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의 법은 본성의 법과 다릅니다 / 스테판 차녹

 

 

1) 마음의 법은 회심한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법입니다

마음의 법, 마음에 새겨진 법은, 본성(nature)의 법칙과 전적으로 같은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단지 올바른 이성의 법칙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견해는 잘못되었습니다. 그것은 은혜의 법입니다.

 

본성의 법이 행위언약의 법이라면, 마음의 법은 은혜언약의 법입니다. 본성의 법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지만, 이 은혜의 법은 특정한 사람들 속에만 있습니다. 본성의 법은 바울이 회심하기 이전에도 있었지만, 마음의 법은 그의 회심 때에 주어졌습니다. 본성의 법에는 중보자에 대한 믿음이 없지만, 은혜의 법에서 믿음은 중요합니다. 본성의 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죄와 불신앙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은혜의 법은 이러한 것들을 깨닫게 합니다. 죄와 불신앙을 깨닫게 하는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16:8,9).

 

본성의 법은 성화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 속에 육신으로 태어난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법은 성화의 한 부분이 되어서, 몸의 지체의 법과 싸웁니다. 물론, 본성의 법도 사악한 범죄들에 대항해서 전쟁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 자체에 대항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가 '방향 제시의 법'으로서의 마음의 법에 대항해서 싸우는 것과 같이, 마음의 법, 또는 은혜의 법은, 죄에 대항해서 싸웁니다. 죄는 마치 자기가 사람의 인생을 지도하고 질서를 잡아 주는 것처럼 흉내 내고 있는 하나의 법인 것입니다.

 

2) 타락 이전에는 본성의 법과 마음의 법이 같았습니다

마음의 법은 원래 본성의 법이었던 그 법의 회복입니다. 처음에 아담의 마음속에 새겨졌던 그 법을 거듭난 사람들의 마음속에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4:24). 하나님을 따라 '지으심을 받았다'라는 말은, 아담이 창조될 때 지니고 있었다가 잃어버린 그 의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지니고 있었던 그 의는 율법의 의였습니다. 십계명의 첫째 돌판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 둘째 돌판에 있는 인간에 대한 의무를 포함하는 의, 그리고 (아마도 그 거룩과 의, 두 가지 모두에 대하여) 더해진 진리가, 하나님을 향한 거룩과 인간에 대한 그 의의 표현 방식과 목적에 있어서 회복된 마음의 성실함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래 창조되었을 때에 마음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하여 그 법이 희미하게 되었습니다. 인간 속에 이 법의 작은 흔적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중재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듭남을 통해서 영혼 속에 새롭게 새겨지는 것이 바로 이 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속에 다른 법을 두시겠다고 하시지 않고 '나의 법'을 두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불변의 법, 곧 아담과 우리의 선조들에게 주셨던 '나의 법'을 말합니다. 마음에 새겨지는 법은, 아담의 본성에 있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타락함으로 인하여 인간이 이 법을 지워 버리고, 그분의 의를 잃어 버렸으며, 오히려 마음속에 그것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법에 대하여 본성적으로 복종하지도 않고, 복종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자기 속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에 대한 적대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법 대신에 죄의 법이 자리를 차지해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이란 죄의 법을 그 자리에서 쫓아내고, 하나님의 법을 그 합당한 위치에 두는 것입니다.

 

3) 마음의 법은 마음속에 전체적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심으신 모든 법과 모든 명령이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명령을 돌판에 새기셨던 것처럼, '마음의 판(심비, 心碑)'에도 전체의 법을 새기셨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거룩하고 참으로 의로운' 것입니다. 또한, 본질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참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율법의 한 부분만을 새기시고 나머지는 새기시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명령의 반쪽만을 새기시고 나머지 반쪽은 새기시지 않고 남겨 두어서, 흠이 있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만약 마음에 새겨진 그 법이 전체의 법이 아니라면, 새로운 피조물의 본질에 속한 무엇인가가 결핍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피조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괴물에 가까울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의 형상을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 아닙니다. 본성 속에 다른 어떠한 것과 일치되는 요소가 있다면, 그 둘은 전체의 본성에 있어서도 일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본성이 그 법의 본성과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4) 마음의 법은 외적인 법을 필요 없게 만들지 않습니다

외적인 법은 여전히 하나의 규칙으로서 가능하게 됩니다. 마음속에 새겨지는 이 내적인 법은 외적인 규칙과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내적인 법은 구칙 자체가 아닙니다. 마음에 있는 법은, 성령의 손길에 의해서 외적인 말씀이 새겨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적인 법의 진리를 실행하기 위하여 외적으로 기록된 법을 의뢰해야 합니다.

 

만약 사람이 어떤 인간적인 법률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면, 그 개념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 그리고 그의 행동이 그 법의 문자와 목적을 따르는 것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하여, 외적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해야 합니다. 사람 안에 있는 죄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죄가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규칙이 되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속에 새겨진 은혜의 법이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규칙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만이 그 기준이 됩니다.

 

마음속에 있는 법은 비록 그 본질적인 부분에 있어서 외적인 율법과 조화를 이루지만, 아직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규칙이 되려면 기록된 율법과 같이 완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생활을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말씀 속에 기록된 법입니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 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119:11). 이 말씀에는 주의 법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 약속되어 있으며, 또한 내적인 가르침도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렘31:34). 이것은 복음의 빛이 비춰지는 시대에 있어야 할 지식의 풍성함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인데, 그러한 지식은 유대인의 제의(祭儀)들의 여명(黎明) 속에서 희미하게 비춰졌던 것들입니다. 그래서 복음 아래에서 가장 미천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임하시기 이전의 유대의 박사들보다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속성에 대하여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는 것을 전혀 무의미하게 보셨던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러하셨다면 왜 사도, 목사, 교사 등을 세우시고 세상 끝 날까지 그들과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겠습니까? 이러한 내적인 가르침의 약속이 외적인 가르침을 무용하게 만들어 버린다면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에 법을 새기는 것은 문자로 쓰인 법을 무용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외적인 법을 확립하고 진전시키며, 또한 존중하게 만듭니다. 외적인 법은 목수가 집을 지을 때 규칙으로 삼는 집의 모델과 같습니다. 그 규칙에 따라서 목수는 마음에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그 생각에 맞춰서 집을 짓습니다. 자기 마음속에 가지게 되는 그 생각이나 그림은 그에게 이미 주어져 있던 외적인 규칙에 맞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목수는 그 규칙을 항상 상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은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의 법도 그러할 것입니다. 모든 이성적인 피조물들이 어떠한 조건 속에 있든지, 자연 상태에있든지 은혜의 상태에 있든지, 아니면 영광의 상태에 있더라도 순종해야 할 법인 것입니다.

 

 

스테판 차녹의 '거듭남의 본질' 162~167p 에서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이단분별 (복음과 희망에서 퍼왔습니다)

애니어그램은 철저하게 이단종파들, 뉴에이지영성가들, 불교와 캐톨릭에서 가장 열광하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애니어그램을 신봉하고 있다면
당신은 그 속에 분명히 십자가복음에 의한 전인격적인 구원을 부정하는 "이단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속이는 영들이 얼마나 강한가를 보여주는 일례입니다.

애니어그램(enneagram)은 ‘9’를 의미하는 희랍어의 ‘ennea’와
‘문자’ 또는 ‘점(點)’을 뜻하는 ‘gramma’의 합성어이다.
우리말로 굳이 푼다면 ‘9개의 점’이다.
원을 따라 분배되어 있는 점에는 1부터 9까지의 번호가 붙어있고
3, 6, 9가 세 개의 선분으로 1, 4, 2, 8, 5, 7이 여섯 개의 선분으로 연결되어 있다.

애니어그램은 지금으로부터 2천년쯤 전에 기독교가 페르시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할 즈음
아프카니스탄에서 생겨난 뒤, 이슬람교가 중앙아시아와 인도에까지 전파된 시절에는
이슬람교 국가 대부분의 지역에 보급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에니어그램은
이슬람교의 신비종파의 일종인 수피(sufi)의 스승들에 의해서만 엄격하게 구전되어 왔을 뿐이었다.
20세기 들어 에니어그램은 서구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현재 에니어그램은 러시아 출신 구제프(Gurdjieff)에서 비롯한 ‘과정 모델(process model)’과
볼리비아 출신으로 이를 처음으로 미국에 소개한 오스카 이차조(Oscar Ichazo)에서 출발한
‘인성유형론’이라는 두 개의 큰 조류가 있다.
전자는 에니어그램을 통해 인간의 삶뿐만 아니라
진행하고 변화하는 우주의 모든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후자는 인간의 성격형성에 국한하여 이 모델을 적용하고 있다.

++ 에니어그램을 H교회내에서 2007년에도 계속 한다는 것은
L목사님이 아직도 복음과 만나지 못하였다는 증거로 삼겠다는 논조의 글을 올렸습니다.
2년동안 에니어그램을 하더니만, 이제 공개적으로 내어 놓고 하는 모양입니다.
성도님들은 에니어그램이 무엇인지, 에니어그램이 어디에서 나왔는지에 대한 기본지식을 가지신 후,
분별하여 교회내 흘러들어온 그릇된 사이비사상에 미혹을 받지 말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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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에 새교회에서 애니어그램에 의한 성격진단프로그램을
수요예배시간에 십수회에 걸쳐서 전 담임목사님이 주도한 적이 있습니다.
현재, 새롭게 개척한 하나임교회에서도 애니어그램강의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분이 애니어그램을 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목회가 되지 않는다" 는 것과
"말씀이 성령님과 함께 역사하신다는 사실" 에 대한 그 목사님의 불신앙과
스스로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듯 하여 연민의 정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자신의 목양이 되지 않는다고 한계를 느꼈기 때문에
"각종 훈련프로그램 및 각종 세미나" 가 새교회에 난무하였으며
결국 애니어그램도 그 중에 보조기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애니어그램은 출발은 이슬람교의 영성프로그램에서 나왔으며
대표적인 뉴에이지 사상을 품고 있는 도구입니다. 목회자가 만약 애니어그램을 통해서
성도님들의 성격을 나누고 진단하고 싶어한다면
그것은 평소에 예수를 잘 믿는 듯이 보였던 권사님이 토정비결이나 신수를 보러가는 것과 똑 같습니다.

정말 그렇느냐고 반문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최근 애니어그램이 복음에서 벗어난 캐톨릭교회와
구원이 없는 불교에서 훨씬 열광적인 것인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불교가 포교에 사용하는 큰 주제는 "나를 찾는다. 나의 나됨을 안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려운 불경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 바로 감정과 생각을 자각하는 과정과 방법으로서
애니어그램을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불교대학에서는 아예
애니어그램수료증까지 주고 있는 있는 실정이며 열광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에니어그램(enneagram)의 역사와 개념>

에니어그램은 약 2000년 전 아프가니스탄에서 생겨났다고 합니다.
그 후 이슬람 국가 대부분에 보급되었습니다.
고대 그루나 수피들에 의해 영적 지도와 상담에 사용되었던 에니어그램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얼마 안됩니다.
이들은 리더를 딱 두 사람만 키웠습니다. 그리고는 한 사람에게만 그것을 사용하도록 허락했다고 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지도자가 사망했을 때를 대비해 맥을 잇기 위한 존재였을 뿐이었으며,
에니어그램은 전적으로 구전되던 비법이었는데, 1970년대에 천주교 예수회 수사 한 사람이
인도에서 에니어그램을 배우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70년대 들어와서 복원이 되고 80년 중반부터 보급 되기 시작했는데
90년대 와서 상당히 크게 확산이 되었습니다.

에니어그램은 희랍어인데 현대 사람들한테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용어입니다.
희랍어에 에니아스의 아홉이라는 뜻과 그라마라는 단위를 나타내는 단어를 합성한 말입니다.
그래서 에니어그램을 직역하면 아홉 가지의 무게라는 뜻입니다.
미국이나 다른 곳에서는 에니어그램을 아홉 개의 점, 또는 아홉 개의 선으로도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직관을 통해서 사람의 무게를 보는 직관적인 학문인데 사람의 무게에 따라서
그 사람의 성향이 결정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에니어그램은 아홉 가지 인간의 성격, 성향을 뜻한다고 보면 됩니다.

에니어그램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 스스로 자신을 찾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찾아야만 제대로 이해가 되고 체험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끝까지 안 될 때는 리더가 ‘당신은 이런 부분에 대해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오.’ 하고 권합니다.
거꾸로 자기를 발견할 수 있게 도와주는 방법이라고 사이비 이론을 전개합니다.

에니어그램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사람들한테는 굉장히 큰 호응을 받지만
자신에 대해서 합리화하거나 감추려고 하고 자신으로부터 피하려고 하는 사람한테는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고 강조하면서 리더들이 악용을 한다면 상대방 속에 있는 것을
전부 토해내게 만들어 결국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성향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어떠한 인격의 성숙도 이루어내지 못한다고 강조하는데
결국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나 말씀의 인격적인 변화의 역사를
교묘하게 부정하는 고도의 사악한 도구임을 알아야 합니다.

<기존의 심리 프로그램과 에니어그램과의 차이점>

기존의 프로그램들은 심리학을 바탕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에니어그램은 초심리학(super psychology)의 일종입니다.
체계적인 학문이라기보다는 직관으로 사람을 느끼게 한다고 합니다..
심리학이 발달되어 있는 지금 상태보다도 2천5백년 전에 도를 닦는 사람들이나 은수자(隱修者)들이
하늘과 직관을 통해 서로 통교가 된 상태에서 왔다고 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신비적이라고 하겠지만, 사실 신비적인 경향이 강한데,
교회안에서 만약에 목회자가 애니어그램을 신봉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컬트집단의 "구루" 혹은 "교주"의 길로 가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만이
우리들의 인격을 변화시키는 가장 완벽하며 최고이고 최적의 생명과 은혜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가르친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인양 분별없이
그냥 애니어그램의 강의를 받아들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영성에 상처가 입혀져
하나님의 말씀의 완전성과 절대성 보다는 내가 나를 찾아 헤매는 일이 벌어집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행동이나 성격패턴을 애니어그램에서 습득한 사이비적인 가치관으로
가볍게 속단해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할 것입니다.

더우기, 절대적인 가치기준인 말씀으로 세상과 이웃과 나를 보는 것이 아닌
초심리학적인 직관과 감정으로 판단하는 습관이 형성되며,
애니어그램을 열심히 하면 할 수록 할 수록 최종적으로는 그야말로 "내가 바로 신이다" 라는
뉴에이지사상에 깊히 물들어 결국 은혜의 복음과는 거리가 먼
허망한 도를 닦는 허무의 삶을 살다가 구원에서 떨어지는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역사만으로 나를 알 수 없다는
이상한 사고와 인간관계성의 회복도 바랄 수 없다는 그릇된 사상에 오염될 수 있습니다.

교회내 프로그램임에도 에니어그램을 들어보시면 인간의 성격이나 본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성령의 역사나 말씀의 역사나 십자가의 복음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즉 L목사님이 에니어그램강의를 통해서 십자가 복음의 완전성이나
전적인 은혜의 구원에 대하여 스스로 부정하는 모순 속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왜 에니어그램을 합니까? 라고 물어보십시오.
대답은 지금까지 몰랐는데, 에니어그램을 통해서 나를 알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알게 되어 결국 치유되고 회복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복음이 아닌 것이 복음으로 둔갑하여 치유되고 회복되었다는 그 고백들이
지금까지 복음으로 들었던 것이 전부 사이비고 가짜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부작용 에니어그램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사람들한테는 굉장히 큰 호응을 받지만
자신에 대해서 합리화하거나 감추려고 하고 자신으로부터 피하려고 하는 사람한테는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고 강조하면서 리더들이 악용을 한다면
상대방 속에 있는 것을 전부 토해내게 만들어 결국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가져온 곳 : 
카페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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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 쉼터/한아름



  

  

♧ 날씨와도 같은 우리네 삶 ♧


    세상사는 마치 날씨와도 같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맑게 개인 날만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허나 날씨라는 것은 그렇지 못해
    태풍도 불고 비바람,눈보라도 있게 마련이지요.



    하지만 어떤 태풍도 한달 이상
    계속 되지는 않습니다.



    세찬 비바람과 눈보라도
    여간해서는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요.



    설령 몇달 동안 계속 햇빛만 내리쬐는
    맑은 날만 계속 되었다고 칩시다.


    하지만 그것 또한 슬픈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매일 날씨가 좋아 햇살만 내리쬐면
    그 땅은 이내 사막이 되어버리니까요.



    비바람과 폭풍은 귀찮고 혹독한 것이지만
    그로 인해 씨앗은 싹을 틔웁니다.




    당신의 삶 또한 그와 다를바 없습니다.



    견디기 힘든 시련과 아픔이
    삶의 여정중에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시련과 아픔은 필히
    당신이라는 거목을 키우기 위한 밑거름입니다.

    삶은 오늘 내리는 비바람과 폭풍우 속에서
    맑게 개인 내일의 아침을 엿볼수 있는
    사람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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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분규 해결을 위한 십계

박문규 ㆍ 2014/11/19 ㆍ추천: 0      

이민교회의 공신력이 떨어지는 가장 큰 이유가 번번한 교회 분규라고들 말한다. 지난달 22일 LA기독교 윤리 실천운동은 정기 건강교회 포럼을 통해 한인이민교회의 분쟁과 그 해결방안을 주제로 다루었다. 주제발표자로 나온 허현 목사는 한인으로서는 몇 안되는 기독교 평화 운동가이자 화해사역자이다. 그는 분쟁이 표면화되면 해결하기가 쉽지 않지만 갈등 자체는 창조적인 갈등으로 전환시킬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교회 내에서의 갈등전환 교육이 실시되어야 하고 신학교에서 평화의 신학과 갈등해결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주제발표와 패널과의 토론을 거쳐 필자 나름대로 적어본 한인교회의 분쟁 해결책을 적어본다.

1. 갈등은 자연스러운 것임을 인지하라

2. 남을 규탄하는 언어, 인격을 모독하는 언어, 사생활을 침해하는 언어, 저속한 언어, 높은 음성등은 철저히 배제하라

3. 교회법, 교단 법, 회의 규칙을 숙지하고 규칙은 목숨을 걸고 지켜라

4. 교회에서 의견대립이 있는 상대방과 교회 밖에서 자주 만나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

5.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데 시간을 쓰되 판단을 빠르게 내리지 마라.

6. 교역자 등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맡고 있는 사람을 갈등의 전면에 세우지 말라

7. 분쟁이 되는 잇슈에 걸려있는 이해관계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가능한 선택이 무엇인가를 열거해 본 후 타협책을 찾아라

8. 윤리적인 문제가 이슈일때는 불의를 인정케하고 정의를 회복한 후 장래 일을 의논하라

9. 목회자는 분노조절 및 회의하는 방식에 대한 훈련을 받고 교인들에게 평화와 갈등전환에 대한 교육을 정기적으로 실시하라

10. 중재자를 세울수 있으면 중재자를 받아 들이고 교회분리만이 해결책일 때는 그 방법을 선택하라

평화와 갈등전환에 대한 교육을 하기 원하는 교회가 있다면 앞으로 LA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도움을 드릴수 있음을 알려드린다.

박문규(LA 기윤실 실행위원, 캘리포니아 인터내셔날 대학 총장)
ⓒ 크리스천위클리 /USA아멘넷



칭의와 성화 / 로이드존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꼐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에 되셨으니 (고전1:30)

 

칭의와 성화가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살펴봅시다.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십시오. 

 

칭의는 성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고, 성화는 본질적으로 성령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복되신 삼위일체 안에서 이렇게 일을 분담하고 계십니다.

의롭다 하며 옳다고 선언하는 분은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거룩하게 하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둘째로, 칭의는 법정에서 일이 그러하듯이 우리 밖에서 일어나는 일인 반면,

성화는 우리 안에서, 내면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법정에 선 나에게 재판장이 의롭다는 판결을 내리고 자유를 선포합니다.

그 판결은 내 밖에서 내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화는 내 안에서 일어나고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셋째로, 칭의는 죄의 책임을 제해 주는 것인 반면,

성화는 죄의 오염을 제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칭의는 그 정의상 단번에 일어나는 행위입니다.

반복될 수도 없고 반복될 필요도 없는 일이므로 결코 반복되어 일어나지 않습니다.

칭의는 하나님이 단번에 선언하는 것이지,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 아닙니다.

반면에, 성화는 계속 진행되는 과정입니다.

장막을 벗고 완전해질 때까지 주님을 아는 지식과 은혜 안에서 계속 자라 가야 합니다.

 

칭의와 성화의 본질적인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만큼

비성경적이고 혼란을 일으키는 잘못은 없습니다.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과 모든 가톨릭 신앙의 문제점이 여기 있습니다.

성화와 칭의를 혼동하면 자신이 의롭게 되었는지 그렇지 않은지 의심하게 됩니다.

자신의 상태와 형편이 좋지 못하거나 죄를 지었을 때에는

자신이 과연 의롭게 되었는지 회의가 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칭의가 법정에서 외부적으로 선언되는 것임을 깨닫는다면,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이미 의롭게 되었음을 알 것입니다.

 

 

칭의는 죄의 책임을 제해 주며, 성화는 죄의 오염을 제해 줍니다.

 

'날마다 읽는 로이드존스' 24p 에서..

 

가져온 곳 : 
카페 >말씀의 교회와 새빛장로교회
|
글쓴이 : 상록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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