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된 욕심

얼마 전, 이스라엘의 무차별적인 폭격을 맞고 무너진 가자지구의 한 민간인 아파트 건물 더미 아래서 신음하던 젊은 여인을 봉사자들이 힘을 합하여 무사히 구출해낸 장면을 뉴스로 보면서 세계인이 모두 기뻐한 적이 있다. 이 여인은 임신 8개월의 무거운 몸이었고 병원으로 후송하던 중 안타깝게도 차 안에서 숨졌다. 죽은 어머니로부터 제왕절개로 태어난 아기가 인큐베이터에서 살아 숨 쉬는 앙증스러운 모습이 전 세계로 방영되는 것을 보면서 악한 세상에서 기적을 본다면서 누리꾼들은 환호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그 기적의 아기는 끝내 작은 인큐베이트 안에서 눈 한 번 제대로 떠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고 이렇게 푸르른 어머니와 아기가 어이없게도 어른들 욕심의 희생제물이 되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 슬픈 소식은 전 세계 누리꾼들의 분통을 터트리기에 충분했다. 언제나 그렇듯, 전쟁의 희생자는 항상 힘없는 아이와 여자. 노인이란 것이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자기 백성을 보호해야할 지도자 ‘하마스’가 오히려 자기 백성을 방패로 삼아 자기의 욕심을 충족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제적, 수적으로 열세한 ‘하마스’가 이스라엘 민간인을 타켓으로 자살 테러를 부추기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보복을 목적으로 가자 지구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 민간인의 거주지도, 어린 새싻들의 배움터인 학교 건물마저 아랑곳하지 않고 무차별적인 폭격을 가하고 있다. 지금껏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사망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보건부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대규모 공격으로 죽은 가자지구의 희생자 3분의 2는 민간인이라고 한다. 팔레스타인 인권센터에 따르면, 가자지구 주민 약 13만 명은 집을 떠나 국경 쪽으로 피신했고, 6만 명 이상은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기구가 학교시설에 마련한 대피소로 몸을 피하고 있다. 이들은 전기 공급 중단과 식수, 의료품 부족 등으로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무서운 일의 시작(뿌리)은 어디서부터인가? 그것은 사명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인간의 욕심 때문이다! 육적으로는 양국 간의 권력욕, 물질 욕이고 영적으로는 이스라엘과 이스마엘의 숙명관계다. 이스라엘은 성경에 근거한 약속된 땅을 되찾고자하는 시도, 즉 사명으로 포장된 욕심이지만, 세상법과는 조화될 수없는 시도라 하겠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질문을 받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입술로는 아름다운 말로 자신의 마음속 욕심을 포장한다. 물론, 모두가 다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많은 전문인들이 그렇다. 억울한 자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호언장담하는 변호사님들, 그러나 막상 억울한 일을 당해 찾아가면 터무니 없이 비싼 사례비를 요구하는 것을 보게 된다.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하는 의사선생님들, 때때로 진료비가 없으면 진료를 거부하기도 하는 것을 보면 사명으로 포장된 욕망의 끝은 어딜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정치인들에게서는 더 이상 기대할 것도 없겠다.

이런 예는 성경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구약 성경의 발람이 그랬고, 신약의 가롯 유다가 그랬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께 다가와 “랍비여, 평안하십니까?” 입맞춤으로 자신의 욕심을 포장하였다. 구약성경의 발람 선지자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직분을 가지고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려하는 삯꾼 목자, 거짓 선지자의 대표적 인물이다.

유다서 1장 11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발람의 길’이란 삯꾼 목자의 길이다. 이렇듯 하나님이 주신 직분을 사사로운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삼는 자에겐 멸망과 심판이 기다릴 것뿐이다(딤전 6: 20-21). 그렇다면, 현대 교계는 예외인가? 목사님들은 과연 제대로 된 사명 자들만 계실까? 현란한 말솜씨가 사명자의 길인가?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바른 복음을 전해야 한다. 특히, 부름을 받은 자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이란 것이다.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기쁜 소식이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나눌 수 있어야 하고 그 복음을 위하여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사명 자는 행동하기 전, 먼저 본인의 삶 속에 사랑의 주체이신 주님을 만나야 한다. 주님을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는 “내가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일하는가?” 확실한 목적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일에만 집착하다 보면 본인에게도 남에게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내 마음 가운데 과연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여유와, 충만함, 그리고 참사람, 그리스도의 피로 회복된 전인적 인격을 갖춘 모습이 있는지 없는지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결국 복음은 “일”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사역도 마찬가지다. 내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하여, 이 일을 하는 것인지, 그 대상과 목적을 분명히 해 두지 않으면 이토록 맹목적이 될 수 있으며 그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나는 지금 누구를 위해 살고 있으며 하나밖에 없는 나의 생명, 누구를 위해 바칠 것인가? 한 번쯤 깊이 생각하며 심사숙고해 보아야 한다는 것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성도는 물론이거니와 복음을 맡은 사역자들이라면 더욱더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역자가 자신의 사역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동역 자들, 부교역자나 곁에 있는 형제. 자매들에게 상처를 입히고도 나는 거룩하고 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내가 가장 많이 알고…등등의 자고 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지도력 혹은 깨달음을 따르라 강요하고 있는가? 또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도 더욱 효율적인 사역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의 희생은 당연하다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도대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사역이란 말인가? 욕심이 사역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사례라고 보겠다. 이 시점에 와서 우리는 주님의 사역 방법을 다시 한 번 배워보고 우리들의 사역자세도 재검토해 보아야만 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오셔서 감당하신 사역이 무엇인가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이지 사람을 희생시키며 그들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입히고 죽이려 함이 아니었다는 그 중요한 사실을 우리는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혈기를 죽여야 한다, 교만을 죽여야 한다, 정욕을 죽여야 한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정신없이 뛰고 있는가? 일의 동기 가치를 부여하라(value entitlement), 목적에 가치를 부여하라, 발걸음(행보)에 가치를 부여하라, 삶의 가치를, 죽음의 가치를 부여하라.

우리는 심지 않은 것, 거두어들이는 일에 참여하는 것뿐이다. 생명으로 생명을 심은 이는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그 생명을 거두어들이는 기쁨에 참여하기 위하여 부름 받은 종일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심지 않은 생명을 주와 함께 거두어들이는 기쁨을 누리는 특권을 포기하면서까지 육신대로, 정욕대로 살겠다 고집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내가 지금 열심 내고 있는 그 일속에 그리스도와 그의 사랑이 빠졌다면 문제다. 그런 사람이나, 그런 마음으로 행하는 사역, 역시, 자살폭탄 테러범만큼이나 어리석고 무모한 짓이며, 사람을 죽이고 자기도 죽는, 그야말로 일말의 가치조차도 없는 하찮은 일에 목숨 거는 것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사람의 영혼을 죽이는 병기로 사용되게 원수에게 내어주지 말고 사람을 살리는 일, 그리스도의 일꾼, 의의 병기로 사용되어지도록 주님께 내어 드려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잘못된 믿음, 올라가려고 하는 마음, 진실함이 없는 현란한 언어의 유희, 내면적 그리스도인이 아닌, 표면적 유대인이 되어서 외식하는 지도자들, 이렇게 허황된 신기루 같은 거짓 믿음을 사명자란 그럴듯한 포장지로 미화시키는 마음이 자기 자신과의 분열, 대인 관계에서 분열과 자중지란을 일으키게 되고, 더 나아가 감정을 와해(瓦解)시키고, 결국 모든 것을 공중분해(空中分解)시켜버리는 것이라고 말하면 너무 무리한 말일까?.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분량대로 그리스도의 선물인 은혜를 주셨다. 서로 다른 극단적인 견해차를 보일 수도 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데 도구로 사용하길 원하신다. 욕심을 버리면 내가 보이고 내가 보이면 우리가 보일 것이다.

나와 너 우리, 모두 다르다. 다양성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안다면, 나와 다르다고 하여 형제. 자매를 원수로 삼지 않을 것이고 사명이란 이름 하에 상대를 무차별 사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와 다르면 비록 성경에 있는 말씀을 믿는다고 고백할지라도 나와 다른 견해는 이단으로 몰아 죽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어디로부터이겠는가? 내 마음속에 과연 올라가려하는 욕심이 없는가? 생각해보아야 한다.

상대를 정죄하기 전,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마음을 넓혀야 한다. 나와 다른 것은 수용하고 공존하며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것을 주께서 원하고 계심을 항상 염두에 두고 행한다면, 결코 사명이란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죽이려 모함하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누구를 위하여 일하고 있느냐.” 내 영혼 깊숙이 파고들듯 울려오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나는 통곡한다. 나 자신만이라도 형제의 영혼을 먼저 생각할 수 있기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로마서 12:3)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이것을 좇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찌어다 "(딤전 6: 20-21)


USA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고전15:1). 복음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전하시는 메시지이기 때문에 당연히 반응을 요구하고, 또 반응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본문은 복음을 전해 들은 고린도 교회가 그 위대한 가치에 적합한 태도로 복음을 받아들였고, 그것을 발판으로 하나님 앞에 섰다고 말한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우리도 그래야 한다.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받아들여야한다. 이 말은 매우 놀랍고 혁신적인 성경 용어다. 첫째, 서로 모순되거나 반대되는 것이 둘 있다면, 그중 하나를 받아들이는 것은 곧 다른 하나를 거부하는 것이 된다. 복음과 세상은 서로 유사점도 없고, 친밀하지도 않다. 따라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세상을 거부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세상을 거부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큰 혁신인지를 잘 보여준다. 복음을 받고 그 요구에 따라는 것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붙잡고 있는 것을 모두 버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을 뜻한다(11:1,7,27,벧전1:8).

 

2,000년 전, 반란죄와 신성모독죄로 처형된 메시야를 섬기기 위해 개인의 자율성과 자치권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다수와 다수의 견해를 거부하고 교회라는 핍박받는 소수 대열에 합류하는 것을 뜻하며, 십자가에 매달린 선지자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의 구원자이시라는 믿음을 위해 온갖 희생과 위험을 무릅쓰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기도를 드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세상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온전한 진리를 전폭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둘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여기고 그분을 온전히 신뢰한다. 그러나 세상은 어떤 것 하나만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처사라고 가르친다. 기독교 신앙은 배타적이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영접했다면,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희망을 두어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면, 죄를 증오해 멀리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 외에 다른 모든 것(특히 자아)을 포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그의 공로나 선행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순간도 용납하지 못한다. 그는 선행을 구원의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로지 그리스도의 인격과 온전하신 사역만 전적으로 의지한다.

 

셋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삶을 복종시키는 것이다.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주인은 오직 예수 뿐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다고 말한다(2:36). 하나님은 그분의 왕을 거룩한 산에 세우시고, 그분에게 반역하는 이들을 비웃으신다(2:4-6).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마치 그런 힘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예수님을 주님으로 세우라고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분이 세우신 주님께 철저히 복종하며 살라고 명하실 뿐이다. 따라서 복음의 은혜를 받아들이기 원하는 사람은 모든 자율성과 자치권을 복음의 주님께 기꺼이 넘길 것인지를 먼저 결정해야 한다.

 

복음 설교자는 이런 말의 뉘앙스를 명확하게 설명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현명하면서도 가장 위험한 일이라는 사실을 구도자들에게 분명하게 설명해야만 정직한 설교자가 될 수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시는 예수님은 또한 모든 것, 심지어 목숨까지도 내놓고 이 어둡고 타락한 세상에서 그분을 위해 일하라고 명령하신다(11:28,10:16,39).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12:1).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영적 예배, 합당한 예배이다.

 

넷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새로운 현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에서 신학자들은 구원과 신앙생활의 중심이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의 궁극적인 동기이자 목적이요 원천이시다. 그분은 우주의 중심이시다. 복음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삶 전체가 완전히 달라진다. 우리 삶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뀐다.

 

처음 회심했을 때 겉으로 드러난 극적인 현상은 없을지라도, 그 효력은 점차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다. 호수 중앙에 던진 작은 돌맹이처럼, 복음의 파장은 그리스도인의 삶 가장 바깥쪽까지 구석구석 퍼진다. 참된 회심자는 복음을 이전 삶에 추가되는 부가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복음으로 옛 사람을 대체한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옛 삶은 버려진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16:25).

 

마지막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스도를 삶(생명)의 원천이요 유지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삶의 일부로 여기거나, 이미 소유하고 있는 다른 좋은 것들에 하나를 더 보태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수님은 우리 삶을 좀 더 아름다워 보이게 만드는 장신구가 아니시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분 자신이 곧 우리 생명이 되신다(3:4).

 

과거에 아무리 훌륭하던 것도 그리스도와 비교하면 배설물에 지나지 않는다(3:7,8). 비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생명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이룬 개인의 업적은 한갓 헛된 허영심을 보여주는 증거물, 곧 눈 깜짝할 새에 무너질 모래성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루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6:53)고 가르치셨다. 어려운 말씀”(6;60)은 그리스도가 단지 삶의 양념이나 보완물이 아니라 생명의 유지자이시라고 증언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요, 사막에서 생수를 내는 바위시며, 생명과 열매 맺을 능력을 공급하는 포도나무시다(6:31-35,41,47-51,고전10:4,15:5,6).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영접한 자는 양식이 아닌 것과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해 살지 않고,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 곧 먹고 죽지 않게 하는 양식을 위해 살아간다(55:2,6:50).

 

설교자는 죄를 뉘우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복음을 맏아들이라고 외쳐야 한다. 설교자는 만족을 주지 못하는 이 시대의 양식을 버리라고 외쳐야 할 뿐 아니라 사람들을 참된 양식이 쌓여 있는 곳간으로 인도해야 한다. 다윗처럼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34:8)라고 권고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계속해서 경험하고, 그분 안에서 만족을 찾으며, 그분과 한시도 떨어질 수 없다는 마음이 있어야만 비로소 그분의 구원을 진정으로 맛본 것이라고 가르쳐야 한다.

 

- 폴 워셔, 복음, pp 22-27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결혼은 미친 짓, 이런식이라면...

 

"색다른 결혼식  열망이 지나쳐... 누드로, 번지점프하며, 상어소굴에서..."


결혼식장이나 교회, 성당만을 결혼 예식의 장소로 생각하십니까?  색다른 곳에서 색다르게 예식을 치르려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누구나 결혼식을 잊지 못할 예식이 되게 하고 싶으니까요. 그런데 색다른게 아니라 아주 심하게  유별난 걸 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령  나체로 하는 결혼식, 번지점프하면서 결혼식, 상어소굴에서 하는 결혼식 등 말이죠.
 
 

| 누드 결혼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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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장점은 신랑이건 신부건 돈들여서 예복 맞춰 입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들러리도 최소한의 치장만 합니다. 하객들도 훌훌 벗습니다. 피로연에서도요. 플로리다주의 사이프레스 코브 리조트는 누드촌으로 사랑받는 곳인데 1년에 10건 정도 결혼식이 열립니다. 겉치장을 벗어버린 가장 순수한 모습으로 결혼맹세,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 보이네요. 디즈니월드가 있는 올랜도에서 남쪽으로 30분만 가면 나옵니다. 

 

| 번지점프 결혼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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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강심장을 지닌 사람만이 하는 것. 이런 메시지를 온몸으로 말해주고 싶은 것일까요?  50여m 상공에서 예식을 치른 후 ‘결혼 행진’ 대신 번지점프로 화끈하게 떨어집니다. 굳이 하늘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커플에게 물어봤더니 대답이 그럴 듯 하더군요. “하늘의 천사한테 좀 더 가까이 가고 싶어서예요.”

 

| 얼음 궁전에서 결혼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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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벡시티의 글레세이 호텔에선 영하의 아이스 홀에서 결혼식을 할 수 있습니다. 새하얀 순백의 세상에서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는 세상에서 가장 순결한 자태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을 겁니다. 신랑 신부의 결혼맹세가 영하의 온도에서 꽁꽁 얼어붙어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아요. 그리고 신부에겐 평생 얼음공주라는 별명이 따라붙겠죠.

 

| 코끼리 등에 업혀 결혼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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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품위와 우아함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인도네시아에서 거대한 코끼리 등에 올라타 결혼행진을 하는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옛 수마트라 왕국의 결혼식 처럼 커플은 화려하게 치장한 코끼리 등 위에서 성혼 선언을 하고 행진을 합니다. 코끼리에서 내리면 그곳이 바로 발리섬의 허니문 리조트입니다. 수마트라 코끼리는 멸종위기 동물이라 예식 비용의 일부는 코끼리 보호기관을 위해 쓰인답니다.

 

| 상어 소굴에서 결혼식 With Some Fishy Guest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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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롱아일랜드 수족관에서 평생 잊지 못할 결혼식을 치를 수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상어가 바로 옆에서 기웃거리는 가운데 신랑 신부는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라고 비장하게 결혼맹세를 하게 됩니다. 주변 분위기와 아주 잘 어울리겠죠? 갑자기 “결혼식은 용궁 예식장~ 주례는 문어 아저씨~ 하객은 상어~ 예물은 조개 껍데기~” 라는 동요가 떠오르네요.

 

| 수퍼마켓, 음식점에서 결혼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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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의 쇼핑 공간이 어떤 이들에겐 유니크한 결혼장소가 됩니다. 주례사가 끝나고 퇴장할 때 마트의 카운터에서 결혼증서를 떼면 되겠습니다. 전에 한번은 맥도날드에서 결혼식을 치른 커플도 있어요. 피로연 음식은 빅맥으로 저렴하게!

 

박흥우 - 가시꽃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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