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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둥지

대장쟁이

구원은 하나님께 속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하십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것이며 그러므로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다른 무엇도 개입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래는 하나님께서 이루지 못 하실까봐 자신의 몸종 애굽여인 하갈을 남편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리하여 하갈이 잉태하였습니다. 자신이 잉태함을 깨닫자 하갈은 여주인인 사래를 멸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래가 여종 하갈을 남편에게 주어 아들을 낳았다 하여 하나님께서 그걸 사용하실 턱도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끼어들어 만드는 것은 다툼과 고통뿐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지 못 하는 불신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귀가 그 불신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기 때문입니다. 뻐꾸기라는 새가 생각났습니다. 뻐꾸기는 우는 소리가 ‘뻐꾹, 뻐꾹“ 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시계의 시각을 알리는 소리로 많이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 뻐꾸기란 놈의 하는 짓이 몹쓸 짓입니다. 맷새, 종달새, 떼까치, 할미새 같은 자기보다 좀 작은 새들의 둥지를 찾아다니며 알을 낳습니다. 보통 열 두어 개의 알을 이곳저곳에다 한 개씩 낳으니 열 두어 새들의 둥지와 그들의 인생(조생?)을 망치는 셈입니다. 그것도 모르는 다른 새는 뻐꾸기의 알을 자기의 알과 함께 열심히 품습니다. 그런데 뻐꾸기의 알이 제일 먼저 깨어납니다. 알을 깨고 나온 새끼 뻐꾸기는 다른 알들을 모조리 둥지 밖으로 밀쳐내 버립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미새는 자신의 새끼들을 다 죽인 원수인 뻐꾸기 새끼를 자신의 새끼로 알고 열심히 먹이를 물어다 먹이며 기릅니다. 나중엔 자기보다 훨씬 몸집이 커진 새끼 뻐꾸기를 먹이느라 등골이 다 빠집니다. 너무나 불쌍합니다.

사래와 아브람의 불신이 낳은 애굽여종 하갈의 아들....., 뒤늦게라도 사래가 후회를 하고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하갈과 하갈의 아들이 아브람과 사래의 약속의 아들을 밀쳐내 버리고 둥지를 차지하는 뻐꾸기가 되는 꼴이 되지 않았을까요? 아브람과 사래가 뻐꾸기를 자신들의 둥지에 끌어들인 꼴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 하는 불신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결국 아브람과 사래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고 사래가 잉태한 하갈을 내어 쫓습니다. 뒤늦게라도 하갈을 내쫓으니 잘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자신이 뿌린 씨는 자신이 거두어야 합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자신들의 불신의 열매, 하나님의 일에다 뻐꾸기를 불러들인 씨앗의 열매를 후손들에게, 그리고 온 세상에 남겨주게 됩니다. 그 뻐꾸기 둥지의 비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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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여종 하갈이 뻐꾸기(?)를 임신한 몸으로 쫓겨나 광야의 샘 곁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납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여주인에게 돌아가 복종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하갈의 자손이 크게 번성하여 그 수를 셀 수 없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하갈의 고통을) 들으셨다’는 뜻입니다. 그 이스마엘이 들나귀 같이 모든 사람을 치고 모든 사람은 그를 치고 그는 동방에서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갈은 “내가 어떻게 여기에서 나를 보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하면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로 부릅니다. 그리고 사래에게 돌아가 아브람의 아들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이 태어나지 않게 하시거나 태어났더라도 죽거나 후손이 번성하지 않도록 하셨으면 좋았을 것을...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갈과 이스마엘에게도 번성하는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그 후손들이 오늘날까지도 이슬람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거대한 세력이 되었는데 말입니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 부르신 자, 믿는 자들을 번성케 하시고 이기게 하시면 좋을 것을... 싶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서 사도바울은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약속을 따라 난 아들과 계집종에게서 육체를 따라 난 아들로 비교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갈에게도 나타나셨고 이스마엘도 번성케 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나 원수의 자식들에게나 똑같이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리고 계십니다. 전혀 차별을 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택하시고 부르신 자들이나 그렇지 않은 자들이나 차별 없이 다 사랑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들보다 하나도 더 나을 것 없는 죄인이었던 내가 구원을 얻은 것으로 인하여 조금이라도 교만해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원수이었을 때에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사 아들을 내어주신 것을 잊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원수 되었던 우리에게 주님께서 오셨던 것처럼, 우리도 원수같은 저들에게 복음 들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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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나의 삶의 모습에 예수님의 흔적이 있는지 ...

늘 닮고싶고 늘 그렇게 살고자 합니다...

 

 

 

 

 


 

 

 

 

 

 

 
출처: 사모님사모님/켈리 - 힘찬글 사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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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 (Of Christian Liberty and Liberty of Conscience)

 

1. 그리스도인의 자유 (신조 1)

먼저, 20장에서의 자유의 의미와 신앙고백서 제9장에서 이미 다룬 자유의 의미는 다른 것임을 밝혀 둔다.  9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 의지 즉 인간이 선이나 악을 행하도록 외부로부터 강요 당하거나 또는 어떤 절대적인 필연에 의하여 결정되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본래의 자유의지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러나, 본 장에서 다루고 있는 자유는 성도들을 위하여 자신의 죽음으로 값주고 사주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시는 성령께서 부여해 주시는 진리 안에서 성도들이 죄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함, 즉 요8:32에서 말씀하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가 의미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부여해 주시는 자유함인 것이다. 자유함을 제19장의 율법 바로 다음인 20장에서 다루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전에는 율법에 순종할 능력과 의지가 없었으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는 성도인 우리는 그 율법에 얽매임 없이 자유함 가운데에서 자발적으로 지켜야 할 의무와 능력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누릴 수 있는 본래의 자유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후 죄의 노예상태에 있게 됨으로 인하여 인간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그리고 율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대신 담당해 주신 죄 값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자유함을 누리게 되었다. (1) 성도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에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에 매어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생명을 얻기 위해 지켜야 할 율법을 대신 지켜 주신 그 순종과 댓가 때문에 성도는 은혜로 인하여 생명의 구원을 받은 것이므로 생명을 얻는 수단으로써의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야 할 의무로부터 자유한 것이다.  (2) 성도는 죄의 지배로부터 자유하다. 성도는 더 이상 사탄이 지배하는 죄의 종이 아니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지배하는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이다. (3) 성도는 죄의 마지막 요구인 사망으로부터 자유하다. 비록 성도도 죽지만, 죽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자는 것이며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죽은 성도들은 부활하여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의 율법의 구속으로부터 자유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원하는 마음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이제 성도는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앞으로 더욱 담대하게 나아가게 되었다.

 

2. 그리스도인의 양심의 기준과 자유 (신조 2, 3)

성도에게 주어진 신앙 양심의 기준은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될 수가 없으며 그의 말씀만이 양심의 규칙이 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누구도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으며, 교회와 양심을 주관하는 주관자가 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거나 과장된 사람의 교훈들과 계명들에 의해서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이 속박 당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과거 중세시대의 로마 카돌릭 교회의 부패 요소 중 하나로서, 성도들이 성경 말씀을 따라 성령의 자유를 누리고 하나님께 자원하여 순종하는 믿음의 생활을 하는 대신에 교황과 사제들의 말을 맹종함으로 신앙의 양심이 침해 당 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요즘에도 개신교의 어떤 교파들의 교회가 어떤 특정 음식을 먹지 못하게 금하는 등 성경에 어긋나고 더하여진 사람들의 주장과 규칙들로 성도들의 신앙 양심의 자유를 속박하고 무시하는 경우를 볼 수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 값으로 사신 자유를 성도들에게 주셨기에 성도들은 이 신앙 양심의 자유를 감사함으로 바르게 누려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구실로 그 자유를 남용하여 무책임하게 죄를 범하거나 정욕에 끌려 남용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의 목적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에게 자유를 주신 목적은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고 성령을 좇아 행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고 육체의 정욕을 죽이게 하기 위함이며 (5:22-24) 그리고 열심을 다해 주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12:11).

 

3.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의무 (신조 4)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하나님 외에는 누구에게도 구애를 받지 않을 자유를 주셨지만, 한편으로는 교회와 국가에 대해 지켜야 할 성도의 의무도 함께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국가에게 성도가 마땅히 순종해야 할 권세를 주셨고 또 그 권세를 가진 자들은 그 자체의 영역 안에서 그 권세를 시행할 권한을 주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은 자기의 영적 자유를 구실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합법적인 권세나 그 권세의 행사를 거부하거나 반항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바울은 권면하고 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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