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에서의 성령의 사역

로이드 존스

 

지금부터 다루려고 하는 주제에 접근할 때 마음에 새겨야 할 본문으로 고린도전서 2장 6-7절보다 접합한 것은 없을 듯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이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마리 정하신 것이라.” 저는 우리가 바로 사도가 말한 온전한 사람들이라는 전제 아래 이 강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려는 일은 분명 하나님의 지혜를 연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그가 고린도인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이런 식으로 설교할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아직 “어린 아이”였으며 “육신에 속한 자”(고전 3:1)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헬라인들이 관심을 가졌던 그런 지혜가 아니라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구원과 영원한 운명에 관련된 일들이 담겨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감추어진 지혜를 연구해 보려 합니다.

 

 

1. 성령의 일반적 사역에 대한 보충 사항

 

우리는 지금 성령의 사역을 고찰하는 가운데 성령의 일반적 사역을 살펴보았고, 지난 강의에서는 요한복음 16장에 기록된 성령의 사역에 대한 우리 주님의 말씀을 함께 고찰했습니다. 주님은 “그(성령)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구절이 일차적으로 성령이 영혼 안에서 하시는 일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성령이 세상에 계신 것 자체로 인해 행하시는 일에 대한 묘사라고 해석했습니다. 지난 주 금요일 이 강단을 떠나 제 방에 들어가면서, 이전에는 분명하게 알지 못했던 무언가가 떠올랐습니다. 그 내용을 추가적으로 말씀드릴 테니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세 가지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정말로 말씀하시고 있는 것은 성령의 오심이 그리스도 그분이 진실로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오시는 분이며, 선지자이자 교사이자 하나님의 계시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라는 최종 증거이자 표시가 되리라는 것이었따는 사실이 제방에 들어가서야 떠올랐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또한 의를 다루시는 제사장이기도 합니다. 죄의 속죄라고 하는 단 한 가지 가능한 방법을 통해 우리에게 의를 제공하시는 분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는 만유를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이 세상 신이며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인 사탄을 멸하시고,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다시리고 계시며 앞으로도 다스리실 것입니다. 모든 권세가 그리스도께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임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선지자, 제사장 왕이시라는 사실을 최종적으로 보여 줍니다.

 

우리는 또한 성령이 일반적인 복음의 부르심을 제시하는 일에 관심이 있으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 부르심은 불신자로 남아 있는 자들과 신자가 되는 자들 모두에게 주어지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성령은 그 메시지가 전달되도록 하시고 일반적이고 외적인 부르심이 선포되도록 하십니다.

 

 

2. 외적 부르심에 대한 상반된 반응

 

그러나 우리는 즉각 한 가지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 부르심, 즉 복음의 제시는 모든 사람에게 이루어졌지만 그 결과 두 가지 부류가 생겨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볼수 있듯 어떤 사람들은 믿었고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 주님은 “청함을 받는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는 말씀으로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이미 예언하셨습니다. 회중이 앉아 복음을 들었을 때 어떤 사람은 그로 인해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받지 못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되었고, 우리 주님이 예언하셨으며, 처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교회사에 수 없이 나타난 사실입니다. 한 부모의 자녀들이 같은 집, 같은 환경에서 자라 같은 곳에서 예배를 드리지만, 어떤 아이는 구원받고 어떤 아이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가?’라는 질문이 즉시 떠오릅니다. 성령의 사역을 다룰 때는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믿음에 관련된 가장 신비스러운 문제이지만, 그것이 이 문제를 피할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실제적인 문제이지만 하나의 사실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탐구하는 것은 우리의 임무입니다. 물론 주의 깊고 지혜롭게, 우리의 편견을 확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알고자 하는 소망으로 탐구한다는 조건 하에서 그렇습니다. 여러 사람이 이 질문에 대답해 왔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일반적 부르심이 주어졌지만 그 반응은 달랐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해결책이 제시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질문에 어떤 대답들이 주어졌는지 살펴보는 것이 의미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한 가지 대답은 일반적으로 펠라기우스는 공교롭게도 영국에서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그 말을 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사실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펠라기우스에 대해서는 위대한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가 효과적으로 논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펠라기우스에게 고맙게 생각하는 유일한 이유는 그가 아우구스티누스로 하여금 그의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잡느라 많은 글을 쓰게 했다는 것뿐입니다!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은 원죄란 없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펠라기우스는 사람들은 일종의 중립적 상태에서 태어나 살아가며, 모든 사람은 완벽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선이나 악을 선택할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거나 거부할 능력이 있다는 견해를 고수합니다. 성령은 사람 안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그 견해에 따르면 성령이 하신 유일한 일은 사람을 사용해 성경을 만들어 낸 일이었으며, 그 후에는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시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성경에 동의하거나 거부하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펠라기우스의 견해이며, 애석하지만 현재에도 교회 바깥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사람이 이 견해에 추종합니다.

 

반펠라기우스주의자(semi-Pelagians)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펠라기우스주의자들 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령은 사람들을 도우시지만 사랑은 사람들 자신에게서 생겨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소망하고 진리를 알고 싶어 하기 때문에 성령이 그들에게 오셔서 도우십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펠라기우스는 너무 극단적이었습니다. 사람들 스스로는 이 모든 것을 할 수 없고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이런 소망을 나타내면 성령이 도우실 것입니다. 이것이 반펠라기우스주의입니다. 일종의 협력적 은혜를 가르치고 있기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우리가 진리와 구원의 지식에 이르도록 우리와 협력하여 은혜로 도우시는 것뿐입니다.

 

그 다음에 - 저는 이 이론들을 역사에 등장한 순서대로 살펴보고 있는데 여기서는 아마도약간 순서가 바뀔 것입니다 - 일반적으로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ism)라고 알려진 이론이 있습니다. 이것은 17세기 초 네델란드 사람인 아르미니우스(Arminius)에세서 비롯되었습니다. 그의 위대한 제자 중 한 사람인 존 웨슬리(John Wesley)와 마찬가지로, 아르미니우스는 사람은 전적을 부패했고,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어서 성령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받아들여 믿을 수 있도록 충분한 분량의 은혜를 주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은 그 은혜에 협력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그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면 왜 어떤 사람들은 믿고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나요?”

 

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 이유는 믿을 수 있는 능력은 성령이 모든 사람에게 주시지만, 일부의 사람만 그 능력을 사용하기로 선택하고 나머지는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가르침입니다. 여기에도 협력의 요소가 나타나 있지만 약간 다르게 표현되었습니다.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사람이 먼저 소망하면 성령이 와 그들을 돕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주의적인 견해는 사람은 아무것도 소망하지 않고 허물과 죄 가운데 죽어 전적으로 부패했지만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모든 사람에게 소망하고, 믿고, 받아드릴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사람ㅇ 성령과 협력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협력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멸망할 것입니다. 이것은 존 웨슬리와 이후 그를 따른 모든 사람이 실제로 가르쳤던 견해입니다.

 

루터파 견해는 다릅니다. 역사적으로는 이 가르침이 아르미니우스주의보다 먼저 등장했지만, 이것이 흔히 개혁주의적 견해라고 부르는 것과 좀 더 유사하기 때문에 순서를 바꾸어 설명하는 것입니다. 루터파의 견해 역시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했고 허물과 죄로 죽었기 때문에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중생의 초기 단계에서 은혜 역시 모든 사람에게 작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고 어떤 사람들은 멸망하게 됩니까? 루터파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가 작용하는 것에 저항할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은혜에 저항하면 그는 불신자로 남아 정죄를 받습니다. 저항하지 않으며 은혜로 인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루터파의 아르미이우스주의의차이를 아시겠습니까?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사람이 협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루터파에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능동적으로 협력할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거부할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문제에 대한 루터교의 전통적이 가르침입니다. 정통 루터교라면 이 세상 어디에서건 이렇게 가르칩니다.

 

역사적으로 이렇게 네가지 견해가 제시되었습니다. 다섯째이자 마지막 견해는 개혁주의적 견해로, 영국 국교회의 39개 신조는 이 견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사실에 주의하십시오. 이것은 39개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그리고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이나 네델란드 혹은 벨기에 신앙고백 등과 같은 유럽 교회들의 위대한 역사적 개역주의 신앙고백에서, 그리고 다른 개혁주의적 교리에 대한 고전적 진술들에서 명백하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 역시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했고 완전히 무력하고 무능력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한 사람은 구원받고 다른 사람은 멸망하는 일이 벌어집니까? 구원에 있어서 성령의 특별하 사역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이 견해는 하나님의 성령이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 안에서는 행하시지 않은 일을 구원받는 사람들 안에서는 행하신다고 말합니다. 이 견해는 선행적 은혜(prevennient grace), 즉 사전에 사람들 안에서 역사하여 그들이 믿도록 하는 은혜에 대해 말합니다. 다시 말해 이 견해는 궁극적으로는 다른 모든 일에 앞서는 중생의 절ㅈ대적 필요성의 교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에게 친숙한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몇 가지 고전적 시도들이 있습니다. 저는 딱 한 가지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중 어떤 이론을 신봉하고 수호할 것이지는 인류의 상태에 대해 우리가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되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교리들을 다루었을 때, 저는 개혁주의적 견해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른 어떤 교리들보다도 이 교리를 다룰 때에는 우리 이성의 한계를 자각하고 열린 마음으로 성경에 다가가며 우리 자신의 개념이나 철학에 너무 이끌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아가며 하며 몇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나는 왜 이것을 믿는가? 이런 교리를 사람이 만들어 내었는가? 성경이 이 교리를 가르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다행히도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이해함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천국에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도 있을 것이 분명하고, 아르미니우스주의자도, 루터파도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과정에 대해 잘못된 생각과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만일 우리가 이해 여부로 구원받는다면, 더 지적이고 큰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유리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문제들을 이해하는 것에 의해 구원을 받지 않는다면서 왜 굳이 그런 문제를 갖고 귀찮게 합니까?”

 

그건 정말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말 그대로 우리가 “귀찮게”하는 이유는 성경이 그 문제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모든 하나님이 자녀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이해하고 소원해야 합니다. 저는 그 이상의 일도 할 것입니다. 저의 경험을 말씀드리자면, 기독교 교리를 이해하고, 구원의 길 혹은 과정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맏음을 강화시켜 주고, 확신을 세워주며, 앞으로 주어질 복된 소망의 확실성을 알게해 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그 문제에 대해 스스로를 “귀찮게” 합니다. 지적인 측면에서도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긴 하지만, 이것이 지적 호기심의 대상은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일차적으로 가장 실제적인 이유 때문에 이 문제를 고찰합니다. 즉, 이 문제가 참으로 위로가 되고, 힘을 주며, 우리를 세워 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앞으로 어려 번 말했던 것처럼, “온갖 교훈(doctrine)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엡 4:14) 사람들은 너무 게을러서 교리를 연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나는 교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바로 그들이 잘못된 교리를 믿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분별할 도구가 없으며, 가르침을 평가할 시금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중요한건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뿐입니다.”라고 이야기하지만 조만간 최신 사이비 종교나 이단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비록 구원에 필수불가결한 사항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런 문제들을 고찰해 봅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세세한 부분에서 이 문제들은 실로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결론은 성령이 멸망한 채 남은 사람들 안에서 행하시지 않은 특별한 역사를 구원받은 사람들 안에서 행하신다는 것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3. 구원의 순서

 

 

이어서 또 다른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의미로은 더욱 당황스럽고 난처한 질문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제가 처음에 여러분에 대해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라는 바울의 말을 인용할 수 있다고 말씀 드렸던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상태와 능력, 진리를 알고자 하는 소망을 이 말씀과 같이 평가합니다. 아실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여러분을 대단히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어서 고찰할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구원받을 사람들의 영혼 속에서 행해지는 특별한 사역이 있다면 성령은 어떤 순서에 따라 이 사역을 행하시는가?’

 

이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위대한 권위자들, 교회의 위대한 학자들, 수 세기 동안의위대한 신학자들, 이런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수많은 책을 썼고 소위 구원의 순서(ordo salutis, the order of salvation)에 대해 논쟁했습니다. 솔직히 이것이 대단히 황홀한 주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고백합니다. 이번 강의를 준비하면서 이 문제를 고찰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는 구조적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크로스워드 퍼즐 따위에 의지해야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음의 문제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단계와 과정이 있는가? 성령은 어떻게 이 사역을 진행하시는가?’ 이에 대한 대답으로 지금까지 제시된 것들은 끝이 없을 정도입니다.

 

성경 자체는 어떠한 정확한 순서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여기에 가장 근접한 구절은 로마서 8장 28-30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주목하십시오 -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 바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것이 순서입니까?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순서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것이 완전한 목록은 아닙니다. 이 구절에서 사도는 우리에게 완전한 목록을 제시하는 일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특별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영화에 관심이 있었고 그것을 보증하고 싶었기 때문에 필수적인 단계들만 말했습니다. 그는 성화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본문이 있습니다. 루터파에서는 이 구절을 즐겨 사용합니다. 사도행전 26장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가 다메섹 도상의 사도 바울에게 주신 위임령에 한 가지 순서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행 26:17-18). 하지만 이 또한 완전한 목록은 절대로 아닙니다. 이 구절은 목록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순서를 제시하고 있지만 충분하지 않습니다.

 

제가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이 구원의 순서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단 두 사람도 의견이 일치는 것을 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은 앞에서 언급한 다섯 가지 학파에 속한 사람들ㅇ 자기들끼리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개혁주의의 권위자들의 의견을 물어보면 이들 중 단 두명도 위의 항목들을 같은 순서로 배열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경우에도 역시 정확한 순수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순서를 전혀 다르게 제시하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문제에 접근하는 데에는 두 가지 주요한 방법이 있습니다. 구원의 순서를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거룩하심 가운데 타락의 결과로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시며 구원의 계획을 생각하고 계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순서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여러분은 영원하신 분의 마음 가운데 있는 일종의 논리적 순서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접근 방법은 이와는 정반대되는 것으로서 시간에 따라 즉 이 일들이 시간과 경험 속에 나타나는 방식에 따라 사고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이 순서를 순전히 객관적인 방식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경험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생각하는 대신 아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기 전에 일어나야 하는 일들은 무엇이고, 그것들은 어떤 순서로 일어날까?“ 그것이 객관적인 관점입니다. 이어서 주관적인 관점을 취하여, “내가 아는 것이라곤 그 일이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겁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견해 역시 타락에 대해, 그리고 타락의 결과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상태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느냐에 죄우될 것입니다. 그 교리에 따라 여러분 나름대로 구원의 순서를 정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훈련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 결과를 보면 매우 흥미로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이것이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님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것들을 올바른 순서로 배열했다고 해서 구원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말하건대, 비록 그것이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만 대단히 유익하고 가치 있는 것이며, 멋진 영적 훈련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몇 가지 가능한 순서를 제시해 보겠습니다. 저는 그 가운데 하나를 고집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첫 번째이자 근본적인 문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며, 우리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구원받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 때문에 칭의를 그 다음에 놓고, 또 그 때문에 중생이 뒤를 잇습니다. 그로부터 믿음이 도출되며, 거기에서 양자됨이 나옵니다. 다음에는 회심을 놓을 수 있는데 여기에는 회개와 돌이킴, 그리고 믿음이 포함됩니다. 다음은 성화, 그리고 그 다음은 견인입니다.

 

한편, 주관적 요소를 더 강조하면서도 신학적 순서를 유지하고 싶다면 다음과 같이 배열할 도 있습니다. 우선 부르심을 사람들 안에서 유효한 것으로 만드는 “효력있는 부르심(effectual calling)"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이어서 중생과 믿음, 칭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회개와 회심, 양자됨, 성화 , 그리고 견인의 순서로 진행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순전히 주관적이고 경험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자 한다면, 이렇게 배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죄의 자각, 회심, 믿음, 칭의, 중생, 양자 됨, 성화, 연합과 견인, 제가 위의 세 가지를 주된 분류법으로 제시했지만, 여러분은 각각의 항목의 위치를 거의 무한정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대닫히 유용한 영적 훈련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일을 하는 동안 지나치게 연대기적 사고를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시간적 요소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이 요소들이 서로 대단히 엄격하고 기계적인 시간의 순서에 따라 이어져야한다고 말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이것은 실로 위험한 일이며 언제나 오류에 빠지게 만듭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행동은 시간에 제한 받지 않기 때문이며, 바로 그 때문에 우리에게 어려움이 발생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시간 속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건들을 시간 속에서 주어진 순서에 따라 경험한다고 해서, 그 일이 반드시 그런 순서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아이가 태어난다는 사실에 대한 첫 번째 증거는 아이가 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는 것이 가장 첫 번째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아이가 울기 위해서는 반드시 태어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생명의 증거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증거가 생명보다 먼저 일어난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삭의 항목 중 일부는 정확히 동시에 일어나며,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관점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선행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특정한 순서를 부여하지 않고서 이런 일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는 업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오늘 강의에서 저는 여러 가지 고백을 했습니다만, 한 가지를 더 고백해야겠습니다. 저는 오늘 밤에 제가 다룬 모든 내용을 여러분께 말씀드릴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상당히 고민했습니다. 저의 이런 생각을 아내에게 말해더니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그 모든 내용을 말한다면 사람들은 혼란에 빠질 거예요. 그건 어려워요. 신비라고요." 이 대화가 이루어진 것은 늦은 밤이었고, 아내는 그녀 자신이 혼란스럽다고 고백했습니다.

 

저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어렵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유일한 대안은 지금까지 살펴본 모든 내용을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대신, 구원받은 사람들안에서 행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강의를 시작하되 논리적인 설명은 없이 첫째는 이것, 다음엔 저것, 하는 식으로 출발하는 방법뿐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죄의 자각이 첫 번째라는 것은 분명한데요, 그런데 목사님은 중생을 믿음보다 먼저 놓지 않으시는군요!” 그 사람은 당혹스러워하면서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왜 저기서 시작하지? 왜 저걸 두 번째 놓고 이건 세 번째에 놓는 것일까?”

 

지금까지 저는 여러분과 함께 구원의 순수에 대해 간략하게 고찰해 보았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일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강단에 서서 말하는 사람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으며 왜 그렇게 하고 있는지 최선을 다해서 설명하지 않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저는 교황이 아니며 교황을 믿지도 않고, 교황의 성좌선언 역시 믿지 않습니다. 성경의 진리와 교리를 해설하려는 사람은 누군나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정당함을 보여 줄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서의 문제를 살펴보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서의 여러 세부 사항들을 살펴나가면서 여러분은 자신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는 것과, 이 순서는 타락했을 때 일어난 일, 원죄의 결과, 그리고 타락하고 잃어버려진 상태에 있는 사람의 상황에 대한 이해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한 가지 순서가 다른 것보다 필연적으로 완전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한 일들을 고찰하고 파악해 나가면서, 그 순서가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는지 확인하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이자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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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순종(靈的 純種)과 남은 자”
                                                                                                                                           백 봉 태 목사


  제가 자주 방문하는 중국 연길에 있는 고아원인 희망의 집에는 ‘번개’라는 이름을 가진 진돗개가 있는데, 희망의 집 원장의 말로는 그 ‘번개’가 ‘순종 진돗개’라고 합니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 한국 토종견인 진돗개가 그곳까지 가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 번개의 하는 행동들을 보면 일반적인 개들과는 다른 점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흔히 개를 비롯한  동물들을 순종과 잡종으로 구분합니다. 거기서 순종이라는 말은 순수한 혈통을 간직한 개나 동물들을 가리키는 것이며, 반면에 다른 혈통과 섞인 것들을 잡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 땅에 사는 하나님 백성들 가운데서도 순종과 잡종이 섞여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 백성으로서 갖추어야 할 특징들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영적인 순종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을 믿노라 하지만 세상과 연합하여 살아가며 세상의 모습을 더 닮아 있는 사람들은 영적인 잡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런 영적 순종들을 가리키는 표현이 있는데, 그것이 ‘남은 자’(the remnant)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이 ‘남은 자 사상’으로 집약이 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하신 민족이요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약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순수성을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방 나라들과 혼합되었으며 그들의 신앙은 여호와에 대한 신앙과 각종 우상 숭배가 혼합이 된 혼합신앙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말하자면 잡종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는 열방에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라고 만들어진 이스라엘은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민족이 되고 말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이스라엘을 심판하고 마십니다. 즉 이방 나라인 앗수르와 바벨론을 끌어들여 잡종이 되어 버린 이스라엘을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스라엘의 실패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한 동안은 이스라엘이 심판을 당하여 세상에서 끊어져버린 듯해도 언젠가는 그들이 회복될 것을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희망을 선지자들에 보여주시며 예언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해서 소망을 가지시며 기대를 버리지 않으시는 까닭은 이스라엘 모두가 범죄하고 잡종들이 되어버린 것 같은 현실 속에서도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영적 순종의 적은 무리들을 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런 소수의 영적 순종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켜서 ‘남은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남은 자의 사상을 잘 보여주는 예언의 말씀이 이사야서 6장에 나옵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 6:13)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큰 산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 산에는 밤나무, 상수리나무 등 여러 가지 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산의 수많은 나무들이 베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원래 있었던 나무의 십분의 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 남은 나무들마저 모두 베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 산이 언젠가는 다시금 울창한 산림으로 뒤덮이고 회복되는 날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모든 나무들이 베임을 받아 황폐하게 된 가운데서도 나무를 잘라내고 남은 그루터기들 때문입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그 그루터기들로부터 새 순이 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한 순들이 큰 나무들로 자라고, 마침내 그 산은 푸른 나무들로 빽빽한 생명력 있는 산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그루터기와 같은 사람들을 가리켜서 거룩한 씨, 남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소수의 사람들을 그루터기처럼 사용하셔서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역사와 부흥의 역사를 다시 이루어 나가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가는 ‘창조적 소수’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런 그루터기와 같은 영적 순종들을 사용하셨으며, 2,000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도 이런 영적 순종들을 통하여 생명력을 상실해 가는 교회를 다시금 회복하고 부흥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이 땅의 교회들이 세속화되어가고 또 수많은 교인들이 잡종들처럼 되어갈지라도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비록 우리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을지라도 어딘가에는 이 그루터기와 같은 남은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엘리야의 이야기를 잘 압니다. 그는 그야말로 악한 시대에 홀로 우상숭배자들과 맞서서 싸웠던 순종 중의 순종입니다. 그러나 그는 바알의 선지자들과 싸워서 승리를 거둔 후에 극심한 영적 탈진을 경험합니다. 그가 얼마나 깊이 침체되었든지 차라리 지금 자기 생명을 취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를 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하는 말이 무어냐 하면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히 특심하건만,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하는 볼멘 소리였습니다(왕상 19:10). 그의 말은 자기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순수한 마음으로 신앙을 지키는 자가 자기 하나밖에는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 즉 영적인 순결성을 지키고 있는 남은 자들이 칠천 명이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호렙 산에서 엘리야를 만나주시고 소명을 다시금 주신 후에, 그는 남은 생애를 선지 생도들을 양육하며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일에 힘씁니다. 그리고 그가 그처럼 선지 학교를 설립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어두운 시대를 극복하고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한국교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한국교회의 현실을 바라보며 실망이 될 때가 많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온 세속적인 사상과 방법론들,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웃기는 이야기와 재담과 처세술로 대치된 설교들, 경제 논리와 크기의 논리에 철저히 종속되어 가고 있는 교회의 목회 철학들......이 모든 것들이 엘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알 숭배와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그래도 저는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고 주님의 교회가 다시 생명력 있는 모습으로 부활할 것을 기대해 봅니다. 그리고 그런 진정한 부흥의 역사는 오직 혼잡되지 않은 순전한 말씀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공급되어 그들을 영적 순종으로,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남은 자들로 양육하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2008년 8월. 망원동 일각에서.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 12:32)


(이 글은 제가 2008년에 은혜와 진리를 집필하기 시작하면서 당시 저의 심경을 글로 썼던 내용입니다. 즉 구속사적 성경연구인 은혜와 진리를 집필하게 된 동기에 대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처: 물과피와성령

      나는 하나님께 나의 나쁜 습관을 없애달라고 기도했다. God said NO! 나쁜 습관은 내가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네가 포기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 장애아를 완벽하게 고쳐달라고 기도했다. God said NO! 그의 영혼은 완벽하단다. 그의 몸은 잠깐이란다. 나는 하나님께 인내를 달라고 기도했다. God said NO! 인내는 긴 고통의 산물이다. 그것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 행복을 달라고 기도했다. God said NO! 나는 너에게 축복을 주었다. 행복은 너에게 달려 있다. 나는 하나님께 고통을 없애달라고 기도했다. God said NO! 고통은 네가 세상적인 관심에서 벗어나서 나에게로 더 가까이 오게 한단다. (작자미상)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은혜의 단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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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개혁이 아닌 변혁의 시대

한정국
한국교회가 좋아하는 구호가 ‘종교개혁 시대로 돌아가자. 지금은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이다. 과연 그럴까?

1517년 존 칼빈과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할 당시의 시대는 유럽 세계 전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있어서 썩어빠진 중세교회를 대항해 목숨을 걸고 개혁을 부르짖어야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교회는 수많은 이교도 그리고 적그리스도 집단에 둘러 싸여 있는 상황이다. 우리의 저항자(Protestant) DNA는 개신교회 한 그룹이 또 다른 개신교회 그룹을 향하여 엄청난 비판을 가하고 세상 법정에 고소까지 한다.

Social Network Service를 통해 고발하고 세상 사람들까지 끌어들여 선명한 주장과 함께 상대의 체면을 뭉개곤 한다. 결과는 어떠한가? 개신교회의 이미지가 갈수록 나빠져 우리의 전도가 힘을 잃어가고 있다. 교회의 모든 분쟁의 결과는 모두 패자가 될 뿐이다.

성경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Being Transformed )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그리고 온전한 뜻을 분별하라”(롬 12:2)고 하셨는데, 개혁을 명분삼아 이 세대의 방식으로 문제를 풀려고 한다.

선교사들은 늘 이교도에게 둘러싸인 환경에서 일하기에, 개혁보다는 변혁 정신에 늘 깨어 있어야 한다. 또한 한국 선교계가 한국 개신교 130년을 분석한 결과,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한 민족의 수많은 위기 속에서 한국 사회를 변혁시켰던 교회로 성장시켜 왔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지금의 한국교회는 세상을 변혁시키기보다 교회 안의 문제를 개혁시키는 데 함몰하여 싸우기에 바쁘다.

한국 선교계는 염려하는 마음으로 변혁하는 한국교회, 그리고 변혁시키는 한국 선교의 슬로건으로 금년 한해에 많은 전략회의를 열었다. 다음의 글은 필자가 금년도 선교계가 한국 자신학 선교 적용대회에서 발표한 키노트 스피치의 초두 부분이다. 이를 인용함으로써 한국 선교계의 열망을 대변하고 싶다.

“한국사회는 21세기 들어와 급속히 다원화되고, 가정과 학교 등이 다문화 되어가고 있다.  여기에 대응하는 한국교회는 과거의 목회 및 전도 패러다임으로 대응에 한계를 보이면서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교회가 도리어 사회의 저항(Protest)을 받고 있는 듯하여 더욱 곤혹스럽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 선교계는 한국교회를 섬기는 차원에서, 선교지 상황과 유사한 한국 사회 및 교회에 다음과 같은 처방을 제안하는 바이다.

1) 한국교회가 기존 인구 비율 25% 앞에서 주저앉는 것은 자신학(Self  Theology)으로서 건전한 한국 신학화 작업이 미비하며, 서구 신학의 틀로 한국 문화의 토양에 뿌리를 내리는 데 한계를 보이고 있다.
2) 자신학화는 한국 문화에 적합한 기독신학화 작업인 바, 그 작업은 성경적이고, 자기 성찰적이며, 그리고 이론과 실천을 통합하며 종합적이어야 한다.

3) 한국교회는 1517년 종교개혁 태도에 너무 함몰된 나머지, 당시의 시대 상황과 오늘의 한국 상황이 다른 것을 간과하고 있다. 당시는 유럽세계가 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으나, 지금은 교회가 이교도에게 둘러싸인 선교적 상황이다. 교회가 개혁 명분으로 교회를 서로 공격하고 싸우니, 사회가 교회를 염려하고 있다. 이런 속에서 교회는 사회 변혁 동력은 갖지 못하고, 개혁의 이름으로 자체 분열에 힘쓸 뿐이다.

따라서 이제는 교회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힘쓰면서(히 10:24~25)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교사회를 변혁시키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오늘 우리는 세월호로 상징되는 한국사회의 위기 앞에서, ‘한국교회가 어떻게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며, 한국을 변혁시킬 것인가?’라는 역사적 임무 앞에 서있다.

우리는 우리를 삼키고자 하는 안티기독교의 공격과 사회의 비난 앞에서 분열된 행동을 삼가고, 최대한 우리 자신의 변화와 사회 변혁 앞에 분연히 일어서야 한다.”

한정국 목사(KWMA 사무총장)
ⓒ뉴스미션
usa아멘넷 칼럼
 당신은 사랑입니다.
                          최송연 
사랑 없는 곳에 계시지 않은 당신 용서가 없는 그곳에도 당신은 계시길 거부하십니다 십자가의 고통으로 원수된 나를 용서하셨으니 내게 아픔을 준 이웃을, 나 또한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일 순 없을까요 선홍빛 당신 사랑 아무런 조건 없이 내게 주셨으니 나도 조건 없이 사랑하게 하시고 진정, 내 안에 원수가 없게 도우소서 당신 사랑하는 내 마음 형제 사랑하는 내 마음 온전히 하나가 될 때, 그제야 당신과 내가 하나될 수 있음을 믿사오니...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1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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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법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의 차이점 (존 오웬)

 

 

진리를 아는 지식으로 각성되고 죄에 대한 신령한 자각으로 자기 자신의 영적 상태를 감지하게 된 영혼은 두 가지 지배적인 소망과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이 영원히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각성한 영혼이 이 두 가지 소망 중에 어느 한 가지라도 없이는 한순간도 지낼 수 없으며, 각성된 영혼 안에서 이 두 가지 소망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방탕한 삶을 살아가는 죄인들은 이 두가지 소원 중 첫 번째 소원과 전혀 무관한 사람들입니다. 정말 이 사람들은 첫 번째 소원과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율법적인 차원에서 죄를 자각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율법적인 차원에서 죄를 자각했을지라도 그와 동시에 신령한 빛을 일체 받지 못했다면, 이런 사람들 역시 첫 번째 소원과 전혀 무관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도 자신들이 구원받았으면 좋겠다고 소원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높아 지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을 확보하셔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사람들은 첫 번째 소원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을 쓰지 않으며, 첫 번째 소원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이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외적인 비참함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든지 안 받으시든지 그저 자신들이 외적인 비참함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을 소원합니다. 결국 이런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의 구원을 전혀 소원하지 않는 셈입니다.

 

반대로 신령한 빛과 은혜가 사람에게 맨 처음 비추이면, 그 빛과 은혜를 소유하게 된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끊임없는 갈망”이 시작되게 되어 있습니다. 신령한 빛과 은혜를 소유하게 된 영혼은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갈망없이 자기 자신의 구원만을 소원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씀드려도 좋을 것 같습니다.

 

신령한 빛과 은혜를 소유하게 된 영혼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지 못하시는 방식으로는 결단코 구원 받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일이 없다면, 영혼이 아무리 좋은 상태에 이른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이 결코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것은 본질적으로 구원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향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소원은 각성된 모든 사람의 영혼 안에 확고부동하게 각인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영적으로 각성된 사람들은 아무리 영원한 것을 제안받을지라도,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면 그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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