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 있는 웃음으로 한여름을 시원하게~~~

어느 집사가 죽어 천국에 들어갔다.

그런데 천국 입구에
많은 시계가 걸려 있고
그 시계 밑에는 시계주인들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여긴 왠 시계가
이렇게 많이 걸려 있죠?"

베드로가 하는 말

"여기에 걸려있는 시계는
자기들이 세상에서 살 때
나쁜 일을 한 만큼 시계 바늘이
빠르게 돌고 있느니라."

그 말을 들은 집사는...

자기 이름이 붙은 시계를 입구에서
아무리 찾아도 자기 시계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답답해서
베드로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전 나쁜 일을 하나도 안해서
내 시계가 여기 입구에 없나 보죠?"

그러자 베드로가 하는 말이 너무 가관이었다.
.
.
.
.
.
.
.
.
.
.
.
"당신의 시계는...........!!!
너무 빨리 돌고 있어서.......!!!

더위 많은 모세 할아버지가 ........!!!
지금 선풍기로 쓰고 있소ᆞ

주제 때를 아는 감각


마16:2-3‘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
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
별할 수 없느냐’
- 아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생의 영원한 소망이자 동시에 삶의 감각
을 새롭게 하시는 역사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새로운 존재(성도)
로서 합리적으로 사는 일반인과 다르게  우리 성도들은 <때를 아는
감각>으로 살아야 할 것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성경진리가 삶의 원칙

성도가 되면 성령으로 중생했기 때문에 성경이 삶의 철학이 됩니다.
요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
운데로 인도하시리니...
’라고 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성경이 삶의 원칙이 된 사람은  하나님이 도우실
것이며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교회가 합리적, 과학적, 통계적, 상황적으로  변질된 처세(處世)를
하다가 유럽과 서구교회가 몰락을 했습니다. 한국교회도 목사를 직
업으로 생각하다가 그런 생활문화로 만연해 있으므로 위험 중에 있
습니다.


2. 성령의 감각을 좇아 사는 것

성경은 삶의 목적적 설정이고 구체적인 삶의 요소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갈5:16).

가령 이사를  가야하나 가면 어디로 가나, 결혼을 앞둔 사람들로서
상대를 어떻게 만나기를  소원하고 그 소원이 내게 정당한가? 등의
결정을 볼 때 성령의 인도가 필요합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도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
라..’ 는 말씀만으로  아무 때나 아무 곳에나 나서는 것이 아니라
는 점을 봅니다.
행16:6-7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성경은 상식 가운데서 움직이게 하시지만 때로는  상식을 초월하게
하실 때도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마16:3 ‘.. 너희가 날씨는 분별
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고 하십니다.세상
을 사는 동안 우리의 행보는 주님이 이끄시는  영적 감각을 살려서
분별력 있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순간순간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요2:4 ‘...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나 우리는 잘 모릅니다.
잠27:1‘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
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개역)(잠16:9)


3. 성령님의 인도는 어떻게 나타나나?

성경에 나타난 몇 가지 요소를 기초하여 감각을 살려야 하겠습니다.

1)성경내용과 그 사상성이 있는가?(요16:13,지식)

2)욕심(정욕,사욕,개인영광 의식)이 아닌 평안인가?(감정)

빌4:7 ‘..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
각을 지키시리라’
(9), 살후3:16 ‘.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
을 주시고 ..’
요14:27‘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
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
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롬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
락이라’

3)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일들을 보고 확인

롬8:28‘..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
루느니라’

4)영적 음성이나 꿈과 환상도 있지만 조심스럽습니다

직통계시, 환상 꿈에 빠지면  성경이 주는 지성이 부족해져서 신비
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습니다.무조건 이런 방편으로 응답을 받거나
삶의 계시로 삼으려는 습관은 이미 상당히 위험한 단계입니다.이런
일들은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며 성도로서는 크게 회개하고 영적 눈을
뜨고 이제부터라도 성경진리와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해 간절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성도의 삶의 존재적 감각을  살려서 모든 일에 적절히 대처하
게 하시는 지각을 사용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은혜의 단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뒤 늦은 후회  (1) 2014.07.19
예수의 말을 들으라  (0) 2014.07.18
귀향  (0) 2014.07.15
맛잃은 소금  (0) 2014.07.09
천개의 심장  (0) 2014.06.03

 

존 파이퍼와 같은 목사가 이 대한민국의 땅에서도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참된 복음을 전하게 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출처: 양무리 마을/아굴

방언에 대한 관심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다. 요즘도 교계에는 방언과 관련하여 논쟁이 뜨겁다고 한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방언논쟁은 주기적으로 제기되는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만큼 방언은 끊임없는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민감한 사안이다. 이럴 때 신약성경은 방언에 대하여 어떤 견해를 제시하는지 정리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방언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천사의 방언과 사람의 방언이다(고전 13:1). 천사의 방언(글로사)은 사도 바울 자신이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고후 12:4)이라고 정의했기 때문에 우리의 몫으로 더 이상 논의할 것이 없는 듯이 보인다. 사람의 말은 순수한 외국어와 종교적인 성격을 띤 언어로 구분할 수 있다. 잔소리를 늘어놓을 것 없이 외국어란 문법으로 정리하는 것이 가능한 언어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헬라 말과 히브리 말(디아렉토스)을 했다( 21:40). 그는 당연히 로마 말을 할 줄 알았을 것이며, 이 외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수많은 나라들을 여행했기 때문에 다양한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의 말 가운데 종교적인 성격을 띤 언어(글로사)는 타의적 방언과 자의적 방언으로 나누어진다. 타의적 방언은 오순절 날 초대교회에 발생했던 것처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언어이다( 2:4). 그런데 타의적 방언은 말함으로서의 방언일 가능성도 있고, 들음으로서의 방언일 가능성도 있다. 이 두 가지 가능성은 제자들이 여러 지방 사람들의 방언(디아렉토스)으로말했다( 2:6)는 표현과 여러 지방 사람들이 자신들의 방언(디아렉토스)으로 들었다( 2:8)는 표현 때문에 모두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아무튼지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말하는 사람들과 듣는 사람들 사이에 상호이해가 성립되었다는 점에서 이것은 문법이 있는 방언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방언을 통역한다는 것은 문법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전 12:10; 14:13,26-28).

 

자의적 방언은 사람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조어(造語)이다. 기도자가 때때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기도내용을 듣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자기만 사용하는 기도 말을 만들 수 있다. 또 어떤 경우에 기도자는 기도할 내용이 산더미처럼 많은 데 마음은 바쁘고 시간이 부족할 때 앞뒤 말들이나 가운데 말들을 생략하고 압축해서 자신만의 특유한 어법으로 기도할 수 있다. 이런 자의적 방언에는 문법이 없다. 엄격히 말하자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방언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낸 조어이다. 따라서 자의적 방언을 가리켜 구태여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강변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억지이다. 그것은 기도를 돕는 데 어느 정도 유익하다는 점에서 이미 충분한 가치를 가진다. 따라서 자의적 방언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굳이 제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방언에 관해서 논의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방식보다도 내용과 목적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방언이라면 그 내용은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는 것이어야 하며( 2:11), 그 목적은 자기를 세울 뿐 아니라(고전 14:4) 교회를 건설적으로 만들며(고전 14:5) 심지어 불신자에게도 유익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전 14:22). 이런 내용과 목적에 맞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방언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지금도 은사를 주시지만 동시에 살아계신 하나님은 지혜로시기 때문에 함부로 은사를 주시지 않는다. 모든 은사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두 속성은 사람이 감지하거나 인식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오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헬라어로 글로사는 혀를 가리키며디아렉토스는 말을 가리킨다


   조병수 교수

   총신대 (B.A.)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M.Div.) 
   독일 뮌스터 대학교 
   신학부 신학박사(Dr. theol.) 
   독일 Aachen 한인교회 목회
   독일 Wuppertal 한인교회 목회 
   염광교회 담임목사 (1995-2001)
   現 합동신학대학원 교수

 


a1.jpg

a2.jpg

a3.jpg

a4.jpg

a5.jpg

a6.jpg

a7.jpg

a8.jpg

a9.jpg

a10.jpg

a11.jpg

a12.jpg

a13.jpg

a14.jpg

a15.jpg

a16.jpg

a17.jpg


칼빈의 핵심 교리 해설 (2) -정준모 목사
하나님에 관한 지식
 
 
칼빈의 신학의 초기 집합체인『제 1차 신앙교육서』 2절에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지녀야 할 참된 경건”을 다룬 칼빈은 같은 책 3절에서 “그런 경건의 삶을 위하여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논한다.
 
먼저 칼빈은『기독교강요』1권의 주제인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를 대단히 눈부신 극장으로 본 칼빈은 이 세상을 주께서 그의 영광의 놀랄만한 광경을 보여 주시는 극장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타락과 범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무지한 인간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속성을 이해할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고 보았다.

따라서 칼빈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우상이나 귀신을 스스로 만들고 있음을 보고 안타까워하였다. 이런 이유로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으로부터 그 분의 영원함, 능력, 지혜, 선하심, 공의, 그리고 긍휼과 같은 것들을 충분히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입장인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20)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칼빈의 인간 이해는 그들의 무지와 아집으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나타난 일반 계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 근거한다. 『기독교강요』에서 그는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가 선포하는 영광들과 죄로 인하여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인간의 상태를 상세하게 다루는 데 다섯 장을 할애한다. 그 다음에, 그는 성경을 창조주 하나님께로 나오려는 자에게 선생과 안내자로서 필수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칼빈의 명저인『신앙교육서』와 『기독교강요』에 기록된 성경의 목적은 창조 사역 가운데 거하시는 참되신 하나님을 명확히 보도록 돕는 것이고 그러한 창조 사역에 어울리는 감사가 우리 가운데 울려 퍼지도록 하는 것이다. 『신앙교육서』에서 칼빈은 창조 사역을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위대함은 단지 그분에 대한 참된 지식에 이르게 되는 첫 번째 단계일 뿐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우리는 겸손하게 우리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선과 긍휼을 깊이 생각할 때에 우리는 그것들이 가진 진정한 목적, 가치, 그리고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를 인식하게 된다.

『신앙교육서』 3절의 마지막 문장은 『기독교강요』의 첫 장을 여는 중요한 문장이며, 모든 신학 문헌들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장 가운데 하나이다. 칼빈은 계속해서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 왜 그리고 어떻게 얻어지는가를 묻는다. 칼빈은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신앙, 그리고 사랑을 모두 포함하는 진정한 경건에 기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앙을 지식으로 표현한 칼빈은 마음과 심정으로 이해하는 지식을 생각하였다. 이처럼 칼빈은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은 비록 말씀으로 알게 되지만 실제적인 지식에 의존한다고 강조한다.

지금까지 경건에 관한 관찰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을 경건이라는 용어에 맞추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사실인지의 여부를 판별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에 관해 아는가에 있지 않고, 우리가 그 분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있다.

따라서 경건하고 거룩한 삶은 하나님에 관한 거짓되고 죽은 지식에서 참된 신앙을 구별하는 것이다. 덧붙여서 그리스도 없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은 즉시 우리의 모든 사고들을 삼켜 버릴 거대한 심연과 같다고 꼬집은 칼빈은,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되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한, 혹은 그리스도 중심의 하나님의 지식을 강조하였다.

|가져온 곳/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예수가좋다오

가져온 곳 : 
카페 >╋예수가좋다오
|
글쓴이 : (一麥.)|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천사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3장 천사들의 타락  (0) 2017.07.1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