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다”는 말의 의미/ 마르틴 부처

그러나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보혈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을 성취하셨듯이,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께 바치며,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살아가게 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계의 기초가 놓이기 이전에 선택되었고, 성령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위하여 성도들에게 부음 바 되어, 그들의 이름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생명책에 기록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들이 현재 속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사도는 여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 나는 이것을 ‘그리스도를 통하여’라고 번역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바울은 올바르게도 우리의 선택을 그리스도에게로 돌리고 있다. 만약 아마도 어떤 사람이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로 파악할 경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거룩하고도 복된 삶으로 예정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 의미는 항상 바울의 교리와 전적으로 일치할 뿐만 아니라, 첫 번째 의미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며,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성도들을 그의 자녀들의 유업으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하여 그들을 그곳에 참여하게 하셨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고, 거룩하고도 행복한 삶이 주어지고, 선하고도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하여 능력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 이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 돌려져서는 안 된다.

- ‘에베소서 주석’(1527) 중에서 -


마르투스선교회 /개혁주의마을

구약성경을 읽어나가면서 우리가 발견해야 하고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구약성경 속에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 곧 예표(豫表), 그리고 하나님의 한결같은 구속사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여자의 후손,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하셨고 이를 위하여 아브람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람에게는 아무 공로도 없고 게다가 늙어서 쓸 만한 구석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부르심, 그리고 도우심과 쓰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또 아브람이 복을 받은, 또 반드시 복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불러내실 때에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의미하신 복은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부귀영화나, 장수나, 후손이 아닙니다. 참 된 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브람은 복의 근원, 곧 예수 그리스도의 통로, 곧 구세주의 계보로 쓰임 받으려고 불러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에게는 복을 받을 자격,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믿기는커녕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도 못 했고 예수님의 이름도 몰랐습니다. 코앞의 후사 걱정, 아들 없이 죽는 걱정으로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하늘의 무수한 별을 보이시면서 ‘네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후손은 ‘후손들’이 아닌 ‘후손’, 단수명사였습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후손을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의미하신 '후손'은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은 이를 정확히 지적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후손’이라고 말씀하신 그 ‘후손’은 복수명사 ‘후손들’이 아닌 단수명사 ‘한 후손’이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아브람은 “아니, 하나님, 왜 ‘후손들’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후손’이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은 기초문법도 모르십니까?”라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하신 말씀을 그대로 믿기만 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셈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를 “아브람의 의”로 여기실(인정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만일 아브람이 굳이 따져서 ‘후손’이 아닌 ‘후손들’의 약속을 받아내고 믿었더라면 의로 여기심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브람이 ‘후손’, 곧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자 그제야 하나님께서는 “나는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호와로라.” 하심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하신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었다면 더 할 게 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하고 증거를 요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거셨는데 또 증표를 요구하다니 참으로 불경스러운 일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도 믿지 못 하는 악하고 약한 존재인가 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증거, 예언, 계시 같은 것을 요구하는가 봅니다. ‘나는 여호와로라.’ 하시면서 자신의 이름을 거신 하나님으로서는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믿음 없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화도 안 내시고 아브람에서 삼년 된 암소,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수양, 그리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아브람은 이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히브리어로 ‘브릿트’하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습니다. 과연 아브람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을까요? 아무튼 솔개가 내려앉을 때 쫓았습니다. 그러다가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밤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고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났습니다. 히브리어 “브릿트”는 같은 발음이지만 ‘쪼개다’라는 단어도 되고 ‘약속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도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중요한 약속을 할 때 짐승을 쪼개어놓고 그 사이를 함께 지나면서 약속을 합니다. 그 약속을 어길 경우에는 그 짐승처럼 쪼개어져 죽임당하겠다는 뜻이 됩니다. 목숨을 거는 약속인 셈입니다. 거기를 하나님이 연기 나는 풀무와 타는 횃불로 지나신 것입니다. 아브람은 그리로 함께 지나지 않았습니다. 정작 그 복을 받을 당사자인 아브람은 자빠져(?) 잠자고 하나님 혼자서 ‘하나님의 목숨을 건’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왜 삼년 된 희생물들일까요? 그것들은 삼년 공생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새는 왜 쪼개지 아니하였을까요? 비둘기는 성령을 뜻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솔개는 왜 덤벼들었을까요? 솔개는 훼방하고 의심케 하는 사단의 무리였을 것입니다. 그것을 쫓는 것은 아브람의 몫이었습니다. 그리고 타는 횃불, 한없이 뜨거운 사랑과 ‘열심’으로 하나님은 그 사이를 지나셨습니다. 그것은 그 아들을 참혹한 십자가에 내어주실 약속이었습니다. 아들을 쪼개어 지성소의 장막을 가르고 부르신 자들이 그리로 지나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실 것을, 죄인들이 피 흘려 죽으신 그 아들의 몸을 지나면서 그 피로 모든 죄를 씻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복되게 하실 것을 아브람에게 보여주시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람이 과연 그걸 이해했을까요? 못 했겠지요. 그러나 그 광경은 결코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뇌리에 깊이 박혀 일평생 한시도 잊지 못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광경은 피가 흐르는 참혹한 십자가의 광경의 예표였기 때문입니다. 구속함을 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일평생 결코 잊혀질 수 없는 그 참혹한 십자가의 광경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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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떨어질 때 더욱 아름다운 것 지난 며칠은 평소보다 운동을 좀 더 많이 하였던 것 같다. 올해는 마침 해변 가까운 시내로 이사를 나왔기에... 새벽이면 남편과 함께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 바닷가로 산책을 나가는 것을 일상화시키려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아침 약속이 있을 때는 저녁 예배가 없는 날을 택하여 밤 바닷가를 산책하는 것 또한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기에 좋다. 청색 하늘 아래 쪽빛 초승달을 품고 사르르 사르르 일렁이는 바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가슴 속에 애잔한 그리움을 싣고 어머니 품속처럼 포근함이 느껴짐을 그대는 아는가? 때마침, 지난 금요일은 아침부터 낮 동안 교회 일이 밀려서 새벽 산책을 하지 못한 터라 저녁 식사를 끝내기가 무섭게 바닷가를 향해 나섰다. 자동차로 공원 가까이 가서 그곳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걸어서 바닷길을 산책하는 것이 코스인데 그날 따라 길이며 파킹장이며 발들여놓을 틈새를 찾지 못할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것이 아닌가? "아니, 오늘은 웬일로 사람들이 이렇게 복작거리나, 이건 완전히 서울 명동거리보다 더 심한 거잖아?" 궁시렁대면서 남편이 차를 세울 곳을 찾아보지만 빈 공간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 30분을 헤매며 돌다 차를 세울 마땅한 곳을 도저히 찾을 자신이 없어 살고 있는 아파트로 되돌아가 차고에 차를 세워두고 다시 도보를 걸어서 가보기로 했다. 걸어서 가노라면 아무래도 거리가 있으니까 늘 두 바퀴씩 돌던 바닷가 산책길인데, 오늘은 두 바퀴 대신 한 바퀴만 돌고 돌아 나오면 될 것 같다는 계산이었다. 다시금 운동화를 졸라매고 밖으로 걸어나가니까, 점점 더 불어나는 사람의 물결.... 은근히 궁금증이 발동한 우리들의 별님, 지나가는 청년을 붙들고 오늘 이곳에 무슨 행사가 있는가? 그럼요, 모르셨어요? 조금 있으면 독립기념일 폭죽을 이곳에서 터트리는데요. 오잉?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생각 없이 그저 하루하루 주어진 일에만 매달려 허둥지둥 살아오느라고.... 그렇구나, 오늘이 미국독립기념일이구나... 암튼, 이렇게 하여, 그 유명한 독립기념 폭죽놀이에 직접 참여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도 저녁 산책을 할 겸 우연히 나갔다가... 그럼 우리도 불꽃놀이를 구경할 수 있겠구나 소녀처럼 설레는 마음이 되어 여름 아카시아 꽃잎이 하얗게 쏟아져 내리는 잔디 위, 삼삼오오 짝지어 앉은 잔디 위를 비집고 들어가 내 집처럼 펑퍼짐 눌러앉았노라니까... 갑자기 여기저기서 "와~" 하는 큰 함성과 함께 뻥뻥! 하늘을 향해 폭죽이 터지기 시작한다!! 아! 얼마나 아름답고 웅장한 하늘 쇼가 눈앞에서 벌어지든지 하늘에서 수없이 많은 은하수가 반짝이며 낙하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똥이 춤추며 하늘하늘 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린다. 넋을 잃고 떨어져 내리는 별똥별을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사물은 모두 떨어질 때 더욱 장엄하고 아름답다. 인생도 언젠가 한 번은 떨어질 텐데... 저토록 아름답게 반짝이며....떨어질 순 없는걸까? 무엇을 하건 시작보다 끝이 좋아야 한다고 하지를 않던가? 특별히, 성도의 생활은 처음보다 끝이 더 좋은 결과를 거두어야 하는 게 아닐까?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나의 최선으로 경주해야겠다.
      그분이 부르시는 그날, 아름다운 삶의 美를 거둘 수 있도록...
          제가 본 광경과 꼭 같이 이쁜 폭죽놀이 영상을 찾긴 했는데...에공~ 작년 것밖에 없더라고요. 그런데로 눈요기 하세요.^^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3달러의 호의 

         

        어느 날 아침,

        한 젊은이가 계산대로 허겁지겁 달려왔습니다.
        무척 급한 모양이었습니다.


        몇 가지 물건을 계산대에 내려 놓고는

        100달러 지폐를 내 밀었습니다.
        물건 값은 다 합해 봐야 3달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잔 돈 없으세요?”
        “죄송해요. 100달러짜리 밖에…”
        아직 이른 시간이라 계산대에 있는 돈이라고는

         40달러가 채 안 되었습니다.


        뒤에서 기다리는 손님들도 있었습니다.
        주디는 100달러짜리 지폐를 그 젊은이에게 되돌려 주고는

        자기 지갑에서 3달러의 지폐를 꺼내어
        금전 출납기에 넣고 영수증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영수증을 젊은이에게 건네며

         웃는 얼굴로 말했습니다.
        “홈 디포우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젊은이는 어리둥절했지만 일단 급한 마음에

        고맙다는 인사만 몇 차례 한 후,
        서둘러 매장을 빠져나갔습니다.


        며칠 후,

        그 젊은이가 다시 그녀의 계산대로 왔습니다.
        이번에는 젊은이의 아버지와 함께 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건축 회사인

        존슨 컨스트럭션 컴퍼니의 소유주 밥 존슨 경이었습니다.


        “며칠 전 제 아들에게 호의를 베푼 것으로 들었습니다.
        우리 회사에서는 앞으로 필요한 자재를

        홈 디포우에서 구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주디는 고액지폐를 거절하거나 짜증을 내지 않았습니다.
        대신 침착하고 현명하게 처신함으로써

        모든 고객들에게 훌륭한 서비스를 제공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 젊은이와 아버지를 감동시킨 것입니다.
        그 뒤 젊은이는 그 가개에 계속 드나들면서

        그 점원과 가깝게 되었고

        결국 점원 됨됨이에 감동을 받기에 충분한 

         주디는 밥 존슨 경의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구광광 제공-

         

        "하눈의 아버지 나하스가 전에 내게 호의를 베풀었으니

             이제 내가 그의 아들 하눈에게 호의를 베풀리라"(역대상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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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생한 신자가 귀신들릴 수 있는가?

        동양종교와 미국내의 사교의 보급으로 전에 외국에서 선교사 들이 보고한 것과
        유사한 귀신들린 역사가 증가하게 되었다. 이런 일은 너무나 자주 발생하는 반면
        이러한 영역에 있어서의 가르침은 너무나 미미한 실정이었다. 그러나 신약성경
        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라는 명령 이상의 것을 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영혼의 원
        수에 대하여 확고하게 경고하고 있으며, 귀신은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손길”, 성령의 권능, 그리고 예수의 이름
        을 통하여 구원이 가능함을 강조하고 있다.

        극단주의의 위험

        어느 무시된 교리를 강조할 때 성경의 의도를 넘어서 극단주의로 나갈 위험이
        있다. 또한 무시된 교리를 전체의 사역으로 삼음으로써 목회의 궤도를 벗어날 가능성도 있다. 이것은 귀신론의 주제에 매혹된 어떤 사람들의 경우와 같다. 그들
        은 자기들의 모든 관심을 귀신론에 집중함으로써 함정에 빠지고 만다. 그들이 귀
        신을 많이 쫓아내면 낼수록 쫓아내야 할 귀신의 수도 많아지기 때문에 귀신 쫓는
        이외의 사역은 실제적으로 무시된다.

        그리스도를 높이기보다는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빠지게 되는 이러한 경향은 성
        경의 균형에 모순된다. 또한 귀신을 좇아낼 때 여러 가지 토해내는 등 외적인 현
        상에 대한 부수적인 선입관은 성경에서 근거를 발견할 수 없다.(귀신이 영적인
        존재임을 잊었다.) 거품을 일으켰던 경우에 있어서도 성경은 귀신이 쫓겨가기 전
        에도 지속적으로 있었던 일이었으며 귀신이 쫓겨날 때만 있었던 현상이 아님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귀신론에 대하여 비성경적으로 지나치게 강조한 경우 유감스러운 부작용이 있는데 그것은 때때로 성경적인 가르침까지도 악평을 듣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16세기와 17세기의 영국 그리고 17세기 미국의 소위 마법의 결과였다. 영국에서
        사례들이 보고된 것이 있는데 그 중에는 아이들이 그들의 몸속에 들어갔다고 추정되는 악령을 토해냈다는 것이다.

        1962년 커튼 마더(Cotton Mather)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하바드를 우수한 성
        적으로 졸업한 유능한 설교가였다. 이 사람이 마녀들에 대하여 메사추세츠주의
        살렘에 사는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귀신들린 것으로 추정되는 아이들의 증언 때
        문에(이 아이들은 다른 설명이 더욱 필요하겠지만 거짓말하는 귀신에 의하여 움직였던 것 같다.) 19명이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150명이 감옥에 들어갔다.

        고발당한 사람들 앞에서 이 아이들은 발작을 일으키다가 혼수상태처럼 보이는 상태
        에 들어갔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당한 고통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
        의 이름을 대었다. 고발당한 사람 중 상당수는 기독교 순교자에 해당하는 믿음과
        정신을 보였지만 인격적으로 고상한 판사는 이 사람들을 유죄로 판결하였다. 이
        재판이 공개된 결과로 이때 당시의 미국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하여 외면
        하게 되었으며 사탄과 악령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이 미신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
        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탄이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귀신이나 악령들에 대하여 잘못된 관
        심을 갖게 하여 성경이 제시하는 명확한 가르침의 도에서 떠나도록 하는데, 우리
        는 이것을 방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귀신이나 악
        령에 대하여 잘못된 태도를 갖게 될 때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것을 외면하게 되고
        하나님의 일은 방해를 받게 된다. 그러나 조심한다고 해서 귀신론을 가볍게 취급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귀신의 활동과 그들의 수가 많은 것을 명확히
        가르쳐 주고 있다. 영어 성경에서 마귀(devils)라는 단어는 실상 귀신(demons)
        을 지칭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더욱 자명한 일이다.

        실지로 마귀라는 단어는 (헬라어, Diabolos는 “참소자”이다) 사탄에게만 적용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귀가 귀신들을 통해서 역사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은 아니다. 사탄은 피조물이며 제한 받는 영이며, 편재하지도 않는다. 사탄은 세계의 곳곳에 흩어져 있는 귀신들을 통해서 대부분 그의 일을 수행한다. 귀신들을 쫓아내던 예수의 사역은 적어도 마귀에게 눌린 자들을 치유하는 사역의 일부였다. (행10:38)-여기서 사용된 “눌린”의 뜻은 오늘날 사용되는 의미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제기되는 질문은 오늘날도 귀신이 활동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한 신자도 귀신에게 사로잡힐 수 있는가 혹은 누군가가 중생한 신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성령과 귀신이 한 집에 같이 거할 수 있는가?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 아닌가?

        저자들이 말한 것

        대부분의 옛날 저자들은 참된 기독교인들 안에 귀신이 거할 수 없으며 귀신이
        참된 신자들을 사로잡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한 예로서 존 네비어스(John L.
        Nevius)라는 장로교 선교사는 거의 40년간 중국에서 살았는데 귀신들린 사례를
        많이 보았지만 기독교인들 중에서는 볼수 없었다고 한다. 빅톨 플리마이어
        (Victor Plymire)라는 오순절 계통의 개척 선교사는 티베트에서 유사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더욱이 최근 여러 교단의 저자들은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넬슨(M.
        H. Nelson)이라는 의사는 귀신에게 사로잡혀서 고통 당하는 듯이 보이는 기독교
        인들에 관한 많은 보고서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들 중 몇몇은 하나님
        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불순종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외견상 이 의사는
        영원한 보장을 믿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을 기독교인이
        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귀신이 신자의 몸과 마음에 영향
        을 줄 수는 있어도 신자의 몸이 귀신에 의하여 사로잡히는 것은 매우 의심스럽다
        고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귀신이 기독교인의 속 사람을 사로잡지 않은 채 기독교인의 몸속에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몸이 성령의 전이라고 하는 성경의 관점에 배치되는 것 같다. 또한 책임이 관계되는 한에 있어서 한 사람을 여러 모양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이방인의 사고방식이다. 만일에 귀신이 몸이나 마음(혹은 자세)중 어느 영역에 들어갔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들어간 것이 된다.

        성경이 말하는 것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문제들로부터 구원하고 계시며, 귀신들리는 것
        으로 부터도 구원 하신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일어난 사건에 대한 그들의 해석과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일치하는지 우리는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어
        떤 사람들은 성경이 비겁하게 두려워하는 영(spirit of cowardly fear)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두려움으로부터 구원받으려면 두렵게 하는 귀신과 근신
        혹은 절제의 영(한글판에는 spirit이 마음으로 번역되었음:역자주)으로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만일 사람들이 두려움을 쫓아낼 필요가 있는 악한 영이라고 해
        석한다면 동일한 논리로 선한 영들이 들어오기를 간청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논
        리의 잘못은 명확한 것이다. 사랑이나 절제는 우리의 생활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들이다. 사랑이나 절제의 영은(a spirit of love and of self-control) 우리
        가 성령을 따를 때 결과로서 나타나는 자세를 의미한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있어서 영(spirit)이라는 단어는 자세 혹은 기질을 나타낸다
        다윗은 상한 영(broken spirit:상한 심령, 시51:17)이라고 말했으며 솔로몬은
        겸손한 영(humble spirit: 마음을 낮추는 것, 잠16:19)이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고린도에 갈 때에 매대신 사랑과 온유한 영(love and meek or gentle spirit:사
        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가기를 원한다고 하였다.(고전4:21) 베드로는 온유하고
        조용한 영의(meek and quiet spirit: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
        로 단장하라고 말하였는데 (벧전3:4) 실제로는 조용한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이라는 단어는 자기 자신의 심령이나 그것의 표현으로 자주 사용한 것
        을 알 수 있다.(학개1:14), 행17:16, 고전2:11 등. 그러나 학1:14, 행17:16에
        서 spirit 을 한글 성경에서는 마음으로 번역했다 : 역자주)

        이와같이 문맥상 독립된 영적 존재라는 뜻이 나타나 있지 않다면 거만한 영, 성
        급한 영, 졸리운 영, 시기의 영 등과 같은 말은 귀신이 아니라 육신의 정욕(갈6장)
        이나 죄의 기질로 취급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본다. 이러한 죄의 기질을 귀
        신이라고 생각한다면 심각한 위험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것은 개 개인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지 않게 되며, 회개할 필요성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은 이러한 죄들에 대하여 회개를 촉구하고 있으며 이러한 자세를 버
        리라고 한다. 우리 안에서 싸우는 싸움은 성령과 귀신 사이에 싸움이 아니라 내
        주하는 성령과 육신과의 싸움인 것이다.(육신은 죄의 경향을 띤 모든 감각기관을
        의미한다.)

        “영”이라는 단어가 귀신에 대하여 사용될 때는 성경은 악령 혹은 더러운 영이
        라고 말한다. 때로는 이 단어는 같이 사용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더러운 마귀
        의 영(a spirit of an unclean devil, 한글 성경에는 더러운 귀신으로 번역되었음:
        역자주. 눅4:33)같은 것이 있다. 많은 경우 이 귀신들은 질병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모든 질병을 귀신이나 악령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실재
        로 많은 구절들이 귀신에 의한 질병과 그렇지 않은 질병 사이에 분명한 구분을
        보여준다.(마4:24, 8:16, 9:32,33, 10:1, 막1:32, 3:15, 눅6:17,18, 9:1 등) 이
        들 중 어느 구절에도 귀신에 의한 질병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있었다는 단서를 보여주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모든 예가 오순절 이전에
        사건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다이모니조마이”라는 헬라어에
        는 귀신에게 사로잡히다, 혹은 귀신들리다라는
        뜻인데 많이 나타나지 않는 단어이다. 이것은 오직 한번 동사로 사용되었는데 심
        하게 귀신들린 가나안 여인의 딸의 경우이다. 그 외에는 “귀신들린”이라고 번역
        되는 분사로써 사용되고 있다. (마8:28,32, 9;32, 12:22, 막5:15-18, 눅8:35)
        다시 말하거니와 이 귀신들린 사람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
        고 할 수 있는 단서는 없다. 이들 중 대부분은 심한 괴로움을 겪거나 급격한 인격
        의 변화를 경험하였다.

        신자도 귀신들릴 수 있다는 사상은 또 다른 큰 문제를 야기시키는데 그것은 믿
        음을 잠식하며, 하나님과 하나님이 제공하는 구원에 대한 개념을 약화시킨다. 하
        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 (골1:13) 지난 시대에는 우리가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
        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다
        (엡2:2)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였으며 우리를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으로 삼으셨다(엡2:19) 우리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 되었는데 우리의 몸 안에 귀신이 거한다는 것은 모순처럼 들린다. 우리가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롬6:17)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도록 자유인이 되었다. 지금도 신자는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다. 만일 신자가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그렇게 하고자 하는 자기의 의지 때문이지 귀신에 의해서 침입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로마서는 귀신을 좇아낼 것을 요구하지 않고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데 사람이 믿음으로 자기의 신분이 결정된다.

        만일 신자에게 귀신이 있다면 예수님도 인정하기를 거부했던 분쟁사태를 초래
        할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
        낸다고 말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사탄의 왕국이 서로 대적하며 분쟁하고 있다고
        가정하였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거부하였다. 눅11:21,22은 사탄이 신자를 사로 잡으려고 할 때에 예수께서 사탄을 이기시고 무장해제 시킨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귀신이 돌아와서 그 집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만 귀신이 다시 들어갈 수 있다.(눅11:24-26, 마12:43-45) 진실한 신자에게 귀신이 있다는 사상은 또한 구원과 평강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을 잠식한다. 이것은 신자가 다음 어떤 귀신이 자신을 침입할지 전전긍긍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엄청난 두려움을 자아내게 한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가 소유했다고 확신시켜주는 자유와 배치되는 것이다. 초대교회 신자들이나 2세기 교회의 신자들은 이런 종류의 두려움을 갖지 아니했다. 주후 139년경에 목자(The Shepherd)라는 매우 영향력 있는 기독교 책을 쓴 헤마스(Hermas)는 부패를 책망하며 기독교의 덕목을 격려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사람 안에서 악령이 거하면서 주관할 수 있다고 말하였지만 이러한 악령을 지니고 있는 사람 안에 성령이 거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였다. 성경은 신자를 위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4:4). 신자는 귀신으로부터 구원받은 사람이다. 이것은 기본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외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지적한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사탄이 그 안에 가득하여 성령께 거짓말하기 전에 이미 타락하였던지, 아니면 스스로 교회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다.(행5:13,14참조) 적어도 그 당시에 자칭 그리스도인 이상은 아니었다.

        악령을 대적할 것

        귀신들린다는 말을 진실할 신자에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자명하게 보인
        다. 성경이 보여주는 것은 사탄과 그의 무리들은 외부적인 원수라는 것이다. 우
        리는 사탄의 세력에 대하여 전쟁 중에 있으며 그들은 우리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
        고 있다.(엡6:12 참조) 성경적인 강조점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에서 무엇을 대면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그 요구는 우리가 누군가를 시켜서 우리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들은 밖에서 우리를 공격하고 있으며 시험하고 있지만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요구는 깨어 있어 전신갑주를 입고 굳게 서라는 것이다. (고후10:3-6, 엡6:10-18, 벧전5:8,9)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사탄을 물리쳤다.(마 4장) 우리 역시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서 사탄과 그의 귀신들을 믿음으로 대적해야 한다.(약4:7,벧전 5:8,9) 그리고 믿음의 방패는 원수의 불화살을 꺼버릴 것이다.(엡6:16,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대대로 천사를 통해서 오듯이 사탄의 공격도 대대로 귀신이나 귀신들린 사람을 통해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사탄의 공격이 외부적이라는 사실은 욥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의 육체에 있는 가시의 경우인데 바울은 이것을 자기를 치기 위하여 사탄이 보낸 사자라고 불렀다.(고후12:7 참조) 바울은 이것을 떠나게 하기 위하여 세 번이나 간구하였으나 하나님은 거절하시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고 하셨다. 그 결과 바울은 그의 연약함과 수치와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 여기서 사탄의 사자가 귀신인지, 질병인지, 혹은 사람인지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여기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치고 공격하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내쫓아 달라고(cast out) 간구하지 않고, 떠나게 해달라고(to be kept away) 간구하였다. 또한 우리는 바울이 그 자신과 우리 안에서 유일한 소망으로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보고 있음을 유의하여야 한다.(골1:2,29) 우리는 또한 영들 분별의 은사가 성령의 내주함이 없는 사람들을 주관하는 영을 분별하기 위한 것이지 신자들 안에 있다고 여겨지는 귀신을 분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만일 진리가 우리 안에 있다면 우리는 아들과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이다.(요일2:24) 오직 우리가 포도나무에서 잘려져 죽은 가지로 버려졌을 때만이 사탄이나 혹은 그의 귀신들이 우리를 주장할 수 있다.

        우리의 구속은 전인적인 구속이다. 모든 대가는 이미 지불되었다.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그리스도가 귀신들렸다고 공격하였다. 그것은 마귀의 교묘한 수작으로서 오늘날 성실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들이 귀신들렸다고 공격하게 만드는 것이다. 확실히 여러 가지 구원들이 있다. 그러나 귀신들림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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