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호의 아름다운 빛을 머금고 되 뿜어내는 바다는 푸르다 못해 녹색을 띠고 작열하는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해변의 얕은 물 속에는 물과 하나가 된 꼬마들이 키득거리며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고, 세계 각 곳에서 휴가차 모여든 중.노년들이 햇볕을 즐기려고 파둔 커다란 모래찜질 통(?)속에는, 하마처럼 불룩한 배들 때문인지 이곳저곳에 작은 모래 산을 이루는 풍경이 사뭇 나른하고 한가롭기 그지없다. 젊은 청년들은 검붉게 탄 근육질 몸매를 과시하듯, 손바닥만 한 작은 판자 위에서 각종 묘기의 서핑놀이로 파도를 타는 모습은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듯 싱그럽다..

사면이 바다이기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공기와 물이 깨끗하고 맑아 어른들은 물론, 갓태어난 신생아에게마저도 수돗물 그대로를 받아 분유를 타서 마시게 해도 좋다고 의사들이 권한다고 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없이 사시사철 아름다운 꽃이 다투어서 피고 지는 곳, 제각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각종 이름도 모를 꽃들이 풍겨내는 향기는 비행기 트랩을 밟고 내리는 순간부터 그 달콤한 향기를 맡을 수 있다며 함성을 지르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수많은 아름다운 꽃 중의 꽃, 단연 으뜸인 꽃이 있는데, 그 이름은 ‘푸루메리아’이다. 이 꽃은 생김새는 소박하고 색갈은 천사의 날개처럼 하얗고(가끔씩 붉은 색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흰 색이 많다.) 속은 노란 것이 보기에 무척 우아하고 단아하지만, 그 향기만은 단연 양귀비의 미소처럼 고혹적이며, 그 달콤한 향기는 가까이 코를 대면 아찔할 정도로 강열하다. 고운 여인의 눈망울처럼 매혹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암튼, 필자의 짧은 수사학으로는 제대로 표현하기에 역부족이다.ㅎ

밤낮으로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해풍은 고기의 비릿함이 섞인 짭짤한 바다 내음을 실어 나르고, 제아무리 태양이 이글거리는 뜨거운 여름날이어도 집이나 그늘에만 들어서면 가슴까지 시원해지는 것이 마치 청량음료수를 마신 것 같다. 혹독하고 모진 겨울 추위가 없기에, 각종 예쁜 새들이 집 앞에도, 상점이나 식당 앞에도 사람을 친구하자며 날아들어 재재거리며 노래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음식을 먹을 때면, 한 입 달라는 듯, 더욱 가까이 와서 까만 눈망울을 도르르 굴리면서 애교를 부린다. 이토록 아름다운 곳이기에, 굳이 흠을 찾아보라고 한다면, 그것은 겨울이 없기에 매일 그날이 그날 같고, 또 하얀 눈꽃 송이를 구경할 수 없다는 것, 그 정도일 것이다.

내가 사는 곳은 (러시아’ 선교사를 자원한 남편과 함께 ‘러시아’로 발길을 옮기기 전이나 지금이나) 세계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한 관광 명소다. 한국에서 온 어느 짓궂은 여행객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곳이야말로 천당 바로 아래 999단쯤 된다.” 고 말하였을 정도라니까, 가히 그 아름다움은 짐작이 갈 것이다. (별님이 사는 곳이 어디메냐고요? 안드로메다? 꼭 집어서 말을해 달라고요? 그것은 독자님의 상상에 맡기려고 해요. ^^ 너무 열어버리면 재미가 없거든요. ㅠㅠ)

정작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내가 사는 지역의 예찬론이 아니라, 그렇게 아름다운 곳에 살고 있을 때, 내가 그 아름다움을 얼마나 즐감하면서 살았던가? 그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얼마나 있었던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혜택을 누리고 사는 것에 대한 감사보다는 주어진 환경에서 일어나는 작은 어려움에 불평이 더 많았던 것을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고 싶은 마음 진심으로 간절하다. 그때는 내가 처한 환경이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가장 열악하고 가장 힘든 것만 같았다. 개척교회의 어려움에 시달리고 어쩌다가 부정적인 말이 들리기라도 하면, 그 한마디에 여린 성품인 나는 상처를 받고 가슴앓이를 하느라고 눈물로 지새운 밤도 수없이 많다. 그런 상태였으니까, 주위의 아름다움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라고는 전혀 가져보지 못하였다고 해야겠지…

그러다가 막상, 러시아, 그것도 시베리아에서 가깝다는 ‘우수리스크’(연회 주)에 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곳에서의 삭막함이란 이루 말로 다 형언키 어려웠다. 글자 그대로,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것처럼 척박한 땅이요, 각박한 인심에 부딪히게 되었던 것이다. 사시사철 겨울이 없는 열대 지방에서 살던 사람이 갑자기 백팔십도로 회전, 이제는 여름이 없는(있다고 하여도 아주 짧은 순간뿐) 곳에서 겨우내, 밤도 낮도 없이 몰아치는 혹한 속에 흰 눈이 무릎까지 폭폭 빠지는 곳, 내게는 낭만적이기만 하던 그 하얀 눈꽃 속에 파묻혀 동사하는 사람이 속출하고 폭설에 갇혀서 몇 날 며칠 밖에 나갈 수도 없이 집안에만 갇혀서 지내야 했던, 말만 듣던 동장군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얼마나 무시무시한 무기를 지녔는지 체험하고 전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제야, 나는 내가 얼마나 좋은 곳에서, 행복 조건을 두루 갖춘 곳에서, 천혜의 혜택을 누리면서 살고 있었던가? 뒤늦게야 깨달았고, 주님께 눈물로 회개 자복했던 기억이 감사절을 맞아 새롭게 떠오른다. 감사를 회복하니까, 생활도 회복시켜 주신 주님, 감사보다는 불평이 더 많았던 나를 가르쳐주시고 길러주시기 위함이였음을 뒤늦게 깨달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성도의 감사를 제사로 여겨 기쁘게 흠향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시 116: )

우리 인간도 그러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불평하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신 것 같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 더 큰 것을 주고 싶어하는 인간의 마음, 이런 인간의 심리가 하나님의 성품 중 한 부분을 닮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ㅠㅠ 요즘처럼 어려운 세태 속에서 감사한 마음을 가지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이해한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 중에서, 종의 자리에 던져졌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하는 중에서라도 요셉은 어떠했는가? 우리 모두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신앙 따로, 생활 따로, 따로국밥이 아니라면 말이다.

요셉, 그는 아무리 열악한 환경에 던져졌더라도 절대 원망하지 않는 위대한 인물이다. 불평하기보다는 감사한 마음을 가졌던 대표적 인물이었고, 그런 요셉을 주님께서는 애급 제국의 대 국무총리 자리까지 번쩍 들어 올려놓으신 결과를 보면서 우리도 다시 한 번 마음속에 각인 시켜야 한다. 요셉의 감사를 배워야 한다. 욥도 마찬가지다. 욥도 최악의 상황에서 고통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어버리라”고, 저주성 폭언에 가까운 말을 쏟아내는, 사랑하는 아내의 원망 소리에도 굴하지 않더니 결국 그도, 드라마틱한 인생 역전의 승리자로 주께서 일으켜 세워주셨던 것이다!!

추수감사 계절이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늘 듣게 되는 소리가 ‘감사하자’라고 하는 소리이기에, 우리 마음이 무디어져 버린 것은 아닐까? 형식적인 감사, 표면적인 감사 생활로 전락해 버린 것은 아닌가? 나의 감사에 대해 전반적인 ‘퍼스펙티브(Perspective)’ 가 이루어져야 한다. 감사의 본질은 무엇이던가?

기왕에 감사할 거면, 어떤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인가, 감사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니까, 나의 감사 생활을 살펴서 제대로 된 감사 생활로 업그레이드(upgraded) 시켜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감사에도 세 가지 차원의 감사가 있다고 한다.(어느 책에서 읽은 것 같은데 함께 나눈다.) 영어로 1. If (~ 만일의 감사), 2. because of (~때문에 감사), 3. in spite of (~ 그럼에도 감사)로 나눌 수 있다.
 
첫째, If의 감사. 이것은 조건부 감사다. “만약,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혹은 저렇게 해주신다면(물질을 주시면, 건강을 주시면, 내 병을 고쳐주시면 등등.) 감사하겠습니다.” 하는 조건 단서를 붙인 감사다. 이것은 가장 차원이 낮은 감사로 분류해 볼 수 있겠다.

다음, because of = “하나님께서 내게 건강을 주셨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내게 물질 축복을 많이 주셨기 때문에, 나와 내 가정의 건강을 지켜주셔서 감사하고, 내 자녀가, 내 사업이 잘되어서 감사하다.”고 하는 것, ‘때문에(Because of)감사’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상대적 감사이다. 물론, 이 때문에 감사(상대적 감사)마저도 범인인 우리네에게 있어서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다음, 실질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영국이 낳은 유명한 성경 주석가 ‘매튜 헨리’(Matthew Henry, 1662.10.18~1714)가 도둑을 맞고 낙심 중, 범사에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생활에 적용시키는 훈련을 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여기에 옮겨 보면,

1. 이전에 도둑을 맞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2. 자신의 생명이 도둑 맞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3. 아직도 자신에게 무엇(가족, 건강, 이웃 등)이 남아 있음에 감사하고
4. 자기 자신이 도적이 되지 않은 것에 감사한다.
어떤가? 우리는 매튜 헨리의 감사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이 되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3. in spite of =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다”. 이 감사는 절대적 감사로서 인간 이성을 넘어선 감사, 환경을 초월하는 감사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 욥이나 하박국 선지자가 드린 감사로 극한 환난이나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 한 분으로만 감사하는 것이다. 이런 감사는 인간의 지. 정, 의로 느껴서 하는 감사가 아니라, 전적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라 할 수 있다. 사실, “감사”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유카리스토우’(Ευχαριστώ)인데, 이 말은 ‘’은혜’ (Χάρης, 카리스)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를 통한 감사와 감격이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는 뜻일 것이다.

내가 아주 오래전, 한 번 들려드린 기억이 있으나, 너무도 감명 깊은 실화이기에 다시 금 들어도 좋을 것 같아서 소개한다. 절대적 감사,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는 환경에서나 느낌에서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오는 것, 실제 인물의 이야기이다.

일본에 ‘미즈노 겐조’라고 하는 유명한 장애시인이 있다.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심한 열병을 앓았다고 하는데 그 결과로 그는 손가락도 움직이지 못하고 발가락도 움직이지 못하며 말도 할 수가 없는, 그야말로 식물인간처럼 되어버렸다고 한다. 이렇게 그는 고통스러운 몸과 마음이 되어 하루하루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는데….

그런 그에게 이웃에 있는 한 그리스도인이 찾아와 성경책 한 권을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겐조의 어머니는 척추가 마비되어 앉을 수도 없는 사랑하는 아들이 엎드린 채라도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작은 나무받침대를 하나 만들어 그 위에 성경을 펼쳐놓아 주었다. 어머니가 나무 받침대 위에 성경책을 펴놓아 주긴 했으나, 겐조는 손가락을 쓰지 못하니까 책장을 넘길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겐조가 성경 한 장을 다 읽고 나서 눈으로 껌벅껌벅 신호를 보내면 옆에 앉아 있던 그의 어머니가 책장을 한 장씩 손으로 넘겨 주었다. 이렇게 해서 학교도 교회도 다닐 수가 없었던 겐조는 남아 있던 눈으로만 성경책을 읽고 또 읽었다고 한다.

그러든 어느 날, 그는 성경을 읽다가 그 속에서 구원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벌레보다 못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그 외아들을 보내신 것, 성부 하나님과 동등권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하늘 보좌를 버리신 것, 육신을 입고 고난을 받으시다가 종내 십자가를 지신 그 귀한 사실을 마음속 깊이 깨닫게 된 그는 울고 또 울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마음을 글로서 표현하고 싶었으나 손가락이 말을 안 들으니 글을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었고, 말을 할 수가 없으니 녹음을 할 수도 없었고… 그저 두 눈만 끔뻑거렸다고 하는데, 이것을 본 그의 어머니가 철자가 적혀 있는 종이를 한 장 그 앞에 놓아두고 막대기로 한자씩 짚어 나가면서 아들의 눈동자를 살폈다.

어머니가 들고 있는 막대기 끝이 자기의 원하는 글자에 가서 닿으면 그것이 맞는다고 겐조는 눈으로 신호를 보내었고… 그러면 그의 어머니가 그 글자를 뽑아서 다른 종이에다 옮겨 적었고, 이렇게 고통 중에서 겐조가 눈으로 한 자 한 자 모아서 적은 글이 시집으로 출간되었는데 그곳에는 아름답고 영감 있는 시가 170여 편이나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중에 한편을 여기에 소개한다. 제목은 ‘괴롭지 않았더라면…'

괴롭지 않았더라면

만일 내가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을…

만일 모든 형제.자매들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을…

만일 우리 주님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을….


정말 눈물 없이는 읽을 수가 없고 깨달은 자만이 쓸 수 있는 시, 깊은 영감이 흐르는 아름다운 글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미즈노는 그에게 닥친 환난 때문에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만났다면 장애가 더는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된 셈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닥친 고난과 역경은 그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허락된 광야는 더 좋은 곳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축복의 통로임을 믿는 사람만이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만족하며 절대적 감사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의 감사는 차원 높은 최상의 감사로 엎그레이드 되는 것이다.

필자가 좋아하는 성구를 소개하고 싶다.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외우고 또 외우는 말씀이다. 주께서 나를 선한 길로 이끄심을 믿고 입술로 고백하면 환난 중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 28) 이 말씀이 환난 가운데서 나를 지켜주시고 모든 환난으로 인해서 주님께 더욱 가까이 가게 됨을 믿을 때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감사하는 자에게는 점점 더 큰 은혜와 복을 주시고 싶어하시는 주님이심을 알 수 있다.

 

이 복된 추수감사 절기에, 풍성한 감사를 마음속에 품되, 만약(If)에, 때문에(Because of)가 낮은 차원의 감사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의 감사, 감사의 개념(concept)을 한층 더 up grade 시켜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시 116: 12-14)

**별똥별의 방을 찾아주시고, 졸글이나마 늘 격려의 박수로 응원해주신 독자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개인적으로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마땅하지만 여의치 못해, 지면을 통해서나마 인사를 드려요. 지난 한 해동안도 감사했어요. ^^ 앞으로 더욱 많이 기도하면서 섬기도록 하겠습니다! 가내에 주님의 은총이 넘치시기를!!**
 
"Happy ThanksGiving Dear Friends!!"
 

USA 아멘넷 별똥별/ 최송연 신앙칼럼 글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이환봉 교수

종교개혁 당시에 로마교는 칭의가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 뿐 아니라 인간의 협력에 의한 점진적 성화의 과정을 통해 완성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들에게 칭의와 성화는 실질적으로 동일시되었다. 그들은 성경 원문의 헬라어“의롭게하다”(dikaio-o, 롬3:28)를 법정적 의미를 지닌“의롭다고 선언하다”로 번역하지 않고 자신들의 불가타 라틴어 성경에서“의롭게 만들다”(justificare)로 잘못 번역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칭의를 단번에 이루어지는 법정에서의 선언적 행위가 아니라, 인간 편의 선한 행위와 성화의 노력에 의해 점진적으로 완성되어 가는, 즉 인간 자신을 의롭게 만들어 가는 과정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1521년 독일어 신약성경을 번역하였을 때, 로마서 3:28을 사도 바울의 일관된 주장을 따라“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번역하였다. 루터는 인간의 모든 계략과 지옥의 문에 대항하여 우리를 보호해줄 수 있는“칭의”(justification)의 신조는“우리가 행위 없이도 그리스도에 대한 오직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함을 받는다고 선언되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그리고“믿음이 그 적절한 직무를 수행할 때, 믿음은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무엇도 바라보지 아니한다. 믿음은 이같이 말하지 아니한다. 즉 내가 무엇을 행하였는가? 내가 어떤 죄를 범하였는가? 내가 무슨 공로를 세웠는가? 믿음은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행하셨는가? 그리스도께서 무슨 공로를 세우셨는가?”이는 우리의 구원적 믿음의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 후 1530년 6월 25일 루터의 추종자 멜랑흐톤이 작성한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Augsburg Confession)에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능력과 공로와 행위에 의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에 의해 의롭다함을 받는 다는 칭의의 교리(Article IV: Of Justification)가 구체적으로 고백되었다. 칼빈 역시 칭의론에서“의의 전가”를 주장하면서“우리는 오직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값없는 의를 얻는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칼빈은 오시안더(Osiander)가“dikaio-o”를  의롭게 만들다”로 설명한 것을 비판하였다.


개혁자들이 이해한 칭의는 개인의 영적 도덕적 진전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
아니라“오직 믿음으로”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완벽한 거룩을 옷 입고 하나님의 완전한 의의 전가(imputation, 전달되어 소유됨)가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실제로 의롭게 되기 이전에, 그리고 아직 완전한 성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하나님은 오직 믿음을 수단으로 단번에 자신의 의를 우리의 의로 선언하시고 인정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오직 믿음은 칭의의 근거가 아니라 칭의의 수단이다. 칭의의 근거는 오직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이며, 믿음도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주권적 은혜의 선물(엡2:8-10, 빌1:29)이기에 인간의 믿음이 칭의를 받을 수 있는 근거와 공로가 될 수 없다. 그리고 개혁자들은“오직 믿음으로”의 원리를 통해 율법폐기론자들처럼 행위는 모두 필요 없다거나 행위는 아무렇게 해도 좋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인간의 선행과 성화의 노력이 구원(칭의)의 근거와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려고 한 것이다. 선행과 성화는 칭의의 열매와 표시이지 결코 구원의 전제와 수단이 아니다. 이처럼 종교개혁의 실질적 원리로 불리는“오직 믿음으로”의 원리는 구원적 신앙의 조건(수단)을 말해주기도 하지만 성령의 선물인 신앙은 신학의 내적원리로써 외적원리인 말씀과 더불어 개혁신학을 말씀과 성령 즉 주객관의 균형을 가진 신학으로 만들어 준다. 그리고 우리 신앙생활의 도덕주의와 율법주의에로의 회귀를 막아주는 원리이기도 하다.

오늘날 로마 카톨릭과 복음주의자들이“로마 카톨릭과 복음주의 연대”(Roman Catholics and Evangelical Together, 1994년 3월 29일)라는 공동 성명에서“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진리에 동의한다”고 함께 선언하였다. 이 성명서에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팩커(J. I. Packer), 빌브라이트(Bill Bright) 등의 유수한 복음주의자들이 함께 서명하였다. 그러나 유의해야할 점은“오직”(Sola)이라는 단어가 생략되어있다는 사실이다. 로마 카톨릭은 트랜트 종교회의(1547년)가 결정한 바대로“만약 누군가 칭의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 그 어떤 다른 협력도 요구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한 죄인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한다면 ... 그에게는 저주가 있을 지어다”라는 교리적 선언을 그대로 견지하고 있다. 오늘날 로마교는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의 교리에 동의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성례준수와 선한 행위가 구원(칭의)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추가되어 있는 한에서의 동의를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칭의는 그리스도의 공로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세례를 통해 주어진 성령 하나님의 주입된 의를 사용하여 스스로 자신을 더욱 의롭게 만들어 주고 자신의 죄를 갚을 수 있는 사랑과 자비를 행하는 인간 죄인의 공로가 협력할 때에 비로소 가능해 지는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신인협력에 의한 구원의 교리를 견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은 루터교 세계연맹(1999년)과 서울 감리교 세
계대회(2006년)를 통해서 자신들의 칭의 교리에 대한 동의를 이끌어 내었다. 이제 로마 카톨릭은 개신교의“마지노 라인”(최후 방어선)과도 같은 개혁주의(칼빈주의)를 주적(main enemy)으로 규정하고 특히 오직 믿음을 강조하는 칼빈주의 구원에 대한 5대 교리를 웹사이트 등을 통해 집중 공격할 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와의 연대를 통한 협공에 진력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은“오직 믿음으로”의 교리를 참된 복음의 핵심적인 본질로 생
각하여“교회가 일어서고 또는 넘어지는 신앙조항”(articulus cadentis et stantis ecclesiae)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이신칭의의 교리를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자는 사실상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시 한 번 더“오직 믿음으로”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진리를 확인한다. 칭의를 통해 하나님의 완전한 의를 유일하게 만족시킬 수 있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음을 믿는다. 칭의가 우리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그 어떤 인간적 공로에나 우리 안에 주입된 그리스도의 의와 그 어떤 인간적 제도와 의식에 근거한다는 것을 단호히 부정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떠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용납 받을 수 있다는 그 어떤 근거(종교적 헌신과 윤리적 삶)도 부정한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을 선포하는 것이지 구원의 하나님께 우리가 스스로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출처: 개혁주의학술원

가져온 곳 : 
카페 >말씀의 교회와 새빛장로교회
|
글쓴이 : 상록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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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가다듬고 집중해서 아래 질문에 답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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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찾아 볼 수 있으면 치매나 알즈하이머 걱정을 안 해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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