련된 효과적 부르심과 중생

     

    1. 외적 부르심과 불가분의 관계성

    (1) 내적 부르심은 성령의 사역에 의해 구원적으로 적용된 말씀에 의한 부르심이다.(고전1:23,24; 벧전2:9)

    (2) 이는 강력한 부르심, 즉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효과적인 부리심이다(행13:48; 고전1:23,24).

    (3) 이는 회개 없이 일어난다. 즉 변화될 수 없고, 결코 철회될 수 없는 부르심이다(롬11:29)

     

    2. 내적 부르심의 특징

    (1) 도덕적 설득과 성령의 강력한 사역이 결합되어 일어난다.

    (2) 인간의 의식 영역에서 역사한다.

    (3)목적론적이다.

     

    3.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의 관계

     

    (1) 17세기 신학에서의 양자의 동일시.

    17세기 신학 효과적 부르심과 중생을 동일시하거나 완전히 동일시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중생이 부르심에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부 옛 신학자들은 부르심에 관해서는 별개의 장(章)을 가지고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중생을 별개의 항목으로 다루지 않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0장 2절에 의하면 효과적 부르심은 중생을 포함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부르심과 중생이 인과적으로 관계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전문적인 의미에서 내적 혹은 효과적 부르심이 아니라, 창조적 부르심까지도 포함하는 일반적 부르심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종교개혁 이후의 시대에서는 죄인의 삶에서 은혜의 사역의 발단을 지칭하기 위해 중생보다 부르심이라는 용어를 광범하게 사용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의 사역간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부르심이라는 용어가 사도 시대에 성행한 것은, 선교적 시대에 교회에 모이게 된 사람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이 일반적으로 동시적이었으며, 그 변화가 하나님으로부터의 강력한 부르심으로서 의식 생활 가운데 반영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하지만 진리를 체계적으로 진술하기 위해서 우리는 부르심과 중생을 구분해야 한다.

     

    (2)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의 차이.

    엄격한 의미에서 즉 "재발생"으로서의 중생은 인간의 잠재의식에서 발생하며, 인간이 이에 대해 취할수 있는 어떠한 태도와도 독립되어 있다. 반면 부르심은 의식을 대상으로 하며 의식생활의 일정한 성향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중생은 안으로부터 역사한다면, 부르심은 밖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유아들의 경우, 우리는 부르심보다는 중생에 대해 언급하게 된다. 더욱이 중생은 창조적이며 초자연적인 성령의 사역으로, 이로써 인간은 다른 상태로의 전이, 즉 영적인 사망의 상태에서 영적인 생명의 상태로 옮겨지게 된다. 반면 효과적인 부르심은 목적론적이며 새로운 생명을 이끌어 내며 하나님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는 새로운 성향이 발현되게 하며 새 생명을 활동하게 한다.

     

    (3) 부르심과 중생의 관련 순서.

    우리가 다음의 단계들에 주목한다면 이들의 관련 순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 볼 때 말씀의 설교에서의 외적 부르심(유아의 경우는 제외)은 일반적으로 새 생명이 인간의 영혼 속에 생성되는 성령의 사역에 선행하거나 이와 동시에 일어난다.

     

    이때 창조적 말씀으로 하나님은 새 생명을 생성시키시고, 영혼의 내적 성향을 변화시키시며, 마음을 조명하고, 감정을 고양시키시며, 의지를 새롭게 한다. 하나님의 이러한 행위 안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영혼을 구원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을 수 있는 귀가 심어지게 된다. 이것이 엄격한 의미에서 중생이다. 여기서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영적인 귀를 가진 후 죄인은 이제 복음 안에서의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게 되며, 효과적으로 이를 마음에 받아들이게 된다. 저항하고 싶은 열망이 순종하고 싶은 열망으로 변화되고, 죄인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설득력에 감화된다. 이것이 설교 말씀의 도구를 통해 하나님의 영에 의해 효과적으로 적용되는 효과적 부르심이다.

     

    ④마지막으로, 이러한 효과적 부르심은, 진리를 통해 영혼 안에 탄생된 새로운 성향이 최초로 거룩하게 발현되도록 한다. 새 생명이 발현되기 시작하고, 심겨진(주입된) 생명은 새로운 출생을 일으킨다. 이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중생의 사역의 완성이요, 회심으로 전환되는 시점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논리적 순서를 모든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시간적 순서로 이해하는 우(愚)를 범치 말아야 한다. 새 생명은 종종 유아들이 복음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게 되기도 전에 이들의 마음속에 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복음이 설교되는 곳에서만 새로운 생명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새 생명이 생성되게 하는 하나님의 창조적 부르심은 항상 존재한다. 복음의 집행하에 사는 사람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들이 분별력을 갖추기 오래 전, 즉 효과적인 부르심이 의식에 침투하기 오래 전에 중생의 씨앗을 가질 가능성도 많다. 하지만 중생된 자로서 이들이 수년 동안 심지어 성장한 이후에도 여전히 죄 가운데 생활하며 그들 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의 증거를 전혀 보여주지 못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반면 언약의 집행하에 생활하지 않았던 자들생과 효과적인 부르심 사이에 시간적 간격을 상정할 필요가 없다. 효과적인 부르심에서 이들은 자신의 갱신을 인식하게 되고, 즉시 중생의 씨앗이 새로운 생명으로 발육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중생, 효과적 부르심, 회심이 모두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 / 벌코프의 조직신학에서 발췌 (714-72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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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2 (토마스 왓슨)

     

     

    제 2장 가장 나쁜 것들이 경건한 자에게 선을 이룬다.

    내 말을 오해하지 말라. 나는 가장 나쁜 것이 본질적으로 선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가장 나쁜 것은 저주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본래 악할지라도, 하나님의 지혜롭고 압도하는 손이 그것들을 써서 거룩하게 하므로 그것들은 도덕적으로 선하다. 물론 모순되는 성질을 가진 요소이지만 하나님이 적절히 조절하셨기에, 그것들은 우주의 선을 위하여 조화로운 방식으로 활동한다.
    시계의 톱니바퀴는 서로 반대로 움직이지만, 모두가 시계의 운동을 수행한다. 그래서 경건한 자에게 십자가를 안겨다 주는 것같은 일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의하여 경건한 자에게 선을 이룬다.
    이런 가장 나쁜 것 가운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선을 이루는 고약한 악이 넷 있다.

    1. 고난의 악한 것이 경건한 자에게 선을 이룬다.
    우리에게 임하는 모든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이 특별히 간섭하신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평온하다.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룻 1:21) 휘두를 손이 없이 도끼만으로는 쪼갤 수 없듯이 하나님이 사명을 주시지 않으면 도구는 움직일 수 없다. 욥은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지적하듯이, 욥은 “주님은 주셨고 마귀는 가져갔다”고 말하지 않고 “주님이 취하셨다”고 말한다. 누가 우리에게 고난을 주든지, 그것을 보내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고난이 선을 이룬다는 것을 생각하면 또 한번 마음이 평온해진다.
    “내가 이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같이 보아 좋게 할 것이라.” (렘 24:5) 바벨론에 잡혀간 유다의 포로 생활은 그들의 유익을 위함이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시 119:71) 고난의 쓴 물에 모세가 던진 나무처럼, 이 본문은 쓴 물을 달고 마시기 좋게 만들 것이다.
    경건한 자에게 고난은 의약품이다. 하나님은 가장 해로운 독약에서 우리의 구원을 추출하신다. 고난은 구례만큼이나 필요하다. (벧전 1:6) 불이 없이는 황금으로 그릇을 만들 수 없다. 그처럼 우리가 고난의 풀무에 녹아 제련되지 않으면 존귀의 그릇이 될 수 없다.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시 25:10) 화가가 밝은 색과 어두운 그림자를 섞어 사용하듯이 지혜로우신 하나님은 자비와 심판을 섞어 사용하신다. 고난의 섭리들이 불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유익하다. 성경에서 몇 가지 예를 살펴보자.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구덩이에 던지고 후에 그를 판다. 그런 다음 요셉은 감옥에 들어간다. 하자만 이 모든 것이 그에게 선을 이루었다. 그의 비천해짐은 그의 발전을 위한 길을 만들었고 그는 나라에서 이인자가 되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창 50:20)
    야곱은 천사와 씨름하여 환도뼈가 어긋났다. 이는 슬픈 일이었지만 하나님은 도리어 선이 되게 하셨다. 왜냐하면 야곱은 거기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고 주님은 그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이다.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창 32:30) 하나님의 얼굴을 뵈려고 굳이 탈골하려 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므낫세 왕은 사슬에 묶였다. 차마 두 눈으로 보고 싶지 않은 슬픈 일이다. 황금 면류관이 족쇄로 바뀌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선을 이루었다. 왜냐하면
    “저가 환란을 당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 열조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비하여 기도했기” (대하 32:12,13) 때문이다. 그는 황금 면류관을 쓰고 있는 것보다 쇠사슬에 매여 있는 것이 나았다. 전자는 그를 교만하게 했지만 후자는 그를 겸비하게 했다.
    욥은 비참할 대로 비참해진 사람이었다. 그는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남은 것은 악창뿐이었다. 이는 슬픈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에게 선을 이루었다. 그의 덕망은 입증되었을 뿐만 아니라 증진되었다. 하나님은 그의 정직함을 하늘에서 증거 하셨고 이전에 두 배나 주셔서 그의 잃은 것을 보상하셨다. (욥 42:10)
    바울은 눈이 머는 고통을 받았다. 이는 불편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도리어 그에게 선이 되었다. 하나님은 바울을 눈멀게 하심으로써 그의 영혼에 은혜의 빛이 비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다. 이는 복된 회심의 출발점이었다. (행 9:6)
    겨울의 매서운 서리가 가시고 봄꽃이 피듯이, 밤이 지나고 새벽별이 나오듯이, 고난의 악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큰 선을 이룬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사실인지 언제든 질문하고,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했듯이 “어찌 그럴 수 있나이까?” 하고 말하자. 그러므로 나는 고난이 어떻게 선을 이루는지 몇 가지 방법을 당신에게 보여주려 한다.
    1) 고난은 우리의 설교자와 교사의 역할을 하므로 선을 이룬다 -

    “너희는 매를 순히 받고” (미 6:9).
    루터는 고난을 당하기 전까지 몇몇 시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고난은 죄가 무엇인지 가르친다. 우리는 전파된 말씀에서 죄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배운다. 죄란 더럽게 하고 저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림의 사자 보듯 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고난을 내리시며 그럴 때 우리는 죄의 열매를 보고 죄를 비통하게 느낀다. 병상은 종종 설교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치곤 한다. 우리는 고난의 안경으로 죄의 추한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다.
    고난은 우리 자신을 알도록 가르친다. 생활이 풍족할 때 대체로 우리는 자신에게 이방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을 더 잘 알도록 하시려고 고난을 맛보게 하신다. 우리는 평소에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우리의 마음이 부패한 것을 고난의 때에 본다. 그릇에 담긴 물이 깨끗해 보이지만, 그릇에 불을 지피면 찌꺼기가 올라온다. 성마름과 불신이 많이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은 말한다. “내 마음이 그렇게 나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이제야 두 눈으로 확인한다. 전에는 나의 부패상이 그렇게 분명하고 나의 덕이 그처럼 연약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2) 고난은 마음을 더욱 올곧게 하는 수단이므로 선을 이룬다. 생활이 풍족할 때는 두 마음이 되기 쉽다 (호 10:2)
    마음이 하나님께도 얼마간 붙어 있고 세상에도 얼마간 붙어 있다. 이는 자석 사이의 바늘과 같다. 하나님도 끌어당기시고 세상도 끌어당긴다. 이제 하나님께서 세상을 제거하시면 마음은 참으로 하나님께로 더욱 향할 것이다. 징계는 마음을 올바르고 곧게 한다. 우리가 때때로 굽은 막대기를 불에 대고 펴듯이, 하나님은 고난의 불에 우리를 두셔서 우리가 더욱 바르고 올곧게 하신다. 죄가 영혼을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때 고난이 영혼을 다시 바로잡는다면 그 얼마나 선한 일인가!
    3) 고난은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므로 선을 이룬다.
    하나님의 회초리는 우리에게 더욱 생생하게 그리스도의 형상을 그리는 펜이 된다. 머리와 지체가 대칭과 조화를 이루는 것은 선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이면서 그분을 닮지 않을 것인가! 칼빈이 말하듯이 그분의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 (사 53:3)이다. 그분은 우시고 피흘리셨다. 그분이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는데 우리가 장미관을 쓸 생각을 하겠는가?
    고난을 통해서라도 그리스도와 같아지는 것은 선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쓴 잔을 마시셨다. 그 생각을 하실 때 그리스도는 피와 같은 땀을 흘리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잔(하나님의 진노)의 독을 마시셨지만, 잔에는 쓴 쑥이 얼마간 남아 있으며 성도들은 그것을 마셔야 한다. 오직 이 점에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우리의 고난이 다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보속(補贖)을 이루는 것이었고, 우리의 고난은 징벌의 고난이다.
    4) 고난은 죄를 파멸시키므로 경건한 자에게 선을 이룬다.
    죄는 어머니이며 고난은 딸이다. 이 딸은 어머니를 파멸시키는데 이바지한다. 죄는 벌레를 자라게 하는 나무와 같으며 고난은 나무를 먹는 벌레와 같다. 아무리 뛰어난 마음에도 부패는 심하므로, 불이 황금에서 불순물을 제거하듯이 고난은 그 부패를 상당히 제거한다.
    “그 죄를 없이함을 얻을 결과는 이로 인하나니” (사 27:9) 우리에게 있는 녹이 더 많이 없어진다면 거친 줄보다 더한 것도 마다하랴?
    고난은 죄의 찌꺼기만 제거한다. 의사가 환자에게 “당신의 몸은 탈이 났고 나쁜 체액이 가득하니 그것을 깨끗하게 씻어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죽게 되오. 내가 약을 처방해줄 텐데, 그 약을 먹으면 아프긴 하지만 질병의 찌꺼기가 없어져 당신은 목숨을 건질 것이오.”하고 말한다면, 이것이 환자에게 선하지 않겠는가?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적 질병을 없이하는데 사용하시는 약이다. 고난은 교만의 고창, 탐욕의 질병, 욕심의 수종을 고친다. 그러니 고난은 선을 이루지 않는가?
    5) 고난은 우리의 마음이 세상에서 벗어나게 하는 수단이므로 선을 이룬다.
    당신이 나무뿌리에서 흙을 파서 없애면, 그것은 나무를 땅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세상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우리의 지상적 위로를 파서 없애신다. 꽃마다 가시가 함께 자란다. 하나님은 흔들거리는 치아를 비틀어 빼서 우리로 크게 고통당하지 않게 하실 것이다. 젖을 떼는 것은 선한일이 아닌가? 아무리 나이 먹은 성도라도 그 일이 필요하다. 어찌 주님께서 그 공급하시던 관을 부수지 않으시겠는가? 이는 “나의 모든 근원” (시 87:7)이 되시는 그분께 우리로 나아가게 하시려함이다.
    6) 고난은 위로를 위한 길을 열므로 선을 이룬다.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호 2:15) 아골은 괴롬을 뜻한다. 하나님은 내면의 평안으로 외면의 고통을 누그러뜨리신다.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요 16:20) 여기서 물은 포도주로 변한다. 쓴 알약 다음에 주님은 사탕을 주신다. 바울은 감옥에서 찬양을 드렸다. 하나님의 회초리 끝에는 꿀물이 있다. 고난 가운데 성도는 너무도 달콤한 기쁨의 황홀경에 빠지므로 자신이 천상의 가나안 경계에 있다고 생각했다.
    7) 고난은 우리를 크게 하는 것이므로 선을 이룬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욥 7:17) 하나님은 고난을 쓰셔서 우리를 세 가지로 크게 여기신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를 살피려고 지극히 낮아지시는 데서 우리를 크게 여기신다. 하나님이 먼지와 재에 마음을 두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영광이다. 하나님이 우리가 고통 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크게 여기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치지 않으시는 것은 우리를 무시하는 것이다 :
    “네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사 1:5) 만일 당신이 계속 죄 가운데 행하고 스스로의 길을 취해서 가려하면, 스스로 범죄 하여 지옥에 떨어진다.
    둘째, 고난은 역경의 깃발, 양자됨의 표이므로 우리를 크게 여기시는 것이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히 12:7) 회초리 자국마다 존귀의 붕대가 감긴다.
    셋째, 고난은 세상에서 성도를 유명하게 하여 성도를 크게 하곤 한다. 성도가 고난으로 칭찬받는 일은 없었다. 순교자들은 시련에서 열정과 한결같음을 보여서 후세에 이름을 떨쳤다. 욥은 그 인내로 얼마나 유명한가!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기록에 남겨 두신다.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약 5:11) 고난당하는 자 욥은 정복자 알렉산더보다 유명해졌다.
    8) 고난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수단이므로 선을 이룬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욥 5:17) 십자가에서 행복을 발견한 정치가나 도덕론자가 있었던가? 욥은 참으로 그렇게 말한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어떻게 고난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할 수 있는가? 우리는 고난 때문에 우리가 성화되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된다고 대답한다. 보름달은 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처럼 많은 사람들은 번영의 보름달에 취해 하나님께 멀리 떨어져있다.
    고난은 그들을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한다. 긍휼의 자석은 고난의 밧줄만큼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지 못한다. 압살롬이 요압의 보리에 불을 놓았을 때, 요압은 압살롬에게 달려갔다. (삼하 14:30) 하나님이 우리의 세상적 위로에 불을 놓으실 때, 우리는 하나님께 달려가며 하나님과 화평 한다. 탕자가 궁핍하여 수척해졌을 때 아버지께 돌아갔다. (눅 15:13) 비둘기가 발꿈치를 둘 곳을 발견할 수 없을 때 방주로 돌아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의 홍수를 보내실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방주로 날아간다. 그러므로 고난은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데려가므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신앙은 고난의 물살을 이용하여 그리스도께로 더 빨리 헤엄칠 수 있다.
    9) 고난은 불의한 자를 침묵하게 하므로 선을 이룬다.
    불의한 자들은 경건한 자를 헐뜯고 비방하는데 얼마나 빠른가! 그들은 오직 자기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섬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불의한 자들의 거짓된 입술에 맹꽁이자물쇠를 두시려고 자기 백성이 신앙을 위하여 고난을 참도록 하신다. 먹을 것을 얻으려고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한 백성이 하나님께 있는 것을 볼 때 세상의 무신론자들은 그 입이 막힌다.
    마귀는 욥이 돈을 위하여 사는 위선자라고 고소했다. 그의 모든 신앙이 금은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욥 1:9-10)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욥 1:12) 마귀는 임무를 받자마자 욥의 산울을 부순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경배했고(1:20)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고백한다.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그를 의지하리라”(13:15, 한글 개역에는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로 되어 있음). 이리하여 마귀는 침묵했다.
    경건한 자가 고통을 받는 처지에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하고 모든 것을 잃을 때도 여전히 흠없이 지내는 것을 볼 때 불의한 자는 기가 꺾인다.
    10) 고난은 영광을 위한 길을 열므로 선을 이룬다.(고후 4:17)
    고난은 영광을 받을 공로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영광을 준비하는 것이다. 쟁기질은 밀이 자라도록 토양을 준비하는 것이듯이 고난은 우리로 영광을 준비케 하고 맞이하게 한다. 화가가 어두운 색 위에 황금색을 칠하듯이, 하나님은 고난의 어두운 색을 먼저 칠하시고 영광의 황금빛 색을 칠하신다. 포도주를 붓기에 앞서 그릇을 먼저 닦듯이, 먼저 자비의 그릇을 고난으로 닦고 그런 다음 영광의 포도주를 붓는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이 성도에게 불리한 것이 아니라 유익한 것임을 안다. 우리는 고난이 악한 것을 보지 않고 선한 것을 보아야 한다. 구름의 어두운 면을 보지 않고 밝은 면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아무리 호되게 대하시더라도 그것이 그들이 하늘로 향하도록 치시는 채찍질이다.

    2. 시험의 악한 것이 경건한 자의 선을 위하여 제압된다.
    시험의 악은 선을 이룬다. 사단은 시험하는 자(막 4:15)로 불린다. 그는 늘 수풀 속에 누워있으며 이 성도 저 성도에게 항상 일을 꾸미고 있다. 마귀는 매일 돌아다니는 구역이 있다. 그는 아직 완전히 옥에 던져지지 않았지만 보석 상태에 있는 죄수처럼 성도를 시험하려고 배회한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큰 방해가 된다. 그런데 사단의 시험에 관해서는 세 가지를 살펴야 한다.
    1) 사단의 시험 방법
    여기서 두 가지를 주의하라. 사단은 시험할 때 폭력을 행하므로 붉은 용이다. 그는 마음의 성을 쳐들어가려고 애쓰며 참람한 생각을 집어넣으며 하나님을 부인하려 한다. 이것은 사단이 쏘는 사나운 화살인데, 사단은 이 화살로 고통을 일으키려 한다. 또한 사단은 교묘하게 시험한다. 그래서 그는 옛 뱀이다. 마귀가 사용하는 중요한 술책은 다섯 가지가 있다.

    (1) 사단은 기질과 체질을 관찰한다.
    사단은 시험의 적절한 미끼를 던진다. 농부처럼 사단은 어떤 곡물이 토양에 가장 적합한지 않다. 사단은 자연적 성질과 기질을 거슬러 시험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책략인데, 그는 바람과 조수를 함께 사용한다. 그래서 마음의 자연스러운 조수가 흘러가는 곳에 시험의 바람이 분다. 마귀는 사람의 생각은 알 수 없지만 기질은 알며 그에 따라서 미끼를 놓는다. 그는 야심찬 사람에게는 면류관으로 시험하고 다혈질인 사람에게는 아름다움으로 시험한다.
    (2) 사단은 시험할 가장 좋은 시간을 관찰한다.
    예리한 낚시꾼이 고기가 가장 잘 물때에 낚싯줄을 드리우듯이 말이다. 사단의 시험 시간은 보통 성찬식 후이다. 그 이유는 그때 우리가 가장 걱정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엄숙한 의무를 행하고 있을 때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기 쉬워 태만해져서 이전과 같은 열정과 엄격함을 팽개친다. 전투에서 돌아와 원수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고 해제한 군인처럼 우리가 가장 의심하지 않을 때를 사단은 관찰하다가 시험을 걸어온다.
    (3) 사단은 가까운 관계를 사용한다.
    마귀는 대리인을 통하여 시험한다. 그래서 그는 욥의 아내를 통하여 욥에게 시험을 걸어왔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욥 2:9) 품속의 아내가 범죄 하게하는 마귀의 시험 도구가 될 수 있다.
    (4) 사단은 선한 사람을 통하여 악을 일으키려고 시험한다.
    그래서 그는 황금 잔에 독을 집어넣는다. 그는 베드로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시험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고통을 당하지 마시도록 권한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마 16:22) 사도의 입에서 시험하는 자를 발견하리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었겠는가?
    (5) 사단은 신앙을 구실로 범죄하도록 시험한다.
    사단은 광명의 천사로 변할 때 가장 두려운 존재가 된다. 그는 그리스도께 가서 성경을 언급했다. “기록되었으되.” 마귀는 낚시 바늘에 신앙의 미끼를 단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족을 부양한다는 구실로 탐욕을 부리고 관직을 이용하여 부당히 이를 취하도록 시험한다. 그는 어떤 이들을 시험하여 더 이상 하나님께 범죄 하지 않도록 자살하게 한다. 그러므로 그는 죄를 피한다는 구실로 사람들이 범죄 하도록 시험한다. 이런 것들이 사단이 시험할 때 사용하는 교묘한 전략이다.

    2) 사단의 능력 범위
    사단이 시험할 때 그 능력은 어디까지 미치는가?
    (1) 사단은 목적을 제안할 수 있다.
    아간 앞에 황금덩이를 두듯이 말이다.
    (2) 사단은 상상력을 못쓰게 만들어 지성에 악한 생각을 주입한다.
    성령님이 선한 제안을 내시듯이, 마귀는 나쁜 제안을 낸다. 그는 유다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배반할 생각을 넣었다.(요 13:2)
    (3) 사단은 마음속에 부패를 일으키고 자극할 수 있으며 마음에 시험을 받아들이고 싶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사단이 인간의 의지로 하여금 동의하도록 강요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열심히 고소하는 자이므로 끊임없이 졸라대며 악을 행하도록 자극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다윗으로 하여금 백성의 수를 세도록 격동했다.(대상 21:1) 마귀는 미묘한 주장을 내세우면서 우리에게 의심을 품게 하여 죄를 범하게 할 것이다.

    3) 이 시험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선을 위하여 제압된다.
    바람에 흔들린 나무가 더욱 굳게 터를 잡고 더욱 깊이 뿌리를 박듯이, 시험의 바람은 그리스도인을 은혜 가운데 더욱 굳게 터를 잡게 한다. 시험은 여덟 가지 방법으로 선을 위하여 제압된다.
    (1) 시험은 영혼으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든다.
    사단이 사납게 시험하면 할수록 성도는 더욱 열정적으로 기도한다. 사슴은 화살에 맞을 때 물을 찾아 더욱 빨리 달린다. 사단이 사나운 화살을 쏠 때, 영혼은 은혜의 보좌를 향하여 더 빨리 달린다. 바울은 사단의 사자 때문에 괴로웠을 때,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다”(고후 12:8)고 말한다. 시험은 보호를 얻게 하는 약이다. 시험은 우리가 더욱 기도하게 하므로 선을 이룬다.
    (2) 죄로 이르게 하는 시험은 도리어 죄를 짓지 못하도록 막는 수단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시험받을수록 시험과 맞서 싸운다. 사단이 참람하게 하려고 시험할수록 성도는 그런 생각에 떨며 “사단아 물러가라”고 말한다. 요셉의 여주인이 어리석은 행동을 하도록 시험했을 때, 그 시험이 강해질수록 요셉의 반대도 강해졌다. 마귀가 죄를 짓도록 하는 박차로서 사용하는 시험을,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을 죄에서 물러나도록 하는 굴레로 만드신다.
    (3) 시험은 교만의 종기를 수그러들게 하므로 선을 이룬다.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고후 12:7) 육체의 가시는 부풀어 오르는 교만에 구멍을 낼 것이다. 우리를 겸허하게 하는 시험은 우리를 교만하게 하는 의무보다 더 낫다. 그리스도인이 오만한 마음을 계속 갖지 못하도록, 하나님은 그를 마귀의 손에 잠시 떨어지게 하여 그의 종기를 낫게 하실 것이다.
    (4) 시험은 마음에 있는 것을 알아보는 시금석이므로 선을 이룬다.
    마귀는 속이기 위하여 시험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시험을 당하게 하신다. 시험은 우리의 신실함을 알아보는 것이다. 우리가 시험을 똑바로 보고 난 다음 등을 돌릴 때 시험은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께 순결하고 충성스러움을 입증한다.
    또한 시험은 우리의 용기를 알아보는 것이다
    .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같이 지혜가 없어서”(호 7:11) 그런 말을 듣는 자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다. 그들은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마음이 없다. 사단이 오자마자 그들은 굴복한다. 도둑이 다가오자마자 지갑을 내주는 겁쟁이는 말이다. 그러나 성령의 검을 사단에게 휘두르며, 항복하기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려 하는 자가 용감한 그리스도인이다. 로마인의 용기는 카르타고인 에게 공격을 받았을 때 가장 잘 나타났다. 성도의 용기와 능력은 붉은 용과 싸우고 믿음의 능력으로 마귀를 패하게 만드는 전쟁터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연단되어 정금이 된 그런 덕목은 사나운 시험을 견디고 사나운 화살을 막을 수 있다.
    (5) 하나님이 시험받는 자를 쓰셔서 역시 괴로움 가운데 있는 다른 사람을 위로하게 하시므로 시험은 선을 이룬다.
    그리스도인은 약한 자에게 시기적절한 말을 해줄 수 있으려면 먼저 사단의 괴롭힘을 당해야 한다. 성 바울은 시험에 통달했다
    .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후 2:11) 그래서 그는 사단의 저주스런 계략을 다른 사람에게 잘 알릴 수 있었다. (고전 10:13) 늪과 유사가 있는 곳을 달려 본 사람이 다른 사람을 그렇게 위험천만한 길에서 인도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사람이다. 울부짖는 사자의 발톱 맛을 보고 상처가 나서 피를 흘려 본 사람이 시험받는 사람을 다루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다. 시험의 펜싱 도장에 오래 다닌 사람보다 사단의 술책과 책략을 잘 아는 사람은 없다.
    (6) 시험당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부성적 긍휼을 입게 되므로 시험은 선을 이룬다.
    아이가 병들고 상처를 입을 때 가장 잘 돌봐주는 법이다. 성도가 시험으로 상처를 입을 때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시며 성부 하나님께 불쌍히 여기신다. 사단이 영혼에게 열병이 나게 할 때 하나님은 음료를 갖고 오신다. 그래서 루터는 시험이 그리스도께서 용인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시험받는 영혼에게 자신을 가장 친절히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7) 시험은 성도로 하여금 하늘나라를 더욱 바라게 만들므로 선을 이룬다.
    하늘에 가서야 성도는 사정권을 벗어날 것이다. 하늘은 안식의 장소이며 시험의 총탄이 날아다니지 않는다. 하늘 높이 오르며 높은 나무에 앉아 있는 독수리는 뱀의 쏘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처럼 신자는 하늘로 오르게 될 때 옛 뱀에게 훼방 받지 않을 것이다. 이생에서는 하나의 시험이 끝나면 다른 시험이 찾아온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죽음이 물러가는 소리를 듣기 원하며, 총알이 너무도 빨리 날아다니는 전쟁에서 벗어나 빛나는 면류관을 받고자 한다. 그곳에서는 북이나 대포가 아니라 수금과 비파가 계속 울리고 있다.
    (8) 시험은 그리스도의 힘을 끌어들이므로 선을 이룬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친구이며,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 우리를 위하여 모든 힘을 쓰신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8) 만일 가련한 영혼이 지옥의 골리앗과 홀로 싸워야 한다면 틀림없이 패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별도로 힘을 쏟으시며 은혜를 새로이 공급하신다.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그래서 시험의 악한 것은 선을 위하여 제압된다.

    질문. 때때로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을 좌절시키곤 한다. 이것이 어떻게 선을 이루는가?
    대답.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끊어지고 시험이 불같이 일어나서 성도가 정복당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처럼 시험으로 좌절되는 일은 선을 이루기 위하여 제압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좌절을 통하여 은혜를 더 많이 베푸는 길을 여신다.

    베드로는 시험을 받아 자만심에 빠져서 스스로 힘 있는 체했다. 그리고 그가 혼자 서려 할 때 그리스도는 그를 넘어지게 하신다. 그러나 이 일이 그에게 선을 이루어, 그는 많은 눈물을 흘렸다.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 하니라.”(마 26:75) 그러자 그는 더욱 신중해진다. 그는 다른 사도보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했다고 감히 말하지 않았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 그는 자신의 타락이 교만의 목을 부러뜨렸다고 감히 말하지 않았다.

    시험으로 좌절될 때 하나님의 자녀는 더욱 신중하고 경계하게 된다. 사단이 그를 유혹하여 범죄 하게 만들긴 했지만, 장차 그는 더욱 조심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사자의 쇠사슬에 더욱 깊이 빠질까 걱정할 것이다. 그는 범죄의 기회를 더욱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한다. 그는 영적 무장 없이 나가지 않으며 기도로 갑옷을 입는다. 그는 미끄러운 땅을 걷는 것을 알기에 지혜롭게 발걸음을 옮긴다. 그는 보초 서듯 영혼을 면밀히 살피며, 마귀가 다가오는 것을 볼 때 무기를 들고 신앙의 솜씨를 보인다. (엡 6:16)
    마귀는 이렇게밖에 해를 끼치지 못한다. 마귀는 시험으로 성도를 좌절시키면서, 성도의 부주의한 태만을 고친다. 성도로 하여금 조심하며 더 많이 기도하게 하는 것이다. 사나운 짐승이 울타리를 넘어 곡물을 상하게 할 때 사람은 울타리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 것이다. 그처럼 마귀가 시험을 통하여 울타리를 넘을 때 그리스도인은 울타리를 단단히 수리할 것이다. 그는 죄를 더욱 두려워하고 의무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그래서 시험에 패배하는 것은 선을 이룬다.

    반론. 그러나 좌절하는 것이 선을 이룬다 해도, 그리스도인은 시험에 패배하든 패배하지 않든 그 일로 인해 부주의해질 것이다.

    대답. 시험에 떨어지는 것과 시험 속으로 달려 들어가는 것은 큰 차이가 난다. 시험에 떨어지는 것은 선을 이루겠지만 시험 속으로 달려 들어가는 것은 그렇지 않다. 강에 떨어지는 사람은 도움과 연민을 받지만 처절하게 강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은 죽음을 자초한다. 이는 사자의 소굴로 미친 듯이 달려가는 것이다. 시험 속으로 달려드는 사람은 자기 칼에 거꾸러지는 사울과 비슷하다.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에서, 옛 뱀의 시험을 자기 백성의 선으로 바꾸심으로써 하나님이 옛 뱀을 어떻게 절망시키는지 모라. 마귀는 시험이 성도에게 얼마나 큰 유익을 주는지 안다면 분명히 시험을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한때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인을 형성하는 것이 세 가지 있다. 즉 기도와 묵상과 시험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로 여행할 대 역풍을 만났다. (행 27:4) 그처럼 시험의 바람은 성령의 거스르는 역풍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바람을 이용하여 성도를 하늘로 보내신다.

    3. 버림당함의 악한 것은 경건한 자에게 선을 이룬다.
    버림당함의 악한 것은 선을 이룬다. 아가서에는 버림당하는 것을 하소연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나의 사랑하는 자)가 벌써 물러갔네.”(아 5:6) 이중적인 물러남 (withdrawing)이 있다. 은혜에 관하여 하나님은 성령의 영향을 중지시켜 은혜의 생생한 활동을 억제하신다(withdraw). 만일 성령님이 떠나시면 은혜는 냉랭하고 나태함으로 얼어붙는다. 또 위로에 관한 물러남이 있다. 하나님이 호의를 달콤하게 나타내지 않으시고 즐거운 시선으로 보지 않으시며 얼굴을 감추시면 영혼으로부터 아주 사라지시는 것 같다.
    하나님은 물러나실 때 언제나 공정하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기 전에 우리가 그분을 버린다. 우리는 하나님과 가까운 교제를 내팽개치고, 그분의 진리를 버리며, 그분을 위하여 모습을 보이지 않고, 하나님 말씀의 인도와 지도를 버리고, 우리의 부패한 성정과 정념의 가짜 빛을 따를 때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을 먼저 버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 말로 달리 탓할 이가 없다.
    버림당하는 일은 아주 슬프다. 왜냐하면 빛이 물러갈 때 대기에 어둠이 찾아오듯 하나님이 물러나실 때 영혼에 어둠과 슬픔이 찾아들기 때문이다. 버림당함은 양심의 번민이다. 하나님은 영혼을 지옥 위에 맴돌게 하신다.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욥 6:4) 페르시아 사람들은 전쟁 때 뱀의 독을 화살에 묻혀 더욱 치명적이게 만든다. 그래서 하나님은 버림당함이라는 독화살을 욥에게 쏘셨으며, 화살에 맞아 상처난 그의 영혼은 피를 흘렸다.
    버림당하는 때에 하나님의 백성은 비참해지기 쉽다. 그들은 스스로 갈등하며 하나님이 자신을 아주 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버림당한 영혼에게 위로의 처방을 말한다. 뱃사람은 방향을 알려 주는 별이 없어도 등불이 있으며 나침반을 볼 수 있어 도움을 얻는다. 그처럼 나는 뱃사람의 등불처럼, 가련한 영혼이 버림당함이라는 어두운 바다를 항해하며 새벽별을 간절히 찾을 때 빛을 비추는 네 가지 위로를 말하고자 한다.

    1) 경건한 자가 아니면 버림당할 수 없다.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그 사랑을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건강과 친구와 장사를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아도 하나님의 호의를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당신은 버림당하므로 자신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가 하고 두려워한다. 주님이 불의한 자에게서 자신의 사랑을 거두신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의 사랑을 결코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버림당한다는 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입증한다. 하나님의 웃음과 사랑의 표를 때때로 받아 보지 못했는데 어찌 하나님이 멀어지셨다고 불평할 수 있는가?
    2) 기쁨의 꽃으로 피지 않는 은혜의 씨가 있을 수 있다.
    땅은 밀 알갱이를 원하지만 실제 그 땅 속에는 황금 광맥이 있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속에 은혜를 지니고 있어도 기쁨의 달콤한 열매가 자라지 않을 수 있다. 보석과 향료를 가득 담고 있는 바다의 배도 어둠 가운데서 폭풍우에 흔들릴 수 있다. 은혜의 보화로 풍성한 영혼도 버림당함의 어둠 속에서 심하게 흔들려 폭풍우 속에 흔들릴 수 있다. 다윗은 버림받은 상태에서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 하고 기도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듯이 그는 “주여, 주의 신을 내게 주소서”하고 기도하지 않고 “주의 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하고 기도한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자신 속에 하나님의 신을 모셨다.
    3) 이와 같은 버림당함은 잠시뿐이다.
    그리스도는 잠시 물러나서 영혼을 내버려 두시겠지만, 다시 오실 것이다.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이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54:8) 물이 빠져 낮아지면, 곧 다시 조수가 밀려든다. “내가 영원히는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장구히는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나의 지은 그 영과 혼이 내 앞에서 곤비할까 함이니라.”(사 57:16) 온화한 어머니는 아이에게 화를 내지만 곧 아이를 다시 품에 안고 입 맞춘다. 하나님은 영혼에게 진노하시겠지만 그 귀한 품안에 영혼을 안고 사랑의 깃발을 영혼 위에 흔드실 것이다.
    4) 이 버림당함은 경건한 자에게 선을 이룬다.
    버림당함은 나태한 영혼을 고친다. 우리는 나태의 침상에서 떨어진 배우자를 발견한다
    . “내가 잘지라도”(아 5:2) 그리고 곧 그리스도는 떠나셨다.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아 5:6) 조는 사람에게 누가 이야기할 것인가?
    버림당함은 세상에 대한 무절제한 사랑을 고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요일 2:15) 우리는 세상을 꽃다발처럼 손에 들고 있을 수는 있지만, 우리 마음에 너무 가까이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세상을 식사하는 여관으로 이용할 수 있지만 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아마 이 세속적인 것ㅇ 마음을 너무 많이 도둑질하는 것 같다. 선한 사람들이 때때로 너무 많이 먹어 탈나고 번영의 달콤한 기쁨에 취하곤 한다. 주님은 은혜의 은빛 날개를 더럽히고 하나님의 형상을 세상에 문질러 아주 추하게 만든 자들을 고치시기 위하여 구름 가운데 그 얼굴을 감추신다. 이처럼 감추심은 선한 결과를 만든다. 세상의 모든 영광을 어둡게 하고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버림당함은 하나님의 얼굴을 그 어느 때보다 귀하게 여기게 하므로 선을 이룬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시 63:3) 하지만 이 자비가 흔하니까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본다. 진주가 로마에 흔해지자 그 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잠시 하나님의 사랑을 거두심으로써 우리가 그 사랑을 고귀하게 여기게 만드는 뛰어난 방법을 갖고 계신다. 태양이 일 년에 한 번밖에 보이지 않는다면, 태양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겠는가! 영혼이 오랫동안 버림당한 상태에 있을 경우 의의 태양이 다시 오실 때 얼마나 환영하겠는가!
    버림당함은 우리가 죄를 쓰라린 것으로 느끼게 만드는 수단이 되므로 선을 이룬다. 하나님을 불쾌하시게 하는 것보다 큰 비참함이 있을 수 있는가?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시는 것보다 지옥 같은 것이 있겠는가? 그리고 죄 말고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요 20:13) 이와 같이 우리의 죄가 주님을 가져갔으니 우리는 하나님이 어디 누워 계신지 모른다. 하나님의 호의는 가장 좋은 진주이다. 이 호의는 감옥을 즐겁게 하고 사망이 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좋은 보석을 훔쳐가는 죄는 얼마나 밉살스러운가!
    죄 때문에 하나님은 성전을 떠나셨다. (겔 8:6) 죄는 하나님을 원수처럼 보이게 하며 하나님께서 갑옷을 입으시게 만든다 .이리하여 영혼은 거룩한 원한을 갖고 죄를 쫓아가서 복수하고자 한다. 버림당한 영혼은 죄에게 담즙과 식초를 주어 마시게 하고 굴욕의 투창으로 그 심장의 피를 쏟게 만든다.
    버림당함은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서 눈물을 흘리게 하므로 선을 이룬다. 태양이 사라질 때 이슬이 내린다. 그처럼 하나님이 가버리실 대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미가는 자신의 신들을 잃었을 때 얼마나 괴로웠는가!
    “나의 지은 신들……을 취하여 갔으니 내게 오히려 있는 것이 무엇이 더 있겠느냐”(삿 18“24) 그처럼 하나님이 가버리실 때 우리에게 무엇이 더 있겠는가? 하나님이 가버리실 때 수금과 비파가 위로를 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임재가 없어서 고통을 받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하나님의 부재를 한탄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버림당함은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한다. 그리스도가 떠나실 때 신부는 그를 발견하지 못해서 소리치며 그를 찾아 나선다.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아 3:3) 버림당한 영혼은 한숨과 신음만 연신 발한다. 버림당한 영혼은 기도로 하늘의 문을 두드린다. 그는 하나님의 얼굴에서 황금 광선이 비칠 때까지 쉴 수 없다.
    버림당함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탐구하게 만든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떠나신 이유를 탐구한다. 하나님을 화나시게 한 저주스런 일이 무엇인가? 교만일 수도 있고 폭음일 수도 있고 성찬식을 수도 있고 세속적인 태도일 수도 있다.
    “그의 탐심의 죄악을 인하여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사 57:17) 아마 죄가 허용한 어떤 비밀이 있을 것이다. 수도관의 돌이 물의 흐름을 방해하듯이, 생활 속의 죄는 달콤한 하나님의 사랑의 흐름을 방해한다. 그래서 탐정이 죄를 뒤쫓아 가서 잡듯이, 양심은 이 아간을 잡아 돌로 쳐서 죽인다.
    버림당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어떤 고통을 당했는지 보게 하므로 선을 이룬다. 만일 그 잔을 조금씩 마시는 것이 그렇게 고통스럽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마신 잔은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그리스도는 치명적인 독배를 마셨으므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하고 소리치게 되셨다. 버림당하여 겸비해져서 잠시 지옥의 불길에 휩싸인 사람보다 그리스도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 더 불타오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버림당함은 성도로 하여금 장차 위로를 맞이하도록 하므로 선을 이룬다. 얼어붙게 하는 서리가 봄꽃을 준비시킨다. 처음에는 쓰러뜨리고 다음에는 위로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고후 7:6) 우리 구주께서 금식하고 계셨을 때 천사가 와서 힘을 도왔다. 주님이 자기 백성을 오랫동안 금식하게 하셨다면, 위로자(성령님)를 보내며 비밀의 만나로 그들을 먹이신다.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시 97:11) 성도의 위로는 씨처럼 땅에 감추어 있을 수 있지만 씨는 썩어 자라서 열매를 많이 맺는다.
    이런 버림당함은 하늘나라를 우리에게 더욱 달콤하게 만들 것이므로 선을 이룬다. 여기서 우리의 위로는 마치 달처럼 어느 때는 가득 차고 어떤 때는 기운다. 하나님은 잠시 우리에게 자신을 부이시며 그런 다음 우리에게서 물러나신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사랑을 받는다면, 하늘은 얼마나 더욱 돋보이고 더욱 즐겁고 기쁘겠는가(살전 4:17)!
    그래서 우리는 버림당함이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주님은 깊은 버림당함에 빠뜨리시는데, 이는 우리로 깊은 저주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 주님은 우리를 진짜 지옥에 빠지지 않게 하려고 지옥의 허울에 빠뜨리신다.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의 미소를 향유하고, 하나님의 얼굴에 구름이 끼거나 해가 지는 일이 없고, 그리스도가 오셔서 신부와 함께하시고 신부가 다시는 “나의 사랑하는 자가 떠났다”고 말하지 않을 때를 맞이하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준비시키신다.

    4. 죄악은 경건한 자에게 선을 이룬다.
    죄는 본래 저주스러운 것이지만 하나님은 무한하신 지혜로 죄를 제압하고 선과 가장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서 선이 생기게 하신다. 사실 꿀이 사자에게서 나온다면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이중적으로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
    1) 다른 사람의 죄는 경건한 자에게 선이 되도록 제압한다.
    덕스러움은 마음이 불의한 자 가운데서 산다는 것은 적지 않은 괴로움이다
    . “메섹에 유하며 게달의 장막 중에 거하는 것이 내게 화로다”(시 120:5) 하지만 주님은 이런 것도 선을 바꾸신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다른 사람의 죄는 거룩한 눈물을 만들므로 경건한 자에게 선을 이룬다.
    하나님의 백성은 개혁할 수 없는 것을 두고 눈물을 뿌린다.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같이 흐르나이다.”(시 119:136) 다윗은 시대의 죄를 슬퍼했다. 그의 마음은 샘처럼 그의 눈은 강처럼 바뀌었다. 불의한 자는 죄와 더불어 즐거워한다. “그가 악을 행하며 기뻐하도다.” (렘 11:15) 그러나 경건한 자는 시대의 저주와 참람을 한탄한다. 다른 사람의 죄는 창처럼 그들의 영혼을 꿰뚫는다. 다른 사람의 죄를 이처럼 슬퍼하는 것은 선하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 행한 불의를 슬퍼하며 분개하는 것은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보여준다. 이는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보여준다.
    “(예수께서)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막 3:5) 주님은 이 눈물에 특별히 주의하신다. 그 눈물을 아주 좋아하신다. 주님의 영광이 해를 입을 때 우리는 눈물을 흘려야 한다. 우리 자신의 죄를 슬퍼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죄를 슬퍼하는 것이 더욱 큰 덕을 입증한다. 지옥이 두려워서 자신의 죄를 슬퍼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죄를 슬퍼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원리에서 나온다. 이 눈물은 장미에서 물이 떨어지듯 떨어지며, 이 눈물은 달콤하고 향기로우며, 하나님은 그 눈물을 병에 담으신다.
    (2) 다른 사람의 죄는 경건한 자로 하여금 죄를 대적하여 더욱 기도하게 하므로 선을 이룬다.
    만일 그런 불의의 정신이 널리 퍼져 있지 않으면, 아마 그런 기도의 정신도 마찬가지로 퍼져 있지 않을 것이다. 심한 죄는 강력한 기도를 일으킨다. 하나님의 백성은 시대의 부정에 대적하여, 하나님께 죄를 억제하여 주시고 죄를 부끄럽게 하여 달라고 기도한다. 그들은 기도로 죄를 무찌를 수 없다 해도, 죄를 대적하여 기도한다. 하나님은 이 기도를 친절하게 대하신다. 이 기도는 기록되고 상 받을 것이다. 우리가 기도에서 이기지 못한다 해도, 기도를 그치지 않을 것이다.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시 35:13)
    (3) 다른 사람의 죄는 우리로 하여금 은혜와 더불어 사랑가운데 더욱 거하게 하므로 선을 이룬다.
    다른 사람의 죄는 은혜의 광택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금박이다. 대립되는 것들은 서로를 돋보이게 한다. 추함은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한다. 불의한 자의 죄는 불의한 자를 더욱 추하게 한다. 교만은 꼴사나운 죄이다. 이제 다른 교만을 지켜보는 것은 우리를 더욱 겸손하게 사랑 가운데 있게 한다. 악의는 볼썽사나운 죄이다. 마귀의 모습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서 악의를 보면 볼수록 온유함과 자선을 더욱 사랑하게 된다. 술 취함은 볼꼴 사나운 죄이다. 사람을 짐승이 되게 하고 이성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술 취하는 모습을 볼수록 맑은 정신을 더욱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죄의 검은 얼굴은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더욱더 돋보이게 한다.
    (4) 다른 사람의 죄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더욱 강력하게 반대하게 하므로 선을 이룬다.
    “저희가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내가 주의 계명을……사랑하나이다.”(시 119:126,127)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법을 그렇게까지 대적하지 않았다면 다윗은 하나님의 율법을 그렇게까지 사랑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이 진리에 더욱 광폭할수록, 성도는 진리를 위하여 더욱 용맹을 떨친다. 살아있는 고기가 물살을 거스른다. 그처럼 조류가 밀려들수록 경건한 자는 밀려드는 물결을 더욱 거슬러 헤엄친다. 시대의 불 경건이 성도 안에 거룩한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죄가 없으면 죄를 거스르는 분노가 없다. 다른 사라의 죄는 숫돌처럼 우리에게 더욱 날카롭게 다가온다. 그 죄는 죄를 반대하는 우리의 열정과 분개를 더욱 불러일으킨다.
    (5) 다른 사람의 죄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진지하게 구원을 이루게 하므로 선을 이룬다.
    우리는 불의한 자가 지옥에 가려고 그렇게 몸부림치는 것을 볼 때, 하늘에 이르려고 더욱 노력하게 된다. 불의한 자는 죄 지을만한 일이 전혀 없어도 죄를 짓는다. 그들은 수치와 불명예를 당하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반대를 뚫고 지나간다. 성경이 그들을 대적하고 양심이 그들을 대적하고, 그 길에 화염검이 있어도 그들은 범죄 한다. 경건한 마음은 불의한 자가 금단의 열매를 먹으려고 미쳐 날뛰며 마귀에게 봉사하려고 지치도록 일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길에서 더욱 담대하고 활기를 얻는다. 그들은 폭풍우에 밀려가듯 하늘에 이를 것이다.
    불의한 자는 죄에 발이 빠른 암 약대이다. (렘 2:23) 그리고 우리는 신앙의 문제에서 뱀처럼 기지 않는가? 우리가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것보다 불순한 죄인은 마귀에게 더욱 봉사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천국에 가려고 재촉하는 것보다 불의한 자가 지옥에 가려고 더욱 재촉하지 않겠는가? 그들은 죄를 짓는데 지치지 않으며 우리는 기도하는데 지치지 않지 않은가? 우리에게는 그들보다 더욱 뛰어난 주인이 계시지 않는가? 덕의 길은 유쾌하지 않는가? 의무의 길에는 기쁨이 있고 그 끝에 하늘이 있지 않은가? 벨리알의 아들이 행하는 범죄의 행위는 경건한자로 하여금 보폭을 바꾸어 더욱 빨리 하늘로 달려가게 하는 박차이다.
    (6) 다른 사람의 죄는 우리의 마음을 볼 수 있는 거울이 되므로 선을 이룬다.
    우리가 흉악무도하고 불경건한 죄인을 보고 있는가? 우리 마음의 정경을 살펴보라. 하나님이 우리를 내버려 두시면, 우리도 그런 흉악무도한 자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은 행동으로 실천하고, 우리는 본성에 숨겨 놓은 것에 불과하다. 불의한 자의 죄는 봉화대의 불과 같아서 활활 타올라 빛을 발한다. 경건한 자의 죄는 깜부기불과 같다. 그리스도인이여, 추문의 불길 속으로 뛰어들지 않더라도 자랑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당신의 본성의 깜부기불에 많은 죄가 한데 모여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모진 뿌리를 갖고 있으며, 하나님이 그 능력으로 당신을 속박하거나 그 은혜로 당신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누구 못지않게 지옥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7) 다른 사람의 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더욱 감사하게 하므로 선을 이룬다.
    다른 사람이 전염병에 감염되어 있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이 당신을 거기서 벗어나게 하심을 얼마나 감사하는가! 더욱 감사하게 된다면, 다른 사람의 죄를 잘 이용하는 것이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그처럼 극심한 소동에 내버려 두지 않으실까? 오, 그리스도인이여, 하나님이 하필이면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에게 친절을 베푸셔야 하는지 생각해 보라. 왜 하나님은 자연의 돌 감람나무에서 그 사람이 아닌 당신을 빼내어 주셔야 하는가? 이리하여 당신은 거저 주시는 은혜를 얼마나 동경하게 되는가!
    바리새인은 교만하게 말했지만 우리는 감사하며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눅 18:11) 그처럼 우리는 풍성한 은혜에 감사하여, 다른 사람들, 곧 술 취하고 욕하고 안식일을 어기는 자들과 같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서둘러 죄를 짓는 것을 볼 때마다, 그런 자가 되지 않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우리는 격분한 사람을 볼 때 자신이 그렇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사단의 능력 아래 있는 것을 볼수록, 우리의 상태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감사하게 인정해야 한다.
    (8) 다른 사람의 죄는 하나님의 백성을 더 좋아지게 하는 수단이 되므로 선을 이룬다.
    그리스도인이여, 하나님은 다른 사람의 죄를 통하여 당신이 이득을 얻게 하실 수 있다. 다른 사람이 거룩하지 않을수록, 당신은 더욱 거룩해야 한다. 불의한 사람이 죄에 빠질수록, 경건한 사람은 기도에 더욱 전념한다.
    “나는 기도할 뿐이라” (시 109:4)
    (9) 다른 사람의 죄는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주므로 선을 이룬다.
    죄인이 없다면, 우리는 봉사할 기회를 가질 수 없다. 경건한 자들은 종종 불의한 자를 회개시키는 수단이 된다. 경건한 자의 사려 깊은 충고와 경건한 모범은 죄인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유혹과 미끼이다. 환자의 질병은 의사에게 선을 이룬다. 환자에게서 해로운 체액을 없앰으로써 의사는 부자가 된다. 이와 같이 죄인을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게 함으로써 우리의 왕관은 더 커지게 된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 12:3) 등불이나 가느다란 촛불이 아니라 별과 같이 영원히 비췬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가 우리의 선을 위하여 제압되는 것을 본다.

    2) 경건한 자가 자신의 범죄 함에 대하여 갖는 느낌은 그들의 선을 위하여 제압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죄는 선을 이룰 것이다. 경건한 자의 죄가 선을 이룬다고 말할 때는 조심해서 받아들여야 한다. 즉 죄에는 선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죄는 피를 더럽히고 심장을 오염시키고 탁월한 해독제가 없는 상태에서 죽음을 가져오는 독과 같다. 죄의 해로운 본성이 그와 같으므로, 죄는 치명적이며 저주스럽다. 죄는 지옥보다 악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강력하고 위압하는 능력으로 문제의 죄를 그 백성의 선으로 만드신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의 황금 격언이 있다. “하나님은 죄에서 선을 이끌어내실 수 없다면 죄를 결코 허용하시지 않을 것이다.” 성도에게 있는 범죄 했다는 느낌은 몇 가지 방식으로 선을 이룬다.
    (1) 죄는 경건한 자로 하여금 이생이 싫증나게 만든다.
    죄가 경건한 자 안에 있다는 것은 슬프지만, 그것이 짐이라는 사실은 선하다. 성 바울의 고통은 (이런 표현을 양해하라) 그의 범죄에 비하면 연극에 불과했다. 그는 시련을 즐거워했다 (고후 7:4) 그러나 이 극락조는 자신의 죄 때문에 얼마나 눈물을 흘리고 한탄했는가!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죄수가 족쇄를 차고 다니듯이 신자는 자신의 죄를 달고 다닌다. 신자는 벗어날 날을 얼마나 바라는가! 죄에 대한 이런 느낌은 선한 것이다.
    (2) 죄의 이런 본질은 성도가 그리스도를 더욱 귀하게 여기도록 한다.
    병든 사람이 자신의 병을 느끼듯이 자신의 죄를 느끼는 사람은 의원이신 그리스도를 얼마나 환영하겠는가! 죄에 쏘였다고 느끼는 사람은 놋뱀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겠는가! 바울이 사망의 몸에서 벗어날 것을 소리쳤을 때 그리스도께 얼마나 감사했겠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5) 그리스도의 피는 죄에서 구원하며 이 변덕스러운 기질을 치유하는 거룩한 연고이다.
    (3) 죄에 대한 이런 느낌은 다음 여섯 가지 구체적인 의무를 영혼에게 부가하는 기회가 되므로 선을 이룬다.
    ① 영혼은 죄를 느낄 때 자신을 살피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의식할 때 말씀의 촛불과 초롱을 취하여 자신의 마음을 살핀다. 그는 자신의 가장 나쁜 것을 알고자 한다. 몸이 병든 사람이 병의 가장 나쁜 것을 알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은혜를 아는 데 우리의 기쁨이 있지만, 우리의 부패를 아는 것에도 유익이 있다. 그러므로 욥은 기도한다
    .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욥 13:23) 스스로 우쭐하지 않고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 위하여 자신의 죄를 아는 것은 선하다. 우리의 죄가 우리를 찾아내지 못하도록 우리가 우리의 죄를 찾아내는 것은 선하다.
    ② 날 때부터 죄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를 겸손하게 만든다.
    가슴에 암이 있고 등에 혹이 있듯이 죄는 경건한 자에게 남아서 그를 교만하지 못하게 한다. 자갈과 흙이 바닥짐으로 실려 있어서 배가 뒤집어지지 않게 된다. 죄에 대한 느낌은 영혼을 안정되게 하여 헛된 영광으로 뒤집어지지 않도록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흠(신 32:5) 에 대하여 읽는다. 경건한 사람이 성경의 안경으로 자신의 운명을 보고 불신과 위선의 흠을 볼 때, 교만의 깃털이 떨어진다. 그 흠은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죄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 때 우리의 죄조차도 좋게 사용할 수 있다. 나를 겸손하게 만드는 죄는 나를 교만하게 만드는 의무보다 나은 것이다. 거룩한 브래드포드는 자신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공허한 위선자이다.” 후퍼는 “주여, 나는 지옥이며 주님은 천국이니이다.” 하고 말했다.
    ③ 죄는 하나님의 자녀를 스스로 판단하게 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스스로에게 판결을 내린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잠 30:2)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나, 자신을 판단하는 것은 선하다.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고전 11:31) 사람이 스스로를 판단할 때 사단은 활동을 벌이지 못한다. 사단이 성도에게 무엇을 비난할 때, 성도는 이렇게 대꾸할 수 있다. “사단, 나는 이런 죄를 지었다. 그러나 이미 그 죄에 관하여 스스로 판단했다. 그리고 양심의 저 아래 법정에서 스스로를 정죄했으니, 하나님이 저 위의 하늘 법정에서 나를 사면하실 것이다.”
    ④ 죄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여금 자기 갈등을 일으키게 한다.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갈 5:17) 우리의 삶은 나그네 생활이며 전투 생활이다. 두 근원사이에는 매일 이중적인 싸움이 있다. 신자는 죄에게 곱게 사로잡혀 있지 않을 것이다. 신자는 죄를 내쫓을 수 없을 경우, 죄를 억누르려고 할 것이다. 신자는 완전히 정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정복해 나가고 있는 상태이다. “이기는 그에게는”(계 2:7)
    ⑤ 죄는 하나님의 자녀를 스스로 살피게 한다.
    죄를 짓는 하나님의 자녀는 마음을 거스르는 자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을 주의 깊게 살핀다. 민감한 마음에는 주의 깊은 눈이 필요하다. 마음은 매일 공격받을 위험이 있는 성과 같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를 항상 보초가 되어 자신의 마음을 경계하게 한다. 신자는 추하고 터무니없는 일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엄격하게 바라본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세상 낙이 사라지도록 수문을 연다.
    ⑥ 죄는 영혼이 스스로 개혁하도록 만든다.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찾을 뿐만 아니라 죄를 내몬다. 한 발은 죄의 목을 누르고 다른 발은
    “주의 증거로 돌이킨다.”(시 119:59) 그래서 경건한 자의 죄는 선을 이룬다. 하나님은 성도의 질병을 약품이 되게 하신다.
    그러나 이 교리를 남용하지 말라. 나는 죄가 참회하지 않는 죄인에게 선을 이룬다고 말하지 않는다. 죄는 죄인에게 정죄를 이루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선을 이룬다. 그리고 경건한 자라면 죄를 사소하게 여기거나 죄에 대하여 대답해지기 위하여 이 교리에서 잘못된 결론을 내리지 않을 것임을 안다. 만일 당신이 그런 결론을 내린다면, 하나님은 그로 인하여 당신을 혼나게 하실 것이다.
    다윗을 기억하라. 그는 주제넘게 감히 죄를 범했는데, 그가 얻은 것이 무엇이었는가? 그는 평안을 잃고 그 영혼에 전능자의 두려우심을 느꼈다. 물론 그에게는 많은 낙이 있었다. 그는 왕이었으며 음악에 소질이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그를 위로할 수 없었다. 그는 “꺾으신 뼈” 때문에 하소연한다. (시 51:8) 그리고 그는 결국 검은 구름에서 나왔지만, 몇몇 신학자들은 그가 죽는 날에도 완전한 즐거움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견해를 말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죄를 선으로 돌이실 수 있다 하여 어떤 하나님의 백성이 쓸데없이 죄에 관여할 경우, 하나님은 그들을 정죄하지는 않으시더라도 이생에서 그들을 지옥 같은 지경에 빠뜨리실 수 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심한 고뇌와 영혼의 격동을 주셔서 두려움이 가득하게 하시며 거의 절망 상태에 이르게 하신다.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금하신 과실에 다가가지 못하도록 하는 화염검이 되게 하신다.
    지금까지 나는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나쁜 것들이 크신 하나님의 압도하는 손에 의하여 합력하여 성도에게 선을 이룬다는 것을 보였다.
    다시 한 번 말한다. 죄를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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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에 바르는 약 남에게 상처 줄 수 있는 말은 되도록 하지 마세요.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속으로 울고 있을지도 몰라요.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니까 무조건 이해해 주길 바라는 마음도 버리세요. 그건 이해가 아니라 강요랍니다. 힘들 때 누군가 위로해 줄 것을 바라지만 말고 혼자서 이겨내 볼 방법을 생각해 보세요. 그들이 당신의 고민보다 더 큰 고민을 안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리고 기억하세요. 단어 몇 글자로 이루어진 말들이지만. 이런 사소한 것들이 당신의 삶을 바꿀지도 모르니까요.
                  - 담아온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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