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받음

존 칼빈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창22:1)

  창세기 기자는 "그 일 후에"라는 말로 하나의 어구 안에 아브라함이 겪었던 여러 사건과 그가 노년에 얻기 시작한 편안한 삶을 표현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팔십 세까지 유랑의 불안정한 삶을 살았습니다. 많은 피해에 시달리며 계속되는 어려움 속에서 비참하고 근심 가득한 삶을 어렵게 견뎌 왔습니다. 기근은 아브라함을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들어온 땅에서 이집트로 쫓아 냈습니다. 그는 아내를 두 번이나 뺏았겼습니다. 그리고 조카와도 헤어졌습니다. 조카가 포로로 잡혔을 때 아브라함은 자기 목숨을 걸고 조카를 구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이 살다가 나중에는 자식을 가질 수 있는 모든 희망마져 사라지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마침내 아들을 얻은 뒤에도 그는 그 아들을 포기하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데려가야 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특별하고 유일한 위로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집에서 아들과 함께 평안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갑자기 하늘에서 청천벽력과도 같이 이 아들에게 사망 선고를 내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의미는 마치 연극의 마지막 장처럼 이 시험을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전보다 훨씬 심하게 검증받았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곧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려는 방법, 즉 하나님의 말에 대한 이 거룩한 사람의 믿음을 하나님이 그 말 자체를 반대로 뒤집으심으로써 흔들어 보시려 한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명하는 분이 누구인지에 대해 아무 의문이 없게 하시려고 아브라함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하는 것이 하나님의 음성임을 분명히 확신하지 않았다면 그는 근심에서 벗어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랬다면 이삭이 아브라함의 씨를 이어 갈 것이라는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에 의지하여 아브라함은 그런 암시를 사탄의 궤변으로 여겨 거부했을 것이고 그래서 아무 두려움 없이 유혹을 떨쳐 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모든 의심의 원인은 제저되어 아브라함은 이의 없이 이 음성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합니다.
  

  개력주의마을/Jennifer

 

난 정말 그녀석이 싫다.
그런 녀석은 처음본다.
아침에 일어나서 큐티를 열심히 하는 것은 인정한다.
거기까진 내가 봐준다.
하지만, 왜 기도를 1시간씩이나 하느냐 이말이다.
도대체 기도를 하는 멍청한 녀석들은 이해를 못하겠다.
기도할 시간에 좀 더 전공 공부를 한다던지,
좀 더 좋은 일들을 하면

기도보다 더 눈에 보이는 결과를 경험할텐데
도대체 왜 멍청하게 무릎아프게 한시간씩 기도하는지 모르겠다.


 

거기까진 내 인정한다.
그런데 왜 기도 내용이 그모양 그꼴이냔 말이다.
도대체 자기를 위한 기도가 별로 없다.
자기와 상관없는 다른 친구들을 위해 왜 기도하냔 말이다.
더 이해못할 일은 그 녀석 맨날 괴롭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는 사실이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내가 맨날 기도할때 쓸대없는 짓이라고 생각을 집어넣어줘도
도대체, 무식한건지, 단순한건지 알아듣지를 못한다.
내 살아생전에 그렇게 무식하게 기도하는 놈 첨본다.
정말 내 살이 빠진다.


 

그런데 거기까진 괜챦다 이거다..
왜 말씀을 그렇게도 꼼꼼히 보냐 이거다.
대충대충 보고 대충대충 생각하면 될 걸 가지고,
왜. 말씀 하나가지고 그렇게 끄냔말이다.
제대로 성경을 본다느니 하면서 성경을 볼 때마다 알게 해 달라고
기도는 그리하고 관주나, 관련 서적들은 또 왜 그렇게 보는지.
성경은 그냥 삼국지나,
도덕책같이 좋은 책들중 하나로 여기면 될 것인데
왜 하나님 말씀으로 그렇게 깊게 생각하며 인식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더 환장하겠는건..
그걸 그대로 한다는 사실이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지.
그 친구가 성경을 보더니만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막 들뜨는거야..
그래서 내 부하 중 한명 보내서 좀 타일러줬지..
''아직 아냐. 좀 더 시간을 봐가면서 하라구..''
그랬더니 그 친구는 더 확신이 있는듯.
멍청하게 막 복음을 전하는거야..
물론, 내가 좀 힘을 불어넣어줘서
그 친구를 바보 만들었지.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그녀석이 거기서 실망하거나 슬퍼하거나
울지 않더라는 것이야.
처음에는 조금 쫄더군..
그러더니 좀 지나니..
그 자체를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이야..
그 이유가 뭔지 알아?
글쎄,

자기가 그런 핍박과 고난을 주님께서 이겨 나갈 수 있도록
하심에 감사하는 거야..


 

내가 제일 짜증나고 힘이 드는건..
그 친구에게 실패를 줬을때야.
실패를 주면 그 녀석은 더 잘 일어나는거야.
꼭 오뚜기같이 말야..
내 비록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만
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지만, 그때까지만이라도
이 녀석 엄청 괴롭히려고 맘 먹었거든..
그런데 그럴수록 이 녀석은 더 내 왕국에 큰 치명을 주니
다시 한번 고려해 봐야겠더라구..


 

그래서 그 친구에게 성공을 좀 줬더니.
그건 좀 먹혀들어 가는 것 같았는데..
그것도 좀 지나니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거야..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지..


 

그래서 내가 그녀석 이 세상에서 보내 버릴려고
많은 노력을 해봐도.
하나님이 그 녀석과 함께 해서.. 내 한계를 많이 느껴.


 

내 고민은 그거야.
난 사실 고민을 안하거든.
다들 내 말을 잘 듣더라구.
내가 가진 것들을 좋아하고 즐기는데.


 

그 녀석은 글쎄..
내 말을 안 듣는거야.
그래서 그녀석 얼굴만 봐도 이젠 짜증이 나.
그리고 솔직히 말해.
쪼금 무서워..


 

뭐라고?
내 힘으로 그녀석 하나도 못 이기냐구?
물론, 한주먹거리도 안되지.
그런데 그녀석이 쪼금 똑똑한 거 같아.
글쎄..


 

그녀석 절대 자기 힘으로 나와 싸우지 않더라.
항상 도망치지..
그리고는 예수 그리스도 뒤로 숨어서
싸우는거야..


 

그러니 내가 어떻게 하냐구..
나도 답답해 죽겠어.
예수 그리스도만 아니면 단숨에 끝나는 녀석인데.
글쎄.
도무지.. 얼굴을 드러내질 않는거야.
정정 당당히 겨뤄보자구 해도..
도대체가 말을 안들어.


 

이제 알겠지?
내 고민이 얼마나 큰질..
그런데 요즘 그런 녀석이 좀 더 늘어나는것 같아서.
내 졸개들에게 비상 대책 위원회를 만들어
지금 막~.. 회의하고 있어..


 

우씨..

..................................................................................

 

하루 한 시간

깨어 주님을 향해 기도할 때,  

우리는 시험에 빠지지 않고

사탄을 대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승리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따르는 아가페목장 / 돌쇠

 

 





 

교회의 세례 예식을 연상시키는 아이스버킷 챌린지가 루게릭 환자를 돕기 위한 자선행사라는 이름으로 확산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것이 사탄 숭배자들이 치루는 ‘정결예식’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한 때 사탄 숭배에 빠진 바 있는 제보자는 머리에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이 퍼포먼스는 자신이 사탄을 숭배하던 당시 악마와의 계약을 맺을 때 치루던 의식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증언하고 있다.

 

지난 16일에는 아이스 버킷 챌린지를 창시한 코리 그리핀이 27세의 나이로 미국 매사추세츠주 휴양지 난터켓 섬에서 다이빙을 하다 척추 손상으로 사망했다는 발표가 있었다.  이런 코리 그리핀의 급작스런 죽음에 대해서 음모론가들 사이에 그가 일루미나티의 “희생제물”이 되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미국의 재능이 뛰어난 젊은이들 가운데 27세라는 나이에 ‘의문사’를 당하는 사건이 이어지면서, ‘27세 클럽’이라는 새로운 조어까지 만들어진 바 있는데, 이번에 아이스 버킷 챌린지를 창시한 코리 그리핀이 그 희생자가 되었다는 소문이다.

 

 

 

 

 

 





27세의 나이에 의문사 했던 재능많은 젊은이들처럼 아이스 버킷 챌린지 창시자인 코리 그리핀도 27세에 급작스런 죽음을 맞았다.

 

 

평소 일루미나티의 depopulation(인구 감축) 어젠더를 열심히 실천하던 빌 게이츠가 참여함으로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한 아이스 버킷 챌린지가, 조만간 미국 안에서 일어날 '대규모의 인신제사(테러)'를 앞두고 치루는 사탄 숭배자(일루미나티)들의 ‘정결예식’이라는 분석이다.

 

 

 




가부좌를 튼 상태에서 오른 손이 위로, 왼손이 아래로 향하고 있는 바포멧의 자세로 아이스 버킷 챌린지(사탄의 정결예식)에 동참한 레이디 가가의 모습 

 

 

 

기사원문>> The Illuminati Fire & Ice Challenges ‘Purifying America’ Before The ‘Great Human Sacrifice’





- 예레미야 -


미국이 예상과 달리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부정적인 입장을 정리했다. 그 속에 유대인 변수가 숨어 있다.

미국의 정책을 다루는 핵심 멤버 중에는 유대인이 끼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 클린턴 행정부 때, 800여 명의 백악관 직원 중 약 35%가 유대인이었다.

부시 행정부를 움직였던 싱크탱크 격인 네오콘의 연구원 중 대다수가 유대인이다. 따라서 미국의 대외 정책을 정확히 알려면, 유대인의 생각을 아는 게중요하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미국 서부의 유대인 인권단체장은 이렇게 말 했다. "유대인에게 아픔을 주었던 독일의 나치 전범들은 대부분 죄에 대한 선고를 받고 사라졌거나, 숨어서 수치스럽게 살아간다. 그러나 일본의 전범들은 국민에게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호화롭게 산다. 어떻게 이런 사회에 정의가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가?"

유대인 인권단체들은 4년 전부터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고, 세계 여론을 움직이려 노력하고 있다. 이번 일본의 안보리 진출을 막은 것도 유대인의 영향이 지대함은 물론이다.

독일 나치정권하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총 1.500만 명. 주변국 국민이 900만 명이고, 나머지 600만 명이 유대인이다. 그런데도 나치의 만행을 만천하에 알리는 일에 유독 유대인만이 특출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고난의 역사를 기억하는 교육을 시키기 때문이다. 사회 공의를 세우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세계 역사 속에서 재발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나치 게슈타포의 아히만을 15년간 추적해 아르헨티나 농촌에서 가명으로 숨어사는 것을 1960년에 체포, 이스라엘로 압송한 뒤 사형을 선고함으로써 유대인 학살의 죄를 물었다.

그뿐인가. 수많은 유대인 변호사가 독일에 집요하게 요구해 엄청난 배상을 받아냈고, 스위스에 숨겨 놓은 조상들의 계좌도 찾아내 후손에게 돌려줬다.

또 유럽에 산재해 있는 집단수용소 역사 현장을 그대로 보존하게 해 세계인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미국에도 20여 군데의 유대인 대학살 박물관을 만들어 놨다. 뿌리가 뽑힐 때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왜 똑같은 전범 국가 일본이 자신의 침략을 미화하는 데도, 독일은 처절하리만큼 사죄하는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는가?. 독일인과 일본인의 국민성도 있지만, 유대인의 집요한 투쟁이 큰 몫을 담당한다.

투쟁만 갖고 되는가?. 힘도 있어야 한다. 그들은 미국의 수퍼파워를 업고 일한다. 유대인의 대학살 박물관에 가면 안내자가 꼭 묻는다.

"어떻게 해야 자유를 얻을 수 있나요?" 정답은 "자유와 평화는 싸워 얻는 것이지 공짜가 아닙니다"다. "왜 나치와 같은 악한 사람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수많은 생명을 앗아갈 수 있었나요?" "나를 비롯한 세계인이 잠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일본의 역사 왜곡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그 답도 마찬가지다. 정의와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이 함께 일어나일본의 횡포를 막아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은 일본을 능가하는 힘을 키워야 한다. 힘이 적으면 힘있는 국가를 친구로 삼을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리고 과거를 잊는 것이 아니고, 과거의 고난의 역사를 기억하며, 끊임없이 일본의 죄상을 파헤치고 전범들을 국제사회가 심판하게 해야 한다.

또한 세계인에게 알려 여론화해야 한다. 한국은 미국에도 일본의 대학살 박물관을 만들어 세계인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원수를 갚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와 자유가 넘치는 세계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함이다.

<현용수 재미 교육학자 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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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하자 *♡
 
마지막 종말이 가까울수록
해야 할 일을
바이블에서는 베드로를 통해 다음
3가지를 명하고 있다.
 
기도하라!
사랑하라!
봉사하라!
 
기도의 사람중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큰소리 치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일이 하나님 손바닥 안에 
있는 일이라는 것을 믿고, 조용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립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참 잘 참고 기다립니다. 
물론 해야할 일은 하지만, 자신이 
최선을 다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좋
은 결과가 있으리라 너무 쉽게 자신하지 않고, 
그저 하나님이 직접 일하실 것을 기다립니다. 
이러한 기다림은 위대한 행위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실망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겐 실망이란 없습니다. 
아무리 앞 길이 캄캄해도,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지 않고, 나날이 
더 힘들어지기만 해도, 기도하면 길이 열립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결코 내버려두시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을 보면 은근함을 느낍니다. 
말을 많이 하지 않지만 많은것을 
생각나게 하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 자신도 어려운 가운데 있지만, 
그를 만나면, 괜히 힘이 납니다.
희망이 솟구칩니다.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오늘의 만나]
 
잠언19 : 22절
"사람은 그 인자함으로 남에게 
사모함을 받느니라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흐르는곡/>기도하자 우리 마음 합하여

 
달빛 사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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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목자와 거짓목자의 차이



11절 보십시요.  “나는 선한 목자라.”
이 말씀을 볼 때, 예수님은 양의 문도 되시고, 양을 돌보는 목자가 되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양들의 주인이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당신의 양 떼를 잘 돌보라는 목자의 사명을 받은 목자이십니다. 목자의 사명을 감당하신 부활의 주님은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장이십니다. 목자장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양떼를 돌보라는 목자의 사명과 직분을 위임했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냐? 그렇다면 내 양을 먹이라 네가 나를 사랑하는냐? 그렇다면 내 양을 치라”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 선한목자 예수님, 목자장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목동이요, 작은 목자입니다. 예수님의 양떼를 돌보고 지키라는 사명을 부여 받은 목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선한 목자와 거짓목자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말씀을 볼 때 여덟(8) 가지입니다.

1.  첫째, 2절입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도록 돕습니다. 그런 사람이 좋은 목자입니다.
반대로 거짓목자, 나쁜 목자는 양들을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엉뚱한 곳으로 인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인기를 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양떼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자기를 따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양들을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닌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2. 둘째, 1절 입니다. “양의 우리”는 “양들이 편히 쉬는 곳”으로서 “하나님의 목장”이면서도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선한 목자는 자기가 돌보는 양떼를 언제나 자기가 소속된 교회로 인도합니다. 자기가 감당하는 목장의 양들이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고, 교회에 대한 소속감을 가지도록 돕는 것입니다.
반대로 나쁜 목자는 교회보다는 자기 목장을 더 강조하고, 교회와는 별개로 자기가 감당하는 목장에 철옹성을 쌓는 것입니다.

저기 어느 여자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감당하고 있는 목장의 식구들을 데리고 나가버렸습니다. 나가서 따로 교회를 차렸습니다. 이런 분은 아주 나쁜 목자, 거짓목자에 속합니다. 그런 분은 교회의 양 떼를 훔치는 절도요, 강도인 것입니다. 나가고 싶으면 혼자 나가야지, 하나님의 양떼들을 데리고 나가선 안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목자가 아니라 절도며 강도인 것입니다.

3. 셋째, 11절에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했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당신의 양떼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 희생하셨습니다. 목숨을 내주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 목자의 직분과 교회 리더의 직분이란 높임 받고, 섬김 받고, 군림하는 위치가 아닙니다. 오히려 양들을 위해 섬기며, 봉사하며, 양들을 위해 희생하는 위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고, 양들을 위해 희생할 수 있고 헌신 할수 있어야 합니다. 이 희생과 버림과 헌신이 있어야만 양들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반대로 거짓목자는 절대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지 않습니다. 조금도 양들을 위해 희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양들을 잡아먹고, 이용하려 듭니다. 자신만의 유익을 챙깁니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목장과 양들을 이용합니다. 유사시엔 도망갈 궁리를 합니다. 별로 유익이 없으면 언제든지 목장을 내동이 칩니다. 위기시엔 양들이 어찌되든 말든 내 팽개치고 자기 갈 길로 갑니다. 그래서 12절에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저는 양들을 위해 희생해 보았을까요? 목숨을 내놓아 보았을까요? 네. 그렇게 했습니다.
어느 자매가 저에게 전화하기를 “목사님이 재정보증을 서 주어야만 제 아들이 감옥에 가질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순간적으로 고민했습니다. 그 자매의 변호사는 저에게 신중히 생각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집을 담보해야 하는 것이기에 잘못 하다간 뺐길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찌할 것인가? 주님을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 놓으셨고 희생했는데 난 뭔가?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는 주님의 음성이 저의 마음을 때렸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셨는데… 그래서 주님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보증을 서 주었습니다.

그러면 양들을 위해 희생을 해야하고 맨날 손해만 보는 나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17절 입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가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생각해주시는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그 증거로 양들을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은 하늘보좌 위에 높이 올리우심 받았고, 세상 만민의 주가 되셨습니다.
여러분이 양들을 위해 손해를 보고, 피해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 희생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이 아닐지라도 반드시 여러분의 후손들에게라도 주실 것입니다. 저는 그 걸 체험했습니다.

4. 넷째, 선한 목자와 거짓 목자의 차이는 10절입니다.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니.”
선한목자는 양들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자유롭고, 은혜스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아 잘 살도록 돕는 것입니다. 거짓 목자는 그 반대입니다. 양들을 구속하고, 구박하고, 이용하고, 억압합니다. 은혜스런 삶을 살지 못하도록 괴롭힙니다.

5. 다섯째, 12절을 보십시요.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선한 목자는 자기 목장에 속한 양만 돌봅니다. 자기 교회에 속한 양만 돌봅니다. 다른 교회에 속한 양은 절대로 손대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짓목자는 다른 교회에 속한 양을 데려다가 칩니다. 다니고 있는 교회가 분명할 때는 절대로 데려와선 안됩니다. 소속이 있음을 알면서도 데려다가 양을 삼으면 그것은 절도요, 강도입니다.
참된 목자는 다른 교회에 잘 있는 양을 절대로 꼬시지 않습니다. 꼬셔 데려가면 그것은 절도요, 강도입니다. “우리 교회로 오라고 하여 꼬득여 데려가는 것”, 이것 때문에 오늘날 교회 목사들 사이가 많이 파손되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교회가 하나로 되는데 장애를 겪고 있습니다. 내 양을 데려갔기에 거기서 오는 불신과 미움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6. 여섯째, 3절 입니다.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14-15절을 보십시요.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중동 지방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은 양과 친하다고 합니다. 양들에게 각자의 이름을 붙여줄 정도입니다. 양들 하나 하나의 특징을 모두 파악하고 있습니다. 양들의 장점과 단점도 다 알고 있을 정도입니다. 양들이 어디가 아픈지도 알고, 아프면 치료해줍니다. 이동할 때 그들의 이름을 불러 모이게 합니다.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께선 우리의 이름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우리 각자의 이름을 당신의 손바닥에 새겨 놓고 계십니다. 우리가 울 때 함께 우시고, 우리의 모든 사정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양들과 친해야 합니다. 1:1 인격적인 관계성을 가지며 친밀해야 합니다. 양들의 아픔과 생각까지도 모두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양들이 울면 함께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양들의 형편과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양들과의 대화이며, 함께 하는 시간입니다. 대화가 없고, 멀리 떨어져 있으면 양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수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수요예배, 성경공부시간, 기도회 시간에 반드시 참여할 수 있길 바랍니다. 일주일에 딱^ 한번 주일예배만 참석하고 가면, 저는 절대로 여러분의 형편과 시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과 친할수도 없고, 여러분의 기도제목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최소한 주중에 갖는 성경공부시간에 참여한다면, 성경공부를 하면서 서로간의 대화를 나누기에 친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일예배만 참석하고, 성경공부시간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저를 나쁜 목자로 만들고, 거짓목자로 만들고, 삯군 목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성경공부 시간은 성경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여러분을 알고 여러분이 저를 알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 누누이 성경공부에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딱 한번 주일예배에 저를 보고만 간다면 저는 여러분을 절대로 모릅니다.

이렇게 볼 때, 숫자 많은 교회에 다니며, 주일날 교회에 나가 하나님의 눈도장이나 찍고, 담임목사와 일대일 관계성이 전혀 없다면, 그런 교회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원하는 교회생활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바람직한 목자와 양의 관계가 아닌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숫자 적은 우리 교회가 아주 좋은 것입니다.

7. 일곱째, 요한복음 21장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양을 먹이라, 양을 치라” 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돌보면서도, 양을 칠 줄 아는 것입니다. 양을 친다는 것은 양이 양을 낳게 하여 목장을 번성케 하는 것입니다. 목장에 양들이 많아지게 하는 것입니다. 양들이 양을 낳지 못하면 전도하여 양을 증가시키는 것입니다. 나쁜 목자는 그 반대입니다. 안일무사하고, 양을 돌보려고 하지도 않고, 양을 키우지도 않고, 양들을 전도도 안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목장이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도 않고, 내버려둡니다. 그렇다면 그런 목자는 아주 나쁜 목자인 것입니다.

8. 여덟째, 추가로 히 13: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각 구역의 목장의 목자들은 교회의 권위에 복종하고, 교회의 질서를 존중히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목자인 목사에게 순종합니다. 나쁜 목자는 그 반대입니다. 목사의 권위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고, 목사를 가르치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유익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한번은 000 도시에 있는 어느 교회의 집사를 초빙하여 간증집회를 가지려 했습니다. 오시라고 했더니 그 집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저희 교회 목사님의 승락이 있어야 합니다. 저의 교회 목사님이 허락하시기 전에는 제가 “Yes , No” 가부를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목사님께서 직접 저희 교회 목사님께 허락을 받으십시요. 저희 교회 목사님의 승낙이 있어야만 제가 움직일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 집사님이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담임목사의 승락을 받기도 전에 아마 Yes 했을 것입니다. “상관 없어요 목사님이 허락 말든 전 갈 수 있어요.” 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그 집사님의 말에 감탄했습니다. 그토록 교회의 권위와 질서를 지키는 집사님이라면, 진짜 선한 목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도 그 집사님 처럼 그러할 수 있길 바랍니다. 담임목사의 허락이 없으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 무슨 일을 결정하기 전에 담임목사의 의견을 먼저 묻고 결정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담임목사가 가라 하면 가고. 가지 말라고 하면 안가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진짜 교회생활이고, 교회 간에 반드시 지켜야 할 질서요, 목시와 성도간에 지켜야 할 예의요, 의무인 것입니다.

( 이 글은 저의 교회의 형편에 맞게 쓴 것 입니다. 졸작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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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을 만난 후 최송연 주님, 당신을 만난 후, 내 마음속에 흐르는 감격의 노래 하나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던 나는 보잘것없는 실수투성이 그러나 당신의 눈에 비친 나는 최고의 걸작품이죠, 주께서 정성 다해 빚으셨으니까요. 주님, 당신을 만난 후, 내 마음속에 흐르는 사랑의 노래 하나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던 나는 슬픈 자아상을 가진 외로운 영혼 그러나 당신이 보시는 나는 사랑받는 자녀죠, 주님의 보혈로 자녀 삼아 주셨으니까요. 주님, 당신을 만난 후, 내 마음속에 흐르는 소망의 노래 하나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던 나는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아집 덩어리 그러나 당신이 보시는 나는 들에 핀 백합화죠, 주님의 그 크신 은혜 향기 되어 내 온몸과 영혼을 적셔주고 있으니까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 17)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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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암의 역사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는 유대인을 중심으로, 신약 시대에는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빛의 역사를 이끌어 오셨습니다.
이에 반해 사탄은 구약 시대에는 이방인에게 나타나 신으로 군림했고, 신약 시대에는 프리메이슨에게 힘을 실어줘 온 세상을 악으로 물들이고 타락시키며 사망으로 인도하는 흑암의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아예 인류의 역사가 흑암의 역사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탄은 인류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인류가 흑암의 역사로 기울은 것은 정신 문명을 멀리하고,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물질 문명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작고 초라하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생명 나무를 멀리하고, 크고 화려하지만 사망으로
인도하는 선악 나무를 선택한 것과 같습니다.

사탄은 예전에 하나님 최 측근에 있던 케루빔으로 아름답고 지혜로왔으나 마음이 교만해져 하나님의 보좌를 탐내 자신 밑에 있는 천사들과 함께 배반을 일으켰습니다.
사탄과 마귀들은 심판을 받아 하늘에서 쫓겨나 지상으로 내려왔으나, 유대인을 제외한 모든 민족에게 나타나 신으로 섬김을 받았습니다.

사탄이 케루빔이었을 때의 모습은 머리가 4개(사람, 독수리, 황소, 사자)이고, 날개가 4개이며, 손이 4개 입니다.
이 모습은 이집트와 바빌론과 그리스와 인도의 고대 신앙에서 나타나는 최고의 신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고대 신화도 정의로운 신이 불의한 창조주를 하늘에서 쫓아내고 인간을 다스린다는 불손한 내용이 공통적으로 들어 있습니다.

이런 사탄 숭배 요소는 현대에도 프리메이슨과 힌두교(요가, 기수련, 뉴에이지)에 남아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사탄의 직간접적인 영향 하에 살고 있습니다. 즉 사람이 진리 말씀을 믿고 죄사함을 받아 성령으로 거듭나기 이전에는 사탄의 주관권 아래에서 내 의지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7 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로부터 도망하리라.

나도 모르게 솟아 오르는 분노와 욕심, 불안과 의심과 음란한 생각 등은 사탄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사탄은 교활해 온갖 거짓말로 우리를 속이고 있으며, 어떤 때에는 진리와 거짓을 섞어 놓아 구분할 수 없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이단종교나 철학사상에 있어서 이치에 맞는 진실을 한번 신뢰하면 그 뒤의 거짓말은 의심 없이 받아들입니다.
사탄의 계략에 속지 않기 위해서는 성경의 진리와 역사 속에 숨겨진 진실을 깨달아 이를 분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탄의 최종 목표는 이 땅에 예전의 바빌론 같은 자신을 숭배하는 사탄의 왕국을 만드는 것이며, 지금까지 프리메이슨과 금융세력을 중심으로 모든 계획이 체계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껏 이상시 했던 세계화, 자유무역, 무한경쟁, 신세계 질서, 신자유주의 등이 모두 세계 정부를 세우려는 이들의 계획 중 일부입니다.

 

시편 36/12 악인은 의인을 대적하여 음모를 꾸미며 그를 향해 이를 가는도다.

이사야 24/16~18 땅의 맨 끝 지역에서부터 나오는 노래가 우리에게 들리니 곧 의로우신 이에게 영광이라 하는도다.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나의 쇠약함이여, 나의 쇠약함이여, 내게 화가 있도다! 속이는 자들이 속였으니 참으로 속이는 자들이 심하게 속였도다, 하였느니라. 오 땅의 거주민아, 두려움과 구덩이와 올무가 네게 이르렀은즉 두려운 소리로부터 도망하는 자는 구덩이에 빠지겠고 구덩이 한가운데서 올라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 이는 위에 있는 창문들이 열리고 땅의 기초들이 흔들리기 때문이라.

마태 10/26 그러므로 그들을 두려워 말라. 가려진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겨진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누가 8/17 비밀로 간직된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겨진 것도 알려지고 공개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 음모 이론

◆ 음모의 사전적 의미:
        1. 남이 모르게 꾸미는 꾀 (A Plot)
        2. 범죄 행위를 의논함 (a Conspiracy)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대형 사건에는 겉으로 드러난 사실 이외에 특정한 목적을 위해 불법적으로 치밀하게 계획된
흔적이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음모'
(陰謀 나쁜 목적으로 몰래 흉악한 일을 꾸밈)라고 합니다.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군산복합체가 미국의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고 경고하였습니다.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정치적인 일은 우연이란 있을 수 없다. 오로지 계획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진주만 기습,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유고 내전, 걸프전, 미 이라크 전쟁, 링컨 암살, 케네디 암살, 911 테러 등에는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한 무서운 음모가 숨어 있습니다.
음모를 파헤치는 방법은 언론에서 보도하는 기사를 그대로 믿지 말고, 더 깊숙히 들어가 사건의 배경과 의문점,
모순점을 등을 찾아내며, 그 사건을 통해 누가 가장 큰 이익을 얻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음모 이론을 믿기 힘든 이유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와 언론 보도에 의해 세뇌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뇌란 거짓말이라도 반복해서 듣다 보면 그것를 진실로 믿게 되는 과정입니다.

고급 정보들은 미국이나 영국의 비밀기관에 의해 독점이 되고, 일반인은 겉 껍데기에 불과한 정보만 얻습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사건의 내막을 모른 채 조작된 언론보도를 그대로 믿게 되고 잘못된 여론이 형성됩니다.

미국의 검은 집단이 담대히 음모를 자행할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이 국민의 눈과 귀 역할을 하는 언론사와 방송사를
소유하고 통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음모이론을 표현한 영화 "컨시피러시"에서는 멜 깁슨이 미국 정부의 비밀 조직에 의해 테러범으로 세뇌되어지는
과정을 보여 주었습니다.

얼마전 미국 CIA의 해제된 비밀문서에서 73년 칠레 쿠데타가 미국 닉슨 대통령의 직접 지시에 의해서 감행되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30년이 지나서 비로서 공개된 이 문서에는 음모와 공작이 얼마나 만연되었는지 여실히 보여 주었습니다.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는 고문과 테러, 학살로 수천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바 있습니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엘살바드로의 군부 독재 정부의 만행을 로메로 대주교가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로메로 대주교는 다음날 피살되었는데, 이에 미국 정부가 관여했음을 보여주는 문서가 엘살바드로 대사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미국은 중미와 남미의 친미 정권을 지원하고, 반미 세력을 억압하기 위해 CIA를 통해 많은 비밀공작을 자행했습니다.

 

* 다음은 백과사전(http://www.encyber.com)에 나오는 음모론입니다.

음모에는 모반(謀反) ·정체변혁(政體變革) ·암살 등을 위한 정치적 음모와 범죄의 공동수행을 위한 합의를
가리키는 형법상의 음모가 있습니다.

a) 정치적 음모

두 사람 이상이 비밀리에 공모하여 폭력이나 그 밖의 비합법적 수단에 의하여 정체의 변혁, 정권의 탈취,
정부 요인의 교체나 암살 등을 획책하는 것을 말합니다.
혁명 ·쿠데타 ·폭동 ·암살 등의 공모가 음모에 포함되나, 때때로 소규모의 형태로서 정당 ·노동조합 ·회사 ·
대학 ·종교단체 등의 소집단에서도 나타납니다.

BC 1200년대 이집트의 파피루스 고문서(古文書)에도 궁정음모(宮廷陰謀)에 의한 람세스 3세의 암살기록이
있고, 구약성서에도 이에 대한 많은 기록이 보이며,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는 음모가 정치적 수단으로서
상식화되어 있었습니다.

절대주의 전제정치하에서나 독재정치하에서는 반대투쟁이 공공연히 행하여지는 관계로 음모사건이 빈번히
일어났습니다.

영국의 화약음모사건(가이 포크스 사건이라고도 하며, 의회의 회의장에 화약을 장치하여 제임스 1세와
황태자를 암살하려 한 계획. 1605년 11월 5일 밀고에 의하여 사전에 발각), 반히틀러 음모사건(1938년 위츠레벤
샤하트 계획, 1939년 초센에서의 육군의 계획, 엘사의 계획, 1944년 7월 20일 사건, 1945년 A.슈페어에 의한
지하방공호 환기장치 독가스 주입계획 등), 반스탈린 음모사건(1956년 흐루시초프의 보고에 따르면, 1937∼1938년
사이에 1934년 당대회의 대표자 1,966명 중 1,108명이 체포되었고, 당중앙위원회 위원 134명 중 98명이 체포 ·
총살되었다고 함), 베리아 음모사건(1953년 12월 정부전복음모죄로 총살), 문화대혁명에서 마오쩌둥[毛澤東]파가
실권파를 음모라고 비난한 일 등, 그 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또한 KKK(Ku Klux Klan), 프리메이슨(Freemason), 시오니즘단(團)과 같은 비밀결사는 음모의 소굴과도 같이
의심받았다. (프랑스 대혁명은 프리메이슨에 의한 전유럽적인 대음모라 함).

음모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경찰권 ·비밀경찰 ·스파이망(網) 등이 총동원되는데, 음모를 획책하는 쪽에서는
고도의 비밀성, 강한 단결, 특별한 전달방법 등으로 대항하며, 지도자 ·자금 ·수단 ·시기(타이밍), 대중의 지지 등이
그 성공조건의 관건이 됩니다.
발견되면 즉각 체포되고, 간단한 형식적 재판을 거쳐 극형에 처하여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음모는 발견되어도 그 진상을 자세히 알 수 없는 점이 많으므로, 이 점을 역이용하여 반대파를 탄압하기 위하여
음모사건의 날조(捏造)가 자주 행하여집니다.
독일의 국회의사당 화재사건(火災事件)이 그 예로서 자주 취급되는데, 최근의 연구에서는 날조가 아니라는 설도
나와 진상불명의 상태에 있습니다.

국제적인 음모도 적지 않아 제5열(第五列) ·스파이가 암약하며, 중립국가가 책원지(策源地)로 자주 이용됩니다.
독일 참모부가 봉함열차(封緘列車)로 N.레닌을 러시아에 보낸 사건이나, 나치스가 획책하였다고 전하여지는
두하체프스키 사건(반스탈린 음모의 용의로 1937년 총살, 1958년 명예회복)이 국제적 음모의 예로서 유명합니다.

음모는 그것이 가진 비밀성과 폭력성 때문에 나쁘게만 생각되기 쉬우나, 러시아 혁명의 공산당, 레지스탕스
운동 등과 같이 성공을 거두면 평가(評價)가 전혀 달라지는 특색이 있습니다.

 

b) 형법상의 음모

두 사람 이상이 특정한 범죄의 실행을 협의하는 일. 범죄의 단계로서는 예비 이전의 단계에 속합니다.
음모 그 자체는 원칙적으로 처벌되지 않고, 다만 예외적으로 처벌하고 있습니다.

출처: 빛과 흑암의 역사/장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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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로 부터 요한 계시록에 이르기 까지, 성경은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신정국가(말 그대로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기사다.

에덴 동산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통치는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로 상징되었다. 모든 창조물을 다스릴 대리자의 지위를 부여받은 아담은 모든 지상활동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이바지하도록 해야만 했다. 구약학자인 Meredith Kline은 이와 같은 신정국가들을 시종일관 종교(예배)와 문화(세속적 활동)의 결합으로 구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적인 활동들이 '예배'라는 보편적 방향에 기여할 수 있도록 아담의 왕적 신분을 통해 에덴동산을 통치하셨다. 바꿔 말하자면, 에덴 동산은 말 그대로 '지상천국'이었다. 모든 것이 이적에 의해 다스려졌다. 그것은 천국의 축소판이었다. 그렇지만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예배와 문화의 통일성이 와해되었다. 하나님 나라는 단지 장래를 위한 상징과 그림자와 약속을 통해 구원을 소망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 나라가 다시 회복되고, 하나님 나라의 왕이 죄를 용서하고, 믿는 자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모든 것을 바르게 회복하실 때가 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는 구원을 받았다.

세계 역사가 진행된 훨씬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반역과 죄악으로 가득 차 버린 세상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라는 한 사람을 택하시고 방주를 만들게 하셨으며, 장차 그 방주를 통해 '새 창조'가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하셨다. 각각의 종류에서 보존된 생명체들은 이 작은 신정국가, 곧 노아의 방주 안에서 하나님의 진노로 범람하는 바다를 견뎌 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다시 한 번 한 왕을 통해 기적으로 자기백성을 인도하셨다.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으로 말미암아 악인들은 멸망당하고 의인들은 구원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것임을 약속하셨을 때, 하나의 새로운 국가가 탄생되었다. 이스라엘이 바로 그 신정국가가 되었다. 성막이 세워졌으며 이후에는 성전이 건축되었다. 그 성전은 에덴 동산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불쾌한 냄세로 가득 찬 방주도 아니었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업적이었다. 다시 한번 종교(예배)와 문화(인간의 활동)가 융화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이적으로 직접다스리셨다. 홍해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길을 열기 위해 갈라지고 그들의 대적을 집어삼키키 위해 덮쳤을 때, 하나님의 백성은 다시 한번 물로 구원을 받았다. 그들은 광야에서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양육되었으며,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았다. 그 나라는 그들 가운데 있었다. 그들은 대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갔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왕을 세우셨다. 다윗은 이스라엘 왕국사의 중심이요, 장차 오실 왕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가 되었으며, 자신이 가진 제사장과 왕의 직무를 행함으로 종교와 문화를 하나로 융합시켰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 구원, 기도, 예전 그리고 '영적'인 일에 관한 문제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셨을 뿐 아니라, 문화, 사회, 정치, 경제 생활의 모든 양식을 지시하셨다.

그와 같은 각각의 신정국가에는 성전,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이 있었으며, 희생 제사도 있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첫 신정국가의 성전이었고, 노아의 방주는 두 번째 성전이 되었지만, 솔로몬의 성전이 구약 전체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것이었다.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직무의  경우, 신정국가에서는 대개 한 사람의 대리자가 그 세가지 직무를 모두 겸임했다. 희생 제물의 경우, 타락한 아담과 하와에게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덮을 수 있는 가죽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동물을 희생 제물로 삼으셨으며(창 3:21), 죄를 위한 궁극적 희생을 약속하셨는데, 단지 이 동물 희생은 장차 있을 궁극적 희생에 대한 하나의 모형에 불과한 것이었다(창 3:15). 홍수 이후에 노아는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다"(창 8:20). 희생제사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신정 국가에서 중심을 이루었다. 그리고 모든 신정 국가들은 이적으로 통치 받았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시하시고, 구원하시고, 보여주고 계셨던 것이다.

하지만 나사렛의 어느 고요한 밤, 한 유대인 처녀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잉태했을 그때에 어떤 변화가 발생하였다. 과거에 예언자들과 제사장들과 왕들이 예표했던 바로 그분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이르자 세상에 오셨던 것이다. 그분의 신정국가는 이적과 계시와 구속 행위가 다시 한번 새로운 국면으로 국면으로 펼쳐질 것을 예고했다.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 나라의 실제 속에서 천국을 지상으로 이끄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성전이셨으며, 그것은 솔로몬이 최고 전성기 때 누렸던 명성과 영예의 찬란함을 능가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라고 선언하셨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그때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적보다는 섭리가 특정적이었던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승천을 기점으로 지상이 아닌 하늘의 신정국가로 나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천국에 계시기 때문에 천국이 이 땅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복음이 전 세계를 통해 신앙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적으로 현존한다. 우리는 말 그대로 홍해를 통해, 혹은 방주 안에서 홍수를 통해 인도함을 받는다기 보다는 심판의 바다를 통해 인도함을 받는다.

그리스도께서 통치하고 있는 나라가 점진적으로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는 사실과,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시는 일이 원수를 친구로 변화시키는 십자가상에서 이루어진 그분의 희생으로 성취된다는 것에 주목하자. 대중들이 믿고 있는 바가 다양하지만, 그것은 정치적 강령이나 사회적 행동지침이 아니다. 결국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희생 제물이다. 그리스도는 성전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이시며,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우리의 죄악을 위해 희생 제물이 되셨다. 그리스도는 '정결한' 짐승 제사로 예표되었던 온전하고 흠이 없는 한 번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화목을 위한 최고의 방식을 충족시키셨다.

은혜의 복음이란/ Michael S. Horton

 

*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10 가지 증거 - 세상에 남겨두신 하나님의 지문 *

 

 

 

 

 

 

 

<동영상 내용 개요 이하>

 


증거 1.  미세조정된 우주 - 물리학적 증거 The Evidence of Physics


증거 2.  최초의 생명 발생 - 무신론의 증거들에 대한 반증 The Negative Evidence


증거 3.  DNA 와 생명 정보 - 생명정보를 통한 증거 The Evidence of Biological Information

 

 


증거 4.  미토콘드리아 이브와 Y 염색체 아담


증거 5.  홍해 사건과 여리고성의 고고학적 증거


증거 6.  많은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


증거 7.  예수님은 언제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는가?

 

 

 

증거 8.  이스라엘의 회복

 

증거 9.  모든 민족이 예수를 믿게 되다!

 

증거 10.  하나님의 임재

 

 

 

 

<이미지 출처: http://bostonkorea.com/board.php?id=madang&type=&code1=&code2=&code3=&mode=view&num=3469&page=5&odr=>

 

 


필연과 강제의 구분

(존 칼빈의 '기독교 강요' 중에서)

 

인간의 의지는 죄의 굴레에 완전히 묶어 있기 때문에 선을 향하여 움직일 수도 없고, 꾸준하게 선을 추구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런 움직임은 바로 하나님께로 향하는 회심의 시초인데, 성경은 그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레미야는 자기를 돌이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자신을 돌이켜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또한 같은 장에서, 신자들의 영적 수공을 묘사하면서, 여호와께서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속하였다”고 말씀한다. 이는 분명 여호와께 버림을 받아 마귀의 멍에 아래서 행하는 동안 죄인이 얼마나 단단한 족쇄에 묶어 있는가를 시사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의지는 그대로 남아 있어서, 죄를 향하여 강력한 애착을 갖고 그 쪽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이런 처지에 있다고 해서 의지를 빼앗기는 것은 아니고, 다만 의지의 건전성을 빼앗기는 것이다.

 

자, 자유를 빼앗긴 의지는 필연적으로 악으로 이끌릴 수밖에 없다는 내 말을 납득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참 의아스러운 일이다. 그 말이 사람들에게 거슬리는 것은, 그들이 필연과 강제를 서로 구분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인 것이다. 가령 누군가가 그들에게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선하지 않으신가? 마귀는 필연적을 악하지 않은가? 라고 묻는다면 무어라 대답하겠는가?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의 신성과 너무나도 밀착되어 있어서, 그가 하나님이신 것이나 그가 선하신 것이나 똑같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귀 역시 타락으로 말미암아 선에 참여 하는 것에서 완전히 끊어져 버렸으므로, 그는 악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가령,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모욕하려고, 하나님께서는 강제로라도 자신의 선하심을 보존하지 않으실 수 없으니 그가 선하다는 것에 대해서 굳이 칭찬을 받으실 이유가 없다는 식으로 빈정거린다고 하자. 그럴 경우에는 곧바로 답변할 수가 있다. 곧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지 못하시는 것은 그렇게 못하시도록 어떤 강제적인 압력을 받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한량없이 선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마땅히 선을 행하실 수밖에 없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선을 행하는 하나님의 자유 의지가 전혀 방해를 받지 않는다면, 또한 마귀가 오직 악 이외에는 아무것도 행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의지로 악을 행하는 것이라면, 사람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 아래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의지와는 별 상관없이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여러 곳에서 이런 필연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코엘레스티우스(Coeletius)가 이에 대해 트집을 잡으며 그를 비난했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단언하였다. “자유를 통해서 사람이 죄 가운데 있게 되었지만, 그에 대한 형벌로 나타난 부패성이 자유를 필연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언급할 때마다, 주저하지 않고 이를 필연적인 죄의 속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분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사람이 타락에 의하여 부패하였을 때에 강제에 의해서 억지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지은 것이며,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마음의 강력한 이끌림에 의해서 죄를 지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의 본성이 너무나 부패해 있어서 그는 오직 악을 향해서만 움직일 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사람이 분명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에 매여 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베르나르도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에 동의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모든 생물들 가운데 오직 사람만이 자유롭다. 그런데 죄가 개입함으로 인하여 사람 역시 일종의 폭력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는데, 이것으로 그의 본성이 아니라 그의 의지가 해를 입은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본래 부여받은 자유는 빼앗기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뒤에 가서는 이렇게 쓰고 잇다. “무언가 비열하고도 이상한 방식으로 그 의자 자체가 죄로 말미암아 더 악하게 변하여 그 자체가 필연이 되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필연이 ? 그것이 의지에 속하면서도 ? 의지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지도 않고, 반대로 의지도 ? 그것이 이끌림을 받아 그릇된 상태로 나아가지만 ? 필연을 배제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이 필연이 말하자면 자의적인 것이 때문이다.

 

그리고 더 뒤에 가서는, 우리를 압박하는 멍에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일종의 자의적인 종노릇의 멍에이며, 따라서 의지가 자유로울 때에 스스로 죄의 종이 되었으니 종노릇의 상태를 보면 비참하기 이를 데 없고, 의지를 보면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짓는다. “이렇듯 영혼은, 무언가 이상스럽고도 악한 방식으로 자의적이면서도 그릇 자유로운 필연성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하면서도 동시에 자유로운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스럽고 한심스러운 일은 영혼이 자유롭기 때문에 죄책이 있으며, 죄책이 있기 때문에 종노릇의 상태에 있는 것이요, 결국 자유롭기 때문에 종노릇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D0VS/4510

[출처] 필연과 강제의 구분--칼빈 (한마음개혁교회) |작성자 목사님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소망의 하나님 미국 대도시 학교에서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학생 환자가 학습을 따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어느 날 이 프로그램을 맡은 한 선생님이
    한 학생을 소개받았습니다.
    그녀는 그 학생의 이름과 병실 번호를 받았고,
    그 학생의 담임선생님과 간단하게
    학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현재 그의 학교 교실에서
    명사와 부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 담임선생님은 말했다.
    “그 학생이 너무 뒤떨어지지 않게 명사와 부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면 참 감사하겠습니다.”
     그 병원 프로그램 담당교사는 그날 오후
    그 학생을 만나기 위해 병원으로 갔습니다.
    아무도 그 학생이 완전 심하게 화상을 당해서
    중증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병원에 들어선 순간 그 소년의 모습을 보고
    그 선생님은 너무나 당황이 되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겨우 그녀는 말했습니다.
     “난 학교에서 너에게 명사와 부사를 가르치라고
    부탁을 받고 여기 온 거야.” 그렇게 하고 그녀는 수업을 했다.
    그녀가 떠나려고 했을 때, 많은 것을 이룬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다음날 병원에 갔을 때 그
     병원 간호사가 그녀에게 물었다. “어제 그 소년에게 무엇을 하셨어요?”
    그 선생님은 자기가 틀림없이 뭔가 잘못했다고 생각해서
    사과하기 시작했다. “아뇨. 그러실 필요 없으세요.”
    간호사가 말했다. “우리 말을 이해하지 못하셨군요.
    우리들은 그 어린 소년이 늘 걱정이 되었거든요.
    그런데 어제부터 그 아이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 거예요.
    이제 그가 우리의 치료에 반응을 하게 되었고,
    자기의 병과 맞서 싸우려는 자세가 보인 거예요.
     살려고 결심한 것처럼 말이지요.”
     2주 후에 그 소년이 다음과 같이 사실을 고백했다.
    “그 선생님이 올 때까지는 제가 살려는 희망을 완전히 포기했어요.
    그러나 아주 단순한 사실을 깨닫고서야 모든 것이 바뀌었어요.”
    그렇게 말하고는 그 소년은 다음의 놀랄만한 고백을 덧 붙였다.
    “그 분들은 죽어가는 아이에게 명사와 부사를 가르치도록
     선생님을 보내진 않았겠죠? 그렇지 않아요?”
     (1991년 7월 Bits and Pieces에서 발췌)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로마서 15장 13절)
    -펀글


한기총 '이단 해제' 패소의 의미
"이단 문제 해결 없는 한기총 원상회복 없다"

2014/08/26 ㆍ추천: 0      

이단 옹호 행보를 보인 한기총과 이를 비판한 신학대교수들간의 소송에서 법원은 지난 14일 신학대 교수들의 손을 들어줬다. 이번 소송에 참여한 신학대교수들은 25일 서울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에서 소송 승소 감사예배를 드리고 앞으로도 한국교회의 바른 신앙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할 뜻을 밝혔다. <편집자 주>

이번 소송은 잇따라 이단을 해제한 한기총과 주요 교단 신학교수들 대부분이 맞붙은 것이서 교계에서 초미의 관심을 끌었다.

소송의 발단은 한기총이 다락방전도총회 류광수 목사를 이단에서 해제하고, 다락방총회와 합친 예장개혁 교단에 회원권을 부여하면서 비롯됐다.

신학교수들은 2011년 12월 첫번째 성명을 낸 데 이어 여섯차례에 걸쳐 한기총의 이단 옹호 행위를 강하게 비판했다.

신학교수들은 당시 성명에서 "주요 교단들이 이단 혹은 사이비성 등으로 규정한 단체들을 이단에서 해제하고 회원권을 준 것은 결과적으로 이단 활동을 지원하는 것"이라며 한기총을 비판했다.

이에 대해 한기총은 지난해 8월 한기총의 이단 해제와 회원 영입은 정당한 절차를 거쳐 진행된 것이라며, 신학자들의 성명이 허위사실을 유포했다고 규정하고 명예훼손을 이유로 1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최근 1심 법원은 신학교수들의 손을 들어줬다.

서울중앙지법 제21 민사부는 한기총이 다락방 류광수 목사에 대한 이단 해제를 비판한 6개 신학회 관계자와 신학대 교수 등 179명을 상대로 제기한 10억원 상당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신학자들이 발표한 성명서는 이단 해제결정을 둘러싼 신앙 교리 논쟁에서 상대방의 의견을 비판하고 그 내용을 대내외적으로 알리기 위한 것으로 일반적인 언론 출판의 자유에 비해 고도의 보장을 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이번 판결로 거침없는 이단 해제 행보를 보였던 한기총에 상당한 타격이 불가피해졌다.

한기총 소송대책위원장을 맡았던 허호익 교수는 "이번 판결로 한기총이 원상 회복되거나 혁신 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며, "한기총을 혁신하려면 이단 문제를 해결해야 되고 그래야 원래 한경직 목사가 만든 한기총으로 원상 회복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기독교이단상담소 박형택 목사는 "한기총이 친이단성향의 인사들을 정리하지 않는 한 한기총의 미래 또한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을 통해 이단, 사이비에 대한 규정과 해제의 주체는 교회의 건강성과 건전성이 확보돼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줬다고 평가했다.

부산 장신대 탁지일 교수는 "이단 문제에 대해 올바르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이단 규정 주체의 건강성과 건정성이 확보돼야 한다"며, "교파주의가 특징인 한국 개신교 풍토에서는 교단들과의 긴밀한 연구와 협의를 통해 이단에 대해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한기총의 이단 해제 권한에 대한 판단은 내리지 않은채 업무방해가 아니라고 판시해 갈등이 완전히 해소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더 나아가 한기총이 앞으로도 이 점을 이용해 이단 해제 구실로 삼을 것으로 보여 주요 교단들의 공동대처가 시급하다는 과제를 남기게 됐다.

한편, 한기총을 상대로 소송을 벌였던 신학대교수들은 25일 소송 승소 감사예배를 드리고 이단문제에 대해 공동 대처할 것임을 밝혔습니다.

신학교수들은 또 한기총이 공교회를 무시한 채 이단옹호 행보를 계속 이어갈 경우 단호하게 비판할 것임을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송주열 기자 ⓒ CBS 크리스천노컷뉴스
츨처: USA아멘넷

마10:1-15,오늘날에도 사도와 선지자가 존재하는가?     10.12.12, 박홍섭 목사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12제자를 세워 추수할 일꾼으로 파송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놀라운 권능을 주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칠 수 있게 하셨고 심지어 죽은 자도 살리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들이 가는 곳마다 더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입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권능이 오늘 날에도 유효하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이지 않습니까? 과연 우리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는 곳마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쫒아내며 심지어 죽은 자도 살릴 수 있겠습니까? 어떻습니까? 그러나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와 같은 사명을 감당할 때 그저 받은 것을 그저 주는 자세이며 전대에 은이나 금을 가지지 말고 주님의 공급하심을 믿고 일꾼의 사명을 감당하는 그와 같은 자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이 당부하신 그와 같은 자세보다는 우리도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가? 우리도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는가?에 더 많은 호기심을 가집니다.

 

정확하게 따지면 본문의 12제자는 그냥 제자가 아니라 사도들입니다. 1절에서는 12제자라고 불렀는데 2절에는 사도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12사도는 1절의 말씀처럼 많은 제자들 중에서 특별히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받은 12제자들입니다. 2절은 그와 같은 특별한 권능을 받은 자를 강조하기 위하여 제자라고 부르지 않고 ‘사도’라고 부릅니다. ‘사도’라는 명칭은 마태복음에서 여기에 유일하게 사용된 단어로 ‘왕이 임무를 맡겨 보낸 자’라는 뜻입니다. 본문 10:1절은 그냥 12제자를 불러서 이와 같은 권능을 주신 것으로 되어 있지만 눅6:12-13절을 보면 예수님이 이들을 세울 때 그냥 세운 것이 아니라 산에 가서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지금 예수님이 모든 병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까지 주셨던 이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많은 제자들 중에 특별한 임무수행을 위해 예수님이 가려 뽑은 사도라는 것입니다.

 

그 특별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5-6절을 보면 이방인의 길도 아니고 사마리아도 아니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 가서 천국이 가까웠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여기 보면 제자들의 사역범위가 제한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이 어떤 때라고 하셨습니까? 9:37절에 보면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들이 적은 때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아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시면 구약에 그렇게 많이 예언하셨던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말씀한 이스라엘의 회복은 더 이상 혈통적 육신적 정치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영적 이스라엘로 신약의 교회를 의미합니다.

 

이제 곧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성령을 보내시면 더 이상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직 추수할 영혼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희어져 추수해야 할 영혼들이 이스라엘의 여기저기에 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고 부활하지 않아서 육신의 제한을 받고 계시는 때입니다. 그래서 이 고을 저 고을로 다 다니지 못합니다. 다 추수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십니까? 12제자에게 권능을 맡겨서 각 고을을 다니면서 희어져 추수할 영혼들을 추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2사도들에게 맡긴 권능들은 이런 목적수행을 위한 한시적인 권능들입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사도는 신약 성경을 기록한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구약성경은 선지자들이 주로 기록했고 신약은 사도들이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승천 하신 후에 이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영감 중에 신약성경을 기록하게 하시어 이들이 교회의 터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라는 직분은 성경을 기록하고 신약교회의 터가 되도록 하기 위한 특별한 기간의 한시적인 직분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에 의해 성경이 다 기록되고 교회의 터가 닦인 후에는 더 이상 선지자와 사도라는 이 특별한 직분자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병든 자와 약한 자를 고치십니다. 저는 기적을 믿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사도들을 통해 죽은 자를 살리고 모든 병을 고치고 약한 것을 고치도록 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을 하시고 예언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계시를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선지자와 사도대신 선지자와 사도들이 기록한 성경을 교회에 주셨습니다. 이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으로 우리를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것을 하게하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성경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만이 아니라 마28:19-21절의 말씀처럼 모든 민족을 제자 삼기 위해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갑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성경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예언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들 모두는 주님의 제자들이고 주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이지만 우리가 사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 선지자적인 자세로 이 땅을 살아가야 하지만 우리가 선지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처럼 보냄 받은 자들이지만 사도는 아닙니다. 우리는 사도들이 받았던 모든 병을 고치고 모든 약한 것을 치료하는 권능과 죽은 자를 살리는 특별한 권능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에도 선지자가 있다고 하고 사도가 있다고 하면서 예언을 하고 병을 고치면서 마치 자신이 하나님께 권능을 받은 선지자요 사도인 것처럼 행세하는 자들은 망령된 자들입니다. 그들이 죽은 자를 살릴 수 있습니까? 그들이 성경을 기록할 수 있습니까? 그들이 신약교회의 터가 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당시 사도들이 받았던 그와 같은 권능을 행할 수 있나?가 아니라 주님께 받은 것들을 어떻게 나누어 주는가?입니다. 그들이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병을 고치고 죽은 자도 살리는 권능을 받았다면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다 담고 있는 성경을 받았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사도들이 받았던 이 특별한 권능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그들이 남긴 하나님의 말씀, 곧 권능의 말씀들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은 딤후3:16절 이하의 설명처럼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듣는 자로 하여금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해서 육신의 죽음보다 더한 영혼의 죽음에서 우리를 살릴 것이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죄를 치료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전파되고 이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고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방의 모든 길과 사마리아와 땅 끝의 모든 열방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비록 사도들이 주님에게 받았던 놀라운 권능이 우리에게 없지만 더 놀라운 성경의 권능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 성경이 선포되는 곳에 병든 자들이 치료되고 이 성경이 선포되는 곳에 허물과 죄로 죽은 영혼들이 일어날 것이며 죄가 치료되고 죄를 이기는 새 이스라엘 백성들이 태어날 것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문제는 어떤 자세와 어떤 원리로 이 사명을 대하는가? 입니다. 그저 받았으니 그저 주어야 합니다. 마치 나에게 있는 것을 주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생색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그저 받았으니 그저 주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육신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해 금이나 은이나 동에 마음을 두지 말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이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마지막 14-15절을 보면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않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감히 내 말을 안 들어....두고 보자..먼지를 떨고...” 이런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무례를 떨고 건방을 떨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올 수 있는 기회는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의 기회가 없다는 것이며 하나님이 이들을 향하여 베푸시는 긍휼과 용서와 기다림의 기회는 이것이 전부라는 것입니다. 육신적 혈통적 차원의 이스라엘 선교의 긴급성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땅 끝까지 나아갈 때 이와 같은 긴급성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시대와 사회 속에서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베푸시는 긍휼과 용서와 은혜를 맡았습니다. 우리가 이 긍휼의 복음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그저 받았으니 그저 주는 자세로 이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합니다. 우리 하나가 이 사명을 감당하고 있으면 하나님은 우리 때문에 이 시대와 이 사회를 긍휼과 은혜로 만나주시지만 우리가 외면하고 등을 돌리면 이들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이 긴박성을 가지고 주의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이 바로 이 시대의 교회이며 주의 백성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다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들을 부르셔서 맡기신 하나님의 말씀은 사도들에게 맡기신 능력보다 더 큰 능력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주시고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땅 끝까지 증인이 되라고 하셨고 모든 족속을 제자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주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만으로 부족해서 다른 그 무엇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먼저 이 말씀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들을 때 우리의 영육간의 병든 부분들이 고침 받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어 모든 죽어 있는 것을 살리는 생명의 말씀임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으로 우리가 먼저 살아나서 온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는 이 부르심에 마땅한 책임과 감사함으로 충성하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국교회 미래 지속가능한 해법은
『2020-2040 한국교회 미래지도』를 읽어보니

2014/08/06

 
▲ 『2020-2040 한국교회 미래지도』 (저자 최윤식, 생명의말씀사) 출처: 생명의 말씀사 ⓒ뉴스파워

지난 1일 본지는 ‘한국 교회 계속 감소...대책 마련 시급’이란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전국적으로 많은 수의 교회가 세워졌지만 제주도와 경상도 지방은 다른 지역에 비해 그 수가 많지 않으며 전체적으로 교회수가 매년 감소하고 있다는 것은 크리스천들이 경각심을 가져야 할 문제이다.

이 위기 속 한국 교회는 그렇다면 무엇을 준비하고 실행해야 할까? 그 해답을 『2020-2040 한국교회 미래지도』 (저자 최윤식, 생명의말씀사)에서 찾아봤다.

이 책의 저자는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아시아와 한국을 대표하는 전문 미래학자로 주목받고 있는 최윤식 원장(아시아미래인재연구소장·한국 뉴욕주립대 미래연구원장)이다. 미국의 권위있는 미래학 정규과정인 휴스턴대학교 미래학부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학위를 받은 그는 미래예측기법, 미래전략경영, 시스템사고, 미래모니터링 등을 바탕으로 정부기관과 국내외 기업, 비영리 단체, 그리고 개인을 대상으로 미래와 관련된 자문과 교육활동을 펼치고 있다.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사랑의교회에서 고 옥한흠 목사의 지도를 받으며 수년간 부목사로 섬겼던 최 원장은 『2020-2040 한국교회 미래지도』를 통해 미래학과 성경에 입각한 한국 교회의 현재와 미래를 분석했다.

■한국 교회, 잔치는 끝났다!

필자는 한국 교회가 성장이 멈춘 것을 넘어서 쇠퇴기에 돌입했다고 분석했다. 한국 사회의 인구구조 변화와 기독교 자체의 부흥동력 상실, 그리고 점점 지속되는 교회 이미지의 실추로 한 세대(30~40년)가 지나면 최악의 경우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미래라고 볼 수 있는 주일학교 총인구 변화 추이만으로도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기독교 총인구 중 주일학교는 1960년대 폭발적으로 상승했지만, 1980년부터 본격적인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예장 통합 측에서만 지난 10년 동안 주일학교 어린이 부서가 38만 명에서 28만 명으로 줄었고 기독교성결교회는 30%가 감소했다.

필자는 현 상황이 지속될 경우 2050년경 교인 중 60~70%가 은퇴자로 가득 찰 것이며, 농어촌이나 소도시의 경우 그 수가 80~90%에 이를 것이라는 충격적인 예측을 내놨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한국 교회 위기, 문제는 무엇인가?

필자는 이집트 왕 파라오가 꾼 꿈을 요셉이 해석한 이후 그들이 7년의 흉년에 대비한 것처럼 한국 교회도 그 흉년의 때를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우선 한국 교회 위기의 진원지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필자는 한국 교회 위기의 내부 진원지를 초대형 교회만이 살아남는 기형적 목회 환경, 조화와 균형 무시에 따른 목회 생태계 교란, 뿌리지는 않고 거두려고만 하는 교회 사역, 둔감해진 시대적 소명 등 4가지를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이와 같은 내부적 요인을 제외하고도 한국 교회의 위기는 외부적인 문제에 휩싸이고 있다. 교인들의 삶에 직결되는 글로벌 경제 위기와 출산율 저하 등이 그 주된 요인이다. 필자는 이 모든 변화는 한국 정치, 외교, 경제의 방향 전환에 영향을 줄 것이고 한국의 미래 방향이 바뀌면 교인들의 미래, 그리고 생각과 삶의 모습이 바뀌게 된다며 내부요인만큼이나 외부요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경제 불황으로 인한 성장 한계 문제와 중산층의 붕괴는 자연스레 목회환경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필자는 지난 20년 동안 우리 교인들은 말로만 중산층이었고, 말로만 잘 살게 됐을 뿐 오히려 실질적으로는 소득은 줄고 빚만 늘어난 ‘보릿고개 시절보다 더 가난해진 교인들’이라 표현했다.

■문제는 더 찾아올 것……한국 교회가 피해갈 수 없는 미래 키워드들

그렇다면 지금까지 현재 일어난 문제들만 해결하면 위기를 피할 수 있을 것일까? 앞으로도 상황은 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신세대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것이고,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의 무분별한 종교혼합주의, 개인주의 신앙과 가나안 성도들, 점점 약해지는 영성은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한국 교회의 미래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필자는 이런 미래 키워드들 중 ‘통일’이라는 키워드를 ‘핵폭탄급 변수’라 칭하며 높은 관심을 보였다. 필자는 교회가 통일 한국을 위해 얼마만큼 준비를 했는지 독자에게 질문한다. 축복받는 통일이 되기 위해서는 한국 교회가 통일에 대한 영적, 심리적, 사회적, 선교적, 경제적 준비를 시급히 해야 하며, 이런 준비가 선행되지 않은 채 통일이 되면 북한 교회의 급격한 세속화와 남한 교회의 극심한 분열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필자는 독일의 통일을 통해 한국 교회가 통일을 위한 3가지 준비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첫째는 재정적 준비이다. 서독 교회는 통일 직전까지 동독 교회를 재정적으로 돕는 사역을 실시해 결과적으로 통일비용을 낮추는 데 기여했다.

두 번째로 북한 교회의 영적 순수성을 지켜 줄 준비다. 필자는 이미 세속화될 대로 세속화된 한국 교회는 북한의 영적 순수성을 지켜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고 지적하며 이 상태로 통일이 되면 북한 교회는 수년 내에 찢기고 타락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마지막으로 북한 주민의 인권을 보호할 준비다. 준비된 통일을 한 독일조차도 통일이 된 지 20년이 흐른 후에야 동독 지역에서 서독 출신 국회의원이 당선될 정도로 감정의 골이 컸다. 통일이 되면 우리는 그들을 끌어안을 수 있을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필자는 한국 교회가 통일을 위한 간절한 기도만으로 만족할 때가 아니라 구체적인 준비와 훈련이 필요하다고 책에서 주장한다. 서독 교회가 동독 교회를 지원해 독일의 통일과 안정에 배후로 역할을 맡았던 것처럼 우리나라도 복음적 평화통일의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교회, 해법은?

한국 교회는 역사의 굴곡가운데 우는 자와 함께 울며 그들의 편에 서 오며 부흥을 맞이했다. 하지만 요즘은 10년 뒤에도 우리 교회가 문을 닫지 않고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 휩싸여 있다.

필자는 겉으로는 세계 최고의 기독교의 아성을 자랑하는 한국 교회지만 속으로는 영적으로 곪고 문드러져 있는 세계 최고의 세속 교회가 우리의 현 주소라며 ‘통회하는 울음’이 절실하다고 강조한다. 오순절 다락방 사건처럼, 평양대부흥운동처럼 다시 하늘 문이 열리고 성령의 불덩이가 쏟아지려면 차지도 덥지도 않은 세속화된 교회가 아닌 통회하는 눈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객관적인 시선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선제적 대응 방식으로 교회나 교단이 정책 방향을 시급히 전환해야 한다고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단순히 교회가 커지고 교인 수가 늘어나는 것에 가치를 두시지 않는다며 양적 성장보다 질적 성장에 중점을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필자는 개인과 교회 공동체 성장을 위한 10단계 프로세스(부르심, 비전 자극, 비전 코딩, 비전 스캐닝, 비전 디자인, 비전 이퀄라이징, 비전 훈련, 비전 재인식, 비전 네트워킹, 비전 재생산)로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사역에 대한 방향을 제시했다.

이 프로세스를 통한 비전훈련 영역은 영성훈련, 자질훈련, 능력훈련 등 세 가지로 나뉜다. 필자는 이를 통해 구체적인 자신의 비전을 발견할 수 있고, 교인들을 전인격적이며 균형잡힌 성장으로 이끌게 된다고 설명했다.

필자는 책에서 전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하나님의 이기는 전략은 늦더라도 씨를 뿌리는 것이라며, 미래에는 ‘찾아가는 전도’보다는 ‘찾아오게 하는 전도’의 비중이 커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사람은 가치에 따라 이동하는 존재로 교회가 한 발 먼저 이웃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가치있는 것을 제공하면 그들이 자발적으로 교회에 찾아올 것이라는 설명이다.

■살아남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필자는 책에서 교회를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라고 표현했다. 사도 바울이 교회는 ‘한 몸’이라고 로마서 12장 4절에 표현했고, 예수님 또한 자신을 ‘머리’, 교회를‘몸’이라 지칭했듯이 성도들은 서로 밀접하게 관계된 ‘지체’인 것이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라는 고린도전서 말씀처럼 어떠한 문제를 한 지체만의 문제로 치부하고 공격하면 그것은 올바른 해결방법이 아니다.

필자는 ‘안주는 곧 박탈’이라며 하나님은 우리가 변화되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변화의 주체가 되기를 원하신다고 설명했다. 산소호흡기에만 의존하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을 연명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인 변화를 통한 살아있는 교회로 회복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시고 우리 앞에는 ‘변화냐 안주냐’라는 선택지가 놓여있다며 책은 끝을 맺었다.

범영수 ⓒ 뉴스파워

출처:USA아멘넷

신비주의 문제를 다루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방대합니다. 초대교회를 넘어서서 플라톤까지 올라가는 아주 방대한 내용입니다.

 

 

오늘날 신비주의 문제가 한국교회에 크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분별하여 알아야 할 내용입니다. 목사들과 교수들이 나서서 신비주의를 현실의 대안으로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과연 그러한 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봐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주로 들었던 것이 관상기도로 영성훈련에서 많이 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방대한 내용이며 기도문제와 맞물려 있고 여기서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배경적으로 전체적인 신비주의와 기독교와의 관계에서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읽었던 말씀은 바로 신비주의적인 질문입니다. 빌립이 했던 질문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소서.’ 오늘 신비주의자들이 다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을 보고 대면하여 그와 합일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너의 추구가 참 갸륵하구나.’ 하고 예수님이 칭찬해주는 것이 아니라 혼나고 있습니다. 신비주의자들이 놓치고 있는 사실입니다. 빌립이 시도한 신비주의적인 추구, 역사 속에서 계속되고 있고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왜 갑자기 신비주의인가? 사실 기독교 안에 신비주의적인 모습과 내용이 두드러졌던 시대가 있긴 했지만 보편적으로 거의 항상 있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안에 신비주의 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아마도 관상기도라고 하는 것이 유명목사님들에 통해서 권장되고 이곳저곳에서 관상기도를 실천하는 교회, 영성 훈련원들이 생겨나고 신학교에서 정식으로 가르치고 장신대에서는 입학했을 때 모두 기도원에 가서 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심리학적인 기독교의 양태를 띤 것은 데이비드 시멘스 같은 사람 책이 1980년에 번역되고 두란노서원에서 훈련시키고 상처치유 훈련, 상담학, 양육 받은 사람이 개교회로 돌아가고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강조하면서 저변 확대 보편화된 것이 한 세대가 흘렀습니다. 관상기도는 신학생들과 교수들에 의해서 책에 의해서 나오고 있으니 30년 후에는 보편화될 문제가 될 것입니다. 특별히 영성이라는 이름아래서 신비주의가 90년대부터 특별히 대두되어 지금까지 온 것을 보게 됩니다. 배우는 신학생들과 목사들이 교회에서 분명히 파급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대중화되는 것은 10-20년이면 되리라고 봅니다.

 

항상 유학 다녀온 사람들, 영향 받은 사람들에 의해 책이 추천되거나 번역되고 그 밑에서 영향을 받는 신학생들, 책에 영향 받는 사람들, 대중화 코스를 받는데 지금 우리는 그 코스의 중반기로 신비주의가 중간 단계에 와 있다고 봐집니다.     

 

한국교회는 관상기도를 새로운 것처럼 말하면서 신비주의를 크게 수용하고 있습니다. 관상기도는 신비주의의 핵심적인 주제입니다. 관상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합일하게 되는 경험, 황홀경에 빠지면서 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신비주의란 말을 잘 안 쓰고 영성이란 말을 씁니다. 시중에 가면 영성이란 단어가 나오는데, 본래 이 두말은 동의어로 씁니다. 17C 프랑스에서 특히 장르 귀용부인과 관련된 상류계층에서부터 이 말이 두 가지를 거의 동의어처럼 썼습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주장입니다. 그들은 신비주의와 영성이란 말을 신비적인 것이나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직접적인 내적 지식을 뜻하는 것으로 이 단어를 썼습니다. 현대에 이르러서 신비주의란 말이 부정적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다 보니까 그것을 기피하고 영성이란 말을 주로 쓰는 것입니다.

 

요즘 10년 사이에 한국교회에 갑자기 영성이란 단어가 대중화되고 있습니다. 신비주의에 대한 경계심이나 거부감을 영성이란 단어 때문에 덜 갖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말하는 이 정도가 최소의 내용인데 정말로 알아야 됩니다. 어떤 신학생들이 저에게 향후 10-20년 한국교회 추세가 어떻게 흘러갈 것이냐의 질문에 신비주의가 흘러갈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이 새로운 것이라고 해서 빠져 들어갈 것인데 우리가 최소의 가닥을 잡아야 합니다.

 

특별히 요즘 영성 작가들로 알려진 리차드 포스터, 유진 피터슨, 필립 얀시, 게리 토마스, 달라스 윌라드, 제임스 휴스톤 , 존 윈버 이런 사람들의 책들이 번역되고 과거 영성에 뿌리는 둔 릭 워렌이 쓴 글들, 목적이 이끄는 삶을 안 읽으면 간첩 취급받습니다. 대중들이 그런 것을 접하므로 인해서 영성, 신비주의를 어느새 우리들에게 친숙하고 쉽게 수용해도 되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신비주의, 영성을 추구하는 일이 불 일 듯이 일어나고 있는가? 영성에 대한 간단한 글을 쓴 김상재라는 사람이 한 말을 인용하면 ‘과거의 전통적인 언어와 메시지와 제도적인 틀과 신앙적인 사고와 예배 방식과 사유로서는 오늘날의 다양한 갈등과 욕구들을 효과적으로 치유하고 섬겨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계속 전해오는 메시지와 제도와 예배 방식을 통해서는 현대인들의 욕구를 채워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런 추세를 아주 고무적인 현상으로 말했습니다. 장신대의 유해룡 교수는 관상기도에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오늘날 한국교회 성도들이 기도생활에 대한 열망은 전과 다름없는데 기도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만족도의 충족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영성훈련과 관상기도를 크게 보급하고 있는 최일도 목사는 그동안 한국교회가 외적 성장에 주력했었는데 이제 성도 개개인의 내적치유와 내면적인 성숙에 관심을 가지면서 카톨릭교회에서 이야기 되어 왔던 영성 수련과 관상기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말하기 시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신대의 권명수 교수는 관상기도를 더 많이, 더 자주 실천하면 할수록 한국의 기독교인이 점점 성숙해지고 교회가 건강한 방향으로 나갈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모두 요즘의 신비주의적인 추세의 원인을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현실과 상태 때문이고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현재 한국교회의 상태에 대한 반응으로서 이런 것을 이야기 했을 때 현재 문제에 대해 자각을 갖는 다거나 각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긍정할 수 있겠습니다. 중세 신비주의가 크게 일어났던 것처럼 그런 취지에서 이야기한다면 설득력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중세 신비주의가 크게 대두되었던 것도 당시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과 반발에 의해서 일어났다고 일반적으로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이유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더 근본적인 원인입니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교리보다 체험을 선호하는 인간의 본성과 무르익은 시대 분위기 때문이라고 저는 진단합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말씀 속에서 은혜를 경험하고 그것을 탐구하는 것 대신에 개인적이고 신비적인 체험을 추구하는 대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같은 현상은 세계적인 추세이고 그 흐름을 주도하는 중심에는 북미가 있습니다. 미국과 캐나다의 영성가들이 큰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바짝 그 뒤를 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놀라지 마세요. 1900년에 죽은 반기독교적인 철학자 니체가 이런 서구 교회의 모습을, 현재 야기되는 이런 것을 예견했습니다. 마이크로 로버튼이나 데이빗 윌스가 그대로 인용하는데 ‘교리적인 기독교는 종말을 고했다고 탄식하면서 서구는 이제 새로운 불교를 정착시켜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기독교에서 말하고 예배하는 하나님이 죽게 되면 신들이 비같이 내리게 될 것이라고 하는 놀라운 예견을 했습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말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가 말한 하나님의 죽음은 서구 사회는 모든 진지한 신학적인 자각이 끝났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사람들의 의식가운데 하나님의 존재의미가 없어지게 될 것을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결과를 예견했습니다. 하나님이 죽고 나니 교회가 교리를 내어 던지고 나니 신들이 비같이 내리게 되고 허무주의가 활발하게 활동하게 될 것이며 새로운 불교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했던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은 여러 神 중의 하나로 여겨지는 일이 뒤에서 생겼습니다. 기독교는 서서히 내면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관상기도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내면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입니다. 니체가 말한 것처럼 새로운 불교의 양태로 발전한 것입니다. 교리가 교회에서 사라지고 그것을 말해도 죽은 교리가 되다 보니까 뒤따르는 것은 새로운 불교가 교회 안에 태동되는 일이 있게 된 것입니다.

 

실재로 오늘날 기독교가 어떻게 되었는지 여러분 잘 생각해보세요. 힌두교와 불교와 같은 명상, 물질주의, 교회 안에 심리학, 실용주의, 실존주의, 종교적인 감정에 의해 모든 것을 판단하는 감정주의, 소비자 중심적인 마케팅 원리나 적극적인 사고방식, 번성 신학, 은사주의 이 모든 것을 뒤섞는 뉴에이지 사상, 종교 다원주의 정말로 모든 것이 기독교 안으로 다 들어왔습니다. 나만의 신, 내면의 영들을 추구하는 현상이 기독교 안에 대세처럼 기독교라는 이름아래서 보편화되는 현상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정말로 기독교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전통적으로 믿어온 하나님이 죽고 교리를 버리게 되자 니체 말대로 신들이 비처럼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니체가 말해서가 아니고 기독교 신앙의 본성상 그렇게 됩니다. 교회가 교리를 버리고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으면 다른 신들로 채워지거나 하나님을 바꾸는 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체스터톤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을 부인하게 되면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이나 다 믿게 된다고 했습니다. 정말 명쾌한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 현재의 추세를 잘 봐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우리들이 신비주의적인 추구를 하는 것은 단순한 현상과 어떤 반동을 넘어서서 근본적인 문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살아있는 하나님의 진리 교리를 뒤로 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기에 또 한 가지 원인을 덧붙이면 사람을 위한 신학과 가르침이 한몫했기 때문입니다.

 

마이크로 호튼이라는 사람은 현재 미국교회가 다시 영지주의로 돌아가서 감정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이고 뉴에이지 사상에 물들게 된 그 최초의 원인을 하나님 주권과 은혜의 교리를 거부한 데서 찾고 있습니다. 마이크로 호튼이 쓴 두 권의 책이 있습니다.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미국제 영성에 속지마라」제가 여기서 정리해주고 있습니다.

 

개혁주의 차원에서 썼기 때문에 읽어보시면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통찰력이 있습니다. 그 뿌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교리를 거부한데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미국 것을 다 도입하고 있는데 대중적인 복음들이 그런 뿌리 속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결국 미국이 정착한 초기 청교도들이 붙들었던 하나님 주권과 그의 은혜에 대한 말씀으로 균형을 이룬 그들에게서 CORAMDEO 곧 하나님 앞에서라는 의식을 가지고 삶을 살면서 자신의 전 존재를, 몸과 마음과 영혼을 하나님께 바쳤던 그들의 모습에서 이탈해서 한걸음 뒤로 물러나서 사람을 위한 신학으로 점진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에드워즈 전에 있었던 현상으로 반언약제가 등장을 하고 사람을 위한 신학, 알미니안주의가 만연하게 되면서 지금의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고 진단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조지 휫필드가 다시 그런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원죄와 하나님 주권과 칭의 교리, 특별히 조지 휫필드는 선택의 교리를 영적 각성을 외치는데 메시지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런 선포를 통해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각성하게 하면서 그런 교리에 의해서 영혼들이 회복하고 각성된다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 다시 찰스 피니를 중심으로 한 부흥운동에서 메시지가 하나님에서 인간으로 바뀌게 됩니다.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한 1차 대각성 운동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를 강조점에 두었는데 피니를 중심으로 한 2차 대각성 때는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메시지가 주류를 이루고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이것은 신학과 교리에서 감정으로 변화하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으로 계속 발전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주권과 원죄와 칭의 교리와 하나님을 향한 전인적인 삶이 무너지자 알미니안 신학과 함께 개인적이고 감정적주의적인 신앙이 자연스럽게 자리 매김하게 되었습니다. 피니 이래로 교회는 사람의 전존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서 교회 안에서 모든 말씀을 통해서 사람의 전 존재를 변화시키는데 교회가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감정을 변화시키는데 초점을 두는 현상이 교회에 자리매김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는 마침내 내면의 빛을 찾고 자기의 직관적인 감정을 중시하며 물질적이고 객관적인 세계를 초월해서 영의 원천에 도달해 가지고 힘을 공급받으려고 하는 더 나아가서 신과 합일하려는 온갖 신비주의적인 시도와 은사 운동과 대중적인 복음주의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신비주의적인 추구는 간단히 말해서 객관적인 진리를 뒤로 하고 인간 중심의 신앙과 감정에 의한 신앙으로 변화된 것에 따른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호튼이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무한하시며 인격적인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청교도적인 신앙으로부터 인간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죄와 은혜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견해를 약화시킨 알미니안주의에로 다시 성경적 신앙을 단순한 인간의 감정 순으로 약화시키는 지경으로 변해왔다.” 얼마나 신학이 무서운지 모릅니다. 신학이 사람 중심으로 바뀌니까 물꼬를 확 터버린 것입니다.

 

댐을 하나 열어준 것 같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참고로 우리들이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독일 경건주의자들도 교회 역사 속에서 개인주의적인 감정적 기독교로 바뀌게 되는데 한 몫을 하게 됩니다.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 이성중심의 반동으로 개인주의적인 체험과 감정을 중시하는 것으로 발전하면서 우리가 그들이 상당히 경건한 모범으로 알지만(진젠도르프 백작의 그룹들) 이런 물꼬를 텄습니다. 한 몫을 한 사람들입니다. 죽은 정통에 대한 반동으로 이성을 중시했던 그런 현상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이성을 무시하고 감정을 중시하는 개인주의적인 신앙이 다각적으로 교회사에서 물꼬를 터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개인주의적이고 감정주의적인 신앙은 더욱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판을, 배경을 역사 속에서 설정해 주었습니다. 대륙은 대륙대로 미국은 미국대로, 오늘날 기독교가 개인감정을 중시하고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합일하려는 신비주의로 나가게 된 것은 이런 배경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상 그것이 악하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많은 표적을 보고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는 곧 악하고 불충실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핵심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악하고 불충실한 세대가 핵심을 놓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기독교 역사 속에서 교리를 뒤로 하고 개인감정을 중시하며 하나님과 합일하려고 했던 신비주의가 가졌던 모습은 흥미롭게도 기독교 역사상 영적으로 가장 어두웠던 시대, 특히 하나님의 말씀이 대중들에게 통용되지 않았던 시대, 신앙생활을 개인의 체험에 크게 의존했던 중세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때 신비주의가 가장 크게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쉽게 접할 수 있고 성경의 진리를 배우고 있는 우리들이 다시 그런 신비주의로 돌아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아주 기이한 현상입니다. 지금 미국에도 영성운동이 굉장히 일고 그것이 그대로 우리에게 넘어오고 있습니다. 뉴에이지 운동이 크게 일어나고 있는데 지금 이것이 기이한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종교적인 형태는, 교회는 나오는데, 교회라는 곳은 다니는데 기독교라는 껍데기는 가지고 있는데 마치 그들의 신앙의 행태와 중심성은 악하고 불충실한 세대에 있는 현상과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유념할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영성을 말하는 사람들이나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중세 신비주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동양 정통의 명상수행을 본받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는 것도 아니며 인간의 의지적 노력을 중시한 인본주의도 아니라고 그들이 말합니다.

 

오히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통을 하기 위함이고 그것을 위해 옛날 신비주의자들이 했던 방식 중에 긍정적인 것들을 재창조하여 사용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구색을 갖춘 말에 불과합니다. 물론 관상기도를 몰라도 우리들이 어떤 면에서 하나님과 진실하게 나가기 위해서 관상기도에 해당하는 것 같은 모양새를 취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아무리 바뀌어도 핵심적으로 붙들고 있는 그 중심, 그들이 의존하는 것,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개인감정이요 내면의 무엇입니다. 이것 때문에 결정적으로 얼굴 바꾸어 봐야 소용없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신비주의와 기독교는 다릅니다.

 

신비주의는 무엇이고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와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가?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하는가? 성경적인 대안은 무엇인가? 

 

신비주의에 대한 정의는 공식적으로 사람들이 사용하고 인정하는 것만도 약 30가지나 됩니다. 신비주의가 주관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정의도 다양합니다. 기독교와 관련된 간단한 정의를 먼저 말하면 하나님과 개인적인 연합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만 보면 우리는 기독교와 똑같이 생각하는 좋은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맥아더 목사의 정의를 덧붙이면 ‘신비주의란 역사적 사실이나 하나님의 객관적인 계시보다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직관이나 경험에 의해 하나님, 또는 궁극적인 실재에 관한 지식을 직접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 것을 추구하는 신비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목적하는 하나님과 연합하는 체험과 그 신비 체험을 통해 얻은 지식이 인간의 지각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의미를 이성으로 제대로 포착하는 것은 물론이고 말로서 제대로 설명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이들이 하나님을 체험하고 초월적인 지식을 얻었다는 것이 모두 자신들의 감각, 감정에 의한 것이어서 각각 설명이 다릅니다. 그들은 그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서 자신이 깨닫고 경험한 것을 신비로 유지하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19C 탁월한 신학자 B.B. 와필드가 그것은 사실 신비주의자들이 말로 표현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무언을 고집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끝없이 깊은 침묵과 묵상 속에서 자신의 감정 감각을 발견하려고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신비주의자들은 자신이 심연에 접해있을 때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그것을 신성시 합니다. 그런데 그 막연한 감정과 두려움을 신성시하다보니 그때 보거나 경험한 것을 신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힌두교의 브라마가 될 수도 있고 제우스가 될 수 있고 알라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굳이 설명하자면 성령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종교의 신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감정에 근거한 신비주의적인 하나님과의 합일은 이런 면에서 너무 위험하고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계시 종교입니다. 따라서 권위의 종교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해 온 신비주의는 계시가 없는 정신의 종교요, 따라서 권위가 없는 종교입니다. 여러분 모든 종교는 두 개로 나눕니다. 계시의 종교와 비계시의 종교입니다. 계시 종교는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했다는 것이고 비계시의 종교는 사람들의 사상으로부터 기인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신비주의도 같은 것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비주의가 다 그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계시가 없는 그저 정신의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권위가 없는 종교인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이 하나님을 말하면서 정신의 종교요, 감정과 이 감각의 종교 방식을 따르는 것은 기독교가 가진 고유하고 특별한 권위를 스스로 내던지는 것입니다.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 지상에 있는 모든 종교세계나 어떤 신앙의 세계에서 고유한, 유일한 특성을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내 던지는 것입니다.

 

기독교 안에 들어온 신비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원천인 성경, 곧 기록된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객관적인 계시를 무시하거나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대신 자신의 종교적 감정과 체험으로 대치시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해 나가는데 있어서 자신의 내부, 종교적인 감정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도 내부를 바라봅니다. 그런데 잘 하셔야 됩니다. 그것이 좋은 줄만 압니다. 성경적으로 하셔야 합니다. 성경적인 기독교는 모든 종교적인 체험을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해석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체험을 인도받고 지시받으며 정정함으로서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표준으로 삼습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찰스 하지는 이런 신비체험이 성령의 사역에 따른 것인지 인간 스스로 노력에 의한 것인지 악한 영의 역사에 따른 것인지 구분하는 방법을 말했습니다. 첫째, 성경의 충분성을 저해하고 다른 계시를 주장하는가? 이것을 해 본다는 것입니다. 말씀보다 자신의 직관이나 명상에 더 의존하는가? 이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제도와 법령과 학문을 무시하고 말씀보다는 성령의 직접적인 내적 조명 또는 내적인 빛을 더 중시하는가? 이것도 유사한 것 같지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퀘이커교도들이 주로 했던 것입니다. 죄와 회개를 무시하고 신비적이고 황홀한 체험만을 추구하는가? 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독일 신비주의자들,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범한 오류입니다.

또 하나님과 내가 하나라는 범신론적인 주장을 하거나 하나님이 아닌 것에 수동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는가? 이것이 뉴에이지 운동을 하는 것과 정적주의자들, 침묵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옛날에 우리나라에 방문했던 틱카탄 워킹 메디테이션 하는 사람들, 틱란탄이라든가 이런 사람들도 침묵주의 정적주의를 추구합니다.

 

불교에도 이런 신비주의 요소는 있습니다.

게다가 신비주의자들이 찾는 하나님은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입니다.

 

벌거벗은 하나님,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이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시면서 동시에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 감추인 하나님 그것이 아닙니다. 직접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입니다. 구도자적인 하나님을 추구한 나머지, 기독교는 구도자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릭 워렌 같은 사람에 의해서 구도자를 위한 예배라고 하면서 구도자를 위한 기독교를 오픈하는 것은 기독교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고 믿는 자들에게 허락되는 복음의 구원입니다. 구도적인 마인드가 있으면 다 오라는 것입니다. 당신들을 기독교라는 사상을 집어넣어서 구원받고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다고 하는 값싼 복음을 유포하는 것입니다. 구도자적인 하나님을 이들은 추구한 나머지 인간의 부패와 죄를 약화시키고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지 않습니다. 구원론적으로 말하면 회개와 믿음, 칭의를 말하지 않고 성화만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르는 것.

 

신비주의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그 가운데 어떤 긍정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손 치더라도 기독교 안에 어떤 신비자들에게 결정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기초와 표준에서 빗나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보다 자신들의 감정에 근거한 하나님을 찾는 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정타입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신비주의자들은 계시를 뒤로 하고 내적인 빛, 내적인 말씀을 의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벗어난 하나님을 찾고자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이번에 글을 실은 최일도 목사의 관상기도에 대한 글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 박동을 따라서 예수란 단어를 넣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고 집중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며 단어를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예수를 이야기하지만 실재 자신들이 추구하는 것에는 예수가 없습니다. 직접 벌거벗은 하나님,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추구입니다. 이번에 글 속에서 내적인 빛, 내적인 말씀을 의지하는 것이 관상기도에서 말하는 것이 같은 맥락입니다. 현대 개신교의 작가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람 이런 것을 추구하여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리차드 포스터입니다.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합일하기 위해서 어떤 과정, 단계를 밟는가?

 

일반적으로 신비주의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 갖는 여정은 3단계, 좀 더 상세히 말하면 5단계를 말합니다.

 

먼저 전통적으로 주장해 온 5단계를 간단히 말하면 각성, 정화, 조명, 영혼의 어두운 밤, 하나님과의 연합(합일)입니다.

 

여기서 존 웨슬리는 신비주의 영향을 그대로 받아서 이 중에서 4번째 영혼의 어두운 밤만 빼고 4가지를 수용하고 체계화하려고 했습니다. 3단계를 말하는 사람들은 정화, 조명, 하나님과의 연합을 말합니다.

 

저는 3단계만 간단히 말하고 한 가지를 덧붙이겠습니다. 첫 번째로 정화라는 것은 깨끗케 하는 단계로서 자아를 살피고 회개하는 것에서 시작해 가지고 거룩한 삶으로 나가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서 사람들은 물질과 육적 욕망을 포함해서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죄를 죽이는 일을 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고행, 금식 이런 것들을 하기도 합니다. 그 다음 조명은 내적인 소리와 통찰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참된 영적 진리를 알고자 애를 쓰고 하나님의 사랑과 아름다움의 초점을 맞추고 영혼의 내면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상상하려고 힘쓰면서 하나님을 묵상합니다.

 

이런 모든 추구와 알고자 하는 노력도 이성을 사용하기보다 직관적인 앎을 추구합니다. 이성이란 것을 이야기 하지만 그래도 최종적인 결정은 직관적인 앎 이 감정에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깊은 것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관상기도는 바로 이 조명 단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조명 단계서부터 하나님과 합일한다고 하면서 황홀경으로 들어간다고 하면서 이 단계를 중시여깁니다. 이 조명에 대한 이론은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신비주의자 로욜라라고 하는 사람이 많이 주장했는데 그것을 오늘날 리차드 포스터가 많이 차용해서 책을 쓴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과의 연합은 앞의 것을 실현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하나님과 합일하게 되는 단계입니다. 이것이 모든 신비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이것을 토마스 아퀴나스와 그 몇몇 사람들은 지복의 비전이다. 곧 아름다우심과 엄위로우심과 영광과 사랑 가운데 하나님을 보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되는 것으로 말을 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과 합일하게 되면 그 순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적인 ecstacy 황홀경, 무아경을 경험하게 되고 모든 장애물들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며 자신이 신에게 전가되어 초자연적인 통찰력을 가진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중세 신비자들은 바로 이런 경험을 낭만적이고 감각적인 용어로 특히 하나님과의 혼인 관계 속에서의 연합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중세 사람들이 아가서를 많이 강론했습니다. 술라미 여인과의 약간 그런 내용들을 이런 식으로 강의를 많이 했습니다. 이렇게 신비자들은 최소한 이런 정화, 조명, 연합을 통해 또는 하나님과 연합 전에 영혼전의 어두운 밤을 경험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는 것은 십자가 요한이라는 사람이 특히 많이 강조했는데 영혼이 흑암에 압도당하는 순간에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때 영혼 가운데 어떤 하나님의 탄생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종의 신과 접촉할 수 있는, 어떤 신적인 무엇이 자신까지 잊게 된다. 신적인 자신의 영혼이 우리의 영혼이 신적인 것과 접촉하게 되는 동등한 무엇으로까지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내용 속에서 이들은 죄와 은혜, 하나님의 성육신 같은 진리를 다 뒤로 해버립니다. 아무런 중개 없이 직접 하나님과 합일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이성적인 사고과정이나 정상적인 자각 경험, 일종의 이런 지각 활동들, 이런 경험을 철저히 배제합니다. 그런 것은 오히려 방해거리라고 여깁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 있다면 조명과 하나님과 연합의 과정 속에서든, 하나님과 관상하며 기도하는 가운데서든 그 과정에서 사랑을 갖는 것입니다. 이들은 무척이나 사랑을 이 과정에서 강조하고 인간의 감정에 의존합니다.

 

신비주의자들이 굉장히 사랑을 강조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지금 나와 있는 영성에 관한 책들을 보면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말하는 이때 사랑은 신비주의적인 사랑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이 인간의 육체에 갇힌 영혼이 추구하는 사랑, 곧 에로스를 말하는 것입니다. 뿌리가 그렇습니다.

 

신비주의자들이 왜 그렇게 사랑을 강조하는 지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이 시간에 이것을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신비자들이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해서 그렇게도 중요시하는 감정, 특히 사랑은 플라톤이 말하는 에로스요, 헬라 신비주의자들과 신플라톤주의자들이 강조하는 그 사랑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이런 것을 느낀 것이 바로 하나님을 느낀다고 하면서 다 빠져 들어갑니다. 지금도 영성 훈련하는 사람들이 그거 하면서 관상과정 겪으면서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다고 하면서 다 빠져 들어갑니다. 끝없이 감각적이고 감정적인 느낌에 의해서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신비주의 또는 영성을 말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이 관상의 모든 과정을 사랑의 과정으로 말하는데 이것은 사실 플라톤 철학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철학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인 것 같지만 일단은 아닙니다. 다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구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에 이미 그런 영혼의 숭고한 지식으로서 관주된 헬라 철학의 에로스, 사랑 이것이 영지주의적인 부류들의 영향을 받아서 특별한 지식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지주의자들이 말한 그노시스를 정죄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그노시스는 바로 이거였습니다. 영혼의 숭고한 지식으로서 간주되는 헬라 철학자들이 말하는 그 에로스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그것을 알고 이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그노시스, 곧 지식은 플라톤이 말한 에로스, 육신에 갇힌 영혼이 추구하는 에로스와 같은 것을 알고 정죄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구별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3장에서 우리가 유명한 사랑장이라고 알고 있는 사랑을 말할 때 헬라 철학자들이 말한 에로스와 구별해서, 또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그노시스, 지식과 대비해서 아가페 사랑을 말했던 것입니다. 우린 바울이 왜 고전 13장에서 ‘아가페 사랑은 사라지지 않지만 지식은 폐할 것이다’라고 말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신비주의자들이 추구했던 그 지식 이었습니다. 에로스적인 사랑, 영혼의 숭고한 사랑, 그것을 구별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신비주의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바울이 배격하고 정죄한 영지주의자들의 지식, 곧 영혼이 갖는 신비적이고 직접적인 지식이요, 더 높은 지식, 신비적인 직관, 헬라 철학자들이 말한 육체에 갇힌 영혼으로 하여금 영원한 곳으로 나가게 하는 에로스 사랑을 그대로 차용해서 하나님과 합일을 추구하는 것은 뿌리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사랑을 이야기하고 기독교 양태를 거론하고 예수를 이야기해도 뿌리가 잘못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헬라 신비자들과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에로스는 인간 중심적인 획득적인 사랑이요, 신에게 이르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사랑이며 자기중심적인 사랑입니다.

 

바울이 말한 아가페가 아니었습니다. 신비자들은 바로 이런 사랑과 지식으로 하나님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중세 신비자들은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서 그것을 차용해서 하나님과 연합하려고 하는데 사용했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한 대로 지복의 비전에 이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모든 기독교적인 무리들, 곧 퀘이커교도, 로마 카톨릭교도, 경건주의자, 자유주의자, 은사주의자, 심지어 보수주의자들까지 수용해서 개인적인 내면의 체험을 추구하는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차용한 것입니다. 그렇게 발전시켰습니다.

 

그래서 지금에 이른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잘 분별해야 합니다. 다른 무리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오늘날 소위 복음주의자들,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까지 신비주의의 매력에 빠져든 것은 너무 흥미로운 일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지난 복음주의 교회 역사 속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그룹이나 탁월한 사람들이 신비주의적인 모습을 가졌고 그런 그들의 사상과 글들에 꾸준히 영향을 미쳤습니다.

 

종교개혁이후에 복음주의 진영 내에서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갖도록 영향을 미친 사람들과 무리들은 제가 조금 거론하겠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이후 17세기에 이성을 무시한 개인의 신앙 감정을 중시한 독일 경건주의자들이 여기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18세기로 넘어와서는 윌리암 로라고 하는 이런 사람들, 윌리암 로는 웨슬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조지 휫필드도 회심하기 전에 그 사람들 책을 읽었습니다.

 

웨슬리가 결국은 윌리암 로에게 나중에는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는 진리의 말씀으로 회심을 하고 나서 윌리암 로의 가르침이 잘못 되었다고 해서 편지를 주거니 받거니 합니다. 신비주의에서 벗어나려고 웨슬리가 굉장히 애를 씁니다. 그러나 나중에 신비주의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신비주의로 돌아간 것이 아니고 신비주의에서 긍정적인 것을 잘 체계화 한 것이다. 복음주의 안에서 가지고 있는 장점과 신비주의의 장점을 잘 취합한 사람이 존 웨슬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제가 그것은 너무 긍정적으로 웨슬리를 본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면 웨슬리가 주장하는 성화론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완전교리가 바로 신비주의의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올라가는 교리 완전에 이르는 교리입니다.

 

벗어나지 못합니다. 웨슬리 같은 사람의 영향이 복음주의에 미쳤기 때문에 독일 경건주의나 웨슬리에 의해 영향이 자연스럽게 흡입되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19세기에 미국의 찰스 피니 이런 사람이 신비주의와 무관하다고 하지만 아닙니다. 신학 체계 같은 것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영국의 케이직 사경회 그룹들의 성결운동이 신비주의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케이직 그룹은 더 높은 생활 The high of life 더 높은 생활을 추구하는 신비주의인 정신을 표방합니다. 더 거룩하고 더 멋진 것은 좋아 보이는데 뿌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뒤를 이어서 20세기 초에 케이직 성결운동에 열심이었던 우리나라 여러 사람에 의해 많이 번역되었던 여사 제스판 루이스 1904년  웨일즈 부흥에도 기여했습니다. 그에 영향을 받은 워치만 리의 삼분설 속에서 영에 대한 견해는 신비주의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R. A. 토레이 신부 이런 사람들이 다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면 됩니다.  20세기 중반이후에 가장 크게 개신교회에 열어놓은 사람은 리차드 포스터입니다. 그가 1978년에 출간한 책 번역본으로는 영적 성장을 위한 제자훈련인가 하는 제목입니다.

 

아주 히트를 쳤습니다. 1978년에 미국에서 출간한 책 중에서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베스트 10에 이 책이 들어갔고 사람들이 성경 외에 가장 영향력 있는 책으로 무엇을 뽑겠는가에 3번째에 이 책을 집어넣을 정도로 사람들이  1970년 대 이후부터 이 영성을 통해서 무엇인가 대리 만족하는 획기적인 장을 연 것처럼 생각하면서 모두가 여기에 이 책을 통해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의 모든 내용은 퀘이커에 내적인 빛을 말하면서 중세 신비주의 사상을 흡수하여서 정리한 것입니다. 로욜라 같은 사람이 많이 기여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도 내노발의 운동을 하는 대표로서 자기는 신비주의운동이 아니라고 하지만 말로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향을 미치는 사상 글들이 충분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실명을 거론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신문에 기재가 되었고 본인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전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지에 있는 지구촌교회 담임목사님이 최근에 관상기도를 사역자들이나 목사들에게 많이 전하고 긍정적으로 시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해를 긍정적으로 해서 하고 있을 것이고 그런 요소가 있을 것입니다. 개신교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단점들을 보완하여 긍정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있겠으나 내노발의 그룹과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이 다 그런 것을 같이 연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리차드 포스터는 1960년대에서 70년대에 카톨릭 교회가 그동안 신비주의를 그렇게 대중화하지 않고 있었는데 카톨릭 교회에 신비주의를 대중화하는데 기여를 했던 대표적 사람이 토마스 머튼이라는 사람인데 그 사람의 사상에 많이 동조해서 신비주의를 개신교 안에 전한 개신교의 토마스 머튼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나라에 토마스 머튼 책도 많이 번역되었습니다. 20세기 후반 이후에 지금까지 리차드 포스터 뒤를 이은 유명한 영성 작가들이 그 역할을 개신교 복음주의 안에 신비주의를 흡수하는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신비주의 영성을 가지고 글을 써서 신비주의 영향 배후에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리차드 포스터를 위시해서 달라드 윌라드, 유진 피터슨, 필립 얀시, 브래넌 매닌, 헨리 나우웬, 게리 토마스, 알리스터 맥그라스도 영성에 대해서 동조합니다. 재임스 휴스톤, 릭 워렌, 존 윈버 이런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굉장히 많은 책들이 번역되었는데 저는 여러분들이 이런 것을 읽어도 됩니다. 분별을 하고 읽으세요. 혹시 여러분들이 시간이 저만큼 없어서 배경이 안 될까봐 거론을 해 드리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개신교 안에 신비주의가 자연스럽게 들어오는데 기여를 한 케이스는 개신교 안에서 개신교 출판사들이 이 번역하고 있는 신비주의적인 글과 그 영향을 받아 쓴 옛날 책들의 번역본들입니다. 일반 신자들은 개신교의 출판사에서 출판되니까 문제가 없다고 접하게 되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윌리암 로의 책이나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런 책이나 은성 출판사에서 나오는 옛날 신비주의자들의 책들, 쟌느 귀용 부인의 책들, 제스펜 루이스의 책들, 토마스 머튼의 책들 이것이 다 개신교에서 출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런 것들이 어떤 배경이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너무 개신교에서 쉽게 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파상적인 신비적인 영향에 대해서 또 현재 추세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결론이 중요합니다.

 

제가 4가지를 말해야 되는데 일단 3가지를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말해야 하는가? 우리는 개혁주의에 있으니까 우리는 무조건 잘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중간중간 성경적인 내용들을 언급했기 때문에 3가지 정도만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내부에서 발견하는 것, 또는 체험하는 것, 추구하는 것을 외적인 권위에 철저하게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외적인 권위는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신 것과 십자가와 부활,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대속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셨다 하는 사실들 이런 외적인 권위에 우리의 모든 발견과 체험과 추구를 굴복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발견하고 체험하고 추구하는 것은 우리 내면에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 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 다시 말해서 나의 주관적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그의 행하심, 특히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들 그런 것들을 더 알고 체험하고자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저는 목사로서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 하셨다는 것에 지금도 계속 놀라고 있습니다.

말씀을 계속 살펴야 하니까 묵상하면서 계속 놀랍니다. 사도 바울이 성도들이 율법주의에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말하면서 구원 그 이후의 삶을 말하면서 왜 그토록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특히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하신 것을 집요하게 말하는지를 제가 묵상하면서 정말 깊은 감동, 너무 행복한 감동을 흥분하게 되는 그런 감동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정말로 그러셔야 됩니다.

 

바울 같이 왜 그렇게 의롭다하신 것에 갈라디아서 전체를 할애할 정도로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는지 여러분들이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하셨다는 것에 부요함이 과거 한 때, 우리가 과거에 구원받았다는 것이 교리적으로 그것은 과거적인 것이야 하고 우리를 손상시키는지 모르겠습니다. 과거에 머물지 않고 과거를 넘어서서 현재 미래로 계속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아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삶은 이런 의롭다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있게 된 이 부요함을 더욱 알고 계속 확인하고 체험하기에도 너무 인생이 짧다라는 이런 이해를 가지고 여러분들 그런 객관적인 진리, 외적인 권위에 더 마음을 쏟으셔야 합니다. 현재 우리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떤 자가 되었는지 어떤 은혜를 누릴 수 있고, 또 누려 마땅한지를 여러분들이 더 알고자 하여야 합니다. 저는 목사이지만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면서 이것의 부요함 때문에 행복한 감동, 그런 것도 경험하게 됩니다. 정말 조금씩 경험 속에서 깨닫고 배워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 수많은 것들 제가 의롭다 하심 그 하나가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이루신 그 수많은 것들을 머리로 아는 것에서 벗어나서 삶속에서 이루기를 원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요하겠습니까?

 

우리 전 삶을 소진해도 모자라는 것입니다. 겨우 조금 알다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외적인 권위들을 뒤고 하고 내면의 뭣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 그것은 아무리 기독교적인 무엇이라고 한다고 해도 워필드 말대로 훨씬 낮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체험을 최고로 높은 것으로 여기면서 생각하지만 그것은 이 외적인 권위, 계시의 내용에 비하면 훨씬 낮은 수준이고 부차적인 것들입니다.

 

여러분들이 경험에 의한 그런 이해를 가져야 됩니다. 저는 누구보다 못지않게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적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계시 안에서입니다. 여러분 내면의 무엇으로 신앙생활하려고 하지 말고 외적인 권위에 항상 눈을 고정시키고 특히 우리 주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무한한 것에 온 마음과 시선을 두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벗어나면 아무리 놀라운 체험을 해도 길을 잃게 됩니다. 아니 기독교가 아닌 곳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워필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비주의 역사는 자기 자신 안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으로 시작한 사람이 스스로를 하나님과 혼돈 하는 것으로 끝맺을 수 있다는 것을 아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체스터 톤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

 

모든 종교들 가운데서 아주 끔찍한 것은 내부에 있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만일 존스씨가 자기 내부에 있는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존스씨가 존스 자신을 섬긴다는 의미가 됩니다. 차라리 존스로 하여금 내적인 빛보다는 어떤 다른 것, 해나 달을 섬기게 하라 존스로 하여금 내부에 있는 하나님을 경배하게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고양이나 악어 또는 거리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어떤 사물을 찾아보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잊지 말아야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존재 가치, 또는 정체성 의롭게 된 것은 외적인 권위, 내 안에 보아서 내가 살펴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내 밖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이루신 것에 의해서 온 것입니다 여기에 뿌리를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선을 내 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박식하고 신비한 체험을 많이 했던 바울, 삼 층천에 이끌렸던 경험이 있고 사람들을 살리는 능력을 행했던 바울이 각종 신비적인 체험과 하나님의 은사들로 인해서 날리었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했던 말을 유념해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 하기로 작정했다.” 이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유명 구절로 알면 안 됩니다. 이 배경 속에서, 자신의 경험 속에서 이 바울 같은 체험을 한 입장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유념해야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으로 부족한 듯해서 율법주의적인 무엇에 마음을 빼앗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결론적으로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한 것이 없다.”고 한 것을 유념해야 됩니다. 골로새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이 이루어져서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불충분하게 여겨서 골로새서 2장에 기록된 대로 철학과 율법주의 신비주의 금욕주의 등에 유혹받는 것을 보고 바울이 외친 것이 무엇인지를 유념해야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다.” 고 바울이 외쳤습니다. 거기에 모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바울과 다윗의 체험에 대한 묘사들을 잘 묵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신구약 성경에서 가장 많이 기록한 사람들인데도 놀랍게도 내면의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내면을 들여다보고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내 밖에서 행하시고 드러내신 객관적인 계시에 의해서 계시된 하나님, 선조들이 말한 그 하나님을 믿고자 했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부르짖었고 그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자신들의 삶 속에서 바로 그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고  하나님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분명히 기독교에는 신비스런 체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체험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체험은 오직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따른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우리들이 추구하고 원한다고 해서 갖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삼 층천에 이끌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모했다고 말하지 않아요, 그 경험을 말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추구하고 경험해야 할 체험은 특별한 신비적인 체험이 아니고 계시된 하나님을 삶속에서 믿음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가 경험한 하나님입니다. ‘약속한 땅으로 가라. 내가 너희에게 함께 할 것이다.’ 모든 것을 이야기하시면서 말씀하시고 그 다음부터 여호수아가 경험한 하나님은 그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을 의지해서 요단강을 발로 밟는 것이고 여리고를 도는 것이며 믿음으로 모든 것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이 내 삶속에서 같이 계시는구나, 역사하시는구나, 바로 이 하나님이야’ 라고 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런 체험을 하는 것이지 내면을 바라보고 황홀경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모호한 신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삶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그런 우리를 계속 어떻게 어떻게 하시겠다 라고 성경에서 말하잖아요? 그것을 믿고 경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을 믿고 경험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의롭다 하신이가 어떻게 하시겠다고 하는 것을 말씀을 그대로 우리가 믿고 나아가면서 그 하나님을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무리 힘들어도 내 어떤 그 문제 앞에서도 말씀하신 그 하나님이 나의 삶속에 계셔서 인도하신다는 것, 여리고를 무너뜨린 것처럼 나의 삶의 환경에서 인도하신 것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우리가 구하고 경험할 하나님 체험은, 보편적인 하나님 체험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 어떤 신비체험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계시된 하나님을 삶속에서 체험하려고 하시길 바랍니다.

 

특히 독생자를 주어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믿고 삶속에서 그 하나님으로 인해 행복해 하고 이렇게 말씀하시며 나를 이끄시겠다고 하는 자기 생명까지 주신 그 하나님 때문에 좀 만족해 할 줄 알고 그분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해하고 황홀해 할 수 있는 그런 믿음으로의 경험을 오히려 하시라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그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즐거워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 이런 체험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웨스터민스터 신앙 교리 문답 1번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체험, 그것을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꼭 그런 식으로 계시된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생이 다 소진 될 때까지 그래도 모자랍니다. 조금 하다 갈 것입니다.

 

두 번째로 신비주의인 현재 추세에 대해서 우리들이 확고히 해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은혜주시며 자신을 알고 경험케 하시는 수단, 바로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수단에 충실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신비주의자들이 크게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는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 이해에 대한 크게 두 기둥이 있는데 초월성과 내재성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 했던 것처럼 보면 죽는 것입니다. 그렇게 초월적입니다. 그 엄위로우심을 누구도 못 감당합니다. 사도 요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뵐 때 죽은 자같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육신을 입고 이 땅에 계셨던 분이라도 그분 자체에 부활하신, 승천하신 그 분 속에는 초월성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초월성이 있는 분입니다.

 

동시에 자기 백성들 가운데 오셔서 인도하시고 역사하시는 내재성이 있습니다. 두 기둥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비자들은 내재성만 주장합니다. 자기들이 하나님께 합일하다가 죽은 것은 생각 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다가오시기 위해 정하신 수단이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신비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더 많이 경험하고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 자신이 정하신 그 수단에 우리가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수단은 말씀, 기도, 성례라고 세례 문답에서 이야기 합니다. 이 셋 중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경험하는데 먼저 중시할 것은 말씀과 성례입니다.

 

기도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이 두 가지 기초위에서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신비자들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은혜의 방편 외에 많은 것을 추가했습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기도를 무척이나 중요시 여기고 말씀, 계시를 뒤로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주장했던 은혜의 방편들은 우리가 말한 이런 것 외에도 묵상, 죄고백, 훈련, 노동 리차드 포스터는 금식 기도 공부 독거 검소함 죄고백 시련 이런 것도 다 은혜의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철저하게 자기감정과 자기주관적인 경험들을 따라서 하나님과 그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저 섭리적인 이야기를 그저 그런 식으로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나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수단조차 정해 주셨습니다.

 

자신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며 알게 하시고 성례를 통해서 자신과 연합됨과 은혜 경험을 말씀하셨습니다. 계시된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신비자들은 하나님을 경험하고 합일하는 도구의 기도를 가장 중시하지만 말씀과 성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하나님을 아는 유익을 얻지 못하면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것은 계시 없는 이방 종교인들처럼 모호한 신을 찾고 만나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말씀과 성례의 수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 안에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종교 개혁자들처럼 기록된 말씀과 설교는 우리들이 듣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례는 보이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특히 성령의 사역에 대한 말씀과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성례가 바르게 시행될 때마다 ‘성령님은 자유롭게 주권적으로 임하신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라고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우리가 정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정하신 대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은혜를 경험하려고 하고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과 교통해야지 다른 방법들을 쓰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성례전에 참여할 때 여러분의 헌신 결심이나 다짐에 초점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서 독생자의 생명으로 또 우리 주께서 자신의 몸과 피를 스스로 맹세하신 사실을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것입니다. 피는 독생자를 주신 것도 하나님의 맹세요, 자신이 몸과 피를 쪼개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도 그리스도께서 맹세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맹세해요? 우리를 완전히 구원하시고 그를 영원한 가족으로 삼으시겠다고 맹세하신 것입니다.

 

보이는 말씀을 보아야 되는 겁니다. 우리가 성례에 참여할 때, 그 하나님 그 은혜의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특히 그 정한 수단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개인적이고 실질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신 것들을 믿고 주님을 확신하여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항상 유념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특별히 말씀을 들을 때는 그리해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성령님께서 만나주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말씀은 절대적으로 독립적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성령하나님께서 같이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시해서 그렇지. 이 말씀은 그분의 말씀입니다.

성령하나님은 말씀과 함께 우리에게 오시기 때문에 말씀을 통해 우리를 통제하십니다. 따라서 말씀과 성례 속에서 하나님을 보셔야 합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얻고자 하고 경험하고자 해야 합니다. 감각적인 것을 구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전 인격 속에서 감동하고 수용하고 그 하나님을 인정하고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경험코자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고리타분하게 여기고 그 대신 내면의 빛을 찾는 것은 새롭고 신령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모호한 신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비주의의 추세 속에서 점검하여 확고히 해야 할 것은 신비주의를 비롯해서 오늘날 개신교 안에 만연해 있는 이 올라감의 신앙 체계, 루터의 말로 표현하면 영광의 신학을 거부하고 그 대신 성경이 말하는 내려감의 신앙 체계, 곧 십자가 신학을 가지고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비주의에 완전히 대두되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 신학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경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비적인 풍토 속에서 살았고 신비주의에 젖어 있었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결론적으로 뽑아낸 것입니다. 발견한 사실입니다. 성경과 계시 안에서, 이것이 우리에게 아주 좋은 신비주의에 대한 답이 되는 것입니다. 그가 발견한 십자가 신학이. 루터는 당시에 헌신적인 성자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체험을 하기 위해서 올라가고자 했던 그 3가지 사다리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것들은 신비주의 사다리요, 공로의 사다리며, 사변의 사다리였다고 말하였습니다. 루터가 말하는 이 사다리들은 모두 올라가는 사다리입니다. 이 영광의 신학에 기초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루터가 성경을 통해서 깨달은 것입니다.


영광의 신학이라는 것은 루터의 말을 빌리면 벌거벗은 하나님, 곧 엄위하신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인간에 허락된 것이 아닌 것이고 성경에서 볼 때, 또 가능하지도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만날 수 있을까? 그것은 오직 십자가 안에서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신학을 통해서 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신학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같이 하나가 된 것이요, 죄악 된 인류에게로 내려오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보는 신학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영광의 신학은 절대 복종 명상 황홀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한다고 말하는 것이고 십자가 신학은 죄범한 우리에게 하나님 편에서 내려오시는 것,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비주의와 그런 신학 체계를 가진 사람들은, 아니 오늘날 이 개신교의 추세는 자신들이 올라가는 것 이 영광의 신학이 근거해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한국교회나 세계 교회가 크게 이탈하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본질을 이탈하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 올라감의 사상이 모든 종교에 있지만 기독교 신비주의에 들어온 올라감의 사상, 그 영광의 신학의 뿌리는 바로 플라톤을 위시한 헬라 철학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상과 신학이 옛날 영지주의부터 시작해서 오늘날에 뉴에이지 사상 심지어 오늘날 복음주의 내 은사주의 운동, 번성신학, 긍정적 사고방식 이런 것들로 옷을 입고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즘 방언 받기 위해 열광하고 있다고 그러더군요. 베스트 10에 다 방언이야기, 성령님으로 나오는데 저는 요즘 「안녕하세요? 성령님」 하며 성령을 구분하는 내용이 바람직하지 않은 추세라고 생각합니다. 성령님을 이야기하려면 말씀과 함께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런 것이 다 올라감의 신학을 이야기하다보니 그런 식으로 구분해서 이야기하는 현상이 생겼고 모두 다 직접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무엇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계시는 잘 모르면서 은사를 받겠다고 야단입니다. 부산의 큰 교회의 어떤 분이 나에게 전화로 물었습니다. 강대상에 직분자들을 다 나오라고 하고 성령론을 주장하는 사람이 다 쓰러뜨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영광의 신학의 잔재들입니다.


이 영광의 신학을 신학적으로 잘 체계화 한 사람이 존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교리입니다. 그 라인에서 계속 발전한 그룹과 사람들이 더 높은 산과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외친 케직사경회 그룹과 한나 스미스, 찰스 피니, R. A. 토레이, 헬레 블랙까미 요즘 대중적인 선교단체들 중에서 신학적으로 이들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단체는 예수 전도단입니다. 신비주의가 가진 영광의 신학을 어느 새 복음주의도 얼굴 모양을 달리 해서 그대로 가지고 계속 추구해 왔습니다. 올라가는 사상은 헬라 철학뿐만 아니라 더 오래 전에 힌두교나 불교 조로아스터교 등에도 있었고 지금의 힌두교나 불교도 계속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기독교와 모든 종교는 이런 것을 올라가는 종교 체계를 갖는 다면 똑같아 보여요.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계시 종교라는 면에서도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다른 종교들처럼 올라감의 종교가 아니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기독교는 정반대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오신 종교입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십시오. 기록된 내용 중에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 발견했다는 사례가 하나라도 기록되어있는지...없습니다. 아담아, 아브라함아, 밤에 잠자고 있는 야곱에게도 하나님이 왔습니다. 다 하나님이 오십니다. 성경은 항상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오셔서 자신을 나타내시고 계시하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가 마치 빌립이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는 것처럼 영광의 신학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은 아버지와 하나라고 하시면서 길과 진리이고 생명을 통해서 아버지께 이를 수 있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자,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봐야 합니다.

 

그를 통해야 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 하나님의 권능을 가지고 계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자연과 귀신과 온갖 질병과 사망까지 주관하시는 그런 모습을 보이셨지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이 하나님의 비밀스러움을 보이셨습니다. 완전히 다 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를 통해서 그가 오셔서 말씀해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다 안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벌거벗은 하나님을 직접 만나겠다고 신과 합일하겠다고 이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이 어떠하심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열심을 보고 싶거든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는 겁니다. 그의 십자가를 보는 것입니다. 신비자들과 영광 신학을 가진 자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봄으로서 하나님을 보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악 가운데 있는 인간이 하나님과 평화할 수 있는 길은 우리의 내면을 봄으로서가 아니고 우리 자신 바깥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봄으로서 입니다. 비밀은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는 자는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고 하나님의 지혜와 그의 성품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삶속에서 더욱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으신가요? 내면으로 들어가지 마시고 십자가를 보십시오. 십자가 신학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올라가지 말고 내려가는 삶, 곧 그리스도를 따라서 고난의 삶을 살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삼 층천을 경험한 체험이 있었지만 그런 체험을 그리스도 뒤를 쫓아 고난의 삶을 사는 가운데서 삼 층천 이야기하면서 그리스도 뒤를 쫓아서 고난의 삶을 사는 것에 대한 결론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계시를 고후 12장에서 이야기합니다. 영광 체험을 말하면 좋겠는데 그것은 말하지 않고 거기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또 다른 길을 밝히고 있습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네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해짐이니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하므로 나의 여러 약함을 인하여 자랑함이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함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력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강함이니라.’ 이것이 비밀입니다. 바울은 이 비밀을 삼층 체험을 경험한 후에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광 신학으로 살려고 하지 말고 하늘의 은사를 받고 신비스런 체험을 하는 것도 좋은데 그런 것들보다 십자가 신학에 온 맘을 쏟으시고 바로 약할 때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을 하고자 하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수입니다. 그래서 기꺼이 고난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길입니다. 경험할 수 있는 길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기도 속에서 내면을 바라보고 어떤 특별한 체험을 해도 이 하나님의 생생함은 고난 속에서 경험되어져야 합니다. 삶속에서 확인되어야만 합니다. 신비주의가 잘못 가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비밀을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신앙을 버리고 영광의 신학을 취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의 신학에 현혹되지 말고 지금까지 말한 이 세 가지를 확고히 하십시오.


제가 마지막으로 워필드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우리는 신비주의자가 될 수도 있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두 가지 다는 될 수 없습니다.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하는 척하는 것은 단지 기독교로부터의 변절을 숨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명쾌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계시 안에 있는 부요한 하나님을 경험하고자 하십시오.  

 

 

 

 


나는 진화론을 가르치던 교수였습니다.- Walter Veith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스스로를 진화론의 전도사라고 부르던 한 사람이, 다윈이 알수 없었던 유전학에 대해 알며 진화론을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을 믿게 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합니다. 


무신론 그리고 진화론은 일어날수 없는 불가능한 우연에 심하게 의존하는 이론입니다. 

잘 지어진 집을 폭파해서 다시 완벽한 집으로 만들 가능성은 10^80 분의 1 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숫자는 온 우주에 있는 미립자의 숫자와도 같습니다. 


즉 진화론은 불가능 합니다. 왜냐하면 유전 정보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그런 확률과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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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부러진 들길 같은 사람 나는 구부러진 들길이 좋다 구부러진 들길을 가노라면 나비의 밥그릇같이 넓죽한 해바라기도 만나고 하늘거리며 손짓하는 가녀린 코스모스의 미소도 만난다
      저녁이면 뽀얀 연기가 올라오는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정겹고 노을 지는 하늘 동구 밖 샘터를 따라 키드득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이 흘러 좋다. 구부러진 하천 작은 바위틈 아래는 알록달록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고 있다 길가엔 은은한 향을 품은 들꽃이 철 따라 피고지고 그곳은 밤이면 별빛이 더 초롱거린다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는다
      나는 구부러진 들길 같은 사람이 좋다 가는 길에 江도 만나고 산도 만나며 태풍도 만나고 눈보라도 만나고 울퉁불퉁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고 자빠지며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에게는 소박한 들꽃처럼 순수한 향이 있어 좋다..
      잘 다듬어진 아스팔트 길 위로 쉽게만 살아온 사람은 한 치의 모자람도 없고 반듯하게 보이지만 도시의 딱딱한 아스팔트 냄새가 나서 싫다 먼지투성이 감자 고구마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나는 좋다 '보톡스' 주사로 매끈매끈한 이마보다는 구불구불 굵게 주름진 이마로 가족을, 이웃을 품고 가는 사람, 남에게 해를 입힐줄 모르고, 오히려, 다른 사람이 밟고 지나갈 수 있도록 당신의 등이라도 기꺼이 내어줄 줄 아는 사람 구불구불 매끄럽지 못하고 투박한 언어 속에 인간 냄새가 흙내음처럼 물씬 배어 정겨운 이... 그런 사람이 나는 좋다 그리스도는 들길 같은 삶을 살다 가셨는데 그분의 제자란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화려한 궁전을 사모하는지 왜 형제 자매와 어우러져 소담한 꽃이라도 피우려 하지 않고 시샘과 비방을 일삼는 것인지... 다른 이를 위해 등을 내어주는 넉넉한 마음, 정녕 들길처럼 소박한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걸까?

       









      좋은 글 한 편을 토대로 '패러디' 한 것임
      글/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읽으면 힘이 되는 명언

    다정하고 조용한 말은 힘이 있다
    _ 에머슨

    벗의 곤경을 동정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벗의 성공을 찬양하려면 남다른 성품이 필요하다.
    _ 오스카 와일드

    사랑은 첫 인상과 함께 시작된다.
    _ 세익스피어

    위대함에는 신비성이 필요하다,
    너무 알면 사람들은 존경하지 않는다.
    _ 드골

    몸가짐은 각자 자기의 모습을 비치는 거울이다.
    _ 괴테

    남의 생활과 비교하지 말고 네 자신의 생활을 즐겨라.
    _ 콩도르세

    힘은 희망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있고
    용기는 속에 있는 의지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_ 펄벅

    순간을 지배하는 사람이 인생을 지배한다.
    _ 에센바흐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자본금이다.
    이 자본을 잘 이용한 사람에겐 승리가 있다.
    _ 아뷰난드

    서두르지 말라. 그러나 쉬지도 말라
    _ 괴테

         
    출처: 서춘웅 목사님의 방/에스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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