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새의 기도

              최송연

 

내 영혼에

성령의 불을 밝혀주소서
불어치는 모진 폭풍 
너무 거칠고 캄캄하여
주의 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주님 사랑

내 마음속에 넘쳐나게 하소서
동족의 비방하는 돌팔매질
너무 강퍅하고 드세어  
여린 날개 접지 않기를... 

 

 

날마다

생명 시냇가로 나아가

그 물 마시기 나 원합니다

주의 피로 씻은 영혼

바람에도 오염되지 않기를...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게 기도란...  (2) 2013.12.30
    낙엽의 소원  (9) 2013.12.18
    사랑의 노래  (0) 2013.11.12
    가을 애수(哀愁)  (5) 2013.11.11
    행복한 미소로만 채워주소서  (0) 2013.10.28

    
      
      
      Joyful 백 여덟번째 묵상 겔러리    
      
       
      
       
       가지 않은 길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읽을 때마다 
      가고 싶었지만 가지 못했던 길이 생각난다.
      
      나는 어려서부터 무용을 좋아했다.
      성탄절이면 교회에서 무용을 했고 사람들의 칭찬에 고무되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일 학년 어느 날. 
      아버지는 퇴근하시고 마당에서 무엇인가 또드락거리며 만드시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저녁 밥을 준비하고 있을 때
      나는 제 흥에 겨워 기다란 마루를 오가며 정신없이 춤을 추고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대문앞에 어른,아이 여나믄 사람들이 서서 웃지도 않고 내 춤을 보고있었다.
      얼마나 놀라고 부끄럽던지 방으로 뛰어들었는데 가슴이 콩닥거렸던 기억이 있다.
      
      주일학교 선생님이, 선진국의 아이들은 너희들 나이쯤 되면 앞으로 무엇이 될것인가
      목표를 정하고 공부한다고 하시면서 너희들의 꿈은 무엇이냐고 물으셨다.
      나는 그때 서슴치 않고 무용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의 무용가의 꿈은 그냥 꿈으로 끝났다.
      여덟이나 되는 동생들이 있는데 내 꿈을 실현하기엔 현실이 너무 어려웠다.
      언젠가 부모님이 두런두런 하시는 말씀을 언듯 들으니
      "저 재주있는 것을 못가르쳐서....." 마음 아파하시는 말씀을 듣고는
      그래도... 혹시나 막연한 기대를 가졌던 무용가의 꿈을 완전히 포기하고 말았다.
      
      동생들의 학교운동회에 가면 전에 내가 도 대회에 나가서 했던 무용곡
      로져스 작곡 '파도를 넘어서'가 운동장에 울려퍼졌다.
      나는 운동장 끝에 있는 플라타나스 밑에서 그 음악을 들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 후로 살아오면서 해야 될 산적한 일이나.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는 일이 있을 때마다
      드넓은 무대에서 내가 고난도의 춤을 추며 가슴이 탁 트이는 꿈을 꾸곤 한다.
      이런 것을 프로이드는 뭐라고 해석할지 모르지만 
      내 나름으로는 벗어나고 싶고, 피하고 싶은 스트레스 상황에서 
      행복하고 좋았던 기억의 무대에서 희열을 맛보는.... 
      내 잠재의식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 아닌가 싶다.
      
      지난 5월부터 해운대 장산복지관에서 '우리춤 체조'와 '댄스 스포츠'를 배웠다. 
      댄스 스포츠 시간에 자이브 댄스와 탱고를 배웠는데 나하고는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이번 가을 학기 수강 신청할 때에는 우리춤 체조와 고전 무용을 신청했다.
      65세 이상 노인들이라지만 대부분 아줌마같이 젊어보이는 분들이 많다.
      등산도 어렵고, 심한 운동을 할수 없어 운동삼아 배우는 무용이다. 
      그 좋아하던 무용을 이 나이에 배운다는 것이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
      무용을 배우면서 내가 마치 '물 만난 고기'같다는 생각을 하며 혼자 웃는다.
      그런데 자타가 공인하는 '무용 잘하는 애'였던 내가
      엊그제 배운 것도 잊어버리는 자신을 보고 놀라고 비애를 느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일흔 세살이나 된 할머니이니 놀랄 일도 아니지만.....
      
       '그래! 이것도 감사하지.
        지난 3월에 뒤로 꽈당! 넘어졌지만 뇌진탕도 아니고. 
        골반도 안다치고, 허리만 다쳤으니 감사하고
        허리를 다쳐 밸트를 감고 무용을 배워도 하고 싶었던 일을 하니 얼마나 감사해?
        나보다 더 젊은 사람도 중풍으로 지팡이를 짚고 걸음 연습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무용가가 되고 싶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더 요긴한데 사용하신거야.
        무용가의 길을 갔다면 은근히 끼가 있는 내가 어떤 삶을 살았을지?
        내게 무엇이 좋은지 나보다 더 잘아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최선의 길로 인도하신거야.'
      
      다른 길로 갔더라면... 이라는 회의는 있을 수 없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연이 아니고 필연이며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속에 사람의 생애가 전개되고 역사가 진행되고 있으 니까.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시니라.' 잠언16:9.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사모님들의 이야기 "중에서

    '사모님들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단의 공격  (0) 2014.01.14
    그동안 많이 미안했어  (0) 2013.12.04
    한 농촌교회 사모님의 체험 간증  (0) 2013.11.25
    오늘은 나도 위로받고 싶습니다  (0) 2013.11.23
    아직도 부치지 못한 편지  (0) 2013.11.15

    홍합 효능 및 홍합의 진실

    안녕하세요 꺼북이의 궁금타파입니다. 오늘은 홍합 효능 및 홍합의 진실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홍합은 정말 저한테는 특별히 맛는 음식인데요. 저도 평소에 술을 자주 마시기 때문에 자주가는 홍합탕전문집이 있습니다. 홍합탕을 안주삼아서 소주와 한잔하면 그간의 스트레스가 확풀릴정도지요. 이러한 홍합탕은 우리몸에 자주 좋은 효능을 가지고 있지만 반대로 독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얼마전에 홍합의 진실이 티비로 나와서 순간 당황하긴 했죠~그래도 먹는답니다. 홍합만한게 또 없거든요. 오늘은 이러한 홍합 효능 및 홍합의 진실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홍합 효능 첫째, 숙취해소

    역시 홍합의 첫번째 효능은 숙취해소에 좋습니다. 저도 홍합탕을 자주 먹지만 이것만큼 숙취해소에 좋은 것은 없는 것같아요. 이는 홍합에 들어가 있는 타우린이라는 성분때문인데요. 이 타우린은 우리몸의 간기능을 회복시키는 효능을 가지고 있기때문에 평소에 만성피로나 숙취해소가 잘 되지않으신다면 한번쯤 이 홍합을 드셔보시기 바랍니다.



    홍합 효능 둘째, 노화방지

    노화방지에도 좋은 홍합!!홍합에는 비타민A와 C가 매우 풍부합니다. 그 중에서도 셀레늄이라는 성분이 잇는데 이는 노화를 촉진시키는는데 필요한 활성산소가 우리몸에서 생성되는 것을 억제해주는 효과를 가져다 줍니다. 그렇기때문에 노화를 막아주는 것이지요. 평소 이런 미용에 관심있으시거나 주름살이 늘이난다면 홍합을 드시기 바랍니다.



    홍합 효능 셋째, 원기회복

    홍합에는 조혈작용을 하는 성분이 아주 많이 함유되어 있어서 우리몸의 원기를 회복시켜주는데 상당히 효과적입니다. 평소에 체력이 좋지않거나 자주 병을 앓는다면 이러한 홍합이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주 두통을 느끼고 식은땀을 많이 흘리는 분들에게도 좋다고 합니다.



    홍합 효능 넷째, 골다공증예방

    마지막으로 소개해드릴 효능으로는 골다공증예방을 들 수 있습니다. 홍합에는 뼈를 건강하게 해주는 칼슘과 인의 흡수를 도와주는 성분이 들어 있습니다. 이 성분은 바로 프로비타민D인데요. 갱년기의 여성분들이나 골다공증으로 고생하시는 분들에게 홍합은 아주 좋다고 할 수 있겠네요



    홍합의 진실

    지금까지 홍합 효능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 얼마전에 방송에서 홍합의 진실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답니다. 홍합이 정수능ㄺ이 아주 뛰어나다고 합니다. 그래서 좋지않은 성분을 빨아들이기때문에 실제로 어민들은 홍합을 더러워서 잘 먹지않는다고 합니다. 홍합은 사실 오염된 곳에서 오염된 물을 몸속에 정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그렇기때문에 홍합은 깨끗한 물에서도 살지만 더러운 물에서도 정화능력으로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정수장 몇개가 하는 일보다 훨씬더 물을 정수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합니다.



    그렇기때문에 홍합은 잘못드시면 좋지않는 성분을 드실 수 있습니다. 물론 일어날 가능성은 극소수지만 더러운 성분들을 정화시키는 홍합이기때문에 잘못먹으면 독성으로 인해서 피해를 보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땜ㄴ에 홍합은 1년내에 잡을 수 있지만 4~7월에는 홍합속에 독소가 많아서 채취가 금지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때에는 안드시는 것이 좋을 것같네요. 그렇다고 홍합을 아예드시지 않는 것은 좀 오버구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홍합에는 많은 효능이 있고 동의보감에서도 우리의 몸에 상당히 좋은 음식이라고 합니다. 이상으로 홍합 효능 및 홍합의 진실이었습니다.



    nfcj: USAdkapsspt

    <

     
     
    "온땅이 여호와를 즐거이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
     
    -시편 100편-"
    점점 깊어 가는 가을입니다.
    이 한 해도 곧 지나가겠지요.
             
    어제를 슬퍼하지 마세요
    후회하지도 말아요
    아름다운 내일이 있음을 믿어요.
           
    지나가 버린 날에 너무 집착하다보면....
    앞으로 전진할 수 없잖아요.
    새날을 꿈꾸며 살아요, 우리.
    다시 한 번 높이 높이 뛰어오르세요.
    주께서 우리의 손을 붙잡고 계시잖아요.

    토기장이되신 주님의 손에 들려지면…
    더 많이 깨어진 조각들,
    더 많이 부서진 진흙덩이일수록
    더 아름다운 작품의 소재로...
    더 멋지게 사용되어질 수 있다 하시네요. ^^

    지난 한 해 동안도 부족한 목양연가를 아껴주시고,
    넘치는 관심과 사랑.그리고 기도로 응원해 주신,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동역자님들,        

    댓글을 남기진 않으셨으나, 마음속으로 응원해 주시는
    목양연가를 아껴주시고 함께해 주신 많은 독자님들
    여러분 한 분 한 분께 마음속 깊이 감사를 드리구요. ^^*
    사랑해요, 여러분 모두를...주님 안에서...!!

    Have a wonderful Thanks- Giving!        
    목양연가지기/별똥별/최송연 드림
     

     
      
       

      뉴브런스윅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인 차재승 교수가 '십자가, 그 신비와 역설'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습니다. 왜 십자가입니까. 목회자는 기독교 핵심사상인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많이 하며, 평신도들도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수없이 듣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찬이라면 십자가에 대한 자칭 전문가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라는 주제가 독자들이 관심을 끌기에 너무 흔한 주제같기도 보입니다.

      하지만 과연 십자가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예수님은 십자가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차재승 교수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신비이자 역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십자가를 원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결코 인간이 원하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하는 크리스찬이면서도, 예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십자가에 적용합니다.

      차재승 교수는 십자가에 대한 해석은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세계로 돌아가서 성경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대해서 직접 하신 5가지의 말씀들을 근거로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십자가에 대한 다양한 이론과 해석들을 고찰하며, 십자가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새물결플러스를 통해 낸 268페이지의 책에는 2부로 되어 있습니다, 1부 신비와 전제는 십자가는 무엇인지 그리고 십자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2부 신비와 역설은 성경에 나오는 5개 구절을 통해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가르침과 선포를 다루고 있습니다.

      '십자가, 그 신비와 역설'은 3명이 추천사를 썼는데 강영안 교수(서강대학교 철학과)는 "이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삶에 대한 적용까지 이끌어 내는 책", 이수영 목사(새문안교회)는 "성경 말씀으로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 이해를 풀어내고 있기에 평신도를 포함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유익한 책", 양춘길 목사(필그림교회)는 "그리스도적 성경적 십자가 이해를 통해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를 확고히 정립하고 성숙한 신앙으로 발돋움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는 책"이라고 추천했습니다.

      아멘넷은 차재승 교수와 이메일을 통해 인터뷰를 했습니다. 인터뷰 내용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차 교수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대답을 준비했습니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입니다.


      ▲뉴브런스윅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차재승 교수

      ● 관련 사진을 보면 늘 개량 한복을 입습니다. 미국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한복을 입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신 것이 연상이 되기도 합니다.

      한복을 즐겨 입는 이유는 특별히 사상적인, 문화적인 배경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우선적으로 한복이 양복보다 몸에 편하기 때문입니다. 유독 극동 삼국에서 심할 정도로 양복이 공식적인 옷이 되어버린 현상에 대해서 좀 염려스럽기도 합니다. 구태여 의도를 밝히자면, 저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한복과 양복을 함께 번갈아 가면서 입는데, 저의 신학적인 작업이 서양신학과 동양사상의 접목을 시도하는 것과 연관될 수 있습니다.

      특히 기독론에 있어서 서양신학이 걸어온 길에 몇몇 치명적인 문제를 발견하고, 동양의 사상에서 새로운 단초를 발견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상황신학의 흐름을 일방적으로 쫓아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서양신학, 특히 교부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을 잘 이해하고 연구한 후에 그 비어있는 부분이나 잘못된 부분을 동양의 사상, 특히 도교의 사상으로 재해석하고 보완하려는 시도입니다.

      이러한 주제로 몇몇 논문을 이미 발표했고, 몇 년 안에 영어로 편찬할 책의 제목이: “Fellowship and Reconciliation: Christ’s Nature and Person from Patristic, Reformed, and Taoistic Perspectives” 입니다. 상황신학이 지나치게 개개의 상황을 절대화하면서 서양신학의 역사와 가치를 무시하는 것도 문제이고, 서양신학이 서양문화와 철학의 테두리 속에 갇혀있는 것도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이 둘 사이에 신학적인 교류, 혹은 서양신학으로부터 비서양신학으로의 신학적 흐름의 연착륙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 일의 일부를 감당하고 싶습니다.

      ● ‘십자가, 그 신비와 역설’은 특별히 어떤 사람들이 읽기를 기대합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심이 있는 모든 분들이 이 책을 읽을 수 있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평신도들이 접근하기 쉬운 십자가 이해를 써야 한다는 점을 절감하고 이 책을 계획했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다 읽기 쉬운 문체를 사용하고 각 장을 설교식의 서술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내용이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십자가 이론의 거의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고, 그 위에 저의 십자가 사상을 첨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학교에서 교재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학자들의 학회에서 발표한 전문적인 내용도 일부 포함하고 있어서 신학자들에게도 참고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전통적인 십자가 이론 가운데, 형벌적 대속론, 상업적 대속론, 제례적 대속론, 도덕적 모범론의 문제점을 잘 이해하고 있는 분들께는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최후의 만찬의 선언과 버림받음의 선포에 대해서 전문적인 신학적 해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결국, 평신도, 신학생과 목회자, 전문 신학자들 모두에게 저의 책이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기대합니다.  

      ● ‘십자가, 그 신비와 역설’라는 책과 ‘예수 그리스도, 그 신비와 역설’라는 책이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십자가'입니까?

      그리스도가 누구이시고 그리스도의 일은 어떤 것인가를 논하는 것을 기독론이라고 합니다. 기독론은 크게 (1) 그리스도의 본성과 인격 (2) 그리스도의 삶, 죽음, 부활이라는 두 분야로 나뉘어 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비와 역설”은 이 모든 분야를 다 포함해야 할 것이지만, “십자가, 그 신비와 역설”은 그리스도 십자가 죽음의 신비와 역설만을 다루는 좁은 영역의 책입니다.

      ● ‘십자가, 그 신비와 역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핵심 의도는 무엇입니까?

      핵심적인 내용은,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고(Christ shares himself with us), 인간의 고난을 우리와 나누시고(Christ shares humanity with us), 우리의 죄, 고난, 죽음, 한계를 짊어지셨다(Christ bears humanity)는 것입니다.

      핵심적인 의도는, 기존의 십자가 이해는 인간이 이해 가능한 논리, 사고체계, 사회 제도 등에 힘입어서 설명해 왔는데 이러한 이해의 메커니즘이 십자가의 실재와 잘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폴 리꾀르의 “Text 그 자체의 세계”라는 개념을 적용해서 성경 속에 등장하는 실재와 개념이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개념들과 어떻게 다른 가를 먼저 밝힌 후에 성경 속의 개념으로 십자가를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나 우상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보다는, 성경만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 드러내고 있고 (십자가의 내용과 실재), 또한 성경만이 그 해석학적인 패러다임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십자가 해석의 원리), 성경 속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개념들을 다시 재 정의(redefine)할 수 있는 문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인간의 법정에서는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심판하고 용서하고 의를 심어주는 일을 동시에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 속에서 십자가는 심판, 용서, 의를 심어주시는 것과 모두 연결되어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철학적 실재론(philosophical realism)은 사물과 사태에 보편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해서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성경 속에는, 자신을 인류에게 나누어 주셔서 인류를 그 안에 품으시는 새로운 인간, 신적 실재론(divine realism)의 인간을 발견합니다.

      두 번째 의도는, 위의 첫 번째 의도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습니다만, 이 책을 통해서 저는 세속적 대속론과 구분되는 성경적인 대속론을 주장하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가장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십자가 이해는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심판 받았다”는 사상인데, 소위 형벌적대속론(penal substitutionary theory)라고 불리는 이 대속론은 “의인인 예수께서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죄인인 인간이 그 죄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기본 골격으로 인해서, 정의(justice)를 세우기 위해서 비정의(injustice)가 발생하는 논리의 모순, 폭력적 하나님, 인간의 도덕적 퇴화,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의 단절을 야기할 수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심지어 한국에서 신학을 40년간 가르치셨다는 어떤 익명의 조직 신학자조차 이 대속론 때문에 기독교를 떠났다는 책을 쓰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비판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셨다는 기독교 사상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1) 대속의 개념과 (2) 십자가의 동시성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대신(substitution)이라는 세속적 개념은 대신하는 자가 대신 당하는 자를 대신해서 교환이 발생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신은, 그 능력에 있어서는 예수님 홀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우리도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기 때문에(고후5:14; 갈2:20; 롬6:6-8), 세속적 대신과는 정반대 입니다. 뿐만 아니라, 심판의 하나님이 바로 용서와 의의 하나님시기 때문에 십자가에서는 심판과 용서, 의가 동시에 발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의인 그리스도를 심판하신 것이라기 보다는 죄인인 인간을 심판하셨기 때문에 십자가는 정의와 하나님의 거룩함을 세우는 일입니다. 그리고 바로 자기 아들을 희생하시면서 인간을 함께 심판하셨기 때문에, 또한 심판하시는 그 분이 용서로 가득 찬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결코 폭력적 하나님이 아니라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우리도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기 때문에 십자가는 인간의 도덕적의 퇴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강력한 도덕적 영적 요청을 가집니다. 함께 죽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강한 형태로 결속시키며 새롭게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이렇게 성격적 대속론을 올바로 이해하게 되면 십자가의 신비와 역설의 가장 깊은 내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의도는, 이 책을 통해서 저는 도덕적 모범론의 대한 논의를 균형 있게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현대의 십자가 이해가 도덕적 모범론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우선적으로 도덕적인 모범이 되셨다는 주장입니다. 사실 여러 가지 이유로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만, 위에서 언급한대로 세속적 대속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 때문에 도덕적 모범론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성경적 대속의 의미에서 밝힌 대로, 십자가가 얼마나 강력하게 도덕적 함의를 가지고 있는가를 먼저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도덕적 의미만을 가지고 있거나, 도덕적 의미를 일차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모두 논리적인 한계를 드러냅니다. 죽음 그 차제는 도덕적 가치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오로지 죽기 위해서 십자가를 따른다면, 역설적으로 십자가를 따를 필요조차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도덕적 노력을 가하지 않아도 죽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내용을 가지지 않는 죽음 그 자체가 도덕적 가치를 결코 가질 수 없습니다. 희생적 죽음만이 도덕적 가치를 가질 수 있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희생적 가치를 먼저 가져야 도덕적 모범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저술하게 된 중요한 동기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도덕적 모범론의 문제를 지적하고, 십자가가 윤리적, 영적 함의를 얼마나 강력하게 가지는가 하는 문제를 도덕적 모범론의 테두리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밝히고자 하는 것입니다.

      ● ‘십자가, 그 신비와 역설’은 제1부 신비와 전제와 제2부 신비와 역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책의 제목에서 '십자가의 신비'는 쉽게 이해가 되지만 '십자가의 역설'은 손에 잘 잡히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역설은 무엇입니까?

      역설은 신비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에서 “이것이 역설입니다”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신적 존재가 인간의 육이 되어서 십자가에서 피조물을 위해서 희생한다는 기본적인 골격 그 자체가 역설적입니다.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는, 자신의 몸과 피를 나누심으로써 우리를 하나로 만드신다는 것(받아라, 내 몸이다), 버림받음으로써 버림받은 자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심판이 바로 용서라는 것(많은 사람을 위해서 대속물로 주노라), 죽음이 사랑과 화해를 이루어 낸다(다 이루었다)는 요한복음의 선포도 역설적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잘 알지 못해서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박았는데, 예수께서 자신이 들리면 즉, 십자가에서 죽으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것도 깊은 역설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는데 우리도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도 역설입니다(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우리가 늘 직면하는 역설은, 십자가를 잘 알고 십자가를 따르는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 자들이게도 십자가는 늘 충격과 도전이 된다는 점입니다.  이런 내용들이 책에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 ‘십자가, 그 신비와 역설’에서 “내 몸과 피”,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다 이루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는 다섯가지 말씀을 통해 십자가를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많은 성경구절에서 특별히 이 5개 구절을 인용한 이유가 있습니까?

      첫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십자가 사상은 전통적으로 바울의 글 속에서 그 근거를 찾아왔습니다. 현대신학에서는 이런 점을 비판하고 공관복음에서 예수를 이해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왔습니다. 역사적 예수 운동도 이런 맥락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깊은 사상을 찾을 수 없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예수님 자신이 자신의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서 잘 의식하고 있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주장이 어느 정도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십자가 달려 죽을 것이라는 것 자체는 반복적으로 선포하시고 있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장에 반대해서, 저는 책에서 공관복음, 특히 마가복음에서 예수님 자신이 하신 선포만 살펴보아도 십자가에 대한 깊은 내용과 그 내용의 근거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다섯 말씀을 선택했고 그 말씀에 대해서 해설하고 있습니다.

      둘째, 구체적으로 이 다섯 말씀을 선택한 이유는 다섯 말씀들이 비록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고 할지라도, 십자가에 대한 실재(reality)를 아주 원초적으로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다섯 말씀은 서로 연결되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하나의 긴 호흡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 자신이 그런 호흡을 의도하신 것은 아닙니다. 저자인 제가 그 긴 호흡을 발견하고 다섯 말씀을 순차적으로 배열했습니다. 그 긴 호흡 속에서 우리는 아래와 같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자신을 나누시고 우리를 짊어지시며 마침내 우리를 자신에게로 모으시는 일관된 흐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나누어 주시는 예수님 (Christ shares himself with us)—“내 몸이라”
         ⇒ 인간을 나누시는 예수님 (Christ shares humanity with us)—“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 우리를 짊어지시는 예수님 (Christ bears us)—“대속물로 주노라”
             ⇒ 우리를 모으시는 예수님 (Christ draws us)—“다 이루었다”
               ⇒ 우리가 그리스도에게로—“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실제로는 위의 5과정 가운데 3번째, “짊어지시는 예수님”에서부터 그 방향이 위쪽으로 향해야 합니다. 우리를 자신에게로 올리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아래 도표 자료 참조).


      ▲사진을 클릭하면 큰 그림으로

      다섯 말씀을 하나하나 간략하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첫째, 최후의 만찬에서 하신 말씀, “받아라 이것은 내 몸이다,” “내 피로 새운 새 언약이다”(막14:22-25)는 말씀은 일반적으로 성찬을 제정하신 것으로 이해 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는 “기념하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위한 피”라고 선포하십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그 죽음이 가지는 가장 원초적인 모습을 선포하신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죽음으로 나누어 주셨습니다. 단 하나의 몸이신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셔서 우리와 동일한 몸이 되셨고, 죽음으로 자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Christ shares himself with us.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는, 죽음의 살아있는 공동체가 됩니다.    

      두 번째 말씀은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막15:34)입니다. 이 고통에 찬 예수님의 절규는, 기독교를 잘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상당히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것이 마치 자신이 이루려고 했던 것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한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구절 때문에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분들도 많습니다. 전통적으로 이 말씀을 시편 22편의 맥락에서 이해해 왔는데, 시편 22편에서는 버림받았다는 것은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신뢰의 선포이자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해하게 되면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로 축소될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구절은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인간에게로” 버림받았다고 해석합니다. 인간은 인간에게로 버림받아 고통과 죄악, 죽음 속에서 살아갑니다. 인간의 고난은 어떤 종교나 철학도 해결할 수 없는 가장 어려운 난제중의 난제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버림받은 인간에게로 버림받아서 우리의 고난과 함께 하십니다. 십자가에서 마침내 우리는 인간의 고난 속에 계시는 신적 존재를 만나게 됩니다. 모두에게 버림받아도, 심지어 우리 자신들에게서 버림받아도 우리는 결코 상실의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을 버리시어 버림받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고난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Christ shares humanity with us.

      세 번째 말씀은, “많은 사람을 위해서 대속물로 주로라”(막10:45)입니다. 대속물이라는 단어는 신약에서 이 구절에서만 사용되고 있어서 정확한 의미를 알기 어렵지만, 그 파생어를 살펴보면 이 단어는 (1) 상업적으로 대신 지불한다는 의미, (2) 법정적으로 죄를 짊어진다는 의미, (3) 제례적으로 피로 대속한다는 의미 등을 갖고 있습니다. “피로 산다”는 내용이 성경에 많이 등장하고 있지만 십자가를 상업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재화의 교환이 가지고 있는 세속적 내용과 교환의 메카니즘이 십자가의 치열함을 약화시키거나 왜곡시킬 우려가 있습니다.

      법정적인 의미로, 성경은 심판과 용서를 동시에 선포하고 있는데, 저는 심판을 십자가의 “외적 원리,” 용서를 십자가의 “내적 원리”라고 해석합니다. 하나님은 외적 심판 속에 그 용서를 감추고 계시고, 또한 반대로 용서하시기 위해서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또한 십자가를 “의를 심어주심”과도 연관시킵니다. 일반적으로 심판이라고 하면 의가 세워지는 것으로 이해해서 심판과 의를 동일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심판과 용서뿐만 아니라 “의가 우리에게 들어와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롬3:22-26; 고후5:21)을 십자가와 연관시킵니다. 절대적이고 영원하신 의가 우리를 찾아오시는 의가 됩니다.

      돼지나 닭과 같은 동물을 죽여서 그 살을 태우고 피를 뿌리는 제사의 풍습은 인류의 역사 속에 풍부하게 자리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을 제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죽음이 분명히 발생했다는 것 말고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제사 제도의 유사성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 책에서는 저는 이러한 문제를 유월절, 구약의 제사제도,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장면, 계시록의 어린양과 같이 다양한 각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2-3장에서 고난의 종이 요한복음 1:29절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이해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근거가 된다는 것도 함께 다룹니다.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우리를 짊어지셔서, 거래와 보복과 교환과 미신의 인간굴레를 깨뜨리고, 참회와 용서와 나눔과 희생과 의로움과 위로와 동행과 감사라는 새로운 인간실존, 새로운 지성의 가치, 새롭고도 아름다운 도덕적, 영적 세계로 우리를 향하게 합니다.

      네 번째, 예수께서는 “다 이루었다”(요19:30)라고 십자가에 선포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기록된 복음서이기 때문에, 공관복음과 구분되는 요한복음만의 독특한 초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요한복음 내용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십자가는 사랑입니다(10장, 15장). 그런데 죽음이 어떻게 사랑이 되는지를 예수께서 상세히 설명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단지 “내가 들려지면 영생을 얻으리라”(3:14-15), “내가 들려지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리라” (요8:28), “내가 들려지면 모든 사람을 내 자신에게로 모으리라”(12:32)는 선포를 하고 계십니다. 이 세 말씀 속에서 예수께서 “다 이루신 것”의 실체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십자가에 달린 그 분을 보면 우리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 수 있다는 두 번째 말씀이 충격적이고 역설적입니다. 아들을 보면 아버지를 알 수 있고 아들의 죽음을 보면 아들이 참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지식이 십자가에서 드러난 셈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십자가위의 그 하나님 외에는 다른 하나님은 없다”고 할 정도로 십자가와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을 연결 지었습니다. 세 번째 말씀은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 모으신다는 선포입니다. 어떤 의미인지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죽음으로 인해서 제자들은 십자가 주위를 멀리서 서성이다가 다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모두가 떠나갔던 그 자리로 다시 모은다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평화화 화해를 이룬다는 바울의 사상을 통해서 “모은다”는 말씀을 비추어 보면, 죄와 죽음과 자기애로 갈기갈기 찢겨졌던 인간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다시 그리스도에게로 모여들어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인간이 하나님께 화해되었다는 말씀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죽음이 생명과, 참 지식과 평화를 다 이루셨습니다. 이 신비스러운 실체가 이 땅에 다 이루어 졌는가에 대한 의문 속에 우리는 살아가지만, 예수께서 선포하신 일이기 때문에 이루심의 완성된 실체가 어떤 형태로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고백합니다. 예수께서 죽음으로 이루신 일의 결국은 이 땅의 모든 분열을 물리치고 그 자신이 평화이신 예수(엡2:14)님 자신에게로 모든 사람들을 모으시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막8:3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8:29절)고 물으시고, 자신이 누구신지를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다”(8:31)라고 정의하신 후에 제자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결국, 자신에 대한 자기 정체성과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자기 정체성을 함께 언급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로 만나는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자들! 따라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자기 정체성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총체적으로 부인하고 비어내고 십자가로 채우며 고난 당하는 인류와 함께 할 때, 이미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희생이 우리 안에서 넘쳐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은 이렇게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일을 통해서, 이 땅에서 점점 더 이루어져 갑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을 참으로 엄청난 일입니다. 자신 홀로 인류를 나누시고 짊어지신 그 유일한 예수께서, 자신에게로 모두를 모으시는 총체적인 예수님이 되셨고, 우리는 바로 그 예수님과 십자가로 점점 더 연합되어 갑니다.            
                   
      ● 미국 웨스턴 신학교에서 목회학석사 과정을 밟는 동안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해를 읽고 그리스도인의 십자가가 어떤 의미인지를 발견하고 회심했다는데 특히 루터가 말하는 어떤 부분에서 깨달음을 얻었습니까?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해를 읽기 전까지 다른 신학자들의 십자가 사상을 계속 읽고 있었습니다. “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고 했고, 많은 사상가들이 여러 가지 비유와 개념을 사용해서 이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런 논리, 인과관계, 교환, 메타포등을 통해서 십자가를 이해한다는 것이 일종의 역추론(reverse inference)에 가깝기 때문에 뭔가 부족하고 미흡하다는 것을 계속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신의 자시 희생을 이해하고 해석할만한 그 어떤 사상체계나 언어나 문화코드가 없을 경우에 어떻게 십자가를 이해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루터의 십자가사상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why?”라는 질문보다는 “what?”에 더 초점을 맞춘 루터의 사상 속에서 아주 간결하지만 강력한 십자가의 실재(reality), 즉 “죽음에 죽음, 죄에 죄, 사탄에 사탄”(라틴어로 여격을 사용했기 때문에, “죽음을 위한 죽음”으로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접하게 되었고, 인간의 논리체계를 넘어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이후에 루터에 대해서 석사 논문을 쓰면서 더 다양하고 복잡한 루터의 십자가 사상을 접하게 되었지만, 그의 갈라디아서 강해를 통해서 비로소 인간의 철학과 사상이 결코 다 담아내지 못하는 십자가의 초월적인 면을 깨닫게 되었고 십자가로 드러난 “신적 자기 희생(divine self-sacrifice)”의 하나님께로 참다운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 오늘날 교회는 십자가라는 외형은 있지만 그 진정한 의미를 잃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같은 의미로 모습만 크리스찬인채 크리스찬의 삶을 살지 못하는 현대 교인의 모습이 많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함께 하는 교회와 신앙인의 삶의 모습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삶은 좁은 의미로는 (1) 행동양식에 관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보다 더 기독교적인 의미로는 그 삶 속에서 (2) 인간이 내적으로 외적으로 누리고, 지향하고, 의도하고, 품고, 관계하고, 행동하는 모든 총체적인 면, 전 인격적인 면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십자가로 찾아오신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과 믿음과 고백으로 인해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과 은총 속에, 또한 말할 수 없는 참회와 고통 속에 사는 삶이며 이것은 결코 인간의 잣대나 기준에 의해서 쉽게 판별 될 수 없는, 가장 깊숙한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삶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우리의 행동양식도, 우리의 삶의 표현도 십자가가 드러나는 삶이 될 것이며 이것은 그 어떤 도덕적, 영적 수준보다도 더 강력한 요청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총체적 모습을 일관되게 소유할 수 있는 존재가 못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식으로부터, 행동으로부터, 확신으로부터도 소외 당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양자 사이에 긴장 속에 살아갑니다.

      첫째, 이러한 근본적인 한계로 인해서 우리는 일정 부분에 우리 삶을 초점을 맞출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해방신학이 지나치게 정치, 사회적인 면을 강조함으로써 해방의 전 인격적인 면을 놓칠 수는 있지만, 그 동안 기독교가 해방의 복음을 내적인 면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치명적인 문제를 낳았습니다. 따라서 현재 우리의 삶이 보다 더 강력한 초점을 가져야 하는 것은 정치, 사회적인 해방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실천하는 삶을 지향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점들이 현재 한국교회가 당면한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즉, 십자가가 실천적으로 드러난 삶을 한국기독교가 그 동안 놓쳐왔다면,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 강력한 실천을 지향하는 길입니다. 자기부인, 희생, 나눔, 내려놓음을 우리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며 십자가를 따르는 것입니다. 모든 세속적 가치를 초월하는 십자가의 윤리가 기독교인의 삶을 압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에 대한 깊은 반성은 특히 오늘날 가장 시급한 문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둘째, 삶의 다양성과 깊이를 이해하고 그 다양성 속에서 십자가가 드러낸 포괄적인 조화를 지향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 깊은 침묵과 안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신비주의적인 기도와 명상을 통해서 기독교인의 삶의 조화를 꾀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천박한 영적 상태가 우리의 행동양식을 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은, 우리의 일천한 지성이 십자가를 획일화하거나 심지어 우상화하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면, 전교회적으로 십자가에 대한 깊은 연구와 묵상이 필요합니다. 십자가가 뻔하고 식상 하다면 우리는 죽은 영혼입니다. 혹은, 십자가의 희생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아무리 노력해도 십자가의 그 본질에 결코 다가갈 수 없는 인간의 도덕적 한계로 인해서 좌절하고 절망한다면, 바로 그 좌절과 절망의 한 가운데 십자가의 은총의 깊은 비밀과 풍요로움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고백하고 나누는 것도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는 한 모습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십자가의 전 인격적인 면을 주목한다면, 우리의 삶의 신비와 지성과 행동이 포괄적으로 십자가와 만나는 삶을 지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삶의 아주 긴 호흡 속에서 포괄적으로 전개되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위와 같이 우리는 어느 한 긴급한 일에 십자가의 삶으로 매진하거나, 긴 호흡으로 십자가의 삶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긴급함과 포괄성 사이에 그 긴장을 서로가 이해하고 허용하는 것도 십자가를 따르는 하나의 길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 또한 교역자가 십자가의 진리를 알게 된다면 목회에 어떤 변화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교회의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십자가의 심오한 진리와 신비를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목회현장에서 늘 십자가가 드러나도록 노력하고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그래도 오늘 교회가 직면한 수많은 문제를 생각해 본다면 십자가에 대한 깊은 지식과 나눔이 교회의 회복의 핵심적인 내용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만약 교회의 세속화가 목회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다면, 십자가의 희생과 나눔과 용서가 세속적 가치와 얼마나 선명하게 구분되는 가를 가르치고 선포하고 실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만약 지도자들의 부패가 교회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를 가져오고 있다면, 지도자들이 먼저 십자가 앞에 한없이 엎드려 지는 삶을 통해서 교회의 영적, 도덕적 회복을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살아간다는 것은 십자가 앞에서(coram cruce) 살아가는 것입니다. 명예, 부, 권력은 십자가와 가장 먼 가치입니다. 사실 한국교회가 직면했다고 고발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세속의 부침에 귀 기울이지 않는 목회, 십자가와 함께 기독교의 정도를 걸어가는 호흡이 긴 목회, 인간의 가치로 쉽게 전환되지 않는 십자가의 신비를 나눔으로써 그리스도와 연합되어가는 기쁨이 늘 잠잠히 차오르는 목회를 지향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 아버지가 총신대 조직신학 교수였으며, 교수님도 현재 뉴브런스윅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십자가, 그 신비와 역설’은 조직신학적인 면에서 다루고 있습니까?

      저의 전공도 분명히 조직신학입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분명히 조직신학에서 다루는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조직신학자들의 다양한 견해를 다루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견해를 다루는 책은 내년에 한국어로 출판될 예정입니다. 십자가, 그 신비와 역설에서는 조직신학적인 안목과 철학적인 문제의식이 그 골격을 형성해서 성경본문의 5말씀을 다루고 있는데, 성경 신 구약의 여러 말씀들을 참고하고 그 말씀들 속에 녹아있는 하나님의 특성들을 근거로 조직신학에서 다루고 있는 많은 주제들을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내용은 조직신학이지만, 그 방법론은 조직신학적인 테두리를 벗어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 '십자가 그 자체와 넘치는 십자가'라는 다음 책이 준비되고 있고, 7인의 십자가 사상을 다룰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이번 출간된 책과 비교하여 다음 책의 내용은 무엇이며, 7인은 누구입니까?

      “십자가 그 신비와 역설”은 십자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루는 책입니다. 내년에 새물결출판사를 통해서 출간될 “7인의 십자가 사상”은 (아직 제목이 정해지지 않는 가제입니다) 7명의 신학자들의 십자가 사상을 다루는 전문적인 신학 책입니다. 더 쉽게 요약하면 십자가 그 신비와 역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상이고, 7인의 십자가 사상 신학자들의 십자가 사상입니다. 7명의 신학자들이란, 초기교회에서 이레네우스과 오리겐, 중세의 안셈, 개혁시대의 마틴 루터와 캘빈, 근세의 맥레오드 캠벨, 현대의 아브라함 판드 베잌입니다. 이렇게 각 시대마다 가장 중요한 십자가사상을 전개한 신학자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그 자체와 넘치는 십자가”라는 개념은 저의 십자가 사상의 기초가 되는 개념으로서, 인간의 지성의 패러다임을 가능한 한 배제 한 “십자가는 그 자체”로부터 우리의 십자가에 대한 이해를 출발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십자가 그 자체라고 이름 지었고,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 그 자체로부터 “넘치는 십자가”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는 의미에서 넘치는 십자가라고 개념 지었습니다. 십자가 사상의 다양성을 나타내는 개념으로는 “객관적 의미” 와 “주관적 의미,” “대속적 의미” 와 “도덕적 모범,” “회귀적 의미”와 “전향적 의미”등이 있습니다만 이들의 개념들은 그 두 개념의 연속성을 잘 표현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그 자체와 넘치는 십자가는 십자가의 다양성이 서로 구분되어야 하면서도 연속성을 가진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십자가의 실재로부터 십자가 그 자체에 대한 이해를 출발하면, 승리주의, 도덕적 모범론의 논리적 문제, 대속론의 재조명 등의 단초를 찾을 수 있습니다. 신학교에서는 십자가사상의 유형을 다루는 2차 자료를 주로 교재로 사용해왔는데, 본 저서에서는 7인의 십자가 사상가들의 원전을 풍부하게 인용하고 있어서 직접적으로 7명의 신학자들의 사상을 접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10주년


      숯으로 가족 건강 지키는 생활 지혜


       (숯은 겉 부분을 물에 씻어 말린 뒤 열 번 정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coal06.jpg


       

      1.과일이나 채소, 쌀을 씻는 물에 숯을 넣고 10-20분

      놓아두면 숯이 농약성분을 빨아들인다.

      2.음식을 끓일 때 넣으면 음식물이 으게지지 않아

      요리의 모양을 예쁘게 유지할 수 있다.


       

      3.숯은 물속의 유해물질을 흡착, 분해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정수 효과를 낸다.수도물에 넣어

      두면 소독약 냄새도나지 않고 물맛도 좋아진다.


       

      coal02.jpg

       


      4.튀김 기름에 넣으면 기름이 잘 산화되지

      않고 요리의선도가 유지된다.


       

      5.숯을 넣어 밥을 하면 좋지 않은 쌀이나

      묵은 쌀이라도

      햅쌀로 지은 밥처럼 밥맛이 좋다.


       

      6.집안 구석 구석에 놓아두면 공기정화 역활

      을 한다.

       


      coal07.jpg


       

      7.냉장고에 넣어두면 김치냄새 등의 여러가지

      냄새를 없앨 수 있다.


      8.구두속에 넣으면 퀴퀴한 발냄새를 없애 준다.


      9.후미진 곳에 놓아두면 바퀴벌레나 개미를 퇴치

      하는 효과도 있다.

       


      coal04.jpg



       

      10.쌀통에 숯을 넣어두면 바구미가 생기지 않는다.

      11.컴퓨터나 텔레비젼 등의 전자파를 흡수한다.

       

      12.화초를 심을때 숯가루를 뿌리면 화초가 잘 자

      란다. 화분위에 뿌리거나 숯덩이를

      올려놓아도 화초가 잘 자란다.


       

      coal05.jpg

      13.숯을 욕조물에 넣어 몸을 담그고 있으면 체내의

      유해한 화학물질이 피부에서 배출된다.

      아토피성 피부염과 피부미용에 좋고

      신경통과 요통을 완화시킨다.


      14.숯가루를 탄 물로 관장을 하면 체내에 쌓인숙변을

      제거하고 변비를 예방한다.


       

      15.간장을 띄울 때 숯을 넣으면 잡균이 생기지 않는다.


       

      coal10.jpg


       

      16.숯을 바구니에 담아 잠자리 옆에 두거나

      침대밑에 두면 숙면과 피로회복 및

      에너지 충전 효과가 크다.숯가를를

      잘 싸서 베개에 넣어두는 것도 좋다.

      17.습도를 조절, 가습기 역활을 해 준다

       


      coal11.jpg

      기독교 연합의 기초 -2 / 로이드 존스

       

       

      2. 요한복음 17장의 가르침

       

      요한복음 17:21은 하나의 슬로건으로서 너무 빈번하게 사용되는 구절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 구절에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십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무엇보다 먼저 그 말씀을 문맥과 배경에 비추어서 그 말씀을 봄으로써 해석해 나갑니다. 언제나 성경을 해석하는 주도적인 원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복음적인 사람들에게 자주 퍼부어지는 비난은, 복음주의자들은 “증거본문”을 사용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향해서 그러한 비평이 가해집니다. 그 신앙고백이야말로 신앙고백 중에서 가장 훌륭한 신앙고백입니다. 신앙고백은 증거본문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성경의 일반적인 흐름과 의미를 취해야지 우리의 입장을 어떤 특별한 본문 위에 올려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적인 운동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이 구절에 대해서 바로 그 일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구절을 문맥에서 완전하게 떼어내어 그것을 하나의 슬로건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는데 대하여 역설합니다. 한 본문을 따로 떼어놓는 것은 ‘언제나’ 잘못된 것이라고 말입니다. 성경해석의 제1법칙은 본문을 언제나 문맥에 비추어 생각해야 하며, 첨가하여 다른 본문들과도 비교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 성경해석의 규범이 중요하다면 바로 이 특별한 진술과 관련하여 그러합니다.

       

      (1) 문맥을 분석함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요한복음 17장을 보편적으로 분석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7장은 분명한 여러 대목으로 나누어집니다. 처음 다섯 구절로 이루어진 첫 번째 대목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주로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두 번째 대목은 6-10절까지의 내용으로, 당신이 위하여 기도하시는 그 백성들에 대한 묘사를 하고 계시며 그들을 위한 보편적인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다. 11-12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로 보전되기를 원하는 근본적인 기도를 드리십니다. 13-16절까지에서는 특별히 본질적인 연합을 무산시키려고 언제나 벼르고 있는 악한 자의 교활한 공격에 맛서서 하나로 보전되기를 원하는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다. 17-19절에서는 그 백성들이 거룩하게 되기 원하는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다. 다시 그들이 진리와 이 하나됨 안에 보전될 수 있기 위하여 말입니다. 20-23절까지에서는 11절에서 이미 기도하신 것을 들어 정교화 시켜 연합의 본질을 더 상세하게 규정해 나가십니다. 24-26절까지에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당신의 궁극적인 소원을 표현하십니다. 그들이 당신 계신 곳에 함께 있고,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셨던 영광을 보기를 원하시는 긍극적인 소원을 표현하십니다. 전체 대목에 대한 보편적인 분석이 그러합니다.

       

      (2) 연합의 원리들

      이 연합(하나됨)의 문제를 보다 더 상세하게 생각해 나감에 따라서 그 하나됨을 처음으로 특별하게 언급하시는 것은 11절임을 주목하게 됩니다. 우리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이 본문이 근본적인 본문입니다. 그 한 진술 속에 모든 진수가 되는 원리들이 설파되어 있습니다.

       

      1) 그 본문이 제한적으로 지적하는 사람들

      먼저, 주님께서는 당신이 ‘저희’라고 지칭하신 특별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심을 주목하게 됩니다. 저희, 저희만이 이 하나됨의 주체들입니다. ‘저희’는 누구입니까? 요한복음 17장 자체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저희’는 막바로 처음에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자들이라고 말씀하셨던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근본 진술입니다. 그는 그 진술을 계속 반복해 나가십니다. 하나님께 속한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님께 주셨던 사람들이요, 그들을 위해서 주님은 세상에 오셨고, 그들을 위해서 당신이 하셨던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들에 대한 또 다른 요점으로, 그들은 세상에서 구별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9절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진술은 매우 중요한 진술입니다. 여기 이 사람들은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아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 사람들만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이 요한복음 17장에는 ‘보편구원론’(Universalism)이 전혀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일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암시가 전혀 없습니다. 또한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알지 못한 채 이 세상에 거하면서도, 결국 그들에게 그 기도가 해당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구원 받는다는 암시를 주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로 여전히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주님께서 세상에서 불러내신 사람들 사이에 명확한 구분이 지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6-8절에서 ‘저희’로 지칭된 사람들에 대한 더욱 흥미롭고 중요한 정의를 대하게 됩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오신 것인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이는 정말 중요ㅗ하기 그지없는 요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20절에서 다시 그 동일한 개념을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내고 계십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을 위함이 아니요 또한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인함이니.” 이 사람들은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또한 세상에서 이 사람들이 말한 똑같은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믿게 될 다른 사람들도 있습니다. 강조점은 같습니다. 그는 25절에서 그 점을 다시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25절 말씀은 이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종국적으로 규정해 주고 있습니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이는 정말 중요한 진술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더욱 더 규정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다시 우리는 구분과 구별의 요소를 강조해야겠습니다. 우린 주님께서는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바 된 이 사람들을 위해서만 기도하십니다. 실로 그는 19절에서 특별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로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물론 이 말씀은 당신 자신을 속죄와 화해의 사역을 위해서 죽음에 내어주실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그 일을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해 하시는 것은 아니라고 특별히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이 사람들’만을 위해서 하십니다. 다시 이 진술은 매우 중요한 진술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하나됨을 이루는 이 사람들은 우연하게 어떤 나라에서 길리움 받거나 우연한 어떤 민족이나 어떤 종족이나 어떤 특별한 눈에 보이는 교회 안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받은’사람들이요, 주님의 교훈을 받은 사람입니다. 특별히 주님께서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누구시며, 주님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으셨고, 자기들을 위해서 이 일을 하러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믿었고’, ‘받아들였습니다’. 바로 이 사람들에 대한 주님 자신의 정의가 그러합니다. 다른 말로 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하나됨(연합)은 당신의 말씀, 곧 우리가 복음의 메시지라 부르는 것을 받아드리는 믿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2) 하나됨의 기원

      주님께서 하나됨의 기원에 대해서 11절에서 설정해 놓으신 두 번째 원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보전하사’라는 말씀을 쓰고 계심을 여러분은 주목하실 것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개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7장 그 어느 곳에서도 이 하나됨을 산출하라고 권면하거나 호소하는 말씀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연합은 이미 존재하며, 이미 실존하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 연합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주님과 주님의 사역에 대한 진리를 믿는 사람들의 연합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이 세상을 떠나실 것과 그들이 악한 자의 공격과 죄와 악의 모든 세력에 노출될 것이라는 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아버지께 이미 존재하는 그 하나됨 안에서 그들을 보존해 주십사고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그것이 매우 중요한 요점입니다. 원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목표하여 도달해야 하는 어떤 것을 다루고 계시지 않습니다. 실로 우리 주님께서는 이 요한복음 17장에서 조금이라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전도의 말씀을 통해서 이미 이 사람들 속에 존재케 된 그 하나님을 지켜 주십사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3) 하나됨의 본질

      우리 주님께서 제기하시는 세 번째 요점은 연합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말하자면 그 주제에 대한 근본적인 분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20-23절에서 그 점을 정교하게 설명하고 계시니 그 구절들을 숙고해 나가기로 합시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은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여기서 우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성경 전체에서 발견되는 진술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진슬 하나를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번에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하나됨(연합)의 진수적인 성격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존재하는 하나됨에 빗댈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그 하나됨은 주님께서 위하여 기도하는 그 백성들과 아들 자신 사이의 하나됨에도 빗댈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의 몇 구절 속에서 이에 대한 이해를 주는 빛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20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다시 21절에서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그런 다음 23절에서 이렇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 자, 우리가 다루고 있는 요한복음 17장의 몇 구절에 대해서 어떤 주장들을 한다 할지라도 이 진술은 마치 그 의미가 완벽하게 드러나고 명료하게 나타나는 것처럼 생각하고 가볍게 취급하거나 입심 좋게 또 대충 취급될 진술이 아님은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우리 주님은 여기서 복되신 성삼위간에 본체론 쪽으로 존재하는 신비한 연합을 다루고 계십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 중 가장 고차원적인 신비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 이 용어를 마치 그 뜻을 명백하게 알 수 있는 것처럼 마구 취급하고들 있습니다. 실로 그것이 마치 한 뜻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들을 합니다. 곧 어떤 외향적인 조직적 영합을 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진술에 대한 모든 것이 그 정반대의 것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본체의 연합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삼위일체의 전체 신비입니다. 세 인격이 존재하나 그러면서도 한 하나님이십니다. 본체는 위(位, 인격)들 간에 구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세 위(位)로 하여금 하나 되게 하는 것은 본체(진수, essence)의 연합입니다. 그 점을 배제시킬 수 없습니다. 물론 그에 더하여 사고방식, 사상, 목적, 서로간의 사랑, 또한 그 점에서 필연적으로 뒤따라오는 다른 모든 것의 연합이 존재합니다. 바로 그 방식을 우리 주님께서는 이 사람들 속에 확보해 놓으신 이 하나됨을 규정하고 계십니다. 바로 우리 주님은 하나님께서 그 하나됨을 보전하시고 주님이 영광으로 돌아가신 다음에도 지켜주십사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으로부터 유추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일으켜야 하는 연합은 이 진수(본체), 또는 존재의 연합을 함축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너무나 명백하게 가르치는 교리를 또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사람이며, ‘성령으로 난’사람이며,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라는 교리입니다. 그 모든 것이 여기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주제가 어렵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신(神)이 되었다고 가르쳐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사용한 성경 어구는, 우리가 ‘신의 성품(divine nature)에 참여한 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벧후 1:4).

      우리 주님께서 뜻하는 바로 말하면 진리를 믿은 자들 속에서 이 새로운 성품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근본적인 작용이 없이는 연합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연합을 바꾸어 설명하여 같은 유추로 말한다면 관점, 목적, 사랑 등등의 본질성을 같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연합은 거듭난 또는 다시 난 사람들 중에서만 얻어질 수 있는 연합이라는 것입니다. 규정상 그것은 어느 누구라도 결심하여 이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협동을 하거나, 어떤 공회를 형성하여 어떤 목적과 어떤 목표를 수행해 나가는 것 같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일에 잘못된 어떤 것이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제 관심은,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연합은 그런 것이 아님을 보여주려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심지어 우정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보다 더 깊습니다. 그것은 가족관계와 같습니다. 여러분은 그 가족관계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그 가족관계가 수반하는 것을 마음대로 정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한 가정에 태어납니다. 비록 여러분이 여러분의 가정에 어떤 권속들과 의견이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피와 본질의 문제입니다. 교회의 연합이 바로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어떤 자원하여 의지적으로 행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주어진 가족에 태어난 결과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형제들입니다. 단순히 친구들의 연합이 아닙니다.

       

      (3) 요약

      우리가 다른 대목으로 넘어가기 전에 이 대목의 가르침을 요약해 보면 이러합니다. 주님께서 존재케 하시고, 또한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에 스스로 보전하셨던 그 연합이 계속될 수 있이 위해서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유다의 경우에는 특이하게 예외로 말씀하시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정말 흥미롭습니다. 그 사람은 그 부류에 속해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그 연합에 ‘진정으로 속하지 아니한 것’을 매우 분명히 보여주는 사람이었습니다.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지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함이니이다.” 여러분이 그 연합에 속해 있는 것처럼 외모를 보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새 생명, 이 새로운 탄생이 없다면 진정한 연합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언젠가는 그 본모습을 들어내고야 맙니다.

      그와 같이 우리 주님의 진술 전체는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권면하는 것이 아님을 여기서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아버지께 이미 존재하는 이 연합을 보전해 주십사고 간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연합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이고, 거듭남의 역사를 통해서 성령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산출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주님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가르침을 똑같이 믿고 받아드리는 데서 그 정체를 드러내게 됩니다. 이러한 특징이 모자란 ‘연합’은 그 어느 것이든지 우리 주님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말씀하시는 연합은 아닙니다.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요즘 트위터 페이스북 더보기


      '로이드 존스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참된 신자의 모습  (0) 2014.01.25
      설교자가 되어야 했던 이유  (0) 2014.01.15
      거짓된 열심들의 특징  (0) 2013.11.23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롬 1:18~20) 로이드존스  (0) 2013.10.28
      참 회심의 증거  (0) 2013.10.10

      기독교강요 제5장 보속설에 첨부된 면죄부와 연옥(1-5) / 존 칼빈

        제5장 보속설에 첨부된 면죄부와 연옥
       
      (면죄부의 교리는 오류이며 그 영향은 유해하다. 1-5)
      1. 로마 교회의 면죄부와 그 해독
      그런데 이 보속의 교리에서 면죄부(또는 속죄부, Indulgences)가 생겨났다. 우리의 논적들은 보속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능력이 부족한 것을 면죄부가 보충하는 듯이 말한다. 그리고 광적인 극단으로 가서, 면죄부는 그리스도와 순교자들의 공로의 분배라고 정의하며, 교황이 교서에 의해서 그 공로를 분배한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토론의 상대로 삼는 것보다 정신병 치료제로 치료하는 것이 좋겠다. 이렇게까지 어리석은 오류는 논박하려고 애쓸 가치가 없다. 그것은 이미 많은 쇠망치의 공격을 받아 저절로 낡아가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태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간단한 논박이 유익할 것이므로 나는 그냥 생략하지 않겠다.
      면죄부가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공격을 받지 않았으며, 무제한의 방자와 난무를 감행하면서도 이렇게 오랫동안 심판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얼마나 짙은 오류의 암흑 속에 빠져 있었는가를 잘 증명한다. 사람들은 교황과 그 교사 전달자들이 아주 노골적으로 자기들을 우롱하는 것과 자기들의 영혼의 구원을 이익이 많은 장사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과 구원의 값을 돈 몇 푼으로 계산하는 것과 값없이 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보았다. 이런 협잡으로 그들은 예물을 빼앗기며, 빼앗긴 것은 매춘부들과 포주들과 난취 난무에 허비되는것을 보았다. 그들은 또 면죄부의 최대 선전가들이 자기들을 가장 경멸하는 것을 보았다. 이 괴물은 날이 갈수록 더욱 더 소란하고 음탕하게 돌아다니며 그칠 줄을 몰랐고 매일 새로운 납을 내놓고, 새로운 돈을 가져갔다. 그래도 그들은 최고의 경의를 표하여 면죄부를 받으며, 경건한 모양을 가진 사기인 줄 알면서도 속는 사람들에게 다소의 유익을 줄 것으로 생각해서 그 앞에 경배하였다. 드디어 세상이 조금 지혜롭게 되려는 용기를 내게 되자, 면죄부는 냉각하며 점점 열기가 식어가고 있으니 결국 완전히 소멸하고 말 것이다.
       
      2. 면죄부는 성경에 배치된다
      면죄부 상인들이 우리를 속이기 위해서 지금까지 비루한 간객과 기만 수단을 썼고 탐욕과 도둑질을 자행한 것을 지금 많은 사람들이 간과했지만, 이 불경한 죄악의 근원 자체는 아직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면죄부의 성격뿐 아니라, 그 정체를 깨끗이 드러내 보일 필요가 있다. 우리의 논적들은 그리스도와 거룩한 성도들과 순교자들의 공로를 "교회의 보고"라고 부른다. 내가 이미 시사한 바와 같이, 그들은 이 창고의 보관권을 로마 주교에게 위임하였으며, 로마 주교가 이 심히 위대한 혜택의 분배를 주관하여, 직접 분배하기도 하며 분배 사업을 타인에게 위임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완전한 면죄부와 일정한 연한의 면죄부는 교황이 발부하며, 백일간의 면죄부는 추기경들이, 그리고 사십일 간의 면죄부는 주교들이 발부한다고 한다.
      올바르게 말한다면, 이런 짓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더럽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분리시켜 구원의 진정한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악마적 간계에 불과하다. 죄의 용서와 화해와 보속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는 것보다 더 그리스도의 피를 더럽히는 짓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주장은 마치 그리스도의 피가 고갈되어 없어졌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보충해야 된다는 듯한 생각이다. 베드로는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들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라고 증거한다(행 10:43). 면죄부는 베드로와 바울과 순교자들을 통해서 사죄를 부여한다. 요한은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라고 말했다. 면죄부는 순교자들의 피가 죄를 씻어버린다고 한다. 바울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도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고 말했다. 면죄부는 순교자들의 피가 죄에 대한 보속이 된다고 한다. 바울은 고린도의 신자들에게 그리스도만이 십자가에서 그들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선언하며 증거한다(고전 1:13). 면죄부는 "바울과 기타 사람들이 우리를 위하여 죽었다."고 선언한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라고 하였다. 면죄부는 순교자들의 피도 교회를 사는 값이 되었다고 한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 면죄부는 거룩하게 함은 순교자들에 의해 완성하며, 그렇지 않으면 불충분하다고 선언한다. 요한은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고 말했다. 그러나 면죄부는, 성자들의 피로 옷을 씻는다고 가르친다.
       
      3. 권위자들은 면죄부와 순교자들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는다
      로마 주교 레오는 팔레스틴 교인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아주 분명한 말로 이 모독 행위를 공격한다. "여러 성도들의 죽음을 주께서는 귀중하게 보시지만(시 116:15), 한 무죄한 사람이 살해된 것이 세상을 위한 화목의 제물은 되지 않았습니다. 의인들은 면류관을 받는 것이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의 용기는 인내의 모범을 보였으나, 의의 선물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의 죽음을 죽은 것이며, 그 죽음은 다른 사람의 빚을 갚는 것이 아닙니다. 주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시며,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죽고 매장되고 부활하였습니다." 그는 이 생각을 기억할 가치가 있다고 해서, 다른 곳에서도 반복하였다.
      확실히 그 불경한 교리를 부수기 위해서 이보다 더 분명한 발언은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어거스틴도 그에 못지 않게 적절한 말로 같은 판단을 내린다. "우리는 형제로서 다른 형제들을 위해서 죽지만 순교자가 피를 흘리는 것은 죄의 용서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미 하셨다. 그가 우리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도 그를 모방하라는 것이 아니고 은혜를 기뻐하라는 뜻이다." 그는 같은 생각을 다른 곳에서도 표명하였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는 우리를 그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려고 인자가 되셨다. 그와 같이 내놓을 만한 선함이 없고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가 그를 통해서 은혜를 얻도록 하기 위하여 죄 없는 그가 홀로 우리를 위하여 벌을 받으셨다." 그들의 모든 교리가 무서운 소독적인 생각과 말을 꿰매어 붙인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이것은 가장 놀라온 모독이다. 다음에 몇 가지 생각을 열거할 것인데 이것이 그들의 판단인지 또는 아닌지를 알아보자. 그 순교자들은 죽음으로써 자신을 위해서 필요한 것 이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렸으며 그로 인하여 필요 이상의 공로를 세웠다. 그리고 그들의 공로는 너무 많아서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넘쳐흐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위대한 은혜가 헛되이 되지 않도록, 그들은 자기의 피를 그리스도의 피와 섞었다. 그리고 죄의 용서와 배상과 보속을 위하여 이 섞인 피에서 교회의 보고가 구성되었다. 그리고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고 한 말은 이런 뜻으로 이해해야 된다.
      이런 입장은 그리스도에게 이름만을 남기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다른 성자들과 구별할 수 없는 일개의 작은 성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스도만이 선포되며 제시되며 그 이름을 부를 가치가 있는 분이었다. 죄의 용서와 화목과 성화를 얻는 문제가 있을 때에는 그만이 소망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이라고 하는지 들어 보라. 순교자들이 흘린 피가 무익하게 되지 않도록, 그 피를 교회의 공동 재산에 기증하라고 한다. 이것은 사실인가? 그들이 죽음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것은 무익한 일이었는가? 그들의 피로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며, 현세 생활을 멸시함으로써 더 좋은 생명을 구한다는 것을 증거한 것이 무익하였는가? 그들의 굳센 지조로 교회의 믿음을 강화하며 원수들의 고집을 깨뜨린 것이 무익하였는가?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만이 화목의 제물이며, 그만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으며, 그만이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회생되셨다고 하면서 순교자들의 죽음에 아무 결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베드로와 바울은 평안히 죽었더라도 승리의 면류관을 받았으리라고 그들은 말한다.
      사도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싸웠으므로 그들의 희생에 아무 결실도 없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부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선물의 분량에 따라 그의 종들을 통해서 자기의 영광을 더하실 줄을 모르신다고 하는 것과 같은 생각이다. 그들의 승리로 인해서 교회에 전투열이 일어날 때 교회는 전체적으로 큰 혜택을 입는다.
       
      4. 반대자들의 성경 해석을 반박함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육체에 채운다(골 1 : 24)고한 말을 그들은 얼마나 사악하게 곡해하는가! 바울은 그 남은 것 또는 보충되는 것을 구속, 보속, 속죄와 관련시키지 않고,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즉 모든 신자들이-지상 생활을 계속하는 동안 단련을 받기 위하여 당하는 고통과 관련시킨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아직 남아 있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으로 한 번 당하신 고난을 지금은 그의 지체들을 통해서 매일 당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받는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인정하셔서, 우리에게 이 특별한 영예를 주신다. 그런데 바울은 "교회를 위하여"라는 말을 첨가한다. 이것은 교회의 구속이나 화해나 보속을 위해서라는 뜻이 아니고, 교회의 건설과 발전을 위해서라는 뜻이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얻게 하려고, 자기는 모든 것을 참는다고 말한다(딤후 2:10). 그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가 받는 모든 고난을 참는 것은 그들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라고 하였다(고후 1:6).
      그는 즉시 자기가 한 일의 뜻을 설명하여, 자기가 교회의 일꾼이 된것은 구속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한다(골 1:25, 롬 15:19).
      만일 나의 반대자들이 다른 해석자를 요구한다면 어거스틴의 말을 들어 보라. "그리스도의 고난은 머리이신 점에서는 그리스도 한 분에게만 있으며, 몸 전체로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있다." 따라서 한 지체인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이 말을 듣는 분이 누구이든 간에-그리스도의 한 지체라면,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닌 사람들에게서 당신이 받는 고통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다. 어거스틴은 다른 곳에서 사도들이 교회를 위해서 당한 고난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내게는 여러분에게 가는 문이십니다"(요 10:7). 이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피로 준비된 그의 양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값을 인정하십시오. 나는 그 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전파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목숨을 내놓으신 것같이, 우리도 우리의 형제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이것은 평화를 수립하며 신앙을 강화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라고 첨부한다. 이것이 어거스틴이 한 말이다. 바울이 완전하고 충실한 의와 구원과 생명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결함이 있었다고 생각했다는 관념은 버려야 한다. 또는 그가 무엇을 첨가하려고 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바울은 분명하고 웅장한 말로 그리스도께서 풍성한 은혜를 풍부하게 부어주셨기 때문에, 그 은혜가 죄의 세력 전체를 훨씬 능가했다고 전하였다(롬 5:15). 베드로가 웅적으로 증언하듯이(행 15:11), 모든 성자들도 자신의 생활이나 죽음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이 은혜에 의해서 구원을 얻었다. 그러므로 어떤 성자의 가치를 하나님의 은혜 이외에 어떤 다른 것에 의존시키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를 경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괴한 오류는 정체가 폭로되면 곧 정복되는 것인데, 나는 무엇 때문에 아직도 모호한 점이 있는 듯이 여기서 더 시간을 보낼 것인가?
       
      5. 면죄부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통일성과 포괄적 활동을 방해한다
      나는 이런 가증한 것들은 무시하고 이제 묻고자 한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복음의 말씀에 의해서 널리 전파하라는 것이 주의 뜻이었는데, 그 은혜를 납과 양피지에 봉인하도록 교황에게 가르친 것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복음과 면죄부 이 둘 중의 하나가 거짓인 것은 분명하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복음을 통해서 하늘의 모든 풍성한 은혜와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와 그의 모든 의와 지혜와 은총과 함께 하나도 예외 없이 우리에게 제공된다고 증언한다. 사역자들이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행동하도록 화해의 말씀이 사역자들에게 위탁되었는데, 이를테면 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호소하신다고 바울은 말한다(고후 5:18-21)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0-21). 그리고 신자들은 그리스도와의 친교의 가치를 안다. 이 친교는 바울이 증언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받아 즐기도록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제공된다. 이와 반대로 면죄부는 교황의 창고에서 소량의 은혜를 끌어내선 납과 양피지와 일정한 장소에 붙이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은혜를 떼어버린다.
      이 악폐의 근원을 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이전에는 참회하는 사람들에게 명령된 보속 의무가 견딜 수 없으리만큼 엄격했기 때문인 듯하다. 참회자들은 그들에게 부가된 무거운 고행에 눌려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교회가 그것을 다소 완화해 주기를 청하였다. 이런 사람들에게 허락하는 용서를 "면죄"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들이 보속을 하나님과 관련시키고 그것을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신을 구속하기 위한 상쇄 수단이라고 했을 때에, 그들은 면죄 구속 수단으로 변형시켜, 이것이 우리가 받아야 할 벌에서 우리를 석방시킨다고 했다. 그들은 이렇게 파렴치한 생각으로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짓이라고 한 저 훼방죄를 저지른 것이다.

       

      출처: 포도나무선교회/생명나무 쉼터 



      류광수 목사 이단성 검증 공청회(1)
      1998년 10월 01일 (목)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질의 : 최삼경 목사 (빛과소금교회 담임, 예장 통합측 총회 사이비이단문제상담소장)
      답변 : 류광수 목사 (동삼제일교회 담임, 세계복음화 다락방전도훈련원 원장)
      사회 : 이경원 목사 (대전 혜성교회 담임, 예장 합동측 총회 이단조사연구위원회 총무)
      개회기도 : 김창영 목사 (예장 통합측 사이비이단대책위원회 위원장)
      주최 : 월간 <교회와신앙>, 일시 : 98년 8월 27일 오후 2시~6시, 장소 : 횃불선교센터 사랑성전


      지난 8월 27일 본지 주최로 열린 '다락방 류광수 목사 이단성 검증 공청회'는 2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4시간여에 걸쳐 진행되었다. 한국교회의 10여 개 주요 교단으로부터 이단 또는 사이비성이 있는 것으로 규정된 바 있는 다락방의 류광수 목사는 이 자리에서 "한국교회와 함께 가고 싶다"는 변화된 심경을 밝혔다.

      류목사는 공청회에서 그 동안 자신에 대한 많은 지적들이 대부분 오해였다고 해명하는 한편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자신의 지나친 반교회적 발언과 부적절한 용어 사용이 문제가 되었음을 시인, 사과했다. 사탄배상설과 재영접설도 자신의 신앙사상은 결코 아니나, 그런 사상을 가진 것으로 비판을 받을 만한 자신의 표현에 대해서는 잘못을 분명하게 시인했다. 다락방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전도현장에서 기신자들에게조차 예수님을 다시 영접시키는 등의 사례에 대해서도 사과하고 추후로는 그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류목사는 또한 지금까지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던 변증 차원의 모든 글은 사실 자신이 직접 작성한 것이 아니고 다락방 관계자들이 기술한 것이었다는 고백도 했다. 그런 관계로 그  동안의 해명이 충분하지도 적절하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특히 그로 인해 자신의 음주운전 구속 사건을 두고 다락방측에서 잘못 해명하고, 나아가 음주문제를 지적했던 인사들을 오히려 '허위사실 유포에 따른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까지 했던 점 등에 대해 분명하게 사과하고,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고 밝혔다.

      이번 공청회는 최삼경 목사가 12개 항에 걸쳐 기본 질의를 하고 이에 대해 류광수 목사가 답변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기본 질의 각 항마다 수 차례 또는 10여 차례의 보충 질의 답변이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단회적 질의 답변이 안고 있는 한계점의 보완으로 심도 있는 진실 접근이 어느 정도 가능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물론 이같은 방식의 공청회가 모두에게 처음이었다는 점에서 질의, 답변 등 전반에 걸쳐 진행상의 아쉬움도 남겼다.

      본지는 이번 공청회를 통해 중요한 두 가지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는 다락방 류광수 목사에 대해 그 동안 지적되었던 이단성이 비록 류목사 자신의 중심 사상은 아니요 오해였다는 해명이 있었지만, 그렇게 비판받을 수밖에 없도록 하는 신학적 오류 발언 및 표현을 그 동안 류목사 또는 다락방 사람들이 해왔다는 사실이다. 즉 스스로의 분명한 원인 제공에 따른 결과였다는 점이다. 둘째는 중요한 몇 가지 문제에 있어 류목사의 잘못 시인과 회개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류목사의 실천과 이에 대한 계속적인 검증을 필수적으로 전제하는 것이지만, 최소한 잘못 시인과 회개가 반영된 새로운 관찰의 필요성만큼은 제기됐다 할 것이다.

      지면 관계상 공청회의 주요 내용만을 이번호에 게재한다. 질의 답변을 그대로 녹취하는 과정에서 문장으로 맞지 않은 부분에 대해 문맥상 뜻이 통하도록 괄호 안에 보충 문장 또는 단어를 첨가하였음을 밝혀둔다. 그리고 공청회 석상에서 충분히 답변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당사자의 요청에 따라 최삼경 목사의 12개 항의 질의에 대한 류광수 목사의 서면 추가답변이 다음번에 실릴 예정이다. <편집자 주>

       

      ---------------
      * 사회자: 먼저 이 공청회의 진행사항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고 오늘 최삼경 목사와 류광수 목사를 여러분들에게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공청회는 12개의 큰 항목을 놓고 질의, 답변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 항목에 질의, 답변 시간은 통합해서 15분 이내에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12항목을 진행하면 180분이 소요됩니다. 그리고 휴식시간, 그리고 약간의 여분의 시간을 합하면 4시간 안에 끝날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세한 내용들은 진행하면서 그때 그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특별히 여러분들이 검증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생각이나 신학사상에 맞지 않는 그런 내용들이 최삼경 목사나 류광수 목사에게서 나올 때 야유를 한다든가, 또 진행에 방해를 일으킨다든가 하는 행동들은 없도록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최삼경 목사와 류광수 목사는 좀더 정중하게 질의하시고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질의하시는 분은 심문하는 식으로 해서는 안될 것이고 답변하는 사람은 그저 자기 변명하는 식이 되서는 안될 것입니다.

      많은 회중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시인하고, 또 잘된 부분이 있으면 우리가 함께 공유하면서 한국교회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져야 하지 않겠나 생각을 합니다. 저는 합동측 목사이기 때문에 다락방의 대표격인 (류광수 목사에 대해) 저희 교단에서는 이미 결론이 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면직된 분에게 직함을 부르는 것은 그 교단 목사로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주최측인 <교회와신앙>의 요구대로 '류광수 목사님'으로 호칭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최삼경 목사님'이라고 호칭하면서 진행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먼저 류광수 목사께서 기조연설을 해 주시겠습니다. 10분 이내에 마쳐 주시기 바랍니다.

      * 류광수 목사: 먼저 공청회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바른 길을 가며, 한국교회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염려해 주신 목사님들과 특히 이번에 객관적인 검증차원의 본 공청회를 마련해 주신 <교회와신앙> 관계자들에게 중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 동안 전도의 열심 때문에 오해를 끼치며 염려를 끼친 것에 대하여 사과를 드리며 본인도 모르게 일어나는 일들도 많았으나, 일일이 다 해명해 드리지 못한 부분을 주께서 은혜로  도와주실 것을 믿습니다. 저는 너무나 어려움과 험한 세상 중에서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오직 복음과 전도만 하는 중심을 갖고 있습니다. 계획도 전략도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의 충고와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 동안 제가 들어도 이해가 안 될 말들과 도저히 저 자신이 용납할 수 없는 글들을 보며, 제가 한국교회에서 받는 오해된 부분이 너무 많았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해된 부분에 있어서 중심을 가지고 상세히 설명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너무 답답할 때에 약간의 몸부림을 친 것이 오히려 저에게는 은혜가 되지 않았으며, 다른 분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했음을 깨달았고 묵묵히 기다리기로 작정했습니다. 총회를 구성한 것은 수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이 막연하게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한국교회를 위해 바르게 계속 헌신한다면, 문제는 풀릴 것으로 보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총회 형성이라는 판단이 와졌으며, 막상 무조건 기다릴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이 여러 군데 나타났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이해하며 우리가 더욱 바른 복음을 전하는 모임이 되기 위하여 총회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의 표현이 부족했고 오해될 만한 소지가 있는 언어 사용과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은 표현과 비판들이 큰 오해와 문제를 일으키는 결과가 된 줄로 압니다.  그러나 오해되는 부분은 언제든지 겸허히 지도를 받으며, 수정할 것입니다. 더욱이 저를 오해한 분들의 신앙배경이 전혀 저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논쟁할 것이 없으며, 저의 부족한 표현을 수정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정통 보수 신학을 수학했으며 정통 보수 교단에서 성장했습니다.

      그 속의 신앙관이나 교리나 신조가 전혀 저와 상반된 부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저의 신앙관임을 고백합니다. 꼭 부탁 드리고 싶은 것은 저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 중의 하나가, 흑암에서 구원을 받고 지금까지 24년 간 현장에서 계속 전도활동을 한 것입니다. 현재 무당에서 돌아온 사람만 200여 명이 넘습니다. 그러다 보니 영적 문제와 귀신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언급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 말고는 아무런 특별한 언급이 없었습니다. 지금 무속인(무당), 점술가들이 그리스도 앞으로 많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이 일은 생을 걸고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일임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보고를 올린다면, 교인과 교회 수는 감소하고 있으며, 교인들은 전도가 어렵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우리가 힘을 합쳐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소신을 저는 갖고 있습니다. 우리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이 총회를 형성할 때 우리의 소원인 전도만 자유로이 할 수 있는 시간이 오면, 총회를 해산하고 각 교단과 교회에 들어가 헌신할 것을 다짐하고 시작했습니다. 그날이 오면 총회는 해산하겠습니다. 한국교회의 몇몇 큰 오해된 분들께 엎드려 부탁합니다.

      이단을 만들기보다는 안 되도록 도와주시며, 진실된 확인없이 일방적인 비판만  계속 들으면 얼마나 큰 오해가 생기겠습니까? 이것은 보통 영적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는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지도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해결 안 될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저의 각오를 몇 가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랑의 충고를 항상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리고 잘못된 것이나 오해된 표현은 고치려고 합니다. 진심으로 한국과 교회의 구석구석에서 교회와 세계선교를 위해 전도하려고 합니다.

      단, 한국과 세계 교회에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매진할 것입니다. 더욱더 노력할 것은 바른 복음, 바른 전도, 바른 교회, 바른 국가의 유익을 위해 계속해서 고쳐 나가려고 합니다. 이상의 것들이 하루 아침에 다 이루어진다고 보지 않습니다. 저의 모습도, 한국교회와의 관계도 계속 노력해 나가겠습니다. 혹시, 경쟁을 한다면 성경적이고 선한 경쟁을 하겠습니다. 한국교회의 모든 지도자와 성도 여러분! 저를 위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지금 어차피 저희들은 많은 목회자들과 교회들이 형성되어 현장에서 전도와 선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른 길을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저와 많은 양떼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끝으로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가지고 용납하실 것을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 사회자: 최삼경 목사님께서 이어서 서두발언을 해 주시겠습니다.

      * 최삼경 목사: 그 동안 다락방 전도학교를 인도하는 류광수 목사에 대해서 한국교회 역사의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십여 개 교단으로부터 사이비 내지는 이단 또는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그렇게 연구하고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옳은 결정이었는지 잘못된 결정이었는지 점검해 보려고 합니다. 만에 하나 바르지 못한 연구가 있었다면 재고해야 할 일이라고 여겨지며 반대로 바른 연구였다면 뼈를 깎는 회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15년 동안 이단연구를 하는 동안에 약 30여 종의 이단연구에 간접적, 직접적으로 참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진리에 대한 논쟁을 하자고 해 놓고도 불리하면 '변론은 무익하다'고 하여 회피하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그런데 류목사측에서 이렇게 공청회를 요구한 점에 대하여 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본인은 공청회가 성경에서 하지 말라는 변론이 되지 않기를 바라고 그렇게 기도하며 이 공청회에 나왔습니다. 오늘 공청회를 하는 2가지 이유를 먼저 밝히겠습니다. 첫째는 형식적으로는 류광수 목사님의 요구에 의해 이 공청회가 이루어졌습니다. 조금 전에 기조연설에서 말한 것처럼 류목사님에게 2가지 의중이 있다고 봅니다. 첫번째는 오해된 부분을 해결하겠다는 의지고 또 하나는 잘못된 부분을 회개하고 고치겠다는 의지라고 봅니다.

      진행 과정에서 밝혀지겠지만 류목사님편에서는 오해된 부분이 많다는 것 같고, 저는 회개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오해는 2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첫번째는 류목사님의 사상을 한국교회가 얼마나 객관적으로 이해했는가 하는 문제이고 두번째는 바르게 이해한 그의 신학에 대해서 얼마나 바른 신학적 기준을 설정했는가 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점을 밝히기 위해서 저는 공청회에 응했습니다. 둘째는 이 일은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비록 다락방에 속한 사람이든, 또는 정통교회에 속한 사람이든, 또는 '다락방은 이대로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든, 아니면 다락방을 사이비 이단이라고 생각하든, 또는 '잘 모르겠다, 그걸 알아보자' 그것 때문이었든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이 이 일 자체가 진리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데 큰 유익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공청회에 앞서서 네다섯 가지 이해를 구하고 싶습니다.

      저는 예장 통합측에 속한 목사이고 통합측 연구에 참여했던 한 사람이지만 교단의 대표자로 이 일을 하는 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저 개인의 자격으로 이 일을 하고 있음을 꼭 주지해 주시기 바라고 10여 개 교단의 연구에 대해서 본인이 다 변명 내지 변호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필요한 만큼은 하겠습니다. 두번째는 류광수 목사님이 소속된 교단으로부터 비록 목사 면직을 받았지만 목사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세번째는 류광수 목사님에게도 이해를 구합니다. 류광수 목사님에게 이단이라는 말이나 사이비라는 말을 사용할 수밖에 없음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듣기에 거북하고 불쾌한 일이겠지만 한국교회사에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많은 교단들이 그렇게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네번째, 중요한 것은 이 공청회 광고가 나간 뒤에 수많은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뭔가 하면 '면죄부를 주려고 공청회를 하였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면죄부를 주기 위함도 아니고 회개의 기회를 막으려고 함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선입견을 가지고 보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여러분들이 그것은 오늘 공청회 진행과정을 통해서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는 어쩔 수 없이 공청회 진행 도중에 자료의 진실성 여부가 확인될 수가 없다고 하는 점입니다. 만일 자료를 잘못 제시했다면 본인이 그 모든 책임을 질 것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불리한 점에 대해서는 모른다거나 그런 일이 없다고 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자료 확인절차가 필요하다면 추후에라도 자료 확인을 철저하게 하는 방법을 합의에 의해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사회자: 최삼경 목사님께서 첫번째 질문을 하시겠습니다.

      * 최삼경 목사: 한국교회와 함께 가겠다는 뜻을 보이셨는데 어떻게 함께 가고 싶다는 말인지 그 점을 묻고 싶습니다. 오해라는 말을 제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지금까지 다락방측에서 나온 광고문마다 오해라는 말을 수도 없이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해만 해결되면 한국교회와 함께 갈 수 있다는 얘기인지, 단지 본인이 인정하는 부분은 말의 실수라고 많이 말했습니다. 그러면 말의 실수와 오해만 고치면 한국교회와 함께 갈 수 있다고 그렇게 보시는 것인지,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회개라고 하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본인 스스로 지금 공청회에 들어가기 전에 무엇을 회개해야 되겠는지, 한 번도 회개의 구체성을 언급한 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밝혀 주십시오.

      * 류광수 목사: 기조연설문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기록이 되어져서 나올 것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검증을 계속해도 좋은 말씀만 드리려고 노력하고요, 그리고 진실한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오해라는 단어를 쓴 배경은, 여러 가지 비판을 받았을 때 그 문서나 책자를 보았을 때 제가 충격이 되었습니다. 솔직히. 그래서 거기에 대한 가장 좋은 자세로 할 말은 그 단어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오해된 부분이다'라고 저는 말할 수밖에 없었고요, 그러면 차후에 '왜 그러면 그런 오해와 이런 말들을 많이 주고 받게 되었는가' 하는 이유는 여기에서 간단하게 말씀드리기 힘들겠고요.

      여러 가지 이제는 저는 '나의 태도와 바른 것을 계속함으로써 해결될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회개의 말을 쓴 것이고요. 실제로 한 마디로 짧게 얘기하자면 상대방이 저에 대한 비판을 할 때 '저건 맞다'라는 생각이 들어야 진정한 회개가 되는 것이지 도저히 아니라고 생각이 들 때는 진정한 회개가 힘들겠죠. 그래서 너무 지금까지, 최삼경 목사님이 처음으로 제게 진실한 질문을 하는 것이지, 지금까지 질문을 한 사람이 없습니다. 묻지도 않고 얘기를 하자고 해도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답답해서 쓴 단어인데 그 이상 더 좋은 단어를 쓸 수가 없었습니다.

      * 최삼경 목사: 구체적인 내용은 후에 들어가겠습니다만, 십여 개 교단이 가지는 공통점 몇 가지가 있습니다, 류목사님께 지적한  내용이. 천사동원권 문제나 또는 귀신론을 중심한 구원관이나 그 다음에 재영접설이나 이런 부분이 한 마디로 말해서 오해라고 생각하십니까?

      * 류광수 목사: 가장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어떤 오해를 하고 계시는가, 느껴진 것을 얘기하자면 '전도활동을 하는데 교회에 물의를 일으키지 않냐'라는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구요. 제 중심은 그게 아닌데. 그 다음에 '천사동원권이라든지 이런 귀신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것을 보니 혹시 귀신론 쪽에 관계되지 않았나' 하는 오해를 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기존 교회를 부인하기 위해서 재영접설을 새롭게 말하는 것 아닌가' 하는 (오해를 하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께서 중요한 세 가지 질문을 하셨는데 거기에 대한 오해는 제 중심으로서는 정말 그것은 오해인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한 내용을, 저의 잘못된 표현이 있는 것은 회개하고 또 거기에 대한 오해된 것은 풀어드리려고 합니다.

      * 최삼경 목사: 그러면 본인 스스로 회개라는 단어를 쓰기도 했으니까,  회개해야 될 부분은 또 한 번 무엇이 있는지 말씀해 주실래요?

      * 류광수 목사: 제일 첫번째 것은, 제가 잘못을 지금까지 느낀 것은 '전체를 많이 생각하지 않았다' (하는 점입니다.) 전체를. 전체를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전도만 하는 이런 삶을 살아온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는 전체를 생각하면서 전도해야 되겠다' 좀 이런 면에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 최삼경 목사: 적어도 회개를 본인이 하겠다고 하셨다면 다른 사람이 요구하는 수준은 아니더라도 본인 스스로도 회개할 점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회개하겠다는 표현을 쓰셨을 것으로 본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본인 스스로 지금까지 이 엄청나게, 제가 볼 때 목사님보다 더 이단성이 많은 집단도 이렇게까지 이단규정을 한국교회로부터 많이 받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K집단의 경우는 제가 볼 때 목사님보다 훨씬 이단성이 농후한데도 한국교회 6개 교단으로부터 지적을 받고 이단 사이비로 규정을 받았는데, 웬일인지 그 사람보다는 제 입장으로 봐도 사이비 이단성이 더 적은데 십여 개 교단이나 한국교회 역사에 없도록 목사님을 사이비 이단 내지 경계할 단체로 규정을 했는데, 그것들을 통해서 목사님이 회개해야 될 내용이 '전체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뿐이라는 말입니까?) 그러면 전체를 생각하지 않아서 무엇을 어떤 잘못을 했다고 생각이 되느냐 하는 구체적인 것 한두 가지라도 얘기해 달라 그 말입니다.

      * 류광수 목사: 예. 첫째로는 제가 전도에 너무, 한  24년 전부터 너무 열심히 하다 보니까 좀 한국교회의 안타까운 부분을 너무 비판을 많이 했다 (하는 점입니다.) 심하게. 그 부분은 우리 자체에서도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와 같이 전도하고 같이 가야지 비판을 해 버리면 이 문제가 되지 않겠냐 하는 것도, 저도 그렇고 우리 자체에서도 많은 그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이 제가 솔직히 공청회를 통해서 제일 제가 회개해야 될 부분이다 그렇게 보고요. 제가 '한국 교회가 구원이 없다' 이런 식으로는 전혀 (말해) 본 적이 없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고 흔들리는 교회는 많아요. 그래서 거기에 대해 좀 안타까운 나머지 비판을 했다든지, 이것을 너무 심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제가 좀 많이 회개를 합니다.


      * 최삼경 목사: 다락방에 두 가지 얼굴이 보입니다. '정통교회와 같다. 우리는 정통교회와 하나다' 라고 하는 그런 얼굴과 또 '우리는 정통교회와 다르다'는 이론입니다. 그런데 정통교회와 다르다고 하는 점이 전도의 열심히 달라서 다른 것인지, 아니면 전도의 방법이 달라서 다른 것인지, 아니면 전도의 신학이 달라서 다른 것인지 그 점을 말씀해 주십시오.

      * 류광수 목사: 여러 가지 말이 나돌 수 있겠습니다만, 잘 보셨는데요, '어디가 같으냐?' 복음과 신학사상이 같습니다. '그러면 어디가 다른가?' 전도 현장에서 전도의 열심, 실제적인 전도에 대한 추구하는 마음, 그런 부분이 다르다고 봅니다.

      * 최삼경 목사: 그러면 전도를 열심히 해서 한국교회로부터 사이비 이단이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 류광수 목사: 그건 아니죠. 전도의 이유가 사이비가 될 수 없죠.

      * 최삼경 목사: 그런데 정통교인은 전도를 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까?

      * 류광수 목사: 저도 정통교회 중에 속해 있으니까요 (그런 전제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도 정통교회에서 자랐구요. 지금, 현장에 가보면 전도를 안 한다가 아니고, 현재 우리 기독교인이 복음을 받을 사람이 있어도 설명을 못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빨리 바꿔야 됩니다.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한 강조를 많이 한 것이죠.

      * 최삼경 목사: 그 원인이 어디 있다고 보십니까? 열심의 문제입니까? 신학의 문제입니까?

      * 류광수 목사: 아니죠. 신학의 문제가 아니죠. 그것은 원인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것이죠.

      * 최삼경 목사: 그게 뭡니까?

      * 류광수 목사: 지금 보통, 신자들이 그렇습니다. '신자들이 전도에 대한 상당한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하는) 그것이 일반적입니다. 아마, 다 그렇게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한 강조를 하다보니까 다르게 보여진 것이죠. 그 열심에 있어가지고 또 거기에 대한 방법이라든가 하는 것이 여러 가지가 나올 수 있겠죠. 그 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 최삼경 목사: 그러니까 전도에 어려움을 느낀다고 하시는 것이, 제가 지금까지 본 바로는 목사님이 '다락방적 구조를 통해서 전도를 해야만 전도가 된다'고 (주장)하는 (것 같은) 내용을 제가 수도 없이 발견하고, 정통교인이 가지는 구원의 확신과 정통교인들이 가지는 영접이나 이런 것들이 문제가 있다고 (류목사님께서) 수도 없이 지적을 했어요. 제 편에서 볼 때는 열심도 '정통교회는 우리하고 (비교할 때) 열심이 못 따라온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요. 나도 그 열심은 인정하겠어요. 그것은 구원파는 구원에 대한 열심이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제일 뜨겁고, 시한부 종말파는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선에서 보면 종말 신앙에 대한 열정이 가장 뜨겁고, 귀신파는 귀신에 대한 관심이 가장 뜨겁습니다.

      그렇다면, 전도를 캐치프래즈로 내걸고 하고 있는 다락방이야 말로 전도에 대해서 가장 뜨거울 수밖에 없죠. 그 점은 장점인데, 혹 그것이 장점이 되는 이유가 틀림없이 둘 중에 하나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도의 방법이 다르든지, 전도의 내용이 다르든지 하리라는 것입니다. 늘 '전도자로 봐달라, 전도자로 봐달라' 마치 전도자에게는 전도의 신학이 존재할 수 없는양, 전도자에게는 이단성을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말해왔어요. 제가 글을 다 통해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하나씩 묻습니다. 전도에는 전도신학이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지요?

      * 류광수 목사: 그렇겠죠.

      * 최삼경 목사: 그런데 목사님의 전도신학과 정통교인들이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전도신학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 류광수 목사: 그 부분에 있어서 변함없는 생각을 제가 갖고 있습니다. 저는 한 번도 제가 정통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을 목사님이 이해해 주시기 바라고. 그러면 '왜 말이 구분되어지게 되었느냐?' 우리가 지금 같은 가족 같은 입장에서 볼 때도 신학이 잘못되어 있다거나 뭐가 잘못되었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 지금까지, 현재까지 온 사실 가지고는 전도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제가 제일 주장 많이 하는 부분은 가장 '성경적으로 돌아가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만이 전도할 수 있다' 그것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 최삼경 목사: 그러면 정통교회는 성경적으로 하지 않아서 어려움을 느낀다고 봅니까? 가장 성경적이란 말은, 세상에 제가 지금까지 본 바로는 정통교회라고 하는 말은, 어느 누구도 자기가 정통이라는 말은 누구나 다 합니다. 그것이 천주교에서 말하는 외형적 정통이냐 아니면 이레니우스가 말하는 성경적인, 그리고 성령의 내적인 전승을 말하느냐에 따라서 차이가 있을 뿐이지 누구든지 자기가 정통교회라고는 말을 한다고 하는 점인데, 왜 한국교인은 전도의 문을 열어 주었고 전도의 효과를 위해서 한국교회에 봉사를 하고 있는 류목사를 고마워하지는 못하고 그런데 류목사님을 왜 이단이라고 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국에는 전도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CCC도 있고, 또 CCC의 전도에도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제임스 케네디의 전도폭발도 있고. 그러면서도 CCC의 전도가 한국교회에 유익을 주었다고 보편적으로 다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현재 여러 가지 전도법들이 있는 중에 목사님이 굳이 성경적이라고 말하면 '다른 사람들은 성경적이 아니라 한다'라고 말해야 말이 되지 않냐 그 말이죠.

      * 류광수 목사: 그렇겠습니다만, CCC라든지 여러 단체라든지, 이런 단체들이 처음에는 저처럼 오해를 다 받았습니다. 다 받았고, 그분들이 계속 잘하다 보니까 지금은 오해가 없어졌죠. 저도, 그렇게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고요, 계속 바르게 가다가 바로 이해될 것으로 (믿습니다.) 지금, 목사님께서 얼마만큼 성경적으로 전도하셨는가는 제가 알 수 없습니다. 제가 알 수 없고, 또 한국교회 전체가 얼마만큼 성경적으로 전도가 실제로 되어지고 잘 한지는 저는 알 수가 없고, 단,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제 앞에 있는 사람에게 성경적으로 전도해서 현장에다 전도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한국교회를 다 부정한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월간<교회와신앙> 1998년 10월호)

      2012121002419_0.jpg
      icon_img_caption.jpg 톡소포자충 현미경 사진. 안쪽에 딸세포(가운데 노란색)들이 형태를 잡아가고 있다. /플로스 제공

      -동물 뇌 조종 기생충 톡소포자충
      기생충 번식 위해 쥐 공포심 없애 고양이에게 쉽게 잡아먹히게 해
      -인간의 약 30%가 감염
      자살 충동 유발할 확률 높이고 임신부 감염 땐 유산·기형아 출산

      고양이 앞에 선 생쥐는 숨도 제대로 못 쉰다. 심지어 고양이 오줌 냄새만 맡아도 질겁을 한다. 하지만 가끔 생쥐가 미칠 때가 있다. 고양이를 무서워하기는커녕 심지어 고양이에게 추파를 보내기도 한다. 톡소포자충(Toxoplasma gondii)이라는 기생충에 감염됐을 때다. 이 정도면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는 일도 아니다. 사람이 감염되면 정신분열증과 우울증, 심지어 자살까지 유발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도대체 기생충은 뇌에 어떤 짓을 한 것일까.

      쥐의 공포심 없애… 고양이에게 성(性)적 흥분까지

      톡소포자충(胞子蟲)은 단세포 기생충으로, 고양잇과(科) 동물의 배설물을 통해 퍼진다. 이후 여러 동물이 흙과 물을 통해, 또는 식물이나 다른 동물을 먹고 감염된다. 최근 과학자들은 톡소포자충이 감염된 동물의 뇌까지 조종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지난해 8월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진은 수컷 쥐가 톡소포자충에 감염되면 스스로 천적인 고양이에게 잡아먹히려고 다가가는 좀비가 된다고 발표했다. 쥐는 일반적으로 고양이 오줌 성분이 감지되면 거리를 유지하는 본능이 있다. 하지만 기생충에 감염되면 고양이와 거리를 두지 않았다. 다른 동물의 오줌 냄새에는 이전처럼 반응했다. 심지어 고양이에게 성적으로 흥분까지 느끼는 특이한 현상도 나타났다.

      스웨덴 카롤린스카연구소와 웁살라대 연구진은 지난 6일 국제학술지 플로스 병원체(PLoS Pathogens)에 이상행동의 원인을 찾았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쥐에서 나뭇가지 형태의 면역세포인 수지상(樹枝狀)세포가 톡소포자충에 감염되면 뇌로 이동해 가바(GABA)란 신경물질을 더 많이 분비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가바는 공포나 불안감을 억제한다.

      기생충이 쥐의 공포심을 없앤 데는 기생충의 번식과 관련돼 있다는 분석도 있다. 톡소포자충은 오직 고양이의 내장기관에서만 유충이 암수로 자라 생식을 하고 알을 낳는다. 쥐에게선 유충 상태로만 있다. 고양이가 감염된 쥐를 잡아먹어야 기생충의 번식이 완결되는 것이다. 즉 쥐가 고양이에게 잡아먹히도록 기생충이 쥐를 조종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꿈을 찾는 사람들

      우리가 갈려고 하는 곳이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곳을 찾으려고 희망에 부풀어 길을 떠납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길을 떠난 이들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합니다.
      그야말로 즐거운 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어느정도 시간이 흐릅니다.
      그런데 보이는 것들은 여전히 우거진 숲에 있는 나무들뿐
      반겨주는 것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만의 손짓입니다.

      마침내 희망스럽던 마음이 근심된 마음으로 걱정이 고이기 시작합니다.
      모두들 각각이 흩어져서 도착지점을 찾아보자고 헤어집니다.
      많은 곳을 누비며 다닙니다.
      시간이 많이 흐릅니다.
      이제 함께 길을 떠났던 사람들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지친 몸과 실망스런 마음으로 어디엔가 기대고 앉아서
      지친 몸과 마음을 쉬고 싶은 애처러운 자기자신의 나약함만 발견한 것입니다.

      헤어졌던 사람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앞에 있는 나무들과 나뭇잎들을 물끄러미 쳐다 봅니다.
      그런데 사다리가 나무에 기대어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그 곳으로 발을 옮겨봅니다.
      엉금엉금 기어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갑니다.
      세상에선 전혀 볼 수 없는 또 다른 세상이 나무위에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사다리가 있어야 합니다.
      이 사다리는 눈으로 볼 수 없는 나무위의 세상을 볼 수 있도록 합니다.
      야곱의 사다리가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땅에서 찾지 못하는 것은 하늘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눈에 절망스럽게 보이는 세상이지만
      기어서 올라갈 수 있는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에
      우리의 방황은 헛되지 않습니다.
      언젠가 나무에 기대어 쉬게 될 때
      우리에게 사다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
      글: Apostle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은혜의 단비" 중에서

      & 

      제11장 창조의 교리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1:1) 성경은 창조로부터 시작한다. 하나님이 창조자라는 사실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견해이다. 근본적으로 성경이 과학에 관한 책은 아니지만 다른 주제에서와 마찬
      가지로 과학의 영역에서도 신뢰할 수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기”(딤후3:16) 때문에 우리는 성경이 모든 것의 근원에 대하여 말씀하는 것을 신뢰할 수 있다. 성경은 변할 수 있는 인간의 말이 아니라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창조자로 나타낸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대하여 보다는 창조자로서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창1:1에서 2:3까지 모든 문장의 주어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나님이 보셨다. 하나님
      이 나누셨다. 하나님이 부르셨다. 혹은 칭하셨다. 하나님이 만드셨다. 하나님이 두셨다. 하나님이 축복하셨다. 하나님이 쉬셨다.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창조는 지적인 하나님, 사랑과 인격적인 하나님을 나타내 준다. 범신론과는 달리 하나님의 그의 피조물과는 다르다(시90:2). 자연신론과는 달리 그는 그의 손으로 만드신 것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시는데, 그것은 그가
      만드신 것을 떠받치고 계시며, 유지하시며, 보존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느9:6).
      그 외에 나머지 성경에서도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하여 계속 강조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여러 가지 면을 알게 한다. 우리는 그 분을 창조자로서 섬기며 예배해야 한다. (사40:26,28,31) 우리는 우리의 창조자와 다투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 있다. (사45:9) 우리는 선을 행하는 가운데 우리의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이신 그분께 부탁한다. (벧전4:19) 우리는 우리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분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또한 인정한다. (렘32:17)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주이신 사실을 더욱 강조한다. 구약과 신약에서 반복적으로 이것은 우리의 주의를 끈다. (출20:11, 느9:6, 시146:6, 행14:17, 계4:11, 10:6)

      이것은 성경계시의 특별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고대 이방종교나 현대 물질주의와는 달리 성경은 순수한 시작을 가르친다. 대부분의 이방종교는 우주가 어떠한 형태로 신들과 함께 영원히 존재했었다고 가르치는 이원론을 보인다. 이방종교의 신화에서 신들은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항상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창조하는 것처럼 나타난다.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선언은 하나님을 다른 우상과 분간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시96:5)
      물질주의자들은 물질과 그의 법칙은 영원하며 모든 존재의 총합계라고 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사상을 모두 제외시킨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것의 창조주이며, 모든 것이 있기 전부터 존재하신 분이라고 선언한다. (시90:2). 이와같이 우리는 하나님이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우주를 존재하도록 하신 참된 기원을 가지고 있다.

      또 다른 성경계시의 중요한 사실은 창조가 삼위일체의 협동적인 일이었다는 것이다. 구약은 하나님의 신이 그 일부를 담당하는 것을 보인다.(창1:2) 신약은 우리의 구속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한 중보자이신 예수가(딤전2:5) 또한 창조에 있어서도 중보자이심을 더욱 계시한다. 상속자의 위치에서 첫 번째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에 먼저 나신 자(The first born)라고 불리우는 그리스도(골1:15) 창조에서 활동적인 집행자였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1:3) “말미암아”로 번역된 헬라어는 “디아”(dia)인데 제2의 집행자에 대한 단어로써 예를 들면 “하나님이 선지자로 말미암아 혹은 예수를 통해서 창조하셨다. 예수는 하나님이 세상을 존재하도록 말씀하신 살아있는 말씀이었다. 그는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그분이었다. 그는 모든 것 이전에 계시며, 또한 보이지 않는 천사의 셰계의 창조주시다.(골1:16) 창조에 대한 성경적인 설명은 전개와 절정을 나타낸다.

      전개와 절정은 창조에 대한 성경적인 성명의 일부이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에서 하나님의 개인적인 배려의 증가에서 전개를 볼 수 있다. 채소에 대하여 하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읽을 수 있다. 즉 “땅은 ...내라 하시매....땅이...내니라”(창1:11,12) 짐승에 대하여 하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즉 “땅은 ...내라 하시고...하나님이...만드시니”(창1:24,25) 그러나 사람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하나님이...창조하시고”(창1:26,27)라고 하였다. 이와같이 사람은 특별하고 독특한 존재이며 절정이며 인간에게 지배권이 주어졌다.

      순서, 균형, 조화, 전개 및 절정에 대한 이러한 모든 증거는 주의 깊고 지적인 계획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창조했다는 것은 일부 피조물은 우연히 존재하게 되었다는 어떠한 사상도 전적으로 배제한다. 하나님은 그의 지혜를 사용하셨고, 항상 통제하셨고(시136:5, 148:5, 사45:12, 48:12,13), 완전하고 잘 계획된 종결에 이르게 되었다.
      순서, 균형, 조화, 전개 및 절정에 대한 이러한 모든 증거는 주의깊고 지적인 계획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창조했다는 것은 일부 피조물은 우연히 존재하게 되었다는 어떤 사상도 전적으로 배제한다. 하나님은 그의 지혜를 사용하셨고, 항상 통제하셨고(시136:5, 148:5, 사34:12, 48:12,13), 완전하고 잘 계획된 종결에 이르게 되었다. (창1:31)
      성경적인 설명은 뚜렷한 창조의 단계를 보여준다.
      하나님이 뚜렷한 단계로 그의 계획을 이루신 것은 확실하다. 이것은 창조시에 이어지는 날들에 대한 언급과 저녁과 아침에 대한 언급으로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저녁이 되다”라는 말은 이 부분을 끝냈다는 것이고, “아침이 되다”라는 말은 새로운 것이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창세기 2장은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다른 창조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창세기 1장에서 언급하지 않은 활동을 확대한 것이다. 즉, 1장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것을 단순히 진술한 것이고, 2장은 여섯 번째 창조하는 날에 대하여 더욱 상세하게 설명한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흙을 취하여 사람을 만드시는 것을 본다. 그리고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 이러한 행동은 사람이 짐승의 생명과 다르다는 것을 가리키고, 하나님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짐승으로부터 인간을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고전15:39) 흙으로 짐승의 생명을 창조하신 것은(창2:19) 하나님이 사람과 짐승에 대하여 같은 재료를 사용하신 것을 가리킬 뿐이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후에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에게 할 일을 주셨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여자를 만드셨다.(창2:21) 이와같이 이러한 창조에 대한 성경기록은 모든 생명의
      형태가 내재하는 힘에 의하여 수행된 점차적이고 점진적인 진화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는 진화론적인 사상을 배제한다. 또한 그것은 유신론적 진화론을 포함하여 모든 진화이론이 여자 이전의 남자의 근원을 설명할 수 없으며, 남자가 어떻게 여자로 진화할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없으므로 사람에 대한 진화론적인 근원을 배제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피조물 중 어느 것도 사람이든지, 천사든지, 마귀든지 하나님께서 하시듯이 창조할 수 없다는 것은 또한 확실하다. “창조하다”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바라(bara)”인데 이 동사의 주어는 항상 하나님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 대하여 사용되며, 하나님이 색다르고, 전례없는 어떤 일을 하고자 하실 때 사용된다. 땅이 반역하는 고라 일당을 삼키기 위하여 입을 벌렸을 때 “새일을 행하사”라는 구절은 문자적으로 “피조물을 택하사”이다.(민16:30).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을 때에도 사용되었다. “내가 아무 국민에게도 행치 아니한 (bara, 창조하다)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출34:10)
      우상을 의지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나타내었던 이사야의 시대에 기적과 예언의 성취에 대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새 일을 네게 보이노니 이 일들은 이제 창조된 것이요 옛적 것이 아니라”(사48:6,7)고 하셨다. 이와같이 창세기 1장에서도 “창조하다”는 단어는 완전히 새롭고 전례없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하여 사용된다. 다른 경우에는 만들다.(히브리어 asah)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창조하다(bara)라는 단어는 이와같이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심을 강조하며 그의 창조행위는 독특하고 전례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의 목적을 가지셨다.

      하나님은 창조에 있어서 목적을 갖고 계셨다. 그는 “자신을 위하여” 혹은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잠16:4, 계4:11), 그리고 그의 영광을 위하여(사43:7)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땅이 거할 수 있는 곳이 되기를 원하셨다.(사45:18) 이와같이 모
      든 창조물은 그의 뜻과 능력의 표현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이다.(창1:26,27) 즉 자유롭고, 이성적이며, 자아인식 및 자아표현이 가능하다. 도덕적 및 영적 이해력을 가지며, 하나님과 교제 할 수 있도록 지음받았다. 사람은 예수 안에 완성된 구속을 통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을 때만이 창조물 안에서 자신의 올바른 위치를 발견할 수 있다.
      창조의 설명은 사실적이며 역사적이다.
      창조의 설명은 사실적이며 역사적으로 취급되도록 의도되었다.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역사적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것에 대한 계시와 그의 아들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 같이,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성격상 역사적인 계시에 근거를 두고 있다. 모든 신약성경은 그것을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예를 들면 첫사람 아담은 역사적 인물로서 인정하고 있다.(롬5:14, 고전15,45, 딤전2:13,14)

      어떤 사람은 창세기의 처음 두장은 시가체(poetical)이며 비유로 취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창조에 대한 시가적인 언급과(신명기32, 33장, 욥38:4-11, 시90, 104:5-9) 비교해 볼때 창세기는 시가체가 아니라 산문체인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성경 안에서 시가체는 자주 사실적이고 역사적 사건을 묘사하고 있으며, 시가체의 사용이 사건을 비유나 신화로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비록 창조의 사건이 현대의 과학적 용어로 기술되고 있지는 않으나 이 사건들은 특이하게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말로 주어졌으며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위한 확실한 기록을 제공한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요약하면 성경이 창조의 각 단계마다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음을 우리는 본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저가 말씀 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33:9)

      '하나님의 성회(윤영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2장 신자의 보장  (0) 2014.04.22
      (Q 12) 도박  (0) 2014.03.26
      (Q 11) 재정 관리와 신용  (0) 2013.10.12
      제10장 안수에 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견해  (0) 2013.09.19
      (Q 10) 유물론  (0) 2013.05.29

      계피와 꿀의 효능

      177C413550F21D7F03F8F0


      꿀은 이 지구상에서 상하지 않는 유일한 식품입니다.
      꿀은 실제로 변하지를 않습니다.

      다소 시원하고 어두운 곳에 오래동안 두면
      "크리스탈"같이 변한 것처럼 보여지지만
      그럴때면 뚜껑을 느슨하게 열어놓고 끓는 물에
      용기채 중탕을 해서 불을 끄고 얼마간 두면
      다시 본래의 형체로 돌아 옵니다.

      꿀을 절대 끓이거나 전자렌지에 넣지 마세요.
      그렇게 하면 꿀안에 있는 효소들이 파괴 합니다.

      아마 약국에서는 이글이 돌아 다니는 것을 싫어 할 걸요.
      사실, 꿀과 계피를 적당히 혼합 해서 쓰면
      상당히 많은 병을 고칠 수 있거든요.

      꿀은 세계의 대부분의 나라에서나 생산되고 있고
      오늘날 과학자들은 많은 질병에
      유용하게 쓰이는 약으로 받아 들이고 있어요.
      꿀은 어떤 질병에도 부작용이 없어요.
      요즘 과학자들은 꿀이 달지만 만일 적당한 량을 쓰기만
      한다면 당뇨병 환자한테도 해롭지 않다고 말한답니다.


      카나다에 있는 1995년 1월 17일자,"세계주간뉴스" 에 의하면
      꿀과 계피의 혼합물이 아래와 같은 질병들을 고칠 수 있다는,
      서양 과학자들의 연구 실험 결과를 기사로 다루었습니다.



      심장병
      꿀과 계피가루로 반죽을 해서 젤리나 잼 대신에 빵에 발라서
      매일 아침 식사로 꾸준히 먹어 보세요.
      그러면 환자로 하여금 동맥혈관 들 속에
      지방이 축적되는 것이나 심장마비에 걸리는 확률을 줄여 줍니다.
      또한, 심장마비를 이미 경험한 사람이라도,
      이 방법을 매일 쓰면,
      재발이 될 확률을 훨씬 줄여 줍니다.

      위의 방법을 정규적으로 꾸준히 사용하면,
      숨이 차는 것도 덜하고 심장박동도 강해 지게 됩니다.

      미국과 캐나다에 있는 여러 요양원에서
      이 방법을 성공적으로 써 왔었으며,
      또한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혈관의 유연성이 떨어지고 막히는 현상이 생기는데,
      그때 꿀과 계피가루가 동맥이나 혈관들을 튼튼하게 만듭니다.



      관절염
      관절염 환자는 매일 더운 물 한 컵에 두 스픈의 꿀과
      작은 숫가락 하나 분량의 계피가루를
      섞어서 드세요. 만일 매일같이 마시면
      고질적인 관절염도 고칠 수 있어요.

      코펜하겐 대학에서 최근에 이루어진 연구에 의하면,
      의사가 환자들에게 매일 아침 식사 전에
      한 큰스푼의 꿀에 1/2작은 스푼 분량의 계피가루를
      복용토록 했더니,
      일주일 안에 200 명을 고쳤고
      73명의 환자가 통증이 완화 되었으며,
      한달 안에 거의 모든 환자들이 통증없이
      걸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방광염
      큰스푼 두개분량의 꿀과 작은 한스푼분량의 계피가루를
      미지근한 한컵 의 물에 녹여 마셔 보세요.
      그러면, 방광에 있는 병균을 없애 줍니다.



      콜레스트롤
      큰 스푼으로 두개 분량의 꿀과 작은스푼 세개 분량의 계피가루를
      16온즈의 물에 타서 콜레스트롤 환자에게 마시게 하면
      두시간 안에 혈관 속의 콜레스트롤 칫수가 10% 내려 갑니다.
      관절염 환자들이 했던 것처럼
      그것을 하루에 세번씩 마시면 고질적인 고지혈증도 고쳐집니다.
      저널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순 꿀을 음식과 함께 섭취해도
      코레스트롤로 인한 불편을 다소 해소 할 수가 있다고 합니다.



      감기
      감기에 걸려서 고생을 할 때는 큰스푼 한개분량의 미지근한 꿀에
      1/4스푼의 계피가루를 섞어서 삼일동안 매일 드세요.
      그렇게 하면 왠만한 기침이나 감기, 혹은 콧물병도 나아집니다.



      위 통
      꿀과 계피가루를 혼합해서 드시면
      위통을 낫게 할 뿐아니라 위궤양도
      뿌리부터 깨끗하게 만들어 줍니다.



      속에 가스가 찼을 때
      인도와 일본에서 연구한 바에 의하면,
      꿀과 계피가루는 위에 가스가 찼을 때도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면역체계
      꿀과 계피가루를 매일 쓰면,
      우리 몸의 면역체계를 강화하고
      병균이나 바이러스의 공격에서 몸을 보호 해 줍니다.
      과학자들은 꿀이 여러가지 비타민이나
      철분을 아량 함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꿀을 꾸준히쓰면, 병균이나 바이러스에 대항해 싸우는
      백혈구를 튼튼하게 만들어 줍니다.



      소화불량
      계피가루를 큰스푼 두개 분량의 꿀에 뿌려서
      식사 전에 드시면,
      위산분비를 조절하고 아주 무거운 식사라도
      소화가 잘 되게 도와 줍니다.



      독 감
      스페인 의 과학자들은 꿀 속에 독감 균을 죽이는
      자연성분이 들어 있을 뿐 아니라 환자를 치유한다는
      사실을 증명 했습니다.



      노화방지
      꿀과 계피가루를 혼합해서 정기적으로 드시면
      노화를 지연 시킬 수 있어요.
      네 스푼의 꿀과 한 스푼의 계피가루를
      세컵분량의 물에 넣어서 차처럼 끓이세요.
      그것을 하루 서너번씩 1/4컵씩 마시면
      피부를 싱싱하고 부드럽게 가꾸어 줄 뿐아니라
      노화방지에 도움을 주지요.
      생명연장에도 효과가 있고
      백세가 되도 스무살 처럼 일을 할 수 있어요.




      여드름
      큰스픈으로 세개 분량의 꿀과
      작은 스푼 하나의 계피가루로
      혼합액을 만드세요.
      그것을 자기 전에여드름 부위에 발라두었다가
      다음날 아침에 따스한 물로 씻어 내세요.
      그렇게 매일 두주간 동안 계속하시면
      여드름의 뿌리까지 제거해 줍니다.




      피부병
      같은 분량의 꿀과 계피가루를 환부에 쓰면,
      습진이나 백선 같은 온갖 염증에 효과적입니다.





      최근 일본과 오스트랠리아의 연구진이 밝힌 바에 의하면
      진전된 위암이나 골수암을 성공적으로 치유했다고 합니다.

      이상의 질환으로 고생하시는 환자는
      큰 수푼 하나 분량의 꿀에, 작은 스픈 하나의 계피가루를
      하루 세번씩 한달동안 복용해야 합니다.




      피곤할 때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꿀에 함유된 당분은
      몸의 체력에 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꿀과 계피가루를 동일한 분량을 복용한 노인분들이
      더 민첩하고 유연성이있었다고 해요.
      그 연구를 한 밀튼 박사님에 의하면,
      큰스푼으로 반 분량의 꿀을 계피가루를 뿌린
      한컵의 물에 타서 칫솔질을 한후와,
      몸의 활력이 줄어드는 오후 세시경에 마시면,
      일주일 안에 몸의 활력이 되살아나게 되다고 합니다.





      나쁜 입냄새
      남아메리카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작은 스픈하나의 꿀과 계피가루를
      뜨거운 물에 타서 입안을 씻어 냅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하루 종일 입안을 상쾌하게 합니다.




      1877493550F21D7E094103

                                                                       건강하게 사세요! 

      므낫세는 어떻게 그리 악한 왕이 되었을까?


      악한 왕 아하스에게서 히스기야 같은 선한 왕이 나고, 히스기야에게서 다시 므낫세 같은 악한 왕이 나는 것도 참 희한한 일입니다. 신앙은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도, 부모에게서 물려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봅니다.

      히스기야를 이어 12살에 즉위한 유다 왕 므낫세는 장장 55년을 집권하면서 온갖 악행을 저지릅니다.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그 부친 히스기야가 헐어버렸던 산당을 다시 세우고 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의 소위를 본받아 바알과 아세라상을 세우고 일월성신의 단을 쌓아 유다왕국을 우상숭배소굴로 만듭니다. 여호와께서 “내 이름을 두리라,” 하신 여호와의 전에다 우상의 단을 쌓고 바알과 아세라상, 일월성신의 단을 세우는 악하고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고, 점치고, 사술과 요술을 행하고,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고 의지함으로써 여호와의 진노를 격발합니다. 유다백성들도 므낫세의 꾀임에 빠져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열방보다 더욱 심하게 우상숭배를 합니다.

      진노하신 하나님은 예루살렘과 유다를 심판하고 무서운 재앙을 내리고 대적의 손에 붙여 ‘사람이 그릇을 씻어 엎음 같이 예루살렘을 말갛게 씻어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노아의 홍수를 다시 일으켜 모든 악을 씻어버리겠다 하심 같습니다. 므낫세 시대의 이 극악한 패역과 타락은 결국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을 가져오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므낫세가 왜 그토록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우상숭배와 패역의 악행들을 행한 악한 왕이 되었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므낫세가 왜 이런 악행을 했을까요? 므낫세가 원래 악한 인간이어서일까요?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여호와의 성전에다 우상의 단을 만들만큼 그는 포악하고 겁도 없는 무모한 인간이었을까요? 어떻게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었던 산당과 부수어버렸던 우상을 다시 세우고 감히 여호와의 성전을 더럽힐 수 있었을까요?

      성경은 이에 대하여 자세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추측해본다면 아하스는 용감하거나 포악무도한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겁 많고 우유부단하고 소심하고 두려워 떠는 자였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 히스기야가 54세에 불과 열 두 살 된 자신을 남겨두고 죽은 다음 자신을 지켜주고 이끌어줄 보호자가 없었기 때문에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살지 않았을까, 그래서 점을 보고 접신한 자의 말을 듣게 되고, 우상과 일월성신에 의지하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목숨을 구걸하여 15 년을 더 살지 않았더라면 므낫세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원망의 지적을 하기도 합니다만 아무튼 어머니 헵시바라도 아들을 여호와 신앙으로 굳세고 용감하게 세우고 바른 신앙으로 잘 이끌었다면 므낫세가 이런 악한 왕이 되지는 않았겠지요. 부모의 신앙교육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요!

      인간은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없는 자는 불안할 수밖에 없고 이 불안을 통하여 사단은 미혹과 위협과 장악의 검은 손을 뻗쳐옵니다. 바른 신앙 없는 인간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의 문제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가는 진시황의 거대한 무덤과 그 속의 병마 등 부장품들, 이집트의 피라밋 같은 유적들에서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자연재해와 빈곤, 질병 같은 것들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에게 무서운 위협이었습니다. 죽음을 무서워하는 인간의 모습을 우리는 샤머니즘과 온갖 종교, 심지어 인간을 잡아 제물로 바치는 아즈텍 문명의 유적같은 것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인간들에게는 자신을 지켜줄 수많은 우상들과 일월성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워하는 인간을 움켜잡고 사단은 얼마든지 조종하고 농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전에다 우상의 단을 쌓고 바알과 아세라상, 일월성신의 단을 세우는 악하고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게 하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심지어 아즈텍 신전에 산 사람의 심장을 도려내어 바치도록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살얼음판 같은 세상, 외줄타기 같은 인생살이, 실업과 불황, 경제위기, 전쟁과 재해, 불안한 미래가 두렵습니까? 당신을 찾아오고 덮쳐들 늙음과 병이 두렵습니까? 죽음이 두렵습니까? 무언가 의지할 것, 돈, 재산이라도 있어야 마음이 좀 놓일 것 같습니까? 아마도 이러한 불안들이 오늘날 이 시대에도 사람들을 우상숭배로 이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음으로 인한 두려움이 죄의 출발이요 우상숭배의 원인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1장 8절은 불못에 참예할 자의 명단 첫 번째에 ‘두려워하는 자’를 올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그에게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 안에 있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군병은 어떤 위험이나 환난에도 굴하지 않습니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찌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찌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시 27:3)’

      한 농촌교회 사모님의 체험 간증 

       

      내가 거의 매일 드나드는 사모카페에 도움을 요청하는 글을 보았다.

      어느 여 목사님의 사연인데 땔감이 필요하고 양식도 필요하다는 사연을

      그 목사님과 친구가 되시는 사모님이 올려놓으셨다.

       

      우리도 벌써 10년 째 나무 보일러를 사용하여 해마다 엄청난 땔감이 필요하다.

      몇 년 전만 해도 교인들이 모여서 직접 산으로가서 나무를 자르고 그 나무를 밧줄로 묶어서

      산 아래로 끌고 내려와 경운기에 싣고 교회 마당으로 운반하는 공동 작업을 했다.

      너무 굵은 것은 도끼질을 하여 차곡히 쌓아놓고 겨우내 보일러에 땔감으로 사용한다.

       

      추운 날에는 나무가 펑펑 들어가서 금새 수북히 쌓아두었던 나무가
      푹 줄어들면 교인들 앞에 괜히 미안하고 겨울만 돌아오면
      이렇게 땔감 때문에 마음 앓이를 하는 환경 속에 살고 있다.

      그나마도 3년 전쯤 부터는 교인들과 함께하는 작업도 모두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교인들이 젊은사람은 없고 모두 연로하신 할머니들이시니 어찌할 수가 없다.

      이년전 부터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런 형편을 아시고
      사우디에 나가 계시는 우리 여전도회 회장님

      아드님께서 국내 공사현장에서 나오는 건축 폐자재를 보내주셔서
      그나마도 너무 감사하다.

      그것을 목사님과 열심히 기계톱으로 잘라서 사용을한다. 

       

      시골 목회 모두가 일 덩어리이다.

      그 목사님의 안타까운 사연을 보면서 나무는 어떻게 구해드릴 방법이 없어서

      쌀을 보내드리기로 맘먹었다.

      주소를 받고 그동안 여름내 먹던 쌀 20kg을 택배로 발송해드렸다.

      그래도 우리 주변은 모두 논농사를 짓는곳이니
      쌀 쯤은 성도들이 해결하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 쌀을 받으신 여목사님이 너무 고맙다면서 울먹이며 전화를 하셨다.

       

      오직 주님 바라보며 어떤 형편에서든지
      오직 감사로 넉넉히 이겨 나가노라고 하셨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게이트볼 시합이 있어서 우리 대표선수들을
      우리 차량에 태우고 다녀왔다.

      회원 한 분을 모셔다드리는데 얼른 쌀자루를 한자루 차에 실어주셨다.

      우리를 주려고 미리 방아를 찧어서 준비해 두셨다고 했다.

       

      찹쌀이 듬뿍섞인 햅쌀 20kg

      그리고 다음날 필리핀 단기선교사역을 마치고
      돌아오시는 목사님을 마중해서 집에까지모시고온 딸차에

      무공해 햅쌀 반가마니가 실려온 것이다.

      우리 미산성실 카페 회원이신 얼짱님께서 농사지으신 것을
      이렇게 햅쌀밥 해먹으라고 보내주셨다.

      묶은쌀 20kg을 보내고나서 햅쌀 그것도 너무나 정성이 들어간 쌀을
       이렇게 받게되니 내 마음이 너무

      송구스럽고 뭐라 할 말이 없다.

       

      오직  주님만 의지하고 사역하시는 그 여목사님을 아주 조금 사랑해드린 그 댓가가

      이리도 감격적인 사랑으로 돌아오다니 너무나 세밀하신 주님 사랑 앞에서
      내 눈에 이슬이 맺힌다.

      사랑의 마음으로 쌀을 주신 두분을 위해 나는 기도의 두손을 모아본다.

       

       

      '사모님들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동안 많이 미안했어  (0) 2013.12.04
      가지 않은 길  (0) 2013.11.30
      오늘은 나도 위로받고 싶습니다  (0) 2013.11.23
      아직도 부치지 못한 편지  (0) 2013.11.15
      예수님의 발냄새  (0) 2013.11.13

      한국교회의 이단문제는 그 심각성이 이미 공지된 사실이다. 그러나 심각성에 비해 대처와 처방이 미흡하고 적절하지 못했다. 이단 문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다각적인 방법을 통해 분석하고 또한 대처해야 할 시급한 과제이다.

      이단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는 교리적인 문제의 접근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올바른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이단 사상에 대한 현실 인식을 위해서는 과거에 어떤 교리에, 어떤 이단들이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본지는 이단이 발생할 수 있는 전 교리를 고찰, 오늘날의 이단 사상에 대한 올바른 기준을 제시하고자 '기독교 2처년 교리 속에 나타난 이단 사상'을 기획했다.

      필자마다의 다소간의 학문적 차이점이 있고, 전문적인 용어 때문에 독자들에게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있더라도 집중해서 읽어 주었으면 하는 바이다. <편집자 주>

      이종성 원장(장로회신학대학 조직신학 교수 역임, 기독교학술원 원장)

      먼저 성서적이고 정통적 종말론의 요점을 밝히고자 한다.
      첫째, 하나님은 그의 창조목적과 인간과의 계약을 성취하기 위하여 세상(역사)에 마지막을 오게 한다. 그것이 모든 존재의 마지막이 된다.
      둘째, 예수의 재림이 곧 세상의 마지막이 된다.
      셋째, 예수는 세상의 모든 것의 삶에 대한 최종적 평가를 한다. 그것을 최후심판이라고 부른다.
      넷째, 예수의 재림의 시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하나님이 알려주시지 않았다.
      다섯째, 예수는 직접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모양으로 온다.
      여섯째, 예수는 승리자로 재림한다.
      일곱째, 최후심판이 끝나면 모든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어 영원한 구원과 영원한 버림의 세계로 나누어준다.
      여덟째, 그것으로써 현재의 우주와 세상과 역사는 종결이 된다. 성서가 가르치고 교회가 이때까지 믿어온 종말신앙은 위에서 지적한 것과 같다.

      그런데 신자들 가운데 이와 같은, 성서가 가르치는 정통적 신앙과는 다른 종말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서 교인들을 현혹하고 있다. 많은 교인들이 이단적 종말사상에 현혹되어 개인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에 차제에 이단종말사상을 밝힘으로써 신앙적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한다.

      종말이 없다는 이단

      17세기부터 산업과 과학이 발달됨에 따라 역사에 대한 낙관주의가 강하게 나타났다. 천재인재(天災人災)도 사람의 지혜로 막을 수 있으며, 인간의 행동도 발달된 지식과 상식과 이해심으로 공존을 위해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신론자(理神論者)들의 주장대로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자연법에 의하여 인류의 공존과 번영을 위하여 얼마든지 이끌어갈 수 있다고 한다. 세상에 종말이 있다면 종말사건으로써 해결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나 지상에는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써 해결할 수 없는 것은 별로 없다고 한다. 따라서 예수가 와서 역사의 손을 대어 수술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낙관적 역사관과 강한 인본주의 신봉자들은 세상에는 종말이 없다고 한다.
      이러한 생각을 이단적 종말관이라고 하는 이유는 성서가 가르쳐준 것과 같은 역사관을 무시하고 상대적 존재를 절대화하고 인간의 능력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마치 인간이 역사의 주인인 것처럼 오해하고 오도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종말은 있으나 예수가 재림할 필요는 없다고 하는 이단

      일반적으로 역사나 세상에는 종말이 있다고 믿는다. 지식인들은 논리적으로나 체험적으로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풀도 일년초가 있고 일년을 더 산다 해도 몇 년 가지 못한다. 동물의 수명이 길다 해도 십수 년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은 1백년 안팎이 한계 수명인 것을 알고 있다.

      옛날 시인이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라고 읊었으나 의구(依舊)한 그 산천에는 사실은 매순간 퇴화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는 종말이 있다고 느낀다.

      일반 대중은 지식인들보다 세상에 종말이 있을 것을 일상생활에서 민감하게 느끼고 있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최근 한국인이 체험한 공중재난, 지상재난, 해상재난 등을 통하여 매우 불안해하고 있으며, 다음에는 지중 재난이 일어날 것이라고 불안해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교통사고나 화재사고 등으로 하루의 삶의 보장을 받기가 어렵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들의 입에서는 무심코 말세라는 말이 쉽게 나온다.

      그러나 그러한 사건과 예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하다. 예수는 2천년 전에 유대 나라에서 살다가 십자가 위에서 처형된 사람으로서 역사와는 관계를 끊어버렸는데, 20세기의 오늘에 있어서 우리의 역사와 무슨 관계가 있을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한다. 그러므로 세상에 종말은 있을 것이나 예수와는 관계가 없다고 한다.

      이러한 사상이 이단적이라는 이유는, 성서에 의하면 모든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하여 지배되며, 특히 예수 그리스도와 역사와 직접적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마지막 날에 모든 것이 예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기(롬11:36, 마28:20) 때문이다.

      예수가 직접 오시지 않고 대리인을 보내리라고 하는 이단
      일반 평신도나 신학자들 가운데는 예수가 이 세상에 다시 직접 오시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사실 세상에는 환생(還生)을 가르치는 종교가 있다. 인도교와 불교다. 그들은 윤회설을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전생과 현생과 내생이 연결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전생에서 한 행동에 따라 현생에 사람으로나 동물로 환생한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 사람으로 환생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여기저기에서 자기가 재림주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간혹 나타나기도 한다. 최근에 미국에서 물의를 일으킨 짐 존스나 코레쉬가 그러한 사람이었다.

      한국교회 안에도 심심치않게 그러한 사람이 나타난다. 해방 전에도 있었고 현재도 있다. 통일교 교주는 자기가 예수를 대신하여 세상에 와서 예수가 실패한 그 일, 즉 육체적 구원을 완수하려고 포교한다고 한다.

      이러한 생각이 이단적인 이유는 인간은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거나 대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가 그렇게 위임한 일도 없거니와 이간으로서는 그 일을 감당할 수가 없다. 유한자가 영원자를 대행할 수가 없다. 성경은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마24:5)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러한 낭설을 믿지 않고 참예수가 오실 것을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24:13)라고 했다. 그리고 예수가 분명히 말씀했다.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요143, 행1:11). 이러한 성서의 가르침을 보아 마지막 날에 예수가 자기 대신에 다른 사람을 대리인으로 보내리라는 생각은 이단적인 생각이다.

      예수가 영적으로만 오신다는 이단

      많은 사람들은 영과 육은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 양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이원론) 서로 혼합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영은 영으로, 육체는 육체로 따로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성서에 의하면 예수가 부활했을 때, 육체를 가진 것 같았으나 그것은 사람들(제자들)의 착각이었지 실제로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하늘에서 영적으로 계시므로 예수가 오실 때에는 육체를 가진 분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오실 것이라고 한다.

      여호와의 증인이란 단체에 속한 사람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으며 프로테스탄트의 시나들 가운데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성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부활하신 후의 예수의 존재양태는 영과 육을 동시적으로 완전한 합일체로 존재한다. 그리고 승천하실 때의 그 모습 그대로 오신다고 한다(행1:11).

      초림(성육신) 때와 마찬가지로 육체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을 구하러 오시기 때문에 재림하실 예수도 육체를 가지고 오실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는 영적으로만 오신다는 것은 성서적이 아니며 따라서 이단적인 생각이다.

      아무도 모르게 이미 재림했다는 이단

      재림을 열심히 기다리다가 지친 사람들이나 자기를 재림예수로 착각한 사람들 중에는 예수가 아무도 모르게 이미 재림했다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주로 사이비 기독교 종파를 형성하여 그들의 추종자들을 모아 별개의 집단생활을 하게 된다.

      자기가 재림주라고 하거나 재림 예수의 특별한 영을 받았다고 한다. 그들은 추종자들과 함께 집단생활을 하면서 현세를 떠나 독특한 공동체를 구성하면서 현세를 죄악시한다.

      그러한 예로서 미국에서 일어난 몰몬교와 여호와의 증인과 크리스천사이언스 등을 들 수 있다. 한국에서 일어난 유사한 운동은 통일교를 들 수 있다.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예수가 이미 1914년에 하나님의 우편의 보좌에 앉게 되었는데, 그것이 곧 지상에 있는 우리에게는 그의 둘째 현존(역사 안에서의)이며 재림이다. 그때부터 예수는 지상의 왕으로 군림하게 되었다고 한다.

      통일교의 주장은 더 극단적이다. 예수가 세상에 온 초림 목적은 인간의 영과 육의 구원이었으나 그가 십자가 위에서 처형됨으로써 인간의 영적 구원에는 성공했으나 육체적 구원에는 실패했다고 본다. 재림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죽은 예수가 아니라 사람과 똑같은 몸을 갖춘 다른 사람의 몸으로 올 것인데, 이미 일제 때 왔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교회는 이 사실을 모르고 육적 구원 사업을 하고 있는 그 사람을 박해하고 있다. 그리고 원리 강론에서 그가 바로 문선명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통일교의 재림관은 두 가지 점에 있어서 이단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예수의 구원사역을 영적 구원과 육적 구원으로 나누고 예수는 완전한 인류구원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그 중 반만 수행했다고 함으로써 예수의 유일의 구주성을 부인한다.

      또 하나의 이단적 요소는 현재 한국인으로서 살고 있는 문선명을 재림주처럼 선전하는 점이다. 이외에도 한국에는 재림주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심심치않게 출현하고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재림의 날짜를 예고할 수 있다고 하는 이단

      예수의 재림은 성서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재림의 날짜에 대해서는 성서는 어느 곳에서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 날짜는 하나님이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예수가 직접 말하고 있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 행1:7).

      바울은 그 날이 도적같이 임한다고 누차 말한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살전5:1,2,4). 주의 날이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쉬이 동심(動心)하지 말라고 주의한다(살후2:2).

      이와 같이 성서는 주의 재림의 날짜에 대해서는 경솔하게 말하지 말도록 주의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재림을 인간이 사용하는 시간으로 측정하여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에 예수가 재림한다고 예고했다가 거짓말쟁이가 된 사람들이 많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미국교회를 어지럽게 했던 윌리엄 밀러(1782~1849)와 한국의 이장림이다. 밀러는 재림의 날짜를 1843년 3월 21일에서 1844년 3월 20일 사이라고 일차적으로 정했다가 그 동안에 재림사건이 없었으므로 다시 10월 20일까지 연기했다가 실패했다. 이장림은 1992년 10월 28일을 예수의 공중 재림일로 정하고 그날에 휴거가 대대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예고했다가 역시 불발로 끝났다.

      이러한 예고는 하나님의 경세섭리(經世攝理)의 심부까지 파헤치려고 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교회는 그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먼저 알 것은 경(經)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것이 아니니라"(벧후1:20)고 경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사로이 예고했다가 실패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감행했다.
       
      재림신앙 때문에 세상일을 포기하는 이단

      교회와 신자는 반드시 역사와 사회 안에서 활동해야한다. 아무리 좋은 신앙을 가졌다해도 현 사회를 부인하고 사회 안에서 세상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면서 살아가는 문화적 생활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예수는 이 점을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하리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3-14).

      세상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의 대상에는 둘이 있는데, 하나님과 이웃이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요한도 말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이니라"(요일4:20). 이와 같이 신앙생활은 예수의 재림 날까지 이 세사에서 구체적으로 활동하는 삶을 말하다.

      그런데 예수재림의 날짜를 예고하는 사람들은 재림이 임박했으니 세상에서의 모든 육체적 삶의 멍에를 끊어버리고 오로지 찬송과 기도로만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물론 신앙생활을 원숙하게 하려면 주님만을 생각하고 경건한 생활에 몰두하며 기도에 힘써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가정을 버리고, 이혼하고, 직장을 떠나고, 학교도 다니지 않고, 일체의 사회활동을 단절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사회와 문화를 떠난 신앙생활은 불가능하다.

      모든 종교에는 현세의 구체적 생활을 단념하고 일정한 장소에서 세속적인 생활양식을 버리고 영혼의 안식만을 추구하는 제도가 있으나 그것이 정당한 신앙생활은 아니다. 예수님은 그런 생활을 원치 않으셨다. 세상에 나가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되기를 원했다.

      그렇다면 예수재림을 기다리면서 사회를 버리고 문화생활을 부인하고 기도에만 힘쓴다는 것은 성서적 종말신앙은 아니다. 성서가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은 언제 예수의 재림이 있을지 알 수 없으므로 항상 깨어있는 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신앙 때문에 세상의 일을 전적으로 포기한다는 것은 비성서적인 이단사상이다.

      한국교회는 상기한 것과 같은 잘못된 종말신앙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세상이 혼란할 때 그러한 사상이 일어나기 쉽다. 그러나 그러한 이단사상에 현혹되지 말고 예수의 재림이 언제 있을지 모른다해도 항상 깨어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4년 1월호)



      07172737_1.jpg

      07172737_2.jpg

      07172737_3.jpg

      07172738_4.jpg

      07172738_5.jpg

      07172738_6.jpg

      07172738_7.jpg

      07172738_8.jpg

      07172738_9.jpg

      07172738_10.jpg

      07172738_11.jpg




      '마음을 열어주는 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겨울 사랑  (0) 2013.12.14
      겨울 사색  (0) 2013.12.08
      세계의 고성  (0) 2013.11.24
      조선시대 혜원의 명화들  (0) 2013.11.17
      멋진 이태리의 관광명소  (0) 2013.11.15

      [한 무슬림 가정에서 일어난 기적!]



      몇 달 전 이집트에서 일어난
      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미국의 대표적인
      텔레비전 방송국 중 하나인
      CBS에서 방영된 내용입니다.



      이 방송 내용을 본 미국의 크리스천들이
      전 세계의 이메일로 이 방송내용을 전송했습니다.
      저도 며칠 전 이들이 보낸
      스토리를 읽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 내용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내용인즉 한 무슬림 남편이
      자기 부인과 8살 먹은 딸과 갓난아기를 살해한 이야기 입니다.
      이들을 살해한 이유는
      부인이 성경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인이 성경을 읽는 것은 무슬림으로는 금지되어있는
      행위를 하였기에
      남편은 죄 의식 없이 이런 무자비한 행위를 하였던 것입니다.



      무슬림 코란에 의하면
      무슬림이 다른 종교로 개종하면
      이런 사람을 죽여야 된다고 쓰여 있습니다.
      이 남편은 두 딸을 산채로 묻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경찰에 보고하기를
      자기 어린아이들의 삼촌이
      이들을 죽였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15일이 지났는데
      같은 마을에 한 사람이 죽어서
      이 사람을 매장하기위해 공동묘지로
      죽은 시체를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가족이
      모래 밑에 깔려 있는 어린 두 여자아이를 발견한 것입니다.

      이 두 여자아이는 무슬림 남자가
      죽였던 두 딸 이였습니다.
      이 두 아이를 발견한 그 가족은
      놀래서 경찰에 보고를 했습니다.
      경찰에서 신원을 조사해보니
      친 아버지가 한 짓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이 이집트 전국에 방송과
      신문에 보도 되였습니다.
      전 국민이 이 사건으로 경악했으며
      처를 죽이고 두 아이를 생매장한
      이 무슬림 남자는 금년 7월말에
      처형될 것이라고 합니다.
      죽은 줄 알았던 두 아이들이 살아난 것이 기적 이였습니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죽은 줄로 생각했습니다.

      이집트 국영 텔레비전 방송국이
      이 큰 딸을 인터뷰했습니다.


      전국에 이 인터뷰한 내용이 방영되었습니다.
      이 아이를 인터뷰한 방송 여기자는
      무슬림 터번을 쓰고 있었습니다.
      이 딸에게 땅속에 묻혀 있을때에
      무슨 일들이 일어났고 어떻게 이렇게 살아났느냐고 물었습니다.

      15일 동안 동생과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어떻게 건강한 모습으로 이렇게 살 수 있었느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대답하기를 하얀 가운을 입은
      한 분이 자기들에게 매일 찾아 오셔서
      먹을 음식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양손에 못 자욱이 있었으며
      이분은 예수님 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 어머니를
      매일 깨우시더니 자기 젖먹이
      여동생에게 젖을 먹였다고 했습니다.
      이 텔레비전 내용은 생방송 이였기에

      방송국에서 정지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내용이 이집트만이 아니고
      주변 아랍나라까지 퍼졌습니다.
      이 아이가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이런 기적을 일으켰다고 인터뷰했기에
      애굽은 물론 주변 무슬림 나라들이 상당히 당황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예수님께서는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에게 이런 방법으로
      직접 나타나는 일들을 많이 일으키십니다.


      이들에게는 이런 기적을 보여주어야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재림이 가까운 이 때에 이런 기적들이

      더욱 빈번히 일어날 것이 예상됩니다.



      <이글은 용인 소재 아미교회 황용현 목사님 ,주보에 실린 글입니다.>

      

      받은 은혜를 감사하라

       

      조지 휫필드

       

      사람의 영혼 속에는 자신이 타락한 존재이며, 하나님과 소원한 상태에 있는 자라는 사실을 증명해줄만한 표시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사람들은 감사와 찬송의 임무를 거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을 낙원에 두셨을 때에는 그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풍성한 감정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복됨 안에서 살게 됩니다.

       

      1. 구속받은 자가 당연히 해야 할 찬양과 감사태초에 인간은 완벽한 존재였습니다. 이는 죽음 후에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완벽한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종종 누릴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구원의 상속자가 될 자들을 섬기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자들은 참으로 복된 영혼들입니다. 하지만 이 자들은 우리의 심령을 감화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입이 열려 여호와의 자애로우심을 노래하거나 그의 찬양에 대하여 말하는 때가 거의 없습니다. 찬양과 사모함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들에게는 결코 결핍되어서는 안 되는 임무입니다. 영원부터 계신 하나님은 전 인류에게 매일 그의 복을 내리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런 사랑과 흠모를 나타내 보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들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다른 은총들도 마치 자기들의 공적으로 받은 것인 양 감사하지 않습니다.

       

       

      1) 감사하지 않는 것이 죄이며 , 그런 죄를 범하지 않도록 기도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타락한 인간을 신나게 만드는 가장 위대한 경향을 가진 이 감사와 찬양은 하나님의 개별적인 은총들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우리 마음에 가까이 다가올 때 그것들은 더 큰 효과를 발합니다. 성도들은 그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그 사실들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임무입니다. 우리가 주 여호와로부터 수천 가지 복을 받은 자들 중에 그의 거룩하심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자가 과연 얼마나 됩니까? 감사할 줄 몰랐던 문둥병자들에 대한 기록은 인간들이 얼마나 감사할 줄 모르는 지를 잘 예증합니다. 병에서 고침 받거나 심한 고통가운데서 해결함을 받고 정말로 다시 돌아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들은 십분의 일도 채 안 되는 상황입니다.그러나 감사할 줄 모르는 이런 죄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것은 그런 자가 되지 않도록 주님께 기도하는 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것과 정반대의 성품보다도 더 절대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성도의 성품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7,18).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2)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기이하신 섭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모세도 여호수아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할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이한 일을 행하셨는지를 항상 상기시켰습니다. 이 보다 더 좋은 사례는 없습니다. 실로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을 보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스라엘을 백성들을 떠나지 않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그 동일한 하나님이 지금도 태양으로 낮을 달로 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는 물이 갈라져 육지같이 건너는 것을 본적이 없고, 왕과 그의 군대에 의해 추격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다에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다른 배에 의해서 침몰 할 수 있는 위기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실로 무신론자들은 모든 것들을 행운으로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기술과 선견지명으로 이곳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섭리하심이 모든 것을 관할하십니다. 바람과 바다고 그의 말씀에 잠잠케 되었습니다. 그분이 어떤 때는 가라고 명하시매 바람이 가고, 때로는 오라고 말씀하시매 바람이 왔습니다. 우리가 엄청난 광풍 속에서 그 파도를 타고 안전한 항구에 도착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이 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그를 찬송해야 합니다.

       

       

      2. 우리에게 복을 베푸시는 까닭

       

      1) 감사의 찬송을 받으시기 위해가장 약한 사람들의 아들들보다 못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그의 행사를 인하여 진정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분에게서 멀어지면 목이 곧은 백성이 되어 그분께 드리는 제사는 하나같이 가증스러운 것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오직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바로 그의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는 이 모든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의 무한한 사랑의 끈으로 여러분을 단단히 잡아매 그에게 영광을 돌리며 순종하십시오. 여러분 스스로 그분보다 더 나은 주인을 결코 섬길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다짐하십시오. 왜냐하면 그를 섬기는 것이 가장 완벽한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계명을 지킴으로 우리에게는 엄청난 상급이 주어지고 이후에는 결코 썩지 않는 면류관을 주십니다.다른 주인들은 여러분들에게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고 경배하며 이 세상의 모든 왕국과 그 영광을 준다고 약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설혹 모든 세상을 준다 할지라도 여러분들을 결코 행복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속한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오직 그분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 분 없이는 여러분은 비참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2) 영적 삶을 더욱 증진시키기 위해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지만 또한 의로운 분이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복을 많이 받을수록, 우리가 받은 복만큼 우리의 영적 삶을 진전시키지 못한다면 우리가 이후에 받을 저주가 그만큼 커집니다. 우리가 믿음의 진보를 이루지 않으면 그러한 일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3. 함께 항해한 군인들과 그의 아내들, 그리고 선원들에게 주는 당부

       

      1) 행실을 선하게 하십시오. 이제 여러분들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곳 주변은 엄청나게 많은 이교도들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방인들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지는 것’을 주의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부름에 합당하게 행동’하지 않는 다면 여러분은 간 헤롯의 군사들처럼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조소거리로 만들고 말 것입니다.여러분들이 이 땅에 들어온 다른 사람들보도 많이 누렸던 특권이 무엇인지 생각하십시오. 그들은 말씀의 기근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지나치게 많은 영적 양식으로 과식을 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여러분들에게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영적 진보를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실패 할 수 없고 실패하기를 원치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은밀하게 저 자신을 낮추는 일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하여 기꺼이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들을 더 많이 사랑함으로 인해 제가 사랑을 덜 받을지라도 그렇게 되기 원합니다.

       

       

      2) 옳은 일에 장부가 되십시오.낙심치 말고 강해지고 대장부가 되십시오. 민수기 13장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겁쟁이가 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행동하십시오. 용감히 행동하십시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안에서 모든 난제들을 넉넉히 이기게 하실 것이라고 말하십시오. 더 나아가 여러분들 위에 세우신 지도자들에게 불평하지 않도록 주의 하십시오.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3) 혀를 주의하고 마음의 정결을 지키십시오.여러분들의 아내들에게 권면의 말씀을 드립니다. 결혼식 때 엄숙한 서약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모든 합법적인 일에 있어서 남편에게 복종해야 할 자입니다. 여러분의 입술의 문을 굳게 지키도록 조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그리하여 여로 남을 공격하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사랑으로 행동하십시오. 그리하여 기도가 막히지 마십시오. 아이들을 둔 여성들은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 아이들을 양육하는 일이 여러분의 주된 관심사가 되도록 하십시오. 거룩하고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삶이 되게 하여 정결치 못한 여자로 의혹을 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4) 영혼이 폭풍을 피할 수 있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십시오.하나님의 진노의 폭풍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회개하지 않고는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 폭풍은 우리를 순식간에 삼키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이 조심스럽게 항해하기 위해 나침반을 살펴보는 것처럼 믿음의 파선을 방지하고 선한 양심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길인 말씀에 눈을 떼지 않기를 바랍니다. 5) ‘오늘’이라고 말하는 동안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지혜로운 자가 되십시오. 오늘 듣고 있는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오늘이라고 말하는 동안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왜냐하면 병들었을 때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지금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시기를 촉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취하실 때의 결단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약속에 따라 그분께 감사를 표현하십시오. 입술로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으로 표현하십시오. 비록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분이기는 하지만 언제까지나 참으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흠모하시기 바랍니다. 6) 하늘 아버지의 집에서 다시 만나기를 빕니다. 여러분들은 유혹의 세상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리석은 자가 될 준비가 된 자들로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하늘에 있는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결코 헤어짐이 없는 그 집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여러분 자신의 영혼 구원을 위하는 데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필경 종말이 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경건과 일에 있어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본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간직하십시오. 그리하면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서로 사랑하는지 보라고 하는 칭찬을 들을 것입니다.

       

       

      7) 입술로가 아니라 삶으로 감사를 드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새로운 심령을 주시고, 이 말씀을 여러분의 실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면 크게 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분이 여러분들을 포구로 인도하셨기 때문에, 험한 파도와 고통의 순간들을 다 이기게 하시고 여기로 도달하게 하셨기 때문에 할 일이 더 이상 없는 영원한 안식의 나라에 도달할 때까지도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오직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할 것입니다. 찬양의 노래를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하신 놀라운 인들을 노래하며 선포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다른 모든 노래와 더불어 그분을 찬양할 것입니다

       


      4. 몰몬교의 한국전래

       

      미국에서 이미 두파로 나누어져 포교되어 온 몰몬교는 한국에서도 각기 다른 경로를 통하여 전래되었고 서로 별개의 종교 단체로 발전하였다.

       

      1>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말일성도 예수그리스도의 교회는 1951년 김호직이 미국에서 몰몬교의 신자가 되어 침례를 받고 귀국하여 부산에서 6.25사변으로 파병되었던 미군들과 함께 집회를 가짐으로 시작되었다.

       

      조직기구로는 선교부와 교구가 양립되어 있고 선교부 아래 각 지방부를 교구 아래는 감독구(Ward)를 두는데, 한국에는 현재 3개의 선교부와 5개의 교구가 있다. 또한 선교부 아래의 지방부로는 서울서.서울동.중부.남부 호남.미국인 지방부등 6개가 있으며, 연 2회의 교구대회를 열고 있다.

       

      그리고 미국의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총본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산하에 교육기관으로 신학연구원(서울 서대문구 창천동)을 운영하고, 정기간행물인 「성도의 벗」을 발행하고 있다.

       

      본부는 서울 종로구 청운동 7번지에 두고 대표자인 선교부장은 하킨스 선교사가 맡고 있다.

       

      2> 복원 예수 그리스도교회

       

      복원 예수 그리스도교회는 1958년 한국 주둔 미국인 함(Wher Ham)에 의하여 전래되었다. 조직기구로는 한국선교부 산하의 하부기관으로 서울과 충남 아산에 지부가 설치되어 있다.

      년1회 성직자 및 일반 신도대회를 열고 있으며, 미국 복원 예수 그리스도교 세계본부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복원고등공민학교(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의료기관으로 매곡기독병원(충남 아산군 양정면 매곡리)을 운영하고 있다.

       

      본부는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340-27에 두고 대표자는 선교부장은 조한국이 맡고 있다.

       

       

       

      5. 몰몬교의 포교

       

      한국에 와 있는 선교사라고 하는 그들은 모두 평신도로서 번화한 길거리나 가정을 방문하면서 크고 작은 팜플렛을 나누어주며 환등기(등화를 써서 그림의 확대상을 벽이나 영사막 따위에 비추는 장치)등을 동원하고, 그들은 주로 젊은이들이 짝지어 다니며 젊은 남녀층을 유혹하며 학생들에게 외국어 교습을 시키는 활동을 통하여 포교한다.

       

       

       

      6.몰몬교의 중요의식

       

      가. 신전결혼 의식

       

      몰몬교에서는 두 가지 결혼이 있다.

       

      1)영원한 결혼(Marriage for eternity) - 이는 그들이 중요시하는 신전예식이다.

       

      2)시간적 결혼(Marriage for time) - 이는 신전밖에서의 결혼으로 무의미하다.

       

      영원한 결혼은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교회의 신전 안에서만 받을 수 있는 축복이라고 주장한다.

       

      일반 결혼은 사망과 함께 끝나는 것이고, 충만한 구원을 얻으려면 반드시 신전예식이어야하며 남자나 여자나 혼자서는 승영에 들어갈 수가 없다.(엘리야 사명p.31,구원의 교리p.40)고 한다. 그리고 몰몬교에 있어서 신전예식은 곧 구원에 이르는 길이 되므로 절대추종자들에게만 행해진다. 그러므로 몰몬교는 이 신전 예식, 곧 영원한 결혼예식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없으며(교성76:50-70,이라34권 p.643)사망의 상속자가 된다고 한다.

       

      * 천상성례인 신전결혼은 중요한 교리이다.(교성132:15-16)

       

      * 신전예식은 신성한 결혼을 해야 구원이다.(성약132:15-20)

       

      * 독신으로는 구원이 없다.(구원의 교리 p.40)

       

      나. 침례의식

       

      몰몬교의 침례의식은 8세 이상된 몰몬교인으로서 여섯과의 기초 공부를 마친후 지부장이 신앙의 유무를 확인한 후에 침례를 베푼다.

      더욱이 몰몬교의 침례의식은 구원과 직결된다. 곧 침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한다. 또한 침례는 해의 천국에 들어가는 관문이라고 한다.(구원의 교리 p.40)

      몰몬교의 또 하나의 교리는 죽은 자를 위한 대신 침례이다. 인간이 구원을 받는데 침례가 필수임으로 죽은자를 위하여 대리침례를 받아야한다.(나와 나의 조상1)고 가르치며, 죽은 자를 위한 침례의식은 창세기전부터 제정된 것이라고 한다.(교성124:33)

      또한 몰몬교의 성찬식은 매주 거행하는데 8세이상이면 모두가 참여한다.

       

       

       

      7 . 몰몬교의 일부다처주의

       

      몰몬교는 일부다처주의를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 하며 가장 높은 덕이라고 한다. 몰몬교가 이것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1843년 7월 12일 일리노이주 한 코크지방 나부에서 결혼언약의 영원한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교성132:4) 그들이 다처주의 때문에 일리노이주에서 추방당하였고, 또 유타주에 정착하여서도 미국의 큰 사회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미국법은 다처를 금하고 있으므로 계속 국법에 대항하다가 존폐의 위기에 봉착하자 드디어 1890년 9월 24일자에 대관장 원포드 우드럼에 의해 "국법으로써 금지된 결혼을 맺지 말자"하고 형식상 금지되었으나 이는 법을 피하고 여론을 피하는 방편일뿐 다처주의는 몰몬경의 기록처럼 축복으로 여기기 때문에 계속된다.

       

      몰몬교의 창시자인 요셉 스미스 2세는 일종의 변태성욕주의자로 50여명의 처를 거느렸다고 한다.

       

       

       

      8. 몰몬교의 그릇된 주장

       

      * 일부일처를 축복으로 주장한다.(교성132:4)

       

      * 독신자는 천국에 못 간다고 주장한다.(교성76:50-70, 이라34권 p.643)

       

      * 아담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구원교리 1권 p.91)

       

      * 요셉 스미스를 인정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구원교리1권 p.180)

       

      * 몰몬성약을 거부하면 저주받는다고 주장한다.(구원교리1권 P.151)

       

      * 요셉 스미스를 믿어야 구원이 있다고 주장한다.(구원교리2권 P.267)

       

       

       

      9. 몰 몬 경

       

      가. 몰몬경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성경에 더하여 경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책. 1830년에 뉴욕주 팔미라에서 처음으로 출간된 이 책은 그 후 대단히 많이 재판되고 번역(목회와 신학 1995년 9월호 p.171 1830년 처음 출판된 뒤 4,000번이나 문구를 바꾼 오류와 모순투성이라고 함)되었다.

       

      몰몬교들은 이 책이 요셉 스미스에게 계시되고 그에 의해서 번역된 하나님의 영감에 의한 책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은 B.C.600년경 한 예언자 레히가 인도하여 예루살렘으로부터 아메리카로 이주하였던 한 무리의 히브리인들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은 번성하였으며 결국 두 무리들로 나뉘게 되었다. 한 무리는 레이맨 사람들로 자신들의 신앙을 잃어버렸으며, 야만인이 되었고, 아메리칸 사람들의 조상이 되었다. 또 한 집단은 니파이 사람들로 문화적으로 발전하였고, 대도시들을 건설하였으나, A.D.400년경에 레이맨 사람들에 의해서 멸망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이 있기 전에 예수가 나타났으며, (그의 승천후에)니파이인들에게 가르쳤다.

       

      그 역사와 가르침들이 예언자 몰몬에 의해서 축약되어 금판위에 기록하였으며, 그 금판들을 땅에 묻었다. 거기서 그것들은 묻힌 채로 1400년이 흘렀다. 그런데 그렇게 세월이 흐른 뒤 한 부활한 존재 또는 천사인 모로나이는 그 금판들을 요셉 스미스에게 주었으며, 결국 그 금판들은 없어지게 되었다.

       

      비몰몬교 비평가들은 그 책의 기원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주장하기를 그것은 솔론몬 스포울딩이라는 한 성직자가 쓴 소설의 유실된 원고에 기초한 것이라 하였다.(목회와 신학 1995년 9월호 p.171) 몰몬경은 솔로몬 스폴딩이라고 하는 은퇴목사가 쓴 두 권의 공상소설「아메리칸 인디안의 시조」,「이스라엘의 잃어버린 후예」를 표절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나. 몰몬경과 고고학

       

      * 몰몬경에 나오는 도시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 몰몬경에 나오는 이름들은 세계의 비석들 가운데서 발견되지 않았다.

       

      * 히브리어로 된 원판은 아메리카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 이집트어나 혹 요셉 스미스2세가 번역한 개정된 이집트어와 같은 유사 이집트어로 된 원판이 아메리카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 몰몬경의 옛 사본들이 발견되지 않았다.

       

      * 고대 원주민들이 히브리어와 기독교의 신조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는 옛 비문들이

      아메리카에서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 몰몬경에 나오는 인물들, 나라들, 장소들에 대한 언급이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 몰몬경은 참되다고 증거하는 어떠한 종류의 고기물도 발견되지 않았다.

       

      「고기 古記- 옛적 기록 antique records古基- 오래된 옛터 old site」

       

      * 몰몬교 학자들은 몰몬교를 지지할수 있는 증거를 찾기보다는 몰몬경의 진술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들 조차 손을 대지 못하도록 강요당해왔다.

       

      다. 몰몬경의 개정판

       

      요셉 스미스 2세에 의하여 몰몬경은 "땅 위의 모든 책 중에서 가장 바른 책"이라고 하며 1830년 초판에서 시작하여 현대판에 이르기까지 4,000번이나 문구를 개정하였다.

       

       

      ※ 참 고 자 료 ※

       

      * 족보사업

       

      계보 협회의 인도하에 교회와 교인들은 출생,결혼,사망시등 중요 기록과 통계를 오늘날까지 수백만권을 마이크로 필름으로 복사해서 교인들에게는 물론 일반에게도 공개하고 있다.

       

      * 몰몬교의 신전

       

      몰몬교회의 신전은 전 세계에 걸쳐 18개소인데 미국 유타주의 솔트 레이크시로 간오그던,맨타이, 성조지,푸로보 ,아리조나주의 메사, 아이다호주의 아이호훨스 , 캘리포니아주의 로스앤젤스와 오클랜드 , 카나다의 알버타, 카드스튼, 스위스랜드 ,영국 , 하와이 , 뉴질랜드 , 워싱턴등이다.

      특히 솔트 레이크시에 있는 신전은 1853년에 시작하여 40년(1893년 4월 6일 38층)만에 완공했다.

       

      * 교육 기관과 병원

       

      미국의 브리감 영 대학교 , 아이다호주의 릭스대학 , 솔트 레이크시의 말일성도 상업 대학 , 하와이 교회대학 , .뉴질랜드 교회대학 , 그리고 멕시코 , 카나다 , 영국 , 호주 , 일본 , 필리핀 , 인도 , 독일에 종교교육학원이 있다.

       

      솔트 레이크시에는 말일 성도 병원이 있으며 유타주 , 아이다호주 , 와이오밍주에도 병원이 있다.

       

      * 솔트 레이크 몰몬 태버나클 합창단

       

      몰몬교의 태버나클 합창단은 375명으로 구성되었고 1847년 발족했다. 그리고 1929년이후 매주일 아침 템풀수케아로부터 칼럼비아 방송망을 통해 미국전역에 중계되는 라디오 방송을 위해 노래부르고 있다.

      img001.jpg

      스코트랜드 두노타 성


      img002.jpg

      독일 엘쯔 성


      img003.jpg

      프랑스 상보르 성


      img004.jpg

      독일 모리츠부르크 궁전


      img005.jpg

      독일 츠빙거 궁전


      img006.jpg

      스위스 오보호펜 성


      img007.jpg

      스코트랜드 엘린 도닌 성


      img008.jpg

      덴마크 에끼스코브 성


      img009.jpg

      독일 노이슈반슈타인 성


      img010.jpg

      스웨덴 칼마르 성


      img011.jpg

      스위스 엥가딘


      img012.jpg

      러시아 크렘린 궁전


       Giovanni Marradi - Shadows

      '마음을 열어주는 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겨울 사색  (0) 2013.12.08
      롱우드 가든 연꽃 축제  (0) 2013.11.25
      조선시대 혜원의 명화들  (0) 2013.11.17
      멋진 이태리의 관광명소  (0) 2013.11.15
      만추  (0) 2013.11.14

      매튜헨리 주석 (Matthew Henry Comentary)

       

      위대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은 모든 주석 중에 매튜 헨리 주석을 첫째로 손꼽으며 매튜 헨리 주석 전체를 독파하기를 강력히 권고했습니다.

      조지 휫필드 또한 이 주석을 네 번이나 정독하며 극찬하였습니다.
      매튜 헨리 주석은 전설적입니다. 이것은 주석의 고전이요, 경건의 고전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필요할 때 참고하기 위한 주석만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해야 하는 경건서적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타 주석과 구별되는 큰 특징입니다. 매튜 헨리 주석은 설교자를 위한 책일 뿐 아니라 평신도들에게도 영적 성장과 큐티를 위해서 대단히 유용한 책입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이 주석을 사용해 왔으며, 시간의 시험을 이기고 오늘날에도 우뚝 서 있습니다. 이미 300년(1706년 첫 출간)이 지났으나, 주석학의 많은 발전에도 불구하고 영적이고 영원한 진리에 대한 이 책의 통찰력과 교훈들은 오늘날에도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자였던 찰스 스펄전은 모든 주석 중에서 매튜 헨리 주석을 첫째로 손꼽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매튜 헨리는 가장 경건하고 명쾌하며, 건전하고 분별력 있고, 시사적이고 진지하며, 군더더기가 없고 신뢰할 만합니다. 은유와 유비가 번득이며, 예화와 묵상이 아주 풍부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신학교를 졸업한 후 열두 달 안에 매튜 헨리 주석 전체를 독파하기를 강력히 권고합니다. 만약 당신이 방금 읽은 구절을 강해한다면, 회중들은 당신의 설교의 신선함과 사상의 깊이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매튜 헨리가 얼마나 보물인지 말하게 될 것입니다.

       

      조지 휫필드는 이 주석을 네 번이나 정독하고 항상 위대한 매튜 헨리를 극찬하였으며, 로버트 홀, 윌리엄 쿠퍼(찬송가 작시자) 등도 이 주석을 정독하고 그들의 설교와 찬송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또 찰스 웨슬리의 찬송가도 이 주석에서 나온 것이 있습니다. 경구와 뛰어난 구절들은 영어권 국민들에게 격언이 되었습니다.

       

       메튜헨리( Matthew Henry)

       

      성경 주석가. 영국국교회의 복음주의 목사의 아들인 그는 통일령으로 아버지가 성직에서 ?겨난 직후에 태어났습니다. 학문을 좋아하는 소년이었으며 1672년에 회심하였습니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학문성이 차츰 떨어지므로 1680년 런던 이슬링턴 대학에서 신학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대학은 신앙을 저버린 시대에 높은 학문을 유지해왔습니다. 그 대학의 학장은 케임브리지에서 온 토머스 두리틀이었고, 부학장은 옥스퍼드에서 온 토머스 빈센트였습니다. 그 후에는 그레이 법학원에서 법률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는 국교회 목사가 되려고 생각하였지만, 비국교도가 되기로 결심하였고, 개인적으로 장로교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첫 목회지는 체스터(1687-1712)였으며 그 뒤에 런던의 해크니(1712-1714)로 옮겼습니다. 

       

      청교도들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은 그는 성경 해설을 목회의 중심으로 삼았습니다. 날마다 4시 또는 5시에 일을 시작하였던 그는 시간을 최대한 사용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1704년에 「성경 주석」을 집필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사도행전까지 탈고하였으며, 그의 사후 목회 동역자들이 그의 노트와 저서들을 참고하여 신약성경 주석을 완성하였습니다. 그 주석은 성경에 대한 자세하고 종종 대단히 영적인 해설 양식을 취하였는데, 그 양식은 그 이후의 복음주의적 목회의 형태를 결정하였습니다. 스펄전은 자신이 매튜 헨리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였습니다.
        

       

      메튜헨리( Matthew Henry) 신앙의 자유를 위해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프로테스탄트 목회자들 대부분이 그의 주석서를 통해 미국의 청교도의 기초를 세웠습니다. 목회자들이 성경 이외 유일하게 소장하였던 책이기도 합니다. 기도와 묵상으로  수십년간  기도실에서 주석서를 집필하여, 청교도 신학의 기초를 세운 신학자라고 할수 있습니다.  사도이후 아직까지 그를 뛰어넘는 주석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매튜헨리 주석 (Matthew Henry Comentary) -  whitelawyer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강추)정서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교회의 10가지 증상 - Derwin Gray

      (본 아티클은 Derwin Gray목사님께서 본인의 섬기는 교회, "Transformation Church"를 "Emotionally Healthy Spirituality by Pete Scazzero"라는 책의 내용을 가지고 진단해 보면서, 해당 책에서 제시한 정서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교회의 10가지 증상을 요약한 것입니다.)

      괄목할만하게 예수님을 드높이며 세상을 바꾸는 교회 공동체가 정서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고 침체될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10년 2월 7일 개척된 Transformation Church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3명이던 사역자의 수가 27명으로 늘어났고,
      12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왔으며,
      수백명의 성도들이 Transformation Groups에 속해서 훈련되어지고 있고,
      3개의 공립학교와 사역협정을 맺었으며,
      두번이나 늘어나는 성도 수를 감당하기 위해 교회 시설을 확충하였고, 현재도 성장세에 따라 다른 빌딩사용을 고려하고 있으며,
      1000명 가까운 성도들이 훈련을 받아 교회 사역 팀들이 세워졌고,
      이러한 폭발적인 성장 가운데서, "우리를 통해,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대신, "사역 자체"에 초점을 둔다는 것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

      1.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
      "하나님이 아닌 나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
      "다른 목회자들이나 교회들과의 미묘한 경쟁관계를 의식해서 하나님을 위한 사역의 열매들과 결과들을 과장할 때"
      "나 자신의 내적 문제를 향한 초점을 무시하고 나의 실수들에 대한 방어적 자세를 취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숨길 때"

      2. 두려움과 슬픔과 화의 감정들을 무시하는 것
      우리의 느낌은 우리의 생각을 따릅니다. 왜 우리는 분노, 열등감, 화, 그리고 절망을 야기시키는 것들을 생각하는 것일까요?
      만약 우리가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들을 예수님께 내어 드려서 그 분이 다루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들은 도리어 우리와 우리가 이끄는 이들을 공격하여 다루게 될 것입니다.

      3. 잘못된 것에 죽을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하는 것
      목회자님들, 사역 외 즐거움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의 삶이 즐겁습니까?
      가족과 결혼관계를 즐기고 계시나요?
      친구들이 있으시나요?

      4. 현재에 미치는 과거의 영향을 거부하는 것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였을 때, 우리는 거듭난 것이며, 의롭게 된 것이고, 구속된 것이고, 영광스러운 자녀가 된 것이고, 영원히 용서받은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과거와 출신이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것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도록 맡기는 능력입니다.

      5. 우리의 삶이 "세상적인 삶"과 "성도로서의 삶"으로 나뉘는 것
      "교인들이 그들 주변 세상 사람들과 같이 이혼하는 것"
      "교인들의 삶의 패턴이 비교인과 같이 물질주의적 삶을 나타내는 것"

      6.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 대신에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
      오직 예수 그리스도 위에서 우리를 용납하시고 무조건적 사랑과 은혜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은 사역은 자기도취행위와 다른 이들의 칭찬을 듣고자 하는 중독으로 인해 오염될 것입니다.
      우리가 누릴 최고의 기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즐거워함이 흘러 넘치는 것, 이것이 바로 사역입니다.

      7. 혼선을 회피하고자 하는 영적 자세
      "사람들의 면전에서는 한 말과 그들이 없을 때에 하는 말이 다른 것"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는 것"
      "사람들을 비난하고 공격하며, 완전히 무시하는 것"
      "누군가의 감정이 상처입는 것을 견디기 싫어서 사실 전체를 말하지 않는 것 (Telling only half truth)"
      "사람들을 피하고 물러나며 대화를 중단하는 것"
      "주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는 것"

      8. 실수, 약점, 그리고 상처들을 덮는 것
      다음과 같은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진정한 나의 모습을 안다면, 그들은 나를 거절할거야." 그러므로, 죄에 대해 정직해 지기보다는 도리어 죄를 숨기게 됩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안에 뿌리내려져 있지 않다면, 우리는 결코 정직할 수 없습니다. 놀라운 은혜 안에서 자유하십시오.

      9. 영역 설정이 없는 삶
      "예수님께서는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의 모든 병자들을 고치시지 않으셨습니다. 죽은 자들 모두를 살리시지 않으셨습니다. 길거리의 모든 굶주린 자들을 먹이지 않으셨으며, 예루살렘의 모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직업계발소를 세우시지 않으셨습니다."
      영역설정은 매우 건강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메시야는 오직 한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메시야는 당신도, 저도 아닙니다.

      10. 다른 이들의 영적 여정에 대한 정죄하는 것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잊게 된다면, 그 은혜가 다른 이들에게 전해질 수 없을 것입니다. 정죄는 결코 다른 이들이 예수님과 사랑에 빠지도록 만들 수 없습니다.
      리더로서, 저는 신학적, 철학적 견지를 유지할 뿐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성숙하고 건강하길 원합니다. 제가 만약 건강하다면, 제가 섬기는 Transformation 교회도 건강할 것입니다.

      Derwin Gray, "10 Symptoms of Emotionally Unhealthy Spirituality"

      영문 원기사 보러 가기

      '은혜의 단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꿈을 위하여 한국에  (0) 2013.12.04
      꿈을 찾는 사람들  (0) 2013.11.27
      가을 한서(恨書)  (0) 2013.11.18
      부르심과 택하심  (0) 2013.11.12
      진리 편에 서라!  (0) 2013.11.06

      거짓된 열심들의 특징

      열심 자체는 도덕적으로 중립적이고 참된 열심뿐만 아니라 거짓된 열심도 있기 때문에 '열심'을 검증해 보아야 하는데, 내 열심이 거짓인지 참인지 어떻게 테스트할 수 있습니까? 함께 사용되어야 할 몇 가지 시금석들 중 어느 한 가지도 그 자체만으로는 적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우리의 열심이 어떤 다른 사람을 보고 나온 것이고 그 다른 사람의 본을 좇아가는 형식이 되어 있다면, 항상 의문을 가지고 검증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이단들의 특징은 언제나 그런 식입니다. 어떤 한 경우가 사람들에게 제시됩니다. 그러면 그 경우에 설득을 당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취합니다. 그래서 그 경우를 따라가는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들과 정확히 똑같이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식으로 열심이 생겨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어떤 열심이 일어나서 조직적으로 견지가 된다면, 그 열심은 거짓된 열심일 가능성이 아주 다분하다는 증거를 보이는 셈입니다. 특히 그 열심을 일으키는 자극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오는 경우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세 번째 시금석을 제시합니다. 이 시금석은 정말 매우 중요한 또 다른 요점입니다. 여러분이 '됨됨이' 보다도 '어떤 일을 행하는' 것에 더 큰 강조점을 두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조심해야 할 표증입니다. 만일 성도가 되는 것보다 어떤 일을 하는 데 더 열심이라면, 다시 그 열심을 검증하는 것이 좋습니다. 거짓된 열심은 언제나 행하는 것에 강조점을 둡니다. 어떤 존재가 되느냐 에는 흥미가 없습니다. 바로 거기에 위험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시금석을 소개합니다. 거짓된 열심 속에서는 진리보다 행동이 우선합니다. 언제나 그 점이 두드러져 나타납니다. 삶의 중심에 있어서 활동을 강조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여러분이 내내 설득을 당하고 충격을 받은 한 가지 요점은 힘이 넘쳐나 보이는 다른 사람이 보인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들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보다는 그런 것에 자극을 받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거짓된 열심은 언제나 일들을 지나치게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나침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행동은 그 행동을 유발했던 가르침보다도 그 가르침의 증상을 보여 주는 더 큰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방식, 조직, 구조가 매우 탁월한 위치에 있다면 거짓된 열심일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섯 번째 시금석으로 '육적인 것(carnality)'이라는 제목 밑에 여러 가지를 함께 놓아 표현해 보겠습니다. 제가 말하는 '육체'라는 것은 육신적인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거짓된 열심에는 이러한 육신적인 요소가 상존하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일종의 정신의 경박성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의 천박할 정도지요. 안타깝게도 그러한 모습이 기독교의 종교적 집회 속에서 가끔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일종의 경박함, 비상성, 명랑함의 모습이지요. 사도 바울이나 아니면 다른 사도들의 근처에서 그러한 것들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복되신 주님 가까이에서 감히 그러한 것들을 생각해 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집회에서 우리는 그것들을 봅니다. 대단히 열심이 있습니다. -제가 그들의 열심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그걸 인정합니다. 그들의 광신주의적인 열심을 정말 인정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 일이 지나칩니다. 그들의 열심에 이 경박한 모습이 보입니다. 실로 어떤 경우들에서는 정말 내가 이 종교적인 집회에 와 있는가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내가 그 집회에 참석해서 느낀 정신은 크리켓이나 축구팀의 정신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정말 세상적인 오락의 정신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진지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 어린 지각이나 성결의식이나 경외심 어린 의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밝고 명랑하였고 놀랍게 조립된 큰 세력과 기운으로 넘쳐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것들이 진지한 열심의 표증이라기 보다는 육신적 사고의 표증들 이라고 주장합니다. 여러분은 거기에다 덧붙여 말할 수 있습니다. 거짓된 열심은 대단한 흥분이 일어날 때마다 발견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 흥분도 역시 육체성의 제목 밑에 집어 넣어야 합니다- 흥분은 보통 육체에 속한 것입니다. 자신하고 확신하고 상황을 장악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의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거짓된 열심임이 틀림없습니다. 그 사람이 자신감에 넘쳐 있는 인상을 끼치고 있다면 그 사람이 정말 얼마나 진지하고 열심 있는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저는 그 사람의 열심을 의심해 버립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어떤 흔적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그것은 역시 더 나쁜 것이지요.

      일곱 번째 시금석으로 나아가 보아야 하겠습니다. 거짓된 열심은 자신을 검증하려는 것을 대단히 싫어합니다. 자신이 검증받는 것 자체를 분개합니다. "내가 열심이라는 것을 모르세요? 나는 아주 열광적입니다 나는 그것을 하기를 원해요"라고 열심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십시오. "자,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확인해 봅시다." 그러나 그 열심은 그 모든 가르침을 참아내지 못하고 일들을 계속해 나가기를 원합니다. 무엇인가를 계속하고 있어야 합니다. 검증을 계속 참아내지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매우 나쁜 징표입니다.

      여덟 번째로, '열심'이 가르침을 참아내지 못하는 양상을 때게 될 때 그 상황은 더욱 나쁜 것이지요.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바울은 그들이 지식을 원치 않고 거부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지식에 관심이 없습니다. 무엇인가를 계속 해 나가야 합니다. 가르침 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거짓된 열심의 정신입니다.

      아홉 번째 시금석은 환상주의입니다! (신비주의와 거의 같은 말로 쓰이고 있음-역자주) 정말 참을성이 없습니다! 거짓된 열심은 일차적으로 그것이 선전하고 있는 것이 진리냐보다는 그것이 성공하느냐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열 번째 시금석으로, 균형의 결핍을 지적하겠습니다. 거짓된 열심에 고양된 사람들이 한 가지만 보고 있음을 여러분은 금방 알게 될 것입니다. 진리의 한 국면만을 보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복음전도에만 관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는 칼빈주의에만 관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는 알미니안주의에만 생각이 가 있습니다. 또는 예언에만 생각이 가 있습니다. 바로 이 한 가지 요점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서 바로 이 한 가지에만 강조점을 둡니다. 다른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항상 치명적인 특징입니다. 이단들이 언제나 그와 같은 고통을 안고 있습니다. 그 이단들은 균형을 상실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한 가지에 너무 빨려 들어간 나머지 다른 것을 보지 못합니다. 오직 한 가지에만 집착하여 균형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한 가지만'은 하나의 거짓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맹목적인 열심이 되는 것입니다. 열심이 맹목적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균형이 결핍되었다는 어떤 증표가 있거나, 온전한 진리가 제시되지 않거나, 하나님의 전체 뜻이 다루어지지 않거나, 오직 한 가지에만 부단히 강조하는 것만 있다면, 그것은 거짓된 열심입니다. 거짓된 열심은 학식이나 교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신학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들로 구원받게 해야지"라는 데에만 관심있고 다른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또 그 거짓된 열심을 내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그들이 주장하는 그 독특한 교리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습니다. 언제나 그것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에 언제나 그 한가지 요점이 부상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발견할 것입니다. 그것 또한 거짓된 열심이요 균형을 상실한 것입니다. 물론 교리와 생활 속에 어떤 균형이 없거나, 사람들이 믿고 가르치는 바와 살아가는 삶의 방식 사이에 균형이 깨져 있는 것을 본다면, 필연적으로 그들이 거짓된 열심을 가지고 있다는 하나의 적극적인 증표입니다.

      마지막 열 한 번째 시금석은 이러합니다. 거짓된 열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계속 활동하고 힘이 넘쳐나고 열심이 항상 들끓어 오르고 진지하기 때문에 실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에게 평안을 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그 평안을 보이기는 합니다. 병들어 어떤 일을 할 수 없으면 그들은 침체되고 불행해집니다. 그들은 그때서야 자기들이 활동에 의지해서 살아왔었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하나님도 아시지만 저는 여러분에게뿐만 아니라 제 자신에게도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자기 자신이 설교하는 것만 의지하여 살아가는 설교자들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저는 어떤 비극들을 보았습니다. 평생목회를 했던 노(老) 목사님들이 더 이상 설교를 못하게 되자 불행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설교할 수 없기 때문에 불행해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 스스로가 불행해 있었기 때문에 불행해진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과 그 진리에 의존해서 살아가지 않고 자기들의 설교사역에 의존해서 살아갔습니다. 목회를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참으로 무서운 위험요소가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역에서 활동적인 어떤 사람에게도 그와 같은 위험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활동에 의지해서 살아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그러고 있다면 거짓된 열심을 가지고 있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등의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가 끈질기고 집요할 수도 있습니다. 진정으로 우리 자신을 내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한 다음 우리가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게 될 때 안식도 없고 상실된 상태로 남아 있게 되었다면 그 모든 열심이 다 그릇되었던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교자가 되어야 했던 이유  (0) 2014.01.15
      기독교 연합의 기초-2  (0) 2013.11.28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롬 1:18~20) 로이드존스  (0) 2013.10.28
      참 회심의 증거  (0) 2013.10.10
      설교의 행위  (0) 2013.10.05

      * 기적과 계시 (B. B. 워필드)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년)가 이 사실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각 개인들의 개별적인 필요를 충당시켜 주기 위해 신 지식(神知識) 창고를 개인에게 따로 전달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다. 그분은 오히려 모두를 위한 공동의 식탁 하나를 펼쳐 놓으신 뒤 모든 사람에게 와서 풍성한 대축제에 참여하라고 초청하신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고 모든 사람에게 넉넉하고, 모든 사람을 위해 준비된 하나의 완성된 계시를 세상에 주셨으며, 각 사람으로 하여금 이 하나의 완성된 계시로부터 각자의 모든 영적 양식을 가져가도록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계시 능력의 표적인 기적은 그 본체인 계시가 완성된 후에는 계속되리라고 기대할 수 없으며 실질상 계속되지도 않는다.

       

      칼빈(John Calvin)은 더 이상의 새로운 복음이 없는데도 기적을 간구하거나 찾아다니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라고 말한다. 한 복음이 모든 땅, 모든 백성, 모든 시대를 위해 충분하듯이, 그 한 복음에 대한 기적의 입증도 모든 땅 모든 시대를 위해 그만큼으로 충분하다. 따라서 더 이상의 기적들이 복음과 관련하여 기대되어질 수 없다.

       

      바빙크(Herman Bavinck)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에 의하면, 특별계시는 하나의 역사 과정의 형식으로 베풀어져 왔던바,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그 정점에 이른다. 특별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가 다시 하늘로 가심으로써 단번에 끝나지 않았다. 아직 성령을 부어주실 일과 사도들의 인도를 통해 그리고 인도 하에 능력과 은사들이 발휘될 일이 남아 있었다. 성경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 모든 사항을 특별계시의 영역으로 간주하며, 이 계시의 연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정점에 도달한 특별계시를-성경의 말씀과 교회의 삶 모두로써-세상 안에 영존(永存)하게 하는 데 필요했다. 진리와 삶, 예언과 기적, 말씀과 행위, 영감(靈感)과 중생이 특별계시가 완성되는 동안 나란히 진행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가 완성되고 성경과 교회 안에서 우주의 한 구성 분자가 되었을 때 이제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전에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준비였던 것처럼 이후에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결과가 될 것이다. 이전에는 그리스도께서 그 백성의 머리가 되고 계신 과정이었으나 이제는 그 백성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형성되어가고 있다. 이제는 특별계시의 새로운 구성 요소들이 더 이상 보태질 수 없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그분의 사역이 이미 행해졌고, 따라서 그분의 말씀은 이제 완전하기 때문이다.”

       

      만일 사도 시대 이후에 어떤 기적이 우연히 발생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중요성을 띠지 못할 것이다. 아무런 우주적인 의미도 지니지 않은 사건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 중요한 사실은 “성경이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졌다고 분명히 가르친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부어주신 바 된 성령께서 오직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하고 그리스도께 속한 일들을 행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만유 안에 모든 것이시며, 모든 계시와 구속(救贖)이 함께 그분 안에 집약되기 때문에 계시나 혹은 그에 따른 표적들이 그 위대한 계시와 그것을 보증하는 역사들이 완성된 이후에, 즉 바로 그 일들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구원계시의 완성과 절정, 그리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집약으로서, 그리고 그 백성의 유일하고 충분한 구주로서 그분의 의로운 자리에 서게 되신 이후에도 계속된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가져온 곳 : 
      카페 >(안산) 회복의 교회
      |
      글쓴이 : 전상범| 원글보기

       

      오늘은 나도 위로받고 싶습니다

      요즘은 정말 , 목회사명을 내려놓고 싶습니다..

      아무리 달동네 무당촌 이라 영적 바람이 쎈곳인줄 알지만 ..

      단 .몇명이라도 마음 편하게 해주는 성도를 만나고 싶습니다..

      몇명 안되는 개척교회 지만 어찌 하나같이 그렇게 속을 썩이는지! 

      사업하다 부도내고  교도소에 몇년간 복역하고 우리교회 오고..

      식당하다  파산 신고하고 수급자 되어 오고....

      대형교회에서 권사 떨어졌다고 우리교회오고....

      .와서는 몇달간 열심히 나오다가 권사 직분 달라기에 

      올해는 안된다고 했더니 온통 흔들어놓고  나가고.

       회계는 교회통장에 헌금 입금안시키고..

      90만원이나 더 찾아 여행 떠나고..그것도 유부남이랑...

      오자마자 오만 참견하던 집사는 나간지 1년만에

      여목사 되어 가까운곳에 개척하고..

      권사 직분 안준다고 가던 그 싸납던 집사도 2년만에 여목사 됐다고

      개척했다고 전도지 들고 왔더이다..

       

      너무 가난한 동네 이다보니  몇명안되는 성도들 데리고  온천을 갔는데

      탕안에서 벌거벗고 삿대질 해가며 싸우고..

      목욕비누를 16개나 비닐봉투에 몰래 담아와서 교회 화장실에 놓고 쓰라고 합니다...

      본인 이름으로 통장 개설이 안되...

      우리 목사님 이름으로 통장 만들어 자기 달라고 하고..

      피해자들이 찾아올까 주소도 교회로 옮겨 놓고...

      오죽 잘 살았으면 통장하나 못만들고..주소도 자기 거처로 옮기지 못하고 사는건지..

      울 목사님 한 술 더떠  챙겨 주는 것도 부족해.

      자기주식 우리 앞으로 명의 이전해달라는 부탁받고 인감증명까지 떼주고....

      너무 어두운 지역이라  60 나이에  특수학교 보육교사로 근무하며

      자기들 제일 좋은 것으로 섬겨 주려하면 감사는 커녕..

      나 없을 때 주방에 들어가서 무엇.무엇.있나 확인하고.

      잡곡이고 과일이고 양파 마늘까지 .대놓고 달라합니다..

      개척교회다 보니 장소가 협소에 안보이는데 둘 곳도 없고....

      낮 예배에 안나오고  저녁예배에 와서 점심에 나눠준 간식 .. 

      내가 제일 좋아하는 모시잎떡인데 안남기고 주었다고...

      저녁까지 두면 딱딱해져서 남은것 나눠줬다고 하니..

      굳으면 쫄깃해서 더 맛있다고....

      직장 다니기 전에 분재 배우며 감귤나무랑  모과 나무..

      소사 철쭉을 키워 감귤이 주렁주렁 달렸는데.. 

      목사님 꼬셔 자기 사업장에 분재 잘 키우는 사람 있다고

      분갈이 해주고 잘 키워준다고..가져가서 물도 안주고..

      눈에 보기 좋으니 감귤나무는 손님으로 온사람들이 다 따가서 엉망으로 해놓고..

       

      이제는 울 목사님에게도 너무 화가 납니다.

      교인 잘되는 일이라면 미친듯이 자기것 다 내주는 사람하고

      사느라 이 사모는 오늘도 가슴이 터져갑니다...

      서울 근교에 10억이 넘는 어머니 집이 있으면서도....

      이 달동네와서 집도 없이 상가 한 켠에  수도꼭지 하나놓고  씻어야하고

      화장실을 가려면 추운겨울에 옷입고 밖으로 나가 2층까지 뛰어가야 합니다.

      목회 그만두면  장교로 근무했던 목사님 연금과  내 봉급이랑 편히 살수 있는데

      이 늦은 나이에 꼭 이 길을 가야만 하는건지.....

      오늘도 고민해 보지만 내입으로 목회 그만 두라는 말을 할 수도 없고..

      사모가 사명이기게   오늘도 이길을 갑니다...

      하도 속상해 넉두리 하고 갑니다...

      훌훌 털어 버리고 그러러니 하고  살 수 있는 넉넉한 마음으로 살 수 있기를 ....

      기도해 주세요... 

       

      글/베로니카1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사모님들의 이야기" 중에서

       


      '사모님들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지 않은 길  (0) 2013.11.30
      한 농촌교회 사모님의 체험 간증  (0) 2013.11.25
      아직도 부치지 못한 편지  (0) 2013.11.15
      예수님의 발냄새  (0) 2013.11.13
      오늘의 말씀  (0) 2013.10.2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