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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통계시 예언하는 목사 점쟁이들
말씀; 겔. 13; 1-7
제목; 직통계시 예언하는 목사 점쟁이들
여호와께서 말씀 하셨다고 하는 자들이 허탄한 것과 거짓된 점괘를 보며 사람으로 그 말이 굳게
이루기를 바라게 하거니와 어호와가 보낸 자가 아니라.
너희가 말하기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하여도 내가 말한 것이 아닌즉 어찌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된
점괘를 말한 것이 아니냐. 겔. 13; 6-7
요즈음 목사는 남 목~여 목이 있다.
대게 여 목사들이 기도원 원장을 하면서 직통계시니 예언이니 얄궂은 소리를 한다.
이것도 엄숙하게 옆에서 바람잡이가 있다.
우리 원장님은 특별한 은혜로 계시와 예언의 은사를 받으신 것이다.
안수와 동시에 문제 해결은 물론이고 어떤 병이라도 치유가 된다.
원장님을 뵈옵기를 원하시면 이름과 기도제목과 직분을 기재해 주십시오.
그리고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고 정성을 담은 예물도 준비 하라고 한다.
여기에 앞도가 되고 믿음이 생기게 된다.
기도 받는 곳은 완전 밀폐되어 비밀이 보장된다.
1대1로 상담 식으로 하면서 방언으로 하고 해석을 해 준다.
이글을 보시는 여러분에게 간절한 부탁이다.
직통계시나 예언은 없다.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마.11;13 하셨다.
성경이 완성이 된 후 성령님께서 성경으로 응답하시게 된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지혜의 영감을 주셔서 성경의 비밀을 알게 하신다.
그리고 안수도 함부로 받아서도 아니 된다. 딤전. 5;22
직통계시나 예언이나 꿈 해몽 같은 것에 미혹되지 말자.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 우리의 생사화복이 다 들어있다.
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시.119;114
우리는 주님의 말씀 안에만 살면 나의 은신처가 되시고 방패가 되어 주신다.
우리 교회가 제일이고 우리 목사가 제일이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 목사도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니 경계해야 한다.
어떤 목사는 세미나 가서 안수한번 받고 넘어진 체험을 한 후 금요일 마다 안수하여 넘어지게 하였다
그 교회가 이상하게 팔 다리가 길어지고 짧아지고 금이빨이 되고 하는 완전 거짓의 역사였다.
알고 보니 넘어짐의 알파 하는데 가서 목사가 악령을 받은 것이다.
안수 함부로 받지 말자.
어떤 장로도 기도원에 가서 안수 받고 이상하게 환청이 듣기고 헛것이 보이고 한다고 했다
우리는 성경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글/엘로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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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혜선 전도사 따르는 이들 전쟁 피해 미국으로 간다? (9) | 2014.11.20 |
50년대의 한국의 이모저모, 지금은 사진의 어린이들은 아마도 우리들의 부모님이 되셨을 것입니다. 미국에 사는 청소년 들이나 한국의 젊은 세대는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를 것입니다. 바로 6.25 한국 전쟁이후 잿더미가 된 나라에 하나씩 다 시 만들어가기 시작한 때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촬영은 미국인 젊은 부부가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때 한
국에서는 영락교회의 고 한경지 목사님과 미국의 밥 피어슨 목사님이 한국에서 부흥운동을 일으키며 엄청난 지원을 쏟
아 부었는데 그것이 바로 월드비전의 시작입니다.
좋은 교육자료가 될 듯하여 사진들을 올립니다. 보시고 함께
조국을 위한 기도를 항상 잊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 대구역을 알리는 푯말로
보입니다.
▲ 대구 달성군에 있는 예배당에서 미국인들이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한 아름씩 안겨주고 기뻐하는 모습으로 보입
니다. (대구 달성이 맞나요?)
▲ 아마도 조선 후기의 장독대의 모습을 그대로 이어온듯 합니다. 저 안에 된장 고추장 등이 있을 것입니다.
▲ 농사를 돕는 미국인 청년, 그 옆에 쉼을 갖는 농부의 모습이 보입니다.
▲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사진입니다. 전쟁에 남편을 잃고 어린 아이를 업고 보따리 하나만 들고 고개를 숙
인 모습으로 어딘가 가는 모습처럼 생각이 되기도 하고, 그 뒤에는 아쉬운 모습으로 바라보는 눈길이 처량해 보입니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이렇게 키우셨습니다.
▲ 할아버지들이 곰방대를 물고 사진을 찍은 사람을 신기한듯 보는 모습
▲ 아마도 장이 서는 날의 장터 모습 같습니다. 소들을 팔려고 몰고 나왔습니다.
▲ 미국인은 반소매의 짧은 모습인데 아이들은 예쁜 한복을 입었군요,, 설날이면 추울 텐데,,, 가을 추석도 아닌
것 같고,, 초콜렛을 선물 받았는지 어린이가 즐거워 하는 모습입니다.
▲ 우리의 어머니들의 옛 모습 같습니다. 깔끔한 새 옷을 입었는데 명절날 같기도 합니다.
▲ 시골 장터의 모습같습니다. 거의 소를 파는 분들만 보입니다. 소 장 인가?
▲ 마늘 같기도 하고 파 같기도 한데, 수확을 거두며 즐거워하는 아낙네의 모습입니다.
▲ 포목 장사라 하나요? 이 분은 돈을 많이 벌었는지 돈 세는 모습이 즐거운 표정입니다. 여러분도 돈 많이 버세
요,,, 그리고 선교 하시고,, ^^
▲ 큰 가마솥에 뭔가 음식을 만드는 것 같습니다. 먹을 것을 아이들에게 많이 만들어 나누어 줄 것 같습니다.
▲ 국회의원 연설을 하는지 사람들이 한곳에 시선을 모으고 있네요,,,부흥회 하나?
▲ 무슨 잔치날 인가 봅니다.
▲ 이게 웬 거지떼?.. 아닙니다. 저때는 먹을 것이 정말 부족했던 시절이라 합니다. 우리의 어른들이 저렇게 살기
도 하셨답니다.
▲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것 같습니다. 노랗게 기다란 것은 자장면 먹을때 나오는 단무지 같습니다. 흔히 말하는
닥꽝... ^^ 저 무우를 자르면 되는 것입니다.
▲ 아이들에게 죽을 나누어 준 것 같습니다. 아마 그것을 꿀꿀이 죽이라 불렀나요?
▲ 소를 사려는 사람이 입을 벌려 건강상태를 보고 있습니다. 소의 눈을 보고 입을 보면 건강한 소 인지 아는 가
봅니다.
▲ 에궁,,, 아기가 벌거벗고,, 요즘 저렇게 했다가는 당장에 경찰관 아저씨가 부르겠지요? 신호등이 없던 시절 저
렇게 수신호를 하면서 교통정리를 했었답니다. 당시 차라고 몇대 있었겠나? 미군들 자동차가 대부분 이었을 것
같은데,,,
▲ 자전거에 팔려가는 돼지,,,, 어느 잔치집으로 가는지,,
▲ 아마도 학교의 모습 같습니다. 선생님이 아이들과 함께 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 시장의 모습인데 큰 갖을 덮어 쓰고 걸어가는 아저씨씨를 비롯 옷차림이 참 다양합니다. 미국의 문화와 조선문
화가 섞인 근대사회의 모습입니다.
▲ 미국인 선교사로 보이는데,, 코 큰 미국인을 보는 눈길이 신기한듯 모두 처다 봅니다. 그 뒤에 보
이는 것은 탱크가 아니라 승용차 입니다. 요즘 처럼 날렵한 것이 아니지요,,,
▲ 1954라는 숫자가 써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의 사진은 1954년도,, 그러니까,, 전쟁이 막 끝난 후의 모습이네요,,
아이들이 죽 같은 것을 먹나 봅니다. 수저도 필요없고,,
▲ 지금 우리 꼬마들에게 저런거 머리에 얹고 가라면 큰일 나겠지요?
▲ 이것이 아이들의 놀이터 같습니다. 그네와 미끄럼틀이 있습니다. 지금은 찾아 볼수 없는 판자로 만들은 담장이
뒤에 있는데 별로 보기는 좋지 않아 보입니다.
▲ 귀하의 원조를 충심으로 감사합니다.... 베너를 들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 참으로 가난한 시절의 모습입니다.
▲ 가운데에는 아이들이 있고 주위에는 어른들이 있는데 무슨 학교 입학식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뒤에
는 컨테이너로 만든 막사도 보이고,,, 저런 둥근 컨테이너 막사는 필자가 한국에서 군대생활 할때 지냈던 막사 이기도
한데 여름에는 덥습니다.
▲ 수확을 하는 농부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30장의 사진들을 보면서 나름대로 청소년들
이 알아 보기 쉽게 하려 노렸했는데 의미가 잘 전달이 되었으면 합니다. 잘 이해가 안가는 사진들은 50대 후반 이상의
어른들께 여쭈어 보시기 바랍니다. 할아버지 할머님께 여쭈어 보시면 더욱 생생한 말씀을 들으실 수 있을 것으로 생각
됩니다.
이 사진들은 옛날 우리 조국의 전쟁 직후의 모습들로서 지난 과거의 어려웠던 시절을 기억을 신선
한 충격으로 받아 들여 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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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음의 법은 회심한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법입니다
마음의 법, 마음에 새겨진 법은, 본성(nature)의 법칙과 전적으로 같은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단지 올바른 이성의 법칙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견해는 잘못되었습니다. 그것은 은혜의 법입니다.
본성의 법이 행위언약의 법이라면, 마음의 법은 은혜언약의 법입니다. 본성의 법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지만, 이 은혜의 법은 특정한 사람들 속에만 있습니다. 본성의 법은 바울이 회심하기 이전에도 있었지만, 마음의 법은 그의 회심 때에 주어졌습니다. 본성의 법에는 중보자에 대한 믿음이 없지만, 은혜의 법에서 믿음은 중요합니다. 본성의 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죄와 불신앙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은혜의 법은 이러한 것들을 깨닫게 합니다. 죄와 불신앙을 깨닫게 하는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16:8,9).
본성의 법은 성화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 속에 육신으로 태어난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법은 성화의 한 부분이 되어서, 몸의 지체의 법과 싸웁니다. 물론, 본성의 법도 사악한 범죄들에 대항해서 전쟁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 자체에 대항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가 '방향 제시의 법'으로서의 마음의 법에 대항해서 싸우는 것과 같이, 마음의 법, 또는 은혜의 법은, 죄에 대항해서 싸웁니다. 죄는 마치 자기가 사람의 인생을 지도하고 질서를 잡아 주는 것처럼 흉내 내고 있는 하나의 법인 것입니다.
2) 타락 이전에는 본성의 법과 마음의 법이 같았습니다
마음의 법은 원래 본성의 법이었던 그 법의 회복입니다. 처음에 아담의 마음속에 새겨졌던 그 법을 거듭난 사람들의 마음속에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4:24). 하나님을 따라 '지으심을 받았다'라는 말은, 아담이 창조될 때 지니고 있었다가 잃어버린 그 의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지니고 있었던 그 의는 율법의 의였습니다. 십계명의 첫째 돌판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 둘째 돌판에 있는 인간에 대한 의무를 포함하는 의, 그리고 (아마도 그 거룩과 의, 두 가지 모두에 대하여) 더해진 진리가, 하나님을 향한 거룩과 인간에 대한 그 의의 표현 방식과 목적에 있어서 회복된 마음의 성실함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래 창조되었을 때에 마음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하여 그 법이 희미하게 되었습니다. 인간 속에 이 법의 작은 흔적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중재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듭남을 통해서 영혼 속에 새롭게 새겨지는 것이 바로 이 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속에 다른 법을 두시겠다고 하시지 않고 '나의 법'을 두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불변의 법, 곧 아담과 우리의 선조들에게 주셨던 '나의 법'을 말합니다. 마음에 새겨지는 법은, 아담의 본성에 있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타락함으로 인하여 인간이 이 법을 지워 버리고, 그분의 의를 잃어 버렸으며, 오히려 마음속에 그것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법에 대하여 본성적으로 복종하지도 않고, 복종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자기 속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에 대한 적대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법 대신에 죄의 법이 자리를 차지해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이란 죄의 법을 그 자리에서 쫓아내고, 하나님의 법을 그 합당한 위치에 두는 것입니다.
3) 마음의 법은 마음속에 전체적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심으신 모든 법과 모든 명령이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명령을 돌판에 새기셨던 것처럼, '마음의 판(심비, 心碑)'에도 전체의 법을 새기셨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거룩하고 참으로 의로운' 것입니다. 또한, 본질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참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율법의 한 부분만을 새기시고 나머지는 새기시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명령의 반쪽만을 새기시고 나머지 반쪽은 새기시지 않고 남겨 두어서, 흠이 있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만약 마음에 새겨진 그 법이 전체의 법이 아니라면, 새로운 피조물의 본질에 속한 무엇인가가 결핍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피조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괴물에 가까울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의 형상을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 아닙니다. 본성 속에 다른 어떠한 것과 일치되는 요소가 있다면, 그 둘은 전체의 본성에 있어서도 일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본성이 그 법의 본성과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4) 마음의 법은 외적인 법을 필요 없게 만들지 않습니다
외적인 법은 여전히 하나의 규칙으로서 가능하게 됩니다. 마음속에 새겨지는 이 내적인 법은 외적인 규칙과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내적인 법은 구칙 자체가 아닙니다. 마음에 있는 법은, 성령의 손길에 의해서 외적인 말씀이 새겨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적인 법의 진리를 실행하기 위하여 외적으로 기록된 법을 의뢰해야 합니다.
만약 사람이 어떤 인간적인 법률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면, 그 개념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 그리고 그의 행동이 그 법의 문자와 목적을 따르는 것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하여, 외적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해야 합니다. 사람 안에 있는 죄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죄가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규칙이 되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속에 새겨진 은혜의 법이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규칙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만이 그 기준이 됩니다.
마음속에 있는 법은 비록 그 본질적인 부분에 있어서 외적인 율법과 조화를 이루지만, 아직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규칙이 되려면 기록된 율법과 같이 완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생활을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말씀 속에 기록된 법입니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 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119:11). 이 말씀에는 주의 법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 약속되어 있으며, 또한 내적인 가르침도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렘31:34). 이것은 복음의 빛이 비춰지는 시대에 있어야 할 지식의 풍성함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인데, 그러한 지식은 유대인의 제의(祭儀)들의 여명(黎明) 속에서 희미하게 비춰졌던 것들입니다. 그래서 복음 아래에서 가장 미천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임하시기 이전의 유대의 박사들보다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속성에 대하여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는 것을 전혀 무의미하게 보셨던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러하셨다면 왜 사도, 목사, 교사 등을 세우시고 세상 끝 날까지 그들과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겠습니까? 이러한 내적인 가르침의 약속이 외적인 가르침을 무용하게 만들어 버린다면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에 법을 새기는 것은 문자로 쓰인 법을 무용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외적인 법을 확립하고 진전시키며, 또한 존중하게 만듭니다. 외적인 법은 목수가 집을 지을 때 규칙으로 삼는 집의 모델과 같습니다. 그 규칙에 따라서 목수는 마음에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그 생각에 맞춰서 집을 짓습니다. 자기 마음속에 가지게 되는 그 생각이나 그림은 그에게 이미 주어져 있던 외적인 규칙에 맞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목수는 그 규칙을 항상 상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은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의 법도 그러할 것입니다. 모든 이성적인 피조물들이 어떠한 조건 속에 있든지, 자연 상태에있든지 은혜의 상태에 있든지, 아니면 영광의 상태에 있더라도 순종해야 할 법인 것입니다.
스테판 차녹의 '거듭남의 본질' 162~167p 에서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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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와 성화 / 로이드존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꼐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에 되셨으니 (고전1:30)
칭의와 성화가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살펴봅시다.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십시오.
칭의는 성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고, 성화는 본질적으로 성령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복되신 삼위일체 안에서 이렇게 일을 분담하고 계십니다.
의롭다 하며 옳다고 선언하는 분은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거룩하게 하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둘째로, 칭의는 법정에서 일이 그러하듯이 우리 밖에서 일어나는 일인 반면,
성화는 우리 안에서, 내면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법정에 선 나에게 재판장이 의롭다는 판결을 내리고 자유를 선포합니다.
그 판결은 내 밖에서 내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화는 내 안에서 일어나고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셋째로, 칭의는 죄의 책임을 제해 주는 것인 반면,
성화는 죄의 오염을 제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칭의는 그 정의상 단번에 일어나는 행위입니다.
반복될 수도 없고 반복될 필요도 없는 일이므로 결코 반복되어 일어나지 않습니다.
칭의는 하나님이 단번에 선언하는 것이지,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 아닙니다.
반면에, 성화는 계속 진행되는 과정입니다.
장막을 벗고 완전해질 때까지 주님을 아는 지식과 은혜 안에서 계속 자라 가야 합니다.
칭의와 성화의 본질적인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만큼
비성경적이고 혼란을 일으키는 잘못은 없습니다.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과 모든 가톨릭 신앙의 문제점이 여기 있습니다.
성화와 칭의를 혼동하면 자신이 의롭게 되었는지 그렇지 않은지 의심하게 됩니다.
자신의 상태와 형편이 좋지 못하거나 죄를 지었을 때에는
자신이 과연 의롭게 되었는지 회의가 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칭의가 법정에서 외부적으로 선언되는 것임을 깨닫는다면,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이미 의롭게 되었음을 알 것입니다.
칭의는 죄의 책임을 제해 주며, 성화는 죄의 오염을 제해 줍니다.
'날마다 읽는 로이드존스' 24p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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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마피아에게 압수한 총기들의 파괴 행사 ...
멕시코 불법 마약단체 마피아에게서 압수한 총기들을 파괴시키는 행사 - 2012년 2월 16일
황금으로 장식하고 값비싼 목재로 화려하게 조각한 칼리시니코프 자동소총들이 포함된 이 샘플들은 현지 멕시코의 불법 마약 단체인 마피아에게서 압수한 총기들이며 멕시코 보안군의 Ciudad Juarez에 의해 군대에 전시되었다. 이 불법 무기들의 전시하여 파괴시키는 행사에 멕시코의 대통령 펠리페 칼데론과 멕시코 대통령의 영부인이 직접 참관했다. 이 압수된 마피아의 불법무기들을 파괴시키는 작업에는 멕시코 육군의 프랑스제 AMX-VCI DNC 장갑차가 이용되었다. 이날 행사에 동원된 장갑차를 이용하여 파괴시킨 무기는 3091정의 기관총과 자동 소총및 3,697정의 라이플 소총과 21정의 유탄 발사기와 다양한 구경의 탄약 456308발을 파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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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복된 추수감사 절기에, 풍성한 감사를 마음속에 품되, 만약(If)에, 때문에(Because of)가 낮은 차원의 감사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의 감사, 감사의 개념(concept)을 한층 더 up grade 시켜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시 116: 12-14)
**별똥별의 방을 찾아주시고, 졸글이나마 늘 격려의 박수로 응원해주신 독자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개인적으로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마땅하지만 여의치 못해, 지면을 통해서나마 인사를 드려요. 지난 한 해동안도 감사했어요. ^^ 앞으로 더욱 많이 기도하면서 섬기도록 하겠습니다! 가내에 주님의 은총이 넘치시기를!!**
"Happy ThanksGiving Dear Friends!!"
USA 아멘넷 별똥별/ 최송연 신앙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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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이환봉 교수
종교개혁 당시에 로마교는 칭의가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 뿐 아니라 인간의 협력에 의한 점진적 성화의 과정을 통해 완성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들에게 칭의와 성화는 실질적으로 동일시되었다. 그들은 성경 원문의 헬라어“의롭게하다”(dikaio-o, 롬3:28)를 법정적 의미를 지닌“의롭다고 선언하다”로 번역하지 않고 자신들의 불가타 라틴어 성경에서“의롭게 만들다”(justificare)로 잘못 번역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칭의를 단번에 이루어지는 법정에서의 선언적 행위가 아니라, 인간 편의 선한 행위와 성화의 노력에 의해 점진적으로 완성되어 가는, 즉 인간 자신을 의롭게 만들어 가는 과정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1521년 독일어 신약성경을 번역하였을 때, 로마서 3:28을 사도 바울의 일관된 주장을 따라“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번역하였다. 루터는 인간의 모든 계략과 지옥의 문에 대항하여 우리를 보호해줄 수 있는“칭의”(justification)의 신조는“우리가 행위 없이도 그리스도에 대한 오직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함을 받는다고 선언되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그리고“믿음이 그 적절한 직무를 수행할 때, 믿음은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무엇도 바라보지 아니한다. 믿음은 이같이 말하지 아니한다. 즉 내가 무엇을 행하였는가? 내가 어떤 죄를 범하였는가? 내가 무슨 공로를 세웠는가? 믿음은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행하셨는가? 그리스도께서 무슨 공로를 세우셨는가?”이는 우리의 구원적 믿음의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 후 1530년 6월 25일 루터의 추종자 멜랑흐톤이 작성한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Augsburg Confession)에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능력과 공로와 행위에 의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에 의해 의롭다함을 받는 다는 칭의의 교리(Article IV: Of Justification)가 구체적으로 고백되었다. 칼빈 역시 칭의론에서“의의 전가”를 주장하면서“우리는 오직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값없는 의를 얻는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칼빈은 오시안더(Osiander)가“dikaio-o”를 “의롭게 만들다”로 설명한 것을 비판하였다.
개혁자들이 이해한 칭의는 개인의 영적 도덕적 진전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 아니라“오직 믿음으로”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완벽한 거룩을 옷 입고 하나님의 완전한 의의 전가(imputation, 전달되어 소유됨)가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실제로 의롭게 되기 이전에, 그리고 아직 완전한 성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하나님은 오직 믿음을 수단으로 단번에 자신의 의를 우리의 의로 선언하시고 인정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오직 믿음은 칭의의 근거가 아니라 칭의의 수단이다. 칭의의 근거는 오직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이며, 믿음도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주권적 은혜의 선물(엡2:8-10, 빌1:29)이기에 인간의 믿음이 칭의를 받을 수 있는 근거와 공로가 될 수 없다. 그리고 개혁자들은“오직 믿음으로”의 원리를 통해 율법폐기론자들처럼 행위는 모두 필요 없다거나 행위는 아무렇게 해도 좋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인간의 선행과 성화의 노력이 구원(칭의)의 근거와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려고 한 것이다. 선행과 성화는 칭의의 열매와 표시이지 결코 구원의 전제와 수단이 아니다. 이처럼 종교개혁의 실질적 원리로 불리는“오직 믿음으로”의 원리는 구원적 신앙의 조건(수단)을 말해주기도 하지만 성령의 선물인 신앙은 신학의 내적원리로써 외적원리인 말씀과 더불어 개혁신학을 말씀과 성령 즉 주객관의 균형을 가진 신학으로 만들어 준다. 그리고 우리 신앙생활의 도덕주의와 율법주의에로의 회귀를 막아주는 원리이기도 하다.
오늘날 로마 카톨릭과 복음주의자들이“로마 카톨릭과 복음주의 연대”(Roman Catholics and Evangelical Together, 1994년 3월 29일)라는 공동 성명에서“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진리에 동의한다”고 함께 선언하였다. 이 성명서에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팩커(J. I. Packer), 빌브라이트(Bill Bright) 등의 유수한 복음주의자들이 함께 서명하였다. 그러나 유의해야할 점은“오직”(Sola)이라는 단어가 생략되어있다는 사실이다. 로마 카톨릭은 트랜트 종교회의(1547년)가 결정한 바대로“만약 누군가 칭의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 그 어떤 다른 협력도 요구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한 죄인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한다면 ... 그에게는 저주가 있을 지어다”라는 교리적 선언을 그대로 견지하고 있다. 오늘날 로마교는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의 교리에 동의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성례준수와 선한 행위가 구원(칭의)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추가되어 있는 한에서의 동의를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칭의는 그리스도의 공로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세례를 통해 주어진 성령 하나님의 주입된 의를 사용하여 스스로 자신을 더욱 의롭게 만들어 주고 자신의 죄를 갚을 수 있는 사랑과 자비를 행하는 인간 죄인의 공로가 협력할 때에 비로소 가능해 지는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신인협력에 의한 구원의 교리를 견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은 루터교 세계연맹(1999년)과 서울 감리교 세계대회(2006년)를 통해서 자신들의 칭의 교리에 대한 동의를 이끌어 내었다. 이제 로마 카톨릭은 개신교의“마지노 라인”(최후 방어선)과도 같은 개혁주의(칼빈주의)를 주적(main enemy)으로 규정하고 특히 오직 믿음을 강조하는 칼빈주의 구원에 대한 5대 교리를 웹사이트 등을 통해 집중 공격할 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와의 연대를 통한 협공에 진력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은“오직 믿음으로”의 교리를 참된 복음의 핵심적인 본질로 생각하여“교회가 일어서고 또는 넘어지는 신앙조항”(articulus cadentis et stantis ecclesiae)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이신칭의의 교리를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자는 사실상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한 번 더“오직 믿음으로”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진리를 재
출처: 개혁주의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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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 강문호 목사 |
지난 마르틴 루터 종교 개혁 주일을 기하여 사도신경을 예배 시간에 가만히 뺐습니다. 물론 부목사들에게는 빼는 이유를 알려주었습니다.
한 달동안에 아무 일도 없는 것같더니 반응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요즈음 우리 목사님이 마지막 때 강조를 하더니 사도신경을 하지 않는다. 이상해졌다. 나 교회를 떠나겠다.”
한 두명이 이렇게 말한다는 이야기를 부목사가 와서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한 목소리를 내지 못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사도신경입니다. 어느 교단에서는 외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는 교회는 이단이다.”
어느 교단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교회는 이단이다.”
과연 어느 말이 맞는 가요?
지금까지는 사도신경에 대하여 빌립 샤프의 이론을 지지하여 왔습니다. 그는 그의 책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529 페이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기독교 교리의 요약이다.”
“사도신경은 교회 믿음에 대한 요약이다.”
“사도신경은 논리적인 명쾌함, 엄격함 그리고 정확성을 갖춘 걸작으로 그 무엇으로도 능가될 수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카토릭 신조
로마 교회가 이 신조를 만들었습니다. 카토릭은 이 사도신경을 반복함으로 창녀교회(계 17;1-8)가 되었습니다.
사도신경이 형성되기 전에 믿음의 고백문을 만들어 표준으로 삼으려는 시도가 여러 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졌었습니다. 시도하였던 유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레네시우스(180년)
시프리안(250년)
노바티안(250년)
오리겐(250년)
그레고리 타우마투구스(270)
루시안(300)
사이릴(350년)
에피파니우스(374)
루피누스(390)
그러나 시도에서 끝나고 널리 보급되지는 못 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고백에서 두 조류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1. 동방 신조
길고 다양한 내용들이 많이 들어 있었습니다. 동방 신조는 니케아 신조로 완성되었습니다. 325년, 381년, 451년 세 차례 니케아에서 회의를 하면서 믿음의 신조가 완성되었습니다.
2. 서방 신조
서방 신조는 동방 신조에 비하여 짧았습니다. 간단하였습니다. 단순하였습니다. 그래서 북 아프리카,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이 서방 신조가 카토릭의 신조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신경입니다. 본래 이름은 “로마 신조”“카토릭 신조”입니다.
카토릭이 자기들의 신조를 “사도 신경”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간결하고 암송하기 좋기에 동방 신조를 버리고 서방 신조를 받아 드린 것입니다.
카토릭의 암브로스와 루피아누스가 처음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12 사도가 성령받고 예루살렘을 떠나기 전이었습니다. 모두 모였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전하여야 할지 이야기하였습니다. 한 사도가 한 마디씩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을 적은 것이 사도신경이다. 사도들이 그 때 특별한 영감을 받아 열두가지 고백을 한 것이 사도신경이다.”
그 후 카토릭 백과 사전 집필자 Pet Meyers가 백과 사전에 기록함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동방 신조나 서방 신조나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수세기를 내려오면서 첨가되고, 고쳐지고 삭제하면서 완성되었음이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로마 카토릭이 수 세기 내려오면서 오늘날의 사도신경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분명히 증명이 되고 있습니다.
첫 사도신경
처음 사도신경이 있습니다. 340년 Marcellus가 교황 율리우스 1세에게 처음으로 믿음의 고백문을 보냈습니다. 이 문서가 지금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날 사도신경의 시작입니다. 오늘 날 사도신경이 형성된 것은 7세기입니다. 300년 정도 더 지나서 완성된 셈입니다.
이 언급한 사도신경 연구가 필립 샤프는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이 신조는 의심의 여지없이 점진적으로 확대된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변명하고 있습니다.
“현재 형태의 사도신경은 사도들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사도신경의 내용과 정신은 진정 사도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 언급하려고 합니다.
시도신경은 사도적이지도 않고, 성경적이지도 않습니다.
피터 럭크만 박사는 말했습니다.
“샤프가 말한 그대로 소위 사도신경이라 불리오는 것은 성경을 거부하는 음녀(계 17;1-8)의 생산품이었다.”
사도신경의 변천
시간이 흐르면서 사도신경 첨가되고 빠지며 형성된 증거들 실제를 들어 봅니다. 우선 사도신경의 12가지 고백을 봅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1. “천지를 만드신” 이라는 문구는 650년에 골지방에서 처음 나타났습니다.
2. “지옥에 내려 가시고” 이 문구가 360년 아리안 신조에 있었습니다. 베스티누스 폴투나투스 신조에도 590년에 있었습니다. 골 지방 문서에서도 650년에 발견되었습니다. 현재 문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가 이루어진 것은 750년입니다.
3. 공회라는 말이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본래 마르셀루스의 최초의 본문에는 “하기안 에크레시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교회”였습니다. 시프리안, 루피누스 그리고 어거스틴 신조에도 같습니다. 그런데 650년 골지방에서 공회라는 말을 넣었습니다. 카토릭이라는 말을 신조속에 넣었습니다.
4. “성도가 교통하는 것과”라는 구절도 같습니다. 650년 이전에는 이 말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들의 신경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로마 카토릭인 만들어낸 신조입니다.
이제 차례로 살펴 보려고 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전혀 문제가 없을 것같습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귀중한 고백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은 일체이십니다. 천지창조는 하나님 혼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같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4-17)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2)
그래서 삼위일체 고백을 하여야 참 고백입니다. 그리고 문제가 또 있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이것이 문제입니다. 창세기 1장은 세가지 창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1. 히브리어로 “바라”는 무에서 유의 창조입니다. 천지창조는 바라입니다.
2. 히브리어로 “아솨”는 개조 창조입니다. 있는 것을 다시 만드는 것입니다.
3. 히브리어로 “야탈”은 모방 창조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모방 창조하셨습니다.
천지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창조하신 것입니다. 아쉬하신 것이 아니라 바라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고백은 이것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전혀 문제가 없는 것같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두 가지 문제가 보입니다.
“그”가 누구인가하는 문제입니다.
그가 하나님인지 예수님인지 불분명합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면 “그의”라고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외아들입니다. 성경은 어디에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외아들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독생자라고 하였습니다. 독생자는 영어로 “The only begotten Son”입니다. 하나님이 낳으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외아들이라고 하면 아들은 하나인 데 딸도 있을 수 있습니다. 1남 3녀인 가정에서도 아들을 외아들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딸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하나님을 영접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는 외아들만 있다고 하는 것은 성경과 모순입니다. 하나님이 낳은 독생자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이 낳은 자녀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외아들이라고 하면 예수님외에는 누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의미가 되어 구원론에 큰 문제가 야기됩니다.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여기에도 독소가 들어 있습니다. 영어로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Ghost, born of the Virgin Mary,)
문제는 이것입니다.
a Virgin 과 the Virgin 이라는 말 차이는 엄청납니다. 처녀와 그 처녀 차이입니다. 성경은 마리아를 기록할 때 예수님을 낳을 때까지만 처녀 즉 동정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카토릭은 아닙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은 후에도 처녀로 죽었습니다. 마리아 숭배 사상입니다.
이사야는 말하고 있습니다.
“보라. 한 처녀(a Virgin)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성경은 확실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막 6:3)
모든 이단 종교의 기원은 니므롯입니다. 니므롯이 죽자 아내 세미라미스는 니므롯의 시체를 잘게 잘라서 바벨론 지경 곳곳으로 보냈습니다. 니므롯의 시신을 받은 곳에서는 신전을 세워놓고 세미라미스와 그의 아들 담무스를 모자신으로 섬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천주교가 이 모자신 사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와 예수 모자신을 만든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보다 위에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고난을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에게 고난을 주지 않으려고 발버둥쳤습니다.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2)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 27:2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눅 23:4)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전 15:3)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빌라도는 지옥에서도 불평할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에게 고난을 주지 않았는 데 왜 기독교인들과 카토릭 교인들은 내게 예수에게 고난을 주었다고 예배시간마다 고백하는 것일가?”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시며”
이미 언급한 대로 본래 원문에는 “지옥에 내려 가셨다가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시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이 죽으셨을 때 그의 영은 지옥을 방문하셨었습니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4:9-10)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행 2:31)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2)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벧전 3:18-19)
이 말씀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에 지옥에 내려가셔서 인간의 모든 죄를 다 처리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빠졌습니다.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원문을 보면 빠진 말이 하나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He ascended into heaven, and sittenth on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aighty,)
아버지라는 말이 빠져 있습니다.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사도신경이 사도들의 신조라면 한 단어도 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라는 말을 빼고 변개시켰습니다.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말도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속 사업을 마치시고 하늘에 올라가셔서는 하나님 우편에서 편안히 앉아 계신 분으로 오해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심히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쉬지 않고 간구하시고 중보 기도하시는 분이십니다(롬 8;34, 딤전 2;15, 히 12;24)
우리가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께 대언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1요 2;1)
일곱 금촛대 사이를 다니시며 교회를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계 1;12-20)
그리고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히 1;3)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저리로서”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애매합니다. 모두가 이 단어의 뜻을 모릅니다. “저리로서”는 “그 곳”이라는 말입니다. 왜 의미도 모르는 말을 일부러 넣었을 가요? 교리적인 문제는 없지만 구성상에 문제는 있습니다.
“성령을 믿사오며”
성령을 믿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성령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영접의 대상입니다. 성령은 모셔드리는 대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죄사하심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렇게 믿도록 도와 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거룩한 공회와”
영어로 보면 문제가 분명합니다.
“the Holy Catholic Church”
그러므로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이들은 고백할 때마다 카토릭을 믿는 것입니다. 로마 카토릭을 통하여서만 구원이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카토릭은 성경적인 언어가 아닙니다. 성경에 카토릭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카토릭을 거룩한 교회라고 도저히 볼 수 없습니다. 카토릭은 12세기, 13세기 두 세기에 죽인 그리스도인들만도 5천만명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종교 개혁자들은 카토릭을 모두 적그리스도로 보고 있습니다. 결코 거룩하지 않습니다.
나포레옹
"예수회는 종교단체가 아니라 군대 조직이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군대 장군이며 수도원 대장이 아니다. 이 조직의 목적은 권력이다."
마르틴 루터
"바울이 데살로니가 후서 2장 3절에서 4절에 하나님이나 숭배받는 자 위에 뛰어나 지존하여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라고 기록하였 데 그 존재가 여기 있다. 적그리스도인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있는 데 그는 하나님의 법을 폐지하였으며 하나님의 계명 위에 자신이 만든 계명을 높였다. 우리는 여기서 교황권이 진짜 적그리스도의 권좌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죤 칼빈
"나는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임을 부인한다. 그는 적그리스도다. 나는 그가 교회의 머리됨을 부인한다."
죤 웨슬리
"로마 교황권이 바로 불법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런데 개신교도들은 예배시간마다 카토릭을 거룩한 교회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개인교가 기만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통합에서는 다행스럽게도 “거룩한 공회”라는 말을 “거룩한 교회”로 바꾸었습니다.
공회라는 말도 성경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공회로 끌려 가셨습니다(마 26;5, 막 15;1) 제자들, 스데반 그리고 바울도 공회에 끌려 가서 고난을 받았습니다(행 5;27, 22;30) 공회는 사탄의 장소입니다. 복음 방해 장소입니다. 핍박의 기록이 있는 곳입니다. 결코 거룩하지 못 한 곳입니다. 그런데 개신교에서 거룩한 공회라고 거룩한 예배시간만다 고백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공회”에 대하여 카토릭은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로 사도신경에서 우리는 이 교회가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유일한 교회임을 고백한다.”(제 811항)
“공회는 카토릭이다. 왜냐하면 그 곳에 그리스도께서 임재해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 카토릭 교회가 있다.”(제 830항)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the communion of Saints”라는 대목도 정말 문제입니다. 교통은 교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친교가 아닙니다. 죽은 성도와의 교제를 의미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살아있는 성도끼리 교제를 넘어 죽은 성도, 죽은 성인과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카토릭의 교리의 핵심입니다.
죽은 사람인 성자에게 기도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saints는 일반 성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카토릭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자 숭배사상입니다. 카토릭은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체를 통하여 죽은 자와 효과적인 교제를 하게 된다”(제 1689항)
“우리의 동료 순례자들과의 교제로 우리가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처럼 성자들과의 교제로 우리는 그리스도께 합류하게 된다”(제 957항)
성자란 살아 있을 때 행한 선행으로 사후에 성자로 인정을 받은 이들입니다. 그래서 카토릭에서는 성자로 지명된 이들에게 기도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성자들은 하늘에서 지속적으로 땅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기에 중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와 전 세상을 위하여 중보해 줄 것을 간청할 수 있으며 또한 간청해야 한다”(제 2683항)
이것이 사도신경이 말하는 성도의 교제입니다. 성경적은 죽은 자와 교통은 사탄적인 것입니다. 초혼입니다. 죽은 영혼을 부르는 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31)
“남자나 여자가 접신하거나 박수무당이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곧 돌로 그를 치라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레 20:27)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신 18:11-12)
예배시간마다 죽은 영혼을 부르는 것을 고백한다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여기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음을 믿기만 하면 죄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미 과거입니다. 죄사하여 주시고 계시는 진행형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십시오. 얼마나 분명한 진행인가가 보입니다.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죄사함 받은 것이 아니라 죄사함 주시는 진행형입니다. 예수믿으면 죄문제 완결입니다. 끝난 것입니다.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죄문제가 끝난 것입니다. 카토릭에서는 순간순간마다 성찬을 행합니다. 죄는 진행형입니다.
그리고 더 문제가 있습니다.
어떻게 죄사함을 받는 것인지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사하는 것임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카토릭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기에 죄사함받는 것이 아닙니다. 신부에게 고해성사함으로 죄사함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 죄를 사해주는 것이 아니라 신부와 교황의 중재가 죄사함을 줍니다.
카토릭은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완전한 수단을 얻는 길은 그리스도의 카토릭 교회를 통하여서만 가능하다”(제 816항)
“카토릭 교회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 의하여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세워졌음을 알고서도 그 곳에 속하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제 846항)
“그리스도의 뜻에 의하여 교회는 세례받은 자들의 죄들을 용서할 권세를 갖는다”(제 986항)
“성직자의 성사로 주교들과 사제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죄들을 용서할 권세를 갖는다”(1461항)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죄를 사한다는 말은 성직자들이 사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2)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 13:12)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4)
예수님의 피외에 구원을 주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소망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헛 것이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5-17)
그러나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 데 애매한 표현입니다. 누구의 몸을 의미하나요? 우리 몸 그대로 사는 것처럼 고백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몸처럼 부활할 것을 믿어야 참 믿음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몸처럼 부활하게 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1)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우리는 영원히 살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지옥에서도 영원히 살고 있습니다. 어디에서 영원히 사는 것인지 구별하여 주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을 믿는 것이지만 “천국에서”라고 추가하여야 구원입니다.
카토릭은 연옥설을 믿고 있습니다.
더구나 애매합니다.
결론
그려면 사도신경을 어떻게 고치면 완벽에 가까울 가요? 이렇게 고백하여 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사오며
그의 독생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으로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어 지옥에 내려 가신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서 일하시다가
그 곳으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모셔드리오며
거룩한 교회와 성도가 서로 친교하는 것과
죄를 용서하신 것과
몸이 예수님처럼 다시 사는 것과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출처: http://ikccah.org/free_board/1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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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후의 명곡과 소모되는 설교
방금 저녁식사를 하는데 TV에서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오래 전에 유행했던 대중음악을 젊은 가수들이 현대 감각을 살려 새롭게 부르는데 정말 압권이다. 40여 년 동안 온 국민들이 애창해온 하얀 손수건을 다시 열창하니 그 감동의 물결이 온 관중과 시청자들에게 퍼져가는 듯하다.
그것을 들으며 문득 오래 전 어떤 목사가 한 말이 생각났다. 가수는 한 번 자신의 곡이 히트하면 평생 그것을 재탕하며 돈을 버는데 목사는 아무리 좋은 설교를 만들어도 같은 교회에서 다시 써먹지 못한다는 것이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그 프로를 보아서 그런지 갑자기 그 생각이 났다. 그렇게 보면 설교사역은 무한히 소모하는 일 같아 보인다. 몇 년 전에 큰 교회 목사가 내가 주일마다 몇 십 명이 모이는 교회에서 설교한다는 말을 듣고 참 아깝다고 했다. 정성껏 설교를 준비해서 전해도 적은 회중 가운데서도 소수만이 경청한다. 그러니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너무도 비효율적인 일을 하는 셈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서는 효율성이 핵심가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 특별히 작은 교회를 섬기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열 명 가까운 성도들을 상대로 충성스럽게 말씀사역을 하는 목사들이 있다. 주의 종은 하나님의 소모품이라는 말이 있다. 설교사역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기에 한없이 더디고 완고한 사람들에게 무한히 소모하는 사역이다. 그러나 이렇게 무의미해 보이는 봉사를 통해 자격 없는 자들에게 당신의 사랑과 말씀을 무한히 탕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증거된다.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성공적인 사역의 기준은 효율성이 아니라 주님이 맡기신 일이라면 작은 것이라도 우직하게 충성하는 것이다.
별 효율도 없이 곧 소모되어버릴 설교를 준비하느라 이 밤도 노고를 아끼지 않는 동료 설교자들에게 파이팅을 보냅니다.
<박영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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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성경으로”
(Sola Scriptura)
이 환 봉 개혁주의학술원장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는 교회개혁의 표어는 이미 “개혁되어진”(reformata)과 항상 “개혁되어야 하는”(reformanda) 교회의 역설적인 두 가지 과제를 잘 표현하고 있다. 개혁교회는 불변하는 성경 말씀을 따라 개혁되어졌기 때문에 변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개혁교회는 성경 말씀을 따라 항상 개혁되어야 하기 때문에 변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개혁교회는 오직 성경의 표준을 따라 모든 악한 타협을 거부하기 위해 보수주의자보다 더 보수적이어야 한다. 또한 개혁교회는 오직 성경의 진리 안에서 모든 악한 전통을 극복하기 위해 진보주의자보다 더 진보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역설적 과제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의 길 즉 보다 더 철저하게 성경적이 되는 길뿐이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는 성경 말씀의 표준에 비추어 볼 때 너무 변해서 회개해야 하고 또한 너무 변하지 않아서 회개해야 한다.
1. 오늘 우리는 성경 말씀을 떠나 변하였기에 회개해야 한다.
상황론자는 세상을 섬기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급변하는 세상의 현실과 상황에 따라 항상 새로운 변화와 발전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개혁자들이 생각한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semper reformanda)는 말의 의미는 새로운 상황에 따라 항상 새로운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개혁자들이 요구한 개혁의 핵심은 항상 오직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개혁의 표준은 상황이 아니라 성경이었으며 개혁의 태도는 창조가 아니라 회개였다. 즉 교회개혁이란 상황이 요청하는 새로운 것의 창조와 확립이 아니라 성경이 요구하는 옛것의 갱신과 재확립이다.
루터가 95개 조항의 종교개혁 선언문을 회개의 요청과 더불어 시작하였던 것은 회개 즉 성경적 신앙의 회복이야말로 교회개혁의 진정한 출발점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칼빈의 교회개혁도 시대의 요청에 교회가 얼마나 잘 적응하는가의 문제 이전에 교회가 성경 말씀의 요구에 얼마나 충실한가의 문제에서 시작된 것이다. 사실상 오늘 한국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도 교회가 세상에 동화되어 변화하지 못한 기능적 실패 때문이라기보다는 교회가 성경에 충실하여 일치하지 못한 존재론적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진보적으로 변화되지 않기 때문에 회개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너무 진보적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회개해야 한다.
웰즈(D. F. Wells)가 그의 책 “No Place for Truth"에서 지적한 것처럼 오늘 한국교회도 신학과 목회 현장에서 성경의 교훈과 명령은 뒷전으로 하고 저급한 현대사상과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세상의 학문에 성경의 진리를 위한 자리를 내어 주고 있다. 예를 들면, 경제성장을 위한 시장경제 논리와 마케팅 전략이 교회성장을 위한 성경적 원리와 방법을 대신하는 것을 본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죄와 구속의 은혜가 심리학이 말하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상호갈등과 내적 상처로부터의 단순한 심리적 치유와 안정으로 대체되는 것을 본다. 오늘날 많은 이단과 은사주의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대신에 인간의 체험과 감정에 기초한 새로운 계시를 앞세워 혹세무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성경적 원리 대신에 수요자 개인의 요구와 필요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개인주의와 실용주의의 원리가 오늘날 교회의 예배, 설교, 전도의 형식과 내용을 결정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성경으로”의 원리를 떠나 기독교를 다시 개혁자들이 반대했던 그런 철저한 인간중심적인 종교로 만들어 가는 교회 변질의 현대적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혁교회와 개혁신앙은 우리의 생각과 판단이 아무리 정당하고 시대적인 요청이 제아무리 더높다할지라도 성경 말씀을 제쳐두고서 우리 자신의 사회학적, 심리학적, 경제학적 생각과 필요를 따라 우리의 신앙을 재구성할 수 없다. 물질주의, 물량주의, 세속주의의 가치와 방식을 따라 은밀히 기획되어진 오늘 교회안의 온갖 인위적인 조작은 결국 교회를 갱신하기 보다는 오히려 훼손해 갈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세상의 영을 따르는 세상의 지혜를 단호히 거부해야한다. 성경 말씀의 표준을 떠나 너무도 변하여 버린 것을 참으로 회개해야한다. 진정한 교회개혁은 하나님의 영을 따라 오직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갈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2. 오늘 우리는 성경 말씀을 따라 변하지 않기에 회개해야 한다.
성경은 “복음”(good news)으로서 새로운 소식을 의미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우리의 오래된 편견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을 주시고 우리의 회개와 변화를 격려하기 위해주신 것이다. 참된 회개는 진정한 변화를 가져온다. 선지자들은 거듭거듭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전통을 재고하도록 도전하였다. 성경과 교회사에 나타난 신앙의 영웅들은 그 시대의 거짓된 요구들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원리를 옹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항상 하나님의 말씀의 요구를 따라 회개와 변화를 앞서 주도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거짓된 전통과 일상으로부터 떠나 생각과 삶에 있어 새로운 변화와 혁신을 단행하도록 요구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새로운 백성의 조상이 되도록 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그의 역사적 뿌리로부터 잘라내시고 새로운 나라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하셨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은 자신의 과거와의 분명한 단절이었고 약속된 미래를 향한 새로운 헌신과 위탁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일상에 사로잡힌 삶에서 떠나 가나안의 약속의 땅을 향하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히려 애굽의 일상의 삶을 그리워하고 다시 포로생활로 되돌아가기를 요구하며 모세를 원망하고 거역하였다. 구약의 전 역사에 나타난 바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종 자신들의 일상과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혼동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29:13)고 하셨다. 예수님도 이 구절을 인용하여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책망하셨다(마 15:8-9, 막 7:6-7).
바리새인들은 “고르반”(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이라는 사람의 계명 즉 인간의 전통을 하나님의 진리로 내세워 사실상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자들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한 전문가들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다른 많은 인간적인 전통을 만들고 따르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머물고 있었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올바른 해석학적 또는 주석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메시야를 한갓 세상의 군왕으로만 오해하였고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였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전통과 이해를 책망하여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5:39-40)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지난날의 교회역사를 통해 때마다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잘못된 전통을 반성하고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되돌아올 것을 거듭 요구하셨다. 그러한 하나님의 결정적인 요구가 바로 종교개혁이었다. 종교개혁은 오직 성경으로 교회를 청결케 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였다. 마침내 교회의 신학과 예배와 설교, 그리고 교회생활의 모든 영역이 혁신적으로 새롭게 변할 수 있었다.
개혁자들은 사도들의 성경적 가르침으로 되돌아가는 일에 있어서는 아주 보수적이었지만, 반면에 성경에서 떠난 인간적 전통들에 대한 공격에 있어서는 매우 급진적이기도 하였다. 개혁자들의 이러한 교회개혁의 자세가 “오직 성경으로”라는 슬로건에 잘 표현되어 있었다. 오늘 우리도 개혁자들처럼 현대사상의 거짓된 요구에 직면하여 오직 성경을 따라 우리의 신앙을 파수해야하고 또한 전통사상의 편협적인 판단에 대해서도 오직 성경을 따라 날로 새롭게 개혁해 가야 한다. 오직 성경에 순종하기 위해 개혁교회와 개혁신앙은 언제나 변하지 말아야 하고 또한 항상 변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거짓된 세상의 새로운 요구에 타협하지도 않고 동시에 변하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지도 않는 균형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균형 있는 개혁자의 삶을 살기 위해 먼저 우리 자신이 오직 성경으로의 삶 즉 철저한 성경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 맡겨진 교회개혁의 시대적 사명을 올바로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만이 우리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표준과 충족한 근거임을 새롭게 다짐하며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란다.
출처: 개혁주의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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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책임 / 아더 핑크
그리스도께서 두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과 그 한 강도는 주님을 영접하고
다른 강도는 주님을 거절한 사실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관한 것입니다.
그 두 행악자들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들은 꼭 같이 그리스도 곁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둘 다 이 죽음의 6시간 동안에 일어난 모든 것을 보고 들었습니다.
둘 다 악명 높은 죄인들이었습니다.
둘 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둘 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절박하게 요구되는 것은 사죄였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하나는 강퍅하고 완악해서
그가 이 때까지 살아오던 대로 죄 가운데서 죽었고 다른 하나는 자기의 사악한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었으며 그에게 자비를 구하여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얼마나 잘 설명하여 주고 있습니까!
우리는 오늘날에도 이와 꼭 같은 일들을 봅니다.
아주 동일한 환경과 조건 하에서도 한 사람은 녹아지나 다른 사람은 마음이 굳어진 채로 남아 있습니다.
동일한 설교를 듣고 서도 한 사람은 무관심하나 다른 사람은 눈이 떠져서 자신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고 하나님의 자비를 간절히 구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복음이 밝히 드러나 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복음이 감취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에 대하여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하는 것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선하셨기 때문이다”라는
사실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결코 인간의 책임을 파괴하지 아니합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모두 성경에 분명히 밝혀져 있습니다.
우리가 이 두 가지 사실을 이해할 수 있든지 없든지, 또 서로 모순되지 않게 조화시킬 수 있든지
없든지 간에 두 가지 사실을 모두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할 일입니다.
우리가 그리할 때 우리의 청중들에게 대해서 우리 자신이 모순에 빠지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된단 말입니까?
지금 고인이 된 스펄전은 디모데전서 2:3,4에 관한 설교에서 성경 본문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듯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내가 또 알기로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그의 독생자를 믿지 아니한다면 그 중 아무도 구원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이는 그가 거듭 거듭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구원하지
아니하시겠다고 밝히셨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하나님께서 온 마음을 다하여 자기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 외에는 결코 아무도 구원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또 내가 알기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소유된 백성이 있어서 그 백성을 구원하시되 그의
영원하신 사랑으로 만세 전에 택정하사 그의 무한하신 권능으로 그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나는 이 두 사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는 모릅니다. 그것은 내가 모르는 일들 가운데
또 하나의 것입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설교가 중의 대 설교가는 또 말하기를 “나는 지금까지 내가 항상 설교해오던 것을 앞으로도
계속하여 설교할 것이며 내가 하나님 말씀의 어느 한 부분을 다른 부분과 일치시킬 수 있든지
없든지 간에 성경에 기록된 말씀 그대로 전파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인간의 책임을 무너뜨리지 아니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뭇 영혼들을 구원하실 목적으로 지정하신 모든 수단들을 부지런히 사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베푸시는 은혜는 값없이 거저 주시는 것이며 그의 구원에의 부르심은 “믿는 자 마다”
모두에게 넉넉히 해당될 만큼 넓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를 아무도 거저 돌려보내지 아니하시며 다 영접하여 들이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하고, 심고, 물을 준 후에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오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로 그의 절대 주권적인 뜻을 이루시는 가장 큰 기쁨을 삼으십니다.
출처: 양무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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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어느 기도원의 희얀한 역사....입신 ,꿀단지, 영서 ,방언 ,치료 | |
번호 : 217 / 조회 : 63 / 작성일 : 2011-05-30 [20:24] | |
작성자 : 개혁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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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 추수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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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속 나비 구하기 - 나는 왜 CCM을 떠났는가?
나는 왜 CCM을 떠났는가?
- 예배인도자로 사역했던 한 크리스천의 고백 -
Chapter 1. 폭풍 속 나비 구하기(Saving butterflies from the storm)
하나님께서는 내게 없는 재능 두 가지를 아내인 주디(Judy)에게 주셨다. 그것은 매우 민감한 영적 안테나와 그 안테나에 걸린 상황을 분별할 수 있는 빠른 이해력이다. 결혼생활 21년 동안, 아내는 일견 건전해 보이는 어떤 흐름과 형식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 만들어내는 장기적인 부정적 영향들을 잘 분별할 수 있었고, 이런 모습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놀라며 고마워했다. 그러면서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아내의 통찰력은 교회 안에서 상처를 주거나 받는 영혼들에 대하여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1993년, 아내와 나는 미국 미시건(Michigan) 주 머스키건(Muskegon)에서 휴가를 보냈다. 그런데 그때, 그곳 미시건 호수에 맹렬한 파도를 일으키며 사나운 폭풍우가 몰아쳤다. 그 폭풍우가 그친 후 우리가 호숫가를 산책하고 있을 때, 아내는 자기 발 아래에서 모래에 반쯤 묻혀있는 나비들을 발견했다. 주변을 살펴보니 그야말로 수백마리 정도 되는 나비들이 호숫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그 나비들이 모두 죽은 것처럼 보였다. 주디가 허리를 굽혀 나비 한 마리를 살짝 건드리자 놀랍게도 그 나비가 움직이듯 싶더니 이내 날아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날개는 젖어 있었고 모래 때문에 몸이 무거워 제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었다. 폭풍우는 나비들을 호숫가에 내동댕이치고는 그 날개를 갈기갈기 찢어버린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은 나비들이 불쌍하여 그냥 내버려둘 수 없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다면 나비들은 이내 죽고 말 것이었다. 아내는 조심스럽게 나비를 들어 날개의 모래를 정성스럽게 털어내고 햇빛에 말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에 날개가 약간 움직이더니 곧 조금 빨라졌다. 주디는 내게 이 모습을 보여 주었고 우리는 나비들이 살 수 있을 거란 일말의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그 나비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제 힘으로 날개를 펴고 날아야 했다.
거친 폭풍우 후에 찾아오곤 하는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호숫가로 불어왔다. 주디는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나비를 던져 올렸는데 날개짓을 하면서 날아 오르려 했다. 나비는 떨어질 듯 좌우로 흔들리며 날았다. 난 그 모습을 보며 어딘가에 부딪히지나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비는 힘을 내었고 농장 쪽으로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비 구조 작업이 성공한 것이다! 우리는 호숫가 이곳저곳을 오가며 정신없이 가능한 한 많은 나비들을 구조하려 애를 썼다. 주디는 나비들을 모래 속에서 끄집어내 모래를 털어내고, 나는 그것들이 다시 날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나비들은 너무 빨리 죽어갔고 슬프게도 우리 부부는 아주 적은 수만을 구할 수 있었다.
현대기독교 음악운동(The Christian Contemparary Music Movement)
나중에 그 지역 주민 하나가 이 이상한 현상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 사람은 폭풍우가 그 나비들을 위스콘신 주에서 이 호수까지 몰고 와서는 호숫가에 쏟아 부운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나비들은 강한 폭풍 속에 꼼짝없이 휩쓸려 버린 것이다. 나비들은 폭풍이 다가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아내 주디는 CCM 운동(Contemparary Christian Music Movement, CCM Movement)을 위에서 이야기한 강한 폭풍우로 비유하곤 했다. 1990년대, 이 운동은 엄청난 힘을 동반하여 교회 예배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마치 나비같은 형편에 처해졌다. CCM 지지자들은 반대자들을 폭풍에 휩쓸려 호숫가로 쫓겨와 갈기갈기 찢기고 결국 죽어버리고 만 나비들 같은 처지로 만들었다. 어떤 이들은 다시 날아오를 수 없었다. 그들의 영혼이 CCM 폭풍으로 인해 갈갈히 찢겨나갔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들은 그 폭풍이 동반하고 있던 부도덕성, 사기성, 분열성에 짓눌린 채 살았다.
나는 이전에 현대 경배와 찬양 인도자였다. 그렇지만 유명하지도 않았고 명성을 얻지도 못했으며, 그저 일개 군인처럼, CCM 변혁가 역할을 수행하며 그 운동권 안에서 수년을 보낸 사람일 뿐이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예배를 현대 경배와 찬양 형식의 예배로 어렵사리 전환시키며 교회를 이끌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몇년 동안 복음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교회의 주일예배에 CCM이 수용될 수 있도록 열심히 일했다. 그것이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2년 전, 나는 하나님께서 내 눈을 열어 주셔서 CCM 운동이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과 기만성을 깨닫고 거기에서 빠져나왔다(그 이야기는 이후 이 책에서 상세히 기술할 것이다). 나는 CCM의 폭풍우 속에서 상처를 받아온 나비들을 구하고 싶어 이렇게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덧붙여 전통적인 예배를 드리는 교회들 중 현대적 예배 형식으로 바꾸기를 고려 중인 교회들에게 경고를 하고 싶다. 그런 변화에 맞서려는 이들에게 내가 용기를 주고 성경적 원리에 기반한 답변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들이 CCM 지지자들의 질문에 답을 하고 논박하는데 이 책이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음악의 매력에 빠져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발견한 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며 이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CCM 운동권 내의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어디에서 도움과 격려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교회에서 CCM를 사용하는 문제들에 대한 많은 책들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 저자들은 CCM 지지자들도 아니었고 그 운동의 일원이었던 사람들이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현대적 교회음악주의자들(Contemporaries)은 부당한 편견을 갖고 고루하고 죽은 음악적 전통을 부여잡은 이들을 ‘근본주의자’, ‘전통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였고, 그 사람들을 핑계 삼아 CCM의 문제를 지적하는 책들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
CCM과 나(personal involvement)
반면에 나는 CCM 운동이 갖는 태도와 동기에 대해 참된 ‘참호속 관점(in the tenches' view)’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왜냐하면 최근까지 그 운동에 깊이 관여했기 때문이다. 어떤 현대적 교회음악주의자들은 나이 지긋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음악을 비판하면 재빨리 세대 차이를 들어 변명하곤 한다. 그들은 세대가 다르기 때문에 나이 지긋한 그리스도인들이 CCM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1970년대에 나는 시끄럽고 저속한 록음악을 추구했던 경험이 있다. 나는 ‘거침없고 공격적인(in your face)' 음악 스타일에 익숙한 사람이다. 오늘날의 최악의 음악은 그때 당시에 우리가 시작했던 음악 스타일의 확장판일 뿐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바라기는 내가 고리타분한 방식에 천착하는 ‘인 박힌(dyed in the wool)' 전통주의자가 절대 아님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나는 이 책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치를 정해보고 싶다. 이것은 성경과 교회 안에 존재하는 음악에 대한 소모적인 신학 논쟁을 하자는 뜻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우리의 예배행위와 삶의 유형에 대해 계속 최종 권인인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성경적 관점을 공유하지 않는 독자들은 나의 주장에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록 비트와 그것이 인간의 생리기능에 미치는 효과에 대한 논쟁을 다루지 않을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하여 여타의 사람들이 충분한 저술과 설교들을 남겼다. 특별히, 이 책은 개인이 여가시간에 어떤 스타일의 음악을 들어야 하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여러 경고와 공예배에 관한 원리들에서 많은 유익함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오히려 나는 예배에 현대적 음악 스타일을 혼합하는 것이 좋게 말하면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문젯거리를 제공하는 일일 뿐이며, 나쁘게 말한다면 분열, 자기 탐닉, 부도덕성 등을 일으킬 수 있는 오류들이 있음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이 책 속에서 비판의 대상들은 일반적으로 CCM의 오류들을 이끄는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지 보통의 평범한 예배자들은 그 대상이 아니다.
다음은 우리가 사용하게 될 특별한 용어들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정의들이다.
● CCM(Contemprary Christian Music)
현대적 기독교음악. 특별히 CCM에는 소포트 록, 팝/록, 이지 리스닝, 클래식 록 같은 음악 스타일을 포함한다. 록 영향을 받아 당김음이 대단히 많이 사용되는 다른 음악 형 식들도 이에 포함되는데, 이런 음악에는 재즈, 랩, 블루스, 힙합, 펑크, 모던 컨트리 앤 웨스턴 등이 있다.
● P & W(Praise & Worship Movement)
CCM 영역 중 찬양과 경배 운동. 이 운동의 음악 스타일도 역시 강한 록음악의 영향을 받았다. 호산나, 빈야드, 마라나타 음악 등이 이 영역에서 유명하다.
● 현대적 교회음악주의자(Contempararies)
교회의 예배에서 P & W 음악 스타일의 사용을 선호하는 그리스도인들. 이 말에는 어떤 경멸적인 뜻을 담고 있지 않으며, 단지 그리스도인들을 음악적으로 분류하는데 사 용하는 용어일 뿐이다.
● 전통적 교회음악주의자(The Traditionals)
교회의 예배에서 전통적이거나 보수적인 음악 스타일을 선호하는 그리스도인들. 여기서 ‘보수적’이라 함은 일반적으로 비논쟁적이고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음악을 뜻한다. 우리 가 내린 정의 속에는 찬송가(hymns), 전통적인 노래들, 록음악이나 관능적인 다른 음 악적 영향을 받지 않은 현대적 음악 스타일이 포함된다. ‘전통적 교회음악주의자’라는 용어는 일부 CCM 계열에서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용어 가 긍정적인 뜻으로 변하기를 바란다.
나는 이 책의 모든 내용이 성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이 되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정중한 대화로 이어지길 기도하는 바이다. 내가 하는 이 비평의 의도는 CCM을 장려하고 있거나 이러한 사역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려는데 있지 않다. 내가 그런 대결을 좋아하지 않으며 오히려 평화를 이루며 평화로운 삶을 추구한다는 점은 내 친구들이 증명해 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은 했지만,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 내가 하는 이야기와 결론이 가시가 될 것임을 잘 알고 있다. 만약 여러분이 교회 내에서 논쟁을 하고 싶다면 그저 음악 스타일에 대한 문제만을 제기하라.
또한 과거 CCM 사역을 같이 했던 그리스도인 동료들은 내가 CCM에 대한 생각이 바뀐 것을 보고는 놀라거나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 동료들은 교회에서 CCM 사역을 하고 CCM이 교회 안으로 수용될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일하던 나를 기억하고 있다. 우리들은 함께 멋진 경험을 했고 우리 사역에 신실했다. 그들이 내가 책 속에서 말하는 바를 모두 경청하고 CCM을 장려하는데 있어 자신들의 역할을 점검해 보기를 기도하는 바이다.
강력한 요새(Powerful stronghold)
나는 내가 교회 안에 존재하는 매우 강력한 요새에 도전하고 있음을 안다. CCM은 이제 확고한 자리를 잡고 있어서 상당수의 근본주의적 교회들이나 복음주의적 교회들에서조차 지지를 받는 음악 스타일이다. 많은 신자들의 삶 속에 CCM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으며, 이 책을 읽는 어떤 이들은 자신에게 뿌리 깊게 내린 CCM을 흔드는 내용 때문에 몹시 괴로울 것이다. 어떤 목회자들은 CCM 운동을 아주 깊이 받아드린 까닭에 내가 언급하는 내용들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경배와 찬양을 드릴 때 CCM을 사용하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현상이다. 그것은 성경적인 기초가 부족하고 우리에게 알맞은 예배에 관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것이므로 이것을 명백히 말해야 한다. 예배에서 CCM을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를 만들어내고 육적인 삶의 유형을 조장하는 것인데, 이 두 가지 결과는 그리스도인의 연합과 유효성에 상처를 입힌다. 또한 나는 자주 언급하였듯이, 경배와 찬양에 CCM을 사용하는 진정한 동기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을 통해 우리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함이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예배의 정의가 성경적 의미에서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러므로 나는 더 이상 침묵할 수가 없다.
이러한 점 때문에, 독자들은 이미 내가 CCM에 관한 모든 것이 나쁘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결론내렸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그렇지 않다! 이 책은 현대적 찬양과 경배에서 발견되는 영적인 위험성과 비성경적인 철학에 대한 내 개인적 체험의 기록이다. 나는 현대 찬양과 경배양 운동을 하는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고,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는데 관심이 많다. 그리고 CCM 안에도 성경적으로 건전한 가사와 아름다운 멜로디로 이루어진 훌륭한 음악들이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록 비트와 세상적인 공연 형식에서 분리된 음악이라면 예배 때 충분히 사용 가능하리라 본다.
나는 여러분들이 현대적 찬양과 경배 운동에 관여하고 있다고 해서, 여러분들을 비난할 생각이 없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마태복음 7:1-5과 누가복음 6:42의 예수님의 명령을 늘 명심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우리 눈에 들보를 먼저 뺄 때만이 제대로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문제의 책임을 물으려는 행동을 제어하려 노력하며 살았다.
비록 내 신념과 충고 등을 자유롭게 나눌 테지만, 나는 책에 나오는 어떤 내용도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규정이 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규정을 만드는 것은 율법주의에 상응하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사도 바울의 예를 따라) ‘자의적 숭배와 거짓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에는 지혜의 모양을 가지나 육체의 욕망을 제어하는데에는 무익한(골 2:23)’ 규정들로 어떤 사람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가족 간의 다툼이요, 형제 자매들 간의 불협화음이다. 나는 내 형제와 자매들에게 비생산적이고 분열적인 운동에 참여하는 것에 아주 조심스럽게 경고하려 한다. 현대적 교회음악주의자들이 CCM 및 찬양과 경배 속에서 자신의 역할이 어떠한지를 생각해 보고 더 나은 길을 제시할 때 이에 관심을 기울여 주었으면 좋겠다. 따라서, 나는 독자들이 이 증언들을 공정하고 완전하게 읽고 난 후에 어떤 판단을 내리기를 바란다.
출처: 좁지만 가장 바른 길 위 내가 서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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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섯 솔라(Five Solas)
다섯 솔라(Five Solas)는 종교 개혁 기간 동안 나타난 다섯가지 라틴어 표어이며, 로마 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는 대조되는, 개혁주의자들의 기본적인 믿음을 나타낸다. 라틴어 솔라(sola)는 한국어로 "오직, "홀로"로 번역된다.
출처 위키백과 - http://ko.wikipedia.org/wiki/%EB%8B%A4%EC%84%AF_%EC%86%94%EB%9D%BC
2. 5 Sola(다섯 가지 오직)의 의미
종교개혁은 중세의 먹구름을 헤치고 그동안 가려졌던 태양을 인류에게 다시금 비취게 하였다. 이로써 그동안 가려졌던 구원의 복음이 명확하게 드러났고, 성경의 가르침은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신앙의 원리를 다섯 가지 솔라로 요약했다. 이것은 대부분 루터와 에라스무스와의 논쟁에서 루터로 부터 나온 것이다. 이로써 루터는 당시의 가톨릭과 인본주의를 넘어서서 복음의 가르침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는 다시 중세의 암흑시대로 돌아갔다는 비난이 높다. 이것은 교회가 성경의 근본이 되는 원리를 잊었으므로 인간의 세계관, 욕심, 무지, 우상숭배, 열광주의 등이 교회를 지배하는 하나의 원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수십년 다녀도 기본적인 신앙의 원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교회는 요즈음 사방에서 지탄을 받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 이유를 분석해서 개선하려는 의지는 적다고 본다. 다시 복음의 원리가 가려져서 유사복음이 교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에 필자는 종교개혁의 원리이자 기독교의 원리인 다섯 솔라를 설명하면서 우리가 무슨 잘못을 하고 있는지를 분석하고 점검하고자 한다. 먼저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핵심 논쟁점을 보고 그다음에 5솔라의 가르침을 살펴본다.
에라스무스의 입장
자유의지는 nonnihil(약간)이며, 하나님의 은혜는 plurimum (대부분)이다.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되지만, 그래도 인간의 의지가 작용할 여지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을 상주시고 벌하시겠는가? 그래야지만 인간은 선행을 위해 힘쓰지 않겠는가? 만약,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벌을 주시는 하나님은 불공정한 잔인한 하나님이 아니겠는가?
루터의 입장
루터의 대답에서 신교 칭의론(인간이 어떻게 의롭게 되는가, 즉 구원을 받는가?)의 본질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개혁교회의 4가지 솔라는 이곳에서 나왔으며, 이것은 루터의 칭의론의 근간을 이룬다.
I. 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
에라스무스는 인본주의자로서 인간의 존엄성을 살리려고 했다. 즉 인간은 비록 일그러지고 병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선한 면이 조금은 있으므로, 이것을 잘 고양하면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사람은 그리스도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는 (여러 의사 중에) 가장 좋은 의사이다. 성경도 여러 가지 좋은 약 중에서 가장 좋은 약이다.
루터: 인간이 병이 든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죽었다! 세포 하나라도 살릴 수가 없다. 그에게는 부활만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그를 살리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이다.
해설:
에라스무스는 세미펠라기우스 주의이다. 세미펠라기우스 주의는 인간이 완전히 타락한 것이 아니므로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아서 본성을 잘 살려나가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오늘날 이 이론이 발전되어 많은 교회에서도 그리스도 외에 타 종교를 믿어도 좀 어렵기는 하지만 구원의 길이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인간은 철저하게 타락했으므로,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출발할 수 없다. 아무리 본성을 잘 개선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에 도달할 수 없다. 타락한 인간을 살리시는 분은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
적용:
1) 인문주의는 일차적으로 고전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다(ad fontes). 학자들은 고전(성경 포함)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했다. 따라서 그들은 성경이 가장 좋고, 그리스도도 꼭 필요한 것이지만, 다른 책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즉, 오직 그리스도, 오직 성경이 아니었다. 이것은 오늘날 복음주의가 그리스도와 성경 외에 심리학, 사회학, 상담학을 받아들이는 것과 유사하다. 그렇게 되면 차차로 그리스도의 유일성이 사라지고, 다른 것들이 그리스도를 대신하게 된다.
2) 요즘 교회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이 기승을 부리는 이 때에 „오직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이 더욱 절실하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원래 교회 일치 운동으로 시작했으나, 지금은 종교일치 운동으로 발전했다. 이들은 다른 종교를 통해서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II. sola gratia(오직 은혜)
에라스무스: 인간의 내부에는 아직 불씨가 꺼지지 않고 있다. 이것이 자유의지다. 인간은 성(城)에 비유하자면, 성의 대부분이 적에 의해 점령을 당했지만, 가장 깊은 곳에는 아직 자유가 있다. 외부에서 강력한 지원군이 온다면, 이는 해방될 수 있다. 이 지원군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루터: 무슨 소리! 바로 가장 깊은 곳(마음, 양심)이 이미 옛날에 적에게 강점되어 있소. 인간의 중심이 바로 사단의 노예가 되어 있소.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간의 의지는 속박되어 있소.
에라스무스: 인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facere quod in se est).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한 것을 채워서 완성시킨다(당시 가톨릭의 가르침).
루터: 이러한 가르침은 „사단의 가르침“이다. 인간이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하게 되면, 그는 대죄(죽을 죄)만 지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은혜를 내리게 하시기 위해 무엇을 준비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하게 자신을 만든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더이상 은혜가 아니다. 은혜와 공적은 물과 불이라서 결코 섞일 수 없다. 진실로 인간은 암흑, 토후와보후(창1:2: 혼돈하고 공허하며)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은혜 외에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III. sola fide(오직 믿음)
우리는 이 구원의 은혜를 무료로, 선물로 받기 때문에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해설: 죄인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를 얻는 길은, 공적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믿음으로써 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을 때 그분이 이루신 의가 나에게로 전가된다. 죄인이 구원받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길 뿐이다(전가된 의). 그리스도가 주시는 의를 받아들이고 심판받은 자로서, 그리고 부활한 자로서 사는 것이 믿음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60문: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있습니까?
답: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믿음을 통해서만(오직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비록 내 양심이, 내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범하였고 그 계명 중 어느 하나도 (완전하게) 지키지 못했으며 아직도 모든 종류의 죄를 짓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고소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나의 공로와 관계없이 순전한 은혜로 나에게 완전한 속죄와 그리스도의 의와 거룩함을 선물로 주십니다…
제61문 : 왜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있다고 말합니까?
답: 하나님께서 나를 기쁘게 받으시는 것은 내 믿음이 공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속죄와 의와 성결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 대하여 의로운 자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의를 내 것으로 삼을 방법은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것 자체도 성령님의 사역이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로 믿은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님을 받아 그 결과로 믿음을 가지게 된다. 오직 은혜로라는 말은 구원을 하나님 편에서 표현한 것이고, 오직 믿음이라는 말은 인간의 편에서 표현한 말이다.
그동안 한국 교회에서 가장 강조해왔던 것이 믿음 같다. 믿기만 하면 된다!!! 믿음으로 해라!!! 그러나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이 가르치는 믿음과는 전혀 반대이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이 한국 교회를 망친 주원인 중의 하나이다. 개혁자들이 가르친 믿음이란, 우리의 행위와는 전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순전히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많은 목사들은, 믿음을 무엇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가르쳤다: 믿음으로 불가능한 것을 이루어라(긍정적 사고 방식)! 믿기만 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완전히 뒤집었다. 이들은 믿음을 자신의 조직을 키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따라서 교회는 부흥하고 성장하되, 정작 기독교는 무너졌다.
그 결과 교인들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거룩함과 사랑의 정서는 뒷전으로 밀렸다. 그 대신 이방종교에서 성행하는 치료, 그들이 방언이라고 주장하는 이상한 소리, 거짓 예언, 뒤로 넘어지는 것, 금 이빨로 변하기, 부자가 되고 성공하여 행복해지기 위한 기도 등이 많은 교회에서 성행하게 되었다.
IV. sola scriptura(오직 성경)
에라스무스: 성경에는 어둡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심지어 서로 모순되는 부분도 있다.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없고, 단지 주장이나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성경과 교부들의 해석, 성경과 전통, 성경과 교황의 가르침, 성경과 철학, 성경과 건전한 이성, 이 양자가 모두 필요하다.
루터: 성경은 명료하다! 단지 우리의 어두워진 눈이 이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면,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멸망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다음에 하나님의 구원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하게 신앙고백을 할 수 있다. 성령님께서는 회의하는 이성과 같은 회의론자가 아니므로 그리스도인도 확신의 사람이다. 이 모든 것은 활짝 열린 성경이 선사한다.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오직 성경이다.
루터는 이곳에서 성경은 다른 권위에 의존해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성경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성경해석학적 원칙을 내세웠다. 좀 어두운(어려운) 부분은 밝은 부분으로부터 해석이 가능하다. 성경해석에 있어서 교황이나 전통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알리시기 위해 성경을 주셨다. 비록 인간이 성경을 썼으나,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썼으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작품이다. 성경의 다음의 네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다:
2) 필수성: 성경은 인간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구원의 방편으로서 필요불가결하다.
3) 명료성: 성경에는 구원에 필요한 지식이 “명료”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교회나 사람의 해석에 의존하지 않고도 구원의 도를 알 수 있다.
4) 충분성(충족성): 하나님의 구원의 뜻은 성경에 충분히 계시하셨다. 그리고 성경은 개인과 교회의 영적, 도덕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V.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주권을 재발견했다. 하나님의 주권은 구원에서 뿐만 아니라 신자의 모든 삶에 침투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을 자신의 영광과 죄인의 구원을 위해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전 생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답: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칼빈 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 사람은 드믈다. 루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드러냈고, 칼빈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잘 드러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로 살았다. 그의 다소 엄격한 태도는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의 유언대로, 묘지도 초라하게 하고 비석도 세우지 않아, 장사된지 몇 달만에 그의 무덤은 아무도 찾지 못했다. 그는 법학도 시절에 교수 대신 학생을 가르칠 정도로 수재였고,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 분명하지만, 자신은 이것을 한번도 밝힌 적이 없어서 아무도 정확하게 그가 박사였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이라는 구호를 삶으로 실천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기독교강요는 이러한 킬빈의 신앙을 잘 반영한다.
참다운 신자라면, 신자로서의 분명한 정서를 갖추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과 정서에서 몇 구절을 인용한다.
성도들의 기쁨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데서 나온다.
기쁨은, 신적인 것들이 자기들과의 이해 관계나 어떤 연관이 있어서 나온 것이 아니다. 신적인 것 자체가 가지고 있는 거룩한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묵상할 때 자기의 마음이 즐겁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위선자와 참된 성도의 기쁨을 구분하는 차이이다. 즉, 위선자는 자아가 그 기쁨의 첫째 기초이며 참 성도는 하나님을 즐거워한다. 위선자는 자기가 도달했거나 도달할 것이라고 상상하는 행복을 생각하면서(예: 주일헌금 일억원, 1000명 선교사 파송) 마음에 기쁨을 찾는다. 그러나 참된 성도는 먼저 하나님께 속한 일들의 영광스럽고도 호감 어린 본질들을 아름답게 생각함으로써 말로 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운 마음을 가진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기쁨의 샘이요, 그들의 모든 유쾌함의 진수이다.
그러나 위선자의 정서는 정반대의 순서를 따른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것들이 많이 조성된 것을 즐거워하고(목표 달성), 그로 말미암아 마음이 고양된다. 그런 다음에 그런 것을 기초로 해서 하나님을 사랑스럽게 보는 것이다. 참된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기쁨의 가장 큰 기초는 그리스도의 완전성과 아름다움이다.
복음의 거룩한 교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높아지고 사람은 낮아지며, 거룩은 영예롭게 되며 촉진되고, 죄는 수치를 당하고 기가 꺾이게 된다. 그리고 은혜롭고도 값없이 주어지는 주권적인 사랑이 드러난다. 바로 그 거룩한 복음의 교리들이 성도의 눈에 영광스럽게 보이며, 그의 취향에 아름답게 보인다. 이것들은 이러한 일들이 자기와 어떤 이해관계를 가지는지 생각하기 이전의 일이다. 실로 성도들은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것을 즐거워하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구주이심을 즐거워한다.
그러나 위선자들은 자신이 선한 상태에 있다는 착각으로 그러한 교리 아래서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위해서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하시는가를 듣고 대단할 정도로 즐거움을 나타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의 기쁨은 그들 자신 속에 있는 기쁨이다. 즉 그들이 기뻐하고 마음을 스스로 부풀릴 때, 자기들의 시선을 늘 자기에게 두기 마련이다(나는 …했다). 그래서 자기들이 소위 영적인 발견이나 체험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받은 후에 그들의 마음이 그것들에 사로잡혀서 자신의 체험을 크게 찬탄한다.
그들은 계속 자신에 대해 생각한다: ‘이 체험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이 발견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내가 얼마나 놀라운 일을 만났는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아름다움과 온전하심의 자리에 자기의 체험을 가져다 놓는다.
이들은 자신이 체험하고 성취한 것의 위대한 것을 바라보면서 자기 자신의 일에 관한 한 대단한 수다꾼들이 된다(선교보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욕망을 크게 채워준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들의 복종심과 맹렬한 열성은 보통이 아니다. 자기에게 꼭 맞는 하나님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그를 높이고 복종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정서는 자신이 대단한 성도라는 상상 위에 세워져 있다.
그러나 참된 성도는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영광 그 자체에 대하여 진정으로 발견한 것들을 기뻐한다. 그들의 정서는 자기 밖에 계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출처 : | 개혁주의 마을 | 글쓴이 : 송다니엘 원글보기 |
출처: Return Bible / 개혁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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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버트 글렌 라스 콜리 나스, 텍사스,
▼ 2. 할거 브래들리, 뉴욕, 미국
▼ 3. 익명의 행인의 기념물, 브로츠와프, 폴란드.
▼ 4. 연어 조각, 포틀랜드, 오레곤,
▼ 5. 싱가포르 강
▼ 6. 필라델피아, 펜실베니아,
▼ 7. 매듭 건, 터틀 베이, 뉴욕, 미국.
▼ 8. 지 노스 Frudakis, 필라델피아, 펜실베니아,
▼ 9. 블랙 고스트, 클라이 페다, 리투아니아
▼ 9-a
▼ 10. 레의 뱃사공, 마르세유, 프랑스.
▼ 11.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 공화국.
▼ 12. Vaartkapoen, 브뤼셀, 벨기에.
▼ 13. 소, 달라스, 텍사스,
▼ 14. 거미, 테이트 모던, 런던,
▼ 15. 하마 조각, 타이페이, 대만.
▼ 16. 주립 도서관, 멜버른, 호주 이외의 건물을 침몰
▼ 17. 아나 공원, 암스테르담의 네덜란드.
▼ 18. 작업, 브라 티 슬라바, 슬로바키아
▼ 19. 미하이 에미 네 스쿠, Onesti, 루마니아.
▼ 20. 리얼 크기 동상 Eceabat, 터키와 함께 세계 전쟁의 한 장면.
▼ 21. 남자는, 프라하, 체코 공화국
▼22. Kelpies, Grangemouth, 영국.
▼ 23. 런들 몰 돼지, 애들레이드, 호주.
▼ 24. 알 수없는 공식, 레이캬비크, 아이슬란드.
▼ 25. 상어, 옥스포드,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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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는 예로부터 혈액을 맑게 하고 기운을 좋게 하며 뱃속을 든든하게 하고 소화기관을 튼튼하게 한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약리작용이 있으면서 부작용은 크게 없어 악성 종양이나 고혈압,동맥경화,심장병,간장병 등의 만성 질환을 치료하는 민간요법으로 많이 쓰여 왔다. 감자의 성분은 대부분 녹말이지만 비타민 B1.B2.C, 판토텐산, 칼륨도많이 들어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받는 것은 비타민 C입니다. 비타민 C는 스트레스를 줄이고 감기에 대한 면역성을 높이며 철분흡수 촉진, 콜레스테롤 감소, 바이러스성 간염 억제, 발암물질의 생성 억제 등 다양한 효능을 발휘합니다.
◈민간요법◈
▶벌레에 물렸을때
벌이나 벌레에 물리거나 원인 모르게 피부가 부어오를 때 감자를 짓찧어서 환부에 붙이면 증상이호전된다.
▶타박상
타박상이나 삔 데에 감자를 갈아서 밀가루와 식초를 섞은 다음 상처부위에 바르는데 하루에 1~2번 교환하면 통풍,류머티즘, 요통,염좌,타박상에 통증을 감소시킨다.
▶알레르기 체질
천식 등의 알레르기 체질에는 감자 스프를 해서 장기간 먹으면 체질의 상태를 개선해 주며
감자스프를 만드는 방법은 감자 5개와 적당한 양이 양파를 잘게 썰어 미지근한 불로 고아서
국물을 하루에 3번 정도 나누어 마시면 된다.
▶위궤양
감자 생녹말 요법을 한다. 감자의 껍질과 싹눈을 버린 후 강판에 갈아 생즙을 얻어 컵에 담아
놓으면 앙금이 밑에 가라앉고 위로는 붉은 물이 뜨는데 이때 앙금만 취하여 먹으면 위궤양
치료에 효과가 좋다.
▶만성 변비
생감자를 깨끗이 씻어 껍질째 즙을 내어 그것을 한번에 반 컵씩 하루에 3회 빈속에 먹는다.
위장튼튼- 감자!
1> 신대륙에서 온 것중에 악마의 저주와 신의 혜택이 있다. 전자는 담배이고 후자는 감자이다!! -괴테
: 괴테마저 <신의 혜택>이라고 극찬한 감자!!
이것의 결정적 효능은 동서고금을 망라한 소화의 기본!! 위장강화인데요. 대장의 연동운동을 자극해서 변비를 치료하 고 체내에 남아있는 염분을 배설시킵니다. 그리고 이것의 가루는 위벽에 막을 만들어 위를 보호하는 기능이 있다.
뿐만아니라 이것의 '즙'을 마시면 위궤양 같은 위장 질환치료나 예방에 탁월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2> 감자는 북유럽의 오렌지!!
: 비타민 C는 만병의 근원이 되는 스트레스를 이기는 데 도움을 주는 부신피질 호르몬의 생성에 필수적인 영양소이죠. 이것에 들어 있는 비타민 C는 사과의 두 배나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에 들어 있는 비타민 C는 다른 채소나 과일에 들어 있는 비타민 C와는 달리 열을 가해도 쉽게 파괴되지 않는데요.
그래서 기후 때문에 오렌지, 레몬 등 비타민 C가 많이 들어 있는 과일을 재배할 수 없는 북유럽 사람들은 이것으로 비타민 C를 보충했다. 그래서 북유럽의 '오렌지'라고 부른다.
3>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
1800년대 작품으로 당시 유럽에
감자가 가난한 사람들의 주식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
러시아에서는 감자를 <제2의 빵!!>로 불리 우기도 했다!! 왜?? 감자는 2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중요하게 자리잡았는데, 같은 면적에서 재배되는 밀에 비해 5배나 많은 수확량으로 군인들의 배를 채웠주었으며 특히 러시아의 과학자들은 전쟁 기간동안 남미의 우수한 감자 종자들을 밤낮으로 추위와 쥐들 로부터 보호하는데 여념이 없었고 감자의 종자는 금보다 더 중요했으며, 아직도 '제 2의 빵'이라 불린다
4> 감자는 지방을 흡수하며 적은 양으로도 쉽게 포만감을 느낄 수 있어 예전에는 식량대신 먹었지만 요즘은 다이어트에 매우 효과적인 식품이다. 탄수화물, 단백질, 칼륨과 비타민 및 식이 섬유도 다량 함유되어 있다
5> 성장에 필요한 필수아미노산이 풍부해 영양식으로도 좋으며 소화율도 96%로 높아서 장수마을로 유명한 "불가리아의 훈자"와 "에콰도르의 비루카밤바" 지방 주민들의 식생활을 조사해 본 결과 "유카"라는 감자류를 주식으로 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발견되었다.
6> MIT 대학의 주디스 워트먼 박사의 연구결과 기분이 나쁠 때 감자를 먹으면 30~40분이 지난 뒤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서 "탄수화물은 진정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밝혀 스트레스를 잘 견딜 수 있는 것은 체내에서 부신피질호르몬을 분비하여 보호해 주기 때문인데, 이때 반드시 비타민C가 필요 한데 감자에는 사과의 2배나 들어있어 "감자를 많이 먹으면 스트레스를 견뎌 나가는데 큰 도움이 된다.
7> 알칼리성 감자와 산성인 버터는 영양상으로도 잘 어우러진다.
감자는 전분, 비타민C, 칼륨 등이 풍부한데 버터에는 비타민C 가 잘 흡수될 수 있도록 돕는 비타민A가 많이 들어있다. 또 감자의 칼륨 성분은 버터 속의 나트륨이 체내에 지나치게 흡수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
8> 위대한메뉴
생감자주스- 생감자즙은 위점막을 보호하여 위장질환에 효과적이며 대장의 연동운동을 자극하여 변비에도 좋다. 이 밖에도 혈압강하작용을 하여 고혈압에 효과가 있고 비타민C가 풍부하여 인슐린 생 성에 도움이 되므로 당뇨에도 좋다.
감자범벅 -감자에 부족한 단백질을 완두와 밤 등을 첨가함으로써 질이 좋은 식물성 단백질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게 되며 감자에 유일하게 부족한 비타민A를 보완해준다. 감자범벅은 특히 성장기 어린이들에게 훌륭한 영양간식이 되겠다.
감자카나페- 비스켓이나 바게트 대신 구운감자를 이용하여 칼로리 가 낮아 다이어트하면서 먹는 간식으로 좋다.
감자가 우리 몸에 좋은 이유 !!
감자는 예로부터 혈액을 맑게 하고 기운을 좋게 하며 뱃속을 든든하게 하고 소화기관을 튼튼하게 한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약리작용이 있으면서 부작용은 크게 없어 악성 종양이나 고혈압, 동맥경화, 심장병, 간장병 등의 만성 질환을 치료하는 민간요법으로 많이 쓰여왔다.
감자의 성분은 대부분 녹말이지만 비타민 B1·B2·C, 판토텐산, 칼륨도 많이 들어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받는 것은 비타민 C. 비타민 C는 스트레스를 줄이고 감기에 대한 면역성을 높이며 철분 흡수 촉진, 콜레스테롤 감소, 바이러스성 간염 억제, 발암물질의 생성 억제 등 다양한 효능을 발휘한다. 하지만 가열하면 파괴되는 단점이 있는데 감자의 비타민 C는 전분 입자로 싸여 있어 익혀도 손실이 적다.
또한 감자는 피부병을 예방하고 알레르기 체질 개선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최근에는 감자에 항암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비타민 C가 스트레스를 줄인다
감자는 비타민 C가 풍부해 스트레스로 인한 피로를 풀며 우리 몸을 스트레스로부터 지키는 부신피질 호르몬의 생성을 촉진한다. 또한 뇌의 작용을 돕는 비타민 B1이 많아 불안, 초조 등 심리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좋다.
위벽을 보호해 위장 질환을 치료한다
감자에는 점막을 강화시키는 성분이 들어 있어 위의 기능이 약하거나 위염, 위궤양, 십이지장궤양 등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먹으면 좋다. 특히 감자 생즙에 들어 있는 ‘알기닌’은 위벽에 막을 만들어 위를 보호하기 때문에 위장 질환을 치료, 예방한다. 또한 신선한 감자즙에는 진정작용을 하는 ‘아트로핀’이 들어 있어 위·십이지장궤양 등의 통증을 줄인다.
염분을 배출해 고혈압을 막는다
염분은 고혈압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지만 소금의 섭취를 갑자기 줄이면 음식 맛이 없을 뿐더러 소화도 잘 안된다. 감자는 칼륨의 함유량이 밥의 16배나 되는데 칼륨은 염분의 성분인 나트륨을 배출하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소금으로 인한 가벼운 고혈압을 예방, 치료할 수 있다. 아울러 칼륨은 현기증을 치료하고 소변을 잘 보게 해 부기를 빼는 효과도 있다.
콜레스테롤을 줄여 피를 맑게 한다
감자에 들어 있는 사포닌은 기침 감기를 치료할 뿐만 아니라 콜레스테롤을 녹여 피를 맑게 한다. 또한 수용성 섬유인 ‘펙틴’은 혈중 콜레스테롤의 수치를 낮추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당뇨병 환자의 식사로도 그만~
감자는 위장의 열을 없애고 갈증을 없애는 작용을 해 당뇨병에 효과가 있으며, 감자의 탄수화물은 소화가 서서히 이루어져 흰쌀밥처럼 혈당치를 급격히 상승시키지 않는다.
암을 예방, 치료한다
감자에는 세균과 발암물질을 중화시키는 물질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 치료를 목적으로 감자를 먹을 때는 날것으로 먹는 것이 좋으며 아침식사 전, 위가 비어 있을 때 먹는 것이 가장 좋다.
만성 변비를 치료한다
감자의 불소화물은 대장 속의 미생물이 발육하는 데 좋은 영양원이 된다. 증식한 미생물은 장벽을 자극함으로써 장의 활동이 활발해져 변비를 치료, 예방하는 데 도움을 준다.
충치를 예방하고 술독을 푼다
감자에 들어 있는 칼륨, 황, 인, 염소 등의 미네랄은 피부나 몸 속의 불순물을 없애는 정화작용을 한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감자는 충치를 예방하고 해충이나 기생충 따위를 없애는 구충작용과 술독을 푸는 해독작용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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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6일 새벽 5시17분 거대한 불기둥이 개성교회(아래 작은 사진)로 이어지는 장관이 연출되고 있다. 성경의 불기둥은 ‘하나님의 동행’을 의미한다. 이 사진은 개성공단에 있는 소방서가 24시간 개성공단을 촬영한 동영상을 캡처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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