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밖에 있는 의로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종교개혁주일이 다가온다. 종교개혁의 핵심교리는 칭의론이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칭의론을 한 마디로 요약해보았다. “우리 밖에 있는 의로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고.


루터의 칭의론은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칭의는 조금이라도 인간 안에서 이루어진 생래적인 의에 기초하지 않고 전적으로 우리 밖에서 성취된 그리스도의 외래적인 의에 근거한다. 


외래적인 의란 우리 바깥에서 2천 년 전 십자가에서 타자,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율법의 저주를 받으시고 성취하신 의로움이며 결코 인간 자신의 것으로 융화될 수 없으며, 인간의 의로움과 완전히 이질적인 것이라는 의미에서 외래적이다. 이 낯선 의로움이 죄인에게 법적으로 전가되는 것이다.


그러나 죄인에게 낯선 의로움 자체로 남아있다. 그래서 믿는 자는 법적으로는 의인이지만 실제로는 죄인으로 남는다. 신자는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다. 항상 의인이며 항상 죄인이다. 그래서 신자는 항상 외래적인 의로 말미암아 살아가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외래적인 의만을 유일한 공로로 의존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의 의미이다. 칭의와 구원의 근거를 자기 안에서 찾아서는 안 되고 자신의 외부로부터 오는 의에서 찾아야 한다.


이 의로움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우리의 소유가 되지만 우리의 생래적인 의로움이 되지는 않는다는 의미에서 결코 우리 자신의 의로움이 되지는 않는다. 중세 신학이 가르치는 대로 이 의로움이 인간의 본성이나 특질을 변화시키지는 않고 우리에게 항상 낯선 의로움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루터의 칭의론이 중세신학 뿐 아니라 어거스틴의 입장과도 분명히 단절됨을 확인할 수 있다. 서방신학의 전통에서 칭의를 인간의 실제적인 의로움과 분리된 외래적인 의로만 이해한 것은 새로운 개념의 유입이라고 볼 수 있다.


루터에 의하면,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on account of Christ),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only through faith) 일어난다. 의롭게 하는 믿음이란 단순히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적인 승인이 아니라 믿음의 인격적인 대상인 그리스도를 붙잡는 믿음이다(apprehending faith). 


믿음은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를 취하여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Faith grasps Christ, appropriates Christ, makes Him my own).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개관적인 대상일 뿐 아니라 믿음 안에 내재하는 실존이다. 믿음은 성전이고 그 안에 그리스도가 좌정해 계신다(Faith is the temple and Christ sits in the midst of it).


여기서 믿음에 대한 루터의 탁월한 통찰을 보게 된다. 이는 믿음에 대한 매우 인격적이고 역동적인 이해이다. 믿음은 모든 은혜와 선과 사랑의 근원인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거하게 하며 우리와 연합하게 하는 것이기에 우리를 의롭게 하는 믿음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여 새로운 창조물이 되게 하는 살아 있고 창조적이고 활동적이며 강력한 것(living, creative, active, powerful)이다. 


그래서 신자의 의는 항상 자기 밖에 있는 외래적인 의이지만 그 의를 전가하시는 그리스도는 항상 신자 안에 거하시기에 실제적인 갱신과 중생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우리 밖에 있는 의로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가 루터 칭의론의 핵심이다. 이런 루터의 통찰을 살펴볼 때 그가 외래적인 의만을 강조한 나머지 실제적인 갱신을 무시했다는 비난은 잘못된 것이다.


-박영돈 목사-

 

'사모님들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Do It Now.


어느 한국학생이 미국 유학 시절,
금발의 제니교수는 그 날도
강의를 시작하면서 주제를 칠판에 섰다.
‘만약 당신이 사흘 후에 죽는다면’

여기에 관해 세 가지 일을 생각해 보고
각자가 발표해 보라는 거였다.

‘부모님을 찾아뵙고,
애인하고 여행하고,
다툰 사람과 화해할 겁니다.’

의외로 죽음을 앞두고 하고 싶은
세 가지 일들은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었다.

학생들의 대답을 다 들은 후에
교수는 칠판에 이렇게 섰다.

‘Do it now!’

어수선했던 강의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일시에 조용해질 때 그녀는 말했다.

‘죽음이 닥칠 때까지 그런 일들을
미루지 말고, 지금 즉시 그 일들을 하세요!’




죽을 때 아쉬워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지금 실천해야 할 일은 무었인가.


첫째로 지금 해야할 일은 용서(容恕)다.
이웃에 살고 있는 어느 멤버는
잇몸이 아파 약을 먹었지만 효과가 없자
대학병원에 갔는데 구강(口腔)암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결국 19시간의 대수술을 받았는데,
수술보다 더 큰 문제는 혈압이
180에서 내려올 줄 몰랐다.

약(藥)으로도 안 되기에 그는
사람을 다 내보낸 후 기도를 했지만
마음이 열리지 않자 방법을 바꾸어 보기로 했다.

즉 그동안 불평하고 미워했던 사람들을
용서(容恕)한 후에
다시 기도했는데 거짓말처럼
혈압은 순간에 정상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기적(奇蹟)은 계속 일어났다.
몇 십 배나 높았던 혈당수치도 정상이 되었고,
수술 부위들도 전혀 아프지가 않았다.

그에겐 미움과 용서는
생명과 사망을 오가게 했던 기로였다.

율법으론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율법에 용서가 있어야 복음(福音)이 된다.

용서는 용서하는 대상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다.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남을 사랑할 수 있듯이,
자신을 용서하는 자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용서를
생각한다면 분명 실패한 인생이다.
하루 동안에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에
용서는 뒤로 미루지 말고 지금 해야 하는 일이다.
둘째는 사랑(愛)은 지금 해야 한다.
사랑하기에도 짧은 생(生)이건만
사람들은 수없는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상처는 친밀감을 먹고산다는 말처럼,
가까운 사람은 너무 친밀하므로 기대가 많아
타인보다 더 많은 상처를 주고받는다.

인생의 척도(尺度)는 사랑에 달려있다.
믿지 않았기에 빨리 끝나버리고,
그리워하지 않았기에 내일에 대한 설렘이
없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다.

사랑은 가장 정직(正直)하다.
내가 먼저 주지 않으면 상대도 주지 않는다.
사랑은 가장 무모(無謀)한 짓이다.
몸과 미래까지 주지만 결코 망하는 법이 없다.


셋째로 봉사(奉仕)는 지금 해야 한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
사랑과 용서(容恕)는
봉사를 통해 비로써 결실을 맺게 된다.



마치 신을 섬기듯
연약한 사람들에게 봉사할 때,
또 다른 세상을 알게 되며
보다 폭 넓은 시야를 갖게 된다.

정(情)이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인색했던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생의 목적은 성공이 아니라
이웃과 나눔에 있음을
스스로 알게 된다.

백 마디 말보다도
한 번의 직접 봉사를 통해
돈 보다 더 귀한 인생의 가치들을 배우게 된다.



봉사가 어느 한 때의 이벤트가 아니고
삶의 일부분이 되어갈 때
내 양심을 지키고
겸허하게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이므로
여유 있는 내일을 맞이하게 한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간직한 사랑  (0) 2014.10.31
어느 소나무의 가르침  (0) 2014.10.24
나비천사가 소녀에게 들려준 행복이야기  (0) 2014.10.21
부부란...  (2) 2014.10.21
남편 나무  (0) 2014.09.3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