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5대교리 네번째 / 불가항력 은혜(Irresistible Grace)

 

 

개혁주의 성경공부

제 4 강

칼빈주의 5대 교리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1.도입

 

  우리는 지난 강의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택은 죄로부터의 구원을 전제하는 바 죄를 없이해 주시는 속죄교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살펴봤습니다. 아울러 선택이 다수 중에 일부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서 택정하시는 주권적 사역으로 인해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 또한 전 인류가 아닌 바로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제한적(制限的)으로 적용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공효의 능력은 전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무한한 것이지만 공효의 범위와 대상은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해서 예정하신 자들에게만 차별적이고 선별적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사역의 효력이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어떤 방식을 통해 미치는지에 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를 일컬어 종교개혁자들은 불가항력적 은혜 또는 유효적 소명(effectual calling)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택자들을 구원에로 부르실 때 사람 편에서 의지적으로 거부하거나 저항하면 성령의 사역은 훼방을 받아 목적이 좌절될 수도 있다는 교리에 대한 반동으로 나와진 내용이며 동시에 철저히 성경에 기초를 둔 교리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자들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셨으면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를 구원에로 인도하시며 이 과정에서 선택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어떤 방식을 통해서도 결코 거부할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가항력적’이란 용어를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하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를 강제로 납치하거나 유괴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억지로 강요해서 인간의 뜻을 거스려 역사 하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불가항력적 은혜에서 말하는 ‘불가항력적’이란 단어의 올바른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불가항력적이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셔서 택자들의 심령 속에서 역사하게 하시면 그들의 영혼이 거듭나게 되며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복음을 받아들여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백성에 편입된다는 말입니다. 이는 성령님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택하신 자와 그리스도께서 대신해 죽어주신 모든 자들로 틀림없이 예수님을 구주와 하나님으로 믿게 하신다는 사실을 내포합니다.

 

    오늘 강의에서는 유효한 부르심으로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의 도리에 대해서 보다 면밀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의 효력을 구체적으로 적용시켜 실제적 구원에로 부르시는 직접적이고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하나님의 구원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이 사역을 주도적으로 수행하신다고 기록합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구원은 실로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의 공동의 사역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2.전개

 

    불가항력적 은혜와 유효적 부르심이란 같은 내용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동일하게 하나님의 택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사역 안에서 효과적으로 불러내셔서 구원에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을 가리킵니다. 이때 성령께서 이 사역을 주도적으로 수행하십니다. 이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외적 부르심(outward calling)

 

    외적소명을 일명 외소(外召)라고 부릅니다. 이는 먼저 구원받은 성도들이나 전도자들에 의해 십자가의 복음이 불특정 다수나 개인을 향해 전해지는 것을 가리켜 부르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누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고 권고합니다(딤후4:2).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십니다(막16:15). 이 뿐만이 아닙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하십니다(마28:19).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라고 촉구하십니다(행1:8). 이는 전파하는 자가 없이는 복음을 들을 수 없으며 듣지 못하면 믿을 수도 없는(롬10:14) 구원의 기본도리에 근거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속죄사역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은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한결같은 의무이며 책임입니다. 누구도 이 직무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도 알지도 못하는 고로 전도의 미련한 방식을 통해 주님의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셨습니다.(고전1:21). 주님께서 친히 제자들을 통해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는 과정에서도 전도의 미련한 방식을 사용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열 두 제자들을 보내셨습니다(눅9:1). 이들은 각 촌에 두루 다니며 처처(處處)에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이 후에 따로 칠십인을 세우셔서 둘씩 앞서 보내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을 전파하라고 이르셨습니다(눅10:1). 이들은 각 동네를 찾아다니며 천국복음을 전했습니다. 병든자를 고쳤습니다. 제자들의 복음을 들은 자들에게는 항상 크게 두 가지의 반응이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즉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과 거절하는 자들이 발견됩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어느 동네를 무론하고 불특정 다수를 향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가리켜 외적 부르심(소명)이라고 일컫습니다.

 

    오늘날도 이런 방식은 변하지 않고 사용됩니다. 이 시간에도 세계 도처에서는 여러 가지 방식과 방법을 통해 십자가의 복음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선교사를 통해 오지(奧地)의 땅에서 그리고 복음이 아직 들어가지 않은 불모지에서 복음은 끊임없이 증거됩니다. 공개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아직은 허락되지 않은 지역에서조차 생명을 불사하고 전도자들의 활약은 중단 없이 진행됩니다. 주님 안에서 먼저 된 자로 복음의 빚진 자로서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심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영적 충동이 우리를 자극해 지속적으로 주님의 보혈의 능력과 효과를 전파하게 됩니다. 이 일은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이런 복음 증거를 신학적으로 외적 부르심이라고 일컫습니다. 따라서 외적 부르심에는 다수의 청중을 향해 대중전도를 하는 경우와 그룹 내지는 개인을 향해 전파하는 개인전도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증거에서 외적 부르심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16:13-14의 말씀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바울의 이차 전도 여행 시 빌립보에서 자주장사 루디아를 만나 복음을 전파하는 광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바울 일행은 안식일에 기도처를 찾아 이곳 저곳을 배회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마침 강가에 앉아 있는 일단의 여인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접근해서 얘기를 나누던 중에 복음을 전파하게 됩니다. 누가는 이때의 광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4절입니다. “두아디라 성의 자주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본절에서 우리가 주의해 봐야 할 부분이 자주장사 루디아라 하는 여인이 바울의 복음을 ‘들었다’는 지적입니다. 이 말은 루디아라는 여자만 홀로 바울의 복음을 들었다는 지적이 아닙니다. 13절에서 보면 강가에는 얼마간의 여인들이 함께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를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라고 기록함으로써 이런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바울은 일행과 함께 기도처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때 강가에 한 무리의 여자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접근합니다. 기도처를 찾고 있었기에 기도처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함이 일차적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내친 김에 복음을 전하려는 강한 내적 충동을 느꼈습니다. 물론 이런 사실이 공개적으로 기록돼 있지는 않지만 바울의 입장과 상황으로 보건대 얼마든지 가능한 추리입니다. 아니 상황의 전개상 이들 여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기도처의 위치를 묻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는 분위기로 전환된 사실을 문맥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 바울과 그의 일행은 이방인을 향한 복음 전파의 사명을 띠고 이곳까지 온 것이기에 말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루디아라는 여인 뿐 아니라 그곳에 함께 모여 있었던 일단의 여자들이 동시에 들었다는 지적입니다. 이렇게 불특정 다수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저들이 들은 사실을 일컬어 외적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오늘날도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도처에서는 앞서 주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있을 것입니다. 개인 전도를 통해서, 교회 차원의 전도집회를 통해서, 또는 의도된 대중전도집회를 통해서 말입니다. 이런 사건들을 일컬어 한결같이 외적 부르심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적 부르심 그 자체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외적으로 전해지면 여기에는 크게 두 부류의 서로 다른 반응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즉 믿는 자와 거부하는 자의 반응이 그것입니다(막16:15-16, 눅9:4-5, 10:5-11). 때문에 외적 부르심은 그것을 듣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기계적으로 구원에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외적 부르심은 내적 부르심을 요구하는 바 내적 부르심을 통해서만이 복음에 반응하여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외적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내적 부르심에 접촉되지 못하면 결코 자의적으로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아울러 내적 부르심에 접촉이 되면 자의적으로 구원을 기피하거나 거절할 수도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을 위한 예정을 기뻐하시는 뜻 안에서 창세 전부터 이미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은 효과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유효한 부르심으로 작용하게 되는 법입니다.

 

내적 부르심(inward calling)

 

    내적 부르심을 내적 소명 또는 내소(內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는 외적 부르심에 대해 상대적인 개념으로 호칭되고 있습니다. 외적 부르심이 사람을 도구로 해서 주님의 복음을 불특정 다수나 소수 또는 개인에게 전하는 것이라면 내적 부르심이란 외적 부르심을 입은 자들 중에 일부를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로 인해 복음에 긍정적으로 반응케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신 속죄와 구속사역을 구체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 다수 중의 일부가 복음에 반응한다는 말의 의미는 이들이 바로 창세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서 선택함을 받은 자들이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적으로 저들의 죄를 속량해 주신 자들을 가리킵니다. 한편 당신의 백성을 부르셔서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일에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활동하십니다.

 

    행16:14에서 다시 보겠습니다.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본문은 세 가지 사건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복음을 ?루디아라는 한 여자가 ‘들었다’는 사실과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었다는 사건과 ?루디아로 하여금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셨다’라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위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한 것을 루디아가 듣게 된 사건이 곧 ‘외적 부르심’이라는 사실에 대해 이미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우리의 생활 현장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를 소위 전도라고 말합니다. 성도는 먼저 복음을 받은 자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에 빚진 자들로서 평생 복음을 전하는 일(전도)에 책임과 의무가 주어진 자들입니다(딤후4:2).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적 부르심인 전도자의 복음을 듣는다고 해서 한결같이 복음에 반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만이 반응합니다. 이들만이 복음을 긍정적으로 받습니다. 믿음으로 수납합니다. 여기서 루디아가 바울의 복음을 듣고 ‘청종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내적 부르심’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분명히 바울의 복음을 전해들은 여인들은 루디아 한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여럿이었습니다. 문맥을 통해 이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루디아만이 여럿 중에서 유독 홀로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현실적으로 뭐가 특별한 면이 있어서일까요? 본문은 루디아가 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인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참된 성경적 믿음에서 나와진 신앙이란 의미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향한 성경적 믿음은 한 사람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거듭나는 것을 통해서만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루디아의 하나님을 향한 공경은 그녀가 하나님에 대한 보편적인 지식과 그에 따른 일반적인 믿음을 갖고 있기는 했으나 아직 구원에 이르는 신앙에는 접촉되지 못하고 있었음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특히 누가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란 표현을 유대교에 접촉된 경건한 이방인들을 향해 사용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행10:1-2).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런 루디아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청종할 수 있게 된 것은 주께서 그녀의 마음을 열어주신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보아 그녀가 이미 하나님의 택자로 존재해 나오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요6:65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따라서 그녀의 하나님 공경은 이미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선행적으로 그녀에게 작용해 오다가 때가 차매 바울을 통해 복음을 전해 듣게 하시고 이런 사건을 계기로 그녀를 구원에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섭리적 손길이 간섭하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선(先) 선택의 역사가 선행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특정인에게 선별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효와 성령님의 내적 조명을 통한 구원에로의 부르심은 하나의 연장선상에서 일관성을 띤 채 동일한 사람에게 유효적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본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수 중에 일부를 부르셔서 구원에 접촉시키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일컬어 내적 부르심이라고 부릅니다. 이때 다수 중 일부가 반응하게 되는 경위를 다른 말로 유효적 부르심이라고 말합니다.

 

택자들을 향한 유효한 부르심

 

    우리는 여기서 내적(유효적) 부르심의 범위와 대상에 대한 성경의 증언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내적 부르심의 주체는 성령님이란 사실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고전12:3입니다.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행16:14에서는 루디아로 하여금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청종하게 하신 당사자가 주님이심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영으로서의 성령님을 가리키는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롬8:9). 에베소서 기자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원계획을 설명하면서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사역적 측면에서 구원사역을 분담하고 계심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엡1:4-14). 이때 성령님의 사역은 구원의 보증의 영으로서의 인치심의 역할을 담당하십니다.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예수님의 대속적 구속사역을 유효하게 적용시킴으로 하나님의 자녀와 기업의 후사로 삼으시는 역사를 수행하고 계심을 확연히 보여주고 있습니다(엡1:13-14, 고후1:22). 그렇습니다. 성령하나님께서 내적 부르심의 주체가 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제한적이지만 유효적으로 적용시키는 작업을 수행하십니다.

 

    여기서 유효적이라 함은 하나님의 택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사역 안에서 성령님으로 하여금 구원에로 부르실 때 분명하고 확실하게 성령의 내적 부르심에 응답하게 하는 것을 통해 창세전에 선택한 자들을 남김 없이 불러모으신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를 다른 표현으로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내적 부르심은 어떤 경우에도 실패하실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때에 택자들의 응답은 죽은 영혼을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하나님의 신적 감동과 감화의 역사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영혼에게 그의 인격을 통해 유기적으로 역사하심으로 외부적 절대 타자에 의해 섭리적으로 간섭되고 있음을 본인도 자각하지 못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고 당연스럽게 복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절대로 타의에 의해 강제적이고 강압적인 요구를 받고 있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불가항력적 은혜의 실제적 배경이 이렇습니다.

 

    요6:37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본 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란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주권적으로 선택하신 예정자들을 가리킵니다(엡1:4, 요15:16). 그런데 이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한결같이 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믿음으로 주님께 나오게 된다는 지적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구원은 절대 안전이 보장된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본체로서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그 장중에 붙들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계1:18). 만유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요10:28-29). 요10:4과 27절에서는 목자와 양의 비유를 통해 당신의 백성을 부르시는 내용이 소개됩니다. 여기서 보면 목자는 자기의 양을 알고 양은 그들의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부르면 따라오게 돼 있음을 우리에 들지 않은 일단의 다른 양들(26절)과의 비교를 통해 대조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잃어버린 당신의 백성을 찾아 죄로부터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눅19:10, 마1:21)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 가운데 구주로 오셨습니다. 주님은 성령님을 통해 복음의 말씀으로 당신의 양무리를 부르십니다. 찾으십니다. 오늘도 여전히 말입니다. 이때 주님의 양들은 목자 되신 주님의 음성을 들어 알고 기꺼이 따르게 된다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증거합니다. 때문에 이때의 부르심은 강요에 의한 억지가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음성을 듣고 본능적으로 알아서 기쁨으로 찾아가듯이 그렇게 동일한 원리와 방식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복음에 반응하는 택자들의 모습이 이렇다는 얘깁니다. 이런 일련의 사실을 일컬어 신학적으로 유효적 부르심 또는 불가향력적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성령의 유효적인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을 통해 주님의 생명에 신비적으로 연합되어 한 몸 곧 보편의 우주적 교회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고전12:12-1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종말론적 가정공동체 말입니다(엡2:14-16, 19). 이 보편의 교회가 지상에 가시적으로 그 자태를 드러낸 것이 지역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지상의 지역교회는 늘 천상의 보편의 교회로서 주님의 몸을 이루어 가는 일에서 교회적 존재이유와 본질적 가치를 부단히 창출해 내야 하는 것입니다.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존재양식으로서 말입니다. 이를 현실적으로 가능케 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말씀에 대한 풍성한 이해와 이에 따른 순종력의 발휘입니다. 지식을 좇아 행하는 신앙적 삶 말입니다(롬10:2-3).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왕적 권세가 충만히 발휘될 뿐 아니라 그 통치를 원활하게 받고 살아가는 방식을 통해 현존성이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형편은 교회의 천상적 본질을 추구하는 일에서 너무나도 동떨어지고 부족할 뿐임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니 교회가 무엇인지 조차 성경적으로 바르게 해명해 내지 못함으로 해서 말씀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임의대로 적용시키는 나머지 인간의 종교심만을 한껏 부추기는 가운데 급기야 우상숭배의 이교도적 집단으로 변질돼 가고 있는 실정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부르짖기는 하는데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닌 철저히 자신의 일신상의 일락(逸樂)과 세속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말입니다. 이런 신앙적 성격을 성경은 우상숭배 내지는 자의적 숭배신앙이라고 정죄하고 있습니다(골2:23, 3:5). 하나님께서는 이런 신앙을 혐오하실 뿐 아니라 결코 방관치 않으신다고 경고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을 만홀(漫忽)이 여기는 처사이며 동시에 망령된 행실이 되기 때문입니다(출20:3-7).

 

    이와 관련해서 계시록의 일 곱 교회를 통해 주께서 책망하시고 권고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시는 교회적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두려운 마음으로 살펴봐야 할 줄 압니다(계2-3장). 그렇지 않으면 촛대가 옮겨지고 심지어 이미 사망선고가 내려진 교회와 사단의 교회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는 타락하고 변질된 교회로 전락될 수 있다는 경고에 귀기울여야 될 줄 압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는 오늘도 여전히 현존하는 모든 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준엄하신 경고와 경계의 말씀입니다.

 

 

3.결론

 

    죄로 말미암은 인간의 전적타락과 부패는 스스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릴 수 있는 지각과 감정과 능력을 근원적으로 상실했기에 자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기회란 전무한 것이 인간의 비참한 영적 실상입니다. 우리는 이런 상태를 일컬어 전인적(全人的) 타락과 무능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사실은 자연히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주권적인 선택에 호소하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대속적 속죄사역의 공효는 하나님의 택자들에게만 선별적이고 제한적으로 적용될 수밖에 없다는 당위와 필연을 유발하게 됩니다. 불가항력적 은혜와 유효적 부르심의 교리는 이상의 사실들을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적용시키는 성령하나님의 신비스런 사역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복음을 들은 다수 중 얼마를 복음에 반응케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사죄의 은총을 선물의 의미로 수납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런 대가(代價)없이 말입니다. 이때 이 사역을 성령님께서 주도적으로 담당하시는 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택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십자가의 복음의 내용을 저항 없이 본능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지적입니다(행13:48). 이런 사실은 단순히 교리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택자들의 인격 안에서 구체적으로 경험되는 현실적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기독교 신앙이 관념이 아닌 실질인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성령하나님의 유효한 부르심의 결과가 이런 신비한 구원사역을 현실로 절감하게 만듭니다. 이 크신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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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나는 믿을 수 있습니다/최송연
    폭우가 쏟아져 내리는 날이면
    나는 언제나 기적의 우산을 구했으나
    그 속에서 기적의 우산을 찾지 못했습니다.
    
    태풍이 휘몰아치는 캄캄한 밤이면
    나는 언제나 당신의 음성 듣기를 원했으나
    그 속에서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풀무불 같은 시련이 
    내 모든 삶을 태워버릴 것만 같을 때면
    나는 언제나 당신의 도우심의 손길을 구했으나 
    그 속에서 당신의 도우심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큰 파도같은 고난이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을 때면
    나는 언제나 당신께 구원의 밧줄을 구했으나
    그 속에서 구원의 밧줄은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주여,
    이제 나는 믿을 수 있습니다 
    

    내게 다가오는 폭우를 막아준 것은 싸구려 우산이 아니라 당신 옷깃으로 나를 덮어주셨음을....

    푹풍 속에서 내가 원하던
    주님의 음성은 듣지 못하였을지라도
    당신의 품속에서 내가 고이 잠들 수 있었음을...
    
    풀무불 같은 시련 앞에서 
    건져주신 것 아니라 
    그 풀무불 속에 함께 따라들어 오셔서 
    나를 품어주신 사랑의 주님이심을...
    내 주여,
    이제 나는 믿을 수 있습니다
    내가 당해야만 했던 
    그 모든 아픔과 고통과 절망의 골짜기들...
    그곳에 당신은 나와 함께 계셨으며 
    나보다 더 많이 아파하셨음을...
    
     
     
     
    ♬ 흐르는 곡 ~ ♡   God will make a way 나의 가는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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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 Slug


칼빈의 5대교리 세번째 /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개혁주의 성경공부

제 3 강

칼빈주의 5대 교리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Sola Scriptura, Sola Fide, Sola Gratia, Soli Christo, Soli Deo Gloria"

God, "and God alone", is man's highest good!

 

1.도입

 

  우리는 지난 두 번의 강의를 통해 죄로 말미암아 초래된 인간의 전인적(全人的) 타락과 부패와 무능은 자력구원의 길이 근원적으로 차단돼 버린 나머지 외부적 절대타자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함을 살펴봤습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그러나 필연적으로 하나님편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선택을 통해서만 허물과 죄로 철저히 죽어버린 인간이 다시 구원의 길에 올라 하나님과 깨진 관계를 새롭게 정립시키고 화목과 교통과 교제를 회복시킬 수 있는 재창조의 유일한 방식임을 도출하게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교리는 구원 그 자체가 아닙니다. 구원의 전제조건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은 죄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바 창세 전 선택이란 창세 후에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자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의지적 표명이며 동시에 구원을 위한 사전표식이란 사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은 구원의 사전단계일 뿐 아니라 그 성격이 죄로부터의 구원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칼빈주의 5대 교리는 하나님의 선택이 유효하게 발휘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속죄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를 대신해서 갚아주신다는 속량(贖良)내지는 대속(代贖) 또는 구속(救贖)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때 베푸시는 하나님의 속죄가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일부 특정인들에게만 선별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이 속죄교리를 제시하면서 특별히 제한속죄라고 표현한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주권적인 뜻에 따라서 모두 중 일부에게 만 적용된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속죄교리는 누구를 위해 속죄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적 죽음을 담당하셨느냐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알미니안파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보편적 속죄교리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해 예수님은 죽으셨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인간편에서 원하기만 하면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이런 주장을 적극적으로 거부합니다. 만일 주님께서 전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면 모두가 구원의 은혜를 받아야 할텐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의 구원의 복음이 증거될 때 거기에는 크게 두 가지 양상이 나타나게 되는 바 한 부류는 믿음으로 반응하는 가 하면 다른 한편은 복음을 거부함으로 정죄에 빠진다는 사실입니다(막16:15-16). 이런 결과를 볼 때 비록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은 그 분의 하나님 되심으로 인해 온 인류의 죄를 구원하고도 남음이 있지만 그것이 적용되는 범위는 제한적으로 나타나는 것임을 지적합니다. 이것이 소위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제한속죄의 실상입니다. 역사적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구속사역과 관련해서 언제나 제한속죄 교리를 성경의 바른 증언으로 신앙고백을 해 왔습니다.

 

2.전개

 

    제한속죄 교리는 알미니안 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보편적 속죄교리의 반동으로 나왔으나 그 근거는 철저히 성경의 증언에 기초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아니 될 줄 압니다. 아울러 제한속죄 교리는 앞에서 언급된 무조건적 선택교리와 내용의 전개상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사실로 인해 제한속죄는 차별적으로 일부에게만 베푸신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교리의 연장선상에서 접근을 시도해야 할 줄 압니다. 이제 그 구체적 내용을 살펴봅니다.

 

속죄의 필요성

 

    하나님의 선택은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들 중 일부에게 당신의 기뻐하시는 주권적 뜻을 좇아 사죄의 은총을 베푸시는 가운데 죄 없다고 선포하실 뿐 아니라 의로운 자로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칭의적 구원의 예비적 조치를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전 선택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속죄의 범주에서도 제외될 수밖에 없음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속죄는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해서 시행되는 연속적인 구원사역의 일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속죄(贖罪)가 필요한 것일까요. 속죄의 사전적(辭典的) 의미는 ‘금품이나 공로로 지은 죄를 씻음 받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인본주의적 접근방식의 정의입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인류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적 구원사역을 일컫습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해서 자력으로는 어떤 선행과 공로의 대가로도 죄의 문제를 탕감 받을 수 없기에 말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의의기준과 가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음이 성경의 증언입니다(롬3:10).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베푸시는 속죄사역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선택교리는 구체적 시행에 있어서 그 정당한 실효의 가능성을 잃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선택이 미래적 구원을 전제로 하는 하나님의 사전표식인 바 구원은 바로 죄로부터의 자유를 선포함과 동시에(무죄선언) 하나님의 법정에서의 의인됨(칭의)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문제해결이 선행돼야 합니다. 이런 일련의 상호 관련 속에서 선택은 필연적으로 죄로부터의 구원을 위한 속죄의 문제를 제기하게 됩니다. 즉 죄의 문제가 선결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선택은 실제적 적용에 있어서 불가능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선택교리 후에 바로 속죄교리가 뒤따르는 당위성이 이런 이유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속죄사역을 통해서만이 최종적으로 실현된다는 얘깁니다.

 

속죄의 성격과 방식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의 죄를 속죄 받을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통해 속죄의 성격이 요구됩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타락한 존재로서 자력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전무(全無)함을 이미 살펴봤습니다. 이는 어떤 형태의 인위적 방식으로도 자신의 죄를 탕감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있지 않음을 시사합니다. 바로 이런 사실로 인해 절대 외부적 타자에 의해서만 인간의 선택이 가능했듯이 동일한 원리로 절대적 선과 의의 소유자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인간의 속죄를 실현시키기 위한 다른 방도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을 신학적으로 ‘대속적(代贖的) 속죄’라고 일컫습니다. 말 그대로 절대적 타자가 대신 죄의 값을 지불해 주는 것을 통해서만이 인간의 속죄는 비로소 실현 가능성의 길이 열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죄 문제의 해결은 오직 절대타자에 의한 대속적 희생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지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전적타락으로 인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비참한 존재입니다. 영적 파산자입니다. 영원히 죄인으로 정죄 될 뿐입니다. 외부의 도움이 없이는 자력구원은 요원합니다. 아니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바로 이런 사실로 인해 인간의 죄를 사면하시는 방식은 죄인이 아닌 절대적 타자에 의한 대속의 원리가 요구됩니다. 죄와 불의와 허물이 전혀 없는 절대 타자(他者) 말입니다. 여기서 속죄의 성격 또한 대속적일 수밖에 없는 당위성이 대두됩니다.

 

    이제 인간의 속죄는 절대타자가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바치는 것을 통해서만이 가능하게 됩니다. 죄 값은 사망 곧 죽음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6:23). 구약의 율법의 제사제도하에서 요구되어진 일체의 희생제사 행위는 바로 이런 속죄사건을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계시적 사건의 일환입니다(레1-7장, 히9:13). 이는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히9:22, 레17:11)는 하나님의 속죄의 원리에서 나와진 실천적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약제사의 실체(히9:14)로서 절대타자의 필요충분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요.  

 

절대타자이신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대속물로 표현합니다(막10:15). 이는 인류의 죄를 대속적으로 담당하기 위해 한 마리 희생양으로 오신 분(요1:29)임을 언급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는 또 다른 의미에서 예수님이 바로 절대타자의 당사자로 오신 분임을 가리킵니다. 나아가 이런 사실은 예수님이야 말로 절대 선과 의로우신 분으로서 곧 하나님의 본체가 되시는 분임을 시사합니다(빌2:5).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말입니다(요1:14, 18). 그러기에 비록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육화(肉化)하셨지만 그 분의 본체는 하나님으로서 죄가 없으시고(히4:15), 죄를 모르시며(고후5:21), 죄를 짓지도 않으신 분(벧전2:22)으로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신 사실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신(神)-인(人)이십니다. 하나님이신 자신을 사람과 동일시하심으로 중보자적 사역을 담당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요, 예수님을 알면 하나님을 또한 알고 믿게 된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요14:9).  

 

    성경은 예수님의 인격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 분의 출생이 신적 기원에 근거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눅1:26-35). 곧 하나님의 크신 구속의 비밀의 경륜 속에서 오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사실은 예수님의 출생과 전 생애가 앞으로 오직 하나님의 뜻하신 바 구속의 도리를 세상 가운데 펼치시고 이루시는 일에 집중 될 것임을 예고합니다(요17:4).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공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하셨으며,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귀신을 쫓아내셨을 뿐 아니라 죄를 친히 사해주시는 것 등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와 자신이 하나님으로서의 왕적 권세를 발휘하고 계심을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막2:1-12).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속죄사역은 그 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대속적 사역의 절정을 보여주십니다. 이 사건에 근거해서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성경은 감히 선포합니다(롬8:1). 다시 말해 그 분의 죽으심은 우리의 범죄함을 위한 대속적 죽음이었으며 그 분의 다시 살아나심은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우리 또한 의롭다고 칭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롬4:25).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적 죽으심이 우리 자신의 죄와 허물을 위한 대속적 죽음인 사실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은 죄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나아가 의롭다고 여겨 주십니다.(롬3:24) 그 결과로 주님을 왕과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들을 일컬어 성경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성도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사역을 믿음으로 거듭나셨는지요. 죄의 문제를 해결 받으셨는지요. 구원 받으셨는지요. 그래서 지금은 확고부동한 하나님의 백성 된 신분으로 분명한 목적과 가치관의 전환 속에서 살아가시는지요. 물론 때때로 넘어지고 쓰러지는 경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죄 없다하면 거짓말하는 자라고 우리의 연약과 한계를 인정합니다. 문제는 그때마다 상한 심령으로 자백하는 일과 지속적으로 죄로부터 멀어지는 일에 진보가 있어야 함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요일1:8-10).    

 

속죄의 효력과 적용의 범위

 

    이제 우리는 본 교리의 핵심부분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대속적 속죄사역을 베푸셨다면 과연 누구를 위한 속죄사역이란 말인가 하는 문제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과연 누구를 위해 대속적으로 자신의 몸을 속전으로 내어주셨단 말인가? 이 주제에 대해 알미니안주의 자들은 보편속죄를 주장합니다. 이는 모든 인류를 위한 속죄를 전제로 하며 따라서 자신이 믿기를 원하기만 한다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반면에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을 견지해 오는 칼빈주의 자들은 제한속죄를 성경적 바른 교리로 수납해 왔습니다. 이는 속죄로 말미암는 구원의 은혜가 결국은 창세 전 택자들에게만 유효하게 적용될 수밖에 없다는 전제에서 볼 때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택은 제 2 강에서 이미 살펴 본대로 당신의 기뻐하시는 절대 주권적인 뜻에 따라서 전체 중 일부에게만 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속죄의 효력이나 능력의 측면에서 본다면 대속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적 공효는 염소나 송아지의 희생과 같은 저급한 피조물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이들은 그 가치면에서 그처럼 피조물의 영장인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기에 효력 또한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매년 같은 제사를 반복적으로 드리는 것을 통해서만 한시적으로 죄를 사함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속적이지는 못합니다. 완전하지는 못합니다. 성경은 이를 실체를 향한 모형으로 설명합니다. 더 나은 제사, 더 나은 제물로서의 실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것으로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모형과 실체의 관계를 이렇게 해명합니다. 히9:13-14입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이신 바 그 가치의 우월성과 속성상 영원성으로 인해 단번에 드리신 바 영원히 온전한 제사를 드린 셈이라고 설명합니다(히10:12-14).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 안에서 이제는 추가적으로나 반복적으로 더 이상의 죄를 위한 다른 속죄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됐습니다.

 

    이런 사실은 다른 한편 ‘영 단번’으로 드려진 예수님의 속죄사역의 효력이 전 인류의 죄를 대속적으로 전담하시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무한한 공효적 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의 본체로서의 예수님의 무한하신 가치는 온 인류의 죄를 넉넉히 담당하시기에 족하고도 남습니다. “다 이루셨다”(요19:30)는 십자가상의 주님의 마지막 말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켜 드리셨다는 승리의 일성(一聲)입니다. 비록 죽으시지만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림으로서 후에 받으실 부활의 영광을 내다보시고 말씀하신 계시적 발언인 것입니다(히12:2). 이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 안에서 죄인 된 인류는 당당히 구원에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새롭고 산’ (히10:20) 생명의 길이 열려진 셈입니다. 온 인류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사역으로 인해 도말 되기에 족했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멀리 옮겨졌습니다(시103:12). 속죄의 공효적 능력의 측면에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속죄사역과 관련해서 두 번째로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속죄의 적용과 범위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누구를 위한 속죄란 말인가 하는 문제 말입니다. 예수님은 과연 누구를 위해 그토록 무서운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담당해야만 하셨느냐의 관한 내용 말입니다. 성경은 이 문제와 관련해서 결코 전 인류의 죄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증언합니다. 속죄의 공효는 온 인류의 죄를 속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일 원하셨다면 그리스도의 속죄적 능력이 온 인류를 구원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적용의 측면에서 볼 때 결코 전 인류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제한적으로 적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일정한 범위 내에 들어온 자들을 위해서만 예수님의 속죄사역의 효력은 유효하게 미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누구란 말인가요. 바로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이 그들입니다. ‘남은자’(사10:20-22, 롬11:4-5)들 말입니다. 성경은 이사실을 다양한 표현과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먼저 마1:21입니다. 본문에서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서 천사의 고지(告知)를 인용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니라 하니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의 출생은 그 분의 인격과 사역의 특성상 신적 기원에 근거하고 있기에 나시기 전에 이미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라는 이름이 갖고 있는 독특한 사역적 측면을 확인하게 되는 데, 이는 다름 아닌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일’입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인류의 죄를 대속적으로 담당하시기 위해 구약제사의 제물인 어린양의 실체로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면 모든 인류의 죄가 아니라 ‘자기 백성’들의 죄만을 담당하기 위해 예수의 이름으로 오실 것임을 지적합니다. 자기 백성이란 누구를 말합니까? 온 인류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백성 곧 예수님께 속한 자들을 제한적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세상에 피조된 수많은 사람들 중에 유독 예수님께만 속한 당신의 특별한 백성들이 따로 있다는 사실의 지적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속죄사역을 위해 오셨다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저들의 대속물로 오셨다는 사실의 증언입니다.

 

    눅19:10에서 누가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과 관련해서 그 분의 성육신 사건을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라고 제한적으로 설명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세리장 삭개오를 구원에로 부르신 후에 직접 하신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잃어버린 자가 누구일까요. 온 세상 만민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만민 중에 일부를 가리킵니다. 요6:37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가 아니면 예수님께 나올 수 없음을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하는 것을 통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란 제한적 의미로 당신의 백성 곧 세상 가운데 잃어버린 특별한 백성이 따로 존재하고 있음을 분명히 시사합니다. 그들만이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 분 앞으로 나온다는 지적입니다. 양과 목자의 비유가 이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제시되고 있습니다(요10:1-6). 모두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만이 나옵니다. 목자 되신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일단의 양무리가 따로 있다는 얘깁니다. 요5:40을 보십시오. 분명히 주님께 오기를 원치 않는 일단의 무리 또한 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주님의 양무리가 아닌 연고입니다.

 

    막16:15-16에서 마가는 복음증거와 이에 따른 결과를 얘기하면서 복음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있음을 동일하게 지적합니다. 동시에 한 자리에서 같은 복음의 내용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받는 자와 거부하는 자의 두 부류로 나뉜다는 지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이 제한적으로 전해지고 있는 실질을 봅니다. 이는 예수님의 속죄사역의 공효가 그들 중 일부에게만 선별적으로 역사하고 있음에 다름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성령의 유효한 부르심이라는 제 4 강의를 통해 재차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께 주신 자들만을 한 사람도 잃지 않고 구원에로 이끄십니다(요6:39). 여기서 구원에로 이끄신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대속적 속죄사역이 결국 잃어버린 자들만을 위해 제한적으로 적용될 것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속죄사역의 효력은 무한하기에 온 인류를 속하고도 남음이 있을지라도 궁극적으로 속죄사역의 범위와 대상은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주님께 주신 바 된 하나님의 택자(擇者)들 곧 당신의 백성들에게만 제한적이고 양보적으로 적용될 것임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행13:18입니다. 본 절에서 누가는 이방인들 중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만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되고 있는 사실을 바울의 전도내용을 통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이 따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이 바로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과 기쁘신 뜻에 의해 미리 선택된 자들입니다. 선택과 구원은 약속과 성취의 구조와 동일합니다. 다시 말해 선(先) 약속이 전제되지 않으면 후(後) 성취의 내용이 있을 수 없듯이, 선(先) 선택이 있기에 후(後) 구원의 역사가 가능하다는 논리입니다. 행18:10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시에서 복음을 전할 때 핍박으로 심히 두려워했으나 주께서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바울을 위로하시면서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는 말로 고린도 전도에 열심을 낼 것을 촉구하시는 내용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도 ‘내 백성’ 곧 주님의 백성이 따로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런 일련의 내용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적용의 측면에서 결과론적으로 접근할 때 결국은 일부의 택자들인 하나님의 백성들만을 위한 제한적 죽음이란 신학적 명제를 유발시킵니다. 따라서 제한속죄란 성경의 여러 말씀을 종합해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규명해 본 결과에서 얻어진 당연한 귀결입니다. 단지 견해와 입장이 다른 반대편의 무리를 거부하고 성토하기 위해 취해진 억지발언이 아니란 말입니다.

 

    물론 일부 성경 구절을 통해 ‘모든 사람(고후5:14-15)’ 이나 ‘세상(요3:16)’을 위해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셨으며 또한 대속적 죽음을 담당하신 것으로 기록된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를 본(本) 절에만 제한시켜서 지엽적으로만 해석한다면 얼마든지 보편속죄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의 본문을 해석할 때 잊지 말아야 될 명제는 언제나 주어진 본문을 문맥과, 한 장 전체와, 나아가 성경의 총체적 계시관 곧 구속사적 경륜에 입각해서 접근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전체를 통해 부분을 해석해야 한다는 지적 말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고 나름대로 코끼리의 모양이 넓은 벽 같다느니, 굵은 통나무 같다느니, 아니면 큰 부채와도 같다는 식의 주관적인 견해를 피력하는 경우가 될 위험이 다분히 있습니다. 코끼리의 다리가 마치 통나무 같이 생긴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코끼리 전체의 모습을 마치 통나무 같다 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해석한다면 틀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죽으심이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죽으신 대속적 죽음이며 세상을 위한 죽음이라고 언급한 부분이 있다고 해도 보다 확실하고 분명한 다른 본문을 통해 그리고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 관점을 통해 총체적 시각으로 접근해서 본문이 말하는 의미를 명확히 해명해 내야 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보다 확실한 내용을 통해 불확실한 부분을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3.결론

 

    우리는 제 2 강을 통해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닌 일부의 특정한 사람들에만 제한적이고 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제한적이고 차별적이라면 저들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대속적 속죄사역 또한 제한적이고 차별적으로 적용될 수밖에 없음이 당연한 논리의 귀결입니다. 더욱이 보다 많은 성경의 본문이 이를 실제로 뒷받침 해주고 있음을 위에서 확인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속죄의 공효는 능력면에서 온 인류의 죄를 속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 분은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이시기에 말입니다(히9:14). 그러나 적용의 대상과 범위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결코 온 인류를 포함하고 있지 않음이 성경의 솔직한 증언인 사실을 봅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대속적 죽음을 담당하기 위해 속죄 양으로 오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의 공효가 미치는 대상을 볼진대 당신의 잃어버린 백성들 곧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셔서 그 분께 주신 택자들에게만 선별적이고 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봅니다. 결코 성경은 모든 사람이 최종적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증거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단에 매여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심판과 지옥의 형벌을 면치 못할 것임을 확실히 증거합니다(마25:41).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대 앞에는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무수한 사람들이 무론대소하고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고 최종적으로 유황 불못에 처해지는 광경을 봅니다(계20:11-15). 이들은 결국 유기된 자들 곧 버려진 자들입니다. 주님의 속죄사역이 공효가 이들에게 미치지 않음으로 해서 자신들의 죄 값으로 심판에 처해지는 것입니다. 영벌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주님의 속죄의 공효는 제한적으로 당신의 택한 백성들만을 선별해서 유효하게 적용시키십니다. 이 크신 일을 이루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만민 중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예수님의 속죄의 공효를 덧입은 자들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몸이 아님을 새삼 깨닫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주님의 생명으로 변환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이를 새로운 피조물(고후5:17), 새사람(엡2:15), 하나님의 권속(엡2:19), 천국시민(빌3:20)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보다 본질적으로 주님의 생명에 함께 지체로 연합돼 주님의 몸을 이루고 있는 교회공동체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어느 칭함보다도 영광스런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교회는 주님의 피로 친히 값을 지불하고 사신 바 된 예수님의 생명 그 자체와 방불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임재방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유기체란 말입니다. 몸입니다. 공동체입니다. 이 몸으로서의 교회공동체의 개념을 잃으면 우리의 구원은 어디에서도 보장받을 수 없게 됩니다. 교회는 지상에서 성도의 구원을 보증해 주는 유일한 천상의 기관입니다. 이 복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보증의 권한의 열쇠를 오직 교회에게만 맡기셨습니다. 소위 천국열쇠 말입니다(마16:19). 따라서 복음적 삶을 살아감이 교회를 세워나가는 첩경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양하며 운반하는 삶의 실질이 됩니다. 이 사실을 잠시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일에 최선을 경주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주님은 바로 세상 속에 남은자들을 위해서만 당신의 몸을 내어 주셨습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5:14-15).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통해서만 성도의 삶의 의미와 가치는 하나님께 열납됩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신앙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의 정당한 발휘로 정의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품성으로 닮아 가는 삶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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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상록수| 원글보기

이 성전을 헐라.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성전에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쫓아내고 돈 바꾸는 사람의 돈을 쏟고 상울 뒤집어엎으며 외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그러자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무슨 권세로 이러느냐며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은 되물었습니다. “이 성전은 사십 륙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헤롯성전이 아니라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다는 것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깨달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말씀은 성전 되신 주님 자신의 육체만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십자가에 죽으신 삼일 후에 부활하셔서 자기 육체를 일으키시겠다는 것만을 뜻하신 게 아니란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오셨습니다. 죄악과 죽음, 사단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구해내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 몸으로 우리를 사시려고 오셨습니다. 그 피로 값 주고 사시려고 말입니다. 자신의 목숨으로 우리를 바꾸시려고 말입니다. 그리하여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주님의 부활과 함께 모든 믿는 자들도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시겠다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부활의 승리와 함께 일어나는 모든 믿는 자들도 성전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헤롯성전을 헐지 아니하였습니다. 거꾸로 성전 되신 주님을 헐어버렸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헤롯성전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헤롯성전은 결국 기원후 70년 돌 하나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는 철저한 파괴를 당하였습니다. 그들이 헐지 않은 헤롯성전을 하나님께서 허신 것입니다.

구원 받은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이 안에 계신 우리는 성전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영접하는 것은 우리를 주님의 임재와 다스리심 아래에 드리는 것이요 우리의 몸을 주님의 거하실 처소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 안에서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의 삶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장입니다. “너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로마서 12장 1절을 말씀합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 말씀은 지금 우리를 향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엎드러져 우리를 포기하고 우리를 허물어뜨리면 주님께서 우리를 다시 일으키실 것입니다. 다시는 허물어지지 않을 영원한 성전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날마다 주님을 찬송하는 성전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소유가 아닌 것은 다 헤롯성전입니다. 자기를 위한 신앙은 헤롯성전입니다. 주님은 그 성전을 헐라 하십니다. 그것은 성전 아니라 하십니다. 장사하는 집이요 도적과 강도의 굴혈이라 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의 헤롯성전을 포기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 강도의 굴혈에 주님이 들어오시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이러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가요? 내가 헐지 아니하면 결국 돌 하나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헐릴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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