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의 은사는 중지 되었는가? (Q&A) / 박신 목사

[질문]


오늘 대형 서점에서 기독교 서적을 보다가 우연히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라는 책을 보게 되었는데요. 서점에 앉아서 책을 속독으로 보았습니다. 옥한흠 목사님 아들 옥성호 형제님께서 쓴 책인데 “심리학에 물든 기독교”와 비슷한 색깔의 책으로 현재 교인들이 하고 있는 방언에 대한 반박 글 입니다.

성경의 문맥과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고린도 전서 12-14장을 상세히 얘기하고 있는데 굉장히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혹시 목사님께서 이 책을 접하실 수 있으시다면 의견을 나눠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께서 얘기하시는 방언과는 비슷한 부분도, 그리고 분명히 다른 점도 있습니다.

[답변]

먼저 방언에 관한 제 개인적인 의견을 간단하게 정리해보자면;

- 저는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했지만 이미 다른 은사를 많이 받았다고 믿기에 막연히 방언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해도 절실하게 소원하지는 않습니다.
- 방언에 관해선 성경(고전12-14장)에 기록된 그대로만 이해하면 된다고 믿습니다. 또 그런 맥락에서 방언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고 보며 그 이유와 근거는 아래에서 다시 설명할 것입니다.
- 방언중지론자의 의견 중에 일부 동의하는 부분도 꽤 있습니다. 예컨대 오순절의 방언은 오늘날 이해하고 시행되는 방언과 달리 외국어 방언으로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 반면에 방언지속론자의 의견 중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많습니다. 예컨대 방언을 받아야만 구원 받은 것이라든지, 성령 받아 구원을 얻었을지라도 이차로 방언을 받지 않으면 올바른 신앙이 되지 못한다는 것 등입니다.  
- 방언 은사는 중지되지 않았지만 그 은사를 실현하는 데에는 필히 성경 지침에 따라야 하며 특별히 은사자는 더욱 겸손하게 그리스도만 증거하여 교회에 덕을 세워야 합니다.  
- 따라서 교회에서 방언 외에도 각종 은사에 대해 잘 가르쳐서 교인들로 은사를 받고 싶은, 사실은 이미 받은 은사를 발견하고 키워서 실현하고 싶은 소망을 생기게 해주어야 합니다.
- 그러나 방언을 훈련해서 받는다든지, 어떤 특정한 방법대로 따르면 방언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는 반대합니다.
- 대신에 한 개인이 방언을 받으려 하면 그 전후에 성령 은사에 관한 성경 말씀을 철저하게 가르쳐서 부작용과 폐해를 미연에 방지해야 합니다.
- 결국 방언을 포함해 은사는 구원 받은 신자가 그 믿음을 성숙시켜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라고 각자에게 나눠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소중히 가꾸고 적극적으로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위해 실현해야 합니다. 반면에 개인적 이득과 욕심을 위한다면 사용하지 않아야할 뿐 아니라 그 배경에 사단이 도사리고 있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아래의 답변은 순전히 이런 중립적 입장에서 말씀드린다는 뜻입니다. 방언의 은사가 중지되었는지 지금도 계속 지속될 수 있는지에 관해선 지금껏 수 없는 논쟁이 이어져 왔습니다. 또 양쪽 진영 의견들 모두가 성경구절을 바탕으로 논리적 설득력을 갖고 전개되고 있기에 언뜻 다 그럴듯해 보입니다. 이미 수없이 논의된 내용과 같거나 비슷한 이유를 또 다시 들어봐야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조금 다른 측면에서 저만의 특별한 이유를 먼저 말씀드린 후에, 옥 형제의 주장에 대해 논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방언 은사 찬성의 현실적 근거

소제목을 현실적 근거라고 붙였듯이 실제로 지금 일어나는 현상을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성경적 근거를 살피기 이전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이유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1.1. 신실한 크리스천의 방언

무엇보다 신실한 크리스천들이 실제로 방언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방언을 구원의 표식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영적 우월성으로 인식해 주위 사람에게 자랑하지도 않고, 자기 개인의 유익과 욕심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면서, 정말로 성경에 기록된 뜻대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영으로 비밀히 대화하며 교회의, 여기선 조직체 개별 교회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성도들의 모임이라는 뜻이 더 강함, 덕을 세우려 합니다. 주위 사람들과 교회의 영적으로 피폐한 모습을 안타까이 여기며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합니다. 영적으로 위급한 일이 닥치면 자신도 모르게 방언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물론 그렇지 못하고 온갖 부작용과 폐해를 드러내는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방언이 중지되었다면 이들 신실한 형제들이 하고 있는 방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그 모두가 악령의 방언입니까? 또 그럼 그들이 구원 받지 못한 자들입니까? 아니면 일시적으로 사단에 넘어간 것입니까? 그럼 사단이 성도더러 새벽기도마다 어려운 자와 교회를 위해서 뜨겁게 기도하도록 시킨다는 뜻이 되지 않습니까? 매일 한두 시간씩 방언으로 기도하는 자도 많은데 구원 받은 신자를 사단이 그렇게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을까요?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No.” 인 것만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방언이 중지되었다면 나머지 가능성은 정신적 장애가 있거나, 감정적 절정(ecstasy)에 이르렀거나, 단순히 어떤 초자연적 기운이 작동했거나, 진짜로 혀를 열심히 굴리는 훈련의 결과로 하는 기계적 언어거나, 심지어 뇌의 손상이 있어서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일부 그런 근거에서 방언하는 일도 분명 있겠지만 방언하는 신자 모두에게 다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또 열거한 그런 이유들은 방언하는 자는 어떤 면에서건 부족하고 심지어 장애가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일종의 정신병자 즉, 증상이 항구화 일상화된 병자라기보다는 심각한 mental problem을 최소한 잠재적으로 지닌 셈입니다. 그렇다면 평소에도 자주 혹은 가끔은 그런 부작용들이 나타나야만 합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최고등 교육을 받아 아주 지성적이고, 건전한 가치관과 사고를 가졌으며, 신체적으로 아무 이상도 없으며, 오직 성경 말씀 위에 균형 잡힌 신앙을 가졌음에도 방언 기도를 합니다. 정말로 불신자들을 예수님의 복음으로 인도해 변화시키는 신실한 성도들과 목사님들 가운데 방언을 하시는 분이 의외로 많습니다. 심지어 방언 은사는 받지 못했는데 남들이 하는 방언을 통변만 하는 은사를 받은 분도 실제로 보았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경우는 하나님이 주신 성경대로의 방언이라고 밖에는 해석할 수 없습니다. 다른 어떤 설명으로도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범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시며, 심지어 사단도 그분의 통제 아래 있다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방언 은사가 현재 교회 안에 성행하는데 그 모두를 악령의 짓이나 단순히 신체적 심리적 감정적 작용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 옥 형제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신가 아닌가?”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해소하려고 방언에 기를 쓰고 매달린다고 말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존재는 당연히 확신하고 복음 안에서 주님의 일에 헌신하려는 사람에게 방언이 임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또 성경은 분명히 성령이 임의로 은사를 각 사람에게 나눠준다고 했는데 순전히 인간의 욕심으로 방언을 얻는 것이라고 단순히 해석해버리면 진짜로 방언하는 자들은 전부 악령의 자녀가가 되어버리지 않습니까?  

1.2. 악령의 방언이 있다면?

물론 방언이라고 다 성령이 주시는 방언이 아닙니다. 현재 교회 안에 성행하는 방언 가운데는 사단이 주는 방언도 분명히 있습니다. 동물 울음 같은 이상야릇한 소리를 내면서 기괴한 행동을 함께 하기도 합니다. 또 귀신 들린 점쟁이도 다른 사람의 음성으로 말하거나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괴상한 언어를, 주문과는 다른, 주절주절 외우지 않습니까? 모두가 악령이 주는 방언입니다.  

비록 악령이 주는 방언이 있고 또 교회 안에 방언 은사의 온갖 폐해가 나타난다고 해서 성령의 방언까지 배제할 이유와 근거는 되지 못합니다. 엄연히 실재하는 현상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방언이 성경대로 실행되고 있다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위에서 말한 대로 방언 기도의 유익이 분명히 있으며 많은 신실한 신자와 사역자들이 영적 싸움에 그 은사를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악령의 방언이 현재 성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성령의 방언 은사도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 가라지와 알곡이 주님 오실 때까지 공존하지 않습니까? 진짜에는 반드시 가짜가 들어붙게 마련입니다. 기독교만 유독 이단이 많은 까닭이 바로 그것이지 않습니까? 진짜 방언이 있으니까 가짜 방언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생각해 봅시다. 만약 악령의 방언만 있고 성령 방언이 중지되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든 이들이, 특별히 불신자들이 그들에게 완전히 속아 넘어가지 않겠습니까? 점쟁이에게 넘어가는 것만 염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은 지금껏 계속 있었던 일입니다.

제 뜻은 교회 안의 방언들이 전부 악령이 하는 방언이라고 하면, 혹시 그게 아니라 단순하게 말해 정신이상자들이 하는 방언이라 해도, 거기서 불신자가 영향을 받는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분히 부정적입니다. 미국에서 은사주의자들 집회에서 그런 일들이 많이 벌어졌지 않습니까? 그래서 방언중지론자들의 반박 구실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과연 교회 안의 방언이 악령에게만 지배되도록 계속 방관하시겠습니까?  아무리 주님 재림하실 때가 임박했다고 해도 하나님은 한 명의 남은 자라도 찾고 있습니다. 또 교회 안에 비록 거짓 사역자와 거짓 성도가 많아도 여전히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저주까지 하셨지만 그들의 가르침은 따르되 그들의 행동은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요23:3) 아무리 흠결이 많은 제도적 교회라도 완전히 사단의 놀이터로 그분이 내어주실 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악령의 방언만 설치도록 방관하시지 않는다면 당연히 성령의 방언을 지속케 하실 것입니다. 아니 역으로 성령의 방언이 지속되니까 사단이 더욱 기승을 부려 마치 성령의 방언처럼 혼동되는 방언을 교회 안에 계속 많이 뿌리고 다니는 것입니다.

공중 권세 잡은 사단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는 여전히 세상을 미혹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초림 전과는 다를 것이 이제는 그분의 복음 안에 드는 자는 누구나 성령의 무기로 전신갑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신자만이 사단과 대적해 싸울 수 있습니다. 사단이 방해하는 무엇이라도 신자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음부의 권세를 얼마든지 깨트릴 수 있습니다.

예컨대 병균에 의한 질병이 아니라 사단이 심어준 질병이라면, 물론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특별한 경우에도 가능하지만, 신유의 은사로 사단과 대응토록 했습니다. 악령의 방언이 성행하고 있다면 마찬가지로 성령의 방언으로 대적해야 합니다. 점쟁이 앞이나 잘못된 은사 집회에 가서 일일이 성령의 방언으로 전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영으로 하나님께 간구한다는 뜻이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영적 차원에서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에 방언 기도하는 자가 동참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악령의 방언이 있으니까, 대적하라고 성령의 방언을 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신자를 미혹시키려 사단이 광명의 천사로 위장해서 거짓 방언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단이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려면 반드시 거의 같은 모습이어야만 합니다. 또 흉내 내고자 하는 모습이 이미 실재(實在)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쉽게 말해 성령의 방언이 이왕에 있으니까 그와 비슷한 모습으로 방언해서 미혹시킨다는 것입니다.

악령은 또 주님 오시는 시기가 가까워질수록 더 기승을 부릴 것입니다. 계속 도무지 분간하기 어려운 광명한 천사로 위장하다 그 방식마저 효능이 완전히 떨어졌을 때는 본색을 드러낼 것입니다. 누가 봐도 기괴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 전에는 교회 안에 비슷한 모습을 띈 두 종류의 은사들이, 특별히 방언에서 더더욱 성행하며 병존할 것입니다. 방언만큼 영적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나게 증명할 수단이 없으니까 그러합니다.

또 그래서 하나님은 오순절에 방언의 은사부터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곳에 모인 모든 이들의 관심을 우선 끌게 해놓고 율법에 묶인 유대인들과 하나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불신자들로 영적 차원에 눈을 뜨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이라고 해서 불신 세상의 형편이 오순절보다 그리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방언 은사는 유효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2. 방언 은사 지속의 성경적 근거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8-13)

방언중지론자는 그 핵심 근거로 “온전한 것”이 오면 방언이 폐해진다는 상기 구절에서 찾습니다. 온전한 것을 신구약 66권으로 "완성된 성경"으로 보는 것입니다. 반면에 지속론자는 그것을 마지막 때의 "주님의 재림"으로 해석합니다. 또 두 진영 다 방언에 관한 다른 성경 구절들을 자기 입장에 맞추어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해석하는 경향마저 보입니다. 어쨌든 본문대로 정말 온전한 것이 이미 왔다면 방언은 폐지된 것이며, 아직 오지 않았다면 지속되어야 함은 너무나 간단명료한 이치입니다. 따라서 그 책의 다른 모든 부분은 제쳐두고 이 구절에 관한 옥성호 형제의 해석만 분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1. 정경의 완성시기와 방언의 유효성

그 전에 먼저 따져봐야 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방언중지론자들이 미처 주목하지 못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알고도 짐짓 간과하는 요소일지 모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저술한 시기와 신약성경이 27권의 정경으로 완성되어 인정받게 된 시점의 비교입니다.

고린도 전서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AD 53-58) 중에 에베소에 체류했던 시기인 AD 55 년  경에 저작한 것으로 봅니다. 신약성경이 현재 27권의 모습으로 공식적으로 확정 된 것은 397년의 칼타고 종교회의에서였습니다. 물론 4세기 초부터 오리겐이 현재 27권을 모두 정경으로 인용했고 또 다른 교부들의 서신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정경화된 칼타고 회의와 바울의 저작시기와는 단지 340년의 차이만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방언중지론자의 “온전한 것”은 정경의 완성으로 아무리 늦어도 주후 397년에는 도래한 셈입니다. 그럼 방언은 아주 길게 잡아야 340년만 유효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정도 밖에 유효하지 않았던 은사를, 말하자면 일부 세대의 일부 지역의 특정한 사람들에게 유효했던 은사를 성경이 그렇게 많은 구절을 할애해서 설명할 필요가 구태여 있었을까라는 의구심이 생깁니다.

혹시 몇 구절 안 된다고 반발할지 몰라도 방언이 신앙의 근본 요소가 아닌데도 그 정도라면 상당히 많은 언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역으로 따져 만약 방언이 일부 시대와 지역의 일부 사람에게만 유효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오히려 너무 많은 언급입니다.

물론 구약성경의 경우는 그 배경에 담긴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별도로 하고 이제는 무효로 된 구절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구약의 정결법과 제사법과 일부 사회법 등이 대표적인 예이지 않습니까? 당시 시대에만 유효했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인류 구속 계획이 실제 역사 속에서 궁극적인 한 지점 즉, 골고다의 십자가를 향해 점진적으로 나아갔기에 당신의 계시도 그에 상응하여 발전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오시면 당연히 폐지될 것이라고 하나님의 뜻 안에 예정되었던 사항이며 또 신약성경이 그런 의미에 오해가 없게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신약성경의 진술은 어떠합니까? 학자에 따라 신약성경에도 약 200여개의 예언이 있는데 예수님의 재림 때에 성취될 것이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이 이스라엘에 관한 역사적인 사건을 제외하고는 예수님의 초림 때에 다 완성되었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가르치고, 섬기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무엇보다 진리의 영인 성령이 강림하자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사실과 그 의미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혹시라도 초림 전에 성취된 구절이라고 해도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게 된 것은 분명히 성령이 오신 후였습니다.

신약성경의 예언도, 특별히 요한 계시록의 경우는 더더욱,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그 예언이 실현될지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섣불리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주님이 다시 오셔야만 완전히 성취되고 혹시 그 전에 성취될 것이 있다 해도 마지막 때에 가서야 비로소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런 원리에 비추어 보면 방언의 경우 신약정경이 완성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폐지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성급한 판단일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분명 신약시대의 믿는 자를 위한 책입니다. 구약이 유대인으로 메시아의 초림을 대망케 만드는 책이었다면, 신약은 새 이스라엘인 모든 믿는 자로 주님의 다시 오심을 소망케 하는 책입니다. 신약은 주님 오실 때까지의 모든 세대, 모든 지역, 모든 인종의 신자들에게 절대적 진리로서 유효하다는 뜻입니다.  

이렇게만 따져 보십시오. 신약성경을 신자들이 제대로 읽게 된 시기가 언제입니까? 잘 알다시피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활자 인쇄술이 발전되어 각 나라 언어로 번역본이 대량으로 출간하게 된 이후입니다. 나아가 책값이 크게 부담되지 않았던 근자의 일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정경으로 확정되고, 각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가르쳐지며, 또 대중에게 보급되는 것 전부도 사실은 성령의 간섭 하에 이뤄집니다. 그럼 문제의 고린도전서의 본문 구절도 결국은 현대의 최소한 종교개혁 이후의 독자들에게도 분명히 적용되는 하나님의 계시라는 뜻이 됩니다.  

바꿔 말해 극히 일부 지역과 시대에만 성행하다가 1600여 년 전에 완전히 폐지된 은사를 주님 오실 때까지의 모든 세대 신자들더러 참조만 하라고 기록되었다면, 구태여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요? 바울 본인으로선 당장 눈앞에 문제되고 있는 사안인지라 당연히 기록했어야 했겠지만 성령님이 곧장 폐지될 은사와 그 의미와 특별히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내용을 그에게 계시해주고 또 기록하게 했을지는 의문이라는 뜻입니다.

딱 한 가지 가능성은 후대 사람들더러 방언의 은사에 대해 오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럼 오히려 그렇다고 분명하게 기록했어야 합니다. 또 고린도전서 14장처럼 구체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까지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은 교회의 질서를 세우십니다. 또 하나님의 뜻은 의외로 간단명료합니다. 신자로 혼란스럽게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계시된 진리는 성령의 온전한 조명을 받으면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의, 단 성령 안에서 진정으로 거듭나 십자가 복음 안에 완전히 들어온 자라면, 해석이 동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그런 일이 불가능하고 사람마다 해석이 다 다를 수 있으며 또 어느 것이 옳다고 판단할 수 없다고 하면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는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럼 한마디로 성경 자체도 존재할 의미가 아예 없어집니다.

어쨌든 최대한 양보하여 이미 1600년 전에 효력이 상실된 방언인지라 후대 신자로 혼동하지 않게 성경에 기록했다고 칩시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서두에서 말한 대로 현재 방언을 하는 모든 신자는 악령의 장단에 놀아나고 있는 꼴이 됩니다. 아무리 감정적, 신체적, 종교적 현상에 불과하다고 쳐도 성경이 말하는 바는 성령의 통치 하에 있지 않다면 악령의 수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중간 회색 지대는 성경적으로 없습니다. 신자에겐 매 순간, 매 사건이 다 영적 전투이지 않습니까? 끝까지 현재의 방언이 영적으로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단순한 현상이라고 우겨도, 진짜 그렇다면 그런 의미 없는 일을 성경이 구태여 그렇게 길게 기록할 이유는 더더욱 없지 않습니까?

2.2. 옥성호 형제의 변증에 대하여

방언중지론자 가운데는 옥 형제님이 나름대로는 합리적인 변증을 하려고 많이 노력한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몇 가지 맹점(盲點)들이, 특별히 논리전개의 일관성이 부족하여 스스로 모순이 되는 진술을 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띕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일단 방언이 폐지되었다고 보고 또 그 이유를 성경의 완성이라고 단정해 놓고 해석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그런 결함이 노정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온전한 것”이 성경의 완성이라고 보는 이유는 크게 셋인데 각각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2.2.1. 방언과 사랑

첫째 온전한 것이 예수님의 재림이라면 예언, 지식, 방언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사 전부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셋만 따로 떼어서 말했으니 온전한 것은 예수님의 재림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논리적으로는 옳습니다. 이 구절만 따로 떼어서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경 해석은 항상 전체 문맥에서 살펴야 하고 또 그 문맥이 일차적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초점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분별해야 합니다.  

먼저 문제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이 폐한다는 말씀(10절)은 사실상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이 아닙니다. 알다시피 13장은 성령의 은사에 관한 설명이 아니라 사랑의 영원성을 강조한 장입니다. 은사의 부작용은 가르치려 했지만 세 은사가 폐지되는 시점을 구체적으로 예언하려는 의도가 원저자에겐 전혀 없었거나 훨씬 부차적이었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고린도 교회의 은사자들 가운데 방언과 예언 등은 능하게 하면서도 오늘날처럼 많은 부작용과 폐해를 드러내는 것을 바울은 안타깝게 여겼던 것뿐입니다. 특별히 성도에 대한 사랑이 없이 영적 우월을 과시하거나 개인의 유익을 채우는 경우를 많이 봤기에 은사를 사용하되 반드시 사랑에 바탕을 두라고 권면하는 것이 핵심 내용입니다.

방언, 예언, 지식 셋이 8절에서 언급된 이유는 꼭 그것만 폐하고 나머지는 폐해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3장의 1-3절에서 사랑이 없는 은사의 대표적인 예로 방언, 천사의 말, 예언,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아는 것, 산을 움직이는 믿음, 구제, 심지어 자기 몸을 내주는 것 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8절에서 그 예 든 것 중에서 대표적 예로 예언, 방언, 지식을 사랑과 대비하려고 다시 언급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14:1 절에서도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또 “나는 너희가 다 방언을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3절)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는 예언과 방언이 곧 폐지될 것을 예상한 언급이 결코 아닙니다. 여전히 오직 사랑에 바탕을 두고 두 은사를 사용하라는 면에 초점이 가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절에서 셋 중에서 지식은 빠지고 방언과 예언만 언급된 이유는 14장은 교회에서 말로 의사 전달하는 그 두 가지 일을 대조해 가르치려는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런 의도로 저술하다보니까 13:1에서부터 예언과 방언이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라고 비유했던 것입니다. 또 그래서 13;8절에선 이왕 앞에서 예로 들었기에 온전한 것이 오면 폐지될 것의 대표라는 의미로만 다시 그것들을 거론한 것입니다. 알기 쉽게 말해 저자는 지금 방언의 폐해를 예언과 비교해서 설명하려는 목적으로 저술하고 있으니까 방언과 예언이 자꾸 언급되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옥형제의 논리대로 만약 그 셋만 폐지될 것이므로 따로 떼어서 강조했다면 중지론자들은 왜 방언만 집중적으로 문제 삼습니까? 정작 더 파고들어 따져야 할 쪽은 예언과 지식이지 않습니까? 바울도 방언보다 예언을 더 사모하라고 했는데 예언의 폐지를 구체적으로 논의하지 않는 것이 도리어 셋만 폐지되었다는 주장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반증 아닐까요?

만약 13:10절에서 따로 셋을 구별해서 말했기에 그 셋만 폐지되었다는 논리가 옳다고 치면, 13:13의 경우는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왜 다른 은사는 다 없어지고 믿음의 은사만 끝까지 폐지되지 않습니까? 또 그럼 나머지 은사들도 혹시 폐지 시기가 각기 다른 것은 아닌가요?  

예언, 방언, 지식은 특별히 말씀과 연관되기에 성경이 완성되면 없어진다는 논리는 아주 미약합니다. 왜냐하면 12:8-10절에서 각종 은사의 종류를 말하면서 지혜도 지식처럼 말씀으로 분류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따져도 지식이 폐지되면 자연히 지혜도 폐지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지혜란 지식을 삶에 적용해 활용하는 능력이기에 지식이 없이는, 꼭 학술적이 아니라 경험에서 체득한 것이라도, 지혜가 발휘되지 못하니까 말입니다.

한 마디로 14장의 내용은 방언은 본인만 아니까 교회의 공중집회에선 통변이 없는 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교회에선 모든 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으로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14장에서 “예언”은 순전히 교회에서 일상 언어로 설교하고 교육하고 권면하는 언어적 교통을 총칭하는 의미로 쓰였던 것입니다. 그럼 그런 의미로서 예언은 아무리 성경이 완성되어도 결코 폐지될 수는 없습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13장은 모든 은사는 영원한 사랑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중점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모든 은사의 바탕이 되어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은사라는 뜻입니다. 또 믿음 소망 사랑이 항상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 셋 다 영원하신 주님을 주 대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은사가 끝까지 남고 모든 은사가 사랑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면, 10절 말씀은 방언과 예언과 지식을 포함한 은사들의 폐지에 대한 구체적 시점을 적시하기보다는 그 폐지가 영원과 관련되어서 이뤄질 것이라고 암시하는 것입니다.  

2.2.2. 장성한 분량까지 자람과 방언

옥 형제가 든 방언중지의 둘째 이유는 온전한 것이 예수님의 재림이라면 그 때까지 12절 묘사대로 항상 어린아이처럼 지내야만 하는데 성경은 오히려 그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라고 권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재림 때에 가야만 이루어질 목표를 왜 성경은 미리 이루라고 권면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반면에 오늘날은 완성된 말씀을 통해 더 이상 어린아이처럼 행동하지 않고 또 더 이상 희미하게 보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러합니다. 그러나 확실해지고 명료해진 것은 구원 중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으면 하나님이 의롭다 칭해주는 칭의 구원에 관한 측면입니다. 반면에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야할 부분은 성화입니다. 그리고 성화는 아무리 믿음이 좋은 자라도 이 땅에선 완성할 수 없습니다. 이는 성경의 정경화 과정이 언제 완성되었던, 예수님의 재림이 언제 닥치든 간에 성도에겐 항상 미완성의 상태로 남는 것입니다. 성경이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라고 했으니 “온전한 것”이 성경완성이라고 하는 것은 초점이 어긋난 이유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는 것은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에게 궁극적인, 정확한 의미로는 이상적인(ideal), 목표이긴 해도 현실적으로는 성취 가능한 목표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반드시 그 곳을 향해서 걸어가야만 하기에 최종 목표지점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또 상식적으로도 먼 장래에 가서야 완성되는 일이라도, 심지어 자기 생애에는 불가능하지만 먼 후손들이 달성해야 할 일도 얼마든지 선대(先代)부터 목표로 정해서 권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두 쌍의 은유로 부분적으로 아는 지금과 온전한 것이 올 때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린아이이고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한 반면에 그 때는 장성한 사람이 되었고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는 옥형제의 주장대로 성경이 없어 진리를 모르다가 성경 완성으로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을 대조한 뜻이 아닙니다.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부연해서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삼위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히’ 즉, 출생에서 죽음과 영원까지 심령에 가장 깊숙이 숨겨진 것까지 하나 남김없이 속속들이 아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말씀을 통해 진리를 깨달아도 인간이 주님을 그렇게까지 알 수는 도무지 없습니다. 성경의 예언도 그렇습니다. 지금 이런 토론을 벌리고 있는 것 자체가 그 사실을 입증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주님을 온전히 알 수 있는, 특별히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주님이 우리를 아는 정도로 알게 되는 때는 언젠가 도래합니다. 우리가 죽어 천국에 가서 주님처럼 영화로워질 때, 나아가 마지막 때에 육신의 부활을 입을 때이지 않습니까?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13:12)라는 표현이 의미하는바 그대로 됩니다.

나아가 바로 그 앞 절에선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11절)고 오해의 여지없이 명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장에는 자란다는 뉘앙스가 없습니다. 지금 바울이 짝지어 대조하는 대상은 어린아이와 장성한 사람, 지금과 그 때, 거울과 맞대면, 부분과 온전한 것, 모두가 완전히 상반되는 개념입니다. 점차 자라면서 변화 성숙되는 이미지의 대조가 아닙니다. 실제로 “버렸노라”라는 헬라어도 “쓸모없게 만든다.”는 단어에서 유래하여 완전히 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자람의 의미라면 이전 것이 전혀 쓸모없거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이전 것에 더 좋은 것이 첨가된 것일 뿐입니다.      

설령 성경이 어린아이와 장성한 사람으로 대조한다고 해서 당연히 성장이라는 개념이 둘 사이에  개입될 수 있다거나 되어야 한다고 오해해선 안 됩니다. 누차 말씀드린 대로 어린아이나, 장성한 사람은 저자가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를 보충 설명해주는 은유(metaphor)에 불과하지 중심내용이 아닙니다. 본문의 표현방식 또한 그러합니다. 성장의 의미를 나타내려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으로 자라 가면서”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이라고 이미 다 자란 상태를 은유에 사용했습니다.

요컨대 본문은 완성된 성경을 갖고 신앙성숙 하도록 권면하려는 비유가 아니라, 이 땅과 천국, 신약시대와 재림 후 새 시대를 대조하여 사랑의 영원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당연히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성경보다는 예수님의 재림이 되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캘빈도 온전한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심판 때에 이루어진다고 강해했습니다.  

2.2.3. 로마서와 방언

옥 형제가 방언이 중지 된 세 번째 이유로 고린도전서 외의 다른 성경에는 방언의 언급이 없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특별히 고린도전서보다 1-2년 후에 저술된 로마서에선 그 교회에 전하고 싶었던 “신령한 은사”가 방언이 아니라 복음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또 바울로선 방언의 은사는 곧 사라질 줄 예측했기에 고린도전서에 그런 언급을 한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먼저 다른 성경에 언급이 없는 것은 이미 고린도전서에 충분히 설명되었기 때문입니다. 방언이 곧 사라지리라 예측했기 때문이라고 여기는 것은 너무 무리한 가정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오히려 고린도전서에도 기록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최소한 후대에 이런 식의 오해와 논란이 없게끔 명료하게 그 뜻을 밝혔어야 했습니다.

당시는 손으로 쓴 편지가 먼 지역의 교회까지 배달되고 또 전 교인이 회람되는 데만도 족히 최소 수개월은 걸릴 것입니다. 저자들도 그런 사정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를 저작하는 시점에 이미 방언 은사가 곧 사라질 줄 확신, 예상, 최소한 감을 잡은 저자라면 구태여 그것을 편지에 쓸 이유는 없습니다. 말하자면 편지를 읽고 그 의미를 교인들이 충분히 숙지했을 때는 이미 방언 은사가 없어질 수도 있었다는 뜻이 되니까 말입니다.

그럼 고린도 교회의 잘못을 견책해야하는 당장의 필요 때문에 그렇게 쓸 수 있지 않느냐고 반박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전혀 틀림없는 말입니다. 바울은 단순히 고린도 교회의 방언 은사로 인한 부작용과 폐해를 고치려는 의도로 이 편지를 저작했습니다. 그 말은 저자인 바울로선 이 편지를 저작할 당시에 “온전한 것이 올 때”를 성경이 완성되는 시점이라고 확신 내지 의도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가 됩니다.

아마 바울을 필두로 사도들이 서신서를 저작할 당시에는 자기들 편지가 나중에 수집되어져 정경으로 완성될 것을 알았거나 예측한 자는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라 해도 저작 시에 약 3백년 후에 이 편지들이 신약성경으로 편찬 될 것이니 정신 차리고 쓰라는 영감은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순전히 수신자인 교회와 개인의 상황에 맞추어 십자가 복음을 온전히 전하려는 열정과 지혜와 믿음만 심어주었을 뿐입니다.

한 마디로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당시에 신약성경의 완성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었는데도 어떻게 온전한 것이 올 때를 신약 정경의 완성으로 뜻하고 저작했겠습니까? 너무 무리한 억측입니다. 또 후대 사람이 저자도 몰랐던 일을 어떻게 제 멋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까?
      
로마서에 성령의 은사로 방언을 소개하지 않고 복음만 말한 것은 오히려 당시의 모든 상황과 이치에 더 들어맞는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오순절에 성전 순례 온 유대인들이 로마로 돌아가 세운 자생적 교회입니다.(행2:10) 사도들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그들은 방언과 베드로의 설교만 보고 듣고 간 셈입니다. 물론 예수님에 대한 모든 소문도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럼 바울로선 무엇부터 전해야 합니까? 사도들이 직접 세운 교회는 사도들이 처음부터 복음을 제대로 가르칩니다. 오순절 순례객은 방언 현상과 베드로의 일회 설교, 그것도 이스라엘 역사에 간섭하셨던 하나님이 보내주기로 한 메시아가 바로 예수라는 단순한 내용의 설교만 들었습니다. 당연히 복음의 진리와 그 의미를 풀어서 설명해주어야 했습니다. 방언은 그들이 이미 봤기에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기보다는 구원의 핵심진리와는 상관없으니 로마서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뿐입니다.  

그리고 옥 형제의 주장대로 하자면 방언과 함께 폐지될 예언의 은사가 로마서 12장에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6절)라고 소개되어야 할 이유는 전무합니다. 예언은 방언보다 후대에 더 천천히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 동일한 문장에서 분석해낸 이유와 근거가 방언에만 적용하고 예언에는 적용하지 않은 셈으로 논리 전개에 일관성이 없어집니다. 방언이 사라질 것을 예측했기에 로마서에 예를 들지 않았다면, 비록 늦게 사라질지라도 예언도 포함시키지 말았어야 합니다.

또 그와는 반대로 사라지지 않을 다른 은사들 예컨대 신유, 통변은 왜 로마 교회에 소개해줄 신령한 은사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입니까? 그들이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방언을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도 그들이 잘 알기 때문일,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논리적으로 따지면, 수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방언이 사라지면 통변도 자연히 사라져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통변은 폐지되는 목록(고전13:8)에 포함되지 않았습니까?

바울은 고린도전서나 로마서에서 은사 폐지 여부를 옥 형제 식으로 단호하고도(?) 구체적으로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서에서 은사들을 열거한 이유는 바로 그 앞부분에서 말한 것처럼 교회 안에 많은 지체가 있고 당연히 많은 은사들이 따르는데 여전히 사랑의 바탕에서 실행하라고 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사의 많은 종류들을 설명하려다보니 고린도전서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권위하는 자, 다스리는 자, 긍휼을 베푸는 자 등도 포함시킨 것입니다. 방언이 사라질 것이라거나 조금이라도 그와 연결되는 예시는 로마서엔 전혀 없습니다.

로마서도 은사를 열거한 직후에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다시 강조했지 않습니까? 또 각종 은사를 각자의 믿음의 분량과 맡은 직분의 본질에만 충실하여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처럼 자기 자랑이나 유익을 위해 은사를 사용하지 말라고 또 다시 강조한 것입니다. 두 서신서를 망라한 바울의 논리가 일관성을 유지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눈을 닦고 보아도 옥형제의 주장처럼 1-2년 사이에 방언에 대한 그의 생각이 변화된 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2.2.4 은사의 본질

옥 형제는 방언과 예언과 지식을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와 거의 같은 반열에 두고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완성되었으니 완전히 용도 폐기 되었다는 것은 그 전에는 어쨌든 성경이 맡을 역할을 대신 했다는 뜻이 됩니다. 일종의 절대적 계시이거나 그와 유사한 계시입니다. 실제로 그는 “이 세 가지 은사는 완성된 성경이 없었던 초대 교회 시절,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역으로 따지면 초대 교회 신자들은 최소한 이 셋 중에 하나는 받았어야 그분의 계시를 제대로 알 수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물론 사도와 그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들음으로 계시를 알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어쨌든 초대교회 모두가 사도들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다 받은 것은 아니기에 성경은 모든 성도가 이 세 은사 중 하나는 받아야 한다거나, 최소한 그 셋은 계시에 준하는 은사라는 언급은 있었어야 합니다. 성경이 정경으로 완성되기 전이니까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그 셋은 누구는 받고 누구는 받지 않아도 될 만한 은사가 아니어야 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에서 은사의 가장 본질적인 내용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12:7)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12:11)

우선 은사는 “성령의 (겉으로) 나타남”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모든 믿는 자의 내면에 성령이 내주하고 있음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본인이나 제삼자가 분명히 알 수 있도록 드러나서 자신과 교회의 유익을 도모하게 되는 것이 은사라는 것입니다. 또 각 사람에게 성령이 당신 임의로 나눠준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교회 안에 여러 지체가 있는데 각 지체마다 하나님께 받은 은사는 각기 다르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방언과 예언과 지식들도 당연히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받을 수 있는 은사였습니다. 성도들 모두가 꼭 받아야만 했던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또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14:26)고 했습니다. 방언과 가르치는 말씀(여기선 예언을 의미)을 계시와 분명히 다르게 취급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아가 예언이란 장래 일을 미리 이야기하는 것도 일부 포함되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풀어서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고린도전서 12-14장에선 주로 방언과 대비되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14:22)라고 했습니다. 방언은 제 삼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하는 기도이고, 예언은 통용어로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 예언이 성경 완성으로 폐지 될 수 있습니까?

한 마디로 바울의 초점은 시종일관 고린도 교회 내에서 방언을 통변자 없이 무분별하게 사용하여 함께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불신자와 방언을 받지 못했거나 믿은 지 얼마 안 되어 영적 지식이 모자라는 자들에게 끼치는 악영향을 제거하는데 두고 있습니다. 곧 폐지될 방언이라면 그렇게까지 염려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방언, 예언, 지식 등도 다른 모든 은사와 같이 이미 계시된 말씀이나 자신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권능이나 은혜를 더 정확히 이해하여서 주위에 증거, 교육, 실천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초대교회에 한해 말씀을 대체할 만한 계시의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사도와 그 제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생생한 증언과 설교들만이 성경을 대신할 수 있는 하나님의 계시였던 것입니다.

이 셋도 문자 그대로 성령의 나타남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성령이 신자에게 내주하는 한에는 그 은사의 나타남도 계속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서두에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 악령도 설치고, 악령의 방언이 있는 한 성령의 방언도 지속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요컨대 방언이 구원과 성화에 절대불가결한 계시의 역할을 맡았기에 성경이 완성되자마자 폐지되어야만 했던 것이 아닙니다.

3. 맺는 말

결론적으로 옥형제가 온전한 때를 성경이 완성된 때라고 든 세 근거는 성경의 다른 부분과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볼 때에 무리하고도 부족한 해석입니다. 방언중지라는 예단된 결론에 맞추려다 보니까 성경을 좁은 시각으로 풀어나간 것 같습니다. 저자의 이전의 다른 책들이 참고할 내용이 풍부했던 것에 비하면 많이 안타깝고 유감스럽습니다. 물론 책의 다른 부분까지, 본 논의에선 구태여 다룰 필요가 없었음, 다 그렇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을 보는 시야를 좀 더 넓혀 주었고, 옳고 그름을 떠나, 또 방언 은사의 부작용과 폐해를 다시 심각하게 지적했다는 면에선 분명 이 책의 가치는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가 이 책을 대할 때에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은 온전한 때에 방언, 예언, 지식이 폐해지리라는 말씀의 근본 목적은 그 폐기시점을 밝히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은사를 영원하도고 진정한 사랑의 바탕 위에 실현하라는 것입니다. 구태여 그 때를 밝히자면 앞뒤 문맥과 성경 전체에 일관된 뜻에 따라 바로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그 전에는 비록 방언이 폐해가 많아도 지속될 것입니다.

만약에 방언중지론자의 주장대로 성경 완성으로 방언이 폐지 된 것이 옳다면 현재 신실한 교인들이 방언기도를 하는 현상에 대해서도 성경적이고도 합리적인 해석을 내어 놓아야만 합니다. 아니면 방언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목소리와 같은 크기로 그들은 악령의 부하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정 그럴 수 없다면 최소한 방언 반대의 주장만큼 예언과 지식의 폐지에 대한 성경적 논의는 따라 나와 주어야 합니다. 예언과 지식이 정확히 무엇이며 언제 어떻게 폐지되었는지에 관해 그동안 있어왔던 방언의 논쟁만큼 활발하게 전개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 스스로 자신들 주장의 모순을 인정하는 셈이 됩니다.

신약성경은 신약시대 즉, 성령시대의 신자를 대상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주후의 모든 세대, 모든 신자에게 항상 진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 중에 성취되지 않은 예언들이 수없이 남아있습니다. 설령 일부 성취되었다 해도 정확한 의미는 그분이 다시 오셔야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해 신약성경은 구약성경과 달리 신자들이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그 전부를 기록된 내용 그대로 믿고 따라야 합니다. 함부로 일부 내용을 빼버려선 안 됩니다. 방언을 폐지하면 그와 관련된 고린도전서 12-14장의 일부가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게 아니라 후대의 독자에게 경고만 줄 목적이라고 해석해도 누차 강조하지만 현재 방언을 하는 신실한 신자에게 정말로 납득될 만한 확정적인 증거를 내어놓아야 합니다.

신약시대에는 교회 안에 양과 염소가 공존하는 시대입니다. 성령이 주는 방언과 악령이 시키는 방언이 교회 안에서도 혼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을 분별하는 은사도 주었습니다. 또 성경은 그 분별의 기준도 정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계 내부에서 서로 방언이 중지되었다 지속되고 있다는 논쟁은 접어야 하고 오히려 이왕에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대해 어떻게 분별할 것인지 또 그래서 그 폐해를 어떻게 방지할지에 관한 논의와 실천으로 초점이 옮겨져야 합니다. 그렇게 교회와 성도들이 방언의 폐해를 스스로 줄이고 영분별을 정확히 해나가다보면, 실현 가능성은 극히 적지만, 언젠가는 이 논의에 대한 모두가 공감하는 확실한 정답도 자연히 얻게 될지 모릅니다.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기준은 알다시피 갈라디아서 5:22, 23절의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한 마디로 “사랑 안에서의 화합”입니다. 반면에 악령에 넘어간 육체가 도모하는 일은 그와 완전 대조되는 것으로 한마디로 “온갖 악행으로 인한 분열”입니다.

그리고 이 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기준이 있는데 바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그분의 향기를 더 드러내느냐 여부입니다. 따라서 방언을 하되 예수님을 더 확실히 증거하며 성도 간의 화평도 더 증진되면 성령의 방언입니다. 반면에 방언을 하면 할수록 은사자 개인이 앞세워지고 교회 안에 분열이 일어나면 악령의 방언입니다.

4/21/2010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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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람이 한번 성령 세례를 받으면 왜 후에 재충만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까?
 

오순절날에 120명의 제자들 (예수님을 따르는 헌신한 사람들)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2:4). 이것은 며칠 전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하셨던 약속이 실현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사도행전 1:5)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를 받을 때 처음 나타나는 이 체험은 단지 전 생애를 통해서 체험하는 것의 시초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성령으로 늘 충만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마도 하나의 예는 이 점을 분명히 해 줄 것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들은 전력을 생산하는 저수지와 비교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에, 우리들의 저수지 건축은 완성이 됩니다. 이제 우리들은 유용하고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수지의 문이 열리고 강물이 그곳을 통하여 흘러내리기까지는 전력이 생산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성령 세례를 받았을 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열어 드리고, 성령님은 우리 속으로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흐릅니다. 바로 그 때에 우리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가장 효과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저수지와 관련해서, 이 전력을 만드는 체험은 단 한번 일어나는 것으로 의도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계속 진행해 가는 과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영적 전력이 낮아질 때에 우리들은 그 자원으로 되돌아가서 축복하는 성령님이 우리들 가운데 다시 흘러 들어 오셔서 새로운 전력을 공급하시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초대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후에 핍박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새로운 성령의 능력의 충만함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 다시 한번 기도를 드렸으며, 그리고 나서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4:31).

성령 충만한 신자가 주님을 섬길 때, 영적 전력의 소모가 있습니다. 그는 그의 능력을 재충전시키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새롭게 성령님께 열 필요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5:18의 말씀은 문자 그대로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 성령 충만한 삶의 비밀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받고 주는 것, 성령 충만함을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고 복음의 사역을 위해 그것을 사용하는 것의 연속적인 과정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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