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아름답고 환상적인
빛의 향연을 연출하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바로
앤털롭 캐년일 것입니다.
Antelope Canyon은
전세계의 내로라 하는 사진 작가들이
가장 촬영하고 싶어하는 장소 가운데 한 곳이기도 합니다.
앤털롭 캐년은
미국 서부 애리조나의
북서쪽에 위치한 캐년입니다.
앤털롭 캐년(Antelope Canyon)은,
캐년 안으로 내리는 환상적인 빛으로 인해
이제는 너무나도 유명해져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앤털롭 캐년은
Upper Antelope Canyon과
Lower Antelope Canyon으로 나뉘어집니다.
여름에
이곳을 방문할 경우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서라면
Upper로 들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Lower도 좋기는 하지만
Lower는 Upper 만큼 빛이 좋지는 않습니다.
다만, Lower는
길이 매우 드라마틱하기 때문에
빛을 촬영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면
Lower도 방문자를 결코 실망시키지는 않습니다.
Upper의 길이
대부분 평탄하다면
Lower는 대부분 내리막길입니다.
그래서
아래로 내려가는
가파른 계단도 있습니다.
Lower가
Upper보다 길 자체가
훨씬 드라마틱하니 볼 것은 당연히 더 많습니다.
Lower가
Upper보다 부족한 것은
단 한가지, 빛이 약할 뿐입니다.
Upper는
5월이나 9월의 경우에도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빛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시간대가 있기는 합니다.
여름철의 경우
이론적으로는 하지를 전후한
6월 20-22일 사이가 빛이 바닥에 가장 오래 머뭅니다.
여름철에
포토투어 타임은
오전 11시부터 시작되는데
11시에 들어갔다고 해서
빛이 곧장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또한
11시 30분이나 12시에
빛이 떨어지는 시간대에 그 자리에 있었다 할지라도
모든 장소에서
동시에 빛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캐년 위쪽의 상태에 따라 빛이 더 빨리,
혹은 더 늦게 들어오는 위치가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앤털롭 캐년의 빛은
직광, 순광, 역광, 측광, 사광,
반사광, 간접광 등 여러 가지 빛이 공존하는데
실제 육안으로 보는 빛과
사진 촬영 결과에 나타나는 빛이 다르기 때문에
좋은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서는
여러 번 다녀온 후에
촬영한 결과를 비교 측정해 보아야만 합니다.
캐년 안으로 들어온 빛은
빛의 강도 혹은 위치에 따라
참으로 다양한 색감으로 나타납니다.
대낮에
육안으로 빛을 볼 때는
빛이 하나의 색으로 보이지만
프리즘을 통과하면 기본 7가지 색으로 세분됩니다.
앤털롭 캐년에서는
하나의 빛이 프리즘을 통해 보는 것 같이
평상시에 보기 힘든 여러 가지 색으로 나뉘어져 보입니다.
Antelope Canyon을
처음 방문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Lower 보다 빛이 좋은 Upper Antelope Canyon을 찾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겨울철에는 계절적 요인으로 인해
자주 구름이 끼거나 흐릴 때가 있으며,
드물긴 하지만
여름철에도 가끔 흐릴 때가 있는데
이럴 경우는 Upper보다 Lower에 가야 사진촬영에 유리합니다.
그 이유는
Upper의 대부분은
캐년의 위쪽이 막혀 있는 반면에,
Lower 경우는
캐년의 위쪽 대부분이 뚫려있기 때문에
빛이 없을 경우,
Upper 캐년의 내부는
Lower의 내부보다 더 어두워서
그만큼 촬영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Lower와
Upper를 비교해 본다면,
공식적인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Lower는
전체 길이가 약 300m로써
Upper의 200m보다 약 1.5배 정도 더 깁니다.
Lower는
매표소에서 걸어서
약 1- 2분 정도 이동한 다음 곧바로 입구로 들어가지만
Upper에 갈 때는
하이 클리어런스(차체를 들어올린 개조차량)
4륜 구동 차량으로 약 15분 이동한 다음에 입구로 들어갑니다.
Upper의 폭은
여러명이 동시에 옆으로 갈 수 있지만
Lower의 폭은 대부분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이며
전체적으로 볼 때
Lower의 대부분의 폭은
Upper보다 훨씬 더 좁습니다.
Upper가 평지길이라면
Lower는 거의 대부분 내리막 길과
약간의 경사진 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Lower는
Upper 에 비해 모양이 덜 예쁘고,
또 빛의 연출도 Upper보다 좀 못하기는 하지만
길이가 더 길뿐 아니라
훨씬 더 드라마틱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빛이 가장 강할 때인
낮 12시 경의 사진입니다.
이 때는
모래를 뿌리지 않아도
선명한 빛의 광선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누군가가 모래를 뿌렸더니
빛이 마치 스타워즈에 나오는 광선검처럼 보입니다.
돋보기로
빛을 모으면
종이에 불이 붙듯이
캐년에 들어온 빛이
마치 불을 일으킨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 빛에 모래를 뿌리면
캠파이어의 불꽃처럼 모래가 타오릅니다.
빛과
캐년에 있는 모래가
합쳐지게 되면 이따끔씩
이런 유령 모양이 형성되기도 합니다.
Upper의
Candlestand 주위의 모습입니다.
촛대의 모습을 닮은 것처럼 보여서
Candlestand, 혹은 Candlestick 이라고 합니다.
Lower와 Upper에는
빛과 어두움이 절묘하게 조화되어
눈에 띄는 특이한 모양이 나타나곤 합니다.
캐년안으로 들어오는 빛이
희미할 경우 가이드는 모래를 뿌려서
빛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해주는데
위의 사진은
빛과 모래가 혼재한 사진입니다.
참고로,
Upper Antelope Canyon의
나바호 인디언의 이름은 Tse bighanilini(The Crack)이며,
Lower Antelope Canyon의 이름은
Hasdeztwazi(Corkscrew)입니다.
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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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왜 사탄의 유혹을 막지 않으셨는가? / 박신 목사
하나님은 왜 사탄의 유혹을 막지 않으셨는가? / 박신 목사
[질문]
어제 제가 오래 전에 전도했던 자매를 만나서 이야기하던 중에 오래도록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내용인즉,
“천사(루시엘)의 타락이후 하와에게 접근한 사탄을 하나님께서는 왜 그냥 두셨느냐? 인간의 창조 목적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고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과 교감 형성에 있었다면 타락 천사의 접근을 아예 차단하실 수도 있었을 텐데?”라는 의문이었습니다.
얼버무려 대답한다는 게 우스운 일이고 해서 목사님께 여쭤봅니다.
[답변]
범주의 오류
답변드리기 전에 먼저 전제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 질문은 일종의 범주의 오류(mistake of category)에 속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저 총각의 아내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원천적으로 잘못된 질문입니다. 총각이란 결혼하지 않은 사람을 뜻하므로 아내가 있을 수 없는데 아내가 누구인지 물었기 때문입니다. 문의한 범위가 모순되고 부정확해서 질문으로 성립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타종교에는 이런 질문들을 거의 하지 않는데 유독 기독교 신앙과 성경의 기술에 관해선 아주 많습니다.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는가?”,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기 전의 태초에는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가?” 따위의 질문입니다. 타종교는 인간이 고안해낸 도덕적 종교적 사상이기에 인간 이성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에 난해한 질문이 생길 근거가 없습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영원하고 신령한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이므로 어리석은 인간으로선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며 이해가 안 되기에 말도 안 되는 질문이 꼬리를 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자존(自存)하시는 창조주로서 피조물이 아닙니다. 그분을 누가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또 그분은 시간과 공간을 만드셨기에 그것들로 어떤 제한과 영향도 받지 않으십니다. 태초보다 이전이라는 인간이 유추할 수 있는 시간대 안에 묶어서 파악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크리스천 조크이긴 하지만 이런 유의 질문을 하는 사람들을 벌주려고 지옥을 만들고 있었다고 답합니다.
본 질문은 그런 오류의 일종이라고 했습니다. 완전히 황당한 질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타락한 사탄을 막지 못한 하나님이 잘못한 것 아니냐고 따졌다면 그런 유의 질문이 됩니다. 거룩하시고 진선미(眞善美)에 완전하신 하나님에게 잘못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 자체가 오류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질문자는 단지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궁금하다고 했습니다. 욥이 황당 중에 당한 자신의 고난에 대한 이유라도 알아야겠다고 깊이 고뇌하며 하나님께 따져든 것처럼 얼마든지 물어볼 수 있는 질문입니다.
그럼에도 엄밀히 말해 일종의 범주 오류에 속하는데 그 이유는 여럿입니다. 우선 하나님은 천사장이 타락하는 것부터 묵인하셨을 뿐 아니라 땅으로 쫓아내었습니다. 그럼 그 후에 사탄이 이 땅에서 인간을 대상으로 활동하는 것을 묵인하겠다는 뜻도 이미 내포된 것입니다. 거기다 사탄의 유혹을 왜 막지 않으셨는가라는 본 질문은 필연적으로 그 직전상황과 연결되는 추가 질문을 제기합니다. 왜 사탄을 땅으로 쫓아내셨는가? 그럼 또 왜 천사장이 타락하는 것을 막지 않았는가? 나아가 왜 그런 천사를 만들었는가? 등등 끝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어떤 반발을 합니까?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을 줄 알면서도 왜 선악과를 만들고선 먹지 말라고 금했느냐고 따집니다. 아예 선악과 자체를 안 만들었으면 인간이 범죄하는 일은 없었을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도 어디까지 이어지는가 하면, 그럼 인간을 악은 아예 모르고 오직 선만 사고하고 행동하는 존재로 만들라는 요구가 됩니다. 그럼 로봇이지 인간이 아니며, 또 선에만 제한되면 선인 줄도 모릅니다.
꼬리 무는 질문에 대한 답변
어린아이는 부모에게 자꾸 왜?, 그것은 또 왜? 식으로 바로 앞의 것은 물론 앞의 앞에 것에 관해 끝없는 질문을 합니다. 아이들이 그런 질문을 계속 퍼부어올 때 부모는 어떻게 합니까? 처음에는 차분히 대답해주지만, 아이가 설명을 못 알아먹겠다 싶으면 거기서 그칩니다. “네도 어른이 되면 다 알 수 있어!”라는 한마디로 일방적으로 종결시킵니다. 질의와 응답이 아이의 이해 수준을 넘어서면 이미 토론 자체의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대한 범주오류성의 질문들을 계속하다 보면 종국에는 황당한 결론에 이릅니다. 아예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지 말았어야 하며, 나아가 인간과 천지자체를 창조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주장, 아니 생떼가 되어버립니다. 본 질문도 실은 하나님은 사탄을 아예 만들지 말았어야 하고, 그럼 영적 세계 자체가 없어야 하며, 나아가 영적 전투는 아예 존재조차 않거나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뜻과 통해버리지 않습니까?
욥이 하나님에게 의심, 반발, 질문 공세를 파상적으로 퍼붓자 하나님도 그의 입을 막아버렸습니다. 거꾸로 욥에게 자연의 신비로운 이치에 대해 그가 도무지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퍼부었습니다. 말하자면 아이가 스스로는 아무래도 알 수 없는 문제를 제기했기에 크면 다 알 수 있다고 잘라버리는 부모처럼, 욥더러 너도 하나님이 되어보면 깨달을 수 있다고 대답한 셈입니다.
하나님은 욥더러 마침내 이런 고백을 하게 한 것입니다.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42:2,3)
욥의 이 고백에 대해 자칫 몇 가지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무조건 맹목적으로 하나님을 믿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려고도 해선 안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이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했지 않습니까? 너무 어렵기에 파고들면 들수록 오히려 골치가 아프고 신앙성숙에 도움이 안 되니까 적당히 은혜로 넘어가라는 뜻도 아닙니다.
대신에 신앙상의 모든 의문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데다, 인간의 생각과 길과 다를 수 있으며, 무엇보다 그분의 모든 행사는 절대로 완전하고 선하고 거룩하며 인간에게 유익하다는 믿음의 바탕에서 탐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고 비판, 반대, 불평, 불만, 의심 심지어 호기심만으로 질문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그분을 깊이 알아서 기꺼이 그분을 경배 감사 찬양하겠다는 믿음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물론 본 질문을 제기하신 분께서도 다분히 그럴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이유가 궁금해서 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질문이 일종의 범주의 오류일 뿐 아니라 질문자마저 미처 몰랐던 불신앙의 요소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죄의 기원은 결코 하나님과 사탄이 아니다.
본 질문은 궁극적으로 죄의 기원을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탄을 막지 않았기에 이 땅에 죄악이 들어오고 인간의 불행이 생겼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그럼 또 그렇게 된 책임이 사탄은 물론 하나님에게도 일부 있다는 뜻이 됩니다. 질문자로선 순수하게 단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겠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께 죄의 탓을 돌리고 있는 셈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탄의 시험이 없었다면, 다른 말로 하나님이 막았다면, 인간은 타락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은 죄의 기원이 하나님께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나님은 죄를 고안하거나, 적극적으로 만들 만큼 악한 분이 절대 아닙니다. 이 질문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실체가 부인되기에 엄밀히 따져서 범주의 오류에 속하게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죄의 기원은 누구에게 귀속됩니까? 바로 아담입니다. 마침 마태복음 강해 #145로 예정론에 대해 설교한 내용에 들었던 비유가 이 주제에 적합하기에 다시 인용, 보완해보겠습니다. 급한 볼일이 생긴 선생님이 숙제할 문제지를 내주면서 자율학습을 시키고 외출했습니다. 그런데 종일 외출했다 돌아왔더니 아무도 숙제한 학생이 없었습니다. 왜 공부하지 않았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창문 너머로 같은 또래의 갱들이 신나게 먹고 마시며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는데 너무 부러워서 같이 신나게 놀다보니 그랬다는 것입니다.
비유에선 항상 비유가 상징, 예표하는 핵심적 주제만 고려해야 합니다. 선생은 하나님이고, 학생은 아담이며, 자율학습을 시킨 것은 자유의지를 주어서 하나님 뜻대로 순종하라는 뜻이며, 창밖의 갱들은 사탄입니다. 선생의 명령을 거역하고 실컷 논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입니다. 그러나 그 죄를 지은 것이 선생과 갱 탓은 아니지 않습니까? 오직 학생 탓 즉, 인간에게 그 기원이 있는 것입니다. 자율학습 시킨 선생에게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또 같이 놀자고 꾄 갱에게도 근본책임은 없는 것입니다. 자율적 의지를 이미 가졌기에 충분히 그 시험을 거절할 수 있었고 또 학생이라는 신분을 제대로 인식했다면 숙제를 했어야 합니다.
대신에 하나님이 아담에게 자유의지를 주고 선악과 금령을 내린 것은 너무나 놀랍고도 큰 은혜이자 사랑입니다. 인간을 절대 동물이나 로봇 수준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여 준행할 수 있는 독립된 하나의 인격체로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만들어 당신과 교통하고 이 땅을 그분 대신에 다스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선악과 금령을 주신 것입니다. 위반하면 벌주겠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의 품 안에서 당신과 계속 교제하며 순종하는 것이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유일한 근거이자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선생이 외출하는 바람에 교실에 안 계셔서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엄연히 선생은 있고 또 그 선생 말씀대로 자율학습하는 것이 학생의 축복이듯이 말입니다. 죄의 기원이 전적으로 인간인데도 하나님에게 그 탓을 돌렸기에 이 질문이 범주의 오류에 속하는 또 다른 이유인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범주의 오류에 속한 질문들이 단순히 인간의 영적 어리석음에 기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인간의 원죄를 반증하는 증거가 됩니다. 질문자는 미처 의식하지 못하지만 인간 세상의 모순을 궁극적으로 자꾸만 인간보다 하나님 쪽에서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피해자이고 하나님이 가해자처럼 여기는 것은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나온 것입니다. 인간 중심의 사고가 바로 죄의 본질이지 않습니까?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하나님
하나님이 사탄의 타락을 묵인하시고 그에 동조한 악한 천사들과 함께 땅으로 쫓아내셨다면, 그분의 완전하시고 영원하신 계획 가운데 사탄이 땅에서 맡을 역할이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또 그 역할은 성경이 기록하는 대로 바로 아담을 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라곤 없습니다. 인간 이성으로 언뜻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욥의 마지막 고백대로 “하나님의 이치를 인간의 무지한 말로 가릴” 수는 없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화가 꼭지까지 차서 사탄더러 더 이상 꼴도 보기 싫으니 이 거룩한 영계에 머물지 말고 물질계인 지구로 내려가라고 고함치며 쫓아낸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달리 순간적 감정에 좌우되어서 마음에도 없었던 일을 충동적으로 하는 법은 없습니다. 충동적으로 하지 않았다면 사전에 정한 특별한 의도가 있었거나, 최소한 전후 사정을 알고 그 대응책까지 미리 마련하신 후에 묵인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사탄으로 인간을 꾀어서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 해서 절대 오해하지 말아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탄과 공모해서 죄악을 만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예 인간을 처음부터 죄인으로 만들려 창조한 것도 아닙니다. 인간을 자유의지를 갖춘 온전한 인격체로서, 피조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고 온전한 하나님의 청지기로 온전히 세우려 했습니다.
그분은 죄는 당신께서 죽기까지 철두철미 저주하십니다. 또 그 죄인은 당신께서 죽기까지 한 없이 사랑하십니다. 그분의 뜻은 비록 최초 인간 아담이 타락하여 그 후 모든 인간이 죄인으로 태어나는 한이 있어도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어서 로봇이나 동물로 만들지 않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넘치는 기쁨과 감사와 경배와 찬양 중에 당신을 자발적으로 따르고 동행해주길 원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런 당신의 남은 자를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도 비록 타락을 했을지언정 기계나 짐승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며 큰 은혜입니까? 그 외의 방안은 인간이 악만 알고 행하는 사탄 내지 그 부하 같은 존재가 되거나, 아니면 오직 선만 알고 행하는 하나님이나 천상의 선한 천사 같이 만들어야 합니다. 둘 중 어느 쪽도 인간이 아니라 영계에 속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또 다른 영적 존재를 창조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당신과 교제하면서 이 땅을 아름답게 다스릴 당신의 대리인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은 물론 최초 인간이 타락할 줄도 다 아시고, 묵인하셨고, 또 미리 예정하셨습니다. 인간이 보기엔 태초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이해되지 않고 차라리 사탄을 막아주었더라면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으로 죄에서 빠져나와 선을 실현토록 만드는 당신만의 계획이 따로 있었습니다. 또 그 계획은 더 완벽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십자가가 예정되어 잇지 않았다면 지금 질문이 아주 훌륭한 질문으로 성립될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얼마든지 불평 원망해도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마저 대꾸할 답변이 없을 것입니다. 아이가 너무 똑똑해서 도무지 대답 못할 질문을 하면 부모가 “이제 그만 귀찮게 해! 질문 그만해!”라고 고함치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 때문에 “내가 지혜 있는 자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사29:14)라는 하나님의 예언이 하나 어김없이 성취된 것입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어른이 되면 다 알 수 있어!”라고 답하듯이 십자가를 알면 인간 타락의 전말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만유를 충만케 하시는 예수님.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성경에서 가장 먼저 십자가 복음을 드러내는 구절입니다. 아담을 타락으로 이끈 사탄에게 하나님이 내린 저주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당연히 동정녀에서 탄생하실 예수님입니다. 또 사탄은 주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함으로써 승리했다고 잠시 착각할지 몰라도, 주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 것밖에 안 됩니다. 주님은 사흘 후에 부활하심으로써 인간을 죄의 노예로 묶고 있는 사탄의 철장권세를 완전히 깨트리고 인류를 구속할 길을 활짝 열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하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나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1-4) 태초 즉, 인간을 창조하기 전부터 말씀이신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하시다가 나중에 인간에게 생명의 빛으로 올 계획이 있었다고 합니다. 인간 창조 전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먼저 예정된 것입니다. 문제는 그 빛이 세상에 왔으되 흑암을 더 좋아한 인간들이 배척한 것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가 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5-17) 하늘의 보이지 않는 보좌, 주관, 정사, 권세들은 악한 천사를 포함한 영적존재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비 되어있었기에 하나님은 사탄이 당신을 배반한 것도 묵인했다는 뜻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4:4,5) 태초에 십자가가 계획되어 있었지만 시공간에 제한 받는 이 땅에서 실현되는 일은 하나님의 일정표대로 따르게 됩니다. 사탄의 꾐, 인간의 타락, 죄악의 확산, 이스라엘의 선택, 율법의 수여, 다윗 후손과의 언약, 메시아를 대망,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 죽음 등등, 모두가 하나님의 때에 따라 이뤄진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가 눈으로 보기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다 행한 것 같지만 실은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였다는 것입니다. 인간 역사 전부가 필연적으로 골고다 언덕의 절정을 향해 집중되도록 하나님이 이끄신 것입니다. 역사는 그분의 역사(His-story) 이야기이자, 그분의 인간구속사(Salvation History)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역사는 진행될 수밖에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 마지막 날의 악인의 영원한 불 못 심판과 동시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의인의 부활과 구원의 완성 등은 그 시기만 문제일 뿐 반드시 이뤄질 것입니다. 지금은 모든 피조물이 예수님의 구속과 그 완성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지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17-20)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7-12)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이 땅의 모든 것이 인간의 눈에 보이는 대로 모순, 상충, 불공평, 불합리, 왜곡, 거짓, 허망, 등등 한마디로 완전히 헛되고 헛될 뿐입니다. 태초부터 예비된 십자가의 사랑과 권세가 있기에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영원토록 신실하신 사랑 안에서 다시 회복되고 온전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의 은총과 권능 없이는 인간이 제대로 의로워질 수도, 선을 행할 수도 없으며, 심지어 참 인간다워질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탄의 타락은 물론 인간을 유혹하는 것을 묵인하신 뜻은 태초부터 영원토록 일관되게 “인간으로 순수한 자의에 의해 진심으로 당신을 기뻐하며 찬양하며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8/29/2012
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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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탄생에 대해 궁금합니다.(Q&A) / 박신 목사
죄의 탄생에 대해 궁금합니다.(Q&A) / 박신 목사
[질문]
셋째로, 죄의 탄생에 대하여 궁금합니다. 창세기의 처음부터 등장하는 죄,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던 죄 같은데 왜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죄가 있었을까요? 그 당시에는 하나님만이 존재하시던 시기인데 왜 죄란 것도 같이 공존해서 있었을까요?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죄란 것이 필요(?)했던 것인지요?
[답변]
많은 신자들이 궁금해 하면서도 제대로 정리하고 있지 못하는 주제를 질문해 주셨습니다. 인간이 더 강해지려면 환난을 통과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죄도 인간을 더 선하게 만들려고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조성한 것처럼 여기는 신자가 의외로 많습니다. 아니면 사탄이 아담을 유혹해서 범죄케 했으니 전적으로 사탄의 책임으로 떠넘기려는 경향도 보입니다.
질문자님이 예리하게 지적한 것처럼 가장 먼저 주지해야 할 사항은 하나님은 절대 죄와 공존(共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진선미(眞善美)에서 완벽하며 온전하게 거룩합니다. 어떤 추하고 더럽고 악한 것과도 티끌만큼도 연관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독생자라도 죽이시어 인류의 죄 값을 치르게 할 정도로 철두철미하게 죄를 저주합니다. 한마디로 죄는 그분과는 전혀 별개로 세상에 들어온 것입니다.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는 엄격히 말해 죄가 아니라 악의 세력 즉, 사탄이 존재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와 인간을 만드시기 전에 먼저 하늘의 영적 존재인 천사들을 창조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 가장 높은 천사장이 스스로를 너무 높이고선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사14:12-20, 겔28:11-19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벌을 받아 천국에서 추방되었는데, 그 때 자기를 추종하는 악한 천사들을 데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악한 영적 세력(evil spirits)들의 우두머리가 마귀 혹은 사탄(satan)이며, 그 졸개들을 귀신 또는 악령(demons)이라 부릅니다. 참고로 억울하게 죽은 영혼이, 혹은 사람이 죽어서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모든 환경을 아름답고 완벽하게 조성하신 후에, 당신의 형상을 닮도록 인간을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했습니다. 인간은 당신을 대신해서 이 땅을 다스릴 존재였습니다.(창1:28, 시편 8편)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기에 그분과 교통할 수 있는 영과, 또 그런 교통에 의거해 스스로 판단 결정 시행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심어주었습니다. 인간의 지배를 받아야 할 다른 피조물은 갖지 못한 인간만의 특성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인간을 정해진 프로그램대로만 움직이는 로봇이나, 생존과 종족보존만을 위한 한정된 지정의(본능)를 소지한 동물처럼 만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순전히 자발적으로 또 기꺼이 당신과 교제하며 그 뜻에 순종하여 이 땅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가꾸라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원래부터 하나님을 싫어하고 그분 대신에 세상을 통치하고 싶어서 안달하는 존재였습니다. 존재하는 목적 자체가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어떻게든 떼어놓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도 하나님과 즐겁게 교제하는 인간을 가만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아담에게 하나님이 선악과를 금하는 명령을 내린 까닭이 인간이 하나님처럼 될까 스스로 두렵고 싫었기 때문이라고 속삭였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좋아하는 마음을 불평하거나 의심을 품는 마음으로 바꾼 것입니다. 그러자 아시는 대로 선악과를 따먹고 불순종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사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악한 영적 존재로 그 활동 영역은 영적 차원에 머뭅니다. 물질계에 직접 자기를 드러내고 악을 행하지 못합니다. 반드시 대체물을 이용합니다. 때로 기괴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 같아도 사탄의 실체는 아닙니다. 인간을 속이는 짓일 뿐입니다. 에덴에서도 뱀을 이용해서 인간을 속인 것이지 뱀 자체가 사탄은 아니듯이 말입니다.
다른 말로 사탄은 악으로만 뭉쳐진 존재로서 영계에서 활동하기에 죄가 시작된 출발지는 될 수 있을지언정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된 근본책임이 그에게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담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었기에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면서 얼마든지 사탄의 유혹을 거부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죄의 탄생은 인간에 의한 것입니다.
흔히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어서 죄가 들어왔다고 계명을 위반한 행동 자체를 죄로 보지만 죄의 본질은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게 된 것은 그 마음에 하나님을 불순종하겠다는 결심이 이미 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 불순종을 죄의 본질로 보지만 여기서도 한 칸 더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 지워버렸기에 불순종하겠다는 결심이 섰다는 뜻입니다. 불순종 이전에 하나님을 등진 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이런 맥락은 사탄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사탄을 비롯한 천사들 모두에게도 당연히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성경문답 사이트 #117 “왜 천사에게도 자유의지를 주었나요?”의 글을 참조 바람) 하나님은 결코 규칙을 제정해서 강제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탄이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서 지움으로써 불순종을 넘어 거역 대적하게 된 것입니다.
요컨대 죄의 궁극적인 본질은 하나님과의 분리(分離)라는 것입니다. 모든 윤리적 죄악도 엄밀히 따지면 바로 그분을 외면, 거부, 대적할 때에 생기는 것입니다. 아담도 사탄의 유혹에 빠져 잠시나마 의도적으로 그분을 마음에서 지워버리자 범죄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자 자신과도 분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자연인에게는 자아를 찾는 것이 평생의 과제가 되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찾아서 그 안에서 안식을 찾기 전에는 자아 발견 혹은 실현은 전혀 불가능한데도 그럽니다. 헛되고 헛된 인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죄는 또 인간으로 이웃과도(진정한 사랑의 실종), 피조세계와도(인간의 안락만 목적으로 무분별한 자연정복) 분리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너무나 명백한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죄의 본질이 하나님과의 분리라면 그 근원을 하나님께 돌릴 수는 절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 대신에 이 땅을 다스리게 하고 또 그런 은혜와 복락을 누린 인간의 찬양과 경배를 받기 위해 창조했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당신과 교통할 대상인 인간과의 분리란, 인간적 표현으로 하자면, 꿈에도 상상하지 않았습니다. 죄의 기원은 전적으로 사탄의 유혹에 빠진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첨언할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간혹 만약 아담이 사탄의 유혹을 물리침으로써 지금껏 죄악이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어떤 세상이 되었을지 호기심을 갖는 사람이 있습니다. 즉 세상이 선으로만 가득 차면 아무런 재미가 없을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악이 있어야만 선을 선으로 알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서두에 잠시 언급한대로 인간의 도덕적 발전을 위해서 하나님이 고의로 악을 만들었다는 가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죄의 본질만 고찰해 보아도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음은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만약 아담이 끝까지 순종하였더라면 세상은 선으로 가득 차서 정말로 더 풍성하고 살만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선을 선으로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선을 행할수록 더 큰 선을 행하고 싶은 열정으로 가득 차게 것입니다. 절대 무료하지도 않고 날마다 더 새롭고 신나고 즐거울 것입니다. 오늘날 죄의 본성이 생생히 남아 있는 우리로선 그 아름답고 은혜로운 상태를 도무지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비유컨대 천국은 분명 그러한 곳일진대 우리로선 과연 어떨지 모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의 뜻은 인간더러 이 땅을 천국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끝까지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고 순종했다면 말입니다. 다른 말로 만약 아담이 그랬다면 죄가 이 땅에 들어올 여지는 전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죄의 탄생이 과연 누구의 책임이 됩니까?
요컨대 하나님은 스스로 인간과 분리할 뜻이 전혀 없었다는 이유로, 또 사탄은 아담이 그의 유혹을 거절했다면 죄는 얼마든지 들어오지 않을 수 있었다는 이유로, 죄에 대한 책임이 면제됩니다. 아무리 주인이 물방울 다이아몬드 반지를 철제금고가 아닌 화장대 위에 방치해 놓았다 해도 또 곁에서 자꾸 갖고 가자고 부추긴 악한 친구가 있었다 해도, 결국은 훔친 자가 죄를 지은 것이지 주인과 친구의 잘못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10/28/2011
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
세상에 이런 꽃도 있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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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첨가물 간단한 제거방법입니다.
•단무지
사카린나트륨 - 소화기&콩팥장애,발암성
▶찬물에 5분 담그기~
•어묵
소르빈산칼슘 - 중추신경마비,출혈성 위염,
간에 영향,발암성,눈&피부점막자극
▶뜨거운 물에 헹구기~
•맛살
착색제/산도조절제 - 간,혈액,콩팥 장애,발암성,생식기 저하
▶찬물에 담그기~
•햄
아질산나트륨/발색제 - 구토,호흡곤란,어린이 주의력 결핍,
분노,어린이 뇌손상,천식,우울증
▶뜨거운 물에 데치기~
•(캔에든)햄
아질산나트륨/발색제 - 구토,호흡곤란,어린이 집중력결핍,
어린이 뇌손상,천식,우울증
▶위에 노란기름 제거~
•비엔나소시지
아질산나트륨/MSG/타르색소 - 구토,호흡곤란,어린이 집중력결핍,
천식,우울증
▶칼집내서 뜨거운 물에 데치기~
•베이컨
아질산나트륨/MSG/타르색소 - 구토,호흡곤란,어린이 주의력 결핍,
천식,우울증
▶끊는물에 데친 후 키친타올로 기름제거~
.통조림
옥수수 아질산나트륨/산화방지제/인공색소 - 중추신경마비,
출혈성위염,발암성, 피부 점막 자극 콜레스테롤 상승
▶찬물에 씻기~
•두부
응고제/소포제/살균제 - 피부염,고환위축,발암성
▶찬물에 담그기~
•식빵
방부제/젖산칼슘 - 중추신경마비,간에 영향,눈·피부점막 자극
▶굽거나 전자레인지에 데워먹기~
•라면
산화방부제 - 콜레스테롤상승,호르몬제에서 발암성유발,
유전자 손상,염색체 이동
▶면만 삶은 후 찬물에 헹궈 다시 끊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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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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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츠와나
리비아
브룬디
튀니지아
짐바브웨
예멘
예루살렘
두바이
페트라, 요르단
팔미라
몰다이브
라샤, 티벳
라오스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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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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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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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유래 없는 세월호 대 참사 원인지목! 유병언 父子 현상수배 보상최고액 5억! 1390억이라는 천문학적인 배임·탈세 혐의…. 그러나 대다수 기독교복음침례회(구원파, 교주 유병언) 신도들에겐 이 모든 게 오히려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오래전부터 유병언 교주가 ‘핍박’에 대한 예방교육을 철저히 시켰기 때문이다. 지난 2005년 10월 15일 유병언 교주의 설교 ‘데살로니가후서를 읽고서’를 보자(영상기사 참고). 유 교주는 먼저, 자신들에게 닥칠 핍박은 현실이라고 말한다. “핍박을 겪어야 될 그리스도인들…이것은 결코 이론이 아닙니다. 역사의 실체며 …진짜 역사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어서 말한다. 핍박이나 고난, 환란이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고난을 받기로 결정된 집단이라면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된다”고. “많이 깨닫느냐, 못 깨닫느냐 그 차이일 뿐이지 핍박은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도 아무에게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환란이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축복과 함께 연결되는 겁니다. …복음을 아는 의 때문에 고난을 받기로 결정된 집단이라면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됩니다. 이것보다 나은 삶이 어디 있느냐. 궁궐 같은 예배당, 교회? 대단한 조직을 세운 그거?” 또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도 덧붙인다. “믿는 성도들에게는 기이히 여김을 받는 날이 온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날까지 우리는 세상에 괴롭지만, 남들에게 천덕꾸러기 같이 보이지만 확실히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물론 구원파가 핍박받는 이유는 오로지 복음 때문이다. 구원파, 사이비, 심지어 오대양이라는 핍박도 마찬가지다. “복음을 미리 알았다, 은혜의 복음을 알았다, 의를 주장했다, 구원에 대한 확신에 대해서 지적을 했다, 여기에 얻어 걸리는 인사가 무엇이냐? 구원파다! 음? 또 심지어 덮을 욕 없는 사람들은 만들어서 사이비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오대양이다! 별 거 다 뒤집어 씌웠습니다.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 할 때, 이것은 아무에게나 내는 게 아닙니다. 어떤 거스려 더러운 소리를 해도 복음은 계속 진행되고 있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핍박을 면하기 위해서 떠나면 핍박은 우리에게 가중됩니다. 떠난 사람들은 많이 갔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간직되어 왔습니다. 역사는!” “예수 믿고 편하기를 원해요? 또 타협하기를 원해요? 인터넷을 찾아보면 괴상치도 않습니다. 그러나 너무 거짓들이 많습니다. 다 같이 따라합시다. 너희를 거스려(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또, (마태복음 5장) 10절 다시 보겠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천국이 저희 것이라) 나를 인하여(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때는(모든 악한 말을 할때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유 교주의 설교에 따르면 핍박은 결국 구원파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러므로 절대 외면해선 안 된다. “이것(핍박)은 영광의 길에 서는 하나의 척돕니다.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이것은 우리에게 그림자같이 깔려 있습니다. 억지로 핍박을 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경찰과 검찰의 유병언 교주 일가 검거작전에 대해서조차 “갈 데 까지 가 보자”며 결사항전 하는 구원파 신도들의 모습이 아마 여기서부터 기인된 게 아닌가 짐작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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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은사 지금도 계속 된다
개혁교의 대표적 신학자들이라 할만한 분들(죤 칼빈, 마틴 루터, 벤저민 휫필드. 죤 매카터, 리처드 개핀, 대니얼 월리스) 등, 그분들은, 초대 교회 이후, 은사중단론을 지지한 것을 저도 알고 있다. 중단설(cessationism)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초기교회 이후 방언, 신유, 은사, 계시 등이 끊겼고 사라졌다는 주장이다. 그 이유로는 성경 말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만 모든 은사들이 필요하였고 그에 따른 임무(성경이 완성)가 끝났으므로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성경을 많이 읽기 전에는 그것이 그런가 하였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우리가 모든 은사들이 중지되었다고 하는 것을 그대로 따르면 안전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요 14: 26 말씀이 성도에게 아무런 유익도 필요함도 없게 된다”는 것이 밝히 깨달아지기 시작했다.
물론,직통 계시적, 성경 말씀을 벗어나고 그 말씀을 대치할 예언은 중단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66권을 가감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기에 그러하다. 그럼에도 내 속에 내주해 계신 성령 하나님의 역할이신, 견인의 능력마저 부인할 수는 없다는 것이 성경을 토대로 재정립된 나의 견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 26) 예수님께서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오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분께서는 우리 속에 내주해 계시면서, 오늘도 우리 성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우리가 나가야 할 길을 가르켜 주시고 그 말씀을 지키게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무시하지 않는 성도들이 수많은 기적의 능력들을 실생활에서 체험을 하게된다.
믿는 자는, 새 방언을 말할 것을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때부터...그 약속이 어떤 다른 데 기초를 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 마음속에 계신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감히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면, 그분의 말씀이 생각나고 떠오름으로 내 앞길 인도함 받는 것 그 자체는 당연한 것인데, 우리 개혁교회에서는 이 부분을 간과하기 때문에, 오히려 ‘극단적 신비주의자들’을 양산해 내는 것이라고 본다.
신약 시대의 신앙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인정하는데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한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예수를 주로 시인할 수도 없다. 완성된 기록 계시 속의 예언이 마음속에 떠오르고 생각나기도 하고…이런 성령 하나님의 역할하심마저 인정하지 못하면 우리네 같은 선교사들, 제 3국에서 어찌 살아남을 수가 있을 것인가?
성경은 어느 한 구절도 필요없는 구절이 없이 중요하지만, 앞 뒤 전 후 문맥도 살펴야 하고 통전적으로 살펴야 한다. 방언이 우리가 배워서 할 수 있는 외국어일 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new tongues(νέες γλώσσες)란 말씀을 쓰지 않으셨고, strange language(παράξενη γλώσσα) 혹은, 다른 방언 the other dialects( Οι άλλες διάλεκτοι)를 너희 믿는 자들이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배워서, 학습으로 되는 것을 무엇 때문에 성령의 능력으로 행해야 한다는 것인지....그러나, 그 역시,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나는 성령 하나님의 전지 전능성을 믿기에,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언젠가 댓글로 말씀 드렸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아는 분 중에 어릴 적 부모를 여이고 천애 고아로 성장하신 여성이 있다. 그분은 학교 문턱에도 가볼 수가 없었고, 우여곡절 끝에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에 들어왔다고 한다. 얼마 후, 첫 남편에게도 버림을 받았고, 고통 중에 있을 때 찾아와 주신 주님을 만났다고 한다. 교회를 나가긴 해야겠는데, 말이 많은 한국 사람들이 싫었기 때문에 그분은 미국인 교회를 출석했다. 과거가 여간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미국 교회에 나가니, 영어로 찬송도 불러야 하고 말씀도 들어야 하고...너무나 힘이 들어서 고통 하던 중, 영어 성경을 읽어보기로 작정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매일 아침 영어 성경을 들고 읽어나가기 시작(읽는 것이 아니라, "I n t h e b e g i n n i n g 이렇게 알파벳을 한자씩 소리내어 읽었단다.)했다. 화장실에서도 읽고...틈만 나면 그러던 중, 어느 날, 그녀의 입이 갑자기 열려서, 알파벳으로 끙끙거리던 그 말씀이 문장으로 줄줄 이어지고....
깜짝 놀란 그녀 자신, 그리고 그녀의 그런 음성을 듣고 있던 (재혼한 일본인 2세)남편이 놀라서 소동을 하고요....이렇게 배운 적없는 외국어도 가능함을 나는 안다. 성령 하나님 안에서는....
또 고전 14: 2절의 영언(비밀)의 체험 사례: 그야말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선교지에서 경함한 일이다. 교회로 빌려서 사용하는 건물에서 몇 몇 성도님들과 함께 철야 기도를 드리던 때였다.
나는 기도할 때면,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불러가면서 주님께 기도로 아뢴다. 그날도 우리가 섬기던 교회의 집사님 한 분의 이름을 넣고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저의 혀가 구르면서 내가 평소에 쓰지않던 방언이 나왔다. 그리고 그 뜻이 연달아 깨달아지는데 "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그를 침상에 내어 던지리라!" 나는 너무도 놀라서 울며 불며, 조금만 더 참아주시고 그를 불쌍히 여겨주십사...아마도 그때 나와 함께 하는 다른 분이 들으면 안될 것을 아시고...이런 것이 비밀이 아닌가 싶다. 새로운 계시로서가 아닌, 성경 말씀을 들려주시되 교회의 덕을 세우도록...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 이분이야말로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신가 이런 말이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한다고 해서 성령의 능력마저 부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치유도 주님 안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때, 주님의 뜻에 따라 일으켜주심을 믿는 그런데, 한 번 기적을 베풀어 주셨다고 하여서, 자신이 신령하다고 착각을 한다던지, 다른 성도들보다 더 우월하다던지....이런 마음을 먹는 그 순간부터 사단이 그런 사람을 가지고 충동질 하기 시작한다. "너는 신령하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네가 기도해 주면 병도 낫는다." 등등. 그런 사단의 속삭임도 우리의 영혼이 깨어 감지해 내어야 하는데, 오히려 이용하여 자신을 신성화시켜서 모든 성도들 위에서 군림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는 삯군이요 거짓 선지자요 사단의 졸개일 뿐이다! 그들이 지금 자신을 극대화 시키는 것이 보이지가 않는가?
((개혁 교회는 성령의 음성과 인도가 없다고 가르치지요)이 말은 표현적으로 잘못되었기에 다음과 같이 수정한다.(개혁교회(다는 아님)중 일부에서는 성령의 은사중 방언과 예언은 중지되었다고 가르친다. (아래 참조를 올려두었음) 칼빈주의는 사도 시대와 함께 모든 은사가 중지됐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며, 오늘날의 은사는 어떤 은사라 하더라도 사도성이나 직통 계시성을 가지지 못한다 지적하고, 이부분은 우리 모두 동의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자신은 성령의 인도하심의 음성을(성령의 선물로서의 방언의 은사), 방언의 은사를 체험했다. 그러니까, 체험을 한 성도님들이 달려갈 곳이 어디겠는가? 사단이 쳐놓은 덫, 극단적 신비주의자, 삯꾼들의 품밖에 더 있겠는가? 어찌 생각해보면, 말씀 안에서 바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순진한 양떼들을 '은사중단론 자'들이 극단적 신비주의, 사단이 쳐논 덫, 그 함정으로 밀어넣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고로, 극단적 신비주의자도 경계해야 하나, 극단적 칼비니즘도 배격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글: 별똥별/ 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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좐 칼빈-복음(福音) 전파(傳播)의 목적(目的)]
복음(福音) 전파(傳播)의 목적(目的)]
“너희가 누구의 죄(罪)든지 사(赦)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20:23)
복음 전파의 주된 목적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和睦)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이 일은 죄에 대한 무조건적인 용서(容恕)로 이루어집니다. 바울도 이런 이유로 복음을 “화목하게 하는 직분”(고후5:18-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이라고 부를 때 우리에게 그 사실을 알려 줍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다른 많은 것들도 복음 안에 담겨 있지만 하나님이 복음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시는 주된 목적은 인간에게 죄를 묻지 않으심으로써 인간을 은총 안에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의 신실한 일꾼임을 보여 주려면 이 문제에 우리의 가장 진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복음과 이교도 철학의 주된 차이점은, 복음만이 인간의 구원을 값없는 은혜를 통한 죄 용서에 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이 주시는 나머지 복-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를 조명하시고 거듭나게 하시며 우리를 당신의 형상으로 새롭게 빚으시며 세상과 사탄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으로 우리를 무장시키시는 일 등-의 원천입니다. 따라서 모든 경건의 교리와 교회의 영적인 건축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신 하나님이, 값없는 은혜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입양하신다는 이 기초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죄를 용서하라고 명하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자신만이 가지신 권세를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용서할 권세는 그리스도께만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영광을(그 영광이 그리스도께만 있는 한) 사도들에게 주지 않으시고 다만 그들의 사역을 통해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자 그들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죄 용서를 선포하라고 명하십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사도들과 사역자들을 통해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그리스도뿐입니다. -존 칼빈과 함께하는 말씀묵상 36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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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교황의 축복과 저주
로마 교황의 축복과 저주
* 이 글은 영국과 호주에서 발간된 「Papal Blessings and Curses」라는 소책자를
스위스의 구영재 선교사님이 번역한 것입니다.
「천주교는 기독교와 다릅니다」(도서출판 두루마리)에 수록돼 있습니다.
1990년 이탈리아에서는 월드컵 세계축구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특별히 카톨릭 국가인 아일랜드 팀을 축복하고 다음날의 경기에서 승리할 것을 기원하였다. 그러나 교황의 축복은 오히려 아일랜드 팀에게 패배를 안겨다 주었다.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살려 세계제패를 꿈꾸며 결승에 진출했던 이탈리아 팀 역시 바티칸에서 로마 교황으로부터 특별축복을 받고 출전했으나 역시 패배의 잔을 마셔야만 했다. 이탈리아의 신문들은 로마 교황의 축복에 대해 의심했으며, 로마 카톨릭교의 주간지 [카톨릭 위클리](Catholic Weekly, 1990년 7월 25일자) 조차도 로마 교황의 축복의 효력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는 글을 실었다.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1588년 스페인 함대에 일어난 일을 잘 알고 있다. 무적함대를 자랑하던 스페인의 필립 2세는 영국을 정복하여 로마 교황에게 되돌려 주려고 금과 군인과 로마 교황의 축복을 가득 실은 [아르마다] 함대를 출항시켰다. 그러나 로마 교황의 축복은 그들에게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음이 곧 드러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쳐서 흩어 버리시고 그들 대부분을 산채로 수장시켜 버리셨다. 역사는 로마 교황의 축복이 가져다주는 치명적인 것들에 대한 수많은 예들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이 작은 책자를 통해 독자는 로마 교황의 축복과 저주가 어떻게 일관성 있는 결과를 가져왔는지 이제 보게 될 것이다.
로마 교황의 축복
1) 로마 교황 비오 9세(1846~78)는 시실리아의 왕에게 “황금 장미”(역자 주: 로마 교황이 축복한 황금 장미는 특별한 명예의 상징이며, 순금으로 제작되어 로마 카톨릭 국가의 원수, 교회, 도시 등에 기증되었다. 이 황금 장미의 실물은 프랑스 파리의 끌리니 박물관 Museede Paris에도 소장되어 있으며, 좀더 자세한 정보를 원하면 대영백과사전의 “Golden Rose”란을 참조하기 바란다)를 보냈다. 그런데 이 왕은 그 축복을 받은 지 일년이 채 못 되어 왕좌에서 쫓겨났다.
2) 역시 같은 로마 교황 비오 9세가 오스트리아의 황제를 축복했을 때, 황제는 일년이 못되어 베네치아를 잃었고, 사도와에서 참패를 당했다.
3) 로마 교황 비오 9세는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에게 황금 장미를 보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녀는 왕좌에서 쫓겨나 망명 중에 죽었다.
4) 로마 교황 비오 9세는 프랑스의 위제니 왕후에게 황금 장미를 보냈다. 일년이 채 못 되어 왕과 왕비는 권좌에서 쫓겨났고, 둘 다 망명 중에 죽었다. 그들의 외아들이었던 왕자는 아프리카에서 줄루족에 의해 살해되었다.
5) 브라질의 왕후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삼일 후 왕후의 다리가 부러졌으며, 왕과 왕비는 권좌에서 쫓겨났고 귀양 중에 죽었다.
6) 브라질의 왕위 상속자였던 공주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곧 기형아를 출산했으며 망명 중에 죽었다.
7) 로마 교황은 멕시코의 막시밀리안 황제를 축복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곧 권좌에서 쫓겨났으며, 국민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8) 로마 교황은 역시 그 황제의 과부를 축복하였으나 그녀는 불치의 정신병에 걸려 망명 중에 죽었다.
9) 1890년 로마 교황은 수녀들을 가득 싣고 남아프리카를 향해 떠나는 증기선을 축복하였다. 그러나 이 배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실종되었다.
10) 로마 교황은 몬테비데오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는 호화 여객선을 축복하였다. 그러나 이 배는 이틀 후 침몰하고 말았다.
11) 로마 교황은 프랑스의 로마 카톨릭교도였던 불랑제(George Boulanger, 1837-91) 장군을 축복하였다. 그러나 채 2주가 못되어 그는 추방되었고, 그후 자신의 정부(情婦)의 무덤 앞에서 자살하였다.
12) 미국 남북전쟁의 영웅이었던 셔만(W. T. Sherman) 장군의 부인은 로마 교황으로부터 황금 장미를 받은 직후에 죽고 말았다.
13) 윈드호스트(Ludwig Windhorst, 1871년에 결성된 독일 로마 카톨릭 중앙당의 지도자) 박사는 로마 교황이 수여하는 그리스도 훈장(Order of Christ))을 받은 뒤 채 일년이 못되어 죽었다.
14) 1895년 다마스커스의 대주교는 빗토리아(Vittoria)에서 스페인의 군대와 함대에 로마교황의 축복을 기원하였다. 그 결과 스페인은 두 개의 함대와 두 개의 군단을 잃었다.
15) 1897년 로마 교황의 사절단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대자선 바자회를 축복하였다. 그러나 5분이 채 못 되어 바자회는 불길에 휩싸였고, 오스트리아 황후의 자매를 비롯해서 거의 150명의 상류인사들이 사망하였다.
16) 가련한 오스트리아의 황후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황금 장미를 받았다. 그 후 황후는 스위스의 제네바 호숫가에서 살해되었고, 그의 아들은 자살을 했으며, 왕위계승자였던 그녀의 조카 페르디노는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해 세계 제1차대전이 일어났다. 그 후 오스트리아는 더 이상 제국으로 불려지지 않았다.
17) 로마 교황을 방문한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7세는 교황 자신의 서명이 들어있는 레오 13세의 사진을 기념선물로 받았다. 그러나 바로 영국군이 소말리아에서 역전을 당했다는 소식이 들렸고, 왕의 건강은 악화일로를 치달아 죽을 때까지 회복되지 못했다.
18) 로마 교황은 영국 국왕의 특사였던 덴비(Denbigh)경을 축복하였다. 바로 그 날 남아프리카의 영국군은 참패를 당했고, 미투엔(Mithuen)경은 중상을 입었다. 영국의회의 로마 교황 신봉주의자들은 이 뉴스를 듣고 기뻐했다.
19) 1923년 바텐베르크(Battenberg)의 에나(Ena) 공주는 결혼식 날 로마 교황의 축복을 받았다. 나흘이 채 못 되어 그녀는 로마 카톨릭 무정부주의자들의 습격을 받아 13명이 사망하고 80여명이 부상당하는 와중에서 겨우 도망쳐 목숨을 건졌으나 그녀의 결혼 예복은 피로 범벅이 되었다. 1931년 5월, 그녀와 남편(알폰소 13세 왕)은 왕좌에서 쫓겨나 스페인으로부터 탈출하였다.
20) 1906년 로마 교황은 로마 카톨릭교로 개종한 세르비아의 나탈리(Natalie) 여왕을 축복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망명 중에 죽었으며, 그녀의 외아들은 왕위에 올랐다가 살해되었다.
21) 오를레앙(Orleans)가에 속한 포르투갈의 한 왕비는 로마 교황의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왕이었던 남편과 장남은 마차를 타고 가다가 왕비 옆에서 살해되었고, 목숨을 건진 왕비는 살아남은 다른 한 아들과 함께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그 후 포르투갈은 공화국이 되었다.
22) 권세가 극에 달했던 독일의 황제는 1908년 로마 교황을 방문하고 그의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1918년에 왕위를 잃었고 망명 중에 죽었으며, 독일은 패망하여 약소국으로 전락하였다.
23) 1914년 영국의 재산가였던 다이어 에드워드(Dya Edwards)는 로마 교황의 신봉자가 되었다. 그 뒤 1916년에 그는 로마를 방문하고 로마 교황의 축복을 받았다. 그리고 4일 후에 그는 죽었다.
24) 1926년 로마 교황은 벨기에의 엘리자베스 왕비에게 황금 장미를 보냈다. 1934년 왕 알베르 1세는 등반사고로 죽었고, 그들의 며느리였으며 왕비가 되기 위해 로마 카톨릭교로 개종한 스웨덴 출신의 아스트리드 왕비 또한 스위스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다.
25) 1928년 로마 교황은 비행선 이탈리아를 축복하고 북극점에 놓을 십자가도 주었다. 그러나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비행선은 추락하여 두 동강이가 되었고, 승무원의 절반은 실종되었다. 노빌(Nobile) 장군은 부상을 입었고, 그 후 사건조사 위원회로부터 심한 견책을 받았다. 이 사건은 그 당시 최악의 사건이었다.
26) 무솔리니가 이디오피아(Abyssinia - 이디오피아의 옛 이름) 사람들을 학살하고 그 땅을 약탈했을 때, 로마 교황은 이탈리아 국민을 "위대하고 선량한 국민"이라고 축복하였으나 무솔리니와 그의 정부(情婦)는 살해되어 거꾸로 매달려 군중에게 공개되었다.
27) 1961년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로마 교황청의 요청대로 검은 색 의상을 입고 로마 교황을 방문하였다. 그 이후로 해가 지는 일이 없었던 대영제국은 쇠퇴의 길로 들어섰으며, [로마협약]에 의한 유럽공동시장에 가입함으로써 그 주체성을 잃고 경제적으로 로마에 예속되는 길을 걷게 되었다. 또 영국 왕실 왕족들이 로마 교황과 잦은 접촉을 함으로써 자신들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 정치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안겨 주었다.
28) 1963년 3월 7일, 소련의 후르시초프(Krushchev) 수상은 로마 교황과 직접 접견하지는 않았지만, 바티칸-소련간의 관계개선을 증진시키기 위해 딸과 사위인 아주벨(Adzubel)을 로마에 보내어 로마 교황을 접견케 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일년 반이 지난 후 1964년 10월 16일, 그는 권좌에서 밀려나 당서기장직을 사임하였으며, 그 이후로 그는 정치세계에서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29) 1963년 7월 2일,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로마 교황을 접견하고 축복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월남파병 병력을 증강시킴으로써 미국을 월남전에 깊이 개입시켰다. 그리고 1963년 11월 12일에 그는 암살당하고 말았다.
30) 1964년 로마 교황은 황 금장미를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에 보냈다. 그 이후로 이스라엘 영토 내, 특히 "거룩한 장소"로 불리는 곳에서는 끊임없는 소요가 잇달아 일어났다.
31) 1964년 5월 12일, 요르단의 후세인 왕은 로마 교황을 접견했다. 일 년 후 1965년 6월 5일, 요르단 군은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 군에게 대패하였고 많은 영토를 잃게 되었다.
32) 1964년 10월 12일,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대통령은 그 권력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로마 교황을 접견하고 평범한 신도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명예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1967년 2월에 축출당하고 말았다.
33) 호주의 노동당 당수인 아더 콜웰은 로마 교황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곧이어 그의 정치 생활은 끝이 나고 말았고, 결국 정치무대로부터 사라지게 되었다.
34) 1965년 10월 5일 로마 교황 바오로 6세는 뉴욕 시를 방문해서 유엔총회에서 연설하였다. 존슨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로마 교황을 방문하였고, 미국을 위해 뜻 깊은 방문이라며 환영하였다. 대통령은 자신의 부인과 딸을 로마 교황에게 소개하였다. 그 후 그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미사에 자주 참석하였다. 1968년 4월 1일, 그는 차기 선거에 나서지 않을 것을 선언함으로써 사실상 은퇴하였으며, 일년 후 사망하였다. 그가 임기를 치른 3년은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때였다. 50만 명 이상의 미군이 월남에 파병되었으나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대학가에서는 반전데모가 한창이었고 흑인 폭동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해외에서의 미국의 위신은 크게 실추되었다.
35) 1966년 4월 24일, 그리스의 콘스탄틴 왕과 마리 왕비는 로마 교황을 접견하였다. 일 년 후 1967년 4월 21일, 일단의 육군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콘스탄틴 왕을 폐위시켰다. 같은 해 12월 12일 친 왕파가 일으킨 쿠데타가 실패하자 왕과 그 가족은 그리스로부터 탈출했다.
36) 1967년 2월 5일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함과 동시에 로마 교황을 접견하였다. 그러나 1968년 6월 6일 그는 암살되고 말았다.
37) 1967년 6월 1일, 프랑스의 드골 장군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의 전쟁 주축국이 항복한 후 형성된 평화위원회에 바티칸 대표를 절대 용인하지 않겠다는 종래의 태도를 바꾸어 로마 교황과 화해하기 위해 로마 교황을 접견했다. 그러나 1969년 8월 24일, 드골 대통령은 헌법개정안이 부결된 후 사임하고 말았다.
38) 1967년 5월 12일, 로마 교황 바오로 6세는 포르투갈의 파티마(Fatima)를 방문하녀 그 당시 수상이었던 살리자 박사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일 년 후인 1968년 9월 8일에 살리자 수상은 중풍에 걸려 사임하고, 캐타노 박사가 새 수상이 되었다.
39) 1969년 7월 31일, 로마 교황 바오로 6세는 아프리카의 우간다를 방문하여 자신을 초청한 밀톤 오보테 대통령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하고 우간다 국민을 축복하였다. 그러나 1971년 1월, 오보테 대통령은 이디 아민이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하야했고 국외로 추방되었다. 그 후 8년 동안 우간다 국민은 이디 아민의 폭정에 시달렸다. 1975년 9월 10일, 이디 아민 대통령은 로마 교황을 접견하였다. 그러나 1979년 4월 12일, 인접한 탄자니아에서 온 해방군은 이디 아민의 군대를 격파하였고, 이디 아민 대통령은 해외로 탈출하였다.
40) 1970년 9월 29일, 닉슨 대통령은 로마 교황을 방문하고 월남전으로부터 모든 미군을 철수시킬 계획을 말하였다. 이 때 그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냉대를 받고 축복도 받지 못하였다. 1972년 닉슨 대통령은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하였다. 불행하게도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닉슨 대통령은 미국 헌법이 바티칸의 공식 대표부를 두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자신의 개인적인 특사를 바티칸에 보내어 로마 교황청과 타협하였다. 1972년 12월 21일, 닉슨 대통령의 딸 패트리샤와 사위는 로마 교황을 접견하였다. 그러나 1974년 8월 24일,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 불명예스럽게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41) 1970년 10월 10일 이디오피아의 하이레 셀라시에 황제는 로마 교황을 접견하였다. 1972-73년에 걸쳐 이디오피아는 심한 기근과 가뭄에 시달렸다. 1974년 8월, 그는 쿠데타에 의해 폐위당하고 군부가 권력을 장악하였다. 1975년 8월 27일, 그는 감옥에서 죽었다.
42) 1970년 11월 30일, 로마 교황 바오로 6세는 파키스탄을 방문하고 폭풍으로 인한 피해 상황을 돌아보고 난민들을 동정하였다. 그러나 1971년 3월, 내전이 일어나 일 년 이상 계속되었고, 수십만의 사람이 죽고 수백만이 난민이 되었다. 1972년 4월, 로마 교황의 방문을 허락하였던 칸(Khan) 대통령은 인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하야했다.
43) 1970년 12월, 로마 교황 바오로 6세는 호주를 방문하여 “하나님의 축복이 위대한 호주 위에 함께 하기를, 또 평화와 번영이 함께 하기를” 기원하며 호주를 축복하였다. 그의 추종자들은 매우 기뻐하며 국가 위에 큰 축복이 임하기를 기대하였으나 실제로는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1973년 4월 27일, 위트램 수상은 로마 교황을 접견하고 몇 달 후 국민의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호주 역사상 최초로 바티칸과의 외교 관계를 열었다. 그 후 많은 노동쟁의가 일어났으며, 절제 없는 임금인상 요구, 경제 불황, 17%에 이르는 높은 인플레이션, 심각한 실업률 등은 1982년이 되도록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974년 12월 15일, 다윈 시는 무서운 폭풍우에 의해 초토화되었고, 1975년 12월 13일 호주 노동당은 선거에서 대패를 당했다. 프레이저가 수상이 되었고 다시 한 번 노동당이 참패하면서 위트램은 당수직에서 물러났다.
44) 1972년 10월 5일, 영국의 히드 수상은 로마 교황을 접견하였다. 1973년 12월 17일,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경제적, 산업적 위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1974년 3월 4일, 보수당이 패배하고 히드 수상은 사임하였다. 1975년 2월, 마가렛 대처가 당수가 되고 히드는 당수직에서 물러났다.
45) 1972년 11월 14일, 망명 중이던 아르헨티나의 전 대통령이었던 페론은 새 대통령으로 부임하기 전에 로마 교황을 먼저 접견하였다. 그러나 1974년 7월 2일, 그는 일년간의 공직생활 후 심장마비로 서거하였다.
46) 1973년 4월 9일, 월남의 티우 대통령은 로마 교황을 접견하였다. 그러나 1975년 7월 24일, 월남군은 월맹군과 베트콩에 의해 완전히 축출되어 티우는 해외로 탈출하였다.
47) 1975년 6월 4일, 포드 대통령 부부는 로마 교황을 접견하였다. 1976년 11월 4일, 포드 대통령은 선거에서 패배하고 지미 카터가 새 대통령이 되었다.
48) 1977년 7월 4일, 호주 수상 프레이저는 로마 교황을 접견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프레이저 수상에게 재앙이 내리는 대신에 1978년 8월 6일 로마 교황 바오로 6세가 죽었다. 새로 선출된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1세도 급작스럽게 죽었다. 그러나 프레이저 수상에게 올 재앙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인플레이션 대응책은 큰 실패로 돌아갔고 호주는 최대의 실업률로 인해 크게 곤경을 당했다.
49) 1978년 2월 14일,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은 로마 교황을 접견하였다. 그러나 1981년 10월 7일 그는 암살당했다.
50) 1979년 11월,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터키를 방문하녀 디머렐 수상의 영접을 받았다. 1980년 9월 12일, 디머렐 수상은 이브렌 장군이 이끄는 터키 군부의 무혈 쿠데타에 의해 하야하고 말았다.
51) 1979년 10월,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미국을 방문하자 교황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을 뿐 아니라 백악관에까지 초청하였고, 의회 연설까지도 하게 했다. 연이어 카터 대통령은 1980년 6월 23일 개인적으로 바티칸을 방문하였다. 1980년 12월 선거에서 그는 레이건에게 압도적인 대패를 당했다. 로마 교황의 두 번에 걸친 축복도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52) 1981년 2월, 오히라 수상은 일본을 방문한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환영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12일 그는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53) 1981년 2월,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필리핀 군도를 방문하여 관습대로 땅에 입을 맞추고 필리핀을 축복하였다. 그 이후 이 나라는 태풍의 피해로 인해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상실하였다. 마닐라의 대주교인 신 추기경은 필리핀의 경제가 악화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The Age, 1981년 1월 2일자). 마르코스 대통령은 굴욕스럽게 쫓겨났고, 새 대통령이었던 아키노는 인기를 잃었다. 재앙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 것이다.
54) 1980년 5월 9일,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가나의 아크라를 방문하여 리만 대통령의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1982년에 로링스는 군사혁명을 일으켜 리만 대통령의 부정부패를 규탄하고 그 정권을 축출했다. 리만 대통령은 해외탈출을 시도하다가 체포되었다.
55) 1980년 6월 2일,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프랑스를 방문하여 지스까르 데스땡 대통령으로부터 국가 원수 급의 예우를 받고 개인적인 면담을 가졌다. 그러나 일 년이 채 못 된 1981년 1월 5일, 그는 대통령 선거에서 사회당 당수인 미테랑에게 패배 당했다.
56) 1980년 7월 1일, 로마 교황은 10일 간에 걸쳐 브라질을 방문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82년에 브라질의 정부 관리들은 900억불의 외채를 지고 있음을 시인하였고, 1983년에는 지난 5년 동안의 가뭄으로 인한 기근이 브라질 일부지역을 휩쓸었고 브라질은 경제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57) 1981년 11월 11일, 인디라 간디 인도 수상은 로마 교황을 접견하였다. 그러나 1984년 11월 그녀는 시크교도인 자신의 경호원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58) 1982년 2월, 로마 교황은 나이지리아를 방문하여 세가리 대통령의 영접을 받았다. 그 뒤 세가리 대통령은 바하리 장군이 이끄는 쿠데타군에 의해 축출 당했고, 3년 후인 1985년에 바하리 대통령도 다고냐라 장군이 이끄는 쿠데타군에 의해 축출 당했다.
59) 1982년 6월, 로마 교황은 아르헨티나를 방문하여 야외 미사에서 갈티리 장군을 비롯한 군 수뇌 장성들을 축복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4일 후 아르헨티나 군은 포클랜드 섬의 스탤리 항에서 영국군에게 항복하고, 갈티리 장군은 사임하였다. 1983년 10월에는 아르헨티나 공군의 고위 장성 두 명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다. 그 중 한 사람은 공군 사령관 플레시 장군이었다. 갈티에 장군은 12년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60) 영국은 사상 초유로 로마 교황이 영국을 방문하겠다는 호의를 수락하였다. 그러나 1982년 5월로 예정된 로마 교황의 영국 방문을 몇 주 앞두고 영국은 국민의 95%가 로마 카톨릭교도국인 아르헨티나와의 전쟁에 휘말려들었다.
61) 1982년 9월, 모나코의 그레이스 왕비는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이 사고가 있기 약 2년 전 왕과 왕비는 로마에서 선전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로마 교황을 접견하였다.
62) 1984년 5월,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파푸아 뉴기니를 방문하여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같은 해 9월, 뉴브리튼 섬의 물루웨이 화산이 분출하여 섬 주민들이 급히 대피하였고 1985년에는 집단강간, 살인, 강도 등의 폭력사건이 온 섬에 만연하였다. 1986년에 지도자였던 소매어는 윙티에 의해 축출되었다.
63) 1984년 5월, 로마 교황은 구아달카날과 호니아라를 방문하여 솔로몬 군도를 축복하였고, 아울러 인근 피지와 바노트 섬에서 온 방문자들도 축복하였다. 그런데 1985년 1월에 에릭이라는 이름을 가진 태풍과 니켈이라는 이름을 가진 태풍이 연달아 섬들을 강타하였다. 특히 피지와 바노트에 있는 가옥과 농장은 큰 피해를 입었다. 1986년 3월, 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태풍이 솔로몬 군도를 강타하여 그 지역을 황폐케 만들었고, 섬주민의 절반은 집을 잃었고, 이 태풍은 계속해서 시카이나, 말라이타, 구아달카날, 산 크리스토벨 섬들을 강타하였다.
64) 1985년 8월 13일, 로마 교황은 아프리카의 카메룬 국의 보멘다 시를 방문하고 근처에서 야외 미사를 가졌다. 그로부터 1년 후 화산호(湖)인 니요스 호수에서 독가스가 분출되어 보멘다 시의 외각지대의 촌락들에서만 2천 명이 사망하였고, 짐승과 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하였다.
65) 1986년 11월 22일, 로마 교황은 랭 수상이 이끄는 뉴질랜드를 방문하여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1989년 8월, 랭 수상은 더 이상 정치적 압력을 견디다 못해 사임하였다. 비록 그가 속한 당이 1987년 8월 선거에서 이겼지만 그에 대한 개인적인 추문은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다.
66) 1986년 11월 25일, 뉴질랜드 야당 당수였던 하워드는 의회에서 로마 교황을 환영하였다. 그의 환영 연설문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로마) 교황께서는 이 시대의 가장 존경받는 기독교인으로서 이곳을 방문하셨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위대한 교회의 가장 추앙 받는 지도자로서 환영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최고 멤버로서 말입니다......!” 그러나 하워드는 1988년 총선에서 패배를 했고 결국 자유당 당수직에서 밀려났다.
67) 1986년 11월 26일, 제프 케넷은 비록 자신이 로마 카톨릭교도가 아닐지라도 플레밍톤 경마장에서 로마 교황이 집전하는 미사에 참가할 것이라는 것을 선언하고 로마 교황을 만났다. 그러나 1989년 케넷은 빅토리아에서 있었던 선거에서 패배했고 6개월 후에 자유당 당수직에서 물러났다.
68) 1986년 11월 26일, 뉴사우스 웨일즈의 수상인 언스워스는 시드니에서 로마 교황을 영접하였다. 그러나 호주 노동당은 1988년 선거에서 패배하고 언스워스는 실각하였다.
69) 1986년 12월 1일, 호주의 재벌 알란 본드는 퍼트에서 로마 교황을 영접하여 무릎을 꿇고 교황의 반지에 입을 맞춘 후 개별적으로 교황과 면담을 가졌다. 그 후 그는 사업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호주의 방송 심의위원회는 본드가 방송면허를 소유할 자격이 없다고 판결하였고, 그는 재정적으로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70) 1987년 로마 교황이 미국을 떠난 지 한 달이 채 못 되어 월 가(Wall Street)의 주가가 폭락함으로 인해 온 세계는 “검은 월요일”(Black Monday)을 맞았고, 미국은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준 축복에 깔려 휘청거렸다.
로마 교황이 한국을 축복하고 떠난 후
■ 1984년은 한국천주교 2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해 5월 3일 사상 처음으로 로마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첫 한국인 사제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103위 시성식 등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하는 행사의 진행상황은 TV로 생생히 소개됐다. 교황은 여의도 광장에서 이른바 한국순교복자 1백3위를 시성하고 5월 7일 로마의 바티칸으로 돌아갔다.
대한민국의 1984년은 특별한 해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이신 분이 이 땅을 찾아와 우리나라를 축복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가 축복했다면 하나님은 당연히 우리에게 降福(강복)하실 것이다. 그러나 로마 교황이 한국을 축복하고 떠난 직후 이 땅에는 국가적인 불운과 재앙이 닥쳤다. 교황 방한 넉 달 후인 9월 1일부터 3일 동안 중부내륙지방에 300밀리미터가 넘는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물폭탄이었다. 그 결과 한강에 대홍수가 발생해 189명이 사망했고 150명이 실종됐다. 재산피해는 1천3백여억원에 육박했다. 이 물난리가 바로 북한이 보내준 구호물자를 받았던 ‘1984년 한강대홍수’ 이다.
1984년 한강대홍수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후 60년 만에 우리가 경험한 가장 큰 수해였다. 을축년 대홍수 때 한강 인도교 수위가 12.26m까지 상승해 물이 한강제방 위로 넘쳐 사망자가 404명에 이르고 가옥 유실 및 침수가 수만호에 달하는 큰 피해가 있었다. 당시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58%에 해당하는 1억300만원의 피해를 냈다. 1984년 한강대홍수는 을축년 대홍수에 버금가는 재앙이었다.
그 피해규모가 얼마나 큰지 북한이 수재물자를 보내줄 정도였다. 북한 적십자사가 9월 8일 “쌀 5만석, 천 50만 미터, 시멘트 10만 톤, 기타 의약품 등을 제공하겠다고 제안을 했고 이걸 대한적십자사가 “상부상조의 길을 트고 남북 관계개선을 위하여”라는 명분을 내세워 북한 구호물자를 받았던 것이다(1984년 9월 29일). 로마 교황이 한국을 축복하고 떠난 지 불과 넉 달 만에 벌어진 국가적 재난이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의 결과인가!
■ 1989년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두 번째 한국을 방문했다. 10월 4일~8일까지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개최된 소위 “세계성체대회”를 집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요한 바오로 2세가 5년 전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가 떠난 후 한국 백성은 또다시 재난과 불운을 겪었다. 로마 교황이 한국을 축복하고 떠난 지 11개월 후 수도권에 대홍수가 또 발생했다.
1990년 9월 9일부터 12일까지 한강 전역(중부지방)에 많은 비가 집중적으로 내렸다. 경기도 이천 581mm, 수원 529mm, 강화 512mm, 홍천 508mm, 양평 491mm. 서울 486mm의 강우량을 기록했다. 경기도 이천, 수원의 시간당 최대강우량은 각각 59mm와 56mm, 1일 최대강우량은 경기도 수원이 296.3mm가 내렸다.
당시 사흘간의 중부지방 집중호우는 평균 452mm의 강우량을 기록하면서 곳곳에 크고 작은 많은 수해를 발생시켰다. 한강 수위는 집중호우와 한강수계 댐들의 방류량 증가로 급상승했고 결국 한강대홍수가 났다. 그로 인해 126명이 사망하고 37명이 실종되었으며, 187,265명의 이재민이 발생했고, 5,203억원의 재산피해가 났다. 로마 교황이 한국을 축복하고 떠난 지 1년이 채 안 돼서 발생한 국가적 재앙이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축복의 결과인가!
1984년과 1990년의 두 차례 한강대홍수는 근래에 우리가 겪은 최악의 대홍수였다. 이 두 수해 모두 로마 교황이 한국을 축복하고 떠난 후 1년 안에 발생했다. 더욱이 교황은 한강을 끼고 있는 여의도 광장에서 행사를 집전하며 대한민국을 축복했다. 그런데 한강대홍수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올여름 25년 만에 교황이 다시 한국을 찾아온다. 로마 교황 프란치스코가 한국 천주교 대전교구에서 개최하는 제6회 아시아청년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오는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4박5일간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교황의 이번 방한 일정 중 주목되는 것은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 집전이다(16일). 시복식 장소로는 서울 광화문광장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경찰청은 최하 35만 명이 모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천주교의 한 저명인사는 약 100만 명이 운집할 것이라고 했다.
물론 프란치스코 교황도 한국을 축복하고 떠날 것이다. 하지만 그가 떠난 후가 우려된다. 로마 교황이 한국을 축복하고 떠난 후에는 여지없이 국가적 재난이 닥쳤기 때문이다. 서울 광화문 광장은 대한민국 1번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수도 서울의 중심인 그 곳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를 사칭하는 교황의 활동장소로 내어준다면 교황의 첫 번째, 두 번째 방문 때보다 더 강력한 후폭풍이 있을 것이다. 올가을과 겨울을 위해 기도하라.
로마 교황의 저주
아마도 지난 1700년 동안 로마 교황 혹은 로마 교황청의 축복을 받고 망한 사람들을 세어 본다면 시간이 부족할 것이다. 두 번이나 로마 교황의 축복을 받은 한국, 그가 떠난 후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지...
역대 로마 교황들은 거의 로마를 떠나지 않고 죽었으나, “슈퍼스타”, “날으는 교황”의 별명이 붙은 이 교황은 지구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축복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발이 닿는 곳마다 재난이 생겼으며, 이 사실은 온 세상에 임할 재앙을 우리들에게 예고해주고 있다. 로마 교황의 축복이 재앙을 동반한다면, 그의 저주는 응당 축복을 가져올 것이다.
1) 로마 교황 비오 9세는 이탈리아의 해방자였던 빅토르 에마누엘 왕을 저주하였다. 또 이탈리아를 자유국으로 만들고 로마를 그 수도로 선포한 이탈리아 정부를 저주하였다. 로마 교황의 저주로 인해 이탈리아는 세계 열강의 하나가 되었지만, 이디오피아를 정복하러 떠나던 이탈리아 군을 로마 교황이 축복한 후부터 이탈리아 제국은 다시 붕괴하기 시작했다.
2) 가리발디는 그의 모든 애국적인 노력 때문에 로마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특히 시실리 왕국을 전복시켰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나 가리발디는 이탈리아의 영웅이 되었고, 그를 기념하는 기념물들이 여기저기에 세워졌다.
3) 비스마르크와 프러시아이 왕이 제수이트(일명 예수회) 사제들을 추방했을 때, 로마 교황은 프러시아를 저주했다. 그러나 로마 교황의 저주는 축복이 되어 프러시아는 세계 열강의 하나가 되어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격파하였고, 어느 날 그 지도자가 로마 교황과의 친교 관계를 맺는 불운이 오기까지는 수년간 서유럽에서 최강의 제국으로 군림하였다.
4)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내린 로마 교황의 저주는 영국에 큰 축복이 되었다. 반대로 아일랜드에 내려진 로마 교황의 축복은 아일랜드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마틴 루터가 로마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받은 저주로 인해 온 세계의 기독교회가 누려온 축복을 어찌 다 헤아릴 수가 있을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엄히 말씀하고 계신다.
말 2:2 내가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I will curse your blessings” Malachi 2:2
하나님께서는 대원군을 일으키시고 프랑스 군함에 실려 오는 로마 카톨릭교의 세력을 막게 하셨고, 결과적으로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인해 한국은 로마 카톨릭 국가가 되지 않았다.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로마 종교가 들어간 나라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라. 공산주의 국가를 제외한 가장 가난한 나라들의 대부분이 카톨릭 국가가 아닌가? 남미와 북미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의 경우,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및 모든 동구권 국가들이 가장 가난한데, 이들의 공통점은 천주교가 국교라는 점이다. 또한 아메리카 대륙을 보면 남미는 북미보다 더 자원이 풍부하지만, 국민들은 무지하고 생활수준은 형편없다. 소위 “카니발”, “삼바 축제” 등의 카톨릭 국가에서만 볼 수 있는 무질서로 인해 1년에도 수십만 명의 부모 없는 아이들이 태어나 거리에 버려지고 있다. 천주교는 기독교와 다르며 천주교의 영은 기독교의 성령과 다르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진실인 것이다. 오늘날 로마종교와의 일치운동에 빠져있는 한국교회의 낭만적인 에큐메니칼(종교통합) 지도자들이 받을 저주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이들이 짓는 죄악은 너무나도 크며 슬픈 것이다.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은 먹이를 찾는 이리들이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사람들이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모으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고, 변질된 나무는 악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악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변질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마 7:15-20).
기사 중 한국 관련 부분은 영문 원서 및 번역서에는 없으나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보충 추가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출처 :알이랑 코리아 선교회 - 알이랑민족회복운동 원문보기▶ 글쓴이 : 셈의장막재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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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生에 도움되는 충고 교훈글 모음
[1] 소외당하기 쉬운 10가지 충고
1. 그가 없을 때 그를 비웃는다면
2. 모든 대화에서 당신만 계속 말한다면
3. 그가 말하고 있을 때 끼어들어 당신의 자랑을 시작한다면
4. 당신의 생각과 다른 말을 할 때 그 사람의 말을 무시한다면
5. 그의 관심보다는 당신의 관심에만 촛점을 맞추어 말한다면
6. 항상 상대보다는 당신이 더 중요하다고 느낀다면
7. 그를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여긴다면
8. 만나면 말로 싸워서 꼭 이긴다면
9. 그의 단점을 지적하고 꼭 수정하게 한다면
10. 다른 사람에게 당신의 잘못을 절대 사과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언제나 남들로부터 소외당하게 될 것이다.
[2] 기분 전환을 위한 10가지 충고
1. 어린아이와 함께 논다.
2. 햇볕을 받으며 걷는다.
3. 공상을 즐긴다.
4. 꽃이나 나무를 심거나 가꾸어본다.
5. 옛날 즐기던 음악을 듣는다.
6. 자신을 위해 작은 선물을 산다.
7. 땀이 날 정도로 운동을 한다.
8. 못 만났던 친구들에게 전화를 건다.
9. 기쁜 소식을 기억하며 편지를 쓴다.
10. 목욕을 하거나 무엇이든 손수 세탁해 본다.
[3] 대화를 위한 10가지 충고
1. 자세를 상대방을 향하여 듣고 있음을 나타내라.
(예 : 고개를 끄떡이라...)
2. 간혹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라.
(예 : 더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무슨 뜻이지요..등)
3. 상대방의 말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라.
4. 같은 느낌으로 그의 말을 되풀이하라.
5.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들어보라.
6. 이야기의 맥을 끊지말고 조용히 들으라.
7. 논쟁하지 말라. 이겨도 손해다.
8. 말을 들을 땐 변명거리를 생각하지 말라.
9. 중요한 말을 메모하는 습관을 가져라.
(충실히 듣고 있다는 이상의 표현이다.)
10. 이야기를 들려준 것에 대해 감사하라.
[4] 얽힘을 해결하기 위한 10가지 충고
1. 명령하는 듯한 말을 쓰지 말라.
2. 비판보다 칭찬거리를 먼저 찾으라.
(칭찬해서 싫어할 사람은 없다.)
3. 상대에게 호의를 베푸는 연습을 시작하라.
(좋아하려고 노력하고 좋아지도록 연습해야 한다.)
4. 그의 반항을 존중하라.
(반항은 단지 존재가치를 느끼고 싶기 때문임을 알라)
5. 싸우지 말라.
(말이나 행동에 의한 적대감정을 피하라.
윽박질러 놓으면 결과는 손해다.)
6. 상대방이 틀렸다고 마구 꾸짖지 말라.
(틀리고, 나쁜 점을 증명해 보라. 잇점은 없다)
7. 큰소리가 "NO"라는 뜻이 아님을 알라.
(80%는 반항함으로 잊고 만다)
8. "나는 당신이 지금 어떤 기분인지를
압니다"라는 말을 애용하라. (놀라운 효과가 있다.)
9. 무언가 질문하고 그 얘기에 귀를 기울이라.
(진지하게 자기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을 싫어할 사람은 없다).
10. 그 상대를 위해 기도하고 용서하라.
(사랑으로 감싸는 모습을 마음속으로 그리라.)
1. 자녀를 특별한 사람으로 대해 주세요.
2. 따뜻하고 친절한 부모가 되세요.
3. 자녀에게 칭찬의 말을 먼저 해 주세요.
4. 다른 사람은 자녀를 이해 못해도 부모님만은 자녀를 이해해 주세요.
5. 자녀의 생각을 표현하게 하고 인정해 주세요.
7. 자녀에게 한 번 더 관심을 갖되 한가지 정도는 욕심을 버리세요.
8. 먼저 부모님이 행복해지세요.
9. 자녀의 감정을 그대로 인정해 주고 좀더 잘 알려고 하십시오.
10. 부모님께서 먼저 평화로운 분위기를 만드십시오.
1. 항상 명랑하고 유머를 잃지 말라.
2. 남의 말을 잘 들어라.
3. 사람을 가려 사귀지말라.
4. 약속을 생명처럼 지키라.
5. 남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라.
6. 필요할 때 망설이지 말고 필요한 행동을 취하라.
7. 꿈을 향해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라.
8. 외모를 단정하게 하라.
9. 말을 골라할 줄 알라.
10. 남에게 인색하게 굴지 말라.
그럼 당신은 분명히 매력적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2. 시간 계획을 짜서 행동하라.
3. 책을 가지고 다니면서 틈틈히 읽어라. (지루하지 않다.)
4. 어려움이 생기면 누구에게든 의논하라.
5. 용모에 신경을 쓰라.
7. 걱정거리를 머리로만 생각하지 말고 종이에
8. 하기 싫은 일을 미루지 말라.
9. 목욕을 하고 충분한 수면을 취하라.
10. 땀이 날만큼 운동을 하라. (줄넘기, 달리기, 탁구)
이것을 생활화 하라.
2. 그 일이 끝날 때까지 시간과 관심을 최대한 집중하라.
3. 당장 변화가 없다고 포기하지 말라.
4. 실패했으면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면 원인을 찾아라.
5.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들과 만나라.
7. 나쁜 상황에서도 기대하는 마음을 버리지 말라.
8. 자신이 얻은 정보와 지식을 활용하라.
9. 옳다고 생각한 일을 끝까지 고수하라.
10. 요청한 것보다 더 많이 일하라.
2. 장애를 가졌다는 특수한 제한점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다.
3. 장애인을 모두 동일시하지 말고 각자가 다른 인격을 가진
4. 장애인과 함께 생활하는 것은 풍부한 인간성의 표현임을 알라.
5. 장애가 있거나 없거나 서로 도와 생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7. 지체장애인들도 넘어졌을 때 스스로 일어나고 싶어한다.
8.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친절이 아니고 쓸데없는 참견이다.
9. 과잉보호나 과잉염려 그리고 과잉친절은 금물이다.
10. 당신은 그의 능력과 관심에 대해 얼마나 잘못 판단하고
1. 누구에게나 설득은 가능하다고 생각하라.
2. 질문의 힘을 사용하라.
3. 상대방의 존재가 중요하게 느끼게 하라.
4. 나의 입장이 아니라 상대방의 압장에서만 말하라.
5. 상대방의 행동에 개입시키도록 하라.
6. 큰 것을 위해서는 작은 것을 양보하라.
7. 판단은 상대방이 결정할 수 있게 맡기라.
8. 명확하고 힘있게 유머와 위트를 가지고 부탁하라.
9. 어떤 경우도 언쟁은 금물이다.
10. 상대가 계속 내게 호의를 갖도록 하라.
(질문해 보실까요 - ~을 알고 싶습니다.)
2.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라.
3.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지고 바른 자세로 말하라.
4. 무의한 말은 하지 말라. (아~ 에~저~)
5. 거절할 것은 단호하게 거절하라.
7. 내 의견을 듣지 않으려는 사람과는
8. 상대방의 상사를 만나겠다는 단호한 태도를 취하라.
9. 당신을 이용하려는 사람에게는 냉정한 태도를 취하라.
10. 자신을 강한 사람으로 여기고 말하라.
2. 반문하라 (왜, 어떻게)
3.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라
4. 늘 목표를 확인하고 끈기를 갖고 나가라.
5. 눈치를 보거나 위축되지 말고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라.
7. 다양한 정보를 얻으라.
8. 소설이나 예술 분야에서 영감이나 힌트를 얻으라
9. 만남의 폭을 넓혀가라
10. 날마다 정기적으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라
1. 긍정적인 정신자세를 보이라
2. 이기적인 생활에서 남을 위한 의미있는 일을 찾으라
3. 삶의 기준을 정하고 타협하지 말라
4. 목표 (장기, 단기)를 구체적으로 세우라
5. 그 방면에 노련한 일인자를 찾으라
6. 능력에 맞는 계획을 세워라
7. 할 일과 생각나는 것을 시각화하라.
8. 내일 일에대해 자기전에 우선순위를 정해 메모해 두라
9.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사랑을 전하라
10. 어떤 절망 앞에도 희망을 버리지 말라
(압박감은더욱 커지게 되기 때문이다)
[14] 젊어지기 위한 10가지 충고
2. 꿈에 매달리라.
3. 마음을 쾌할하게 하라.
4. 새로운 만남, 새로운 취미, 새로운 책을 가까이 하라.
5. 넓은 마음을 가지라.
7. 바쁘라.
8. 새로운 계획과 늘 맞서라.
9. 좋은 일을 하라.
10. 위대한 일에 봉사하라.
2. 말은 상대방의 방식대로 들어야 한다.
3.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관심을 갖고 들어라.
4. 그의 가치를 인정해 주라.
5. 상대방을 격려하고 긍정적으로 말하라.
7. 어려운 이야기는 말할 시기를 잘 맞추라.
8. 자기의 감정, 느낌, 마음의 상처를 말로 표현하라.
9. 상대방을 내 마음대로 넘겨 짚어 생각하지 말라.
10. 잘 듣고 있음을 표현하라. (메모, 질문, 반복, 감사)
1. 단순하게 생각하라.
2. 어떤 결과에 대해 지나치게 겁먹지 말라.
3. 일을 즐기라.
4. 건전한 취미를 가지라.
5. 현재 생활에 만족할 줄 알라.
6. 사람들과 만나 유쾌하고 긍정적으로 말하라.
7. 문제와 맞서라. 피하지 말라.
8. 오늘 이 순간을 성공으로 장식하라.
9. 계획 속에 살라.
10. 좋지 않은 것을 빨리 잊어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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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빔밥
하얀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아직은 메마른 들녘, 낮으막한 산등성이를 따라 진달래꽃 철죽꽃이 다투어 피기 시작하고, 노란 개나리꽃이 덮인 울타리 너머로 아지랑이 아른거리는 이른 봄이면, 나는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에 눈물 짓곤 한다.
어린 시절 나는 몸이 유난히도 약했다. 태어나서는 그렇지 않았다고 하는데 자라면서 어찌된 셈인지 입이 까탈스러워졌고 입이 까다로우니 제대로 먹지를 않아 약한게라고 어머님께서는 늘 핀잔을 주셨던 것이다.
그랬습다. 육미는 육미의 그 특유한 냄새가 싫었고, 생선은 생선대로 비려서 싫고, 계란은 그 속에 병아리가 있다기에 징그러워서 먹기 싫었다. 그러다 보니까, 몸은 바싹 여윈게 눈만 커다랗게 보인다고 언니와 오빠는 놀려대었다. 요즘이야 다이어트 미인들이 인기라, 날씬해지려고 젊은 여성들이 심한 다이어트식을 하다 영양실조 현상으로 노인들에게나 있을 법한 골다공증도 걸리고 다이어트 증후군으로 고생들을 한다지만, 필자가 어릴 적만 해도 통통하게 살이 찐 것이 부티(귀티)가 난다 하여 흠모의 대상이 되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런 때였으니, 약하디약한 내가 우리 어머니에게 무척 근심거리였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나의 입맛을 돋워 주기 위해, 봄이면 우리 집 식탁에 자주 올라오는 메뉴는 비빔밥과 아기 쑥국이었다. 하얀 무와 빨간 홍당무는 송송 채 썰고, 도라지와 고사리는 미리 삶아 물에 불려두었다 건져 내어 따로따로 참기름에 살짝 볶고, 소금물에 새파랗게 데쳐 낸 시금치와 콩나물은 참기름과 깨소금을 듬뿍 넣고 조물조물 버무린다. 계란은 노랗게 지단을 부쳐 썰어놓고, 잘게 다져 양념하여 달달 볶은 소고기를 예쁘게 순서대로 하얀 밥 위에 올려놓은 다음, 거기다 고추장과 참기름을 한 숟갈 듬뿍 집어넣고 썩썩 비벼주면 아주 개운한 맛이 일품인 비빔밥, 무엇보다도 짙은 밤색 빛 고사리를 선두로, 빨강, 파랑 하양 노랑 이렇게 가지각색의 고운 색상이 한데 어우러져, 보기만 해도 어린 나의 입맛을 돋우고 거기다 고추장과 참기름은 고기의 특유한 냄새를 제거해 주니 좋았다.
어린 딸이 잘 먹는다고 그 바쁘신 와중에도 비빔밥을 자주 만들어 주시던 어머니의 따스하신 그 사랑의 손길이 그리워, 이 나이가 되어도 진달래 피기 시작하는 봄이면 눈가에 이슬이 맺히곤 한다.
내 기억에 소중한 비빔밥, 이 비빔밥은 우리나라 민속 음식으로서 다섯 가지 이상의 야채가 들어가고, 인체에 필요한 모든 영양소를 골고루 함유하고 있다는 계란이며, 곡물에서 추출하는 생명 원이랄 수 있는 탄수화물, 거기다 단백질 원이 되는 소고기마저 곁들이면, 밥맛이 없는 노약자에게 더없이 훌륭한 영양식이며 건강한 사람에게도 별미로서 아주 좋은 음식이다. 이 비빔밥을 처음으로 언급한 문헌은 1800년대 말엽의 '시의전서'로, 비빔밥을 "부븸밥"으로 표기하고 있다고 하니 과연 그 비빔밥을 일컬어 가히 민족 음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비빔밥의 특징은 각종 음식의 혼합물이란 데 그 의미가 있고, 입맛을 돋우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요즘 교회들이 진리를 떠나 각종 사이비에 노출되어 있다.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 그것은 입맛이 까탈스럽고 병든 성도들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고, 어떻게 하든, 그 병들고 까탈스런 성도들의 입맛을 맞추어 주려는 시도로 부흥강사들이 이런저런 혼합된 이야기들을 말씀 속에 섞어서 양떼들에게 먹이기 시작 한 데 있다고 볼 수도 있다. 희극배우인지 목사님인지 알 수 없는 어릿광대 같은 부흥강사들의 섞어 복음을 맛있다고 넙죽넙죽 받아먹는 철없는 성도들을 바라보는 목자들이 너도나도 그들, 부흥강사들의 흉내를 내기 시작한 것 같다. 복음을 변질시켜 먹이는 것임에도 그것이 부흥의 지름길이라면 마다치 않고 받아들인다!
오늘 아침 기도 중에 현대 기독교는 ‘비빔밥’같은 설교를 즐겨 듣고 전하는 것, 그 혼합된 비빔밥 같은 설교와 사상을 버려야만 살 수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떠오르게 하신다.
주님께서는,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신 22: 9 절),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신 22: 11절),”, 또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레 19:19절 말씀).”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심이 가시적인 우리의 육신을 위해서 말씀하심이 아닐 것이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실제로 우리가 두 가지 재료로 섞어 짠 옷을 입지 말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영적인 해석을 기초로 풀어야만 그 뜻이 정확해진다. 우리 주님께서 염려하시는 그 염려는 불가시적이며 영원한 우리의 영혼이기 때문이다! (고전 9: 9절 참조)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밭은 인간의 마음이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마 13: 13, 막 4:3, 막 4; 26-27, 눅 8: 5-11절 참조) 한 밭에 두 가지 씨앗을 뿌리지 말라고 하신다. 진리는 여러 가지가 아니다. 진리는 단 하나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닌 다른 사상을 예수님의 말씀과 혼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옷도 두 가지 직조를 섞어 짠 것을 입지 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희어진 세마포 이외는 입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인간의 육이 먹어야 할 음식은 여러 가지 영양소가 필요하기에, 여러 가지 음식을 많이 혼합하여 섞으면 섞을수록 좋다. 다시 말해, 육신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 영양소가 혼합된 비빔밥이 건강에 좋을 수 있다. 그러나 영혼의 양식만은 비빔밥 같은 사상이나, 교리를 섞어 혼합하지 말아야 한다. 영혼이 살 수 있는 음식은 단일 식품, 오직 성경말씀 신구약 66권 뿐이다!!
우리의 영혼이 살 찌고 성장하려고 하면 단일식품이랄 수 있는 성경만을 그대로 풀어 먹여야 하고 먹어야만 산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또, 사도행전 4:12에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요, 생명이며 구세주가 되심을 믿어야 하고, 바로 전해야 한다. 우리가 믿어야 할 하나님은 유일하신 신이시다.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시며 영원하신 영적존재시다.(마3:13-17;28:19;고후13:14) 그 성품으로서는 사랑이 풍부하시며 각 개인의 사사로운 일까지도 매우 깊은 관심을 두고 계시는 자상하신 분이시다.(마11:28;시50:15)
WCC의 종교혼합정책, 현대신학의 종교다원주의, 포스트모던 신학적인 경향, 뉴에이지운동, 에큐메니칼운동 등등…우리의 영혼을 죽이는 비빔밥 같은 종교다원주의가 곳곳에서 기세를 떨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경계해야 한다. 사실상 WCC와 종교다원주의, 이 사상가들의 시초는 힌두교 신학자들이었음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결코 그들의 神과 손잡을 수 없는 것이다! 종교는 모두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니? 결코 그럴 수 없다! 비빔밥은 나의 육신은 살릴수 있을지 모르지만, 혼합된 영성은 나의 영혼을 죽이는 독극물이다! 주께서는 밭에 두 가지 씨앗을 뿌리는 것을 금하셨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절 말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잘 말씀)."
출처: USA아멘넷/별똥별 최송의 신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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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사랑) 어느 병원장의 일기!
★(진정한 사랑) 어느 병원장의 일기!
아침 8시 30분쯤 되었을까?
유난히 바쁜 어느날 아침, 80대의 노신사가 엄지 손가락의
봉합사를 제거하기 위해 병원을 방문했다.
그는 9시에 약속이 있어서 매우 바쁘다고 하며 나를 다그쳤다.
나는 노신사의 바이털 사인을 체크하고 의자에 앉으시라고 권했다.
아직 다른 의사들이 출근하기 전이어서 그를 돌보려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하지만 시계를 연신 들여다 보며 초조해 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내가 직접 돌봐 드리기로 마음을 바꿨다.
(때마침 나는 한가한 편이었다.)
다행히 노신사의 상처는 잘 아물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의사를 불러 '노신사의 봉합사를 제거하고
드레싱을 갈아 드려야 하니 관련장비와 소모품 일체를 챙겨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노신사의 상처를 치료하며 그와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서두르시는 걸 보니 혹시 다른 병원에 진료 예약이 되어 있으신가 보죠?"
라고 물으니 노신사는 "요양원에 수용되어 있는 아내와 아침 식사를 해야 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부인의 건강상태를 물으니 노신사는 "아내는 알츠하이머 병에 걸려 요양원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부인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으며,
"어르신이 약속 시간에 조금이라도 늦으시면, 부인께서 언짢아하시나 보죠?"
라고 말했다. 그러나 노신사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뇨, 아내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지 5년이나 됐는걸요."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부인이 선생님을 알아보시지 못하는데도 매일 아침마다 요양원에 가신단 말입니까?"
노신사는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잡고 말했다.
"그녀는 나를 몰라보지만, 난 아직 그녀를 알아본다오."
노신사가 치료를 받고 병원을 떠난 뒤, 나는 흐르는 눈물을 애써 참아야 했다.
내 인생을 걸고 찾아 왔던 사랑의 모델을 드디어 발견했다는 기쁨에,
내 팔뚝에서는 소름이 돋았다. 진정한 사람은 육체적인 것도, 로맨틱한 것도 아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인내합니다.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 고린도전서 13: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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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한 수단 여성이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이유로 태형 100대를 선고받아 논란이 일고 있다. 태형 100대는 사실상 사형 선고와 같아서, 이 여성의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견이 점차 커지고 있다.
미국 남침례회 윤리와종교위원회 러셀 무어(Russell Moore) 위원장은 존 케리(Johm Kerry) 국무장관에게 “정부가 외교적인 수단을 통한 리더십을 발휘해 이 여성의 형 집행을 멈춰 달라”고 요청했다.
무어 학장은 “개인적으로 마리암 이브라힘에게 내린 형벌이 너무나 끔찍하고 비인간적임을 알리고, 그녀를 석방하라고 요구하기를 바란다. 또한 미국 정부의 외교적인 영향력을 이용하여 가장 기본적인 인권인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수호해 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올해로 28살인 마리암 야흐야(Mariam Yahyah)란 이름의 수단 여성은,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이유로 지난 15일(이하 현지시각) 수단 법원에서 태형 100대를 선고받았다. 법원은 그녀가 기독교인 남성과 결혼한 것도 법적인 효력이 없다고 밝혔다. 현재 임신 중인 그녀는, 다만 형이 집행되기 전 출산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이브라힘의 남편인 다니엘 와니(Daniel Wani)는 미국 시민권자이며, 최근 그녀와 함께 감옥에 갇힌 20개월 된 아들 역시 미국인이다. 판사는 그녀의 믿음을 돌이키기 위해 3일간의 시간을 주었으나, 그녀는 “난 한 번도 무슬림이 아니었다. 난 처음부터 기독교인으로 자랐다”며 이를 거절했다.
이브라힘의 아버지는 무슬림이었지만, 그녀가 6살이 되던 해 가정을 떠났다. 기독교인이던, 이브라힘의 어머니가 그녀를 길렀다.
무어 학장은 “오늘날에도 수단에서는 이러한 종류의 비극이 일상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면서 “수단의 정부는 지독한 인권 침해의 직접적인 가해자가 되고 있다. 비영리단체는 소수자들을 무차별적으로 박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암’에 대한 이러한 판결은, 특별히 신성모독법의 야만적인 결과와 종교적 자유의 침해를 드러내고 있다. 인권은 인권선언문의 18조 조항에 의해 확정된다”고 밝혔다.
무어 학장은 “우리의 남침례교 선조들도 종교에 관한 당국의 권위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행정 당국의 핍박을 받았다. 우리는 이브라힘 여사의 이름으로, ‘신앙은 강압되거나 법률로 제재될 수 없으며, 어떤 사람도 종교적인 신념을 이유로 투옥되거나 처형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단언한다”고 주장했다.
수단은 오픈도어선교회가 매년 발표하는 박해국가순위에서 11위를 기록하고 있다.
미국법과정의센터는 21일 오후 이브라힘 석방을 요구하는 온라인 청원을 실시했으며, 149,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서명했다.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7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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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Justification) 와 중생(Regeneration)의 관계- 바른 중생교리 확립이 왜 중요한가?
칭의(Justification) 그리고 중생(Regeneration)은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간략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칭의는 법정적 의미로서 그리스도가 이루신 의로움이 신자에게 전가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신자들이 가진 의가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가 가지신 의로움인데
그것이 신자들의 의로움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칭의는 믿음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이신칭의 혹은 이신득의 교리이다.
이러한 칭의 교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택한 자들을 위한 대속적 죽음이라는
전제를 배경으로 한다. 그리스도가 택한 자들을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는 것은
그가 택한 자들을 법적이고 공적으로 대표하여 대신 형벌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택한 자들의 죽음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택한 자들의 부활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칭의교리는 택자들이 아무런 행위를 한 것이 없이
그리스도의 공로적 행위로 말미암아 획득된 의로움을 값없이 전가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칭의는 값없는 것이지만 반드시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의의 전가는 반드시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칭의를 얻는 믿음은 무엇이며 어떻게 칭의가 믿음으로 주어지는가?
칭의 교리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와 택자들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그리스도는 택자들을 공적이고 법적으로 대표하는 관계에 있고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택자들의 죽음으로 간주되며
그리스도의 부활이 택자들의 부활로 간주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점을 가리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고 말하였다.
그러니까 법적이고 공적인 대표의 관계의 실체는
그리스도와 택자와의 실제적인 연합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연합이 바로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국 칭의를 얻는 믿음이란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연합을 가져오는 믿음인 것이며
오직 이 믿음으로 택자는 그리스도와 연합되며 그 연합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곧 택자의 죽음과 부활이 되는 것이다.
중생 교리는 이 믿음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중생이란 성령의 역사인데 택한 자에게 새로운 영적 본성이 주어지는 것이다.
중생은 그리스도가 이루신 모든 유익을 택자들에게 적용시키는 성령의 역사이다.
중생을 통하여 택자들에게 믿음이 주어지고
이 믿음은 택자들과 그리스도를 연합시키는 수단이 된다.
바로 이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이신칭의의 교리이다.
그러니까 믿음은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인데 바로 이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써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들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 곧 거듭남이란 첫번째 아담에서 연합되어 있던 자가 죽고
두번째 아담인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 새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첫 아담과 연합되어 있을 때는 필연적으로 그의 죄책과 죄성과도 연합되어 있으므로
죄책과 죄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죄인이었지만
새로운 출생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수여받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칭의의 실체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믿음은 중생을 통하여 주어지며
그 믿음을 통하여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써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신자들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이 연합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죽음이 신자의 죽음이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신자의 부활이 되며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모든 영적 유익이 신자의 유익이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이 없는 믿음은 없으며 믿음없는 칭의가 없을 것이니
결국 중생없는 칭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칭의를 얻는 믿음은 오직 중생으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의 이후에 성화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기 전에
중생없는 칭의를 먼저 염려해야 한다.
중생없는 칭의는 헛되고 거짓된 칭의일 뿐이다.
좋은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못된 열매를 맺듯이
진정한 칭의는 반드시 성화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려면 반드시 먼저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바르고 선명한 중생교리의 확립은 매우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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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교황이 한국을 축복하고 떠난 후
로마 교황이 한국을 축복하고 떠난 후
“I will curse your blessings” Malachi 2:2
비행기에서 내려 한국 땅에 입을 맞춘 뒤 우리나라를 축복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84년 5월 3일)
1984년은 한국천주교 2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해 5월 3일 사상 처음으로 로마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첫 한국인 사제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103위 시성식 등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하는 행사의 진행상황은 TV로 생생히 소개됐다. 교황은 여의도 광장에서 이른바 한국순교복자 1백3위를 시성하고 5월 7일 로마의 바티칸으로 돌아갔다.
실로 우리나라의 1984년은 특별한 해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이신 분이 이 땅을 찾아와 한국백성을 축복했기 때문이다. 교황은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로서 대한민국을 축복했다. 놀라운 일 아닌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축복했다면 하나님은 당연히 우리에게 降福(강복)하실 것이다.
그러나 로마 교황이 한국을 축복하고 떠난 후 이 땅에는 국가적 재앙과 불운이 닥쳤다. 교황 방한 넉 달 후인 9월 1일부터 3일 동안 중부내륙지방에 300밀리미터가 넘는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물폭탄이었다. 그 결과 한강에 대홍수가 발생해 189명이 사망했고 150명이 실종됐다. 재산피해는 1천3백여억원에 육박했다. 이 물난리가 바로 북한이 보내준 구호물자를 받았던 ‘1984년 한강대홍수’ 이다.
1984년 한강대홍수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후 60년 만에 우리가 경험한 가장 큰 수해였다. 을축년 대홍수 때 한강인도교 수위가 12.26m까지 상승해 물이 한강제방 위로 넘쳐 사망자가 404명에 이르고 가옥 유실 및 침수가 수만호에 달하는 큰 피해가 있었다. 당시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58%에 해당하는 1억300만원의 피해를 냈다. 1984년 한강대홍수는 을축년 대홍수에 버금가는 재앙이었다.
그 피해 규모가 얼마나 큰 지 북한이 수재물자를 보내줄 정도였다. 북한 적십자사가 9월 8일 “쌀 5만석, 천 50만 미터, 시멘트 10만톤, 기타 의약품 등을 제공하겠다고 제안을 했고 이걸 대한적십자사가 “상부상조의 길을 트고 남북 관계개선을 위하여”라는 명분을 내세워 북한 구호물자를 받았던 것이다(1984년 9월 29일). 로마 교황이 한국을 축복하고 떠난 지 불과 넉 달 만에 벌어진 국가적 재난이었다.
▲ 1984년 5월 6일 여의도광장(한강 마포대교 옆)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집전으로 거행된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신앙대회와 103위 순교복자 시성식” 모습
1989년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두 번째 한국을 방문했다. 10월 4일~8일까지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개최된 소위 “세계성체대회”를 집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요한 바오로 2세가 5년 전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가 떠난 후 한국 백성은 또다시 재난과 불운을 겪었다. 로마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한국을 축복하고 떠난 지 11개월 후 수도권에 대홍수가 또 발생했다.
1990년 9월 9일부터 12일까지 한강 전역(중부지방)에 많은 비가 집중적으로 내렸다. 경기도 이천 581mm, 수원 529mm, 강화 512mm, 홍천 508mm, 양평 491mm. 서울 486mm의 강우량을 기록했다. 경기도 이천, 수원의 시간당 최대강우량은 각각 59mm와 56mm, 1일 최대강우량은 경기도 수원이 296.3mm가 내렸다.
당시 사흘간의 중부지방 집중호우는 평균 452mm의 강우량을 기록하면서 곳곳에 크고 작은 많은 수해를 발생시켰다. 한강 수위는 집중호우와 한강수계 댐들의 방류량 증가로 급상승했고 결국 한강대홍수가 났다.
그로 인해 126명이 사망하고 37명이 실종되었으며, 187,265명의 이재민이 발생했고, 5,203억원의 재산피해가 났다. 로마 교황이 한국을 축복하고 떠난 지 1년이 채 안 돼서 발생한 국가적 재앙이었다.
제44차 세계성체대회(1989년 10월4일~8일). 한강 변 여의도 광장을 가득 메운 천주교인들은 약 65만여 명.
1984년과 1990년의 두 차례 한강대홍수는 근래에 우리가 겪은 최악의 대홍수였다. 이 두 수해 모두 로마 교황이 한국을 축복하고 떠난 후 1년도 안 지나서 발생했다. 더욱이 교황은 한강을 끼고 있는 여의도 광장에서 행사를 집전하며 대한민국을 축복했다. 그런데 한강대홍수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러나 올여름 교황이 25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아온다. 로마 교황 프란치스코가 한국 천주교 대전교구에서 개최하는 제6회 아시아청년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오는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4박5일간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3월 10일 오후 8시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께서 대한민국 대통령과 주교들의 초청을 받아들여, 대전교구에서 치러지는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시고자 2014년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대한민국을 사목방문하신다"고 공식 발표했다. 교황청도 같은 시각(현지 낮 12시) 교황이 한국을 방문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교황의 방한 계획이 발표되자 그 다음 날인 3월 11일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는 즉각 환영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 ‘교황방한 정부지원위원회’를 구성해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범정부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지금 박근혜 정부는 범정부적으로 위기를 맞았다.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교황의 이번 방한 일정 중 주목되는 것은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 집전이다(16일). 시복식 장소로는 서울 광화문광장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경찰청은 최하 35만 명이 모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천주교의 한 저명인사는 약 100만 명이 운집할 것이라고 했다.
물론 교황 프란치스코도 한국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축복하고 떠날 것이다. 하지만 그가 떠난 후를 대비하라. 교황이 한국을 축복하고 떠난 후에는 여지없이 국가적 재난이 닥쳤기 때문이다. 올 가을과 겨울을 위해 기도하라. 이것이 결코 기우가 아님은 아래 링크한 문서에 수록된 역사적 자료들이 분명히 입증해줄 것이다. 로마 교황의 축복은 재앙을 동반했고, 그의 저주는 복을 가져왔다.
아래를 클릭해
「Papal Blessings and Curses」라는 글을 정독해주십시오.
< Papal-Blessings-and-Curses.rtf - Bible Based Ministries >
< http://www.freedom.neilcadman.com/papalblessings.html >
▼ 관련기사
‘적그리스도(Anti Christ)’의 ‘안티’(Anti-αντι)가 지닌 이중적 의미
알이랑 코리아 제사장 나라
유석근 목사
cafe.daum.net/ALILANG
출처 :알이랑 코리아 선교회 - 알이랑민족회복운동 원문보기▶ 글쓴이 : 셈의장막재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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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쌍둥이 자매의 아름다운 이야기
아름다운 이야기
네 쌍둥이 자매가 한날한시에 자신들이 태어난 병원의 간호사가 됐다.
인천 구월동 가천의대 길병원 본관 12층 대강당.
최근 간호사 국가고시에 합격하고 이 병원에서 첫 근무하게 된 42 명을
대표해 단상에 오른 황 슬·설·솔·밀 자매 가운데 맏이 슬이가
가천 길재단 이길여 회장 앞에서 신고식을 겸해 감사 편지를 읽었다.
▲ 황설·밀·솔·슬(왼쪽부터) 자매는
이곳 길병원에서 첫 울음을 울었었다.
그리고 21 년 뒤 태어난 병원에서 간호사로
나란히 사회 첫 걸음을 걷게 됐다.
-
네 쌍둥이와 길병원의 인연은 21년 전으로 거슬러간다.
강원도 삼척 에서 광부로 일하던 아버지 황영천(56)씨와 동갑 부인 이봉심씨는
결혼 5년째인 1988년 말, 둘째가 임신된 것 같아 병원을 찾았다.
결과는 놀랍게도 70만분의 1 확률이라는 네쌍둥이.
월세 2만원 방 한 칸에서 살던 부부에게 병원은 "하나만 낳고 나머지는
포기하라"고 권했다. 하지만 부부는 모두 낳기로 하고 이씨의 친정이 있는
인천의 한 병원을 찾았다. 그런데 출산 예정일 전에 양수가 터졌다.
당황한 병원에서는 인큐베이터가 있는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고,
이씨는 길병원으로 몸을 옮겼다.
출산 2시간여 전인 오전 7시쯤 병원에 도착했지만이곳 의료진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인천에서는 처음인 네 쌍둥이,
게다가 아무런 진료 기록도 없이 산모만 급하게 실려왔기 때문이었다.
“저도 사실 걱정스러웠어요. 우리 병원에서도 네 쌍둥이는 처음이었으니까요.게다가 진료 기록도 없고, 아기는 당장 나오게 생겼고….”
이 이사장은 고심 끝에 제왕절개 출산을 결정하였다.
오전 9시 14분 첫째 슬이가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20 여분 만에 나머지 셋이 뒤를 이었다.
한동안 산모의 출혈이 멈추지 않아 의료진 모두가 긴장했지만
재수술을 거치며 무사할 수 있었다.
이 이사장은 출산 다음날 입원실로 찾아와 산모를 위로하고
신생아실 인큐베이터에 누워있는 네 쌍둥이를 둘러보았다.
“아이들이 조르르 누워있는 걸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오더라고요.인천에서는 처음 나온 네 쌍둥이였는데 어쩌면 저렇게들
올망졸망하게 생겼나 싶고….
그런데 직원들 얘기를 들어보니 산모의 집안 형편이 아주 어렵더라고요.”
산모와 아이들이 퇴원할 때 이 이사장은 수술비와 인큐베이터 사용비를받지 않았다. 대신 강보에 싸인 채 나란히 누워있는 네 아이와 기념 사진을 찍고,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고 인사하는 산모에게
네 아이가 대학교에 가면 장학금을 주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21년 전 출생 당시의 네쌍둥이와 이길여 길병원 이사장
그러나 그 뒤 이 이사장은 바쁜 생활 속에 이들을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2006년 사진첩을 정리하던 중
네쌍둥이가 퇴원 때 함께 찍은 사진을 발견하고는
그때 약속이 떠올라 이들 가족을 수소문했다.
황씨 가족은 경기도 용인에 살고 있었다.
황씨는 광부를 그만둔 뒤 장사와 노동일 등을 하고 있었고,
집안은 생활 보호대상자로 지정될 만큼 어려웠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쌍둥이 자매들은 중.고등학교 시절 반장을 도맡아 하고
학교 성적도 우수할 뿐 아니라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태권도를
배워 4명 모두 각종 태권도 대회에서 상을 받을 정도로 우수한
실력을 갖췄다.
어린 시절의 꿈은 다양했지만 4 명 모두 ’백의의 천사’라는 같은 꿈을이루기 위해 간호학과 진학을 결심했다.
’슬’과 ’밀’은 수원여대 간호학과에, ’설’과 ’솔’은 강릉영동대 간호학과에합격, 4명 모두 간호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넷 모두 간호학과에 간 것은 길병원 퇴원 때
이 이사장이 농담처럼 "간호사가 돼 고마움을 사회에 갚게 하시라"고
했던 말을 부부가 가슴에 새겨두었다가 가족회의를 거쳐 결정한 일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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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은 했지만 등록금이 없어 고민하던 이들에게 다시 행운이 날아들었다.
2007년 이들의 생일을 하루 앞둔 1월 10일 이 이사장은
입학금과 등록금으로 2300만원을 전달해 18년 전 약속을 지켰다.
그 자리에서 학비를 계속 대주기로 한 이 이사장은
"열심히 공부해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면 모두 길병원 간호사로 뽑아주겠다"는
두 번째 약속을 했다.
네 자매는 올해 1월 치러진 제 50회 간호사 국가고시에 모두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어머니 이 씨는 “4명 중 하나라도 떨어질까 봐 마음을 졸였는데간호사 국가고시에 모두 합격해 정말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네 쌍둥이가 간호사 국가고시에 전원 합격하자
이 이사장은 약속대로 이들을 모두 길병원 간호사로 채용했다.
이 이사장은 “전세계적으로 희귀한 네 쌍둥이를 건강하게 키워낸 엄마가훌륭하다”며 “길병원에서 태어나 간호사로 되돌아온 네 쌍둥이들이
나이팅게일 선서의 가르침대로 훌륭한 간호사가 됐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네 쌍둥이가 우리 병원에서 같이 근무하면 모르는 사람들은
한 사람이 홍길동처럼 여기저기 병동을 다니면서 환자를 보는 줄
알 거야.” 이 이사장의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네 쌍둥이의 맏이인 황 슬 씨는 “ 이길여 이사장님께서 저희와의 약속을 지켰듯이네 자매들도 이사장님께 약속 드렸던 대로 가난하고 아픈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열심히 섬기는 가슴 따뜻한 간호사가 되겠다”라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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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4) 너는 분노하지 않을 수 있느냐?
(욥기 14) 너는 분노하지 않을 수 있느냐?
대장쟁이 ㆍ
지난 시간에 살펴본 엘리후의 지적은 그것이었습니다. 말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하나님의 것이라 하면서 욥은 자기 의를 의지하고 그것을 움켜쥐었다는 것입니다. 욥이 자기의 의를 주장한 것, 하나님이 욥의 의를 인정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 앞에 교만이요 악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선악, 인간의 의는 하나님께 아무 영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36장에서 엘리후는 계속 말합니다. “나를 잠간 용납하라. 내가 네게 보이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오히려 할 말이 있음이라. 내가 먼데서 지식을 취하고 나를 지으신 자에게 의를 돌려보내리라. 진실로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 지식이 구비한 자가 너와 함께 있느니라.” 거만하고 건방진 것 같기도 한 엘리후의 이 말은 영적비밀, 복음의 비밀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담대함에서 오는 것일까요?
엘리후는 17절부터 다시 욥에게 직격탄을 날립니다. “이제는 악인의 받을 벌이 네게 가득하였고 심판과 공의가 너를 잡았나니 너는 분격함을 인하여 징책을 대적하지 말라. 대속함을 얻을 일이 큰즉 스스로 그릇되게 말찌니라.” 욥이 바로 악인이요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대하여 욥이 분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지적입니다. 욥이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이는 어떤 큰 대속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큰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계속하여 하나님의 행하시는 엄위하신 일들을 말합니다. 폭풍우와 파도와 지진이 땅을 뒤흔든다 해도 땅이 잠잠하고 고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세계가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는 것처럼 너는 고요하라는 것입니다. 너는 분격(분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피조물의 본분이요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본 인터넷 신문 기사 한 토막입니다. “건강음식-화를 다스리는 것이 장수의 첫걸음. 무엇이 인간의 수명을 단축해왔을까. 바로 노여움과 분노다. 분노로 몸을 가득 채우는지, 도전으로 승화시키는지에 따라 수명이 결정된다. 노여움은 분한 감정에서 유발되고 이는 분노로 파생된다. 쓸데없는 노여움은 자기 명줄을 끊는 칼이 되고 칼날선 분노는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부메랑이 되어 명을 단축한다. 이것들이 자신의 몸 안에 암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즉 마음에 노여움을 품어 그것이 쌓이면 스스로 독이 되는 것. 분함을 품지 않고 노여움을 없애는 것이 즐겁고 유쾌하게 장수하는 지름길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 하는 사람들도 분노가 자신에게 해가 된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한국인의 ‘욱-’ 하는 성격, 순간적인 분노폭발이 많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합니다. 분노는 인간의 마음과 몸을 파괴하고 비극을 초래합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분노를 다스리라고 권하며 경고하고 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욥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자기의 의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빼앗아 가셨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분노였던 것입니다. 욥은 이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향한 분노로 자신의 영혼을 파멸시키는 죄를 저지르고 있었다는 것을 엘리후가 지적한 것입니다. 결국 욥의 이 분노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완전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 공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며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당하게 대우받고 있다는 불만이라는 것을 욥 자신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확신한다면, 하나님의 행하심에는 반드시 선한 뜻과 목적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이러한 분노는 잘못일 것입니다. 죄 없으시면서 그 참혹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은 전혀 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참혹한 십자가에서도 아버지의 뜻에, 아버지의 손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욥기를 통하여, 엘리후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는 분노하지 않을 수 있느냐?” 수많은 고난당하는 자들과 순교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내 자녀들아, 너희는 분노하지 않을 수 있느냐?” 하나님의 통치 아래, 주 안에 있는 자에게 분노란 당치 않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믿음, 이것이 진정 최고의 신앙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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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성경관
칼빈의 성경관
⊙ 칼빈에 있어서 오직 성경 (김영규, 신학정론, 제 11권 2호, 1993. 11)
1. 성경의 원칙(Regula scriptura sive Regula verbi Dei)
칼빈(Calvin)은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향하여 생각하고 말했던 인문주의적인 학자는 아니었다. 처음 이레니우스(Irenaeus)가 모든 이단들 안에서 잘못으로 인식하였던 그런 인간들의 생활 양식을 오히려 그는 하나의 커다란 신학적인 문제로 간주하였다.
어거스틴(Augustinus) 역시 그 인간문제에서 모든 문제의 원천을 응시할 수 있었다.
"절대자이신 그 분으로부터 떠나 절대자가 아닌 그들이 그들 스스로에게 돌아가는 것… 이것이 그 본성에 있어서 첫 타락이요 첫 결점이며 첫 잘못이다. 왜냐하면 절대자이신 그 분으로부터 비절대자인 것으로 떨어지는 것이 바로 악한 의지를 갖는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아야 될 그 알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을 배우는 것 이외에, 어느 누구도 나로부터 내가 모른다고 하는 것을 알고자 하여서는 안된다"
칼빈에 의하면, 자아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앞서가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 없이는 바른 자아에 대한 지식도 없다. 더구나 이런 신적 지식의 근원과 관련하여서도 칼빈은 성경의 진리가
예리한 논지, 심중의 온 힘으로 하는 논쟁들, 열기찬 쟁론이나 교회의 공동일치를 통해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내적 조명(interius Spiritus testimonium)을 통하여 확신됨을 믿었다.
그러한 한 그의 신학은 실증적인 과학의 의미에서의 과학이 아니다. 왜냐하면 실증적인 과학은 인간 일반으로부터 보편적 혹은 인간의 천재성을 통하여 증명되어지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성경에 대한 확신은 무엇보다도 먼저 말씀 안에서 성령의 직접적인 조명으로부터 야기되는 참된 믿음과 더불어 얻어진다는 것을 그는 강하게 강조하였다.
칼빈은 이런 입장에서 성령이 현재의 인간 안에서 증거 하시는 것 이외에 다른 방식으로는 성경 진리의 절대적 실재성이 그들 안에서 증명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근본 원리에 관련하여 역사 신앙, 일시적 신앙 그리고 지적신앙에 대한 어거스틴의 비판을 상기시킬 수 있으며, 종교개혁자들 중에 특히 불링거(Bullinger)가 그 어거스틴의 비판을 다시 영적으로 새롭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근본원칙에 관해서 최고의 종교개혁적 교리의 총체인 "오직 들음으로(fidei)"라는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의 소리를 상기하게 되며, 그 엄밀한 성격은 갈라디아 서신에 대한 그의 강의(1516/1517)에서 증거해 주고 있다. 즉 "믿음의 들음으로부터(ex auditu fidei)"는 "믿음으로부터(ex fidei)"나 "행위로부터(ex operibus)"와는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즉 사도행전 10장 44절의 근거에 의하면 성령은 믿고 행하기 이전에 선물로 받는다. 들음은 들을 수 있는 힘이나 듣는 행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객관적인 말씀 자체나 말로 선포된 복음에 따른 것이다.
그 때문에 들음은 다른 말씀들로 뿐만이 아니라, 또한 쓰여졌던 복음으로부터 혹은 그 자체에나 그것을 통하여 유발하는 생각과 구별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들을 수 있는 능력(organ)이나 듣고 있는 행위를 통해서 믿을 수 없고, 말씀을 통해서 믿을 수 있다. 비록 루터가 후기 칭의론에 있어서 "믿음으로부터(ex auditu fidei)"를 "듣는 능력(vis auditiva)" 과 "듣는 행위(actio audiendi)" 및 "믿음의 사역(opus fidei)"과의 대립에서 포기해 버렸지만, 위에서 본대로 칼빈은 루터의 출판되지 않은 글을 직접 접촉함이 없이도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진정한 루터의 칭의 교리의 근원적 이해를 모든 기독교 교리의 자기 체계의 기초로서 그의 성경이해에 사용하고 있다.
그 때문에 칼빈이 불링거의 글 "성경의 권위와 확실성과 확고성과 절대적 완전성(de scripturae sanctae authoritate, certitudine, firmitate et absoluta perfectione)"을 이미 읽었다고 가정한다 해도 그 자신의 발전을 "단순히 체계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모든 자신의 인간적인 행위에 앞서가는 성령의 역사와 그로부터 선물 받은 믿음 위에 기초한 성경의 자기 해석 안에서, 스콜라적인 방법과는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인상을 받게 된다.
이런 근본 테재를 가지고 칼빈은 성경의 자기해석의 방법을 위한 근거를 타당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종교개혁적인 근본원칙에 대한 최고의 소리를 높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학적인 방법의 정당한 이해를 위해서 성경에 대한 확신과 성경의 구원적 사용(salvificus scripturae usus)에 대한 그의 근본원칙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환에 관하여, 뮐러(J. M ller)는 "성경은 성경을 통해서 해석한다"는 해석학적 순환논증에 관한 문제가 종교개혁 당시에 이미 하나의 커다란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부쩌(M. Bucer)로부터 마치 "긴급한 것으로 추천되었다"고 주장하였고, 그 이유로 "여기에서는 성령으로부터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의 일괄적인 통일성이 전제되어졌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반면에 쉬텔케(J. Staedtke)는 성경의 자기해석의 근본원칙이 인문주의로부터 넘겨받은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지만, 하우자만(S. Hausamann)에 의하면, 불링거 자신이 오직 성경이란 사상이나 성경을 성경으로부터 해석한다는 사상에 대한 증인들로서 어거스틴과 게르손(Gerson)과 힐라리우스(Hilarius)를 들고, 파버(Faber)나 에라스무스(Erasmus)는 들지 않았다고 하였다.
물론 칼빈은 기독교 강요 재판들에서와 많은 성경 주석들에서 문헌 참조의 일반 희랍적인 방식인 외부로부터의 인용( ) 뿐만 아니라, 성경구절들의 비교 취급 방법을 도움의 수단으로 자유롭게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의 후자의 방법론은 표제에 있어서 개념의 평형을 기한다든지 문헌적인 그리고 상황적인 문맥에 있어서 의미의 평형을 다만 뜻하지 않는다. 역시 칼빈이 그의 글에서 수사적이고 역사적인 분석 방법을 사용하려고 할 때조차도, 그는 성경 본문의 모든 비교들 안에서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Consilium Dei) 혹은 성령의 뜻(consilumm Spiriti sancti)을 찾고 있다.
그 때문에 다른 종교개혁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런 외적인 방법들은 칼빈의 자기해석의 근본 원칙에 있어서 결정적인 의미가 없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래도 여기에 다만 근본적인 두 가지 질문들이 남아 있는 것이다. 성경본문과 성경 개념들을 특별히 비교하는 것이 칼빈 신학의 특색에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의 성경의 이해가 삼위일체에 대한 신적 지식에 어떻게 관련되어지고 있는지? 우리가 이 근본문제에 들어가기 전에 불링거의 해석학적 방법론을 소개하면서 그 첫 번째 문제를 취급하고자 한다.
2.0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방식(Modus tractandi scripturas per locorum collationem)
불링거는 1527년에 쓴 "성경연구 규범(Studiorum Ratio)"이라는 그의 책자에서 칼빈의 성경의 해석 방법과 비교되는 "성경의 취급 방법(omnes scripturas tractandi rationes)"을 다루고 있다. 즉 문맥 관찰(observatio contextus), 수사적 분석(tropi orationum et dictionum), 역사 배경과 인물 배경 등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불링거는 이 소책자에서 앞에 있는 질문에 관련하여 성경 본문의 비교방법(Modus tractandi scripturas per locorum collationem)에 대한 중요한 증거를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네가 성경을 유용하게 읽거나 취급하기를 원한다면, 가능한 한 많은 본문을 준비한다는 것을 염두 하도록 하라 그러면 준비된 많은 본문이 빈곤하고 아주 복잡한 본문에서 너를 구해 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성경 분문에 대해서 차곡차곡 쌓이도록 이용하는 것에 무엇보다도 주의 깊게 신중함을 기하고 그렇게 다루어진다면, 얼마큼 많으냐가 아니라 얼마나 잘 읽고 그것을 얼마나 확실하게 기억에 남게 할 것인지 그것을 염려하게 될 것이다. 너는 가능한 한 자주 읽도록 하며, 읽은 것은 너에게 주지하여 능하게 하고, 그것을 충분히 정리하는 것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하라. 그러나 본문 비교를 동일한 것으로 혹은 구별된 것으로 비교 사용하라."
여기에서 성경을 신중함과 판단력을 가지고 읽고, 쉬지 않고 성경에 몰두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는 성경이 자체의 유일한 주석이라는 주장을 기초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링거가 성경의 전체 문맥과 관련하여 "성경의 유일한 목적이요 모든 성경이 그 위에 세워진 그 언약(foedus)을 사려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거기에 중심점이 존재하고 모든 사실들이 그것 주위를 전적으로 맴돌며 전적으로 그것에 대해서 논쟁이 되면서도 모든 논거들이 그것에 의존하는", 그 성경의 핵심 질문들을 사려하였다는 점을 제외하고 성경비교에 의한 불링거의 이러한 방법은 해석학에 있어서 그의 고유한 방법이 아님을 의미하였다. 이미 에라스무스(Erasmus)는 이와 같은 성경 비교의 일찍 사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무엇에 설명을 주고자 했을 때, 본문들이 스스로 쉽게 증명하도록 하라. 즉 우리가 애매한 본문을 다른 것과 비교로부터 분명하게 해야 할 때, 그리고 신비적인 말씀을 다시 신비적인 말씀을 통해서 설명하고자 할 때, 결국 이러한 뛰어난 방법을 오리게네스(Origenes)뿐만 아니라, 어거스틴이 성경해석에 사용하고 있다"
위에서 증거했던 해석학적 과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링거의 종교개혁적인 근본원칙에 있어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와 관련해서 불링거는 성경본문의 적절한 취급을 위해서 신뢰할 만한 세 가지의 중요한 조건의 근본원칙을 제시하였다.
첫째로 불링거는 그것으로부터 주장된 영감론을 근거로 해서(nam scriptura sancta spiritus sancti inspiraio est) 성경의 무오성에 인간적인 판단의 유오성을 대조시키고 있다.
"성경에 관하여 사람들의 주석들을 읽으려고 할 때, 바로 처음부터 너에게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은 판단 없이 모든 것을 취하지 말고, 또한 가장 좋고 가장 기독교적인 것만을 취하는 것이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선한 사람들이 타락하게 되었을 때, 왜곡될 수 있고 잘못으로 눈이 멀 수 있기 때문이요, 대개 가장 감사치 못하는 사람의 경우, 모든 타락에 있어서 비극적인 소리를 향하여 높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둘째로 불링거는 성경을 읽기 위한 지침서를 공개적인 성경해석이 아니라, 단지 개인적인 성경해석을 위해 그 도움수단으로 사용하기를 원하고 있음을 덧붙이어야 하였다.
마지막으로 불링거의 경우 적정의 규범이 성경의 정당한 사용을 위해 조건으로 되어 있다.
"너는 시간 자체가 스스로 가르치는 대로 주목하게 될 것이고, 너는 어떤 것을 아주 강제로 굽게 하였을 때, 스스로 지나치게 호기심을 갖고, 결국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태도를 어디에서 취했는가? 그 외에도 무엇을 변경해야 하고, 무엇을 지우거나 다시 복구시켜야 하는지를 인식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성경 그 자체로 해석한다(scriptuam sui ipsius esse commentarium)"는 그의 해석방법론적인 근본원칙을 위해 이런 불링거의 마지막 세 가지의 핵심원리들이 그에게 실제적으로 중요시 되고 있다.
2.1. 적정과 절도의 원리(Regula modestae et sobrietatis)
앞에서 본 불링거의 마지막 사고의 단계는 칼빈의 신중하고 엄정한 적정과 절도의 근본원리와 일치하고 있다. "여기에서 모든 종교적인 교리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적정과 절도의 규범을 지켜야 함을 기억하고 있다. 즉 감추어진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 것 이외에 다른 것을 말하거나 생각하고 알고자 욕망 하지 않는 것이다"
불링거와 다르게, 짧게 진술된 이 증거가 인식하도록 하는 것은 칼빈 신학의 독특한 방식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서 생각과 말에 있어서 적정과 절도의 규범은 두 가지 근본원리, 즉 "오직 성경과 호기심의 거절"이라는 원리들에 의해서 규정되어지고 있다.
이렇게 정해진 정의 아래에 모든 과학적인 행위와 기독교적인 생의 태도들에 있어서 엄밀하고 신중한 적정의 규범이 정확하게 1539년 판 기독교강요에 있는 하나님의 십계명의 세 번째 명령에 대한 해설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정신과 말에 있어서, 하나님과 그의 신비에 대하여 아주 경건한 절도를 가지지 않고는 어떤 것도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는 것, 즉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의 판단에 있어서 그를 지극히 영광스럽게 하는 것 이외에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역시 같은 1539년 판 기독교강요로부터 두 가지 다른 증거들이 확증되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 다르게 한 번 성경의 감추어진 신비에 대한 경우 규범에 맞게 매우 적합하도록 사색하는 것, 즉 매우 주의 깊게 행하면서, 사고나 말에 있어서 하나님 말씀의 한계를 벗어나서 더 멀리 나아가지 않도록 한다."
"적정의 이러한 최선의 한계는, 우리가 배움에 있어서 항상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지 않을 때, 스스로 교리의 결말을 지어야 함에 있어서 조차도, 생각하고자 원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다."
이런 준칙과 관련해서 칼빈은 동일한 판에서 특히 로마서 12장 1-2절을 인용하여 논증했다.
"이제 이것이 큰 일이다. 즉 우리가 지금으로부터 그의 영광을 위하지 않는 다른 것을 생각하고 말하며, 심사숙고하고 행하지 않은 것만큼, 하나님께 바치고 헌신되어지는 일이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근본원리는 적정의 엄밀한 규범을 통해서 조건 되어 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 기독교적인 삶의 목적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노력을 가지고 충족되고 있다. 그래서 엄밀한 절도의 표상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의 원리의 고유한 방식으로서 그의 성숙의 외적인 단계를 드러내 주고 있다.
그러나 그 엄밀한 "적정과 절도의 규범(Regula modestae et sobrietatis)"은 일찍이 1537년 공동고백에 대한 글에서 카롤리(P. Caroli)와의 싸움에 관련하여, 화렐(G. Farellus)과 칼빈, 비레(P. Viretus)가 합의하였고, 카피토(V. Capito)와 부쩌(M. Bucerus), 미콘니우스(Os. Myconius), 그리네우스(S. Grynaeus) 등이 서명했던 하나의 의미 있는 증거 문서에서 발견되고 있다. 거기에서 그들 모두는 오직 성경의 말들로부터(ex solis scriptuae verbis)의 근본적인 엄밀한 규범이 앞세워 지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그의 말씀밖에 어떤 다른 곳에서 찾지 않고 그의 말씀을 가지지 않고는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말하지 않을 때, 우리는 만족스럽고 긍휼로 주워진 피조물들 가운데 그 모든 재화들로부터 저를 확신하고 있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밖에는 어떤 것도 찾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지 않고는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은 그 엄밀한 적정과 경외의 규범이라는 해석학적인 근본원리를 가지고 이제 정통주의로부터 전혀 내려온 "삼위일체(trinitans)"와 "인격체들(persona)"등의 용어들을 참된 성경적 삼위일체 교리 일반을 위해 사용해야 함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 말씀의 한계에 그의 말들을 제한하는 것은 동시에 하나님 말씀의 한계에 그의 생각을 제한하는 것을 통해서 엄밀히 되고 있다.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주의적인 원리는 여기에서 이미 기독교인의 엄격한 매일의 삶과 더불어 결합되어진 것을 또한 잘 인식할 수 있다. 즉 기독교인들은 성경말씀을 향하여, 그 안에서 물어야 하고, 그 말씀과 함께 생각하여야 하며, 그 말씀을 통해서 말하여야 한다.
그러나 엄밀한 규범의 정확한 세세한 것에 대해서 그의 1536년 기독교강요의 제 일판을 지금 분석해 보아야 한다. 칼빈은 그 기독교강요의 제 일판에서 근본적으로 오직 성경을 근거로 하여 생각하고 말하는 명료한 규범을 언급하였고, 그것을 이미 적정의 사고 과정과 호기심을 삼가는 일과 관련시켰다.
예를 들면, 본질(essentia)과 위격(persona)과 같은 삼위일체의 개념들의 전통적인 언어의 관용을 비난한 현학자들에 대해서, 칼빈은 기독교강요의 제 일판의 제 이권에서 성경으로부터 생각하고 말하는 간소하고(parce) 절도있는(modeste) 규범을 내세웠다.
그래서 칼빈은 그 외래어들이 성경으로부터 증거 되어지는 그것보다 다른 것을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용어들을 사용해도 지장 없다고 간주하였다. 동시에 칼빈은 역시, 그런 방식의 언어들의 혁신은 우리들의 두뇌 안에서 혼돈 되고 성경에서 발견되는 어려운 문제들의 분명한 의미를 위해서 유용할 뿐만 아니라, "우물쭈물하면서 진리를 밀어내"는 거짓 탄원자들(adversus caluminatores)에 반대하여 진리를 확실하게 세우기 위해서도 유용함을 강조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 "성경으로부터 생각하고 말하는 규범(ex scripturis et loquendi regula)"은 "그것에 따라서 우리들의 마음의 모든 생각과 입의 모든 말들이 측정되는", 즉 "어떤 척도나 표준"으로서 확고히 되어지고 있다. 그의 주석들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기독교강요의 후대 재판들에서도 그렇게 독특한 의미에 있어서 완전히 되어진 이런 규범은 계속 정당하게 입증되고 있다. 이러한 신중한 규범을 사려함이 없이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그의 일반 개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음이 그 결과가 된다.
오히려 칼빈신학의 독자성은 단순히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그의 개념이 기초를 두고 있는 "성경으로부터 생각하고 말하는 규범(ex scripturis et loquendi regula)"으로부터 비로소 시작하고 있다.
2.2. 오직 성경(Sola Scriptura/Locum ipse per se satis clarus esse)
사람들이 때때로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칼빈은 사실 성경의 자기해석의 표현들, 예를 들면, 위클리프(J.Wicliff)의 경우 "종종 성경의 한 부분을 다른 부분으로 해석하는 것이 필연적이다"하고, 루터(M. Luther)의 경우 "성경은 그 자체로 해석한다((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하며, 부쩌(M. Bucer)의 경우 "우리는 성경을 성경을 통하여 해석한다(das wir schrifft durch schrifft u legan)"하고, 불링거(H. Bullinger)의 경우, "성경이 그 자체의 해석이다(scripturam sui ipsius esse commentarium)"하며, 의학자이기도 한 파라켈수스(Th. Paracelsus)의 경우 "오직 성경 자체로부터 성경해석(ex scriptura ipsa tantum interpretatio scripturae)"이고 네테스하미의 아그리파(Agrippa von Nettesheim)의 경우 "성경은 그 자체가 충분하여 그 자체로 해석하고 그것이 모든 것을 판단하며 어떤 이로부터 판단 받지 않는다(Dieser Heiligen Schrift…sondern es ist dieselbe an sich selbst genug, interpretiert sich selbst, sie judiziert alle und wird von niemanden judiziert)"는 등등의 표현들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성경해석의 이런 원리들은 물론 해석의 목적으로부터 형성되어진 것도 아니고, 다만 원전으로(ad fontes) 혹은 원전 자체로부터(ex ipsis fontibus)와 같은 그 근본원리들을 가지고 성경의 어거스틴적인 자기해석에 대해서 동의를 주고 있다.
그러나 "오직(sola)"이라는 그 특별한 종교개혁주의적인 강조는 때때로 문헌학적이거나 법적인 정신뿐만 아니라, 역시 어거스틴적인 자기해석과도 구별됨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을 통해서 칼빈은 분명히 종교개혁적인 자기해석을 거절하지 않았다. 악의 있고 비루한 적대자들을 대항할 뿐만 아니라, "사탄의 공공연한 미혹"에 맞서서, 그는 그 근원에 있어서 그렇게 오래되고 잘 알려진 원리를 실제적인 의미에 있어서 다시 정확하게 발굴해 냈다.
언제든지 기독교인들이 "오직(sola)" 성경을 통해서 모든 사실에 대하여 그리고 전 삶에 있어서 주의 깊고 절제 있게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칼빈에게 중요했다. 그 때문에 역시 강조할 수 있는 것은 칼빈은 다른 위험스러운 급진주의자들과 비록 신중하고 중용적이라 생각하나 실제적으로 학문적 절충주의자들일 수 있는 현학자들에 대항하여, 다른 과학적인 방법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 성경의 자기해석론을 확고히 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러한 해석학적 규범을 통하여 "전 기독교 교리(tota doctrina christiana)"와 "기독교 철학의 기초(fundamentum christianae philosophiae)"를 굳게 세우기를 원했다는 사실이다.
칼빈은 이런 확고한 원리에서 출발하여 성경이 말하지 않은 것에 관하여, 혹은 그 성경의 증거들을 넘어선 것에 대해서는 엄밀하고 확실하게 침묵하기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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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그랜 티톤산의 아름다움
미국의 옐로우스톤 국립공원 근처에 티톤(Teton Mountain) 이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산이 있습니다.
이 산 주변의 잭슨 호수와 아름다운 들이 너무 멋집니다.
사진은 잭슨 호수에 비친 아름다운 가을 풍경입니다.
만약 미국여행 때 저에게 연락되면 엘로우스톤 국립공원 티톤에 안내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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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예수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재림 신앙, 모든 것을 의미 있게 만들어”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삶에 대한 전도서 식의 평가는 초대기독교인들에게
도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인생에 변화가 있더라도 그것은 허무한 것이
며, 순환이 있더라도 그것은 식상한 것이다. 삶이란 비슷한 요철의 반복이
며 평범한 굴곡의 연속이다. 인생에서 모든 게 그렇고 그렇다.
인생에서 새로운 것 없어
이런 입장은 신약성경의 기자들이 부와 가난에 대하여 말할 때 아주 선명하
게 나타난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약 1:9-10). 심지어 부한 자를 포함하여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고 말할 때(약 1:10; 벧전 1:24) 전도
서 식의 견해는 절정에 달하는 것처럼 보인다. 부하다는 것 그 자체도 그저
그런 것일 뿐이다.
하지만 부요함이란 것은 그저 그런 것일 뿐 아니라 인생에 엄청난 손해를 끼
치는 독소적인 성분도 가지고 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첫째 편
지의 끝부분에서 부에 관한 문제를 꽤 끈질기게 다루면서 이 사실을 강하게
표명하였다.
이미 앞에서 사도 바울은 부하려 하는 자들에게 재물이란 시험과 올무에 떨
어뜨리며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돈을 사랑하고 탐내
는 마음에 주의를 주었고(9-10절), 다시 뒤에서 부한 자들에게 마음을 높이
지 말고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고 말하면서 오직 모든 것을 후히 주시어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마음과 소망을 둘 것을 권면한다(17절). 부요함이
란 그저 그런 게 아니라 때때로 삶을 치명적으로 망가뜨리는 무서운 세력이
라는 말이다.
그래서 결코 안정되지 않은 재물의 부요함에 의존해서 사는 것은 매우 불안
한 삶이다. 사도 바울이 부의 문제를 다루는 이유가 보통 그것이 인생에서
가장 의존할만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재
물의 부요함을 의존하는 것이 불안하다는 말은 곧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엇
을 의지해서 사는 것이 불안하다는 말로 바꾸어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참된 안정을 줄 수 없다. 오히려 세상
에 있는 것을 의지하면 불 속에서 꺼낸 숱 조각을 잡는 것처럼 손이 더럽혀
지고, 상한 갈대를 잡는 것처럼 손에 상처를 입는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진정으로 의존해야 할 대상이 세상 밖에 있다고 말한
다. 그분은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의 나타나심을 전심을 다해 기다린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대
망하는 데는, 그 이유만은 아니지만, 재물의 부요함이 가장 신뢰할만한 것이
라고 믿는 세상에 대한 불신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세상 밖에서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참된 안정을 발견
할 수 있다.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며 신앙하는 것만이 비바람에
도 흔들리지 않는 산성과 같은 것이며, 폭풍우에도 요동하지 않는 요새와 같
은 것이다.
게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확신할 때, 거기에서부터 신자의 윤리가 출
발한다. 그런 든든한 믿음에 의하여 신자는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는
삶을 견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림에 대한 신앙은 현실적인 윤리
의 동인이다. 예수의 재림이 신자의 현재를 결정한다.
윤리는 신앙의 열매이다. 재림을 믿는 것에서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발생
하며, 삶의 새로운 시도가 착수된다. 이렇게 볼 때, 재림신앙은 삶의 대변혁
이라고 부를 수 있다. 사도 바울 자신이 항상 새롭고 항상 역동적이었던 것
도 이런 재림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분명히 신자는 삶이란 것이 그렇고 그런 것이며, 삶에 가장 큰 유익을 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것조차도 도리어 큰 해악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래서 신자는 세상에 있는 것을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
스도를 대망한다.
신자는 재림의 주 소망해
신자는 재림신앙을 가지고 있는 까닭에, 그렇고 그런 세상이라도, 심지어는
가장 믿을만한 것까지도 손해꺼리가 되는 세상이라도 도피하지 않고 고스란
히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이 세상
에서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거룩한 명령을 지키는 것이다.
출처" 영적분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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