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하 신년
    목적을 두지 않는 편안한 만남이 좋았습니다.
    장미처럼 화려하진 않아도 풀꽃처럼 들꽃처럼 성품이 온유한 사람
    심신이 고달픈 날엔 떠올리기만 해도 그냥 마음이 편안하고 위로가 되는 사람
    흐린 날에 고개 들어 하늘을 보면, 왠지 햇살같은 미소 한번 띄워줄 것 같은 사람 늘 말없이 기도해 주는 사람 내 속을 다 드러내지 않아도 짐짓 헤아려 너그러이 이해해주는 사람
    욕심없이 사심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상대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 진심으로 충고를 해주면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 어딘가 꼬여서 항상 부정적인 사람보다, 매사에 감사하고 긍정적인 사람
    양은냄비같이 빨리 끓지 않고 뚝배기처럼 더디게 끓어도 한번 끓은 마음은 쉬 변치않는 사람
    진솔함이 자연스레 묻어 내면의 향기가 저절로 베어나오는 사람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알고 흔들림없이 자신을 지키는 사람
    세상 풍파 사람 풍파에도 쉬 요동치지 않고, 늘 변함없고 한결같은 사람 입으로 '사랑한다' 말하지 않아도 가슴으로 사랑이 느껴지는 바다같은 사람 그래서 처음보다 알수록 더 편한 사람 바로 이 글을 읽는 그대입니다. ^^
    지난해 목양연가를 찾아주신 님께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 전해드립니다

    소망으로 2014 갑오년 맞이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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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 사랑 흰 눈처럼...
    최송연 차갑게 얼어붙은 내 영혼의 뜨락에 저 흰 눈처럼 보드라운 당신 사랑이 소리도 없이 내려옵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순 없으나 주님 사랑이 그렇게 사르르 사르르 내 영혼을 감싸며 쌓여가고 그 사랑으로 소복소복 내가 채워지니 주위의 모든 것들이 어찌 그리도 아름답고 어찌 이리도 사랑스러운지요 그동안 내가 문제였었나 봐요 만물이 못생겼다 미웁다고 투정한 것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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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이 믿음으로 성립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소
      (존 오웬)

      1.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과 은혜와 자비에 관한 복음의 계시와 선포에 대한 신령한 지식과 발견 - 계시된 진리에 대한 단순한 동의가 아닌 내용 자체에 대한 영적인 분별과 지각과 이해가 필요하며 사도 바울은 이것을 "예수 그리스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고후4:6)이라고 부릅니다.

      2. 하나님의 구원 방식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특별히 자기 자신의 칭의와 구원에 적합하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능력이 그 모든 것 안에서 자신의 칭의와 구원이라는 목적을 효력있게 성취하도록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깨닫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복음을 통해 제시된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믿는 사람 각각을 구원하기에 적합하고 적당하며 유력하다는 사실에 대한 만족스러운 확신입니다.

      3. 믿음의 마지막 행위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제외한 다른 모든 구원 방식과 구원 방편들을 거부하고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의 영원한 복락을 위하여 오직 하나님의 구원 방식만 인정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신뢰의 이 같은 행위에 있어서 믿음의 적합하고 직접적인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인격과 그 중보와 그 의로 인하여 하나님의 구원 방식의 생명과 중심이 되시기 때문에 믿음의 적합하고 직접적인 대상이십니다.
      가져온 곳 : 
      카페 >개혁주의 마을
      |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화해 

       

            우리가 논쟁을 할 때나 회의를 할 때

      무조건 이겨야한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상대방이 항복을 하면서 '그래 당신의 말이 맞아'하고

      말해주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얻은 승리가

       과연 도움이 될까요. 내가 맞았다 하더라도

      상대방과의 관계가 수습되지 않는 한

      그 승리는 씁쓸할 뿐입니다.

       

      상대방이 기분이 상했거나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면

      나 역시 불편합니다.

      지금은 승리가 아닌 화해를 위해 내가 먼저 손을 내밀 때입니다.

      '화해는 승리보다 아름답다.

      ' 니카라과의 정치가 비올레타 차모르의 말입니다.

       

       

       

       

       

       



      Innocence / Giovanni Marradi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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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기도란...

      최송연 주님께 마음 다해 바치는 뜨거운 사랑 고백 새벽 미명부터 밤 이슥하도록 갈급히 부르는 노래 잠자리에 들 땐 온전히 내어 드리는 내 심장의 고동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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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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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생명체로 거듭나고 성장하라

       

      기독교 신앙은 거듭남이라는 기적을 통해 영원히 그 생명을 이어간다. 거듭남은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이 사역이다. 거듭남은 이성적인 추론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사건이다. 거듭남의 체험을 설명할 수 있는 심리학자는 없다.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 날이 이르면, 자신이 거듭남의 기적이 없이 단지 기독교 신앙을 정신적으로 동의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충격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릴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기계문명의 시대와 더불어 도래한 ‘인스턴트 기독교’는 기독교적인 삶의 참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 인스턴트 기독교는 새 신자가 갓난아이와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발육을 위해 적절한 양분섭취와 운동이 필요한 생명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은 성장의 능력을 지닌 갓난아이와 같다. 따라서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성장이 둔화되거나 발육이 지체되기도 하고, 또 영양실조에 걸리거나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따라서 좋은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만 건강하고 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올바른 가르침이 없으면 신자의 영적 성장은 둔화될 수밖에 없다.

       

      자기애를 믿음으로 위장하지 말라

       

      우리는 죄를 제거하지 않고 세련되게 위장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한 가지 죄를 다른 죄로 바꿔치기 했을 뿐인데 죄에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예를 들어 회개를 장소의 변화와 혼동해서는 곤란하다. 한때 는 먼 타국의 돼지치기들과 어울리며 죄를 짓고 살다가 지금은 왼견상 훨씬 더 깨끗하고 존경할만한 경건한 신자들과 교제를 나누고 있더라도 여전히 전과 다름없이 불결한 마음을 소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존재한다.

      교만의 경우에도 종교적인 영향 아래 이른바 자긍심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실제로는 하나님의 가증스럽게 여기는 자기애를 도모하면서도 겉으로는 성경말씀으로 위장해 교묘하게 그 실체를 숨기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럴 경우에는 문제가 깨끗이 청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속으로 더욱 깊이 숨어든다.

      험담을 일삼고 문제를 일으키기 좋아하는 사람이 회심을 하게 되면 ‘영적 조언자’로 변신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하지만 좀더 깊이 관찰해 보면 이전과 다름없이 강한 호기심과 불안정한 심리상태는 그대로인 것을 보게 된다. 즉 외양만 변했을 뿐 내면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상태다. 사탄은 이런 식으로 교회 안에 침투해 중상과 분열을 조장하고 신자들을 연약하게 만든다.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기 행각으로 인정되는 사업수완도 그리스도인이 기도한 뒤에 적용한 경우에는 기도에 대한 응답이자 하나님이 그일에 함께 동참하신다는 증거로 크게 선전된다.

      지금까지 열거한 여러 사례는 죄가 그 본질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얼마든지 외양만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뜻은 죄를 세련되게 위장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다.

       

      무엇을 믿는가?

       

      참 믿음은 마음을 거룩하게 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게 한다.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다. 하지만 모든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아니다. 믿음이 요즘처럼 큰 인기를 누린 적은 일찍이 없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믿음을 인간의 도덕적, 영적, 경제적 질병을 치유하는 만병통치약으로 간주한다. 강한 믿음만 있다면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 요즘 사람들의 신념이다. 이런 이유로 모든 사람이 목소리를 높여 믿음의 가치를 부르짖는다. 무엇을 믿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믿으며 된다.

      이런 현실의 배후에는 믿음이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사용할 수 있는 우주의 절대적인 힘이라는 모호한 개념이 도사리고 있다. 믿음만 있으면 절망, 공포, 패배, 실패 등이 사라지고 희망, 자신감, 자기통제를 비롯해 전쟁과 사랑과 스포츠와 사업과 정치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모든 사람을 지배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진리를 믿을 때만 믿음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거짓을 믿으면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단지 ale음을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진리이신 하나님에 관한 진실을 믿어야만 한다.

      참 믿음은 하나님이 그분 자신에 관해 말씀하신 것과 우리 인간에 대해 말씀하신 모든 것을 믿는 것이다. 먼저 우리 자신이 흉악한 죄인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전에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믿을 수 없다. 대중의 인기를 누리는 종교는 바로 여기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자신에 대해 말씀하신 것과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그분에 대해 말한 모든 증거를 믿는 것이다. 우리가 영접한 예수님은 우리의 상상에 의해 날조되거나 우리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가 아니다.

      참 믿음은 언제나 복종을 요구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고 스스로의 신념에만 귀를 기울이는 감상적인 믿음의 청산가리만큼이나 치명적이다.

      자기의 신념을 믿은 믿음은 거짓믿음이다. 그런 믿음으로 하늘나라에 가기를 바라는 것은 어둠 속에서 두 동간난 다리를 건너겠다고 차를 몰고 질주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믿음은 혁명이다

       

      초창기 루터교 신자들은 “믿음은 사람을 동요하게 만든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루터의 교리가 요즘에는 이상하게 변질되었다.

      바울과 루터가 말한 믿음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믿음은 개인의 삶을 온통 뒤흔들 뿐 아니라 그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킨다. 믿음은 개인의 삶을 완전히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한다. 믿음은 최종적인 권한을 지닌다. 믿음은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삶의 우선순위를 올바로 결정하게 한 뒤 하나님이 뜻에 부합한 삶을 살아가게 만든다.

      하지만 오늘날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피종적인 동의를 표하는 것에 불과하다. 다소곳한 태도로 영혼 구원에 열중하는 전도자의 가르침에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며 믿음을 갖게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믿음은 사람들을 동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편안하게 해준다. 그런 믿음은 자아의 표면을 깨끗이 닦아주고 자긍심을 회복시켜 준다.

      기독교가 장난삼아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 오직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위치에 서게 된 사람만이 진정한 성경적 신앙의 소유자라고 자신할 수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계획 가운데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믿음이 있어야만 그리스도의속죄사역이 가져다주는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다. 믿음이 없이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믿음은 순종을 낳는다

       

      나는 지난 수년 동안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전하고 받아들이는 믿음의 교리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믿음은 결코 성경적인 믿음이 아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사실로 알고 있는 진술문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에 근거한 믿음도 일종의 믿음이기는 하지만 결코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이성에 근거한 믿음은 확실한 증거를 받아들이는데 그칠 뿐 도덕적이거나 영적인 속성을 지니지 못한다. 참 믿음은 하나님의 성품에 초점을 맞춘다. 참 믿음은 거짓을 말할 수 없으신 하나님의 도적적인 완전함 위에 다른 증거를 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말한다. 믿음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는 것을 뜻한다.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없다. 믿음은 회개하는 영혼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선물일 뿐 감각이나 감각을 통해 얻어지는 자료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믿음은 기적이다.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실 때 믿음이 생겨난다.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지 않는 행동은 믿음이 아니라, 믿음에 미치지 못하는 다른 어떤 것이다.

      믿음과 도적적인 삶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믿음의 본질은 도덕적이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다고 말하면서 그분을 주님으로 알고도 순종하지 않는 믿음은 지극히 불완전하며 결국에는 거짓으로 드러날 뿐이다. 참 믿음을 지닌 사람은 순종한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만 믿음을 허락하신다. 참된 회개가 있는 곳에는 항상 순종이 뒤따른다.

      행위로 말미암은 구원에 이르는 그릇된 교리를 피하려다가 우리는 순종이 없는 구원을 말하는 극단에 치우쳤다.

       

      믿음은 세상을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아홉 걸음을 다가오신다. 하지만 마지막 열 걸음을 떼어놓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하는 마음을 갖게 하시지만 우리 대신 회개하실 수는 없다.

      세상을 버리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고 믿는 신종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다.

      생명을 유지하려면 날숨과 들숨이 조화를 이루어야한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려면 반드시 그분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버려야 한다.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친구를 우리의 친구로, 그분의 원수를 우리의 원수로, 그분의 길을 우리의 길로, 그분의 고난을 우리의 고난으로, 그분의 십자가를 우리의 십자가로, 그분의 생명을 우리의 생명으로, 그분의 미래를 우리의 미래로 받아들여야 한다.

      온 세상에 새 생명을 얻지 못하게 속이는 마귀의 책략이 설치되어 있다. 맡기는 믿음으로 포장해 겉으로는 아무런 위험도 없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생명을 노리는 계책이 설치되어 곳을 하나 예로 들자면, 바로 기도다.

      하나님이 항상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승낙’은 물론 ‘거절’도 응답이고, 또 구하는 것과 다른 것을 허락하실 수도 있다는 논리를 종종 듣는다. 하지만 그런 논리는 불순종 때문에 기도응답을 받지 못하는 데도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느끼게 함으로써 기도하는 자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교묘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려면 다음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 반드시 하나님이 뜻대로 기도해야 한다. 둘째, 반드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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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선지자의 길/ 서창원 목사

      오늘의 한국교회 현실을 바라볼 때 이곳저곳에서 자성의 소리가 많이 있으나 정작 나아지고 있다는 것보다 솔직히 더 악화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절망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 7천인을 남겨두시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물론 소돔과 고모라처럼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곳에 모인 여러분들 중 상당수는 사람들이 알아주던 그렇지 않든지 묵묵히 주님의 진리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자들이라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본 연구원과 같은 기관이나 하나님의 숨겨두신 일군들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여전히 이 시대의 소망의 빛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참 선지자의 길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목회자는 많아도 참 설교자가 없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면서 제사장에 가까운 목회자보다 선지자에 가까운 설교자의 길을 생각해보며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는 깨우침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신약성경에 근거해 보면 목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장 직임보다 선지자 직임에 더 가까운 직분이다. 제사장 기능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선지자적 기능이 더 요구된다는 말이다.

      부활 이후에 베드로를 만나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시고 사랑한다는 대답을 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명령하셨다(요 21:15-17).

      먹이고 치는 일은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을 제외하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사도들은 다 설교자들이었고 선지자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역할을 감안할 때 설교자의 범주에 속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제사장과 선지자는 다 주님의 일군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역할은 분명 차이가 있다.

      구약에서 제사장은 세습제였다. 그리고 특별한 지파 사람들이어야 했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렇지 않았다. 찾아보지는 못했지만 아버지의 대를 이어 선지자가 된 자들도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대체로 다양한 지파에서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선지자가 되었다. 즉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선지자가 된 것이지, 부모로부터 계승된 것이 아니었다. 제사장은 성전과 성막 주변에 머물며 주로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희생 제사를 집전하는 자들이었다. 그들도 가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도 했다(에스라 7:12, 미 3;11, 말 2:7 etc), 그러나 주된 직임은 제사드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선지자는 성막이나 성전이 주거지가 아니었고 광야나 들판이었다. 제사장은 늘 제물을 다루었기 때문에 먹을 것이 풍부했고 창고가 비어있을 틈이 없었지만 선지자는 굶주리는 일이 더 많았다. 까마귀가 날라다 주는 것이 없으면 먹지 못하였다.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의 특별한 공궤가 없이는 힘든 세월을 보내야 했다(아합왕 때 오바댜가 선지자 100명을 숨겨주고 먹임).

      그들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지냈다. 제사장은 사람들에게 인기 만점이었다. 왜냐하면 무슨 죄를 지어도 책망하기보다는 사랑으로 제사를 드려주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선지자는 백성들의 죄악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기피대상으로 삼았다.

      오늘날에도 제사장적 목회를 잘하는 목사들은 인기가 좋다. 그러나 선지자적 기능에 더 치중하는 목사들은 인기가 없고, 있다 하더라도 주목받을 만한 것이 못된다. 자립교회이든 개척교회이든 목사도 인간이기 때문에 세상의 화려한 조명을 받고자 하는 욕망이 없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주의 종이 된 자들로서 사람들 편이어야 하는지 아니면 불러 주신 주님의 편이어야 하는지 답은 간단하지만 우리들의 행위는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아합 왕 시대의 이스라엘은 마치 중세 시대의 암흑기와 같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다. 이스라엘 역대 왕 중 가장 사악한 왕이었고 더욱이 시돈 사람 이세벨이라는 이방여인이 왕비가 되어 아합이 22년 동안 사마리아에서 통치하는 동안 그 전의 모든 사람들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더욱 악을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을 섬기게 하였다. 그는 그 전의 모든 이스라엘의 왕보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심히 격발시킨 왕임을 열왕기상 16장 29절 이하에서 기록하고 있다.

      아합의 통치하던 시기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싸워 멋지게 승리한 사건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 때 엘리야는 자기 혼자만 남았다고 하나님께 고하며 이세벨을 피하여 도망치던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7천명의 사람들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사실 엘리야는 궁내대신 오바댜를 만났다. 그로부터 여호와의 선지자 백 명을 몰래 굴에 숨겨두고 떡과 물로 먹인 사실을 들었다. 고로 바알에게 절하지 않고 입맞추지 않은 자들이 어느 정도 있었으리라고 짐작을 했을텐데도 그는 자기 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만나지는 아합왕 측근의 사람들인 400명의 선지자와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선지자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합 왕 시대, 그것도 가장 여호와의 진노를 많이 불러일으키고 있는 악한 왕 시대에 선지자들이 왕성하게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합 왕은 길르앗 라못을 점령하기 위하여 자식들의 혼인관계를 통하여 인척관계를 맺은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연합전선을 펼치고자 했다.

      나는 여호사밧이 왜 사악한 왕 아합과 인척관계를 맺게 되었는지 잘 이해가 안된다. 그러나 그 원인을 추측해 볼 수는 있다. 우리가 본문에서 읽은 것처럼 여호사밧은 부귀와 영광이 극하였다고 했다.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준 것은 그가 그 조상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여 바알에게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 구하며 그 계명을 행하고 북쪽 이스라엘의 행위를 좇지 아니하였기 때문이었다(대하 17:3-5).

      그는 여호와의 도를 행하였고 왕 위에 오른지 3년에 유다 전 지역에 지도자들을 보내어서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쳐 지키게 하였다(대하 17:9). 온 나라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하게 무장시키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18장에 오면 아합 왕과 연혼하였다고 하였다. 정략결혼을 시킨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것 때문에 자신이 죽고 나서 자기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었을 때 8년 밖에 통치하지 못하고 여호와의 심판을 받았는데 그 이유가 아합 왕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것 때문이었다. 그 결혼 때문에 여호람은 부친의 길로 가지 못하고 아합 왕의 길로 갔고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샀던 것이다. 나는 여호사밧이 아합의 여식을 며느리로 삼은 원인을 그의 영적 교만함 때문이라고 본다.

      오늘날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자기는 너무나도 확고하게 개혁주의 정통 보수 신학에 충실히 지켜오고 있다. 온 나라가 다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배웠고 그 말씀대로 우상을 멀리하고 참 하나님만을 섬기고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넘치도록 복을 주셨고 그 결과 부와 영화가 극에 달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제 어떤 악한 것이 있더라도 유다는 능히 악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진리 편에 우뚝 서 있을 것이라는 자만심이 들었을 것이다. 설혹 이방신을 섬기는 여자를 며느리로 맞이한다고 하더라도 기독교로 개종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요즘 우리 교단의 중진 목회자들 가운데 타 교단과의 연합 활동이나 강단 교류등을 언급하면서 합동측이 다른 교단의 영향을 받지 않고 능히 우리들의 신학적 기조를 지킬 수 있는 역량은 충분히 되어 있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과 연합사업을 해도 신학적으로 흔들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자. 옛날 박형룡 박사나 박윤선 박사 같은 분들이 있을 때는 보수 신앙을 충분히 지킬만한 역량이 되지 못하여 에큐메니칼 운동에 그토록 예리한 칼을 세웠었는가? 아니다. 도리어 그 분들이 계셨을 때는 악한 것들을 능히 대적할 수 있는 힘이 충분했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연합활동을 하지 않은 것은 적은 누룩이 온 떡 덩이를 부패시킬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이었다고 본다.

      개혁주의 신학을 지키려고 몸부림 친 그런 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보수 교단이 놀랍게 성장해 왔다. 그러나 지금 개혁주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을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우리 보수 교단을 보라. 교단의 장벽을 뛰어넘는 다양한 활동들 때문에, 그리고 하나라는 이름 때문에 만들어진 통일 찬송가 때문에 영적인 상태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다.

      여호사밧 왕을 보라. 그처럼 철저하게 온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르게 가르친 왕이 어디에 있었는가? 적어도 온 나라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든든하게 세워지고 있으니 불신자 며느리 하나 들어온다고 해서 무슨 재앙이 미치랴, 우리가 능히 신앙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 있게 아합 왕의 여식을 며느리로 맞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2년의 세월이 흘렀다. 아합 왕이 제안을 한다. 사돈이 된 아합 왕은 여호사밧과 그의 시종들을 위하여 소와 양을 많이 잡아 푸짐한 대접을 한다. 과거에나 지금이나 식사대접이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는 방편으로 변함없이 통하고 있음을 본다.

      여호사밧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함께 하지 않는 것이 복있는 자의 길임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합은 잘 대접을 한 후에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 아람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는 길르앗 라못을 침략하려고 하는데 함께 연합 전선을 펴자는 것이었다. 그러자 18:3절에서 여호사밧이 즉시 대답한다: “나는 당신과 일반이요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일반이니 당신과 함께 싸우리이다.”

      영적인 교만이 찾아오면 기도도 하지 않는다.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대체적으로 안다는 생각을 한다. 여느 때 같으면 그는 충분히 기도한 후에 답변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지금 입부터 열었다. 그리고 악한 자들과 우리는 하나라고 주저 없이 대답을 했다. 그러고 나서 조금 껄끄러운 것이 있었는지 그는 아합에게 청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한지 물어보자고 했다.

      그래서 선지자 400인을 모아 전쟁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묻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같이 다 전쟁을 하라고 한다. 무엇이 이상했는지 여호사밧은 물을만한 여호와의 다른 선지자가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합왕이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를 소개한다. 그러면서 그는 미가야가 자기에게 대하여는 길한 것은 하나도 말하지 않고 항상 흉한 것만 예언하기 때문에 자기가 미워하는 선지자라고 했다.

      그러지 말고 그도 청하여 그의 말을 들어보자는 여호사밧의 요구에 아합 왕은 내시를 보내 미가야를 데리고 온다. 데리려 간 내시는 미가야에게 선지자들의 말이 다 왕에게 길하게 예언하니 당신도 저희들 중 한 사람처럼 좋게 말하라고 당부한다. 그 때 미가야 선지자가 13절에서 모든 주의 종들이 명심해야 할 핵심을 말한다.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선지자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명을 맞서 싸워야 했다면 미가야는 동일한 여호와의 선지자 400명과 맞서야 했다. 지금 주님의 참 선지자들이 가야 할 길은 불교 세력이나 이슬람권, 또는 무속신앙인들과의 싸움이 문제가 아니다. 같은 성경을 말하고 같은 하나님을 말하며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는 자들과의 싸움이 어마 어마하게 어려운 문제이다.

      자유주의 신학과 복음주의 신학, 인본주의와 세속주의, 심리학과 경영학 등 다방면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교회내의 세력들과 전쟁이 우리의 마음을 더욱 괴롭게 하는 것이다. 더욱이 미가야가 맞선 400명은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 선지자가 말하고 있듯이 철로 뿔을 만들어 가지고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라고 했다고 예언하였다. 즉 하나같이 다 아합 왕의 마음에 흡족한 예언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예언을 듣는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믿을 만한 증거물도 제시한 것이다.

      오늘날 대다수의 목사들도 실적으로, 성공사례로 자신들이 가고 있는 길이 주님이 원하는 길임을 늘 설파한다. 한국민족의 복음화를 위해서 세상 사람들도 탄복할만한 기발한 아이디어를 산출한다. 그리고 별 성장도 없고 활력도 없이 보이는 개혁교회는 이제 수명이 다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저급한 교회 성장론을 앞세우고 개혁교회를 위협하고 있다. 소위 대형교회로 맹위를 떨치고 있는 몇몇 목사들은 개혁주의가 무엇이냐고 하면서 신학생 때부터 개혁주의로 부흥한 교회가 없다는 사실에 깊이 절망하고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여 오늘날 대형교회를 이루었다고 자신의 목회 역량을 자랑한다.

      문학평론가요 연세대 교수로 봉직했던 뛰어난 문필가인 유종호 교수가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포기한 이 시대의 문학적 흐름을 비판한 글에서 글로벌 시대의 귀염둥이요 37개 언어로 번역되었다는 무라카에 하루키를 비롯한 외국의 베스트 셀러 작가들을 지목하며 이렇게 말했다(동아일보 08년 8월 25일자): ‘그들은 팝 음악의 문학적등가물 생산자이고 소비자 우위시대의 시간 소비용 소일거리 제공자일 뿐이다.’

      오늘날 인기영합주의에 편승한 일부 목사들, 기독교 출판시장에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내고 있는 저자들의 활동에 대하여 유종호 교수의 ‘소비자 우위 시대의 시간 소비용 소일거리 제공자’라는 비판을 그대로 적용해도 틀리지 않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 중심과 계시 중심의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발전시켜 가기보다 소비자가 왕으로 추대되고 있는 세상의 흐름에 영합하여 회중 중심의 종교적 전문가의 광대 노름에 만족하고 있다.

      아합 왕 밑에서 선지자 노릇하고 있는 400명의 다수들, 그들은 왕이 주는 녹을 받아 챙기며 편안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반면에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만을 전하는 것 때문에 언제나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마셔야만 했던 것이다.

      결국 여호사밧은 전쟁에 나갔다가 큰 낭패를 겪고 고국으로 돌아온다. 돌아오는 그를 맞이한 유다의 선지자 예후가 나와 말하기를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 라고 책망하였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왕에게 임할 것이라고 했다. 결국 그의 아들 때에 피바람이 부는 사건들이 터지고 얼마 못가 아들도 죽임을 당하는 화를 심게 된 것이다.

      오늘날 개혁교회가 세속의 부와 영화를 꿈꾸어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만 전파하는 것이 된다면 지금까지 쌓아온 업적으로 인해 혹 우리 시대에는 큰 문제가 없을지라도 우리가 심어놓은 세속주의 인본주의 씨앗이 자라 우리 후손들의 교회는 망하게 될 날이 올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목사는 미가야가 말한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만을 말해야 한다. 동료들로부터 따귀를 얻어맞을지라도 주님이 말씀하신 것만을 전한다는 사명감에 충실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부름을 받은 여호와의 선지자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지적하고 있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선지자의 미친 짓을 금지하게 된 장본인 발람 선지자조차도(벧후 2:15-16) 민수기 22장에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발락의 요청에 이렇게 답변하였다: “하나님이 내 입에 주시는 말씀 그것을 말할 뿐이니이다”(민 22:38).

      설교자로서 목사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만을 선포하는 자라야 한다. 기록된 말씀 밖을 넘어가면 안된다. 하나님이 말씀하라고 주신 영감 된 신구약성경을 자세히 풀어 증거하는 자라야 한다. 하나님의 전 경륜을 설파해야 한다. 소비자들이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소비자들이 반드시 들어야 할 말씀을 전파하는 자여야 한다.

      우리들의 안위가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우선이다. 우리들의 명예가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는 것이다.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즉결처분을 받은 후에 주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레 10:3).

      기록된 말씀에 충실하게 증거할 때 우리 가운데서 주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신다. 말씀에 위배되는 일들을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망령된 언사들을 하지 말아야 한다. 사실 오늘의 본문 역대하 18장에서 아합 왕 밑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400명의 선지자들이 알지 못한 것은 그들에게 임한 거짓말 하는 영이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거짓말하는 영은 사단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사단이 거짓의 아비이지만 하나님 보좌 좌우에 서서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들 중 하나가 아합 왕을 꾀어 죽게 하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그 방법이 스스로가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아합의 가려운 귀를 긁어주기에 충실한 선지자들에게 임하겠다고 했다. 혹 그들처럼 우리들의 안위와 영화를 위해서 소비자 우위시대에 소비자의 심심풀이를 해결해주고자 하는 시간소비용 소일거리 종교의식에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원래 사기는 무지와 탐욕이라는 두 가지 바퀴 때문에 지금까지 굴러간다.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지 못하는 무지와 그리고 ‘오직 성공’이라는 목회적 탐욕에 이끌려 계시된 말씀과는 상관없이 진리에서 멀어지게 하는 거짓교사들이 되어가고 있지 않는지 심히 우려스럽다.

      베드로는 발람과 같은 선지자들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저희를 위하여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나니”(벧후 2:17). 거짓 교사들의 최후는 멸망의 종들이 가는 길과 동일한 곳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설교자로서 참 선지자로서 우리가 가야할 올바른 사명은 무엇인가? 나는 존 오웬의 작품에서 그가 설파한 11가지 목사의 사명을 소개하며 말씀을 맺고자 한다.

       

      목사의 역할은 개개인 성도들의 영적 삶의 경험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직임이다. 목사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먹이고 다스리는 자이다(벧전 5:3). 그 일을 함에 있어서 사랑과 돌봄 및 온유함으로 감당해야 한다. 목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들을 수행하도록 외형적으로는 교회의 부름을 받는다. 그러므로 목사는 그의 임무 수행에 있어서 필요한 영적 은사들을 소유하고 있어야만 한다.

      열정과 기도의 사람, 양들을 위한 지속적인 관심을 지닌 자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정을 소유하고 있어야 하며 그 모든 일에 있어서 남다른 자라야 한다. 목사직을 수행함에 있어서 목사는 대 목자장이신 그리스도의 성품과 자질을 반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모든 직임은 교회의 질서와 통치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수여하신 일이다. 그리스도의 권위를 드러내는 일이어야 한다.

      출처: 개혁주의 마을


      Razaq Vance의 집으로(Take Me Home)라는 작품집에 나오는 작품들입니다.
      아름다운 풍경이 가슴속을 적시고, 돌아 온다는 의미가 주는
      느낌을 새롭게 느껴보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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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ke Me Home  /  Phil Coulter  

        





      성경의 거인들과 현대의 거인 발자국 논란

      박재권 / 캐나다 주재 기자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스와질랜드 경계에 위치한 음팔루지 마을 부근 화강암에 찍힌 발자국이 거인의 존재에 대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스와질랜드 경계에 위치한 음팔루지 마을 부근 화강암에 찍힌 발자국이 거인의 존재에 대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가끔씩 거인들에 대한 기사가 인터넷에 등장하곤 한다. 그럴듯하게 사진도 합성해서 사람들을 속이곤 하는데 분별력 없는 사람들은 영락없이 속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들이 알려지면서 그런 합성 사진 때문에 실재했던 거인들에 대한 성경적 진실을 거짓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더 늘어나게 되었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를 통해 전파되고 있는 거인에 대한 한 사진에 따르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저술가이자 음악가인 마이클 텔링거가 “신의 발자국”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면서 해당 영상을 공개했다고 한다. 언론에 따르면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스와질랜드 경계에 위치한 음팔루지 마을 부근에 있는 발자국의 크기는 1.2미터가 넘으며 화강암에 찍혀 있다고 알려졌다. 이 발자국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12년으로 한 사냥꾼이 우연히 발견했다고 알려졌다. 이를 접한 해외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단순한 침식 작용의 결과를 놓고 거인 또는 신의 발자국이라 주장하는 것은 과대망상이라는 비판도 제기되는 한편, 거인의 발자국을 접하니 신비스럽고 경외감을 느낀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전해졌다.”고 한다.


      성경에는 거인들의 존재들을 분명히 말씀하시고 그들의 이름들도 등장하고 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창세기 6:1-6에 등장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당시 자신들의 위치를 떠나 멋대로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렸던 천사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합해서 낳은 존재들, 즉 거인들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한 존재들의 자손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홍수로 인해 다 멸망하였지만 홍수 후에도 다시 나타나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인 유대인들을 괴롭혔다. 『그 당시에 땅에는 거인들이 있었고, 그 후에도 있었으니, 즉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들어와서 그녀들이 그들에게 자식들을 낳았을 때며, 그들은 옛날의 용사들로 유명한 사람들이 되었더라』(창 6:4). 거인들은 노아 홍수 당시뿐만 아니라 노아 홍수 이후에도 역사상 실제로 계속 존재했고(민 13:33, 수 17:15), 그들의 이름도 여러 가지로 불렸다. 성경에 등장하는 그들은 삼숨인(신 2:20), 엠인(창 14:5, 신 2:10,11), 아낙인(신 1:28; 2:10,11,21; 9:2, 수 11:22; 14:12,15), 르파인(창 14:5; 15:20), 수스인(창 14:5)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물론 지금도 가끔씩 거인들이 태어나긴 하지만 그들처럼 그렇게 크지도 않을뿐더러 많지도 않은 편이다. 오늘날의 거인들이 어떤 경로로 태어나는지는 몰라도 존재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스와질랜드 경계에 위치한 음팔루지 마을 부근에서 발견된 발자국이 정말로 사람의 발자국이 맞다면 대단히 큰 거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거인의 발자국을 “신의 발자국”이라고 했다는데 성경에서도 타락한 천사들에 대해서 “신들”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거인들(giants)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피림”은 “타락한 자들”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개역성경은 거인들을 그냥 네피림으로 음역함으로써 창세기 6장의 거인들의 실체를 가려 버렸다). 어느 시대, 어느 민족, 어느 종족의 문명에도 “신들”에 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고, 오늘날 현대인들이 만들어 내는 창작물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과거 역사에 실존했던 인물들을 근거로 해서 만들어낸 것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용사들의 회중 가운데 서 계시며 그는 신들 가운데서 판단하시는도다』(시 82:1).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너희 모두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손들이라. 그러나 너희가 사람들처럼 죽게 될 것이며 통치자들 중의 하나같이 쓰러지리라.” 하였도다』(시 82:6,7). 시편에서 말한 이 “신들”이라는 존재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부르는 신, 즉 이방 신들이 아니고, 사람들은 더더욱 아니다. 이들, 즉 “죄를 지은 천사들”은 이 땅에 내려와 어디선가 피를 얻어서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아 관계를 맺은 것이고, 그 결과 사람과 같은 육체로 변하자 외계와의 “통신” 능력을 상실해 버린 돌연변이 종류들이 된 것이다. 그들은 대홍수가 나자 사람들처럼 익사해 버렸고, 그들의 영은 현재 백보좌 심판을 기다리면서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다(벧전 3:19,20, 벧후 2:4). [자세한 내용은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창세기>를 참고하라.]


      자신의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지구를 방문했던 “죄를 지은 천사들”은 다시 외계로부터 이 땅에 내려와서 사람들로부터(어쩌면 동물들로부터) 피를 얻어 창세기 6장에서 행했던 일들을 되풀이 하다가 결국은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다. 해 아래 새 것은 없다고 했다. 사람들은 그들의 정체를 가리기 위해서 미리서 이처럼 각종 언론과 만화영화 등을 통해서 재미있는 이야깃거리 정도로 만들어 버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들의 처음 지위를 떠나 이 땅에 내려와서 사람의 딸들과 결합해서 그들의 자손인 “거인들”을 태어나게 해서 죄를 확산시키고 있을 때 엄청난 대홍수로 그들을 수장시켜버리셨던 것처럼 앞으로 때가 되면 사탄의 어떠한 흉악한 계략도 불로써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현재 있는 하늘들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보존되어 있으되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에 불사르려고 간수되어진 것이니라』(벧후 3:7). 이처럼 성경에 따르면 현재 있는 땅은 맹렬한 심판이 있을 그날을 위하여 한시적으로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주의 약속은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나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들이 굉장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우주의 구성 요소들이 맹렬한 불로 녹아내리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이 타버릴 것이라』(벧후 3: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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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 속 거인들을 가려 버린 사진 합성기술

      박재권 / 캐나다 주재 기자     

      성경에는 거인들의 실제로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기록들이 다수 발견된다. 이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 최근 한 일러스트레이터의 컴퓨터 합성사진 유출로 말미암아 불신자들의 불신에 불을 지피고 있다. <그림은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 성경에는 거인들의 실제로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기록들이 다수 발견된다. 이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 최근 한 일러스트레이터의 컴퓨터 합성사진 유출로 말미암아 불신자들의 불신에 불을 지피고 있다. <그림은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원래 통화와 관련되어 설명되는데 나쁜 통화와 좋은 통화가 경제사회에 동시에 유통될 경우 주도권을 쥐고 경제의 흐름을 바꾸는 통화는 나쁜 통화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나쁜 돈이 좋은 돈을 몰아낸다.” 또는 “가짜 돈이 멀쩡한 돈을 쫓아낸다.”는 뜻으로 쓰인다는 것이다. 영적인 측면에서는 악한 세력이 건전한 진리를 변개시키고 그 자리를 꿰찬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이러한 일들은 갈수록 악해지는 이 세상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들이다.


      성경은 분명히 그 옛날 이 땅에 거인들이 살았다고 증거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을 거부하는 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믿지도 않으며, 설령 그 증거가 나오더라도 조작이라며 억지를 부리는 상황이다. 그 중에는 오늘날 컴퓨터로 사진을 합성하는 기술이 발달해 각종 사진들을 합성 조작해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어 성경 속의 진실도 그러한 사기수법에 휘말려 들어가 희석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들의 수법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한 언론에 “내셔널 지오그래픽 인도 지부가 거대한 인간 유골을 발견했다. 발굴 작업은 인도 군대가 지원했으며 해당 지역을 군이 통제하고 있다.”는 설명과 함께 올려진 거대한 유골 발굴사진이 이메일과 블로그와 게시판 등을 통해 전 세계 인터넷 매체들을 통해 엄청나게 퍼져나갔으며, 일부 공신력 있는 언론에까지 소개되기도 해서 인터넷 상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진은 합성된 사진이라는 사실이 밝혀짐으로 많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언론에 따르면 “발굴자(?)로 지목된 내셔널지오그래픽 뉴스는 18일 이 합성 사진의 제작 비하인드 스토리를 소개했다. 문제의 사진을 합성한 이는 캐나다 출신 일러스트레이터. 그의 본명은 공개되지 않았다. ‘아이언카이트(ironkite)’라는 인터넷 닉네임만 알려졌을 뿐이다. 그는 2002년 거인 유골 발굴 사진을 합성해냈다. 실제 동물 유골 발굴 사진 등 3장을 정교하게 합성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 아이언카이트는 이 합성 사진의 파장을 상상도 못했다. 자신의 ‘작품’이 전 세계 인터넷에 유포되고, 유사한 거인 발굴 사진과 호박 속의 태아 사진 등 후속 합성 사진이 만들어질 것으로 짐작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낳은 전 세계적 파장을 보며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고 한다.


      상황이 이렇게 됨으로 인해 컴퓨터 기술이 등장하기 이전에 찍은 거인들에 대한 진품 사진까지도 의심을 받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특별한 거인들은 없었다고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혼란의 창시자인 마귀가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명백한 사실들을 가리기 위해서 갖가지 방법들을 동원해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진리에 대해 의심을 품게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 6장에는 거인들에 대한 정보가 등장한다. 『그 당시에 땅에는 거인들이 있었고, 그 후에도 있었으니, 즉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들어와서 그녀들이 그들에게 자식들을 낳았을 때며, 그들은 옛날의 용사들로 유명한 사람들이 되었더라』(창 6:4). 그런데 그 거인들은 오늘날 일반 사람들보다 키가 조금 더 큰 그런 거인들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존재들이었다. 성경은 그 존재들을 탄생시킨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었다고 말씀하신다. 이들 하나님의 아들들의 신원은 욥기에 등장하는데 그들은 인간이 아닌 영적 존재들이다. 그래서 그 영적 존재인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탄과 함께 나란히 하나님의 면전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주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 왔더라』(욥 1:6).


      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존재들은 구약성경에 딱 6번 등장하는데 호세아 1:10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스라엘)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다 천상의 존재들이다(창 6:2, 창 6:4, 욥 1:6, 욥 2:1, 욥 38:7). 더러는 이 하나님의 아들들을 경건한 셋 계통의 아들들이라고 주장하는데 위의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음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은 모두 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을 지칭한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한 사람도 없었음을 감안할 때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만 민족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림을 받는다. 『너는 파라오에게 말하기를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요, 내 첫태생이니라』(출 4:22). 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있을 이스라엘의 영구적인 회복과 관련하여서는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같이 되어서 측정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게 되리라. 전에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했던 그곳에서 그들에게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말하리라.』(호 1:10)고 말씀한다.


      이와 달리 구약의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존재들을 성경은 타락한 천사들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처음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람의 딸들에게 들어와 불법을 저지른 자들이며 주님은 그들을 심판 때까지 흑암의 사슬에 묶어 지옥에 가두어 두셨다. 『또 자기들의 처음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주께서 영원한 사슬로 묶어 큰 날의 심판 때까지 흑암 속에 가두어 두셨느니라』(유 1:6).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천사들조차 아끼지 않으시고 지옥에 던져서 흑암의 사슬에 내어주어 심판 때까지 가두어 두셨으며』(벧후 2:4). 이 하나님의 아들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 땅에 내려와 불법을 행했는데 그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신들이 택한 자들을 닥치는 대로 아내로 삼아 버렸던 것이다. 『사람들이 지면에서 번성하기 시작하고 딸들이 그들에게서 태어났을 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그들이 택한 모든 자를 아내들로 삼으니라』(창 6:1,2). 그리하여 그들에게서 태어난 존재들이 바로 “거인들”이 된 것이다. 『그 당시에 땅에는 거인들이 있었고, 그 후에도 있었으니, 즉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들어와서 그녀들이 그들에게 자식들을 낳았을 때며, 그들은 옛날의 용사들로 유명한 사람들이 되었더라』(창 6:4).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학자들이나 목사들은 그 거인들에 대해서 한결같이 경건한 셋 계열의 아들들(하나님의 아들들)과 불경건한 카인의 계열의 딸들(사람의 딸들)이 결혼해서 생긴 자손들이라고 우긴다. 그러나 경건한 집안과 불경건한 집안이 결혼한다고 해서 거인이 태어날 확률은 전무하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구약에서는 천상의 존재를 제외하고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만을 하나님의 아들로 불렀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창세기 6장에는 아직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태동도 되지 않았기에 그 하나님의 아들들은 분명 사람이 아니라 천상의 존재들이다. 한글개역성경은 그들에게서 나온 거인들을 거인들로 번역하지 않고 “네피림”으로 기록함으로써 거인들의 존재에 대해 명확하게 알 수 없도록 만들고 말았다.


      땅에 내려온 천사들은 늘 남성으로 나타났고 생식할 수 있는 남성으로 나타났다. 바로 그들이 낳은 거인들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성경은 그 이름까지 분명히 밝히고 있다. 『거인들 중에 남은 자로는 바산 왕 옥만 남았으니, 보라, 그의 침상은 철로 만든 침상이라. 그것이 암몬 자손의 랍밧에 있지 않느냐? 그것은 사람의 큐빗으로 재면 그 길이가 아홉 큐빗이고 그 너비는 네 큐빗이라』(신 3:11).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도 그 유명한 거인 골리앗에 대해서만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때 필리스티아인들의 진영에서 최고 투사가 나왔으니, 그의 이름은 골리앗으로 가드인이며, 그의 신장은 여섯 큐빗과 한 뼘이더라』(삼상 17:4). 이 골리앗에게는 아우도 있었다. 『또 곱에서 필리스티아인들과 다시 전쟁이 있었는데, 베들레헴인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인 골리앗의 아우를 죽였으니, 그의 창자루는 베틀채 같았더라』(삼하 21:19). 그리고 성경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카나안 땅을 정복하는 과정에 나타난 거인들도 기록되어 있다. 『또 우리가 거기서 거인들을 보았는데, 거인들에게서 태어난 아낙 자손들이라. 우리들의 눈에도 우리가 메뚜기들 같았으며 그들의 눈에도 우리가 그와 같았을 것이라』(민수기 13:33). 『그들 역시 아낙인들처럼 거인들로 여겨졌으나 모압인들은 그들을 엠인들이라 불렀으며』(신 2:11). 『그곳도 거인들의 땅으로 여겨졌으니 옛날에 거인들이 그곳에 거하였으며 암몬인들은 그들을 삼숨인들이라 부르니라』(신 2:20).


      성경은 이처럼 거인들에 대해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도, 인간들은 컴퓨터를 이용해 합성사진을 만들어 진위를 판가름할 수 없도록 장난질을 함으로써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에 속아 “컴퓨터로 합성한 사진이 아니었냐”며 성경에 등장하는 거인들에 대해 믿으려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전에는 전설이나 각종 설화 등을 통해서 어렴풋이나마 믿었으나 이제는 그것마저도 믿지 않으려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참으로 마귀는 다양한 방법으로 성경의 진리를 가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온갖 거짓과 속임수를 옷 입은 기술이 난무하는 세상을 보지 않고 성경만을 볼 때 진리가 무엇이며 인류 역사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런 것을 미리 알았으니 악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자신의 견고한 입장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라』(벧후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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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과 흑암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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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총 보수 교단들조차 외면…고신도 ‘한기총 탈퇴’ 결
       
      김민정(atcenjin@newsmission.com) l 등록일: 2013-12-27 
       
       
      한기총의 막장 행보가 보수 교단들의 잇따른 탈퇴로 이어지며 거센 후폭풍을 맞고 있다. 예장합동에 이어 예장고신도 최근 임원회를 열고 한기총 탈퇴를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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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7일 박윤식 목사 이단 해제를 결의했던 한기총 실행위원회 모습ⓒ뉴스미션

       
      예장합동에 이어 예장고신도 탈퇴 결의

      한국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홍재철 목사)가 이단 해제도 모자라 대표회장 연임안 졸속 처리로 논란의 중심에 선 가운데 보수 교단들의 잇따른 탈퇴 선언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장 주준태 목사) 총회 임원회는 26일 회의를 열고 한기총 탈퇴를 결의했다. 예장합동(총회장 안명환 목사)에 이어 한기총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해 줬던 보수 교단들이 줄줄이 한기총에 등을 돌린 것이다.

      고신은 지난 2011년과 2012년 총회에서 한기총 탈퇴를 유보하며, 한기총 쇄신에 무게를 두는 쪽을 택해 왔다. 그러나 최근 무분별한 이단 해제와 함께 절차를 무시한 졸속 총회로 대표회장 연임안을 통과시킨 것이 교단의 신뢰를 저버린 결정적 계기가 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구자우 사무총장은 “2년 동안 한기총 탈퇴를 유보했지만 큰 변화를 발견할 수 없었다”며 “이번 총회 진행 과정도 그렇고, 이단과의 문제도 선명하지 않고 오히려 합리화시키려는 움직임이 우리 교단의 가치관과 같이 갈 수 없다고 판단해 탈퇴를 결의했다”고 밝혔다.

      예장합동 임원회가 한기총 탈퇴를 결의하자마자 홍재철 대표회장이 ‘합동 교단 탈퇴’를 선언하며 맞불을 놓긴 했지만, 대표적 보수 교단들이 떠나버린 상황에서 한기총이 연합기관으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지는 회의적인 분위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재철 대표회장은 26일 열린 총회에서 대표회장 연임에 도전할 것과 한교연과의 통합을 추진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밝힌 바 있다. 고신 임원회의 이번 결의가 한기총의 행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귀추가 주목된다.
          출처: 세이연
        원진살(怨嗔煞)이 뭐예요?

        서재생

        원진살(怨嗔煞)이 뭐예요?

         DJDOC의 맴버인 가수 이xx은 지난2013년 11월 21일 방송된 KBS 2TV '해피투게더3'에 출연해 여자친구와 궁합을 보러갔는데 원진살이 끼어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방송에서 밝혔습니다. 이어 "나도 원진살(怨嗔煞)이 정확히 뭔지 잘 모르겠지만 둘이 그렇게 잘 맞는 것 같지는 않다"고 털어놨고, 원진살은 방송 후 실시간 인터넷 검색어 1위가 되기도 했고, 또한, 2013년 12월 16일 JTBC TV  ‘유자식 상팔자’ 방송에서 ‘우리 부모의 궁합은 잘 맞는다 VS 안 맞는다’라는 주제에서 탤런트 조xx는 “결혼을 앞두고 남편과의 궁합을 안 볼 수 없었는데, 궁합을 잘 본다는 어느 스님이 우리 부부에게 원진살(怨嗔煞)이 있다고 하셨다고 하는 방송을 보면서 결혼을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에게도 궁합(宮合)과 원진살(怨嗔煞)의 영향이 있을 것 같아 원진살에 대한 의미를 정리를 해보고 합니다.

        1,원진살(怨嗔煞)의 의미

        원진살(怨嗔煞)은 부부간의 궁합(宮合)시 가장 먼저 보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까닭도 없이 서로 미워하는 기운(氣運)이며 궁합에서 서로 꺼리는 살(煞)을 말합니다. 원진살(怨嗔煞)은 원망할 원(怨) 성낼 진(嗔) 죽일 살(煞)이니 원망하고 성내고 죽이는 흉살(凶煞)을 말하고 있고, 혹은 원진살(元嗔殺)이라고도 쓰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진살은 서로 미워하여 만나길 싫어하나 만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한국인에게 있어 흔히 "전생(前生)에 무슨 원한(怨恨)이 있었길래.." 이란 말을 자주하곤 합니다. 즉 원진살은 전생에서부터 맺어진 원한이 금세(今世)에지 이어짐을 말합니다. 원진살은 부부 사이에 이유 없이 미워하는 액운(厄運)을 뜻하는 말이 있고, 사주(四周)에서 부정(不正), 재앙(災殃), 이별(離別)을 관장하는 흉신(凶神)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진살이 있는 사람끼리는 결혼(結婚)이나 동업(同業)을 권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알려졌습니다. 그러므로 원진살은 불화(不和), 증오(憎惡), 고독(孤獨), 원망(怨望), 이별(離別) 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가수 이xx 언급한 원진살(元嗔煞)은 한국 전통문화에서 부부 사이에 이유 없이 서로 미워하는 액운(厄運)으로 이러한 원진살은 결혼을 앞둔 남녀에게는 가장 좋지 않은 궁합(宮合)이기 때문에, 원진살이 있는 사람끼리의 결혼은 권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알려졌습니다. 가수 이xx 방송으로 원진살 의미를 접한 네티즌들은 “나도 궁합 한 번 봐볼까?”, “ 원진살이란 새로운 단어를 알게 된 것 같다”, “ 원진살이 그렇구나”등의 다양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원진살(怨嗔煞)이외에도 12신살이 존재하는데 살(煞)에는, 겁살(劫煞), 재살(災煞), 천살(天煞), 지살(地煞), 년살(年煞), 월살(月煞), 망신살(亡身煞), 장성살(將星煞), 역마살(驛馬煞), 육해살(六害煞), 화개살(華蓋煞) 을 가리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출생(出生)과 동시에 살(煞)을 갖고 태어난다고 하는데, 살(煞) 때문에 인생이 좋아지지 않고 힘든 일이 생길 수 도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즉, 원진살에서 살(煞)'은 사람이나 물건 등을 해치는 독한 기운(氣運)을 일컫는 말입니다.

        2, 원진살(怨嗔煞)의 띠 궁합(宮合)의 종류와 풀이

        원진살이란 쉽게 말해 십이지(十二支)에 속한 동물끼리 만나게 되면, 서로가 서로를 헐뜯고 방해를 하게 되는 것이며, 서로에게 치명적(致命的)인 좋지 않은 작용을 하게 되어 원한(怨恨)을 사게 되므로 원진살(怨嗔煞)이라 하는 것입니다.  
         
        원질살(怨嗔煞)의 종류에는 자미(子未), 축오(丑午), 인유(寅酉), 묘신(卯申), 진해(辰亥), 사술(巳戌)이 있습니다. 즉, 원진살이란 부부사이에 까닭 없이 생기는 갈등으로서 암장에 합(合)이 있어 서로 떨어지지 못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끊임없이 자극을 하여 좋은 궁합(宮合)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는 것으로서, 쥐(子)는 양(未)의 머리에 뿔이 달린 것이 싫다고 하고, 소(丑)는 말(午)이 일을 안 하고 논다고 싫고, 호랑이(寅)는 닭(酉)의 부리가 뾰족하게 생긴 것이 싫다고, 싫어한다고, 띠의 원진(怨嗔) 풀이며, 다음과 같이 원진살 띠 궁합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1)자미(子未)의 원진, 쥐와 양 띠;-쥐는 양의 배설물을 꺼림.
        자미(子未)는 쥐(子)와 양(未) 띠를 말합니다. 쥐(子)는 양의 배설물을 가장 싫어하고, 즉, 양(未)의 배설물이 조금만 몸에 묻어도 몸이 썩어 들어가며 털이 다 빠져버려 꼴이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양(未)도 자신을 싫어하는 쥐(子)를 좋아 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쥐(子)는 자기 잘난 척을 잘하고, 쥐뿔도 없다고 양(未)을 놀리는 것이 있기 때문에 원진살이라고 합니다.  

        2)축오(丑午)의 원진인 소와 말 띠;-소는 말의 게으름을 싫어함
        축오(丑午)는 소(丑)와 말(午) 띠를 말합니다. 소와 말은 신경이 예민한 관계로 정신병이나 신경질환에 시달린다는 것, 소(丑)는 자신은 무척 부지런히 일을 열심히 하는데 비해 평상시의 말(午)을 가만히 서서 음식을 먹고 게으르기 때문에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오(丑午)는 소(丑)와 말(午) 띠로서 두 띠는 신경이 예민한 관계로 정신병이나 신경질환에 시달리고, 서로 미워하고 배척하니 신경이 예민해짐으로써 소와 말띠는 원진살이 있다고 합니다.

         3)인유(寅酉)의 원진인 범과 닭 띠;-범은 닭의 울음소리를 싫어함
        인유(寅酉)는 범(寅)과 닭(酉)띠를 말합니다. 호랑이(寅)는 닭(酉)이 우는소리를 무척 싫어하며, 서백(西白)의 흰빛을 띠는 닭을 두려워한다는 것. 장닭이훼를 길게 세번 이상 치고 꼬리를 흔들면 귀신(鬼神)과 호랑이도 민가에서 물러간다는 속설(俗說)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유(寅酉)는 호랑이(寅)와 닭(酉)띠로서 닭은 성품이 능글능글하고 호랑이는 새벽 닭 울음에 활동을 접고 산 속으로 들어가야 하니 호랑이(寅)는 닭(酉)이 미울 수밖에 없는 것으로 띠 궁합(宮合)으로 보면 원진살이 있다는 것입니다.
         
        4)묘신(卯申)의 원진인 토끼와 원숭이 띠;- 토끼는 원숭이의 궁둥이를 싫어함
        묘신(卯申)은 토끼(卯)와 원숭이(申)띠를 말합니다. 토끼(卯)는 자신의 눈과 원숭이 눈과 궁둥이가 빨간 색깔로 비슷해서 싫고, 원숭이는 토끼의 눈이 빨간 것이 자기 궁둥이 색깔과  같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원진살은 일명 대모살(大耗煞)이라 하고 십이지(十二支)에 속한 짐승끼리 서로 미워하는 관계를 설정한 원진(怨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묘신(卯申)인 토끼(卯)와 원숭이(申) 띠 궁합에서 서로 대화가 잘 통하지 못 하무로서 원진살이 있다고 봅니다.

          5)진해(辰亥)의 원진인 용과 돼지 띠;- 용은 돼지 면상의 코를 싫어함.
        진해(辰亥)는 용(辰)과 돼지(亥)띠를 말합니다. 용(辰)은 열 두 동물의 형태를 모두 형상화(形象化)한 동물인데, 다 잘 생긴 모습 중에 돼지(亥)의 코를 형상화한 것이 용(辰)의 코 있고, 용은 돼지만 보면 자기 코를 생각하고 못 견뎌 한다는 것, 즉, 용(辰)은 자기의 코가 돼지(亥)의 코를 닮아서 잘생긴 용모에 오점을 남겼으므로 돼지를 미워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진해(辰亥)은 용(辰)과 돼지(亥) 띠는 용의 코와 돼지의 코가 비슷하게 생겼고, 돼지는 용을 싫어하지 않지만 용(辰)은 돼지(亥)의 코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싫어하는 것, 때문에 원진살이 있다는 궁합입니다.

         6)사술(巳戌)의 원진인 뱀과 개 띠;- 뱀은 개 짖는 소리를 들으면 허물을 벗다 죽음
        사술(巳戌)은 뱀(巳)과 개(戌)띠를 말합니다. 뱀(巳)은 개(戌) 짖는 소리에 기절초풍을 하게 되고, 발정기 때의 개 짖는 소리는 산천초목(山川草木)을 울먹거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강한 쇳소리가 울려 퍼진고. 고막이 없는 뱀(巳)의 귀에 까지 울먹거리는 쇳소리에 놀라 뱀의 심장은 열에 부풀어 오르게 되고, 그리곤 허물을 미처 다 벗어 버리지 못하고 죽어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술(巳戌)인 뱀(巳)과 개(戌)띠 궁합에서는 자손을 얻기 힘들고, 개가 짖는 곳에는 뱀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뱀과 개띠는 원진살이 있다고 합니다.

        한국의 민간신앙(民間信仰)은 수많은 사람들을 헛된 속설(俗說)로 속여서 진리에서 떠나게 만들어 띠 동물숭배(動物崇拜)에 대한 의미와 상징도 세대를 거듭해 전승되어 오는 것이 교회(敎會) 안에서도 성도의 성격과 운명(運命), 궁합(宮合)을 예측하는 구습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민간신앙의 정체를 이해하면서 이 민족의 무속신앙(巫俗信仰)을 깨우치는 한국 기독교(基督敎)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원진살(怨嗔煞)이 기독교에 끼친 영향

        한국의 무속신앙(巫俗信仰)에 수 천년간 길들여진 우리 민족은 외부의 그 어떤 종교가 들어와도 배척하지를 않았습니다. 불교(佛敎)가 그랬고 유교(儒敎)가 그랬듯이 그 어떤 종교라도 이 땅에 들어와서 무속신앙과 어울려 자기들만의 독특한 형태의 종교(宗敎)를 만들어 갔던 것입니다. 기독교(基督敎)도 역시 이 땅에 들어오면서 전통(傳統)관습과 부딪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봅니다. 본 주제인 원진살도 기독교인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필자에게 부모님께서 교회에서 중직을 받고 있지만, 원진살이 끼였다고 결혼 반대한다는 상담을 받은 기억이 생생합니다.

        원진살(怨嗔煞,)은 한자로 원망할 원(怨)과 성낼 진(嗔)을 쓰며, 궁합을 볼 때, 서로 꺼리는 살(煞)로 근래에 나온 신살(身煞)입니다. 두 사람의 뜻이 맞지 않아 서로 불평하고, 원망하고, 화를 내게 되어 가정의 불화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는 나쁜 '살(煞)'을 의미합니다. 흔히 사주(四周) 및 궁합(宮合)을 볼 때 원진살과 관련된 얘기가 나옵니다. KBS 2TV‘'해피투게더3' 가수인 이xx 방송 후  원진살이 무엇인지, 실시간 인터넷 검색어 1위가 되었습니다.

        한국인의 정신문화(精神文化)에 있어 받아 전해 내려오는 형태는 무속신앙(巫俗信仰)에서 찾을 수 있는데, 무속신앙이 대중들 속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민간신앙(民間信仰)이라 생각하고 음지(陰地)에 있는 무속신앙이 아니라. 양지(陽地)에서 손쉽게 찾을 수 있도록 대중화 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영향이 기독교인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생각 합니다.

        한국교회의 신앙 의식 속에는 세속적인 것들로 잠식되어있음을 부인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실례로 작명(作名), 일진(日辰),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 사주(四周), 관상(觀相), 궁합(宮合), 절술(占術)을 보고 있는 현상입니다. 이러한 비 신앙적(信仰的)인 행위는 인본주의(人本主義) 사상이며, 미신행위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세속적(世俗的)인 풍습을 아무런 여과 없이 하나의 민속적(民俗的)인 전통이라는 사상으로 인식하며 수용하는 교인들이 있으니 슬픈 현실입니다. 인간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궁합(宮合)으로 인간의 미래를 점치는 것은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일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제는 미신적(迷信的)인 의식과 세속적(世俗的)인 풍습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은 철저히 하나님 말씀으로 무장하고, 성령으로 거듭난 자로서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철저한 개혁주의(改革主義) 신앙으로 무장하여 세속적(世俗的)인 의식구조(意識構造)와 비 신앙적(信仰的)인 무속신앙인 미신(迷信)의 행위를 배격하면서 사회변혁의 주도적인 임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또한 믿는 자에게는 철저한 기독교의 세계관(世界觀) 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안목과 기독교의 역사관(歷史觀)과 구원관이 요구됩니다.

        서재생목사(서울대현교회)



        성탄절에 대해서 




        성탄절을 보낸다는 것은 성자(聖子) 하나님께서 인성(人性)을 취하시어 이 세상에 구속사적(救贖史的)으로 임하신 일을 기념하는 일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들은 우리 주님께서 정확히 어느 날 이 세상에 태어나셨는지를 알지 못한다. 성경이 그 정보를 우리에게 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쳐주고 있는 것에 대해서만 100%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 다른 것들은 성경의 계시에 근거하여 합리적으로 추론해 가는 작업을 할 수 있고, 성경 계시의 빛에서 자연의 책을 바라보면서 바르게 해석하고, 또한 그로부터 바르게 추론하는 내용들이 바른 학문을 구성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탄절을 보내면서 우리 주님께서 이때 태어나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때에 우리 주님의 성탄을 기념하는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로마 교회가 태양신을 기념하던 이교적 절기에 태양이 신(神)이 아니고, 우리 주님이 하나님이시고 영적인 의미로 진정한 태양이시라는 것을 증언하면서 지키기 시작한 것이 크리스마스(Christ-mas)의 기원이 되었다. 그리스도에게 예배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크리스마스는 이교(異敎) 나라였던 로마에서 기독교가 토착화되는 과정에 생긴 절기이다. 이전에 태양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에는 더 이상 태양신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고, 자신들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하기 시작한 것이고, 그 날이 바로 크리스마스가 된 것이다.

         

        종교개혁시기 특히 청교도들은 이런 사실에 근거해서 천주교적 미신을 일소(一宵)하는 의미에서 성탄절을 절기로 지키지 않기도 했었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날에 어떤 적극적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청교도들의 이런 태도를 존중해야 한다. 성탄절은 바로 이 날 주께서 이 세상에 임하여 오셨기에 주님의 오심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는 것을 청교도들의 이런 태도로부터 잘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날에 잘못된 개념을 전혀 붙이지 않으면서 우리 주님의 탄생 사실 자체를 기념하는 일을 비판하거나 제거해야만 한다고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주께서 언제 탄생하셨는지 모르므로 우리 주님께서 12월 25이나 24일 저녁에 태어나셨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그러나 옛날부터 주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이 날에 우리 주님의 성육신을 깊이 있게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게 생각된 성탄절은 이 날 우리 주께서 탄생하셨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성육신의 사실을 이 날 생각하며 기념하는 날인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 주님의 성육신(成肉身)의 참된 의미를 바르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주님께서 성육신하여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리속죄(代理贖罪)의 죽음을 죽지 않으시면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정도이며, 이와 같이 심각한 죄 문제 때문에 주께서 성육신하셨다는 기독교의 본질적 사실을 성탄절에 즈음해서 깊이 있게 생각해야 한다. 이런 성육신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는 성탄절은 정말 무의미한 날이다.

         

        또한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런 기회를 사용하여서 자연스럽게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잘 알릴 수 있다면 그것은 이 날을 가장 의미 있게 보내는 것이 될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 진정한 의미 없이 이 절기를 보내는 데에 익숙해졌지만, 이 기회를 사용해서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를 잘 설명할 수 있다면, 또한 그런 주님이 과연 누구시며, 그가 무엇을 이루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지를 잘 드러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성탄절을 가장 의미 있게 보내는 일이 될 것이다. 


        베트남 같은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성탄절 즈음에 믿지 않는 이웃과 친구들을 교회당으로 초대해서 좋은 음악을 들려 주고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고 있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어떻게 이 기회를 사용하는 것이 최선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이왕 모든 사람들이 즐기고 있는 이 절기를 사용해서


        (1) 그리스도인들로서는 그리스도의 오심의 의미를 깊이 있게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고, 

        (2) 믿지 않는 분들에게 성탄의 참된 의미를 잘 전하는 기회로 삼으며 (그것을 위해 편지와 카드를 잘 사용해 보면 매우 유익할 것이다), 

        (3) 그리고 그리스도의 정신을 생각하면서 이 세상에 참 사랑을 표현하는 기회로 삼는다면 


        이 성탄의 절기가 사랑의 실천을 연습하는 좋은 기회로도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승구 교수/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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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erry Christma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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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救贖 經綸

        김정한

        이곳 사이트에 맞지 않는 글이면 글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저의 견해는 어디까지 사견인 것이고 얼마든지 다른 입장도 있을 것입니다. 아직까지 한번도 잠김을 당하지 않았기에 좀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좀 보완했습니다.

        하나님의 救贖 經綸
        지난번에 창조신학(신앙)이 바로 설 때 바른 구속사로 이어지고 바른 종말을 가질 때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된다고 하는 이야기에 이어서 올바른 구속사에 대한 필자의 소견을 말해보고 싶다. 얼마든지 다른 견해가 있을 것이다.

        창조신앙의 핵은 삼위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을 예수님의 파트너들로 삼기 위해 ‘다스릴 자’ 창조하셨다는 것에 있다.(창 1:26)

        그런데 이 과정을 알고 있었는지 혹은 모르고 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사단의 반역사건이 인간 창조 이전에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이런 반역으로 하늘나라에서 추방당한 사단마귀의 세력들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범죄자의 신분으로 전락시키고 지금까지 인간세상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알려주고 있다.

        이 사단마귀의 역사로 인해 사람들은 죄와 사망의 법에 놓이게 되었으며 이 법에서 해방과 자유를 주시기로 약속된 메시아인 예수그리스도의 출현을 구약의 이스라엘은 유월절 어린 양과 속죄의 대속 물들을 드림으로 기다렸고, 신약의 교회는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구속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기다렸던 메시야는 유대인들이 소망하였던 이스라엘 회복보다 너무나 엄청난 성부 하나님의 큰 선물인 하나님 아버지의 인류 창조로부터 시작하고 천년 왕국이후 까지의 크고 비밀한 경륜(엡3:1-9)을 가지고 오신 분이셨다(마16:16 그리스도의 3중직)

        그리고 이 경륜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행하고 헌신하는 수준에 따라 하나님나라(=천국)에서 다스릴 신분과 위치가 결정될 것이라고 하였다. (구원 받은 자들의 신앙수준 단계)

        이 단계는 ‘신자’와 ‘성도’와 ‘이기는 자’들의 단계로 되어 있으며 이것에 대한 약속을 구약과 신약에 도처에서 여러차례 말씀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아브라함에게 출애급사건을 통해, 구약의 예언서를 통해 신약에서는 고린도전서, 요한일서를 통해, 그리고 계시록에서  결론지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자의 단계’란 예수그리스도를 구원자(Savior)로만 알고 예수이름을 부르는 자들이다. 예수님이 우리 인생을 구원하러 오신 것을 믿고 회개하면 구원에 이르고 영생이 주어지는 단계이다.(행16:31, 롬10:10-13)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예수님을 주 혹은 왕(Lod)로 마음에 모셔들이며 사는 대신 자신의 삶을 위해 주님을 필요로 하는 단계랄 수 있다.  

        그리고 ‘성도의 단계’가 있는데 이 단계에서는 예수님을 주(Lord)로 알고 주의 도를 따라 살려는 단계, 곧 죄악된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으려는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이 단계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영적으로 성숙하여 지고 자신의 뜻대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단계인 것이다.

        그리고 ‘이기는 자들’의 단계가 있다. 이들은 마귀역사와 세상의 유혹과 핍박과 자신의 뜻과 욕망들을 이기고 예수님의 동역자가 되어, 예수님의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머리이신 예수님의 형상을 닮은 자들이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고 있는 자들이랄 수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우리 인생들은 성부 하나님께서 아들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왕 되심에 동참할 ‘다스릴 자’ 를 찾고 구하시려는 것에 초대받은 자들인 것이다.  초대받은 자들을 향하여 내건 조건은 이 땅에서 인생이란 삶을 얼마나 예수그리스도가 원하는 형상이 되는 것을 평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 목사들 대부분 목사님들이(대형교회 목사들을 더욱) 3중직을 행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일부만을 예수님을 (구원자로만) 알리고 있어 한국교회 성도들을 주님이 원하는 파트너인 이기는 왕권 성도(=알곡 성도)들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이제 목사님들은 모든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경륜인 창조와 구속사를 알리고 종말의 때에 알곡 성도들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 마지막 때에 충성된 종이란 평가를 받을 것이다. (마24:45)


        
        

         

            [수줍음을 이겨내는 방법 ]

             

             
            1. 불안을 극복하라.

             
            빨리 뛰는 맥박과 소용돌이치는 뱃속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긴장을 이완시키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숨을 깊이 느리게 들이마시고 내쉬는 간단한 호흡법을 사용하라.
            어떤 만남이나 모임에서 급격한 불안을 경험할 때
            잠시 그대로 머물러 있는다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
            만일 불편함에 승복하여 5분만에 그 자리로부터 도망친다면
            당신은 스스로에게 실패를 약속하는 것이다.
            그 자리에 머무르라.
             
             
             
            2. 땀나게 뛰어라.

             
            성공처럼 성공을 부추기는 것은 없다.
             
            성공할 가능성이 높고
            덜 위협적인 만남이나 대화의 기회를 만들어
            거기에서부터 시작한다.
             
             

            3. 대면해서 말하라.

             
            대면한 상태에서의 사소한 대화 기술에 도전하라.
            전철 안의 옆사람이나 물건 파는 사람과
             
            짧은 일상적 대화를 시작하라.
            그러한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벼운 대화로 시간을 보내는데 대해
            매우 적극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다.
             신문을 훑어 보며 대화의 주제를 찾으라.
            그리고 당신이 말할 것을 몇번 연습하라.
               
              4. 미소하며 눈을 맞추라.

               
              당신이 미소할 때,
              당신 주위에 온정적인 매력을 내뿜는 것이다.
              사람들은 당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고
              당신에게 미소를 보낼 것이다.
              당신이 얼굴을 찡그리거나 당신의 발끝을 내려다 볼 때
              당신은 사람들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으며,
              더 나아가서 부정적인 느낌을 내뿜는다.
              일단 당신이 눈을 맞추면 당신은 "이 엘리베이터는 느리군요."와 같은
              일상적 대화를 위해 문을 열어 놓은 것과 같다.
               
              대화할 때 언제나 눈을 맞추라.
              이것은 당신이 듣고 있고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표시한다.
                 
                 
                5. 칭찬하라.

                 
                사교적 성공을 위한 가장 빠른 길은 칭찬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 대해
                기분좋게 만들며,
                 
                당신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게 만든다.
                매일 누군가를 칭찬하라.
                   
                   
                   
                  6. 칭찬을 받아들이라.

                   
                  칭찬하는 사람에게
                   
                  곧바로 감사하고 곧 칭찬을 되돌려 주라.
                  "그렇게 칭찬해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당신은 옷 입는 맵시가 멋있군요."
                  이것을 본격적인 대화를 위한 출발점으로 삼으라.
                  그가 넥타이나 옷을 어디서 샀는지 자세히 물어보라.

                   
                   
                   
                  7. 나쁜 가능성을 상상하지 말라.

                   
                  모든 상황에서 가장 나쁜 가능성을 기대함으로써
                  수줍은 사람들은 자신을 망친다.
                  그들은 불안해지고 말을 더듬기 시작하며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잊어 버린다.
                  일단 당신이 그 두려운 만남속에
                   
                  자신을 실제로 던지면
                  그것은 당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쉬워질 것이다.
                  그때서야 당신은 당신이 실패하리라는 기대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던가를 깨달을 것이다.
                     
                     
                     
                     
                     
                     
                    [소심한 성격을 극복하려면]
                       
                      사람들은 누구나 낯선 사람들을 대할 때 약간의 두려움을 갖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지나치게 소심하여 낯선 사람은 물론
                      심지어 이미 알고 지내는 사람을 만날 때도
                      가끔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모임에 가기 전에 항상 혼자 있을 핑계를 만들기에 분주하고,
                      또 그러한 성격으로 인해 잃는 것도 대단히 많습니다.
                        그 한 예로 직장에서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표현 못해 직장 생활이 힘들고
                        무미건조해지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만약 자신에게 그런 소심함이 있다면
                        과감하게 벗어나 보려는 노력을 해야하고,
                        다음은 소심한 성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①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아무리 지위가 높고 힘 있는 사람일지라도
                          사람들과의 만남에 대한 부담감은 어느 정도 가지고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나약함을 스스로 인정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리는 여유를 가져봄이 바람직합니다.
                             
                             
                            ② 자신의 능력과 관심사를 찬찬히 살핀다.
                             
                            아주 가끔씩이라도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즐길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는 기회를 가져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수영에 자신이 있다면 수영을 함께 즐겨 보십시오.
                            그런 상황에서 당신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면
                            다른 어느 때보다 자신감에 넘쳐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회가 조금씩 늘어갈수록 다른 상황에서도
                            역시 당당해진 자신의 모습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③ 내가 나서기에 적당한 시간이나 장소가 아니라는 생각을 합리화시키지 않는다.
                               
                               소심한 사람은 내가 나서서 얘기하다가
                              괜히 분위기를 깨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는데.
                              그래서 침묵을 지키다 보니 그 자리가 더욱 불편하고 재미없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흥미 있는 이야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모임 외에는 어느 누구와도 절대로 만나지 않을 것이라는 가상을 해보자.
                              그러면 당신은 그 안에서 친구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더욱 적극성을 띄게 될 것입니다.
                                 
                                 
                                ④ 눈에 잘 띄는 자리에 앉는다.
                                 
                                소심한 사람들의 특징은
                                항상 구석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또 다시 깨닫게 되는 악순환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구석진 자리를 박차고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관심을 보일 수 있는 중앙자리에 앉아 보자,
                                그리고 조금은 과장되더라도 목소리를 높여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석해 보십시오.
                                그러다 보면 어느 새 사람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자신감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자기암시의 시]
                                    만일 당신이 진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질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이제 틀렸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끝장일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이기고 싶다고 생각하는 마음 한구석에
                                    이건 무리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결코
                                    이기지 못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실패한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실패 할 것이다.

                                       

                                      세상을 잘 보아라.
                                      마지막까지 성공을 기원해 온 사람만이 성공하지 않았든가
                                      모든 것은 "당신의 마음"이 결정한다.
                                        만일 당신이 이긴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이길 것이다.
                                          "용기있게 살고 싶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싶다"고
                                          당신이 원하고 행동하면 당신은 그대로 된다.

                                           
                                           

                                           새 출발이다.

                                          가진 자만 성공한다고 정해져 있지 않다.
                                             
                                            "나도 할 수 있다"고 적극적으로 생각하라.

                                             
                                            "나는 해 내고 있다"고 당당히 행동하라.
                                            결국 신념있는 당신은 성취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호감있는 사람들의 25가지 유형]
                                             
                                             
                                            1.균형잡힌 '손익계산'센스가 있는 사람
                                            2.상황판단을 잘하는 사람.
                                            -상황 분석력과 사람에 대한 통찰력이 있는 사람
                                            3.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은 사람
                                            4.책임을 자청해서 떠맡을 만큼 기량이 있는 사람
                                            -위기에 강한 사람
                                            5.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
                                            6.술자리를 같이 해도 즐거운 사람
                                            7.금전 관계가 분명한 사람
                                            8.남의 아픔을 아는 사람
                                            9.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
                                            10.남에게 공격적이지 않는 사람
                                            -관대한 사람
                                              11.부화뇌동하지 않는 자신의 확고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
                                              12.그 때 그 때의 감정으로 행동하지 않고 말과 행동에 일관성이 있는 사람
                                              13.선물을 적절하게 주고 적절하게 받기를 잘 하는 사람
                                              14.인생이 드라마와 같은 사람
                                              15.문제 처리를 잘 하는 사람
                                              16.여행이나 파티를 세심하게 잘 진행하는 사람.
                                              -잘 노는 사람
                                              17.동성이든 이성이든 호감을 가지게 하는 인관관계의 달인
                                              18.다수파 뿐만 아니라 소수파의 가치도 인정하는 사람
                                              19.직장에서 주위의 신뢰를 받고 있는 사람
                                              20.색다른 정보나 시대감각에 뛰어난 사람
                                              21.아름다운 것을 즐길 줄 아는 사람
                                              22.돈이나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사람
                                              23.마음이 자상하고 힘을 가진 사람
                                              24.무용담을 가진 사람
                                              25.이 사람 곁에 있으면 무슨 일이든 잘 된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사람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마음의 소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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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엔 영광 땅에선 평화로다...


                                              밤 하늘의 별을 보며/ 기자석

                                              밤 하늘의 별을 보며 주의 은혜 생각하며
                                              하나 둘 별을 세며 도우심을 세어 봤네
                                              지나온 고비마다 나를 도운 주의 손길
                                              셀 수 없는 그 사랑에 나는 어찌 감사할까
                                              앞에서 이끄시며 뒤에선 호위하며
                                              나의 길 도우시는 주 예수님 찬양하네

                                              행여나 넘어질까 행여나 잘못 갈까
                                              하늘문 여시고 살피시는 주 예수님
                                              지나온 고비마다 나를 도운 주의 손 길
                                              셀 수 없는 그 사랑에 나는 어찌 감사할까
                                              사막에 길 내시고 바다에 길 내어
                                              나의 길 도우시는 주 예수님 찬양하네


                                              

                                               

                                               예수 믿고 바보 됐네" (마태복음 5:38-42)

                                              바보됐네 바보됐네 예수 믿고 바보됐네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까지 가주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벗어주고
                                              오른뺨 때리면 왼뺨까지 돌려대니
                                              나는 바보 나는 바보 예수 믿고 바보됐네

                                              바보됐네 바보됐네 예수 믿고 바보됐네
                                              빌려달라 하면 이자없이 빌려주고
                                              천군 천사 불러모아 응징할 수 있어도
                                              미워하는 원수를 끝까지 사랑하니
                                              나는 바보 나는 바보 예수 믿고 바보됐네

                                              천재됐네 천재됐네 예수 믿고 천재됐네
                                              악한 일엔 둔감해도 선한 일엔 민감하고
                                              세상 일엔 미련하나 하늘 일엔 영리하니
                                              세상에선 바보래도 하늘에선 나는 천재
                                              예수님은 나를 보고 천재라고 하지요.


                                              글/기자석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

                                              황상하 ㆍ 2013/12/23 ㆍ

                                              사도 요한은 소아시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고 하였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이 문제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신앙은 삼위 하나님과 구원에 관한 내용을 핵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넓게는 모든 사상이나 철학이나 역사나 예술이나 문학이나 경제나 정치나 문화가 다 신앙의 활동영역입니다. 그런 분야에 대해서는 믿음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분석하여 나름대로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은 단순히 학문적 연구와 분석의 대상으로만 취급할 수 없습니다. 영은 눈으로 볼 수 없고 감각적으로 만질 수도 없습니다.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영에 대해 분별하는 것은 세심한 주의가 요구됩니다.

                                              우리가 신앙과 교리와 신학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도 이 영에 대한 말이 나오면 어떻게 말을 해야 될지 모르는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악한 영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성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도 사도 요한이 영을 다 믿지 말고 분별하라고 한 것을 보면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영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영을 볼 수는 없습니다. 영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영이 아닙니다. 만약에 영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면 볼 수 있습니다. 천사나 하나님의 사자가 사람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경우에 눈으로 볼 수 있는데, 그런 때도 눈에 보이는 그 모습은 영의 본래의 모습이 아닙니다. 영은 모습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에 대한 문제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 영의 문제에 대해 바르고 건전한 지식과 깨달음이 없으면 아주 잘못될 위험이 있습니다.

                                              성경은 영이 직접 나타나거나 활동하지 않고 사람이나 지식이나 사상이나 문화나 그 외의 여러 것들을 통해서 활동한다고 가르칩니다. 성령의 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베소서 1장 21-22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 영역에 대해“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고 하였는데, 이는 곧 예수의 영인 성령의 활동 영역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활동 영역은 곧 악한 영의 활동 영역이기도 합니다. 성령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일하시지만 악한 영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허물기 위해 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뿐 아니라 만물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분별해야 하고 또한 악한 영의 활동도 분별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점을 매우 강조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활동 영역은 교회 안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모든 영역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특별히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악한 영을 경계해야 합니다. 악한 영의 활동은 언제나 성령의 사역을 빙자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은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방법을 이용하고 성령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것들을 모방하여 성도를 속이고 기만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성령께서 사도들과 예언자들을 사용하여 일하셨기 때문에 악한 영은 거짓 사도와 거짓 예언자를 교회에 투입하는 전략을 사용하였습니다.

                                              오늘날은 목사나 장로 같이 교회 안에 영향력 있는 지도자를 이용하여 교회를 허무는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 악한 영의 방법일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가 외부의 공격 보다는 내부로부터의 공격에 더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는데 이는 다 악한 영의 전략에 의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교회를 세워 가시는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증거와 가르치는 것인데 악한 영도 그 방법을 이용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구약에서는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왕들을 이용했고 초대교회에서는 선지자나 예언자나 사도나 교사를 이용했습니다. 요즘은 두 말 할 것 없이 목사나 선교사나 장로나 그 외에 영향력 있는 지도자나 능력이나 신비한 체험 같은 것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분별해야 합니다. 악한 영은 초대교회 때만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서도 활동하였습니다. 구약에는 하나님께서 주로 “예언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전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언자들의 특징은 자신이 전하고 보여주는 것은 자신의 지혜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변하는 것으로 자처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참 선지자뿐 아니라 거짓 선지자도 같은 주장을 하기 때문에 누가 악한 영의 지배를 받는지 또는 진리의 영의 지배를 받는지 잘 분별해야만 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는 하나님과 바알 중 참 신과 거짓 신을 가리기 위한 갈멜산에서의 대결이 있었고 그 대결에서 하나님이 참 신이심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악한 영은 언제나 노골적으로 바알이 참 신이라고 주장하는 방법만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이 참 신이라고 주장하면서 거짓 선지자 노릇을 하기도 합니다(cf. 왕상 18:6-12).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언제나 왕이나 백성들에게 좋은 말만 하는 것이고 참 선지자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말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 아합이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미가야에 대하여, 그는 한 번도 내게 좋은 말은 하지 않고 악한 말만 하기 때문에 미워한다고 하였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 되게 전하면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진리만 전하면 사람들이 싫어하는 이유는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위로하고 칭찬하고 용기를 주는 말을 좋아합니다. 세상 살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이유로 죄를 책망하고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메시지를 싫어합니다. 경제적인 용어를 빌리자면 영적 “수요(需要)”가 그렇습니다. 진리를 간절히 듣기 원하는 수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 축복, 성공, 위로, 형통, 치유, 능력, 체험 같은 메시지는 수요가 많아서 그런 메시지를 전하는 교회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진리만 전하는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할 지경입니다.

                                              초대교회에 가현설 자들은 예수님의 인성을 믿지 않았고 육체의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현설 자들은 지식도 많고 수사학에도 능했기 때문에 많이 배우지 못한 성도들이 변론으로는 그들을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성도들은 거짓 교사나 거짓 선지자들과의 논쟁에서 그들을 이길 만큼 학문과 설득력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이긴 것은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한 때문이고 또한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악한 영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복음을 이상한 사상과 그릇된 가르침과 일치시키려는 교묘한 악한 영이 전략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악한 영은 복음을 적극적인 사고방식이나 긍정적인 생각 같은 것과 일치시키려고 합니다. 복음을 형통과 축복, 성공 지향적인 복음으로 재 설명하려고 합니다. 병 고치는 복음, 기적을 행하는 복음, 성공을 약속하는 복음, 사회개혁주의 복음, 그 외에 별의별 형태의 복음이 많습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사도 요한은 ‘미혹의 영’이라고 하였습니다. 미혹의 영은 우리가 들으면 흥미가 있고 구미가 당기고 관심을 끌게 하는 것들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진리에는 그런 달콤한 것이 없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신데 사람들은 진리를 싫어하기 때문에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참 신이신 하나님을 싫어하여 자기들의 마음에 맞는 하나님을 만들어 섬겼듯이 요즘 교인들 중에는 자기 마음에 맞는 성령을 만들어 이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이상한 기적이나 체험하게 하는 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악한 영이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성도들을 미혹하는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성령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악한 영은 목사도 이용하고 선교사도 이용하지만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방법은 성령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악한 영이 교회를 무너뜨리는데 이보다 강력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이 진리의 영인지 미혹의 영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달콤하고 흥미롭고 내 입맛에 맞으면 악한 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악한 영의 결정적 증거는 계시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한 영은 전략적으로 복음을 왜곡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성경적”또는 “말씀 중심”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에 철저한 것 같은 방식으로 말씀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악한 영은 우리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교묘한 방법으로 자신을 감추기 때문에 세심하게 주의하지 않으면 속기 쉽습니다. 악한 영을 분별하는 데도 결정적 시금석은 사랑입니다. 서두르지 말고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면 악한 영은 교묘한 엘리트 의식의 교만을 드러냅니다. 뿐만 아니라 악한 영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절대로 진실한 사랑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악한 영도 사랑을 강조하지만 그 사랑이 진실하지 않다는 것은 사람보다 은사나 능력이나 깨달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진리의 영은 절대로 사람을 무시하지 않지만 악한 영은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사람을 무시합니다. 진리의 영은 사람을 겸손하게 하지만 악한 영은 영적 교만으로 사람을 무시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런 특징이 바로 계시의 말씀을 듣지 않는 증거들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고 지혜의 영이시고 분별의 영이십니다. 모든 성도들이 이 진리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악한 영을 분별하고 은혜와 진리 가운데 진실 된 사랑을 실현하여 교회마다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요일 4:6-



                                              출처: USA아멘넷 신앙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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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내 찾은 그림같은 크리스마스 마을, Nevada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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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ristmas at the Court House by Thomas Kinkade, 1990년]

                                               

                                               

                                              작년에 54세의 이른 나이로 타계한 토마스 킨캐이드 (Thomas Kinkade)는 미국 화가들 중에서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화가로 꼽힙니다. 킨캐이드의 그림들은 대부분 평화스런 시골이나 바닷가를 배경으로 그려지고 그야말로 그림같이 아늑하고 아름다운 집들이 등장하는데 그 집에선 밝고 따뜻한 노란 불빛이 환하게 켜져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킨캐이드는 "Painter of Light", 즉 빛의 화가라고 불리웁니다. 빛의 강조는 킨캐이드의 겨울 풍경화들에게서 더 잘 나타납니다. 춥고 어두운 겨울 밤에 밝은 노란 불빛은 더 잘 드러납니다. 그림에서 보여진 그의 겨울은 눈이 소리없이 내려와서 온 세상을 덮지만 너무 많이 오지는 않아서 걸어다니기에 절대로 힘들지 않습니다. 눈을 치울 필요 없을 만큼만 내립니다.

                                               

                                              킨캐이드의 겨울은 눈이 솜처럼 포근해 보여서 밖에 있는 짐승들이 추워 보이지 않습니다. 집 앞을 흐르는 냇가나 연못은 얼어붙지 않았고 하늘은 밤이라도 캄캄하지 않고 둥근 달은 따뜻한 빛으로 숲을 비춥니다. 한 마디로 환상적이고 이상적일 수 있는 겨울의 풍경이지요. 이런 겨울 풍경은 이제는 보기 힘든 모습들이기에 비단 미국사람들뿐만 아니라 커서 미국에 오신 한인 이민 1세대들에게도 어떠한 동경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경제가 어렵고 이런 저런 일들로 현실이 힘들 때 이렇게 따스하고 이상적인 풍경의 그림들을 보노라면 그 속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킨캐이드의 그림들이 미술적인 실체나 가치가 있든 없든 보여지는 풍경들이 이상화된 허상이든, 보는 사람들이 그림들을 통해 잠시나마 평안함과 위로를 얻을 수 있다면 킨캐이드는 어쩌면 미술가 그 이상의 역활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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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othill Village Christmas by Thomas Kinkade, 1997년]

                                               

                                               

                                              몇년 전부터 저는 킨캐이드의 그림들이 묘사한 평화로운 겨울 풍경들을 실제로 보고 싶은 마음에 새크라멘토 인근 지역의 마을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는데 제가 원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킨캐이드가 태어나고 유년 시절을 보냈던 인근 마을 Placerville이 그가 그리는 그림들의 모티프가 되었다는 글을 읽고 가보았지만 이미 작은 마을이 아니라 여러 개의 신호등과 50번 프리웨이가 지나가는 소도시로 커버린 그곳에선 소박한 모습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봄과 가을에 가끔씩 들리는 역사적 마을 네바다 시티 (Nevada City)에서 빅토리안 크리스마스 축제가 열린다는 뉴스를 보고 지난 일요일 오후에 친동생같이 지내는 지인과 한국에서 방문오신 그녀의 어머니를 모시고 갔습니다. 대략 3,000여명의 인구가 사는 네바다 시티는 해발 2,477 피트의 시에라-네바다 산기슭에 자리한 작은 마을입니다. 캘리포니아 골드 러쉬가 시작된 1849년에 지어진 마을로써 한때는 캘리포니아 최대 규모의 금광 산업이 번창했던 곳입니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역사적 건물들이 잘 보전되어 있어서 아름다운 서부 금광 타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네바다 시티는 이미 여러번 다녀온 곳이고 빅토리안 크리스마스 축제 역시 2주 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고 있는 대규모의 실내 빅토리안 크리스마스 축제에 다녀온지라 이번 축제에는 별 다른 기대없이 갔습니다.

                                               

                                              그런데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제가 그리도 보고 싶었던 그림같은 크리스마스 마을의 풍경을 12월의 네바다 시티에서 찾았습니다. 지난 주에 내린 눈이 아직도 군데 군데 남아있고 소박한 크리스마스 장식이 마을의 중심부를 따뜻하게 밝히고 우연히 들린 언덕위의 작은 교회에서는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쉬어가라고 따끈한 애플 사이다와 갓 구운 쿠키를 내놓은 곳, 말이 끄는 마차가 거리를 지나고 골목마다 숨은 보석같은 상점들과 맛집들이 있는 곳, 마을 앞에 흐르는 맑은 냇가를 따라 지어진 인형집같은 오두막들의 지붕은 아직 눈이 쌓여있고 굴뚝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가 밤하늘로 올라가는 곳...

                                               

                                              마을의 중심부를 가득 채웠던 인파들이 해가 지고 어두워지자 점점 줄고 오색의 크리스마스 빛들이 강렬하게 밝아졌습니다. 손은 시렸지만, 삼각대가 없어서 카메라의 사진은 점점 흔들렸지만 렌즈를 통해서 보이는 마을의 풍경은 킨캐이드 그림 그 자체였습니다. 오늘 밤과 22일 오후에 두번 더 열리는 빅토리안 크리스마스 축제가 끝나면 크리스마스 전에 다시 한번 찾아갈 예정입니다. 더운 커피를 손에 들고 천천히 중심부 거리인 Broad Street과 Commercial Street을 걸으며 드디어 찾은 크리스마스 마을에서 킨캐이드의 그림속으로 들어가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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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바다 시티의 역사적 다운타운; 사진: 구글 이미지]

                                               

                                               

                                              겨울에, 특히 12월에, 북가주를 방문할 기회가 있으시면 꼭 네바다 시티에 들려보시길 강추합니다. 새크라멘토에서 북동쪽으로 60마일 떨어져 있고 Plumas National Forest와 Tahoe National Forest 인근입니다.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 레잌 타호의 북쪽에 있는 스키장을 가시는 분들은 네바다 시티가 80번 프리웨이에서 30분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니 어렵지 않게 방문하실 수 있습니다. 자세한 방문 정보는 공식 웹사이트로 가시기 바랍니다: http://www.nevadacitychamber.com/

                                               

                                               

                                               

                                               네바다 시티의 빅토리안 크리스마스 축제

                                               

                                               

                                              네 블럭 남짓하게 작은 마을의 다운타운 거리가 빅토리안 크리스마스 축제를 보러 온 사람들로 꽉 찼습니다. 다양한 수공예 제품을 파는 거리의 상점들을 기웃거리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빅토리안 시대의 의상을 입은 마을 사람들과 방문객들을 구경하는 것이 더 재미났습니다. 거리의 악사들 또한 그림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해지고 난 거리는 오색불빛으로 가득했고 손이 시리도록 차가운 밤공기는 12월을 제대로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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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 은퇴 기념 고별 강좌|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_박영선 목사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 박영선 교수, 남포교회, 합동신학대학원 실천신학 >

                                               

                                              이 원고는 20131129일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대강당에서 있었던 박영선 교수 은퇴 기념강좌의 내용을 강의안에 의존하여 임의로 발췌한 것입니다. 원고의 일부 내용 중 미흡한 점이 있음을 양해 바랍니다. <발췌자 : 송영찬 국장>

                                               

                                              인류 역사 속에서 보수주의는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주의는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그 풍부하고 명예로운 것에 대하여 그다지 깊은 관심과 가치를 부여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끊임없는 도전을 받아야 하는 보수주의는 이 시대에 과연 자기 자신을 무엇이라고 증명할 것인가에 대해 궁색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보수주의를 통해 누가 존경을 받고 있는가를 우리는 놓치고 있다.

                                               

                                              하나님은 인류 역사 속에서 어느 순간이라도 실패한 적이 없으셨다. 심지어 예수님의 죽음마저도 실패가 아니었다. 이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 보수주의이다. 이런 점에서 보수주의가 가지고 있는 명예와 가치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Text(역사적 사실)Context(역사적 의미)

                                               

                                              보수주의는 역사성의 인식에서부터 자유주의와 다르다. 보수주의는 역사, 곧 사실을 하나님의 경륜과 약속의 시행으로 본다. 반면에 자유주의는 역사, 곧 사실보다는 실존의 공감과 이해에 우선을 둔다. 그 결과 사실보다는 그 의미에 치중한다. 보수주의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과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그대로 고백한다. 반면에 자유주의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사실보다는 그 의미가 무엇인가에 더 관심을 가지고 강조한다. 여기에서 역사적 사실과 역사적 의미의 충돌이 발생한다.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사실(text)을 담고 흘러간다. 이와 관련해 하나님은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55:8-11)라고 선언하신다.

                                               

                                              그렇지만 역사라고 하는 시, 공간 속에서 사실(text)과 정황(context)의 구별은 그리 쉽지 않다. 오히려 역사적 사실보다는 그 정황(context)을 압도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개인의 신앙체험에서 보듯이, textcontext와 너무 깊이 연결되어 있어서 그 text는 그 특정한 context 이외의 것으로는 담아낼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점은 자유주의의 주장과도 연결된다.

                                               

                                              특히 인문학자들에게 있어 역사의 context 밖에 보이지 않아서 그들은 text를 무시한 채 역사를 '반복'이라고 하거나 심지어 인생을 '윤회'라고 오해하기도 한다. 그들은 역사 속에 녹아든 text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학교를 보는 것과 같다. 학교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학교 자체로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매년 학생들이 입학하고 승급하고 졸업을 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윤회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 또한 해마다 학생들의 입학과 졸업이 반복된다고 해서 학교가 발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생각은 본문과 정황이 분리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에서 나온 것이다.

                                               

                                              역사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의 틀은 변하지 않고 그 안에서 수많은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각각의 정황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과 찾아오심에 대해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밭에 감춰진 보화는 그 context의 보잘 것 없음으로 말미암아 그 text 자체를 무시케 하게 만든다. 그와 같이 말구유는 역사지만 그 말구유에서 태어난 예수는 조작되거나 신화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수주의는 text를 감싸고 있는 context를 더 잘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할 사람들이다.

                                               

                                              보수주의는 무엇보다도 먼저 본문, text를 존중한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 그 text를 보여주신다. 그것이 바로 계시이다. 특히 구약이 그렇다. 구약에는 문맥이 있다. 그 문맥이 없다면 신약조차 있을 수 없다. 이런 이유에서 보수주의는 하나님만이 주도권과 능력을 행사하시며 그 안에서 자신의 성품을 나타내신다는 사실을 가장 중요한 신학 원리로 고백하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textcontext 없이 전하면, 다만 고함과 공허한 주장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context 속에서 text를 전달 할 수 있어야 한다. 전후 사정이 없다면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전달할 수 없다.

                                               

                                              구약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역사는 거듭해서 실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의 실패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셨지를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역사 속에서 충돌을 통해 자신을 보이셨다. 그것이 바로 계시였으며 이 계시는 전인격적인 성숙을 그 목적으로 주어졌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주권 사상이다.

                                               

                                              이 하나님의 주권 사상은 contexttext 자체, 또 이해와 설득이 모두 하나님께만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역사의 내용과 사실보다 우선하는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에 근거하고 그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 바울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11:36)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주권 사상은 야곱이 경험한 벧엘 사건을 통해서 이미 확인된 바 있다. 창세기 2810절 이하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야곱에게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증언하신다. 야곱에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며 이삭의 하나님이시다. 조부와 부친의 하나님 곧 과거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야곱의 하나님 곧 현재의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께서 조상들에서 하신 약속을 실행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여기에서 그 하나님은 미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2. 기독교 신앙의 실제적 이해

                                               

                                              하나님의 주권 사상은 하나님의 역사성으로 실제가 된다. 곧 역사라고 하는 그릇 속에서 비로소 야곱은 역사의 문맥인 정황을 깨달아 가는 것이다.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실제적 이해가 있다.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몇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유산(모태 신앙), 체험(극적 회심), 기복(현실)이 동기가 되거나 정황(context)을 가지는 경우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그 계기를 통해서 text를 만나게 된다.

                                               

                                              둘째는 개인 현실에서 느끼는 실존적 결단, 현실적 필요, 정체성의 질문 등에 의해 구체화 되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특성도 갖게 된다. 그리고 이 정황(context)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오신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신앙의 본질적 특성을 전부 가지거나 균형을 가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들의 정황을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하는 방식을 다음과 같이 취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장로교에서는 전통과 역사를 인정한다. 감리교에서는 헌신과 열정을 강조하게 된다. 순복음에서는 체험적 신앙을 그 정점으로 가진다. 이런 것들은 모두 text의 정황을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로부터 기인한다. 그 결과 설명이 달라진다. 본문, text는 동일하지만 그 안에 담긴 정황을 설명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서로 신학이 다르다고 매도하면 안 된다.

                                               

                                              잘 아는 것처럼 각자 자신이 정황을 이해하는 방법들의 다양성, 즉 그 장점들이나 또는 특징들을 중심으로 설명하거나 증언을 하게 된다. 이것이 변증이고, 이러한 변증의 과정을 통해 균형과 종합을 위해 하나의 신학을 형성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각각의 신학은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의 방식과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정황 이해와는 확연하게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자유주의에서는 context를 공감하고 납득하는 방식을 취한다. 거기에는 남다른 열심과 정열이 있다. 심지어 감동과 환희, 사색과 성찰도 있다. 그들은 누구보다 이 방면에서 많은 고뇌를 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체험주의이거나 신비주의로 빠지게 된다.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정황의 근거를 확보하려는 시도들 때문이다. 반면에 보수주의, 특히 장로교는 그들과 전혀 다른 방식을 취한다.

                                               

                                              보수주의는 일종의 원어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신앙이 모국어인 자신들은 실상 자기가 가진 유산을 잘 모르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외국인들은 영어를 배우기 위해 누구보다 많이 공부를 한다. 특히 문법과 철자를 사용함에 있어 영어를 사용하는 원어민보다 더 잘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외국인들이 원어민들보다 더 영어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이 신앙 그 자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보수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에 비해 성경 원어나 성서 역사의 배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별로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유주의자들은 히브리어, 희랍어, 라틴어, 독일어 심지어 불어까지도 공부한다. 그리고 이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잘 아는 것처럼 언어()는 역사와 유산으로 만들어 진다. 그런데 자유주의자들은 그 역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정작 text를 대할 때 오류에 빠지게 된다.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그런 외적인 것들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무엇보다도 역사를 인정한다. 그리고 그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본다. 그 하나님의 일하심에 우선성을 부여하고 거기에서 구체적인 정황을 찾으며 마침내 역사의 완성을 보고 있다. 이것이 다른 점이다.

                                               

                                              결국 보수주의자들은 체험(확인), 헌신(열정), 공감(실존) 등이 결국 하나님의 크기와 약속과 능력 그리고 성품 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이 보수주의의 가장 큰 장점이다. 혹시 그와 같은 모든 정황들을 잘 모른다 할지라도 보수주의는 결국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역사의 완성을 향하게 된다.

                                               

                                              따라서 보수주의자들은 비록 자기 자신이 속한 역사의 성격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 정황을 해석하고 변증함에 있어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배타적인 신학이라거나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정도의 차이이지 다름의 차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서로 배타적일 때 기독교 신앙을 훼손하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이 사실을 교회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처음에 가톨릭에서는 장엄한 형식과 아름다움에 text를 담아 자신들의 진심을 표하는 방식을 강조했다. 그래서 가톨릭은 성상이나 성화와 미사 혹은 화려한 예식(일곱 성례)와 같은 것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했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이러한 가톨릭의 형식이 오히려 text를 가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교리로써 사실을 설명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교리문답이나 신앙고백서들로써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했다. 이것들은 모두 사실 자체를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선포 위주의 방식을 택했다. 이때부터 설교가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 계몽주의 영향을 받게 되자 설명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통적인 선포 위주의 설교를 설명 위주의 설교로 바꾸게 되었다. 그러한 설명을 통해 설교자들은 신자들에게 공감을 유도하고 신앙을 납득시키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칼 바르트의 신정통 방식이다.

                                               

                                              또 다른 방식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사실이 중시된 선포에서 사실은 하나의 명분에 지나지 않고 그 내용만을 강조하는 방식이 등장했다. 이로써 사실은 더 이상 실제적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자유주의 방식이다. 이 자유주의에서는 내용의 공감만을 강조하게 된다.

                                               

                                              3. 자유주의를 향한 질문

                                               

                                              자유주의에서는 text보다는 context의 의미, 가치, 이해, 공감 등에 강조점을 둔다. 때문에 그들은 초시간적 추상적 개념들에 초점을 둔다. 한마디로 이것은 환상적이다. 그러기 위해 그들은 이 추상적 개념들을 도입함에 있어 실존성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context의 의미, 가치, 이해, 공감 등을 실감해야 할 자아, 곧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은 매우 고무적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신앙으로 이끄는 문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자체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여기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 자칫하면 이 길만이 신앙으로 가는 유일한 길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자유주의의 인식론을 향해 질문해야 한다. 인간이 다만 신적 의지와 능력에 의해 조종되는 존재라면 곤란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해 보수주의 곧 개혁주의는 답을 해야 한다. 그 답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의 선택과 책임은 명예요 영광이다.

                                               

                                              둘째, 그러나 인간의 공감과 이해에 의해 성립되는 신의 존재나 의지일 수 없다.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의 변덕스러움과 피조물로서의 한계와는 진정 달라야 할 것 아닌가?

                                               

                                              셋째, 신앙인의 감격은 피조물에게 없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의 선하심과 능력에 근거한다.

                                               

                                              성경은 이상의 사실들을 증거한다. 곧 인간의 곤경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증언한다. 그것은 고백이 아니라 진술이다. 생각한다고 해서 존재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생각도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자들은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존재만 인정하게 되면 생각 없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자들은 무척이나 성경 본문에 충성하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성경을 주신 하나님을 먼저 보아야 한다.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저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사람들이지만 생각도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다시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개혁주의는 인간의 이해에 묶인 신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자유주의가 말하듯, 공감을 요구한다는 점은 인간에게 필수적이지만 그것이 근거가 되거나 출발점은 되지 못한다. 나와 현재라는 정점은 얼마나 작은 것인가?

                                               

                                              한편, 하나님의 임재가 삶에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부재로 인한 여러 죄악이 구체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 선지서들은 징벌을 받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징벌은 은혜가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도덕이 아니며, 윤리를 초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존재의 절대성을 말하기 위함이다. 곧 하나님의 없음이 벌이고 그것이 곧 재앙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상을 볼 때 자유주의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더 분명해진다.

                                               

                                              먼저 (1) 교리를 외우듯이 거대한 종교개혁의 유산을 누려야 한다. 이 교리들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고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다. 교리는 나중에 이해하게 된다. 거기에 인격이 따라야 한다. 곧 하나님의 일하시는 정황 속에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교리를 가졌다는 것이 우리의 우월감을 나타내거나 타인에 대한 경멸로 나타나는 배타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이것은 마치 탕자의 비유에서 배우는 것과 같다.

                                               

                                              집나간 자식이 정신 차리는 문제는 아버지의 부요와 선하심을 증명한다. 반면에 집에 있는 자신의 유익과 명예에 대한 책임도 말하고 있다. 큰 아들에게 있어 동생이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다는 비난이 전부라면 결코 얘야,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부요와 선하심을 즐기지 못하는 것과 다름없다.

                                               

                                              (2)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담긴 부요함에 참여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바울 사도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3:20-21)이라고 한 말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인간적 노력을 무한히 뛰어넘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누리고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큰 법칙이 있다. 교회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원칙이다. 우리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 부요함과 신실함을 누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4. 역설이 담긴 text어떻게 대할 것인가?

                                               

                                              보수주의에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보수주의가 대면하고 있는 과제이다. (1) 유신론 안에서 전체 세계관이 항상 정확히 이해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2) 교회가 (죽은) 전통주의 항목, context가 배제된 채로 text에 집착하는 경향을 지녀왔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필연과 자유를 동시에 말하는 성경으로서 text를 받아들이는 방법에 익숙해져야 한다. 제임스 사이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 “내가 필연과 자유를 관념의 세계에서 생각지 않고, '신 앞에 서 있다' 하는 현실에서 생각한다면, 그리고 내가 '신의 처분에 맡겨져 있으며' 동시에 '모든 것은 내개 달렸다'는 것을 안다면, 이 두 개의 조화될 수 없는 명제를 두 개의 분할된 타당성의 영역에 돌림으로써 내가 살아가야 할 역설에서 벗어나려 해서는 안 된다. 또는 어떤 신학적 기교로써 이 둘의 관념적 화해에 도움을 주려 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필연과 자유를 동시에 스스로 취하여 함께 살아야 하며, 또한 함께 살 때만 이 두 가지는 하나가 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하신다. “모든 정황에 네가 들어가 살아라.” 이 명령을 기억하라. 이럴 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반면에 text에서 보이는 역설을 잘못 수용할 때는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1) 신 앞에서 인간의 위치를 역설적으로 이해한 진술이 위세를 떨치는 이유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대부분의 인간이 자신의 입장을 비역설적으로 진술할 능력이 없다는 데 있다.

                                               

                                              2) 대부분의 비역설적 선언은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거나 인간의 의미를 부인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즉 그들은 펠라기안이거나 극단적 초칼빈주의로 흐른다. 펠라기안주의는 모든 것을 사람에게로 책임을 넘긴다. 초칼빈주의는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책임을 넘긴다.

                                               

                                              3) 역설을 의지하는 것의 약점은 멈취야 할 지점(경계)을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계를 정할 외적인 객관적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역설이 제멋대로 날뛰게 된다. 그런데 사실 그 지점을 알기란 결코 만만치 않다.

                                               

                                              5. 신학과 신학자 그리고 목회자

                                               

                                              과연 신학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에게인가, 아니면 인간에게인가? 여기에 하나님과 학문의 대립이 있다. 계시와 인식의 대립이 있다. 사실과 의미의 대립이 나타난다.

                                               

                                              하나님이 학문의 대상일 수 없다. 곧 신학이 하나님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신학이 존재하는 거다. 마찬가지로 계시가 있기 때문에 인식을 필요로 한다. 인식을 위해 계시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이 있기 때문에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의미를 가지기 위해 사실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 관계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주도권이 있음을 의미한다.

                                               

                                              만일 인간에게 주도권이 있다면 그리고 이해하고 납득하는 내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과 우연 속에 있는 존재라면, 의미와 이해와 객관적 기준을 가지지 못하며 다만 억지가 된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사실은 우연으로부터인가, 필연으로부터인가? 우연이면 사실은 단순한 반복일 뿐이며, 허무주의에 불과하며, 역사는 의식을 가지지 않는다. 곧 역사가 우연이라 한다면 거기에는 그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야 한다. 반면에 필연이라면 거기에는 그 필연을 만드신 분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우리가 이미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어느 것 하나도 역사의 사실은 실패하거나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곧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실패하게 하거나 망하게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은 결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의 경우에 보면 인간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근거를 만드는 것을 보게 된다. 곧 인간은 자신과 현실을 설명할 세계관을 필요로 하고, 대부분은 내용보다 어떤 주류나 인물로 그것을 대신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신앙인들의 모습을 보면 다만 지도자를 따르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을 유지, 보전 하려고 한다. 자기가 아닌 칼빈이나 박윤선을 내세우는 것으로 모두를 납득시키려 한다. 그리고 칼빈을 모르면, 박윤선을 모르면 신학이 다르다고 함으로써 책임을 모면하거나 그 책임을 덮어씌우려고 한다.

                                               

                                              과거 일본 역사에서 위대한 장수라고 하면 오다, 도요토미, 도쿠가와를 내세운다. 그런데 그들이 위대해질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복종한 무지하고 순종적인 병졸들 때문이었다. 우리는 오다, 도요토미, 도쿠가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병졸들을 보아야 한다.

                                               

                                              병졸들의 무지와 순진은 절대적 다수에게 준 복이다. 그러니 지도자들이라면 우월함으로 자신을 확인하려말고 유통업자 같은 역할임을 기억해야 한다. 여기에서 목회자와 신학자의 역할을 확인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보이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기쁘신 은혜에 속한다. 여기에는 우리의 승인이나 획득이 필요하지 않는다. 단지 사람은 그 하나님의 은혜에 공감하거나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 의존의 책임을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가지는 것이다. 때문에 교육과 진심으로 그들을 공감시켜서 자신의 짐을 덜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실존적, 인격적 요소인 에 대한 이해를 해야 한다.

                                               

                                              1) 실존적이라는 말은 관념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고 말한다(12:1). 삶으로써 드러내어야 하는 것이다. 2) 인격적이라는 말은 기계적이지 않고 더 풍성하고 깊은 관계를 의미한다.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만큼 풍요롭고 풍성해져야 함을 의미한다.

                                               

                                              6. 결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그 하나님은 폭풍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신다(40:6). 그때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천지만물을 욥에게 보이신다. 그러자 비로소 욥은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42:2-3)라고 실토하면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42:5-6)라고 고백한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그리고 땅을 보라. 그리고 그 세계 안에 있는 만물을 보라. 이것들을 있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다. 바로 사망으로부터 생명을 가져오시는 분이시다. 곧 부활 사건이 그것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내일 실패할 것을 두려워하면서 오늘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죽음에서 생명을 만드시는 분이다. 그것이 바로 부활 사건이다. 우리는 바로 이것을 가지고 있다.

                                               

                                              아무런 이유와 자격 없이 어느 시대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러내셨고 세우셨음을 자랑스러운 명예로 여겨야 한다.

                                               

                                               

                                              출처: 기독교개혁신보
                                              생명나무 쉼터

                                              죽은 교회 / 김명도 목사

                                               서론:
                                              죽은 교회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3장에서 죽은 교회가 있다고 말합니다.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신데 주님이 살아계시는데 죽은 교회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죽은 교회란 무엇을 말하는지 왜 교회를 죽었다고 주님이 책망하시는지,  죽은 교회를 책망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 책망은 비단 사데교회만 아니라 죽은 것과 같은 오늘의 우리를 책망하는 것이 아닌지 자신을 살피며 회개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기를 바라며 오늘 본문 계시록 3:1-6 말씀을 통해서 죽은 교회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I.  죽은 교회의 특징
                                              II  죽은 교회를 향한 책망
                                              III  교회가 살려면

                                              I. 죽은 교회의 특징
                                                계시록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장차 하늘에서 일어날 놀라운 일들을 강조하지만 주님이 재림하기 전에 이 땅에서 일어날 일을 더 중점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요한계시록 전체의 요절은 17:14절인데 “저희가 어린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이것이 계시록의 중심 요절입니다. 이 요절 한 절을 가지고 전개해 나간 것이 계시록입니다.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가 부단히 싸우는데 많은 성도들이 사탄의 공격을 받고 핍박을 받지만 반드시 나중에는 참 성도,즉 거듭한 성도는 승리하여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영광의 날이 있으므로 인내하며 죄와 타협하지 말고 마귀를 대적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싸우라는 내용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성도란 진정 거듭난 성도들을 말하며 사이비 신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이비 신자는 핍박을 받을 이유도 없고 받을 수도 없습니다. 상황윤리에 따라 살아가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미움을 살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참다운 성도는 진리를 수호하려다 보니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 즉 사이비 신자들과 반드시 충돌하게 되므로 핍박과 고난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을 디모데후서 4장에서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직무를 다하라고 명령합니다. 참 성도나 참 목회자에 대한 핍박은 점점 더 해가는데 이유는 점점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떠나고 따라서 복음을 떠나서 형식적으로 믿는 사람들은  성경대로 믿는 참 성도들을 시기하거나 조롱하게 되며 따라서 대적하게 됩니다. 오늘의 복음을 방해하는 자들은 외부에 불신자의 세력도 있지만 교회 안에 더욱 그런 세력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5:7에 “심판이 교회안에서 시작되었다” 고 경고의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바로 전하는 사역자들이 받은 고통과 핍박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상상도 못합니다. 과거 초대교회나 중세 종교개혁시기에 얼마나 많은 정통신학자들과 진정한 성도들이 대적하는 손에 죽어갔는가를 보십시오. 스위스의 종교개혁가 Ulrich Zwingli 는 양편에 날센 도끼를 들고 다른 종교개혁가들과 힘을 합하여 천주교 군사와 싸우다가 스위스  Zurich 근처 Kappa 평야에서 순교했습니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은 “몸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말고 몸과 영혼을 아울러 지옥에 던지는 자를 두려워하라“ 라고 하며 눈을 감았고 천주교의 지도자들은 죽은 그를 유품이라도 거두지 못하도록 유해를 불질렀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천주교 군사가 물러간 다음 쯔빙글리의 제자들이 스승의 시체를 거두려 갔을 때 놀랍게도 그의 심장만큼은 불에 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는 말도 있지만 이것은 전설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참다운 주의 종들은 복음을 왜곡하는 사이비 종교지도자들에게 많은 핍박과 순교를 당하며 기독교가 오늘까지 이어져 왔는데 21세기에 들어와서는 그 속임수가 극에 달하여 상상할 수 없는 영적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

                                              소아세아 교회에 있는 일곱 교회 중에는 믿음을 잘 지킨 서머나 교회나 빌라델비아교회 같은 좋은 교회도 있었지만 반면에 라오디아 교회처럼 뜨겁지도 차지도 아니한 중립노선을 걸어가는 기회주의적 교회도 있었고 오늘 본문에서 읽어보는 사데 교회처럼 주님으로부터 “죽은 교회” 라고 꾸중을 듣는 교회도 있었습니다. 자식이 부모로부터 꾸중을 들으면 분명 부모님은 아무 이유 없이 나에게 어려움을 주기 위해서 꾸중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내가 무엇을 잘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압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꾸중을 들으면 무언가 신앙생활을 잘못했기 때문에 그런 책망을 받으므로 돌아서서 회개해야 하는데 사데교회 성도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럼 과연 사데교회 사람들은 어떤 잘못을 했길래 “죽은 교회” 라는 말을 들었을까요? 교회란 건물을 말함이 아닙니다. 성도들을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주의 말을 듣고 순종치 않았습니다. 본문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라고 했으니 라고 우리 속까지 모두 알고 계시는 주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살아있다고 떠들어도 하는 행위 즉 신앙생활 양상을 보니 그것이 살아 있는 성도가 할 일이 아니고 죽은 사람 즉 영적으로 아직도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이나 하는 그런 일들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데교회 성도들도 주일에 교회에 출석하고 설교 듣고 헌금도 하고 성례식도 하고 성도의 교제도 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주를 봉사한다고 했지만 주님은 바른 신앙생활이 아니라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본문 2절에,’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라고 말합니다.

                                              지금의 터키에 기원 1 세기에 존재하던 사데교회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경로로 사데교회를 죽었다고 하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말은 단지 해위가 가증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몇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봅니다. 첫째 복음을 전해도 건성으로 듣고 복음의 내용을 알지 못하면서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만은 남에게 자랑하고 열매가 없는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교리도 모르고 감격이 없고 기쁨이 없고 봉사와 전도의 열이 없는 그런 생활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책망을 받는 것입니다. 저들은 나름대로 저들의 믿음이 옳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이 옳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주님에게 신앙을 인정받는 길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아가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성경보다 사람의 이성을 내세우기도 하지만  인간의 이성으로 성경을 풀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합니다. 동정녀 탄생을 이성으로 어떻게 해석합니까? 죽은 사람의 부활을 이성적으로 어떻게 입증합니까?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말씀인 성경은 피조물인 인간의 이성을 초월합니다. 인간은 아무리 지혜 있다고 해도 피조물에 불과하며 피조물은 조물주를 따라가지 못하며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어서 지혜가 극히 제한되어있습니다. 종이 한 장이 앞에 가리어있어도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지혜입니다. 5분 이후에 일어날 일을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지혜입니다. 그런 인간이 자기의 이성으로 지혜가 무한하신 하나님의 일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미련한 인간은 자기의 이성으로 성경을 판단하고 하나님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피조물은 조물주에게 순종할 것 뿐입니다.

                                              사데교회가 <죽었다>고 하는 주님의 책망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살아 있다고 하나 실은 죽었는데 그 첫 이유가 “행하는 것을 보니 죽은 것” 이라고 했습니다. “행한 것을 본다” 는 말은 신앙생활이 온전하지 못함을 말합니다. 주님에게 숨겨질 일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신앙생활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말은 저들의 믿는 도리를 모르거나 아니면 알아도 머리로만 알고 실천생활이 없기 때문인데 어느 편이건  모두 주님의 책망꺼리입니다. 믿음의 도리를 모르면 신앙생활을 바로 할 수 없고 따라서 신앙생활을 바로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자녀라고 하면 그는 분명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하나님의 책망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육신의 아버지도 아들이 아버지의 뜻과 상관없이 나가서 마음대로 악행을 행하면서 “나는 아무 집 아들이라” 고 하면 이는 분명 가문을 더럽히는 결과로 아버지의 혹독한 책벌을 받을 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도 그러하거늘 영의 아버지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기에 교회마다 투철한 교리 공부가 필요합니다. 믿는 도리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한국에서는 30년 교회를 다닌 성도도 아는 것이라고는 “예수는 우리 구주인데 우리의 죄를 인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분이고 예수 믿고 죽으면 천당에 가서 영원토록 산다“ 고작 이런 정도의 신앙이라면 자세한 기독교의 심오한 교리들을 알 턱이 없습니다. 설교가 너무 현세 중심적이고 도덕중심이고 바른 요리 문답 공부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왜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죄를 용서하게 되는지? 그분이 어떻게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셨는지?  성령은 어떻게 역사하는 것인지, 성례식의 참 의미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불신자에게 전도할 때도 아무것도 기독교의 교리를 전할 수가 없는데도 남에게 그가 교리를 다 아는 것처럼 자처합니다. 이런 사람을 오늘 주님은 죽은 교회라고 책망합니다.

                                              이런 점을 감안한 1563년의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Zacharius Ursinus 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만들면서 주일마다 반드시 몇 문제씩 매주 교리를 공부하도록 작성했습니다. 전문 129문으로 되어 있는 이 요리문답은 가장 개혁주의적인 신조이지만 일년에 쉰 두번 다가오는 주일, 매 주일마다 예배하기 전에 기독교의 교리 두 문제 혹은 세 문제씩 공부하도록 했습니다.

                                              1월 첫 주일에는 제1문 “살거나 죽거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가 무엇이뇨?” 이렇게 물으면, 대답은 “죽거나 살거나 나의 유일한 위로는 몸과 영혼이 살거나 죽거나 내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나의 미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피로서 나의 모든 죄의 값을 다 갚아주시고 마귀의 지배에서 나를 완전히 해방시켜 주셨다. 그는 나를 잘 지켜 주시기 때문에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 뜻이 없이는 머리털 하나라도 나의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모든 것이 나의 구원을 위한 그의 목적에 부합됨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성령에 의하여 그는 영생을 나에게 보장해 주시고 나로 하여금 이제부터는 뜻을 다하여 그를 위해 살도록 준비해 주신 것이다.” 라고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제2문에는 “당신이 이 위로의 축복 가운데서 기꺼이 살고 죽기위해서는 몇 가지를 알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Heidelberg Catechism 은 답하기를  “세 가지인데, 첫째 나의 죄가 커서 비참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요, 둘째는 내가 어떻게 나의 모든 죄와 그 비참한 결과에서 해방되었는가를 아는 것이요, 셋째는 그러한 구속에 대하여 내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감사가 무엇인가를 아는 일이다“ 라고 하니 이 얼마나 명확한 교리인가요? 이런 교리들을 교인들에게 매주일 체계 있게 가르쳐주면 이단이나 <사이비 사역자나 부흥사> 를 그냥 둘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교리를 모르니 교회마다 분규가 시끄럽고 교계가 어지러운 것입니다.

                                              물론 다른 신앙고백서도 요리문답이 붙어 있지요. 가령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대요리문답 196문과 소요리문답 107문이 붙어 있습니다. 소요리문답은 원래 만든 사람들이 무식한 사람들이나 초등학교 학생들을 위하여 제정한 것이고 비교적 작아서 “소요리문답” 이라고 부르고 “대요리문답” 은 교회론까지 포함하여 포괄적으로 기독교의 믿는 교리를 총망라하여 체계화하여 “대요리문답” 이라고 하고 성도들에게 믿는 도리를 가르쳐 주는 것인데 매주 몇 문제씩 가르치도록 구성된 것이 아니지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16세기 종교개혁기에 나온 가장 정확한 개혁주의 교리를 아는데 도움을 주는 좋은 신조중 하나입니다.

                                              오늘의 문제는 교리 공부가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단상에서 비성경적인 내용을 선포해도 그냥 묵과 합니다. 미국의 정통장로교단에서는 그런 일이 발생할 수도 없지만 그런 일이 생기면 그 목사는 당장 파면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정통장로교단은 문자 그대로 정통을 지켜오는 교단입니다. 한국 교회 중에 말씀을 바로 전하고 권징을 바로 하고 성레식을 바로 행하는 교회는 보기 드뭅니다.

                                              또한 사데교회가 "죽은 교회“ 라고 책망 받은 이유는 믿는 도리를 알되 머리로만 알고 그런 교리를 믿지도 않고, 따라서 그런 교리대로 실천하며 살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신학에서 말하는 소위 <역사적 신앙>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은 책망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기독교 교계에는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기에 무르익은 가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은 ”살아 있는 교인, 일을 많이 하는 교인, 모범적 헌신적인 교인”이라고 자부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죽은 교인입니다. 죽은 교인은 영적생명력이 없습니다.

                                              죽은 교회의 특징은 그리스도의 교리의 착념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바울도 디모데에게 말하면서 교리에 착념하여 저들을 바로 인도하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본문에 보니 “옷을 더렵혔다” 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룩한 의의 옷을 버리고 자기 자신의 옷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의로서는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를 못합니다. 주님의 의를 저버렸고 말씀을 떠났다는 말이니 그 행실이 온전할 리가  없으며 따라서 주님의 책망을 받게 마련입니다.  

                                              이사야 64:6에 “우리의 의는 모두 더러운 옷 같다"고 합니다. 우리의 옷을 입고 어찌 하나님에게 칭찬받기를 기대하겠습니까?  또한 이사야 4:1에는 “그날에 일곱여자가 한 남자를 붙들고 우리가 우리의 떡을 먹으며 우리의 옷을 입으리니 당신의 이름으로 일컫게 해달라” 고 애원하는 모습을 읽어보는데 마치 사데 교인처럼 위선적인 교인들, 혹은 이단에 속한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나와서 참 성도인척 위장한다는 말입니다.

                                              2절에는 ‘일깨워“ 라고 했는데 영적 수면에 취한 자들입니다. 신앙생활에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잠을 자면 반드시 사탄이 침노합니다. 실수하여 실족하는 이들은 모두 신앙생활을 하다가 잠을 자던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에 잠을 자도록 자장가를 불러주는 목회자들이 수두룩 합니다. 어떤 목사는 ”교회에서 죄 이야기를 말하지 말라“ 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죄 이야기를 하면 교인들이 기분을 상하여 다음 주일에 교회에 출석하지 않게 되고 그렇게 되면 교회가 어떻게 성장하겠는가?“ 혹은 ”피곤하면 하루쯤 교회에 빠진다고 하나님이 벌을 주시겠습니까? 하나님도 우리 피곤한 사정을 잘 아시는데...“  ”기도하면 하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니 성경을 볼 필요가 어디 있는가? 기도만 하면 된다“ 라고 하는 요즘 소위 Contemplative Meditation 을 주장하는 영성훈련가들의 말, “찬송가는 너무 진부하고 장송곡 같으니 세상에서 부르는 템포가 빠르고 신나는 음악으로 찬송가를 대체하자“는 퇴폐한 사이비 목사들, 이 모든 일들이 교회를 영적 수면으로 빠져 들게 합니다.

                                              교회는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영적 생활이 침체해서는 온갖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요즘은 목회자의 말이라고 비판없이 믿으면 큰 낭패를 당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너무도 성경을 왜곡하는 분들이 많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제대로 하지도 않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면 거짓말을 가끔하게 되고 이들은 주께서 피로 사신 성도들에게 독약을 먹이는 결과가 됩니다. 그래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신앙생활하기가 어럽다는 것입니다. 어떤 여 성도님의 말대로 목사마다 다른 소리를 하니 누구의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성경을 체계있게 공부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통달하면 누구의 말이 진리인지 자연히 분간하게 됩니다. 문제는 성경공부나 요리문답을 등한히 하는 타성에 젖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타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II. 죽은 교회를 향한 책망
                                                 죽은 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은 대단합니다.  “만일 회개하고 일깨지 아니하면 주님이 도적 같이 임하신다” 고 했습니다. “도적같이 임” 하는 것은 칭찬하기 위함이 아니라 심판 하시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믿는 자에게는 도적같이 임하지 못한다” 고 살전 5:4에 말합니다. 그러나 벧후 3:10에는 “도적같이 임한다” 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성경구절을 놓고 서로 혼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 해결은 간단합니다. 잘 믿는 자에게는 도적같이 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깨어 주님의 오심을 고대하고 있으니 도적같이 임할 수 없습니다.  방심하고 세상의 연락에 취해 있는 자에게는 도적같이 임합니다.  

                                              여기 본문에서 사데교회를 향하여 책망하는 말씀 중에 “도적같이 임한다” 는 말은 심판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에 이르게 됩니다. 요즘 교회에는 “심판” 이란 말이나 “지옥” 이란 말을 강대상에서 들어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청교도의 신학에서는 지옥과 천당의 개념이 뚜렷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을 모릅니다. 하나님은 절대 거룩한 분이고 그래서 죄를 참지를 못하는 분임을 설교하는 목사도 드물고 그런 설교를 듣는다고 해도 예배를 마치고 나면 모두 잊어버리고 맙니다. 세상에 동화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가르치기를,  “본질적인 것은 간직하고 지엽적인 것은 문화에 동화한다” 고 말하지만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지엽적입니까?  하나님의 법가운데는 casuistic law (사례법) 이 있고 apodictic law (기본법) 이 있습니다. 사례법은 어떤 사건 중심으로 그 사건에만 해당되는 법입니다. 가령 남의 양을 도적질하면 4배가 갚아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양을 도적질 한 경우에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또 민사법이니 각 나라마다 헌법에 참조는 하겠지만 지금도 그대로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신정국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주신 민사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란 말이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말라“ 라는 말은 시대를 초월하여 어느 때 이건 모든 사람, 믿는 사람이건 안 믿는 사람이건 모든 인류가 지켜야할 기본 법입니다.

                                              또한 성경을 해석할 때 관습 (Custom) 이 있고 원칙(Principle)이 있습니다. 원칙과 관습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가령 집집마다 외부 손님을 맞으면 발을 씻어주는 것은 당시 Palestine 에 국한된 관습이지 그것이 시대나 문화를 초월해서 항상 남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라“(요 4:24) 는 말은 그런 관습법이 아닙니다. 원칙 (Principle) 입니다.  원칙의 문제는 타협이 있을 수 없고 어떤 이유로든지 그 원칙은 변개될 수 없습니다.

                                              그러하다면 예배의 어느 부분이 ”진수“ 이고 어느 부분이 ”지엽“ 적입니까?  대부분 교회가 음악에 대해서는 자유하다고 생각하지만 예배시의 음악은 예배의 일부가 아닙니까?  예배란 설교만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예배 전체 요소를 모두 내포합니다. 기원, 묵도, 설교, 창양, 찬송, 헌금, 성례식, 축도 어느 하나 지엽적인 것이 없습니다. 모두 진수이며 필수입니다. 지엽적인 것을 말하려면 예배 장소와 예배 시간 같은 것일 것입니다. 이것들은 우리들 마음대로 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당회에서 결정하는 대로 시행하면 될 것입니다만 개혁주의신학은 예배를 성경적으로 드리는 것을 가장 중요시 합니다.  

                                              요즘 기독교 교계가 타락하고 성직자가 타락하여 남의 웃음꺼리가 되어 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예배를 가볍게 생각하고 사람의 생각대로 드리기 때문입니다. 교회마다 극장으로 변해 갑니다. 이유는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예배는 수은자 중심이 아닙니다. 예배는 항상 시은자이신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의 대상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방법은 신령과 진정으로 거룩하게 예배하는 길이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말은 영적 예배로 성경대로 예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데 교회는 나름대로 그들도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렸고 또 설교도 했을 것이고 성례식도, 시편을 노래하며 찬미도 불렀을 줄 압니다. 그러나 주님은 책망했는데 그 책망은 가장 가혹한 책망으로 “도적같이 임하겠다” 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도적 같이 임하여 무엇을 하신다는 말인가요? 심판하신다는 말입니다. 아주 무서운 말입니다.


                                              III  교회가  살려면
                                                  죽은 사데 교회가 살 길은 없을까요?  사는 길은 회개하는 길입니다. 본문은 회개하라고 가르칩니다. 흰 옷을 입으라고 합니다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유혹을 이기는 자 신앙을 지키는 자는 흰옷을 입을 것이며 생명책에서 흐리지 않으시겠다고 신실하게 약속하십니다. 회개 운동입니다. 오늘의 교계에는 회개 운동은 거의 없고 대개 무슨 부흥운동이니 영성운동뿐입니다. Rick Warren 목사의 책에는 “회개” 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 뿐 만 아닙니다. 요새 나오는 모든 best seller 기독교 서적은 하나같이 현세 중심이고 현세의 성공중심입니다. 중고생들이 많이 보고 있는 “Secret ” 이라는 책도 모두 예수를 이용하여 인생에 성공하는 법을 가르쳐주려는 내용일색 입니다.  이런 책들이 청소년들의 영혼을 병들게 해도 교회의 목회자들은 오히려 이런 서적을 장려합니다. 이것이 퇴폐한 현대의 교회의 현주소입니다.

                                              교회가 살려면 몇가지 방법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깨어야 합니다. 깨어 있다는 말은 성경 교리에 밝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단이나 사이비 기독교가 침투할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개혁주의 신앙이 철저하게 전파되어야 합니다. 성경과 함께 개혁주의 신조들을 읽어야 합니다.  체계적인 성경공부는 필수입니다. 혼자서 공부하는 것보다는 믿을만한 개혁주의 전도자들과 같이 공부하면 좋을 것입니다.

                                              둘째, 성경대로 살아야 합니다. 성경대로 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율법주의” 라고 매도합니다. 어느 나라의 국민이건 헌법을 지킵니다. 천국 시민은 하나님의 법인 성경말씀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은혜를 아는 것은 율법을 아는데서 출발합니다. 율법을 모르고 은혜를 알 수 없습니다. 율법의 목적은 그것들을 문자 그대로 지켜서 구원을 얻도록 제정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목적이 여럿 있지만 가장 중요한 골자는 첫째, 율법을 통해서 내가 죄인된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니 율법은 내가 죄인된 것을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둘째로, 율법의 목적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합니다. 내가 다 지키지 못할 율법을 내 대신 완전하게 십자가상에서 그의 능동적 순종으로 모두 지켜주신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율법의 목적은 우리 생활의 지침입니다. 우리가 천국 시민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표준과 규범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율법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복음 14장에 15, 21, 23, 24 절 등에서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따르는 자요 내 제자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폐기론자” (antinomian) 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구원을 얻었으니 이제는 율법이 필요 없다고 가르치는데 이는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혼동한 것입니다.

                                              셋 째로, 세상에 동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달나라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에 동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즉 세상 사람들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자칫 성도는 세상의 물결 따라 흘러가기 쉽습니다. 실제에 있어서 오늘 교회가 얼마나 세상에 물들어 있는가를 보십시오. 교회에 다방을 차려 놓는 교회도 있습니다. 예배는 세상의 풍속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열린 예배” 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뉴스에는 시카고에 있는 Willow Creek 교회에서는 그간 열린 예배를 실험해 보았는데 이제는 별로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 “Christianity Today” 잡지가 보도합니다.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질이 문제인데 바로 본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벗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의 일을 해야 하며 절대로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넷째로. “흰옷을 입으라” 고 본문에서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옷“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세 가지 직분을 가지고 계십니다. 제사장직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제사장 직입니다. 그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 그리스도는 선지자 직분과 왕의 직분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직분을 제대로 가르치는 교회도 드뭅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는 주님의 세 가지 직분을 모두 믿는 것입니다.  

                                              말씀을 등한히 하면 주님의 선지자 직분을 믿지 않는 것이요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주님의 왕권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덧입고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을 입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죄의 가리움을 받았습니다. 기독교는 구약부터 모두 “가리움, cover" 의 종교입니다. 아담이 범죄하니 짐승의 가죽으로 몸을 가리었습니다. 속죄소도 백성의 죄를 가리는 목적입니다. 속죄일의 희생양도 백성의 죄를 그에게 짊어지게 하여 죄를 가리는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흰 옷을 입을 때 주님의 책망을 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의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덧입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살아 있는 교회”라는 말을 들게 될 것입니다.


                                              결론
                                              오늘 계시록 3:1-6 말씀을 통해서 왜 사데 교회를 주님이 “죽은 교회” 라고 하셨는지 알아보았습니다.   사대 교회는 형식만 있고 진액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실속이 없는 형식적인 교회여서 책망을 받았습니다.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도 된 줄로 착각했던 교회여서 책망을 받았습니다.  교리가 없고 신앙생활에 열매가 없는 교회라서 주님으로부터 “당장 심판하시게다”는 혹독한 책망을 들었던 교회입니다. 이것이 어찌 2000년 전 소아세아의 적은 교회 였던 사데교회에만 국한된 말씀이겠습니까?  말세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잘못된 신앙노선을 걷고 있는 현대교회를 향한 우리 주님의 책망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떠합니까? 주님에게 책망 받을 자리에 있지나 않은지요? 주일마다 교회에 출석한다고 “그리스챤” 이라고 자부하지 마십시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요리문답서 제61문에 보면, “복음을 듣고 교회에 나가면 모두 구원을 얻는가?” 라고 질문하는데 그에 대한 대답은 “복음을 듣고 교회에 나가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고 무형교회에 속한 사람만 구원을 얻는다” 는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은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주님의 책망의 대상입니다. 바른 개혁신앙을 지켜 나갑시다. 사데 교회를 향한 책망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합시다. 주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아 가십시다. -죽은 교회, 끝-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교회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들 

                                               

                                              얼마 전 제가 쓴 글에 댓글이 달렸습니다. 반가운 마음으로 읽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악플'이었습니다. 댓글을 쓴 분은 분명 뭔가를 아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적어도 나름대로 성경을 읽었고 해석하고 최소한 설교를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댓글의 내용은 참 신랄했습니다. 읽을수록 댓글을 단 사람의 마음이 참 날카롭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우월감에서 나온 댓글이었습니다. 분명 댓글을 단 사람은 제가 쓴 글이 유치하거나 조잡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잠시 동안이었지만 제 마음은 아팠습니다. 제 글이 마음에 들지 않고 유치하게 느껴졌다면 좀더 어른스런 방법으로 지적해주고 조언해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온라인상의 교제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기독교 특유의 특성으로 자리 잡은 오만이 실려 있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에는 그런 종류의 폭력이 난무합니다. 자신이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오만이 다른 이들을 향한 판단과 정죄로 이어집니다. 분명 그 사람의 생각은 무언가 옳은 것을 위해 자신이 일조를 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개혁을 위해 혹은 순수함을 유지하기 위한 당연한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칼로 찌르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느끼게 합니다. 그것이 치명적인 폭력이라는 것을 당사자는 여간해서는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경건의 폭력'이라고 표현한 어떤 분의 글을 읽고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새벽기도에 오래도록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한 집사님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머릿속에는 새벽기도에 빠진 목사와 장로들의 빠진 횟수와 날자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일조를 정확하게 꼬박꼬박하는 신자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머릿속에는 십일조을 빼먹거나 제대로 하지 않는 동료 신자들의 목록이 빼곡히 들어 있습니다.

                                               

                                              40일 금식기도를 다녀온 권사님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시선에는 '너는 왜 금식기도를 하지 않느냐'는 무언의 질타가 섞여 있습니다. 크고 건강한 교회를 다니는 성도가 무섭습니다. 그분의 말투에는 작고 별 볼일 없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이 넘쳐납니다. 무언가를 깨달은 '안티'가 무섭습니다. 그분의 몸짓에는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들을 향한 손가락질이 배어있습니다.

                                               

                                              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신학자가 무섭습니다. 그분 앞에 서면 모든 사람들이 종류별로 차곡차곡 분류되어 버리고 맙니다. 성도수가 제법 되는 교회 목사들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권위와 무게가 엄청난 압박으로 성도들을 찌그러트립니다.

                                               

                                              사실 이런 모습은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는 오래 된 전통입니다. 너무도 경건이 몸에 배어 스스로 자신들을 구별된 존재라고 여겼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도 모자라 울타리 율법까지 만들어 놓고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심지어는 음식에 집어넣는 양념까지 십분의 일을 구분하여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신앙의 일상화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과시'의 일상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율법과 경건이 종교의 광기로 치달았습니다. 그래서 수틀리면 사람들을 돌로 쳐 죽이고자 하는 무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의 전해지는 많은 이야기들 중 하나입니다. 프란체스코의 제자들이 스승과 함께 40일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하루를 남겨 놓은 39일째 되는 날 젊은 제자 하나가 맛있는 스프 냄새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한 숟가락을 입에 떠 넣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함께 금식을 하던 제자들은 눈을 부릅뜨고 그 젊은 제자를 노려보았습니다.

                                               

                                              그 눈길 속에는 유혹에 넘어간 불쌍한 영혼을 향한 애처로움이 아니라 분노에 찬 정죄의 따가운 시선이 들어 있었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았던 제자들은 유혹에 넘어간 젊은 제자를 엄하게 꾸짖어주기를 바라며 스승, 프란체스코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프란체스코는 말없이 수저를 집어 들더니 젊은 제자가 먹었던 스프를 천천히 떠먹기 시작했습니다. 경악의 눈길로 스승을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프란체스코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우리가 금식을 하며 기도를 드리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의 인격을 닮고 그분의 성품을 본받아 서로가 서로를 참으며 사랑하며 아끼자는 것입니다. 저 젊은이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스프를 떠먹은 것은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를 정죄하고 배척하는 여러분들이야말로 지금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굶으면서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는 실컷 먹고 사랑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경건의 폭력이 어떤 것인가를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39일 동안 무사히 금식을 마친 프란체스코의 제자들에게서 그들의 엄격한 경건과 돈독한 신앙이 오히려 형제를 짓밟고 자신들의 영성마저 망가트리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 주변에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율법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고 다른 이들을 욕하고 질타하면서 그보다 더 큰 사랑의 계명을 어기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오늘 우리의 모습 속에서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도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仁) 과 신(信)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선종(禪宗)에서는 깨달음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데, 그것을 잘못할 수 있음과 동일한 것으로 봅니다. 참으로 귀중한 생각입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잘못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아니 '잘못할 수 있음'이야말로 인간의 인간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욕망과 고통으로 가득 찬 어리석은 범부(凡夫)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로 긍휼하게 여기고 잘못했을 때에는 그 잘못을 꾸짖고 정죄하기보다는 잘못을 깨닫고 바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인내하면서 기다려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경건은 겸손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경건과 믿음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타와 거부가 될 것이며 무엇보다 폭력이 되어 다른 사람의 영혼을 상하게 하는 끔찍한 범죄가 될 것입니다.

                                               

                                              누구의 이야기랄 것도 없이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더구나 오늘날처럼 자아가 모든 것의 중심이 되도록 부추기는 이 세상 속에서 신앙생활을 잘해보겠다는 사람들이 쉽게 빠지게 되는 함정입니다.

                                               

                                              프란체스코의 금식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사순절을 맞아 프란체스코는 사람이 살지 않는 섬에 들어가 금식하기로 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빵 두 덩이를 가지고 섬으로 건너갔습니다. 사순절 기간이 끝나 다시 배를 타고 갔을 때 프란체스코는 한 덩이 반을 들고 있었습니다. 교만해지지 않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부족함을 잊지 않기 위해 금식 기간 동안 빵 반쪽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가 허기를 참지 못해 빵 반쪽을 먹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가 허문 것은 자신의 완벽함이었습니다. 언제라도 잘못 할 수 있는 인간임을 잊지 않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사랑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 인격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 때로 종교에 실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떠실는지요? 프란체스코의 빵 반쪽을 기억하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자신의 완벽함을 버리고, 다른 이의 영혼을 상하게 할 수 있는 경건의 폭력을 제거할 수 있다면 우리들의 교회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평화로운 곳이 될 것입니다.

                                               

                                              댓글을 통해 제게 기꺼이 빵 반쪽이 되어주신 형제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저자: 최태선 목사/ 어지니교회 

                                              출처: 뉴스엔조이
                                              생명나무 쉼터/한아름님


                                              알미니안주의의 ‘조건적 선택’에는 세 가지 문제점이 있다 / 조엘 비키

                                               첫째로, 조건적 선택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근본적인 선택을 인식하지 못한다. 성경의 선택 교리는 땅의 기초가 세워지기 아주 오래전에 설계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부를 자유롭게 선택하신다는 교리이다(계7:9-17).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구원 얻을 방편을 마련해 놓으셨다(엡1:4,5). 하나님은 그들을 구속하고 믿음과 회개로 이끌어 의롭다 하시고, 거룩하게 하고 보존하시며, 그 택한 자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또 그를 통하여 영화롭게 하신다(롬8:28-39,살후2:13,14,딤후1:9,10). 그리고 불신앙을 고집하는 자들을 죄 가운데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신다(롬9장).

                                               

                                              선택은 무조건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 안에 있는 어떤 내재적인 선함 때문에(고전1:27-31), 혹은 그들이 언젠가는 믿을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로, 조건적인 선택은 우리의 전적 타락과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의 범위를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영광을 가로채고 만다. 반면에 무조건적인 선택은 인간의 전적 타락 교리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은혜 교리에서 비롯되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만일 우리가 성경이 말씀하는 바와 같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라면, 우리의 구원은 결코 우리 자신에게서 시작될 수 없다. 우리는 본질상 ‘허물과 죄로 죽었던’(엡2:1)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택자를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를 고난과 죽음에 내주셨던, 주권적으로 선택하시며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다. 왜 그런가? 우리가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진노를 받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택’이 없다면 구원도 없다.

                                               

                                              스펼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나는 인간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죄와 저주를 받아야 하며, 구원은 그 시작에서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발견한다. 하나님께서는 멸망받을 자를 멸망받도록 선택하신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기로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셋째로, 조건적 선택은 실제로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다. 조건적 선택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타락한 인간 존재에 구원의 기초를 두기 때문에 결국 인간을 파멸로 이끌게 되는 것이다. 반면 무조건적인 선택은 인간을 파멸로 이끌지 않고, 천국에 있어야 할 것 같은 사람들을 천국에서 물리치시고 천국에 가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 천국문을 열어 놓으시는 하나님의 복이다. 그러므로 경이로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어떤 죄인들을 의롭게 거절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단 한사람의 죄인이라도 구원하신다는 사실이다.

                                               

                                              어거스터스 스트롱, “우리는 하나님께서 너무나 적은 수의 사람을 구원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불의하시다고 건방지게 비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더 찬미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덕이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불의와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을 선택하신다는 이 신비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존 라일, “자기 자신의 마음을 진정으로 아는 신자는 선택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미하게 될 것이다.”

                                               

                                              - 조엘 비키, 『칼빈주의』, pp 121-123

                                               

                                               

                                              출처: http://blog.daum.net/kds2012/245

                                              생명나무 쉼터/한아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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