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 그리기

신석환 ㆍ 2014/02/27 ㆍ추천: 0      

목회 생활에 연륜이 더해질수록 말씀을 준비하고 전하기가 쉽지 않다. 이제는 전과 달리 각종 매체를 통해 설교가 얼마나 빈번히 유통되는지 설교자인 나 자신도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그리고 설교의 텍스트가 성경이다 보니 이 설교가 저 설교 같고 이 말씀이 저 말씀과 같을 때도 적지 않고 예화 역시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중복되기 십상이다.

그렇게 설교가 엇비슷하다보니 교회를 성장시키는 수단으로의 설교도 한 물 간듯하고 전통적 설교의 패턴에 인간적 메스를 가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언필칭 설교의 또 다른 해석이라든지 설교의 신출(神出)한 능력자나 귀몰(鬼沒)한 영력의 대가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현상을 싸잡아 비난한다는 것도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어차피 기독교 진리의 본질이 성령의 역사에 있으니.

그러나 주님은 말세의 현상 중에 하나가 믿음의 내용과는 관계없는 믿음의 형식을 지적하셨고 여기저기서 예수가 나타나고 신비로운 도사들과 요란한 이단사설을 많이 보게 될 거라고 언급하셨다.

한마디로 영적 능력을 가장한 속빈강정들이 판을 친다는 예언이다. 말씀을 중심으로 한 순수한 복음 전파에 식상한 시대적 요청이 이런 증빙할 수 없는 능력을 횡행시키고 있다 하여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지나친 영성의 강조가 빚는 부작용이다. 특히 우리 한국 사람은 다분히 감정적이어서 밋밋한 설교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부흥회 강사도 웃기고 울려야 인기가 있고 간증도 막장 드라마 뺨칠 정도가 아니면 문안도 못 드린다. 그러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진실인지 분간이 안 가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옛날 얘기 중에 재미난 얘기가 있다. 제나라 왕이 유명 화공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림을 그릴 때 어떤 그림이 제일 어려운가?” 화공이 대답했다. “인물화도 어렵고 개나 말도 어렵습니다.”  “그러면 무슨 그림이 제일 쉬운가?” 이 질문에 화공이 웃으며 대답했다. “제일 쉬운 그림은 도깨비나 귀신을 그리는 것입니다.

사람의 얼굴은 모르는 이가 없고 개나 말 역시 사람이 그 구조를 잘 알뿐만 아니라 조석으로 보기 때문에 똑같이 그리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귀신은 형체도 없고 뚜렷하게 본 사람도 없으므로 아무렇게나 그려도 사람들은 그것을 따지지 않고 믿습니다.”  

이 말에서 “귀매최이(鬼魅最易)”라는 말이 나왔다. 말씀을 전하는 것은 누구나 잘 알 수 있는 진리를 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보편적이고 평이하다 하여 지나친 조미료를 첨가해서는 안 될 일이다. 더 나아가 사람을 일시적으로 흥분시키는 “능력” 쏠림 현상을 경계해야 마땅하다. 양식도 일용할 양식이 구할 축복의 기본이며 요체이기 때문이다.  

부활의새빛교회 신석환목사

출처: USA아멘넷

습관적 탐욕에 대한 고찰(존 오웬)

질문 1 : 누군가의 죄나 탐욕이 습성적이거나 지배적이라고 간주되는 경우는 언제입니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나는 다음의 전제들을 밝혀야만 한다.

1. 모든 탐욕들과 타락은 아무리 최악의 경우라고 할지라도 그 근원과 거주지는 바로 우리의 본성 안에 있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14)라고 성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특별한 욕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나가 경험하듯이 그 욕심의 근원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안에 있습니다. 이러한 탐욕은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서 나오며, 이 본성은 모든 사람가운데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회심한 후라 할지라도 이런 욕심은 사람의 본성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들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고 편지를 썼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육신을 쫓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육신의 일입니다. 육신의 일은 무엇입니까? “곧 간음과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갈 5:19-21)입니다. 육신은 신앙인들 가운데서도 여전히 이렇게 추악한 것들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진리는 악한 시대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빛으로 강조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과 모든 사람에게 임하게 될 커다란 재앙과 황폐함과 멸망을 예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눅 21:3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간절하게 우리에게 권고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너희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21:34) 분명하게, 주님께서는 죄악이 난무하는 그 때가 다가올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최고의 것은 바로 죄의 심각성과 악함을 깨닫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방탕함과 술취함에 빠지고, 그런 문제와 괴로움 가운데 삶을 걱정하리라고 어느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지혜의 하나님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그 일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임하게 될지 다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크리스챤이라고 신앙고백을 하는 것은 멸망이 문 앞에 누워있는 것과 같이 육적이고 자극적인 죄악들을 범하게 되는 위험에 처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날에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2. 우리 안에 거하는 죄의 근원과 뿌리는 우리를 유혹하여 모든 악한 일을 행하도록 시도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서 우리의 영혼과 또 다른 것들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거룩한 질투심을 자극할 것입니다.

3. 만약 죄가 우리 안에 거하여 항상 모든 악한 일들을 하도록 부추긴다면, 죄를 극복하고 정욕과 감정을 억제하고 극복하는 것은 날마다 우리가 해야만 하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의무가 됩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라”(골 3:3) 축복받은 지위와 신분! 온 세상에서 이보다 더 위대한 축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대한 진리로 인해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의무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그것이 무엇입니까? “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 3:5) 죄를 벗어버리는 것은 성숙한 성도에게 주어진 의무입니다.

4. 개개의 죄가 특별한 우월함과 지배력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면 그것은 습성적인 지위를 갖지 못합니다. 우리들의 죄성은 보편적으로 동등하게 타락되었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죄들은 특별한 우월함으로 말미암아 지배력을 얻게 됩니다. 지금 이 우월함이 무엇인지 모두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먼저 현저하게 나타나는 2가지를 지목할 것입니다.

우리가 타고난 체질적인 성향이 특정한 죄악들에 특정한 우월함과 지배력을 가져다 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질투심이 강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쉽게 분노하거나 격정(激情)하는 성향이 강하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는 탐식과 술취함같은 육욕의 죄악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질을 죄에 대한 핑계와 구실로 삼으려는 악마의 거짓말입니다. 어떤 이는 “나는 천성이 성미가 급하고 화를 잘 내는 체질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나는 본래 낙천적이고 친구들을 사랑한다”고 말을 합니다. 당신의 기질은 당신의 죄를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죄에 대한 구실이나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더 깊이 다룰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가 타고난 체질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찌 그 은혜를 자랑스러워 하겠습니까. 늑대나 사자도, 곰이나 원숭이도 독사의 본성마저도 양과 같이 변화시켜 주신다는 것이 바로 위대한 약속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타고난 기질이나 체질에서 오는 삶의 습성적 패턴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은혜는 결코 그런 일들을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습성적인 원리로 인하여 은혜가 천성적이고 체질적인 성향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저는 그것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외적인 유인(誘因) 역시 특정한 죄에 대해 특별한 우월함을 가져다 줍니다. 어떤 죄들은 교육을 통해 우월함을 얻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아이들을 거만하고 오만해지도록 교육한다면, 그것은 그들 자신의 욕심이 그들을 불사르고 파괴할 때까지 바짝 마른 연료를 쌓고 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또한 삶 속에서 상이한 사회적 환경들 역시 특별한 죄악들을 선동하고 자극합니다.
이 같은 전제를 토대로 이제 질문에 대답하겠습니다.

누군가의 죄나 탐욕들이 습성적이고 지배적이라고 간주되는 경우는 언제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이여, 나는 우리 주님과 그의 사도들이 우리에게 인내하며 극복하라고 경고하셨던 가장 추악하고 수치스러운 탐욕들이 우리 마음과 생각 속에서 활동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특정한 욕심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습성적으로 널리 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외적인 결과나 효과를 수반하지는 못합니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생각과 영혼속에 빈번하게 그리고 아주 강하게 특별한 욕망과 타락이 밀어 닥쳐와서 괴로워하고 있다면, 그 사실 자체가 특별한 욕망이나 혹은 타락이 습성화, 혹은 지배적인 것이 되었음을 증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이것은 단지 유혹이 가져온 힘겨운 순간에 지날 수도 있습니다. 유혹과 결합하여 내재하고 있는 죄는 당신을 죄의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 끊임없이 강력하고 힘겨운 투쟁을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당신이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습성적인 죄의 지배 가운데 거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일반적인 유혹일 뿐인지 당신은 어떻게 구별하겠습니까? 만약 다음의 세 가지 사항이 옳다면 당신은 습성적인 죄에 빠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1. 만약 당신이 죄로 인하여 더럽혀지기보다는 더 슬퍼진다면, 그것은 단순한 유혹이지 습관적인 탐욕은 아닙니다.
이런 경우에, 죄와 은혜 모두 자신의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정반대입니다.
은혜의 목적은 영혼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고, 죄의 목적은 영혼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죄를 인정하고, 죄에 동의하게 되면 영혼은 타락하고 맙니다. 생각속에서만 일어나는 활동적인 유혹은 사람을 타락시키지 못합니다. 단지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를 동의하게 만드는 유혹만이 ‘타락’하게 만듭니다.
죄에 대한 동의가 본래 얻어졌든지 오랜 기간 동안의 유혹이후에 얻어졌든지 간에, 그것은 죄로 자신의 영혼을 더럽히겠다는 동의인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죄로 인해 더럽혀지기보다는 더 슬퍼하고 애통해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죄가 습성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유혹은 길고도, 피곤하고, 절대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유혹에 동의하기를 거절하는 한, 영혼은 유혹의 공격으로부터 순결함과 거룩함을 지킬 수 있습니다.

2. 만약 당신이 진심으로 특정한 죄를 가장 큰 도덕적인 적으로 간주할 수 있다면, 이것은 죄를 바라보는 당신의 관점이 되며, 당신은 습성적인 죄의 지배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유혹의 힘이 미치는 범위아래 있는 것일 뿐입니다.

3. 만약 당신이 죄에 대한 전쟁과 투쟁을 끊임없이 그리고 특별히 개인적인 기도와 중보기도라는 두 가지의 의무가운데서 계속해 나간다면, 영혼은 이러한 유혹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며, 죄는 분명히 정복될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 은혜가운데서도 이러한 갈등을 계속해 나간다면, 나는 그가 유혹을 받는 것 자체가 죄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제 언제 죄가 습성적으로 지배적인 것이 되는지를 보여줄 것입니다.
당신의 삶 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참이라면 특별한 죄가 당신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당신이 죄로 알고 있는 것들을 선택하거나 기꺼이 맞아들인다면 그것은 습성적인 죄입니다. 정직한 모든 크리스챤들은 어떤 경우의 일들이 우리 안에 죄를 자극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완전히 악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죄 자체를 위해 죄를 선택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떤 일들이 특별한 타락의 행위들을 휘젓고, 흥분시키고, 불러일으키는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꺼이 죄악된 일들로 둘러 쌓여 지는 것을 선택하게 될 때, 우리는 죄의 지배아래 놓여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는 모든 일들을 거절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죄의 세력을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을 절대로 가질 수 없습니다.

2. 당신이 특별한 죄에 대한 논쟁이 힘을 잃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면, 죄는 습성화된 것입니다. 특별한 죄의 영향력 아래 있는 모든 크리스챤은 그런 타락 속에 계속 거함으로 인한 파멸과 두려움과 위험과 수치심으로부터, 생각 속에 떠오르게 되는 논쟁들을 처음에 발견하게 됩니다. 당신의 이런 논쟁이, 힘을 잃어가고 당신의 삶 가운데서 이전에 가졌던 만큼의 영양력을 행사할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면, 죄가 이미 습성화된 것임을 두려워하십시오.

3. 당신이 유혹이나 죄에 빠질 수 있는 기회가 올 때마다 한번도 빼놓지 않고 죄 가운데 거하게 된다면 그 죄는 습성적인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업가가 할 수 있을 때마다 사기를 친다면, 그는 마음속에 탐욕을 갖게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이 술을 마실 수 있는 기회가 올 때마다 술을 마신다면, 그것은 습성적인 타락의 징표가 됩니다.

4. 당신의 행동의 동기가 새로워지는 은혜 안에 있기보다는 기껏해야 제한되거나 구속된 은혜에 의한 것이 전부라면, 그 죄는 습성적인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날마다 새로워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끔 유혹의 구렁텅이 아래로 미끄러질 때, 하나님은 은혜를 제한하시거나 구속하심으로, 죄에 대한 위험과 수치스러움과 겸손함을 가르치시고, 우리를 질서 안에서 지켜 나가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님께서 마음속에 주시는 내적인 새로워짐보다는 외적인 상황들을 의지하여 자신을 죄에서 지켜나가려 합니다. 만약 당신이 특별한 죄로부터 당신을 지켜주는 유일한 것이, 하나님의 제한되고 구속된 은혜 때문에, 외적인 상황이나 조건들이 전부임을 발견하게 되거나, 날마다 새로워지는 은혜로 인하여 변화되고 거듭나고자하는 내적인 바램이 없다면, 그것은 죄가 당신에게 완벽한 승리를 거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당신은 죄에 대한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죄의 위험과 죽음과 지옥에 대한 아무런 두려움 없이 당신 삶의 목적을 더럽힌 것입니다. 당신은 더 이상 새로워지는 은혜 즉, 사랑을 통한 믿음으로 행동하기보다는 제한되고 구속된 은혜로 인하여 죄의 사슬에 묶이게 됩니다. 이것은 불신자들의 삶에 대한 사고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영적인 지혜를 가진 자는 그 자신을 살피고 점검하며, 자신의 행동의 동기가 무엇인지 발견합니다. 그것이 새로워지는 은혜인지 아니면 제한되고 금지된 은혜인지 말입니다.

5. 우리의 의지가 주권적으로 죄와 관련되어 질 때, 그 죄는 습성적인 것입니다. 죄는 생각을 혼란시킬 수고 있고 감정의 무질서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지배력을 갖지는 못합니다. 다만 그것이 우리의 의지를 노예화시킬 때, 죄는 우리의 주인이 됩니다.

질문 2 : 습성적인 죄, 탐욕, 타락이 어떻게 신앙인들의 삶 속에서 구원의 은혜의 능력과 양립할 수 있습니까?

답변 : 이것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답변과 관련된 내용의 난해함 때문에 정확한 대답을 내놓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영혼에 대한 현재적이고 또한 영원적인 지위와 관련되어지는 그런 문제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매우 신중해야만 합니다.

1. 먼저 이런 일들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 모든 믿는 자들의 의무입니다. 우리는 습성적인 죄라는 짐을 덧붙이지 않고도, 우리가 누리게 될 영원한 지위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과 문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허물과 죄를 깨닫고, 용서와 죄 씻음과 정결함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가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 19:12) 그러나 그는 특별히 우러나오는 양심에서 자신의 죄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시 19:13) 같은 맥락에서, 사도바울 역시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히 12:15)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모든 죄 가운데는 쓴 뿌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형제들을 권하노니 여러분들의 영혼과 나의 영혼을 위해 이런 일들이 절대로 당신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2. 구원과 습성적인 죄의 양립성에 대해 어떠한 논쟁이 오간다 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것이 평화와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은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습성적인 죄를 따라 사는 누군가에게 존재하는 평화가 거짓된 평화인지 말하는 것은 까다로운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죄의 지배가운데 살아가는 순간 내내 어느 날 한 순간에 하나님께 자신들을 받아주실 것이라는 멋진 기대와 함께 은혜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들은 그 마지막 날은 자신들에게 유일할 것이며, 그 날은 적절한 시기나 혹 자신들이 편한 시기에 임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습성적인 죄악들을 경험하는 자는 믿음에서 되돌아섭니다. 누군가 크리스챤이 되겠다고 고백을 하고 자신의 삶 가운데서 끊임없이 신실한 삶의 모습을 드러낸다고 해도, 그가 하나님 안에서 새로워지고 성숙하기 이전의 모습이나 자신의 타고난 체질이나 유혹 등으로 인하여 탐욕이 그를 지배하게 될 때, 그 모든 것은 처음으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니라"(히 10:38)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기쁘지 아니한 일이 어떻게 우리에게 평화가 되겠습니까? 당신의 기쁨의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십시오. 만약 당신이 습성적인 죄 아래 거할 때에도 평화를 누렸다고 하면, 그 평화안에서는 더 이상 믿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고난과 고통의 순간에 당신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3. 만약 습성적인 죄가 은혜의 진리와 모순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분명 은혜의 참된 역사(예배)와 모순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여전히 주님 앞에서 신성한 의무들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습성적인 죄는 그것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습성적인 죄 가운데 머물러 있는 한 이런 의무들 가운데는 은혜의 참 역사(예배)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습성적인 죄 가운데 빠진 사람들이 그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하나님께 보상하고자 혹 그들의 양심을 잠재우고자 여러 가지의 종교적인 의무들을 감당하는 것이 종종 발견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 가운데 만연한 죄악들의 가리개로써 사람들의 눈속임을 위해 이런 경건한 것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도도 많이 할 것이며, 설교하는 곳마다 따라 다닐 것이며 다른 의무들에도 참여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의무들 가운데는 은혜의 참된 역사(예배)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죄가 우리 삶 속에서 습성화되고, 은혜는 언제까지 하나님이 주시는 방법을 통해 우리를 실제적으로 새롭게 하도록 제한되고 구속되어 지는가"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습성적인 죄의 능력아래 있다면, 기도와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을 잃게 될까 두려워하십시오. 왜냐하면 습성적인 죄안에서는 절대로 참된 은혜의 역사(예배)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4. 어떤 사람의 영적 생활이 기절한 상태라면 그 영의 사람은 아직 죽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신앙인들에게는 삶의 어떤 징표도 나타나지 않고 영적 착란상태가 닥칠 수도 있습니다. 그때도 아직 죽은 것은 아닙니다. 습성적인 죄를 통하여 영적인 삶이 기절한 상태에 있다는 모든 증거를 가지고 있을 때라도, 나는 그들의 영혼이 죽었다고 쉽사리 결론짓지 않습니다. 다윗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밧세바와 불륜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죄를 지을 때부터 나단 선지자의 따끔한 지적을 듣고 회개할 때가지 영적인 기절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는 죄에 빠짐으로 영적인 삶을 속여 그의 육신을 가로챈 것입니다.

나는 앞에 언급한 영적 삶에 대한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라고 판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가 영적 삶의 모든 증거와 관련해서 기절한 상태에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 사람이 죽었다고 판단하면 당신은 그에 대해 소홀해질 것이며 분명 그를 떠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그가 기절 상태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그의 삶을 소생시키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5. 실제로 구원과 양립할 수 없는 죄의 습성적인 위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고백했던 사람들에게 닥칠 수 있다고 했던 일입니다. 계속해서 죄의 종노릇하는 것은 진짜 주인이 누구인가를 말해줍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질문 3 : 습성적이고 지배력을 지닌 타락과 죄와 유혹의 능력아래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답변 : 만연된 죄는 우리 삶에서 외적인 치욕과 수치심을 가져올지도 모릅니다. 내적인 평화의 상실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혹 우리가 그리스도의 일 가운데 정말로 참여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하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경우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1. 죄의 위협이 당신의 생각 속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힘쓰십시오. 아무런 위험이 없다고 우리를 설득하는 죄가 얼마나 사소한 것들인지 깨닫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나는 당신이 죄라는 것이 사망과 지옥과 저주 가운데로 이끄는 것임을 명심하고 모든 일에 임하라고 권면합니다. '모든 일이 마지막에는 다 잘 될거야'라는 자기 기만적인 합리화 속에서 안주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위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안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2. 죄로 인한 양심의 짐을 지십시오. 우리의 생각은 죄의 위험을 깨닫는 것에 느립니다. 우리의 양심은 아주 오랫동안 죄의 짐을 지는 것을 너무나도 꺼려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인 죄를 생각해보지도 않고 너무나 쉽게 자신의 상황을 변명하고 합리화시킵니다.

3. 일단 우리가 죄의 위험을 깨닫고, 죄의 짐을 짊어지기로 했다면, 우리는 죄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기 위해 "신음하고"(시 32:3) "부르짖어"(애 3:8)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십니다"(히 2:18) 우리가 "도우신다"라고 번역한 그리스 단어는 멸망해 가려고 하는 사람을 도우려고 달려가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힘들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사단의 올무에서 우리 자신을 건질 수 없음을 깨닫게 될 때, 이것은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4. 당신의 특별한 죄악들에 반하여 당신을 지도하는 성경의 모든 교훈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모든 죄의 위험에 관하여 경고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단지 읽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그 같은 좋은 교훈을 주셨다면, 당신은 그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아야만 하며 그것을 기록하고 그것을 명심하여 절대로 잊지 않도록 해야만 합니다. 궁극적으로, 당신은 그것을 소중하게 여겨야만 합니다.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잠 29:1)

마지막으로, 도움을 주는 또 다른 두 가지의 규칙과 내가 하려고 하는 것들.

1. 죄와의 싸움이 아무리 힘들고 혼란스럽다 할지라도 절대로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당신은 죄의 능력으로 혼란스러워 할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패배했다고, 이젠 모든 것에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죄의 정복과 승리를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2. 모든 죄를 극복하기 위해서 한순간에 전력을 다하지도 않고 만연되어 있는 죄를 극복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익한 것입니다. 당신은 어떠한 장소에서도 순종을 구해야 하며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따라야만 합니다. 당신이 죄와 싸울 때 하나님께서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어떤 영역에서 불순종을 하게 된다면 현재 당신을 지배하고 있는 죄를 철저하게 다루려고 할 때에 너무나 힘겨운 시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규칙을 명심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성령님의 탄식하심으로 인하여 모든 죄악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면, 당신의 마음에 슬픔을 주는 어떠한 죄도 절대로 극복할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선교회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

 

교회사에서 2-3세기를 이단의 춘추전국시대라고 부른다. 그만큼 정통기독교 내에서 교리적인 확립을 이룩하지 못한 때였다는 것을 반증한다. 다행히 교부들과 변증학자들의 공헌과 각종 교회회의들의 결과로 교회는 조금씩 교리적 기반을 다지고 순항의 닻을 올리게 된다. 그런 점에서 4세기는 교회의 빠른 성장기로 본다. 그러나 성장의 후유증은 반드시 병폐를 수반한다. 로마제국은 종착역을 향해 달려갔다. 국경은 게르만족과 고트족과 훈족 등에 의해 서서히 무너지고 제국의 위용은 붕괴되고 있었다. 오히려 붕괴는 국경에서가 아니라 로마라는 중심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400년경, 아일랜드 출신의 한 수도사가 로마를 방문한다. 당시 로마는 모든 수도사들에게 이상향이었고 새로운 예루살렘이었다. 누구든지 로마를 한 번 방문해보고 싶지 않았으랴? 그러나 그 수도사는 큰 충격에 빠졌다. 그의 눈에 비친 로마는 영적으로뿐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도시로 타락해 있었다. 로마는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퇴폐로 물들은 소돔이자 고모라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 젊은 수도사는 고민했다. ‘왜 로마가 이렇게 타락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그 답을 찾기 위해 머리를 싸맸다. 이 수도사가 바로 교회사에서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그 유명한 자유의지의 주창자인 ‘펠라기우스’(Pelagius, 354~418?)이다. 그는 원죄, 그리스도의 구원, 세례 등을 부정한 이른바 ‘펠라기우스주의’의 원조이다.

 

결론적으로 그는 이 모든 원인이 어거스틴(Augustin, 354~430)에 의한 ‘운명론적인 결정론’에 있고, 이로 인해 로마사회가 극도로 퇴폐하고 타락하였다고 진단했다. 그는 어거스틴이 사람들을 무기력하고 무책임하고 나약한 존재로 만들었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 책임은 전혀 없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존하게 만드는 어거스틴의 사상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무엇보다 인간의 책임 있는 행동이 중요함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그의 사상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된다.

 

1)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 인간은 스스로 선과 악을 선택할 충분한 자유의지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

2) 신의 은총이란 단순히 외적인 것에 불과하며 모든 사람에게 원죄가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아담의 죄는 완전히 개인적인 것으로 죄인은 이를 모방할 뿐이다.

3) 인간은 대부분 죄를 짓지만 신앙에 의해 죄를 용서받으면 인간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므로 성령의 능력이 적극적으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니다. 은총은 단지 인간 생활에 도움을 주는 조력자이며 사람의 의지 안에 있는 것이다. 은총의 수락여부는 개인의 의지에 달린 것이다.

 

펠라기우스의 이런 주장은 어거스틴의 은총론을 전부 부정하는 것이었다. 어거스틴은 인간은 완전히 타락하여 자연적인 강태에서는 하나님의 은총과의 어떤 협력도 할 수 없으며 신앙의 촉발도 인간의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한다고 정의했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으로 보았지만 펠라기우스는 정반대로 본 것이다. 그는 412년과 418년에 칼테이지에서 열린 두 차례의 교회회의와 431년 에베소에서 열린 2차 세계교회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 받았다.

 

한편 429년부터 남부 갈리아지역의 일부 수도사들에 의해 어거스틴주의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 일어났다. 수도사 카시아누스, 빈켄티우스, 파우스투스 등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 인간의 노력만으로 충분하다고 한 펠라기우스주의와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어거스틴주의를 절충하여 ‘영혼의 구원에는 은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나 그것을 받아들일지는 첫째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렸다’고 주장하였다. 상호 대척점에 있는 주장들을 절반씩 취했다는 이유로 교회사에선 이들을 ‘반(semi)펠라기우스주의’라 부른다.

 

그들은 특히 어거스틴의 핵심적 교리라고 할 수 있는 예정설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들은 어거스틴의 예정교리는 전도의 목적을 파기하고 도덕적 정신을 약화시키며 사람들을 절망으로 이끈다고 선포했다. 초기엔 예정론만 아니면 그들은 어거스틴의 추종자들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그들은 펠라기우스의 이론을 강하게 질타했다. 펠라기우스의 원죄부정과 자력구원설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원죄란 인간내부에 존재하는 인간을 타락하게 만드는 보편적인 힘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는 이 타락의 힘을 극복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과 행동에 하나님의 은총이 우선 필요하다고 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은 어거스틴을 따랐다. 그렇지만 그들은 어거스틴을 완전히 주장하지 않았다. 타락도 완전 타락이 아니라 부분 타락으로 보았다. 결국 그들이 정리한 결론은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손을 내밀 때 인간 쪽에서도 같이 손을 내밀어 서로 붙잡을 대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른바 ‘신인협력설’이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다.

 

490년 파우스투스가 죽은 뒤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받던 반펠라기우스주의는 중세의 금욕적이고 율법 편중적인 신심의 태도와 융화되어 카톨릭교회 내에서 정착하면서 활발하게 살아나 반펠라기우스주의 후기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6세기 들어 펠릭스 4세 교황(526-530)이 이 사상을 경계하자 세력이 약화되었고 마침내 529년 제2차 오렌지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의 전통은 여전히 죽지 않고 지금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후기에서 추종자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능력을 불어넣는 내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밖에서 들려지는 복음처럼 순수하게 외적인 것으로 보았다. 특히 이들의 핵심은 ‘하나님의 정의’라는 개념이었다. 인간이 자신의 본성과 능력으로 구원을 향하여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공평하시고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구원하지 않으며, 이 선택에서 제외한 사람의 입장에선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분이 아니므로 인간에게도 선택권을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행위구원은 이렇게 해서 다시 살아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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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물랭"이라는 이름의 호텔을 경영하는 분의 글입니다.

우리가 되새겨 볼만한 내용이어서 전달합니다.

프랑스인은 루이 뷔똥을 사지 않는다

 

 

 
 
  
 
▲ 신근수(파리 물랭호텔 대표)
 
서울은 낭비가 너무 심하다.
마치 다른 나라 같다.
처음에는 부럽고, 다음에는 신기하다가,
마지막에는 걱정스럽다.
사람들은 거품이니 금융위기니 불황이니 한다.
그러나 그 거품이 낭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뼈저리게 느끼는지는 알쏭달쏭하다.
영종도 공항 입국 때부터 이를 느낄 수 있다.
공항 면세점이나 레스토랑,
대기실에서는 파리공항보다 배나 더 많은 사람이 일하고 있다.
심지어 환경미화원 수도 두배 많다.
프랑스를 명품의 나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이는 착각이다.
‘루이 뷔똥’ 같은 명품은 일본 대만 홍콩 한국을 위한 수출품이지,
프랑스 자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다.
명품회사들이 발표하는 수출국가 분포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프랑스는 GNP가 한국보다 50% 더 많다.
그러나 세금으로 다 거두어 가서 개인들의 호주머니 사정은
한국보다 30% 더 빈약하다.
한국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한다.
 
“그동안 얼마나 인건비가 올랐는지, 사람쓰기가 무섭다.
한국 인건비, 장난이 아니다.”
그러나 프랑스에 비하자면 한국은 아직 여유가 많은 듯하다.
프랑스는 고용인 1명당 급료의 60%가 사회보장세이다.
결과적으로 이런저런 명목의 세금 때문에 한명을 고용하면
기본적으로 두명의 비용이 나간다.
 
프랑스는 주유소가 ‘셀프 서비스’로 바뀌고 있다.
직접 기름을 넣어야 하는 ‘노맨(No man)’ 주유소다.
스웨덴의 조립형 가구업체 ‘이케아’가
프랑스에서 크게 성장한 이유도
DIY(스스로 하기, do it yourself)이기 때문이다.
주유, 가구 조립, 집 손질, 페인트 칠, 자동차 수선, 배달,
이삿짐 운반까지 내 손으로 한다.
짜장면을 배달 받는 호강(?)이 파리에서는 불가능하다.
 
파리는 백화점에 주차 보조원이나 승강기 안내원이 없다.
식당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식당들은 프랑스 식당의 2배 인원을 고용하고 있다.
한국의 인건비가 프랑스보다 2배 싸다는 증거이다.
 
낭비는 주택과 차량에 이르면 극치에 이른다.
파리에서 특파원으로 지냈던 한 언론인의 경험담이다.
 
“파리에서 경차를 타던 버릇대로 귀국하자마자
‘티코’를 운전해서 출근했다.
5년간 떠나 있었기 때문에 회사 주차장 경비원들이
얼굴을 몰랐기 때문일까.
내게 ‘야야, 저쪽으로 가!’하고 반말로 명령(?)했다.
‘너무 작은 차’를 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티코’를 타고 출근하는 기자는 나 뿐이었다.
5년 파리에 있다가 오는 사이에
한국이 이처럼 부유해졌음을 깨달았을 때,
웬지 불안한 느낌이었다.”
 
호텔은 더 하다.
서울의 특급호텔은 방이 운동장만하다.
파리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크기다.
하루 수 천 유로씩 하는 파리의 최고급 호텔
‘플라자 아테네(Plaza Athenes)’나 ‘조지5(George5)’,
‘끄리옹(Crillon)’ 호텔의 스위트 룸이
한국의 특급호텔의 보통 방 크기다.
 
아파트도 마찬가지다.
파리의 중상층 아파트가 한국에 가면 중하층 면적이 된다.
프랑스 국토는 남한보다 6배나 큰데도 말이다.

 


프랑스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절약형이고 검소해서가 아니다.

그들도 인간인데,

널찍한 아파트에서 살기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급료의 절반을 세금으로 빼앗겨서

절약해서 살 수 밖에 없다.

 

한국에 흔한 ‘접대비’를 보자.

한국에는 공기업 종사자가 안마시술소에 가서

회사용 카드로 결제했다는 기사가 신문 사회면에 자주 실린다.

 

그러나 프랑스에는 그 같은 항목이 없다.

프랑스는 이런 지출이 법적으로 차단돼 있다.

국세청 조사 때,

한 끼 식사한 영수증에 대해서도 ‘누구와 왜 먹었는지’를 따진다.

고급 식당이 아니라 대중식당도 마찬가지이다.

 

프랑스 식당업이 사양산업이 된 이유의 하나가

바로 이 국세청 조사 때문이다.

한국인 출장자들이 프랑스 회사와 상담하러 와서는

가장 먼저 내뱉는 불평이 “접대가 없다”는 것이다.

공항영접, 식사는 물론 노래방 초대는 절대 없으며,

회의 때 커피 한잔, 물 한잔 대접이 없다.

이는 수입업자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한국에 수 백만 달러, 수 천만 달러를 수출하는 수출업자도

마찬가지이다.

 

‘내 출장비 들여 찾아와서 수 백만 달러 아치의 물건을 사는데도

공항영접, 물 한잔 대접이 없다니.

우리는 빚을 내서라도 해주는데…’라는 불평을

한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들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프랑스는 그런 나라이다.

프랑스 사람들이 본래 그런 것이 아니라,

세금과 관련한 프랑스 법이 이처럼 인색한 것이다.

인색한 법 아래서 사는 사람은 인색할 수 밖에 없다.

 

회사 차로 등록된 차량의 이용도 마찬가지다.

개인영업자여서 회사차를 자기 차처럼 쓸 수 있는 자영업자에게

프랑스 국세청은 휴가 때 회사차를 얼마나 썼는지,

골프 치러가는데 썼는지에 대해서도 조사한다.

개인용도로 회사차를 썼다면 추징금을 매긴다.

한국적 정서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프랑스가 아파트 면적이나 차 배기량에서는

한국에 훨씬 뒤떨어지는 후진국이지만,

국세청 조사에 관한 한 최첨단 선진국이다.

한인동포가 파리에서 크게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이 복잡한 프랑스식 국세청 조사 때문이다.

 

금융위기로 인해 한국의 아파트 값이 반토막이고,

실질 실업자 수가 300만을 육박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러나 프랑스는 실업자가 200만명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가정주부의 60%가 직장에 나간다.

 

오늘 한국의 경제위기를 미국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무절제한 낭비가 없어지지 않는 한,

한국의 위기는 하루 이틀 아침에 반전될 것 같지 않다.

- 받은글 -



'대체신학'이란 용어 사용은 정당한가? | 이필찬 교수의 신학 일기
이필찬 | 조회 99 |추천 1 | 2013.05.14. 17:31 http://cafe.daum.net/pcleeschool/4bCZ/363

 

인트레이터는 9장에서 최초로 ‘대체 신학’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대체신학이란 말 그대로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이 ‘대체 신학’에 대해서 “만일 교회가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 편에 선다면, ‘대체신학’은 근절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120쪽). 그러나 대체 신학은 근절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대체신학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 신학이란 용어는 혈통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설정한 용어일 뿐이다. 이것은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이 주장하는 천년설이 없다 하여 무천년설이라고 말한 것과 동일한 패턴이다. 사실 무천년설은 정확한 말이 아니다. 무천년설이라는 신학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천년설이란 말의 뜻은 천년왕국이 없다는 뜻인데 소위 무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천년왕국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주장하는 그 천년왕국이 없을 뿐이다. 무천년설은 지금 초림과 재림 사이의 이시대가 천년 왕국 시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무천년설이라는 용어보다는 ‘현천년설’(present millenium)이란 용어가 정확하다. 


이러한 패턴이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한다고 하여 대체 신학이라고 주장하는 경우에도 발생한다. 사실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하는 측면은 있다. 그러나 인트레이터가 주장하는 방식의 대체가 아니다. 인트레이터가 대체라고 할 때에 그것은 구약과 신약과의 관계에 불연속성만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둘 사이에 그러한 불연속성이 존재한다. 신약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이스라엘이 경험할 수 없는 탁월한 시대를 경험한다. 이러한 면에서 세례 요한은 자신을 신부의 친구라고 하고 예수님과 신약의 교회 공동체를 신랑과 신부로 비유하면서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요 3:29)고 말하면서 마침내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는 멋진 말을 남기고 있다. 이것은 신약의 교회와 구약의 이스라엘 사이에 불연속적인 측면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와 이스라엘 사이에 연속성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과 교회와의 관계는 약속과 성취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약의 여느 약속과 신약의 성취와의 관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연속의 중간에 바로 예수님이 계신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오셨다고 하면서 끝내는 12사도를 세우셔서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작업을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 자신이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신다. 예수님을 통해 구약의 약속들이 신약에서 재해석되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신약 성경 저자들은 문맥에 따라 구약과 신약 사이에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에에 연속성이 강조되기도 하지만 또한 불연속성이 강조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 둘 사이에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이 모두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대체 신학’이란 적절한 말이 아니다.

 

 

출처: 이필찬교수의 성경 연구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보호받는 영혼 (아다나시우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6)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동안에는 원수가 우리를 해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묵상합시다.
원수가 우리를 접근할 때는 우리의 마음 상태에 맞게 접근합니다. 원수는 우리 마음의 상태에 맞춰 기만 전략을 씁니다. 그러므로 원수는 우리가 겁을 먹고 혼란에 빠져 있다고 여겨지면 우리 마음이 무방비 상태임을 발견하고 강도처럼 우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원수는 우리에 대해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원수는 우리가 약하고 비겁하다고 생각되면 기만과 위협으로 우리의 공포를 배가시킵니다. 그러면 불행한 영혼들은 그러한 일들로 인해 고통당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고, 장래의 축복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모든 것은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고 여기며, 어떤 악한 영도 그리스도인을 대적할 힘이나 누군가를 지배할 권세가 없음을 알고 있는 모습을 보면 원수는 그러한 생각의 힘으로 인해 패배하고 뒤로 물러납니다.


원수는 이런 식으로 욥이 힘을 얻는 모습을 보고 욥에게서 물러 났습니다. 그러나 원수는 유다가 무방비 상태에 있는 모습을 보고 그를 포로로 사로 잡았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원수를 경멸하고 싶다면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영혼은 언제나 소망 안에서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귀의 함정은 연기와 같고 악한 자들은 우리를 쫓아오기 보다는 달아날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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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해리슨 포드가 주연한

아주 독특한 영화 위트니스(witness)가 개봉되었죠.

 

영화의 주 배경은

아미쉬(Amish) 마을이었는데

The Amish는, 미국인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나라사람들에게도

매우 이색적인 모습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아미쉬 사람들은

그 당시가 20세기 후반임에도 불구하고

  

문명의 이기인

전기도, 전화도 없이 살아가는

아주 독특한 사람들로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아미쉬 사람들로부터 받은 인상은

  

그들이 검소하고

겸손한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정말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느껴졌습니다.

  

약 21년 뒤,

미국의 모든 뉴스가

아미쉬 마을에 집중된 한 사건이 일어났지요.

  

2006년 10월 2일,

펜실베니아의 한 아미쉬 학교에

라버츠(Charles Carl Roberts)라는 사람이 침입하여

  

권총으로

5명의 여학생을 살해하고

5명의 여학생에게 중상을 입히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에

아미쉬 공동체가 보여준 반응은

미국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충격이었습니다.

  

사건 직후에

아미쉬의 피해자 가족은

라버츠를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해자 가족을 찾아가 위로했고,

범행 직후 자살한 라버츠의 장례식에

30명의 아미쉬가 참석하여 가해자 가족을 위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장의 죽음으로 살길이 막막해진

가해자 가족을 위해 아미쉬 공동체는

기금을 마련하여 라버트의 가족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아미쉬(The Amish)의

이런 용서와 사랑의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1517년,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은

 

칼뱅(Calvin),

쯔빙글리, 알미니우스 등에 의해

성경의 신학적 논점에 대해 서로 다른 노선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운데 한 분파가

스위스 형제단이라 불리는

재세례파(Anabaptist)들이었습니다.

 

아미쉬는 바로

이 재세례파의 후예들입니다.



재세례파는

유아세례를 거부하였는데

 

세례는 반드시

스스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성인에 국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도

온전한 신앙을 고백한 후에

다시금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재세례파(Anabaptist)로 불리워졌습니다.



재세례파는 개신교와

카톨릭 양쪽으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박해를 피해 스위스의 산지와 독일,

그리고 프랑스의 동부지역인 Alsace 지방으로 피신했습니다.



아미쉬의 기원은

1693년, 재세례파의 지도자이자

 

Alsace지방으로 와 있던

Jakob Ammann 라는 지도자의 이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미국에서의 아미쉬 역사는

1730년대에서 1770년대 사이에

 

약 500여명의 The Amish들이

펜실베니아에 정착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2010년의

U.S. Religion Census 자료에 의하면

 

오하이오 주에 59,103명,

펜실베니아 주에 58,009명

그리고 인디애나 주에 45,144명이 살고 있으며,

 

현재(2013년)는

미 전역 25개 주에

약 28만명의 아미쉬가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미쉬 사람들은

한 가정당 평균 6-7명의 자녀를 낳습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

10명에서 12명 이상의 자녀를 가진 가정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미쉬 인구는

1920년에 약 5천명 선에서

 

2013년에는

약 28만명으로 50배 이상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이 수치는

매 20년마다 두배로 늘어난 수치입니다.



아미쉬는 TV도,

라디오도, 전화도 소유하지 않고

전기나 자동차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아미쉬가 현대 문명을 거부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들도 문명을 선택적으로 수용합니다.

예컨대 필드에서는 트랙터 사용을 거부하지만

큰 힘을 필요로 하는 barn(광) 내부에서는 사용하도록 허용합니다.



또한

110V 전기 사용은 거부하지만

배러리로 출력되는 12V 전력은 사용하도록 허용합니다.



아미쉬는

이 문명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조와 커뮤니티가 방해받지 않는 범위내에서 문명을 사용합니다.

 

그들은

현대문명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문명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아미쉬는

Old Order Amish와

New Order Amish 로 구분되는데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OOA가 NOA보다 더 보수적입니다.



아미쉬는

커뮤니티 별로 생활하기 때문에

각 district마다 생활에 약간씩의 차이가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놀이기구 가운데 하나인

롤러 블레이드 같은 경우도

사용하게 하는 커뮤니티가 있는가 하면

금지하는 커뮤니티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아미쉬 학생들은

8학년까지만 교육받는데

 

그들은 이정도 교육만으로도

그들의 주업인 농사를 짓거나

읽고 쓰는데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아미쉬 구역은

자체 사립학교를 가지고 있으면

 

1학년부터 8학년까지 한교실,

혹은 두 개의 교실에서 함께 공부합니다.

  

교사는 미혼의 아미쉬 여자이며

가르치는 은사나 재능이 있는 여자중에서 선택됩니다.



아미쉬 사회에서는

16세가 되면 Rumspringa(running around)라고 하는

동료들과의 여러 모임(game, sports, date)에 참석할 수 있는데

 

본격적인 데이트는

이 나이가 되어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아미쉬 여자는

보통 19-21세에 결혼하게 되며,

 

위에 언급한 것처럼

한가정당 평균 6-7명의 자녀를 가집니다.



아미쉬 학생들은

그들 스스로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17-20세 사이에 세례를 받는데 이 때에 그들은

아미쉬 공동체에 남을지 아니면 떠날지를 스스로 결정합니다.

 

아미쉬 district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공동체에 남는 비율은 평균 85%이며

어떤 공동체는 95%까지 남는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아미쉬를 떠나는 비율은

불과 10%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만큼 그들의 공동체 의식은 끈끈합니다.

 

세례 후에 그들은

교회와 아미쉬 공동체의 정식 멤버가 됩니다.



아미쉬 남자들은

수염을 기르는데(수염을 깎지 않음)

 

대부분 남자들은 결혼직후부터 수염을 기르지만

어떤 커뮤니티에서는 세례 후부터 기를 수 있도록 허용합니다.



아미쉬의 주언어(first language)는

17세기에 사용되던 Pennsylvania Dutch 라고 하는 독일방언이며

 

인디애나의 일부지역에서는

Swiss-German 언어를 사용합니다.

 

 Pennsylvania Dutch는

일상회화에서만 사용될 뿐 writing에서는 사용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언어는 당연히 영어이며,

 

세 번째로 배우는 언어는 high German입니다.

이 언어는 예배 때의 성경봉독, 기도, 찬송을 부를 때 사용됩니다.

 

아미쉬 학교의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 세 가지 언어를 모두 구사합니다.



아미시 사람의

평균 약혼기간은 4-6개월이며

약혼반지나 결혼반지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결혼은 신부의 집에서 열리며

첫날 밤을 신부집에서 머문 후에

그들은 몇주동안 친척들을 방문하며 인사를 하는데

 

이 기간 동안이

 그들이 갖는 유일한 허니문 기간입니다.



아미쉬는 매주가 아닌

2주에 한 번씩 커뮤니티별로 예배를 드립니다.

 

아미쉬는 예배를 위한

별도의 자제 건물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가정이나 창고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인원이 늘어나서

예배를 함께 드릴 수 없을 경우

그 커뮤니티(district, gemeinde)는 분리됩니다.



아미쉬의 예배는

약 3시간에 걸쳐 진행되며

두 번의 설교가 있는데 첫 번 설교는 약 30분,

두 번째 설교는 약 1시간에 걸쳐 진행됩니다.

 

그들의 목사는 bishop(Senior Paster)이며

Bishop은 정식 신학 수업을 받은 것은 아니고 월급은 없습니다.



그들은 예배시간에

unison으로 노래하며 악기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아미쉬가 부르는 찬송은

Ausband 라고 하는 16, 17세기에 불리워지던 찬송들입니다.



예배시간에 사용되는 언어는

중세 독일어와 스위스-독일어이며,

 

예배 복장은

18-19세기 독일 이민자들이 입었던 옷을 입습니다.



아미쉬 문화의

두 가지 덕목은 겸손과 복종입니다.



아미쉬 공동체는

동부와 중부의 약 25개주에 걸쳐 형성되어 있으며

 

오하이오,

펜실베니아,

인디애나의 순으로

 아미쉬 공동체가 밀집되어 있습니다.



아미쉬인들은

숙명론자는 아니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사건,

 

그것이 비극이든,

고통스런 사건이든 모두 인내로 받아들입니다.



아미쉬의 특산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퀼트입니다.

 

quilting은

아미쉬 여성들에게

중요한 사회적 경제적 활동입니다.

  

그들은

퀼트를 통해

서로 교제하고 협력합니다.



오늘날 아미쉬는

2,000군데 이상의

Old Order Amish church district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district에서

음주와 흡연은 금지됩니다.

  

자동차, TV, 라디오,

핸드폰, 컴퓨터 등의 소유는 당연히 금지입니다.



아미쉬가 타는 마차를

버기(buggy)라고 부르는데

 

오하이오, 펜실베니아, 인디애나에서는

버기를 운전하려면 라이센드가 필요합니다.

 

버기의 컬러는 일관적이지 않고

지역마다 white, yellow, black 등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아미쉬는

미국 최후의 희망입니다.



소돔성에

의인 10명이 있었다면

소돔은 멸망당하지 않고 오늘까지 존재했을지도 모릅니다.



미국이 지금

도덕적, 영적으로 갈 때까지 갔지만

미국이 망하지 않는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미국에 아미쉬라는

10명의 의인들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대장쟁이


[느헤미야 12장]

보면 볼수록 느헤미야에 기록된 예루살렘 성벽재건의 기록은 성도의 신앙과 교회를 세우는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수산궁에서 아닥사스다 왕의 술관원으로, 세상적으로는 부러울 것 없이 잘 나가던 느헤미야가 어느 날 동생 하나니로부터 퇴락한 예루살렘, 유다 성읍들의 참상을 듣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벽을 재건하는 것은 전도인이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결국은 바벨론의 포로라는 사실, 자신의 영혼은 돌아갈 곳이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신앙과 교회를 세워가는 성도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죄와 사망의 포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 한 채 그렇게 살다 가고 마는가요? 가을에 단풍이 붉게 물들었는데, 그것이 자신의 인생의 종점, 지옥불의 예고라는 것을 깨닫지 못 하고, 그 단풍잎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 하고 어느 날 바람에 뚝 떨어져 날아가고 마는 것 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져 있다면, 성벽이 무너지고 훼파되어 있다면, 어떠한 부귀영화도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오직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곳, 무너진 성벽을 수축하는 것만이 인생의 해답이라는 것을 느헤미야는 그 몸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의 삶을 청산하고 예루살렘, 하나님의 도성으로 돌아가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가졌던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일이었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고난과 희생의 길이었고 숱한 조롱과 조소와 원수들의 훼방과 발악과 위험이 따르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모든 어려움을 우리를 넉넉하게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겨내고 마침내 이루어내었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는 52일 만에 성벽수축이 완성되자 낙담하며 두려워하였고 백성들은 승리에 환호하였습니다. 성벽은 완성되고 백성들은 에스라로부터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배우고 깨달아 죄와 사망의 포로에서 온전히 놓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초막절의 감격과 기쁨과 즐거움을 맛보게 됩니다.

그것은 주께로 돌아오며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성도들의 모습이며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 이 세상 모든 부귀영화보다, 이생의 목숨보다 그것이 가장 귀한 것이요 그것이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 이제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대적의 온갖 훼방과 위협을 이기고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감격 속에서 초막절 행사를 마치고 다시금 하나님 앞에 모여 '이제부터는 나 이렇게 살리라. 이제부터는 하나님 앞에 살리라, 십일조를 드리고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며 신앙을 지키며 떠나지 아니하리라....' 굳세게 다짐합니다.

그리고 느헤미야 11장은 그들 족속들의 이름과 모습들을 기록하면서 “책에 기록되었고, 역대지략에 기록되었고, 다 용사였느니라, 큰 용사니.....” 등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큰 용사'라 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싸움, 성벽재건의 싸움에서 이긴 큰 용사들로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12장 27절에 보니 그들은 예루살렘 성벽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식, 낙성식을 행하려 모여듭니다. 각처에서 레위사람들을 찾아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합니다. 사방에서 모여오고 몸을 정결케 하고 백성과 성문과 상을 정결케 합니다. 모여들고 정결케 하는 그들의 모습은 하나님께 돌아와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케 된 자들의 세례의식을 연상케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 위로 오릅니다. 두 떼로 나누어 한 떼는 좌편, 한 떼는 우편으로 성벽 위를 돌게 합니다. 나팔을 잡고, 제금, 비파, 수금 등 다윗의 악기를 잡고 에스라가 앞서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나아갑니다. ‘이 날에 무리가 크게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의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로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스바냐 3:19)’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 같고 하나님과 어린양을 찬양하는 요한계시록의 큰 무리의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무너진 성벽을 쌓아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하는 것, 인생에 그 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 그 보다 더 큰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너진 성벽을 버려둔 채 세상살이에 매여 살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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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당신을 구원하실 때까지 매달리십시오!

- 폴 워셔 목사님 -

 

http://www.youtube.com/watch?v=s1ll7pqDDSA

 

 

그가 죽었습니다!

실제로 돌아가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나무 위에서 흘리신 보혈 오직 그것으로 인해 더러운 오물같은

우리의 죄가 씻겨지는 것입니다.

 

그 나무에서 흘리신 보혈 도살당하신 하나님의 아들...

리스도에 대해서 들을 때 당신의 마음이 기쁨으로 춤을 추며

나는 더러운 사람들 중에 가장 더러운 사람입니다.

 

저에게 소망이 있습니까?라고 말했다면 그래요 당신에겐 소망이 있습니다.

당신에겐 회개가, 적어도 회개의 씨앗이 마음 속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을 믿은 모든 자들은 아무도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시계는 멈추지 않습니다.

시간은 지속적으로 흘러가고 있고 지옥의 죽음은 계속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다시 오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천년후에나 올 것이라고 신경을 안씁니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렇지만 25년 50, 60년 안에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분을 볼 것입니다.

그분이 여기로 오시든지 여러분이 그분에게 가든지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분을 볼 것이며 그 분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분은 오십니다!

그 분이 오실때 그것은 동시에 대단히 좋을 것이고 굉장히 무서울 것입니다.

 

반드시 오십니다!

하늘문을 가르시고 내려 오실때 가장 광대하고 강력한 인간들과

그들의 군대는 말을 타고 내려 오시는 그분의 눈길 한 번에

산들에게 그들을 묻어달라고 외칠 것입니다!

너무 광대하시기에 모든 것 위에 절대적인 주권으로 앉아계십니다.

당신은 심판 받을 것입니다!

 

그때 당신의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면

천국에 자격이 없다고 판단되어 지옥에 던져질 것입니다!

구원의 증거는 바로 그 분과 지속적으로 걸으며

당신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그것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순종은 생명이다!

     
     
    내가 처음 집례한 장례식은 어린 꼬마의 장례식이었다. 우리 교회 한 부부의 첫아이였고, 조부모에게는 첫 손주였다.

    어느 날 그 집에 심방을 가서 보니 그 아이는 부모의 말을 대놓고 무시했다. 오라고 하면 갔고, 앉으라고 하면 일어섰다. 부모는 그런 행동을 나무라기보다는 그저 귀여워했다.
    하루는 그 집 앞마당 문이 열려 있었다.

    딸아이가 마당을 빠져나가 길 쪽으로 가는 것이

    부모 눈에 띄었다.

    저쪽에서 차 한 대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딸아이는 주차해 둔 두 대의 차 사이로

    빠져나가 도로 쪽으로 달려갔다.

    “안돼! 돌아와!” 부모가 다급한 목소리로 어린 딸에게 외쳤다.

    아이는 잠깐 서서 부모를 보고 씩 웃더니

    다시 돌아서서는 달려오는 차 쪽으로 곧장 뛰어들었다.

    차는 아이를 세차게 들이받았다. 아이의 죽음 앞에서

    터져 나오는 부모의 통곡은 그야말로 단장(斷腸)의 비애였다.

    그것은 한 아이가 부모 말에 순종하도록

    훈련되어 있지 않아서 일어난 비극이었다.

    나는 그 사건을 통해 큰 교훈을 얻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분의 음성이 들릴 때

    반드시 즉각 순종하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음성을 알아듣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이

    바로 생명이다!

     

    - 「하나님 음성에 응답하는 삶」/ 헨리 & 리처드 블랙커비 




세대주의 종말론에 대한 개혁주의 입장에서의 비판

 

                                              김명도 교수   

   

 

1. '세대주의’와 ‘세대’라는 용어

 

'세대'라는 말의 헬라어 ‘오이코노메오’는 ‘청지기 사무를 보다’라는 뜻으로,

명사형인 ‘오이코노모스’는 우리말로 ‘청지기’라는 말로 이외에도 ‘직분’, ‘경영’, ‘경륜’이라는 단어로 번역되곤 합니다.

그런데 세대주의자들은 이 말의 의미를 하나님께서 어떤 일정한 방법으로 인간을 다루시는 기간을 가리키는 뜻으로 설정하였습니다.

즉 세대주의는 세상을 하나님의 뜻(경륜)이 이루어지는 장(場)으로 간주하고서 시간의 과정 안에서 여러 단계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다양한 경륜이 성취되어 간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시간의 단계마다 확실하게 구분되어지는 하나님의 경륜을 세대라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세대주의자들은 단계적 세대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는 것을 매우 중요한 신학적 과제로 삼았는데,  이 계시는 점진적으로 마침내 완전한 종말에 이르게 된다고 생각하였기에, 이러한 신학 사상을 가리켜 ‘세대주의 종말론’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2. 세대주의 개괄적인 역사와 한국 교회에 미친 (부정적) 영향

 

‘세대주의’란 19세기에 출현한 (종말론적) 신학의 경향으로서 흔히 ‘세대주의 신학’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아일랜드계 영국인 존 넬슨 다비(J. Nelson Darby, 1800-1882)에 의해 주창되었습니다.

그는 변호사였으나 회심이후에 그의 직업을 포기하고 영국국교회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목회의 길에 접어든지 일 년 만에 수백 명의 가톨릭교회 신자들을 개신교로 개종시킬 만큼 유능한 목사였으나, 대주교의 교령에 반발하여 국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플리머스 형제단’(Portsmouth Brethren)이라는 신령주의적 성경 연구 모임에 참여하게 되면서, 신앙에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후 플리머스 교단의 대표로 유럽과 미국을 여행하면서 그의 예언에 기초한 독창적인 성경해석법을 완성시켜 나가던 중, 스코틀랜드에서 10세의 어린 성령 운동 지도라는 ‘맥도날드’양의 예언(대환난이 있기 전에 휴거되는 환상)을 전해 듣고서 그녀의 휴거론을 바탕으로 자신의 세대주의적 성경해석방식을 구체화하였습니다.

 

다비의 대환난 이전의 휴거설과 7년 대환난과 이후에 전개되는 천년왕국 사상이 주장될 때만해도 반대 주장도 만만치 않았지만, 미국의 스코필드(C.I. Scofield) 박사의 손질을 거친 후, 급속도로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무디 성서신학교 출신으로 회중 교회 목사였는데, 다비의 세대주의적 종말 사상에 심취되어 자신의 스코필드 관주성경(The New Scofield Reference Bible, 1909, 1917)의 주석에 그 내용을 포함시켰습니다.

 

스코필드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하나의 가설에 불과했던 다비의 세대주의 종말론은 스코필드의 주석 성경의 유명세와 더불어 삽시간에 전 세계에 전파되면서, 어느덧 세대주의 종말론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 성경적인 종말론 사상으로 인식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무디 성서학원의 아이언싸이드(Ironside)를 비롯해서 달라스 신학교, 그레이스 신학교, 탈봇 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이론화 작업과 D.L 무디와 R.A. 토레이같은 유명 기독 인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19세기 이후 복음주의권에서 가장 확고하고 보편적인 기독교 종말론 사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의 세계 선교화의 추세에 따라 한국에 들어 온 미국 복음주의 신학교 출신의 선교사들이  당시 기독교 종말론의 정설로 인식되던 세대주의 신학을 한국에 소개하는 일은 자연스런 결과였습니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초대교회 시절부터 세대주의 종말론 사상에 깊이 관련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초창기 한국 교회 지도자들 대부분이 세대주의 종말론 신봉론였다고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요한계시록을 많이 강해하신 길선주 목사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의 초기 신학자들도 세대주의 종말론의 여자적 논리성에 매료되었는데,

한국 정통 보수주의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박형룡 박사와 성서침례신학교 장두만 교수 같은 이는

 세대주의 종말론주의에 확신을 가졌던 대표적인 신학자입니다.

그러나 해방이후 세대주의 신학(특히 세대주의적 전천년사상)은 불안한 사회 현실과 맞물리면서

보다 극단적인 종말론 형태로 변형을 거듭합니다.

 

 이러한 신학적 오용과 변질의 중심에서 가장 큰(나쁜) 영향력을 발휘했던 인물이 J 목사입니다.

J 목사는 세대주의 종말론 사상에 기초해서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기록된 순서대로 문자적으로 이해하면서 말세에 될 일의 시나리오를 작성하였습니다.  1992년에 한국은 물론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가 결국 해프닝으로 끝나고 만 다미선교회의 이장림 일파의 극단적 종말론 운동은 J 목사의 세대주의적 종말론 해석의 완곡한 적용에 지나지 않은 일입니다.

 

J 목사는 Y 교회와 산하 집단을 통해 세대주의적 종말론의 한국적 토착화에 절대적으로 기여하였습니다. 그 결과 다미선교회의 환상이 비극적인 실패로 끝났음에도 오늘날 여전히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세대주의 종말론의 환상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세대주의 신학의 강조점(특징)

 

세대주의 신학의 세계화가 있었던 만큼 세대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고 복잡한 해석이 있습니다만, 다비와 스코필드를 이 이론의 창시자로 볼 때, 두 사람이 주장한 범위안에서 세대주의 신학의 포괄적인 신학적, 교리적 요점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들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문자적인 구약과 신약 해석에 근거하여 미래를 연속적인 시대의 도식으로 묘사한다.

 

--> 대개 세대주의자들은 계시록 4장은 교회의 휴거를 예언하며, 6-10장까지는 전환난 3년 반을,

 11-19장은 후환난 3년 반을 예언하다고 주장합니다.

 

후환난 시대의 마지막에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나도, 그리스도는 지상에 강림(둘째 강림)하여 천 년간 사단을 무저갱에 가두고 천년왕국을 건설합니다.

 

이 후 사단은 잠시 놓였다가 백보좌 심판이 있으며, 신천신지(새 하늘과 새 땅)가 건설된다고 합니다. 특히 J 목사는 <요한계시록 강해>에서 이러한 계시록의 문자적 성취 과정을 세대주의 종말론에 기초해서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2) 스코필드의 일곱 세대 구분

 

① 낙원의 무죄세대

 ② 홍수까지의 양심세대

③ 인류 통치세대

④ 아브라함의 소명으로 시작하는 약속세대

⑤ 시내산에서 골고다까지의 율법세대

⑥ 은혜세대(교회)

 ⑦ 그리스도의 인격적 통치가 이루어지는 천년왕국세대

 

--> 세대주의는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새로운 경륜이 작용하며,

 각 시대는 자연인에 대한 새로운 시험(test) 기간으로 생각될 수 있으며, 그 시대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난다고 주장합니다.


 

3) 이스라엘과 교회는 다르다.

 

-->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지연되었기에 하나님이 교회의 우회로를 택했다.

교회세대는 결국 과거의 이스라엘과 미래의 이스라엘 사이에 놓인 중간단계이다.

그러나 주의 재림으로 교회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고, 칠년 대환난이 끝난 이후에 지상에 천년왕국이 세워진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종말의 7년 대환난 이전에 ‘하늘로 들림’,

즉 ‘휴거’가 되기 때문에 이 땅에서 임하는 7년 대환난을 겪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4) 그리스도의 재림은 이중재림이다.

 

--> 세대주의는 주님의 첫 번째 공중 재림 때에 교회와 성도들은 첫 번째 부활을 경험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휴거라고 합니다.

 

주님의 첫째 재림은 심판의 재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데리러 오시는 재림입니다.

 이후에 지상에서의 7년 대환난과 아마겟돈 전쟁이 있은 이후에,

주께서 수많은 성도들과 함께 7년 공중혼인잔치를 마치고 지상 강림하시는데,

이것이 둘째 재림이요, 마지막 ‘지상 재림’인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주님은 모든 원수, 마귀를 멸하시고 천년동안 무저갱에 가두심으로서

성도들과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하는 천년왕국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이 지상재림은 모든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궁극적인 심판과 구원의 재림이라고 말합니다.


 

5) 문자적 해석에 천착한다.

 

--->세대주의는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대부분의 숫자를 문자적 의미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예를 들어, 계 7장과 14장에 언급된 ‘144,000’이라는 숫자 역시 주님의 첫 번째 공중 재림과 더불어 부활한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혼인 잔치를 즐길 때,

지상에 남겨진 이스라엘에 속한 사람들의 실제적인 숫자로 이들에 의해 많은 이들이 회개를 하게 된다고 봅니다. 계 20장의 천년왕국도 문자적 해석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상재림 이후에 땅위에 문자적이고 가시적인 천년왕국을 건설해 직접 왕으로 통치하실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외에도 7년 대환난의 7년과 심지어 계 21장의 새 예루살렘의 보석으로 묘사된 모습마저 문자적인 해석을 시도합니다.


 

4. 개혁주의 관점에서의 세대주의 종말론 비판

 

세대주의 종말론에 대해 세부적으로 말씀드린다면, 한도 끝도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몇 편의 논문으로도 모자를만큼 세대주의 신학은 복잡, 다양한 양상으로 진화(?)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몇 가지 특징을 보더라도 세대주의가 얼마나 심각하고 치명적인 신학적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에 언급한 내용을 중심으로 개혁주의 신학적 견지에서 세대주의 종말론을 평가해 보겠습니다.


 

1) 세대주의 종말론 해석법의 문제

보통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문자적 해석 방법

 ② 영해적(spiritualizing) 방법

③ 문자적 - 영해적 방법입니다.

 

세 가지 범주 중 어느 한 가지만을 무조건 적용할 수 없지만,

 대체로 개혁주의자들은 세 번째 해석 방법을 존중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단순한 어떤 문학 형태로 고정할 수 없을 만큼, 저술 원인과 방식에서 그 어느 성경보다도 독특합니다. 계시록은 요한이 하늘의 환상과 하나님의 직접적인 신탁을 직접 보고 듣고 기록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늘의 천상적 경험은 지상의 문자적 형식으로서 기술한 것입니다.

계시록은 우리의 이성과 경험이 접근할 수 없는 공간적 초월성을 함유한 동시에

세상에 내재된 관념으로 실제로 추론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계시록에 나타난 모든 진술을 한쪽 방향에서 고정된 채 해석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계시록 21 장에서 언급된 새 예루살렘의 모습은

 소위 천국을 다녀왔다는 사람들의 ‘내가 본 천국“ 간증의 대표적인 사례로 인용되는데,

 과연 환상가운데 요한에게 보여 진 새 예루살렘이 진귀한 보석으로 치장된 새로운 문명 세계를 나타내는 것일까요?  또한 계시록의 ’144,00‘이라는 숫자는 새 예루살렘에 입성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은 특정 소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며, ‘천년’은 과연 인류가 경험한 10세기의 시간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수많은 하나님 관점에서의 초월성과 상징성과 묵시성을 지극히 인간적인 상식과 이성의 차원으로  끌어내린 억지스런 시도가 바로 세대주의 종말론의 특징인 동시에 한계인 것입니다.  따라서 계시록의 환상과 상징은 구약과 신약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언약과 성취라는 구도 속에서 성경의 유기적 진술에 근거하여 해석되어야 합니다.


 

2) 이스라엘과 교회를 분리 해석하는 문제

 

세대주의는 이스라엘과 교회 관계를 대립 혹은 단절로 설명하려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교회를 언약적 통일성 안에서 보는 개혁신학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개념입니다.  옛 언약(출 20:1-17, 24장)은 이스라엘과만 맺은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 개종자들이 하나님의 언약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언약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는 언약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새언약 역시 교회와만 맺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새 언약은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과 맺은 것이지만 이스라엘과 이방인과 구분 없이

하나님의 백성 전체와 맺은 언약이기 때문입니다(히 8:10-11).

새 언약은 또한 옛 언약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옛 언약의 성취로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유대인에게, 교회를 이방인 중에서 구원받은 성도에게만 적용하는 이분법적 도식은 언약의 통일성적 유효성을 훼손하는 중대한 오류인 것입니다.

 

3) 이중 재림설에 대한 해석 문제

 

세대주의는 7년 환난을 전후로 있을 그리스도의 이중 예정을 기정사실화 합니다.

그러니까 환난 전에 첫 번째 (공중) 재림이 이루어지는데,

 이때에 교회와 성도들이 들림(휴거)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휴거되지 못하고 지구상에 남아 있는 자들은 불신 세계의 심판을 위해 대환난을 겪은 후에야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이 또 한 번 반복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이중 재림에 대해 말하는 곳을 찾을 수 없습니다.

존 T. 샤프트라는 사람은 그의 책 『세상을 진동시키는 종말사건』을 통해

교회와 성도가 환난 전에 휴거될 것이라는 성경 구절을 단 한 구절이라도 찾는 사람에게는

1만 달러의 상금을 주겠다고 약 4만 명의 목회자들에게 통지를 했으나 상금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단회적 재림은 정통 교부들과 어거스틴으로부터 칼빈과 루터, 수많은 종교개혁자들에게 공히 지지받고 있는 성경적인 견해입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적어도 19세기 세대주의가 출현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이중 재림을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더구나 7년 대환난을 전후로 각각의 다른 대상을 전제한 첫 휴거와 재림에 대한 견해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의 말씀대로 인격적이며, 육체적이며, 가시적이며, 갑작스러우며, 영광스럽고 승리의 단 한 번의 재림이 있을 뿐입니다.  물론 그 시기는 하나님외에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세상의 종말, 죽은 자의 육신의 부활,  그리고 모든 악의 세력의 파멸과 마지막 심판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4) 천년왕국에 대한 해석 문제

 

계시록 10:1-3에 나와 있는 ‘천년동안’이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셋 또는 네 가지 해석의 경향을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점으로 천년이 앞에 오면 전천년설이요,

뒤에 오면 후천년설입니다. (잘못 기재된 듯합니다. 천년왕국전에 재림이 있으면 즉

재림후 천년왕국이면 전천년설, 천년이후 재림이면 후천년설입니다. 카페지기 주)

 

이 두 가지 견해는 천년의 위치는 정반대이지만 천년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편 무천년주의는 형식상 후천년설에 속하지만 천년을 문자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중 전천년설은 두 가지로 구분되어지는데, 세대주의적 전천년설과 역사적 전천년설입니다.

후자는 전자의 지나친 주장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주장이라고 볼 수 있는데,

전자와 비교해 가장 큰 차이점은 재림을 단일 사건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진술을 문자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서 역사적 사건 중심으로 해석한다는 점에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과 유사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개의 천년설은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고, 또한 개혁신학을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지지하는 입장에 따라 다소 견해차가 있습니다.

 

기독교 3세기의 이레니우스, 저스틴, 터툴리안, 락탄티우스와 같은 정통 교부들은 전천년설을 지지하였습니다. 그러나 4세기에 들어 콘스탄틴 황제의 개종으로 교회 시대를 천년왕국으로 보는 무천년설이 유행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의 지지 가운데 무천년설은 중세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일어날 즘, 로마 교회에 반대하는 신령주의적 급진적 개혁세력들에 의해 현세적 천년왕국 사상이 번성하였습니다.

 칼빈과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 대부분은 신학적으로는 어거스틴의 무천년설에 머물면서도

재세례파와 같은 극단적인 세력의 전천년주의 운동의 폐해를 지켜보면서

 천년왕국설을 개진하는데 매우 신중한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7세기 청교들의 신대륙 이주 이후 기독교 복음의 번성과 함께

낙관적인 후천년주의 사상이 대두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를 비롯해서 프린스톤 3인의 핫지, 댑니, 워필드에 이르기까지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수혜자였던  신학자들에 의해 후천년설이 정통 교회의 입장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와서 프랑스 혁명 시대 이후 유럽의 정치적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면서

전천년설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상에 대한 염세적인 사상과 천국에 대한 열정적인 기대가 맞물려 예언 집회가 유행하던 때에,

다비와 플리머스 형제단을 통하여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나타났습니다.

불과 몇 십년만에 이 사상은 20세기의 복음주의에 가장 커다란 영향력 있는

기독교적 종말론으로 자리 잡히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천년왕국설은 교회가 처한 역사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네 가지 입장 모두 나름대로의 성경과 현실에 대한 주장과 근거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적어도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배제하고라도

세 가지 주장중에 어느 것 하나가 유일하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이전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왕성하게 이루어진 천년왕국에 대한 논의 과정을 지켜볼 때, 문자적-영해적 해석을 근간으로 한 무천년설이 가장 성경적이며,

개혁주의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천년은 문자적 의미에서의 천년이 아니며,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심판의 순서들 역시 문자적인 예언이 역사적 순서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볼 수 없습니다. 또한 천년왕국은 문자적 지상의 세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지상과 천상에서 동시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영원한 축복 상태로 볼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까지의 시간을 집약적으로 상징화한 표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천년 동안 왕노릇하다’는 계 20:4 말씀 역시,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현재적 사건인 동시에,

 현재의 성도들이 아직 경험하지 못한 천상의 미래적 사건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은 지상과 하늘에서 메시아 왕권이 발휘되는 이중적 개념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지상과 천상을 통(通)하는 메시야의 ‘천년왕국’은

사단과 그의 대행자인 악의 세력들이 받을 아마겟돈 최후 전쟁과 더불어 임하게 될 주의 재림과 마지막 대심판으로 끝이 나고,  ‘새 하늘과 새 땅’ 가운데 ‘새 예루살렘’의 영원한 축복 상태가 완성될 것입니다.


 

5) 144,000과 짐승의 표(666), 적그리스도에 대한 해석 문제

 

세대주의자들은 계 7장과 14장에 언급된 숫자 ‘144,000’을 민족적, 혈통적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과 함께 교회와 성도들이 휴거된 이후,

지상의 7년 대환난 기간 중에 살아남은 자의 이스라엘(유대인)의 숫자가 144,000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이전에 땅 위에 남아 있는 성도들 중에서

구원의 기회를 받을 수 있는 또 다른 무리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주장 역시 요한계시록 말씀을 문자적으로 과도하게 해석한 오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44,000’은 하나님의 백성의 완전한 총수를 상징화한 숫자입니다.

즉 이 숫자는 12×12×1000으로서 약속의서의 구약의 백성(구약의 12지파)과

 그 성취로서의 신약의 백성(신약의 12사도)에다 완전성과 무한성을 나타내는 숫자인 1000을 곱하여 나온 숫자입니다.  따라서 이 숫자는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딤후 2:19). 계시록 7장에서는 이들이 마지막 때의 환난과 사단의 시험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는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고,

 14장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하나님의 인을 맞은 사람들이 받을 최종적인 운명(영벌과 영복)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13장을 보면 ‘짐승의 표’에 관한 기사가 나옵니다.

 세대주의는 이 ‘표’를 문자적인 의미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오른손이나 이마에 짐승의 표를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계시록 전후 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억지보다 더한 주장입니다.

세대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컴퓨터의 영자 철자를 아라비아 숫자로 환원하여 합하면,

666이라는 숫자를 얻게 된다고 말하고, 더러는 사품의 통상부호인 바 코드(bar cord)도 666으로 환원된다고 주장합니다. 이외에도 666이라는 숫자를 적그리스도와 연결해서 설명하기 위한 수많은 억측들이 난무하였습니다. 그러나 계시록에 언급된 ‘표’는 당시 군인들, 노예들, 신전 봉사자들에게 소유물의 증거로서 낙인을 찍는 통상적인 전통에서 빌려 온 상징어입니다.

 즉 ‘표’는 소유, 충성, 보호를 상징하는 내용입니다.

물론 성경에 적그리스도와 666이라는 숫자가 직접 언급되었기 때문에

이들의 정체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실지로 교회 역사를 보면, 666을 로마의 불신 황제들(네로, 칼리굴라, 도미티안등)과 관련시키거나  히브리어 원어를 환산하는 방식을 통해 설명하려했던 시도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노력을 전부 무익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적그리스도와 666을 언급하는데 있어서 놓쳐서는 안 되는 점은

짐승의 수를 판독하는 일보다 짐승의 도덕적 본질을 파악하는 통찰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짐승의 머리이고, 짐승은 적그리스도의 하수인입니다.

이들은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을 부정하며, 복음의 본질을 파괴하려 합니다.

집단적 권력의 총체로서 등장하는 적그리스도가 초대 교회에서는 네로로,

 중세시대에는 교황으로 지목되었고, 그것은 바른 지적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계시록에 언급된 마지막 때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는 아닙니다.

마지막 때에는 이전의 적그리스도 보다 훨씬 더 가공할만한 능력과 속임을 가진 인격체로서 드러날 것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때를 사는 성도는 적그리스도와 짐승이 언제 어느 때에 그 실체를 드러낸다고 할지라도  결코 흔들리지 말며 인내와 믿음가운데 굳건히 서야 할 것입니다(계 13:10).


 

6) 대환난 이전에 나타날 징조에 대한 해석 문제

 

세대주의는 7년 대환난을 매우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7년 대환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교회와 성도의 공중 들림(휴거)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7년 대환난이 다가올 시기와 징조에 대해 유난히 관심이 많습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세대주의 입장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만,

한국의 세대주의 신학의 대표적인 전도자라고 할 수 있는 J목사의 해석을 살펴보기만 해도

얼마나 황당하고, 억지스러운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J목사는 그의 『요한계시록 강해』과 『지금이 말세인가?』, 『다가올 미래』라는 책에서

 7년 대환난의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는 세계적 사건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는 EC통합을 로마 제국의 부활로 보면서

다니엘이 예언하고 계시록이 말하고 있는 열 발가락시대,

 열 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고 봅니다.

또 마지막 전쟁을 중동전쟁으로 보고,

19991년 1월의 걸프전을 전주곡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또한 페라스토로이카의 실패로 경제가 위축된 소련이 아랍의 동조를 얻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함으로 3차 대전과 같은 전지구적 전쟁이 발생하는데,

소련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은 예기치 않은 천재지변으로 패하게 되고,

마침내 승리한 이스라엘이 시온산에 솔로몬 성전을 재건함으로써

통일 유렵과 평화조약을 맺게 되는데, 이것이 7년 대환난 직전에 일어날 세계사적 사건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적 근거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런 식의 세계 종말 시나리오는 너무나 많습니다.

 unshakable 님의 질문중 예를 드신 일부 내용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가상적 답변이지만,

그러나 ‘아님 말고’식의 무책임한 주장들 가운데 하나라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아무런 성경적 근거없이 계시록의 진실을 세계사적 사건에 끼워맞추려는

 그런 주장들에 대해서는 일일이 대답할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런 조악스런 발상들이 세대주의 사상과 무관하지 않음을 기억한다면,

왜 세대주의 신학(특히 종말론)을 경계해야 하는지 더욱 명백해 진다는 것입니다.


 

답변을 마치면서...

 

오늘날 성경 중에 요한계시록만큼 관심이 많은 반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성경도 드뭅니다.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계시록 해석과 주해와 설교가 봇물 터지듯 넘쳐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 전반적으로 드리운 불안하고 암담한 시대 정서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영혼의 도피처를 찾는 심약한 성도들에게

계시록에 대한 잘못된 호기심과 열심을 불러일으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모를 일 없는 거짓 선생들이 거짓된 가르침과 선동으로 이들을 파멸로 인도해 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때에 성도들에게 진정 요청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과 신앙을

 보다 바르고 정밀하게 추구해 가는 일입니다.

이 답변을 통해 성도로서의 이 거룩한 사명을 다시 한 번 각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 해석과 관련된 두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홍창표, 천년왕국, 합신대학원출판부

이필찬, 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서유니온교회

계시록에 대한 좋은 통찰과 전망을 얻을 수 있는 책이라 생각됩니다

 

 

[출처]  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CKRIRF)

      위대한 어머니의 유언 민주주의의 등불이요 노예해방의 아버지 링컨의 생애는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스무 살이 넘을 때까지 손에서 도끼를 놓아본 적이 없었고 농부, 품팔이꾼, 뱃사공 장사꾼, 측량사 조수, 우체국장, 변호사를 지냈다

      그가 역경속에서 꿈과 신념을 잃지 않았던 것은 어머니 낸시가 세상을 뜨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늘 성서를 읽고 말씀대로 살아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 이것이 마지막 부탁이다“

      링컨은 어머니의 말을 항상 기억하고 역경을 헤쳐나가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이 되었다

      -옮긴 글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감방에서 나오는 나의 모습이

          어찌나 침착하고 명랑하고 확고한지

          마치 성에서 나오는 영주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간수들과 대화하는 내 모습이

          어찌나 자유롭고 사근사근하고 밝은지

          마치 내가 명령하는 것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불행한 나날을 견디는 내 모습이

          어찌나 한결같고 벙글거리고 당당한지

          늘 승리하는 사람 같다는데

          남들이 말하는 내가 참 나인가?

          나 스스로 아는 내가 참 나인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고

      그립고 병약한 나

          목 졸린 사람처럼 숨을 쉬려고 버둥거리는 나

          빛깔과 꽃, 새소리에 주리고

          따스한 말과 인정에 목말라하는 나

          방자함과 사소한 모욕에도 치를 떠는 나

          좋은 일을 학수고대하며 서성거리는 나

          멀리 있는 벗의 신변을 무력하게 걱정하는 나

          기도에도, 생각에도, 일에도 지쳐 멍한 나

          풀이 죽어 작별을 준비하는 나인데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나인가?

          저것이 나인가둘 다인가?

          사람들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자신 앞에선 천박하게 우는소리 잘하는 겁쟁이인가?

          내 속에 남아있는 것은

          이미 거둔 승리 앞에서 꽁무니를 빼는 패잔병 같은가?

          나는 누구인가?

       

      날카로운 질문이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아시오니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오, 하나님! 

       

       

       

      류호준 교수의 무지개 성서교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은혜의 단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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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글은 [제3시 http://3-rd.net]에서 닉네임 infiltrator 님의 글을 허락을 받고 올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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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트라교[Mithraism]는 조로아스터교 이전 고대 페르시아인들(현재 이란 근교 지역에서 활동했던)이 숭배했던 태양·정의·계약·전쟁의 신인 미트라를 숭배했던 종교를 의미합니다.

    2, 3세기 로마 제국에서 미트라스로 알려졌던 이 신은 황제에 대한 충성의 후원자로 존경받았다고 합니다. 4세기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뒤 미트라교는 급속히 쇠퇴했다고 하죠!^^

    조로아스터교 이전에(BC 6세기나 그 이전) 페르시아인들은 다신교를 믿었으며 미트라는 그들이 숭배하던 신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신이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미트라는 계약과 상호간의 의무의 신으로 히타이트인과 미탄니인 사이의 조약을 담고 있는 설형문자판에서 서약의 신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더욱이 인도의 몇몇 베다 문서에는 신 미트라(Mitra:미트라의 인도식 표기)가 '친구'와 '계약'으로 묘사된다고 합니다. 미트라란 단어는 계약과 상호간의 의무가 친구를 만들기 때문에 양자 모두를 의미하는 뜻으로 번역되었다고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미트라는 사람들 사이의 교제와 사람들 사이의 좋은 관계를 확립하는 것을 중요시했다는 뜻이겠죠! 그래서 미트라는 중재자로 불렸다고 합니다.

    또한 미트라는 태양의 신이며, 만물을 품은 빛나는 빛의 신이어서 사람들은 미트라를 맹세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특별히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미트라를 태양신으로 간주했으며, 왕들은 태양을 숭배하는 의미로 미트라를 숭배했다고 합니다.

    또한 미트라는 왕과 왕의 전사 사이의 [쌍무(雙務): 상호의무이행]를 나타내는 신이자 전쟁의 신이었으며, 왕이 보증하는 정의의 신이기도 하여 사람들이 정의와 계약을 준수할 것을 맹세하기 전에 언제든지 미트라를 경배하며 그 맹세를 체결했다고 합니다.

    미트라를 숭배하는 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은 황소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의식의 기원이 조로아스터교 이전이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나
    조로아스터교는 황소로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을 비난했기에
    그 의식은 고대 페르시아인들(현 이란인들)의 우상숭배의 일부였던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러한 추론은 미트라가 흰 황소나 달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소마'라는 이름을 가진 신의 희생에 마지못해 참여하곤 했다는 내용의 인도 문서에 의해 제기 되었다고 합니다.
    로마의 기념비들에 있는 기록에도 나중에 달로 변형되는 '미트'라는 흰 황소를 마지못해 제물로 바쳤다는 기록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세세한 부분이 인도와 로마의 기록에 의해 유사함을 살펴볼 때, 소로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이 조로아스터교 발생 이전에 행해졌음을 추론해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고대의 조약은 공동 식사를 통해 승인되었기 때문에, 소를 재물로 드린 후 그것을 공동으로 나눠 먹음을 통해 결속을 다시고 계약을 성사시켰던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다리우스(BC 522~486)로부터 시작되는 아케메네스왕조의 페르시아 왕들은 조로아스터교도였습니다. 그러나 다리우스와 그의 후계자들은 대부분의 귀족들이 마음 속에서 여전히 존중하는 옛 신앙을 근절시켜 시끄러운 정치적 문제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로아스터교는 점차 옛부터 내려오는 오래된 다신론적인 예배 요소에 물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사용하던 찬송가(Yasht)는 옛 신들을 기리며 작곡되었는데, 거기에는 만물을 주의깊게 보는 천상의 빛의 신, 서약을 보호하는 자, 이승과 저승에서 의로움을 수호하는 자, 무엇보다도 악과 어두움의 세력에 대항하는 자로, 그래서 그러한 전쟁에서의 승리의 신으로 미트라를 찬송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후기 아케메네스 시대의 혼합종교에서는 점차 조로아스터교의 양상이 이교도적인 양상을 지배하게 되어, 조로아스터교가 거부했던 황소 희생에 대한 언급이 거의 사라지고 없었으며, BC 330년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했을 때는 미트라 숭배는 더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미트라 숭배가 알렉산더 대왕의 정벌과 함께 과연 사라졌을까요? 기록에 의하면 멸망 이후에도 과거 페르시아 제국 서부 지역의 귀족들은 미트라 숭배를 존속시켰고, 그리스 로마와 페르시아 지역 사이 경계지역에 있던 왕과 귀족들은 여전히 미트라를 예배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르메니아의 티리다테스가 로마 황제 네로를 자신의 최고 주인으로 승인했을 때, 그는 계약과 우정의 신인 미트라가 아르메니아와 강력한 로마 사이에 좋은 관계를 확립시켜 줄 것을 기원하면서 미트라 의식을 치루었다는 기록도 나타납니다.

    터키의 남동쪽이었던 콤마게네라는 곳의 왕들이 미트라 의식을 거행했다는 기록과 폰투스의 미트라다테스 6세도 미트라를 숭배했으며, 동맹자인 실리시아의 해적들도 미트라를 숭배하는 의식을 행했다는 기록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BC 67).

    오직 한 곳 그리스 세계에서만은 미트라 숭배가 전혀 인기가 없었는데, 그리스인들은 미트라가 자신들의 적인 페르시아의 신이라는 것을 절대로 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2세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로마 세계는 페르시아의 신에 대한 관심이 없었으나, 136년 이후로는 미트라에게 바쳐진 수백 개의 비문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 로마가 점차 페르시아의 신에게 동화되어 나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심이 되살아난 이유를 쉽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가장 그럴듯한 가설에 따르면 100년경 생존했던 어떤 종교적 천재가 전통 페르시아 의식을 신(新)플라톤적으로 해석하여 미트라교가 로마 세계에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미트라교는 로마에서 재 창조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페르시아의 미트라교와 같이 로마의 미트라교도 결국 왕에게 충성하는 종교였기에
    콤모두스(180~192), 셉티미우스 세베루스(193~211), 카라칼라(211~217) 같은 황제들에 의해서 미트라교는 계속해서 권장되었다고 합니다.

    비문을 통해 알려진 미트라 신봉자들은 신이 자신들을 승진시켜 주리라 믿었던 하급 및 고급 군인, 황제에게 봉사하는 공직자, 제국의 노예와 자유인(강한 영향력을 지닌 사람들이 많았음)들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미트라에게 바쳐졌던 신전과 봉헌물은 로마와 오스티아에서,
    군사적 변경을 따라서는 영국, 라인,도나우,유프라테스 강 유역 등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비교적 평화로운 지역에서는 봉헌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는데, 봉헌자가 있다면 당시 형편으로 볼 때, 지방의 통치자나 제국의 공직자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결국 페르시아를 정복했던 로마 제국은 몇 세대 안 가서 자신들이 정복했던 페르시아의 신 미트라에 의해 완전히 동화되어 버렸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의 도시와 종교를 부활시켜려고 했을 때 미트라를 사용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에 미트라가 얼마나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었는 지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307년 카르눈툼(빈 근처의 도나우 강가에 있음)의 봉헌식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그의 동료들은 제국의 보호자(fautori imperii sui)인 미트라에게 제단을 봉헌했습니다. 그러나 312년 콘스탄티누스가 꿈에 본 십자가를 기치로 밀비아교(橋) 전투에서 승리함으로 말미암아 미트라를 숭배하는 신앙의 형태들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미트라 의식을 즉각 공식적으로 금지시키지 않았으나 사람들은 곧 미트라에 대한 헌신을 그만두게 되었고, 제국이 미트라교도에 대해 불호의적으로 돌아서기 시작했기 때문에 예배가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미트라에 대한 헌신이 357년과 387년 사이에 다시 나타난 것은 사실이었지만 단지 로마에서뿐이었다고 합니다. 로마 시의 오래된 이방인 귀족 출신의 미트라 봉헌자들이 콘스탄티노플의 그리스도교 황제를 공공연히 반대했지만, 미트라는 마침내 여러 이방신 중 하나로 격하되었고, 그 신비의식은 점차로 사라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세상의 창조(creation of the world)는 미트라교의 중심이 되는 신화입니다.
    신화에 따르면 태양신이 자신의 사자(使者) 갈가마귀를 미트라에게 보내어 황소를 제물로 바치도록 명령했다고 합니다. 미트라는 마지못해 그 명령을 수행했는데 여러 부조에서 그는 슬픔에 잠겨 얼굴을 돌린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황소가 죽는 바로 그 순간에 커다란 기적이 일어나 그 흰 황소가 달로 변했고[소가 달로 변했다는 부분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이 부분이 제가 '시리우스'라는 글을 쓸 때, 말씀드렸던 zodiac과의 커넥션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트라의 외투가 빛나는 행성과 고정된 별이 있는 하늘의 둥근 천장으로 변했으며[천궁도 즉 zodiac의 배경이 됩니다. 한국에서는 별자리 운세가 한때 한참 유행을 했었는데... 이 모든 것들이 그 배경 속에 포함됩니다.]

    황소의 꼬리와 그의 피에서 낟알의 첫 이삭과 포도가, 동물의 생식기에서는 신성한 종자들이 나와 그것들을 뒤섞는 그릇에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상의 모든 피조물은 그 신성한 종자들이 섞여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고 그들의 신화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미트라의 한 찬송가는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당신은 영원한 피를 흘림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식물과 나무가 창조되었고 낮과 밤이 교차하고 달이 주기를 갖추었으며 계절이 한 해를 통해 둥근 춤을 추기 시작하면서 시간이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창조의 신화의 구도가 그러하듯 창조의 선에 대비되는 악의 구도가 여기서도 등장합니다.

    갑작스런 빛으로 깨어난 어둠의 동물들이 땅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뱀 한 마리와 개 한마리가 황소의 피를 핥았고[사진 2를 참고 하십시오], 전갈 한 마리가 생식기에서 나온 신선한 종자를 빨아먹으려고 했다고 합니다[다음에 확인하실 수 있는 사진을 올리면 좋겠습니다].

    이들의 신화에서는 황소의 죽음과 세상의 창조로 인해 선과 악의 투쟁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을 인생의 상황으로 묘사합니다. 갈가마귀는 공기를, 사자는 불을, 뱀은 땅을, 뒤섞는 그릇은 물을 상징한다고 하며, 그래서 이 4가지 요소가 이 지구에 존재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다고 신화는 주장합니다.

    황소를 희생시킨 뒤에, 미트라와 태양신은 함께 연회를 베풀어 고기와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셨다하며, 그뒤 미트라는 태양신의 전차에 올라타 대양을 건너 공중에서 세상 끝까지 몰고갔다고 창조신화는 기록합니다.

    로마의 미트라교도들은 이 창조신화를 플라톤 철학의 관점에서 해석했다고 합니다.
    플라톤의 〈국가론 Republic〉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처럼, 세상의 형상인 동굴 안에서 그들의 제물이 희생되었습니다. 미트라는 <대화 Timaeus〉의 조물주(데미우르고스)와 같게 되었고,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처럼 '만물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4가지 요소들, 섞는 그릇, 시간의 창조, 새로 탄생한 피조물에 대한 흉악한 동물들의 공격등은 〈대화〉의 유명한 특징이라고 합니다.

    미트라의 [영혼에 대한 교리]는 창조신화 및 플라톤 철학과 의도적으로 결합된 흔적이 보입니다.〈대화〉에서처럼 인간의 영혼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면서 행성의 악(예를 들면 화성과 금성)을 타고 일곱 영역을 건너와 마침내 육체 속에 갇혔다고 합니다. 인간의 과제는 그의 신격의 일부인 영혼을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일곱 영역을 통해 붙박힌 별들의 영원불변한 영역까지 다시 올라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하늘로의 상승은 미트라가 태양신의 전차로 지구를 떠났을 때 미트라 자신이 예시한 것이라고 주장하죠.

    이번에는 미트라교의 예배와 의식 그리고 제도에 대해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미트라의 신전은 그 규모가 제한될 수밖에 없는 지하의 동굴이었습니다.
    발굴된 여러 성지 중의 어느 것도 100명 이상 수용하지 못하며 대부분은 그 이하의 규모였다 합니다. 모든 의식에는 반드시 인공조명이 필요했고 그래서 동굴에는 항상 벽이 있었다고 합니다.
    동굴에는 입교예식이 시작될 때 이용하는 지하통로가 있었고, 남자만이 이 군인의 종교에 허용되었으며, 어떤 조직적인 위계질서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입회자들은 갈가마귀(corax), 신랑(nymphus), 군인(miles), 사자(leo), 페르시아인(Perses), 태양의 시종(heliodromus), 아버지(pater) 등 7등급으로 조직되었는데, 각 등급은 특별한 가면(갈가마귀·페르시아인·사자)이나 의상(신랑)을 가졌다고 합니다. 미트라교도의 등급이 올라가는 것은 죽은 뒤 영혼이 상승하는 것을 예시했다 합니다. 입문과정은 7개의 관문을 통과하고 일곱 계단의 사다리를 올라감으로써 행해졌던 것 같습니다. 각 등급은 일곱 행성의 신에게 속했고, 열성적인 미트라교도는 점차 이런 중요하지 않은 신들의 영역을 통과하여 마침내 고정된 별의 영역에 도달해야 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그들의 7등급과 행성의 연결을 소개합니다.
    Corax: The Raven with Mercury
    Nymphus: The Bridegroom with Venus
    Miles: The Soldier with Mars
    Leo: The Lion with Jupiter
    Perses: The Persian with the Moon
    Heliodromus: The Runner of the Sun or the Messenger with the Sun
    Pater: The Father with Saturn

    입교의식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현재는 거의 없습니다.
    고대문서에는 세정식(세례)과 정화예식, 징벌, 속박과 해방, 그리고 어떤 의식의 암호에 대해 언급되어 있을 뿐입니다. 카푸아(이탈리아)의 프레스코에서는 입문자들이 눈을 가리고,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은 체하는 것과 부활을 나타내는 그 무엇이 의식의 일부였던 것 같습니다.

    2세기 북아프리카의 신학자인 테르툴리아누스는 군인등급에 부과된 용기의 시험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요, 손에 무기를 들고 아마도 거짓 결투를 하면서 화관이 있는 곳까지 나아가야만 했고, 성공했을 때 한 사제가 화관과 함께 왕관을 수여하지만 패배한 자는 미트라만이 그의 화관이라고 말하고서 남은 생애 동안 다시는 화관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트라교의 동굴은 프레스코와 부조 및 중요하지 않은 신과 행성의 신의 신상으로 보통 장식되어 있다고 합니다. 좁은 복도 양면에는 예배자가 무릎을 꿇거나 몸을 눕힐 수 있는 넓고 높은 벤치가 붙어 있습니다. (종종 반원 같은) 복도의 한끝에는 언제나 황소의 희생제물을 표현하는 부조나 프레스코가 있습니다. 때로 축으로 회전될 수 있는 부조의 뒷면은 미트라와 태양신의 식사를 표현했다고 합니다. 후에는 황소의 희생제물에 대한 의식이 자주 수행되지 않았던 반면 입교자의 공동 식사는 미트라 예배의 일상적인 특징으로 굳어 갔다고 합니다.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제가 미트라에 대한 수집 자료를 여러분들께 공개하며 알려드립니다.
    다소 복잡하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도 많으시겠지만...
    궁극적으로 이 미트라교가 헬레니즘과 함께 파급되었을 그 효과를 한번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거슬러 올라가 니므롯으로부터 애굽, 앗수르, 바벨론, 페니키아 그리고 알렉산더를 통한 로마제국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혼합형태의 태양신 숭배의 흔적들을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지요.
    그리고 이 태양신 숭배가 용과 봉과 소 그리고 뱀 심지어 개와 전갈까지...
    그리고 그것이 서양의 점성술 동양의 무속, 샤머니즘과 복합적으로 연결되어져 있는지를
    다시 한번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사단의 총체적 전략아래... 수많은 우리 인류가 그 궤계에 종노릇한 흔적들이
    우리 인류의 역사를 통해 곳곳에 묻어나고 있음을 주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에는 좀더 compact한 자료들로 우리의 목표를 조준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보죠!
    이 내용을 읽으시면서 여러분께 주시는 성령의 음성도 나누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계속 부족한 저를 위해 기도 부탁도 드립니다!^^

    사진 1: British Museum에 있는 미트라가 소를 희생제물로 잡는 장면의 조각상입니다.
    사진 2: 특별히 같은 조각상에서 개와 뱀이 미트라가 칼로 찌를 소의 상처에서 피를 빨아먹는 장면을 확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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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서고고학(세미라미스의 공중정원)  (0) 2012.07.20

    바울의 구원론의 기본사상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인간은 처참한 죄인이라 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예 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결론하기 위해서 인간이 죄의 종이었다 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으로부터 그의 구원론을 시작합니다.

    < 죄의 종 >

    바울은 '죄(하말티아, )'라는 용어를 64회 사용하는데 로마서에서만 48회 사용합니
    다. 그리고 인간이 '죄의 종'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롬 6:17,20). 그리고 모든 사람이 죄 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단언합니다(롬 3:23).

    < 육신 >

    바울은 '육신'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신약 성경에 147회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 바 울이 91회를 썼습니다. 이 단어는 인간의 육체라는 의미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지만, 군터 보른캄에 의하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에 대립되고 모순되는 인간의 존재와 태도'라는 의미 로 바울에 의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육신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본문은 로마서 8장 1-17절 말씀입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은 육신을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여깁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고 육신을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보고 있습니다.

    < 율법 >

    바울이 구원론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가 율법입니다. 바울은 이 율법이라는 단어를 119회 사용하는데 신약성경 전체 191회의 62퍼센트 정도입니다. 바울이 율법을 말할 때는 대개 모세의 율법을 말하며, 바울은 그 율법을 하나님의 좋은 선 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이라는 헬라어 단어 '칼로스( )'는 '아름다운'이라는 뜻 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데이비스(W. D. Davie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은 폐기되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으로 이해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즉 바울은 율법의 목적이 그것을 지킴으로 사람을 의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즉 죄를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드러내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롬 5:20).
    레온 모리스는 여기서 '범죄'가 원어를 보면 단수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더 많은 범죄(범죄들)를 일으켰다는 말이 아니라 범죄에 대해서 더 밝히 드러냈다는 해석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율법이 있음으로 범죄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게 되는 것이 아니라, 범죄 여부가 더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목적은 우리의 죄를 명확하게 보여줌으로, 우리들에게 구원의 필요를 보여줌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갈 3:24)
    그러므로 바울이 생각하는 율법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구원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리기를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율법이 이용되면 율법은 오히려 구원의 방해꾼이 됩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죄를 깨닫고, 죄를 깨달음으로 구원의 필요를 느끼고, 구원의 필요를 율법으로는 만족시킬 수 없음을 알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는 선까지 나아가야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 죽음 >

    바울이 생각하는 죽음의 개념은 단순히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라 죄의 결과인 죽음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죽음은 모든 인간을 쓸어버리는 잔인한 정복자이나 신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내세를 위한 디딤돌입니다.

    < 하나님의 진노 >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었습니다(엡 2:3).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철저히 거부권을 행사하신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속성 자체가 '진노하시는 하나님'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의 인간을 진실로 사랑하기에 죄를 거부하는 모습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바울의 구원론과 관련된 몇 가지 주제를 더 살펴볼까요?

    < 심판 >

    심판에 대한 바울의 사상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습니다.
    1. 현재에도 하나님의 심판은 진행되고 있다.
    2. 미래의 종말에 가장 큰 심판이 있다.
    3.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딤후 4:1).
    4. 심판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딤후 4:8).
    5.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에게 구원과는 별도로 행위심판이 있다(고전 3장).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행위에 따라 하나님의 보응이 달라진다고 말합니다.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 3:8). 즉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라는 기초 위에서 건축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금, 은, 보석으로 건축하고 어떤 사람은 나무, 풀, 짚으로 건축한다는 것입니다(12절). 심판의 날에 그 문제가 그냥 눈감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공덕의 능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를 불 가운데서 심판하는데 나무, 풀, 짚과 같은 것으로 건축한 사람은 그 공력이 타버려서 구원을 받기는 받지만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이 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12절).
    이런 사상을 바울이 말한 배경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린도교회의 교인의 파당문제와 관련되어 바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은 파당 문제로 바울이 질책하는 내용입니다. 1장과 2장에서 분파의 원인에 대해서 원론적인 언급을 했다면 3장에서는 분파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바로 육신의 욕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볼로가 무엇이고,
    바울이 무엇인가?"라고 반문합니다. 다 사람일뿐이라고 하면서 그는 말합니다. 자기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1-9절).
    그래서 계속되는 바울의 말을 설명하면 이런 말입니다. "너희는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성전인데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지어진 견고한 성전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왜 추악한 분열을 일삼아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세워진 성전이 되려고 하는가? 그러면 심판의 날 너희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얻는 구원, 즉 시커먼 숯과 타버린 재처럼 되어서 창피한 모습으로 신랑을 맞이해야 한다. 그런 일이 없도록 더 이상 분파행동을 하지 말고 거룩하라!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않는가?(16절)"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들의 잘못된 행위도 하나님께서 눈감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비참한 업적들만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사람은 심판 날에 안타까운 처지에 처할 것입니다.

    < 이 악한 세대 >

    바욿은 '이 악한 세대(갈 1:4)'라는 개념을 통해서 인간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환경적 요소가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 환경적 요소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첫째, 인간의 범죄가 피조물에게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고, 둘째, 악한 영들의 활동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영들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지금 불순종의 아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엡 2:2),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엡 6:12) 등의 표현이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승리도 말하지만 거대한 악의 세력에 대한 현실적인 평가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 십자가 >

    바울의 삶과 사상에 있어 가장 중심에 놓인 것은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그가 처음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습니다(고전 2:2). 아덴에서의 선교에서 성공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십자가는 다른 성경 기자와는 다른 바울의 탁월한 사상입니다. 바울은 십자가를 무수히 역설했지만 바울 서신 외에서는 복음서에서의 십자가 사건을 제외하고는 히브리서에서만 십자가와 관련한 언급이 한 번 나옵니다(히 12:2).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라는 개념이 얼마나 '바울적인 개념'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지탱하는 두 개의 축 중의 한 축입니다. 또 다른 한 축은 부활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 하는 논란도 벌어집니다. 그러나 그런 논란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둘 중에 하나만 있으면, 혹은 한 축이 더 길면 절름발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개념은 분리된 개념이 아닙니다.

    < 구속 >

    구속이란 말은 '속전(대가)을 지불하고 구해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라는 말보다 더 의미심장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속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구속을 가져다 준다고 바울은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삼으셔서(롬 3:25)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신 것입니다.

    < 칭의 >

    '의롭다고 여김 받는다'라는 뜻을 가진 칭의라는 개념은 법정적인 용어입니다. 의로운 재판장으로부터 어떻게 '무죄!'라는 선언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그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는다."(롬 3:24)

    < 속죄와 관련된 의미를 가진 다양한 범주 >

    구속(롬 3:24; 고전 1:30; 갈 1:13; 4:4; 엡 1:7; 골 1:14). 값을 치르고 노예를 사서 풀어주는 의미입니다. 무슨 값을 치르셨습니까? 가장 비싼 값을 치르셨는데 바로 '그리스도의 피'라는 값입니다.
    새 언약(고전 11:25).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로
    운 하나님과의 약속의 관계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언약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사죄'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유대교를 조금 변형시킨 것이 아닙니다. 율법보다는 하나님과의 약속에 바탕을 둔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입니다.
    화목(롬 5:10-11; 고후 5:18-20; 엡 2:11-16; 골 1:19-22). 바울의 글에서 앞에 열거한 4구절에서만 '화목'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화목은 분쟁이나 적의를 지니고 있다가 다시 화평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과 원수였다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거두어졌다는 것입니다.
    제물(엡 5:2; 고전 5:7). 동물의 피를 바치면서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의 확신을 얻는 제사의식과 관련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완전한 희생 제물입니다.
    용서(골 3:13; 엡 4:32). 우리는 죄의 책임을 져야 하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양자됨(롬 8:15; 갈 4:5; 엡 1:5). 양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가족에 속하지 않던 한 사람이 그 가족의 완전한 일원이 되는 것이며, 권리와 동시에 의무도 주어집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가족의 일원으로 입양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사랑 >

    이 사랑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입니다. 우리가 "믿음! 믿음!"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떠나서는 믿음은 무의미합니다. 목회서신에는 사랑이 10번 언급되어 있는데, 그 중에 9번이 믿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을 이해하는 중심 사상입니다. 바울은 수많은 글에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합니다. 바울의 수많은 축도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바울을 지배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느 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패배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롬 8:35-39). 바울이 수없이 쓰고 있는 '은혜'라는 단어도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배경으로 합니다. 사랑 없이 은혜가 어떻게 온전히 이해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때로 하나님은 '융통성 없는 심판자'요, 그리스도는 '그 심판자로부터 구출하는 분'으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상한 그림은 바울의 그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역사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 이한규목사


    우리가 인을 치나이다.

    대장쟁이 ㆍ 2014-02-19 (수) 16:57

    [느헤미야 10장] "그 인친 자는 하가랴의 아들 방백 느헤미야와 시드기야, .........."


    오늘 생각해볼 것은 우리에게 신앙생활이 무엇이며 왜 필요한가입니다. 인간은 그 본질이 죄인입니다. 죄인의 본질의 하나는 연약함과 낡아짐과 부패함입니다.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육신은 무너지고 정신은 희미해지고 기억과 약속조차 변하고 사라지고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나이 들고 몸이 늙고 치매로 기억을 상실하고 마음과 정신마져 무너져내리는 것이 죄인의 본질 중 하나인 것입니다. 이러한 늙음과 후패함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처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죄(원죄)를 범한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서 얻은 저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노쇠와 연약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러한 죄인이 된 것을 하나님 앞에 송구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도우심을 간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양로원에서 노인들을 돌보는 일을 하면서 느끼는 것이 많습니다. 모세처럼 늙어서도 온전한 육신과 마음을 지키다가 가는 것은 축복 중에 축복일 것입니다. 그러나 노인들은 몸과 마음이 함께 허물어져 내립니다. 앙상하게 노쇠한 육신은 수발을 받아야 하고 기억과 마음은 치매증세를 보이며 함께 피폐해 집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죄인의 몸을 입고 사는 것을 우리가 어찌 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소망하노니 그 날이 오면 새 몸을 입으리다. 그 날이 오기까지 이 연약한 몸이 하나님을 잊지 않게 하시고 나의 심령을 날로 날로 새롭게 하소서.” 이것이 죽는 날까지 우리의 기도제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늙기도 전에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떠나고 악을 행하는 인간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하는 악(惡)이로구나 싶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자기들의 에녹성을 짓고 하나님을 잊고 대적하며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홍수가 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습니다. 하나님 앞에 살면서조차 불순종하며 악을 행하였습니다.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홍해바다를 건너게 하시고, 광야에서 마라의 쓴물과 엘림을 보이시고, 만나와 메추라기, 불기둥, 구름기둥, 그리고 시내산의 화염과 말씀 돌판, 반석의 물, 성막, 그리고 많은 사건들을 통하여 백성들이 잊을래야 잊을 수 없도록, 그렇게 그들의 가슴에 새기듯 하나님을 각인했건만 그들은 가나안 땅을 얻는 순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잊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대적들에게 파셨고 백성들은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 때마다 사사를 일으키셔서 구원하셨는데......., 문제는 그것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인간의 패역이 반복되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언약의 도장을 팍, 찍으셨지만 인간들은 그것이 가슴에 팍, 찍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무리 찍어도 잊어버리고 다시 후패하는 것이 죄인의 본질이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 8장에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나서 모든 백성들이 모여 에스라에게 율법책 낭독을 청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울며 통회하며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초막절을 지키는 감격적인 회복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모여서 하나님 앞에 통회자복하며 서원합니다. 느헤미야 9장에서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열조들이 반복해온 범죄를 자복하며 그 조상들과 그들을 하나님께서 자비와 긍휼로 지켜 오신 것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9장 마지막 절 38절을 보면 “우리가 이 모든 일을 인하여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을 치나이다.” 하며 하나님 앞에서 서약을 합니다. 인을 친다는 것은 문서를 작성하고 거기에다 도장을 찍는다는 말입니다. 도장을 찍어서 다시 잊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10장 1-27절은 그 인 친 자, 도장을 찍은 자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8절부터 그 나머지 백성들, 제사장, 레위인, 문지기, 찬양대, 느디님 사람들,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심한 사람들, 그 가족들은 저주로 맹세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저주를 당하겠습니다,” 하는 무서운 결단입니다. 그 맹세의 내용을 보면, 자녀들을 이방사람들과 혼인시키지 않겠다,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고 빚을 탕감해 주겠다, 연수입 3분의 1을 하나님 전을 위하여 사용하여 제사가 끊이지 않도록 하겠다, 첫 열매. 첫 소산, 첫 생축, 처음 익은 곡식, 과일, 새 포도주, 기름, 그리고 십일조를 드리겠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는 세부실천사항들입니다.

    그리고 한 달 동안 백성들이 감격과 기쁨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초막절을 지키며 그들이 다시금 맹세한 것은 “잊지 않겠습니다, 잊지 않기 위하여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는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초막절의 감격, 구원의 감격, 하나님 앞에 나아온 기쁨이 단회성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잊어버리는 인간의 속성과 약점으로 인하여 반복되는 죄로 연결될 것입니다. 물론 십일조나 절기나 규례와 율례를 지키는 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규례와 율례가 잊지 않게 그들을 붙잡아 줄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결사적으로 스스로에게 인을 쳤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기 힘쓰고 아침저녁 소제를 드리며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려고 애쓴 것은 매 순간마다 날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연약한 죄인의 심성이 하나님을 떠나서 부패하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같이 겸손하게 우리의 죄인이라는 본질을 깨닫고 날마다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 앞에 시간과 물질과 삶을 드리며 날마다 심령을 새롭게 하는 삶을 살기 힘쓰며 주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기를 힘쓰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을 치는 일일 것입니다. 이것이 죽는 날까지 우리에게 규칙적인 신앙생활이 필요한 이유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처럼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켜서 인을 치지 않습니다. 스스로 결단하고 스스로 그런 인 쳐봐야 소용 없습니다. 쳐지지도 않습니다. 구약시대의 그들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인을 쳤지만 우리에겐 성령님께서 인을 쳐 주셨습니다. 우리의 육신이 늙어 후패해지고, 결단도 희미해지고, 기억도 사라지고, 마음도 무너져내린다 해도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치신 인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놀라운 일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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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지주의(Gnosticism)

     

    배경

     

    주후 1세기경, 로마를 비롯한 몇몇 중심 도시들을 제외한 여타지역은 극심한 기근과 전염병에 시달리며 모든 정신적 자원도 고갈된 상태였다. 이러한 때 기독교가 가진 구원의 복음은 희망을 잃고 사는 사람들에게 단비와 같은 희소식이었다. 기독교는 점점 세를 확장해 갔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미는 생명의 손을 잡은 사람들은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로마제국 내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기독교 예배공동체가 생겨났다.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나와 가정이나 공동의 공간을 이용하여 주일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한편, 당시 사회는 헬레니즘에 침식된 철학적 개념과 주제와 더불어 혼합주의로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대개 혼합주의는 겉으로는 다양성을 바탕으로 한 일치와 연합을 주무기로 사용한다. 그래서 보기에 사람들의 입맛을 돋우게 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혼합적인 문화에 대해 먼저 우려를 표명하고 대응책을 논한 그룹이 나타났는데 그들이 바로 지성적 탐구자들인 영지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세상의 타락과 재앙으로부터 인간의 구원을 논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와 궤를 같이 하지만 이들의 가르침은 헬라철학에 비해 매우 신비스럽고 우아한 요소를 가미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점점 영지주의자들의 호소가 기독교인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아 갔으며 급기야 대세로 확산되어 초대교회의 복음에 일대 위기를 초래하게 되었다. 여기에 이들이 득세한 데에는 자연의 재앙들이 영향을 끼쳤다. 63년에 지진이 갑자기 발생했고, 79년에는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해서 당시 휴양지였던 폼페이와 헤르클라네움 두 도시가 폐허가 되었으며, 80년대 중반에는 로마제국 전체에 흑사병이 창궐해 사람들은 염세주의에 빠졌다. 사람들은 비관적인 상태에서 현실세계를 벗어나고 싶었다. 이런 차에 영적세계를 소개하는 영지주의의 가르침은 너무나 매력적인 것으로 다가온 것이다.

     

    영지(그노시스)란, 곧 지식을 뜻하는데 이 지식은 단순히 세상에서 배움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그런 일반적인 지식이 아니라 깊은 영적인 체험으로부터 얻어진 지식을 말한다. 사람들은 영지주의자들의 손에 이끌려 영적 체험의 현장으로 모여 들었다. 새로운 지식을 얻어 절대자를 만나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영적 체험을 하고 영험한 지식을 획득한 이들은 일종의 신적 우월감을 가지고 하류의 인간그룹을 지도하고 관장해 나갔다. 점점 이들의 손에서 성경이 중요치 않게 되거나 사라지게 되었다.

     

    여기에 영지주의자들의 주요한 하나의 특징이 발견된다. 그들은 신비적인 방식으로 신을 체험하는 것을 절대화했는데, 이 결과 그들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으로 만족을 하지 못하고 성경 이외의 더 깊은 세계를 탐닉하고 여행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이고 정통 기독교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오직 성경만이 절대적인 기준이요 성경 안에 모든 구원이 다 들어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은 성경만을 고수하지 않고 성경을 포함한 다른 방식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탐험가들은 깊은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 결국에 어떤 궁극적인 영을 만나고 그 영과의 합일을 추구하며, 드디어 육체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신적 경지를 터득하고 누린다는 것이다.

     

    이 방식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단의 공통된 특징이다. 한 마디로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는 모든 이단의 원형이다. 초대교회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이단은 영지주의에 속하거나 영지주의의 한 분파일 뿐이다. 모든 이단은 영지주의가 가지고 있는 속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예컨대 신비주의와 체험주의, 고행주의와 내재주의, 그리고 혼합주의와 다원주의 등은 모두 영지주의의 산물이다. 영지주의는 반 기독교적 철학과 사상과 종교의 집합체이다. 영지주의는 한 마디로 적그리스도의 사상이다. 영지주의 안에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원수 삼아 괴롭히고 멸망케 하려는 모든 미혹의 술법과 책략들이 다 들어 있다. 영지주의 이후에 나타난 모든 이단들은 단지 영지주의의 변형이자 위장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단을 알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영지주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그를 잘 간파하면 될 일이다.

     

    주요 내용

     

    그들이 가르친 주요 내용은 무엇인지 좀 더 논하기로 한다.

    첫째, 이원론(dualism)적 관점으로 모든 것을 논한다. 이는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특히 플라톤의 이원론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세상을 두 부분으로 본다. 빛의 영역과 흑암의 영역이다. 이 두 질서의 불행한 만남과 혼합으로 영자아의 타락과 추방이 일어났다. 흑암의 세계 즉 우주는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부차적이고 다른 것에서 파생한 것이다. 이들은 물질세계는 악한 것이고 하나님에 의해 지배되는 정신의 세계만이 선하다고 전제하고, 주된 관심사는 인간이 어떻게 악한 물질의 세계를 벗어나 하나님이 계신 빛의 세계에 참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모든 신자는 철저히 금욕을 실천해야 하고 무지를 추방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신적인 계시를 받고 높은 지식을 소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둘째, 두 개의 세상 즉 충만(플레로마)이라고 하는 영, 즉 재료의 본래적이며 신적인 세계와, 공허(케노마)라고 하는 열등하고 물질적인 세계라는 두 질서 사이의 대립을 강조하는 것이 기독교 영지주의적 사고방식의 특성이다. 다시 말해 무엇이든 실재하고 중요한 것은 충만 속에서 발출한다. 하지만 이것은 가시적 우주의 낮은 수준에서 전위된 양식으로 모방된다. 공허는 충만의 그림자나 상이다.

     

    셋째, 빛의 세계는 영(프뉴마)으로 이루어져 있고, 좀 더 낮은 세계는 혼(프쉬케)과 물질(휠레), 육체(싸륵스)로 이루어져 있다. 두 세계는 서로 다른 신이 이끌고 있는데 물질적 우주의 조성자가 '데미우르고스'이고 이는 하나의 신이며 유대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지만 영의 세계에 속한 구성원이 아니며 그저 혼의 재료로 이루어져 있고 사물의 참된 근원을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영의 세계의 주인이신 분의 지성적 복제이다.

     

    넷째, 영지주의자들은 자기들의 내면적이고 참된 자아에서 영이며, 그들의 고유한 고향은 충만에 있다. 그런데 참자아를 가진 영적 존재인 자기들이 이질적인 우주에서 길을 잃었고 다시 길을 찾기 위해선 계시의 은혜를 입어야 한다고 했다. 자신들은 선민이며 유대교의 하나님보다 월등하며 이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질서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 존재임을 주장했다.

     

    다섯째, 따라서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을 세 등급으로 나누었다. 제 1그룹은 희망도 없이 육 혹은 물질의 세계에 잡혀 궁극적으로 멸망할 운명을 가진 사람들이고, 제2 그룹은 혼의 차원에서 유대교 성경의 하나님에게 속한 기독교인들로서 멸망하지 않지만 2등급의 구원을 얻는 부류익, 제3 그룹은 마지막으로 영들(Spirituals)로서 이들이 영지주의자들이며 신적인 세계의 충만에 속하게 된다고 했다. 모드 이단의 공통점 중의 하나는 자기에게 속한 구성원들을 계급이나 신분 등으로 나누어 차별화한다는 것이다.

     

    여섯째, 그들은 스스로를 그리스도 혹은 예수와 더불어 구원의 계시를 가진 자로 여겼으며 다른 사람과 자신들을 엄격하게 구분했다. 그렇지만 예수는 혼의 그리스도일 뿐이라고 했다.

     

    특색들

     

    첫째, 통일된 내용이 없다. 마치 오늘날의 WCC처럼 특정한 신학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각자의 주장이 중구난방 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2세기경의 기독교를 연구하는데 있어 중요한 자료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둘째, 영지주의가 기독교보다 연대 상으로 아주 앞서지는 않아도 영지주의가 표현하는 운동이나 종교적 경향은 교회와 독립적으로 존재했다는 것이 분명하다.

     

    셋째, 종종 영지주의는 교회 안에서 자란 하이레시스(hairesis, 분파, 이단)의 모습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 중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아쉽게도 그들은 신앙에 있어서 영지주의의 습성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현상이 목격되기도 했다.

     

    넷째, 대개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은 비밀스러운 가르침이며, 소수에게 계시되고 본질적으로 신비스러운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들이 소유하는 지식(영지)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의 강화에는 의도적인 수수께끼 같은 성질이 있다. 모호하고 복잡하고 신비스럽게 만드는 것 속에 빛이 있다고 가르쳤다.

     

    다섯째, 또한 잘 알고 있는 자들에게 계시로서 나타나는 이 영지는 초월적이고 원초적인 실재에 대하여 이야기 형식(뮈토스)을 띤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추상적인 철학적 혹은 신학적 개념 혹은 일반적인 상징들이 담겨 있다.

     

    여섯째, 영지주의 문학에는 공상적인 내용이 포함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의 창조이야기에는 이교신화로부터 혹은 점성술로부터 마술로부터 나오는 주제와 개념들을 끌어다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개 영지주의자들은 기독교의 기본교리에 대한 반박의 도구가 되었다.

     

    역사적 자료들

     

    <플로라에게 보내는 편지(Letter to Flora)>

    - 영지주의자인 프톨레미의 작품으로 이 안에 <피스티스 소피아>가 들어 있는데 바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눈 대화를 기록한 것이다. 이것은 뒤에 <위대한 로고스의 신비>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1955년엔 <요한의 비밀스러운 가르침>으로 모습을 보였다. 영지주의에 반대한 기독교 변중가들인 리용의 이레니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터툴리안, 로마의 히폴리투스 등의 작품에서 영지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그들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다.

    - 한편, 1945년 이집트의 나그 하마디에서 4세기경의 영지주의 작품들 사본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엔 총 48개의 짧은 논문들이 수록되어 있다. <진리의 복음>, <도마복음>, <트리파르티트 트락타테>, <레기스에게 보내는 서신>, <부활에 대한 논문> 등이 대표적이다.

     

    영향

     

    영지주의자들은 초기 기독교 문학과 전승에 진지하고 중요한 해석가들이었다. 대표적 영지주이자인 발렌티우스(130-160년에 활약)는 바울서신으로부터 자신의 영감을 발견하고 영적인 것과 혼적인 것, 그리고 육적인 것으로 나누었고 테오도투스는 골로새서를 가지고 충만을 설명했으며, 헤라클레온은 요한복음에 대한 최초의 주석을 시도했다. 이런 일들은 기독교의 학문적인 부분에 하나의 충격을 던진 것이다. 모든 교회의 지도자들은 영지주의의 심각한 왜곡과 가르침에 대해 화가 났다. 궁극적인 하나님은 이 우주의 창조주와 다르다는 주장에 대해 분노했으며, 영은 자동적으로 선하고 육은 그 자체로 악하고 구속받을 없는 것이라는 운명론 또는 결정론에 대해 반론을 펼쳤다.

     

    한편 영지주의와 기독교의 결합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보이며 새로운 이단의 주장을 하는 부유한 기독교인이 나타났는데 그가 바로 마르키온(110-160)이다. 주후 139년부터 로마에서 활약한 그는 바울서신을 기준으로 새로운 성경을 만들었으며 독립된 교회를 세웠다. 특히 유대교의 율법과 복음사이에는 대립과 모순이 있다고 추론했으며, 모세의 언약의 하나님과 예수와 바울의 하나님이 전혀 다른 존재라고 했다.

     

    영지주의는 170년경 이상한 예언주의자인 몬타누스를 등장시켰다. 그는 자신이 성령이라고 했으며 세상과 완전히 고립된 채 살며 다가올 종말을 선언했다. 정결과 순교를 원칙으로 내세워 두 아내인 브리스길라와 막시밀라도 몬타누스와 헤어졌다. 179년 막시밀라는 죽으면서 '내 이후로는 더 이상 여성 선지자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운동은 시리아와 안디옥에 퍼졌고, 로마와 서방세계를 휩쓸었다. 겉으로 보기에 매우 경건한 그들의 삶이 매력을 던졌던 것이다.

     

    결론

     

    영지주의는 기독교의 초기 역사상 가장 심각한 내부의 위협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물질적인 것은 타락하고 악한 것에 불과했다. 영적인 것만이 선하고 순수할 따름이었다. 그들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영적인 지식, 즉 세상의 악의 기원을 알게 됨으로써 구원을 완성하게 만드는 비밀스러운 지식. 즉 그노시스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선택받은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만이 그노시스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밀스럽고 신비한 지식을 소유하지 못한 다른 사람들은 진리의 그림자로 규정하고 노골적으로 경멸했다.

     

    12개 정도의 분파로 나누어진 영지주의자들은 물질을 부정해서 성경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라는 내용을 배격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육신이 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예수님과 그리스도를 따로 구분했다. 이는 19-20세기경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따로 분리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주장과 동일하다. 다시 말해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예수라는 이름의 평범한 젊은이를 잠시 사로잡은 어떤 영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선택받은 일부에게 있는 영이 현재 육체에 갇혀 있으므로 이 몸에서 해방되면 다시 영의 세계로 올라갈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의 핵심교리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선과 악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이고, 다른 하나는 구전이나 비밀문서들이 전해주는 은밀한 진리에 관한 믿음이다. 단순하고 간단명료한 영지주의의 이원론은 매우 쉽게 대중들에게 어필했다. 이것이 이단들이 갖는 대중적인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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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진실| 원글보기
    요즈음 유행하는 영상 예배는 참 예배가 아닙니다.

    광야의 소리 ㆍ 2014-02-23 (일) 01:17 IP: 183.xxx.194    

    영상 예배는 예배가 아니다.

       
    영상 예배는 엄격히 말하면 예배가 아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참 예배는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와 그의 인격을 통해 전해지는 진리의 말씀과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영적 교통이고 또 그리고 그 현장에 예배 순서 순서마다 성령님이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은혜의 자리다. 

    그런데 영상 예배의 설교자는 살아있는 사람의 인격의 교통과 성령님의 역사의 교감이 그 예배 현장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하나의 매스 미디어의 영상의 부산물이고 죽은 허상이다. 

    예를 들 어느 목사의 설교를 영상으로 보고 예배를 드린다고 하자.
    그 예배 현장에서 그 목사의 인격과 삶으로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진리가 그 영상으로 통해 성도들에게 영적 커뮤케이션으로 감동과 은혜로 이루어지고 또 성령님의 임재와 역사가 동일하게 나타나고 임할까?

    천만의 만만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는 반듯시 살아있는 메신저와 그리고 그 자리에 참예한 교우들과 그 예배 현장에서의 신령과 진정의 영적 교류가 이루어져야 하고 또 그런 만남과 커뮤케이션을 통해 하나님게 드려지는 예배다.

    그렇지 않고 설교자 대신에 그의 영상을 띄워 놓고 예배드리는 것은 말이 예배지 죽은 조상에게 제사드리는 것과 꼭같은 하나의 우상숭배다. 

    그것이 만약에 예배라고 주장한다면 지상의 교회가 필요 없고 목사가 필요 없다. 
    왜 아까운 시간 낭비하고 교회당에 찾아가서 살아있는 목사 설교 듣고 예배 드릴려고 하겠는가?

    영상을 보고 예배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 라면 스마트 폰으로, 인터넷으로, 케이블 방송으로, 위성방송으로 예배 드리고 말 일이다.

    그래서 감히 말하건대 영상 예배는 예배가 아니다.
    대형 교회에서 교인들이 많아 자리가 없다고 유아실, 교육관등에 목사 영상 보여주고 예배 드리게 하는 것 다 엄격하게 말하면 그건 참된 예배가 아니다.
    자리가 없으면 다른 교회에 가도록 해야 한다.
    절의 중도 신도도 영상으로 부처 안 섬기고, 우상 종교 천주교도 영상으로 미사에 참여하고 안 드린다.

    지금 개신교는 전의 여의도의 조 00목사의 영상 예배가 제일 먼저 기억나고, 또 그가 타 지역의 지 교회를 세워 영상 예배를 드리게 하는 대한민국의 영상 예배의 원조격인데. 내가 보니 한국의 이렇다하는 어느 신학교수나, 또 한국의 내노라하는 어느 목사들이 그런 영상 예배를 가르켜 하나님께 드리는 잘못된 예배라고 지적하거나 비판하여 그런 영상 예배를 배척하고, 이 땅에 그런 괴물같은 망령된 예배가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여야 하는것이 너무나도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너도 나도 그런 타락한  귀신 장난같은 영상 예배를 세상의 편리한 매스 미디어의 문화와 유행의 시류에 편승하여 교회들 마다 앞다투어 그런 영상 예배를  따라하며 갈수록 그것을 확대 재생산하는 한국교회를 볼 때마다 이것은  세상의 어느 우상 종교 절간이나 카톨릭보다도 더 추악하고 더러운 회칠한 무덤같은 즉, 빛좋은 개살구같은 허상의 예배로 타락시키는 구나하는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림속의 호랑이가 살아있는 실물 호랑이가 아니고. T.V속에 나오는 영상의 호랑이가 내 앞에 진짜 살아 나타난 호랑이가 아니듯이, 영상속의 나타나 설교하는 목사는 살아있는 목사가 아니고 하나의 영상속의 가상의 인물이고 허상이다.

      그것은 동화속의 그림과 똑같다.

    영상 속에서 그와 대면하고 듣는 설교를 통해 나는 절대 그와 살아있는 인격적 교류와 만남이 없고 그 영의 교통이 나와 그 자리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는 실로 죽은 자다.
    인격이 없는 자다.
    그런 영상속에 그를 보고 그에게 욕을 해보라?
    그에게 주먹질을 해보라?
    그가 반응하는가?
    절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실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상속의 하나의 그림이다.

    영상 예배란 말 자체가 비 성경적이고 비 신학적이고 비 신앙적이다.  어디 예배란 말을 갖다 붙일데가 없으면 영상을 들어다 보고  구경하고 관람하는것을 예배라고 하니 정말 한국교회가 이러고도 살아 남을 수 있을까?  

    소위 영상 예배란 그 말 단어 조차도 언급 할 가치가 없는 하나님앞에 너무 참람한 신성모독이고 불경스러운 망언이다.

    영상 예배란  목사가 자기 교회 숫적부흥을 이루기 위해  인위적 방법으로  만들어낸 하나의 술책이고 사술에 불과하다.

    그래도 영상 예배를 입에 담고 구태어 말을 한다면 위의 언급한 그대로  그것은 안방에나 거실에서 T.V에 나오는  드라마를 구경하는것이나 아니면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것이나 하나도 다를것이 없는  영상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의 이렇다하는 대형교회를 비롯하여 이제 몇명 모이지 않는 상가 개척교회들 까지 목사들이 그런 영상물을 띄워놓고  그것을 들어다 보고 하나님께 죽은 예배를  드리고,또 허상인 짝뚱 예배를 드리고 있으니 한국교회 예배가 썩고 타락해도 이제 너무 썩고 타락하여  삼복염천에 시체 썩는 냄새보다도 더 타락한 썩는 악취가 천지를 진동케 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마24:4)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마24:11)



    출처: http://cafe.daum.net/jmsoo.  (한국교회 회복과 개혁)



    [다큐] 프리메이슨의 음모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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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블로그 뉴스] 치명적인 아름다움이 있는 Monterey Bay Aquarium 

     

     

    캘리포니아 중부의 해안도시 몬트레이에 있는 Monterey Bay Aquarium은 미서부 지역의 최고 수족관입니다. 1984년에 천혜의 자연인 몬트레이 앞바다를 이용하여 지어진 이곳은 지난 30년 동안 놀랍도록 다양한 해양 생물들을 친환경적인 운영으로 보호하고 관리하여 매년 180만명의 관람객이 방문하는 캘리포니아의 명소로 자리잡았습니다. 수족관이 위치하고 있는 역사적 Cannery Row 지역 또한 이 영향으로 몬트레이를 대표하는 관광지역으로 발전했습니다. 한때는 생선 통조림 공장들로 활발했던 곳이 이제는 여러 식당들과 관광상품을 판매하는 가게들로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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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의 10대 수족관 리스트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Monterey Bay Aquarium은 해양자연 연구기관의 역활도 겸하고 있는데 다양한 해양 생물에 대해 알려주는 특별 전시회도 자주 열리고 있습니다. 현재는 해파리에 대한 특별 전시회인 "The Jellies Experience"가 진행중입니다. 오대양에 200종류가 살고있는 해파리는 일년에 30만톤 이상이 식탁위에 올려지는 식용 해파리들이 있는가하면 한번 쏠 때 내품는 독소로 60명을 죽일 수 있는 무시무시한 독성 해파리도 있습니다. 모든 해파리들이 쏘는 것은 아니지만 쏘이면 독성을 막론하고 무척 아프기로 유명한데 요새 지구의 이상기온으로 더 자주 해변가에 돌출하기에 악명이 높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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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nterey Bay Aquarium의 "The Jellies Experience"에서는 우산 모양의 몸통 크기가 불과 2 밀리리터에서부터 3미터까지 다양하고 촉수의 길이가 200 피트 이상되는 해파리의 치명적인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생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면 볼수록 탄성이 나올 정도로 신비스러운 해파리의 아름다움에 쉽게 빠져들게 만듭니다. 해파리의 독성보다는 아름다움에 더 촛점을 맞춰서 보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친근하게 다가올 수 있도록 조명과 세트 디자인에도 세심한 신경을 쓴 것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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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파리 특별 전시회 외에도 Monterey Bay Aquarium은 몬트레이만을 이용한 야외 전시장을 비롯하여 언제나 사람들이 빽빽히 모여드는 해달 전시장, 수족관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한 해초 전시장 등등 정말 볼 것이 많습니다. 특히 아이들을 위한 여러 해양 생물 체험장들이 잘 구비되어 있어서 온 가족이 즐기기에 최상입니다. 입장료는 성인이 $39.95, 12세 미만 아동은 $24.95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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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자세한 방문 정보는 공식 사이트로 가시기 바랍니다: http://www.montereybayaquarium.org/ 

     

     

     

     "The Jellies Experience"의 치명적 아름다움 

     

    해파리들은 크기와 모양이 매우 다양했는데 Crystal Jellyfish들은 거의 투명해서 특별조명이 없다면 제대로 볼 수도 없습니다.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불빛을 내는 Comb Jellyfish나 Spotted Comb Jellyfish들은 보면 볼수록 신기했습니다. 이름 그대로 계란 노른자를 풀어 놓은 것 같은 Egg Yolk Jellyfish는 중국식당의 egg drop soup이 연상되었습니다. 쏘면 신경을 마비시키는 독소을 뿜어내는 Sea Nettle Jellyfish의 촉수들은 얼마나 긴지 한번 휘감기면 빠져나올 수 없을 듯 보였습니다. Moon Jellyfish는 하늘하늘한 레이스 블라우스가 연상될 정도로 여리고 고왔습니다. 특히 Blubber Jellyfish는 하늘빛의 통통한 버섯같은 모습이 얼마나 이쁜지 한번 잠깐 눌러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해파리에게 쏘이면 독성이 없는 것이라도 매우 아프다고 하니 그들의 치명적 아름다움이 새삼 느껴졌습니다.

     

     

    Blubber Jellyfish

    (크기: 둥근 부분의 지름이 12-18 인치; 서식지: 오스트레일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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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b Jellyfish

    (크기: 종류에 따라 다름; 서식지: 종류에 따라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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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rown Jellyfish

    (크기: 지름이 24 인치 까지 자람; 서식지: 인도양과 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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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rystal Jellyfish

    (크기: 둥근 부분의 지름이 3 인치에서 12 인치까지 자람; 서식지: 북미의 서부 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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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gg Yolk Jellyfish

    (크기: 둥근 부분의 지름은 2 피트까지 자라고 촉수는 20 피트까지 자람; 서식지: 동 태평양, 대서양, 지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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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on Jellyfish

    (크기: 둥근 부분의 지름은 12 인치 까지 자람; 서식지: 한국 해안, 캘리포니아 해안, 동부 해안, 멕시코만, 유럽 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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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a Nettle Jellyfish

    (크기: 둥근 부분의 지름은 18 인치까지 자라고 촉수는 15 피트까지 자람; 서식지: 알래스카, 캘리포니아, 베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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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otted Comb Jellyfish

    (크기: 종류에 따라 다름; 서식지: 종류에 따라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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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nterey Bay Aquarium의 이모저모 

     

    수족관을 제대로 보려면 적어도 반나절은 걸립니다. 실내에서 앞바다로 이어지는 열린 바다 전시장에서는 마냥 바라만 보아도 좋은 에메랄드 물빛이 아름다운 몬트레이만의 절경이 펼쳐집니다. 수족관에는 구석구석마다 여러 종류의 물고기들은 물론이고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해양 생물들이 조화롭게 살고 있습니다. 언제가도 사람들이 발딛을 틈 없이 꽉찬 해달 전시장은 어린 아이처럼 귀엽고 천진스럽게 노는 해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열린 바다 전시장과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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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초 전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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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양한 해양 생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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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기 만점의 해달 전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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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지각색의 물고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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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사진: J블로그 시민기자 하얀 불 (白火)]





    노아의 때-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지혜자 ㆍ 2014-02-21 (금) 04:24 

    본문읽기;

    창세기 6장
    1.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4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10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11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14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15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16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17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19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 수 한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20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
    21 너는 먹을 모든 식물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식물이 되리라

    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중략....
    7장
    5절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하략....

    마태복음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3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중략....

    32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3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35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하략....

    오늘은 종말의 때에 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전체를 숙지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23장-25장은 한 번 읽어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전체의 흐름 중에서 1장에서 11장 까지를 그림을 보듯 한 눈에 볼 수 있다면 본문 이해에 도움이 되겠습니다.

    요즘 일각에서는 되지도 않는, 말같잖은 종말론으로 택한 자들도 미혹하려드는 사이비 종말론이 난무하고 있음을 봅니다. 어찌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해서, 바른 종말론 다시말해 성경적 종말론을 신자 각자가 정립하는데 작은 참고라도 될까 싶어서 짦은 소견을 올립니다. 비록 필자의 부족한 이해일지라도 성경적 이해, 환언하자면 성령님의 조명을 바탕으로 글을 올린다는 사실을 감히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완전과 완벽을 지향하지만 늘 부족하고 한계가 있는 우리입니다. 지금은 청동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지만, 때가 되면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처럼 밝히 알게 되겠지요. 부족한 부분을 채운다는 마음가짐으로 글을 통해 교제한다면 주님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관련 본문들을 상고해보시기 바랍니다.

    한꺼번에 강해하기도 부담스럽니다. 글을 쓰는 저도 그렇지만 너무 길게 쓰면 읽은 분들의 눈을 피로하게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기도하면서 동참하시면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은헤와 깨달음을 주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독자제현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USA아멘넷 게시판/지혜자 올림

    "현재 고난은 장래에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6권4장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의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 8:18-23)

     

    우리는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 고난과 시련과 환난과 고통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있다.

    첫째, 이미 알아본 바와 같이 ‘현세’와 ‘나타날’ 오는 세대로 바울이 구분하는 시간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였다. 현재의 고난과 고통과 난제들을 가지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전체 세계에 나타나게 될 이 영광스러운 상태에 비추어 살펴보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 ‘생각함’의 과정을 실천에 옮김으로써만이 기독교의 위안과 위로를 즐길 수 있다.

     

    둘째, “비교할 수 없도다” - 이 구절은 가치와 값을 가리키는 문구이다. 어떤 것은 다른 것과 비교할 때, 전혀 무게를 지니지 못한 것이 있다.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4:17). 아무리 여러분이 지금 감당하고 있는 고난의 짐이 무겁다 할지라도 장차 여러분의 것이 될 영광의 무게와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전형적인 기독교의 방식이다. 고난을 받을 때, 세상은 “힘내라 곧 잘 될꺼야”라고 말을 하나 그것은 하등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 이단들의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이단들은 마약과 같이 이 무게를 실제보다 가볍게 보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그 문제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다만 사실에 대한 자기의 반응을 변화시키는 데 불과하다. 일종의 어리석은 자의 낙원 속에 있는 것이다.

     

    바울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고난의 실제적인 성질이나 구체적인 성격을 극소화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난이 무서운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 볼 때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본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실제적으로 고통의 진상 그대로를 대처하라.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알라. 그런 다음에 더 이상 그것이 참아낼 수 없이 무섭다고 느껴질 때, 다른 쪽을 보라. 나타날 영광을 보라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그것에 대한 바른 안목을 가지고 있다면 결국 오직 유일한 한 가지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자기의 고난이 어떠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나게 될 영광과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위안을 주는 기독교 방식의 진수이다.

     

    히브리서 11장에서 고난을 받아야 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세우신 터를 가진 한 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세의 비결은 ‘보상의 상급에 두었으며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더 좋게 여기는’ 그것이었다.

    우리 주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의 고뇌와 수치와 고난을 당하시도록 한 것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우리들이 확신해야 하고 그리스도인들로서 주의를 집중시켜야 하는 것은 장차 올 영광의 지극히 큼에 대한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활을 좌우하는 교리이다. 삶 속에서 ‘넉넉히 이기게’ 되는 방식은 그것 밖에 없다.

     

    셋째, 주요한 교리는 우주의 현재 상태에 대한 설명이다. 진화를 말하던 사람들은 오늘날을 설명할 수 없다. 바울이 여기에서 그 해답을 주고 있다. 첫 번째 진술은 모든 피조 세계가 장차 올 이 영광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진술은 어째서 전체 피조물이 그런 식으로 고대하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라” - ‘피조물’은 비이성적인 피조물인 동물, 식물, 땅, 하늘, 눈에 보는 것들을 의미하며, 사도는 이 비이성적인 피조물들을 의인화시켜 말하고 있다. 사도는 하나님의 이 창조의 부분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매우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 영광은 너무나도 커서 모든 피조물들이 목을 길게 빼고 그것을 갈망하며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이 그것을 이렇게 고대하는 것은 피조물의 운명이 사람의 운명과 불가분해적인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가 피조물의 현재 상태를 가져왔다. 20절에서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한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사람의 타락으로 피조물 전체가 무익하거나 쓸데없는 것, 허무한 데에 복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21절에서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고 말함으로써 더욱 잘 설명해 준다. 피조물은 썩어져 가고 있고 사망과 멸망에 굴복하여 있다. 바울은 피조물 그 자체로서는 부패와 자기 속에 있는 썩어지는 요소를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를 구분하는 요점들 중에 하나를 대하게 된다. 비그리스도인은 인생을 바라보고 “인생은 아름답지 않은가!”라고 말하는 피상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더 깊은 관점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세상에 나오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세상을 빠져 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첫 번째 호흡이 마지막 호흡과 연관되어 있다. “너희 인생이 무엇이뇨? 그것은 안개와 같으니라”. 모든 것이 부패하여 가고 있다. 그것은 어느 시점에 “굴복케” 되었다. “자기의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땅과 피조물이 인간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창3:17-19) 피조물은 이러한 결과를 낼만한 하등의 일을 하지 않았다. 그것을 가져 오게 한 것은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하였고 ‘만물의 주가 타락했을 때’ 그의 당하는 형벌의 일부가 그가 영장 노릇을 하던피조물에게 주어져 허무한 데 굴복하게 되고 썩어짐에 종노릇을 하게 된 것이다. 사람은 자기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살라고 조성해준 낙원을 누리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사도는 이제 하나님의 계획 속에 긍정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그것이 바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열심히 기대하며, 열렬한 기대감을 가지고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 한가족교회, 김영희사모 요약

     

     

    출처: 청교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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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혜사 성령유감

     

     

    성령을 보혜사(保惠師)라 부릅니다(16:7). 보통 크리스천들에게 보혜사가 무슨 뜻이냐 물어보면 어물어물합니다. 대부분 상담을 해주시는 분”, “조언을 주시는 분” “어깨를 다독거리며 위로해 주시는 분정도로 이해합니다. 이런 이해를 갖게 된 것은 아마 영어로 "카운슬러"(Counselor, NIV), "위로자"(Comforter, KJV), "돕는자"(Helper, NASB)로 번역되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게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나 카운슬러(Counselor)라는 단어를 조금만 더 깊이 이해해도 상황은 달라집니다. 카운슬러가 (법률) “고문”(顧問)이란 뜻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고문은 어떤 분야에 대하여 전문적인 지식과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자문에 응하여 의견을 제시하는 직책 또는 그 직책에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여기에서 나온 뜻이 변호사”(advocate)입니다. 보혜사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래토스는 원래 변호사”(advocate)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파라클래토스보혜사”(保惠師)로 번역한 것은 아무래도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한자어 보혜사는 은혜를 보존해 주는 분이란 뜻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파라클래토스법적 후견인”, “변호사”, “법률 고문”, “고문 변호사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자기가 하나님께로 가시면 자기 대신 파라클래토스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약속했을까요? 이유는 자명합니다. 그가 하나님께로 떠나가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면 퍼즐이 풀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고아과부나그네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의 대상자들이었습니다. 고아는 아버지가 없는 자이고 과부는 남편이 없는 자입니다. 그리고 나그네라 함은 이스라엘 땅에 와서 사는 외국인 거주자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세 부류의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모두 법적 보호에서 취약적인 사람들입니다. 착취를 당하기 쉬운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그들에겐 법적 후견인들이 없습니다. 아버지도 남편도 없으니 고아와 과부가 억울한 일들을 당하기 쉬운 표적이었습니다. 외국인 거주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땅 본토인들에게 사회적 소외를 당하거나 착취나 조작의 대상이 되기 일쑤였습니다. 이들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법적 후견인이었습니다. 그들의 억울한 사정을 변호해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파라클래토스가 되시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억울한 일들이 없도록 법적인 보호자가 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예수는 그의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무방비로 착취와 공격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든든한 고문변호사, 정의를 위해 일하는 변호사, 억울한 일이 없도록 대신 나서서 변호해주는 변호사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 분이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이 세상에 사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든든한 보호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혜사라는 번역보다는 차라리 후견인, 변호인으로 번역하는 것이 본뜻에 가깝지 않을까 합니다.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

    좁은 길을 걸어도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하심이라.”

     

     

    출처: 류호준 교수의 무지개 성서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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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풍랑 속에서 인생이 날마다 순풍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결혼할 때, 아기를 키울 때, 중년의 위기를 겪을 때,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바람이 잔잔해지면 또 다른 태풍이 밀려옵니다. 인생의 풍랑에 정신없이 휘말리는 것이 우리의 삶에 현존하는 실재입니다. 혹시 당신은 지금 인생의 강풍 가운데 있습니까? 예수님은 그 강풍 가운데서 흔들리고 있는 당신의 인생을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외면 하시지도 주무시지도 않습니다. 바로 당신 곁에서 눈물 흘리시며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고난을 홀로 겪지 않습니다. 우리의 한숨 소리를 들으시며 중보하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고난의 강풍 앞에서 우리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 달려오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 옮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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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기독교유적지3,

    조경현 ㆍ 2014-02-21 (금) 02:14


    * 제주 답사 마지막 글입니다.

    제주 기독교유적지3,

    제주 답사 3일차이다. 우리팀은 성산에서 시작한다. 이른 아침을 먹고, 성산항으로 나가 우도행 가는 배를 기다려야 한다. 우도는 성산항에서 보일 만큼 가깝지만 결코 가까운 곳은 아니기에 배를 이용해야 한다. 시간은 약 20분 걸린다. 일행은 섬 중에 섬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잔잔한 흥미와 기대에 들떠있다. 가장 첫 번째 배를 이용하여 차량과 함께 탑승을 하여 우도에 닿았다.

    우도는 자그마한 섬이지만, 제주와는 또 다른 풍광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곳이다. 이곳을 걸어서 한 바퀴 도는 것도 여행에 재미를 더해 주는데, 봄이면 청보리밭을 지나면서, 유채꽃을 볼 수 있어 낭만을 더해 주는 곳이다.

    그곳에는 두 개의 교회(우도교회, 우도제일교회)와 한 개의 천주교가 있으니 이미 복음화 된 곳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아쉽게도 그 교회의 역사를 들을 수 없었지만, 누군가에 의해 교회가 이곳에 세워졌고, 그곳에서도 매일 새벽에 기도하는 교인들이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우도를 오전에 투어한 후에 제주 성산으로 나오려면 다시 배를 이용해야 한다. 성산항에서 다시 올렛길을 걷는 것도 제주 여행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제주 올렛길은 제주의 어떤 이가 스페인 순례자의 길(산티아고)을 걷다가 힌트를 얻었고, 돌아와서 만든 길이라 들었다. 제주인들의 말을 빌리면, 이 길이 만들어지지 전에는 관광객들이 극히 한정적이었지만, 이 길로 인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말을 귓전으로 들은 적이 있다. 말하자면 제주의 자연풍광을 느끼면서 걷는 컨셉이 대박 난 것이리라.

    우리는 올렛길을 걷다가 승합차로 김녕의 만장굴(천연기념물 98호)을 들렸다. 제주에는 용암으로 인해 만들어진 굴이 약 130여개나 이른다고 한다. 그 가운데 만장굴이 가장 대표적인 곳인데, 길이가 왕복 약 2키로, 걸어서 2시간 정도 걸린다. 이 굴은 중국 곤명에 구향동굴에 비하면 그 규모나 크기가 지극히 작지만 나름 멋과 낭만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걷기도 한다. 게다가 부근에는 동굴 찻집이 있어 그곳에서 차 한 잔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는 것도 여행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만장굴에서 나와 조천으로 이동해 오면 이기풍 목사가 세운 조천교회가 있다. 이교회의 역사도 100년 정도 되는데, 제주에 오래된 성내교회, 성안교회, 동부교회, 금성교회, 대정교회, 모슬포교회와 역사적인 맥을 같이하는 교회여서 잠시 들렸다. 하지만 그래도 역사적인 교회를 꼽으라면 제주시에 있는 성내교회와 성안교회, 그리고 동부교회일 것이다.

    여기서 잠시 대정교회와 관련된 한 인물을 소개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바로 이종도 목사이시다. 그는 이기풍 목사에 의해 전도를 받아, 청년시절 복음증거자가 되기 위해 평양장로회신학교로 유학을 떠났고,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 제주로 내려와 여러 교회를 섬기셨다. 당시는 목회자가 턱없이 부족한 시절이라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대정교회로 자전거를 타고 예배 인도 하러 가다가 좌익에게 납치되어 생매장 당한 사건으로서 순교자가 되었다. 이때가 1948년 6월 정도였다.

    제주는 아름다운 섬이지만, 나름 아픔과 깊은 상처가 있는 곳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1948년 4월 3일에 일어난 반란사건으로, 좌익파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약 14,000명의 아까운 생명이 희생을 당한 것이다. 이때 좌익파들은 기독교도 미제의 앞잡이라 하여 교인들을 무참하게 학살을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앞서 언급한 이종도 목사였던 것이다.

    사실 제주는 복음의 불모지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지금은 매해 약 1,000만 명의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는 다고 하니 과거와 격세지감을 느끼며, 이기풍 목사를 비롯한 제주의 기독교를 위해 수고했던 인물들을 새삼스레 추억하고 싶다. 국제적인 섬, 세계 7대 자연유산의 명소, 제주가 이렇게 변했으니, 이제 제주의 기독교는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임에 공감한다. 제주, 이 땅에 100여 년 전에 주의 복음이 전래되었는데, 이제는 복음증거를 위하여 제주의 약 300여 교회가 힘을 모아 정진하길 바랄 뿐이다.

    14 2 21(금) 도현


     빛 안에 있는 사람 VS 어두움에 있는 사람 - 학자의 혀

     

     

     

     

     

     

    빛 가운데로 행하면 예수의 피로 깨끗함을 얻는다?

     빛 안에 있는 사람 VS 어두움에 있는 사람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장 7>

     

     

     

    개역개정은 요한일서 17절을 빛 가운데에 행하면, 예수의 피로 깨끗하게 해주실 것이다.”라고 번역했다. 빛 가운데에 행하는 것”을 예수의 피로 깨끗하게 씻김을 받는 것의 조건으로, 깨끗하게 되는 것을 미래의 일로 말이다. 만약 이러한 개역개정의 번역이 맞다면 두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의문 하나는 예수의 피로 깨끗함을 얻는 데에 있어서 선행되는 조건이 믿음이 아니라 빛 가운데에서 행함이 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빛 가운데에서 행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요한일서 17절은 예수의 피로 깨끗함을 받는 조건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피로 깨끗함을 받은 자의 현상(모습, 행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구절이다.

     

    또한 개역개정은 "깨끗하게 하다"라는 헬라어 단어 "카다리제이(kaqarizei)"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미래형으로 번역을 했지만, 헬라어 원문은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능동태 직설법 3인칭 단수"로 쓰여져 있다. 그러므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가 아니라 "깨끗하게 하고 있다"라고 번역해야 바른 것이다.

     

    두 번째 의문, 빛 가운데에 행하는 것의 의미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의로우심”과 같이 행하는 것, 다시 말하여 거짓을 말하지 않고 진리를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말하고 있는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빛 가운데에 행한다는, 짓을 말하지 않고 진리를 따르는 것의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이며, 빛 안에 있는 것과 어두움 안에 있는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 아래에서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어두움 안에 있는 자 vs 빛 안에 있는 자

     

    1. 하나님은 누구이시며, 그를 따르는 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분 안에는 어두움이 전혀(하나도) 없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신실하고, 의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 안에 어두움이 전혀 없으시므로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도 어두움에 있지 않고 빛 안에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의로운 분이시므로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람도 신실하며, 의롭습니다. 신실하다는 것은 거짓이 없다,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의롭다는 것은 불의가 없으며 진리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빛 안에서 행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자신은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다”, “빛 안에 있다”, “구원 받았다고 소리 높여 말할지라도 거짓을 말하고, 진리를 따르지 않고 있다면 하나님 안에, 빛 안에 있는 것이아니라 어두움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시기에 하나님 안에 있는 자들도 거짓을 말할 수 없고, 진리를 따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빛 가운데로 행한다는 것이며, 빛 안에 있는 것입니다. 빛이신 하나님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은 어두움에 있고, 어두움에 있는 자는 거짓을 말하고 진리를 따르지 않습니다.

     

     

    2. 자신에게 죄가 없다 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속이고,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사람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하는 사람은 첫째는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자기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자신이 그동안 어떤 생각을 해왔으며,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서는 세상 아무도 몰라도 오직 자신은 정확하고도 확실하게 잘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한 적이 있는지 없는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압니다. 즉 하나님께 범죄했다는 것을 자신은 알고 있는데 범죄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범죄를 알고 있는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범죄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3:23, 5:12).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했다고 말씀하시고, 우리는 하나님께 범죄한 적이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과 우리 중에 한쪽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한 적이 없다는 우리 말이 맞다면 당연히 하나님은 거짓말쟁입니다. 정말 우리가 아닌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진리가 안에 없는 사람

    우리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저런 실수를 하기는 했지만 고의는 아니었고, 특히나 지옥에 갈만큼, 천국에 가지 못할 만큼 죄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여도, 모든 사람이 불의한 죄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자신이 불의한 존재라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지만 진정으로 깨닫지는 못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 사람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죄와 죄 아닌 것을 구분하는 기준입니다. 의와 불의를 구분하는 그것을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올림픽 100미터 달리기 시합을 하기 위해 운동장에 트랙을 그어야 한다고 합시다. 트랙을 긋는데 100미터 짜리 줄자가 있다면 자기가 그은 선의 맞고 틀림을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줄자가 없다면 맞고 틀림을 알 수 없습니다. ‘진리는 줄자 같은 것입니다. 맞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죄인지 아닌지, 의인지 불의인지를 가늠하는 것을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며,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만약 우리 안에 진리가 있다면 우리가 죄인이며, 불의한 자라는 것을 선명하게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없다면 우리가 지옥에 갈만한 불의한 자라는 것을 알기는 알아도 깨닫지를 못합니다.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신이 지옥에 갈만한 불의한 존재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 안에 진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3.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운 분이시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불의한 것을 정확하게 판단하십니다. ‘신실하다는 것은 거짓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불의를 정확하게 판단하십니다. 그리고 말씀(로고스, 예수)은 하나님의 ’ 자체이시기 때문에 말씀에서 벗어난 모든 것이 '불의'입니다거짓을 말씀하지 않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범죄한 죄인이라고 말씀하셨고(3:23, 5:12), 불의를 정확하게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기준으로 우리 모두 불의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14:33:10).

     

     

    4. 어두움 안에 있는 자 vs 빛 안에 있는 자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한 죄인임을 인정치 않고, 우리가 불의한 존재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진리가 없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거짓말을 하는 신실하지 않은 자이고, 불의한 존재임을 알지 못하는 진리가 없는 자라면 하나님 안에 있지 않은 것이며, 하나님 안에 있지 않다면 빛 안에 있지 않고 어두움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한 것을 깨닫고 죄인임을 고백하고 있다면, 또한 자신이 의롭지 않으며 지옥에 갈만큼 불의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면 어두움에 있지 않고, 빛 안에 있는 것입니다. 어두움에 있지 않고, 빛 안에 있는 자들은 이미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깨끗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이미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깨끗하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미래에 혹은 다른 조건이 충족되면 깨끗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고 현재에도 계속해서 깨끗하게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는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더럽게 하는 모든 불의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여기서 모든 불의라고 하는 것은 앞으로 있게될 것까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죄인이라는 것과 불의한 자신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사람은 빛 안에 있기에 예수의 피로 깨끗함 가운데에 있으며, 죄 용서를 받았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5. 오직 성령과 말씀으로

    우리는 모두 어두움에서 벗어나 빛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가 우리 안에 임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이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했다는 것과 지옥에 갈만큼 불의한 존재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과 내가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우리 자신의 지식과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어떤 지혜로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주셔야만 가능 한 일입니다.

                         [스가랴 4:6]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요한복음 16:7,8]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또한 줄자가 없으면 맞고 틀린 것을 알 수 없듯이, 말씀이 우리 안에 진리로서 임해야만이 우리가 불의한 것인지 아닌지, 불의한 존재라면 얼마나 불의한 존재인지를 밝히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말씀을 진리로 임하게 하시는 이 일 또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14: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이 모든 은혜를 입기 위해서 첫째는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믿는 마음으로 읽고, 듣고, 공부하며, 깨닫게 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알고, 불의함을 깨닫는 방편은 오직 성령과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방편들을 사용하기만 하면 기계적으로 무조건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구하고 노력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지 않으시면 이 모든 노력이 소용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은혜를 입고 싶다면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 전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옥에 갈만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옥에 보내시는 것이 전혀 불공평하지 아니하고, 당연하고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아직 자신의 신분과 처지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고,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야만 하는 의무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범죄하고 그를 대적한 자들로서 도리어 버림받아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공명정대(公明正大)한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개들에게 허락되는 부스러기 은혜를 간구하는 가난한 마음, 거지와 같은 마음,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죽을때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지 않으시더라도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십시다.

     

     

    6. 그 은혜에 합당한 감사를

    자신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죄인임을 깨닫고 고백한 분들은 어두움에서 벗어나 빛 안에 있게 된 상태입니다. 빛 안에 있다는 것은 빛이신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의로움이 전혀 없는 불의한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면 그것은 여러분 안에 말씀이 거하므로 진리를 따르게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이 이처럼 빛 안에 거하게 되고, 진리를 따르게 된 것은 여러분의 공로와 지혜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역사하심과 그 말씀의 임하심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랑 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모든 영광과 감사를 하나님께 돌리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어두움에 있지 않고, 빛 안에 거하게 되어 하나님께 죄들을 용서 받고, 모든 불의로부터 깨끗하게 되어 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깨끗하게 된 분들은 하나님의 그 은혜에 합당한 감사를 더욱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를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그의 영광스런 빛 안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그 탁월하심을 전파하는 데에 더욱 열심을 내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경이로운 빛에 들어가게 하신 분의 탁월함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2:9)

       

     

     

     

    ※ 아래는 헬라어 번역 비교.

        검정색은 개역개정번역이며, 푸른색은 나의 번역.

      

     

    요한일서 15-10

      

           5절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들어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분 안에는 어두움이 하나도 없다."

     

    6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만일 우리가 (빛이신) 하나님과 함께(안에)하고 있다고 말은 하지만 어두움에 머물러 있다면 진리를 따르지 않고, 거짓말을 한다."

     

           7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러나 하나님이 빛이신 것처럼 우리가 그 빛 안에 거하고 있다면 하나님과 함께(교통)하고 있으며, 그분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깨끗케 하고 있다."

     

           8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진리가 우리 안에 없다는 것이다."

     

           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만일 우리의 그 죄들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그 죄들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로부터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

     

           10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만일 우리가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고,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없는 것이다."

     

     

     

    * 이미지 출처 :

    http://www.infochurch.net/board/user/view.php?board_name=%C0%CC%B9%CC%C1%F6&bbs_no=5279&julgi_name=&keyfield=bbs_title&keyfield=bbs_title¤tPage=1

    http://photo.naver.com/view/2009070707542873744?page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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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이스트 모 교수가 출제한 문제라는데
        맞춘 사람이 100명중 3명정도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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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스타 2009-12-16 11:10:00 기사원문보기
    아내의 20년 손발된 남편..소리없는 '사랑해'에 '뭉클'

    영화 속 사랑이 현실에도 있음이 밝혀져 추운 겨울에 훈훈함을 돌게 했다. 그 주인공은 전남 신안군 임자도에 살고 있는 부부 장성배-오욱금씨.

    지난 15일 MBC ‘TV특종 놀라운 세상’에 나온 장성배-오욱금 부부는 동네에서 닭살 부부로 유명하다. 부인 오욱금씨는 영화 ‘내 사랑 내 곁에’의 종우(김명민 분)의 병으로 잘 알려진 루게릭병(근육이 점차 마비돼 신체를 움직일 수 없는 병)에 걸린 후 26년째 투병 중이다.

    하나에서 열까지 혼자서 할 수 없는 아내를 위해 64세 장성배씨는 20년이 넘게 아내의 손발이 되어왔다. 머리를 감겨주고 음식을 씹을 수 없는 아내를 위해 좋은 건 모두 구해서 갈아 먹이는 등 정성스럽게 그녀를 간호해왔다.

    36년 전 장성배씨의 열렬한 구애 끝에 두 사람은 결혼했지만 10년 만에 아내는 루게릭병을 얻었고 길어야 5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아내를 살리기 위해 그날부터 오로지 아내를 위해 지내왔다.

    그 정성어린 간호 덕분이었을까. 20여년을 버텨온 욱금씨의 앙상했던 몸에 얼마 전부터 조금씩 살이 붙기 시작했다. 욱금씨의 담당 의사 역시 “합병증 없이 지금까지 잘 지내실 수 있었던 것도 아버님이 간병을 열심히 하셔서 인 것 같다”며 성배씨의 지극정성에 감복한 모습을 보였다.

    20년을 넘게 간호를 해왔다면 지칠 만도 한데 장성배씨는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아내 오욱금씨를 항상 바라봤다. 오욱금씨 역시 마찬가지. 오욱금씨는 비록 말은 하지 못했지만 입모양으로 “사랑해”를 표현했고 성배씨 역시 “세상에서 내 아내가 제일 예쁘죠”라며 “나도 사랑해”라고 화답하는 등 금슬좋은 부부의 모습을 보여줬다.

    마지막으로 그는 “바람이 있다면 아내 목소리 한 번 듣는 것. 아내 목소리나 듣고 산다면 더 바랄 것도 없죠”라며 너털 웃음을 지었다. 평생 부인을 위해 살아도 모자란다는 남편과 그런 남편을 가슴으로 느끼고 눈으로 말하는 그의 아내. 이들이 만들어 가는 사랑의 기적에 시청자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이날 ‘TV특종 놀라운 세상’에서는 이외에도 경품으로 세계일주하는 남자, 중학교 다니는 78세 할아버지, 머리 위에 항아리 119개 이고 다니는 여자 등을 함께 방영했다.

    백나래 기자/ idsoft3@reviewstar.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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