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신자의 보장

하나님의 성회는 신자의 보장에 관하여 하나님의 성회 조례에 선언하였다(제 8조 1항)

신자의 보장은 그리스도와의 생생한 관계에 좌우한다는 성서적인 가르침의 견지에서(요15:6),
거룩한 삶으로의 성경의 부르심의 견지에서(히12:14, 벧전1:6),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 있는 책임이 사람에게 일부 있다고 하는 분명한 가르침의 견지에서(계22:19),
잠시 믿던 사람이 타락할 수 있다는 사실의 견지에서(눅8:13),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한번 구원받은 사람이 그 구원을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고 하는 무조건적인 보장의 입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왜 이러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는지 더욱 설명하고자 한다.

신자의 보장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주의의 극단적인 입장의 중간에 서있다. 우리는 양쪽의 가르침에서 성서적인 요소를 받아들인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특권을 올바르게강조하는 반면 알미니안주의자는 사람의 자유의지와 책임 또한 올바르게 강조한다. 그러나 이 두 입장을 적절하게 이해하려면 그것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임의에 의해서 때묻지 않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특권을 믿으며 또한 사람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믿는다.

하나님의 성회에 의해서 취해진 신자의 보장에 관한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4가지가 강조되어야 한다.

1.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다.(요3:16, 롬10:11-13, 벧후3:9)
2. 구원은 믿음으로 받으며 유지된다.(롬3:28, 갈2:20-21, 엡2:8, 빌3:9, 히10:38, 벧전1:5)
3. 계속적인 죄는 신자의 믿음에 해롭게 영향을 준다. (롬3:5-8, 고전3:1-3, 히3:12-14, 12:1, 요일1:8, 3:8)
4. 신자의 구원은 그리스도를 거부하면 상실된다.(요17:12, 딤전4:1, 5:12,15, 히6:4-6, 10:26,27,38, 벧후2:20,
    요일5:16)

1.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구원 받기로 예정되었으며, 또 다른 사람은 멸망 받도록 예정되었는가?” 그리고 “누가 택함을 받은 자인가?” 이 두가지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한 답변은 복음의 메시지가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을 향하여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명확해진다. 신약성경을 읽는 사람은 이 위대한 진리를 놓칠 수 없다.

그러나 로마서 9-11장에서 신자의 구원에 있어서 사람의 자유의지가 배제되며 택함을 받은 자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를 떠나서 완전히 그의 주권으로 행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이 있다. 예를 들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사...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내가 긍휼히 여길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9:11,13,15,16,18)
그러나 이 구절을 선택에 관하여 가르치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 볼때 사람의 의자가 선택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야곱은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선택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야곱이 무엇을 할 것인지
하나님이 미리 알고 계시다는 것에 근거한다. 이 진리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쓴 베드로의 편지에 나타나있다. 이 신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었다.(벧전1:1,2)

이 진리를 또한 롬8:29에도 나타나 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고 기록했다. 하나님은 미리 자비를 보일 조건을 정하셨다. 그리고 그의 미리 아시는 지식에 근거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를 선택하신다.(엡1:4). 이와같이 하나님은 그의 주권 안에서 구원의 계획을 제공하셨으며 이에 따라서 모든 사람은 구원 받을 수 있다. 이 계획안에서 사람의 의지가 고려된다. 구원은 누구든지 원하는 자에게 열려 있다.

2. 구원은 믿음에 의해서 받으며 유지된다.

성경은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명백히 말씀한다.(엡2:8)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한다. (합10:38, 롬1:17, 갈3:11, 히2:4) 신자의 구원은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의 행위로 말미암아 받
아들여짐과 같이 신자의 구원은 의로운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의 생활로 인하여 유지된다.
크리스찬이 되는 것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다. 이것은 강조되어야 한다. 죄인이 자기가 행한 어떤 선한 일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경우는 없다. 그는 전적으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는다.

믿음으로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대신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믿음으로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 앞에 맡기며, 그리스도를 본다. 자신에게는 아무 공로가 없을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신분을 깨닫는다.(빌3:9) 그는 믿음을 통해서 자신이 받아들여진 것을 알고, 이러한 지식은 그에게 기쁨과 평안을 준다. 그러나 신자의 상태는 그의 신분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그는 믿음 때문에 안전하게 서있다.
그의 신분은 그가 믿음으로 받아들인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다.
그는 의로운 위치에 서 있으며 그리스도의 의로 옷을 입었다.

신자의 상태 혹은 신자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로 행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성령과 협력하여 순종함으로써 얻어지는 점진적인 성화인 영적 성장과 관계가 있다.(롬6:12,13, 8:13, 골3:1-5, 벧후1:5-7) 성숙해 가는 과정 속에서
신자는 그의 승리 분만 아니라 실수를 통해서도 배워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보장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견고할 동안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믿음으로 지키심을 받기 때문이다.

그의 영적 성작은 그의 안에 역사하고 계시는 성령께 대한 순종과 주의에 따라 달라진다. 완전을 향하여 성장하는 동안에 그는 여전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여 완전한 자로 간주된다. 자신을 적응시키는 과정 속에서도 그는 안전하며 그의 구원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신자의 보장은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나 구원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오직 믿음을 통해서 보증된다. 이 보장은 신자가 그리스도에 대한 살아있는 믿음을 유지하는 한, 타락할 수도 있고 결점도 있는 신자에게 입혀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3. 계속되는 죄는 신자의 믿음에 악영향을 준다.

성경은 신자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죄를 지으며, 그가 죄를 지었을 때 그가 의뢰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요일1:8,9, 2:1) 이와는 달리 크리스찬이 죄악의 생활을 지속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즉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한 그는 습관적으로 죄를 범할 수가 없다. (요일3;8,9 여기서 헬라어 시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죄를 짓는 것은 마귀의 일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누구든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며 습관적으로 죄 짓기를 계속하지 아니한다. 그는 마귀의 자녀가 하는 식으로 죄짓는 것을 계속할 수 없다. 그 대신에 크리스찬은 계속적인 자기의 믿음에 악영향을 주는 것을 인정하고, 죄를 내려놓고 영적으로 자라야 한다.

이것은 크리스찬이 죄를 범할 수 있고 여전히 구원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많은 사람의 첫 번째 반응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염려, 교만, 시기, 쓴뿌리 등은 공통적으로 범하는 과오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죄를 범하는 신자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더욱이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죄없는 완전을 요구하신다고 주장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신분이 그 자신의 의로움에 근거한 것인가 아니면 믿음에 의해서 그에게 씌워진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 것인가? 만일에 사람이 흠없는 생활을 유지해야만 구원을 받는다면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얻은 것이 된다!
그리고 또한 사람이 흠 없어야만 하나님이 받으신다면 크리스찬의 삶은 바울이 롬8:1에서 주장한 것처럼 정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오히려 그것을 계속적으로 철저한 자기 분석과 참회를 행하며, 두려움과 정죄로 가득 차 있으며 구원 받을 수 있다는 확신과 기쁨이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롬5:9-11을 보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예비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우리는 위하여 영광에 이르는 모든 길을 제공하시기까지 사랑하신다. 이러한 확신은 그 안에서 우리로 기뻐하게 한다.)

관련된 질문으로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순간에 죄를 범한 신자에게 무슨 일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범할 수 없으며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신자는 구원을 잃게 될 것이며 영원한 파멸에 이를 것이라고 가르치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낙심되는 일인가!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안과 밖을 들락날락하면서 회전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손 안에서 안전하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그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그러나 크리스찬이 범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강조되어 말해져야 한다. 옛날의 죄를 계속해서 범할 수는 없다. 성령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신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며, 그에게는 이전 것은 지나갔으며 새것이 되었다.(고후5:17)

이와같이 이제 죄를 범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이전의 삶은 과거의 것이며, 안에 잠재된 힘이며 다스려져야 하며, 새로운 신분에 의해서 죽은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롬6:11) 이전의 삶은 과거의 것이며, 안에 잠재된 힘이며 다스려져야 하며, 새로운 신분에 의해서 죽은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롬6:11) 이전의 습관과 행실이었던 것은 이제 부자연스러우며 우리의 새로운 마음에 반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죄짓기를 계속하지 아니한다)”고 사도 요한은 말했다. 즉, 죄는 새로운 피조물에게는 낯선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이 된 새로운 피조물은 죄를 짓지 아니한다. 그러나 옛것이 잠시 우발적으로 우세하게 될 때 새 피조물은 이 부자연스러운 침입에 대항하여 싸우게 되는데 즉시 의지할 것은 그리스도이시다.

죄를 범한 신자가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면 그는 자신의 영혼이 멸망하게 되었다는 실망을 안고 돌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미쁘시고,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보혜사를 모시고 있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확신을 가지고 돌아온다. 이와같이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의 특권을 사용하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 자신의 신분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또한 신자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강조하는 것도 필연적이다. 신자는 자유의지를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계속해서 자유의지를 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 믿음을 계속 유지 하는 것은 신자의 책임이다.

또한 신자는 죄에 대하여 가벼운 자세를 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지어도 된다는 허가로 사용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롬6:1)하며 바울은 묻는다. 그 대답은 단호
하게 부정적이다. 바울은 지속적인 죄가 신자의 믿음에 악한 영향을 준다는 것과 믿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알았으며 또한 가르쳤다.

지속적인 죄는 주제넘게 하며, 고자세가 되게 하며 또한 반역의 증거이다.(민15:30,31) 번역은 의지나 믿음의 순종에 반대되는 것이다. 신자는 반드시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히12:15) 항상 주의해야 한다. 성경의 권면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고후13:5)는 것이다.
왜 이러한 경고와 우려를 하고 있는가? 이렇게 반복되는 경고들은 믿음을 잃게 되면 영원한 영혼의 파멸을 의미한다는 것을 인정할 때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신자의 구원은 그의 의로운 행동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며, 그의 의로운 행동으로 유지되는 것도 아닌 것이 사실인 반면 신자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처럼 또한 믿지 않음으로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것도 똑같이 사실이다.
죄와 불신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죄는 믿음을 위태롭게 하며, 믿음을 잃는 것은 자신의 신분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히3:12-14 은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형제들에게 불신에 대하여 경고하였는데 이 불신은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는 불신의 원인으로서 죄의 유혹을 언급하였으며,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만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할 자가 될 것이라고 상기시켰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믿음에 의해서이다. 믿음을 제거하면 거기에는 더 이상 서 있을 곳이 없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신자들에게 “삼가 혹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지 않도록”(히3:12) 훈계하는 이유이다.

4. 구원은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상실될 수 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쉽게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롬10:21을 보라. 여기서 바울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나 적용할 수 있는 원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신자가 성령의 계속적인 점검을 무시하고 예수를 그의 구세주로 모시기를 거부하는 곳에까지 이르면 그는 구원을 상실하게 된다.

잠시동안 믿다가 유혹이 올 때 배반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눅8:13)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약한 형제가 실족하는 것은 가능하다. (고전8:11) 생명책에 기록되었던 이름이 그 책에서 지워질 수 있는 것은 가능하다.(계22:19)
한 사람이 그의 구세주이신 예수를 이미 배반하였는지 판단하는 것은 항상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에 관한 판단은 전지하신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좋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의 사실은 확실할 수 있다. 즉 만일 하
나님이 탕자를 돌아오게 하시는 그의 노력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아직도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아니하셨는데도 사람들은 너무나 자주 그 사람을 삭제해 버린다.

성경은 구원을 상실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지만 성령의 탄식에 응답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소망을 끊임없이 제의하고 있다. 예수의 초청은 자격을 따지지 않는다.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말씀하실 때 이것은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이다.

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롬10:13)고 성경이 말씀하실 때도 모든 사람에 대한 것이다.







“사랑” 바다의 진주인 듯 해맑고 청아하며 붉은 산호초처럼 빛나고 새까만 청색 하늘의 별처럼 영롱하다. 생명의 젖줄을 입에 물고 힘차게 빨아대는 어린 아들을 바라보는 젊은 어머니의 그윽한 눈빛, 흐드러진 들꽃 한 송이 꺾어 함께한 소녀의 머리에 꽂아주고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감추려고 소나무 뒤로 달아나 숨는 까까머리 소년의 순수한 마음도 사랑이다.

“ 사랑” 모든 시인들의 가슴에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고운 시어( 詩語)이며, 영원히 노래해도 좋을 만큼 아름다운 언어이다. 언젠가 어느 책에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죽음의 침상에 누운 사람에게도 ‘사랑’은 필요한 것이라고…이토록 모든 인간이 갈망하는 것이 사랑이지만 그 사랑을 소유하기는 쉽지 않다는데 인간의 비극이 있는 것이 아닐까?

안타깝게도 모든 인간이 그토록 갈망하는 사랑, 그 사랑이란 것이 영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고 어쩌다 쟁취한 사랑이라고 하여도 사랑이란 상대적이기에 종국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만 주게 됨을 알 수 있다.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상처 주기 쉬운 것이 우리네 인간사이기도 하다. 가까운 예로 가장 사랑해야할 부부의 사랑이 그러하다. 너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나를 위한 사랑이기에 우리는 늘 사랑을 갈망하나 얻는 것은 사랑으로 오는 행복이 아니라 미움과 원망이 더 많은 것이다. 이것이 범죄한 인간의 사랑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사랑을 정의하기를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그렇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사랑이란 실제로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오로라’일 수도 있다. 참사랑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 아가페”적 사랑, 전적 주는 사랑이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 있다면 그것이 가장 숭고한 사랑이며, 참된 사랑이라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다. 사랑하기에 풀무불 속에 자신을 내어던진다면 그 사랑은 믿을 수 있는 사랑이란 것이다. 입술의 유희가 아닌, 사랑을 증거로 확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희생의 댓가를 지불 할 수 있을 때 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세상을 살면서 어려움과 고통의 터널을 지나갈 때 그 다가오는 어둠을 원하지 않기에 매사에 이타보다는 이기적이 되기 쉽다. 이런 인간의 심리를 바탕으로 한 때문에, 고통도 자기 자신을 위한 고통보다 타인을 위한 고통을 당해야 한다면 그 고통의 수위는 한층 더 높아질 것이다.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고난이 더욱 가중되는 것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온 인류, 처음부터 선(good)이라고는 한 가지도 없고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는 흉악한 무리의 죄악을 대신 지고 가는 고통이었다.

그 고통을 스스로 당하셨기에 예수님의 사랑은 참사랑이며 사랑 중의 사랑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분이 사랑 때문에 당하신 고난을 잠시 생각해 보면,

1) 예수님은 삼중 적 고통을 겪으셨다

1. 육신 적으로 당하는 고난
어떤 신비적인 사람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육신의 고통은 별로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믿음이 참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또 얼핏 들으면 그럴법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를 않다. 그는 완전한 신이심과 동시에 완전한 육체를 가지셨다. 따라서 육체가 찔리면 아프고 고통을 느껴야만 하도록 신경세포가 살아 있는 예수님이셨다. 만약, 찔러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는 장애인이요, 중풍에 걸린 환자의 병든 육체란 말이 되기에 말이 안 된다.

마 26장 37절을 보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하셨고, 39절에는 “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찢어지는 고통이 얼마나 무섭고 큰 것인지를 미리 다 아셨기에 주님께서 이 고통을 지나가게 해달라는 간구를 하신 것이다. 그의 고통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었던 것이다.

2. 심적으로 당하는 고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군중을 사랑하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치시고 배고플 때 광야에서 먹여주셨고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모든 필요한 것을 다 채워주셨고 가르치시며 3년간이란 긴 시간 동안 함께 생활하셨다. 그런데, 막상, 십자가를 져야 하는 절박한 때가 되니까 하나같이 모두 배신하고 버리고도망을 갔다.

a. 가롯 유다는 은 30냥에 예수님을 팔았다.
b.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 이나 부인했고
c. 다른 모든 제자가 다 도망쳤다.
사람들이 생활 중에서 아픈 사연들이 많다. 그 많은 아픔 중에서 가장 큰 아픔을 느낄 때가 언제일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버림받거나 배신당했을 때라고 한다. 한 솥에서 함께 밥을 먹던 제자들, 수제자라고 불리던 베드로, 신임하고 돈궤를 맡겼던 가룟인 유다뿐만 아니라 모두 달아날지라도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하겠나이다 하고 큰 소리로 맹세하던 제자들이 다 도망을 가버렸다. 이 사실을 보시던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 것인가? 그렇다 육신을 입은 우리 주 예수님은 배신감 때문에 극심한 심적 고통을 겪으셨던 것이다.

3) 영적으로 당하는 고난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육체의 고통도 힘이 들고 마음의 고통, 심적인 고통도 고통이다. 그런데 가장 큰 고통은 영혼의 고통이라고 본다. 하나님과 하나로 늘 함께하시던 예수님, 갑자기 하나님과 단절되는 캄캄함을 느낄 때, 그 선을 넘어 캄캄한 흑암으로 덮인 터널 속을 지나야 하는 것과 같은 시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는 영의 세계마저 막혀버렸던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성부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그만큼 인류의 죄가 무겁고 중했던 것이다.

마 27: 45-46을 함께 읽어보자. “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9시까지 계속하더니 제9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뜻이라” 했다.

그렇게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그 한몸에 짊어지신 “흉악한 죄인”으로 처형당하셔야만 했다. 따라서 성부와 영의 교통까지 끊어졌고 캄캄함을 느끼시는 처절한 고통을 당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고통은 이렇게 삼중 적 고난을 겪으셨던 것이다.

2) 사랑 중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걸어가시는 예수님이 겪고 계시는 처절한 능욕은 어둔 구름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먹구름 아래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지! 예수님께서 자신이 못 박히실 십자가를 친히 짊어지고 가셨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지!
이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에 비추어 볼 때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사실, 성경에서 자기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갈 고문 형틀과 사형 형틀을 짊어지고 갈보리로 걸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상징이요 표현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휘장이요 문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셨다. 그것도 가장 고통스럽고 참혹한 죽음을 죽으셨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자기의 외아들을 내어주셨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자기 자신을 내어주셨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예수님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다.

사랑! 오직 사랑만이 여호와께서 영원 전부터 구속언약(covenant of redemption) 안에서 행하신 모든 구원을 우리에게 공급해 준다. ´옥타비우스 윈슬로우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에 비추어볼 때만 제대로 이해된다고 했다.

그렇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것은 오직 “사랑” 때문이다. 자기가 지은 죄로 죽어 마땅한 죄인들이지만 그들이 죄악 중에서 고통당하며 처절하게 죽어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긍휼의 마음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 마음이시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고 그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가? 생각해보아야 한다. 고난주간은 경건한 모양으로 새까만 옷을 입고 금식하고 그런 외적인 나타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은 자가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죽은 위성인 별들이 찬란한 햇빛을 받았으면 그 빛을 반사하여 어두운 세상을 비추게 마련이란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삶에서 밝은 빛보다 어두운 그늘이 더 짙게 드러난다면? 이는 분명히 뭔가 잘못된 것이다.

미국의 한 대형교회 목사가 노숙인이 된 이야기가 페이스북을 비롯하여 인터넷을 크게 강타하고 있던 실화를 읽어본 적이 있다. 예레미아 스티펙이라는 목사 의 이야기다. 목사는 어느 주일 오전 자신이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될 교회 근처에서 노숙자로 변신해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하지만 교인 중에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걸어온 사람은 불과 세 명에 불과하더란다.

스티펙 목사는 교회로 향하는 교인들에게 배가 고프니 잔돈 좀 달라고 했지만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더라고 했다. 예배시간이 되어 교회에 들어간 스티펙 목사는 맨 앞자리에 앉으려 했으나 예배위원들의 저지를 받고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맨 뒷자리에 겨우 착석하게 된다. 이윽고 새로운 목사가 부임했다는 광고 시간, 맨 뒷자리의 스티펙 목사는 노숙인 차림 그대로 강단에 올라갔고 교인들은 경악 했다.

그는 곧장 마25:31-40까지를 읽어 내려갔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것을 읽고 난 스티펙 목사는 이날 오전에 겪었던 것을 말하면서 “나는 오늘 아침 교인들이 모이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교인은 아니었다. 세상에는 교인들이 많다. 하지만 제자는 부족하다. 여러분은 진정 예수의 제자입니까?” 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훌륭한 제스쳐다. 초심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어떤가?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고난주간이다. 연례 행사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지나 않은지… 표면적 겉치레와 사람의 교훈으로 가르치는 것에 만족하고 있지나 않은지…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이란 곧 그분의 사랑을 받은 그대로 나타내 보여주는 사람이 돼야 할 것이다. 수난의 주님이시여, 내 마음속에 좌정하소서, 그리하여 그 빛을 나타내소서, 영원히!!!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벧전 2: 22-24)
USA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 칼럼 글

 

 

1881년 3월 4일 무더웠던 저녁 워싱턴 D.C.
제임스 A. 가필드(James A. Garfield) 대통령의 취임 무도회를 위해
건축가 클러스(Cluss)와 슐츠(Schulze)에 의해 고 빅토리언 스타일로 새롭게 건축된 스미소니언 The Arts and Industry 박물관 건물이 개장되었다.

이곳을 방문한 당시 고위층과 부유층 인사들과 그의 부인들은 그 건물의 원형홀에 세워진 거대한 여신상의 엄위함 앞에 잠시 입을 다물지 못한다. 잠시 후 그 여신의 오른손에 쥐어져 높이 들린 횃불(Torch)에 불이 켜지자 거기에 모인 이들은 더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날 그 여신의 오른손 위 횃불을 통해 켜진 전기 빛(electric lightning)은 워싱턴 D.C. 최초의 백열등 전기 빛이었다. 그날 거기 모인 모든 이들은 그 여신의 오른손 위에 켜진 백열등 불빛을 통해 새로운 세기에 대한 어떤 무언의 예견 앞에 전율한다. 그 여신의 이름은 다름아닌 ‘The Statue of America’여신 ‘아메리카’였다.

5년 이후 이 여신 ‘아메리카’는 프랑스 조각가 Frederic Auguste Bartholdi와 에펠탑의 디자이너 Alexandre Gustave Eiffel에 의해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The Statue of Liberty)’으로 둔갑되어 1886년 10월 28일 프랑스로부터 헌정된다. 자유의 여신상 오른손 위에 높이 들린 횃불이 ‘계몽(enlightenment)'을 상징한다는데, 이는 1881년 저녁 스미소니언 박물관을 밝혔던 그 백열구 전기 빛이 ’계몽‘으로 둔갑한 것이었다. (워싱턴과 뉴욕의 실질적 커넥션)

1879년 전기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Thomas Alva Edison)이 발명한 ‘백열등(incandescent lamp)'의 발명은 우리가 알듯 미국 50만 인구의 삶의 스타일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었다.

빛 - 계몽 - 삶의 변화

The Statue of America는...
The Statue of Freedom
The Statue of Liberty의 원조였던 것이다.

이무하 형제께서 언급하셨듯... 이 여신의 기원은... 결국 마리아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이 시대의 로마 워싱턴 D.C.가 바티칸 로마와 연결되는 또 하나의 커넥션...

1969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President and Mrs. Richard Nixon)
1981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President and Mrs. Ronald Reagan)
1989년 조지 부시 대통령(President and Mrs. George Bush)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President and Mrs. Clinton)은 가필드 이후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대통령 축하연을 개최했던 역대 대통령이었습니다.(이 커넥션 또한 흥미롭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신념과 합리적 원리들에 의존함으로써 자기들에게 거짓 평안을 말한다

 

사람들이 자기 신념과 합리적 원리들에 따라 평안을 측정하는데,이것은 거짓 평안으로 결코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만 설명해봅시다. 어떤 사람이 죄로 인해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는 죄로 인해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복음에 합당한 바른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영혼 사이의 관계는 모두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봅니다. 그는 빛을 소유하고 있고, 어떤 길을 가야 할지 알고 있습니다. 또 이런 경우 과거에 자기 영혼이 어떻게 고침 받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치유하고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적용해야 할 외적 수단으로 간주하고, 그는 그곳으로 달려가 약속들을 뒤져서 문자적 표현들이 자신의 상태에 직접 부합되는 말씀들을 몇 가지 골라 냅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하나님은 이 약속을 통해 말씀하신다. 여기서 내 상처를 덮을 만한 크기의 고약을 발라야겠다고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약속의 말씀을 자신의 상태에 적용시키고 평안을 추구합니다. 이것은 또 다른 산 위에서의 모습입니다. 주님이 가까이는 계시지만 그 안에 계시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우리를 책망하실 수 있는’ ( 16:8)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지성적,이성적 영혼의 단순한 작용에 불과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생명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생식적인 생명, 감각적인 생명 그리고 이성적 또는 지성적인 생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존재들은 단지 생식만합니다. 어떤 존재들은 감각도 함께 갖고 있습니다. 또 어떤 존재들은 이 두 가지에 이성을 추가로 구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성적인 생명을 갖고 있는 존재는 이성적 원리에 합당하게 행동할 뿐만 아니라 다른 두 요소의 원리에 대해서도 합당하게 행동합니다. 즉 성장할 뿐만 아니라 감각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일들에 있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이들은 단순히 자연적이고 합리적입니다. 또 어떤 이 들은 계몽을 통해 추가된 깨달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진실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후자에 속한 사람은 전자의 요소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때로는 자연적인 사람의 원리에 따라 행동하기도 하고, 때로는 계몽된 사람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참된 영적 생명의 원리가 모든 행동의 동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항상 영적 생명의 원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행동의 열매가 반드시 이 원리의 뿌리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방금 제가 언급한 경우의 사람은 단순히 신념과 계몽의 원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고 이로 언해 첫 번째 자연적 요소가 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령은 이 모든 물줄기를 따라 흐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재발된 타락으로 인해 영혼이 받고 있는 상처와 불안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타락이 악한 행위든 아니면 미련한 행위든 결코 작은 것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 영혼이 받게 되는 상처보다 더 큰 상처는 없고, 영혼이 갖게 되는 불안 보다 더 큰 불안은 없습니다. 극도로 마음이 혼란한 상황에서 그는 이사야 55 7절의 약속을 찾아냅니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리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여기서 그는 하나님이 거듭해서 무조건 용서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또는 호세아 14 4절의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라는 말씀을 찾아 낼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자신에게 평안 하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든 안 하든, 곧 그 말씀에 생명과 권능을 불어넣으시든 안 넣으시든,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는 주 하나님이 평안 하라고 말씀하시는지 여부는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얼굴을 숨기시고 가련한 피조물이 평안을 빼앗겨 평안으로부터 멀리 달아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를 다시 다루시고 새로운 판단의 자리로 자기를 부르실 때 곧 하나님이 손으로 자기를 끌지 않으시면 발자국을 떼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때를 곧 깨닫게 될 것 입니다.

On Mortification of Sin by John Owen (1616~1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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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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