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무드 처세 17계명

       

       

      1. 지금 힘이 없는 사람이라고 우습게 보지 마라.

      힘 없고 어려운 사람은 백번이라도 도와줘라. 

      그러나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은 경계하라.

      2. 평소에 잘해라. 평소에 쌓아 둔 공덕은 위기 때, 빛을 발한다.

      3. 내 밥값은 내가 내고 남의 밥값도 내가 내라.

      남이 내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마라.


       

      4. 고마우면 고맙다고, 미안하면 미안하다고 큰소리로 말하라.

      마음으로 고맙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사가 아니다.

      남이 내 마음 속까지 읽을 만큼 한가하지 않다.

      5. 남을 도와줄 때는 화끈하게 도와줘라. 도와주는지 마는지

      흐지부지하거나 조건을 달지 마라. 

      괜히 품만 팔고 욕만 먹는다.

      6. 남의 험담을 하지 마라. 그럴 시간 있으면 팔굽혀펴기나 해라.

      7. 직장 바깥사람들도 골라서 많이 사귀어라.

      직장사람들 하고만 놀면 우물 안 개구리가 된다.  

      직장 그만두면 고아가 된다.

      8. 불필요한 논쟁, 지나친 고집을 부리지 마라. 직장은 학교가 아니다.

      9. 회사돈이라고 함부로 쓰지 마라. 사실은 모두가 다 보고 있다.

      10. 가능한 한 옷을 잘 입어라. 외모는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

      11. 남의 기획을 비판하지 마라. 자신이 쓴 기획서를 떠올려봐라.

      12. 조의금을 많이 내라. 사람이 슬프면 조그만 일에도 예민해진다.

      13. 약간의 금액이라도 기부해라. 마음이 넉넉해지고 얼굴이 핀다.

      14. 수위 아저씨, 청소부 아줌마, 음식점 종업원에게 잘해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경계하라. 

      나중에 그대가 어려워지면 배신할 사람이다.

      15. 옛 친구들을 챙겨라. 새로운 네트워크를 만드느라 가지고 있는

      최고의 자산을 소홀히 하지 마라.

      16. 너 자신을 발견하라. 일주일에 한 시간이라도 좋으니

      혼자서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라.

      17.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지금 그대가 살고 있는 순간은 나중에

      그대 인생의 가장 좋은 추억이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지혜의 창" 중에서


알곡과 가라지 비유 / 김홍전 목사

 

성경: 요일2:18-29절

 

제목: 알곡과 가라지 비유

 

 

오늘날에 우리는 마태복음 13장에서 제둘째번에 기록된 비유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배웠는데, 이 “알곡과 가라지”비유 가운데서 가라지라고 하는 것이 순전히 이세상에 예수를 믿는 사람과는 아주 다른 불신자의 세계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알곡을 뿌려 놓은 위에 덧뿌려 놓은 알곡과 가장 근사하게 보이는 것들로, 또 알곡의 생장에 같이 뿌리를 박고 자라나는 것들로서 그것이 가라지가 그 우거진 숲이 알곡을 해할 여러가지 우려가 있는 까닭에 그것을 주인의 종들이 “뽑으리이까”하고 물을 때 주인은 “그만 둘다 자라게 두었다가 추수 때 추숫군들을 시켜가지고 가라지를 먼저 불사르기 위해서 뽑아서 단으로 묶을 것이다”

 

 

그 가라지에 대해서 주께서 이 비유에 대한 해석을 하시면서 거기에 무슨 이야기를 하셨는고 하니 가라지를 말할때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이를 갊이 있으리라”(아 13:41,42)

  이렇게 해서 결국은 주께서 이 역사의 종말에 심판을 하셔서 그 초자연적인 위대한 심판에 의해서 이들을 다 전부 불사뤄서 비로소 교회를 정화하기까지는, 이 땅위에는 참것과 거짓것이 같은 모양을 가지고 뒤섞여 가지고 역사는 진행되어 나갈 것이니라.

  여기서 우리가 아침에 생각한 것은 배교의 중요한 한 상태의 하나가 참되이 진리를 속으로 받는 것이 아닌 가라지가 - 그 소종래를 따지면 그 악한 자 호 포네로쓰가 뒤에 뿌려놓았던 이 가라지가 - 가장 알곡인 것 같이 나타나서 얼마 동안 자라지가 그 싹이 나고 결실을 할 때쯤되면 비로소 그 가라지의 본명을 발휘하는 것아리고··· 이렇게 해서 한동안 같이 지내다가 나중에는 그것이 이색적인 것, 이질적인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는 이야기 올시다.

 그것이 누가 뿌린 것이냐하면 <그 악한 자> 곧 마귀가 뿌린 것이라··· 또 “가라지는 마귀의 자식들이요” 그랬어요. 이것은 보통 “이세상 사람이요”하는 말보다도 현저하게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에게 대척적인 위치에, 아주 반대되는 위치에 서 있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어요.

  그 성격이나 목적이나 그 전체의 존재의 이유가 왜 하필 넓은 세상에 다른 데 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어 나가는 역사의 현실속에 들어와서 그것을 같이 붙들고 나라는 체 하면서 항상 작해를 하느냐 하면, 이것은 자체가 그악한 자, 즉 좋은 씨를 뿌리시는 인자에 대치해서 스스로 인자의 그 천국의 자식들을 뿌려 놓은것을 모방해서 자기의 자식들을 뿌리는 마귀의 소치이니까 그렇다····

 

 

이렇게 여러가지 다른 면에서 보는 것 보다도 그들이 이세상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운영해 나갈 때에 그 위치나 그들의 소행이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활, 모든 결과가 결국은 악한 자의 자식으로서 가라지로서 알곡에 해를 끼치고, 또 사람들로 하여금 알곡인지 분별할 수 없이 스스로 알곡의 위신을, 진리성을 파괴하고 혼탁하게 하고 사람들에게 미혹을 주려고 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거요. 이런 것이 또 하나 중요히 배교의 증상, 혹은 현상 가운데의 하나인데···· 여기와 [요한일서 2:18]

 

 

부터 오늘 저녁에 읽은 말씀을 대조해 보면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 그리스도가 이르갰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 처럼 지금도 많은 적 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건 마지막에 오는 그 한 적 그리스도, (즉)안티그리스토쓰라는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릇 적 그리스도의 신과 본질을 가진 자들은 어떤 한 사람만 종말에 환연히 홀연히 나타날 것이 아니라 벌써 사도요한이 있던 일세기부터 그 인물이다 있었다.

 

많은 적 그리스도, 한 사람이 아니라 많은 적 그리스도가 지금 여기 있다.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요일 2:18) 이 마지막 때라는 것은 역사의 종말인 줄 아노라 하는, 소위 역사의 맨 종점, (즉)터머너쓰라 하는 의미가 아니고, 여기 마지막 때하는 특수한 성격을 가진 역사 서기를 가르치는 것으로서 이 후라 하는 말에도 그 특수한 많은 시기, 긴 시기를 보이는 바가 있지만 적 그리스도적인 그 패괴와 또 역사의 종극적인 성격을 띤 시간이 그것이 1000년이든지 2000년이든지 계속 할 때라는 말로 표시하는 것 뿐이요.

 

 

그것이 말하는 그 터미너스 혹은 에스카토스, 역사의 중점을 늘 의미하는 것 보다는 이것이 한 마지막의 시기를 시기의 그 정격을 띤 그런 역사 시기다 하는 것을 가르키는 것이 올시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거 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 2:19)

 

 

그러면 여기 많은 적그리스도가 있다고 했는데 그 많은 적그리스도라고 하는 자들은 원래 하나님의 참자녀들과, 거룩한 나라의 시민들과 관계없이 바깥에서 일어나서 한 세력을 형성해 가지고 쳐들어온 것이 아니요. 원래는 안에 있었는데, 안에 있다가 자기가 싹이 나가지고 결실할 때쯤 되니까 마침내 스스로 자신의 그 정체를 나타내면서 떠나 다 하는 것이올시다

 

 

그러니까 소위같이 있다가 나간 자도 크게 적그리스도라 하는 말로 표현할 만큼 강렬하게 적그리스도의 성격과 세력을 표시하는 것이요 이말은 달리 뒤집어 보면 적그리스도의 성격이나 그 세력은 반드시 교회의 바깥이나 하나님의 자녀 바깥에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원래 안에 있다가도 나가는데 안에 있다 나간 것을 자세히 살펴 보니까, 알고 보니까 정체는 적그리스도다. 적그리스도의 성격과 그 세력을 그대로 가진 자들이다 하는 것이 올시다.

 

다른 말로 말하면 교회안에 적그리스도의 성격과 세력이라는 것은 주저 앉아서 거기에 보금자리를 치고 자랄 수 있는 것이다. 하는 말이요.

 

 

그리고 그런 세력과 성격이란 것이 보금자리를 치고 자라나는 그교회는 그러는 동안에 그만큼 적그리스도적 성격이나 그 세력이 교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요. 적그리스도의 세력이나 그허한 성격을 가진 자들이 교회에 ?아 있어도 교회는 조금도 손상을 안 받는다는 법은 없어요.

 

그가 또 교회안에 있는 동안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데 주저 앉아 있는 것은 아니어요. 있을 만한 곳이니까 있는 것이요.

 

교회는 적그리스도적인 성격이나 세력을 가진 자들도 있을 만한 곳으로 여기고 얼마만한 동안은 있는 것이니라 그 얘기요.

 

그러면 교회에 그러한 자들이 강렬한 성격으로 뒤흔들고 나가면 많은 수가 거기에 영향을 받아 가지고 이끌려 나가기 쉬운 것이요. 이렇게 해서 배교의 현실의 하나는 별다른 세력과 이질적인 작용이 교회안에서 움직여서 교회를 찢어갈기기도 하고 교회의 성격을 변질도 시키고 그래서 발생하는 것이요.

 

 

배교라는 문제는 항상 중요한 문제로서 1972년에 들어서 우리는 세계의 교회, 기독교계의 정세의 전진이라는 것을 더 주시를 하면서 우리 교회의 사명이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할 때 그 문제를 심각하게 주의깊게 연구하는 것이 좋은 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동안 때때로 이 배교라는 사실과 관련이 된 하나님의 말씀의 도리를 때때로 이야기 한 것이요. 지난 주일 저녁에는 씨뿌리는 비유 가운데 [돌밭에 뿌리운 씨]에 대한 얘기를 할 때 그 돌밭에 뿌리운 씨에 대한 주님의 해석은 처음에는 잘 자라고 다른 옥토에서 난 씨하고 조금도 차별이 없이, 구별을 가질 수가 없이 좋은 씨였지만, 좋은 나무였지만은 그러나 얼마 지난 다음에 뜨거운 햇빚이 비취듯이 말씀의 연고로 인하여 환란과 시련을 만날 것같면 그만 “말씀을 포기하고 배반하는 자요”(눅 8:13) 그래서 거기에 배교의 중요한 이유 하나를 주께서 말씀하셨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오늘은 우리가 낮에 본 그 [가라지와 좋은 씨]의 그 비유의 몇가지 문제점과 더불어서 [가라지]라 할 때 가장 교회적인 그 자태를, 모양을 잘 가진 자로서, 교회적인 모양을 가지고 많은 사람에게 그럴 듯한 영향을 주는; 그런고로 단독적이 아니고 많은 종자, 추종자들을 만들어 내는 그 사람이, 그런 사람들이 갑자기 본색을 드러내 가지고 - 그건 본색을 드러내기 아니할 수 없는 그런 시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요.

 

 

차츰차츰 해 나가느라면 저도 그냥 할 수는 없고 무엇을 결정하고 무엇을 행동하고 무엇을 해 나가야 할 테니까 아무래도 시간이 가는 동안에 더욱 발전하는데 따라서 그 정체가 차츰차츰 명확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란 말이에요 - 났을 때에는 거룩한 교회의 코유니온가운데, 그 교통가운데들어 있을 수가 없는 까닭에 그 세력을 별다른 그 장소를 찾아서든지 별다른 형식을 취해서 그대로 수립하고 나가는 것이요.

 

 

그러면 그것은 교회라는 이름을 포기하고 나가는 것은 아니요. 그러나 그것도 교회는 교회요. 그리고 그것은 정치적으로는 교묘하게 항상 큰 교회와 관련을 가지는 것이요. 즉 교파라든지, 그렇지 않으면 교회의 큰치리회와 관계를 가지고 나가게 되면, 여기서 오늘 아침에 이야기한 것과 같이 많은 진과 그 비진리가 뒤섞이는 현실이 그대로 존재하는데, 사도 요한은 그러한 사람들을 지목해서 적그리스도라고 그랬어요.

 

 

적그리스도라고 하는 만치 강렬한 반 그리스도성격을 가진 것이다고···이것은 그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정도에 있는 것은 아니요. 강력하게 그리스도에 반대하는 성격을 가졌어요.

 

적그리스도라고 할 때에는 우선적으로 제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의 그리스도인 점을 예수의 그리스도인 점을 부인하는데 있는 것이요.

 

 

다른 말로 말하면 정당한 기록론을 항상 외곡시키고 부인하는데 있어요. 여기서 이 적그리스도의 문제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말씀을 할 때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요일 2:22) 그래서 나사렛예수 그 분이, 그분이야 말로 참 그리스도다 하는 사실을 부인하는 자가 이것이 거짓말을 하는 자다···

 

 

둘째는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요일 2:22) 여기는 또 일단 더 뛰어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결론을 내리랄 것같으면 그러면 먼저 소급해 올라가 가지고 신론에 올라가서는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으로서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과 아드님되시는 하나님과 성신이신 하나님이 세 위로, 즉 세 인격으로서 계시나 일체로 계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 아드님 되시는 하나님이 그 인격을 가지고 사람의 본질을 취할 때에는 성모 마리아에게서 취하사 당휘에 - 또한 사람이시요, 하나님으로 계셨다 하는 사실 그리고 그런 그 분이 잊[는 땅위에서 성경이 예언한 것과 같이 메시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이로서, 즉 중보자로서 사람과 하나님사이에 거룩한 직분을 가지셨으니; 이 중보자로서의 거룩한 직분은 기름을 부은 자로서의 제사장이요 왕이요 선지자다.

 

 

이렇게해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 하마시야 곧 메시야 크리스토스란 말씀이요. 그가 누구냐 하면 그가 이 세상에 나오셨을 때 나사렛에서 나온 예수라는 이름으론 세상에 거하셨더니라. 그 분이 곧 그다 그 얘기요.

 

그런데 그 분이 우리가 기대하는 그 메시야고 또 제이위되시는 하나님이 친히 성육신하시사, 땅에 사람의 본질을 취하시고 거룩하신 로고스의 인격을 가지고 땅에 임하셨다는 그 사실을 부인하면 그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

 

 

즉 신론을 별다른 것으로 부인해 놓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적그리스도니라 그것이 올시다. 그런고로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요일 2:23) 이 말은 아주 중요한 말이어요,

 

 

모두다···· 어떤 말이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는 말이 없지만 기독론을 할 때와 우리 에수 믿는 도리의 가장 대본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시냐”는 문제요, 늘····· 그냥 예수를 믿는다 하지말고 “그리스도는 누구시냐”하는 문제인 것이요.

 

 

그런데 이 그리스도를 논할 때에 그리스도를 논하려면 필연적으로 신론을 해야 하는 것이요. 하나님은 그러면 누그시냐? 어떤 하나님이시냐?

 

만일 유일신의 하나님만을 생각할 때는 그리스도는 생각할 수가 없어요.

 

그런 경우에 메시야는 성경이 구약에서부터 차례차례 바로 가르친 그 메시야가 아니고 구약을 읽되 오해해 가지고 읽었던 유대 사람들의 교법사나 바리새인들의 생각과 같은 메시야관을 가지게 되는 것이요.

 

 

그것은 더떤 메시야냐하면 하나님은 일신이시요, 유일신이시요 메시야는 하나님의보내심을 받은 초연한 인물로 위대한 인물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는, 혹은 그 직에서 건져 내신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모든 기반 가운데서 겉져 내시는 그 분이다···· 그런고로 그들의생각에서는 메시야는 사람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왜곡되고 일부적인 사람들, 그러면서 교법사라고 하고 바리새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생각에는 그것이 있었다. 그말씀이에요.

 

 

성경을 우리가 주의해서 읽을 때 성경 가운데 [메시야는 그냥 사람일 수가 없다]는 그 결론을 못 얻는 것은 아니요. 그러나 그렇게 갖지 않고 저들은 괴이한 - 메시야는 아무리 위대해도 하나의 인물이다 하는 - 생각을 하게 됐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특별히 바벨론 포로 이후에 그 우상 섬긴 것 때문에 큰 징벌을 받았다는 것을 깊이 아는 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다시는 우상을 섬길 수는 없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하나님 없고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시다. 독일 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독일성만을 생각했지, 하나님의 완전성이라는 데서부터 추출해서 하나님은 삼위로 게시지 아니하면 아니되겠다는 거룩한 계시와 거룩한 도리를 생각해낼 길이 없었단 말씀이요.

 

 

그런고로 그런점에 있어서 이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은 유일한 하나님으로서 여호와요. 또한 하나님의 모든 종들, 여호와의 모든 종들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특출한 종의 사상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특수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과연 메시야는 종의 형상을 입고 나오셨어요. 그런 의미에 있어서 여호와의 종이란 말로 쓸 수 있는 것이요.

 

 

그리고 종의 형상으로서 어떻게 봉사했는가는 성경에 자세히 그러한 관점에서 그를 기록했어요. 여러분은 복음서 가운데 마가복음은 종으로서의 그 임무를 특별히 그리노라고 한 것 아니에요? 그런데도 우리가 하나님의 그 완전하신 위치 가운데서 볼 때에는 참으로 이스라엘을 건지시려면, 그리고 참으로 구약의 약속하고 예언한 모근 사실들을 이루려면 그건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을 알아야해요.

 

 

그것은 죄를 속하는 것, 또 “저가 대신 우리죄를 짊어지시고, 우리 약한 것을 짊어지시고, 우리의 맞을 매를 대신 맞으심으로 우리를 고치고 성하게 하셨다.”(이사야 63:4,5)는 사실은 사람으로 한 것은 아니요.

 

 

위대한 엘리야나 이사야와 같은 위대한 인물이, 다니엘 같은 위대한 인물이 다시 회생해서, 부생해서 왔다고 하는 것은 아니에요. 이러므로, 그런 점으로서 구약의 메시야관의 그 이해의 문제가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침침한 흑암 속으로 자꾸 들어가게 한 것이올시다.

 

 

여기서 우리가 또한 주의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도 그렇게 메시야관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하사람에 불과하다. 도무지 하나님일 수 없다고 모두가 일체로 믿는 것은 아니에요. 어떤 초연한 인물이라는 것을 막연하게 믿고 있던 많은 사람이 있었어요. 그런 사람들에게 메시야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이다하는 점을 또 생각지 못할 것은 아니였어요.

 

 

그러나 대체로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할 때에도 반드시 성경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쓸 때에 생각하는 그리스도의 신성, 신의 본성이라는 것을 붙여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서는 그가 초연한 인물이어서, 말하자면[한 분의 ㅅ긴이다]하는 사상이 없는 것은 아니요. 이런 사상은 헬라에도 있던 것이요.

 

 

데미-갇 그래서 사람이요 신 그리고 기독론에 대해서 기독의 그 두개의 본성이 한 인격에서 충분하게, 충전하게 나타나는 그 신비를 설명해 보려고; 지난번 말 한것과 같이 에수님이 하신 업적을 보아서 그것은 초연하고 위대해서 결국은 그에게는 신이 계시다하는 식의 생각··· 그러면 사람이 신을 내포하고 계신다는 이야기올시다.

 

 

이것은 물론 그대에 와서늬 신학상 가장 영향을 준 기독론의 하나요. 릿출이라는 사람이 특별히 강하게 주장했다고 저번 번에도 말씀드렸는데··· 이런 것들을 주의해야 할 것은 항상 그러한 사상이 어느 때는 더강하게, 어느 때는 약하게 항상 돌아다니는 것이요.

 

 

예수님께 대한 생각을 할 때 역사적기독을 역사적 그리스도를 우리는 깊이 연구를 해야 한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는 위대하고 그는 신이지만 그러나 먼저 그는 사람이다 그 ?기요. 역사적 기독, 역사적인 그리스도, ㅁ날을 들어보면 그럴듯하고 좋은데 예수님은 그러면 역사적인 그리스도라는 관점에서 이해하여야 한 분자로서의 의미를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요.

 

 

그러나 예수님은 역사적인 그리스도인 동시에 초연하신 선재의 그리스도요 동시에 내재의 그리스도인 것이요. 이런 것들을 종합해서 늘 생각해야지 부분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유일의 하나님으로 생각할 때에는 그러면 메시야는 하나님과 동렬에 놓을 수가 없는 것이요. 그건 참람인 것이요.

 

그런 까닭에 메시야는 아무리 위대해도 그건 하나님 아래에 있는 분이다.

 

 

이렇게 해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완전히 같은 권리의 같은 본질과 같은 영광을 생각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있고 그 아래 아들이 있다 하는 생각···· 그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신비한 요어가 거기에는 적용치않고 하나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그 아주 초연한 인물이다 하는 것이올시다.

 

 

이런 말들이 다 알송달송한 말이 되는데 이런 것을 누가 주장?느냐? 적그리스도가 주장한 것이다 그거요. 적그리스도의 주장한 것은 그렇게 현묘하다. 그래서 자칫하면 끌려 들어가기 쉬운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반대한다 하는 이것이 적그리스도인데,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그리?반대하고 자기가 그 그리스도의 취한 그 위치를 대신 취한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아주 성격에 뚜렷한 점이올시다. 그런데 그러한 적그리스도가 먼저 하는일은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르리스도니라” 그랬어요. 성경이····

 

 

“만일 사람이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사람이 신의 존재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 할 때에도 신의 존재를 그냥 막연한 가운데서 승인할 때는 적그리스도가 시인하는 정도의 신을 시인할 수 있는 것이요. 그건 뭐냐하면 신은 계시다.

 

 

이론상 적그리스도가 시인하는 것이요. 적그리스도가 진짜로 마음으로 시인하는 것은 물론 삼위일체의 신성한 하나님을 자기가 모르는 것은 아닐것이요.

 

차라리 마귀도 한 분이신 하나님을 알고 믿고 떠는 거요(약 2:19). 그렇지마는 이 세상에 베푸는 이론으로서는 신은 계시냐 하면 신은 계시다. 그는 한 분이신 신이다.

 

 

그러나 신 이외에 다른 신은 없는 것이니라. 그리고 신은 한 인격으로서 나타나 계신 분이다. 거기까지, 즉 인격신까지도 시인할 수 있는 것이요.

 

그러면 인격신까지 시인하지만 삼위의 신을 시인하지 않을 때 적그리스도적이다. 그것이요. 여기서··· 교회안에서 그런 것을 그렇게 생각할 때 “너는 적그리스도다” 이것이 사도 요한이 엄격하게 재단한 말이에요.

 

 

그리고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철학적인 한 ?론에 불과한 것 같지마는 실지로 알고 보면 적그리스도의 이론이다 그거요. 교회에서 적그리스도가 나올 수 있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 얘기요. 왜 그러냐면 기독론이 명백하지 아니할 때, 신론이 그렇게 모호할 때는 적그리스도는 얼마든지 도량한다. 그 말이어요.

 

 

이것이 무서운 사실이요.

 

그래서 아직 으때에 기록론이나 신들에 대해서 확연한 신학적인 이론으로 구체적인 개념을 세우기 전에 - 개념이 없다는 말은 아니에요. 구체적인 개념을 문자화해 가지고 확실히 신학화하기 이전에 - 벌써 노쓰티시-즘 같은 것이 그때 횡행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과 인성의 그 신비를 이리저리 설명을 하고 싶어서 누구는 두개의 인격을 가졌다는등, 그렇지 아니할 것 같으면 가현설 가현 신인데 신가운데에도 아마 차등된느 신일텐데 그가 사람으로서는 가현한 것이다하는 설을 주장을 하고···· 그 제일세기에 돌아다니든 여러가지 이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나의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오늘날의 강렬한 것은 무엇보다도 역사적인 그리스도를 이해하자는 것이 강렬한 것이요. 오늘날 신학계에 강렬하게 세계에 떠들어지는 중요한 문제의 기독론의 그 대체를 볼 것 같으면, 역시 역사적인 그리스도라는 점과 동정녀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의미없다는 설이올시다.

 

 

동정녀에게서 탄생했다는 것이 의미없다는 것은 동정녀 탄생을 믿었던 빨트와 그의 종자의 구릅가운데에 그런 사람들이 다 용인 됐다 그 말이요. 여러분, 한국에도 왔다간(다녀간) 부른너같은 사람은 동정녀 타생 같은 것은 그것은 일이 없는 이야기다 그것이요.

 

같은 빠티안이면서 그 사람은 동정녀탄생 같은 것은 일없다고 해요. 이렇게 해서 그들도 그 한 빨티안이면서 기독에 대한 생각이 반드시 통일되어 있는 것은 아니요.그러나 오월동주를 하는지는 몰라도 같이들 가는 것이요. 그것을 용인할수 있을만 하다. 그 얘기요.

 

 

이런 것은 뭐냐하면 그이들이 이론으로써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트리니테리안들이요. 그렇지만 그의 삼위일체론과, 또 예수 그리스도론은 자꾸 분리되어 있는 것이요. 유리되어 있단 말씀이요. 이렇게 해 가지고 만일 하나님께 대한 그 이론이라는 것이 정당하지 않고 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친대로 정당하게 유지되지 아니하면 그건 참 무섭게 적그리스도적으로 변한다는 것이요. 세상에 신에 대한 이론이 많습니다.

 

 

여러가지 신론이 많아요. 혹은 지고의 선이라고 하는 철학적인 관념도 있는 것이고, 혹은 유신론적인 관점에서 하나의 신이 계시다하는 생각도 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신의 계신 여러가지 것을, 소위여러 논증에 의해서 자꾸 증명해 보려고 하는 것이요. 스콜라철학자들이 중요히 그런것을 했어요.

 

 

삼위일체의 문제를 논하는 것보다 오히려 신의 존재론을 해 왔던 것을 여러분 아시지요?! 특별히 스콜라 철학을 가지고 있던 신의 존재의 이론들이 그렇다 말씀이요.

 

 

그러나 그렇게 해서 시인하고 주장하는 신이 삼위일체의 신이요. 그 삼위일체 신가운데 제2위되시는 그 로고스되시는 분이 그 인격을 가지고 육신을 입었다는 사실까지를 명확하게 믿지 아니할 때는 그 신론은 적그리스도가 지지하고 있는 신아라 그 말이요.

 

 

적그리스도의 신론이 된다는 말이요. 그것을 거기까지 수긍할 수 없이 그냥 교회안에서 고려중이라든지 생각중이라든지 하다가 “그럴수가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로서 분리해서 생각을 하자. 그가 신이라고 하더라도 좋다. 그러나 먼저 시작은 그는 위대한 인물이다”하는 데서 시작을 한다면 이런 릿츌리안적 기독론이라든지, 그로인한 신사상이라는 것은 그것은 적그리스도적인 것이다 그거요. 그것을 무섭게 적그리스도적인 것이다고 그랬어요.

 

 

둘째의 신의 존재에 대한 생각을 사람들의 여러가지로 할 때 그것을 억지로 증명해 가지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요. 성경은, 한번도 “신은 존재하시나라, 존재하는 신을 믿어야 한다. 신은 이러이러하니까 존재하니라”고 여러분, 신의 존재의 논증을 한 일이 없지요! 스콜라 철학자들은 했어요, 그러나 성경은 그런일 없어요.

 

 

성경이 맨 처음에 시작하는 말은 하나님은 계시다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서 그가 지으신 만물을 보아 알 것이고 각 사람에게 핑계할 수 없이 그것을 계시되는 것이다.(롬 1:19,20) 사람의 그 본성에 의해서, 그 네이쳐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이고, 또 하나님의 지으신 바깥에 있는 네이쳐에서 그런고로 우리안에 있는 본성과 우리 바깥에 있는 자연계에 위해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묘하신 신성, 그 본성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주장인 것이요.

 

 

사람들은 말할때 “아! 사람이 신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거짓말인 것이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까닭에 아무리 부패해서 타락해서 이즈러졌더라도 사람이라고 말을 붙일 수 있는 이상 신을 부인 못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그는 핑계할 수 없느니라” (롬 1:20, 롬 14:11,12, 고후 5:10 묵 20:12, 행 10:42) 그랬어요. 핑계할 수 없는것이니라···· 이런데 신의 존재부터 증명하려고 나선다면 벌써 틀린 생각이다. 그 말이요.

 

 

그러나 거대한 무신론이 이론으로 지배하는 것이요. 이론으로··· 그런데 이 무신론의 이론에 대해서 사람들은 신의 존재에 대한 자연적인 경향도 불구하고 이번데는 적극적으로 부인하는 이론을 만드는 것이요.그러니까 신의 존재의 그 부인의 적극적인 이론이라는 것은 그것 자체가 신의 존재의 증명의 하나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요. 계시니까 자꾸 부인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 말이요.

 

 

그런데 이런 현실가운데서 신께대해서 바로 파악하게 가르치려면 무얼 먼저 가르치느냐하면 “아들”을 가르치는 것이요. 아들을··· 그런고로 여기 말하기를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아들을 가르쳐요. 즉 아드님 되시는 그분을 가르치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부터 시작하여도 괜찮아요. 그러나 사람에게서 시작하라는 말은 아니요.

 

 

예수그리스도에게서 시작하면 그리스도가 도우신 줄 알면 그 다음에는 천부는 누구신줄 아는 것이다. 아버지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적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것이요. 다른 말로 말하면 분리해 놓는 것이다. 말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시인해요. 하나님도 시인해요.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한다. 그말이요. 그 관계를 ···· 이렇게해서 적그리스도적인 사상이 차츰차츰 들어오는 것이요.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되, 역사적인 그리스도로 안다는 이러한 설에 귀를 기울여 가지고 거기에 주저앉으면 안되는 것이요···

 

 

역사적인 그리스도의 위대성에 대해서 우리는 십분 연구해야하는 것이요.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께서 그 로고스의 인격을 가지고 사랑을 취하시고 나오신 후에는 그가 사람에게 나와서 사람과 동류가 되사 사람의 모든 연약한 것을 짊어지시기 위하여 아담의 범죄아래에 인류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 약점을 당신 스스로 취하고 나오셨다. 그 말이요.

 

 

강건하고 아주 도무지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 가장 초연적인 인간으로 나온것이 아니라 “죄만 없으시지 모든 점에 있어 우리와 한결같이 같으시니라”(고후5:21,히7:26,요일3:5) 그러기 까닭에 그런 의미에 있어서 그는 역사의 제한 가운데 나오셨고 순전히 인간성인 그 방면에서만 볼 때에는 당신은 알지 못하는 것이 있는 것을 이야기 하시는 것이고 당신은 한꺼번에 훌쩍 날라서 천리를 가는 것이 아니고 한 발씩 한 발씩 걸어 가지고 사람들이 보통 걷는 걸음에 의해서 가는 거리를 가는 것이고,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먹어야 살았고, 그리고 사람들이 자는 잠을 자고 피곤을 그는 회복하시고···· 이렇게 사신것이요.

 

 

그러한 까닭에 이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상이란 것이 잘 분명하게 들어가요. 들어가 가지고 그 다음에는 그의 가지고 있는 그 초연한 신성에 대해서 바로 알 때 거기서는 필연적으로 성삼위에 대해서 우리는 확신을 해야 하고 성삼위의 깊은 이론을 다 아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나 삼위, 완전하신 하나님으로 삼위, 삼위의 하나님이 아니 계실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요.

 

 

하나님을 가만히 생각할지라도 하나님의 그 무한성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그 영원성이라는 것이 동시에 하나니므이 완전성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완전하려면 하나님의 그 발휘하는바 속성들이 완전해야 한다.

 

발휘하는 속성이 완전하려면 발위하는 속성이 완성하기 위한 그러한 완전한 대상을 늘 요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어떠한 속성이라는 것은 반드시 대상이 있고서 비로소 발휘되고 완선하는 것이요.

 

 

예를 들명 여러분이 사랑을 한다면 사랑을 마음에 품고만 있어가지고는 사랑이 안되는 것이요. 사랑은 그 발휘될 대상이 있어 가지고 사랑이 발생하는 것이고 사랑은 완성하는 것이요. 그러기 까닭에 참된 사랑의 덕이라는 것이 완성되려면 사랑을 하는 사람이 있고 받는 사람이 있어야 한는 것이요. 하는 사람만 있고 받는 사람이 없으면 그 사랑은 어디 갈데 없는 것이요. 완성이 안되는 것이요.

 

 

그렇기 까닭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할 때 완전한 사랑을 가진 하나님께는 필연적으로 그 사랑의 대상의 인격이 늘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요.

 

그러고 그분도 또한 그렇게 완전하신 거요. 그분이 불완전한 대상이 아닌 것이요.

 

불완전한 대상에 대한 사랑이란 것은 그만큼 제한된 사랑이고 완전한 사랑이 유지되는 것이요.

 

 

이렇게 해서 주는 이가 있고, 받는이가 있고 그것을 증거하는 이가 있고 그 사실에 대해서는 그것을 방종하는 이가 있고···· 이렇게 함으로써 반드시 셋을 요구하는 거요.

 

그래서 히브리 사상에는 증거할 때에도 두 사람의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요.

 

 

한 사람이 있고 양쪽 가운데 하나가(한 사람의) 증거자가 있어야 해요. 그래서 두 사람이 증거하면 된다. 즉 세 사람이 늘 거기 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요. 이것은 간단한 우리의 이론이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의해서 하나님의 그 무한성과 영원성과 완전성이라는 것을 차례차례 생각해 나갈 때 하나님의 그 영원성 완전성이라는 것이 그의 발휘할 수 있는 속성의 면에서만 생각할지라도 반드시 거기에도 그것이 발휘하는 때가 발출하는 때가 있고 그것이 또 주어지는 급여되는 대상이 생기고 그것이 발출하고 급여하는 것이 확실한 사실로서 입증하는 대상이 거기 생기고····하는 것이다. 하는 것이다 말씀이어요.

 

 

그러니까 이러한 현실 가운데서 우리가 하나님의 삼위라는 것을 깊이 늘 생각하는 것이요. 이렇게해서 삼위 가운데에 아드님 되시는 그 하나님이 당신의 그 신으로서의 인격을 가지고 사람을 입고 땅에 오셨다. 이것이 아드님이요.

 

 

그런고로 아드님되신 것을, 즉 하나님의 아들이요, 동시에 당신은 사람의 아들이라고 했다고 그랬지요?! 그분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아! 그런고로 하나님은 인격자시요 완전하신 분이시요.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요···” 그런 의미에 있어서는 아주 유니크한 독특한 그 의미를 가지니까 우리 주께서는 때때로 “내 아버지라”(마 7:21)는 말을 썼어요.

 

우리 아버지라는 말을 제자들에게 그 주기도문을 가르칠 때 제자들 끼리 자기네가 기도할 때는 그렇게 하라고 가르친 것이고, 에수님 당신이 기도할때 “우리 아버지여!”하지 않았단 말이요.

 

 

“내 아버지!” 늘 명확하게 그렇게 썼어요. 그리고 둘째는 예수님은 또한 당신의 완전성을 늘 표시하는 점에 있어서 “아! 이건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을 그렇게 했다고 후외한 일이 없고 잘못했다고 한 일이 없어요.

 

 

예수님의 그 말씀을 종합해서 보면 언제든지 예수님이 한 것은 그것 대로 완전했던 것이요. 완성한 것이요. 이런 점에서 우리가 아드님을 바로 알아야 하고 그런 아드님을 통해서 아드님께 대한 바른 지식은 우리를 이끌억서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을 바로 알게 하시는 것이요/ 그런데 그것을 바로 알게 못하면, 또 바로 알기에 주력하지 않고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항상 모호하거나 유치하면 적그리스도의 도모한 이론에 압도 당하는 것이요.

 

 

왜 신학교에서 많은 신학생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교수가 가르칠때 그것을 좋다고 받아들입니까?

 

지금 미국에 푸린스톤신학교가 그 야단이요. 존획이라는 교수가 동정녀 탄새을 시인하지 아니하니까 거기에 있는 여러 장로들이(그 지역의 장로들이) 푸린스톤에 이러나서 총회에다 대고 건의를 하고 “이럴수가 있느냐”거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어요. 총회에서는 ···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장로들 무슨 아우성이냐 하고서 그대로 승인해 주었어요.

 

 

죤휙이라는 사람은 영국사람인데 영국국교 성공회에서 초빙을 받아 가지고 미국의 변증학, 또 종교철학 그런 중요한 것들을 가르치려고 푸린스돈신학교에 와서 가르치는데 그이가 또 역시 그런 것이요. 옛날에 칼빈선생이 가르쳤던, 도도한 좋은 이론들을 가장 잘 가르치고 크게 그것을 선양했다는 그 본산이라고 할만한 학교가 그렇게 변해 버렸어요.

 

 

그래가지고 학생들에게는 그것이 인기가 있으니까 그 선생이 와서 그대로 튼튼한 지반을 가지고 가르친 것이요. 밀어내려고 하던 사람들이 혼나고 알았어요.

 

 

이것이 미국의 북장로교회의 현실이고 푸린스톤신학교의 현실인 것이요. 그러면 세계에서도 이름이 알려져 있는 학교인데 왜 이 모양인가?

 

 

요컨대 기독론에 대해서 심오하지 않고, 명확하지 아니하니까 일단 이론을 배우게 될 때에는 그런 설이 좋단 말이요. 훨씬 이론적이고 훨씬 현실적이고 훨씬 소위 인간이성에 의한 합니적인 이론이란 말씀이요. 합리적인 이론인줄 안단말이요.

 

 

그러니까 교회가 에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깊이 안가르치고 밤낮 그만한 정도안에서만 뱅뱅돌고 “예수님 예수님”하고 부르면 일단 신학적인 큰 바람이 불때에는 넘어가는 것이다 그거요. 일세기에 그랬어요. 일세기에 그 때는 아직 기독론이 형성하기 까지 바쁜시대니까 이럭저럭하는 동안에 막 노스티즘이라는 것이 일어나서 기독은 이것이다 하고서 기독론으로; 말하자면 마귀가 다른 것으로 공격을 않고 그 사람의 신앙이나 서로의 사랑이나 봉사로는 공격을 못했다. 그말이요.

 

 

그러나 그사람들의 허점이 아직 그리스도에 대한 이론이 명확하지 아니할때 그것을 공격했다 그 말씀이요. 이에 사도요한은 엄격하게 쓴 것이요. 적그리스도가 그런줄 알아라. 이게 많은 적그리스도가 돌아 다니는구나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이요.

 

 

그것은 그 때만이 아니올시다. 오늘도 그래요. 유치한 교회에는 나중에 그러한 신학 바람이요. 너무 유치하면 무슨 바람이 부는 줄 압니까?

 

성경만 가지고 바람부는 거요. 아직 기독론까지 바람 불 필요가 없는 것이요. 성경관이란 정도로 바람불어 놓으면 그것 때문에 막 야단 내는 것이요.

 

거기 아직 확립을 못했다. 그얘기요.

 

 

성경이 순순하게 무류한 하나님의 말씀인가?

 

무모한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어 가지고서는 교회가 찢어 갈겨 가지고 싸울만한 정도라면 이야기 할 것 없지 않느냐 그 얘기요. 이것이 유치한 교회의 당하는 일이란 말씀이어요.

 

그리고 이렇게 유치하면 적그리스도가 와서 몰고 나간다 그것이요. 우리는 이래서 금년에는 특별히 이 매교의 현실과 거기에 문제점이라는 것을 좀더 때때로 생각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가 항상 든든하고 확실한 믿음의 근거 가운데에 서 있기를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시지요.

 

 

출처: 지명교회까페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