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 담임목사와 부목 목회에 성공비법

장달윤목사

제2강 : 牧會란 무엇인가?

본 교회 후임연수생 부목사에게 牧會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였더니 양들을 잘 돌보는 것 아닙니까 하였다. 독자여러분들은 이 대답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학문적으로는 맞는 대답이다. 문자 그대로 牧會란 모여 있는 양들을 치는 것이다. 그러나 목회본질에서는 너무 거리가 멀다.
牧會本質의 牧會란? 牧=죽을 목. 會=장례회자이다. 목회는 내가 죽어 장례를 치르는 것이다. 목회는 내가 죽지 않으면 아니 되는 직업이다. 목회 실패자는 내가 죽지 못한 결과요, 목회 성공 자는 자신을 죽여 장례를 치른 목회자들의 결과이다.

죽은 목회자는 어떤 것인가?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죽은 자는 두들겨 맞아도 반응이 없고, 죽은 자는 송장냄새가 난다. 목회는 침묵으로 웃는 얼굴을 하고 분노를 극복해야하는 직업이요, 어떤 억울한 욕설과 폭언을 듣고 짓 밟혀도  반응이 없어야하는 직업이요, 목회는 목회자가 썩어 냄새가 나야하는 직업이다. 침묵과 무반응은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이요(갈2:20)냄새는 예수님의 향기이다(고후2:14-15.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라. 우리는 구원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그리스도의 향기니)목사가 죽어 썩어 냄새가 날 때에 교회 안에는 예수님의 향기가 진동하고, 예수님의 향기가 진동할 때에 범나비들과 꿀벌들이 날아든다. 牧=죽을 목, 會=장례회자를 모르면 그의 목회는 반드시 실패한다. 죽을(牧), 장례(會)자가 없는 교회는 마귀의 전쟁터로 변한다.

고후2:16.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목사의 썩는 냄새는 生命으로 좇아 生命에 이르게 하고 교회를 부흥 시키는 예수님의 향기가 된다.

흥분하며 얼굴을 붉히고, 신경질 내며 맛 대응하고, 증오하며, 분노하며 고함을 치고, 마음에 들지 않은 자를 향해 강단에서 난도질을 하며 고치려하는 목사는 장례를 치르지 못한 아마추어 목사이다. 이런 목사는 얼마동안 밥은 얻어먹을 수 있지만  교회를 평탄하게 장기적으로 끌고 갈 능력이 없다. 속세에서 시달리다가 천국복음을 듣고 위로받고 희망을 얻기 위해 오는 양들을 피곤하게 만들고 상처를 준다. 아마추어들은 훌륭한 멘토를 찾아 장례지내는 법을 배워 장례부터 치르라. 그렇지 않고 목회하는 자는 하나님의 교회를 마귀로 틈을 타게 하여 어지럽히고 많은 상처를 잎이게 되어있다. 참 牧會를 實踐하는 목회자가 되라. 牧會란? 죽어 장사 지내는 것.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마13:25).

유형 교회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다. 마치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뿌려져 있는 넓은 들판과 같다. 신자와 불신자, 거듭난 사람과 아직 변화 받지 못한 사람, 그리고 천국의 자녀들과 악의 자녀들이 모두 회중 가운데 섞여 있다. 

순수한 복음의 선포로도 이 상황은 막을 수 없다. 모든 세대에 걸쳐 교회들은 이 상태를 변함 없이 유지해 왔다. 초대교회 교부들과 마찬가지로 종교개혁자들도 교회 안에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있는 경험을 했다. 현재의 사역자들도 겪고 있는 상황이다.

이 세상의 어떤 교회나 종교적인 모임도 ‘알곡’으로만 이루어진 단체를 만들 수는 없다. 우리의 영적 대적인 마귀가 늘 ‘가라지’를 뿌리고 다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엄격하고 철저히 훈련시키더라도 이 상황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성공회나 장로교, 감리교, 그 밖의 독립교회 안에서도 우리는 똑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교회를 깨끗하게 한다 할지라도 완벽하게 순수한 알곡들의 공동체를 만들 수는 없다.

오히려 이러한 노력과 방법들이 교회에 해를 끼칠 수 있다. 완벽을 추구하는 가롯 유다와 같은 신자를 만들어 낼 수도 있고 많은 신자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 가라지를 뿝으려다 알곡의 뿌리가 뽑힐 위험도 있다. 이러한 열정은 말씀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경우 해를 불러올 수 있다.

 

심겨진 알곡에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의 마음에는 전연히 가라지가 자라게 되고 그리스도에게서도 점차 멀어지게 되어 있다. 한편 어거스틴이 남긴 은혜로운 격언 가운데 깊은 진리가 감추어져 있다. “오늘의 가라지가 내일의 알곡이 될 수 있다.”

 

- 존 라일, 『존 라일의 예수묵상 365』, pp 18-19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성경의 내용은 유일하다. 성경의 완전한 권위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기독교 계시론에 기독교 영감론이 첨가되어야 한다. 영감론이란 다음과 같다. 성경은 중요한 일들에 대한 기록일 뿐만 아니라 그 기록 자체가 참되며, 저자들이 오류로부터 완전히 지켜져 그들의 생각과 표현의 습관이 온전히 유지되면서도, 그들이 쓴 책이 믿음과 행위의 무오한 규칙이 되는 것이다.

 

완전 영감교리는 지속적으로 잘못 제시되어 왔다. 이 교리의 반대자들은 완전 영감 교리가 성령이 기계적으로 작동한다는 주장인 것처럼 말해 왔다. 성령이 저자들에게 셩경 내용을 불러 주었고, 저자들이 그것을 받아쓴 것에 불과하다는 이론이라고 비판한다. 물론 이런 모든 희화화된 내용에는 아무 근거도 없다. 어떤 사안에 대한 천박한 비판을 그저 따르기에 앞서, 본인이 직접 그 문제를 검토하는 것이 좋은 태도다. “기계적혹은 그와 유사한 몇 가지 무례한 말로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는 것은 훨씬 쉬운 일이다.

 

실제로 완전 영감 교리는 성경 저자들의 개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또한 정보 획들을 위해 그들이 정상적인 방법을 사용했음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성경의 각 책이 만들어진 역사적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완전 영감 교리가 부인하는 것은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주장이다. 완전 영감 교리는 성령이 성경 저자들의 마음을 잘 가르쳐서, 다른 모든 책에는 반드시 있는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정한 계시의 기록을 포함하지만, 참된 기록을 포함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영감 교리에 따르면, 그것도 실제로는 참된 기록이다. 성경은 믿음과 행위의 무오한 규칙인 것이다.

 

자유주의 설교자는 너무나 자주, 성경의 오류에 관한 미묘한 문제를 피하고자 기계적 영감설”, “받아쓰기 영감설”, “성경을 부적으로 사용하는 미신등에 관해서만 말하려고 한다. 자유주의 설교자도 성경은 신성하다- 실제로 그것이 더욱 인간적이기 때문에 더욱 신성하다고- 말하지 않는가? 덕을 세우는 데 이보다 더 유익한 것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러나 물론 자유주의자들의 이런 외면은 속임수다. 오류로 가득한 성경을 신성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현대의 범신론적 의미에서 신성하다는 것으로, 이에 따르면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불완전함과 죄로 가득한 세계의 진행과정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경배하는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다.

 

완전 영감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 내에는 이와 같이 성경의 중심 메시지를 받아들이면서, 성경 저자들이 작품을 쓸 때 성령의 초자연적인 지도를 받지는 않았지만, 오직 그 증언이 신뢰할 만하기 때문에 성경 메시지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자유주의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독교의 근거가 되는 메시지를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생사가 달린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을 부인하는 사람들과 그들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견해는 매우 다르다. 현대 자유주의자는 완전 영감을 거부할 뿐 아니라, 신뢰할 만한 모든 책에 대해 갖는 정도의 존경심마저 성경에 대해서는 갖기를 거부한다. 기독교적인 성경관을 무엇으로 대체했는가? 종교의 권위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자유주의의 견해는 무엇인가?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 성경의 권위 대신 내세우는 것이 그리스도의 권위인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자유주의자는 구약의 잘못된 도덕적 가르침, 혹은 바울의 궤변론적 논증으로 보이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간주한다. 왜냐하면 성경의 나머지 부분을 거부하고 오직 예수만을 의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인상은 완전히 거짓된 것이다.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사실 예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의 구원 사역의 의미는 그 일이 성취되기 전에는 완전히 제시될 수 없었다. 예언을 통해 제시될 수도 있었으며, 예수가 지상 생애 동안에 그 의미를 설명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완전한 설명은 당연히 그 일이 성취된 후에 주어졌고, 그것이 실제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사도들을 통해 주어진 성령의 가르침을 예수의 가르침보다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성령뿐 아니라 예수 자신에 대한 모욕이다.

 

그러나 실제로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예수의 권위마저도 굳게 견지하지 않는다. 분명 그들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기록된 예수의 말씀 속에는 현대 자유주의 교회가 가장 혐오하는 것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서 예수는 나중에 사도들을 통해서 드러날 더 충만한 계시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대 자유주의 신학에 의해 권위를 인정 받을 수 있는 예수의 말씀들은, 기록된 말씀의 더미 속에서 비평 과정을 통해 걸러져야 하는 게 분명하다. 이 비평 과정은 확실히 매우 난해하며, 비평가들 자신의 선입견에 맞는 말들만이 역사적 예수의 진짜 말들로 선택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자주 일어난다. 현대 역사가들에 의해 재구성된 역사적예수의 말 가운데서도 어떤 말들은 참되지 않다고 받아들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대개 많은 부분이 예수의 말씀으로 여겨지고 있다. 설령 예수가 말한 모든 것이 참되지는 않다 하더라도, 그의 중심적인 삶의 목적은 교회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질 만하다고 주장된다. 그렇다면 예수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가장 짧은 복음서이며 현대 비평주의가 인정하는 가장 초기 복음서에 따르면, 인자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는 본문이다(10:45). 여기서 대속의 죽음이 예수의 삶의 목적이 되고 있다. 그런데 현대 자유주의 교회에서는 이런 말이 당연히 한쪽으로 밀쳐진다. 진실을 말하자면,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 발견한 예수의 삶의 목적은 예수의 진짜 삶의 목적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 중에서- 격리되고 잘못 제시된-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프로그램과 우연히 일치하는 요소들일 뿐이다. 그렇다면 참된 권위는 예수가 아니라, 예수의 기록된 교훈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지를 결정한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원칙이다. 산상수훈에서 뽑힌 윤리적 원리들이 받아들여졌는데, 이는 그것들이 예수의 가르침이기 때문이 아니라 현대의 관념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 예수의 권위에 근거해 있다는 말은 전혀 참이 아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의 모범과 교훈에서 절대적으로 본질적인 의미를 가지는 상당한 분량을- 대표적으로 자신이 하늘로부터 온 메시아라는 의식- 거부할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 신학에서 진짜 권위는 오직 기독교적 의식혹은 기독교적 경험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독교적 의식이 만들어 낸 결과물들을 어떻게 확증할 수 있는가? 제도 교회의 다수결 투표에 의해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방법은 양심의 자유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결과가 되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유일한 권위는 개인의 경험일 수밖에 없다. 각 개인을 돕는것만 진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권위는 전혀 권위가 아니다. 개인의 경험이란 무한히 다양하며. 진리가 어떤 특정한 때에 작동되는 것으로만 간주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그 결과는 끝이 보이지 않는 회의주의다.

 

반면에, 기독교인은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한다. 한 책을 의지하는 것은 죽은 것이거나 인위적인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16세기 종교 개혁은 성경의 권위를 근거로 했으면서도 세상에 불을 붙였다. 사람의 말을 의지하는 것은 맹종이 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은 생명이 된다. 만약 우리 자신의 수단만 남아 있고 하나님의 복된 말씀이 없다면, 세상은 어둡고 우울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이 기독교와 전혀 다르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근거가 다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성경 위에 서 있다. 기독교는 그 사상과 삶에서 성경을 근거로 한다. 반면 자유주의 신학은 죄 있는 사람의 무상한 감정에 근거해 있다.

 

- 그레샴 메이첸, '기독교와 자유주의', 116-123

가져온 곳 : 
블로그 >청 교 도 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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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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