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개성교회에 내린 ‘불기둥’…
기사입력 2014.11.13 오전 3:49
 
지난달 16일 새벽 5시17분 거대한 불기둥이 개성교회(아래 작은 사진)로 이어지는 장관이 연출되고 있다. 성경의 불기둥은 ‘하나님의 동행’을 의미한다. 이 사진은 개성공단에 있는 소방서가 24시간 개성공단을 촬영한 동영상을 캡처한 것이다.

지난 10월 16일 새벽 5시17분. 남북한의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개성에는 밤새도록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개성공단 내 개성교회 예배당에서는 독실한 신앙을 가진 신자들이 모여 새벽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남북한의 공존과 협력의 상징적 공간인 개성공단에 갑자기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이 들렸다.

하늘에서 거대한 불기둥이 일어나더니 미명(未明)을 잠시 환하게 밝혔다. 하늘을 둘로 나누는 상서롭고 거대한 불기둥이었다. 불기둥은 잠시 하늘을 밝힌 후 힘차게 지상을 향해 돌진했다. 새벽에 일어나 하늘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과연 저 불기둥이 어디로 떨어질 것인가. 큰 사고와 화재를 낼 수도 있을 텐데….”

개성공단 소방서 직원들과 몇몇 근로자들의 시선은 온통 불기둥을 향하고 있었다. 그것은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공중에서 방향을 선회했다. 그리고 바람처럼, 불처럼, 생수처럼 어느 지점에 무서운 속도로 긴 선을 그었다. 미명의 황홀한 파노라마에 사람들은 잠시 넋을 잃었다.

과연 불기둥의 낙하점은 어디일까. 개성교회였다. 10년 전 신원그룹이 대리석으로 견고하게 건축한 아름답고 웅장한 예배당이었다. 불기둥은 예배당 지붕에 낙하해 휘황찬란한 위용을 한참 동안 시위했다. 참으로 신비로운 장면이었다. 이 모습을 촬영하던 소방서 직원이 크게 놀라 개성교회로 출동했다.

“교회는 괜찮은가요? 화재가 발생하지는 않았는가요?”

성경에서 불의 상징성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할 때 사용한 것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이다. 불기둥은 ‘하나님의 동행’을 상징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천사가 함께한다는 징표로 사용된다. 그것은 어둠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불은 곧 말씀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예레미야 23장 29절)

불은 곧 여호와다. 여호와는 시내산에서 불 가운데 강림했다. 모세는 불붙은 떨기나무가 타지 않는 것을 보았다. 떨기나무 불꽃은 여호와의 임재를 뜻한다. 하나님은 불 가운데 현현하신다. 그때 여호와는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명한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애굽기 3장 5절)

이날 개성교회에 떨어진 불기둥은 무슨 메시지를 담고 있을까. 여러 목회자들의 해석이 이어지고 있다. 우선 개성교회를 통해 남북한의 공존과 평화를 약속하신다는 하나님의 메시지로 받아들인다. 또 개성공단의 발전과 남북한 교회의 부흥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으로 해석한다. 불기둥이 쏟아지던 바로 그 시각, 개성교회 예배당에서는 소수의 신자들이 무릎 꿇고 남북의 평화정착과 개성공단의 발전을 위한 40일 작정기도를 드리는 중이었다.

불기둥은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성경의 불은 하나님이 제사를 열납하신다(또는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의미로 설명할 수 있다(레위기 9장 4절). 개성교회 신자들은 개성공단의 중심에 자리한 교회를 환하게 비춘 거대한 불기둥은 곧 지구촌 유일의 분단국인 한반도를 향해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광야 같은 질곡의 역사를 품고 분쟁의 소용돌이에 처한 한민족을 향해 ‘환하게 밝은 길을 인도해주리라’는 언약으로 해석하고 있다.

개성교회의 불기둥. 그것은 분쟁과 갈등과 고난의 땅. 한반도를 향한 하나님의 강력한 사랑의 메시지였을까. 그날 개성공단에는 강 같은 평화가 임했다. 샬롬!

개성교회 정병업 목사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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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으로부터 구원받는가 / R.C. 스프로울

 .....

지난 40여년 동안, 스바냐서를 본문으로 설교한 적이 딱 한 번 있다. "무엇으로부터 구원받는가?"라는 문제에 깊이 있는 답변을 제시하는 중요한 본문이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는 쏟아져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지라 그들의 은과 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습1:14-18).

 
 

주의 깊게 읽어보면, 이 본문에서 귀중한 복음을 발견할 수 있다. 본문은 "좋은 소식"이 아니라 불길하고 두려운 소식을 전한다. 전체적으로 매우 불길한 어조를 띠고 있는 이 본문은 분명 목회자들이 별로 다루고 싶어하지 않을 부분이다. 물론 본문 메시지는 오늘날의 사회 상황과도 큰 관련이 없다. 스바냐는 주의 날을  가리켜 "분노의 날이요 환란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라고 묘사했다. 또한 그는 "경고, 고난, 피, 분노, 불" 등과 같은 언어를 사용했다.

 

이렇듯 스바냐는 다양한 어휘를 사용하여 주의 날을 명확하게 묘사했다. 그의 묘사는 주의 날의 공포를 잘 전달해 준다. 그러나 본문은 스바냐가 한 예언의 일부일 뿐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 부어질 것을 묘사하는 스바냐서의 예언을 읽어보면 그야말로 머리끝이 쭈뼛해진다.

 

스바냐서는 구원의 약속으로 끝을 맺고 있지만, 그에 앞서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심판을 예고하는 끔찍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런데도 내가 이 구절을 설교 본문으로 삼은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다름 아니라 이 구절이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는가?"라는 문제에 해답을 제공하는 보기 드문 성경 구절이기 때문이다. 구원을 논한다는 것은 곧 성경의 중심 주제를 논한다는 것이다. 구원의 의미는 우리가 반드시 이해해야 할 개념이다.

 

구원의 시제

 

지금까지 "구원"이라는 용어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구원하다"라는 표현 역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헬라어는 영어보다 동사의 시제가 다양한데 "구원하다"라는 헬라어 동사도 신약성경에서 다양한 의미와 다양한 시제로 사용되었다. 성경은 우리가 "창세전에" 구원되었다고 가르친다(엡1:4). 이때 사용된 헬라어 동사의 시제는 과거인데,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와 지혜로 우리가 영원 전에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예수께서 임금이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25:34)고 말하는 때가 올 거라고 하신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성경은 "구원하다"라는 동사를 "구원받고 있는 중이었다"라는 과거 미완료시제 사용하기도 한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이 일련의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통해 역사적으로 이루어져왔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브라함의 소명, 이삭과 야곱의 생애를 통해 우리의 구원이 준비되고 이루어져왔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리고 성경은 "구원하다"라는 동사를 "구원받는다"라는 현재시제 사용하기도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의롭다 함을 받는 순간에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 지금 우리는 구원받은 상태이며, 예수님 안에서 안전하다.

 

또한 성경은 "구원하다"는 동사를 "구원받고 있는 중이다"라는 현재 미완료시제로도 사용한다. 구원이란 단순히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믿음을 갖는 순간부터 구원은 시작된다. 구원이 시작되는 순간 우리는 성화의 과정을 거치며 성장한다. 성화의 과정도 구원의 과정으로 묘사된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구원하다"라는 동사를 "구원받을 것이다"라는 미래시제로 사용한다. 우리는 구원받는 중이며, 장차 온전히 구원받아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 가운데 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마지막 단계이자 완성이다.

 

이처럼 성경은 "구원하다"라는 동사를 다양한 시제로 사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구원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조금 혼동을 겪기도 한다. 그러지 않으려면 성경이 "구원"이라는 용어를 다양한 의미와 시제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장차 다가올 진노로부터 구원받다

 

구원의 궁극적인 의미를 탐구하려면 반드시 "무엇으로부터 구원받는가?"라는 질문을 생각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1:9,10).

 

"장래의 노하심"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학자들에 따라서 70년에 일어난 예루살렘의 멸망을 가리킨다고 믿기도 하고, 마지막 심판을 가리킨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장차 다가올 진노를 모면하는 것이다. 장래에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가? 오늘날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마지막 심판을 믿지 않는다. 심지어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이와 같은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구약성경에 보면 참 선지자는 무시무시한 심판의 날을 예언한다. 반면, 거짓 선지자는 거짓 평화를 외친다. 이것이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차이다. 사람들은 심판의 날에 대한 예언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거짓 선지자는 주의 날은 기쁨과 빛과 영광이 가득한 날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다고 약속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생을 위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라는 말로 백성의 비위를 맞춘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은 자들을 위해 놀라운 계획을 세우지 않으신다. 그런 사람은 심판의 날에 결코 행복한 운명을 맞이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를 쏟아 부으실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미가, 아모스 등을 비롯해 하나님의 모든 선지자가 한결같이 전한 메시지였다. 아모스는 백성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암5:18-20).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한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행복한 날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가장 두려운 재앙의 날이 될 것이다. 그들에게 스바냐의 예언대로 환란과 고통의 날이다.

 

주님의 날이 가까이 왔다. 그날이 빠르게 다가올 것이다. 그날은 환란과 고통, 황폐와 패망, 구름과 흑암의 날이다. 스바냐는 주의 날이 오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습1:18)고 예언했다.

 

무엇으로부터 구원받는가?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구세주가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말했다(살전1:10 참조). 예수님은 장차 다가올 진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구세주이시다.

 

주님에 의해, 주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다

 

구원의 문제와 관련해 혼동하기 쉬운 개념이 또 하나 있다. 구원은 주님께 속한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돈이나 권력, 공로, 그 무엇으로도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다. 한마디로 인간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없다.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온다. 오직 주님만이 구원을 베푸실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다가올 진노에서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 정해 주신 구세주뿐이다. 궁극적인 구원은 주님께 속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이 있다. 바로 구원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일 뿐아니라, 그분의 진노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무엇으로부터 구원받는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 회개하지 않는 불신자들은 죽은 뒤에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일 뿐 아니라,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아야 한다. 심판의 날에 구세주를 믿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될 것이다. 산을 가리켜 "내 위에 무너져 나를 덮어다오. 나를 가려다오" 하고 부르짖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 앞에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진노를 막아줄 수 있는 유일한 방패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밖에 없다.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혀주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있는 한, 절대로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지 않는다. 예수님께 피하는 자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며 결코 정죄함이 없을 것이다.....

 

"당신은 구원 받았는가?" 이 질문은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다.

 

장차 하나님의 진노가 무섭게 쏟아져 내릴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두려워 떨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에 재가 될 운명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진노를 예수님이 대신 당하셨다. 예수님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실들을 생각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단언컨데, 이 큰 구원을 등한시한다면 피난처는 어디에도 없다.

 

 

R.C. 스프로울의 '구원'에서 발췌, 11-31p

 

가져온 곳 : 
카페 >말씀의 교회와 새빛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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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상록수| 원글보기

“오직 성경으로”

(Sola Scriptura)

이 환 봉 개혁주의학술원장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는 교회개혁의 표어는 이미 “개혁되어진”(reformata)과 항상 “개혁되어야 하는”(reformanda) 교회의 역설적인 두 가지 과제를 잘 표현하고 있다. 개혁교회는 불변하는 성경 말씀을 따라 개혁되어졌기 때문에 변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개혁교회는 성경 말씀을 따라 항상 개혁되어야 하기 때문에 변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개혁교회는 오직 성경의 표준을 따라 모든 악한 타협을 거부하기 위해 보수주의자보다 더 보수적이어야 한다. 또한 개혁교회는 오직 성경의 진리 안에서 모든 악한 전통을 극복하기 위해 진보주의자보다 더 진보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역설적 과제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의 길 즉 보다 더 철저하게 성경적이 되는 길뿐이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는 성경 말씀의 표준에 비추어 볼 때 너무 변해서 회개해야 하고 또한 너무 변하지 않아서 회개해야 한다.

 

    1. 오늘 우리는 성경 말씀을 떠나 변하였기에 회개해야 한다.

    상황론자는 세상을 섬기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급변하는 세상의 현실과 상황에 따라 항상 새로운 변화와 발전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개혁자들이 생각한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semper reformanda)는 말의 의미는 새로운 상황에 따라 항상 새로운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개혁자들이 요구한 개혁의 핵심은 항상 오직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개혁의 표준은 상황이 아니라 성경이었으며 개혁의 태도는 창조가 아니라 회개였다. 즉 교회개혁이란 상황이 요청하는 새로운 것의 창조와 확립이 아니라 성경이 요구하는 옛것의 갱신과 재확립이다.

 

  루터가 95개 조항의 종교개혁 선언문을 회개의 요청과 더불어 시작하였던 것은 회개 즉 성경적 신앙의 회복이야말로 교회개혁의 진정한 출발점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칼빈의 교회개혁도 시대의 요청에 교회가 얼마나 잘 적응하는가의 문제 이전에 교회가 성경 말씀의 요구에 얼마나 충실한가의 문제에서 시작된 것이다. 사실상 오늘 한국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도 교회가 세상에 동화되어 변화하지 못한 기능적 실패 때문이라기보다는 교회가 성경에 충실하여 일치하지 못한 존재론적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진보적으로 변화되지 않기 때문에 회개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너무 진보적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회개해야 한다.

 

  웰즈(D. F. Wells)가 그의 책 “No Place for Truth"에서 지적한 것처럼 오늘 한국교회도 신학과 목회 현장에서 성경의 교훈과 명령은 뒷전으로 하고 저급한 현대사상과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세상의 학문에 성경의 진리를 위한 자리를 내어 주고 있다. 예를 들면, 경제성장을 위한 시장경제 논리와 마케팅 전략이 교회성장을 위한 성경적 원리와 방법을 대신하는 것을 본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죄와 구속의 은혜가 심리학이 말하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상호갈등과 내적 상처로부터의 단순한 심리적 치유와 안정으로 대체되는 것을 본다. 오늘날 많은 이단과 은사주의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대신에 인간의 체험과 감정에 기초한 새로운 계시를 앞세워 혹세무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성경적 원리 대신에 수요자 개인의 요구와 필요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개인주의와 실용주의의 원리가 오늘날 교회의 예배, 설교, 전도의 형식과 내용을 결정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성경으로”의 원리를 떠나 기독교를 다시 개혁자들이 반대했던 그런 철저한 인간중심적인 종교로 만들어 가는 교회 변질의 현대적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혁교회와 개혁신앙은 우리의 생각과 판단이 아무리 정당하고 시대적인 요청이 제아무리 더높다할지라도 성경 말씀을 제쳐두고서 우리 자신의 사회학적, 심리학적, 경제학적 생각과 필요를 따라 우리의 신앙을 재구성할 수 없다. 물질주의, 물량주의, 세속주의의 가치와 방식을 따라 은밀히 기획되어진 오늘 교회안의 온갖 인위적인 조작은 결국 교회를 갱신하기 보다는 오히려 훼손해 갈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세상의 영을 따르는 세상의 지혜를 단호히 거부해야한다. 성경 말씀의 표준을 떠나 너무도 변하여 버린 것을 참으로 회개해야한다. 진정한 교회개혁은 하나님의 영을 따라 오직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갈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2. 오늘 우리는 성경 말씀을 따라 변하지 않기에 회개해야 한다.

    성경은 “복음”(good news)으로서 새로운 소식을 의미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우리의 오래된 편견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을 주시고 우리의 회개와 변화를 격려하기 위해주신 것이다. 참된 회개는 진정한 변화를 가져온다. 선지자들은 거듭거듭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전통을 재고하도록 도전하였다. 성경과 교회사에 나타난 신앙의 영웅들은 그 시대의 거짓된 요구들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원리를 옹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항상 하나님의 말씀의 요구를 따라 회개와 변화를 앞서 주도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거짓된 전통과 일상으로부터 떠나 생각과 삶에 있어 새로운 변화와 혁신을 단행하도록 요구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새로운 백성의 조상이 되도록 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그의 역사적 뿌리로부터 잘라내시고 새로운 나라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하셨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은 자신의 과거와의 분명한 단절이었고 약속된 미래를 향한 새로운 헌신과 위탁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일상에 사로잡힌 삶에서 떠나 가나안의 약속의 땅을 향하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히려 애굽의 일상의 삶을 그리워하고 다시 포로생활로 되돌아가기를 요구하며 모세를 원망하고 거역하였다. 구약의 전 역사에 나타난 바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종 자신들의 일상과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혼동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29:13)고 하셨다. 예수님도 이 구절을 인용하여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책망하셨다(마 15:8-9, 막 7:6-7).

 

  바리새인들은 “고르반”(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이라는 사람의 계명 즉 인간의 전통을 하나님의 진리로 내세워 사실상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자들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한 전문가들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다른 많은 인간적인 전통을 만들고 따르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머물고 있었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올바른 해석학적 또는 주석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메시야를 한갓 세상의 군왕으로만 오해하였고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였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전통과 이해를 책망하여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5:39-40)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지난날의 교회역사를 통해 때마다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잘못된 전통을 반성하고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되돌아올 것을 거듭 요구하셨다. 그러한 하나님의 결정적인 요구가 바로 종교개혁이었다. 종교개혁은 오직 성경으로 교회를 청결케 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였다. 마침내 교회의 신학과 예배와 설교, 그리고 교회생활의 모든 영역이 혁신적으로 새롭게 변할 수 있었다.

 

    개혁자들은 사도들의 성경적 가르침으로 되돌아가는 일에 있어서는 아주 보수적이었지만, 반면에 성경에서 떠난 인간적 전통들에 대한 공격에 있어서는 매우 급진적이기도 하였다. 개혁자들의 이러한 교회개혁의 자세가 “오직 성경으로”라는 슬로건에 잘 표현되어 있었다. 오늘 우리도 개혁자들처럼 현대사상의 거짓된 요구에 직면하여 오직 성경을 따라 우리의 신앙을 파수해야하고 또한 전통사상의 편협적인 판단에 대해서도 오직 성경을 따라 날로 새롭게 개혁해 가야 한다. 오직 성경에 순종하기 위해 개혁교회와 개혁신앙은 언제나 변하지 말아야 하고 또한 항상 변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거짓된 세상의 새로운 요구에 타협하지도 않고 동시에 변하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지도 않는 균형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균형 있는 개혁자의 삶을 살기 위해 먼저 우리 자신이 오직 성경으로의 삶 즉 철저한 성경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 맡겨진 교회개혁의 시대적 사명을 올바로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만이 우리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표준과 충족한 근거임을 새롭게 다짐하며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란다.

 

 

출처: 개혁주의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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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내가 만난 하나님의 공의


‘흔들리는 갈대처럼
하나님의 공의가 흔들리는 공동체(교회),

첫 번째의 기대를 간직하고
두 번째 도착한 오산리 기도원에는
눈이 쌓이고 녹아 황토 흙이 보이는 황량한 벌판의 언덕아래에 입구가 있어
방범 초소 같은 임시초소(?)가 설치되어 입장료를 받았고
찾아간 기도원의 숙소는 가건물로 합판을 깔아 만든 마루에 장판을 씌운
강당 같은 커다란 방에 어림잡아 이백 명 넘을 사람들로 붐비었고
입구에 만들어 놓은 신발장의 신발이 넘쳐서 바닥에 이리 저러 흩어져
나중에 외출할 때면 신발을 찾기가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먼저 자리를 잡아야 가지고 간 담요와 세면도구가 들은 가방을 놓아야 할 텐데
벽면마다 이미 자리를 잡은 사람들로 인해 그 옆에 자리를 잡고
가지고간 담요위에 앉아 기도를 하였으나 강당 같은 커다란 공간에
통성기도와 찬송으로 목쉰 칼칼한 음성의 말소리와 찬송가를 부르는 소리
방언 기도하는 소리 등 온갖 소리는 울림이 되어 떠들썩하고 어수선 하였고
겨울이라 난방을 하고 조그만 창을 막아놓았기에 환 풍이 되지 않아
퀴퀴한 냄새와 발 고린내 같기도 한 냄새는 비위를 상하게 하였고
정신 집중을 할 수 없어 짧은 기도를 하고 밖으로 나오며 바라본 실내는
피난민 수용소가 아마 그런 모습이었으리라.
아니 피난민이리라
세상의 비바람에 날리는 가벼운 티끌 같이
삶의 소망과 절망의 경계인 절벽에서 구원을 잡고자
새해를 며칠 남겨든 연말을 가족과 친지를 떠날 만큼 절박하고도 가난한 사람들
축농증 심장병 천식 등의 환자에다
겨울이라 더운물에 목욕도 못하여 피부병 걸려 이중으로 힘든 사람들
가정문제 사업실패로 의지 할 곳 없어 머물며 이제 주거지가 되어버린 불쌍한 사람들
굶주려 눈이 힁하여 힘이 없어 바닥에 두러 누운 사람들
오늘이 절박한 그들의 문제...
연말이라 붐비지 않을 거라 짐작했고
잠시 다시 온걸 환경으로 실망했던 자신이 한 없이 못났음을 한탄했다.

저녁시간이 되어 식당을 가신다는 아주머님께 여쭈었더니
식권을 사야지 저녁을 먹을 수 있다 알려주셨지만
이미 금식을 하고 있어 식권이 필요 없지만
식사시간이라 돈이 없어 배고픈 사람들의 군침을 삼키는 소리를 외면할 수 없어
수중의 돈을 어림잡아 헤아려 보았고 금식을 하기에 준비한 돈이 넉넉하지 않아
망설이다 중년의 남자 분께 식권을 사드릴까 물어 보았으나 얻은 식권이 있다는 대답을
들었고 그 분의 처지를 숨기는 듯 한 그 분의 말과 표정으로도 알 수 있어
그 분에 대한 연민과 망설였던 내 마음의 연민이 겹쳐져
자신을 숨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녁식사 시간이 지난 후
모든 사람은 00성전으로 저녁예배를 드린다는 어느 분의 고함소리를 들고
피곤하고 배고프고 힘이 없어 일찍 자리에 누웠지만
모두들 빠짐없이 예배에 참석해야 한다는 관리인 인 듯한 분의 성화에
주위를 돌아보니 나 혼자 뿐이었다.
어두운 밖을 나가 도착한 00성전에는 울부짖는지 고성인지 모를 소리와 시도 때도 없이
‘할렐루야’ ‘주여 주여’ 목터지는 인도자 목사나
이를 따라 화답하는 사람들의 함성으로 정신이 사나운데
‘예수 이겼네 예수 이겼네 예수사탄을 이겼네’
‘내주의 보혈은’ 등의 똑같은 찬송을 반복하여 악을 쓰듯 목이 터져라 부르고
볼륨을 올려놓은 마이크 음성에 ‘믿씁니다 믿씁니다’ 는 바람이 새는 듯 한 음성은
귀를 막고 싶은 만큼 휭휭 거렸다.
이윽고 설교 전 찬송이 끝나자 헌금 바구니를 돌리고
또 찬송 몇 곡을 군가처럼 부르고 헌금 걷으며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
‘양심이 있으면 죄만큼 헌금을 내야 선교에 쓰고 그만큼 죄가 사함을 받지 않겠냐’
‘죄로 인해 병이 걸렸으니 회개하고 은사를 받으려면...’
이상한 논리로 헌금 결단을 촉구하는 강압적인 말투도 듣기 싫었지만
설교도 많이 내야 많이 복 받는다는 내용으로
중간 중간에 회개기도 하고 회개 찬양이라고 부르고 회개하고 또 회개하고
죄를 만들어 회개하는 듯하여
설교자가 입은 가톨릭 신부 같은 가운이 이상하게 보이더니
무당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시도 때도 없는 조목사의 이야기와 최자실 전도사의 이야기
그리고 설교를 마치고 또 헌금
예배를 마치기전 또 헌금
한 번의 예배에 네 번의 헌금과 강제적인 새벽예배, 오전예배, 오후예배, 저녁예배 등
쉴 틈 없는 예배와 헌금 시간은 매일 계속되었고
어느 날은 예배 전에 후에 광고를 하였다.
‘지방에서 올라오신 목사님은 따로 방이 준비되어 있으니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목사는 따듯한 독방을 쓰고 다른 사람은 강당같이 넓은 방에서 추위에 떨고...
화가 났다.
인간 세상이야 차별이야 그렇지만 기도원에서 차별이라니
광고하는 사람의 멱살을 잡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고 밖으로 나와 바람 찬 동산을
거닐었으나 추위에 떨기 까지도 화는 누그러지지 않아
친척의 기도제목을 갖고 왔던 목적을 되새기며 진정하려 했고
이곳 분들과 처지와 내 처지를 비교하여 억지로 감사하려했다.
이 곳에 모인 사람들은
병에 걸린 어린아이와 같이 온 부모도 있었고
내 나이 또래는 20대는 없었지만
지방에서 올라온 삼사십 오십대의 아주머니와 아저씨들 들이 많았고
노인들도 더러 있어 다양한 사람들이 한 방을 쓰면서
그들의 공통점은 급박하게 응답을 받고 문제해결이 되기를 바라기에
더하여 유행 같은 방언을 받고 싶어 하기에
그 추운 날 낮과 밤으로 동산으로 올라가 기도하였고
어느 이는 나무를 하나 잡고 기도하면서 간절히 몸부림 쳐서
나무 하나를 부러트려서야 방언을 받을 수 있었다 하여
이에 동요하여 또 동산으로 올라가는 사람들
어느 이는 하나님의 응답을 듣기위하여 습기 찬 토굴에서 큰소리로 고함을 치듯 기도했고
또 그들은 그들의 응답되기를 바라며 예배의 기도시간이나 어느 때나
방언 받은 것을 어린 아이가 자랑하듯이 떠들썩하게 기도를 하기에 언짢았지만
그들은 한 해가 시작되는 연말에 가족과 떨어져서 기도원을 찾을 만큼 절박하고 심각했기에 그들의 기도가 응답되기를 내 기도제목과 함께 기도했으나
답답한 마음은 끊이지 않았다.
불쌍하고 가난한 그들의 금식과 방언과 기도응답과 같은 자랑이
밤이면 이곳저곳의 소곤대는 말소리로
이따금 고함치는지 기도하는지 모를 소리로
힘들게 잠들어 자다 깨고 보면
앓는 이의 신음소리가 짜증스러워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기도 했지만
이내 불쌍한 그들의 처지에 내 자신을 비교한 자신이 한심스러워 스스로 나무라고
그들의 고통의 신음을 탓한 잘못을 용서하시길 기도하다
잠을 설치고 아침을 맞이하면
그들과 비교하여 안심 하는 미련함과 어리석은 비교가
아직도 날카로운 칼이 되어 가슴을 찔렀고
무엇이 얹힌 것처럼 답답하여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예배를 빙자하여 빚 진자 에게 빚 독촉하듯이
예배시간에도 교대로 돌아가면서 설교하고 수금 하는
그들의 말투 ‘하늘나라에 금고’ ‘하늘나라 확장’이라는 말이 가증스러워
속이 미식 거려 나중에는 얼음이 붙은 수도꼭지에 나오는 지하수 물을 이가 시리게 마셔
더러워진 속을 닦듯이 마시고 마셔도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일주일의 금식도 채우지 못한 다섯째 날
조용기 목사와 최자실 전도사가 계시를 받아서 짓기 시작했다는 기도원을
이를 성지를 여겨 모여든 사람들을 떠나오면서
탄식하는 마음에 기도원을 들어오기 전 보다 더 마음이 무거워
주님은 내게 왜 이런 모습을 보여주시는지 화가 났다 감사했다 또 부아가 났다.
임시초소 같은 입구를 나오니
금식을 위하여 한 동안 음식을 줄이다 굶은 허기가 몰려왔다.
입구 앞 몇 식당 앞에서 머뭇거리다 식당에 들어가
빨리 준비되는 국물을 시키고 허겁지겁 음식을 몇 숟가락 먹을 때
눈물이 뚝배기 속의 국물에 떨어졌고 마음에 파문이 일어
목이 메여 더 이상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돌아온 집에서
아직 내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알았고
허기지고 휑한 마음에 먹은 반 그릇도 채 되지 않는 떡국 물을 먹고 체하여
그 후 떡국을 먹으면 체하여 오래 동안 떡국을 먹지 못했고
빈속에 먹은 음식으로 인해 위장이 탈나 오래 동안 고생했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너는 기도원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성전으로 둔갑한 기도원 이냐?
선지자로 둔갑한 무당이냐?
세속에 절은 돈을 밝히는 바리새인 이냐?

그 누구도
생명을 구원하러 오신 주님을 본받겠다는 자라면
십일조 등 어떠한 헌금을 강요할 수 없고
강요하는 마음에는 이미 생명을 경시(輕視)한 자라
그 누구라도
더하여 작정 헌금을 강요하는 그 마음에는
이미 주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기로 작정한
신앙인에서 사이비 종교인으로 변절한 변절자의 욕심이고

은사를 사모하라 하는 말은
은사 받기를 원한다면
한 알의 씨가 되어 죽어야 생명을 얻듯
나의 욕심과 나의 생각마저 버려진 마음의 중심에
그 자리를 대신하여 채워지는 은사라
믿음으로 믿음을 세우고 더하여 덕을 세워
공동체를 세우라는 공동체를 사모하라는 말로
동체를 위하여 헌신 하겠다는 결심이 결여된
마음의 정함 없는 은사는 탐심(貪心)이며 부당한 욕심이며
이를 가르치지 못한
이를 인지(認知)하지도 못한 기도원식 은사는
이미 은사가 아니다.

그 후
기도원 짓기가 유행하였고
기도원식 예배를 받아들인 교회들이 많아졌고
조용기 목사의 음성을 흉내 내는 목사들과 부흥사들은
그들은 며칠을 금식하였다는 금식 기간을 자랑으로 삼아
광야에서 시험을 받은 예수님의 금식 40일을 따라 40일 금식을
거룩한 금식의 기간 이라며 자랑으로 삼았고
그들과 야합하여 수많은 종류의 헌금을 만들고
헌금과 복을 연관시켜 믿음의 평가 기준으로 삼았고
더해 교회를 짓게 되면 교회가 성전으로 둔갑하였고
기도원이 그랬고
방언이 믿음의 척도로 유행처럼 변질되어갔고
방언의 자랑으로 예배 중 방언 기도로 경건한 예배가 사라졌으며
신유 은사집회, 심령 각성 부흥회, 치유 은사집회 등 수많은 기적을
보고 믿으라는 체험 집회가 늘어나면서
예언을 하고 귀신을 쫓고 입신하고 환상을 보고 영분별을 하는
능력의 은사를 추구할수록 누룩이 번성하여
그런 헌신에 반비례하여 교회는 세상의 질타(叱咤)의 대상이 되어갔다.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 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며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
베드로후서 2:14-16]

헌금의 종류를 수 없이 만들어 놓은
외식하는 현대판 바리새인은
어린아이와 같이 무조건 믿으라는 분별없는 맹신자를 양산(量産)하였고
열성은 있으나 의가 사라진 광신자를 양산하였고
보여주기 식 수많은 은사예배와 간증
천국 간증, 지옥 간증, 입신, 예언, 치유 간증 등 수 많은 행위로
자신의 능력이라 자랑으로 삼는 자기도취의 신실한 의(義)로
박수받기를 원하고 존경받기를 원하는 자기 능력의 나타냄의 영광으로
공동체의 의라는 본연의 의는 사라지고
기도도 하나님의 의(義) 보다 자신들의 목적이 하나님의 의 인양
목적을 위장하거나 호도(糊塗)하여 기도했고
진실하지 않은 외식을 행하는 자들이기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보다 헌금이 중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과 하나님의 의가 사라진 장로의 유전을 지키려는 전통을
예수님은 속은 더러우면서 깨끗한 척 꾸미는 회칠한 무덤과 비교했음은
하나님의 공의에서 떠난 기복신앙은
하나님의 공의에서 떠난 세속화는 물질 만능의 맘몬(Mammon)은
하나님의 공의에서 떠난 가증한 행위를 일삼고
천국 문을 가로막는 거짓 선지자는
멸망으로의 회귀(回歸)라 경고 이었고 경고이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
화가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 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도다
화가 있을 진저 눈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 지라 하는 도다 마태복음 23:15-18]

광야와 같은 세상의 삶에
사치에 물들면 영혼이 황폐하여 지고
화려한 신앙을 추구(追求)하면 믿음이 변절되었다는 반증이고
광야와 같은 세상의 교회가
세상의 화려함을 추구하면 진리와 멀어진 겉모습만 남은 종교의 나락으로 떨어져서
교회가 천국의 모형이 되기는커녕 세상의 영리를 목적으로 존재하는
진정한 교제가 사라진 기업 같은 모임이 되어
목회자가 세상의 CEO인 최고 경영자라 스스로 칭하면
이미 그는 교회의 머리가 되었고
그런 그가 설교가 ‘말씀 선포’ 라 하면
자기가 그린 그림인 자화(自畵)로 교회를 재단하는 자라
진리를 이미 짜깁기한 상태라
글과 설교가 자기 자신의 신앙고백이 아니기에
그의 설교는 예문의 적응에 중독된 자기 고백을 갖추지 못한 화려한 말의 잔치고
의식을 갖춘 듯 하나 허례(虛禮)일 뿐이다.
그런 교회는
예수님은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였건만
이미 교회는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의 안식과 나눔의 교제가 사라진
교회가 무거운 짐을 지워주는,
온갖 헌금을 강요하고 작정하게 하고 헌금자를 주보에 공포하면
이미 은혜를 복(福)으로 연관시킨 결부(結付)라
헌금의 금액이 믿음의 측도가 되면
교회의 건축이 ‘성전 건축’ 이란 미명(美名)이 되면
성전이 헐림을 예언하시고 선포하신 예수님의 복음에 반한 반 복음적인 행위라
구약의 성전 건축을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인 교제의 회복을
예배의 회복으로 회복하려는 진정한 의미를 무시한 무지로
이미 교회는 교회의 의(공의)와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린 종교적이고 세속적인 행위라
화려한 왕궁을 바라보는 행위라
화려한 가운을 입고 사치한 종교인의 허세는
반 공동체의 길인 종교적인 획일한 모임으로 변절되어
생명을 구하러 오신 예수님의
생명인 사람을 바라보지 못하고 화려한 건물인 교회를 바라보게 되어
하나님을 교회에 가두고 의와 단절된 종교인의 집단으로 되어간다.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의 모임이고
닿아올 보이지 않는 성전(천국)
즉, 천국의 모형이 됨을 알지도 못하여 인지(認知)하지도 못하고 인정치 않아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기를 포기한 공의의 무지라
세상의 도덕과 윤리에 미치지도 못하여
세상의 조롱거리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너는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선지자 적인 사명을 가진 자냐?

스스로 지도자라 칭하는 자가 많은 세대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고자 하는 선생들이 많은 시대
진정 지도자가 무엇인지
진정 선생이 무엇인지
진정 우리의 모습, 우리의 교회가
예수님이 세우시겠다는 교회의 모습인지
그런지 묻고 싶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복음17: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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