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막는 10가지 습관

(livewiseblog.com)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를 희망한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해지기 위해 할 일과 가져야 할 습관에 대해서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행복을 방해하고 불행을 낳는 습관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미국 허핑턴 포스트는 지난 30일 행복해지기 위해서 알아두어야 할 “행복을 막는 10가지 습관”에 대하여 보도하였다.

1. 원한을 품는 것

남에게 원한을 품는 것은 결국 본인의 정신 건강에 이롭지 못하다. 상대를 향한 분노와 적의심을 이기지 못하고 해하고자 하면 결국 인과 응보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의심을 누르고 다시 한번 상대방에 대하여 생각 해볼 필요가 있다.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혹시 내가 모르는 그 사람의 좋은 면이 있지 않을까? 이러한 질문을 통해 상대방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다 보면 상대에 대한 원한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2. 꿈을 포기하는 것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는 꿈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이 중 몇몇의 사람들은 실패가 두려워 쉬운 길을 택해 결국 꿈을 실현하지 못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시간이 흘러 후회하기 마련이다.

꿈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행복을 누린다. 원하던 결과를 얻지 못할지라도, 후회가 없기 때문에 시도조차 하지 않은 사람보다는 백배 낫기 때문이다.

3. 즐거움을 주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 것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할 때 당연히 더 행복한 법이다. 그러나 일이나 상사와의 만남 등 하고 싶은 일 보다 해야 할 것이 더 먼저라는 생각에 좋아하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즐거움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다면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만 하고 사는 지루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될 것이고, 궁극적으로 삶에서 행복을 영위할 수 없다.

4. 진솔치 못한 인간관계를 맺는 것

요즘 사람들의 대화는 진솔치 못하다. 늘 겉돌며 누구도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나를 이해하고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과 함께할 때 행복을 느낀다. 서로 교감하고 조언을 구하는 대화를 통해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이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5. 비교하는 것

어떤 사람은 부자이나 끔찍한 결혼 생활에 시달릴 수도 있으며, 또 어떤 사람은 성공적인 직장생활은 못해도 행복한 가정이 있을 수 있다.

이처럼 비교한다는 것 자체는 매우 편협적이고 과장이 심하며 진실되지 못하다. 따라서 타인의 삶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그 대신 자신이 가진 행복을 즐길 줄 아는 삶이 더 바람직하다.

6. 경험보다 물질적인 것을 중요시하는 것

사람들은 평소 원하던 물건을 가질 때 일시적인 행복감에 젖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익숙해지면 금방 사라지곤 한다.

반면, 오랜 친구와의 저녁식사, 여행, 사랑하는 이들과의 만남 등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것들은 오래 기억 속에 남으며 의미가 깊어 더 큰 행복을 전해준다.

7. 창의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가끔 마음속에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채 창의적이고 새로운 도전을 하지 못하는 것 또한 행복을 불러오기 어렵다. 삶의 재미는 새로운 시도와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의력을 발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8. 삶에 안주하는 것

행복은 끈임 없이 추구되어야 한다. 정말로 행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항상 본인이 가진 삶에 안주하지 않고 이를 뛰어넘고자 한다. 더 큰 행복을 얻고자 하는 과정과 결과의 즐거움을 알기 때문이다.

반면 본인이 가진 것에 안주하는 삶은 결국 익숙해져 계속적인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9. 남에게 베풀지 않는 것

대부분의 행복은 바라는 것을 얻을 때 느껴지나, 남에게 베풀 때 얻는 행복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가끔 봉사활동에 참여하거나 매월 소정의 금액 기부하는 등 대단한 일이 아닐지언정,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 때 얻는 행복은 배가 되어 삶을 보람차게 할 것이다.

10. 현재를 즐기지 못하는 것

미래를 걱정하거나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현재를 즐기지 못하는 행동은 어리석다.

본인의 의지로 바꾸지 못하는 일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눈 앞에 놓인 순간 하나하나를 즐기고 보람 차게 보낸다면 행복도 제 발로 걸어 들어올 것이다.

(코리아헤럴드 김민진 인턴기자 minjin103@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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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이 오려나 봐요
               최송연                                                                   
         
봄이 오려나 봐요
버들개지 사이로
새하얀 안개 이슬을 타고 

봄이 오면
내 사랑
그분도 오시려나
가슴이 마냥 콩닥이네요

하지만
기나긴 겨우살이
너무 찌들어버린 내 옷

행여,     
내 사랑 그분께서 
날 몰라보시면 나는 어찌할까

세마포 옷 빨리 꺼내
그 피로 씻고 닦아 정결케 하고
꽃단장 분단장도 곱게 해야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 22: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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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 않은
주 리투아니아 일본 영사 스키하라의 자아 희생이 유대인 30,000명 이상의 목숨을 구하다


(1) 영사관에 몰려 온 사람들

1939년 세계 제2차 대전이 한창 무르익을 때, 나고야 태생의 스카하라 치우네씨는 일본 의 전통적인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예수를 믿게 된 그는 기도 중에 외국 대사가 되어 복음을 열 방에 전하라는 소명을 받는다.  1930년 그는 일본 정부로부터 러시아 근처 리투아니아( 폴란드, 소련 간의 작은 나라)의 총 영사로 임명되었다.

하루는 대사관 앞에 50여명의 사람들이 몰려 오더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왼 종일 떠나 지 않고 무어라고 소리 쳐 아우성 대고 있었다. 스키하라 영사는 그들 중 몇 사람을 대표 자로 대사관 안에 불러들여 사연을 물었다. 사연인즉 자기들은 폴란드에 살던 유대인들인데 독일군이 폴란드를 점령하여 거기서 야간에 탈출 하여 리투아니아로 피난왔는데, 독일군 탱크가 지금 리투아니아로도 들어오고 있다.

독일인은 유대인은 다 잡아 죽이니 자기들도 여기 있다가는 필경 죽을 판이라. 우리를 살려 달라고 절박하고, 간절한 어투로 탄원하는 것이었다. 스키하라는“날보고 어찌 해달라는 것이냐?” 물으니 그들은 우리가 여기서 빨리 탈출하 도록 일본행 비자를 발급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을 불쌍하게 여긴 스키 하라씨는 하 루만 기다려 달라고 하고 본국에 전보를 쳤다

“여기 유대인들에게 비자를 발급해 주어도 되겠느냐?” 고 하니 답신은 NO!였다.  일본이 동일과 이태리와 삼국 동맹을 맺고 있는 중인데, 독일이 원치 않는 일을 일본이 허락할 리가 없었다. 대사관 앞에서 노숙하며 애타게 기대를 걸고 있는 유대인들을 실망시킬 수가 없 어서 조금 더 기다리라고 하고 두번째 전문을 보내어도 역시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 날 또 세번째로 급히 보낸 전문은 비자 발급 여부에 대한 질문이 아닌 강한 어투로 "이들을 여기서 내보내지 않으면 그들은 다 죽으니 허락해 달라." 고 하였으나 역시 노!였다.  

 

(2) 사람의 생명이 더 중하지 아니한가?

그래서 그들을 불쌍하게 여긴 기독교인 스키하라씨는 생각하기를 “사람의 생명이 더 귀하지 아니한가? 어찌 이들이 죽는 것을 뻔히 보면서, 그들을 사지로 내몰 수가 있단 말인가?” 하고 드디어 주님께 기도로 주님의 인도를 구하며 성경을 펴니, (행5:29)이 펴졌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는 이제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이 유대인들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했다. 사무라이 전통 정신을 그리스도인 정신으로 승화시킨 스키하라는 그가 비겁하지 않고 주께 순종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다시 기도하였다. 그리고 결심하기를

“국가의 명을 어겨 나는 처벌을 받는 한이 있어도 내 직권으로 그들에게 비자를 내주리 라” 고 의로운 결단을 내리고, 그들을 불러들여 비자를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비자는 이름 쓰고 싸인만 하는 것 뿐이 아니고 서류를 다 작성하는 것이므로 1인당 서류 작성에 20분~ 30분만 가지고는 되지 아니하므로 서류 작성은 너무 바뻤다.

드디어 그들 50여명에게 비자를 다 내주고 나니, 그 소문을 들은 유대인들이 점점 몰려 와 수백명이 되고 드디어 며칠 동안에 1,000명이 넘게 되고, 나중에는 2,000명에서 3,000명 가량도 넘었다

그래서 부지런히 싸인 하는데, 하루에 200명씩 밖에 싸인을 못하므로 자기 부인 가족과 직원들까지 총동원 되어 서류를 작성하고 자기는 싸인만 하여도 시간이 부족하였다.

너무 바뻐 야간에 잠도 누워 못자고,의자에 앉은 채 잠깐씩 졸며 싸인하였고, 싸인하는 손은 마비되어 감각도 없이, 잘 움직여지지도 아니하였으나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 라 만난을 무릅쓰고 싸인하였다

 하루 200명씩 다 싸인했으나 더 많이 몰려와 지쳐 죽도록 싸인하였다. 그 때 본국에서 전문이 날아와 주 리투아니아 일본 영사관을 폐쇄하니, 영사관 문을 닫고, 독일로 이동 하라는 지시가 왔다,

그래서 모든 행정 조치가 단절되니 더 이상 영사관 업무를 볼 수가 없어서 영사관 문을 닫고 이동할 수 밖에 없었는데 드디어 이사하는 그 D-Day 에 그와 가족이 가는데도 유대인들이 따라왔다. 기차가 정거장에 서 있는 동안에도 기차 안에서 계속해서 싸인해서 창 밖으로 내어주었다.

드디어 기차가 움직이자, 유대인들은 일제히 눈물을 흘리면서 양팔을 들어 큰 소리로

“스키하라 만세”

를 외쳤다. 그 때 스키하라는 다 싸인 못해 준 사람들을 위하여 마지막 결단을 내려 주 리투아니아 일본 영사의 직인(印)을 창 밖으로 던져주며

“ 당신들 마음대로 하라!”

고 외치자 유대인들이 그 도장을 줏어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그 도장으로 가로 싸인 만든 것까지 합하면 스키하라가 구한 유대인은 세대주인 남자들만 약 6,000명이라 하며, 그 딸린 가족들까지 합하면 약 30,000명 이상이라 한다. 그들은 일본까지 와서 2,3일 정도 있다가 다시 홍콩을 통해서 독일군이 없는 유럽으로 갔다

 

(3) 스키하라의 고독한 신세

스키라하씨는 영사직에서 쫓겨나고 그 후 독일은 패망하고 2차대전이 끝나자 서독에 진주한 미군에 의하여 스키하라 가족은 수용소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 미군이 진주 안했으면 유대인 방면 죄로 곧 사형 당했을 것인데 사형 직전 풀려 났다 한다.)

일본에 돌아 왔으나 직장도 없이 불쌍한 처지가 되며 세상은 그를 다 잊었다. ( 그러나 천사들은 물론 그의 모든 행실을 하늘 책에 다 기록하였을 것이다.)  

(4) 스키하라를 찾아라

그 후 이스라엘이 독립하고 6일 전쟁을 승리하며 안정을 되찾은 후 이스라엘 정부는 주 일본 이스라엘 대사에게 “ 스키하라를 찾아내라 ”는 특명을 내렸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독특한 첩보 능력은 드디어 시골에 쓸쓸히 묻혀 있던 스키 하라를 찾아내었는데, 그를 만난 주일 이스라엘 대사 자신이 바로 스키하라의 싸인으로 리투 아니아를 탈출한 유대인들 중 한 사람이었다. 대사는 스키하라를 만나자 말하기를 “ 당신은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저는 당신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자 여기 당신이 발행한 비자를 보십시오”  하면서 오랜 세월 지나는 동안 다 낡은 주 리투아니아 일본 대사 스키하라 발행의 일본 행 비자를 꺼내 보여주며

“ 당신이 발행한 이 비자로 수천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 비자를 귀중한 보물로 간직하며 당신께 감사하며 “홀로코스트”의 쓰라린 경험을 잊지 않고 이스라엘 나라 건설에 힘쓰고 있습니다

앞으로 얼마 안 있어 열리는 이스라엘 건국 기념일에 당신과 당신의 가족을 이스라엘 나라를 대표하여 초대합니다.”

하면서 미리 작성한 이스라엘 수상의 초대장을 주었다  그리하여 스키하라는 그 건국 기념일에 초대 받아 대대적인 전 이스라엘 국가적 환영을 받으며, 건국 기념일에 이스 라엘 대통령으로부터 이스라엘 건국 제1공로 훈장을 받았다
( 그 훈장에는 많은 상금과 그의 한 평생 생활비가 따라 다닌다.)

그 자녀들은 이스라엘 정부에서 공부 시켜주고 장남은 나중에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을 졸업하고 보석 회사 사장이 되었다

스키하라씨는 일본 정부로 부터도 명예 회복이 되었고 더구나 그를 2차대전의 영웅으로 추서하였고 그의 기념관도 있다.

그와 그의 아내 그의 아들 그리고 그의 몇 동료들은 해직 당하여 끌려나기까지 약 28일간 무려 6,000명의 유대인들에게 비자를 발급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서 그는 그와 그의 가족은 많은 어려움을 당했지만 후일 이스라엘 국가가 예루살렘 근교에 유대인 학살 기념관 야드 받셈을 건립하였을 때 이스라엘의 은인으로 그와 그의 가족이 초청받아 오게 된다. 그리고 이 결정에 대하여 후회가 없었느냐는 한 유대인 기자의 질문이 있었을 때 가족을 대신하여 스키하라의 아들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저희 아버지께 말씀하셨고, 저의 아버지와 저희들은 기꺼이 순종했을 따름입니다. 아무런 후회가 없습니다. 우리를 통해 당신들(유대인들)을 인도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이 또한 우리의 남은 날도 인도하실 것을 믿고 있으니까요”

그는 일본으로 돌아온 몇년 후 이스라엘 정부에서는 그에게 또 다시 다른 훈장을 추가로 재차 수여하려 하였으나 그가 몸이 약하여져서 이스라엘로 가지 못하고 주일 이스라엘 대사가 그에게 와서 훈장을 전달하였고 그로부터 얼마 후 죽었다  자아 희생은 예수님의 정신이다

사랑은 자아 희생이 없이는 나타나지 않으며 주님의 십자가처럼 자아 희생은 많은 사람 의 목숨을 구하니 사랑은 하나님 나라의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요  우주 행복의 대원칙 이다

출처:
 "예수가 좋다오"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죄를 참되이 보속하며 양심에 평안을 준다/ 존 칼빈

 

 

그들(카톨릭)은 말하기를, 죄 사함과 화목이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 속에 들어갈 때에 단번에 일어난다고 하고, 세례를 받은 후에 죄를 범하면 다시 보속을 통해서 회복해야 한다고 하며, 교회의 열쇠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의 피가 아무런 효력을 발생하지 못한다고 하니, 그들의 패역함이 어느 정도인가를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이와는 전연 달리 말하고 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요일2: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라”(요일2:12). 그는 신자들을 향하는 말하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죄를 위한 화목 제물로 제시하면서 거역을 당하신 하나님을 진정시킬 수 있는 다른 보속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단번에 너희와 화목되셨으니, 이제 너희 스스로 다른 수단을 구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영원하신 대언자로 제시하며,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심으로 우리를 아버지의 사랑에로 회복시키신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야말로 죄를 사하는 영원하신 화목 제물이시라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한 말은 언제나 진리이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곧, 다름 아닌 오직 그가 죄를 없이 하시는 것이요, 그가 홀로 하나님의 어린양이시요, 그가 홀로 유일하신 속죄 제물이시요, 화목 제물이시요, 유일하신 보속이시라는 것이다. 죄를 사하시는 권세와 능력은 아버지께 속한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또 다른 각도에서 제시되고 있다. 곧, 우리가 지고 있는 형벌을 그 스스로 담당하셔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우리의 죄책을 씻어버리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속죄에 우리가 참예하게 될 것이다. 다만 자기 자신의 보속으로 하나님을 진정시키려 하는 자들이 그리스도께 있는 영광을 빼앗는 일만 없다면 말이다.

 

보속의 원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빼앗고 양심을 괴롭힌다.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곧, 그리스도의 영광을 순전하게 지키며 그 영광을 흐리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양심으로 죄 사함을 확신하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우리의 죄악을 담당시키셨고(사53:6) 그가 맞으신 채찍으로 우리가 낫게 하였다(사53:5)고 말씀한다. 베드로는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2:24). 바울도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셨고(롬8: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셨다(갈3:13)고 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짐을- 그 저주와 그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과 사망의 형벌과 함께- 친히 담당하시고 제물로 드리신 바 되셨을 때에, 그의 육신 속에서 죄의 권세와 저주가 죽임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처음 죄를 씻은 이후부터는 우리 각자가 회개에 합당한 보속을 드리는 정도만큼만 그리스도의 고난의 효능을 느낄 수 있다는 그들의 거짓된 이론 같은 것은 여기서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죄를 범할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보속을 의지해야 할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리고 양심을 편안하게 하는 면에 있어서도, 과연 보속을 통해서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에 과연 그 사람의 양심이 편안해지겠는가? 과연 어느 정도 보속해야 충분하다는 확신을 얻게 되겠는가?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과연 긍휼하신 분인지에 대해서 항상 의심하게 될 것이고, 언제나 근심에 싸이고 언제나 두려워 떨게 될 것이다.

 

사소한 인간적인 보속을 의지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가볍게 여기며 죄의 그 큰 짐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적절한 보속을 통해서 몇 가지 죄를 속한다 치더라도, 나머지 무수한 죄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겠는가? 그 죄들을 다 보속하자면, 평생을 죄를 보속하는 데 소비한다 해도 수백 번의 인생을 살아도 모자라지 않겠는가?

 

또한, 죄 사함을 선언하는 그 모든 성경의 말씀들은 세례를 받기 위해 교육 받는 자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교회의 품에서 양육 받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높이 기리는 사신의 임무, 즉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5:20)고 선포하는 일은 외인들에게가 아니라 이미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보속과는 작별을 고하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탁하게 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 자기와 화목되”게 하셨다(골1:20)고 말하는데, 그 사실은 우리가 세례를 통해서 교회에 받아들여지는 순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평생토록 지속되는 것이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중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155-158

 

 

출처: 청교도의 길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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