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는 사모 수칙 10훈(訓)

부제: 내가 눈물로 터득한 노하우/최송연

        

1. 기도를 게을리 마라.
기도를 많이 하는 사모가 섬기는 교회는 언제나 부흥한다.
그것은 어떤 역경이 와도 기도를 많이 하게 되면 담대한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을 받기 때문이다.

2. 말씀을 많이 읽어라.
성도들은 목사님뿐만 아니라 사모도 성경박사이기를 원한다.
평소에 꾸준히 읽어두면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설명해 줄 수가 있다.

3. 좋은 어머니가 되라.
문제부모가 문제아를 낳는다는 말은 목회자 가정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님을 알라.
비뚤어진 자녀가 있는 목회자 가정은 모두는 아니지만
대개 그 부모의 신앙인격이 이중성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 않고 부모, 특히, 집에서 어머니가 올바른 신앙관점으로
자녀를 훈계로 양육하면 절대로 빗나가지 않는다.
설사 잠시 빗나간다 해도 다시 되돌아온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기 때문이다.

4. 목사님을 잘 내조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임을 명심하라.
 목사직은 영적인 일로서 우리의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책이다.
 따라서 사모가 그의 건강관리도 잘 해주어야 하지만 때로는 그의 애인도 되어주고
 사탄이 틈타지 못하게) 때로는 친구도 되어 주어야 하며 때로는 야당이 되어
 비뚤어진 길을 가지 못하게 따끔한 충고도 서슴지 않고 해 줄 수가 있어야 한다.

5. 교회 일에 간섭하지 마라.
헌신이란 이유로, 개척교회란 이유로 사모가 교회 안에서 동분서주하는데
그것은 성도들을 길러내는데 오히려 걸림돌이 될 뿐 아무런 유익이 없다.
재능이 많은가? (피아노 혹은 꽃꽂이) 내가 직접 하려 하지 말고
조금 부족해도 성도들 중에서 그 일을 하게 하라. 그것도 안되면
가능성이 있는 성도를 택해서 무료 개인지도를 시켜서라도 그들이 하게 하라.
일꾼이 없는가? 그래도 사모는 앉아 있으라 그러면 주께서
적재적소에 적당한 일꾼을 보내심을 깨닫고 놀랄 것이다.

6. 돈을 사랑하지 마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하고
그 어떤 명분으로도 투기성 투자는 사모가 할 일이 아니다.

7. 매력적인 사람이되라.
굳이 사모가 아니더라도 너무나 화장이 짙거나 사치스러우면 눈살이 찌푸려진다.
하물며 사모이랴. 또 너무나 남루하게 하고 다녀도 궁상맞아 역시 보기에 좋지가 않다.
외모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단정히 하고 무엇보다 속 사람( Inner person)을 강건히 하라.
지식과 교양 그리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눔으로 잘 다듬어지면
반드시 ‘고운 우리 사모님’이란 칭호와 함께 여자 성도들의 사랑과 신망을 받게 된다.

8. 지식과 정보에도 뒤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라.
많은 교양서적들을 읽고 가능하다면 적어도 한 가지 외국어 정도는 능통하도록 노력하라.
특히 이민목회자의 가족이 영어에 능통하지 못하면 성도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하고 그렇게 되면 존경보다는 멸시가 뒤따르게 된다.

9. 구제에 힘쓰라.
구제를 많이 하되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그리하면 주께서 후히 갚아주시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10.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라.
여자 성도들의 매서운 입씨름에 말려들지 않는 최선의 방법 중 하나는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면 원수까지라도 용서해 줄 수가 있다.

 사모가 가장 참기 어려운 때가 바로 누명을 쓰거나
억울한 말을 (대개 상처가 많은 사람이 사모에게 상처를 주려고 만들어 내는 말들로서
 신빙성이 없는 소리들이다.)들었을 때 자기의 결백함을 하소연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때가 바로 사탄에게 칼을 넘겨 주게 되는 때임을 깨닫고 결코 분노하거나
또는 말질하는 사람들에게 하소연이란 명분으로라도 말을 쏟아 놓아서는 안 된다.
잠잠히 주님만 바라고 참고 있노라면 반드시 주께서 일어나 도와주신다.
그렇게 되면 시험의 물결은 곧 잠재워지게 되고 오히려 그런 사모가 신뢰를 받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지 못하면 억울하고 분한 소리를 액면 그대로 받게 되고
그때 자신이나 목사님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교회가 크나큰 상처를 입게 된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계2장10절 하반절 말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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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1: 예장통합의 공식자료

 

1. 이재록(만민중앙교회)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에서 지난 해(99년) 이재록 씨를 이단으로 전격 규정한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먼저 한기총은 한국교회 전체를 대표한다는 위상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재록 씨는 한국교회 전체가 이단으로 규정한 셈이다. 그 다음은 이재록측의 로비가 실효성을 거두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는 이씨의 이단성이 그만큼 농도가 짙었음을 반증해준다. 이씨의 이단성은 구원론, 신론, 인간론, 교회론 등 신학 전반에 걸쳐 드러났다. 일부에서는 만민중앙교회가 붕괴될 것으로 내다보는 사람도 있다. 물론 이씨측에서는 이를 전면 부인한다. 이렇게 되나, 저렇게 되나 이재록 씨에 의한 최대의 피해자는 이씨의 핵심 신도들일 것이다.

 

이재록 씨 문제의 개요

이재록 씨는 서울시 구로구 구로동 851번지 소재 만민중앙교회 담임목사이며, 예수교대한연합성결교회 총회장과 연합성결신학교 이사장이다. 그는 '만민교회' 내지는 '만민성결교회'란 이름으로 많은 지교회들(국내 : 25개 처, 해외 : 11개 처)을 세워 국내는 물론 국외까지 교세를 확장시켜 가고 있다. 만민중앙교회 일부 신도들은 1999년 5월 12일 MBC-TV의 'PD수첩'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이재록 씨에 대한 내용을 방송하자 방송국 주조정실을 점거하여 방송 중단시키는 큰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이씨는 이미 정통기독교에서 수용할 수 없는 이단적 설교를 함으로써 1990년 5월 그가 속했던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 총회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된 바 있고, 한국기독교총연합회로부터도 1999년 4월 30일에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신론의 문제점

이재록 씨의 신관에는 심각한 이단성이 존재한다. 그는 우선 '하나님의 편재성'에 제한을 가하는 말을 한다. 그는 1998년 7월 3일 설교에서 '하나님이 보좌에서 자기 교회 강단에 강림하신다'고 말했다. 그는 "제가 아버지, 강림하셔 제단에 임하소서 하면 아버지가 그대로 오시는 것 보실 수 있을 거예요. … 아버지가 지금 빨리 오고 싶어 견디지를 못하시니까 제가 빨리 끝내야 되겠어요. 그래야 아버지 빨리 오시죠."라고 말하여 자신이 하나님을 부르면 오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또한 "새예루살렘의 열쇠를 놓고 가셨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1998. 7. 5. 저녁예배).

하나님은 영이시기에(요 4:24) 물체와 같이 어떤 특정 장소에 제한적으로 존재하시고, 또 제한적인 장소에 머무르시는 분이 아니시다. 또한 그는 하나님을 자기가 마음대로 부르면 오시고, 그렇지 않으면 안 오시는 분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을 인간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존재로 격하하는 것으로 기독교 신앙에서는 용인될 수 없는 신성모독이라 할 수 있다.

 

기독론(구원론)의 문제점

이재록 씨는 자신이 예수님과 하나되었다고 하였다. "해와 달과 별에 나타나는데, …… 달 속에 전등 속에 저를 놓아두시고 주님이 함께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와 나는 하나'라고 말씀하시고 전세계에 선포하고 있지 않느냐 이 말예요. …"(1998. 7. 5. 주일저녁)라고 하여 자신을 예수님과 동일시하고 있다(1998. 10. 1. 금요철야집회). 또한 그는 자신은 "원죄도 자범죄도 없는 깨끗한 피를 가졌기에 죽음이 피해간다"고 주장하였다(1998. 7. 5. 주일저녁).

이재록 씨는 여기서 더 나아가서 기독교 구원론,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죄 씻음을 받고 그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보편적 진리에 반하여, 마치 자신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자신을 신격화하고 있다.

"(자신이) 아브라함 등 모든 선지자들과 주님의 제자들을 부르면, 사장이 부르면 오는 전무처럼 나타나는데, …… 그리고 선지자들과 제자들이 자신에게 인사를 한다."(1998. 7. 5. 저녁예배, 1998. 7. 18. 금요철야집회)

(자신은) "영이 하나님 보좌 좌편에 앉아 있으며"(1998. 7. 8. 주일저녁), "죽고, 사는 권세가 있으며"(1998. 7. 5. 주일저녁), "물위에 걷는 것 외에 66권의 모든 말씀을 이루었다"(1998. 6. 28. 주일 저녁), "하나님이 하나가 되었기에 해와 달과 별에 나타나는데 이는 (자신이) 특허를 냈다"(1998. 6. 28. 주일예배, 1998. 10. 16 금요철야).

이상의 예에서 보는 것 같이 이씨는 마치 자기가 구세주요, 자기를 통해서 구원이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예수님만이 만민의 구세주이심을 부인하는 결과가 되어 기독론과 구원론에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인(간)론의 문제점

이재록 씨의 "부모로부터 받은 모든 피는 다 쏟아 버렸고, 주님과 같은 죄성이 없는 새 피를 받아 자기는 원죄도 자범죄도 없다"(1998. 7. 5. 주일저녁예배)는,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의 결정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롬 5:12)고 하여,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원죄와 자범죄가 있음은 성경에서(시 14:, 53:), 교회 역사에서 누누이 강조, 지적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만일 인간이 죄가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결과'(요일 1:8, 10)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자신을 원죄도 자범죄도 없다고 하는 것은 자신을 신격화시키는 결과가 되어 기독교 신학의 인론에 중대한 오류가 된다.

 

성령론의 문제점

이재록 씨는 성령론에 있어서 성령의 치유의 능력을 자신이 치유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는 '어떤 이들의 [자신의] 간증 책만 읽어도 그대로 막 치료받는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사진만 안고 자도 치료받고, 꿈속에 나타나서 자기가 안수해도 치료받는다'고 주장한다. 또 '자신이 기도한 손수건만 만져도 치료된다'는 등의 말을 한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치병을 하는 것이 아니고, 바울과 요한이 그랬던 것 같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는 것임(행 3:6)을 밝히 보여주고 있다. 치유의 은사는 성령의 은사이지 자신의 책을 읽거나, 사진을 안고 자거나, 손수건을 만져서, 또는 자기가 꿈에 안수한다고 하는 것은 성경에나, 기독교 역사 어느 곳에도 없었던 일로 성령의 신유 사역을 근본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교회론의 문제점

이재록 씨는 1998년 7월 3일에 자신의 "만민중앙교회에 하나님의 보좌가 내려왔고"(1998. 7. 5. 주일저녁예배), "2천년 전의 성경에 기록된 인물들이 자기 교회에 나타났다"(1998. 7. 10. 금요철야집회)고 주장한다. "만민중앙교회에서 예배드릴 때 하늘에서도 천군 천사들이 똑같이 예배드린다"(1998. 7. 17. 금요철야집회)고 주장하였다.

이는 만민중앙교회를 특별히 하나님이 성별하고 사랑하신다는 의미로서 보편적 교회론에 위배되는 주장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one, holy, catholic, apostolic)이다(각종 신조-사도신조, 니케아, 칼케돈, 웨스트민스터 등). 따라서 이 땅에 편재한 하나님의 진리를 보유한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고, 하나님은 특별한 교회에 강림하시거나 어느 특정 교회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종말론과 내세론의 문제점

이재록 씨는 종말론에서도 중요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재림을 알려 주셨다. …… 휴거 될 것을 알려 주셨다"([죽음 앞에서 영생을 맛보며] p.198)고 기록했다.

이는 언제 예수님이 재림하실 지는 인자도 천사도 알지 못한다(마 24:36)고 하였는데, 어떻게 자기에게만 알려 주셨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는 또 말하기를 마지막 심판 때에 자기가 심판장 되시는 하나님 좌편에 앉는다고 말한다. 하나님 우편에는 예수님이 앉으시고 자기는 좌편에 앉아 "심판 날에 주님 옆에서 성도들을 위해 변호해 줄 것"이라고 선포하면서,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은 새예루살렘에 들어가 살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1998. 7. 17. 금요철야예배).

그러나 신약성경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여 인간은 누구나가 심판에 이른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심판대에 앉을 수 없고, 심판대에 서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씨는 자기가 주님의 좌편에 앉아 성도들을 위해 성도들을 위해 변호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를 신격화 내지는 예수님과 동일시하는 것으로 종말에 천하의 모든 인간이 심판대에 설 것이라는 기독교의 종말론에 크게 위배되는 일인 것이다(사도신조). 성경의 어느 곳에도 교회 역사의 어느 곳에도 이런 허무맹랑한 기사나 근거는 없다.

또한 그는 내세관에서 5단계 천국관을 이야기하면서 믿음을 분량에 따라 상급과 거하는 처소가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우리의 모습은 예수님처럼 누구나가 33세의 모습으로 변화하며 얼굴은 백옥같이 희고 빛나며 백인의 모습이다. 키도 남자는 약 180cm, 여자는 한 뼘 정도 작다. 남자의 머리는 목 바로 위까지의 길이로 똑 같지만, 여자는 상급에 따라 [머리] 길이가 다르며 상급이 클수록 긴 머리이며, 허리까지 내려오는 사람도 있다"([죽음 앞에서 영생을 맛보며], pp.228-229)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가르침은 전혀 성경에 없는 자신의 독자적 해석으로 기독교 교리에서는 용인될 수 없는 독단적 주장이다.

 

지나친 신비주의과 신유 은사의 문제점

이재록 씨는 그의 책 [죽음 앞에서 영생을 맛보며]에서 '40일 금식기도를 하면서 대언자를 주시라고 기도했더니 1982년 5월 하나님은 대언을 통하여 태양이 작렬하는 때에 개척되리라 하였고, 그대로 되어 7월 25일 개척 되었고 하나님은 여종(한정애를 지칭)을 통하여 대언해 주셨으며, 부흥집회 말씀도 대언을 통해 영혼에게 주님이 뜻을 알려주시고 갈 길을 밝히 보여 주셨다.'고 주장하는 등, 지나치게 직통 계시를 강조하여 마치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언제나, 무슨 일이나 계시를 받는 것 같이 말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병자들을 치유 치유한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기독교 신앙을 무속적 신앙으로 오해하게 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에 신비주의 요소와 신유의 은사는 있다. 그리고 그런 것은 오늘에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절제가 필요하다(갈 5:23). 이재록 씨의 지나친 신비주의 경향이나, 치병 강조는 기독교의 근본진리를 훼손할 위험이 있다.

 

연구 결론

이상과 같이 이재록 씨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기독교 신학, 기독교 역사에서 살펴볼 때 이단성을 지닌 사람으로 단정치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이재록 씨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교인들이 이 유혹에 빠지지 않게 가르쳐야 할 것이다.

(예장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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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골의 어느 통나무집에

병색이 짙고 쇠약한 한 남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집 앞에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 때문에 집 출입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 말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집 앞의 바위를 매일 밀어라!”

그 때부터 남자는 희망을 가지고 매일 바위를 밀기 시작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열심히 밀었습니다.

8개월이 지난 어느 날,

남자는 점차 자신의 행동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밀어도 바위는 1인치도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현관에 앉아 지난 8개월의 이상 헛수고만 한 것이

원통하고 서운해서 엉엉 울었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이 찾아와 그 옆에 앉으며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왜 그렇게 슬피 우느냐?”

남자가 말했습니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지난 8개월 동안 희망을 품고 바위를 온 힘을 대해 밀었는데

바위가 전혀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원망스럽습니다”


하나님은 웃으시며

“나는 네게 바위를 (to move the rock) 옮기라고 말 한 적은 없단다.

그냥 바위를 (to push against the rock) 밀라고 했을 뿐이란다.

이제 거울 앞에 가서 네 자신의 모습을 보아라”


남자는 거울 앞으로 가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변화된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거울 속에 비춰진 남자는 병약한 남자가 아니라 근육질의 튼튼한 남자였습니다.


남자는 외마디 탄성을 질렀습니다.

“아~! 지난 8개월 동안 밤마다 하던 기침이 없어졌구나!

매일 기분이 상쾌했었고 잠도 잘 잤었지.

내가 어리석었구나. 남의 탓만 하고…”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은

바위의 위치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남자를 변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덧글>

자신의 관점이나 생각을 바꾸게 되면 자신의 운명도 바뀌어 갑니다.

아내(남편)가 밉습니까?


부부사이인데도 서로 내 말이 옳다고 다투지는 않으세요?

상대방의 말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오늘부턴 고집을 꺾고 내 생각부터 바꿔보실 생각은 없으세요?

부부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랍니다.


사랑받기보다 사랑을 줘 보실 생각을 하세요.

행복은 바로 당신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윗글은 sns를 통해서 저에게 들어왔습니다. 같이 공유합니다.





이 시대를 조명하는 골로새서 (존 맥아더)

 

 

이 시대는 과학의 시대입니다.

 

1. 현시대의 상황에 적합함.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오늘날 살고 있는 과학자들 중에 95%는 그 어느 시대에도 존재하지 않은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과학은 날로 발달하고 있고 옛날의 과학자들은 더 이상 오늘날 과학자들의 틈에 끼지 못합니다. 이러한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창조와 과학과 발견들에 관련 되었는가? 이것들에 그리스도가 내적으로 연관되었는가? 외적으로 연관되었는가? 라는 것과 같은 질문들을 하게 됩니다.


2. 골로새서의 대답.


골로새서는 이와 같은 질문들에 대하여 답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1:16절 상절은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세계 교회주의 시대입니다.


1. 현 시대의 상황에 적합함.


이 시대의 사람들은 "초대형 교회", 온 세상에 교회들을 하나로 만들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만 나는 가끔 이에 대해 머리없는 몸이 있을 수 있을까 자문해 봅니다. 진실한 교리없이 진정한 연합이 있을 수 있을까요? 사회적인 기준의 철학과 문화 그리고 일반적인 계획으로 모든 종교들을 하나로 합할 수 있겠습니까? 이 결합의 노력은 유사한 사람들끼리의(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같은) 교회적인 연합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종교를 하나로 합하려는데 투자되고 있습니다. 라마, 비시뉴우, 조로아스터, 석가, 공자, 모세 그리고 모하멧이 모두 예수님과 함께 참여하여 그들 모두가 한 덩어리가 된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교회이겠습니다. 이 같은 교회에 그 머리는 누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의 연합의 기초는 무엇이겠습니까?


2. 골로새서� 대답.


골로새서는 1:18절 상절에서 진정한 교회의 머리에 대한 논쟁에 대하여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그리스도)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이 시대는 권위가 없는 시대입니다.


1. 현 시대의 상황에 적합함.


이 시대는 사람들이 질적인 것들을 부인하고 서로 관계를 갖는 것을 부인하는 시대입니다. 모든 권위는 혐의를 받습니다. 신성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일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고 가능한 것이라면 모든 것들이 다 전복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종교도 그 권위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각각 자기들의 종교를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종교는 절대적인 것이나 규칙들이 없는 인간 마음에 관한 종교로써 그저 하나의 경험이나 황홀경 가운데 오락 가락하는 것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도 하나의 평범한 교주로 봅니다. 그의 말씀은 절대적인 것이 되지 못하며 그의 진리는 구속력을 갖지 못하고 있으며 그는 진실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2. 골로새서의 대답.


절대적인 것이 없는 이 세대의 누군가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가 정의하는 것이 필요한데 골로새서가 바로 그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1:15절에서 예수님을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뛰어나신 분)자니"라고 정의하고 더 나아가 2:9절에서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말했습니다. 골로새서는 우리들에게 절대적인 것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첫째입니다.

 

 

이 시대는 실용주의 시대입니다.


1. 현 시대의 상황에 적합함.


이 시대는 사람들이 무엇이 실용적인 것인가? 어떤 것이 정말 효과가 있는가? 알기를 원하는 시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호한 묵상이나 요가 도는 반(反)영적인 것에 빠져 있는데 이는 그러한 것들이 그들의 삶을 다르게 해주며 그들이 무엇을 하든 그것을 더 능력있게 또는 효과있게 해준다고 듣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그것이 정말 효과가 있느냐?"라고 묻는 특별한 시대입니다. 오늘날엔 그것이 진리이냐 아니냐 하는게 문제가 아니고 문제는 그것이 효과있느냐 없느냐하는 것입니다.

2. 골로새서의 대답.


나는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생각할 때 그들은 정말 그것이 효과가 있느냐 하는 것을 알기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정말 그리스도가 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느냐? 그가 정말 내게 평강을 줄 수 있느냐? 그가 내게 기쁨을 주느냐? 그가 내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느냐? 그가 정말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느냐? 그가 내게 능력, 희망, 목적을 줄 수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골로새서가 이에 대한 답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1:22절은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고 거룩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때 그에게 극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 삶의 변화에 대한 세부적인 것들이 골로새서3:12∼4:6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습니다(골3:12하). 사람들이 바라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가능합니다.

 

 

이 시대는 서로 관계를 갖는데 좌절감을 갖는 시대입니다.


1. 현 시대의 상황에 적합함.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수 많은 사람들이 서로가 의미있고 성취적인 관계를 갖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절망적으로 의미있는 관계를 성취하지 못하며 외로워하고 어떤 사람들과도 의미있는 관계를 갖지 못합니다. 결혼 생활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람들은 서로 의미있는 관계를 갖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2. 골로새서의 대답.


서로의 관계에 대하여 골로새서는 뭐라고 말합니까? 바울은 3:18∼4:1절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들에게 아내들에 대하여(3:18) 남편들에 대하여(3:19), 자녀들에 대하여(3:20), 아버지들에 대하여(3:21), 종들에 대하여(또는 고용된 자들)(3:22∼25) 그리고 주인들에 대하여(또는 고용주들)(4:1)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들에게 이러한 관계들이 어떻게 작용되는가를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관계를 갖는데 좌절감을 갖는 사람들에게는 골로새서가 그 답을 주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마지막 시대입니다(말세).


1. 현 시대의 상황에 적합함.


"인구 폭발"과 "미래의 충격"이라는 책이 나온 뒤로 사람들은 더욱더 세상이 종말에 왔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최종적으로 어떤 파멸에 직면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세에 살고 있습니다.


2. 골로새서의 대답.


골로새서는 미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1:12절에서 바울은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하고 3:4절에서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장래에 일어날 일입니다. 오늘날까지도 그래왔지만 이 골로새서는 현대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책입니다.

 

이 골로새서는 시간과 시대에 상관없이 궁지에 빠진 모든 사람들에게 그 해결책으로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과학의 시대로 그를 건축가, 창조자, 그리고 온 우주를 붙들고 계시는 분임을 알게 하십시오. 세계 교회주의 시대로 그가 그의 몸인 진정한 교회의 한 머리됨과 부족함이 없는 구세주이며 필수적인 교회 연합의 근원됨을 알게 하십시오. 권위가 없는 이 시대로는 그가 오직 진정한 권위이며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온 우주에 뛰어나신 분이고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 분이며 모든 지혜와 지식의 근원되심을 알게 하십시오.

 

이 실용주의 시대로 주님은 그들의 삶을 기적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바꾸실 수 있으며 오직 그분만이 사랑과 기쁨, 평강, 용서 그리고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실 수 있는 분임을 알게 하십시오. 서로 관계를 갖는데 좌절감을 가지는 실패한 시대로는 그가 진정한 사랑과 이해의 근원이며 그분만이 오직 가정이나 결혼 생활 그리고 친구들간의 관계를 세워주실 수 있는 분임을 알게 하십시오. 말세의 세상으로는 그가 끝이 되시며 또한 희망과 절정, 오실 왕, 모든 역사에 해결의 열쇠가 되실 분임을 알게 하십시오. 이 모든 것들을 그들이 알게 될 때 그들은 또한 골로새서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골 1:1-2)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D0VS/3782

 

가져온 곳 : 
카페 >(안산) 회복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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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전상범| 원글보기

욥기에 들어가면서


‘욥기’, 하면 우리는 먼저 욥이 당한 무서운 고난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욥기는 욥과 세 친구들의 긴 대화와 쟁론이 좀 지루하여 잘 읽어지지 않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욥기는 깊고도 오묘한 하나님의 사랑과 성도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신뢰의 피에 젖은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욥기는 가장 오래 전에 기록된 성경 중 하나라고 합니다. 저자는 전통적으로 욥 자신이거나 모세였을 것이라고 봅니다. 욥기의 말미에 ‘그 후에 욥이 일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고 되어 있어 욥이 최소한 200살은 더 살았던 것으로 보아, 또 제사방식이라든지 엘로힘 하나님이라는 명칭이 많이 사용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브라함 이전시대에 일어난 일이라고 보기도 하고, 우스 땅이 에돔과 아람지역이라는 점과 수아, 데만, 엘리바스 같은 지명 또는 인명들이 역대상 1장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아브라함 후 족장시대에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되기도 합니다. 또한 욥기는 솔로몬 시대에 쓰인 것이며 실제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희곡(드라마)라고 주장되기도 합니다. 헬라어로 기록된 70인역 성경의 욥기 말미에는 욥이 아브라함의 5대손이었다는 언급이 나온다고 합니다.

어쨌든 욥기는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욥이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과 처절한 고뇌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고통을 인하여 부르짖으며 괴로워하고 하소연하지만 결코 입술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음으로써 죄 없이 십자가에 달려 그 몸을 찢기우신 어린양 주님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라.”는 욥의 아내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이생에서의 물질적 축복과 형통에서 찾다가 고난의 바람이 불면 낙엽처럼 떨어져 가버리는 어리석은 성도의 모습이, 엘리바스, 빌닷, 소발, 세 사람의 욥의 친구의 비판과 쟁론을 통하여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사랑과 섭리에 다가갈 수 없는 인간의 한계가,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끈을 붙잡고 자신에게 닥친 고난의 고통의 격류 속에서 몸부림하는 욥에게서 성도의 믿음의 싸움, 그리고 모든 것을 이미 아시며 결코 버리거나 떠나지 아니하시며 능히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하심이 욥기를 관통하고 있다 할 것입니다.  

또한 욥기에는 하나님 앞에 등장하는 사단과 하나님께서 그 사단의 손에 욥을 맡기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와 아울러 사건과 쟁론 가운데 나타나고 언급되는 여러 가지 일들과 철학과 사상과 신앙고백들이 우리의 신앙에 많은 도전과 의문과 사색과 묵상과 깨달음을 주는 수준 높은 문학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욥기를 통하여 고난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는 담대한 믿음을 갖게 되기 원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자를 가장 극한 고통과 고난에 내어주시는,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회복시키시고 더욱 높이시는 욥의 야야기를 통하여 우리 주님의 모습을 보기 원합니다. 이를 통하여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고 더 가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신앙을 다듬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한량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우리에게도 임하여 있음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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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상샘.. 떼어내면 샘솟듯 챙겨주던 호르몬과 칼시토닌을 한평생 사먹어야 합니다..

「갑상샘 호르몬과 칼시토닌을 만들고 분비한다. 갑상샘 호르몬은 체온 유지와 신체 대사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칼시토닌은 뼈와 신장에 작용하여 혈중 칼슘 수치를 낮추어주는 역할을 한다」

절대로 병원/의사 믿지 마세요.   돈벌이로 하는 의업은 생사람 잡는 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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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연​대 "갑상선암, 초음파검사 필요 없다"

 

2014.03.20

의사연대 "갑상선암, 초음파검사 필요 없다"

"의료기관, 수익 노려 불필요한 검진 권유...정부 방치"

생존율 거의 100%...매년 4만명 수술로 부작용 시달려


국내 암발생률 1위인 갑상선암에 대해 과잉진단과 과잉진료 문제가 의사들에 의해 지적됐다.

신상원·안형식 고려대 의대 교수, 서홍관 국립암센터 의사, 이재호 가톨릭의대 교수 등 의사 8명으로 구성된 '갑상선암 과다저지를 위한 의사 연대'는 20일 "우리나라 갑상선암의 증가는 기형적이고 이로 인해 국민들이 불안해하고 있다"며 "이는 과도한 건강검진이 부른 과다진단이므로 무증상일 경우 초음파 검사도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421&aid=0000739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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놔둬도 문제 없는데… ‘갑상선암’ 의사들의 자아비판

  


직장인 박모(42)씨는 2년 전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다. 건강검진 때 의사 권유로 갑상선 검사를 추가했더니 0.5㎜의 아주 작은 혹이 발견됐다. 증상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작다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다 그래도 몸에 암세포를 두고 살 수는 없다는 생각에 곧바로 갑상선 제거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박씨는 “수술 후 피로감과 두통 등 후유증이 매일 반복된다”고 토로하고 있다.

국립암센터 자료와 관련 논문을 종합하면 1986년 인구 10만명당 남녀 각각 0.8명과 3.9명이던 갑상선암 발병률은 2011년 인구 10만명당 81명으로 30배 정도 늘었다. 세계 평균의 10배가 넘는다. 영국보다는 무려 17.5배 많다. 대부분은 박씨처럼 아무 증상이 없는 데도 의사 권유로 검진했다가 갑상선암 판정을 받은 경우다. 세계에서 유독 한국만 갑상선암 환자가 비정상적으로 급증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의학적으론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현상이라고 말한다. 이는 2000년대 이후 대형병원들이 고가의 초음파 진단기를 경쟁적으로 도입한 상황과 무관치 않다. 투자비를 회수하려 갑상선 초음파 검사가 빈번하게 이뤄지다보니 갑상선암 발병률이 급증한 것이다. 2000년 이후 국내 갑상선암 연평균 증가율은 무려 23.7%. 전체 암 평균 증가율(3.6%)의 7배나 된다.

이런 기형적인 상황을 보다 못해 암 전문의들이 “득보다 해가 많은 갑상선암 검진을 즉각 중단하라”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서홍관(국립암센터) 안형식(고려대) 이재호(가톨릭대) 교수 등 암 전문의 8명은 ‘갑상선암 과다 진단 저지를 위한 의사연대’를 구성하고 18일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안형식 교수는 “굳이 발견할 필요가 없는 갑상선의 암세포를 찾으려고 증상도 없는 사람에게 초음파 검사를 권하는 건 정상적인 의료행위로 볼 수 없다”며 “정부가 나서서 무분별한 갑상선 초음파 검사를 중단시키고 상업화된 건강검진 체계를 개편하라”고 촉구했다.

암은 조기 발견이 중요하다는 게 상식이지만 갑상선암만은 그렇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쓸데없는 조기 검진이 불필요한 수술과 후유증을 양산해 환자들의 삶의 질을 해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갑상선암 환자 10명 중 9명은 수술을 받고 있다. 일단 수술하면 평생 갑상선기능저하증을 안고 살아야 한다. 갑상선을 제거하면 신진대사와 체온조절 등을 담당하는 기관이 사라져 적절한 호르몬 분비를 위해 매일 호르몬제를 먹어야 한다. 한동안 힘든 운동을 피해야 하는 등 생활에 제약도 많다. 한국보건의료연구원에 따르면 수술환자 중 7.3%는 부갑상선기능저하증이나 성대마비 같은 후유증에 시달린다. 호르몬제 부작용을 일으키는 경우도 6%나 됐다.

의료비 낭비 역시 심각하다. 건강보험이 지불하는 갑상선암 진료비는 2008년 1200억원에서 2012년 2600억원으로 2배 넘게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2012년 갑상선암 수술 4만건 대부분이 ‘불필요한’ 수술이라고 판단한다. 수술비 낭비만 860억원이다.

게다가 갑상선암 사망률은 인구 10만명당 0.5∼0.7명으로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조기 진단과 수술이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미국 예방서비스위원회(USPSTF)는 이미 1996년 갑상선암에 대해 조기 진단 권고 ‘D’ 등급 판정을 내렸다. 굳이 발견할 필요가 없는 암이란 뜻이다. 국내 국가암정보센터도 ‘증상이 없는 갑상선암’의 검진(촉진, 초음파)은 권장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주요 대형병원은 대부분 갑상선암 초음파 검진을 시행한다. 일종의 ‘불안 마케팅’인 셈이다.

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가상칠언 강해 1 (첫째 -용서의 말씀) 아더핑크


십자가 위에서 하신 주님의 일곱 마디 말씀 
 
첫째  용서의 말씀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 23:34).
 
인간은 그 최악의 일을 저질렀습니다. 세상을 지으신 주님이 자기 땅에 오셨으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영광의 주님이 사람 가운데 거하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배척하였습니다. 죄로 어두워진 눈들은 주님에게서 그가 원하신바 아름다운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주님이 탄생하셨을 때 사관에는 주님을 모실 방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장차 사람들의 손에서 받으실 대접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예시하여 주었습니다. 주님이 탄생하시자 곧 헤롯 임금은 어린 주님을 찾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백성이 야기 시킨 적대감을 말해 주며 또한 주님에 대한 인간의 적대감이 극에 달할 십자가를 미리 보여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거듭 거듭 주님의 원수들은 주님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자 하였습니다. 이제 드디어 그들은 그들의 사악한 욕망을 채우게 되는가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을 원수들의 손에 넘기워 주셨습니다. 몇 차례 거짓된 심문이 있었고, 심문자들은 주님에게서 아무런 죄도 발견하여 낼 수가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심문자 빌라도는 주님을 미워하는 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하고 끈질기게 고함치며 위협하는 소리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사악한 행위가 저질러졌습니다. 보통의 죽음으로는 앙심을 품은 주님의 원수들 마음에 만족을 채워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극도의 고통과 수치스런 죽음이 결정되었습니다. 십자가가 준비되고 그 위에 구주께서 못 박히셨습니다. 이윽고 주님의 십자가는 공중으로 곧게 세워졌습니다. 주님은 말없이 거기에 매달려 계셨습니다. 그런데 순간 주님의 창백해진 입술이 움직이려는 듯이 보입니다. - 그가 동정을 구하시려는 것일까?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것일까?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에게 저주를 퍼부으시려는 것일까? 그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지금 기도하시려는 것입니다. 바로 그의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 23:34).
십자가 위에서 하신 우리 주님의 일곱 말씀 중 첫 번째의 말씀은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일입니까! 이 얼마나 교훈적인 일입니까! 주님의 공생애는 기도로 막이 올랐습니다(눅 3:21).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주님의 공생애가 다시금 기도로 막이 내리는 것을 봅니다. 확실히 주님은 우리에게 모범을 남기셨습니다! 이제 주님의 두 손은 더 이상 병자들을 위하여 일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두 손이 십자가에 못 박혀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 이상 주님의 두 발은 불쌍한 자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도록 주님을 모시고 다닐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두 발이 저 잔인한 나무에 단단히 못 박혀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주님이 사도들을 가르칠 수가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사도들이 주님을 버리고 도망 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기도하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교훈이 되고 있습니까!
어쩌면 이 글이 나이 많고 병들어서 더 이상 주님의 포도원에서 활발히 일할 수 없게 된 어떤 이들에게 읽혀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지난 날 선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목사나 주일학교 교사나 전도지를 나누어 주던 전도인 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늙어서 자리에 누워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직 당신은 여기 땅 위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으로 하여금 기도의 사역에 참여하도록 며칠 더 당신을 이 땅 위에 남겨 두시는지 누가 압니까? 어쩌면 당신이 지난 날 봉사했던 모든 일 보다도 더 많은 일을 기도를 통하여 이룰 수 있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만일 당신이 이 귀한 기도의 사역을 비웃도록 시험을 당하면 당신의 구주를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죄인들을 위하여 그의 최후 순간에서 까지도 기도하셨습니다.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우리를 미워하고 우리에게 잘못을 범하는 자들을 어떻게 대하여야 할 것인가를 보여 주는 완전한 모범을 우리에게 남겨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사람도 우리의 기도가 미치지 못할 사람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살인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을진대 우리는 이제 분명히 죄인 괴수를 위해서라도 기도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신앙 동지여, 결코 희망을 잃지 맙시다. 곁길로 나아가는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시간 낭비로 생각됩니까? 날이 갈수록 그 자녀의 장래가 어두워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까? 그 아이가 이제는 하나님의 자비마저도 기대할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까? 아마도 당신이 그처럼 오랫동안 기도해 오던 사람이 그 시대의 사탄숭배 의식 가운데 하나에 빠져들었거나 아니면 공공연하고 뻔뻔스러운 불신앙자, 곧 한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의 공공연한 원수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누구도 당신의 기도에 미치지 못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이 기도에 관하여 또 하나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 기도의 효력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원수들을 위하여 하신 이 십자가 위에서의 중보기도는 분명하고 확실한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 응답은 오순절날 3천의 영혼이 회개하고 돌아온 사실에서 확실하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한줄 아노라”고 말한 사도행전 3:17에 근거하여 저자는 이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베드로가 사용한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라는 말이 우리 주님의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하는 말씀과 연결이 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베드로가 행한 한 차례의 설교에 3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온 사건에 대한 하나님편의 설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뛰어난 웅변술로 인하여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구주의 기도로 인하여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신앙 동지여,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진리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기 오래 전에 그는 당신과 나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 증거로 요한복음 17:20을 찾아보십시오. 다시 한 번 우리는 그리스도의 그 완전하신 모범을 본받아 행하여 유익을 얻도록 합시다. 우리도 역시 하나님의 원수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합시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면 우리도 역시 버려진 죄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기도의 효력을 목격할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본문으로 직접 들어가 봅시다. 곧,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1. 여기서 우리는 예언의 말씀이 성취된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날 중의 날에 일어나야 될 일에 관하여 얼마나 많은 것을 미리 알려 주셨습니까! 성령께서는 우리 주님의 수난 받으실 일을 그 수반될 모든 형편과 함께 얼마나 자세하고 완벽하게 미리 보여주셨습니까! 여러 일들 가운데 구주께서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시리라”(사 53:12)는 사실이 예언되어 왔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현재 하나님의 우편에서 행하고 계시는 사역에 관한 예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5)는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가 자기를 믿는 자들을 위하여 지금 하고 계시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한편 이사야 53:12은 그가 십자가 위에 달리셨을 때 행하실 자비하신 행위에 관한 예언의 말씀인 것입니다. 범죄자들을 위한 주님의 중보기도가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 하였느니라 하시니라”(사 53:12)는 말씀 속에 연결되어 있는 것을 살펴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의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리라는 것은 이사야 53장에서 발견되는 놀라운 예언의 항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사야 53장은 우리에게 구주의 낮아지심과 고난을 보여주는, 적어도 열 가지의 항목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 항목들은 주께서 멸시를 받아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될 것이며, 간고를 많이 겪고 질고를 아는 자가 될 것이고, 맞으며 찔리고 상할 것이며, 잠잠히 저항하지 않고 도수장으로 끌려가실 것이고, 털 깎는 자 앞에서 벙어리가 되실 것이며, 사람의 손에서 곤욕을 받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맞으실 것이고,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실 것이며, 그의 무덤이 부자와 함께 될 것이고 그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을 것이며, 마지막으로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실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 하였느니라”하는 예언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하신 주님의 기도에서 그 성취를 본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위하여 간구하셨습니다. 그들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2. 여기서 우리는 그의 백성과 하나가 되신 그리스도를 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전 어느 경우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게 이와 같은 요청을 하신 일이 없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도록 아버지께 빈적이 없으셨습니다. 이제까지 그는 자신이 친히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에게 그는 말씀하시기를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셨습니다(마 9:2).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눈물로 발을 적시며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며 향유를 부은 죄인인 한 여인에게 그는 말씀하시기를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왜 그 자신이 친히 직접 그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대신에 아버지께 그들의 죄사하여 주시기를 구하셔야만 한단 말입니까?
죄 사하여 주는 일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특권입니다. 어떤 유대 서기관들이 의론하기를 “오직 하나님 한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 2:7)고 한 것은 옳은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앞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참 인간이셨습니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셨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죄를 위하여 드리는 바 희생제물로 삼으시려는 특별한 목적으로 사람의 아들 곧 인자가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예수께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하고 외치실 때 그는 십자가 위에 계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는 그가 죄 사하여 주는 특권을 행사하지 아니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보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놀라운 정확성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On earth: 땅 위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노라”(마 9:6)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땅 위에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지금 땅에서 들려 계신 것(요 12:32)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대속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계셨습니다. 의로우신 자가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죽음의 고통을 당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인들의 대표자로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더 이상 그의 신적인 특권을 행사하실 수 있는 권위의 자리에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지금 아버지 앞에서 비는 자의 입장을 취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찬송을 받으실 주 예수께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시는 기도를 대할 때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백성과 절대적으로 하나가 되신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더 이상 그는 죄 사하는 “권세” 혹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땅위”의 위치에 계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시는 중보자의 위치에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는 마땅히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를 대신하여 드리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3. 여기서 우리는 죄와 그 죄의 결과로 비롯된 죄책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봅니다.
레위기 5:15,16에서 하나님은 부지중에 그릇 범과한 죄에 대해서도 반드시 속(贖)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곧, “누구든지 여호와의 생물에 대하여 그릇 범과하였거든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너의 지정한 가치를 따라 성소의 세겔로 몇 세겔 은에 상당한 흠 없는 수양을 떼 중에서 끌어다가 속건제로 드려서 성물에 대한 범과를 갚되 그것에 오분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건제의 수양으로 그를 위하여 속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우리는 또 민수기 15:22-25에서 “너희가 그릇 범과하여 여호와가 모세에게 말한 이 모든 명령을 지키지 못하되 곧 여호와가 모세로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여호와가 명한 날부터 이후 너희의 대대에 지키지 못하여 회중이 부지중에 그릇 범화하였거든 온 회중은 수송아지 하나를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로 드리고 규례대로 그 소제와 전제를 드리고 수염소 하나를 속죄제로 드릴 것이라 제사장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위하여 속죄하면 그들이 사함을 얻으리니 이는 그릇 범죄함이며 또 그 그릇 범죄함을 인하여 예물 곧 화제와 속죄제를 여호와께 드렸음이라”하는 말씀을 읽게 됩니다. 우리가 시편 19:12에서 발견하는 다윗의 기도, 곧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하는 대목은 바로 이러한 성경구절들에 연상시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든지 모르고 있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보실 때 죄는 어디까지나 죄로 남아 있습니다. 부지중에 그릇 범한 죄라 할지라도 알고 지은 죄와 꼭 마찬가지로 속할 것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는 결코 그의 의의 표준을 우리의 무지의 수준으로 낮추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무지는 무죄가 아닌 것입니다. 사실 무지에서 비롯된 죄는 모세의 때보다도 오늘날 우리의 때에는 더욱 더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무죄로 인하여 범한 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핑계를 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고 완전하게 그의 뜻을 나타내어 보이셨습니다. 우리의 손에는 그의 온전하신 뜻이 담긴 성경이 들려져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성경의 내용을 모른다고 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게으름을 탓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모든 것을 분명히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의 말씀에 의하여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아직 많은 것에 대하여 무지한 상태로 있으니 그 잘못과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모르고 있다고 해서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이 감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무지에서 비롯된 죄도 역시 여기 주님의 기도가 분명히 보여 주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용서를 필요로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표준이 얼마나 높은 것인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 것인지를 밝히 아십시오. 그것을 깨달았다면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의 무한 충족한 속죄에 대하여 그에게 감사와 찬송으로 영광을 돌리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4.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마음이 어두워진 것을 봅니다.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하고 소리 질렀던 사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악독한 요구가 빌라도에 의해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그 저주 받은 나무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저희가 친히 저희 눈으로 그 잔혹한 범죄행위를 본 목격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뜻으로 주님께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하고 말씀하셨단 말입니까? 그가 하신 말씀의 뜻은 저희가 자기들의 범죄가 얼마나 끔찍하고 큰 것인가를 알지 못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는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 박는 분이 영광의 주님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강조점이 “알지 못함이니이다”에 놓여진 것이 아니라 “자기의 하는 것을”에 놓여져 있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그가 누구이신 것을 알아야만 했었습니다. 그들의 무지는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를 본 구약 성경의 예언들은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심을 명백히 입증하여 주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그의 가르치심은 유일무이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에게서 흠을 잡으려 하던 자들마저도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 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요 7:46)하고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의 생애는 얼마나 완전한 것이었습니까! 그는 사람 앞에서 이전에 이 땅위에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그러한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선한 일만을 행하고 다니셨습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 뜻을 따라 행하셨으며 그를 기쁘시게 하셨고 그의 백성을 위하여 일하셨습니다. 그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를 희생하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의 생애는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사시는 생애였습니다. 그의 생애는 하늘의 증거를 받는 생애였습니다. 이는 하늘로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하시는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무지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핑계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한 일은 오로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롬 8:7)는 사실을 여지없이 입증하여 주었습니다.
이 끔찍한 비극이 아직도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죄인들이여, 당신들이 하나님의 크신 구원을 소홀히 여기는 일이 얼마나 큰 죄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모르고 있단 말입니까! 당신들을 당신들의 모든 죄에서 구원하여 주실 수 있으니 그 유일하신 분을 구주로 영접하기를 거절하는 당신들의 행동에 얼마나 끔찍하고 두려운 죄책이 따르는지를 모르고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이 사람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아니하리라”고 말하는 죄악이 얼마나 가공한 것인가를 모른단 말입니까! 당신들은 당신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당신들은 지금 당신들의 생사에 관한 문제를 냉담한 태도로 무관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흔히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와 내가 무슨 상관이 있을 것인가?”하고들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예수를 멸시하고 배척하든지 아니면 당신의 영혼의 구주요 생명의 주님으로 영접하든지 간에 당신은 예수와 상관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지금 당신이 취하고 있는 행동이 당신에게는 하찮은 일,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 해 동안 당신은 주의 영이 당신을 위해서 행하시는 역사를 저항해 온 것이 아닙니까? 수년 동안 당신은 극히 중요한 생각들을 묵살해 온 것이 아닙니까? 오랫동안 당신은 마음 문을 닫아 성령이 못 들어오시게 하고 귀를 막아 그의 호소하시는 음성을 듣지 아니하고 눈을 감아 그의 뛰어나신 아름다움을 보지 아니한 것이 아닙니까? 아! 당신은 지금까지 당신이 해온, 그리고 지금도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영적으로 눈이 멀어있습니다. 당신은 당신 스스로 지금 끔찍한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당신이 원하기만 하면 구원 받을 수가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오, 이제라도 구주께 나아와 이렇게 간구하십시오. “주여, 나의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5.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보여주신바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하나의 훌륭한 모범을 봅니다.
산상설교 가운데서 우리 주님은 그 제자들에게 가르쳐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하셨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특히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전파하신 바를 몸소 실천에 옮기셨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그 자신 친히 육신의 몸을 입으신 진리이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요 14:6)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자신이 가르쳐 전하신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친히 실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하나의 훌륭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주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모범을 남기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원수들을 개인적으로 용서하여 주지 아니하신 사실에 주의 하십시오. 이와 마찬가지로 마태복음 5:44에서 주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의 원수들을 용서하라고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이었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지 말라는 뜻입니까? 이것은 우리를 오늘날 성경을 올바로, 그리고 철저히 가르쳐야 할 필요성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관점으로 이끌어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경우에서든지 우리가 항상 용서해야 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나는 이 질문에 강조하여 대답하거니와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이르시기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 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눅 17:3,4) 하셨습니다. 성경은 여기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을 용서해야 할 것을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죄를 범한 자가 먼저 “회개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이 범한 죄를 인정하고 또 그것을 뉘우치며 다시는 그러한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 우리가 그를 용서하여 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죄를 범한 자가 회개하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런 경우 나는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의미하고 있는바에 대하여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에게 죄를 범한 형제가 돌이켜 회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그에게 악감을 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음속에 미움이나 악의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나는 그가 나에게 마치 아무런 잘못도 범하지 않은 것처럼 그를 대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범죄한 형제를 너그럽게 보아주는 것이 될지는 몰라도 성경이 요구하는 의를 바로 세우는 일에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형제가 죄를 범할 때 우리는 그를 경계해야 하고 그가 돌아와 회개할 때 우리는 그를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이 마땅히 해야 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데도 언제나 우리를 용서하여 주십니까? 그렇지 아니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선언하기를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9,10)하였습니다. 주의해야 할 일이 또 하나 더 있습니다. 만일 어떤 형제가 나에게 죄를 범하고도 회개하지 아니하여 내가 그를 용서하여 줄 수가 없고, 또 그를 마치 아무런 잘못도 범하지 아니한 것처럼 대할 수도 없는 경우라 할지라도 나는 그에 대하여 마음속에 악감을 품지 않아야 할 것이며 또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그를 위하여 기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완전한 모범의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가 죄범한 형제를 용서하여 줄 수 없을 경우라도 그를 용서하여 주시도록 우리가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6. 여기서 우리는 인간에게 우선적으로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봅니다.
우리 모두가 알아야 될 필요가 있는 것 중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는 죄인들이며 따라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갈 수 없는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고상한 이념들을 선택하고 아무리 좋은 결심을 갖고 또 아무리 훌륭한 법률을 채택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모두가 헛된 일일 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훌륭한 성품을 가지려 노력하고 또 아무리 하나님께서 인정하실만한 일을 행하려고 애를 쓴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 사이에 죄의 담이 가로막혀 있는 동안에는 헛수고에 그칠 뿐입니다. 만일 우리의 두 발이 모두 마비되어 있다면 제 아무리 좋은 신발을 신는다 해도 아무 쓸모없는 일일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두 눈이 멀어 있다면 제 아무리 좋은 안경을 낀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일 것입니다. 먼저 나의 죄를 용서받는 문제가 기본적이며 근본적이며 절대적으로 필요한 급선무인 것입니다. 내가 여전히 나의 죄 가운데 있다면 아무리 친구들 사이에서 널리, 그리고 높이 존경을 받는다 해도 그것이 문제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내가 여전히 용서받지 못한 죄인으로 남아 있다면 아무리 사업에 성공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문제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곧 “나의 지은 바 모든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눈보다 희게 씻기워 졌는가?”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알아야 될 필요가 있는 것 중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는 근거 혹은 기초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하나님의 용서와 인간의 용서 사이에는 절대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밝히고 지나가는 것이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대개의 경우 인간의 용서는 아량의 문제에 속하고 때로는 종종 그것이 애매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용서는 공평과 의를 희생하고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법정에서 판사는 양자택일을 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곧, 피고가 유죄로 판명이 되었을 때 판사는 그에게 법에 따라 형을 선고하든지, 아니면 법의 요구를 무시하고 그를 사면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합니다. 전자의 경우는 공의요 후자의 경우는 자비입니다. 판사가 법의 요구 곧 공의와 그 요구를 무시하는 사면 곧 자비로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그리고 가능성이 있는 방법은 제 3자로 하여금 그 피고를 대신하여 그 형을 치루도록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법정에서는 이것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이 일이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희생하고 자비를 베풀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땅의 심판자로서 그의 거룩한 율법의 요구를 결코 하나라도 희생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와 동시에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제 3자 곧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이 깨뜨린 그의 율법에 대한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킴으로써 이 일을 가능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믿는 모든 신자들을 대신하여 자신의 몸에 그들의 죄를 지고 친히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이 일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는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는 피고인 죄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의 공의에 저촉되지 않고 사면을 받아 의롭게 될 수 있는 의의 기초를 제공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의의 기초는 모든 믿는 자들만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하기를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3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6-48)하였고 또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3,39) 하였습니다. 구주께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하신 것은 그 자신이 지금 흘리고 계신 대속의 피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피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으리라”는 성경 말씀도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의 몸으로 드리시는 바 대속의 제들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원수들의 죄 사함을 위하여 기도하실 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우선적으로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 그 근원을 바로 지적하여 주셨습니다.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또한 아담의 모든 후손들에게도 역시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독자여, 당신의 죄는 사함을 받았습니까? 당신의 죄과는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멀리 옮겨져 있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은”(골 1:14) 사람 중에 하나가 되어 있습니까?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7. 여기서 우리는 구속적인 사랑의 승리를 봅니다.
우리의 본문 서두의 “이에”라는 말에 자세히 주의하여 보십시오. 바로 앞선 구절을 보면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로 되어 있습니다. “이에”, 곧 “이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에” - 그 때는 인간이 그의 죄악의 일을 저지르고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에” - 그 때는 인간의 사악함이 그 절정에 이르렀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에” - 이때는 저들이 그 사악한 손으로 감히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순간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순간 저들을 향하여 무서운 저주를 퍼부으실 만도 하였습니다. 주님은 이 순간 의로우신 진노의 번개를 명하여 저들을 그 자리에서 죽이실 만도 하였습니다. 주님은 이 순간 땅으로 그 입을 벌리게 하여 저들을 산채로 삼키도록 하실 만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지 아니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순간 말로 다 할 수 없는 수치를 당하고 계셨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고 계셨으며 멸시와 배척과 미움을 받으셨으나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구속적인 사랑의 승리를 의미하였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이 사랑이 그대로 십자가 위에서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위대한 힘의 용사 삼손은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그 몸의 마지막 힘을 그의 원수들에게 복수의 죽음을 선사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완전하신 구주께서는 그 사랑의 위대한 힘을 원수들의 죄 사함을 위하여 기도하심으로써 보여 주셨습니다. 그야말로 비할 데 없는 은혜였습니다! “비할 데 없다!”는 표현은 옳은 표현입니다. 이는 스데반 집사마저도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완전히 따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7장에 돌아가 보면 스데반 집사가 먼저 자기 자신을 생각하고 다음으로 그의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한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곧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59:60). 그러나 그리스도의 경우는 이와 반대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그의 원수들을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을 생각하셨습니다. 모든 일에 주님은 뛰어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 적용과 권면의 말로 결론을 맺어야 하겠습니다. 이 장을 읽어 온 독자여, 당신이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당신이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진리를 대적하는 것이 반드시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인가!” 깊이 생각하기를 진지한 심정으로 권유합니다. 구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저희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의 사랑하는 독자여, 지금 이 시간 당신의 경우는 저들의 경우와 다르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지금 마땅히 당신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해야 하고 당신의 생명의 주님이신 그에게 금 면류관을 드려 왕으로 모셔야 하며 이후로 그만을 기쁘게 하여 드리고 그에게만 영광을 돌리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정신을 차리십시오. 당신의 위험은 더 큰 것입니다. 당신이 그에게서 고의적으로 돌아서면 당신은 당신의 모든 죄에서 당신을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에게서 돌아서고 마는 결과가 됩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 10:26,27) 하였습니다.
이제는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의 사죄의 완전성에 관하여 한마디 덧붙일 것만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점에 확고한 지식을 갖지 못하여 혼동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저들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기 이전에 지었던 모든 죄들이 어떻게 사하여졌는가는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중생한 이후로 지은 죄들에 관하여는 분명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죄를 범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 주셨던 용서가 취소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들은 그리스도의 피는 과거의 죄에만 관계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현재와 미래의 죄에 관해서는 저들 스스로 해결해야 될 문제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모든 죄를 다 용서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용납하여 주시고 또 천국에 가는 일이 내 힘과 노력으로 그리스도를 붙드는 일, 혹은 나의 순종과 나의 신실성에 달려 있는 것이라면 과연 나에게 동요가 없이 안정된 평안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립시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용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다 덮고도 남음이 있는 용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료 신자여,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죄들”을 그 몸에 지고 저 저주받은 나무 위에 달리지 아니하셨던가요? 그가 죽으신 것은 당신의 모든 미래의 죄까지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요?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과거에 지은 죄들만 아니라 당신의 미래에 지을 모든 죄까지도 담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는 자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그리스도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용서를 받은 백성입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롬 4:8) 하셨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다시 죄가 전가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선 우리의 입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고로 나는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땅 위에서 100년을 더 산다 해도 다시는 죄가 나의 구원에 대하여 나에게 책임을 지우지 아니할 것입니다. 나는 그러한 처지에서 영원히 벗어났습니다. 성령의 증거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골 2:13). 여기서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은 나의 모든 죄가 사하여졌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나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하였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들”이 사하여 졌는데 어찌 정죄함이 있을 것입니까?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할 것이며 누가 능히 정죄할 것입니까(롬 8:33,34)? 주 안에 있는 독자여, 우리의 모든 죄 사함받은 일을 인하여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일에 저자와 하나가 됩시다.

가져온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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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옥타비우스 윈슬로우)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오늘 본문에 기록된 대로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도에 들어갈 담력을 얻습니다.
이 피는 예수님께서 신성의 모든 위엄과 능력을 소유하신 채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흘리셨던 피입니다. 이 피를 힘입어 우리는 성소에 나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간다는 것은 정확하게 무슨 뜻입니까?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우리의 기도는 과연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까?

첫째로,  '예수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줌으로써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없는 사람으로
서도록 만들어줍니다.

잘 아시는 대로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으면
우리는 결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죄로 가득 찬 우리가 어떻게 감히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은 마치 나방이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거니와 죄를 씻지 않고서는 절대로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히 12:29)

죄를 씻지도 않고 거룩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존전으로 나아가는 일은
끔찍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씻고 우리의 모든 허물을 도말함으로써
가로막혔던 모든 담을 허물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끗하게 씻긴 상태로 지성소에 나아가게 됩니다.

겸손히 그리스도만을 소망하는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드리신 희생 제사에
모든 소망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여러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주목하십시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여러분의 발목을 잡던 모든 어려움들이, 여러분의 길을
가로막아놓던 높은 담들이 다 제거되고 허물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이 모든 일을 성취하였습니다.

이제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 많은 여러분 사이에는 막힌 담이나 장애물이 없으며
걸리는 것도 없습니다.
용서받는 죄인으로써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여러분을 가로막아 설 것은
이제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가장 친밀하고도 달콤하며 거룩한 교제를 나누려는 여러분을
가로막고 방해할 것은 더 이상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씻었고 여러분의 죄책을 제거하였으며,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를 갈라놓는 유일한  장벽인 죄를 제거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예수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케 씻어 줌으로써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성소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거 되지 않은 죄에 대한 죄책이 양심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도 양심에 죄를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고
씻음 받지도 않은 죄를 가지고 잇으면, 지성소에 들어간다는 것이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죽음을 새롭게 인식하고 붙잡게 되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로 자신의 양심을 가지고
나와 정결하게 하는 샘에 자신을 씻고 그리스도의 보혈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면,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그를 막고 방해했던 것들은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보혈에 적셔진 마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보이지 않는
거룩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게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거룩한 교제를 나누는 일의 가장 위대한 비밀입니다.
바로 우리의 양심을 그리스도의 보혈의 샘물에 씻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에서 상함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피에 우리의 양심을 적시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자신이 너무나 무가치한 죄인이라는 생각에  휩싸여
하나님께 나아갈 용기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이 영적으로 너무나 멀리까지 나아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러분을
받아 주지 않을까 봐 걱정이십니까?

두려워하지도 걱정하지도 말고 그리스도의 삽자가 아래로 나아오십시오.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인하여 이제 여러분은
얼마든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이것을 경험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우리의 기도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대하여
한 가지 견해가 더 있습니다.
'예수의 피'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과 담력을 주는 공로를 우리에게 제공해 줍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 내세울 만한 공로가 전혀 없습니다.
오직 속죄하신 구세주로부터 제공되는 공로만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피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피의 공로로 우리의 인격이 하나님 앞에 용납을 받고 우리의 기도가 들으심을 얻으며,
우리의 간구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우리의 유일한 공로는
우리자신의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신적인 공로입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공로가 전혀 없으며 하나님의 진노 외에는 달리 무엇을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피에 우리를 의탁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주는
모든 공로를 그리스도로부터 얻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피'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사용할 수 있는 탄원과
논증도 제공해 줍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하면, 수천가지의 생각들이 들고 일어나서
우리의 의지를 꺽어 놓고, 수천 가지의 어려움이 합세하여 우리의 길을 가로막습니다.
헤아리 수 없이 많은 우리의 죄와 단점, 결점과 부족이 갑자기 한꺼번에 몰려들어,
마치 집요하게 나타나는 유령들 처럼, 우리를 정면으로 노려보면서,
우리 같은 사람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자격도  없다고 공격을 퍼붓습니다.

이 때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붙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치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히 여자를 예수님 앞으로 끌고 나와 정죄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아무말 못하고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듯이,
우리를 방해하던 모든 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오직 우리와 주님만 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로써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우리를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물리치고
제거하셨습니다. 오직 한 가지로써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한 가지는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흠없는 어린양의 피! 우리의 모든 죄를 씻는 피! 은혜의 보좌를 적시는 피!
휘장 안쪽에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는 피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이렇게 우리를 위하여 일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죄가 아무리 많고
악하다고 할지라도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지요!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 가운데 다른 모든 복보다 뛰어난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단연코 예수님의 피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자신의 많은 죄와 허물 때문에
지성소로 감히 들어가거나 눈을 들어 바라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그저 밖에서 서성이는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피가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니오.
예수님의 피는 여러분의 모든 죄를 씻고도 남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면, 그 피는 여러분을 하나님의 임재로 인도하고
여러분의 모든 죄를 확실하게 사해 주며, 죄로 말미암아 혼란스럽던 여러분의 마음에
평강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화목하신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을 활짝 열어 줄 것입니다.


십자가 곁에 서 있는 여인들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 19:25)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경건한 구경꾼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모여 있는 장소는 슬픔의 장소이면서도 말할 수 없이 소중하고
바람직한 장소였습니다. 전에도 예수님이 피곤하고 궁핍할 때 여러 번 일꾼으로 섬기면서
예수님을 가까이 모셨던 적이 있었던 이들은, 여성에게만 있는 매우 섬세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조용하고도 온유하게, 약간의 거리를 두고, 예수님으로부터
복을 얻거나 예수님을 섬기기 위하여 예수님을 가까이하였습니다.

이들의 사랑은 다른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이들의 섬김은 쓸데없이 참견하거나 다른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섬김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온화하면서도 아침 이슬처럼 촉촉한 사랑과 섬김으로, 조용하면서도
밝은 햇빛처럼 원기를 북돋아 주는 사랑과 섬김으로 예수님의 외롭고도 참혹한
공생애 길을 하면서 거룩한 동정심으로 그 길에 광채를 더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극도로 궁핍해지고 기진맥진하실 때마다 '자기 소유로'(눅 8:3)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는 암울한 시간이 되자, 죽는 한이 있어도
예수님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따르겠노라고 맹세하고 다짐하던 제자들이 하나 둘씩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떠나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이 경건한 여인들은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서 십자가를 지키는
파수군처럼 십자가 아래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는 고통과 어둠과 출혈 속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는 동안 예수님의 생명이 서산의 지는 해처럼
서서히 꺼져 가는 것을 지켜 보았습니다.

이들이 십자가 아래 이렇게 모이게 된 것은 거듭나지 앟은 사람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깊은 사랑과 고차원의 생명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이 여인들에게 은혜의 기적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본래 이 여인들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길을 잃고 영원한 지옥으로 달려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죄인이었던 그들을 찾아주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 여인들이 둘러 있는 바로 그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죄를 감당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받아야 할 모든 저주를 예수님이 하나도 남김없이 감당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받아야 할 모든 고통과 형벌을 그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대신 받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모든 고통은 바로 이 여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영혼에 깊은 슬픔을 겪으신 것도, 십자가  상에서 피를 흘리신 것도,
그리고 마침내 죽으신 것도 모두 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형벌을 받고 사람들로부터 고문을 당하며 친구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원수들로부터 모욕을 당하는 동안, 그것도 칠흑 같은 어둠과 지진 속에서,
모욕과 저주 속에서 그 모든 고난을 담당하시는 동안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서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광경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 19:25).

아, 이 여인들은 참으로 명예로운 여인들이었습니다!
이 여인들이 모여 있는 장소는 참으로 모든 성도가 부러워할 만한 장소입니다!
그곳은 얼마나 풍성한 영적인 교훈을 내포하고 있는지요!
이제부터 전심을 다하여 그 곳에 내포되어있는 풍성한 교훈을 배우도록 합시다.


십자가 아래서의 죄 사함


인생에서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한 가지 질문이 있다면,
그것은 "나는 죄 사함을 받았는가? 내 죄는 용서받았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하나남과 사람 사이에서 가장 큰 문제가 다름 아닌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죄를 용서받는다면,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손상시키지 않는 정당한 방법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가장 큰 문제가 종결되고, 하나님과 죄인이 완벽한 화목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게에서는 얼마나 놀랍고
기이한 사랑과 긍휼과 얼마나 거대한 능력이 함께 만나는지요!
십자가에서 만나는 이 모든 것들은 무한히 부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 줍니다.
또한 죄인들의 죄를 사해 주시는 하나님의 뛰어난 위대하심도 함께 보여줍니다.


1. 죄사함의 은혜를 받는 자들

예수님이 피를 흘리며 매달려 계시던 십자가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속성을 가진 사람들이 거기에 모여 있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타락한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 거기에 모여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우리를 대표하는 것이며, 그러하기에 실상 우리가
거기에 서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철저한 죄인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적의를 가지고 십자가 아래 모여든 사람들 중에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죄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그 입에는 저주하는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얼마나 끔찍한 설명입니까! 우리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우리의 위로와 소망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는 죄인이지만, 그것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은 죄인을 위한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는 도덕적으로 흠이 많고 추하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에서
제외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비참한 죄인들을 위한 긍휼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죄인이지만, 그것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 받을 수 없는 영역으로 밀려나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의가 하나도 없는 죄인들을 위한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기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대적하는
원수들이었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생명과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죽인 잔인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 사람들보다 죄가 덜한 사람들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의 삶을 계속 살아간다면, 결국 우리는
영광의 주님을 죽인 이 살인자들의 범죄를 인정하는 셈이며, 사실상 우리 자신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면 이런 사실이 우리의 마음에 얼마나 강력하고도
엄숙하게 뼛속 깊이 느껴지게 되는지요! 또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살인자가 바로 우리 자신임을 얼마나 처절하게 느끼게 되는지요!

은혜로 그 마음이 새로워진 사람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살인자라는 사실을 뼛속 깊이 느끼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중에서도 자신이 가장 우두머리 범죄자였다고 느끼게 됩니다.
자신의 모든 죄가 예수님에게 전가된 것과 자신이 죄 사함을 받게 된 것은
구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사실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엄숙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그러하기에 은혜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다음과 같이 절규하게 됩니다.

" 내 죄가 생명과 영광의 주님을 죽였구나. 예수님의 머리를 가시 면류관으로 찌르고
예수님의 손과 발에 대못을 박고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것도 결국 나였구나."

아! 우리는 죄 사함을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지요! 우리는 철저한 죄인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죄 사함의 은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여러분의 범죄가 그리스도의 피로 사해지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빌라도 법정 밖에서 "그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막 15:13)라고
목청 돋우어 외쳤던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될 것입니다.

2. 우리의 대언자가 되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

두 번째로 숙고할 것은 죄인들을 위하여 죄 사함의 은총을 간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게 무지막지한 죄인들을 위하여 성부하나님께 죄 사함의 은총을 간구하신 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험한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받으시는 구주, 고통 속에 죽어 가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저 무지막지한 죄인들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고통을 가하고 있었던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저 무지막지한 죄인들이 조롱 섞인 말들로 쉼 없이
괴롭히고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며 여러 말들로 그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 27:40)

"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막 15:31)

그런데 이렇게 비열한 조롱을 들으신 바로 그분이 무지막지한 죄인들의 죄 사함을 위하여
간구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주님이 자기 백성을 위하여 행하시는
공식적인 직무가 얼마나 놀랍고도 소중한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기 백성을 위하여 '대언자'의 직무를 늘 감당하십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일 2:1)

십자가의 모진 고통 속에서도 성자 하나님과 성부 하나님 사이에는 여전히
상호 신뢰감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주목하십시오.
비록 성부하나님이 자신의 얼굴빛을 가리시고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지 않으셨으며,
마치 전쟁에 사옹되는 개들처럼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덤벼드는 원수들의 능력에
자신의 아들을 내어 주셨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굉장히 감동적이고도 귀중한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징계와 고난 중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여러분의 손에 있는 고난의 잔을
입에 대기가 두려울 때, 고통스러운 일들이 연이어 생기는데도 하나님게서
얼굴빛을 가리고 여러분을 홀로 그 음산한 길을 걷도록 내버려 두실 때,
그 순간에도 여전히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또한 아무리 짙은 먹구름이 여러분을 덥고 아무리 혹독한 징계가 여러분에게 임하더라도,
하나님을 여러분의 아버지로 굳게 신뢰하며, 사랑과 은혜가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따뜻한 품에 여러분의 지치고 상한 영혼을 쉬게 하는 것이 여러분의 특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제는 대언자이신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우리를 위하여 변론하셨는지를 주목해 보십시오.
옛님께서 죄사함의 은총을 간구하셨던 제단, 우리를 위하여 죄 사함의 은총을
호소하셨던 변론의 장소는, 자기 자신도 피를 흘리며 고통 속에 죽어 가고 있던
십자가 위였던 것입니다.

아, 십자가! 그곳은 위대한 대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철저히 부패하고
타락한 죄인들을 위하여 죄 사함의 은총을 간구하시기에 가장 적절한 장소였습니다.
갈보리 십자가 위의 예수님은 바로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의 보배 피를 흘리고 계셨기에
얼마든지 그런 기도를 올릴 수 있었습니다. 갈보리 십자기 위의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법정에 서 있었던 것이기에 우리를 위하여 그런 기도를 올릴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 사함의 은총을 간구할 수 있었던 근거는
바로 주님 자신이 짊어지셨던 십자가였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간구사하시는 귀한 은혜들은 한결같이 주님의 속죄 제사에
근거하고 있으며, 또 주님이 죄인들을 대신하여 받으신 고난과 죽음에 근거하고
응답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 몸에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으며 그 심령에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주님은 사람의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사랑으로 자신의 원수들을 위하여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기이한 광경을 바라보면서도 여러분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분명하고 또 얼마나 광대한지를 아직도 의심하고 염려하십니까?
이제는 그 모든 의심과 염려를 다 내려놓으십시오.
십자가에서 나타난 주님의 한량없는 사랑의 깊은 바다에 푹 빠지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외치십시오.

" 아, 주님의 사랑은 넓고도 깊어서 내 모든 죄를 덮고도 남는다.
주님의 그 사랑이 내 모든 죄를 도말한다. 다시는 그 어느 한 가지라도 보이지 않도록 하신다. "

주님은 자신을 죽이는 원수들을 향해서도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친구들을 향해서는 얼마나 더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 주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천국에서도 여러분을 마음에 품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영광 중에서도 여러분을 위해 중보하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시고,
여러분의 원수들이 이기지 못하도록 기도하시며,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복들이
여러분의 것이 되도록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을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십자가 아래서 (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저)
가져온 곳 : 
카페 >그리스도의 몸인 형제사랑의집
|
글쓴이 : 형제사랑| 원글보기



오랜만에 콜로라도 스프링스 내용을 올려 봅니다.
이번 내용은 콜로라도 전체를 함축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시각을 열어줄 수 있는 내용입니다.
다름 아닌 콜로라도 주 인장(Seal of the State of Colorado)에 대한 내용입니다.


첫번째 사진은 콜로라도 주의 인장입니다.
이 인장과 그와 관련된 역사들을 자세히 추적해 보면 콜로라도가 워싱턴 DC와 또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살펴 보실 수 있게 됩니다.

먼저 인장의 제일 윗부분을 보십시오. 그곳에는 1달러 지폐에서 여러분들이 흔히 보실 수 있는 신의 눈-전시안(Eye of Providence: All Seeing Eye)이 피라밋 속에 그려져 있습니다.
그 전시안과 피라밋으로부터 황금빛들이 양쪽으로 비춰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그 전시안 바로 아래에는 한 다발의 로마 속간[(fasces):옛 로마에서 다발로 묶은 막대에 도끼를 붙인 것으로 집정관의 권위를 표시했음]이 빨강, 파랑, 흰색(미국의 색)의 가죽끈에 의해 묶인 채 놓여져 있습니다. 그 가죽끈에는 “Union and Constitution"이라는 단어가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다발로 묶은 막대의 연합은 힘(Strength)을 상징하고 도끼는 권위(Authority)와 지도력(Leadership)을 상징합니다.

그 아래는 포고관의 방패가 있는데, 그 위쪽 절반  안에는 눈에 덮인 세 봉우리와 세 구름이 붉은색 바탕 안에 그려져 있고, 그 절반 아래에는 광부의 도구인 정과 망치가 황금색 바탕에 그려져 있습니다. 이는 로키산맥과 그 산맥에서 채굴하는 금광의 바탕 아래 콜로라도가 형성되었음을 의미하겠죠!

바로 그 방패 아래는 ”Nil Sine Numine"이라는 콜로라도의 모토가 적혀있는데요,
그 뜻은 “신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Nothing without the Deity)"입니다.
어떤 이는 Numine을 New Mine으로 해석해서 "새로운 광산없이는 아무 것도 아닌"이란 뜻으로 번역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중요한 문제는 그 신(the Deity)이 누구냐 하는 것이지요!^^

그 아래는 콜로라도가 설립된 연도인 1876년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 인장을 디자인 한 사람은 루이스 L. 웰드(Lewis Ledyard Weld)로 1861년 링컨에 의해 the Territorial Secretary로 지명되었던 자였으며, 또 한명의 가담자였던 윌리엄 길핀(William Gilpin)은 the Territorial Governor였습니다. 그 역시 이 인장 제작에 부분적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현재 워싱턴 DC에 세워져 있는 링컨 기념관의 대리석들이 바로 콜로라도에서 공수되어져 링컨 기념관을 건립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생소한 로마 속간도 워싱턴DC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속간 역시 링컨 기념관과 제일 먼저 관련이 있는데, 링컨 기념관 안에 좌정하고 계시는 링컨 대통령의 동상 의자 좌우가 바로 이 속간으로 조각되어 있고, 링컨 기념관을 오를 때 (유심히 찾지 않으면 잘 볼 수 없음^^) 양쪽 대리석 기둥에도 역시 이 속간이 조각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진 2는 바로 링컨 대통령의 조각상을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속간을 보십시오!

또한 이 속간은 미국 국회 의사당 내 상하원들이 모여 회의하는 회의장의 의장석 바로 뒤에도 벽에 양각되어져 있습니다. 이 속간은 고대 로마에서 힘(Power)과 권위(Authority)를 상징하는 그 무엇이었는데... 역시 미국 국회 의사당의 상하원 의장석에도 이 속간이 새겨져 있는 것을 확인함을 통해 우리는 워싱턴 DC의 스피릿이 이 시대의 로마 건설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이 속간과 관련된 기원을 추적해 보면 이 속간은 '신시나투스(Cincinnatus)'라는 인물로부터 기원됨을 알 수 있는데, 로마가 위급했을 때 로마의 부름을 받아 집정관으로 활동하다, 로마의 승리 후에는 다시 전원 생활로 돌아가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 존경을 받았던 정치가이자 장군이며 로마의 영웅이었던 신시나투스가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면서 돌려 주었던 것이 바로 이 [속간]이었습니다. 곧 힘과 권위를 내려놓고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미국 오하이오 주에 있는 신시내티는 바로 이 신시나투스의 이름을 본 따 세워진 도시이며, 조지 워싱턴 역시 자신이 대통령직을 내려 놓고 마운트 버논으로 돌아갈 때, 이 신시나투스를 언급했다는 역사의 기록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되면 워싱턴 DC와 콜로라도 그리고 오하이오의 신시내티까지 어떤 커넥션 가운데 있음을 살펴보게 됩니다.

힘과 권위의 상징이었던 속간... 국회 의사당 의장석 뒤에도... 콜로라도의 인장 속에도... 신시내티 가운데도... 그 스피릿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호루스의 눈인 전시안과 피라밋이 콜로라도를 비취고 있는 인장... 콜로라도 스프링스 다운타운 Pionner 박물관 앞 피라밋 속에 있던 햇빛 모양의 광선에서도 보셨듯이... 이런 연결 커넥션들이 콜로라도 속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금광을 통해 획득된 자금의 흐름... 콜로라도 인장 속에 나타난 황금색 방패 가운데 있는 광부들의 채굴 도구들...

어느 것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흔적들이... 우리의 목표를 어디에 조준해야 할지를 더욱 명확하게 부각시켜 주고 있습니다.

콜로라도와 콜로라도 스프링스를 위하여 함께 중보해 주십시오!



▲ 연세중앙교회 홈페이지

 

 

 

 

 

윤석전 목사의 이단성 문제에 관한 예장 합신총회 연구 보고서

 

 

20001201()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예장합신(총회장 김명혁 목사) 교단에서 금년(2000) 총회를 통해 이유빈, 윤석전, 이재록 씨 사상의 문제점들을 깊이 있게 지적했다. 예장합신 총회는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위원장 박병식 목사)에서 조사 연구한 보고를 그대로 받아, 이유빈과 윤석전 씨에 관해 그 사상의 문제점을 이유로 관계금지조치 결론을 내리고, 이재록 씨에 대해서는 이단으로 공식 규정했다. 자교단 교회는 물론 한국교회가 이단사이비 등 문제의 사상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하는 단호한 조치를 내린 것이다.

 

이유빈 씨의 죄공개자백사상은 이미 본지가 9811~12월호, 993월호에 심도 있게 취급했으며, 예장 합동 교단과 기성 교단에서도 이씨 사상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한국교회 내에 피해 호소가 줄지 않고 있는 시점에서 이번 합신측의 규정은 문제의 사상이 더 이상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공적인 조치가 내려졌다는 데 의의가 있다.

 

윤석전 씨의 사상에 대해서 합신측은 보고서를 통해 이단 혹은 이단성이 짙은 주장들이라며 강도 있게 지적했다. 또한 윤씨의 사상을 전통적 장로교회가 고백하고 존중하는 기본 신학적 입장에 유해한주장들이라며 소속 교단의 목회자들이 주의할 것을 당부하며 관계금지령을 내린 것이다. 윤씨의 사상에 대해 침례교단측은 그렇다치더라도 예장합동, 예장통합의 소위 장자 교단들이 정치 바람에 흔들린 것에 비해 이번 합신측 규정은 공교단으로서 한국교회의 이단문제 이슈를 소신 있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이재록 씨의 이단성은 이미 한국교회에 잘 알려진 상태다. 신론, 기독론, 종말론, 천국론, 교회론, 인죄론 등 그의 이단성은 마치 독버섯처럼 성경 교리에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이번 이씨에 대한 규정은 이단사상의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 한 번 일깨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본지는 이번 합신측 규정 내용중 주요 부분들을 요약 게재한다. 이단문제 분별에 좋은 지침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편집자 주>

  성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기도하지 않는 자의 입술에서는 성령이 나올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자의 생활 속에서는 성령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1)

 

상기와 같은 대표적 표현은 성령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 오류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실체에 따라서 모든 역사들(예정, 창조, 섭리, 구원)에 있어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은 가장 오래된 정통신학에 대한 고백 내용이다. 따라서 존재와 속성에 있어서 성삼위일체 하나님은 세 하나님이나 세 속성들을 가진 것으로 고백하지 않는다. 다만 상호 혹은 피조물과의 관계해서 성삼위일체는 세 위격(persona)으로 구별될 수 있으나 분리될 수 없다. 이런 면에서 삼위 사이에 구별된 성령의 역사는 언제든지 실체에 따라서 삼위일체라는 고백이 앞서야 하고 성령이 한 위격으로 구별된 역사가 표현되더라도 언제든지 성령 하나님은 주체로 표현되어야 한다. 동시에 성령 하나님은 언제든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으로부터 역사하신다는 확고한 틀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상기와 같이 성령이 어떤 피조물의 인격이나 그 생활에서 나오는 것처럼 표현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모욕적이고 동시에 어떤 피조물로서 성령을 생각하는 오래된 이단들(오리겐파, 아리우스파, 마케도니아파)에서 주장하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런 표현에서 볼 수 있는 경향이 기도를 하나님과의 거래 개념으로 이해하는 부분에서도 확인될 수 있는 내용이다: "내가 기도하고 있다는 증거는 하나님과 거래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2), "내가 기도한다는 것은 최고의 자존심 있는 행동입니다. 나는 하나님과 거래하는 사람이다는 자존심을 가져야 합니다"3),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기업으로 삼아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사용합시다"4)

 

 

예정에 대해서

 

펠라기우스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후대의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Semi-Pelagiani)의 이런 주장들에서 볼 수 있듯이, 윤석전 목사의 예지예정론은 팔레스틴 공의회에서(in Synodo Palaestina) 정죄된 오래된 이단들의 주장과 근본적 차이가 없는 주장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예지예정론이란 구원에 이를 자가 미리 알려져 있을 뿐 결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석전 목사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를 믿으면 살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취사선택할 권리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을 권리도 있고, 믿지 않을 권리도 있습니다.

 

··· 바로 지금이 우리 자신을 위해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5)고 하였다. 역시 "만일 '예수 안 믿으면 지옥이요, 예수 믿으면 천국이다'하여 당신의 의지로 예수 믿기로 결심했다면, 이 천국 가려는 의지를 항상 당신이 품고 있어야 합니다.··· 결국엔 천국에 가겠다는 의지가 더 멀어지면서 반대로 세상욕심만 점점 커지게 됩니다. 그 순간 당신의 의지가 꺾이면서 하늘나라도 멀어지고, 그런 당신의 생각의 결과는 끝내 지옥을 초래하고 말 것입니다"6)고 하였다.

···

 

그렇게 종교개혁시대에도 공히 종교개혁이 일어난 모든 도시로부터 믿음을 선행시키는 예정론이 거절되었다. 그러나 윤석전 목사가 자신의 예정론을 예지예정론이라고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구원받을 자가 결정되지 않았다고 말하기 때문에,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보다 더 나아간 이단으로서 예정론 자체들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도르트회의에서 최종으로 정죄된 다음과 같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견해들을 비교하면, 그의 입장이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보다 더 위험한 주장임을 알 수 있다.

···

 

그렇다면, 윤석전 목사의 주장은 범교회가 정죄하였던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이단적 주장들과 엄밀하게 다른 것이고 그들의 이단적 주장보다 더 극단적 입장을 가진 이단의 주장이다.

 

 

기도에 대해서

응답 받는 기도

 

기도의 응답이 없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하나님 앞에 외식했었다는 증거요 증언부언했다는 증거로 보고 응답 받는 기도가 참된 기도로 강조하고 있다. 그런 응답된 기도는 기도 중에 평안한 마음이 되는 것이 특징이라고 보면서도 그 응답내용은 다음과 같은 양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했거든 응답을 정복하라는 말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막 정복해 돌진해 나가라는 말이다", "응답은 바로 행위로 정복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하고 응답을 받았다고 믿어지거든 이미 우리는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이 준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입을 벌려 구한 것은 응답 받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실천해야 합니다. ··· 소유는 우리가 해야 합니다"7)

 

즉 그는 소유를 위한 적극적인 행동과 그 소유를 기도의 응답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종종 하나님의 역사라는 미명 하에 이루어지는 이웃에 대한 폭력이 될 수 있고, 이웃에 대해서 마음으로 미워하지 않고 원수를 위해 기도까지 하라는 이웃 사람의 기본정신과 상반된 주장이다.

 

 

골방기도와 묵상기도

 

"부르짖어 기도하다 보면 하나님과 나의 기도가 완전히 분명한 획을 그어(긋는) 대로 같은 길이 확 났을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옆에서 떠드는 잡념도 안 들리고 별 소리를 다 해도 안 들리고 오직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마음과 마음이 통하기 시작하여, 그때는 묵상이 절로 되고, 이때부터 묵상기도가 되고, 이때부터 하나님과의 진실한 영적교제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묵상기도는 눈 감으면 묵상기도인줄 아는데, 이 묵상기도는 잡념의 소리가 옆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 앞에 완전히 나의 귀도 빼앗기고, 마음도 빼앗기고, 생각도 빼앗기고, 하나님이 나를 독점하고, 나도 하나님을 독점하여 아무도 나의 기도를 방해하지 못할 만큼 영적으로 깊이 들어갔을 때 드리는 골방기도가 시작되고 묵상기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8)

 

이런 특별한 기도의 단계나 기도의 종류는 성경에서 증거되지 않고 있다. 성경 본문 자체로부터 증거 되지 않는 비약된 해석으로서 이런 신비주의적 해석은 여러 부분들에서 나타나고 있다.

 

 

목사의 절대적 권위와 교회와의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가장 좋은 습관은 목사님 말씀에 절대 복종하는 습관입니다. 이 습관이 여러분 속에 젖어 버려야 합니다."

"만약 목사의 지혜와 지식과 언어가 성도들만 못하다고 한다면, 성도들은 목사를 우습게 보고 말 것이며 목사에 대한 존경심과 절대권위 앞에 무릎 꿇지 않고 무시하고 깔보게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나 제직들이 목사의 말에 절대 복종하는 것은 그만큼 목사 입에서 나가는 언어와 말과 지혜가 감히 그들이 생각지 못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기도로만 될 수 있습니다."9)

 

"제가 기도하지 않아도 성도는 줄지 않습니다. 기본적인 영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수준으로 살고, 하나님의 수준으로 먹고, 하나님 수준으로 자라고, 하나님의 수준으로 성장시켜서 정말로 땅의 것과 하늘의 것을 비교할 수 없도록 만들어 하늘의 소망을 이 땅에 실현하려는 겁니다."10)

 

"예수님이 길이십니다. 우리는 그냥 예수님을 따라가면 됩니다. 잔소리하는 사람들은 내려야 합니다. ··· 정 내리고 싶으면 내리라 이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막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차를 타는 사람은 운전자에게 자기 갈 길을 맡기듯이, 교회는 목사에게 맡기고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됩니다."11)

 

이런 태도는 교회의 성도들을 목회자가 수종하고 섬기는 자세가 아니다. 교회에는 목회자와 함께 토의하고 수의하는 회의기관이 있고 교회 회원들은 교회의 모든 결정에 참여하는 길로서 공동의회가 있다. 아무리 좋은 의견일지라도, 목회자가 혼자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결 론

상기와 같은 윤석전 목사의 이단 혹은 이단성이 짙은 주장들은 성경에 나타난 복음의 주된 내용들과도 다른 주장으로서 우리 전통적 장로교회가 고백하고 존중하는 기본 신학적 입장에 유해한 주장들이다.

 

 

 

)-----------

1) 윤석전, 절대적 기도생활, 요단출판사 1996, p.283

2) Ibid, 275

3) Ibid, 280

4) Ibid, 247

5) 윤석전, 당신을 성공시켜라, 요단출판사 1999, p.58

6) Ibid, 67-68

7) 윤석전, 절대적 기도생활, 요단출판사 1996, p.337-338

8) Ibid, 322-323

9) 윤석전,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요단출판사 1998, p.162

10) 윤석전, 절대적 기도생활, 요단출판사 1996, p.160

11) Ibid, 186-187

 

 

(월간<교회와신앙> 200012월호)

 

 

 

 

 

* 출처 :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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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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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개는 가장 장수하는 조류로 알려져 있다.
솔개는 최고 약 70세의 수명을 누릴 수 있는데
이렇게 장수하려면 약 40세가 되었을 때 매우 고통스럽고 중요한 결심을 해야만 한다.

솔개는 약 40세가 되면 발톱이 노화하여 사냥감을 그다지 효과적으로 잡아챌 수 없게 된다.


부리도 길게 자라고 구부러져
가슴에 닿을 정도가 되고,
깃털이 짙고 두껍게 자라
날개가 매우 무겁게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기가 나날이 힘들게 된다.

이즈음이 되면 솔개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을 뿐이다.
그대로 죽을 날을 기다리든가
아니면 약 반년에 걸친 매우 고통스런
갱생 과정을 수행하는 것이다.

갱생의 길을 선택한 솔개는
먼저 산 정상부근으로 높이 날아올라
그곳에 둥지를 짓고 머물며
고통스런 수행을 시작한다.

먼저 부리로 바위를 쪼아 부리가 깨지고 빠지게 만든다.
그러면 서서히 새로운 부리가 돋아나는 것이다.
그런 후 새로 돋은 부리로 발톱을 하나하나 뽑아낸다.

그리고 새로 발톱이 돋아나면
이번에는 날개의 깃털을 하나하나 뽑아낸다.
이리하여 약 반년이 지나 새 깃털이 돋아난

 

솔개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힘차게 하늘로 날아올라
30년의 수명을 더 누리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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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Liberalism)

 

1. 칸트와 헤겔

 

18세기는 칸트(I. Kant)를 중심으로 한 계몽주의의 시대였다. 칸트는 흄의 회의론적인 지식론을 바탕으로 플라톤이 이데아와 감각의 세계를 구분한 것처럼 세계를 현상계와 예지계(혹은 본체계. 오성으로 인식되는 체계)로 구분하고, 이성의 한계에서 종교의 가능성을 논함으로서 초자연의 세계를 부정하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종교의 초자연적이며 영적인 주제들을 도덕의 영역으로 격하시킴으로서 자유주의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한편, 자유주의(Liberalism)란 18세기의 이성과 자유를 강조한 계몽주의와 이후 프랑스혁명으로 대표되는 정신적 자극에 의해 출현했다. 이로 인해 인간의 자율성이 강조되면서 인간은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는 의식이 팽배해졌다.

 

헤겔(Hegel)은 대표적인 관념론자이다. 슐라이어마허가 감정을 강조했다면 헤겔은 이성의 관념을 확대하여 정신의 모든 측면과 이성을 동일시하는 사상을 전개했다. 두 사람은 개인적으로는 같은 대학을 다니면서도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신학적으로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최근에 발표된 연구에 의하면 헤겔의 철학적 동기가 슐라이어마허와 같이 원래는 기독교신앙을 사람들이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의 철학은 가장 포괄적인 체계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문제의식은 절대적 진리의 주장들이 어떻게 역사와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따라서 그는 생각하기를 역사 전체를 하나의 합리적인 체계로 나타내 보여줄 수 있는 시각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절대적 진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서 그의 변증법이 출현했다. 즉, “상대의 세계는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세계이며, 모순을 지닌 채 운동과 생성하는 세계이다. 그런데 생성은 이 자기 모순을 지양하고 보다 높은 단계에 이르러 자기 안전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무한한 진행은 아니고 일체의 상대적 관계가 경과함에 따라 절대정신이 개현된다고 본다. 절대자는 정적 실체자일 수 없고 일체의 상대를 그 안에 포괄하고 있는 살아 있는 주체이다. 이 운동은 이성과 실체에 통하고 그 이성의 법은 변증법이다”라고 하였다. 헤겔의 이 변증법을 성경과 기독교의 본질연구에 적용한 대표적인 신학자로 스트라우스와 바우어가 있다. 그들은 역사적 예수와 이상적 예수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풀어보고자 노력했다.

 

2. 슐라이어마허와 자유주의 신학

 

칸트의 영향을 받아 자유주의가 발현했고, 자유주의는 개인주의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세상의 풍조들은 신학자들에게도 많은 도전을 주었다. 그런데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종교를 멸시하는 풍조가 일어났다. 사람들은 더 이상 기독교가 말하는 진리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풍조에 휩쓸렸다.

 

이 때 슐라이어마허는 이런 풍조 앞에 종교의 본질을 논함으로서 도전받는 기독교를 방어하고자 했다. 그는 종교는 형이상학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며 또 그것들에 종속되지도 않은 종교라는 독특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런 시도는 당시로서는 매우 독창적이고 신선한 것이었다. 그는 종교에 대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지고 세상의 그릇된 사조에 반기를 든 것은 높이 평가받을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잘못된 신학과 사상은 훗날 자유주의신학을 태동시킴으로서 그는 자유주의신학의 아버지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그는 종교를 우선 직관과 감정의 영역으로 설명하면서 새로운 자유주의신학의 체계를 완성시켰다. 그는 전통적인 신학의 방법을 버리고, 경건주의와 계몽주의, 그리고 낭만주의에 심히 고무되어 인간의 이성, 직관, 감정, 기타 체험을 이용하여 성경과 신학을 자유롭게, 역사비평에 근거하여 재해석하는 신학을 출현시켰다. 이후 대부분의 유럽의 신학자들은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 심지어 현대신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며 슐라이어마허를 혹독하게 비판했던 칼 바르트마저 슐라이어마허의 영향을 벗어난 자는 아무도 없다고 할 만큼 그의 영향력은 강력한 것이었다.

 

한편, 칸트의 영향으로 자유주의신학자들은 인간의 윤리를 강조하게 되었다. 리츨과 그의 학파들이 대표적으로 이런 경향을 가졌다. 슐라이어마허가 감정을 신학의 주제로 삼고, 헤겔이 정신에 역점을 두었다면 리츨은 윤리에 신학의 중심을 두었다. 그는 예수를 인간이 따를 위대한 윤리의 모범자로 보았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예수와 함께 발전하고 성숙되어진 도덕적인 나라라고 했다. 그는 죄에 대해서도 말하기를 죄는 무지의 결과로서 도덕적 양육과 교육에 의해 교정될 수 있다고 하였다. 결국 리츨과 그의 추종자들은 칸트에서 나타나는 현세적이며 세속적인 왕국의 영역으로 종교의 수준을 끌어들인 결과를 낳으며 자유주의 신학의 종점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확실히 보여주는 결과를 낳았다.

 

3. 자유주의 신학의 특징

 

첫째,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에 대한 재해석의 작업으로 출범했다. 자유주의 신학은 신학자와 철학자들의 개인적 사상과 진술에 따라 기독교를 다시 해석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재해석의 작업은 기독교라는 범주를 넘어선 특정한 시대적 산물이 되었을 뿐이다.

 

둘째, 신학의 기초와 방법을 성경에 두지 않고 인간의 이성이나 감정, 경험에 두고 있다. 경건주의가 강조한 개인주의적 성경연구의 영향으로 전통적인 신학 방법을 벗어버리고 인간의 자율성을 활용하여 성경과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이성, 감정, 그리고 경험을 가지고 자유롭게 재해석하는 작업이다. 즉, 신학을 하나님 중심에서 보지 않고 인간의 경험에서 시작하는 신학의 방법으로 주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이 신학의 주체이고 인간의 이성적 노력으로 신학의 요구들을 성취할 수 있다는 인본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은 어거스틴

의 하나님의 은총론에 맞서 인간의 선택의 힘을 강조했던 펠라기우스의 견해와 비슷하다.

 

셋째, 내재적인 신학이다. 유한자와 무한자의 관계성을 파괴시킴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초월성을 강조하지 않고 내재적인 신학으로 빠져 들었다. 슐라이어마허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느낌으로 이해했다. 그는 종교를 한 인간이 자기의 한계를 넘어 무한자(the infinite)와 교제하는 것으로 말한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이성의 한계를 넘지 않고 윤리만을 강조하는 칸트보다는 더 종교적이지만 그의 내재주의는 초월주의, 즉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 차이(키에르케고르도 헤겔의 관념주의를 비판할 때 이것을 강조했다)를 강조한 칼 바르트에 의해 철저하게 공격을 받았다. 실상 자유주의신학은 칼 바르트에 의해 붕괴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언급이 아니다.

 

넷째, 낙관주의 신학이다. 계몽주의는 인간의 자율성과 인간의 능력을 믿고 다분히 인간이 모든 역사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즉, 인간은 충분히 선을 가지고 있기에 영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와 세상을 복된 낙원으로 만들 수 있다는 낙관주의를 생산했다. 그러나 이러한 안일한 생각들은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여지없이 무너졌으며 이후 칼 바르트의 '위기의 신학'이 대세로 자리 잡는다.

 

다섯째, 윤리의 실천을 강조하는 신학이다. 자유주의신학은 성경의 초자연적인 주제들을 버렸다. 그들의 목표는 도덕적인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었다. 따라서 모든 영적인 주제들과 내세적인 소망들을 폐기시키고 오직 인간 이성의 한계 안에서 종교를 윤리적 실천의 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영향으로 라우센부쉬가 주도한 사회복음주의운동이 태동하였고, 최근에는 해방신학, 민중신학, 여성신학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끝으로,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신학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역사적 예수의 연구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것은 성경에 나타난 역사적 예수를 신앙의 차원에서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주의적 역사비평학적 입장(종교사학파의 입장)에서 예수를 연구하여 하나의 종교적 모델로서 제시하는 한편, 그런 차원에서 예수의 인간성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연구 등으로 예수의 신성은 사라지고 예수는 그저 타종교의 지도자와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예수가 타종교의 지도자가 되는 순간, 기독교는 참 진리를 가진 구원의 종교가 아니라 여러 종교들 중의 하나로 전락했다. 그러자 등장한 것이 바로 종교다원주의자들이다. 대표적으로 존 힉(John Hick) 같은 자는 성육신 사건을 상대화시킴과 함께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는 각자의 진리적 체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각 종교 간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선 기독교가 주장하는 오직 예수만이 구원이라는 절대적이며 독선적인 주장을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영향을 받아 WCC, KNCC 등이 중심이 되어 시도하고 있는 운동이 최근의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그 본질은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주의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4. 자유주의 신학의 세 가지 흐름

 

첫째 흐름은 슐라이어마허로 대변하는 감정의 신학이다. 네안더, 니이체, 슈바이처, 트베스텐 등이 이에 속한다.

 

두 번째 그룹은 헤겔학파의 신학이다. 칸트 이후 서양철학을 주도한 헤겔철학에 기반을 두고 역사 비평적인 신학을 추구했다. 헤겔은 역사는 변증법적으로 진보적 과정을 통해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스트라우스, 바우르, 비더만(1819-1885)과 구약성서연구에 역사 비평적 방법을 동원한 벨하우젠(Wellhausen,1844-1918) 등이 이에 속한다.

 

세 번째 그룹으로 칸트 철학에 기반을 둔 리츨학파의 신학과 트뢸취의 종교사학파의 신학이다. 슐라이어마허의 탁월한 해석자요 자유주의 개신교의 왕자로 불리우는 리츨(A. Ritschl, 1822-1889)은 칸트의 추종자로 그의 비판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현상계와 본체계와의 구분, 하나님에 대한 이론적 지식의 한계성, 도덕과 종교의 일치에 대한 칸트의 입장을 받아들였다. 그는 종교를 본질적으로 실천적이고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는 또 경험에 호소한 슐라이어마허로부터 영향을 받아 형이상학적인 신학방법을 거부했다. 이후 헤르만, 하르낙(1852-1930), 카텐부쉬, 숄츠 등이 리츨학파를 이루었다. 한편 19세기 말엽 독일에서 발현한 학파가 종교사학파이다. 이 학파는 모든 종교를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이해하려 했으며 기독교의 발전 과정을 역사적, 지리적 환경에 비추어 보려 했다. 이러한 관점으로 인해 그들은 성경의 초자연적인 요소가 모두 고대 근동지방의 신비종교로부터 들어온 것으로 보고 모두 제거해 버렸다. 궁켈(H. Gunkel, 1862-1932), 부세트(W. Bousset), 바이스(Johanes Weiss, 1863-1918) 등이 이에 속하고 대표적인 인물이 트뢸취(E. Troeltsch, 1865-1923)이다.

 

5. 기타 자유주의(Liberalism) 신학의 발전과 양태

 

1) 리츨학파 - 리츨, 하르낙, 헤르만, 카덴부쉬, 루푸스, 트륄치

2) 후 불트만 학파 - 불트만, 콘젤만, 반 두센, 하롤드 등

3) 급진파 - 본회퍼 등

4) 세속화 신학 - 반 부렌, 하비 콕스 등

5) 신정통주의 - 칼 바르트, 에밀 브룬너, 도드, 니버, 폴 틸리히

6) 독립파 - 몰트만

7) 구속사학파 - 오스카 쿨만, 슈바이처, 알란 리차드슨, 헌터 등

8) 신 자유주의 - 부로우스, 필슨, 조지 라이트, 브라텐, 앤드슨

9) 한국 - 송창근, 김재준, 정경옥, 김경재, 길희성 등

 

6. 비평

 

첫째, 자유주의신학은 신학의 출발점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두지 않고 인간의 주관적인 경험에 주었다. 계시종교를 윤리와 도덕의 종교로 전락시켰다. 말씀중심의 기독교를 인간 중심의 합리적인 종교로 바꿔치기했다.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신학은 주관주의적 신학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성경(Sola Scripture) 중심의 신학방법을 따르지 않고 주관주의적이며 신비주의적, 감정적, 경험적인 새로운 방식을 사용함으로서 결과적으로 정통적인 신학의 체계를 허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것은 교회공동체를 약화시키는 주범이 되었다. 자유주의신학으로 인해 초대교회부터 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지켜지고 계보를 이어왔던 기독교 신학의 공동체가 약화되고 말았다. 신정통주의자인 폴 틸리히는 “유럽의 개신교는 자유주의로 인해 죽었다”고 까지 진단했다. 이것은 하나의 잘못된 사상이 얼마나 악한 영향을 끼치는 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산 교훈이 된다. 한편 한 개인의 신학의 방법과 내용은 성경과 기존의 건전한 신학적인 전통에 의해 검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어떤 신학이 새로운 독창성과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고 긍정적인 부분이지만 어떤 방식으로 신학을 형성하였는지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떤 신학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말씀을 벗어나면 그것은 참다운 신학이 될 수 없고 그런 신학을 쫓는 자는 사망과 곤경에 처해질 뿐이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시 107:10-11)

 

둘째, 자유주의신학은 성경 본문을 과학적이고 학문적인 방법으로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면서 정통교리를 무시하고 말살했다. 그들은 주관적인 경험을 하지 못하고 단지 지식만 있는 신앙을 무차별 공격했다. 이 영향으로 신학을 경시하는 풍조가 나타났고 교리무용론이 득세했다. 그들은 기존 교회가 교리에 붙들려 죽어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정통이 화석화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지식이 문제가 아니라 잘못된 방식으로 취득하는 지식이 문제이며, 교리가 문제가 아니라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만든 비성경적인 교리가 문제임을 간과했다. 그들은 성경을 절대적인 최종 권위로 두지 않는다. 성경은 단지 좋은 신앙생활을 하기 위한 좋은 교과서요 윤리적인 지침이요 참고서이다. 그리스도는 구속주가 아니라 훌륭한 윤리교사이다. 최고의 신의식을 지닌 인간일 뿐이다. 그들은 성경에 있는 비과학적인 이야기들은 실제로 믿지 않는다. 단지 신앙을 위한 좋은 참고자료라고 여긴다. 성육신과 동정녀탄생, 부활 승천 따위는 실제역사가 아니라 믿음의 역사적 사건이라 치부한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성경에 일점일획이라도 더하거나 빼지 말라고 경고했다. 성경은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9)

 

셋째, 자유주의신학은 하나님의 공의를 삭제하고 사랑의 하나님만 강조했다. 진노의 하나님을 삭제하고 미소 짓는 하나님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그들은 우레 소리와 함께 심판을 단행하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하면 질겁한다. 하나님은 매우 인자하시고 나와 늘 즐겨 대화하시며, 나의 짓궂은 장난과 개구쟁이 같은 행동에도 머리를 긁적이며 다 받아주시며 나와 농담도 자주 하시며 내가 언제든지 달려가면 만나주시고, 나의 고충을 이야기하고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고 하면 들어주시는 친근하고 재미있는 분으로 각색했다. 여기에 하나님의 내재성 즉,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강조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므로 나는 언제든지 하나님과 대화한다는 것이다. 내재주의로 인해 묵상기도, 관상기도 등이 나타났고 영성훈련을 한다고 법석을 떨게 되었다. 자유주의신학으로 인해 악을 미워하시고 무섭게 진노하시며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사라졌다.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만든 자기 백성을 지옥에 보낼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여기서 지옥이 부정되고 영혼멸절설이 나타났다. 자유주의교회에서 더 이상 회개를 요청하는 설교는 사라졌다. 그들은 신자가 잘못을 해도 권징하지 않는다. 용서가 최고의 미덕이 되었다. 그러나 공의 없는 사랑, 사랑 없는 공의는 절름발이일 뿐이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기에 악을 미워하고 우상숭배를 엄하게 금하시고 다른 신에 대해 질투하시고 백성들의 죄악을 친히 징계하시고 채찍질하신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징계의 채찍질을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징계하지 않는 자마다 사생아에 불과하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장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6, 8, 벧전 5:9, 계 3:19)

 

넷째, 자유주의신학은 낙관적인 인간론을 펼침으로 기복신앙을 낳았다. 그들은 예수만 잘 믿으면 부자 되고 성공한다는 말을 계속 강조하고 반복했다. 낙관론은 아담으로부터 형성된 원죄를 부정하면서 나타난 사상이다. 그들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선한 존재이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지 않고 얼마든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적극적인 존재이다. 인간의 행, 불행은 인간의 책임이지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예정에 달려 있지 않다고 했다. 칼빈이 주창한 예정론 교리는 그런 의미가 아님에도 그들은 예정론을 한 번 정해진 운명론으로 몰고 갔다. 잘못된 예정론으로 인해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을 의지로 개척하고 극복하지 않고 주어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불행을 형해 달린다고 했다.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을 불행으로 이끄는 분이 아니라 인간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말했다. 그들은 주님께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는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물론 자유주의 신학은 현실의 상황을 직시하고 문제의식을 갖는 좋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왜 그들이 특수한 시대의 철학과 새로운 사상을 가지고 새로운 신학의 방법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문제의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유주의신학에 대해 우리가 이러한 자세를 가질 때 그들의 실수를 통해 올바른 신학, 정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자유주의 신학은 우리가 신학을 성경적이며 개혁주의적인 방법으로 다루지 않을 때 얼마나 위험해 질 수 있는 가를 보여준 단적인 실례라고 하겠다. 여기서 말하는 전통이란 로마 카톨릭교회가 만든 인위적이고 비성경적인 전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했던 역사적 교회들의 전통과 신조들, 그리고 개혁적 신학사상을 말한다. 개혁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인문주의자들의 역사적 문법적 해석방법들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들은 인문주의의 수준에 머물지 않고 그러한 방법들을 성경과 연결하여 차원 높은 신앙적 원리로 승화시켰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처음부터 성경의 권위를 버리고 인문주의적 방법을 고수했기 때문에 그들의 사상은 철학의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지나치게 현실과의 조화에 치중하다보니 기독교의 근본진리를 부정하고 세상의 논리와 타협을 하는 결과를 낳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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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자들의 덕행도 하나님의 선물임 

(칼빈의 '기독교 강요' 중에서...) 

 

우선, 나는 불신자들 가운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온갖 재능들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또한 일반의 상식적인 판단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티투스와 트라야누스에게서 나타나는 정의와 중용과 공평이 칼리굴라나 네로나 도미티아누스에게서 나타나는 광기와 무절제와 잔인함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으며, 또한 티베리우스에게서 나타나는 도착적인 음욕이 베스파시아누스에게서 나타나는 금욕의 자세와 엄청난 차이가 있으며, 개별적 덕목과 악행을 일일이 거론하지 않는다 해도 정의와 법을 준수하는 것과 그것들을 멸시하는 것이 서로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다 인정하고 있는데, 나 역시 그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는 서로 큰 차이가 있어서 심지어 죽은 모습에서도 그런 차이가 나타날 정도다. 이것들을 서로 혼동한다면, 과연 세상의 질서가 어떻게 유지되겠는가? 그러므로 주님은 사람들 개개인마다 마음속으로 선한 행실과 악한 행실을 구분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때때로 그의 섭리를 통하여 이를 확증하기도 하시는 것이다. 사람들 가운데 덕을 불러일으키는 자들에게 이생에서 많은 복들을 베푸시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런 덕행의 겉모양이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합당하기 때문에 그런 복을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서 진정한 의를 얼마나 높이시는지 증명해 보이시기를 기뻐하셔서 그들에게 그런 복을 베푸시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겉으로 꾸며내는 의로움에 대해서도 세상적인 상급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내용이 자연스럽게 성립되는 것이다. 곧 이런 모든 덕행들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 말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면 여하한 경우에도 칭찬할 만한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다음과 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진술도 사실이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벗어나 있는 모든 사람들은 아무리 덕망이 높다 할지라도 상급도다는 오히려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이 오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한 일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의와 정절과 우정과 절제와 용기와 지혜로 인간 사회를 보존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들이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이런 선한 임무를 최악의 상태로 이행하는 것이다. 선을 이루고자 하는 순전한 열심에서가 아니라 단순한 야망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 혹은 기타 부패한 동기에서 악행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마음이 매우 불결하여 그들의 선행도 그 근원에서 부패하였으므로, 그것들을 덕행으로 인정할 수가 없고 오히여 덕행과 비슷하게 보여 사람들을 속이는 악행으로밖에는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지혜가 제시하는 목표를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행하는 일도 비록 좋아 보이기는 하지만, 그 의도가 부패하여 있으므로 결국 죄악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결론짓기를, 파브리키우스나 스키피오나카토 등 탁월한 선행을 행한 이교도들은 믿음의 빛을 받지 못하여 마땅히 지향하여야 할 행위의 목표를 지향하지 못하였으므로 참된 의로움이 그들에게 없었으며 결국 죄를 지은 것이라고 한다. 사람의 덕행은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향하는 목표에 의해서 판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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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봄이되면

캘리에는 엄청난 야생화들이 핍니다.

  

파피, 루핀,

피들넥, 아울 클로버 등

수많은 야생화들이 피어나지요.

  

캘리의 야생화는

3월 초순에 싹이 나면서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피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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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가 제대로 피려면

두 가지 조건이 따라야 하는데

그 조건은 바로 기온과 강수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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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조건 가운데

한 가지라도 맞지 않으면

 

야생화는 피지 않거나

꽃이 피는 면적이 현저히 줄어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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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기온이란,

겨울 동안에 춥지 않고

날씨가 따뜻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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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2월 중순과

2월 말에 기온이 떨어질 경우

싹을 틔우던 야생화는 냉해를 입어 얼어 죽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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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야생화가 활짝 피려면

겨울동안 따뜻한 날씨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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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보다

더 중요한 요소는 강우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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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아무리 따뜻해도

비가 오지 않거나 적게 오면

그해의 야생화는 죽을 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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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추워도

비가 제 때에 와주면

어느 정도 야생화는 핍니다.

 

그러나

날씨가 좋아도

비가 오지 않으면

야생화는 아예 피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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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기온보다 강수량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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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야생화가 활짝 피려면

겨울 동안 따뜻한 날씨가 유지되고,

 

적절한 시기에

비도 알맞게 내려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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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올해의

야생화 개화는 어떻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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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올해에

야생화 개화를 예상하기란

아주 어려운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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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는,

올해 캘리포니아는

100년 만의 가뭄 위기를 맞이했는데

 

이럴 경우에

강우량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야생화는 당연히 피지 않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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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난 2월말부터

3월초까지 캘리에는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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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서

올해 야생화는 피지 않겠다 싶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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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가 싹을 틔우는

2월 말의 매우 중요한 시기에

뜻하지 않게 많은 비가 내려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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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올해는

야생화가 조금이나마

피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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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같은 캘리라 할지라도

지역에 따라 야생화 개화는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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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Bakersfield의 일부 지역에는

그나마 야생화를 볼 수 있었지만

 

같은

Bakersfield 지역이라도

불과 10-20마일 거리의 차이였지만

다른 야생화 지역에서는 피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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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3월 초)에

모하비 사막의 양쪽 길가에

야생화들이 활짝 핀 것을 보았습니다.

 

Ridgecrest와

Kern County 일부에서도

노란 야생화가 많이 피어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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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야생화를 기대해도 될까요?

 

아니면

작년이나 제작년처럼

올해도 야생화를 구경하기 힘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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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은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올해도 지역에 따라

야생화는 핀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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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링크된 야생화는

모두 2013년에 촬영한 사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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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보고 싶은 야생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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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 피는 언덕과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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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천연색 야생화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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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정으로 치닫는 야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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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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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 왜 기독교인이 도박을 하지 않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일인가?

열 두 번째 질문

비록 “너는 도박을 하지 말라.” 가 십계명중의 한 가지가 아닐지라도, 도박을 하는 것 은 성경이 인정하는 가치를 위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성경이 명백하게 가르치는 것을 순종하는 것 외에도, 성경이 분명하게 의미하는 것도 또한 지켜야 합니다.

청지기의 원리 는 도박을 반대합니다.

기독교인은 부를 포함한 그들의 모든 소유물과 또한 그들의 소유물 이 어떻게 사용되고 쓰여 지는가 하는 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청지기가 되어야만 합니다 (시편 24:1; 마태복음 25:14-20). 도박은 우리들의 자원에 대하여 책임 있는 청지기 직분 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정직한 노동과 생산적인 일을 존중하는 성경의 원리는 도박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존경받을 만한 일이 아닌 방법으로 부유하게 되려고 하는 것은 성경의 진실에 위배됩니다 (잠언 12:11, 28:19-20; 데살로니가2장 3:10). 모든 인간에 대한 기독교인의 사랑의 성경적 원리는 도박을 반대합니다. 만일 우리들이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한다면 (마태복음 22:39), 우리는 이웃의 손실을 통해서 이윤을 얻으려는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도박을 두둔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삶 자체가 도박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아무도 언제 혹은 어떻게 자기의 삶이 끝날지 모른다고 그것을 합리화시킵니다. 어느 때라도 대참사와 병마는 일생의 계획을 뒤집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삶이 그토록 모험인데, 왜 교회는 복권과 도박을 반대하느냐고 그들은 질문을 합니다.

차이 --- 한 가지는 스스로 자초한 것이고, 다른 것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복권, 카지노 도박, 그리고 승마투표 도박(paramutual betting)은 정상적인 삶의 환경에서 부딪치는 위험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들은 이익의 유혹 때문에 의도적으로 가지게 된 위험입니 다.

중요한 점은 도박은 자발적으로 동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확실한 사건이 일어나는 조건으로 가치 있는 무엇을 옮겨주기로 해서, 그 결과 한 쪽에게는 상당한 이득의 결과를 주고 다른 쪽에게는 상대적인 손실을 주도록 두 당사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정의에 근거해 볼 때 우리들은 모든 형태의 도박이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계획하신 대로 사람들 사이의 건전한 관계를 개발하고 유지하는 것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들은 오락이나 유흥으로서의 도박과, 도박으로부터 얻어진 수익을 정부가 사회와 교육 프로그램에 사용하기로 계획되었다고 옹호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충분히 인식하면서 이 위치를 취합니다. 이것은 정부에 대하여 고발하는 것입니다. 목적(즉, 교육을 위한 더 많은 금액을 사용하는 것)이 수단을 정당화시키지 않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정말로 가치 있는 일에 공헌을 하고 싶다면, 그들은 직접 그렇게 해야 하며 모든 위험한 요소를 제거해야 만 합니다.

도박의 유익한 점에 대한 선전은 환상적이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고 의도하 는 사람들의 이득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복권, 카지노 도박, 그리고 여러 가지 형태의 도박에서 돈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상처는 사실이고 비극입니다. 도박에서 돈을 잃는 사람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기업은 도박에서 돈을 딴 사람들에 대해서 선전하지만, 잃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 밖에도 – 도박에서 돈을 따서 갑자기 부해진 사람들은 큰 유혹에 빠쳐서, 결국에 가서는 흔히 “패자”가 되어 버립니 다.

관심사:

기독교인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는 애매모호한 점들이 있습니다. 증권시장 에 투자하는 것은 괜찮은 것입니까? 자신의 돈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어떤 것에 투자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어떤 신학자들은 운에 맡기는 게임과 결정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기술 이나 정보를 사용을 필요로 하는 모험이 포함된 사업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청지기직분에 관한 자기의 양심과 서약이 여기에서 안내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많은 은퇴 프로그램이 총명한 투자회사에서 기술적으로 운영하는 반면에, 적절한 준비와 배경지식이 없는 개인의 투자는 그 투자를 커다란 위험에 처하게 만들며, 거의 도박과 같은 환경에 처하게 됩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형제들을 지키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이 우리들의 소중한 청지기직분을 통해 맡기신 것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또 한 가지 고려할 사항은 아주 필수적인 것 이상의 자원에 대한 성경적 사용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의 정직한 일 윤리를 축복하실 때, 그 결과는 번영이 될 것입니 다.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 이외에 얼마만큼의 부를 저축하거나 투자를 해야만 합니까? 예상되는 십일조 이외에 얼마나 더 주님의 일에 “투자”를 해야만 합니까? 우리들의 자원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물어보는 것은 좋은 성경적 청지기임 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이 위치에 대한 공식적인 기술은 1983년도 하나님의 성회의 위치를 표방한 “도박에 대한 성서적 고찰” (1983)에 기록되어 있다.

역자 주: 승마투표 도박 (paramutual betting)은 경마에서 경주를 관전하는 관객들이 우승이 예상되는 출전 마를 선택하여 돈을 거는 행위로서, 이긴 말에게 건 사람들에게 수수료를 제하고 건 돈의 남은 돈 전부를 분배하는 방법으로 하는 도박이다.





오늘은 콜로라도 스프링스(02)의 두번째 사진에 나오는
Will Rogers Shrine of the Sun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자 합니다.
Will Rogers Shrine of the Sun은 Cheyenne Mountain[다음에 이곳에 대한 정보 또한 말씀드리겠지만... 재밌게도 현 부통령인 딕 체니(본명:Richard Bruce Cheney)와 발음이 비슷하죠^^]에 위치한 일종의 관측소(Observation Tower)입니다.

Shrine[슈라인]이란 성인이나 성자들의 유물 또는 유골을 모신 성골[물]함을 의미합니다.
Shrine of the Sun이란 바로 '그 태양의 성지[성골(물)함]' 또는 '그 태양의 성골을 모신 장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죠!^^ 그래서 마치 Will Rogers를 김일성과 같이 민족의 태양과 같은 모드로 모신다는 그런 의미 부여일수도 있을 것 같네요.^^


하지만 그 태양이 Will Rogers일까요? 

Will Rogers Shrine of the Sun는 Will Rogers가 아니라 Spencer Penrose의 무덤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면 왜 이곳을 Spencer Penrose의 무덤이라 명명하지 않고
Will Rogers Shrine of the Sun이라고 명명했을까요?
Will Rogers는 1935년에 작고한 Spencer Penrose의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제가 이미 콜로라도 스프링스(02)에서 약간 말씀 드렸죠!^^
저는 아마도 모종의 Trick이 숨겨져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보다 확실한 증거가 확인되면 말씀드리도록 하죠...

Will Rogers Shrine of the Sun는 Penrose의 무덤이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산에 위치한 전망대이기 때문에 이곳에 오르면
콜로라도 스프링스 Metropolitan과 Downtown이 한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그림 1 참조)
그외 Garden of Gods 같은 장소들이 모두 한 눈에 들어옵니다.
그림 2에서 보실 수 있듯이 Will Rogers Shrine of the Sun에는 망원경을 설치해서
콜로라도 스프링스 곳곳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해 놓았습니다.
그 망원경 곁에 Spencer Penrose의 조각상이 있습니다.

제가 이미 Spencer Penrose와 그의 아내 Julie Penrose에 의해 시작된
El Pomar Foundation이라는 재단을 소개해 드리면서
이 재단이 이곳 콜로라도 스프링스와의 깊은 연관에 대해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이 부부와 관련된 이들에 의해 세워진 건물들과 조형물들[그의 무덤인 이곳... 그리고 부시 대통령이 묵었던 호텔 The Broadmoor Hotel, 그리고 America The Beautiful Park, 그의 가족들의 무덤 위치, 그리고 다운타운에 있는 Penrose의 동상 등]이 콜로라도 스프링스 곳곳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 위치적 의미를 볼 때... 이 건물들과 조형물들은 마치 Spencer Penrose가 죽은 뒤에도 콜로라도 스프링스 전역을 여전히 통치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실질적으로는 돈으로 콜로라도 스프링스를 잠식해 들어가고 있고...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주요 장소에 그를 기념하고 그를 기억할 수 있는 건물을 만들거나 조형물들을 세움을 통해... 이 콜로라도 스프링스가 마치 자신의 통치와 지배 아래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는 죽고 없지만... 그와 관련된 이들이... 그를 정면으로 내세워...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도가 간파되는 것입니다. (원수 마귀가 한 지역을 점령하면서 드러내는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어제는 여기 Penrose로부터 시작된 El Pomar Foundation이 건설한 The Broadmoor Hotel에서 딕 체니가 Fund rasing을 위해 숙박을 하고 이곳에서 Fund 모금을 위한 행사를 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behind의 영적 Connection들을 확인하게 되면서
저는 그들의 숨은 궤계 앞에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참된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어두운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사람을 기만하여 이러한 숨은 전략으로
콜로라도 스프링스를 더럽혀 나가는 사단의 궤계는 무너질찌어다!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주인은 우리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십니다!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주인은 Spencer Penrose와 그와 관련된 배금의 자본이 아닙니다.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주인은 오직 여호와 한분 뿐이신 것입니다.



제16장 선행 (Of Good Works)



1. 선행(善行)이란? (신조 1, 2)

성경에서 의미하는 선행이란 세상에서 행해지는 착한 일을 뜻하고 있지 않다. 성경에서 말하는 선행은 첫째로, 목적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해지는 것이어야 한다. 즉 하나님 밖에서 행해지는 것을 선행이라고 하지 않는데 이는 하나님 만이 오직 선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막10:18). 둘째로, 원리면에서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어야 한다. 사람의 생각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원리를 따라 행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셋째로, 동기면에서 선한 양심과 공의와 사랑과 겸손 즉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함으로 행하여 지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이 선행은 그 믿음의 열매와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참된 믿음은 가만히 있지 않고 살아서 활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열매로서의 선행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이웃에게는 덕이 되며, 자기 자신에게는 구원의 확신이 견고해짐과 영생의 풍성함으로 인한 감사와 기쁨이 주어지게 된다.



2. 선행의 주체 (신조 3, 4, 5, 6)

그리스도인이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은 그 자신이 아니라 성도 안에 거하시는 성령과 그 성령이 심어주시는 믿음이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느니라”(빌2:13)고 말씀함으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성령으로 일하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서 선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 것이므로 우리는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혜와 성도의 책임과 열심은 실제로 정비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의 은혜 아래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선한 뜻을 구하고 그 뜻을 책임있게 행함에 열심을 내기 마련이다. 즉 참된 성도라면 더욱 힘써 선을 행하며 성령의 은사를 불일 듯 하게 하기 위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도록 말씀과 기도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선행은 성령이 주도하는 열매이기에 성도가 아무리 최선의 선행을 했다 할 지라도 영생을 얻을 만한 공로가 결코 될 수 없고 단지 성도의 의무를 행한 것 뿐이다. 이렇게 성도의 선행이 마땅히 행할 의무일 뿐이고 또한 그 선행이 우리들의 연약성과 불완전성을 수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기뻐 받아 주시는 것은 그 선행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행하여졌고, 성도는 그 성령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3. 불신자의 선행 (신조 7)



선행이라는 그 행위 자체만을 놓고 생각해 볼 때, 타 종교인들을 포함한 불신자들도 참 신자들이 행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선행의 행위들을 할 수 있다. 그들에게도 이런 형태적인 “선”이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혜의 영향 때문인 것이다(롬2:14,15). 그러나 그 선이 그들 자신에게와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익한 것들일지라도, 그것들이 믿음에 의하여 또 말씀을 좇아서 행해진 것도 아니며, 목적과 동기면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으실 선행은 절대로 될 수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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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대해서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1)



(1) 성경은 신화인가, 사실인가?

이는 성경의 성격에 대한 매우 중요한 진술이 아닐 수 없다.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지니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입장이 달라진다. 성경을 주로 신화적이라고 보는 태도를 지니면 자유주의적 입장을 나타내는 것이고, 성경을 사실을 진술하는 것으로 보면 정통주의적 성경관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성경은 사실과 어느 정도의 연관성을 지니면서도 역사적 사실을 진술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쓰여져서 성경의 일부는 “사화”(Saga)로 쓰여져 있다고 보는 신정통주의적 입장도 있다. 이런 신정통주의적 입장은 성경이 신화는 아니라
고 보면서 성경을 신화로 보는 입장을 비판하지만, 또한 성경을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기에 오히려 우리가 가장 주의해야 할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입장 가운데서 가장 많이 오해 받아 왔으나 가장 중요한 태도는 정통주의적 입장이다. 이것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성경에 대한 입장이기도 하며, 루터와 칼빈 등 개혁자들의 입장이기도 하고, 근자의 정통주의적 신학에 충실한 분들의 일관된 입장이기도 하다. 이는 성경이 사실로 제시하고 있는 것들은 다 사실로 받아들이면서 생각하고 그에 근거해서
논의를 진행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성경이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은유나 비유로 받아들이도록 시사를 주고
있는 것들은 은유나 비유로 받아들여서 해석해야만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정통주의적 입장은 단순한 문자주의라고 매도하는 것은 심각하게 잘못된 것이다. 요약하자면, 정통주의적 입장은 성경이 스스로 시사하는 바에 따라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성경이 사실적 해석을 요구하면 사실적으로 해석하고, 성경이 시적인 해석을 요구하면 시적인 해석을 하고, 성경이 은유적 해석을 요구하면 은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정통주의적 해석이다. 그러므로 정통주의적 입장은 모든 것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는 과격한 문자주의적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니다.

정통주의적 해석에 따르면, 우리는 모세나 예수님이나 사도들과 같이 성경이 역사적 사실로 시사하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런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서 신학적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게 된다. 성경이 창조에 대해서 말하는 바를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역사적 아담과 하와에 대해서 말하는 바도 받아들이며, 역사적 타락과 그로 인해 인류에 미친 폭 넓은 영향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또한 노아 시대에 일어난 대홍수의 사실도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물론 이 때에 “하늘에 창을 여시고” 등의 표현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언제부터 언제까지 비가 내리고, 언제까지 “물이 땅 위에 창일하더라”
등의 표현은 매우 역사 기술적인 태도로 되어 졌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노아의 후예들이 바벨성과 탑을 건축한 사건과 그로 인해 인류의 언어가 나뉘어지고 따라서 나뉘어 살게 된 것과, 그런 이들 가운데 아브라함을 불러 내시고 언약을 세우셔서 구약적인 하나님의 백성을 세우실 뜻을 보이시고, 이삭과 야곱과 12족장들로 이스라엘을 구성하신 일을 사실로 받아들인다.(여기까지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성경에 대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서는 매우 드물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또한 그들이 애굽에 내려가게 된 사건과, 모세를 사용하셔서 출애굽시키신 사건과 여호수아 지도 아래서 가나안 땅에 정착한 사건과 사사시대의 모든 사건들과 그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일어난 인간 왕을 세워 달라는 요구와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상적인 왕 다윗을 세우시고, 그 후손을 통한 영원한 왕권 수립에 대한 약속을 받아들이고, 선지자들의 출현과 그들의 메시지에 담긴 메시아예언과 약속을 성경 가운데서 주어진 대로 받아들인다. 또한
예수님께서 그 모든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 과연 어떻게 탄생하셨으며, 어떻게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어떻게 자신이 그리스도(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시고, 제자들이 이를 고백할 때 받아들이셨는지, 그리고 그가 어떤 자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셨으며, 과연 어떤 방식으로 죽으셨는지, 그리고 약속하신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 제자들에게 보이시며 확실한 많은 증거를 주시고, 많은 이들이 보는중에 승천하셨고, 그 후에 약속하신대로 하늘로부터 성령님
을 보내주셨는지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다. 또한 신약 교회에 임하여 오신 성령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 땅 가운데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이들이 하나님 백성으로 살며,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하여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에로 이끌어 들이는 역할을 하여 이 땅 가운데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고 있음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이런 입장에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성경의 가르침도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과연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셔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과
그를 위해 죽은 자들의 몸이 부활할 것과 그들의 생전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그 믿음의 결과로 그를 주님으로 모시고 그의 뜻에 따라서 산 자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극치에 이른 영생을 누라며 살며, 이에 동참하지 못하는 이들은 구원에서 제외되어 영원한 형벌을 그들의 존재 전체로 받을 것임을 성경이 말하는 대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이런 정통주의적 입장은 가진 분들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선교적인 태도를 가지고 이 땅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가는 것이 이런 정통주의적 성경 이해를 가진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삶의 태도가 된다. 그러므로 성경을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도 매우 중요한 질문이지만, 그것이 낳는 삶의 열매로 보아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우리 시대에 성경을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만연해 가는 것에 대해서 매우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것이 일반화되면 우리는 예수님이나 사도들이나 교부들이나 개혁자들이나 전시대의 정통주의적 신학자들과 신앙인들과는 다른 성경 이해를 가지는 사람들로 나타나게 되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그것이 사실로 말하는 바를 그 말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견지해 가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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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된 체험신앙, 이제는 버려야 할 때/기독교개혁신보사설


우리 신자들 중에는 소위 체험신앙 또는 신비적 체험신앙을 갈망하는 이들이 더러 있는 모양이다.

사실 종교는 세인들에게 신비적 체험을 제공하는 통로가 되기도 하지만 과연 기독교 신앙을 그와 같은 저속한 세속적 체험으로 대신할 수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일이다.

기독교 신자들 중에는 소위 ‘예언기도’에 목이 말라 하거나, 심지어 ‘관상기도’와 같은 이교적 풍습을 수련하는 곳을 찾아다니기도 한다니 안타깝기만 하다.

이것은 마치 점집을 찾아가 알 수도 없는 자신의 운명을 타인의 손에 내맡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심지어 ‘성령치유집회’나 ‘천국간증집회’와 같은 허무맹랑한 낭설에 수천 명씩 모여 희희낙락거리면서 자신이 마치 성령의 치유나 받은 것처럼, 혹은 천국에나 갔다 온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우리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놀랍고 신비로운 신적 체험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회심'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죄로 죽었던 우리가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이 회심이야 말로 가장 신비스러운 체험이 아니겠는가.

신자가 이땅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놀랍고 신비로운 영적 체험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찬'이다.

성찬을 통하여 하늘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이 놀라운 영적 체험이야말로 우리 신자들에게는 더 없는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때문에 이 두 가지 체험보다 더 놀랍고 신비로운 종교적 체험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결단코 찾을 수 없다.

이 두 가지 영적인 체험은 신비주의자들이 추구하는 비정상적인 체험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회심과 성찬은 신비주의자들이 구하는 신비한 체험을 능가하는 신비로움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신자는 이 두 가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맛볼 수 있다.

그러므로 회심했다 하면서 다른 체험을 더 구하는 자는 아마도 진짜 회심한 자가 아닐 것이다.

성찬을 맛보았으면서도 다른 체험을 더 구하는 자는 성찬을 제대로 맛본 자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우리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회심’과 ‘성찬’과 같은 영적 체험 이외 더 이상의 신비로운 체험은 없다. 회심과 성찬이야말로 다른 것을 더 구할 필요가 없을 만큼,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신적이며 영적인 체험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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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의 복음의 의미

존 칼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1:16)"

 

"복음"이라는 말의 의미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에서 복음은 고결함을 통해 세상과 세상의 사라져 가는 부요와 쾌락을 경멸함으로써 우리의 온 마음으로 이 소중한 복을 소망하고 그 복이 우리에게 베풀어질 때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가르치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난 기쁘고 즐거운 은혜의 메시지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명시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해 선포되도록 명하신 메시지에 복음이라는 이름을 허락하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참되고 확고한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행복한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복음"이라는 말이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 흩어져 있는 모든 은혜로운 하나님의 약속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보통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복음이 처음 선포되었다고 밝히시므로 내가 제시한 복음의 정의를 따르도록 합시다.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은혜의 엄숙한 공표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일컬어집니다.(롬1:16) 복음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비와 우리를 향한 아버지로서의 사랑의 보증인 것처럼 특별한 방식으로 복음의 주제가 되십니다. 개혁주의마을/Grace





콜로라도 스프링스(01)에서 America The Beautiful 공원에 세워진 오벨리스크 사이로 저 멀리 우뚝 솟아있던 산 "Pikes Peak"은 콜로라도 스프링스를 대표하고, 로키산맥 중 다섯 번째로 높은[14,115 feet (4302 m)] 영험한^^ 산입니다. 이 영험한 산의 이름은 Zebulon Montgomery Pike Jr. (January 5, 1779 – April 27, 1813)라는 군인이자 탐험가의 이름을 따 지었습니다. [그는 최초 이 산을 등정한 사람이지만 1806년 11월 24일 극심한 눈보라로 인해 정상 등정에 실패하고 맙니다. 첫 정상 등정자는 의사며, 식물학자며, 역사학자였던 Dr. Edwin James였습니다. 후에 시장(Mayor)인 Stephen H. Long이 1820년 7월 14일에 정상 등정에 성공해  Dr. Edwin James를 기념해 James Peak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곧 Pikes Peak으로 환원되었고 1835년부터 군사지도에는 Pikes Peak이 공식 지명이 되었습니다.]

이후 1858년 이 Pikes Peak 일대에 금맥이 발견되면서 당시 약 10여 만명의 사람들이 이곳 일대로 몰려들게 되었고, 지금의 콜로라도 스프링스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Cripple Creek도 당시 같은 이유로 형성된 중요한 인근 도시임] 

당시 이곳으로 금을 찾아 나섰던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슬로건이 유행했었다고 합니다. "Pike's Peak or Bust!(파잌스 픽으로! 그렇지 않으면 파산할 것이요!)" 

당시 금을 찾아 갑부가 되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이러한 기대에 부풀어 지금의 콜로라도 스프링스 일대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1871년 이 일대는 William Jackson Palmer라는 지도자에 의해 공식적으로 콜로라도 스프링스라는 도시로 탄생되게 됩니다. 

1915년에는 [제가 콜로라도 스프링스 (02)와 (02) 추가]에서 말씀드렸던 금광 개발로 갑부가 된 Spencer Penrose와 그의 동료들이 Pikes Peak의 정상까지 자동차 도로를 구상하고 그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됩니다. 사실 이 고속도로는 금을 찾아나섰던 사람들이 이미 통행하며 1889년경에 마차도로로 형성된 도로를 정리하고 포장을 덧 씌움으로 완성된 도로인데요, 지금의 24번 지방도로의 원형이 바로 그것입니다. 당시 이 고속도로 건설의 비용으로 $500,000이 소요되었다고 하니 과히 엄청난 투자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붉은 땅 '콜로라도' + 광천수[Manitou Springs 지역을 비롯하여]가 지금도 솟아나오는 '스프링스' = Colorado Springs. 그곳으로 몰려든 사람들은 아마도 그 붉은 땅과 이 영험한 산에서 마치 광천수가 샘터져 솟아오르듯 금맥이 쏟아져 나와 자신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기를 갈망하며 속속들이 모여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했던 조금은 이상한 빛깔을 띤 이 땅이 사람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다름아닌 Gold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Pikes Peak 주위로 몰려든 이유는 이 영험한 산에서 얻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자신들의 보다 나은 삶을 보장해 줄 '금송아지'^^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열망(Hope and Spirit)을 가진 이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어 형성된 곳이 바로 '콜로라도 스프링스'였던 것입니다.

워싱턴으로 돌아와 이 Pikes Peak을 살피게 되면서 저는 믿음의 눈으로 다시 산을 오르며 시내산의 모세와 그 아래서 모세를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 그분과 대면하며 그들의 참된 생명과 삶을 위한 율례를 받아 내려왔던 모세... 하지만 그들의 백성들은 그 아래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일하게 같은 '금송아지'의 Spirit 아래 모여들어 만들어지게 된 이 콜로라도 스프링스를 다시 한번 믿음의 눈으로 내려다 보며... 비록 제가 모세는 아니지만... Pikes Peak정상에 다시 서서 두 손을 높이 들어 콜로라도 스프링스와 제가 살고 있는 워싱턴 D.C.를 향하여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아버지! 이 땅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워싱턴 D.C.와 동부로 부터 시작될 주의 부흥의 화살이 콜로라도 스프링스를 통과하여 평양과 예루살렘으로 날아가게 하옵소서! Pikes Peak의 황금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겼던 이들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콜로라도 스프링스가... 그들의 금송아지를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참된 하나님으로 깨달아 알고 그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Pikes Peak으로 올라가며 하나님의 율례를 묵상하게 되며, 깨닫게 되며, 배우게 되며 그 정상에서 하나님을 찬미하여 예배하여 이 땅 미국의 부흥과 전 세계의 부흥을 위하여 기도하는 백성들이 되게 하옵소서!"

-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사2:2-5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그가 많은 민족 중에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니라!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행하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 미4:1-5

첫번째 사진은 America The Beautiful Park에서 찍은 Pikes Peak입니다.
두번째 사진은 Pikes Peak에서 찍은 콜로라도 스프링스 전경입니다. 멀리 아래 콜로라도 스프링스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마이클 호튼 저 (김성웅 역)

현대 교회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증상
문: 사탄이 한 도시를 완전히 장악하면 어떤 모습일까?
답: 교회는 매주일 문전성시를 이룰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가 선포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는 사탄이 만들려고 하는 교회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리스도로 충만한 교회인가, 아니면 '그리스도 없는 교회'인가? 호튼은 이 물음에 대해 오늘날 미국 기독교의 현실을 한 마디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라고 진단한다. 이것은 자유주의 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자유주의와 복음주의를 막론하고 미국 교회 전반에 대한 진단이다. 참으로 충격적인 선언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어떠할까? 우리는 미국 교회와 다르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미국 교회에서 만든 제품을 가장 빠른 시간에 직수입해서 쓰고 있는 한국 교회는 미국 교회의 쌍둥이라 해도 좋을 터인데, 호튼이 말하는 미국 교회의 현실이 한국 교회에서도 그대로 복사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바짝 긴장하고 호튼의 말에 귀 기울여 들어 볼 필요가 있다.

호튼은 현재 미국 교회의 메시지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막론하고 "더 열심히 하세요. 더 노력하세요" 일색이며, 보수 진영에서 자유주의 진영에 이르기까지, 로마 가톨릭에서 재세례파에 이르기까지, 뉴에이지에서 남침례교에 이르기까지, 미국 교회의 '영성 탐구'에 대한 열광적 분위기에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의 증상을 발견한다. 16세기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그리스도 없는 중세 교회를 '바벨론의 포로 된 교회'라 불렀듯이 호튼은 '그리스도 없는 미국 기독교'를 '미국 문화의 포로 된 교회'로 생각한다.

1. 펠라기우스주의적 도덕주의
  호튼은 미국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증상을 질병명을 사회학자 크리스천 스미스가 말한 '도덕적이 심리적인 이신론'이라고 규정한다. 스미스가 말하는 '도덕적이고 심리적인 이신론'의 핵심 내용은:

첫째,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둘째, 하나님은 사람들이 착하고, 멋지고, 서로 공평하기를 원하신다.
세째, 인생의 중심 되는 목표는 행복이고, 자신에 대해 뿌듯하게 느끼는 것이다.
넷째, 하나님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할 때 외에는 사람의 삶에 굳이 간섭하지 않는다.
다섯째, 착한 사람은 죽어서 천국에 간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사람을 착하게 만들었으며, 그러므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적이고 심리적인 이신론'의 신학적인 명칭은 펠라기우스주의다. 호튼은 미국 교회가 펠라기우스주의로 심하게 기울기 시작한 것은 2차 대각성 이후 즉 찰스 피니의 등장이라고 말한다. 찰스 피니는 미국 교회에 펠라기우스를 유행시킨 전도사였다. 오늘날 미국 기독교의 심각성은 찰스 피니의 이러한 펠라기우스주의적 경향이 미국 교회에 전반에 스며들어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명목적으로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들까지도 일부 침투했다는 점이다. 미국 기독교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 펠라기우스주의적 경향은 종교개혁에 역사적 뿌리를 둔 교회들에서조차 드러나고 있다. 크리스천 스미스와 제임스 헌터와 같은 종교사회학자들은, 루터파 교회와 개혁 교회의 평신도들이 이와 똑같은 전제들을 공유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기억시킨다. 로버트 슐러도 그렇지만, 노만 빈센트 필이 미국 개혁 교회에서 안수받은 목사였음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서 좀 더 보수적인 장로교와 개혁교회들에서도 스미스가 지적한 도덕론적이고 심리요법적인 이신론에 딱 맞아떨어지는 설교들을 들을 수 있었다. 시카고 대학에서 가르치는 주류 교단의 신학자인 브라이언 게리쉬는 위기의 본질을 이렇게 진술한다. "은혜에 대한 개혁주의자들의 증언이 16세기보다 현재 더 절박하게 필요하다. 지금은 개혁교회들에서도 펠라기우스주의가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2. 조엘 오스틴 비판
  오늘날 미국 교회에서 이러한 펠라기우스주의적 도덕주의를 가장 강력하게 전파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조엘 어스틴이다. 조엘 어스틴은 베스트셀러가 된 <긍정의 힘>과 <잘되는 나>라는 책과 레이크우드 교회에서 전하는 메시지를 통해 미국과 전 세계에 이러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확산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다.

호튼은 '개신교 자유주의에서 나온 일종의 부드러운 도덕주의가 슐러를 통해 복음주의의 주 메뉴가 되었고' 어스틴은 "입으로 시인하고 믿음으로 얻어라"라는 형통주의 철학을 주류의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이라 말하면서 어스틴의 신학은 '펠라기우스주의의 자기 계발과 영지주의의 자기 신성화가 접목된 형태'라고 진단한다. 조엘 어스틴의 책은 미국 교회만이 아니라 한국 교회에서도 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한국 교회에도 조엘 어스틴의 긍정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병의 심각성에 대해 경고한 사람도 별로 없고 이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책을 제시한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이 심각한 병은 점점 더 많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전염되고 있다. 물론 왜 조엘 어스틴의 <긍정의 힘>과 <잘되는 나>에서 가르치는 자기 계발식 메시지가 문제가 되는가?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하고 항변을 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말하고, 긍정적으로 살면 된다는 조엘 어스틴의 메시지는 무엇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호튼은 이 문제에 대해 명쾌한 대답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어스틴과 요즘 활동하는 다른 많은 설교자들이 약속하는 것들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리스도가 없어도 된다. 유명한 자기계발 강사 토니 로빈스처럼 성경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복음서들에 약속된 구속과 같은 것도 필요 없다. 삶을 좀 더 긍정적으로 전망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하나님이 필요할 데가 어디 있을지 분명하지 않다... 미국인들에게는 더 나은 가정, 재정, 건강 혹은 나아가서 도덕성을 함양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예수가 필요 없다.

3. 맥클라렌의 이머징 교회 운동 비판
  최근 미국 복음주의에서는 맥클라렌 같은 인물이 주도하는 다소 자유주의신학적 성향과 신비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이머징 교회 운동이 떠오르고 있다. 호튼은 '조엘 어스틴의 형통복음에 나타나는 자기도취와 개인주의와는 동떨어져 있기는 하나 맥클라렌의 메시지는 중요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어스틴이 말하는 죄와 구원은 하나님에서 도덕적 개선을 통한 자아의 행복과 향상으로 옮겨갔다면, 맥클라렌에게서는 지구 온난화, 가난, 에이즈 그리고 자본주의적인 탐심으로 옮겨간 정도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스틴은 구원을 전적으로 지금 여기에서의 형통이라 말하는 반면 맥클라렌은 주로 지금 여기에서의 평화와 정의라고 말한다.' 이 두 경우 모두 구원을 가져오는 것은 사람의 몫이다. 형동 복음을 주장하는 조엘 어스틴 류의 <믿음의 말씀 운동>이나 맥클라렌 류의 <이머징 교회 운동>의 가장 결정적인 문제점은 무엇인가? 호튼은 이들은 복음과 율법을 혼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복음을 "지금의 길에서 돌이켜서 새로운 길을 따르라"고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초대 (맥클라렌)라고 규정하든, 혹은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어스틴)라고 하든, 우리는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고 있다. 복음은 그리스도가 죽음, 정죄 그리고 죄의 폭정을 종식시켰고, 장차 영광과 권세 가운데 다시 오셔서 먼저 심판하신 후 이어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는 하늘의 선언과 함께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4. 영지주의와 닮은 꼴인 미국 기독교 영성
  펠라기우스주의적 도덕주의와 더불어 최근 미국 기독교에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은 영지주의적 영성이다. 영지주의는 오늘날 '뉴에이지' 혹은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종교 시장의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이 되고 있다. '영성에 대한 탐구'가 미국의 시사 잡지 커버스토리에 자주 등장하고, 역사학자, 사회학자, 소설가 등이 '영성'이라 부르는 영지주의적 탐구에 열을 올리고 있다.

호튼은 복음주의자들이 자주 진리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실은 복음주의자들의 예배, 전도, 영성은 역사적인 기독교라기 보다 여러 면에서 몰몬교나 뉴에이지 그리고 자유주의자를 닮았다고 말한다.

미국 영지주의 전문가 브룸에 따르면 고대 영지주의는 즉 브룸은 유대교와 기독교 신비주의, 피오레의 요아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재세례파, 천년왕국 열광주의자, 내면의 빛 분파주의자, 미국의 모든 초월주의 (위트만, 소로 그리고 에머슨), 몰몬주의, 그리고 뉴에이지 운동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역사를 통해 계속적으로 다양한 변종의 모습으로 지속되어왔다. 그렇다면 최근 미국의 영성이 고대 영지주의자와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요소란 무엇일까?

호튼은 고대 영지주의와 최근 미국의 영성을 이렇게 비교한다. 루프가 고대 이단에 관해 논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시대 미국 영성에 관한 기술은 영지주의의 주요 특성들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그 특성들로는, "교리보다 경험을 우위에 둔다, 공적 제도가 아니라 사적이다, 인식의 문제를 피하고 신화적이고 몽환적이다, 공공의 종교가 아니라 대중의 종교를 지향한다, 부드럽고 마음 써 주는 신관을 가지고 있다" 등이다.

고대 영지주의처럼 우리 시대 미국인들이 영성에 접근하는 방법은 전형적으로 개인적인 관계의 축으로서 내면의 영을 강조한다. 보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변형판들마다 표면적으로 조금씩 다를 수 있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호튼은 영지주의적 관점에서 미국 기독교를 관찰했을 때, 오늘날 개신교 자유주의와 개신교 복음주의는 정도 차이는 있지만 그 기본적인 종교 형태에서는 다르지 않다고 한다.

5. 미국제 기독교의 특징: 펠라기우스주의와 영지주의의 결합
  호튼은 현재 미국제 종교의 특징을 도덕주의와 신비주의의 결합으로 본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펠라기우스주의와 영지주의의 결합이다. 현대 미국 기독교는 바로 이 두 가지 이단이 결합한 절묘하게 결합한 형태라는 것이 호튼의 주장이다. 펠라기우스주의는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로 귀착된다. 구세주가 아니라 좋은 모범이 필요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에 이르는 영지주의의 길은 선한 창조주, 죄를 부른 타락,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처참한 죽음 그리고 육체의 부활 이야기를, 한 악신, 물질을 악하게 한 타락, 내면적인 계몽으로 인한 구속이라는 신화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구원을 위해서 우리 밖을 보도록 하는 반면, 펠라기우스주의와 영지주의는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 안을 들여다보도록 한다. 이 둘은 합쳐서 미국제 종교라는 완벽한 기습작전을 성공시켰다.

6. 교회가 그리스도를 다시 회복하는 길
  펠라기우스주의건 영지주의건 이 모든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복음이 없다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고, 결국 각기 독특한 복음 없는 율법을 주장한다.

호튼은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는 것은 타락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향이며, 기독교라고 전혀 말할 수 없는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는 어떤 형태의 자력구원을 가정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호튼은 교회에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복음과 율법이란 무엇인가? 호튼은 복음과 율법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율법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하지만, 복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말한다. 율법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을 말한다. 이 둘은 아주 다른 말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수많은 성도들이 지쳐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호튼의 진단에 따르면 복음이 강조되지 않고 복음없는 율법만 강조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위대한 복음의 이야기를 강조하기 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해야 할 일, 우리가 이웃을 위해서 해야 할 요구사항만 자꾸만 늘어놓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벗어나 다시금 그리스도 충만한 기독교로 변화될 수 있을까? 질병의 원인을 정확하게 진단해야 바른 치료를 할 수 있다.

호튼에 따르면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라는 증상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복음과 율법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율법과 복음을 혼동한 것이며, 결국 교회가 복음을 복음답게, 율법을 율법답게 선포하지 못하고 복음 없는 율법만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호튼의 해결책은 명확하다. 복음과 율법의 차이를 바로 알고, 복음과 율법을 바르게 선포하며 복음을 복음답게 율법을 율법답게 하는 길이다.

호튼의 책을 읽고 나면 호튼의 다음과 같은 말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줄 것이다. 율법은 복음이 아니다. 이 차이를 자각하고 나면, 복음은 복음, 율법은 율법으로 대접할 수 있을 것이다. 율법은 율법, 복음은 복음이 되게 하자. 이제부터 호튼의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먼저 다음의 질문에 답해보라.

첫째,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둘째, 율법이란 무엇입니까?
셋째, 복음과 율법의 차이는 무엇이며, 복음과 율법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면 우리 또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의 일원으로 살아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과 율법의 의미를 정확하게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복음의 원수로 살아가는 것 곧 성경이 말하는 '다른 복음'을 믿고 살아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까지 호튼의 여러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도움을 받은 것 중의 하나는 바로 이 '복음과 율법'의 의미였다. 그동안 호튼의 <세상의 포로된 교회>, <언약의 하나님: 언약신학 입문서>등을 통해서 복음과 율법의 의미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성경을 읽고 신앙생활을 하고 목회를 하는데 있어 중요한 전환점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번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통해서 교회사의 모든 이단들이 사실 이 복음과 율법의 의미를 혼동한데서 비롯되었으며, 자유주의와 복음주의를 막론하고 오늘 우리 시대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만든 가장 중요한 뿌리요 원인이 '복음과 율법의 혼동'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호튼의 기존의 책들을 통해 복음과 율법의 원리를 배웠다면, 이번 호튼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통해 복음과 율법의 실전을 배운 느낌이다. 복음과 율법은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요, 그리스도로 충만한 교회를 형성하는 데 기초다. 앞으로 호튼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가 우리 한국 교회가 다시금 복음과 율법의 참된 의미를 깨달고 복음의 중심인 그리스도로 충만한 기독교가 되는 불씨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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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과 강제의 구분

(존 칼빈의 '기독교 강요' 중에서)

 

인간의 의지는 죄의 굴레에 완전히 묶어 있기 때문에 선을 향하여 움직일 수도 없고, 꾸준하게 선을 추구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런 움직임은 바로 하나님께로 향하는 회심의 시초인데, 성경은 그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레미야는 자기를 돌이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자신을 돌이켜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또한 같은 장에서, 신자들의 영적 수공을 묘사하면서, 여호와께서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속하였다”고 말씀한다. 이는 분명 여호와께 버림을 받아 마귀의 멍에 아래서 행하는 동안 죄인이 얼마나 단단한 족쇄에 묶어 있는가를 시사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의지는 그대로 남아 있어서, 죄를 향하여 강력한 애착을 갖고 그 쪽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이런 처지에 있다고 해서 의지를 빼앗기는 것은 아니고, 다만 의지의 건전성을 빼앗기는 것이다.

 

자, 자유를 빼앗긴 의지는 필연적으로 악으로 이끌릴 수밖에 없다는 내 말을 납득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참 의아스러운 일이다. 그 말이 사람들에게 거슬리는 것은, 그들이 필연과 강제를 서로 구분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인 것이다. 가령 누군가가 그들에게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선하지 않으신가? 마귀는 필연적을 악하지 않은가? 라고 묻는다면 무어라 대답하겠는가?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의 신성과 너무나도 밀착되어 있어서, 그가 하나님이신 것이나 그가 선하신 것이나 똑같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귀 역시 타락으로 말미암아 선에 참여 하는 것에서 완전히 끊어져 버렸으므로, 그는 악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가령,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모욕하려고, 하나님께서는 강제로라도 자신의 선하심을 보존하지 않으실 수 없으니 그가 선하다는 것에 대해서 굳이 칭찬을 받으실 이유가 없다는 식으로 빈정거린다고 하자. 그럴 경우에는 곧바로 답변할 수가 있다. 곧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지 못하시는 것은 그렇게 못하시도록 어떤 강제적인 압력을 받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한량없이 선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마땅히 선을 행하실 수밖에 없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선을 행하는 하나님의 자유 의지가 전혀 방해를 받지 않는다면, 또한 마귀가 오직 악 이외에는 아무것도 행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의지로 악을 행하는 것이라면, 사람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 아래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의지와는 별 상관없이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여러 곳에서 이런 필연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코엘레스티우스(Coeletius)가 이에 대해 트집을 잡으며 그를 비난했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단언하였다. “자유를 통해서 사람이 죄 가운데 있게 되었지만, 그에 대한 형벌로 나타난 부패성이 자유를 필연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언급할 때마다, 주저하지 않고 이를 필연적인 죄의 속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분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사람이 타락에 의하여 부패하였을 때에 강제에 의해서 억지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지은 것이며,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마음의 강력한 이끌림에 의해서 죄를 지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의 본성이 너무나 부패해 있어서 그는 오직 악을 향해서만 움직일 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사람이 분명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에 매여 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베르나르도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에 동의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모든 생물들 가운데 오직 사람만이 자유롭다. 그런데 죄가 개입함으로 인하여 사람 역시 일종의 폭력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는데, 이것으로 그의 본성이 아니라 그의 의지가 해를 입은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본래 부여받은 자유는 빼앗기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뒤에 가서는 이렇게 쓰고 잇다. “무언가 비열하고도 이상한 방식으로 그 의자 자체가 죄로 말미암아 더 악하게 변하여 그 자체가 필연이 되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필연이 – 그것이 의지에 속하면서도 – 의지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지도 않고, 반대로 의지도 – 그것이 이끌림을 받아 그릇된 상태로 나아가지만 – 필연을 배제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이 필연이 말하자면 자의적인 것이 때문이다.

 

그리고 더 뒤에 가서는, 우리를 압박하는 멍에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일종의 자의적인 종노릇의 멍에이며, 따라서 의지가 자유로울 때에 스스로 죄의 종이 되었으니 종노릇의 상태를 보면 비참하기 이를 데 없고, 의지를 보면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짓는다. “이렇듯 영혼은, 무언가 이상스럽고도 악한 방식으로 자의적이면서도 그릇 자유로운 필연성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하면서도 동시에 자유로운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스럽고 한심스러운 일은 영혼이 자유롭기 때문에 죄책이 있으며, 죄책이 있기 때문에 종노릇의 상태에 있는 것이요, 결국 자유롭기 때문에 종노릇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개혁주의 마을/Grace




 콜로라도 스프링스(02)에서 다룬 Julie Penrose Fountain Sculpture의 제작자 David Barber과 Bill Burgess를 추적해 보던 중 Bill Burgess는 본명이 William C. Burgess로 확인되었습니다.

그의 웹싸이트를 확인하게 되면서 그가 만든 조각상들 중에 Denver에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있는 Julie Penrose Fountain Sculpture과 비슷한 조각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것이 위의 첫번째 사진입니다.


올려놓은 첫 번째 그림에서는 콜로라도 스프링스에서와는 약간 다르게... 그 동그란 원형이 피라밋의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덴버에 존재하는 이 조각상은 Opus 2(the building Pyramid)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습니다. Opus란 작품이란 뜻으로 음악작품 번호를 부여할 때 이 명칭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Opus 2 곧 작품 2의 부제를 the building Pyramid로 지은 연유는 무엇일까요?


Burgess는 자신이 나선형태(Convolution=Helix): 일종의 Circle 의 구도를 선호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Circles have a long tradition, dating back to prehistory, and they are almost universally regarded as symbolizing "wholesomeness(건전[유익]함; 신중함), completeness(완성[완결]도) and continuity(연속[성, 상태])."


특별히 Burgess는 이 나선형태의 작품을 선호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Julie Penrose Fountain에서는 그 나선형태에서 물이 뿜어 나오도록 만듦을 통해 '그것이 대기와 지구 사이에서 생명을 부여한다'는 자기 만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던 것을 기억해 봅니다.


조금 극단적일 수 있겠지만 1달러 지페에 등장하는 피라밋 위의 전시안과 비교해 볼 때... Burgess의 작품 Julie Penrose Fountain의 구도는 거의 동일한 맥락을 유지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두번째 사진은 역시 Bill Burgess의 작품으로 University of Colorado School of Medicine Aurora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냥 언뜻 보면 특별한 특징이 없는 듯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역시 오벨리스크를 뒤틀어 놓은 조각상의 일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작품명은 Aspire 곧 갈망, 열망인데, 오벨리스크 역시 자신을 하늘에 맞닿으려는 인간 바벨탑의 전형이기에... 이러한 형태로 우리 인간이 갈망하려 하는 바가 어떠한 것인지를 충분히 함축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을 향한 갈망일까요?^^


한 조각가의 작품은 그의 정신세계의 반영입니다. 특별히 Burgess의 작품을 살펴보면 그의 정신세계 역시 다분히 로마 그리스 신화에 많은 배경을 두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신탁, 헤라클레스, 아프로디테, 제우스 등). 2005년 그의 작품 주제는 드디어 이집트로 넘어가 Osiris(죽음 또는 저승의 신: Isis의 남편)와 Isis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http://www.artactiveonline.com/Art/OneArtist.asp?ArtistID=95 으로 들어가 보시면 23점의 그의 작품을 감상해 보실 수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여러분들과 함께 생각을 공유해 보고자 하는 부분은 미술작품이라는 미명하에^^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공간 곳곳에 세워져 있는 여러가지 조각상 또는 건축물이... 그 제작자들의 정신세계(혹은 신앙세계)를 지속적으로 반영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의도로 견고하게 세워져 있다는 부분입니다. 그냥 무심코 지나치면 아무 것도 아닐 것 같은 그러한 것들이... 발걸음을 멈추어 그 의미를 추구하기 시작하게 되면...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우상 숭배로 얼마든지 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을 수행하면서... 제가 살고 있는 워싱턴 D.C. 곳곳에 악한 의도에 의해 조각되고 건축되어 있는 조각물들과 건축물들이 산재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조직적이고 의도적이다는 사실도 확인하면서 말입니다. 그것을 신봉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이 함께 연결되어 하나님을 반역하는 쪽으로 그들의 정신세계를 통일해 나가면... 그 역시 이 땅을 더럽히는 또 하나의 stronghold를 형성시킬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하겠습니다.


참고로 Opus Dei라는 단체를 소개합니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개인적인 생각에 Bill Burgess는 Opus Dei와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를 추적해 보면서 그가 에스파니아에서 개인전시회를 개최한 전력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Opus Dei는 1928년 에스파냐인 신부 J.M. 에스크리바에 의해 창설된 종교단체로 <신의 조화의 성십자가 성직자단(Sociedad Sacerdotal de la Santa Cruz del Opus Dei)>의 약칭입니다. 혼자 깨달음을 얻는 엘리트주의와 내밀하고 엄격한 성직 위계제 정치조직이 있습니다. 1940년 무렵부터 에스파냐의 대학 및 연구기관에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그 후 세계 각국으로 확대되었고 1950년에 로마교황으로부터 인가를 받았습니다. 1950년대 후반부터 프랑코정권 내에 하나의 그룹을 형성하여, 주로 경제정책을 담당하고 정계에도 진출하였습니다. 에스파냐에서는 교육기관·은행·기업·출판사·신문사 등에도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원은 1970년대 전반에 5만∼6만 명 가량이었으며, 에스파냐인이 반수 이상입니다. 기본적 문서는 1939년에 에스크리바가 쓴 《도(道)》이고, 본부는 로마에 있다고 합니다. - 일종의 프리메이슨 아류이기도 합니다.



[한글성경들을 비교하며 읽으라]

1. 우리말로 번역된 성경들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물론 대개 좋은 번역들이긴 합니다만,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2. 대개의 경우, 원문에 비해 잘못 번역된 부분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각 번역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말입니다. 또 오역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절하지 못한 번역들도 있게 마련입니다.

3. 저희 교단의 경우, 예배시간에 사용토록 허락된 성경은 개역한글 및 개역개정판이며, 바른성경은 공예배 이외의 시간에 읽을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저희 교단 밖에서는, 이 외에도 여러 종류의 성경들이 번역되어 있고, 읽혀지고 있습니다.

4. 물론 어린이들이나 초신자들을 위한 쉬운 번역성경들도 있습니다만, 어느 정도 성경에 익숙해진 성도나, 특별히 설교를 해야... 하는 목회자들의 경우는, 본문의 뜻을 정확하게 전달해주는 성경이 꼭 필요합니다.

5. 그러므로, 목회자의 경우, 설교준비를 위해 본문을 깊이 읽으려고 한다면, 한 종류의 성경만 보지 말고, 여러 종류의 성경을 비교해보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은 워낙 성경 프로그램들이 잘 되어 있어서, 이런 비교작업은 매우 쉽게 할 수 있습니다. )

6. 저희 교단의 목회자 같은 경우는, 위에 언급한 세 종류를 함께 놓고 읽어보면 유익함이 많습니다.

7. 비교하며 읽다가, 서로 다르게 번역된 부분이 발견되면, 그 부분에 대해서 좀 더 깊이있게 살펴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원문에 대한 이해가 다르거나, 아니면 사본간의 이문에 대한 생각이 다른 경우들이 있게 되니까 그렇습니다.

8. 번역상 큰 차이가 없더라도, 조금 다른 번역 표현으로 읽어보게 되면, 본문의 의미가 훨씬 새롭게 다가오게 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9. 물론 이런 작업을 할 때, 원문과 비교하면서 읽어가게 되면 금상첨화입니다. 원문을 어떻게 자연스러운 한국말로 번역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읽고, 여러 번역본들은 어떻게 번역했는지를 참조하고, 그래서 성도들에게 가장 쉽게 전달될 수 있도록 본문의 구절들을 이해해보는 것입니다.

10. 또한 번역본들 간에 매우 큰 차이가 있을 경우, 어느 한 성경이 오역을 하거나 본문을 완전히 다르게 이해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원래 원문이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것은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11. 이러한 과정에서 얻게 되는 가장 큰 유익은, 본문이 내 눈 앞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 춤추게 된다는 것입니다.

12. 기존에 익숙하게 알고 있던 구절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게 되고, 어렵거나 모호하게 느껴지던 구절들의 의미가 더 명확해지게 되고, 심지어 많은 경우 앞뒤 문맥이 살아나면서 본문 구절의 뜻이 선명하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13. 사실, 위에 말씀드린 내용은 주해의 첫 단계인 '사역'의 일부분에 속하는 내용입니다. 본문 이해의 출발선상에 있는 내용이지요.

14. 내가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는 본문이라 생각하지 말고, 처음 대하는 본문이라고 생각하고, 주의깊게 본문을 읽어나가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 명확하게 깨닫게 되고, 내가 이 말씀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가 뚜렷하게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15. 말씀을 연구하고 전한다는 것은, 작은 실천들이 쌓여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을 꼼꼼히 읽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 작은 실천적인 노력들 중의 첫 단계입니다. 기초부터 잘 다지고 실천하는 신학도들과 목회자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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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탓입니다 (시39:9)

요셉은 자신을 푼돈에 팔아넘긴 형들의 옹졸한 시기와 선을 넘어간 배신에 대해 "나를 보내신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 하신 것"이며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욥도 여호와의 불이 떨어지고 갈대아 사람들의 잔혹한 약탈이 자행되고 악창으로 몸까지 망가졌을 때에 분노와 복수의 불길에 휩싸이지 않고 입술로도 범죄치 않았으며 오히려 "주신 분도 여호와요 취하신 분도 여호와니 오직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뿐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다윗은 죽은 개처럼 여겨졌던 시므이가 자신을 비루한 자로 여기며 돌맹이를 던지며 저주의 무례한 입...술을 놀렸을 때에 오히려 격분한 충신들을 달래고 면박까지 주면서 "주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 두라"고 했던 분입니다.

아무리 억울하고 아무리 쓰라리고 아무리 다급해도 하나님을 사려하고 하나님 앞에서 사태를 이해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반응하는 믿음의 선배들이 있어서 좋습니다. 물론 당사자는 억울함과 분통과 원망을 온 몸과 생으로 삼켜야 하는 고통과 희생이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희생의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교훈을 얻고 생을 갱신하고 시선을 사망의 땅에 떨구지 아니하고 생명과 평강의 하늘로 올리는 열매를 얻습니다. 억울하다 생각하면 한없이 억울하나 자신의 희생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된 요셉을 생각하면 영광의 도구로 쓰여진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억울한 희생과 참혹한 죽음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우리를 위하여 그리하신 것입니다. 욥과 요셉과 다윗은 그런 예수님을 예표하는 듯합니다. 그렇다고 희생과 손해를 미덕으로 여기자는 건 아닙니다. 그 자체로는 할 수만 있다면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실 때 기쁨으로 맞이하는 준비는 필요할 듯합니다.

막상 그런 현실에 부딪히면 내공이 드러날 것입니다. 말은 화려해도 몸은 사리는 분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제가 늘 그러니 그런 분들의 행보가 더 잘 보입니다. 경건의 연습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낍니다. 유익이든 손해이든 하나님의 행하심을 늘 감지하며 촐삭대지 않고 잠잠히 입을 열지 않는 연습부터 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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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다음글의 원래 주인은 infiltrator님으로써 원문은 제3시 사이트(http://3-rd.net)의 '담장을 넘은 가지'코너에서 볼 수 있다.

 
 

콜로라도 스프링스(01) 첫 그림에서 오벨리스크 정 중앙에 있는 둥근 원형의 조각상에 대한 이야기를 후에 나눠드리기로 했었는데... 오늘 (02)에서 잠시 나누어 드리고자 합니다.

콜로라도 스프링스 뉴 다운타운 에 위치한 America The Beautiful Park에는 Julie Penrose Fountain이란 분수 조각상이 지난달 2007년 6월 7일에 헌정되어졌습니다.

왜 이 조각상이 Julie Penrose라는 여인을 기념하여 헌정되어졌는지에 대한 이유가 어떻게 지금 콜로라도 스프링스라는 도시가 거대한 맘몬의 커넥션 가운데 통합되어져 가고 있는지를 밝혀주는 실마리가 됩니다.
 


이 Julie Penrose Fountain의 부제는 Continuum입니다.

연속 또는 연속체 또는 어떤 느리지만 점진적인 변화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David Barber and Bill Burgess라는 두 인물에 의해 디자인 되었는데요...

이 분수 조각상은 대기와 지구 사이에서 물이 생명을 부여한다는 의미의 운동을 대표한다고 합니다.

원문은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this sculptural fountain represents the life-giving movement of water between the atmosphere and the earth.

그렇다면 과연 이 Julie Penrose라는 여인은 누구일까요?


줄리 펜로스의 본명은  Julie Villiers Lewis McMillan인데요

그녀는 1890년대 Cripple Creek지역 주위 금광에서 큰 재력을 모은 Spencer Penrose의 아내입니다. 그가 모은 자금은 현재 El Pomar Foundation이라는 재단으로 탈바꿈하여 콜로라드 스프링스 전역에 자선, 투자, 리더 양성의 명목으로 지속적으로 그 맘몬의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좀 더 엄밀하게 말씀드리면... 이 El Pomar Foundation이 콜로라도 스프링스 지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자금줄로 역사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들의 Fund는 the Broadmoor Hotel, the Cheyenne Mountain Zoo, the Will Rogers Shrine of the Sun, the Pikes Peak Highway을 비롯한 중요한 지역 병원 건립에 사용되었습니다. 금으로 형성된 자금으로 새로운 다운타운이 Continuum 즉 점진적으로 확장되어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The Will Rogers Shrine of the Sun은 Spencer Penrose의 무덤이있는 장소인데요, 이곳은 자기의 친구 Will Rogers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합니다. 이 Will Rogers란 인물 역시 여러 연결고리를 가진 인물입니다. 이 윌 로저스라는 인물에 대해 잠시 찾아 보았었는데요, 워싱턴 D.C.와 관련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 각 State는 미 국회 의사당 건물 안에 주별로 두개의 상(statue)를 가질 수 있도록 허락이 되어 있는데요. 이 윌 로저스가 오클라호마 주에 의해 그 영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첨부합니다: Each state is allowed to have two statues in the United States Capitol Building. Will Rogers was one of the people to be given this honor by the state of Oklahoma. The statue is made of bronze and faces the floor entrance of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gallery in a hallway connected to Statuary Hall. There is a story that Oklahoma knew they wanted Will Rogers, before he passed away, to be one of their two statues in the Capitol and when the state asked him if that would be okay he told them only if his statue is placed facing the House gallery so he can keep an eye on Congress. It is true that of all the statues in the hallway, Will Rogers is the only one facing the House gallery entrance. It is also said that as Presidents walk by the Will Rogers statue on the way to give a State of the Union speech it is good luck to rub the shoes on the statue. The old US Route 66 is known as the Will Rogers Highway — "officially" named this by the US Highway 66 Association in 1952.


그리고 El Pomar Foundation이 건설한 The Broadmoor Hotel은 지금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를 만들어낸 별 다섯 등급의 호텔입니다. 2006년 12월 11일판 Newsweek magazine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President George W. Bush decided to quit drinking after waking up with a hangover in the Broadmoor Hotel one morning in the summer of 1986. (^^ 86년 여름 어느 아침 이 호텔에서 숙취상태에서 깨어나 술을 마시지 않기로 결단한 장소라고 합니다. - 부시와 이 El Pomar Foundation과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이들의 자금이 누구에게 구체적으로 전달되었는지에 대한 내력도 결국은 이 자금이 누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자료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수 많은 학교들이 이 Fund로 부터 지속적인 자금을 제공받고 있었습니다.


America The Beautiful Park역시 이들의 Fund로부터 완성된 공원입니다.

이곳에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고, 그들의 자금줄의 근원이 되는 Spencer의 아내를 위해 헌정되어진 Julie Fenrose Fountain이 공원의 Core Sculpture로 세워져 있습니다.


이 오벨리스크를 두고 그 자리에서 바로 뒤로 돌면 Pioneer Museum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 박물관에 콜로라도 스프링스 (01)에서 보여드린 피라밋이 세워져 있습니다.


아직 Spencer Penrose가 프리메이슨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제가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자금에 의해 지어진 건축물이 오벨리스크와 피라밋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Pikes Peak과 America the Beautiful Park 그리고 Pioneer Museum은 같은 Spirit을 가진 연결 고리임에 틀림없습니다.


Pike Peak은 다음 콜로라도 스프링스 (03)에서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El Pomar Foundation이 건립한 동물원이 있는 Cheyenne Mountain 역시 (04) 정도에서 다루어 보아야 할 중요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저는 콜로라도 스프링스에서 워싱턴 D.C.와 연관된 자금줄을 발견하게 된 셈이지요.^^


당시 세계 최고의 금광이 있었던 콜로라도 스프링스...

그 금광으로 인해 갑부가 된 자들이 형성한 Fund...

그리고 그 자금이 지금 현재 콜로라도 스프링스와 콜로라도 전역 그리고 미 전역에 미치고 있는 보이지 않는 맘몬의 영향력을 간파해 볼 수 있었습니다.


주께서 왜 콜로라도 스프링스를 주목케 하셨는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정치와 돈 그 배후에서 역사하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그들과 싸워야 하는 우리...

로마의 재건을 꿈꾸며 계획된 세계정치의 중심 워싱턴 D.C.

이곳으로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금으로부터 비롯된 돈들이 흘러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주여!! 도우소서!! 우리의 기도를 보다 정밀케 하시고!!

우리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의 영적 배후에서 벌어지는 궤계를 깨닫게 하셔서...

그들의 궤계가 도모되지 못하도록 막아서는 주의 군사로... 주의 군대로...

우뚝 세워지게 하옵시고...

왜곡되고 비뚤어진 주의 땅이 주의 새로운 은혜를 경험하는 땅으로

주의 이름을 높이고 주를 예배하며 영광돌리는 장소로 바뀌게 하옵소서!

주의 참된 생명과 구원의 역사가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온전히 임하게 하옵소서!!



간증집회 강사들 중에는 유독 연예인이 많은 것 같다. 교회에 발을 걸치고 있는(?) 연예인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씩은 간증집회를 다닌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연예인들의 간증집회 행렬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연예인들이 진짜 참 신앙인인지 검증도 하지 않고 대중의 인기나 지명도만 가지고 섣불리 교회들끼리 모시기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한 때 간증집회 초청 강사 1순위로 불릴 만큼 이 교회 저 교회 많이 불려 다녔던 어느 유명 연예인은 서비스가 엉망이라는 이유로 룸살롱 종업원에게 행패를 부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를 신실한 신앙인으로 알았던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바가 있다. 어디 이 뿐이랴! 분명히 무슨 나이트클럽 홍보지에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던 연예인이 기독교방송에서 버젓이 하나님을 만난 간증을 하거나 찬양하는 장면을 보고는 깜짝 놀란 적이 여러 번 있다. 교회를 순회하면서 간증집회를 인도하다가 밤에는 유흥가 밤무대를 누비고 다닌다는 것이 과연 어울리는 일일까?

 

 

그건 그렇다 치고 과연 그들의 간증은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내가 들었던 간증 중에는 특이한 외모와 유행어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어느 코미디언의 간증은 잊을 수가 없다. 너무 감동적이거나 은혜로운 내용이라 잊을 수 없는 것은 아니고 저게 과연 성경적인 해석인가?’ 싶은 경험담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자기가 애지중지 키웠던 딸이 어린나이에 죽고 마는데 그 일로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기는가?’ 하고 크게 낙심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자기 어머니가 한 때 무당으로 활동했는데 십계명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이 자신을 미워하는 자의 죄를 삼사 대까지 갚으셨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다.

 

한 때 교계를 어지럽혔던 조상이 지은 죄 때문에 자손이 벌을 받는다는 가계저주론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었다. 아무리 조상의 죄악이 크다 하여도 신자인 나와 내 가족에게 그 저주가 미칠 수 없다. 그런 주장은 우리의 과거와 미래 모든 죄와 저주를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훼손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런 비성경적이고 검증되지 않은 간증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도 많이 은혜롭다라는 명목으로 행해지고 있다. 이것은 비단 연예인들의 간증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믿은 지 2,3년 밖에 안 되는 사람이 무슨 전도왕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간증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 분은 한 번 물면 놓지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이 전도왕의 비결이라고 했다. 그것이 어떤 면으로 보면 전도할 때 쉽게 포기하지 말고 인내심을 가지고 하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자칫하면 스토커식으로 상대방을 집요하게 괴롭히는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로 데리고 나오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그리고 그 분이 간증을 시작할 때가 신앙생활 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는데 아직 교회 안에서 양육을 받아야 할 때이지 강단에서 전도 집회의 강사로 서고, 간증프로에 나올 시점은 아니었다.

 

 

오늘날 소위 잘 나간다는(?) 간증을 들어보면 대부분 힘들고 어려운 시절도 있었지만 하나님 은혜로 극복하고 사업이나 하는 일이 성공했든지, 건강을 되찾았든지, 자녀교육을 잘 했다든지 하는 내용 일색이다. 그런 간증을 듣다보면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피부로 느낄 수도 있지만 저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고 저렇게 잘 나가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인가?’ 하는 자괴감에 빠질 수도 있다.

 

간증이 꼭 세상적으로 성공했다는 승리주의적인 관점으로만 비쳐지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왜곡시킬 소지가 크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해결받기 위해 주님께 세 번이나 구했지만 주님의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것이었다(고후 12:8-10).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응답받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응답하지 않으신 것에 대한 의미를 깨닫고 기뻐한다. 왜 오늘날 수많은 간증 가운데 이처럼 망하고 실패한 경험을 나누는 간증은 듣기 어려운 것일까? 우리 육신의 욕망만 충동질하는 성공한 사람들의 간증보다 더 희생과 낮아짐의 자리로 내려가기로 결단케 하는 간증이 이 시대에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또한 성경과는 거리가 먼 내용임에도 유명인이라는 이유로 간증집회를 열어서 강단을 혼란하게 만드는 행위도 속히 중단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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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진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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