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고난’의 설교자 본회퍼Ⅲ
영혼을 움직인 설교자 11
출처: 교회와신앙
2008년 10월 02일 (목) 00:00:00 권영삼 032kwon@naver.com

   

 

본회퍼 설교는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그는 철저하게 본문을 중심으로 설교했다. 지나치리만큼 본문에 집중했기에, 예화나 적용도 없다. 그의 설교는 또한, 시대와 무관하지 않았다. 나치의 철권통치 아래에서도 본회퍼는 성경에 입각해 올바른 진리 선포를 포기하지 않았다.

본회퍼 설교에서는 대부분 시가 등장한다. 그는 시를 통해 기도의 제목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있다. 더불어 그의 설교 중심에는 항상 그리스도가 있었다. 본회퍼는 항상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설교했고, 고난에 대한 깊은 묵상을 통해 청중들을 감동시켰다. 그리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진정한 제자도의 삶을 강조하는 설교를 강단에서 거침없이 전한 설교자였다. 그 밖에도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서론을 생략하거나 짧게 언급한다. 비유와 상징을 사용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견되고 있다.

 

본문 중심의 설교
본회퍼의 설교의 가장 큰 특징은, 그의 설교관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본문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점이다. 그 실례로, 1937년 3월 마태복음 26:45-50절(『십자가의 부활의 명상』, pp.63-77) 본문의 설교에서, 본회퍼는 본문 한 절 한 절을 구체적으로 강해하고 있다. 특히, 47절 “말씀하실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라는 말씀과 50절 상반절의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그리고 50절 하반절의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등의 본문을 읽고 난 후, 그는 각각의 구절들을 전체 말씀의 문맥 안에서 풀어 설명하고 있다.

또한, 1938년 3월에 로마서 5:1-5절(『십자가의 부활의 명상』, pp.80-93)을 본문으로 한 설교에서도 구절에 집중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별히, 3-5절까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을 순차적으로 설명하면서, 그 의미를 매우 구체적으로 설교하고 있다. 그뿐 아니다. 본회퍼의 시편 설교에서는 성경 구절을 정확하게 인용하되, 그 구절에 집중하여 설교를 전개하고 있다. 이처럼 본회퍼는, 그가 교수시절 학생들에게 가르친 내용을 그대로 설교에 적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다. 이것은 진리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가장 기본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그리고 본문에 대한 깊은 묵상과 주해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을 청중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본회퍼는 그 누구보다 본문에 충실한 설교자였다.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설교
본회퍼가 생존할 당시는, 나치 정권의 정치적 종교 탄압이 극에 달한 시대였다. 그런 억압과 모순의 시대를 살았던 설교자로서, 본회퍼는 설교를 통해 시대에 대한 비판과 성도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본회퍼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얼마 전인 1932년 6월, 골로새서 3:1-4을 본문으로 설교를 했다. 그는 이 설교를 통해, 이 세상의 부정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강력하게 저항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저항은 말씀과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들은 꿈꾸는 자도, 구름 너머에 있는 자도 아닌 것을,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에 대해 충분히 증언할 수 있는지 그것이 문제이다. 우리들의 신앙은 결코 부정이 충만한 이 세상에서 마음 편안히 있게 하는 아편이 아니다. 우리들은 위엣 것을 생각하여야 하는 바로 그것 때문에 이 지상에서는 더욱 강력하게 부정에 대해 저항해야 하는 것이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말씀과 행동으로 하는 저항에 앞장서야 하는 것이다. 처음엔 그처럼 혁명적인 기독교가, 어찌해서 오늘날에는 언제나 보수적인 입장에만 서야 되는 것인가?”(『기다리는 사람들』, pp.75-76).

그는 또한,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직후인 1933년 2월 사사기 7:2을 본문으로 한 설교에서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강력하게 설교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것처럼, 이 시대에 교회를 부르셔서 이 땅의 불의와 공포와 악의 올가미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해방시키기를 원하시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무거운 책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상 속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탄했다.

본회퍼는 나치 정권의 교회 탄압이 극에 달했던 1937년을 전후로, 시편 58편을 본문으로 삼아 설교했다. 이 설교에는 시대적 상황과 이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본회퍼의 시편명상』, pp.99-115). 그는 시편 58편은 ‘복수의 시편’으로서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가능한 기도문임을 전제하면서, 그 본문을 통해 시대의 불의와 고통당하는 자들의 울부짖음 그리고 압제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기대 등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적용과 예화가 없는 설교
본회퍼 설교의 또 다른 특징은, 예화나 적용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가끔 나치 정권이라는 시대적 환경 속에서 회중의 행동을 촉구하는 적용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본회퍼가 설교관에서 밝히고 있듯이, 유일한 적용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설교에 있어서 적용은 불필요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본회퍼는 설교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로지 본문을 중심으로 한 강해뿐이었다. 예화 역시 마찬가지다. 본회퍼에게 있어, 예화 또한 말씀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게 하는 위험 요소였다. 그는 예화를 설교에서 피해야 할 것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설교에서 적용은 반드시 필요하다. 설교의 목적은 ‘청중의 변화’이기에, 설교는 적용을 통해 사람의 변화를 촉구할 수 있어야 한다. 적용이란 설교 끝에 덧붙여진 하나의 결론 같은 것이 아니다. 있어도 괜찮고 없어도 무방한 선택의 문제도 아니다. 거룩한 변화의 목적 없이 설교할 수 없듯이, 적용을 향한 촉구 없는 진정한 기독교적 설교 역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시적 감흥이 있는 설교
본회퍼와 관련된 서적들을 보면, 그의 삶 속에서 시가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본회퍼는 감옥에 있을 때에도 시를 통하여 자신의 심정을 드러내곤 하였다. 이런 정서는 그의 설교에도 자주 등장한다. 본회퍼는 설교 중간이나 마무리 부분에서 시와 같은 기도문들을 자주 사용한다.

“하나님이시여, 우리들의 기다림 속으로 걸어와 주옵소서.
하나님이여 우리들은 당신의 구속을 기다리며
당신의 심판을, 당신의 사랑을, 당신의 평화를 기다리고 있나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라’(계 3:20).
그러므로 우리도 말씀드립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아멘”(1931년 11월, 누가복음 12:35-40을 본문으로 한 설교, 『기다리는 사람들』, p.25).

그 밖에 시편 42편 설교를 보면, 각 구절에 대한 설교가 끝날 때마다 그 구절에 맞는 기도문을 기록하고 있다. 이 처럼 본회퍼의 설교에 본문을 잘 요약하는 시구들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그가 한편의 설교를 완성할 때 얼마나 많은 묵상과 연구를 거듭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
본회퍼 설교의 또 다른 특징은, 설교의 결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고난을 넘어선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본회퍼는 암울한 나치 정권 하의 고난과 핍박 속에 있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설교를 통하여 위로와 희망을 전했다. 그는 또한,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해오던 옥중에서도 동료들에게 말씀을 통해 위로와 소망을 전했다.

지나친 낙관주의나 근거 없는 희망은 우리가 분명하게 경계해야 부분이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운 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통한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는 설교자가 간직해야 할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일 것이다.

 

본회퍼 설교의 단점
본회퍼는 매우 많은 장점을 지닌 설교자였으나, 몇 가지 점에서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그는 당시의 독일 기독교가 사변적 형이상학에 머무르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종교성이 배제된 기독교’(Religionless Christianity)를 주장했다. 그리고 비종교화를 통해 기독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현존하는 이 세상에서 그 역할을 다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같은 신학적 이론은 세속화 신학을 통한 급진적 제자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의 신학은 1960년대에 급진적 세속 신학자들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본회퍼 설교의 또 다른 문제점 중 하나는 그의 성경관에서 찾을 수 있다. 에버하르트 베트게는 본회퍼가 개신교의 ‘하나님 말씀론’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축자영감설에 예민하게 반응했다고 비판했다. 본회퍼는 말씀을 정치적 관점에서 깊이 이해했고, 그러한 말씀 이해는 오늘날까지 교회에 커다란 도전이 되었다. 본회퍼에게는 그만큼 축자영감설이 불편했고 말씀의 정치적 이해가 절실했다.

본회퍼의 정치 편향적인 설교도 문제다. 암울한 시대 속에서 실천적 신앙을 강조하며 정치적 행동을 촉구하는 그의 설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와 같이 정치 성향으로 크게 치우친 설교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본질을 흐리게 할 염려가 있다.

 

본회퍼가 한국교회에 주는 교훈
본회퍼 설교는 철저히 성경 본문을 근거로 한 강해설교라는 점이다. 이런 그의 설교관은 말씀은 사라진 채, 일상의 삶과 예화만이 가득한 한국교회 강단에 커다란 도전이 된다. 그는 또, 설교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둔 설교자였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 강단의 설교는 어떠한가? 보편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한국교회 설교가 지나치게 기복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성경이 성도의 복된 생활 자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의 핵심은 성도들이 얼마나 복 받는 삶을 살고, 또 얼마나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면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핵심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이다. 그 구원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와 그 고난이다. 그러기에 설교의 중심도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

본회퍼는 강단에서 행한 설교와 삶이 철저하게 일치되도록 살다간 설교자였다. 그는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것을 선포했다. 나치 정권의 암울한 환경 속에서도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실천적인 믿음을 촉구했다. 그리고 강단에서 선포한 대로,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이 땅 가운데 진정한 평화를 이루고자 몸부림치다가 젊은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실천적 방법들이 옳았는가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본회퍼는 신학자요 설교자이기 이전에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 가운데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뇌했고, 거기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요 설교자였다는 사실이다. 삶이 곧 거룩한 한 편의 설교가 되는 설교자, 그런 설교자가 차고 넘치는 한국교회 강단을 소망해 본다.

한창덕 목사 / 한국교회연합 바른신앙수호위원회 전문위원

<글 싣는 순서>
1. 다락방의 이단성
2. 다락방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
  1) 삼위일체의 양태론
  2) 다락방의 기독론
3. ‘비밀’이란 단어로 구성된 다락방의 교리들
  1) 베뢰아 귀신론과 동일한 사탄신학
  2) 다른 복음
  3) 다른 그리스도
  4) 번영신학
  5) 신화사상
4. 결론












류광수 다락방은 고신(1995/45, 1997/47/이단), 통합(1996/81/사이비성), 합동(1996/81/이단), 합신(1996/81/위험한 사상, 참여금지), 기성(1997/52/사이비운동), 기감(1998/23/이단), 고려(1995/45/유사기독교운동, 사이비기독교운동), 개혁, 기침 등 9개 교단에서 이단 및 사이비 단체 등으로 규정하였다.

다락방에서는 김기동 베뢰아 귀신론과 같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불행, 질병, 가난, 사건·사고, 재앙 등이 다 사단 때문이라고 하며, 사단만 멸망시켜버리면 그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고 한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단을 멸해버리셨으니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하면서 구원파와 같은 논리를 전개하고 ‘그리스도의 비밀’, ‘복음의 비밀’, ‘언약의 비밀’, ‘영접의 비밀’, ‘삼위일체의 비밀’, 그리고 ‘임마누엘의 비밀’ 등 비밀시리즈로 이어지는 핵심적인 교리들을 통하여 ‘사람이 하나님 된다’는 지방교회의 ‘신화사상’을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다락방이 베뢰아와 흡사하다는 말을 듣게 된 이유이며, ‘천사 동원권’과 ‘사단 결박권’ 등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것을 자기들의 주장과 같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면 사람이 하게 된다고 한 이유이다. 그러므로 다락방은 과거에도 그렇지만 지금도 확실히 이단이다.

1. 다락방의 이단성

다락방은 확실한 이단성을 가지고 있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에 관한 양태론적 이해나 성자의 인격으로 오셔서 한 분이시지만 온전한 인성을 취하셔서 참 하나님과 동시에 참 사람이 되신 예수님에 관해 “영은 하나님이시고 몸만 사람의 몸을 입고 계신 분”(류광수, <복음편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이라고 하면서 주님의 인성을 반쪽만 인정해서 결국 그분의 온전한 인성을 부인한 것 등이다.

전자는 흔히 한국교회의 많은 분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 또한 오해였다고 하며 변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자는 381년에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아폴리나리우스와 같은 사상이기 때문에 변명하기 어렵다.

물론, 어떻게 생각하면 그와 같은 것들은 단편적인 것으로써 실수나 무지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그와 같은 정도의 실수는 털어서 먼지 안 날 사람이 없는 것과 같이 어떤 목회자라도 할 수 있는 정도인데 그것을 가지고 이단이라 정죄 한다면 거기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누가 있겠냐고 하면서 그것은 지나친 처사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단편적인 실수나 무지로 인한 문제에 대해서는 함부로 이단으로 정죄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다락방의 문제는 그와 같은 것들이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는 그들의 전체적인 교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들의 그 교리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이는 베뢰아와 비슷한 사탄신학과 지방교회의 신화사상 등에 핵심적인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다락방의 또 다른 문제점은 대부분의 이단이나 불건전 사이비 단체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그들의 교회론적인 특징, 즉 교주가 실제적으로는 교인들과 직접적으로 관계되어 있어서 목회자는 다만 관리자에 불과한 것과 같은 체제로 되어 있는가 하면 불건전한 번영신학 등도 문제점이라 할 수가 있다.

2. 다락방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

류광수 목사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을 바로 알아야 그의 ‘신화사상’을 바로 알 수 있고, 그의 전체적인 주장이 어떻게 지방교회와 연관되는지 알 수 있다.

1) 삼위일체의 양태론
류광수 목사는 삼위일체에 있어서 양태론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 한다.

“더 확실한 것은 고린도전서 3장 16절,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우리 속에 성령이 계신다. 우리 안에 누가 계신단 말이지요. 하나님이 계신다. 이것 보고 삼위일체, 그래 삼위일체 교리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단들은 전부 삼위일체를 부인하지요”(EBS 양육 테이프 2).

이 내용은 고려 측에서 류광수 목사의 잘못된 삼위일체론을 통하여 지방교회와의 관련성을 지적하고 나아가서는 인간의 신격화, 즉 지방교회에서 ‘사람이 하나님 된다’라고 하는 신화사상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것을 밝히기 위하여 인용하며 비판한 것이다.

지방교회에서는 하나님이 본질이 하나이지만 구별된 세 인격으로 존재 하신다는 정통 삼위일체와는 다르게 본질도 인격도 하나라는 삼일론을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의 신관은 양태론일 수밖에 없는데, 류광수 목사 또한 그와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이 같은 지적에 대해 개혁측 나용화 교수는 “성자는 성부와 함께 같은 성령을 가지고 계시므로 성부와 함께 한 하나님이시다. 성부는 전체로 성자 안에 내주하고, 성자는 전체로 성부 안에 상호 내주하신다”는 ‘상호내주’를 통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 하나님이 교회 안에 함께 동시에 항상 계신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성경적 진리이므로 성경적이고 개혁주의적이라고 하면서 고려 총회 신학부의 지적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며 다락방을 옹호 하였다.

그러나 나용화 교수의 옹호는 정당하지 못하다. 하나님은 신격, 혹은 본질이 하나이시기 때문에 삼위일체 중 삼위의 하나님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을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며, 위격들이 상호내재 해서 소위 ‘페리코레시스’라 불리는 상호교류와 상호순환이 있어 신성이 분할된 위격들 안에 분할되지 않은 채로 존재하여 세 위격은 각각 자신 안에 동일실체 전부를 갖기 때문에 성부 안에는 성자와 성령이 있고, 성자 안에 성부와 성령이 있으며, 성령 안에 성부와 성자가 있으므로 각 위격은 실체에 관한한 다른 위격들을 완전히 포괄하고 관통한다.

그러므로 이것만 보면 나용화 교수의 옹호가 어느 정도 옳은 것 같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는 갑바도키아의 바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닛사의 그레고리 등 세 교부들의 연구에 의해 상호내주뿐만 아니라 상호구별에 가서야 비로소 정리가 되게 되었으며 오늘의 신앙고백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쉽게 말하면, 삼위간의 상호내재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는 서로 다른 위격들과 공유할 수 없는 특성이 있어서 상호 구별되기 때문에 성부는 성자와 성령이 아니고, 성자는 성부나 성령이 아니며, 성령 또한 성부나 성자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내주를 가리켜 삼위일체라고 하면 안 되는데, 나용화 교수는 그것을 무시하고 각 사람의 심령에 임한 성령의 내주를 양태론적 입장에서 삼위일체라고 한 것을 가리켜 정통 개혁주의 삼위일체라 하며 옹호하고 만 것이다.

물론, 각 사람의 심령에 임하는 성령의 내주를 하나님이 거룩한 영이시다라는 측면에서 성령이라 하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며, 이런 측면에서 성경에는 하나님의 영이나 여호와의 신,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을 성령이라 하기도 하고, 또한 삼위 하나님을 본질이 하나요 분리할 수 없는 같은 하나님이란 측면에서 여호와가 예수님으로 인용되기도 하며, 예수의 영을 성령이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상호 구별된 인격으로서의 삼위를 말할 때에는 성령을 삼위일체라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성육신 하신 분이 성자가 아니라 성부 하나님이 되기도 하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성부라는 ‘성부 수난설’을 주장하게 되기도 하는데, 류광수 목사는 그것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류광수 목사의 삼위일체에 관한 양태론적인 입장은 이 외에도 많이 있다.

다음은 류광수 목사의 <현장복음 메시지>에 있는 것으로, 필자가 보기에는 여기에만 봐도 그의 양태론적 입장이 바글바글한데 이와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버리고 그의 주장을 양태론이 아니며 정통 개혁주의 삼위일체라고 했던 나용화 교수가 이 글을 보면 뭐라고 변명할지 궁금하다.

{ △ 이 예수님께서 지금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3가지 치료가 나타나는 것이다. 요 16:4~24절에 주님 재림 오시는 날까지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성령을 보내사 너희와 영원히 같이 있겠다고 하였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성부 하나님,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성자 하나님, 지금 우리 속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 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시다.
△ 베드로가 이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완전히 힘이 생겨서 바뀌어 버렸다. 바리새인들이 모인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담대히 말했다. “내가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과 사람의 말을 듣는것 중에서 어느 것이 옳은지 생각해 보라.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노라!”고 담대히 말했다.

△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위협하니까,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였다.
△ 이러고 나서 기도하는데, 행 4:29~39절에 성령이 그대로 임하신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역사하신 것이다. 이것이 안 되어지면 여러분의 일이 안되어진다.
△ 행 2:1~13절에 보니까, 마가 다락방에서 기도하는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거기 역사하시는 것이다. 베드로가 힘을 얻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면서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말했는데, 앉은뱅이가 일어나 버렸다. 너무너무 놀라운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계속 터집니다. 겁도 없이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려고 설치는 사울 앞에 주님이 나타나신 것이다. 그 일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 어떤 사람은 큰 실수를 한다. 행 1:8절을 유언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죽었는가? 유언을 하시게? 부활하신 주님의 첫 번째 명령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힘하시면…” 이 말은, ‘나의 영이 너희에게 역사하면’ 이란 말이다.
△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살아계신 증거로 역사하시겠다는 뜻이다. 이 역사가 지금 그대로 일어나고 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

류광수 목사의 이와 같은 주장에는 그의 양태론적 주장들이 그대로 녹아 있는데, 간추려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 그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재림 때까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실 것이라 하면서 성령으로 너희와 영원히 같이 함께 있을 것이라 하셨는데, 그와 같이 모순처럼 보이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같은 하나님’이라는 것, 즉 ‘성부 = 성자 = 성령’이기 때문에 그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라 하였고,

둘째, 베드로가 그 사실을 깨닫고 바리새인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한 다음 기도 했더니 성령이 임하셨는데 그것을 부활하신 주님의 역사라고 하였으며,

셋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다른 보혜사를 약속 하시고(요 14:16~17), 승천하시기 직전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4~5)고 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이 박해를 피해 도망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아 기도하였고, 오순절 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여 제자들이 방언을 하고 각 사람의 위에 불의 혀 같은 것이 갈라지는 모습이 보이게 되었는데 그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부활하신 주님의 역사라고 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라 하였으며,

넷째,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라고 하신 다음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 가셨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어떤 사람들이 그분이 이 세상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이란 뜻에서 유언이라고 한 것에 대해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비판 하면서 성령의 예고를 “나의 영이 너희에게 역사하면”이란 뜻으로 바꾸어 인격적으로 구별되는 제 2위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영과 성령을 같은 분으로 본 것 등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16~17절에서 제자들에게 분명히 당신이 떠나가서 ‘다른 보혜사’를 보낼 것이라 하셨고, 그 다른 보혜사가 제자들의 ‘속에 거하실 것’이라 하셨다. 그러므로 오순절 때 다른 보혜사로 오셔서 성도들의 속에 계신 성령과 그분은 분명히 인격적으로 구별되는 분이시다. 그런데도 류광수 목사는 그것을 정면에서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하나님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된 세 인격으로 존재하시지만 본질(본체)이 하나라는 하나님의 존재양식에 대한 표현이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하나님이시지만 성부는 성자나 성령이 아니며, 성자 또한 성부나 성령이 아니고, 성령은 성부나 성자가 아니다. 그런데 류광수 목사는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가 양태론자가 아니며, 그의 주장을 정통 개혁주의 삼위일체라 할 수가 있겠는가!

2) 다락방의 기독론
류광수 목사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인성도 부인한다. 그는 <복음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 하였다.

① 영이신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요 1:14).
△ 우리가 만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길을 여셨다.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② 그러므로 그분은 죄가 없고 그 영은 하나님이십니다(고전 15:45).
△ 고전 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③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④ 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가진 분입니다(마 16:16~19). -영은 하나님이시고 몸만 사람의 몸을 입고 계신 분이 예수님이다.

류광수 목사는 성육신의 목적을 설명하는 가운데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고 하며, “그 영이 하나님이므로 죄가 없다”는 주장을 하다가 “영은 하나님이고 몸만 사람의 몸을 입고 계신 분이 예수”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인성의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였다. 즉, 사람이라면 영혼과 육체가 있어야 온전한 사람이라 할 수가 있는데, 그는 예수님에게 있어서 인성의 영혼이 없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영이 있다고 함으로 그분이 참 사람도 되신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분의 인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이단이다.

그러면 류광수 목사는 양태론 뿐만 아니라 왜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일까?

3. ‘비밀’이란 단어로 구성된 다락방의 교리들

다락방의 교리는 주로 ‘비밀’이란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복음의 비밀’, ‘그리스도의 비밀’, ‘영접의 비밀’, ‘언약의 비밀’, ‘삼위일체의 비밀’, ‘임마누엘의 비밀’ 등이 곧 그것인데, 이것들은 상호간에 깊은 관계가 있다.

다락방에서 말하는 ‘복음’과 ‘복음의 비밀’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을 의미하며, 그리스도는 예수님이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직을 가지고 있다는 그분의 삼중직을 의미하고, 영접의 비밀은 그 삼중직을 가지고 계신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임마누엘의 비밀은 그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분이 우리와 임마누엘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락방의 이와 같은 주장들은 겉으로 보기엔 정통교회의 주장과 별반 다르지 않게 보인다. 그러나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핵심적인 것에서 서로 의미가 다른 것을 알 수가 있다.

다락방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핵심 교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다. 그들은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다 하면서 사람들은 이리 저리 얘기하지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칭찬하시고 그에게 천국 열쇠를 주었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고, 그것을 증거 하는 것이 다락방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런 것만 보면 다락방의 주장은 정통교회와 같아 보인다.

그리스도란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보면 세 가지 직분 자를 세울 때 기름을 부었으니 곧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였다. 다락방에서는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강조하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야 한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강조한다.

사실, 이와 같은 주장도 정통교회의 주장과 같아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그 삼중직의 의미가 정통교회에서 말하는 의미와 다르기 때문에 다락방에서 주장한 그리스도는 정통교회에서 말한 그리스도가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국 정통 교회와 다른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제 그들의 ‘비밀 시리즈’가 무엇이 문제인지 류광수 목사의 신학사상을 통하여 차근차근 살펴보자.

1) 베뢰아 귀신론과 동일한 사탄신학
다락방에서는 베뢰아 귀신론과 같이 귀신이 자신의 수명을 다 하지 못하고 죽은 불신자의 사후의 영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한사코 자신들이 베뢰아 귀신론이 아니라고 항변 한다. 그러나 그들의 기본적인 주장은 베뢰아 귀신론과 동일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인류의 모든 불행이 창세기 3장에 나타난 사건 때문이며, 인간의 타락의 원인은 사단의 유혹 때문이고,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인류는 사단의 종이 되어 그의 영향아래 있으므로 헤어 나오지 못할 운명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각종 사고나 질병, 실패 등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고 한다.

한 마디로 말해 모든 문제는 사탄 때문에 일어난다고 하면서 사탄을 멸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하며, 사탄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라 하기도 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논리 형식은 베뢰아와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락방의 교주라 할 수 있는 류광수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축복이 회복되었습니다”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기도 한다.

“창세기 1장 27~28절에 원래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는데, 창세기 3장 1~6절을 보니 마귀에게 이 축복을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요한일서 3장 8절에 예수님께서 이것을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래서 회복이 되었는데 옛날과는 다릅니다. 복음을 통해서 회복된 것입니다. 예전에는 예수님 없이 바로 누렸는데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부터는 복음을 통해서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찾아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비밀입니다”(류광수, <파급단계>, p.95).

인간은 마귀 때문에 축복을 빼앗긴 것이지 마귀에게 빼앗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마귀에게 축복을 빼앗겼다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그렇다면 마귀는 인간이 가지고 있던 축복까지 가져갔으니 축복받은 존재가 되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류광수 목사는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는 요한일서 3장 8절에 있는 성경 구절의 내용까지는 쓰지 않았지만 그는 그 구절을 이용하여 예수님께서 그것을 회복시키셨다고 한다.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다 찾아냈는데 그것이 비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비밀이라고 한 이 주장부터가 그의 비밀이라고 하는 주장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궁극적으로는 타락하기 이전보다 더 놀라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죽음도, 고통도, 눈물도, 한숨도, 질병도 없는 영원한 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님의 재림 이후에 최종적으로 구원이 완성되어 영화로운 몸이 되었을 때에 그렇게 된다는 것이지 지금 현실적으로 그렇게 된다는 것은 아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통해 구원받아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하더라도 ‘아직’ 최종적인 구원의 상태인 영화로운 몸이 되지 않았고, 천국 또한 어떤 의미로 보면 ‘이미’ 임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아직’ 임하지 않아 완성된 천국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이후에 변해버린 가시나무와 엉겅퀴가 있는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타락하기 이전과는 다르게 죽기도 하고 병들기도 하며, 또 때론 자연의 재해를 통해 고통을 당하며 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락방에서는 이 차이를 무시하고 주님의 복음을 통하여 창세기 3장에서 타락하기 이전의 복을 다 찾아 누리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락방의 비밀 교리들은 이미 여기에서부터 잘못된 것이다.

2) 다른 복음
다락방에서는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그리스도의 비밀’이라 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을 ‘영접의 비밀’이라 하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을 ‘복음의 비밀’이라 하고, 성령의 내주를 ‘임마누엘의 비밀’이라고 하는데, 이 임마누엘의 비밀로 이끌어가는 것이 양태론인 ‘삼위일체의 비밀’과 아폴리나리우스 사상과 같은 예수님의 성육신이며, 그들이 성육신과 성령의 내주를 같은 것으로 보는 이유이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하나님의 자녀에게 임하신 성령의 내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성육신은 삼위일체 중 제 이 위의 하나님이신 성자께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당신의 인격으로 우리와 같은 마리아의 살과 피를 취하여 참 하나님으로써 참 사람이 되신 사건이다. 그러나 그분이 비록 인성을 취하여 사람이 되기는 하셨지만 성자 하나님의 인격으로 오셨기 때문에 두 분이 아니라 한 분 그리스도시요 주로써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써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되신다. 그분은 하나님으로써의 중단됨이 없이 인성을 취하여 신·인이 되신 사건이 바로 성육신인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임한 성령의 내주는 성육신과 다르다.

성령의 내주는 성자 하나님과는 구별되신 성령께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을 기억나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시며(요 14: 26), 그분을 믿고(요 16:7~11),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보증하시고 인치신 것으로(엡 1:13), 거듭나게 하기 위하여 성도들의 심령에 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내주는 성육신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 되는 것은 결코 아니며, 성령이 임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다락방에서는 이 둘을 같은 의미로 보기 때문에 각종 ‘비밀’이라 칭하는 교리들이 나타나게 된 것이며, 인간이 성령의 내주를 통하여 마치 하나님이 되기나 한 것처럼 ‘천사 동원권’, ‘사탄 결박권’ 등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세를 사람도 행한다 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주장들은 우리가 믿는 복음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복음이다.

3) 다른 그리스도
다락방에서 정통교회와 다른 복음을 주장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그리스도라는 개념이 정통교회에서 믿고 있는 그리스도란 개념과 다르기 때문이다. 다락방의 류광수 목사는 다음과 같은 주장들을 한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세 가지로 압축이 되며 그것도 한가지로 압축됩니다.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창 3:1~20). 그것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났습니다(롬 3:23). 그 배후에는 사단이 미혹하여 인간을 실패시킨 것입니다(요 8:44). 이 문제를 해결한 분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실제로 발견해야 합니다”(류광수, <성경적인 다락방 전도>, p.49).

“근본 문제 해결 - 그리스도다.
근본 원인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서 간단하게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란 말은,
① 사단을 꺽은 왕이다. 기름부음 받은 자 이런 말은 할 필요가 없어요. 전도하는데…그렇죠. 그리스도란 말은 사단을 꺽은 왕이라 그 말입니다.
② 그리스도라는 말은 하나님의 성령이 임할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소개하는 선지자라는 그 말입니다. 성령이 임하죠? 말씀을 따라 성령이 임하니까. 선지자가 말씀을 전하지 않습니까?
③ 그리스도 이 말은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와 실패를 전부 해방시켜 버리신 제사장이라는 말입니다.
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지금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고 정말 내가 마음에 믿고 기도하면 그 날부터 성령이 내게 역사하는 것인데 그것을 보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류광수, <기본 메시지>, 1집).

“그리스도를 바르게 아는 자는 어떤 것을 알고 있는 자입니까?
① 그리스도는 창 3:1~20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참 선지자).
② 그리스도는 롬 3:23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참 제사장).
③ 그리스도는 요 8:44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참 왕).
이 사실을 아는 자는 모든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류광수, <성경적인 다락방 전도>, p.17).

“‘그리스도’라는 증거에서 초대교회의 모든 문제해결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도란 말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글자의 의미는 알아도 사실을 몰랐습니다. 여기서 유대인은 구원을 얻지 못하는 실패에 빠졌고, 초대교회는 이 의미의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세상을 살렸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선지자, 제사장, 왕에게만 기름을 붓는데 바로 예수는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되는 참선지자라는 말입니다(요 14:6). 죄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가는 참 제사장이라는 말입니다. 세상과 사단을 이긴 참된 왕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을 구원 혹은 성령의 내주(요 1:12, 요 14:16~17, 고전 3:16)라는 것입니다. 구원과 평안의 증거가 실제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분을 구주로 영접할 때 참 제사장의 증거인 해방(미신, 점, 죄, 지옥, 모든 악한 것)되는 증거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증거했습니다”(류광수, <성경적인 다락방 전도>, p.11)>

“그렇다면 전도는 무엇입니까?
①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마4:19, 막3:14~15, 마28:18~20
② 응답하시는 그리스도의 역사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엄청난 비밀을 계속 고백 했습니다.
△ 최고의 지식이 그리스도를 얻는 것입니다(빌 3:1~7).
그리스도의 비밀을 발견하면 모든 것을 얻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발견되기를 소원했습니다(빌 3:7~8)”(류광수, <성경적인 다락방 전도>, p.30).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정말로 정말로 모든 일의 원인이 되는 사단의 세력을 꺽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 구주로 영접하면 거기에서 해방됩니다”(류광수, <기본메시지>, p.2).

진정으로 한 분만 알면 당신 모든 문제가 해결이 다 된다. 진짜 진실하게 얘기했습니다. 당신이 한분만 알면 다 해결된다”(류광수, <기본메시지>, p.3).

이 주장들만 보아도 류광수 목사가 얼마나 베뢰아 사상에 찌들어 있는지 알 수가 있다. 그런데 그는 베뢰아 사상과 같은 주장을 하면서 귀신을 쫓아내는 성락교회의 김기동 목사와 같은 축사를 하는 대신에 그 자리에 ‘그리스도’를 넣고 그리스도가 현실적인 모든 문제를 해결했으므로 그런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다락방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는 ‘사단을 꺽은 왕’으로서의 왕이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로서의 선지자이며, ‘인생의 모든 저주와 실패를 전부 해방시켜버리신 분’으로서의 제사장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생의 모든 문제는 창세기 3장 사건 때문에 생긴 것인데, 인간의 타락의 원인은 사단의 유혹 때문이며,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인류는 사단의 종이 되어 그의 영향아래 있기 때문에 헤어 나오지 못할 운명 속에 살고 있고, 사단은 각종 사고나 질병, 실패 등 모든 문제가 발생하게 하는데 예수님께서 사단을 멸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사단을 꺾고 모든 문제의 원인을 해결했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라 하며, 그것을 ‘그리스도의 비밀’이라 하고, 그런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을 ‘영접의 비밀’이라 하며, 그것을 ‘복음의 비밀’이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락방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와 정통교회에서 믿는 그리스도는 다르다. 왜냐하면 정통교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서 상의 그리스도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문 31 : 왜 그를 그리스도, 즉 기름 부음 받은 이라고 부릅니까?
답 :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성령으로 기름 부어 우리의 대선지자요, 선생으로 세우셨습니다. 선지자로서 그는 우리에게 우리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숨은 결정과 뜻을 완전하게 계시하십니다. 그는 또한 우리의 유일한 대제사장으로 세우심을 받으셔서 자신의 몸을 단번에 제물로 드려 우리를 구속하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늘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영원한 왕으로 세우심을 받으셔서 말씀과 영으로 우리를 다스리시며 다 이루신 구속으로 우리를 보호하시며 보존하십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문 42 : 우리의 중보자를 왜 그리스도라고 부릅니까?
답 : 우리의 중보자를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분이 성령으로 한량없이 기름 부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구별되셨으며, 자신을 낮추신 가운데서나 높이 들림을 받으신 가운데서, 모든 권위와 능력을 충만히 부여 받으셔서 당신의 교회의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의 직능을 다하십니다.

문 43 :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선지자의 직능을 다하십니까?
답 : 그리스도께서는 시대마다 여러 가지 달리 경영하심으로써 사람들을 교훈하고 구원하는 모든 일에 관한 하나님의 온 뜻을 나타내 보이심으로 선지자의 직능을 다하십니다.

문 44 :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제사장의 직능을 다하십니까?
답 :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고자 자신을 하나님께 흠 없는 희생 제물로 단번에 드리심으로써,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계속 중보의 일을 하심으로써 제사장의 직능을 다하십니다.

문 45 :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왕의 직능을 다하십니까?
답 :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세상으로부터 자신에게로 불러내시고 그들에게 직분과 법을 주시고 책망하심으로써 왕의 직능을 다하십니다. 이를 통하여 주께서는 그들을 눈에 보이게 다스리십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택함을 받은 이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부여하십니다. 그들이 순종하면 상을 주시고, 그들이 죄를 범하면 징계하시며, 그들이 시험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거나 원수를 제압하고 정복할 때 그들을 보전하시고 도우십니다. 주께서는 당신의 영광과 백성들의 유익을 위하여 모든 사물을 능력 있게 주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복음을 순종치 않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원수를 갚으심으로써 왕의 직능을 다하십니다.

‘그리스도’란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구약시대에는 세 종류의 직분 자를 세울 때 기름을 부었다. 세 직분은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었는데, 선지자는 자기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며 메시야를 증거 하는 자로써 말씀이 육신이 되어 참된 선지자로 말씀을 가르쳐주실 예수님을 예표 하는 자였고,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써 제사를 집전하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역할을 함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하신 중보자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던 자였으며, 왕은 이방의 왕처럼 절대 권력을 누리며 자신의 뜻대로 통치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인 율법으로 다스리며 그 말씀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백성들을 보호하고 다스림으로써 우리의 왕이 되셔서 말씀으로 다스리시고 보호하실 예수님을 예표 하는 자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란 말,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세움을 입은 자란 뜻이었으며, 이런 의미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예수라는 말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이며 그리스도란 말이 기름이라는 상징을 통하여 그것을 부음으로 그 특별한 직분을 수행하게 했듯이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세우신 자로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고백서에서도 그분이 우리의 선지자로써 우리를 교훈하시고, 제사장으로써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지금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중보의 일을 하시며, 왕으로써 순종하면 상을 주시고 죄를 범하면 징계하시며 책망하고 다스리시며 보호하심으로 왕의 직을 수행하고 계신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다락방에서는 이와 같이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고백서 상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4) 번영신학
‘사단을 꺾은 왕’,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한 그리스도’와 같은 다락방의 그리스도관은 병의 원인이 되는 병원균을 없애버리면 병의 증상도 사라지고 병에 아예 걸리지도 않게 된다고 하면서 병과 죄를 같이 보고 예수님께서 죄를 도말하여버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가 없고 죄를 지을 수도 없다고 하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내용이 들어있는 주기도문을 암송조차 하지 않는 구원파의 논리와 같이 잘못된 것일 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건전하지 못한 번영신학으로 이끌어 간다. 그러나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5) 신화사상
다락방에서는 자기들만의 독특한 그리스도의 삼중직인 ‘그리스도의 비밀’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을 ‘복음의 비밀’이라 하며, 그런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영접의 비밀’이라 하고, 성령의 내주를 성육신과 같은 의미에서 ‘임마누엘의 비밀’이라 하기 때문에 다락방의 이와 같은 주장은 ‘사람이 하나님 된다’라고 하는 지방교회의 ‘신화사상’과 같은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다락방의 류광수 목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리스도’라는 증거에서 초대교회의 모든 문제해결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도란 말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글자의 의미는 알아도 사실을 몰랐습니다. 여기서 유대인은 구원을 얻지 못하는 실패에 빠졌고, 초대교회는 이 의미의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세상을 살렸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선지자, 제사장, 왕에게만 기름을 붓는데 바로 예수는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되는 참선지자라는 말입니다(요 14:6). 죄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가는 참 제사장이라는 말입니다. 세상과 사단을 이긴 참된 왕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을 구원 혹은 성령의 내주(요 1:12, 요 14:16~17, 고전 3:16)라는 것입니다. 구원과 평안의 증거가 실제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분을 구주로 영접할 때 참 제사장의 증거인 해방(미신, 점, 죄, 지옥, 모든 악한 것)되는 증거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증거했습니다”(류광수, <성경적인 다락방 전도>, p.11).

“영접 ― 이 말은 성령께서 우리 속에 내주한다. 그러니까 이 말을 이해해야만 영접이란 말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영접시킨다는 말이 보통 말이 아니지요. 신약에서는 영접이라는 말을 요한복음 1장에서 썼는데 구약에서는 쓰지 않는 말입니다. 그렇지요? 구약에서는 전부 예언이고, 그림자인데 신약에 와서 썼습니다.
구약에는 성령이 임했다. 동행했다. 이 말은 썼지만 성령의 내주란 말은 쓰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시고 난 뒤에 쓴 단어가 성령의 내주입니다. 그렇지요? 이 말을 이해해야만 성령이 우리 속에 오셨다는 이 말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오셨다. 말씀이 육신을 입어 오셨습니다. 그것을 보고 뭐라고 말하느냐? → 성령의 내주!
이것을 이해해야 이해되는 말입니다. 주님이 여러분 속에 오셨다는 그 말이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뭘 주셨으니? ― 권세를 주셨으니…그러니까 창 3:1~20의 모든 것을 다 이루어 버렸어요.
성령의 내주 ― 이 말은 모든 것을 다 회복해 버렸다는 말입니다. 보통 사건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영접해 버리면 몰라서 그렇지 모든 것을 다 회복해 버린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멸망 받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다 회복했어요”(류광수, <기본메시지> 기초 M 모음).

“한 가지 발견 ― 모든 것 발견
2.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
골 1:26, 골 2~3 이 사실을 믿는 자, 확인한 자, 이 비밀을 가지고 누리는 자는 모든 것을 다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을 다 포함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만 만나면 모든 것을 다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빌3:1~6)”(류광수, <성경적인 다락방 전도>, p.90).

“그리스도를 누리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해결하셨고,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류광수, <성경적인 다락방 전도>, p.50).

“전도는 모든 문제 해결
전도는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누리는 말씀운동이다.
1. 전도
(2) 성도의 가장 축복된 하나님의 비밀을 누리는 것입니다(막 3:14~15)”(류광수, <성경적인 다락방 전도>, p.36).

“육체, 사회, 환경, 가정에 병들기 시작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 해 주는 것이 전도입니다. 순서는 영혼구원 → 마음치유 → 환경치유 → 육신치유입니다. 이 순서를 어기면 또 다시 재발합니다(요삼 1;2, 행 8:4~8, 마 8:15~17)”(류광수, <성경적인 다락방 전도>, p.47).

류광수 목사는 정통교회와 다른 그리스도를 주장하면서 성령의 내주로 인한 성도들의 거듭남을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 1:23)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같은 개념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지방교회와 같은 신화사상이 되어 ‘천사 동원권’ 등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각종 권세를 사람이 하게 된다는 그릇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4. 결 론

다락방은 예수님께서 사탄을 멸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는 잘못된 베뢰아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양태론과 아폴리나리우스와 같은 주장을 하였고, 아폴리나리우스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다 결과적으로 그분의 인성을 부인하게 되었지만 다락방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잘못된 그리스도관을 가지고 구원파와 같은 논리 전개를 하여 번영의 신학이 되었으며, 성령의 내주를 성육신과 같은 것이라 함으로 지방교회의 신화사상과 같은 주장을 하게 되어 인간이 마치 하나님이나 되는 것처럼 천사 동원권 등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각종 권세도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다락방은 베뢰아 귀신론을 바탕으로 하여 구원파와 같은 논리전개를 하여 불건전한 번영의 신학으로 나아갔으며, 그 핵심은 지방교회와 같은 신화사상이기 때문에 비복음적이며 반성경적인 가르침이라 할 수가 있다.

충처: 교회와신앙


요세미티 국립공원 안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호수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요세미티의 호수들은

테나야 호수나 미러 호수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호수들은

일반인들이 접근하기에

다소 어려운 장소에 위치해 있습니다.

 

위에 언급한 호수를 제외하면

그나마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쉬운 호수는

엘리자베스 호수, Dog Lake, May Lake 등일 것입니다.

 

타이오가 호수나

엘러리 호수는 접근하기 쉽지만

이 호수들은 국립공원 바깥에 위치해 있지요.

 

일반적으로

호수가 아름답다는 것은

호수 자체가 아름답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호수 자체는

볼품이 없다 할지라도

호수가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서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할 때도

호수가 아름답다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요세미티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는

이론의 여지없이 단연 Cathedral Lake일 것입니다.

 

 

커씨드럴 호수는

일반인들이 접근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게다가

가는 길도 만만치 않아서

선뜻 쉽게 갈 수 있는 호수는 아닙니다.

 

 

 

하지만 커씨드럴 호수는

주변의 멋진 풍경과 어우러져서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는 호수입니다.

 

 

 

커씨드럴 호수는

Upper 호수와 Lower 호수가 있습니다.

 

 

Lower든 Upper든

어느 곳에서 바라 보더라도

Cathedral Peak이 보이기 때문에

 

이 호수의 이름이

커씨드럴 호수로 명명되어 졌습니다.

 

참고로

커씨드럴 봉우리는

해발 10,912ft(약 3,326m)입니다.

 

 

커씨드럴 봉우리는

끝부분이 대성당의 첨탑처럼

뾰족하여서 커씨드럴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커씨드럴 호수로 가는 길은

쟌 뮤어 트레일(JMT)선상에 있기 때문에

JMT 주자는 반드시 거쳐가게 되는 길이기도 합니다.

 

 

커씨드럴 호수로 가는 길은

트알르미 메도우즈 부근에서 시작되는데

 

이 길(Tioga Road)은

겨울부터 봄까지는 close 되기 때문에

5월 중순 이후부터 10월 중순 사이에만 갈 수 있습니다.

 

 

트레일헤드는

트알르미 메도우즈의

방문자 센터에서 서쪽 약 1마일 지점에 있는데

 

이곳에서 Lower까지 3.5마일,

Upper까지도 약 3.5마일입니다.

 

 

Upper와 Lower를 동시에 볼 경우

먼저 Lower까지 갔다가 돌아 나와서

Upper까지 약 1마일을 다시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트레일헤드에서 출발하여

두 군데를 모두 다 볼 경우에

약 8마일 정도의 거리를 걷게 됩니다.

 

 

커씨드럴 호수의

Lower는 9,288ft(약 2,831m),

Upper는 9,585ft(약 2,922m)의 높이에 있습니다.

 

 

커씨드럴 호수는

석양이 매우 아름다운 곳입니다.

 

여름의 경우

석양을 촬영하고 나온다면

아무리 빨라도 밤 11시가 되어야

트레일헤드까지 다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석양을 촬영한 후에

커씨드럴 호수 주변에서 자는 것이 좋은데

 

이곳은

월더니스 지역이라서

하룻밤 캠핑을 하기 위해서는

레인저 스테이션에서 퍼밋을 받아야만 합니다.

 

 

캠핑할 경우에는

곰이 서식하는 지역이라서

음식은 반드시 곰통에 보관해야 합니다.

 

 

요세미티에 가신다면

시간을 내어 커씨드럴 호수에 가보세요.

 

그러면

당신은 요세티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를 보게 될 것입니다.

 

 

사진과 글 : 미서부 사진여행 오지여행 전문가 주안(POWER 21)



 
 


 
 
이란...   
 
 
 행복 작습니다.
거창하고 큰 것에서 찾지 마세요. 
멀리 힘들게 헤매지 마세요. 
비록 작지만, 항상 당신 눈앞에 있답니다. 
 
 행복 이기적입니다.
자신을 돌보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남의 시선 따위는 무시해 버려요. 
스스로 행복하지 않으면 아무도 도울 수 없답니다. 
 
 행복 연습입니다
그냥 주어지는 행운의 복권이 아닙니다. 
부지런히 노력하고 연습해야 얻을 수 있는 열매입니다. 
가는 길은 만 갈래지만 방법은 하나랍니다. 
 
 행복 투자입니다
미래가 아닌 현실을 위해 남김없이 투자하세요.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내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을 온전하게 쓸 수 있어야 한답니다. 
 
 행복 공기입니다.
때로는 바람이고 어쩌면 구름입니다. 
잡히지 않아도 느낄 수 있고.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답니다.
 
 행복 선물입니다. 
어렵지 않게 전달할 수 있는 미소이기도 하고.  
소리없이 건네 줄 수 있는 믿음이기도 합니다. 
가장 달콤한 포옹이랍니다. 
  
 행복 소망입니다. 
끝없이 전달하고픈 욕망입니다.  
하염없이 주고 싶은 열망입니다. 
결국엔 건네주는 축복입니다. 
 
 행복 당신입니다.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당신입니다.  
변함없이 사랑하는 당신입니다. 
이미 당신입니다. 
 

 - 좋은 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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