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호수
                   최송연

       

      넓은 저 하늘 닮고 싶어 산이 외롭다면 산을 품고 별이 투정하면 별을 품고 돌이 날아들면 그 돌마저 품으니

      누가 가시채를 던진다 한들 되갚아 줄 리 없는 깊은 수심, 보드랍기가 천사의 치마 폭 같아라
      불어치는 모진 광풍에 할퀸 생채기 아파 눈물 흘릴 때면 달빛 내려앉아 쓰다듬어 주니 은가루를 뿌린 듯 밤 깊을 제면
      되려 더 반짝이네

      이제 곧 폭설 내려치는 무서운 겨울이 닥칠 것이나 그때도 달빛이 함께 할 것을 믿으니 두렵지도 외롭지도 않으리라  


         

        **달빛 같은 주님의 은총을 힘입어 역경을 견뎌내는 성도의 삶을 그린 것임**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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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 율법과 그리스도인의 삶 / 마이클 호튼

    옛 언약의 율법과 새 언약의 율법의 차이는 주로 종말론적이다. 옛 언약의 신정체제를 지배하는 의식들과 시민법은 단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요약되는 십계명에 일시적으로 부가된 것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의식과 시민법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취와 그에 뒤이은 쇠퇴는 결코 이 두 돌판의 영원한 타당성을 위협하지 않는다. 사도 요한은 신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는데 이는 율법의 두 번째 돌판의 요약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그리스도]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요일2:7~8). 이 명령은 그 내용의 측면에서 볼 때 처음부터 하나님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도덕적인 뜻이다. 그러나 흔들릴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함께 무덤 속으로 끌려갔다가 그리스도의 새 창조의 생명으로 나오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존되지 않는다. 사랑하라는 명령은 타락한 피조물인 우리에게는 위협이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옛 창조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 있는 새 창조에서는 가능하다. 사랑하라는 계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이며 그러므로 "당신 안에서" 참이다. 밤은 지나가고 있고 낮은 이미 밝아 오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리스도가 영광 중에 다시 오시는 밝은 대낮이 아니라 새벽녘이다.

    칼빈이 율법의 세 번째 용도(즉, 신자들을 인도하는 용도)를 "주된 용도"라고 부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신자들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의를 떠난 모든 의에 대한 율법의 정죄를 들을 필요가 있지만 칼빈은 설교자들이 율법을 신자들의 양심을 위협하는 데 이용할 때 이를 설교자들의 직분에 관한 중대한 과오로 간주했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 안에서 아직 동이 트지 않은 것처럼 신자들을 다시 사망의 직분으로서의 율법 아래 두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버지다운 관용"을 논하면서 칼빈은 로마서 8장15절에 나오는 "종의 영" 대 "양자의 영"에 대한 바울의 언급을 이렇게 설명한다.

    [전자를 바울은 종의 영이라고 부르는데 우리는 이를 율법에서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은 후자를 양자의 영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복음에서부터 나온다. 전자는 이전에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주어졌으며 후자는 지금 확신을 주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바울은 진술한다. 바울이 확증하고자 하는 우리 구원의 확실성은 보다시피 상반되는 것들의 그와 같은 대조로부터 훨씬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그 부사로부터 또다시 우리는 바울이 여기서 율법을 복음과 비교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바울은 율법에 그 자체의 성질을 할당하며 그로 인해 율법은 복음과 다르다.(John Calvin, Commentary on the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 p.269.)]

    그러므로 율법 자체에는 은혜로움이 없다. 율법은 우리에게 명령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순종하게 할 어떤 능력도 갖고 있지 않다. 칼빈은 여러 곳에서 율법의 첫 번째 용도(즉, 죄인들을 그들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절망하도록 몰아가는 기능)를 일차적인 용도로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칼빈은 기본적으로 "율법은 언제나 고발한다."는 루터의 격언을 되풀이한다.

    [율법은 사망만을 낳는다. 율법은 우리의 정죄를 늘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불타게 한다.....하나님의 법은 우리 마음에 말하지만 우리 마음을 개혁시키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여 주실 것이다. "이것이 내가 너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욕구, 우리의 기질과 생각이 하나님이 명하시는 것과 반대된다면 우리는 정죄를 받을 뿐만 아니라 내가 말한 대로 율법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더 비난받을 만하게 만든다....왜냐하면 복음서에서 하나님은 "너는 이 일이나 저 일을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독생자가 너의 구속자임을 믿으라. 그의 죽음과 수난을 너의 불행에 대한 치유책으로 받아들이라. 그의 피 아래 네 자신을 내던지면 그 피가 너의 씻음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I. John Hesselink, Calvin's Concept of the Law, p.212.)]

    율법은 마치 거울처럼 단지 우리의 더러운 얼굴을 폭로할 수는 있지만 깨끗이 닦을 수는 없다. "바울은 종종 '율법'이라는 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자신의 소유인 것을 요구하시고 우리가 완전히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아무런 생명의 소망도 주지 않으시며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가장 작은 명령에 있어서라도 벗어나면 저주를 더하시는 그런 의로운 삶의 규범을 말하고자 한다. 요컨대 "율법의 생명은 인간의 사망이다." "복음의 약속들은 값없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만 의존하는 반면, 율법의 약속들은 오직 행위의 조건에만 의존한다.

    그러므로 신자도 불신자 못지않게 북음이 "교회에서 매일 반복되게" 해야 한다. 성화에 있어서도 칭의와 마찬가지로 "율법과 복음의 대조를 이해해야 하며 이 구별로부터 우리는 율법이 행위를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복음은 오직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믿음을 가져올 것을 요구한다고 추론한다."고 칼빈은 쓰고 있다.

    그렇다면 칼빈은 어떻게 율법의 세 번째 용도가 신자들을 위한 율법의 주요 기능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여기서 또다시 칼빈은 새 언약 아래 있는 성도의 새로운 종말론적 상황을 인식한다. 칼빈이 생각하기에 무엇보다 우선 율법은 정죄의 핵심에 있어서 신자에 대해 사법권이 전혀 없다. "율법은 이제 우리에게 요구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 엄격한 집행관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우리가 노력해야 할 목표'를 가리켜 보이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율법이 고발하기만 했지만 이제 율법은 다른 목적을 갖고 있다. "이제 율법에는 신자들을 권면하는 능력이 있다. 이 능력은 신자들의 양심을 저주로 속박하는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섬김을 향한 길을 가리키는 능력이다. 신자는 율법의 위협이 아니라 율법의 지시에 귀를 기울인다. 실제로 워필드는 칼빈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사랑"을 결합시켜야 한다는 루터의 믿음과 같은 생각을 가졌지만 "두려움" 보다 "아버지다운 자비심"을 루터보다 훨씬 더 강조했다고 주장하는 한 루터파 신학자의 말을 인용한다. 따라서 워필드 자신은 이렇게 결론짖는다. "한마디로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을 대단히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훨씬 강한 강조점을 둔다." 그래서 심지어 열심조차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의 명예를 지킨다는 의식으로 인해 고취되었다.

    더욱 아이러니한 점은, 칼빈이 때때로 루터보다 더 신자의 믿음의 연약함을 강조했고 그 결과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는 명제도 더 강조했다는 것이다. 루터는 이렇게 선언했다. "그러므로 [믿음]은 또한 한 인간을 새롭게 하고 그에게 거듭남을 주는 한편 그가 끊임없이 선을 행하지 않기가 불가능하도록 그를 새로운 삶의 태도와 방식으로 인도하는 매우 강하고 능동적이며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 바쁜 것이다. 선행은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믿음에 뒤따르기 때문이다." 칼빈은 믿음과 행위의 필연적인 연관성에 대해서는 루터의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겠지만 새 피조물의 자발적인 순종에 대해서는 다소 덜 확신했다. 칼빈은 신자의 지속적인 의심과 게으름을 종종 강조하며 이런 상태는 심지어 거듭난 상태에 있는 참된 신자에게도 사실이다. 순종은 믿음에서 흘러나오지만 주님의 명령에 생각과 마음과 몸이 언제나 자동적으로 응답하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선행에 필요한 감사를 낳아야 하지만 율법은 신자에게 그의 의무를 상기시킴으로써 신자의 게으름을 방해한다. 우리가 의를 구할 때 의무는 법적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지만 율법의 우렛소리가 잦아들면 하나님은 종종 자신의 자녀들을 징계하시고 그들에게 그들이 이전에 가던 길을 생각나게 하시는 데 율법을 사용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우리의 의무를 상기시키는 일 이상으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오직 복음의 약속만이 우리를 감사의 순종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

    [그는 교훈뿐만 아니라 거기에 수반되는 은혜의 약속도 붙잡으며 이 약속만이 쓴 것을 달게 만들어 준다. 만일 율법이 조르고 위협하는 것만 가지고 두려움을 통해 영혼을 괴롭게 하고 공포를 통해 영혼을 낙심시킨다면 율법보다 덜 사랑스러운 것이 무엇이겠는가? 다윗은 특히 자신이 율법에서 중보자를 깨달았고 그 중보자가 없으면 기쁨이나 감미로움도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Calvin, Institutes, 2.7.12.)]


    마이클 호튼의 '개혁주의 조직신학'(V. 율법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발췌, 679~682p

    출처: 생명나무 쉼터  http://blog.daum.net/7gnak/15722828

    페루, 갈대로 엮은 호수 위의 우로스 섬

    푸노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티티카카 호수를 30분 정도 가면 우로스 ( Uros )섬을 만난다. 갈대 (토토라)로 만든 섬이다. 호수에 떠있는 40여개의 섬 에는 약 350명 정도가 생활하고 있으며 학교와 교회도 있다. 이 섬에 사람들은 우루족이라고 불리며 티티카카 (TitiCaca)호수애서 서식하는물고기, 물새등을 잡고, 밭에서 감자 등을 재배하며 생활하고 있는데 근래에는 관광객상대로 생활하고있는 사람도 많다.

    큰곳에는 우체국, 박물관및 후지모리 대통령 시절 지은 학교도 보인다. 잉카 시대에 천민으로 쫓겨난 사람들이 코파카바나에서 생활을 하다가스페인 군에 쫓겨서 이곳에서 섬을 만들어 살게 되었다고도 한다. 어쨌든 그들은 몇 백년에 걸쳐서 자신들의 독자적인 원시 생활형태를 유지하면서 대를 이어 갈대섬에서 살아오고 있다.







































































































    http://blog.daum.net/yunsb/7697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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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종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 / 박신 목사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26:39)


    시간과 재물의 특성

    순종이란 항상 수고와 희생을 요구합니다. 일상적으로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구태여 순종하라고 명하지도 않습니다. 그 수고와 희생을 감내하기 위해서 신자들이 먼저 어떤 일을 시도합니까? 또는 시도해야만 합니까?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수고와 희생이 가장 적은 일부터 순종하거나, 자신의 소유와 여유를 늘려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게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자연스레 나타나는 반응은 후자입니다. 시간과 재물이 지금보다 더 늘어나면 교회 일에 적극 참여 봉사하겠다고 말합니다. 어쨌든 순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기에 순수한 동기도 내포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 힘들이지 않고도 당장 순종할 수 있는 일부터 순종하려는 생각은 왜 하지 않을까요? 여유가 생기면 순종하겠다는 것이 나에게도 좋고 하나님에게도 좋으니 님도 보고 뽕도 따겠다는 심산이 아닐까요?

    문제는 시간과 재물이 늘어날수록 스스로 체감하기는 여전히, 아니 이전보다 오히려 더 부족하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탐욕이 끝이 없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나면 재물 욕심이 많이 줄고 쾌락 추구에서도 상당히 자유로워집니다. 그와는 별개로 시간과 재물에 조금의 여유만 가지려 해도 현실적으로 또 다른 시간과 재물이 소요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말 헌금을 더 많이 하고 싶고 성도들도 근사하게 대접하고 싶고 교회 봉사나 전도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고 싶은 선한 욕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과 재물이 갖는 바로 이 특성 때문에 여유를 가진 후 순종하겠다는 것은 물정 모르는 어리석음이나 내 것부터 챙기려는 욕심 둘 중 하나일 뿐입니다.  

    지금 상태에서 아주 작은 틈새의 여유라도 찾아내거나, 의지적으로 만들어내지 않으면 결코 여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시간과 돈이란 누구에게나 무제한으로 제공되지 않고 항상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 특성상 그 둘은 쪼개고 또 쪼개면서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가진 사람이라도 본인의 일이 아닌 다른 이의 일을 위해 아무리 적은 양이라도 내어놓으면 수고와 희생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또 자기 것을 내려면 그런 아픔과 미련이 따르니까 순종인 것입니다.

    그 가장 좋은 예가 십일조입니다. 참으로 지속적으로 온전하게 헌금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수입의 10%나 다시 빼앗아(?) 가셔서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세상 만물이 전부 당신의 것이자 당신의 관할 아래에 있는데 새삼 자기 것으로 당신의 창고에 쌓아둘 이유나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십일조는 교회나 목회자나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헌금을 하는 당사자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우선 올바른 물질관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청지기인 신자에게 재물이 잠시 맡겨진 것뿐입니다. 원래 소유권자인 하나님에게 돌려드리는 것이 바로 헌금입니다. 자기가 소유한 것 전부를 주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아무리 자신이 힘써 온갖 수고를 했더라도 재물을 만들 능도 그분이 주신 것입니다. 자신의 주인 내지 힘을 주는 이가 재물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한 분이라는 고백을 실제로 구현해 보이는 것이 바로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또 하나님만 의지하며 근검절약하며 사는 습관을 들이라는 뜻입니다. 부족해 보이는 나머지 90%로 충분히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믿음으로 하나님께 돌려드리면 그분이 의외의 지출과 재난에서 보호해주셔서 쓰고 남게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가장 중요한 뜻은 다른 이를 섬기기 위해 자기 재물의 10% 정도는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작금 십일조가 단지 종교적 헌신을 측정하는 용도로 제한된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결국 십일조도 현재 자기가 가진 것에서 일부를 의지적으로 떼어내는 훈련을 겸하는 것입니다. 바치면 더 많은 복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이름 없는 과부가 구차한 중에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헌금하여 예수님께 그 믿음을 칭찬 받았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전부를 바치는 헌신만 강조하지만, 그에 앞서 자기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서 헌금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단언컨대 시간과 재물이란 언제나 부족한 법입니다. 수치적 양이 늘어난다고 해서 선한 목적으로 활용할 여유까지 따라서 늘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현재 소유한 것에서 따로 떼어내지 않으면 나중이라고 따로 더 생기지 않습니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정작 시간과 재물을 바쳐야할 미래의 어느 순간도 사실은, 그때까지 이르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던 간에, 미래가 아니고 바로 지금입니다. 모든 행위는 지금 이뤄지는 것이며 미래에 행할 행위를 미리부터 확정적으로 예단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래서 맹세하는 것 자체가 바로 죄라고 지적했지 않습니까?

    현재 순종 못하면 미래에도 순종 못합니다. 시간과 재물에서 여유를 만들어 순종하려 들지 말고, 서두에서 지적한 대로 그리 부담 느끼지 않고 당장 순종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찾아야 합니다. 주님이 적은 일에 충성하라고 명하는 가장 기본적인 의미입니다. 현재의 적은 일에 순종 못하면 미래의 큰일은 더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런 신자는 미래의 큰일로 절대 부르지 않습니다. 그럼 결국 단 한 번도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지 못하고 자기 문제만 해결해 달라고 떼만 쓰다가 신앙생활을 마감하게 될 것입니다. 또 종국에는 그런 부끄러운 모습으로 주님을 얼굴로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실체가 없다.    

    당분간 시간과 재물이 늘어날 전망이 보이지 않거나, 혹은 그런 핑계를 대자니 아무래도 쑥스러워져서 순종하지 못하는 또 다른 핑계를 댑니다. 아직 믿음이 성숙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과 교리를 더 많이 배우고 기도도 열심히 한 후에 감당할 만한 믿음의 수준이 되면 순종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신자들이 생각하는 믿음에 사실상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실체가 없는 믿음인지라 실제로는 거의 자라지 않는데도 자라게 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나름대로 온갖 노력을 경주해보지만 실패로 끝나기 일쑤입니다. 또 그런 착각에 붙들려 있으니까 동일한 수고와 실패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그렇게 오래 했는데도 내 믿음은 왜 아직 이 모양이지라는 고백 내지 한탄을 입에 달고 다니지 않습니까?  

    실체가 없다는 것이 너무 심하게 느껴진다면 믿음의 본질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수정하겠습니다. 성경적 지식이 늘어나고 기도 금식 예배 찬양 헌금 봉사 같은 종교적 행위나 의식에 능숙해져야 믿음이 자란 것으로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성경 지식과 종교 의식에 능해지는 것은 정작 믿음과 별개로 교회 구성원에게 요구되는 기본적 자질 내지 의무일 뿐입니다. 믿음이 좋아지면 그런 것도 함께 능해지지만, 그런 것에 능하다고 반드시 믿음이 좋아졌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 교회 차원이 아닌 현실의 일상 삶에서 적용이 되어져서 능력이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아주 쉬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고난이 닥치면 주님의 구원을 소원하고 또 잘 이겨나가기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도를 열심히 해놓고는 종일 염려 초조에 사로잡혀 고난을 제대로 뚫고나가지 못하면 기도한 의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기도라는 종교적 의식을 행한 것뿐이지 믿음으로 삶에서 승리는커녕 적용도 하지 못한 것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신자들이 내 믿음이 왜 자라지 않는지 불평할 때는 사실은 삶에서 믿음이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지식과 종교행위에 능해지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고난을 잘 이겨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고난을 이기는 것보다 성경지식과 종교의식에 능해지는 것이 믿음이 자란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음에 체험하는 것과 겉으로 말하는 것에 괴리가 있습니다. 평강이나 담대함으로 고난을 대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이가 알면 믿음이 적다고 탓할까 두려운 반면에, 성경 지식과 종교 의식은 시간이 지나야 자란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하기에 별로 수치가 안 되기 때문은 아닐까요?  

    고난을 실제로 이겨내는 것이 믿음이 자란 증거라면 일단 온 몸으로 고난과 부딪혀 봐야 믿음이 늘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도 바로 그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에 범람하는 요단강에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매고선 일단 첫발을 디뎌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구체적으로 갈 바가 어디인지 또 그곳에서 무슨 일을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만 믿고 갈대아는 무조건 떠나야 했습니다. 여리고 성 싸움에서도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기발한 전투방법이긴 했어도 그대로 따라야 했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요단강이 갈라지지도, 가나안 땅이 정복되지도 않는 것입니다.

    흔히들 십일조를 잘 하면 믿음이 자랐다고 간주합니다. 역으로 십일조 하라고 하면 믿음이 자란 후에 하겠다고 합니다. 그 논리대로라면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평생 믿음이 자라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막상 십일조를 하라고 하면 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자라지 않는 상태로 있겠다는 것이며 실은 믿음을 키울 의사는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순종 자체의 특성이 믿음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명령의 구체적 내용에 관심을 모으다 보면 대부분의 명령이 내 능력에 과분한 것이므로 거의 매번 주저하게 됩니다. 현재 내가 갖고 있는 시간과 재물에서 순종할 여유를 찾지 않으면 영영 그럴 수 없듯이, 현재 내가 갖고 있는 믿음에서 순종할 수 있는 여분을 찾아내어야만 합니다. 지금 믿음의 상태에서 일단 순종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여전히 아니, 더더욱 힘들어지게 마련입니다.

    다른 말로 명령의 내용은 제쳐두고 명령을 내리시는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어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는 분임을 확신하기에 일단 순종하고 보아야 합니다. 합력해서 선으로 이끈다는 것은 일단 순종하고 나면 반드시 하나님의 놀랍고도 큰 은혜와 권능을 체험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한 번이라도 순종해 본 사람이 다음에도 더 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의지적으로라도 일단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알기에 일단 순종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믿음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그래야만 믿음이 자란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 자란 표시입니다. 믿음이 자라야만 순종하겠다는 것과는 믿음에 대한 전혀 다른 차원의 해석이자 적용입니다. 성경적 지식과 종교적 의식에 능해지는 것은 믿음이 자라기 위한, 더 정확히 말해 믿음을 삶에 적용하기 위한 준비 과정에 불과합니다.

    다른 말로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믿음은 믿음이라는 지식일 뿐이며 실습을 통해서 그 지식을 적용하는 지혜가 늘어야만 믿음이 자란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식이 자란 것으로만 믿음이 자랐다고 오해하고 실제로 적용(순종)은 하지 않으니까 아무리 해도 그 지혜, 참 믿음은 자라지 않는 것입니다. 현실의 삶에서 순종하는 훈련, 체험이 없으면서 교회 생활 열심히 했다고 믿음은 절대 자라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분을 순수하게 믿고 그분이 시키는 대로 그대로 행하는 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요컨대 순종이 없이는 믿음 자체가 아닌데도 믿음이 자란 후에 순종하겠다는 것은 너무나 이상한 논리라는 것입니다.  

    나만 유독 사랑하는 신자들

    물론 일단 순종해야만 믿음이 자라고, 아니 순종하는 것 자체가 믿음의 본질이라고 이해하는 신자도 꽤 있습니다. 자기 신앙에 대해 조금만 갈등해봤다면 최소한 믿음이 자란 후에 순종하겠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자기변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아도 오랜 교회 생활의 경험으로 터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을 가로막는 마지막 장애가 있습니다. 이야말로 온전히 순종치 못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과, 그와 같은 열정과 세기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이 그 둘로 대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둘을 또 합치면 당신을 사랑하되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뜻이 됩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명령이 결국은 이웃을 사랑하는 일로 귀착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신자 스스로 막상 순종해야만 하는 명령을 대하면 그 궁극적인 내용이 바로 그것임을 눈치 챌(?) 수 있습니다.    

    신자치고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없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으며 어느 정도(‘어떤’보다는 이 표현이 적합할 것임) 수고와 희생이 따르더라도 그분의 일을 하고자 하는 소원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측면에선 큰 문제가 없다는 뜻입니다. 목숨까지는 몰라도 마음과 뜻은 다 바쳐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연약함까지 아시고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은 거의 시키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웃사랑입니다. 우리 모두가 사실상 이웃 사랑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중간에 정작 자기 사랑은 왜 없느냐는 것이 신자의 뿌리 깊은 불만입니다. 이해도 안 되고 출구도 안 보이는 고난은 신자에게 허락해 놓고서, 또 기도를 아무리 해도 나아질 기미도 안 보여주면서, 대신에 수고와 희생이 잔뜩 따르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이나 기회만 마련해 놓으니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일한 열정과 성의로 사랑하라고 하니 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 제가 숨이라도 좀 쉴 수 있어야 남을 사랑하든지 할 것 아닙니까?”라는 한탄이 절로 입에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저더러 이웃을 사랑하게 하려면 그럴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내 코가 석자인데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제대로 사랑하지 못해도 제 잘못은 아닙니다.” 결국 시간과 재물에 여유가 있으면 순종하겠다는 첫 핑계의 자리로 되돌아 왔습니다. 거의 모든 신자가 자신의 믿음이 자라지 않고 항상 그 모양인 것 같이 느껴지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명령에 순종치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말입니다.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 없는 것은 아니고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에 비해서 턱없이 부족한 것입니다. 자기를 이웃보다, 때로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때문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아담의 타락 때부터 내려오는 모든 인간이 지닌 죄의 본질 즉, 자기중심성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극심한 고난의 십자가 처형 앞에 세 번이나 망설인 까닭이 무엇입니까?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럼에도 세 번밖에 망설이지 않고 골고다로 올라가신 이유는 또 무엇입니까? 자신보다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죄에 찌든 영혼들이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그 큰 고통을 감내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소명에 철저히 붙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십자가 이후의 자신의 전부를 온전히 성부 하나님께 의탁했던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계명을 능히 순종할 수 있는 근거도 바로 이웃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뿐입니다. 엉뚱하게도 시간과 재물의 여유, 믿음의 미성숙, 기도나 말씀에 능하지 못한 것, 의지력이 약한 것, 아직 믿은 지 얼마 안 된 것, 교회에서 맡은 일이 너무 많고 바쁜 것, 현실적 지위 신분 책무 등이 비기독교적이라 상충되는 점, 현재 겪고 있는 다른 고난과 문제들, 가족이나 인간관계의 상처 등등에 이유를 돌릴 필요가 없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처럼, 아니 그 반의반이라도 이웃의 영혼을 안타까이 여긴다면 어떤 계명에도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계명대로 거룩하게 살고 또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섬겨봐야 자신에게 돌아오는 현실적 유익은 없다는 것이 순종을 가로 막는 가장 큰 장애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여유, 믿음, 의지 등은 부차적입니다.

    복음 안에서 소명을 붙들어라.

    그러니까 어떤 현상이 생깁니까? 하나님을 잘 믿고 잘 따르면 현실적 복락이 따른다고 가르치면 신자들이 아주 좋아합니다. 기복주의나 크리스천 청부(淸富) 사상을 가르치는 교회는 자연히 크게 성장합니다. 신자들도 자신의 시간과 재물을 희생해가면서 열심히 순종합니다. 막상 하나님의 거룩한 뜻보다는 교회 일에 더 순종하지 않는지 염려가 되긴 해도 말입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좋은 일입니까? 아닙니다. 누이가 좋으면 매부도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는 인간 신자의 착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바라는 것도 그것일 것 같거나, 그래야만 한다고 믿는 것도 큰 오해일 뿐입니다. 이런 주제에 혼동이 오면 무조건 예수님의 가르침과 생애와 십자가에 비추어 보면 그 답은 명확해집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갈대아 우르에서 불려내실 때에도 그를 복이 통과하는 근원으로 삼으신다고 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면 별도 보너스를 크게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를 직접 축복하기 보다는 그를 축복하는 다른 이를 축복하고 그를 저주하는 다른 이를 저주하겠다고 했습니다.

    오늘 날의 신자도 아브라함과 똑같은 자리에 서야만합니다. 자신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불쌍한 영혼들에게 전해지는 도구로써 말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자기가 사나 죽으나 자기 몸에서 오직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에게서 자신과 하나님 이 땅에서 함께 win-win 하는 모습은 발견할 수도 없었고 또 그것을 소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만 win 하면 자신은 어떤 모습이 되어도 좋았습니다. 죽이기로 작정이 되어서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어도 감사하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아무쪼록 몇몇 사람이라도 주님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코자 하는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사십에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했고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른 것은 일상사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모든 교회를 위한 염려로 날마다 그 속이 눌렸습니다.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주님 안에서 붙잡힌 소명을 실현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며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에게 주님을 위한 자신의 수고와 희생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시간과 재물의 여유가 생기면 하겠다는 핑계는 아예 떠오르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열정으로 항상 불타 있었습니다. 그도 주님처럼 사탄의 노예가 되어 흑암 속에 헤매는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안타까움만이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을 이끄는 힘이자 활력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그 모든 핍박과 고난을 아무렇지 않게 담대히 이겨낸 것은 아닙니다. 두려움으로 떨었던 적도 있었고 여러 번 야반도주도 했습니다. 아마 겟세마네의 주님처럼 고난과 핍박이 닥칠 때마다 그 잔을 피하고자 하는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안락과 형통을 바라기보다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심정이 훨씬 더 컸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자신을 사랑할 겨를도 없이 이웃을 사랑하는 순종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거기다 어쩌면 주님보다 실제적인 고통은 더 많이 겪었을 법한 그가 정말로 확고하게 믿는 바가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인격적 체험적으로 만난 이후에 자신을 위한 영광의 면류관이 천국에 분명히 예비 되어 있음을 알았습니다. 십자가 복음이 이 땅의 어떤 극심한 고통을 포함해 죽음마저 뚫고 승리하는 하나님의 권능임을 확신했습니다.

    요컨대 자신이 어떻게 되든 주님께 죽기 까지 순종하면 하나님이 천국의 상급으로 보상함을 알았습니다. 아니 그전에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절대 수정, 변개, 감소, 왜곡, 파괴, 취소되지 않음도 알았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십자가 복음 안에 온전히 들어와서 자신에게 맡겨준 소명대로 그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는 살든지 죽든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예수를 외치며 살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의 뜻에 쉽게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둘 중 하나입니다. 십자가 복음의 은혜와 권능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수시로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현실적 형통과 하나님의 승리와는 절대 무관하다는 진리에 대한 확신과 적용이 온전히 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를 믿고 난 이후에 자신에게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붙잡혀 살지 않는 것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사실은 이 둘이 하나입니다. 사나 죽으나 자기를 대신해서 죽으신 자를 위해서 살아야만 하는데도 자신이 사는 데에 먼저 신경을 쓴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 안에 온전히 들어왔다면 최소한 신자로써의 어떻게 살아야할지 그 소명을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소명대로 살려면 믿음과 여유를 키우기보다는 복음의 능력과 은혜에 대한 확신, 정확하게는 실제 순종으로 인한 앎을 더 키워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끈질기게 자신을 옭아매는 자기중심주의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잘라내야 합니다. 간단하게 말해 일단 주님께 순종하면 그 모든 일도 성령의 간섭과 인도를 통해 그분께서 이루어주십니다. 한 번 순종하면 두 번 세 번의 순종은 쉽고도 아름답고 풍성한 모습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7/11/2012

     

    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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