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권에 대한 나의 헌장
                          최송연       

                

                주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선과 악을 분별하여

                택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선택의 능력을
                부여해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나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내게 부여하신

               그 아름다운 선택권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부요한 자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 악을

               택해야만 한다면.

               나는 결코 그 길을 택하지 않겠습니다.


               차라리 가난하여 배고플지라도

               진실하게 살 수만 있다면

               나는 진실한 가난을 택하는 그 길에

               기꺼이 내 선택권을 사용하겠습니다.

 

               나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내게 부여하신

               그 아름다운 선택권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유익한 삶을 남기겠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남을 아프게 해야 한다면

               나는 결코 그 길을 택하지 않겠습니다.


               차라리 좀 어렵고 힘이 들어도

               그리스도가 영광 받으시는 길이라면

               내 자신이 아픈 것을 택하는 그 길에

               기꺼이 내 선택권을 사용하겠습니다.

 

              나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내게 부여하신

              그 아름다운 선택권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많은 것을 배우며 행하는

              지식인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교만을 위한 지식을 쌓고

              그 지식으로 남을 짓밟아야 한다면

              나는 결코 그 길을 택하지 않겠습니다.


             차라리 조금 못나고 부족해도

             겸손으로 남을 도와줄 수 있다면

             겸손의 풍성함을 택하는 그 길에

             기꺼이 내 선택권을 사용하겠습니다.

 

             나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내게 부여하신

             그 아름다운 선택권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안락한 삶을 누리겠습니다.


             그러나,

             세상 향락의 넓은 길을 가는 것이

             안락이라면,

             나는 결코 그 길을 택하지 않겠습니다.


            차라리 좁고 협착하여 눈물 없이는 갈 수 없는

            십자가의 쓰라린 길 일지라도,

            우리 주님께서 먼저 가신 그 길을 따르는 일에

            기꺼이 내 선택권을 사용하겠습니다.


            우리들의 선택권 저 너머에는

            사망과 생명, 두 곳이.

            결과로 놓여 있음도

            나는 분명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신명기 30:19)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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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이 되면

동부로부터 서부까지

형형색색의 온갖 단풍이 물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단풍명소마다

단풍을 즐기려는 관광객들과

단풍을 사진에 담으려는 사진사들로 붐비곤 합니다.

 

 

하지만

10월엔 이미

겨울이 시작되는 곳들도 있습니다.

 

 

산간지방과

고지대에 위치한

대다수의 지역이 바로 그러합니다.

 

 

미국 서부에서

10월에 겨울이 시작되는

대표적인 곳 가운데 하나가 브라이스 캐년입니다.

 

 

브라이스 캐년은

9월 말 즈음부터 이미

아침 최저 기온이 영하(32℉)로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0월 초가 되면

씨에라 네바다가 그러하듯이

브라이스 캐년에도 눈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낮에는 물론

따뜻할 경우도 있지만

아침과 저녁으로는 혹독하게 춥습니다.

 

 

겨울의 브라이스 캐년은

곳곳에 내린 눈으로 인하여

다른 계절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럼,

눈이 내린 직후의

브라이스 캐년의 아침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요?

 



 

15054214_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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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뜨기 전의

브라이스 캐년 모습입니다.

저 멀리 해가 떠오르기 전의 아침 노을이 보입니다.

 

브라이스 캐년에서

일출과 일몰을 찍는다는 말은

후두에 떨어지는 빛을 찍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브라이스 캐년에서는

역광이 아닌 순광으로 촬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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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빛이 후두를 넘어

평원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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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빛이

잠시 평원에 비췬 다음에

본격적으로 후두(Hoodoo)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15054214_5.jpg

브라이스 캐년에서

일출을 찍든지, 일몰을 찍든지

망원은 필수적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후두의 디테일한 모습을 촬영할 수 없습니다.


15054214_6.jpg

망원으로 당긴 후두의 모습입니다.


15054214_7.jpg

초보라 할지라도

적절한 스팟에 자리잡고

겨울의 브라이스 캐년을 촬영한다면

멋진 사진을 건질 가능성이 많아집니다.

 

물론,

일출과 일몰 포인트를 잘못 잡으면

고수라 할지라도 좋은 사진을 건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15054214_8.jpg

사진사가

찍은 브라이스 캐년의 사진과

일반인이 찍은 브라이스 캐년이 다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 물론

사진사는 일반인보다

사진 실력이 뛰어나기에

당연히 더 나은 사진을 찍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한 사실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사진사들이

사진이 가장 잘 나오는

황금 시간대에 사진을 찍기 때문입니다.


15054214_9.jpg

황금 시간대란,

사람에 따라 magic hour니

golden time이니 라는 말을 쓰곤 하는데

 

요약하면

해뜨기 전후 20-30분,

혹은 해지기 전후 20-30분 사이를 말합니다.

 

 

계절에 따라

여름은 조금 길어지기도 하고

겨울은 조금 더 짧아지기도 합니다.


15054214_10.jpg

아무리 멋진

브라이스 캐년이라 할지라도

한낮에 찍으면 밋밋하고 색이 칙칙합니다.

 

하지만

황금 시간대에 찍으면

붉은색에서 오렌지색, 분홍색,

황금색 등 시시각각으로 변화무쌍하게 색상이 변합니다.


15054214_11.jpg

그래서

사진의 고수라 할지라도

한낮에는 밋밋한 사진을 찍을 수 밖에 없지만

 

사진의 초보라 할지라도

황금 시간대에는 멋진 사진을 건질 수 있습니다.


15054214_12.jpg

그런데 문제는

황금 시간대에 사진을 찍으려면

아침 일찍, 때로는 새벽에 일어나야 하고

 

브라이스 캐년의 경우는

추위를 무릅써는 고생을 해야

이런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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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세상에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과 같은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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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러하듯이

사진도 고생하고 수고해야 좋은 작품을 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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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r's Hammer 옆에 있는

Three Brothers의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은

Three Sisters라도 부르기도 하는데

brother이든 sister이든 사진을 찍는데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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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린 직후에

날씨가 화창하게 개이면

브라이스 캐년은 참으로 눈부신 장면을 연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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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스 캐년의

겨울 설경을 촬영하는 외로운 사진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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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점에서의 촬영을 마치고 다음 스팟으로 이동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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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뜬 후에

30분 정도가 지나면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아름다운 빛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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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글 : 주안(POWER21)



[WCC 바로알기 연속기획] (10)WCC의 교회론 비판
안인섭 교수(총신대·교회사)
2013년 09월 10일 (화) 04:19:13 안인섭 교수 ...@kidok.com
출처: 기독신문

 
교회의 ‘가시적 일치’에 집착, 본질 뒤바꾸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이고 신비적 연합’ 간과, 진리와 교회 공동체 순결성 수호못해
복음이 내포하는 사회적책임 배타적으로 강조, 교회를 정치적 압력 단체로 전락시켜

 

   
  ▲ 안인섭 교수  
역사적으로 교회는 진리 수호와 교회 일치라는 양자 사이의 긴장 속에서 존재해 왔다. 그런데 근래 한국에서는 교회 연합 운동인 WCC에 의해서 진리가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분열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런 역설적인 상황 속에서 본 기고는 1948년 제1차 암스테르담 총회 이후 발전해 온 WCC의 교회론의 신학적 특징들을 분석하면서 개혁주의 입장으로 비판적 평가를 제시하고자 한다.
 

1. 선후가 전도된 교회의 본질: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이 아닌 가시적인 일치를 목표함

WCC는 제1차 암스테르담 총회에서 교회들의 협의회(a council of churches)요 그리스도안에서의 일치를 표현하는 교제를 강조했다. 그러나 WCC는 하나의 사도적인 신앙과 세례와 성만찬을 공유하고 있는 “협의회적 교제” 안에서의 일치를 주장하면서, 교회의 본질을 교회의 가시적인 일치(the visible unity of the church)로 바꾸어 버리고 말았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에 근거하며, 그 결과로 성도들의 연합이 뒤따른다. 교회 연합의 본질적인 속성은 영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와 몸 되는 그의 성도들과의 신비적인 연합이라고 하는 교회론의 가장 근원적인 내용을 결여한 채, WCC는 교회의 가시적이고 제도적인 일치를 앞세우고 있기 때문에 “선후가 전도된” 교회론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2. 하나님의 선교에 기초한 성만찬론

1982년 페루의 리마에서 완성된 BEM문서(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의 약자를 따서 BEM으로 불리움)는 WCC의 성만찬론을 가시적인 교회의 일치와 관계시키면서, “성만찬을 거행하는 자체가 교회가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한다는 증거”라고 밝히고 있다. WCC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후컨데이크(J.C. Hoekendijk)에 의해서 주창되었던 성만찬의 종말론적인 관점을 도입했다. WCC는 성만찬을 ‘세상’ 안에서 왕국을 대표하는 개념으로 보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성찬을 순수하게 교회론적인 사건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WCC의 BEM문서는 성찬을 그리스도 안에서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통해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축제라고 확대 해석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하나님의 선교라는 WCC의 신학이 발견된다.

 

뿐만 아니라 WCC는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를 실체와 상징의 구별 없이 강조함으로 인해서 칼빈과 종교개혁자들이 극렬하게 반대했던 그리스도의 계속적 희생을 연상하게 한다. 결국 WCC의 성만찬론은 종교개혁의 전통을 벗어났으며, 사회적이고 종말론적인 차원을 지나치게 강조하였는데, 그 근저에는 “하나님의 선교” 신학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3. 사회 구원적인 선교관

1961년 WCC 뉴델리 총회에서 IMC(국제선교협의회,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가 WCC와 통합되면서 WCC 산하 세계 선교 및 전도국(The Division on World Mission and Evangelism)이 되었고 이것이 WCC의 선교관을 규정하게 되었다. 1968년 WCC 제5차 웁살라 대회에서 “하나님의 선교”는 그 절정에 달하여 선교는 불의와 가난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이 무렵에 남미의 해방신학과 한국의 민중신학의 등장하게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1972년 방콕 선교대회에서 선교의 방향은 불의와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에 초점이 놓여졌다. WCC의 이런 선교관과 사회관은 1980년 멜버른 선교대회로 이어져 선교는 가난한 자를 위한 사회참여로 진술되었다. 뿐만 아니라 변혁된 WCC의 선교관을 대변한다고 하는 중요한 문서인 “선교와 전도: 에큐메니칼 확언”(1982년) 이후에도 WCC 선교관은 여전히 성경적이고 전통적인 선교관과 사회관과는 거리가 멀며, 사회 구원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1960~70년대 이후 WCC의 선교관은 해방신학적인 맥락으로 이해되었으며, 이것은 교회의 전통적인 선교관과는 다른 관점이다.


4. 정치학적인 행위로 전락한 교회의 복음 선포

WCC에 의하면 예수를 왕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서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투쟁하면서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를 받아들이며, 예수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WCC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린당하고 무시당한 모든 사람들과 연대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에 불과하다. WCC에 의하면 교회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가난한 자들을 물질적인 가난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의미이다.

 

과거 보수적인 교회가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자들을 위한 신학적 이해를 깊게 하지 못했던 면은 물론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WCC는 예수 그리스도를 오직 가난한 계급만을 위한 그리스도로 만들었다. 복음이 내포하고 있는 사회적 책임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다가 성경에서 제시하는 복음 선포를 이탈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과 범위를 제한시키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WCC는 교회를 그 본질에서 이탈하여 정치적인 압력을 행사하는 단체로 전락시켰다는 화란 캄펜신학대학교의 신학자 클라스 루니아 교수의 평가는 매우 적절하다. WCC는 죄로부터의 구원이라고 하는 전통적인 복음 선포에 대한 이해를 간과하고 있다. 사회 정의를 위한 측면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복음을 사회 불의를 일소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인간화로 대치시켜 버림으로 복음의 본질을 희석시키고 말았다.

 
5. 타 종교에 대한 종교다원주의적인 태도

인간에게는 종교의 씨앗이 있어서 절대자를 향하게 되어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는 당연한 현상이다. 문제는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 향하는 신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어떤 대상, 즉 우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WCC는 교회가 타 종교를 가진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기 보다는 종교간의 대화와 연합을 강조하고 있다. WCC는 예수 안에 구원이 있다고 말하지만, 이 그리스도의 구원이 다양한 종교적인 신념을 가진 자들에게 미칠 수 있는가의 문제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한 확실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결국 종교 다원주의적인 입장으로 가는 것이다. WCC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유일성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WCC 교회의 선교는 결국 종교간의 대화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6. 나오는 글: 새로운 패러다임의 개혁주의 연대의 긴요성

WCC의 교회 일치는 성경적인 진리와 역사적인 신학적 토대 위에서 이루어 지지 못했다. WCC는 교회의 본질을 가시적인 일치로 이해해 왔기 때문에 그보다 전제되어야 할 머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이 되는 교회와의 영적이고 신비적인 연합이 간과되고 말았다. 이것은 선후가 전도된 일치일 뿐이다. 교회는 성경에서 제시하는 진리를 담지하고 또 그것을 보호해야 하는데, WCC는 교회의 일치를 획득하기 위하여, 진리와 교회 공동체의 순결성을 수호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지 못했다. 또한 WCC에서 말하는 복음 선포는 지나치게 사회적-정치적 차원에 경도되어 있어서 성경적이고 전통적인 교회의 선교 개념과 달랐다. 결국 WCC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한 확실성을 가지고 있지 못함으로 종교 다원주의적인 입장으로 귀결되고 말았던 것이다.

 

교회의 진리 수호와 교회 일치라는 명제는 역사적으로 동전의 양면과도 같았다. 머리 되시는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서로 연합해야 한다는 것과, 교회가 세상에서 복음 선포와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명제이다.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개혁신학 위에서 이루어지는 교회 연합 운동의 필연성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WCC 교회론을 비판하는 글을 마무리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며 역사적 개혁주의의 신학적 유산을 공유하는 신학자와 목회자 뿐 아니라, 기독인 학자 및 기독 전문인까지 포함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연대 운동이 현 시점에서 절실히 요청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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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WCC 바로알기 연속기획] (9)WCC의 성경관 비판
황성일 교수(광신대학교 구약학)
2013년 08월 28일 (수) 09:27:12 기독신문 ekd@kidok.com
출처: 기독신문

 
“성경은 인간의 작품” 주장, 절대 기준 포기했다

‘수많은 교회 전통 중 하나에 불과’ 인식, 하나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권위 부정
신학적 다원주의 지키기 위해 ‘오류없는 하나님 말씀’이란 중요한 고백 버렸다

 

   
  ▲ 황성일 교수  
들어가는 말

2009년 8월 31일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이하 WCC로 표기) 중앙위원회는 2013년 WCC의 제10차 총회 장소를 한국 부산으로 결정했다. 이 결정이 있은 지 이미 4년이 지났고, 총회 개최를 두 달 남짓 남겨 놓고 있다. 한편 WCC 준비위원회 측에서는 총회를 정확히 100일 남겨둔 때인 지난 7월 22일 서울 도륜동의 종교교회에서 기도회를 열고 총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확신한다고 선언한 바 있었다. 그러나 예장 합동측 교단을 위시한 보수주의 기독교계에서는 지금까지 WCC 총회의 부산 개최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신문 지상을 통해서 다시 한 번 WCC의 신학, 여기서는 특히 그들의 성경관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간략히 지적하는 것도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1. WCC는 성경을 여러 전통들 중의 하나로 간주한다.

1963년 몬트리올에서는 WCC의 산하 기구인 ‘신앙과 직제’ 제4차 대회가 ‘성경, 전통, 전통들’이라는 주제로 개최되었다. 여기서 작성된 보고서에 따르면 복음이란 대문자로 시작하는 전통(Tradition)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을 가리킨다. 그러면서 이 보고서는 성경은 복음에 대한 전승의 초기 단계에서 기록된 소문자로 시작하는 전통(a tradition)이며 교회의 많은 전통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 보고서는 복음(Tradition)과 성경(a tradition)을 구분함으로써,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린다. 심지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창고라고 표현함으로써 성경 자체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라고 말한다. 이것은 성경이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WCC의 주장과는 달리 인간의 전통에 권위를 돌리지 않는다. 성경은 명료하고 충족하기 때문에 다른 전통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성경의 권위는 인간의 전통에 의존을 의존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성경에 추가하거나 성경을 악용하는 것에 대해 책망하셨고, 모세와 요한도 성경 기록에 가감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따라서 성경은 신앙과 행위의 유일하고 오류가 없는 법칙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2. WCC는 성경이 인간의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1) WCC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인 것을 믿지 않는다. 예를 들어, 1971년 루뱅에서 신앙과 직제 위원회에 의해 작성된 보고서는 영감이 성경적 권위가 출발하거나 기초할 수 있는 논거가 아니라, 신앙의 결과물로서 인정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루뱅 보고서는 성경의 메시지가 그 스스로 권위 있는 것으로 입증되는 체험이 있을 때 “성경이 영감 되었다”라고 고백해야 하며, 성경의 영감을 미리 전제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율법주의적 견해로 나아갈 뿐이라고 말하면서, “성경이 영감 되었다면, 왜 바질, 어거스틴, 루터 또는 몇몇 현대 저자들 역시 영감 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가?”라고 질문한다.


성경의 영감성이 인간의 경험에 따라 좌우된다는 그들의 주장은 심각한 잘못이다. 성경의 영감성은 신앙생활의 결과가 아니라, 출발이며, 전제가 된다. 또한 성경이 영감 되었다면 다른 경건한 성도의 저작들도 영감 되어야 한다는 말은 WCC가 성경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권위를 부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을 통해 오류 없이 기록된 책이며, 신앙과 삶에 있어서 유일한 권위를 가진 책”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성경의 사본들을 만든 서기관들이 아니라, 성경 각 책의 저자들이 영감 되었다는 사실을 믿는다. 성경의 각 책들의 원본은 우리가 영감이라고 부르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감동과 인도에 의해 기록되었다. 또한 영감의 범위에 관하여 성경은 모든 부분에 있어서 완전히 참되며, 그것의 계명에 있어서 완전히 권위적이라고 믿는다.

 

2) WCC는 성경이 감동을 줄 때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말한다. 성경 자체의 영감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성경의 어떤 구절이 사람에게 “부딪혀 올 때” 그것이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주장한다. 루뱅 보고서는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하는 수단이며 그리하여 사람들을 신앙으로 인도할 수 있게 하는 통로라고 말한다. 또한 그 보고서는 성경 자체에 권위가 있지 않다고 말한다. 즉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점에서만 성경이 권위를 갖는데, 그 권위는 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WCC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을 수단으로 하여 증언되고 들려지지만,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여 그들에 따르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만드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사실상 WCC는 실존적 체험에 의해서 성경이 계시와 진리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성경을 자신의 판단과 감정 아래에 두는 바르트적이며 신정통주의적인 성경관에 해당한다. WCC는 인간의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성경이 어떤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을 때에만, 성경의 영감과 가치를 인정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 그 권위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믿고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성경의 권위는 어떤 사람의 체험이나 어떤 교회의 증거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저자이시요,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달려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감정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벧후 1:19~21, 딤후 3:16, 요일 5:9, 살전 2:13)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있건 없건 간에 성경은 권위를 갖는다. 심지어 사람이 성경을 믿든지 안 믿든지 예수를 믿든지 안 믿든지 상관없이 성경에는 권위가 있다.

 

3) WCC는 성경을 다른 인간의 문학 작품들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 1967년 브리스톨에서 진행된 신앙과 직제 위원회 회의에서 그들은 성경을 다른 문학작품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경은 오랜 기간 동안 기록과 재기록과 해석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역사적 산물이므로, 역사비평이 필수적이다. 또한 성경은 일련의 문학적인 자료들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여타 문학적 자료들의 연구에 사용되는 방법들과 동일한 방법에 의해 연구되어야 한다. 따라서 문학비평이 필수적이다. 성경은 다양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데, 서로 다른 내용들은 상호보완적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서로 모순될 수 있다.”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성경을 다른 문학 작품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연구한다는 것은 큰 잘못이다. 성경은 저자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오류가 없이 기록한,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라는 믿음에 근거하여 연구되어야 한다. 성경은 오랜 시간 동안 수집 혹은 편집되고 수정되어 온 인간의 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 저자를 통하여 오류 없이 자신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성경 안에는 서로 모순되는 내용이 없다. 비록 성경이 긴 시간 동안 다수의 저자들에 의해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과 사상에 있어서 통일되어 있다.

   

3. WCC는 신구약 66권을 유일한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루뱅 보고서는 “정경적인 것과 비정경적인 저작들 간의 이러한 구분선은 엄격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훨씬 더 유동적인 경계선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WCC가 정경과 비정경 사이의 구분을 유동적인 것, 즉 변화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이유는 교회들이 서로 다른 정경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들은 헬라어 구약 성경(칠십인경)과 로마 가톨릭이 정경으로 받아들이는 외경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외경은 정경이 될 수 없다. 유대인들과 초대 교회가 정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외경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교회가 정경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특히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외경을 성경의 일부로 인용하거나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우리가 외경을 정경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실제적으로 외경은 역사적 진실성에서나 성경의 다른 책들과의 일관성에 있어서, 그리고 도덕적 표준에 있어서 영감된 성경으로서의 권위와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한편 한국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2009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개최한 에큐메니칼 신학강좌에서 성경을 정경이라는 권위 속에 가두는 것이 잘못이며, 성경의 본문은 가감될 수 있어야 하고, 성경 무오설을 폐기하여 성경에 대한 유연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되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성경을 가감할 수 없다는 개혁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조차 무시하고 있으며, 성경 무오설을 신봉하는 것을 어리석은 행동으로 간주하고 있다.
    

맺는 말

WCC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다양한 교회 혹은 교파들이 신학과 교리에 있어서 분명하고 절대적인 기준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인권과 복지라는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교단과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종교인들이 서로 협력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일치는 다양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일치이며, 이것은 신학적 다원주의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이것의 당연한 결과로서 그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가장 중요한 고백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들은 성경을 인간의 문학 작품들 중 하나로 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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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 바로알기 연속기획] (8)WCC의 종교다원주의 비판
정준모 목사(총회장·성명교회·대신대 교수)
2013년 08월 23일 (금) 09:31:01 기독신문 ekd@kidok.com
출처: 기독신문

 
‘평화’ 주창하며 다원주의 꽃밭 배회하고 있다

1961년 3차 WCC총회서 제기…일관되게 급진적·혼합적 종교다원주의 견지
타종교 존중이란 휴머니즘 표방하며 그리스도의 유일 구원관 파괴해 버렸다

 

   
  ▲ 정준모 목사  
1 서론-불꽃 튀는 WCC 신학 논쟁: 2013년도 제 10차 WCC 총회가 대한민국 부산 개최로 선정된 이후 한국 교계의 신학적 뜨거운 감자에서 불꽃 튀는 신학적 논쟁을 벌이고 있다. 2013년 WCC 한국 총회 개최를 앞두고 한국 교회 전체가 양분되는 진통을 겪고 있다. 문제가 되는 WCC 신학 논쟁 중 가장 심각한 이슈는 바로 WCC 종교다원주의 문제이다. 다원화 사회에 다원주의를 따르고, 타종교를 존중한다는 명제하에 절대 유일한 진리를 파괴하고 훼손시키는 통탄할 일이 자행되고 있다. WCC의 신학적 패러다임과 정체성을 바로 파악하고 그들이 발표하고 주장하는 문서들을 살펴보면 분명코 종교다원주의 길을 활짝 넣어 놓았고 종교다원주의 꽃밭을 배회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2 WCC 진영 한국 신학자의 일반적 주장들: 자유주의 한 신학자는 ‘최근 한국교회 내부의 WCC 비판의 근거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란 논문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식 논지를 던져 그의 신학적 입장을 밝히고 있다.

 

(1)WCC는 단일교회를 추구하는가? (2)WCC는 용공적인가? (3)WCC는 사회구원만을 주장하는가? (4)WCC는 정치 단체인가? (5)WCC는 선교에 무관심한가? (6)WCC는 다원주의를 표방하는가? (7)WCC는 교회를 분열시켰는가?

 

그의 입장은 “한국에서 WCC비판은 WCC공식문서나 학문적 주장에 기초된 신학적인 것이 아니라 50년대, 60년대에 시작된 이야기들이 확인과정 없이 반복되거나 확대 생산되었다고 주장하고 또한 WCC에 대한 비난은 신학적인 것도 있지만 정치적인 것이 훨씬 더 크게 작용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WCC에 반대하는 신학적 정체성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WCC 총회가 단순한 ‘이웃집 잔치’가 아니라 불쾌하고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한 그는 “WCC에 대한 한국교회 일각의 비난의 출처는 학문적 연구나 실제적 사실에 근거하기 보다는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과 미국 근본주의 단체의 반WCC 선전에 크게 작용했고 WCC활동에 대한 진지하게 살펴보는 기회가 없이 부정적 선입견관을 교육해 왔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그는 한국교회의 WCC 반대 정서를 학문적 연구 결여, 한국장로교 분열, 미국 근본주의 영향, 정치적 영향, 유치장소 불만, 부정직한 선입관, 흑색선전 등의 이유를 들고 있다. 그러나 WCC에서 보고된 문서를 중심으로 종교다원주의에 혼미된 주장들을 소개하고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3 WCC와 종교다원주의: WCC에 가입된 모든 회원 교회들이 다 종교다원주의를 주창하거나 따르지는 않는다. 또한 어떤 학자는 WCC는 “어디에서도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하거나 긍정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WCC는 세계 교회 연합과 일치의 목적을 위해 종교다원주의를 따를 수밖에 없다. WCC 헌장이나 집행자들이 공식적으로 종교다원주의를 공공연하게 주창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총회 및 각종 분과 위원회에서 매우 급진적인 종교다원주의 신학사조를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종교다원주의에 눈을 뜬 WCC-제3차 1961년 뉴델리 총회
종교다원주의 운동은 1961년 뉴델리의 제3차 WCC 총회에서 인도 신학자 더바난단(P. Devanandan)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이 총회는 타종교를 ‘다른 신앙’으로 표현하면서 하나님이 “다른 신앙을 통해서 말씀하시며, 성령이 역사하는 것을 긍정”하였다. 이 총회에서 더바난단은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다’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였다. 이 강연에서 그는 비기독교적인 종교들을 “성령의 창조자 사역”에 대한 응답이라고 해석하고 복음을 비기독교적인 철학적 신앙의 개념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71년 힌두 배경을 가진 인도의 자유주의 신학자 사마르타(Stanley Samartha)에 의하여 주도되고 종교 혼합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2.종교다원주의에 미소짓는 WCC-제4차 1968년 웁살라 총회
WCC가 타종교와의 대화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부터이다. 왜냐하면 WCC는 이때 처음으로 아잘톤(Ajaltoun) 회의에 참석한 기독교(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와 무관한 타종교인들(무슬림, 힌두교도, 불교도들)과 대화를 시도했으며 이것을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살아 있는 신앙들의 사람들 간의 대화”라 불렀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타종교를 “다른 신앙들”(other faiths)라고 불렀으나 이 때 이후로 다른 신앙들은 “살아 있는 다른 신앙들”(other living faiths)로 불리게 되었다.

 

3. 종교다원주의에 박수를 보내는 WCC-제5차 1975년 나이로비 총회
1975년 WCC 총회의 일각에서 타종교에 대한 급진적 견해가 등장하였다. 제3분과는 타 종교 및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의 공동체를 논하면서 ‘어떤 사람’은 그것을 “보다 확대된 에큐메니즘”이라 묘사하자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당분간” ‘에큐메니칼’이라는 용어는 기독교인들 사이의 대화로 국한하고 그보다 더 확대된 대화는 종교간 (inter-religious) 대화로 부르자고 결정했다. 1975년 나이로비에서 모인 WCC 총회에서 총회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는 해방하고 연합한다”는 주제 아래 강연한 토마스(M. M. Thomas)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혼합주의”를 제안한다. 토마스(M. M. Thomas)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혼합주의”에 대해 종교 간의 대화를 통해서 수행되며, 문화와 종교가 서로 침투하는 “거짓된 혼합주의가 아니라, 비판적인 사고를 통해서 교리적인 차이를 초월하고,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기초로 한 그리스도 중심적인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였다.

 

4. 종교다원주의에 열광하는 WCC- 제6차 1983년 벤쿠버 총회
1983년 7월 캐나다 밴쿠버에서 개최된 WCC 제6차 총회에는 나이로비보다 3배나 많은 15명의 타종교 대표자들이 참석하였다.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이란 주제하에 모인 전체회의에는 캐나다 원주민, 불교도, 힌두교도, 이슬람교도 그리고 유대주의자 등이 각자의 입장을 발표함으로 종교다원주의적 신론을 추구하였다. 또한 WCC 출범 이후 처음으로 리마 성만찬 예식서를 따라 공동성찬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범교회적 차원과 교회 일치의 차원을 넘어 범종교적, 종교다원주의적 방향으로 선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캐나다 인디언의 토템 제막식, 한국의 무당의 강신굿도 행하는 범신론적 성만찬식이 거행되었다.

 

5. 종교다원주의에 포옹하는 WCC- 1990년 바르 선언문
WCC의 문서들 중 가장 현저하게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이 드러난 것은 1990년 CWME에 의해 작성된 바르 선언(Baar Statement: Theological Perspective on Plurality)이다. 이 선언을 시점으로 WCC는 종교다원주의를 본격적으로 포용, 열애하면서 신학화하는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바르 선언문은 그 이전까지 견지해왔던 기독교 우월적 상대주의를 과감하게 포기하고 기독교 평등 상대주의를 표방하는 내용들로 가득찼다.

 

6. 종교다원주의 영에 혼미된 WCC-제7차 1991년 캔버라 총회
1991년 2월 호주 캔버라에서 개최된 제7차 WCC 총회에서 한국의 여성신학자 정현경은 ‘오소서 성령이여, 온 우주를 새롭게 하소서’라는 주제 강연에서 초혼(招魂)굿의 향연을 벌였다. 그녀는 (1) 호주 원주민 무용수와 함께 춤을 추면서 영성을 표현하려 했다. (2) 여러 종류의 혼 또는 영을 부르면서 무속적 정령을 성령과 동일시했다. (3) 성령을 동양의 기(氣)로 표현하면서 성령의 형상을 관음보살의 형상과 연계시켰다. 여기서 정현경은 기독교의 성령을 한국의 무당의 영과 일치시키는 혼합주의 성령관을 피력하고 있다.

 

7. 종교다원주의를 위한 새 옷을 갈아입는 WCC-2011년 6월 제네바 선언문
2011년 6월 28일 제네바 선언문은 선교적 차원에서 타종교와의 대화 원리에 대한 지침서를 발간하였다. WCC가 함께 이 선언문 작성을 위해 지난 5년간 동참한 교단과 교파을 보면 결국 신학적 일치가 없는 채, 비가시적 교회론을 배제한 채. 가시적 교회론 입장에서 단지 전도를 위해 전도전략의 원리와 전도 있으나 이 문서에서 다분히 포괄적 종교다원주의 색체를 띠고 있음을 직시할 수 있다.


4 결론: 현재의 WCC의 논란은 정치적 이슈가 아니라 신학적 문제이다. WCC 신학의 문제 중 제일 혼란스러운 문제가 종교다원주의 문제이다. WCC가 노골적으로 “우리는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한다”라고 선언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WCC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살펴 볼 때, 종교다원주의의 신학적 매력에 흠뻑 젖어있다. 인본주의 신학원리 속에 종교적 평화주의를 주창하면서 종교다원주의 꽃밭을 배회하고 있다. 타종교 존중이란 휴머니즘을 표방하면서 그리스도의 유일 구원관을 파괴해 버렸다. 종교다원주의는 교회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신학적 적수이며 신앙적 배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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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 바로알기 연속기획] (7)WCC의 선교관 비판
박윤만 교수(대신대 신약학)
2013년 08월 16일 (금) 09:35:47 박윤만 교수 ...@kidok.com
출처: 기독신문

 
‘하나님의 선교’ 이름 아래 사회운동으로 변화

1952년 호켄다이크에 의해 시작… ‘샬롬’ 중시하는 인본주의적 선교관 강조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증거’ 우선…복음과 사회개혁 동일시하는 입장 바꿔야

 

   
  ▲ 박윤만 교수  
1.WCC 선교관:‘하나님의 선교’

WCC의 선교관은 ‘하나님의 선교’(Mission Dei)로 대변된다.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1952년 독일 빌링겐에서 열린 국제선교협의회(IMC)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 대회의 주제 강연을 맡은 화란의 선교학자 호켄다이크(J.C. Hoekendijk)는 선교를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보냄 받은 교회가 해야 하는 사역으로 이해한 전통적인 선교관에 문제를 제기한 후,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을 선교의 주체로 보고 교회는 그 선교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핵심이라 주장했다. 호켄다이크에 따르면 하나님은 교회 안팎에서 ‘구원’를 이루어 나가신다고 주장하면서 ‘구원’을 ‘샬롬’으로 간주한 후, ‘샬롬’을 하나님과의 화해에 기초를 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런 ‘샬롬’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 곧 선교라 주장한다. 하나님의 이런 ‘샬롬’ 사역은 교회 밖에서도 이루어지기 때문에 교회는 선교사역의 주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하며, 다만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여 세상 사건에 변화를 가져오도록 하는 여러 도구들 중 하나로 쓰임 받을 뿐이라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빌링겐 선교대회에서 일어난 선교에 대한 패러다임 변화는 형식상으로 보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선교를 그리스도의 교회와 상관없이 사회적 활동과 동일시 하게 되는 인본주의적 선교관의 길을 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2. ‘하나님의 선교’ 개념의 여러 발전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빌링겐 선교대회 이후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 발전된다. 1963년 12월 8일~19일 열린 멕시코 대회는 WCC의 선교관이 ‘하나님의 선교’라는 이름 하에서 사회운동의 성격으로 변화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흐름은 이후 열린 제4차 WCC의 웁살라 대회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 대회에서 선교는 인간화(humanization)로 이해되었고, 하나님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예를 들면, 건강과 사회봉사, 청소년을 위한 활동, 정치적 관심을 가진 집단이 하는 일, 도시갱생 프로그램, 인권옹호 등)이 선교라고 이해한 것이다. 교회가 교회이기 때문에 어떤 구별된 선교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더 이상 이 대회에서 거론될 수 없었다. 다만 교회는 선교의 목표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성을 지적하고 그 인간성을 다른 인류에게 심는 것을 그것의 임무로 이해해야했다. 보쉬(David Bosch)가 적절하게 지적한 것처럼 그 당시 에큐메니칼 진영이 인간과 역사에 대해 얼마나 순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회였다. 즉 역사와 인간 안에 내재한 악과 그것을 제거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어떤 언급이 없이 단지 사회 정치적 활동을 계획하면 어떠한 계획이든지 성공할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이 만들어낸 선교이해가 그곳에서 펼쳐졌다.

 

이후 1983년 캐나다 벤쿠버 대회가 열리기 직전 1982년 7월 WCC 중앙위원회에서 ‘선교와 전도: 에큐네니칼 선언’ 이름으로 공포된 문서의 두 번째 주제, ‘삶의 모든 영역을 향한 복음’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회개를 뛰어 넘어 사회구조적 변혁으로 가야 함을 밝히고 있다. 만일 한 개인의 회심이 바른 것이라면 그 회심은 사회구조악의 변화에 헌신함으로 그것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그 문서는 그러한 사회운동은 회심의 결과가 아니라 바로 회심자체의 본질적인 구성요소임을 선언한다. 여기서 우리는 사회구조적 변화를 구원으로 보는 ‘하나님의 선교’의 입장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WCC는 다양한 기독교 전통으로 온 교단들이 함께 한 연합회라는 태생적 성격으로 인해 선교관에서 혼합적인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흐르고 있는 주된 선교관은 호켄다이크에 의해 시작된 ‘하나님의 선교’ 즉 사회, 정치, 경제적 구조악들에서 사람을 해방시켜 봉사의 삶을 실천하게 하는 것을 그 뼈대로 삼고 있다. 이러한 WCC의 선교관은 성경 보다는 현대 사회문화와 인본주의적 철학을 그 토대로 삼으면서 발전된 관점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삶의 모든 규범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계시로 여기고 있는 이라면 성경에 뿌리를 둔 선교관 정립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3. 개혁주의 입장에서 본 ‘하나님의 선교’의 두 가지 문제

그렇다면 개혁주의는 WCC의 ‘하나님의 선교’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도록 하는가? 두 가지가 밝혀져야 한다.

 

첫째, ‘하나님의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언급하지만 한 인간이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책임 있는 회심에 대해 우선권을 두지 않는다. 웁살라 대회로부터 나온 문서는 새 인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인간은 누구나 각각 새 인류의 한 식구가 되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해 하신 일방적인 화해 선언을 세상이 맛보게 하고 그 샬롬에 참여하게 하는 것을 선교의 핵심으로 삼는다. 이러한 선교관에 따르면 교회의 주된 임무는 이미 세계가 구원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하지만 개혁주의가 따르고 있는 성경적 선교관은 하나님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성취되었기 때문에 복음전파로서 선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이 우선이 되어야 함을 가르쳐 준다. 따라서 사회개혁과 정치적 불의 그리고 모순적인 경제 제도를 고쳐나가는 일 그 자체를 복음전하는 것과 동일시하는 WCC의 ‘하나님의 선교’는 앞뒤가 바뀐 사역을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승리를 가져오신 중보자 예수에게 개인적으로 회심을 하여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이끌기 보다는 여전히 사탄과 이데올로기의 지배하에 놓여 있는 사람에게 복음을 따라 살아가도록 요구하는 모양새를 가질 수밖에 없다.

 

물론 선교현장에서 복음전파와 사회복지 실현 중 어느 것이 우선적으로 실행되어야 하는지를 논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성경이 복음전파와 선교에 대해 가르치는바 자체가 바뀔 수는 없다. 선교에 있어서 ‘복음전파’는 하나님의 승리를 가져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세주로 고백하도록 하는 사역이어야 하며, ‘하나님의 선교’가 주장하는 사회개혁과 정치적 프로젝트는 복음전파의 열매로 이해되어야 한다. 

 

둘째, 에큐메니칼 진영의 선교관의 이러한 문제는 근본적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이유로 시작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복음을 이 땅에 선포하기 위해 하신 싸움이 온 세상을 부패로 이끄는 죄 즉 사탄과의 싸움이었다는 사실에 별다른 주목을 하지 않는다.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도 그리스도를 이야기 하지만 그리스도는 사회개혁가의 모델로 이해되며, 죄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죄는 압박과 착취 불평등 가난 기아와 그것을 일으키는 사회 구조적 모순과 동일시되어 버린다.

 

성경적 선교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시고 선포하신 예수께서 싸우신 대상이 불평등과 가난 그리고 기아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가져온 더 근본적인 원인 즉 죄였다는 것(막 3:20-30; 히 2:14)을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가져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주되심의 고백이 모든 사회적 프로그램과 복지(사회선교)를 가능케 하는 근본이라는 믿음은 선교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기초위에 올려놓으려는 모든 이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핵심임이 분명하다.


4. 나가는 말

‘하나님의 선교’의 공헌은 있다. 선교의 주체를 삼위하나님으로 보는 것이다. 당신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쉬지 않고 일하시는 성부 하나님, 그 피조물을 재창조/구속하시고자 성육신 하신 성자 하나님, 그리고 승천하시어 성부 하나님 우편에서 성자를 통해 이 땅에 보냄을 받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오늘도 선교는 진행된다는 사실을 적절하게 지적했다.

 

사실 교회는 선교명령을 받은 교회 자신이 영혼을 구원하고 있다는 오만한 태도를 가진  것이 사실이며, 또 선교를 교회 성장의 도구로 삼은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선교’관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고 있는 이는 바로 삼위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교회가 눈을 돌리도록 하여 선교를 하나님 중심으로 이해하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주장을 끝까지 밀고 가지 못하고 정반대의 길로 갔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인간과 사회 프로젝트에 의해 달성될 수 있는 사회, 정치적 자유로 흡수시켜 버린 것이다. 앞뒤가 바뀐 그와 같은 구원관은 삼위 하나님 중심에서 출발한 WCC의 선교를 인본주의적 사상으로 끝을 맺도록 해버렸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바 복음의 핵심을 놓쳐서는 안 된다. 성경은 복음을 십자가에 죽은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온 세상의 주로 등극하셨다는 사실로, 복음전파는 예수를 주로 고백할 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증거사역이라 말한다. 따라서 복음전파로서 선교는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 땅에 가져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람들을 회심 시키는 사역이어야 하며 사회적 책임은 그리스도께 회심한 자들이 맺는 필연적인 열매로 이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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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 바로알기 연속기획] (6)WCC의 비성경적 반교리적 교회일치론 비판
문병호 교수(총신대 신대원)
2013년 08월 08일 (목) 09:29:23 문병호 교수 ...@kidok.com
출처: 기독신문

 
‘교회의 하나됨’ 아닌 ‘인류의 하나됨’에 집착

‘협의회적 교제’ 절대 추구, 교회를 가시적이며 기구적인 것으로만 이해
‘비가시적 교회’ 본질에 대한 이해 결여, 진리보다 현상적 교류 우선한다

 

   
  ▲ 문병호 교수  
 

WCC 에큐메니칼 운동의 실제적인 문제점은 대부분 그들의 잘못된 교회론에 기인하고 있다. WCC는 헌법에서 ‘다함께 공동의 소명을 완수하고자 노력하는 교회들의 교제’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의 본질을 호도(糊塗)하면서, 성경의 가르침과 정통 교리를 무시하고 무분별한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추구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WCC가 중심이 되어 한 몸을 이루고자 ‘협의회적 교제(conciliar fellowship)’라는 개념을 만들어 이를 마치 절대적인 가치라도 되는 듯이 추구하고 있다.

 

WCC는 ‘비가시적 교회(무형교회)’와 ‘가시적 교회(유형교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오직 교회를 가시적이며 기구적인 것으로만 이해한다.

 

WCC에 의하면 교회는 단지 지상의 한 조직체에 불과하다. 우리가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 제 25장에서는 ‘보편의 교회’가 유·무형 교회에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과 이러한 ‘교회의 유일하신 머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천명하고 있다.

 

‘비가시적 교회(무형교회)’는 과거, 현재, 미래의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를 말한다(엡 1:13; 딤후 2:19). 그리고 ‘가시적 교회(유형교회)’는 함께 신앙을 고백하고 예배와 성례를 드리며 경건한 성도의 삶 가운데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는 자들과 그 자녀들의 모임을 말한다(엡 2:19; 4:11~13). 그리스도 안에서 이 두 형태의 교회는 서로 구별은 되나 분리되지 않는다(롬 12:5; 고전 10:17; 12:12, 27; 엡 1:22~23; 5:30). 즉 유기적으로 하나가 되어 있다. WCC는 이러한 이해를 전혀 결여하고 있다.

 

WCC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교회들의 협의회’라고 본다. 다만 그들이 말하는 교회는 단지 가시적 형태의 교회에만 제한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세계교회협의회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교회, 오직 영적인 교회, 비록 신앙상의 문제에서는 분열될지라도 보이지 않는 끈을 통해서 하나가 될 교회를 상상하지 않는다.”

“우리는 두 개의 교회, 즉 가시적인 교회와 비가시적인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가 지상에서 가시적인 표현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에 일치한다.”

 

WCC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에 대하여 고백은 하고 있지만 이를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 기초시키지 않고 단지 지상의 가시적이고 기구적인 교회의 속성을 표현하는 말 정도로만 여긴다.

 

WCC는 교회의 본질이 성도와 그리스도의 보이지 않는 연합에 있지 않고 성도 서로간의 가시적 친교에 있다고 봄으로써 비가시적 교회의 비밀을 제거해 버렸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무조건적 선택과 그리스도를 통한 종말론적 성취를 외면하고 개개인의 주관적 신념과 공동체적 가치만을 교회에 남겨 두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연합된 성도들의 모임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언약의 공동체이다. 교회를 ‘몸’이라고 부르는 한 그 ‘머리’는 그리스도이다. 교회를 ‘몸’이라 부를 때 그것은 일차적으로 비가시적 교회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비가시적 교회에 대한 인식 없이 교회를 ‘몸’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성경은 교회가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진리를 분명히 선포하고 있다(엡 1:20~23). 그럼에도 불구하고 WCC는 교회가 ‘주의 몸’이라는 사실은 도외시하고, 그것이 ‘사람들의 몸’이라는 점에만 집착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의 존재를 가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WCC의 입장은 그들의 최근 문건들 가운데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들은 그동안 명목적으로나마 주장해 왔던 교회의 주가 그리스도라는 언급을 거의 폐기해 버렸거나 사실상 무화(無化)시켰다.

 

그들은 교회가 오직 믿음으로써 거저 값없이 그리스도의 의를 자신의 의로 전가(轉嫁) 받게 된 성도들의 모임이라는 점은 망각하고, 사람들이 각자의 종교적 신념이나 정서를 가지고 서로 모여 교제하는 곳에는 교회가 있다고 보는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리하여 성례의 실체도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아니라 사람들 간의 교제에서 찾는다. 

 

교회의 본질을 논함에 있어서 성도의 교제는 중요하다. 그러나 성도의 교제는 성도 각자가 먼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있다는 전제 하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지체들의 교제는 자생적이지 않다. 그것은 그들이 한 머리에 붙어 있기 때문에 당연히 뒤따르는 결과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머리이심을 부인하면서 성도의 교제나 교회의 존재를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렇듯 WCC 에큐메니칼 운동의 가장 원초적인 문제점은 그들이 사람들 상호 간의 교제를 성도의 그리스도와 연합보다 우선시할 뿐만 아니라 아예 그것만 내세우는데 있다.  

 

제10차 부산총회를 앞두고 WCC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진정한 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차치하고 동양적 합일 사상이니 전통적 해원상생(解寃相生)이니 하면서 비성경적이며 반교리적인 이교적 이념만 내세우면서 건전한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다. 그들의 속내는 ‘교회의 하나 됨’이 아니라 ‘인류의 하나 됨’에 있다.

 

교회가 세속을 복음의 진리로 감화시키고 교화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 모임이 있는 곳에 곧 교회의 출발이 있다고 그들은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들의 교회론에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에 빚어진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의 일치를 말하는 것은 교회가 없는 교회의 일치를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성경과 이를 교회적 고백으로 체계화한 정통 교리는 교회의 본질을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지체들인 성도들로 구성된 몸 곧 연합체로서 설명하고 그 속성으로서 단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을 논의한다. 지상의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복음의 진리에 터를 잡고 있을 때에만 진정한 가치가 있다. 교회는 교리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교리는 교회가 서고 넘어짐의 조항이기 때문이다.

 

WCC는 교회의 본질을 가시적 교회의 교제로만 파악하고 있다. 비가시적 교회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으므로, 진리보다 현상적 교류를 우선한다. 주님께서 나누어지지 않으시듯이 교회도 나누어질 수 없다(고전 1:13). 교회가 하나인 것은 오직 진리 안에서 그러하다. 교회의 하나 됨은 ‘자격을 갖춘 일치(a qualified unity)’ ‘진리 가운데의 일치(a unity-in-the-truth)’여야 한다.

 

어찌 진주를 돼지에게 줄 것인가? 어찌 극상품 포도나무를 주셨는데 들포도를 구하고자 하겠는가? 초대교회 이후 전개된 진정한 에큐메니즘은 성경의 참 진리를 수립하고자 추구되었다. 성경과 정통 교리의 가르침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단지 모이기만을 추구하는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단지 헛되고 속될 뿐이다. 성경은 이러한 것을 거짓된 것으로 여긴다. 과연 ‘거짓의 아비’는 누구인가?(요 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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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 바로알기 연속기획] (5)WCC와 한국교회-죽산 박형룡과 해원 정규오 중심으로
문병호 교수(총신대 신대원)
2013년 07월 24일 (수) 13:39:45 문병호 교수 ...@kidok.com
출처: 기독신문

 
“WCC는 진리의 문제” 흔들림 없는 원칙 강조

죽산 박형룡-신학적 엄밀성 없이 추상적 종교 관념 공표…진정한 교회연합 아닌 무늬만 그려
해원 정규오-WCC 특징은 신신학, 단일교회, 용공사상…칼빈주의와 결코 양립할 수 없다
 

1WCC의 신학에 대한 견해차로 말미암아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통합측이 이탈하였으며, 교단이 분열되었다. 이는 12신조와 함께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信徒揭要書)와 성경 대·소요리문답에 따른 개혁신학과 신앙에 그 자리를 둔 교단·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처음부터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신앙과 삶을 추구했던 보수적인 교단이 겪었던 신학적 분열이어서 더욱 아픔이 컸다. 통합측의 이탈은 연합과 일치를 외치는 WCC가 단절을 초래하는 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 문병호 교수  
WCC의 신앙고백은 단지 명목적이며 그들의 활동은 교회의 부흥과 전도 그리고 선교에 역행한다. 한국교회가 WCC를 처음 접하고 겪은 혼동은 그들의 모호한 정체성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 가운데서 WCC의 문제는 곧 진리의 문제라는 것을 간파한 두 분이 곧 죽산 박형룡 박사와 해원 정규오 목사였다. 전자는 신학적으로 후자는 교역(敎役)과 교정(敎政)에 주로 관련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개진하였다.

2 죽산은 칼빈의 신학과 그를 계승하고 심화시킨 개혁주의자들의 신학에 심취하였다. 그는 영미의 보수신학과 대륙의 정통신학을 두루 섭렵하였다. 그는 또한 장로교의 신학과 정체(政體)를 견지한 교단신학자였다.

죽산의 신학적 노정은 단지 조직신학 전권의 저술과 강의에 제한되지 않는다. 그의 신학은 사변적이지 않았으며 당대의 신학적 논쟁들과 교회정치 그리고 성도의 삶에 관한 교리들을 아우르는 것이었다. 죽산의 초기 작품 <기독교 현대 신학난제선평>은 가히 시대를 지로(指路)하는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여기에서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과 신복음주의에 대한 비판도 다수 다루었다.

죽산은 WCC에는 “명백히 정의된 신학”이 없다고 단정 짓는다. WCC의 신학이 애매하게 보이는 것은 그들이 자유주의에 젖어서 성경의 계시를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WCC의 정강에 따르면 성부와 성령을 믿지 않아도 회원이 될 수 있으며, 예수의 인성을 부인하는 자들이나, 예수의 신성을 종교적 감정이나 신적 의식 정도로 여기는 자유주의자들도 모두 포용하게 된다고 일침을 놓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교리는 교회의 판단기준이 될 수 없으며 각각의 교회가 그것을 따를 것인지의 여부는 자유에 맡겨지기 때문에, 그 신학은 산만(散慢)하며, “모순의 표적(表跡)”을 남길 뿐이며, “변증법적 긴장”을 고양시킬 뿐이라고 지적하였다.

죽산은 WCC가 “교의(敎義)는 분열하나 봉사는 연합한다.” 라는 말을 일종의 모토와 같이 여기고, 교리의 일치를 오히려 폄하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죽산이 WCC를 “자유주의 광장”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에큐메니칼운동의 사상, WCC는 칼빈주의 정통 보수신학과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한국장로교회에서 지지하고 용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에큐메니칼운동의 사상은 신신학과 단일교회 운동과 용공주의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죽산은 WCC가 공식적으로 천명하는 교리적인 고백들은 신학적인 엄밀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단지 추상적인 종교적 관념을 공표하고 있을 뿐이라고 보았다. 죽산은 이러한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진정한 교회의 연합이 아니라 단지 무늬만 그려내는 “일양(一樣, uniformity)”을 추구하는데 불과하다고 단정하였다.

죽산은 WCC가 “속죄구령(贖罪救靈)의 옛 복음이 아니라 사회개량의 새 복음”을 전하고, “이교들과 대화의 광장”을 무분별하게 열고, 스스로 전락하여 “자유세계에서 공산주의를 선전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죽산은 선교가 복음전도 외에 다른 것을 본질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WCC가 추구하는 새로운 선교방법은 현세적 생명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 사명을 개인의 삶과 인류사회의 평화에 두고, 타 종교와 화해를 모색하고, 복음의 전파를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하고, 급기야는 구원이 타종교에도 있다는 종교다원주의에 이르게 됨을 지적한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신복음주의자들이 추구하는 복음주의 연맹(NAE,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도 WCC와 같은 맥락에 서 있다고 정곡을 찌른다.   
   
3 한권의 책은 사람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기도, 시대를 움직이기도 한다. 죽산의 <기독교 현대 신학난제선평>을 거의 암송하다시피 한 해원 정규오는 여기에서 자신이 살아가야 할 삶과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함께 읽었다. 해원은 죽산을 “최고의 스승이요, 신학과 신앙의 지도자요, 공사간 나의 인생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 위대한 인물”로 여기고 따랐다.

해원 정규오 목사는 뛰어난 목회자요 설교자였으며, 교정(敎政)의 지혜가 남달랐던 진정한 교회 정치가였다. 해원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시대의 격랑을 헤쳐나간 변증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해원은 신학과 삶이 어우러진 진정한 칼빈주의자였다. 제 33회 총회에 접수한 51인 신앙동지회의 진정서에 나타나듯이 해원은 “신앙은 보수적이나 신학은 자유”라는 당대 자유주의의 주장을 일축했다.

해원은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복음의 역사는 구원의 의를 다 이루신 중보자가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주님의 이러한 신인양성의 중보를 믿지 않고 예수를 단지 모범이며 지도자로만 여겨서 우리가 WCC의 경우에서 보듯이 세속주의, 종교다원주의에 이른다고 보았다.

해원은 성도와 교회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교회의 연합과 일치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행하는 것이 칼빈주의라고 보았다. 이러한 연합은 “자율주의”로 되지 않고 오직 “타율주의”로 말미암는다. 곧 비성경적인 자유주의가 아니라 성경중심주의에 따를 때 가능하다. 

해원의 WCC 비판은 그가 견지했던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믿음주의의 필연적인 결실이었다. 해원은 WCC가 하나의 권력기구가 되고 있다는 점을 간파하였고, 그들이 단지 협의회 중심의 가시적, 세속적 일치를 꿈꾸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WCC에 대한 해원의 입장은 분명하다. 그는 당시 교단이 WCC 총회를 탈퇴해야 할 명분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피력하고 있다.    
이렇듯 해원은 WCC의 특징이 “신신학, 단일교회, 용공사상”에 있다고 보았으며, 이 세 가지는 칼빈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선언했다.

    
4 한국교회는 교회의 연합과 일치 운동이 올바로 성경의 진리에 서 있지 않으면 첨예한 갈등을 조장하고 급기야 교회의 분열이라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약 반세기 전에 통렬히 경험하였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운동이 정치의 도구로 악용될 때의 폐해는 말할 수 없이 쓰라린 것이다.

WCC에 대한 죽산의 입장은 언제나 확고하였다. 그는 WCC가 교회의 본질을 왜곡하고 진리를 해치는 가운데 단지 기구적 일치만을 외향적으로 추구하고 있을 뿐이라고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죽산의 이러한 반 WCC 사상은 해원에 의해서 충실히 교정(敎政)에 반영되었다.

해원은 WCC의 에큐메니즘이 당대 사조와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비성경적인 기구라는 사실을 분명히 직시하였다. 하나님은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시점에 양인을 나란히 세우셔서, 교리를 떠나서 무분별하게 수행되는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이 참 교회와 거짓 교회의 경계를 허물고 결국 교회를 파괴하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음을 직시하게 하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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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들수록 자리 지키기 때로는 해야 할 일을 위해서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해야 한다. 위기가 닥칠 때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서 참고 견디고, 남을 돕기로 결단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행동이다. -토미 테니의 [돌이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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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롬 1:18~20) 로이드존스

이제 우리는 죄가 전혀 핑계 댈 수 없다는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됩니다.

① 인류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몰랐다고 핑계를 늘어놓을 수 없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들이 진리를 알고도 고의로 그것을 막고 끌어내렸기 때문입니다.

② 그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았을 때가 있었고 여전히 알고 있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치도 않았습니다.
...
하나님께서 이 지식을 그들에게 내면적인 것을 통해서 이미 알려 주셨는데, ?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그들 안에 나타내심으로서 알려 주셨습니다.(19절) [예 : 세계 중에 가장 원시적인 부족들을 만난다 할지라도 최고의 존재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인간을 전혀 만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사람들의 양심을 통해서, 즉 옳고 그름에 대한 의식, 그리고 죄는 심판을 받는다는 것과 우주를 도덕적으로 통치하는 분은 의롭고 정의롭다는 느낌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③ 또한 하나님께서 외면적인 것을 통해서 이 지식을 주셨는데, 창조를 통해서 자연 속에 자신을 분명히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양과 달, 별과 짐승들, 우주의 질서와 체계, 계절 등,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증거들로서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④ 그리고 세계와 열방들의 전체 역사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처음 열한 장을 통해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성경 밖의 세상 역사를 살펴보면 어느 곳에서나 언제나 같은 것이 작용했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섭리나 창조계 자체를 통해서 자신을 보여 주셨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역사를 통해서도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⑤ 이제까지 증거했던 모든 것들이 이방적인 나라들에게 해당되어 그들이 핑계 댈 수 없다면 특별한 계시를 받고,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말씀해 주시는 은혜를 받았던 유대인들이야말로 얼마나 더 핑계 댈 수 없겠습니까!

⑥ 이제 현대에 와서는 자연인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증거에 더하여 특별계시인 구약 성경과 그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그것에 더해 신약 성경까지 주어진 현대인에게는 핑계를 댈 수 있는 조건은 더욱더 희박해 진 것입니다

 

 

출처:개혁주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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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한 미소로만 채워주소서
      최송연

      손바닥만 하게 작지만... 도심 한 폭판에 푸른 잔디 깔린 뜰이 있어 더 없이 싱그러운 아침 토독! 솔솔 불어오는 실바람의 숨결 따라 새벽 이슬 머금고 다소곳 피어난 하얀 '푸루메리아'... 그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히며 생채기난 가슴을 토닥토닥 햇살 한가득 뿜어내며 솟아오르는 힘찬 태양 앞에 안개인 듯 구름인 듯... 흩어지는 새까만 하늘조각들 상처 주고, 상처받아 아린 우리 어둡고 슬픈 기억들은 태양보다 밝은 주님 빛 앞에 안개인 듯 구름인 듯... 산산이 깨어져 흩어지게 하시고 사랑하는 이들의 가슴 속에는 언제나 행복한 미소로만 가득, 가득하게 채워주소서 츨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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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육 맛을 알고난 후 인간을 노린 식인 동물들


먹이사슬에서 인간이 맨 꼭대기에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인간은 여러 동물들로 부터 잡아먹히며 간신히 종족을 유지시켜왔습니다.
인육을 맛본 동물들은 반복해서 인간을 공격합니다. 역사적으로 인간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포식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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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위: 아나콘다

이 거대한 뱀은 인간의 몸을 통째로 삼킵니다. 희생자들은 이 포악한 놈이 그렇게 빠를 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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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위: 군대개미

2인치가 넘는 크기로 턱뼈가 강력하여 들소 한 마리를 한 시간안에 흔적도 없이 먹어치웁니다.
그러니 잘못 걸린 인간은 몇 분안에 목숨을 잃습니다. 수백만 마리가 몰려다니는 모습은 공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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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위: 대백상어

영화 ‘조스’의 바로 그 주인공.
인간을 잡아 먹지만 인간이 그들의 주 메뉴는 아닙니다.
육중한 몸의 에너지가 필요한 백상어에겐 인간은 너무 영양가가 없는 먹잇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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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위: 피라냐

남미의 작은 민물고기로 물속에 인간이 잘못 근처에서 허우적거렸다간 잡아먹힙니다.
살찐 물소 한마리가 뼈만 앙상하게 남도록 물어뜯기는데 60초도 안걸렸다는 목격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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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위: 호랑이

옛날 호환당한 얘기에서 알 수 있듯 말이 필요없는 동물의 왕. 인간 희생자 대부분은 벌건 대낮에 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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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위: 사자

정글의 왕이지만 정글에 머물러만 있지 않습니다. 인간을 사냥하러 마을로 내려와 글자 그대로 ‘인간 사냥’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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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위: 침팬지

하는 짓이 사람을 닮아 귀여워 보이지만 그건 길들여진 침팬지에 국한합니다.
그놈들은 인간을 닮아 강간하고 강도질 하고 살육을 자행합니다.
어린 새끼들을 잡아 먹기도 합니다.
실제 아프리카 야생에서 굶주린 침팬지들은 마을을 공격, 어린 아이와 아기들을 납치해 잡아먹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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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위: 불곰

무서워 보이지만 뜻밖에 낯가림이 있습니다.
웬만해선 인간을 공격하지 않지만 굶주리면 달라집니다. 절대 가까이 가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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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위: 표범

인육의 맛을 아는 놈들은 사람이 숨어 있는 방의 문을 부수고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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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위: 코모도 왕 도마뱀

인도네시아산 공포의 도마뱀은 인육의 맛을 아는 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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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위: 악어

사하라 사막 이남에서 해마다 수백명의 인간이 이놈들에게 희생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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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위: 하이에나

모잠비크 등에선 적지않은 사람들이 이 교활한 놈들에게 끔찍하게 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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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위: 타이거 상어

인간을 노리고 해변으로 접근하는 아주 위험한 놈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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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위: 인도 곰

인도와 버마에선 호랑이보다 곰이 더 두려운 존재입니다. 더 예측불허이고 더 포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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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위: 괭이상어

따뜻한 수온의 근해에서 많이 출몰하는 일반적인 상어로 매우 공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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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위: 북미산 오소리

잔혹하고 흉포하게 사냥을 하는 놈으로 인간을 포함해 자기보다 몇배 더 큰 짐승들을 잡아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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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위: 늑대

개보다 크고 성질이 나쁜 놈으로 인간과 접촉이 많았던 만큼 희생된 인간의 숫자도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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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위: 콩고 타이거 잉어

돌출된 날카로운 이빨에 물리면 인간이든 들짐승이든 무참하게 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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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인간(식인종)

당연히 인간도 포함됩니다.
인육을 먹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제의적인 것이 많았지만 기근이나 전쟁때엔 예외입니다.

[WCC 바로알기 연속기획] (4)WCC에 대한 역사적 비판 - 총회의 형성과 활동 중심
박창식 목사(달서교회·대신대 교수)
2013년 07월 18일 (목) 13:46:53 기독신문 ekd@kidok.com
출처: 기독신문

역사는 WCC 위험성 강력히 경고하고 있다

1959년 통합측 이탈의 핵심적 단초 … 한국 장로교단 지형 왜곡에 직접적 영향 미쳐
WCC총회 감성적 접근은 위험 … ‘선한 싸움하라’ 박형룡·박윤선 박사 경고 잊지 말아야

   
  ▲ 박창식 목사(달서교회·대신대 교수)  
 
WCC 제10차 부산총회를 앞두고 전방위적 홍보가 진행되는 가운데 성도들의 혼돈은 심화되고 있다. 과거 역사적 진실을 체험한 세대들은 그나마 감이라도 잡고 있지만 교회 안의 신세대들의 느낌은 전혀 다르다. 최근 WCC 준비위원회의 일간지 홍보 내용에 따르면 WCC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는 교회들의 교제요, 성경적 권위 위에 굳게 서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며 구주로 분명하게 고백하고, 심지어 공산주의 이념, 동성애, 일부다처제까지 지지하거나 결의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피상적인 내용만을 접한 성도들은 ‘이러면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갖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WCC의 신학적 정체성과 총회와의 역사적 관계성을 살펴보면 섣부르게 용인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박윤선 박사의 WCC에 대한 경고(1951년)

한국장로교회가 아직 WCC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때 비교적 일찍이 WCC 신학적 위험성에 경종을 울린 분은 박윤선 박사였다. 당시 고려신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었던 박윤선은 WCC가 자유주의 신학, 신정통주의를 지향하고 있음을 개탄하며 이렇게 비판하였다. “WCC운동은 신신학적이고 타협주의적이며 기독교의 근본적 진리의 해석을 각자의 자유에 맡기어 올바르게 믿지 않아도 교회라고 하며, 그 어떤 교회라도 모두 다 서로 뭉치어 하나가 되기를 도모한다. 이것은 항의자(프로테스탄트)의 걸어온 길을 후회하며 일소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보다 연합을 즐기는 운동이며, 따라서 개혁파의 올바른 신앙노선을 오착으로 여기는 그릇된 주의이다”(파수군, 1951년). 박윤선은 이러한 때에 부전론자(不戰論者)와 주전론자(主戰論者) 중에 누가 참 예언자인가를 질문하면서, 옳은 일을 위해서는 선한 싸움을 싸우지 않을 수 없다고 강력하게 경고하였다.

 

박윤선의 이러한 경고대로 WCC는 암스텔담에서 에반스톤 총회 사이(1948~1954)에 이미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이론이 등장하는 등 상당한 신학의 변질이 감지되었다. 하지만 당시 한국장로교회는 고신과 기장의 연이은 분열에 골몰하였기에 외부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총회는 1954년에 와서야 김현정과 명신홍 목사를 WCC 제2차 에반스톤 총회의 대표로 파송하여 이를 확인 보고토록 하였다. 이 두 참석자의 견해차가 컸는데, 명신홍은 김현정과 달리 WCC 운동이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것은 당시 한국장로교회 안에 WCC 문제를 두고 신학적으로 상반된 두 견해가 존재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박형룡 박사의 WCC에 대한 경고(1958년)

WCC 문제를 놓고 총회 안에 찬반 기류가 점증되자 1956년 41회 총회는 8인의 ‘에큐메니칼 연구위원회’를 발족하였다. 위원회는 WCC 지지파의 대표격인 한경직, 반대파의 대표격인 박형룡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한경직은 총회 석상에서 에큐메니칼 찬성발언을 하면서 이와 같은 비유를 들었다. “예를 든다면, 에큐메니칼이란 한국전쟁 때 인민군들에게 쫓겨서 산중 동굴 속에 피신한 기독교 목사, 천주교 신부, 불교 승려 세 사람이 이념과 사상은 다르지만 친밀했던 것과 같다.” 비유의 적절성을 떠나 현대 WCC가 추구하는 종교다원론의 모습을 예견이나 한 듯해서 씁쓸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박형룡은 이러한 입장에 동의할 수 없었다. 이에 박형룡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교리와 목적’(신학지남, 1958)이란 논문을 통하여 WCC 운동의 위험성을 전국교회 지도자들에게 알렸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리적으로는 혼란한 자유주의의 지도하에 움직이며 정책적으로는 세계단일교회의 구성을 최종 목표로 한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고로 복음주의에 입각하여 교회의 전통적 신앙을 존중하며 보수하려는 교회의 신도로서는 이 운동에 방심하고 따라 갈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신학을 칼빈주의 개혁파 전통적 복음주의 신앙으로 규정하고 에큐메니칼 운동에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할 것과 교회합동이라는 구체적인 계획이 드러날 때는 이 운동으로부터 단연코 탈퇴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사실 한국장로교회 안에 박형룡과 한경직 간의 신학적인 갈등은 해묵은 것이었다. 박형룡은 일찍이 1930년대 이후 한국장로교회 안에서 비등하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창세기의 모세 저작설, 여성의 교권문제 등으로 제기된 역사비평주의를 막고 정통적 성경관을 고수하였다. 하지만 한경직 목사는 고등비평을 수용한 아빙돈 단권 주석 작업과 조선신학교 이사진에 참여하였으며 또한 총회가 김재준 목사를 처리할 때 옹호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입장을 달리하였다. 한경직의 신학적 이념이나 성향은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었지만 표출할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WCC 문제로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WCC 문제로 인한 총회의 분열(1959년)

한국장로교회는 WCC 문제를 놓고 양 진영으로 재편되어 분열로 치닫고 있었다. 총회에서 구성한 연구위원회마저 표류하였고, 1958년 43회 총회에서는 보고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게다가 정규오 목사를 중심으로 1952년부터 결성된 ‘복음주의협의회’(NAE,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와 WCC간에 기구적인 대립까지 겹쳐서 한치 앞을 예견치 못할 지경이었다. 분열의 위기감이 고조되자 총회장 노진현 목사를 중심으로 한 교단 지도자들이 중재에 나서 ‘교회 평화의 방안’이란 4개항의 해명서를 발표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1959년 9월 28일 대전중앙교회에서 개최된 44회 총회는 개회 벽두부터 양측의 치열한 갈등으로 인해 결국 총회는 11월 23일에 속개하기로 결의하고 정회하였다. 하지만 에큐메니칼 지지파는 서울 연동교회로 자리를 옮겨 단독으로 불법 속회를 열었다. 이를 두고 교회사가 김영재 교수는 이렇게 일갈하였다. “통합측에서 볼 때는 그럴만한 충분한 명분이 있었겠으나, 그것은 분명한 쿠데타와 같은 것이었다. 수적으로 열세인 고려파와 기장파의 경우는 다수결의 법적 절차에 따라 총회에서 축출하는 절차를 통하여 분립하게 되었으나, 주류와 비주류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백중지세의 두 분파가 분열할 때는 법적 절차를 밟을 수 없었기에 탈법적인 분열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1959년 한국장로교회 대분열의 핵심적 단초는 WCC 문제였음이 드러난다. 하지만 통합측과 일부 고신측 사가들은 분열의 직접적인 원인을 WCC 문제보다는 총신의 삼천만 환 사건이나 경기노회 총대사건으로 기술하였다. 이에 당시 총회장으로 분열을 온 몸으로 체험했던 노진현 목사는 그의 회고록 <진실과 증언>에서 “역사는 창작될 수 없으며, 왜곡된 교회사의 전수와 재생산은 분열의 아픔 못지 않은 고통을 안겨준다”고 준엄하게 꾸짖었다. 분명한 것은 한국장로교회의 대분열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역사적 해프닝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1930년대부터 상존하던 신학적인 차이가 WCC를 통로로 분명하게 확인된 것 뿐이다. 그러므로 WCC 문제는 혹자들의 주장처럼 단지 분열을 위한 명분이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던 신학적인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담아낸 새로운 그릇이었다. 차제에 분열의 원인을 두고 저들이 가진 정치적인 관점은 시급하게 신학적인 관점으로 재해석 내지는 재진술 되어야 할 것이라 사료된다.

 

이와 같은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WCC 문제는 우리 교단의 구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신학적 사건임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교계 일각에서의 주장처럼 ‘WCC 부산 총회가 기독교 올림픽이며, 한국교회의 자랑인데 남의 잔치에 재는 뿌리지 말아야 한다’는 소리는 대단히 감상적인 접근으로 위험한 발상이다. 분명히 할 것은 WCC 문제는 교단의 정체성 형성과 관련된 신학적인 문제이지 결코 정서적인 문제가 아니다. 차제에 보수적 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WCC 신학을 방심하며 따라갈 수 없고, 진리를 위해서는 선한 싸움을 싸워야한다는 박형룡, 박윤선 박사의 경고에 다시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교단이 WCC를 영구 탈퇴한 이후 지금까지 반대하는 것은 우리 신학의 배타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수호에 대한 확고한 태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현재 교회 안의 성도들은 막연함 가운데 상당한 혼돈을 겪고 있다. 그러므로 교단의 각 교회들은 WCC 신학의 정체성을 성도들에게 분명히 인식시키고, 자유주의 신학의 계속적인 도전 앞에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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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 바로알기 연속기획] (3)WCC와 서구 자유주의-신정통주의와 로마 가톨릭 중심
서철원 교수(조직신학)
2013년 07월 10일 (수) 11:37:13 서철원 교수 ...@kidok.com
출처: 기독신문

 
타종교와 대화하자고 창조주 하나님 버렸다

바티칸 공의회, 전통적 신앙내용 전부 바꾼 종교다원주의 교리로 공식화
WCC도 3차 총회부터 주요의제로…자기해체된 기독교로 무슨 대화하나

 

   
  ▲ 서철원 교수  

WCC는 3차 총회부터 종교다원주의를 주요 의제로 토론해왔다. 금년에 부산에서 열리는 10차 총회는 종교다원주의를 중심토론 주제로 삼아 진행될 것이다. 종교다원주의는 본래 바티칸 공의회(1962~65)에서 교리로 제정하였다. 1959년 79세의 나이로 교황이 된 요한 23세는 1961년에 칙령을 내려 바티칸에서 공의회를 연다고 선언하였다.

 

처음 공의회를 열 때 교황 요한 23세는 종교개혁교회들을 맞아들여 한 교회를 만들려는 뜻으로 회의를 소집하였다. 교회를 갱신하여 개신교회를 받아들이는 준비를 하려고 공의회를 소집하였으나 1963년 83세의 나이로 죽자 바울 6세가 뒤를 이어 공의회를 진행하였다. 공의회가 진행되는 동안 회의의 방향이 바뀌었다. 교황을 전 기독교 세계의 교황에서 세계 모든 종교들 위의 교황으로 삼으려는 뜻이 강하여 종교다원주의를 교리화 하였다.

 

종교다원주의 교리는 3조항으로 성립되었다. 종교다원주의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 그러나 신을 찾거나 믿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기본전제로 하여 교리를 작성하였다. 교회에 관한 교리적 구성 2장 16조에서 종교다원주의 교리를 펼쳤다.

 

첫 조항은 유대인들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하였다. 첫째로 언약과 약속이 주어지고 그로부터 육신을 따라 그리스도가 나온 백성은 조상들 때문에 가장 사랑스런 백성이다. 회개 없이 하나님의 선물들과 소명이 주어졌다.

 

둘째 조항은 무슬림들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확정하였다. 구원계획은 창조주를 아는 자들도 포함한다. 그들 가운데는 특별히 무슬림들이 포함된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고백하여 지킨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유일하시고 자비로우시며 마지막 날 사람들을 심판하실 하나님을 경배한다.


셋째 조항은 일반 종교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배정하여 구원을 약속하였다. 그림자와 형상들 안에서 알려지지 않는 하나님을 찾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하나님 자신은 멀리 계셔도 그들 모두에게 생명과 영감과 모든 것을 주신다. 또 구주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의 교회를 모르는 것이 자기 허물이 아니지만 신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은 양심의 지시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어 주입된 은혜 아래 행실들을 행하려고 시도하는 자들도 영원한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

 

이상이 바티칸 공의회가 정한 종교다원주의 교리이다. 본문만 보면 그럴듯하다.

 

그러나 이 교리조항 본문 배경에 있는 신학에 의하면 전통적인 하나님 견해가 전혀 아니다. 또 구원도 전통적인 그리스도교회가 주장하는 구원이 전혀 아니다. 로마교회는 유대교와 이슬람교와 이방종교들과 대화하기 위해서 전통적인 신앙내용들을 전부 바꾸었다. 이 신학적 작업은 20세기 로마교회의 대표적 신학자인 카알 라아너가 이루어냈다.

 

라아너는 전통적인 교회의 믿음에 관한 가르침이 현대인들에게 전혀 맞지 않는다고 하여 전적으로 새로운 신학을 구성하였다. 로마교도인 말틴 하이덱거의 철학에 맞추어 신학을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하였다. 그리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없애버렸다. 그 자리에 존재 자체를 하나님으로 세웠다. 삼위일체도 완전히 제거하고서는 존재 통보 과정을 삼위일체라고 정하였다.

 

창조주 하나님을 없애버렸으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육신일 수 없다. 한낱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성육신이 아니다. 마리아와 요셉에게서 출생한 한 사람일 뿐이다. 원죄도 첫 인류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 섬김을 거부한 반역이 아니라 존재 통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그러면 구원도 내세에 영생하고 영광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현 세상에 사는 동안 사람이 자기를 실현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이런 신학에 바탕하여 바티칸 공의회가 종교다원주의를 교리화 하였다. 로마교회가 그들의 신학과 신앙내용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없애버렸다. 따라서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창조주 하나님을 없애버림으로 로마교회가 종교다원주의를 교리로 공식화하였다.

 

유럽에서 종교다원주의 교리와 그 배경신학이 이해되고 알려지므로 로마교회가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닌 것을 알게 되어 유럽의 교회들이 다 문을 닫았다. 교회의 전통적 신학이 이렇게 완전히 파괴되므로 주일에 미사하기 위해서 모이는 교회들이 거의 없게 되었다. 이런 종교다원주의를 개신교회가 받아들여 종교다원주의를 바르고 정당한 신앙생활로 삼게 되었다. 

 

WCC는 3차 총회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종교다원주의를 주요의제로 다루어왔다. 그러면서 종교 간의 대화를 적극 권장하고 시행해왔다.

 

로마교회가 무슬림들과의 대화를 깊이 진행하므로 WCC도 무슬림들과의 대화를 깊숙이 진행하고 있다. 또 불교와 대화도 깊이 진행하면서 불교의 종교생활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 기독교 신학의 바른 전범으로 삼고 있다. 종교다원주의를 정착시켜 종교 간의 대화를 진행하므로 종교 간의 갈등을 없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 나아가서 세계를 하나의 정부 아래 두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의도가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사상에 깊이 박혀있다.

 

비록 로마교회가 종교다원주의를 교리로 확정했어도 그 시작과 완전한 준비는 개신교회의 근세신학에서 비롯되었다. 근세신학의 아버지 슐라이어막허는 전통적인 하나님 관을 완전히 바꾸었다. 신은 사람 자신이 전적으로 의존되어있다는 느낌을 발언하는 것이라고 정하였다. 근세신학은 피상적으로 이해하듯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유일신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 자존하신 하나님을 없애버림으로 새로운 기독교를 만들었다.

 

20세기 최대 신학자인 칼 바르트도 창조주 하나님 자존하신 하나님을 없애버렸다. 바르트는 규정하기를 하나님의 존재는 행동과 사건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행동과 사건을 떠나서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행동과 사건 뒤로 돌아가서 자존하신 하나님을 다시 붙들 수 있는 계기가 없다고 하였다.

 

20세기 3대 신학자로 인정받은 폴 틸리히의 신학에서도 자존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 존재가 하나님이시라면 그도 존재자이므로 유한한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존재자일 수 없다. 하나님은 내 존재를 있게 해준 존재 자체이고 또 그런 존재로 있게 해주는 존재의 힘이라고 하였다. 존재의 힘은 용기 소망 등으로 바꿀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 자존하신 하나님을 없애버리므로 기독교 신학과 신앙에서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20세기 중반에 소망의 신학을 내어 새로운 신학전개의 지평을 열은 위르겐 몰트만의 신학도 창조주 하나님 자존하신 하나님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인간 예수가 있지도 않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으나 버림받아 죽었다. 만일 아버지가 있어서 자기를 아버지라고 부른 아들의 고통을 내려다본다면 그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삼을 것이다. 그러면 십자가에 달린 아들의 고통이 그에게서 나와서 아버지에게로 간다. 이 십자가상에서 있었던 고통의 교류가 바로 삼위일체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개신교회의 근세신학과 로마교회의 근세신학 혹은 현대신학이 다 동일하게 창조주 하나님을 없애버렸다. 그러면 전통적인 기독교의 신앙내용과 신학내용이 다 없어진다.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단지 인간 예수로 신학작업을 하는 것만 남는다.

 

기독교가 이러하면 다른 종교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꼭 같다. 이렇게 인정하는 것이 종교다원주의이다. 이런 종교신학을 가지고 다른 종교들과 대화를 하여서 무슨 소득이 있는가? 기독교의 자기해체를 완벽하게 마감하는 것 밖에 아무것도 없다. 귀신들의 종교인 이방종교들만 번창하고 기독교는 완전히 땅에 묻히는 일만 남는다. 올더스 헉슬리가 말한 대로 옛날 옛적에 기독교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 잔해가 지금 대영박물관에 가 있다. 종교다원주의의 실상을 알면 종교다원주의의 진행을 결사하고 막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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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의 아름답고 멋진 여행

2011년 아마존은 세계 7 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인정되었다. 아마존江은 나일江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6,400km) 江이다. 아마존은 1.500 킬로미터 이상 되는 17개의 지류와 1,100개의 작은 지류가 있다.

브라질, 페루,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볼리비아, 가이아나, 수리남과 프랑스 령 기아나 등, 9 개국에 속하는 영토를 커버하는 열대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우기(雨期)때마다 광대한 숲은 지역마다 침수된다. 세계 열대 숲의 큰 영역인 아마존 숲은 5,500,000k㎡로서 모든 열대 우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지구의 "폐"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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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vitation to sweet dream / Yuhki Kuramoto

누가 이곳을 사막(desert)이라고 말했는가?
예술가의 눈에 비추어진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예술작품 전시회 라 고 말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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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워셔 비판에 대한 주나그네님의 반론 

 

 

주나그네

2011/02/18 13:29

 

위의 영문 자료 출처는 http://www.jesus-is-savior.com/Wolves/paul_washer.htm 입니다. 이 글은 www.jesus-is-savior.com 이라는 웹사이트를 운영하는 David J. Stewart라는 사람이 쓴 것이지요. 한 주에 7만명 이상이 접속할만큼 꽤 유명한 사이트이긴 하지만, 이 사람 개인에 대해서는 그리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신앙적 관심사가 워낙 방대하고 조잡해서 한 마디로 규정하기 쉽지 않은 인물입니다. 그의 글을 보면 대부분 비평과 비난조의 글인데, 유익한 내용도 많지만 지나치다 싶을 만큼 독선적인 내용도 많습니다.

 

그는 현재의 기독교(특히 미국 기독교)와 기독 유명 인사들을 향해서는 거침없이 독설을 퍼붓고 있지만, 정작 자신에 관해서는 철저하게 신비주의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신학을 파악하려면 그가 쓴 글로 밖에 확인할 수 없는데, 차제에 그의 사이트에 올려진 글들을 살펴보니, 신학적으로 위험한 요소가 많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신학적 사고의 연원을 정리한다면, 제세례주의와 세대주의가 절충된 극단적 근본주의(Radical Fundamentalism)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렇다고하여 그의 주장 전체가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현대 기독교의 병폐를 날카롭게 파헤치고,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기독교의 구원의 유일성을 일관되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개혁신학과는 커다란 간격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그는 역사적 칼빈주의 혹은 칼빈신학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칼빈주의의 5대 교리(TULIP교리)를 '이단적인 가르침'이라고 단정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에 대해서도 좋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의 영문 글을 유심히 읽어보신 분이라면, 고개를 갸우뚱할 수도 있습니다. 이 글대로라면 Paul Washer 목사가 행위구원론을 강조하는 것 같고, 자신은 전통적인 개혁교회가 부르짖는 오직 은혜로 얻는 구원을 주장하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전자는 알미니안 전통에 속한 반면, 후자는 칼빈주의 전통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David J. Stewart는 칼빈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제가 볼 때에, Paul Washer 목사의 설교에 대해 이 사람이 비판하는 내용은 그리 새롭거나 독창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세대주의 권에서 줄곧 지속되어 오는 '주되심 교리'(The Lordship Salvation Doctrine) 논쟁의 일부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에 불과합니다. David J. Stewart는 '주 되심 교리'를 반대하는 전형적인 주장입니다. 이 사람이 Paul 목사의 설교를 비판하는 핵심적인 내용은 Paul 목사가 구원을 말할 때에, 은혜로만 얻어지는 구원이 아니라 행위를 조건으로 삼는 구원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Paul 목사가 그의 설교에서 구원 받기 위해서 죄에서 떠나야 한다거나 회개해야 한다거나 순종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행위 구원론을 조장하는 내용이므로 복음을 왜곡한 비성경적인 주장이라는 것입니다.

  • 언뜻 들어 보면 맞는 말 같이 들리지만, 이는 성경적 구원에 대한 일방적인 오해로부터 야기된 것입니다. 건전한 주되심 교리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믿음으로 이끄는 복음의 부르심은 죄인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나아가 그리스도의 권위(주되심)에 복종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여기서 말하는 회개와 복종을 마치 인간 편에서 구원을 이루기 위한 조건처럼 이해하기 때문에 주되심 교리를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믿음과 행위를 상치된 개념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 믿음에 합당한 열매가 반드시 드러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설명하자면, (인간의 노력이나 수고없이) 오직 믿음으로서 얻는 칭의는 반드시 거룩과 경건을 도모하는 성화의 과정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모순되거나 분리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래서 칼빈 역시 믿음을 늘 경건과 관련해서 설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믿음의 경건의 원인이며, 경건은 믿음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 제 생각에는 David Stewart가 바로 이 점에서 Paul Washer의 설교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Paul 목사를 두둔하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도 일전에 지금 David Stewart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그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요즘 한창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얼떨결에 듣게 된 설교여서, 그 한편으로 Paul 목사의 신학 사상 전체를 평가하기란 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평소 지향하는 신학이나 그가 존경하는 신학자들의 면모를 볼 때, 그를 가리켜 복음의 배교자, 이단적 복음을 전하는자, 행위구원론자라고 부르는 David Stewart의 견해는 얼토당토한 생각입니다.

    어떤 점에서 Paul 목사의 설교는 청자와 의도를 분명하게 설정하고 있는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위 믿음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 말로는 주를 찾지만 구원의 좁은 길에 서기를 반대하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고민과 도전을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다보니 구원의 칭의적 관점보다는 성화적 관점에서 보다 강하게 어필하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 성경에는 성도의 참된 믿음에 관하여서 뿐만 아니라 참된 행위에 대해서도 무수히 많은 언급이 있습니다. 구원의 원인으로서는 믿음이 강조되지만, 구원의 열매로서 행위가 강조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논리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도 바울은 서신서들의 첫 부분에서 늘 자신의 소명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된 예정을 언급하지만, 후반부에서는 성도로서 마땅히 추구해야 할 삶의 본분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교훈들을 언급합니다. 믿음과 행위, 칭의와 성화는 구원론에서 바늘과 실과 같이 다루어져야 할 주제입니다.

    고로, David Stewart의 글은 Paul 목사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를 떠나서, 그 자체로 성경적인 구원론에 대한 매우 편협적인 사고에서 기인된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지적한다면, Paul 목사가 속한 교단의 상황이나 그가 교제하는 사람을 근거로 그를 거짓 선생으로 단정하는 태도는 참된 신앙을 추구하는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 마지막으로 두 가지 정보만 더 드리고 마칠까 합니다.
    David Stewart가 자신의 주장에 각주를 달듯 소개하는 Dr. John R. Rice 와 Dr. Harry Ironside는 세대주의 신학자들입니다.
    그리고 '주되심 논쟁'에 관해서는 J. MacArthur 목사의 'The Gospel According to the Apostles'라는 책을 참조하세요. 다행히 이 책은 '구원이란 무엇인가'(부흥과 개혁사)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어느 정도 답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 출처: 생명나무 쉼터


    천상의 생활을 막는 장애들(2) 리차드 백스터

    2) 세상적인 마음

    세상적인 마음은 우리가 조심스럽게 피해야 할 장애물이다.
    하나님과 맘몬, 그리고 세상과 천국이 동시에 당신의 마음의 즐거움이 될 수는 없다.
    하늘의 마음을 가진 신자는 하나님 안에서 복을 누리며 다가올 영광의 소망 가운데 기뻐한다. 하지만 세속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은 세상의 번영에서 복을 누리며 이 세상에서 형통할 소망 가운데 즐거워한다.
    하늘의 마음을 가진 신자는 그리스도 및 그가 영원히 함께 하게 될 천사들과 성도들을 바라보며 그 영혼에 위로를 얻지만, 세상적인 마음을 가진 당신은 당신의 부귀로 위로를 받고 당신의 재산과 물건과 소 떼와 건물을 바라보며 흐뭇해한다.
    당신은 또한 위대한 사람들의 호의를 생각하며 좋아하고, 넓은 부...동산과 자녀들에게 물려줄 큰 재산과 당신의 가문의 발전이나 식솔들이 많아질 것을 생각하며 기뻐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눅 12:19)라고 말한 어떤 부자를 어리석은 자로 선포하셨다면, 그 부자와 똑같은 말을 하는 당신은 얼마나 더 어리석은 자이겠는가!
    이 어리석은 부자의 표현과 세상을 좋아하는 당신의 마음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말해 보라. 당신은 마음을 살피는 주의 음성을 기억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당신이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안주하려는 만큼 하나님을 즐거워함이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세상적인 마음을 갖고도 겉으로는 신앙을 고백하고 평범한 의무를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늘을 즐거워하며 묵상하는 이 의무를 병행할 수는 없다.
    당신이 이 세상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세상과 거래를 한 이후로 당신에게는 하늘의 즐거움을 생각할 여력이 없다.
    당신이 세상에 마음을 준 이후로 당신이 위의 즐거움을 찾은 때가 얼마나 드물고 냉랭했던가!

    오, 종교적으로 보이는 많은 사람들의 저주스러운 광기여!
    그들은 너무 많은 일에 자신을 던지더니 결국 일에 치이고 염려로 가득 찬다.
    따라서 그들의 영혼은 등에 산을 얹고 걷는 사람처럼 너무나 지쳐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여유가 없으며, 몸이 태양을 뛰어넘듯 묵상 가운데 높은 곳에 오를 힘이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천국을 놓친 후에는 그 상태가 합법적임을 입증하기 위해 몇 가지 썩어빠진 논리들을 편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입증하지 못한다.

    하늘의 즐거움을 맛본 그리스도인들이여, 내가 당신에게 충고하는 것은 만일 당신이 천국의 즐거움을 더 맛보길 원한다면 만족을 모르는 세상적인 마음을 피하라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일단 ‘부유하려고 하면’ 많은 유혹과 덫에 빠질 것이며 여러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빠질 것이다.
    세상의 것들을 붙들지 말고 세상의 것을 언제든지 벗어던질 수 있는 외투처럼 여기라.
    그러면 필요할 때만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하늘 영광은 당신의 마음 곁에 항상 있게 하라.
    언제나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는 것은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약 4:4)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다”(요일 2:15)는 진리다. 이는 자명한 진리이니 신실하게 이 진리를 받는 자는 복될 것이다

    생명나무 쉼터
    [WCC 바로알기 연속기획] (2)WCC와 한국교회-1959년 통합측 이탈을 중심으로
    정성구 목사(전 총신대ㆍ대신대 총장, 현 한국칼빈주의 연구원장)
    2013년 07월 03일 (수) 13:26:13 정성구 목사 ...@kidok.com
    출처: 기독신문

     
    에큐메니칼 운동이 형제와 교회 갈라놓았다

    WCC 가입 문제로 첨예한 대립…신학 충돌을 교권다툼으로 부각, 본질 흐려
    불법 총회진행·신학교 습격은 ‘이탈’ 증거… ‘개혁주의’ 공통분모 잊지말아야


       
      ▲ 정성구 목사  
    합동측 장로교회와 통합측 장로교회는 같은 교회, 같은 뿌리로서 신조와 교리와 정치에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1959년 WCC 에큐메니칼 가입문제로 서로 나눠진지 벌써 54년이 되었다.


    1.1959년을 전후한 한국 장로교회의 분위기

    1950년 초에 기장이 분열되고 고려파가 분열되는 아픔을 겪은 한국 장로교회는 수년 동안 교회 부흥과 성장을 위해 가던 중에 이른바 세계교회협의회 곧 WCC 에큐메니칼 운동에 가입하느냐 마느냐로 교회는 다시 시끄럽게 되었다. 당연히 교회 안에는 WCC 지지세력과 반대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그 당시도 그러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WCC 운동을 제대로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또 WCC를 논리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다. 다만 에큐메니칼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주로 연합장로교회와 호주 장로교선교회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의 지시를 받고 움직였다. 한편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하는 학자들은 평양신학교 창설자인 마포삼열 박사의 신학과 신앙, 그리고 길선주, 김익두, 주기철, 손양원 목사의 신앙을 사수하고 박형룡 박사를 중심으로한 보수주의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한편 선교사들은 본국의 신학과 신앙과 정치에 따라서 한국교회가 에큐메니칼 운동에 가담하도록 적극 지지할 뿐 아니라 총회에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여 영향력을 과시했다.


    2.3천만환 대 3천만환

    당시 기록을 보면 에큐메니칼 운동에 반기를 든 분은 장로회 총회 신학교 교장 박형룡 박사였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박형룡 교장은 학교 부지를 구입하려다가 박호근에게 걸려 3천만환을 사기 당했다. 사실 박형룡 박사는 신학자일 뿐 학교 행정에는 어두운 분이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지하는 교권자들은 박형룡 박사를 공격했고 그 후 박형룡 박사는 사임하고 임시교장에 노진현 총회장이 시무케 된다. 지난 반세기 동안 통합측 모든 인사들의 강연, 세미나 그리고 유인물에는 합동측이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하는 것은 박형룡 박사의 3천만환 사건이며, 박형룡 박사를 옹호하기 위한 세력이 WCC를 반대한다고 했다. 그런데 1960년 3월 ‘총회장 수습위원장, 증경총회장, 총신동창회장 성명서, 2.17 집단의 무법성’이란 성명서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연동집단과 미국인 안두화씨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신학교 재단 이사회를 불법으로 등록하였고, 은행에 예금한 공금 약 3천만환 즉 보상금 2400만환 경상비 400만환을 재단 이사장이란 명의를 악용하여 회계도 모르게 비밀히 찾아내어 일방적으로 사용하였다. 교회일을 세상법정에 소송하는 것이 본의는 아니나 문교부당국을 속여 재단 이사를 불법 변경한 것은 법에 의해 시정할 수 밖에 없으므로 우리는 부득히 법적 조치를 취한것 뿐이다. 이제라도 피고측이 불법 변경한 재단이사와 교장서리를 즉시 취소하면 법적고소는 취하하게 될 것이다.” 라고 총회장, 임원, 증경총회장들이 연명 날인했다.

     

    박형룡 박사 3천만환 사건은 사표수리로 귀결 되었으나, 에큐메니칼 운동에 앞장섰던 안두화씨의 불법 사용한 3천만환 사건은 아직도 미제로 남아있다.


    3.분열이냐 이탈이냐

    1959년 이후에 모든 문건에는 통합측 총회 건을 분열과 이탈을 병행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두 가지 이유로서 이탈이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통합측은 총회법에 맞지 않게 이루어졌다. 제44회 대전중앙교회의 총회는 경기노회 총대를 받는 문제를 두고 개회만 하고 시간을 모두 허비해 버렸다. 그래서 정회 되던 날 총회장 노진현 목사는 총회진행의 묘방으로 총회속회를 증경총회장 회의에 회부하기로 총회에 제안하여 채택되었다.

     

    증경총회장 회의에서는 11월 24일까지 정회하기로 하여 그 안을 한경직 목사가 부르고 명신홍 목사가 기록하여 총회장으로 하여금 총회에 제출하였다. 총회는 이 안에 가부를 물어 가결을 얻어 정회를 선언하고 기도로 마쳤다. 바로 정회가 이루어진 직후에 갑자기 안광국 목사가 단에 올라가서 불신임안을 낭독하고 자기 자신이 가부를 물어 몇 사람의 호응을 받아 서울로 올라와 연동교회에서 불법집회를 하고 총회라 칭했다. 교회는 헌법(정치), 권징조례, 예배모범, 총회규칙 각부 규칙 등이 있는데 그 중에 불신임이란 없다. 세상법으로 하더라도 그같은 방식은 민주주의 세계는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섭섭한 말이 되겠지만 역사적 기록으로 보면 통합측은 본 총회로부터 이탈이란 말이 된다.

     

    둘째는 신학교의 이탈이다. 1959년 11월 17일 신학교가 아직도 종강을 하지 않았는데, 학생들과 사무직원이나 일방의 이사나 교수에게 일절 알리지도 않고 선교사들과 계일승씨는 신학교 직원 김규당, 박창환, 김윤국 목사 등을 대동하고 트럭 5대와 수십 명의 인부를 데리고 11월 17일 새벽 미명에 평화롭고 신성한 신학교에 돌연 침입했다. 그들은 학교 수위의 반항과 거절을 물리치고 굳게 잠가둔 문과 자물쇠를 파괴하고, 학교 비품을 강제로 꺼내어 트럭에 싣고 황급히 도주하려 했다. 순간, 회현동 기숙사 학생들에게 발각되어 마침내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때 선교사 배의취, 마펫, 곽안전, 옥호영, 데가보, 썰멜빌 제씨와 계승일씨 등은 학생들에게 추궁과 비난을 당하고 여러 가지 부끄러운 질문을 받고 심히 당황하였다. 선교사들은 운전기사에게 운임을 더 많이 줄테니 속히 옮겨달라고 하여 보았고 학생들에게 간청해 보았으나, 학생들은 의분을 참지 못하여 교직원들과 선교사들의 불법한 행동을 힐문하였다.

     

    그런데 이튿날 18일 새벽 4시 30분에 또 다시 군인 수십 명과 트럭 6대를 동원해서 신학교 습격을 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3선교회에 대한 경고문, 총회장과 2개 노회 연서) 참으로 불행한 사건이었다. 에큐메니칼 운동이 얼마나 좋았으면 선교사들이 진두지휘하여 야간에 신학교의 물건을 가져가려 했을까 의문이다. 아마도 신학교의 물건 중에 선교사들이 후원한 것이 많아 가져가겠다는 것인데, 참으로 불행한 사건이다. 역사적 사건인 만큼 그대로 밝히는 수밖에 없다.


    4.교권충돌인가 신학충돌인가?

    반세기 전이나 지금이나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서 서로 다른 견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1959년 대전 총회가 있기 전에 양측에서는 WCC 에큐메니칼 운동 가입 여부를 두고 엄청난 설전과 성명전이 있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은 1959년 1월에 우재(유호준 목사라함)란 익명으로 발표된 ‘에큐메니칼 반대운동에 대해 답변서’라는 성명서로서 WCC 탈퇴건의서에 대해서 감정에 찬 지지성명을 발표했다. 그 핵심적 내용은 WCC  반대하는 측을 ‘불순한 교권운동’ ‘반교회운동’ ‘부패한 교권주의’ ‘바리새교인’ ‘교회제도주의’ ‘교파주의’ ‘근본주의’ ‘부도덕하고 비양심적이며 불신앙적 인사들’이라 하고 심지어 WCC 반대하는 사람들을 ‘분열주의자’ ‘사탄’이라고 세 번이나 지칭했다.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저주와 비판을 여과없이 쏟아냈다. 이는 당시의 에큐메니칼 지지자들의 일반적인 정서였고 세월이 반세기가 흘러가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고있다. 한편 당시 이런 성명서를 보고 정제(조동진 목사)라는 익명으로 ‘우제의 답변서에 답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정제의 답변서에는 우제의 글이 지나치게 과격한 문장임을 지적하고 에큐메니칼 운동의 방법과 목표가 비성경적임을 증명했다. 특히 우재가 항상 정통보수임을 말하다가 갑자기 근본주의를 비난하는 것은 이론의 갈피를 잡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신학적인 문제를 조목조목 짚어갔다. WCC 지지자들은 보수주의자들이 세계 정세에 어둡고 무식한 사람들이고 폐쇄적이고 고립주의 사람이라고 비난했지만, 1958년의 조동진 목사는 국제 문제에 훤히 밝은 기독교 언론인 출신의 목사였다. 에큐메니칼 운동과 보수주의자들의 논쟁은 교권충돌이 아니고 신학충돌이다. 최근에 최덕성 교수는 에큐메니칼과 보수주의자들의 논쟁은 곧 신학충돌이라고 썼다. 오늘의 문제는 이미 55년 전에도 한국 장로교회에 있었던 내용이다.


    5.개혁주의 신앙이냐? 에큐메니칼 정신이냐?

    1959년 총회가 나누어진지 40년 되던 1999년과, 50년 되던 2009년에, 양교단의 화해무드가 조성되었다. 특히 40주년 되던 해는 양측 대표 3인이 대전 중앙교회 당회장실에 모여 서로 대화와 소통을 갖고 함께 화기 애애한 분위기 가운데 오찬을 나누었다.(필자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 후에 총회장끼리 강단 교류도 있었다. 그런 후에 서울 교육문화회관에서 처음으로 합동측 대표 50명과 통합측 대표 50명이 함께 포럼을 가졌고 방청객과 교계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여기 대표는 양측 총회임원, 원로목사 대표5명, 신학교 교수대표 5명, 장로대표 5명 등등 각 분야에서 5명씩이 나왔다. 주제 강연자로는 필자와 이종성 박사가 나섰다. 필자는 ‘개혁주의 신앙으로 하나되자’라고 제목을 정하고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의 신학과 신앙으로 공동분모를 갖고 있으니 개혁주의 신앙으로 하나 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내 뒤에 강연자로 나온 이종성 박사의 제목은 ‘에큐메니칼 정신으로 하나되자’고 했다. 결국 공동분모가 없어지고 말았다. 에큐메니칼 운동 때문에 마음이 상하고 형제가 갈리고 교회가 갈리는 뼈아픈 상처를 도리어 덧나게 했다. 합동측 장로교회의 지도자들은 같은 신앙을 가진 교회들과 교회연합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그때나 지금이나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하는 것이다.


      이 지면은 총회WCC대책위원회(위원장:서기행 목사) 협조로 제작됩니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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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WCC 바로알기 연속기획] (1)WCC부산총회 앞둔 한국교회 방향과 전망

    김길성 교수(총신대 부총장·통합대학원장)

     

    2013년 06월 19일 (수) 11:56:23 김길성 교수 ...@kidok.com
    출처: 기독신문

      
    WCC 이전 역사적 개혁주의로 돌아가자

    한국교회 일치·연합운동 대표하지 못하는 WCC부산총회 반대
    ‘오직 성경만으로’ 개혁전통 따르는 성경적 에큐메니즘 천명해야

     

       
      ▲ 김길성 교수  
     

    제10차 WCC 총회가 10월 30일부터 11월 8일까지 부산에서 열린다. 한국교회는 WCC 총회 부산 개최가 확정된 이후 한시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예장합동을 비롯한 보수교단은 지금도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주의를 표방하는 WCC의 총회를 한국에서 개최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으며, 100만인 서명을 받아 WCC 총회에 보내기도 했다. 본지는 WCC로 인해 어려운 상황에 놓인 한국교회에 WCC의 성경관, 사회윤리, 사회참여, 종교다원주의 등을 상세히 게재하여 한국교회가 나갈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편집자 주>

     

    WCC 부산총회 유치는 한국교회를 대표하지 못한다 

    한국교회와 WCC(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세계교회협의회)와의 관계는 1948년 8월 22일부터 9월 4일까지 화란의 암스텔담에서 열린 제1차 창립총회로부터 시작한다. 창립총회에 당시 한국기독교회협의회(NCCK)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정치부장 김관식 목사와 청년대표 엄요섭 목사, 감리교 대표로 변홍규 목사를 옵서버로 참석케 하였고, 김관식 목사의 귀국보고를 받고 장로교는 WCC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1954년 미국 일리노이 주 에반스톤에서 열린 제2차 총회에는 한국의 장로교 대표로 명신홍 박사와 김현정 목사를 참석케 하였으나 상반된 보고서를 통해 WCC 신학의 방향 선회와 신학의 변절을 한국교회가 알게 되었다. 그 후 WCC 문제로 1959년 통합총회가 분리된 후 우리 총회는 WCC와는 완전 단절하였고, 1961년 인도의 뉴델리에서 열린 제3차 총회에는 기장측 강원용 목사가 대표로 참석하고, 기장측이 정회원으로 가입하였고, 통합측은 제3차(1961년), 제4차 총회(1968년)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1975년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열린 제5차 총회에는 한국대표로 김활란(이대 총장), 강원용(경동교회 목사), 김길창(NCCK 회장), 길진경(NCCK 총무), 박상증, 오재식(청년 대표) 등이 참석하였다.

     

    한국에서는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대한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한국성공회 등 4개 교단이 WCC에 정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WCC의 산하단체로,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성공회 외에, 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구세군대한본영, 정교회한국대교구 등 8개 교단이 가입되어 있다. 이들 교단 중 절반 이상이 한국교회 안에 진보적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고 나머지는 이에 동조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한국교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복음적이고 보수적인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에는 실패한 것이 소요의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WCC는 1948년 화란 암스텔담에서 창립총회 이후, 1954년 미국 에반스톤에서 제2차 총회, 1961년 인도 뉴델리에서 제3차 총회, 1968년 스웨덴 웁살라에서 제4차 총회, 1975년 케냐 나이로비에서 제5차 총회, 1983년 캐나다 벤쿠버에서 제6차 총회, 1991년 호주 캔버라에서 제7차 총회, 1998년 짐바웨 하라레에서 제8차 총회, 2006년 브라질의 남부도시 포르토 알레그레에서 제9차 총회를 가졌다. 그리고 2013년 대한민국 부산에서 제10차 총회를 가질 예정이다.


    WCC 신학은 sola scrptura의 원리에 어긋난다

    WCC 신학과 관련하여, 에큐메니칼 운동을 주도하거나 동조한 사람들 가운데는 복음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있으나, WCC를 있게 한 단체나 기구의 지도부를 구성한 사람들 중에는 자유주의 신학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WCC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 제4차 세계대회인 몬트리올회의(1963년) 보고서(제목: “성경, 전통, 전통들”)에 따르면, “우리는 복음의 전통(즉, 복음선포 kerygma의 전승 paradosis)에 의해서 기독교인으로서 존재한다(단락 제45번). 그러나 본래적으로 그리고 단독으로 존재하는 전통(Tradition)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성경(Bible)은 말하자면 그것의 초기 단계에서 기록되어진 전통(Tradition)이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보고서의 중요성은 성경과 전통이 두 개의 독립적인 실체들이 아니라는 인식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 두 가지(성경과 전통)는 너무 얽혀 있어서 그것들 중 어느 하나만으로는 권위 있는 것으로 사용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sola scriptura)이라고 하는 종교개혁의 기치를 벗어난 주장이다. 이는 기록된 성경과 전통을 동시에 강조하는 로마가톨릭 신학자들과의 대화를 위한 기초 작업으로 간주될 수 있다.


    WCC 신학은 개신교 신학의 기초인 칭의교리에 어긋난다

    또한 로마가톨릭교회와 루터교 세계연맹에서는 “칭의의 교리 공동선언”(“The Joint Declaration of the Doctrine of the Justification,” 1999년)을 통해 칭의 문제에 관한 한 16세기에 있었던 상호정죄를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하였고, 2006년에는 세계감리교협의회 제19차 총회에서 이 문서에 서명하였으며, 2007년 한국에서 열린 감리교대회에서 감리교회가 동의하였으며, 이를 WCC에서는 적극적으로 수납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를 강조하는 로마교회에 대항하여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sola gatia),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는(sola fide) 도리를 선포한 종교개혁의 기치가 분명한데, 이제 와서 로마교회가 받아들인 칭의 교리를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종교개혁의 원리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비성경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박형룡 박사가 평양신학교의 신사참배 반대로 문을 닫은 후에 중국에서 가르치다가 1947년 귀국하여 고려신학교에 몸담았으나 1948년 고려신학교를 떠나 서울로 온 것은 바로 교회의 하나 됨을 귀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박 박사가 1951년 12월 25일 고신측 지도자들을 향해 호소한 말에서도 교회의 하나 됨에 대한 그의 생각과 열망을 볼 수 있다.

     

    출옥한 지도자들이여 우리 교회 전체의 회개의 지연함에 불만하여 당파를 이루어 교회 밖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른 일이겠습니까? 교회전체의 회복갱신이란 원래 힘드는 일이요 일조일석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고 참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보다는 그들 속에 남아 있어 그들을 잘 권면하여 회개시키는 것이 출옥성도 여러분들의 하실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박형룡 박사는 교회의 일치를 사모한 신학자였으나 장로교회가 WCC에 남아있을 것인가를 결정해야하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교회가 잘못된 신학에 휩싸이거나 끌려가는 것보다는 그 신학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WCC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하고 교회를 지도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WCC 부산총회는 한국교회 일치운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195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2회 총회록에 따르면 에큐메니칼 연구위원회(위원장 한경직 목사, 서기 정규오 목사)의 보고서에 위원회의 입장을 말하되 “친선과 협조를 위한 에큐메니칼 운동은 과거에나 현재에도 참가하고 있으니 계속 참가하기로 하며, 단일 교회를 지향하는 운동에 대하여서는 반대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듬해인 1958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3회 총회는 “국제적인 교제와 사업에 관하여 우리 교회와 신앙 처지에 손상이 없도록 한다”고 결의하였다. 그리고 1959년 제44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WCC 문제로 인하여 총회장이 정회를 선언한 후(9월 28일), 연동측이 총회정회 후 속회(11월 23일)를 기다리지 못하고 이탈(9월29일 속회)하는 아픔이 있었고, 우리 총회는 정해진 날짜에 총회를 속회(11월 23일)하여 “WCC를 영구히 탈퇴하고, 소위 WCC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하기로” 결의하였다.

     

    1901년 평양에서 시작한 평양장로회신학교(평양신학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총신대학교는 올해로 112주년을 기념하게 되었다. 1910년 일제의 국권침탈로 나라 잃은 슬픔을 맛보았고, 다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이를 거부하여 폐교한 1938년까지 평양신학교는 칼빈주의 보수정통신학을 가르쳤고, 평양신학교가 폐교한 후 일제의 허락을 받아 설립된 조선신학교(1940년)의 신학적 노선에 반대하여, 고려신학교(1946년)가 독자노선을 취한 것은 총회적인 아픔으로 남게 되었으나 장로회신학교의 설립(1948년)으로 폐교 전 평양신학교의 신학전통을 이어가게 되었다. 다시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가 해체되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가 정식으로 총회직영신학교로 출범하게 되었으며, 조선신학교는 끝내 신학적 자유주의 노선을 고집하여 기장을 세우기에 이르렀다(1953년). 그 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는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대한 범 교단적인 입장의 차이로 말미암아 WCC에 찬동하는 통합측이 분열(1959년)하는 아픔을 맛보았고, 이 분열로 우리 총회는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교세도 통합에 비해 매우 열악했고, 교회도 매우 미약하게 출발했다. 이런 중에도 다행한 것은, 이후의 분열(1979년 개혁측, 1980년 개혁합신측) 후 2005년에 그동안 26년 동안 헤어져 있었던 구 개혁 측 가족들과 합동하여 하나가 되었고, 한국의 기독교 역사상 그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좋은 선례를 남기게 되었다. 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해외선교사 파송에 있어서도 단연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1만 1000교회를 가진 교단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제, 한국장로교회는 WCC 이전의 역사적 개혁주의 전통을 지켜온 신학과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일치와 연합은 진리 안에서의 연합이요, 우리는 한국교회의 진정한 일치를 위해 오직 성경으로만(sola scriptura), 오직 은혜로만(sola gratia),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을 외쳤던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신앙을 따라 교회의 일치를 지향하는 성경적인 에큐메니즘을 천명한다.


      이 지면은 총회WCC대책위원회(위원장:서기행 목사) 협조로 제작됩니다 .  

    출처: 생명나무 쉼터


    <열왕기하 13장>

    양로원에서 일하는 분들이 노인환자들을 수발할 때 가장 힘 드는 건 축 늘어지는 노인환자입니다. 사람이 축 늘어지면 아주 무겁고 힘듭니다. 열왕기를 살펴오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인간들이 바로 축 쳐지고 늘어지는 존재들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서든 일으켜 세워보시려고 애쓰시지만, 다윗을 도우셔서 왕국을 이루게 하시지만, 인간들이나 인간들의 왕국은 모래성인지, 사상누각인지, 노인환자인지 하나님이 잠시만 돌아보지 않으시면 무너져 내리고 맙니다. 인간들은 타락하여 축 늘어지고 하나님은 붙잡아 일으키시고 또 끌어올리시고..... 인간의 끝없는 타락은 하나님도 못 말리겠다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부지런히 선지자를 보내시고 남왕국 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역사에 개입하셨습니다. 북이스라엘이 끝없이 타락하여 무너져 내리자 예후를 세우셔서 아합과 이세벨을 징벌하셨고, 남왕국 유다에서 악한 태후 아달랴가 왕자의 씨를 진멸하려 할 때는 여호세바와 여호야다를 통하여 아달랴의 마수로부터 요아스를 빼내어 왕국을 보존하셨습니다. 그러나 요아스는 40년간의 통치기간 중 고모부 여호야다가 살아있을 때는 괜찮았지만 여호야다가 죽자 부하 방백들의 세력에 굴복하는 비굴한 군주의 모습을 보입니다. 아람왕 하사엘이 올라오니까 지레 겁을 먹고 예루살렘성전과 왕궁의 모든 금과 보물을 갖다 바치는 유약한 겁쟁이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결국 부하들의 손에 죽습니다.

    13장에 들어가면 한심스러운 일이 북이스라엘왕국에도 계속됩니다. 북이스라엘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 17년 동안 치리하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좇고 떠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노하시어 아람왕 하사엘의 손에 붙이십니다. 이스라엘이 학대를 당하자 여호아하스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구원자를 이스라엘이 주십니다. 그러나 여호아하스는 다시 타락과 범죄의 수렁에 빠집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아람왕의 손에 붙이십니다. 여호아하스가 죽자 그 아들 요아스가 대를 이어 똑같은 죄를 반복합니다. 어쩌면 사사기에 기록된 반복되는 타락과 그렇게도 닮았을까요? 왜 인간은 이러한 한심스러운 죄와 타락을 반복하는 것일까요? 왜 그렇게 혼나면서도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를 못 하는 것일까요? 어째서 인간들은 축 늘어지는 양로원의 노인환자처럼 손을 놓으면 무너져 내리는 반복을 끝없이 계속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지 못 하는 불신앙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또 하나 기이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엘리사가 죽을병이 들었을 때 엘리사를 찾은 이스라엘 왕 요아스는 엘리사가 화살로 땅을 치라 할 때 겨우 세 번을 치고 말았습니다. 엘리사는 대여섯 번을 치지 않고 겨우 세 번을 치고 그만 둔 왕에게 노하였습니다. 요아스왕은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원기와 패기, 열정의 부족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요아스에게 하나님은 그의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일 요아스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였다면, 하나님이 요아스의 전부였다면, 절대로 세 번만 치고 그만 두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늙어 죽을병이 든 엘리사를 찾아와 '내 아버지여,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며 눈물을 흘리던 요아스가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며 아람을 진멸하도록 칠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으로 어쩔 줄 몰라 하며 방방 뛰고, 펄쩍펄쩍 뛰었어야 할 것입니다. 화살을 세번이 아니라 열번, 스무번이라도 신이 나서 꽝꽝 내리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겨우 세 번을 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넘치는 원기와 패기로 행하십시오. 양로원 노인환자처럼 축 쳐지지 마십시오. 겨우 세 번 두드리고 힘이 빠져 주저 앉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기쁨과 감격으로 방방 뛰십시오. 펄쩍펄쩍 뛰는 야생마같이 달려 나가십시오.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자의 모습은 자신감과 패기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동행하심의 나타남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힘이요, 소망이요, 생명이요 나의 전부인 자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이사야 40:2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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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행복입니다...    최송연
    햇살 고운 아침이나 바람 거센 밤이나 당신의 그 사랑, 나 느낄 수 있으니 행복입니다
    비록 당신을 따르는 이 길 험하나 당신의 그 사랑, 별빛 되어 날 인도하시니 행복입니다
    사랑 때문에 거룩한 몸 갈기갈기 찢기신 당신의 그 사랑, 내게 영원한 생명 되시니 행복입니다
    당신의 사랑은 영롱한 새벽이슬 날이면 날마다, 내 영혼 소생시키시니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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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맞이꽃 사랑

      최송연
      달빛 어스름 흘러내릴 제면 가슴에 쌓인 그리움 모아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네 긴긴 낮 동안 얼마나 애틋했으면 그립던 임과 하나이고파 샛노란 달빛으로 옷 입었나 사랑하기에 하나 되고 싶고 둘이 하나가 되면 기쁨과 슬픔도 함께 하며 同 색으로 닮아가게 마련인 것을...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 15: 10절)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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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0년전의 思夫曲(사부곡)

       


      * 400년전의 思夫曲(죽은 낭군을 그리워하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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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술년(1586) 유월 초하룻날 아내가-

        몇 년 전 추석무렵 안동대학교 박물관에서
        고성 이씨 분묘 이장 시에 발견한
        미이라와 유품들을 공개한 적이 있습니다.


        시신을 염할 때 입혔던 옷가지 등이
        우리 복식사나 풍습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하여
        TV에 방영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미이라의 주인공인 이응태의 품에서

        부인이 죽은 남편에게 보낸 한글 편지 한 통이
        416년 만에 같이 공개되어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ㅡ눈물로 쓴 400년 전의 사부곡(思夫曲)ㅡ

        사부곡(思夫曲)은 죽은 남편을 못 잊어 그리워하는
        아내의 가슴 도려내는 그리움의 읊음이다
        지난 1998년 4월 경북 안동시 정상동의 한 양반가의
        오래된 묘지를 이장하던 중 무덤 안에서 조선 중기에 쓴
        한 여인의 한글편지가 한 통 발견되었다.

        412년이라는 세월을 넘어서 세상에 알려진 이 편지는
        조선조 명종과 선조 때 살았던 경남 고성이씨(固城李氏)
        이응태의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나간 남편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과 사랑의 마음을 편지 형식으로 써서
        죽은 남편의 품에 넣어준 만사(輓詞)이다.

        만사(輓詞)-죽은 사람을 떠나보내는 심정을 적은 글 輓-수레끌만



        원이 아버지에게...로 시작되는 이편지는
        어찌 나를 두고 당신이 먼저 가십니까?...
        당신은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 왔었나요?....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몰래 와서
        당신모습 보여주세요...라며 남편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과 생전의 각별했던 부부애를 애틋한 필체로 표현하고 있는
        죽은 남편을 그리는 사부곡(思夫曲)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6년 전인 1586년 서른 한 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남편을 위해 임종 후 장례 전날까지의 짧은 시간에
        써 내려간 이 글은 원지 절반 크기의 한지에 촘촘하게 적혀 있다.
        하고픈 말이 더 있는데 쓸 종이의 지면이 부족하자 종이를 옆으로
        돌려 상단 남은 부분에 다시 빼곡하게 적을 정도로 지아비를 그리는
        아내의 애절한 마음이 곳곳에 담겨 있다.

        또 무덤 안에는 저승갈 때 신고 가라고 이씨 부인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삼줄기와 함께 정성껏 역은 미투리와
        남편이 소중히 여겼던 아직 태어나지 않는 복 중의 아이에게 줄
        배냇저고리까지 함께 들어 있어 죽은 남편의 넋을 위로하려는
        각별했던 정성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토록 남편을 그리워한 이씨 부인이
        정작 어디에 묻혀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이 기사는 전하고 있다.

        이 편지는 당시 엄격한 남녀유별의 유교사상 속에서
        이처럼 때 묻지 않고 허물없는 애정표현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뜻밖이지만 무엇보다도 아내와 남편이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또 존중했던 당시 조선사회의 남녀 평등한 사고 관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았지만 정신만은 영원히 함께 하고자
        소망했던 이응태 부부의 사랑이야기는 툭하면 이혼하고
        자기만 위로 받으려는 이기주의 생각으로 나날이 엷어지고 있는
        현대사회의 부부와 가족 간에 대한 사랑의 참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400년 전 진실로 서로 사랑하며 백발이 될 때까지
        함께 해로하고자 소망했던 이응태 부부.
        비록 육신은 떨어져 있을지언정 그들의 영혼만은
        지난400년 동안에도 줄곧 함께였을 것이다.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었던 이응태 부부의 사랑,
        긴 어둠의 세월 속에서 이 사랑을 지켜온 것은
        아내가 써서 가슴에 고이 품어주었던 마지막 편지였다.

        원이 아버지에게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을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 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 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 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해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병술년(1586) 유월 초하룻날 아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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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혜근 교수, 알파코스는 개혁신학 아니다
      논평 : “개혁주의 입장에서 본 알파코스의 성경관과 구원론”
       
      리폼드뉴스 기사입력  2008/11/29 [10:09]
      알파코스(the Alpha course)는 1995년부터 004년까지 보수와 자유주의 진영을 막론하고 개신교의 대부분의 교파와 로마 카톨릭 교회 등에서 28,000번이상 채택되었고 약 10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참여 했을 만큼 세계적인 교회 성장 프로그램이 되었다.[Alpha News (2002) July-October: pp. 31-32.] 그러나 이런 세계적인 위상에도 불구하고 알파코스는 어떤 진영으로부터도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을 정확하게 대변하는 것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신학부 알파코스 문제 공청회 모습     © 리폼드뉴스

       
       
       
       
       
       
       
       
       
       
       
       
       
       
       
       
       
       
       
       

       

      그 이유는 오늘의 알파코스를 체계화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니키 검블(Nicky Gumbel)이 처음부터 “대중적인 기독교”를 지향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누구에게도 거부감을 주지 않는 최소한의 기독교 진리를 제시하는 대신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는 대중성을 얻고자 했기 때문에 주요한 교리적 논쟁점들은 의도적으로 지양했던 것이다. 그러나 모두에게 호소력을 갖는 초교파적 전도 프로그램이랑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중대한 신학적 문제점을 노정하게 될 수밖에 없다.

      알파코스의 대중성은 정련된 신학적이고 지적인 내용보다는 토론토 블레싱(the Toronto Blessing)과 같은 은사주의운동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성취된 것이었다. 1998년 전후로 토론토 블레싱이 교회와 정통신학의 신랄한 비판을 받게 되면서 급속히 쇠퇴하게 되었다. 바로 이 시기에 알파코스가 등장하게 되면서 꺼져가는 은사주의운동의 불씨를 다시 일으키는 그러면서도 대중적으로 보급할 수 있는 돌파구를 열게 된다.

      다시 말하면 실로 괴이하다 할 황홀경을 수반하는 은사주의운동에 대한 신학적인 비판을 잠재우면서도 그것을 지속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보다 체계적인 모범교안이 등장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검블의 알파코스인 것이다.[토론토 블레싱의 은사주의 운동에 흔히 수반되는 극도의 열광주의적 다양한 현상에 대해서는 다음의 자료들을 참조하라. P. Richter, "God Is Not a Gentlemen!" in The Toronto Blessing Or IsIt, ed. S. Porter and P. Richter (Longman & Todd, 1995); J. Hunter, Evangelism: The Coming Generation (Chicago: Chicago University Press, 1987); M. Poloma, Main Street Mystics: The Toronto Blessing and Reviving Pentecostalism (New York: Altimira Press, 2003).] 검블은 출판물과 같은 문서화된 도구가 은사주의운동의 매우 유용한 방어책이 된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었고 그것을 매우 효과적으로 다룰 줄 알았던 인물이었다.[N. Gumbel, Telling Others: The Alpha Initiative (Eastbourne: Kingsway, 1994), 120.]

      알파코스는 은사주의운동이 단순한 비교적(秘敎的) 현상에서부터 성경공부와 기본적인 복음적 진리를 제시하는 하나의 체계화된 시스템으로 반전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이 은사주의운동이라는 알파코스의 근본적 성격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이 알파코스의 근본적 성격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이 알파코스는 본질적으로 열광적 은사주의운동을 이론화한 결과였던 까닭에 주로 은사주의교회를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채택되었고 그리고 이 교회들이 다른 일반의 개신교회와 로마 카톨릭, 성공회, 심지어 제칠안식일재림교에게까지 알파코스를 확산시키는 전초기지가 되었던 것이다. 한국교회에서 알파가 급속히 확산되었던 이면에도 이미 1990년대 중반에 이미 빈야드 운동(the Vineyard Movement)이나 토론토 블레싱의 은사 운동에 대한 경험이 중요한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이런 정도의 알파코스의 역사적인 기원과 발전 과정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만 있어도, 알파코스의 신학사상이 근본적으로 개혁주의의 신학적 입장에 부합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신학부 알파코스 문제 공청회에서 알파코스 문제를 논평하고 있는 박혜근 교수     © 리폼드뉴스
      본 논문의 저자인 서창원 목사는(편집자 주: 서청원 목사의 <개혁주의 성경론과 구원론의 입장에서 본 알파>에 대한 박혜근 교수의 논평글) 검블의 성경관과 구원관이라는 두 가지의 주제에 한정한 비판적 분석을 수행하였다. 저자는 검블의 저서들 가운데서 현재 우리말로 번역된 저서들을 대부분 검토하였고 두 가지의 주제와 관련한 검블의 신학사상을 전통적인 개혁주의의 입장과 비교하고 그 차이를 규명하고자 시도하였다.

      단정적ㄷ으로 말하자면, 알파코스의 성경관과 구원관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은 저자가 주장한 대로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은사주의자로서 검블은 기본적으로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와 관련하여 연속주의자 혹은 회복주의자의 입장에서 성경의 완료성을 제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참조. S. Ferguson, 『성령』(The Holy Spirit). 김 재성 역(서울: IVP, 1999), pp. 237-274] 예언의 은사와 관련하여 그는 오늘날에도 성령의 계속적인 사역으로 인해서 예언, 꿈, 환상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체적인 지시가 중단 없이 주어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요한복음 14:12의 무리한 해석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형식적인 원리에서는 성경이 완료되었으나, 실제적으로는 성경은 개인의 체험 속에서 개별적인 성령의 지도로 보충되어야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검블은 이런 개인적 체험의 내용에 오류가 있을 수 있고 따라서 성경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단서를 붙이기는 한다. 그러나 체험의 유용성에 대한 알파코스의 강조는 필연적으로 성경의 탁월한 지위를 손상시키는 결과를 야기한다. “왜 그리고 어떻게 성경을 읽어야 할 것인가?”라는 제목 하에서 그는 “성경은 오류가 없으며 신조와 행위에 관한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라고 하면서도 “오직 성경만”(Sola Scriptura) 그러한 신적 권위를 갖는다고 명시하지는 않고 있다.

      검블의 성경관의 문제는 바로 이것에서 비롯된다. 성경만이 유일한 신적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라고 명시하지 않을 때 개인의 체험이나 확신은 얼마든지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지게 될 수도 있고 로마 교회의 외경들이나 심지어 이단들이나 소위 예언은사자들도 성경과 마찬가지로 권위적인 것이 될 수가 있다. 만일에 어떤 결론이나 결정이 성경의 진리에 근거한 사고에 따른 것이 아니라면, 성경의 권위는 훼손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성경 이외의 것을 성경보다 더 상위에 두기 때문이다.

      이런 우려는 성경에 대한 검블의 저급하고 비평적인 입장을 고려한다면 더욱 설득력을 갖게 된다. 예를들면 성경은 도덕적인 문제가 있고 또한 역사적인 문제를 갖고 있다거나, 성경이 가이드북이라거나, 혹은 성경보다는 하나님은 상식을 통해서 중대한 결정을 내리도록 하신다는 등의 주장은 성경의 충분성과 완전성을 훼손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참조. Dusty Peterson, New Age of Alpha: A Critique of The Alpha Course For Those Who Know Their Bible, retrieved May 7, 2008, from
      http://www.inplainsite.org/html/new_age_of_alpha.html] 성경이 하나님의 완전하고 무오한 계시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신앙체험의 유용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였다면 성경이 갖는 유일한 최고의 권위는 필연적으로 손상될 수밖에 없다고 할 것이다.

      더욱이 검블은 성경은 기본적인 원리를 제공하는데 그칠 뿐 개별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않으므로 성령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할 때, 성경은 질적인 원리에서도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알파코스에 참여하는 독자들이 성겯ㅇ을 읽을 때 과연 성경이 무엇을 뜻하고 또, 어떻게 적용할지에 대한 적절한 원리도 모른다는 현실을 감안할 때, 막연히 성령의 구체적인 인도하심을 구하라고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감정이나 직관을 성경의 특정한 본문이 의도한 진의로 오인하게 되는 위험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성경의 바른 해석과 작용은 장기간 전문적인 교육을 요구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알파코스는 독자가 원하기만 한다면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처럼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성경은 해득되어야 하기보다는 참조되어야 할 대상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검블의 성경관은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을 성령의 연속적인 사역으로 정당화하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은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대로 과연 이것을 두고 알미니안적 태도라고 해야 할지는 의문이다.
       
      ▲ 알파코스 문제 공청회에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여 강의를 경청하고 있다.     © 리폼드뉴스
      한편 알파코스의 구원관은 탈현대적 사회에 상관성을 갖고자 하는 동기가 검블의 복음제시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서 본 논문이 검블의 구원관을 논의하면서 단지 개혁주의의 그것과 다르다는 서술적인 비판에 그친 것은 좀 아쉽다고 하겠다.

      예를 들어 저자가 지적한 대로 검블의 죄의 이해는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분명 신학적으로 퇴행적이다. 검블에 따르면, 죄는 삶을 온통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것이며, 펠라기우스의 입장과 유사하게 의지에 따른 행동으로 구현되지 않는 한 죄가 되지 않는ㄱ 것으로 간주된다. 또한 지옥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단지 “텅 빈 도시”이며 그것은 “파멸의 날” 정도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죄와 지옥에 대한 검블의 이해는 성경의 그것에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음이 자명하다. 성경은 인간의 죄행 뿐 아니라 마음의 뜻과 생각 그리고 인간의 본성까지도 죄의 범주에 포함하고 있으며(창 6:5; 출 20:17; 마 5:28; 갈5:20; 엡 2:3), 지옥은 불못이며(계 20:15) 영벌(마 25:46)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런 느슨한 죄나 지옥의 이해는 회개의 필요성이나 복음의 긴급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실제로 그의 구원관을 평가하자면, 검블의 구원관은 오직 은혜에 근거하여,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하여서만,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만 획득하는 의로움이라는 개혁주의의 독특한 구원이해를 적절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또한 중생의 의의와 중요성을 평가절하하거나 혹은 간과하고 있다. 이같은 알파코스의 구원관의 문제는 분명히 인간의 전적부패와 전적 무능력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서 탈선할 때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검블의 구원관의 이러한 결점은 이 시대의 문화적인 상관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그의 의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탈현대적 사회는 어떤 형태의 윤리성이라도 윤리적이라는 점에서 쉽게 용인하며, 특히 본 훼퍼(Bonhoeffer)가 주장한 대로 “죄인”이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모욕감을 불러일으키는 매우 도발적인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동시대의 문화에 상관성을 확보하고 현대인들을 있는 그대로 포용하자면 검블은 죄에 대해 극히 종교적으로 절제되고 문화적으로 정제된 표현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 결과 탈현대사회에서 누구에게도 위협적이지 않고 노골적이지 않은 문화화 된 프로그램이 되고자 했던 알파코스는 결국 불가피하게 사람들에게 참된 회개를 요구할 수 없는 중대한 장애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한 마디로 검블이 죄와 구원에 관련하여 신학적으로 퇴행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저변에는 “대중 친화적인 기독교의 부흥”이라는 알파코스의 근본취지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알파코스는 기독교의 복음을 21세기 탈현대적 사회에 문화적으로 순치시킨 결과물이다. 동시대의 문화에 적응하고 그것의 지시를 받고자 하는 의도로 인해서 알파코스는 성경적인 죄의 이해에서 벗어났고 그 결과 믿음보다는 감정과 자아를, 회개보다는 회오를, 그리고 성화보다는 대중성을 더욱 강조하게 된 것이다. 이 점을 혹평한다면, 알파코스는 정통과 이단의 혼합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알파코스는 종종 너무 광ㄷ적이며, 성장에 집착하고 체험을 강조하는 등 기업가정신에 깊이 물들어 있다는 비판을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화적 친화성을 교리적 정통성보다 더 우선하는 알파코스가 개혁주의 신앙을 신봉하는 교회에서도 무분별하게 채택되고 있다는 사실은 겉으로는 보수적인 모양을 띄지만 실제로는 현대 문화에 동화되지 못해서 안달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국교회 안에도 죄에 대한 설교를 기피하고 청중들을 불쾌하게 하는 언사를 지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이미 만연하고 있다. 회개를 촉구하기 보다는 위로와 격려 그리고 자아완성 등에 관하여 주로 설교하고자 하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청중의 지지와 승인이 없으면 교회의 성장은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문화적인 일치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교회의 존립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던 계몽주의 시대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신념은 소멸된 것이 아니라 21세기에도 여전히 그 추종자를 더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무지가 때로 죄를 낳기도 하지만, 그러나 탐욕은 필연적으로 죄를 낳는다. 교회의 양적 성장을 무한히 추구하는 것은 목회 역시 얼마든지 탐욕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목회자의 정신과 자세가 사도적인 모범에서 벗어나 현대주의에 물들때 신학은 필연코 부차적인 것이 되고, 교회는 현대 문화의 한 단층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마지막으로 결어에서 저자가 언급한바 목회에서 무엇보다 신학이 중요하다고 한 점, 그리고 알파에 대한 진지한 신학적인 검증을 요구한 것은 지극히 옳다고 할 것이다. 논평자 역시 목회에서의 신학이 차지하는 최우선적인 중요성에 대한 목회자의 심각한 인식결여가 오늘날 현대교회가 정체 현상을 보이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믿고 있는 바이다.
       
      목회에서 신학이란 고작 부가적이거나 혹은 “신학교의 일”라는 신학의 중요성에 대한 저급한 인식이야말로 실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작금의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매우 다양한 이단들과 현대주의의 다양한 도전으로 인한 혼란의 한 중대한 원인은 단적으로 신학의 부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신학이 신앙의 체계적인 표현이라면, 신학은 신앙인들에게 불가피한 것이며 그것의 건전한 수립과 발전은 진리를 보전하고 전파하는 일에 필수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교회의 제도와 조직 그리고 목회적인 실천의 기법과 장치들은 반드시 신학적인 검증을 거쳐야 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 과정에서 성경의 승인과 지지를 얻을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된다면 마땅히 거부되어야 한다. 그것이 얼마나 실제적으로 효과가 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진리란 그 본질이 실천적인 효용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계시성에 있기 때문이다.
       
      복음이 갖는 시대적인 상관성과 사회적인 효용성이란 교회의 전도전략이나 원리 혹은 기술의 완성도에 달린 것이 아니라, 단순히 복음이 진리라는 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진리야 말로 가장 실천적이며 효과적이다. 우리는 성령께서 복음이 실효적인 것이 되도록 보증하신다는 믿음에서 출발해야 하며, 성령께서 사람의 창의적인 고안물이나 프로그램에 의존하지는 않으신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해야 한다.
       
      <박혜근 교수> 영남대학교 전자공학과(B.E.)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Th.M.)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Ph.D.) 현,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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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입력: 2008/11/29 [10:09]  최종편집: ⓒ 리폼드뉴스

       

       

      출처: 영적분별력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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