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위에 사는 동안 좋은 사람을 만나 삶을 함께 나누는 만큼 큰 복이 어디 있겠는가. 부부나 사제(師弟), 선후배나 친구뿐만 아니라 목사와 성도 사이에도 사랑과 신뢰와 상호 소통이 있다면 우리의 삶은 아름답고 행복할 것이다. 남편이나 아내, 친구 문제로 고민하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듯이 목사님들 가운데는 성도들 문제로, 성도들 가운데는 목사님 문제로 고민하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최근 우리 기독교계 경향 가운데 우려할 일은  평신도들만 모이는 교회가 이제는 점점 낯설지 않게 보인다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진지하게 하고자 하는 사람들 가운데, 그 가운데서도 대부분 전문직에 종사하는 30~40대 젊은이들 가운데 이런 성도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준다.

기존 교회를 떠나 새로운 교회를 이루고자 하는 동기가 현실 교회에 대한 실망이고, 현실 교회에 대한 실망은 대체로 담임목사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되는 것을 자주 본다. 성도들의 은사를 충분히 인정하고 활용하기보다는 목회자 독단으로 일을 계획하고 집행하는 모습이나 언행일치가 되지 않는다거나 말씀 사역에 열심을 내지 않고 다른 일에 관심을 더 많이 둔다거나 하는 것들이 성도들에게는 목회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하는 요인이 된다. 목회자에 대한 비판적 생각을 가진 성도들이 많이 늘어나면 날수록 목사 청빙 문제는 어려워진다. 조건이 늘어나고 사람 보는 눈이 까다로워지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일이다. 목회자 문제로 열 가정이 한꺼번에 나와 따로 예배를 드리는 그룹이 있었다. 직접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어느 목회자를 그 교회에 추천을 해서 보냈는데 청빙을 하지 않기로 했다고 했다. 청빙 과정에 중심 역할을 했던 장로에게 사정을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자기들이 듣고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고 했다. 교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럴 생각이 없으며, 소형 교회를 지향하기를 성도들은 기대를 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았으며, 설교가 성도들의 관심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사람을 잘못 봤을 것이라고 말은 하긴 했지만 좋은 목사님 모시려는 열망을 나무랄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 자신이 목사 청빙에 직접 관여해 본 일은 두 번 있었다. 두 번의 경우 역할과 주안점은 서로 달랐다. 한 번은 1980년대 초반 네덜란드 유학 시절에 암스테르담에 있는 한인 교회에서 목사 청빙에 관여한 일이었다. 네덜란드에서 목회자를 초빙할 때, 주로 관심을 둔 것은 절차였다. 목회자를 초빙하자면 교회가 종교 기관으로 등록이 되어 있어야 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정관기초위원회를 만들었고 내가 서기를 맡아 정관 초안을 만들었다. 네덜란드 개혁교회 교회 헌법을 읽고 교회법과 교회정치의 역사를 자세히 공부한 때가 이 때였다. 아직도 한인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그 때의 정관을 보면 목회자 청빙과 관련된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자세하게 규정이 되어 있는 것은 정관을 만든 동기가 목사 청빙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관이 공동의회에서 통과된 뒤, (다시 내 손으로) 번역하여 네덜란드 법무부에 교회를 종교 법인으로 등록하였고 그 뒤에야 청빙위원회를 구성하여 청빙 절차를 밟았다.

당시 그 한인 교회는 어느 특정 교단 소속이 아니었기 때문에 교단에 추천을 부탁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교인들이 믿고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한 세 분에게 추천을 요청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어려움이 생겼다. 청빙위원 가운데 친지를 통해서 추천받은 목사님을 끝까지 고집한 가정이 생겼고 이 분들이 교민으로 오래 생활한 분들과 함께 자신들의 안을 관철시키려고 애썼다. 그러나 결국 공식 결정과 절차를 따라야 한다는 주장으로 청빙위원회가 애초에 결정한 통로를 통해 추천받은 목사님을 초빙할 수 있었다. 청빙 과정에서 특정 인물을 거론하기 전에 절차를 정해 두고 절차를 따라 일을 진행함이 얼마나 유익한지를 이 때 배웠다고 하겠다.

두 번째 경우는 90년대 후반 본인이 몸담고 있는 교회의 당회를 도와 청빙에 관여한 일이었다. 목회자가 갑자기 옮기게 되는 일이 생겼는데, 당시 장로님들은 교단 측 목회자들을 많이 알지 못했다. 그래서 장로님들은 나에게 적합한 목회자를 찾아 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이 교회가 어떤 교회로 자라가야 하며 어떤 목회 스타일이 가장 알맞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때 떠오른 키워드가 세 가지였다. ‘지역 목회’, ‘청년 목회’, ‘현실 목회’였다.

목회학 시간에는 아마 이런 단어가 사용되지 않겠지만 교회가 처한 상황에서는 장로들과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따라서 목회자도 지역을 섬기는 일과 청년들을 키우는 일, 그리고 현실 속에서의 성도들의 구체적이고 일상적 삶을 성화시키는 목회에 관심을 둔 분을 모시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말씀을 잘 가르쳐야 한다든지, 영성에 뛰어나야 한다든지, 인품이 좋아야 한다든지, 가정생활에 충실해야 한다든지 하는 것은 물론 기본적으로 깔려 있었다.

당시 청빙위원회를 따로 구성하지 않았다. 장로들이 모두 청빙위원으로 역할 했고 그 가운데 나는 여러 통로를 통해서 추천을 받는 일을 맡았다. 그래서 세 분의 이름을 장로들의 모임에 제출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 임시 당회장을 맡은 분이 따로 추천하는 분이 있었기에 그분도 보기로 했다. 그래서 한 분은 주일 설교와 오후 특강을 하고, 특강이 끝 난 뒤 전 교인들과 한 시간 반 개인의 삶과 가정, 목회철학 등에 관해서 질의토론을 할 시간을 가졌다. 다른 한 분은 수요일 저녁 설교 후, 한 시간 정도 질의 토론할 시간을 가졌다. 두 분 모두 훌륭했고 교회로서는 과분한 분들이었다. 청빙절차가 끝난 뒤, 임시당회장을 맡았던 목사님이 주일설교를 한번 하시겠다고 하셔서 오셨는데, 어떻게 목회자를 불러놓고 질의 토론을 할 수 있느냐고 질책했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두 경우 모두 교단 신문에 광고를 내거나 하지 않고 가능한 인맥을 동원하여 교회에 가장 적합한 분이라 생각되는 목회자를 찾았다. 교육 배경이라든가 학위라든가 언어 능력이라든가 요즘 사람들이 자주 거론하는 조건을 내세우지 않았다. 암스테르담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네덜란드 안에 있는 교회이기 때문에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 전통을 잘 이해하는 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고 내 개인적으로는 교단 측 목사님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고신 교단 소속이기 때문에 해당 신학대학원을 나온 분으로 기본적 자격은 충족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신경을 많이 쓴 부분은 청년들 중심 목회, 지역을 섬기는 목회,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일군으로, 삶 속의 선교사로 성도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세울 수 있는 목회가 가능한 분을 찾으려고 애썼다.

신학적인 관점에서가 아닌, 교회 장로로서 청빙에 관한 의견을 한정된 경험을 토대로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1. 목사 청빙을 하고자 할 때 당회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일의 절차를 규정하는 일이다. 청빙위원회를 어떻게 구성할지, 청빙위원회는 어떤 방식으로 활동할지, 가능한 목회자의 명단을 어떻게 만들지, 어떤 순서를 따라서 적합 여부를 판단할지, 당회에는 몇 분을 추천해서 올릴지, 당회에서는 어떤 절차를 통해서 공동의회에 제출할 최종 후보자를 정할지 등을 먼저 정해야 한다. 이미 이러한 규정이 되어 있는 교회가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교회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2. 절차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교회의 현 상황에 대한 파악과 미래 비전에 대한 이해이다. 개체 교회는 지역에 따라, 계층 구성에 따라, 구성원들의 연령대에 따라 그 특성이 다를 수밖에 없다.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이룬다는 점에서 어떤 교회나 기본적으로는 비전이 동일하지만 지역과 인적 구성에 따라 세분화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작업은 연역적일 수밖에 없다. 성경의 원리, 개혁주의 신학의 기본 정신, 교단의 특성, 개체교회의 자원과 역량 등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3. 가능한 후보 명단을 만들기까지는 여러 단계를 밟을 수 있다. 문제는 우선 가능한 인물을 찾는 일이다. 쉬운 방법 중 하나는 목사 안수를 이미 받은 분 가운데 부목사로 섬기고 있는 분들의 명단을 확보하는 일이다. 소속 노회나 가까운 노회 소속 교회의 부목사들 가운데서 가능한 후보 명단을 만드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만일 가까운 노회에서 찾을 수 없다면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노회 부목사 가운데서 찾는 일도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목회를 잘 하고 계시는 목사님을 청빙 대상으로 삼는 일은 삼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4. 그러나 문제는 명단을 확보했다고 하더라도 해당 교회에 적임자인지 검증하기가 쉽지 않다. 교회 담임 목사, 신학 교수, 동기들을 통해서 나이나 배경, 경험, 사역에 대한 평가, 사람 등에 대해서 알아 볼 수도 있을 것이고 본인에게 필요한 정보를 요청할 수 있을 것이다.  노회 차원에서 이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각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되 아직 담임 목회를 하지 않는 분들의 이력서와 자기 소개서를 예컨대 교단 홈페이지에 올려놓고 만일 청빙이 필요한 교회가 있을 경우 그곳에 들어가 자료를 보고 확인하여 가능한 후보를 물색하는 일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5. 마지막으로 교단 신문에 목사 청빙 광고를 내는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담임목사를 청빙을 해야 할 상황에 처한 교회와 임지를 찾아야 할 목회자가 다 같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길이 없는 상황에서 교단 신문에 광고를 내는 방식이 선호되는 것을 현재로서는 중단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느 교회에서 목회자를 찾고 있는지, 어떤 목회자가 올 수 있을지 목회자나 해당 교회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하나의 대안은 공석이 생긴 교회에 관한 정보와 목사 안수를 받을 강도사와 부목사에 관한 정보를 알릴 수 있는 방법을 노회 차원에서 찾는 것이다. 정말 공정하게 할 수 있다면 신학교를 졸업하는 강도사부터 교회에서 사역하는 부목사에 이르기까지 사역지가 필요한 분들과 목회자가 필요한 개체 교회 사이를 연결해 줄 수 있는 부서를 노회 안에 두고 담당 목사와 장로를 세우는 것이 제도적으로 필요할지 모른다. 시장 경제 방식이 목사 청빙에 지속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강영안 / 서강대 철학과 교수, 두레교회 장로

* 이 글은 <코람데오닷컴>에 실린 글입니다.

      

     
    어느 소나무의 가르침
     
    소나무 씨앗 두 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바위틈에 떨어지고 
    다른 하나는 흙 속에 묻혔습니다.
     
    흙 속에 떨어진 소나무 씨앗은 
    곧장 싹을 내고 쑥쑥 자랐습니다.
     
    그러나 바위틈에 떨어진 씨는 
    조금씩밖에 자라나지 못했습니다.
     
    흙 속에서 자라나는 소나무가 말했습니다.
    “나를 보아라. 나는 이렇게 크게 자라는데 
    너는 왜 그렇게 조금밖에 못 자라느냐?”
     
    바위틈의 소나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깊이깊이 뿌리만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비바람이 몰아쳤습니다.
    태풍이었습니다.
    산 위에 서 있는 나무들이 뽑히고 꺾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바위틈에서 자라나는 소나무는 꿋꿋이 서 있는데 
    흙 속에 있는 나무는 뽑혀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바위틈에 서 있던 소나무가 말했습니다.
    “내가 왜 그토록 모질고 아프게 살았는지 이제 알겠지?
    뿌리가 튼튼하려면 아픔과 시련을 이겨내야 하는 거란다.”
     
    --영혼의 샘터 중에서 --
     
     
    
     

    사모님사모님 방에서/달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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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JECT : 예언을 멸시치 말라!

    Despise not Prophesyings

     

     

    Writer : mikelee

      

     

    Quench not the Spirit. (quench = σβέννυμι (헬)스벤누미 = extinguish 불을 끄다, quench (갈증을) 풀다 2. (타는 불을) 끄다, snuff out 완전히 끝내다[파괴하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마라. 그러기 위해서는,
    DESPISE NOT PROPHESYINGS. 예언을 무시하지 마라 (1 Thessalonians 5:19-20)
    살전 5:19-20 • 성령을 소멸치 말며 • 예언을 멸시치 말고


    Different Translations:(다른 번역본들)

    (AMP) Do not spurn the gifts and utterances of the prophets [do not depreciate prophetic revelations nor despise inspired instruction or exhortation or warning]. 선지자의 은사들과 발언들을 퇴짜놓거나 일축해 버리지 마라. [예언적인 계시들을 평가절하. 경시하지 말고, 영감을 받아 전하는 지도.지시, 간곡한 권고.장려. 훈계들, 혹은 경고들을 무시하지 마라]

    (ERV) Don’t treat prophecy like something that is not important.
    (NCV) Do not treat prophecy as if it were unimportant.
    예언을 마치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다루지 마라.

    (NIVUK) Do not treat prophecies with contempt.
    예언들을 경멸하듯 취급하지 마라.

    (VOICE) Don’t downplay prophecies.
    예언들을 경시하거나 대단치 않게 생각하지 마라.

    (TLB) Do not scoff at those who prophesy.
    예언하는 자들을 비웃거나 조롱하지 마라.

    (DARBY) do not lightly esteem prophecies;
    예언들을 가볍게 여기지 마라.

    (CEB) Don’t brush off Spirit-inspired messages.
    성령의 영감을 받은 메세지들을 가볍게 털어버리지 마라.

    The English word “despise” was translated from the Greek word ἐξουθενέω EXOUTHENEO (헬) 엑수떼네오, which means “to make utterly nothing of 완전히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다, i.e. despise 경멸하다 ridicule 조롱하다 Ignore 무시하다” (Strong). It was translated “set at naught 무시[경시, 경멸]하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다” three times in the New Testament.
    이 단어는 신약에서 세번 “set at naught 무시[경시, 경멸]하다”으로 번역되었다.

    Lk. 23:11 And Herod with his men of war set him at nought, and mocked him, and arrayed him in a gorgeous robe, and sent him again to Pilate. 헤롯이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무시.경시.경멸하며) 희롱하고(비웃고 조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Acts 4:11 This is the stone which was set at nought of you builders, which is become the head of the corner.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무시.경시.경멸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었던)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Rom. 14:10 But why dost thou judge thy brother? or why dost thou set at nought thy brother? for we shall all stand before the judgment seat of Christ.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무시.경시.경멸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http://www.sfkorean.com

     

     

     

     

    살전 5:20 예언을 멸시치 말고

     

    예언을 멸시치 말고’라는 구절은 바로 이런 서구 신학의 이중성을 드러냅니다. 워어스비의 The Bible exposition commentary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완전한 계시를 가지고 있어서 예언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주석을 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예언을 멸시치 말고’는 없어져도 무방한 말씀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언을 멸시치 말라고 하였는데, 예언은 멸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예언의 은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선지자 사명을 받은 사람이 있음을 말합니다. 목사와 구분되는 역할로 사도 바울은 보았습니다.

     

     

     

    예언은 앞을 내다본다는 점에서 신기한 은사입니다. 이것은 마치 점쟁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앞을 내다보는 점쟁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유사해보이지만 유사하지 않습니다. 이런 차이를 경험하지 못한 신학자들에 의해 예언은 필요치 않다는 서글픈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마치 이것은 거룩한 성경을 손상하는 위험한 도구로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잘못된 예언은 성경을 무시하고, 성경보다 예언을 더 중하게 여깁니다. 이들은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미혹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위험성으로 인해 예언이 필요 없다는 신학자들의 말은 구더기가 무서워서 장을 못 담구는 어리석음과 같습니다.

     

     

     

    물은 고이면 썩습니다. 하지만 썩은 물은 자신들이 썩었다는 것을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범죄를 변명하고, 인간의 욕망을 위하여 쓰이고 있는 시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말씀도 위험한 것이기에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언은 이렇게 부패한 교회에 소금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교회를 새롭게 거듭나게 한다는 점에서 예언은 필요한 것입니다. 구약에 선지자들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언하고, 이스라엘의 타락을 질책했습니다. 바로 교회의 올바른 예언이 바로 이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백성이 다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기 위해서 세웠습니다. 바로 신약에서도 선지자의 사명은 타락한 교회가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하는 것입니다.

     

     

     

    밧모섬에 유배된 요한은 7교회에 편지를 하였습니다. 그는 다른 교회의 사정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칭찬받을만한 것과 비난 받아 마땅할 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어떻게 요한은 밧모섬에서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 없이 불가능합니다. 예언은 이렇게 교회에 유익을 위해 주시는 은사입니다. 개인적으로 성도에게 유익을 주고, 교회를 바로 세우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예언이 사라진다면 교회는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부패의 수렁에서 나오지 못합니다. 썩은 물이 자신을 썩었다고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분란을 일으키는 예언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의 예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배치되는 예언은 마귀의 역사입니다. 예언으로 돈을 벌거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구하는 것은 장사꾼입니다. 이런 잘못된 형태의 예언으로 인해 예언의 은사가 멸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 중에 이런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성도들 중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사도 바울은 선지자는 다른 직책과 구분을 했습니다. 목회자들이 다 선지자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성경의 생각이 아닙니다.

     

     

     예언은 교회의 진정성을 밝힙니다. 사람의 숨겨진 의도를 밝혀냅니다. 그래서 교회의 부패를 고발하고, 성도의 죄를 드러내도록 합니다. 이런 일을 통해서 교회의 부패를 막고, 성도 간에 분란과 싸움을 막습니다. 교회가 올바른 말씀을 통하여 반석위에 서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 예언입니다. 전에도 한국교회의 부패에는 이런 선지자 사명을 받은 목회자가 적기 때문이라고 언급하였습니다. 현대 한국 교회는 ‘예언을 멸시치’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부패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새롭게 하시기 위해 주시는 은사이기 때문입니다.(초대 그리스도교회)  

     

     

     

     

     

         오늘날의 예언 운동의 문제

     

    오늘날의 예언 운동들은 성경적이라고 하면서 성경의 권위를 가지고 말하지만 그것은 성경을 문자주의적으로 그리고 주관주의적으로 인용하여 무속주의적 점쟁이들이 하는 것들과 혼합시키고 있다. 진정한 성경의 권위와는 거리가 너무나 멀다.

     

    선지자와 예언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성령에 의해서 교회에게 주신 은사의 하나인 선지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며, 그러한 은사가 성경 후에도 있다고 한다면, 어거스틴이나, 루터나, 웨슬레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선지자는 앞일을 예언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개인적인 것이기보다는 교회와 복음에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은사의 하나인 예언은 반드시 선지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있는 기능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개인의 앞날의 운명을 미리 말하기보다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완성된 계시를 들어냄으로 그것을 듣는 믿지 않는 자나 어리석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있다.

     

    선지자나 예언은 하나님의 은사임으로 결코 훈련을 통해서 또는 세미나를 통해서 전수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의 권위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더욱이 온갖 자랑과 개인의 권위를 높임과 광란과 무질서와 비이성적인 그리고 물질의 착취가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을 어기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않고 교회를 어지럽히고 신앙인의 이성을 파괴시키고 정욕적이라면 베드로가 경고한 거짓 선생들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 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 .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벧후 2:1-19).  -홍성국:교회와 신앙 2000-9 中-

     

     

     

     

     

     

     

    *현대에도 한국 개신교 교계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언을 한다고 하는 가운데, 예언이 범람하고 있는 실정인데 예언은 앞날을 예견하여 말하는 기능도 있지만 예언은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볼 때에 예언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선포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성경적인 예언은 예언하는 사람이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 작은 신학교에 다니는 한 집사가 모기도원에서 예언을 받았는데 자신의 지난일들을 알아맞추는 등 '쪽집게' 라는 말을 하는데 나는 '쪽집게'라는 말에 "그건 가짜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웬만한 사람들의 예언을 믿지 않는다. 한마디로 대부분 (뻥)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예언을 멸시하고 있는 것인가? -Ezra-

     

     

     

     

    그러나 예언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인데, 덕을 세우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을 합니다.(고전 14:3)

     

     

     

     

     

     

     

     

     

     

     

     

                               

     

    가져온 곳 : 
    카페 >개혁주의 마을
    |
    글쓴이 : Ezra| 원글보기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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