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위한 기독목사에 대한 사견

김정한

미국교회 목사님들 가운데 그런 분들은 없지만 한국교회 목사님들 가운데 극 보수 혹은 종북에 물든 목사님들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교단 게시판에 좌우 이념에 대한 논쟁이 있어 써 본 글인데 이곳에다도 올려봅니다.

兩非論은 아니나 輕重을 따라 분별했으면

이곳 게시판(통합측을 말함)을 달구는 좌우 이념에 대한 시각에 대해서 그간에 오고간 글을 읽으면서 생각나는 사견을 말해보고 싶다. (나와 다른 시각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에 논쟁은 피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 역사에 어느 때 유토피아가 이루어진 적이 있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보다 낫은 세상을 만들어 가려는 노력을 해 온 것이 인류사가 아니겠는가?

작금의 한국이란 나라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될 것인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근 현대사의 한국역사를 되짚어 보고 앞으로 나갈 것에 대한 각자의 시각에서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특히 기독교신앙인들에게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을 알리는 길이 종의 직무의 일부라고 믿고 있기에 이곳 게시판이 이리 뜨거운 줄로 안다.

내가 보기엔
좌우가 양보와 타협과 화합대신 사사건건 극렬히 부닺치는 것에는 자신의 약점과 허물과 실수를 인정하기만 하면 그것을 기회로 상대방측이 무차별 공격해 들어올 것이 두려워 자신들의 이념에 헛점과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모로쇠로 일관하고 오직 상대방의 약점과 실수를 확대시켜 상대를 압도하고 쓸려뜨리려고 하는 대서 온다고 보고 있다.

먼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라.
먼저 자유시장경제와 민주세력은 이승만대통령과 박정희, 군부시절을 겪어오면서 행해진 숱한 부정과 부패의 고리를 꿇으려는 의지가 없이(말로만 외치고 있다고 본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것을 현재에까지 지속하여 기만하는 집권세력으로 보여지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한국사회를 이렇게 만든 것에 대한 공적과 과오를 알고 인정하라는 말이다)

그에 반해서 이승만대통령의 정부수립고 625이후에 공산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지식인들은 주류사회에서 밀려나 불만이 팽배하고 있었던 차 박정희 독재와 군부의 무지한 행동들이 저들에게 약자 편에 있는 노동자 편에 서서 활동하기 시작하고 교육분야에 뛰어들어 사회 평등주의를 말하면서 가진 자들의 횡포에 대해 이념교육을 시작하여 오늘날 각 분야, 심지어 기독교안에 들어와 그 사상이념을 가진 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자신의 주장이 한국사회를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북한을 따라가자는 것을 속이지 말고 들어내라는 말이다)

거기에 대한 나의 시각
현재의 기득세력자들이 지금의 종북세력이 바로 자신들의 모순과 잘못으로 만들어진 그림자 인 것을 인정하고 투명한 쪽으로 나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이념자들은 아무리 한국사회가 잘못되었어도 적어도 북한보다는 몇십 배 가 낫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이 나라를 위한 길이 어떤 지를 자신부터 냉정하게 살핀 연후에 나섰으면 한다.

기독목사들의 사명
우리 목사들은 어떤 환경에서 던지 복음을 전하며 복음진리를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 본질적인 것이라면 세상나라에서의 직무는 어떤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념에는 모순이 있는 것을 알게 하여 서로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올바른 지적을 수용할 수 있는 사회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라고 본다.

우리나라와 같이 북한을 지척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는 우리기독목사들이 복음진리에 서서 살 뿐 아니라 세상에서 살라고 한 빛과 소금의 삶을 살면서 극도로 첨예한 좌우 이념 자들에게까지라도 영향을 미쳐서 기독교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를 보전하게 해야 하리라고 본다. 목사들이 본이 되고 교회가 권위를 회복할 때 극한 좌우이념의 대립을 중재할 힘이 있다고 본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복되게 하셔서 세계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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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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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 유^^^^^^^머

ハ _ バ
ミ^o^ミ?
( \. ./ )/
(") (") !~~~!(^o^*)!
?♥?♥?♥

흐린 날은 유머와...^^^.......^^^

하~하...호~~호...헤~~~헤

주말은 가족과 함께

더위 식히며

또 다른 내일을 기다린다.


♡♧♧♧
∏____________♥
{▣▣▣][▣▣▣}~유머 실은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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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스님이 같은 버스를 탔다.



서너 정거장 지나자 예수님이 내리며
가라사대...... '신내림'




얼마후 스님도 내리며 외쳤다.






↔↔↔↔↔↔'중도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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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 사람(born again Christian)은 ‘성령의 사람’이며, 생물학(生物學)적 용어를 빌리면, ‘바이오제네시스(biogenesis)'이다. ‘바이오제네시스’, 생물은 생물에서만 난다는 설, 생명은 생명에 의해서 생명을 받는 것, 生에서 生이 난다는 것, 죽음에서는 결코 生을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이 생물학(生物學)적 원리다. 이런 원리로, 산 생명이신 성령 하나님이 마음속에 내주한 사람은 생명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생명이 없으며 이름과 형체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실상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란 것이다.

교회를 다니기는 하지만, 거듭남의 고백 (입술만으로가 아닌, 진정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 (롬 10: 9-10)함 없이 직분을 받은 자들, 목사, 전도사, 장로, 권사, 집사, 교인들이 저지르는 온갖 비리가 교회 안에서도 교회 밖에서도 비일비재 일어나는 탓에, 주님의 교회는 지금 큰 수난을 겪고 있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 다니기는 하나,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지 못한 자들이 교회 안팎에서 저지르는 온갖 추악한 죄악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채 모두 전 세계의 성도들과 주님의 교회가 함께 뒤집어쓰게 된 오물이라고 하면 너무 심한 표현인가…. (말씀에 의지하여 바로 살아보려고 최선의 삶을 경주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마저 무더기로 “개독교인”이란 소릴 듣는 것은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말이다. ㅠㅠ)

죽은 송장에서 썩은 냄새가 나는 것이고, 산 생명에서는 생명의 향기가 나는 것이 마땅하다.(고후 2:14-16절 참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을 모시지 않은 사람은 산 생명이 아니다. (1요 5: 12)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주님의 영광을 실추시키는 자리에서 떠나고 나중에 주님의 얼굴을 마나 뵙기 원하면 먼저 내가 믿음에 서 있는가 자기 자신을 말씀에 비추어 다시 재점검을 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고후 13: 5) 성령과 성령의 사람을 알지 못하는 무지(ignorant)가 빚어내는 촌극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무서운 현상으로 미혹하는 영이 활개를 치는 세상, 정신을 차리고 분별하지 않으면 내가 잠식당하게 된다. 짧은 지면에 모두 다 논하기는 어렵지만, 간단히나마 성령과 성령의 사람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고, 새해에는 우리 다 함께,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어보자는 슬로건이라도 내어걸고 싶은 심경으로 정리를 해 본다.

성령은 삼위일체의 神이심을 믿는 신앙을 확고히 해야 한다

“성령”이라는 표현은 구약에서는 “성신” (루-아흐 코드쇼) 2회 사용되었다. (사 63: 10, 11) 신약에는 “성령”이란 말이 93회가 인용되었다. 구약에는 “루-아흐”가 단독으로 하나님의 영을 나타내는 경우에는 “선한 신”(Spirit, 대문자로 표현)으로 번역되었다. (느 9:20, 30, 시 139:7, 슥 7:12) 신약에도 (프뉴마)가 단독으로 “성령, Spirit”으로 표현되지만, (마 4:1, 22: 43, 등 13회가 사용되며, 또는 ‘하나님의 성령’ (το Πνεύμα του Θεού)가 사용되고(마 12: 28, 고전 6: 11, 7: 40), ‘주의 성령’ (the Spirit of the Lord, το Πνεύμα του Κυρίου) (눅 4: 18 ), 또는 ‘예수의 성령’ (the Spirit of Jesus, το Πνεύμα του Ιησού)( 행 16: 7 )으로도 인용된다. 또 (바람)이라든가 ‘호흡’이라든가 공기의 진동을 뜻하는 것이 본래의 의의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해당 되어지는 (생명), (영혼)의 뜻이 된다. (창 2:7, 출 35: 31, 욥 7: 11) 성령은 곧, 하나님의 영, 주의 영,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삼위일체의 신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성서 원어 대사전 참조

성령의 사역 (성령과 우리와의 관계)을 바로 알아야 한다

성령의 하시는 사역을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은 성령님을 어떤 마술의 영으로 착각할 수 있고, 신성을 버리고 무당 푸닥거리 같은 짓을 성령의 이름으로 행하는 사이비 집단을 형성할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성령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다. 성령은 죄를 깨닫게 해주신다.(요 16: 8절), 성령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주(Lord)라 부를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고전 12: 3절), 성령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도록 성령의 세례(침례)를 주신다. (고전 12:13절) 성령은 영적인 생명을 주신다. (요 6: 63절), 성령은 신자들 안에 거하신다. (고전 6: 19절), 성령은 구원의 확신을 주신다. ( 롬 8: 16절) 성도의 일상 삶을 도우시는 사역을 하신다. 성령은 지 정 의(知情意)를 온전히 갖추신 인격적인 신(神)이시다. 불신자들이 깨달을 수 없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 (고전 2: 12-14절) 섬기는 일을 도우시는 사역을 하신다. (고전 12: 7-11절),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은사도 성령께서 친히 결정하신다. 은사를 주시는 목적은 개인 교회,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유익을 주기 위함이다. (벧전 4: 10, 고전 12: 7절)

성령의 사람이 경계해야 할 것:

1.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해야 한다
바리새인의 누룩이란, 곧 ‘외식(hypocrisy)’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친히,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조심하라” (눅 12: 1下)고 경고하신 것이다. ‘외식’, 그렇다!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되지 못하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이 ‘외식’인 것이다. 외식이란 글자 그대로 안과 겉이 다른 것을 의미한다. 성령의 사람임을 알 수 있는 외적인 현상은 오직 그 열매뿐이다. 그가 성령의 사람인지, 아닌지, 타인은 누구도 그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성령님과 자기 자신은 알 것이다. 죄를 짓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든지, 바리새인의 누룩(외식)으로 포장하고 있다면 문제가 심각하다.

누룩이란, 확산되어 본질을 부패시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지금 기독교계 안에서 불거져 나오는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목사들의 간음, 성폭행 문제나 재정비리 의혹, 세습 문제 등, 전 세계의 기독교계를 절망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은 그들이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즐기다 그 덫에 치어 헤어나오지 못한 탓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런고로 우리는 너무 늦기 전에 바리새인의 누룩을 멀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 자신 믿음의 상태를 비추어 살펴보아 바르게 분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깨달아졌으면 회개하고 즉시 그 자리를 떠나 돌이켜야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것이다.

2. 광명의 천사를 가장한 거짓 은사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아주 간단(simple)할 것 같은 issue건만 각처에서 뜨거운 감자로 달아오르고 있는 은사론, 신사도 운동, 은사중지론 등은 세기를 두고 신학자들 간의 논쟁이 치열했으나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결말이 나지 않고 다툼이 끊이질 않는다.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많은 목사님들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지 않고, 아전인수(我田引水), 천착지학(穿鑿之學), 견강부회(牽强附會)하여 자기의 사상이나 지식의 틀에 끼어 맞추려고 말씀을 끌어다 붙이기 때문이며, 성도들 역시 자신의 입맛에 맞은 목사님들의 사상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혼란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은사중단론 자가 되어서도 안 되고 극단적 신비주의자가 되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것은 모두 아멘으로 받고 그대로 믿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자세가 ‘축자영감설’을 그대로 믿는 성도의 올바른 태도인 것이다. 방언도 다른 은사들처럼 교회와 개인의 건덕을 위해서 주시는 성령님의 선물로 믿어야 하고, 모든 것을 적당히 하고 질서대로 해야하되 영을 다 믿지 말아야 한다. 모든 방언이 다 성령의 주시는 선물로서 온 것이 아닌, 사단의 장난질 방언도 있다는 것도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믿을진대, 외국어로 들려지고 알아지는 방언이 있음을 믿어야 하고, 인간의 소리가 아닌, 영으로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알아듣지 못할 방언도 있다는 것도 인정하자. 모든 방언이 각 지방 언어들로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여야 한다면 영들을 다 믿지말고 분별하라는 말씀을 무엇 때문에 기록으로 남겨두었겠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면 관계로 간증을 넣을 수는 없지만, 나는 외국어로 방언하는 것과 같은 현상, 어릴 적 고아로 자라, 학교는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여 일자무식한 사람이 주님의 영으로 인도함 받아, 영어 성경을 줄줄 읽을 수 있고 영어로 기도를 할 수 있는 한 부인을 만난 적 있다. 또 방언을 한다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을 원망하며 밤새도록 저주하는 것도 들어본 적 있다.

바울사도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간곡하게 권면하신 말씀을 들어보자.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고후 11:7 ), 놀라운 것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을 알아보는 방법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말하는 자를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참 선지자도 아니고 진실된 그리스도의 사도가 아니며 오직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아 미혹의 길로 끌고 가려는 사단의 졸개들이다. 계속해서 다시 보자. “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 고후 11: 14-15)

필자가 운영하는 블로그에 어떤 독자님이 댓글로 남긴 말이 가슴에 와닿기에 여기 옮겨본다. “예수님이 오실 때가 가까워지면 질수록 성경말씀을 인간적인 사고의 관점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경향과 함께 눈에 보이는 이적을 추구하는 경향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참.. 성경 말씀은 상당히 함축적, 암시적인 표현이 많은데...그것을 인간적인 생각으로 추론한다는 것이 참 어불성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그런데 기존의 정통 교회들도 그 방향으로 해석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 우려스럽기도 하구...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는 모습이 안스럽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모습 중에서 잘못된 것들을 회개하고 고쳐나가며 눈에 보이는 이적을 구하기보다 말씀에 드러난 예수님이 말씀하신 삶들을 묵묵히 살아가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아무튼... 말씀 안에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가슴이 다 시원해지는 옳은 말씀이 아닌가, 성령의 사람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귀중한 깨달음의 발언이라고 할 수 있겠다.

3.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죄에게 굴복하지 아니한다.

거듭난 성도라 할지라도, 죄 성이 남아 있어 죄의 유혹을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죄의 유혹을 받는다고 하여도, 죄가 그 사람을 주장할 수 없도록 주님의 영이 지키신다. 때문에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가슴과 머리, 말과 행위가 모두 함께 나간다. 거듭난 사람은 작은 죄를 지어도 성령의 탄식하시는 세미한 음성이 들려져 그 양심이 심히 괴롭다. 그러면 기도하게 되고, 성령의 도우심과 회개의 영으로 죄사함을 받고 돌이켜 구원함에 이르는 것이다. 안과 밖이 다른, 외식으로 포장된 생활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 Holy Spirit)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1요 5: 18절 말씀) 죄의 소원은 성령의 사람에게도 있으나 죄가 그를 주장하거나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이기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우리는 죄를 이기고 승리한다. 이것이 성령의 법, 곧 생명의 법이다!

성령 충만을 내 삶 속에서 지속할 수 있는 방법:

a)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이다.(요1: 1절 참조)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는 사람은 그 사람 속에 그만큼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나님은 능력이시다. 하나님의 말씀 또한 능력이시다. 이 능력의 말씀을 더 많이 소유한 사람이 더 많은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더 많은 능력이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사람은 더 큰 일을 해 낼 수 있다….이것이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비결이라고 하면 믿어지겠는가? 그러나 사실이 그러하다.

b) 그리스도의 말씀에 전적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순종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이 바로 바리새파적인 사람이다. 바리새파처럼 머리만 굵어진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싫어 버린 바 된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이 알기 때문에?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싫어 버린 바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는 많이 알았지만, 그 알고 있는 만큼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면 무조건 바리새파로 몰아가는 것은 틀린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은 사람이 그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삶을 살기만 하면, 이런 사람이야말로 큰 믿음을 소유한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새해에 우리는 극단적 신비주의나 샤머니즘적 신앙으로 물든데서 돌이켜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많이 읽고 그 말씀의 잣대(Canon)로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고집과 아집, 정욕, 이런 육신에 속한 죄성을 측정하고 자를 것은 자르고 버릴 것은 버리고, 내 속에 좌정하고 계신 성령님께 굴종하며 복종하는 순종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령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비례해 성령의 열매가 내 삶 속에 나타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자신을 쳐서 더 많이 복종하는 사람에게는 더 큰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치 않으면 그 사람은 그만큼 자신의 아집, 고집 이런 죄의 속성들이 더 크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은 인격적이시기에, 내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굴종할 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구원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내가 변화되는 능력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내가 새로워지는 길이 있다. 내 힘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 아무것도 없다. 울어도 안 되고 힘써도 안 된다. 부흥회 백날 쫓아다녀 봐야 성령 받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직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주시는 그분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런고로 성령 충만한 성도는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요즘처럼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위상이 바닥을 친 시대는 역사적으로 다시 없었던 것 같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교회 다니는 모든 사람을 총칭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엄격히 말해서 교회 등록하고 매주 교회 출석하는 사람을 모두 그리스도인으로 보면 안 된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뜻으로서. 반드시 물(하나님의 말씀)과 성령(Holy Spirit, 삼위 일체의 영)으로 중생한(born again)사람, 성령의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어야 옳다. (요 3: 3-9절 참조) 이런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며, 이런 사람은 바이오제네시스(Biogenesis), 생명의 신이 그 속에 내주해 계신, 거듭난 사람( born again Christian)이다. 생명은 생명을 낳고, 성령의 사람은 생명의 열매가 그 생활 속에서 맺히는 것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 8- 9절 말씀).”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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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인디언의 특별한 성인식!

북미에 사는 어느 인디언들은 자녀들의 성인식을 옥수수 밭에서 거행한다고 한다. 어떤 성대한 의식으로 치루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넓은 옥수수 밭으로 데리고 가서 바구니를 하나씩 주면서 옥수수 밭에서 가장 좋은 옥수수 한 개만을 따서 바구니에 담아 오게 한다. 그것이 성년식의 전부이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고 힘든 일도 아니다. 그렇다고 신나고 즐거운 일도 아니다. 아이들은 자신이 가장 좋은 옥수수라고 생각하는 것을 한 개만 골라 따면 되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조건이 붙는다. 옥수수를 따기 위해밭고랑을 한번 지나가면 다시 되돌아갈 수 없고, 또한 한번 고른 옥수수보다 더 좋은 옥수수가 나타나도 그것으로 바꿀 수가 없다.

아이들은 좋은 옥수수를 고르기 위해 밭고랑의 시작부터 매우 신중하게 옥수수를 살피며 걸어가게 된다. 그리고 밭고랑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면 아이들은 옥수수 한 개씩을 바구니에 담아 오는 데 그들이 선택한 옥수수는 모두 별로 좋은 옥수수가 아니었다.

그 이유는 아이들은 좋은 옥수수를 발견하고서도 앞으로 가면 더 좋은 옥수수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그냥 스쳐 가버렸기 때문이다? 북미인디언들은 옥수수 따기 체험을 통해 더 좋은 것을 찾으려고 욕심을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우쳐 주려고 이런 체험을 성년식에 통과의례로 만들었을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인디언들의 옥수수 따기 체험은 지나간 세월 아쉬워 해도 아무 소용이 없으니 매일을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다.
 
 


 

    사랑이란 이런 것- 어느 병원장의 일기 중에서
    아침 8시 30분쯤 되었을까? 유난히 바쁜 어느날 아침, 80대의 노인이 엄지 손가락 꿰맨곳을 제거하기 위해 병원을 방문했다. 그는 9시에 약속이 있어서 매우 바쁘다고 하며 나를 다그쳤다. 나는 노신사의 바이털 사인을 체크하고 의자에 앉으시라고 권했다. 아직 다른 의사들이 출근하기 전이어서 그를 돌보려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하지만 시계를 연신 들여다 보며 초조해 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내가 직접 돌봐 드리기로 마음을 바꿨다. 다행히 노신사의 상처는 잘 아물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노신사의 상처를 치료하며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서두르시는 걸 보니, 혹시 다른 병원에 진료 예약이 되어 있으신가 보죠?"라고 물으니, 노신사는 "요양원에 수용되어 있는 아내와 아침 식사를 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부인의 건강상태를 물으니, 노신사는 "아내는 알츠하이머 병에 걸려 요양원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어르신이 약속 시간에 조금이라도 늦으시면 부인께서 언짢아하시나 보죠?"라고 물었다. 그러나 노신사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뇨, 아내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지 5년이나 됐는걸요."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부인이 선생님을 알아보시지 못하는데도 매일 아침마다 요양원에 가신단 말입니까?" 노신사는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아내는 나를 몰라보지만, 나는 아내를 알아본다오." 노신사가 치료를 받고 병원을 떠난 뒤, 나는 흐르는 눈물을 애써 참아야 했다. 사랑의 참된 모습을 발견했다는 기쁨에, 내 팔뚝에서는 소름이 돋았다. 진정한 사랑은 육체적인 것도 로맨틱한 것도 아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있는 그대로를 오롯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 이 글은 참으로 제게 힘을 주기도 하네요. 저도 아내가 너싱홈(요양원)에 있거든요.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새삼 느껴봅니다... 오늘 하루도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마음과 사랑을 듬뿍 나누어 보세요. 행복하실 것입니다.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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