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tar Of The Sea

 Phil Coulter & Roma Downey

 


 

 

The Star Of The Sea...

 

  "이 곡은 1984년 스윌리호수에서

익사한 나의 형을 위하여 작곡하였다.

 

  Fahan 부두에 서 있으면,

호수 너머에 있는...

 

형의 마지막 모습이 목격되었던,

버크라나와 던리가 보인다.

 

주여,

그의 영혼이 평온히 잠들게 하소서...

" - Phil Coulter -

 

 

6thSeasonRoma2.jpg

Roma Downey

기적을 믿으며...


기적이란 무엇일까?


 기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현상, 큰 위기의 순간에 찾아오는

 구원의 손길, 치유와 환상, 만날 수 없으리라 여겼던

 이와의 만남,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는 일.

이런 정의가 틀리다고는 할 수 없지만,

기적은 그 이상의 개념이다. 우리의

 마음을 불현듯 사랑으로 채우는 것.

그것이 바로 기적이다.

- 파울로 코엘료의《아크라 문서》 중에서 - 


'사회/정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종자체가 변형된 북한!  (2) 2014.05.08
바사호의 최후  (0) 2014.05.05
배고픈 목숨이었다  (0) 2014.04.28
제 2 차 세계대전사  (0) 2014.04.27
대한민국 대통령의 특권 19가지!  (0) 2014.04.20



      가슴에 영원토록 살아 숨쉬는 사랑


      천년을 살아도 일그러진 일상 보다는
      해 뜨면 해를 바라보고
      달이 뜨면 달을 바라보고
      비가 오면 비에 젖어도 보고

      누구나 살아가듯 그렇게
      같은 하늘 아래 오랜 세월 함께 숨쉬며
      당신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나를 위해 사는 내가 아닌
      당신을 위해 사는 내가 되고 싶습니다.

      내 마음 속에 들어 올 때
      시리게 아프고 눈물이 흘렀어도

      내 마음에서 나갈 땐
      소슬바람처럼 작은 흔들림으로
      그렇게 떠나가는 당신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내 곁에 머무르기 전에
      난 이미 당신 마음 안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스치는 인연이 아니라
      찢기는 고통 안고 살아가는 인연이 아닌
      사랑을 머금고 행복한 당신이길 바랍니다.

      내 가슴에 영원토록 살아 숨 쉬는 당신
      당신이 내 마음 안에 머무르고 있는 한
      난 당신을 버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스쳐지나가는 바람의 인연이 아니라면
      차디차고 쓰린 사랑이라 해도
      당신을 품고 살아가는
      당신의 사람이고 싶습니다.


      - 좋은 글 중에서 -












죽음과 부활의 체험

노기송 ㆍ 2014/04/25 ㆍ추천: 0      

2003년 9월 28일 오전 10시. 이날은 내가 죽음 바로 앞에까지 갔던 날이다. 그 날은 주일으로 같은 교단 목사님 교회와 연합야외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278(BQE) 하이웨이를 가다가 3중 충돌로 머리가 깨지고, 허리가 으스러지고, 왼쪽 어깨뼈가 튀어나오는 대형 사고를 당했다. 그 때 내 몸이 하이웨이 아스팔트 위에 누워 생각하는 것이, ‘아! 오늘이 내가 죽는 날이구나!’이었다. 그리고 바로 생각하는 것이, ‘그럼 내가 지금 죽으면 깨어나는 곳이 어디일까? 천국일까? 지옥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왜냐하면 나는 죽은 후에 사후 세계가 있고, 심판이 있음을 확실히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히9:27).

또한 목사라고 무조건 천국에 다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어야 가기 때문에, 나의 믿음을 순간적으로 심각하게 점검하게 되었다. 그 때 떠오르는 성경 구절이 요한복음 11장 25절-26절이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때처럼 이 말씀이 실감나고 고마운 말씀인 줄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네! 하나님! 저는 이 말씀을 믿습니다! 비록 50세 젊은 나이에 죽는 것이 아깝지만 하나님 앞에서 다시 깨어 날 줄 자신합니다!”라고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애절히 흐느끼는 독백처럼 흘러 나왔다.

물론 그 후에 짧은 지면상 다 표현할 수없는 하나님의 놀랍고도 기적적인 크신 은총의 역사와 가족들과 수많은 목사님들과 성도님들의 기도 덕분에 신속하게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게 되었다. 할렐루야!

사고 후 한 달 만에 병원에서 퇴원하였고, 재활병원에서 갓난아기가 걸음마를 배우듯 걷는 연습부터 시작하였다. 고맙게도 후러싱에서 목회하는 막내아우 목사가 올라와서 6개월 넘게 교회서 설교해 주었다.

죽음! 평소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죽음! 장례식도 많이 가 보았고, 장례식 집례도 여러 번 해 보았지만, 내 자신이 그렇게 빨리 직접 죽음 앞에 가 볼 줄은 그때까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물론 나도 언젠가는 죽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은 하고 살았지만, 죽음이 그렇게 빨리 내 앞에 닥칠 줄은 미처 몰랐다는 것이다.

실제 죽음 앞에 가보니,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났다. 그렇게 사랑하는 아내도, 토끼 같은 자식들도, 분신 같은 성도들도,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났고, 세상의 다른 아무것도 소용이 없었다. 오직 예수님뿐이 없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임을 생각할 때, 참으로 부활절을 맞이할 때마다 예수님의 그 크신 은혜에 누구보다도 더욱 감사, 감사,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10:9)는 평소에 구원에 대하여 평범하게 들리던 말씀이 내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며 살아야 함을 다시 한 번 깨닫는 것이다. 내 죄를 위해 십자가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사건 후 내 설교가 달라졌다. 성경에 기록되어진 예수 그리스도가 실존적이고 체험적인 믿음이 무엇인지를 설교하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체적인 믿음, ‘성육신’, ‘십자가’, ‘부활’, ‘승천’, ‘재림’의 다섯 가지 핵심을 더 구체적으로 설교하게 되었다. 물론 교회 다니며 이 설교를 안 들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들이 어떻게 적용되는가는 자신들의 죽음 앞에서 제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내가 과연 죽은 후에 자신 있게 하나님 앞에서 부활 할 수 있을까? 각자 심각하게 점검해 보아야 한다.

지난 4월16일 한국에서 인천을 떠나 제주도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 젊고 싱싱한 어린 아이들이... 누구 하나 그 끔직한 사건을 미리 예상이나 했을까?

참으로 죽음은, 언제,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찾아오는지 아무도 모른다. 특별히 요즘처럼 돌발 사고가 많이 나는 시대에 사는 우리는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죽음을 준비하고 살아야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으로 무장하고 살아야 한다. 죽음 앞에 가보아야 예수님이 얼마나 고마우신 분인지 깨닫게 된다. 특히 죽음 앞에서 소망 없이 오열하는 유가족들의 모습을 보며, 더욱더 필요한 것이 부활 신앙임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부활은 곧 산 소망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다시 만날 기회가 꼭 있다는 것이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3-4)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그리고 꼭 다시 오마 약속하셨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노기송 목사(뉴욕새예루살렘교회)
ⓒ 크리스찬투데이

출처: USA 아멘넷

          가난했지만, 낭만과 정이 흘렀던 그때 그 서울

 

05075529_1.jpg


05075529_2.jpg


05075529_3.jpg


05075529_4.jpg


05075529_5.jpg


05075529_6.jpg


05075529_8.jpg


05075529_9.jpg


05075529_10.jpg


05075529_11.jpg


05075529_12.jpg


05075529_13.jpg


05075529_14.jpg


05075529_15.jpg


05075529_16.jpg


05075529_17.jpg


05075529_18.jpg
 
그리고
 


05075529_19.jpg


05075529_20.jpg


05075529_21.jpg


05075529_22.jpg


05075529_23.jpg


05080456_24.jpg


05080456_25.jpg


05080456_26.jpg


05080456_27.jpg


05080456_28.jpg


05080456_29.jpg


05080456_30.jpg


05080456_31.jpg



'사회/정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사호의 최후  (0) 2014.05.05
세월호 희생자 가족을 위로하면서...  (0) 2014.04.29
제 2 차 세계대전사  (0) 2014.04.27
대한민국 대통령의 특권 19가지!  (0) 2014.04.20
2013년 가장 강력했던 사진 30장  (1) 2014.01.11

 




삼위일체 하나님은 과연 성서적인가
?

필자는 최근에 어느 전도사님이란 분이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 주시요, 메시야임에는 분명하지만, 하나님은 아니다, 성경에 단 한 구절도 삼위일체란 말이 없다. 라고 주장한 것을 읽어 본 적이 있다. 그 이유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기 때문에, 그는 다윗의 자손이요, 아들이긴 해도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리스도는 과연 하나님이신가? 하는 것을 성경 속에서 먼저 살펴보고 그 말씀을 근거로 삼위일체의 하나님되심을 몇차레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려고 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 하나님되심을 증거하고 있다.
1. 그리스도의 선재(先在)성.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믿지를 않았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만 받아드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은 다윗보다 먼저 있는 자라고 분명히 말씀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주장하셨다(마22:41-46, 요8:55-59). 그 전도사님은 그때 당시 유태인들과 꼭 같은 우를 범하고 있다. (자손으로만
)

2. 하님의 말씀(로고스)은 창조 이전에 계신 자로서,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
(로고스)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로고스)은 곧 하나님이시라.(요1:1절 말씀)

3.
 하나님께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나, 복수를 사용하심으로써, 자신 속에 계신 성부, 말씀, 성령을 인정하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7절)
하나님께서는 유일신이심을 전제로 할 때, 여기에서 우리(We), 라고 하는 복수를 사용하신 것은 성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4.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란 이름으로 오심은 예언된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아기로 오지만, 그분은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사9:6-7참조)고 표기함으로써, 오실 아기,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라고 예언했다.

5.
 메시야
,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 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1:23절 말씀)

6.
교회
(성도)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값주시고 샀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20:28절 말씀)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언제 한 번 피를 흘리신 적이 있는 데, 그 이유는 교회(성도)를 값주고 사기 (구속)위해서였다. 그러면 그 하나님은 언제 피를 흘리셨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 성도를 사셨음을 말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동일성. 성부 하나님은 육신이 없으신 분으로써 피를 흘리실 수가 없고,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성자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음을 부인할 수 없다.

7.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이라 증언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도마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My Lord and my God!(요20:28)" 고백했다.

8.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 who, being in the form of God)이시다.
(빌2:5절)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곧
, 육신을 입고 계신 동안에는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종의 형체를 입고 있는 동안임을 간과치 말라.

9.
  예수 그리스도는 홀로 하나이신 주재시다.
      
유다서 4절 홀로 하나이신 주재 (The Lord God)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 하는 자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주재 곧 창조주 하나님이 되신다
.

10.  재림하실 주님은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시다.
디도서 2;13 "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
, 다시(재림)오실 주 예수님은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시다.

1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알파와 오메가시요
, 처음과 나중이시다.
계시록 1: 8절을 읽어보라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하나님께서 알파와 오메가이시다. 또 같은 장, 17절 하반절-18절에서는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전에 죽었었노라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께서 한 번 죽었었고 살아 (부활)나신 적이 있으시고 세세토록 살아 계신다.

계2: 8절에서도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 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알파와 오메가시요, 처음과 나중인 하나님께서 한 번 죽었다가 살아 나신 적이 있으시다. 계22: 13절에서 결론을 맺으시면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천명하셨고, 여기에서 는 누구인가
?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정확하게 그 이름을 밝히셨다.

조금 더 내려가서 계22: 16절을 보자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니.
하셨다. 곧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심을 증명하는 확고부동한 말씀이다.

12.
 성부, 성자, 성령, 이 셋은 하나이다라고 말씀한다.
1서 5:7절 말씀을 영어성경에는 한글 번역판보다 더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다 For there are three who bear witness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Spirit: and these three are one (N.K.V) 라고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the Father= 성부, the Word=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성자, the Holy Spirit = 성령님. these three are one = 이 셋은 하나이니라
. 삼위일체란 말이 아니고 무엇이랴.

안타깝게도 작금의 많은 목사님들도 번역된 한글 성경만 가지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란 성구가 단 한 구절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연구 부족의 부끄러운 결과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삼위일체도 역시 아리우스라고 하는 이단이 나타나 예수가 하나님과 유사본질이며,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다가 니케야회의를 통하여 아타나시우스와 토론 끝에 이단으로 정죄를 당함에 따라 삼위일체의 초석이 정립된 것을 알 수 있다. 니케야회의는 아리우스가 장로로서 처음부터 정치적으로 동조세력이 많았으며, 아타나스우스는 집사로서 알렉산더감독의 서기였으나, 알렉산더감독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토론을 참여하게 되었다. 결국 아타나시우스는 성경적으로 토론을 승리함으로서 아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되고 만다.-이인규


글/최송연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교단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회원이며,

세계교회협의회(WCC)회원입니다.

 

이러한 여러분들은 한국에 있는 기독교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교세를 가지고 

그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분 교단과 여러분들이 회원으로 있는 WCC와 NCCK는

오래전 부터 로마 가톨릭과 하나되는 일치를 위한 행사로

일년에 1주간 동안을 정하여 기도회로 지금까지 행하여 왔습니다.

 

금년에는 여러분들의 총회장 김동엽목사가 시무하는 목민교회에서

가톨릭(천주교) 신부의 인도로 기독교와 천주교가 하나되는 일치를 위한 기도회를

아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가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2009년으로 기억하는데

통합측 교단의 김삼환 목사가 NCCK회장 일때는  

올림픽 홀에서 가톨릭과 하나되는 일치를 위한 기도회를 다음과 같이 개최한 사실이 있습니다.

 

 

 

 

 

 

가톨릭과 하나되게 하기 위한 이러한 행사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이미 오래전 부터 계획하고 이를 따라서 진행되어 왔습니다.

 

그 결과로,

가톨릭의 경우는 지난 3월 말에

직제협의회 구성에 대한 정관을 승인했었고,

 

통합측 교단이 중심회원으로 있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도

4월 24일 열리는 정기 실행위원회에서

직제협의회 창립 승인 안건으로 다루고

통과키로 정하였고

 

이를 따라서 가톨릭과 NCCK는 금년 5월22일 가톨릭과

하나되기 위한 “한국 그리스도인 신앙과 직제협의회"(가칭)창립키로 하였습니다.

 

통합측에 소속된 목사님 여러분!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교회와 교인들은 기독교로서 

기독교이면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몸이 된 지체들을 뜻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님을 머리와 몸으로 해서 이에 붙어 있는 지체들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교회, 곧 기독교라고 칭해 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독교가 어떻게 가톨릭과 하나되는 일치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통합측은 기독교가 아닙니까?

기독교가 어떻게 가톨릭과 하나를 이루기 위하여  “한국 그리스도인 신앙과 직제협의회"를 창립한단 말입니까?

 

묻습니다.

가톨릭이 기독교입니까?

기독교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비슷한 것 같지만 모든 것이 완전히 다릅니다.

다를 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해치는 무서운 실체를 가졌습니다.

 

가톨릭은 가톨릭이지 기독교가 아닙니다.

가톨릭이란 말 그 자체가 로마교라는 말이 아닙니까?

로마의 보편적인 교라고 해서 로마 가톨릭이라고 칭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근원으로 해서 성령으로 말미암은 사도들에 의하여

복음으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곳 저곳에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 교회가 로마에 와서는

바벨론의 여러 신들과 함께 부정과 부패가 그리스도의교회 안으로 유입이 되어 혼합으로 말미암아

변형, 변모, 변개,변질되어 그만 로마교가 되고 말았지 않았습니까?

그로 부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곧 기독교가 로마에서는 로마 가톨릭이 된 것이 아닙니까?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들은

여러분들의 교단 소속, 역사학을 전공하신 신학자들이 더 잘 아실 것입니다.

 

이제 묻습니다.

그 동안 여러분 교단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했습니까?

이단으로 정죄한 그들의 잘못이 무엇인지요? 

그들이 어떤 잘못을 범하였기에 이단으로 정죄하고 배척했습니까?

어떤 이단이더라도 아니, 대한 민국에 있는 이단들을 전부 모아 놓은 것 보다 

더 큰 이단이 가톨릭입니다.

가톨릭에 비하여 한국의 모든 이단들은 하루 살이에 불과 하고 로마 가톨릭은 약대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의 교단, 통합측이 가톨릭과 하나 되겠다고 가톨릭과 함께 새로운 총회를 만든다는 이것은, 

기독교+가톨릭= 기형적인 괴물을 출산하는 모양새입니다. 

그 괴물을 성경적인 기독교를 해치는 불의의 병기가 됩니다.

 

여러분들은 로마 가톨릭을 이단 차원을 넘어선, 

적 그리스도로 규정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는 고사하고 가톨릭과 하나를 이루겠다며,

일치를 위한 가톨릭과 함께 하는 총회를 만들겠다고 나섰습니다.

이것은 제 정신이 아닙니다.

미혹의 영에 걸려든 것이 아니라면 결코 할 수 없는,

어두움의 길을 여러분 교단은 걷고 있습니다. 

 

묻습니다.

마리아 상을 만들어 놓고 이를 향하여 엄마 삼창을 하게 하거나 한다면 

이단입니까? 아닙니까?

마리아 상을 만들어 놓고 이를 향하여 머리 숙이고 기도를 하거나 

꽃을 드린다면 이단입니까? 아닙니까?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 라고 한다면 이단입니까? 아닙니까?

마리아가 하늘의 여왕이라면 이단입니까? 아닙니까?

예수님을 통하지 말고 마리아를 통하라고 가르친다면 이단입니까? 아닙니까?

마리아가 죄 없이 태어났다고 주장 한다면 성경교리에 반한 이단입니까 아닙니까?  

눈을 뜨고 다음 사진을 보십시요.

 

 

 

 

 

 

 

성당 안에 죽은 사람의 무덤을 두거나

시체를 미라로 만들어 전시하거나 뼈들을 모아 놓는, 

이러한 행동이 유물 숭배입니까? 아닙니까?

가톨릭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이 보이지만 형상을 만들어 놓고 이를 숭배하고 유물을 숭배하는 노선을 걷는,

무서운 정체성을 가진 것이 로마 가톨릭이라는 사실을 통합측은 속히 아셔야 합니다. 

 

 

성찬시,

떡이 예수님의 실제의 몸으로 변하여

이것이 사제들의 손에 의하여 

하나님께 제사드리는것이라고 주장하고

이를 행한다면 정신이 바른 행동입니까? 

정신이 나간 행동입니까? 

 

성경까지 변개 시킨 행위 등등,

가톨릭의 모든 행위들을 낱낱이 열거하고 문제점을 지적하자면  

천년 세월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사람을 죽이라고 지시를 했습니까?

로마 가톨릭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몰아서 잔혹하게 죽이되,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죽였습니까?

이들이 진정한 회개를 한 적이 있습니까?

그들은 지금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

세계를 정복하려는 어두운 세력일 뿐입니다.

이에 모든 인류가 위장된 평화의 사도에 미혹되어 있을 뿐입니다.

 

통합측 목사님들!

가톨릭과의 하나되는 일치를 위한 5월에 있을 한국 기독교-천주교 직제협 창립 총회

기형적인 괴물을  태어나게 해서 성경적인 기독교를 한국 땅에서 없애 버리는  총회가 될 것입니다.

 

통합측 목사님들 가운데,

주의 인도하심을 받는 목회자분들이 계시다면

가톨릭과 하나되는 일치를 위한 직제협 총회가 개최되지 못하도록

나서 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가톨릭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로마교입니다.

성경적인 기독교가 세계로 번성 한다면야 참 좋으련만

불행하게도 변형, 변개, 변모, 변질돤 로마교가 기독교 처럼 온 지구상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평화, 봉사, 구제 등등 이 세상 사회적인 면을 부각 시켜서 말입니다.

 

가톨릭은 평화의 사도가 아니라

기독교를 대적하고 인류 구원의 길을 왜곡 시켜 가로막는, 

인류의 대적이기도 하며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를 훼손 시키는 십자가의 원수이기도 합니다.

어찌하여 통합측은 이러한 어두움의 세력들과 하나가 되겠다고 가담을 하는지요?

 

 

변하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금수와 버러지 형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로마 가톨릭임을 아셔야 합니다.

붉은 옷 속에 가려진 거짓된 평화를 아셔야 합니다.

한국교회 130년 역사에서 오늘을 살아가는우리들의 시대에서

성경적인 기독교를 가톨릭과 하나되는 일치로 인한 혼합으로 

변모, 변형, 변개, 변질 시켜 다음 세대에 물려 줄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로마 가톨릭 교황을 방문한 NCCK 소속 교단장들)





출처: http://cafe.daum.net/wccpusan/V5oM/21

‘제2차 世界大戰史’ 

우리 세대가 겪었던 20세기의 대 사변(事變) 제2차 세계
대전을 
새삼 돌이켜보며 우리의 미래를 생각해 보는 것이
오늘 우리가
처한 환경에서 절실하다고 느껴져,'제2차
세계대전사(世界大戰史)
     65편 중 50편을 찾아 편집 한 것입니다.         
 

 



차 세계대전사 제01부 U보트 파란의 6년 (45:31)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akZ6g3OffJ8

 

          2차 세계대전사 제02부 육.해.공 협동작전 (47:37)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JJNsG3tHxX4

 

          2차 세계대전사 제03부 독일 폭격기 수투카 (47:16)

                         http://www.youtube.com/watch?v=X9ZW_4Jo_L0&feature=player_detailpage

 

          2차 세계대전사 제04부 공수부대의 대활약 (47:19)

                         http://www.youtube.com/watch?v=a6TtcgouPFA&feature=player_detailpage

 

          2차 세계대전사 제05부 독일 육군의 선봉 기갑부대 (47:06)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bOHvOcuZpd0

 

          2차 세계대전사 제06부 항공모함전 (46:29)

                        http://www.youtube.com/watch?v=YZrGWMqZT94&feature=player_detailpage

 

          2차 세계대전사 제07부 독일 제트 전투기 (47:54)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WsLPM8WJ7jw

 

          2차 세계대전사 제08부 독일의 신무기 (47:48)

                          http://www.youtube.com/watch?v=_UmKPH_pWx8&feature=player_detailpage

 

          2차 세계대전사 제09부 잠수함전 (47:18)

                          http://www.youtube.com/watch?v=ZcYEp7QAud8&feature=player_detailpage

 

          2차 세계대전사 제10부 독일 공군의 활약 (47:51)

                          http://www.youtube.com/watch?v=tPndZmp1tCI&feature=player_detailpage

 

          2차 세계대전사 제11부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 (47:20)

                         http://www.youtube.com/watch?v=QspKjyPodr4&feature=player_detailpage

 

          2차 세계대전사 제12부 독일 전차의 완성 - 타이거 (47:13)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p53ThgJX2o4

 

          2차 세계대전사 제13부 얼어붙은 동부전선 (47:42)

                          http://www.youtube.com/watch?v=j4I03GxcO_Q&feature=player_detailpage

 

          2차 세계대전사 제14부 독일 폭격기 부대 (47:49)

                         http://www.youtube.com/watch?v=VpSubcaYlmc&feature=player_detailpage

 

          2차 세계대전사 제15부 독일 해군의 활약 (47:38)

                         http://www.youtube.com/watch?v=Mj43ZfQ4sOo&feature=player_detailpage

 

          2차 세계대전사 제16부 영국 전투기 부대 (47:57)

                         http://www.youtube.com/watch?v=w-xL14OvjGw&feature=player_detailpage

 

          2차 세계대전사 제18부 영국 폭격기 부대 (48:19)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88ecfTEc24Y

 

          2차 세계대전사 제19부 교착상태의 이탈리아 (48:58)

                          http://www.youtube.com/watch?v=BJmjd5lDQeA&feature=player_detailpage

 

          2차 세계대전사 제20부 선전의 극대화 (46:55)

                         http://www.youtube.com/watch?v=Elhy2h4nq3A&feature=player_detailpage

 

          2차 세계대전사 제21부 전쟁과 군자금 (47:34)

                          http://www.youtube.com/watch?v=VXAzbiaKZXs&feature=player_detailpage

 

          2차 세계대전사 제22부 파르티잔 빨치산 (47:41  

      http://www.youtube.com/watchv=AEGMpzG2Myw&feature=player_detailpage&list 

                                                      =PLapY1RqEBuWQJBiqaA8PjC0mqYtP_KH3-

 

           2차 세계대전사 제23부 U보트에 맞선 호송함대 (48:37)

                          http://www.youtube.com/watch?v=tSxD28negEA&feature=player_detailpage

 

           2차 세계대전사 제24부 독일 보병의 화력 (47:55)

                          http://www.youtube.com/watch?v=4KwDounU5m0&feature=player_detailpage

 

           2차 세계대전사 제25부 독일 북부군 (47:51)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Ne43ipdWfGs

 

           2차 세계대전사 제26부 독일 중부군 (47:52)

                          http://www.youtube.com/watch?v=Zvl3u0NW_eo&feature=player_detailpage

 

           2차 세계대전사 제27부 독일 남부군 (48:35)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sa7cISqJxOU

 

           2차 세계대전사 제28부 히틀러의 무적대포들 (47:33)

                          http://www.youtube.com/watch?v=gpAicjObFX8&feature=player_detailpage

 

         2차 세계대전사 제30부 사막의 여우와 아프리카 군단 (49:30)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tjFZo6DUgtU

 

            2차 세계대전사 제31부 유럽상공의 야간전투 (46:07)

                          http://www.youtube.com/watch?v=zl8BDONktrQ&feature=player_detailpage

 

            2차 세계대전사 제32부 - 비밀병기 슈퍼건 (42:26)

                          http://www.youtube.com/watch?v=IXdIG3A28nU&feature=player_detailpage

 

             2차 세계대전사 제33부 선전장관 괴벨스 (45:44)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LoC_bYFPyRY

 

             2차 세계대전사 제34부 총통보좌관 루돌프 헤스 (47:00)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JuTDDo0bt-w

 

             2차 세계대전사 제35부 총사령관 괴링 (47:48)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n4xlcPZ6gPM

 

             2차 세계대전사 제36부 건축가 슈페어 (46:57)

                          http://www.youtube.com/watch?v=820k-fS7vQQ&feature=player_detailpage

 

             2차 세계대전사 제38부 사형 집행관 히믈러 (47:44)

                          http://www.youtube.com/watch?v=s8kXOXM6IMo&feature=player_detailpage

 

 

             2차 세계대전사 제39부 아이히만 #01 (9:40)

                          http://www.youtube.com/watch?v=GuVENXmPKM8&feature=player_detailpage

             2차 세계대전사 제39부 아이히만 #02 (9:40)

                          http://www.youtube.com/watch?v=hV6ON0_WE8Y&feature=player_detailpage

             2차 세계대전사 제39부 아이히만 #03 (9:40)

                          http://www.youtube.com/watch?v=lstBwr_i8gI&feature=player_detailpage

             2차 세계대전사 제39부 아이히만 #04 (9:40)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yCqO2d8EVcU

             2차 세계대전사 제39부 아이히만 #05 (9:43)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CZrVI5qHfOk

 

 

             2차세계대전사 제40부 - 마틴 보르만 (46:23)

                          http://www.youtube.com/watch?v=q453Zb6VTsU&feature=player_detailpage

 

             2차 세계대전사 제42부 리벤트롭 외교장관 (45:31)

                           http://www.youtube.com/watch?v=akZ6g3OffJ8&feature=player_embedded

 

             2차 세계대전사 제44부 재판관 프라이슬러 (46:04)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Xe4LCQTgc4o

 

             2차 세계대전사 제45부 -카이텔 (34:41)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i7w0h7LHZKo

 

             2차 세계대전사 제47부 히틀러 프로필 : 사령관 (46:15)

                         http://www.youtube.com/watch?v=1eD8OJHnsLc&feature=player_detailpage

 

             2차 세계대전사 제48부 만슈타인 (42:04)

                          http://www.youtube.com/watch?v=Qc7HKavDpU8&feature=player_detailpage

 

             2차 세계대전사 제49부 - 파울루스 (41:31)

                          http://www.youtube.com/watch?v=8gzxuEFQYGw&feature=player_detailpage

 

             2차 세계대전사 제50부 - 우데트 (43:48)

                         http://www.youtube.com/watch?v=09KeqdNhxUI&feature=player_detailpage

 

             2차 세계대전사 제52부 카나리스 (41:48)

                          http://www.youtube.com/watch?v=k0ZJS2-BMoA&feature=player_detailpage

 

             2차 세계대전사 제54부 - 프로필 사령관 (46:15)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AfSaQQoh7FU

 

             2차 세계대전사 제60부 대서양 해전 : 역습 (48:17)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zgiyeGZzGhk

 

             2차 세계대전사 제61부 - 샤른호르스트의 비밀 (45:07)

                         http://www.youtube.com/watch?v=BElNuFEs1Xs&feature=player_detailpage

 

         2차 세계대전사 제64부 그들만의 전쟁. 적과의 동행 (47:34)

                         http://www.youtube.com/watch?v=N9vuz5IOLks&feature=player_detailpage

 

         2차 세계대전사 제65부 그들만의 전쟁. 루즈벨트의 분노 
           (48:06)

                       ttp://www.youtube.com/watch?v=Are6Lmi1zbI&feature=player_detailpage 



2003년,

“당신이 죽기 전에...” 시리즈의 원조로서

수많은 아류작을 만들어 낸 영국 BBC 방송의

 

죽기 전에

방문하고 싶은 장소

1위로 선정된 그랜드 캐년은 

 

한해 방문객이

약 5백만명에 육박하는

명실공히 미국을 대표하는 국립공원입니다.

  

그런데

그랜드 캐년을

방문하는 사람 가운데

  

단 1마일이라도

Rim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사람은

전체 방문객의 약 1% 미만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당일이든, 1박 2일이든 간에

콜로라도 강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사람은

전체 방문객의 0.1%에 불과합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이유는

그만큼 어려운 난코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랜드 캐년을

종주하는 길에는

약 네 가지의 코스가 있습니다.

 

 먼저,

싸우스 종주 코스라고 불리워지는데

싸우스 카이밥 츠레일(South Kaibab Trail)로 내려가서

브라잍 앤젤 츠레일(Bright Angel Trail)로 올라오는 코스입니다.

  

이 코스는

전체 길이가 약 16.5 마일이며

팬텀랜치(Phantom Ranch)까지 다녀올 경우 약 17 마일입니다.

 

 다음으로 Rim to Rim 이라고 하는

싸우스 림에서 출발하여 North Rim으로 가거나

혹은 노쓰림에서 출발하여 South Rim으로 오는 것인데

 

 이 코스는

출발지와 도착지에 따라서

전체 길이가 약 21마일에서 24마일 정도됩니다.

 

 그 다음으로

어려운 코스가 있는데

노쓰림에서 출발하여 콜로라도 강까지 갔다가

다시 North Rim으로 올라오는 것인데 약 28마일의 거리입니다.

 

 

마지막으로

Rim to Rim to Rim 이라고 하는

 

싸우스림에서 노쓰림까지 갔다가

다시 싸우스림으로 돌아오는(혹은 그 반대로) 왕복종주인데

체력의 한계를 시험해 볼 수 있는 최고의 코스입니다.

 

어느 코스이든 간에

그랜드 캐년을 종주하는 것은

죽기 전에 꼭 한 번 해보아야 할 activity이며

 

그랜드 캐년을 종주하고 나면

그 자체가 생애 최고의 체험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성취감과 자신감으로 인해 인생의 남은 날이 즐거워질 것입니다.

 

11110636_1.jpg

싸우스 림을 종주할 경우

대부분의 경우는 싸우스 카이밥 츠레일로 내려가서

브라잍 앤젤 츠레일(Bright Angel Trail)로 올라옵니다.

 

그 이유는

South Kaubab Trail의 경우는

도중에서 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곳이 없지만

 

Bright Angel Trail의 경우,

츠레일 도중에서 인디언 가든을 비롯한

두 세군데서 식수를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1110636_2.jpg

South Kaibab Trail의 초입입니다.

 

저 길로 약 3-4시간을 내려가면

그랜드 캐년의 콜로라도 강을 볼 수 있습니다.


11110636_3.jpg

우와 포인트(Ooh Aah Point)에서

시더 릿지(Cedar Ridge) 가는 길입니다.


11110636_4.jpg

Desert View 방향에서

찬란한 아침해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11110636_5.jpg

림(Rim)에 아침 빛이 비췬 모습...


11110636_6.jpg

시더 릿지(Cedar Ridge) 부근입니다.

 

trailhead(7,260ft/2,213m) 에서 이곳까지는

약 1.5마일(2.4km)이며 해발은 5,760ft(1,756m)입니다.


11110636_7.jpg

사슴이 아침을 먹으러 나왔군요.


11110636_8.jpg

아침 빛을 받아서 빛나는

그랜드 캐년의 협곡속으로 하이커들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11110636_9.jpg


11110636_10.jpg

황금빛에 빛나는

그랜드 캐년의 모습입니다.

 

콜로라도 강으로 가려면

지그재그의 저 길을 내려가야 합니다.


11110636_11.jpg

해뜰 무렵에

그랜드 캐년을 내려가서

아름다운 일출을 바라보는 기쁨은

정말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1110636_12.jpg

장엄한 그랜드 캐년앞에 서있는

어느 하이커의 모습입니다(오른쪽 아래)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아마도 그의 얼굴에는 장엄한

그랜드 캐년에 대한 경외감이 서려 있지 않을까요?


11110636_13.jpg


11110636_14.jpg

이른 아침,

팬텀 랜치로 향하는 나귀의 행렬입니다.

 

나귀가 지나갈 때는,

나귀가 사람을 비켜가는 것이 아니라

나귀가 지나갈 수 있도록 하이커들이 비켜서야 합니다.


11110636_15.jpg

계속해서 그랜드 캐년의

협곡 아래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왼쪽에서

3분의 1지점에 보이는 봉우리가 시더 릿지입니다.


11110636_16.jpg

Skeleton Point 부근입니다.

이곳에서부터 가파른 길을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그럼 지금까지의 길은...

네, 모두 예고편에 불과한 길이죠.


11110636_17.jpg

스켈레톤 포인트 부근의

가파른 내리막 길이 시작됩니다.


11110636_18.jpg

얼마 전에 지나갔던 나귀 행렬이

벌써 길 저 아래 부분까지 내려갔네요.


11110636_19.jpg

현재의 위치가

South Kaibab Trailhead와

팬텀 랜치의 가운데쯤 되는 길입니다.


11110636_20.jpg

앞쪽에 사람이 보이는 곳이

톤토 츠레일(Tonto Trail) 정션부근입니다.

 

trailhead에서부터

Tonto Trail JCT까지는

4,4마일(약 7.1km)이며 이곳은 해발 4,000ft(1,219m)입니다.


11110636_21.jpg

콜로라도 강으로 가는 길이

왼쪽으로 길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11110636_22.jpg

츠레일 위에서

콜로라도 강을 내려다 본 모습입니다.

 

왼쪽에 보이는 은색 다리는

이름 그대로 Silver Bridge 이며

 

오른쪽 위쪽 숲이 있는 곳이

Bright Angel Creek과 캠프그라운드입니다.


11110636_23.jpg


11110636_24.jpg

절벽 가장자리에서

강 아래를 내려다 보면

아찔한 현기증이 저절로 일어납니다.


11110636_25.jpg

저 멀리 하이커들이

콜로라도 강을 향해 내려가고 있습니다.


11110636_26.jpg

 

오른쪽에 보이는 다리는

Black Bridge, 혹은 Kaibab Suspension Bridge 라고 합니다.


11110636_27.jpg

관광객을 태운

한 무리의 나귀가

팬텀 랜치에서부터 올라옵니다.


11110636_28.jpg

나귀를 탄 관광객들이

그랜드 캐년의 웅장한 모습을 감상하고 있네요.


11110636_29.jpg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는 센스있는 아줌씨...


11110636_30.jpg

그랜드 캐년엘

수십 번 왔다 할지라도

 

콜로라도 강까지

하이킹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그랜드 캐년을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11110636_31.jpg

콜로라도 강이 눈앞에 보이지만

아직도 강까지 가려면 30분은 족히 걸어야 합니다.


11110636_32.jpg

왼쪽에 보이는 길은

South Kaibab Trail이 아니라 River Trail입니다.

 

River Trail로 가면

Black Bridge를 건너지 않고

곧장 Indian Garden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11110959_33.jpg

하지만 우리는

River Traiil로 질러가지 않고

우직하게 팬텀 랜치까지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콜로라도 강물이 붉은색이라고 말했나요?

  

지금 보니

콜로라도 강물이

강건너편에 보이는 나무와 같이

완전 그린색인데...

 

스페인의 콘키스타도레스가

그랜드 캐년에 도착했을 무렵엔 우기였거나

 

아니면 비가 온 후라

상류의 흘탕물이 뒤섞여서

콜로라도 강이 붉게 보였을 것입니다.

 

 

보이는 다리는 Black Bridge입니다.


11110959_34.jpg

Black Bridge는

Black Suspension, 혹은

Kaibab Suspension Bridge 라고도 하는데

 

1928년에 최종 완공되었으며

전체 길이는 440ft(약 134m)입니다.


11110959_35.jpg

검정 다리를 지나

팬텀 랜치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11110959_36.jpg

드디어

브라잍 엔젤 캠프그라운드에 도착했습니다.

 

츠레일헤드에서 이곳까지

약 6.5마일(10.3km)의 거리입니다.

 

오! 겁 없는 사슴 한 마리가 우리를 반겨줍니다.


11110959_37.jpg

보이는 크릭은

Bright Angel Creek입니다.

물이 너무 차가워서 1분 이상 발을 담글 수가 없었죠.

 

아니 1분은 고사하고

20초가 지나자 발목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아픔에

물속에서 발을 뺄 수 밖에 없었답니다.

 

그러다가 다시 물속에 발을 담그고,

다시 발을 뺐다가... 그러는 사이에 피로가 쫙 풀렸죠.

 

 

아래 사진은 팬텀 랜치에서...


11111000_38.jpg

 

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마음을 열어주는 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세미티의 봄날에 피는 꽃  (0) 2014.05.17
세계문화유산 경주 양동마을  (0) 2014.05.04
매화꽃 피는 봄  (0) 2014.04.08
봄향기 가득실은 봄열차  (0) 2014.03.31
야생화 시즌이 시작됐다  (0) 2014.03.26

??????????? ???????? ? ????? ?? ??????? ????????? ????????????,????????? ??????? & ???? - ?? ?????? ?? ?????,???????? ? ?????

 <

 영광의 불꽃 최송연 태초부터 약속되어지신 분, 약속대로 성육신 하시어 몸으로 그 약속 성취하시네 양발 양손에 대못 머리에 가시관 허리에 날카로운 창 메마른 입술 '다 이루었다' 선포하시었네 삼 일 삼 야, 어둡고 긴 죽음의 터널을 지나 당신은 그렇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찬란한 부활의 아침 억겁으로 엉킨 죄의 쇠사슬 끊어내는 승리의 노래 죽었던 영혼 다시 살리시네 주여, 당신의 그 핏빛 사랑 영광의 불꽃 되어 영원토록 피어나소서 내 가슴 속에 !!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처럼/최송연  (10) 2014.06.03
내 마음속의 별빛  (2) 2014.05.18
한 사명자의 고백  (2) 2014.04.16
내 영혼 옥토 되게 하소서  (0) 2014.04.16
당신의 연가(戀歌)  (2) 2014.04.13

★ 예수와 만났던 마리아, 그 세 여인 - 지미라즈키(폴란드, 1843-1902)


    수많은 그림들 가운데 종교와 관련한 그림을 감상하는 느낌은, 일반 그림들과는 또 다른 감동을 줍니다. 대부분의 화가들이 성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신비하고 장엄하며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대부분의 성화도 그러하며, 독자들이 상상하는 성화에 대한 선입견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소개할 헨드릭 헥터 지미라즈키(Henryk Hector Siemiradzki, 폴란드, 1843-1902)의 아래 그림은 기독교와 관련한 다른 성화들처럼 신비하거나 성스러운 분위기의 그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신격화하거나 미화하여 그린 그런 종류의 성화가 절대 아닙니다.

     인간 예수의 일상을 묘사한 종교화

   즉 우리가 쉽게 접하는 예수의 죽음이나 부활, 탄생과 같은 신비한 그림도 아닙니다. 이적이나 병고침, 비유에 관한 이야기들처럼, 많이 알려진 내용의 일반적인 그런 작품도 아닙니다. 단지 인간 예수로서 살아가는 삶의 하루 가운데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오늘 감상할 지미라즈키의 그림은 우리에게도 익숙하지 않을 것입니다. 일반적인 미술사에도 등장하지 않을 만큼, 그에 대한 소개나 설명도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마리아와 예수
"에 대한 베르메르와 지미라즈키의 두 그림을 비교, 감상한 기사를 접했던 독자들에게는 다소 익숙할 것입니다. 또한 지미라즈키는 폴란드에서는 예수의 일상을 담은 그의 그림뿐만 아니라, 성경의 역사를 그린 종교화와 풍경화, 초상화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지미라즈키의 초상 ⓒ Don Kurtz

   그림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지미라즈키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아래 세 그림의 배경이 되는 성경책의 내용을 덧붙여 놓았습니다. 지미라즈키의 그림과 글은
Wikipedia와 Olga's Gallery, Art Renewal Center, 아름다운 미술관을 참고하였으며, 영문은 번역, 정리한 것입니다. 함께 읽고 감상하면서 평안을 얻을 수 있길 바랍니다.
   

   고전주의 화가, 지미라즈키

   오늘의 작가 지미라즈키는 특별히 고대 그레꼬 로마 양식의 그림을 그렸던 화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1843년에 우크라이나 카르코프(Kharkov) 근처의  페케네지(Pechenegi)라는 작은 마을에서 군의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시절과 청소년기를 러시아, 카키프(Kharkiv)에서 보냈으며, 고등학교에서 그림공부를 시작했으며, 1864년 카키프대학 자연과학과를 졸업할 때까지 그림공부를 계속했습니다. 그 후부터 과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1870년까지 페터즈(Saint-Peters)시에 있는 순수예술(Fine Arts)대학에서 그림을 공부했습니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학문적인 고전주의(classicism)를 고수하면서 어렵게 일하며 공부를 마쳤습니다. 그 후 1871년까지 뮌헨과 로마에서 유학하였으며, 이때부터 작품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는 폴란드의 국립박물관과 모스크바의 국립역사박물관에서 일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작품으로, 모스크바 성당(Cathedral of Christ the Saviour)에서 작업했을 때 남긴 프레스코(fresco, 갓 바른 회벽 위에 수채로 그리는 방법) 화법의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파리와 로마에서도 전시회도 가졌으며, 판매된 그림값을 국가에 기부하는 애국자였습니다. 그의 대부분의 그림들은, 그의 고향에 있는 박물관(Juliusz Słowacki theatre)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1902년에 스트잘코보(Strzalkowo)에서 눈을 감았으며, 이 때 바르샤바(Warsaw)에 매장되었다가, 나중에 국가에 의해 그의 고향인 카르코프로 옮겨졌습니다.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용자 삽입 이미지

▲ 그리스도와 사마리아 여인(Christ and the Samaritan Woman), 1890. Oil on canvas. The Lvov Picture Gallery, Lvov ⓒ Siemiradzki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요 4 : 5-26)

사용자 삽입 이미지

▲ 그리스도와 사마리아 여인 세부그림(Christ and the Samaritan Woman, Detail), 1890, Oil on canvas, The Lvov Picture Gallery, Lvov, Ukraine ⓒ Siemiradzki


   이 그림의 배경이 되는 위 성경내용의 저자는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예수가 사랑했던 제자 사도요한입니다. 기록 연대는 대략 주후 80-90년대로 추정하며, 간결한 언어로 심오한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푸른빛 채색으로 일상을 강조

   위 그림은 요한이 기술한 에피소드를 지미라즈키가 상상하여 그린 삽화같은 작품입니다. 오늘 감상하는 성화 네 점은 예수의 흔한 일상들을 담백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세 여인과 만났던 장소와 그 때의 정취를 매우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묘사한 그림입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갈릴리로 가던 길에,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가고, 예수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쉬다가 '수가'라는 여인을 발견합니다. 당시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말도 나누지 않는 풍습이 있었으므로, 예수가 물을 좀 달라고 하였더니 여인은 깜짝 놀랍니다. 예수가 너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줄 수 있다는 신학적인 말을 건네자, 수가라는 여인은 그 말을 믿고 마을로 돌아갑니다.

   이 짧은 얘기의 한 장면을 요한은 저술하였고, 그 이야기를 읽은 지미라즈키는 상상하여 한 순간의 그림으로 그려냈던 것입니다. 마치 찍어 놓은 오래된 사진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그림 속의 주인공들도 매일의 일상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을 보여주며 정겨운 표정입니다.

   위 그림을 보면, 큰 우물 주변을 아주 오래된 아름드리 큰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 그늘아래 얘기를 나누는 두 주인공의 모습을 큰 나뭇잎 사이로 반사되는 엷고 약한 빛과 푸른빛 채색으로 부드럽게 표현하여 평화로운 분위기를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화가가 옆에서 바로보는 듯한 낮은 시각으로 처리하여, 독자가 그림 속에라도 들어가 옆에 같이 앉아 비밀스런 이야기를 같이 엿듣고 있는 듯, 편안한 느낌을 줍니다. 직사광이 아닌 그늘 아래로 스며드는 반사광을 진하지 않은 푸른빛 색조로만 채색하여 전체적인 느낌을 통일하였으며, 특별하지 않은 일상을 강조하였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그리스도와 죄인, 막달라인 마리아와의 첫 만남(Christ and Sinner, The First Meeting of Christ and Mary Magdalene), 1873, Oil on canvas,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 Siemiradzki


     병고침을 받은 막달라인 마리아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누가복음 8 : 1-3)

사용자 삽입 이미지

▲ 그리스도와 죄인, 막달라인 마리아와의 첫 만남 세부그림(Christ and Sinner, The First Meeting of Christ and Mary Magdalene, detail), 1873, Oil on canvas,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 Siemiradzki


   이 그림의 배경을 기술한 저자, 역시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누가입니다. 의사출신이었으며, 사도바울의 동역자로서 사도행전도 기술한 사람입니다. 저작 연대는 주후 61년에서 63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은색 계열로 통일하여 차분한 일상을 강조

   예수를 만났거나 따랐던 여인들 가운데 성경에 나오는 마리아란 이름은 총 세명이 나옵니다. 첫 째는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할 때, 예수의 발에 향료(향수)를 바르고 그녀의 머리로 닦아 말려주었던 죄인, 마리아가 있습니다. 둘 째는 나사로와 마르다의 형제로서, 예수를 집으로 초대해 죽었던 남매 나사로를 살려냈던 마리아입이며, 맨 아래의 그림이 바로 그 여인입니다.

   셋 째는 막달라라는 마을에 사는 귀신들린 마리아로, 예수가 귀신을 쫓아 그 병을 고쳐주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맺은 인연으로 아래에 있는 그림처럼, 예수를 집으로 직접 초대하기도 하였으며, 훗날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마지막으로 무덤에 장사될 때 그 옆을 떠나지 않고고 지켰던 여인이기도 합니다.

   바로 위 두 그림이 그렇게 첫 만남을 갖는 이야기 가운데 한 순간을 포착하여 화폭에 담아낸 그림입니다. 예수를 따르던 열두 제자들도 보이고, 마리아와 함께한 여러 명의 여인들도 보입니다. 기적을 일으킨 신비한 광경으로 보이지 않으며, 그림 속의 인물들도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일상으로 보입니다.

   우선 화가는 둘레가 제법 큰 기둥으로 받혀진 건물 지붕의 처마와 아름드리의 오래된 나무를 뒷 배경으로 배치하였습니다. 그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비치는 빛 조각만을 모아 명암의 미세한 묘사에 사용함으로써 차분한 일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맨 위 첫 두 그림들과 같이 위 두 그림에서도, 화가는 부드럽고 약한 빛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치 무대장치를 통하여 은회색 빛을 연출한 것처럼, 매우 담담한 느낌을 주었고, 두 여인을 제외하면 등장인물들의 의상을 흰색 계열로 통일하여 기분좋은 일상을 표현하였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y), 1886. Oil on canvas.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 Siemiradzki


     마르다의 초대로 담소나누는 막다라 마리아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에게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으로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것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0 : 38 - 42)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y), 1886. Oil on canvas.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 Siemiradzki


   이 막다라인 마리아와의 인연은 깊은 믿음과 신뢰 속에서 시작됩니다. 예수와 거리가 먼 동네에 살고 있었음에도, 마리아는 애써 예수를 찾아갔고, 그렇게 모신 예수 역시 무덤에 이미 장사했던 나사로 형제를 살려줌으로 기적같이 맺어집니다.

     어두운 명암으로 편안한 일상을 강조 

   이런 인연은 바로 이 두 그림에서처럼, 두 자매가 종종 예수를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만남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도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종종 들러 편안한 마음으로 쉬어가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맨 위 그림에서 우물가의 수가라는 사마리아 여인이나 바로 위 막달라 마리아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전체적으로 모두 참 정겹게 느껴집니다. 두 여인은 물론이거니와 예수의 표정과 모습도 어디 하나 불편한 곳 없이 편안해 보입니다.

   특히 이야기에 심취해 있는 예수의 손동작이나 의상이 무척 자유로워보입니다. 발 아래 바짝 다가 앉은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과 자태에도 반가움과 겸손함이 베어있으며, 평소에도 정갈한 마음으로 서로 경청하며 진지하게 대화도 나눴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늘로 드리워진 어두운 빛의 음영이 눈을 편안하게 하며 낮은 명암이 무척 부드럽습니다. 또 은은한 은회색빛 채색으로 통일하여 전체적인 분위기를 평안하게 강조하였습니다.

   오하려 다소 가라앉은 듯 차분한 일상입니다. 평소에 보는 각도와 시각을 기준으로 독자가 보기에도 거부감없는 일상으로 표현하였으며, 여백을 남겨둔 여유로운 구성으로 일상의 자연스러운 정취를 잘 자아낸 작품입니다.
 

     고전주의 화풍으로 예수의 일상의 평화로움 강조

   이상에서 감상한 바와 같이, 그의 그림에는 신념처럼 고수해온, 이성과 통일성을 중시하는 고전주의 색채가 짙게 베어있습니다. 그 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세 그림이 모두 통일된 사실성을 보여준 것처럼, 고대 로마 형식에서 볼 수 있는 정형화된 통일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첫 째, 빛의 명암을 들 수 있는데, 그늘을 통해 일관되게 보여주는 어둡고 낮은 명암이 그렇습니다. 세 그림 모두에서 차분한 조명으로 편안한 일상을 강조합니다.

   둘 째, 채색을 통일하였는데, 화폭 전체에 은푸른빛이나 은회색의 밝은 색채를 사용하였습니다. 이렇게 통일함으로써 차분하고 평범한 일상을 강조하였습니다.

   셋 째, 전체적인 구성을 비슷하게 통일하였습니다. 세 그림 모두 뒷 배경으로 아름드리 고목나무와 큰 집이나 건물이 등장합니다. 각 주인공들은 그 앞 나무 아래 배치하여 위 세 이야기의 상황과 조건을 통일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독자는 한 날 한 시에 이루어진 세 사건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지미라즈키는 이런 일관된 표현 기법과 색채의 사용, 그리고 화폭의 구성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일상의 편안함과 평화로움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성화 -사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드의 천국 - Vigeland Sculpture Park  (0) 2013.10.11
신인상주의 미술(쇠라)  (0) 2013.05.23
인상주의 미술 (마네)  (0) 2013.05.05
가톨릭 바로크 미술  (0) 2013.04.18
8) 매너리즘 미술  (0) 2013.03.31

a1.jpg

a2.jpg

a3.jpg

a4.jpg

a5.jpg

a6.jpg

a7.jpg

a8.jpg

a9.jpg

a10.jpg

a11.jpg

a12.jpg

a13.jpg

a14.jpg

a15.jpg

a16.jpg

a17.jpg



★영생을 꿈꾸던 진시황의 사후 지하궁전!

‘세계 10대 기적의 하나’로 꼽히는 진시황릉(秦始皇陵)은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 시황제의 묘지로 중원을 통일한 진나라의 도읍지인 함양(咸陽)땅인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에서30km 떨어진 동현의  원산원(驪山園)에 자리하고 있다.  咸陽능묘 건설만 기원전 246년에서 208년까지 39년 동안 펼쳐진 이 황릉은 최대 70여 만명의 인력이 동원된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로 현재는 여산이라 불려지는 높이 76m의 야산에 무덤이 안치되어 있으리라 짐작만 될 뿐 완전한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을 통일하고 만리장성 건설에 착수한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의 무덤에 관한 문헌인 사마천의 사기 진시황본기편에 의하면 황릉은 지하궁전으로 지어졌으며 내와 강을 이룰 정도로 엄청난 양의 수은을 이용하여 무덤을 외부의 침입자로부터 보호되게끔 시설되었다고 쓰여져있다.

그 동안 추측만 했을 뿐 진시황릉은 베일에 싸여 있었으나 우물을 파던 농부의 삽끝에서 우연히 '세기의 발견' 이라 불리는 진시황릉의 병마용갱(兵馬俑坑)이 1974년 발견됨으로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진시황릉원 동쪽 담에서 1km 떨어진 곳에 진시황의사후를 지키는 친위군단인 병마도용을 수장한 갱도가 긴 어둠의 세월을 걷어내고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곧 바로 발굴이 시작되어 현재 총면적 25,380제곱미터에 달하는 4개의 갱이 발굴되었다.1호갱의 규모를 보면 길이 210m, 너비 60m, 깊이 4.5~6.5m의 총면적 12,000제곱미터로 본래 이 갱 위에는 회랑식 건축물이 있었으나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병마용갱 전체 도용은 약 6,000개로 추정되며, 도용의 크기는 1.75~1.86m, 도마용은 높이 1.5m, 길이 2m의 실물대이며, 갑옷을 입고 무장한 무사의 표정들은 마치 살아 있는 듯 하고 얼굴이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2호갱은 부분적으로 발굴되어 다량의 목제 전차와 이를 끄는 마용 356건, 기병용 116건, 안마 116건, 보병용 562건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완전 발굴된 520제곱미터의 3호갱은 지휘부로 추정되는데, 장군의 것으로 보이는 채색된 전차 1량과 갑옷 입은 보병용 64건, 마용 4건이 출토되었다. 이 밖에도 진시황릉 서북측에서 동마용과 동용이 딸린 대형 동전차가 1대 발견되었다.


 

'세계의 8대 경이' 중의 하나로 꼽히기도 하는 이 병마용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훌륭한 예술품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진시황 친위군단의 강력한 위용은 물론, 당시의 군사편제 갑옷·무기 등의 연구에도 구체적인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정작 시황제의 무덤은 아직 발굴되지 않고 있으나 아마도 4면으로 된 피라미드 형태의 흙둔덕 바로 아래 지하궁전에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 고고학자들의 연구결과를 보면 진시황릉의 구조가 하나의 거대한 지하도시로 전체 면적이 60여 만평에 달하고,  지하 4층의 거대한 궁전으로 되어 있으며,  묘역 안팎에는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을 쌓아 당시 도읍지인 장안(長安)과 같이 외성곽 길이만도 12㎞에 달한다는 발표다. 한마디로 진시황릉은'거대한 묘역도시'인 셈이다.

일반 황릉과는 달리 황후와 합장하지 않은 것도 특이하다.  황후를 합장하지 않고 진시황 단독 묘를 쓴 것은 당시‘황제권력은 한없이 높다'는‘황권지고무상관(皇權至高無上觀)'을 반영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런 진시황릉에 대한 발굴작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발굴기술로는 원형을 훼손할 가능성이 크다는 중국 정부의 판단 때문에 대대적인 발굴은 미뤄지는 형편이다. 완전한 발굴로 그 실체를 밝히기 까지는 앞으로도 몇 세대의 세월이 필요하다는 고고학자들의 이야기다.

절대권력자로서 불로장생을 꿈꾸었던 시황제는 죽음을 막을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 앞에서 내세(來世)의 영생을 믿으며 ‘삶과 죽음은 동일하다’는 ‘생사동일관(生死同一觀)’하에 천년, 만년, 영원한 제국을 이루고자 한 진시황! 사후 21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무한권력자의 생사마저 초월코자 했던 그의 힘이 그대로 느껴지는 진시황릉이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손기철 장로의 저서에 나타난 문제점
기사입력 2014-04-14 오후 7:59:00 | 최종수정 2014-04-14 19:59   


▲ 헤븐리터치미니스터리의 대표 손기철 장로(HTM 홈페이지 갈무리)


손기철 장로(헤븐리터지미니스터리 대표, 온누리교회 장로)는 그동안 주로 치유사역을 해왔다. 필자는 치유사역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오늘날도 치유의 기적은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치유사역자들이 자신의 치유 행위와 관련된 특별한 교리를 주장할 때는 조금 달라진다. 치유의 배경과 바탕이 되는 나름대로의 교리와 사상을 말한다면 그것이 과연 성경적인지, 한국교회가 받아들일 만한 것인지 성도들이 분별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손기철 대표는 최근에 자신이 갖고 있는 교리와 사상을, <치유기도>, <알고싶어요 성령님>,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 <기름부으심>, <왕의 기도>(이상 규장 출판사) 등 적잖은 저서를 통해 나타내왔고 이와 관련한 제보와 질의가 필자에게 많이 들어오고 있다.

손기철 대표의 몇 권의 책을 읽는 중에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발견되었고, 특히 예수님도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그리스도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심각한 문제점을 느꼈다. 그의 교리적 사상을 요약하자면, (1) 영·혼·육을 분리하는 이원론 (2) ‘외부로부터 임하는 성령’(그는 이것을 ‘성령체험’이라고 설명한다)에 대한 비성경적인 주장 (3) 신사도운동의 임파테이션과 유사한 기름부음 (4) 신사도운동의 신비주의적인 집회 (5) 하나님나라에 대한 왜곡과 불균형적인 이해 등이다. 먼저 손 대표의 사상의 문제점을 좀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한국교회 주요 교단이 이단으로 규정한 지방교회·귀신파·다락방의 이원론적 인간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영에는 하나님이 거하고 육에는 사탄(죄)이 거한다는 이원론

인간의 구성요소에 따른 신학적인 견해에는 이분법과 삼분법이 있다. 물론 필자는 교단의 차이에 따른 다양한 신학적인 견해를 존중한다. 이분법이든 삼분법이든 그것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인간을 영과 혼과 육의 세 부분 또는 세 장소로 분리시키는 이원론적인 견해는 조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즉 살아있는 전인적인 사람을 영과 혼과 육의 장소적인 개념으로 분리시켜, 영에는 성령 하나님이 거하고 육에는 사탄 또는 죄가 거한다고 가르치거나, 혼과 육은 성령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거나, 영은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혼과 육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지방교회, 베뢰아, 구원파, 다락방의 주장을 살펴보자.

(지방교회의 주장)
“죄는 사단의 체현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체현이다. 이 두 체현들이 우리 안에 있다.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영 안에 있고, 사단의 체현인 죄는 우리 육신 안에 있다.”(위트니스 리, 세부분의 사람의 생명이 되시는 삼일하나님, 73쪽)

“우리는 우리 존재에 세부분이 있음을 알고 있다. 당신은 사단이 그의 거처를 당신의 몸, 즉 당신의 육체 속에 만들었다는 것을 아는가? 그리고 당신은 주님께서 당신의 영을 그분의 거처로 삼으셨다는 것을 아는가?”(위트니스 리, 왕국, 218쪽)
  
사단은 우리 몸 안으로 들어왔으며, 우리 몸으로부터 우리 혼에 대해 통제를 행사하고 있다. 이같이 사단은 밖에서부터 안으로 역사한다. 주님은 반대방향으로 즉 안에서부터 밖으로 역사하신다. 어느날 주님은 우리 존재의 중심이요 축인 우리 영 안에 들어오셔서 그것을 그분의 거처로 삼으셨다.”(위트니스 리, 왕국, 217쪽)

(베뢰아의 주장)
“우리의 심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졌기에 하나님의 처소가 될 수 있지만 육체는 하나님의 처소가 될 수 없습니다.” (김기동, 마귀론, 하 154쪽)

귀신은 사람의 영혼 속에는 들어오지 못하지만 육체 안에는 들어올 수 있습니다.”(김기동 마귀론 하 63쪽)

(구원파의 주장)
(1) 영혼의 구원: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영혼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육신의 죄성은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2) 구원받은 사람도 죄를 짓는 이유: 사단은 공중권세를 가진 자이며 인간육체를 통해 역사합니다.
(3) 구원받은 사람이 범하는 죄의 유형 첫째는 부지 중에 짓는 죄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육신이 아직 죄성 가운데 있기에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올라오는 죄입니다 (생명의말씀 선교회 홈페이지, 이요한, 대한예수교복음침례회)

(다락방의 주장)
(1) 영이신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요 1:14).
(2) 그러므로 그분은 죄가 없고 그 영은 하나님이십니다(고전 15:45).
(3)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4) 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가진 분입니다(마 16:16~19) - 영은 하나님이시고 몸만 사람의 몸을 입고 계신 분이 예수님이다.” (복음편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아예 오신 것이다. 우리가 실패하는 것은 육이고, 우리의 마음이지 하나님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신다” (류광수, 현장복음, 2과 - 새로운 생명 (3) 성령의 내주란 무엇인가?).

헬라철학적인 이원론자들은 이 세상의 근원을 영(선)과 물질(악)의 대결구도로 분리하며, 이 세상을 하나님과 사탄의 두 세력으로 양분하려고 한다. 즉 세상의 악, 질병, 사고나 불행은 모두 사탄으로부터 온다고 간주하며, 육체는 악한 것으로 간주하고 죄가 거하는 좌소로 간주하였다. 그러한 헬라철학은 초대교회 영지주의 이단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인이라고 할 때에는, 우리의 육체만이 죄인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인적인 인격이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육은 그 자체만으로 악하거나 악의 좌소가 되지 않는다. 예수님이 죄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육체에 죄가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며, 인간 자체가 죄인이라는 뜻이다. 성경에는 ‘육체’라는 단어는 대부분 전인적이며 총체적인 인간 자신을 뜻하였고, 영이신 하나님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표현된다. 성경은 선악의 문제에서 육체와 영의 구별을 하지 않는다. 육만 더러운 것이 아니라 영도 더러운 것이며 전인적인 인간이 곧 더러운 것이다. 다시 말하여 육체에 사탄이 거하며, 죄가 있다고 하거나, 영은 죄가 없고 이미 구원을 받았으며, 영에 하나님이 거한다는 주장은 성경적이지 못하다. 우리의 죄는 전인적인 마음에 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살전 5:23)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7:11)

또한 성경은 육체에 사단이 거한다고 말하지 않으며 예수의 생명이 우리 육체에 나타난다고 말한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4:11)

또 육체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과 혼도 죄를 짓는다.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이니 자기의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soul)을 보전하느니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spirit)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 16:17-18)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네페쉬)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시 41:4)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spirit)을 감찰하시느니라” (잠 16:2)

마찬가지로 육체가 죄악되고 더러운 것이 아니라, 육체도 영과 함께 전인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있다. 이러한 성경적인 증거는 얼마든지 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63:1)

2) 손기철 대표의 이원론

손기철 대표는 구원파의 주장과 같이 영은 이미 구원을 받았으며, 혼과 육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고 주장하며, 또 지방교회나 베뢰아와 같이 우리의 영 안에 성령이 거하며, 육과 혼에 죄의 세력과 악한 영들이 있다고 분리시킨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고, 성령체험을 하기 위해 모든 잘못된 것을 회개했으며, 갈망함으로 지금 구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독대하여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구할 차례입니다.
“주님, 제가 이 시간에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시는 체험을 하기 원합니다. 비록 내 영은 구원받았고, 내 영 안에는 이미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만 내 혼과 육에 찾아주시는 성령체험 없이는 일상에서 그리고 모든 삶의 모든 부분에서 주의 자녀로서 주의 뜻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간절히 사모하오니 지금 이 시간에 임하시옵소서”(알고싶어요 성령님, 89쪽).

“성령님이 빛으로 사랑으로 영광으로 임하시면 하나님의 성전된 우리 육신이 반응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빛이 임하실 때 우리의 육신을 붙들고 있던 악한 영들이 떠나가기 때문에 보기에 아름답지 못한 현상들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알고싶어요 성령님, 90쪽).

“그렇지만 우리는 죄 가운데 태어났고,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죄사함을 받은 존재입니다. 우리의 영은 새롭게 되었지만, 우리의 혼과 육은 여전히 죄의 세력에 노출되어 있고 자신의 상처와 욕심으로 죄를 짓게 됩니다. 이때부터 악한 영은 우리 자신이 지은 죄와 상처에 대해 본격적으로 시험하게 됩니다”(알고싶어요 성령님, 128-129쪽).
  
악한 영들은 그리스도의 영이 계신 우리의 영에는 결코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여전히 상처가 있고 쓴뿌리가 있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삶을 사는 한, 죄의 세력은 우리의 육신을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기 위해 늘 우리 주위를 돌며 틈을 노립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유혹이나 두려움에 묶이거나 거짓말이나 참소에 넘어갈 때에, 그 죄를 타고 들어와 우리의 혼과 육을 사로잡고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들은 우리가 우리 영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함을 받아 삶의 태도와 행동을 바꾸고 악한 영을 쫓아내는 비밀을 깨닫게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 합니다”(알고싶어요 성령님, 132쪽).

“우리가 중생할 때 우리는 영적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요 3:6). 구원 받은 후, 비록 우리의 혼과 육은 여전히 죄의 세력 가운데 놓여 있다 해도, 우리의 영 안에는 2천년 전 육신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영 안에 계신 바로 그 하나님의 영이 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내 영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의식하고, 그분의 말씀을 통해 자기 자신과 세상을 보는 것이 임재의식입니다. 끊임없는 하나님의 임재의식 가운데 살아가는 훈련이 깊어지면 우리가 일상에서 그분께 예배하고 그분과 친밀함을 나누는 것이 가능해 집니다”(알고싶어요 성령님, 182쪽).


성경에서 바울은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못한 사람을 대조시키면서, “육신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 성경에서 ‘육체’라는 표현은 고깃덩어리의 부분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지 못한 인간 자체’를 말함으로서 ‘성령 하나님’과 대조한 것이다.

"육체의 소욕(인간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하나님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

즉 본문은 인간의 육체와 영을 대조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가진 인간과 ‘영’이신 성령하나님을 대조하는 것이다. 또한 ‘영’(프뉴마)이란 인간의 내적인 부분으로서 신적 실재와 접촉하는 직접성과 관련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성령을 가리킨다. 앞서 말하였듯이, 바울이 말한 ‘육신을 좇는 소욕’의 개념은 사람을 육과 영으로 분리하고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와 보호를 좇는 삶’과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구별한다. 바울은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함을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고 표현한다. 다시 말하여, 바울이 "영에 있다"고 하는 것은 영과 육을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거듭남’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다시 말하자면, ‘육신에 있는 자’는 거듭나지 못한 자를 뜻한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3:6-7)

즉 바울이 말한 ‘육체의 소욕’이란 영혼을 제외한 고깃덩어리만의 육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에 반대되는 총체적인 인간의 소욕을 말한다. 영이 거듭난다는 것은 없었던 영을 갖게 된 것을 뜻하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그 영을 강퍅하게 하셨다"(신 2:30)는 것처럼, 우리가 불신자였을 때에 그 ‘영’이 없거나 죽은 것이 아니라, 그 영이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졌음을 뜻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하나님과 단절된 영은 죽은 것이며, 그것이 곧 ‘육신에 있는 자’로 표현된다.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했을 때에, 그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영적인 죽음도 함께 포함되어졌다. 바울이 허물과 죄로 죽었으나(엡 2:1)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가 되었다(롬 6:11)고 말하였을 때에, 영과 육을 구별하고 분리하자는 뜻이 아니며, 전인적으로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고후 5:17). 물론 인간은 죽어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다. 야고보서 2장 26절과 같이, "영혼없는 몸은 사실상 죽은 시체"이다.

또한 손기철 대표는 성령이 내주하는 거듭난 성도들에게도 영에는 성령이, 육과 혼에는 악령이 동시에 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러한 주장은 비성경적이다. 손기철 대표에게는 성령이 성도들에게 내주하는 이유가 개인에 대한 구원의 보증과 인도하심보다는 오히려 귀신을 쫓고 권능을 행하기 위한 신비적인 것만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 4:4)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요일 5:18)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약 4:7)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살후 3:3)

3) 성령세례와 성령체험에 대한 손기철 대표의 문제점

“개혁복음주의에서는 우리가 중생할 때(혹은 물세례를 받을 때) 성령의 내주하심을 성령세례로 생각합니다. 즉 물세례를 받을 때 성령세례도 임한다는 입장입니다. 한편 오순절 은사주의에서는 우리가 중생할 때에 이루어지는 성령의 내주하심과 성령세례를 다른 것으로 보며(우리가 물세례를 받을 때 성령의 내주하심과 성령세례가 동일하게 임할 수도 있지만) 대개 물세례 이후 별도의 경험으로 성령세례가 임한다고 봅니다. 저는 성령의 내주하심을 성령세례로, 오순절 은사주의에서 말하는 성령세례를 성령체험이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성령체험(성령의 임하심, 성령강림)은 외부로부터의 성령의 임하심으로 그 혼과 육이 성령님께 사로 잡히는 체험을 말합니다. 오순절 이후부터는 성령세례와 성령체험이 동시에 임할 수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성령세례 이후 진정한 성령체험을 하게 됩니다” (알고싶어요 성령님, 51-52쪽).

우선 손기철 대표의 신학적 오류부터 지적하여야 할 것 같다. 손기철 대표가 말하는 개혁복음주의는 아마 개혁주의와 복음주의를 총칭하는 것 같다. 어쨌든 손기철 대표의 신학적인 무지와 달리, 개혁주의나 복음주의에서는 물세례를 받을 때에 성령세례도 함께 받는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개혁주의나 복음주의는 성령세례를 단회적인 성령내주로 보며, 성령충만은 이미 내주한 성령의 Full-fill 상태로 보며 반복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또 오순절 은사주의에 대해서도 손기철 대표는 잘못된 오류를 주장하고 있는데, 오순절 계열의 교회와 개혁주의, 복음주의가 모두 동일하게 물세례와 성령세례는 다르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오순절 계열에서는 성령내주와 성령세례를 동일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 손기철 대표는 개혁주의나 복음주의도 사용하지 않고, 오순절도 사용하지 않는 ‘성령체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성령체험이 ‘외부로부터 임하는 성령’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거듭난 사람에게 성령이 내주하여 있으니 성령충만할 수 있으며 성령체험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내부로 임하는 성령이 따로 있고 외부로 임하는 성령이 따로 있는가?

4) 성령체험에 대한 이상한 주장

손기철 대표는 계속 성령체험을 성령내주와 다른 것으로 구별하여, 기름부음은 위로부터 성령이 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성령내주와 그리스도의 나타남을 다른 사건으로 구별하는데, 그렇다면 성령 내주로는 그리스도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인가?

그 성령님은 지금 우리가 기도할 때에도 위로부터 임하십니다. 그때 우리의 혼과 육이 영의 통치함을 받는 것을 비로소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지금도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와 함께 또 온 우주에 편재하시는 분입니다. 특별히 그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셔서 우리를 강력하게 사로 잡으실 때에 우리는 혼적 의식을 내려 놓게 됩니다. 그 때 이미 우리 심령 안에 계신 성령님으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 우리의 혼과 육이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함을 받게 되고 비로소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알고싶어요 성령님, 35-36쪽)

“그러나 동일한 성령님이시지만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것과 우리가 매일의 삶 가운데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의 영이 거듭나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지만 내주해 계시는 성령님이 전부가 아니라, 성령님이 위로부터 임하셔서 우리의 혼과 육을 사로잡은 주권적인 역사가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알고 싶어요 성령님, 48)

우리의 혼과 육이 온전히 사로 잡히는 체험적 과정을 통해 우리 안에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이 생깁니다. 성령체험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의 영에 기초한 새롭게 변화된 자기 의식을 경험할 때 우리는 자기 죄성이 이미 없어졌으며, 우리 자신의 영 안에(자신의 혼과 육이 아니라) 새로운 하나님의 성품이 내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알고싶어요 성령님, 58쪽)


장로교인인 손기철 대표의 주장은 개혁주의나 복음주의적인 입장도 아니고 그렇다고 오순절교회와 같은 주장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성령님이 위로부터 임하는 것이 성령체험이라고 주장하면서 성령내주와 그리스도의 나타남을 다른 것으로 구별하기 때문이다.

또 손기철 대표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들의 삶 가운데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함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온전하지 못한 가르침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성령내주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분명히 손기철 대표의 성령체험에 대한 주장과 이원론은 정통신학적인 내용이 아니다. 그렇다면 손기철 대표의 사상과 다른 정통신학을 가르치는 개혁주의와 복음주의에서는 온전하지 못한 가르침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를 받지 못한다는 것인가? 말을 바꾸면, 정통신학이 말하는 성령내주로는 그리스도가 나타날 수 없고 그리스도의 영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인가? 손 대표의 주장은 결과적으로는 지방교회, 또는 베뢰아나 다락방의 주장과 유사하다는 것이 문제이다.

“예를 들면 성령님이 임하실 때 쓰러지거나 몸을 떨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기침하거나 우는 일들을 보며 성령님이 역사하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그런 현상은 성령님이 우리의 혼과 육에 임하셨기 때문에 일어나며 또는 그 결과로 우리 육신 안에 있던 악한 영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알고 싶어요 성령님, 45쪽)

Q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삶 가운데 그리스도의 영이 인도함을 받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A 지나온 역사를 볼 때 그것은 성령에 대한 편견적 이해와 성령사역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그리고 온전하지 못한 가르침 때문입니다. 그것이 결국 말씀과 성령을 분리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알고싶어요 성령님, 63쪽)

“흔히 자신 안에 성령님이 이미 계시기 때문에 더 이상 위로부터 임하시는 성령체험이 필요없으며,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나타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 자신의 영 안에 성령님이 계신다고 하더라도 아직 온전히 구원받지 못한 우리의 혼과 육의 헌신과 노력으로 그 성령님을 알 수 없고, 그 분이 나타나게 할 수도 없으며, 나타나시는 것을 알지도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알고싶어요 성령님, 58쪽)

“성령체험은 누구나 추구해야 합니다. 칭의와 성화는 우리의 회개와 거듭남으로, 우리 안에 계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완성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적으로 성화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령체험이 필요합니다. 이 성령체험은 중생 또는 물세례와 동시에 또 이후에 이차적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알고싶어요 성령님, 73쪽)


놀랍게도 손기철 대표는 칭의와 성화는 우리의 회개와 거듭남으로 이미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체험이 있어야만 실제적인 성화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것을 2차적으로 체험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령내주만으로는 아무리 헌신하고 노력해도 성령님을 알수도 없고 나타나게 할 수도 없고 나타나도 알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손 대표는 성령내주만 알고 있는 성도들은 도저히 성령을 알 수 없고 자신이 주장하는 위로부터의 성령을 체험해야만 성령을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정통신학적인 성령론으로는 실제적인 성화의 삶을 살 수 없다는 이상한 주장을 말하는 셈이다. 아래 글을 보면 손기철 대표는 분명히 성령세례와 성령체험을 다르다고 말하며, 사람들이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성령체험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왜 성령체험을 구하지 않을까요? 첫 번째로는 성령체험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성령세례와 성령체험을 혼동하여 성령체험을 하지 못했는데도 이미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령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삶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세 번쩨로 자신의 혼적의지로 통제하지 못하는 영적인 것에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알고싶어요 성령님, 76-77쪽)

심지어 손기철 대표는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웨슬레의 회심 사건을 잘못 인용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많은 신앙선배들의 삶을 보더라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존 웨슬레의 경우 그는 예수님을 영접했고 선교사로서 각별한 수고와 헌신을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었을 때 그에게 성령님이 함께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성령님이 내주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행위와 노력으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려고 했을 때 그는 아무 열매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올더스케이트의 모라비안교도 집회에서 뜨겁게 성령을 체험함으로 그의 혼과 육이 영의 통치함을 받을 때부터 그에게 기름 부으심이 임했고 놀라운 성령의 열매가 맞히기 시작했습니다” (알고싶어요 성령님, 35쪽)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손기철 대표는 사실을 잘못 파악하고 있다. 존 웨슬레는 올더 스케이트 집회를 참가하여 사회자가 마틴 루터의 서문에서 롬 1:14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을 읽을 때에 회심을 한 것이며, 웨슬레는 손기철 대표가 말하는 혼과 육이 영의 통치함을 받는 이상한 성령체험을 하거나 특히 기름부음을 받은 것이 아니다.

   
▲ 집회 중인 손기철 장로(HTM 홈페이지 갈무리)

5) 손기철 대표의 기름부음(크리스마, anointing)

손기철 대표는 기름부음이라는 용어도 성경과 전혀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손기철 대표가 말하는 기름부음은 소위 성령체험으로서 신사도운동이 주장하는 기름부음과 같은 것이다.

“또한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안수를 통해서도 성령체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물세례는 받았지만,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했을 때 성령체험을 하게 된 예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행8:14-17, 행19:5-6 인용) (알고 싶어요 성령님, 53쪽)

안수를 통하여 성령을 체험한다는 이러한 주장은 신사도운동의 임파테이션과 동일한 주장이다. 성경에서는 안수라는 행위나 의식을 통하여 성령체험을 한 것이 아니라, 안수라는 기도를 할 때 성령을 받게 된 것이다. 손기철 대표는 행 8:12-17을 인용하여 안수를 통하여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행 8:15에서는 “성령받기를 기도하니”라고 기록되어, 기도를 통하여 성령을 받은 것이며, 특히 행 8:18에서 시몬이라는 자가 안수를 통해서 성령을 받는 줄로 착각하여 돈을 주고 그 능력을 사려고 하다가 행 8:20에서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라는 꾸중을 듣게 된다. 손기철 대표는 하나님의 선물을 안수를 통해 받았다고 생각하는 시몬과 같다. 행 19:5-6에서도 “그 전에는 성령을 받은 적이 없었다”는 구절로 볼 때에 그 사건은 성령체험이 아니라, 성령의 내주로 보아야 하며, 안수라는 의식을 통하여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안수를 할 때 성령이 강림하신 것이다.

특히 ‘기름부음’에 대해서는 신약성경에서 몇구절이 기록되어 있다. 그 신약구절은 기름부음이 손기철 대표의 주장과 달리 “성령내주”라는 것을 말하여 준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크리스마, anointing)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요일 2:20).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구약에서 ‘기름부음’은 왕과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특별히 하나님이 임명하시거나 하나님의 선택하시는 제한된 사람에게 해당되었다. 그러나 신약에서 ‘기름부음’은 곧 성령을 받은 것을 뜻한다. 본문에서 요일 2:20은 “거룩하신 자에게서···받고” 요일 2:27은 “주께 받은 바”라고 언급한다. 자칭 사도나 목사의 임파테이션을 통하여 성령 혹은 성령의 능력을 전이시킬 수 있다는 신사도운동의 주장은 비성경적이며, 신약에서 ‘기름부음’은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거듭남의 상태를 뜻한다. 즉 요한일서에서 사도요한은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성유식과 같은 인위적인 형식이나 의식으로 성령을 받는다고 주장하였을 때,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기름 부음이 곧 ‘성령의 내주’라는 것을 말한다. 특히 고후 1:21~22는 기름부음이 곧 성령의 내주를 뜻한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고후 1:21-22)

성령이나 능력은 안수 자체를 통하여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임하시는 것이다.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이 과연 안수를 통하여 오셨는가? 성령의 은사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성령께서 그의 뜻대로 각 지체에게 나누어주는 선물이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고전 12:11)

손기철 대표는 방언이 기름부으심을 흐르게 하는 유익한 기도라고 말하는데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주장이다.

“늘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도록 간구하기 위해 무시로 방언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방언은 영의 기도이며 성령을 통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방언이 아니라 내 뱃속 깊은 곳에서 흘러 나오는 생수를 따라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자신을 비우고 기름부으심이 흐르게 하는 매우 유익한 기도입니다”(기름부으심, 177)

6) 임파테이션(Impartation)

   
▲ 기도 중인 손기철 장로(HTM 홈페이지 갈무리)

손기철 대표는 성령 혹은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안수를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다는 신사도운동과 동일한 임파테이션을 주장한다. 이러한 임파테이션에 대해서 1949년 당시 미국 오순절 교단측에서도 늦은비운동(윌리엄 브래넘)을 이단으로 정죄한 적이 있다.

“나눔은 다른 말로 기름부으심이 나타나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게 하는 기도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이 나의 육신을 뚫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과거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쓴 뿌리나 상한 감정들이 들통 나지 않도록, 자신의 낮은 자존심이나 거절감 그리소 수치심을 들키지 않으려고 부인했고, 나의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수많은 방어기제들로 자신을 보호해 왔습니다. 성경에는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고후10:4)이라고 표현합니다”(기름부으심, 183)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하심으로 오랫동안 친밀함을 누린 사람은 그분의 기름부으심이 육신을 통해서 흘러 나가는 것과 흘러 들어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기름부으심, 184쪽).

“그러나 수없는 기도사역 과정을 통해서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언제부터인가 나는 자연스럽게 내 안에서 능력이 나감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손의 안수를 통한 접촉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나중에는 직접적인 신체 접촉 없이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기름부으심의 흐름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을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기름부으심, 164-165).


‘안수’(lay hand upon)라는 의식이 어떤 효과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안수는 일종의 의식이며 기도일 뿐이며, 기도에 의하여 하나님이 그 능력을 주시는 것이다.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마 19:1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행 13:3)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웠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행 28:8)

구약에서 희생제물이 되는 짐승에게 안수를 하므로서 죄를 전가시킨다. 그러나 과연 안수라는 의식 자체가 죄를 이동시키는 능력이 있어서, 사람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시켰을까? 사람의 죄는 물질이 아니며 이동되거나 전가되지 않는다. 죄사함은 죄성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죄책을 묻지 않는 것이다. 즉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속죄’를 뜻하는 ‘카파르’와 '푸림‘이라는 단어는 “죄를 덮는다”는 뜻이다. 그 짐승은 죄가 실제로 이동하여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대신 죽음으로서 죄책을 면제 받은 것을 의미한다. 신약에서도 그 사상이 나타나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 5:14)

안수를 통하여 실제적으로 죄의 전가가 가능하다면, 지금도 짐승에게 안수를 하여 희생제사를 드리면 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손기철 대표는 이와 같이 신사도운동의 비성경적인 임파테이션을 주장하고 있다. 신사도운동이 임파테이션을 성경적인 근거로 주장하는 것은 구절은 다음과 같다.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롬 1:11)

신사도운동에서는 바울이 신령한 영적 은사를 성도들에게 나누어준다고 주장한다. 이 동사의 단어가 영어로 impart이기 때문에 Impartation이라는 용어가 나타났다. 과연 사도바울은 신령한 은사를 성도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고 하였는가? 정확한 해석을 위해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11절에서 말한 ‘어떤 신령한 은사’(some spiritual gift)라는 표현에 대해서 다른 번역성경을 살펴보자.

[공동번역] 내가 여러분을 애타게 만나보려는 것은 여러분과 함께 영적인 축복을 나눔으로써 여러분에게 힘을 북돋아주려는 것입니다.

[현대인의성경] 이처럼 내가 여러분을 간절히 만나려고 하는 것은 영적인 축복을 나눔으로써 여러분의 믿음을 강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은사’라는 단어를 영적은사로만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공동번역과 현대인의성경은 “축복”으로 번역하였으며, KJV와 NIV영어성경은 모두 "Spiritual gift"로 번역하였다. 성경에서 “은사”(카리스마)라는 단어는 언제나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언급되는 방언이나 예언과 같은 영적 은사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영적, 정신적, 물질적인 “선물, 은혜”를 모두 포괄한다. 같은 로마서를 살펴보면,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갖고 간다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bressing, 율로기아)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롬 15:29).

7) 기름부음에서 나타난 위험한 기독론

손기철 대표의 기름부음에는 매우 위험한 기독론적 주장들이 내포돼 있다. 손기철 대표는 “예수님이 기름부으심을 받은 후 그리스도라고 불렸습니다”는 이상한 주장을 한다.

“이 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에게 이런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과 기름부으심의 차이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신앙생활에서 구원 후 매우 중요한 것이 ‘기름부으심’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기름부으심을 받은 후 ‘그리스도’라고 불렸습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아’ 혹은 ‘기름부으심을 받은 자’를 뜻합니다. 예수님이 기름부으심을 받은 자라면 우리도 당연히 그 기름부으심을 받은 자에게 속해야 합니다. 즉 우리에게도 동일한 기름부으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었을 때 비로소 공생애 사역을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기름부으심이 임할 때라야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할 수 있게 됩니다”(기름부으심, 손기철, 2008년, 규장, 8쪽)

손기철 대표는 예수님이 기름부으심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동일한 기름부으심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와 같은 주장은 매우 위험한 주장으로 “사람은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지방교회와 같은 신화사상으로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더욱이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는 내주”와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기름부음, 성령체험”에 대한 이상한 차이점을 예수님의 경우에 비교할 때에 그는 위험한 지방교회의 주장과 연결되어진다.

메시아(헬라어: 멧시아스. 히브리어: 마쉬아흐)라는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번역하면 “그리스도”가 된다. 구약에서는 주로 왕, 선지자, 제사장같은 높은 직분을 가진 자가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불렸으며,(왕상19:16, 시133:2, 출30:22-30) 그 말의 의미는 신성한 지위를 부여하고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약속된 “그 메시아”(호 크리스토, the Christ)를 기다려왔다.

다시 말하여, “메시아”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 선지자, 제사장(출 29:29)을 의미하며, 그래서 그 세 직분을 “예수님의 삼중직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직분을 모두 겸한 사람은 예수님 외에 누구도 없었다. 그래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크다는 세례요한도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한다.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요1:20)

성경은 오직 예수만이 구약에서 예언된 “그 그리스도”(the Christ)이시며,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구약에서 약속된 그 메시아라는 것을 명백하게 말해주고 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몇몇 이단들은 기름부음(그리스도)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모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2000년 전에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하여도 믿지 말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마24:23-26. 참고: 막13:21)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마24:5)

기독교의 교회는 예수를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베드로와 동일한 신앙고백 위에 세워졌다.

“당신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마16:16)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후부터 공생애를 시작하셨으며, 우리는 그때부터 그분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단지 물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물 위로 올라오실 때 성령세례를 받았고, 그 결과로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이고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이며, 그 뜻은 ‘기름부으심을 받은 자’입니다” (기름부으심, 18쪽)

“결국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기름부으심을 받으신 후에 권능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가르치심에 권세가 있고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선포하시고, 권능으로 기사와 표적을 일으키신 것도 바로 기름부으심이 임했기 때문입니다.”(기름부으심, 19쪽)


손기철 대표는 예수님이 물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그 결과 기름부으심을 받은 후에 권능과 표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며,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하는 매우 위험한 주장을 한다. 더욱이 우리도 그와 같은 기름부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8) 신사도운동의 신비주의 현상

손기철 대표는 누가 보아도 신사도운동을 추구하는 신비주의 성향을 갖었다. 그가 말하는 근거는 주관적이며 개인적인 체험일 뿐으로 억지로 성경적인 것처럼 만들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체험은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와 이단들에서도 볼 수 있는 ‘쿤들리니’ 현상이며, 아래와 같은 손기철 대표의 주장은 명백한 신사도운동의 집회로 볼 수 있는데, 이미 합동은 2011년에 손기철 대표의 집회를 교류금지와 집회참석금지로 규정하였고, 고신은 신사도운동에 대해서 2007년 지국히 불건전한 사상과 집회참석금지로, 합신은 2009년 신사도운동을 이단성과 참여금지로 규정하였으며, 통합교단은 2012년 직통계시, 쓰러짐과 입신등의 집회를 극단적 신비주의로 규정한 바 있으며, 2012년 미주한인장로교연합도 손기철 대표를 집회참석금자로 규정하였다.

“저는 침묵 가운데 깊은 곳으로 나아갈 때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설 만큼 두려움을 주는 악한 영들이 저를 둘러싸고 공격하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또 기도하지 못하도록 동굴 안에서 뱀이 똬리를 틀고 저를 노려보는 장면을 환상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영적세계로 나아갈 때는 누구나 이런 종류의 동굴을 통과하게 됩니다.”(알고싶어요 성령님, 134-135쪽)

“흔히 안수기도를 받을 때나 집회에 참석해서 찬양과 경배를 드리거나 말씀을 듣는 도중에,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온 몸에 진동이 일어나고 떨리는 현상, 쓰러지거나 쓰러지지 않았지만 몸이 경직되는 현상,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저절로 음직여지는 현상(특별히 허리가 반복적으로 꺾이고 목과 팔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현상 등),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고 싶다거나 감각이 무뎌지는 현상, 눈꺼풀이 심하게 떨리는 현상 등입니다. 그 외에도 호흡이 가빠지거나, 몸이 무겁게 느껴지고 뭔가 내리누르는 느낌을 받거나, 온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거나, 마치 큰 형광등을 켜 놓은 것처럼 머리 주위가 따뜻하게 느껴지거나, 눈 앞에 형형색색의 빛의 움직임을 보거나, 심한 기침을 하거나, 수천볼트의 전기가 지나가는 것처럼 팔이 진동하고 감전된 것처럼 느끼거나, 손바닥이 뜨거워지거나,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하품을 계속 하거나,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괴로워하거나, 드물지만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이 웃기도 합니다” (알고싶어요 성령님, 142쪽)

“또한 육신이나 마음의 치유를 동시에 경험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 손을 잡고 정원을 거닐거나, 예수님의 품 안에 안겨있거나,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기도 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방언을 하게 되거나, 환상을 통해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 가보는 경험을 하거나, 자신의 의지나 생각과 상관없는 말을 선포하기도 합니다”(알고싶어요 성령님, 143쪽)

“성령체험의 역사를 통해서 다양한 현상들을 보게 되는데 그 중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이 ‘쓰러지는 현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찬양하다가 쓰러지기도 하고, 집회 후 기도시간에 안수기도를 받다가 쓰러지기도 하고, 자신도 미처 안식하지 못하는 상황 가운데 쓰러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현상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부정적으로 인식되거나 오해받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이렇게 쓰러지는 현상을 가르켜 ‘혼절하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의 역사로 쓰러지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해 보지 못한 데서 나온 매우 부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알고싶어요 성령님, 149쪽)

“제가 인도하는 말씀치유집회의 현장도 예외는 아닙니다. 말씀을 전하는 도중이나 또는 말씀을 마치고 기도하거나 찬양하는 시간에 한편에서는 기뻐 웃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악한 영의 나타남으로 여기저기 쓰러지고 울부짖고 기침하고 비명을 지르는 둥 소란스러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어이쿠 여기 잘못 왔구나’, ‘이상한 데 왔구나’라고 생각하고 놀라 도망치다시피 자리를 떠납니다. 그것은 자신 안에 있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성령님이 임하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 일은 성령님이 일으키신 일이 아니라 성령님이 임하시자 각종 더러운 죄악, 질병과 악한 영이 떠나가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우리 내면의 어둠 가운데 비춰졌을 때 우리 안에 숨어있거나 눌러 놓았던 슬픔, 우울, 염려, 걱정, 불안, 두려움, 비통, 원망, 거절 등 모든 상처와 악한 영들이 드러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 일들은 도리어 정말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알고싶어요 성령님, 162-163쪽)


이단들은 항상 성경, 신학, 이성보다 개인의 체험을 먼저 내세운다. 이와 같이 기적과 표적의 체험적 현상을 위주로 한다면 이러한 현상은 타종교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특히 쓰러짐의 현상에 대해서, 하루에 백번을 쓰러져도 구원을 받지 못하며,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뿐이다. 성경은 표적과 기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다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4).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살후 2:9-10).

따라서 온누리교회 장로이자 헤븐리터지 손기철 대표는 자신의 체험과 표적에 대해 그것이 과연 성령의 역사인지 검증과 재검증을 하는 심정으로 되돌아 봐야 한다. 그는 관절염 환자를 5명을 치료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하는데, 과연 손기철 대표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가? 자신의 느낌인가?

   
▲ 출판 기념 사인회에서 사인하는 손기철 장로(HTM 홈페이지 갈무리)

9) 손기철 대표의 선포기도, 대적기도

손 대표의 선포기도·대적기도를 살펴보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 정리부터 하고자 한다.

하나님나라는 원래 통치적인 개념으로서, 궁극적이고 장래적인 개념뿐 아니라 현재적이며 내면적인 개념까지 포함한다. 정통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나라는 궁극적인 하나님나라와 함께 현재적인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균형과 조화를 강조한다. 손기철 대표는 책에서 Already but not yet 이라고 써놓고 Already 만 읽고 있는 것 같으며 두 가지를 착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2000년 전 예수님과 함께 도래한 하나님나라”를 “손기철 대표가 선포한 하나님나라”와 동일시하고 있다. 둘째, “예수님과 함께 도래한 하나님나라”를 “이미 성취된 하나님나라”로 착각을 하고 있다. 손기철 대표는 자신의 집회에서 “하나님나라가 임하였기 때문에 아프고 고통받는 사람이 치유되어야 한다”라고 설교를 한다. 손기철 대표의 주장대로라면 이미 하나님나라가 임하였기 때문에 사람이 죽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다. 또한 그가 말하는 소위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병도 고통도 가난도 불행도 없어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바로 신사도운동의 대적기도와 선포기도이다.

성경적인 예를 들자면, 예수님이 직접 파송하신 칠십문도들이 돌아와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예수님께 고한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눅10:17)

그 때에 예수님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눅 10:20)

다시 말하여 귀신을 쫓는 권세를 받은 것은 기뻐할 일이 아니며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며 그것이 본질적인 것이 된다. 우리는 귀신과 악한 영에 대적하고 싸워야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귀신과 마귀를 쫓아낸 것은 하나님나라를 전파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으며 그것이 곧 하나님나라의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성경에서 영적싸움은 구원을 위한 성화적인 과정을 뜻하며, 그 방법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슴으로 무장하여 성령의 인도와 보호로 미혹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하라는 구절은 있지만, 대적기도와 선포기도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기도”라는 것은 그 대상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대적, 싸움 등은 우리의 삶에서 사탄, 마귀의 미혹에 빠지지 않는 것을 말하며,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초능력과 신비한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회중을 방해하는 모기떼들은 모두 사라질지어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회중들에게서 모기가 싫어하는 물질이 분비될지어다!”
그런 다음 밤늦도록 집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로 이어진 집회에서 어제 모기에 물린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30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 중에 단 한명의 자매가 손을 들었습니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왕의 기도, 17쪽)


손기철 대표는 자신의 책에서 선포기도로 모기가 사라졌다고 주장하는데, 그 자매를 물었던 한 마리의 모기는 예수의 이름으로 내려진 선포기도보다 더 강한 모기였던 것 같다.

신비주의란 “자신이 원할 때마다 하나님이 기적을 만들어 주신다는 것을 실제로 믿는 신앙”을 뜻한다. 이러한 주장은 자신을 신격화시키려는 의도로 신사도운동 인사들이 사용하는 수법과 일치한다. 피터와그너는 자신이 독일에서 광우병이 사라지라고 선포기도한 후에 광우병이 없어졌다고 주장하며 (피터 와그너, 도미니온, 170-171쪽), 하이디베이커는 자신이 미국의 산불을 꺼지라고 선포를 한 후에 여름에 눈보라가 내려서 산불이 꺼졌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예언이 반만 맞으면 훌륭한 것이며 대부분은 틀린다고 고백한 바 있다.

손기철 대표 역시 대적기도가 어떤 문제에 대해서 명령하고 선포하는 것으로 예수님이 하셨던 그 기도라고 정의하며 왕의 기도라고 말한다.

“나는 기도를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소개합니다.
첫 번째 기도의 종류는 ‘하나님께 구하고 드리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는 기도, 우리의 마음을 드리기도 하고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기도 하지만, 사실 이 기도의 내용은 대부분 우리의 소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기도의 종류는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기도’입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그리스도와 친밀함을 누리기 위해서 믿음의 눈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의 음성을 듣고 말씀하시는 것을 감동으로 받는 기도가 이에 해당합니다. ‘구하고 드리는 기도’에 비해 좀더 영적이고 깊은 기도이며 꼭 필요한 기도이지요.

세번째 기도의 종류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기도’입니다. 나는 이 기도를 왕의 기도라고 표현합니다. 이 기도의 목적이 왕이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왕의 기도는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문제를 향해 명령하거나 믿음으로 선포하는 기도로서 예수님이 하셨던 바로 그 기도방법을 따라 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에서 누려야할 축복입니다”.(왕의 기도, 24쪽)

당신이 육신의 사고체제를 벗고 영의 사고체제를 입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신다면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첫째 사실과 현상으로 꾸짖으십시오
“이 더러운 암종아, 파쇄될지어다”
둘째 원하는대로 선포하십시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암종아 사라진 깨끗한 장기가 될지어다”(치유기도, 118쪽)

어떤 장소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였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함을 선포하는 손기철 대표는 하나님인가? 물론 하나님의 나라는 통치적인 개념과 함께 현재적이고 내면적이며 진행적인 개념도 포함된다. 그렇다고 하여 손기철 대표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수는 없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도래하였다. 더욱이 손기철 대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왕의 기도의 비밀을 알려 주셨다고 주장한다.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곳을 주의 보혈로 덮노라”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였음을 선포하노라”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였음을 선포하노라”
“주의 말씀이 선포될 때에 주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선포하노라”

이것은 내가 집회를 인도하기 시작할 때마다 전형적으로 사용하는 기도문입니다. 이런 기도를 처음 듣는 사람들은 내가 이런 기도부터 시작하는 것을 의아하게 여깁니다. 듣도 보도 못한 기도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바로 왕의 기도를 드리는 기본 전제입니다. 나 역시 오랫동안 성경말씀대로 기도해 왔건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고, 나 자신을 정죄하기도 했고, 하나님께서 무심하게도 나에게 관심이 없다고 확신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왕의 기도의 비밀을 알려 주시자마자 나는 곧바로 이 선포를 시작했습니다(왕의 기도, 88쪽)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것도 마귀를 심판할 권한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동일하게 적용해 볼 수 있는 사건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시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마귀의 일을 멸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게 됩니다.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일 뿐만 아니라 마귀를 대적하여 이길 수 있고 이 땅에서 주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알고싶어요 성령님, 119쪽)

“지금 우리는 영적으로 어떤 위치에 서 있습니까? 좌표를 분명히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위치는 마귀의 일을 멸한 지점입니다.
(요일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따라서 마귀는 우리가 우리의 생각으로 허용하는 만큼만 우리에게 역사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마귀의 일을 멸한 위치에 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마귀를 두려워하고 떨 뿐 마귀의 일을 멸한 위치에서 그들을 쫓아내고 그들을 지배하고 통제할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름부으심, 224쪽)


손기철 대표의 주장은 다락방의 기도응답권, 사탄결박권과 천사동원권과 동일한 주장이다. 다락방의 류광수 목사는 사탄결박권과 천사동원권은 내가 하는 기도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주님이 직접 명령하는 선포라고 주장한 바 있다.

(다락방, 현장복음멧세지 - 예수의 이름)
(3)여호와의 이름(요17:11-12)
악령을 좇아낼 때,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악한 영아 물러가라!’고 명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더 많이 깨달은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내게 있는 주 예수께서 네게 명령하시니, 나가라!”고 한다. 이게 더 정확한 것이다.

(현장복음 19과 - 그리스도의 부활)
6. 부활의 결과
(3)고전4:45-50 하나님- 예수님은 그 영이 하나님이시다.
(4)요1:14 사람- 예수님의 그 육이 사람이시다.
▶이 위대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사람에게 오셨다. 이 예수 이름을 부르면 바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고, 여러분이 예수 이름을 부를때, 사탄의 권세는 깨어진다.
어마어마한 역사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노니!”라는 이 말이 보통 말이 아니다. 안되는 것이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 되시는 분이 직접 명하노니! 라는 말이다. 그래서 역사가 막 일어나는 것이다.

다락방의 사탄결박권과 천사동원권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직접 명령한다는 주장으로 소위 양태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직접 사탄과 천사에게 직접 명령을 한다는 것이다. 손기철 대표는 성령내주로는 부족하고, 위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아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혼과 육에 나타나야만 권능을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손기철 대표는 또한 예수도 세례를 받을 때에 기름부으심을 받았으므로 우리도 동일한 기름부으심을 받으면 동일한 권능을 행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또 손기철 대표는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사탄의 일을 멸하는 위치에 있다고 말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손기철 대표가 말하는 왕의 기도는 양태론적인 다락방과 동일한 주장으로서 손기철 대표에게도 양태론이 발견된다.

10) 양태론적 삼위일체

손기철 대표가 삼위일체를 용어적으로 해석할 때에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양태론적인 내용은 그의 책 도처에서 발견된다. 즉 그는 용어적으로는 삼위일체를 인정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많은 문제가 발견된다. 손기철 대표는 구약의 하나님의 영광을 성령님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하며, 또 성령님이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예수그리스도로 임하셨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예수가 부활하신 이후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우리에게 오셨다고 주장하며 심지어 성령이 우리의 아버지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성령님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모세가 지은 성막에 임하셨고, 다윗이 지은 장막에 나타나셨으며, 솔로몬의 성전에 계셨고,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예수그리스도로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성령으로 우리에게 임하고 계십니다.”(왕의 기도, 99쪽)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십니다. 바로 하나님이 이 땅에 현시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알고싶어요 성령님, 38-39)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자신의 형상을 지으시고자 하는 것을 ‘하나님의 형상의식’이라고 부르러 합니다. 우리는 본래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삶이 무엇인지 성육신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삶을 사신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분은 지금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님으로 우리에게 임하셔서 우리도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알고싶어요 성령님, 186-187쪽)

“성령님은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자녀가 다른 어떤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자신의 사랑 전부를 당신에게 쏟아 부으시기를 원하고, 세상 무엇보다도 당신과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분이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알고싶어요 성령님, 191쪽)

“예수님은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진리의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 영어로 카운슬러, 우리 말로 풀면 “도와주고 보호하고 변호하는 은혜를 주시는 자”입니다. 예수께서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요16:7)고 하신 것이 바로 이 뜻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다음, 우리 가운데 또다른 보혜사 성령님으로 오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영광을 받지 않으셨을 때에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영원히 내주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때부터입니다“(알고 싶어요 성령님, 26-27쪽)


필자가 보유하고 있는 동영상에도 손기철 대표는 명백한 양태론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하나님이시고 말씀이 예수님이시고 말씀이 성령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집회를 하고 수많은 설교를 함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느냐 믿지 않기 때문에 말씀과 성령님을 나눌 수 없습니다. 십자가와 성령님을 나눌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예수와 성령님을 나눌 수가 있습니까? 성령님은 예수그리스도이시고 성령님은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동영상)

손기철 대표가 자신의 주장과 같은 책을 볼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의 사상은 정통신학적인 내용과 다르기 때문이다. 건전하고 올바른 신학은 성경을 근거로 제시하는 것인데 반하여, 그에게 진리적인 기준은 단지 자기의 주관적인 체험일 뿐이다.

"지금까지 저는 성령에 관한 수많은 책들을 읽었습니다. 제 소견에는 성령님에 대해 알려주는 책, 성령님에 대한 잘못된 교리나 부작용을 비판하거나 바로 잡아주는 책은 많았지만, 정작 그 성령님과의 만남과 올바른 관계와 친밀한 교제 그리고 그 성령님이 인도함을 받는 삶에 대해 쓴 책은 많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신학적 이론적인 책이 아니라 말씀에 기초하여 살아계신 성령하나님과의 관계를 나눌 수 있는 실제적이고 체험적인 책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알고싶어요 성령님, 308-309쪽)

(참고서적)
치유기도 (손기철, 2010, 규장)
알고싶어요 성령님 (손기철, 2012, 규장)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 (손기철, 2009, 규장)
기름부으심(손기철, 2008, 규장)
왕의 기도(손기철, 2008, 규장)


이인규 대표
평신도이단대책협회

 

 

http://reformednews.net/

가져온 곳 : 
블로그 >영적 분별력
|
글쓴이 : 진실| 원글보기


* 하나님께서 인간을 시험하시는 목적 (존 오웬)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시는 것은 두 가지 목적 때문이다.

 


첫째,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 주시기 위하여 시험하신다.

 

...
인간은 자신 안에 있는 죄의 속임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분명하게 알지 못할 때가 많이 있다. 은혜와 부패 모두 신자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 어느 것도 신자에게 충분히 그 실재의 상태를 바로 알게 해 주지 않는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고하거나 격려하실 목적으로 넒은 의미에서 시험을 행하시는데 이로써 그는 어떤 특별한 환경에 반응하는 자신의 마음의 작용 안에서 은혜와 부패의 상태 여부에 대해 바르게 알게 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시험을 통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만을 바라보게 하신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때로는 은혜를 막으시는 방법으로 시헌 받기 전에는 자신의 힘으로 산다고 믿던 사람들이 사실은 이제까지 하나님이 자신을 붙드셨기 때문에 살아왓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고, 또 때로는 은혜를 새롭게 하시는 방법으로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을 바라보게 하신다.
어떤 상황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중요성을 잘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시험을 통해 신자는 다시 새롭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힘, 그리고 은혜를 확인 할 뿐 아니라 그것들을 더욱더 깊이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가져온 곳 : 
카페 >(안산) 회복의 교회
|
글쓴이 : 전상범|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워싱턴 D.C. The Mall의 핵심이자 미국 정치의 1번지인 국회의사당.
겉으로 보기에도 놀라운 미학적 건축구조로 세워져 있는 이 웅장한 건물 앞에 서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간역사(?) 앞에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참을 넋을 잃고 그 겉모습을 바라보다 보면... 우리의 시선이 그 건물의 정상에 있는 상(Statue)에 고정되어집니다. 멀리서보면 저게 뭘까? 꼭 로마 군인 같은 동상이 그 건물의 꼭대기에 세워져 주변의 모든 지역을 감찰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무엇일까? 궁금해 하다... 이 상의 실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Statue of Freedom

국회의사당 돔의 꼭대기에 세워져 있는 이 청동상은 로마의 군인이 아니라 '자유의 여신'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뉴욕 맨해튼으로 눈을 돌리면... 1886년 미국이 프랑스에게 선사한 Statue of Liberty가 우뚝 세워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이름도 유명한 '자유의 여신'

같은 이름의 두 여신이 정치의 로마 워싱턴 D.C.와 경제의 로마 뉴욕에 우뚝 세워져 있습니다.

특별히 국회의사당 위에 세워진 자유의 여신은 미국의 모토인 'E pluribus unum'가 세겨진 반구 위에 우뚝 서 있습니다. 미국 모토 중의 하나인 'E pluribus unum' 는 1782년 미국의 the Great Seal of the United States에도 채택되었는데, 그 뜻은  "Out of many, (is) One." or "From many, (comes) One." 곧 "다수로 부터 하나"라는 뜻을 가집니다. 이 모토는 미국 안에서 전세계 모든 민족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으로 미화되어 있지만... 사실은 전세계를 단일 정부아래 두려는 그들의 흑심도 함께 반영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반구를 떠 받치고 있는 것은 The Great Seal에 등장하는 독수리가 움켜쥐고 있는 월계수와 화살의 묶음으로, 옛 로마에서 다발로 묶은 막대기에 도끼를 붙인 것으로 집정관의 권위를 표시하는 Fasces(페시즈)입니다. 이는 힘과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힘과 권위 위에 전세계를 단일 정부 또는 통치 아래 두려는 이 시대의 로마제국 미국의 흑심을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국회 의사당 정상의 '자유의 여신'은 오른손에 칼을 왼손에는 13개의 스트라이프가 새겨진 미국이라는 방패와 승리를 상징하는 월계수를 쥐고 있습니다. 또한 독수리와 깃털 그리고 주변에는 별로 장식된 투구를 쓰고 가슴에는 US라는 뺏지로 망토를 고정한 채... 완전 무장한 한 전사의 모습으로 세워져 있습니다

다시 여러분의 시선을 맨해튼으로 돌려보십시오.
뉴욕의 여신은 워싱턴의 여신과는 조금 다르게 칼 대신 횃불(계몽을 상징한다 함), 월계수와 방패대신 돌판(이 돌판은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the date of the nation's birth (July 4, 1776)을 로마 숫자로 기록한 것임)stone tablet을 쥐고 7대양 7대륙을 상징하는 Spike 왕관을 쓴 채 우뚝 세워져 있습니다.

워싱턴 D.C. 와 뉴욕을 잇는 첫번째 connection!
두 여신... Statue of Freedom & Statue of Liberty!

두 여신 모두의 이름이 '자유'이지만...
그 자유는 결국 정치와 경제의 단일 통치 체제 수립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 땅 미국의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 워싱턴과 뉴욕에는
이런 사이좋은 두 여신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에펠탑 근처에 세워져 있는 자유의 여신 역시 서쪽을 바라보며...
뉴욕의 자유의 여신을 동경하고 있다고 하네요^^

두 여신...
주께서 눈을 열어 다시 이 두 여신을 바라봅니다.
보입니다.^^

우리의 원수!


두 여신에 대해 좀 더 알기 원하시는 분들은 아래를 클릭해 보십시오.
http://en.wikipedia.org/wiki/Statue_of_Freedom (워싱턴 여신^^)
http://en.wikipedia.org/wiki/Statue_of_Liberty (뉴욕 여신^^)



제12장
신자의 보장

하나님의 성회는 신자의 보장에 관하여 하나님의 성회 조례에 선언하였다(제 8조 1항)

신자의 보장은 그리스도와의 생생한 관계에 좌우한다는 성서적인 가르침의 견지에서(요15:6),
거룩한 삶으로의 성경의 부르심의 견지에서(히12:14, 벧전1:6),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 있는 책임이 사람에게 일부 있다고 하는 분명한 가르침의 견지에서(계22:19),
잠시 믿던 사람이 타락할 수 있다는 사실의 견지에서(눅8:13),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한번 구원받은 사람이 그 구원을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고 하는 무조건적인 보장의 입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왜 이러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는지 더욱 설명하고자 한다.

신자의 보장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주의의 극단적인 입장의 중간에 서있다. 우리는 양쪽의 가르침에서 성서적인 요소를 받아들인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특권을 올바르게강조하는 반면 알미니안주의자는 사람의 자유의지와 책임 또한 올바르게 강조한다. 그러나 이 두 입장을 적절하게 이해하려면 그것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임의에 의해서 때묻지 않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특권을 믿으며 또한 사람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믿는다.

하나님의 성회에 의해서 취해진 신자의 보장에 관한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4가지가 강조되어야 한다.

1.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다.(요3:16, 롬10:11-13, 벧후3:9)
2. 구원은 믿음으로 받으며 유지된다.(롬3:28, 갈2:20-21, 엡2:8, 빌3:9, 히10:38, 벧전1:5)
3. 계속적인 죄는 신자의 믿음에 해롭게 영향을 준다. (롬3:5-8, 고전3:1-3, 히3:12-14, 12:1, 요일1:8, 3:8)
4. 신자의 구원은 그리스도를 거부하면 상실된다.(요17:12, 딤전4:1, 5:12,15, 히6:4-6, 10:26,27,38, 벧후2:20,
    요일5:16)

1.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구원 받기로 예정되었으며, 또 다른 사람은 멸망 받도록 예정되었는가?” 그리고 “누가 택함을 받은 자인가?” 이 두가지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한 답변은 복음의 메시지가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을 향하여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명확해진다. 신약성경을 읽는 사람은 이 위대한 진리를 놓칠 수 없다.

그러나 로마서 9-11장에서 신자의 구원에 있어서 사람의 자유의지가 배제되며 택함을 받은 자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를 떠나서 완전히 그의 주권으로 행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이 있다. 예를 들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사...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내가 긍휼히 여길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9:11,13,15,16,18)
그러나 이 구절을 선택에 관하여 가르치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 볼때 사람의 의자가 선택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야곱은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선택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야곱이 무엇을 할 것인지
하나님이 미리 알고 계시다는 것에 근거한다. 이 진리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쓴 베드로의 편지에 나타나있다. 이 신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었다.(벧전1:1,2)

이 진리를 또한 롬8:29에도 나타나 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고 기록했다. 하나님은 미리 자비를 보일 조건을 정하셨다. 그리고 그의 미리 아시는 지식에 근거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를 선택하신다.(엡1:4). 이와같이 하나님은 그의 주권 안에서 구원의 계획을 제공하셨으며 이에 따라서 모든 사람은 구원 받을 수 있다. 이 계획안에서 사람의 의지가 고려된다. 구원은 누구든지 원하는 자에게 열려 있다.

2. 구원은 믿음에 의해서 받으며 유지된다.

성경은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명백히 말씀한다.(엡2:8)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한다. (합10:38, 롬1:17, 갈3:11, 히2:4) 신자의 구원은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의 행위로 말미암아 받
아들여짐과 같이 신자의 구원은 의로운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의 생활로 인하여 유지된다.
크리스찬이 되는 것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다. 이것은 강조되어야 한다. 죄인이 자기가 행한 어떤 선한 일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경우는 없다. 그는 전적으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는다.

믿음으로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대신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믿음으로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 앞에 맡기며, 그리스도를 본다. 자신에게는 아무 공로가 없을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신분을 깨닫는다.(빌3:9) 그는 믿음을 통해서 자신이 받아들여진 것을 알고, 이러한 지식은 그에게 기쁨과 평안을 준다. 그러나 신자의 상태는 그의 신분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그는 믿음 때문에 안전하게 서있다.
그의 신분은 그가 믿음으로 받아들인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다.
그는 의로운 위치에 서 있으며 그리스도의 의로 옷을 입었다.

신자의 상태 혹은 신자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로 행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성령과 협력하여 순종함으로써 얻어지는 점진적인 성화인 영적 성장과 관계가 있다.(롬6:12,13, 8:13, 골3:1-5, 벧후1:5-7) 성숙해 가는 과정 속에서
신자는 그의 승리 분만 아니라 실수를 통해서도 배워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보장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견고할 동안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믿음으로 지키심을 받기 때문이다.

그의 영적 성작은 그의 안에 역사하고 계시는 성령께 대한 순종과 주의에 따라 달라진다. 완전을 향하여 성장하는 동안에 그는 여전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여 완전한 자로 간주된다. 자신을 적응시키는 과정 속에서도 그는 안전하며 그의 구원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신자의 보장은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나 구원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오직 믿음을 통해서 보증된다. 이 보장은 신자가 그리스도에 대한 살아있는 믿음을 유지하는 한, 타락할 수도 있고 결점도 있는 신자에게 입혀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3. 계속되는 죄는 신자의 믿음에 악영향을 준다.

성경은 신자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죄를 지으며, 그가 죄를 지었을 때 그가 의뢰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요일1:8,9, 2:1) 이와는 달리 크리스찬이 죄악의 생활을 지속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즉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한 그는 습관적으로 죄를 범할 수가 없다. (요일3;8,9 여기서 헬라어 시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죄를 짓는 것은 마귀의 일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누구든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며 습관적으로 죄 짓기를 계속하지 아니한다. 그는 마귀의 자녀가 하는 식으로 죄짓는 것을 계속할 수 없다. 그 대신에 크리스찬은 계속적인 자기의 믿음에 악영향을 주는 것을 인정하고, 죄를 내려놓고 영적으로 자라야 한다.

이것은 크리스찬이 죄를 범할 수 있고 여전히 구원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많은 사람의 첫 번째 반응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염려, 교만, 시기, 쓴뿌리 등은 공통적으로 범하는 과오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죄를 범하는 신자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더욱이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죄없는 완전을 요구하신다고 주장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신분이 그 자신의 의로움에 근거한 것인가 아니면 믿음에 의해서 그에게 씌워진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 것인가? 만일에 사람이 흠없는 생활을 유지해야만 구원을 받는다면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얻은 것이 된다!
그리고 또한 사람이 흠 없어야만 하나님이 받으신다면 크리스찬의 삶은 바울이 롬8:1에서 주장한 것처럼 정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오히려 그것을 계속적으로 철저한 자기 분석과 참회를 행하며, 두려움과 정죄로 가득 차 있으며 구원 받을 수 있다는 확신과 기쁨이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롬5:9-11을 보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예비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우리는 위하여 영광에 이르는 모든 길을 제공하시기까지 사랑하신다. 이러한 확신은 그 안에서 우리로 기뻐하게 한다.)

관련된 질문으로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순간에 죄를 범한 신자에게 무슨 일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범할 수 없으며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신자는 구원을 잃게 될 것이며 영원한 파멸에 이를 것이라고 가르치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낙심되는 일인가!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안과 밖을 들락날락하면서 회전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손 안에서 안전하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그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그러나 크리스찬이 범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강조되어 말해져야 한다. 옛날의 죄를 계속해서 범할 수는 없다. 성령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신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며, 그에게는 이전 것은 지나갔으며 새것이 되었다.(고후5:17)

이와같이 이제 죄를 범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이전의 삶은 과거의 것이며, 안에 잠재된 힘이며 다스려져야 하며, 새로운 신분에 의해서 죽은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롬6:11) 이전의 삶은 과거의 것이며, 안에 잠재된 힘이며 다스려져야 하며, 새로운 신분에 의해서 죽은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롬6:11) 이전의 습관과 행실이었던 것은 이제 부자연스러우며 우리의 새로운 마음에 반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죄짓기를 계속하지 아니한다)”고 사도 요한은 말했다. 즉, 죄는 새로운 피조물에게는 낯선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이 된 새로운 피조물은 죄를 짓지 아니한다. 그러나 옛것이 잠시 우발적으로 우세하게 될 때 새 피조물은 이 부자연스러운 침입에 대항하여 싸우게 되는데 즉시 의지할 것은 그리스도이시다.

죄를 범한 신자가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면 그는 자신의 영혼이 멸망하게 되었다는 실망을 안고 돌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미쁘시고,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보혜사를 모시고 있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확신을 가지고 돌아온다. 이와같이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의 특권을 사용하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 자신의 신분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또한 신자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강조하는 것도 필연적이다. 신자는 자유의지를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계속해서 자유의지를 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 믿음을 계속 유지 하는 것은 신자의 책임이다.

또한 신자는 죄에 대하여 가벼운 자세를 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지어도 된다는 허가로 사용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롬6:1)하며 바울은 묻는다. 그 대답은 단호
하게 부정적이다. 바울은 지속적인 죄가 신자의 믿음에 악한 영향을 준다는 것과 믿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알았으며 또한 가르쳤다.

지속적인 죄는 주제넘게 하며, 고자세가 되게 하며 또한 반역의 증거이다.(민15:30,31) 번역은 의지나 믿음의 순종에 반대되는 것이다. 신자는 반드시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히12:15) 항상 주의해야 한다. 성경의 권면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고후13:5)는 것이다.
왜 이러한 경고와 우려를 하고 있는가? 이렇게 반복되는 경고들은 믿음을 잃게 되면 영원한 영혼의 파멸을 의미한다는 것을 인정할 때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신자의 구원은 그의 의로운 행동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며, 그의 의로운 행동으로 유지되는 것도 아닌 것이 사실인 반면 신자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처럼 또한 믿지 않음으로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것도 똑같이 사실이다.
죄와 불신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죄는 믿음을 위태롭게 하며, 믿음을 잃는 것은 자신의 신분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히3:12-14 은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형제들에게 불신에 대하여 경고하였는데 이 불신은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는 불신의 원인으로서 죄의 유혹을 언급하였으며,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만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할 자가 될 것이라고 상기시켰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믿음에 의해서이다. 믿음을 제거하면 거기에는 더 이상 서 있을 곳이 없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신자들에게 “삼가 혹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지 않도록”(히3:12) 훈계하는 이유이다.

4. 구원은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상실될 수 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쉽게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롬10:21을 보라. 여기서 바울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나 적용할 수 있는 원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신자가 성령의 계속적인 점검을 무시하고 예수를 그의 구세주로 모시기를 거부하는 곳에까지 이르면 그는 구원을 상실하게 된다.

잠시동안 믿다가 유혹이 올 때 배반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눅8:13)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약한 형제가 실족하는 것은 가능하다. (고전8:11) 생명책에 기록되었던 이름이 그 책에서 지워질 수 있는 것은 가능하다.(계22:19)
한 사람이 그의 구세주이신 예수를 이미 배반하였는지 판단하는 것은 항상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에 관한 판단은 전지하신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좋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의 사실은 확실할 수 있다. 즉 만일 하
나님이 탕자를 돌아오게 하시는 그의 노력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아직도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아니하셨는데도 사람들은 너무나 자주 그 사람을 삭제해 버린다.

성경은 구원을 상실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지만 성령의 탄식에 응답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소망을 끊임없이 제의하고 있다. 예수의 초청은 자격을 따지지 않는다.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말씀하실 때 이것은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이다.

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롬10:13)고 성경이 말씀하실 때도 모든 사람에 대한 것이다.







“사랑” 바다의 진주인 듯 해맑고 청아하며 붉은 산호초처럼 빛나고 새까만 청색 하늘의 별처럼 영롱하다. 생명의 젖줄을 입에 물고 힘차게 빨아대는 어린 아들을 바라보는 젊은 어머니의 그윽한 눈빛, 흐드러진 들꽃 한 송이 꺾어 함께한 소녀의 머리에 꽂아주고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감추려고 소나무 뒤로 달아나 숨는 까까머리 소년의 순수한 마음도 사랑이다.

“ 사랑” 모든 시인들의 가슴에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고운 시어( 詩語)이며, 영원히 노래해도 좋을 만큼 아름다운 언어이다. 언젠가 어느 책에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죽음의 침상에 누운 사람에게도 ‘사랑’은 필요한 것이라고…이토록 모든 인간이 갈망하는 것이 사랑이지만 그 사랑을 소유하기는 쉽지 않다는데 인간의 비극이 있는 것이 아닐까?

안타깝게도 모든 인간이 그토록 갈망하는 사랑, 그 사랑이란 것이 영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고 어쩌다 쟁취한 사랑이라고 하여도 사랑이란 상대적이기에 종국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만 주게 됨을 알 수 있다.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상처 주기 쉬운 것이 우리네 인간사이기도 하다. 가까운 예로 가장 사랑해야할 부부의 사랑이 그러하다. 너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나를 위한 사랑이기에 우리는 늘 사랑을 갈망하나 얻는 것은 사랑으로 오는 행복이 아니라 미움과 원망이 더 많은 것이다. 이것이 범죄한 인간의 사랑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사랑을 정의하기를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그렇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사랑이란 실제로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오로라’일 수도 있다. 참사랑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 아가페”적 사랑, 전적 주는 사랑이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 있다면 그것이 가장 숭고한 사랑이며, 참된 사랑이라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다. 사랑하기에 풀무불 속에 자신을 내어던진다면 그 사랑은 믿을 수 있는 사랑이란 것이다. 입술의 유희가 아닌, 사랑을 증거로 확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희생의 댓가를 지불 할 수 있을 때 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세상을 살면서 어려움과 고통의 터널을 지나갈 때 그 다가오는 어둠을 원하지 않기에 매사에 이타보다는 이기적이 되기 쉽다. 이런 인간의 심리를 바탕으로 한 때문에, 고통도 자기 자신을 위한 고통보다 타인을 위한 고통을 당해야 한다면 그 고통의 수위는 한층 더 높아질 것이다.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고난이 더욱 가중되는 것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온 인류, 처음부터 선(good)이라고는 한 가지도 없고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는 흉악한 무리의 죄악을 대신 지고 가는 고통이었다.

그 고통을 스스로 당하셨기에 예수님의 사랑은 참사랑이며 사랑 중의 사랑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분이 사랑 때문에 당하신 고난을 잠시 생각해 보면,

1) 예수님은 삼중 적 고통을 겪으셨다

1. 육신 적으로 당하는 고난
어떤 신비적인 사람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육신의 고통은 별로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믿음이 참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또 얼핏 들으면 그럴법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를 않다. 그는 완전한 신이심과 동시에 완전한 육체를 가지셨다. 따라서 육체가 찔리면 아프고 고통을 느껴야만 하도록 신경세포가 살아 있는 예수님이셨다. 만약, 찔러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는 장애인이요, 중풍에 걸린 환자의 병든 육체란 말이 되기에 말이 안 된다.

마 26장 37절을 보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하셨고, 39절에는 “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찢어지는 고통이 얼마나 무섭고 큰 것인지를 미리 다 아셨기에 주님께서 이 고통을 지나가게 해달라는 간구를 하신 것이다. 그의 고통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었던 것이다.

2. 심적으로 당하는 고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군중을 사랑하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치시고 배고플 때 광야에서 먹여주셨고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모든 필요한 것을 다 채워주셨고 가르치시며 3년간이란 긴 시간 동안 함께 생활하셨다. 그런데, 막상, 십자가를 져야 하는 절박한 때가 되니까 하나같이 모두 배신하고 버리고도망을 갔다.

a. 가롯 유다는 은 30냥에 예수님을 팔았다.
b.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 이나 부인했고
c. 다른 모든 제자가 다 도망쳤다.
사람들이 생활 중에서 아픈 사연들이 많다. 그 많은 아픔 중에서 가장 큰 아픔을 느낄 때가 언제일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버림받거나 배신당했을 때라고 한다. 한 솥에서 함께 밥을 먹던 제자들, 수제자라고 불리던 베드로, 신임하고 돈궤를 맡겼던 가룟인 유다뿐만 아니라 모두 달아날지라도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하겠나이다 하고 큰 소리로 맹세하던 제자들이 다 도망을 가버렸다. 이 사실을 보시던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 것인가? 그렇다 육신을 입은 우리 주 예수님은 배신감 때문에 극심한 심적 고통을 겪으셨던 것이다.

3) 영적으로 당하는 고난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육체의 고통도 힘이 들고 마음의 고통, 심적인 고통도 고통이다. 그런데 가장 큰 고통은 영혼의 고통이라고 본다. 하나님과 하나로 늘 함께하시던 예수님, 갑자기 하나님과 단절되는 캄캄함을 느낄 때, 그 선을 넘어 캄캄한 흑암으로 덮인 터널 속을 지나야 하는 것과 같은 시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는 영의 세계마저 막혀버렸던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성부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그만큼 인류의 죄가 무겁고 중했던 것이다.

마 27: 45-46을 함께 읽어보자. “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9시까지 계속하더니 제9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뜻이라” 했다.

그렇게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그 한몸에 짊어지신 “흉악한 죄인”으로 처형당하셔야만 했다. 따라서 성부와 영의 교통까지 끊어졌고 캄캄함을 느끼시는 처절한 고통을 당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고통은 이렇게 삼중 적 고난을 겪으셨던 것이다.

2) 사랑 중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걸어가시는 예수님이 겪고 계시는 처절한 능욕은 어둔 구름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먹구름 아래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지! 예수님께서 자신이 못 박히실 십자가를 친히 짊어지고 가셨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지!
이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에 비추어 볼 때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사실, 성경에서 자기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갈 고문 형틀과 사형 형틀을 짊어지고 갈보리로 걸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상징이요 표현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휘장이요 문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셨다. 그것도 가장 고통스럽고 참혹한 죽음을 죽으셨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자기의 외아들을 내어주셨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자기 자신을 내어주셨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예수님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다.

사랑! 오직 사랑만이 여호와께서 영원 전부터 구속언약(covenant of redemption) 안에서 행하신 모든 구원을 우리에게 공급해 준다. ´옥타비우스 윈슬로우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에 비추어볼 때만 제대로 이해된다고 했다.

그렇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것은 오직 “사랑” 때문이다. 자기가 지은 죄로 죽어 마땅한 죄인들이지만 그들이 죄악 중에서 고통당하며 처절하게 죽어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긍휼의 마음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 마음이시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고 그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가? 생각해보아야 한다. 고난주간은 경건한 모양으로 새까만 옷을 입고 금식하고 그런 외적인 나타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은 자가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죽은 위성인 별들이 찬란한 햇빛을 받았으면 그 빛을 반사하여 어두운 세상을 비추게 마련이란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삶에서 밝은 빛보다 어두운 그늘이 더 짙게 드러난다면? 이는 분명히 뭔가 잘못된 것이다.

미국의 한 대형교회 목사가 노숙인이 된 이야기가 페이스북을 비롯하여 인터넷을 크게 강타하고 있던 실화를 읽어본 적이 있다. 예레미아 스티펙이라는 목사 의 이야기다. 목사는 어느 주일 오전 자신이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될 교회 근처에서 노숙자로 변신해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하지만 교인 중에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걸어온 사람은 불과 세 명에 불과하더란다.

스티펙 목사는 교회로 향하는 교인들에게 배가 고프니 잔돈 좀 달라고 했지만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더라고 했다. 예배시간이 되어 교회에 들어간 스티펙 목사는 맨 앞자리에 앉으려 했으나 예배위원들의 저지를 받고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맨 뒷자리에 겨우 착석하게 된다. 이윽고 새로운 목사가 부임했다는 광고 시간, 맨 뒷자리의 스티펙 목사는 노숙인 차림 그대로 강단에 올라갔고 교인들은 경악 했다.

그는 곧장 마25:31-40까지를 읽어 내려갔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것을 읽고 난 스티펙 목사는 이날 오전에 겪었던 것을 말하면서 “나는 오늘 아침 교인들이 모이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교인은 아니었다. 세상에는 교인들이 많다. 하지만 제자는 부족하다. 여러분은 진정 예수의 제자입니까?” 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훌륭한 제스쳐다. 초심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어떤가?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고난주간이다. 연례 행사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지나 않은지… 표면적 겉치레와 사람의 교훈으로 가르치는 것에 만족하고 있지나 않은지…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이란 곧 그분의 사랑을 받은 그대로 나타내 보여주는 사람이 돼야 할 것이다. 수난의 주님이시여, 내 마음속에 좌정하소서, 그리하여 그 빛을 나타내소서, 영원히!!!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벧전 2: 22-24)
USA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 칼럼 글

 

 

1881년 3월 4일 무더웠던 저녁 워싱턴 D.C.
제임스 A. 가필드(James A. Garfield) 대통령의 취임 무도회를 위해
건축가 클러스(Cluss)와 슐츠(Schulze)에 의해 고 빅토리언 스타일로 새롭게 건축된 스미소니언 The Arts and Industry 박물관 건물이 개장되었다.

이곳을 방문한 당시 고위층과 부유층 인사들과 그의 부인들은 그 건물의 원형홀에 세워진 거대한 여신상의 엄위함 앞에 잠시 입을 다물지 못한다. 잠시 후 그 여신의 오른손에 쥐어져 높이 들린 횃불(Torch)에 불이 켜지자 거기에 모인 이들은 더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날 그 여신의 오른손 위 횃불을 통해 켜진 전기 빛(electric lightning)은 워싱턴 D.C. 최초의 백열등 전기 빛이었다. 그날 거기 모인 모든 이들은 그 여신의 오른손 위에 켜진 백열등 불빛을 통해 새로운 세기에 대한 어떤 무언의 예견 앞에 전율한다. 그 여신의 이름은 다름아닌 ‘The Statue of America’여신 ‘아메리카’였다.

5년 이후 이 여신 ‘아메리카’는 프랑스 조각가 Frederic Auguste Bartholdi와 에펠탑의 디자이너 Alexandre Gustave Eiffel에 의해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The Statue of Liberty)’으로 둔갑되어 1886년 10월 28일 프랑스로부터 헌정된다. 자유의 여신상 오른손 위에 높이 들린 횃불이 ‘계몽(enlightenment)'을 상징한다는데, 이는 1881년 저녁 스미소니언 박물관을 밝혔던 그 백열구 전기 빛이 ’계몽‘으로 둔갑한 것이었다. (워싱턴과 뉴욕의 실질적 커넥션)

1879년 전기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Thomas Alva Edison)이 발명한 ‘백열등(incandescent lamp)'의 발명은 우리가 알듯 미국 50만 인구의 삶의 스타일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었다.

빛 - 계몽 - 삶의 변화

The Statue of America는...
The Statue of Freedom
The Statue of Liberty의 원조였던 것이다.

이무하 형제께서 언급하셨듯... 이 여신의 기원은... 결국 마리아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이 시대의 로마 워싱턴 D.C.가 바티칸 로마와 연결되는 또 하나의 커넥션...

1969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President and Mrs. Richard Nixon)
1981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President and Mrs. Ronald Reagan)
1989년 조지 부시 대통령(President and Mrs. George Bush)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President and Mrs. Clinton)은 가필드 이후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대통령 축하연을 개최했던 역대 대통령이었습니다.(이 커넥션 또한 흥미롭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신념과 합리적 원리들에 의존함으로써 자기들에게 거짓 평안을 말한다

 

사람들이 자기 신념과 합리적 원리들에 따라 평안을 측정하는데,이것은 거짓 평안으로 결코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만 설명해봅시다. 어떤 사람이 죄로 인해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는 죄로 인해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복음에 합당한 바른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영혼 사이의 관계는 모두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봅니다. 그는 빛을 소유하고 있고, 어떤 길을 가야 할지 알고 있습니다. 또 이런 경우 과거에 자기 영혼이 어떻게 고침 받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치유하고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적용해야 할 외적 수단으로 간주하고, 그는 그곳으로 달려가 약속들을 뒤져서 문자적 표현들이 자신의 상태에 직접 부합되는 말씀들을 몇 가지 골라 냅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하나님은 이 약속을 통해 말씀하신다. 여기서 내 상처를 덮을 만한 크기의 고약을 발라야겠다고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약속의 말씀을 자신의 상태에 적용시키고 평안을 추구합니다. 이것은 또 다른 산 위에서의 모습입니다. 주님이 가까이는 계시지만 그 안에 계시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우리를 책망하실 수 있는’ ( 16:8)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지성적,이성적 영혼의 단순한 작용에 불과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생명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생식적인 생명, 감각적인 생명 그리고 이성적 또는 지성적인 생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존재들은 단지 생식만합니다. 어떤 존재들은 감각도 함께 갖고 있습니다. 또 어떤 존재들은 이 두 가지에 이성을 추가로 구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성적인 생명을 갖고 있는 존재는 이성적 원리에 합당하게 행동할 뿐만 아니라 다른 두 요소의 원리에 대해서도 합당하게 행동합니다. 즉 성장할 뿐만 아니라 감각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일들에 있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이들은 단순히 자연적이고 합리적입니다. 또 어떤 이 들은 계몽을 통해 추가된 깨달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진실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후자에 속한 사람은 전자의 요소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때로는 자연적인 사람의 원리에 따라 행동하기도 하고, 때로는 계몽된 사람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참된 영적 생명의 원리가 모든 행동의 동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항상 영적 생명의 원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행동의 열매가 반드시 이 원리의 뿌리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방금 제가 언급한 경우의 사람은 단순히 신념과 계몽의 원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고 이로 언해 첫 번째 자연적 요소가 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령은 이 모든 물줄기를 따라 흐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재발된 타락으로 인해 영혼이 받고 있는 상처와 불안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타락이 악한 행위든 아니면 미련한 행위든 결코 작은 것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 영혼이 받게 되는 상처보다 더 큰 상처는 없고, 영혼이 갖게 되는 불안 보다 더 큰 불안은 없습니다. 극도로 마음이 혼란한 상황에서 그는 이사야 55 7절의 약속을 찾아냅니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리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여기서 그는 하나님이 거듭해서 무조건 용서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또는 호세아 14 4절의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라는 말씀을 찾아 낼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자신에게 평안 하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든 안 하든, 곧 그 말씀에 생명과 권능을 불어넣으시든 안 넣으시든,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는 주 하나님이 평안 하라고 말씀하시는지 여부는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얼굴을 숨기시고 가련한 피조물이 평안을 빼앗겨 평안으로부터 멀리 달아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를 다시 다루시고 새로운 판단의 자리로 자기를 부르실 때 곧 하나님이 손으로 자기를 끌지 않으시면 발자국을 떼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때를 곧 깨닫게 될 것 입니다.

On Mortification of Sin by John Owen (1616~1683)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D0VS/4001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대한민국 대통령의 특권 19가지!


19,대통령의 월급 

대통령도 엄밀히 공무원이다.
그렇기에 대통령도 월급을 받는다.
현 박근혜 대통령의 연봉은 1억 8천 9백 41만 9천원이다.
월급은 1553만원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의 월급은 저 기준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18,스타일팀

대통령 전속 스타일팀
이발사,메이크업 아티스트,스타일리스트(코디) 3명으로 이루어진다.
이발사는 직업상 도구가 무기이기때문에 대통령이 바뀔때마다
이발사도
교체된다.

17,주치의 전용병원

대한민국 국민 5000만 중에 1명만을 위한 의사 주치의
현대판 어의라고 보면 된다.
청와대에 상주하지 않지만 대통령 일가에 문제가 생겼을 때
30분내로 도착해야 한다. 지방, 해외출장 때도 동행한다.
대우는 장관급 대우.
대통령의 건강은 청와대 의무실에서 24시간 체크한다.
또한 삼청동에 위치한 국군서울지구병원은 사실상 대통령 일가
전용병원이다.

16,젼속 요리사

대통령의 밥상을 책임지는 사람은
청와대 총무비사관실 소속 운영관이다.
운영관은 그날 음식메뉴 결정, 식재료를 구입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청와대에 근무하는 요리사는 12명이며 한, 중, 일, 양식 음식전문가이다.
대통령이라고 특별한 걸 먹는 건 아니다.
밥과 6가지 반찬 정도의 평범한 밥상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먹는 것이니 만큼 식재료는 모두 최고급이며
웨이트리스와 웨이터가 존재한다. (지방순시 때도 동행)
또한 경호실에서 먼저 음식을 하나 하나 검식한 후 대통령 밥상에 올린다.

15.대통령 연금

전직 대통령이 받는 연금 금액은 평균 1088만원이다.

14,전직대통령의 경호

전직 대통령 경호는 기간 제한이 없다.
현재 전두환 전 대통령 수행 경호에는 경찰관 10명
사저 경비에는 전의경 69명이 배치되어 있다.
소요되는 예산은 27억원이다.

13,대통령의 사저

사저는 대통령이 임기가 끝난 후 사는 집이다.
이멍박 대통령은 내곡동 사저 부지가 무산되면서
논현동 자택으로 돌아간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봉화마을 사저에 12억원의 예산을 투입했다.

12,기타예우

11,병원비 무료

전직 대통령도 비서관과 운전기사가 있다.
서거한 전직 대통령의 배우자도 비서관과 운전기사를 둘수 있다.
또한 전직 대통령과 배우자는 국공립병원에서 받는 진료는 전액 무료이다.
민간
의료기관에서 진료할 경우 그 비용 또한 국가가 부담한다.
쉽게 말해, 전직 대통령의 병원비는 모두 국민들 세금으로 부담한다.

10,당선자 경호

대통령 당선자는 취임까지 2달의 기간이 있다.
당선자 경호는 본인 포함 부인, 자녀, 손자, 손녀, 부모까지 경호대상이다.
별도의 방탄차량, 전용기, 전용헬기까지 지급 된다.
당선자가 원하면 서울 삼청동의 안전가옥으로 숙소를 옮길 수도 있다.

9,사면권

이른바 광복절 특사라고 불리는 사면권.

죄지은 자를 사해주는 사면권.
하지만 무면허, 뺑소니, 인명사고, 2회이상 음주운전은
사면권에서 제외된다.

8,대통령의 경호

대통령 경호는 경호처가 담당한다.
경호대상은 대통령과 그 가족. 실례로 이명박 대통령 독도 방문시
군, 경호실, 경찰, 육해공이 모두 총동원 됐으며 공중조기경보기, 전투기,
해군호위함, 잠수함까지 경계작전을 수행했다.
또 전파도 차단된다.
약 자신의 휴대폰이 갑자기 터지지 않는다면 지금 당신이 그곳에
대통령이 있을 수도 있다.

7,의전 차량

다음은 대통령의 전용 탈것이다.
 
먼저 차량. 메르세데스 벤츠 S600 풀맨 가드 & 에쿠스 리무진
설명: 4개의 타이어가 모두 펑크 나도 시속 80km 이상 주행가능
RPG도 견디는 장갑차량 내부엔 호흡장치 등
유사시에 대비한 응급시설 완비

6,전용비행기

다음은 전용기와 전용 열차

전용기
보잉747-400
설명: 일명 코드원 엄밀히 말하면 5년간 임대한 것이다
기내엔 회의실,휴게실,대통령 전용공간 심지어 기자회견장까지
완비하였다. 또한 미사일 기만장치등 여러 첨단장비들도 탑재되었다
항상 전투기 2대가 에스코트 한다

전용 헬기

S92
설명: 탑승감이 아주 좋다고 한다
역시 간단한 회의를 위한 회의실,휴게실등이 갖춰져있고
미사일 기만장치들이 탑재되어있다.
적의 공격에 대비해 항상 같은 기종 3대가 같이 다닌다

KTX
기관차에 36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으면
그 KTX는 대통령 전용 KTX다.

새마을호 (개조 차량)
설명: KTX 외에 전용 기차도 있다.경복호라 한다.
새마을호를 개조했으며 미사일도 견디는 장갑,최고시속180km
이 열차는 운행열차 시간표나 배정표에 표시되지 않으며
이 열차가 운행하면 전국의 다른 모든 열차는
이 열차 운행 다음 시간 으로 배정된다
서울역 어딘가에 전용 격납고가 있다
또한 이 열차는 재밍 전파를 발사해반경 1km 까지
전자통신을 방해할수 있다
유사시 이동 사령부 역할도 한다.

5,불소추 특권

대통령 재직중에는 형사기소를 받지 않는다.

4,법율안 거부권

대통령이 법률안을 거부할수 있는 권리다.
"법률안을 국회로 다시 돌여보내!" 라고 할 수 있는 권리다.
법률안 거부권 행사는 엄청난 권한이다.
국민이 뽑은 국회의 결정에 대응하는 강력한 힘이다.

3,영전 수여권

훈장을 달아줄수 있는 특권이다.
상을 받는게 아니라 상을 주는 특권이다.
하지만 그만큼 정치적 부담감도 큰 권한이다.
훈장은 건국훈장,문화훈장,산업훈장,체육훈장,무공훈장등 총12종이 있다.
특히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은 백범김구선생,안중근,윤봉길의사 등에게
수여된 최고의 훈장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본인이 본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를 수여했다.
지난 2006년 정부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훈장포함 서훈 9개를 취소
했는데
취소와 함께 훈장을 돌려줘야 하는 것이 원칙인데 전두환
전 대통령은 아직까지 돌려주지 않고 있다.

2,국군 통수권

대한민국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군의 최고 통수권자다.
63만 대군은 물론 장성까지 벌벌떠는 최고의 자리이다.
대통령 당선자의 첫임무는 국군통수권을 이양 받는 일이다. 
미국은 핵무기 발사 버튼이 들어 있는 가방을 주고 받는 것이
상징적인 군 통수권 이양 방식이다.

1,임명권
대통령은 공무원의 임명,파면권한을 갖고 있다.
쉽게 말해 대통령은 공무원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것이다.
직접적인 임명권은 1500개 정도이며 간접적으로는 2만여개이다.
국무총리, 국무위원, 각부장관, 감사원장, 중앙선관위원3인,
대법원장, 대법관, 헌법재판소장 소장과 재판관 검찰총장, 국세청장,
국가정보원장까지 대통령 뜻에 따라 결정한다. 
모든 권력이 대통령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

위에 열거한 대통령 특권보다 더 큰 특권이 있다.
그건 바로
대한민국 국민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특권이다 


'사회/정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배고픈 목숨이었다  (0) 2014.04.28
제 2 차 세계대전사  (0) 2014.04.27
2013년 가장 강력했던 사진 30장  (1) 2014.01.11
동성애대책위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개정' '환영'"  (0) 2014.01.08
우리를 보라  (0) 2013.12.19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교회 (존 칼빈)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찌어다 하였느니라”(딤후 2:19)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선택하셔서 양자로 삼으셨기 때문에 이 은총이야말로 다른 사람들은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시면서 우리에게 내려 주신 특별하고도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귀중한 축복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온전히 당신의 뜻에 따라 자유롭게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전 인류의 멸망에서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 만큼 더 하나님께 순종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느냐 아니면 버림받은 자가 되느냐를 구별지어 준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유익하다는 사실을 명심합시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혼란과 범죄를 볼 때 그리고 시작을 잘 했던 자가 중도에서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볼 때 사람은 의지가 약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기쁘게 양자 삼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충분한 확실성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당신의 약속하신 대로 우리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실망하거나 의기소침해질 때는 언제나 하나님의 선택에 호소합시다. 만약 사람들이 타락하게 되는 것을 보거나 전 교회가 파멸되는 것처럼 보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터를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사람의 뜻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들 자신을 만들 수도 없고 또한 자기들 자신을 개조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서 나왔습니다.

 

비록 그 건물의 윗 부분이 허물어진 것처럼 보이며 기둥이 보이지 않고 그 건물의 형태와 모습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터를 견고하게 지켜 주실 것이니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전하는 하나님의 선택교리가 필요한지 필요하지 않은지를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섭리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을 억지로 파악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우리에게 숨겨져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이 될 것입니다. 그것의 인위적인 은폐는 필수적인 위안을 우리에게서 빼앗는 것이 아닙니까? 마귀들이 우리들의 믿음을 파괴하는 데에는 우리로 하여금 이 조항을 보지 못하도록 감추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변함없는 창세 전의 선택

 

반역자와 위선자가 많은 세상 특히 사람들이 자기들 손으로 기적을 일으켜 보겠다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그와 똑같은 일이 우리에게서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선택을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로 삼지 않거나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돌보아 주실 것을 의심한다면 어떻게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안정된 마음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복음과 관련해서 우리와 한 약속을 어기신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에 대한 우리들의 사랑을 파멸하기 위해 사단이 고안 할 수 있는 중요한 목적이며 또한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단과 그 졸개들에게 구애받지 말고 우리의 방패가 되는 이 무기를 굳게 잡읍시다.

 

하나님의 선택 안에서 견고해지며 그것을 가치 있게 만듭시다! 만약 우리가 우리 영혼의 구원을 사랑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신경을 많이 씁시다. 우리는 이러한 교리를 우리에게 숨기려고 하는 자를 우리의 영원한 적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마귀는 그들로 하여금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것을 빼앗으라고 독려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도 바울이 한 권고를 기억해야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에게 결코 변함이 없으며, 환난 중에서도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함입니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불안하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부르며 그에게 달려가서 하나님이 불러 주신 일에 부지런히 임해야 합니다.

 

가져온 곳 : 
카페 >(안산) 회복의 교회
|
글쓴이 : 전상범|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부활 속에서 그리고 부활하신 뒤 이 땅 위에 머무시는 동안 우리의 구원이라는 위대한 사역을 수행하신 예수님을 알자. 그것에 우리의 칭의와 성화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만일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면 우리에게는 천국에 대한 소망도, 부활에 대한 소망도 없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면 모든 사람 가운데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가장 비참한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다면 그것을 이론적으로 아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가 않다. 당신이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마음속에 새기고 있는지를 확실히 하라. 그것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스도가 나의 머리가 되신다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식은 개인적으로 특별히 적용되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실 때 나도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에게 임한 은혜가 당신에게도 흘러갈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열매가 당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것일 뿐만 아니라 바로 당신의 것이다! “너의 유익을 위해 그것을 알지니라”(5:27).

 

구원에 필요한 진리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우리의 가엾은 영혼에 영양분과 새 힘을 주기 위해서는 진리를 소화 흡수해서 그것에서 힘을 끌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한 시간 안에 많은 진리를 머릿속에 담아 둘 수는 있지만 그 진리를 모두 소화시키기 위해서는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묵상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 많은 설교가 잊혀진다. 이 설교, 저 설교를 찾아다니면서도 파리하게 굶어가는 영혼이 되어 간다. 그것은 그들이 묵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율법을 읽을 뿐만 아니라 묵상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1:8). 알고 있다면 그것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반추하며 묵상하라.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신 시간에 대해 생각하라.

그리스도가 무덤 속에서 정확히 3일을 보내셨듯이 당신은 그분에 대해 3일의 시간을 생각해야 한다. 첫째 날은 준비의 날이라고 불렸다. 둘째 날은 안식일이었고, 셋째 날은 부활절이었다. 따라서 당신의 첫째 날은 준비의 날, 수난의 날이다. 이 날에 당신은 죄와 사탄과 대적해 몸부림치고 싸워야 한다. 이 날에 당신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죄와 사탄이 쏘는 모든 고통스런 불화살을 견뎌야 한다. 둘째 날은 안식의 날이다. 이 날에 당신의 몸은 무덤 속에 있어야 하고 소망 가운데서 안식을 누려야 한다. 이 날에 당신은 나팔 소리가 울리고 당신에게 일어나 심판대 앞에 오라는 명령을 받을 때까지 평안에 들어가고 침상에서 편히 쉬리라”(57:2). 셋째 날은 영광으로 부활하는 날이다. 그것은 안식일 다음 날, 한 주가 시작되는 첫날이다. 이 날은 결코 끝남이 없는 세상이 시작되는 첫 날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때를 생각하라. 그렇게 할 때 당신은 자신의 영혼의 양식을 위해 부활의 유익을 끌어올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신 이유들을 생각하라.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이 유대인들을 당황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는가? 제자들이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것을 전하자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했다”(5:33). 자신의 죄로 매일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그분이 높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끔찍한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가 그들의 심판자로서 다시 살아나신다는 사실이 그들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놓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것이 그분을 따르는 자들의 믿음을 확증시켜 주지 않았는가? 그들의 믿음은 단지 연약한 믿음에 불과했다. 지식도, 확신도, 담대함도 연약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류 없는 많은 증거를 통해 자신이 살아나셨음을 나타내신 뒤에 제자들은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니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분이 온전히 우리의 모든 빚을 지불하셨다는 증거가 되지 않았는가?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7:22). 죽음으로 그리스도는 체포되어 감옥에 내던져졌다. 그 감옥에서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셨고 무덤의 빗장과 족쇄를 깨뜨리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만족함을 얻었고 하나님이 친히 그리스도를 풀어 주셨다는 명백한 증거다. ! 여기에 얼마나 넘치는 위로가 있는가!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이 죄와 죽음, 사탄을 정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는가? 이제 그리스도는 사망에서 그 쏘는 것을 제거하셨다. 지옥에서 그 깃발을 취하셨다. 이제 그리스도는 손에 우리를 대적하는 문서를 취하고 그것을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이제 그리스도는 주권과 권세를 탈취하고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손에 쥐셨다. 이제 그리스도는 강한 정복자로서 무덤에서 나와 드보라가 찬양했듯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기손 강은 그 무리를 표류시켰으니 이 기손 강은 옛 강이라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5:21).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었는가? 그리스도는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첫 번째 분이 되었다. 그분의 부활의 미덕을 통해 모든 택함받은 자가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고전15:22-23). 한 사람의 죽음이 우리 모두가 죽어야 할 이유가 되었듯이 한 사람의 부활이 우리가 다시 살아나는 이유가 된다. 아담과 그리스도는 두 머리다. 두 뿌리요 두 첫 열매다. 아담과 그리스도 모두 대표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선포하기 위함이 아니었는가?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분이 높임을 받고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 아니었는가? 그것이야말로 다른 모든 이유 가운데 가장 주된 이유다. 그것에 주목하라. !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그분에게 영광과 찬양을 올려 드리라. 이 놀라운 일을 묵상하고 반추하라. 생각하라. 그리스도의 이름에 모든 존귀와 영광을 올려 드리라!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는가?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2:9). ! 그렇다면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아이작 암브로스, 예수를 바라보라 2, pp 245-249

 

가져온 곳 : 
블로그 >청교도의 길
|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부활 진리: 만일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Pastor ㆍ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리고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신앙과 믿음은 어찌되는 것인가? 또한 우리의 인생은 어찌 되는 가? 말씀에 기초하여 볼 때 다섯(5) 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두(2) 가지만 열거합니다.

첫째, 죄와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16-18)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죄 문제가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이 평상시에 말씀했던 대로 다시 살아나야만 그 말씀했던 사죄의 은총이 효력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이 죽고 없다면,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그 사죄의 은총은 부도수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죽음만 있고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죄”란 무엇인가? 54-55절. “사망의 쏘는 것”입니다. 죄는 죽음이라는 독화살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망은 언제나 승리하기 때문에 우리를 패배케 만들고 비참하게 만듭니다. 현대의 많은 사람이 죄의식에서 시달리기 때문에 정신적인 고통을 겪습니다. 마침내 정신분열중과 정신이상을 일으켜 시달립니다. 그러므로 죄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만 합니다.

또한 죄는 우리에게 치명적인 죽음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죽음 입니다. 죽음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고통과 슬픔을 가져 왔습니다. 인간이 왜 살아야 하는가 하는 존재 의미와 목적 마다도 상실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죄 문제입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고 영생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면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차단시키는 죄문제와 죽음의 문제가 절대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해 주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죽음이라는 두 단어가 인생의 최후가 됩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18절)  그래서 예수님도 “만일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면 죄 가운데 죽는다”고 반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인을 반드시 한 번은 죽도록 정하셨습니다.(히9:27)  죄인은 결코 영생할 수 없습니다. 또한 죄인들은 육적인 죽음 뿐만 아니라, 심판을 통하여 영적 죽음인 둘째 사망을 겪게 됩니다.(계21:8)  죽음은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갑니다. 이 땅에 지금까지 쌓아올린 돈과 부귀와 명성과 권력, 호화스런 저택, 벤츠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만이 죄악된 생각을 다 제거해줍니다. 죄의 장벽을 다 헐어 버립니다. 잠 자는 영혼을 깨워서 일으켜 세우십니다.

둘째, 영생의 희망이 없는 비참한 인생 입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19절)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영생과 하늘나라 입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이 없으면 바라는 것이 오직 이 세상에 사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생에 대한 희망과 소망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예수님을 위해 모든 수고와 희생을 아끼지 않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바보가 됩니다. 오히려 악하게 살고 권모술수와 거짓된 방법으로 살고, 먹고/마시고/즐기고, 권력과 부와 쾌락을 소유하며 사는 자들이 훨씬 더 Smart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하면 내일 죽을 것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서도 참고 인내하며, 억울해도 울면서 사는 것은, 영원하고 살아있는 소망인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 때문이고 하늘나라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하기에 우리의 부활은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필연적인 것입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어떻게 됩니까? 죽음이 우리를 통치합니다. 악이 세상을 지배합니다. 악한 자들과 사기꾼들과 거짓 정치꾼들과 거짓 목사가 판을 치며 삽니다.
우리의 믿음과 복음 전파가 헛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는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죄와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죽음이라는 두 글자 앞에 생을 체념하면서 삽니다. 무덤이 인생의 최후가 됩니다. 우리는 이처럼 어떤 희망도 없는 비참한 인생 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었고, 그리스도의 부활처럼 우리의 부활은 필연적이며,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는 것이고, 그 모형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인 것입니다. 우리는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마침내 그 날에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에 죄와 악과 악한 자에 대해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부활은 필연이고, 하나님은 진실로 믿음과 말씀대로 사는 우리에게 부활을 주시고 악한 자에 대한 승리인 부활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 53: 4-8)
 
 
수난의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온맘 다 해...
 


1) 악인은 자신의 최고 만족을 땅에서 구한다.

 

악인은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하며, 하늘의 행복보다 육체의 만족을 더 좋아한다. 또한 육체의 일을 구하며, 성령의 일에는 관심도 없고 추구하지도 않는다. 땅의 것을 확신하는 사람은 천국의 것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천국으로 가기보다는 여기에 머무르려고 한다. 천국에서 칭찬 받을 만한 온전하고도 거룩한 삶을 추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여기 이 세상에서 건강과 부와 명예를 얻는 삶을 추구한다. 또 설령 그가 거짓으로 하나님을 모든 것보다 더 사랑한다고 고백할지라도, 참으로 그는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을 결코 알지 못하며, 하나님보다 세상과 육체의 쾌락을 더 많이 생각한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천국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육체의 만족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악인이요 회심하지 못한 사람이다.

 

반대로 회심한 사람은 조명을 받아 하나님의 사랑을 분별한다. 더 나아가서 그는 하나님과 함께 누릴 영광을 믿고 마음으로 그 영광을 생각하며, 이 세상에 있는 다른 어느 것보다 이러한 영광에 마음을 기울인다. 그는 세상에서 모든 부와 쾌락을 누리느니 차라리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찬양하며 살기를 구한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허무하며, 오직 하나님만이 영혼을 만족시켜 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세상이 어떻게 되든지 그는 자신의 재물과 소망을 하늘에 쌓아 둔다. 그는 모든 것들을 버리리라 각오한다. 불이 위로 타오르고 나침반의 바늘이 북쪽을 가리키는 것처럼, 회심한 영혼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경향을 가진다. 하나님의 사랑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회심한 영혼을 만족시켜 줄 수 없으며, 어떤 만족이나 안식도 줄 수 없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모든 회심한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더욱 존경하며 사랑한다. 또한 그들에게는 하늘의 행복이 세상의 번영보다 더욱 매력적이다.

 

2) 악인은 출세하고 세속적인 목표들을 달성하는 것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로 삼는다.

혹시 그가 성경을 읽거나 듣고, 형식적으로는 신앙의 의무들을 많이 행하며, 부끄러운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부수적인 것일 뿐, 그는 결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한 영광을 얻는 것을 자기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삼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하나님을 떠나 세속적인 것들을 즐기며,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육신을 더욱 아낀다. 그는 천국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한다.

 

반면에 회심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구원받는 것을 자기 삶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와 과업으로 삼는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복들을 취하면서도 그것을 다른 세상을 향해 가는 여행에 필요한 것으로 간주하고는 피조물을 하나님께 복종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그는 거룩한 삶을 사랑하며 거룩하게 되기를 열망한다. 그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며, 죄를 미워한다. 그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소망하고 기도하며 노력한다.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려는 경향과 성향을 가진다. 죄를 짓는 것은 그의 마음과 삶의 성향에 방향에 반대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는 죄를 짓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회개하며, 기꺼이 알고 있는 모든 죄에서 떠나려고 한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그에게 매력을 주지 못하며,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의 소망을 위해서 포기하고 버릴 수 있다.

 

3) 악인의 영혼은 결코 구속의 신비를 분별하거나 맛보지 못한다.

 

악인은 이 세상에 오신 구주를 감사함으로 영접하지도 않고, 구속주의 사랑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또한 그는 자기 죄의 형벌과 세력으로부터 구원받고 하나님께로 회복되기 위해 자기 영혼의 의사인 구주에게 기꺼이 순복하지도 않는다. 그가 형식적으로는 신앙생활을 하는지도 모르지만, 그는 결코 한 번도 자신의 영혼을 그리스도에게, 또한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에 맡긴 적이 없다.

 

반면 회심한 영혼은 스스로 죄인이라고 느낀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과의 평화와 천국에 대한 소망들을 상실했으며,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위험에 처해 있음을 깨닫고, 감사하면서구속 사역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주 예수를 자신의 유일한 구주로 믿으며, 지혜와 의와 성화와 영화를 위해서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위탁한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를 자기 영혼의 생명으로 받아 들이고, 그리스도를 힘입어 살며, 그리스도를 모든 문제의 열쇠로 사용하며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 사역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찬양한다.

 

한 마디로, 그의 마음 안에는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내주하고 계신다. 이제 그는 그를 사랑하사 그를 위해 자기 목숨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간다. 그렇다. 이제 사는 것은 그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시는 것이다.

 

- 리처드 백스터, 『회심』, pp 80-86

'리챠드 백스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가 징계를 실천해야 할 이유  (0) 2015.11.04
죄의 뿌리  (0) 2015.06.18
천상의 생활을 막는 장애물  (0) 2013.10.26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받는 지침  (0) 2013.05.01
악인의 세 가지 특성  (0) 2013.03.12

구원의 단순성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하나님의 구원은 얼마나 단순한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지요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으니 얼마나 놀랍습니까믿는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기만 하면또 빈손을 내밀어 주님의 은혜를 받고자 하기만 하면떨리는 손으로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하면성령을 통해서 주님의 보혈이 한 방울만 우리에게 떨어지기만 하면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죄로 인한 상처가 치유되며 죄인이 살게 되고 우리 영혼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위대한 일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어떤 사람들이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는 것처럼여러분 자신을 학대할 필요도 없고먼 성지로 순례 여행을 떠날 필요도 없고,단식으로 몸을 상하게 할 필요도 없고값비싼 희생을 치를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할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의 피로 여러분의 죄를 씻으십시오높이 들린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그러면 에덴동산에서 인류가 잃어버렸던 생명보다 더 고결한 생명이 여러분의 영혼으로 흘러 들어올 것입니다그리고 여러분은 영광스러운 영원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Octavius Winslow (1808-1878) 영국의 비국교도 목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p. 24-25 (지평서원 역간, 2009)

                   (At the Foot of the Cross)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세계의 특이한 건축물

29000952_1.jpg


29000952_2.jpg


29000952_3.jpg


29000952_4.jpg


29000952_5.jpg


29000952_6.jpg


29000952_7.jpg


29000952_8.jpg


29000952_9.jpg


29000952_10.jpg


29000952_11.jpg


29000952_12.jpg


29000952_13.jpg


29000952_14.jpg


29000952_15.jpg


29000952_16.jpg


29000952_17.jpg


29000952_18.jpg


29000952_19.jpg


29000952_20.jpg


29000952_21.jpg


29000952_22.jpg


29000952_23.jpg


29000952_24.jpg


29000952_25.jpg


29000952_26.jpg

기도의 씨름 /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 기도란 얼마나 큰 특권인지! 염려로 상했던 마음 평안을 얻고

세상을 벗어나 천국을 맛보고 비참한 죄인이 만복 누리네.

 

강력한 기도에 권능있으니 영원한 보좌 한 걸음에 이르고

거기서 전능자의 도움 당당히 구하며 그 모든 도움 우리 것으로 누리네.

 

나 아무리 약하고 원수들 강해도 기도의 힘이 모든 원수이기니

나 기도하면 내 하나님 내주변에 불담을 쌓아 주시네.

 

나 기도하면 네 모든 원수들 연기사라지듯 혼비백산 도망하고

나 기도하면 여호와의 능력 지친 내 영혼 강건하게 하네.

 

 

무슨 잘못 있고 무슨 필요 있든지 기도로 그 모든 것 토해낼 수 있으며

사랑하는 내 아버지의 귀가 그 모든 것 세심하게 들으시네.

 

죄에서 벗어나려 힘써 싸우나 오히려 죄가 더 무겁게 짓누를 때

무력감에 휩싸여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승리 주시네.

 

거룩함에 도달하려 애쓰는 이들도 기도 가운데 그것에 이를 수 있으니

믿음과 기도로 씨름하면 불가능한 일 전혀 없음이라.

 

성령께서 기도 가르쳐 주시고 어린 양의 공로 의지하여 나아가니

아무리 연약한 기도도 들으심을 얻음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의 향기가 됨이라.

 

존귀하신 예수님을 통해 드리는 기도 단숨에 하늘 보좌에 이르고

빛나는 천사들 사랑의 날개에 응답 싣고 내려오네.

 

 

 

지친 심령에 소망도 기도요 염려하는 마음에 확실한 위로도 기도라

약속의 말씀으로 하나님께 간구하여 거기에서 구원을 발견하네.

 

기도는 모든 것을 채워줄 수 있는 분께 모든 소망 아뢰는 것!

거지가 왕께 나아가 원하는 모든 것 아뢰는 것!

 

마음은 여전히 세상에서 뒹굴면서 허공을 치는 유창한 말 늘어 놓고

멋진 말과 표현 내 품는 것은 기도 아니라.

기도는 마음의 깊은 중심이거늘.

 

♥ 옥타비아누스 윈슬로우(1808-1878)♥

   미국 청교도의 후예로서 미국에서 목사가 되어 영국으로 이주한 비국교도 목회자

   1861년 찰스스펄전이 개척한 교회(메트포 폴리탄테버내클. 런던) 완공시 입당예배의 설교자

 

 

출처: 새노래교회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