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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미니우스주의의 5대 강령과 칼빈주의의 5대 강령 / 제임스 보이스

제임스 보이스의 개혁주의 핵심” [1. 복음주의에 왜 칼빈주의가 필요한가]중에서 발췌

 

[아르미니우스주의의 5대 강령]

 

이 책의 핵심은 성경을 근거로 한 은혜의 교리에 대한 해설이다. 그러나 이 교리들을 철저하게 성경적으로 변호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복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문제가 되는 신학적 주제를 요약해 주는 간략한 설명을 제시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은혜의 교리는 교회 역사 내내 가르쳤지만 이른바 칼빈주의 5대 강령은 야코뷔스 아르미니우스의 신학에 대한 반응으로 전개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라이덴 대학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그가 죽은 뒤인 1610년에 그의 추종자들은 그의 구원에 대한 관점을 요약한 5개항의 신조를 작성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라고 불리게 된 그들은 이 교리를 네덜란드에 항의(또는 항변)의 형식으로 제출하면서 네덜란드 신앙 고백서는 자신들의 견해에 맞게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 내용은 다섯 항목으로 된 그들의 신학적 강령이다.

 

이 신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I. 하나님은 예견된 믿음 또는 불신앙을 바탕으로 선택하시거나 문책하신다.

 II. 비록 신자만이 구원을 받지만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과 각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III. 인간은 너무 부패해서 믿음이나 어떤 선한 행실에는 신적인 은혜가 필요하다.

IV. 이 은혜는 인간이 거부할 수 있다.

 V. 참되게 거듭난 모든 사람이 확실히 끝까지 믿음을 지킬지의 여부는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한 쟁점이다.

 

이러한 진술들의 공통점은 은혜 안에서의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대한 반신반의이자 몇몇 대목에서는 그에 대한 저항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취하는 입장의 핵심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어떻게 해서든 인간의 능력에 맞추어야 한다는 주장이 깔려 있다. 선택과 유기는 하나님의 작정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선택에 기초한다. 속죄의 효력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믿음과 회개에도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완고하게 거부하는 이들을 이길 만큼 강력하지는 않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끝까지 인내할 지 그렇지 않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견인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보다는 그리스도인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런 교리들은 뚜렷한 교리적 문제이지만 모든 인간에게 자신의 영적인 운명을 결정하게 할 만큼 예정을 경시하려는 공통된 관심사로 서로 연결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항변은 개혁주의 교리에 대한 국제적회의인 도르트 총회에서 절정에 이르는 신학적 논쟁의 폭풍을 몰고 왔다. 각국 대표들이 7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함께 모였을 때 그들의 논쟁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입장을 명확히 하는 역할을 했다. 약간의 반대되는 재확인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 대표들은 마침내 아르미니우스주의는 다음과 같은 신학적 함의를 피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1. 인간의 능력.

 

인간 본성은 타락으로 손상되었지만 완전히 무능해지지는 않았다. 우리가 설령 기본적으로 선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우리는 완전히 악하지는 않다. 의지는 죄에 예속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거듭남 이전에도(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믿지는 못하지만)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죄인은 하나님 편에 서든지 하나님을 대적하든지, 성령과 협력하여 구원에 이르든지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하여 저주에 이르든지 선택할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2. 조건적 선택.

 

  특정한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택은 예견된 믿음, 즉 그들이 자유롭게 복음을 믿으리라는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기초했다. 선택은 궁극적으로 개인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조건적이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만이 하나님이 믿을 것으로 미리 아신 이들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미리 아시는 믿음은 오로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인간의 결정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궁극적 원인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죄인의 선택이다.

 

3. 비한정적 속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은 구원을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게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누군가에게 실제가 되게 하지는 않는다. 십자가형으로 인해 하나님은 용서를 베풀 수 있게 되었지만 용서는 오직 개인적 믿음을 조건으로 해서만 베풀어진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그러나 믿는 이들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속죄는 누군가가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할 경우에만 효력 있게 된다.

 

4. 저항할 수 있는 은혜.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은 외적으로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부르심 받는다. 성령은 모든 심령에 말씀하시며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도록 설득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신다. 그러나 죄인들은 성령을 거역할 수 있으며 회개하지 않으면 회개할 때까지 거듭나지 못할 것이다. 이 점을 달리 표현하자면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대한 성령의 적용은 죄인이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성령은 죄인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면 새로운 영적 생명을 주실 수 없다.

   

5. 거부할 수 있는 은혜.

 

그리스도를 믿고 진실로 구원받은 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에서 떨어져 나감으로써 구원을 완전히 최종적으로 상실할 수 있다. 영원한 생명은 죄인이 그리스도께 올 때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께 대한 그리스도인의 신실함에 달려 있다.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고 모든 아르미니우스주의자가 최소한 여기서 기술된 바와 같은 앞의 다섯 가지 교리 모두에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요약한 내용은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믿는 바를 표현한 것이다. 이 다섯 가지 교리 모두가 공유하는 점은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을 어떤 식으로든 인간의 선택의 자유로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거듭남, 선택, 속죄, 영화 등 구원의 핵심적인 국면들의 효력은 하나님에게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죄인의 협력에도 의존한다. 데이비드 스틸과 커티스 토머스는 <칼빈주의 5대 강령>에 대한 연구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가 보기에 구원은 (주도권을 쥐신) 하나님과 (반응해야 하는) 인간의 공동 노력을 통해 성취된다.”고 결론지었다. “인간의 반응은 결정적인 요소다. 하나님은 무두를 위해 구원을 제공하셨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자신의 자율의지로 하나님과 협력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하는 이들에게만 효력 있게 된다. 핵심적인 점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누가 구원의 선물을 받을 것인지를 결정한다. 

 

이는 현대 복음주의 안에서 왜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이 이토록 우세한가를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경우 인간의 의사 결정은 구원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이는 오로지 하나님 중심적인 신학이 아니라 자아의 방향으로 뒤틀린 신학으로 귀결된다. 물론 이는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것이다. 이탈 근대적이고 점점 탈 기독교적으로 변하는 시대에 사람들은 관심을 요구하고 있다. 사람들은 세속화 되고 인간화 되고 상대화된 영적 체험을 찾고 있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오늘날의 복음주의가 요구하는 바로 그것, 즉 개인적 선택에 결정적 역할을 맡기는 복음을 제공한다.

  

 

[칼빈주의의 5대 강령]

 

이와는 대조적으로 칼빈주의는 구원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로 말미암는다고 주장한다. 구원은 어느 모로 보나 선물, 즉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아니면 구속받을 수 없는 합당치 못한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선물은 하나님이 선물(구원)을 주시기로 택하신 이들에게 주어진다. 이 선물은 모든 이들에게 제안되지만 모두에게 주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선물을 주기로 작정하시면 효력 있게 선물을 자녀의 손에 쥐어 주신다. 이 선물은 한 번 받으면 결코 잃어버리거나 도난당하거나 손상되지 않는다. 참으로 그것은 하나님이 계속해서 주시는 선물이다!

 

이 은혜로운 원리들은 도르트 총회 신경에서 정의되고 변호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국제적인 신학자 집단이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입장을 살펴보기 위해 도르트에 모였다. 그들의 심의는 종교개혁의 위대한 진리들에 대한 한 세기에 걸쳐 성숙된 신학적, 실제적 사고를 대표하는, 조심스럽게 표현된 일련의 교리적 명제들로 귀결되었다. 요컨대 도르트 총회는 선택과 유기의 작정이 예견된 믿음이나 불신앙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기초해 있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모두에게 충분하지만 오직 택함받은 이들에게만 효력이 있으며, 인류는 타락으로 인해 완전히 부패했고 따라서 거듭나기 전에는 구원을 선택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는 불신자를 회심시키는데 효력이 있고, 하나님은 신자들이 결코 완전히 은혜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신자들을 보존하신다고 결론지었다. 이 다섯 가지 기본적인 요점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전적 타락이라는 말은 구석구석 만연해 있는 죄 또는 영적인 일에 있어서의 인간의 무능이라는 교리를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우리 모두가 더 이상 악해질 수 없을 만큼 악하며 모두가 똑같이 죄로 가득하다는 암시를 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죄를 짓고 그 죄로 인해 지옥에서 더 큰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신학자 존 거스너가 말해온 바와 같이 우리는 더 이상 악해질 수 없을 만큼 악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 안에는 더 악해질 수 있는 무한한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전적 타락 교리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그가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전적으로 악함을 뜻한다기보다는 그가 하는 어떤 일도 결코 완벽하게 선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죄는 우리의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 구조의 모든 부분에 만연해서 우리에게는 죄가 건드리지 않은 부분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므로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근본적 타락, 포괄적 죄악 또는 죄의 만연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낫다. 우리의 동기는 결코 완전하게 순수하지 않으며 따라서 어느 정도 우리의 모든 행동은 악한 욕구로 부패해 있다. 이러한 부패는 우리의 존재의모든 측면에 침투해서 우리의 존재나 행위의 어떤 것도 완벽하게 죄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런 불행하고 속속들이 죄에 물든 상태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찾으려는 성향이 전혀 없고 그래서 하나님을 찾거나 심지어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졌을 때 복음에 반응할 수도 없다.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서 우리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거나 영접하는일에 관한 한 자유의지가 없다. 사실 우리는 죄에 철저히 예속되어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영적인 이해력을 주시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믿음조차 선물로 찾아온다.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 이전에는 우리의 부패성이 우리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협력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2.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인류의 상태가 성경의 타락 교리가 가리키는 것만큼 나쁘다면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어야 한다.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 편에서의 어떤 도움도 없이 성취하시고 적용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어야 한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이므로 (실제로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셔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다가오심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이러한 다가오심의 첫 번째 단계는 그 일을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정이며 선택이라는 말은 바로 이 결정을 가리킨다. 선택이란 한 개인의 구원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세상이 생겨나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작정을 세우신 하나님의 사전 결정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미다. ‘무조건적이라는 말은 이 결정이 하나님께서 죄에 물든 피조물 속에서 예견하셨을만한 어떤 것과도 관계없이 이루어졌음을 가리킨다. 만일 선택이 죄인이 그렇게 되거나 행할 만한 어떤 것에 바탕을 두었다면 궁극적으로 구원은 인간의 공로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서 나온 자비로운 행위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선택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 중에 하나다.

 

3.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튤립이라는 약어로 요약되는 다섯 가지 교리 중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가장 어려운 것이 제한 속죄 교리다. 문제는 용어 자체에도 일부 있다. 이 용어는 사실 오해의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제한속죄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무언가 할 수 있거나 해야 할 모든 역할을 다 하지 않았고 어떤 면에서는 효력이 없는 것 같은 암시를 준다. 그러나 그것은 제한 속죄 교리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 개혁주의자들이 이 용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속죄는 창세전에 성부가 성자에게 주신 이들의 구원이라는 구체적인 목표를 염두에 둔 것이며 그 사람들을 구원하는데 효력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교리는 한정적 속죄 또는 특별 구속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특별 구속이란 그리스도의 죽음이 택함 받은 자들에게만 구원의 효력을 가진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자신을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을 위한 완벽한 대속 제물로 드리면서 죄를 속하셨다. 그러므로 구원의 계획에 따라 그리스도의 죽음은 택함 받은 자들의 죄는 속했지만 한 번도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오지 않은 이들의 죄는 속하지 않았다.

   

4.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able Grace)

 

속죄의 유익은 어떤 식으로든 택함 받은 이들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이 일은 성령의 사역이며 성령의 내적인 역사는 죄인으로 하여금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한다. 모두에게 주어지는 복음의 외적인 부르심 외에 성령은 내적인 부르심을 주신다. 이 내적인 부르심은 오직 택함 받은 이들에게만 임하며 필연적으로 그들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이끈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그들을 구원하시므로 그들이 이 효력 있는 부르심을 영구적으로나 효과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며 당해날 수 없다. 성령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들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 속에서 구원의 목적을 반드시 성취하신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도 성령의 은혜롭고 효력 있는 사역을 바로 그와 같이 기술한다. “하나님이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모든 이들, 오직 그들만을 하나님은 스스로 정하시고 받아들이신 시간에 말씀과 성령으로 그들이 본래 처해 있는 죄와 사망의 상태에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구원으로 효력 있게 부르시고, 그들의 생각을 영적으로 구원 얻도록 조명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게 하시며, 그들의 돌 같은 마음을 제하시고 그들에게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며, 그들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을 선한 것에 이르도록 작정하시고 효력 있게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끄시되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자발적인 상태에서 가장 자유롭게 나아오게 하시기를 기뻐하신다.”(101)

 

5. 성도의 堅忍.(Perseverance of Saints)

 

때때로 이 교리는 영원한 안전의 교리라고 불린다. 이 교리는 다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1)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오래 참으신다. 2)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오래 참으심으로 그들 또한 오래 참는다. 성도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이 그 아들의 사역을 통해 거룩하게 여기시는 이들이다. 성도의 견인은 사실 성도의 보존이다. 성도의 견인은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은혜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성도들을 영광으로 인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실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이다.

 

 

이 다섯 가지 교리는 각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독특한 기여를 한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각 교리는 개별적으로 분석할 수도 있고 개별적으로 변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다섯 가지 교리는 논리적, 신학적으로 상호 관련되어 있다. 이 교리들은 모두 구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워필드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이 5대 강령은 유기적인 통일체, 하나의 진리 체계를 이룬다. 이 교리들은 성경에서 풍부하게 지지하는 두 가지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첫 번째 전제는 인간의 완전한 무능이며 두 번째 전제는 은혜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다. 다른 모든 것은 여기서 도출된다. 이 두 기초적 진리가 만나는 곳이 복음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했다면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주권적이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부패함 가운데 은혜를 거부하고 구속받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은혜의 교리는 함께 운명을 같이 하며 함께 구원은 전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므로 은혜에서 비롯되며, 전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하나의 핵심적 진리를 가리킨다.

 

은혜의 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충분히 인식하려면 칼빈주의 5대 강령에서 삼위일체의 각 위격의 역할을 인식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선택은 성부 하나님의 선택이다. 속죄는 성자 하나님의 희생 제사다.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며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견딜 수 있게 하는 은혜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그래야 하듯이 구원은 전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사역-삼위 하나님의 협력 사역-이다. 생각해 보라. 만일 우리가 실제로 죄로 죽어 있다면(근본적 타락) 하나님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실 수 있고(무조건적 선택),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속하실 수 있으며(특별 구속), 성령만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실 수 있고(효력 있는 은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보존하실 수 있다(보존하는 은혜). 그러므로 모든 찬양과 영광은 하나님께만 속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11:36).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네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대장쟁이
[욥기 6:1-4]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분한을 달아 보며 나의 모든 재앙을 저울에 둘 수 있으면
바다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럼으로 하여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씀합니다. 진실로 엄위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알고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모든 지식의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그저 세상종교의 한 종류로, 혹은 사상(思想)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심지어 일부 교회와 목회자들마저도 그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심판하실 것을 안다면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은 악한 일마저 해치울 정도로 타락한 오늘날입니다. 교회에서마저 ‘경외(敬畏)가 실종되고 있는 지경인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진실로 살아계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일 것입니다. 보이지 아니하신다는 것은 시각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느껴지지도 않고, 아무런 응답도 없고, 아무런 역사나 기적이나 증거나 체험도 없고, 도대체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소리쳐도 침묵하시는 하나님, 도대체 계시는 증거가 아무것도 아니 보이는 하나님이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그 하나님을 찾는 믿음의 싸움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이신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나 방언보다도, 성령충만보다도, 어떠한 신앙생활보다도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욥이 말로 할 수 없는 고난과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찾아온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 그들이 한 주일동안 욥의 곁에 앉았다가 드디어 욥의 고난을 놓고 토론이 시작되는데 그것은 욥이 탄식하며 자신의 생을 저주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 토론의 첫 번째 주제가 “경외”입니다. 지난 시간 살펴본 욥이 탄식한 그 탄식은 무엇이었습니까? 자신의 생에 대한 저주.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더라면 하는 탄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태어나지 않는 것이 복일까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복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아무리 천한 것으로라도, 아무리 짧게라도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복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으심을 입어 존재하는 것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신 아름다운 하나님의 세계에 피조물로 태어나는 것이, 설사 힘들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 복일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자신의 생을 저주하고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한탄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3장 26절,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입니다.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나은 고통” 때문입니다. 욥이 누구입니까? 그 욥은 하나님이 인정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입니다.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고 두 번이나 사단에게 자랑하신 자입니다. 욥 또한 그 엄청난 고난 가운데서도 두 번이나 그 믿음을 나타내었습니다. “적신으로 나왔으니 적신으로 돌아갈지라.”, “하나님이 복도 주셨으니 재앙도 주시지 않겠느뇨?”고 말한 욥입니다. 그러나 그 욥도 완전하지는 못 하였습니다. 만일 욥이 완전하였더라면 어떠한 고난, 고통도 그를 흔들지 못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도 한계성을 가진, 극심한 고난 앞에서는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연약한 피조물이었던 것입니다. 욥의 탄식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연약하기 때문에,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요 연약함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연약함 때문에 참소하는 자의 공격이 가해지는 것입니다.

그 욥에게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입을 열어 지적합니다.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염증이 나겠느냐?(히브리어 '라아'; ‘싫증이 나겠느냐?’) 염증이 날지라도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쉽게 말하자면 “야, 도저히 못 참겠네. 보자보자 하니 하나님 앞에서 방자하구나. 내가 한 마디 안 하고는 안 되겠구나.” 그러고는 공격이 시작됩니다.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교훈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면 강하게 하였고 넘어져 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이제 이 일이 네게 임하매 네가 답답하여 하고 이 일이 네게 당하매 네가 놀라는구나.” “그래, 남은 잘 가르치더니만 너 자신은 그게 뭐냐?” 참으로 약점을 찌르는 아픈 지적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네 의뢰가 경외함에 있지 아니하냐? 네 소망이 네 행위를 완전히 함에 있지 아니하냐?” 다시 말하면 “네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더니, 그것이 너의 모든 것이라더니 어째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의문의 제기입니다. 그리고 공격의 화살을 날립니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욥이 남모르게 죄를 범하였을 것이라는 추정에 의한 단죄요 정죄입니다. 욥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한다면서 사실은 경외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재앙이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엘리바스의 지적이 욥에게는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엘리바스가 하는 말은 우리 모두가 새겨들어야 할 말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경외하지 않기 때문에 온갖 죄악들이 심지어 교회 안에서까지 벌어지는 시대입니다. 진실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코람데오"의 삶을 살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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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의도가 무엇이냐 묻는 이들에게
2014년 02월 25일 (화) 16:15:15 전현진 ( 메일보내기 )( wjsguswlswls

파장은 컸다. 고 김성수 목사의 사인이 자살이었다는 사실을 밝힌 기사의 조회수는 사흘이 지나지 않아 2만 건을 훨씬 넘겼다. 기사 밑으로는 '신뢰할 수 없다', '진실은 하나님만 아신다'는 식의 의문과 '자살하면 천국에 못 간다'는 댓글이 달렸다. 항의성 메일도 이어졌다. 내용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소문을 사실인 것처럼 썼다는 비판과 1년이 지난 지금 이런 기사를 쓰는 의도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기사 자체로 의혹을 해소하지 못한 채 의문을 남긴 부족함을 인정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선 그동안의 취재 과정을 간략하게나마 설명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 취재수첩은 의도가 무엇이냐 묻는 이들에게 보내는 답장인 셈이다.

처음 제보를 접한 건 지난해 11월이었다. 고 김성수 목사가 개척한 LA·서울 등 서머나교회에서 그가 사망한 뒤에도 생전 촬영한 설교 영상을 통해 예배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3년 3월 세상을 떠난 김 목사의 사인 역시 당초 알려진 심장마비가 아닌 자살이라는 소문도 돈다고 했다. 교회 리더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교인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 김성수 목사의 사인은 심장마비사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자살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아내를 제외한 유족들과 교회 팀장들은 이를 알고 있었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시험에 들까 봐 심장마비사로 발표했다고 했다. 사진은 서울서머나교회 홈페이지에 게재된 김 목사 소개. (서울서머나교회 홈페이지 갈무리)

 
 
민감한 내용이었다. 소문이었지만, 대게 소문은 여러 경로를 거쳐 확인할 경우 사실로 드러난다. 사실 여부는 둘째 치더라도, 고인이 된 김 목사의 이야기를 다시 들춘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세상을 떠난 이의 영상으로 정기적인 예배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다. 인터넷 등을 통해 그의 설교를 들으며 그를 추종하는 이들도 여전했다. 또, 김 목사가 실제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 사실을 알면서 침묵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취재를 통해 사실 관계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동안 떠도는 소문을 정리했다. 기본적인 내용을 정리하고 틈틈이 자료를 확인했다. 실체에 다가서기 전 조금씩 디딤돌을 쌓아 갔다. 그리고 올해 1월부터 한국 <뉴스앤조이> 기자와도 함께 취재를 진행해 소문을 확인했다. 설교 영상을 틀어놓고 예배를 열고 있다는 사실은 쉽게 확인되었다.

자살설에 대한 확인은 쉽지 않았다.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는 그의 첫 부고 소식을 보며 사실 관계를 확인할 방법을 궁리했다. 장례식에 함께 했던 조문객들과 교회 리더들을 수소문했다. 김 목사 자살에 대해 인터넷 카페에 장문의 글을 올린 한 인사와 어렵게 연락이 닿았다. 그는 김 목사가 자살한 것이 맞으며 장례식장에서 들었다고 했다. 당시 추모를 위해 자리한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장례 위원으로 참여한 이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했다. 장례 예배에 참여한 한 목회자는 기자의 질문에 "세상을 떠나신 분인데 사인을 확인할 필요가 있냐"고 말했다. 

김 목사가 스스로 목을 매 숨진 것으로 2월 6일 처음으로 확인됐다. 사실을 확인해 준 이는 취재원 보호를 요청해 그대로 반영할 수는 없었다. 유족들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었다. 김 목사의 아내는 자살 사실을 부인했다. 김 목사의 다른 가족과 취재 과정에서 접촉한 교회 팀장들은 자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김 목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교회 장로 등 책임자들에게 침묵한 이유를 물었다. 서울서머나교회의 한 팀장은 자살 사실에 대해 부인하지 않았지만, 사인을 굳이 밝힐 필요가 없었다며 일부러 감출 의도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믿음이 약한 이들과 김 목사의 명예를 위해 심장마비로 사인을 발표한 것이라고 했다. 미주LA서머나교회 한 장로는 '그런 소문이 있다'며 확답을 피했다. 오히려 자살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확인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전했던 말씀이라고만 했다.

보도가 나간 뒤 논란이 이상한 방향으로 번졌다. 많은 이들이 자살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마치 진리인양 '선포'하기 시작했다. 기사에 밑으로 달리는 무수한 댓글 속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유로 한 인간이 겪어낸 비극을 마치 스스로 신이라도 된 것 마냥 판단하는 자들이 넘쳐났다. 그의 구원 여부를 자신이 판가름하겠다고 나서는 모양새였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김 목사의 설교를 들어오던 많은 이들이 한 목회자의 죽음을 파헤친 이유가 무어냐고 물었다. 의도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김 목사를 질투한 돈 많은 목사가 사주한 것 아니냐며 추측을 늘어놓았다.
   
 
 

▲ 서울서머나교회는 김성수 목사가 2012년 4월 설립한 교회다. 김 목사는 2013년 3월 사망했지만, 교인들은 흩어지지 않고 장소를 얻어 김 목사의 영상 설교를 들으며 예배를 지속하고 있다. 주일예배 때는 본당에 빼곡히 앉고서도 자리가 없어 바깥 로비까지 의자를 놓는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그의 죽음을 파헤친 이는 누구인가. 1년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가 여전히 스크린 안에서 살아가게 만든 이들은 누구인가. 죽어도 죽지 못하는 존재로 만든 것은 누구인가. 도대체 누구의 유훈 쫓는 것인가.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저 살아남은 자들이 김 목사의 영면을 훼방한 채 스크린 속에 그를 끝없이 불러낸다. 누구나 문제 의식을 품을 법한 일이다. 기사를 사주한 것은 질투에 눈 먼 목사가 아니다. 진실에 눈 감은 채 매주 프로젝터로 그를 소환하는 이들이다.

당신들의 예배는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그가 전한 말씀이 중요하다'는 그 말씀은 누구의 말씀인가. 예수의 말씀인가 김 목사의 말씀인가. 지금 당신을 향해 김 목사는 뭐라 말하겠는가. 양복 입은 무당을 절규하며 비판한 그를, 스크린 속에 가둬 양복 입은 우상으로 만든 당신에게 뭐라 말하겠는가.

전현진 기자 / jin23@newsnjoy.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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