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진섭 목사-설교 표절, 무엇이 문제인가?


안진섭 목사(기침, 새누리2교회), 한목협 열린마당 발제문

Sermon의 라틴어 어원 sermo, 혹은 sermonis는 고대 로마의 웅변가들의 웅변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단순히 ‘연설’(speech)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그 단어에 세례를 주어 전혀 새로운 의미로 옷 입혔다. 성경이 결코 단순한 책일 수 없듯이 설교도 단순한 연설이 아니다. 설교는 예배의 자리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요, 회중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이다. 그러므로 신학자 에밀 브룬너는 “진정한 설교와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게 선포되는 곳에는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이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외쳤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작금의 한국 교회는 설교 표절로 몸살을 앓고 있다. 재정 문제, 목사의 윤리성 문제와 아울러 설교 표절까지 문제가 되어 내홍을 앓고 있는 교회가 한둘이 아니다. 2007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가 교역자 36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교 준비, 설교문 작성 실태 및 의식조사”에서 타인의 설교를 그대로 사용한 경험이 있다고 대답한 사람이 43%로 조사됐다. 기윤실은 인터넷과 미디어의 발달, 교회 홈페이지 활성화 같은 현대 문화의 특성상 상황은 갈수록 더 심각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어떤 목사는 아예 카페를 만들어 수천 편의 설교를 올려놓고 누구든지 가입비를 내고 회원이 되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요즘같이 지적 재산권 문제가 첨예하게 되어 있는 시대에 그런 무분별한 설교 장사가 가능한지 개탄스러울 뿐이다. 이에 본고는 무엇이 설교 표절인지를 규정하고 그 해악과 해결책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무엇이 설교 표절인가?
 
미국의 유명 대학들은 글쓰기에 있어 표절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하버드대학: “출처를 표시하지 않고 가져다 쓴 정보나 데이터.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임을 밝히지 않고 사용하는 것. 인용부호를 하지 않은 어구. 출처를 밝히지 않은 구조나 구성 전략.” 예일대학: “인용부호 없이 원전을 그대로 가져오거나 정보의 출처를 명시하지 않은 경우. 원전을 조금 바꿨으나 거의 흡사한 경우.” 프린스턴 대학: “다른 사람의 언어나 생각, 또는 다른 사람의 고유한 것에 대해 각주나 인용부호 등을 붙이지 않고 그대로 옮기는 경우. 몇 가지 변화를 주기는 했지만 원 저자가 쓴 단어들을 많이 사용하여 바꿔 쓰면서 각주를 달지 않은 것.” 스탠포드대학: “합당한 자료의 출처나 작가를 밝히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작업을 도용하는 것.”

이상에서 보듯 각 대학들의 공통적인 규정은 출처를 밝혀야한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일반적인 글쓰기와 설교는 다르다. 글쓰기에서는 남의 것을 인용할 때는 아이디어든 문장이든 출처만 밝히면 된다. 자신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거의 없이 인용으로 점철되는 글이라도 학위를 받는 데는 문제가 있을지 모르나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설교에서는 출처를 밝히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설교 중에 ‘이것은 어느 주석에서 따왔습니다,’ ‘이것은 어느 목사님 설교집에 있는 내용입니다.’를 연발한다면 과연 교인들이 은혜 받을 수 있을까? 그러므로 설교 표절 문제를 다룰 때는 다음과 같이 일반 글쓰기와는 다른 각도로 접근해야 한다.

(1) 의도적인가?
설교자가 처음부터 베끼기를 하겠다고 작심하고 시작했는가 아니면 설교자가 다른 사람의 자료로부터 받은 영향을 무의식중에 표출하게 되었는가 하는 의도성 여부가 중요하다. 우리 주위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건서적들, 주석들, 강해서적들이 나돈다. 그 자료들을 접하다 보면 거기에 나오는 아이디어들, 영감들, 힘 있는 문구들이 끊임없이 목사 자신의 사고 속에 축적된다. 그런 자료들이 설교를 통해 흘러나온다면 그런 것을 표절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자료들은 이미 깊은 묵상을 통해 목사 자신의 피와 살로 체화된 것이라고 보아야하기 때문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목사의 사고와 영성, 삶과 인격이라는 필터를 거쳐 선포되는 종합예술과 같은 것이다. 한 사람의 설교자가 강단에 서기까지는 자신의 고뇌어린 몸부림은 물론이거니와 다양한 외부적 영향들이 함께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 영향들 중에는 어디에서 왔는지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예화들 중에는 돌고 돌아서 전해지기 때문에 무엇이 오리지널인지 추적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그런 경우에는 “제가 어떤 책에서 보니까,” 라든지 “누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등의 단순한 포괄적 표현만으로도 충분하다. 자신이 오리지널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것만으로 설교자의 윤리적 책임은 다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처음부터 베끼기로 작정하고 시작하는 것이다. 대지를 가져오든 내용을 통째로 가져오든 출처를 밝히지도 않고 남의 설교를 사용하는 것은 명백한 도용이다. 일반 글쓰기와는 달리 설교에 있어서는 출처를 밝힌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의 대리인으로 강단에 선 설교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없이 다른 사람의 말만을 들고 선다면 그것은 설교자로서의 책무를 저버린 처사이기 때문이다.

(2) 반복적인가?
또 한 가지 표절의 척도는 그런 행위가 단회적인가 반복적인가? 그 상황 속에서 불가피한 행위였는가 아니면 습관적인 것인가? 하는 점이다. 매주 서너 차례씩 설교해야 하는 과중한 부담 속에서 때로는 초읽기에 몰려 불가피하게 남의 설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출처를 밝히기만 한다면 정상참작의 여지는 있다고 본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설교 가운데서 강한 성령의 감화를 받으며 현재적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을 수 있다. 그것이 자신의 청중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라는 확신이 든다면 그 설교를 사용하는 것도 용인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필자는 자신의 설교를 재탕하는 재탕설교도 경우에 따라서는 가능하다고 본다. 교회사에 영성이 출중한 목사 가운데서 자신의 설교를 백 번 넘게 재탕한 사람도 있었다. 관건은 남의 설교를 사용하든 자신의 설교를 재탕하든 그 메시지가 하나님이 회중에게 주기를 원하시는 적실한 말씀이라는 확신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경우의 표절의 가납 여부는 전적으로 설교자의 양심에 맡겨야 한다.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상습적으로 남의 설교를 사용하는 경우이다. 작금에 설교 표절로 인해 내홍을 앓는 교회들도 대부분 목사의 장기간에 걸친 설교 도용 때문이다. 그런 경우는 100% 출처를 밝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목회 윤리적으로나 말씀의 종으로 세움 받은 사명의 차원에서나 비난 받아 마땅한 행위이다. 표절행위에는 아편보다 더한 중독성이 있다. 설교자 자신을 위해서나 회중을 위해서나 그런 행위는 근절되어야한다.

(3) 위선적인가?
설교 표절 중에 가장 교묘한 것은 남의 설교를 기술적으로 자신의 것처럼 포장하는 것이다. 남의 설교를 이곳저곳에서 끌어와서 편집하거나 짜깁기해서 자신의 것처럼 둔갑시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설교자는 자료의 출처를 밝히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행위에 도덕적 면죄부를 주는 경향까지 있다. 짜깁기를 하더라도 자신의 관점이나 방향이 있어야 하고 또 자신이 일정 부분 노력도 했으므로 그렇게 짜 맞춘 설교를 자신의 창작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 대한 깊은 묵상이나 자신의 고유한 창의적인 내용이 없이 남의 것을 편집한 것에 불과한 설교는 기술적인 표절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남의 예화를 편집해서 사용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남의 예화에 나오는 이름과 일시를 살짝 바꾸어 사용하거나, 남의 체험을 마치 자신의 체험인양 둔갑시켜 사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며 저질스러운 변조 행위이다. 그런 비양심적인 행위를 동원해서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위선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이상과 같은 설교 표절 행위의 해악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설교 표절이 왜 잘못인가?
 
첫째, 표절한 설교는 하나님의 현재적 메시지를 가로막는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며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다. 시대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신적 메시지를 전했지만 그 배후에서 말씀하신 진정한 설교자(the only Preacher)는 하나님이셨다. 설교자 하나님은 교회 시대에는 목사를 통해 말씀하기를 원하신다. 주일마다 강단은 회중을 향한 하나님의 생생한 뜻과 음성을 전달하는 계시의 현장인 것이다.

그런데 설교자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은 없이 베끼기만 한 원고를 들고 선다면 그보다 더한 잘못이 있겠는가? 바울 사도는 “내 말과 내 전도함이(preaching)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라고 했다(고전 2:4). 그 어떤 인간의 지혜로운 말보다도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하나님의 현재적 메시지를 그분의 백성들에게 전해야 하는 것이 설교자의 직무이다. 그 사명을 바르게 감당하기 위해 설교자는 늘 두렵고 떨림으로 엎드려 묵상하며 말씀을 기다려야 한다. 그런 몸부림이 없이 ready made 된 인간의 말만을 들고 서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선생이 받을 더 큰 심판”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약 3:1 참조). 설교 표절은 윤리적 문제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가로막는 참람한 행위이다.

둘째, 설교 표절은 설교자의 영혼을 고사시키는 행위이다.
혹자는 설교를 통해 교인들에게 은혜를 끼칠 수만 있다면 표절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논문 표절은 자기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므로 부도덕한 행위지만, 설교는 교인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보다 더 신학지식이나 지성이나 영성이 깊은 분들의 설교를 이용하는 것을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고 한다. 그것은 선한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은 어떠해도 좋다는 상황윤리적인 궤변이다.

계속되는 설교 표절 행위는 결국 설교자의 영을 죽게 만든다. 위로부터 공급받는 말씀이 없이 남의 대문만을 기웃거리는 영적 걸인 같은 사람의 영혼이 어떻게 건강하고 충만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런 빈핍한 영성으로 어떻게 교인들을 먹이며 교회를 이끌 수 있겠는가? 상습적인 설교 표절은 양떼들의 목자로 세운 설교자의 영을 고사시켜 결국은 목사도 죽고 교인들도 죽게 만드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셋째, 설교 표절 행위는 교회를 병들게 한다.
베낀 설교라도 은혜롭기만 하면 교인들은 영적으로 잘 성장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교회마다 회중의 특징과 그들이 처해 있는 삶의 자리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교회에서 은혜로웠던 설교라고 해서 내 교회에서도 반드시 은혜로우리라는 보장은 없다. 성경에 담겨있는 영원한 진리를 ‘지금 여기에’ 있는 청중에게 적실하게(relevant) 들려지도록 전파하는 것이 설교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본문을 연구하는 것 못지않게 청중에 대해서도 연구해야 한다. 표절 설교는 청중을 완전 무시한 적실성 제로의 설교이므로 그런 설교에서 교인들의 영적 성장을 기대한다는 것은 난망한 일이다.

한 편의 설교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설교자의 영성은 물론 그의 지성과 인품, 가정생활, 인간관계, 사회생활, 취미생활에 이르기까지 설교자의 전 삶이 영향을 미친다. 한 편의 설교 안에 설교자의 전 인격이 녹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목사는 “지난 주 설교를 준비하는데 몇 시간이나 걸렸습니까?” 하는 질문에 “55년이 걸렸습니다.”라고 답했는데 그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표절 설교를 통해서는 그런 설교자의 전 인격적인 감화를 기대할 수 없다. 청중은 비 양심과 위선의 냄새를 맡을 뿐이다. 따라서 표절 설교는 교인들에게 일시적인 은혜를 끼칠 수는 있을지 모르나 균형 잡힌 건강한 성장을 안겨줄 수는 없다.

현금에 한국 교회가 직면한 위기의 중심에는 신뢰성의 붕괴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말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그 충격파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 수밖에 없다. 수년 간 들었던 설교가 남의 것을 베낀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교인들이 받을 충격을 생각해보라. 결국 목회 현장은 황폐화되고 교회는 병들 수밖에 없다. 우리는 설교 표절이야말로 이 시대의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사단의 핵심 전략 중의 하나임을 인식하고 보다 엄중한 경각심을 가져야한다.
 
개선을 위한 제안들
 
설교 표절 문제는 목사 개인의 양식에 의존하는 개인 윤리의 성격이 강하므로 외부적인 제도나 환경의 변화로 개선될 수 있는 여지는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방안들을 생각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첫째, 설교 작성에 관한 전반적 교육의 강화이다.
댈러스신학교의 M.Div 과정은 신학의 전 과목들이 좋은 강해설교자를 양성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필자도 개인적으로 신학의 꽃은 설교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중요성에 비해 한국 신학교들의 설교에 대한 교육은 빈약한 경우가 많다. 비전공자가 대충 가르친다거나 현장과는 동떨어진 지엽적인 이론 교육에 치우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본문 선택에서부터 주석과 아웃라인 작성, 그리고 전개의 전 과정을 스텝 별로 세밀하게 가르치는 실제적 교육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런 든든한 기초도 없이 배출된 사역자들이 평생 남의 자료에 휘둘리며 살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또한 신학교 시절부터 설교 작성의 윤리에 대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과제물을 작성에 있어 신학생들의 정직성은 일반 대학생들보다 하등 나은 것이 없다. 신학교 시절에 짜깁기 같은 비양심적인 행위에 익숙하게 된 학생들이 평생을 그와 유사한 유혹에 노출되어 살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미국의 대학들은 학생들이 학문적 정직성을 준수할 수 있도록 ‘명예규약(honor code)’을 제정하여 운영하고 있다. 서울대학교도 2010년부터 리포트를 제출할 때 표지의 ‘배움의 윤리 서약’에 서명하는 절차를 거치게 하고 있다. ‘배움의 윤리 서약’에 담긴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이 과제는 내가(우리가) 직접 연구하여 작성한 것이다.
2. 정확한 출처 제시 없이 다른 사람의 글이나 생각을 가져오지 않았다.
3. 인용한 문헌의 내용이나 자료(도표나 데이터)를 조작(위조 혹은 변조)하 지 않았다.
4. 과제물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거나 구매하여 제출하지 않았다.
5. 과제물 작성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을 공동제출자로 명기하지 않았다.

신학교에서도 위와 같은 제도를 도입하여 기본적인 글쓰기의 윤리에 대해 세밀하게 교육할 필요가 있다.

둘째, 목사의 과중한 설교사역에 대해 제고할 필요가 있다.
작년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해 목회자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목회자들은 일주일 동안 평균 7.5회 설교하며, 주일 낮 설교시간은 평균 45.9분, 그리고 설교준비 시간은 평균 4시간 4분으로 나타났다. 4시간 준비해서 설교해야 한다면 바울 사도라도 좋은 설교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설교를 위해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의 절대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목사들이 표절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므로 과중한 설교사역을 개선하기 위해 목사 자신과 교회 당국의 공동적인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목사는 대외적인 활동이나 목회 외적인 일에 시간을 뺏기지 않도록 절제해야 한다. 동시에 목사가 교회 행정에 대한 전반적인 관여나 심방, 각종 모임 주도 같은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진하지 않도록 교회 측에서도 세심한 배려를 할 수 있어야한다. 목사는 오로지 기도와 말씀에 전념해야한다는 것은 변함없는 성경적 원리이다.

셋째, 목회 성공주의 신드롬을 극복해야 한다.
목사들은 초읽기에 몰린 다급한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타인의 설교를 베끼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 유명 목사의 탁월한 설교를 도용함으로 자신의 역량을 과시하려는 불순한 동기가 작용하기도 한다. 출처를 밝히기만 하면 표절의 잘못은 면할 수 있는데도 굳이 출처를 밝히지 않는 것이 그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랴? 좋은 설교를 통해 명예도 얻고 교회 성장도 꾀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열매가 곧 파멸의 열매였듯이 그러한 욕망은 망하는 길임을 알아야한다. 세속적인 성공주의 가치관에 함몰되어 무분별하게 거짓된 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곧 자신을 망치고 교회를 파괴시키는 지름길이다.

넷째, 설교사역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목사는 오직 말씀 증거를 위해 부름 받은 자이다.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입’으로 부름 받은 자이다. 그것은 인간이 땅위에서 감당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놀랍고 영광스러운 직무이다. 20세기가 낳은 강해설교자 로이드 존스는 그의 책 「목사와 설교」의 첫 문장을 “설교사역은 인생이 받을 수 있는 소명 중에서 가장 고상하고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소명이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잭 하일즈는 설교가 유한한 존재들에게 영원을 안겨주는 사역임을 확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따라서 하나님의 종이 강단에 가까이 갈 때에는 천사들도 날지 못하게 하고 천국의 호산나 소리도 잠잠케 하며, 어른들을 경청케 하고 아이들은 귀를 기울이게 하고 젊은이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하여, 천국이 응답하고 지옥은 떨도록 전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거룩함으로 기다려야 한다. 그럴 때 영원한 모든 것은 떨며 사탄과 그의 사자들은 두려움으로 흠뻑 젖게 될 것이다.
 
이 영광스러운 사역을 부끄럽고 부정직한 사탄의 유혹에 넘겨주는 것은 진주를 돼지 앞에 던져주는 망령된 일과 다름이 없다. 우리는 다시금 말씀의 종으로 부름 받은 영광스러운 소명을 자각하고 설교사역에 목숨을 걸어야한다.

ⓒ 뉴스파워
출처: USA아멘넷

십자군 전쟁 (crusades, 十字軍) 

 

 

 

 평범한 아랍 청년이 느닷없이 허리에 고성능 폭탄을 두르고 미군에게 뛰어들고, 그런 자살 폭탄 테러를 두려워한 미군은 의심스런 행동을 하는 중동인을 향해 가차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민간 여객기를 탈취한 중동 테러리스트가 미국 무역 센터 빌딩을 공격하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이어 리비아에도 서방 기독교 국가들의 폭격기가 폭탄을 투하하고 있다. 세상을 양분하고 있는 이슬람과 기독교 세력은 왜 이렇게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게 ?을까 ? 하느님과 알라는 공존할 수 없는 걸 까 ? 중동인은 원래 폭력적이어서 그런 건가 ? 여러 미디어에서 떠들어 대는 표면적인 이유를 걷어낸 근본적인 해답은 서기 1096년 있었던 어느 전쟁에서 찾을 수 있다. 그 해 는 이슬람과 기독교 세력을 이후 천 년간 충돌하게 만든 1차 십자군 전쟁이 있었던 해다.

 

(영화 Kingdom of Heaven, 십자군 출정 장면)

 

당시 이슬람 세력의 서진(西進)에 위기를 느낀 비잔틴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종교와는 그 다지 관련없는 영토 유지의 목적으로 당시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SOS를 친다. 중동을 평정하고 비잔틴 제국(동로마)을 위협하던 이슬람 세력에 맞서 큰 형뻘인 교황에게 지원군을 좀 보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교황은 마침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과 성직자 임명권을 둘러싸고 세속적인 권력 싸움을 벌이던 중이었고, 알렉시우스 1세가 도움을 요청한 지역내에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이 있음을 알고 교황은 기회가 찾아왔음을 직감한다. 영특했던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전략을 순서대로 풀어보자면 대략 이랬다.

 

1. 비잔틴의 위기를 이용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으로 편 가르기 하고 갈등을 조장한다.  

2. 비잔틴을 지원하기 위한 기독교 세력이 뭉치게 되면 대장은 당연히 교황이 할 수 있다. 

3. 교황이 대장이 되면 유럽내 모든 황제나 영주들을 세속적인 종속관계로 둘 수 있다. 

4. 교황과 교회의 권위는 황제의 권위보다 강해지고 정치적 영향력도 증대된다. 

5. 내부적 갈등은 이슬람 세력에 대한 적개심으로 아름답게 승화시킨다.

 

사진 (좌)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 모인 유럽 영주들

사진 (우) : 당시 십자군 기사들의 복장, 갑옷과 방패에 십자가를 새겨넣었다

 

대강의 계획을 수립한 그는 차근 차근 행동에 옮긴다. 먼저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 3,000명에 달하는 유럽내 권력을 지닌 황제, 영주, 귀족들을 불러모았다. 그 자리에서 비잔틴 황제의 지원요청을 설명하며 이슬람 지배하에 있던 예루살렘의 상황을 전달한다. 예루살렘에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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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순례를 가는 기독교인들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 끔찍한 박해와 고문을 받고 있으며, 예루살렘 성지를 점령한 이교도에 의해 성지와 성물들이 처참히 훼손, 모욕받고 있기때문에 기독교인으로서 더이상 성지를 이렇게 방치하는 건 하느님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열변을 토한다. 또 분노한 영주들에게 교황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교도로부터 성지를 해방 시킬 것'과 '해방 전쟁은 성스러운 전쟁, 즉 성전(聖戰) 이라는 것', '그 징표로 옷에 십자가를 붙일 것 그리고 이 전쟁에 참여한 모든 사람은 죄 사함을 받을 것'이라고 공표한다. 하지만 당시 예루살렘에는 이슬람,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었고, 성지 순례를 오는 기독교인들은 일정 세금만 내면 자유롭게 예루살렘을 드나 들수 있었다는 진실은 의도적으로 전달되지 않았다. (사진 : 1차 십자군 원정대의 주력부대를 이끌었던 고드프리아)

 

결론적으로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영토를 지키고자 했던 비잔틴 황제의 지원 요청과, 이를 종교 전쟁으로 미화해서 교회의 권위를 세우려던 교황의 선동이 절묘하게 맞아 들어가면서 전 유럽이 분노로 술렁인다. 기사뿐만 아니라 민간인,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십자군을 조직했고 좀 더 자극적이고 효과적인 선동을 위해 교황청은 유럽 전역에 십자군 전쟁 참가를 독려하는 전도사들을 파견한다. 이렇게 왜곡된 정보에 분노한 기독교 세력은 칼을 들고 십자가 깃발아래 모여든다. 프랑스인, 노르만인, 로렌인등으로 구성된 4개 주력 부대의 1차 십자군 원정대는 총 6만에 달했고, 그 지휘관은 '고드프리아 드 부용', '레몽 드 툴루즈'같은 후세에 영웅으로 미화된 유력 영주들이 맡게된다. 1096년 8월 15일 쾰른을 출발한 십자군 1차 원정대는 앞서 출발했다가 전멸당한 민간인 십자군과 달리 우여 곡절끝에 1097년 니케아를 함락하고, 1098년 안티오크를 점령한데 이어 1099년 7월 15일 남은 2만 병력을 동원해 드디어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사진 : 1098년 안티오크 십자군 전쟁 묘사도) 

 

사실 1차 십자군 원정대가 강력했다기 보다는 뜻밖의 공격에 준비가 되 있지 않았던 이슬람

군의 내부 분열이 예상밖의 성과를 거둔 원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슬람과 기독교간의

비극적인 증오의 역사는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에 십자군이 입성하면서 시작된다. 그간 교황이 왜곡해 놓은 이슬람 이미지로 복수심에 가득차 있던 기독교 기사들은 성안에 살고 있던 모든 주민 - 남녀노소 불문, 종교 불문 - 모든 예루살렘 시민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기독교 순례객을 도륙한 것에 대한 보복이자 하느님을 모독한 이교도를 징벌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십자군은 입성 후 무려 6주간 학살을 계속했으며 기록마다 편차는 있지만 기독교권 기록에서는 4만, 아랍권 기록에서는 7만에 이르는 주민들이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성안에 살고 있던 사람은 누구를 불문하고 모두 도륙되었으며 당시 공존하고 있던 대다수의

 이슬람,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기독교 주민들 마저도 학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사건이 이슬람인, 유대인, 기독교인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고 이로써 공존의 역사는 끝장나 버렸다. 이 잔인한 학살은 이슬람인들에게 복수심을 안겨주었고, 이후 십자군 원정이 7차례나 거듭 되면서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간의 증오심은 씻을 수 없는 감정으로 세대를 넘어 전해지게 되었다. 십자군 원정은 시간이 흐를 수록 애초의 종교적 목적에서 약탈, 노략, 방화등을 통한 전리품 획득 즉 일확 천금의 기회로 변질되간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십자군이 동맹국인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했던 사건은 그 원정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목적이 얼마나 세속적이었던가를 보여주는 사례로 남아 있다.

 

 

1996년 4월 기념비적인 행사가 유럽에서 열렸다. 총 500명에 달하는 기독교인들이 과거 1차 십자군 원정 당시의 경로대로 총 5,000km 를 도보로 걸어 쾰른에서 예루살렘까지 횡단하는 행사였다. 1999년 7월 12일 예루살렘에 입성한 이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목적은 900년 전 십자군의 영광을 재현하고 상기시키는 데 있지 않고, 반대로 당시 십자군이 저지른 대 학살을 사과하고 십자군 원정을 제대로 보겠다는 의지를 아랍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라고 밝혔다.

 

 

 

1999년 7월 14일 경향신문에 보도된 참가자의 인터뷰 내용은 당시 기사를 읽는 내게도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유럽에도 십자군에 대한 올바른 역사관을 가진 양심들이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계기였다. 당시 인터뷰 내용을 옮겨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시에 저질러진 일들이 잘못된 것임을 인정키위해 여기 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압도적으로 많은 서구인들이 왜곡된 역사관에 빠져있다. 지금도 많은 서구 영화들이 십자군의 안티오크 승리나 기적같은 예루살렘 정복등을 소재로 제작되고 있으며 그 승리를 찬양하고 있다. 하나 같이 이슬람 지휘관 '살라딘'을 악의 화신으로, 보스푸러스 해협을 넘어 이슬람의 땅으로 진격하는 십자군은 고귀한 가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하느님의 군대로 설정하고 있다. 정치적 목적을 가진 교황에게 선동되어 양민을 학살하고 동족을 약탈했던 십자군 원정이 이후 역사에 얼마나 깊은 상채기를 남겼는 지를 조명하는 자료는 찾아보기 힘들다. 예루살렘내 모든 생명체를 살해한 잔혹성은 사실 묘사하기 힘든 불편한 진실이 아닐 수 없다.

 

이 사건 이후 생겨난 두 종교간의 희생과 복수의 순환고리는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중동인과 서구인들 가슴속에 남아있다. 기독교인들에게 자긍심의 역사로 기록된 십자군 원정이 지속적인 종교 분쟁을 야기한 최악의 사건중 하나로 냉정하게 재 조명되기를 기대해본다. 

[출처] 추악한 성전(聖戰) - 십자군 전쟁의 실체 |작성자 가우디 

 

The Crusades : 제1부

 

 

 The Crusades : 제2부

 


 The Crusades : 제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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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기독교공인 그 이면의 진실: 세속적인 변질의 시작

 

지난 포스팅에서도 로마기독교공인 이후에 기독교가 변질되기 시작한 점을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는 기독교에 콘스탄티누스를 숭상하고 그의 지시에 타협을 시작하면서 사자굴과 카타콤에서는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로마가 공인한 기독교, 로마기독교 공인. 사실 그것은 진실된 기독교 공인이 아니라 로마를 이끄는 콘스탄티누스의 입맛대로 변형시켜 본 모습을 잃은 변질된 기독교로서 기독교 공인이었습니다. 또한 기독교신자를 자처했다는 콘스탄티누스에 대해서도 모순적인 상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콘스탄티누스의 신앙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포스팅에서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독교가 과거처럼 핍박을 받지 않게 된 것은 은혜였지만, 황제에게 보호를 받지 않는 것은 더 큰 은혜였음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 이후 기독교 사역자들은 새로운 사회적 신분과 세속적 이익을 얻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전에 이방 종교의 사제들이 누리던 특권을 기독교 성직자들에게 주었다. 감독들은 높은 명예를 가지게 되었으며, 이교도의 돈으로 교회들이 신축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의 면세를 확대했고(312), 십자가형을 금지시켰으며(315), 검투를 폐지시켰다. 또한 기독교의 주일을 공휴일로 제정했고(321), 교회의 절기를 존중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그는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긴 다음 도시를 확대해 콘스탄티노플로 개명하고, 그곳에 수많은 교회들을 건축했다. 자연히 출세를 위해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불로 시험을 받던 교회가 이제는 호의로 시험을 받았다.”(롤랜드 베인튼, 1894-1984).


“(예배당) 지붕은 금으로 치장하고 대리석을 끼워 장식하고 있다. 한때는 불꽃 속에 던져졌던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책이 이제는 화려하게 제본되고 황금과 보석으로 꾸며지고 있다.”(제롬, 345?-419?)


많은 가짜 기독교인들이 생겨났고, 점차 많은 사람들이 매우 무가치한 동기로 성직자 세계에 들어왔다. 순교를 각오한 신자들만이 들어올 수 있었던 교회가, 정치적 야심을 품고 아직 반은 이교적인 사람들이 몰려들어오는 세속적인 교회로 변질되어갔다.

 

 


콘스탄티누스가 본 환상과 그의 삶은 그가 참으로 회개한 사람이 아니며,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그는 개종했다고 한 후로도 여러 번 살인했고, 20년간 살아온 두 번째 부인 파우스타(Fausta)를 물이 끓는 목욕탕 안에 넣어 질식시켜 죽이라는 비밀 명령을 내렸다. 또 니케아 공회의를 소집한 그 해에 맏아들을 처형(암살)함으로써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고, 그의 누이의 아들은 태형으로 죽였다. 그는 피로 물든 옷을 입은 황제였다. 그러나 타락한 교회들은 고마운 후원자를 위해 콘스탄티누스의 미덕들을 찬양하고 그의 결점들은 감추었다. ‘황제의 축제일’까지 제정한 거짓 기독교인들은 콘스탄티누스라는 이름을 언급할 때마다 12사도에 준하는 분이라는 명칭을 반드시 덧붙였다.  


콘스탄틴 대제와 로마제국교회 -송광택
 관리자    | 2006·02·14 11:14 | HIT : 8,538 | VOTE : 3,117 |

콘스탄틴 대제와 로마제국교회

 

송광택 교수

들어가는 말

주후 4세기부터 중요한 변화가 서방교회와 정치구조 가운데 발생하였다. 제 4세기에 콘스탄틴의 종교정책에의해 소수파였던 기독교가 4세기말에 로마제국의 종교가 되었다. 또한 교회와 로마제국 그리고 이방종교 사이의 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었다. 교회사가 곤잘레스의 표현대로, 제4세기는 “교회사에서 새로운 전기를 여는 시작” 1) 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종교적 관용을 베푼 ‘밀란의 칙령'(the Edict of Milan) 2) 을 출발점으로 하여 제4세기의 변화는 점진적으로 여러 방면에서 이루어졌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콘스탄틴을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로마 제국 최초의 기독교 황제”(Christian emperor) 3) 로 환호하며 맞이하였다.  그리고 콘스탄틴 대제는 직접 간접으로 교회를 위해서 많은 일을 했다. 이전에 이교 사제들이 누리던 특권을 기독교 성직자들에게 주었다. 교회는 이교 사원과 동일한 권리를 갖게 되었다. 기독교의 주일(일요일)은 법정 공휴일이 되었다. 감독들은 높은 명예를 가지게 되었으며, 교회가 이교도의 돈으로 신축되었다. 그러나 “불로 시험을 받던 교회가 이제는 호의로 시험을 받았다”(Roland Bainton).  제롬(Jerome, 435?-420)은 “(교회당) 지붕은 금으로 치장하고 대리석을 끼워 장식하고 있다. 한때는 불꽃 속에 던져졌던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책이 이제는 화려하게 제본되고 황금과 보석으로 꾸며지고 있다” 4) 고 말했다.

본 소고에서는 로마제국교회 탄생의 배경을 살피면서, 당시의 교회가 겪은 변화와 직면한 문제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당시의 교회 상황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배우고 통찰을 얻고자 한다.

1. 콘스탄틴의 성장 배경

콘스탄틴은 로마제국의 속주(屬州)인 상 모에시아(Upper Moesia)의 나잇수스(Naissus) 5) 에서 로마 군대의 장교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와 헬레나(Helena)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헬레나는 해방된 동방의 여노예로서 그리스도인으로 미인이었다고 한다(a beautiful Christian Oriental freedwoman 6) ), 그가 일생동안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던 모친 헬레나는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와 결혼하였지만 법률상의 아내는 되지 못하였다. 이는 당시 로마법이 고급 장교들에게 속주의 주민들과의 결혼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7)

콘스탄틴은 일신교 8) 와 그리스도교에 대한 경향이 짙은 가정의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 3세기의 로마 제국에 있어서 종교적 성향은 모든 신들을 초월하는 ‘최고신'에 대한 신앙이 우세하였는데, 그의 부친도 이러한 일신교 신봉자였다. 콘스탄틴의 이복 여동생 아나타시아(Anathasia)는 유대교신자이거나 그리스도인이었고, 또 다른 이복 여동생 콘스탄시아도 그리스도인으로 간주되었다.

콘스탄틴은 292년에 니코메디아에 있는 디오클레시안의 황궁에 들어가서 지도자로서의 교육을 받았다. 그후 그는 디오클레시안과 이집트 전쟁에 출전하러 가던 도중에 팔레스타인에서 유세비우스 9) 를 만나 친교를 맺게 되었다(후에 유세비우스는 대규모로 '교회사' 10) 의 저술을 시도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는 팔레스타인 가이사랴의 감독으로 일했고 콘스탄틴 황제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11)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로마의 평화는 그리스도의 평화의 궁극적 승리를 위한 준비였다. 그는 최초의 기독교 황제를 구약의 메시야 예언들의 성취(the fulfilment of the messianic prophecies)로서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아우구스투스 치하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하신 일을 콘스탄틴을 통해 이루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세상은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로 인도되었기 때문이다. 12)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틴의 친구요 정치평론가(publicist)요 전기작가였다 13) ).

그후 305년 디오클레시안과 막시미안이 은퇴를 선언하였을 때, 콘스탄틴은 그의 부친이 제1 정제(正帝)가 되고, 자신은 부친의 뒤를 이어 제2부제로 임명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디오클레시안은 그의 사위 갈레리우스를 제1정제로 임명하였고 콘스탄틴의 부친은 제2정제가 되었다. 또한 두 부제에는 막시미누스 다이아(Maximinus Daia)와 세베루스(Severus)가 임명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콘스탄틴은 몰래 황궁을 빠져나와 그의 부친이 있는 골(Gaul) 지방 불로뉴로 갔다가, 후에 부친과 함께 브리탄니아로 건너서 갈레도니아(Galedonia) 전쟁에 참전하였다. 전쟁 발발 후 얼마되지 않아 그의 부친이 요크(York)에서 사망하자, 군대의 지도자들이 콘스탄틴을 정제(正帝)로 추대하였다. 이제 그는 부친을 계승하여 골 지방과 브리탄니아 속주를 다스리는 통치자가 되었다.

콘스탄틴은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군사력을 통해서 310년에 에스파니아를 정복하고 로마제국의 서부 지역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311년에 제1정제인 갈레리우스가 사망한 후, 서부 지역에서는 콘스탄틴과 막센티우스가 영토를 나누어 지배하였고, 동부 지역의 통치자는 리키니우스와 막시미누스 다이아였다. 이 황제들의 정치적 동맹관계는 그들의 지리적 환경과 기독교에 대한 정책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즉 콘스탄틴은 서방에서 막센티우스를 물리치고 유일한 통치자가 되기 위해 동방의 리키니우스와 동맹관계를 맺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콘스탄틴은 그의 부친처럼 관용정책을 취하였고, 리키니우스도 이에 동조하였다.

2. 밀비안 다리(Milvian Bridge) 전투

312년에 콘스탄틴은 당시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지배하고 있던 막센티우스와의 전쟁을 계획하였다. 그는 막센티우스를 서부 지역의 폭군으로 규정하고, 주민에게 자유를 부여한다는 명목으로 이탈리아로 출정하였다. 그는 알프스를 넘어 저항군대를 격퇴시키면서 로마로 진격하였다.

그는 로마의 티베르 강에 놓여있는 밀비안 다리에서 상대방의 막강한 군대와 마주쳤을 때 그의 군대로서는 로마를 점령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는 하나의 모험이었다.

그런데 콘스탄틴은 전투 전에 환상(혹은 꿈)을 통해 그의 군대가 승리할 수 있는 표징(sign)을 받았다. 그는 “이 표식으로 이겨라”( In this sign, Conquer, In hoc signo vinces )라는 라틴어 환상을 보았다고 전해진다. 14)

자신감을 얻은 그는 로마로 진군하였고 대승리를 거두었다. 막센티우스(Maxentius)의 군대는 완전히 패했다. 막센티우스 자신이 타이버 강을 가로 질러 밀비오 다리를 건너 도망하려고 시도하다가 그 강에서 빠져 죽었다.

이 전쟁은 312년 10월 28일에 있었는데, 세계 역사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 큰 전쟁이었다. 이 전투가 콘스탄틴에게는 생애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제 그는 서부 유럽 전체를 차지한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312년 10월 28일에 로마 원로원은 콘스탄틴을 최고통치자로 영접하였고, 그의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문을 착공하였다(315년에 완성됨).

리챠드 토드에 따르면, 콘스탄틴의 ‘환상' 이야기는 ”미심쩍은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 신앙을 불완전하게 이해하고 있었고 또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와 신령한 태양 사이의 구별을 명확하게 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가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충성심을 갖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15)


3. ‘밀란 칙령'과 교회

밀비안 다리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콘스탄틴은 로마에서 두 달을 지낸 다음 313년 봄에 밀란(밀라노)으로 갔다. 여기서 그는 그의 누이동생인 콘스탄티아와 리키니우스(Licinius) 황제의 결혼식에 참석하였다. 여기서 두 황제는 소위 ‘밀란 칙령''(the Edict of Milan)이라는 포고령을 선포하여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관용 정책을 베풀었다. 16) 그리하여 동부 로마제국의 집정관들에게 제극내의  제국내의 여러 종교에 부여된 권리들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승인하도록 지시하였다. 밀란의 칙령은 “기독교로 하여금 로마 제국 내에 있는 다른 종교들과 함께 법률 앞에서 동등한 발판을 얻게 하였다.” 17)

그때부터 수년 동안에 콘스탄틴은, 칙령을 내려, 몰수되어 있던 교회 재산을 반환하고 국가가 교회를 보조하도록 하며, 성직자에게는 공적인 의무를 면제하고 점장이를 금하고, ‘태양의 날'(Day of the Sun)을 안식과 예배의 날로 정했다. 18)

콘스탄틴은 재위 기간 중에 기독교에 대해 물질적 특혜와 법적 특권을 부여하였다. 313년에 그는 로마 감독에게 라테란 궁전을 기부하여, 후에 이곳에 콘스탄틴 대성당(지금의 죠반니 대성당)이 건립되었다. 또한 그의 시대에 베드로 대성당, 예루사렘 무덤 성당, 베들레헴의 예수 성탄 성당이 건립되었다. 이로써 기독교 예술과 건축이 처음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콘스탄틴은 315년 십자가 처형을 폐지시켰고, 321년에는 ‘일요일'을 그리스도인의 예배일로 공인하였다. 또한 국법에 의하여 주일과 교회 축일을 공휴일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기독교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공휴일에 로마인들은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는데 여가 시간을 보냄으로써 예술의 발달을 가져왔다.

아울러 콘스탄틴은 몰수된 교회재산의 반환 조치를 취하였고, 321년에는 교회가 상속권을 갖는 법을 제정하여 신자들이 그들의 재산을 교회에 기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교회는 급속적으로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였고,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콘스탄틴은 사생활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임을 공인하였고, 그의 가족은 모두 신자로서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337년 그는 임종을 앞두고 침상에서 세례를 받았다. 19)   세례를 미루는 일은 ‘인간의 죄를 피하기 위한 계락'으로서 그 당시에는 관습적으로 유행하던 것이었다. 20) “당시 사람들은 그와 같이해서 죄에서 정결케 되어 천국에 들어갈 것을 희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21)

그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업적 가운데 하나는 콘스탄티노플의 건설이다. 옛 비잔티움의 터전을 두 대륙을 통치하는 최선의 장소로 선택하여, 326년 11월 26일 정초(定礎)하고, 330년 5월 11일 신도(新都) 창설의 축하를 행하고, 콘스탄티노플(콘스탄티노폴리스)이라 명명하였다.

4. 평가

1) 콘스탄틴에 대한 평가

(1) 긍정적 평가

이 평가와 관련하여 제일 먼저 던져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콘스탄틴은 그리스도인이었나?” 이 질문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을 한 사람이나 부정적인 대답을 하는 사람이나 모두 이것이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가정해왔다. 22)  

콘스탄틴을 옹호하는 케레츠페스(Paul Keresztes)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시의 문헌과 기록을 보면, 콘스탄틴은 자신이 삶에서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으며 언제나 교리 문제를 잘 알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성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 교회사에 있어서 진정으로 위대한 그리스도인 황제이며 순수한 사도였다.”(Constantine: The Christian Monarch and Apostle, 1981, p. 8) 23)

김성태 교수에 따르면, 콘스탄틴은 이교도의 종교행사를 조심스럽게 제한함으로써 기독교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24)  

그러면, 콘스탄틴이 세례 받는 것을 뒤로 미룬 이유는 무엇인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콘스탄틴이 당시의 일반적 관례를 따랐다는 것이다. 크리소스톰(Chrysostom)도 말하기를 “세례는 이전의 죄들을 용서해 줄 수 있다(Baptism can give remission of former sins.)...  우리가 받은 은혜가 큰만큼, 세례 후에 죄를 범한 자들에 대한 심판은 더 중하다”라고 했다. 25)

(2) 부정적 평가

일부 카톨릭 교회사가의 입장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교회사가들은 콘스탄틴의 ‘개종'과 신앙(경건)에 관하여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사실 콘스탄틴의 개종이 정확하게 어떠한 성격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알리스테어 키는 콘스탄틴에게 종교가 제국 전략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로마제국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승리'라는 생각을 타당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콘스탄틴이 그리스도인의 신과 제휴한 것은 “그의 천재성과 창의적인 안목 때문이었다.” 26) 그는 콘스탄틴에게 ‘개종'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한다. 27) 그는 “콘스탄틴은 그리스도인이었나?”라는 질문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고 평가한다.

(3) 중도적 평가

얼 케언즈(Earle E. Cairns)에 의하면, “환상은 사실이었는지 모르나 콘스탄틴이 그리스도 교회에 호의를 보인 것은 편의상의 일 이었던 것 같다.”  또한 “죽음의 직전까지 세례를 받기를 연기하였고, 이교적인 국가의 ‘대사제직'(Pontifex Maximus)의 직위를 보유하고 있었던 일은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는 것 같다. 더구나 제위에 오를 권리를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젊은 사람들을 그가 처형한 것은 28) 진실된 그리스도 신자의 행동(the conduct of a sincere Christian)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아마도 그의 정책에는 미신과 편의주의가 혼합되어 있었을 것이다”라고 했다.

콘스탄틴은 재위기간 동안 우상숭배의 이교사상을 배격하지 않고 그리스도교와 동등한 위치에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동의 동기에 대한 이러한 해석이 옳든지 옳지 않든지간에) 콘스탄틴은 그리스도 교회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29)

얼 케언즈는 다음과 같이 당시의 변화를 언급하고 있다:

"멸시를 받아오던 소수의 회원을 가진 하나의 종파이던 그리스도교가 강대한 로마 제국의 공인 종교가 되었던 경로를 회고해 볼 때, 이 승리의 행진은 교회로서 좋지 못하였다고 믿는 경향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사회의 도덕적 수준을 높이고 그 결과로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전보다 높아졌고, 투기사의 죽음을 구경하는 것이 폐지되고, 노예에게는 전보다 관대한 대우가 주어지고, 로마의 법제는 훨씬 공정하게 되고, 전도사업은 더욱 촉진되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국가와 밀접하게 협력하는 일의 이익이 있었던 한편, 또 현저한 손해도 있었다. 정부는 교회의 지위와 보호와 지원의 보상으로서 영적 문제와 신학문제에 간섭하는 권리를 요구하였다...교회와 국가 사이의 논쟁이라는 길고 복잡한 문제는 이 시대에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313년부터 590년까지의 시기에 있어서의 교회의 로마 제국과의 긴밀한 제휴(closer association)는 박해 시대에는 문제도 되지 아니하던 그러한 많은 약점들을 교회내에 가져 들어오고 말았다” 30) 즉, 교회와 국가 사이의 친선(화해)은 교회에 축복 보다는 손해를 더 많이 가져왔다.

2) 기독교 공인(또는 국교화)의 결과에 관한 평가

(1) 긍정적 측면

곤잘레스에 의하면, "새로운 환경을 맞이해서 4세기의 교부들은 지금까지 순교를 가르치고 이교도들의 고소에 대해 논박하는 데 집중시켰던 정력을 이제는 다른 활동 분야에서 배출구를 찾을 수 있었다." 31)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4세기는 아타나시우스, 캅바도키아 교부들, 제롬, 암부로스, 어거스틴 등등 위대한 교부 배출하였다.

(2) 부정적 측면

B. K. 카이퍼는 기독교 공인의 부정적 결과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신자의 이름은 정치적 군사적 패스포트(passport)이며 사회적 승진의 수단이 되었다. 그 결과로 수천 수만의 이교도들이 교회에 합류하였는데, 이들은 불행하게도 다만 이름뿐인 기독 신자였다...  콘스탄틴 황제도 의심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참으로 높은 수준의 신자는 아니었다. 교회가 양(量)에서는 얻었으나 질(質)에서는 잃었던 것이다. 313년에 콘스탄틴의 칙령은 교회에 힘센 타락의 홍수 문을 열었던 것이다.” 32)

곤잘레스에 의하면, "대량적인 개종은 교회의 도덕적 삶과 신앙의 확신의 깊이를 얄팍하게 하였다.“ 그리고 ”황실의 보호를 받으면서 지금까지 불가능했던 신학이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바꾸어 생각하면 황실은 어떠한 신학적 주장이나 다른 문제에 대해서 정죄를 내리거나 총애를 표명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라고 했다. 33) 콘스탄틴은 교회 논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곤 했다.

어거스틴은 기독교 공인의 결과와 관련하여, 콘스탄틴의 개종 이후  ‘수많은 이교도들'(crowds of the heathen)이 교회에 들어오려고 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34) 이교도들은 우상숭배의 축제를 거행할 때 익숙하였던 흥청거림과 술취함을 포기하지 않고 교회에 들어 왔다. 또한 이교적 관습이 그들과 함께 교회에 들어왔다.

교회는 많은 이방사상과 상징을 받아들였다. 35) 5세기 중엽에 교황 레오 1세는 베드로성당에 들어가기 전에 태양에게 절하기 위해 돌아섰던 숭배자들을 비난하였다. 기독교화된 몇몇 이교적 풍습들, 즉 초나 향, 화관 같은 것을 사용하는 풍습은 이방 종교를 상징한다고 해서 초기에 교회 내에서 금했었다. 성모 마리아 숭배는 이방 종교의 유사한 것들 때문에 자극을 받은 듯 하다. 몇몇 학자들은 아데미(다이아나) 숭배가 마리아 숭배로 바뀌어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본래 아데미를 숭배했던 에베소 사람들은 초기부터 마리아를 숭배하였다. 마리아 숭배를 애굽의 여신 이시스와 연관시키기도 한다. 이시스를 열정적으로 숭배하는 자들은 그 여신을 ‘대동정녀'(the Great Virgin) 혹은 ‘신의 어머니'라 불렀다.

이방 종교와 기독교가 혼합되면서 4세기에는 성자와 순교자들을 숭배하는 일이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교회당을 순교자의 무덤 위에 세웠고, 성자들의 시신을 찾고자 하는 경쟁은 곧 미신적인 탐사로 타락해 버렸다. 동방 지역에서는 아직 살아있기는 하지만 곧 죽을지도 모르는 ‘숨어있는 성자들'을 찾기 위해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36)

잘못된 순교자 숭배와 성자 숭배에 대해 아퀸타인 출신의 비지란티우스는 다음과 같이 비난하기도 했다:

“우리는 신앙심을 구실로 하여 교회에 들어 온 이교적 의식을 볼 수 있다. 즉 양초가 대낮을 밝히고 있고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진귀한 천에 싸여 있는 작은 항아리의 먼지에 입을 맞추고 그것을 숭배한다.” 37)

3) 입교 절차(교리문답교육)의 체계화

적어도 콘스탄틴의 시대부터(개종자가 훨씬 더 많아졌기 때문에) 더 정교한 입교 과정이 발전되었다. 38) 305년에 엘비라 종교회의(the Synod of Elvira)는 세례 준비 기간을 최소한 2년으로 확정했고, 병자를 위해서는 더 짧은 유예기간을 허락하였다. <힙포리투스의 법규집>은 3년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특별히 열성적이고 적절하다면 그 기간을 단축할 수 있는 예외 규정이 있다. 그 준비기간이 6년 이하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규정도 보이나, 다른 증거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일반적인 요구사항은 아닌 듯 하다. 39)

교리문답 내용은 기독교 교리의 기본적 내용들로 이루어졌다. 즉, 하나님의 본성과 삼위일체, 창조와 우주의 질서, 세계 창조의 목적과 그 안에서의 인간의 위치, 인간의 본성, 악인에 대한 심판과 성도에 대한 보상,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 등이었다. 교육이 이루어지면, 감독이나 사제의 기도 후에 교리문답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수난과 부활 그리고 승천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40)  

나가는 말

콘스탄틴 아래에 일어난 큰 변화가 교회에 있어서 축복된 일인가 아니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간단히 ‘그렇다' 또는 ‘아니다'라고 대답하기에 이르기는 어렵다. W. V. 뢰벤이히에  의하면, “중요한 일은 단지 교회의 외적 대승리는 아니고, 그리스도교 라고 하는 것의 현실적인 발전이다. 공공의 생활은 전부 그리스도교의 영향하에 놓이게 되었다”라고 했다. 41)

교회는 이 세계를 정복했으나, 이번에는 이 세계가 교회를 정복하려 했다. 교회는 국가에 대해서 잘못된 의존관계에 빠져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자신은 이 방향에 나아가는 것에 상당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 밑에서 절대적인 국가교회의 제도가 시작되었다. 42) 뢰벤이히는 이 세속화가 “콘스탄티누스에 의한 제국교회의 설립에 의하여” 비로소 생겨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이 일에 책임 있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교회 자신이다.

1)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 I, 311쪽.

2) The Ecclesiastical History of Eusebius Pamphilus(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91), X. v.; cf. 박용규, 초대교회사, 107-109.

3) J.D. Douglas ed., Who's Who in Christian History, 1992, 172.

4) 롤랑 베인튼, 정통교회사(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1), 50쪽에서 인용.

5) 오늘날의 세르비아에 위치함.  cf. "Conctantine the Great", Microsoft Encsrta 98 Encyclopedia.

6)  Earle E. Cairns, Christianity through the Centuries(Grand Rapids: Academie Books, 1981), 124.

7) 김성태, 세계교회사 I (서울: 성바오로출판사, 1990), 215쪽.

8) 콘스탄틴은 그의 부친과 3세기초의 황제들의 본을 따라 초기에 로마의 태양신(Sol)을 믿는 ‘태양 단일신론자'(solar henotheist)였다. 태양신은 우주 배후의 원리인 ‘보이지 않는 최고의 신'(summus deus)의 보이는 현시(顯示)라고 생각했다.
9) 마이클 스미드, ‘유세비우스', 교회사핸드북, 17쪽.

10) 교회사는 303년 혹은 311년에 최초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유세비우스는 324년까지의 이야기를 기록하기 위해 몇 가지 부록을 첨가하였다. 그의 친구 콘스탄틴의 최후 승리까지 추가시켰던 것이다. 유세비우스는 지루하고 장황하며 어려운 문체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그이 책은 다른 잃어버린 저작들로부터의 인용문들을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아주 귀중하다. 대부분의 그의 역사기술은 앞선 저술가들로부터의 긴 인용문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 저술가로서의 유세비우스는 지나치게 경솔하게 믿지도 않았고 아주 비판적이지도 않았다.
11) Erwin R. Goodenough, The Church in the Roman Empire, 56. "..., Eusebius, Bishop of Caesarea, the learned historean of the Church, become his intimate friend."12) R. A. Markus, Christianity in the Roman World(London: Thames and Hudson Ltd., 1974) 91, 98.
13) 그의 정치사상은 비잔틴 기독교제국을 건설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콘스탄틴의 통치를 새 시대로의 진입으로 여겼다.
14)  콘스탄틴은 이 승리의 표시가 태양신이 보낸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만약 전투에서 이긴다면 태양신의 전사가 되겠다고 서약했다. 다음날 10월 26일 콘스탄틴의 군대는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콘스탄틴은 그의 승전을 그리스도의 위력과 그리스도교의 우수성의 증거로 보았다.
15) 리챠드 토드, ‘콘스탄틴 대제와 기독교 제국', 교회사핸드북, 130쪽.
16) Erwin R. Goodenough, The Church in the Roman Empire(New York: Cooper Square Publishers,Inc.,1970), 40. "...  Constantine had conquered the Roman world, he renewed with Licinius the policy of toleration for Christians in the great Edict of Milan, late in the year 312, or early in 313."
17) B. K. 카이퍼, 세계기독교회사(서울: 성광문화사, 1980), 37쪽.
18) Earle E. Cairns,124.
19) 콘스탄틴은 세례를 받은 후 황제복을 다시 입기를 거부하여 세례복인 흰옷을 입은 채 세상을 떠났다.
20)  세례를 지체하는 이유는 세례가 회개한 교리문답자들에게 과거의 죄에 대한 용서를 보장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유아세례는 5세기가 될 때까지는 규정(rule)이 되지 않았다.
21) W. V. 뢰벤이히, 교회사개론(서울:마라나다, 1995), 95쪽.
22)  알리스테어 키, 콘스탄틴 대 그리스도(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8), 8쪽.
23)  알리스테어 키, 콘스탄틴 대 그리스도, 22쪽.
24) 김성태, 세계교회사 I, 223쪽.
25) M. L. W. Laistner, Christianity and Pagan Culture in the Later Roman Empire(London: Cornell University Press, 1978), 34.
26)  알리스테어 키, 21쪽.
27) “우리는 진실로 이 점에서 ‘개종'이란 단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알리스테어 키, 같은 책, 21쪽)

28) 예를 들면, 326년 그의 아들 크리스푸스(Crispus)와 황후 파우스투스(Faustus)를 간통 혐의로 처형했다.
29)  Earle E. Cairns, 124.

30) Earle E. Cairns, Christianity through the Centuries(Grand Rapids: Academie Books, 1981) 121.
31) 곤잘레스, 같은 책, 311쪽.

32)  B. K. 카이퍼, 세계기독교회사, 38-39쪽
33)  콘스탄틴은 아리우스 논쟁에 깊이 개입하였다.(참고. 곤잘레스, 312쪽 이하)34) Peter Brown, Authority and the Sacred: aspects of the Christianisation of the Roman world(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23.
35) 교회사핸드북, 131쪽. “예를 들면, 태양숭배로부터 에수의 탄생일이 태양제의 날인 12월 25일로 정해지게 되었다.”

36) 교회사핸드북, 132쪽. “성자 숭배 의식은 그 시대의 위대한 지도자들(제롬, 암브로우스, 어거스틴)에 의해서 고무되었다.”
37) 같은 책, 132-133쪽.

38) Erwin R. Goodenough, The Church in the Roman Empire(New York: Cooper Square Publishers,Inc.,1970), 36.
39) 같은 책, 38.

40) 같은 책, 39.
41)  W. V. 뢰벤이히, 교회사개론(서울:마라나다, 1995), 95쪽.
42) 같은 책, 96쪽.

http://www.chongshin.re.kr/4_study/study.htm

가져온 곳 : 
카페 >사이버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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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늘새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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