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도/ 최송연 주님을 만났노라 외치는 사람 심히 많으나… 외로운 영혼 찾아 만나주는 사람 너무 적네요 주님의 사랑을 받았노라 자랑하는 사람 심히 많으나… 이웃에게 작은 사랑 나누어 주는 사람 너무 적네요 주님의 용서를 받았노라 큰소리치는 사람 심히 많으나… 내게 잘못한 형제를 용서해 주려는 사람 너무 적네요 아버지여, 나로 하여금 주님을 만났노라 외치는 사람 되기보다는 외로워 우는 자를 찾아가는 발걸음 이게 하시고 주님의 크신 사랑을 입으로 논하는 자 되기보다는 병들어 우는 이웃을 찾아가는 작은 손길 이게 하시며 주님의 용서 하심을 받았노라 외치는 사람 되기보다는 내게 악을 행한 이웃마저 따뜻이 품어 줄 수 있는 당신 닮은 그런, 넉넉한 가슴 이게 하소서. "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2: 17절."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 호수  (0) 2014.11.20
이제 나는 믿을 수 있습니다  (0) 2014.11.18
영혼의 빛, 미소  (0) 2014.11.07
내 가슴에 영원히 계신 당신  (4) 2014.11.07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  (0) 2014.10.29





    1. Valley of Flowers National Park, India


2. Five Flower Lake, China

3. Hitsujiyama Park, Japan



4. The Great Barrier Reef, Australia

5. Yuanyang County, China

6. Lavender fields in France

7. Lake Hillier in Australia

8. Braunwald, Switzerland

9. Red Sea Beach, China

10. Tulip fields in the Netherlands



11. Grand Prismatic Hot Spring, Wyoming

12. Cornwall, England

13. Alberta, Canada


      14. Luoping, China

14. Luoping, China

15. Shark Bay, Australia

16. Pamukkale, Turkey

17. Kawachi Fuji Gardens, Japan

18. Hokkaido, Japan

19. Vermont in Autumn

20. Cano Cristales River, Columbia



21. Namaqualand, Namibia 



22. Juneau, Alaska



거짓된 체험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 결과가 일반적으로 교만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체험을 끊임없이 말하자고 그것을 떠벌리고 또한 현상적인 국면에만 강조를 하게 합니다. 재잘거리며 거짓된 안전감을 가지고 삶에 있어서 게으름을 가져옵니다.

 

그 거짓된 체험에 말려 든 사람들이 그것을 추구함이 없이 또한 거룩을 위해서 애쓰는 것 없이 이러한 체험을 가지게 될 때 어째서 그들이 이제 와서 거룩을 좇아가려고 진력하겠습니까? 그들은 그것을 가졌고 그것이 그들에게 일어났으며 그들은 완벽합니다. 언제나 입심 좋게 재잘거리고 완고한 정신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 거짓된 체험에 있어서 겸손이란 없으며 온유함도 없고 체험을 받을 때나 받은 후에도 언제나 완고합니다. 다만 육신적인 자기 만족과 이러한 자기들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떠벌리기를 좋아하여 야단법석을 떱니다.

 


참된 체험의 결과들은 전적으로 다릅니다. 디엘 무디는 뉴욕시의 윌 스트리트가를 걷고 있을 때에 성령이 자기에게 임했는데 그때에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언제나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너무 거룩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거의 무서웠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다같이 그것이 말로 묘사되기에는 너무 어렵다는데 의견을 같이 합니다.


 

그것이 너무나 초월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참으로 묘사해 낼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압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지는 그의 사랑을 받아본 자 밖에는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거짓된 체험을 하게 될 때에 그 사람은 그러한 어려움이 없습니다.


마귀의 가공품인 그러한 체험은 과장으로 인도하고 또한 기만을 당한 사람은 불덩어리를 묘사할 수도 있고 전류나 뜨거운 기운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정의상 참된 체험은 묘사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돌아다니면서 자기의 체험을 떠벌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감추어진 만나요 흰 돌입니다.

 

 

가져온 곳 :  카페 >(안산) 회복의 교회|글쓴이 : 전상범|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성경과 세상 / 아더 핑크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요일 5:4)

신약 성경은 세상과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대해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세상의 참된 본질에 대해서도 분명히 규정하고 있고, 신자들에게 세상에 대하여 근엄하게 경고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은 이 “어두운 곳”(벧후 1:19)을 비추는 하늘로부터 온 빛이다. 말씀의 거룩한 광선은 만물의 진정한 색채를 드러내며, 수많은 물체를 가리고 있는 거짓된 외관과 신비한 매력을 꿰뚫고 그 실상을 드러낸다. 성경에서는 많은 수고가 필요하고, 많은 돈이 소비되며, 눈이 먼 얼뜨기들에 의해 지나치게 높은 찬양과 경탄을 받는 세상이 ‘하나님의 적’으로 선포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을 따르거나 사랑하는 일은 금지된다.

지금 우리가 다루는 주제는 지금까지 다뤄 온 주제들에 비해 그 중요성이 결코 작지 않다. 그리고 진지한 독자라면 그것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헤아려 보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자녀들에게 하시는 권면들 중 하나는 이렇다.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 각자가 자신이 이와 같은 경우에 해당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정직하고 성실하게 자신을 살펴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우리는 성경에 대해 단순히 머리로만 아는 지식이 늘어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우리의 실제적 성장, 즉 그리스도의 형상을 실제로 닮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점검할 수 있는 한 가지 요점은 이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일이 나를 보다 덜 세상적으로 만들고 있는가?”

 

1. 세상의 참된 본질을 알게 된다

어느 시인은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옳다”고 노래한 바 있다. 이것은 어떤 관점에서는 옳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완전히 잘못이다. 왜냐하면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요일 5:19) 처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초자연적인 가르침을 주실 때에만 사람 중에서 높임을 받는 것이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눅 16:15)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세상은 언젠가는 안개처럼 없어질 것이 분명한 거대한 속임수, 속 빈 강정, 더러운 물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그것은 크게 감사할 일이다.

논의를 더 진행하기 전에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해서는 안 되는 '세상‘에 대해 정의를 내려 보자. 성경에서 이보다 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 단어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런 문맥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대개 그 의미가 드러난다.

세상은 그 자체로 완벽한 사물의 체계나 질서다. 어떤 외부적인 요인도 그 속을 침투하지 못하며,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신속하게 세상에 순응하거나 동화된다. 세상은 동료 인간들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또한 자신의 성향에 따라 인간사회의 틀을 형성하고 있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육신의 생각”이라는 견고한 왕국을 건설한다(롬 8:7). 육신의 생각이 있는 곳에 세상이 있다. 그러므로 세속성이란 곧 하나님이 없는 세상을 의미한다.

 

2. 세상이 우리가 맞서야 할 대적임을 알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딤전 6:12)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대적하고 정복해야 할 원수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부, 성자, 성령의 ‘거룩한 삼위일체’가 있듯이, 육신, 세상, 마귀의 ‘악한 삼위일체’도 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들과 치명적으로 싸우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 여기에서 ‘치명적인’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이 싸움에서 마귀가 우리를 파멸시키든가. 아니며 우리가 마귀를 물리치든지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치명적인 적‘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또한 마음으로부터 세상을 쳐부수지 않는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왜냐하면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다(요일 5:4).

우리가 세상을 이겨야만 하는 이유들 중 몇 가지를 꼽아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세상적인 유혹들은 우리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소원하게 만든다. 이것은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박에 없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로부터 마음이 멀어지게 하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세상의 영은 그리스도의 성령을 철저히 반대한다. 그런 까닭에 사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고전 2:12).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왔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요 1:10). 그러므로 이세상의 관원들과 지배자들은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전 2:8).

셋째, 세상적인 관심과 염려는 경건하고 천성적인 삶을 살지 못하도록 만든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1주일에 6일 동안 열심히 일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일하는 동안 그들은 계속해서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탐욕스런 관심사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에 의하지 않고서는 세상을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 영원한 존재로 가득 차 있을 때, 그것은 세상적인 것들의 부패한 영향력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다. 믿음의 눈은 만물의 진정한 색깔을 분별할 수 있으며, 그것들의 공허하고 헛될 뿐 아니라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영원한 것들과 비교할 가치조차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임재에 대한 체험은 세상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볼 수 있게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셔서 성도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중보하시며 성도의 최종적인 구원을 위해 만물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거룩한 구주를 바라볼 때, 그들은 이렇게 고백하게 된다. "주님 외엔 이 세상에서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드는가? 당신은 앞에서 논의된 내용들에 진심으로 동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도 그러한가?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높에 평가하는 것들이 마음을 사로잡고 매혹하지는 않는가? 그들이 즐거워하는 또한 그 안에서 불행해지는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떠나라. 당신도 그런 것들로 인해 울고 웃는가? 아니면, 당신의 기쁨과 만족은 아무도 당신으로부터 빼앗아 갈 수 없는 것들 안에 있는가?

바라건대 이런 질문들을 가볍게 취급하지 마라.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이것들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 이에 대한 정직한 대답은 당신의 영혼이 진정으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알려 주는 지표가 될 것이고, 또한 당신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 여기면서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의 여부를 알려 줄 것이다.

 

3. 세상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모든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기 위해서(마 5:17).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요일 3:8),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지 위해서(살전 1:10),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마 1:21)뿐 아니라, 이 세상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세상의 미혹케 하는 영향력으로부터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오래 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루실 때 이미 예고되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노예였고, 이집트는 세상의 모형이었다. 그들은 바로를 위하여 벽돌을 만드는 일로 시간을 보내면서 모진 종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종살이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분의 전능하신 손길로 그들을 해방시키시고 쇠로 만든 화덕으로부터 끌어내셨다.

그리스도 역시 자신의 백성들에게 같은 일을 하신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의 마음을 짓누르는 세상의 권세를 깨부수신다. 그분은 자기 백성들이 세상의 호의를 얻기 위해 안달하지도 세상의 협박을 두려워하지도 않게 하기 위해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독립시키신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로 주셨다. 그 결과 그들은 이 세상의 모든 악한 것들의 정죄하는 힘과 지배하는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왕죄를 차지하고 있는 사탄으로부터,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허탄한 욕망으로부터,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공허한 대화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성도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도 이 복된 사역에 그리스도와 함께 동역하신다. 성령께서는 그들의 생각과 애정을 세상적인 것들이 아니라 천상의 것들로 향하게 하신다. 성령께서는 그 권능의 역사를 통해 그들을 주변의 비도덕적인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늘의 기준을 따르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이 은혜 안에서 성숙해지면, 그는 기준을 깨닫고 그것에 따라 행동한다. 그는 이 험악한 세상으로부터 완전한 구원을 바라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해주시기를 간구한다. 그는 한때 그를 매혹시켰던 것들에 대해 험오감을 느낀다. 그는 자신의 복되신 주님이 너무나 비참하게 수모를 당하신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고대한다.

 

4. 우리의 마음이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요일 2:15). “걸림돌이 행인에게, 몸무게가 육상선수에게, 올가미가 하늘을 나는 새들에게 문제가 되듯이, 세상에 대한 사랑은 삶의 여정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문제가 된다. 그 사랑이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게 하든, 그 속으로 깊이 꼬여 들이든, 혹은 억지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던 간에 말이다”(나다나엘 하디, 1660)

우리는 마음이 이러한 부패로부터 깨끗해지기 전에는 하나님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다. 우리가 시간과 감각에 속한 것들을 초월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순종에 이르지 못한다. 마치 둥근 물체 위에서 물이 미끄러지듯이, 하늘의 진리 역시 세상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서 미끄러져 내린다.

세상은 그리스도에게 등을 돌렸다. 비록 많은 곳에서 그분의 이름이 불리기는 하나, 세상은 사실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세상적인 것들이 의도하는 모든 것은 자기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세상의 목표와 추구는 댜양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자기를 만족케 하는 것이 종속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살고 그곳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정하신 시간동안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그들은 세상에서 생계를 유지해야 하고 가족들을 부양해야 하고, 세속적인 일들에 참여한다. 하지만, 세상이 그들을 행복하게 할지라도, 그들은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보화와 몫은 다를 곳에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타락한 사람들의 모든 본능에 호소한다. 세상에는 그들을 유혹하는 온갖 것들로 넘쳐난다. 그것들은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그 눈길은 그것들을 향한 욕망과 사랑을 부추기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람k들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심어 놓는다. 세상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똑같이 치명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아무리 매력적이고 호소력이 있는 유혹거리가 많다고 하더라도, 세상의 모든 기쁨과 추구 오직 이 세상에서의 행복만을 증진시킬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 16:26), 막 8:36, 눅 9:25).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다. 그리고 그들의 영혼에 그리스도가 나타나심으로써 세상에 대한 생각을 바꾼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나타나면 아주 쉽게 이전 것을 집어던지듯이,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심령은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자 함이라고 고백하게 된다.

 

5. 세상과 구별된 길을 걷게 된다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약 4:4). 이런 구절은 우리 모두룰 철저히 파고들어 우리를 전율하게 할 것이 분명하다. 어떻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님께서 정죄하신 것들과 친하게 지내고 그 안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되는 동시에 나는 그리스도와 원수가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실수하지 말기를 바란다. 성경은 권고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구역 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 이렇게 적혀 있다.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그를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민 23:9). 거듭난 사람은 그 성품과 행실과 소원과 추구하는 바에 있어서 거듭나지 않은 사람과 분명한 차이가 있어야 한다. 다른 나라의 시민권을 가졌고, 다른 영의 인도를 받고, 다른 지배자의 통치를 받고, 다른 행선지로 여행하고 있다고 고백하는 우리가 그 모든 것들을 멸시하는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특징을 잘 드러내도록 하자. 우리가 이 세대를 본받지 않기 때문에(롬 12:2)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기이히 여기게 되기를...(슥 3:8).

 

6. 세상을 미워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세상에 겉모습을 보존하고 그 모습을 그럴듯하고 훌륭한 상태로 유지하기는 얼마나 힘이 드는가! 세상의 관습과 예의, 호의와 관용 등은 세상에 점잖은 분위기를 주기 위해 고안된 장치들이다. 세상의 이면에서 들끓고 있는 타락상을 그럴듯하게 얼버무리기 위해서는 교회와 성당, 사제들과 고위 성직자들도 필요하다. 세상에 중요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기독교가 추가되고, 그리스도의 멍에를 한 번도 메어본 적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입술에서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이 읊조려진다. 그들에 대해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 15:8).

그렇다면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그것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 성경의 대답은 분명하다.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후 6:17). 그렇다면 우리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좋할 때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당연히,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말씀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여기에서 말하는 세상이란 구제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가? 비로 앞 구절이 해답을 제공해 준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어떤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그분을 죽음에까지 내몰았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l하여 가장 열심을 내는체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종교적인 세상’이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기독교에 등을 돌리게 해보자,. 그러면 그들의 가장 격렬하고 가장 무자비하고 파렴치한 원수는 스스로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들어날 것이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리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12).

종교적인 세상이 당신을 미워하라 때 그것은 당신이 말씀으로부터 유익을 얻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이자 건강한 표시다. 그러나 당신이 교회나 회중들 사아에서 좋은 지위를 갖고 있다면, 당신이 하나님의 칭찬보다 사람들의 찬양을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마음으로 살펴봐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7. 세상을 초월하게 된다

첫째, 우리는 세상의 관행이나 유행을 초월해야 한다. 세상적인 사람들은 그 시대에 만연하고 있는 관행이나 유행의 노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것이다(엡 4:13).

둘째, 세상의 염려와 슬픔을 초월해야 한다. 성경은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한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앓이라”(히 10:34).

셋째, 세상의 유혹을 초월해야 한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자들에게 세상의 화려한 빛과 현란함은 무슨 매력이 있겠는가? 아무것도 매력적이지 않다.

넷째, 세상의 견해와 인정은 초월해야 한다. 당신은 세상을 초월하고 그것에 맞서는 것을 배워 본적이 있는가? 만약 당신의 온 마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에 맞추어져 있다면, 당신은 불경건한 이들의 비난에 전혀 마을 두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이 장에서 다룬 내용으로 자신을 헤아려 보기를 참으로 원하는가?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해 보라.

첫째, 여가 시간에 당신의 마을을 사로잡는 대상은 무엇인가? 당신의 생각이 가장 많이 머무는 대상은 무엇인가?

둘째, 당신이 선택하는 대상은 무엇인가? 평일 저녁이나 주일 저녁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경절할 때,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는가?

셋째, 당신은 어떤 경우에 가장 슬퍼하는가? 세상적인 것을 상실했을 때인가, 아니면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지 못할 때인가? 당신은 어떤 일에 더욱 크게 애통(혹은 분통)하는가? 당신의 계획이 망쳐졌을 때인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향한 당신의 마음이 냉랭해졌을 때인가?

넷째, 당신이 즐겨하는 대화의 주제는 무엇인가? 당신은 그날의 뉴스에 매달리는가, 아니면 모두가 깊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가?

다섯째, 당신은 선한 의도를 실천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런 것들이 단지 공허한 망상에 지나지 않는가?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는 시간이 더 많아지고 있는가, 아니면 적어지고 있는가? 말씀이 꿀보다도 더 달콤한가, 아니면 말씀의 맛을 잃어버렸는가?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