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지나간 시절에 우리의 도움이셨던 하나님

                다가올 세월에는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비바람 치는 폭풍의 때에는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영원한 우리의 본향이십니다.

                 

                주님의 보좌 그늘 아래서

                우리가 여전히 안전하게 거합니다.

                주님의 팔만으로도

                우리의 방패는 확실합니다.

                 

                작은 산들이 질서 있게 서고

                땅의 틀이 잡히기도 전에

                영원부터 당신은 하나님이시며

                영원까지 동일하십니다.

                 

                오,

                지나간 시절에 우리의 도움이셨던 하나님

                다가올 세월에는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우리의 삶이 다하기까지

                우리가 영원히 본향에 이르도록

                우리의 인도자가 되소서.

                 

                      - 아이작 와츠-

         

         

        다시 났습니다.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니고데모는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몰약과 침향을 100근쯤 가지고 와서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이고 유대인 관원 (a member of the Jewish ruling council)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이라면 어려서부터 성경을 달달 외우면서 배웠을 것이고 관원이라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표적을 행하시는 걸 보니까 그렇다는 것입니다. (요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가 메시아의 예언을 믿었거나 인생의 문제와 구원에 관하여 심각하고 고민하다가 가르침을 얻기 위해 왔는지, 아니면 예수님이 굉장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꼭 한 번 찾아서 만나야지 생각하고 찾아 왔는지, 혹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분일지 모르니까 미리 눈도장을 받아두고 한 자리 얻어걸릴 심산으로 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세베대의 아내는 주님을 찾아와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님의 오른편,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치맛바람 청탁을 했고 사도행전 1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니고데모에게 느닷없이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니고데모는 화들짝 놀랐을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별별 생각 다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다시 태어나라고? 그럼 나는 늙어서 안 된단 말인가? 한 자리 얻어볼 요량으로 찾아왔는데 면접시험에서 불합격이란 말인가?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묻는 게 아니겠습니까? 다음절을 보면 (요3: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더 어려운 말씀을 던지십니다.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 요3:6 )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니고데모에겐 참 어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단 말입니까? 이것이 무슨 뜻이란 말입니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란 말씀은 또 무슨 뜻이란 말입니까?

        우리말 성경은 “거듭 난다”라고 쓰고 있습니다만, 영어성경을 보면 “Born Again" 다시 난다는 뜻입니다. 즉 “거듭”이 아니고 “다시”가 맞는 말입니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태어나서 여태 살아온 것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효! 싹 지우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태어나서 자라온 너는 육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영이요, 그 다시 태어난 영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도 성령으로 다시 영으로 태어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육신인 인간이 어떻게 영으로 다시 난단 말입니까? 그런데 7절을 보면 주님께서 “네가 다시 나야 한다.”는 말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요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바람이 붑니다. 나무가 흔들리고 소리가 들립니다. 그런데 안 보입니다. 바람이 어디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붑니다.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다시 태어납니다. Born Again합니다. 성령으로 영으로 다시 납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우리는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거듭, 아니 다시 태어납니다.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우리를 대신해서 니고데모가 묻습니다. “(요3:9)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그렇게 질문하는 니고데모를 예수님은 너는 이스라엘 선생이면서도 이러한 일을 모르느냐고 책망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무슨 굉장한 새로운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이미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새롭고 기이한 방법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다시 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게 된 이스라엘 백성이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쳐다보면 살았던 것이 바로 죽어가던 자가 다시 난, 생명을 얻은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쳐다보기만 하면, 믿기만 하면 다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아무것도 안 느껴져도 말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이며 성령으로 다시 났으니 영인 것입니다.

        니고데모에게 하신 주님의 결론적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보세요. 끝부분이 똑같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광야의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살듯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새 생명을 얻습니다. 다시 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당신은 다시 났습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아무 표도 없어도 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무슨 굉장한 체험이 있어야 성령을 받아 거듭 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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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 2천 년 금기에 도전?…‘동성애 포용’ 보고서 발표

        2014/10/16 (목) 12:09 ㆍ추천: 0      

        가톨릭교회가 2천 년 동안 금기시 해 온 동성애를 포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충격을 주고 있다. 이와 관련해 가톨릭 내부는 물론 전 세계 종교계에서 뜨거운 논란이 일 것으로 예상된다.

         
        ▲교황이 주재하는 세계주교대의원회가 바티칸에서 열리고 있다. (유튜브 동영상 캡쳐)

        ‘동성애ㆍ이혼ㆍ혼전 동거’ 차별 말고 환대해야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재하는 세계주교대의원회(주교 시노드)가 지난 5일부터 보름간의 일정으로 바티칸에서 진행 중이다.

        시노드(Synod)는 가톨릭교회의 주요 현안들에 대해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주교들의 회의 명칭이다. 200여 명의 주교들이 참석한 이번 회의에서 현지 시간으로 13일 충격적인 보고서가 발표돼 화제다.

        외신에 따르면,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책임보고관 페터 에르도 추기경은 이날 ‘교회가 동성애자와 이혼자, 결혼하지 않은 커플, 이들 커플의 아이들을 환대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12쪽 분량의 예비보고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동성애자와 관련 이 보고서는 “동성결혼을 허용하지 않는 기존 교리는 유지하되 동성애자에게도 은사(恩賜ㆍgift)가 있으며 이들 사이에 희생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서로 돕는 사례가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고 “그들은 환영받아야 하고 인내와 사려도 함께 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교회의 승인을 받지 않은 세속적 결혼과 혼전 동거의 긍정적 면모를 이해해야 한다”면서 “이혼으로 상처를 입은 이들이 차별 없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외신들 “혁명적” 보도…가톨릭 내부도 혼란

        이번 보고서가 동성애ㆍ이혼ㆍ혼전 동거를 교리적으로 허용한 것이 아니고, 최종적 입장이 아닌 예비보고서 형태라고 하지만, 오랫동안 금기시해 온 것을 포용할 필요가 있다는 제안 자체가 파격적임에는 분명하다.

        뉴욕타임스는 “동성애에 대해서는 혁명적 변화”라고 보도했고, AP는 “결혼과 이혼, 동성애, 피임과 같은 중대 사안들에 대한 이번 보고서의 어조는 거의 혁명적 수용”이라며 “동성애를 2천 년 간 죄악시해온 가톨릭에서 이 같은 문제제기만으로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보고서를 둘러싸고 가톨릭 내부도 혼란스러운 분위기다. 보수 진영의 대표적 인물인 레이먼드 레오 버크 추기경은 “상당수 주교들이 이번 보고서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실제로 보고서 발표 이후 41명의 주교가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고서도 이혼한 신자와 재혼한 신자의 영성체 참여에 대해 주교들의 의견이 갈렸음을 밝히고 있다.

        주교들은 19일까지 최종 보고서를 작성하게 되며, 이를 바탕으로 내년 10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두 번째 세계주교대의원회의가 열린다. 이때 최종 결정은 교황이 내리게 된다.

        5년마다 열리는 정기총회인 내년 회의 때까지 가톨릭 내부 보수-개혁 간 치열한 격론이 예상되는 가운데, 개신교에 어떠한 파장을 몰고 올지도 지켜볼 일이다.

        김민정 ⓒ 뉴스미션
        USA아멘넷 기사



        천국과 지옥

        (16:19-31)

         

        누가복음 16:19-31까지를 가리켜 혹자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터툴리안(Tetullian)과 암브로스(Ambross), 칼빈(Calvin)은 이것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본문에 거지의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나사로입니다. 부자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지만 전설에 의하면 다이브스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많은 비유 가운데 이름이 나와 있지 않지만 거지의 이름이 나와 있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사로는 믿는 자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그가 아브라함 품으로갔다는 말씀이 잘 가리킵니다(22). 부자는 믿지 않는 자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그가 얼마나 호화로운 연락한 생활을 하였다는 말씀이 증거합니다(19).

         

         

        부자

         

        부자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그는 자색 옷을 입었습니다. 이 자색은 로마 황실에서 전용으로 입는 색깔입니다. 자색의 빛깔은 깊은 시내의 고동 끝에서 조금씩 나오는 자연 색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옷 한 벌을 자색으로 온전히 물들이려면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황실은 자기의 권위를, 부자들은 자기의 부요를 드러내기 위해서 자색 옷을 입었었습니다. 거기다가 고운 베옷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운 베옷은 이집트에서 직조를 했습니다. 마에서 가장 가는 섬유로 천을 만들었기 때문에 한없이 부드럽고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그 값을 칠 때에는 옷 무게와 금을 똑같이 달아서 금 값을 지불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당시에 얼마나 많은 돈을 지불하고 그 고운 베옷을 입었는지 모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는 날마다 호화롭게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친구들을 불러모아놓고 자기 좋은 것을 원 없이 나누고 같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돈 많이 벌어 축재하는 사람들의 세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값진 옷입니다. 부자로서의 자기 과시를 옷,자동차,주택 등으로도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날마다 날마다 즐기는 생활입니다. 여가를 기분 좋게 보냅니다. 생의 목표가 그것입니다. 아침에 침상에서 일어나며 궁리하는 것이 오늘은 무엇을 하며 즐길까? 하는 것입니다.

        호화로운 생활입니다. 분수 넘치게 사치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를 최대한 활용하여 남은 아랑곧 하지 않고 사치합니다.

         

         

        거지

         

        이에 비해 나사로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나사로에게는 부스럼이라는 병이 있었습니다. 못먹고 병원 가지 못하니 병이 떠날 틈이 없는 것입니다. 질고를 지고 평생살았습니다. 그는 부자의 연회에서 남겨진 음식 부스러기를 얻어서 배를 채웠습니다. 쓰레기통을 뒤지며 사는 불쌍한 인생이었습니다. 그 문가에서 같이 음식을 나누던 개가 그 헌데를 핥아 주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나사로가 어떤 사유로 거지가 되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 사람은 몹시 불행했고 고통받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22절에 보면 그에게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부자보다 나사로가 먼저 죽었습니다. 가난한 자는 빨리 죽습니다. 부자는 젊어서 몸을 녹용, , 인삼 등으로 많이 보호했기 때문에 숨이 안 끊어져 고생을 합니다. 나사로는 죽었으나 누구 하나 거들떠 보지 않았습니다. 가마니에 둘둘 말아다 어딘가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다 버렸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호화로운 장례식을 치루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사람은 다같이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세 가지 죽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인 죽음입니다. 육신적 죽음입니다. 영원한 죽음입니다. 육신의 죽음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잘 압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와 허물로 죽은 존재요 영원한 죽음 지옥에 가게 될 운명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9:27)”.

        육신이 죽으면 심판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무시한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영원한 천국에 가게 됩니다. 사람이 죽은 뒤의 운명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죽기 이전의 상태와 죽음 이후의 일을 예수님은 가장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만 18회에 걸쳐 지옥을 말하고 있습니다. 육신이 죽으면 두 길이 나타납니다. 간단 명료하게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그 사실을 설명해 줍니다.

         

          

        23절에 음부 지옥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거기에 비해서 지옥에 있는 부자를 봅니다. 부자가 그 지옥 속에서 외치는 외침을 들어봅시다. 그는 첫 번째로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저 나사로의 손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서 내 혀를 적셔 주시옵소서." 그는 이미 지옥에 가서 분위기를 파악했습니다. 머리가 보통 좋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 지옥은 한번 빠지면 이미 결판이 났고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달라고 아무리 졸라도 안되는 곳임을 눈치챘습니다. 그래서 그는 최소한의 것을 요구합니다. 나사로의 손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서 내 혀에 대달라고...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얘야, 너는 살았을 때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그것뿐만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있어서 뛰어넘을 수 없는 간격이, 단절이 생겼다. 그래서 갈 수가 없다."

        이 사람은 생각이 깊은 사람입니다.

         

         

         

        두 번째 강청합니다. "아브라함이여, 내 아버지 집에 형제 다섯이 있는데 그 다섯 형제만은 이곳에 오지 않도록 해주시옵소서."

        그는 형제들을 생각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아니라.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듣고 구원을 받아야 된다". 부자는 말합니다. "아브라함이여, 아닙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서 형님 전갈이라고 말하면 들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말합니다"아니, 모세가 다시 살아나서 가도 안 믿을 사람은 안 믿는다."

         

        지옥은 고통의 장소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지옥의 중요한 요소들을 생각해 봅니다. 지옥이 없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런데 지옥을 말하시는 분은 이사야도 아니고 예레미야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호세아도 아니고 아모스도 아닙니다. 세례 요한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지옥을 말합니다. 성경 전체를 보십시오. 지옥에 대해서 가장 심각하게 경고하시는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창조를 아십니다. 시작을 아십니다. 끝을 압니다. 인생의 높이를 압니다. 저 깊은 낮음도 아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그 분이 지옥의 실체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지옥을 부정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께서는 이 지옥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 몸을 희생하셨습니다. 그 분이 지옥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죽어주신 그 분이 말하고 있습니다.

         

         

        지옥은 자비가 끊어진 장소입니다.

         

        두 번째로 이 지옥은 단 한 방울의 물의 자비도 끊어진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악인과 선인에게 햇빛과 비를 골고루 주십니다. 공평하십니다. 한없이 주십니다. 그런데 그처럼 흔한 물이 지옥에서는 단 한 방울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불 자체가 지옥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옥 불 같은 불 속에 있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라는 세 친구는 7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주님의 보호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자비와 긍휼이 있었습니다.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불 자체가 지옥이 아닙니다. 주님의 자비가 끊어져버린 장소, 단 한 방울의 물의 자비마저도 말라버린 장소가 지옥입니다.

         

          

        지옥에는 기회가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지옥에서는 다시는 기회가 없습니다. 거기 들어갔던 이 부자는 다시 기회 없는 줄 이미 눈치챘습니다. 만약 기회가 있었으면 그 유능한 능력으로 아마 예수님이라도 로비를 해서 천국으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먼저 물 한 방울만 요구하고 있고 그리고 자기가 이미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확실히 알면서 두 번째로 자기 형제들을 걱정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다시 기회가 없습니다. 단절의 땅입니다.

         

         

        지옥은 기억력이 되살아나는 곳입니다. 부자는 이 땅에 살고 있는 다섯 형제를 분명하게 기억했습니다.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들의 고통은 필설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지옥으로 빠져가는 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18:8-9)

         

          지옥의 고통의 길을 피하도록 하나님은 천국을 준비하셨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행복이 무엇입니까?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21:4)”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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