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얘기지만, 짝퉁을 근사近似하게 만들지 못하면 이것으로는 사람들을 속이기가 어렵다. 따라서 대부분의 미혹들은 근사해 보이도록 만들어진다. 항상 강조하지만, 이런 근사하게 만드는 과정 중에서는 늘 진리와 거짓이 교묘하게 혼합된다. (물론 처음에는 거짓의 농도가 엷게 시작했다가 차차 시간이 지날수록 거짓의 농도가 짙어질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겠다.)

 

그래서인지, 뉴에이지도 소위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한다. 그런데 "마이트레야"로 불리는 이 뉴에이지의 재림 그리스도는, 물론 성경 속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며, 기독교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 앞에 "적"자를 붙여야 할 존재이다. 따라서 뉴에이저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재림"이겠지만 크리스천들에게는 "적그리스도의 출현"인 것이다. (이 뉴에이지 그리스도, 마이트레야에 관해서 잘 모르는 독자들에게는 "무지개의 숨겨진 위험들<<"을 꼭 읽어 보기를 권한다.)

 

지금쯤은 많은 독자들이 알고 있겠지만, 현대 뉴에이지 그리스도 개념은, 신지학회의 블라바츠키와 앨리스 베일리<< 등을 통해서 ("마스터"들에 의해 초자연적으로) 전달되었으며, 이후 신지학회를 비롯한 많은 뉴에이지 세력에 의해 증진되어 왔다. 특히, 앨리스 베일리는 이 그리스도 마이트레야의 지상 데뷰(?)에 관한 예언적(?) 내용을 "승천 마스터" 드왈 쿨Djwhal Khul(DK대사)로부터 받아 적어서 "그리스도의 재림(재출현)"The Reappearance of the Christ이란 책으로 발표했는데, 이후 이것은 그들의 교리서 중 하나가 되었다. (당연하겠지만, 이 책에는 세계통합과 종교통합도 언급되고 있다.)

 

블로거는 그들의 속임수가 조만간 현실적으로 흥행할 것으로 생각한다. 아니, 이미 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해 상당히 진행해 왔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교설들을 증진하는 뉴에이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영문 비디오를 소개하니, 많은 독자들이 아래 비디오를 보고 그들의 계략을 간파하기를 바란다. (능력이 안 되어서 자막을 달지 못함을 죄송하게 생각한다. 한가지 덧붙인다면, 비디오에 나오는 이미지에도 독자들이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뉴에이지 재림 그리스도는 집단 그리스도(Corporate Christ/하이어라키) 개념이며, 그들의 "아버지의 집"은 샴발라에 있다 - 비디오 이미지 캡처]

["최종적으로, 더 이상 인류의 요구에 맞지 않는 세계 기구들과 사회 구조들을 재조직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아래 첫번째 비디오 5:28 ~ 5:39)]

 

[유의! 뉴에이지 비디오]

  .  

 

참고로, 내용 중에 신사도들이 좋아하는 "구름덮음"oveshadowing 개념이 등장한다. 비디오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직분이며, 현재 그리스도직은 마이트레야가 맡고 있으며, 그가 2000년 전 예수를 "구름덮음"으로써 예수를 그리스도로 현신시켰다고 한다. 또한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에 그는 승천대사들과 함께 올 것이라는 내용도 있다.

 

"The Reappearance of the Christ" 뉴에이지 교리 전문보기<<



행여, 내가...

                      최송연

주님,
날마다 내 영혼의 불을 밝혀주십시오
불어치는 거센 폭풍
연약한 영혼이 감당하기에
너무 거세고 캄캄해
행여, 내가
주의 길을 벗어날가 그것이 두렵습니다 
 
주님,
아침마다 사랑의 향기로 채워 주소서
나를 모함하고 비방하는 말들
연약한 감성이 소화하기에
너무 강팍하고 드세어 
행여, 내가
본분 망각하고 대항할가 그것이 두렵습니다 
 
주님,
흰눈처럼 정결한 당신 영을 부어주소서
마음 깊은 곳에 엉겅퀴로 돋아난
갖가지 절망적인 상념들
연약한 지성이 감당하기에
너무 두껍고 질겨
행여, 내가
거기 얽혀 헤어나지 못할가 그것이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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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19장 64편)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시편119장 64편)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The earth is filled with your love, O LORD; teach me your decrees)

내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는 남편 미국인 형제들과 자녀들이 많은 교회이다. 담임목사님이 교회를 비운 토요일 새벽기도회이다. 목사님이 안 계시므로 성경을 교대로 읽으며 설교를 대신하자 제의를 하고 성경에서 가장 긴 말씀 장인 Psalms (시편) 119편을 영어로 번갈아 가며 176 끝절 까지 회중과 교대로 1절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한다. 성경을 교대로 읽어 내려오며 순서가 되어 시편119편64절을 내가 읽게 되었다. 64절 (The earth is filled with your love)을 읽는중에 내 중심에서 빤짝하며 기쁨이 순간적으로 스치고 지나간다.

1991년도 5월 마지막 주간에 참석하였던 어느 집회에서의 3째날 새벽 시간이다. 2째날, 분명 은혜를 사모하여 참석하게 된 집회인데, 내일이면 마지막 날인데, 2일째 저녁임에도 아무런 잡히는 것이 없었다. 2박3일을 집회참석, 1주일 왕복 티켓, 자영업을 하는 처지에 1주일 문을 닫으며, 2주반 정도의 영업 손실을 감수하고 참석한 집회인데 2일째 저녁이 마무리되는 시간임에도 아무 느낌이 없었다. 갈급한 심령으로 2일 저녁도 지났다. 3일 째 마지막 새벽을 맞아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세상은 간데없이 주의 사랑을 묵상하며 사모하는 심령에 젖어 있을 때인가 보다!  언제부터인가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둘러싸는 듯 하며 주의 사랑이 몰려오는 것을 느낀다. 끊임없는 주의 사랑이 나를 향하여 닦아오는데, 마치 온 우주에서 사랑이 끊임없이 몰려 오는 듯 하다. 마치 따뜻한 봄날 아지랑이가 사랑사랑 피어 오르는 듯한 형상으로 느껴지며 나에게 닦아온다. 사람으로서의 만족의 극치를 보이는 베드로의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하는 신앙고백이 절로 연상되는 부분이다. 마치 그 집회하던 산장이 천국같이 느끼게 된다. 그 후에 얼마 동안을 눈물로 지샜는지 모른다.

시편119편64절 앞 부분을 읽어보자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분명 한글의 뜻이 “하나님의 사랑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로 쓰여진 것은 분명한데 받는 의미와 느낌이 영어 본문으로 받는 느낌 보다는 많이 부족하고 감이 전혀 다르다. 받는 느낌이 영어 본문에서는 간단하고 분명하다 “The earth is filled with your love” “땅 위에 주의 사랑이 가득하도다”

64절 까지 성경을 읽어내려 오다, 영어로 된 “The earth is filled with your love” 본문을 읽으며, 그 집회에서 받은 나에게 특별히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실제가 존재함을, 영어 성경에서 확인하는 순간이다. 성경은 계속 읽어 내려가고 있으나 마음의 중심에서는 받은 주의 사랑을 성경으로 comfirm 하며 세상을 다 소유함과 같은 기쁨이 짧은 순간에 빤짝하며 마지막 절을 다 읽을 때까지 기쁨으로 떨리는 마음이 그대로 남아있다.

주어진 말씀을 읽은 후 모두들 흩어져 기도에 들어간다. 평소에 자주 하던 대로 기쁨이 감사가 되어 기도를 시작하니 찬양으로 입술을 열게 하시는 대로, 성령이 인도하시는 방언찬양이 자유롭게 흘러 나온다.

나에게는 방언찬양 중에 받은 미완성된 곡들이 있는데 대개는 곡을 잊어버리고 만다. 찬양 중에 받은 곡조가 여럿 있으나 오선지에 옮길만한 실력이 없기에 이번에는 곡을 잊어버리지 않으리라 하며 임시로 가사를 부쳐 놓고 기억하는 찬양곡이다. 그 방언찬양을 찾아 시작하려면 도, 레, 미, 파, 솔, 라, 라~ 라~ 라 하며 음을 찾아 가사를 붙혀 부르는 찬양이다. 언제 텔레비전에서 보니 걸 구룹 아이돌이 역시 도, 레, 미, 파, 솔, 라, 라~ 라~ 라 하며 음을 찾아 연습을 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 잠긴동산에게 배워서 따라하는 것만 같다 ㅋ ㅋ

곡에 임시로 부쳐 논 곡의 가사를 소개한다
오! 나의! 예수~ 여! ~ ~ 오! 나의! 구세주! ~ ~ ~
날 위해 돌아가신 주! ~ ~ 오! 나의 예수님! ~ ~ ~

달랑 한 절만 부쳐놓은 미완성 가사이다. 최소한 몇 절은 부쳐 놓아야 가사다운 가사가 되지 않겠는지요. 기쁨으로 벅차하며 입을 열게 하시는 대로 방언찬양으로 기도를 드리는데 역시 그 미완성 찬양이 흘러 나온다. 그런데 찬양을 드리는 중에 그 동안 끙끙거리며 완성할 수 없었던 가사가 입술에 붙어서 저절로 나온다

1. 오! 나의! 천부~ 여! ~ ~ 오! 나의! 하나님! ~ ~ ~
날 사랑하시는 ~ 하나님! ~ ~ 오! 나의 하나님! ~ ~ ~

2. 오! 나의! 예수~ 여! ~ ~ 오! 나의! 구세주! ~ ~ ~
날 위해 돌아가신 주! ~ ~ 오! 나의 예수님! ~ ~ ~

3. 오! 나의! 보혜사! ~ ~ 오! 나의! 성령님! ~ ~ ~
날 주께로 인도하시는! ~ ~ 오! 나의 성령님! ~ ~ ~

유일하신 삼위일체 나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지를 않는가! 할렐루야! ^^

이렇게 왜, 언제, 어디서,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찬양을 어떻게 해 왔는가를 간증한다면
먹물로 게시판을 가득 채우더라도 모자를 것이다! 할렐루야!^^

출처: USA 아멘넷 독자공간 게시판/잠긴동산

어찌보면 여자들은

'사랑한다' 라는 말보다 '예쁘다' 하는 말을 더 듣고 싶어하는 것 같다.

'예쁘다' 라는 그말을 듣기위해

예쁘지고 싶은 여자들이

평생동안 시간과 돈을 써가며 예뻐지는데 공을 드리는 것도

여자의 의미는 아름다움에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09134821_7.jpg

                                                                                     -구글-

'예쁘다' 라는 말이 

얼굴에 비중을 둔 평범한 표현이라면 

" 아름답다, 우아하다 "라는 말은

얼굴의 선과 이목구비가

신체적인 비율과도 아우려져

 빚어내는 총체적인 분위기를 말하지 않나 싶다.


*

 

나도 한때는 예쁘다는 말을 듣고자

몸부림을 친적도 있었지만

예쁘다, 아름답다는 내게 해당하지 않는것은

누구보다 내가 너무 잘 안다고 하는것이

솔직한 고백이 될 것이다. 

만약

억지를 부려도 용서가 된다면

차라리

 '서글서글하다' 라는 표현이 

그런대로 솔직한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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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글-
 

놀라운것은

  내 능력으로는 절대로 예쁜 여자도 아름다운 여자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을 바로 볼 수 있는 나이가 되니

저절로 깨달아 진다는 점이다.

 

물론

'예쁘고 싶다' 는 욕망이

'젊고 싶다' 로 서서히 교체 되긴 했지만

그 억지도

일시적인 집착에 불과 하다는 것도 안다.

 

*

 

음악감독인 박칼린이

 -사는 동안 멋지게-  라는 제목으로..

두번째 에세이  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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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글-

갑자기 '멋지다' 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졌다. 

그런데

'멋진여자' 보다 '멋진 사람' 이 훨씬 마음에 땡긴다.

 멋짐에는 웬지 당당함이 버티고 있는것 같다.


 

예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자신의 늙은 모습에 초연하고,

자신이 선택에서 비롯된 어떠한 결과에도 당당하며

무엇보다 그러한 자기 자신에게 당당할 줄 아는

사람을 향해 나는 박수를 쳐주고 싶다.

 

*

 

 앞으로

그렇게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기회가

나한테도 주어질련지 모르지만

죽기전에

자기에 대한 연민에서 벗어나서

자기 감정에 솔직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을 끊임없이 하면서 

 내 삶의 주인이 되는 멋진 사람으로 꼭 한번 살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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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글-

 

그러기에

 멋지다는 소리도 아무나 들을 수 있는게 아니다. 

 본인이 아닌 주변에서 그렇게 느끼고 또 인정을 해줘야 하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것들 찾는 도전과

스스로 자신의 삶의 방식을 찾아내

그것을 즐기는 열정과 카리스마를 지닌 박칼린을

그래서

 '멋진 사람' 이라 평가하는 모양이다.

*

 

나이가 들면 인간은 용기를 잃고 지혜를 얻는다고 하는데 

 독신도, 음악감독도 아니고

게다가

카리스마 조차 없는 주제에

멋진사람 이고 싶어하는것은 무슨 베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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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ssica-

                                                                                   

'냄새란 겉에서 속으로 들어가는게 아니라

속에서 겉으로 나오게 되어있다'


지금까지는

기껏 겉표면에다 냄새를 바르려고 했지만

이제부터는

안으로 부터 스며 나오는 당당한 냄새를 위해

 고민을 해야하는 것이다.

 

 

그 또한

'호모사피엔스 Homo Sapiens'

생각하는 사람처럼 갈고 닦는 용기를 가질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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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슬
 



'삶의 목적과 의미' (제1장 옳은 일을 하는 것) / 마이클 호튼

 

 

구약 성경에 대한 모호성

 

~~'율법'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모든 명령을 가리킨다. '복음'은 오직 믿음을 통해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의 약속을 발견할 수 있는 신구약 성경의 모든 본문을 가리킨다. 율법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줌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히도록 만든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 예수님이 친히 우리 대신 형벌을 받아 하나님의 기준을 만족시키신 사실과 하나님이 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이미 성취하신 일들을 가르쳐 준다.(23p)

 

 

~~요엘 선지자의 예언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성취되었으며, 그 때부터 모든 신자는 성령에 충만하고 거듭남으로써 하나님의 율법, 곧 하나님의 계시된 뜻이 수놓인 마음을 받는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인의 순종을 '성령의 열매'로 부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인데, 그것은 우리 자신의 덕성이나 인품의 성과가 아니라 율법을 우리 마음 판에 새기고 우리 속에서 새로운 순종을 일으키도록 일하시는 성령의 직접적인 영향 때문이다.

 

로마서 1,2장에서 바울 사도는 모든 사람 - 심지어 가장 변태적이고 문란한 사람까지도 - 은 자기 양심에 기록된 법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하지만 신자만이 자기 마음에 기록된 율법을 가진다. 다시 말해, 사람은 오직 거듭남을 통해서만 진정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 할 수 있다. 거듭나기 전에 율법은 정죄하고 저주할 뿐이지만, 예수님이 우리 대신 율법을 성취하심으로 우리도 율법을 완전히 지킨 자로 인정받기 때문에, 이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삶으로 이끌 뿐이다. 더 이상 율법은 "당신이 자신에게 맡겨진 본분을 다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하나님께서 맡으신 본분을 다하시지 않을 것이다."는 말로 위협할 수 없다. 결국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완전한 삶과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맡겨진 본분'까지 친히 이행하셨다. 이제부터 이 무조건적인 약속은 자신의 순종이나 노력으로 약속의 어느 한 부분도 얻을 수 없는 생명을 줄뿐 아니라, 평생 처음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게 되는 새 심령을 우리에게 준다. 바울 사도가 신자의 삶에서 율법을 없애기는커녕,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고후3:3~4)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3:6)고 선포한 사실에 주목하라. 

 

이것은 많은 사람이 생각하듯 성령을 하나님의 말씀이나 율법과 대립되는 위치에 두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생명을 주는 성령을 배제한다면 하나님의 명령(하나님의 복음 약속도)은 죽은 것임을 말한다. 달리 표현하면, 그것은 우리가 오히려 죽은 상태에 있음을 말한다고 하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 율법은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 없다.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 힘쓸지라도 우리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혹은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하든지 '더 큰 성령 충만'을 받든지 아니면 여러분이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간에). 생명은 온전히 모든 신자에게 속한다. 성령만이 "허물과 죄"(엡2:1)로 죽은 사람을 끄집어 내어 소생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일단 되살아난 사람은 평생 처음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긍정적이고 다정하게 반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신자는 아브라함이 그렇듯이 약속의 후사이며, 아브라함이 한 것처럼 하나님의 도덕법에 대한 의무를 갖는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출19:6)으로 삼으신 일은 이제 신약 성경의 교회에 적용되며, 그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아브라함의 모든 자녀(벧전2:9)로 구성된다.(27~29p) 

 

바리새인은 성경(오늘날 구약 성경)을 본질적으로 하나의 도덕규범이나 생활지침으로 받아들였다. 구약 성경이(신약 성경과 마찬가지로) 도덕법을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도덕법은 이미 죽음 반대편에 있는 천국이라는 약속의 땅을 상속받을 것이라는 약속에 대한 믿음을 통해 조건 없이 구속받고 선택된 사람에게 주어진 명령이다. 오늘날 구약 성경에 대한 율법주의적이고 경건주의적인 접근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은 구약 성경을 따분하게 생각하고 거기에 흥미를 잃어버렸지만,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를 통해 펼쳐지는 구속의 관점에서 구약 성경의 주제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곧 아브라함의 자손에 속한다는 소속감을 새롭게 환기시킬 것이다. 이삭과 야곱과 다윗과 라합과 여러 선지자와 더불어 우리도 율법과 약속이라는 가보를 이어받는다.(32p)

 

율법에 대한 강조

 

하나님이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이미 구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교훈을 즐거워하면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우리는 율법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 자유를 얻는다. 하지만 복음을 통해 얻은 자유는 우리 자신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심령이 평생 처음으로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자유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고 그 백성을 다스리신다.....

 

우리는 마치 계명에 순응하고 그것을 지킴으로써 새 생명에 들어가거나 하나님께 합당한 존재가 된다는 식으로 첫 계명을 시작할 필요가 없으며, 항상 바로 지금 여기서 하나님이 이미 행하신 모든 일 - 율법을 순종해야 하는 조건의 성취까지 포함시켜 - 에 기초해 자기 백성에게 친히 주장하시는 전문에서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은, 성육신 하신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우리 자리에서 우리를 위해 이 일을 행하신다.(34p)

 

도덕적 용도

 

율법은 하나님의 영원한 성품을 표현한 것이므로 변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도 이 율법에 완전히 순응할 수 없으며, 자신은 그 도덕적 탁월함에 근접할 수 있다는 식으로 율법을 다루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신자는 하나님이 자신의 도덕적 성품의 표현에 따라 요구하신 완전한 기준으로 율법을 다루어야 하며,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성취되므로) 단지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려는 목적으로 생활해야 한다.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키려는 사람은 하나님 그분의 의에 도달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얻고자 마음먹지만,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려는 사람은 하나님이 이미 자신을 의롭고 거룩하다고 인정하셨기 때문에 자비로운 천국 아버지께 순종하려는 자세를 갖는다.

 

바리새인처럼 자신의 의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는 사람에게 율법은 정죄와 심판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다윗처럼 아무런 대가 없이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알게 된 사람에게 율법은 의의 길로 이끄는 안내자로 다가온다.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 가리이다"(시119:32). 양자 됨의 특권을 아는 자만이 시편 기자와 같이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18)라고 말할 수 있다.(36~37p) 

 

 

마이클 호튼의 '삶의 목적과 의미'(제1장 옳은 일을 하는 것)에서 발췌, 23~37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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