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편 나무 ♥


어느 날 남편이라는 나무가 내 옆에 생겼습니다.

바람도 막아주고, 그늘도 만들어주니 언제나 함께하고 싶고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나무가 싫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나무 때문에 시야가 가리고

항상 내가 돌봐줘야 하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할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내가 사랑하는 나무이기는 했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그런 나무가 싫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때로는 귀찮고 때로는 불편하게 함으로

날 힘들게 하는 나무가 밉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괜한 짜증과 심술을 부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더니 어느 날부터 나무는 시들기 시작했고,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심한 태풍과 함께 찾아온

거센 비바람에 나무는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럴 때 나는 그저 바라만 보았습니다.


그 다음날 뜨거운 태양 아래서,

나무가 없어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여겼던

나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때서야 나는 깨달았습니다. 내가 사랑을 주지않으니 쓰러져버린 나무가

나에겐 얼마나 소중한 지를,


내가 남편나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이에 나무는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그늘이 되었다는 것을...

이미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는 쓰러진 나무를 일으켜

다시금 사랑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나 필요한 존재임을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남편 나무님! 죄송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여러분들의 남편 나무는 혹시 잎이 마르거나 조금씩 시들진 않는지요?

남편이란 나무는 사랑이란 거름을 먹고 산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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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리스도와 연합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해하기 위해 언약을 알아야 한다.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의 언약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 전에 예정한 목적은 하나님과 우리와 특별한 관계를 맺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우리를 자기의 자녀로 부른 것이다.하나님과 아담의 교제는 언약을 전제로 한 것이다. 아담을 만드시고 정기적인 교제를 하신 것은 언약을 전제로 하신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는가? 선택의 목적이 무엇인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특별한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 특별한 관계는 언약적 관계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그 분의 백성이다 라는 특별한 관계이다. 이 언약적 관계는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이다. 즉 구원의 관계이다.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을 사람으로 우리를 선택하셨다. 그 특별한 관계란 언약적 관계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언약적 관계에서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이다 곧 구원이다. 구원이란 사건인 동시에 사건보다 선행하는 것이 있다. 구원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안에 들어가는 것이고 인격적이고 구체적인 관계 안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다. 예정하심을 따라 그 특별한 관계를 갖게 되는 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 관계를 맺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알고 나도 하나님을 알고 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나님은 나를 자기의 자녀라 부르는 특별한 관계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바로 이 특별한 관계에 들어갈 대상으로 우리를 예정해 주셨다. 그리고 예정하심을 따라 그 특별한 관계를 이루는데 하나님의 형상이 필요하다. 이것이 아니면 결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이 관계를 맺기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야 한다. 지식이 지식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식이 없다면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하나님은 무한자고 우리는 유한자다 무한자와 유한자가 인격적인 교제를 맺는 것이다 어떻게 맺는가? 우리는 아버지라 부르고 하나님은 우리는 자녀로 부르고 우리는 감사하고 찬송하고 대화하고 느끼고 그 친밀한 관계속에 들어가기 위해 무한자와 유한자가 사이의 존재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그 한계를 뛰어 넘을수 있는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인격적 교통을 가능하게 하는 채널이 있어야 한다. 그 채널로서 하니님께서 자기의 형상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지식이 있다.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것이 없이는 기독교의 종교는 없다. 그것이 없이는 예수그리스도가 와도 우리를 위해 죽었을 찌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질 수 없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야, 은혜도 알고 감사도 알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줄도 알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만약에 이것이 없다면 땅에 기어다니는 구더기에게 미분 적분방식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이치이다. 여러분! 하나님이 어떠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전능자이시다.


  우주는 너무 광대하다. 우주를 아는 사람만이 우주가 광대하다는 것을 안다. 이 모든 것을 떠받들고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이런 하나님과 우리가 어떻게 교제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형상을 주신 것이 하나님의 언약적인 관계 안에 우리를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다. 이 언약적인 관계는 특별한 관계다. 이것은 전폭적인 헌신하는 관계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우리는 그 모든 은사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 안에 들어가기 원해서 부르신 그들에게 은사를, 언약을 주신 것이다. 우리를 언약적 관계로 만드신 것이다. 구원은 이런 언약적 관계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믿고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성령을 양자의 영이라 부른다. 말하자면 성령의 사역도 우리를 예정하신 대로 언약적 관계로 들어오시게 하는 관계다. 하나님의 형상을 아담에게 주실 때 하나님은 아담으로 대표되는 모든 이의 아버지가 되고자 하는 신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눅3장38절에서 아담을 사람의 조상으로 하나님을 말씀하고 계신다. 아담을 지으실 때 하나님은 아담으로 대표되는 모든 선택된 사람들이 언약적 관계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창세기에 보면 아담에게 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고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먹지 않도록 명하셨다. 이것이 언약의 징표다. 그 사람이 언약에 머무는지 머무르지 않는지 가리기 위한 시험지다. 그것을 따먹지 않은 한 그가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 안에 있음을 그도 알고 하나님도 알고 세상도 아는 것이다, 그것을 어기면 언약적 관계가 파괴되고 더 이상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선택한 사람들을 부르시고 항상 부르신 다음에 언약을 세우셨다. 아브람 부르시고 언약을 세우시고 이삭에게 아브람의 언약을 새롭게 하시고 야곱에게 아브람의 언약을 새롭게 하시고 계속 언약을 새롭게 하셨다. 애굽에서 백성들을 이끌어 내시고 모세를 통해서 언약을 세우셨다. 나중에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을 파괴한 사람들이라고 책망하셨다.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너희들을 회복시키신다 하셨다. 예수님도 유월절 전날 밤 마지막 식사 때 이것은 나의 피로 살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라고 하셨다. 우리가 지금 언약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룻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 룻도 하나님의 약속이 보장되어있는 언약 안에 들어오는 신앙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다. 올 때 그를 하나님이 복되게 하셨다. 언약을 지키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언약에 들어갈 사람을 불러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가게 하는 사역이다.


  고전 15장 21~22절, 롬 5장 12절~17절 구원에 관한 언약적 배경을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구절이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아담을 대조하는 것이다. 구원을 이해하는 도표가 있다. 이들은 실제적으로 역사에 존재하였던 인물이다.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이다. 구원의 원리가 여기에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언약의 머리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에 나타나는 것이다. 아담이 언약의 대표자로서, 아담이 하는 모든 행동의 결과는 아담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그대로 미쳐진다는 대표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고 아담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 그것이 바로 동산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라는 아담만 죽는 것이 아니라 아담으로 말미암는 모든 인간의 후손들이 아담처럼 범죄한 자로 아담처럼 범죄하고 아담처럼 죽는다는 언약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몸이 죽는 것은 생물학적인 죽음이 아니라 종교적인 죽음이다. 언약을 깨뜨린 자가 겪는 결과이다. 그래서 아담은 결국 자기 자신의 한번의 범죄로 모든 사람들이 사망에 이르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죄를 만든 사람은 아담 한 사람이다. 죄를 지어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난 것이다.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 되었다. 이것은 거부할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이다. 이 모든 사람은 아담처럼 죄를 범했다. 행위로 죄인된 것이 아니라 언약으로 말미암아 죄인된 것이다. 내가 언약에 속해 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다. 같은 원리로 모든 사람이 의로움에 이른다는 것은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언약 때문에 의롭다 인정을 받는 것이다. 오로지 예수그리스도의 새 언약에 들어가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이다. 새 언약에 들어가는 수단이 무엇인가? 성경은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한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자기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마찬가지로 믿는자가 그 언약에 들어가는 것이다. 죄인 되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 되는 것이다. 태어나는 것을 중생이라고 말하는 것의 의미는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중생케 하므로서 예수그리스도의 새 언약에 참여하는 것이다. 영적 출생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연적인 출생은 육체로 말미암아 영적 출생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는 것이다. 구원은 행위로 얻지 못한다.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 성령의 아버지 삼위일체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으로써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결코 없다. 오직 언약으로 구원받는 것이다. 언약에 참여하는 자만이 구원받는다. 언약에 어떻게 참여하는가? 믿음으로 참여한다. 그 믿음이 성령의 중생케 하심을 일으키신다. 그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보면 구원의 서정을 다루고 있기는 한데, 원인과 결과식으로 기계적인 사고방식으로써 연쇄적인 도미노 현상을 일으키는 것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10장~16장에 보면 언약적 모델로 되어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구원의 경험을 원인과 결과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신론적인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구원의 서정을 다루고 있다. 구원의 서정을 언약적 이해를 바탕으로 다루게 되면 한가지 사실을 강조한다, 그 한 가지 사실은 그리스도의 연합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연합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성도들을 언약으로 한대 묶는 것이다. 한 덩어리가 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이란, 칭의와 성화처럼 구원의 경험중의 하나가 아니다. 구원의 경험을 그리스도의 연합의 결과라고 한다. 그리스도 연합안에는 모든 구원의 경험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연합을 통해서 구원의 경험이 이루어진다. 구원의 경험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출발한다. 구원의 적용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적용이다. 성령은 우리안에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한다. 엡5장 30~31절 “우리는 그의 몸의 한 지체다...”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가 하나가 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되는 결정적인 증거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우리 몸이 성전 이라한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신다는 뜻이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연합 때문이다. 남녀가 결혼해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약적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치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한 몸이 되는 것인데, 이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연합을 의미한다. 교회와 그리스도를 하나로 결합시키는 힘은 성령으로부터 온다.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언약적 관계이다. 그것이 곧 교회와 그리스도와 관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공동운명체이다. 교회원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를 결합시키는 힘은 바로 성령으로 부터이다. 언약적 관계를 깨버리면 하나가 될 수 없다. 깨어 버리면 한 몸 한 지체가 될 수 없다. 약함은 우리에게 있다. 그러나 우리의 약함을 도우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은 회개하게 하고 믿음을 갖게 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고 결국 언약의 테두리 안에 머무르게 하고 육체를 죽이고 성령에 따라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즉 죄를 죽이고 성령께 순종하게 하는 이유는 언약 안에 머무르게 하시는 것이다. 성령의 목적은 죄를 소멸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의 소멸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로운 신부로 그와 연합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것이 일반 세상윤리와 다른 것이다. 죄의 소멸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그의 순결한 신부로 언약의 동반자로 그와 연합하기위해 죄의 소멸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룰.수 없고 그 연합의 결과로 주어지는 구원의 경험도 결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이 안된다면 구원의 경험이 없다. 칭의 회심도 없고, 믿음도 없고 회개도 안.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을 해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죄이다.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는 것은 이 죄에 끌려가지 않도록 역사하시는 것이다. 죄를 지어서 악한 양심이 회복될 수 있도록 사죄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사죄의 확신을 주시고 우리로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사모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우리를 감동케 하신다. 우리가 미처 회개하지 못한 것도 성령이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 가운데 기도해 주신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언약의 동반자로서 그리스도의 연합에 머무르지 못한다. 성령의 사역은 외적인 기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본질적인 그리스도의 형상 만든 요소에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야 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것은 명령인 동시에 필연적인 귀결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연합에 관한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구약성경에 연합적 힌트가 있다. 대제사장이 백성들의 죄를 속죄할 짐승 머리 위에 안수하고 그 짐승을 잡아 속죄의 제물로 드린다. 이럴 때 안수할 때 그 대상인 짐승과 제사를 드리는 제주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 짐승은 그 죄를 지은 사람의 자리에서 그 사람을 대신해서 죽음으로서 그 사람의 죄를 속죄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개인의 인격적인 개체성을 믿는 믿음 때문에 불신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언약적으로 다루신다.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죄도 언약으로 사해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다. 하나님은 구원을 언약적으로 다루시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이 숨을 쉬어야만 살 수 있듯이 이것은 정해놓으신 질서이다. 언약으로 말미암아 죄인되고 언약으로 죄사함 받는다. 다른 것으로 절대 죄시힘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구약에 동물제사가 많이 행해졌던 것은 언약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속죄를 완성하신다. 그의 죽음이 대속적 죽음이다. 우리를 위한 언약에서 대신하신 죽음이다. 실제로 나의 죄가 그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그가 다신 부활하심으로 나의 죄가 확실하게 해결되었다. 그 외에는 죄가 해결되는 방법이 없다.


  이사야 53장 4~6절, 이사야 53장 11~12절에서 고난 받는 종의 기사가 나온다. 고난 받는 종의 고통은 그 고난 받는 종에게 붙은 모든 사람을 위한 고난이다. 채찍을 맞고 질고를 당하고 사람들에게 수욕당하고 버림당하고 결국 죽는 그 모든 그의 고통은 그가 고난 받는 종과 붙어있는 모든 사람의 위한 고난이다. 내가, 그리스도가 고통 받을 때 언약적으로 내가, 그와 함께 고난을 다 받았고 그가 장사되어 죽을 때 내가, 언약적으로 그와 함께 죽고 그가 부활할 때 내가, 함께 부활하여 산바 되었다. 이것이 성경의 진리이다 마25장40절“작은 소자”를 자기와 동일시(identify) 한다. 언약적으로 하나로 묶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약적으로 가장 작은 자와 억울한 자와 버림 받은 자와 자기와 동일시한다. 구제하는 것은 없어지지 아니하고 잊혀지지 아니하고 소멸되지 아니하고 그것이 언약적으로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하는 것이다. 언약적으로 예수그리스도에게 하는 것이다. 내가 헌금한 것이 다른 사람이 오용한다 할지라도 내가 바친 것이 오용된다 할지라도, 바쳐진 것이 무효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받쳐진 것이다. 헌금할 때 인간적인 생각을 하면 안된다. 오직 언약적 하나님만 생각해야 한다. 요15장에서 “포도나무와 포도나무의 가지”연합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구원의 경험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와 머무는 동안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있는 한 구원의 경험은 모두 내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은사가 모두 내게 주어진다. 하나님의 아들과의 연합이 중요한 것이다.


(3강 마무리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우리를 영원전에 예정하시고 작정하신대로 구속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송하기를 쉬지 않고 날마다 날마다 계속하게 하옵소서. 우리속에 하나님의 이 사랑이 붙들린 바 된 간절한 심령을 주사 하나님의 종되기를 마음 또한 생기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 언약에 동참한 바 되었고 하나님의 모든 은사를 우리 것으로 받았사오니, 우리가 복받은 사람이요 정말 참으로 행복한 사람임을 깨달아 알게 하시고 세상의 재물과 세상에 속한 것을 사모하게 하지 않도록 주님 우리를 날마다 붙잡아 주옵소서. 말씀을 읽을 때 마다, 그 말씀이 우리 속에 믿음의 기초가 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에 양심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이어서 coming soon....  6부. 구원과 언약의 관계 편입니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이게 진실입니다. / 폴워셔 목사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성화(Sanctification)
(관련말씀: 로마서 7장 계속입니다.)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부르짖던 사도바울이 25절에 이르러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하고 찬양합니다. 죄와 사망의 고통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터져나오는 사도바울의 찬양이 언뜻 이상하게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통스럽게 절규하다가 갑자기 이 찬송을 하는 것은 “아하, 이토록 절망적인 죄인, 결코 죄를 이길 수 없는, 구원해 놓아도 죄인인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구원하셨구나!” 하는 깨달음과 감사와 환희일 것입니다.
바로 뒤에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아, 그렇구나, 구원받은 나의 마음은 하나님의 소유(노예)이고, 나의 육신은 여전히 죄의 법의 노예로구나.” 하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 어쩔 수 없는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방법을 깨달은 깨달음일 것입니다.

“대신 죽어주심으로 죽음을 면한 죄인”
이것이 바로 우리 예수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어차피 구원 받았다고 해서 우리는 죄를 수용해서는 안 됩니다.
어차피 우리 연약한 육신이 죄의 법을 이길 수 없다 해서 죄와의 싸움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듯,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또한 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죄 때문이라면 우리가 어찌 다시 죄를 짓겠습니까?
히브리서 12장 4절은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 명령합니다.

그러나 죄와 싸운다고 해서 우리가 온전히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일평생 온전히 성화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성화(Sanctification)는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갈 때까지도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성화되어서, 거룩해져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대신 죽어주심으로 구원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때에도 여전히 죄인일 것입니다.

출애굽기 29장(레위기에도 있음)을 보십시오.
제사장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에게 청색, 홍색, 자색실로 수놓고 보석을 물린 아름다운 제사장 옷을 입힌 다음, 하나님은 그들의 오른 귀, 오른손 엄지, 오른발가락 엄지에 희생제물의 피를 바르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뿐 아니라 피와 기름을 옷에다 뿌리라고 하십니다.
그 멋진 제사장 옷을 입은 제사장들의 피투성이가 되는 것입니다.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끔찍스럽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와 그의 옷과 그 아들들과 그 아들들의 옷이 거룩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갈 때 이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일평생을 죄와 싸우며 아버지 앞에 이르기까지, 죄에 질 때마다 어린양의 피를 뿌리며, 우리의 손과 발이 피투성이가 되고 우리의 옷이 피와 기름범벅이 된 모습으로 하나님의 심판대 서야 할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피투성이가 된 우리를 향하여 “너와 너의 옷과 너의 아들들과 너의 아들들의 옷이 거룩하리라.” 하고 성화(Sanctification)를 선언하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온전히 성화가 완성되고 완전히 거룩해질 것입니다.

죄악과 유혹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말세가 가까웠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왠만한 죄는 죄로 여기지도 않는 세상입니다.
그리스도인들까지 죄에 둔감해진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까지 죄 속에서 태연히 살아가야 할까요?

육신이 연약하다고 해서,
어차피 죄의 법을 이길 수 없다고 해서,
온 세상이 그렇다고 해서,
죄와 피나게 싸우지 않아도 구원은 받는다고 해서 죄와의 싸움을 포기하시겠습니까?
그리하여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말끔한 차림과 맨송맨송한 얼굴로 하나님 앞에 서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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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호수
             최송연

 

넓은 저 하늘 닮고 싶어
산이 외롭다면 산을 품고
별이 투정하면 별을 품고

 

돌이 날아들면 그 돌마저 품으니
누가 가시채를 던진다 한들
되갚아 줄 리 없는 깊은 수심,

보드랍기가 천사의 치마 폭 같아라

 

때때로
불어치는 모진 광풍에
할퀸 생채기 아파 눈물 흘릴 때면
달빛 내려앉아 쓰다듬어 주니
은가루를 뿌린 듯

밤 깊을 제면 되려 더 반짝이네

 

이제 곧 폭설 내려치는
무서운 겨울이 닥칠 것이나
그때도 달빛이 함께 할 것을 믿으니
두렵지도 외롭지도 않으리라



 

**달빛 같은 주님의 은총을 힘입어

역경을 견뎌내는 성도의 삶을 그린 것임**

 

 

 

 


 



 

마음이 따뜻해지는 아침입니다.

깨끗하고 맑은 사모님 글을 읽고

쭈~~욱 찾아 읽고 감사한 마음을

가을색으로 드립니다. -은총

 

저의 졸詩 '가을 호수'를
읽고 이렇게 아름다운 선물을
작품을 만들어 주신 '은총 ' 사모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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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세 가지 간구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승구 교수는 마틴 루터의 명언인 "하나님을 진정 하나님되게 하라!" 라는 말을 들고서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어 있는 우리 안에 하나님 자리가 없을 수 있다!"고 강하게 경고한다. 모든 역사가 하나님 중심으로 흘러가야 이 땅 위에서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거룩히'라는 말을 '무겁다'라는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승구 교수는 거룩한 하나님을 가벼이 여기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물 위에 떠 있는 배는 어느 정도 중심 한 가운데가 무거워야 함을 예로 들면서 말이다. 균형 잡힌 삶과 예배가 있어야 앞으로 나아가는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 삶도 하나님 중심의 '무거움'을 가지고 그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허물을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무겁게 눌러 다시는 기도와 예배를 중심으로 죄악, 연약함 앞에 넘어지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무엇을 하든지 이 땅 위의 모든 자녀들이 그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게 함으로 하나님의 무거운 거룩하심을 만천하에 알려야 한다. 우리의 삶과 영혼이 그의 거룩함에 가득 차 자신을 위한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재배열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미소와 감동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 받아 개인의 삶이 제대로 정립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존재가 거룩하게 드러나기를.

"무거우심"의 용어를 자주 사용하는 이승구 교수가 말하는 핵심은 "우리가 무언가 노력한다고 해서 혹은 기도와 예배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더 찬란하게 비추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의 노력도 모습을 떠나 그분은 그 영광 자체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루에 몇 시간씩 기도한다고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이 더 짙어지거나 흐려지지 않는다. 또한 예배적 측면에서 주일, 수요일, 금요 철야, 새벽기도까지 빠짐없이 나오고 봉사하고, 구제하고, 선교하고 목회하여도 하나님의 영광이 더 찬란하게 발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실수로 인해 긁혀진 유리의 흠집같이 우리의 잘못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흠집이 더 가해지는 것도 아니다. 칼빈 역시 하나님의 '자비·전능·진리·완전함·거룩함'이라는 크고 놀라운 속성을 말하며 "우리가 간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엄이 그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들 안에서 거룩하여지기를 비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아무것도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이미 완성된 '거룩히 여김'에 대해 다시 한 번 새겨 보아야 한다. 그의 거룩함은 절대 사라지지도 더해지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것에 동조할 수 없다. 다만 그 거룩함을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역사·정치·경제·문화·과학 전체에서 우리의 위치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우리의 삶과 예배가 하나님의 영광을 극명하게 비추는지 살펴야 한다. 만약 '우리 내면의 하나님을 버리는 일'에 빠져, 전혀 하나님의 영광에는 흠집이 없는데도 삶과 예배의 균형이 깨지고 있다면 이는 되돌아보아야 한다. 균형 잡힌 삼위일체적 하나님 중심에 우리의 마음을 담아 두지 못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게 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껴야 한다.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을 치유하고 비추는지 우리의 마음을 살피고, 그 안타까움과 불편함을 심각하게 자각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이내 울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의식이 이 땅에 존재하는 하나님을 가리지 않는지, 물질에 어두워 예배를 뒤로 미루지 않는지, 모든 것들이 내 중심으로 흐르지 않는지, 이런 내면을 자각하여 '내적 심리적 공황'이라는 심각한 자각을 가지면 이 땅 위를 울리고 대지를 적신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우리의 두 번째 간구는 완전한 '하나님나라'에 관한 것이다. 칼빈이 말하는 하나님나라에 관한 개념은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자기 백성 위에 행하시고 다스리어 그의 선하심과 자비의 부요가 그들이 하는 모든 일 속에 나타나도록 하는 일이다"라고 정의한다. 하나님은 그의 나라의 '통제성과 현재성'을 이룩하기 위해 우리 손을 내밀기 바라신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승구 교수가 말하는 '3중적 의미'를 바라보자.

첫째, 예수를 통해 이미 통치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에 감사해야 한다.


둘째, 우리의 목표를 가지고 전진해 나가는 '하나님나라'를 친히 삶에서 이루도록 기도한다.


셋째, '하나님나라'는 '아직 아니 하심'(아직 이룩되지 않았다는 의미)으로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의 나라를 혼자 이끌어 가고 있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이 하나님나라에 이바지함으로 그의 나라를 바꾸거나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의 통치와 하나님나라에 협조하는 의미로 동참하는 것뿐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이승구 교수는 강조한다. 우리는 '삶과 말'로서 하나님나라가 과거에 이룩했으며 하나님께서 지금 통치하고 있다는 것들을 전하는 '하나님의 메신저'일 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대리인이고 그의 '메시지' 역할을 할 뿐이다.

기독교인들이 아닌 자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인 '하나님나라'의 일부분인 이 세상 속에서도 '번창함과 통제함'을 분명히 보여준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는 정녕 이 땅과는 무관하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나님나라'(요17:14)의 성격은, 영적이며 부패하지 않고 영원한 성격을 띤다고 칼빈은 부르짖는다. 진정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해 정신 차리고 '하나님나라' 메시지 역할을 하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번영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동조해야 하나, 일반 사람들은 칼빈에게 선교 사상이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주님께서 새로 믿는 자들을 날이면 날마다 그의 백성에 더 보태사"라고 주장하면서 선교에 눈뜨지 못한 때부터 이미 선교를 향해 마음을 두고 있다. 우리는 지금 선교적 마인드로 "하나님나라가 어서 오소서!"라고 간구하며 기도해야 한다. 칼빈은 우리가 공동체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들에 회초리를 가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계시가 이루어짐에 따라 우리는 이승구 교수가 말하는 '신비한 연합'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예수와 함께 동조한 수많은 선교사, 순교자, 봉사자들과 늘 함께 한듯하다. 비록 몇 십 세대가 지났지만, 마치 과거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고 문제를 제기하며 동일하게 받은 세례를 통해 연대감과 연합을 이루어 나가는 단계를 말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다"

"우리가 이 같은 간구를 할 때,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모두 버리고,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애정을 주님께 향하도록 조정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되 우리의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작성하신 대로 해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라고 칼빈은 세 번째 간구의 특성을 제대로 드러낸다. 즉 하나님은 개인에게 성령을 주었고 그 성령의 인도함에 따라 '하나님이 작성한 기도'를 해야 한다.

우리는 늘 내면의 깊은 자각이 없이 그저 보이는 대로 간구하며 보챈다. 이에 대한 인간의 심리를 이승구 교수는 "우리는 간구하라고 하면 늘 '바라는 바'를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바라는 바'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헬라어로 "에피두미아 (-epithoumia)", 즉 "~ 하려는 관점이나 의도로"라는 뜻이다. 인간의 보이지 않는 '욕망', '욕구', '탐욕', '정욕'등을 품고 있는 속마음을 일컫는다. 하나님의 뜻을 등지고 사는 사람들의 에너지가 너무 충만하여 하나님이 그 안에 들어갈 수가 없고 그 인간적 '에피두미아의 마음'은 쉽게 버릴 수 없다.

나의 잘못된 '바라는 바'대로 흘러가는 기도보다는 하나님을 향해 '에피두미아'의 성격을 지녀야 한다. 나의 애정이 하나님에게 향하여 나의 성령과 마음이 감화 감동되어 육체의 고집과 연관한 '에피두미아'적 요소는 버려야 한다. 지구상에서 진정 다른 자와 차별되어 아름답고 찬란한 영적 하나님과 연관하며 구별된 자로 거듭난다. 이승구 교수는 이를 두고 "거룩성은 관계의 개념이다"라는 짧은 표현으로 단정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연인과의 대화처럼, 하나님의 마음과 교류한다. 그때부터 이제 모든 것이 거룩해진다.

하나님을 향한 간구에 대해 칼빈은 "우리가 간구하는 이 일들은 다 그때가 되면 우리의 생각이나 바람이나 간구 없이도, 일어날 일들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 일들을 여전히 바라고 구해야만 한다"라고 말하면서 간구를 정의한다. 우리는 기독교 세계와 다른 사상을 가진 자들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심지어 회의론자들은 '딴죽걸기'를 서슴없이 구사한다. 하나님이 최선을 모두 알고 있다면 기도할 것이 무엇이냐고 말이다. 그 '딴죽걸기'는 여기 '예수의 기도' 앞에 소용이 없어진다. 그의 길 앞에서는 모두가 다 겸허해진다. 그는 어떠한 상황가운데서도 늘 기도했으며 심지어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바대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아버지의 뜻대로 되길 기도했다.

"Prayer is not only asking, but an attitude of mind which produces the atmosphere in which asking is perfectly natural."
(기도는 '간구'일 뿐만 아니라 완벽한 자연이 되기를 간구하는 공기를 생산하도록 하는 마음의 자세이다) - Oswald Chambers(오스월드 체임버스)

이승구 교수 '기독교 고전 읽기' - 칼빈 <기독교 강요> 기도편: 예수의 기도(중)
출처: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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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숫자에 관심 없으신 하나님 / 로이드존스

      하나님께서는 거대한 군대를 동원하여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숫자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정결함과 거룩함,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숫자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되며,
      ...
      교리와 거듭남과 거룩, 그
      리고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며

      하나님의 거하시는 장소임을 깨닫는 일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사랑이란 이런 것- 어느 병원장의 일기 중에서
          아침 8시 30분쯤 되었을까? 유난히 바쁜 어느날 아침, 80대의 노인이 엄지 손가락 꿰맨곳을 제거하기 위해 병원을 방문했다. 그는 9시에 약속이 있어서 매우 바쁘다고 하며 나를 다그쳤다. 나는 노신사의 바이털 사인을 체크하고 의자에 앉으시라고 권했다. 아직 다른 의사들이 출근하기 전이어서 그를 돌보려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하지만 시계를 연신 들여다 보며 초조해 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내가 직접 돌봐 드리기로 마음을 바꿨다. 다행히 노신사의 상처는 잘 아물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노신사의 상처를 치료하며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서두르시는 걸 보니, 혹시 다른 병원에 진료 예약이 되어 있으신가 보죠?"라고 물으니, 노신사는 "요양원에 수용되어 있는 아내와 아침 식사를 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부인의 건강상태를 물으니, 노신사는 "아내는 알츠하이머 병에 걸려 요양원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어르신이 약속 시간에 조금이라도 늦으시면 부인께서 언짢아하시나 보죠?"라고 물었다. 그러나 노신사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뇨, 아내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지 5년이나 됐는걸요."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부인이 선생님을 알아보시지 못하는데도 매일 아침마다 요양원에 가신단 말입니까?" 노신사는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아내는 나를 몰라보지만, 나는 아내를 알아본다오." 노신사가 치료를 받고 병원을 떠난 뒤, 나는 흐르는 눈물을 애써 참아야 했다. 사랑의 참된 모습을 발견했다는 기쁨에, 내 팔뚝에서는 소름이 돋았다. 진정한 사랑은 육체적인 것도 로맨틱한 것도 아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있는 그대로를 오롯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 이 글은 참으로 제게 힘을 주기도 하네요. 저도 아내가 너싱홈(요양원)에 있거든요.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새삼 느껴봅니다... 오늘 하루도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마음과 사랑을 듬뿍 나누어 보세요. 행복하실 것입니다. -옮긴 글

          설교는 표절이나 모방이 아니다.

          설교는 이미 계시된 성경말씀을 전하는 것이기에 표절과 모방은 불가피하다는 식의 논리는 참으로 궁색한 변론이다. 물론 설교는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작이 아니라 말씀을 잘 듣고 전달하는 것이다. 설교의 원재료는 성경말씀이며 설교는 그 말씀의 충실한 해석에 기초해야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설교는 성경을 그대로 되뇌거나 주해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굳이 설교자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말씀도 그 시대의 사람들이 처해있던 특별한 정황 속에 주어진 말씀이었듯이 지금도 성령님은 이미 기록된 말씀을 통해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새로운 상황과 영적인 상태와 필요에 적중하는 살아있는 말씀을 들려주신다. 설교자의 임무는 자신의 공동체와 교인들에게 매 주 새롭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잘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설교자는 자신 안에 말씀이 풍성히 거하게 하며 그 말씀을 자신의 회중의 상태와 문제와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적용하는 성령의 지혜의 이끌림을 받아야 한다.

          이런 면에서 설교자는 노련한 외과의사와 치유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 좋은 처방책이라고 해서 모든 환자에게 다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똑같은 내용의 설교가 한 교회에서는 은혜가 되었을지라도 다른 교회에서는 별 유익이 없을 수 있다. 어떤 이에게는 약이 되지만 다른 이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다. 책망과 견책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에게 위로가 가득한 메시지는 그 사람을 더 깊은 거짓 안위에 빠지게 하여 파멸을 재촉하게 할 것이다.

          만약 똑같은 성경본문을 가지고 모든 강단에서 설교할지라도 성령이 주시는 메시지는 천편일률적으로 고루함을 드러내기보다 모두가 색다른 다채로움의 조화가 만발하게 될 것이다. 물론 같은 본문에 대한 해석은 동일하거나 비슷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시대적인 정황과 자신의 교회의 영적인 필요에 맞게 잘 요리된 영적인 양식으로 만드는 데는 각자가 다를 수 있다. 이렇게 성령과 진리의 말씀은 다양성 가운데 통일된 하모니를 이루게 하신다.

          목사마다 서로 다른 인격과 기질과 특성을 가지고 있고 각 교회마다 서로 다른 문제와 필요를 안고 있기에 인격이신 성령님은 목사의 독특한 인격을 통해서 교인들의 특별한 상황에 잘 맞는 말씀을 공급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같이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고도 남는 무궁무진한 진리의 광맥이 흐르고 있다. 오직 영적으로 어둡고 피폐한 사람만이 이 진리의 보화를 포착하지 못하고 성경과 다른 이의 설교를 밋밋하게 읊조릴 뿐이다. 이렇게 성령과 말씀에 사로잡혀 때를 따라 풍성한 양식을 교인들에게 공급하는 선하고 충성된 목자들이 등장하는 것이 한국교회가 살 길이다.

          가져온 곳 : 
          카페 >개혁주의 마을
          |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출처는 
          동방정교회의 사제였으며,
          성 세르기오스 정교회 신학교 교회사 교수였고 
          프랑스 CNRS의 전문연구위원으였으며,
          미국으로 건너가 성 블리디미르 정교회 신학교 설립에 크게 일조하여, 
          줄곳 이 곳에서 교회사와 교부학 교수를 역임했고
          이후 하버드, 포드햄, 컬럼비아, 유니언 신학교에서 겸임교수로 비잔틴 교회사를 가르쳤던
          존 메이엔도르프라는 분이 저술하신 [비잔틴  신학:역사와 주요 교리]라는 책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교부학과 교회사, 특히 비잔틴 교회사 학자로서 20세기 정교회를 대표하는 신학자중 한 사람이시니, 믿을만한 연구 결과라 사료됩니다.

           

          *
          무염시태(無染始胎)에 대해서

           

          p.292
          비잔틴 설교가들과 성가들은 자주 동정녀를 '완전하게 준비되시고' '정화되시고' '성화되신' 분으로 찬양한다. 하지만 이 본문들은 원죄에 대한 동방 교리에 비추어서 이해되어야 한다. 아담의 유산은 사멸성이었지 죄가 아니었으며, 비잔티움의 어떤 신학도 마리아가 사멸할 존재였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p.293~294
          비잔틴  저자들에게서 그녀가 불멸성이라는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는 사실을 입증해줄 단 하나의 주장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러한 주장만이 그녀의 인간성은 아담의 후손들에게 지워진 공동의 운명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하게 함축할 것이다. 게오르기오스 스콜라리오스라는 단 한사람의 비잔틴 저자만이 아무런 이의없이 원죄라는 서방 개념과 무흠수태교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
          ..중략.. 비잔틴 교회는 마리아가 참으로 또 실제적으로 하느님의 어머니인 테오토코스라고 주장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마리에아 관련된 어떤 교리적 정식화도 지지하지 않았다. 

           

          한국 정교회 대교구 교리문답

           

          52 성모 마리아는 원죄가 있었는가? 
           물론 원죄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아버지 요아킴과 어머니인 안나로부터 태어난 정상적인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주장하기를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을 낳으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갖지 않고 원죄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정녀 마리아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은 완전한 인성을 취하지 못하였다고 말 할 수가 있다. 

          *몽소승천에 대해서
          p.328
          마리아와 그리스도의 밀접한 관련성은 동방에서 위경 전통들에 대한 대중적 신심이 성장하는 데 공헌했다. 이 위경 전통들에 따르면, 마리아는 사후에 그녀의 몸과 함께 영화롭게 되었다. 이 위경 전통들은 성모 안식 축일의 성가시들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것들은 전혀 신학적 사유나 교리적 정의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시인들과 설교자들은 마리아 '승천'전승을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선취 등으로 간주한다. 본문들은 동정녀가 자연적인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서방에서는 마리아에게 불멸성을 귀속시켜주는 이유가 되었던 무흠수태 교리는 원죄를 죄의 유전이 아니라 사멸성의 유전으로 이해했던 동방에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교리였으며 따라서 이 교리와 연계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은 배제되었다. 


          이 주장의 경우 
          [Heinrich Petri는 1854-1950까지의 로마 카톨릭교회의 마리아론에 대한 동방정교회의 입장을 정리했다. 그 결과 그는 흥미롭게도 동방정교회 전반에 걸쳐서 마리아의 무흠임신과 육체승천에 관한 확신들이 증거되고 있음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들이 결코 교리로는 부인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오히려 동방정교회의 찬송들 중에는 이 내용을 노래하면서도 이의 교리화에는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Ref-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정홍열교수의 강의안이 증언과 대략적으로 일치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 평생동정에 대해서.
          그리고 공의회에 의해 공식적으로 강제되는 교리로 선포된 것은 아니지만,
          한국 정교회 대교구 교리문답에 따르면

          45 실제적으로 마리아는 평생을 동정으로 살았는가? 
           물론이다. 그리스도를 낳기 전에도 동정녀였으며, 그리스도를 낳은 후에도 동정녀로 살았다. 그러므로 평생 동정녀라고 부르는 것이다. 

          위와 같은 사항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에, 평생동정에 대한 믿음은 보편적이라고 추측해도 될 듯 합니다.

          IV.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활동 / 마이클 호튼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게 된 우리 자신의 활동을 포함한다(요15:2, 8, 16; 롬8:12~13, 12:9, 16~17; 고전6:9~10; 고후7:1; 갈5:16~23, 6:7~8; 골3:5~14; 벧전1:22). 매일 죽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의의 길을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신자들이다. 영적으로 죽어 있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이들이었던 우리는 거듭남과 칭의를 위해 은혜에 협력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우리는 능동적이지 않았고 다만 복음을 통해 성령의 감화를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난 이들로서 다음과 같은 권면을 받았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2~13).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 일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매일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 구원을 이루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놀라운 진리를 점점 더 많이 실현시킬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실 때 성령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성부께 영광과 기쁨이 되도록 이끄신다. 바울은 이렇게 권면한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5:25~26).

           

          우리가 우리 자신을 피조물이라고 믿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며 하나님은 지금 무에서부터(ex nihilo) 새 창조의 일을 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진리에 기쁘게 '아멘'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또한 지속적인 재창조 사역을 하시면서 성령을 통해 성자 안에서 하신 말씀의 효과를 불러일으키시기 때문이다. "~이 있으라"라는 명령적 선언이 "땅은 ~을 내라"라는 명령법을 통해 보완된 것처럼 하나님의 의롭다 하시는 판결은 이제 타락한 피조물이 의의 열매를 맺는 것이 가능한 상황을 창조한다. 우리는 말씀과 성령으로 말씀을 향해 돌아섰으므로 우리의 회심(믿음과 회개)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표시하는 결정적이고 단회적인 인간적 돌아섬이며, 이 회심은 '거듭해서' 평생에 걸쳐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을 살린다. 그러나 돌아섬이라는 이 매일 행하는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죄에서 돌아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경험이나 경건이 아닌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선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벌코프는, 고대 교회에서 분명히 나타난 도덕주의가 칭의와 성화를 혼동했을 뿐만 아니라 성화를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분리시키는 경향이 있었다고 바르게 논평한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우리를 다시 낙원으로 가는 길로 되돌아가게 하는 데 필요했지만 세례 이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지위는 언제나 은혜에 대한 협력과 선행에 의존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최소한 중세뿐만 아니라 고대의 기독교 저술가들 사이에서는 성화가 마치 명백히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칭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얻기를 소망하는 도덕적 노력의 과정인 것처럼 성화를 다루려는 경향이 있었다.

           

          감각 세계로부터의 영혼의 상승이라는 신비적인(플라톤주의의) 이론과 더불어 이런 도덕주의적인 성화관은 분명 고대 교회에서 금욕주의와 수도원주의가 일어나게 된 주된 이유다. 벌코프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은혜로움을 강조한 아우구스티누스조차 다음과 같은 경향이 있었다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화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형이상학적 관점을 취하여 성화를 하나님이 인간 안에 넣어 두신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속하시는 그리스도께 믿음으로 끊임없이 몰두해야 할 필요성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충분히 강조하지 않았다.....근대 자유주의 신학의 상당히 많은 부분에 있어서 성화란 오직 인간의 고등한 자아의 지배를 통한 하등한 자아의 점진적 구속에 있다. 성품에 의한 구속은 오늘날의 표어 가운데 하나이며 '성화'라는 용어는 단순히 도덕적 개선을 의미하게 되었다.(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p.529.)

           

          그러나 구약과 신약에서 모두, 심지어 윤리적 의미에 있어서도 오늘날의 함의가 암시하는 것처럼 "거룩함은 단순히 도덕적 올바름이 아니며 성화는 결코 단순히 도덕적 개선이 아니다. 성경은 "성화를 하나님의 일로(살전5:23; 히13:20, 21), 예수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연합의 열매로(요15:4; 갈2:20, 4:19), 인간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간의 일이 될 수 없는 일로(엡3:16; 골1:11) 묘사하며 또 성화가 성령의 사역으로서 그리스도인의 미덕으로 나타남에 대해 말한다"(갈5:22).(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p.533.) 

           

          성화와 관련해서 피해야 할 가장 분명한 두 가지 위험은 율법주의와 도덕률 폐기론이다. 둘 다 특별히 신자들과 도덕법과의 관계에 관한 오류다.

           

           

          A. 율법주의 (생략) (665~674p)

           

          B. 도덕률 폐기론 (생략) (674~679p)

           

           

          마이클 호튼의 '개혁주의 조직신학'(IV.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활동)에서 발췌, 663~66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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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칭의(Justification)"라고 하는데....
          (관련말씀: 로마서 7장)

          예수 믿고서 누구나 한 번 쯤 그런 의구심을 가져보았을 것입니다.  
          예수 믿어 구원 받은 사람이 다시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되는가, 혹시 죄 지으면 도로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 말입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받을 때 회개함으로 지금까지의 죄는 모두 사함 받는 것은 알겠는데 그 다음에 다시 죄를 지으면 그 죄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말입니다.
          혹시 예수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거 아닌가 말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천주교는 고해성사와 선행, 그리고 수양을 통하여 성결에 이른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살면 예수님을 따라 거룩해진다는 것이지요.
          기쁜 소식 무슨 교회인지 하는 소위 구원파는 전혀 다른 주장을 합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구원 받는 순간 의인으로 거듭나게 되는데 거듭 난 의인은 죄를 지을 수 없게 된다고 말합니다. 죄는 죄인에게서 나오는 것이지 의인에게서는 죄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이지요.
          바꾸어 말하면 의인이 행하는 모든 것은 설사 도적질과 살인이라 할지라도 의인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죄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과연 이런 식의 대답들이 옳은 것일까요?

          예수 믿었다고 다시는 죄를 안 짓는 인간이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예수 믿었다고 그 순간 몸과 마음이 천사와 같이 거룩해집디까?
          아닙니다.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구원하기 전에도 죄인이요, 구원해 놓아도 죄인입니다.
          통째로 타락하였기 때문에 씻거나 고치는 방법 따위로는 애당초 구원이 불가능한 것이 죄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고쳐질 수 있다면 아들을 내어주실 게 아니라 고치는 방법을 택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내어주신 것은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구원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유일한 구원의 방법은 대신 죽어 주시는 방법뿐이었던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받습니다.
          주님이 대신 죽어주셨기 때문에 죽을 수가 없게 된 죄인이 된 것입니다.
          여전히 죄인이지만 그렇다고 죄로 인해 죽을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우리 죄 때문에 죽게 되면 예수님의 죽으심이 헛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칭의(Justification)란 “죄 없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죄 없는 것으로 친다.”라는 것일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이 우리에게서 죄를 말끔히 없애는 방법이 아니라 대신 죽어주는 방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원은 받았지만 심령과 육신이 믿는 순간 모두 의롭게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하늘나라에 이르기까지, 주님 오시어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여전히 육신 속에서 죄와 싸우며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기록한 로마서 7장은 구원 받은 자가 죄와 싸우는 처절한 부르짖음입니다.
          “(롬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죄에 팔렸다는 것은 죄의 소유물, 곧 죄의 노예라는 말입니다.
          내가 율법 지키고 싶다고 지킬 수 있고 죄의 명령을 거부하고 싶다고 거부할 수 있다면 나는 죄 아래 팔린 것이 아닐 것입니다.  

          “(롬7: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도대체 구원 받은 내가 왜 이 모양이냐는 것입니다. 도무지 내가 하는 것을 내가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원치 않는 것, 내가 미워하는 것을 행하느냐 말입니다.

          “(롬7:22-24)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구원 받은 자의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자 하나 도대체 죄를 이겨내지를 못 하겠다는 것입니다.
          번번이 죄에 지고 마는 그 곤고함으로 인하여 처절하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롬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사도바울이 한 법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법은 일종의 법칙이라는 뜻입니다.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이나 에너지 불변의 법칙 같은 법칙 말입니다.
          이 땅에서 육신 속에 사는 인간은 절대로 마음의 법으로 죄의 법을 이겨낼 수 없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육신을 입고 사는 사람이 죄를 넘어설 수 있다면 그것은 중력의 법칙을 이기고 하늘을 날아오를 수 있는 거나 다름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천사처럼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죄를 이길 수 없고, 따라서 죄와 피나는 싸움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칭의, 곧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선언’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이르기까지, 주님 오시는 날까지 피를 흘리며 죄와 싸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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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기술중 90 % 는 싫어하는 사람과
          잘 지내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 새뮤엘 골드윈-

           

           

          끈기는 성공의 대단한 비결입니다. 
          만일 끝까지 큰소리로 문을 두드린다면
          당신은 분명히 어떤 사람을 깨우게 될 것입니다

          - 구지선, 지는 것도 인생이다 중에서 -



           

          장미는 아름답다 라는 말은 장미에 달린 가시까지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장미의 일부는 아름답다 라고 했을 것입니다
          인생은 아름답다 라는 말은 인생에 딸린 고통까지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 내 머리 사용법 중-


           

          그대, 아직 이르다.
              적어도 무엇이든 바꿀 수 있을 만큼은.
             "인생에 너무 늦었거나, 혹은 너무 이른 나이는 없다."  

           - '인생시계' 중에서-

           


          두 눈을 크게 뜨는 사람은 인생의 많은 부분이 잘될 것이다.
          그런데 한 눈을 감을 줄 아는 사람은 더 잘된다.

          - 괴테-

           

           

          산다는 것은 경험하는 것이지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 파울로 코엘류, 알레프 중-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수 없을 때
          그 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 '진정한 여행' 중-

           

           

          혼자 있다는 것은 고독의 절대 조건이 아니다.
          사람들은 오히려 고독을 피하기 위해 혼자 있기도 한다.

          - 이인화 -

           

           

          바쁠수록 명심해야 한다.
          성찰과 성장은 혼자 있을 때 싹튼다.
             중요한 것은 고독을 대면할 수 있는 용기다.
             외로움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 김난도,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산다는 건 어차피 외로움을 견디는 것. 누군가 그랬지..
          지구에 4억 인구가 있다면 4억 개의 고독이 있다고.

          -드라마, 연애시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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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18장 이다.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라스베가스의 여름은 바퀴벌레와 귀뚜라미의 천국이다. 이 놈들이 밖에서만 돌아다니면 좋은데
          집 안에서도 유유히 돌아다녀서 가족들의 비명을 종종 자아내게 만든다.
          하루는 식탁에서 가족들과 밥을 먹는데 겁도 없는 바퀴 한녀석이 징그러운 더듬이를 더듬거리며 식탁위로 기어 오르는 것이 아닌가. 가족 모두 괴성을 지르며 필자를 쳐다 보는데...

          "빨리 안 잡고 뭐해!" 하는 표정으로... 왜 집안의 벌레는 꼭 내가 잡아야 하나?
          언제나 남편 이겨먹는 마누라도 있고 덩치도 필자만한 큰 아들놈도 있건만... 이런 생각을 하는 찰라 둘째딸이 "아빠!" 하고 꽥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기에 눌려 식탁 위에 놓인 신문지를 둘둘 말아서 신중을 기해서 내리치는 순간 간발의 차로 상황을 알아차린 바퀴가 먼저 움직이는 바람에 비껴 맞고 말았다.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가는 바퀴... 냉장고 옆틈새로 들어가 버리고 가족들의 실망속에 눈총을 한몸에 받으며 밥을 다 먹을 즈음... 아니...그 놈이 또 기어 나왔다. 겁도 없이..
          용맹스러운 건지 부상이 아물어서 좀 전 사건을 잊은건지.. 두번째도 실패한다면 가장의 위신 문제이기에 심기일전 하여 신문지도 집어던져 버리고 맨손으로 승부를 걸었다.
          그리고 한 번에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듯 손바닥으로 덮어버렸다.
          놈은 즉사했고 시체를 확인하자 가족들은 다시 한번 비명을 지르고 도망갔다.
          변기안으로 장례를 치러주고 나오면서 생각했다. "이것이 바퀴의 한계구나.."

          모르긴 몰라도 바퀴나라의 율법에는 분명 "인간이 밥먹을 때는 근처에 알짱거리지 말라!"라는 구절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계명은 바퀴들의 본성과 충돌을 일으킨다.
          그것을 알고 또 실천할 수 있다면 바퀴가 아니라 바퀴 신이다.
          일반 바퀴는 맞아죽는 그날까지 식탁을 배회할 것이다. 바퀴는 그렇다 치고 인간은 어떠한가?
          인간은 바퀴보다 나은가? 성경은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죄의 삯은 사망이라 말한다.
          우리는 이 말을 인정하는가 아니면 인정하는 척 하는가.
          우리는 기도할 때 "이 죽을 밖에 없는 죄인이..." 하면서 죄인임을 고백하지만 막상 누가
          "이 죽일 놈아!" 하고 말하면 그날 잠을 못이룬다.^^ 

          우리는 우리가 연약한 죄인임을 인정하면서도 그 죄 때문에 사망에 이르는 심각성은 인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도덕적인 행동을 하기도 하고 언행을 조심하며 됨됨이가 바른 기독교인이 되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자신의 죄를 은닉하고 자신을 변호하려는 노력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인간의 본질이 바뀐 것이 아니다.

          영생이 걱정이 되어 예수를 찾아온 부자청년은 영생의 방법을 예수께 묻는다.
          예수는 그 청년에게 되 묻는다. "계명을 다 지켰느냐?"
          그는 대답한다. "예 지금까지 다 지켰습니다."
          예수는 그의 속을 휜해 다 들여다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네 재산을 다 처분하고 나를 따르라."
          그는 그 말에 괴로워하다 예수를 떠나고 만다.
          어떤이는 말한다. 부자청년이 예수의 말대로 재산을 버리고 따랐다면 영생을 얻었을 것이라고...
          정말 그럴까? 물론 그가 결코 그런 결단을 내릴수 없는 자라는 것을 예수는 미리 아셨을 것이나
          예상을 깨고 그가 예수의 명을 따랐다 한들 그의 믿음을 예수는 온전히 보셨을까? 
          부자청년의 평생 계명을 잘 지켰다고 자신있어 하는 모습에서 지금의 도덕성으로 교회봉사로 포장한 모범적인 교인들을 본다.

          본질이 바뀌었는가? 아니다. 본질은 그대로이고 옷만 좀 깨끗한 것으로 갈아입었다.
          기특한 일이나 신앙하고는 무관하다. 오히려 자신의 그 기특함이 남에게 정죄의 칼날이 될 수가 있다. 그것이 다름아닌 바리세인이다. 바리세인은 우리집 바퀴벌레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
          아니 우리 모두가 바리세인이요 바퀴벌레이다. 아무리 인간 밥상근처에 알짱거리지 말라는 계명이 있어도 또 그 말에 "아멘" 한다 해도 바퀴는 밥상 앞에서 오늘도 죽어간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마음이 부패하여 죄의 본성의 지배를 받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죄인임을 망각하고 적당히 개조하여 하나님앞에 의로워지려는 시도를 한다.

          예수가 부자청년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가 이것이다. 부자청년은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켰다 말한다. 그는 계명대로 도둑질 하지 않았다 말하지만 예수는 말한다. "네 탐심을 어떡할래?" 
          또 그는 계명대로 간음하지 않았다 말하지만 예수는 말한다. "네 음욕은 어떡할래?"
          그는 계명대로 살인도 해 본일이 없다 말하지만 예수는 "네 증오심은 어떡할래?" 하신다.
          여러분은 해결책이 있는가?^^ 

          인간에겐 해결책이 없다. 부자청년이야기 결말부분에 에수께서 해답을 말하신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다 할 수 있느니라."
          그래서 그 은혜 안에 거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이것 외에 그 어느것도 기독교라 할 수 없다.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죄인이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18장 8절 9절은 말한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성경이 얼마나 죄에 대하여 단호하며 치를 떠는지 짐작이 가는 구절이다.
          네 손이나 발이 죄를 지으면 잘라 내 버리라 말씀하신다.
          실제로 과거에 브라질의 한 청년이 어느 유부녀와 사랑에 빠졌다가 고민고민하고 있을 때
          이 성경구절을 찾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결단하여 자신의 생식기를 잘라버렸다.
          이 기사를 접했을 때 그의 행동은 어이가 없었으나 필자는 그의 믿음을 대단히 평가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역시 바퀴벌레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자기자신이 생식기뿐 아니라 몸뚱아리 아니 마음까지도 몽땅 죄덩어리 라는 것을 간파하지 못했다. 

          원래 우리 몸 전체가 죄가 없었는데 어느날 손과 발이 헤까닥해서 범죄했다면야 그 놈들만 잘라내면 천국가겠지만...^^ 우리는 총체적인 죄인이다.
          다시말해 손과 발과 눈을 범죄케 한 장본인은 손과 발과 눈이 아니라 부패한 마음을 가진
          그 사람전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양손 양발 양눈 모두제거하고 몸뚱이만 남아도 아니 그 몸뚱이까지 제거해도 천국갈 수 없다.
          그러나 제거하지 않아도 갈 수 있는 곳이 천국이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부녀를 사랑한 그 청년이 자신의 그것을 제거한다고 깨끗한 몸이 되어 천국갈 수 있겠는가.
          죄는 자기자신이 저질러 놓고선...애꿎은...
          하나님은 온전한 것만 원하신다.
          계명을 다 지키고 하나를 못지키면 계명 전체를 거부한 것으로 인정하신다.
          죄인인 인간이 깨끗해 지려고 더러운 부분들을 제거하고 보완한다 해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는 조건은 죄인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저주를 온 몸으로 막아서신
          예수로 인하여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 라는 의미는 죄를 향해 퍼붇는 하나님의 저주의 융단 폭격을
          예수의 등뒤에 숨어 피한다는 의미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글/essence

           

           

              가을 그리움 최송연 가녀린 햇살이 강둑에 아련히 걸릴 제면 산머루 익어가듯 내 그리움도 익어갑니다 다시 오마 약속 주신 님 오시지 않고 임 그리는 애잔함은 떨어지는 낙엽처럼 서러운데 가을 그리움은 영원으로 이어지는 불빛 되어 오늘도 저 산천을 저리도 붉게 물들이고 있나 봅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 20) 마라나 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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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건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마귀의 얼굴



          더 큰 은혜와 능력을 받은 사람일수록 더 무서운 죄에 빠질 위험이 있다. 큰 은혜를 받은 것으로 인해 인간의 부패성이 자극되어 헛바람이 부풀어 오르게 되면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교만의 죄에 휘말리게 된다. 그래서 간혹 영적인 은혜를 많이 체험한 이들에게서 마귀의 얼굴이 드러나는 것을 보며 흠칫 놀라게 된다. 


          우리는 은혜로 충만해지고 거룩해질수록 더 사악한 죄, 즉 자신의 은혜로움과 거룩함으로 인한 영적인 우월의식과 교만에 사로잡히기 쉽다. 영적으로 우쭐해져 자신과 같지 않은 이들을 무시하고 쉽게 판단하는 영적인 폭력을 휘두른다. 은혜와 능력을 충만히 받을 때가 가장 위험한 때이다. 큰 은혜를 받음으로 자고하지 않기는 바울 같이 위대한 사도도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바울을 도와주셔야만 했다. 하나님이 바울을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기 위해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고 했다.


          바울에게 있었던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는 바울이 스스로를 높이고 싶어 하는 욕망, 충동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그를 쳐서 때려눕히는 역할을 한 동시에, 사람들이 바울을 지나치게 높은 자리에 올려놓고 그를 추앙하는 것을 막아주는 기능을 했다. 이 가시 자체는 고통이고 악이며 사탄이 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악을 허용하시므로 당신의 종이 더 큰 악과 파멸에 빠지지 않게 그를 보호하신 것이다. 그 악을 허용하시므로 바울이 받은 큰 은혜가 교만으로 인해 변질되지 않고 그 안에 온전히 보존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셨다. 육체의 가시로 인한 바울의 약함이 하나님의 능력이 바울에게 충만히 거하는데 전혀 방해나 거침돌이 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사탄의 가시가 은혜의 통로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바울 안에 안전하게 거하게 하는 장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바울에게 있었던 육신의 가시와 똑같지는 않지만 그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고난이나 약함이 있다. 우리를 자고하지 못하게 하는 그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각 사람마다 다르다. 우리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높이려는 교만이 머리를 들고 올라올 때마다 그것을 꾹 눌러주는 무언가가 자동제어장치처럼 우리 안에 설치되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그것이 없었다면 우리는 천방지축으로 날뛰다가 벌써 망했을 것이다. 그래서 은혜를 받을수록 이 가시의 역할은 중요하다. 이 가시가 우리를 은혜로 인해 자만해지지 않게 하고 더 겸손하게 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만을 전적으로 의존하게 한다.


          바울사도가 이 가시의 비밀을 깨닫고 더 이상 그로 인해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크게 기뻐할 수 있게 된 것은 고통스러운 가시가 주는 엄청난 유익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바울이 처음에는 그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으나 이제는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게 하는데 필요한 안전장치라는 사실을 알고 그 고통을 그대로 받아드리며 감사하게 되었다. 우리도 우리에게 있는 가시와 같은 약함과 고통에 깃든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를 깨닫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주님의 말씀에 “정말 그렇습니다”라고 화답할 수 있다면 그 가시는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 축복의 사자가 될 것이다. (주일 설교 중에서)


          -박영돈 목사-

           

          장 새 언약적 순종 (율법을 율법답게 사용하기) / 마이클 호튼

           

           

          지금까지 우리는 구약 자체가 우리에게 두 가지 구별된 형태의 언약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즉 두 가지 언약이란 율법과 약속인데 약속은 은혜 언약의 기초가 된다. 분명 우리는 죄 안에 있는 우리의 상태를 고려해 볼 때,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맹세에 기초해서만 아브라함의 복을 상속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은 율법을 제외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성취함으로써 우리에게 임한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상속받지만, 구원은 먼저 가장 철저한 순종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아주 실제적인 의미로, 우리는 행위 즉 그리스도의 행위로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서 구원받을 행동을 하셨다는 것을 믿음으로서 이러한 구원을 받는다. 그러므로 율법은 세워진다. 그리고 율법만이 아니라 행위 언약도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명령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켰으며, 아버지의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셨다. 그리스도의 승리 때문에, 우리 역시 가장 큰 우주적 심판대에서 변호를 받을 것이다. 우리는 값없는 칭의의 복음 안에서 이미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데, 최후심판에서의 무죄 선언은 심지어 지금 우리에게 속해 있으며, 우리의 세례에 의해 확증되고, 주의 만찬 안에서 경험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성취된 것 말고 율법이 세워진다는 또다른 의미가 있는가? 만일 시내 산 언약이 더 이상 강제력이 없고 우리가 '은혜 아래' 있다면 - 즉 율법이 아니라 약속의 언약 아래 있다면 - 신약 성도들이 율법을 배척해야 할 어떤 율법의 원리가 있는가? 우리는 구약의 모든 윤리적 교훈을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무시하고, 신약에서 발견하는 명령만을 받아 들여야 하는가? 어쨌든 성도의 삶 속에서 율법이 차지하는 위치는 무엇인가?

           

          만일 우리가 이러한 질문을 한다면, 우리는 복음을 좋은 소식으로써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은 죄인은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메시지를 여러 장에 걸쳐 설명한 후, 로마서 6장 1절에서 이렇게 질문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만일 우리가 들은 복음 설교가 우리가 완전히 율법과는 관계없을 수도 있다는 식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면, 그것은 바르게 들은 것이다. 그러나 물론 질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아니오' 다. 바울의 반응은 율법 언약의 반응과는 다르다. 말하자면, 바울은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다. "만일 너희가 계속 죄안에 거한다면, 너희는(상급상실 또는 심지어 구원상실) 고통스러운 결과를 맛보게 될 것이다." 오히려, 바울의 대답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하여 세례받은 사람은 무덤 속에 남아 있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성령에 의해 새 생명을 받았다. 그 좋은 소식은 점점 더 좋아져서 죄책만이 아니라 죄의 왕 노릇으로부터도 우리를 구원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순종은 단지 어떤 기록된 법을 따를 필요가 없이 일어나는 것인가? 율법을 규범으로서 보는 관점은 성령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살려 주셨을 때, 율법이 죽이는 문자를 대체한다는 의미인가?

           

           

          율법을 율법답게 사용하기

           

          새 언약 안에서의 율법의 역할에 대한 많은 논의가 중요한 구분짓는 것을 실패함으로써 잘못된 출발을 한다. 결과적으로, 다양한 집단들이 성도를 위한 율법의 규범적 용도를 단순하게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기가 쉽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르게 인식하는 데 필요한 율법의 구분은 무엇인가?

           

          첫째, 율법 자체와 율법 언약 사이의 차이점을 마음에 간직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주석가들은 '율법'과 '복음'을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했다(내 생각에는정당하다). (1) 율법의 원리(율법의 언약조항을 개인적으로 성취하는 것)는 약속/복음의 원리와 구별된다. (2) 옛 언약(약속)은 새 언약(성취)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이 모세오경으로서의 '율법' 안에 계시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명령)과 약속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칭의를 받는 문제에 있어 심지어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며 구분된다.

           

          원리로서의 '율법'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어떤 것이다. 하나님이 명령형(하라와 하지 말라)의 형태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어떤 것이 율법이다. 율법은 십계명, 상세한 성전 청결 규정, 이혼과 재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또는 갈라디아서 5장 16~24절에 나오는 성령 안에서의 삶을 위한 지침 등의 형태가 될 수 있다. 구약과 신약은 명령에 대해 조금도 차이가 없으며,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구약을 율법, 신약을 약속으로 나눌 수 없다.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명령에는 잘못된 것이 전혀 없다. 명령은 하나님 자신의 도덕적 성품의 표현이다. 성경이 애써 보여 주려는 것은 성도를 위한 규범적 율법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일단 우리가 율법 언약에 따라 하나님과 관련될 가능성을 배제하면, 우리는 여전히 성경으로부터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신명기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심지어 시내 산 언약도 약속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조심스럽게 언약의 범주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구약 성경 안에 복음(약속으로서의 복음)이 있다는 의미라면, 율법 안에도 복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더구나 만일 신약 성경(성취로서의 복음)안에 명령들(율법의 원리)이 있다는 의미라면 복음 안에도 율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은혜 언약의 기초가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적, 구속적 은혜(율법과 복음이 혼합되지 않은)이면, 분명히 은혜 언약의 제도 안에는 명령과 약속이 있다. 우리가 언약의 기초를 말할 때, 율법과 복음은 엄격하게 반대된다. 말하자면, 우리가 율법과 복음을 율법 언약과 약속 언약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할 때마다 율법과 복음은 구분되며 심지어 반대된다.....

           

           

          둘째, 새 언약에서의 율법의 역할을 결정하기 위해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하는 율법의 종류인 도덕법, 시민법, 의식법을 구분해야 한다.

           

          만일 시내 산 언약이 지금도 절대적이라면, 시내 산 언약에 포함된 구체적인 명령들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실 때,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것이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사실 시내 산에서 주어진 십계명은 엄격하게 말해 이스라엘에게 직접 주어진 것이다. 나머지 우리들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명령들은 고립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정치사회적이며 문화적 삶을 규정하는 신정 수립의 율법과 함께 주어졌다. 지붕에 난간을 설치하는 것, 땅과 이방인과 죄수들을 취급하는 것 등과 관련된 시민법은 분명 신정자체가 존재하는 동안만 유효하다. 예배를 관장하며, 구체적인 정결의식, 사람뿐만 아니라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사이의 구별, 성전, 제사장, 제물 등을 포함하는 의식법도 비슷하게 신정이 존재하는 동안만 '규범적'인 것이다. 정결한 짐승과 비정결한 짐승에 대한 환상을 본 베드로는 이방 선교를 완전히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옛 언약이 이제 폐지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고전적인 사례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분리를 상징하는 더 엄격한 정결법들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행10:9~43). 그러므로 칼빈(루터파 개혁자 필립 멜란히톤처럼)이 옛 언약 율법을 도덕법, 시민법, 의식법의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한 많은 교부들을 따랐다는 것은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도덕법은 십계명으로 요약되는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존재로 인해 우리 양심에 새겨져 있다(롬1~3). 십계명은 신정을 지배하는 다른 법들의 핵심으로 기능하는데, 십계명 가운데 많은 내용들이 심지어 이스라엘 건국 이전의 문명(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은 고전적인 사례)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게다가 이러한 도덕법의 개념은 신약 성경에서 상세히 설명된다. 신약 성경은 도덕법의 요구를 축소시키는 대신, 내적인 의미를 강조함으로써 도덕법의 요구를 더욱 강화시킨다. 이것은 단지 외적으로만 지키고서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하는 것이 위선임을 보여 주며, 새 언약의 복 가운데 하나는 성령이 율법을 사람의 마음속에 기록하고서 그것을 지키도록 인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십계명의 두 돌판의 의미를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요약한 것은 하나님의 요구라는 관점에서 언약 사이의 연속성을 증명해 준다(마22:37과 병행 구절) 도덕법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기대는 구약에서 신약에 걸쳐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도덕적 성향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 안에서의 삶과 성령의 열매에 대한 바울의 놀라운 묘사는 단지 도덕법의 내적인 의미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상세하게 설명한 것이다.....

           

          신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 내용으로 볼 때, 도덕법의 의미는 단순히 외적인 행동이라기보다 태도와 성향과 동기라는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새 언약의 신자들은 더 큰 의무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성령이 신약 성도들의 육신이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행하였고, 그래서 신약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자로서 이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보다 더욱 '합리적인 예배'로 간주된다(롬12:1). 그러므로 시민법과 의식법이 배타적으로 신정에 해당되며, 더 이상의 구속력이 없는 대신, 도덕법은 여전히 유효하다. 도덕법은 성경에 분명히 명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양심에 각인되어 있다.

           

          셋째, 새 언약에서의 율법의 역할을 규정하기 위해 우리는 이러한 도덕법의 세 가지 용도를 구별해야 한다.

           

          때로 성경에서 율법은 범죄에 대한 억제로서 간주된다..... 

           

          도덕법은 적어도 불신자에게 부분적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도덕법으로 인해 악을 행하는 자들은 국가의 형벌이라는 빛 아래서 두 번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종종 율법의 정치적(civil) 용도라 불린다.

           

          도덕법의 두 번째 용도는 죄를 보여 줌으로써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데려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종종 교육적(pedagogical) 용도라 불린다. 비록 율법이 우리 죄 때문에 나쁜 소식과 죽음을 초래한다 할찌라도 바울이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 임이니라.....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7:7~13)라고 말한 것은 도덕법의 교육적 용도를 의미한다.

           

          도덕법의 세 번째 용도는 종종 규범적(normative) 용도라 불리는데 이는 도덕법이 신자의 삶을 위한 규범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도덕법의 규범적 용도는 오직 신자만을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신자들에게는 율법의 저주가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저주할 수 없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다 지킨자로 보며, 또한 율법은 우리와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기록되어 있다. 비록 우리가 계속해서 생각, 말, 행동 속에서 율법을 어기기는 하지만 율법은 우리에게 빛이 된다(롬7:21~24).

           

          율법과 사랑은 적대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본 것처럼 율법과 사랑은 고대 근동 조약문서와 성경 모두에서 함께 간다. 우리 주님은 율법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요약하셨고,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13:10)이라 말했다. 재미있게도 바울은 이것을 성령의 열매에 대한 구절 바로 앞에서 다시 반복한다(갈5:14). 그러므로 우리는 새 언약이 율법의 의무를 사랑의 의무로 대체했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율법은 언제나 사랑의 의무를 구체화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생 얻는 조건으로서 율법을 완성해야 할 개인적인 의무에서 해방되었다. 그래서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섬길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가장 깊은 의미에서 율법을 순종하는 것이다.

           

          이런 사례로부터 우리는 율법의 이러한 구분이 조직신학에서 연역한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에서 자연스럽게 본래적으로 생겨난 것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칼빈과 개혁주의 전통만이 아니라 루터와 루터파도 신자의 삶을 위한 규범으로서의 율법의 중요한 의미를 포함해서 율법의 3가지 용도를 모두 주장한다.

           

          이러한 구분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새 언약에서의 조건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복음 안에(좁은 의미 즉 신약성경) 율법(넓은 의미 즉 계명들)이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새 언약에는 분명한 조건들이 있다. 그러나 절대적이며 불변하며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맹세인 약속의 언약 안에 있는 조건들은 어떤 것인가?

           

           

          마이클 호튼의 '언약신학'(9장 새 언약적 순종- 율법을 율법답게 사용하기)에서 발췌, 241~25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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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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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지방 아닌 단백질 풍부해야

          건강에 좋은 대부분의 식품 속에는 섬유질이 가득 차 있다. 이런 섬유질을 많이 섭취하면 배가 부풀어 오르거나 가스가 찰 수가 있다. 하지만 이런 뱃속 가스를 먹어서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미국의 여성생활 잡지 '위민스 헬스(Women's Health)가 '스몰 체인지 다이어트(The Small Change Diet)'의 저자인 게리 간스 박사의 조언을 토대로 뱃속에 가스가 찼을 때 먹으면 좋은 식품 4가지를 소개했다.

          구운 닭고기=간스 박사는 "숯불이나 오븐 등에 구운 닭고기에는 단백질이 다량 함유돼 있는 반면 섬유질은 거의 없다"며 "이 때문에 가스가 찬 느낌이 들지 않고 배가 편안해 질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구운 닭고기에 다른 첨가물을 많이 넣어서는 안 된다. 소스 등을 많이 뿌리거나 닭고기를 튀기면 오히려 배탈이 날 수 있다.

          달걀=달걀은 위를 편안하게 하는 음식이다. 달걀에 들어있는 단백질은 가스가 가득한 위장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달걀을 수란으로 만들거나 삶아서 먹으면 좋다. 이때 버터나 식용유 등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 간스 박사는 "이외에도 채소나 핫 소스, 치즈 등을 곁들여 먹으면 지방이 너무 많아져 위장에 부담이 되니 달걀만 먹는 게 좋다"고 말했다.

          구운 통감자=배에 가스가 찼을 때는 뭘 안 먹느냐보다는 뭘 먹느냐가 더 중요하다. 간스 박사는 "감자를 껍질 채 오븐 등에 구운 것은 지방이 거의 없기 때문에 소화에 아주 좋은 음식"이라고 말한다. 그는 "구운 통감자 같은 것은 신체가 음식물을 분해하는 데 많은 일을 하도록 하지 않음으로써 배를 편안하게 한다"고 덧붙였다.

          워터 크래커=워터 비스킷이라고도 불리는 워터 크래커는 얇고 파삭파삭한 비스킷을 말한다. 간스 박사는 "이런 크래커에는 지방 등 장을 불편하게 하는 성분이 거의 들어가 있지 않다"며 "이 때문에 꾸르륵 거리는 소리가 나는 위장을 편안하게 하고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단 로즈메리와 같은 향료를 넣어서 먹으면 안 된다. 향료나 양념을 첨가하면 오히려 위장을 괴롭게 할 수 있다.


          이웃 블로그에서 옮긴 글-

                 

           

             

              

           

           

           

           

           

           



          가슴에 흐르는 가을 향기 최송연 꽉 막혔던 가슴 무더운 여름을 보내고 나니 이제야 실바람 흐르는 가을을 조금 느낄 수 있어 정말 좋네 바람을 휘감아도는 가을 노래 향긋한 빛깔로 물들여지는 나뭇잎 내 마음에도 수채화처럼 고운 가을이 빈 공간을 따라 채워지기 시작한다 가슴에 흐르는 이 가을 향기 따라 내 사랑 그분이 오신다면 좋겠는데....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 22: 20절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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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dway Geyser Basin에 있는 Grand Prismatic Spring은 미국에서 제일 크고 세계에서 3번째로 큰 Hot spring으로 그 아름다움은 그 무엇과도 비교가 안 된다.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이곳 주차장은 늘 붐비기에 아침 일찍 가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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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ismatic"은 brilliantly colored라는 뜻인데 보이는 것은
          Grand Prismatic Spring

          나무로 만든 boardwalk 위의 행렬도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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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선명하고 아름다운 빛깔은 미네랄이 풍부한 물 주위에 사는 박테리아  때문인데
          이 미생물은 고온에서 성장하고, 칼라풀한 색소를 지니고 있어 빨강,주황, 노랑,
          그리고 초록색까지 생성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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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ring 크기는 약 250 x 300 피트 (80 x 90 m)되고 깊이는 160피트 (50미터)나
          된다고 하며 1분마다 화씨 160도 (섭씨 70도)의 물을 560갤론정도 방출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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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중에 뒤로 보이는 산등성이에 올라가 바라보니 Grand Prismatic Spring이 한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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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celsior Geysor 는 화씨 199의 물을 매 분마다 4000갈론이 넘게 Firehole River로 방출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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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urquoise Pool까지 Midway Geyser Basin의 아름다움을 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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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dway Spring Basin에 오가는 다리 아래로 Firehole River가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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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rand Prismatic Spring을 한눈에 내려다 보기 위해 조금 남쪽으로 가서 
          주차 후에 Fairy Falls로 가는 트레일을 걷는다.
          멀리 Grand Prismatic Spring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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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들꽃이 피어 있는 길도 지나 산등성이에 오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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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앞에 나타나는 절경


          coffee pot에서 내려 온 커피와 스넥을 먹으며 한참 머물었다.
          그 때 커피향이 지금도 코 끝에 스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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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lack Sand Basin의 Cliff Geyser에서 분출하는 모습이 보인다.

          유명한 Old Faithful Geyser, Black Sand Basin, Biscuit Basin이 모두

          Upper Geyser Basin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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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merald P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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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lack Sand Bas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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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scuit Basin을 본 후 Firehole Lake Drive로 들어섰다.

          Firehole Lake Drive는 One way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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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Firehole Spring이 기다리고 있었다.

          외길이라 들어오는 길을 놓치면 이 아름다운 spring을 못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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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rehole Spring (정말 불꽃?)
          뒤로 보이던 Geyser가 바로 Great Fountain Gey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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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급해서 주차장에 차도 나두고 달려 와서 본 Great Fountain Gey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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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출이 예상보다  늦어져 1시간 반을 기다렸다고...

          행운이랄까? Firehole Spring에서 바로 달려가니 진행중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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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reat Fountain Geyser에서 분출이 끝날 즈음 White Dome Geyser에서 스팀이 나온다.

          두 Geyser의 분출을 한꺼번에 보니  감개무량하다. 

          White Dome Geyser는 cone모양을 하고 있으며 아직도 분출 할 때마다 자라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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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ower Geyser Bas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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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Clepsydra Gey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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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untain Paint Pots는 mudpots로 boiling water 대신 boiling mud를 함유한 hot spring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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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lex Spring는 정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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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반영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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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rehole Falls

          산천이 아름다워 그 이가 좋아하는 Firehole Canyon Drive는 2마일의 좁은
          외길이나 폭포도 아름답고 따뜻한 물에 수영을 할 수 있는 안전한 곳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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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iff jumping 과 diving은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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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rehole Swimming Area


                                                 얼마나 따뜻한 물일까? 수영 해 볼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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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ld Faith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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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분마다 분출한다고 했으나 20분가량 더 기다리는 동안 비가 와서 모두 우산을 바쳐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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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rris Geyser로 가는동안 본 무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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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rris Geyser Basin

          마치 가면을 연상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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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옥색을 잊을 수가 없어 다시 찿은 Norris Gey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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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록색은 Algae, 부라운색은 Living thermometer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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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nwheel Gey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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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rris에서 맞이한 석양은 또 다시 마음속에 오래오래 남으리라.

          나의 보금자리 블로그에서 캡쳐

          Yellowstone National Park
          Idaho/Montana/Wyoming

          Information : (307)344-7381





           

          로이드 존스 교리집

          제1권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제10강

          선한 천사들

           

           

          10.선한 천사들

          창조교리를 다루기 전에 다루어야할 교리가 하나더 있다. 바로 선한 천사들과, 마귀

          와 타락한 천사들의 교리이다. 우리는 일정한 순서를 따라 성경교리에 접근하고 있

          으며 이 순서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이 성경에 자신에 대해 계시하시는것

          들 즉, 그분의 존재, 인격, 속성들에 대해 공부하였고 성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공부했다. 그리고 우리는 위대한 하나님의 작정에 대해 공부했으며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본성으로 인해 경외심 가운데 말하건데 '정해진 방식'으로 일하실 수밖에 없다는것을 배웠다.

           

          1)천사의 교리를 고찰하는 이유

          성경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전에 천사들이라고 하는 지적존재를 창조

          하셨다는 사실이 분명히 나와있다. 많은 복음주의자들 조차 구원의 교리에는

          흥미를 느끼지만 천사의 교리같은 부분은 간과한다. 이것은 성경의 풍성한 진리 를 깨닫는것을 스스로 막는것과 같다. 교리에 도달하지 못하는 성경공부는 아무

          런 유익이 없다. 이런식으로 공부하기 때문에 성경이 천사에 대해 말씀하시는것

          을 한번도 고려하지 않는 일이 발생한다.

           

          2)천사에 관한 일반적 사항들

          천사란 사자(messenger)란 의미이다. 이 말은 찬사들이 하나님의 사자로 보내심

          을 받는다는 말이다. 이말은 예수 그리스도에도 사용되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다

          시피 "언약의 사자"로 몇차례 언급한 적이 있다.

           

          (1)천사는 피조된 존재다.

          천사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처럼 영원전부터 존재하지 않았

          다. 히브리서 첫장은 하나님의 아들과 천사들을 구분한다. 천사들은 영적존재

          이나 피조물이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곧 알게 되겠지만 권세들이란 말은 천사를 의미하는 용어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

          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6)

           

          (2)천사는 영적인 몸을 가지고 있고 때로 인간의 형태로 나타난다.

          천사는 영적상태에 적절한 영적인 몸을 가지고 있고 창세기 18장에 아브라함

          에게 천사가 세 사람의 사람형태로 나타났다. 또한 삼손의 부모와 천사의 이

          야기를 봐도 그렇다.

           

          (3)천사에게 성별이 있는가?

          성경에는 천사가 언제나 남성인것처럼 지칭되고 "그(he)"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4)천사는 죽지 않는다.

          "그들은 다시 죽을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눅20:36)

          "천사들모다 잠시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뒤로 관을 쓰신" (히2:9) => 주님이 천사보다 못하게 되지 않았더면 죽음의 고난을 받으실수 없 었다. 그들은 불멸의 존재들이다.

           

          (5)천사는 사람보다 우월하다.(천사의 지위)

          천사는 분명 피조물로 성부, 성자, 성령님의 피조물이다. 그러나 그들의 지위

          는 사람보다 우월하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8:4-6)

           

          (6)천사들의 이름과 칭호

          a)통치,권세,능력,주권

          그들은 "영"들로서 묘사되며 에베소서 1장 21절에는 그들이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이라고 묘사되어있다. 이런 용어들은 선한천사건 악한

          천사건 언제나 천사들에게만 사용된다.

          "혈과 육을 상대하는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

          들..."(에베소 6:12) => 사도바울은 여기서 타락한 악한 천사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b)거룩한 천사

          "거룩한 천사"(눅9:26), "택하심을 받은 천사"(딤전5:21)로도 표현된다.

           

          c)섬기는 천사

          그들은 종종 '섬기는 영'으로 묘사된다. 모든 천사는 섬기는 영이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히1:14)

           

          d)그룹, 스랍, 생물

          "그룹"(시99:1,겔10:1-22), 스랍(사6:2), 생물(계 4:6) 이 용어들은 모두다

          동의어로 볼수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동물의 모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적어도

          모양에 있어서는 그들이 혼합된 존재인거 같다. 그들은 구속받고 영화된

          인류를 상징하는듯 하며 예표하는듯하다. 그들의 주된 기능이 우리를

          섬기는것에 있다는데는 이견이 없다.

           

          (7)천사들의 수

          성경에는 천사들의 수가 셀수 없을 만큼 많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가 탄생하셨을때 목자들은 "수 많은 천군"의 목소리를 들었으며 예수님

          님은 십자가에 못밖히실 때 자신이 하려고만 하면 "열 두군단" 되는 천사들

          을 보내어 자신을 지키도록 하실수 있다고 하셨다. 요한계시록 5장엔

          천사들의 수가 무수히 많아 만만이요 천천의 크고 강력한 천사의 무리를

          묘사하고 있다.

           

          (8)천사들의 서열

          천사들이 그렇게 많다면 그들 사이엔 서열이 존재하는가라는 문제를 생각해

          볼수 있다. 성경을 보면 그들이 지위와 사역에 있어 모두 구분이 있다고 분

          명히 말하고 있다.

          '천사장'이란 단어는 살전 4장 16절과 유다서에 나타난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살전4:16)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유다서 9절)

          =>천사장은 미가엘이다.

          미가엘은 다니엘서 10장에서도 바사국 군대와 싸웠으며 이스라엘을 특별히 돌보는일이 할당되었다.

          =>다음은 가브리엘을 들수있다.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임재앞에서 전달해야 할 말씀을 기다리며 서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될것이라 말하도록 보냄받은것은 가브리엘 이었다.(눅 1:26) 또한 스가랴에 메시지를 전한것도 역시 그였다.(눅1:19)

          분명 천사들 간에는 모종의 질서와 구분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역사에 나타나는 특성으로써

          심지어 타락한 악한 영들 사이에서 조차도 이러한 질서가 나타난다.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엡6:12)

          또한 그들은 능력의 존재라고 기록되어 있다.(시103:20) 그들의 능력은 분명 인간의 능력보다 크다.

          존엄성과 지위에서 분명 인간보다 우월하다.

           

           

          3)선한 천사들의 임무

          천사들은 분명히 두 집단으로 나뉜다. 택함받은 천사들 즉 선한 천사들과 버리움

          을 받은 천사들 즉 마귀와 그 사자들(마태25:41)로 나뉜다. 이번 장에서는 선한

          천사들을 우선 다루어야 한다.

          그들은 하늘에 살고 있으며-"하늘에 있는 천사들"(마22:30)- 주님은 또한 ".....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마22:30)라고 말씀하셨다. 이들의 거주지는 하나님의 보좌 주변임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이들의 임무는 무엇인가?

           

          (1)일반적인 임무

          a)하나님과 어린양을 찬양함

          요한계시록 5장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과 어린양을 찬양하며 지낸다고 기록

          되어 있다. 그분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예배하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가장 그들에겐 우선적인 일이고 그들이 기뻐하는 일이고 존재하는

          목적이다.

          그들은 게으르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의 가장 사소한 지시라도 놓치지않게

          주의하고 있다. "그들은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그들은 마치

          가죽끈에 묶인 개가 놓이기를 기다리는것처럼 주님의 위대한일을 하려고

          노심초사하고 있다.

           

          b)우리의 구원을 탐구함

          우리는 이 사실을 읽을때마다 우리 구원의 영광스러운 면을 더 잘 이해할수

          있다. 베드로는 우리의 구원을 말하면서 "이것은.......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것이라"(벧전1:12)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정말 놀랍고도 멋진일이기에 영원히 하나님 앞에 임재하도록 창조된 천사들 조차도

          이 일을 살펴보고 놀라고 있다. 이는 어떤일보다 천사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

          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엡 3:10-11)

          =>그들은 이 구원을 보고 너무 놀라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라고 서로 묻습니다. 그들은 이 놀라운

          구원을 들여다보고 연구하고 조사하는 일에 시간을 보내고 있다.

           

          c)성도들 가운데에 임함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고전11:10)

          =>여자가 공예배시나 기도할 때 머리에 무엇을 쓰고 해야하는 이유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일때 그 자

          리에 천사들이 그 자리에 임한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여자가 남자의 권위 아래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리고 천사들의 임재로 머리에 무엇을 써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를

          "두렵고도 놀라운일"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d)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됨

          ㄱ)율법은 천사들의 중개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어졌다.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히2:2) 이와비슷한 구절이 갈3:19, 행7:53 에도 나운다.

          ㄴ)하나님의 목적을 계시한다.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천사를 통해 계시하였고 야곱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하실때도

          천사를 통해 그리하셨다. 기드온도 천사를 통해 그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들었으며 신약에서 스가랴

          는 천사를 통해 자신의 아들 세례요한의 탄생에 대해 들었다. 동정녀 마리에게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계시한것도 천사를 통해서 였다.

           

          (2)성도를 섬김-가장 큰 임무

          천사에 관한 교리중 가장 놀랍고 위로가 되는 측면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

          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을 돌보시기 위해 천사를 통해 우리를 섬기도록 하셨다

          는 사실이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것

          이 아니냐"(히1:14)

           

          a)우리의 구원을 위해 사용받음

          우리의 구원을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시간동안 그들은 우리를 준비시킨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고넬료의 회심때 고넬료가 어느날 기도하고 있는대 한 천사가 와서 그에게 자신

          의 구원에 관한 예고편을 보여주고 구원이 실현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주었다.

          이 사건을 보면 천사들이 우리가 구원받도록 준비시키는일에 있어 우리가 알고있는것보다 더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것을 추론할수 있다. ex) 예배의 장소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갑자기 우연히 누군가 를 만나 예배의 장소에 가게 되거나 예수님을 만나 영접하게 되는일등등

           

          b)성도를 보호함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하

          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시편91:10-11)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단 6:22)

           

          c)성도를 인도함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행8:26)

          =>이 사건의 결과로 빌립에 의해 에디오피아 내시가 회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d)성도를 위로함

          바울은 폭풍을 만나 파선상태에 있던 배에 탄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행27:23) 그 천사는 사도바울을 격려하기 위해 보내심

          을 받았다.

           

          e)성도를 구해냄

          사도행전 12장에 베드로가 감옥에 있을때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

          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베드로는 이렇게 감옥

          에서 풀려났다.

           

          f)성도가 죽을때 낙원으로 인도함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눅16:22-23)

          천사들은 처음에 우리를 준비시키고, 우리를 지켜보고, 보호하고, 호위해주고, 구해주는 모든일을 한다.

          그리고 우리가 죽을때 우리를 주님 계시는 낙원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이것이 종종 "수호천사"라 불리는 존재가 우리 모든 사람에게 존재

          다는 교리를 지지하는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성경에 천사가 이런일을

          한다는 내용은 기록되어 있으나 모든 사람에게 "수호천사"가 있다는 내용은

          성경에 근거가 없다.

           

           

          (3)심판

          a)하나님의 원수들에게 심판을 시행함.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이것은 백성들 앞에서 연설을 하던 헤롯

          왕에 대한 언급이다. 그는 주의 사자가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었다.

           

          b)최후의 심판을 수행함

          "가라지를 거두어 불사르는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

          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저 넣으리니"(마 13:40-42)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

          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것을 보리라 그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

          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24:30-31)

          천사들은 사람과 이 천지가 창조되기 전에 창조되었다. 유기된자를 택함받은자들로부터 갈라내어 파멸

          시키고 택함받은 자를 영광의 주께 인도하는 이 마지막 활동은 천사의 몫이다.

           

           

          4)천사의 교리를 탐구하여 얻는 유익

          당신이 보던 보지 못하던 천사들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우리를 돌보고 있으며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그들은 우리를 보호해주고 숨겨주며 종종 위험으로부터

          구해준다. 하나님은 그들이 이런식으로 우리를 돕도록 그들을 사용하신다.

          천사들은 하늘의 상속자인 우리들을 섬기도록 임명되고 보내심을 받은 존재들

          이다. 천사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소홀히 하는일이 없도록 하자. 그러면 놀라

          우신 하나님과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알아갈수록 더 큰 경이감으로 가득

          차게 될것이다.

          가져온 곳 : 
          카페 >양무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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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요단강건너는사람



           







          사도 바울은“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grievous wolves)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행전20:29-30)고 강력히 경고한다. 그리고 이처럼 자신을 따르게 하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사람들의 교리를 바울은‘귀신의 가르침’(doctrines of devils)(딤전 4:1)이라 칭한다. 성경을 왜곡하는 본성을 소유한 이단들은 사나운 이리들과 흉악한 늑대들이며 거짓 교사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사악한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사람들을 미혹하며 양 떼와 교회를 해친다.

          성령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이들의 왜곡된 가르침이 자기를 따르게 하려는 육신의 탐욕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 있다. 이에 더하여 이단의 가르침은 귀신(악령)의 영감과 지도를 받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하시고 있다. 그래서 이단들의 교리를 연구해 보면 어떤 부분은 육신의 탐욕이 돋보이고, 어떤 부분은 귀신의 영감과 역사가 분명히 드러난다.

          신천지의 교리 가운데 귀신의 영감과 역사를 잘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 소위 ‘씨’에 관한 교리이다. 신천지는 렘31:27“(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의 말씀을 해석하며 다음과 같이 함부로 주장한다. “성경에 기록된 바 하나님의 씨도 있고 짐승 마귀의 씨도 있다(렘 31:27). 이 씨는 신의 말씀이다(눅 8:11).”<요약해설, 66>

          신천지의 주장에 따르면 렘 31:27에 나오는‘사람의 씨’는‘하나님의 씨’를 뜻하는 것이고, ‘짐승의 씨’는‘짐승 마귀의 씨”를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이런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함에 있어서 신천지는 마땅한 성경적인 근거나 신학적 이유를 전혀 제시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 본문의 역사적인 배경(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과 회복)과 문법적인 지식‘( 씨’에 관한 용어상 의미) 및 문자적인 상황(예레미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점)을 근거로 본문을 해석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 과연 신천지의 말처럼 렘31:27의‘사람의 씨’는‘하나님의 씨’를, ‘짐승의 씨’는‘마귀의 씨’를 뜻하는 것이 될 것인가? 물론 아니다!
           
          성경의 바른 해석은 신천지의 주장이 거짓된 것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신천지는 여기서‘사람의 씨’는‘하나님의 씨’로서 신천지 교인들을 뜻하고, ‘짐승의 씨’는‘마귀의 씨’로서 정통교회 성도들을 가리킨다는 말을 하고자 한다. 즉 사람들이 신천지를 따르게 하려고, 또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위해서 성경의 참된 뜻을 왜곡하여 억지로 성경을 풀고 있는 것이다. 렘 31:27
          의 말씀은 그러나 신천지의 거짓된 주장과는 전혀 다른 상반된 말씀을 하고 있다.

          렘 31:27-28은 이스라엘 집과 유다집이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하고 포로로 잡혀간 이후에 찾아올 회복의 시대의 은혜를 약속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렘 31:27에서 약속한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사람의 씨,’즉 이스라엘과 유다의 후손들 및‘짐승의 씨,’즉 이스라엘과 유다 소유의 육축과 야생동물들의 수가 증가하고 번성하게만드실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권위 있는 영역본들은 렘 31:27의‘씨’를offspring,descendants, posterity, children등과 같은 단어로 표현함으로, ‘씨’는 곧 사람의 후손들과 짐승의 새끼들을 가리킨다는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회복의 섭리는 렘 31:28에서 반복 강조된다. “내가 경성하여 그들을 뽑으며 훼파하며 전복하며 멸하며 곤란케 하던 것같이 경성하여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여호와의 말이니라”

          위대한 신학자들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본문(렘 31:27-28)을 이해하고 있다. 존 칼빈은 본문을 해석하며“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그것(황폐한 땅)을 사람들과 짐승들이 거주하도록 만드실 것이라고 말한다”라고 적고 있다(Jeremiah and the Lamentations, 120). 찰스 파인버그(Charles Feinberg) 역시 그의 주석에서 “침략과 추방이 그 땅으로부터 사람과 짐승을 이동시켰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땅에 사람과 짐승을 다시 심으심을 통하여 그 땅을 극적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을 예레미야를 사용하여 보여주셨다”고말한다(Jeremiah, 217).
           
           이처럼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후손들‘( 사람의 씨’)과 그들 소유의 짐승의 새끼들‘( 짐승의 씨’)
          의 수를 하나님께서 증가시켜 번영케 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다.신천지는 이처럼 분명한 본문의 말씀
          의 참된 뜻을 왜곡하여‘사람의 씨’는 ‘하나님의 씨’로‘짐승의 씨’는‘짐승 마귀의 씨’로 불법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렇게 함으로 신천지는 본문의 해석과 관련하여 세 가지 중대한 오류를 범한다. 첫째로, 본문의 예언은 바벨론 포로 이후 70년이 지난 후(주전 약 500년 경) 이스라엘 땅에서 성취된 역사적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이 예언이 오늘날 대한민국 과천 땅에서 신천지 창시자 이만희를 통해서 성취되고 있다고 거짓되이 말하고 있는 점이다.

          둘째로, 본문의‘사람의 씨’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후손들을, ‘짐승의 씨’는 그들의 육축과 야생동물의 새끼들을 가리킴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들을‘하나님의 씨’와‘짐승 마귀의 씨’로 바꾸어 버린 점이다. 그런데‘사람의 씨’를‘하나님의 씨’로 바꾸어 놓으면 결국 사람과 하나님을 동일시하는 치명적인 영적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며, ‘짐승의 씨’를‘짐승 마귀의 씨’로 바꾸어 놓으면 결국 짐승과 마귀를 동일시하는 정말 터무니 없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천지의 해석은 명백한 이단 신론, 이단 인간론, 이단 천사론에 해당된다.

          끝으로, 신천지가 주장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씨도 있고 짐승 마귀의 씨도 있다(렘 31:27). 이 씨는 신의 말씀이다 (눅 8:11)”라는 말을 그대로 대입하여 해석해 보면 지극히 황당무계하고 혼돈스러우며 불경스럽고 비성경적인 개념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짐승 마귀의 씨’라는 말에‘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을 그대로 대입해 보면, ‘짐승 마귀의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얼토당토한 개념이 나온다. ‘마귀의 하나님의 말씀’이라니! . . . 이것은 누가 신천지의 주장을 조롱하기 위해서 만든 말이 아니라, 신천지의 말을 그대로 대입해 보면 저절로 산출되는 개념이다.
          이 세상 누가 감히 이런 불경한 말과 개념을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인가? 귀신들이 거룩한 성경 말씀을 가지고 장난을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말과 개념이 아닌가? 따라서 신천지 교리는‘귀신의 가르침’(딤전 4:1)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신천지 교리는 창시자 이만희에게서 비롯되었음으로, 신천지 이만희 교리는‘귀신의 가르침’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런 결론이 아닐 수 없다.

          ▲ 김홍기 목사    
             필자 /.김홍기 목사(교회부흥성장연구원 원장)
             Ph.D. (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M.Div., D.Min. (Talbot School of Theology)
          www.youtube.com 검색창에  "신천지 교리를 교정한다"를 써 넣고 클릭하면 필자의 신천지 관련 동영상 메시지들을 볼수 있습니다. 출처: 크리스챤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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