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률 폐기론 / 마이클 호튼

 

 

율법주의 내지 완전주의 반대편 극단에는 도덕률 폐기론이 있다.

문자적으로 '반(反) 율법주의'를 뜻하는 이 관점에서는 율법이 - 율법의 형벌과 준엄함뿐만 아니라 율법의 규범적 지위도 - 신자에게는 완전히 폐지되었다고 생각한다. 율법주의에 대한 반응으로 앞에서 제시된 많은 논증들이 여기서도 타당하다. 우리는 신명기부터 마태복음과 갈라디아서에 이르기까지 삶의 규범으로서의 도덕법에 대한 호소의 완벽한 일관성을 살펴보았다. 차이는 구약과 신약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담 안에서 우리와 율법과의 관계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율법과의 관계 사이에 있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율법으로 인해 정죄를 받는다. 사실 할례는 유대인들에게 온 율법을 지킬 의무를 더 명시적으로 지운다(갈5:3). 그러나 바울은 계속해서 이런 의미에서의 (삶의 조건으로서의) 율법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우리가 법 없는(아노모스) 상태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자유를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섬기는 데 사용하기 위해서다(13절). 바울은 바로 14절에서 율법의 요약이 사랑임을 상기시키며 계속해서 사랑의 표출을 성령의 열매로 추론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분명히 도덕법을 루터파 및 개혁파 신학자들이 율법의 "세 번째 용도"라고 부르는 것 - 그리스도인의 행실을 지도하는 용도 - 에 따라 적용한다.

 

여러가지 도덕률 폐기론과 율법주의는 율법에 대한 똑같은 오해를 공유한다. 하나님의 법은 인간의 법처럼  삶을 위한 추상적인 원리가 아니라 언약 안에 있는 규정들이다. 하나님의 법은 언약의 유형에 따라 다르게 기능한다. 율법 언약에서의 원리는 "이것을 하면 살 것이고 그것을 어기면 죽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복과 저주의 기초는 언약의 조건에 대한 개인적인 성취다. 그러나 은혜 언약에서 기초는 우리의 대표자이신 분이 십자가 위에서 언약의 저주를 짊어지심으로써 개인적으로 율법을 성취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께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에게 전가되는 이 교환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법의 가장 충만한 문자와 영에 따라 의롭다고 선언된다. 더 이상 하나님의 법정에서 우리를 정죄할 수 없는 율법은 믿음으로 가득한 감사의 길에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한다. 도덕률 폐기론과 율법주의는 율법의 유일한 기능은 - 심지어 신자와의 관계에서도 -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정죄하는 기능이라고 가정하는 듯하다. 둘 다 신자가 하나님의 법과 맺은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다.

 

더 나아가 도덕률 폐기론은 율법주의처럼 전형적으로 ('그리스도의 법', '성령의 법', '사랑의 법' 또는 성경에 결코 언급되지 않은 다양한 규칙들 같은) 율법에 대한 몇몇 개념을 재도입하며 - 마치 이런 명령들이 어떤 식으로든 십계명보다는 덜 까다로운 듯이 - 그 개념을 복음과 쉽사리 혼동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도덕률 폐기론은 하나님의 법을 '외적인 준수'와 대비되는 내적인 영에 대한 거의 영지주의적인 집착으로 대체함으로써 새로운 종류의 율법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 도덕률 폐기론자들은 구약에서 주어지고 예수님이 가장 심오하게 추론하신 율법에 대한 해석이 외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내적인 동기와 태도까지 포괄한다는 점을 망각하고 성화를 '하나님이 하시도록 내버려 두고', '하나님 안에 거하며' 자아의 모든 의식을 폐하라는 권면으로 표현하면서도 종종 성화란 결국 인간의 일이라는 인상을 준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랑의 규범조차 도닥법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권면은 일종의 법이다.

 

율법은 칭의에 대해서나 성화에 대해서나 여전히 측정 기준이다. 율법을 통해 죄인은 정죄받고 심지어 신자의 가장 훌륭한 행위조차 부족한 것으로 밝혀진다. 그러나 율법은 여전히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의 계시다. 율법의 첫 번째 용도는 우리를 구원의 유일한 소망이신 그리스도께로 몰고 가서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시키는 반면, 세 번? 용도는 하나님의 도덕법을 생략하는 이들이 종종 부과한 성화를 위한 부담스러운 규칙들, 기술들, 공식들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단순히 우리의 양심에만 새겨진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의 마음에 새겨진 율법을 신자들은 소중히 여긴다. 신자들은 생명을 얻기 위한 한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 받은 생명을 삶으로 실천하는 방법으로 율법을 지키기를 갈망한다. 율법은 칭의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없다. 율법은 단지 우리의 성화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도덕적인 뜻을 계시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결코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 당황하지 않는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예수님은 율법을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요약하셨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에서 언급한 사랑, 오래 참음, 자비 절제 온유 등과 같은 성령의 열매는 그와 같은 요약에 잘 들어맞는다. 하나님의 도덕적인 뜻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품의 표현으로서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율법주의와 마찬가지로 도덕률 폐기론은 하나님의 법의 심각한 요구 조건과 그리스도인의 지속적인 죄와의 싸움에 대한 비현실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복음은 설령 "하나님이 하시도록 내버려 두라"는 최소한의 요구 조건으로 변형되더라도 우리에게 어떤 일을 수행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실제 관행에 있어서 이 권면은 가장 가혹한 율법이 될 수도 있다. 어떻게 자신이 진정으로 모든 것을 내버려 두고 모든 것을 예수님께 바쳤다는 것을 실제로 알겠는가? 완전주의의 율법주의적인 흐름과 도덕률 폐기론적인 흐름은 그와 같은 신비적인 정적주의에서 수렴된다. 도덕률 폐기론은 결코 진정한 자유에 이르지 못하고 다른 경로를 통해 율법주의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성화를 다루면서 의기양양한 직설법,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베푸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우리를 되살리셨다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6:11). 이것은 자신을 완전히 넘겨주었거나 하나님이 자기 방식대로 하시도록 내버려 둔 특별한 부류의 그리스도인들이 얻은 두 번째 복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복이다. 우리가 세례로 말미암아 연합된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경험이지 우리가 성취해야 할 위기의 경험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기초로 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우리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린다(롬6:13). 우리가 이 기준에 따른 행동에 얼마나 많이 못 미치느냐와 관계없이 우리가 처한 직설법적인 상황에 관한 사실은 죄가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죄가 그 지배권을 상실한 것은 바로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14절).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말하는 죄와의 지속적인 싸움은 이 사실을 취소시키지 못한다. 도리어 그런 싸움은 우리의 거듭남과 성화의 실재에 대한 가장 분명한 증거가 된다.

 

로마 가톨릭의 관점에서는 칭의와 성화를 관련지을 길이 없다. 그 둘은 사실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연과 은혜와의 갈등이나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노력과의 협력이 아니라 우리 실존의 모든 구석구석으로 뻗어 나가 사랑의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의롭다 하시는 판결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베르카우어는 종교개혁의 관점이 성화나 거룩한 삶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으로 비판받을 수도 있었다는 견해는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종교개혁의 관점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되돌려놓기 때문에 성화와 관련이 아주 많다. 믿음은 아무런 주관적인 영향이 없는 '외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믿음은 그리스도의 모든 유익과 더불어 우리를 그리스도께 연결시킨다. 일방적으로 주어지고 언제나 순수한 선물로서 그 기초에 있어서 무조건적인 언약은 듣고 응답하며 수동적으로 받고 능동적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돌려 드리며 이웃을 섬기는 진정으로 쌍방적인 관계를 낳는다. 칭의에 있어서 믿음과 행위는 전적으로 상반되는 반면, 성화에 있어서 그 둘은 씨앗과 꽃처럼 서로 관련되어 있다.

 

지금까지의 설명에 따르면 칭의는 신앙생활의 첫 번째 단계가 아니라 성화와 선행의 끊임없는 원천이다. 루터는 이렇게 요약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믿으며 너의 믿음은 내가 너에게 너를 의롭게 하는 자요 구주로 값없이 준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으니 그러므로 너는 의롭게 되어라.' 따라서 하나님은 오직 당신이 믿는 그리스도 때문에 당신을 받아 주시거나 당신을 의인으로 간주하신다." 우리가 유익한 권면은 말할 것도 없고 (거듭남, 죄의 폭정에 대한 그리스도의 정복과 우리의 일평생 동안 우리를 새롭게 하시겠다는 약속, 우리 몸의 부활과 죄의 현존으로부터의 자유 등과 관련한) 어떤 다른 좋은 소식을 전하더라도 루터가 여기서 요약하는 소식만이 의롭다 할 뿐만 아니라 거룩하게 하는 믿음을 창조하고 유지한다. 이는 믿음 안에 있는 어떤 미덕 때문이 아니라 믿음이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각 행위의 혼합된 동기로 인한 번민 없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자유롭게 선행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칭의 때문에 우리의 선행조차 '구원받을' 수 있으며 이는 하나님의 몫이나 우리 자신의 몫이 아닌 우리 이웃의 몫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다. 칼빈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율법의 이런 가혹한 요구나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율법의 완전한 엄격함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서 아버지처럼 부드럽게 그들을 부르시는 소리를 듣는다면 그들은 기분 좋게 매우 진지한 자세로 대답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를 것이다. 요약하자면, 율법의 멍에에 메인 이들은 매일 자기 주인에게 특정한 임무를 할당받은 종들과 같다. 이 종들은 자신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임무의 정확한 분량을 성취하지 못하면 주인 앞에 감히 나타나지 못한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더 관대하고 공평하게 대접받으므로 자신이 한 일이 불완전하고 반밖에 못했고 심지어 흠이 있더라도 그것을 아버지에게 주저 없이 내어놓고 비록 자신이 아버지가 의도한 바를 제대로 이루지 못했더라도 자신의 순종과 자발적인 마음이 아버지에게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그런 자녀가 되어 우리의 섬김이 제아무리 작고 무례하고 불완전할지라도 우리의 가장 자비로운 아버지께 인정받을 것임을 굳게 신뢰해야 한다.....그리고 우리는 상당한 정도로 이런 확신이 필요하다. 그런 확신이 없다면 우리가 시도하는 모든 일은 헛된 일이기 때문이다.

 

에임스는 이렇게 덧붙인다. "칭의 때문에 선행의 불결함은 그 선행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보상받는 것을 막지 못한다."

 

그와 같은 관점은 올바르게 행위의 근거를 믿음에 둘 뿐만 아니라 또한 신자들을 해방시켜 하나님의 호의를 얻으려는 동기나 그 호의를 상실하는 데 대한 두려움을 떠나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게 한다. 그런 관점은 우리의 사랑과 섬김은 하나님과 우리 인격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에는 아무것도 보탬이 되지 않지만, 아무리 무기력하게 열성 없이 불완전하게 행해졌더라도,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돌보시는 수단이 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는, 세상을 포용하는 행동주의를 위해 우리를 해방시킨다.

 

복음주의적인 신앙고백서(1560년)는 성화와 윤리가 없는 전가로서의 구원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기는커녕 이렇게 선언한다. "그리스도가 성화의 영이 없는 이들의 마음속에 거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하나님의 선택된 자녀가 참된 믿음으로 받는 주 예수의 영은 누군가의 마음을 차지하자마자 곧 그를 거듭나게 하시고 새롭게 하신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이전에 사랑했던 것을 미워하기 시작하고 이전에 미워했던 것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거기서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서 육체와 성령 사이에 있는 끊임없는 싸움이 찾아온다....."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는 의롭다 하는 믿음의 본질에 관한 종교개혁의 만장일치의 합의를 이렇게 되풀이한다.

 

같은 사도가 믿음을 효력 있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것이라고 부른다(갈5:6). 믿음은 또한 양심을 고요하게 하고 하나님께 자유로이 나아가는 길을 열어 준다. 그래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하나님에게서 유용하고 필요한 것을 얻을 수도 있다. 바로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계속 하나님과 우리 이웃에게 베풀어야 할 섬김을 베풀게 하고 역경 중에 우리의 인내를 강하게 하며 참된 고백을 만들어 내고 한마디로 온갖 종류의 좋은 열매와 선행을 낳는다.

 

그런 선행은 개인적인 이득이나 공로에 대한 어떤 욕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해, 그리고 이웃의 유익을 위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성화는 칭의라는 하나님의 프로젝트를 보완하는 인간의 프로젝트도 아니고 자유의지와 주입된 은혜 사이의 인과적 관계를 다루는 과정도 아니며 하나님의 의롭다 하시는 말씀이 인간 삶의 모든 측면에 미치는 영향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렇게 진술한다. "효력 있게 부르심을 받고 거듭나 자기 안에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영이 창조된 사람들은 그들 안에 거하는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효력을 통해 실제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더욱 거룩해진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구속은 이중적 원천(신인협력설) 대신 칭의와 내적 갱신이라는 이중적 효과와 관련이 있다. 레슬리 뉴비긴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자기 자신의 의라는 개념은 죄의 정수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즉 단순히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에만 의존하지 않는 거룩함이나 의의 모든 흔적에 대해 우리는 바울 못지않게 강경하게 반대해야 한다. 그러나 바울과 똑같이 우리도 만일 누구든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새 창조, 허구가 아닌 실제 초자연적인 거듭남, 영혼 안에 있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마이클 호튼의 '개혁주의 조직신학'(IV.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활동 中에서 B. 도덕률 폐기론)에서 발췌, 674~67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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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남침례회 뉴욕한인지방회, 장로 호칭제 상정 거부

2014/09/17 (수) 09:31 ㆍ추천: 10    

미남침례회 뉴욕한인지방회는 9월 16일(화) 오전 10시 영원한교회에서 31회 정기총회를 열었다. 이날 남침례회 정체성에 대한 뜨거운 토론들이 진행됐다. 임원회(회장 김영환 목사)는 지방회 규약 수정안을 올렸는데, 핵심은 '호칭 장로'에 대한 것이었다. 미남침례회는 교회에 목사와 집사 직분만 있지만, 한국의 침례교(기독교한국침례회)는 호칭 장로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장로직을 선호하는 교인들이 많다는 현실적인 문제가운데, 장로를 임직하지는 않지만 '장로'로 호칭한다는 것.


▲발언하는 이창송, 정태진, 최창섭 목사(왼쪽부터)

남침례회와 장로 호칭제

임원회는 몇년에 걸쳐 일부 회원목사에게서 호칭 장로제도에 대한 안이 계속 올라오자, 지난 6월 월례회에서 회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후 이번 정기총회에 정식안건으로 올린 것. 기존의 지방회 규약은 "장로 장립제도를 시행하는 교회는 본 회에서 자동 탈퇴하는 것으로 정한다"라는 조항이 있는데, 이를 "본회는 개교회의 안수집사 제도 시행을 원칙으로 정하지만 개교회의 의사와 형편에 따라 안수 받은 집사를 장로로 호칭할 수도 있다"라고 바꾸는 수정안을 냈다.

결론적으로 이 수정안은 회원들의 반대로 상정되지도 못하고 사라졌다. 거수로 표결을 한 결과, 과반수가 훨씬 넘는 회원들이 상정 자체를 반대했다. 먼저 원로들이 앞장 서 반대했다. 원로 이창송 목사는 호칭 장로제는 목사와 집사로 이루어진 침례교의 정체성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반대했다. 더 나아가 집사를 장로로 호칭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며, 상정 자체를 반대했다. 원로 정태진 목사도 남침례회와 뉴욕지방회의 규약 전문에는 신약성경의 신앙과 원리에 따르게 되어 있는데, 호칭 장로라는 것이 성경에 없기때문에 수정안을 상정할 수 없다는 규약발언을 했다. 남침례회 한인총회 총회장을 지낸 최창섭 목사도 성도들에게 침례교회에는 목사와 집사가 있다고 계속하여 가르쳤는데 다르게 가르칠 수 없다고 반대했다. 최 목사는 장로를 세운다고 교회가 부흥하는 것은 아니라며,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장로교회를 하면 되는 것이라고 반대했다. 호칭 장로제는 교단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며, 본인은 침례교회 목사로서 긍지를 가지고 있다고 호칭 장로제를 반대했다.

호칭 장로제를 찬성하는 침례교 목사들의 입장은 무엇인가? 김재용 목사는 호칭 장로제에 대한 수정안은 침례교의 전통의 문제나 성서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개교회의 제도에 관한 문제라며, 성서는 손을 대지 못하지만 제도는 고칠 수 있다고 말했다. 박마이클 목사는 "남침례회의 전통은 다른 생각을 가진 교회, 신학이 다른 교회가 모여 연합하는 것이다. 남침례회의 특징은 다양성이다. 신학과 생각이 달라도 선교를 통해 연합해서 하나된다. 또 남침례회가 장로교와 다른 것은 개교회주의이다. 남침례회는 개교회에서 장로를 세운다고 문제시 하지 않는다. 과거에 집착해서 장로를 세우면 이단시 하면 안된다. 장로제도가 없어 좋은 인재들을 다른 교단으로 빼앗기고 있다"고 주장했다. 뉴욕과 뉴저지 지역에는 미주 다른 지역에 비해 규모가 큰 남침례회 한인교회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남침례회는 왜 장로라는 직이 없을까? 골든게이트신학교 안상희 교수는 아멘넷과 인터뷰에서 "남침례회는 성경에 나오는 장로라는 직분은 교회의 직분이 아니라 유대나라의 문화적인 위치개념으로 본다. 우리나라에도 '마을유지'라는 표현이 있다. 하지만 '마을유지'가 정치적인 직분이 아닌 것 처럼 성경에 장로라는 호칭이 나오지만 교회의 공식적인 직분이라고 보지 않고, 신약교회의 직분은 집사와 목사만 있다고 믿는다"고 설명한 바 있다.


▲단체사진(사진을 클릭하면 큰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임원교체

사업보고 및 임원선출

미남침례회 뉴욕한인지방회는 25개의 교회들이 소속되어 있다. 임원선출을 통해 회장에는 부회장 김재용 목사, 부회장에는 총무 이재홍 목사를 선출하여 업무의 연속성을 기대하게 했다. 회장단 회의후 총무 이선일 목사, 서기 박춘수 목사, 회계 안병재 목사, 각 위원장등을 공천했다.

총무부(이재홍 목사)는 사업보고를 통해 5회의 임원회, 뉴욕과 뉴저지 연합 송년모임, 중독 영화 상영, 뉴욕과 뉴저지 연합체육대회 등이 사업을 보고했다. 사회선교부(박진하 목사)는 3개 개척교회에 7천2백불을 지원했다고 보고했다. 교육부(김재용 목사)는 석정문 목사 초청 코칭세미나와 37명이 참가한 목회자 가족수양회 등 사업을 보고했다. 청소년부(노기송 목사)는 찰랜지 청소년연합수련회가 제이콥 김 목사(필라안디옥교회 EM목사)를 강사로 뉴저지 리벤젤 수영관에서 14개교회 128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고 보고했다. 여선교부(이영미 사모)는 연말모임을 가을 소풍으로 대신했으며, 기도모임을 가졌다고 보고했다. 또 새해에는 사모중창단을 준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미국의 금권정치-1

 

* 목차

1. 금권정치

2. 미국의 금권정치

3. 극단적인 빈부격차로 인한 미국의 신계급주의

 

 

1. 금권정치

경제력이 있는 소수의 부유한 계층이 지배하는 정치.

한국에서는 흔히 금력(金力)에 의해서 좌우되는 정치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원래는 고대 그리스의 정치철학에서 사용된 말이며,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에 의한 정치(aristokratia)와 부에 의한 정치(plutokratia)를 대립시켰고, 플라톤은 종교의 지배와 부의 지배를 대립시켰다.

금권정치는 고대 그리스뿐만 아니라 각 시대와 각 국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근대에 들어와 독일의 푸거가(家)는 금융력으로 카를 5세를 제위에 오르게 하고, 또 교황 레오 10세를 마음대로 움직였다. 19세기 영국의 로드차일드가(家)는 나폴레옹전쟁에 개입하여 거부가 되고 왕후에 대한 금융과 조세 청부(請負)를 통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자본주의시대에도 여러 나라에서 재벌들이 선거자금의 조달 ·매수, 대표자의 정계파견 등을 통하여 정부의 정책을 움직이고 있다.

원래는 고대 그리스에서 부자의 지배를 의미하였으며, 지자(知者)의 지배나 전사(戰士)의 지배, 그리고 가난한 대중의 지배와 대치되는 하나의 체제를 뜻했다. 그것은 처음 정치참가의 조건으로 일정액 이상의 재산을 요구하는 정체(政體)로서 나타나, 과두제(寡頭制)와 관련되면서 문제가 되었다. 과두제를 플라톤은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과의 두 국가의 대립이라 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순히 지배자의 수(數)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자에 의한 빈자(貧者)의 지배라고 정의하였다. 이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금권정치에 대한 비판은 과두제에 대한 비판과 연결·전개되어 왔다.

원래 정치사회는 어느 정도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있는 유산계급(有産階級)에 의해 운영되어 왔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시대의 지배적 정치형태는 금권정치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아, 귀족제(貴族制)가 금권정치와 마찬가지로 소수자(少數者)의 지배이면서도 덕이 있는 인간에 의한 지배였는데 반하여, 과두제·금권정치는 좋지 못한 소수자 지배를 의미하였다. 로마에서는 영토의 확대에 따라 빈부의 차가 점차로 벌어져 제정기(帝政期)에 들어서자, 정치는 황제와 부유계급에 의해 독점되었다.

금권정치라고 할 수 있는 정치가 다시 출현한 것은 중세 후기에 화폐경제가 침투하여 상업이 활발해져서 중세도시가 원거리 무역을 좌우하는 대상인(大商人)에 의해 지배되면서부터이다. 이탈리아의 메디치가(家)나 독일의 푸거가(家), 한자동맹(同盟)의 여러 도시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는 바로 이러한 도시의 부(富)를 배경으로 성립된 것이다.

근세 이후 절대왕정(絶對王政)이 확립되어 가는 과정에서 도시의 부유한 상인은 왕실에 대한 금융을 실시하고 또 조세의 징수를 청부 맡게 되어 절대적인 권력을 쥐게 되었다. 시민혁명을 거쳐 근대민주주의가 성립된 서구의 여러 나라에서, 정치권력은 인민의 의지에 기초를 둔 것이었지만, 재산에 근거한 참정권(參政權)의 제한은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지배적이었다. 선거법 개정에 따라 그 제한이 철폐된 뒤에도 자본과 정치권력과의 유착은 오히려 강화되어 갔다.

금권정치라는 말은 이와 같은 자본주의의 전개에 대한 좌익(左翼)의 비판으로 이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사회주의(國家社會主義)를 표방한 나치스에 의해 유대계(系) 금융자본에 대한 공격으로서도 사용되게 되었다. 현대의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정부의 정책은 군사·공공사업을 통하여 많은 이권을 창출한다. 이 때문에 한쪽에서는 정부의 사업과 대자본과의 유착이, 다른 한쪽에서는 정치가(政治家) 개인 차원에서의 이권개입이 복잡하게 얽히게 된다. 금권정치는 단순히 정치윤리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현대정치사회의 구조에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2. 미국의 금권정치

세계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라고 자부하는 미국의 정치는 실제로는 돈이 없으면 실현될 수 없습니다.
국회의원 선거나 대통령 선거를 치루려면 TV 광고나 유세에 엄청난 자금을 동원해야 하는데, 이는 거액을
기부한 후원자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미국 정부와 국회에서는 후원금을 내는 대기업과 소수의 부자를 위한 정책이 채택될 수밖에 없습니다.

워싱턴은 여러 이익집단(기업, 협회, 국가)의 이해를 대변하는 로비집단이 번성해 정부의 여러 가지 정책결정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정부관료 출신이 로비집단이 되기 때문에 쉽게 정경유착이 진행되고, 기업가 출신이 해당 정부기관의 관료가 되어서
기업을 위한 결정을 내리기도 합니다.

미국 국민은 베트남 전쟁, 닉슨의 워터게이트 도청사건, 레이건의 이란 콘트라 사건, 클린턴의 화이트워터 사건 등으로
거짓과 위선으로 얼룩진 정치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미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공화당과 민주당의 양당제인데, 어느 정당을 뽑더라도 대선공약을 뒤엎기 일수이며,
서민보다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벌이게 됩니다.

미국에서 하원의원을 하려면 50만달러 정도의 돈이 들고, 상원의원을 하려면 수백만 달러의 돈이 들어갑니다.
1996년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자들은 공식적으로 보조 받은 선거자금 외에 1억2천5백만 달러라는 거금을 들였습니다.
돈줄을 잘 잡는 것이 선거의 당락과 정책을 결정하기 때문에 선거기간 대통령 후보의 주요업무는 선거자금
모금활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미국 정치를 좌우할만큼 막강한 권력과 재력을 갖춘 소수의 엘리트 집단을 미국인들은 '컨트리 클럽'이라고 부릅니다.
컨트리 클럽 회원들은 주로 대기업의 엘리트 그룹, 각종 이익단체와 조합들, 거부들로 이들은 주로 워싱턴의 정치의제를
조율하고, 정당을 지원하며, 거액의 정치헌금을 냅니다.
이들은 거액의 기부금을 민주당과 공화당에 내고, 백악관 만찬에 드나들며, 정당위원회로부터 특별대우를 받습니다.

미국은 정치자금법에 따라 정치헌금을 낼 때에는 여러 통로를 이용하는데, 그 통로 중 하나가 정치행동위원회(Political
Action Committees, PAC)입니다.
미국은 1904년부터 기업이 연방 선거자금을 직접 특정후보에게 주지 못하도록 법으로 묶어 놓았습니다.
PAC는 회사직원이나 조합원으로부터 돈을 기부 받아 후보에게 전해주는 가교 역할을 위해 결성되었습니다.

개인이나 PAC는 의회이나 대통령 후보에게 선거자금을 지원할 수 있는데, 연방법에 따라 한도액이 정해져 있습니다.
개인은 한 선거에서 한 후보에게 1천달러 이상 기부할 수 없고, PAC도 한 후보에게 5천달러까지만 지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직접 후보에게 전달되는 선거지원금을 유권자의 주머니에서 나오기 어려운 돈이라는 뜻에서 '하드 머니'(hard
money)라 부릅니다.

이와 대조적인 개념으로 등장한 것이 '소프트 머니'(soft money)인데, 소프트 머니는 최고 한도액 없이 누구나 무한정으로
정치자금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대개는 회사나 조합들이 많이 내는데 액수가 천문학적이어서 선거에 직접 쓰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소프트 머니는 당조직 활동비나 당원들의 봉급, 임대료를 내는데 쓰이며, 수백만 달러가 드는 TV 광고료로도 쓰입니다.

이 소프트 머니를 듬뿍 내는 기업이나 개인이 워싱턴 컨트리 클럽의 회원이 되며, 이 중 1백인을 추려 '1백인 클럽'이라
하고, 이들이 미국 정치를 좌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클럽 회원들은 금융계 실세, 스포츠 연예 도박 산업을 주무르는 자들, 방송 언론계의 거물, 법조계와 의료계의 실세
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은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자신들의 이익과 관련된 안건이 다루어지는 소위원회의 출석을 보장받습니다.
이들은 수백만 달러의 정치자금을 기부하며, 민주 공화 양당에 선거자금을 내기도 합니다.
연간 2백만 달러 이상 기부하는 기업으로는 필립 모리스, 나비스코, 아메리칸 파이넨셜, 애틀랜틱 리치필드, 암웨이 등입니다.
연간 1백만 달러 이상 기부하는 기업으로는 메릴린치, 쉐브론, 전국교육협의회, U.S. Tabacco C6 등입니다.

미국에는 여러 종류의 컨트리 클럽이 있어 개중에는 자격요건이 까다로운 곳도 많지만, 워싱턴 컨트리 클럽은 누구나
현찰만 있으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기업들은 경영악화로 한 번에 수천 수만명씩 해고하면서도 정치자금만은 꾸준히 냅니다.
AT&T, 시어스 로벅, GTE, 나이넥스, 델타 항공, 체이스 맨하튼 은행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미국인의 99.97%가 한 번에 2백달러 이상의 기부금을 낼 수 없는 형편임을 감안한다면 단 0.03%의 사람들이 미국의
주요 국가시책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80년대 중반 선거법 개정과정에서 등장한 이 소프트 머니 시스템은 민주 공화 양당의 무한대 선거자금 모금 경쟁을
유발하였습니다.

소프트 머니는 미국의 정치구조를 부패시키고, 양당 간의 정책노선을 흐리게 만들었습니다.
정치인들은 더 많은 기부금을 유치하기 위해 기업끼리 거래를 붙히고, 기업은 더 강력한 영향력을 얻기 위해 무리를
해서라도 많은 돈을 내려 합니다.
이로 인해 워싱턴의 정치는 거대한 돈 시장으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워싱턴에서 각종 행사의 저녁 만찬에 초대되려면 최소한 1만달러 정도는 내야 하고, 5만 달러 정도 내면 긴급한 사안이
발생했을 때 국회의원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습니다.
1995년 클린턴 대통령이 담배에 대한 연방세를 올리고, 담배회사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겠다고 밝히자 필립 모리스와
나비스코 같은 담배회사는 즉시 공화당에 230만 달러를, 민주당에 42만 달러를 기부해 힘을 썼습니다.

1994년 공화당은 뉴욕에서 정치자금 모금파티를 열고, 누구나 10만 달러만 내면 공화당 간부들과 와인을 곁들인 저녁식사를
할 수 있고, 정치기류에 대한 설명회도 듣고,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나란히 사진도 찍게 했습니다.
그러자 민주당도 이에 질세라 누구나 10만 달러만 내면 기부자뿐 아니라 부인까지 동행해 대통령과 식사를 하고, 덤으로
엘 고어 부통령과 힐러리까지 만날 수 있는 패키지 상품을 마련했다가 언론의 질타를 받고 취소했습니다.

워싱턴 정치인의 가장 큰 덕목은 기부금을 모으는 능력이고, 이런 능력을 갖춰야 2선, 3선 의원으로 살아 남을 수 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미국 하원의원에 출마하려면 44만 달러가 들고, 상원의원에 나가려면 440만 달러가 듭니다.
상원의원에 당선된 사람은 다음 선거를 준비하려면 매주 1만 5천 달러씩 모아야 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상원의원은 의정활동보다 한 주일도 빠지지 않고 꾸준히 선거자금을 모아야 다음 선거를 치룰 수 있습니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부시 후보는 9천만 달러를, 클린턴 후보는 1억 3천만 달러를 썼습니다.
1992년 각 당의 전당대회 비용까지 합쳐 대통령 선거에 든 총 비용은 5억5천만 달러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많이 모으고 쓰는 자가 승리한다는 것이 워싱턴의 정치방식입니다.
그래서 클린턴 대통령은 바쁜 와중에도 파티 참석자와 3시간에 걸쳐 일일이 악수를 하곤 했습니다.

미국에서 정치가 못지 않게 막강한 힘을 가진 부류는 통상 로비스트로 이들의 입김에 따라 미국의 국제무역이 좌지우지됩니다.
통상(通商) 로비스트는 미국 다국적 기업을 대표하는 이들도 있지만 주로 외국기업이나 외국정부 또는 특정 이익단체를
대변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통상 로비스트의 수가 늘어나면 미국의 대외 무역적자는 늘어나고, 미국 중상층 삶의 질은 떨어지게 됩니다.

미국은 막대한 무역적자를 기록해 국내산업에 피해를 입으면서도 로비스트의 영향으로 강력한 무역제재를 시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1995년 통상 로비스트는 554명으로 늘어났고, 미국의 무역적자는 1,610억 달러로 증가해 수백만명의 일자리가 사라졌습니다.
외국 기업들은 로비스트를 앞세워 미국 관세를 낮추고, 수입상품에 대한 각종 제약을 완화했습니다.

통상 로비에 가장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국가는 단연 일본으로 이미 30년 전에 대미 통상 로비에 관한 책을 낼 정도입니다.
미국에 대규모 수출을 할 때부터 일본의 대기업이나 무역단체, 정부부처들은 영향력 있는 워싱턴의 로비 법률회사에 의뢰해
이들로 하여금 의회나 관련기관에 나가 일본을 대표하도록 하였습니다.
일본은 통상 로비를 위해 연간 1억 달러 이상을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은 오랫동안 최혜국 대우를 받으며 미국에 가장 낮은 관세로 수출하고 있는데, 1985년 중국의 대미 수출액은 38억달러에서
1995년 445억달러로 증가했습니다.
미국은 엄청난 대중국 무역적자에도 불구하고 낮은 수입관세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통상 로비스트의 활약 뿐만 아니라
중국에 시장을 노리는 미국의 대기업이 적극적으로 중국의 입장을 옹호하기 때문입니다.

 

 

3. 극단적인 빈부격차로 인한 미국의 신계급주의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에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날로 심해져 주체할 수 없는 재물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특권층 계급이
있는가 하면 저임금과 실업으로 생계가 어려워 극도의 가난에 시달리는 저소득 계층이 있습니다.
미국의 헌법부터가 대부분이 부자인 55명의 백인 남성 엘리트에 의해 만들어졌고, 노예제도를 합법적이라고 인정하였습니다.
미국은 현재도 대기업과 부자들을 위한 세금감면 정책 등을 계속하고 있고, 노동자의 권리와 혜택은 축소하고 있습니다.

미국 하원 세입위원회 보고서에 의하면 1987년 한 해 동안 미국 전체 인구의 1/5 즉 5천만명 이상이 연평균 5천달러
미만의 수입으로 생계를 꾸렸습니다.
저소득층의 가난은 필연적으로 절망을 불러 일으켜 범죄와 폭력, 마약중독과 알코올중독, 정신질환과 가정폭력,
가정파괴와 결손가정 등을 유발합니다.

미국 정부는 200만명의 살 곳 없는 미국인들에게 줄 보조금은 과감히 삭감하면서도 700억 달러나 들어가는 스텔스
폭격기 개발에는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 시절 빈부격차가 심화되었는데 1,500만명의 저소득 계층이 식량배급표를 받지 못해 만성적인
영양불량 상태에 놓였으며, 아사를 면하기 위해 구걸하는 사람이 3만명이 넘었습니다.

미국의 빈부격차가 심해진 사상적 배경에는 잘살던 못살던 자기 책임이라는 자유방임주의와 경제발전을 위해 개인의
권리는 희생될 수 있다는 신자유주의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국가의 주요 기능이 부자와 권력 있는 자로부터 가난한 사람과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돌보는 것이란
사실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빈부격차가 심해진 것은 역사적, 정치적, 제도적으로 다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독립전쟁 이후 미국 헌법을 기초한 55인은 대부분 부유한 노예주, 법률가, 상인, 채권소유자, 기업인 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조지 워싱턴의 최측근 보좌관이자 초대 재무장관을 지낸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의 정치사상을
지도철학으로 삼았습니다.

해밀턴은 "모든 사회는 소수집단과 다수집단으로 나눠진다. 소수집단은 부자와 명문가 출신이며, 다수집단은 대중이다.
그러므로 최상층 계급에게 명확하고 영속적인 정부역할을 부여하도록 하라."고 언급했습니다.
부자들은 정부가 빈자로부터 자신들의 재산을 지켜 주기를 원했고, 독립선언서에 쓰여졌던 '생명, 자유, 행복추구'라는
문구는 헌법 비준과 동시 폐기되고, 그 대신 '생명, 자유, 재산'이라는 새로운 문구가 헌법 수정조항 5조로 등장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출발부터 부의 분배보다는 부자들의 재산권을 지키는데 노력을 기울였고, 실제적으로 '탈주 노예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켰는데, 그것은 노예가 다른 주로 도망쳤을 경우 그를 본주인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법률입니다.
정부는 가난한 농민들에게 가차 없이 세금을 거두어 들여 보조금을 조성해 은행가들이게는 연방은행(national bank)을 세울
수 있는 자금을, 제조업자들에게는 관세 형태의 보조금을, 채권 보유자에게는 정부 차원의 보증을 제공했습니다.

남북전쟁 이전에 수십년 동안 자본가들은 정부와 의회의 특혜적인 지원에 힘입어 막대한 부를 형성하였습니다.
막대한 자본을 필요로 하는 철도와 운하 설립자들은 스스로 자금을 마련하지 않고, 입법부에 뇌물을 제공함으로써 마련했습니다.
1856년 위스콘신의 라크로스 앤드 밀워키 철도회사는 90만 달러 상당의 주식과 채권을 72명의 주의회 의원과 주지사에게
제공함으로써 100만 에이커의 땅을 공짜로 얻었습니다.

1850년대 10년 동안 주정부들은 2,500만 에이커의 공공토지를 철도 투기꾼들에게 무상으로 불하했으며, 수백만 달러의
융자까지 덤으로 안겨주었습니다.
남북전쟁 당시의 거국내각(National Goverment)은 1억 에이커가 넘는 토지를 여러 철도 자본가들에게 선사했습니다.
유니언 퍼시픽 철도회사(Union Pacific Railroad)는 1,200만 에이커의 공짜 땅과 2,700만 달러의 정부융자를 챙겼습니다.

이에 반해 매일 5마일에 달하는 철도를 놓으면서 더위와 추위로 수백명씩 죽어 나갔던 2만명의 노동자(퇴역군인과
아일랜드 이민자)를 위해서는 정부는 땅 1평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하루 1~2달러를 받고 센트럴 퍼시픽에서 일했던 1만명의 중국인 노동자와 3천명의 아일랜드인들에게는 한 푼의
융자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1929년 주식시장의 붕괴로 시작된 미국의 경제공황 당시에는 노동자의 1/3이 일자리를 잃었고, 기아와 노숙이 전국으로
화산되었지만 이들은 정부로부터 거의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재계를 위해서는 철도법의 시행, 하천과 항구 개발, 운하건설에 투입된 수억달러의 재정기부금, 해운사업과
고속도로 건설업에 지원금, 높은 관세장벽 등으로 큰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재계는 미국 정부의 공권력과 군사력을 이용하기도 하는데 1954년 CIA는 과케말라에서 유나이티드 푸르트 사(United Fruit)의
자산을 지키기 위해 선거로 선출된 과테말라의 대통령을 제거했습니다.
1973년 미국 정부는 IT&T(국제전신전화회사)와 공모하여 칠레의 국부를 너무 많이 착취해 외국기업에 우호적이지 않았던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를 전복시켰습니다.

1984년 미국 군수계약 순위 상위 12개 기업 중 5개 기업이 상당한 수입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연방 소득세를 단 한 푼도
내지 않았습니다.
12개 순수 기업이 1981년부터 1983년까지 확보한 수익은 190억달러였는데, 이들의 평균 세율은 겨우 1.5%였습니다.
반면 당시 미국 중산층은 소득의 15%를 세금으로 납부하였습니다.

기업은 정부의 경찰력과 군사력을 동원하여 소작인과 노동자의 파업을 강제로 진압하였습니다.
철도 노동자, 직물 노동자, 탄광 노동자, 자동차 고무 철강의 노동자들이 지방정부의 경찰력과 연방군대에 의해 탄압�습니다.
기업가들은 법원에도 의지해 변호사를 고용하여 찬사의 판결에 영향을 끼침으로써 파업과 보이콧을 불법화하고, 피케팅을
규제하며, 파업 주도자들을 투옥시켰습니다.

1905년 뉴욕주 입법부가 제빵 노동자들의 근로시간을 하루 10시간, 주 6일 노동으로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켰을 때
대법원은 이 법이 계약의 자유를 침해함으로 위법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고속성장을 이룬 미국의 노동조건은 매우 열악하였는데 1914년 한 해에만 3만 5천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했고,
70만명 이상이 상해를 입었습니다.

1911년 뉴욕시의 트라이앵글 피복회사에서는 노동자들에게 계속 일을 시키기 위해 작업 중에는 문을 잠가 두었습니다.
그래 3월 25일 화재가 발생했고, 문은 잠겨 있었습니다.
8,9,10층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불길 속에 갇혔고, 대부분 불에 타 죽거나 창문으로 뛰어 내렸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여성이었고, 그 중 146명이 죽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미국의 극단적인 빈부격차가 대물림 되어 '새로운 계급제도'(신계급주의)가 생겨난다는 점입니다.
소득이 높은 계층의 자녀들은 좋은 환경과 교육여건에 있기 때문에 저소득층보다 좋은 대학에 갈 확률이 몇 배나 높습니다.
재력가들에게 유리하고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미국의 경제제도는 부자들은 더욱 부자되게 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합니다.

이에 반해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뉴질랜드 등 서유럽 선진국들은 자본주의의 병폐인 빈부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일찍부터
사회주의적 요소를 도입하여 복지국가를 실현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엄청난 세금을 국민복지보다 국민에게 쓸모 없고 전쟁의 위험성만 높히는 군사비 지출에 투입하고 있습니다.
또한 경제가 발달할수록 중소기업이나 중소상인은 도퇴되어 중산층은 몰락하고, 소수의 대기업과 임원에게만 부가 집중됩니다.

 

* 참고서적

1. 미국 현대문명 보고서 (박영배, 미채)

2. 오만한 제국 (하워드 진, 당대)

 

잠언 11/4 재물은 진노의 날에 유익하지 않으나, 의는 죽음에서 구해 내느니라.

잠언 15/16 소유가 적어도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큰 재물로 인하여 고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언 23/4~5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라. 네 자신의 지혜를 그칠지니라. 네 눈을 허무한 것에 주목하려느냐? 재물은 반드시
스스로 날개를 만들어 하늘을 향하여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전도서 5/8 네가 어느 지역에서 가난한 자들을 압제함과 재판과 정의를 심하게 왜곡하는 것을 볼지라도 그 일을 이상히
여기자 말라. 가장 높은 자보다 더 높은 이가 지켜보시며 그들보다 더 높은 이가 있음이라.

마태 16/25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아이야, 너는 네 생전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나쁜 것을 받았음을 기억하라.
그러나 이제 그는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느니라.'

마태 19/23~24 그 후 예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 
또 다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쉬우니라.”고 하시더라.

누가 12/19~20 그리고 나서 내 혼에게 말하기를, 내 혼아,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물건들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편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라 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 네 혼을
네게서 앗아가리니 그러면 네가 장만한 그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누가 12/33 너희가 가진 것을 팔아서 구제하고, 너희 자신을 위하여 헤이지지 않는 돈주머니를 만들라. 고갈되지 아니하는
하늘들의 보물이니, 거기에는 도둑도 접근하지 못하고 좀도 손상시키지 못하느니라.

야고보서 5/1-6 이제 오라, 너희 부자들이여, 너희에게 닥칠 재난으로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의 재물은 썩었고, 너희의 의복은 좀먹었으며, 너희의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것들의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어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마지막 날들을 위한 재물을 쌓았도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일꾼들에게 속임수로 주지 않은 품삯이 소리지르며, 추수꾼들의 울부짖음이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가 땅에서 쾌락 가운데 살며 방탕함에 빠져 살육하는 날에서와 같이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너희가 그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분은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시느니라. 

계시록 18/2~3 그가 큰 음성으로 힘있게 외쳐 말하기를 “큰 바빌론이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마귀들의 거처가 되었고 온갖
더러운 영의 소굴이요, 모든 더럽고 가증한 새의 소굴이로다. 이는 모든 민족들이 그녀의 음행으로 인한 진노의 포도주로 취한
까닭에 땅의 왕들이 그녀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또 땅의 상인들은 그녀의 사치의 풍요함으로 부유하게 되었도다.”라고 하더라.


 


출처: 사모님사모님/피스마리아

그리스도와의 연합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왜 아직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다루지 않는지 의아해 할 것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적용함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만일 이 연합을 다루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논의는 온전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이해 역시 심각하게 왜곡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제보다 더 중심적이고 근본적인 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구속이 적용되는 여러 측면만 더불어 이 주제를 다루지 않은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주제는 그 자체로 매우 광범위하고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구속이 적용되는 한 단계 정도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넓은 견지에서 보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속이 적용되는 모든 단계의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구속을 적용하는 일에는 물론, 단번에 이룬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중심에 자리한다. 구원 과정 전체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한 단계에서 시작할 뿐 아니라, 구원은 다름 아닌 이 연합의 다른 단계들이 실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짧은 표현이 말하는 것이 바로 연합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할 때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뜻하는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단순히 구속의 적용을 의미할 때만 사용하지 않는다. 물론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어떤 측면은 구속의 적용에만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룰 것이다. 하지만 먼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갖는 포괄적인 의미를 먼저 이해할 때, 구속의 적용과 관련해서도 이 말이 뜻하는 바를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관련해서 성경이 가르치는 것들을 살펴보면 그 범위가 어디까지 미치는지 알게 된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어디로부터 시작해서 어디로 향하는지를 알게 된다.

 

성부께서 영원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정하심으로 구원이 시작되었다.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 1:3-4). 성부께서 영원 전에 우리를 택하시되,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하셨다. 여기에 내포된 것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영원 전에 성부께서 우리를 택정하실 때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말은 곧 성부께서 영원한 사랑의 경륜으로 구원받은 자들을 택정하실 때,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상관없이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받았다. 우리가 그 원천에까지 구원을 최대한 거슬러 가보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자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나중에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거기에 그렇게 있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신 것도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과 연합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롬 6:2-11, 엡 2:4-6, 골 3:3-4). 바울은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7).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이루신 구속 역사를 생각할 때, 창세전에 성부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연합과 상관없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가 저주받은 나무에 달려 죽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을 때 그리스도와 백성들 간의 연합을 가능하게 한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은혜의 신비로운 작정과 상관없이 구속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는 곧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이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엡 5:25).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어졌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 지금 바울은 행위가 아닌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진리를 주장하고 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 구원을 받음으로 확정되었다. 구원의 시작뿐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누리기 시작하는 것 역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라는 사실에 놀랄 이유는 없다. 영원 전에 성부의 택정하심으로 구원이 시작된 것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된 것이고,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단번에 구원에 참여하는 것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된다는 것을 이미 살펴보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실제로 구속에 참여한 자가 될 때까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보류된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사람들이다.

 

하지만 새 생명의 시작만 그리스도 안에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생명이 지속되는 것 역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동일한 관계 덕분이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행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된다(롬 6:4, 고전 1:4-5, 참조. 고전 6:15-17).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여 살아감으로 신자들은 새 생명을 누린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게 된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잠들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다(살전 4:14, 16).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죽음으로도 끊어질 수 없다는 사실만큼 이 연합의 불변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죽음은 엄연한 사실이다. 죽음으로 영혼과 육신이 분리된다. 하지만 그렇게 분리된 상태에서도 여전히 그리스도와 연합한 상태로 남아 있다.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시 116:15).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고 영화롭게 될 것이다. 마지막 나팔 소리와 더불어 죽은 자들이 썩지 않을 몸을 입고 다시 살아날 때, 그들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난다(고전 15:22). 그리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화롭게 된다(롬 8:17).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창세전에 성부 하나님의 선택에 뿌리를 박고 있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화롭게 되는 것으로 결실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지평은 광대하고 장구하다. 공간과 시간에 갇혀 있지 않고 영원까지 이른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시야는 두 개의 초점을 따라 궤적을 그린다. 하나는 영원한 경륜 속에 있는 성부 하나님의 택정하신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영광이다. 전자는 그 시작이 없고, 후자 역시 그 끝을 모른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와 더불어 영화롭게 되는 것은 영원한 세대를 통틀어 계속될 완성의 시작일 뿐이다.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 과거를 돌아보고 장래를 조망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단지 우리가 알고 있는 현세의 역사로만 국한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 땅의 역사가 의미가 있고 소망이 있는 것은 신자들이 이런 조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사는 삶과 영광의 소망 속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것이 무엇인가? 신자들이 하나님이 이미 정하신 경륜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큰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재 당하는 여러 어려움과 당혹스러움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인내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신자들로 하여금 큰 확신으로 장래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가운데 즐거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항상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기초로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살아가고, 장래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신자에게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택정하심의 실체를 확신하도록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을 통해 항상 현재적으로 누리는 그분과의 연합이다. 영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함을 입은 것처럼, 지금도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을 성부로부터 받는다(참조. 엡 1:3-4). 신자가 영원한 기업의 후사로 인침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셨고, 그 안에서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참. 엡 1:13-14).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아니고는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 어디를 보나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암담함과 두려움뿐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있음으로 시간과 영원의 전체 그림이 완전히 달라지고 하나님의 백성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한 영광으로 기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아주 포괄적인 주제다.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이라고 하는 궁극적인 시작에서부터 택함을 받은 자들이 영화롭게 되는 종국적인 결실에 이르기까지의 전체 구원 과정을 포함한다.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속을 적용하는 어느 한 단계에서 그치지 않는다. 성취와 적용에 이르는 구속의 전 과정의 토대가 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이 모든 것을 아우를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친히 값 주고 사셔서 구속해 주시기로 한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효력 있게 적용하고 나누어 주실 것을 확증한다.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을 적용하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구속이 효력 있게 적용되기 전에는 실제로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가 아니다. 에베소 교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그들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함을 받았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들도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 역시 상기시켰다(엡 2:3, 12). 영원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함을 받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아들과의 교제를 위해 유효한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는 그들도 그리스도에 대하여 외인이었던 것이다(고전 1:9). 이처럼 성부 하나님의 유효한 부르심이 있어야, 사람은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가 되고 구속의 복을 누리는 즐거움에 참여하게 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런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본질은 무엇인가? 몇 가지를 말할 수 있다.

 

1.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영적이다. 신약성경에서 "영적, spiritual"이라는 말만큼이나 더 자주 왜곡되는 단어도 드물 것이다. 모호하거나 막연한 느낌을 가리킬 때 사람들은 이 말을 사용한다. 신약성경에서 "영적"이라는 말은 성령과 관련해서 쓰인다. 영적인 사람은 성령이 내주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행하는 사람이다. 영적인 마음이란 성령에 붙잡히고 성령에서 비롯된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영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 연합의 끈이 바로 성령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참조. 고전 6:17, 19, 롬 8:9-11, 요일 3:24; 4:13). 우리는 구원하는 은혜가 역사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성령 간의 긴밀한 관계를 더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성령은 주의 영이시고 그리스도는 성령의 주다(참조. 롬 8:9, 고후 3:18, 벧전 1:11).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거하신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크나큰 신비다. 성령이 연합의 끈이라는 사실은 이 신비를 손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신비를 환히 밝혀 준다. 한편으로는 이 신비를 감각적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순전한 감성으로 다가가도록 돕는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영적인 이유는 그것이 영적인 관계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신자가 누리는 연합은 한 하나님으로 세 위께서 누리시는 그런 연합과는 다르다. 삼위 하나님의 연합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보는 연합 - 한 인격 안에 있는 두 본성 - 과도 다르다. 우리가 누리는 영혼과 육신으로 한 인간을 이루는 연합과도 다르다. 단순히 감정, 정서, 지각, 생각, 마음, 목적과 같은 것들의 연합도 아니다.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은 우리가 구체적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연합이다. 하지만 성령의 본성과 사역과 일치하는 아주 신령한 연합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 중에 거하고 그의 백성이 그분 안에 거하는 연합은 성령의 본성이나 사역과 일치하는 우리의 분석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신령한 연합이다.

 

2. 이 연합은 신비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관련하여 "신비적"이라는 말을 사용하기에 앞서 먼저 성경에 나오는 "신비"라는 말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이해가 도무지 불가능하거나 불가사의한 일을 가리키기 위해 흔히들 이 말을 사용한다. 하지만 성경이 신비라는 말을 쓸 때의 의미는 아니다. 로마서 16:25-26에서 사도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도록 몇 가지를 이야기 한다. 여기서 바울은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 신비와 관련하여 우리가 눈여겨볼 것이 네 가지가 있다. 우선, 영원 전부터 신비로 간직되었다. 하나님의 생각과 경륜 속에 감취었다. 둘째, 하지만 계속해서 감추인 상태로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따라 나타나고 알려졌다. 셋째, 하나님 편에서의 이런 계시는 성경을 통해 이루어졌고 성경에 담겨 있다. 성경을 통해 온 나라들에 계시되었고 더 이상 비밀로 감취어 있지 않는다. 넷째, 이 계시가 목적하는 바는 온 나라들이 믿음의 순종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신비란, 눈으로 보지 귀로도 듣지 못하며 사람의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에게 계시하셨고 계시와 믿음으로 우리에게 알려지고 또 우리가 누리게 된 비밀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신비가 바로 이 같은 신비다.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하면서, 그것을 남편과 부인 사이에 존재하는 연합과 비교한 후에 이렇게 말한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2). 바울은 또다시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고 하면서 이 연합에 대해,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다"고 말한다(골 1:26-27).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비다. 이런 사실을 통해 우리는 이 연합의 가치와 이 연합에 포함된 친밀함을 잘 알 수 있다.

 

이 연합을 성명하기 위해 성경이 말하는 광범위한 유비가 아주 인상적이다. 가장 고차원적으로는 삼위 하나님의 각각의 위격 간에 이루어지는 연합에 비교된다. 너무나 경이롭고 놀랍기는 하지만, 사실이 그렇다(요 14:23, 17:21-23). 가장 낮은 차원으로는 건축물을 구성하는 각각의 돌들과 그것들을 떠받치는 모퉁잇돌과의 관계에 비유된다(엡 2:19-22, 벧전 2:4-5). 이 두 가지 경계 사이에 있는 다양한 차원의 관계와 존재에서 비롯된 많은 각종 유비들이 이 연합을 성명하기 위해 성경에 등장한다.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 사이의 연합과도 비유된다(롬 5:12-19, 고전 15:19-49). 남편과 부인이 이루는 연합과도 비유된다(엡 5:22-33, 참조. 요 3:29). 인간의 몸과 머리가 이루는 연합과도 비유된다(엡 4:15-16). 포도나무와 가지에도 비유된다(요 15장). 이처럼 생명이 없는 존재의 영역에서 삼위 하나님의 위격에 이르는 다양한 차원의 존재들에서 비롯된 유비들이 이 연합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우리는 위대한 원리를 배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본질과 방식을 모퉁잇돌과 다른 돌들 사이에 이루는 것과 같은 연합 정도로 격하시켜서도 안되고, 포도나무와 가지가 이루는 연합으로 한정해서도 안되며, 사람의 머리와 몸, 혹은 남편과 부인이 이루는 연합으로 축소시켜서도 안된다. 연합의 방식과 본질과 성격은 각각의 경우마다 다르다. 유사하기는 해도 똑같은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 간의 연합을, 위에서 언급한 다양한 차원의 연합 가운데 하나로 한정해서는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연합을 삼위 하나님의 각 위격 간의 연합의 차원과 동일시해서도 안된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사용되는 유비는 동일성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곧 우리가 삼위 하나님의 삶 속에 결합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이 위대한 진리를 왜곡하는 것이다. 이런 비유들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사고할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원리인 유비가 곧 동일성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한 결과다. 무엇을 서로 비교했다고 해서 그것이 같다는 말은 아니다. 피조물이 참여하는 이런 모든 연합과 조화 중에서 가장 고상한 것이 바로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누리는 연합이다. 가장 위대한 신비는, 한 하나님 안에 세 위격이 계시는 삼위 하나님의 연합이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경건의 신비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셔서 육신 가운데 나타나신 성육신의 신비다(딤전 3:16). 하지만 피조물이 참여하는 가장 위대한 신비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와 누리는 연합이다. 그리스도와의 이런 연합이 신비라는 사실은, 그것이 신성 안에서 성부와 성자가 누리는 연합과 비교된 사실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믿음을 발휘하는 데 포함된 기이함을 묘사할 때 우리는 흔히 신비로운mystical 이라는 표현을 쓴다. 믿음의 삶에는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신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와의 사귐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이 사귐은 곧 그리스도와의 교제communion를 말한다. 믿음의 삶이란 승귀하셔서 영존하시는 구속자와 누리는 살아 있는 연합과 교제의 삶이다. 믿음이란, 이 땅에 오셔서 단번에 구속을 성취하신 구속주에 대한 믿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요 중보자로 영존하시는 분을 믿는 믿음이기도 하다. 이처럼 믿음이란 살아계셔서 구원자와 주가 되시는 그분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 정점에서 발휘되는 것을 교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와의 사귐에 비교할 수 있는 인간 사이의 사귐은 어디에도 없다. 의식적으로 서로 주고받는 사랑으로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과 교제하시고, 그의 백성들은 그분과 교제한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라고 말한다(벧전 1:8). 믿음의 삶은 사랑의 삶이요, 사랑의 삶은 교제의 삶, 곧 영존하셔서 자기 백성을 위해 중보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분과의 신비로운 친교의 삶이다. 믿음의 삶은 죄와 상관없이 자기 백성들과 같이 모든 일에서 동등하게 시험을 받으심으로 그들이 당하는 유혹과 고난과 연약함에 대한 무한한 연민을 가지신 분과의 사귐이다. 진정한 믿음의 삶은, 쇠와 같은 냉랭한 이지적인 동의가 아니다. 믿음의 삶이란 열렬하고 뜨거운 사랑과 사귐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의 교제야말로 참된 신앙의 면류관이요 최고봉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전체 구원 교리의 중심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작정된 모든 것, 단번에 이루신 구속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획득하고 보장된 모든 것,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속을 적용하고 참여함으로 누리도록 하신 모든 것,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지복의 상태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가게 될 모든 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교제라는 이 범주 안에 다 포함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특권과 복락의 정점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로서 하나님의 권속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없는 양자됨이란 있을 수 없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함을 입는 것은 곧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되기 위한 선택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바울은 성부께서 거룩하게 하시려고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한 백성을 택정하신 것을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사랑 안에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양자 삼으셨다고 덧붙인다(엡 1:4-5). 거룩하게 하기 위해 한 백성을 택정하신 것과 양자 삼으시기 위해 예정하신 것이 대구를 이룬다. 하나의 위대한 진리를 이렇게 두 가지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두 가지 표현 방식을 통해 우리는 성부께서 이루신 선택에 포함된 두 가지 서로 다른 측면을 본다. 이처럼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양자됨은 이 놀라운 은혜를 상보적으로 잘 나타내 보여준다. 양자됨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정점에 이르고, 양자됨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다(롬 8:17). 생명이나 죽음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의 일이나 모든 것이 그들의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3:22-23).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고가 감취어진 그분과 연합되었고, 모든 정사와 권세와 머리이신 그분 안에서 그들은 완전하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다함이 없이 풍성한 은혜와 진리와 지혜와 권세와 선하심과 사랑과 의로움과 신실하심의 샘에서, 이 세상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과 장차 누리게 될 삶을 바라는 소망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길어 올린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와의 연합만큼 주 안에서 확신과 능력과 위로와 기쁨을 누리게 하는 진리는 없다. 이 진리는 또한 성화를 불러일으킨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승천하신 구속주이신 그리스도로부터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를 얻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 연합에 포함된 고상한 특권과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인식함으로 감사와 순종과 헌신이 촉발되기 때문이다. 연합은 교제를 의미하고, 이런 교제는 우리의 주가 되시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을 경외하고 사랑과 겸손으로 동행하게 한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5-6).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 15:4).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관련하여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이 측면을 간과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해하고 누리는 데 심각한 결함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가 다른 위격들과 누리시는 관계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우리가 누리는 위격들과의 관계를 적용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친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신다(요 10:30).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우리 역시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가지시는 것과 유사한 관계를 누리게 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이는 우리 주께서 말씀하신 바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 너무나 엄청난 말씀임이 분명하지만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물론 성부께서도 오셔서 신자 안에 거처를 정하신다. 이것보다 더 놀라운 말씀은 아마 그리스도의 이 말씀일 것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0-23). 신자들과 연합하여 그들과 함께 거처를 정하시는 분은 성부만이 아니다. 성령께서도 그렇게 하신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그렇다면,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의 연합이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는 요한의 말과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바울의 말은 예수께서 친히 사도들에게 하신 증거를 되풀이한 것일 뿐이다.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백성들과 이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누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너무나 제한적으로 만들고 축소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장 고상한 차원의 신비다. 여기서 신비란 뭔지 모를 막역한 느낌이나 황홀경과 같은 신비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참되고 살아계신 한분 하나님과 사귀는 신비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과 관련된 삼위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 안에서 각각의 위격이 가지신 독특함을 누리는 세 분의 구별된 인격과의 교제이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성부를 알고, 아버지로서의 그분만의 독특한 성품과 역사를 통해 그분과 교제한다. 그들은 또한 성자를 알고, 아들과 구주와 구속주와 존귀하게 되신 하나님으로서 그분이 가진 독특한 성품과 역사 안에서 그분과 더불어 교제한다. 그들은 또한 성령을 알고, 대언자와 보혜사와 거룩하게 하시는 분으로서 그분이 가진 독특한 성품과 역사 안에서 그분과 더불어 교제한다. 이 교제는 황홀경 가운데 누리는 몽롱하고 막연한 것이 아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계시에 기초한 믿음이요, 성령의 내적인 증거를 통해서 이 계시를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믿음이다. 이뿐 아니라 깊은 감정의 샘을 솟구치게 하는 거룩한 사랑과 기쁨에 겨운 믿음이다. 신자들은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라고 하는 지성소로 들어간다.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일으킴을 받아 하늘에 앉게 되기 때문이다(엡 2:6). 그들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 안에 감취었다(골 3:3). 악한 양심으로부터 깨끗하게 된 마음과 물로 씻기움을 받은 몸을 가진 그들은 믿음의 확신으로 가까이 나아간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소가 아닌 하늘로 들어가신 그리스도께서 지금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을 뵙고 있기 때문이다(히 9:24).


 

[구속,2부 14장,복있는 사람,pp.235-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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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참 재미있으신 분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저위 젖가슴 열매를 보니 웬만한 여성 젓가슴보다
     더 예쁜것 같습니다. 웃음이 절로 나오네요~~^*^



얼마 전 한 일간지를 통해 ‘교회 건물을 여호와 증인에게 매각 결정’이 보도돼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당시 교회 관계자는 교회 매각 문제가 논란이 되자 ‘보고만 받았을 뿐’이라 변명하기에 급급했고, 이런 교회의 행동에 실망한 몇몇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기도 했다.

최근 크리스천 포스트에 한 건물 안에 교회 예배와 사탄숭배자들 미사가 함께 드려지는 것과 관련된 논란이 보도되었다. 사탄 숭배자들과 한 건물에서 예배 드린다는 것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은 가운데, 해당 교회 목사는 변명으로 일관하지 않고 당당히 목회 소신을 밝힌 것으로 알려져 주목을 끌고 있다.

오클라호마시 커뮤니티 교회(Oklahoma City Community Church, OKC) 담임인 톰 매닌(Tom Mannin)은 최근 자신들이 예배 드리는 건물 안에 있는 시청 뮤직홀에서 사탄숭배자들의 블랙미사(black mass)를 이달 말부터 같이 할 수 있도록 허락한 시의 결정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매닌 목사는 그의 블로그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랑의 사도로서 반응하길 원하며, 예수께서 그를 반대하고 싫어했던 이들에게 하셨던 그 방식대로 우리가 대응하길 희망한다”라며, “우리는 은혜와 평화로 다양한 믿음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길 기도한다”고 말하며 시청센터에서 블랙미사를 가지려는 Dakhma of Angra Mainyu를 향해 언급했다.

그는 블랙미사를 올리려는 이들에 대해 적개심을 표현하는 이들에게 ‘다른 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라는 마태복음 5장 38-42절을 인용하면서 “이 구절은 우리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미움을 준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아주 쉽다”라며, “하지만 누군가가 싫어함에도 사랑으로 대한다면 그 미움은 지속될 수 없다. ‘응보의 법’을 뛰어넘어 사랑의 법칙으로 승화시킨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클라호마 시는 금년 초 주정부가 운영하는 시민 센터(civic center)에서 블랙미사를 가지려하는 사탄숭배자 그룹(satanist group)에게 극장 사용을 허락했으며, 이 그룹은 오는 9월 21일(일)에 미사를 드릴 예정이다.

이 소식은 오클라호마 내외적으로 많은 비판에 직면했으며, 반기독교 의식을 허락한 오클라호마시의 결정에 대한 비난이 쏟아져 나왔다. 지난 7월엔 블랙미사 중단을 요구하는 3만 7천명의 서명을 담은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오클라호마 공화당 주지사인 매리 폴린(Mary Fallin)은 사탄그룹의 의식을 ‘가톨릭 신앙에 대한 역겨운 조롱’(disgusting mockery of the Catholic faith)이라 폄하하면서, “미국 수정헌법 1조에 의해 보호를 받긴 하겠지만, 그것이 비난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라며, “뉴욕 사탄숭배자들이 오클라호마까지 왔다는 사실이 충격이다. 그들의 행위가 얼마나 많은 문제를 유발하는지 깨닫고 이 행사를 취소하길 기도한다”고 평하기도 했다.

‘여호와 증인’에게 건물 매각을 한다는 점이 두려워 남 탓으로 일관한 교회의 태도와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될 걸 알면서도 나름 소신을 밝힌 매닌 목사의 태도를 단지 문화의  차이로 돌리기에는 찜찜한 여운이 남는 두 장면이다.

양재영 기자 / <뉴스 M>

6장 새 언약적 순종 (여전히 율법이 할 수 없는 것) / 마이클 호튼

 

 

여전히 율법이 할 수 없는 것

 

복음을 죄 용서로 축소시킬 때, 우리는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것들의 '높이와 깊이'를 잃어 버린다. 우리는 한편으로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부과되어 있는 요구와 다른 한편 성화는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는 자유를 주는 좋은 소식을 쉽게 잊어버릴 수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칭의와 죄 용서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리고 이것은 처음 행동과 관계있다고 가정한다. 사람들은 은혜로 구원받는다. 그러나 그 다음 기독교인의 삶은 행위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지속적인 복을 받기도 하고, 받지 못하기도 하는 문제가 되어 버린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2~3절에서 이와 비슷한 것을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우리가 율법의 제3용도(기독교인의 행동을 위한 가이드로서의 율법)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시점에, 이 문제는 쉽게 반율법주의(우리는 율법에 대한 모든 의무로부터 자유하다는 신념)와 율법주의(율법을 영생을 얻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신념)의 형태로 나타난다. 어떤 기독교인도 기독교인의 삶이 전적으로 어떤 규범도 없이 살아야만 한다고 실제로 믿지는 않는다. 사실 내가 십계명은 신약 시대 신자에게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가르치는 그룹에서 양육받았지만, 일련의 비성경적인 문화적 금기사항이 그 빈자리를 채우고 말았다. 우리는 식사시간에 포도주를 마시는 기독교인은 아마 비기독교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러한 규범들이 사실 십계명이 도덕법을 받아들이는 교회에서 하는 것보다 더욱 '율법적으로' 기능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 모두 기독교인들이 개인과 공동체로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어떤 기준을 요구한다는 것을 동의한다면, 이 질문은 이런 규범이 우리에게서 비롯되어야 하는지 혹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 된다. 나는 결혼한 지 오래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아내가 실제로 좋아하지 않는 선물을 아내를 위해 사는 버릇을 충분히 고치지 못했다. 대신 나는 종종 아내가 가져야 한다고 또는 아내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아내에게 사 줄 것이다. 내가 원하는 반응을 받지 못했을 때, 내 반응은 종종 이렇게 될 것이다. "어때, 만일 당신이 크리스마스나 당신 생일 때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내게 분명히 말했다면, 나는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을 표현하는 데 있어 결코 자발적이면서 창조적이지는 못했을 거야." 물론 어떤 정해진 날에 자발적이면서도 창의적인 방식으로 내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많은 방법들이 있다. 그러나 그 사랑을 표현할 때, 아내의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이기심의 표시다. 자발적이고 창의적으로 하고자하는 욕구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를 고집스럽게 자기마음대로 결정을 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다는 우리의 자부심이 실제로는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내 아내는 나처럼 죄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하나님은 단순히 개인적으로 더 선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도덕적 성품을 나타내시는 율법을 계시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본성에 위배되는 어떤 것을 우리에게 명령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명령은 변덕이 아니라 하나님의 불변하는 본성에 뿌리박은 뜻에서 나온다.

 

만일 이런 논의가 사실이라면 - 즉 하나님은 자신의 율법을 주셨고,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이 불변하는 성품의 표현이며, 신약은 도덕적인 율법을 철회하거나 축소시키지 않고 오히려 더 확장시키고 심화시킨다는 것 -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도덕법에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순종해야 하는 의무보다 우리의 의무가 더 작지 않다. 이 도덕법은 모세 신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의식법과 시민법과 쉽게 구별될 수 있으며, 여전히 신구약 성도 모두에게 구속력이 있다. 심지어 인류가 창조될 때 양심에 도덕법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도덕법은 모든 인류에게도 구속력이 있다.

 

이 율법의 세 번째 용도를 변호해 왔는데, 이 세 번째 용도에 있어서조차 율법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요컨대, 때로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할 수는 없지만,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우리는 칭의에 있어서는 율법과 복음을 조심스럽게 구별하지만 기독교인의 삶을 다룰 때는 이 둘을 혼동한다. 마치 이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천국 가는 여행길에 율법으로부터 힘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칭의에 있어서처럼 성화에 있어서도 불가능하다. 율법의 여러 가지 용도에 있어 기본적인 기능은 변하지 않는다. 즉 율법은 명령한다. 이것이 율법이 하는 일이다. 율법(하나님의 명령으로 간주되는)은 결코 이 이상을 하지 않는다. 십계명이거나 바울의 성령의 열매에 대한 가르침이거나 간에 이러한 도덕적 지침은 인도하고, 우리의 은혜로운 아버지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알려 줄 수 있지만 결코 우리 마음을 움직이거나 우리 행동에 동기부여를 줄 수는 없다. 이것은 왜 순종이 열매인지를 보여 준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죄 용서만이 아니라 중생과 새로운 순종으로 시작된 완전한 회복임을 상기해 보라.

 

이러한 마음을 다한 신뢰와 순종이 언제나 하나님의 의도였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고, 온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찰 때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나머지 피조물을 신실하게 다스리도록 하셨다. 우리는 약한 것이 아니라 강하게, 불성실한 것이 아니라 성실하게, 악한 것이 아니라 의롭게, 자기중심적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으로 창조되었다. 타락은 파괴와 분리와 분열을 만들어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도덕적 본성이나 자신의 형상을 가진 자로서 인간에 대한 기대를 변경시킬 수 없다. 하나님은 완전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며, 다시 온전한 파트너로서 인간과 더불어 교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빛 아래서 우리는 시편 40편에 나오는 시인의 입 속에 담겨진 새 노래를 읽을 수 있다.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 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40:6~8).

 

용서는 좋은 것이며, 순종은 더 좋은 것이라는 것은 선지서에서도 마찬가지로 일관되게 반복된다. 그런 다음 히브리서 10장에 오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10:1~10).

 

논증은 아주 평이하다. 요점은 옛 언약 예배는 죄를 없이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용서 자체는 새 언약에 약속된 유일한 언약적 복이 아니다. 그런 다음 히브리서 저자는 죄 용서뿐만 아니라 마음에 기록된 율법에 대한 예레미야 31장을 인용하면서 다시 되풀이 한다(히10:15~17).

 

핵심에는 우리 죄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단번에 용서되었을 뿐만 아니라 순종이 최종적으로 우리의 언약적 대표에 의해 단번에 드려졌으며, 그래서 하나님은 마침내 아들 안에 있는 사람들 자신이 향기나는 제물이 되도록 하셨다는 선언이 있다. 말하자면, 이 구절은 하나님이 실제로 원하는 것이 언약 범한 자를 위한 동물 속죄 제물이 아니라 언약에 순종하는 인간 자신이 감사 제물이다. 율법은 어긴 들에 대한 규정은 있지만 모든 죄에 대한 참된 용서와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기뻐하시는 감사의 순종적인 을 주지는 못한다. 대신 이스라엘 사람들이 속죄일에 예루살렘 여행을 위해 가족들의 짐을 꾸릴 때마다, 그들이 자신들과 함께 데리고 가는 울고 있는 양은 계속적으로 그들의 죄를 생각나게 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우리 그리고 자신의 뒤에 던져 버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호의를 회복하기를 원하신다. 게다가 하나님은 우리 죄를 묻어 버리고, 우리를 살려 새 생명을 주시고,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는 한 가족을 가지기를 원하신다. 율법은 궁극적으로 용서를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온전하게 하지 못한다(히7:19). 복음은 궁극적인 용서와 완전함 두 가지 모두를 준다. 즉 지금 용서와 영광 중에 우리의 것이 될 완전함의 시작을 준다.

 

그러므로 이러한 선언에는 용서를 넘는 두 종류의 복음에 대한 메시지가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희생은 죽음만이 아니라 삶, 십자가에서 기꺼이 처형당하신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언약적 뜻에 날마다 순종하는 것도 포함된다. 둘째,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우리에게 전가되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 안에서 율법이 절대로 이룰 수 없었던 그 순종을 우리 안에서 이룰 수 있다. 하나님이 "첫째 것을 폐하심(옛 언약)"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새 언약)"이다. 더 이상 우는 양과 염소가 없으며, 한 몸 곧 우리 주님의 몸이 새 언약 제사 즉 순종과 죽음의 제사가 준비된다.

 

확실히, 우리 순종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내적인 쇄신과 갱신은 언제나 진행 중이며, 우리가 영화롭게 되었을 때의 마음의 거룩과 삶에는 모자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생명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 이러한 새 언약의 복은 돌이킬 수 없다.

 

이 모든 것 안에 있는 모순은 순종에 근거해 생명을 약속한 바로 그 율법이 죽음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롬7:10). 이것은 완전히 직관에 반대되는 것이다. 모든 종교에서 그리고 우리가 거리에서 만나는 보통사람들에게 있어, 종교의 목적은 사람들을 더 착한 사람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은 양심에 기록된 율법인 행위 언약을 행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복음은 우리 밖에서 오는 소식이며, 메신저에 의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복음은 우리에게 자연스럽지 않고 완전히 낯설다. 율법은 생명을 줄 수 없다. 종교는 속박이다. 그러나 복음은 누군가 우리를 위해 행한 좋은 소식을 전해 준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1~4)

 

하나님 자신은 율법 자체가 결코 할 수 없는 것을 하셨다. 율법은 명령한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할 수 있다.

 

이것은 단지 새로 회심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숙한 신자를 위한 좋은 소식이다. 존 머리가 말한 것처럼, "율법은 칭의에서 한 것보다 성화에서 더 많은 것을 할 수 없다." 처음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세우는 것보다 우리에게 성화를 위한 힘을 주는 것이 율법의 직무는 아니다(심지어 도덕법의 세 번째 용도에 있어서조차).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 생명과 능력의 유일한 원천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할 때와 동일하다. 즉 율법(그리고 우리의 순종)이 결코 할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이 하신다는 복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은혜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구원받았고, 구원받아가고 있으며, 구원받게 될 자로서 율법(도덕법의 세 번째 용도)에 대해 반응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판결로서의 하나님의 율법은 심판에서 "무죄 선언"을 해 주는 복음과 함께 한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면서, 그 동일한 율법은 우리 길을 보여 주고, 하나님의 불변하는 뜻을 계시해 준다.

 

용서는 위대하다. 그러나 순종은 더 위대하다. 속죄제물은 죄 용서를 받기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감사제물은 하나님이 무엇보다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이다(직설법)(롬12:1~2).

 

그러므로 복음은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여러분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직설법(즉 하나님이 행하신 것에 대한 좋은 소식-하나님의 자비)이 명령법(즉 도덕법의 세 번째 용도로서의 율법)에 동기를 부여한다. 율법 언약에 의해 결정되는 성화를 위해 오직 은혜로 용서와 칭의를 받은 것이 아니다. 모순은 그대로 남는다. 즉 율법 언약은 정죄로 인도하는 반면 약속 언약은 율법이 요구는 하지만 결코 줄 수 없는 바로 그 순종으로 인도한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며, 내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비록 여러분이 눈에 보이는 언약 공동체에 가입되어 있다 할지라도 구원은 여러분의 것이 아니다. 복음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크며,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을 위한 심판은 엄중하다.

 

한 예화가 이 실마리들을 하나로 묶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각종 최신 장비를 가진 신형 돛배를 상상해 보라. 위성기술을 가지고 있는, 이 돛배는 여러분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맞는 계획을 짤 수 있다. 심지어 여러분이 좌표에서 벗어날 때 경보 신호를 울릴 수도 있다. 이제 여러분이 인상적인 장비를 의지한 채, 바다로 나가 돛을 활짝 펴고 전력 항해를 하다 점점 바람이 줄어들게 되어 완전히 고요한 상태가 되었다고 해 보자. 그때 돌풍이 갑자기 동쪽에서 접근하고 있다고 라디오가 경보를 해 준다. 일단의 동료 선원들이 라디오에서 조언을 준다. 그러나 안내 시스템에 의해 제공되는 각종 정보들과 동료들의 유익한 조언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어떤 바람 없이는 안전한 곳으로 방향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여러분은 온갖 좋은 기술을 가지고도 항구로 움직일 수 없다.

 

기독교인의 삶도 종종 이와 같다. 우리는 미끄러지듯이 항구에서 나와 우리 죄가 용서되고, 우리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아는 기쁨으로 흥분된 채 전력으로 항해한다. 우리 구주에 대한 새로운 사랑으로 감사로 가득한 마음을 가지고, 구주께서 자신의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지정해 놓은 길을 열심히 따라가려 한다. 그러나 넓은 바다로 나갔을 때, 영적인 침체를 만난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이 방향을 제시해 주지만 능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또한 영적인 기술의 장식품은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이 책을 읽거나, 저 세미나에 참석하거나 또는 영적 승리를 위한 이 계획을 따르거나 죄를 극복하기 위한 이런 단계들을 따름으로써 배를 다시 바른 방향으로 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안내자들은 흔히 율법(즉 하나님의 지시)도 아니고 복음(즉 하나님의 약속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행동)도 아니다. 단지 동료 선원들의 유익한 조언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이 제공하는 조언은 복음보다는 더욱 율법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공을 위한 조건으로서 요구사항을 부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언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여러분이 영적으로 죽어 있다는 느낌을 더 깊게 받게 된다. 완전히 지쳐 여러분은 포기하고 다시는 항해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든지 아니면 여러분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신선한 강력한 바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 바람은 언제나 구원을 베푸시는 그리스도다. 여러분이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하나님이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 무엇을 하셨으며, 신실하지 않은 항해자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 새로운 세계에 대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듣는 일이다. 이것만이 돛에 바람을 잔뜩 받게 해서 바람이 거세게 불 때, 여러분을 안전하게 항구로 다시 돌아가게 할 수 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전 생애는 항해하는 과정으로서 확신을 가지고 넓은 바다에 나갔다가, 점점 지치기도 하고, 또다시 하나님의 소중한 약속으로 다시 우리의 항해를 해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어떤 지점에서도 전력 항해를 하고 있거나 물 속에서 죽은 경우는 없으며, 단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로마서 6~8장에서 발견하는 움직임이다. 승리의 직설법으로 시작해서(6:1~11), 도덕적 명령법을 통해(6:12~14), 다시 직설법으로 갔다가(6:15~7:6), 죄와 싸우면서 완전히 지쳤다가(7:7~24), 다시 승리의 직설법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로 돌아갔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의 희망으로 가는데, 이런 희망을 위해 지금 우리는 성령을 계약금으로 가지고 있다(8:1~39).

 

그러므로 이 모든 것에 있어 결정적인 것은 율법의 세 번째 용도에 있어서조차(명령보다 인도하는), 율법은 율법이 하는 것만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율법이 처음에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했다가(도덕법의 두 번째 용도), 다음으로 그리스도가 다시 우리를 율법으로 인도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성화된다(도덕법의 세 번째 용도)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율법은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최선의 길을 안내해 준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우리 안에서 행하신 것에 대한 직설법인 선포 없이는, 율법이 우리를 인도할 수 있는 것은 절망 아니면 자기 의다. 우리가 처음 믿었을 때보다 더 많이 우리는 감사함으로 돛에 바람을 잔뜩 받게 하는 능력을 복음의 덕분으로 돌려야 하고, 그러한 감사가 이루어지는 바른 길을 율법의 덕분으로 돌려야 한다. 시작과 중간과 끝에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롬1:16).

 

 

마이클 호튼의 '언약신학'(9장 새 언약적 순종- 여전히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에서 발췌, 257~268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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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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