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 과연 무엇인가?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세계교회협의회(WCC)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매특허 낸 듯이 사용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회적 활동, 윤리적 실천, 이상사회 건설 등 비종말론적이고 세상적인 무엇으로 이해한다. 지난 해 부산에서 선포된 WCC의 새로운 선교-전도 선언서 "함께 생명을 향하여"(2012)는 하나님의 나라와 이상적 세상 만들기 활동을 똑 같은 것으로 여긴다. 한국교회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하나님 나라 개념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듯 하다. 교회의 생명력을 앗아가는 죽음의 독이 한국교회에 깊숙이 침투했음을 시사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는 설교자들의 메시지, 신학자들의 대화, 교회일치운동 선언문, 기독언론 보도문 등에 자주 등장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독교인이 추구해야 하는 최대의 가치이다. 그러나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이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마다 이해가 다르다. 하나님의 나라, 과연 그것은 무엇인가?


아래의 글은 필자가 신학 초년생 때 쓴 것이다. 당시의 한국교회는 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천당으로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미래에 도래할 신국으로 인식하는 것이 지배적이엇다. 이 글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체적을 조망하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enjoy)하는” 삶(웨스트민스터소요리문답 제1)의 중요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추구하는 것과 다른 개념의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한다.


(원제: 천국이란 무엇인가?)


기독교는 천국(하나님의 나라) 운동이다. 천국은 기독신자의 소망이며 현실이다. 성경 전체에 깔려있는 주제이다. 특히 신약성경에 나타난 우리 주님의 사역과 메시지의 중심 주제는 천국이었다. 이 천국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란은 기독교 안에서 늘 있어왔다. 근래에 서구신학계는 이 문제를 새로운 관심사로 등장시키고 있다.

 

우리 한국 기독인들은 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죽은 다음에 가는 저 세상으로 이해해 버리는 데 커다란 문제가 있다. 한국 기독교는 수세기 동안 토착화된 샤머니즘과 불교, 유교, 도교 등 이방 종교 영향권 안에서 성장하면서, 특히 윤회사상을 가진 불교의 열반, 극락 관념 등의 영향으로, 천국을 마치 저 세상으로, 그것도 행위에 대한 인과응보와 관계되는 다음 세상으로만 인식하여 다른 종교가 말하는 것과 별 다를 바 없이 이해하고 있는 실정이다. 나아가 신비적 경향이 강한 교회들과 세대주의자들은 지나친 종말론을 앞세워 타계주의 또는 염세주의적 신앙에 빠진다. 현실을 저주, 무시하고, 오직 내세 또는 저 천국만 바라는 나머지 현실에 주어진 책임과 축복을 도외시 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 글은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을 중심으로, 성경이 천국을 무엇이라고 가르치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1. 천국 이해에 대한 역사적 고찰

 

천국(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를 더 잘 하기 위해서는 천국관의 역사적 고찰이 매우 필요하나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어거스틴은 그의 신국에서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잘 표현했으나 완전하다고 볼 수 없다. 슈바이처, 리츨 등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천국의 미래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너무 현재성만을 강조한다. 천국을 사회적, 윤리적, 비종말론적인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 비롯된 그릇된 종파들은 지상천국의 실현을 주장하기도 한다. 한편, 신학자 칼 바르트는 천국을 비역사적, 비시간적, 찰나적인 것으로 본다. 도드는 실현된 종말론에 기초를 두고 해석한다. 오스카 쿨만은 변증법적 시간의 긴장관계로 설명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성경에 충실하지 않은 점이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으면서도 이 보다는 인간의 사변적 철학적 사상을 딛고 서서 그 위에 하나님 말씀을 끌어 들인다. 여기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태도는 비평적 취급이 빈약한 상태이고, 종말론적 사상이 농후하여 천국(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을 소홀히 취급하고 있는 형편이다.

 

2.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

 

하나님의 나라(신국, Kingdom of God)라는 용어는 마태복음에 4, 마가복음에 4, 누가복음에 32, 요한복음에 2, 사도행전에 6, 바울서신에 8, 요한계시록에 1번 나타난다. 하늘나라(천국, Kingdom of Heaven)는 마태복음에 33, 요한복음에 1, 히브리서에 11번 나타난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이란 말을 직접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습관을 따라, 마태는 하늘나라(천국)라고 하였다. 이 두 표현은 결국 같다. 그리스도의 나라도 동일한 의미이다.

 

천국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면, 우선 나라’(Kingdom)의 의미를 살펴봐야 하겠다. 나라는 본래 한 왕이 그 권위를 시행하는 영역(a realm)이. 요즈음의 영연방(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이 그 예이다. 그러므로 왕으로 원수를 삼은 국가 또는 왕국 또는 지배(dominion),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나라는 첫째로 왕이 있어야 하고, 둘째로 백성과 신하 각료들이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의를 가지고는 성경이 말하는 천국의 올바른 개념에 도달할 수 없다.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나라에 대한 일차적 의미는 왕에 의하여 실행되는 신분, 권위, 주권(sovereignty), 그 주권이 권위를 행사하는 영역이다. 그리고 그 영역에 속한 백성이나 각료는 이차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시편 103:19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 모든 것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의미한다. 시편 145:11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능력(Power)이다. 다니엘 2:37, 5:26은 왕의 통치를 의미한다. 마태복음 10:15, 누가복음 16:11, 12하나님 나라는 그의 왕직, 그의 통치, 그의 권위를 말한다. 마태복음 6:33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 그의 지배를 구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시되어질 영역이 없는 지배는 없다. 성경은 천국을 현재 들어갈 영역으로 묘사한다. 마가복음 9:47과 같은 구절은 미래의 천국을 말한다. 이 나라는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만 경험할 수 있는 영생과 동일한 측면의 하나님 나라를 말한다(10:23, 14:25, 7:21).

 

이상의 설명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a. 성경의 어떤 구절은 천국을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적 지배(reign, dominion)을 의미한다.

b. 성경의 어떤 구절은 하나님의 복의 지배를 체험하려고 지금 들어갈 수 있는 영역(realm)을 의미한다.

c. 성경의 어떤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할 때 임하는 미래의 한 영역(a future realm)을 의미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통치나 지배 영역의 상태는 어떠한가? 다시 말하면 천국을 무엇인가? 성경 어느 곳에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간결한 정의를 내리고 있지 않다. 다만 그 나라에 들어오라는 초청과 요구만 있을 뿐이다. 다음과 같이 집약하여 생각할 수 있다.

a. 한 나라의 국민이 된다는 것은 그 나라의 법률을 받아들이고 지켜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국민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이다.

b. 그 나라의 시민이 된다는 것은 각자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c. 그 나라에 대한 이 개념은 어떻게 그 나라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동시에 있을 수 있는가를 설명해 준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 사람은 누구나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나라의 완성은 아직도 미래에 속하며 여전히 인간의 기도와 인간의 목표이다. 천국은 인간의 노력으로 임하게 할 수 있는 성질을 가진 무엇이 아니다.

d. 천국은 예수님과 더불어 임했고 또 와야 했다. 그가 오시기 전의 시간과 오신 이후의 시간은 달랐다. 예수님은 그의 능력을 통해 천국이 임했음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으셨다. 천국은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이뤄진 상태 속에 실현될 것이다(6:10).

3. 미래의 천국

천국은 하나님의 뜻의 실현과 동반되는 축복을 누리는 권계(權界) 또는 영역이다.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뜻이 현세에서 완성된다고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신자의 부활로 완성된다고 말한다. 하나님 나라와 궁극적 실현은 역사 건너편에 있는 새롭고 바른 질서가 존재하는 곳이다(20, 21, 22). 그곳은 이 세상과는 다른 오는 세상”(12:32)이다. 현세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세계이다(1:4, 2:1-2, 5:19-27, 고후 4:3-4).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나타나고 구원의 완성과 복의 전개는 내세에 속한다.

그러면 영생이 도래할 세상에 속하고 예수님의 재림 때에 비로소 천국이 시작된다면 우리는 그때까지 구원도 영생도 얻을 수 없단 말인가?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미래의 천국은 근본적으로 역사의 건너편에 장소성을 가지고 임할 하나님의 영원하고 완전한 통치이 영역이다.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이 훌륭한 곳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은 벌써 임했으며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때에 구원과 영생도 이미 주어졌음을 가르친다(2: 1-9).

4. 도래한 천국

완전하고 영원한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장차 영광 중에 임할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 구절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에 올 뿐만 아니라 현재에 와 있음을 분명하게 말한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체험할 수 있고 그 나라의 생활을 조금씩 맛볼 수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 6:5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라고 한다. 현세에서 우리가 내세의 능력을 맛본다고 하였다. 맛보는 것은 약속보다 나으며, 현실이며, 경험이다.

그리스도는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구하려고 오셨다(1:4). 로마서 12:2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한다. 이 악한 세대에 사는 우리가 어떻게 이 세대를 본 받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가 내적 변화를 체험해야 가능하다. 이는 악한 세대로 들어오는 오고 있는 세대의 능력의 결과이며, 능력 그 자체이다. 이 두 가지 세대가 겹쳐 함께 존재함을 이해하는 것이 성경적 구원과 교회를 이해할 수 있는 근본 도리이다.

이 세대는 오는 세대를 포함하고 있다. 두 줄이 겹쳐지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이 악한 세대 가운데서도 우리는 천국의 현재적 측면을 볼 수 있다. 네덜란드 신학자 헤르만 리덜보스(H. Ridderbos)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a.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5). 예수님의 이 말씀 가운데 나오는 때가 찼다는 말은 그 나라가 완성 단계에 들어간 상태에 있음을 말한다. 세례요한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했으나 주님은 때가 찼다고 하였다(4:18,19, 61장 참고).

b.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노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11:12). 이 말씀은 천국, 하나님의 나라의 실재 곧 현재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요한은 지금 다가오는 미래적 측면의 천국 입구에 서서 우리를 옛 시대에서 새 시대로 인도하고 있다. 요한은 사치와 안위를 거부하고 금욕적 생활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혼인집을 찾아갔고,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었다. 그의 반대자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라고 비난할 정도로 먹고 마셨다. 금식에 대한 태도도 유태인과 같지 않았다(9:14-17). 예수님과 함께 새 시대가 도래했다.

c.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 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16:16). 이 말씀에 따르면, 천국은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임했으며(과거), 오늘도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임하고 있다(현재).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의 활동들에서 천국,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을 볼 수 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12:28, 11:21). 여기의 임하였다는 완료형이다. 사탄의 통치가 깨어지는 위대한 순간이 도래함과 동시에 천국 도래의 시작을 말하고 있다(4:13, 12:43-45, 8:29, 1:24, 5:7, 4:34, 8:28-31, 10:18, 19 등 참조하라).

그리스도의 이적들은 그 나라의 권세와 그 나라의 현재적 임함을 증거한다(4:23, 11:12, 15, 13:6). 특히 죽은 자를 살리신 이적은 그 나라의 구원이 최고 절정에 달했음을 말해준다.

예수님이 전파하신 복음 메시지는 천국,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것은 미래에 도래할 천국 뿐 아니라 더욱 이미 임하여 존재하고 있는 나라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마태복음 13장의 천국 비유와 산상보훈의 교훈들은 천국과 천국 백성들의 새로운 지침이다. 이것들을 미래적인 무엇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 비유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을 크게 강조한다.

천국,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는 우리가 미래의 어느 날 완전히 주어질 구원을 현재에 이미 소유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그것을 받은 사람들이 기뻐해야 할 선물이다(12:32, 21:43, 10:12, 25:34). 기독신자의 구원은 미래에 이뤄질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라고 함은 기독인이 현재 구원을 소유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예수님은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나니”(5:24)라고 말씀하셨다.

신약신학자 박윤선 교수는 위 성경본문을 신자가 현세에서 부터 영생을 소유했다는 뜻이다라고 주석한다. 요한복음 5:24사망에서 생으로 옮겼느니라옮겼다3인칭 단수 완료형으로 기술되어 있다. 옮겨져서 지금 영생을 가지고 있는 상태로 표현되었다. 이 점에 유의하자.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17:21)라는 가르침의 너희 안에 있다”(in the midst of you, among you), 무리들 가운데 있는 예수님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일 수 있다. 무리들 가운데 있는 예수님 자신의 오심은 곧 천국, 하나님 나라의 도래(coming)라는 뜻이다.

맺음말

성경이 말하는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신자가 죽어서 가는 저 세상만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천국은 임했고,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에게 임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들의 부활, 심판과 함께 완전하고 영원한 천국은 임할 것이다. 천국은 3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근본적으로 역사의 저쪽에 있으며 장소성이 있는 미래에 속한 것이다. 그러나 신자는 현세에서 그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맛보고 체험하며 승리하는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에게 미래도 중요하지만 현재는 더욱 중요하다.

현재의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오고 있는 세대의 능력이 이 악한 세대에 들어와 겹쳐져 있는 상태이다. 천국은 예수님의 임재와 동시에 시작되었다. 지금도 예수가 구원자라고 하는 복음을 믿는 자는 즉시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옮겨진다. 그 백성이 되어 버린다. 천국은 임하였다. 그러나 그 완성은 미래에 속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를 창조하고 교회를 통해서 세상에서 역사하며 확장된다. (이 때의 교회는 가시적인 교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다. 천국은 이 세상이 보기에는 매우 미미하고 초라해 보일 수 있다. 그 나라는 강력한 권력으로 임하지 않는다. 복음전도와 자기희생과 봉사를 통해 임한다.

천국은 임했고, 임하고 있고, 임할 것이다. 지금 현재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감사함으로 주님을 위하여 봉사한다. 날마다 기쁨과 희망을 가지며 승리생활을 한다. 타계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저 세상만을 추구하는 생활과 사고방식을 버린다.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구원과 하나님의 복을 누린다. 주님과 매일 동행하는 삶을 산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를 올린다. 장래의 희망과 함께 성도의 생애와 기쁨을 더 좋아한다. 미래도 중요하지만, 현재는 더욱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삶을 살고 있는가?

이 글은 다음의 책들에서 도움을 얻었음을 밝혀둔다. Herman Ridderbos, Coming of the Kingdom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1962); Eldon G. Ladd, The Gospel of the Kingdom (Grand Rapids: Eerdmans, 1959); 박윤선, <성경주석: 공관복음> (부산: 영음사, 1960).


원제: 천국이란 무엇인가?


최덕성, 高神大學報 29(1977): 37-43

 

출처: 리포트만다

가져온 곳 : 
카페 >지명교회까페
|
글쓴이 : 아침그림| 원글보기

 

아주 특별한 실험


 

첫째날,
집집마다 들러서 만원씩 놓고 나오는 그를 보고
사람들이 제정신으로 하는 행동인지 의아해하면서도
멈칫멈칫 나와서 그 돈을 집어 갔습니다.
둘째날도 거의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셋째날, 네째날이 되자
그 동네는 만원씩을 선물로 주고가는
사람의 이야기로 떠들썩 했습니다
신기하기도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두번째주쯤 되었을때
동네 사람들은 현관 입구에 까지나와
돈을 나눠주는 사람이 오는쪽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언제쯤 올것인가 기다리게 되었고,
그 소문은 이웃마을까지 퍼졌습니다

세번째주쯤 되자
 이 마을 사람들은 더이상
그 이상한 사람이 와서 돈을 주는 것을
신기해하거나 고맙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네 번째주 쯤이 되었을때는
매일 만원씩 돈을 받는 것이
마치 세끼 밥을 먹고 세수하고
출근하는 것 같은
일상사가
되어버렸습니다


드디어
실험기간이 끝나는 한달의 맨 마지막날
그 실험을 계획했던 사람은
평소와는 달리 그 마을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주지않고
그냥 그 골목을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이상한 반응들이 터져나왔습니다
여기저기서 투덜대고 화를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돈은 어디 있습니까?"
"오늘은 왜 내 돈 만원을 안 줍니까?" 라고
따져 묻기까지 했습니다
마을사람들이 매일 만원을 받는 일은
어느새 당연한 권리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일 공짜로 만원을 받는 것처럼
공기가 있어 숨을 쉴 수 있는 것도,
물을 마실 수 있는 것도,
흙이 있어 딛고 설 수 있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직장에 처음 입사했을 때는
적은 보수도 낮은 직책도,
부족한 근무환경도 개의치 않고
고마움을 느끼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받는 것이 익숙해지고,
고마운 것들이 당연한 것이 되고,
더 잘 해 주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들이 쌓이게 됩니다



부모님만 찾던 아이도 성장하면
부모님의 사랑을 당연시하거나
귀찮게 여기다가 결국 돌아가신 후에야
그 사랑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느끼고 후회하곤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가진 것에 대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왜 일까요?
모든것이 늘 곁에 그렇게 있으리라는 착각,
당연히 내가 가져야하는 권리라는 착각 때문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계약서를쓰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내 심장이 70년동안 아무 탈 없이
뛰어주리라는 보장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가 댓가를 지불하고 구입한 물건이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몸조차도
온전히 내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 입니다


 


따라서
내가 가진 내가 누리는 모든 것에 대해
항상 감사하는 맘을 가져야합니다.
감사하는 풍요로운 마음이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짧은 글 긴 여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생  (0) 2014.05.07
이 기막힌 사랑  (2) 2014.04.09
거인이 가지고 온 것  (0) 2014.04.01
"솔개" 새 이야기  (3) 2014.03.27
아무도 미워하지 맙시다  (0) 2014.03.06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vs Sola Ecclesia,,,

흔히들 종교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을 성취할 수 있었던 형식규범을 꼽아보세요, 라고 질문하면 "오직 성경" 혹은 "오직 성경으로"라는 격언을 취한다. “오직 성경”의 원리 아래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와 “오직 그리스도”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실질적인 내용을 견고하게 취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올바른 입장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오직 성경”...이라는 명제를 내세웠을 때, 그 반대편에 “오직 교회”라는 명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으면, 그 진의가 파묻히는 사태에 직면할 수도 있다.

“오직 교회”라는 명제는 중세의 교회적 삶의 근간을 보여주는 핵심적 지위를 차지했다. 중세교회는 “오직 교회”의 원리 아래 다스려졌다. 키프리아누스를 통해서 적어도 이단들과 유사기독교가 출몰하던 그 당시의 문맥에서는 합당하게 강화되기 시작한 감독직의 기능이, 10세기를 넘어서면서 교황권의 강화로 변질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런 흐름에서 중요한 교회 인식이 나타나는데, 교회의 본질을 정의할 때 회중을 소외시키고 일차적으로 직분자에게서 파악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어느 덧 교회라는 말을 쓸 때, 자연스러이 이원화된 상을 동반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교훈하는 교회”(ecclesia docens)와 “교훈받는 교회”(ecclesia audiens)로 교회를 구분했는데, 전자가 직분자이고, 후자가 평신도들이다. 이 둘의 관계는 계급적이어서, 직분자가 높은 질서를 점유하며 동시에 본질적인 요소이고 평신도는 낮은 질서를 차지하며 이차적인 요소로 밀려나게 된다.

그리고는 교훈하는 교회에 7성례를 귀속시켰다. 세례성사로부터 종부성사에 이르는 일체의 신앙의 과정에, 쉽게 말하여 신앙에 입문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일체의 과정에 은혜의 직접적인 매개자인 직분자가 개입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평신도는 직분자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접근할 수조차 없게 된 것이다. 역으로는 하나님도 직분자를 매개로 삼지 않고서는 어떤 은혜도 그의 백성들에게 전하지 못하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이것은 비단 은혜와 관련된 일만은 아니다. 인격(persona)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말한다면, 로마 가톨릭 교회는 한 인격적 존재의 지배 아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평신도, 일반성직자, 감독, 주교, 추기경이라는 계급질서적인 교회의 수장인 교황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실질적인 “유일한 인격”이다. 교황이외의 다른 인격들은 사유하고 행동하는 주체로 인정되지 않는다. 다만 교황이라는 한 인격의 결정을 다양한 인격의 양상(樣相)을 통해서 실행에 옮길 뿐이다. 그러니까 교황이라는 한 인격적 주체의 다양한 양상들이 교황 이외의 인격자들의 현주소인 셈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교황은 천상의 그리스도의 실질적인 성육신으로서 연장된 그리스도(the extended Christ)라고 불릴 수 있다. 물론 이 사실은 교황은 자기 인식을 철저한 그리스도 따름에서 찾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전제한다. 따라서 교황이 정상적일 때는 그나마 로마 가톨릭 교회의 상황이 괜찮을 수 있으나, 비정상적일 때는 문제가 심각해진다. 한 인격적 주체와 함께 다 무너지게 되니까 말이다. 교리적으로나 삶에 있어서나 그 영향력은 실로 심대하다 하지 않을 수 없고, 바로 그 부패되고 왜곡된 양상이 종교개혁시대전야에 만연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오직 성경”의 원리에 의해서 전복되었다는데 있다. “오직 교회”라는 원리를 “오직 성경”이라는 원리로 대체했다. 이런 점에서,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는 교직제도의 한 대표적인 양상으로 교황제도를 꼽았고, 교회의 유일한 머리로서 그리스도를 외치게 된 것이다. 교황과 추기경과 주교와 감독과의 관계성 가운데 의존적으로 실존하는, 무/비인격적 인간의 굴레를 깨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 구성원 각각의 인격적 실재를 인정했고, 이로써 교회 구성원인 개개 그리스도인을 인격적 주체로서 하나님 앞에 곧바로 설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오직 성경”의 원리를 따라 교회를 재형성한 것이다.

인간론적인 면에서 본다면, 교황이라는 한 인격적 주체의 존재와 사유의 양상으로 단순히 존재하던 무인격적인 인간을 인격적인 인간으로 복원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형성해갈 수 있도록 한 것이 종교개혁인 셈이다. 중세적 인간이해에 배태된 집단인격의 담벼락을 헐고 개인의 주체성,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야 하는 인간을 발견하고 일깨운 운동이 종교개혁이었다.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직접 설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에로 인간을 끌어냈다는 점에서, 종교개혁은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진정한 인간 주체성의 재발견을 꾀한 운동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오직 성경”은 성경해석의 주체로서 교황을 비롯한 교회의 직분자의 지위에 대한 문제제기를 노정했다. 왜냐하면, 과연 직분자로서의 교회가 “성경”과 “전통”을 매개하고 그 의미를 권위적으로뿐만 아니라 창조적으로까지 종합할 수 있는 지위를 점하는가에 대하여 종교개혁교회는 의심했고, 직분으로서의 사도직의 계승을 사도적 가르침의 전통의 계승이라는 내용차원으로 잡아 끌어당겨 높아진 직분을 상대화하여 “오직 성경”의 원리 아래 놓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니까 성경을 사도적 교훈의 전통을 통하여 해석해야 한다는 큰 흐름을 정당화하고, 또한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원리를 세움으로써 “쏠라 에클레시아”의 해석적 권위를 해체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성경을 평신도에게 돌려주는 위업을 이루었다.

확인했듯이, “오직 성경”은 형식적인 원리이면서 실질적인 원리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여, “오직 성경”을 형식원리로 내세울 경우, 바로 그 동일한 원리를 가지고 실제 삶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둘이 실제로 통합되지 않고 분리되는 현상, 즉 “오직 성경”을 외치면서 “오직 교회”를 취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종교개혁의 상속자가 아님을 보이거나, 혹은 미성숙한 상속자임을 드러내거나, 혹은 이익에 기댄 기회주의적 처신임을 스스로 증언하는 셈이다.

카페 >개혁주의 마을/Grace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