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의 항구... 최송연 주께서 나의 여정에 함께하지 않으셨다면 나 지금보다 얼마나 더 많이 외로웠을까 주께서 내가 연약할 때 손잡아 주지 않으셨다면 나 지금보다 얼마나 더 많이 울었을까 밤 점점 깊어가고 광풍(狂風) 휘몰아쳐 내가 탄 배 삼키려 하나 주께서 날 지키심 믿으니 두려움 없는 저 바위 틈새 작은 비둘기처럼 나 즐거이 사랑노래 부르며 소원의 항구로 노 저어 가네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107: 29_30)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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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도 앞에서

     

     - 이 해 인 -

     

     

     

    바다에 나가

    큰 소리로 빌었습니다

     

    부디

    출렁일 준비를 하십시오

     

    겉으로 드러나는 고요함으로

    평화를 측정하진 말라고

    파도가 나에게 말해줍니다

     

    멈추지 않아야 살 수 있다고

    출렁이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오늘도 파도 앞에서

    큰 소리로 빌었습니다

     

     

     

     

    * 이해인 시집 '작은 기쁨'(열림원)중

     

     


    Amembo _ Chris Glass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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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스앤젤리스 인근에  Vernon 이라는 시티가 있다. 로스앤젤리스 인근에는 자잘구레한 시티들이 많기 때문에 그저 그런 중의 하나려니 하였는데 얼마전 신문기사를 보고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주민의 수가 40여명에 불과한데 몇명 안되는 시정종사원의 년봉이 1백만불에 이르고 그들이 사용하는 공공용무에 지출되는 비용은 년봉을 초과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출장비로 계상되는 호텔의 숙박비는 최고급호텔기준으로 계상되는 것은 기본이고 센프랜시스코에 거주하는 한  행정위원은  출퇴근을  비행기를 이용한다는 것도 놀랍지만 비행기 요금을 1등석으로 지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도시의 예산은 년간 4억불에 이른다고 하는데 이런 예산을 지출할 수 있는만큼의 세수가 확보되고 있기에 가능한 일 일것이다. 40여명의 주민에게서 4억불의 세수가 가능하다는 것은 이해가 안되지만 그 이유는  뜻밖에도 단순하다.

     

     이 도시의 세원은 많다. 도시의 대부분이 공장이기 때문인데 이런 기형적인 형태의 도시는 이곳 말고도 더 있다는 것이다.

     

    재정압박에 시달리는 로스앤젤리스시가 이런 사실을 알고 눈독을 들이고 있다. 주정부와 합작으로 도시흡수작전을 시작하려하자 이를 눈치챈 산하공장들이 반대운동을 먼저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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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자진납부로 원만하게 돌아가고있는 세정에 만족하고 있는 공장들은 대도시와의 합병으로 세정이 한층 가혹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바로 옆에 Bell이라는 시티도 있다. 그 시티는 작년에 똑같은 사실이 들어나 신문에 난 것을 보았는데 결과가 어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또 있다.

     

    와이오밍주에 Lost Springs라는 시티가 있는데 지금까지 주민 수가 단 1명으로 알려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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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da Price라는 주민 겸 시장은 이혼녀인데 지난 30년동안 연방정부관할인 녹색 도로표지판의 정정투쟁을 벌여 이번에 그 숙원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샘"인지 "잃어버린 봄"인지는 모르지만 도시의 명칭은 알고보면 그 지정적인 위치가 해발 4996피트이기 때문인듯 한데 사실 이 도시는 이미 1세기도 이전에 석탄광산이 개발되면서 생겨났고 한창때는 주민 수가 3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마켓을 경영하고 있는 지금의 주민 겸 시장은 2000년 주민센서스에 조사원의 실수로 하이웨이25의 양쪽주민을 계상해야 되는데도 한쪽주민만을 계상했기 때문에 주민 수가 단 1명으로 되어 있다가 이번에 여시장의 노력으로 2010년 센서스에 이를 바로잡았고 하이웨이 그린싸인에도 주민수 4명이라고 밝힌 새로운 싸인을 확보하였다는 것이다.

      

    주민수를 4배로 늘린 나머지 흥분에 들뜬 여시장은 대대적인 자축행사를 계획중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주민 1명이나 주민 4명이나  얼마나 달라서 그리 흥분할 일이 되는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런 1인도시가 미국에는 3이나 더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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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확신과 우리의 자랑과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닻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과,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천국의 상속자들이고, 우리 자신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영원한 복락의 소망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를 번성하게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하게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하게 하시리니”(7:12-13). 또한 마찬가지로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리니”(7:5-7). 이와 비슷한 말씀들을 천 가지도 넘게 인용할 수 있다.

     

    모세는 율법은 우리 앞에 축복과 저주, 그리고 죽음과 생명을 제시하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축복이 무익하고 무효가 되든지, 아니면 칭의가 오직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 주장을 한다. 만일 율법을 붙잡게 되면, 모든 축복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모든 범죄자들을 위하여 마련된 저주가 우리 위에 드리워지게 된다(27:16). 왜냐하면 주께서는 오직 그의 율법을 완전무결하게 지키는 자들에게만 약속을 하시는데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율법을 통해서는 온 인류 전체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 있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요, 거기서 해방을 받기 위해서는 율법의 권세에서 벗어나고, 말하자면 율법의 속박에서 풀려나서 자유를 얻어야만 한다는 것이 사실로 남아 있게 된다.

     

    그런데 만일 이 자유가 육체적인 자유라면 우리가 율법을 준행하는 데서 벗어나서 모든 일에 방종해지며, 마치 자물쇠가 망가져버렸고 고삐가 풀려버린 것처럼 우리의 욕심이 마음껏 활개치게 되겠지만, 이 자유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영적인 자유이다. 그러므로 이 자유는 실망에 빠져 있는 상한 양심을 위로하고 일으켜 세워서, 율법이 억누르고 얽매어 놓고 족쇄를 채워놓고 있던 그 저주와 정죄에서 자유함을 받았음을 분명히 확신케 해 주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붙잡을 때에 이러한 자유와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을 얻게 된다. 율법이 양심으로 죄를 의식하도록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찌르고 괴롭혀 왔으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죄를 사함 받았음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선하심으로 복음을 통해서 우리를 도우지 않으셨더라면 율법에 우리에게 제시되어 있는 약속들이 모두가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율법을 준행하여야 한다는 조건이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께서는 우리를 도우시되, 우리의 행위들의 의의 일부로 인정하시고 또 나머지 일부는 그의 사랑과 긍휼하심으로 채워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그 의를 이루시는 분으로 지정하심으로써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고 말한 다음 이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2:16).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의 부패함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자들에게 주는 상급의 혜택을 절대로 누릴 수가 없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다른 의를 얻고서야 비로소 그 혜택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다윗은 주께서 자기 종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상급을 기억하고서 곧바로 그 상급을 무효화시키는 죄를 떠올리는 것이다. 시편 19:12에서 율법의 유익함을 높이 찬양하면서도 곧바로 이렇게 외치고 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다윗은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25:10)라고 말한 다음, 곧바로 이어서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25:11)라고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율법에 우리를 위하여 제시되어 있어서 행위로써 자격을 갖추기만 한다면 그 자비하심을 얻을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로서는 그런 행위를 도저히 이룰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율법의 약속들이 복음을 통하여 효력을 발휘한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약속이 열매를 내지도 못하고 그냥 사라지기 위해서 주어졌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 율법의 약속들은 행위의 공로와 관련지을 때에는 전혀 그 혜택을 누리는 일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그 자체로만 생각하면 그것들이 어떤 의미에서 폐기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는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18:5)라는 유명한 약속이 있으나 그냥 거기서 그쳐버리면 그 약속이 아무런 소용이 없고 또한 없는 것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이다(10:5,312). 아무리 거룩한 하나님의 종들이라 할지라도 율법을 지키기는커녕, 온갖 과실과 허물로 얼룩져 있기 때문에, 그들조차도 그 약속을 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의 약속들로 그것들을 대체시키면, 그 약속들은 값없는 죄 사함을 선언하는 것으로서 우리를 하나님께 합당하도록 만들어줄 뿐 아니라 우리의 행위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만들어 주게 된다. 주께서 우리의 행위들을 기뻐하시기로 정하실 뿐 아니라, 그의 율법을 준행하는 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축복들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주께서 그의 율법에서 의와 거룩함을 지키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그 상급들이 신자들의 행위에 대해서 베풀어진다는 것을 인정한다. , 이러한 상급이 베풀어지는 데 대해서 우리는 주께서 무엇 때문에 우리의 행위들을 인정하셨는지 그 이유를 항상 생각해야 마땅한 것이다.

     

    거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의 행위를 돌아보시면 언제나 칭찬보다는 책망이 앞서게 되는데, 그가 그 종들의 행위를 돌아보시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 종들을 품어 안으시고, 행위의 도움이 없이 오직 믿음만을 보시고 그들을 자기 자신과 친히 화목하게 하신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 지니신 그의 자비하심과 너그러우신 사랑으로 그들의 행위를 그토록 존귀한 자리로 높이 인정하셔서 그것들에게 가치를 부여하시는 사실이다. 셋째는, 그 종들의 행위들을 그 불완전하며 부패한 상태 그대로 보신다면 덕이 아니라 죄일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불완전함을 인정하시지 않고, 그 행위들을 용서하시고 받아주신다는 사실이다.

     

    궤변가들은 자기들이 공로를 세워준다고 보는 그 행위들이 과연 율법의 약속을 실현시키는 조건들에서 얼마나 거리가 먼가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오직 믿음에 근거하는 의롭다 하심과 죄 사함을 통해서 선한 행위들이 흠도 티도 없이 깨끗이 씻음을 받아야만 그런 조건들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중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353-357

     

    가져온 곳 : 
    카페 >청교도 아카데미
    |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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