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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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문호 목사

 

지난 마르틴 루터 종교 개혁 주일을 기하여 사도신경을 예배 시간에 가만히 뺐습니다. 물론 부목사들에게는 빼는 이유를 알려주었습니다.

한 달동안에 아무 일도 없는 것같더니 반응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요즈음 우리 목사님이 마지막 때 강조를 하더니 사도신경을 하지 않는다. 이상해졌다. 나 교회를 떠나겠다.”

한 두명이 이렇게 말한다는 이야기를 부목사가 와서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한 목소리를 내지 못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사도신경입니다. 어느 교단에서는 외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는 교회는 이단이다.”

어느 교단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교회는 이단이다.”

과연 어느 말이 맞는 가요?

 

지금까지는 사도신경에 대하여 빌립 샤프의 이론을 지지하여 왔습니다. 그는 그의 책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529 페이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기독교 교리의 요약이다.”

“사도신경은 교회 믿음에 대한 요약이다.”

“사도신경은 논리적인 명쾌함, 엄격함 그리고 정확성을 갖춘 걸작으로 그 무엇으로도 능가될 수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카토릭 신조

 

로마 교회가 이 신조를 만들었습니다. 카토릭은 이 사도신경을 반복함으로 창녀교회(계 17;1-8)가 되었습니다.

사도신경이 형성되기 전에 믿음의 고백문을 만들어 표준으로 삼으려는 시도가 여러 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졌었습니다. 시도하였던 유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레네시우스(180년)

시프리안(250년)

노바티안(250년)

오리겐(250년)

그레고리 타우마투구스(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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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안(300)

사이릴(350년)

에피파니우스(374)

루피누스(390)

 

그러나 시도에서 끝나고 널리 보급되지는 못 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고백에서 두 조류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1. 동방 신조

 

길고 다양한 내용들이 많이 들어 있었습니다. 동방 신조는 니케아 신조로 완성되었습니다. 325년, 381년, 451년 세 차례 니케아에서 회의를 하면서 믿음의 신조가 완성되었습니다.

 

2. 서방 신조

 

서방 신조는 동방 신조에 비하여 짧았습니다. 간단하였습니다. 단순하였습니다. 그래서 북 아프리카,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이 서방 신조가 카토릭의 신조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신경입니다. 본래 이름은 “로마 신조”“카토릭 신조”입니다.

카토릭이 자기들의 신조를 “사도 신경”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간결하고 암송하기 좋기에 동방 신조를 버리고 서방 신조를 받아 드린 것입니다.

카토릭의 암브로스와 루피아누스가 처음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12 사도가 성령받고 예루살렘을 떠나기 전이었습니다. 모두 모였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전하여야 할지 이야기하였습니다. 한 사도가 한 마디씩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을 적은 것이 사도신경이다. 사도들이 그 때 특별한 영감을 받아 열두가지 고백을 한 것이 사도신경이다.”

그 후 카토릭 백과 사전 집필자 Pet Meyers가 백과 사전에 기록함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동방 신조나 서방 신조나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수세기를 내려오면서 첨가되고, 고쳐지고 삭제하면서 완성되었음이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로마 카토릭이 수 세기 내려오면서 오늘날의 사도신경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분명히 증명이 되고 있습니다.

 

 

첫 사도신경

 

처음 사도신경이 있습니다. 340년 Marcellus가 교황 율리우스 1세에게 처음으로 믿음의 고백문을 보냈습니다. 이 문서가 지금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날 사도신경의 시작입니다. 오늘 날 사도신경이 형성된 것은 7세기입니다. 300년 정도 더 지나서 완성된 셈입니다.

이 언급한 사도신경 연구가 필립 샤프는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이 신조는 의심의 여지없이 점진적으로 확대된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변명하고 있습니다.

“현재 형태의 사도신경은 사도들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사도신경의 내용과 정신은 진정 사도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 언급하려고 합니다.

시도신경은 사도적이지도 않고, 성경적이지도 않습니다.

 

피터 럭크만 박사는 말했습니다.

“샤프가 말한 그대로 소위 사도신경이라 불리오는 것은 성경을 거부하는 음녀(계 17;1-8)의 생산품이었다.”

 

사도신경의 변천

 

시간이 흐르면서 사도신경 첨가되고 빠지며 형성된 증거들 실제를 들어 봅니다. 우선 사도신경의 12가지 고백을 봅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1. “천지를 만드신” 이라는 문구는 650년에 골지방에서 처음 나타났습니다.

2. “지옥에 내려 가시고” 이 문구가 360년 아리안 신조에 있었습니다. 베스티누스 폴투나투스 신조에도 590년에 있었습니다. 골 지방 문서에서도 650년에 발견되었습니다. 현재 문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가 이루어진 것은 750년입니다.

3. 공회라는 말이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본래 마르셀루스의 최초의 본문에는 “하기안 에크레시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교회”였습니다. 시프리안, 루피누스 그리고 어거스틴 신조에도 같습니다. 그런데 650년 골지방에서 공회라는 말을 넣었습니다. 카토릭이라는 말을 신조속에 넣었습니다.

4. “성도가 교통하는 것과”라는 구절도 같습니다. 650년 이전에는 이 말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들의 신경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로마 카토릭인 만들어낸 신조입니다.

이제 차례로 살펴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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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전혀 문제가 없을 것같습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귀중한 고백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은 일체이십니다. 천지창조는 하나님 혼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같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4-17)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2)

그래서 삼위일체 고백을 하여야 참 고백입니다. 그리고 문제가 또 있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이것이 문제입니다. 창세기 1장은 세가지 창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1. 히브리어로 “바라”는 무에서 유의 창조입니다. 천지창조는 바라입니다.

2. 히브리어로 “아솨”는 개조 창조입니다. 있는 것을 다시 만드는 것입니다.

3. 히브리어로 “야탈”은 모방 창조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모방 창조하셨습니다.

천지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창조하신 것입니다. 아쉬하신 것이 아니라 바라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고백은 이것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전혀 문제가 없는 것같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두 가지 문제가 보입니다.

“그”가 누구인가하는 문제입니다.

그가 하나님인지 예수님인지 불분명합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면 “그의”라고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외아들입니다. 성경은 어디에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외아들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독생자라고 하였습니다. 독생자는 영어로 “The only begotten Son”입니다. 하나님이 낳으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외아들이라고 하면 아들은 하나인 데 딸도 있을 수 있습니다. 1남 3녀인 가정에서도 아들을 외아들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딸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하나님을 영접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는 외아들만 있다고 하는 것은 성경과 모순입니다. 하나님이 낳은 독생자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이 낳은 자녀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외아들이라고 하면 예수님외에는 누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의미가 되어 구원론에 큰 문제가 야기됩니다.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여기에도 독소가 들어 있습니다. 영어로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Ghost, born of the Virgin Mary,)

문제는 이것입니다.

a Virgin 과 the Virgin 이라는 말 차이는 엄청납니다. 처녀와 그 처녀 차이입니다. 성경은 마리아를 기록할 때 예수님을 낳을 때까지만 처녀 즉 동정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카토릭은 아닙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은 후에도 처녀로 죽었습니다. 마리아 숭배 사상입니다.

이사야는 말하고 있습니다.

“보라. 한 처녀(a Virgin)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성경은 확실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막 6:3)

모든 이단 종교의 기원은 니므롯입니다. 니므롯이 죽자 아내 세미라미스는 니므롯의 시체를 잘게 잘라서 바벨론 지경 곳곳으로 보냈습니다. 니므롯의 시신을 받은 곳에서는 신전을 세워놓고 세미라미스와 그의 아들 담무스를 모자신으로 섬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천주교가 이 모자신 사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와 예수 모자신을 만든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보다 위에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고난을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에게 고난을 주지 않으려고 발버둥쳤습니다.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2)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 27:2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눅 23:4)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전 15:3)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빌라도는 지옥에서도 불평할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에게 고난을 주지 않았는 데 왜 기독교인들과 카토릭 교인들은 내게 예수에게 고난을 주었다고 예배시간마다 고백하는 것일가?”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시며”

 

이미 언급한 대로 본래 원문에는 “지옥에 내려 가셨다가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시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이 죽으셨을 때 그의 영은 지옥을 방문하셨었습니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4:9-10)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행 2:31)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2)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벧전 3:18-19)

이 말씀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에 지옥에 내려가셔서 인간의 모든 죄를 다 처리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빠졌습니다.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원문을 보면 빠진 말이 하나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He ascended into heaven, and sittenth on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aighty,)

아버지라는 말이 빠져 있습니다.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사도신경이 사도들의 신조라면 한 단어도 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라는 말을 빼고 변개시켰습니다.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말도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속 사업을 마치시고 하늘에 올라가셔서는 하나님 우편에서 편안히 앉아 계신 분으로 오해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심히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쉬지 않고 간구하시고 중보 기도하시는 분이십니다(롬 8;34, 딤전 2;15, 히 12;24)

우리가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께 대언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1요 2;1)

일곱 금촛대 사이를 다니시며 교회를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계 1;12-20)

그리고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히 1;3)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저리로서”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애매합니다. 모두가 이 단어의 뜻을 모릅니다. “저리로서”는 “그 곳”이라는 말입니다. 왜 의미도 모르는 말을 일부러 넣었을 가요? 교리적인 문제는 없지만 구성상에 문제는 있습니다.

 

“성령을 믿사오며”

 

성령을 믿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성령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영접의 대상입니다. 성령은 모셔드리는 대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죄사하심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렇게 믿도록 도와 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거룩한 공회와”

 

영어로 보면 문제가 분명합니다.

“the Holy Catholic Church”

그러므로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이들은 고백할 때마다 카토릭을 믿는 것입니다. 로마 카토릭을 통하여서만 구원이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카토릭은 성경적인 언어가 아닙니다. 성경에 카토릭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카토릭을 거룩한 교회라고 도저히 볼 수 없습니다. 카토릭은 12세기, 13세기 두 세기에 죽인 그리스도인들만도 5천만명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종교 개혁자들은 카토릭을 모두 적그리스도로 보고 있습니다. 결코 거룩하지 않습니다.

나포레옹

"예수회는 종교단체가 아니라 군대 조직이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군대 장군이며 수도원 대장이 아니다. 이 조직의 목적은 권력이다."

마르틴 루터

"바울이 데살로니가 후서 2장 3절에서 4절에 하나님이나 숭배받는 자 위에 뛰어나 지존하여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라고 기록하였 데 그 존재가 여기 있다. 적그리스도인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있는 데 그는 하나님의 법을 폐지하였으며 하나님의 계명 위에 자신이 만든 계명을 높였다. 우리는 여기서 교황권이 진짜 적그리스도의 권좌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죤 칼빈

"나는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임을 부인한다. 그는 적그리스도다. 나는 그가 교회의 머리됨을 부인한다."

죤 웨슬리

"로마 교황권이 바로 불법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런데 개신교도들은 예배시간마다 카토릭을 거룩한 교회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개인교가 기만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통합에서는 다행스럽게도 “거룩한 공회”라는 말을 “거룩한 교회”로 바꾸었습니다.

공회라는 말도 성경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공회로 끌려 가셨습니다(마 26;5, 막 15;1) 제자들, 스데반 그리고 바울도 공회에 끌려 가서 고난을 받았습니다(행 5;27, 22;30) 공회는 사탄의 장소입니다. 복음 방해 장소입니다. 핍박의 기록이 있는 곳입니다. 결코 거룩하지 못 한 곳입니다. 그런데 개신교에서 거룩한 공회라고 거룩한 예배시간만다 고백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공회”에 대하여 카토릭은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로 사도신경에서 우리는 이 교회가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유일한 교회임을 고백한다.”(제 811항)

“공회는 카토릭이다. 왜냐하면 그 곳에 그리스도께서 임재해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 카토릭 교회가 있다.”(제 830항)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the communion of Saints”라는 대목도 정말 문제입니다. 교통은 교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친교가 아닙니다. 죽은 성도와의 교제를 의미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살아있는 성도끼리 교제를 넘어 죽은 성도, 죽은 성인과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카토릭의 교리의 핵심입니다.

죽은 사람인 성자에게 기도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saints는 일반 성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카토릭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자 숭배사상입니다. 카토릭은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체를 통하여 죽은 자와 효과적인 교제를 하게 된다”(제 1689항)

“우리의 동료 순례자들과의 교제로 우리가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처럼 성자들과의 교제로 우리는 그리스도께 합류하게 된다”(제 957항)

성자란 살아 있을 때 행한 선행으로 사후에 성자로 인정을 받은 이들입니다. 그래서 카토릭에서는 성자로 지명된 이들에게 기도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성자들은 하늘에서 지속적으로 땅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기에 중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와 전 세상을 위하여 중보해 줄 것을 간청할 수 있으며 또한 간청해야 한다”(제 2683항)

이것이 사도신경이 말하는 성도의 교제입니다. 성경적은 죽은 자와 교통은 사탄적인 것입니다. 초혼입니다. 죽은 영혼을 부르는 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31)

“남자나 여자가 접신하거나 박수무당이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곧 돌로 그를 치라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레 20:27)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신 18:11-12)

예배시간마다 죽은 영혼을 부르는 것을 고백한다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여기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음을 믿기만 하면 죄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미 과거입니다. 죄사하여 주시고 계시는 진행형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십시오. 얼마나 분명한 진행인가가 보입니다.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죄사함 받은 것이 아니라 죄사함 주시는 진행형입니다. 예수믿으면 죄문제 완결입니다. 끝난 것입니다.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죄문제가 끝난 것입니다. 카토릭에서는 순간순간마다 성찬을 행합니다. 죄는 진행형입니다.

그리고 더 문제가 있습니다.

어떻게 죄사함을 받는 것인지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사하는 것임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카토릭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기에 죄사함받는 것이 아닙니다. 신부에게 고해성사함으로 죄사함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 죄를 사해주는 것이 아니라 신부와 교황의 중재가 죄사함을 줍니다.

카토릭은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완전한 수단을 얻는 길은 그리스도의 카토릭 교회를 통하여서만 가능하다”(제 816항)

“카토릭 교회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 의하여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세워졌음을 알고서도 그 곳에 속하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제 846항)

“그리스도의 뜻에 의하여 교회는 세례받은 자들의 죄들을 용서할 권세를 갖는다”(제 986항)

“성직자의 성사로 주교들과 사제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죄들을 용서할 권세를 갖는다”(1461항)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죄를 사한다는 말은 성직자들이 사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2)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 13:12)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4)

예수님의 피외에 구원을 주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소망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헛 것이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5-17)

그러나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 데 애매한 표현입니다. 누구의 몸을 의미하나요? 우리 몸 그대로 사는 것처럼 고백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몸처럼 부활할 것을 믿어야 참 믿음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몸처럼 부활하게 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1)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우리는 영원히 살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지옥에서도 영원히 살고 있습니다. 어디에서 영원히 사는 것인지 구별하여 주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을 믿는 것이지만 “천국에서”라고 추가하여야 구원입니다.

카토릭은 연옥설을 믿고 있습니다.

더구나 애매합니다.

 

결론

 

그려면 사도신경을 어떻게 고치면 완벽에 가까울 가요? 이렇게 고백하여 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사오며
그의 독생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으로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어 지옥에 내려 가신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서 일하시다가
그 곳으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모셔드리오며
거룩한 교회와 성도가 서로 친교하는 것과
죄를 용서하신 것과
몸이 예수님처럼 다시 사는 것과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출처: http://ikccah.org/free_board/12829

불후의 명곡과 소모되는 설교



방금 저녁식사를 하는데 TV에서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오래 전에 유행했던 대중음악을 젊은 가수들이 현대 감각을 살려 새롭게 부르는데 정말 압권이다. 40여 년 동안 온 국민들이 애창해온 하얀 손수건을 다시 열창하니 그 감동의 물결이 온 관중과 시청자들에게 퍼져가는 듯하다.


그것을 들으며 문득 오래 전 어떤 목사가 한 말이 생각났다. 가수는 한 번 자신의 곡이 히트하면 평생 그것을 재탕하며 돈을 버는데 목사는 아무리 좋은 설교를 만들어도 같은 교회에서 다시 써먹지 못한다는 것이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그 프로를 보아서 그런지 갑자기 그 생각이 났다. 그렇게 보면 설교사역은 무한히 소모하는 일 같아 보인다. 몇 년 전에 큰 교회 목사가 내가 주일마다 몇 십 명이 모이는 교회에서 설교한다는 말을 듣고 참 아깝다고 했다. 정성껏 설교를 준비해서 전해도 적은 회중 가운데서도 소수만이 경청한다. 그러니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너무도 비효율적인 일을 하는 셈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서는 효율성이 핵심가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 특별히 작은 교회를 섬기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열 명 가까운 성도들을 상대로 충성스럽게 말씀사역을 하는 목사들이 있다. 주의 종은 하나님의 소모품이라는 말이 있다. 설교사역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기에 한없이 더디고 완고한 사람들에게 무한히 소모하는 사역이다. 그러나 이렇게 무의미해 보이는 봉사를 통해 자격 없는 자들에게 당신의 사랑과 말씀을 무한히 탕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증거된다.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성공적인 사역의 기준은 효율성이 아니라 주님이 맡기신 일이라면 작은 것이라도 우직하게 충성하는 것이다.


별 효율도 없이 곧 소모되어버릴 설교를 준비하느라 이 밤도 노고를 아끼지 않는 동료 설교자들에게 파이팅을 보냅니다.


<박영돈 목사>

 

“오직 성경으로”

(Sola Scriptura)

이 환 봉 개혁주의학술원장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는 교회개혁의 표어는 이미 “개혁되어진”(reformata)과 항상 “개혁되어야 하는”(reformanda) 교회의 역설적인 두 가지 과제를 잘 표현하고 있다. 개혁교회는 불변하는 성경 말씀을 따라 개혁되어졌기 때문에 변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개혁교회는 성경 말씀을 따라 항상 개혁되어야 하기 때문에 변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개혁교회는 오직 성경의 표준을 따라 모든 악한 타협을 거부하기 위해 보수주의자보다 더 보수적이어야 한다. 또한 개혁교회는 오직 성경의 진리 안에서 모든 악한 전통을 극복하기 위해 진보주의자보다 더 진보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역설적 과제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의 길 즉 보다 더 철저하게 성경적이 되는 길뿐이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는 성경 말씀의 표준에 비추어 볼 때 너무 변해서 회개해야 하고 또한 너무 변하지 않아서 회개해야 한다.

 

    1. 오늘 우리는 성경 말씀을 떠나 변하였기에 회개해야 한다.

    상황론자는 세상을 섬기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급변하는 세상의 현실과 상황에 따라 항상 새로운 변화와 발전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개혁자들이 생각한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semper reformanda)는 말의 의미는 새로운 상황에 따라 항상 새로운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개혁자들이 요구한 개혁의 핵심은 항상 오직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개혁의 표준은 상황이 아니라 성경이었으며 개혁의 태도는 창조가 아니라 회개였다. 즉 교회개혁이란 상황이 요청하는 새로운 것의 창조와 확립이 아니라 성경이 요구하는 옛것의 갱신과 재확립이다.

 

  루터가 95개 조항의 종교개혁 선언문을 회개의 요청과 더불어 시작하였던 것은 회개 즉 성경적 신앙의 회복이야말로 교회개혁의 진정한 출발점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칼빈의 교회개혁도 시대의 요청에 교회가 얼마나 잘 적응하는가의 문제 이전에 교회가 성경 말씀의 요구에 얼마나 충실한가의 문제에서 시작된 것이다. 사실상 오늘 한국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도 교회가 세상에 동화되어 변화하지 못한 기능적 실패 때문이라기보다는 교회가 성경에 충실하여 일치하지 못한 존재론적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진보적으로 변화되지 않기 때문에 회개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너무 진보적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회개해야 한다.

 

  웰즈(D. F. Wells)가 그의 책 “No Place for Truth"에서 지적한 것처럼 오늘 한국교회도 신학과 목회 현장에서 성경의 교훈과 명령은 뒷전으로 하고 저급한 현대사상과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세상의 학문에 성경의 진리를 위한 자리를 내어 주고 있다. 예를 들면, 경제성장을 위한 시장경제 논리와 마케팅 전략이 교회성장을 위한 성경적 원리와 방법을 대신하는 것을 본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죄와 구속의 은혜가 심리학이 말하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상호갈등과 내적 상처로부터의 단순한 심리적 치유와 안정으로 대체되는 것을 본다. 오늘날 많은 이단과 은사주의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대신에 인간의 체험과 감정에 기초한 새로운 계시를 앞세워 혹세무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성경적 원리 대신에 수요자 개인의 요구와 필요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개인주의와 실용주의의 원리가 오늘날 교회의 예배, 설교, 전도의 형식과 내용을 결정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성경으로”의 원리를 떠나 기독교를 다시 개혁자들이 반대했던 그런 철저한 인간중심적인 종교로 만들어 가는 교회 변질의 현대적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혁교회와 개혁신앙은 우리의 생각과 판단이 아무리 정당하고 시대적인 요청이 제아무리 더높다할지라도 성경 말씀을 제쳐두고서 우리 자신의 사회학적, 심리학적, 경제학적 생각과 필요를 따라 우리의 신앙을 재구성할 수 없다. 물질주의, 물량주의, 세속주의의 가치와 방식을 따라 은밀히 기획되어진 오늘 교회안의 온갖 인위적인 조작은 결국 교회를 갱신하기 보다는 오히려 훼손해 갈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세상의 영을 따르는 세상의 지혜를 단호히 거부해야한다. 성경 말씀의 표준을 떠나 너무도 변하여 버린 것을 참으로 회개해야한다. 진정한 교회개혁은 하나님의 영을 따라 오직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갈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2. 오늘 우리는 성경 말씀을 따라 변하지 않기에 회개해야 한다.

    성경은 “복음”(good news)으로서 새로운 소식을 의미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우리의 오래된 편견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을 주시고 우리의 회개와 변화를 격려하기 위해주신 것이다. 참된 회개는 진정한 변화를 가져온다. 선지자들은 거듭거듭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전통을 재고하도록 도전하였다. 성경과 교회사에 나타난 신앙의 영웅들은 그 시대의 거짓된 요구들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원리를 옹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항상 하나님의 말씀의 요구를 따라 회개와 변화를 앞서 주도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거짓된 전통과 일상으로부터 떠나 생각과 삶에 있어 새로운 변화와 혁신을 단행하도록 요구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새로운 백성의 조상이 되도록 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그의 역사적 뿌리로부터 잘라내시고 새로운 나라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하셨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은 자신의 과거와의 분명한 단절이었고 약속된 미래를 향한 새로운 헌신과 위탁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일상에 사로잡힌 삶에서 떠나 가나안의 약속의 땅을 향하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히려 애굽의 일상의 삶을 그리워하고 다시 포로생활로 되돌아가기를 요구하며 모세를 원망하고 거역하였다. 구약의 전 역사에 나타난 바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종 자신들의 일상과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혼동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29:13)고 하셨다. 예수님도 이 구절을 인용하여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책망하셨다(마 15:8-9, 막 7:6-7).

 

  바리새인들은 “고르반”(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이라는 사람의 계명 즉 인간의 전통을 하나님의 진리로 내세워 사실상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자들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한 전문가들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다른 많은 인간적인 전통을 만들고 따르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머물고 있었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올바른 해석학적 또는 주석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메시야를 한갓 세상의 군왕으로만 오해하였고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였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전통과 이해를 책망하여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5:39-40)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지난날의 교회역사를 통해 때마다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잘못된 전통을 반성하고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되돌아올 것을 거듭 요구하셨다. 그러한 하나님의 결정적인 요구가 바로 종교개혁이었다. 종교개혁은 오직 성경으로 교회를 청결케 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였다. 마침내 교회의 신학과 예배와 설교, 그리고 교회생활의 모든 영역이 혁신적으로 새롭게 변할 수 있었다.

 

    개혁자들은 사도들의 성경적 가르침으로 되돌아가는 일에 있어서는 아주 보수적이었지만, 반면에 성경에서 떠난 인간적 전통들에 대한 공격에 있어서는 매우 급진적이기도 하였다. 개혁자들의 이러한 교회개혁의 자세가 “오직 성경으로”라는 슬로건에 잘 표현되어 있었다. 오늘 우리도 개혁자들처럼 현대사상의 거짓된 요구에 직면하여 오직 성경을 따라 우리의 신앙을 파수해야하고 또한 전통사상의 편협적인 판단에 대해서도 오직 성경을 따라 날로 새롭게 개혁해 가야 한다. 오직 성경에 순종하기 위해 개혁교회와 개혁신앙은 언제나 변하지 말아야 하고 또한 항상 변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거짓된 세상의 새로운 요구에 타협하지도 않고 동시에 변하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지도 않는 균형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균형 있는 개혁자의 삶을 살기 위해 먼저 우리 자신이 오직 성경으로의 삶 즉 철저한 성경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 맡겨진 교회개혁의 시대적 사명을 올바로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만이 우리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표준과 충족한 근거임을 새롭게 다짐하며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란다.

 

 

출처: 개혁주의학술원

가져온 곳 : 
카페 >말씀의 교회와 새빛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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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상록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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