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훼방하는 죄란 무엇입니까? (Q&A) / 박신 목사

 

 

[질문]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12:31,32)

위 말씀을 말로 성령을 거역(성령을 훼방)한 자는 회개(영접)하여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의미로나, 한번 회개(영접)하여 구원에 이른 자는 성령을 거역(성령을 훼방)할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지요? 위 말씀에 대한 해석 부탁드립니다.

[답변]

성경을 해석하는 가장 첫째가는 원칙은 앞뒤 문맥에서 말하는 의미를 가장 먼저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게 된 배경과 그 목적을 따지지 않고는 올바른 해석이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문단은 마12장의 22절부터 37절까지입니다. 참고로 성경에는 한 사건이나 문맥이 시작되는 구절에는 반드시 작은 동그라미가 붙어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 해석은 최소한 동그라미 하나에서 시작해 다음 동그라미 바로 앞 절까지는 함께 읽고 그 전체 대의(大意)를 파악한 후에 각 구절의 구체적인 의미를 추적해 들어가야 합니다. 또 그 대의를 파악하기 위해선 사건의 발단과 전개 과정과 결말까지 다 함께 따져 보아야 합니다.

본 문단의 대의는 어떻게 됩니까? 먼저 바리새인들이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린 된 자를 고쳐주는 예수님을 보고 귀신의 왕의 힘을 빌려 쫓아내었다고 비방했습니다. 그러자 일단 예수님은 사단이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망하는 일인데 그렇게 할 리가 없다고 해명했습니다.  예수님이 사단이거나 사단의 힘을 빌린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았다고 반박한 셈입니다.

그리고서 말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와 말로 인자를 훼방하는 죄로 나누어서 전자는 용서 받을 수 없고 후자는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로 성령을 훼방한 죄라고 말했을 때에는 무엇을 지적한 것입니까? 바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더러 사단의 힘을 빌렸다, 즉 사단과 같은 편이라고 매도한 죄입니다.

반면에 인자를 말로 거역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인자라고 말할 때는 평범한 인간과 구약에 예언된 인자 즉 메시야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다른 구절과는 달리 본문에선 정확하게 둘 중 어느 것을 의미하는지 불명합니다만, 어느 쪽으로 해석을 하더라도 그 뜻에 무리는 전혀 없습니다.

먼저 인간의 뜻이라면 사람이 사람을 말로 상처 주거나 욕을 한 것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지은 이런 윤리적인 죄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믿는 자는 언제든 사함을 받을 수 있음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두 번째로 메시야의 뜻으로 해석하면 어떻게 됩니까? 말로 예수님을 비방한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는 뜻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베드로가 죽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고 마지막 세 번째는 저주하면서까지 배반(막14:71)했지만 위대한 사도가 되었지 않습니까?

본문에서 예수님이 당신을 인자로 지칭하여 말씀하셨다 할지라도 구태여 성령 훼방 죄와 메시야 훼방 죄로 구분한 것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은 사실은 구분 지을 수는 없습니다.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삼위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지상에 계시는 동안에는 완전히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서 사역하셨습니다. 내면적으로는 성령님이 바로 예수님이자 예수님이 성령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의 외형과 인성을 띄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바리새인을 포함한 일반적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볼 때에는, 특별히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에는 평범한 인간으로 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23절)라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뜻은 너희가 나를 완전한 인간으로 취급하는 견지에서 하는 비방과 방해는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구태여 성령을 훼방한 죄라고 따로 지적한 것은 지금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들을 고쳐 주는 것을 보고도 나를 사단이나 그 종이라고 비방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나아가 하나님 당신을 부인하는 짓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 세상과 다가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받지 못할 죄입니다.

그 말씀을 한 후 부연해서 설명한 내용(33-37절)을 보면 그 뜻이 더욱 확실해집니다. 실과로 그 나무를 알고,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말하고, 사람은 자기 속에 쌓은 것에서 겉으로 나온다고 했습니다. 결국 말로 한두 마디 비방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근본 마음에 진정으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온전히 믿는지 아닌지의 여부로 구원이 결정된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37절에 “말로 의롭다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는다”고 해서 단순히 말을 잘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속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말이니까 한두 번 잘못 말한 것이 아니라 평소의 신관, 가치관, 인생관, 역사관 등에서 일관되게 말한 것을 두고 말하는 것으로 구원 여부가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의 경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을 아예 부인하겠다는 근본 마음이 있었으므로 그런 성령의 역사를 보고도 부인했습니다. 심지어 사단을 들먹인 것은 나사렛의 랍비 예수를 거역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 즉 하나님 자체를 거역한 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5절 처음에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라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로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요 예수님과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로 예수님을 헤치는 자”(30절)였던 것입니다.

이제 질문자님께서 의문을 가졌던 두 가지 부문에 대한 해답도 나왔습니다. 먼저 “말로 성령을 거역(성령을 훼방)한 자는 회개하여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의미로” 봐도 되는지 물었습니다. 이 질문 자체가 의미하는 바가 조금 애매하기는 합니다만, 순수하게 말로 실수하거나 잘못하여 성령을 비방했던 자가 회개해도 구원 받을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이 어떤 극악한 죄를 지어도 하나님 당신을 적극적으로 부인하지 않는 한 구원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신을 부인하지 않는 한 십자가로 용서 받지 못할 죄라고는 없습니다.

두 번째로 “한번 회개(영접) 하여 구원에 이른 자는 성령을 거역(성령을 훼방)할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성령은 악령과 달리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신자의 자유의지에 자신의 사역을 일차로 맡기십니다. 사단과는 달리 사람을 노예로 부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신자 자신의 죄, 욕심, 나태, 혹은 때로는 사단에 넘어가거나 본성으로 하나님을 잠시 외면하는 이유로 인해서 신자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이 활발하게 역사하지 못할 수는 있습니다. 그럴 때는 성령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고 인내하시지만 도저히 신자를 방임할 수 없을 때는 강권적으로 역사하십니다. 궁극적으로는 구원 받은 신자가 성령을 거역할 수는 없지만 실제적으로는 신자 자신의 믿음과 헌신에 따라 성령의 역사가 충만해지거나 약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란 적극적으로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 사역을 거부 훼방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완악하게 고집을 부려서 끝까지 그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또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일을 말합니다. 단순히 말로서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심지어 저주하는 말을 했더라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당연히 사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주 유감스럽게도 목회자들이 교회의 행사나 심지어 목사 개인을 제대로 따르지 않은 일을 두고 감히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범했다고 매도하는 일이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얼마나 두려운 죄를 목회자 자신이 범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인간이 인간을 절대로 지옥 가는 형벌을 받는다고 또는 사함을 못 받는 죄라고 정죄 내지 저주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의 죄를 사해주는 일을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3/15/2007

 

 

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다른 복음을 몰아내라-② 율법주의
▲정성욱 교수.
 

한국교회의 안방을 차지해 들어와서 한국교회를 어지럽히고 부패하게 하고 있는 다른 복음 중 두 번째는 율법주의다. 율법주의의 기본 정의는 죄인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을 지켜 행해야 한다는 주장과, 그런 주장에 근거한 신앙생활이다. 좀더 풀어 해설하면 죄인이 율법을 지켜 행하는 도덕적 공로를 세울 경우, 그 도덕적 공로에 대해 하나님께서 칭의나 구원으로 보상하신다는 도덕주의·공로주의적 신념과 그런 신념에 기초한 잘못된 신앙생활이다. 좀더 넓게 말한다면 죄인이 칭의와 구원을 얻기 위해 어떤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모든 종류의 조건주의 역시 율법주의라 할 수 있다.

 

한국교회 내에 팽배한 율법주의는 다양한 형태를 띄고 있다. 그 첫째 경우가 바로 오직 믿음과 은혜로 말미암은 칭의와 구원을 거부하고, 죄인 스스로의 능력과 노력으로 거룩한 율법의 요구를 성취함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원조 율법주의이다. 이런 원조 율법주의를 신봉하고, 또 그렇게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교단이나 교회는 그렇게 많지 않다.

 

세계 교회사에서 어거스틴과 구원론 논쟁을 벌였던 펠라기우스의 구원론은 율법주의·도덕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 본성의 전적 타락과 무능력을 거부하고, 인간의 본성이 근원적으로 선하며, 하나님의 율법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펠라기우스는 본성적으로 선하고 능력 있는 인간이 도덕법을 대표하는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함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 내에서 급진적 펠라기안주의자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둘째 경우가 로마 가톨릭적 율법주의다. 로마 천주교의 공식 교리에 의하면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영세를 받을 때, 죄인의 원죄를 포함한 과거의 죄가 사함을 받고 처리된다. 그러나 이때 칭의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영세를 받은 천주교인은 남은 인생 동안 지속적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뤄가야 한다. 천주교의 공식 교리에 의하면 영세 이후 신앙생활 속에서 율법의 요구를 이뤄가는 과정이 칭의다. 신앙생활 과정에서 영세받은 천주교인이 율법의 요구를 이뤄가야 한다는 조건을 성취할 때만 최종적으로 칭의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천주교인이 율법의 요구를 이뤄가는 칭의의 과정 속에서 계속 죄를 범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죄에 대한 보속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천주교인들 중 최종적으로 자신이 칭의되어 천국으로 간다고 믿고 또 그렇게 확신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한 로마 천주교의 구원론은 펠라기우스주의 같은 원조 율법주의는 아니지만, 오직 하나님 은혜로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믿고 의지함으로 영 단번에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는 성경적 구원론에서 크게 이탈한 이단적 주장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죄인의 모든 죄를 일거에 용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공로를 믿음으로 붙드는 모든 죄인이 영 단번에 의롭다 함을 받아, 영원한 의인의 신분을 얻게 된다는 성경적 구원론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 천주교회의 구원론은 예수 믿음에 인간의 율법적·도덕적 공로를 더해야 칭의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의미에서 반(半)펠라기우스주의로 비판받아 왔다. 로마 가톨릭이 가르치는 반펠라기우스주의적 구원관은, 바로 신약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경고한 ‘다른 복음’과 매우 유사한 성격을 띠고 있다.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율법주의자 또는 유대주의자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완전성과 충족성을 거부하고, ‘오직 믿음’의 효력을 거부하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믿고 의지한다 해서 칭의와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음에 율법 준수를 더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말한 율법 준수란 할례 받음, 안식일과 다른 절기 준수, 구약 정결음식법 준수 등을 포함한다. 우리의 칭의와 구원은 오직 은혜만으로, 오직 믿음만으로,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완성된다는, 순수한 복음, 순도 100%의 복음, 진짜 복음에서 이탈한 것이다. 이것은 다른 복음을 전하고, 다른 복음을 믿고,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이기에 영원히 저주 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오늘날 이러한 로마 가톨릭적 율법주의가 한국 기독교회 내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예수 믿음에 율법 준수를 더해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공공연히 가르치는 교회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교회들에서는 예수님을 믿고 회심한 후 주일성수, 십일조 헌금, 새벽기도, 주초 금지 등을 준수하지 않으면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처럼 가르친다.

 

이들의 의도가 어떻든, 이런 설교는 철저히 율법적이며,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에 정면 배치된다. 이런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하며, 다시금 믿는 자들을 율법과 정죄 의식의 굴레와 속박에 빠져들게 하는 심각한 오류이다.

 

상술한 관점이 좀 더 노골적인 율법주의라면, 좀 더 미묘한 차원에서 율법주의적 다른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교회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런 교회들은 칭의·구원과 선행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 오해로 말미암아 이런 미묘한 율법주의적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들의 주장은 소위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입술로는 신앙고백을 하더라도, 삶 속에 선행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표면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가지고 있는 미묘한 함정은, 여전히 믿음에 선행을 더해야 구원을 얻는다는 율법주의적 패러다임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믿음에 선행을 조건으로 더해야 구원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수식으로 표현하자면 ‘믿음+선행=구원’이다.

 

그들이 이런 주장을 내세우는 이유와 배경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교회 내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적으로 복음에 합당한 삶과 윤리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교회 지도자들 중에서도 윤리적 실패의 모습을 보여준 사례가 최근 많이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의 계속되는 윤리적 실패를 바라보면서 좌절을 경험한 일부 지도자들은, 선행과 윤리를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려는 유혹에 쉽게 빠져들 수 있다. 이들의 의도는 십분 이해하더라도, 그들의 가르침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우리들에게 전해준 오직 은혜와 믿음과 보혈의 복음과는 배치되는 다른 복음이다. 왜냐하면 선행은 결코 구원의 조건이 아니며, 구원의 조건으로 높여도 안 되기 때문이다.

 

선행은 참된 믿음의 결과와 열매이며 동시에 선행은 구원의 목적이요, 증거라는 것이 100% 순수한 복음이다. 이것을 수학적인 등식으로 표현하자면 ‘믿음=구원’이며, “구원이 뿌리라면 선행은 열매”, “구원이 원인이라면 선행은 결과”, “구원이 실재하다면 선행은 그 증거”, “구원을 받은 사람의 삶의 목적은 선행”이라는 방식으로 표현돼야 한다. 참된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의 삶 속에는 선행이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 있다. 그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선행은 구원의 조건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와 결과와 목적과 증거로서 따라온다.

 

최근 교회 갱신 전략으로 제시되었지만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제안들 중 다른 하나는, 바로 성경과 종교개혁에 뿌리를 두고 있는 칭의론을 수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몇몇 영향력 있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이런 제안을 하고 있고, 이 제안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심각하게 우려할 만한 일이다. 한국교회는 외부에서 신천지와 하나님의교회 같은 이단들의 공격을 받고 있으며, 동시에 내부에서 교리적 수정주의자들로 인한 혼란으로 골치를 앓고 있는 형국이다.

 

수정주의자들은 전통적인 교회에서 가르친 칭의론, 즉 종교개혁의 법정적 칭의론이 신학적으로 심각한 오류라고 주장한다. 죄인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할 때 영원히 칭의된다는 법정적 칭의론은 구원파적 오용과 남용의 대상이 되었다고 수정주의들은 주장한다. 한 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다음에는 어떤 방식으로 삶을 살더라도 구원이 영원히 보장된다는 전통적인 칭의론 때문에, 교인들의 방종적이고 비윤리적인 삶이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칭의를 “전 생애에 걸쳐 일어나는 과정”이며, “처음 예수를 믿을 때 선취적으로 칭의를 받았더라도 남은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해야만 종말에 최종적으로 완성적 칭의를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따라서 처음 예수님을 믿은 다음 삶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경우 종말론적인 완성적 칭의를 받을 수 없으며, 결국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 번 칭의는 영원한 칭의이며,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전통적 교리가 도리어 한국교회의 윤리적 타락의 주범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일견 일리가 있는 분석인 것 같으나, 더 깊이 들어가보면 이런 수정주의는 매우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성경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깊이 분석해 보면 죄인을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인이라고 선포하는 칭의는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영 단번의 사건이며 영원한 효력을 가진다. 그리고 칭의는 율법의 행위와 관계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와 공로 덕분에, 그리고 오직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 덕분에, 그리고 예수님의 인격과 공로에 대한 믿음만으로 완성되는 사건이다. 한 번 칭의된 자는 영원히 칭의된 것이며, 한 번 칭의된 자의 구원은 영원히 보장된다.

 

그래서 루터와 칼빈과 같은 개혁자들은 오직 믿음과 은혜로 말미암는 칭의가 복음의 중심이요, 복음의 정체성 자체라고 선포했다. 그리고 참된 믿음으로 칭의된 신자는 성화의 과정을 시작하며, 점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가고 선한 일에 열심하는 하나님의 친백성으로 자라가게 된다. 즉 칭의가 뿌리라면, 성화는 열매이다. 칭의가 원인이라면 성화는 결과이다. 성화의 칭의의 증거이며, 목적이다. 칭의와 성화는 서로 구별되지만, 필연적인 연합관계에 있기 때문에 결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입술로는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그 사람의 삶 속에서 거룩함과 선행의 열매가 나오지 않을 경우는 두 가지 중 하나이다. 하나는 그의 신앙고백이 거짓인 경우 즉 참되게 거듭나지 못한 경우이고, 둘째는 신앙고백은 참되나 아직 믿음이 연약하고 유치한 단계에 있는 경우이다.

 

한국교회 내에는 성경적 칭의론에 대한 오해와 남용이 팽배해 있다. 이것은 율법주의적 유혹을 부추긴다. 그렇다 해서 성경적 칭의론을 수정하여 율법주의적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복음에 대한 배신이요, 진리의 왜곡이기에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 무엇보다 성경적 칭의론에 대한 바른 이해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비상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더 나아가 칭의론에 대한 바른 이해에 기초하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신앙인들의 윤리적인 삶을 고취시키는 일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점진적으로 열매를 맺게 될 때 한국교회는 새롭게 갱신되고 개혁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덴버신학대학원 조직신학)-ⓗ

 

예수가좋다오

가져온 곳 : 
카페 >╋예수가좋다오
|
글쓴이 : (一麥.)|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8개의 수족 여자 아이.  4살 때 수십명의 의사들이 동원되어 정상아 수술에 성공한 내용의 장면입니다.

지금은 초등학교 5-6학년 나이가 되겠군요.

nina.jpg

nina2.jpg

nina3.jpg

아래는 13살 소녀의 트럼펫 연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